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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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

정의

1919년 3월 1일을 기해 일어난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


원인 및 배경

3·1운동은 일제의 폭압적인 식민지 지배에 대한 민족의 저항으로 일어났다.

일본은 조선을 강점한 뒤 군사력을 배경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의 각 분야에서 폭력적인 억압과 수탈을 자행하는 무단통치를 실시했다.

무단통치 하의 조선총독부는 민족 고유문화 말살, 경제적 지배의 철저화 등을 통해 한민족의 정당한 민족적 저항의 기반을 없애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어쩔 수 없이 중국, 만주, 노령, 미주 등의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거나, 아예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지하로 숨어 기회를 엿보고만 있게 되었다.


*그러던 중,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발표되었다.

한국의 민족지도자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발표가 있자, 이에 의거해 한국 민족의 독립을 호소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들의 움직임에 힘을 더 실어주었던 사건은 일본 도쿄에서 거행된 '2·8독립선언'이었다.

젊은 동경 유학생들이 모여 발표한 「2·8독립선언서」는 일제의 침략행위를 역사적으로 설명하고, 병합이 민족의 의사를 무시한 일제의 군국주의적 야심의 사기와 폭력에 의해 이뤄졌음을 규탄하였다. 또한 식민지 정책의 야만적 성격을 폭로하였고, 일제와 열강은 마땅히 동양평화와 세계평화를 위해 한국을 독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민족자결주의 발표 이래 국내에서도 독립운동의 분위기가 고조되어가던 중, 고종황제가 갑자기 붕어[1]하였다.[2]

건강하던 고종이 갑작스럽게 중병으로 붕어하자, 국민들은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이때 일제에 의해 독살 당한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 온 국민들은 망국의 설움과 일제에 대한 적개심으로 크게 동요하게 되었다.


1910년 국권 상실 이래 잠자코 기회만을 노리고 있던 민족지도자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 발표', '재일 유학생의 2·8독립선언', '고종황제의 붕어' 등이 연속적으로 일어나 민족적 항일 의식이 고조되자, 이때가 독립을 꾀할 가장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여, 거족적인 3·1 운동의 계획에 본격적으로 돌입하였다.


전개

*시작

1919년 3월 1일, 미리 계획했던 대로 서울과 평양, 의주, 선천, 안주, 원산, 진남포 등 6개 도시에서 동시에 만세 운동이 시작되었다.

원래 독립선언식의 예정 장소는 탑골공원이었으나 학생들의 희생을 고려하여 민족대표들은 그 장소를 인사동의 태화관[3]으로 갑자기 변경하였다.

민족대표 33명 가운데 29명[4]은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 모여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인 서영환을 통해 독립통고서를 조선총독부에 전달했다.

한편 최린은 태화관 주인 안순환에게 조선총독부에 전화를 걸어 민족대표 일동이 여기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나서 축배를 들고 있다고 통고하게 하였다.

이 통고를 받은 즉시 일본경찰 80여 명이 달려왔고, 태화관은 포위되었다.

그러던 중 계획했던 대로 오후 3시가 되자 한용운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그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제창한 뒤, 민족대표들은 의연히 일본 경찰에 스스로 체포되었다.

탑골공원에 모여 있던 학생들은 등장하지 않는 민족대표들에 당황하여 강기덕 등을 그들에게 보내 항의하기도 했으나, 2시 30분[5] 무렵에 따로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한 청년이 단상으로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두 갈래로 나뉘어 종로, 서울역, 정동, 이화학당, 서대문 등을 행진하며 시위를 벌였다.


*확산

3·1운동은 수 개월 동안 지속되었으며, 교통이 발달한 여러 도시 등을 중심으로 시작되어 농촌 등지로 전파되며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되었다.

갈수록 참여하는 인원과 계층이 늘어나면서 운동의 양상은 비폭력 시위에서 폭력투쟁으로 발전하였다.

국외로도 확산되어 만주, 연해주, 도쿄, 오사카, 필라델피아 등에서도 독립 시위가 벌어졌다.


