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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dh_edu - 사용자 기여 [ko]</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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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5-18T07:23:25Z</updated>
	<subtitle>사용자 기여</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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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님의 침묵</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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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06-20T06:16:0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Nsgjjsjsjy02: /* 각주 */&lt;/p&gt;
&lt;hr /&gt;
&lt;div&gt;{|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 width:100%&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8%&amp;quot;|사진&lt;br /&gt;
|[[파일:님의침묵.jpg|center|200픽셀]]&lt;br /&gt;
|+ 시집 &amp;lt;님의 沈黙&amp;gt;&lt;br /&gt;
|한글||님의 침묵&lt;br /&gt;
|-&lt;br /&gt;
|한자||님의 沈黙&lt;br /&gt;
|-&lt;br /&gt;
|판본||활자본&lt;br /&gt;
|-&lt;br /&gt;
|시대||일제강점기&lt;br /&gt;
|-&lt;br /&gt;
|간행연도||1926년&lt;br /&gt;
|-&lt;br /&gt;
|간행처||경성 회동서관&lt;br /&gt;
|}&lt;br /&gt;
&lt;br /&gt;
'''만해 [[한용운]]이 1926년에 출간한 시집이다.'''&lt;br /&gt;
&lt;br /&gt;
== 구성 및 형식 ==&lt;br /&gt;
1925년 내설악 백담사에서 쓰여져서 1926년 회동서관에서 간행하였고, 1934년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재판하였다. 광복 후 1950년에 다시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재간되었다.&lt;br /&gt;
&lt;br /&gt;
시집 『님의 침묵』의 구성은 앞에 ‘군말’과 뒤에 ‘독자에게’가 붙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군말’에는 창작 동기가 제시되어 있다.&lt;br /&gt;
&lt;br /&gt;
본문은 「님의 침묵」을 비롯하여,「알 수 없어요」·「자유정조」등 모두 88편의 시가 기승전결의 극적 구성을 취한 연작시 형태로 배열되어 있다. 이것은 첫 시 「님의 침묵」이 기(이별의 제시), 승(이별 후의 고통과 슬픔), 전(슬픔의 희망으로의 전이), 결(만남의 성취)이라는 전개 과정을 지닌 것과 대응된다.&lt;br /&gt;
&lt;br /&gt;
즉, 시집 『님의 침묵』은 88편의 시가 대체로 기(이별의 시편), 승(슬픔과 고통의 시편), 전(희망으로의 전환시편), 결(만남을 향한 시편)이라는 연작시와 같은 구성방식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첫 시 「님의 침묵」에서의 첫 구절은 “님은 갓슴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갓슴니다.”라는 이별의 시로 시작되어, 끝 시 「사랑의 끗판」에서의 마지막 행이 “녜 녜 가요 이제 곳 가요.”라는 만남의 시로 귀결되는 특징을 지닌다.&lt;br /&gt;
&lt;br /&gt;
시의 본문 뒤에 붙어 있는 ‘독자에게’는 탈고 소감을 적어놓은 일종의 후기인데, 시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점 또한 특이하다.&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창작 동기는 민족항일기인 1920년대의 극심한 언론 탄압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에 문학적으로 저항하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시의 비유와 상징을 통해 보다 높은 정신적 차원에서 문학적 저항을 시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점은 “해저믄 벌판에서 도러가는 길을 일코 헤매는 어린양이 긔루어서 이 시를 쓴다.”라는 &amp;lt;군말&amp;gt;에 극명히 제시되어 있다.&lt;br /&gt;
&lt;br /&gt;
“님만 님이 아니라 긔룬 것은 다 님이다.”라는 구절에서 이미 알 수 있듯이 임은 연인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연인일 수도 있지만 ‘길을 잃은 어린양’, 즉 당대 식민지 하에서 방황하는 민족의 모습일 수도 있으며, 또한 빼앗긴 조국의 모습이기도 하고, 아울러 실현되지 않고 있는 이념이거나 진리일 수도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님'은 연인이라는 개인적 의미일 수도 있고, 조국 · 민족 등의 규범적 의미일 수도 있으며, 정의 · 진리 등의 의미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이 시집의 형상적 우수성이 드러난다.&lt;br /&gt;
&lt;br /&gt;
이렇게 볼 때 전체적인 내용은 이별이나 사랑의 고통 그 자체만을 노래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별과 그 고통 속에서 참다운 삶의 의미를 깨닫고, 마침내 임과 사랑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함으로써 크고 빛나는 만남을 성취한 생성과 극복의 시로서의 성격을 지니는 것이다. '님의 침묵'이라는 표제에서 침묵의 의미는 단순한 명상의 침묵이 아니라 생생한 삶의 몸부림과 깨달음을 생성하는 적극적 침묵인 것이다.&lt;br /&gt;
&lt;br /&gt;
방법론적인 면에서의 특징은 은유와 역설을 탁월하게 구사함으로써 현대시적인 면모를 확보한 데서 드러난다. 1920년대 중반에 독창적인 은유와 역설을 시의 중심 방법으로 삼음으로써 우리 현대시의 한 기점이 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였다.&lt;br /&gt;
&lt;br /&gt;
== 수록 작품 ==&lt;br /&gt;
* 군말&lt;br /&gt;
* 님의 침묵&lt;br /&gt;
* 이별은 미의 창조 &lt;br /&gt;
* 알 수 없어요&lt;br /&gt;
* 나는 잊고자&lt;br /&gt;
* 가지 마서요&lt;br /&gt;
* 고적한 밤&lt;br /&gt;
* 나의 길&lt;br /&gt;
* 꿈 깨고서&lt;br /&gt;
* 예술가&lt;br /&gt;
* 이별&lt;br /&gt;
* 길이 막혀&lt;br /&gt;
* 자유정조&lt;br /&gt;
* 하나가 되어 주서요&lt;br /&gt;
* 나룻배와 행인&lt;br /&gt;
* 차라리&lt;br /&gt;
* 당신이 아니더면&lt;br /&gt;
* 나의 노래&lt;br /&gt;
* 잠 없는 꿈&lt;br /&gt;
* 생명&lt;br /&gt;
* 사랑의 측량&lt;br /&gt;
* 진주&lt;br /&gt;
* 슬픔의 삼매&lt;br /&gt;
* 의심하지 마서요&lt;br /&gt;
* 당신은&lt;br /&gt;
* 행복&lt;br /&gt;
* 착인&lt;br /&gt;
* 밤은 고요하고&lt;br /&gt;
* 비밀&lt;br /&gt;
* 사랑의 존재&lt;br /&gt;
* 꿈과 근심&lt;br /&gt;
* 포도주&lt;br /&gt;
* 비방&lt;br /&gt;
* 님의 손길&lt;br /&gt;
* 해당화&lt;br /&gt;
* 비&lt;br /&gt;
* 복종&lt;br /&gt;
* 참아 주서요&lt;br /&gt;
* 어느 것이 참이냐&lt;br /&gt;
* 정천한해&lt;br /&gt;
* 첫 ‘키스’&lt;br /&gt;
* 선사의 설법&lt;br /&gt;
* 그를 보내며&lt;br /&gt;
* 금강산&lt;br /&gt;
* 님의 얼굴&lt;br /&gt;
* 심은 버들&lt;br /&gt;
* 낙원은 가시덤불에서&lt;br /&gt;
* 참말인가요&lt;br /&gt;
* 꽃이 먼저 알아&lt;br /&gt;
* 찬송&lt;br /&gt;
* 논개의 애인이 되어서 그의 묘에&lt;br /&gt;
* 후회&lt;br /&gt;
* 사랑하는 까닭&lt;br /&gt;
* 당신의 편지&lt;br /&gt;
* 거짓 이별&lt;br /&gt;
* 꿈이라면&lt;br /&gt;
* 달을 보며&lt;br /&gt;
* 인과율&lt;br /&gt;
* 반비례&lt;br /&gt;
* 잠꼬대&lt;br /&gt;
* 계월향에게&lt;br /&gt;
* 만족&lt;br /&gt;
* 눈물&lt;br /&gt;
* 어디라도&lt;br /&gt;
* 떠날 때의 님의 얼굴&lt;br /&gt;
* 최초의 님&lt;br /&gt;
* 두견새&lt;br /&gt;
* 나의 꿈&lt;br /&gt;
* 우는 때&lt;br /&gt;
* 버리지 아니하면&lt;br /&gt;
* 타고르의 시(GARDENISTO)를 읽고&lt;br /&gt;
* 수의 비밀&lt;br /&gt;
* 당신은&lt;br /&gt;
* 사랑의 불&lt;br /&gt;
* ‘사랑’을 사랑하여요&lt;br /&gt;
* 당신 가신 때&lt;br /&gt;
* 여름밤이 길어요&lt;br /&gt;
* 요술&lt;br /&gt;
* 당신의 마음&lt;br /&gt;
* 명상&lt;br /&gt;
* 생의 예술&lt;br /&gt;
* 칠석&lt;br /&gt;
* 꽃싸움&lt;br /&gt;
* 거문고 탈 때&lt;br /&gt;
* 오서요&lt;br /&gt;
* 쾌락&lt;br /&gt;
* 고시&lt;br /&gt;
* 사랑의 끝판&lt;br /&gt;
* 독자에게&lt;br /&gt;
&lt;br /&gt;
== 님의 침묵(시) ==&lt;br /&gt;
=== 원문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 center&amp;quot;&amp;gt;'''님의 沈默'''&amp;lt;/div&amp;gt;&lt;br /&gt;
----&lt;br /&gt;
님은갓슴니다 아々 사랑하는나의님은 갓슴니다&amp;lt;br/&amp;gt;&lt;br /&gt;
푸른산빗을ᄭᅢ치고 단풍나무숩을향하야난 적은길을 거러서 참어ᄯᅥᆯ치고 갓슴니다&amp;lt;br/&amp;gt;&lt;br /&gt;
黃金의ᄭᅩᆺ가티 굿고빗나든 옛盟誓는 차듸찬ᄯᅴᄭᅳᆯ이되야서 한숨의微風에 나러갓슴니다&amp;lt;br/&amp;gt;&lt;br /&gt;
날카로은 첫「키쓰」의追憶은 나의運命의指針을 돌너너코 뒤ㅅ거름처서 사러젓슴니다&amp;lt;br/&amp;gt;&lt;br /&gt;
나는 향긔로은 님의말소리에 귀먹고 ᄭᅩᆺ다은 님의얼골에 눈머럿슴니다&amp;lt;br/&amp;gt;&lt;br /&gt;
사랑도 사람의일이라 맛날ᄯᅢ에 미리 ᄯᅥ날것을 염녀하고경계하지 아니한것은아니지만 리별은 ᄯᅳᆺ밧긔일이되고 놀난가슴은 새로은슯음에 터짐니다&amp;lt;br/&amp;gt;&lt;br /&gt;
그러나 리별을 쓸데업는 눈물의源泉을만들고 마는 것은 스々로 사랑을ᄭᅢ치는 것인줄 아는ᄭᅡ닭에 것잡을수업는 슯음의힘을 옴겨서 새希望의 정수박이에 드러부엇슴니다&amp;lt;br/&amp;gt;&lt;br /&gt;
우리는 맛날ᄯᅢ에 ᄯᅥ날것을염녀하는 것과가티 ᄯᅥ날ᄯᅢ에 다시맛날것을 밋슴니다&amp;lt;br/&amp;gt;&lt;br /&gt;
아々 님은갓지마는 나는 님을보내지 아니하얏슴니다&amp;lt;br/&amp;gt;&lt;br /&gt;
제곡조를못이기는 사랑의노래는 님의沈默을 휩싸고돔니다&amp;lt;br/&amp;gt;&lt;br /&gt;
&lt;br /&gt;
=== 현대어역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 center&amp;quot;&amp;gt;'''님의 침묵'''&amp;lt;/div&amp;gt;&lt;br /&gt;
----&lt;br /&gt;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amp;lt;br/&amp;gt;&lt;br /&gt;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amp;lt;br/&amp;gt;&lt;br /&gt;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amp;lt;br/&amp;gt;&lt;br /&gt;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amp;lt;br/&amp;gt;&lt;br /&gt;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amp;lt;br/&amp;gt;&lt;br /&gt;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amp;lt;br/&amp;gt;&lt;br /&gt;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amp;lt;br/&amp;gt;&lt;br /&gt;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amp;lt;br/&amp;gt;&lt;br /&gt;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amp;lt;br/&amp;gt;&lt;br /&gt;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amp;lt;br/&amp;gt;&lt;br /&gt;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amp;lt;br/&amp;gt;&lt;br /&gt;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amp;lt;br/&amp;gt;&lt;br /&gt;
&lt;br /&gt;
== 의의와 평가 ==&lt;br /&gt;
전통적인 정신과 방법을 현대적인 것으로 확대, 심화시킴으로써 현대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 것은 중요한 일이다. 『님의 침묵』이 성취한 사랑 · 자유 · 평등 · 평화의 깊이 있는 사상성과 방법론적인 예술성의 조화야말로 이 땅 현대시의 바람직한 지평이다.&lt;br /&gt;
&lt;br /&gt;
== 사진 ==&lt;br /&gt;
[[파일:님의침묵본문.jpg|center|200픽셀]]&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님의 침묵 본문&amp;lt;/div&amp;gt;&lt;br /&gt;
&lt;br /&gt;
[[파일:님의침묵초판본.jpg|center|200픽셀]]&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님의 침묵 초판본&amp;lt;/div&amp;gt;&lt;br /&gt;
&lt;br /&gt;
&lt;br /&gt;
== 참고문헌 ==&lt;br /&gt;
* [https://ko.wikipedia.org/wiki/%EB%8B%98%EC%9D%98_%EC%B9%A8%EB%AC%B5_(%EC%8B%9C%EC%A7%91) 위키백과_님의 침묵(시)]&lt;br /&gt;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3398 님의 침묵(님의 침묵(沈黙))-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 『님의 침묵연구』(윤재근, 민족문화사, 1985)&lt;br /&gt;
* 『한용운문학연구』(김재홍, 일지사, 1982)&lt;br /&gt;
* 『궁핍한 시대의 시인』(김우창, 민음사, 1977)&lt;br /&gt;
* 『님의 침묵 전편해설』(송욱, 과학사, 1974)&lt;br /&gt;
* 『한용운전집』(신구문화사, 1973)&lt;br /&gt;
* 『한용운연구』(박노준·인권환, 통문관, 1960)&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감자]]&lt;/div&gt;</summary>
		<author><name>Nsgjjsjsjy02</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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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한용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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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06-20T06:02:2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Nsgjjsjsjy02: /* 외부 링크 */&lt;/p&gt;
&lt;hr /&gt;
&lt;div&gt;{|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width:100%&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0%&amp;quot;|사진&lt;br /&gt;
|[[파일:한용운.jpg|center|200픽셀]]&lt;br /&gt;
|+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lt;br /&gt;
|+ style=&amp;quot;caption-side:bottom;text-align:left:&amp;quot;|출처: 위키백과&lt;br /&gt;
|법명||용운(龍雲)&lt;br /&gt;
|-&lt;br /&gt;
|출생||1879년 8월 29일 조선 충청도 결성현 현내면 박철리 잠방골&lt;br /&gt;
|-&lt;br /&gt;
|입적||1944년 6월 29일 일제강점기 경성부 동대문구 성북정 [[심우장]]&lt;br /&gt;
|-&lt;br /&gt;
|입적원인||중풍&lt;br /&gt;
|-&lt;br /&gt;
|거주지||일제강점기 경성부 동대문구 성북정 심우장&lt;br /&gt;
|-&lt;br /&gt;
|국적||대한민국&lt;br /&gt;
|-&lt;br /&gt;
|속명||한정옥(韓貞玉)&lt;br /&gt;
|-&lt;br /&gt;
|경력||신간회 중앙위원장&lt;br /&gt;
|-&lt;br /&gt;
|종파||조계종&lt;br /&gt;
|-&lt;br /&gt;
|호||만해(萬海·卍海)&lt;br /&gt;
|-&lt;br /&gt;
|직업||승려, 시인, 독립운동가&lt;br /&gt;
|-&lt;br /&gt;
|배우자||유숙원(재혼), 전정숙(이혼)&lt;br /&gt;
|-&lt;br /&gt;
|자녀||한보국(아들), 한영숙(딸)&lt;br /&gt;
|-&lt;br /&gt;
|부모||한응준(부), 방숙영(모)&lt;br /&gt;
|}&lt;br /&gt;
&lt;br /&gt;
'''한용운'''(韓龍雲, 1879년 8월 29일 ~ 1944년 6월 29일)은 일제강점기의 시인, 승려,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청주 한씨. 호는 만해(萬海)이다. 불교를 통한 언론, 교육 활동을 하였다.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으며, 그것에 대한 대안점으로 불교사회개혁론을 주장했다.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이며 광복 1년을 앞둔 1944년 6월 29일에 중풍병사(입적)하였다. 독립선언서의 &amp;quot;공약 3장&amp;quot;을 추가보완하였고 옥중에서 '조선 독립의 서'(朝鮮獨立之書)를 지어 독립과 자유를 주장하였다.&lt;br /&gt;
&lt;br /&gt;
1910년 일본이 주장하는 한일불교동맹을 반대철폐하고 이회영, 박은식, 김동삼 등의 독립지사(志士)들을 만나 독립운동을 협의하였다. 1918년 11월부터는 불교 최초의 잡지인 《[[유심]]》을 발행하였고 1919년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을 하여 체포당한 뒤 3년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 풀려났다. 1920년대에는 대처승 운동을 주도하여 중에게도 결혼할 권리를 달라고 호소하기도 하였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 언론활동에 참여하였다. 1927년 2월부터는 [[신간회]]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과 이듬해 신간회 경성지부장을 지냈다.&lt;br /&gt;
&lt;br /&gt;
1918년 《[[유심]]》에 시를 발표하였고, 1926년〈[[님의 침묵]]〉등의 시를 발표하였다. 님의 침묵에서는 기존의 시와, 시조의 형식을 깬 산문시 형태로 시를 썼다. 소설가로도 활동하여 1930년대부터는 장편소설《흑풍》(黑風),《후회》,《박명》(薄命), 단편소설《죽음》등을 비롯한 몇 편의 장편, 단편 소설들을 발표하였다. 1931년 김법린 등과 청년승려비밀결사체인 만당(卍黨)을 조직하고 당수가 되었으나 1937년 불교관계 항일단체를 적발하는 과정에서 만당사건(卍黨事件)의 배후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저서로는 시집 《[[님의_침묵]]》을 비롯하여 《조선불교유신론》,《불교대전》,《십현담주해》,《불교와 고려제왕》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 생애 ==&lt;br /&gt;
==== 유년기 ====&lt;br /&gt;
조선전기 한명회 동생으로 전구서승(典廏署丞)을 지낸 서원군 한명진(韓命溍)의 이양공파 20대손이다. 한응준의 차남으로 태어났고, 그의 형은 한윤경(1860년~1929년)이다. 자필이력서와 승적부의 출생지는 충청남도 홍주군 주북면 옥동(玉洞)이다. [[3.1운동]] 후 재판 때 고향을 홍성의 '남문리'라고 답변하였다. 현재 출생지로 알려진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491번지는 그의 아들인 한보국의 제적등본에 따른 기록이다..&lt;br /&gt;
&lt;br /&gt;
==== 소년 시절 ====&lt;br /&gt;
16살 되던 해인 1894년부터 홍성읍내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고 전한다. 그 해에 음력1월부터 12월까지 갑오농민운동이 일어났고, 7월 25일에 청일전쟁이 발발하였다. 그의 부친 한응준은 홍주성에서 관군의 참모관으로 활약하며 동학농민군 방어에 성공하였으나 이듬해 병고로 사망하였다. 회고록에 의하면 18세인 1896년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 서울로 향하였다가 설악산 오세암에 입산하여 불교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그의 아들 한보국의 제적등본에 의하면, 부친의 3년상을 치른 후에 20살이 되던 해인 1892년 2월 10일 전정숙과 결혼하였다. 1904년 12월 21일 전정숙에게서 아들 한보국(1904년~1977년)을 얻었으나 그는 이미 강원도 백담사에서 출가를 하였다.&lt;br /&gt;
&lt;br /&gt;
==== 방랑 생활 ====&lt;br /&gt;
[[파일:청년기한용운.jpg|섬네일|오른쪽|200px|청년기의 만해]]&lt;br /&gt;
건양 1년인 1896년에 그는 설악산 오세암에 들어갔다. 후일 그는 '나는 왜 중이 되었나'라는 그 자신의 술회에 간략하에 언급하기를 세상에 대한 관심과 생활의 방편으로 집을 떠나 오세암에 입산하여 처음에는 머슴으로 일하다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고 한다. 출가의 원인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당시 고향 홍성군 홍주에서도 [[동학농민운동]]과 의병운동이 전개된 것으로 미루어 역사적 격변기의 상황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오세암에 머무르면서 그는 불교의 기초지식을 섭렵하면서 선(禪)을 닦았다.&lt;br /&gt;
&lt;br /&gt;
=== 대한제국(1897년~1910년)  활동 ===&lt;br /&gt;
==== 출가와 문학 ====&lt;br /&gt;
[[파일:만해기념관.jpg|섬네일|왼쪽|[[백담사]] 경내의 만해기념관]]&lt;br /&gt;
1905년 1월 26일 강원도 [[백담사]]에 가서 김연곡(金蓮谷)을 은사로 하여 정식으로 출가, 김연곡에게 득도한 다음 전영제(全泳濟)에게 계(戒)를 받아 승려가 되었고, 만화(萬化)에게서 법을 받았다. 계명은 '''봉완(奉玩)'''이며 '''법호는 용운(龍雲)이며, 후에 필명 및 아호는 만해(萬海·卍海)'''라 하였다. 이후 수년 간 불교활동에 전념했다. 이즈음에 불교 관련 서적뿐만 아니라 량치차오의〈음빙실문집 飮氷室文集〉등을 접하면서 근대사상을 다양하게 수용하였다.&lt;br /&gt;
&lt;br /&gt;
이 때를 전후해서 영환지략(瀛環志略)-서계여 저술,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양계초 저술 등을 읽고 세계동향을 알기 위해 세계여행을 계획하고 백담사에서 하산하여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건너갔으나 밀정으로 인하여 구사일생으로 귀국하였으나, 각처에서 의병 활동으로 어지럽게 되자 함경남도 안변 석왕사를 찾아가 암자에서 참선생활을 하였다.(삼천리 제6호 회고록)&lt;br /&gt;
&lt;br /&gt;
'''&amp;quot;「영환지략瀛環地略」이라는 책을 통하여 비로소 조선 이외에도 너른 천지 잇는 것을 인식하고 행장을 수습하여 원산을 거처서 서백리아에 이르러 몃 해를 덧업는 방낭생활을 하다가 다시 귀국하여 安邊釋王寺에 파뭇겨 叅憚 生活을 하엿다. 그러다가, 동양문명의 집산은 동경에서 되니 東京으로 갈 차로 이듬해 봄에 처음으로 서울에 발을 드려노앗다.&amp;quot;&amp;lt;삼천리 제5권 제9호 처음 서울 오든 때-회고록&amp;gt;'''&lt;br /&gt;
&lt;br /&gt;
1908년 명진학교(현 동국대학교) 보조과(일어과와 측량과) 수학 후 4월에 일본의 시모노세기, 교토, 동경, 닛고 등지를 주유하며 신문물을 시찰하였고, 동경 조동종대학(현 고마자와駒澤大學)의 아사다교수와 교유하여 불교와 서양철학을 수강하였다. 이 때에 유학 중이던 최린(崔麟), 고원훈, 채기두 등과 교류하였고 9월 귀국하였다. 10월 20일 일본의 조선 전국 사찰 대표 52인의 한 사람으로 서울 원흥사(元興寺)에서 원종종무원(圓宗宗務院)의 설립에 참여하였다. 12월 10일 서울에 경성명진측량강습소를 개설 소장에 취임하였다. 1909년 초에는 조선불교의 유신을 주장하는 논저《[[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하기 시작하였다(1913년 회동서관 간행).  1910년 한문으로 된 불경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 즉 불교의 대중화작업에 주력하였다.&lt;br /&gt;
&lt;br /&gt;
==== 승려들의 결혼 자유화 주장 ====&lt;br /&gt;
1909년 초부터 그는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을 집필하였고, 1910년 12월 8일 백담사에서 탈고하였다. 동시에 그는 [[백담사]]에서 거의 독학하다시피하며 대장경을 암송하고 한문과 인도어로 된 불교 경전들을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을 하였다. 한편 1910년부터 그는 승려의 결혼을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만해는 1910년 3월 승려의 결혼을 공식적으로 허락해 달라는 문건인 중추원 헌의서를 청원서 형식으로 대한제국 중추원에 제출하였고, 경술국치(한일합방) 이후 9월에는  [[조선총독부]] 통감부에 승려취처에 관한 건백서를 테라우치 통감에게 제출하였다. 승려에게 결혼을 금지하라고 부처님이 가르친 것은 아니라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lt;br /&gt;
&lt;br /&gt;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이 미혹을 떠나 깨달음을 얻고 악을 고쳐 선을 행하도록 바라셨으나, 중생의 끈기가 각기 달라서 부득불 천하에서 정을 제거하고 욕망을 끊어 버린 사실들을 모두 연설하였던 것이니, 각기 좋아하는 것을 좇아 인도하시고자 희망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계율에 있는 금혼은 본디 방편의 하나에 불과한 것일뿐, 불교의 궁극의 경지와는 거리가 먼 것이니 이를 제거한들 어찌 손상됨이 있겠습니까.&amp;lt;ref&amp;gt;김광식, 《한용운 연구》 (동국대학교출판부, 2011) 109쪽&amp;lt;/ref&amp;gt;'''&lt;br /&gt;
&lt;br /&gt;
대중의 결혼생활, 가장이라는 짐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중생들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승려의 결혼을 허가해 달라는 그의 주장은 그대로 묵살당한다.&lt;br /&gt;
&lt;br /&gt;
한일합방 직후 총독부가 조선인을 차별대우하고 일본인을 우대하자 그는 불만을 드러냈다. 만해의 제자였던 춘성 스님에 의하면 만해는 평소 조선총독부의 조선인 차별 정책에 대해 &amp;quot;왜놈의 머슴살이 같으니라구!&amp;quot;라며 불만을 토로하였다 한다.&lt;br /&gt;
&lt;br /&gt;
=== 일제강점기 활동 ===&lt;br /&gt;
==== 불교 사회 혁신 운동 ====&lt;br /&gt;
1910년  8월 29일에 한일 합방 조약이 체결된 이후로, 원종의 이회광이 일본과 맺은 한일불교동맹조약인 조동종맹약을 분쇄하기 위해 12월 광주 증심사로 내려갔다. 1911년 1월 석전 박한영, 진진웅, 김종래, 장금봉 등과 순천 송광사, 동래 범어사에서 승려궐기대회를 개최하여 일본의 조동종(曹洞宗)과 한국불교의 통합을 꾀한 이회광 등의 친일적인 불교행위를 규탄, 저지하였다. 송광사에 임제종 종무소를 설치하였고 조선임제종 종무원 관장에 취임하였다. 11월 서울에서 임제종 중앙포교당(조선선종포교당) 건립을 착수하였다. 그 해 6월 3일 일제가 한국불교를 억압하고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제정·공포한 법령인 사찰령이 공포되었고, 한국불교교단은 삼십본산연합사무소에 귀속되었다. 일제의 사찰령에 맞서 한국불교의 전통을 계승하려는 노력으로  1912년 4월 10일 중앙포교당이 준공되자 5월 26일 한용운, 백용성, 이화능 등 중앙포교당을 개설하였다.  6월 21일에 경서부 관청에 소환된 이후 이회광의 원종은 조선불교선교양종으로, 임제종은 조선선종중앙포교당으로 개칭되었다.&lt;br /&gt;
&lt;br /&gt;
1912년 9월 10일부터 10월 8일까지 만주 동북삼성(東北三省)을 방문하여 독립군의 훈련장을 순방하면서 그들에게 독립정신과 민족혼을 심어주는 일에 전력하던 중에 통화현 굴라재에서 일진회 첩자로 오해를 받아 목에 총을 맞고 마취없이 '''총알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은 후 귀국하여 동래부 범어사로 내려갔다. 1913년 2~3월에 조선불교월보 13호, 14호에 조선불교유신론 9장 ‘승려의 단결’편을 간행전 기고했다. 필명을 '''만해생(萬海生)으로 문헌상 처음으로 만해'''라는 아호를 사용하였다. 5월 25일에 조선불교유신론을 회동서관에서 출판하였다.&lt;br /&gt;
&lt;br /&gt;
1914년 4월 서울에 유학 온 불교 '고등강숙' 학생들이 불교를 발전시키려는 목적으로 설립한 단체인 '''조선불교강구회(朝鮮佛敎講究會)''' 총재에 취임하였다.&lt;br /&gt;
&lt;br /&gt;
경전을 대중화하기 위해 불교대전을 편찬할 계획으로 양산 통도사에 보관된 고려대장경을 열람하였고, 4월 30일 범어사에서《불교대전 (佛敎大典)》을 간행하였다. 대승불교의 반야사상(般若思想)에 입각하여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계의 각성과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lt;br /&gt;
&lt;br /&gt;
8월에 조선불교회 회장에 취임하였다. 불교의 문제점을 해결하고 불교유신을 직접 수행하고자, 30본산 주지들을 배제하고, 승려와 신도를 융합한 통일기관을 창립하였다. 그러자 30본산 주지들의 반발로  '''불교동맹회'''로 개칭하여, 서울 낙원동에 본부를 두겠다고 경성북부경찰서에 9월10일경 신고했으나, 30본산 주지의 권한을 벗어났다며 등록 거부 당하였다, “'''고등강숙'''”의 학생들이 만해를 따르자, 이회광은 공문을 보내 상경을 막으려다 결국 학교를 폐쇄시켰다.&lt;br /&gt;
&lt;br /&gt;
1915년 6월 20일 청나라 승려 내림(來琳)의 증보본에 의거하여 정선강의 《채근담》 국한문 혼용체 주해본을 저술하였다. 10월에 조선선종 중앙포교당 포교사에 취임하여 계몽활동, 근대화 필용성,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15년 개교한 중앙학림 학생들이 만해를 따랐다. 불교강구회, 각황사 등에서 강연하였다.&lt;br /&gt;
&lt;br /&gt;
==== 불교포교 대중화와 선교진흥론 ====&lt;br /&gt;
1914년에는 [[불교]] 포교의 보편화 대중화를 선언하고 조선불교청년동맹(朝鮮佛敎靑年同盟)을 결성하였다. 조선불교청년동맹의 강령을 손수 지었는데 이를 보면, 첫째로 정교분리(政敎分離), 둘째로는 여러 불교 종단의 통일 또는 연합, 셋째 불교와 사찰의 사회적 진출의 필요 등을 제시하였다. 이는 대중불교의 확산을 위하여 그 출발점을 청년 운동으로 삼아야 한다는 그의 실천행이었다. 그는 불교 포교가 보편화되려면 일단 청년들에게 침투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천주교와 개신교의 선교 활동, 동학의 포교 확산, 사이비 종교 등의 확산에 긴장한 그는 불교 역시 대중에게 침투하여야 함을 역설하고 불교가 중생의 곁에 가장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으로 청소년과 청년층을 공략하는 것을 들었다. 그는 불교의 보편화 운동의 실천을 위하여 '승려에서 대중에로', '산간에서 길가로' 등을 내걸었다.&lt;br /&gt;
&lt;br /&gt;
또한 불교 포교의 대중화를 위해서는 교단, 종단간의 갈등을 줄이고 협력하자는 주장을 펼쳤다. 이는 선교진흥론(禪敎振興論)으로 발표되었다. 그에 의하면 불교의 진흥을 위한 필수불가결의 요건은 수행 이상을 확립하는 일이라 하였다. 이에 한용운은 지금까지 조선의 불교는 오교구산과 선교양종이니 해서, 마치 교의(敎義)와 종지(宗旨)가 다른 것처럼 잘못 인식되어 왔다. 선과 교의 본질은 하나이다. 왜냐하면, 선이란 불교의 마음이며, 교란 불교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양자는 서로 배치되는 개념이 아니며, 양자의 이론적 합일과 연대의 실천이 불교 진흥, 포교 확산의 관건이라고 주장하였다. 동시에 한용운은 선원(禪院)이나 강원(講院)의 지도 이념이나 이론, 실수(實修) 등에 있어 외전(外典)도 첨가해야 한다, 그리고 속된 것을 전적으로 배격하지 말 것을 호소하였다. 그는 선교일치를 주장해온 조선 불교의 일승정신(一乘精神)이 새로운 시대의 좌표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lt;br /&gt;
&lt;br /&gt;
==== 불교 경전의 한글화 ====&lt;br /&gt;
만해는 1910년부터 대장경과 화엄경 등을 비롯한 불교 경전의 내용을 한글로 번역하여 소개하였다. 1930년대 이후에도 그는 불교 경전의 한글화를 주장했다. 경전의 내용이 한문이나 산스크리트어이기에 일반 중생이 읽기에는 너무 힘들다, 어렵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대장경의 한글 번역이다. 현대포교의 요체는 문서에 의한 홍포였다.&lt;br /&gt;
&lt;br /&gt;
그는 아무리 좋은 말씀도 이해를 하지 못하면 무용지물이라 주장하였다. 불교 경전의 대부분이 한문으로 되어 있어서 일반인이나 문맹률이 높던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읽고 이해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방대한 대장경을 쉽게 옮기는 일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불교의 교리와 활동, 고승 등에 대한 내용을 한글로 표현했으며 《불교대전》에는 대장경 등의 내용을 한글로 해석하였는데 이는 바로 그와 같은 시도의 결정이다. 대장경의 요지를 발췌하여 대의를 옮겨 적은 불교대전은 20세기 한국 불교이론서와 《불교성전》들의 효시가 되었다. 그밖에도 그는 불교학 진흥과 포교의 활성화를 위하여서는 각종 금석문(金石文)이나 사장된 자료들이 일반에 소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lt;br /&gt;
&lt;br /&gt;
==== 잡지 발행 ====&lt;br /&gt;
1918년 9월 1일  제자 춘성 등과 함께 월간 불교잡지《[[유심]]》을 창간하여 12월까지 3권을 발행하고 중단되었으나, 이 잡지를 통해 불교 논설만이 아니라 계몽적 성격을 띤 글을 발표했고, 또 신체시를 탈피한 신시〈심 (心)〉을 발표하여 문학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는 당시 조선불교의 침체와 낙후성과 은둔주의를 대담하고 통렬하게 분석과 비판을 한 저서 &amp;lt;[[조선불교유신론]]&amp;gt;을 발표하여 사상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lt;br /&gt;
&lt;br /&gt;
월간 유심지에서 그는 시 '심 (心)'과 수필 고학생, 남모르는 아이들을 발표하는 등 불교의 보편화와 친숙화를 꾀한다. 불교의 홍보, 포교와 함께 계몽, 자각, 자유정신,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논설들을 다수 실은 월간지 [[유심]]은 뒷날 그가 관계한《불교》잡지와 함께 가장 괄목할만한 문화사업의 하나가 되었다.&lt;br /&gt;
&lt;br /&gt;
==== 3.1 만세 운동과 투옥 ====&lt;br /&gt;
[[파일:3.1운동한용운.jpg|섬네일|210px|오른쪽|1920년 7월 2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 3.1 운동에 참가한 민족대표 48인 공판에 관한 기사, 다섯째 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한용운]]&lt;br /&gt;
1918년 12월에 발표한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감동하여 1919년 1월부터는 전국적인 만세 운동 준비에 참여하고, 백용성 등과 함께 [[불교]] 지도자들을 소집하여 손병희 등 천도교 지도자들과 이상재 등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과 회합하였다. 그는 독립선언문의 내용을 둘러싸고 최남선과 의견충돌을 하였다. 내용이 좀 더 과감하고 현실적이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으나, 최남선 등은 만해의 주장이 급진적이고 과격하다며 반대했고 결국 만해가 제시한 조건들 중 마지막의 행동강령인 공약 제3조 '최후의 일인까지 쾌히 우리의 의사를 발표하자' 만이 수용, 독립선언서에 수록되었다.&lt;br /&gt;
&lt;br /&gt;
1919년 [[3.1 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고,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으며 일설에는 용성 스님의 도장도 그가 찍었다 한다. 경성 탑골공원에서 독립 선언서 낭독과 만세 운동에 가담했다가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었다. 민족대표자들은 평화 시위를 기획하였는데 시위는 격화되었고, 민족대표자들은 자수를 결심한다. 이종일의 회고에 의하면 &amp;quot;수감 중 만해는 일제의 고문 및 위협에 벌벌 떠는 나약한 민족대표들에게 인분을 퍼부었다.&amp;quot;고 한다.&amp;lt;ref name=&amp;quot;:1&amp;quot;&amp;gt;김광식, 《만해 연구》 (동국대학교출판부, 2011) 315쪽&amp;lt;/ref&amp;gt;&lt;br /&gt;
&lt;br /&gt;
그는 만세운동을 진행하던 중 탑골공원에서 총독부 경무국 순사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어 피신한 다른 민족대표자들이 자수함으로써 바로 [[서대문형무소]]로 넘겨지고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받고 복역하였다.&lt;br /&gt;
&lt;br /&gt;
==== 수감과 석방 ====&lt;br /&gt;
한편 체포된 만해는 동대문 시장에 투옥되어 복역하며 재판을 받았다. 이때 옥중에서 변호사는 물론 사식과 보석을 거부할 것을 결의하고 수감생활을 한다. 그리고 옥중에서 '조선독립의 서'를 집필하다가 발각되어 결국 원본을 형사에게 제출했다. 그러나 만해는 한편으로 '조선독립의 서'를 일본인 서울지방법원 검사에게 제출하기 이전에 일부를 휴지에 작은 글씨로 옮겨 적었다. 그리고 그것을 접어 형무소 밖으로 나가는 의복의 갈피에 집어넣었다. 이렇게 외부로 나온 그 선언서는 상해까지 전달되었다.&amp;lt;ref&amp;gt;김광식, 《만해 연구》 (동국대학교출판부, 2011) 332쪽&amp;lt;/ref&amp;gt; 그것은 인간의 권리와 자유와 평등에 대한 길을 가로막는 어떠한 형태의 무력, 군사력, 압제 정치는 결국 스스로의 덫에 걸려 스스로 패망하게 되리라는 내용이었다. 옥중에서 작성한 '조선독립의 서'는 종이를 노끈처럼 말아 유일하게 그의 옥바라지를 하던 제자 춘성 스님을 통해 상하이로 보내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 1919년 11월 4일의 기사 부록에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대요'라는 제목으로 발표, 보도되었다.&lt;br /&gt;
&lt;br /&gt;
1921년 12월 22일 [[3.1운동]] 민족대표자 최린, 함태영, 오세창, 권동진, 이종일 등과 함께 가출옥되자 많은 면회객이 찾아왔다. 그런데 그가 인사를 하는 것을 보고 면회객들은 이상하게 여겼다. 이에 만해는 자신을 마중하러 나온 인사들에게 &amp;quot;너희들은 이런 출옥의 인사를 할 줄은 알고, 인사를 받을 줄은 몰랐더냐?&amp;quot; 하고 대성질타하였다.&amp;lt;ref&amp;gt;김광식, 《만해 연구》 (동국대학교출판부, 2011) 322쪽&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출옥 후에는 언론에 칼럼을 발표하는 동시에 1922년부터 1923년까지 민립대학 설립운동과 물산장려운동 등의 민족운동에도 참여했다. 이 기간 중 그는 [[김성수]], 조만식, [[안재홍]], [[이광수]], [[방응모]] 등을 만나 인맥을 쌓기도 했다. 글 못지않게 연설가로서도 남다른 능력을 지니고 있던 그는 1922년 5월 전조선학생대회 주최로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강연회가 개최되자 3인의 종교 지도자의 한 사람이자 연사의 1인으로 초빙되었다. 대회가 열린 날 두 번째 연사로 나선 만해가 강연하자 청중이 열광하여 결국 다음 사람이 강연을 포기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1922년 9월 잡지《개벽》에 옥중시 '무궁화 심으라'를 발표하였다.&lt;br /&gt;
&lt;br /&gt;
==== 사회 단체 활동과 님의 침묵 ====&lt;br /&gt;
1922년 출옥 후에도 일본경찰의 감시 아래에서 강연 등 여러 방법으로 조국독립의 열변을 토하였다. 1920년대에 부인이 있는 대처승이 속인들에게 사이비 중이라고 모욕을 당하는 것을 보고 대처승 운동을 주도하여 중에게도 결혼할 자격을 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1924년부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논설위원을 겸하며 계몽, 사회 참여를 촉구,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칼럼을 게제하였다.&lt;br /&gt;
&lt;br /&gt;
1923년 1월 동아일보에 논설 '조선 급(及) 조선인의 번민(煩悶)'을 발표한다. 1924년 1월 6일 조선불교청년회 초대 총재에 취임하며 청년조직을 항일운동에 걸맞게 바뀌었다.&lt;br /&gt;
&lt;br /&gt;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다. 5월15일 &amp;lt;십현담주해&amp;gt;를 법보회에서 발행, 5월 20일 &amp;lt;[[님의 침묵]]&amp;gt;을 회동서관에서 발행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님은 갔습니다&amp;lt;br/&amp;gt;푸른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나 있는 작은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amp;lt;ref&amp;gt;서적 인용 |편집자= 강승원 |제목= EBS 수능특강 언어영역|날짜= 2009-01-05 |판= 초판 |출판사= 한국교육방송공사 |쪽= 8 |인용문=푸른 산빛의 희망적 이미지가 단풍나무 숲의 상실의 이미지를 대비하여 만남→이별의 의미를 형상화하고 있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황금(黃金)의꽃가티 굿고빗나든 옛 맹서(盟誓)는 차듸찬띠끌이되야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나러갓슴니다&amp;lt;br/&amp;gt;날카로은 첫 키스의 추억(追憶)은 나의 운명(運命)의 지침(指針)을 돌너노코 뒷거름처서 사러젓슴니다&amp;lt;br/&amp;gt;나는 향긔로은 님의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은 님의얼골에 눈멀었슴니다&amp;lt;br/&amp;gt;사랑도 사람의일이라 맛날때에 미리 떠날것을 염녀하고경계하지 아니한것은아니지만&amp;lt;br/&amp;gt;리별은 뜻밧긔일이되고 놀난가슴은 새로은 슬븜에 터짐니다&amp;lt;br/&amp;gt;그러나 리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源泉)을만들고 마는것은 스스로 사랑을깨치는것인줄&amp;lt;br/&amp;gt;아는까닭에 것잡을수업는 슬븜의 힘을 옴겨서 새 희망(希望)의 정수박이에 드러부엇슴니다&amp;lt;br/&amp;gt;우리는 맛날때에 떠날것을염녀하는 것과가티 떠날때에 다시맛날것을 믿슴니다&amp;lt;br/&amp;gt;아아 님은갓지마는 나는 님을보내지 아니하얏슴니다'''&amp;lt;ref&amp;gt;서적 인용|편집자= 강승원 |제목= EBS 수능특강 언어영역|날짜= 2009-01-05 |판= 초판 |출판사= 한국교육방송공사 |쪽= 8 |인용문=우리는 맛날때에~: 회자정리(會者定離)와 거자필반(去者必反)의 정신을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님의 침묵]]에서 그는 한글 표준어를 쓰지 않고 충청도 방언과 토속어가 세련되지 않은 표현으로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향토적 정감의 방언 및 토속어 애용과 서민적인 시어의 활용은 님의 침묵에 민중정신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1925년부터 [[백담사]]에서 집필하여 1926년 경성부 안동서관에서 발행한《[[님의 침묵]]》은 당시 자유주의적, 남녀간의 연애를 위주로 하던 한국문단의 영향을 받지 않고 생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현실과 이상,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요구되는 주체적 자세에 대해 노래했으며, 더욱이 그것을 풍부한 시적 이미지로 아름답게 형상화해 수준 높은 민족문학의 경지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는 조선의 독립, 혹은 자연을 '님'으로 표현하여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부처로도 해석되고 이별한 연인으로도 해석되는 화법을 구사하여 총독부 학무국의 검열 탄압을 피하였다.&lt;br /&gt;
&lt;br /&gt;
==== [[신간회]] 창설에 참여 ====&lt;br /&gt;
[[파일:한용운동상.jpg|섬네일|오른쪽|200px|한용운의 동상]]&lt;br /&gt;
1927년 1월 19일 신간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이인, 김병로, 허헌, 조병옥, 허정숙 등과 함께 종교, 사회단체를 망라한 사회단체 [[신간회]]의 결성에 [[불교]]계 대표자의 한 사람 겸 경성부 서부 지역 대표자의 한 사람으로 적극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의 한 사람이 되었다. 신간회 조직을 결성하는 주도적으로 참여한 그는 1928년 다시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의 한사람에 선출되고 신간회 경성지회 회장(京城支會會長)에 피선되어 허정숙 등과 신간회 경성지회에서 활동하였다.&lt;br /&gt;
&lt;br /&gt;
1927년 12월 조선불교청년회(朝鮮佛敎靑年會)의 체제를 개편하여 조선불교청년동맹(朝鮮佛敎靑年同盟)으로 개칭,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였다.&lt;br /&gt;
&lt;br /&gt;
한편 1929년 3월 6일 그의 속가 형 한윤경이 사망하였다(70세). 그는 150섬 이상을 수확하던 홍성군의 대지주였다.&amp;lt;ref&amp;gt;&amp;quot;독립운동가 만해 선사 속가 후손들 날품팔이 생활&amp;quot;, 경향신문 1986년 6월 2일자 10면, 사회면&amp;lt;/ref&amp;gt; 한윤경의 아들이자 조카인 한창국은 일찍 죽고 한창국의 후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한다.&lt;br /&gt;
&lt;br /&gt;
1929년 광주항일학생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학생 시위를 보고 그것을 민족적·민중적 운동으로 확산시키고자 민중대회를 계획했으나, 조선총독부 밀정에게 발각, 총독부 경무국에 의해 무산되었다.&lt;br /&gt;
&lt;br /&gt;
1930년 5월 김법린, 김상호, 이용조, 최범술 등이 조직한 '''청년승려비밀결사 만당(卍黨)'''의 영수로 추대되었다.&lt;br /&gt;
&lt;br /&gt;
1931년 6월 &amp;lt;불교&amp;gt;지를 인수, 불교사 사장으로 취임하여 많은 논설을 발표하였다. 이후 많은 논문과 논설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특히, 고루한 전통에 안주하는 불교를 통렬히 비판하였으며, 승려의 자질 향상, 불자에게 생계를 의존하지 않기, 기강확립, 생활불교 등을 제창하였다.&lt;br /&gt;
&lt;br /&gt;
==== 반일 강연 활동 ====&lt;br /&gt;
그는 조선 불교가 일본 불교에 예속되지 않고 독립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한편 한 강연에서 그는 [[조선총독부]]나 일본 불교에 아첨하는 일부 승려들을 질타하기로 했다.&lt;br /&gt;
&lt;br /&gt;
그간 &amp;quot;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amp;quot;고 묻자 아무도 그 물음에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amp;quot;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것은 똥이올시다. 똥! 그런데 그 똥보다 더 더러운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겠습니까?&amp;quot;라고 하자 역시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가난한 불자들의 시신을 염습해본 적이 있는 한 사람은 시체라고 하였다. &amp;quot;내 경험으로는 똥보다 더 더러운 것이 송장 썩는 것이올시다. 똥 옆에서는 식음을 할 수 있어도 송장 썩는 옆에서는 차마 음식이 입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amp;quot;라는 것이다.&lt;br /&gt;
&lt;br /&gt;
그의 말을 듣고 일부는 좌석을 이탈하려 하였으나 좌중에 압도당해 움직일 수 없었다. 이어 만해는 &amp;quot;시체보다 더 더러운 것이 있으니 그것이 무엇일까?&amp;quot;하고 물었다. 아무도 답을 하지 않자 한용운은 굳은 표정으로 강연대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amp;quot;그건! 바로 여기 앉아 있는 31본산 주지 네놈들이다!&amp;quot;라고 일갈하고는 즉시 단상에서 내려와 퇴장해버렸다. 반일 혹은 일본 불교에의 흡수를 반대하는 그를 두고 불령선인이라는 지적이 계속되었고 그는 결국 [[조선총독부]] 형사들의 감시하에 놓이게 된다.&lt;br /&gt;
&lt;br /&gt;
한편 총독부로부터 생계비와 연구비를 지원받는 조건으로 전향한 육당 최남선이 탑골공원 근처에서 마주쳤을 때 &amp;quot;오랜만이오. 만해.&amp;quot;라고 먼저 인사하자 그는 &amp;quot;당신이 누구요?&amp;quot;며 냉정하게 답하였다. 최남선이 &amp;quot;나는 육당이오. 나를 몰라보겠소?&amp;quot;라고 하자 만해는 &amp;quot;뭐, 육당? 그 사람은 내가 장례 지낸 지 오랜 고인이오.&amp;quot;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lt;br /&gt;
&lt;br /&gt;
=== 생애 후반 ===&lt;br /&gt;
==== 소설 집필 활동 ====&lt;br /&gt;
1931년 53세의 나이에 재혼에 뜻이 있어 동지들의 소개로 13살 연하의 유숙원(1892년~1965년)과 재혼하였다. 유숙원은 결혼하기 전까지 단성사 옆에 위치했던 진성당병원의 간호사로 일하였다.  1933년에 金漁 김벽산(金碧山)스님이 집터를 기증하자, 조선일보사장 [[방응모]], 박광 등 몇 분의 성금으로 절반의 비용을 지원받아 [[심우장]]을 짓기 시작하였다. 이때 총독부돌집을 마주보기 싫다고 북향으로 짓도록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다음 해에 딸 영숙(1934년 9월 1일)이 태어났으며, 1935년에 완공되자 입주하여 [[심우장]]에서 여생을 보내며 작품활동을 지속하였다.&lt;br /&gt;
&lt;br /&gt;
1935년 장편소설 《흑풍》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였다.《흑풍》에서는 검열을 피하기 위해  배경을 청나라를 무대로 하고, 억압에 대한 투쟁정신을 묘사하여 [[조선총독부]]에 대한 저항성을 은근히 보여주고 여성해방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삽입하여 반봉건 정신 및 여성도 인격체라는 견해를 설파하였다. 1936년 단재 [[신채호]]의 시신이 비밀리에 입국한 것을 접하고 [[방응모]]와 함께 신채호의 묘비건립과 정약용 서세100년기념회 개최에 참여했다. 1936년 《조선중앙일보》에 장편 《후회 後悔》를 연재하였다. 이러한 소설을 쓴 까닭은 원고료로 생활에 보탬을 얻기 위한 까닭도 있지만 그보다도 소설을 통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하려는 의도가 더 큰 것으로 이해된다. 1937년 불교관계 항일단체인 만당사건(卍黨事件)의 배후자로 검거, [[서대문형무소]]에 재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lt;br /&gt;
&lt;br /&gt;
1937년 4월 13일 서간도 독립운동단체의 지도자였던 김동삼이 경성감옥에서 사망하였다. 아무도 그의 시신을 거두거나 수습하려 하지 않았는데 한용운이 홀로 찾아가 통곡하며 시신을 수습하여 심우장에서 장례를 치루었다.&lt;br /&gt;
&lt;br /&gt;
==== 태평양 전쟁 전후 ====&lt;br /&gt;
석방 후 [[불교]] 혁신과 작품활동을 계속하였고 1938년에는 장편 《박명(薄命)》을 발표하였다. 1938년부터는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에 반대하여 학도병 거부 운동을 벌였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는 여러 장편 외에 장편소설인 《박명(薄命)》이 있고, 저서로는 시집《[[님의 침묵]]》을 비롯하여《[[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불교대전》,《불교와 고려제왕(高麗諸王)》등이 있다.&lt;br /&gt;
&lt;br /&gt;
그는〈[[님의 침묵]]〉 외에도《신인 문학》과《삼천리》에 시 '꿈과 근심', '실제 (實際)',《조광》에 수필 '최후의 5분간', [[조선일보]]에 장편소설 흑풍, 박명, 조선중앙일보에 소설 &amp;lt;후회&amp;gt;와 중편소설 &amp;lt;죽음&amp;gt; 등을 발표하였다.&lt;br /&gt;
&lt;br /&gt;
중일전쟁 이후로도 그는 계속 징용이나 보국대 또는 일본군을 찬양하는 글을 쓰지 않으며 강연도 하지 않았다. 또한 강연 협조 등도 거부하였다. 또한 1937년부터 강요된 신사 참배와 일장기 게양을 거부하고, [[조선총독부]]의 일본식 호적에 이름조차 올리지 않았다.&lt;br /&gt;
&lt;br /&gt;
만년에는 경성부 성북동의 [[심우장]]을 친히 지어 거처했는데, [[심우장]]은 후일 서울기념물 제7호로 지정되었다. 1939년 경상남도 사천군 다솔사(多率寺)로 내려가 회갑을 맞으면서 몇몇 동지들과 함께 자축연을 가졌다. 다솔사는 당시 민족독립운동을 주도하던 본거지였다.&lt;br /&gt;
&lt;br /&gt;
==== 사망 ====&lt;br /&gt;
1940년 5월부터는 창씨개명 반대운동을 하였고 1943년에는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말년에는 [[방응모]], 정인보, [[안재홍]], 홍명희, [[김성수]], 만공 등과 교류하며 그들이 보내주는 생활비로 어렵게 생활하였다. 일제의 극심한 탄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비타협적인 독립사상을 견지하다가, 성북동 집인 [[심우장]]에서 냉방으로 생활하였다.&lt;br /&gt;
&lt;br /&gt;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한 만해의 생계는 그의 친구인 [[안재홍]], [[방응모]], [[김성수]], 송진우, 조만식, 최남선, [[이광수]], 윤치호 등이 십시일반으로 부담해주었다. 말년에 중풍으로 고생하였지만  1944년 6월 28일 [[조선총독부]]의 특별 훈련으로 공습경보가 발령되었을 때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후 계속 혼수상태로 있다가 1944년 6월 29일 [[심우장]]에서 입적하였다.&lt;br /&gt;
&lt;br /&gt;
그가 사망하였던 1944년은 일본 제국이 패망하기 1년 전이자 광복을 1년 앞두고 있던 때라 그토록 염원하던 조국의 독립은 끝내 생전에 보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가 사망한 지 1년 후인 1945년 8월 15일에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일본 제국이 패망하게 되면서 대한민국이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 사후 ==&lt;br /&gt;
[[파일:한용운흉상.jpg|섬네일|250px|만해의 흉상]]&lt;br /&gt;
* 사망한지 1년 후인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면서 조선은 광복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한용운 본인은 1년 전에 고인이 되었기 때문에 그토록 염원하였던 광복의 모습은 보지 못하였다.&lt;br /&gt;
* 동지들에 의하여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미아리 사설 화장장에서 다비된 뒤 망우 역사 문화공원에 유골이 안치되었다. 후일 그 옆에는 부인 유숙원 여사의 묘소가 오른편에 매장되었다.&lt;br /&gt;
* 그는 문학을 전문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님에 대한 그리움과 곧은 지조를 표현한 작품들을 통해 해방후에도 인기를 끌게 되었다. 그후 문인, 저항 시인, 대처승, 출가 승려로만 인식되다가 1960년대부터는 그의 독립운동 역사가 학자들에 의해 재조명 받기 시작했다.&lt;br /&gt;
*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려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lt;br /&gt;
* 1967년 그가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던 탑골공원에는 후에 승려 운허에 의해 《용운당 만해 대선사비》(龍雲堂 萬海 大禪師碑)가 세워졌다.&lt;br /&gt;
* 고향인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남산공원에 동상이 세워졌고 홍성읍내 장터에도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lt;br /&gt;
* 1973년 신구문화사에서 《만해 전집》6권이 간행되었다.&lt;br /&gt;
* 그의 결성면 성곡리 박철동 잠방굴마을 생가지는 1989년 12월 24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75호로 지정되었다.&lt;br /&gt;
* 1990년에 생가가 복원되고 기념관이 건립되었다.&lt;br /&gt;
* 1991년에는 만해의 업적을 기리는 만해학회가 설립되었다.&lt;br /&gt;
* 그밖에 만해기념관, 만해사상선양회 등이 세워졌다.&lt;br /&gt;
*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에는 만해문학박물관이 건립되었다.&amp;lt;ref&amp;gt;[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426287 네팔 민주화·문학의 뿌리는 불교?]&amp;lt;/ref&amp;gt;&lt;br /&gt;
* 후에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만해 생가지에는 생가복원에 이어 사당을 건립하고 안내판을 설치하였다.&lt;br /&gt;
&lt;br /&gt;
== 작품성 ==&lt;br /&gt;
시와 작품에 있어 퇴폐적인 서정성을 배격하였으며 조선의 독립 또는 자연을 부처님에 빗대어 불교적인 '님'으로 형상화했으며, 고도의 은유법을 구사하여 [[조선총독부]]나 일제 정치에 저항하는 민족정신과 불교에 의한 중생제도(衆生濟度)를 노래하여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검열을 교묘하게 피하였다. 여기에서의 님은 보는 관점에 따라 조선의 독립, 자연, 부처님 혹은 이별한 연인 등으로도 해석이 가능한 어법을 구사하였다.&lt;br /&gt;
&lt;br /&gt;
그는 대표작 [[님의 침묵]]을 비롯한 시집, 작품집에서 중심을 이루고 있는 '님'은 연인·조국·부처 등 다의적인 의미를 지니며 그에 따라 '님의 침묵'이라는 표현은 당시의 민족적 상황을 은유적으로 상징하였다. 또한 세속적인 정감의 진솔성이 불러일으키는 인간적 설득력과 함께 세속적인 사랑을 표출하면서도 세속사의 진부함에 떨어지지 않으며 목소리 높여 민중정신을 강조하지도 않는다는 작품평도 있다.&lt;br /&gt;
&lt;br /&gt;
그는 당시 상황을 시적 주체인 '나'가 님과 이별하여 님이 부재하고 침묵하는 시대로 규정하면서도, 님은 이 자리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나'는 진정으로 님의 존재를 깨닫게 된다는 변증법적인 진리 또는 부처에 대한 믿음, 이별한 연인에 대한 애정을 확신, 재다짐하는 것을 드러내고, 새로이 '나'는 이 자리에는 계시지 않는 님 또는 돌아올 님과 다시 합일될 수 있다는 뜻을 노래한다. 또한 내가 님과 새로이 만나기 위해서 나는 님이 존재하지 않지만 님에 대한 의리와 절개를 지키고 님에 대한 철저한 복종이 요구되는데, 그 절개와 의리, 복종을 통해서 비로소 '님'에 대한 신의도 지키면서 한편으로 '나'는 자유로워진다는 '복종과 자유의 변증법'을 노래한 것은 역사의 필연성의 인식을 통해 진정한 자유를 획득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출한다. 그는 식민지 하에 있는 조국의 운명과 독립의 필연성 또는 오지 아니한 극락세계와 다시 만나게 되는 그 날, 그리고 그 날을 위한 실천, 변함없는 믿음을 통해 진정한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는 진리를 작품들을 통해 형상화, 승화시켰다.&lt;br /&gt;
&lt;br /&gt;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그의 시는 오언절구나 칠언절구, 3.4조 등 당시 조선의 시조, 시의 형식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산문시의 전형이 되었다. 은유와 역설의 자유로운 구사를 보여주며, 정형적인 틀을 완전히 벗어난 산문적 개방 속에서도 내재율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근대 자유시의 완성에도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lt;br /&gt;
&lt;br /&gt;
== 저서 ==&lt;br /&gt;
* 《불교대전 (佛敎大典)》(1913년)&lt;br /&gt;
* 《[[조선불교유신론]] (朝鮮佛敎維新論)》(1913년)&lt;br /&gt;
* 시집 《심》&lt;br /&gt;
* 시집 《[[님의 침묵]]》&lt;br /&gt;
* 《유마힐소설경강의 維摩詰所說經講義》(1933년)&lt;br /&gt;
* 《십현담주해 (十玄談註解)》&lt;br /&gt;
* 《불교와 고려제왕 (高麗諸王)》&lt;br /&gt;
* 《조선독립의 서 (朝鮮獨立之書)》&lt;br /&gt;
&lt;br /&gt;
=== 번역서 ===&lt;br /&gt;
* 《정선강 채근담》&lt;br /&gt;
&lt;br /&gt;
=== 소설 ===&lt;br /&gt;
* 《흑풍》(1935년)&lt;br /&gt;
* 《후회》(1936년)&lt;br /&gt;
* 《박명 (薄命)》(1938년)&lt;br /&gt;
* 《죽음》&lt;br /&gt;
&lt;br /&gt;
=== 시 ===&lt;br /&gt;
* 시 '꿈과 근심'&lt;br /&gt;
* '실제 (實際)'&lt;br /&gt;
* '나룻배와 행인'&lt;br /&gt;
* 님의 침묵&lt;br /&gt;
* 수의 비밀&lt;br /&gt;
* 사랑하는 까닭&lt;br /&gt;
&lt;br /&gt;
=== 수필 ===&lt;br /&gt;
* 《최후의 5분간》&lt;br /&gt;
&lt;br /&gt;
== 연보 ==&lt;br /&gt;
* 1879년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출생&lt;br /&gt;
* 1905년 강원도 인제군 백담사에서 수계&lt;br /&gt;
* 1906년 명진학교 입학&lt;br /&gt;
* 1908년 명진학교 졸업&lt;br /&gt;
* 1908년 조동종대학림에서 연구&lt;br /&gt;
* 1911년 박한영 등과 친일불교에 맞서 승려대회 개최&lt;br /&gt;
* 1918년 청년계몽운동지 [[유심]]지를 창간,주재&lt;br /&gt;
* 1919년 3월 1일 (→ [[3.1 운동]]) 불교 대표로 독립 운동에 참가&lt;br /&gt;
* 1919년 ~ 1921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3년간 감옥살이&lt;br /&gt;
* 1924년 불교청년회 회장, 총재&lt;br /&gt;
* 1926년 시집 &amp;lt;[[님의 침묵]]&amp;gt; 출판&lt;br /&gt;
* 1927년 [[신간회]] 중앙위원회 위원&lt;br /&gt;
* 1928년 [[신간회]] 경성지부장&lt;br /&gt;
*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 민중대회 개최&lt;br /&gt;
* 1931년 만당 당수&lt;br /&gt;
* 1931년 월간 불교지를 인수, 2년 간 간행&lt;br /&gt;
* 1944년 서울 [[심우장]]에서 중풍으로 사망&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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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 평가와 비판 ==&lt;br /&gt;
민족독립, 불교유신, 자유문학의 3대 사상가로서 절의의 행적을 남겼다. 강렬한 현실비판 등 현세에서의 실천을 강조한 그의 혁명사상을 가졌다는 평가가 있다. 그가 불교이념에 의한 자유, 평등의 국가사회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하였다는 평가도 있다. 한편 자유민주주의, 비폭력 무저항주의, 민족자결주의 등에 입각한 소극적, 관념적인 차원에 머물렀다는 시각도 있다.만해 한용운은 대단한 독립운동가다. 스님이면서 독립운동에도 힘썼다. 또 독립 운동을 할 때 같이 했던 동지들이 창씨개명 등 일본이 억지로 권유한 것을 하기라도 하면 차갑게 외면했다.&lt;br /&gt;
&lt;br /&gt;
== 기타 ==&lt;br /&gt;
* 승려의 결혼 허용 주장은 1920년대 1930년대 화제가 되어 사회적 이슈거리와 논란이 되었다.&lt;br /&gt;
* 친하던 벗 또는 호형호제하던 사이로는 이시영(李始榮), 백용성, 최남선, 최린, 김동삼(金東三), [[방응모]], [[신채호]], [[김성수]], [[안재홍]], 송진우, 정인보(鄭寅普), 김규식, 박광(朴珖), 홍명희, 만공 송월면(宋月面), [[이광수]], 김일엽, 최범술(崔凡述) 등이 있었다.&lt;br /&gt;
* 그의 제자 중에는 춘성도 있었다. 춘성 역시 일제강점기의 대표적 반일 인사이자 해방 후에도 승려로 활동하였다.&lt;br /&gt;
* 그의 아들 한보국은 일제강점기의 사회주의자이자 해방 후에는 남로당 당원으로 활동하다가 월북하였다. 1980년대까지 그에게는 아들이 한 사람 있었다는 것 이외에는 아들과 본부인 전정숙의 존재는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다.&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 /&amp;gt;&lt;br /&gt;
&lt;br /&gt;
== 참고문헌 ==&lt;br /&gt;
* 김광식, 《한용운 연구》 (동국대학교출판부, 2011)&lt;br /&gt;
* 윤재근, 《님의 침묵 연구》 (민족문학사, 1985)&lt;br /&gt;
* 김재홍, 《한용운문학연구 1》 (일지사, 1982)&lt;br /&gt;
* 송욱, 《님의 침묵:전편해설》 (과학사, 1973)&lt;br /&gt;
* 박노준·인권환, 《한용운 연구》 (통문관, 1960)&lt;br /&gt;
&lt;br /&gt;
== 외부링크 ==&lt;br /&gt;
* [http://www.manhae.or.kr/ 만해기념관 홈페이지]&lt;br /&gt;
* [http://wwww.peace21.org/today_column_board/18492 만해 한용운과 아들 한보국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 부자, 애국애족만은 부전자전]]&lt;br /&gt;
*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amp;amp;search_div_id=CP_THE006&amp;amp;cp_code=cp0525&amp;amp;index_id=cp05250499&amp;amp;content_id=cp052504990001 승려결혼을 주장한 한용운]&lt;br /&gt;
* [https://web.archive.org/web/20131214035146/http://www.hongsung.net/tt/board/ttboard.cgi?act=read&amp;amp;db=city_people&amp;amp;page=1&amp;amp;idx=3 한용운:홍성넷]&lt;br /&gt;
*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8/08/01/200808010500005/200808010500005_2.html 민족대표 33인 한용운과 박희도:“독립의 영(榮), 변절의 욕(辱), 모두 산 자들의 짐인 것을…”]&lt;br /&gt;
* [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C%9A%A9%EC%9A%B4 한용운-위키백과]&lt;br /&gt;
&lt;br /&gt;
[[분류:감자]]&lt;/div&gt;</summary>
		<author><name>Nsgjjsjsjy02</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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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한용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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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06-20T06:02:1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Nsgjjsjsjy02: /* 참고 문헌 */&lt;/p&gt;
&lt;hr /&gt;
&lt;div&gt;{|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width:100%&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0%&amp;quot;|사진&lt;br /&gt;
|[[파일:한용운.jpg|center|200픽셀]]&lt;br /&gt;
|+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lt;br /&gt;
|+ style=&amp;quot;caption-side:bottom;text-align:left:&amp;quot;|출처: 위키백과&lt;br /&gt;
|법명||용운(龍雲)&lt;br /&gt;
|-&lt;br /&gt;
|출생||1879년 8월 29일 조선 충청도 결성현 현내면 박철리 잠방골&lt;br /&gt;
|-&lt;br /&gt;
|입적||1944년 6월 29일 일제강점기 경성부 동대문구 성북정 [[심우장]]&lt;br /&gt;
|-&lt;br /&gt;
|입적원인||중풍&lt;br /&gt;
|-&lt;br /&gt;
|거주지||일제강점기 경성부 동대문구 성북정 심우장&lt;br /&gt;
|-&lt;br /&gt;
|국적||대한민국&lt;br /&gt;
|-&lt;br /&gt;
|속명||한정옥(韓貞玉)&lt;br /&gt;
|-&lt;br /&gt;
|경력||신간회 중앙위원장&lt;br /&gt;
|-&lt;br /&gt;
|종파||조계종&lt;br /&gt;
|-&lt;br /&gt;
|호||만해(萬海·卍海)&lt;br /&gt;
|-&lt;br /&gt;
|직업||승려, 시인, 독립운동가&lt;br /&gt;
|-&lt;br /&gt;
|배우자||유숙원(재혼), 전정숙(이혼)&lt;br /&gt;
|-&lt;br /&gt;
|자녀||한보국(아들), 한영숙(딸)&lt;br /&gt;
|-&lt;br /&gt;
|부모||한응준(부), 방숙영(모)&lt;br /&gt;
|}&lt;br /&gt;
&lt;br /&gt;
'''한용운'''(韓龍雲, 1879년 8월 29일 ~ 1944년 6월 29일)은 일제강점기의 시인, 승려,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청주 한씨. 호는 만해(萬海)이다. 불교를 통한 언론, 교육 활동을 하였다.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으며, 그것에 대한 대안점으로 불교사회개혁론을 주장했다.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이며 광복 1년을 앞둔 1944년 6월 29일에 중풍병사(입적)하였다. 독립선언서의 &amp;quot;공약 3장&amp;quot;을 추가보완하였고 옥중에서 '조선 독립의 서'(朝鮮獨立之書)를 지어 독립과 자유를 주장하였다.&lt;br /&gt;
&lt;br /&gt;
1910년 일본이 주장하는 한일불교동맹을 반대철폐하고 이회영, 박은식, 김동삼 등의 독립지사(志士)들을 만나 독립운동을 협의하였다. 1918년 11월부터는 불교 최초의 잡지인 《[[유심]]》을 발행하였고 1919년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을 하여 체포당한 뒤 3년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 풀려났다. 1920년대에는 대처승 운동을 주도하여 중에게도 결혼할 권리를 달라고 호소하기도 하였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 언론활동에 참여하였다. 1927년 2월부터는 [[신간회]]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과 이듬해 신간회 경성지부장을 지냈다.&lt;br /&gt;
&lt;br /&gt;
1918년 《[[유심]]》에 시를 발표하였고, 1926년〈[[님의 침묵]]〉등의 시를 발표하였다. 님의 침묵에서는 기존의 시와, 시조의 형식을 깬 산문시 형태로 시를 썼다. 소설가로도 활동하여 1930년대부터는 장편소설《흑풍》(黑風),《후회》,《박명》(薄命), 단편소설《죽음》등을 비롯한 몇 편의 장편, 단편 소설들을 발표하였다. 1931년 김법린 등과 청년승려비밀결사체인 만당(卍黨)을 조직하고 당수가 되었으나 1937년 불교관계 항일단체를 적발하는 과정에서 만당사건(卍黨事件)의 배후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저서로는 시집 《[[님의_침묵]]》을 비롯하여 《조선불교유신론》,《불교대전》,《십현담주해》,《불교와 고려제왕》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 생애 ==&lt;br /&gt;
==== 유년기 ====&lt;br /&gt;
조선전기 한명회 동생으로 전구서승(典廏署丞)을 지낸 서원군 한명진(韓命溍)의 이양공파 20대손이다. 한응준의 차남으로 태어났고, 그의 형은 한윤경(1860년~1929년)이다. 자필이력서와 승적부의 출생지는 충청남도 홍주군 주북면 옥동(玉洞)이다. [[3.1운동]] 후 재판 때 고향을 홍성의 '남문리'라고 답변하였다. 현재 출생지로 알려진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491번지는 그의 아들인 한보국의 제적등본에 따른 기록이다..&lt;br /&gt;
&lt;br /&gt;
==== 소년 시절 ====&lt;br /&gt;
16살 되던 해인 1894년부터 홍성읍내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고 전한다. 그 해에 음력1월부터 12월까지 갑오농민운동이 일어났고, 7월 25일에 청일전쟁이 발발하였다. 그의 부친 한응준은 홍주성에서 관군의 참모관으로 활약하며 동학농민군 방어에 성공하였으나 이듬해 병고로 사망하였다. 회고록에 의하면 18세인 1896년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 서울로 향하였다가 설악산 오세암에 입산하여 불교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그의 아들 한보국의 제적등본에 의하면, 부친의 3년상을 치른 후에 20살이 되던 해인 1892년 2월 10일 전정숙과 결혼하였다. 1904년 12월 21일 전정숙에게서 아들 한보국(1904년~1977년)을 얻었으나 그는 이미 강원도 백담사에서 출가를 하였다.&lt;br /&gt;
&lt;br /&gt;
==== 방랑 생활 ====&lt;br /&gt;
[[파일:청년기한용운.jpg|섬네일|오른쪽|200px|청년기의 만해]]&lt;br /&gt;
건양 1년인 1896년에 그는 설악산 오세암에 들어갔다. 후일 그는 '나는 왜 중이 되었나'라는 그 자신의 술회에 간략하에 언급하기를 세상에 대한 관심과 생활의 방편으로 집을 떠나 오세암에 입산하여 처음에는 머슴으로 일하다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고 한다. 출가의 원인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당시 고향 홍성군 홍주에서도 [[동학농민운동]]과 의병운동이 전개된 것으로 미루어 역사적 격변기의 상황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오세암에 머무르면서 그는 불교의 기초지식을 섭렵하면서 선(禪)을 닦았다.&lt;br /&gt;
&lt;br /&gt;
=== 대한제국(1897년~1910년)  활동 ===&lt;br /&gt;
==== 출가와 문학 ====&lt;br /&gt;
[[파일:만해기념관.jpg|섬네일|왼쪽|[[백담사]] 경내의 만해기념관]]&lt;br /&gt;
1905년 1월 26일 강원도 [[백담사]]에 가서 김연곡(金蓮谷)을 은사로 하여 정식으로 출가, 김연곡에게 득도한 다음 전영제(全泳濟)에게 계(戒)를 받아 승려가 되었고, 만화(萬化)에게서 법을 받았다. 계명은 '''봉완(奉玩)'''이며 '''법호는 용운(龍雲)이며, 후에 필명 및 아호는 만해(萬海·卍海)'''라 하였다. 이후 수년 간 불교활동에 전념했다. 이즈음에 불교 관련 서적뿐만 아니라 량치차오의〈음빙실문집 飮氷室文集〉등을 접하면서 근대사상을 다양하게 수용하였다.&lt;br /&gt;
&lt;br /&gt;
이 때를 전후해서 영환지략(瀛環志略)-서계여 저술,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양계초 저술 등을 읽고 세계동향을 알기 위해 세계여행을 계획하고 백담사에서 하산하여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건너갔으나 밀정으로 인하여 구사일생으로 귀국하였으나, 각처에서 의병 활동으로 어지럽게 되자 함경남도 안변 석왕사를 찾아가 암자에서 참선생활을 하였다.(삼천리 제6호 회고록)&lt;br /&gt;
&lt;br /&gt;
'''&amp;quot;「영환지략瀛環地略」이라는 책을 통하여 비로소 조선 이외에도 너른 천지 잇는 것을 인식하고 행장을 수습하여 원산을 거처서 서백리아에 이르러 몃 해를 덧업는 방낭생활을 하다가 다시 귀국하여 安邊釋王寺에 파뭇겨 叅憚 生活을 하엿다. 그러다가, 동양문명의 집산은 동경에서 되니 東京으로 갈 차로 이듬해 봄에 처음으로 서울에 발을 드려노앗다.&amp;quot;&amp;lt;삼천리 제5권 제9호 처음 서울 오든 때-회고록&amp;gt;'''&lt;br /&gt;
&lt;br /&gt;
1908년 명진학교(현 동국대학교) 보조과(일어과와 측량과) 수학 후 4월에 일본의 시모노세기, 교토, 동경, 닛고 등지를 주유하며 신문물을 시찰하였고, 동경 조동종대학(현 고마자와駒澤大學)의 아사다교수와 교유하여 불교와 서양철학을 수강하였다. 이 때에 유학 중이던 최린(崔麟), 고원훈, 채기두 등과 교류하였고 9월 귀국하였다. 10월 20일 일본의 조선 전국 사찰 대표 52인의 한 사람으로 서울 원흥사(元興寺)에서 원종종무원(圓宗宗務院)의 설립에 참여하였다. 12월 10일 서울에 경성명진측량강습소를 개설 소장에 취임하였다. 1909년 초에는 조선불교의 유신을 주장하는 논저《[[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하기 시작하였다(1913년 회동서관 간행).  1910년 한문으로 된 불경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 즉 불교의 대중화작업에 주력하였다.&lt;br /&gt;
&lt;br /&gt;
==== 승려들의 결혼 자유화 주장 ====&lt;br /&gt;
1909년 초부터 그는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을 집필하였고, 1910년 12월 8일 백담사에서 탈고하였다. 동시에 그는 [[백담사]]에서 거의 독학하다시피하며 대장경을 암송하고 한문과 인도어로 된 불교 경전들을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을 하였다. 한편 1910년부터 그는 승려의 결혼을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만해는 1910년 3월 승려의 결혼을 공식적으로 허락해 달라는 문건인 중추원 헌의서를 청원서 형식으로 대한제국 중추원에 제출하였고, 경술국치(한일합방) 이후 9월에는  [[조선총독부]] 통감부에 승려취처에 관한 건백서를 테라우치 통감에게 제출하였다. 승려에게 결혼을 금지하라고 부처님이 가르친 것은 아니라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lt;br /&gt;
&lt;br /&gt;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이 미혹을 떠나 깨달음을 얻고 악을 고쳐 선을 행하도록 바라셨으나, 중생의 끈기가 각기 달라서 부득불 천하에서 정을 제거하고 욕망을 끊어 버린 사실들을 모두 연설하였던 것이니, 각기 좋아하는 것을 좇아 인도하시고자 희망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계율에 있는 금혼은 본디 방편의 하나에 불과한 것일뿐, 불교의 궁극의 경지와는 거리가 먼 것이니 이를 제거한들 어찌 손상됨이 있겠습니까.&amp;lt;ref&amp;gt;김광식, 《한용운 연구》 (동국대학교출판부, 2011) 109쪽&amp;lt;/ref&amp;gt;'''&lt;br /&gt;
&lt;br /&gt;
대중의 결혼생활, 가장이라는 짐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중생들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승려의 결혼을 허가해 달라는 그의 주장은 그대로 묵살당한다.&lt;br /&gt;
&lt;br /&gt;
한일합방 직후 총독부가 조선인을 차별대우하고 일본인을 우대하자 그는 불만을 드러냈다. 만해의 제자였던 춘성 스님에 의하면 만해는 평소 조선총독부의 조선인 차별 정책에 대해 &amp;quot;왜놈의 머슴살이 같으니라구!&amp;quot;라며 불만을 토로하였다 한다.&lt;br /&gt;
&lt;br /&gt;
=== 일제강점기 활동 ===&lt;br /&gt;
==== 불교 사회 혁신 운동 ====&lt;br /&gt;
1910년  8월 29일에 한일 합방 조약이 체결된 이후로, 원종의 이회광이 일본과 맺은 한일불교동맹조약인 조동종맹약을 분쇄하기 위해 12월 광주 증심사로 내려갔다. 1911년 1월 석전 박한영, 진진웅, 김종래, 장금봉 등과 순천 송광사, 동래 범어사에서 승려궐기대회를 개최하여 일본의 조동종(曹洞宗)과 한국불교의 통합을 꾀한 이회광 등의 친일적인 불교행위를 규탄, 저지하였다. 송광사에 임제종 종무소를 설치하였고 조선임제종 종무원 관장에 취임하였다. 11월 서울에서 임제종 중앙포교당(조선선종포교당) 건립을 착수하였다. 그 해 6월 3일 일제가 한국불교를 억압하고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제정·공포한 법령인 사찰령이 공포되었고, 한국불교교단은 삼십본산연합사무소에 귀속되었다. 일제의 사찰령에 맞서 한국불교의 전통을 계승하려는 노력으로  1912년 4월 10일 중앙포교당이 준공되자 5월 26일 한용운, 백용성, 이화능 등 중앙포교당을 개설하였다.  6월 21일에 경서부 관청에 소환된 이후 이회광의 원종은 조선불교선교양종으로, 임제종은 조선선종중앙포교당으로 개칭되었다.&lt;br /&gt;
&lt;br /&gt;
1912년 9월 10일부터 10월 8일까지 만주 동북삼성(東北三省)을 방문하여 독립군의 훈련장을 순방하면서 그들에게 독립정신과 민족혼을 심어주는 일에 전력하던 중에 통화현 굴라재에서 일진회 첩자로 오해를 받아 목에 총을 맞고 마취없이 '''총알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은 후 귀국하여 동래부 범어사로 내려갔다. 1913년 2~3월에 조선불교월보 13호, 14호에 조선불교유신론 9장 ‘승려의 단결’편을 간행전 기고했다. 필명을 '''만해생(萬海生)으로 문헌상 처음으로 만해'''라는 아호를 사용하였다. 5월 25일에 조선불교유신론을 회동서관에서 출판하였다.&lt;br /&gt;
&lt;br /&gt;
1914년 4월 서울에 유학 온 불교 '고등강숙' 학생들이 불교를 발전시키려는 목적으로 설립한 단체인 '''조선불교강구회(朝鮮佛敎講究會)''' 총재에 취임하였다.&lt;br /&gt;
&lt;br /&gt;
경전을 대중화하기 위해 불교대전을 편찬할 계획으로 양산 통도사에 보관된 고려대장경을 열람하였고, 4월 30일 범어사에서《불교대전 (佛敎大典)》을 간행하였다. 대승불교의 반야사상(般若思想)에 입각하여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계의 각성과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lt;br /&gt;
&lt;br /&gt;
8월에 조선불교회 회장에 취임하였다. 불교의 문제점을 해결하고 불교유신을 직접 수행하고자, 30본산 주지들을 배제하고, 승려와 신도를 융합한 통일기관을 창립하였다. 그러자 30본산 주지들의 반발로  '''불교동맹회'''로 개칭하여, 서울 낙원동에 본부를 두겠다고 경성북부경찰서에 9월10일경 신고했으나, 30본산 주지의 권한을 벗어났다며 등록 거부 당하였다, “'''고등강숙'''”의 학생들이 만해를 따르자, 이회광은 공문을 보내 상경을 막으려다 결국 학교를 폐쇄시켰다.&lt;br /&gt;
&lt;br /&gt;
1915년 6월 20일 청나라 승려 내림(來琳)의 증보본에 의거하여 정선강의 《채근담》 국한문 혼용체 주해본을 저술하였다. 10월에 조선선종 중앙포교당 포교사에 취임하여 계몽활동, 근대화 필용성,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15년 개교한 중앙학림 학생들이 만해를 따랐다. 불교강구회, 각황사 등에서 강연하였다.&lt;br /&gt;
&lt;br /&gt;
==== 불교포교 대중화와 선교진흥론 ====&lt;br /&gt;
1914년에는 [[불교]] 포교의 보편화 대중화를 선언하고 조선불교청년동맹(朝鮮佛敎靑年同盟)을 결성하였다. 조선불교청년동맹의 강령을 손수 지었는데 이를 보면, 첫째로 정교분리(政敎分離), 둘째로는 여러 불교 종단의 통일 또는 연합, 셋째 불교와 사찰의 사회적 진출의 필요 등을 제시하였다. 이는 대중불교의 확산을 위하여 그 출발점을 청년 운동으로 삼아야 한다는 그의 실천행이었다. 그는 불교 포교가 보편화되려면 일단 청년들에게 침투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천주교와 개신교의 선교 활동, 동학의 포교 확산, 사이비 종교 등의 확산에 긴장한 그는 불교 역시 대중에게 침투하여야 함을 역설하고 불교가 중생의 곁에 가장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으로 청소년과 청년층을 공략하는 것을 들었다. 그는 불교의 보편화 운동의 실천을 위하여 '승려에서 대중에로', '산간에서 길가로' 등을 내걸었다.&lt;br /&gt;
&lt;br /&gt;
또한 불교 포교의 대중화를 위해서는 교단, 종단간의 갈등을 줄이고 협력하자는 주장을 펼쳤다. 이는 선교진흥론(禪敎振興論)으로 발표되었다. 그에 의하면 불교의 진흥을 위한 필수불가결의 요건은 수행 이상을 확립하는 일이라 하였다. 이에 한용운은 지금까지 조선의 불교는 오교구산과 선교양종이니 해서, 마치 교의(敎義)와 종지(宗旨)가 다른 것처럼 잘못 인식되어 왔다. 선과 교의 본질은 하나이다. 왜냐하면, 선이란 불교의 마음이며, 교란 불교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양자는 서로 배치되는 개념이 아니며, 양자의 이론적 합일과 연대의 실천이 불교 진흥, 포교 확산의 관건이라고 주장하였다. 동시에 한용운은 선원(禪院)이나 강원(講院)의 지도 이념이나 이론, 실수(實修) 등에 있어 외전(外典)도 첨가해야 한다, 그리고 속된 것을 전적으로 배격하지 말 것을 호소하였다. 그는 선교일치를 주장해온 조선 불교의 일승정신(一乘精神)이 새로운 시대의 좌표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lt;br /&gt;
&lt;br /&gt;
==== 불교 경전의 한글화 ====&lt;br /&gt;
만해는 1910년부터 대장경과 화엄경 등을 비롯한 불교 경전의 내용을 한글로 번역하여 소개하였다. 1930년대 이후에도 그는 불교 경전의 한글화를 주장했다. 경전의 내용이 한문이나 산스크리트어이기에 일반 중생이 읽기에는 너무 힘들다, 어렵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대장경의 한글 번역이다. 현대포교의 요체는 문서에 의한 홍포였다.&lt;br /&gt;
&lt;br /&gt;
그는 아무리 좋은 말씀도 이해를 하지 못하면 무용지물이라 주장하였다. 불교 경전의 대부분이 한문으로 되어 있어서 일반인이나 문맹률이 높던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읽고 이해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방대한 대장경을 쉽게 옮기는 일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불교의 교리와 활동, 고승 등에 대한 내용을 한글로 표현했으며 《불교대전》에는 대장경 등의 내용을 한글로 해석하였는데 이는 바로 그와 같은 시도의 결정이다. 대장경의 요지를 발췌하여 대의를 옮겨 적은 불교대전은 20세기 한국 불교이론서와 《불교성전》들의 효시가 되었다. 그밖에도 그는 불교학 진흥과 포교의 활성화를 위하여서는 각종 금석문(金石文)이나 사장된 자료들이 일반에 소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lt;br /&gt;
&lt;br /&gt;
==== 잡지 발행 ====&lt;br /&gt;
1918년 9월 1일  제자 춘성 등과 함께 월간 불교잡지《[[유심]]》을 창간하여 12월까지 3권을 발행하고 중단되었으나, 이 잡지를 통해 불교 논설만이 아니라 계몽적 성격을 띤 글을 발표했고, 또 신체시를 탈피한 신시〈심 (心)〉을 발표하여 문학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는 당시 조선불교의 침체와 낙후성과 은둔주의를 대담하고 통렬하게 분석과 비판을 한 저서 &amp;lt;[[조선불교유신론]]&amp;gt;을 발표하여 사상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lt;br /&gt;
&lt;br /&gt;
월간 유심지에서 그는 시 '심 (心)'과 수필 고학생, 남모르는 아이들을 발표하는 등 불교의 보편화와 친숙화를 꾀한다. 불교의 홍보, 포교와 함께 계몽, 자각, 자유정신,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논설들을 다수 실은 월간지 [[유심]]은 뒷날 그가 관계한《불교》잡지와 함께 가장 괄목할만한 문화사업의 하나가 되었다.&lt;br /&gt;
&lt;br /&gt;
==== 3.1 만세 운동과 투옥 ====&lt;br /&gt;
[[파일:3.1운동한용운.jpg|섬네일|210px|오른쪽|1920년 7월 2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 3.1 운동에 참가한 민족대표 48인 공판에 관한 기사, 다섯째 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한용운]]&lt;br /&gt;
1918년 12월에 발표한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감동하여 1919년 1월부터는 전국적인 만세 운동 준비에 참여하고, 백용성 등과 함께 [[불교]] 지도자들을 소집하여 손병희 등 천도교 지도자들과 이상재 등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과 회합하였다. 그는 독립선언문의 내용을 둘러싸고 최남선과 의견충돌을 하였다. 내용이 좀 더 과감하고 현실적이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으나, 최남선 등은 만해의 주장이 급진적이고 과격하다며 반대했고 결국 만해가 제시한 조건들 중 마지막의 행동강령인 공약 제3조 '최후의 일인까지 쾌히 우리의 의사를 발표하자' 만이 수용, 독립선언서에 수록되었다.&lt;br /&gt;
&lt;br /&gt;
1919년 [[3.1 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고,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으며 일설에는 용성 스님의 도장도 그가 찍었다 한다. 경성 탑골공원에서 독립 선언서 낭독과 만세 운동에 가담했다가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었다. 민족대표자들은 평화 시위를 기획하였는데 시위는 격화되었고, 민족대표자들은 자수를 결심한다. 이종일의 회고에 의하면 &amp;quot;수감 중 만해는 일제의 고문 및 위협에 벌벌 떠는 나약한 민족대표들에게 인분을 퍼부었다.&amp;quot;고 한다.&amp;lt;ref name=&amp;quot;:1&amp;quot;&amp;gt;김광식, 《만해 연구》 (동국대학교출판부, 2011) 315쪽&amp;lt;/ref&amp;gt;&lt;br /&gt;
&lt;br /&gt;
그는 만세운동을 진행하던 중 탑골공원에서 총독부 경무국 순사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어 피신한 다른 민족대표자들이 자수함으로써 바로 [[서대문형무소]]로 넘겨지고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받고 복역하였다.&lt;br /&gt;
&lt;br /&gt;
==== 수감과 석방 ====&lt;br /&gt;
한편 체포된 만해는 동대문 시장에 투옥되어 복역하며 재판을 받았다. 이때 옥중에서 변호사는 물론 사식과 보석을 거부할 것을 결의하고 수감생활을 한다. 그리고 옥중에서 '조선독립의 서'를 집필하다가 발각되어 결국 원본을 형사에게 제출했다. 그러나 만해는 한편으로 '조선독립의 서'를 일본인 서울지방법원 검사에게 제출하기 이전에 일부를 휴지에 작은 글씨로 옮겨 적었다. 그리고 그것을 접어 형무소 밖으로 나가는 의복의 갈피에 집어넣었다. 이렇게 외부로 나온 그 선언서는 상해까지 전달되었다.&amp;lt;ref&amp;gt;김광식, 《만해 연구》 (동국대학교출판부, 2011) 332쪽&amp;lt;/ref&amp;gt; 그것은 인간의 권리와 자유와 평등에 대한 길을 가로막는 어떠한 형태의 무력, 군사력, 압제 정치는 결국 스스로의 덫에 걸려 스스로 패망하게 되리라는 내용이었다. 옥중에서 작성한 '조선독립의 서'는 종이를 노끈처럼 말아 유일하게 그의 옥바라지를 하던 제자 춘성 스님을 통해 상하이로 보내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 1919년 11월 4일의 기사 부록에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대요'라는 제목으로 발표, 보도되었다.&lt;br /&gt;
&lt;br /&gt;
1921년 12월 22일 [[3.1운동]] 민족대표자 최린, 함태영, 오세창, 권동진, 이종일 등과 함께 가출옥되자 많은 면회객이 찾아왔다. 그런데 그가 인사를 하는 것을 보고 면회객들은 이상하게 여겼다. 이에 만해는 자신을 마중하러 나온 인사들에게 &amp;quot;너희들은 이런 출옥의 인사를 할 줄은 알고, 인사를 받을 줄은 몰랐더냐?&amp;quot; 하고 대성질타하였다.&amp;lt;ref&amp;gt;김광식, 《만해 연구》 (동국대학교출판부, 2011) 322쪽&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출옥 후에는 언론에 칼럼을 발표하는 동시에 1922년부터 1923년까지 민립대학 설립운동과 물산장려운동 등의 민족운동에도 참여했다. 이 기간 중 그는 [[김성수]], 조만식, [[안재홍]], [[이광수]], [[방응모]] 등을 만나 인맥을 쌓기도 했다. 글 못지않게 연설가로서도 남다른 능력을 지니고 있던 그는 1922년 5월 전조선학생대회 주최로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강연회가 개최되자 3인의 종교 지도자의 한 사람이자 연사의 1인으로 초빙되었다. 대회가 열린 날 두 번째 연사로 나선 만해가 강연하자 청중이 열광하여 결국 다음 사람이 강연을 포기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1922년 9월 잡지《개벽》에 옥중시 '무궁화 심으라'를 발표하였다.&lt;br /&gt;
&lt;br /&gt;
==== 사회 단체 활동과 님의 침묵 ====&lt;br /&gt;
1922년 출옥 후에도 일본경찰의 감시 아래에서 강연 등 여러 방법으로 조국독립의 열변을 토하였다. 1920년대에 부인이 있는 대처승이 속인들에게 사이비 중이라고 모욕을 당하는 것을 보고 대처승 운동을 주도하여 중에게도 결혼할 자격을 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1924년부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논설위원을 겸하며 계몽, 사회 참여를 촉구,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칼럼을 게제하였다.&lt;br /&gt;
&lt;br /&gt;
1923년 1월 동아일보에 논설 '조선 급(及) 조선인의 번민(煩悶)'을 발표한다. 1924년 1월 6일 조선불교청년회 초대 총재에 취임하며 청년조직을 항일운동에 걸맞게 바뀌었다.&lt;br /&gt;
&lt;br /&gt;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다. 5월15일 &amp;lt;십현담주해&amp;gt;를 법보회에서 발행, 5월 20일 &amp;lt;[[님의 침묵]]&amp;gt;을 회동서관에서 발행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님은 갔습니다&amp;lt;br/&amp;gt;푸른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나 있는 작은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amp;lt;ref&amp;gt;서적 인용 |편집자= 강승원 |제목= EBS 수능특강 언어영역|날짜= 2009-01-05 |판= 초판 |출판사= 한국교육방송공사 |쪽= 8 |인용문=푸른 산빛의 희망적 이미지가 단풍나무 숲의 상실의 이미지를 대비하여 만남→이별의 의미를 형상화하고 있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황금(黃金)의꽃가티 굿고빗나든 옛 맹서(盟誓)는 차듸찬띠끌이되야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나러갓슴니다&amp;lt;br/&amp;gt;날카로은 첫 키스의 추억(追憶)은 나의 운명(運命)의 지침(指針)을 돌너노코 뒷거름처서 사러젓슴니다&amp;lt;br/&amp;gt;나는 향긔로은 님의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은 님의얼골에 눈멀었슴니다&amp;lt;br/&amp;gt;사랑도 사람의일이라 맛날때에 미리 떠날것을 염녀하고경계하지 아니한것은아니지만&amp;lt;br/&amp;gt;리별은 뜻밧긔일이되고 놀난가슴은 새로은 슬븜에 터짐니다&amp;lt;br/&amp;gt;그러나 리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源泉)을만들고 마는것은 스스로 사랑을깨치는것인줄&amp;lt;br/&amp;gt;아는까닭에 것잡을수업는 슬븜의 힘을 옴겨서 새 희망(希望)의 정수박이에 드러부엇슴니다&amp;lt;br/&amp;gt;우리는 맛날때에 떠날것을염녀하는 것과가티 떠날때에 다시맛날것을 믿슴니다&amp;lt;br/&amp;gt;아아 님은갓지마는 나는 님을보내지 아니하얏슴니다'''&amp;lt;ref&amp;gt;서적 인용|편집자= 강승원 |제목= EBS 수능특강 언어영역|날짜= 2009-01-05 |판= 초판 |출판사= 한국교육방송공사 |쪽= 8 |인용문=우리는 맛날때에~: 회자정리(會者定離)와 거자필반(去者必反)의 정신을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님의 침묵]]에서 그는 한글 표준어를 쓰지 않고 충청도 방언과 토속어가 세련되지 않은 표현으로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향토적 정감의 방언 및 토속어 애용과 서민적인 시어의 활용은 님의 침묵에 민중정신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1925년부터 [[백담사]]에서 집필하여 1926년 경성부 안동서관에서 발행한《[[님의 침묵]]》은 당시 자유주의적, 남녀간의 연애를 위주로 하던 한국문단의 영향을 받지 않고 생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현실과 이상,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요구되는 주체적 자세에 대해 노래했으며, 더욱이 그것을 풍부한 시적 이미지로 아름답게 형상화해 수준 높은 민족문학의 경지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는 조선의 독립, 혹은 자연을 '님'으로 표현하여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부처로도 해석되고 이별한 연인으로도 해석되는 화법을 구사하여 총독부 학무국의 검열 탄압을 피하였다.&lt;br /&gt;
&lt;br /&gt;
==== [[신간회]] 창설에 참여 ====&lt;br /&gt;
[[파일:한용운동상.jpg|섬네일|오른쪽|200px|한용운의 동상]]&lt;br /&gt;
1927년 1월 19일 신간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이인, 김병로, 허헌, 조병옥, 허정숙 등과 함께 종교, 사회단체를 망라한 사회단체 [[신간회]]의 결성에 [[불교]]계 대표자의 한 사람 겸 경성부 서부 지역 대표자의 한 사람으로 적극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의 한 사람이 되었다. 신간회 조직을 결성하는 주도적으로 참여한 그는 1928년 다시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의 한사람에 선출되고 신간회 경성지회 회장(京城支會會長)에 피선되어 허정숙 등과 신간회 경성지회에서 활동하였다.&lt;br /&gt;
&lt;br /&gt;
1927년 12월 조선불교청년회(朝鮮佛敎靑年會)의 체제를 개편하여 조선불교청년동맹(朝鮮佛敎靑年同盟)으로 개칭,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였다.&lt;br /&gt;
&lt;br /&gt;
한편 1929년 3월 6일 그의 속가 형 한윤경이 사망하였다(70세). 그는 150섬 이상을 수확하던 홍성군의 대지주였다.&amp;lt;ref&amp;gt;&amp;quot;독립운동가 만해 선사 속가 후손들 날품팔이 생활&amp;quot;, 경향신문 1986년 6월 2일자 10면, 사회면&amp;lt;/ref&amp;gt; 한윤경의 아들이자 조카인 한창국은 일찍 죽고 한창국의 후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한다.&lt;br /&gt;
&lt;br /&gt;
1929년 광주항일학생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학생 시위를 보고 그것을 민족적·민중적 운동으로 확산시키고자 민중대회를 계획했으나, 조선총독부 밀정에게 발각, 총독부 경무국에 의해 무산되었다.&lt;br /&gt;
&lt;br /&gt;
1930년 5월 김법린, 김상호, 이용조, 최범술 등이 조직한 '''청년승려비밀결사 만당(卍黨)'''의 영수로 추대되었다.&lt;br /&gt;
&lt;br /&gt;
1931년 6월 &amp;lt;불교&amp;gt;지를 인수, 불교사 사장으로 취임하여 많은 논설을 발표하였다. 이후 많은 논문과 논설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특히, 고루한 전통에 안주하는 불교를 통렬히 비판하였으며, 승려의 자질 향상, 불자에게 생계를 의존하지 않기, 기강확립, 생활불교 등을 제창하였다.&lt;br /&gt;
&lt;br /&gt;
==== 반일 강연 활동 ====&lt;br /&gt;
그는 조선 불교가 일본 불교에 예속되지 않고 독립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한편 한 강연에서 그는 [[조선총독부]]나 일본 불교에 아첨하는 일부 승려들을 질타하기로 했다.&lt;br /&gt;
&lt;br /&gt;
그간 &amp;quot;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amp;quot;고 묻자 아무도 그 물음에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amp;quot;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것은 똥이올시다. 똥! 그런데 그 똥보다 더 더러운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겠습니까?&amp;quot;라고 하자 역시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가난한 불자들의 시신을 염습해본 적이 있는 한 사람은 시체라고 하였다. &amp;quot;내 경험으로는 똥보다 더 더러운 것이 송장 썩는 것이올시다. 똥 옆에서는 식음을 할 수 있어도 송장 썩는 옆에서는 차마 음식이 입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amp;quot;라는 것이다.&lt;br /&gt;
&lt;br /&gt;
그의 말을 듣고 일부는 좌석을 이탈하려 하였으나 좌중에 압도당해 움직일 수 없었다. 이어 만해는 &amp;quot;시체보다 더 더러운 것이 있으니 그것이 무엇일까?&amp;quot;하고 물었다. 아무도 답을 하지 않자 한용운은 굳은 표정으로 강연대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amp;quot;그건! 바로 여기 앉아 있는 31본산 주지 네놈들이다!&amp;quot;라고 일갈하고는 즉시 단상에서 내려와 퇴장해버렸다. 반일 혹은 일본 불교에의 흡수를 반대하는 그를 두고 불령선인이라는 지적이 계속되었고 그는 결국 [[조선총독부]] 형사들의 감시하에 놓이게 된다.&lt;br /&gt;
&lt;br /&gt;
한편 총독부로부터 생계비와 연구비를 지원받는 조건으로 전향한 육당 최남선이 탑골공원 근처에서 마주쳤을 때 &amp;quot;오랜만이오. 만해.&amp;quot;라고 먼저 인사하자 그는 &amp;quot;당신이 누구요?&amp;quot;며 냉정하게 답하였다. 최남선이 &amp;quot;나는 육당이오. 나를 몰라보겠소?&amp;quot;라고 하자 만해는 &amp;quot;뭐, 육당? 그 사람은 내가 장례 지낸 지 오랜 고인이오.&amp;quot;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lt;br /&gt;
