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상드르 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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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소설가, 극작가. 프랑스를 대표하는 대문호 중 한 명이다. 오늘날 그의 작품은 보편적이라고 할 만큼 전세계적인 고전으로 읽히고 있으며 약 100개국의 나라에서 번역됐다. 프랑스 작가 중 쥘 베른 다음으로 번역본이 많은 작가이다.

대중 소설가라는 평을 듣기도 한다. 작품들의 대부분이 프랑스 역사를 바탕으로 하여, 교묘한 줄거리와 풍부한 공상으로 엮어져 있다. 대표 작품으로 <삼총사> <몽테크리스토 백작> 등이 있다. 그는 장르소설의 시초 중 한명이라고 평받는다.

그는 프랑스 역사를 배경으로 소설을 쓰는 작가임에도 특이하게 재미를 위해 고증을 고려하지 않았으며 역사왜곡도 서슴치 않았다.

생애

알렉상드르 뒤마는 프랑스 엔주 빌레르 코트레에서 태어났다. 뒤마의 할아버지는 포병으로 아이티에서 근무하였다. 그곳에서 아프리카계 케러비언 혼혈인이었던 마리 케세테 뒤마와 결혼하였고 빌레르 코트레로 돌아와 뒤마의 아버지인 도마 알렉상드르 뒤마를 낳았다. 도마 알렉상드르 뒤마는 프랑스 대혁명 당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휘하의 장군으로 활약하였다. 그가 이끌던 부대는 "아메리카 연대"라 불렸다. 뒤마가 태어난 1802년 무렵 도마는 퇴역하여 고향인 빌레르 코트레로 돌아온 상태였고 가세가 점점 기울자 집과 재산을 처분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뒤마가 4세이던 1806년 사망하였다.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인해 뒤마는 정규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하여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읽었다. 나폴레옹이 프랑스의 황제로 즉위하자 뒤마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야기는 유명해졌다. 그의 집안은 여전히 가난했지만 아버지의 명망으로 인해 귀족들과 알고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1822년 부르봉 왕정복고가 일어난 후 뒤마는 파리로 가 막강한 권세를 누리던 루이 필리프의 루아얄 궁전 사무실에 취직했다.

문학사적 의의

대중 소설가; 알렉상드르 뒤마

그는 당대 최고의 인기 작가 중 하나였으며 현재에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으로 인정받는다. 또 장르소설의 시초 중의 한 명이라고 평가받는다.

재미만 있으면 고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당대 최고의 능력자이자 이야기꾼이다. 그의 작품은 많은 고전 문학중에서 재미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서양권에서 '페이지 터너'라고 불릴 정도로 작품이 술술 읽힌다. 삼총사의 경우 19세기 작품이라고 믿기지 않을정도로 센스와 유머 감각을 보여준다. 또 역사가 쥘 미슐레는 "뒤마는 다른 역사가들을 모두 합해 놓은 것보다 대중들에게 더 많은 역사를 가르쳤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대부분의 프랑스인은 전문적인 역사가가 아니라 오히려 뒤마의 소설을 통해 프랑스 역사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고 평했는데, 실제 <삼총사>에는 영국과 프랑스를 둘러싼 17세기 유럽의 현실이 허구와 절묘하게 혼합되어 있다. 역사를 분석하는 뒤마의 통찰력은 대중소설가 수준 이상이었고, 간결하고도 속도감 있는 그의 문체는 '역사상 가장 흥미롭고 유명한 역사 모험 소설'을 탄생시키는데 유감없이 발휘됐다. 또 뒤마의 소설은 흡입력이 굉장히 뛰어난데 대표적인 작품이 그의 걸작이자 복수극의 정석이자 시초 몽테크리스토 백작이다. 뒤마의 소설들은 당시부터 '재미있고, 잘 팔릴만한 줄거리'를 담아 집필됐고 특히, 모험물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기에 웬만한 양판소나 가공전기와는 비교도 안 되게 재밌다. 심지어 당대의 기록 중에는 외과 의사가 마취제 대신에 뒤마의 소설을 읽고 있도록 했다는 것마저 있을 정도다.19세기 중반에 창작된 대중 소설이 현대에도 스테디셀러의 반열에 올랐다는 점에서 뒤마의 작품들이 걸작임을 증명하고 있다.

편견을 꺤 알렉상드르 뒤마 ; 인종차별을 이겨내다

흑인 혼혈이란 점 때문에 당시 만연했던 인종차별에 평생 시달렸다. 그럼에도 그는 엄청난 양의 독서와 무한한 상상력 덕에 겨우 작가로 성공했다. 누군가에게 모욕을 당하거나 놀림을 받는 일이 일상이었던 뒤마에게 혼혈은 평생의 짐이었다. 작품들이 엄청난 인기를 끌었음에도 프랑스 작가협회는 그를 거부했고, 사인회 한 번 열지 않아 당시 뒤마의 얼굴을 아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사망 후, 뒤마는 자신이 태어난 고향 마을 빌레르 코트레의 공동묘지에 묻혀 있었다. 그러나 2002년, 그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여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이 그의 무덤을 파서 유해를 꺼내 프랑스의 위인만 들어갈 수 있다는 팡테옹의 안장하도록 지시한다.시라크 대통령은 2002년 3월 그의 이장 포고령을 내리면서 “일생동안 고통을 받았지만 프랑스 공화국 이념에 가장 헌신한 창조적인 천재에게 보답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뒤마는 볼테르, 장 자크 루소, 에밀 졸라, 빅토르 위고, 앙드레 말로에 이어 문필가로서는 6번째로 이곳에 묻혔으며, 당연히 유색인종 작가로는 최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