운동이 발전될수록 투쟁 목표가 구체화되고 조직화되었으며, 비폭력적인 만세운동에서 계획적이고 공세적인 폭력투쟁으로 진전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폭력투쟁은 일제의 탄압에 대한 방어적인 대응으로 나타난 것도 있었지만, 일제의 권력기관에 대해 계획적이고 공세적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었다.

일본 헌병의 총격 등으로 시위가 강제로 해산되면 군중들은 몽둥이와 죽창 등으로 무장하여 헌병 주재소와 면사무소, 우편소, 금융조합, 일본인과 친일 인사의 집 등을 파괴하고 각종 수탈용 장부와 무기를 빼앗아 소각하는 등 무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일제의 권력기관을 접수하려 나서는 경우도 있었는데, 강원도 통천에서는 총검으로 무장하고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특히 국외독립운동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평안도와 함경도 등 북부지방에서 이러한 경향이 강했는데, 간도 및 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 세력은 3·1운동 당시 국내진공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일제의 진압

일제는 3·1운동을 무력으로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화성 제암리, 천안 아우내, 정주 곽산, 남원 광한루, 익산 이리를 포함한 전국 각지에서 시위대에 총격을 가하는 등 학살이 벌어졌다.

그리고 시위자들을 체포하여 가혹한 고문을 서슴지 않았다.

당시 일제의 통계에 따르면 3·1운동 이후 3개월 동안 시위 진압 과정에서 7509명이 사망했으며, 15961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리고 46948명이 구금되었고, 교회 47개소, 학교 2개교, 민가 715채가 소각되었다.


의의 및 한계

*의의

  • 전국적인 범위에서 각계각층을 망라하여 전개된 3·1운동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켜 나라 안팎에 민족의 독립 의지와 저력을 보여주었다.
  • 중국 상하이에서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다.
  • 일제의 통치 방법이 무단통치[6]에서 문화통치[7]로 바뀌게 하였다.
  • 민족의식과 민족정신에 새로운 자각과 힘을 주어 교육을 진흥시켰고, 신문예운동·산업운동이 활성화되게 했으며, 민족 자립의 기초를 다지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 독립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넓혀 독립운동을 체계화·조직화·활성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 민중들은 3·1운동에 참여하면서 민족의식과 정치의식을 높일 수 있었으며, 이민족에 대한 끈질기고 강렬한 독립투쟁정신을 고취할 수 있었다.
  • 1920년대에 다양한 사회운동과 조직이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 왕조의 회복을 목표로 한 복벽주의가 청산되고 민주공화제가 독립국가의 목표로 자리를 잡았다.


*한계

  • 일제의 문화통치로 전환은 가혹한 식민통치를 은폐하고 친일파를 육성하여 민족운동을 분열시키기 위한 기만책에 지나지 않았다.
  • 운동의 과정을 통일적으로 지도하는 조직체가 없었기에 지역과 계층에 따라 투쟁의 형태와 강도가 다른 식으로 운동이 분산적으로 전개되었다.
  • 민족대표는 독립청원의 방식에 주력하여 타협적인 태도를 벗어나지 못했고 광범위하게 일어난 민중들의 항일투쟁을 이끌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지니지 못했다.


각주

  1. 임금이 세상을 떠나는 것.
  2. 덕수궁에서 기거하던 고종황제는 당시 68세로 건강한 편이었다.
  3. 일제강점기 경성부에 있던 음식점 겸 술집. 유명한 요리집이던 명월관의 부속 건물이기도 했다.
  4. 길선주, 김병조, 유여대, 정춘수 등 4인은 지방에 있었으므로 불참.
  5. 혹은 2시.
  6. 헌병의 무력을 보여주는 등 조선인에게 압박을 가해 조선민족의 민족의식을 억누르던 방식.
  7. 무단 통치의 한계를 느끼고 조선인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고자 실시한 식민 통치 정책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