&lt;br /&gt;
=== 생애 후반 ===&lt;br /&gt;
==== 소설 집필 활동 ====&lt;br /&gt;
1931년 53세의 나이에 재혼에 뜻이 있어 동지들의 소개로 13살 연하의 유숙원(1892년~1965년)과 재혼하였다. 유숙원은 결혼하기 전까지 단성사 옆에 위치했던 진성당병원의 간호사로 일하였다.  1933년에 金漁 김벽산(金碧山)스님이 집터를 기증하자, 조선일보사장 [[방응모]], 박광 등 몇 분의 성금으로 절반의 비용을 지원받아 [[심우장]]을 짓기 시작하였다. 이때 총독부돌집을 마주보기 싫다고 북향으로 짓도록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다음 해에 딸 영숙(1934년 9월 1일)이 태어났으며, 1935년에 완공되자 입주하여 [[심우장]]에서 여생을 보내며 작품활동을 지속하였다.&lt;br /&gt;
&lt;br /&gt;
1935년 장편소설 《흑풍》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였다.《흑풍》에서는 검열을 피하기 위해  배경을 청나라를 무대로 하고, 억압에 대한 투쟁정신을 묘사하여 [[조선총독부]]에 대한 저항성을 은근히 보여주고 여성해방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삽입하여 반봉건 정신 및 여성도 인격체라는 견해를 설파하였다. 1936년 단재 [[신채호]]의 시신이 비밀리에 입국한 것을 접하고 [[방응모]]와 함께 신채호의 묘비건립과 정약용 서세100년기념회 개최에 참여했다. 1936년 《조선중앙일보》에 장편 《후회 後悔》를 연재하였다. 이러한 소설을 쓴 까닭은 원고료로 생활에 보탬을 얻기 위한 까닭도 있지만 그보다도 소설을 통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하려는 의도가 더 큰 것으로 이해된다. 1937년 불교관계 항일단체인 만당사건(卍黨事件)의 배후자로 검거, [[서대문형무소]]에 재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lt;br /&gt;
&lt;br /&gt;
1937년 4월 13일 서간도 독립운동단체의 지도자였던 김동삼이 경성감옥에서 사망하였다. 아무도 그의 시신을 거두거나 수습하려 하지 않았는데 한용운이 홀로 찾아가 통곡하며 시신을 수습하여 심우장에서 장례를 치루었다.&lt;br /&gt;
&lt;br /&gt;
==== 태평양 전쟁 전후 ====&lt;br /&gt;
석방 후 [[불교]] 혁신과 작품활동을 계속하였고 1938년에는 장편 《박명(薄命)》을 발표하였다. 1938년부터는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에 반대하여 학도병 거부 운동을 벌였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는 여러 장편 외에 장편소설인 《박명(薄命)》이 있고, 저서로는 시집《[[님의 침묵]]》을 비롯하여《[[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불교대전》,《불교와 고려제왕(高麗諸王)》등이 있다.&lt;br /&gt;
&lt;br /&gt;
그는〈[[님의 침묵]]〉 외에도《신인 문학》과《삼천리》에 시 '꿈과 근심', '실제 (實際)',《조광》에 수필 '최후의 5분간', [[조선일보]]에 장편소설 흑풍, 박명, 조선중앙일보에 소설 &amp;lt;후회&amp;gt;와 중편소설 &amp;lt;죽음&amp;gt; 등을 발표하였다.&lt;br /&gt;
&lt;br /&gt;
중일전쟁 이후로도 그는 계속 징용이나 보국대 또는 일본군을 찬양하는 글을 쓰지 않으며 강연도 하지 않았다. 또한 강연 협조 등도 거부하였다. 또한 1937년부터 강요된 신사 참배와 일장기 게양을 거부하고, [[조선총독부]]의 일본식 호적에 이름조차 올리지 않았다.&lt;br /&gt;
&lt;br /&gt;
만년에는 경성부 성북동의 [[심우장]]을 친히 지어 거처했는데, [[심우장]]은 후일 서울기념물 제7호로 지정되었다. 1939년 경상남도 사천군 다솔사(多率寺)로 내려가 회갑을 맞으면서 몇몇 동지들과 함께 자축연을 가졌다. 다솔사는 당시 민족독립운동을 주도하던 본거지였다.&lt;br /&gt;
&lt;br /&gt;
==== 사망 ====&lt;br /&gt;
1940년 5월부터는 창씨개명 반대운동을 하였고 1943년에는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말년에는 [[방응모]], 정인보, [[안재홍]], 홍명희, [[김성수]], 만공 등과 교류하며 그들이 보내주는 생활비로 어렵게 생활하였다. 일제의 극심한 탄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비타협적인 독립사상을 견지하다가, 성북동 집인 [[심우장]]에서 냉방으로 생활하였다.&lt;br /&gt;
&lt;br /&gt;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한 만해의 생계는 그의 친구인 [[안재홍]], [[방응모]], [[김성수]], 송진우, 조만식, 최남선, [[이광수]], 윤치호 등이 십시일반으로 부담해주었다. 말년에 중풍으로 고생하였지만  1944년 6월 28일 [[조선총독부]]의 특별 훈련으로 공습경보가 발령되었을 때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후 계속 혼수상태로 있다가 1944년 6월 29일 [[심우장]]에서 입적하였다.&lt;br /&gt;
&lt;br /&gt;
그가 사망하였던 1944년은 일본 제국이 패망하기 1년 전이자 광복을 1년 앞두고 있던 때라 그토록 염원하던 조국의 독립은 끝내 생전에 보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가 사망한 지 1년 후인 1945년 8월 15일에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일본 제국이 패망하게 되면서 대한민국이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 사후 ==&lt;br /&gt;
[[파일:한용운흉상.jpg|섬네일|250px|만해의 흉상]]&lt;br /&gt;
* 사망한지 1년 후인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면서 조선은 광복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한용운 본인은 1년 전에 고인이 되었기 때문에 그토록 염원하였던 광복의 모습은 보지 못하였다.&lt;br /&gt;
* 동지들에 의하여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미아리 사설 화장장에서 다비된 뒤 망우 역사 문화공원에 유골이 안치되었다. 후일 그 옆에는 부인 유숙원 여사의 묘소가 오른편에 매장되었다.&lt;br /&gt;
* 그는 문학을 전문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님에 대한 그리움과 곧은 지조를 표현한 작품들을 통해 해방후에도 인기를 끌게 되었다. 그후 문인, 저항 시인, 대처승, 출가 승려로만 인식되다가 1960년대부터는 그의 독립운동 역사가 학자들에 의해 재조명 받기 시작했다.&lt;br /&gt;
*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려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lt;br /&gt;
* 1967년 그가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던 탑골공원에는 후에 승려 운허에 의해 《용운당 만해 대선사비》(龍雲堂 萬海 大禪師碑)가 세워졌다.&lt;br /&gt;
* 고향인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남산공원에 동상이 세워졌고 홍성읍내 장터에도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lt;br /&gt;
* 1973년 신구문화사에서 《만해 전집》6권이 간행되었다.&lt;br /&gt;
* 그의 결성면 성곡리 박철동 잠방굴마을 생가지는 1989년 12월 24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75호로 지정되었다.&lt;br /&gt;
* 1990년에 생가가 복원되고 기념관이 건립되었다.&lt;br /&gt;
* 1991년에는 만해의 업적을 기리는 만해학회가 설립되었다.&lt;br /&gt;
* 그밖에 만해기념관, 만해사상선양회 등이 세워졌다.&lt;br /&gt;
*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에는 만해문학박물관이 건립되었다.&amp;lt;ref&amp;gt;[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426287 네팔 민주화·문학의 뿌리는 불교?]&amp;lt;/ref&amp;gt;&lt;br /&gt;
* 후에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만해 생가지에는 생가복원에 이어 사당을 건립하고 안내판을 설치하였다.&lt;br /&gt;
&lt;br /&gt;
== 작품성 ==&lt;br /&gt;
시와 작품에 있어 퇴폐적인 서정성을 배격하였으며 조선의 독립 또는 자연을 부처님에 빗대어 불교적인 '님'으로 형상화했으며, 고도의 은유법을 구사하여 [[조선총독부]]나 일제 정치에 저항하는 민족정신과 불교에 의한 중생제도(衆生濟度)를 노래하여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검열을 교묘하게 피하였다. 여기에서의 님은 보는 관점에 따라 조선의 독립, 자연, 부처님 혹은 이별한 연인 등으로도 해석이 가능한 어법을 구사하였다.&lt;br /&gt;
&lt;br /&gt;
그는 대표작 [[님의 침묵]]을 비롯한 시집, 작품집에서 중심을 이루고 있는 '님'은 연인·조국·부처 등 다의적인 의미를 지니며 그에 따라 '님의 침묵'이라는 표현은 당시의 민족적 상황을 은유적으로 상징하였다. 또한 세속적인 정감의 진솔성이 불러일으키는 인간적 설득력과 함께 세속적인 사랑을 표출하면서도 세속사의 진부함에 떨어지지 않으며 목소리 높여 민중정신을 강조하지도 않는다는 작품평도 있다.&lt;br /&gt;
&lt;br /&gt;
그는 당시 상황을 시적 주체인 '나'가 님과 이별하여 님이 부재하고 침묵하는 시대로 규정하면서도, 님은 이 자리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나'는 진정으로 님의 존재를 깨닫게 된다는 변증법적인 진리 또는 부처에 대한 믿음, 이별한 연인에 대한 애정을 확신, 재다짐하는 것을 드러내고, 새로이 '나'는 이 자리에는 계시지 않는 님 또는 돌아올 님과 다시 합일될 수 있다는 뜻을 노래한다. 또한 내가 님과 새로이 만나기 위해서 나는 님이 존재하지 않지만 님에 대한 의리와 절개를 지키고 님에 대한 철저한 복종이 요구되는데, 그 절개와 의리, 복종을 통해서 비로소 '님'에 대한 신의도 지키면서 한편으로 '나'는 자유로워진다는 '복종과 자유의 변증법'을 노래한 것은 역사의 필연성의 인식을 통해 진정한 자유를 획득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출한다. 그는 식민지 하에 있는 조국의 운명과 독립의 필연성 또는 오지 아니한 극락세계와 다시 만나게 되는 그 날, 그리고 그 날을 위한 실천, 변함없는 믿음을 통해 진정한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는 진리를 작품들을 통해 형상화, 승화시켰다.&lt;br /&gt;
&lt;br /&gt;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그의 시는 오언절구나 칠언절구, 3.4조 등 당시 조선의 시조, 시의 형식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산문시의 전형이 되었다. 은유와 역설의 자유로운 구사를 보여주며, 정형적인 틀을 완전히 벗어난 산문적 개방 속에서도 내재율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근대 자유시의 완성에도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lt;br /&gt;
&lt;br /&gt;
== 저서 ==&lt;br /&gt;
* 《불교대전 (佛敎大典)》(1913년)&lt;br /&gt;
* 《[[조선불교유신론]] (朝鮮佛敎維新論)》(1913년)&lt;br /&gt;
* 시집 《심》&lt;br /&gt;
* 시집 《[[님의 침묵]]》&lt;br /&gt;
* 《유마힐소설경강의 維摩詰所說經講義》(1933년)&lt;br /&gt;
* 《십현담주해 (十玄談註解)》&lt;br /&gt;
* 《불교와 고려제왕 (高麗諸王)》&lt;br /&gt;
* 《조선독립의 서 (朝鮮獨立之書)》&lt;br /&gt;
&lt;br /&gt;
=== 번역서 ===&lt;br /&gt;
* 《정선강 채근담》&lt;br /&gt;
&lt;br /&gt;
=== 소설 ===&lt;br /&gt;
* 《흑풍》(1935년)&lt;br /&gt;
* 《후회》(1936년)&lt;br /&gt;
* 《박명 (薄命)》(1938년)&lt;br /&gt;
* 《죽음》&lt;br /&gt;
&lt;br /&gt;
=== 시 ===&lt;br /&gt;
* 시 '꿈과 근심'&lt;br /&gt;
* '실제 (實際)'&lt;br /&gt;
* '나룻배와 행인'&lt;br /&gt;
* 님의 침묵&lt;br /&gt;
* 수의 비밀&lt;br /&gt;
* 사랑하는 까닭&lt;br /&gt;
&lt;br /&gt;
=== 수필 ===&lt;br /&gt;
* 《최후의 5분간》&lt;br /&gt;
&lt;br /&gt;
== 연보 ==&lt;br /&gt;
* 1879년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출생&lt;br /&gt;
* 1905년 강원도 인제군 백담사에서 수계&lt;br /&gt;
* 1906년 명진학교 입학&lt;br /&gt;
* 1908년 명진학교 졸업&lt;br /&gt;
* 1908년 조동종대학림에서 연구&lt;br /&gt;
* 1911년 박한영 등과 친일불교에 맞서 승려대회 개최&lt;br /&gt;
* 1918년 청년계몽운동지 [[유심]]지를 창간,주재&lt;br /&gt;
* 1919년 3월 1일 (→ [[3.1 운동]]) 불교 대표로 독립 운동에 참가&lt;br /&gt;
* 1919년 ~ 1921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3년간 감옥살이&lt;br /&gt;
* 1924년 불교청년회 회장, 총재&lt;br /&gt;
* 1926년 시집 &amp;lt;[[님의 침묵]]&amp;gt; 출판&lt;br /&gt;
* 1927년 [[신간회]] 중앙위원회 위원&lt;br /&gt;
* 1928년 [[신간회]] 경성지부장&lt;br /&gt;
*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 민중대회 개최&lt;br /&gt;
* 1931년 만당 당수&lt;br /&gt;
* 1931년 월간 불교지를 인수, 2년 간 간행&lt;br /&gt;
* 1944년 서울 [[심우장]]에서 중풍으로 사망&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v2%3A2PACX-1vTSee_0iJiM6j6SoxnZrz1dB_08wI7e9iABOAcfSWSU9IZ8Zb2_-L0GySFUvO3nkN2qJT_zdBb2OSDA&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width=100%25&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 평가와 비판 ==&lt;br /&gt;
민족독립, 불교유신, 자유문학의 3대 사상가로서 절의의 행적을 남겼다. 강렬한 현실비판 등 현세에서의 실천을 강조한 그의 혁명사상을 가졌다는 평가가 있다. 그가 불교이념에 의한 자유, 평등의 국가사회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하였다는 평가도 있다. 한편 자유민주주의, 비폭력 무저항주의, 민족자결주의 등에 입각한 소극적, 관념적인 차원에 머물렀다는 시각도 있다.만해 한용운은 대단한 독립운동가다. 스님이면서 독립운동에도 힘썼다. 또 독립 운동을 할 때 같이 했던 동지들이 창씨개명 등 일본이 억지로 권유한 것을 하기라도 하면 차갑게 외면했다.&lt;br /&gt;
&lt;br /&gt;
== 기타 ==&lt;br /&gt;
* 승려의 결혼 허용 주장은 1920년대 1930년대 화제가 되어 사회적 이슈거리와 논란이 되었다.&lt;br /&gt;
* 친하던 벗 또는 호형호제하던 사이로는 이시영(李始榮), 백용성, 최남선, 최린, 김동삼(金東三), [[방응모]], [[신채호]], [[김성수]], [[안재홍]], 송진우, 정인보(鄭寅普), 김규식, 박광(朴珖), 홍명희, 만공 송월면(宋月面), [[이광수]], 김일엽, 최범술(崔凡述) 등이 있었다.&lt;br /&gt;
* 그의 제자 중에는 춘성도 있었다. 춘성 역시 일제강점기의 대표적 반일 인사이자 해방 후에도 승려로 활동하였다.&lt;br /&gt;
* 그의 아들 한보국은 일제강점기의 사회주의자이자 해방 후에는 남로당 당원으로 활동하다가 월북하였다. 1980년대까지 그에게는 아들이 한 사람 있었다는 것 이외에는 아들과 본부인 전정숙의 존재는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다.&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 /&amp;gt;&lt;br /&gt;
&lt;br /&gt;
== 참고문헌 ==&lt;br /&gt;
* 김광식, 《한용운 연구》 (동국대학교출판부, 2011)&lt;br /&gt;
* 윤재근, 《님의 침묵 연구》 (민족문학사, 1985)&lt;br /&gt;
* 김재홍, 《한용운문학연구 1》 (일지사, 1982)&lt;br /&gt;
* 송욱, 《님의 침묵:전편해설》 (과학사, 1973)&lt;br /&gt;
* 박노준·인권환, 《한용운 연구》 (통문관, 1960)&lt;br /&gt;
&lt;br /&gt;
== 외부 링크 ==&lt;br /&gt;
* [http://www.manhae.or.kr/ 만해기념관 홈페이지]&lt;br /&gt;
* [http://wwww.peace21.org/today_column_board/18492 만해 한용운과 아들 한보국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 부자, 애국애족만은 부전자전]]&lt;br /&gt;
*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amp;amp;search_div_id=CP_THE006&amp;amp;cp_code=cp0525&amp;amp;index_id=cp05250499&amp;amp;content_id=cp052504990001 승려결혼을 주장한 한용운]&lt;br /&gt;
* [https://web.archive.org/web/20131214035146/http://www.hongsung.net/tt/board/ttboard.cgi?act=read&amp;amp;db=city_people&amp;amp;page=1&amp;amp;idx=3 한용운:홍성넷]&lt;br /&gt;
*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8/08/01/200808010500005/200808010500005_2.html 민족대표 33인 한용운과 박희도:“독립의 영(榮), 변절의 욕(辱), 모두 산 자들의 짐인 것을…”]&lt;br /&gt;
* [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C%9A%A9%EC%9A%B4 한용운-위키백과]&lt;br /&gt;
&lt;br /&gt;
[[분류:감자]]&lt;/div&gt;</summary>
		<author><name>Nsgjjsjsjy02</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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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width:100%&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0%&amp;quot;|사진&lt;br /&gt;
|[[파일:방응모.jpg|center|200픽셀]]&lt;br /&gt;
|+ '''방응모'''&lt;br /&gt;
|+ style=&amp;quot;caption-side:bottom;text-align:left:&amp;quot;|출처: 위키백과&lt;br /&gt;
|출생||1883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조선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또는 정부면 성내동&lt;br /&gt;
|-&lt;br /&gt;
|사망||1950년경으로 추정&lt;br /&gt;
|-&lt;br /&gt;
|사인||불명&lt;br /&gt;
|-&lt;br /&gt;
|거주지||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amp;gt; 경성부 -&amp;gt; 경기도 양주군 의정부읍&lt;br /&gt;
|-&lt;br /&gt;
|국적||대한민국&lt;br /&gt;
|-&lt;br /&gt;
|본관||온양&lt;br /&gt;
|-&lt;br /&gt;
|별칭||호: 계초(啓礎), 춘해(春海)&lt;br /&gt;
|-&lt;br /&gt;
|직업||교사, 변호사, 상인, 언론인, 기업인, 사회운동가, 정치가&lt;br /&gt;
|-&lt;br /&gt;
|배우자||승계도, 이인숙, 배영옥, 노효용&lt;br /&gt;
|-&lt;br /&gt;
|자녀||방재숙(딸), 방재욱·방재선·방재효·방재규(아들), 방재윤(양자)&lt;br /&gt;
|-&lt;br /&gt;
|부모||방계준(부), 온양박씨(모)&lt;br /&gt;
|}&lt;br /&gt;
&lt;br /&gt;
'''방응모'''(方應謨, 평안북도 정주군, 1883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 1950년 8월(추정)는 [[일제강점기]]의 교육자, 언론인, 법조인, 기업인이자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언론인이며 정치인이다. 호는 '''춘해'''(春海)이고, 뒤에 '''계초'''(啓礎)로 고쳤다.&lt;br /&gt;
&lt;br /&gt;
1922년 동아일보 정주 지국을 인수해 지국장을 지내다가 1924년 금광업에 뛰어들어 큰 부를 얻게 되었다. 1932년 6월 조선일보에 입사하였고 이후 영업국장이 되어 조선일보의 판매망을 장악하게 되고 경영권을 인수하면서 1933년 3월 조선일보 부사장이 되었다. 1933년 7월부터 1950년 7월까지 종신으로 [[조선일보]]의 사장을 역임하였다. 1935년 창간한 월간잡지 '조광(朝光)'은 친일 논란이 있다.&amp;lt;ref&amp;gt;안은필. [http://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9211 조선일보가 가장 빛나던 시기, ‘안재홍 시대’]&amp;lt;/ref&amp;gt;&amp;lt;ref name=&amp;quot;안은&amp;quot;&amp;gt;안은필. [http://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9279 방응모 친일증거, “모래밭에서 모래 찾기”]국민TV. 기사입력 2015년 4월 23일. 기사수정 2015년 4월 24일.&amp;lt;/ref&amp;gt;&amp;lt;ref&amp;gt;이민영.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1/0002255321?sid=102 고법 “방응모 前조선일보 사장 친일행적 대부분 인정”]. 서울신문. 2012년 1월 13일.&amp;lt;/ref&amp;gt;&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6/0000000413?sid=110 김성수ㆍ방응모와 친일언론인 군상]. 미디어오늘. 2002년 3월 12일.&amp;lt;/ref&amp;gt; 언론계에서 활동하면서도 사업가의 길을 함께 걸었고, 교육 장학 활동을 하였으며, 1945년 광복 직후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안재홍]]의 추천을 받아 한국독립당 중앙상무위원과 독립촉성국민회 총무부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amp;lt;ref name=&amp;quot;안은&amp;quot;/&amp;gt;&amp;lt;ref&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16/2008031600800.html 계초 방응모와의 우정도 여러 편의 시로 표현해&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해방 정국에서 김구의 재정적 후견인으로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등 삼의사 유골 봉환 사업과 신탁통치 반대 운동 등에 참여하여 활동했다.&lt;br /&gt;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 납북 후 행적은 &amp;quot;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amp;quot;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lt;br /&gt;
&lt;br /&gt;
== 생애 ==&lt;br /&gt;
=== 생애 초기 ===&lt;br /&gt;
==== 출생과 성장 ====&lt;br /&gt;
방응모는 1883년 11월 3일 또는 9월 29일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바우머리 부락 또는 정주군 정부면 성내동 425번지에서 '''방계준(方桂準)'''과 온양 박씨(溫陽朴氏)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어려서 빈곤한 가정환경으로 방응모는 정규 학교에는 입학하지 못하고, 16세 때까지 서당에 드나들며 한학을 익혔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던 중 그가 어느 정도 실력이 우수하다고 인정되자, 스승인 승창률은 잠시 방응모에게 어린아이들을 돌보게 한 후 자리를 피하곤 했다 한다. 그는 홀로 사서육경을 탐독, 독파하였다. 21세 무렵 잠시 서당 훈장을 지내기도 했다. 우연히 경성부에 갔다가 신문물을 보고 충격을 받아 17세에 독학으로 신학문과 일본어, 중국어, 수학 등을 독파하였다.&lt;br /&gt;
&lt;br /&gt;
유년시절 서당의 성리학 스승이던 승창률의 친척인 승시영(承時榮)과 조씨(趙氏)의 딸 승계도와 결혼했다. 결혼한 다음 해에도 그는 공부를 한다며 책만 사다 읽곤 했고, 부인 승계도는 생계를 위해 몸소 나섰다. 그의 아내는 남편에 대한 믿음이 절대적이었고 탓을 하거나 가출하지 않았다.&lt;br /&gt;
&lt;br /&gt;
=== 언론, 기업 활동 ===&lt;br /&gt;
==== 계몽 활동과 언론 활동 ====&lt;br /&gt;
1915년부터 1924년 방응모는 지역 지식인들, 유학파 청년, 계몽 청년들이 모여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하는데 참여했다. 민립대학기성회에서 활동하면서 조만식 등과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언변과 용모가 되었던 그의 여관에도 손님들이 몰렸고, 그가 &amp;quot;2백원도 좋고 5백원도 좋다며 보태달라&amp;lt;ref name=&amp;quot;fsfs87&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7페이지&amp;lt;/ref&amp;gt;&amp;quot;고 하면 기부금을 내는 이들이 있었다. 1919년 정주에서 3.1 만세 운동이 벌어지자, 그도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형사들의 눈을 피해 방응모는 만세운동을 하다 재빨리 몸을 피해 화를 면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8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22년 6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인수하여 분국장에 취임했다. 그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경영하는 동시에 그는 농촌 계몽운동 등에 적극 참여했다. 1922년 6월 19일&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96페이지&amp;lt;/ref&amp;gt; 동아일보 본사를 설득하여 정주분국을 동아일보사 정주지국으로 승격시켰다. 동아일보사 지부장 재직 시 그는 민립 대학 설립 자금과 농촌진흥회 회원의 여비 및 당시 운영난에 처했던 오산학교의 재개교 등을 계획했다. 총독부의 거부로 실패한 대학 설립 자금은 고스란히 오산학교의 부활 자금으로 투입되었다.&lt;br /&gt;
&lt;br /&gt;
1923년 동아일보 정주군 분국이 지국으로 승격되자 정주국을 경영하였고, 같은 해 7월 여성들의 사회 참여와 평등권 신장을 위한 여자교육회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이후 대규모 수해가 나자, 정주군 수해구제회를 결성하여 봉사활동에 가담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 광업 경영과 조선일보 입사 ====&lt;br /&gt;
1924년 친구 전우현이 방응모와도 안면이 있던 금광 채굴업자 두 명을 데리고 그를 찾아왔다. 그들은 자신들이 봐 둔 산이 있다고 방응모에게 소개했다. 이후 광산업에 뛰어들어 1924년 여름 압록강변의 폐금광인 평안북도 삭주군 외남면 교동 다릿골의의 삭주 교동광업소를 찾아가 10미터 정도 땅을 파고 금맥을 발견했다. 곧 삭주 교동광업소를 인수, 경영을 확대하였다. 이때 만난 동업자의 딸이자 친구 전우현의 조카딸인 '''이인숙(李仁淑)'''을 만났다. 본처 승계도가 두 아들을 잃고 복부 수술이 잘못되어 아이를 얻지 못하게 되자 방응모에게도 수많은 중매가 들어왔다. 자식들을 병으로 잃은 것이 자신의 불찰이라고 본 승계도는 그에게 작은 부인이라도 들이자는 말을 꺼내기도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18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26년 방응모에게 광산 사업을 제안했던 두 친구가 손을 털고 나갔고, 그의 가족은 돈이 없어 쌀 대신 좁쌀로 좁쌀죽을 먹으며 연명해야 했다. 방응모는 정주군에 사는 비슷한 또래의 먼 친척 방상진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고, 방상진과 일꾼 대여섯 명, 그리고 후처 이인숙의 친정 쪽에서 얻어온 토지문서를 얻어 자금을 마련했고 다시 금광을 채굴했다. 그 후 1926년 7월 지하 300m 지점에서 금맥을 확보했고, 이후 연간 300kg의 금을 생산하여 벼락부자가 되었다.&lt;br /&gt;
&lt;br /&gt;
1928년 방응모는 자신의 아호를 딴 춘해 장학회를 만들고 장학생들의 모임인 이심회를 만든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48페이지&amp;lt;/ref&amp;gt; 1928년에 그는 의정부 직동, 흥선대원군의 별장이 있던 곳 바로 뒤에 위치한 건물을 매입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한용운]], 홍명희를 자주 초대했다.&lt;br /&gt;
&lt;br /&gt;
1932년 방응모는 교동광산을 135만원이란 거액에 일본 중외광업주식회사에 매각했다. 그 뒤 1932년 6월부터 조선일보 영업국장으로 활동하다 1933년 3월 [[조선일보]]의 경영권을 인수하여 부사장에 취임하였다.&lt;br /&gt;
그는 교동광업소를 운영하며 모은 재력을 바탕으로 부사장 재직 중 [[조선일보]]의 대주주가 되었으며, 1933년 7월 8대 사주 조만식으로부터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제9대 [[조선일보]] 사주로 취임, 활동했다.&amp;lt;ref&amp;gt;조선일보는 1932년 7월에 조만식을 사장으로 영입했지만, 조만식은 거의 평생을 평양에서 살아왔던데다 서울에서 활동하기에는 적응을 잘하지 못했다. 조만식은 신문사 경영난과 지역감정의 혹독한 시련을 받은 채 9개월만에 퇴사했다. 그리고 조만식 후임으로 1933년, 방응모를 사장으로 추대하기에 이르렀다.&amp;lt;/ref&amp;gt;&amp;lt;ref&amp;gt;《한국사 시민강좌 제47집, 대표적 독립운동가 12인》,일조각. p145&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언론, 사업 활동 ===&lt;br /&gt;
==== 사회사업 ====&lt;br /&gt;
[[파일:방응모장학생.jpg|섬네일|160px|오른쪽|방응모와 그의 장학금을 받던 학생들. 가운데 앉은 이가 방응모이고, 서있는 이들 중 왼쪽에서 두 번째는 방응모의 양자 방재윤.]]&lt;br /&gt;
&lt;br /&gt;
1930년 배영옥과 결혼하여 딸 방재숙을 얻었다. 1932년 광산업을 정리하였고 언론사업을 비롯하여 육영사업과 조림 및 간척사업 등을 벌였다. 또한 고아원과 사회복지단체에 후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933년 무렵 방응모가 [[조선일보]] 인수에 나서기 전부터 그는 [[한용운]]을 위한 일이라면 돈을 아끼지 않고 지출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성북동 언덕에 만해 한용운을 위해 기와집 한 채를 지어주었는데 [[심우장]](尋牛莊)이 그것이다. 또한 만해가 일제의 배급을 거부해 생활이 어려워지자 생활비를 지원했던 방응모는 그가 병석에 누운 1944년에는 치료비를 지원해주기도 했다.&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6/0000043262?sid=103 만해가 일송 선생 5일장 치른 사연]&amp;lt;/ref&amp;gt; 그 외에도 방응모는 만해 한용운·벽초 홍명희 등과 함께 새해가 되면 백천온천에도 같이 다녀올 정도로 가까운 관계였다.&lt;br /&gt;
&lt;br /&gt;
1932년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사건으로 체포된 [[안창호]]의 사면 탄원과 보석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총독부 경무국장은 그의 안창호 석방 제안을 정중히 거절한다.&lt;br /&gt;
&lt;br /&gt;
1936년 동방문화학원(숭문중학교·고등학교 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에 취임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인수와 경영 ====&lt;br /&gt;
1933년 1월 16일 그는 정식으로 주식회사 [[조선일보]]사를 창립했다. 일단 그는 조만식을 사장으로 임명하고 자신은 부사장으로 있다가, 그해 3월 13일 다시 부사장에 취임했다. 7월 10일 조만식의 사퇴로, [[조선일보]]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다.&lt;br /&gt;
&lt;br /&gt;
1934년 3월 25일 이광수를 비롯하여 서춘, 김동진, 함상훈, 신태익 등을 [[조선일보]]로 영입해 왔다. 그 외에도 정주군 출신 언론인, 작가들이 조선일보로 많이 오게 되었다.&lt;br /&gt;
&lt;br /&gt;
==== 동방문화학원 재단 설립 ====&lt;br /&gt;
방응모는 1936년 재단법인 동방문화학원(東邦文化學院)을 설립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6페이지&amp;lt;/ref&amp;gt; 동방문화학원은 학교 법인으로 인가된 재단 법인으로, 그 후 고계학원과 인연을 가지고 1936년부터는 보성고등보통학교를 후견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 분리되었다. 그 후 방응모 장학생인 서중회 회원들을 위한 방응모 장학사업을 주관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7페이지&amp;lt;/ref&amp;gt;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구 조선일보 사옥 안에 동방문화학원의 간판을 달고 조광 잡지를 계속 발행하는 조광사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7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일제 강점기 후반 ===&lt;br /&gt;
==== 중일 전쟁 전후 ====&lt;br /&gt;
중일전쟁 개전 직후인 1937년 7월 11일에 열린 [[조선일보]] 간부회의에서 주필 서춘이 '일본군, 중국군, 장개석씨'등으로 쓰던 용어를 '아군, 황군, 지나, 장개석'으로 고치고 일본 국민의 입장에서 논설을 쓸 것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반대 의견도 있기는 했으나, 방응모는 '일장기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이미 몇 십만 원의 손해를 보았을 뿐 아니라 [[3.1 운동]] 때처럼 신문이 민중을 지도할 수 없다'면서 서춘의 입장을 지지했다.&lt;br /&gt;
&lt;br /&gt;
1933년 이심회(후에 서중회, 방응모장학회 등 명칭이 바뀜)를 통해 대학생과 해외 유학생들에게 학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937년 12월 24일 [[안창호]]는 병보석 판정을 받고 재판소가 경성제국대학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안창호]]는 병상에서 병원비 문제로도 고초를 겪었고. 방응모는 50일 간의 입원비인 5백원짜리 수표 한 장을 안창호에게 전달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9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안창호]]는 1938년 3월 10일 밤 12시 경성제국대학 병원에서 운명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폐간 사건 ====&lt;br /&gt;
일본의 전쟁이 격화되면서 조선총독부 공보국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1940년에 강제로 폐간조치 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조선일보에 바쳤던 방응모는 큰 절망과 좌절을 느껴야 했다. [[한용운]]은 ‘신문이 폐간되다/ 붓이 꺾이어 모든 일이 끝나니…’로 시작하는 시를 지어 방응모를 위로했다. &amp;lt;ref&amp;gt;붓이 꺾이어 모든 일 끝나니 이제는 재갈 물린 사람들 뿔뿔이 흩어지고 아, 쓸쓸하고 쓸쓸한지고 망국 서울의 가을날 한강의 물도 흐느끼느니 울음 삼켜 흐느끼며 연지를 외면한 채 바다 향해 흐르느니&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38년 7월 “국민정신을 총동원하고 내선일체 전 능력을 발휘하여 국책 수행에 협력하여 성전(聖戰)의 궁극적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조직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에 참여했다.&lt;br /&gt;
&lt;br /&gt;
1940년 5월 조선총독부 총독 미나미 지로가 방송담화로 창씨개명을 권고했다. 그러나 그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성씨를 이제 와서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며 창씨개명은 완강하게 거절했다.&lt;br /&gt;
&lt;br /&gt;
조선일보에 트집이 잡힐 일이 나타나지 않자 총독부는 전국에 조선일보 신문 구독을 거절하도록 명령을 내렸고, 동시에 조선말을 쓰는 민원인에게는 일을 처리해주지 말도록 하게 했다. 총독부는 동아일보에 이어 조선일보에도 자진 폐간을 권고했고, 결국 8월 10일자로 폐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5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잡지 발행 활동 ====&lt;br /&gt;
신문 강제 폐간 뒤 방응모는 간판을 조광사로 바꿔 걸고, 사옥은 동방흥업주식회사로 등기를 변경해서 유지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1페이지&amp;lt;/ref&amp;gt; 이후 그는 조광 잡지 발행에 전념했다. [[조선일보]]가 폐간된 후에도 방응모는 벽초 홍명희 부자에게 지속적으로 생활비를 대주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4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4년 6월 29일 만해 [[한용운]]이 사망했다. 그는 [[심우장]]을 찾아가 3백원을 내놓았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5페이지&amp;lt;/ref&amp;gt;당시 쌀 10가마가 100원이었지만, 심우장은 당장 현금 1원이 없었는데 거액이라서 놀랐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6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광복 이후 활동 ===&lt;br /&gt;
==== 조선일보 복간 및 군정기 활동 ====&lt;br /&gt;
11월 [[조선일보]]사를 복간시켰다. 그러나 한동안 조선일보의 인쇄는 서울신문사에서 간행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1946년 2월 26일 서울신문사 공무국 종업원들이 조선일보의 인쇄를 거부해버렸다. 표면상의 문제는 임금 문제이나 내용상으로는 조선일보에 대한 조선공산당의 시위의 일종이었다. 사흘간의 교섭 끝에 2월 28일에 가서야 26일자와 27일자를 소급해서 인쇄하여 신문을 한꺼번에 발행하였다. 그러나 3월 1일과 2일에 또다시 인쇄를 거부당해 결국 휴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436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5년 광복 직후 서기원이 그를 찾아왔다. 서기원은 그때 경성농상실천학교의 동창회로부터 이 학교의 교장이 되어 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이다. 방응모는 서기원의 제의를 받아들여 1946년 8월 28일 동방문화학원 이사장으로 숭문상업학교를 인수, 재단 이사장이 되었다.&lt;br /&gt;
&lt;br /&gt;
==== 납북과 최후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 납북 후 행적은 &amp;quot;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amp;quot;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 1950년 8월경 개성 송악산 부근에서 미군의 폭격에 희생되었고 심한 폭격으로 시신을 찾을 수 없어 묘도 만들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남한에서는 1955년 7월 7일 생사불명기간 만료로 인해 실종 처리되었다.&lt;br /&gt;
&lt;br /&gt;
=== 사후 ===&lt;br /&gt;
서울 종로에 있던 양자 방재윤의 두 아들 방일영과 방우영은 방응모의 첩 이인숙이 찾아가 피신하라고 권고하여 황급히 피신했다. &lt;br /&gt;
&lt;br /&gt;
7월 6일 그의 행방불명처리가 되고, 방응모의 사후에도 [[조선일보]]는 그의 명의로 발행되었다. 1952년 4월 28일 조선일보는 발행인겸 편집인을 장기영으로, 인쇄인을 방일영으로, 방응모는 명예사장으로 명의변경하여 휴전 후 계속 발행하게 되었다. 1954년 4월 30일 제8회 조선일보 정기주주총회에서 장기영 사장이 사퇴하면서, 명예사장 방응모가 사장으로 추대되고, 발행인 겸 대표취체역에 방일영이 선임되었다. 이후 실종 후 1959년에 법적으로 사망 처리되었다. 그리고 1970년까지는 조선일보는 그의 이름으로 발행되었다.&lt;br /&gt;
&lt;br /&gt;
1970년 2월 19일 조선일보 정기주주총회에서 방응모 이사를 사퇴 수리하였다. 그의 피폭 사망 사실은 1970년대 이후 탈북자들을 통해 대한민국에 소개되었다.&lt;br /&gt;
&lt;br /&gt;
== 친일행위 의혹 ==&lt;br /&gt;
=== 일제 전시체제기 활동 ===&lt;br /&gt;
일제 강점기 말기 언론인으로서 총독부체제에 협력한 기록과 활동이 다수 기록이 있다. 1933년 3월 [[조선일보]] 경영권을 인수하고 부사장직에 취임했을 당시 1600원을 군에 헌납하였다. 그는 1935년 친일 잡지 《조광(朝光)》을 창간하였고, 1937년에는 경성방송국에 출연하여 일제가 중국의 베일을 절멸케하여 극동평화를 지키려고 한다는 강연을 하였다. 1940년대부터 조광에 집중적으로 친일 논설을 기고하고 시국 강연에 참여하여 전쟁 지원을 독려했다. 1942년 6월에는 '징병령 실시에 일층 더 감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글을 써서 조광에 발표하였다. 애국금차회(1937),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1938), 임전대책협의회(1941), 조선임전보국단(1941) 등 대표적인 친일 단체의 회원에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그는 이런 행적으로 인해 해방정국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명단에 기록되어 있고,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해 발표한 &amp;lt;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amp;gt;에 모두 포함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lt;br /&gt;
&lt;br /&gt;
=== 반민족행위 논란 ===&lt;br /&gt;
방응모를 친일파로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남아 있다. 조선일보 경영 이전에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방응모의 활동이 거의 없었고, 납북 뒤 소식이 끊겨버린 까닭에 본인이 항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 동안의 행적만으로 친일파 여부를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방응모의 후손들이 영향력 있는 [[조선일보]] 언론사의 사주를 맡았기에 그의 입장에서 서술한 기록을 많이 남기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80년 발간된 그의 전기 《계초 방응모》(조선일보사) 등에는 '그가 민족주의적 선각자'로 묘사되고 있다. 방응모가 친일파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일부세력측은 그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논거로 드는 경우가 많이 있다.&amp;lt;ref&amp;gt;유석재, 계간 《유심》 (2004년 봄호) [http://yousim.buddhism.org/html/2004-spr/tamgu-yoo-seok-jae.htm 삭풍 속에 피어난 금란지교(金蘭之交) - 만해와 계초 방응모]&amp;lt;/ref&amp;gt;&amp;lt;ref&amp;gt;&amp;quot;일제 말기 계초는 시국강연에 나설 것과 창씨개명을 집요하게 강요받았으나 그때마다 묵묵부답으로 거부하며 소신을 지켰다.&amp;quot; 《조선일보》 (2001.3) 조선일보 사장열전 - 계초 방응모편, 《한겨레》 (2001.3.30) [http://www.njoyschool.net/news/article_view.asp?menu_code=s20202&amp;amp;no=1206 조선일보, 일장기를 신문제호 위에]&amp;lt;/ref&amp;gt;&lt;br /&gt;
또한 한국정토학회 고문이자 서울 정토사 주지였던 박설산(1918~2007)이 학도병에 끌려가기 직전인 1943년 12월 28일 밤 서울역에서 스스로 왼발을 선로에 올려 발가락을 절단해 징집을 기피하자 방응모는 만해와 함께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설산을 걱정하면서 입원 중 조선일보 기자를 통해 돈을 전달한 것은 물론 퇴원할 때 돈을 전달하고 뒤를 보살폈다고 한다.&amp;lt;ref&amp;gt;박설산 회고록 &amp;lt;뚜껑없는 조선역사책&amp;gt;(1994, 도서출판 삼장) p240~241&amp;lt;/ref&amp;gt;&lt;br /&gt;
&lt;br /&gt;
2010년 12월, 방응모 관계자들 및 조선일보측은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을 취소해달라'며 법원에 낸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amp;quot;1944년 조선항공업 창립발기인으로 활동한 부분에 대해 친일행위로 판단한 부분을 취소하지만 나머지 활동에 대해서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amp;quot;라고 판결했다. 그 이유인 즉 &amp;quot;방응모는 1933년 조선일보 사장으로 취임해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등으로 활동하며 친일활동을 벌였으며, 1937년 경성방송국 시국강연에서 일본제국이 극동평화를 확립시킬 것이라는 내용의 강연을 하고, 1938년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춘추회의 발기인 겸 간사로 활동하기도 했다&amp;lt;ref&amp;gt;[http://media.daum.net/breakingnews/politics/view.html?cateid=1002&amp;amp;newsid=20101222103319164&amp;amp;p=newsis 법원 &amp;quot;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친일파 맞다&amp;quot;]뉴시스 2010년 12월 22일&amp;lt;/ref&amp;gt;&amp;quot;는 것이다.&lt;br /&gt;
&lt;br /&gt;
2012년 1월 12일 서울고등법원은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이 낸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처분 취소 청구소송에서 ‘일제 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의 친일 행위 판정 조항에 비추어 방응모에게 적용된 모든 행위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민족적 지도자로서 비중이 큰 만큼 그로 인한 책임도 무거울 뿐 아니라 고난의 시기를 겪은 민족으로서 그 역사를 반성하자는 입장에 설 때, 방 전 사장의 여러 행태는 반민특별법에서 규정한 친일반민족행위의 유형에 속함을 부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1, 2심 재판부는 방 전 사장이 자신이 운영하던 잡지 &amp;lt;조광&amp;gt;에 일제 침략전쟁에 동조하고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문예물과 일제 침략전쟁에 협력할 것을 주문하는 논문을 게재하는 등의 '친일' 행위를 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또한, 2심 재판부는 일본의 전쟁 수행을 돕기 위해 설립된 군수 제조업체 ‘조선항공공업’의 발기인과 감사를 지낸 것은 “감사는 업무집행에 관여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기관으로, 방 전 사장이 이 회사를 운영했다고 볼 수 있다”는 이유로 친일이라고 판단했다.&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4565.html법원 ‘방응모 친일’ 2심서도 인정] 인터넷한겨레 2010년 12월 22일&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기타 ==&lt;br /&gt;
그는 [[한용운]], 최남선, 정인보, 홍명희 등과 친분관계를 형성하고 어울려 지냈다 한다.&lt;br /&gt;
&lt;br /&gt;
김구의 한국독립당의 재정적 후견인 역할을 하였다 하며,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삼의사 유골봉환식 때 김구, 정인보 등과 촬영한 사진이 있다.&lt;br /&gt;
한편 임꺽정의 저자인 벽초 홍명희가 방응모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그와 깊은 친분을 맺었다는 주장이 있다. 《조광》 1938년 11월호엔 홍명희가 병중에 있는 방응모를 위로하며 지은 한시가 방응모의 답시와 함께 실려 있다고 한다.&amp;lt;ref&amp;gt;[http://weekly.chosun.com/site/data/html_dir/2004/11/05/2004110577041.html ‘임꺽정’으로 되살아난 독립운동의 魂! 주간조선 1827호 2004.11.04&amp;lt;/ref&amp;gt; 또한 [[안창호]]의 비서실장을 지낸 독립유공자 구익균은 방응모와 안창호가 친밀했다는 주장을 했다.&amp;lt;ref&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09/2008030901055.html &amp;quot;공산주의자들, 도산 비판하다가도 하숙비 떨어지면 찾아와&amp;quot;] 조선일보, 2008-03-10 03:22&amp;lt;/ref&amp;gt;&lt;br /&gt;
또한 박설산에 따르면 1943년 만해 한용운에게 학도병으로 끌려가게 되었음을 알리려 심우장으로 찾아가게 되었을 때, 한용운과 방응모가 바둑을 두고 곁에서 정인보가 훈수를 두고 있었다고 한다.&amp;lt;ref&amp;gt;박설산 저 &amp;lt;뚜껑없는 朝鮮 역사 책&amp;gt; p.226 도서출판 三藏(1994)&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 /&amp;gt;&lt;br /&gt;
&lt;br /&gt;
== 참고문헌 ==&lt;br /&gt;
* 청산하지 못한 역사: 언론 내세워 일제에 아부한 교화 정책의 하수인 (문영숙) (반민족문제연구소, 청년사, 1994)&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민족 계몽의 초석 방응모(이동욱 저, 지구촌, 1998)&lt;br /&gt;
* 계초 방응모전(계초전기간행위, 조선일보사, 1980년)&lt;br /&gt;
* 계초 방응모(이동욱, 방일영문화재단, 1996)&lt;br /&gt;
&lt;br /&gt;
== 외부링크 ==&lt;br /&gt;
* [https://web.archive.org/web/20050123171046/http://chosunhost.com/ 계초방응모 기념사업회]&lt;br /&gt;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09145 &amp;lt;조선일보&amp;gt;, 방응모 전 사장의 '친일행적' 말한다] - 오마이뉴스 04.09.10일자&lt;br /&gt;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020302101749 방응모ㆍ 김성수 친일행적 뭔가 : &amp;lt;긴급입수&amp;gt;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 全文] - 프레시안 2002-03-02&lt;br /&gt;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54052 그가 '&amp;lt;조선&amp;gt;의 주인' 주장하는 이유] 오마이뉴스 2001년 9월 20일자&lt;br /&gt;
*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956 방재선씨, 호주·상속 원인무효소송 제기]&lt;br /&gt;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4/06/2008040601053.html '5인 친필 서첩' 발굴] 조선일보 2008년04월06일자]&lt;br /&gt;
&lt;br /&gt;
[[분류: 감자]]&lt;/div&gt;</summary>
		<author><name>Nsgjjsjsjy02</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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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방응모</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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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Nsgjjsjsjy02: /* 참고 자료 */&lt;/p&gt;
&lt;hr /&gt;
&lt;div&gt;{|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width:100%&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0%&amp;quot;|사진&lt;br /&gt;
|[[파일:방응모.jpg|center|200픽셀]]&lt;br /&gt;
|+ '''방응모'''&lt;br /&gt;
|+ style=&amp;quot;caption-side:bottom;text-align:left:&amp;quot;|출처: 위키백과&lt;br /&gt;
|출생||1883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조선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또는 정부면 성내동&lt;br /&gt;
|-&lt;br /&gt;
|사망||1950년경으로 추정&lt;br /&gt;
|-&lt;br /&gt;
|사인||불명&lt;br /&gt;
|-&lt;br /&gt;
|거주지||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amp;gt; 경성부 -&amp;gt; 경기도 양주군 의정부읍&lt;br /&gt;
|-&lt;br /&gt;
|국적||대한민국&lt;br /&gt;
|-&lt;br /&gt;
|본관||온양&lt;br /&gt;
|-&lt;br /&gt;
|별칭||호: 계초(啓礎), 춘해(春海)&lt;br /&gt;
|-&lt;br /&gt;
|직업||교사, 변호사, 상인, 언론인, 기업인, 사회운동가, 정치가&lt;br /&gt;
|-&lt;br /&gt;
|배우자||승계도, 이인숙, 배영옥, 노효용&lt;br /&gt;
|-&lt;br /&gt;
|자녀||방재숙(딸), 방재욱·방재선·방재효·방재규(아들), 방재윤(양자)&lt;br /&gt;
|-&lt;br /&gt;
|부모||방계준(부), 온양박씨(모)&lt;br /&gt;
|}&lt;br /&gt;
&lt;br /&gt;
'''방응모'''(方應謨, 평안북도 정주군, 1883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 1950년 8월(추정)는 [[일제강점기]]의 교육자, 언론인, 법조인, 기업인이자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언론인이며 정치인이다. 호는 '''춘해'''(春海)이고, 뒤에 '''계초'''(啓礎)로 고쳤다.&lt;br /&gt;
&lt;br /&gt;
1922년 동아일보 정주 지국을 인수해 지국장을 지내다가 1924년 금광업에 뛰어들어 큰 부를 얻게 되었다. 1932년 6월 조선일보에 입사하였고 이후 영업국장이 되어 조선일보의 판매망을 장악하게 되고 경영권을 인수하면서 1933년 3월 조선일보 부사장이 되었다. 1933년 7월부터 1950년 7월까지 종신으로 [[조선일보]]의 사장을 역임하였다. 1935년 창간한 월간잡지 '조광(朝光)'은 친일 논란이 있다.&amp;lt;ref&amp;gt;안은필. [http://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9211 조선일보가 가장 빛나던 시기, ‘안재홍 시대’]&amp;lt;/ref&amp;gt;&amp;lt;ref name=&amp;quot;안은&amp;quot;&amp;gt;안은필. [http://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9279 방응모 친일증거, “모래밭에서 모래 찾기”]국민TV. 기사입력 2015년 4월 23일. 기사수정 2015년 4월 24일.&amp;lt;/ref&amp;gt;&amp;lt;ref&amp;gt;이민영.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1/0002255321?sid=102 고법 “방응모 前조선일보 사장 친일행적 대부분 인정”]. 서울신문. 2012년 1월 13일.&amp;lt;/ref&amp;gt;&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6/0000000413?sid=110 김성수ㆍ방응모와 친일언론인 군상]. 미디어오늘. 2002년 3월 12일.&amp;lt;/ref&amp;gt; 언론계에서 활동하면서도 사업가의 길을 함께 걸었고, 교육 장학 활동을 하였으며, 1945년 광복 직후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안재홍]]의 추천을 받아 한국독립당 중앙상무위원과 독립촉성국민회 총무부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amp;lt;ref name=&amp;quot;안은&amp;quot;/&amp;gt;&amp;lt;ref&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16/2008031600800.html 계초 방응모와의 우정도 여러 편의 시로 표현해&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해방 정국에서 김구의 재정적 후견인으로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등 삼의사 유골 봉환 사업과 신탁통치 반대 운동 등에 참여하여 활동했다.&lt;br /&gt;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 납북 후 행적은 &amp;quot;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amp;quot;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lt;br /&gt;
&lt;br /&gt;
== 생애 ==&lt;br /&gt;
=== 생애 초기 ===&lt;br /&gt;
==== 출생과 성장 ====&lt;br /&gt;
방응모는 1883년 11월 3일 또는 9월 29일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바우머리 부락 또는 정주군 정부면 성내동 425번지에서 '''방계준(方桂準)'''과 온양 박씨(溫陽朴氏)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어려서 빈곤한 가정환경으로 방응모는 정규 학교에는 입학하지 못하고, 16세 때까지 서당에 드나들며 한학을 익혔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던 중 그가 어느 정도 실력이 우수하다고 인정되자, 스승인 승창률은 잠시 방응모에게 어린아이들을 돌보게 한 후 자리를 피하곤 했다 한다. 그는 홀로 사서육경을 탐독, 독파하였다. 21세 무렵 잠시 서당 훈장을 지내기도 했다. 우연히 경성부에 갔다가 신문물을 보고 충격을 받아 17세에 독학으로 신학문과 일본어, 중국어, 수학 등을 독파하였다.&lt;br /&gt;
&lt;br /&gt;
유년시절 서당의 성리학 스승이던 승창률의 친척인 승시영(承時榮)과 조씨(趙氏)의 딸 승계도와 결혼했다. 결혼한 다음 해에도 그는 공부를 한다며 책만 사다 읽곤 했고, 부인 승계도는 생계를 위해 몸소 나섰다. 그의 아내는 남편에 대한 믿음이 절대적이었고 탓을 하거나 가출하지 않았다.&lt;br /&gt;
&lt;br /&gt;
=== 언론, 기업 활동 ===&lt;br /&gt;
==== 계몽 활동과 언론 활동 ====&lt;br /&gt;
1915년부터 1924년 방응모는 지역 지식인들, 유학파 청년, 계몽 청년들이 모여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하는데 참여했다. 민립대학기성회에서 활동하면서 조만식 등과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언변과 용모가 되었던 그의 여관에도 손님들이 몰렸고, 그가 &amp;quot;2백원도 좋고 5백원도 좋다며 보태달라&amp;lt;ref name=&amp;quot;fsfs87&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7페이지&amp;lt;/ref&amp;gt;&amp;quot;고 하면 기부금을 내는 이들이 있었다. 1919년 정주에서 3.1 만세 운동이 벌어지자, 그도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형사들의 눈을 피해 방응모는 만세운동을 하다 재빨리 몸을 피해 화를 면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8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22년 6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인수하여 분국장에 취임했다. 그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경영하는 동시에 그는 농촌 계몽운동 등에 적극 참여했다. 1922년 6월 19일&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96페이지&amp;lt;/ref&amp;gt; 동아일보 본사를 설득하여 정주분국을 동아일보사 정주지국으로 승격시켰다. 동아일보사 지부장 재직 시 그는 민립 대학 설립 자금과 농촌진흥회 회원의 여비 및 당시 운영난에 처했던 오산학교의 재개교 등을 계획했다. 총독부의 거부로 실패한 대학 설립 자금은 고스란히 오산학교의 부활 자금으로 투입되었다.&lt;br /&gt;
&lt;br /&gt;
1923년 동아일보 정주군 분국이 지국으로 승격되자 정주국을 경영하였고, 같은 해 7월 여성들의 사회 참여와 평등권 신장을 위한 여자교육회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이후 대규모 수해가 나자, 정주군 수해구제회를 결성하여 봉사활동에 가담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 광업 경영과 조선일보 입사 ====&lt;br /&gt;
1924년 친구 전우현이 방응모와도 안면이 있던 금광 채굴업자 두 명을 데리고 그를 찾아왔다. 그들은 자신들이 봐 둔 산이 있다고 방응모에게 소개했다. 이후 광산업에 뛰어들어 1924년 여름 압록강변의 폐금광인 평안북도 삭주군 외남면 교동 다릿골의의 삭주 교동광업소를 찾아가 10미터 정도 땅을 파고 금맥을 발견했다. 곧 삭주 교동광업소를 인수, 경영을 확대하였다. 이때 만난 동업자의 딸이자 친구 전우현의 조카딸인 '''이인숙(李仁淑)'''을 만났다. 본처 승계도가 두 아들을 잃고 복부 수술이 잘못되어 아이를 얻지 못하게 되자 방응모에게도 수많은 중매가 들어왔다. 자식들을 병으로 잃은 것이 자신의 불찰이라고 본 승계도는 그에게 작은 부인이라도 들이자는 말을 꺼내기도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18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26년 방응모에게 광산 사업을 제안했던 두 친구가 손을 털고 나갔고, 그의 가족은 돈이 없어 쌀 대신 좁쌀로 좁쌀죽을 먹으며 연명해야 했다. 방응모는 정주군에 사는 비슷한 또래의 먼 친척 방상진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고, 방상진과 일꾼 대여섯 명, 그리고 후처 이인숙의 친정 쪽에서 얻어온 토지문서를 얻어 자금을 마련했고 다시 금광을 채굴했다. 그 후 1926년 7월 지하 300m 지점에서 금맥을 확보했고, 이후 연간 300kg의 금을 생산하여 벼락부자가 되었다.&lt;br /&gt;
&lt;br /&gt;
1928년 방응모는 자신의 아호를 딴 춘해 장학회를 만들고 장학생들의 모임인 이심회를 만든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48페이지&amp;lt;/ref&amp;gt; 1928년에 그는 의정부 직동, 흥선대원군의 별장이 있던 곳 바로 뒤에 위치한 건물을 매입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한용운]], 홍명희를 자주 초대했다.&lt;br /&gt;
&lt;br /&gt;
1932년 방응모는 교동광산을 135만원이란 거액에 일본 중외광업주식회사에 매각했다. 그 뒤 1932년 6월부터 조선일보 영업국장으로 활동하다 1933년 3월 [[조선일보]]의 경영권을 인수하여 부사장에 취임하였다.&lt;br /&gt;
그는 교동광업소를 운영하며 모은 재력을 바탕으로 부사장 재직 중 [[조선일보]]의 대주주가 되었으며, 1933년 7월 8대 사주 조만식으로부터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제9대 [[조선일보]] 사주로 취임, 활동했다.&amp;lt;ref&amp;gt;조선일보는 1932년 7월에 조만식을 사장으로 영입했지만, 조만식은 거의 평생을 평양에서 살아왔던데다 서울에서 활동하기에는 적응을 잘하지 못했다. 조만식은 신문사 경영난과 지역감정의 혹독한 시련을 받은 채 9개월만에 퇴사했다. 그리고 조만식 후임으로 1933년, 방응모를 사장으로 추대하기에 이르렀다.&amp;lt;/ref&amp;gt;&amp;lt;ref&amp;gt;《한국사 시민강좌 제47집, 대표적 독립운동가 12인》,일조각. p145&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언론, 사업 활동 ===&lt;br /&gt;
==== 사회사업 ====&lt;br /&gt;
[[파일:방응모장학생.jpg|섬네일|160px|오른쪽|방응모와 그의 장학금을 받던 학생들. 가운데 앉은 이가 방응모이고, 서있는 이들 중 왼쪽에서 두 번째는 방응모의 양자 방재윤.]]&lt;br /&gt;
&lt;br /&gt;
1930년 배영옥과 결혼하여 딸 방재숙을 얻었다. 1932년 광산업을 정리하였고 언론사업을 비롯하여 육영사업과 조림 및 간척사업 등을 벌였다. 또한 고아원과 사회복지단체에 후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933년 무렵 방응모가 [[조선일보]] 인수에 나서기 전부터 그는 [[한용운]]을 위한 일이라면 돈을 아끼지 않고 지출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성북동 언덕에 만해 한용운을 위해 기와집 한 채를 지어주었는데 [[심우장]](尋牛莊)이 그것이다. 또한 만해가 일제의 배급을 거부해 생활이 어려워지자 생활비를 지원했던 방응모는 그가 병석에 누운 1944년에는 치료비를 지원해주기도 했다.&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6/0000043262?sid=103 만해가 일송 선생 5일장 치른 사연]&amp;lt;/ref&amp;gt; 그 외에도 방응모는 만해 한용운·벽초 홍명희 등과 함께 새해가 되면 백천온천에도 같이 다녀올 정도로 가까운 관계였다.&lt;br /&gt;
&lt;br /&gt;
1932년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사건으로 체포된 [[안창호]]의 사면 탄원과 보석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총독부 경무국장은 그의 안창호 석방 제안을 정중히 거절한다.&lt;br /&gt;
&lt;br /&gt;
1936년 동방문화학원(숭문중학교·고등학교 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에 취임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인수와 경영 ====&lt;br /&gt;
1933년 1월 16일 그는 정식으로 주식회사 [[조선일보]]사를 창립했다. 일단 그는 조만식을 사장으로 임명하고 자신은 부사장으로 있다가, 그해 3월 13일 다시 부사장에 취임했다. 7월 10일 조만식의 사퇴로, [[조선일보]]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다.&lt;br /&gt;
&lt;br /&gt;
1934년 3월 25일 이광수를 비롯하여 서춘, 김동진, 함상훈, 신태익 등을 [[조선일보]]로 영입해 왔다. 그 외에도 정주군 출신 언론인, 작가들이 조선일보로 많이 오게 되었다.&lt;br /&gt;
&lt;br /&gt;
==== 동방문화학원 재단 설립 ====&lt;br /&gt;
방응모는 1936년 재단법인 동방문화학원(東邦文化學院)을 설립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6페이지&amp;lt;/ref&amp;gt; 동방문화학원은 학교 법인으로 인가된 재단 법인으로, 그 후 고계학원과 인연을 가지고 1936년부터는 보성고등보통학교를 후견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 분리되었다. 그 후 방응모 장학생인 서중회 회원들을 위한 방응모 장학사업을 주관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7페이지&amp;lt;/ref&amp;gt;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구 조선일보 사옥 안에 동방문화학원의 간판을 달고 조광 잡지를 계속 발행하는 조광사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7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일제 강점기 후반 ===&lt;br /&gt;
==== 중일 전쟁 전후 ====&lt;br /&gt;
중일전쟁 개전 직후인 1937년 7월 11일에 열린 [[조선일보]] 간부회의에서 주필 서춘이 '일본군, 중국군, 장개석씨'등으로 쓰던 용어를 '아군, 황군, 지나, 장개석'으로 고치고 일본 국민의 입장에서 논설을 쓸 것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반대 의견도 있기는 했으나, 방응모는 '일장기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이미 몇 십만 원의 손해를 보았을 뿐 아니라 [[3.1 운동]] 때처럼 신문이 민중을 지도할 수 없다'면서 서춘의 입장을 지지했다.&lt;br /&gt;
&lt;br /&gt;
1933년 이심회(후에 서중회, 방응모장학회 등 명칭이 바뀜)를 통해 대학생과 해외 유학생들에게 학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937년 12월 24일 [[안창호]]는 병보석 판정을 받고 재판소가 경성제국대학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안창호]]는 병상에서 병원비 문제로도 고초를 겪었고. 방응모는 50일 간의 입원비인 5백원짜리 수표 한 장을 안창호에게 전달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9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안창호]]는 1938년 3월 10일 밤 12시 경성제국대학 병원에서 운명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폐간 사건 ====&lt;br /&gt;
일본의 전쟁이 격화되면서 조선총독부 공보국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1940년에 강제로 폐간조치 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조선일보에 바쳤던 방응모는 큰 절망과 좌절을 느껴야 했다. [[한용운]]은 ‘신문이 폐간되다/ 붓이 꺾이어 모든 일이 끝나니…’로 시작하는 시를 지어 방응모를 위로했다. &amp;lt;ref&amp;gt;붓이 꺾이어 모든 일 끝나니 이제는 재갈 물린 사람들 뿔뿔이 흩어지고 아, 쓸쓸하고 쓸쓸한지고 망국 서울의 가을날 한강의 물도 흐느끼느니 울음 삼켜 흐느끼며 연지를 외면한 채 바다 향해 흐르느니&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38년 7월 “국민정신을 총동원하고 내선일체 전 능력을 발휘하여 국책 수행에 협력하여 성전(聖戰)의 궁극적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조직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에 참여했다.&lt;br /&gt;
&lt;br /&gt;
1940년 5월 조선총독부 총독 미나미 지로가 방송담화로 창씨개명을 권고했다. 그러나 그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성씨를 이제 와서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며 창씨개명은 완강하게 거절했다.&lt;br /&gt;
&lt;br /&gt;
조선일보에 트집이 잡힐 일이 나타나지 않자 총독부는 전국에 조선일보 신문 구독을 거절하도록 명령을 내렸고, 동시에 조선말을 쓰는 민원인에게는 일을 처리해주지 말도록 하게 했다. 총독부는 동아일보에 이어 조선일보에도 자진 폐간을 권고했고, 결국 8월 10일자로 폐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5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잡지 발행 활동 ====&lt;br /&gt;
신문 강제 폐간 뒤 방응모는 간판을 조광사로 바꿔 걸고, 사옥은 동방흥업주식회사로 등기를 변경해서 유지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1페이지&amp;lt;/ref&amp;gt; 이후 그는 조광 잡지 발행에 전념했다. [[조선일보]]가 폐간된 후에도 방응모는 벽초 홍명희 부자에게 지속적으로 생활비를 대주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4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4년 6월 29일 만해 [[한용운]]이 사망했다. 그는 [[심우장]]을 찾아가 3백원을 내놓았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5페이지&amp;lt;/ref&amp;gt;당시 쌀 10가마가 100원이었지만, 심우장은 당장 현금 1원이 없었는데 거액이라서 놀랐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6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광복 이후 활동 ===&lt;br /&gt;
==== 조선일보 복간 및 군정기 활동 ====&lt;br /&gt;
11월 [[조선일보]]사를 복간시켰다. 그러나 한동안 조선일보의 인쇄는 서울신문사에서 간행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1946년 2월 26일 서울신문사 공무국 종업원들이 조선일보의 인쇄를 거부해버렸다. 표면상의 문제는 임금 문제이나 내용상으로는 조선일보에 대한 조선공산당의 시위의 일종이었다. 사흘간의 교섭 끝에 2월 28일에 가서야 26일자와 27일자를 소급해서 인쇄하여 신문을 한꺼번에 발행하였다. 그러나 3월 1일과 2일에 또다시 인쇄를 거부당해 결국 휴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436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5년 광복 직후 서기원이 그를 찾아왔다. 서기원은 그때 경성농상실천학교의 동창회로부터 이 학교의 교장이 되어 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이다. 방응모는 서기원의 제의를 받아들여 1946년 8월 28일 동방문화학원 이사장으로 숭문상업학교를 인수, 재단 이사장이 되었다.&lt;br /&gt;
&lt;br /&gt;
==== 납북과 최후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 납북 후 행적은 &amp;quot;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amp;quot;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 1950년 8월경 개성 송악산 부근에서 미군의 폭격에 희생되었고 심한 폭격으로 시신을 찾을 수 없어 묘도 만들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남한에서는 1955년 7월 7일 생사불명기간 만료로 인해 실종 처리되었다.&lt;br /&gt;
&lt;br /&gt;
=== 사후 ===&lt;br /&gt;
서울 종로에 있던 양자 방재윤의 두 아들 방일영과 방우영은 방응모의 첩 이인숙이 찾아가 피신하라고 권고하여 황급히 피신했다. &lt;br /&gt;
&lt;br /&gt;
7월 6일 그의 행방불명처리가 되고, 방응모의 사후에도 [[조선일보]]는 그의 명의로 발행되었다. 1952년 4월 28일 조선일보는 발행인겸 편집인을 장기영으로, 인쇄인을 방일영으로, 방응모는 명예사장으로 명의변경하여 휴전 후 계속 발행하게 되었다. 1954년 4월 30일 제8회 조선일보 정기주주총회에서 장기영 사장이 사퇴하면서, 명예사장 방응모가 사장으로 추대되고, 발행인 겸 대표취체역에 방일영이 선임되었다. 이후 실종 후 1959년에 법적으로 사망 처리되었다. 그리고 1970년까지는 조선일보는 그의 이름으로 발행되었다.&lt;br /&gt;
&lt;br /&gt;
1970년 2월 19일 조선일보 정기주주총회에서 방응모 이사를 사퇴 수리하였다. 그의 피폭 사망 사실은 1970년대 이후 탈북자들을 통해 대한민국에 소개되었다.&lt;br /&gt;
&lt;br /&gt;
== 친일행위 의혹 ==&lt;br /&gt;
=== 일제 전시체제기 활동 ===&lt;br /&gt;
일제 강점기 말기 언론인으로서 총독부체제에 협력한 기록과 활동이 다수 기록이 있다. 1933년 3월 [[조선일보]] 경영권을 인수하고 부사장직에 취임했을 당시 1600원을 군에 헌납하였다. 그는 1935년 친일 잡지 《조광(朝光)》을 창간하였고, 1937년에는 경성방송국에 출연하여 일제가 중국의 베일을 절멸케하여 극동평화를 지키려고 한다는 강연을 하였다. 1940년대부터 조광에 집중적으로 친일 논설을 기고하고 시국 강연에 참여하여 전쟁 지원을 독려했다. 1942년 6월에는 '징병령 실시에 일층 더 감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글을 써서 조광에 발표하였다. 애국금차회(1937),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1938), 임전대책협의회(1941), 조선임전보국단(1941) 등 대표적인 친일 단체의 회원에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그는 이런 행적으로 인해 해방정국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명단에 기록되어 있고,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해 발표한 &amp;lt;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amp;gt;에 모두 포함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lt;br /&gt;
&lt;br /&gt;
=== 반민족행위 논란 ===&lt;br /&gt;
방응모를 친일파로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남아 있다. 조선일보 경영 이전에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방응모의 활동이 거의 없었고, 납북 뒤 소식이 끊겨버린 까닭에 본인이 항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 동안의 행적만으로 친일파 여부를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방응모의 후손들이 영향력 있는 [[조선일보]] 언론사의 사주를 맡았기에 그의 입장에서 서술한 기록을 많이 남기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80년 발간된 그의 전기 《계초 방응모》(조선일보사) 등에는 '그가 민족주의적 선각자'로 묘사되고 있다. 방응모가 친일파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일부세력측은 그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논거로 드는 경우가 많이 있다.&amp;lt;ref&amp;gt;유석재, 계간 《유심》 (2004년 봄호) [http://yousim.buddhism.org/html/2004-spr/tamgu-yoo-seok-jae.htm 삭풍 속에 피어난 금란지교(金蘭之交) - 만해와 계초 방응모]&amp;lt;/ref&amp;gt;&amp;lt;ref&amp;gt;&amp;quot;일제 말기 계초는 시국강연에 나설 것과 창씨개명을 집요하게 강요받았으나 그때마다 묵묵부답으로 거부하며 소신을 지켰다.&amp;quot; 《조선일보》 (2001.3) 조선일보 사장열전 - 계초 방응모편, 《한겨레》 (2001.3.30) [http://www.njoyschool.net/news/article_view.asp?menu_code=s20202&amp;amp;no=1206 조선일보, 일장기를 신문제호 위에]&amp;lt;/ref&amp;gt;&lt;br /&gt;
또한 한국정토학회 고문이자 서울 정토사 주지였던 박설산(1918~2007)이 학도병에 끌려가기 직전인 1943년 12월 28일 밤 서울역에서 스스로 왼발을 선로에 올려 발가락을 절단해 징집을 기피하자 방응모는 만해와 함께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설산을 걱정하면서 입원 중 조선일보 기자를 통해 돈을 전달한 것은 물론 퇴원할 때 돈을 전달하고 뒤를 보살폈다고 한다.&amp;lt;ref&amp;gt;박설산 회고록 &amp;lt;뚜껑없는 조선역사책&amp;gt;(1994, 도서출판 삼장) p240~241&amp;lt;/ref&amp;gt;&lt;br /&gt;
&lt;br /&gt;
2010년 12월, 방응모 관계자들 및 조선일보측은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을 취소해달라'며 법원에 낸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amp;quot;1944년 조선항공업 창립발기인으로 활동한 부분에 대해 친일행위로 판단한 부분을 취소하지만 나머지 활동에 대해서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amp;quot;라고 판결했다. 그 이유인 즉 &amp;quot;방응모는 1933년 조선일보 사장으로 취임해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등으로 활동하며 친일활동을 벌였으며, 1937년 경성방송국 시국강연에서 일본제국이 극동평화를 확립시킬 것이라는 내용의 강연을 하고, 1938년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춘추회의 발기인 겸 간사로 활동하기도 했다&amp;lt;ref&amp;gt;[http://media.daum.net/breakingnews/politics/view.html?cateid=1002&amp;amp;newsid=20101222103319164&amp;amp;p=newsis 법원 &amp;quot;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친일파 맞다&amp;quot;]뉴시스 2010년 12월 22일&amp;lt;/ref&amp;gt;&amp;quot;는 것이다.&lt;br /&gt;
&lt;br /&gt;
2012년 1월 12일 서울고등법원은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이 낸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처분 취소 청구소송에서 ‘일제 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의 친일 행위 판정 조항에 비추어 방응모에게 적용된 모든 행위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민족적 지도자로서 비중이 큰 만큼 그로 인한 책임도 무거울 뿐 아니라 고난의 시기를 겪은 민족으로서 그 역사를 반성하자는 입장에 설 때, 방 전 사장의 여러 행태는 반민특별법에서 규정한 친일반민족행위의 유형에 속함을 부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1, 2심 재판부는 방 전 사장이 자신이 운영하던 잡지 &amp;lt;조광&amp;gt;에 일제 침략전쟁에 동조하고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문예물과 일제 침략전쟁에 협력할 것을 주문하는 논문을 게재하는 등의 '친일' 행위를 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또한, 2심 재판부는 일본의 전쟁 수행을 돕기 위해 설립된 군수 제조업체 ‘조선항공공업’의 발기인과 감사를 지낸 것은 “감사는 업무집행에 관여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기관으로, 방 전 사장이 이 회사를 운영했다고 볼 수 있다”는 이유로 친일이라고 판단했다.&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4565.html법원 ‘방응모 친일’ 2심서도 인정] 인터넷한겨레 2010년 12월 22일&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기타 ==&lt;br /&gt;
그는 [[한용운]], 최남선, 정인보, 홍명희 등과 친분관계를 형성하고 어울려 지냈다 한다.&lt;br /&gt;
&lt;br /&gt;
김구의 한국독립당의 재정적 후견인 역할을 하였다 하며,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삼의사 유골봉환식 때 김구, 정인보 등과 촬영한 사진이 있다.&lt;br /&gt;
한편 임꺽정의 저자인 벽초 홍명희가 방응모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그와 깊은 친분을 맺었다는 주장이 있다. 《조광》 1938년 11월호엔 홍명희가 병중에 있는 방응모를 위로하며 지은 한시가 방응모의 답시와 함께 실려 있다고 한다.&amp;lt;ref&amp;gt;[http://weekly.chosun.com/site/data/html_dir/2004/11/05/2004110577041.html ‘임꺽정’으로 되살아난 독립운동의 魂! 주간조선 1827호 2004.11.04&amp;lt;/ref&amp;gt; 또한 [[안창호]]의 비서실장을 지낸 독립유공자 구익균은 방응모와 안창호가 친밀했다는 주장을 했다.&amp;lt;ref&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09/2008030901055.html &amp;quot;공산주의자들, 도산 비판하다가도 하숙비 떨어지면 찾아와&amp;quot;] 조선일보, 2008-03-10 03:22&amp;lt;/ref&amp;gt;&lt;br /&gt;
또한 박설산에 따르면 1943년 만해 한용운에게 학도병으로 끌려가게 되었음을 알리려 심우장으로 찾아가게 되었을 때, 한용운과 방응모가 바둑을 두고 곁에서 정인보가 훈수를 두고 있었다고 한다.&amp;lt;ref&amp;gt;박설산 저 &amp;lt;뚜껑없는 朝鮮 역사 책&amp;gt; p.226 도서출판 三藏(1994)&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 /&amp;gt;&lt;br /&gt;
&lt;br /&gt;
== 참고문헌 ==&lt;br /&gt;
* 청산하지 못한 역사: 언론 내세워 일제에 아부한 교화 정책의 하수인 (문영숙) (반민족문제연구소, 청년사, 1994)&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민족 계몽의 초석 방응모(이동욱 저, 지구촌, 1998)&lt;br /&gt;
* 계초 방응모전(계초전기간행위, 조선일보사, 1980년)&lt;br /&gt;
* 계초 방응모(이동욱, 방일영문화재단, 1996)&lt;br /&gt;
&lt;br /&gt;
== 외부 링크 ==&lt;br /&gt;
* [https://web.archive.org/web/20050123171046/http://chosunhost.com/ 계초방응모 기념사업회]&lt;br /&gt;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09145 &amp;lt;조선일보&amp;gt;, 방응모 전 사장의 '친일행적' 말한다] - 오마이뉴스 04.09.10일자&lt;br /&gt;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020302101749 방응모ㆍ 김성수 친일행적 뭔가 : &amp;lt;긴급입수&amp;gt;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 全文] - 프레시안 2002-03-02&lt;br /&gt;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54052 그가 '&amp;lt;조선&amp;gt;의 주인' 주장하는 이유] 오마이뉴스 2001년 9월 20일자&lt;br /&gt;
*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956 방재선씨, 호주·상속 원인무효소송 제기]&lt;br /&gt;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4/06/2008040601053.html '5인 친필 서첩' 발굴] 조선일보 2008년04월06일자]&lt;br /&gt;
&lt;br /&gt;
[[분류: 감자]]&lt;/div&gt;</summary>
		<author><name>Nsgjjsjsjy02</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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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위키로 즐기는 성북근현대문학관 산책</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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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콘텐츠 주제===&lt;br /&gt;
----&lt;br /&gt;
[[파일:성북구.png|center]]&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역사와 문학이 살아 숨쉬는 성북구! 수많은 문인과 이야기의 흔적이 남아 있는 동네&amp;lt;/div&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하지만 우리는 성북구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까?&amp;lt;/div&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다양한 문인들의 작품, 장소, 사건 등을 통해 성북구의 발자취를 뒤따라 가보자&amp;lt;/div&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위키를 통해 알아보는 우리의 동네, &amp;lt;font color=&amp;quot;red&amp;quot;&amp;gt; '''''성북구!'''''&amp;lt;/font&amp;gt;&amp;lt;/div&amp;gt;&lt;br /&gt;
&lt;br /&gt;
===기획 의도===&lt;br /&gt;
----&lt;br /&gt;
우리 조는 성북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처음에는 단순히 성북구의 편의시설과 문화공간에 대해 정리하려고 성북마을아카이브를 탐색하였다. 그러던 중 성북구에 있는 '성북근현대문학관'을 찾게 되었고, 일제강점기 때 성북구에 많은 문인들이 거주하며 창작 활동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 조는 성북구의 대표적인 문인 '이육사, 이태준, 한용운' 의 삶을 조사하여, 이를 위키 페이지로 만들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광복 80주년을 맞이하여 문학을 통해 민족의식과 저항 정신을 표현한 문인들을 널리 알리고 싶었다. 이를 위해서 정보 접근성이 높은 디지털 환경을 활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서, '이육사, 이태준, 한용운' 의 삶을 위키 페이지로 만들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성북근현대문학관산책 지도===&lt;br /&gt;
----&lt;br /&gt;
성북근현대문학관을 중심으로 성북구의 역사와 문학이 숨쉬는 장소를 함께 둘러보고자 한다.&lt;br /&gt;
&lt;br /&gt;
이육사 시인이 거주했던 종암동 62번지, 이육사 시인의 역사적 의의를 기념하는 문화공간 이육사, &lt;br /&gt;
&lt;br /&gt;
종암동의 구석구석을 둘러보며 역사를 느낄 수 있는 종암동 북바위둘레길, 성북구의 다양한 문화 행사를 담당하는 성북문화원,&lt;br /&gt;
&lt;br /&gt;
한용운 시인의 유택 심우장, 이태준이 거주했던 수연산방, 성북구의 역사와 문화를 보존하는 성북역사문화센터.&lt;br /&gt;
&lt;br /&gt;
지도에서 이 모든 공간들을 확인해보자.&lt;br /&gt;
&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src=&amp;quot;https://www.google.com/maps/d/embed?mid=1O5wfr6VmJ_4RYzROJDBuTMN0sMAUlMI&amp;amp;ehbc=2E312F&amp;quot; width=&amp;quot;640&amp;quot; height=&amp;quot;480&amp;quot;&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성북구 문인들의 작품 타임라인===&lt;br /&gt;
----&lt;br /&gt;
성북구 대표 문인인 이육사의 &amp;lt;말&amp;gt;, &amp;lt;청포도&amp;gt;, &amp;lt;절정&amp;gt;, &amp;lt;광야&amp;gt;, 한용운의 &amp;lt;조선불교유신론&amp;gt;, &amp;lt;님의 침묵&amp;gt;, &amp;lt;흑풍&amp;gt;, 이태준의 &amp;lt;달밤&amp;gt;, &amp;lt;손거부&amp;gt;, &amp;lt;장마&amp;gt;를 타임라인으로 만들어보았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v2%3A2PACX-1vT69fkWUitexLLpvtbQZZ7eokGLsUvb9FDBp0cgj4OeSaeuvqTUjprMKANs9HQsoTxmYr-QkTfXdmjJ&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width=100%25&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콘텐츠 구조===&lt;br /&gt;
----&lt;br /&gt;
====클래스====&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color:white&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amp;quot; | 클래스 !! style=&amp;quot;width:30%&amp;quot; | 설명 !! style=&amp;quot;45%&amp;quot; | 노드&lt;br /&gt;
|-&lt;br /&gt;
|인물 || 이육사, 한용운, 이태준과 관련된 인물들을 추려서 이 클래스에 정리하였다. || [[이육사(2025)]], 장진홍, [[김원봉]], 윤세주, 이정기, 신석초, 윤곤강, 김광균, 오장환, 유치환, [[한용운]], 백용성, [[방응모]], 춘성, [[김법린]], 한영운, 이시영, 최린, 최남선, 김성수, 안재홍, 송진우, 홍명희, 일엽, 만공, 김동삼, 신채호, 정인보, 박한영, 이태준, [[임화]], [[정지용]], 김기림, 유치진, 이효석, 최인훈, 함석태, 김용준, [[이병기]], 조용만, 이광수, 이무영, 김규식&lt;br /&gt;
|-&lt;br /&gt;
|기관|| 이육사, 한용운, 이태준과 관련된 단체들을 추려서 이 클래스에 정리하였다. || [[의열단(2025)]], [[신간회]], [[대구청년동맹]], 대동청년단, 교남교육회, 한주학파, 백학학원, 보문의숙, 신조선사, [[조선일보]],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민족대표33인, 유심회, 조선불교청년회, 불교총회, 개혁회, 만해사상실천선양회, 광문회, 동제사, 임시정부, 동아일보, 시대일보, 개벽사, 구인회, 문장, 세종시인협회&lt;br /&gt;
|-&lt;br /&gt;
|장소|| 이육사, 한용운, 이태준과 관련된 장소들을 추려서 이 클래스에 정리하였다. || 만주, 종암동 62번지,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원촌리 881번지, [[문화공간 이육사]], [[성북근현대문학관]], [[종암동 북바위둘레길]], [[성북문화원]], 조선은행 대구지점, 대구형무소, 중화민국 허베이성 베이핑 일본총영사관 감옥, 서울 미아리 공동묘지, [[심우장]], [[백담사]], [[서대문형무소]], 탑골공원, 천도교중앙대교당, [[성북역사문화센터]], 만해마을, 휘문고등보통학교, 조오치대학, 이화여자전문학교, 조선중앙일보, [[수연산방]], 성북구&lt;br /&gt;
|-&lt;br /&gt;
|작품|| 이육사, 한용운, 이태준과 관련된 작품들을 추려서 이 클래스에 정리하였다. || [[말]], 춘수삼제, 황혼, 실제, 한개의 별을 노래하자, 해조사, 노정기, 초가, 江건너간 노래, 소공원, 아편, 연보, 소년에게, 남한산성, 호수, [[청포도(2025)]], [[절정(2025)]], 반묘, 광인의 태양, 일식, 교목, 서풍, 독백, 아미, 자야곡, 서울, 파초, [[광야(2025)]], 꽃, 나의 뮤-즈, 해후, 산, 화제, 잃어진 고향, 편복, 바다의 마음, 무제(시조), 謹賀 石庭先生 六旬, 晩登東山, 酒暖興餘, 계절의 오행, 계절의 표정, 나의 대용품 현주, 냉광, 무희의 봄을 찾아서, 문외한의 수첩, 산사기, 연륜, 연인기, 은하수, 전조기, 질투의 반군성, 창공에 그리는 마음, 청란몽, 횡액, 1935년과 노불관계 전망, 국제무역주의의 동향, 노신추도문, 대구사회단체개관, 모멸의 서, 영화에 대한 문화적 촉망, 예술형식의 변천과 영화의 집단성, 오중전회를 앞두고 외분내열의 중국정정, 위기에 임한 중국정국의 전망, 윤곤강 시「빙화」기타, 자기심화의 길, 자연과학과 유물변증법, 조선문화는 세계문화의 일륜, 중국농촌의 현상, 중국문학 오십년사, 공인 깽끄단 중국 청방비사소고, 중국 현대시의 일단면, [[조선불교유신론]], [[불교 잡지 유심]], 채근담 국한문 혼용체 주해본, [[님의 침묵]], 알수없어요, [[흑풍]], 후회, 박명, 십현담주해, 불교대전, 불교와 고려제왕, [[달밤]], [[손거부]], 장마, [[청복반일]], 화두&lt;br /&gt;
|-&lt;br /&gt;
|사건|| 이육사, 한용운, 이태준과 관련된 사건들을 추려서 이 클래스에 정리하였다. || 대구지점 폭파사건, 광주학생항일운동, 대구 격문사건, [[북바위 청포도 문화제]], [[성북구 문학기행]], [[이육사 탄생 120주년 기념 문화제]], [[이육사 문학축전]], [[만해축전]], 민중대회사건, [[만해추모다례제]], [[3.1운동]], 브나로드운동, 물산장려운동, 무오독립선언, 일장기말소사건, [[시와소설]]의 밤, [[성북동문화재야행]]&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NetworkGraph | title=1조_온톨로지.lst}}&lt;br /&gt;
&lt;br /&gt;
====관계성====&lt;br /&gt;
----&lt;br /&gt;
1. ~의_동료이다&lt;br /&gt;
&lt;br /&gt;
함께 활동을 한 인물들의 관계를 나타낸다.&lt;br /&gt;
&lt;br /&gt;
2. ~의_제자이다&lt;br /&gt;
&lt;br /&gt;
사제 관계를 나타낸다.&lt;br /&gt;
&lt;br /&gt;
3. ~을_다룬다&lt;br /&gt;
&lt;br /&gt;
단체나 인물이 다른 인물이나 사건, 작품 등을 기반으로 창작한 행사나 작품 활동 관계를 나타낸다.&lt;br /&gt;
 &lt;br /&gt;
5. ~을_집필했다&lt;br /&gt;
&lt;br /&gt;
작품과 창작자(단체) 간의 관계를 나타낸다. &lt;br /&gt;
&lt;br /&gt;
6. ~에서_거주했다&lt;br /&gt;
&lt;br /&gt;
인물이 거주한 장소를 나타낸다.&lt;br /&gt;
&lt;br /&gt;
7. ~에서_발생했다&lt;br /&gt;
&lt;br /&gt;
사건이나 행사가 발생한 장소를 나타낸다.&lt;br /&gt;
&lt;br /&gt;
8. ~에서_활동했다&lt;br /&gt;
&lt;br /&gt;
인물이 활동한 장소와 단체 등을 나타낸다.&lt;br /&gt;
&lt;br /&gt;
9. ~와_관련되다&lt;br /&gt;
&lt;br /&gt;
인물과 관련된 다양한 사건, 장소, 단체 등을 나태난다.&lt;br /&gt;
&lt;br /&gt;
===마인드맵===&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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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마인드맵.png]]&lt;br /&gt;
[[Category:다은]] [[Category:만두]] [[Category:wlwl]] [[Category:연상]] [[Category:감자]] [[Category:해짐]] [[Category:민지]]&lt;/div&gt;</summary>
		<author><name>Nsgjjsjsjy02</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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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한용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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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width:100%&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0%&amp;quot;|사진&lt;br /&gt;
|[[파일:한용운.jpg|center|200픽셀]]&lt;br /&gt;
|+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lt;br /&gt;
|+ style=&amp;quot;caption-side:bottom;text-align:left:&amp;quot;|출처: 위키백과&lt;br /&gt;
|법명||용운(龍雲)&lt;br /&gt;
|-&lt;br /&gt;
|출생||1879년 8월 29일 조선 충청도 결성현 현내면 박철리 잠방골&lt;br /&gt;
|-&lt;br /&gt;
|입적||1944년 6월 29일 일제강점기 경성부 동대문구 성북정 [[심우장]]&lt;br /&gt;
|-&lt;br /&gt;
|입적원인||중풍&lt;br /&gt;
|-&lt;br /&gt;
|거주지||일제강점기 경성부 동대문구 성북정 심우장&lt;br /&gt;
|-&lt;br /&gt;
|국적||대한민국&lt;br /&gt;
|-&lt;br /&gt;
|속명||한정옥(韓貞玉)&lt;br /&gt;
|-&lt;br /&gt;
|경력||신간회 중앙위원장&lt;br /&gt;
|-&lt;br /&gt;
|종파||조계종&lt;br /&gt;
|-&lt;br /&gt;
|호||만해(萬海·卍海)&lt;br /&gt;
|-&lt;br /&gt;
|직업||승려, 시인, 독립운동가&lt;br /&gt;
|-&lt;br /&gt;
|배우자||유숙원(재혼), 전정숙(이혼)&lt;br /&gt;
|-&lt;br /&gt;
|자녀||한보국(아들), 한영숙(딸)&lt;br /&gt;
|-&lt;br /&gt;
|부모||한응준(부), 방숙영(모)&lt;br /&gt;
|}&lt;br /&gt;
&lt;br /&gt;
'''한용운'''(韓龍雲, 1879년 8월 29일 ~ 1944년 6월 29일)은 일제강점기의 시인, 승려,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청주 한씨. 호는 만해(萬海)이다. 불교를 통한 언론, 교육 활동을 하였다.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으며, 그것에 대한 대안점으로 불교사회개혁론을 주장했다.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이며 광복 1년을 앞둔 1944년 6월 29일에 중풍병사(입적)하였다. 독립선언서의 &amp;quot;공약 3장&amp;quot;을 추가보완하였고 옥중에서 '조선 독립의 서'(朝鮮獨立之書)를 지어 독립과 자유를 주장하였다.&lt;br /&gt;
&lt;br /&gt;
1910년 일본이 주장하는 한일불교동맹을 반대철폐하고 이회영, 박은식, 김동삼 등의 독립지사(志士)들을 만나 독립운동을 협의하였다. 1918년 11월부터는 불교 최초의 잡지인 《[[유심]]》을 발행하였고 1919년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을 하여 체포당한 뒤 3년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 풀려났다. 1920년대에는 대처승 운동을 주도하여 중에게도 결혼할 권리를 달라고 호소하기도 하였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 언론활동에 참여하였다. 1927년 2월부터는 [[신간회]]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과 이듬해 신간회 경성지부장을 지냈다.&lt;br /&gt;
&lt;br /&gt;
1918년 《[[유심]]》에 시를 발표하였고, 1926년〈[[님의 침묵]]〉등의 시를 발표하였다. 님의 침묵에서는 기존의 시와, 시조의 형식을 깬 산문시 형태로 시를 썼다. 소설가로도 활동하여 1930년대부터는 장편소설《흑풍》(黑風),《후회》,《박명》(薄命), 단편소설《죽음》등을 비롯한 몇 편의 장편, 단편 소설들을 발표하였다. 1931년 김법린 등과 청년승려비밀결사체인 만당(卍黨)을 조직하고 당수가 되었으나 1937년 불교관계 항일단체를 적발하는 과정에서 만당사건(卍黨事件)의 배후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저서로는 시집 《[[님의_침묵]]》을 비롯하여 《조선불교유신론》,《불교대전》,《십현담주해》,《불교와 고려제왕》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 생애 ==&lt;br /&gt;
==== 유년기 ====&lt;br /&gt;
