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공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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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공산당 (Communist Party of Korea)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은 일제 강점기와 해방 정국 시기에 존재했던 한국의 사회주의 정당이다. 1925년 경성에서 비밀리에 창당되었으며,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의 지부로서 승인을 받아 활동했다. 일제의 탄압으로 수차례 해산과 재건을 반복하다가, 1946년 남조선노동당과 북조선노동당으로 각각 합당, 개편되면서 소멸하였다. | 창당일 | 1925년 4월 17일 | | 해산일 | 1946년 11월 23일 (남조선노동당으로 합당) | | 주요 인물 | 김재봉, 강달영, 박헌영 등 | | 이념 | 마르크스-레닌주의, 반제국주의, 조선 독립 | | 상급 단체 | 코민테른 (1926년 정식 승인) | | 후신 | 남조선노동당, 북조선노동당 |

‘’‘’‘개요’‘’‘’

조선공산당은 1920년대 초반부터 확산된 사회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조직된 전위 정당이다. 3.1 운동 이후 민족주의 계열과 더불어 독립운동의 한 축을 담당했으나, 치안유지법을 앞세운 일제의 극심한 탄압으로 인해 제1차~제4차에 이르는 잦은 지도부 교체와 조직 와해를 겪었다. 1945년 8.15 광복 직후 박헌영을 중심으로 재건되어 해방 정국의 주요 정치 세력으로 부상했으나, 미군정과의 갈등 및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등을 거치며 불법화되었다.

‘’‘’‘역사’‘’‘’

2.1. 일제 강점기 (1925~1945)

* 제1차 조선공산당 (1925): 1925년 4월 17일, 서울의 중식당 아서원(雅敍園)에서 김재봉을 책임비서로 하여 창당되었다. 고려공산청년회와 함께 조직되었으나, 같은 해 11월 '신의주 사건'을 계기로 조직이 노출되어 대거 검거되었다.
* 제2차 조선공산당 (1926): 강달영을 중심으로 조직을 재건하였다. 6.10 만세 운동을 기획하고 주도하며 대중 투쟁을 전개했으나, 이를 계기로 일제의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불어 다시 와해되었다.
* 제3차 조선공산당 (1926~1928): 일명 'ML파(마르크스-레닌주의파)'가 주도권을 잡아 김철수를 중심으로 결성되었다. 코민테른으로부터 정식 지부 승인을 받았으나, 내부 파벌 싸움과 일제의 탄압으로 약화되었다.
* 제4차 조선공산당 (1928): 차금봉 등을 중심으로 재건을 시도했으나, 코민테른이 파벌 싸움을 비판하며 '12월 테제'를 발표, 당 승인을 취소하고 "노동자·농민 속으로 들어가라"는 지침을 내림에 따라 당 조직은 해체되고 공산주의자들은 지하 활동 및 혁명적 노조 운동으로 전환하였다.

2.2. 해방 이후 (1945~1946)

* 재건 및 장안파와의 갈등: 1945년 해방 직후, 서울에서는 이영 등이 주도한 '장안파 공산당'이 먼저 결성되었으나, 박헌영이 상경하여 '재건파'를 조직하면서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결국 '재건 조선공산당'이 정통성을 확보하였다.
* 활동 및 탄압: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주도하고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1946) 전까지는 미군정 치하에서 합법 정당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신탁통치 찬반 논쟁에서 찬탁(모스크바 3상 회의 지지)으로 선회하며 우익 진영과 극심하게 대립했고, 미군정의 탄압으로 박헌영 등 지도부가 월북하거나 지하화되었다.
* 3당 합당: 대중적 지지 기반을 넓히기 위해 1946년 11월, 조선인민당(여운형), 남조선신민당(백남운)과 합당하여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을 창당함으로써 조선공산당은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이북 지역의 조직은 북조선신민당과 합당하여 북조선노동당이 되었다.

‘’‘’‘주요 강령 및 주장’‘’‘’

창당 당시 및 재건 시기에 조선공산당이 내세운 주요 강령은 다음과 같다.

* 일본 제국주의 통치 타도 및 조선의 완전한 독립
* 8시간 노동제 실시 및 최저임금제 확립
* 토지 개혁 (소작료 인하 및 토지의 농민 분배)
*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보장
* 남녀 평등 및 봉건적 인습 타파

‘’‘’‘평가’‘’‘’

* 긍정적 평가: 일제 강점기 동안 타협하지 않고 비타협적 항일 투쟁을 지속했으며, 노동자와 농민의 생존권 문제를 독립운동의 주요 의제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 부정적 평가: 엠엘파, 화요파, 서상파 등 극심한 내부 파벌 투쟁으로 역량을 소모했다는 점, 해방 정국에서 극좌적 노선(신전술 등)을 고집하여 좌우 합작을 어렵게 하고 분단을 고착화하는 데 일조했다는 비판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