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목(朴詩穆)
박시목(朴詩穆) 소개
박시목(朴詩穆)은 한국의 독립운동가로 광복 이후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 출생 | 1894년 10월 14일 |
| 사망 | 1944년 9월 29일 |
| 자/호 | 회산(晦山) |
| 본관 | 밀성(密城) |
생애
박시목은 1894년 10월 14일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송내리에서 태어났다. 그가 독립운동에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은 25살 무렵 참가한 3·1운동이다. 3·1운동 이후 그는 본격적인 독립운동가로써의 삶을 위해 상하이로 떠난다. 상하이에서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들을 만나게 된다.
1920년부터 박시목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한다.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감찰원으로 경북 지역에서 군자금을 조달하는 임무였다. 이후 그는 1927년 일본 도쿄의 철학과에 입학하고 그해 5월 신간회 동경지회 창립에 참여하여 본부 대의원으로 선출된다.
이후 1928년에는 도쿄에서 창간된 <조선교육신문>의 발행을 꾸준히 도우며 지도한다. 또한 같은 해 <조선교육신문>을 주도했던 이종률이 귀국해 조선학생맹휴옹호전국동맹을 조직하여 활동할 때도 적극 지원한다.
1930년 중반에 그는 귀국한다. 다시 조선으로 돌아온 그는 대구에서 조양회권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팔공산으로 들어가 광산 경영으로 위장하고 지속적인 독립운동의 길을 모색했다. 1940년에는 안재홍, 유석현, 신석우 등의 동료들과 협의한 결과 다수의 청장년들을 중국으로 보내 독립군으로 양성하여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하자는 목표를 세우게 된다. 이를 위해 1942년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 그는 준비 작업을 착실히 수행한다.
1943년 초봄에 옌안에서 훈련 받고 펑톈으로 밀파되어 가던 노석호와 박희규가 일제 경찰에 체포된다. 이 일을 계기로 이들의 계획이 탄로나 100여 명의 동지가 체포된다. 박시목 또한 같은해 10월 베이징에서 붙잡히고 혹독한 고문 끝에 1944년 9월 29일 사망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