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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3.15 의거는 3.15 부정선거에 항거하여 선거 당일인 3월 15일 마산 시민이 일으킨 시위 사건이다. 이승만 정권의 부정한 선거 행위에 대항해 의로운 거사를 행했다는 의미로 3.15 의거 혹은 3.15 마산의거라고 부른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로 평화적 시위대를 향해 경찰이 집단 발포하여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한 유혈 민주화 운동이다. 이 시위에서 실종된 [[김주열]]의 시신이 약 한 달 후 4월 11일에 발견됨으로써 4.11 제2차 마산의거로 발전하였다. 이후 전국적인 시위로 확대되면서, 4월 19일의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고 결국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선언을 이끌어냈다. | 1960년 3.15 의거는 3.15 부정선거에 항거하여 선거 당일인 3월 15일 마산 시민이 일으킨 시위 사건이다. 이승만 정권의 부정한 선거 행위에 대항해 의로운 거사를 행했다는 의미로 3.15 의거 혹은 3.15 마산의거라고 부른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로 평화적 시위대를 향해 경찰이 집단 발포하여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한 유혈 민주화 운동이다. 이 시위에서 실종된 [[김주열]]의 시신이 약 한 달 후 4월 11일에 발견됨으로써 4.11 제2차 마산의거로 발전하였다. 이후 전국적인 시위로 확대되면서, 4월 19일의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고 결국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선언을 이끌어냈다. | ||
2023년 12월 4일 (월) 23:18 판
개요
1960년 3.15 의거는 3.15 부정선거에 항거하여 선거 당일인 3월 15일 마산 시민이 일으킨 시위 사건이다. 이승만 정권의 부정한 선거 행위에 대항해 의로운 거사를 행했다는 의미로 3.15 의거 혹은 3.15 마산의거라고 부른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로 평화적 시위대를 향해 경찰이 집단 발포하여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한 유혈 민주화 운동이다. 이 시위에서 실종된 김주열의 시신이 약 한 달 후 4월 11일에 발견됨으로써 4.11 제2차 마산의거로 발전하였다. 이후 전국적인 시위로 확대되면서, 4월 19일의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고 결국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선언을 이끌어냈다.
원인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선거 하루 전날인 14일 오후 5시, 마산 시민극장에서는 자유당 정책부위원장 한희석(韓熙錫), 경찰서장 손석래(孫錫來), 마산시장 박영두(朴永斗) 등이 배석한 가운데 마산시 일원의 전 공직자가 소집되어 부정선거 요령을 전달받았다.
선거 당일 민주당 마산시당은 투표 개시 시간인 오전 7시 이후 사전 4할 투표, 3인조·9인조 투표장 투입은 물론이고, 민주당 참관인의 입회조차 거부당하는 등 선거 부정 사실을 확인했다. 특히 장군동 제1투표소 참관인이었던 도의원 정남규(鄭南奎)와 부인 안맹선은 투표 시작 전 투표함에 들어 있던 사전 투표용지를 확인하고 격렬히 반발했으며, 이 과정에서 경찰에 연행되었다.
오전 10시 30분경, 민주당 마산시당은 선거 포기를 선언하고 투표소에 배치했던 민주당 참관인들을 철수시켰으며, 마산시 오동동에 위치한 마산시당 당사에서 선거 무효를 선언하는 가두방송을 실시했다. 오후 1시 30분, 민주당 경남도당이 선거 포기를 선언했고, 오후 4시 30분에는 민주당 중앙당사에서 결의한 ‘3.15선거 불법·무효 선언문’이 각 지방 당부에 발송되었다.
전개
마산 지역 3.15 의거의 발발
1960년 3월 15일 오전 10시 30분경에 이루어진 민주당 마산시당의 선거 포기와 무효 선언은 경남도당의 선언보다 3시간, 중앙당보다 6시간 앞섰다. 그리고 오후 2시경, 민주당 마산시당 당사 앞에서 불종거리까지 시민들이 운집하기 시작했다. 민주당 창원을 지구당 선거부장 장복열(張福烈)이 앞장서, “3.15는 부정선거다!”, “협잡선거 다시 하자!”는 구호를 외쳤고, 이윽고 1500여 명의 시민과 학생이 합류했다. 오후 2시 30분경, 연행되었다가 풀려난 정남규 도의원이 마산 지역 민주당원들에게 가두시위를 종용했고, 이에 따라 강경술(姜庚戌), 강선규(姜善圭), 황칠규(黃七圭), 정경도(鄭敬道), 정진철(鄭晋哲) 등 시당 간부 30명이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가두시위를 벌였다. 오후 3시 40분경, 도의원 정남규와 30여 명의 민주당원이 시위대에 합류했고, 시위대는 불종거리, 창동, 부림시장, 남성동 파출소, 서성동 어업조합을 돌며 구호를 외치고 평화적으로 행진하는 가운데, 시위대는 수천 명으로 불어났다.
