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방어선 전투
개요
전개 과정
1950년 6월 28일, 채병덕 총장은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김홍일 소장을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김홍일 소장은 곧바로 방어작전에 들어갔는데, 이때 참모 학교 고문으로 있던 해즐릿 중령이 미 지상군 참전이 정해지더라도 그들이 한반도에 상륙해 전투 전개를 갖추려면 시간이 필요하다며 향후 3일 동안은 한강 방어선을 지탱해 주어야 미군이 들어올 발판을 제공할 수 있다고 조언하였다. 김홍일 장군 역시 한강 방어선을 지탱하는 3일이 나라의 운명을 판가름한다고 생각해 지휘관들에게 3일의 시간 동안 방어선을 지탱할 것을 강조하였다. 김홍일 장군은 낙오병을 수습하며 재정비하는 데에 전력을 쏟으며 부서진 군대를 재건하기 시작했다. 재정비한 병사들을 임시 편제해 방어선에 투입시켰다. 또한 그는 남하하는 장병들을 친절하게 취사장으로 안내하고,헌병들이 퇴각하는 장병들에게 불손한 태도를 보이지 않도록 하였다.
김홍일 장군은 이런 식으로 장병들의 사기를 돋우는 한편 3일이란 시간을 버티기 위해 방어 전략에도 힘을 썼다. 북한군이 파괴되어 있던 한강 철교를 복구해 탱크가 다리를 건너게 하는 순간 국군이 위험해지기에, 그는 다리가 있는 노량진 쪽에 화력을 집중시켰다. 또 여의도는 북한에게 점령당할 경우, 북한군이 곧바로 한강을 건너 영등포 쪽으로 쉽게 진입할 수 있었기에 여의도에도 화력을 집중시켰다. 그렇기에 여의도 쪽에서는 하루에도 수차례 주인이 바뀔 정도로 치열한 격전이 이어졌다.
1950년 6월 29일 맥아더 사령관이 수원 비행관에 도착하고, 그는 이후 전선을 시찰했다. 그는 한강 방어선을 보고 1990년 6월 30일, 미합동참모부에 미군 2개 사단만 있다면 한반도를 지킬 수 있을 것이라는 보고서를 보냈다. 전문가들은 이때 한강 방어선이 지탱됐기 때문에 맥아더가 이런 결정을 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북한군은 7월 3일에 한강 방어선을 결국 돌파하지만, 약 6일 간의 지연전에 성공하였기에 이 시간 동안 분산된 병력을 수습하고 재편성할 수 있었으며, 미 지상군의 참전으로 이어지도록 하여 북한군이 한국군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할 시기를 놓치게 하였으므로 한강 방어선 전투는 사실상 성공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는 인과적으로 7울 8일, UN군 참전으로도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