조선전기 한명회 동생으로 전구서승(典廏署丞)을 지낸 서원군 한명진(韓命溍)의 이양공파 20대손이다. 한응준의 차남으로 태어났고, 그의 형은 한윤경(1860년~1929년)이다. 자필이력서와 승적부의 출생지는 충청남도 홍주군 주북면 옥동(玉洞)이다. [[3.1운동]] 후 재판 때 고향을 홍성의 '남문리'라고 답변하였다. 현재 출생지로 알려진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491번지는 그의 아들인 한보국의 제적등본에 따른 기록이다..&lt;br /&gt;
&lt;br /&gt;
==== 소년 시절 ====&lt;br /&gt;
16살 되던 해인 1894년부터 홍성읍내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고 전한다. 그 해에 음력1월부터 12월까지 갑오농민운동이 일어났고, 7월 25일에 청일전쟁이 발발하였다. 그의 부친 한응준은 홍주성에서 관군의 참모관으로 활약하며 동학농민군 방어에 성공하였으나 이듬해 병고로 사망하였다. 회고록에 의하면 18세인 1896년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 서울로 향하였다가 설악산 오세암에 입산하여 불교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그의 아들 한보국의 제적등본에 의하면, 부친의 3년상을 치른 후에 20살이 되던 해인 1892년 2월 10일 전정숙과 결혼하였다. 1904년 12월 21일 전정숙에게서 아들 한보국(1904년~1977년)을 얻었으나 그는 이미 강원도 백담사에서 출가를 하였다.&lt;br /&gt;
&lt;br /&gt;
==== 방랑 생활 ====&lt;br /&gt;
[[파일:청년기한용운.jpg|섬네일|오른쪽|200px|청년기의 만해]]&lt;br /&gt;
건양 1년인 1896년에 그는 설악산 오세암에 들어갔다. 후일 그는 '나는 왜 중이 되었나'라는 그 자신의 술회에 간략하에 언급하기를 세상에 대한 관심과 생활의 방편으로 집을 떠나 오세암에 입산하여 처음에는 머슴으로 일하다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고 한다. 출가의 원인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당시 고향 홍성군 홍주에서도 [[동학농민운동]]과 의병운동이 전개된 것으로 미루어 역사적 격변기의 상황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오세암에 머무르면서 그는 불교의 기초지식을 섭렵하면서 선(禪)을 닦았다.&lt;br /&gt;
&lt;br /&gt;
=== 대한제국(1897년~1910년)  활동 ===&lt;br /&gt;
==== 출가와 문학 ====&lt;br /&gt;
[[파일:만해기념관.jpg|섬네일|왼쪽|[[백담사]] 경내의 만해기념관]]&lt;br /&gt;
1905년 1월 26일 강원도 [[백담사]]에 가서 김연곡(金蓮谷)을 은사로 하여 정식으로 출가, 김연곡에게 득도한 다음 전영제(全泳濟)에게 계(戒)를 받아 승려가 되었고, 만화(萬化)에게서 법을 받았다. 계명은 '''봉완(奉玩)'''이며 '''법호는 용운(龍雲)이며, 후에 필명 및 아호는 만해(萬海·卍海)'''라 하였다. 이후 수년 간 불교활동에 전념했다. 이즈음에 불교 관련 서적뿐만 아니라 량치차오의〈음빙실문집 飮氷室文集〉등을 접하면서 근대사상을 다양하게 수용하였다.&lt;br /&gt;
&lt;br /&gt;
이 때를 전후해서 영환지략(瀛環志略)-서계여 저술,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양계초 저술 등을 읽고 세계동향을 알기 위해 세계여행을 계획하고 백담사에서 하산하여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건너갔으나 밀정으로 인하여 구사일생으로 귀국하였으나, 각처에서 의병 활동으로 어지럽게 되자 함경남도 안변 석왕사를 찾아가 암자에서 참선생활을 하였다.(삼천리 제6호 회고록)&lt;br /&gt;
&lt;br /&gt;
'''&amp;quot;「영환지략瀛環地略」이라는 책을 통하여 비로소 조선 이외에도 너른 천지 잇는 것을 인식하고 행장을 수습하여 원산을 거처서 서백리아에 이르러 몃 해를 덧업는 방낭생활을 하다가 다시 귀국하여 安邊釋王寺에 파뭇겨 叅憚 生活을 하엿다. 그러다가, 동양문명의 집산은 동경에서 되니 東京으로 갈 차로 이듬해 봄에 처음으로 서울에 발을 드려노앗다.&amp;quot;&amp;lt;삼천리 제5권 제9호 처음 서울 오든 때-회고록&amp;gt;'''&lt;br /&gt;
&lt;br /&gt;
1908년 명진학교(현 동국대학교) 보조과(일어과와 측량과) 수학 후 4월에 일본의 시모노세기, 교토, 동경, 닛고 등지를 주유하며 신문물을 시찰하였고, 동경 조동종대학(현 고마자와駒澤大學)의 아사다교수와 교유하여 불교와 서양철학을 수강하였다. 이 때에 유학 중이던 최린(崔麟), 고원훈, 채기두 등과 교류하였고 9월 귀국하였다. 10월 20일 일본의 조선 전국 사찰 대표 52인의 한 사람으로 서울 원흥사(元興寺)에서 원종종무원(圓宗宗務院)의 설립에 참여하였다. 12월 10일 서울에 경성명진측량강습소를 개설 소장에 취임하였다. 1909년 초에는 조선불교의 유신을 주장하는 논저《[[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하기 시작하였다(1913년 회동서관 간행).  1910년 한문으로 된 불경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 즉 불교의 대중화작업에 주력하였다.&lt;br /&gt;
&lt;br /&gt;
==== 승려들의 결혼 자유화 주장 ====&lt;br /&gt;
1909년 초부터 그는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을 집필하였고, 1910년 12월 8일 백담사에서 탈고하였다. 동시에 그는 [[백담사]]에서 거의 독학하다시피하며 대장경을 암송하고 한문과 인도어로 된 불교 경전들을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을 하였다. 한편 1910년부터 그는 승려의 결혼을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만해는 1910년 3월 승려의 결혼을 공식적으로 허락해 달라는 문건인 중추원 헌의서를 청원서 형식으로 대한제국 중추원에 제출하였고, 경술국치(한일합방) 이후 9월에는  [[조선총독부]] 통감부에 승려취처에 관한 건백서를 테라우치 통감에게 제출하였다. 승려에게 결혼을 금지하라고 부처님이 가르친 것은 아니라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lt;br /&gt;
&lt;br /&gt;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이 미혹을 떠나 깨달음을 얻고 악을 고쳐 선을 행하도록 바라셨으나, 중생의 끈기가 각기 달라서 부득불 천하에서 정을 제거하고 욕망을 끊어 버린 사실들을 모두 연설하였던 것이니, 각기 좋아하는 것을 좇아 인도하시고자 희망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계율에 있는 금혼은 본디 방편의 하나에 불과한 것일뿐, 불교의 궁극의 경지와는 거리가 먼 것이니 이를 제거한들 어찌 손상됨이 있겠습니까.&amp;lt;ref&amp;gt;김광식, 《한용운 연구》 (동국대학교출판부, 2011) 109쪽&amp;lt;/ref&amp;gt;'''&lt;br /&gt;
&lt;br /&gt;
대중의 결혼생활, 가장이라는 짐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중생들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승려의 결혼을 허가해 달라는 그의 주장은 그대로 묵살당한다.&lt;br /&gt;
&lt;br /&gt;
한일합방 직후 총독부가 조선인을 차별대우하고 일본인을 우대하자 그는 불만을 드러냈다. 만해의 제자였던 춘성 스님에 의하면 만해는 평소 조선총독부의 조선인 차별 정책에 대해 &amp;quot;왜놈의 머슴살이 같으니라구!&amp;quot;라며 불만을 토로하였다 한다.&lt;br /&gt;
&lt;br /&gt;
=== 일제강점기 활동 ===&lt;br /&gt;
==== 불교 사회 혁신 운동 ====&lt;br /&gt;
1910년  8월 29일에 한일 합방 조약이 체결된 이후로, 원종의 이회광이 일본과 맺은 한일불교동맹조약인 조동종맹약을 분쇄하기 위해 12월 광주 증심사로 내려갔다. 1911년 1월 석전 박한영, 진진웅, 김종래, 장금봉 등과 순천 송광사, 동래 범어사에서 승려궐기대회를 개최하여 일본의 조동종(曹洞宗)과 한국불교의 통합을 꾀한 이회광 등의 친일적인 불교행위를 규탄, 저지하였다. 송광사에 임제종 종무소를 설치하였고 조선임제종 종무원 관장에 취임하였다. 11월 서울에서 임제종 중앙포교당(조선선종포교당) 건립을 착수하였다. 그 해 6월 3일 일제가 한국불교를 억압하고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제정·공포한 법령인 사찰령이 공포되었고, 한국불교교단은 삼십본산연합사무소에 귀속되었다. 일제의 사찰령에 맞서 한국불교의 전통을 계승하려는 노력으로  1912년 4월 10일 중앙포교당이 준공되자 5월 26일 한용운, 백용성, 이화능 등 중앙포교당을 개설하였다.  6월 21일에 경서부 관청에 소환된 이후 이회광의 원종은 조선불교선교양종으로, 임제종은 조선선종중앙포교당으로 개칭되었다.&lt;br /&gt;
&lt;br /&gt;
1912년 9월 10일부터 10월 8일까지 만주 동북삼성(東北三省)을 방문하여 독립군의 훈련장을 순방하면서 그들에게 독립정신과 민족혼을 심어주는 일에 전력하던 중에 통화현 굴라재에서 일진회 첩자로 오해를 받아 목에 총을 맞고 마취없이 '''총알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은 후 귀국하여 동래부 범어사로 내려갔다. 1913년 2~3월에 조선불교월보 13호, 14호에 조선불교유신론 9장 ‘승려의 단결’편을 간행전 기고했다. 필명을 '''만해생(萬海生)으로 문헌상 처음으로 만해'''라는 아호를 사용하였다. 5월 25일에 조선불교유신론을 회동서관에서 출판하였다.&lt;br /&gt;
&lt;br /&gt;
1914년 4월 서울에 유학 온 불교 '고등강숙' 학생들이 불교를 발전시키려는 목적으로 설립한 단체인 '''조선불교강구회(朝鮮佛敎講究會)''' 총재에 취임하였다.&lt;br /&gt;
&lt;br /&gt;
경전을 대중화하기 위해 불교대전을 편찬할 계획으로 양산 통도사에 보관된 고려대장경을 열람하였고, 4월 30일 범어사에서《불교대전 (佛敎大典)》을 간행하였다. 대승불교의 반야사상(般若思想)에 입각하여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계의 각성과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lt;br /&gt;
&lt;br /&gt;
8월에 조선불교회 회장에 취임하였다. 불교의 문제점을 해결하고 불교유신을 직접 수행하고자, 30본산 주지들을 배제하고, 승려와 신도를 융합한 통일기관을 창립하였다. 그러자 30본산 주지들의 반발로  '''불교동맹회'''로 개칭하여, 서울 낙원동에 본부를 두겠다고 경성북부경찰서에 9월10일경 신고했으나, 30본산 주지의 권한을 벗어났다며 등록 거부 당하였다, “'''고등강숙'''”의 학생들이 만해를 따르자, 이회광은 공문을 보내 상경을 막으려다 결국 학교를 폐쇄시켰다.&lt;br /&gt;
&lt;br /&gt;
1915년 6월 20일 청나라 승려 내림(來琳)의 증보본에 의거하여 정선강의 《채근담》 국한문 혼용체 주해본을 저술하였다. 10월에 조선선종 중앙포교당 포교사에 취임하여 계몽활동, 근대화 필용성,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15년 개교한 중앙학림 학생들이 만해를 따랐다. 불교강구회, 각황사 등에서 강연하였다.&lt;br /&gt;
&lt;br /&gt;
==== 불교포교 대중화와 선교진흥론 ====&lt;br /&gt;
1914년에는 [[불교]] 포교의 보편화 대중화를 선언하고 조선불교청년동맹(朝鮮佛敎靑年同盟)을 결성하였다. 조선불교청년동맹의 강령을 손수 지었는데 이를 보면, 첫째로 정교분리(政敎分離), 둘째로는 여러 불교 종단의 통일 또는 연합, 셋째 불교와 사찰의 사회적 진출의 필요 등을 제시하였다. 이는 대중불교의 확산을 위하여 그 출발점을 청년 운동으로 삼아야 한다는 그의 실천행이었다. 그는 불교 포교가 보편화되려면 일단 청년들에게 침투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천주교와 개신교의 선교 활동, 동학의 포교 확산, 사이비 종교 등의 확산에 긴장한 그는 불교 역시 대중에게 침투하여야 함을 역설하고 불교가 중생의 곁에 가장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으로 청소년과 청년층을 공략하는 것을 들었다. 그는 불교의 보편화 운동의 실천을 위하여 '승려에서 대중에로', '산간에서 길가로' 등을 내걸었다.&lt;br /&gt;
&lt;br /&gt;
또한 불교 포교의 대중화를 위해서는 교단, 종단간의 갈등을 줄이고 협력하자는 주장을 펼쳤다. 이는 선교진흥론(禪敎振興論)으로 발표되었다. 그에 의하면 불교의 진흥을 위한 필수불가결의 요건은 수행 이상을 확립하는 일이라 하였다. 이에 한용운은 지금까지 조선의 불교는 오교구산과 선교양종이니 해서, 마치 교의(敎義)와 종지(宗旨)가 다른 것처럼 잘못 인식되어 왔다. 선과 교의 본질은 하나이다. 왜냐하면, 선이란 불교의 마음이며, 교란 불교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양자는 서로 배치되는 개념이 아니며, 양자의 이론적 합일과 연대의 실천이 불교 진흥, 포교 확산의 관건이라고 주장하였다. 동시에 한용운은 선원(禪院)이나 강원(講院)의 지도 이념이나 이론, 실수(實修) 등에 있어 외전(外典)도 첨가해야 한다, 그리고 속된 것을 전적으로 배격하지 말 것을 호소하였다. 그는 선교일치를 주장해온 조선 불교의 일승정신(一乘精神)이 새로운 시대의 좌표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lt;br /&gt;
&lt;br /&gt;
==== 불교 경전의 한글화 ====&lt;br /&gt;
만해는 1910년부터 대장경과 화엄경 등을 비롯한 불교 경전의 내용을 한글로 번역하여 소개하였다. 1930년대 이후에도 그는 불교 경전의 한글화를 주장했다. 경전의 내용이 한문이나 산스크리트어이기에 일반 중생이 읽기에는 너무 힘들다, 어렵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대장경의 한글 번역이다. 현대포교의 요체는 문서에 의한 홍포였다.&lt;br /&gt;
&lt;br /&gt;
그는 아무리 좋은 말씀도 이해를 하지 못하면 무용지물이라 주장하였다. 불교 경전의 대부분이 한문으로 되어 있어서 일반인이나 문맹률이 높던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읽고 이해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방대한 대장경을 쉽게 옮기는 일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불교의 교리와 활동, 고승 등에 대한 내용을 한글로 표현했으며 《불교대전》에는 대장경 등의 내용을 한글로 해석하였는데 이는 바로 그와 같은 시도의 결정이다. 대장경의 요지를 발췌하여 대의를 옮겨 적은 불교대전은 20세기 한국 불교이론서와 《불교성전》들의 효시가 되었다. 그밖에도 그는 불교학 진흥과 포교의 활성화를 위하여서는 각종 금석문(金石文)이나 사장된 자료들이 일반에 소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lt;br /&gt;
&lt;br /&gt;
==== 잡지 발행 ====&lt;br /&gt;
1918년 9월 1일  제자 춘성 등과 함께 월간 불교잡지《[[유심]]》을 창간하여 12월까지 3권을 발행하고 중단되었으나, 이 잡지를 통해 불교 논설만이 아니라 계몽적 성격을 띤 글을 발표했고, 또 신체시를 탈피한 신시〈심 (心)〉을 발표하여 문학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는 당시 조선불교의 침체와 낙후성과 은둔주의를 대담하고 통렬하게 분석과 비판을 한 저서 &amp;lt;[[조선불교유신론]]&amp;gt;을 발표하여 사상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lt;br /&gt;
&lt;br /&gt;
월간 유심지에서 그는 시 '심 (心)'과 수필 고학생, 남모르는 아이들을 발표하는 등 불교의 보편화와 친숙화를 꾀한다. 불교의 홍보, 포교와 함께 계몽, 자각, 자유정신,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논설들을 다수 실은 월간지 [[유심]]은 뒷날 그가 관계한《불교》잡지와 함께 가장 괄목할만한 문화사업의 하나가 되었다.&lt;br /&gt;
&lt;br /&gt;
==== 3.1 만세 운동과 투옥 ====&lt;br /&gt;
[[파일:3.1운동한용운.jpg|섬네일|210px|오른쪽|1920년 7월 2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 3.1 운동에 참가한 민족대표 48인 공판에 관한 기사, 다섯째 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한용운]]&lt;br /&gt;
1918년 12월에 발표한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감동하여 1919년 1월부터는 전국적인 만세 운동 준비에 참여하고, 백용성 등과 함께 [[불교]] 지도자들을 소집하여 손병희 등 천도교 지도자들과 이상재 등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과 회합하였다. 그는 독립선언문의 내용을 둘러싸고 최남선과 의견충돌을 하였다. 내용이 좀 더 과감하고 현실적이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으나, 최남선 등은 만해의 주장이 급진적이고 과격하다며 반대했고 결국 만해가 제시한 조건들 중 마지막의 행동강령인 공약 제3조 '최후의 일인까지 쾌히 우리의 의사를 발표하자' 만이 수용, 독립선언서에 수록되었다.&lt;br /&gt;
&lt;br /&gt;
1919년 [[3.1 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고,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으며 일설에는 용성 스님의 도장도 그가 찍었다 한다. 경성 탑골공원에서 독립 선언서 낭독과 만세 운동에 가담했다가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었다. 민족대표자들은 평화 시위를 기획하였는데 시위는 격화되었고, 민족대표자들은 자수를 결심한다. 이종일의 회고에 의하면 &amp;quot;수감 중 만해는 일제의 고문 및 위협에 벌벌 떠는 나약한 민족대표들에게 인분을 퍼부었다.&amp;quot;고 한다.&amp;lt;ref name=&amp;quot;:1&amp;quot;&amp;gt;김광식, 《만해 연구》 (동국대학교출판부, 2011) 315쪽&amp;lt;/ref&amp;gt;&lt;br /&gt;
&lt;br /&gt;
그는 만세운동을 진행하던 중 탑골공원에서 총독부 경무국 순사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어 피신한 다른 민족대표자들이 자수함으로써 바로 [[서대문형무소]]로 넘겨지고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받고 복역하였다.&lt;br /&gt;
&lt;br /&gt;
==== 수감과 석방 ====&lt;br /&gt;
한편 체포된 만해는 동대문 시장에 투옥되어 복역하며 재판을 받았다. 이때 옥중에서 변호사는 물론 사식과 보석을 거부할 것을 결의하고 수감생활을 한다. 그리고 옥중에서 '조선독립의 서'를 집필하다가 발각되어 결국 원본을 형사에게 제출했다. 그러나 만해는 한편으로 '조선독립의 서'를 일본인 서울지방법원 검사에게 제출하기 이전에 일부를 휴지에 작은 글씨로 옮겨 적었다. 그리고 그것을 접어 형무소 밖으로 나가는 의복의 갈피에 집어넣었다. 이렇게 외부로 나온 그 선언서는 상해까지 전달되었다.&amp;lt;ref&amp;gt;김광식, 《만해 연구》 (동국대학교출판부, 2011) 332쪽&amp;lt;/ref&amp;gt; 그것은 인간의 권리와 자유와 평등에 대한 길을 가로막는 어떠한 형태의 무력, 군사력, 압제 정치는 결국 스스로의 덫에 걸려 스스로 패망하게 되리라는 내용이었다. 옥중에서 작성한 '조선독립의 서'는 종이를 노끈처럼 말아 유일하게 그의 옥바라지를 하던 제자 춘성 스님을 통해 상하이로 보내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 1919년 11월 4일의 기사 부록에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대요'라는 제목으로 발표, 보도되었다.&lt;br /&gt;
&lt;br /&gt;
1921년 12월 22일 [[3.1운동]] 민족대표자 최린, 함태영, 오세창, 권동진, 이종일 등과 함께 가출옥되자 많은 면회객이 찾아왔다. 그런데 그가 인사를 하는 것을 보고 면회객들은 이상하게 여겼다. 이에 만해는 자신을 마중하러 나온 인사들에게 &amp;quot;너희들은 이런 출옥의 인사를 할 줄은 알고, 인사를 받을 줄은 몰랐더냐?&amp;quot; 하고 대성질타하였다.&amp;lt;ref&amp;gt;김광식, 《만해 연구》 (동국대학교출판부, 2011) 322쪽&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출옥 후에는 언론에 칼럼을 발표하는 동시에 1922년부터 1923년까지 민립대학 설립운동과 물산장려운동 등의 민족운동에도 참여했다. 이 기간 중 그는 [[김성수]], 조만식, [[안재홍]], [[이광수]], [[방응모]] 등을 만나 인맥을 쌓기도 했다. 글 못지않게 연설가로서도 남다른 능력을 지니고 있던 그는 1922년 5월 전조선학생대회 주최로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강연회가 개최되자 3인의 종교 지도자의 한 사람이자 연사의 1인으로 초빙되었다. 대회가 열린 날 두 번째 연사로 나선 만해가 강연하자 청중이 열광하여 결국 다음 사람이 강연을 포기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1922년 9월 잡지《개벽》에 옥중시 '무궁화 심으라'를 발표하였다.&lt;br /&gt;
&lt;br /&gt;
==== 사회 단체 활동과 님의 침묵 ====&lt;br /&gt;
1922년 출옥 후에도 일본경찰의 감시 아래에서 강연 등 여러 방법으로 조국독립의 열변을 토하였다. 1920년대에 부인이 있는 대처승이 속인들에게 사이비 중이라고 모욕을 당하는 것을 보고 대처승 운동을 주도하여 중에게도 결혼할 자격을 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1924년부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논설위원을 겸하며 계몽, 사회 참여를 촉구,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칼럼을 게제하였다.&lt;br /&gt;
&lt;br /&gt;
1923년 1월 동아일보에 논설 '조선 급(及) 조선인의 번민(煩悶)'을 발표한다. 1924년 1월 6일 조선불교청년회 초대 총재에 취임하며 청년조직을 항일운동에 걸맞게 바뀌었다.&lt;br /&gt;
&lt;br /&gt;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다. 5월15일 &amp;lt;십현담주해&amp;gt;를 법보회에서 발행, 5월 20일 &amp;lt;[[님의 침묵]]&amp;gt;을 회동서관에서 발행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님은 갔습니다&amp;lt;br/&amp;gt;푸른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나 있는 작은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amp;lt;ref&amp;gt;서적 인용 |편집자= 강승원 |제목= EBS 수능특강 언어영역|날짜= 2009-01-05 |판= 초판 |출판사= 한국교육방송공사 |쪽= 8 |인용문=푸른 산빛의 희망적 이미지가 단풍나무 숲의 상실의 이미지를 대비하여 만남→이별의 의미를 형상화하고 있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황금(黃金)의꽃가티 굿고빗나든 옛 맹서(盟誓)는 차듸찬띠끌이되야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나러갓슴니다&amp;lt;br/&amp;gt;날카로은 첫 키스의 추억(追憶)은 나의 운명(運命)의 지침(指針)을 돌너노코 뒷거름처서 사러젓슴니다&amp;lt;br/&amp;gt;나는 향긔로은 님의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은 님의얼골에 눈멀었슴니다&amp;lt;br/&amp;gt;사랑도 사람의일이라 맛날때에 미리 떠날것을 염녀하고경계하지 아니한것은아니지만&amp;lt;br/&amp;gt;리별은 뜻밧긔일이되고 놀난가슴은 새로은 슬븜에 터짐니다&amp;lt;br/&amp;gt;그러나 리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源泉)을만들고 마는것은 스스로 사랑을깨치는것인줄&amp;lt;br/&amp;gt;아는까닭에 것잡을수업는 슬븜의 힘을 옴겨서 새 희망(希望)의 정수박이에 드러부엇슴니다&amp;lt;br/&amp;gt;우리는 맛날때에 떠날것을염녀하는 것과가티 떠날때에 다시맛날것을 믿슴니다&amp;lt;br/&amp;gt;아아 님은갓지마는 나는 님을보내지 아니하얏슴니다'''&amp;lt;ref&amp;gt;서적 인용|편집자= 강승원 |제목= EBS 수능특강 언어영역|날짜= 2009-01-05 |판= 초판 |출판사= 한국교육방송공사 |쪽= 8 |인용문=우리는 맛날때에~: 회자정리(會者定離)와 거자필반(去者必反)의 정신을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님의 침묵]]에서 그는 한글 표준어를 쓰지 않고 충청도 방언과 토속어가 세련되지 않은 표현으로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향토적 정감의 방언 및 토속어 애용과 서민적인 시어의 활용은 님의 침묵에 민중정신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1925년부터 [[백담사]]에서 집필하여 1926년 경성부 안동서관에서 발행한《[[님의 침묵]]》은 당시 자유주의적, 남녀간의 연애를 위주로 하던 한국문단의 영향을 받지 않고 생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현실과 이상,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요구되는 주체적 자세에 대해 노래했으며, 더욱이 그것을 풍부한 시적 이미지로 아름답게 형상화해 수준 높은 민족문학의 경지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는 조선의 독립, 혹은 자연을 '님'으로 표현하여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부처로도 해석되고 이별한 연인으로도 해석되는 화법을 구사하여 총독부 학무국의 검열 탄압을 피하였다.&lt;br /&gt;
&lt;br /&gt;
==== [[신간회]] 창설에 참여 ====&lt;br /&gt;
[[파일:한용운동상.jpg|섬네일|오른쪽|200px|한용운의 동상]]&lt;br /&gt;
1927년 1월 19일 신간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이인, 김병로, 허헌, 조병옥, 허정숙 등과 함께 종교, 사회단체를 망라한 사회단체 [[신간회]]의 결성에 [[불교]]계 대표자의 한 사람 겸 경성부 서부 지역 대표자의 한 사람으로 적극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의 한 사람이 되었다. 신간회 조직을 결성하는 주도적으로 참여한 그는 1928년 다시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의 한사람에 선출되고 신간회 경성지회 회장(京城支會會長)에 피선되어 허정숙 등과 신간회 경성지회에서 활동하였다.&lt;br /&gt;
&lt;br /&gt;
1927년 12월 조선불교청년회(朝鮮佛敎靑年會)의 체제를 개편하여 조선불교청년동맹(朝鮮佛敎靑年同盟)으로 개칭,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였다.&lt;br /&gt;
&lt;br /&gt;
한편 1929년 3월 6일 그의 속가 형 한윤경이 사망하였다(70세). 그는 150섬 이상을 수확하던 홍성군의 대지주였다.&amp;lt;ref&amp;gt;&amp;quot;독립운동가 만해 선사 속가 후손들 날품팔이 생활&amp;quot;, 경향신문 1986년 6월 2일자 10면, 사회면&amp;lt;/ref&amp;gt; 한윤경의 아들이자 조카인 한창국은 일찍 죽고 한창국의 후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한다.&lt;br /&gt;
&lt;br /&gt;
1929년 광주항일학생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학생 시위를 보고 그것을 민족적·민중적 운동으로 확산시키고자 민중대회를 계획했으나, 조선총독부 밀정에게 발각, 총독부 경무국에 의해 무산되었다.&lt;br /&gt;
&lt;br /&gt;
1930년 5월 김법린, 김상호, 이용조, 최범술 등이 조직한 '''청년승려비밀결사 만당(卍黨)'''의 영수로 추대되었다.&lt;br /&gt;
&lt;br /&gt;
1931년 6월 &amp;lt;불교&amp;gt;지를 인수, 불교사 사장으로 취임하여 많은 논설을 발표하였다. 이후 많은 논문과 논설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특히, 고루한 전통에 안주하는 불교를 통렬히 비판하였으며, 승려의 자질 향상, 불자에게 생계를 의존하지 않기, 기강확립, 생활불교 등을 제창하였다.&lt;br /&gt;
&lt;br /&gt;
==== 반일 강연 활동 ====&lt;br /&gt;
그는 조선 불교가 일본 불교에 예속되지 않고 독립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한편 한 강연에서 그는 [[조선총독부]]나 일본 불교에 아첨하는 일부 승려들을 질타하기로 했다.&lt;br /&gt;
&lt;br /&gt;
그간 &amp;quot;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amp;quot;고 묻자 아무도 그 물음에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amp;quot;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것은 똥이올시다. 똥! 그런데 그 똥보다 더 더러운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겠습니까?&amp;quot;라고 하자 역시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가난한 불자들의 시신을 염습해본 적이 있는 한 사람은 시체라고 하였다. &amp;quot;내 경험으로는 똥보다 더 더러운 것이 송장 썩는 것이올시다. 똥 옆에서는 식음을 할 수 있어도 송장 썩는 옆에서는 차마 음식이 입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amp;quot;라는 것이다.&lt;br /&gt;
&lt;br /&gt;
그의 말을 듣고 일부는 좌석을 이탈하려 하였으나 좌중에 압도당해 움직일 수 없었다. 이어 만해는 &amp;quot;시체보다 더 더러운 것이 있으니 그것이 무엇일까?&amp;quot;하고 물었다. 아무도 답을 하지 않자 한용운은 굳은 표정으로 강연대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amp;quot;그건! 바로 여기 앉아 있는 31본산 주지 네놈들이다!&amp;quot;라고 일갈하고는 즉시 단상에서 내려와 퇴장해버렸다. 반일 혹은 일본 불교에의 흡수를 반대하는 그를 두고 불령선인이라는 지적이 계속되었고 그는 결국 [[조선총독부]] 형사들의 감시하에 놓이게 된다.&lt;br /&gt;
&lt;br /&gt;
한편 총독부로부터 생계비와 연구비를 지원받는 조건으로 전향한 육당 최남선이 탑골공원 근처에서 마주쳤을 때 &amp;quot;오랜만이오. 만해.&amp;quot;라고 먼저 인사하자 그는 &amp;quot;당신이 누구요?&amp;quot;며 냉정하게 답하였다. 최남선이 &amp;quot;나는 육당이오. 나를 몰라보겠소?&amp;quot;라고 하자 만해는 &amp;quot;뭐, 육당? 그 사람은 내가 장례 지낸 지 오랜 고인이오.&amp;quot;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lt;br /&gt;
&lt;br /&gt;
=== 생애 후반 ===&lt;br /&gt;
==== 소설 집필 활동 ====&lt;br /&gt;
1931년 53세의 나이에 재혼에 뜻이 있어 동지들의 소개로 13살 연하의 유숙원(1892년~1965년)과 재혼하였다. 유숙원은 결혼하기 전까지 단성사 옆에 위치했던 진성당병원의 간호사로 일하였다.  1933년에 金漁 김벽산(金碧山)스님이 집터를 기증하자, 조선일보사장 [[방응모]], 박광 등 몇 분의 성금으로 절반의 비용을 지원받아 [[심우장]]을 짓기 시작하였다. 이때 총독부돌집을 마주보기 싫다고 북향으로 짓도록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다음 해에 딸 영숙(1934년 9월 1일)이 태어났으며, 1935년에 완공되자 입주하여 [[심우장]]에서 여생을 보내며 작품활동을 지속하였다.&lt;br /&gt;
&lt;br /&gt;
1935년 장편소설 《흑풍》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였다.《흑풍》에서는 검열을 피하기 위해  배경을 청나라를 무대로 하고, 억압에 대한 투쟁정신을 묘사하여 [[조선총독부]]에 대한 저항성을 은근히 보여주고 여성해방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삽입하여 반봉건 정신 및 여성도 인격체라는 견해를 설파하였다. 1936년 단재 [[신채호]]의 시신이 비밀리에 입국한 것을 접하고 [[방응모]]와 함께 신채호의 묘비건립과 정약용 서세100년기념회 개최에 참여했다. 1936년 《조선중앙일보》에 장편 《후회 後悔》를 연재하였다. 이러한 소설을 쓴 까닭은 원고료로 생활에 보탬을 얻기 위한 까닭도 있지만 그보다도 소설을 통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하려는 의도가 더 큰 것으로 이해된다. 1937년 불교관계 항일단체인 만당사건(卍黨事件)의 배후자로 검거, [[서대문형무소]]에 재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lt;br /&gt;
&lt;br /&gt;
1937년 4월 13일 서간도 독립운동단체의 지도자였던 김동삼이 경성감옥에서 사망하였다. 아무도 그의 시신을 거두거나 수습하려 하지 않았는데 한용운이 홀로 찾아가 통곡하며 시신을 수습하여 심우장에서 장례를 치루었다.&lt;br /&gt;
&lt;br /&gt;
==== 태평양 전쟁 전후 ====&lt;br /&gt;
석방 후 [[불교]] 혁신과 작품활동을 계속하였고 1938년에는 장편 《박명(薄命)》을 발표하였다. 1938년부터는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에 반대하여 학도병 거부 운동을 벌였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는 여러 장편 외에 장편소설인 《박명(薄命)》이 있고, 저서로는 시집《[[님의 침묵]]》을 비롯하여《[[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불교대전》,《불교와 고려제왕(高麗諸王)》등이 있다.&lt;br /&gt;
&lt;br /&gt;
그는〈[[님의 침묵]]〉 외에도《신인 문학》과《삼천리》에 시 '꿈과 근심', '실제 (實際)',《조광》에 수필 '최후의 5분간', [[조선일보]]에 장편소설 흑풍, 박명, 조선중앙일보에 소설 &amp;lt;후회&amp;gt;와 중편소설 &amp;lt;죽음&amp;gt; 등을 발표하였다.&lt;br /&gt;
&lt;br /&gt;
중일전쟁 이후로도 그는 계속 징용이나 보국대 또는 일본군을 찬양하는 글을 쓰지 않으며 강연도 하지 않았다. 또한 강연 협조 등도 거부하였다. 또한 1937년부터 강요된 신사 참배와 일장기 게양을 거부하고, [[조선총독부]]의 일본식 호적에 이름조차 올리지 않았다.&lt;br /&gt;
&lt;br /&gt;
만년에는 경성부 성북동의 [[심우장]]을 친히 지어 거처했는데, [[심우장]]은 후일 서울기념물 제7호로 지정되었다. 1939년 경상남도 사천군 다솔사(多率寺)로 내려가 회갑을 맞으면서 몇몇 동지들과 함께 자축연을 가졌다. 다솔사는 당시 민족독립운동을 주도하던 본거지였다.&lt;br /&gt;
&lt;br /&gt;
==== 사망 ====&lt;br /&gt;
1940년 5월부터는 창씨개명 반대운동을 하였고 1943년에는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말년에는 [[방응모]], 정인보, [[안재홍]], 홍명희, [[김성수]], 만공 등과 교류하며 그들이 보내주는 생활비로 어렵게 생활하였다. 일제의 극심한 탄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비타협적인 독립사상을 견지하다가, 성북동 집인 [[심우장]]에서 냉방으로 생활하였다.&lt;br /&gt;
&lt;br /&gt;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한 만해의 생계는 그의 친구인 [[안재홍]], [[방응모]], [[김성수]], 송진우, 조만식, 최남선, [[이광수]], 윤치호 등이 십시일반으로 부담해주었다. 말년에 중풍으로 고생하였지만  1944년 6월 28일 [[조선총독부]]의 특별 훈련으로 공습경보가 발령되었을 때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후 계속 혼수상태로 있다가 1944년 6월 29일 [[심우장]]에서 입적하였다.&lt;br /&gt;
&lt;br /&gt;
그가 사망하였던 1944년은 일본 제국이 패망하기 1년 전이자 광복을 1년 앞두고 있던 때라 그토록 염원하던 조국의 독립은 끝내 생전에 보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가 사망한 지 1년 후인 1945년 8월 15일에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일본 제국이 패망하게 되면서 대한민국이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 사후 ==&lt;br /&gt;
[[파일:한용운흉상.jpg|섬네일|250px|만해의 흉상]]&lt;br /&gt;
* 사망한지 1년 후인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면서 조선은 광복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한용운 본인은 1년 전에 고인이 되었기 때문에 그토록 염원하였던 광복의 모습은 보지 못하였다.&lt;br /&gt;
* 동지들에 의하여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미아리 사설 화장장에서 다비된 뒤 망우 역사 문화공원에 유골이 안치되었다. 후일 그 옆에는 부인 유숙원 여사의 묘소가 오른편에 매장되었다.&lt;br /&gt;
* 그는 문학을 전문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님에 대한 그리움과 곧은 지조를 표현한 작품들을 통해 해방후에도 인기를 끌게 되었다. 그후 문인, 저항 시인, 대처승, 출가 승려로만 인식되다가 1960년대부터는 그의 독립운동 역사가 학자들에 의해 재조명 받기 시작했다.&lt;br /&gt;
*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려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lt;br /&gt;
* 1967년 그가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던 탑골공원에는 후에 승려 운허에 의해 《용운당 만해 대선사비》(龍雲堂 萬海 大禪師碑)가 세워졌다.&lt;br /&gt;
* 고향인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남산공원에 동상이 세워졌고 홍성읍내 장터에도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lt;br /&gt;
* 1973년 신구문화사에서 《만해 전집》6권이 간행되었다.&lt;br /&gt;
* 그의 결성면 성곡리 박철동 잠방굴마을 생가지는 1989년 12월 24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75호로 지정되었다.&lt;br /&gt;
* 1990년에 생가가 복원되고 기념관이 건립되었다.&lt;br /&gt;
* 1991년에는 만해의 업적을 기리는 만해학회가 설립되었다.&lt;br /&gt;
* 그밖에 만해기념관, 만해사상선양회 등이 세워졌다.&lt;br /&gt;
*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에는 만해문학박물관이 건립되었다.&amp;lt;ref&amp;gt;[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426287 네팔 민주화·문학의 뿌리는 불교?]&amp;lt;/ref&amp;gt;&lt;br /&gt;
* 후에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만해 생가지에는 생가복원에 이어 사당을 건립하고 안내판을 설치하였다.&lt;br /&gt;
&lt;br /&gt;
== 작품성 ==&lt;br /&gt;
시와 작품에 있어 퇴폐적인 서정성을 배격하였으며 조선의 독립 또는 자연을 부처님에 빗대어 불교적인 '님'으로 형상화했으며, 고도의 은유법을 구사하여 [[조선총독부]]나 일제 정치에 저항하는 민족정신과 불교에 의한 중생제도(衆生濟度)를 노래하여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검열을 교묘하게 피하였다. 여기에서의 님은 보는 관점에 따라 조선의 독립, 자연, 부처님 혹은 이별한 연인 등으로도 해석이 가능한 어법을 구사하였다.&lt;br /&gt;
&lt;br /&gt;
그는 대표작 [[님의 침묵]]을 비롯한 시집, 작품집에서 중심을 이루고 있는 '님'은 연인·조국·부처 등 다의적인 의미를 지니며 그에 따라 '님의 침묵'이라는 표현은 당시의 민족적 상황을 은유적으로 상징하였다. 또한 세속적인 정감의 진솔성이 불러일으키는 인간적 설득력과 함께 세속적인 사랑을 표출하면서도 세속사의 진부함에 떨어지지 않으며 목소리 높여 민중정신을 강조하지도 않는다는 작품평도 있다.&lt;br /&gt;
&lt;br /&gt;
그는 당시 상황을 시적 주체인 '나'가 님과 이별하여 님이 부재하고 침묵하는 시대로 규정하면서도, 님은 이 자리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나'는 진정으로 님의 존재를 깨닫게 된다는 변증법적인 진리 또는 부처에 대한 믿음, 이별한 연인에 대한 애정을 확신, 재다짐하는 것을 드러내고, 새로이 '나'는 이 자리에는 계시지 않는 님 또는 돌아올 님과 다시 합일될 수 있다는 뜻을 노래한다. 또한 내가 님과 새로이 만나기 위해서 나는 님이 존재하지 않지만 님에 대한 의리와 절개를 지키고 님에 대한 철저한 복종이 요구되는데, 그 절개와 의리, 복종을 통해서 비로소 '님'에 대한 신의도 지키면서 한편으로 '나'는 자유로워진다는 '복종과 자유의 변증법'을 노래한 것은 역사의 필연성의 인식을 통해 진정한 자유를 획득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출한다. 그는 식민지 하에 있는 조국의 운명과 독립의 필연성 또는 오지 아니한 극락세계와 다시 만나게 되는 그 날, 그리고 그 날을 위한 실천, 변함없는 믿음을 통해 진정한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는 진리를 작품들을 통해 형상화, 승화시켰다.&lt;br /&gt;
&lt;br /&gt;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그의 시는 오언절구나 칠언절구, 3.4조 등 당시 조선의 시조, 시의 형식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산문시의 전형이 되었다. 은유와 역설의 자유로운 구사를 보여주며, 정형적인 틀을 완전히 벗어난 산문적 개방 속에서도 내재율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근대 자유시의 완성에도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lt;br /&gt;
&lt;br /&gt;
== 저서 ==&lt;br /&gt;
* 《불교대전 (佛敎大典)》(1913년)&lt;br /&gt;
* 《[[조선불교유신론]] (朝鮮佛敎維新論)》(1913년)&lt;br /&gt;
* 시집 《심》&lt;br /&gt;
* 시집 《[[님의 침묵]]》&lt;br /&gt;
* 《유마힐소설경강의 維摩詰所說經講義》(1933년)&lt;br /&gt;
* 《십현담주해 (十玄談註解)》&lt;br /&gt;
* 《불교와 고려제왕 (高麗諸王)》&lt;br /&gt;
* 《조선독립의 서 (朝鮮獨立之書)》&lt;br /&gt;
&lt;br /&gt;
=== 번역서 ===&lt;br /&gt;
* 《정선강 채근담》&lt;br /&gt;
&lt;br /&gt;
=== 소설 ===&lt;br /&gt;
* 《흑풍》(1935년)&lt;br /&gt;
* 《후회》(1936년)&lt;br /&gt;
* 《박명 (薄命)》(1938년)&lt;br /&gt;
* 《죽음》&lt;br /&gt;
&lt;br /&gt;
=== 시 ===&lt;br /&gt;
* 시 '꿈과 근심'&lt;br /&gt;
* '실제 (實際)'&lt;br /&gt;
* '나룻배와 행인'&lt;br /&gt;
* 님의 침묵&lt;br /&gt;
* 수의 비밀&lt;br /&gt;
* 사랑하는 까닭&lt;br /&gt;
&lt;br /&gt;
=== 수필 ===&lt;br /&gt;
* 《최후의 5분간》&lt;br /&gt;
&lt;br /&gt;
== 연보 ==&lt;br /&gt;
* 1879년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출생&lt;br /&gt;
* 1905년 강원도 인제군 백담사에서 수계&lt;br /&gt;
* 1906년 명진학교 입학&lt;br /&gt;
* 1908년 명진학교 졸업&lt;br /&gt;
* 1908년 조동종대학림에서 연구&lt;br /&gt;
* 1911년 박한영 등과 친일불교에 맞서 승려대회 개최&lt;br /&gt;
* 1918년 청년계몽운동지 [[유심]]지를 창간,주재&lt;br /&gt;
* 1919년 3월 1일 (→ [[3.1 운동]]) 불교 대표로 독립 운동에 참가&lt;br /&gt;
* 1919년 ~ 1921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3년간 감옥살이&lt;br /&gt;
* 1924년 불교청년회 회장, 총재&lt;br /&gt;
* 1926년 시집 &amp;lt;[[님의 침묵]]&amp;gt; 출판&lt;br /&gt;
* 1927년 [[신간회]] 중앙위원회 위원&lt;br /&gt;
* 1928년 [[신간회]] 경성지부장&lt;br /&gt;
*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 민중대회 개최&lt;br /&gt;
* 1931년 만당 당수&lt;br /&gt;
* 1931년 월간 불교지를 인수, 2년 간 간행&lt;br /&gt;
* 1944년 서울 [[심우장]]에서 중풍으로 사망&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v2%3A2PACX-1vTSee_0iJiM6j6SoxnZrz1dB_08wI7e9iABOAcfSWSU9IZ8Zb2_-L0GySFUvO3nkN2qJT_zdBb2OSDA&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width=100%25&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 평가와 비판 ==&lt;br /&gt;
민족독립, 불교유신, 자유문학의 3대 사상가로서 절의의 행적을 남겼다. 강렬한 현실비판 등 현세에서의 실천을 강조한 그의 혁명사상을 가졌다는 평가가 있다. 그가 불교이념에 의한 자유, 평등의 국가사회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하였다는 평가도 있다. 한편 자유민주주의, 비폭력 무저항주의, 민족자결주의 등에 입각한 소극적, 관념적인 차원에 머물렀다는 시각도 있다.만해 한용운은 대단한 독립운동가다. 스님이면서 독립운동에도 힘썼다. 또 독립 운동을 할 때 같이 했던 동지들이 창씨개명 등 일본이 억지로 권유한 것을 하기라도 하면 차갑게 외면했다.&lt;br /&gt;
&lt;br /&gt;
== 기타 ==&lt;br /&gt;
* 승려의 결혼 허용 주장은 1920년대 1930년대 화제가 되어 사회적 이슈거리와 논란이 되었다.&lt;br /&gt;
* 친하던 벗 또는 호형호제하던 사이로는 이시영(李始榮), 백용성, 최남선, 최린, 김동삼(金東三), [[방응모]], [[신채호]], [[김성수]], [[안재홍]], 송진우, 정인보(鄭寅普), 김규식, 박광(朴珖), 홍명희, 만공 송월면(宋月面), [[이광수]], 김일엽, 최범술(崔凡述) 등이 있었다.&lt;br /&gt;
* 그의 제자 중에는 춘성도 있었다. 춘성 역시 일제강점기의 대표적 반일 인사이자 해방 후에도 승려로 활동하였다.&lt;br /&gt;
* 그의 아들 한보국은 일제강점기의 사회주의자이자 해방 후에는 남로당 당원으로 활동하다가 월북하였다. 1980년대까지 그에게는 아들이 한 사람 있었다는 것 이외에는 아들과 본부인 전정숙의 존재는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다.&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 /&amp;gt;&lt;br /&gt;
&lt;br /&gt;
== 참고 문헌 ==&lt;br /&gt;
* 김광식, 《한용운 연구》 (동국대학교출판부, 2011)&lt;br /&gt;
* 윤재근, 《님의 침묵 연구》 (민족문학사, 1985)&lt;br /&gt;
* 김재홍, 《한용운문학연구 1》 (일지사, 1982)&lt;br /&gt;
* 송욱, 《님의 침묵:전편해설》 (과학사, 1973)&lt;br /&gt;
* 박노준·인권환, 《한용운 연구》 (통문관, 1960)&lt;br /&gt;
&lt;br /&gt;
== 외부 링크 ==&lt;br /&gt;
* [http://www.manhae.or.kr/ 만해기념관 홈페이지]&lt;br /&gt;
* [http://wwww.peace21.org/today_column_board/18492 만해 한용운과 아들 한보국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 부자, 애국애족만은 부전자전]]&lt;br /&gt;
*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amp;amp;search_div_id=CP_THE006&amp;amp;cp_code=cp0525&amp;amp;index_id=cp05250499&amp;amp;content_id=cp052504990001 승려결혼을 주장한 한용운]&lt;br /&gt;
* [https://web.archive.org/web/20131214035146/http://www.hongsung.net/tt/board/ttboard.cgi?act=read&amp;amp;db=city_people&amp;amp;page=1&amp;amp;idx=3 한용운:홍성넷]&lt;br /&gt;
*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8/08/01/200808010500005/200808010500005_2.html 민족대표 33인 한용운과 박희도:“독립의 영(榮), 변절의 욕(辱), 모두 산 자들의 짐인 것을…”]&lt;br /&gt;
* [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C%9A%A9%EC%9A%B4 한용운-위키백과]&lt;br /&gt;
&lt;br /&gt;
[[분류:감자]]&lt;/div&gt;</summary>
		<author><name>Nsgjjsjsjy02</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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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한용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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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Nsgjjsjsjy02: /* 사회 단체 활동과 님의 침묵 */&lt;/p&gt;
&lt;hr /&gt;
&lt;div&gt;{|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width:100%&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0%&amp;quot;|사진&lt;br /&gt;
|[[파일:한용운.jpg|center|200픽셀]]&lt;br /&gt;
|+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lt;br /&gt;
|+ style=&amp;quot;caption-side:bottom;text-align:left:&amp;quot;|출처: 위키백과&lt;br /&gt;
|법명||용운(龍雲)&lt;br /&gt;
|-&lt;br /&gt;
|출생||1879년 8월 29일 조선 충청도 결성현 현내면 박철리 잠방골&lt;br /&gt;
|-&lt;br /&gt;
|입적||1944년 6월 29일 일제강점기 경성부 동대문구 성북정 [[심우장]]&lt;br /&gt;
|-&lt;br /&gt;
|입적원인||중풍&lt;br /&gt;
|-&lt;br /&gt;
|거주지||일제강점기 경성부 동대문구 성북정 심우장&lt;br /&gt;
|-&lt;br /&gt;
|국적||대한민국&lt;br /&gt;
|-&lt;br /&gt;
|속명||한정옥(韓貞玉)&lt;br /&gt;
|-&lt;br /&gt;
|경력||신간회 중앙위원장&lt;br /&gt;
|-&lt;br /&gt;
|종파||조계종&lt;br /&gt;
|-&lt;br /&gt;
|호||만해(萬海·卍海)&lt;br /&gt;
|-&lt;br /&gt;
|직업||승려, 시인, 독립운동가&lt;br /&gt;
|-&lt;br /&gt;
|배우자||유숙원(재혼), 전정숙(이혼)&lt;br /&gt;
|-&lt;br /&gt;
|자녀||한보국(아들), 한영숙(딸)&lt;br /&gt;
|-&lt;br /&gt;
|부모||한응준(부), 방숙영(모)&lt;br /&gt;
|}&lt;br /&gt;
&lt;br /&gt;
'''한용운'''(韓龍雲, 1879년 8월 29일 ~ 1944년 6월 29일)은 일제강점기의 시인, 승려,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청주 한씨. 호는 만해(萬海)이다. 불교를 통한 언론, 교육 활동을 하였다.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으며, 그것에 대한 대안점으로 불교사회개혁론을 주장했다.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이며 광복 1년을 앞둔 1944년 6월 29일에 중풍병사(입적)하였다. 독립선언서의 &amp;quot;공약 3장&amp;quot;을 추가보완하였고 옥중에서 '조선 독립의 서'(朝鮮獨立之書)를 지어 독립과 자유를 주장하였다.&lt;br /&gt;
&lt;br /&gt;
1910년 일본이 주장하는 한일불교동맹을 반대철폐하고 이회영, 박은식, 김동삼 등의 독립지사(志士)들을 만나 독립운동을 협의하였다. 1918년 11월부터는 불교 최초의 잡지인 《[[유심]]》을 발행하였고 1919년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을 하여 체포당한 뒤 3년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 풀려났다. 1920년대에는 대처승 운동을 주도하여 중에게도 결혼할 권리를 달라고 호소하기도 하였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 언론활동에 참여하였다. 1927년 2월부터는 [[신간회]]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과 이듬해 신간회 경성지부장을 지냈다.&lt;br /&gt;
&lt;br /&gt;
1918년 《[[유심]]》에 시를 발표하였고, 1926년〈[[님의 침묵]]〉등의 시를 발표하였다. 님의 침묵에서는 기존의 시와, 시조의 형식을 깬 산문시 형태로 시를 썼다. 소설가로도 활동하여 1930년대부터는 장편소설《흑풍》(黑風),《후회》,《박명》(薄命), 단편소설《죽음》등을 비롯한 몇 편의 장편, 단편 소설들을 발표하였다. 1931년 김법린 등과 청년승려비밀결사체인 만당(卍黨)을 조직하고 당수가 되었으나 1937년 불교관계 항일단체를 적발하는 과정에서 만당사건(卍黨事件)의 배후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저서로는 시집 《[[님의_침묵]]》을 비롯하여 《조선불교유신론》,《불교대전》,《십현담주해》,《불교와 고려제왕》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 생애 ==&lt;br /&gt;
==== 유년기 ====&lt;br /&gt;
조선전기 한명회 동생으로 전구서승(典廏署丞)을 지낸 서원군 한명진(韓命溍)의 이양공파 20대손이다. 한응준의 차남으로 태어났고, 그의 형은 한윤경(1860년~1929년)이다. 자필이력서와 승적부의 출생지는 충청남도 홍주군 주북면 옥동(玉洞)이다. [[3.1운동]] 후 재판 때 고향을 홍성의 '남문리'라고 답변하였다. 현재 출생지로 알려진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491번지는 그의 아들인 한보국의 제적등본에 따른 기록이다..&lt;br /&gt;
&lt;br /&gt;
==== 소년 시절 ====&lt;br /&gt;
16살 되던 해인 1894년부터 홍성읍내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고 전한다. 그 해에 음력1월부터 12월까지 갑오농민운동이 일어났고, 7월 25일에 청일전쟁이 발발하였다. 그의 부친 한응준은 홍주성에서 관군의 참모관으로 활약하며 동학농민군 방어에 성공하였으나 이듬해 병고로 사망하였다. 회고록에 의하면 18세인 1896년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 서울로 향하였다가 설악산 오세암에 입산하여 불교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그의 아들 한보국의 제적등본에 의하면, 부친의 3년상을 치른 후에 20살이 되던 해인 1892년 2월 10일 전정숙과 결혼하였다. 1904년 12월 21일 전정숙에게서 아들 한보국(1904년~1977년)을 얻었으나 그는 이미 강원도 백담사에서 출가를 하였다.&lt;br /&gt;
&lt;br /&gt;
==== 방랑 생활 ====&lt;br /&gt;
[[파일:청년기한용운.jpg|섬네일|오른쪽|200px|청년기의 만해]]&lt;br /&gt;
건양 1년인 1896년에 그는 설악산 오세암에 들어갔다. 후일 그는 '나는 왜 중이 되었나'라는 그 자신의 술회에 간략하에 언급하기를 세상에 대한 관심과 생활의 방편으로 집을 떠나 오세암에 입산하여 처음에는 머슴으로 일하다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고 한다. 출가의 원인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당시 고향 홍성군 홍주에서도 [[동학농민운동]]과 의병운동이 전개된 것으로 미루어 역사적 격변기의 상황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오세암에 머무르면서 그는 불교의 기초지식을 섭렵하면서 선(禪)을 닦았다.&lt;br /&gt;
&lt;br /&gt;
=== 대한제국(1897년~1910년)  활동 ===&lt;br /&gt;
==== 출가와 문학 ====&lt;br /&gt;
[[파일:만해기념관.jpg|섬네일|왼쪽|[[백담사]] 경내의 만해기념관]]&lt;br /&gt;
1905년 1월 26일 강원도 [[백담사]]에 가서 김연곡(金蓮谷)을 은사로 하여 정식으로 출가, 김연곡에게 득도한 다음 전영제(全泳濟)에게 계(戒)를 받아 승려가 되었고, 만화(萬化)에게서 법을 받았다. 계명은 '''봉완(奉玩)'''이며 '''법호는 용운(龍雲)이며, 후에 필명 및 아호는 만해(萬海·卍海)'''라 하였다. 이후 수년 간 불교활동에 전념했다. 이즈음에 불교 관련 서적뿐만 아니라 량치차오의〈음빙실문집 飮氷室文集〉등을 접하면서 근대사상을 다양하게 수용하였다.&lt;br /&gt;
&lt;br /&gt;
이 때를 전후해서 영환지략(瀛環志略)-서계여 저술,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양계초 저술 등을 읽고 세계동향을 알기 위해 세계여행을 계획하고 백담사에서 하산하여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건너갔으나 밀정으로 인하여 구사일생으로 귀국하였으나, 각처에서 의병 활동으로 어지럽게 되자 함경남도 안변 석왕사를 찾아가 암자에서 참선생활을 하였다.(삼천리 제6호 회고록)&lt;br /&gt;
&lt;br /&gt;
'''&amp;quot;「영환지략瀛環地略」이라는 책을 통하여 비로소 조선 이외에도 너른 천지 잇는 것을 인식하고 행장을 수습하여 원산을 거처서 서백리아에 이르러 몃 해를 덧업는 방낭생활을 하다가 다시 귀국하여 安邊釋王寺에 파뭇겨 叅憚 生活을 하엿다. 그러다가, 동양문명의 집산은 동경에서 되니 東京으로 갈 차로 이듬해 봄에 처음으로 서울에 발을 드려노앗다.&amp;quot;&amp;lt;삼천리 제5권 제9호 처음 서울 오든 때-회고록&amp;gt;'''&lt;br /&gt;
&lt;br /&gt;
1908년 명진학교(현 동국대학교) 보조과(일어과와 측량과) 수학 후 4월에 일본의 시모노세기, 교토, 동경, 닛고 등지를 주유하며 신문물을 시찰하였고, 동경 조동종대학(현 고마자와駒澤大學)의 아사다교수와 교유하여 불교와 서양철학을 수강하였다. 이 때에 유학 중이던 최린(崔麟), 고원훈, 채기두 등과 교류하였고 9월 귀국하였다. 10월 20일 일본의 조선 전국 사찰 대표 52인의 한 사람으로 서울 원흥사(元興寺)에서 원종종무원(圓宗宗務院)의 설립에 참여하였다. 12월 10일 서울에 경성명진측량강습소를 개설 소장에 취임하였다. 1909년 초에는 조선불교의 유신을 주장하는 논저《[[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하기 시작하였다(1913년 회동서관 간행).  1910년 한문으로 된 불경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 즉 불교의 대중화작업에 주력하였다.&lt;br /&gt;
&lt;br /&gt;
==== 승려들의 결혼 자유화 주장 ====&lt;br /&gt;
1909년 초부터 그는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을 집필하였고, 1910년 12월 8일 백담사에서 탈고하였다. 동시에 그는 [[백담사]]에서 거의 독학하다시피하며 대장경을 암송하고 한문과 인도어로 된 불교 경전들을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을 하였다. 한편 1910년부터 그는 승려의 결혼을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만해는 1910년 3월 승려의 결혼을 공식적으로 허락해 달라는 문건인 중추원 헌의서를 청원서 형식으로 대한제국 중추원에 제출하였고, 경술국치(한일합방) 이후 9월에는  [[조선총독부]] 통감부에 승려취처에 관한 건백서를 테라우치 통감에게 제출하였다. 승려에게 결혼을 금지하라고 부처님이 가르친 것은 아니라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lt;br /&gt;
&lt;br /&gt;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이 미혹을 떠나 깨달음을 얻고 악을 고쳐 선을 행하도록 바라셨으나, 중생의 끈기가 각기 달라서 부득불 천하에서 정을 제거하고 욕망을 끊어 버린 사실들을 모두 연설하였던 것이니, 각기 좋아하는 것을 좇아 인도하시고자 희망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계율에 있는 금혼은 본디 방편의 하나에 불과한 것일뿐, 불교의 궁극의 경지와는 거리가 먼 것이니 이를 제거한들 어찌 손상됨이 있겠습니까.&amp;lt;ref&amp;gt;김광식, 《한용운 연구》 (동국대학교출판부, 2011) 109쪽&amp;lt;/ref&amp;gt;'''&lt;br /&gt;
&lt;br /&gt;
대중의 결혼생활, 가장이라는 짐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중생들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승려의 결혼을 허가해 달라는 그의 주장은 그대로 묵살당한다.&lt;br /&gt;
&lt;br /&gt;
한일합방 직후 총독부가 조선인을 차별대우하고 일본인을 우대하자 그는 불만을 드러냈다. 만해의 제자였던 춘성 스님에 의하면 만해는 평소 조선총독부의 조선인 차별 정책에 대해 &amp;quot;왜놈의 머슴살이 같으니라구!&amp;quot;라며 불만을 토로하였다 한다.&lt;br /&gt;
&lt;br /&gt;
=== 일제강점기 활동 ===&lt;br /&gt;
==== 불교 사회 혁신 운동 ====&lt;br /&gt;
1910년  8월 29일에 한일 합방 조약이 체결된 이후로, 원종의 이회광이 일본과 맺은 한일불교동맹조약인 조동종맹약을 분쇄하기 위해 12월 광주 증심사로 내려갔다. 1911년 1월 석전 박한영, 진진웅, 김종래, 장금봉 등과 순천 송광사, 동래 범어사에서 승려궐기대회를 개최하여 일본의 조동종(曹洞宗)과 한국불교의 통합을 꾀한 이회광 등의 친일적인 불교행위를 규탄, 저지하였다. 송광사에 임제종 종무소를 설치하였고 조선임제종 종무원 관장에 취임하였다. 11월 서울에서 임제종 중앙포교당(조선선종포교당) 건립을 착수하였다. 그 해 6월 3일 일제가 한국불교를 억압하고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제정·공포한 법령인 사찰령이 공포되었고, 한국불교교단은 삼십본산연합사무소에 귀속되었다. 일제의 사찰령에 맞서 한국불교의 전통을 계승하려는 노력으로  1912년 4월 10일 중앙포교당이 준공되자 5월 26일 한용운, 백용성, 이화능 등 중앙포교당을 개설하였다.  6월 21일에 경서부 관청에 소환된 이후 이회광의 원종은 조선불교선교양종으로, 임제종은 조선선종중앙포교당으로 개칭되었다.&lt;br /&gt;
&lt;br /&gt;
1912년 9월 10일부터 10월 8일까지 만주 동북삼성(東北三省)을 방문하여 독립군의 훈련장을 순방하면서 그들에게 독립정신과 민족혼을 심어주는 일에 전력하던 중에 통화현 굴라재에서 일진회 첩자로 오해를 받아 목에 총을 맞고 마취없이 '''총알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은 후 귀국하여 동래부 범어사로 내려갔다. 1913년 2~3월에 조선불교월보 13호, 14호에 조선불교유신론 9장 ‘승려의 단결’편을 간행전 기고했다. 필명을 '''만해생(萬海生)으로 문헌상 처음으로 만해'''라는 아호를 사용하였다. 5월 25일에 조선불교유신론을 회동서관에서 출판하였다.&lt;br /&gt;
&lt;br /&gt;
1914년 4월 서울에 유학 온 불교 '고등강숙' 학생들이 불교를 발전시키려는 목적으로 설립한 단체인 '''조선불교강구회(朝鮮佛敎講究會)''' 총재에 취임하였다.&lt;br /&gt;
&lt;br /&gt;
경전을 대중화하기 위해 불교대전을 편찬할 계획으로 양산 통도사에 보관된 고려대장경을 열람하였고, 4월 30일 범어사에서《불교대전 (佛敎大典)》을 간행하였다. 대승불교의 반야사상(般若思想)에 입각하여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계의 각성과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lt;br /&gt;
&lt;br /&gt;
8월에 조선불교회 회장에 취임하였다. 불교의 문제점을 해결하고 불교유신을 직접 수행하고자, 30본산 주지들을 배제하고, 승려와 신도를 융합한 통일기관을 창립하였다. 그러자 30본산 주지들의 반발로  '''불교동맹회'''로 개칭하여, 서울 낙원동에 본부를 두겠다고 경성북부경찰서에 9월10일경 신고했으나, 30본산 주지의 권한을 벗어났다며 등록 거부 당하였다, “'''고등강숙'''”의 학생들이 만해를 따르자, 이회광은 공문을 보내 상경을 막으려다 결국 학교를 폐쇄시켰다.&lt;br /&gt;
&lt;br /&gt;
1915년 6월 20일 청나라 승려 내림(來琳)의 증보본에 의거하여 정선강의 《채근담》 국한문 혼용체 주해본을 저술하였다. 10월에 조선선종 중앙포교당 포교사에 취임하여 계몽활동, 근대화 필용성,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15년 개교한 중앙학림 학생들이 만해를 따랐다. 불교강구회, 각황사 등에서 강연하였다.&lt;br /&gt;
&lt;br /&gt;
==== 불교포교 대중화와 선교진흥론 ====&lt;br /&gt;
1914년에는 [[불교]] 포교의 보편화 대중화를 선언하고 조선불교청년동맹(朝鮮佛敎靑年同盟)을 결성하였다. 조선불교청년동맹의 강령을 손수 지었는데 이를 보면, 첫째로 정교분리(政敎分離), 둘째로는 여러 불교 종단의 통일 또는 연합, 셋째 불교와 사찰의 사회적 진출의 필요 등을 제시하였다. 이는 대중불교의 확산을 위하여 그 출발점을 청년 운동으로 삼아야 한다는 그의 실천행이었다. 그는 불교 포교가 보편화되려면 일단 청년들에게 침투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천주교와 개신교의 선교 활동, 동학의 포교 확산, 사이비 종교 등의 확산에 긴장한 그는 불교 역시 대중에게 침투하여야 함을 역설하고 불교가 중생의 곁에 가장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으로 청소년과 청년층을 공략하는 것을 들었다. 그는 불교의 보편화 운동의 실천을 위하여 '승려에서 대중에로', '산간에서 길가로' 등을 내걸었다.&lt;br /&gt;
&lt;br /&gt;
또한 불교 포교의 대중화를 위해서는 교단, 종단간의 갈등을 줄이고 협력하자는 주장을 펼쳤다. 이는 선교진흥론(禪敎振興論)으로 발표되었다. 그에 의하면 불교의 진흥을 위한 필수불가결의 요건은 수행 이상을 확립하는 일이라 하였다. 이에 한용운은 지금까지 조선의 불교는 오교구산과 선교양종이니 해서, 마치 교의(敎義)와 종지(宗旨)가 다른 것처럼 잘못 인식되어 왔다. 선과 교의 본질은 하나이다. 왜냐하면, 선이란 불교의 마음이며, 교란 불교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양자는 서로 배치되는 개념이 아니며, 양자의 이론적 합일과 연대의 실천이 불교 진흥, 포교 확산의 관건이라고 주장하였다. 동시에 한용운은 선원(禪院)이나 강원(講院)의 지도 이념이나 이론, 실수(實修) 등에 있어 외전(外典)도 첨가해야 한다, 그리고 속된 것을 전적으로 배격하지 말 것을 호소하였다. 그는 선교일치를 주장해온 조선 불교의 일승정신(一乘精神)이 새로운 시대의 좌표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lt;br /&gt;
&lt;br /&gt;
==== 불교 경전의 한글화 ====&lt;br /&gt;
만해는 1910년부터 대장경과 화엄경 등을 비롯한 불교 경전의 내용을 한글로 번역하여 소개하였다. 1930년대 이후에도 그는 불교 경전의 한글화를 주장했다. 경전의 내용이 한문이나 산스크리트어이기에 일반 중생이 읽기에는 너무 힘들다, 어렵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대장경의 한글 번역이다. 현대포교의 요체는 문서에 의한 홍포였다.&lt;br /&gt;
&lt;br /&gt;
그는 아무리 좋은 말씀도 이해를 하지 못하면 무용지물이라 주장하였다. 불교 경전의 대부분이 한문으로 되어 있어서 일반인이나 문맹률이 높던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읽고 이해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방대한 대장경을 쉽게 옮기는 일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불교의 교리와 활동, 고승 등에 대한 내용을 한글로 표현했으며 《불교대전》에는 대장경 등의 내용을 한글로 해석하였는데 이는 바로 그와 같은 시도의 결정이다. 대장경의 요지를 발췌하여 대의를 옮겨 적은 불교대전은 20세기 한국 불교이론서와 《불교성전》들의 효시가 되었다. 그밖에도 그는 불교학 진흥과 포교의 활성화를 위하여서는 각종 금석문(金石文)이나 사장된 자료들이 일반에 소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lt;br /&gt;
&lt;br /&gt;
==== 잡지 발행 ====&lt;br /&gt;
1918년 9월 1일  제자 춘성 등과 함께 월간 불교잡지《[[유심]]》을 창간하여 12월까지 3권을 발행하고 중단되었으나, 이 잡지를 통해 불교 논설만이 아니라 계몽적 성격을 띤 글을 발표했고, 또 신체시를 탈피한 신시〈심 (心)〉을 발표하여 문학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는 당시 조선불교의 침체와 낙후성과 은둔주의를 대담하고 통렬하게 분석과 비판을 한 저서 &amp;lt;[[조선불교유신론]]&amp;gt;을 발표하여 사상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lt;br /&gt;
&lt;br /&gt;
월간 유심지에서 그는 시 '심 (心)'과 수필 고학생, 남모르는 아이들을 발표하는 등 불교의 보편화와 친숙화를 꾀한다. 불교의 홍보, 포교와 함께 계몽, 자각, 자유정신,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논설들을 다수 실은 월간지 [[유심]]은 뒷날 그가 관계한《불교》잡지와 함께 가장 괄목할만한 문화사업의 하나가 되었다.&lt;br /&gt;
&lt;br /&gt;
==== 3.1 만세 운동과 투옥 ====&lt;br /&gt;
[[파일:3.1운동한용운.jpg|섬네일|210px|오른쪽|1920년 7월 2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 3.1 운동에 참가한 민족대표 48인 공판에 관한 기사, 다섯째 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한용운]]&lt;br /&gt;
1918년 12월에 발표한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감동하여 1919년 1월부터는 전국적인 만세 운동 준비에 참여하고, 백용성 등과 함께 [[불교]] 지도자들을 소집하여 손병희 등 천도교 지도자들과 이상재 등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과 회합하였다. 그는 독립선언문의 내용을 둘러싸고 최남선과 의견충돌을 하였다. 내용이 좀 더 과감하고 현실적이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으나, 최남선 등은 만해의 주장이 급진적이고 과격하다며 반대했고 결국 만해가 제시한 조건들 중 마지막의 행동강령인 공약 제3조 '최후의 일인까지 쾌히 우리의 의사를 발표하자' 만이 수용, 독립선언서에 수록되었다.&lt;br /&gt;
&lt;br /&gt;
1919년 [[3.1 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고,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으며 일설에는 용성 스님의 도장도 그가 찍었다 한다. 경성 탑골공원에서 독립 선언서 낭독과 만세 운동에 가담했다가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었다. 민족대표자들은 평화 시위를 기획하였는데 시위는 격화되었고, 민족대표자들은 자수를 결심한다. 이종일의 회고에 의하면 &amp;quot;수감 중 만해는 일제의 고문 및 위협에 벌벌 떠는 나약한 민족대표들에게 인분을 퍼부었다.&amp;quot;고 한다.&amp;lt;ref name=&amp;quot;:1&amp;quot;&amp;gt;김광식, 《만해 연구》 (동국대학교출판부, 2011) 315쪽&amp;lt;/ref&amp;gt;&lt;br /&gt;
&lt;br /&gt;
그는 만세운동을 진행하던 중 탑골공원에서 총독부 경무국 순사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어 피신한 다른 민족대표자들이 자수함으로써 바로 [[서대문형무소]]로 넘겨지고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받고 복역하였다.&lt;br /&gt;
&lt;br /&gt;
==== 수감과 석방 ====&lt;br /&gt;
한편 체포된 만해는 동대문 시장에 투옥되어 복역하며 재판을 받았다. 이때 옥중에서 변호사는 물론 사식과 보석을 거부할 것을 결의하고 수감생활을 한다. 그리고 옥중에서 '조선독립의 서'를 집필하다가 발각되어 결국 원본을 형사에게 제출했다. 그러나 만해는 한편으로 '조선독립의 서'를 일본인 서울지방법원 검사에게 제출하기 이전에 일부를 휴지에 작은 글씨로 옮겨 적었다. 그리고 그것을 접어 형무소 밖으로 나가는 의복의 갈피에 집어넣었다. 이렇게 외부로 나온 그 선언서는 상해까지 전달되었다.&amp;lt;ref&amp;gt;김광식, 《만해 연구》 (동국대학교출판부, 2011) 332쪽&amp;lt;/ref&amp;gt; 그것은 인간의 권리와 자유와 평등에 대한 길을 가로막는 어떠한 형태의 무력, 군사력, 압제 정치는 결국 스스로의 덫에 걸려 스스로 패망하게 되리라는 내용이었다. 옥중에서 작성한 '조선독립의 서'는 종이를 노끈처럼 말아 유일하게 그의 옥바라지를 하던 제자 춘성 스님을 통해 상하이로 보내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 1919년 11월 4일의 기사 부록에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대요'라는 제목으로 발표, 보도되었다.&lt;br /&gt;
&lt;br /&gt;
1921년 12월 22일 [[3.1운동]] 민족대표자 최린, 함태영, 오세창, 권동진, 이종일 등과 함께 가출옥되자 많은 면회객이 찾아왔다. 그런데 그가 인사를 하는 것을 보고 면회객들은 이상하게 여겼다. 이에 만해는 자신을 마중하러 나온 인사들에게 &amp;quot;너희들은 이런 출옥의 인사를 할 줄은 알고, 인사를 받을 줄은 몰랐더냐?&amp;quot; 하고 대성질타하였다.&amp;lt;ref&amp;gt;김광식, 《만해 연구》 (동국대학교출판부, 2011) 322쪽&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출옥 후에는 언론에 칼럼을 발표하는 동시에 1922년부터 1923년까지 민립대학 설립운동과 물산장려운동 등의 민족운동에도 참여했다. 이 기간 중 그는 [[김성수]], 조만식, [[안재홍]], [[이광수]], [[방응모]] 등을 만나 인맥을 쌓기도 했다. 글 못지않게 연설가로서도 남다른 능력을 지니고 있던 그는 1922년 5월 전조선학생대회 주최로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강연회가 개최되자 3인의 종교 지도자의 한 사람이자 연사의 1인으로 초빙되었다. 대회가 열린 날 두 번째 연사로 나선 만해가 강연하자 청중이 열광하여 결국 다음 사람이 강연을 포기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1922년 9월 잡지《개벽》에 옥중시 '무궁화 심으라'를 발표하였다.&lt;br /&gt;
&lt;br /&gt;
==== 사회 단체 활동과 님의 침묵 ====&lt;br /&gt;
1922년 출옥 후에도 일본경찰의 감시 아래에서 강연 등 여러 방법으로 조국독립의 열변을 토하였다. 1920년대에 부인이 있는 대처승이 속인들에게 사이비 중이라고 모욕을 당하는 것을 보고 대처승 운동을 주도하여 중에게도 결혼할 자격을 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1924년부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논설위원을 겸하며 계몽, 사회 참여를 촉구,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칼럼을 게제하였다.&lt;br /&gt;
&lt;br /&gt;
1923년 1월 동아일보에 논설 '조선 급(及) 조선인의 번민(煩悶)'을 발표한다. 1924년 1월 6일 조선불교청년회 초대 총재에 취임하며 청년조직을 항일운동에 걸맞게 바뀌었다.&lt;br /&gt;
&lt;br /&gt;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다. 5월15일 &amp;lt;십현담주해&amp;gt;를 법보회에서 발행, 5월 20일 &amp;lt;[[님의 침묵]]&amp;gt;을 회동서관에서 발행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님은 갔습니다&amp;lt;br/&amp;gt;푸른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나 있는 작은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amp;lt;ref&amp;gt;서적 인용 |편집자= 강승원 |제목= EBS 수능특강 언어영역|날짜= 2009-01-05 |판= 초판 |출판사= 한국교육방송공사 |쪽= 8 |인용문=푸른 산빛의 희망적 이미지가 단풍나무 숲의 상실의 이미지를 대비하여 만남→이별의 의미를 형상화하고 있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황금(黃金)의꽃가티 굿고빗나든 옛 맹서(盟誓)는 차듸찬띠끌이되야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나러갓슴니다&amp;lt;br/&amp;gt;날카로은 첫 키스의 추억(追憶)은 나의 운명(運命)의 지침(指針)을 돌너노코 뒷거름처서 사러젓슴니다&amp;lt;br/&amp;gt;나는 향긔로은 님의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은 님의얼골에 눈멀었슴니다&amp;lt;br/&amp;gt;사랑도 사람의일이라 맛날때에 미리 떠날것을 염녀하고경계하지 아니한것은아니지만&amp;lt;br/&amp;gt;리별은 뜻밧긔일이되고 놀난가슴은 새로은 슬븜에 터짐니다&amp;lt;br/&amp;gt;그러나 리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源泉)을만들고 마는것은 스스로 사랑을깨치는것인줄&amp;lt;br/&amp;gt;아는까닭에 것잡을수업는 슬븜의 힘을 옴겨서 새 희망(希望)의 정수박이에 드러부엇슴니다&amp;lt;br/&amp;gt;우리는 맛날때에 떠날것을염녀하는 것과가티 떠날때에 다시맛날것을 믿슴니다&amp;lt;br/&amp;gt;아아 님은갓지마는 나는 님을보내지 아니하얏슴니다'''&amp;lt;ref&amp;gt;서적 인용|편집자= 강승원 |제목= EBS 수능특강 언어영역|날짜= 2009-01-05 |판= 초판 |출판사= 한국교육방송공사 |쪽= 8 |인용문=우리는 맛날때에~: 회자정리(會者定離)와 거자필반(去者必反)의 정신을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님의 침묵]]에서 그는 한글 표준어를 쓰지 않고 충청도 방언과 토속어가 세련되지 않은 표현으로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향토적 정감의 방언 및 토속어 애용과 서민적인 시어의 활용은 님의 침묵에 민중정신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1925년부터 [[백담사]]에서 집필하여 1926년 경성부 안동서관에서 발행한《[[님의 침묵]]》은 당시 자유주의적, 남녀간의 연애를 위주로 하던 한국문단의 영향을 받지 않고 생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현실과 이상,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요구되는 주체적 자세에 대해 노래했으며, 더욱이 그것을 풍부한 시적 이미지로 아름답게 형상화해 수준 높은 민족문학의 경지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는 조선의 독립, 혹은 자연을 '님'으로 표현하여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부처로도 해석되고 이별한 연인으로도 해석되는 화법을 구사하여 총독부 학무국의 검열 탄압을 피하였다.&lt;br /&gt;
&lt;br /&gt;
==== [[신간회]] 창설에 참여 ====&lt;br /&gt;
[[파일:한용운동상.jpg|섬네일|오른쪽|200px|한용운의 동상]]&lt;br /&gt;
1927년 1월 19일 신간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이인, 김병로, 허헌, 조병옥, 허정숙 등과 함께 종교, 사회단체를 망라한 사회단체 [[신간회]]의 결성에 [[불교]]계 대표자의 한 사람 겸 경성부 서부 지역 대표자의 한 사람으로 적극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의 한 사람이 되었다. 신간회 조직을 결성하는 주도적으로 참여한 그는 1928년 다시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의 한사람에 선출되고 신간회 경성지회 회장(京城支會會長)에 피선되어 허정숙 등과 신간회 경성지회에서 활동하였다.&lt;br /&gt;
&lt;br /&gt;
1927년 12월 조선불교청년회(朝鮮佛敎靑年會)의 체제를 개편하여 조선불교청년동맹(朝鮮佛敎靑年同盟)으로 개칭,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였다.&lt;br /&gt;
&lt;br /&gt;
한편 1929년 3월 6일 그의 속가 형 한윤경이 사망하였다(70세). 그는 150섬 이상을 수확하던 홍성군의 대지주였다.&amp;lt;ref&amp;gt;&amp;quot;독립운동가 만해 선사 속가 후손들 날품팔이 생활&amp;quot;, 경향신문 1986년 6월 2일자 10면, 사회면&amp;lt;/ref&amp;gt; 한윤경의 아들이자 조카인 한창국은 일찍 죽고 한창국의 후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한다.&lt;br /&gt;
&lt;br /&gt;
1929년 광주항일학생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학생 시위를 보고 그것을 민족적·민중적 운동으로 확산시키고자 민중대회를 계획했으나, 조선총독부 밀정에게 발각, 총독부 경무국에 의해 무산되었다.&lt;br /&gt;
&lt;br /&gt;
1930년 5월 김법린, 김상호, 이용조, 최범술 등이 조직한 '''청년승려비밀결사 만당(卍黨)'''의 영수로 추대되었다.&lt;br /&gt;
&lt;br /&gt;
1931년 6월 &amp;lt;불교&amp;gt;지를 인수, 불교사 사장으로 취임하여 많은 논설을 발표하였다. 이후 많은 논문과 논설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특히, 고루한 전통에 안주하는 불교를 통렬히 비판하였으며, 승려의 자질 향상, 불자에게 생계를 의존하지 않기, 기강확립, 생활불교 등을 제창하였다.&lt;br /&gt;
&lt;br /&gt;
==== 반일 강연 활동 ====&lt;br /&gt;
그는 조선 불교가 일본 불교에 예속되지 않고 독립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한편 한 강연에서 그는 [[조선총독부]]나 일본 불교에 아첨하는 일부 승려들을 질타하기로 했다.&lt;br /&gt;
&lt;br /&gt;
그간 &amp;quot;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amp;quot;고 묻자 아무도 그 물음에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amp;quot;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것은 똥이올시다. 똥! 그런데 그 똥보다 더 더러운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겠습니까?&amp;quot;라고 하자 역시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가난한 불자들의 시신을 염습해본 적이 있는 한 사람은 시체라고 하였다. &amp;quot;내 경험으로는 똥보다 더 더러운 것이 송장 썩는 것이올시다. 똥 옆에서는 식음을 할 수 있어도 송장 썩는 옆에서는 차마 음식이 입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amp;quot;라는 것이다.&lt;br /&gt;
&lt;br /&gt;
그의 말을 듣고 일부는 좌석을 이탈하려 하였으나 좌중에 압도당해 움직일 수 없었다. 이어 만해는 &amp;quot;시체보다 더 더러운 것이 있으니 그것이 무엇일까?&amp;quot;하고 물었다. 아무도 답을 하지 않자 한용운은 굳은 표정으로 강연대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amp;quot;그건! 바로 여기 앉아 있는 31본산 주지 네놈들이다!&amp;quot;라고 일갈하고는 즉시 단상에서 내려와 퇴장해버렸다. 반일 혹은 일본 불교에의 흡수를 반대하는 그를 두고 불령선인이라는 지적이 계속되었고 그는 결국 [[조선총독부]] 형사들의 감시하에 놓이게 된다.&lt;br /&gt;
&lt;br /&gt;
한편 총독부로부터 생계비와 연구비를 지원받는 조건으로 전향한 육당 최남선이 탑골공원 근처에서 마주쳤을 때 &amp;quot;오랜만이오. 만해.&amp;quot;라고 먼저 인사하자 그는 &amp;quot;당신이 누구요?&amp;quot;며 냉정하게 답하였다. 최남선이 &amp;quot;나는 육당이오. 나를 몰라보겠소?&amp;quot;라고 하자 만해는 &amp;quot;뭐, 육당? 그 사람은 내가 장례 지낸 지 오랜 고인이오.&amp;quot;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lt;br /&gt;
&lt;br /&gt;
=== 생애 후반 ===&lt;br /&gt;
==== 소설 집필 활동 ====&lt;br /&gt;
1931년 53세의 나이에 재혼에 뜻이 있어 동지들의 소개로 13살 연하의 유숙원(1892년~1965년)과 재혼하였다. 유숙원은 결혼하기 전까지 단성사 옆에 위치했던 진성당병원의 간호사로 일하였다.  1933년에 金漁 김벽산(金碧山)스님이 집터를 기증하자, 조선일보사장 [[방응모]], 박광 등 몇 분의 성금으로 절반의 비용을 지원받아 [[심우장]]을 짓기 시작하였다. 이때 총독부돌집을 마주보기 싫다고 북향으로 짓도록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다음 해에 딸 영숙(1934년 9월 1일)이 태어났으며, 1935년에 완공되자 입주하여 [[심우장]]에서 여생을 보내며 작품활동을 지속하였다.&lt;br /&gt;
&lt;br /&gt;
1935년 장편소설 《흑풍》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였다.《흑풍》에서는 검열을 피하기 위해  배경을 청나라를 무대로 하고, 억압에 대한 투쟁정신을 묘사하여 [[조선총독부]]에 대한 저항성을 은근히 보여주고 여성해방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삽입하여 반봉건 정신 및 여성도 인격체라는 견해를 설파하였다. 1936년 단재 [[신채호]]의 시신이 비밀리에 입국한 것을 접하고 [[방응모]]와 함께 신채호의 묘비건립과 정약용 서세100년기념회 개최에 참여했다. 1936년 《조선중앙일보》에 장편 《후회 後悔》를 연재하였다. 이러한 소설을 쓴 까닭은 원고료로 생활에 보탬을 얻기 위한 까닭도 있지만 그보다도 소설을 통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하려는 의도가 더 큰 것으로 이해된다. 1937년 불교관계 항일단체인 만당사건(卍黨事件)의 배후자로 검거, [[서대문형무소]]에 재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lt;br /&gt;
&lt;br /&gt;
1937년 4월 13일 서간도 독립운동단체의 지도자였던 김동삼이 경성감옥에서 사망하였다. 아무도 그의 시신을 거두거나 수습하려 하지 않았는데 한용운이 홀로 찾아가 통곡하며 시신을 수습하여 심우장에서 장례를 치루었다.&lt;br /&gt;
&lt;br /&gt;
==== 태평양 전쟁 전후 ====&lt;br /&gt;
석방 후 [[불교]] 혁신과 작품활동을 계속하였고 1938년에는 장편 《박명(薄命)》을 발표하였다. 1938년부터는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에 반대하여 학도병 거부 운동을 벌였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는 여러 장편 외에 장편소설인 《박명(薄命)》이 있고, 저서로는 시집《[[님의 침묵]]》을 비롯하여《[[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불교대전》,《불교와 고려제왕(高麗諸王)》등이 있다.&lt;br /&gt;
&lt;br /&gt;
그는〈[[님의 침묵]]〉 외에도《신인 문학》과《삼천리》에 시 '꿈과 근심', '실제 (實際)',《조광》에 수필 '최후의 5분간', [[조선일보]]에 장편소설 흑풍, 박명, 조선중앙일보에 소설 &amp;lt;후회&amp;gt;와 중편소설 &amp;lt;죽음&amp;gt; 등을 발표하였다.&lt;br /&gt;
&lt;br /&gt;
중일전쟁 이후로도 그는 계속 징용이나 보국대 또는 일본군을 찬양하는 글을 쓰지 않으며 강연도 하지 않았다. 또한 강연 협조 등도 거부하였다. 또한 1937년부터 강요된 신사 참배와 일장기 게양을 거부하고, [[조선총독부]]의 일본식 호적에 이름조차 올리지 않았다.&lt;br /&gt;
&lt;br /&gt;
만년에는 경성부 성북동의 [[심우장]]을 친히 지어 거처했는데, [[심우장]]은 후일 서울기념물 제7호로 지정되었다. 1939년 경상남도 사천군 다솔사(多率寺)로 내려가 회갑을 맞으면서 몇몇 동지들과 함께 자축연을 가졌다. 다솔사는 당시 민족독립운동을 주도하던 본거지였다.&lt;br /&gt;
&lt;br /&gt;
==== 사망 ====&lt;br /&gt;
1940년 5월부터는 창씨개명 반대운동을 하였고 1943년에는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말년에는 [[방응모]], 정인보, [[안재홍]], 홍명희, [[김성수]], 만공 등과 교류하며 그들이 보내주는 생활비로 어렵게 생활하였다. 일제의 극심한 탄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비타협적인 독립사상을 견지하다가, 성북동 집인 [[심우장]]에서 냉방으로 생활하였다.&lt;br /&gt;
&lt;br /&gt;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한 만해의 생계는 그의 친구인 [[안재홍]], [[방응모]], [[김성수]], 송진우, 조만식, 최남선, [[이광수]], 윤치호 등이 십시일반으로 부담해주었다. 말년에 중풍으로 고생하였지만  1944년 6월 28일 [[조선총독부]]의 특별 훈련으로 공습경보가 발령되었을 때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후 계속 혼수상태로 있다가 1944년 6월 29일 [[심우장]]에서 입적하였다.&lt;br /&gt;
&lt;br /&gt;
그가 사망하였던 1944년은 일본 제국이 패망하기 1년 전이자 광복을 1년 앞두고 있던 때라 그토록 염원하던 조국의 독립은 끝내 생전에 보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가 사망한 지 1년 후인 1945년 8월 15일에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일본 제국이 패망하게 되면서 대한민국이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 사후 ==&lt;br /&gt;
[[파일:한용운흉상.jpg|섬네일|250px|만해의 흉상]]&lt;br /&gt;
* 사망한지 1년 후인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면서 조선은 광복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한용운 본인은 1년 전에 고인이 되었기 때문에 그토록 염원하였던 광복의 모습은 보지 못하였다.&lt;br /&gt;
* 동지들에 의하여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미아리 사설 화장장에서 다비된 뒤 망우 역사 문화공원에 유골이 안치되었다. 후일 그 옆에는 부인 유숙원 여사의 묘소가 오른편에 매장되었다.&lt;br /&gt;
* 그는 문학을 전문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님에 대한 그리움과 곧은 지조를 표현한 작품들을 통해 해방후에도 인기를 끌게 되었다. 그후 문인, 저항 시인, 대처승, 출가 승려로만 인식되다가 1960년대부터는 그의 독립운동 역사가 학자들에 의해 재조명 받기 시작했다.&lt;br /&gt;
*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려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lt;br /&gt;
* 1967년 그가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던 탑골공원에는 후에 승려 운허에 의해 《용운당 만해 대선사비》(龍雲堂 萬海 大禪師碑)가 세워졌다.&lt;br /&gt;
* 고향인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남산공원에 동상이 세워졌고 홍성읍내 장터에도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lt;br /&gt;
* 1973년 신구문화사에서 《만해 전집》6권이 간행되었다.&lt;br /&gt;
* 그의 결성면 성곡리 박철동 잠방굴마을 생가지는 1989년 12월 24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75호로 지정되었다.&lt;br /&gt;
* 1990년에 생가가 복원되고 기념관이 건립되었다.&lt;br /&gt;
* 1991년에는 만해의 업적을 기리는 만해학회가 설립되었다.&lt;br /&gt;
* 그밖에 만해기념관, 만해사상선양회 등이 세워졌다.&lt;br /&gt;
*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에는 만해문학박물관이 건립되었다.&amp;lt;ref&amp;gt;[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426287 네팔 민주화·문학의 뿌리는 불교?]&amp;lt;/ref&amp;gt;&lt;br /&gt;
* 후에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만해 생가지에는 생가복원에 이어 사당을 건립하고 안내판을 설치하였다.&lt;br /&gt;
&lt;br /&gt;
== 작품성 ==&lt;br /&gt;
시와 작품에 있어 퇴폐적인 서정성을 배격하였으며 조선의 독립 또는 자연을 부처님에 빗대어 불교적인 '님'으로 형상화했으며, 고도의 은유법을 구사하여 [[조선총독부]]나 일제 정치에 저항하는 민족정신과 불교에 의한 중생제도(衆生濟度)를 노래하여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검열을 교묘하게 피하였다. 여기에서의 님은 보는 관점에 따라 조선의 독립, 자연, 부처님 혹은 이별한 연인 등으로도 해석이 가능한 어법을 구사하였다.&lt;br /&gt;
&lt;br /&gt;
그는 대표작 [[님의 침묵]]을 비롯한 시집, 작품집에서 중심을 이루고 있는 '님'은 연인·조국·부처 등 다의적인 의미를 지니며 그에 따라 '님의 침묵'이라는 표현은 당시의 민족적 상황을 은유적으로 상징하였다. 또한 세속적인 정감의 진솔성이 불러일으키는 인간적 설득력과 함께 세속적인 사랑을 표출하면서도 세속사의 진부함에 떨어지지 않으며 목소리 높여 민중정신을 강조하지도 않는다는 작품평도 있다.&lt;br /&gt;
&lt;br /&gt;
그는 당시 상황을 시적 주체인 '나'가 님과 이별하여 님이 부재하고 침묵하는 시대로 규정하면서도, 님은 이 자리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나'는 진정으로 님의 존재를 깨닫게 된다는 변증법적인 진리 또는 부처에 대한 믿음, 이별한 연인에 대한 애정을 확신, 재다짐하는 것을 드러내고, 새로이 '나'는 이 자리에는 계시지 않는 님 또는 돌아올 님과 다시 합일될 수 있다는 뜻을 노래한다. 또한 내가 님과 새로이 만나기 위해서 나는 님이 존재하지 않지만 님에 대한 의리와 절개를 지키고 님에 대한 철저한 복종이 요구되는데, 그 절개와 의리, 복종을 통해서 비로소 '님'에 대한 신의도 지키면서 한편으로 '나'는 자유로워진다는 '복종과 자유의 변증법'을 노래한 것은 역사의 필연성의 인식을 통해 진정한 자유를 획득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출한다. 그는 식민지 하에 있는 조국의 운명과 독립의 필연성 또는 오지 아니한 극락세계와 다시 만나게 되는 그 날, 그리고 그 날을 위한 실천, 변함없는 믿음을 통해 진정한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는 진리를 작품들을 통해 형상화, 승화시켰다.&lt;br /&gt;
&lt;br /&gt;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그의 시는 오언절구나 칠언절구, 3.4조 등 당시 조선의 시조, 시의 형식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산문시의 전형이 되었다. 은유와 역설의 자유로운 구사를 보여주며, 정형적인 틀을 완전히 벗어난 산문적 개방 속에서도 내재율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근대 자유시의 완성에도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lt;br /&gt;
&lt;br /&gt;
== 저서 ==&lt;br /&gt;
* 《불교대전 (佛敎大典)》(1913년)&lt;br /&gt;
* 《[[조선불교유신론]] (朝鮮佛敎維新論)》(1913년)&lt;br /&gt;
* 시집 《심》&lt;br /&gt;
* 시집 《[[님의 침묵]]》&lt;br /&gt;
* 《유마힐소설경강의 維摩詰所說經講義》(1933년)&lt;br /&gt;
* 《십현담주해 (十玄談註解)》&lt;br /&gt;
* 《불교와 고려제왕 (高麗諸王)》&lt;br /&gt;
* 《조선독립의 서 (朝鮮獨立之書)》&lt;br /&gt;
&lt;br /&gt;
=== 번역서 ===&lt;br /&gt;
* 《정선강 채근담》&lt;br /&gt;
&lt;br /&gt;
=== 소설 ===&lt;br /&gt;
* 《흑풍》(1935년)&lt;br /&gt;
* 《후회》(1936년)&lt;br /&gt;
* 《박명 (薄命)》(1938년)&lt;br /&gt;
* 《죽음》&lt;br /&gt;
&lt;br /&gt;
=== 시 ===&lt;br /&gt;
* 시 '꿈과 근심'&lt;br /&gt;
* '실제 (實際)'&lt;br /&gt;
* '나룻배와 행인'&lt;br /&gt;
* 님의 침묵&lt;br /&gt;
* 수의 비밀&lt;br /&gt;
* 사랑하는 까닭&lt;br /&gt;
&lt;br /&gt;
=== 수필 ===&lt;br /&gt;
* 《최후의 5분간》&lt;br /&gt;
&lt;br /&gt;
== '''사상과 신념''' ==&lt;br /&gt;
그는 모든 중생은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불경의 사상을 인용하여 이를 현대적 자유사상에 연관시켜 생각하였다. 그는 이것이 만인의 평등사상을 설파하였다.&lt;br /&gt;
&lt;br /&gt;
=== 불교 사회혁신주의와 보편화 ===&lt;br /&gt;
만해의 불교 사상은 흔히 불교사회혁신주의로 요약된다. 그는 조선의 민중이 역사 이래로 지배자들로부터 억압과 수탈을 당해왔음을 인식하고 [[불교]]가 민중을 구제하거나, 아니면 현실에서 민중들을 위로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하였다. 저서인 《[[조선불교유신론]]》에서 그는 불교혁신론을 주장하였고, 산사로 들어가 고결한 이상만을 추구하는 점을 비판하고, 한국불교의 침체와 낙후성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개혁을 주장하였다. 그는 [[불교]]사상이 자유주의, 평등주의, 구세주의, 진보적 입장에 서야 함을 역설했다.&lt;br /&gt;
&lt;br /&gt;
그는 어떠한 진리와 진실을 대중에게 강요하지 않는 [[불교]]가 미래의 인류문명에 가장 적합한 교리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조선에서는 고결한 이상만을 추구하거나 산에 들어가 낙후성을 면하지 못하고 있음을 비판하였다. 그는 사원운영의 혁신을 주장하는 내용에서 불교의 대중화·민중화라는 기본사상이 도출되어 나온다. 그는 불교의 민중화를 위해 불교 교리와 제도, [[불교]] 재산을 일부 고위층 승려들, 간부 승려들이나 종단이 독식하지 말고 민중화, 사회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lt;br /&gt;
&lt;br /&gt;
그는 청년불교를 제창하고 젊은이들의 불교 포교 및 불교 부흥을 위해 노력했고 《불교대전》 등 불교경전의 한글 번역작업에 착수했으며, 금강경, 화엄경 등 불교 서적의 한글 번역과 불교 서적의 해석서, 해석 칼럼과 논문 등을 발표하였다. 한편으로 《불교교육 불교한문독본》, 《정선강의 채근담 (精選講義菜根譚)》의 편찬에 참여하고 불교잡지인 《[[유심]]》, 《불교》 등의 잡지 간행에 힘쓰며 불교학교와 강연회를 주최하는 등 불교의 대중화, 보편화를 위해 노력했다.&lt;br /&gt;
&lt;br /&gt;
=== 대처승 운동 ===&lt;br /&gt;
또한 그는 생활불교가 되려면 독신이 아니라 생산적인 부부관계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승려는 결혼하면 안된다는 것이 편견이라 주장하고, 승려의 취처(聚妻)를 허락할 것 등을 주장했다. 대중의 결혼생활, 가장이라는 짐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대중의 입장을 이해하겠느냐는 것이다.&lt;br /&gt;
&lt;br /&gt;
그는 승려의 결혼이 [[불교]] 교리에 어긋나지 않음을 주장하였고, 원효 등 대처승의 사례를 소개하기도 했다. 결혼의 타당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그는 윤리적·생물학적 여러 논거를 제시하였다.&lt;br /&gt;
&lt;br /&gt;
한편 그의 대처승 허용 운동, 승려의 결혼 허가 주장에 대해 [[불교]]계에서는 부정적으로 바라봤다. 해방 직후에도 조계종 단에서는 만해가 승려의 결혼 자유화를 주장하고, 그 자신도 그것을 실천하였기에 더욱 거북스러운 존재였다. 다만 일부 불교개혁을 추구하였던 운동권 승려의 그룹에서, 불교청년운동을 하는 재가불교청년단체에서 만해를 찾았을 뿐이다.&amp;lt;ref&amp;gt;김광식, 《만해 연구》 (동국대학교출판부, 2011) 24쪽&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불교 사회 혁신 주의와 도시화 ===&lt;br /&gt;
사원운영에 있어서 그는 염불당(念佛堂)의 폐지와 도시에 사찰 건립을 할 것을 주장하였다. 근본교리에 비추어볼 때 우주에 편재(遍在)한 법신불(法身佛)이 신앙의 대상이 되는 것이지, 결코 특정한 신앙대상이 따로 없는 것이라 보았다.&lt;br /&gt;
&lt;br /&gt;
그는 특히 법당은 산사라는 개념에 반대하였다. 사찰은 사람이 사는 곳에 있어야 하는 것이라는 점이 한용운의 지적이었다. 기존의 염불당 등과 교리에 얽매이는 허례적인 의식들을 타파하고 산중에 있는 절이 도시로 나올 것, 도시로 나와서 여러 국민들과 직접 만나고 직접 면담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승려들도 노동을 할 것을 주장했다. 최소한 사찰 주변에 땅을 마련하여 자기가 먹을 쌀과 곡식은 스스로 만들며 불자들의 시주에만 의존하는 그릇된 사상을 버리라고 촉구했다. 그는 승려들도 사취(詐取)와 동냥질을 그만두고 스스로 생산활동에 참여할 것을 호소했다.&lt;br /&gt;
&lt;br /&gt;
불교사상의 측면에서 중관론(中觀論)에 기초해 소승적인 소극주의나 현세부정적인 불교를 비판하고 중생의 삶에 참여하고 뛰어들라고 촉구했다. 한용운은 곧 중생의 삶과 일상에서 정토를 구하고, 정토로 인도하자고 역설하였다.&lt;br /&gt;
&lt;br /&gt;
==== 불교조직 혁신론 ====&lt;br /&gt;
[[일제강점기]] 후반 [[조선총독부]]의 조선사찰령 발표에 반대하였다. 총독부는 사찰들이 무분별하게 운영된다는 것을 핑계로 조선사찰령의 발표 이후 거의 모든 사원의 운영권이 총독부의 직속 관리하에 들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통일종단의 조직, 규약, 재정확보 등을 일원화시켜 [[조선총독부]]의 관리 감독과 간섭 의도를 무너뜨려야 한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현행의 본말사제도(本末寺制度)를 그냥 두되 중앙에 통제기구를 신설하자는 것이었다.&lt;br /&gt;
&lt;br /&gt;
김법린(金法麟) 등을 중심으로 하는 혁신불교파가 세운 불교총무원에서는 이를 그대로 수용하였다. 비록, 당시 승려들의 개혁 의지가 뒷받침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반대와 비방에 시달리렸지만 이는 불교행정조직의 좌표를 제시한 것이었다.&lt;br /&gt;
&lt;br /&gt;
=== 조선불교 독립 운동 ===&lt;br /&gt;
그는 조선 불교가 일본 불교에 편입되는 것을 반대하고 저항하였다. 1910년말 원종(圓宗) 종무원 이회광이 불교확장이란 미명하에 일본에 가서 조선의 원종이 일본 조동종과 완전히 연합, 동맹할 것 등을 협약하고 오자, 1911년 한용운은 석전 박한영, 백용성 등과 이회광 규탄 및 승려궐기대회를 개최해 이회광을 종문난적(宗門亂賊)으로 규정하면서 원종에 대응되는 임제종(臨濟宗)을 창립한 것은 그의 대표적인 불교자주화운동이다.&lt;br /&gt;
&lt;br /&gt;
그의 불교자주화운동은 1931년 결성된 조선불교청년총동맹의 이면단체였던 만당활동 등으로 이어졌다. 그는 조선불교청년총동맹의 긴급한 사명으로서 정교분립(政敎分立)과 불교통일의 촉진, 불교의 사회적 진출을 강조하였다. 한편으로 그는 정교분립을 주장하기도 했는데, 이는 종교를 정부 혹은 체제의 하수인으로 삼으려는 조선총독부 학무국 정책에 반대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lt;br /&gt;
&lt;br /&gt;
== 연보 ==&lt;br /&gt;
* 1879년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출생&lt;br /&gt;
* 1905년 강원도 인제군 백담사에서 수계&lt;br /&gt;
* 1906년 명진학교 입학&lt;br /&gt;
* 1908년 명진학교 졸업&lt;br /&gt;
* 1908년 조동종대학림에서 연구&lt;br /&gt;
* 1911년 박한영 등과 친일불교에 맞서 승려대회 개최&lt;br /&gt;
* 1918년 청년계몽운동지 [[유심]]지를 창간,주재&lt;br /&gt;
* 1919년 3월 1일 (→ [[3.1 운동]]) 불교 대표로 독립 운동에 참가&lt;br /&gt;
* 1919년 ~ 1921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3년간 감옥살이&lt;br /&gt;
* 1924년 불교청년회 회장, 총재&lt;br /&gt;
* 1926년 시집 &amp;lt;[[님의 침묵]]&amp;gt; 출판&lt;br /&gt;
* 1927년 [[신간회]] 중앙위원회 위원&lt;br /&gt;
* 1928년 [[신간회]] 경성지부장&lt;br /&gt;
*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 민중대회 개최&lt;br /&gt;