1시간 30분 동안 마산 시내의 가두행진이 계속되자 경찰은 시위대를 강제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시위를 주도했던 도의원 정남규, 부위원장 강경술, 상무위원 황칠규, 감찰위원장 정경도, 당원 정진철, 박주복(朴注福) 등 민주당 간부 6명이 연행되었다. 5000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 군중은 남성동 파출소와 자유당 마산시당으로 달려가 투석전을 벌이며 경찰 및 반공청년단과 대치했다.
오후 5시 투표가 완료되자 시위를 주동한 장복열, 이봉수, 이만제는 개표 장소인 마산시청에서 다시 대오를 규합하기로 결의했다. 경찰의 제지가 강화되자 시위대는 "7시 개표 시각에 시청 개표장 앞에서 모이자"고 결의하고 오후 6시경 자진 해산했다.
경찰의 첫 발포와 희생자 발생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선거 당일, 낮에 시작된 마산의 부정선거 규탄 시위는 낮 시위를 주도한 민주당 당직자들에 대한 경찰의 폭행과 체포가 있은 뒤, 시위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저녁 7시가 되자 민주당 마산시당사 앞에는 다시 시민들이 모여들었고 몇몇 청년의 주도하에 남성동 파출소를 향해 진격했다. 수백 명의 군중이 돌멩이와 막대기 등 손에 잡히는 것들을 파출소를 향해 던졌다.
저녁 8시 이후 시위대를 향해 경찰의 사격이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학생 1명이 쓰러졌고, 흥분한 시위 군중은 파출소로 밀어닥쳤다. 당황한 경찰들은 옆 창문을 통해 피신했다. 파출소를 완전히 장악한 군중은 사무 비품, 집기류 등을 부수고 각종 서류와 공문서들을 찢고 내던졌다. 이후 시위대는 남성동 파출소에서 마산시청 쪽으로 이동했다. 대로에는 1만 명에 가까운 인파로 가득했다. 시위를 주도하는 청년, 학생들은 경찰이 시위대 얼굴을 볼 수 없도록 불이 켜진 건물을 향해 “불을 끄시오!” 하고 경고했다. 암흑으로 변한 시가지에서 시위대는 자유당 마산시당 사무소, 국민회 마산지부, 서울신문사 마산지사 건물 등을 부수기도 했다.
3월 15일 ‘밤시위’는 학생보다 시민, 특히 도시 하층민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1960년 3월 15일 마산 밤시위는 시내 곳곳에서 격렬하게 전개되었는데 신마산 쪽에서는 변절자로 지목된 국회의원 허윤수의 집과 마산시장 박영두의 집이 파괴되었다. 특히 허윤수의 가옥은 시민들에게 완전히 파괴당했을 뿐만 아니라, 일부 시민은 분뇨를 끼얹기도 했다. 개표가 이루어지고 있던 시청 부근의 무학국민학교에도 시민들이 상당수 모여 부정선거에 항의하며 시청을 향해 전진했다. 시위 행렬이 시청 쪽으로 다가서려는 순간, 일렬로 늘어선 5대의 소방차가 시위대를 향해 헤드라이트를 비췄고, 그중 시동을 걸고 있던 한 대가 군중을 향해 소방 호스로 물을 살포했다. 이에 격분한 시민들은 소방차를 향해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시위대가 던진 돌에 소방차 운전기사가 부상을 당했다. 소방차는 그대로 무학국민학교 앞 전봇대를 들이박았다. 전봇대가 쓰러지자 고압선 합선으로 폭음과 섬광이 번쩍였고, 정전으로 마산 시내 일원이 일시에 암흑으로 변했다. 군중 속에선 “경찰이 고의적으로 정전 시켰다!”는 외침이 쏟아진 반면, 경찰은 “불순한 데모대가 계획적으로 정전을 시켰다”고 몰아세웠다.
