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지선
명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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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임지선 |
영문 | LIM JISUN |
소속 | 대학원/한국외국어대학교 |
전공 | 중어중문학과 |
인사말
안녕하세요:)
기본정보
한국 외국어대학교 박사 3학기 어학 전공
중국 영화 역사
중국영화의 초창기(1905∼1949)
1896년 상하이에서 중국 최초로 영화가 상영되었고, 그로부터 9년 후 1905년 베이징에서 경극 공연을 담은 중국 최초의 영화 <정군산(定軍山)>이 만들어졌다. 이 시기 중국은 청조가 기우는 가운데 밀어닥치는 외세로 인해 혼미했다. 1911년, 신해혁명을 담은 중국 최초의 기록영화 <우한전쟁(武漢戰爭)>이 나왔다. 이듬해 청나라는 막을 내렸고, 이후 국민당과 공산당은 합작과 공방을 오갔다. 1913년 중국 최초의 극영화 <난부난처(難夫難妻)>가 상하이에서 제작되었다. 같은 해 홍콩에서 제작된 <장자시처(莊子試妻)>는 중국 최초로 해외에 소개된 영화이자 중국 최초로 여배우가 등장한 영화다. 중국영화 초창기에 영화 중심지는 상하이였다. 1920년대부터 산업의 형태를 보였고, 1930년대부터 규모가 큰 영화회사가 등장했으며, 배급과 상영도 체계를 잡아갔다. 영화회사를 중심으로, 시나리오 작가와 감독, 배우들이 활발하게 영화를 생산해 냈다. 사실주의 영화, 반제국․반봉건을 표방하는 영화들과 더불어 무협영화와 사극영화 등 각종 장르영화도 등장했다. 계속된 전란은 영화인들을 상하이에만 머물게 하지 않았다. 1932년 일본이 상하이를 침범했고, 이는 1937년 전면전으로 이어졌다. 1945년 일본이 물러난 후엔 곧 국공내전이 있었다. 영화인들은 상하이를 중심으로 내륙과 홍콩을 오가면서 활동을 계속했다. 내륙에선 이데올로기가 담긴 항전영화가 주로 만들어졌고, 1930년대부터 상하이의 영화 자원을 흡수하기 시작한 홍콩은 중국영화가 해외로 향하는 창구로서 상업영화의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타이완은 1895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의 식민 통치에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 타이완에서 제작된 영화들은 일제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선전영화, 계몽영화 위주였고, 유성영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하면서 일본어 대사를 의무적으로 사용하게 하는 등 철저하게 총독부의 지배를 받았다. 1945년 일본이 물러간 후 국민당 정권이 영화업을 관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경제가 빈곤한 상황에서 제대로 된 영화는 나오기 힘들었고, 1946년 중미우호조약 체결 이후 미국영화가 시장을 장악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삼중국영화가 걸어온 길 (중국·홍콩·타이완영화, 2013. 2. 25., 박희성)
대표작
중화인민공화국 설립과 문화대혁명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된 이후 중국대륙의 영화 자원은 모두 국유화 되었고, 영화업은 사회주의 체제 속에 운영되었다. 이른바 ‘17년 시기’로 불리는 1949년부터 1966년까지의 기간에 영화는 예술이나 산업이 아닌, 이데올로기 도구의 기능이 강조되었다. 1966년부터 1976년까지 계속된 문화혁명 기간 동안 영화는 소수의 모범극(樣板戱) 영화[장칭(江靑)과 4인방이 세운 원칙에 따라 만들어진 현대 경극과 발레극을 촬영한 영화] 외엔 거의 만들지 못했다. 영화인들은 반동으로 몰려 박해받았으며, 베이징영화대학(北京電影學院)은 문을 닫았고, 학생들은 시골로 하방(下放)되어 육체노동에 종사해야 했다. 