* 1931년 만당 당수&lt;br /&gt;
* 1931년 월간 불교지를 인수, 2년 간 간행&lt;br /&gt;
* 1944년 서울 [[심우장]]에서 중풍으로 사망&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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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 평가와 비판 ==&lt;br /&gt;
민족독립, 불교유신, 자유문학의 3대 사상가로서 절의의 행적을 남겼다. 강렬한 현실비판 등 현세에서의 실천을 강조한 그의 혁명사상을 가졌다는 평가가 있다. 그가 불교이념에 의한 자유, 평등의 국가사회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하였다는 평가도 있다. 한편 자유민주주의, 비폭력 무저항주의, 민족자결주의 등에 입각한 소극적, 관념적인 차원에 머물렀다는 시각도 있다.만해 한용운은 대단한 독립운동가다. 스님이면서 독립운동에도 힘썼다. 또 독립 운동을 할 때 같이 했던 동지들이 창씨개명 등 일본이 억지로 권유한 것을 하기라도 하면 차갑게 외면했다.&lt;br /&gt;
&lt;br /&gt;
== 기타 ==&lt;br /&gt;
* 승려의 결혼 허용 주장은 1920년대 1930년대 화제가 되어 사회적 이슈거리와 논란이 되었다.&lt;br /&gt;
* 친하던 벗 또는 호형호제하던 사이로는 이시영(李始榮), 백용성, 최남선, 최린, 김동삼(金東三), [[방응모]], [[신채호]], [[김성수]], [[안재홍]], 송진우, 정인보(鄭寅普), 김규식, 박광(朴珖), 홍명희, 만공 송월면(宋月面), [[이광수]], 김일엽, 최범술(崔凡述) 등이 있었다.&lt;br /&gt;
* 그의 제자 중에는 춘성도 있었다. 춘성 역시 일제강점기의 대표적 반일 인사이자 해방 후에도 승려로 활동하였다.&lt;br /&gt;
* 그의 아들 한보국은 일제강점기의 사회주의자이자 해방 후에는 남로당 당원으로 활동하다가 월북하였다. 1980년대까지 그에게는 아들이 한 사람 있었다는 것 이외에는 아들과 본부인 전정숙의 존재는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다.&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 /&amp;gt;&lt;br /&gt;
&lt;br /&gt;
== 참고 문헌 ==&lt;br /&gt;
* 김광식, 《한용운 연구》 (동국대학교출판부, 2011)&lt;br /&gt;
* 윤재근, 《님의 침묵 연구》 (민족문학사, 1985)&lt;br /&gt;
* 김재홍, 《한용운문학연구 1》 (일지사, 1982)&lt;br /&gt;
* 송욱, 《님의 침묵:전편해설》 (과학사, 1973)&lt;br /&gt;
* 박노준·인권환, 《한용운 연구》 (통문관, 1960)&lt;br /&gt;
&lt;br /&gt;
== 외부 링크 ==&lt;br /&gt;
* [http://www.manhae.or.kr/ 만해기념관 홈페이지]&lt;br /&gt;
* [http://wwww.peace21.org/today_column_board/18492 만해 한용운과 아들 한보국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 부자, 애국애족만은 부전자전]]&lt;br /&gt;
*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amp;amp;search_div_id=CP_THE006&amp;amp;cp_code=cp0525&amp;amp;index_id=cp05250499&amp;amp;content_id=cp052504990001 승려결혼을 주장한 한용운]&lt;br /&gt;
* [https://web.archive.org/web/20131214035146/http://www.hongsung.net/tt/board/ttboard.cgi?act=read&amp;amp;db=city_people&amp;amp;page=1&amp;amp;idx=3 한용운:홍성넷]&lt;br /&gt;
*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8/08/01/200808010500005/200808010500005_2.html 민족대표 33인 한용운과 박희도:“독립의 영(榮), 변절의 욕(辱), 모두 산 자들의 짐인 것을…”]&lt;br /&gt;
* [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C%9A%A9%EC%9A%B4 한용운-위키백과]&lt;br /&gt;
&lt;br /&gt;
[[분류:감자]]&lt;/div&gt;</summary>
		<author><name>Nsgjjsjsjy02</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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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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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Nsgjjsjsjy02: /* 가족 관계 */&lt;/p&gt;
&lt;hr /&gt;
&lt;div&gt;{|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width:100%&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0%&amp;quot;|사진&lt;br /&gt;
|[[파일:한용운.jpg|center|200픽셀]]&lt;br /&gt;
|+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lt;br /&gt;
|+ style=&amp;quot;caption-side:bottom;text-align:left:&amp;quot;|출처: 위키백과&lt;br /&gt;
|법명||용운(龍雲)&lt;br /&gt;
|-&lt;br /&gt;
|출생||1879년 8월 29일 조선 충청도 결성현 현내면 박철리 잠방골&lt;br /&gt;
|-&lt;br /&gt;
|입적||1944년 6월 29일 일제강점기 경성부 동대문구 성북정 [[심우장]]&lt;br /&gt;
|-&lt;br /&gt;
|입적원인||중풍&lt;br /&gt;
|-&lt;br /&gt;
|거주지||일제강점기 경성부 동대문구 성북정 심우장&lt;br /&gt;
|-&lt;br /&gt;
|국적||대한민국&lt;br /&gt;
|-&lt;br /&gt;
|속명||한정옥(韓貞玉)&lt;br /&gt;
|-&lt;br /&gt;
|경력||신간회 중앙위원장&lt;br /&gt;
|-&lt;br /&gt;
|종파||조계종&lt;br /&gt;
|-&lt;br /&gt;
|호||만해(萬海·卍海)&lt;br /&gt;
|-&lt;br /&gt;
|직업||승려, 시인, 독립운동가&lt;br /&gt;
|-&lt;br /&gt;
|배우자||유숙원(재혼), 전정숙(이혼)&lt;br /&gt;
|-&lt;br /&gt;
|자녀||한보국(아들), 한영숙(딸)&lt;br /&gt;
|-&lt;br /&gt;
|부모||한응준(부), 방숙영(모)&lt;br /&gt;
|}&lt;br /&gt;
&lt;br /&gt;
'''한용운'''(韓龍雲, 1879년 8월 29일 ~ 1944년 6월 29일)은 일제강점기의 시인, 승려,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청주 한씨. 호는 만해(萬海)이다. 불교를 통한 언론, 교육 활동을 하였다.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으며, 그것에 대한 대안점으로 불교사회개혁론을 주장했다.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이며 광복 1년을 앞둔 1944년 6월 29일에 중풍병사(입적)하였다. 독립선언서의 &amp;quot;공약 3장&amp;quot;을 추가보완하였고 옥중에서 '조선 독립의 서'(朝鮮獨立之書)를 지어 독립과 자유를 주장하였다.&lt;br /&gt;
&lt;br /&gt;
1910년 일본이 주장하는 한일불교동맹을 반대철폐하고 이회영, 박은식, 김동삼 등의 독립지사(志士)들을 만나 독립운동을 협의하였다. 1918년 11월부터는 불교 최초의 잡지인 《[[유심]]》을 발행하였고 1919년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을 하여 체포당한 뒤 3년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 풀려났다. 1920년대에는 대처승 운동을 주도하여 중에게도 결혼할 권리를 달라고 호소하기도 하였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 언론활동에 참여하였다. 1927년 2월부터는 [[신간회]]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과 이듬해 신간회 경성지부장을 지냈다.&lt;br /&gt;
&lt;br /&gt;
1918년 《[[유심]]》에 시를 발표하였고, 1926년〈[[님의 침묵]]〉등의 시를 발표하였다. 님의 침묵에서는 기존의 시와, 시조의 형식을 깬 산문시 형태로 시를 썼다. 소설가로도 활동하여 1930년대부터는 장편소설《흑풍》(黑風),《후회》,《박명》(薄命), 단편소설《죽음》등을 비롯한 몇 편의 장편, 단편 소설들을 발표하였다. 1931년 김법린 등과 청년승려비밀결사체인 만당(卍黨)을 조직하고 당수가 되었으나 1937년 불교관계 항일단체를 적발하는 과정에서 만당사건(卍黨事件)의 배후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저서로는 시집 《[[님의_침묵]]》을 비롯하여 《조선불교유신론》,《불교대전》,《십현담주해》,《불교와 고려제왕》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 생애 ==&lt;br /&gt;
==== 유년기 ====&lt;br /&gt;
조선전기 한명회 동생으로 전구서승(典廏署丞)을 지낸 서원군 한명진(韓命溍)의 이양공파 20대손이다. 한응준의 차남으로 태어났고, 그의 형은 한윤경(1860년~1929년)이다. 자필이력서와 승적부의 출생지는 충청남도 홍주군 주북면 옥동(玉洞)이다. [[3.1운동]] 후 재판 때 고향을 홍성의 '남문리'라고 답변하였다. 현재 출생지로 알려진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491번지는 그의 아들인 한보국의 제적등본에 따른 기록이다..&lt;br /&gt;
&lt;br /&gt;
==== 소년 시절 ====&lt;br /&gt;
16살 되던 해인 1894년부터 홍성읍내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고 전한다. 그 해에 음력1월부터 12월까지 갑오농민운동이 일어났고, 7월 25일에 청일전쟁이 발발하였다. 그의 부친 한응준은 홍주성에서 관군의 참모관으로 활약하며 동학농민군 방어에 성공하였으나 이듬해 병고로 사망하였다. 회고록에 의하면 18세인 1896년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 서울로 향하였다가 설악산 오세암에 입산하여 불교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그의 아들 한보국의 제적등본에 의하면, 부친의 3년상을 치른 후에 20살이 되던 해인 1892년 2월 10일 전정숙과 결혼하였다. 1904년 12월 21일 전정숙에게서 아들 한보국(1904년~1977년)을 얻었으나 그는 이미 강원도 백담사에서 출가를 하였다.&lt;br /&gt;
&lt;br /&gt;
==== 방랑 생활 ====&lt;br /&gt;
[[파일:청년기한용운.jpg|섬네일|오른쪽|200px|청년기의 만해]]&lt;br /&gt;
건양 1년인 1896년에 그는 설악산 오세암에 들어갔다. 후일 그는 '나는 왜 중이 되었나'라는 그 자신의 술회에 간략하에 언급하기를 세상에 대한 관심과 생활의 방편으로 집을 떠나 오세암에 입산하여 처음에는 머슴으로 일하다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고 한다. 출가의 원인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당시 고향 홍성군 홍주에서도 [[동학농민운동]]과 의병운동이 전개된 것으로 미루어 역사적 격변기의 상황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오세암에 머무르면서 그는 불교의 기초지식을 섭렵하면서 선(禪)을 닦았다.&lt;br /&gt;
&lt;br /&gt;
=== 대한제국(1897년~1910년)  활동 ===&lt;br /&gt;
==== 출가와 문학 ====&lt;br /&gt;
[[파일:만해기념관.jpg|섬네일|왼쪽|[[백담사]] 경내의 만해기념관]]&lt;br /&gt;
1905년 1월 26일 강원도 [[백담사]]에 가서 김연곡(金蓮谷)을 은사로 하여 정식으로 출가, 김연곡에게 득도한 다음 전영제(全泳濟)에게 계(戒)를 받아 승려가 되었고, 만화(萬化)에게서 법을 받았다. 계명은 '''봉완(奉玩)'''이며 '''법호는 용운(龍雲)이며, 후에 필명 및 아호는 만해(萬海·卍海)'''라 하였다. 이후 수년 간 불교활동에 전념했다. 이즈음에 불교 관련 서적뿐만 아니라 량치차오의〈음빙실문집 飮氷室文集〉등을 접하면서 근대사상을 다양하게 수용하였다.&lt;br /&gt;
&lt;br /&gt;
이 때를 전후해서 영환지략(瀛環志略)-서계여 저술,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양계초 저술 등을 읽고 세계동향을 알기 위해 세계여행을 계획하고 백담사에서 하산하여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건너갔으나 밀정으로 인하여 구사일생으로 귀국하였으나, 각처에서 의병 활동으로 어지럽게 되자 함경남도 안변 석왕사를 찾아가 암자에서 참선생활을 하였다.(삼천리 제6호 회고록)&lt;br /&gt;
&lt;br /&gt;
'''&amp;quot;「영환지략瀛環地略」이라는 책을 통하여 비로소 조선 이외에도 너른 천지 잇는 것을 인식하고 행장을 수습하여 원산을 거처서 서백리아에 이르러 몃 해를 덧업는 방낭생활을 하다가 다시 귀국하여 安邊釋王寺에 파뭇겨 叅憚 生活을 하엿다. 그러다가, 동양문명의 집산은 동경에서 되니 東京으로 갈 차로 이듬해 봄에 처음으로 서울에 발을 드려노앗다.&amp;quot;&amp;lt;삼천리 제5권 제9호 처음 서울 오든 때-회고록&amp;gt;'''&lt;br /&gt;
&lt;br /&gt;
1908년 명진학교(현 동국대학교) 보조과(일어과와 측량과) 수학 후 4월에 일본의 시모노세기, 교토, 동경, 닛고 등지를 주유하며 신문물을 시찰하였고, 동경 조동종대학(현 고마자와駒澤大學)의 아사다교수와 교유하여 불교와 서양철학을 수강하였다. 이 때에 유학 중이던 최린(崔麟), 고원훈, 채기두 등과 교류하였고 9월 귀국하였다. 10월 20일 일본의 조선 전국 사찰 대표 52인의 한 사람으로 서울 원흥사(元興寺)에서 원종종무원(圓宗宗務院)의 설립에 참여하였다. 12월 10일 서울에 경성명진측량강습소를 개설 소장에 취임하였다. 1909년 초에는 조선불교의 유신을 주장하는 논저《[[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하기 시작하였다(1913년 회동서관 간행).  1910년 한문으로 된 불경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 즉 불교의 대중화작업에 주력하였다.&lt;br /&gt;
&lt;br /&gt;
==== 승려들의 결혼 자유화 주장 ====&lt;br /&gt;
1909년 초부터 그는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을 집필하였고, 1910년 12월 8일 백담사에서 탈고하였다. 동시에 그는 [[백담사]]에서 거의 독학하다시피하며 대장경을 암송하고 한문과 인도어로 된 불교 경전들을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을 하였다. 한편 1910년부터 그는 승려의 결혼을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만해는 1910년 3월 승려의 결혼을 공식적으로 허락해 달라는 문건인 중추원 헌의서를 청원서 형식으로 대한제국 중추원에 제출하였고, 경술국치(한일합방) 이후 9월에는  [[조선총독부]] 통감부에 승려취처에 관한 건백서를 테라우치 통감에게 제출하였다. 승려에게 결혼을 금지하라고 부처님이 가르친 것은 아니라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lt;br /&gt;
&lt;br /&gt;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이 미혹을 떠나 깨달음을 얻고 악을 고쳐 선을 행하도록 바라셨으나, 중생의 끈기가 각기 달라서 부득불 천하에서 정을 제거하고 욕망을 끊어 버린 사실들을 모두 연설하였던 것이니, 각기 좋아하는 것을 좇아 인도하시고자 희망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계율에 있는 금혼은 본디 방편의 하나에 불과한 것일뿐, 불교의 궁극의 경지와는 거리가 먼 것이니 이를 제거한들 어찌 손상됨이 있겠습니까.&amp;lt;ref&amp;gt;김광식, 《한용운 연구》 (동국대학교출판부, 2011) 109쪽&amp;lt;/ref&amp;gt;'''&lt;br /&gt;
&lt;br /&gt;
대중의 결혼생활, 가장이라는 짐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중생들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승려의 결혼을 허가해 달라는 그의 주장은 그대로 묵살당한다.&lt;br /&gt;
&lt;br /&gt;
한일합방 직후 총독부가 조선인을 차별대우하고 일본인을 우대하자 그는 불만을 드러냈다. 만해의 제자였던 춘성 스님에 의하면 만해는 평소 조선총독부의 조선인 차별 정책에 대해 &amp;quot;왜놈의 머슴살이 같으니라구!&amp;quot;라며 불만을 토로하였다 한다.&lt;br /&gt;
&lt;br /&gt;
=== 일제강점기 활동 ===&lt;br /&gt;
==== 불교 사회 혁신 운동 ====&lt;br /&gt;
1910년  8월 29일에 한일 합방 조약이 체결된 이후로, 원종의 이회광이 일본과 맺은 한일불교동맹조약인 조동종맹약을 분쇄하기 위해 12월 광주 증심사로 내려갔다. 1911년 1월 석전 박한영, 진진웅, 김종래, 장금봉 등과 순천 송광사, 동래 범어사에서 승려궐기대회를 개최하여 일본의 조동종(曹洞宗)과 한국불교의 통합을 꾀한 이회광 등의 친일적인 불교행위를 규탄, 저지하였다. 송광사에 임제종 종무소를 설치하였고 조선임제종 종무원 관장에 취임하였다. 11월 서울에서 임제종 중앙포교당(조선선종포교당) 건립을 착수하였다. 그 해 6월 3일 일제가 한국불교를 억압하고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제정·공포한 법령인 사찰령이 공포되었고, 한국불교교단은 삼십본산연합사무소에 귀속되었다. 일제의 사찰령에 맞서 한국불교의 전통을 계승하려는 노력으로  1912년 4월 10일 중앙포교당이 준공되자 5월 26일 한용운, 백용성, 이화능 등 중앙포교당을 개설하였다.  6월 21일에 경서부 관청에 소환된 이후 이회광의 원종은 조선불교선교양종으로, 임제종은 조선선종중앙포교당으로 개칭되었다.&lt;br /&gt;
&lt;br /&gt;
1912년 9월 10일부터 10월 8일까지 만주 동북삼성(東北三省)을 방문하여 독립군의 훈련장을 순방하면서 그들에게 독립정신과 민족혼을 심어주는 일에 전력하던 중에 통화현 굴라재에서 일진회 첩자로 오해를 받아 목에 총을 맞고 마취없이 '''총알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은 후 귀국하여 동래부 범어사로 내려갔다. 1913년 2~3월에 조선불교월보 13호, 14호에 조선불교유신론 9장 ‘승려의 단결’편을 간행전 기고했다. 필명을 '''만해생(萬海生)으로 문헌상 처음으로 만해'''라는 아호를 사용하였다. 5월 25일에 조선불교유신론을 회동서관에서 출판하였다.&lt;br /&gt;
&lt;br /&gt;
1914년 4월 서울에 유학 온 불교 '고등강숙' 학생들이 불교를 발전시키려는 목적으로 설립한 단체인 '''조선불교강구회(朝鮮佛敎講究會)''' 총재에 취임하였다.&lt;br /&gt;
&lt;br /&gt;
경전을 대중화하기 위해 불교대전을 편찬할 계획으로 양산 통도사에 보관된 고려대장경을 열람하였고, 4월 30일 범어사에서《불교대전 (佛敎大典)》을 간행하였다. 대승불교의 반야사상(般若思想)에 입각하여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계의 각성과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lt;br /&gt;
&lt;br /&gt;
8월에 조선불교회 회장에 취임하였다. 불교의 문제점을 해결하고 불교유신을 직접 수행하고자, 30본산 주지들을 배제하고, 승려와 신도를 융합한 통일기관을 창립하였다. 그러자 30본산 주지들의 반발로  '''불교동맹회'''로 개칭하여, 서울 낙원동에 본부를 두겠다고 경성북부경찰서에 9월10일경 신고했으나, 30본산 주지의 권한을 벗어났다며 등록 거부 당하였다, “'''고등강숙'''”의 학생들이 만해를 따르자, 이회광은 공문을 보내 상경을 막으려다 결국 학교를 폐쇄시켰다.&lt;br /&gt;
&lt;br /&gt;
1915년 6월 20일 청나라 승려 내림(來琳)의 증보본에 의거하여 정선강의 《채근담》 국한문 혼용체 주해본을 저술하였다. 10월에 조선선종 중앙포교당 포교사에 취임하여 계몽활동, 근대화 필용성,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15년 개교한 중앙학림 학생들이 만해를 따랐다. 불교강구회, 각황사 등에서 강연하였다.&lt;br /&gt;
&lt;br /&gt;
==== 불교포교 대중화와 선교진흥론 ====&lt;br /&gt;
1914년에는 [[불교]] 포교의 보편화 대중화를 선언하고 조선불교청년동맹(朝鮮佛敎靑年同盟)을 결성하였다. 조선불교청년동맹의 강령을 손수 지었는데 이를 보면, 첫째로 정교분리(政敎分離), 둘째로는 여러 불교 종단의 통일 또는 연합, 셋째 불교와 사찰의 사회적 진출의 필요 등을 제시하였다. 이는 대중불교의 확산을 위하여 그 출발점을 청년 운동으로 삼아야 한다는 그의 실천행이었다. 그는 불교 포교가 보편화되려면 일단 청년들에게 침투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천주교와 개신교의 선교 활동, 동학의 포교 확산, 사이비 종교 등의 확산에 긴장한 그는 불교 역시 대중에게 침투하여야 함을 역설하고 불교가 중생의 곁에 가장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으로 청소년과 청년층을 공략하는 것을 들었다. 그는 불교의 보편화 운동의 실천을 위하여 '승려에서 대중에로', '산간에서 길가로' 등을 내걸었다.&lt;br /&gt;
&lt;br /&gt;
또한 불교 포교의 대중화를 위해서는 교단, 종단간의 갈등을 줄이고 협력하자는 주장을 펼쳤다. 이는 선교진흥론(禪敎振興論)으로 발표되었다. 그에 의하면 불교의 진흥을 위한 필수불가결의 요건은 수행 이상을 확립하는 일이라 하였다. 이에 한용운은 지금까지 조선의 불교는 오교구산과 선교양종이니 해서, 마치 교의(敎義)와 종지(宗旨)가 다른 것처럼 잘못 인식되어 왔다. 선과 교의 본질은 하나이다. 왜냐하면, 선이란 불교의 마음이며, 교란 불교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양자는 서로 배치되는 개념이 아니며, 양자의 이론적 합일과 연대의 실천이 불교 진흥, 포교 확산의 관건이라고 주장하였다. 동시에 한용운은 선원(禪院)이나 강원(講院)의 지도 이념이나 이론, 실수(實修) 등에 있어 외전(外典)도 첨가해야 한다, 그리고 속된 것을 전적으로 배격하지 말 것을 호소하였다. 그는 선교일치를 주장해온 조선 불교의 일승정신(一乘精神)이 새로운 시대의 좌표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lt;br /&gt;
&lt;br /&gt;
==== 불교 경전의 한글화 ====&lt;br /&gt;
만해는 1910년부터 대장경과 화엄경 등을 비롯한 불교 경전의 내용을 한글로 번역하여 소개하였다. 1930년대 이후에도 그는 불교 경전의 한글화를 주장했다. 경전의 내용이 한문이나 산스크리트어이기에 일반 중생이 읽기에는 너무 힘들다, 어렵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대장경의 한글 번역이다. 현대포교의 요체는 문서에 의한 홍포였다.&lt;br /&gt;
&lt;br /&gt;
그는 아무리 좋은 말씀도 이해를 하지 못하면 무용지물이라 주장하였다. 불교 경전의 대부분이 한문으로 되어 있어서 일반인이나 문맹률이 높던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읽고 이해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방대한 대장경을 쉽게 옮기는 일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불교의 교리와 활동, 고승 등에 대한 내용을 한글로 표현했으며 《불교대전》에는 대장경 등의 내용을 한글로 해석하였는데 이는 바로 그와 같은 시도의 결정이다. 대장경의 요지를 발췌하여 대의를 옮겨 적은 불교대전은 20세기 한국 불교이론서와 《불교성전》들의 효시가 되었다. 그밖에도 그는 불교학 진흥과 포교의 활성화를 위하여서는 각종 금석문(金石文)이나 사장된 자료들이 일반에 소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lt;br /&gt;
&lt;br /&gt;
==== 잡지 발행 ====&lt;br /&gt;
1918년 9월 1일  제자 춘성 등과 함께 월간 불교잡지《[[유심]]》을 창간하여 12월까지 3권을 발행하고 중단되었으나, 이 잡지를 통해 불교 논설만이 아니라 계몽적 성격을 띤 글을 발표했고, 또 신체시를 탈피한 신시〈심 (心)〉을 발표하여 문학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는 당시 조선불교의 침체와 낙후성과 은둔주의를 대담하고 통렬하게 분석과 비판을 한 저서 &amp;lt;[[조선불교유신론]]&amp;gt;을 발표하여 사상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lt;br /&gt;
&lt;br /&gt;
월간 유심지에서 그는 시 '심 (心)'과 수필 고학생, 남모르는 아이들을 발표하는 등 불교의 보편화와 친숙화를 꾀한다. 불교의 홍보, 포교와 함께 계몽, 자각, 자유정신,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논설들을 다수 실은 월간지 [[유심]]은 뒷날 그가 관계한《불교》잡지와 함께 가장 괄목할만한 문화사업의 하나가 되었다.&lt;br /&gt;
&lt;br /&gt;
==== 3.1 만세 운동과 투옥 ====&lt;br /&gt;
[[파일:3.1운동한용운.jpg|섬네일|210px|오른쪽|1920년 7월 2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 3.1 운동에 참가한 민족대표 48인 공판에 관한 기사, 다섯째 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한용운]]&lt;br /&gt;
1918년 12월에 발표한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감동하여 1919년 1월부터는 전국적인 만세 운동 준비에 참여하고, 백용성 등과 함께 [[불교]] 지도자들을 소집하여 손병희 등 천도교 지도자들과 이상재 등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과 회합하였다. 그는 독립선언문의 내용을 둘러싸고 최남선과 의견충돌을 하였다. 내용이 좀 더 과감하고 현실적이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으나, 최남선 등은 만해의 주장이 급진적이고 과격하다며 반대했고 결국 만해가 제시한 조건들 중 마지막의 행동강령인 공약 제3조 '최후의 일인까지 쾌히 우리의 의사를 발표하자' 만이 수용, 독립선언서에 수록되었다.&lt;br /&gt;
&lt;br /&gt;
1919년 [[3.1 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고,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으며 일설에는 용성 스님의 도장도 그가 찍었다 한다. 경성 탑골공원에서 독립 선언서 낭독과 만세 운동에 가담했다가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었다. 민족대표자들은 평화 시위를 기획하였는데 시위는 격화되었고, 민족대표자들은 자수를 결심한다. 이종일의 회고에 의하면 &amp;quot;수감 중 만해는 일제의 고문 및 위협에 벌벌 떠는 나약한 민족대표들에게 인분을 퍼부었다.&amp;quot;고 한다.&amp;lt;ref name=&amp;quot;:1&amp;quot;&amp;gt;김광식, 《만해 연구》 (동국대학교출판부, 2011) 315쪽&amp;lt;/ref&amp;gt;&lt;br /&gt;
&lt;br /&gt;
그는 만세운동을 진행하던 중 탑골공원에서 총독부 경무국 순사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어 피신한 다른 민족대표자들이 자수함으로써 바로 [[서대문형무소]]로 넘겨지고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받고 복역하였다.&lt;br /&gt;
&lt;br /&gt;
==== 수감과 석방 ====&lt;br /&gt;
한편 체포된 만해는 동대문 시장에 투옥되어 복역하며 재판을 받았다. 이때 옥중에서 변호사는 물론 사식과 보석을 거부할 것을 결의하고 수감생활을 한다. 그리고 옥중에서 '조선독립의 서'를 집필하다가 발각되어 결국 원본을 형사에게 제출했다. 그러나 만해는 한편으로 '조선독립의 서'를 일본인 서울지방법원 검사에게 제출하기 이전에 일부를 휴지에 작은 글씨로 옮겨 적었다. 그리고 그것을 접어 형무소 밖으로 나가는 의복의 갈피에 집어넣었다. 이렇게 외부로 나온 그 선언서는 상해까지 전달되었다.&amp;lt;ref&amp;gt;김광식, 《만해 연구》 (동국대학교출판부, 2011) 332쪽&amp;lt;/ref&amp;gt; 그것은 인간의 권리와 자유와 평등에 대한 길을 가로막는 어떠한 형태의 무력, 군사력, 압제 정치는 결국 스스로의 덫에 걸려 스스로 패망하게 되리라는 내용이었다. 옥중에서 작성한 '조선독립의 서'는 종이를 노끈처럼 말아 유일하게 그의 옥바라지를 하던 제자 춘성 스님을 통해 상하이로 보내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 1919년 11월 4일의 기사 부록에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대요'라는 제목으로 발표, 보도되었다.&lt;br /&gt;
&lt;br /&gt;
1921년 12월 22일 [[3.1운동]] 민족대표자 최린, 함태영, 오세창, 권동진, 이종일 등과 함께 가출옥되자 많은 면회객이 찾아왔다. 그런데 그가 인사를 하는 것을 보고 면회객들은 이상하게 여겼다. 이에 만해는 자신을 마중하러 나온 인사들에게 &amp;quot;너희들은 이런 출옥의 인사를 할 줄은 알고, 인사를 받을 줄은 몰랐더냐?&amp;quot; 하고 대성질타하였다.&amp;lt;ref&amp;gt;김광식, 《만해 연구》 (동국대학교출판부, 2011) 322쪽&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출옥 후에는 언론에 칼럼을 발표하는 동시에 1922년부터 1923년까지 민립대학 설립운동과 물산장려운동 등의 민족운동에도 참여했다. 이 기간 중 그는 [[김성수]], 조만식, [[안재홍]], [[이광수]], [[방응모]] 등을 만나 인맥을 쌓기도 했다. 글 못지않게 연설가로서도 남다른 능력을 지니고 있던 그는 1922년 5월 전조선학생대회 주최로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강연회가 개최되자 3인의 종교 지도자의 한 사람이자 연사의 1인으로 초빙되었다. 대회가 열린 날 두 번째 연사로 나선 만해가 강연하자 청중이 열광하여 결국 다음 사람이 강연을 포기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1922년 9월 잡지《개벽》에 옥중시 '무궁화 심으라'를 발표하였다.&lt;br /&gt;
&lt;br /&gt;
==== 사회 단체 활동과 님의 침묵 ====&lt;br /&gt;
1922년 출옥 후에도 일본경찰의 감시 아래에서 강연 등 여러 방법으로 조국독립의 열변을 토하였다. 1920년대에 부인이 있는 대처승이 속인들에게 사이비 중이라고 모욕을 당하는 것을 보고 대처승 운동을 주도하여 중에게도 결혼할 자격을 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1924년부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논설위원을 겸하며 계몽, 사회 참여를 촉구,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칼럼을 송고하였다.&lt;br /&gt;
&lt;br /&gt;
1923년 1월 [[동아일보]]에 논설 '조선 급(及) 조선인의 번민(煩悶)'을 발표한다. 1924년 1월 6일 조선불교청년회 초대 총재에 취임하며 청년조직을 항일운동에 걸맞게 바뀌었다.&lt;br /&gt;
&lt;br /&gt;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다. 5월15일 &amp;lt;십현담주해&amp;gt;를 법보회에서 발행, 5월 20일 &amp;lt;[[님의 침묵]]&amp;gt;을 회동서관에서 발행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님은 갔습니다&amp;lt;br/&amp;gt;푸른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나 있는 작은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amp;lt;ref&amp;gt;서적 인용 |편집자= 강승원 |제목= EBS 수능특강 언어영역|날짜= 2009-01-05 |판= 초판 |출판사= 한국교육방송공사 |쪽= 8 |인용문=푸른 산빛의 희망적 이미지가 단풍나무 숲의 상실의 이미지를 대비하여 만남→이별의 의미를 형상화하고 있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황금(黃金)의꽃가티 굿고빗나든 옛 맹서(盟誓)는 차듸찬띠끌이되야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나러갓슴니다&amp;lt;br/&amp;gt;날카로은 첫 키스의 추억(追憶)은 나의 운명(運命)의 지침(指針)을 돌너노코 뒷거름처서 사러젓슴니다&amp;lt;br/&amp;gt;나는 향긔로은 님의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은 님의얼골에 눈멀었슴니다&amp;lt;br/&amp;gt;사랑도 사람의일이라 맛날때에 미리 떠날것을 염녀하고경계하지 아니한것은아니지만&amp;lt;br/&amp;gt;리별은 뜻밧긔일이되고 놀난가슴은 새로은 슬븜에 터짐니다&amp;lt;br/&amp;gt;그러나 리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源泉)을만들고 마는것은 스스로 사랑을깨치는것인줄&amp;lt;br/&amp;gt;아는까닭에 것잡을수업는 슬븜의 힘을 옴겨서 새 희망(希望)의 정수박이에 드러부엇슴니다&amp;lt;br/&amp;gt;우리는 맛날때에 떠날것을염녀하는 것과가티 떠날때에 다시맛날것을 믿슴니다&amp;lt;br/&amp;gt;아아 님은갓지마는 나는 님을보내지 아니하얏슴니다'''&amp;lt;ref&amp;gt;서적 인용|편집자= 강승원 |제목= EBS 수능특강 언어영역|날짜= 2009-01-05 |판= 초판 |출판사= 한국교육방송공사 |쪽= 8 |인용문=우리는 맛날때에~: 회자정리(會者定離)와 거자필반(去者必反)의 정신을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님의 침묵]]에서 그는 한글 표준어를 쓰지 않고 충청도 방언과 토속어가 세련되지 않은 표현으로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향토적 정감의 방언 및 토속어 애용과 서민적인 시어의 활용은 님의 침묵에 민중정신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1925년부터 [[백담사]]에서 집필하여 1926년 경성부 안동서관에서 발행한《[[님의 침묵]]》은 당시 자유주의적, 남녀간의 연애를 위주로 하던 한국문단의 영향을 받지 않고 생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현실과 이상,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요구되는 주체적 자세에 대해 노래했으며, 더욱이 그것을 풍부한 시적 이미지로 아름답게 형상화해 수준 높은 민족문학의 경지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는 조선의 독립, 혹은 자연을 '님'으로 표현하여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부처로도 해석되고 이별한 연인으로도 해석되는 화법을 구사하여 총독부 학무국의 검열 탄압을 피하였다.&lt;br /&gt;
&lt;br /&gt;
==== [[신간회]] 창설에 참여 ====&lt;br /&gt;
[[파일:한용운동상.jpg|섬네일|오른쪽|200px|한용운의 동상]]&lt;br /&gt;
1927년 1월 19일 신간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이인, 김병로, 허헌, 조병옥, 허정숙 등과 함께 종교, 사회단체를 망라한 사회단체 [[신간회]]의 결성에 [[불교]]계 대표자의 한 사람 겸 경성부 서부 지역 대표자의 한 사람으로 적극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의 한 사람이 되었다. 신간회 조직을 결성하는 주도적으로 참여한 그는 1928년 다시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의 한사람에 선출되고 신간회 경성지회 회장(京城支會會長)에 피선되어 허정숙 등과 신간회 경성지회에서 활동하였다.&lt;br /&gt;
&lt;br /&gt;
1927년 12월 조선불교청년회(朝鮮佛敎靑年會)의 체제를 개편하여 조선불교청년동맹(朝鮮佛敎靑年同盟)으로 개칭,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였다.&lt;br /&gt;
&lt;br /&gt;
한편 1929년 3월 6일 그의 속가 형 한윤경이 사망하였다(70세). 그는 150섬 이상을 수확하던 홍성군의 대지주였다.&amp;lt;ref&amp;gt;&amp;quot;독립운동가 만해 선사 속가 후손들 날품팔이 생활&amp;quot;, 경향신문 1986년 6월 2일자 10면, 사회면&amp;lt;/ref&amp;gt; 한윤경의 아들이자 조카인 한창국은 일찍 죽고 한창국의 후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한다.&lt;br /&gt;
&lt;br /&gt;
1929년 광주항일학생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학생 시위를 보고 그것을 민족적·민중적 운동으로 확산시키고자 민중대회를 계획했으나, 조선총독부 밀정에게 발각, 총독부 경무국에 의해 무산되었다.&lt;br /&gt;
&lt;br /&gt;
1930년 5월 김법린, 김상호, 이용조, 최범술 등이 조직한 '''청년승려비밀결사 만당(卍黨)'''의 영수로 추대되었다.&lt;br /&gt;
&lt;br /&gt;
1931년 6월 &amp;lt;불교&amp;gt;지를 인수, 불교사 사장으로 취임하여 많은 논설을 발표하였다. 이후 많은 논문과 논설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특히, 고루한 전통에 안주하는 불교를 통렬히 비판하였으며, 승려의 자질 향상, 불자에게 생계를 의존하지 않기, 기강확립, 생활불교 등을 제창하였다.&lt;br /&gt;
&lt;br /&gt;
==== 반일 강연 활동 ====&lt;br /&gt;
그는 조선 불교가 일본 불교에 예속되지 않고 독립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한편 한 강연에서 그는 [[조선총독부]]나 일본 불교에 아첨하는 일부 승려들을 질타하기로 했다.&lt;br /&gt;
&lt;br /&gt;
그간 &amp;quot;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amp;quot;고 묻자 아무도 그 물음에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amp;quot;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것은 똥이올시다. 똥! 그런데 그 똥보다 더 더러운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겠습니까?&amp;quot;라고 하자 역시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가난한 불자들의 시신을 염습해본 적이 있는 한 사람은 시체라고 하였다. &amp;quot;내 경험으로는 똥보다 더 더러운 것이 송장 썩는 것이올시다. 똥 옆에서는 식음을 할 수 있어도 송장 썩는 옆에서는 차마 음식이 입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amp;quot;라는 것이다.&lt;br /&gt;
&lt;br /&gt;
그의 말을 듣고 일부는 좌석을 이탈하려 하였으나 좌중에 압도당해 움직일 수 없었다. 이어 만해는 &amp;quot;시체보다 더 더러운 것이 있으니 그것이 무엇일까?&amp;quot;하고 물었다. 아무도 답을 하지 않자 한용운은 굳은 표정으로 강연대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amp;quot;그건! 바로 여기 앉아 있는 31본산 주지 네놈들이다!&amp;quot;라고 일갈하고는 즉시 단상에서 내려와 퇴장해버렸다. 반일 혹은 일본 불교에의 흡수를 반대하는 그를 두고 불령선인이라는 지적이 계속되었고 그는 결국 [[조선총독부]] 형사들의 감시하에 놓이게 된다.&lt;br /&gt;
&lt;br /&gt;
한편 총독부로부터 생계비와 연구비를 지원받는 조건으로 전향한 육당 최남선이 탑골공원 근처에서 마주쳤을 때 &amp;quot;오랜만이오. 만해.&amp;quot;라고 먼저 인사하자 그는 &amp;quot;당신이 누구요?&amp;quot;며 냉정하게 답하였다. 최남선이 &amp;quot;나는 육당이오. 나를 몰라보겠소?&amp;quot;라고 하자 만해는 &amp;quot;뭐, 육당? 그 사람은 내가 장례 지낸 지 오랜 고인이오.&amp;quot;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lt;br /&gt;
&lt;br /&gt;
=== 생애 후반 ===&lt;br /&gt;
==== 소설 집필 활동 ====&lt;br /&gt;
1931년 53세의 나이에 재혼에 뜻이 있어 동지들의 소개로 13살 연하의 유숙원(1892년~1965년)과 재혼하였다. 유숙원은 결혼하기 전까지 단성사 옆에 위치했던 진성당병원의 간호사로 일하였다.  1933년에 金漁 김벽산(金碧山)스님이 집터를 기증하자, 조선일보사장 [[방응모]], 박광 등 몇 분의 성금으로 절반의 비용을 지원받아 [[심우장]]을 짓기 시작하였다. 이때 총독부돌집을 마주보기 싫다고 북향으로 짓도록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다음 해에 딸 영숙(1934년 9월 1일)이 태어났으며, 1935년에 완공되자 입주하여 [[심우장]]에서 여생을 보내며 작품활동을 지속하였다.&lt;br /&gt;
&lt;br /&gt;
1935년 장편소설 《흑풍》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였다.《흑풍》에서는 검열을 피하기 위해  배경을 청나라를 무대로 하고, 억압에 대한 투쟁정신을 묘사하여 [[조선총독부]]에 대한 저항성을 은근히 보여주고 여성해방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삽입하여 반봉건 정신 및 여성도 인격체라는 견해를 설파하였다. 1936년 단재 [[신채호]]의 시신이 비밀리에 입국한 것을 접하고 [[방응모]]와 함께 신채호의 묘비건립과 정약용 서세100년기념회 개최에 참여했다. 1936년 《조선중앙일보》에 장편 《후회 後悔》를 연재하였다. 이러한 소설을 쓴 까닭은 원고료로 생활에 보탬을 얻기 위한 까닭도 있지만 그보다도 소설을 통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하려는 의도가 더 큰 것으로 이해된다. 1937년 불교관계 항일단체인 만당사건(卍黨事件)의 배후자로 검거, [[서대문형무소]]에 재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lt;br /&gt;
&lt;br /&gt;
1937년 4월 13일 서간도 독립운동단체의 지도자였던 김동삼이 경성감옥에서 사망하였다. 아무도 그의 시신을 거두거나 수습하려 하지 않았는데 한용운이 홀로 찾아가 통곡하며 시신을 수습하여 심우장에서 장례를 치루었다.&lt;br /&gt;
&lt;br /&gt;
==== 태평양 전쟁 전후 ====&lt;br /&gt;
석방 후 [[불교]] 혁신과 작품활동을 계속하였고 1938년에는 장편 《박명(薄命)》을 발표하였다. 1938년부터는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에 반대하여 학도병 거부 운동을 벌였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는 여러 장편 외에 장편소설인 《박명(薄命)》이 있고, 저서로는 시집《[[님의 침묵]]》을 비롯하여《[[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불교대전》,《불교와 고려제왕(高麗諸王)》등이 있다.&lt;br /&gt;
&lt;br /&gt;
그는〈[[님의 침묵]]〉 외에도《신인 문학》과《삼천리》에 시 '꿈과 근심', '실제 (實際)',《조광》에 수필 '최후의 5분간', [[조선일보]]에 장편소설 흑풍, 박명, 조선중앙일보에 소설 &amp;lt;후회&amp;gt;와 중편소설 &amp;lt;죽음&amp;gt; 등을 발표하였다.&lt;br /&gt;
&lt;br /&gt;
중일전쟁 이후로도 그는 계속 징용이나 보국대 또는 일본군을 찬양하는 글을 쓰지 않으며 강연도 하지 않았다. 또한 강연 협조 등도 거부하였다. 또한 1937년부터 강요된 신사 참배와 일장기 게양을 거부하고, [[조선총독부]]의 일본식 호적에 이름조차 올리지 않았다.&lt;br /&gt;
&lt;br /&gt;
만년에는 경성부 성북동의 [[심우장]]을 친히 지어 거처했는데, [[심우장]]은 후일 서울기념물 제7호로 지정되었다. 1939년 경상남도 사천군 다솔사(多率寺)로 내려가 회갑을 맞으면서 몇몇 동지들과 함께 자축연을 가졌다. 다솔사는 당시 민족독립운동을 주도하던 본거지였다.&lt;br /&gt;
&lt;br /&gt;
==== 사망 ====&lt;br /&gt;
1940년 5월부터는 창씨개명 반대운동을 하였고 1943년에는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말년에는 [[방응모]], 정인보, [[안재홍]], 홍명희, [[김성수]], 만공 등과 교류하며 그들이 보내주는 생활비로 어렵게 생활하였다. 일제의 극심한 탄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비타협적인 독립사상을 견지하다가, 성북동 집인 [[심우장]]에서 냉방으로 생활하였다.&lt;br /&gt;
&lt;br /&gt;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한 만해의 생계는 그의 친구인 [[안재홍]], [[방응모]], [[김성수]], 송진우, 조만식, 최남선, [[이광수]], 윤치호 등이 십시일반으로 부담해주었다. 말년에 중풍으로 고생하였지만  1944년 6월 28일 [[조선총독부]]의 특별 훈련으로 공습경보가 발령되었을 때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후 계속 혼수상태로 있다가 1944년 6월 29일 [[심우장]]에서 입적하였다.&lt;br /&gt;
&lt;br /&gt;
그가 사망하였던 1944년은 일본 제국이 패망하기 1년 전이자 광복을 1년 앞두고 있던 때라 그토록 염원하던 조국의 독립은 끝내 생전에 보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가 사망한 지 1년 후인 1945년 8월 15일에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일본 제국이 패망하게 되면서 대한민국이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 사후 ==&lt;br /&gt;
[[파일:한용운흉상.jpg|섬네일|250px|만해의 흉상]]&lt;br /&gt;
* 사망한지 1년 후인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면서 조선은 광복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한용운 본인은 1년 전에 고인이 되었기 때문에 그토록 염원하였던 광복의 모습은 보지 못하였다.&lt;br /&gt;
* 동지들에 의하여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미아리 사설 화장장에서 다비된 뒤 망우 역사 문화공원에 유골이 안치되었다. 후일 그 옆에는 부인 유숙원 여사의 묘소가 오른편에 매장되었다.&lt;br /&gt;
* 그는 문학을 전문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님에 대한 그리움과 곧은 지조를 표현한 작품들을 통해 해방후에도 인기를 끌게 되었다. 그후 문인, 저항 시인, 대처승, 출가 승려로만 인식되다가 1960년대부터는 그의 독립운동 역사가 학자들에 의해 재조명 받기 시작했다.&lt;br /&gt;
*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려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lt;br /&gt;
* 1967년 그가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던 탑골공원에는 후에 승려 운허에 의해 《용운당 만해 대선사비》(龍雲堂 萬海 大禪師碑)가 세워졌다.&lt;br /&gt;
* 고향인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남산공원에 동상이 세워졌고 홍성읍내 장터에도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lt;br /&gt;
* 1973년 신구문화사에서 《만해 전집》6권이 간행되었다.&lt;br /&gt;
* 그의 결성면 성곡리 박철동 잠방굴마을 생가지는 1989년 12월 24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75호로 지정되었다.&lt;br /&gt;
* 1990년에 생가가 복원되고 기념관이 건립되었다.&lt;br /&gt;
* 1991년에는 만해의 업적을 기리는 만해학회가 설립되었다.&lt;br /&gt;
* 그밖에 만해기념관, 만해사상선양회 등이 세워졌다.&lt;br /&gt;
*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에는 만해문학박물관이 건립되었다.&amp;lt;ref&amp;gt;[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426287 네팔 민주화·문학의 뿌리는 불교?]&amp;lt;/ref&amp;gt;&lt;br /&gt;
* 후에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만해 생가지에는 생가복원에 이어 사당을 건립하고 안내판을 설치하였다.&lt;br /&gt;
&lt;br /&gt;
== 작품성 ==&lt;br /&gt;
시와 작품에 있어 퇴폐적인 서정성을 배격하였으며 조선의 독립 또는 자연을 부처님에 빗대어 불교적인 '님'으로 형상화했으며, 고도의 은유법을 구사하여 [[조선총독부]]나 일제 정치에 저항하는 민족정신과 불교에 의한 중생제도(衆生濟度)를 노래하여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검열을 교묘하게 피하였다. 여기에서의 님은 보는 관점에 따라 조선의 독립, 자연, 부처님 혹은 이별한 연인 등으로도 해석이 가능한 어법을 구사하였다.&lt;br /&gt;
&lt;br /&gt;
그는 대표작 [[님의 침묵]]을 비롯한 시집, 작품집에서 중심을 이루고 있는 '님'은 연인·조국·부처 등 다의적인 의미를 지니며 그에 따라 '님의 침묵'이라는 표현은 당시의 민족적 상황을 은유적으로 상징하였다. 또한 세속적인 정감의 진솔성이 불러일으키는 인간적 설득력과 함께 세속적인 사랑을 표출하면서도 세속사의 진부함에 떨어지지 않으며 목소리 높여 민중정신을 강조하지도 않는다는 작품평도 있다.&lt;br /&gt;
&lt;br /&gt;
그는 당시 상황을 시적 주체인 '나'가 님과 이별하여 님이 부재하고 침묵하는 시대로 규정하면서도, 님은 이 자리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나'는 진정으로 님의 존재를 깨닫게 된다는 변증법적인 진리 또는 부처에 대한 믿음, 이별한 연인에 대한 애정을 확신, 재다짐하는 것을 드러내고, 새로이 '나'는 이 자리에는 계시지 않는 님 또는 돌아올 님과 다시 합일될 수 있다는 뜻을 노래한다. 또한 내가 님과 새로이 만나기 위해서 나는 님이 존재하지 않지만 님에 대한 의리와 절개를 지키고 님에 대한 철저한 복종이 요구되는데, 그 절개와 의리, 복종을 통해서 비로소 '님'에 대한 신의도 지키면서 한편으로 '나'는 자유로워진다는 '복종과 자유의 변증법'을 노래한 것은 역사의 필연성의 인식을 통해 진정한 자유를 획득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출한다. 그는 식민지 하에 있는 조국의 운명과 독립의 필연성 또는 오지 아니한 극락세계와 다시 만나게 되는 그 날, 그리고 그 날을 위한 실천, 변함없는 믿음을 통해 진정한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는 진리를 작품들을 통해 형상화, 승화시켰다.&lt;br /&gt;
&lt;br /&gt;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그의 시는 오언절구나 칠언절구, 3.4조 등 당시 조선의 시조, 시의 형식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산문시의 전형이 되었다. 은유와 역설의 자유로운 구사를 보여주며, 정형적인 틀을 완전히 벗어난 산문적 개방 속에서도 내재율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근대 자유시의 완성에도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lt;br /&gt;
&lt;br /&gt;
== 저서 ==&lt;br /&gt;
* 《불교대전 (佛敎大典)》(1913년)&lt;br /&gt;
* 《[[조선불교유신론]] (朝鮮佛敎維新論)》(1913년)&lt;br /&gt;
* 시집 《심》&lt;br /&gt;
* 시집 《[[님의 침묵]]》&lt;br /&gt;
* 《유마힐소설경강의 維摩詰所說經講義》(1933년)&lt;br /&gt;
* 《십현담주해 (十玄談註解)》&lt;br /&gt;
* 《불교와 고려제왕 (高麗諸王)》&lt;br /&gt;
* 《조선독립의 서 (朝鮮獨立之書)》&lt;br /&gt;
&lt;br /&gt;
=== 번역서 ===&lt;br /&gt;
* 《정선강 채근담》&lt;br /&gt;
&lt;br /&gt;
=== 소설 ===&lt;br /&gt;
* 《흑풍》(1935년)&lt;br /&gt;
* 《후회》(1936년)&lt;br /&gt;
* 《박명 (薄命)》(1938년)&lt;br /&gt;
* 《죽음》&lt;br /&gt;
&lt;br /&gt;
=== 시 ===&lt;br /&gt;
* 시 '꿈과 근심'&lt;br /&gt;
* '실제 (實際)'&lt;br /&gt;
* '나룻배와 행인'&lt;br /&gt;
* 님의 침묵&lt;br /&gt;
* 수의 비밀&lt;br /&gt;
* 사랑하는 까닭&lt;br /&gt;
&lt;br /&gt;
=== 수필 ===&lt;br /&gt;
* 《최후의 5분간》&lt;br /&gt;
&lt;br /&gt;
== '''사상과 신념''' ==&lt;br /&gt;
그는 모든 중생은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불경의 사상을 인용하여 이를 현대적 자유사상에 연관시켜 생각하였다. 그는 이것이 만인의 평등사상을 설파하였다.&lt;br /&gt;
&lt;br /&gt;
=== 불교 사회혁신주의와 보편화 ===&lt;br /&gt;
만해의 불교 사상은 흔히 불교사회혁신주의로 요약된다. 그는 조선의 민중이 역사 이래로 지배자들로부터 억압과 수탈을 당해왔음을 인식하고 [[불교]]가 민중을 구제하거나, 아니면 현실에서 민중들을 위로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하였다. 저서인 《[[조선불교유신론]]》에서 그는 불교혁신론을 주장하였고, 산사로 들어가 고결한 이상만을 추구하는 점을 비판하고, 한국불교의 침체와 낙후성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개혁을 주장하였다. 그는 [[불교]]사상이 자유주의, 평등주의, 구세주의, 진보적 입장에 서야 함을 역설했다.&lt;br /&gt;
&lt;br /&gt;
그는 어떠한 진리와 진실을 대중에게 강요하지 않는 [[불교]]가 미래의 인류문명에 가장 적합한 교리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조선에서는 고결한 이상만을 추구하거나 산에 들어가 낙후성을 면하지 못하고 있음을 비판하였다. 그는 사원운영의 혁신을 주장하는 내용에서 불교의 대중화·민중화라는 기본사상이 도출되어 나온다. 그는 불교의 민중화를 위해 불교 교리와 제도, [[불교]] 재산을 일부 고위층 승려들, 간부 승려들이나 종단이 독식하지 말고 민중화, 사회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lt;br /&gt;
&lt;br /&gt;
그는 청년불교를 제창하고 젊은이들의 불교 포교 및 불교 부흥을 위해 노력했고 《불교대전》 등 불교경전의 한글 번역작업에 착수했으며, 금강경, 화엄경 등 불교 서적의 한글 번역과 불교 서적의 해석서, 해석 칼럼과 논문 등을 발표하였다. 한편으로 《불교교육 불교한문독본》, 《정선강의 채근담 (精選講義菜根譚)》의 편찬에 참여하고 불교잡지인 《[[유심]]》, 《불교》 등의 잡지 간행에 힘쓰며 불교학교와 강연회를 주최하는 등 불교의 대중화, 보편화를 위해 노력했다.&lt;br /&gt;
&lt;br /&gt;
=== 대처승 운동 ===&lt;br /&gt;
또한 그는 생활불교가 되려면 독신이 아니라 생산적인 부부관계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승려는 결혼하면 안된다는 것이 편견이라 주장하고, 승려의 취처(聚妻)를 허락할 것 등을 주장했다. 대중의 결혼생활, 가장이라는 짐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대중의 입장을 이해하겠느냐는 것이다.&lt;br /&gt;
&lt;br /&gt;
그는 승려의 결혼이 [[불교]] 교리에 어긋나지 않음을 주장하였고, 원효 등 대처승의 사례를 소개하기도 했다. 결혼의 타당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그는 윤리적·생물학적 여러 논거를 제시하였다.&lt;br /&gt;
&lt;br /&gt;
한편 그의 대처승 허용 운동, 승려의 결혼 허가 주장에 대해 [[불교]]계에서는 부정적으로 바라봤다. 해방 직후에도 조계종 단에서는 만해가 승려의 결혼 자유화를 주장하고, 그 자신도 그것을 실천하였기에 더욱 거북스러운 존재였다. 다만 일부 불교개혁을 추구하였던 운동권 승려의 그룹에서, 불교청년운동을 하는 재가불교청년단체에서 만해를 찾았을 뿐이다.&amp;lt;ref&amp;gt;김광식, 《만해 연구》 (동국대학교출판부, 2011) 24쪽&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불교 사회 혁신 주의와 도시화 ===&lt;br /&gt;
사원운영에 있어서 그는 염불당(念佛堂)의 폐지와 도시에 사찰 건립을 할 것을 주장하였다. 근본교리에 비추어볼 때 우주에 편재(遍在)한 법신불(法身佛)이 신앙의 대상이 되는 것이지, 결코 특정한 신앙대상이 따로 없는 것이라 보았다.&lt;br /&gt;
&lt;br /&gt;
그는 특히 법당은 산사라는 개념에 반대하였다. 사찰은 사람이 사는 곳에 있어야 하는 것이라는 점이 한용운의 지적이었다. 기존의 염불당 등과 교리에 얽매이는 허례적인 의식들을 타파하고 산중에 있는 절이 도시로 나올 것, 도시로 나와서 여러 국민들과 직접 만나고 직접 면담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승려들도 노동을 할 것을 주장했다. 최소한 사찰 주변에 땅을 마련하여 자기가 먹을 쌀과 곡식은 스스로 만들며 불자들의 시주에만 의존하는 그릇된 사상을 버리라고 촉구했다. 그는 승려들도 사취(詐取)와 동냥질을 그만두고 스스로 생산활동에 참여할 것을 호소했다.&lt;br /&gt;
&lt;br /&gt;
불교사상의 측면에서 중관론(中觀論)에 기초해 소승적인 소극주의나 현세부정적인 불교를 비판하고 중생의 삶에 참여하고 뛰어들라고 촉구했다. 한용운은 곧 중생의 삶과 일상에서 정토를 구하고, 정토로 인도하자고 역설하였다.&lt;br /&gt;
&lt;br /&gt;
==== 불교조직 혁신론 ====&lt;br /&gt;
[[일제강점기]] 후반 [[조선총독부]]의 조선사찰령 발표에 반대하였다. 총독부는 사찰들이 무분별하게 운영된다는 것을 핑계로 조선사찰령의 발표 이후 거의 모든 사원의 운영권이 총독부의 직속 관리하에 들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통일종단의 조직, 규약, 재정확보 등을 일원화시켜 [[조선총독부]]의 관리 감독과 간섭 의도를 무너뜨려야 한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현행의 본말사제도(本末寺制度)를 그냥 두되 중앙에 통제기구를 신설하자는 것이었다.&lt;br /&gt;
&lt;br /&gt;
김법린(金法麟) 등을 중심으로 하는 혁신불교파가 세운 불교총무원에서는 이를 그대로 수용하였다. 비록, 당시 승려들의 개혁 의지가 뒷받침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반대와 비방에 시달리렸지만 이는 불교행정조직의 좌표를 제시한 것이었다.&lt;br /&gt;
&lt;br /&gt;
=== 조선불교 독립 운동 ===&lt;br /&gt;
그는 조선 불교가 일본 불교에 편입되는 것을 반대하고 저항하였다. 1910년말 원종(圓宗) 종무원 이회광이 불교확장이란 미명하에 일본에 가서 조선의 원종이 일본 조동종과 완전히 연합, 동맹할 것 등을 협약하고 오자, 1911년 한용운은 석전 박한영, 백용성 등과 이회광 규탄 및 승려궐기대회를 개최해 이회광을 종문난적(宗門亂賊)으로 규정하면서 원종에 대응되는 임제종(臨濟宗)을 창립한 것은 그의 대표적인 불교자주화운동이다.&lt;br /&gt;
&lt;br /&gt;
그의 불교자주화운동은 1931년 결성된 조선불교청년총동맹의 이면단체였던 만당활동 등으로 이어졌다. 그는 조선불교청년총동맹의 긴급한 사명으로서 정교분립(政敎分立)과 불교통일의 촉진, 불교의 사회적 진출을 강조하였다. 한편으로 그는 정교분립을 주장하기도 했는데, 이는 종교를 정부 혹은 체제의 하수인으로 삼으려는 조선총독부 학무국 정책에 반대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lt;br /&gt;
&lt;br /&gt;
== 연보 ==&lt;br /&gt;
* 1879년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출생&lt;br /&gt;
* 1905년 강원도 인제군 백담사에서 수계&lt;br /&gt;
* 1906년 명진학교 입학&lt;br /&gt;
* 1908년 명진학교 졸업&lt;br /&gt;
* 1908년 조동종대학림에서 연구&lt;br /&gt;
* 1911년 박한영 등과 친일불교에 맞서 승려대회 개최&lt;br /&gt;
* 1918년 청년계몽운동지 [[유심]]지를 창간,주재&lt;br /&gt;
* 1919년 3월 1일 (→ [[3.1 운동]]) 불교 대표로 독립 운동에 참가&lt;br /&gt;
* 1919년 ~ 1921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3년간 감옥살이&lt;br /&gt;
* 1924년 불교청년회 회장, 총재&lt;br /&gt;
* 1926년 시집 &amp;lt;[[님의 침묵]]&amp;gt; 출판&lt;br /&gt;
* 1927년 [[신간회]] 중앙위원회 위원&lt;br /&gt;
* 1928년 [[신간회]] 경성지부장&lt;br /&gt;
*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 민중대회 개최&lt;br /&gt;
* 1931년 만당 당수&lt;br /&gt;
* 1931년 월간 불교지를 인수, 2년 간 간행&lt;br /&gt;
* 1944년 서울 [[심우장]]에서 중풍으로 사망&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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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 평가와 비판 ==&lt;br /&gt;
민족독립, 불교유신, 자유문학의 3대 사상가로서 절의의 행적을 남겼다. 강렬한 현실비판 등 현세에서의 실천을 강조한 그의 혁명사상을 가졌다는 평가가 있다. 그가 불교이념에 의한 자유, 평등의 국가사회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하였다는 평가도 있다. 한편 자유민주주의, 비폭력 무저항주의, 민족자결주의 등에 입각한 소극적, 관념적인 차원에 머물렀다는 시각도 있다.만해 한용운은 대단한 독립운동가다. 스님이면서 독립운동에도 힘썼다. 또 독립 운동을 할 때 같이 했던 동지들이 창씨개명 등 일본이 억지로 권유한 것을 하기라도 하면 차갑게 외면했다.&lt;br /&gt;
&lt;br /&gt;
== 기타 ==&lt;br /&gt;
* 승려의 결혼 허용 주장은 1920년대 1930년대 화제가 되어 사회적 이슈거리와 논란이 되었다.&lt;br /&gt;
* 친하던 벗 또는 호형호제하던 사이로는 이시영(李始榮), 백용성, 최남선, 최린, 김동삼(金東三), [[방응모]], [[신채호]], [[김성수]], [[안재홍]], 송진우, 정인보(鄭寅普), 김규식, 박광(朴珖), 홍명희, 만공 송월면(宋月面), [[이광수]], 김일엽, 최범술(崔凡述) 등이 있었다.&lt;br /&gt;
* 그의 제자 중에는 춘성도 있었다. 춘성 역시 일제강점기의 대표적 반일 인사이자 해방 후에도 승려로 활동하였다.&lt;br /&gt;
* 그의 아들 한보국은 일제강점기의 사회주의자이자 해방 후에는 남로당 당원으로 활동하다가 월북하였다. 1980년대까지 그에게는 아들이 한 사람 있었다는 것 이외에는 아들과 본부인 전정숙의 존재는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다.&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 /&amp;gt;&lt;br /&gt;
&lt;br /&gt;
== 참고 문헌 ==&lt;br /&gt;
* 김광식, 《한용운 연구》 (동국대학교출판부, 2011)&lt;br /&gt;
* 윤재근, 《님의 침묵 연구》 (민족문학사, 1985)&lt;br /&gt;
* 김재홍, 《한용운문학연구 1》 (일지사, 1982)&lt;br /&gt;
* 송욱, 《님의 침묵:전편해설》 (과학사, 1973)&lt;br /&gt;
* 박노준·인권환, 《한용운 연구》 (통문관, 1960)&lt;br /&gt;
&lt;br /&gt;
== 외부 링크 ==&lt;br /&gt;
* [http://www.manhae.or.kr/ 만해기념관 홈페이지]&lt;br /&gt;
* [http://wwww.peace21.org/today_column_board/18492 만해 한용운과 아들 한보국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 부자, 애국애족만은 부전자전]]&lt;br /&gt;
*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amp;amp;search_div_id=CP_THE006&amp;amp;cp_code=cp0525&amp;amp;index_id=cp05250499&amp;amp;content_id=cp052504990001 승려결혼을 주장한 한용운]&lt;br /&gt;
* [https://web.archive.org/web/20131214035146/http://www.hongsung.net/tt/board/ttboard.cgi?act=read&amp;amp;db=city_people&amp;amp;page=1&amp;amp;idx=3 한용운:홍성넷]&lt;br /&gt;
*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8/08/01/200808010500005/200808010500005_2.html 민족대표 33인 한용운과 박희도:“독립의 영(榮), 변절의 욕(辱), 모두 산 자들의 짐인 것을…”]&lt;br /&gt;
* [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C%9A%A9%EC%9A%B4 한용운-위키백과]&lt;br /&gt;
&lt;br /&gt;
[[분류:감자]]&lt;/div&gt;</summary>
		<author><name>Nsgjjsjsjy02</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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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B0%A9%EC%9D%91%EB%AA%A8&amp;diff=59413</id>
		<title>방응모</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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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Nsgjjsjsjy02: /* 친일행위 의혹 */&lt;/p&gt;
&lt;hr /&gt;
&lt;div&gt;{|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width:100%&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0%&amp;quot;|사진&lt;br /&gt;
|[[파일:방응모.jpg|center|200픽셀]]&lt;br /&gt;
|+ '''방응모'''&lt;br /&gt;
|+ style=&amp;quot;caption-side:bottom;text-align:left:&amp;quot;|출처: 위키백과&lt;br /&gt;
|출생||1883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조선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또는 정부면 성내동&lt;br /&gt;
|-&lt;br /&gt;
|사망||1950년경으로 추정&lt;br /&gt;
|-&lt;br /&gt;
|사인||불명&lt;br /&gt;
|-&lt;br /&gt;
|거주지||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amp;gt; 경성부 -&amp;gt; 경기도 양주군 의정부읍&lt;br /&gt;
|-&lt;br /&gt;
|국적||대한민국&lt;br /&gt;
|-&lt;br /&gt;
|본관||온양&lt;br /&gt;
|-&lt;br /&gt;
|별칭||호: 계초(啓礎), 춘해(春海)&lt;br /&gt;
|-&lt;br /&gt;
|직업||교사, 변호사, 상인, 언론인, 기업인, 사회운동가, 정치가&lt;br /&gt;
|-&lt;br /&gt;
|배우자||승계도, 이인숙, 배영옥, 노효용&lt;br /&gt;
|-&lt;br /&gt;
|자녀||방재숙(딸), 방재욱·방재선·방재효·방재규(아들), 방재윤(양자)&lt;br /&gt;
|-&lt;br /&gt;
|부모||방계준(부), 온양박씨(모)&lt;br /&gt;
|}&lt;br /&gt;
&lt;br /&gt;
'''방응모'''(方應謨, 평안북도 정주군, 1883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 1950년 8월(추정)는 [[일제강점기]]의 교육자, 언론인, 법조인, 기업인이자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언론인이며 정치인이다. 호는 '''춘해'''(春海)이고, 뒤에 '''계초'''(啓礎)로 고쳤다.&lt;br /&gt;
&lt;br /&gt;
1922년 동아일보 정주 지국을 인수해 지국장을 지내다가 1924년 금광업에 뛰어들어 큰 부를 얻게 되었다. 1932년 6월 조선일보에 입사하였고 이후 영업국장이 되어 조선일보의 판매망을 장악하게 되고 경영권을 인수하면서 1933년 3월 조선일보 부사장이 되었다. 1933년 7월부터 1950년 7월까지 종신으로 [[조선일보]]의 사장을 역임하였다. 1935년 창간한 월간잡지 '조광(朝光)'은 친일 논란이 있다.&amp;lt;ref&amp;gt;안은필. [http://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9211 조선일보가 가장 빛나던 시기, ‘안재홍 시대’]&amp;lt;/ref&amp;gt;&amp;lt;ref name=&amp;quot;안은&amp;quot;&amp;gt;안은필. [http://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9279 방응모 친일증거, “모래밭에서 모래 찾기”]국민TV. 기사입력 2015년 4월 23일. 기사수정 2015년 4월 24일.&amp;lt;/ref&amp;gt;&amp;lt;ref&amp;gt;이민영.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1/0002255321?sid=102 고법 “방응모 前조선일보 사장 친일행적 대부분 인정”]. 서울신문. 2012년 1월 13일.&amp;lt;/ref&amp;gt;&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6/0000000413?sid=110 김성수ㆍ방응모와 친일언론인 군상]. 미디어오늘. 2002년 3월 12일.&amp;lt;/ref&amp;gt; 언론계에서 활동하면서도 사업가의 길을 함께 걸었고, 교육 장학 활동을 하였으며, 1945년 광복 직후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안재홍]]의 추천을 받아 한국독립당 중앙상무위원과 독립촉성국민회 총무부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amp;lt;ref name=&amp;quot;안은&amp;quot;/&amp;gt;&amp;lt;ref&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16/2008031600800.html 계초 방응모와의 우정도 여러 편의 시로 표현해&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해방 정국에서 김구의 재정적 후견인으로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등 삼의사 유골 봉환 사업과 신탁통치 반대 운동 등에 참여하여 활동했다.&lt;br /&gt;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 납북 후 행적은 &amp;quot;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amp;quot;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lt;br /&gt;
&lt;br /&gt;
== 생애 ==&lt;br /&gt;
=== 생애 초기 ===&lt;br /&gt;
==== 출생과 성장 ====&lt;br /&gt;
방응모는 1883년 11월 3일 또는 9월 29일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바우머리 부락 또는 정주군 정부면 성내동 425번지에서 '''방계준(方桂準)'''과 온양 박씨(溫陽朴氏)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어려서 빈곤한 가정환경으로 방응모는 정규 학교에는 입학하지 못하고, 16세 때까지 서당에 드나들며 한학을 익혔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던 중 그가 어느 정도 실력이 우수하다고 인정되자, 스승인 승창률은 잠시 방응모에게 어린아이들을 돌보게 한 후 자리를 피하곤 했다 한다. 그는 홀로 사서육경을 탐독, 독파하였다. 21세 무렵 잠시 서당 훈장을 지내기도 했다. 우연히 경성부에 갔다가 신문물을 보고 충격을 받아 17세에 독학으로 신학문과 일본어, 중국어, 수학 등을 독파하였다.&lt;br /&gt;
&lt;br /&gt;
유년시절 서당의 성리학 스승이던 승창률의 친척인 승시영(承時榮)과 조씨(趙氏)의 딸 승계도와 결혼했다. 결혼한 다음 해에도 그는 공부를 한다며 책만 사다 읽곤 했고, 부인 승계도는 생계를 위해 몸소 나섰다. 그의 아내는 남편에 대한 믿음이 절대적이었고 탓을 하거나 가출하지 않았다.&lt;br /&gt;
&lt;br /&gt;
=== 언론, 기업 활동 ===&lt;br /&gt;
==== 계몽 활동과 언론 활동 ====&lt;br /&gt;
1915년부터 1924년 방응모는 지역 지식인들, 유학파 청년, 계몽 청년들이 모여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하는데 참여했다. 민립대학기성회에서 활동하면서 조만식 등과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언변과 용모가 되었던 그의 여관에도 손님들이 몰렸고, 그가 &amp;quot;2백원도 좋고 5백원도 좋다며 보태달라&amp;lt;ref name=&amp;quot;fsfs87&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7페이지&amp;lt;/ref&amp;gt;&amp;quot;고 하면 기부금을 내는 이들이 있었다. 1919년 정주에서 3.1 만세 운동이 벌어지자, 그도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형사들의 눈을 피해 방응모는 만세운동을 하다 재빨리 몸을 피해 화를 면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8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22년 6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인수하여 분국장에 취임했다. 그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경영하는 동시에 그는 농촌 계몽운동 등에 적극 참여했다. 1922년 6월 19일&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96페이지&amp;lt;/ref&amp;gt; 동아일보 본사를 설득하여 정주분국을 동아일보사 정주지국으로 승격시켰다. 동아일보사 지부장 재직 시 그는 민립 대학 설립 자금과 농촌진흥회 회원의 여비 및 당시 운영난에 처했던 오산학교의 재개교 등을 계획했다. 총독부의 거부로 실패한 대학 설립 자금은 고스란히 오산학교의 부활 자금으로 투입되었다.&lt;br /&gt;
&lt;br /&gt;
1923년 동아일보 정주군 분국이 지국으로 승격되자 정주국을 경영하였고, 같은 해 7월 여성들의 사회 참여와 평등권 신장을 위한 여자교육회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이후 대규모 수해가 나자, 정주군 수해구제회를 결성하여 봉사활동에 가담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 광업 경영과 조선일보 입사 ====&lt;br /&gt;
1924년 친구 전우현이 방응모와도 안면이 있던 금광 채굴업자 두 명을 데리고 그를 찾아왔다. 그들은 자신들이 봐 둔 산이 있다고 방응모에게 소개했다. 이후 광산업에 뛰어들어 1924년 여름 압록강변의 폐금광인 평안북도 삭주군 외남면 교동 다릿골의의 삭주 교동광업소를 찾아가 10미터 정도 땅을 파고 금맥을 발견했다. 곧 삭주 교동광업소를 인수, 경영을 확대하였다. 이때 만난 동업자의 딸이자 친구 전우현의 조카딸인 '''이인숙(李仁淑)'''을 만났다. 본처 승계도가 두 아들을 잃고 복부 수술이 잘못되어 아이를 얻지 못하게 되자 방응모에게도 수많은 중매가 들어왔다. 자식들을 병으로 잃은 것이 자신의 불찰이라고 본 승계도는 그에게 작은 부인이라도 들이자는 말을 꺼내기도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18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26년 방응모에게 광산 사업을 제안했던 두 친구가 손을 털고 나갔고, 그의 가족은 돈이 없어 쌀 대신 좁쌀로 좁쌀죽을 먹으며 연명해야 했다. 방응모는 정주군에 사는 비슷한 또래의 먼 친척 방상진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고, 방상진과 일꾼 대여섯 명, 그리고 후처 이인숙의 친정 쪽에서 얻어온 토지문서를 얻어 자금을 마련했고 다시 금광을 채굴했다. 그 후 1926년 7월 지하 300m 지점에서 금맥을 확보했고, 이후 연간 300kg의 금을 생산하여 벼락부자가 되었다.&lt;br /&gt;
&lt;br /&gt;
1928년 방응모는 자신의 아호를 딴 춘해 장학회를 만들고 장학생들의 모임인 이심회를 만든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48페이지&amp;lt;/ref&amp;gt; 1928년에 그는 의정부 직동, 흥선대원군의 별장이 있던 곳 바로 뒤에 위치한 건물을 매입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한용운]], 홍명희를 자주 초대했다.&lt;br /&gt;
&lt;br /&gt;
1932년 방응모는 교동광산을 135만원이란 거액에 일본 중외광업주식회사에 매각했다. 그 뒤 1932년 6월부터 조선일보 영업국장으로 활동하다 1933년 3월 [[조선일보]]의 경영권을 인수하여 부사장에 취임하였다.&lt;br /&gt;
그는 교동광업소를 운영하며 모은 재력을 바탕으로 부사장 재직 중 [[조선일보]]의 대주주가 되었으며, 1933년 7월 8대 사주 조만식으로부터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제9대 [[조선일보]] 사주로 취임, 활동했다.&amp;lt;ref&amp;gt;조선일보는 1932년 7월에 조만식을 사장으로 영입했지만, 조만식은 거의 평생을 평양에서 살아왔던데다 서울에서 활동하기에는 적응을 잘하지 못했다. 조만식은 신문사 경영난과 지역감정의 혹독한 시련을 받은 채 9개월만에 퇴사했다. 그리고 조만식 후임으로 1933년, 방응모를 사장으로 추대하기에 이르렀다.&amp;lt;/ref&amp;gt;&amp;lt;ref&amp;gt;《한국사 시민강좌 제47집, 대표적 독립운동가 12인》,일조각. p145&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언론, 사업 활동 ===&lt;br /&gt;
==== 사회사업 ====&lt;br /&gt;
[[파일:방응모장학생.jpg|섬네일|160px|오른쪽|방응모와 그의 장학금을 받던 학생들. 가운데 앉은 이가 방응모이고, 서있는 이들 중 왼쪽에서 두 번째는 방응모의 양자 방재윤.]]&lt;br /&gt;
&lt;br /&gt;
1930년 배영옥과 결혼하여 딸 방재숙을 얻었다. 1932년 광산업을 정리하였고 언론사업을 비롯하여 육영사업과 조림 및 간척사업 등을 벌였다. 또한 고아원과 사회복지단체에 후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933년 무렵 방응모가 [[조선일보]] 인수에 나서기 전부터 그는 [[한용운]]을 위한 일이라면 돈을 아끼지 않고 지출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성북동 언덕에 만해 한용운을 위해 기와집 한 채를 지어주었는데 [[심우장]](尋牛莊)이 그것이다. 또한 만해가 일제의 배급을 거부해 생활이 어려워지자 생활비를 지원했던 방응모는 그가 병석에 누운 1944년에는 치료비를 지원해주기도 했다.&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6/0000043262?sid=103 만해가 일송 선생 5일장 치른 사연]&amp;lt;/ref&amp;gt; 그 외에도 방응모는 만해 한용운·벽초 홍명희 등과 함께 새해가 되면 백천온천에도 같이 다녀올 정도로 가까운 관계였다.&lt;br /&gt;
&lt;br /&gt;
1932년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사건으로 체포된 [[안창호]]의 사면 탄원과 보석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총독부 경무국장은 그의 안창호 석방 제안을 정중히 거절한다.&lt;br /&gt;
&lt;br /&gt;
1936년 동방문화학원(숭문중학교·고등학교 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에 취임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인수와 경영 ====&lt;br /&gt;
1933년 1월 16일 그는 정식으로 주식회사 [[조선일보]]사를 창립했다. 일단 그는 조만식을 사장으로 임명하고 자신은 부사장으로 있다가, 그해 3월 13일 다시 부사장에 취임했다. 7월 10일 조만식의 사퇴로, [[조선일보]]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다.&lt;br /&gt;
&lt;br /&gt;
1934년 3월 25일 이광수를 비롯하여 서춘, 김동진, 함상훈, 신태익 등을 [[조선일보]]로 영입해 왔다. 그 외에도 정주군 출신 언론인, 작가들이 조선일보로 많이 오게 되었다.&lt;br /&gt;
&lt;br /&gt;
==== 동방문화학원 재단 설립 ====&lt;br /&gt;
방응모는 1936년 재단법인 동방문화학원(東邦文化學院)을 설립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6페이지&amp;lt;/ref&amp;gt; 동방문화학원은 학교 법인으로 인가된 재단 법인으로, 그 후 고계학원과 인연을 가지고 1936년부터는 보성고등보통학교를 후견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 분리되었다. 그 후 방응모 장학생인 서중회 회원들을 위한 방응모 장학사업을 주관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7페이지&amp;lt;/ref&amp;gt;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구 조선일보 사옥 안에 동방문화학원의 간판을 달고 조광 잡지를 계속 발행하는 조광사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7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일제 강점기 후반 ===&lt;br /&gt;
==== 중일 전쟁 전후 ====&lt;br /&gt;
중일전쟁 개전 직후인 1937년 7월 11일에 열린 [[조선일보]] 간부회의에서 주필 서춘이 '일본군, 중국군, 장개석씨'등으로 쓰던 용어를 '아군, 황군, 지나, 장개석'으로 고치고 일본 국민의 입장에서 논설을 쓸 것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반대 의견도 있기는 했으나, 방응모는 '일장기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이미 몇 십만 원의 손해를 보았을 뿐 아니라 [[3.1 운동]] 때처럼 신문이 민중을 지도할 수 없다'면서 서춘의 입장을 지지했다.&lt;br /&gt;
&lt;br /&gt;
1933년 이심회(후에 서중회, 방응모장학회 등 명칭이 바뀜)를 통해 대학생과 해외 유학생들에게 학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937년 12월 24일 [[안창호]]는 병보석 판정을 받고 재판소가 경성제국대학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안창호]]는 병상에서 병원비 문제로도 고초를 겪었고. 방응모는 50일 간의 입원비인 5백원짜리 수표 한 장을 안창호에게 전달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9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안창호]]는 1938년 3월 10일 밤 12시 경성제국대학 병원에서 운명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폐간 사건 ====&lt;br /&gt;
일본의 전쟁이 격화되면서 조선총독부 공보국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1940년에 강제로 폐간조치 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조선일보에 바쳤던 방응모는 큰 절망과 좌절을 느껴야 했다. [[한용운]]은 ‘신문이 폐간되다/ 붓이 꺾이어 모든 일이 끝나니…’로 시작하는 시를 지어 방응모를 위로했다. &amp;lt;ref&amp;gt;붓이 꺾이어 모든 일 끝나니 이제는 재갈 물린 사람들 뿔뿔이 흩어지고 아, 쓸쓸하고 쓸쓸한지고 망국 서울의 가을날 한강의 물도 흐느끼느니 울음 삼켜 흐느끼며 연지를 외면한 채 바다 향해 흐르느니&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38년 7월 “국민정신을 총동원하고 내선일체 전 능력을 발휘하여 국책 수행에 협력하여 성전(聖戰)의 궁극적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조직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에 참여했다.&lt;br /&gt;
&lt;br /&gt;
1940년 5월 조선총독부 총독 미나미 지로가 방송담화로 창씨개명을 권고했다. 그러나 그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성씨를 이제 와서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며 창씨개명은 완강하게 거절했다.&lt;br /&gt;
&lt;br /&gt;
조선일보에 트집이 잡힐 일이 나타나지 않자 총독부는 전국에 조선일보 신문 구독을 거절하도록 명령을 내렸고, 동시에 조선말을 쓰는 민원인에게는 일을 처리해주지 말도록 하게 했다. 총독부는 동아일보에 이어 조선일보에도 자진 폐간을 권고했고, 결국 8월 10일자로 폐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5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잡지 발행 활동 ====&lt;br /&gt;
신문 강제 폐간 뒤 방응모는 간판을 조광사로 바꿔 걸고, 사옥은 동방흥업주식회사로 등기를 변경해서 유지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1페이지&amp;lt;/ref&amp;gt; 이후 그는 조광 잡지 발행에 전념했다. [[조선일보]]가 폐간된 후에도 방응모는 벽초 홍명희 부자에게 지속적으로 생활비를 대주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4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4년 6월 29일 만해 [[한용운]]이 사망했다. 그는 [[심우장]]을 찾아가 3백원을 내놓았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5페이지&amp;lt;/ref&amp;gt;당시 쌀 10가마가 100원이었지만, 심우장은 당장 현금 1원이 없었는데 거액이라서 놀랐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6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광복 이후 활동 ===&lt;br /&gt;
==== 조선일보 복간 및 군정기 활동 ====&lt;br /&gt;
11월 [[조선일보]]사를 복간시켰다. 그러나 한동안 조선일보의 인쇄는 서울신문사에서 간행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1946년 2월 26일 서울신문사 공무국 종업원들이 조선일보의 인쇄를 거부해버렸다. 표면상의 문제는 임금 문제이나 내용상으로는 조선일보에 대한 조선공산당의 시위의 일종이었다. 사흘간의 교섭 끝에 2월 28일에 가서야 26일자와 27일자를 소급해서 인쇄하여 신문을 한꺼번에 발행하였다. 그러나 3월 1일과 2일에 또다시 인쇄를 거부당해 결국 휴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436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5년 광복 직후 서기원이 그를 찾아왔다. 서기원은 그때 경성농상실천학교의 동창회로부터 이 학교의 교장이 되어 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이다. 방응모는 서기원의 제의를 받아들여 1946년 8월 28일 동방문화학원 이사장으로 숭문상업학교를 인수, 재단 이사장이 되었다.&lt;br /&gt;
&lt;br /&gt;
==== 납북과 최후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 납북 후 행적은 &amp;quot;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amp;quot;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 1950년 8월경 개성 송악산 부근에서 미군의 폭격에 희생되었고 심한 폭격으로 시신을 찾을 수 없어 묘도 만들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남한에서는 1955년 7월 7일 생사불명기간 만료로 인해 실종 처리되었다.&lt;br /&gt;
&lt;br /&gt;
=== 사후 ===&lt;br /&gt;
서울 종로에 있던 양자 방재윤의 두 아들 방일영과 방우영은 방응모의 첩 이인숙이 찾아가 피신하라고 권고하여 황급히 피신했다. &lt;br /&gt;
&lt;br /&gt;
7월 6일 그의 행방불명처리가 되고, 방응모의 사후에도 [[조선일보]]는 그의 명의로 발행되었다. 1952년 4월 28일 조선일보는 발행인겸 편집인을 장기영으로, 인쇄인을 방일영으로, 방응모는 명예사장으로 명의변경하여 휴전 후 계속 발행하게 되었다. 1954년 4월 30일 제8회 조선일보 정기주주총회에서 장기영 사장이 사퇴하면서, 명예사장 방응모가 사장으로 추대되고, 발행인 겸 대표취체역에 방일영이 선임되었다. 이후 실종 후 1959년에 법적으로 사망 처리되었다. 그리고 1970년까지는 조선일보는 그의 이름으로 발행되었다.&lt;br /&gt;
&lt;br /&gt;
1970년 2월 19일 조선일보 정기주주총회에서 방응모 이사를 사퇴 수리하였다. 그의 피폭 사망 사실은 1970년대 이후 탈북자들을 통해 대한민국에 소개되었다.&lt;br /&gt;
&lt;br /&gt;
== 친일행위 의혹 ==&lt;br /&gt;
=== 일제 전시체제기 활동 ===&lt;br /&gt;
일제 강점기 말기 언론인으로서 총독부체제에 협력한 기록과 활동이 다수 기록이 있다. 1933년 3월 [[조선일보]] 경영권을 인수하고 부사장직에 취임했을 당시 1600원을 군에 헌납하였다. 그는 1935년 친일 잡지 《조광(朝光)》을 창간하였고, 1937년에는 경성방송국에 출연하여 일제가 중국의 베일을 절멸케하여 극동평화를 지키려고 한다는 강연을 하였다. 1940년대부터 조광에 집중적으로 친일 논설을 기고하고 시국 강연에 참여하여 전쟁 지원을 독려했다. 1942년 6월에는 '징병령 실시에 일층 더 감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글을 써서 조광에 발표하였다. 애국금차회(1937),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1938), 임전대책협의회(1941), 조선임전보국단(1941) 등 대표적인 친일 단체의 회원에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그는 이런 행적으로 인해 해방정국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명단에 기록되어 있고,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해 발표한 &amp;lt;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amp;gt;에 모두 포함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lt;br /&gt;
&lt;br /&gt;
=== 반민족행위 논란 ===&lt;br /&gt;
방응모를 친일파로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남아 있다. 조선일보 경영 이전에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방응모의 활동이 거의 없었고, 납북 뒤 소식이 끊겨버린 까닭에 본인이 항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 동안의 행적만으로 친일파 여부를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방응모의 후손들이 영향력 있는 [[조선일보]] 언론사의 사주를 맡았기에 그의 입장에서 서술한 기록을 많이 남기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80년 발간된 그의 전기 《계초 방응모》(조선일보사) 등에는 '그가 민족주의적 선각자'로 묘사되고 있다. 방응모가 친일파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일부세력측은 그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논거로 드는 경우가 많이 있다.&amp;lt;ref&amp;gt;유석재, 계간 《유심》 (2004년 봄호) [http://yousim.buddhism.org/html/2004-spr/tamgu-yoo-seok-jae.htm 삭풍 속에 피어난 금란지교(金蘭之交) - 만해와 계초 방응모]&amp;lt;/ref&amp;gt;&amp;lt;ref&amp;gt;&amp;quot;일제 말기 계초는 시국강연에 나설 것과 창씨개명을 집요하게 강요받았으나 그때마다 묵묵부답으로 거부하며 소신을 지켰다.&amp;quot; 《조선일보》 (2001.3) 조선일보 사장열전 - 계초 방응모편, 《한겨레》 (2001.3.30) [http://www.njoyschool.net/news/article_view.asp?menu_code=s20202&amp;amp;no=1206 조선일보, 일장기를 신문제호 위에]&amp;lt;/ref&amp;gt;&lt;br /&gt;
또한 한국정토학회 고문이자 서울 정토사 주지였던 박설산(1918~2007)이 학도병에 끌려가기 직전인 1943년 12월 28일 밤 서울역에서 스스로 왼발을 선로에 올려 발가락을 절단해 징집을 기피하자 방응모는 만해와 함께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설산을 걱정하면서 입원 중 조선일보 기자를 통해 돈을 전달한 것은 물론 퇴원할 때 돈을 전달하고 뒤를 보살폈다고 한다.&amp;lt;ref&amp;gt;박설산 회고록 &amp;lt;뚜껑없는 조선역사책&amp;gt;(1994, 도서출판 삼장) p240~241&amp;lt;/ref&amp;gt;&lt;br /&gt;
&lt;br /&gt;
2010년 12월, 방응모 관계자들 및 조선일보측은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을 취소해달라'며 법원에 낸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amp;quot;1944년 조선항공업 창립발기인으로 활동한 부분에 대해 친일행위로 판단한 부분을 취소하지만 나머지 활동에 대해서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amp;quot;라고 판결했다. 그 이유인 즉 &amp;quot;방응모는 1933년 조선일보 사장으로 취임해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등으로 활동하며 친일활동을 벌였으며, 1937년 경성방송국 시국강연에서 일본제국이 극동평화를 확립시킬 것이라는 내용의 강연을 하고, 1938년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춘추회의 발기인 겸 간사로 활동하기도 했다&amp;lt;ref&amp;gt;[http://media.daum.net/breakingnews/politics/view.html?cateid=1002&amp;amp;newsid=20101222103319164&amp;amp;p=newsis 법원 &amp;quot;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친일파 맞다&amp;quot;]뉴시스 2010년 12월 22일&amp;lt;/ref&amp;gt;&amp;quot;는 것이다.&lt;br /&gt;
&lt;br /&gt;
2012년 1월 12일 서울고등법원은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이 낸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처분 취소 청구소송에서 ‘일제 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의 친일 행위 판정 조항에 비추어 방응모에게 적용된 모든 행위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민족적 지도자로서 비중이 큰 만큼 그로 인한 책임도 무거울 뿐 아니라 고난의 시기를 겪은 민족으로서 그 역사를 반성하자는 입장에 설 때, 방 전 사장의 여러 행태는 반민특별법에서 규정한 친일반민족행위의 유형에 속함을 부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1, 2심 재판부는 방 전 사장이 자신이 운영하던 잡지 &amp;lt;조광&amp;gt;에 일제 침략전쟁에 동조하고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문예물과 일제 침략전쟁에 협력할 것을 주문하는 논문을 게재하는 등의 '친일' 행위를 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또한, 2심 재판부는 일본의 전쟁 수행을 돕기 위해 설립된 군수 제조업체 ‘조선항공공업’의 발기인과 감사를 지낸 것은 “감사는 업무집행에 관여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기관으로, 방 전 사장이 이 회사를 운영했다고 볼 수 있다”는 이유로 친일이라고 판단했다.&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4565.html법원 ‘방응모 친일’ 2심서도 인정] 인터넷한겨레 2010년 12월 22일&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기타 ==&lt;br /&gt;
그는 [[한용운]], 최남선, 정인보, 홍명희 등과 친분관계를 형성하고 어울려 지냈다 한다.&lt;br /&gt;
&lt;br /&gt;
김구의 한국독립당의 재정적 후견인 역할을 하였다 하며,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삼의사 유골봉환식 때 김구, 정인보 등과 촬영한 사진이 있다.&lt;br /&gt;
한편 임꺽정의 저자인 벽초 홍명희가 방응모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그와 깊은 친분을 맺었다는 주장이 있다. 《조광》 1938년 11월호엔 홍명희가 병중에 있는 방응모를 위로하며 지은 한시가 방응모의 답시와 함께 실려 있다고 한다.&amp;lt;ref&amp;gt;[http://weekly.chosun.com/site/data/html_dir/2004/11/05/2004110577041.html ‘임꺽정’으로 되살아난 독립운동의 魂! 주간조선 1827호 2004.11.04&amp;lt;/ref&amp;gt; 또한 [[안창호]]의 비서실장을 지낸 독립유공자 구익균은 방응모와 안창호가 친밀했다는 주장을 했다.&amp;lt;ref&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09/2008030901055.html &amp;quot;공산주의자들, 도산 비판하다가도 하숙비 떨어지면 찾아와&amp;quot;] 조선일보, 2008-03-10 03:22&amp;lt;/ref&amp;gt;&lt;br /&gt;
또한 박설산에 따르면 1943년 만해 한용운에게 학도병으로 끌려가게 되었음을 알리려 심우장으로 찾아가게 되었을 때, 한용운과 방응모가 바둑을 두고 곁에서 정인보가 훈수를 두고 있었다고 한다.&amp;lt;ref&amp;gt;박설산 저 &amp;lt;뚜껑없는 朝鮮 역사 책&amp;gt; p.226 도서출판 三藏(1994)&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 /&amp;gt;&lt;br /&gt;
&lt;br /&gt;
== 참고 자료 ==&lt;br /&gt;
* 청산하지 못한 역사: 언론 내세워 일제에 아부한 교화 정책의 하수인 (문영숙) (반민족문제연구소, 청년사, 1994)&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민족 계몽의 초석 방응모(이동욱 저, 지구촌, 1998)&lt;br /&gt;
* 계초 방응모전(계초전기간행위, 조선일보사, 1980년)&lt;br /&gt;
* 계초 방응모(이동욱, 방일영문화재단, 1996)&lt;br /&gt;
&lt;br /&gt;
== 외부 링크 ==&lt;br /&gt;
* [https://web.archive.org/web/20050123171046/http://chosunhost.com/ 계초방응모 기념사업회]&lt;br /&gt;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09145 &amp;lt;조선일보&amp;gt;, 방응모 전 사장의 '친일행적' 말한다] - 오마이뉴스 04.09.10일자&lt;br /&gt;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020302101749 방응모ㆍ 김성수 친일행적 뭔가 : &amp;lt;긴급입수&amp;gt;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 全文] - 프레시안 2002-03-02&lt;br /&gt;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54052 그가 '&amp;lt;조선&amp;gt;의 주인' 주장하는 이유] 오마이뉴스 2001년 9월 20일자&lt;br /&gt;
*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956 방재선씨, 호주·상속 원인무효소송 제기]&lt;br /&gt;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4/06/2008040601053.html '5인 친필 서첩' 발굴] 조선일보 2008년04월06일자]&lt;br /&gt;
&lt;br /&gt;
[[분류: 감자]]&lt;/div&gt;</summary>
		<author><name>Nsgjjsjsjy02</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B0%A9%EC%9D%91%EB%AA%A8&amp;diff=59412</id>
		<title>방응모</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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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06-20T01:12:0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Nsgjjsjsjy02: /* 광복 이후 언론 및 정치활동 */&lt;/p&gt;
&lt;hr /&gt;
&lt;div&gt;{|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width:100%&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0%&amp;quot;|사진&lt;br /&gt;
|[[파일:방응모.jpg|center|200픽셀]]&lt;br /&gt;
|+ '''방응모'''&lt;br /&gt;
|+ style=&amp;quot;caption-side:bottom;text-align:left:&amp;quot;|출처: 위키백과&lt;br /&gt;
|출생||1883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조선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또는 정부면 성내동&lt;br /&gt;
|-&lt;br /&gt;
|사망||1950년경으로 추정&lt;br /&gt;
|-&lt;br /&gt;
|사인||불명&lt;br /&gt;
|-&lt;br /&gt;
|거주지||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amp;gt; 경성부 -&amp;gt; 경기도 양주군 의정부읍&lt;br /&gt;
|-&lt;br /&gt;
|국적||대한민국&lt;br /&gt;
|-&lt;br /&gt;
|본관||온양&lt;br /&gt;
|-&lt;br /&gt;
|별칭||호: 계초(啓礎), 춘해(春海)&lt;br /&gt;
|-&lt;br /&gt;
|직업||교사, 변호사, 상인, 언론인, 기업인, 사회운동가, 정치가&lt;br /&gt;
|-&lt;br /&gt;
|배우자||승계도, 이인숙, 배영옥, 노효용&lt;br /&gt;
|-&lt;br /&gt;
|자녀||방재숙(딸), 방재욱·방재선·방재효·방재규(아들), 방재윤(양자)&lt;br /&gt;
|-&lt;br /&gt;
|부모||방계준(부), 온양박씨(모)&lt;br /&gt;
|}&lt;br /&gt;
&lt;br /&gt;
'''방응모'''(方應謨, 평안북도 정주군, 1883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 1950년 8월(추정)는 [[일제강점기]]의 교육자, 언론인, 법조인, 기업인이자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언론인이며 정치인이다. 호는 '''춘해'''(春海)이고, 뒤에 '''계초'''(啓礎)로 고쳤다.&lt;br /&gt;
&lt;br /&gt;
1922년 동아일보 정주 지국을 인수해 지국장을 지내다가 1924년 금광업에 뛰어들어 큰 부를 얻게 되었다. 1932년 6월 조선일보에 입사하였고 이후 영업국장이 되어 조선일보의 판매망을 장악하게 되고 경영권을 인수하면서 1933년 3월 조선일보 부사장이 되었다. 1933년 7월부터 1950년 7월까지 종신으로 [[조선일보]]의 사장을 역임하였다. 1935년 창간한 월간잡지 '조광(朝光)'은 친일 논란이 있다.&amp;lt;ref&amp;gt;안은필. [http://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9211 조선일보가 가장 빛나던 시기, ‘안재홍 시대’]&amp;lt;/ref&amp;gt;&amp;lt;ref name=&amp;quot;안은&amp;quot;&amp;gt;안은필. [http://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9279 방응모 친일증거, “모래밭에서 모래 찾기”]국민TV. 기사입력 2015년 4월 23일. 기사수정 2015년 4월 24일.&amp;lt;/ref&amp;gt;&amp;lt;ref&amp;gt;이민영.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1/0002255321?sid=102 고법 “방응모 前조선일보 사장 친일행적 대부분 인정”]. 서울신문. 2012년 1월 13일.&amp;lt;/ref&amp;gt;&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6/0000000413?sid=110 김성수ㆍ방응모와 친일언론인 군상]. 미디어오늘. 2002년 3월 12일.&amp;lt;/ref&amp;gt; 언론계에서 활동하면서도 사업가의 길을 함께 걸었고, 교육 장학 활동을 하였으며, 1945년 광복 직후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안재홍]]의 추천을 받아 한국독립당 중앙상무위원과 독립촉성국민회 총무부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amp;lt;ref name=&amp;quot;안은&amp;quot;/&amp;gt;&amp;lt;ref&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16/2008031600800.html 계초 방응모와의 우정도 여러 편의 시로 표현해&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해방 정국에서 김구의 재정적 후견인으로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등 삼의사 유골 봉환 사업과 신탁통치 반대 운동 등에 참여하여 활동했다.&lt;br /&gt;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 납북 후 행적은 &amp;quot;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amp;quot;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lt;br /&gt;