저녁 8시가 지나 경찰의 실탄 사격이 시작되었다. 소방차에서 강렬하게 비추는 헤드라이트 불빛으로 시야를 확보하지 못한 시민들은 실탄 사격에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4명이 사망하고 10여 명이 총상을 입었다. 흩어진 시위 군중 가운데 일부는 다른 방향에서 오던 시위대와 합세해 북마산파출소를 포위했다. 일부 청년 학생이 파출소로 진격을 시도하자 경찰이 총격을 가했지만, 시위대의 투석에 눌린 경찰들이 도주하면서 파출소는 시민들에게 점령당했다.
밀려드는 시위대 인파로 파출소 내부에 비치된 난로가 쓰러지면서 밤 9시 30분경, 건물이 불길에 휩싸였다. 진화를 위해 소방차가 급거 출동했지만, 흥분한 시위 군중 중 일부가 소방차를 향해 일제히 돌을 던졌다. 놀란 운전기사는 소방차를 버리고 도주했다. 뒤이어 달려오던 또 한 대의 소방차 역시 시위대의 돌 세례에 담벼락을 들이받은 채 쓰러졌다. 이 과정에서 북마산파출소는 전소되었다.
밤 9시 30분이 넘은 시각, 마산 시민들은 다시 무학국민학교에 집결한 뒤 경찰과 대치하기 위해 바리케이드를 쳤다. 밤 10시 이후 경남도경 진압부대 200여 명이 도착해 공격 태세를 갖추었다. 경찰은 바리케이드를 쳐놓은 무학국민학교 정문 앞에서 시위대를 향해 총격을 가했다. 시위대의 투석도 만만치 않았다. 시위대는 드럼통을 굴리거나 돌, 막대기, 쇳조각, 유리병 등 손에 잡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던졌다. 그런 와중에 경찰로부터 카빈총 1정을 탈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경찰의 강력한 화력을 견디지 못하고 약 70명의 시위대는 학교 뒷담을 넘어 추산공원 산 정상 방향으로 후퇴했다.
후퇴 도중 다른 시위 군중과 합류한 시위대는 의신여중 교정에 집결했다. 200여 명에 이르는 시위대의 대부분은 청년, 학생, 직업소년이었다. 이들은 자유당에 거액의 정치헌금을 바친 고려모직과 자유당 국회의원 이용범이 운영하는 대동공업사를 습격하려고 했다. 그러나 새벽이 되면서 상당수 청년, 학생들이 빠져나가고 시위대는 절반 이상으로 줄었다. 끝까지 남은 직업소년과 청년들이 경찰에 포위된 뒤 격투 끝에 체포되면서 격렬했던 1960년 3월 15일 마산에서의 항쟁은 막을 내렸다.
결과
피해
3.15 마산 의거 당일, 김영호(金永浩), 김효덕(金孝德), 김영준(金泳濬), 김용실(金涌實), 김삼웅(金三雄), 전의규(全義奎), 오성원(吳成元) 등 7명이 경찰의 실탄사격에 사망했고, 김주열이 최루탄에 직격당해 절명했다. 또한 부상자들 중에서 조현대(趙鉉大)는 이듬해 총상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1960년 3월 23일 당시, 민주당 측에서 파악한 총상 부상자는 총 43명이고, 고문 피해자는 40명에 육박했다. 3.15의거기념사업회에서 파악한 4월혁명과 관련된 마산 지역 희생자는 총 12명이며, 1960년 3월 15일부터 4월 26일까지 조사된 4월혁명 관련 부상자는 총 183명이다.
4.19 혁명
1960년 3.15 마산 의거 직후 실종되었던 김주열이 1960년 4월 11일 오전 11시, 마산 중앙부두 앞 바다에서 참혹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이 소식은 그날 《부산일보》 허종(許鐘) 기자의 기사를 시작으로 전국에 알려졌다. 이 사건으로 곧바로 마산에서 시위가 재개되었고(4.11 제2차 마산 의거), 이는 4월 19일 서울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서 발생한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다.
의의
한국 현대사에 있어 최초의 민주, 민족운동이라는 의의를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