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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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은 1927년 10월 18일 대구에서 발생한 무장 독립운동으로, 장진홍이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시한폭탄을 배달하여 폭발시킨 사건이다. 당시 조선은행은 조선 내 금융·화폐 정책의 핵심 기관이며, 식민경제 지배의 상징적 공간이었다. 폭발은 은행원과 일본 경찰 등 5명에게 중상을 입혔고, 창문 70여 장이 파손될 정도로 강력해 대구 도심 전체가 흔들렸다.
"1927년 한낮, 조선은행 대구지점에서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이 울렸다. 이는 한 민족에게 독립의 외침이었으며, 민족혼을 일깨운 우뢰와도 같았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역사적 배경
3·1운동 이후 1920년대 조선의 무장 독립운동은 의열단 활동을 중심으로 급진화되고 있었다. 이 시기 투쟁의 주요 대상은 경찰서·도청 같은 행정기관뿐 아니라, 식민 금융 지배의 핵심이던 조선은행과 식산은행 등 경제착취 기관이었다.
조선은행 대구지점은 1910년대 중반 대구 중심부에 건립되었으며, 일제의 세금 관리·화폐 유통·대규모 자금 대출을 담당하는 지역 경제 지배의 핵심 기관이었다. 직원의 상당수가 일본인이었고, 군 복무 경험자도 많아 보안 체계가 강화되어 있었다. 건물은 붉은 벽돌과 석재를 혼합한 2층 구조였으며, 외부에서 수상한 물체가 반입될 경우 쉽게 눈에 띌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1927년 4월, 무장투쟁을 준비하던 장진홍은 일본인 좌파 활동가 굴절무삼랑(堀切茂三郞)을 통해 폭탄 제조법과 뇌관, 도화선, 자금을 제공받았다. 일제는 이 사건을 ‘국제공산당 배후설’로 몰아갔으나, 실제로는 일본 내 혁명운동 잔존 세력과의 연결에 가깝다는 평가가 있다.
사건 준비
장진홍은 폭탄 제조법을 익힌 뒤 경북 칠곡·선산 경계의 봉화산에서 시한폭탄 성능 시험을 실시했다. 테스트 결과를 토대로 그는 대형 폭탄 4개와 소형 자결용 폭탄 1개를 추가로 제작했다. 장진홍의 목표는 대구의 핵심 식민통치 기관 네 곳이었다.
- 조선은행 대구지점
- 경북도청
- 식산은행 대구지점
- 경북경찰부
1927년 10월 17일, 그는 폭탄을 자전거에 싣고 대구로 이동해 덕흥여관에 투숙했다. 일제의 수사를 교란하기 위해 다리를 저는 척하고 서울말을 사용한 것은 의도된 위장이었다.
여관 사환 박노선은 장진홍이 넘어진 부상자라고 믿었고, 다음 날 그가 부탁한 ‘벌꿀 상자’ 배달 심부름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 상자들 속에는 모두 폭탄이 들어 있었다.
사건 전개
10월 18일 오전 9시경, 박노선은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상자 한 개를 전달했다. 상자는 국고계 주임 복지흥삼에게 전달되었으나, 건물 안에 있던 일본인 은행원 길촌결(吉村潔)이 화약 냄새를 감지하여 즉시 포장을 풀어 확인했다. 그는 도화선을 잘라냈지만, 이미 점화된 폭탄은 11시 50분경 내부에서 폭발했다.
- 창문 70여 장 파손
- 은행 직원 및 일본 경찰 포함 5명 중상
- 충격파가 대구역까지 도달
- 은행 주변 기와지붕 파손, 유리 파편이 수십 m 반경으로 확산
폭발 직후 은행은 극심한 혼란에 빠졌고, 경찰과 소방 인력이 긴급 투입되었다. 인근 상점과 시장 상인들은 대규모 폭동으로 오인하여 대피했고, 대구 도심 전체가 한동안 마비되었다는 보도도 있다.
나머지 세 건물(도청·식산은행·경북경찰부)의 폭발이 실패한 이유는 길촌결의 조기 발견으로 추가 전달이 중단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래 지도에서 빨간색인 곳은 실제로 폭발이 일어난 조선은행 대구지점이고, 나머지 파란색인 곳은 폭발 예정이지만 실패했던 경북도청, 식산은행 대구지점, 경북경찰부이다.