&lt;br /&gt;
== 생애 ==&lt;br /&gt;
=== 생애 초기 ===&lt;br /&gt;
==== 출생과 성장 ====&lt;br /&gt;
방응모는 1883년 11월 3일 또는 9월 29일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바우머리 부락 또는 정주군 정부면 성내동 425번지에서 '''방계준(方桂準)'''과 온양 박씨(溫陽朴氏)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어려서 빈곤한 가정환경으로 방응모는 정규 학교에는 입학하지 못하고, 16세 때까지 서당에 드나들며 한학을 익혔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던 중 그가 어느 정도 실력이 우수하다고 인정되자, 스승인 승창률은 잠시 방응모에게 어린아이들을 돌보게 한 후 자리를 피하곤 했다 한다. 그는 홀로 사서육경을 탐독, 독파하였다. 21세 무렵 잠시 서당 훈장을 지내기도 했다. 우연히 경성부에 갔다가 신문물을 보고 충격을 받아 17세에 독학으로 신학문과 일본어, 중국어, 수학 등을 독파하였다.&lt;br /&gt;
&lt;br /&gt;
유년시절 서당의 성리학 스승이던 승창률의 친척인 승시영(承時榮)과 조씨(趙氏)의 딸 승계도와 결혼했다. 결혼한 다음 해에도 그는 공부를 한다며 책만 사다 읽곤 했고, 부인 승계도는 생계를 위해 몸소 나섰다. 그의 아내는 남편에 대한 믿음이 절대적이었고 탓을 하거나 가출하지 않았다.&lt;br /&gt;
&lt;br /&gt;
=== 언론, 기업 활동 ===&lt;br /&gt;
==== 계몽 활동과 언론 활동 ====&lt;br /&gt;
1915년부터 1924년 방응모는 지역 지식인들, 유학파 청년, 계몽 청년들이 모여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하는데 참여했다. 민립대학기성회에서 활동하면서 조만식 등과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언변과 용모가 되었던 그의 여관에도 손님들이 몰렸고, 그가 &amp;quot;2백원도 좋고 5백원도 좋다며 보태달라&amp;lt;ref name=&amp;quot;fsfs87&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7페이지&amp;lt;/ref&amp;gt;&amp;quot;고 하면 기부금을 내는 이들이 있었다. 1919년 정주에서 3.1 만세 운동이 벌어지자, 그도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형사들의 눈을 피해 방응모는 만세운동을 하다 재빨리 몸을 피해 화를 면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8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22년 6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인수하여 분국장에 취임했다. 그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경영하는 동시에 그는 농촌 계몽운동 등에 적극 참여했다. 1922년 6월 19일&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96페이지&amp;lt;/ref&amp;gt; 동아일보 본사를 설득하여 정주분국을 동아일보사 정주지국으로 승격시켰다. 동아일보사 지부장 재직 시 그는 민립 대학 설립 자금과 농촌진흥회 회원의 여비 및 당시 운영난에 처했던 오산학교의 재개교 등을 계획했다. 총독부의 거부로 실패한 대학 설립 자금은 고스란히 오산학교의 부활 자금으로 투입되었다.&lt;br /&gt;
&lt;br /&gt;
1923년 동아일보 정주군 분국이 지국으로 승격되자 정주국을 경영하였고, 같은 해 7월 여성들의 사회 참여와 평등권 신장을 위한 여자교육회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이후 대규모 수해가 나자, 정주군 수해구제회를 결성하여 봉사활동에 가담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 광업 경영과 조선일보 입사 ====&lt;br /&gt;
1924년 친구 전우현이 방응모와도 안면이 있던 금광 채굴업자 두 명을 데리고 그를 찾아왔다. 그들은 자신들이 봐 둔 산이 있다고 방응모에게 소개했다. 이후 광산업에 뛰어들어 1924년 여름 압록강변의 폐금광인 평안북도 삭주군 외남면 교동 다릿골의의 삭주 교동광업소를 찾아가 10미터 정도 땅을 파고 금맥을 발견했다. 곧 삭주 교동광업소를 인수, 경영을 확대하였다. 이때 만난 동업자의 딸이자 친구 전우현의 조카딸인 '''이인숙(李仁淑)'''을 만났다. 본처 승계도가 두 아들을 잃고 복부 수술이 잘못되어 아이를 얻지 못하게 되자 방응모에게도 수많은 중매가 들어왔다. 자식들을 병으로 잃은 것이 자신의 불찰이라고 본 승계도는 그에게 작은 부인이라도 들이자는 말을 꺼내기도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18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26년 방응모에게 광산 사업을 제안했던 두 친구가 손을 털고 나갔고, 그의 가족은 돈이 없어 쌀 대신 좁쌀로 좁쌀죽을 먹으며 연명해야 했다. 방응모는 정주군에 사는 비슷한 또래의 먼 친척 방상진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고, 방상진과 일꾼 대여섯 명, 그리고 후처 이인숙의 친정 쪽에서 얻어온 토지문서를 얻어 자금을 마련했고 다시 금광을 채굴했다. 그 후 1926년 7월 지하 300m 지점에서 금맥을 확보했고, 이후 연간 300kg의 금을 생산하여 벼락부자가 되었다.&lt;br /&gt;
&lt;br /&gt;
1928년 방응모는 자신의 아호를 딴 춘해 장학회를 만들고 장학생들의 모임인 이심회를 만든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48페이지&amp;lt;/ref&amp;gt; 1928년에 그는 의정부 직동, 흥선대원군의 별장이 있던 곳 바로 뒤에 위치한 건물을 매입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한용운]], 홍명희를 자주 초대했다.&lt;br /&gt;
&lt;br /&gt;
1932년 방응모는 교동광산을 135만원이란 거액에 일본 중외광업주식회사에 매각했다. 그 뒤 1932년 6월부터 조선일보 영업국장으로 활동하다 1933년 3월 [[조선일보]]의 경영권을 인수하여 부사장에 취임하였다.&lt;br /&gt;
그는 교동광업소를 운영하며 모은 재력을 바탕으로 부사장 재직 중 [[조선일보]]의 대주주가 되었으며, 1933년 7월 8대 사주 조만식으로부터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제9대 [[조선일보]] 사주로 취임, 활동했다.&amp;lt;ref&amp;gt;조선일보는 1932년 7월에 조만식을 사장으로 영입했지만, 조만식은 거의 평생을 평양에서 살아왔던데다 서울에서 활동하기에는 적응을 잘하지 못했다. 조만식은 신문사 경영난과 지역감정의 혹독한 시련을 받은 채 9개월만에 퇴사했다. 그리고 조만식 후임으로 1933년, 방응모를 사장으로 추대하기에 이르렀다.&amp;lt;/ref&amp;gt;&amp;lt;ref&amp;gt;《한국사 시민강좌 제47집, 대표적 독립운동가 12인》,일조각. p145&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언론, 사업 활동 ===&lt;br /&gt;
==== 사회사업 ====&lt;br /&gt;
[[파일:방응모장학생.jpg|섬네일|160px|오른쪽|방응모와 그의 장학금을 받던 학생들. 가운데 앉은 이가 방응모이고, 서있는 이들 중 왼쪽에서 두 번째는 방응모의 양자 방재윤.]]&lt;br /&gt;
&lt;br /&gt;
1930년 배영옥과 결혼하여 딸 방재숙을 얻었다. 1932년 광산업을 정리하였고 언론사업을 비롯하여 육영사업과 조림 및 간척사업 등을 벌였다. 또한 고아원과 사회복지단체에 후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933년 무렵 방응모가 [[조선일보]] 인수에 나서기 전부터 그는 [[한용운]]을 위한 일이라면 돈을 아끼지 않고 지출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성북동 언덕에 만해 한용운을 위해 기와집 한 채를 지어주었는데 [[심우장]](尋牛莊)이 그것이다. 또한 만해가 일제의 배급을 거부해 생활이 어려워지자 생활비를 지원했던 방응모는 그가 병석에 누운 1944년에는 치료비를 지원해주기도 했다.&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6/0000043262?sid=103 만해가 일송 선생 5일장 치른 사연]&amp;lt;/ref&amp;gt; 그 외에도 방응모는 만해 한용운·벽초 홍명희 등과 함께 새해가 되면 백천온천에도 같이 다녀올 정도로 가까운 관계였다.&lt;br /&gt;
&lt;br /&gt;
1932년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사건으로 체포된 [[안창호]]의 사면 탄원과 보석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총독부 경무국장은 그의 안창호 석방 제안을 정중히 거절한다.&lt;br /&gt;
&lt;br /&gt;
1936년 동방문화학원(숭문중학교·고등학교 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에 취임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인수와 경영 ====&lt;br /&gt;
1933년 1월 16일 그는 정식으로 주식회사 [[조선일보]]사를 창립했다. 일단 그는 조만식을 사장으로 임명하고 자신은 부사장으로 있다가, 그해 3월 13일 다시 부사장에 취임했다. 7월 10일 조만식의 사퇴로, [[조선일보]]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다.&lt;br /&gt;
&lt;br /&gt;
1934년 3월 25일 이광수를 비롯하여 서춘, 김동진, 함상훈, 신태익 등을 [[조선일보]]로 영입해 왔다. 그 외에도 정주군 출신 언론인, 작가들이 조선일보로 많이 오게 되었다.&lt;br /&gt;
&lt;br /&gt;
==== 동방문화학원 재단 설립 ====&lt;br /&gt;
방응모는 1936년 재단법인 동방문화학원(東邦文化學院)을 설립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6페이지&amp;lt;/ref&amp;gt; 동방문화학원은 학교 법인으로 인가된 재단 법인으로, 그 후 고계학원과 인연을 가지고 1936년부터는 보성고등보통학교를 후견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 분리되었다. 그 후 방응모 장학생인 서중회 회원들을 위한 방응모 장학사업을 주관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7페이지&amp;lt;/ref&amp;gt;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구 조선일보 사옥 안에 동방문화학원의 간판을 달고 조광 잡지를 계속 발행하는 조광사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7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일제 강점기 후반 ===&lt;br /&gt;
==== 중일 전쟁 전후 ====&lt;br /&gt;
중일전쟁 개전 직후인 1937년 7월 11일에 열린 [[조선일보]] 간부회의에서 주필 서춘이 '일본군, 중국군, 장개석씨'등으로 쓰던 용어를 '아군, 황군, 지나, 장개석'으로 고치고 일본 국민의 입장에서 논설을 쓸 것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반대 의견도 있기는 했으나, 방응모는 '일장기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이미 몇 십만 원의 손해를 보았을 뿐 아니라 [[3.1 운동]] 때처럼 신문이 민중을 지도할 수 없다'면서 서춘의 입장을 지지했다.&lt;br /&gt;
&lt;br /&gt;
1933년 이심회(후에 서중회, 방응모장학회 등 명칭이 바뀜)를 통해 대학생과 해외 유학생들에게 학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937년 12월 24일 [[안창호]]는 병보석 판정을 받고 재판소가 경성제국대학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안창호]]는 병상에서 병원비 문제로도 고초를 겪었고. 방응모는 50일 간의 입원비인 5백원짜리 수표 한 장을 안창호에게 전달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9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안창호]]는 1938년 3월 10일 밤 12시 경성제국대학 병원에서 운명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폐간 사건 ====&lt;br /&gt;
일본의 전쟁이 격화되면서 조선총독부 공보국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1940년에 강제로 폐간조치 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조선일보에 바쳤던 방응모는 큰 절망과 좌절을 느껴야 했다. [[한용운]]은 ‘신문이 폐간되다/ 붓이 꺾이어 모든 일이 끝나니…’로 시작하는 시를 지어 방응모를 위로했다. &amp;lt;ref&amp;gt;붓이 꺾이어 모든 일 끝나니 이제는 재갈 물린 사람들 뿔뿔이 흩어지고 아, 쓸쓸하고 쓸쓸한지고 망국 서울의 가을날 한강의 물도 흐느끼느니 울음 삼켜 흐느끼며 연지를 외면한 채 바다 향해 흐르느니&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38년 7월 “국민정신을 총동원하고 내선일체 전 능력을 발휘하여 국책 수행에 협력하여 성전(聖戰)의 궁극적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조직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에 참여했다.&lt;br /&gt;
&lt;br /&gt;
1940년 5월 조선총독부 총독 미나미 지로가 방송담화로 창씨개명을 권고했다. 그러나 그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성씨를 이제 와서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며 창씨개명은 완강하게 거절했다.&lt;br /&gt;
&lt;br /&gt;
조선일보에 트집이 잡힐 일이 나타나지 않자 총독부는 전국에 조선일보 신문 구독을 거절하도록 명령을 내렸고, 동시에 조선말을 쓰는 민원인에게는 일을 처리해주지 말도록 하게 했다. 총독부는 동아일보에 이어 조선일보에도 자진 폐간을 권고했고, 결국 8월 10일자로 폐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5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잡지 발행 활동 ====&lt;br /&gt;
신문 강제 폐간 뒤 방응모는 간판을 조광사로 바꿔 걸고, 사옥은 동방흥업주식회사로 등기를 변경해서 유지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1페이지&amp;lt;/ref&amp;gt; 이후 그는 조광 잡지 발행에 전념했다. [[조선일보]]가 폐간된 후에도 방응모는 벽초 홍명희 부자에게 지속적으로 생활비를 대주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4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4년 6월 29일 만해 [[한용운]]이 사망했다. 그는 [[심우장]]을 찾아가 3백원을 내놓았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5페이지&amp;lt;/ref&amp;gt;당시 쌀 10가마가 100원이었지만, 심우장은 당장 현금 1원이 없었는데 거액이라서 놀랐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6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광복 이후 활동 ===&lt;br /&gt;
==== 조선일보 복간 및 군정기 활동 ====&lt;br /&gt;
11월 [[조선일보]]사를 복간시켰다. 그러나 한동안 조선일보의 인쇄는 서울신문사에서 간행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1946년 2월 26일 서울신문사 공무국 종업원들이 조선일보의 인쇄를 거부해버렸다. 표면상의 문제는 임금 문제이나 내용상으로는 조선일보에 대한 조선공산당의 시위의 일종이었다. 사흘간의 교섭 끝에 2월 28일에 가서야 26일자와 27일자를 소급해서 인쇄하여 신문을 한꺼번에 발행하였다. 그러나 3월 1일과 2일에 또다시 인쇄를 거부당해 결국 휴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436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5년 광복 직후 서기원이 그를 찾아왔다. 서기원은 그때 경성농상실천학교의 동창회로부터 이 학교의 교장이 되어 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이다. 방응모는 서기원의 제의를 받아들여 1946년 8월 28일 동방문화학원 이사장으로 숭문상업학교를 인수, 재단 이사장이 되었다.&lt;br /&gt;
&lt;br /&gt;
==== 납북과 최후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 납북 후 행적은 &amp;quot;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amp;quot;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 1950년 8월경 개성 송악산 부근에서 미군의 폭격에 희생되었고 심한 폭격으로 시신을 찾을 수 없어 묘도 만들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남한에서는 1955년 7월 7일 생사불명기간 만료로 인해 실종 처리되었다.&lt;br /&gt;
&lt;br /&gt;
=== 사후 ===&lt;br /&gt;
서울 종로에 있던 양자 방재윤의 두 아들 방일영과 방우영은 방응모의 첩 이인숙이 찾아가 피신하라고 권고하여 황급히 피신했다. &lt;br /&gt;
&lt;br /&gt;
7월 6일 그의 행방불명처리가 되고, 방응모의 사후에도 [[조선일보]]는 그의 명의로 발행되었다. 1952년 4월 28일 조선일보는 발행인겸 편집인을 장기영으로, 인쇄인을 방일영으로, 방응모는 명예사장으로 명의변경하여 휴전 후 계속 발행하게 되었다. 1954년 4월 30일 제8회 조선일보 정기주주총회에서 장기영 사장이 사퇴하면서, 명예사장 방응모가 사장으로 추대되고, 발행인 겸 대표취체역에 방일영이 선임되었다. 이후 실종 후 1959년에 법적으로 사망 처리되었다. 그리고 1970년까지는 조선일보는 그의 이름으로 발행되었다.&lt;br /&gt;
&lt;br /&gt;
1970년 2월 19일 조선일보 정기주주총회에서 방응모 이사를 사퇴 수리하였다. 그의 피폭 사망 사실은 1970년대 이후 탈북자들을 통해 대한민국에 소개되었다.&lt;br /&gt;
&lt;br /&gt;
== 친일행위 의혹 ==&lt;br /&gt;
=== 일제 전시체제기 활동 ===&lt;br /&gt;
일제 강점기 말기 언론인으로서 총독부체제에 협력한 기록과 활동이 다수 기록이 있다. 1933년 3월 [[조선일보]] 경영권을 인수하고 부사장직에 취임했을 당시 같은 달에 고사기관총 구입비용 1600원을 군에 헌납하였다. 그는 1935년 친일 잡지 《조광 (잡지)(朝光)》을 창간하였고, 1937년에는 경성방송국 제2방송에 출연하여 일제가 중국의 베일을 절멸케하여 극동평화를 지키려고 한다는 강연을 하였다. 1940년대부터 조광에 집중적으로 친일 논설을 기고하고 시국 강연에 참여하여 전쟁 지원을 독려했다. 1942년 6월에는 '징병령 실시에 일층 더 감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글을 써서 조광에 발표하였다. 애국금차회(1937),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1938), 임전대책협의회(1941), 조선임전보국단(1941) 등 대표적인 친일 단체의 회원에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그는 이런 행적으로 인해 해방정국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명단에 기록되어 있고,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해 발표한 &amp;lt;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amp;gt;에 모두 포함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lt;br /&gt;
&lt;br /&gt;
우리 [[조선일보]]는 다른 어떤 신문도 따라오지 못하는 확고한 신념에서 비국민적 행위를 단연 배격하여 종국까지 조선일보사가 이미 정해놓은 방침에 한뜻으로 매진한다.|원산에서의 순회 강연&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9478.html 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친일 다짐하다 시민에 봉변]《한겨레》2005-08-24 오후 06:13:18&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반민족행위 논란 ===&lt;br /&gt;
방응모를 친일파로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남아 있다. 조선일보 경영 이전에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방응모의 활동이 거의 없었고, 납북된 뒤 소식이 끊겨버린 까닭에 본인이 항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 동안의 행적만으로 친일파 여부를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방응모의 후손들이 영향력 있는 [[조선일보]] 언론사의 사주를 맡았기에 그의 입장에서 서술한 기록을 많이 남기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80년 발간된 그의 전기 《계초 방응모》(조선일보사) 등에는 '그가 민족주의적 선각자'로 묘사되고 있다. 방응모가 친일파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일부세력측은 그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논거로 드는 경우가 많이 있다.&amp;lt;ref&amp;gt;유석재, 계간 《유심》 (2004년 봄호) [http://yousim.buddhism.org/html/2004-spr/tamgu-yoo-seok-jae.htm 삭풍 속에 피어난 금란지교(金蘭之交) - 만해와 계초 방응모]&amp;lt;/ref&amp;gt;&amp;lt;ref&amp;gt;&amp;quot;일제 말기 계초는 시국강연에 나설 것과 창씨개명을 집요하게 강요받았으나 그때마다 묵묵부답으로 거부하며 소신을 지켰다.&amp;quot; 《조선일보》 (2001.3) 조선일보 사장열전 - 계초 방응모편, 《한겨레》 (2001.3.30) [http://www.njoyschool.net/news/article_view.asp?menu_code=s20202&amp;amp;no=1206 조선일보, 일장기를 신문제호 위에]&amp;lt;/ref&amp;gt;&lt;br /&gt;
또한 한국정토학회 고문이자 서울 정토사 주지였던 박설산(1918~2007)이 학도병에 끌려가기 직전인 1943년 12월 28일 밤 서울역에서 스스로 왼발을 선로에 올려 발가락을 절단해 징집을 기피하자 방응모는 만해와 함께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설산을 걱정하면서 입원 중 조선일보 기자를 통해 돈을 전달한 것은 물론 퇴원할 때 돈을 전달하고 뒤를 보살폈다고 한다.&amp;lt;ref&amp;gt;박설산 회고록 &amp;lt;뚜껑없는 조선역사책&amp;gt;(1994, 도서출판 삼장) p240~241&amp;lt;/ref&amp;gt;&lt;br /&gt;
&lt;br /&gt;
2010년 12월, 방응모 관계자들 및 조선일보측은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을 취소해달라'며 법원에 낸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amp;quot;1944년 조선항공업 창립발기인으로 활동한 부분에 대해 친일행위로 판단한 부분을 취소하지만 나머지 활동에 대해서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amp;quot;라고 판결했다. 그 이유인 즉 &amp;quot;방응모는 1933년 조선일보 사장으로 취임해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등으로 활동하며 친일활동을 벌였으며, 1937년 경성방송국 시국강연에서 일본제국이 극동평화를 확립시킬 것이라는 내용의 강연을 하고, 1938년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춘추회의 발기인 겸 간사로 활동하기도 했다&amp;lt;ref&amp;gt;[http://media.daum.net/breakingnews/politics/view.html?cateid=1002&amp;amp;newsid=20101222103319164&amp;amp;p=newsis 법원 &amp;quot;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친일파 맞다&amp;quot;]뉴시스 2010년 12월 22일&amp;lt;/ref&amp;gt;&amp;quot;는 것이다.&lt;br /&gt;
&lt;br /&gt;
2012년 1월 12일 서울고법 행정7부는 방 전 사장의 손자인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이 행정안전부를 상대로 낸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처분 취소 청구소송에서 ‘일제 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의 친일 행위 판정 조항에 비추어 방 전 사장에게 적용된 모두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민족적 지도자로서 비중이 큰 만큼 그로 인한 책임도 무거울 뿐 아니라 고난의 시기를 겪은 민족으로서 그 역사를 반성하자는 입장에 설 때, 방 전 사장의 여러 행태는 반민특별법에서 규정한 친일반민족행위의 유형에 속함을 부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1·2심 재판부는 방 전 사장이 자신이 운영하던 잡지 &amp;lt;조광&amp;gt;에 일제 침략전쟁에 동조하고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문예물과 일제 침략전쟁에 협력할 것을 주문하는 논문을 게재하는 등의 ‘친일’ 행위를 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또한, 2심 재판부는 일본의 전쟁 수행을 돕기 위해 설립된 군수 제조업체 ‘조선항공공업’의 발기인과 감사를 지낸 것은 “감사는 업무집행에 관여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기관으로, 방 전 사장이 이 회사를 운영했다고 볼 수 있다”는 이유로 친일이라고 판단했다.&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4565.html법원 ‘방응모 친일’ 2심서도 인정] 인터넷한겨레 2010년 12월 22일&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기타 ==&lt;br /&gt;
그는 [[한용운]], 최남선, 정인보, 홍명희 등과 친분관계를 형성하고 어울려 지냈다 한다.&lt;br /&gt;
&lt;br /&gt;
김구의 한국독립당의 재정적 후견인 역할을 하였다 하며,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삼의사 유골봉환식 때 김구, 정인보 등과 촬영한 사진이 있다.&lt;br /&gt;
한편 임꺽정의 저자인 벽초 홍명희가 방응모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그와 깊은 친분을 맺었다는 주장이 있다. 《조광》 1938년 11월호엔 홍명희가 병중에 있는 방응모를 위로하며 지은 한시가 방응모의 답시와 함께 실려 있다고 한다.&amp;lt;ref&amp;gt;[http://weekly.chosun.com/site/data/html_dir/2004/11/05/2004110577041.html ‘임꺽정’으로 되살아난 독립운동의 魂! 주간조선 1827호 2004.11.04&amp;lt;/ref&amp;gt; 또한 [[안창호]]의 비서실장을 지낸 독립유공자 구익균은 방응모와 안창호가 친밀했다는 주장을 했다.&amp;lt;ref&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09/2008030901055.html &amp;quot;공산주의자들, 도산 비판하다가도 하숙비 떨어지면 찾아와&amp;quot;] 조선일보, 2008-03-10 03:22&amp;lt;/ref&amp;gt;&lt;br /&gt;
또한 박설산에 따르면 1943년 만해 한용운에게 학도병으로 끌려가게 되었음을 알리려 심우장으로 찾아가게 되었을 때, 한용운과 방응모가 바둑을 두고 곁에서 정인보가 훈수를 두고 있었다고 한다.&amp;lt;ref&amp;gt;박설산 저 &amp;lt;뚜껑없는 朝鮮 역사 책&amp;gt; p.226 도서출판 三藏(1994)&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 /&amp;gt;&lt;br /&gt;
&lt;br /&gt;
== 참고 자료 ==&lt;br /&gt;
* 청산하지 못한 역사: 언론 내세워 일제에 아부한 교화 정책의 하수인 (문영숙) (반민족문제연구소, 청년사, 1994)&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민족 계몽의 초석 방응모(이동욱 저, 지구촌, 1998)&lt;br /&gt;
* 계초 방응모전(계초전기간행위, 조선일보사, 1980년)&lt;br /&gt;
* 계초 방응모(이동욱, 방일영문화재단, 1996)&lt;br /&gt;
&lt;br /&gt;
== 외부 링크 ==&lt;br /&gt;
* [https://web.archive.org/web/20050123171046/http://chosunhost.com/ 계초방응모 기념사업회]&lt;br /&gt;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09145 &amp;lt;조선일보&amp;gt;, 방응모 전 사장의 '친일행적' 말한다] - 오마이뉴스 04.09.10일자&lt;br /&gt;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020302101749 방응모ㆍ 김성수 친일행적 뭔가 : &amp;lt;긴급입수&amp;gt;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 全文] - 프레시안 2002-03-02&lt;br /&gt;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54052 그가 '&amp;lt;조선&amp;gt;의 주인' 주장하는 이유] 오마이뉴스 2001년 9월 20일자&lt;br /&gt;
*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956 방재선씨, 호주·상속 원인무효소송 제기]&lt;br /&gt;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4/06/2008040601053.html '5인 친필 서첩' 발굴] 조선일보 2008년04월06일자]&lt;br /&gt;
&lt;br /&gt;
[[분류: 감자]]&lt;/div&gt;</summary>
		<author><name>Nsgjjsjsjy02</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B0%A9%EC%9D%91%EB%AA%A8&amp;diff=59411</id>
		<title>방응모</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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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Nsgjjsjsjy02: /* 광복 직후 */&lt;/p&gt;
&lt;hr /&gt;
&lt;div&gt;{|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width:100%&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0%&amp;quot;|사진&lt;br /&gt;
|[[파일:방응모.jpg|center|200픽셀]]&lt;br /&gt;
|+ '''방응모'''&lt;br /&gt;
|+ style=&amp;quot;caption-side:bottom;text-align:left:&amp;quot;|출처: 위키백과&lt;br /&gt;
|출생||1883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조선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또는 정부면 성내동&lt;br /&gt;
|-&lt;br /&gt;
|사망||1950년경으로 추정&lt;br /&gt;
|-&lt;br /&gt;
|사인||불명&lt;br /&gt;
|-&lt;br /&gt;
|거주지||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amp;gt; 경성부 -&amp;gt; 경기도 양주군 의정부읍&lt;br /&gt;
|-&lt;br /&gt;
|국적||대한민국&lt;br /&gt;
|-&lt;br /&gt;
|본관||온양&lt;br /&gt;
|-&lt;br /&gt;
|별칭||호: 계초(啓礎), 춘해(春海)&lt;br /&gt;
|-&lt;br /&gt;
|직업||교사, 변호사, 상인, 언론인, 기업인, 사회운동가, 정치가&lt;br /&gt;
|-&lt;br /&gt;
|배우자||승계도, 이인숙, 배영옥, 노효용&lt;br /&gt;
|-&lt;br /&gt;
|자녀||방재숙(딸), 방재욱·방재선·방재효·방재규(아들), 방재윤(양자)&lt;br /&gt;
|-&lt;br /&gt;
|부모||방계준(부), 온양박씨(모)&lt;br /&gt;
|}&lt;br /&gt;
&lt;br /&gt;
'''방응모'''(方應謨, 평안북도 정주군, 1883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 1950년 8월(추정)는 [[일제강점기]]의 교육자, 언론인, 법조인, 기업인이자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언론인이며 정치인이다. 호는 '''춘해'''(春海)이고, 뒤에 '''계초'''(啓礎)로 고쳤다.&lt;br /&gt;
&lt;br /&gt;
1922년 동아일보 정주 지국을 인수해 지국장을 지내다가 1924년 금광업에 뛰어들어 큰 부를 얻게 되었다. 1932년 6월 조선일보에 입사하였고 이후 영업국장이 되어 조선일보의 판매망을 장악하게 되고 경영권을 인수하면서 1933년 3월 조선일보 부사장이 되었다. 1933년 7월부터 1950년 7월까지 종신으로 [[조선일보]]의 사장을 역임하였다. 1935년 창간한 월간잡지 '조광(朝光)'은 친일 논란이 있다.&amp;lt;ref&amp;gt;안은필. [http://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9211 조선일보가 가장 빛나던 시기, ‘안재홍 시대’]&amp;lt;/ref&amp;gt;&amp;lt;ref name=&amp;quot;안은&amp;quot;&amp;gt;안은필. [http://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9279 방응모 친일증거, “모래밭에서 모래 찾기”]국민TV. 기사입력 2015년 4월 23일. 기사수정 2015년 4월 24일.&amp;lt;/ref&amp;gt;&amp;lt;ref&amp;gt;이민영.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1/0002255321?sid=102 고법 “방응모 前조선일보 사장 친일행적 대부분 인정”]. 서울신문. 2012년 1월 13일.&amp;lt;/ref&amp;gt;&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6/0000000413?sid=110 김성수ㆍ방응모와 친일언론인 군상]. 미디어오늘. 2002년 3월 12일.&amp;lt;/ref&amp;gt; 언론계에서 활동하면서도 사업가의 길을 함께 걸었고, 교육 장학 활동을 하였으며, 1945년 광복 직후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안재홍]]의 추천을 받아 한국독립당 중앙상무위원과 독립촉성국민회 총무부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amp;lt;ref name=&amp;quot;안은&amp;quot;/&amp;gt;&amp;lt;ref&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16/2008031600800.html 계초 방응모와의 우정도 여러 편의 시로 표현해&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해방 정국에서 김구의 재정적 후견인으로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등 삼의사 유골 봉환 사업과 신탁통치 반대 운동 등에 참여하여 활동했다.&lt;br /&gt;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 납북 후 행적은 &amp;quot;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amp;quot;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lt;br /&gt;
&lt;br /&gt;
== 생애 ==&lt;br /&gt;
=== 생애 초기 ===&lt;br /&gt;
==== 출생과 성장 ====&lt;br /&gt;
방응모는 1883년 11월 3일 또는 9월 29일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바우머리 부락 또는 정주군 정부면 성내동 425번지에서 '''방계준(方桂準)'''과 온양 박씨(溫陽朴氏)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어려서 빈곤한 가정환경으로 방응모는 정규 학교에는 입학하지 못하고, 16세 때까지 서당에 드나들며 한학을 익혔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던 중 그가 어느 정도 실력이 우수하다고 인정되자, 스승인 승창률은 잠시 방응모에게 어린아이들을 돌보게 한 후 자리를 피하곤 했다 한다. 그는 홀로 사서육경을 탐독, 독파하였다. 21세 무렵 잠시 서당 훈장을 지내기도 했다. 우연히 경성부에 갔다가 신문물을 보고 충격을 받아 17세에 독학으로 신학문과 일본어, 중국어, 수학 등을 독파하였다.&lt;br /&gt;
&lt;br /&gt;
유년시절 서당의 성리학 스승이던 승창률의 친척인 승시영(承時榮)과 조씨(趙氏)의 딸 승계도와 결혼했다. 결혼한 다음 해에도 그는 공부를 한다며 책만 사다 읽곤 했고, 부인 승계도는 생계를 위해 몸소 나섰다. 그의 아내는 남편에 대한 믿음이 절대적이었고 탓을 하거나 가출하지 않았다.&lt;br /&gt;
&lt;br /&gt;
=== 언론, 기업 활동 ===&lt;br /&gt;
==== 계몽 활동과 언론 활동 ====&lt;br /&gt;
1915년부터 1924년 방응모는 지역 지식인들, 유학파 청년, 계몽 청년들이 모여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하는데 참여했다. 민립대학기성회에서 활동하면서 조만식 등과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언변과 용모가 되었던 그의 여관에도 손님들이 몰렸고, 그가 &amp;quot;2백원도 좋고 5백원도 좋다며 보태달라&amp;lt;ref name=&amp;quot;fsfs87&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7페이지&amp;lt;/ref&amp;gt;&amp;quot;고 하면 기부금을 내는 이들이 있었다. 1919년 정주에서 3.1 만세 운동이 벌어지자, 그도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형사들의 눈을 피해 방응모는 만세운동을 하다 재빨리 몸을 피해 화를 면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8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22년 6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인수하여 분국장에 취임했다. 그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경영하는 동시에 그는 농촌 계몽운동 등에 적극 참여했다. 1922년 6월 19일&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96페이지&amp;lt;/ref&amp;gt; 동아일보 본사를 설득하여 정주분국을 동아일보사 정주지국으로 승격시켰다. 동아일보사 지부장 재직 시 그는 민립 대학 설립 자금과 농촌진흥회 회원의 여비 및 당시 운영난에 처했던 오산학교의 재개교 등을 계획했다. 총독부의 거부로 실패한 대학 설립 자금은 고스란히 오산학교의 부활 자금으로 투입되었다.&lt;br /&gt;
&lt;br /&gt;
1923년 동아일보 정주군 분국이 지국으로 승격되자 정주국을 경영하였고, 같은 해 7월 여성들의 사회 참여와 평등권 신장을 위한 여자교육회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이후 대규모 수해가 나자, 정주군 수해구제회를 결성하여 봉사활동에 가담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 광업 경영과 조선일보 입사 ====&lt;br /&gt;
1924년 친구 전우현이 방응모와도 안면이 있던 금광 채굴업자 두 명을 데리고 그를 찾아왔다. 그들은 자신들이 봐 둔 산이 있다고 방응모에게 소개했다. 이후 광산업에 뛰어들어 1924년 여름 압록강변의 폐금광인 평안북도 삭주군 외남면 교동 다릿골의의 삭주 교동광업소를 찾아가 10미터 정도 땅을 파고 금맥을 발견했다. 곧 삭주 교동광업소를 인수, 경영을 확대하였다. 이때 만난 동업자의 딸이자 친구 전우현의 조카딸인 '''이인숙(李仁淑)'''을 만났다. 본처 승계도가 두 아들을 잃고 복부 수술이 잘못되어 아이를 얻지 못하게 되자 방응모에게도 수많은 중매가 들어왔다. 자식들을 병으로 잃은 것이 자신의 불찰이라고 본 승계도는 그에게 작은 부인이라도 들이자는 말을 꺼내기도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18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26년 방응모에게 광산 사업을 제안했던 두 친구가 손을 털고 나갔고, 그의 가족은 돈이 없어 쌀 대신 좁쌀로 좁쌀죽을 먹으며 연명해야 했다. 방응모는 정주군에 사는 비슷한 또래의 먼 친척 방상진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고, 방상진과 일꾼 대여섯 명, 그리고 후처 이인숙의 친정 쪽에서 얻어온 토지문서를 얻어 자금을 마련했고 다시 금광을 채굴했다. 그 후 1926년 7월 지하 300m 지점에서 금맥을 확보했고, 이후 연간 300kg의 금을 생산하여 벼락부자가 되었다.&lt;br /&gt;
&lt;br /&gt;
1928년 방응모는 자신의 아호를 딴 춘해 장학회를 만들고 장학생들의 모임인 이심회를 만든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48페이지&amp;lt;/ref&amp;gt; 1928년에 그는 의정부 직동, 흥선대원군의 별장이 있던 곳 바로 뒤에 위치한 건물을 매입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한용운]], 홍명희를 자주 초대했다.&lt;br /&gt;
&lt;br /&gt;
1932년 방응모는 교동광산을 135만원이란 거액에 일본 중외광업주식회사에 매각했다. 그 뒤 1932년 6월부터 조선일보 영업국장으로 활동하다 1933년 3월 [[조선일보]]의 경영권을 인수하여 부사장에 취임하였다.&lt;br /&gt;
그는 교동광업소를 운영하며 모은 재력을 바탕으로 부사장 재직 중 [[조선일보]]의 대주주가 되었으며, 1933년 7월 8대 사주 조만식으로부터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제9대 [[조선일보]] 사주로 취임, 활동했다.&amp;lt;ref&amp;gt;조선일보는 1932년 7월에 조만식을 사장으로 영입했지만, 조만식은 거의 평생을 평양에서 살아왔던데다 서울에서 활동하기에는 적응을 잘하지 못했다. 조만식은 신문사 경영난과 지역감정의 혹독한 시련을 받은 채 9개월만에 퇴사했다. 그리고 조만식 후임으로 1933년, 방응모를 사장으로 추대하기에 이르렀다.&amp;lt;/ref&amp;gt;&amp;lt;ref&amp;gt;《한국사 시민강좌 제47집, 대표적 독립운동가 12인》,일조각. p145&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언론, 사업 활동 ===&lt;br /&gt;
==== 사회사업 ====&lt;br /&gt;
[[파일:방응모장학생.jpg|섬네일|160px|오른쪽|방응모와 그의 장학금을 받던 학생들. 가운데 앉은 이가 방응모이고, 서있는 이들 중 왼쪽에서 두 번째는 방응모의 양자 방재윤.]]&lt;br /&gt;
&lt;br /&gt;
1930년 배영옥과 결혼하여 딸 방재숙을 얻었다. 1932년 광산업을 정리하였고 언론사업을 비롯하여 육영사업과 조림 및 간척사업 등을 벌였다. 또한 고아원과 사회복지단체에 후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933년 무렵 방응모가 [[조선일보]] 인수에 나서기 전부터 그는 [[한용운]]을 위한 일이라면 돈을 아끼지 않고 지출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성북동 언덕에 만해 한용운을 위해 기와집 한 채를 지어주었는데 [[심우장]](尋牛莊)이 그것이다. 또한 만해가 일제의 배급을 거부해 생활이 어려워지자 생활비를 지원했던 방응모는 그가 병석에 누운 1944년에는 치료비를 지원해주기도 했다.&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6/0000043262?sid=103 만해가 일송 선생 5일장 치른 사연]&amp;lt;/ref&amp;gt; 그 외에도 방응모는 만해 한용운·벽초 홍명희 등과 함께 새해가 되면 백천온천에도 같이 다녀올 정도로 가까운 관계였다.&lt;br /&gt;
&lt;br /&gt;
1932년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사건으로 체포된 [[안창호]]의 사면 탄원과 보석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총독부 경무국장은 그의 안창호 석방 제안을 정중히 거절한다.&lt;br /&gt;
&lt;br /&gt;
1936년 동방문화학원(숭문중학교·고등학교 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에 취임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인수와 경영 ====&lt;br /&gt;
1933년 1월 16일 그는 정식으로 주식회사 [[조선일보]]사를 창립했다. 일단 그는 조만식을 사장으로 임명하고 자신은 부사장으로 있다가, 그해 3월 13일 다시 부사장에 취임했다. 7월 10일 조만식의 사퇴로, [[조선일보]]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다.&lt;br /&gt;
&lt;br /&gt;
1934년 3월 25일 이광수를 비롯하여 서춘, 김동진, 함상훈, 신태익 등을 [[조선일보]]로 영입해 왔다. 그 외에도 정주군 출신 언론인, 작가들이 조선일보로 많이 오게 되었다.&lt;br /&gt;
&lt;br /&gt;
==== 동방문화학원 재단 설립 ====&lt;br /&gt;
방응모는 1936년 재단법인 동방문화학원(東邦文化學院)을 설립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6페이지&amp;lt;/ref&amp;gt; 동방문화학원은 학교 법인으로 인가된 재단 법인으로, 그 후 고계학원과 인연을 가지고 1936년부터는 보성고등보통학교를 후견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 분리되었다. 그 후 방응모 장학생인 서중회 회원들을 위한 방응모 장학사업을 주관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7페이지&amp;lt;/ref&amp;gt;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구 조선일보 사옥 안에 동방문화학원의 간판을 달고 조광 잡지를 계속 발행하는 조광사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7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일제 강점기 후반 ===&lt;br /&gt;
==== 중일 전쟁 전후 ====&lt;br /&gt;
중일전쟁 개전 직후인 1937년 7월 11일에 열린 [[조선일보]] 간부회의에서 주필 서춘이 '일본군, 중국군, 장개석씨'등으로 쓰던 용어를 '아군, 황군, 지나, 장개석'으로 고치고 일본 국민의 입장에서 논설을 쓸 것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반대 의견도 있기는 했으나, 방응모는 '일장기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이미 몇 십만 원의 손해를 보았을 뿐 아니라 [[3.1 운동]] 때처럼 신문이 민중을 지도할 수 없다'면서 서춘의 입장을 지지했다.&lt;br /&gt;
&lt;br /&gt;
1933년 이심회(후에 서중회, 방응모장학회 등 명칭이 바뀜)를 통해 대학생과 해외 유학생들에게 학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937년 12월 24일 [[안창호]]는 병보석 판정을 받고 재판소가 경성제국대학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안창호]]는 병상에서 병원비 문제로도 고초를 겪었고. 방응모는 50일 간의 입원비인 5백원짜리 수표 한 장을 안창호에게 전달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9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안창호]]는 1938년 3월 10일 밤 12시 경성제국대학 병원에서 운명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폐간 사건 ====&lt;br /&gt;
일본의 전쟁이 격화되면서 조선총독부 공보국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1940년에 강제로 폐간조치 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조선일보에 바쳤던 방응모는 큰 절망과 좌절을 느껴야 했다. [[한용운]]은 ‘신문이 폐간되다/ 붓이 꺾이어 모든 일이 끝나니…’로 시작하는 시를 지어 방응모를 위로했다. &amp;lt;ref&amp;gt;붓이 꺾이어 모든 일 끝나니 이제는 재갈 물린 사람들 뿔뿔이 흩어지고 아, 쓸쓸하고 쓸쓸한지고 망국 서울의 가을날 한강의 물도 흐느끼느니 울음 삼켜 흐느끼며 연지를 외면한 채 바다 향해 흐르느니&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38년 7월 “국민정신을 총동원하고 내선일체 전 능력을 발휘하여 국책 수행에 협력하여 성전(聖戰)의 궁극적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조직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에 참여했다.&lt;br /&gt;
&lt;br /&gt;
1940년 5월 조선총독부 총독 미나미 지로가 방송담화로 창씨개명을 권고했다. 그러나 그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성씨를 이제 와서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며 창씨개명은 완강하게 거절했다.&lt;br /&gt;
&lt;br /&gt;
조선일보에 트집이 잡힐 일이 나타나지 않자 총독부는 전국에 조선일보 신문 구독을 거절하도록 명령을 내렸고, 동시에 조선말을 쓰는 민원인에게는 일을 처리해주지 말도록 하게 했다. 총독부는 동아일보에 이어 조선일보에도 자진 폐간을 권고했고, 결국 8월 10일자로 폐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5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잡지 발행 활동 ====&lt;br /&gt;
신문 강제 폐간 뒤 방응모는 간판을 조광사로 바꿔 걸고, 사옥은 동방흥업주식회사로 등기를 변경해서 유지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1페이지&amp;lt;/ref&amp;gt; 이후 그는 조광 잡지 발행에 전념했다. [[조선일보]]가 폐간된 후에도 방응모는 벽초 홍명희 부자에게 지속적으로 생활비를 대주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4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4년 6월 29일 만해 [[한용운]]이 사망했다. 그는 [[심우장]]을 찾아가 3백원을 내놓았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5페이지&amp;lt;/ref&amp;gt;당시 쌀 10가마가 100원이었지만, 심우장은 당장 현금 1원이 없었는데 거액이라서 놀랐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6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광복 이후 언론 및 정치활동 ===&lt;br /&gt;
==== 조선일보 복간 및 군정기 활동 ====&lt;br /&gt;
11월 [[조선일보]]사를 복간시켰다. 그러나 한동안 조선일보의 인쇄는 서울신문사에서 간행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1945년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추념대회에 참여하였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2&amp;quot;&amp;gt;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13&amp;lt;/ref&amp;gt; 순국선열추념대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2&amp;quot; /&amp;gt;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참여,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이 되었다.&amp;lt;ref&amp;gt;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55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6년 2월 26일 서울신문사 공무국 종업원들이 조선일보의 인쇄를 거부해버렸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436페이지&amp;lt;/ref&amp;gt; 그동안 묵시적으로 방해가 은근히 있었다. 표면상의 문제는 임금 문제이나 내용상으로는 조선일보에 대한 조선공산당의 시위의 일종이었다. 사흘간의 교섭 끝에 2월 28일에 가서야 26일자와 27일자를 소급해서 인쇄하여 신문을 한꺼번에 발행하였다. 그러나 3월 1일과 2일에 또다시 인쇄를 거부당해 결국 휴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436페이지&amp;lt;/ref&amp;gt; 조선일보를 경성일보사로 옮겨서 인쇄하기로 하고 3월 5일자로 사고로 독자에게 알렸다.&lt;br /&gt;
&lt;br /&gt;
4월 29일 김구, 김창숙, 김성수, 오세창 등과 함께 서울운동장에서 윤봉길의사 추모회의 창립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amp;lt;ref&amp;gt;&amp;quot;故尹奉吉義士의 記念式 오늘, 發起人會 열고 準備&amp;quot;, 동아일보 1946년 4월 23일자 2면, 사회면&amp;lt;/ref&amp;gt; 그해 5월 조선공업구락부 고문에 위촉되었다.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民族統一總本部) 10인협의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6월 15일 오후 5시 40분 서울역에 마중나가 서울역에 도착한 삼의사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lt;br /&gt;
&lt;br /&gt;
1945년 광복 직후 서기원이 그를 찾아왔다. 서기원은 그때 경성농상실천학교의 동창회로부터 이 학교의 교장이 되어 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이다. 방응모는 서기원의 제의를 받아들여 1946년 8월 28일 동방문화학원 이사장으로 숭문상업학교를 인수, 재단 이사장이 되었다. 후일 방응모가 6.25 전쟁 중에 납북된 후 동방문화학원과 숭문중,고교의 재단은 최용진이 운영하다가 다시 1978년에 방일영에게 인수되었다.&lt;br /&gt;
&lt;br /&gt;
1947년 1월 21일 제5회 창립위원회를 본사에서 개최하고 2월 23일 주식회사 조선일보사 주주창립총회를 열고 대표이사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공동투자 경영자로 참여시킨 전무 이종민과의 알력이 발생했다. 이종민과의 갈등이 심화되자 그해 8월 3일 방응모는 일단 사직서를 제출했다. 1947년 8월 10일 풍문여고 강당에서 개최된 한인신문기자협회에 참석, 민족청년단에서 언론계 공로자로 방응모, 김성수, 설의식을 지정하여 상을 시상받았다.&amp;lt;ref&amp;gt;&amp;quot;朝鮮 新聞記者協會&amp;quot;, 동아일보 1947년 8월 10일자 2면, 사회면&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납북과 최후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 납북 후 행적은 &amp;quot;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amp;quot;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 1950년 8월경 개성 송악산 부근에서 미군의 폭격에 희생되었고 심한 폭격으로 시신을 찾을 수 없어 묘도 만들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남한에서는 1955년 7월 7일 생사불명기간 만료로 인해 실종 처리되었다.&lt;br /&gt;
&lt;br /&gt;
=== 사후 ===&lt;br /&gt;
서울 종로에 있던 양자 방재윤의 두 아들 방일영과 방우영은 방응모의 첩 이인숙이 찾아가 피신하라고 권고하여 황급히 피신했다. &lt;br /&gt;
&lt;br /&gt;
7월 6일 그의 행방불명처리가 되고, 방응모의 사후에도 [[조선일보]]는 그의 명의로 발행되었다. 1952년 4월 28일 조선일보는 발행인겸 편집인을 장기영으로, 인쇄인을 방일영으로, 방응모는 명예사장으로 명의변경하여 휴전 후 계속 발행하게 되었다. 1954년 4월 30일 제8회 조선일보 정기주주총회에서 장기영 사장이 사퇴하면서, 명예사장 방응모가 사장으로 추대되고, 발행인 겸 대표취체역에 방일영이 선임되었다. 이후 실종 후 1959년에 법적으로 사망 처리되었다. 그리고 1970년까지는 조선일보는 그의 이름으로 발행되었다.&lt;br /&gt;
&lt;br /&gt;
1970년 2월 19일 조선일보 정기주주총회에서 방응모 이사를 사퇴 수리하였다. 그의 피폭 사망 사실은 1970년대 이후 탈북자들을 통해 대한민국에 소개되었다.&lt;br /&gt;
&lt;br /&gt;
== 친일행위 의혹 ==&lt;br /&gt;
=== 일제 전시체제기 활동 ===&lt;br /&gt;
일제 강점기 말기 언론인으로서 총독부체제에 협력한 기록과 활동이 다수 기록이 있다. 1933년 3월 [[조선일보]] 경영권을 인수하고 부사장직에 취임했을 당시 같은 달에 고사기관총 구입비용 1600원을 군에 헌납하였다. 그는 1935년 친일 잡지 《조광 (잡지)(朝光)》을 창간하였고, 1937년에는 경성방송국 제2방송에 출연하여 일제가 중국의 베일을 절멸케하여 극동평화를 지키려고 한다는 강연을 하였다. 1940년대부터 조광에 집중적으로 친일 논설을 기고하고 시국 강연에 참여하여 전쟁 지원을 독려했다. 1942년 6월에는 '징병령 실시에 일층 더 감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글을 써서 조광에 발표하였다. 애국금차회(1937),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1938), 임전대책협의회(1941), 조선임전보국단(1941) 등 대표적인 친일 단체의 회원에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그는 이런 행적으로 인해 해방정국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명단에 기록되어 있고,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해 발표한 &amp;lt;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amp;gt;에 모두 포함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lt;br /&gt;
&lt;br /&gt;
우리 [[조선일보]]는 다른 어떤 신문도 따라오지 못하는 확고한 신념에서 비국민적 행위를 단연 배격하여 종국까지 조선일보사가 이미 정해놓은 방침에 한뜻으로 매진한다.|원산에서의 순회 강연&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9478.html 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친일 다짐하다 시민에 봉변]《한겨레》2005-08-24 오후 06:13:18&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반민족행위 논란 ===&lt;br /&gt;
방응모를 친일파로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남아 있다. 조선일보 경영 이전에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방응모의 활동이 거의 없었고, 납북된 뒤 소식이 끊겨버린 까닭에 본인이 항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 동안의 행적만으로 친일파 여부를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방응모의 후손들이 영향력 있는 [[조선일보]] 언론사의 사주를 맡았기에 그의 입장에서 서술한 기록을 많이 남기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80년 발간된 그의 전기 《계초 방응모》(조선일보사) 등에는 '그가 민족주의적 선각자'로 묘사되고 있다. 방응모가 친일파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일부세력측은 그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논거로 드는 경우가 많이 있다.&amp;lt;ref&amp;gt;유석재, 계간 《유심》 (2004년 봄호) [http://yousim.buddhism.org/html/2004-spr/tamgu-yoo-seok-jae.htm 삭풍 속에 피어난 금란지교(金蘭之交) - 만해와 계초 방응모]&amp;lt;/ref&amp;gt;&amp;lt;ref&amp;gt;&amp;quot;일제 말기 계초는 시국강연에 나설 것과 창씨개명을 집요하게 강요받았으나 그때마다 묵묵부답으로 거부하며 소신을 지켰다.&amp;quot; 《조선일보》 (2001.3) 조선일보 사장열전 - 계초 방응모편, 《한겨레》 (2001.3.30) [http://www.njoyschool.net/news/article_view.asp?menu_code=s20202&amp;amp;no=1206 조선일보, 일장기를 신문제호 위에]&amp;lt;/ref&amp;gt;&lt;br /&gt;
또한 한국정토학회 고문이자 서울 정토사 주지였던 박설산(1918~2007)이 학도병에 끌려가기 직전인 1943년 12월 28일 밤 서울역에서 스스로 왼발을 선로에 올려 발가락을 절단해 징집을 기피하자 방응모는 만해와 함께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설산을 걱정하면서 입원 중 조선일보 기자를 통해 돈을 전달한 것은 물론 퇴원할 때 돈을 전달하고 뒤를 보살폈다고 한다.&amp;lt;ref&amp;gt;박설산 회고록 &amp;lt;뚜껑없는 조선역사책&amp;gt;(1994, 도서출판 삼장) p240~241&amp;lt;/ref&amp;gt;&lt;br /&gt;
&lt;br /&gt;
2010년 12월, 방응모 관계자들 및 조선일보측은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을 취소해달라'며 법원에 낸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amp;quot;1944년 조선항공업 창립발기인으로 활동한 부분에 대해 친일행위로 판단한 부분을 취소하지만 나머지 활동에 대해서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amp;quot;라고 판결했다. 그 이유인 즉 &amp;quot;방응모는 1933년 조선일보 사장으로 취임해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등으로 활동하며 친일활동을 벌였으며, 1937년 경성방송국 시국강연에서 일본제국이 극동평화를 확립시킬 것이라는 내용의 강연을 하고, 1938년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춘추회의 발기인 겸 간사로 활동하기도 했다&amp;lt;ref&amp;gt;[http://media.daum.net/breakingnews/politics/view.html?cateid=1002&amp;amp;newsid=20101222103319164&amp;amp;p=newsis 법원 &amp;quot;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친일파 맞다&amp;quot;]뉴시스 2010년 12월 22일&amp;lt;/ref&amp;gt;&amp;quot;는 것이다.&lt;br /&gt;
&lt;br /&gt;
2012년 1월 12일 서울고법 행정7부는 방 전 사장의 손자인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이 행정안전부를 상대로 낸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처분 취소 청구소송에서 ‘일제 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의 친일 행위 판정 조항에 비추어 방 전 사장에게 적용된 모두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민족적 지도자로서 비중이 큰 만큼 그로 인한 책임도 무거울 뿐 아니라 고난의 시기를 겪은 민족으로서 그 역사를 반성하자는 입장에 설 때, 방 전 사장의 여러 행태는 반민특별법에서 규정한 친일반민족행위의 유형에 속함을 부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1·2심 재판부는 방 전 사장이 자신이 운영하던 잡지 &amp;lt;조광&amp;gt;에 일제 침략전쟁에 동조하고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문예물과 일제 침략전쟁에 협력할 것을 주문하는 논문을 게재하는 등의 ‘친일’ 행위를 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또한, 2심 재판부는 일본의 전쟁 수행을 돕기 위해 설립된 군수 제조업체 ‘조선항공공업’의 발기인과 감사를 지낸 것은 “감사는 업무집행에 관여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기관으로, 방 전 사장이 이 회사를 운영했다고 볼 수 있다”는 이유로 친일이라고 판단했다.&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4565.html법원 ‘방응모 친일’ 2심서도 인정] 인터넷한겨레 2010년 12월 22일&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기타 ==&lt;br /&gt;
그는 [[한용운]], 최남선, 정인보, 홍명희 등과 친분관계를 형성하고 어울려 지냈다 한다.&lt;br /&gt;
&lt;br /&gt;
김구의 한국독립당의 재정적 후견인 역할을 하였다 하며,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삼의사 유골봉환식 때 김구, 정인보 등과 촬영한 사진이 있다.&lt;br /&gt;
한편 임꺽정의 저자인 벽초 홍명희가 방응모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그와 깊은 친분을 맺었다는 주장이 있다. 《조광》 1938년 11월호엔 홍명희가 병중에 있는 방응모를 위로하며 지은 한시가 방응모의 답시와 함께 실려 있다고 한다.&amp;lt;ref&amp;gt;[http://weekly.chosun.com/site/data/html_dir/2004/11/05/2004110577041.html ‘임꺽정’으로 되살아난 독립운동의 魂! 주간조선 1827호 2004.11.04&amp;lt;/ref&amp;gt; 또한 [[안창호]]의 비서실장을 지낸 독립유공자 구익균은 방응모와 안창호가 친밀했다는 주장을 했다.&amp;lt;ref&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09/2008030901055.html &amp;quot;공산주의자들, 도산 비판하다가도 하숙비 떨어지면 찾아와&amp;quot;] 조선일보, 2008-03-10 03:22&amp;lt;/ref&amp;gt;&lt;br /&gt;
또한 박설산에 따르면 1943년 만해 한용운에게 학도병으로 끌려가게 되었음을 알리려 심우장으로 찾아가게 되었을 때, 한용운과 방응모가 바둑을 두고 곁에서 정인보가 훈수를 두고 있었다고 한다.&amp;lt;ref&amp;gt;박설산 저 &amp;lt;뚜껑없는 朝鮮 역사 책&amp;gt; p.226 도서출판 三藏(1994)&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 /&amp;gt;&lt;br /&gt;
&lt;br /&gt;
== 참고 자료 ==&lt;br /&gt;
* 청산하지 못한 역사: 언론 내세워 일제에 아부한 교화 정책의 하수인 (문영숙) (반민족문제연구소, 청년사, 1994)&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민족 계몽의 초석 방응모(이동욱 저, 지구촌, 1998)&lt;br /&gt;
* 계초 방응모전(계초전기간행위, 조선일보사, 1980년)&lt;br /&gt;
* 계초 방응모(이동욱, 방일영문화재단, 1996)&lt;br /&gt;
&lt;br /&gt;
== 외부 링크 ==&lt;br /&gt;
* [https://web.archive.org/web/20050123171046/http://chosunhost.com/ 계초방응모 기념사업회]&lt;br /&gt;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09145 &amp;lt;조선일보&amp;gt;, 방응모 전 사장의 '친일행적' 말한다] - 오마이뉴스 04.09.10일자&lt;br /&gt;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020302101749 방응모ㆍ 김성수 친일행적 뭔가 : &amp;lt;긴급입수&amp;gt;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 全文] - 프레시안 2002-03-02&lt;br /&gt;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54052 그가 '&amp;lt;조선&amp;gt;의 주인' 주장하는 이유] 오마이뉴스 2001년 9월 20일자&lt;br /&gt;
*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956 방재선씨, 호주·상속 원인무효소송 제기]&lt;br /&gt;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4/06/2008040601053.html '5인 친필 서첩' 발굴] 조선일보 2008년04월06일자]&lt;br /&gt;
&lt;br /&gt;
[[분류: 감자]]&lt;/div&gt;</summary>
		<author><name>Nsgjjsjsjy02</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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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width:100%&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0%&amp;quot;|사진&lt;br /&gt;
|[[파일:방응모.jpg|center|200픽셀]]&lt;br /&gt;
|+ '''방응모'''&lt;br /&gt;
|+ style=&amp;quot;caption-side:bottom;text-align:left:&amp;quot;|출처: 위키백과&lt;br /&gt;
|출생||1883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조선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또는 정부면 성내동&lt;br /&gt;
|-&lt;br /&gt;
|사망||1950년경으로 추정&lt;br /&gt;
|-&lt;br /&gt;
|사인||불명&lt;br /&gt;
|-&lt;br /&gt;
|거주지||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amp;gt; 경성부 -&amp;gt; 경기도 양주군 의정부읍&lt;br /&gt;
|-&lt;br /&gt;
|국적||대한민국&lt;br /&gt;
|-&lt;br /&gt;
|본관||온양&lt;br /&gt;
|-&lt;br /&gt;
|별칭||호: 계초(啓礎), 춘해(春海)&lt;br /&gt;
|-&lt;br /&gt;
|직업||교사, 변호사, 상인, 언론인, 기업인, 사회운동가, 정치가&lt;br /&gt;
|-&lt;br /&gt;
|배우자||승계도, 이인숙, 배영옥, 노효용&lt;br /&gt;
|-&lt;br /&gt;
|자녀||방재숙(딸), 방재욱·방재선·방재효·방재규(아들), 방재윤(양자)&lt;br /&gt;
|-&lt;br /&gt;
|부모||방계준(부), 온양박씨(모)&lt;br /&gt;
|}&lt;br /&gt;
&lt;br /&gt;
'''방응모'''(方應謨, 평안북도 정주군, 1883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 1950년 8월(추정)는 [[일제강점기]]의 교육자, 언론인, 법조인, 기업인이자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언론인이며 정치인이다. 호는 '''춘해'''(春海)이고, 뒤에 '''계초'''(啓礎)로 고쳤다.&lt;br /&gt;
&lt;br /&gt;
1922년 동아일보 정주 지국을 인수해 지국장을 지내다가 1924년 금광업에 뛰어들어 큰 부를 얻게 되었다. 1932년 6월 조선일보에 입사하였고 이후 영업국장이 되어 조선일보의 판매망을 장악하게 되고 경영권을 인수하면서 1933년 3월 조선일보 부사장이 되었다. 1933년 7월부터 1950년 7월까지 종신으로 [[조선일보]]의 사장을 역임하였다. 1935년 창간한 월간잡지 '조광(朝光)'은 친일 논란이 있다.&amp;lt;ref&amp;gt;안은필. [http://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9211 조선일보가 가장 빛나던 시기, ‘안재홍 시대’]&amp;lt;/ref&amp;gt;&amp;lt;ref name=&amp;quot;안은&amp;quot;&amp;gt;안은필. [http://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9279 방응모 친일증거, “모래밭에서 모래 찾기”]국민TV. 기사입력 2015년 4월 23일. 기사수정 2015년 4월 24일.&amp;lt;/ref&amp;gt;&amp;lt;ref&amp;gt;이민영.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1/0002255321?sid=102 고법 “방응모 前조선일보 사장 친일행적 대부분 인정”]. 서울신문. 2012년 1월 13일.&amp;lt;/ref&amp;gt;&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6/0000000413?sid=110 김성수ㆍ방응모와 친일언론인 군상]. 미디어오늘. 2002년 3월 12일.&amp;lt;/ref&amp;gt; 언론계에서 활동하면서도 사업가의 길을 함께 걸었고, 교육 장학 활동을 하였으며, 1945년 광복 직후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안재홍]]의 추천을 받아 한국독립당 중앙상무위원과 독립촉성국민회 총무부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amp;lt;ref name=&amp;quot;안은&amp;quot;/&amp;gt;&amp;lt;ref&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16/2008031600800.html 계초 방응모와의 우정도 여러 편의 시로 표현해&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해방 정국에서 김구의 재정적 후견인으로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등 삼의사 유골 봉환 사업과 신탁통치 반대 운동 등에 참여하여 활동했다.&lt;br /&gt;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 납북 후 행적은 &amp;quot;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amp;quot;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lt;br /&gt;
&lt;br /&gt;
== 생애 ==&lt;br /&gt;
=== 생애 초기 ===&lt;br /&gt;
==== 출생과 성장 ====&lt;br /&gt;
방응모는 1883년 11월 3일 또는 9월 29일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바우머리 부락 또는 정주군 정부면 성내동 425번지에서 '''방계준(方桂準)'''과 온양 박씨(溫陽朴氏)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어려서 빈곤한 가정환경으로 방응모는 정규 학교에는 입학하지 못하고, 16세 때까지 서당에 드나들며 한학을 익혔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던 중 그가 어느 정도 실력이 우수하다고 인정되자, 스승인 승창률은 잠시 방응모에게 어린아이들을 돌보게 한 후 자리를 피하곤 했다 한다. 그는 홀로 사서육경을 탐독, 독파하였다. 21세 무렵 잠시 서당 훈장을 지내기도 했다. 우연히 경성부에 갔다가 신문물을 보고 충격을 받아 17세에 독학으로 신학문과 일본어, 중국어, 수학 등을 독파하였다.&lt;br /&gt;
&lt;br /&gt;
유년시절 서당의 성리학 스승이던 승창률의 친척인 승시영(承時榮)과 조씨(趙氏)의 딸 승계도와 결혼했다. 결혼한 다음 해에도 그는 공부를 한다며 책만 사다 읽곤 했고, 부인 승계도는 생계를 위해 몸소 나섰다. 그의 아내는 남편에 대한 믿음이 절대적이었고 탓을 하거나 가출하지 않았다.&lt;br /&gt;
&lt;br /&gt;
=== 언론, 기업 활동 ===&lt;br /&gt;
==== 계몽 활동과 언론 활동 ====&lt;br /&gt;
1915년부터 1924년 방응모는 지역 지식인들, 유학파 청년, 계몽 청년들이 모여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하는데 참여했다. 민립대학기성회에서 활동하면서 조만식 등과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언변과 용모가 되었던 그의 여관에도 손님들이 몰렸고, 그가 &amp;quot;2백원도 좋고 5백원도 좋다며 보태달라&amp;lt;ref name=&amp;quot;fsfs87&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7페이지&amp;lt;/ref&amp;gt;&amp;quot;고 하면 기부금을 내는 이들이 있었다. 1919년 정주에서 3.1 만세 운동이 벌어지자, 그도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형사들의 눈을 피해 방응모는 만세운동을 하다 재빨리 몸을 피해 화를 면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8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22년 6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인수하여 분국장에 취임했다. 그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경영하는 동시에 그는 농촌 계몽운동 등에 적극 참여했다. 1922년 6월 19일&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96페이지&amp;lt;/ref&amp;gt; 동아일보 본사를 설득하여 정주분국을 동아일보사 정주지국으로 승격시켰다. 동아일보사 지부장 재직 시 그는 민립 대학 설립 자금과 농촌진흥회 회원의 여비 및 당시 운영난에 처했던 오산학교의 재개교 등을 계획했다. 총독부의 거부로 실패한 대학 설립 자금은 고스란히 오산학교의 부활 자금으로 투입되었다.&lt;br /&gt;
&lt;br /&gt;
1923년 동아일보 정주군 분국이 지국으로 승격되자 정주국을 경영하였고, 같은 해 7월 여성들의 사회 참여와 평등권 신장을 위한 여자교육회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이후 대규모 수해가 나자, 정주군 수해구제회를 결성하여 봉사활동에 가담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 광업 경영과 조선일보 입사 ====&lt;br /&gt;
1924년 친구 전우현이 방응모와도 안면이 있던 금광 채굴업자 두 명을 데리고 그를 찾아왔다. 그들은 자신들이 봐 둔 산이 있다고 방응모에게 소개했다. 이후 광산업에 뛰어들어 1924년 여름 압록강변의 폐금광인 평안북도 삭주군 외남면 교동 다릿골의의 삭주 교동광업소를 찾아가 10미터 정도 땅을 파고 금맥을 발견했다. 곧 삭주 교동광업소를 인수, 경영을 확대하였다. 이때 만난 동업자의 딸이자 친구 전우현의 조카딸인 '''이인숙(李仁淑)'''을 만났다. 본처 승계도가 두 아들을 잃고 복부 수술이 잘못되어 아이를 얻지 못하게 되자 방응모에게도 수많은 중매가 들어왔다. 자식들을 병으로 잃은 것이 자신의 불찰이라고 본 승계도는 그에게 작은 부인이라도 들이자는 말을 꺼내기도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18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26년 방응모에게 광산 사업을 제안했던 두 친구가 손을 털고 나갔고, 그의 가족은 돈이 없어 쌀 대신 좁쌀로 좁쌀죽을 먹으며 연명해야 했다. 방응모는 정주군에 사는 비슷한 또래의 먼 친척 방상진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고, 방상진과 일꾼 대여섯 명, 그리고 후처 이인숙의 친정 쪽에서 얻어온 토지문서를 얻어 자금을 마련했고 다시 금광을 채굴했다. 그 후 1926년 7월 지하 300m 지점에서 금맥을 확보했고, 이후 연간 300kg의 금을 생산하여 벼락부자가 되었다.&lt;br /&gt;
&lt;br /&gt;
1928년 방응모는 자신의 아호를 딴 춘해 장학회를 만들고 장학생들의 모임인 이심회를 만든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48페이지&amp;lt;/ref&amp;gt; 1928년에 그는 의정부 직동, 흥선대원군의 별장이 있던 곳 바로 뒤에 위치한 건물을 매입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한용운]], 홍명희를 자주 초대했다.&lt;br /&gt;
&lt;br /&gt;
1932년 방응모는 교동광산을 135만원이란 거액에 일본 중외광업주식회사에 매각했다. 그 뒤 1932년 6월부터 조선일보 영업국장으로 활동하다 1933년 3월 [[조선일보]]의 경영권을 인수하여 부사장에 취임하였다.&lt;br /&gt;
그는 교동광업소를 운영하며 모은 재력을 바탕으로 부사장 재직 중 [[조선일보]]의 대주주가 되었으며, 1933년 7월 8대 사주 조만식으로부터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제9대 [[조선일보]] 사주로 취임, 활동했다.&amp;lt;ref&amp;gt;조선일보는 1932년 7월에 조만식을 사장으로 영입했지만, 조만식은 거의 평생을 평양에서 살아왔던데다 서울에서 활동하기에는 적응을 잘하지 못했다. 조만식은 신문사 경영난과 지역감정의 혹독한 시련을 받은 채 9개월만에 퇴사했다. 그리고 조만식 후임으로 1933년, 방응모를 사장으로 추대하기에 이르렀다.&amp;lt;/ref&amp;gt;&amp;lt;ref&amp;gt;《한국사 시민강좌 제47집, 대표적 독립운동가 12인》,일조각. p145&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언론, 사업 활동 ===&lt;br /&gt;
==== 사회사업 ====&lt;br /&gt;
[[파일:방응모장학생.jpg|섬네일|160px|오른쪽|방응모와 그의 장학금을 받던 학생들. 가운데 앉은 이가 방응모이고, 서있는 이들 중 왼쪽에서 두 번째는 방응모의 양자 방재윤.]]&lt;br /&gt;
&lt;br /&gt;
1930년 배영옥과 결혼하여 딸 방재숙을 얻었다. 1932년 광산업을 정리하였고 언론사업을 비롯하여 육영사업과 조림 및 간척사업 등을 벌였다. 또한 고아원과 사회복지단체에 후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933년 무렵 방응모가 [[조선일보]] 인수에 나서기 전부터 그는 [[한용운]]을 위한 일이라면 돈을 아끼지 않고 지출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성북동 언덕에 만해 한용운을 위해 기와집 한 채를 지어주었는데 [[심우장]](尋牛莊)이 그것이다. 또한 만해가 일제의 배급을 거부해 생활이 어려워지자 생활비를 지원했던 방응모는 그가 병석에 누운 1944년에는 치료비를 지원해주기도 했다.&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6/0000043262?sid=103 만해가 일송 선생 5일장 치른 사연]&amp;lt;/ref&amp;gt; 그 외에도 방응모는 만해 한용운·벽초 홍명희 등과 함께 새해가 되면 백천온천에도 같이 다녀올 정도로 가까운 관계였다.&lt;br /&gt;
&lt;br /&gt;
1932년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사건으로 체포된 [[안창호]]의 사면 탄원과 보석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총독부 경무국장은 그의 안창호 석방 제안을 정중히 거절한다.&lt;br /&gt;
&lt;br /&gt;
1936년 동방문화학원(숭문중학교·고등학교 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에 취임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인수와 경영 ====&lt;br /&gt;
1933년 1월 16일 그는 정식으로 주식회사 [[조선일보]]사를 창립했다. 일단 그는 조만식을 사장으로 임명하고 자신은 부사장으로 있다가, 그해 3월 13일 다시 부사장에 취임했다. 7월 10일 조만식의 사퇴로, [[조선일보]]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다.&lt;br /&gt;
&lt;br /&gt;
1934년 3월 25일 이광수를 비롯하여 서춘, 김동진, 함상훈, 신태익 등을 [[조선일보]]로 영입해 왔다. 그 외에도 정주군 출신 언론인, 작가들이 조선일보로 많이 오게 되었다.&lt;br /&gt;
&lt;br /&gt;
==== 동방문화학원 재단 설립 ====&lt;br /&gt;
방응모는 1936년 재단법인 동방문화학원(東邦文化學院)을 설립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6페이지&amp;lt;/ref&amp;gt; 동방문화학원은 학교 법인으로 인가된 재단 법인으로, 그 후 고계학원과 인연을 가지고 1936년부터는 보성고등보통학교를 후견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 분리되었다. 그 후 방응모 장학생인 서중회 회원들을 위한 방응모 장학사업을 주관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7페이지&amp;lt;/ref&amp;gt;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구 조선일보 사옥 안에 동방문화학원의 간판을 달고 조광 잡지를 계속 발행하는 조광사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7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일제 강점기 후반 ===&lt;br /&gt;
==== 중일 전쟁 전후 ====&lt;br /&gt;
중일전쟁 개전 직후인 1937년 7월 11일에 열린 [[조선일보]] 간부회의에서 주필 서춘이 '일본군, 중국군, 장개석씨'등으로 쓰던 용어를 '아군, 황군, 지나, 장개석'으로 고치고 일본 국민의 입장에서 논설을 쓸 것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반대 의견도 있기는 했으나, 방응모는 '일장기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이미 몇 십만 원의 손해를 보았을 뿐 아니라 [[3.1 운동]] 때처럼 신문이 민중을 지도할 수 없다'면서 서춘의 입장을 지지했다.&lt;br /&gt;
&lt;br /&gt;
1933년 이심회(후에 서중회, 방응모장학회 등 명칭이 바뀜)를 통해 대학생과 해외 유학생들에게 학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937년 12월 24일 [[안창호]]는 병보석 판정을 받고 재판소가 경성제국대학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안창호]]는 병상에서 병원비 문제로도 고초를 겪었고. 방응모는 50일 간의 입원비인 5백원짜리 수표 한 장을 안창호에게 전달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9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안창호]]는 1938년 3월 10일 밤 12시 경성제국대학 병원에서 운명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폐간 사건 ====&lt;br /&gt;
일본의 전쟁이 격화되면서 조선총독부 공보국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1940년에 강제로 폐간조치 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조선일보에 바쳤던 방응모는 큰 절망과 좌절을 느껴야 했다. [[한용운]]은 ‘신문이 폐간되다/ 붓이 꺾이어 모든 일이 끝나니…’로 시작하는 시를 지어 방응모를 위로했다. &amp;lt;ref&amp;gt;붓이 꺾이어 모든 일 끝나니 이제는 재갈 물린 사람들 뿔뿔이 흩어지고 아, 쓸쓸하고 쓸쓸한지고 망국 서울의 가을날 한강의 물도 흐느끼느니 울음 삼켜 흐느끼며 연지를 외면한 채 바다 향해 흐르느니&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38년 7월 “국민정신을 총동원하고 내선일체 전 능력을 발휘하여 국책 수행에 협력하여 성전(聖戰)의 궁극적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조직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에 참여했다.&lt;br /&gt;
&lt;br /&gt;
1940년 5월 조선총독부 총독 미나미 지로가 방송담화로 창씨개명을 권고했다. 그러나 그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성씨를 이제 와서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며 창씨개명은 완강하게 거절했다.&lt;br /&gt;
&lt;br /&gt;
조선일보에 트집이 잡힐 일이 나타나지 않자 총독부는 전국에 조선일보 신문 구독을 거절하도록 명령을 내렸고, 동시에 조선말을 쓰는 민원인에게는 일을 처리해주지 말도록 하게 했다. 총독부는 동아일보에 이어 조선일보에도 자진 폐간을 권고했고, 결국 8월 10일자로 폐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5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잡지 발행 활동 ====&lt;br /&gt;
신문 강제 폐간 뒤 방응모는 간판을 조광사로 바꿔 걸고, 사옥은 동방흥업주식회사로 등기를 변경해서 유지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1페이지&amp;lt;/ref&amp;gt; 이후 그는 조광 잡지 발행에 전념했다. [[조선일보]]가 폐간된 후에도 방응모는 벽초 홍명희 부자에게 지속적으로 생활비를 대주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4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4년 6월 29일 만해 [[한용운]]이 사망했다. 그는 [[심우장]]을 찾아가 3백원을 내놓았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5페이지&amp;lt;/ref&amp;gt;당시 쌀 10가마가 100원이었지만, 심우장은 당장 현금 1원이 없었는데 거액이라서 놀랐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6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광복 이후 언론 및 정치활동 ===&lt;br /&gt;
==== 광복 직후 ====&lt;br /&gt;
1945년 8.15 광복 후에는 8월 말과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朝鮮在外戰災同胞救濟會) 고문과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9월 초 [[안재홍]] 등이 좌경화되는 건준체제에 반발하여 건준을 탈퇴하자 방응모 역시 건준을 탈퇴하였다.&lt;br /&gt;
&lt;br /&gt;
9월 2일 미군정이 주둔하자, 방응모는 윤전기를 찾기 위해 폐간 당시의 증빙서류를 미 군정청에 제시하였으나 소식이 없었다. 총독부는 조선일보 폐간 직후 인수한 윤전기를 경성일보사에 옮겨서 설치했다. 그는 동방문화재단 외 4개 사업소를 적산으로 파악한 미군정을 설득하고, 사옥 문제도 해결하였다.&lt;br /&gt;
&lt;br /&gt;
10월 1일 조선일보 편집위원회를 구성하고, 신문 복간 운동을 추진했다. 조선총독부의 폐간 지시 당시 의정부로 옮겨놓은 일부 활자 자모음이 잘 보관되어, 그해 11월 23일 조선일보를 복간시키고, 서울신문사 사옥에서 조선일보 복간호를 간행하였다. 이후 조선사회문제대책중앙협의회 중앙위원을 거쳐 10월 16일 이승만 등의 주도로 독립촉성중앙회가 결성되자 독촉에 가입하였다.&lt;br /&gt;
&lt;br /&gt;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이 귀국하자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에 입당했다. 12월 [[안재홍]]의 추천으로 한국독립당의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출되어 3~4개월 동안 활동했다.&amp;lt;ref&amp;gt;일각에서는 방응모가 '한독당 재무부장으로 지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1947년부터 한독당 재무부장을 맡은 신창균이 전면 부정했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47/0000002626?sid=102 백범 비서와 '진짜' 한독당 재정부장의 육성증언. 참고.]&amp;lt;/ref&amp;gt; 그 뒤 대한국민총회 발기인, 대한독립애국금헌성회 발기인 등으로 활동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복간 및 군정기 활동 ====&lt;br /&gt;
11월 [[조선일보]]사를 복간시켰다. 그러나 한동안 조선일보의 인쇄는 서울신문사에서 간행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1945년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추념대회에 참여하였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2&amp;quot;&amp;gt;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13&amp;lt;/ref&amp;gt; 순국선열추념대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2&amp;quot; /&amp;gt;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참여,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이 되었다.&amp;lt;ref&amp;gt;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55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6년 2월 26일 서울신문사 공무국 종업원들이 조선일보의 인쇄를 거부해버렸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436페이지&amp;lt;/ref&amp;gt; 그동안 묵시적으로 방해가 은근히 있었다. 표면상의 문제는 임금 문제이나 내용상으로는 조선일보에 대한 조선공산당의 시위의 일종이었다. 사흘간의 교섭 끝에 2월 28일에 가서야 26일자와 27일자를 소급해서 인쇄하여 신문을 한꺼번에 발행하였다. 그러나 3월 1일과 2일에 또다시 인쇄를 거부당해 결국 휴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436페이지&amp;lt;/ref&amp;gt; 조선일보를 경성일보사로 옮겨서 인쇄하기로 하고 3월 5일자로 사고로 독자에게 알렸다.&lt;br /&gt;
&lt;br /&gt;
4월 29일 김구, 김창숙, 김성수, 오세창 등과 함께 서울운동장에서 윤봉길의사 추모회의 창립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amp;lt;ref&amp;gt;&amp;quot;故尹奉吉義士의 記念式 오늘, 發起人會 열고 準備&amp;quot;, 동아일보 1946년 4월 23일자 2면, 사회면&amp;lt;/ref&amp;gt; 그해 5월 조선공업구락부 고문에 위촉되었다.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民族統一總本部) 10인협의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6월 15일 오후 5시 40분 서울역에 마중나가 서울역에 도착한 삼의사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lt;br /&gt;
&lt;br /&gt;
1945년 광복 직후 서기원이 그를 찾아왔다. 서기원은 그때 경성농상실천학교의 동창회로부터 이 학교의 교장이 되어 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이다. 방응모는 서기원의 제의를 받아들여 1946년 8월 28일 동방문화학원 이사장으로 숭문상업학교를 인수, 재단 이사장이 되었다. 후일 방응모가 6.25 전쟁 중에 납북된 후 동방문화학원과 숭문중,고교의 재단은 최용진이 운영하다가 다시 1978년에 방일영에게 인수되었다.&lt;br /&gt;
&lt;br /&gt;
1947년 1월 21일 제5회 창립위원회를 본사에서 개최하고 2월 23일 주식회사 조선일보사 주주창립총회를 열고 대표이사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공동투자 경영자로 참여시킨 전무 이종민과의 알력이 발생했다. 이종민과의 갈등이 심화되자 그해 8월 3일 방응모는 일단 사직서를 제출했다. 1947년 8월 10일 풍문여고 강당에서 개최된 한인신문기자협회에 참석, 민족청년단에서 언론계 공로자로 방응모, 김성수, 설의식을 지정하여 상을 시상받았다.&amp;lt;ref&amp;gt;&amp;quot;朝鮮 新聞記者協會&amp;quot;, 동아일보 1947년 8월 10일자 2면, 사회면&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납북과 최후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 납북 후 행적은 &amp;quot;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amp;quot;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 1950년 8월경 개성 송악산 부근에서 미군의 폭격에 희생되었고 심한 폭격으로 시신을 찾을 수 없어 묘도 만들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남한에서는 1955년 7월 7일 생사불명기간 만료로 인해 실종 처리되었다.&lt;br /&gt;
&lt;br /&gt;
=== 사후 ===&lt;br /&gt;
서울 종로에 있던 양자 방재윤의 두 아들 방일영과 방우영은 방응모의 첩 이인숙이 찾아가 피신하라고 권고하여 황급히 피신했다. &lt;br /&gt;
&lt;br /&gt;
7월 6일 그의 행방불명처리가 되고, 방응모의 사후에도 [[조선일보]]는 그의 명의로 발행되었다. 1952년 4월 28일 조선일보는 발행인겸 편집인을 장기영으로, 인쇄인을 방일영으로, 방응모는 명예사장으로 명의변경하여 휴전 후 계속 발행하게 되었다. 1954년 4월 30일 제8회 조선일보 정기주주총회에서 장기영 사장이 사퇴하면서, 명예사장 방응모가 사장으로 추대되고, 발행인 겸 대표취체역에 방일영이 선임되었다. 이후 실종 후 1959년에 법적으로 사망 처리되었다. 그리고 1970년까지는 조선일보는 그의 이름으로 발행되었다.&lt;br /&gt;
&lt;br /&gt;
1970년 2월 19일 조선일보 정기주주총회에서 방응모 이사를 사퇴 수리하였다. 그의 피폭 사망 사실은 1970년대 이후 탈북자들을 통해 대한민국에 소개되었다.&lt;br /&gt;
&lt;br /&gt;
== 친일행위 의혹 ==&lt;br /&gt;
=== 일제 전시체제기 활동 ===&lt;br /&gt;
일제 강점기 말기 언론인으로서 총독부체제에 협력한 기록과 활동이 다수 기록이 있다. 1933년 3월 [[조선일보]] 경영권을 인수하고 부사장직에 취임했을 당시 같은 달에 고사기관총 구입비용 1600원을 군에 헌납하였다. 그는 1935년 친일 잡지 《조광 (잡지)(朝光)》을 창간하였고, 1937년에는 경성방송국 제2방송에 출연하여 일제가 중국의 베일을 절멸케하여 극동평화를 지키려고 한다는 강연을 하였다. 1940년대부터 조광에 집중적으로 친일 논설을 기고하고 시국 강연에 참여하여 전쟁 지원을 독려했다. 1942년 6월에는 '징병령 실시에 일층 더 감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글을 써서 조광에 발표하였다. 애국금차회(1937),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1938), 임전대책협의회(1941), 조선임전보국단(1941) 등 대표적인 친일 단체의 회원에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그는 이런 행적으로 인해 해방정국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명단에 기록되어 있고,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해 발표한 &amp;lt;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amp;gt;에 모두 포함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lt;br /&gt;
&lt;br /&gt;
우리 [[조선일보]]는 다른 어떤 신문도 따라오지 못하는 확고한 신념에서 비국민적 행위를 단연 배격하여 종국까지 조선일보사가 이미 정해놓은 방침에 한뜻으로 매진한다.|원산에서의 순회 강연&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9478.html 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친일 다짐하다 시민에 봉변]《한겨레》2005-08-24 오후 06:13:18&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반민족행위 논란 ===&lt;br /&gt;
방응모를 친일파로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남아 있다. 조선일보 경영 이전에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방응모의 활동이 거의 없었고, 납북된 뒤 소식이 끊겨버린 까닭에 본인이 항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 동안의 행적만으로 친일파 여부를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방응모의 후손들이 영향력 있는 [[조선일보]] 언론사의 사주를 맡았기에 그의 입장에서 서술한 기록을 많이 남기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80년 발간된 그의 전기 《계초 방응모》(조선일보사) 등에는 '그가 민족주의적 선각자'로 묘사되고 있다. 방응모가 친일파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일부세력측은 그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논거로 드는 경우가 많이 있다.&amp;lt;ref&amp;gt;유석재, 계간 《유심》 (2004년 봄호) [http://yousim.buddhism.org/html/2004-spr/tamgu-yoo-seok-jae.htm 삭풍 속에 피어난 금란지교(金蘭之交) - 만해와 계초 방응모]&amp;lt;/ref&amp;gt;&amp;lt;ref&amp;gt;&amp;quot;일제 말기 계초는 시국강연에 나설 것과 창씨개명을 집요하게 강요받았으나 그때마다 묵묵부답으로 거부하며 소신을 지켰다.&amp;quot; 《조선일보》 (2001.3) 조선일보 사장열전 - 계초 방응모편, 《한겨레》 (2001.3.30) [http://www.njoyschool.net/news/article_view.asp?menu_code=s20202&amp;amp;no=1206 조선일보, 일장기를 신문제호 위에]&amp;lt;/ref&amp;gt;&lt;br /&gt;
또한 한국정토학회 고문이자 서울 정토사 주지였던 박설산(1918~2007)이 학도병에 끌려가기 직전인 1943년 12월 28일 밤 서울역에서 스스로 왼발을 선로에 올려 발가락을 절단해 징집을 기피하자 방응모는 만해와 함께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설산을 걱정하면서 입원 중 조선일보 기자를 통해 돈을 전달한 것은 물론 퇴원할 때 돈을 전달하고 뒤를 보살폈다고 한다.&amp;lt;ref&amp;gt;박설산 회고록 &amp;lt;뚜껑없는 조선역사책&amp;gt;(1994, 도서출판 삼장) p240~241&amp;lt;/ref&amp;gt;&lt;br /&gt;
&lt;br /&gt;
2010년 12월, 방응모 관계자들 및 조선일보측은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을 취소해달라'며 법원에 낸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amp;quot;1944년 조선항공업 창립발기인으로 활동한 부분에 대해 친일행위로 판단한 부분을 취소하지만 나머지 활동에 대해서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amp;quot;라고 판결했다. 그 이유인 즉 &amp;quot;방응모는 1933년 조선일보 사장으로 취임해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등으로 활동하며 친일활동을 벌였으며, 1937년 경성방송국 시국강연에서 일본제국이 극동평화를 확립시킬 것이라는 내용의 강연을 하고, 1938년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춘추회의 발기인 겸 간사로 활동하기도 했다&amp;lt;ref&amp;gt;[http://media.daum.net/breakingnews/politics/view.html?cateid=1002&amp;amp;newsid=20101222103319164&amp;amp;p=newsis 법원 &amp;quot;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친일파 맞다&amp;quot;]뉴시스 2010년 12월 22일&amp;lt;/ref&amp;gt;&amp;quot;는 것이다.&lt;br /&gt;
