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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4일 (월) 23:52 판
벽수산장
공간 형성과정
- 윤덕영 매입
1910년 한일 강제병합의 큰 공으로 일본정부로부터 작위는 물론 은사금 5만원(현재가치 250억)</ref>1원은 현재돈으로 5만원이다.</ref>까지 받는 데 이 돈으로 송석원을 사들이고 벽수산장을 위시한여러 건물을 지을수있었을것이다.
특징
- 벽수산장의 건축양식은 석재혼입의 벽돌 2층으로 프랑스 계통의 르네상스 스타일이다. 석재는 각 독립주, 건물각부의 귓돌, 창호 주변에 사용되어 이외의 부재에 사용된 붉은 벽돌과의 조화를 이루는 형태이다. 벽수산장은 내외부의 화려함으로 한양의 아방궁이라 불렸다. 철재와 장식품, 타일 등을 독일에서 구입하는 등 외국 건축 자재만을 썼고 보일러 시설을 갖추었다. 응접실 천장에는 두꺼운 대형유리로 수족관을 만들어 금붕어를 기르기도 하여 ‘금붕어 집’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윤덕영의 친일 행각으로 벽수산장에 대한 당시 미디어의 기사는 사치스러운 건물이라는 부정적 표현을 사용되었다.
『조선일보』 1926년 5월 31일자 “매도설이 훤전(喧傳)되는 송석원 양관 내력담” : 집 한채를 14, 5년이나 두고 건축하고도 오히려 필역(畢役)치 못하였다 하면 누구나 경이의 눈을 뜰 것이다. 그러나 그 건물은 삼십여만의 경성시민이 날마다 치어다 보는 한양의 서편 인왕산 아래에 있는 다갈색 연화제의 삼층양관이 그것이니 이 양관은 일국 부원군의 형님인 윤덕영 자작의 송석원이 그것이다. 세상에서는 이 건물이 송석원이라는 이름을 가졌으되 통칭 ‘한양 아방궁’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부르게 되었는데 이것만으로는 능히 이 건물이 얼마나 윤환미를 다 하였는 것을 엿볼 수 있는 것인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