언론 보도와 사회적 반응
- 매일신보(총독부 기관지): 사건을 "공산주의자의 파괴 음모"로 규정, 치안유지법 강화를 촉구
- 조선일보·동아일보: 의거 자체의 배후를 명확히 알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며 보도
- 대구 지역 상공인: 은행의 업무 마비와 금융 거래 지연으로 경제적 혼란 경험
- 민중 여론: 표면적 침묵 속에서도 식민 금융기관을 겨냥한 공격이라는 점에서 은근한 지지 분위기 존재
이처럼 같은 사건을 두고 신문마다 다른 관점을 보였으며, 이후 일제가 지방 경찰권 강화의 명분으로 사건을 적극 활용하였다.
초기 수사와 검거
폭발 직후 일제 경찰은 대규모 검거 작전을 실시하고, 1928년 1월 이정기 등 8명을 체포했다. 이 과정에서 여러 조선인 독립운동가가 고문과 조작된 자백으로 억울하게 연루되었으며, 당시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인물 중에는 시인 이육사도 포함되었다. 이육사는 이때 부여받은 수인번호 ‘264’를 자신의 아호 ‘육사(陸史)’의 유래로 삼게 된다.
조선은행 사건은 이육사에게 첫 투옥 경험을 안겨준 사건이자, 그의 이후 독립운동 및 문학 활동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사건으로 평가된다.
폭발 이후 대구 지역 독립운동의 변화
조선은행 폭파 사건은 대구 지역 항일운동에 다음과 같은 영향을 미쳤다.
- 비밀결사 조직망 와해 및 재편
- 경찰·헌병의 사상 탄압 확대
- 경북·대구 지역에서 폭발물 관련 규제 강화
- 지역 사회의 방범 조직 확대
신고 체계가 강화되면서 무장독립운동은 더 은밀한 underground 조직 형태로 변화했다.
조선은행 대구지점 건물의 이후
폭발 후 조선은행 대구지점은 여러 차례 개·보수를 거쳤으며, 해방 이후 한국은행 대구지점으로 잠시 사용된 기록도 있다. 이후 원 건물은 도시 개발 과정에서 철거되거나 개축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건물의 정확한 형태는 사진 자료를 통해 일부만 확인된다.
결과와 의의
장진홍은 폭발 확인 후 피신했으나, 1929년 2월 일본 오사카에서 경북경찰부 형사들에게 체포되었다. 본국으로 송환된 장진홍은 자신을 취조하는 조선인 경관들의 행태를 질타하며 불굴의 독립의지를 과시했다. 그는 고문을 받은 끝에 1심과 2심에서 사형이 선고되자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1930년 7월 31일 밤, 장진홍은 일제에 대한 마지막 항거로 자신의 손으로 목숨을 끊어 옥중 자결 순국했다. 이 사건의 여파로, 시인 이육사(李陸史)는 1927년 장진홍 의거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어 1년 7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그는 이때 받은 수인번호 264에서 따서 자신의 호를 '육사(陸史)'라고 지었다. 이육사 시인 외에도 장진홍의 어머니가 이 일로 체포된 바 있으며, 인동 장씨 일가인 장용희가 동료와 가족의 피해를 줄이고자 자결했고, 그의 친척인 장효식이 행방불명되는 등 주변 인물들이 이 사건으로 인해 큰 고초를 겪었다. 이 사건은 1920년대 말 대구 지역의 대표적인 무장 독립운동이었으며, 거사가 국제공산당과 연계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소설로 다시 재현해보는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
덕흥여관에 처음 들어갈 때 장진홍은 겨우 걷는 사람처럼 심하게 다리를 절뚝거렸다. 자전거를 나무 아래에 세우고 묶는 일도 간신히 해냈다. 사환 박노선이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이윽고 말을 걸었다.
"와 카심니까(왜 그러십니까)? 크게 다친 거 같은데 자정건 우째 타고 오싰능교(자전거는 어떻게 타고 오셨습니까)?"
"내가 선물을 꼭 보내야 할 고마운 곳들이 몇 군데 있는데, 모두들 이 인근에 있다오. 그래서 이렇게 자전거에 선물들을 싣고 왔는데,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을 기약해야지요. 내리막길에서 자전거를 타다가 심하게 넘어지는 바람에 이리 다쳤지요."
장진홍이 서울말로 대답했다. 그렇게 다리를 전 것과 서울말을 쓴 것은 의거 후 일제 경찰의 수사에 혼선을 주려는 의도된 언행이었다. 자신을 노출하지 않으려면 다른 사람을 동원해야 하는데, 박노선에게 심부름을 시키면 적당하겠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기도 했다.