&lt;br /&gt;
2012년 1월 12일 서울고법 행정7부는 방 전 사장의 손자인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이 행정안전부를 상대로 낸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처분 취소 청구소송에서 ‘일제 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의 친일 행위 판정 조항에 비추어 방 전 사장에게 적용된 모두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민족적 지도자로서 비중이 큰 만큼 그로 인한 책임도 무거울 뿐 아니라 고난의 시기를 겪은 민족으로서 그 역사를 반성하자는 입장에 설 때, 방 전 사장의 여러 행태는 반민특별법에서 규정한 친일반민족행위의 유형에 속함을 부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1·2심 재판부는 방 전 사장이 자신이 운영하던 잡지 &amp;lt;조광&amp;gt;에 일제 침략전쟁에 동조하고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문예물과 일제 침략전쟁에 협력할 것을 주문하는 논문을 게재하는 등의 ‘친일’ 행위를 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또한, 2심 재판부는 일본의 전쟁 수행을 돕기 위해 설립된 군수 제조업체 ‘조선항공공업’의 발기인과 감사를 지낸 것은 “감사는 업무집행에 관여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기관으로, 방 전 사장이 이 회사를 운영했다고 볼 수 있다”는 이유로 친일이라고 판단했다.&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4565.html법원 ‘방응모 친일’ 2심서도 인정] 인터넷한겨레 2010년 12월 22일&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기타 ==&lt;br /&gt;
그는 [[한용운]], 최남선, 정인보, 홍명희 등과 친분관계를 형성하고 어울려 지냈다 한다.&lt;br /&gt;
&lt;br /&gt;
김구의 한국독립당의 재정적 후견인 역할을 하였다 하며,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삼의사 유골봉환식 때 김구, 정인보 등과 촬영한 사진이 있다.&lt;br /&gt;
한편 임꺽정의 저자인 벽초 홍명희가 방응모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그와 깊은 친분을 맺었다는 주장이 있다. 《조광》 1938년 11월호엔 홍명희가 병중에 있는 방응모를 위로하며 지은 한시가 방응모의 답시와 함께 실려 있다고 한다.&amp;lt;ref&amp;gt;[http://weekly.chosun.com/site/data/html_dir/2004/11/05/2004110577041.html ‘임꺽정’으로 되살아난 독립운동의 魂! 주간조선 1827호 2004.11.04&amp;lt;/ref&amp;gt; 또한 [[안창호]]의 비서실장을 지낸 독립유공자 구익균은 방응모와 안창호가 친밀했다는 주장을 했다.&amp;lt;ref&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09/2008030901055.html &amp;quot;공산주의자들, 도산 비판하다가도 하숙비 떨어지면 찾아와&amp;quot;] 조선일보, 2008-03-10 03:22&amp;lt;/ref&amp;gt;&lt;br /&gt;
또한 박설산에 따르면 1943년 만해 한용운에게 학도병으로 끌려가게 되었음을 알리려 심우장으로 찾아가게 되었을 때, 한용운과 방응모가 바둑을 두고 곁에서 정인보가 훈수를 두고 있었다고 한다.&amp;lt;ref&amp;gt;박설산 저 &amp;lt;뚜껑없는 朝鮮 역사 책&amp;gt; p.226 도서출판 三藏(1994)&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 /&amp;gt;&lt;br /&gt;
&lt;br /&gt;
== 참고 자료 ==&lt;br /&gt;
* 청산하지 못한 역사: 언론 내세워 일제에 아부한 교화 정책의 하수인 (문영숙) (반민족문제연구소, 청년사, 1994)&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민족 계몽의 초석 방응모(이동욱 저, 지구촌, 1998)&lt;br /&gt;
* 계초 방응모전(계초전기간행위, 조선일보사, 1980년)&lt;br /&gt;
* 계초 방응모(이동욱, 방일영문화재단, 1996)&lt;br /&gt;
&lt;br /&gt;
== 외부 링크 ==&lt;br /&gt;
* [https://web.archive.org/web/20050123171046/http://chosunhost.com/ 계초방응모 기념사업회]&lt;br /&gt;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09145 &amp;lt;조선일보&amp;gt;, 방응모 전 사장의 '친일행적' 말한다] - 오마이뉴스 04.09.10일자&lt;br /&gt;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020302101749 방응모ㆍ 김성수 친일행적 뭔가 : &amp;lt;긴급입수&amp;gt;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 全文] - 프레시안 2002-03-02&lt;br /&gt;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54052 그가 '&amp;lt;조선&amp;gt;의 주인' 주장하는 이유] 오마이뉴스 2001년 9월 20일자&lt;br /&gt;
*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956 방재선씨, 호주·상속 원인무효소송 제기]&lt;br /&gt;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4/06/2008040601053.html '5인 친필 서첩' 발굴] 조선일보 2008년04월06일자]&lt;br /&gt;
&lt;br /&gt;
[[분류: 감자]]&lt;/div&gt;</summary>
		<author><name>Nsgjjsjsjy02</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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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방응모</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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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Nsgjjsjsjy02: /* 조선일보 폐간 사건 */&lt;/p&gt;
&lt;hr /&gt;
&lt;div&gt;{|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width:100%&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0%&amp;quot;|사진&lt;br /&gt;
|[[파일:방응모.jpg|center|200픽셀]]&lt;br /&gt;
|+ '''방응모'''&lt;br /&gt;
|+ style=&amp;quot;caption-side:bottom;text-align:left:&amp;quot;|출처: 위키백과&lt;br /&gt;
|출생||1883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조선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또는 정부면 성내동&lt;br /&gt;
|-&lt;br /&gt;
|사망||1950년경으로 추정&lt;br /&gt;
|-&lt;br /&gt;
|사인||불명&lt;br /&gt;
|-&lt;br /&gt;
|거주지||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amp;gt; 경성부 -&amp;gt; 경기도 양주군 의정부읍&lt;br /&gt;
|-&lt;br /&gt;
|국적||대한민국&lt;br /&gt;
|-&lt;br /&gt;
|본관||온양&lt;br /&gt;
|-&lt;br /&gt;
|별칭||호: 계초(啓礎), 춘해(春海)&lt;br /&gt;
|-&lt;br /&gt;
|직업||교사, 변호사, 상인, 언론인, 기업인, 사회운동가, 정치가&lt;br /&gt;
|-&lt;br /&gt;
|배우자||승계도, 이인숙, 배영옥, 노효용&lt;br /&gt;
|-&lt;br /&gt;
|자녀||방재숙(딸), 방재욱·방재선·방재효·방재규(아들), 방재윤(양자)&lt;br /&gt;
|-&lt;br /&gt;
|부모||방계준(부), 온양박씨(모)&lt;br /&gt;
|}&lt;br /&gt;
&lt;br /&gt;
'''방응모'''(方應謨, 평안북도 정주군, 1883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 1950년 8월(추정)는 [[일제강점기]]의 교육자, 언론인, 법조인, 기업인이자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언론인이며 정치인이다. 호는 '''춘해'''(春海)이고, 뒤에 '''계초'''(啓礎)로 고쳤다.&lt;br /&gt;
&lt;br /&gt;
1922년 동아일보 정주 지국을 인수해 지국장을 지내다가 1924년 금광업에 뛰어들어 큰 부를 얻게 되었다. 1932년 6월 조선일보에 입사하였고 이후 영업국장이 되어 조선일보의 판매망을 장악하게 되고 경영권을 인수하면서 1933년 3월 조선일보 부사장이 되었다. 1933년 7월부터 1950년 7월까지 종신으로 [[조선일보]]의 사장을 역임하였다. 1935년 창간한 월간잡지 '조광(朝光)'은 친일 논란이 있다.&amp;lt;ref&amp;gt;안은필. [http://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9211 조선일보가 가장 빛나던 시기, ‘안재홍 시대’]&amp;lt;/ref&amp;gt;&amp;lt;ref name=&amp;quot;안은&amp;quot;&amp;gt;안은필. [http://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9279 방응모 친일증거, “모래밭에서 모래 찾기”]국민TV. 기사입력 2015년 4월 23일. 기사수정 2015년 4월 24일.&amp;lt;/ref&amp;gt;&amp;lt;ref&amp;gt;이민영.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1/0002255321?sid=102 고법 “방응모 前조선일보 사장 친일행적 대부분 인정”]. 서울신문. 2012년 1월 13일.&amp;lt;/ref&amp;gt;&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6/0000000413?sid=110 김성수ㆍ방응모와 친일언론인 군상]. 미디어오늘. 2002년 3월 12일.&amp;lt;/ref&amp;gt; 언론계에서 활동하면서도 사업가의 길을 함께 걸었고, 교육 장학 활동을 하였으며, 1945년 광복 직후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안재홍]]의 추천을 받아 한국독립당 중앙상무위원과 독립촉성국민회 총무부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amp;lt;ref name=&amp;quot;안은&amp;quot;/&amp;gt;&amp;lt;ref&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16/2008031600800.html 계초 방응모와의 우정도 여러 편의 시로 표현해&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해방 정국에서 김구의 재정적 후견인으로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등 삼의사 유골 봉환 사업과 신탁통치 반대 운동 등에 참여하여 활동했다.&lt;br /&gt;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 납북 후 행적은 &amp;quot;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amp;quot;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lt;br /&gt;
&lt;br /&gt;
== 생애 ==&lt;br /&gt;
=== 생애 초기 ===&lt;br /&gt;
==== 출생과 성장 ====&lt;br /&gt;
방응모는 1883년 11월 3일 또는 9월 29일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바우머리 부락 또는 정주군 정부면 성내동 425번지에서 '''방계준(方桂準)'''과 온양 박씨(溫陽朴氏)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어려서 빈곤한 가정환경으로 방응모는 정규 학교에는 입학하지 못하고, 16세 때까지 서당에 드나들며 한학을 익혔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던 중 그가 어느 정도 실력이 우수하다고 인정되자, 스승인 승창률은 잠시 방응모에게 어린아이들을 돌보게 한 후 자리를 피하곤 했다 한다. 그는 홀로 사서육경을 탐독, 독파하였다. 21세 무렵 잠시 서당 훈장을 지내기도 했다. 우연히 경성부에 갔다가 신문물을 보고 충격을 받아 17세에 독학으로 신학문과 일본어, 중국어, 수학 등을 독파하였다.&lt;br /&gt;
&lt;br /&gt;
유년시절 서당의 성리학 스승이던 승창률의 친척인 승시영(承時榮)과 조씨(趙氏)의 딸 승계도와 결혼했다. 결혼한 다음 해에도 그는 공부를 한다며 책만 사다 읽곤 했고, 부인 승계도는 생계를 위해 몸소 나섰다. 그의 아내는 남편에 대한 믿음이 절대적이었고 탓을 하거나 가출하지 않았다.&lt;br /&gt;
&lt;br /&gt;
=== 언론, 기업 활동 ===&lt;br /&gt;
==== 계몽 활동과 언론 활동 ====&lt;br /&gt;
1915년부터 1924년 방응모는 지역 지식인들, 유학파 청년, 계몽 청년들이 모여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하는데 참여했다. 민립대학기성회에서 활동하면서 조만식 등과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언변과 용모가 되었던 그의 여관에도 손님들이 몰렸고, 그가 &amp;quot;2백원도 좋고 5백원도 좋다며 보태달라&amp;lt;ref name=&amp;quot;fsfs87&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7페이지&amp;lt;/ref&amp;gt;&amp;quot;고 하면 기부금을 내는 이들이 있었다. 1919년 정주에서 3.1 만세 운동이 벌어지자, 그도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형사들의 눈을 피해 방응모는 만세운동을 하다 재빨리 몸을 피해 화를 면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8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22년 6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인수하여 분국장에 취임했다. 그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경영하는 동시에 그는 농촌 계몽운동 등에 적극 참여했다. 1922년 6월 19일&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96페이지&amp;lt;/ref&amp;gt; 동아일보 본사를 설득하여 정주분국을 동아일보사 정주지국으로 승격시켰다. 동아일보사 지부장 재직 시 그는 민립 대학 설립 자금과 농촌진흥회 회원의 여비 및 당시 운영난에 처했던 오산학교의 재개교 등을 계획했다. 총독부의 거부로 실패한 대학 설립 자금은 고스란히 오산학교의 부활 자금으로 투입되었다.&lt;br /&gt;
&lt;br /&gt;
1923년 동아일보 정주군 분국이 지국으로 승격되자 정주국을 경영하였고, 같은 해 7월 여성들의 사회 참여와 평등권 신장을 위한 여자교육회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이후 대규모 수해가 나자, 정주군 수해구제회를 결성하여 봉사활동에 가담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 광업 경영과 조선일보 입사 ====&lt;br /&gt;
1924년 친구 전우현이 방응모와도 안면이 있던 금광 채굴업자 두 명을 데리고 그를 찾아왔다. 그들은 자신들이 봐 둔 산이 있다고 방응모에게 소개했다. 이후 광산업에 뛰어들어 1924년 여름 압록강변의 폐금광인 평안북도 삭주군 외남면 교동 다릿골의의 삭주 교동광업소를 찾아가 10미터 정도 땅을 파고 금맥을 발견했다. 곧 삭주 교동광업소를 인수, 경영을 확대하였다. 이때 만난 동업자의 딸이자 친구 전우현의 조카딸인 '''이인숙(李仁淑)'''을 만났다. 본처 승계도가 두 아들을 잃고 복부 수술이 잘못되어 아이를 얻지 못하게 되자 방응모에게도 수많은 중매가 들어왔다. 자식들을 병으로 잃은 것이 자신의 불찰이라고 본 승계도는 그에게 작은 부인이라도 들이자는 말을 꺼내기도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18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26년 방응모에게 광산 사업을 제안했던 두 친구가 손을 털고 나갔고, 그의 가족은 돈이 없어 쌀 대신 좁쌀로 좁쌀죽을 먹으며 연명해야 했다. 방응모는 정주군에 사는 비슷한 또래의 먼 친척 방상진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고, 방상진과 일꾼 대여섯 명, 그리고 후처 이인숙의 친정 쪽에서 얻어온 토지문서를 얻어 자금을 마련했고 다시 금광을 채굴했다. 그 후 1926년 7월 지하 300m 지점에서 금맥을 확보했고, 이후 연간 300kg의 금을 생산하여 벼락부자가 되었다.&lt;br /&gt;
&lt;br /&gt;
1928년 방응모는 자신의 아호를 딴 춘해 장학회를 만들고 장학생들의 모임인 이심회를 만든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48페이지&amp;lt;/ref&amp;gt; 1928년에 그는 의정부 직동, 흥선대원군의 별장이 있던 곳 바로 뒤에 위치한 건물을 매입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한용운]], 홍명희를 자주 초대했다.&lt;br /&gt;
&lt;br /&gt;
1932년 방응모는 교동광산을 135만원이란 거액에 일본 중외광업주식회사에 매각했다. 그 뒤 1932년 6월부터 조선일보 영업국장으로 활동하다 1933년 3월 [[조선일보]]의 경영권을 인수하여 부사장에 취임하였다.&lt;br /&gt;
그는 교동광업소를 운영하며 모은 재력을 바탕으로 부사장 재직 중 [[조선일보]]의 대주주가 되었으며, 1933년 7월 8대 사주 조만식으로부터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제9대 [[조선일보]] 사주로 취임, 활동했다.&amp;lt;ref&amp;gt;조선일보는 1932년 7월에 조만식을 사장으로 영입했지만, 조만식은 거의 평생을 평양에서 살아왔던데다 서울에서 활동하기에는 적응을 잘하지 못했다. 조만식은 신문사 경영난과 지역감정의 혹독한 시련을 받은 채 9개월만에 퇴사했다. 그리고 조만식 후임으로 1933년, 방응모를 사장으로 추대하기에 이르렀다.&amp;lt;/ref&amp;gt;&amp;lt;ref&amp;gt;《한국사 시민강좌 제47집, 대표적 독립운동가 12인》,일조각. p145&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언론, 사업 활동 ===&lt;br /&gt;
==== 사회사업 ====&lt;br /&gt;
[[파일:방응모장학생.jpg|섬네일|160px|오른쪽|방응모와 그의 장학금을 받던 학생들. 가운데 앉은 이가 방응모이고, 서있는 이들 중 왼쪽에서 두 번째는 방응모의 양자 방재윤.]]&lt;br /&gt;
&lt;br /&gt;
1930년 배영옥과 결혼하여 딸 방재숙을 얻었다. 1932년 광산업을 정리하였고 언론사업을 비롯하여 육영사업과 조림 및 간척사업 등을 벌였다. 또한 고아원과 사회복지단체에 후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933년 무렵 방응모가 [[조선일보]] 인수에 나서기 전부터 그는 [[한용운]]을 위한 일이라면 돈을 아끼지 않고 지출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성북동 언덕에 만해 한용운을 위해 기와집 한 채를 지어주었는데 [[심우장]](尋牛莊)이 그것이다. 또한 만해가 일제의 배급을 거부해 생활이 어려워지자 생활비를 지원했던 방응모는 그가 병석에 누운 1944년에는 치료비를 지원해주기도 했다.&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6/0000043262?sid=103 만해가 일송 선생 5일장 치른 사연]&amp;lt;/ref&amp;gt; 그 외에도 방응모는 만해 한용운·벽초 홍명희 등과 함께 새해가 되면 백천온천에도 같이 다녀올 정도로 가까운 관계였다.&lt;br /&gt;
&lt;br /&gt;
1932년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사건으로 체포된 [[안창호]]의 사면 탄원과 보석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총독부 경무국장은 그의 안창호 석방 제안을 정중히 거절한다.&lt;br /&gt;
&lt;br /&gt;
1936년 동방문화학원(숭문중학교·고등학교 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에 취임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인수와 경영 ====&lt;br /&gt;
1933년 1월 16일 그는 정식으로 주식회사 [[조선일보]]사를 창립했다. 일단 그는 조만식을 사장으로 임명하고 자신은 부사장으로 있다가, 그해 3월 13일 다시 부사장에 취임했다. 7월 10일 조만식의 사퇴로, [[조선일보]]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다.&lt;br /&gt;
&lt;br /&gt;
1934년 3월 25일 이광수를 비롯하여 서춘, 김동진, 함상훈, 신태익 등을 [[조선일보]]로 영입해 왔다. 그 외에도 정주군 출신 언론인, 작가들이 조선일보로 많이 오게 되었다.&lt;br /&gt;
&lt;br /&gt;
==== 동방문화학원 재단 설립 ====&lt;br /&gt;
방응모는 1936년 재단법인 동방문화학원(東邦文化學院)을 설립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6페이지&amp;lt;/ref&amp;gt; 동방문화학원은 학교 법인으로 인가된 재단 법인으로, 그 후 고계학원과 인연을 가지고 1936년부터는 보성고등보통학교를 후견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 분리되었다. 그 후 방응모 장학생인 서중회 회원들을 위한 방응모 장학사업을 주관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7페이지&amp;lt;/ref&amp;gt;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구 조선일보 사옥 안에 동방문화학원의 간판을 달고 조광 잡지를 계속 발행하는 조광사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7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일제 강점기 후반 ===&lt;br /&gt;
==== 중일 전쟁 전후 ====&lt;br /&gt;
중일전쟁 개전 직후인 1937년 7월 11일에 열린 [[조선일보]] 간부회의에서 주필 서춘이 '일본군, 중국군, 장개석씨'등으로 쓰던 용어를 '아군, 황군, 지나, 장개석'으로 고치고 일본 국민의 입장에서 논설을 쓸 것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반대 의견도 있기는 했으나, 방응모는 '일장기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이미 몇 십만 원의 손해를 보았을 뿐 아니라 [[3.1 운동]] 때처럼 신문이 민중을 지도할 수 없다'면서 서춘의 입장을 지지했다.&lt;br /&gt;
&lt;br /&gt;
1933년 이심회(후에 서중회, 방응모장학회 등 명칭이 바뀜)를 통해 대학생과 해외 유학생들에게 학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937년 12월 24일 [[안창호]]는 병보석 판정을 받고 재판소가 경성제국대학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안창호]]는 병상에서 병원비 문제로도 고초를 겪었고. 방응모는 50일 간의 입원비인 5백원짜리 수표 한 장을 안창호에게 전달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9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안창호]]는 1938년 3월 10일 밤 12시 경성제국대학 병원에서 운명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폐간 사건 ====&lt;br /&gt;
일본의 전쟁이 격화되면서 조선총독부 공보국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1940년에 강제로 폐간조치 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조선일보에 바쳤던 방응모는 큰 절망과 좌절을 느껴야 했다. [[한용운]]은 ‘신문이 폐간되다/ 붓이 꺾이어 모든 일이 끝나니…’로 시작하는 시를 지어 방응모를 위로했다. &amp;lt;ref&amp;gt;붓이 꺾이어 모든 일 끝나니 이제는 재갈 물린 사람들 뿔뿔이 흩어지고 아, 쓸쓸하고 쓸쓸한지고 망국 서울의 가을날 한강의 물도 흐느끼느니 울음 삼켜 흐느끼며 연지를 외면한 채 바다 향해 흐르느니&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38년 7월 “국민정신을 총동원하고 내선일체 전 능력을 발휘하여 국책 수행에 협력하여 성전(聖戰)의 궁극적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조직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에 참여했다.&lt;br /&gt;
&lt;br /&gt;
1940년 5월 조선총독부 총독 미나미 지로가 방송담화로 창씨개명을 권고했다. 그러나 그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성씨를 이제 와서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며 창씨개명은 완강하게 거절했다.&lt;br /&gt;
&lt;br /&gt;
조선일보에 트집이 잡힐 일이 나타나지 않자 총독부는 전국에 조선일보 신문 구독을 거절하도록 명령을 내렸고, 동시에 조선말을 쓰는 민원인에게는 일을 처리해주지 말도록 하게 했다. 총독부는 동아일보에 이어 조선일보에도 자진 폐간을 권고했고, 결국 8월 10일자로 폐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5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잡지 발행 활동 ====&lt;br /&gt;
신문 강제 폐간 뒤 방응모는 간판을 조광사로 바꿔 걸고, 사옥은 동방흥업주식회사로 등기를 변경해서 유지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1페이지&amp;lt;/ref&amp;gt; 이후 그는 조광 잡지 발행에 전념했다. 1943년 8월 경 일본 중앙대학의 예과를 마친 방일영이 입사&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1페이지&amp;lt;/ref&amp;gt;, 필진으로 참여했다. [[조선일보]]가 폐간된 후에도 방응모는 벽초 홍명희 부자에게 지속적으로 생활비를 대주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4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4년 6월 29일 만해 [[한용운]]이 사망했다. 그는 심우장을 찾아가 3백원을 내놓았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5페이지&amp;lt;/ref&amp;gt;당시 쌀 10가마가 100원이었지만, 심우장은 당장 현금 1원이 없었는데 거액이라서 놀랐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6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광복 이후 언론 및 정치활동 ===&lt;br /&gt;
==== 광복 직후 ====&lt;br /&gt;
1945년 8.15 광복 후에는 8월 말과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朝鮮在外戰災同胞救濟會) 고문과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9월 초 [[안재홍]] 등이 좌경화되는 건준체제에 반발하여 건준을 탈퇴하자 방응모 역시 건준을 탈퇴하였다.&lt;br /&gt;
&lt;br /&gt;
9월 2일 미군정이 주둔하자, 방응모는 윤전기를 찾기 위해 폐간 당시의 증빙서류를 미 군정청에 제시하였으나 소식이 없었다. 총독부는 조선일보 폐간 직후 인수한 윤전기를 경성일보사에 옮겨서 설치했다. 그는 동방문화재단 외 4개 사업소를 적산으로 파악한 미군정을 설득하고, 사옥 문제도 해결하였다.&lt;br /&gt;
&lt;br /&gt;
10월 1일 조선일보 편집위원회를 구성하고, 신문 복간 운동을 추진했다. 조선총독부의 폐간 지시 당시 의정부로 옮겨놓은 일부 활자 자모음이 잘 보관되어, 그해 11월 23일 조선일보를 복간시키고, 서울신문사 사옥에서 조선일보 복간호를 간행하였다. 이후 조선사회문제대책중앙협의회 중앙위원을 거쳐 10월 16일 이승만 등의 주도로 독립촉성중앙회가 결성되자 독촉에 가입하였다.&lt;br /&gt;
&lt;br /&gt;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이 귀국하자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에 입당했다. 12월 [[안재홍]]의 추천으로 한국독립당의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출되어 3~4개월 동안 활동했다.&amp;lt;ref&amp;gt;일각에서는 방응모가 '한독당 재무부장으로 지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1947년부터 한독당 재무부장을 맡은 신창균이 전면 부정했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47/0000002626?sid=102 백범 비서와 '진짜' 한독당 재정부장의 육성증언. 참고.]&amp;lt;/ref&amp;gt; 그 뒤 대한국민총회 발기인, 대한독립애국금헌성회 발기인 등으로 활동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복간 및 군정기 활동 ====&lt;br /&gt;
11월 [[조선일보]]사를 복간시켰다. 그러나 한동안 조선일보의 인쇄는 서울신문사에서 간행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1945년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추념대회에 참여하였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2&amp;quot;&amp;gt;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13&amp;lt;/ref&amp;gt; 순국선열추념대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2&amp;quot; /&amp;gt;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참여,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이 되었다.&amp;lt;ref&amp;gt;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55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6년 2월 26일 서울신문사 공무국 종업원들이 조선일보의 인쇄를 거부해버렸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436페이지&amp;lt;/ref&amp;gt; 그동안 묵시적으로 방해가 은근히 있었다. 표면상의 문제는 임금 문제이나 내용상으로는 조선일보에 대한 조선공산당의 시위의 일종이었다. 사흘간의 교섭 끝에 2월 28일에 가서야 26일자와 27일자를 소급해서 인쇄하여 신문을 한꺼번에 발행하였다. 그러나 3월 1일과 2일에 또다시 인쇄를 거부당해 결국 휴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436페이지&amp;lt;/ref&amp;gt; 조선일보를 경성일보사로 옮겨서 인쇄하기로 하고 3월 5일자로 사고로 독자에게 알렸다.&lt;br /&gt;
&lt;br /&gt;
4월 29일 김구, 김창숙, 김성수, 오세창 등과 함께 서울운동장에서 윤봉길의사 추모회의 창립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amp;lt;ref&amp;gt;&amp;quot;故尹奉吉義士의 記念式 오늘, 發起人會 열고 準備&amp;quot;, 동아일보 1946년 4월 23일자 2면, 사회면&amp;lt;/ref&amp;gt; 그해 5월 조선공업구락부 고문에 위촉되었다.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民族統一總本部) 10인협의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6월 15일 오후 5시 40분 서울역에 마중나가 서울역에 도착한 삼의사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lt;br /&gt;
&lt;br /&gt;
1945년 광복 직후 서기원이 그를 찾아왔다. 서기원은 그때 경성농상실천학교의 동창회로부터 이 학교의 교장이 되어 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이다. 방응모는 서기원의 제의를 받아들여 1946년 8월 28일 동방문화학원 이사장으로 숭문상업학교를 인수, 재단 이사장이 되었다. 후일 방응모가 6.25 전쟁 중에 납북된 후 동방문화학원과 숭문중,고교의 재단은 최용진이 운영하다가 다시 1978년에 방일영에게 인수되었다.&lt;br /&gt;
&lt;br /&gt;
1947년 1월 21일 제5회 창립위원회를 본사에서 개최하고 2월 23일 주식회사 조선일보사 주주창립총회를 열고 대표이사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공동투자 경영자로 참여시킨 전무 이종민과의 알력이 발생했다. 이종민과의 갈등이 심화되자 그해 8월 3일 방응모는 일단 사직서를 제출했다. 1947년 8월 10일 풍문여고 강당에서 개최된 한인신문기자협회에 참석, 민족청년단에서 언론계 공로자로 방응모, 김성수, 설의식을 지정하여 상을 시상받았다.&amp;lt;ref&amp;gt;&amp;quot;朝鮮 新聞記者協會&amp;quot;, 동아일보 1947년 8월 10일자 2면, 사회면&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납북과 최후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 납북 후 행적은 &amp;quot;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amp;quot;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 1950년 8월경 개성 송악산 부근에서 미군의 폭격에 희생되었고 심한 폭격으로 시신을 찾을 수 없어 묘도 만들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남한에서는 1955년 7월 7일 생사불명기간 만료로 인해 실종 처리되었다.&lt;br /&gt;
&lt;br /&gt;
=== 사후 ===&lt;br /&gt;
서울 종로에 있던 양자 방재윤의 두 아들 방일영과 방우영은 방응모의 첩 이인숙이 찾아가 피신하라고 권고하여 황급히 피신했다. &lt;br /&gt;
&lt;br /&gt;
7월 6일 그의 행방불명처리가 되고, 방응모의 사후에도 [[조선일보]]는 그의 명의로 발행되었다. 1952년 4월 28일 조선일보는 발행인겸 편집인을 장기영으로, 인쇄인을 방일영으로, 방응모는 명예사장으로 명의변경하여 휴전 후 계속 발행하게 되었다. 1954년 4월 30일 제8회 조선일보 정기주주총회에서 장기영 사장이 사퇴하면서, 명예사장 방응모가 사장으로 추대되고, 발행인 겸 대표취체역에 방일영이 선임되었다. 이후 실종 후 1959년에 법적으로 사망 처리되었다. 그리고 1970년까지는 조선일보는 그의 이름으로 발행되었다.&lt;br /&gt;
&lt;br /&gt;
1970년 2월 19일 조선일보 정기주주총회에서 방응모 이사를 사퇴 수리하였다. 그의 피폭 사망 사실은 1970년대 이후 탈북자들을 통해 대한민국에 소개되었다.&lt;br /&gt;
&lt;br /&gt;
== 친일행위 의혹 ==&lt;br /&gt;
=== 일제 전시체제기 활동 ===&lt;br /&gt;
일제 강점기 말기 언론인으로서 총독부체제에 협력한 기록과 활동이 다수 기록이 있다. 1933년 3월 [[조선일보]] 경영권을 인수하고 부사장직에 취임했을 당시 같은 달에 고사기관총 구입비용 1600원을 군에 헌납하였다. 그는 1935년 친일 잡지 《조광 (잡지)(朝光)》을 창간하였고, 1937년에는 경성방송국 제2방송에 출연하여 일제가 중국의 베일을 절멸케하여 극동평화를 지키려고 한다는 강연을 하였다. 1940년대부터 조광에 집중적으로 친일 논설을 기고하고 시국 강연에 참여하여 전쟁 지원을 독려했다. 1942년 6월에는 '징병령 실시에 일층 더 감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글을 써서 조광에 발표하였다. 애국금차회(1937),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1938), 임전대책협의회(1941), 조선임전보국단(1941) 등 대표적인 친일 단체의 회원에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그는 이런 행적으로 인해 해방정국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명단에 기록되어 있고,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해 발표한 &amp;lt;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amp;gt;에 모두 포함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lt;br /&gt;
&lt;br /&gt;
우리 [[조선일보]]는 다른 어떤 신문도 따라오지 못하는 확고한 신념에서 비국민적 행위를 단연 배격하여 종국까지 조선일보사가 이미 정해놓은 방침에 한뜻으로 매진한다.|원산에서의 순회 강연&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9478.html 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친일 다짐하다 시민에 봉변]《한겨레》2005-08-24 오후 06:13:18&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반민족행위 논란 ===&lt;br /&gt;
방응모를 친일파로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남아 있다. 조선일보 경영 이전에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방응모의 활동이 거의 없었고, 납북된 뒤 소식이 끊겨버린 까닭에 본인이 항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 동안의 행적만으로 친일파 여부를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방응모의 후손들이 영향력 있는 [[조선일보]] 언론사의 사주를 맡았기에 그의 입장에서 서술한 기록을 많이 남기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80년 발간된 그의 전기 《계초 방응모》(조선일보사) 등에는 '그가 민족주의적 선각자'로 묘사되고 있다. 방응모가 친일파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일부세력측은 그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논거로 드는 경우가 많이 있다.&amp;lt;ref&amp;gt;유석재, 계간 《유심》 (2004년 봄호) [http://yousim.buddhism.org/html/2004-spr/tamgu-yoo-seok-jae.htm 삭풍 속에 피어난 금란지교(金蘭之交) - 만해와 계초 방응모]&amp;lt;/ref&amp;gt;&amp;lt;ref&amp;gt;&amp;quot;일제 말기 계초는 시국강연에 나설 것과 창씨개명을 집요하게 강요받았으나 그때마다 묵묵부답으로 거부하며 소신을 지켰다.&amp;quot; 《조선일보》 (2001.3) 조선일보 사장열전 - 계초 방응모편, 《한겨레》 (2001.3.30) [http://www.njoyschool.net/news/article_view.asp?menu_code=s20202&amp;amp;no=1206 조선일보, 일장기를 신문제호 위에]&amp;lt;/ref&amp;gt;&lt;br /&gt;
또한 한국정토학회 고문이자 서울 정토사 주지였던 박설산(1918~2007)이 학도병에 끌려가기 직전인 1943년 12월 28일 밤 서울역에서 스스로 왼발을 선로에 올려 발가락을 절단해 징집을 기피하자 방응모는 만해와 함께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설산을 걱정하면서 입원 중 조선일보 기자를 통해 돈을 전달한 것은 물론 퇴원할 때 돈을 전달하고 뒤를 보살폈다고 한다.&amp;lt;ref&amp;gt;박설산 회고록 &amp;lt;뚜껑없는 조선역사책&amp;gt;(1994, 도서출판 삼장) p240~241&amp;lt;/ref&amp;gt;&lt;br /&gt;
&lt;br /&gt;
2010년 12월, 방응모 관계자들 및 조선일보측은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을 취소해달라'며 법원에 낸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amp;quot;1944년 조선항공업 창립발기인으로 활동한 부분에 대해 친일행위로 판단한 부분을 취소하지만 나머지 활동에 대해서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amp;quot;라고 판결했다. 그 이유인 즉 &amp;quot;방응모는 1933년 조선일보 사장으로 취임해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등으로 활동하며 친일활동을 벌였으며, 1937년 경성방송국 시국강연에서 일본제국이 극동평화를 확립시킬 것이라는 내용의 강연을 하고, 1938년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춘추회의 발기인 겸 간사로 활동하기도 했다&amp;lt;ref&amp;gt;[http://media.daum.net/breakingnews/politics/view.html?cateid=1002&amp;amp;newsid=20101222103319164&amp;amp;p=newsis 법원 &amp;quot;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친일파 맞다&amp;quot;]뉴시스 2010년 12월 22일&amp;lt;/ref&amp;gt;&amp;quot;는 것이다.&lt;br /&gt;
&lt;br /&gt;
2012년 1월 12일 서울고법 행정7부는 방 전 사장의 손자인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이 행정안전부를 상대로 낸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처분 취소 청구소송에서 ‘일제 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의 친일 행위 판정 조항에 비추어 방 전 사장에게 적용된 모두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민족적 지도자로서 비중이 큰 만큼 그로 인한 책임도 무거울 뿐 아니라 고난의 시기를 겪은 민족으로서 그 역사를 반성하자는 입장에 설 때, 방 전 사장의 여러 행태는 반민특별법에서 규정한 친일반민족행위의 유형에 속함을 부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1·2심 재판부는 방 전 사장이 자신이 운영하던 잡지 &amp;lt;조광&amp;gt;에 일제 침략전쟁에 동조하고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문예물과 일제 침략전쟁에 협력할 것을 주문하는 논문을 게재하는 등의 ‘친일’ 행위를 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또한, 2심 재판부는 일본의 전쟁 수행을 돕기 위해 설립된 군수 제조업체 ‘조선항공공업’의 발기인과 감사를 지낸 것은 “감사는 업무집행에 관여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기관으로, 방 전 사장이 이 회사를 운영했다고 볼 수 있다”는 이유로 친일이라고 판단했다.&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4565.html법원 ‘방응모 친일’ 2심서도 인정] 인터넷한겨레 2010년 12월 22일&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기타 ==&lt;br /&gt;
그는 [[한용운]], 최남선, 정인보, 홍명희 등과 친분관계를 형성하고 어울려 지냈다 한다.&lt;br /&gt;
&lt;br /&gt;
김구의 한국독립당의 재정적 후견인 역할을 하였다 하며,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삼의사 유골봉환식 때 김구, 정인보 등과 촬영한 사진이 있다.&lt;br /&gt;
한편 임꺽정의 저자인 벽초 홍명희가 방응모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그와 깊은 친분을 맺었다는 주장이 있다. 《조광》 1938년 11월호엔 홍명희가 병중에 있는 방응모를 위로하며 지은 한시가 방응모의 답시와 함께 실려 있다고 한다.&amp;lt;ref&amp;gt;[http://weekly.chosun.com/site/data/html_dir/2004/11/05/2004110577041.html ‘임꺽정’으로 되살아난 독립운동의 魂! 주간조선 1827호 2004.11.04&amp;lt;/ref&amp;gt; 또한 [[안창호]]의 비서실장을 지낸 독립유공자 구익균은 방응모와 안창호가 친밀했다는 주장을 했다.&amp;lt;ref&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09/2008030901055.html &amp;quot;공산주의자들, 도산 비판하다가도 하숙비 떨어지면 찾아와&amp;quot;] 조선일보, 2008-03-10 03:22&amp;lt;/ref&amp;gt;&lt;br /&gt;
또한 박설산에 따르면 1943년 만해 한용운에게 학도병으로 끌려가게 되었음을 알리려 심우장으로 찾아가게 되었을 때, 한용운과 방응모가 바둑을 두고 곁에서 정인보가 훈수를 두고 있었다고 한다.&amp;lt;ref&amp;gt;박설산 저 &amp;lt;뚜껑없는 朝鮮 역사 책&amp;gt; p.226 도서출판 三藏(1994)&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 /&amp;gt;&lt;br /&gt;
&lt;br /&gt;
== 참고 자료 ==&lt;br /&gt;
* 청산하지 못한 역사: 언론 내세워 일제에 아부한 교화 정책의 하수인 (문영숙) (반민족문제연구소, 청년사, 1994)&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민족 계몽의 초석 방응모(이동욱 저, 지구촌, 1998)&lt;br /&gt;
* 계초 방응모전(계초전기간행위, 조선일보사, 1980년)&lt;br /&gt;
* 계초 방응모(이동욱, 방일영문화재단, 1996)&lt;br /&gt;
&lt;br /&gt;
== 외부 링크 ==&lt;br /&gt;
* [https://web.archive.org/web/20050123171046/http://chosunhost.com/ 계초방응모 기념사업회]&lt;br /&gt;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09145 &amp;lt;조선일보&amp;gt;, 방응모 전 사장의 '친일행적' 말한다] - 오마이뉴스 04.09.10일자&lt;br /&gt;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020302101749 방응모ㆍ 김성수 친일행적 뭔가 : &amp;lt;긴급입수&amp;gt;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 全文] - 프레시안 2002-03-02&lt;br /&gt;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54052 그가 '&amp;lt;조선&amp;gt;의 주인' 주장하는 이유] 오마이뉴스 2001년 9월 20일자&lt;br /&gt;
*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956 방재선씨, 호주·상속 원인무효소송 제기]&lt;br /&gt;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4/06/2008040601053.html '5인 친필 서첩' 발굴] 조선일보 2008년04월06일자]&lt;br /&gt;
&lt;br /&gt;
[[분류: 감자]]&lt;/div&gt;</summary>
		<author><name>Nsgjjsjsjy02</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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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방응모</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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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06-20T00:58:4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Nsgjjsjsjy02: /* 중일 전쟁 전후 */&lt;/p&gt;
&lt;hr /&gt;
&lt;div&gt;{|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width:100%&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0%&amp;quot;|사진&lt;br /&gt;
|[[파일:방응모.jpg|center|200픽셀]]&lt;br /&gt;
|+ '''방응모'''&lt;br /&gt;
|+ style=&amp;quot;caption-side:bottom;text-align:left:&amp;quot;|출처: 위키백과&lt;br /&gt;
|출생||1883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조선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또는 정부면 성내동&lt;br /&gt;
|-&lt;br /&gt;
|사망||1950년경으로 추정&lt;br /&gt;
|-&lt;br /&gt;
|사인||불명&lt;br /&gt;
|-&lt;br /&gt;
|거주지||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amp;gt; 경성부 -&amp;gt; 경기도 양주군 의정부읍&lt;br /&gt;
|-&lt;br /&gt;
|국적||대한민국&lt;br /&gt;
|-&lt;br /&gt;
|본관||온양&lt;br /&gt;
|-&lt;br /&gt;
|별칭||호: 계초(啓礎), 춘해(春海)&lt;br /&gt;
|-&lt;br /&gt;
|직업||교사, 변호사, 상인, 언론인, 기업인, 사회운동가, 정치가&lt;br /&gt;
|-&lt;br /&gt;
|배우자||승계도, 이인숙, 배영옥, 노효용&lt;br /&gt;
|-&lt;br /&gt;
|자녀||방재숙(딸), 방재욱·방재선·방재효·방재규(아들), 방재윤(양자)&lt;br /&gt;
|-&lt;br /&gt;
|부모||방계준(부), 온양박씨(모)&lt;br /&gt;
|}&lt;br /&gt;
&lt;br /&gt;
'''방응모'''(方應謨, 평안북도 정주군, 1883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 1950년 8월(추정)는 [[일제강점기]]의 교육자, 언론인, 법조인, 기업인이자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언론인이며 정치인이다. 호는 '''춘해'''(春海)이고, 뒤에 '''계초'''(啓礎)로 고쳤다.&lt;br /&gt;
&lt;br /&gt;
1922년 동아일보 정주 지국을 인수해 지국장을 지내다가 1924년 금광업에 뛰어들어 큰 부를 얻게 되었다. 1932년 6월 조선일보에 입사하였고 이후 영업국장이 되어 조선일보의 판매망을 장악하게 되고 경영권을 인수하면서 1933년 3월 조선일보 부사장이 되었다. 1933년 7월부터 1950년 7월까지 종신으로 [[조선일보]]의 사장을 역임하였다. 1935년 창간한 월간잡지 '조광(朝光)'은 친일 논란이 있다.&amp;lt;ref&amp;gt;안은필. [http://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9211 조선일보가 가장 빛나던 시기, ‘안재홍 시대’]&amp;lt;/ref&amp;gt;&amp;lt;ref name=&amp;quot;안은&amp;quot;&amp;gt;안은필. [http://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9279 방응모 친일증거, “모래밭에서 모래 찾기”]국민TV. 기사입력 2015년 4월 23일. 기사수정 2015년 4월 24일.&amp;lt;/ref&amp;gt;&amp;lt;ref&amp;gt;이민영.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1/0002255321?sid=102 고법 “방응모 前조선일보 사장 친일행적 대부분 인정”]. 서울신문. 2012년 1월 13일.&amp;lt;/ref&amp;gt;&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6/0000000413?sid=110 김성수ㆍ방응모와 친일언론인 군상]. 미디어오늘. 2002년 3월 12일.&amp;lt;/ref&amp;gt; 언론계에서 활동하면서도 사업가의 길을 함께 걸었고, 교육 장학 활동을 하였으며, 1945년 광복 직후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안재홍]]의 추천을 받아 한국독립당 중앙상무위원과 독립촉성국민회 총무부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amp;lt;ref name=&amp;quot;안은&amp;quot;/&amp;gt;&amp;lt;ref&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16/2008031600800.html 계초 방응모와의 우정도 여러 편의 시로 표현해&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해방 정국에서 김구의 재정적 후견인으로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등 삼의사 유골 봉환 사업과 신탁통치 반대 운동 등에 참여하여 활동했다.&lt;br /&gt;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 납북 후 행적은 &amp;quot;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amp;quot;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lt;br /&gt;
&lt;br /&gt;
== 생애 ==&lt;br /&gt;
=== 생애 초기 ===&lt;br /&gt;
==== 출생과 성장 ====&lt;br /&gt;
방응모는 1883년 11월 3일 또는 9월 29일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바우머리 부락 또는 정주군 정부면 성내동 425번지에서 '''방계준(方桂準)'''과 온양 박씨(溫陽朴氏)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어려서 빈곤한 가정환경으로 방응모는 정규 학교에는 입학하지 못하고, 16세 때까지 서당에 드나들며 한학을 익혔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던 중 그가 어느 정도 실력이 우수하다고 인정되자, 스승인 승창률은 잠시 방응모에게 어린아이들을 돌보게 한 후 자리를 피하곤 했다 한다. 그는 홀로 사서육경을 탐독, 독파하였다. 21세 무렵 잠시 서당 훈장을 지내기도 했다. 우연히 경성부에 갔다가 신문물을 보고 충격을 받아 17세에 독학으로 신학문과 일본어, 중국어, 수학 등을 독파하였다.&lt;br /&gt;
&lt;br /&gt;
유년시절 서당의 성리학 스승이던 승창률의 친척인 승시영(承時榮)과 조씨(趙氏)의 딸 승계도와 결혼했다. 결혼한 다음 해에도 그는 공부를 한다며 책만 사다 읽곤 했고, 부인 승계도는 생계를 위해 몸소 나섰다. 그의 아내는 남편에 대한 믿음이 절대적이었고 탓을 하거나 가출하지 않았다.&lt;br /&gt;
&lt;br /&gt;
=== 언론, 기업 활동 ===&lt;br /&gt;
==== 계몽 활동과 언론 활동 ====&lt;br /&gt;
1915년부터 1924년 방응모는 지역 지식인들, 유학파 청년, 계몽 청년들이 모여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하는데 참여했다. 민립대학기성회에서 활동하면서 조만식 등과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언변과 용모가 되었던 그의 여관에도 손님들이 몰렸고, 그가 &amp;quot;2백원도 좋고 5백원도 좋다며 보태달라&amp;lt;ref name=&amp;quot;fsfs87&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7페이지&amp;lt;/ref&amp;gt;&amp;quot;고 하면 기부금을 내는 이들이 있었다. 1919년 정주에서 3.1 만세 운동이 벌어지자, 그도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형사들의 눈을 피해 방응모는 만세운동을 하다 재빨리 몸을 피해 화를 면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8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22년 6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인수하여 분국장에 취임했다. 그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경영하는 동시에 그는 농촌 계몽운동 등에 적극 참여했다. 1922년 6월 19일&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96페이지&amp;lt;/ref&amp;gt; 동아일보 본사를 설득하여 정주분국을 동아일보사 정주지국으로 승격시켰다. 동아일보사 지부장 재직 시 그는 민립 대학 설립 자금과 농촌진흥회 회원의 여비 및 당시 운영난에 처했던 오산학교의 재개교 등을 계획했다. 총독부의 거부로 실패한 대학 설립 자금은 고스란히 오산학교의 부활 자금으로 투입되었다.&lt;br /&gt;
&lt;br /&gt;
1923년 동아일보 정주군 분국이 지국으로 승격되자 정주국을 경영하였고, 같은 해 7월 여성들의 사회 참여와 평등권 신장을 위한 여자교육회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이후 대규모 수해가 나자, 정주군 수해구제회를 결성하여 봉사활동에 가담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 광업 경영과 조선일보 입사 ====&lt;br /&gt;
1924년 친구 전우현이 방응모와도 안면이 있던 금광 채굴업자 두 명을 데리고 그를 찾아왔다. 그들은 자신들이 봐 둔 산이 있다고 방응모에게 소개했다. 이후 광산업에 뛰어들어 1924년 여름 압록강변의 폐금광인 평안북도 삭주군 외남면 교동 다릿골의의 삭주 교동광업소를 찾아가 10미터 정도 땅을 파고 금맥을 발견했다. 곧 삭주 교동광업소를 인수, 경영을 확대하였다. 이때 만난 동업자의 딸이자 친구 전우현의 조카딸인 '''이인숙(李仁淑)'''을 만났다. 본처 승계도가 두 아들을 잃고 복부 수술이 잘못되어 아이를 얻지 못하게 되자 방응모에게도 수많은 중매가 들어왔다. 자식들을 병으로 잃은 것이 자신의 불찰이라고 본 승계도는 그에게 작은 부인이라도 들이자는 말을 꺼내기도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18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26년 방응모에게 광산 사업을 제안했던 두 친구가 손을 털고 나갔고, 그의 가족은 돈이 없어 쌀 대신 좁쌀로 좁쌀죽을 먹으며 연명해야 했다. 방응모는 정주군에 사는 비슷한 또래의 먼 친척 방상진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고, 방상진과 일꾼 대여섯 명, 그리고 후처 이인숙의 친정 쪽에서 얻어온 토지문서를 얻어 자금을 마련했고 다시 금광을 채굴했다. 그 후 1926년 7월 지하 300m 지점에서 금맥을 확보했고, 이후 연간 300kg의 금을 생산하여 벼락부자가 되었다.&lt;br /&gt;
&lt;br /&gt;
1928년 방응모는 자신의 아호를 딴 춘해 장학회를 만들고 장학생들의 모임인 이심회를 만든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48페이지&amp;lt;/ref&amp;gt; 1928년에 그는 의정부 직동, 흥선대원군의 별장이 있던 곳 바로 뒤에 위치한 건물을 매입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한용운]], 홍명희를 자주 초대했다.&lt;br /&gt;
&lt;br /&gt;
1932년 방응모는 교동광산을 135만원이란 거액에 일본 중외광업주식회사에 매각했다. 그 뒤 1932년 6월부터 조선일보 영업국장으로 활동하다 1933년 3월 [[조선일보]]의 경영권을 인수하여 부사장에 취임하였다.&lt;br /&gt;
그는 교동광업소를 운영하며 모은 재력을 바탕으로 부사장 재직 중 [[조선일보]]의 대주주가 되었으며, 1933년 7월 8대 사주 조만식으로부터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제9대 [[조선일보]] 사주로 취임, 활동했다.&amp;lt;ref&amp;gt;조선일보는 1932년 7월에 조만식을 사장으로 영입했지만, 조만식은 거의 평생을 평양에서 살아왔던데다 서울에서 활동하기에는 적응을 잘하지 못했다. 조만식은 신문사 경영난과 지역감정의 혹독한 시련을 받은 채 9개월만에 퇴사했다. 그리고 조만식 후임으로 1933년, 방응모를 사장으로 추대하기에 이르렀다.&amp;lt;/ref&amp;gt;&amp;lt;ref&amp;gt;《한국사 시민강좌 제47집, 대표적 독립운동가 12인》,일조각. p145&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언론, 사업 활동 ===&lt;br /&gt;
==== 사회사업 ====&lt;br /&gt;
[[파일:방응모장학생.jpg|섬네일|160px|오른쪽|방응모와 그의 장학금을 받던 학생들. 가운데 앉은 이가 방응모이고, 서있는 이들 중 왼쪽에서 두 번째는 방응모의 양자 방재윤.]]&lt;br /&gt;
&lt;br /&gt;
1930년 배영옥과 결혼하여 딸 방재숙을 얻었다. 1932년 광산업을 정리하였고 언론사업을 비롯하여 육영사업과 조림 및 간척사업 등을 벌였다. 또한 고아원과 사회복지단체에 후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933년 무렵 방응모가 [[조선일보]] 인수에 나서기 전부터 그는 [[한용운]]을 위한 일이라면 돈을 아끼지 않고 지출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성북동 언덕에 만해 한용운을 위해 기와집 한 채를 지어주었는데 [[심우장]](尋牛莊)이 그것이다. 또한 만해가 일제의 배급을 거부해 생활이 어려워지자 생활비를 지원했던 방응모는 그가 병석에 누운 1944년에는 치료비를 지원해주기도 했다.&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6/0000043262?sid=103 만해가 일송 선생 5일장 치른 사연]&amp;lt;/ref&amp;gt; 그 외에도 방응모는 만해 한용운·벽초 홍명희 등과 함께 새해가 되면 백천온천에도 같이 다녀올 정도로 가까운 관계였다.&lt;br /&gt;
&lt;br /&gt;
1932년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사건으로 체포된 [[안창호]]의 사면 탄원과 보석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총독부 경무국장은 그의 안창호 석방 제안을 정중히 거절한다.&lt;br /&gt;
&lt;br /&gt;
1936년 동방문화학원(숭문중학교·고등학교 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에 취임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인수와 경영 ====&lt;br /&gt;
1933년 1월 16일 그는 정식으로 주식회사 [[조선일보]]사를 창립했다. 일단 그는 조만식을 사장으로 임명하고 자신은 부사장으로 있다가, 그해 3월 13일 다시 부사장에 취임했다. 7월 10일 조만식의 사퇴로, [[조선일보]]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다.&lt;br /&gt;
&lt;br /&gt;
1934년 3월 25일 이광수를 비롯하여 서춘, 김동진, 함상훈, 신태익 등을 [[조선일보]]로 영입해 왔다. 그 외에도 정주군 출신 언론인, 작가들이 조선일보로 많이 오게 되었다.&lt;br /&gt;
&lt;br /&gt;
==== 동방문화학원 재단 설립 ====&lt;br /&gt;
방응모는 1936년 재단법인 동방문화학원(東邦文化學院)을 설립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6페이지&amp;lt;/ref&amp;gt; 동방문화학원은 학교 법인으로 인가된 재단 법인으로, 그 후 고계학원과 인연을 가지고 1936년부터는 보성고등보통학교를 후견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 분리되었다. 그 후 방응모 장학생인 서중회 회원들을 위한 방응모 장학사업을 주관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7페이지&amp;lt;/ref&amp;gt;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구 조선일보 사옥 안에 동방문화학원의 간판을 달고 조광 잡지를 계속 발행하는 조광사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7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일제 강점기 후반 ===&lt;br /&gt;
==== 중일 전쟁 전후 ====&lt;br /&gt;
중일전쟁 개전 직후인 1937년 7월 11일에 열린 [[조선일보]] 간부회의에서 주필 서춘이 '일본군, 중국군, 장개석씨'등으로 쓰던 용어를 '아군, 황군, 지나, 장개석'으로 고치고 일본 국민의 입장에서 논설을 쓸 것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반대 의견도 있기는 했으나, 방응모는 '일장기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이미 몇 십만 원의 손해를 보았을 뿐 아니라 [[3.1 운동]] 때처럼 신문이 민중을 지도할 수 없다'면서 서춘의 입장을 지지했다.&lt;br /&gt;
&lt;br /&gt;
1933년 이심회(후에 서중회, 방응모장학회 등 명칭이 바뀜)를 통해 대학생과 해외 유학생들에게 학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937년 12월 24일 [[안창호]]는 병보석 판정을 받고 재판소가 경성제국대학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안창호]]는 병상에서 병원비 문제로도 고초를 겪었고. 방응모는 50일 간의 입원비인 5백원짜리 수표 한 장을 안창호에게 전달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9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안창호]]는 1938년 3월 10일 밤 12시 경성제국대학 병원에서 운명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폐간 사건 ====&lt;br /&gt;
일본의 전쟁이 격화되면서 조선총독부 공보국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1940년에 강제로 폐간조치 했다. 광산을 팔아서 자신의 모든 것을 조선일보에 바쳤던 방응모는 큰 절망과 좌절을 느껴야 했다. [[한용운]]은 ‘신문이 폐간되다/ 붓이 꺾이어 모든 일이 끝나니…’로 시작하는 시를 지어 방응모를 위로했다. &amp;lt;ref&amp;gt;붓이 꺾이어 모든 일 끝나니 이제는 재갈 물린 사람들 뿔뿔이 흩어지고 아, 쓸쓸하고 쓸쓸한지고 망국 서울의 가을날 한강의 물도 흐느끼느니 울음 삼켜 흐느끼며 연지를 외면한 채 바다 향해 흐르느니&amp;lt;/ref&amp;gt; 동아일보에는 김성수 외에도 장덕수와 송진우가 있었지만 그에게는 조선일보 폐간을 막기 위해 총독부와 교섭할 인물도 없었다.&lt;br /&gt;
&lt;br /&gt;
1938년 2월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선 내 일간신문 25개사로 조직된 조선춘추회의 창립에 창립발기인으로 참가했고, 조선춘추회 간사로 활동했다. 같은 해 7월 “국민정신을 총동원하고 내선일체 전 능력을 발휘하여 국책 수행에 협력하여 성전(聖戰)의 궁극적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조직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에 참여했고, 그날 결성된 경성연맹 창립총회에서 상담역을 맡았다. 9월부터 조선방공협회 경기도연합지부 평의원을 지냈다. 10월에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주최한 비상시 국민생활 개선을 위한 제1회 생활개선위원회에서 제2부(의례와 사회풍조 쇄신부)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그러나 1938년 10월부터 조선총독부는 조선일보의 신문용지를 검열, 통제하기 시작했다.&lt;br /&gt;
&lt;br /&gt;
1940년 5월 조선총독부 총독 미나미 지로가 방송담화로 창씨개명을 권고했다. 그러나 그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성씨를 이제 와서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며 창씨개명은 완강하게 거절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조선일보에 트집이 잡힐 일이 나타나지 않자 총독부는 전국 면사무소에 조선일보 신문 구독을 거절하도록 명령을 내렸고, 동시에 조선말을 쓰는 민원인에게는 일을 처리해주지 말도록 하게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3페이지&amp;lt;/ref&amp;gt; 조선총독부는 송진우의 예금통장을 문제삼았다. 송진우 명의의 은행저금이 동아일보의 8백여 개의 지국과 분국을 통해 모금된 독립운동 자금이라며, 그리고 동아일보 간부들이 백운장이라는 요정에서 회식을 한 것을 김성수 집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려 했다는 등의 이유로 백관수 동아일보 사장을 전격 구속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3~374페이지&amp;lt;/ref&amp;gt; 동아일보는 백관수가 구속된지 10일 만에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동아일보 중역회의를 열고 폐간신청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4페이지&amp;lt;/ref&amp;gt; 총독부는 조선일보에도 자진 폐간을 권고했고, 1940년 8월 9일 편집회의를 주관, 8월 10일 조선일보의 폐간계를 내고, 8월 10일자로 폐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5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잡지 발행 활동 ====&lt;br /&gt;
신문 강제 폐간 뒤 방응모는 간판을 조광사로 바꿔 걸고, 사옥은 동방흥업주식회사로 등기를 변경해서 유지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1페이지&amp;lt;/ref&amp;gt; 이후 그는 조광 잡지 발행에 전념했다. 1943년 8월 경 일본 중앙대학의 예과를 마친 방일영이 입사&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1페이지&amp;lt;/ref&amp;gt;, 필진으로 참여했다. [[조선일보]]가 폐간된 후에도 방응모는 벽초 홍명희 부자에게 지속적으로 생활비를 대주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4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4년 6월 29일 만해 [[한용운]]이 사망했다. 그는 심우장을 찾아가 3백원을 내놓았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5페이지&amp;lt;/ref&amp;gt;당시 쌀 10가마가 100원이었지만, 심우장은 당장 현금 1원이 없었는데 거액이라서 놀랐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6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광복 이후 언론 및 정치활동 ===&lt;br /&gt;
==== 광복 직후 ====&lt;br /&gt;
1945년 8.15 광복 후에는 8월 말과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朝鮮在外戰災同胞救濟會) 고문과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9월 초 [[안재홍]] 등이 좌경화되는 건준체제에 반발하여 건준을 탈퇴하자 방응모 역시 건준을 탈퇴하였다.&lt;br /&gt;
&lt;br /&gt;
9월 2일 미군정이 주둔하자, 방응모는 윤전기를 찾기 위해 폐간 당시의 증빙서류를 미 군정청에 제시하였으나 소식이 없었다. 총독부는 조선일보 폐간 직후 인수한 윤전기를 경성일보사에 옮겨서 설치했다. 그는 동방문화재단 외 4개 사업소를 적산으로 파악한 미군정을 설득하고, 사옥 문제도 해결하였다.&lt;br /&gt;
&lt;br /&gt;
10월 1일 조선일보 편집위원회를 구성하고, 신문 복간 운동을 추진했다. 조선총독부의 폐간 지시 당시 의정부로 옮겨놓은 일부 활자 자모음이 잘 보관되어, 그해 11월 23일 조선일보를 복간시키고, 서울신문사 사옥에서 조선일보 복간호를 간행하였다. 이후 조선사회문제대책중앙협의회 중앙위원을 거쳐 10월 16일 이승만 등의 주도로 독립촉성중앙회가 결성되자 독촉에 가입하였다.&lt;br /&gt;
&lt;br /&gt;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이 귀국하자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에 입당했다. 12월 [[안재홍]]의 추천으로 한국독립당의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출되어 3~4개월 동안 활동했다.&amp;lt;ref&amp;gt;일각에서는 방응모가 '한독당 재무부장으로 지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1947년부터 한독당 재무부장을 맡은 신창균이 전면 부정했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47/0000002626?sid=102 백범 비서와 '진짜' 한독당 재정부장의 육성증언. 참고.]&amp;lt;/ref&amp;gt; 그 뒤 대한국민총회 발기인, 대한독립애국금헌성회 발기인 등으로 활동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복간 및 군정기 활동 ====&lt;br /&gt;
11월 [[조선일보]]사를 복간시켰다. 그러나 한동안 조선일보의 인쇄는 서울신문사에서 간행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1945년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추념대회에 참여하였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2&amp;quot;&amp;gt;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13&amp;lt;/ref&amp;gt; 순국선열추념대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2&amp;quot; /&amp;gt;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참여,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이 되었다.&amp;lt;ref&amp;gt;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55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6년 2월 26일 서울신문사 공무국 종업원들이 조선일보의 인쇄를 거부해버렸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436페이지&amp;lt;/ref&amp;gt; 그동안 묵시적으로 방해가 은근히 있었다. 표면상의 문제는 임금 문제이나 내용상으로는 조선일보에 대한 조선공산당의 시위의 일종이었다. 사흘간의 교섭 끝에 2월 28일에 가서야 26일자와 27일자를 소급해서 인쇄하여 신문을 한꺼번에 발행하였다. 그러나 3월 1일과 2일에 또다시 인쇄를 거부당해 결국 휴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436페이지&amp;lt;/ref&amp;gt; 조선일보를 경성일보사로 옮겨서 인쇄하기로 하고 3월 5일자로 사고로 독자에게 알렸다.&lt;br /&gt;
&lt;br /&gt;
4월 29일 김구, 김창숙, 김성수, 오세창 등과 함께 서울운동장에서 윤봉길의사 추모회의 창립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amp;lt;ref&amp;gt;&amp;quot;故尹奉吉義士의 記念式 오늘, 發起人會 열고 準備&amp;quot;, 동아일보 1946년 4월 23일자 2면, 사회면&amp;lt;/ref&amp;gt; 그해 5월 조선공업구락부 고문에 위촉되었다.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民族統一總本部) 10인협의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6월 15일 오후 5시 40분 서울역에 마중나가 서울역에 도착한 삼의사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lt;br /&gt;
&lt;br /&gt;
1945년 광복 직후 서기원이 그를 찾아왔다. 서기원은 그때 경성농상실천학교의 동창회로부터 이 학교의 교장이 되어 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이다. 방응모는 서기원의 제의를 받아들여 1946년 8월 28일 동방문화학원 이사장으로 숭문상업학교를 인수, 재단 이사장이 되었다. 후일 방응모가 6.25 전쟁 중에 납북된 후 동방문화학원과 숭문중,고교의 재단은 최용진이 운영하다가 다시 1978년에 방일영에게 인수되었다.&lt;br /&gt;
&lt;br /&gt;
1947년 1월 21일 제5회 창립위원회를 본사에서 개최하고 2월 23일 주식회사 조선일보사 주주창립총회를 열고 대표이사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공동투자 경영자로 참여시킨 전무 이종민과의 알력이 발생했다. 이종민과의 갈등이 심화되자 그해 8월 3일 방응모는 일단 사직서를 제출했다. 1947년 8월 10일 풍문여고 강당에서 개최된 한인신문기자협회에 참석, 민족청년단에서 언론계 공로자로 방응모, 김성수, 설의식을 지정하여 상을 시상받았다.&amp;lt;ref&amp;gt;&amp;quot;朝鮮 新聞記者協會&amp;quot;, 동아일보 1947년 8월 10일자 2면, 사회면&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납북과 최후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 납북 후 행적은 &amp;quot;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amp;quot;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 1950년 8월경 개성 송악산 부근에서 미군의 폭격에 희생되었고 심한 폭격으로 시신을 찾을 수 없어 묘도 만들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남한에서는 1955년 7월 7일 생사불명기간 만료로 인해 실종 처리되었다.&lt;br /&gt;
&lt;br /&gt;
=== 사후 ===&lt;br /&gt;
서울 종로에 있던 양자 방재윤의 두 아들 방일영과 방우영은 방응모의 첩 이인숙이 찾아가 피신하라고 권고하여 황급히 피신했다. &lt;br /&gt;
&lt;br /&gt;
7월 6일 그의 행방불명처리가 되고, 방응모의 사후에도 [[조선일보]]는 그의 명의로 발행되었다. 1952년 4월 28일 조선일보는 발행인겸 편집인을 장기영으로, 인쇄인을 방일영으로, 방응모는 명예사장으로 명의변경하여 휴전 후 계속 발행하게 되었다. 1954년 4월 30일 제8회 조선일보 정기주주총회에서 장기영 사장이 사퇴하면서, 명예사장 방응모가 사장으로 추대되고, 발행인 겸 대표취체역에 방일영이 선임되었다. 이후 실종 후 1959년에 법적으로 사망 처리되었다. 그리고 1970년까지는 조선일보는 그의 이름으로 발행되었다.&lt;br /&gt;
&lt;br /&gt;
1970년 2월 19일 조선일보 정기주주총회에서 방응모 이사를 사퇴 수리하였다. 그의 피폭 사망 사실은 1970년대 이후 탈북자들을 통해 대한민국에 소개되었다.&lt;br /&gt;
&lt;br /&gt;
== 친일행위 의혹 ==&lt;br /&gt;
=== 일제 전시체제기 활동 ===&lt;br /&gt;
일제 강점기 말기 언론인으로서 총독부체제에 협력한 기록과 활동이 다수 기록이 있다. 1933년 3월 [[조선일보]] 경영권을 인수하고 부사장직에 취임했을 당시 같은 달에 고사기관총 구입비용 1600원을 군에 헌납하였다. 그는 1935년 친일 잡지 《조광 (잡지)(朝光)》을 창간하였고, 1937년에는 경성방송국 제2방송에 출연하여 일제가 중국의 베일을 절멸케하여 극동평화를 지키려고 한다는 강연을 하였다. 1940년대부터 조광에 집중적으로 친일 논설을 기고하고 시국 강연에 참여하여 전쟁 지원을 독려했다. 1942년 6월에는 '징병령 실시에 일층 더 감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글을 써서 조광에 발표하였다. 애국금차회(1937),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1938), 임전대책협의회(1941), 조선임전보국단(1941) 등 대표적인 친일 단체의 회원에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그는 이런 행적으로 인해 해방정국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명단에 기록되어 있고,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해 발표한 &amp;lt;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amp;gt;에 모두 포함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lt;br /&gt;
&lt;br /&gt;
우리 [[조선일보]]는 다른 어떤 신문도 따라오지 못하는 확고한 신념에서 비국민적 행위를 단연 배격하여 종국까지 조선일보사가 이미 정해놓은 방침에 한뜻으로 매진한다.|원산에서의 순회 강연&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9478.html 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친일 다짐하다 시민에 봉변]《한겨레》2005-08-24 오후 06:13:18&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반민족행위 논란 ===&lt;br /&gt;
방응모를 친일파로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남아 있다. 조선일보 경영 이전에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방응모의 활동이 거의 없었고, 납북된 뒤 소식이 끊겨버린 까닭에 본인이 항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 동안의 행적만으로 친일파 여부를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방응모의 후손들이 영향력 있는 [[조선일보]] 언론사의 사주를 맡았기에 그의 입장에서 서술한 기록을 많이 남기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80년 발간된 그의 전기 《계초 방응모》(조선일보사) 등에는 '그가 민족주의적 선각자'로 묘사되고 있다. 방응모가 친일파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일부세력측은 그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논거로 드는 경우가 많이 있다.&amp;lt;ref&amp;gt;유석재, 계간 《유심》 (2004년 봄호) [http://yousim.buddhism.org/html/2004-spr/tamgu-yoo-seok-jae.htm 삭풍 속에 피어난 금란지교(金蘭之交) - 만해와 계초 방응모]&amp;lt;/ref&amp;gt;&amp;lt;ref&amp;gt;&amp;quot;일제 말기 계초는 시국강연에 나설 것과 창씨개명을 집요하게 강요받았으나 그때마다 묵묵부답으로 거부하며 소신을 지켰다.&amp;quot; 《조선일보》 (2001.3) 조선일보 사장열전 - 계초 방응모편, 《한겨레》 (2001.3.30) [http://www.njoyschool.net/news/article_view.asp?menu_code=s20202&amp;amp;no=1206 조선일보, 일장기를 신문제호 위에]&amp;lt;/ref&amp;gt;&lt;br /&gt;
또한 한국정토학회 고문이자 서울 정토사 주지였던 박설산(1918~2007)이 학도병에 끌려가기 직전인 1943년 12월 28일 밤 서울역에서 스스로 왼발을 선로에 올려 발가락을 절단해 징집을 기피하자 방응모는 만해와 함께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설산을 걱정하면서 입원 중 조선일보 기자를 통해 돈을 전달한 것은 물론 퇴원할 때 돈을 전달하고 뒤를 보살폈다고 한다.&amp;lt;ref&amp;gt;박설산 회고록 &amp;lt;뚜껑없는 조선역사책&amp;gt;(1994, 도서출판 삼장) p240~241&amp;lt;/ref&amp;gt;&lt;br /&gt;
&lt;br /&gt;
2010년 12월, 방응모 관계자들 및 조선일보측은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을 취소해달라'며 법원에 낸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amp;quot;1944년 조선항공업 창립발기인으로 활동한 부분에 대해 친일행위로 판단한 부분을 취소하지만 나머지 활동에 대해서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amp;quot;라고 판결했다. 그 이유인 즉 &amp;quot;방응모는 1933년 조선일보 사장으로 취임해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등으로 활동하며 친일활동을 벌였으며, 1937년 경성방송국 시국강연에서 일본제국이 극동평화를 확립시킬 것이라는 내용의 강연을 하고, 1938년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춘추회의 발기인 겸 간사로 활동하기도 했다&amp;lt;ref&amp;gt;[http://media.daum.net/breakingnews/politics/view.html?cateid=1002&amp;amp;newsid=20101222103319164&amp;amp;p=newsis 법원 &amp;quot;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친일파 맞다&amp;quot;]뉴시스 2010년 12월 22일&amp;lt;/ref&amp;gt;&amp;quot;는 것이다.&lt;br /&gt;
&lt;br /&gt;
2012년 1월 12일 서울고법 행정7부는 방 전 사장의 손자인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이 행정안전부를 상대로 낸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처분 취소 청구소송에서 ‘일제 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의 친일 행위 판정 조항에 비추어 방 전 사장에게 적용된 모두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민족적 지도자로서 비중이 큰 만큼 그로 인한 책임도 무거울 뿐 아니라 고난의 시기를 겪은 민족으로서 그 역사를 반성하자는 입장에 설 때, 방 전 사장의 여러 행태는 반민특별법에서 규정한 친일반민족행위의 유형에 속함을 부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1·2심 재판부는 방 전 사장이 자신이 운영하던 잡지 &amp;lt;조광&amp;gt;에 일제 침략전쟁에 동조하고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문예물과 일제 침략전쟁에 협력할 것을 주문하는 논문을 게재하는 등의 ‘친일’ 행위를 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또한, 2심 재판부는 일본의 전쟁 수행을 돕기 위해 설립된 군수 제조업체 ‘조선항공공업’의 발기인과 감사를 지낸 것은 “감사는 업무집행에 관여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기관으로, 방 전 사장이 이 회사를 운영했다고 볼 수 있다”는 이유로 친일이라고 판단했다.&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4565.html법원 ‘방응모 친일’ 2심서도 인정] 인터넷한겨레 2010년 12월 22일&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기타 ==&lt;br /&gt;
그는 [[한용운]], 최남선, 정인보, 홍명희 등과 친분관계를 형성하고 어울려 지냈다 한다.&lt;br /&gt;
&lt;br /&gt;
김구의 한국독립당의 재정적 후견인 역할을 하였다 하며,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삼의사 유골봉환식 때 김구, 정인보 등과 촬영한 사진이 있다.&lt;br /&gt;
한편 임꺽정의 저자인 벽초 홍명희가 방응모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그와 깊은 친분을 맺었다는 주장이 있다. 《조광》 1938년 11월호엔 홍명희가 병중에 있는 방응모를 위로하며 지은 한시가 방응모의 답시와 함께 실려 있다고 한다.&amp;lt;ref&amp;gt;[http://weekly.chosun.com/site/data/html_dir/2004/11/05/2004110577041.html ‘임꺽정’으로 되살아난 독립운동의 魂! 주간조선 1827호 2004.11.04&amp;lt;/ref&amp;gt; 또한 [[안창호]]의 비서실장을 지낸 독립유공자 구익균은 방응모와 안창호가 친밀했다는 주장을 했다.&amp;lt;ref&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09/2008030901055.html &amp;quot;공산주의자들, 도산 비판하다가도 하숙비 떨어지면 찾아와&amp;quot;] 조선일보, 2008-03-10 03:22&amp;lt;/ref&amp;gt;&lt;br /&gt;
또한 박설산에 따르면 1943년 만해 한용운에게 학도병으로 끌려가게 되었음을 알리려 심우장으로 찾아가게 되었을 때, 한용운과 방응모가 바둑을 두고 곁에서 정인보가 훈수를 두고 있었다고 한다.&amp;lt;ref&amp;gt;박설산 저 &amp;lt;뚜껑없는 朝鮮 역사 책&amp;gt; p.226 도서출판 三藏(1994)&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 /&amp;gt;&lt;br /&gt;
&lt;br /&gt;
== 참고 자료 ==&lt;br /&gt;
* 청산하지 못한 역사: 언론 내세워 일제에 아부한 교화 정책의 하수인 (문영숙) (반민족문제연구소, 청년사, 1994)&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민족 계몽의 초석 방응모(이동욱 저, 지구촌, 1998)&lt;br /&gt;
* 계초 방응모전(계초전기간행위, 조선일보사, 1980년)&lt;br /&gt;
* 계초 방응모(이동욱, 방일영문화재단, 1996)&lt;br /&gt;
&lt;br /&gt;
== 외부 링크 ==&lt;br /&gt;
* [https://web.archive.org/web/20050123171046/http://chosunhost.com/ 계초방응모 기념사업회]&lt;br /&gt;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09145 &amp;lt;조선일보&amp;gt;, 방응모 전 사장의 '친일행적' 말한다] - 오마이뉴스 04.09.10일자&lt;br /&gt;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020302101749 방응모ㆍ 김성수 친일행적 뭔가 : &amp;lt;긴급입수&amp;gt;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 全文] - 프레시안 2002-03-02&lt;br /&gt;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54052 그가 '&amp;lt;조선&amp;gt;의 주인' 주장하는 이유] 오마이뉴스 2001년 9월 20일자&lt;br /&gt;
*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956 방재선씨, 호주·상속 원인무효소송 제기]&lt;br /&gt;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4/06/2008040601053.html '5인 친필 서첩' 발굴] 조선일보 2008년04월06일자]&lt;br /&gt;
&lt;br /&gt;
[[분류: 감자]]&lt;/div&gt;</summary>
		<author><name>Nsgjjsjsjy02</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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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방응모</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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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Nsgjjsjsjy02: /* 동방문화학원 재단 설립 */&lt;/p&gt;
&lt;hr /&gt;
&lt;div&gt;{|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width:100%&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0%&amp;quot;|사진&lt;br /&gt;
|[[파일:방응모.jpg|center|200픽셀]]&lt;br /&gt;
|+ '''방응모'''&lt;br /&gt;
|+ style=&amp;quot;caption-side:bottom;text-align:left:&amp;quot;|출처: 위키백과&lt;br /&gt;
|출생||1883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조선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또는 정부면 성내동&lt;br /&gt;
|-&lt;br /&gt;
|사망||1950년경으로 추정&lt;br /&gt;
|-&lt;br /&gt;
|사인||불명&lt;br /&gt;
|-&lt;br /&gt;
|거주지||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amp;gt; 경성부 -&amp;gt; 경기도 양주군 의정부읍&lt;br /&gt;
|-&lt;br /&gt;
|국적||대한민국&lt;br /&gt;
|-&lt;br /&gt;
|본관||온양&lt;br /&gt;
|-&lt;br /&gt;
|별칭||호: 계초(啓礎), 춘해(春海)&lt;br /&gt;
|-&lt;br /&gt;
|직업||교사, 변호사, 상인, 언론인, 기업인, 사회운동가, 정치가&lt;br /&gt;
|-&lt;br /&gt;
|배우자||승계도, 이인숙, 배영옥, 노효용&lt;br /&gt;
|-&lt;br /&gt;
|자녀||방재숙(딸), 방재욱·방재선·방재효·방재규(아들), 방재윤(양자)&lt;br /&gt;
|-&lt;br /&gt;
|부모||방계준(부), 온양박씨(모)&lt;br /&gt;
|}&lt;br /&gt;
&lt;br /&gt;
'''방응모'''(方應謨, 평안북도 정주군, 1883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 1950년 8월(추정)는 [[일제강점기]]의 교육자, 언론인, 법조인, 기업인이자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언론인이며 정치인이다. 호는 '''춘해'''(春海)이고, 뒤에 '''계초'''(啓礎)로 고쳤다.&lt;br /&gt;
&lt;br /&gt;
1922년 동아일보 정주 지국을 인수해 지국장을 지내다가 1924년 금광업에 뛰어들어 큰 부를 얻게 되었다. 1932년 6월 조선일보에 입사하였고 이후 영업국장이 되어 조선일보의 판매망을 장악하게 되고 경영권을 인수하면서 1933년 3월 조선일보 부사장이 되었다. 1933년 7월부터 1950년 7월까지 종신으로 [[조선일보]]의 사장을 역임하였다. 1935년 창간한 월간잡지 '조광(朝光)'은 친일 논란이 있다.&amp;lt;ref&amp;gt;안은필. [http://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9211 조선일보가 가장 빛나던 시기, ‘안재홍 시대’]&amp;lt;/ref&amp;gt;&amp;lt;ref name=&amp;quot;안은&amp;quot;&amp;gt;안은필. [http://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9279 방응모 친일증거, “모래밭에서 모래 찾기”]국민TV. 기사입력 2015년 4월 23일. 기사수정 2015년 4월 24일.&amp;lt;/ref&amp;gt;&amp;lt;ref&amp;gt;이민영.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1/0002255321?sid=102 고법 “방응모 前조선일보 사장 친일행적 대부분 인정”]. 서울신문. 2012년 1월 13일.&amp;lt;/ref&amp;gt;&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6/0000000413?sid=110 김성수ㆍ방응모와 친일언론인 군상]. 미디어오늘. 2002년 3월 12일.&amp;lt;/ref&amp;gt; 언론계에서 활동하면서도 사업가의 길을 함께 걸었고, 교육 장학 활동을 하였으며, 1945년 광복 직후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안재홍]]의 추천을 받아 한국독립당 중앙상무위원과 독립촉성국민회 총무부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amp;lt;ref name=&amp;quot;안은&amp;quot;/&amp;gt;&amp;lt;ref&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16/2008031600800.html 계초 방응모와의 우정도 여러 편의 시로 표현해&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해방 정국에서 김구의 재정적 후견인으로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등 삼의사 유골 봉환 사업과 신탁통치 반대 운동 등에 참여하여 활동했다.&lt;br /&gt;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 납북 후 행적은 &amp;quot;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amp;quot;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lt;br /&gt;
&lt;br /&gt;
== 생애 ==&lt;br /&gt;
=== 생애 초기 ===&lt;br /&gt;
==== 출생과 성장 ====&lt;br /&gt;
방응모는 1883년 11월 3일 또는 9월 29일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바우머리 부락 또는 정주군 정부면 성내동 425번지에서 '''방계준(方桂準)'''과 온양 박씨(溫陽朴氏)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어려서 빈곤한 가정환경으로 방응모는 정규 학교에는 입학하지 못하고, 16세 때까지 서당에 드나들며 한학을 익혔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던 중 그가 어느 정도 실력이 우수하다고 인정되자, 스승인 승창률은 잠시 방응모에게 어린아이들을 돌보게 한 후 자리를 피하곤 했다 한다. 그는 홀로 사서육경을 탐독, 독파하였다. 21세 무렵 잠시 서당 훈장을 지내기도 했다. 우연히 경성부에 갔다가 신문물을 보고 충격을 받아 17세에 독학으로 신학문과 일본어, 중국어, 수학 등을 독파하였다.&lt;br /&gt;
&lt;br /&gt;
유년시절 서당의 성리학 스승이던 승창률의 친척인 승시영(承時榮)과 조씨(趙氏)의 딸 승계도와 결혼했다. 결혼한 다음 해에도 그는 공부를 한다며 책만 사다 읽곤 했고, 부인 승계도는 생계를 위해 몸소 나섰다. 그의 아내는 남편에 대한 믿음이 절대적이었고 탓을 하거나 가출하지 않았다.&lt;br /&gt;
&lt;br /&gt;
=== 언론, 기업 활동 ===&lt;br /&gt;
==== 계몽 활동과 언론 활동 ====&lt;br /&gt;
1915년부터 1924년 방응모는 지역 지식인들, 유학파 청년, 계몽 청년들이 모여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하는데 참여했다. 민립대학기성회에서 활동하면서 조만식 등과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언변과 용모가 되었던 그의 여관에도 손님들이 몰렸고, 그가 &amp;quot;2백원도 좋고 5백원도 좋다며 보태달라&amp;lt;ref name=&amp;quot;fsfs87&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7페이지&amp;lt;/ref&amp;gt;&amp;quot;고 하면 기부금을 내는 이들이 있었다. 1919년 정주에서 3.1 만세 운동이 벌어지자, 그도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형사들의 눈을 피해 방응모는 만세운동을 하다 재빨리 몸을 피해 화를 면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8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22년 6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인수하여 분국장에 취임했다. 그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경영하는 동시에 그는 농촌 계몽운동 등에 적극 참여했다. 1922년 6월 19일&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96페이지&amp;lt;/ref&amp;gt; 동아일보 본사를 설득하여 정주분국을 동아일보사 정주지국으로 승격시켰다. 동아일보사 지부장 재직 시 그는 민립 대학 설립 자금과 농촌진흥회 회원의 여비 및 당시 운영난에 처했던 오산학교의 재개교 등을 계획했다. 총독부의 거부로 실패한 대학 설립 자금은 고스란히 오산학교의 부활 자금으로 투입되었다.&lt;br /&gt;
&lt;br /&gt;
1923년 동아일보 정주군 분국이 지국으로 승격되자 정주국을 경영하였고, 같은 해 7월 여성들의 사회 참여와 평등권 신장을 위한 여자교육회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이후 대규모 수해가 나자, 정주군 수해구제회를 결성하여 봉사활동에 가담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 광업 경영과 조선일보 입사 ====&lt;br /&gt;
1924년 친구 전우현이 방응모와도 안면이 있던 금광 채굴업자 두 명을 데리고 그를 찾아왔다. 그들은 자신들이 봐 둔 산이 있다고 방응모에게 소개했다. 이후 광산업에 뛰어들어 1924년 여름 압록강변의 폐금광인 평안북도 삭주군 외남면 교동 다릿골의의 삭주 교동광업소를 찾아가 10미터 정도 땅을 파고 금맥을 발견했다. 곧 삭주 교동광업소를 인수, 경영을 확대하였다. 이때 만난 동업자의 딸이자 친구 전우현의 조카딸인 '''이인숙(李仁淑)'''을 만났다. 본처 승계도가 두 아들을 잃고 복부 수술이 잘못되어 아이를 얻지 못하게 되자 방응모에게도 수많은 중매가 들어왔다. 자식들을 병으로 잃은 것이 자신의 불찰이라고 본 승계도는 그에게 작은 부인이라도 들이자는 말을 꺼내기도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18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26년 방응모에게 광산 사업을 제안했던 두 친구가 손을 털고 나갔고, 그의 가족은 돈이 없어 쌀 대신 좁쌀로 좁쌀죽을 먹으며 연명해야 했다. 방응모는 정주군에 사는 비슷한 또래의 먼 친척 방상진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고, 방상진과 일꾼 대여섯 명, 그리고 후처 이인숙의 친정 쪽에서 얻어온 토지문서를 얻어 자금을 마련했고 다시 금광을 채굴했다. 그 후 1926년 7월 지하 300m 지점에서 금맥을 확보했고, 이후 연간 300kg의 금을 생산하여 벼락부자가 되었다.&lt;br /&gt;
&lt;br /&gt;
1928년 방응모는 자신의 아호를 딴 춘해 장학회를 만들고 장학생들의 모임인 이심회를 만든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48페이지&amp;lt;/ref&amp;gt; 1928년에 그는 의정부 직동, 흥선대원군의 별장이 있던 곳 바로 뒤에 위치한 건물을 매입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한용운]], 홍명희를 자주 초대했다.&lt;br /&gt;
&lt;br /&gt;
1932년 방응모는 교동광산을 135만원이란 거액에 일본 중외광업주식회사에 매각했다. 그 뒤 1932년 6월부터 조선일보 영업국장으로 활동하다 1933년 3월 [[조선일보]]의 경영권을 인수하여 부사장에 취임하였다.&lt;br /&gt;
그는 교동광업소를 운영하며 모은 재력을 바탕으로 부사장 재직 중 [[조선일보]]의 대주주가 되었으며, 1933년 7월 8대 사주 조만식으로부터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제9대 [[조선일보]] 사주로 취임, 활동했다.&amp;lt;ref&amp;gt;조선일보는 1932년 7월에 조만식을 사장으로 영입했지만, 조만식은 거의 평생을 평양에서 살아왔던데다 서울에서 활동하기에는 적응을 잘하지 못했다. 조만식은 신문사 경영난과 지역감정의 혹독한 시련을 받은 채 9개월만에 퇴사했다. 그리고 조만식 후임으로 1933년, 방응모를 사장으로 추대하기에 이르렀다.&amp;lt;/ref&amp;gt;&amp;lt;ref&amp;gt;《한국사 시민강좌 제47집, 대표적 독립운동가 12인》,일조각. p145&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언론, 사업 활동 ===&lt;br /&gt;
==== 사회사업 ====&lt;br /&gt;
[[파일:방응모장학생.jpg|섬네일|160px|오른쪽|방응모와 그의 장학금을 받던 학생들. 가운데 앉은 이가 방응모이고, 서있는 이들 중 왼쪽에서 두 번째는 방응모의 양자 방재윤.]]&lt;br /&gt;
&lt;br /&gt;
1930년 배영옥과 결혼하여 딸 방재숙을 얻었다. 1932년 광산업을 정리하였고 언론사업을 비롯하여 육영사업과 조림 및 간척사업 등을 벌였다. 또한 고아원과 사회복지단체에 후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933년 무렵 방응모가 [[조선일보]] 인수에 나서기 전부터 그는 [[한용운]]을 위한 일이라면 돈을 아끼지 않고 지출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성북동 언덕에 만해 한용운을 위해 기와집 한 채를 지어주었는데 [[심우장]](尋牛莊)이 그것이다. 또한 만해가 일제의 배급을 거부해 생활이 어려워지자 생활비를 지원했던 방응모는 그가 병석에 누운 1944년에는 치료비를 지원해주기도 했다.&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6/0000043262?sid=103 만해가 일송 선생 5일장 치른 사연]&amp;lt;/ref&amp;gt; 그 외에도 방응모는 만해 한용운·벽초 홍명희 등과 함께 새해가 되면 백천온천에도 같이 다녀올 정도로 가까운 관계였다.&lt;br /&gt;
&lt;br /&gt;