이 기간 동안 홍콩에서 영화산업은 만개했다. 대륙에서 유입된 인구로 인해 복잡해진 홍콩에서 영화는 각광을 받는 오락이었다. 1950년 제작편수가 200편에 달할 정도였다. 영국령 자유무역항이라는 유리함을 한껏 발휘해 해외로도 한껏 뻗어가 ‘동방의 할리우드’로 불렸다. 타이완에선 1950년대에 국영 타이완영화사(臺灣電影公司)와 국민당의 중양영화사(中央電影公司)가 선전영화, 반공영화 등을 주로 만들었다. 1960년대 들어 멜로영화, 사극영화, 무협영화 등으로 회복세를 보였지만, 1970년대 후반부터는 힘을 잃고 홍콩영화에 주도권을 내어준다.[네이버 지식백과] 삼중국영화가 걸어온 길 (중국·홍콩·타이완영화, 2013. 2. 25., 박희성)
대표작
개혁 개방과 뉴웨이브의 등장(1977∼2000)
개혁개방 정책으로 인해 중국의 경제 수준은 향상되고 관객들의 눈높이도 달라졌지만, 영화계는 거기에 부응하지 못했다. 그 결과 관객수는 지속적으로 감소했다. 이에 따라 1990년대 들어서 영화업에도 개혁개방의 움직임이 가시화된다. 영화제작소에 자체 배급권을 부여했고, 공적 자금으로 운영되나 민간영화사의 시스템을 도입한 준관방영화사와 민간영화사가 등장했다. 1994년엔 <도망자>를 필두로 할리우드영화를 수입하기 시작했다. 영화계에는 이른바 6세대 감독들이 등장해 검열을 거부하는 지하영화(地下電影)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들은 과거가 아닌 현재, 바로 자신 옆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카메라를 들이댔다. 홀로 장애인 아들을 돌보는 어머니의 이야기인 장위안(張元)의 <엄마(媽媽)>(1990)를 필두로 한 6세대 감독의 영화들은 영화제를 통해 해외에 알려졌다. 제도권에서는 펑샤오강(馮小剛)이 <갑방을방(甲方乙方)>(1997) 등의 설연휴를 겨냥한 코미디영화로 사랑을 받았고, <샤워(洗澡)>(1999) 같은 발랄한 소품들도 인기를 모았다. 1997년의 대륙 반환을 앞두고 홍콩의 경제는 침체기에 빠진다. 많은 홍콩인들은 해외로 이민을 떠났다. 아시아 지역의 경제상황 역시 나빠지면서 홍콩영화도 활기를 잃어갔다. 제작편수는 줄어들고, 영화인력의 해외 유출도 늘어갔다. 그 무렵 저우싱츠(周星馳, Steven Chow)의 황당무계한 코미디영화들이 지친 홍콩인에게 웃음을 안겨주면서 인기를 모았다. <도성(賭聖)>(1990)에 출연해 스타덤에 오른 저우싱츠는 감독과 주연을 겸한 <식신(食神)>(1996) 등을 연거푸 빅히트 시켜 흥행 보증수표로 자리매김한다. 1990년대 접어들면서 타이완 뉴웨이브영화들은 국내 시장에서 활력을 잃고 정부 보조금이나 해외 자본으로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게 된다. 이 시기에 등장한 차이밍량(蔡明亮), 린정셩(林正盛) 등은 예술성을 인정받으며 유수의 해외영화제에서 수상했지만 국내 박스오피스는 초라했다.
1986년 영화 수입쿼터가 폐지되면서 미국영화의 공세를 막을 수 없게 되었고, CATV의 발달과 불법판으로 인해 타이완영화산업은 급격히 몰락하기 시작했다. 한편, <쿵후선생(推手)> (1991) 등으로 주목받은 리안(李安)은 할리우드로 무대를 옮겨 영어로 된 작품을 활발히 만들었고, <와호장룡(臥虎藏龍)>(2000) 이후 중국어영화도 간간이 만들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삼중국영화가 걸어온 길 (중국·홍콩·타이완영화, 2013. 2. 25., 박희성)
대표작
영화로 배우는 근현대사
중화제국의 동요와 제국주의 침략 (1840~1948년)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과 문화대혁명(1949~1976년)
개혁개방 부를 향해 달리는 사회주의 국가의 성장통 (1977~2000년대)
대만 역사 (1920~2000년대)
타임라인으로 톺아보는 근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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