다시 이튿날(18일), 장진홍은 박노선에게 '심부름값'을 주면서 부탁했다.
"자고 나면 낫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다리가 퉁퉁 붓고 통증이 더 심해져서 아주 걷기가 힘들게 되었다오. 이것들이 모두 벌꿀상자인데 조선은행, 도청, 식산은행, 경찰서에 순서대로 급히 배달을 좀 해 주시오."
벌꿀 선물로 위장된 상자들 안에는 장진홍이 직접 제조한 시한폭탄들이 들어 있었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박노선은 짭짤한 심부름값이 흐뭇해 부랴부랴 상자들을 챙겨들고 조선은행 대구지점으로 갔다. 박노선은 장진홍이 시킨 대로 국고계 주임 복지흥삼(福地興三)을 찾았다.
"선물 가꼬(가지고) 심부름 왔어에(왔어요), 주임님!"
박노선은 평소 안면이 있는 복지흥삼에게 벌꿀 상자 하나를 건넸다. 그때 복지흥삼 곁에 군인 출신 일본인 은행원 길촌결(吉村潔)이 앉아 있었다. 그가 군인 출신답게 화약 냄새를 맡았다. 길촌결이 재빨리 포장 끈을 풀었다. 상자 안에는 도화선에 불이 붙은 폭탄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으악! 이게 뭐야? 이게 뭐야!"
복지흥삼이 비명을 질러댔다. 길촌결이 재빠르게 도화선을 잘랐다. 아직 불이 옮겨 붙지 않은 나머지 세 상자는 황급히 은행 앞뜰 자전거 주차장로 옮겨졌다. 신고를 받은 경찰이 달려왔고, 박노선은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경찰은 주차장에 있는 폭탄 셋을 다시 한길로 내놓았다. 옮긴 지 1∼2분 만에 폭탄 셋은 요란한 굉음을 내며 잇따라 폭발했다. 은행원, 경찰 등 5명이 파편에 맞아 중상을 입었고, 은행 창문 70여 개가 박살이 나면서 파편이 대구역까지 날아갔다.
폭파 의거는 '절반의 성공'에 멈추었지만 세상을 흔들었다. 일제 경찰은 1928년 1월 장진홍이 '범인'인 줄 파악하지 못한 채, 이정기 등 독립운동가 8명을 검거해 대구 형무소에 투옥했다. 이때 이원록(이육사)도 자신의 형·동생과 더불어 옥고를 겪었다. 일경은 악독한 고문 끝에 이들을 진범으로 조작해 재판에 회부했다.
의거가 완전한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을 한탄한 장진홍 지사는 1927년 11월과 1928년 1월 안동 경찰서와 영천 경찰서 폭파를 계획했다. 그러나 끝내 실행에 옮기지 못한 상태에서, 검거의 포위망이 좁혀오자 몸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도 장진홍은 새로운 거사 준비에 골몰했다. 하지만 동생의 오사카 소재 안경점에서 마침내 검거되었다. 장 지사를 체포한 일제 경찰은 조선인이었다. 조선인 형사 최덕술은 1929년 2월 19일 의기양양하게 장 지사를 대구로 압송했다.
혹독한 고문이 시작되었다. 더 많은 관련자들을 체포해 공적을 쌓으려는 조선인 형사들의 광분은 그야말로 '필설로 형언'하기 어려울 만큼 비인간적이었다. 하지만 장 지사는 오직 자신의 단독 의거라는 점만 되풀이해서 강조하며 오히려 그들을 꾸짖었다.
"조선 민족의 피를 받은 자로서 일제 경찰의 주구가 되어 동족의 해방운동을 이다지도 방해하는 악질 조선인 경관의 죄상이야말로 나의 죽은 혼이라도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여섯 달이나 악랄한 고문을 당한 끝에 장 지사는 재판에 회부되었다. 1930년 2월 17일 대구지방법원 1심 재판은 '사형'을 언도했다. 그 뒤 대구복심법원 재판도, 고등법원 상고 결과도 마찬가지로 '사형'이었다. 장 지사는 사형 선고가 내려질 때마다 재판정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1930년 7월 31일, 장 지사는 "일제에게 치욕스러운 죽음을 당하느니 차라리 내 손으로 목숨을 끊는 것이 일제에 대한 마지막 항거가 아니겠는가!" 하고 결심했다. 이윽고 그날 밤 11시경 장 지사가 자결·순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