1932년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사건으로 체포된 [[안창호]]의 사면 탄원과 보석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총독부 경무국장은 그의 안창호 석방 제안을 정중히 거절한다.&lt;br /&gt;
&lt;br /&gt;
1936년 동방문화학원(숭문중학교·고등학교 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에 취임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인수와 경영 ====&lt;br /&gt;
1933년 1월 16일 그는 정식으로 주식회사 [[조선일보]]사를 창립했다. 일단 그는 조만식을 사장으로 임명하고 자신은 부사장으로 있다가, 그해 3월 13일 다시 부사장에 취임했다. 7월 10일 조만식의 사퇴로, [[조선일보]]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다.&lt;br /&gt;
&lt;br /&gt;
1934년 3월 25일 이광수를 비롯하여 서춘, 김동진, 함상훈, 신태익 등을 [[조선일보]]로 영입해 왔다. 그 외에도 정주군 출신 언론인, 작가들이 조선일보로 많이 오게 되었다.&lt;br /&gt;
&lt;br /&gt;
==== 동방문화학원 재단 설립 ====&lt;br /&gt;
방응모는 1936년 재단법인 동방문화학원(東邦文化學院)을 설립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6페이지&amp;lt;/ref&amp;gt; 동방문화학원은 학교 법인으로 인가된 재단 법인으로, 그 후 고계학원과 인연을 가지고 1936년부터는 보성고등보통학교를 후견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 분리되었다. 그 후 방응모 장학생인 서중회 회원들을 위한 방응모 장학사업을 주관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7페이지&amp;lt;/ref&amp;gt;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구 조선일보 사옥 안에 동방문화학원의 간판을 달고 조광 잡지를 계속 발행하는 조광사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7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일제 강점기 후반 ===&lt;br /&gt;
==== 중일 전쟁 전후 ====&lt;br /&gt;
중일전쟁 개전 직후인 1937년 7월 11일에 열린 [[조선일보]] 간부회의에서 주필 서춘이 '일본군, 중국군, 장개석씨'등으로 쓰던 용어를 '아군, 황군, 지나, 장개석'으로 고치고 일본 국민의 입장에서 논설을 쓸 것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편집국장 김형원과 영업국장 김광수가 적극 반대를 하기도 했으나, 방응모는 '일장기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이미 몇 십만 원의 손해를 보았을 뿐 아니라 [[3.1 운동]] 때처럼 신문이 민중을 지도할 수 없다'면서 서춘의 입장을 지지했다. 한편으로 방응모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된 [[안창호]]를 [[조선일보]]에 영입하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안창호는 옥중에서 얻은 간질환과 폐질환 등으로 고생했고, 진료비 등을 수시로 지원하고 문병했음에도 출옥후 얼마 뒤에 사망한다.&lt;br /&gt;
&lt;br /&gt;
1933년 이심회(以心會：후에 序中會, 방응모장학회 등으로 명칭이 바뀜)라는 장학회를 만들어 국내 대학생과 해외유학생들에게 학자금을 지급하기도 했으며, 재단법인 동방문화학원(東方文化學院：지금의 숭문중·고등학교 전신)의 이사장직을 맡기도 했다. 또한 자신의 막대한 재원을 들여 1936년부터 함경남도 영흥군 일대에 당시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대단위 조림사업을 벌였으며, 그 전 해인 1935년부터는 경기도 수원군 팔탄면 일대에서 만 2년간에 걸친 간척사업을 벌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937년 12월 24일 [[안창호]]는 병보석 판정을 받고 재판소가 지정한 현 서울대학교병원인 경성제국대학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안창호의 입원 중에 시중을 든 사람으로는 안창호의 외조카 김순원과 청년 박정호 두 사람이었고, 나중에는 이응준 장군의 부인 이정희가 끝까지 지성껏 간호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7페이지&amp;lt;/ref&amp;gt; [[안창호]]는 병상에서 병원비 문제로도 고초를 겪었다. 이 때문에 조만식은 일본 경찰로부터 안창호의 병원비를 대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음에도, &amp;quot;내가 먹고 살면서 그 선생을 돌보지 않을 수 없다&amp;quot;며 완강히 거절하고 안창호를 도왔다고 한다. 안창호의 간호를 같이 도와주던 이응준 장군 부인 이정희는 10일마다 계산되어 나오는 병원 입원비로 안창호 선생이 괴로워하는 표정을 지켜볼수 없었다고 진술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8페이지&amp;lt;/ref&amp;gt; 방응모는 5백원의 수표 한 장을 안창호에게 전달하였다. 50일간의 입원비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9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안창호]]는 1938년 3월 10일 밤 12시 경성제국대학 병원에서 운명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폐간 사건 ====&lt;br /&gt;
일본의 전쟁이 격화되면서 조선총독부 공보국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1940년에 강제로 폐간조치 했다. 광산을 팔아서 자신의 모든 것을 조선일보에 바쳤던 방응모는 큰 절망과 좌절을 느껴야 했다. [[한용운]]은 ‘신문이 폐간되다/ 붓이 꺾이어 모든 일이 끝나니…’로 시작하는 시를 지어 방응모를 위로했다. &amp;lt;ref&amp;gt;붓이 꺾이어 모든 일 끝나니 이제는 재갈 물린 사람들 뿔뿔이 흩어지고 아, 쓸쓸하고 쓸쓸한지고 망국 서울의 가을날 한강의 물도 흐느끼느니 울음 삼켜 흐느끼며 연지를 외면한 채 바다 향해 흐르느니&amp;lt;/ref&amp;gt; 동아일보에는 김성수 외에도 장덕수와 송진우가 있었지만 그에게는 조선일보 폐간을 막기 위해 총독부와 교섭할 인물도 없었다.&lt;br /&gt;
&lt;br /&gt;
1938년 2월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선 내 일간신문 25개사로 조직된 조선춘추회의 창립에 창립발기인으로 참가했고, 조선춘추회 간사로 활동했다. 같은 해 7월 “국민정신을 총동원하고 내선일체 전 능력을 발휘하여 국책 수행에 협력하여 성전(聖戰)의 궁극적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조직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에 참여했고, 그날 결성된 경성연맹 창립총회에서 상담역을 맡았다. 9월부터 조선방공협회 경기도연합지부 평의원을 지냈다. 10월에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주최한 비상시 국민생활 개선을 위한 제1회 생활개선위원회에서 제2부(의례와 사회풍조 쇄신부)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그러나 1938년 10월부터 조선총독부는 조선일보의 신문용지를 검열, 통제하기 시작했다.&lt;br /&gt;
&lt;br /&gt;
1940년 5월 조선총독부 총독 미나미 지로가 방송담화로 창씨개명을 권고했다. 그러나 그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성씨를 이제 와서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며 창씨개명은 완강하게 거절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조선일보에 트집이 잡힐 일이 나타나지 않자 총독부는 전국 면사무소에 조선일보 신문 구독을 거절하도록 명령을 내렸고, 동시에 조선말을 쓰는 민원인에게는 일을 처리해주지 말도록 하게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3페이지&amp;lt;/ref&amp;gt; 조선총독부는 송진우의 예금통장을 문제삼았다. 송진우 명의의 은행저금이 동아일보의 8백여 개의 지국과 분국을 통해 모금된 독립운동 자금이라며, 그리고 동아일보 간부들이 백운장이라는 요정에서 회식을 한 것을 김성수 집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려 했다는 등의 이유로 백관수 동아일보 사장을 전격 구속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3~374페이지&amp;lt;/ref&amp;gt; 동아일보는 백관수가 구속된지 10일 만에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동아일보 중역회의를 열고 폐간신청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4페이지&amp;lt;/ref&amp;gt; 총독부는 조선일보에도 자진 폐간을 권고했고, 1940년 8월 9일 편집회의를 주관, 8월 10일 조선일보의 폐간계를 내고, 8월 10일자로 폐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5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잡지 발행 활동 ====&lt;br /&gt;
신문 강제 폐간 뒤 방응모는 간판을 조광사로 바꿔 걸고, 사옥은 동방흥업주식회사로 등기를 변경해서 유지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1페이지&amp;lt;/ref&amp;gt; 이후 그는 조광 잡지 발행에 전념했다. 1943년 8월 경 일본 중앙대학의 예과를 마친 방일영이 입사&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1페이지&amp;lt;/ref&amp;gt;, 필진으로 참여했다. [[조선일보]]가 폐간된 후에도 방응모는 벽초 홍명희 부자에게 지속적으로 생활비를 대주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4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4년 6월 29일 만해 [[한용운]]이 사망했다. 그는 심우장을 찾아가 3백원을 내놓았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5페이지&amp;lt;/ref&amp;gt;당시 쌀 10가마가 100원이었지만, 심우장은 당장 현금 1원이 없었는데 거액이라서 놀랐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6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광복 이후 언론 및 정치활동 ===&lt;br /&gt;
==== 광복 직후 ====&lt;br /&gt;
1945년 8.15 광복 후에는 8월 말과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朝鮮在外戰災同胞救濟會) 고문과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9월 초 [[안재홍]] 등이 좌경화되는 건준체제에 반발하여 건준을 탈퇴하자 방응모 역시 건준을 탈퇴하였다.&lt;br /&gt;
&lt;br /&gt;
9월 2일 미군정이 주둔하자, 방응모는 윤전기를 찾기 위해 폐간 당시의 증빙서류를 미 군정청에 제시하였으나 소식이 없었다. 총독부는 조선일보 폐간 직후 인수한 윤전기를 경성일보사에 옮겨서 설치했다. 그는 동방문화재단 외 4개 사업소를 적산으로 파악한 미군정을 설득하고, 사옥 문제도 해결하였다.&lt;br /&gt;
&lt;br /&gt;
10월 1일 조선일보 편집위원회를 구성하고, 신문 복간 운동을 추진했다. 조선총독부의 폐간 지시 당시 의정부로 옮겨놓은 일부 활자 자모음이 잘 보관되어, 그해 11월 23일 조선일보를 복간시키고, 서울신문사 사옥에서 조선일보 복간호를 간행하였다. 이후 조선사회문제대책중앙협의회 중앙위원을 거쳐 10월 16일 이승만 등의 주도로 독립촉성중앙회가 결성되자 독촉에 가입하였다.&lt;br /&gt;
&lt;br /&gt;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이 귀국하자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에 입당했다. 12월 [[안재홍]]의 추천으로 한국독립당의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출되어 3~4개월 동안 활동했다.&amp;lt;ref&amp;gt;일각에서는 방응모가 '한독당 재무부장으로 지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1947년부터 한독당 재무부장을 맡은 신창균이 전면 부정했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47/0000002626?sid=102 백범 비서와 '진짜' 한독당 재정부장의 육성증언. 참고.]&amp;lt;/ref&amp;gt; 그 뒤 대한국민총회 발기인, 대한독립애국금헌성회 발기인 등으로 활동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복간 및 군정기 활동 ====&lt;br /&gt;
11월 [[조선일보]]사를 복간시켰다. 그러나 한동안 조선일보의 인쇄는 서울신문사에서 간행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1945년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추념대회에 참여하였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2&amp;quot;&amp;gt;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13&amp;lt;/ref&amp;gt; 순국선열추념대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2&amp;quot; /&amp;gt;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참여,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이 되었다.&amp;lt;ref&amp;gt;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55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6년 2월 26일 서울신문사 공무국 종업원들이 조선일보의 인쇄를 거부해버렸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436페이지&amp;lt;/ref&amp;gt; 그동안 묵시적으로 방해가 은근히 있었다. 표면상의 문제는 임금 문제이나 내용상으로는 조선일보에 대한 조선공산당의 시위의 일종이었다. 사흘간의 교섭 끝에 2월 28일에 가서야 26일자와 27일자를 소급해서 인쇄하여 신문을 한꺼번에 발행하였다. 그러나 3월 1일과 2일에 또다시 인쇄를 거부당해 결국 휴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436페이지&amp;lt;/ref&amp;gt; 조선일보를 경성일보사로 옮겨서 인쇄하기로 하고 3월 5일자로 사고로 독자에게 알렸다.&lt;br /&gt;
&lt;br /&gt;
4월 29일 김구, 김창숙, 김성수, 오세창 등과 함께 서울운동장에서 윤봉길의사 추모회의 창립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amp;lt;ref&amp;gt;&amp;quot;故尹奉吉義士의 記念式 오늘, 發起人會 열고 準備&amp;quot;, 동아일보 1946년 4월 23일자 2면, 사회면&amp;lt;/ref&amp;gt; 그해 5월 조선공업구락부 고문에 위촉되었다.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民族統一總本部) 10인협의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6월 15일 오후 5시 40분 서울역에 마중나가 서울역에 도착한 삼의사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lt;br /&gt;
&lt;br /&gt;
1945년 광복 직후 서기원이 그를 찾아왔다. 서기원은 그때 경성농상실천학교의 동창회로부터 이 학교의 교장이 되어 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이다. 방응모는 서기원의 제의를 받아들여 1946년 8월 28일 동방문화학원 이사장으로 숭문상업학교를 인수, 재단 이사장이 되었다. 후일 방응모가 6.25 전쟁 중에 납북된 후 동방문화학원과 숭문중,고교의 재단은 최용진이 운영하다가 다시 1978년에 방일영에게 인수되었다.&lt;br /&gt;
&lt;br /&gt;
1947년 1월 21일 제5회 창립위원회를 본사에서 개최하고 2월 23일 주식회사 조선일보사 주주창립총회를 열고 대표이사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공동투자 경영자로 참여시킨 전무 이종민과의 알력이 발생했다. 이종민과의 갈등이 심화되자 그해 8월 3일 방응모는 일단 사직서를 제출했다. 1947년 8월 10일 풍문여고 강당에서 개최된 한인신문기자협회에 참석, 민족청년단에서 언론계 공로자로 방응모, 김성수, 설의식을 지정하여 상을 시상받았다.&amp;lt;ref&amp;gt;&amp;quot;朝鮮 新聞記者協會&amp;quot;, 동아일보 1947년 8월 10일자 2면, 사회면&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납북과 최후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 납북 후 행적은 &amp;quot;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amp;quot;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 1950년 8월경 개성 송악산 부근에서 미군의 폭격에 희생되었고 심한 폭격으로 시신을 찾을 수 없어 묘도 만들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남한에서는 1955년 7월 7일 생사불명기간 만료로 인해 실종 처리되었다.&lt;br /&gt;
&lt;br /&gt;
=== 사후 ===&lt;br /&gt;
서울 종로에 있던 양자 방재윤의 두 아들 방일영과 방우영은 방응모의 첩 이인숙이 찾아가 피신하라고 권고하여 황급히 피신했다. &lt;br /&gt;
&lt;br /&gt;
7월 6일 그의 행방불명처리가 되고, 방응모의 사후에도 [[조선일보]]는 그의 명의로 발행되었다. 1952년 4월 28일 조선일보는 발행인겸 편집인을 장기영으로, 인쇄인을 방일영으로, 방응모는 명예사장으로 명의변경하여 휴전 후 계속 발행하게 되었다. 1954년 4월 30일 제8회 조선일보 정기주주총회에서 장기영 사장이 사퇴하면서, 명예사장 방응모가 사장으로 추대되고, 발행인 겸 대표취체역에 방일영이 선임되었다. 이후 실종 후 1959년에 법적으로 사망 처리되었다. 그리고 1970년까지는 조선일보는 그의 이름으로 발행되었다.&lt;br /&gt;
&lt;br /&gt;
1970년 2월 19일 조선일보 정기주주총회에서 방응모 이사를 사퇴 수리하였다. 그의 피폭 사망 사실은 1970년대 이후 탈북자들을 통해 대한민국에 소개되었다.&lt;br /&gt;
&lt;br /&gt;
== 친일행위 의혹 ==&lt;br /&gt;
=== 일제 전시체제기 활동 ===&lt;br /&gt;
일제 강점기 말기 언론인으로서 총독부체제에 협력한 기록과 활동이 다수 기록이 있다. 1933년 3월 [[조선일보]] 경영권을 인수하고 부사장직에 취임했을 당시 같은 달에 고사기관총 구입비용 1600원을 군에 헌납하였다. 그는 1935년 친일 잡지 《조광 (잡지)(朝光)》을 창간하였고, 1937년에는 경성방송국 제2방송에 출연하여 일제가 중국의 베일을 절멸케하여 극동평화를 지키려고 한다는 강연을 하였다. 1940년대부터 조광에 집중적으로 친일 논설을 기고하고 시국 강연에 참여하여 전쟁 지원을 독려했다. 1942년 6월에는 '징병령 실시에 일층 더 감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글을 써서 조광에 발표하였다. 애국금차회(1937),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1938), 임전대책협의회(1941), 조선임전보국단(1941) 등 대표적인 친일 단체의 회원에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그는 이런 행적으로 인해 해방정국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명단에 기록되어 있고,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해 발표한 &amp;lt;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amp;gt;에 모두 포함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lt;br /&gt;
&lt;br /&gt;
우리 [[조선일보]]는 다른 어떤 신문도 따라오지 못하는 확고한 신념에서 비국민적 행위를 단연 배격하여 종국까지 조선일보사가 이미 정해놓은 방침에 한뜻으로 매진한다.|원산에서의 순회 강연&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9478.html 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친일 다짐하다 시민에 봉변]《한겨레》2005-08-24 오후 06:13:18&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반민족행위 논란 ===&lt;br /&gt;
방응모를 친일파로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남아 있다. 조선일보 경영 이전에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방응모의 활동이 거의 없었고, 납북된 뒤 소식이 끊겨버린 까닭에 본인이 항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 동안의 행적만으로 친일파 여부를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방응모의 후손들이 영향력 있는 [[조선일보]] 언론사의 사주를 맡았기에 그의 입장에서 서술한 기록을 많이 남기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80년 발간된 그의 전기 《계초 방응모》(조선일보사) 등에는 '그가 민족주의적 선각자'로 묘사되고 있다. 방응모가 친일파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일부세력측은 그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논거로 드는 경우가 많이 있다.&amp;lt;ref&amp;gt;유석재, 계간 《유심》 (2004년 봄호) [http://yousim.buddhism.org/html/2004-spr/tamgu-yoo-seok-jae.htm 삭풍 속에 피어난 금란지교(金蘭之交) - 만해와 계초 방응모]&amp;lt;/ref&amp;gt;&amp;lt;ref&amp;gt;&amp;quot;일제 말기 계초는 시국강연에 나설 것과 창씨개명을 집요하게 강요받았으나 그때마다 묵묵부답으로 거부하며 소신을 지켰다.&amp;quot; 《조선일보》 (2001.3) 조선일보 사장열전 - 계초 방응모편, 《한겨레》 (2001.3.30) [http://www.njoyschool.net/news/article_view.asp?menu_code=s20202&amp;amp;no=1206 조선일보, 일장기를 신문제호 위에]&amp;lt;/ref&amp;gt;&lt;br /&gt;
또한 한국정토학회 고문이자 서울 정토사 주지였던 박설산(1918~2007)이 학도병에 끌려가기 직전인 1943년 12월 28일 밤 서울역에서 스스로 왼발을 선로에 올려 발가락을 절단해 징집을 기피하자 방응모는 만해와 함께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설산을 걱정하면서 입원 중 조선일보 기자를 통해 돈을 전달한 것은 물론 퇴원할 때 돈을 전달하고 뒤를 보살폈다고 한다.&amp;lt;ref&amp;gt;박설산 회고록 &amp;lt;뚜껑없는 조선역사책&amp;gt;(1994, 도서출판 삼장) p240~241&amp;lt;/ref&amp;gt;&lt;br /&gt;
&lt;br /&gt;
2010년 12월, 방응모 관계자들 및 조선일보측은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을 취소해달라'며 법원에 낸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amp;quot;1944년 조선항공업 창립발기인으로 활동한 부분에 대해 친일행위로 판단한 부분을 취소하지만 나머지 활동에 대해서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amp;quot;라고 판결했다. 그 이유인 즉 &amp;quot;방응모는 1933년 조선일보 사장으로 취임해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등으로 활동하며 친일활동을 벌였으며, 1937년 경성방송국 시국강연에서 일본제국이 극동평화를 확립시킬 것이라는 내용의 강연을 하고, 1938년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춘추회의 발기인 겸 간사로 활동하기도 했다&amp;lt;ref&amp;gt;[http://media.daum.net/breakingnews/politics/view.html?cateid=1002&amp;amp;newsid=20101222103319164&amp;amp;p=newsis 법원 &amp;quot;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친일파 맞다&amp;quot;]뉴시스 2010년 12월 22일&amp;lt;/ref&amp;gt;&amp;quot;는 것이다.&lt;br /&gt;
&lt;br /&gt;
2012년 1월 12일 서울고법 행정7부는 방 전 사장의 손자인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이 행정안전부를 상대로 낸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처분 취소 청구소송에서 ‘일제 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의 친일 행위 판정 조항에 비추어 방 전 사장에게 적용된 모두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민족적 지도자로서 비중이 큰 만큼 그로 인한 책임도 무거울 뿐 아니라 고난의 시기를 겪은 민족으로서 그 역사를 반성하자는 입장에 설 때, 방 전 사장의 여러 행태는 반민특별법에서 규정한 친일반민족행위의 유형에 속함을 부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1·2심 재판부는 방 전 사장이 자신이 운영하던 잡지 &amp;lt;조광&amp;gt;에 일제 침략전쟁에 동조하고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문예물과 일제 침략전쟁에 협력할 것을 주문하는 논문을 게재하는 등의 ‘친일’ 행위를 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또한, 2심 재판부는 일본의 전쟁 수행을 돕기 위해 설립된 군수 제조업체 ‘조선항공공업’의 발기인과 감사를 지낸 것은 “감사는 업무집행에 관여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기관으로, 방 전 사장이 이 회사를 운영했다고 볼 수 있다”는 이유로 친일이라고 판단했다.&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4565.html법원 ‘방응모 친일’ 2심서도 인정] 인터넷한겨레 2010년 12월 22일&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기타 ==&lt;br /&gt;
그는 [[한용운]], 최남선, 정인보, 홍명희 등과 친분관계를 형성하고 어울려 지냈다 한다.&lt;br /&gt;
&lt;br /&gt;
김구의 한국독립당의 재정적 후견인 역할을 하였다 하며,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삼의사 유골봉환식 때 김구, 정인보 등과 촬영한 사진이 있다.&lt;br /&gt;
한편 임꺽정의 저자인 벽초 홍명희가 방응모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그와 깊은 친분을 맺었다는 주장이 있다. 《조광》 1938년 11월호엔 홍명희가 병중에 있는 방응모를 위로하며 지은 한시가 방응모의 답시와 함께 실려 있다고 한다.&amp;lt;ref&amp;gt;[http://weekly.chosun.com/site/data/html_dir/2004/11/05/2004110577041.html ‘임꺽정’으로 되살아난 독립운동의 魂! 주간조선 1827호 2004.11.04&amp;lt;/ref&amp;gt; 또한 [[안창호]]의 비서실장을 지낸 독립유공자 구익균은 방응모와 안창호가 친밀했다는 주장을 했다.&amp;lt;ref&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09/2008030901055.html &amp;quot;공산주의자들, 도산 비판하다가도 하숙비 떨어지면 찾아와&amp;quot;] 조선일보, 2008-03-10 03:22&amp;lt;/ref&amp;gt;&lt;br /&gt;
또한 박설산에 따르면 1943년 만해 한용운에게 학도병으로 끌려가게 되었음을 알리려 심우장으로 찾아가게 되었을 때, 한용운과 방응모가 바둑을 두고 곁에서 정인보가 훈수를 두고 있었다고 한다.&amp;lt;ref&amp;gt;박설산 저 &amp;lt;뚜껑없는 朝鮮 역사 책&amp;gt; p.226 도서출판 三藏(1994)&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 /&amp;gt;&lt;br /&gt;
&lt;br /&gt;
== 참고 자료 ==&lt;br /&gt;
* 청산하지 못한 역사: 언론 내세워 일제에 아부한 교화 정책의 하수인 (문영숙) (반민족문제연구소, 청년사, 1994)&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민족 계몽의 초석 방응모(이동욱 저, 지구촌, 1998)&lt;br /&gt;
* 계초 방응모전(계초전기간행위, 조선일보사, 1980년)&lt;br /&gt;
* 계초 방응모(이동욱, 방일영문화재단, 1996)&lt;br /&gt;
&lt;br /&gt;
== 외부 링크 ==&lt;br /&gt;
* [https://web.archive.org/web/20050123171046/http://chosunhost.com/ 계초방응모 기념사업회]&lt;br /&gt;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09145 &amp;lt;조선일보&amp;gt;, 방응모 전 사장의 '친일행적' 말한다] - 오마이뉴스 04.09.10일자&lt;br /&gt;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020302101749 방응모ㆍ 김성수 친일행적 뭔가 : &amp;lt;긴급입수&amp;gt;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 全文] - 프레시안 2002-03-02&lt;br /&gt;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54052 그가 '&amp;lt;조선&amp;gt;의 주인' 주장하는 이유] 오마이뉴스 2001년 9월 20일자&lt;br /&gt;
*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956 방재선씨, 호주·상속 원인무효소송 제기]&lt;br /&gt;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4/06/2008040601053.html '5인 친필 서첩' 발굴] 조선일보 2008년04월06일자]&lt;br /&gt;
&lt;br /&gt;
[[분류: 감자]]&lt;/div&gt;</summary>
		<author><name>Nsgjjsjsjy02</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B0%A9%EC%9D%91%EB%AA%A8&amp;diff=59406</id>
		<title>방응모</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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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Nsgjjsjsjy02: /* 조선일보 인수와 경영 */&lt;/p&gt;
&lt;hr /&gt;
&lt;div&gt;{|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width:100%&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0%&amp;quot;|사진&lt;br /&gt;
|[[파일:방응모.jpg|center|200픽셀]]&lt;br /&gt;
|+ '''방응모'''&lt;br /&gt;
|+ style=&amp;quot;caption-side:bottom;text-align:left:&amp;quot;|출처: 위키백과&lt;br /&gt;
|출생||1883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조선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또는 정부면 성내동&lt;br /&gt;
|-&lt;br /&gt;
|사망||1950년경으로 추정&lt;br /&gt;
|-&lt;br /&gt;
|사인||불명&lt;br /&gt;
|-&lt;br /&gt;
|거주지||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amp;gt; 경성부 -&amp;gt; 경기도 양주군 의정부읍&lt;br /&gt;
|-&lt;br /&gt;
|국적||대한민국&lt;br /&gt;
|-&lt;br /&gt;
|본관||온양&lt;br /&gt;
|-&lt;br /&gt;
|별칭||호: 계초(啓礎), 춘해(春海)&lt;br /&gt;
|-&lt;br /&gt;
|직업||교사, 변호사, 상인, 언론인, 기업인, 사회운동가, 정치가&lt;br /&gt;
|-&lt;br /&gt;
|배우자||승계도, 이인숙, 배영옥, 노효용&lt;br /&gt;
|-&lt;br /&gt;
|자녀||방재숙(딸), 방재욱·방재선·방재효·방재규(아들), 방재윤(양자)&lt;br /&gt;
|-&lt;br /&gt;
|부모||방계준(부), 온양박씨(모)&lt;br /&gt;
|}&lt;br /&gt;
&lt;br /&gt;
'''방응모'''(方應謨, 평안북도 정주군, 1883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 1950년 8월(추정)는 [[일제강점기]]의 교육자, 언론인, 법조인, 기업인이자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언론인이며 정치인이다. 호는 '''춘해'''(春海)이고, 뒤에 '''계초'''(啓礎)로 고쳤다.&lt;br /&gt;
&lt;br /&gt;
1922년 동아일보 정주 지국을 인수해 지국장을 지내다가 1924년 금광업에 뛰어들어 큰 부를 얻게 되었다. 1932년 6월 조선일보에 입사하였고 이후 영업국장이 되어 조선일보의 판매망을 장악하게 되고 경영권을 인수하면서 1933년 3월 조선일보 부사장이 되었다. 1933년 7월부터 1950년 7월까지 종신으로 [[조선일보]]의 사장을 역임하였다. 1935년 창간한 월간잡지 '조광(朝光)'은 친일 논란이 있다.&amp;lt;ref&amp;gt;안은필. [http://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9211 조선일보가 가장 빛나던 시기, ‘안재홍 시대’]&amp;lt;/ref&amp;gt;&amp;lt;ref name=&amp;quot;안은&amp;quot;&amp;gt;안은필. [http://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9279 방응모 친일증거, “모래밭에서 모래 찾기”]국민TV. 기사입력 2015년 4월 23일. 기사수정 2015년 4월 24일.&amp;lt;/ref&amp;gt;&amp;lt;ref&amp;gt;이민영.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1/0002255321?sid=102 고법 “방응모 前조선일보 사장 친일행적 대부분 인정”]. 서울신문. 2012년 1월 13일.&amp;lt;/ref&amp;gt;&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6/0000000413?sid=110 김성수ㆍ방응모와 친일언론인 군상]. 미디어오늘. 2002년 3월 12일.&amp;lt;/ref&amp;gt; 언론계에서 활동하면서도 사업가의 길을 함께 걸었고, 교육 장학 활동을 하였으며, 1945년 광복 직후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안재홍]]의 추천을 받아 한국독립당 중앙상무위원과 독립촉성국민회 총무부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amp;lt;ref name=&amp;quot;안은&amp;quot;/&amp;gt;&amp;lt;ref&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16/2008031600800.html 계초 방응모와의 우정도 여러 편의 시로 표현해&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해방 정국에서 김구의 재정적 후견인으로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등 삼의사 유골 봉환 사업과 신탁통치 반대 운동 등에 참여하여 활동했다.&lt;br /&gt;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 납북 후 행적은 &amp;quot;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amp;quot;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lt;br /&gt;
&lt;br /&gt;
== 생애 ==&lt;br /&gt;
=== 생애 초기 ===&lt;br /&gt;
==== 출생과 성장 ====&lt;br /&gt;
방응모는 1883년 11월 3일 또는 9월 29일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바우머리 부락 또는 정주군 정부면 성내동 425번지에서 '''방계준(方桂準)'''과 온양 박씨(溫陽朴氏)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어려서 빈곤한 가정환경으로 방응모는 정규 학교에는 입학하지 못하고, 16세 때까지 서당에 드나들며 한학을 익혔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던 중 그가 어느 정도 실력이 우수하다고 인정되자, 스승인 승창률은 잠시 방응모에게 어린아이들을 돌보게 한 후 자리를 피하곤 했다 한다. 그는 홀로 사서육경을 탐독, 독파하였다. 21세 무렵 잠시 서당 훈장을 지내기도 했다. 우연히 경성부에 갔다가 신문물을 보고 충격을 받아 17세에 독학으로 신학문과 일본어, 중국어, 수학 등을 독파하였다.&lt;br /&gt;
&lt;br /&gt;
유년시절 서당의 성리학 스승이던 승창률의 친척인 승시영(承時榮)과 조씨(趙氏)의 딸 승계도와 결혼했다. 결혼한 다음 해에도 그는 공부를 한다며 책만 사다 읽곤 했고, 부인 승계도는 생계를 위해 몸소 나섰다. 그의 아내는 남편에 대한 믿음이 절대적이었고 탓을 하거나 가출하지 않았다.&lt;br /&gt;
&lt;br /&gt;
=== 언론, 기업 활동 ===&lt;br /&gt;
==== 계몽 활동과 언론 활동 ====&lt;br /&gt;
1915년부터 1924년 방응모는 지역 지식인들, 유학파 청년, 계몽 청년들이 모여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하는데 참여했다. 민립대학기성회에서 활동하면서 조만식 등과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언변과 용모가 되었던 그의 여관에도 손님들이 몰렸고, 그가 &amp;quot;2백원도 좋고 5백원도 좋다며 보태달라&amp;lt;ref name=&amp;quot;fsfs87&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7페이지&amp;lt;/ref&amp;gt;&amp;quot;고 하면 기부금을 내는 이들이 있었다. 1919년 정주에서 3.1 만세 운동이 벌어지자, 그도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형사들의 눈을 피해 방응모는 만세운동을 하다 재빨리 몸을 피해 화를 면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8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22년 6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인수하여 분국장에 취임했다. 그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경영하는 동시에 그는 농촌 계몽운동 등에 적극 참여했다. 1922년 6월 19일&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96페이지&amp;lt;/ref&amp;gt; 동아일보 본사를 설득하여 정주분국을 동아일보사 정주지국으로 승격시켰다. 동아일보사 지부장 재직 시 그는 민립 대학 설립 자금과 농촌진흥회 회원의 여비 및 당시 운영난에 처했던 오산학교의 재개교 등을 계획했다. 총독부의 거부로 실패한 대학 설립 자금은 고스란히 오산학교의 부활 자금으로 투입되었다.&lt;br /&gt;
&lt;br /&gt;
1923년 동아일보 정주군 분국이 지국으로 승격되자 정주국을 경영하였고, 같은 해 7월 여성들의 사회 참여와 평등권 신장을 위한 여자교육회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이후 대규모 수해가 나자, 정주군 수해구제회를 결성하여 봉사활동에 가담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 광업 경영과 조선일보 입사 ====&lt;br /&gt;
1924년 친구 전우현이 방응모와도 안면이 있던 금광 채굴업자 두 명을 데리고 그를 찾아왔다. 그들은 자신들이 봐 둔 산이 있다고 방응모에게 소개했다. 이후 광산업에 뛰어들어 1924년 여름 압록강변의 폐금광인 평안북도 삭주군 외남면 교동 다릿골의의 삭주 교동광업소를 찾아가 10미터 정도 땅을 파고 금맥을 발견했다. 곧 삭주 교동광업소를 인수, 경영을 확대하였다. 이때 만난 동업자의 딸이자 친구 전우현의 조카딸인 '''이인숙(李仁淑)'''을 만났다. 본처 승계도가 두 아들을 잃고 복부 수술이 잘못되어 아이를 얻지 못하게 되자 방응모에게도 수많은 중매가 들어왔다. 자식들을 병으로 잃은 것이 자신의 불찰이라고 본 승계도는 그에게 작은 부인이라도 들이자는 말을 꺼내기도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18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26년 방응모에게 광산 사업을 제안했던 두 친구가 손을 털고 나갔고, 그의 가족은 돈이 없어 쌀 대신 좁쌀로 좁쌀죽을 먹으며 연명해야 했다. 방응모는 정주군에 사는 비슷한 또래의 먼 친척 방상진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고, 방상진과 일꾼 대여섯 명, 그리고 후처 이인숙의 친정 쪽에서 얻어온 토지문서를 얻어 자금을 마련했고 다시 금광을 채굴했다. 그 후 1926년 7월 지하 300m 지점에서 금맥을 확보했고, 이후 연간 300kg의 금을 생산하여 벼락부자가 되었다.&lt;br /&gt;
&lt;br /&gt;
1928년 방응모는 자신의 아호를 딴 춘해 장학회를 만들고 장학생들의 모임인 이심회를 만든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48페이지&amp;lt;/ref&amp;gt; 1928년에 그는 의정부 직동, 흥선대원군의 별장이 있던 곳 바로 뒤에 위치한 건물을 매입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한용운]], 홍명희를 자주 초대했다.&lt;br /&gt;
&lt;br /&gt;
1932년 방응모는 교동광산을 135만원이란 거액에 일본 중외광업주식회사에 매각했다. 그 뒤 1932년 6월부터 조선일보 영업국장으로 활동하다 1933년 3월 [[조선일보]]의 경영권을 인수하여 부사장에 취임하였다.&lt;br /&gt;
그는 교동광업소를 운영하며 모은 재력을 바탕으로 부사장 재직 중 [[조선일보]]의 대주주가 되었으며, 1933년 7월 8대 사주 조만식으로부터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제9대 [[조선일보]] 사주로 취임, 활동했다.&amp;lt;ref&amp;gt;조선일보는 1932년 7월에 조만식을 사장으로 영입했지만, 조만식은 거의 평생을 평양에서 살아왔던데다 서울에서 활동하기에는 적응을 잘하지 못했다. 조만식은 신문사 경영난과 지역감정의 혹독한 시련을 받은 채 9개월만에 퇴사했다. 그리고 조만식 후임으로 1933년, 방응모를 사장으로 추대하기에 이르렀다.&amp;lt;/ref&amp;gt;&amp;lt;ref&amp;gt;《한국사 시민강좌 제47집, 대표적 독립운동가 12인》,일조각. p145&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언론, 사업 활동 ===&lt;br /&gt;
==== 사회사업 ====&lt;br /&gt;
[[파일:방응모장학생.jpg|섬네일|160px|오른쪽|방응모와 그의 장학금을 받던 학생들. 가운데 앉은 이가 방응모이고, 서있는 이들 중 왼쪽에서 두 번째는 방응모의 양자 방재윤.]]&lt;br /&gt;
&lt;br /&gt;
1930년 배영옥과 결혼하여 딸 방재숙을 얻었다. 1932년 광산업을 정리하였고 언론사업을 비롯하여 육영사업과 조림 및 간척사업 등을 벌였다. 또한 고아원과 사회복지단체에 후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933년 무렵 방응모가 [[조선일보]] 인수에 나서기 전부터 그는 [[한용운]]을 위한 일이라면 돈을 아끼지 않고 지출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성북동 언덕에 만해 한용운을 위해 기와집 한 채를 지어주었는데 [[심우장]](尋牛莊)이 그것이다. 또한 만해가 일제의 배급을 거부해 생활이 어려워지자 생활비를 지원했던 방응모는 그가 병석에 누운 1944년에는 치료비를 지원해주기도 했다.&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6/0000043262?sid=103 만해가 일송 선생 5일장 치른 사연]&amp;lt;/ref&amp;gt; 그 외에도 방응모는 만해 한용운·벽초 홍명희 등과 함께 새해가 되면 백천온천에도 같이 다녀올 정도로 가까운 관계였다.&lt;br /&gt;
&lt;br /&gt;
1932년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사건으로 체포된 [[안창호]]의 사면 탄원과 보석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총독부 경무국장은 그의 안창호 석방 제안을 정중히 거절한다.&lt;br /&gt;
&lt;br /&gt;
1936년 동방문화학원(숭문중학교·고등학교 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에 취임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인수와 경영 ====&lt;br /&gt;
1933년 1월 16일 그는 정식으로 주식회사 [[조선일보]]사를 창립했다. 일단 그는 조만식을 사장으로 임명하고 자신은 부사장으로 있다가, 그해 3월 13일 다시 부사장에 취임했다. 7월 10일 조만식의 사퇴로, [[조선일보]]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다.&lt;br /&gt;
&lt;br /&gt;
1934년 3월 25일 이광수를 비롯하여 서춘, 김동진, 함상훈, 신태익 등을 [[조선일보]]로 영입해 왔다. 그 외에도 정주군 출신 언론인, 작가들이 조선일보로 많이 오게 되었다.&lt;br /&gt;
&lt;br /&gt;
==== 동방문화학원 재단 설립 ====&lt;br /&gt;
방응모는 1936년 방농장의 소유권을 기본 자산으로 하는 재단법인 동방문화학원(東邦文化學院)을 설립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6페이지&amp;lt;/ref&amp;gt; 동방문화학원은 학교 법인으로 인가된 재단 법인으로, 그뒤 고계학원과 인연을 가지고 1936년부터는 보성고등보통학교를 후견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 분리되었다. 그뒤 방응모 장학생인 서중회 회원들을 위한 방응모 장학사업을 주관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7페이지&amp;lt;/ref&amp;gt;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태평로 구 조선일보 사옥 안에 동방문화학원의 간판을 달고 조광 잡지를 계속 발행하는 조광사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7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일제 강점기 후반 ===&lt;br /&gt;
==== 중일 전쟁 전후 ====&lt;br /&gt;
중일전쟁 개전 직후인 1937년 7월 11일에 열린 [[조선일보]] 간부회의에서 주필 서춘이 '일본군, 중국군, 장개석씨'등으로 쓰던 용어를 '아군, 황군, 지나, 장개석'으로 고치고 일본 국민의 입장에서 논설을 쓸 것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편집국장 김형원과 영업국장 김광수가 적극 반대를 하기도 했으나, 방응모는 '일장기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이미 몇 십만 원의 손해를 보았을 뿐 아니라 [[3.1 운동]] 때처럼 신문이 민중을 지도할 수 없다'면서 서춘의 입장을 지지했다. 한편으로 방응모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된 [[안창호]]를 [[조선일보]]에 영입하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안창호는 옥중에서 얻은 간질환과 폐질환 등으로 고생했고, 진료비 등을 수시로 지원하고 문병했음에도 출옥후 얼마 뒤에 사망한다.&lt;br /&gt;
&lt;br /&gt;
1933년 이심회(以心會：후에 序中會, 방응모장학회 등으로 명칭이 바뀜)라는 장학회를 만들어 국내 대학생과 해외유학생들에게 학자금을 지급하기도 했으며, 재단법인 동방문화학원(東方文化學院：지금의 숭문중·고등학교 전신)의 이사장직을 맡기도 했다. 또한 자신의 막대한 재원을 들여 1936년부터 함경남도 영흥군 일대에 당시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대단위 조림사업을 벌였으며, 그 전 해인 1935년부터는 경기도 수원군 팔탄면 일대에서 만 2년간에 걸친 간척사업을 벌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937년 12월 24일 [[안창호]]는 병보석 판정을 받고 재판소가 지정한 현 서울대학교병원인 경성제국대학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안창호의 입원 중에 시중을 든 사람으로는 안창호의 외조카 김순원과 청년 박정호 두 사람이었고, 나중에는 이응준 장군의 부인 이정희가 끝까지 지성껏 간호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7페이지&amp;lt;/ref&amp;gt; [[안창호]]는 병상에서 병원비 문제로도 고초를 겪었다. 이 때문에 조만식은 일본 경찰로부터 안창호의 병원비를 대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음에도, &amp;quot;내가 먹고 살면서 그 선생을 돌보지 않을 수 없다&amp;quot;며 완강히 거절하고 안창호를 도왔다고 한다. 안창호의 간호를 같이 도와주던 이응준 장군 부인 이정희는 10일마다 계산되어 나오는 병원 입원비로 안창호 선생이 괴로워하는 표정을 지켜볼수 없었다고 진술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8페이지&amp;lt;/ref&amp;gt; 방응모는 5백원의 수표 한 장을 안창호에게 전달하였다. 50일간의 입원비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9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안창호]]는 1938년 3월 10일 밤 12시 경성제국대학 병원에서 운명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폐간 사건 ====&lt;br /&gt;
일본의 전쟁이 격화되면서 조선총독부 공보국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1940년에 강제로 폐간조치 했다. 광산을 팔아서 자신의 모든 것을 조선일보에 바쳤던 방응모는 큰 절망과 좌절을 느껴야 했다. [[한용운]]은 ‘신문이 폐간되다/ 붓이 꺾이어 모든 일이 끝나니…’로 시작하는 시를 지어 방응모를 위로했다. &amp;lt;ref&amp;gt;붓이 꺾이어 모든 일 끝나니 이제는 재갈 물린 사람들 뿔뿔이 흩어지고 아, 쓸쓸하고 쓸쓸한지고 망국 서울의 가을날 한강의 물도 흐느끼느니 울음 삼켜 흐느끼며 연지를 외면한 채 바다 향해 흐르느니&amp;lt;/ref&amp;gt; 동아일보에는 김성수 외에도 장덕수와 송진우가 있었지만 그에게는 조선일보 폐간을 막기 위해 총독부와 교섭할 인물도 없었다.&lt;br /&gt;
&lt;br /&gt;
1938년 2월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선 내 일간신문 25개사로 조직된 조선춘추회의 창립에 창립발기인으로 참가했고, 조선춘추회 간사로 활동했다. 같은 해 7월 “국민정신을 총동원하고 내선일체 전 능력을 발휘하여 국책 수행에 협력하여 성전(聖戰)의 궁극적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조직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에 참여했고, 그날 결성된 경성연맹 창립총회에서 상담역을 맡았다. 9월부터 조선방공협회 경기도연합지부 평의원을 지냈다. 10월에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주최한 비상시 국민생활 개선을 위한 제1회 생활개선위원회에서 제2부(의례와 사회풍조 쇄신부)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그러나 1938년 10월부터 조선총독부는 조선일보의 신문용지를 검열, 통제하기 시작했다.&lt;br /&gt;
&lt;br /&gt;
1940년 5월 조선총독부 총독 미나미 지로가 방송담화로 창씨개명을 권고했다. 그러나 그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성씨를 이제 와서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며 창씨개명은 완강하게 거절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조선일보에 트집이 잡힐 일이 나타나지 않자 총독부는 전국 면사무소에 조선일보 신문 구독을 거절하도록 명령을 내렸고, 동시에 조선말을 쓰는 민원인에게는 일을 처리해주지 말도록 하게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3페이지&amp;lt;/ref&amp;gt; 조선총독부는 송진우의 예금통장을 문제삼았다. 송진우 명의의 은행저금이 동아일보의 8백여 개의 지국과 분국을 통해 모금된 독립운동 자금이라며, 그리고 동아일보 간부들이 백운장이라는 요정에서 회식을 한 것을 김성수 집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려 했다는 등의 이유로 백관수 동아일보 사장을 전격 구속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3~374페이지&amp;lt;/ref&amp;gt; 동아일보는 백관수가 구속된지 10일 만에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동아일보 중역회의를 열고 폐간신청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4페이지&amp;lt;/ref&amp;gt; 총독부는 조선일보에도 자진 폐간을 권고했고, 1940년 8월 9일 편집회의를 주관, 8월 10일 조선일보의 폐간계를 내고, 8월 10일자로 폐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5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잡지 발행 활동 ====&lt;br /&gt;
신문 강제 폐간 뒤 방응모는 간판을 조광사로 바꿔 걸고, 사옥은 동방흥업주식회사로 등기를 변경해서 유지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1페이지&amp;lt;/ref&amp;gt; 이후 그는 조광 잡지 발행에 전념했다. 1943년 8월 경 일본 중앙대학의 예과를 마친 방일영이 입사&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1페이지&amp;lt;/ref&amp;gt;, 필진으로 참여했다. [[조선일보]]가 폐간된 후에도 방응모는 벽초 홍명희 부자에게 지속적으로 생활비를 대주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4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4년 6월 29일 만해 [[한용운]]이 사망했다. 그는 심우장을 찾아가 3백원을 내놓았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5페이지&amp;lt;/ref&amp;gt;당시 쌀 10가마가 100원이었지만, 심우장은 당장 현금 1원이 없었는데 거액이라서 놀랐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6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광복 이후 언론 및 정치활동 ===&lt;br /&gt;
==== 광복 직후 ====&lt;br /&gt;
1945년 8.15 광복 후에는 8월 말과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朝鮮在外戰災同胞救濟會) 고문과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9월 초 [[안재홍]] 등이 좌경화되는 건준체제에 반발하여 건준을 탈퇴하자 방응모 역시 건준을 탈퇴하였다.&lt;br /&gt;
&lt;br /&gt;
9월 2일 미군정이 주둔하자, 방응모는 윤전기를 찾기 위해 폐간 당시의 증빙서류를 미 군정청에 제시하였으나 소식이 없었다. 총독부는 조선일보 폐간 직후 인수한 윤전기를 경성일보사에 옮겨서 설치했다. 그는 동방문화재단 외 4개 사업소를 적산으로 파악한 미군정을 설득하고, 사옥 문제도 해결하였다.&lt;br /&gt;
&lt;br /&gt;
10월 1일 조선일보 편집위원회를 구성하고, 신문 복간 운동을 추진했다. 조선총독부의 폐간 지시 당시 의정부로 옮겨놓은 일부 활자 자모음이 잘 보관되어, 그해 11월 23일 조선일보를 복간시키고, 서울신문사 사옥에서 조선일보 복간호를 간행하였다. 이후 조선사회문제대책중앙협의회 중앙위원을 거쳐 10월 16일 이승만 등의 주도로 독립촉성중앙회가 결성되자 독촉에 가입하였다.&lt;br /&gt;
&lt;br /&gt;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이 귀국하자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에 입당했다. 12월 [[안재홍]]의 추천으로 한국독립당의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출되어 3~4개월 동안 활동했다.&amp;lt;ref&amp;gt;일각에서는 방응모가 '한독당 재무부장으로 지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1947년부터 한독당 재무부장을 맡은 신창균이 전면 부정했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47/0000002626?sid=102 백범 비서와 '진짜' 한독당 재정부장의 육성증언. 참고.]&amp;lt;/ref&amp;gt; 그 뒤 대한국민총회 발기인, 대한독립애국금헌성회 발기인 등으로 활동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복간 및 군정기 활동 ====&lt;br /&gt;
11월 [[조선일보]]사를 복간시켰다. 그러나 한동안 조선일보의 인쇄는 서울신문사에서 간행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1945년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추념대회에 참여하였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2&amp;quot;&amp;gt;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13&amp;lt;/ref&amp;gt; 순국선열추념대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2&amp;quot; /&amp;gt;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참여,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이 되었다.&amp;lt;ref&amp;gt;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55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6년 2월 26일 서울신문사 공무국 종업원들이 조선일보의 인쇄를 거부해버렸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436페이지&amp;lt;/ref&amp;gt; 그동안 묵시적으로 방해가 은근히 있었다. 표면상의 문제는 임금 문제이나 내용상으로는 조선일보에 대한 조선공산당의 시위의 일종이었다. 사흘간의 교섭 끝에 2월 28일에 가서야 26일자와 27일자를 소급해서 인쇄하여 신문을 한꺼번에 발행하였다. 그러나 3월 1일과 2일에 또다시 인쇄를 거부당해 결국 휴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436페이지&amp;lt;/ref&amp;gt; 조선일보를 경성일보사로 옮겨서 인쇄하기로 하고 3월 5일자로 사고로 독자에게 알렸다.&lt;br /&gt;
&lt;br /&gt;
4월 29일 김구, 김창숙, 김성수, 오세창 등과 함께 서울운동장에서 윤봉길의사 추모회의 창립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amp;lt;ref&amp;gt;&amp;quot;故尹奉吉義士의 記念式 오늘, 發起人會 열고 準備&amp;quot;, 동아일보 1946년 4월 23일자 2면, 사회면&amp;lt;/ref&amp;gt; 그해 5월 조선공업구락부 고문에 위촉되었다.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民族統一總本部) 10인협의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6월 15일 오후 5시 40분 서울역에 마중나가 서울역에 도착한 삼의사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lt;br /&gt;
&lt;br /&gt;
1945년 광복 직후 서기원이 그를 찾아왔다. 서기원은 그때 경성농상실천학교의 동창회로부터 이 학교의 교장이 되어 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이다. 방응모는 서기원의 제의를 받아들여 1946년 8월 28일 동방문화학원 이사장으로 숭문상업학교를 인수, 재단 이사장이 되었다. 후일 방응모가 6.25 전쟁 중에 납북된 후 동방문화학원과 숭문중,고교의 재단은 최용진이 운영하다가 다시 1978년에 방일영에게 인수되었다.&lt;br /&gt;
&lt;br /&gt;
1947년 1월 21일 제5회 창립위원회를 본사에서 개최하고 2월 23일 주식회사 조선일보사 주주창립총회를 열고 대표이사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공동투자 경영자로 참여시킨 전무 이종민과의 알력이 발생했다. 이종민과의 갈등이 심화되자 그해 8월 3일 방응모는 일단 사직서를 제출했다. 1947년 8월 10일 풍문여고 강당에서 개최된 한인신문기자협회에 참석, 민족청년단에서 언론계 공로자로 방응모, 김성수, 설의식을 지정하여 상을 시상받았다.&amp;lt;ref&amp;gt;&amp;quot;朝鮮 新聞記者協會&amp;quot;, 동아일보 1947년 8월 10일자 2면, 사회면&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납북과 최후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 납북 후 행적은 &amp;quot;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amp;quot;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 1950년 8월경 개성 송악산 부근에서 미군의 폭격에 희생되었고 심한 폭격으로 시신을 찾을 수 없어 묘도 만들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남한에서는 1955년 7월 7일 생사불명기간 만료로 인해 실종 처리되었다.&lt;br /&gt;
&lt;br /&gt;
=== 사후 ===&lt;br /&gt;
서울 종로에 있던 양자 방재윤의 두 아들 방일영과 방우영은 방응모의 첩 이인숙이 찾아가 피신하라고 권고하여 황급히 피신했다. &lt;br /&gt;
&lt;br /&gt;
7월 6일 그의 행방불명처리가 되고, 방응모의 사후에도 [[조선일보]]는 그의 명의로 발행되었다. 1952년 4월 28일 조선일보는 발행인겸 편집인을 장기영으로, 인쇄인을 방일영으로, 방응모는 명예사장으로 명의변경하여 휴전 후 계속 발행하게 되었다. 1954년 4월 30일 제8회 조선일보 정기주주총회에서 장기영 사장이 사퇴하면서, 명예사장 방응모가 사장으로 추대되고, 발행인 겸 대표취체역에 방일영이 선임되었다. 이후 실종 후 1959년에 법적으로 사망 처리되었다. 그리고 1970년까지는 조선일보는 그의 이름으로 발행되었다.&lt;br /&gt;
&lt;br /&gt;
1970년 2월 19일 조선일보 정기주주총회에서 방응모 이사를 사퇴 수리하였다. 그의 피폭 사망 사실은 1970년대 이후 탈북자들을 통해 대한민국에 소개되었다.&lt;br /&gt;
&lt;br /&gt;
== 친일행위 의혹 ==&lt;br /&gt;
=== 일제 전시체제기 활동 ===&lt;br /&gt;
일제 강점기 말기 언론인으로서 총독부체제에 협력한 기록과 활동이 다수 기록이 있다. 1933년 3월 [[조선일보]] 경영권을 인수하고 부사장직에 취임했을 당시 같은 달에 고사기관총 구입비용 1600원을 군에 헌납하였다. 그는 1935년 친일 잡지 《조광 (잡지)(朝光)》을 창간하였고, 1937년에는 경성방송국 제2방송에 출연하여 일제가 중국의 베일을 절멸케하여 극동평화를 지키려고 한다는 강연을 하였다. 1940년대부터 조광에 집중적으로 친일 논설을 기고하고 시국 강연에 참여하여 전쟁 지원을 독려했다. 1942년 6월에는 '징병령 실시에 일층 더 감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글을 써서 조광에 발표하였다. 애국금차회(1937),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1938), 임전대책협의회(1941), 조선임전보국단(1941) 등 대표적인 친일 단체의 회원에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그는 이런 행적으로 인해 해방정국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명단에 기록되어 있고,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해 발표한 &amp;lt;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amp;gt;에 모두 포함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lt;br /&gt;
&lt;br /&gt;
우리 [[조선일보]]는 다른 어떤 신문도 따라오지 못하는 확고한 신념에서 비국민적 행위를 단연 배격하여 종국까지 조선일보사가 이미 정해놓은 방침에 한뜻으로 매진한다.|원산에서의 순회 강연&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9478.html 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친일 다짐하다 시민에 봉변]《한겨레》2005-08-24 오후 06:13:18&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반민족행위 논란 ===&lt;br /&gt;
방응모를 친일파로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남아 있다. 조선일보 경영 이전에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방응모의 활동이 거의 없었고, 납북된 뒤 소식이 끊겨버린 까닭에 본인이 항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 동안의 행적만으로 친일파 여부를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방응모의 후손들이 영향력 있는 [[조선일보]] 언론사의 사주를 맡았기에 그의 입장에서 서술한 기록을 많이 남기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80년 발간된 그의 전기 《계초 방응모》(조선일보사) 등에는 '그가 민족주의적 선각자'로 묘사되고 있다. 방응모가 친일파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일부세력측은 그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논거로 드는 경우가 많이 있다.&amp;lt;ref&amp;gt;유석재, 계간 《유심》 (2004년 봄호) [http://yousim.buddhism.org/html/2004-spr/tamgu-yoo-seok-jae.htm 삭풍 속에 피어난 금란지교(金蘭之交) - 만해와 계초 방응모]&amp;lt;/ref&amp;gt;&amp;lt;ref&amp;gt;&amp;quot;일제 말기 계초는 시국강연에 나설 것과 창씨개명을 집요하게 강요받았으나 그때마다 묵묵부답으로 거부하며 소신을 지켰다.&amp;quot; 《조선일보》 (2001.3) 조선일보 사장열전 - 계초 방응모편, 《한겨레》 (2001.3.30) [http://www.njoyschool.net/news/article_view.asp?menu_code=s20202&amp;amp;no=1206 조선일보, 일장기를 신문제호 위에]&amp;lt;/ref&amp;gt;&lt;br /&gt;
또한 한국정토학회 고문이자 서울 정토사 주지였던 박설산(1918~2007)이 학도병에 끌려가기 직전인 1943년 12월 28일 밤 서울역에서 스스로 왼발을 선로에 올려 발가락을 절단해 징집을 기피하자 방응모는 만해와 함께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설산을 걱정하면서 입원 중 조선일보 기자를 통해 돈을 전달한 것은 물론 퇴원할 때 돈을 전달하고 뒤를 보살폈다고 한다.&amp;lt;ref&amp;gt;박설산 회고록 &amp;lt;뚜껑없는 조선역사책&amp;gt;(1994, 도서출판 삼장) p240~241&amp;lt;/ref&amp;gt;&lt;br /&gt;
&lt;br /&gt;
2010년 12월, 방응모 관계자들 및 조선일보측은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을 취소해달라'며 법원에 낸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amp;quot;1944년 조선항공업 창립발기인으로 활동한 부분에 대해 친일행위로 판단한 부분을 취소하지만 나머지 활동에 대해서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amp;quot;라고 판결했다. 그 이유인 즉 &amp;quot;방응모는 1933년 조선일보 사장으로 취임해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등으로 활동하며 친일활동을 벌였으며, 1937년 경성방송국 시국강연에서 일본제국이 극동평화를 확립시킬 것이라는 내용의 강연을 하고, 1938년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춘추회의 발기인 겸 간사로 활동하기도 했다&amp;lt;ref&amp;gt;[http://media.daum.net/breakingnews/politics/view.html?cateid=1002&amp;amp;newsid=20101222103319164&amp;amp;p=newsis 법원 &amp;quot;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친일파 맞다&amp;quot;]뉴시스 2010년 12월 22일&amp;lt;/ref&amp;gt;&amp;quot;는 것이다.&lt;br /&gt;
&lt;br /&gt;
2012년 1월 12일 서울고법 행정7부는 방 전 사장의 손자인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이 행정안전부를 상대로 낸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처분 취소 청구소송에서 ‘일제 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의 친일 행위 판정 조항에 비추어 방 전 사장에게 적용된 모두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민족적 지도자로서 비중이 큰 만큼 그로 인한 책임도 무거울 뿐 아니라 고난의 시기를 겪은 민족으로서 그 역사를 반성하자는 입장에 설 때, 방 전 사장의 여러 행태는 반민특별법에서 규정한 친일반민족행위의 유형에 속함을 부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1·2심 재판부는 방 전 사장이 자신이 운영하던 잡지 &amp;lt;조광&amp;gt;에 일제 침략전쟁에 동조하고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문예물과 일제 침략전쟁에 협력할 것을 주문하는 논문을 게재하는 등의 ‘친일’ 행위를 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또한, 2심 재판부는 일본의 전쟁 수행을 돕기 위해 설립된 군수 제조업체 ‘조선항공공업’의 발기인과 감사를 지낸 것은 “감사는 업무집행에 관여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기관으로, 방 전 사장이 이 회사를 운영했다고 볼 수 있다”는 이유로 친일이라고 판단했다.&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4565.html법원 ‘방응모 친일’ 2심서도 인정] 인터넷한겨레 2010년 12월 22일&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기타 ==&lt;br /&gt;
그는 [[한용운]], 최남선, 정인보, 홍명희 등과 친분관계를 형성하고 어울려 지냈다 한다.&lt;br /&gt;
&lt;br /&gt;
김구의 한국독립당의 재정적 후견인 역할을 하였다 하며,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삼의사 유골봉환식 때 김구, 정인보 등과 촬영한 사진이 있다.&lt;br /&gt;
한편 임꺽정의 저자인 벽초 홍명희가 방응모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그와 깊은 친분을 맺었다는 주장이 있다. 《조광》 1938년 11월호엔 홍명희가 병중에 있는 방응모를 위로하며 지은 한시가 방응모의 답시와 함께 실려 있다고 한다.&amp;lt;ref&amp;gt;[http://weekly.chosun.com/site/data/html_dir/2004/11/05/2004110577041.html ‘임꺽정’으로 되살아난 독립운동의 魂! 주간조선 1827호 2004.11.04&amp;lt;/ref&amp;gt; 또한 [[안창호]]의 비서실장을 지낸 독립유공자 구익균은 방응모와 안창호가 친밀했다는 주장을 했다.&amp;lt;ref&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09/2008030901055.html &amp;quot;공산주의자들, 도산 비판하다가도 하숙비 떨어지면 찾아와&amp;quot;] 조선일보, 2008-03-10 03:22&amp;lt;/ref&amp;gt;&lt;br /&gt;
또한 박설산에 따르면 1943년 만해 한용운에게 학도병으로 끌려가게 되었음을 알리려 심우장으로 찾아가게 되었을 때, 한용운과 방응모가 바둑을 두고 곁에서 정인보가 훈수를 두고 있었다고 한다.&amp;lt;ref&amp;gt;박설산 저 &amp;lt;뚜껑없는 朝鮮 역사 책&amp;gt; p.226 도서출판 三藏(1994)&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 /&amp;gt;&lt;br /&gt;
&lt;br /&gt;
== 참고 자료 ==&lt;br /&gt;
* 청산하지 못한 역사: 언론 내세워 일제에 아부한 교화 정책의 하수인 (문영숙) (반민족문제연구소, 청년사, 1994)&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민족 계몽의 초석 방응모(이동욱 저, 지구촌, 1998)&lt;br /&gt;
* 계초 방응모전(계초전기간행위, 조선일보사, 1980년)&lt;br /&gt;
* 계초 방응모(이동욱, 방일영문화재단, 1996)&lt;br /&gt;
&lt;br /&gt;
== 외부 링크 ==&lt;br /&gt;
* [https://web.archive.org/web/20050123171046/http://chosunhost.com/ 계초방응모 기념사업회]&lt;br /&gt;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09145 &amp;lt;조선일보&amp;gt;, 방응모 전 사장의 '친일행적' 말한다] - 오마이뉴스 04.09.10일자&lt;br /&gt;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020302101749 방응모ㆍ 김성수 친일행적 뭔가 : &amp;lt;긴급입수&amp;gt;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 全文] - 프레시안 2002-03-02&lt;br /&gt;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54052 그가 '&amp;lt;조선&amp;gt;의 주인' 주장하는 이유] 오마이뉴스 2001년 9월 20일자&lt;br /&gt;
*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956 방재선씨, 호주·상속 원인무효소송 제기]&lt;br /&gt;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4/06/2008040601053.html '5인 친필 서첩' 발굴] 조선일보 2008년04월06일자]&lt;br /&gt;
&lt;br /&gt;
[[분류: 감자]]&lt;/div&gt;</summary>
		<author><name>Nsgjjsjsjy02</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B0%A9%EC%9D%91%EB%AA%A8&amp;diff=59405</id>
		<title>방응모</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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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Nsgjjsjsjy02: /* 사회사업과 조선일보 인수 계획 */&lt;/p&gt;
&lt;hr /&gt;
&lt;div&gt;{|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width:100%&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0%&amp;quot;|사진&lt;br /&gt;
|[[파일:방응모.jpg|center|200픽셀]]&lt;br /&gt;
|+ '''방응모'''&lt;br /&gt;
|+ style=&amp;quot;caption-side:bottom;text-align:left:&amp;quot;|출처: 위키백과&lt;br /&gt;
|출생||1883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조선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또는 정부면 성내동&lt;br /&gt;
|-&lt;br /&gt;
|사망||1950년경으로 추정&lt;br /&gt;
|-&lt;br /&gt;
|사인||불명&lt;br /&gt;
|-&lt;br /&gt;
|거주지||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amp;gt; 경성부 -&amp;gt; 경기도 양주군 의정부읍&lt;br /&gt;
|-&lt;br /&gt;
|국적||대한민국&lt;br /&gt;
|-&lt;br /&gt;
|본관||온양&lt;br /&gt;
|-&lt;br /&gt;
|별칭||호: 계초(啓礎), 춘해(春海)&lt;br /&gt;
|-&lt;br /&gt;
|직업||교사, 변호사, 상인, 언론인, 기업인, 사회운동가, 정치가&lt;br /&gt;
|-&lt;br /&gt;
|배우자||승계도, 이인숙, 배영옥, 노효용&lt;br /&gt;
|-&lt;br /&gt;
|자녀||방재숙(딸), 방재욱·방재선·방재효·방재규(아들), 방재윤(양자)&lt;br /&gt;
|-&lt;br /&gt;
|부모||방계준(부), 온양박씨(모)&lt;br /&gt;
|}&lt;br /&gt;
&lt;br /&gt;
'''방응모'''(方應謨, 평안북도 정주군, 1883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 1950년 8월(추정)는 [[일제강점기]]의 교육자, 언론인, 법조인, 기업인이자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언론인이며 정치인이다. 호는 '''춘해'''(春海)이고, 뒤에 '''계초'''(啓礎)로 고쳤다.&lt;br /&gt;
&lt;br /&gt;
1922년 동아일보 정주 지국을 인수해 지국장을 지내다가 1924년 금광업에 뛰어들어 큰 부를 얻게 되었다. 1932년 6월 조선일보에 입사하였고 이후 영업국장이 되어 조선일보의 판매망을 장악하게 되고 경영권을 인수하면서 1933년 3월 조선일보 부사장이 되었다. 1933년 7월부터 1950년 7월까지 종신으로 [[조선일보]]의 사장을 역임하였다. 1935년 창간한 월간잡지 '조광(朝光)'은 친일 논란이 있다.&amp;lt;ref&amp;gt;안은필. [http://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9211 조선일보가 가장 빛나던 시기, ‘안재홍 시대’]&amp;lt;/ref&amp;gt;&amp;lt;ref name=&amp;quot;안은&amp;quot;&amp;gt;안은필. [http://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9279 방응모 친일증거, “모래밭에서 모래 찾기”]국민TV. 기사입력 2015년 4월 23일. 기사수정 2015년 4월 24일.&amp;lt;/ref&amp;gt;&amp;lt;ref&amp;gt;이민영.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1/0002255321?sid=102 고법 “방응모 前조선일보 사장 친일행적 대부분 인정”]. 서울신문. 2012년 1월 13일.&amp;lt;/ref&amp;gt;&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6/0000000413?sid=110 김성수ㆍ방응모와 친일언론인 군상]. 미디어오늘. 2002년 3월 12일.&amp;lt;/ref&amp;gt; 언론계에서 활동하면서도 사업가의 길을 함께 걸었고, 교육 장학 활동을 하였으며, 1945년 광복 직후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안재홍]]의 추천을 받아 한국독립당 중앙상무위원과 독립촉성국민회 총무부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amp;lt;ref name=&amp;quot;안은&amp;quot;/&amp;gt;&amp;lt;ref&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16/2008031600800.html 계초 방응모와의 우정도 여러 편의 시로 표현해&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해방 정국에서 김구의 재정적 후견인으로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등 삼의사 유골 봉환 사업과 신탁통치 반대 운동 등에 참여하여 활동했다.&lt;br /&gt;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 납북 후 행적은 &amp;quot;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amp;quot;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lt;br /&gt;
&lt;br /&gt;
== 생애 ==&lt;br /&gt;
=== 생애 초기 ===&lt;br /&gt;
==== 출생과 성장 ====&lt;br /&gt;
방응모는 1883년 11월 3일 또는 9월 29일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바우머리 부락 또는 정주군 정부면 성내동 425번지에서 '''방계준(方桂準)'''과 온양 박씨(溫陽朴氏)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어려서 빈곤한 가정환경으로 방응모는 정규 학교에는 입학하지 못하고, 16세 때까지 서당에 드나들며 한학을 익혔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던 중 그가 어느 정도 실력이 우수하다고 인정되자, 스승인 승창률은 잠시 방응모에게 어린아이들을 돌보게 한 후 자리를 피하곤 했다 한다. 그는 홀로 사서육경을 탐독, 독파하였다. 21세 무렵 잠시 서당 훈장을 지내기도 했다. 우연히 경성부에 갔다가 신문물을 보고 충격을 받아 17세에 독학으로 신학문과 일본어, 중국어, 수학 등을 독파하였다.&lt;br /&gt;
&lt;br /&gt;
유년시절 서당의 성리학 스승이던 승창률의 친척인 승시영(承時榮)과 조씨(趙氏)의 딸 승계도와 결혼했다. 결혼한 다음 해에도 그는 공부를 한다며 책만 사다 읽곤 했고, 부인 승계도는 생계를 위해 몸소 나섰다. 그의 아내는 남편에 대한 믿음이 절대적이었고 탓을 하거나 가출하지 않았다.&lt;br /&gt;
&lt;br /&gt;
=== 언론, 기업 활동 ===&lt;br /&gt;
==== 계몽 활동과 언론 활동 ====&lt;br /&gt;
1915년부터 1924년 방응모는 지역 지식인들, 유학파 청년, 계몽 청년들이 모여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하는데 참여했다. 민립대학기성회에서 활동하면서 조만식 등과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언변과 용모가 되었던 그의 여관에도 손님들이 몰렸고, 그가 &amp;quot;2백원도 좋고 5백원도 좋다며 보태달라&amp;lt;ref name=&amp;quot;fsfs87&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7페이지&amp;lt;/ref&amp;gt;&amp;quot;고 하면 기부금을 내는 이들이 있었다. 1919년 정주에서 3.1 만세 운동이 벌어지자, 그도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형사들의 눈을 피해 방응모는 만세운동을 하다 재빨리 몸을 피해 화를 면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8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22년 6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인수하여 분국장에 취임했다. 그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경영하는 동시에 그는 농촌 계몽운동 등에 적극 참여했다. 1922년 6월 19일&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96페이지&amp;lt;/ref&amp;gt; 동아일보 본사를 설득하여 정주분국을 동아일보사 정주지국으로 승격시켰다. 동아일보사 지부장 재직 시 그는 민립 대학 설립 자금과 농촌진흥회 회원의 여비 및 당시 운영난에 처했던 오산학교의 재개교 등을 계획했다. 총독부의 거부로 실패한 대학 설립 자금은 고스란히 오산학교의 부활 자금으로 투입되었다.&lt;br /&gt;
&lt;br /&gt;
1923년 동아일보 정주군 분국이 지국으로 승격되자 정주국을 경영하였고, 같은 해 7월 여성들의 사회 참여와 평등권 신장을 위한 여자교육회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이후 대규모 수해가 나자, 정주군 수해구제회를 결성하여 봉사활동에 가담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 광업 경영과 조선일보 입사 ====&lt;br /&gt;
1924년 친구 전우현이 방응모와도 안면이 있던 금광 채굴업자 두 명을 데리고 그를 찾아왔다. 그들은 자신들이 봐 둔 산이 있다고 방응모에게 소개했다. 이후 광산업에 뛰어들어 1924년 여름 압록강변의 폐금광인 평안북도 삭주군 외남면 교동 다릿골의의 삭주 교동광업소를 찾아가 10미터 정도 땅을 파고 금맥을 발견했다. 곧 삭주 교동광업소를 인수, 경영을 확대하였다. 이때 만난 동업자의 딸이자 친구 전우현의 조카딸인 '''이인숙(李仁淑)'''을 만났다. 본처 승계도가 두 아들을 잃고 복부 수술이 잘못되어 아이를 얻지 못하게 되자 방응모에게도 수많은 중매가 들어왔다. 자식들을 병으로 잃은 것이 자신의 불찰이라고 본 승계도는 그에게 작은 부인이라도 들이자는 말을 꺼내기도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18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26년 방응모에게 광산 사업을 제안했던 두 친구가 손을 털고 나갔고, 그의 가족은 돈이 없어 쌀 대신 좁쌀로 좁쌀죽을 먹으며 연명해야 했다. 방응모는 정주군에 사는 비슷한 또래의 먼 친척 방상진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고, 방상진과 일꾼 대여섯 명, 그리고 후처 이인숙의 친정 쪽에서 얻어온 토지문서를 얻어 자금을 마련했고 다시 금광을 채굴했다. 그 후 1926년 7월 지하 300m 지점에서 금맥을 확보했고, 이후 연간 300kg의 금을 생산하여 벼락부자가 되었다.&lt;br /&gt;
&lt;br /&gt;
1928년 방응모는 자신의 아호를 딴 춘해 장학회를 만들고 장학생들의 모임인 이심회를 만든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48페이지&amp;lt;/ref&amp;gt; 1928년에 그는 의정부 직동, 흥선대원군의 별장이 있던 곳 바로 뒤에 위치한 건물을 매입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한용운]], 홍명희를 자주 초대했다.&lt;br /&gt;
&lt;br /&gt;
1932년 방응모는 교동광산을 135만원이란 거액에 일본 중외광업주식회사에 매각했다. 그 뒤 1932년 6월부터 조선일보 영업국장으로 활동하다 1933년 3월 [[조선일보]]의 경영권을 인수하여 부사장에 취임하였다.&lt;br /&gt;
그는 교동광업소를 운영하며 모은 재력을 바탕으로 부사장 재직 중 [[조선일보]]의 대주주가 되었으며, 1933년 7월 8대 사주 조만식으로부터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제9대 [[조선일보]] 사주로 취임, 활동했다.&amp;lt;ref&amp;gt;조선일보는 1932년 7월에 조만식을 사장으로 영입했지만, 조만식은 거의 평생을 평양에서 살아왔던데다 서울에서 활동하기에는 적응을 잘하지 못했다. 조만식은 신문사 경영난과 지역감정의 혹독한 시련을 받은 채 9개월만에 퇴사했다. 그리고 조만식 후임으로 1933년, 방응모를 사장으로 추대하기에 이르렀다.&amp;lt;/ref&amp;gt;&amp;lt;ref&amp;gt;《한국사 시민강좌 제47집, 대표적 독립운동가 12인》,일조각. p145&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언론, 사업 활동 ===&lt;br /&gt;
==== 사회사업 ====&lt;br /&gt;
[[파일:방응모장학생.jpg|섬네일|160px|오른쪽|방응모와 그의 장학금을 받던 학생들. 가운데 앉은 이가 방응모이고, 서있는 이들 중 왼쪽에서 두 번째는 방응모의 양자 방재윤.]]&lt;br /&gt;
&lt;br /&gt;
1930년 배영옥과 결혼하여 딸 방재숙을 얻었다. 1932년 광산업을 정리하였고 언론사업을 비롯하여 육영사업과 조림 및 간척사업 등을 벌였다. 또한 고아원과 사회복지단체에 후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933년 무렵 방응모가 [[조선일보]] 인수에 나서기 전부터 그는 [[한용운]]을 위한 일이라면 돈을 아끼지 않고 지출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성북동 언덕에 만해 한용운을 위해 기와집 한 채를 지어주었는데 [[심우장]](尋牛莊)이 그것이다. 또한 만해가 일제의 배급을 거부해 생활이 어려워지자 생활비를 지원했던 방응모는 그가 병석에 누운 1944년에는 치료비를 지원해주기도 했다.&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6/0000043262?sid=103 만해가 일송 선생 5일장 치른 사연]&amp;lt;/ref&amp;gt; 그 외에도 방응모는 만해 한용운·벽초 홍명희 등과 함께 새해가 되면 백천온천에도 같이 다녀올 정도로 가까운 관계였다.&lt;br /&gt;
&lt;br /&gt;
1932년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사건으로 체포된 [[안창호]]의 사면 탄원과 보석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총독부 경무국장은 그의 안창호 석방 제안을 정중히 거절한다.&lt;br /&gt;
&lt;br /&gt;
1936년 동방문화학원(숭문중학교·고등학교 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에 취임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인수와 경영 ====&lt;br /&gt;
1933년 1월 16일 그는 정식으로 주식회사 [[조선일보]]사를 창립, 1월 18일에 발표된 창립 취지서에는 창립위원장 방응모, 창립발기인 방응모, 조만식, 고일청 외 등이 참여했다. 일단 그는 조만식을 사장으로 임명하고 자신은 부사장으로 있다가, 그해 3월 13일 다시 부사장에 취임했다. 4월 25일 편집인 겸 발행인이 되고, 4월 29일에는 조선일보의 조간, 석간제 발행을 부활, 확정시켰다. 1933년 7월 10일 총독부로부터 조선일보사의 법인 등록 승인을 얻어냈다. 7월 10일 조만식의 사퇴로, [[조선일보]]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다. 1933년 그는 자신의 아호를 춘해에서 계초로 바꾸었다. 그는 유능한 문인, 필진의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 상금 1천 원을 걸고 작가를 영입하였다.&lt;br /&gt;
&lt;br /&gt;
1934년 3월 25일 이광수를 비롯하여 서춘, 김동진, 함상훈, 신태익 등을 [[조선일보]]로 영입해 왔다. 그 외에도 정주군 출신 언론인, 작가들이 조선일보로 많이 오게 되었다. 이후 동아일보와 갈등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이광수가 조선일보로 옮겨와 부사장직에서 9개월 근무했다. 당시 조선일보 내부에서는 문모 라는 이가 이광수의 등장으로 자신의 입지 약화를 우려해 오랫동안 이광수를 내보내려 흉계를 꾸몄다고 한다. 이광수는 1934년 5월 25일자로 돌연 사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65페이지&amp;lt;/ref&amp;gt; 문모는 그에게 오히려 잘 됐다는 식으로 말하다가 방응모에게 호되게 혼이 났다. 그리고 문모로 하여금 즉시 금강산에 들어가 이광수를 다시 데려오게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65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이광수는 아들 봉근(당시 8살)의 사망 등으로 실의에 빠졌고, 1935년에 가서야 이광수를 조선일보 고문이자 필진으로 재영입하게 됐다.&lt;br /&gt;
&lt;br /&gt;
==== 동방문화학원 재단 설립 ====&lt;br /&gt;
방응모는 1936년 방농장의 소유권을 기본 자산으로 하는 재단법인 동방문화학원(東邦文化學院)을 설립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6페이지&amp;lt;/ref&amp;gt; 동방문화학원은 학교 법인으로 인가된 재단 법인으로, 그뒤 고계학원과 인연을 가지고 1936년부터는 보성고등보통학교를 후견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 분리되었다. 그뒤 방응모 장학생인 서중회 회원들을 위한 방응모 장학사업을 주관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7페이지&amp;lt;/ref&amp;gt;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태평로 구 조선일보 사옥 안에 동방문화학원의 간판을 달고 조광 잡지를 계속 발행하는 조광사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7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일제 강점기 후반 ===&lt;br /&gt;
==== 중일 전쟁 전후 ====&lt;br /&gt;
중일전쟁 개전 직후인 1937년 7월 11일에 열린 [[조선일보]] 간부회의에서 주필 서춘이 '일본군, 중국군, 장개석씨'등으로 쓰던 용어를 '아군, 황군, 지나, 장개석'으로 고치고 일본 국민의 입장에서 논설을 쓸 것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편집국장 김형원과 영업국장 김광수가 적극 반대를 하기도 했으나, 방응모는 '일장기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이미 몇 십만 원의 손해를 보았을 뿐 아니라 [[3.1 운동]] 때처럼 신문이 민중을 지도할 수 없다'면서 서춘의 입장을 지지했다. 한편으로 방응모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된 [[안창호]]를 [[조선일보]]에 영입하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안창호는 옥중에서 얻은 간질환과 폐질환 등으로 고생했고, 진료비 등을 수시로 지원하고 문병했음에도 출옥후 얼마 뒤에 사망한다.&lt;br /&gt;
&lt;br /&gt;
1933년 이심회(以心會：후에 序中會, 방응모장학회 등으로 명칭이 바뀜)라는 장학회를 만들어 국내 대학생과 해외유학생들에게 학자금을 지급하기도 했으며, 재단법인 동방문화학원(東方文化學院：지금의 숭문중·고등학교 전신)의 이사장직을 맡기도 했다. 또한 자신의 막대한 재원을 들여 1936년부터 함경남도 영흥군 일대에 당시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대단위 조림사업을 벌였으며, 그 전 해인 1935년부터는 경기도 수원군 팔탄면 일대에서 만 2년간에 걸친 간척사업을 벌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937년 12월 24일 [[안창호]]는 병보석 판정을 받고 재판소가 지정한 현 서울대학교병원인 경성제국대학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안창호의 입원 중에 시중을 든 사람으로는 안창호의 외조카 김순원과 청년 박정호 두 사람이었고, 나중에는 이응준 장군의 부인 이정희가 끝까지 지성껏 간호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7페이지&amp;lt;/ref&amp;gt; [[안창호]]는 병상에서 병원비 문제로도 고초를 겪었다. 이 때문에 조만식은 일본 경찰로부터 안창호의 병원비를 대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음에도, &amp;quot;내가 먹고 살면서 그 선생을 돌보지 않을 수 없다&amp;quot;며 완강히 거절하고 안창호를 도왔다고 한다. 안창호의 간호를 같이 도와주던 이응준 장군 부인 이정희는 10일마다 계산되어 나오는 병원 입원비로 안창호 선생이 괴로워하는 표정을 지켜볼수 없었다고 진술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8페이지&amp;lt;/ref&amp;gt; 방응모는 5백원의 수표 한 장을 안창호에게 전달하였다. 50일간의 입원비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9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안창호]]는 1938년 3월 10일 밤 12시 경성제국대학 병원에서 운명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폐간 사건 ====&lt;br /&gt;
일본의 전쟁이 격화되면서 조선총독부 공보국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1940년에 강제로 폐간조치 했다. 광산을 팔아서 자신의 모든 것을 조선일보에 바쳤던 방응모는 큰 절망과 좌절을 느껴야 했다. [[한용운]]은 ‘신문이 폐간되다/ 붓이 꺾이어 모든 일이 끝나니…’로 시작하는 시를 지어 방응모를 위로했다. &amp;lt;ref&amp;gt;붓이 꺾이어 모든 일 끝나니 이제는 재갈 물린 사람들 뿔뿔이 흩어지고 아, 쓸쓸하고 쓸쓸한지고 망국 서울의 가을날 한강의 물도 흐느끼느니 울음 삼켜 흐느끼며 연지를 외면한 채 바다 향해 흐르느니&amp;lt;/ref&amp;gt; 동아일보에는 김성수 외에도 장덕수와 송진우가 있었지만 그에게는 조선일보 폐간을 막기 위해 총독부와 교섭할 인물도 없었다.&lt;br /&gt;
&lt;br /&gt;
1938년 2월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선 내 일간신문 25개사로 조직된 조선춘추회의 창립에 창립발기인으로 참가했고, 조선춘추회 간사로 활동했다. 같은 해 7월 “국민정신을 총동원하고 내선일체 전 능력을 발휘하여 국책 수행에 협력하여 성전(聖戰)의 궁극적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조직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에 참여했고, 그날 결성된 경성연맹 창립총회에서 상담역을 맡았다. 9월부터 조선방공협회 경기도연합지부 평의원을 지냈다. 10월에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주최한 비상시 국민생활 개선을 위한 제1회 생활개선위원회에서 제2부(의례와 사회풍조 쇄신부)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그러나 1938년 10월부터 조선총독부는 조선일보의 신문용지를 검열, 통제하기 시작했다.&lt;br /&gt;
&lt;br /&gt;
1940년 5월 조선총독부 총독 미나미 지로가 방송담화로 창씨개명을 권고했다. 그러나 그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성씨를 이제 와서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며 창씨개명은 완강하게 거절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조선일보에 트집이 잡힐 일이 나타나지 않자 총독부는 전국 면사무소에 조선일보 신문 구독을 거절하도록 명령을 내렸고, 동시에 조선말을 쓰는 민원인에게는 일을 처리해주지 말도록 하게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3페이지&amp;lt;/ref&amp;gt; 조선총독부는 송진우의 예금통장을 문제삼았다. 송진우 명의의 은행저금이 동아일보의 8백여 개의 지국과 분국을 통해 모금된 독립운동 자금이라며, 그리고 동아일보 간부들이 백운장이라는 요정에서 회식을 한 것을 김성수 집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려 했다는 등의 이유로 백관수 동아일보 사장을 전격 구속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3~374페이지&amp;lt;/ref&amp;gt; 동아일보는 백관수가 구속된지 10일 만에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동아일보 중역회의를 열고 폐간신청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4페이지&amp;lt;/ref&amp;gt; 총독부는 조선일보에도 자진 폐간을 권고했고, 1940년 8월 9일 편집회의를 주관, 8월 10일 조선일보의 폐간계를 내고, 8월 10일자로 폐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5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잡지 발행 활동 ====&lt;br /&gt;
신문 강제 폐간 뒤 방응모는 간판을 조광사로 바꿔 걸고, 사옥은 동방흥업주식회사로 등기를 변경해서 유지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1페이지&amp;lt;/ref&amp;gt; 이후 그는 조광 잡지 발행에 전념했다. 1943년 8월 경 일본 중앙대학의 예과를 마친 방일영이 입사&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1페이지&amp;lt;/ref&amp;gt;, 필진으로 참여했다. [[조선일보]]가 폐간된 후에도 방응모는 벽초 홍명희 부자에게 지속적으로 생활비를 대주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4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4년 6월 29일 만해 [[한용운]]이 사망했다. 그는 심우장을 찾아가 3백원을 내놓았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5페이지&amp;lt;/ref&amp;gt;당시 쌀 10가마가 100원이었지만, 심우장은 당장 현금 1원이 없었는데 거액이라서 놀랐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6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광복 이후 언론 및 정치활동 ===&lt;br /&gt;
==== 광복 직후 ====&lt;br /&gt;
1945년 8.15 광복 후에는 8월 말과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朝鮮在外戰災同胞救濟會) 고문과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9월 초 [[안재홍]] 등이 좌경화되는 건준체제에 반발하여 건준을 탈퇴하자 방응모 역시 건준을 탈퇴하였다.&lt;br /&gt;
&lt;br /&gt;
9월 2일 미군정이 주둔하자, 방응모는 윤전기를 찾기 위해 폐간 당시의 증빙서류를 미 군정청에 제시하였으나 소식이 없었다. 총독부는 조선일보 폐간 직후 인수한 윤전기를 경성일보사에 옮겨서 설치했다. 그는 동방문화재단 외 4개 사업소를 적산으로 파악한 미군정을 설득하고, 사옥 문제도 해결하였다.&lt;br /&gt;
&lt;br /&gt;
10월 1일 조선일보 편집위원회를 구성하고, 신문 복간 운동을 추진했다. 조선총독부의 폐간 지시 당시 의정부로 옮겨놓은 일부 활자 자모음이 잘 보관되어, 그해 11월 23일 조선일보를 복간시키고, 서울신문사 사옥에서 조선일보 복간호를 간행하였다. 이후 조선사회문제대책중앙협의회 중앙위원을 거쳐 10월 16일 이승만 등의 주도로 독립촉성중앙회가 결성되자 독촉에 가입하였다.&lt;br /&gt;
&lt;br /&gt;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이 귀국하자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에 입당했다. 12월 [[안재홍]]의 추천으로 한국독립당의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출되어 3~4개월 동안 활동했다.&amp;lt;ref&amp;gt;일각에서는 방응모가 '한독당 재무부장으로 지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1947년부터 한독당 재무부장을 맡은 신창균이 전면 부정했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47/0000002626?sid=102 백범 비서와 '진짜' 한독당 재정부장의 육성증언. 참고.]&amp;lt;/ref&amp;gt; 그 뒤 대한국민총회 발기인, 대한독립애국금헌성회 발기인 등으로 활동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복간 및 군정기 활동 ====&lt;br /&gt;
11월 [[조선일보]]사를 복간시켰다. 그러나 한동안 조선일보의 인쇄는 서울신문사에서 간행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1945년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추념대회에 참여하였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2&amp;quot;&amp;gt;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13&amp;lt;/ref&amp;gt; 순국선열추념대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2&amp;quot; /&amp;gt;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참여,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이 되었다.&amp;lt;ref&amp;gt;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55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6년 2월 26일 서울신문사 공무국 종업원들이 조선일보의 인쇄를 거부해버렸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436페이지&amp;lt;/ref&amp;gt; 그동안 묵시적으로 방해가 은근히 있었다. 표면상의 문제는 임금 문제이나 내용상으로는 조선일보에 대한 조선공산당의 시위의 일종이었다. 사흘간의 교섭 끝에 2월 28일에 가서야 26일자와 27일자를 소급해서 인쇄하여 신문을 한꺼번에 발행하였다. 그러나 3월 1일과 2일에 또다시 인쇄를 거부당해 결국 휴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436페이지&amp;lt;/ref&amp;gt; 조선일보를 경성일보사로 옮겨서 인쇄하기로 하고 3월 5일자로 사고로 독자에게 알렸다.&lt;br /&gt;
&lt;br /&gt;
4월 29일 김구, 김창숙, 김성수, 오세창 등과 함께 서울운동장에서 윤봉길의사 추모회의 창립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amp;lt;ref&amp;gt;&amp;quot;故尹奉吉義士의 記念式 오늘, 發起人會 열고 準備&amp;quot;, 동아일보 1946년 4월 23일자 2면, 사회면&amp;lt;/ref&amp;gt; 그해 5월 조선공업구락부 고문에 위촉되었다.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民族統一總本部) 10인협의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6월 15일 오후 5시 40분 서울역에 마중나가 서울역에 도착한 삼의사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lt;br /&gt;
&lt;br /&gt;
1945년 광복 직후 서기원이 그를 찾아왔다. 서기원은 그때 경성농상실천학교의 동창회로부터 이 학교의 교장이 되어 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이다. 방응모는 서기원의 제의를 받아들여 1946년 8월 28일 동방문화학원 이사장으로 숭문상업학교를 인수, 재단 이사장이 되었다. 후일 방응모가 6.25 전쟁 중에 납북된 후 동방문화학원과 숭문중,고교의 재단은 최용진이 운영하다가 다시 1978년에 방일영에게 인수되었다.&lt;br /&gt;
&lt;br /&gt;
1947년 1월 21일 제5회 창립위원회를 본사에서 개최하고 2월 23일 주식회사 조선일보사 주주창립총회를 열고 대표이사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공동투자 경영자로 참여시킨 전무 이종민과의 알력이 발생했다. 이종민과의 갈등이 심화되자 그해 8월 3일 방응모는 일단 사직서를 제출했다. 1947년 8월 10일 풍문여고 강당에서 개최된 한인신문기자협회에 참석, 민족청년단에서 언론계 공로자로 방응모, 김성수, 설의식을 지정하여 상을 시상받았다.&amp;lt;ref&amp;gt;&amp;quot;朝鮮 新聞記者協會&amp;quot;, 동아일보 1947년 8월 10일자 2면, 사회면&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납북과 최후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 납북 후 행적은 &amp;quot;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amp;quot;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 1950년 8월경 개성 송악산 부근에서 미군의 폭격에 희생되었고 심한 폭격으로 시신을 찾을 수 없어 묘도 만들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남한에서는 1955년 7월 7일 생사불명기간 만료로 인해 실종 처리되었다.&lt;br /&gt;
&lt;br /&gt;
=== 사후 ===&lt;br /&gt;
서울 종로에 있던 양자 방재윤의 두 아들 방일영과 방우영은 방응모의 첩 이인숙이 찾아가 피신하라고 권고하여 황급히 피신했다. &lt;br /&gt;
&lt;br /&gt;
7월 6일 그의 행방불명처리가 되고, 방응모의 사후에도 [[조선일보]]는 그의 명의로 발행되었다. 1952년 4월 28일 조선일보는 발행인겸 편집인을 장기영으로, 인쇄인을 방일영으로, 방응모는 명예사장으로 명의변경하여 휴전 후 계속 발행하게 되었다. 1954년 4월 30일 제8회 조선일보 정기주주총회에서 장기영 사장이 사퇴하면서, 명예사장 방응모가 사장으로 추대되고, 발행인 겸 대표취체역에 방일영이 선임되었다. 이후 실종 후 1959년에 법적으로 사망 처리되었다. 그리고 1970년까지는 조선일보는 그의 이름으로 발행되었다.&lt;br /&gt;
&lt;br /&gt;
1970년 2월 19일 조선일보 정기주주총회에서 방응모 이사를 사퇴 수리하였다. 그의 피폭 사망 사실은 1970년대 이후 탈북자들을 통해 대한민국에 소개되었다.&lt;br /&gt;
&lt;br /&gt;
== 친일행위 의혹 ==&lt;br /&gt;
=== 일제 전시체제기 활동 ===&lt;br /&gt;
일제 강점기 말기 언론인으로서 총독부체제에 협력한 기록과 활동이 다수 기록이 있다. 1933년 3월 [[조선일보]] 경영권을 인수하고 부사장직에 취임했을 당시 같은 달에 고사기관총 구입비용 1600원을 군에 헌납하였다. 그는 1935년 친일 잡지 《조광 (잡지)(朝光)》을 창간하였고, 1937년에는 경성방송국 제2방송에 출연하여 일제가 중국의 베일을 절멸케하여 극동평화를 지키려고 한다는 강연을 하였다. 1940년대부터 조광에 집중적으로 친일 논설을 기고하고 시국 강연에 참여하여 전쟁 지원을 독려했다. 1942년 6월에는 '징병령 실시에 일층 더 감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글을 써서 조광에 발표하였다. 애국금차회(1937),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1938), 임전대책협의회(1941), 조선임전보국단(1941) 등 대표적인 친일 단체의 회원에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그는 이런 행적으로 인해 해방정국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명단에 기록되어 있고,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해 발표한 &amp;lt;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amp;gt;에 모두 포함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lt;br /&gt;
&lt;br /&gt;
우리 [[조선일보]]는 다른 어떤 신문도 따라오지 못하는 확고한 신념에서 비국민적 행위를 단연 배격하여 종국까지 조선일보사가 이미 정해놓은 방침에 한뜻으로 매진한다.|원산에서의 순회 강연&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9478.html 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친일 다짐하다 시민에 봉변]《한겨레》2005-08-24 오후 06:13:18&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반민족행위 논란 ===&lt;br /&gt;
방응모를 친일파로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남아 있다. 조선일보 경영 이전에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방응모의 활동이 거의 없었고, 납북된 뒤 소식이 끊겨버린 까닭에 본인이 항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 동안의 행적만으로 친일파 여부를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방응모의 후손들이 영향력 있는 [[조선일보]] 언론사의 사주를 맡았기에 그의 입장에서 서술한 기록을 많이 남기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80년 발간된 그의 전기 《계초 방응모》(조선일보사) 등에는 '그가 민족주의적 선각자'로 묘사되고 있다. 방응모가 친일파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일부세력측은 그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논거로 드는 경우가 많이 있다.&amp;lt;ref&amp;gt;유석재, 계간 《유심》 (2004년 봄호) [http://yousim.buddhism.org/html/2004-spr/tamgu-yoo-seok-jae.htm 삭풍 속에 피어난 금란지교(金蘭之交) - 만해와 계초 방응모]&amp;lt;/ref&amp;gt;&amp;lt;ref&amp;gt;&amp;quot;일제 말기 계초는 시국강연에 나설 것과 창씨개명을 집요하게 강요받았으나 그때마다 묵묵부답으로 거부하며 소신을 지켰다.&amp;quot; 《조선일보》 (2001.3) 조선일보 사장열전 - 계초 방응모편, 《한겨레》 (2001.3.30) [http://www.njoyschool.net/news/article_view.asp?menu_code=s20202&amp;amp;no=1206 조선일보, 일장기를 신문제호 위에]&amp;lt;/ref&amp;gt;&lt;br /&gt;
또한 한국정토학회 고문이자 서울 정토사 주지였던 박설산(1918~2007)이 학도병에 끌려가기 직전인 1943년 12월 28일 밤 서울역에서 스스로 왼발을 선로에 올려 발가락을 절단해 징집을 기피하자 방응모는 만해와 함께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설산을 걱정하면서 입원 중 조선일보 기자를 통해 돈을 전달한 것은 물론 퇴원할 때 돈을 전달하고 뒤를 보살폈다고 한다.&amp;lt;ref&amp;gt;박설산 회고록 &amp;lt;뚜껑없는 조선역사책&amp;gt;(1994, 도서출판 삼장) p240~241&amp;lt;/ref&amp;gt;&lt;br /&gt;
&lt;br /&gt;
2010년 12월, 방응모 관계자들 및 조선일보측은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을 취소해달라'며 법원에 낸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amp;quot;1944년 조선항공업 창립발기인으로 활동한 부분에 대해 친일행위로 판단한 부분을 취소하지만 나머지 활동에 대해서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amp;quot;라고 판결했다. 그 이유인 즉 &amp;quot;방응모는 1933년 조선일보 사장으로 취임해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등으로 활동하며 친일활동을 벌였으며, 1937년 경성방송국 시국강연에서 일본제국이 극동평화를 확립시킬 것이라는 내용의 강연을 하고, 1938년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춘추회의 발기인 겸 간사로 활동하기도 했다&amp;lt;ref&amp;gt;[http://media.daum.net/breakingnews/politics/view.html?cateid=1002&amp;amp;newsid=20101222103319164&amp;amp;p=newsis 법원 &amp;quot;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친일파 맞다&amp;quot;]뉴시스 2010년 12월 22일&amp;lt;/ref&amp;gt;&amp;quot;는 것이다.&lt;br /&gt;
&lt;br /&gt;
2012년 1월 12일 서울고법 행정7부는 방 전 사장의 손자인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이 행정안전부를 상대로 낸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처분 취소 청구소송에서 ‘일제 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의 친일 행위 판정 조항에 비추어 방 전 사장에게 적용된 모두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민족적 지도자로서 비중이 큰 만큼 그로 인한 책임도 무거울 뿐 아니라 고난의 시기를 겪은 민족으로서 그 역사를 반성하자는 입장에 설 때, 방 전 사장의 여러 행태는 반민특별법에서 규정한 친일반민족행위의 유형에 속함을 부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1·2심 재판부는 방 전 사장이 자신이 운영하던 잡지 &amp;lt;조광&amp;gt;에 일제 침략전쟁에 동조하고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문예물과 일제 침략전쟁에 협력할 것을 주문하는 논문을 게재하는 등의 ‘친일’ 행위를 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또한, 2심 재판부는 일본의 전쟁 수행을 돕기 위해 설립된 군수 제조업체 ‘조선항공공업’의 발기인과 감사를 지낸 것은 “감사는 업무집행에 관여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기관으로, 방 전 사장이 이 회사를 운영했다고 볼 수 있다”는 이유로 친일이라고 판단했다.&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4565.html법원 ‘방응모 친일’ 2심서도 인정] 인터넷한겨레 2010년 12월 22일&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기타 ==&lt;br /&gt;
그는 [[한용운]], 최남선, 정인보, 홍명희 등과 친분관계를 형성하고 어울려 지냈다 한다.&lt;br /&gt;
&lt;br /&gt;
김구의 한국독립당의 재정적 후견인 역할을 하였다 하며,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삼의사 유골봉환식 때 김구, 정인보 등과 촬영한 사진이 있다.&lt;br /&gt;
한편 임꺽정의 저자인 벽초 홍명희가 방응모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그와 깊은 친분을 맺었다는 주장이 있다. 《조광》 1938년 11월호엔 홍명희가 병중에 있는 방응모를 위로하며 지은 한시가 방응모의 답시와 함께 실려 있다고 한다.&amp;lt;ref&amp;gt;[http://weekly.chosun.com/site/data/html_dir/2004/11/05/2004110577041.html ‘임꺽정’으로 되살아난 독립운동의 魂! 주간조선 1827호 2004.11.04&amp;lt;/ref&amp;gt; 또한 [[안창호]]의 비서실장을 지낸 독립유공자 구익균은 방응모와 안창호가 친밀했다는 주장을 했다.&amp;lt;ref&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09/2008030901055.html &amp;quot;공산주의자들, 도산 비판하다가도 하숙비 떨어지면 찾아와&amp;quot;] 조선일보, 2008-03-10 03:22&amp;lt;/ref&amp;gt;&lt;br /&gt;
또한 박설산에 따르면 1943년 만해 한용운에게 학도병으로 끌려가게 되었음을 알리려 심우장으로 찾아가게 되었을 때, 한용운과 방응모가 바둑을 두고 곁에서 정인보가 훈수를 두고 있었다고 한다.&amp;lt;ref&amp;gt;박설산 저 &amp;lt;뚜껑없는 朝鮮 역사 책&amp;gt; p.226 도서출판 三藏(1994)&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 /&amp;gt;&lt;br /&gt;
&lt;br /&gt;
== 참고 자료 ==&lt;br /&gt;
* 청산하지 못한 역사: 언론 내세워 일제에 아부한 교화 정책의 하수인 (문영숙) (반민족문제연구소, 청년사, 1994)&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민족 계몽의 초석 방응모(이동욱 저, 지구촌, 1998)&lt;br /&gt;
* 계초 방응모전(계초전기간행위, 조선일보사, 1980년)&lt;br /&gt;
* 계초 방응모(이동욱, 방일영문화재단, 1996)&lt;br /&gt;
&lt;br /&gt;
== 외부 링크 ==&lt;br /&gt;
* [https://web.archive.org/web/20050123171046/http://chosunhost.com/ 계초방응모 기념사업회]&lt;br /&gt;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09145 &amp;lt;조선일보&amp;gt;, 방응모 전 사장의 '친일행적' 말한다] - 오마이뉴스 04.09.10일자&lt;br /&gt;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020302101749 방응모ㆍ 김성수 친일행적 뭔가 : &amp;lt;긴급입수&amp;gt;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 全文] - 프레시안 2002-03-02&lt;br /&gt;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54052 그가 '&amp;lt;조선&amp;gt;의 주인' 주장하는 이유] 오마이뉴스 2001년 9월 20일자&lt;br /&gt;
*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956 방재선씨, 호주·상속 원인무효소송 제기]&lt;br /&gt;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4/06/2008040601053.html '5인 친필 서첩' 발굴] 조선일보 2008년04월06일자]&lt;br /&gt;
&lt;br /&gt;
[[분류: 감자]]&lt;/div&gt;</summary>
		<author><name>Nsgjjsjsjy02</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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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방응모</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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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Nsgjjsjsjy02: /* 사회사업과 조선일보 인수 계획 */&lt;/p&gt;
&lt;hr /&gt;
&lt;div&gt;{|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width:100%&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0%&amp;quot;|사진&lt;br /&gt;
|[[파일:방응모.jpg|center|200픽셀]]&lt;br /&gt;
|+ '''방응모'''&lt;br /&gt;
|+ style=&amp;quot;caption-side:bottom;text-align:left:&amp;quot;|출처: 위키백과&lt;br /&gt;
|출생||1883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조선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또는 정부면 성내동&lt;br /&gt;
|-&lt;br /&gt;
|사망||1950년경으로 추정&lt;br /&gt;
|-&lt;br /&gt;
|사인||불명&lt;br /&gt;
|-&lt;br /&gt;
|거주지||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amp;gt; 경성부 -&amp;gt; 경기도 양주군 의정부읍&lt;br /&gt;
|-&lt;br /&gt;
|국적||대한민국&lt;br /&gt;
|-&lt;br /&gt;
|본관||온양&lt;br /&gt;
|-&lt;br /&gt;
|별칭||호: 계초(啓礎), 춘해(春海)&lt;br /&gt;
|-&lt;br /&gt;
|직업||교사, 변호사, 상인, 언론인, 기업인, 사회운동가, 정치가&lt;br /&gt;
|-&lt;br /&gt;
|배우자||승계도, 이인숙, 배영옥, 노효용&lt;br /&gt;
|-&lt;br /&gt;
|자녀||방재숙(딸), 방재욱·방재선·방재효·방재규(아들), 방재윤(양자)&lt;br /&gt;
|-&lt;br /&gt;
|부모||방계준(부), 온양박씨(모)&lt;br /&gt;
|}&lt;br /&gt;
&lt;br /&gt;
'''방응모'''(方應謨, 평안북도 정주군, 1883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 1950년 8월(추정)는 [[일제강점기]]의 교육자, 언론인, 법조인, 기업인이자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언론인이며 정치인이다. 호는 '''춘해'''(春海)이고, 뒤에 '''계초'''(啓礎)로 고쳤다.&lt;br /&gt;
&lt;br /&gt;
1922년 동아일보 정주 지국을 인수해 지국장을 지내다가 1924년 금광업에 뛰어들어 큰 부를 얻게 되었다. 1932년 6월 조선일보에 입사하였고 이후 영업국장이 되어 조선일보의 판매망을 장악하게 되고 경영권을 인수하면서 1933년 3월 조선일보 부사장이 되었다. 1933년 7월부터 1950년 7월까지 종신으로 [[조선일보]]의 사장을 역임하였다. 1935년 창간한 월간잡지 '조광(朝光)'은 친일 논란이 있다.&amp;lt;ref&amp;gt;안은필. [http://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9211 조선일보가 가장 빛나던 시기, ‘안재홍 시대’]&amp;lt;/ref&amp;gt;&amp;lt;ref name=&amp;quot;안은&amp;quot;&amp;gt;안은필. [http://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9279 방응모 친일증거, “모래밭에서 모래 찾기”]국민TV. 기사입력 2015년 4월 23일. 기사수정 2015년 4월 24일.&amp;lt;/ref&amp;gt;&amp;lt;ref&amp;gt;이민영.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1/0002255321?sid=102 고법 “방응모 前조선일보 사장 친일행적 대부분 인정”]. 서울신문. 2012년 1월 13일.&amp;lt;/ref&amp;gt;&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6/0000000413?sid=110 김성수ㆍ방응모와 친일언론인 군상]. 미디어오늘. 2002년 3월 12일.&amp;lt;/ref&amp;gt; 언론계에서 활동하면서도 사업가의 길을 함께 걸었고, 교육 장학 활동을 하였으며, 1945년 광복 직후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안재홍]]의 추천을 받아 한국독립당 중앙상무위원과 독립촉성국민회 총무부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amp;lt;ref name=&amp;quot;안은&amp;quot;/&amp;gt;&amp;lt;ref&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16/2008031600800.html 계초 방응모와의 우정도 여러 편의 시로 표현해&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해방 정국에서 김구의 재정적 후견인으로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등 삼의사 유골 봉환 사업과 신탁통치 반대 운동 등에 참여하여 활동했다.&lt;br /&gt;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 납북 후 행적은 &amp;quot;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amp;quot;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lt;br /&gt;
&lt;br /&gt;
== 생애 ==&lt;br /&gt;
=== 생애 초기 ===&lt;br /&gt;
==== 출생과 성장 ====&lt;br /&gt;
방응모는 1883년 11월 3일 또는 9월 29일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바우머리 부락 또는 정주군 정부면 성내동 425번지에서 '''방계준(方桂準)'''과 온양 박씨(溫陽朴氏)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어려서 빈곤한 가정환경으로 방응모는 정규 학교에는 입학하지 못하고, 16세 때까지 서당에 드나들며 한학을 익혔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던 중 그가 어느 정도 실력이 우수하다고 인정되자, 스승인 승창률은 잠시 방응모에게 어린아이들을 돌보게 한 후 자리를 피하곤 했다 한다. 그는 홀로 사서육경을 탐독, 독파하였다. 21세 무렵 잠시 서당 훈장을 지내기도 했다. 우연히 경성부에 갔다가 신문물을 보고 충격을 받아 17세에 독학으로 신학문과 일본어, 중국어, 수학 등을 독파하였다.&lt;br /&gt;
&lt;br /&gt;
유년시절 서당의 성리학 스승이던 승창률의 친척인 승시영(承時榮)과 조씨(趙氏)의 딸 승계도와 결혼했다. 결혼한 다음 해에도 그는 공부를 한다며 책만 사다 읽곤 했고, 부인 승계도는 생계를 위해 몸소 나섰다. 그의 아내는 남편에 대한 믿음이 절대적이었고 탓을 하거나 가출하지 않았다.&lt;br /&gt;
&lt;br /&gt;
=== 언론, 기업 활동 ===&lt;br /&gt;
==== 계몽 활동과 언론 활동 ====&lt;br /&gt;
1915년부터 1924년 방응모는 지역 지식인들, 유학파 청년, 계몽 청년들이 모여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하는데 참여했다. 민립대학기성회에서 활동하면서 조만식 등과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언변과 용모가 되었던 그의 여관에도 손님들이 몰렸고, 그가 &amp;quot;2백원도 좋고 5백원도 좋다며 보태달라&amp;lt;ref name=&amp;quot;fsfs87&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7페이지&amp;lt;/ref&amp;gt;&amp;quot;고 하면 기부금을 내는 이들이 있었다. 1919년 정주에서 3.1 만세 운동이 벌어지자, 그도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형사들의 눈을 피해 방응모는 만세운동을 하다 재빨리 몸을 피해 화를 면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8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22년 6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인수하여 분국장에 취임했다. 그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경영하는 동시에 그는 농촌 계몽운동 등에 적극 참여했다. 1922년 6월 19일&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96페이지&amp;lt;/ref&amp;gt; 동아일보 본사를 설득하여 정주분국을 동아일보사 정주지국으로 승격시켰다. 동아일보사 지부장 재직 시 그는 민립 대학 설립 자금과 농촌진흥회 회원의 여비 및 당시 운영난에 처했던 오산학교의 재개교 등을 계획했다. 총독부의 거부로 실패한 대학 설립 자금은 고스란히 오산학교의 부활 자금으로 투입되었다.&lt;br /&gt;
&lt;br /&gt;
1923년 동아일보 정주군 분국이 지국으로 승격되자 정주국을 경영하였고, 같은 해 7월 여성들의 사회 참여와 평등권 신장을 위한 여자교육회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이후 대규모 수해가 나자, 정주군 수해구제회를 결성하여 봉사활동에 가담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 광업 경영과 조선일보 입사 ====&lt;br /&gt;
1924년 친구 전우현이 방응모와도 안면이 있던 금광 채굴업자 두 명을 데리고 그를 찾아왔다. 그들은 자신들이 봐 둔 산이 있다고 방응모에게 소개했다. 이후 광산업에 뛰어들어 1924년 여름 압록강변의 폐금광인 평안북도 삭주군 외남면 교동 다릿골의의 삭주 교동광업소를 찾아가 10미터 정도 땅을 파고 금맥을 발견했다. 곧 삭주 교동광업소를 인수, 경영을 확대하였다. 이때 만난 동업자의 딸이자 친구 전우현의 조카딸인 '''이인숙(李仁淑)'''을 만났다. 본처 승계도가 두 아들을 잃고 복부 수술이 잘못되어 아이를 얻지 못하게 되자 방응모에게도 수많은 중매가 들어왔다. 자식들을 병으로 잃은 것이 자신의 불찰이라고 본 승계도는 그에게 작은 부인이라도 들이자는 말을 꺼내기도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18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26년 방응모에게 광산 사업을 제안했던 두 친구가 손을 털고 나갔고, 그의 가족은 돈이 없어 쌀 대신 좁쌀로 좁쌀죽을 먹으며 연명해야 했다. 방응모는 정주군에 사는 비슷한 또래의 먼 친척 방상진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고, 방상진과 일꾼 대여섯 명, 그리고 후처 이인숙의 친정 쪽에서 얻어온 토지문서를 얻어 자금을 마련했고 다시 금광을 채굴했다. 그 후 1926년 7월 지하 300m 지점에서 금맥을 확보했고, 이후 연간 300kg의 금을 생산하여 벼락부자가 되었다.&lt;br /&gt;
&lt;br /&gt;
1928년 방응모는 자신의 아호를 딴 춘해 장학회를 만들고 장학생들의 모임인 이심회를 만든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48페이지&amp;lt;/ref&amp;gt; 1928년에 그는 의정부 직동, 흥선대원군의 별장이 있던 곳 바로 뒤에 위치한 건물을 매입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한용운]], 홍명희를 자주 초대했다.&lt;br /&gt;
&lt;br /&gt;
1932년 방응모는 교동광산을 135만원이란 거액에 일본 중외광업주식회사에 매각했다. 그 뒤 1932년 6월부터 조선일보 영업국장으로 활동하다 1933년 3월 [[조선일보]]의 경영권을 인수하여 부사장에 취임하였다.&lt;br /&gt;
그는 교동광업소를 운영하며 모은 재력을 바탕으로 부사장 재직 중 [[조선일보]]의 대주주가 되었으며, 1933년 7월 8대 사주 조만식으로부터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제9대 [[조선일보]] 사주로 취임, 활동했다.&amp;lt;ref&amp;gt;조선일보는 1932년 7월에 조만식을 사장으로 영입했지만, 조만식은 거의 평생을 평양에서 살아왔던데다 서울에서 활동하기에는 적응을 잘하지 못했다. 조만식은 신문사 경영난과 지역감정의 혹독한 시련을 받은 채 9개월만에 퇴사했다. 그리고 조만식 후임으로 1933년, 방응모를 사장으로 추대하기에 이르렀다.&amp;lt;/ref&amp;gt;&amp;lt;ref&amp;gt;《한국사 시민강좌 제47집, 대표적 독립운동가 12인》,일조각. p145&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언론, 사업 활동 ===&lt;br /&gt;
==== 사회사업과 조선일보 인수 계획 ====&lt;br /&gt;
[[파일:방응모장학생.jpg|섬네일|160px|오른쪽|방응모와 그의 장학금을 받던 학생들. 가운데 앉은 이가 방응모이고, 서있는 이들 중 왼쪽에서 두 번째는 방응모의 양자 방재윤.]]&lt;br /&gt;
&lt;br /&gt;
1930년 배영옥과 결혼하여 딸 방재숙을 얻었다. 1932년 광산업을 정리하였고 언론사업을 비롯하여 육영사업과 조림 및 간척사업 등을 벌였다. 또한 고아원과 사회복지단체에 후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933년 무렵 방응모가 [[조선일보]] 인수에 나서기 전부터 그는 [[한용운]]을 위한 일이라면 돈을 아끼지 않고 지출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성북동 언덕에 만해 한용운을 위해 기와집 한 채를 지어주었는데 [[심우장]](尋牛莊)이 그것이다. 또한 만해가 일제의 배급을 거부해 생활이 어려워지자 생활비를 지원했던 방응모는 그가 병석에 누운 1944년에는 치료비를 지원해주기도 했다.&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6/0000043262?sid=103 만해가 일송 선생 5일장 치른 사연]&amp;lt;/ref&amp;gt; 그 외에도 방응모는 만해 한용운·벽초 홍명희 등과 함께 새해가 되면 백천온천에도 같이 다녀올 정도로 가까운 관계였다.&lt;br /&gt;
&lt;br /&gt;
1932년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사건으로 체포된 [[안창호]]의 사면 탄원과 보석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총독부 경무국장은 그의 안창호 석방 제안을 정중히 거절한다.&lt;br /&gt;
&lt;br /&gt;
1936년 동방문화학원(숭문중학교·고등학교 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에 취임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인수와 경영 ====&lt;br /&gt;
1933년 1월 16일 그는 정식으로 주식회사 [[조선일보]]사를 창립, 1월 18일에 발표된 창립 취지서에는 창립위원장 방응모, 창립발기인 방응모, 조만식, 고일청 외 등이 참여했다. 일단 그는 조만식을 사장으로 임명하고 자신은 부사장으로 있다가, 그해 3월 13일 다시 부사장에 취임했다. 4월 25일 편집인 겸 발행인이 되고, 4월 29일에는 조선일보의 조간, 석간제 발행을 부활, 확정시켰다. 1933년 7월 10일 총독부로부터 조선일보사의 법인 등록 승인을 얻어냈다. 7월 10일 조만식의 사퇴로, [[조선일보]]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다. 1933년 그는 자신의 아호를 춘해에서 계초로 바꾸었다. 그는 유능한 문인, 필진의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 상금 1천 원을 걸고 작가를 영입하였다.&lt;br /&gt;
&lt;br /&gt;
1934년 3월 25일 이광수를 비롯하여 서춘, 김동진, 함상훈, 신태익 등을 [[조선일보]]로 영입해 왔다. 그 외에도 정주군 출신 언론인, 작가들이 조선일보로 많이 오게 되었다. 이후 동아일보와 갈등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이광수가 조선일보로 옮겨와 부사장직에서 9개월 근무했다. 당시 조선일보 내부에서는 문모 라는 이가 이광수의 등장으로 자신의 입지 약화를 우려해 오랫동안 이광수를 내보내려 흉계를 꾸몄다고 한다. 이광수는 1934년 5월 25일자로 돌연 사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65페이지&amp;lt;/ref&amp;gt; 문모는 그에게 오히려 잘 됐다는 식으로 말하다가 방응모에게 호되게 혼이 났다. 그리고 문모로 하여금 즉시 금강산에 들어가 이광수를 다시 데려오게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65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이광수는 아들 봉근(당시 8살)의 사망 등으로 실의에 빠졌고, 1935년에 가서야 이광수를 조선일보 고문이자 필진으로 재영입하게 됐다.&lt;br /&gt;
&lt;br /&gt;
==== 동방문화학원 재단 설립 ====&lt;br /&gt;
방응모는 1936년 방농장의 소유권을 기본 자산으로 하는 재단법인 동방문화학원(東邦文化學院)을 설립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6페이지&amp;lt;/ref&amp;gt; 동방문화학원은 학교 법인으로 인가된 재단 법인으로, 그뒤 고계학원과 인연을 가지고 1936년부터는 보성고등보통학교를 후견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 분리되었다. 그뒤 방응모 장학생인 서중회 회원들을 위한 방응모 장학사업을 주관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7페이지&amp;lt;/ref&amp;gt;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태평로 구 조선일보 사옥 안에 동방문화학원의 간판을 달고 조광 잡지를 계속 발행하는 조광사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7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일제 강점기 후반 ===&lt;br /&gt;
==== 중일 전쟁 전후 ====&lt;br /&gt;
중일전쟁 개전 직후인 1937년 7월 11일에 열린 [[조선일보]] 간부회의에서 주필 서춘이 '일본군, 중국군, 장개석씨'등으로 쓰던 용어를 '아군, 황군, 지나, 장개석'으로 고치고 일본 국민의 입장에서 논설을 쓸 것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편집국장 김형원과 영업국장 김광수가 적극 반대를 하기도 했으나, 방응모는 '일장기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이미 몇 십만 원의 손해를 보았을 뿐 아니라 [[3.1 운동]] 때처럼 신문이 민중을 지도할 수 없다'면서 서춘의 입장을 지지했다. 한편으로 방응모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된 [[안창호]]를 [[조선일보]]에 영입하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안창호는 옥중에서 얻은 간질환과 폐질환 등으로 고생했고, 진료비 등을 수시로 지원하고 문병했음에도 출옥후 얼마 뒤에 사망한다.&lt;br /&gt;
&lt;br /&gt;
1933년 이심회(以心會：후에 序中會, 방응모장학회 등으로 명칭이 바뀜)라는 장학회를 만들어 국내 대학생과 해외유학생들에게 학자금을 지급하기도 했으며, 재단법인 동방문화학원(東方文化學院：지금의 숭문중·고등학교 전신)의 이사장직을 맡기도 했다. 또한 자신의 막대한 재원을 들여 1936년부터 함경남도 영흥군 일대에 당시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대단위 조림사업을 벌였으며, 그 전 해인 1935년부터는 경기도 수원군 팔탄면 일대에서 만 2년간에 걸친 간척사업을 벌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937년 12월 24일 [[안창호]]는 병보석 판정을 받고 재판소가 지정한 현 서울대학교병원인 경성제국대학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안창호의 입원 중에 시중을 든 사람으로는 안창호의 외조카 김순원과 청년 박정호 두 사람이었고, 나중에는 이응준 장군의 부인 이정희가 끝까지 지성껏 간호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7페이지&amp;lt;/ref&amp;gt; [[안창호]]는 병상에서 병원비 문제로도 고초를 겪었다. 이 때문에 조만식은 일본 경찰로부터 안창호의 병원비를 대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음에도, &amp;quot;내가 먹고 살면서 그 선생을 돌보지 않을 수 없다&amp;quot;며 완강히 거절하고 안창호를 도왔다고 한다. 안창호의 간호를 같이 도와주던 이응준 장군 부인 이정희는 10일마다 계산되어 나오는 병원 입원비로 안창호 선생이 괴로워하는 표정을 지켜볼수 없었다고 진술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8페이지&amp;lt;/ref&amp;gt; 방응모는 5백원의 수표 한 장을 안창호에게 전달하였다. 50일간의 입원비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9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안창호]]는 1938년 3월 10일 밤 12시 경성제국대학 병원에서 운명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폐간 사건 ====&lt;br /&gt;
일본의 전쟁이 격화되면서 조선총독부 공보국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1940년에 강제로 폐간조치 했다. 광산을 팔아서 자신의 모든 것을 조선일보에 바쳤던 방응모는 큰 절망과 좌절을 느껴야 했다. [[한용운]]은 ‘신문이 폐간되다/ 붓이 꺾이어 모든 일이 끝나니…’로 시작하는 시를 지어 방응모를 위로했다. &amp;lt;ref&amp;gt;붓이 꺾이어 모든 일 끝나니 이제는 재갈 물린 사람들 뿔뿔이 흩어지고 아, 쓸쓸하고 쓸쓸한지고 망국 서울의 가을날 한강의 물도 흐느끼느니 울음 삼켜 흐느끼며 연지를 외면한 채 바다 향해 흐르느니&amp;lt;/ref&amp;gt; 동아일보에는 김성수 외에도 장덕수와 송진우가 있었지만 그에게는 조선일보 폐간을 막기 위해 총독부와 교섭할 인물도 없었다.&lt;br /&gt;
&lt;br /&gt;
1938년 2월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선 내 일간신문 25개사로 조직된 조선춘추회의 창립에 창립발기인으로 참가했고, 조선춘추회 간사로 활동했다. 같은 해 7월 “국민정신을 총동원하고 내선일체 전 능력을 발휘하여 국책 수행에 협력하여 성전(聖戰)의 궁극적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조직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에 참여했고, 그날 결성된 경성연맹 창립총회에서 상담역을 맡았다. 9월부터 조선방공협회 경기도연합지부 평의원을 지냈다. 10월에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주최한 비상시 국민생활 개선을 위한 제1회 생활개선위원회에서 제2부(의례와 사회풍조 쇄신부)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그러나 1938년 10월부터 조선총독부는 조선일보의 신문용지를 검열, 통제하기 시작했다.&lt;br /&gt;
&lt;br /&gt;
1940년 5월 조선총독부 총독 미나미 지로가 방송담화로 창씨개명을 권고했다. 그러나 그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성씨를 이제 와서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며 창씨개명은 완강하게 거절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조선일보에 트집이 잡힐 일이 나타나지 않자 총독부는 전국 면사무소에 조선일보 신문 구독을 거절하도록 명령을 내렸고, 동시에 조선말을 쓰는 민원인에게는 일을 처리해주지 말도록 하게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3페이지&amp;lt;/ref&amp;gt; 조선총독부는 송진우의 예금통장을 문제삼았다. 송진우 명의의 은행저금이 동아일보의 8백여 개의 지국과 분국을 통해 모금된 독립운동 자금이라며, 그리고 동아일보 간부들이 백운장이라는 요정에서 회식을 한 것을 김성수 집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려 했다는 등의 이유로 백관수 동아일보 사장을 전격 구속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3~374페이지&amp;lt;/ref&amp;gt; 동아일보는 백관수가 구속된지 10일 만에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동아일보 중역회의를 열고 폐간신청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4페이지&amp;lt;/ref&amp;gt; 총독부는 조선일보에도 자진 폐간을 권고했고, 1940년 8월 9일 편집회의를 주관, 8월 10일 조선일보의 폐간계를 내고, 8월 10일자로 폐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5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잡지 발행 활동 ====&lt;br /&gt;
신문 강제 폐간 뒤 방응모는 간판을 조광사로 바꿔 걸고, 사옥은 동방흥업주식회사로 등기를 변경해서 유지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1페이지&amp;lt;/ref&amp;gt; 이후 그는 조광 잡지 발행에 전념했다. 1943년 8월 경 일본 중앙대학의 예과를 마친 방일영이 입사&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1페이지&amp;lt;/ref&amp;gt;, 필진으로 참여했다. [[조선일보]]가 폐간된 후에도 방응모는 벽초 홍명희 부자에게 지속적으로 생활비를 대주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4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4년 6월 29일 만해 [[한용운]]이 사망했다. 그는 심우장을 찾아가 3백원을 내놓았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5페이지&amp;lt;/ref&amp;gt;당시 쌀 10가마가 100원이었지만, 심우장은 당장 현금 1원이 없었는데 거액이라서 놀랐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6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광복 이후 언론 및 정치활동 ===&lt;br /&gt;
==== 광복 직후 ====&lt;br /&gt;
1945년 8.15 광복 후에는 8월 말과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朝鮮在外戰災同胞救濟會) 고문과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9월 초 [[안재홍]] 등이 좌경화되는 건준체제에 반발하여 건준을 탈퇴하자 방응모 역시 건준을 탈퇴하였다.&lt;br /&gt;
&lt;br /&gt;
9월 2일 미군정이 주둔하자, 방응모는 윤전기를 찾기 위해 폐간 당시의 증빙서류를 미 군정청에 제시하였으나 소식이 없었다. 총독부는 조선일보 폐간 직후 인수한 윤전기를 경성일보사에 옮겨서 설치했다. 그는 동방문화재단 외 4개 사업소를 적산으로 파악한 미군정을 설득하고, 사옥 문제도 해결하였다.&lt;br /&gt;
&lt;br /&gt;
10월 1일 조선일보 편집위원회를 구성하고, 신문 복간 운동을 추진했다. 조선총독부의 폐간 지시 당시 의정부로 옮겨놓은 일부 활자 자모음이 잘 보관되어, 그해 11월 23일 조선일보를 복간시키고, 서울신문사 사옥에서 조선일보 복간호를 간행하였다. 이후 조선사회문제대책중앙협의회 중앙위원을 거쳐 10월 16일 이승만 등의 주도로 독립촉성중앙회가 결성되자 독촉에 가입하였다.&lt;br /&gt;
&lt;br /&gt;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이 귀국하자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에 입당했다. 12월 [[안재홍]]의 추천으로 한국독립당의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출되어 3~4개월 동안 활동했다.&amp;lt;ref&amp;gt;일각에서는 방응모가 '한독당 재무부장으로 지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1947년부터 한독당 재무부장을 맡은 신창균이 전면 부정했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47/0000002626?sid=102 백범 비서와 '진짜' 한독당 재정부장의 육성증언. 참고.]&amp;lt;/ref&amp;gt; 그 뒤 대한국민총회 발기인, 대한독립애국금헌성회 발기인 등으로 활동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복간 및 군정기 활동 ====&lt;br /&gt;
11월 [[조선일보]]사를 복간시켰다. 그러나 한동안 조선일보의 인쇄는 서울신문사에서 간행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1945년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추념대회에 참여하였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2&amp;quot;&amp;gt;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13&amp;lt;/ref&amp;gt; 순국선열추념대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2&amp;quot; /&amp;gt;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참여,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이 되었다.&amp;lt;ref&amp;gt;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55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6년 2월 26일 서울신문사 공무국 종업원들이 조선일보의 인쇄를 거부해버렸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436페이지&amp;lt;/ref&amp;gt; 그동안 묵시적으로 방해가 은근히 있었다. 표면상의 문제는 임금 문제이나 내용상으로는 조선일보에 대한 조선공산당의 시위의 일종이었다. 사흘간의 교섭 끝에 2월 28일에 가서야 26일자와 27일자를 소급해서 인쇄하여 신문을 한꺼번에 발행하였다. 그러나 3월 1일과 2일에 또다시 인쇄를 거부당해 결국 휴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436페이지&amp;lt;/ref&amp;gt; 조선일보를 경성일보사로 옮겨서 인쇄하기로 하고 3월 5일자로 사고로 독자에게 알렸다.&lt;br /&gt;
&lt;br /&gt;
4월 29일 김구, 김창숙, 김성수, 오세창 등과 함께 서울운동장에서 윤봉길의사 추모회의 창립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amp;lt;ref&amp;gt;&amp;quot;故尹奉吉義士의 記念式 오늘, 發起人會 열고 準備&amp;quot;, 동아일보 1946년 4월 23일자 2면, 사회면&amp;lt;/ref&amp;gt; 그해 5월 조선공업구락부 고문에 위촉되었다.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民族統一總本部) 10인협의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6월 15일 오후 5시 40분 서울역에 마중나가 서울역에 도착한 삼의사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lt;br /&gt;
&lt;br /&gt;
1945년 광복 직후 서기원이 그를 찾아왔다. 서기원은 그때 경성농상실천학교의 동창회로부터 이 학교의 교장이 되어 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이다. 방응모는 서기원의 제의를 받아들여 1946년 8월 28일 동방문화학원 이사장으로 숭문상업학교를 인수, 재단 이사장이 되었다. 후일 방응모가 6.25 전쟁 중에 납북된 후 동방문화학원과 숭문중,고교의 재단은 최용진이 운영하다가 다시 1978년에 방일영에게 인수되었다.&lt;br /&gt;
&lt;br /&gt;
1947년 1월 21일 제5회 창립위원회를 본사에서 개최하고 2월 23일 주식회사 조선일보사 주주창립총회를 열고 대표이사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공동투자 경영자로 참여시킨 전무 이종민과의 알력이 발생했다. 이종민과의 갈등이 심화되자 그해 8월 3일 방응모는 일단 사직서를 제출했다. 1947년 8월 10일 풍문여고 강당에서 개최된 한인신문기자협회에 참석, 민족청년단에서 언론계 공로자로 방응모, 김성수, 설의식을 지정하여 상을 시상받았다.&amp;lt;ref&amp;gt;&amp;quot;朝鮮 新聞記者協會&amp;quot;, 동아일보 1947년 8월 10일자 2면, 사회면&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납북과 최후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 납북 후 행적은 &amp;quot;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amp;quot;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 1950년 8월경 개성 송악산 부근에서 미군의 폭격에 희생되었고 심한 폭격으로 시신을 찾을 수 없어 묘도 만들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남한에서는 1955년 7월 7일 생사불명기간 만료로 인해 실종 처리되었다.&lt;br /&gt;
&lt;br /&gt;
=== 사후 ===&lt;br /&gt;
서울 종로에 있던 양자 방재윤의 두 아들 방일영과 방우영은 방응모의 첩 이인숙이 찾아가 피신하라고 권고하여 황급히 피신했다. &lt;br /&gt;
&lt;br /&gt;
7월 6일 그의 행방불명처리가 되고, 방응모의 사후에도 [[조선일보]]는 그의 명의로 발행되었다. 1952년 4월 28일 조선일보는 발행인겸 편집인을 장기영으로, 인쇄인을 방일영으로, 방응모는 명예사장으로 명의변경하여 휴전 후 계속 발행하게 되었다. 1954년 4월 30일 제8회 조선일보 정기주주총회에서 장기영 사장이 사퇴하면서, 명예사장 방응모가 사장으로 추대되고, 발행인 겸 대표취체역에 방일영이 선임되었다. 이후 실종 후 1959년에 법적으로 사망 처리되었다. 그리고 1970년까지는 조선일보는 그의 이름으로 발행되었다.&lt;br /&gt;
&lt;br /&gt;
1970년 2월 19일 조선일보 정기주주총회에서 방응모 이사를 사퇴 수리하였다. 그의 피폭 사망 사실은 1970년대 이후 탈북자들을 통해 대한민국에 소개되었다.&lt;br /&gt;
&lt;br /&gt;
== 친일행위 의혹 ==&lt;br /&gt;
=== 일제 전시체제기 활동 ===&lt;br /&gt;
일제 강점기 말기 언론인으로서 총독부체제에 협력한 기록과 활동이 다수 기록이 있다. 1933년 3월 [[조선일보]] 경영권을 인수하고 부사장직에 취임했을 당시 같은 달에 고사기관총 구입비용 1600원을 군에 헌납하였다. 그는 1935년 친일 잡지 《조광 (잡지)(朝光)》을 창간하였고, 1937년에는 경성방송국 제2방송에 출연하여 일제가 중국의 베일을 절멸케하여 극동평화를 지키려고 한다는 강연을 하였다. 1940년대부터 조광에 집중적으로 친일 논설을 기고하고 시국 강연에 참여하여 전쟁 지원을 독려했다. 1942년 6월에는 '징병령 실시에 일층 더 감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글을 써서 조광에 발표하였다. 애국금차회(1937),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1938), 임전대책협의회(1941), 조선임전보국단(1941) 등 대표적인 친일 단체의 회원에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그는 이런 행적으로 인해 해방정국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명단에 기록되어 있고,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해 발표한 &amp;lt;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amp;gt;에 모두 포함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lt;br /&gt;
&lt;br /&gt;
우리 [[조선일보]]는 다른 어떤 신문도 따라오지 못하는 확고한 신념에서 비국민적 행위를 단연 배격하여 종국까지 조선일보사가 이미 정해놓은 방침에 한뜻으로 매진한다.|원산에서의 순회 강연&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9478.html 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친일 다짐하다 시민에 봉변]《한겨레》2005-08-24 오후 06:13:18&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반민족행위 논란 ===&lt;br /&gt;
방응모를 친일파로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남아 있다. 조선일보 경영 이전에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방응모의 활동이 거의 없었고, 납북된 뒤 소식이 끊겨버린 까닭에 본인이 항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 동안의 행적만으로 친일파 여부를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방응모의 후손들이 영향력 있는 [[조선일보]] 언론사의 사주를 맡았기에 그의 입장에서 서술한 기록을 많이 남기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80년 발간된 그의 전기 《계초 방응모》(조선일보사) 등에는 '그가 민족주의적 선각자'로 묘사되고 있다. 방응모가 친일파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일부세력측은 그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논거로 드는 경우가 많이 있다.&amp;lt;ref&amp;gt;유석재, 계간 《유심》 (2004년 봄호) [http://yousim.buddhism.org/html/2004-spr/tamgu-yoo-seok-jae.htm 삭풍 속에 피어난 금란지교(金蘭之交) - 만해와 계초 방응모]&amp;lt;/ref&amp;gt;&amp;lt;ref&amp;gt;&amp;quot;일제 말기 계초는 시국강연에 나설 것과 창씨개명을 집요하게 강요받았으나 그때마다 묵묵부답으로 거부하며 소신을 지켰다.&amp;quot; 《조선일보》 (2001.3) 조선일보 사장열전 - 계초 방응모편, 《한겨레》 (2001.3.30) [http://www.njoyschool.net/news/article_view.asp?menu_code=s20202&amp;amp;no=1206 조선일보, 일장기를 신문제호 위에]&amp;lt;/ref&amp;gt;&lt;br /&gt;
또한 한국정토학회 고문이자 서울 정토사 주지였던 박설산(1918~2007)이 학도병에 끌려가기 직전인 1943년 12월 28일 밤 서울역에서 스스로 왼발을 선로에 올려 발가락을 절단해 징집을 기피하자 방응모는 만해와 함께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설산을 걱정하면서 입원 중 조선일보 기자를 통해 돈을 전달한 것은 물론 퇴원할 때 돈을 전달하고 뒤를 보살폈다고 한다.&amp;lt;ref&amp;gt;박설산 회고록 &amp;lt;뚜껑없는 조선역사책&amp;gt;(1994, 도서출판 삼장) p240~241&amp;lt;/ref&amp;gt;&lt;br /&gt;
&lt;br /&gt;
2010년 12월, 방응모 관계자들 및 조선일보측은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을 취소해달라'며 법원에 낸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amp;quot;1944년 조선항공업 창립발기인으로 활동한 부분에 대해 친일행위로 판단한 부분을 취소하지만 나머지 활동에 대해서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amp;quot;라고 판결했다. 그 이유인 즉 &amp;quot;방응모는 1933년 조선일보 사장으로 취임해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등으로 활동하며 친일활동을 벌였으며, 1937년 경성방송국 시국강연에서 일본제국이 극동평화를 확립시킬 것이라는 내용의 강연을 하고, 1938년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춘추회의 발기인 겸 간사로 활동하기도 했다&amp;lt;ref&amp;gt;[http://media.daum.net/breakingnews/politics/view.html?cateid=1002&amp;amp;newsid=20101222103319164&amp;amp;p=newsis 법원 &amp;quot;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친일파 맞다&amp;quot;]뉴시스 2010년 12월 22일&amp;lt;/ref&amp;gt;&amp;quot;는 것이다.&lt;br /&gt;
&lt;br /&gt;
2012년 1월 12일 서울고법 행정7부는 방 전 사장의 손자인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이 행정안전부를 상대로 낸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처분 취소 청구소송에서 ‘일제 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의 친일 행위 판정 조항에 비추어 방 전 사장에게 적용된 모두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민족적 지도자로서 비중이 큰 만큼 그로 인한 책임도 무거울 뿐 아니라 고난의 시기를 겪은 민족으로서 그 역사를 반성하자는 입장에 설 때, 방 전 사장의 여러 행태는 반민특별법에서 규정한 친일반민족행위의 유형에 속함을 부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1·2심 재판부는 방 전 사장이 자신이 운영하던 잡지 &amp;lt;조광&amp;gt;에 일제 침략전쟁에 동조하고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문예물과 일제 침략전쟁에 협력할 것을 주문하는 논문을 게재하는 등의 ‘친일’ 행위를 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또한, 2심 재판부는 일본의 전쟁 수행을 돕기 위해 설립된 군수 제조업체 ‘조선항공공업’의 발기인과 감사를 지낸 것은 “감사는 업무집행에 관여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기관으로, 방 전 사장이 이 회사를 운영했다고 볼 수 있다”는 이유로 친일이라고 판단했다.&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4565.html법원 ‘방응모 친일’ 2심서도 인정] 인터넷한겨레 2010년 12월 22일&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기타 ==&lt;br /&gt;
그는 [[한용운]], 최남선, 정인보, 홍명희 등과 친분관계를 형성하고 어울려 지냈다 한다.&lt;br /&gt;
&lt;br /&gt;
김구의 한국독립당의 재정적 후견인 역할을 하였다 하며,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삼의사 유골봉환식 때 김구, 정인보 등과 촬영한 사진이 있다.&lt;br /&gt;
한편 임꺽정의 저자인 벽초 홍명희가 방응모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그와 깊은 친분을 맺었다는 주장이 있다. 《조광》 1938년 11월호엔 홍명희가 병중에 있는 방응모를 위로하며 지은 한시가 방응모의 답시와 함께 실려 있다고 한다.&amp;lt;ref&amp;gt;[http://weekly.chosun.com/site/data/html_dir/2004/11/05/2004110577041.html ‘임꺽정’으로 되살아난 독립운동의 魂! 주간조선 1827호 2004.11.04&amp;lt;/ref&amp;gt; 또한 [[안창호]]의 비서실장을 지낸 독립유공자 구익균은 방응모와 안창호가 친밀했다는 주장을 했다.&amp;lt;ref&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09/2008030901055.html &amp;quot;공산주의자들, 도산 비판하다가도 하숙비 떨어지면 찾아와&amp;quot;] 조선일보, 2008-03-10 03:22&amp;lt;/ref&amp;gt;&lt;br /&gt;
또한 박설산에 따르면 1943년 만해 한용운에게 학도병으로 끌려가게 되었음을 알리려 심우장으로 찾아가게 되었을 때, 한용운과 방응모가 바둑을 두고 곁에서 정인보가 훈수를 두고 있었다고 한다.&amp;lt;ref&amp;gt;박설산 저 &amp;lt;뚜껑없는 朝鮮 역사 책&amp;gt; p.226 도서출판 三藏(1994)&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 /&amp;gt;&lt;br /&gt;
&lt;br /&gt;
== 참고 자료 ==&lt;br /&gt;
* 청산하지 못한 역사: 언론 내세워 일제에 아부한 교화 정책의 하수인 (문영숙) (반민족문제연구소, 청년사, 1994)&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민족 계몽의 초석 방응모(이동욱 저, 지구촌, 1998)&lt;br /&gt;
* 계초 방응모전(계초전기간행위, 조선일보사, 1980년)&lt;br /&gt;
* 계초 방응모(이동욱, 방일영문화재단, 1996)&lt;br /&gt;
&lt;br /&gt;
== 외부 링크 ==&lt;br /&gt;
* [https://web.archive.org/web/20050123171046/http://chosunhost.com/ 계초방응모 기념사업회]&lt;br /&gt;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09145 &amp;lt;조선일보&amp;gt;, 방응모 전 사장의 '친일행적' 말한다] - 오마이뉴스 04.09.10일자&lt;br /&gt;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020302101749 방응모ㆍ 김성수 친일행적 뭔가 : &amp;lt;긴급입수&amp;gt;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 全文] - 프레시안 2002-03-02&lt;br /&gt;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54052 그가 '&amp;lt;조선&amp;gt;의 주인' 주장하는 이유] 오마이뉴스 2001년 9월 20일자&lt;br /&gt;
*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956 방재선씨, 호주·상속 원인무효소송 제기]&lt;br /&gt;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4/06/2008040601053.html '5인 친필 서첩' 발굴] 조선일보 2008년04월06일자]&lt;br /&gt;
&lt;br /&gt;
[[분류: 감자]]&lt;/div&gt;</summary>
		<author><name>Nsgjjsjsjy02</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B0%A9%EC%9D%91%EB%AA%A8&amp;diff=59403</id>
		<title>방응모</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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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Nsgjjsjsjy02: /* 광업 경영과 조선일보 입사 */&lt;/p&gt;
&lt;hr /&gt;
&lt;div&gt;{|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width:100%&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0%&amp;quot;|사진&lt;br /&gt;
|[[파일:방응모.jpg|center|200픽셀]]&lt;br /&gt;
|+ '''방응모'''&lt;br /&gt;
|+ style=&amp;quot;caption-side:bottom;text-align:left:&amp;quot;|출처: 위키백과&lt;br /&gt;
|출생||1883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조선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또는 정부면 성내동&lt;br /&gt;
|-&lt;br /&gt;
|사망||1950년경으로 추정&lt;br /&gt;
|-&lt;br /&gt;
|사인||불명&lt;br /&gt;
|-&lt;br /&gt;
|거주지||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amp;gt; 경성부 -&amp;gt; 경기도 양주군 의정부읍&lt;br /&gt;
|-&lt;br /&gt;
|국적||대한민국&lt;br /&gt;
|-&lt;br /&gt;
|본관||온양&lt;br /&gt;
|-&lt;br /&gt;
|별칭||호: 계초(啓礎), 춘해(春海)&lt;br /&gt;
|-&lt;br /&gt;
|직업||교사, 변호사, 상인, 언론인, 기업인, 사회운동가, 정치가&lt;br /&gt;
|-&lt;br /&gt;
|배우자||승계도, 이인숙, 배영옥, 노효용&lt;br /&gt;
|-&lt;br /&gt;
|자녀||방재숙(딸), 방재욱·방재선·방재효·방재규(아들), 방재윤(양자)&lt;br /&gt;
|-&lt;br /&gt;
|부모||방계준(부), 온양박씨(모)&lt;br /&gt;
|}&lt;br /&gt;
&lt;br /&gt;
'''방응모'''(方應謨, 평안북도 정주군, 1883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 1950년 8월(추정)는 [[일제강점기]]의 교육자, 언론인, 법조인, 기업인이자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언론인이며 정치인이다. 호는 '''춘해'''(春海)이고, 뒤에 '''계초'''(啓礎)로 고쳤다.&lt;br /&gt;
&lt;br /&gt;
1922년 동아일보 정주 지국을 인수해 지국장을 지내다가 1924년 금광업에 뛰어들어 큰 부를 얻게 되었다. 1932년 6월 조선일보에 입사하였고 이후 영업국장이 되어 조선일보의 판매망을 장악하게 되고 경영권을 인수하면서 1933년 3월 조선일보 부사장이 되었다. 1933년 7월부터 1950년 7월까지 종신으로 [[조선일보]]의 사장을 역임하였다. 1935년 창간한 월간잡지 '조광(朝光)'은 친일 논란이 있다.&amp;lt;ref&amp;gt;안은필. [http://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9211 조선일보가 가장 빛나던 시기, ‘안재홍 시대’]&amp;lt;/ref&amp;gt;&amp;lt;ref name=&amp;quot;안은&amp;quot;&amp;gt;안은필. [http://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9279 방응모 친일증거, “모래밭에서 모래 찾기”]국민TV. 기사입력 2015년 4월 23일. 기사수정 2015년 4월 24일.&amp;lt;/ref&amp;gt;&amp;lt;ref&amp;gt;이민영.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1/0002255321?sid=102 고법 “방응모 前조선일보 사장 친일행적 대부분 인정”]. 서울신문. 2012년 1월 13일.&amp;lt;/ref&amp;gt;&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6/0000000413?sid=110 김성수ㆍ방응모와 친일언론인 군상]. 미디어오늘. 2002년 3월 12일.&amp;lt;/ref&amp;gt; 언론계에서 활동하면서도 사업가의 길을 함께 걸었고, 교육 장학 활동을 하였으며, 1945년 광복 직후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안재홍]]의 추천을 받아 한국독립당 중앙상무위원과 독립촉성국민회 총무부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amp;lt;ref name=&amp;quot;안은&amp;quot;/&amp;gt;&amp;lt;ref&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16/2008031600800.html 계초 방응모와의 우정도 여러 편의 시로 표현해&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해방 정국에서 김구의 재정적 후견인으로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등 삼의사 유골 봉환 사업과 신탁통치 반대 운동 등에 참여하여 활동했다.&lt;br /&gt;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 납북 후 행적은 &amp;quot;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amp;quot;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lt;br /&gt;
&lt;br /&gt;
== 생애 ==&lt;br /&gt;
=== 생애 초기 ===&lt;br /&gt;
==== 출생과 성장 ====&lt;br /&gt;
방응모는 1883년 11월 3일 또는 9월 29일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바우머리 부락 또는 정주군 정부면 성내동 425번지에서 '''방계준(方桂準)'''과 온양 박씨(溫陽朴氏)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어려서 빈곤한 가정환경으로 방응모는 정규 학교에는 입학하지 못하고, 16세 때까지 서당에 드나들며 한학을 익혔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던 중 그가 어느 정도 실력이 우수하다고 인정되자, 스승인 승창률은 잠시 방응모에게 어린아이들을 돌보게 한 후 자리를 피하곤 했다 한다. 그는 홀로 사서육경을 탐독, 독파하였다. 21세 무렵 잠시 서당 훈장을 지내기도 했다. 우연히 경성부에 갔다가 신문물을 보고 충격을 받아 17세에 독학으로 신학문과 일본어, 중국어, 수학 등을 독파하였다.&lt;br /&gt;
&lt;br /&gt;
유년시절 서당의 성리학 스승이던 승창률의 친척인 승시영(承時榮)과 조씨(趙氏)의 딸 승계도와 결혼했다. 결혼한 다음 해에도 그는 공부를 한다며 책만 사다 읽곤 했고, 부인 승계도는 생계를 위해 몸소 나섰다. 그의 아내는 남편에 대한 믿음이 절대적이었고 탓을 하거나 가출하지 않았다.&lt;br /&gt;
&lt;br /&gt;
=== 언론, 기업 활동 ===&lt;br /&gt;
==== 계몽 활동과 언론 활동 ====&lt;br /&gt;
1915년부터 1924년 방응모는 지역 지식인들, 유학파 청년, 계몽 청년들이 모여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하는데 참여했다. 민립대학기성회에서 활동하면서 조만식 등과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언변과 용모가 되었던 그의 여관에도 손님들이 몰렸고, 그가 &amp;quot;2백원도 좋고 5백원도 좋다며 보태달라&amp;lt;ref name=&amp;quot;fsfs87&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7페이지&amp;lt;/ref&amp;gt;&amp;quot;고 하면 기부금을 내는 이들이 있었다. 1919년 정주에서 3.1 만세 운동이 벌어지자, 그도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형사들의 눈을 피해 방응모는 만세운동을 하다 재빨리 몸을 피해 화를 면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8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22년 6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인수하여 분국장에 취임했다. 그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경영하는 동시에 그는 농촌 계몽운동 등에 적극 참여했다. 1922년 6월 19일&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96페이지&amp;lt;/ref&amp;gt; 동아일보 본사를 설득하여 정주분국을 동아일보사 정주지국으로 승격시켰다. 동아일보사 지부장 재직 시 그는 민립 대학 설립 자금과 농촌진흥회 회원의 여비 및 당시 운영난에 처했던 오산학교의 재개교 등을 계획했다. 총독부의 거부로 실패한 대학 설립 자금은 고스란히 오산학교의 부활 자금으로 투입되었다.&lt;br /&gt;
&lt;br /&gt;
1923년 동아일보 정주군 분국이 지국으로 승격되자 정주국을 경영하였고, 같은 해 7월 여성들의 사회 참여와 평등권 신장을 위한 여자교육회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이후 대규모 수해가 나자, 정주군 수해구제회를 결성하여 봉사활동에 가담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 광업 경영과 조선일보 입사 ====&lt;br /&gt;
1924년 친구 전우현이 방응모와도 안면이 있던 금광 채굴업자 두 명을 데리고 그를 찾아왔다. 그들은 자신들이 봐 둔 산이 있다고 방응모에게 소개했다. 이후 광산업에 뛰어들어 1924년 여름 압록강변의 폐금광인 평안북도 삭주군 외남면 교동 다릿골의의 삭주 교동광업소를 찾아가 10미터 정도 땅을 파고 금맥을 발견했다. 곧 삭주 교동광업소를 인수, 경영을 확대하였다. 이때 만난 동업자의 딸이자 친구 전우현의 조카딸인 '''이인숙(李仁淑)'''을 만났다. 본처 승계도가 두 아들을 잃고 복부 수술이 잘못되어 아이를 얻지 못하게 되자 방응모에게도 수많은 중매가 들어왔다. 자식들을 병으로 잃은 것이 자신의 불찰이라고 본 승계도는 그에게 작은 부인이라도 들이자는 말을 꺼내기도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18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26년 방응모에게 광산 사업을 제안했던 두 친구가 손을 털고 나갔고, 그의 가족은 돈이 없어 쌀 대신 좁쌀로 좁쌀죽을 먹으며 연명해야 했다. 방응모는 정주군에 사는 비슷한 또래의 먼 친척 방상진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고, 방상진과 일꾼 대여섯 명, 그리고 후처 이인숙의 친정 쪽에서 얻어온 토지문서를 얻어 자금을 마련했고 다시 금광을 채굴했다. 그 후 1926년 7월 지하 300m 지점에서 금맥을 확보했고, 이후 연간 300kg의 금을 생산하여 벼락부자가 되었다.&lt;br /&gt;
&lt;br /&gt;
1928년 방응모는 자신의 아호를 딴 춘해 장학회를 만들고 장학생들의 모임인 이심회를 만든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48페이지&amp;lt;/ref&amp;gt; 1928년에 그는 의정부 직동, 흥선대원군의 별장이 있던 곳 바로 뒤에 위치한 건물을 매입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한용운]], 홍명희를 자주 초대했다.&lt;br /&gt;
&lt;br /&gt;
1932년 방응모는 교동광산을 135만원이란 거액에 일본 중외광업주식회사에 매각했다. 그 뒤 1932년 6월부터 조선일보 영업국장으로 활동하다 1933년 3월 [[조선일보]]의 경영권을 인수하여 부사장에 취임하였다.&lt;br /&gt;
그는 교동광업소를 운영하며 모은 재력을 바탕으로 부사장 재직 중 [[조선일보]]의 대주주가 되었으며, 1933년 7월 8대 사주 조만식으로부터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제9대 [[조선일보]] 사주로 취임, 활동했다.&amp;lt;ref&amp;gt;조선일보는 1932년 7월에 조만식을 사장으로 영입했지만, 조만식은 거의 평생을 평양에서 살아왔던데다 서울에서 활동하기에는 적응을 잘하지 못했다. 조만식은 신문사 경영난과 지역감정의 혹독한 시련을 받은 채 9개월만에 퇴사했다. 그리고 조만식 후임으로 1933년, 방응모를 사장으로 추대하기에 이르렀다.&amp;lt;/ref&amp;gt;&amp;lt;ref&amp;gt;《한국사 시민강좌 제47집, 대표적 독립운동가 12인》,일조각. p145&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언론, 사업 활동 ===&lt;br /&gt;
==== 사회사업과 조선일보 인수 계획 ====&lt;br /&gt;
금광 사업에 성공한 그는 영림, 조림 사업에도 투자하였다. 방응모는 배우자 승계도에게서 더 이상 아들을 얻지 못하자 첩 이인숙을 통해 아들을 얻으려고 하였다. 이인숙은 아들을 낳았으나 이 아들은 곧 사망하였다. 아들을 잃은 이인숙은 승계도의 도움을 받다가, 그해 6월 방응모가 있는 광산으로 가 생활하였다'''. 승계도와 이인숙을 통해 자녀를 얻지못하자 42세가 되던 해인 1924년 친형인 방응곤의 둘째 아들 방재윤을 양자로 입양시켰다.'''&lt;br /&gt;
&lt;br /&gt;
[[파일:방응모장학생.jpg|섬네일|160px|오른쪽|방응모와 그의 장학금을 받던 학생들. 가운데 앉은 이가 방응모이고, 서있는 이들 중 왼쪽에서 두 번째는 방응모의 양자 방재윤.]]&lt;br /&gt;
&lt;br /&gt;
1930년 배영옥과 결혼하여 딸 방재숙을 얻었다. 1932년 광산업을 정리하였고 언론사업을 비롯하여 육영사업과 조림 및 간척사업 등을 벌였다. 또한 고아원과 사회복지단체에 후원금을 지원하면서 인망을 얻기도 했다. 삭주 지역에서는 그의 송덕비가 세워지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932년 그는 수원군 팔탄면 노하리 일대의 갯벌에 일본인이 수차례 뚝을 쌓다가 실패했다는 정보를 얻고 임삼진을 통해 조선총독부에 허가를 요청하였다. 간척 사업은 이후 1935년부터 시작되었지만 1932년부터 은밀히 착수되어 왔다.&lt;br /&gt;
&lt;br /&gt;
1933년 무렵 방응모가 [[조선일보]] 인수에 나서기 전부터 그는 [[한용운]]을 위한 일이라면 돈을 아끼지 않고 지출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성북동 222번지 언덕에 만해를 위해 기와집 한 채를 지어주었는데 심우장(尋牛莊)이 그것이다. 또한 만해가 일제의 배급을 거부해 생활이 어렵게 되자 만해에게 생활비를 지급했던 방응모는 만해가 병석에 누운 1944년에는 치료비를 지원해주기도 했다.&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6/0000043262?sid=103 만해가 일송 선생 5일장 치른 사연]&amp;lt;/ref&amp;gt; 그 외에도 방응모는 만해 한용운·벽초 홍명희 등과 함께 새해가 되면 백천온천에도 같이 다녀올 정도로 두터운 친분을 맺었다.&lt;br /&gt;
&lt;br /&gt;
방응모의 광산 매각을 일본 정부 측에 알리고 다리를 놓은 것은 고일청(高一淸)이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84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32년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사건으로 체포된 [[안창호]]의 사면 탄원과 보석을 위해 노력하였다. 안창호가 윤봉길을 사주했다는 증거가 없으며 그가 테러행위를 지시했다는 증거 자료나 문건이 없다는 것이 방응모의 안창호 탄원 이유였다. 그러나 총독부 경무국장은 그의 안창호 석방 제안을 정중히 거절한다. 1936년 동방문화학원(뒤에 숭문중학교·고등학교 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1939년 9월에는〈조선일보〉의 조간 1회, 석간 2회의 1일 3회 발행을 시작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인수와 경영 ====&lt;br /&gt;
1933년 1월 16일 그는 정식으로 주식회사 [[조선일보]]사를 창립, 1월 18일에 발표된 창립 취지서에는 창립위원장 방응모, 창립발기인 방응모, 조만식, 고일청 외 등이 참여했다. 일단 그는 조만식을 사장으로 임명하고 자신은 부사장으로 있다가, 그해 3월 13일 다시 부사장에 취임했다. 4월 25일 편집인 겸 발행인이 되고, 4월 29일에는 조선일보의 조간, 석간제 발행을 부활, 확정시켰다. 1933년 7월 10일 총독부로부터 조선일보사의 법인 등록 승인을 얻어냈다. 7월 10일 조만식의 사퇴로, [[조선일보]]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다. 1933년 그는 자신의 아호를 춘해에서 계초로 바꾸었다. 그는 유능한 문인, 필진의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 상금 1천 원을 걸고 작가를 영입하였다.&lt;br /&gt;
&lt;br /&gt;
1934년 3월 25일 이광수를 비롯하여 서춘, 김동진, 함상훈, 신태익 등을 [[조선일보]]로 영입해 왔다. 그 외에도 정주군 출신 언론인, 작가들이 조선일보로 많이 오게 되었다. 이후 동아일보와 갈등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이광수가 조선일보로 옮겨와 부사장직에서 9개월 근무했다. 당시 조선일보 내부에서는 문모 라는 이가 이광수의 등장으로 자신의 입지 약화를 우려해 오랫동안 이광수를 내보내려 흉계를 꾸몄다고 한다. 이광수는 1934년 5월 25일자로 돌연 사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65페이지&amp;lt;/ref&amp;gt; 문모는 그에게 오히려 잘 됐다는 식으로 말하다가 방응모에게 호되게 혼이 났다. 그리고 문모로 하여금 즉시 금강산에 들어가 이광수를 다시 데려오게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65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이광수는 아들 봉근(당시 8살)의 사망 등으로 실의에 빠졌고, 1935년에 가서야 이광수를 조선일보 고문이자 필진으로 재영입하게 됐다.&lt;br /&gt;
&lt;br /&gt;
==== 동방문화학원 재단 설립 ====&lt;br /&gt;
방응모는 1936년 방농장의 소유권을 기본 자산으로 하는 재단법인 동방문화학원(東邦文化學院)을 설립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6페이지&amp;lt;/ref&amp;gt; 동방문화학원은 학교 법인으로 인가된 재단 법인으로, 그뒤 고계학원과 인연을 가지고 1936년부터는 보성고등보통학교를 후견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 분리되었다. 그뒤 방응모 장학생인 서중회 회원들을 위한 방응모 장학사업을 주관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7페이지&amp;lt;/ref&amp;gt;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태평로 구 조선일보 사옥 안에 동방문화학원의 간판을 달고 조광 잡지를 계속 발행하는 조광사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7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일제 강점기 후반 ===&lt;br /&gt;
==== 중일 전쟁 전후 ====&lt;br /&gt;
중일전쟁 개전 직후인 1937년 7월 11일에 열린 [[조선일보]] 간부회의에서 주필 서춘이 '일본군, 중국군, 장개석씨'등으로 쓰던 용어를 '아군, 황군, 지나, 장개석'으로 고치고 일본 국민의 입장에서 논설을 쓸 것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편집국장 김형원과 영업국장 김광수가 적극 반대를 하기도 했으나, 방응모는 '일장기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이미 몇 십만 원의 손해를 보았을 뿐 아니라 [[3.1 운동]] 때처럼 신문이 민중을 지도할 수 없다'면서 서춘의 입장을 지지했다. 한편으로 방응모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된 [[안창호]]를 [[조선일보]]에 영입하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안창호는 옥중에서 얻은 간질환과 폐질환 등으로 고생했고, 진료비 등을 수시로 지원하고 문병했음에도 출옥후 얼마 뒤에 사망한다.&lt;br /&gt;
&lt;br /&gt;
1933년 이심회(以心會：후에 序中會, 방응모장학회 등으로 명칭이 바뀜)라는 장학회를 만들어 국내 대학생과 해외유학생들에게 학자금을 지급하기도 했으며, 재단법인 동방문화학원(東方文化學院：지금의 숭문중·고등학교 전신)의 이사장직을 맡기도 했다. 또한 자신의 막대한 재원을 들여 1936년부터 함경남도 영흥군 일대에 당시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대단위 조림사업을 벌였으며, 그 전 해인 1935년부터는 경기도 수원군 팔탄면 일대에서 만 2년간에 걸친 간척사업을 벌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937년 12월 24일 [[안창호]]는 병보석 판정을 받고 재판소가 지정한 현 서울대학교병원인 경성제국대학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안창호의 입원 중에 시중을 든 사람으로는 안창호의 외조카 김순원과 청년 박정호 두 사람이었고, 나중에는 이응준 장군의 부인 이정희가 끝까지 지성껏 간호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7페이지&amp;lt;/ref&amp;gt; [[안창호]]는 병상에서 병원비 문제로도 고초를 겪었다. 이 때문에 조만식은 일본 경찰로부터 안창호의 병원비를 대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음에도, &amp;quot;내가 먹고 살면서 그 선생을 돌보지 않을 수 없다&amp;quot;며 완강히 거절하고 안창호를 도왔다고 한다. 안창호의 간호를 같이 도와주던 이응준 장군 부인 이정희는 10일마다 계산되어 나오는 병원 입원비로 안창호 선생이 괴로워하는 표정을 지켜볼수 없었다고 진술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8페이지&amp;lt;/ref&amp;gt; 방응모는 5백원의 수표 한 장을 안창호에게 전달하였다. 50일간의 입원비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9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안창호]]는 1938년 3월 10일 밤 12시 경성제국대학 병원에서 운명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폐간 사건 ====&lt;br /&gt;
일본의 전쟁이 격화되면서 조선총독부 공보국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1940년에 강제로 폐간조치 했다. 광산을 팔아서 자신의 모든 것을 조선일보에 바쳤던 방응모는 큰 절망과 좌절을 느껴야 했다. [[한용운]]은 ‘신문이 폐간되다/ 붓이 꺾이어 모든 일이 끝나니…’로 시작하는 시를 지어 방응모를 위로했다. &amp;lt;ref&amp;gt;붓이 꺾이어 모든 일 끝나니 이제는 재갈 물린 사람들 뿔뿔이 흩어지고 아, 쓸쓸하고 쓸쓸한지고 망국 서울의 가을날 한강의 물도 흐느끼느니 울음 삼켜 흐느끼며 연지를 외면한 채 바다 향해 흐르느니&amp;lt;/ref&amp;gt; 동아일보에는 김성수 외에도 장덕수와 송진우가 있었지만 그에게는 조선일보 폐간을 막기 위해 총독부와 교섭할 인물도 없었다.&lt;br /&gt;
&lt;br /&gt;
1938년 2월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선 내 일간신문 25개사로 조직된 조선춘추회의 창립에 창립발기인으로 참가했고, 조선춘추회 간사로 활동했다. 같은 해 7월 “국민정신을 총동원하고 내선일체 전 능력을 발휘하여 국책 수행에 협력하여 성전(聖戰)의 궁극적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조직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에 참여했고, 그날 결성된 경성연맹 창립총회에서 상담역을 맡았다. 9월부터 조선방공협회 경기도연합지부 평의원을 지냈다. 10월에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주최한 비상시 국민생활 개선을 위한 제1회 생활개선위원회에서 제2부(의례와 사회풍조 쇄신부)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그러나 1938년 10월부터 조선총독부는 조선일보의 신문용지를 검열, 통제하기 시작했다.&lt;br /&gt;
&lt;br /&gt;
1940년 5월 조선총독부 총독 미나미 지로가 방송담화로 창씨개명을 권고했다. 그러나 그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성씨를 이제 와서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며 창씨개명은 완강하게 거절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조선일보에 트집이 잡힐 일이 나타나지 않자 총독부는 전국 면사무소에 조선일보 신문 구독을 거절하도록 명령을 내렸고, 동시에 조선말을 쓰는 민원인에게는 일을 처리해주지 말도록 하게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3페이지&amp;lt;/ref&amp;gt; 조선총독부는 송진우의 예금통장을 문제삼았다. 송진우 명의의 은행저금이 동아일보의 8백여 개의 지국과 분국을 통해 모금된 독립운동 자금이라며, 그리고 동아일보 간부들이 백운장이라는 요정에서 회식을 한 것을 김성수 집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려 했다는 등의 이유로 백관수 동아일보 사장을 전격 구속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3~374페이지&amp;lt;/ref&amp;gt; 동아일보는 백관수가 구속된지 10일 만에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동아일보 중역회의를 열고 폐간신청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4페이지&amp;lt;/ref&amp;gt; 총독부는 조선일보에도 자진 폐간을 권고했고, 1940년 8월 9일 편집회의를 주관, 8월 10일 조선일보의 폐간계를 내고, 8월 10일자로 폐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5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잡지 발행 활동 ====&lt;br /&gt;
신문 강제 폐간 뒤 방응모는 간판을 조광사로 바꿔 걸고, 사옥은 동방흥업주식회사로 등기를 변경해서 유지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1페이지&amp;lt;/ref&amp;gt; 이후 그는 조광 잡지 발행에 전념했다. 1943년 8월 경 일본 중앙대학의 예과를 마친 방일영이 입사&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1페이지&amp;lt;/ref&amp;gt;, 필진으로 참여했다. [[조선일보]]가 폐간된 후에도 방응모는 벽초 홍명희 부자에게 지속적으로 생활비를 대주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4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4년 6월 29일 만해 [[한용운]]이 사망했다. 그는 심우장을 찾아가 3백원을 내놓았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5페이지&amp;lt;/ref&amp;gt;당시 쌀 10가마가 100원이었지만, 심우장은 당장 현금 1원이 없었는데 거액이라서 놀랐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6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광복 이후 언론 및 정치활동 ===&lt;br /&gt;
==== 광복 직후 ====&lt;br /&gt;
1945년 8.15 광복 후에는 8월 말과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朝鮮在外戰災同胞救濟會) 고문과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9월 초 [[안재홍]] 등이 좌경화되는 건준체제에 반발하여 건준을 탈퇴하자 방응모 역시 건준을 탈퇴하였다.&lt;br /&gt;
&lt;br /&gt;
9월 2일 미군정이 주둔하자, 방응모는 윤전기를 찾기 위해 폐간 당시의 증빙서류를 미 군정청에 제시하였으나 소식이 없었다. 총독부는 조선일보 폐간 직후 인수한 윤전기를 경성일보사에 옮겨서 설치했다. 그는 동방문화재단 외 4개 사업소를 적산으로 파악한 미군정을 설득하고, 사옥 문제도 해결하였다.&lt;br /&gt;
&lt;br /&gt;
10월 1일 조선일보 편집위원회를 구성하고, 신문 복간 운동을 추진했다. 조선총독부의 폐간 지시 당시 의정부로 옮겨놓은 일부 활자 자모음이 잘 보관되어, 그해 11월 23일 조선일보를 복간시키고, 서울신문사 사옥에서 조선일보 복간호를 간행하였다. 이후 조선사회문제대책중앙협의회 중앙위원을 거쳐 10월 16일 이승만 등의 주도로 독립촉성중앙회가 결성되자 독촉에 가입하였다.&lt;br /&gt;
&lt;br /&gt;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이 귀국하자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에 입당했다. 12월 [[안재홍]]의 추천으로 한국독립당의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출되어 3~4개월 동안 활동했다.&amp;lt;ref&amp;gt;일각에서는 방응모가 '한독당 재무부장으로 지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1947년부터 한독당 재무부장을 맡은 신창균이 전면 부정했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47/0000002626?sid=102 백범 비서와 '진짜' 한독당 재정부장의 육성증언. 참고.]&amp;lt;/ref&amp;gt; 그 뒤 대한국민총회 발기인, 대한독립애국금헌성회 발기인 등으로 활동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복간 및 군정기 활동 ====&lt;br /&gt;
11월 [[조선일보]]사를 복간시켰다. 그러나 한동안 조선일보의 인쇄는 서울신문사에서 간행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1945년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추념대회에 참여하였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2&amp;quot;&amp;gt;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13&amp;lt;/ref&amp;gt; 순국선열추념대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2&amp;quot; /&amp;gt;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참여,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이 되었다.&amp;lt;ref&amp;gt;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55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6년 2월 26일 서울신문사 공무국 종업원들이 조선일보의 인쇄를 거부해버렸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436페이지&amp;lt;/ref&amp;gt; 그동안 묵시적으로 방해가 은근히 있었다. 표면상의 문제는 임금 문제이나 내용상으로는 조선일보에 대한 조선공산당의 시위의 일종이었다. 사흘간의 교섭 끝에 2월 28일에 가서야 26일자와 27일자를 소급해서 인쇄하여 신문을 한꺼번에 발행하였다. 그러나 3월 1일과 2일에 또다시 인쇄를 거부당해 결국 휴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436페이지&amp;lt;/ref&amp;gt; 조선일보를 경성일보사로 옮겨서 인쇄하기로 하고 3월 5일자로 사고로 독자에게 알렸다.&lt;br /&gt;
&lt;br /&gt;
4월 29일 김구, 김창숙, 김성수, 오세창 등과 함께 서울운동장에서 윤봉길의사 추모회의 창립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amp;lt;ref&amp;gt;&amp;quot;故尹奉吉義士의 記念式 오늘, 發起人會 열고 準備&amp;quot;, 동아일보 1946년 4월 23일자 2면, 사회면&amp;lt;/ref&amp;gt; 그해 5월 조선공업구락부 고문에 위촉되었다.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民族統一總本部) 10인협의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6월 15일 오후 5시 40분 서울역에 마중나가 서울역에 도착한 삼의사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lt;br /&gt;
&lt;br /&gt;
1945년 광복 직후 서기원이 그를 찾아왔다. 서기원은 그때 경성농상실천학교의 동창회로부터 이 학교의 교장이 되어 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이다. 방응모는 서기원의 제의를 받아들여 1946년 8월 28일 동방문화학원 이사장으로 숭문상업학교를 인수, 재단 이사장이 되었다. 후일 방응모가 6.25 전쟁 중에 납북된 후 동방문화학원과 숭문중,고교의 재단은 최용진이 운영하다가 다시 1978년에 방일영에게 인수되었다.&lt;br /&gt;
&lt;br /&gt;
1947년 1월 21일 제5회 창립위원회를 본사에서 개최하고 2월 23일 주식회사 조선일보사 주주창립총회를 열고 대표이사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공동투자 경영자로 참여시킨 전무 이종민과의 알력이 발생했다. 이종민과의 갈등이 심화되자 그해 8월 3일 방응모는 일단 사직서를 제출했다. 1947년 8월 10일 풍문여고 강당에서 개최된 한인신문기자협회에 참석, 민족청년단에서 언론계 공로자로 방응모, 김성수, 설의식을 지정하여 상을 시상받았다.&amp;lt;ref&amp;gt;&amp;quot;朝鮮 新聞記者協會&amp;quot;, 동아일보 1947년 8월 10일자 2면, 사회면&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납북과 최후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 납북 후 행적은 &amp;quot;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amp;quot;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 1950년 8월경 개성 송악산 부근에서 미군의 폭격에 희생되었고 심한 폭격으로 시신을 찾을 수 없어 묘도 만들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남한에서는 1955년 7월 7일 생사불명기간 만료로 인해 실종 처리되었다.&lt;br /&gt;
&lt;br /&gt;
=== 사후 ===&lt;br /&gt;
서울 종로에 있던 양자 방재윤의 두 아들 방일영과 방우영은 방응모의 첩 이인숙이 찾아가 피신하라고 권고하여 황급히 피신했다. &lt;br /&gt;
&lt;br /&gt;
7월 6일 그의 행방불명처리가 되고, 방응모의 사후에도 [[조선일보]]는 그의 명의로 발행되었다. 1952년 4월 28일 조선일보는 발행인겸 편집인을 장기영으로, 인쇄인을 방일영으로, 방응모는 명예사장으로 명의변경하여 휴전 후 계속 발행하게 되었다. 1954년 4월 30일 제8회 조선일보 정기주주총회에서 장기영 사장이 사퇴하면서, 명예사장 방응모가 사장으로 추대되고, 발행인 겸 대표취체역에 방일영이 선임되었다. 이후 실종 후 1959년에 법적으로 사망 처리되었다. 그리고 1970년까지는 조선일보는 그의 이름으로 발행되었다.&lt;br /&gt;
&lt;br /&gt;
1970년 2월 19일 조선일보 정기주주총회에서 방응모 이사를 사퇴 수리하였다. 그의 피폭 사망 사실은 1970년대 이후 탈북자들을 통해 대한민국에 소개되었다.&lt;br /&gt;
&lt;br /&gt;
== 친일행위 의혹 ==&lt;br /&gt;
=== 일제 전시체제기 활동 ===&lt;br /&gt;
일제 강점기 말기 언론인으로서 총독부체제에 협력한 기록과 활동이 다수 기록이 있다. 1933년 3월 [[조선일보]] 경영권을 인수하고 부사장직에 취임했을 당시 같은 달에 고사기관총 구입비용 1600원을 군에 헌납하였다. 그는 1935년 친일 잡지 《조광 (잡지)(朝光)》을 창간하였고, 1937년에는 경성방송국 제2방송에 출연하여 일제가 중국의 베일을 절멸케하여 극동평화를 지키려고 한다는 강연을 하였다. 1940년대부터 조광에 집중적으로 친일 논설을 기고하고 시국 강연에 참여하여 전쟁 지원을 독려했다. 1942년 6월에는 '징병령 실시에 일층 더 감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글을 써서 조광에 발표하였다. 애국금차회(1937),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1938), 임전대책협의회(1941), 조선임전보국단(1941) 등 대표적인 친일 단체의 회원에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그는 이런 행적으로 인해 해방정국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명단에 기록되어 있고,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해 발표한 &amp;lt;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amp;gt;에 모두 포함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lt;br /&gt;
&lt;br /&gt;
우리 [[조선일보]]는 다른 어떤 신문도 따라오지 못하는 확고한 신념에서 비국민적 행위를 단연 배격하여 종국까지 조선일보사가 이미 정해놓은 방침에 한뜻으로 매진한다.|원산에서의 순회 강연&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9478.html 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친일 다짐하다 시민에 봉변]《한겨레》2005-08-24 오후 06:13:18&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반민족행위 논란 ===&lt;br /&gt;
방응모를 친일파로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남아 있다. 조선일보 경영 이전에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방응모의 활동이 거의 없었고, 납북된 뒤 소식이 끊겨버린 까닭에 본인이 항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 동안의 행적만으로 친일파 여부를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방응모의 후손들이 영향력 있는 [[조선일보]] 언론사의 사주를 맡았기에 그의 입장에서 서술한 기록을 많이 남기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80년 발간된 그의 전기 《계초 방응모》(조선일보사) 등에는 '그가 민족주의적 선각자'로 묘사되고 있다. 방응모가 친일파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일부세력측은 그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논거로 드는 경우가 많이 있다.&amp;lt;ref&amp;gt;유석재, 계간 《유심》 (2004년 봄호) [http://yousim.buddhism.org/html/2004-spr/tamgu-yoo-seok-jae.htm 삭풍 속에 피어난 금란지교(金蘭之交) - 만해와 계초 방응모]&amp;lt;/ref&amp;gt;&amp;lt;ref&amp;gt;&amp;quot;일제 말기 계초는 시국강연에 나설 것과 창씨개명을 집요하게 강요받았으나 그때마다 묵묵부답으로 거부하며 소신을 지켰다.&amp;quot; 《조선일보》 (2001.3) 조선일보 사장열전 - 계초 방응모편, 《한겨레》 (2001.3.30) [http://www.njoyschool.net/news/article_view.asp?menu_code=s20202&amp;amp;no=1206 조선일보, 일장기를 신문제호 위에]&amp;lt;/ref&amp;gt;&lt;br /&gt;
또한 한국정토학회 고문이자 서울 정토사 주지였던 박설산(1918~2007)이 학도병에 끌려가기 직전인 1943년 12월 28일 밤 서울역에서 스스로 왼발을 선로에 올려 발가락을 절단해 징집을 기피하자 방응모는 만해와 함께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설산을 걱정하면서 입원 중 조선일보 기자를 통해 돈을 전달한 것은 물론 퇴원할 때 돈을 전달하고 뒤를 보살폈다고 한다.&amp;lt;ref&amp;gt;박설산 회고록 &amp;lt;뚜껑없는 조선역사책&amp;gt;(1994, 도서출판 삼장) p240~241&amp;lt;/ref&amp;gt;&lt;br /&gt;
&lt;br /&gt;
2010년 12월, 방응모 관계자들 및 조선일보측은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을 취소해달라'며 법원에 낸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amp;quot;1944년 조선항공업 창립발기인으로 활동한 부분에 대해 친일행위로 판단한 부분을 취소하지만 나머지 활동에 대해서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amp;quot;라고 판결했다. 그 이유인 즉 &amp;quot;방응모는 1933년 조선일보 사장으로 취임해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등으로 활동하며 친일활동을 벌였으며, 1937년 경성방송국 시국강연에서 일본제국이 극동평화를 확립시킬 것이라는 내용의 강연을 하고, 1938년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춘추회의 발기인 겸 간사로 활동하기도 했다&amp;lt;ref&amp;gt;[http://media.daum.net/breakingnews/politics/view.html?cateid=1002&amp;amp;newsid=20101222103319164&amp;amp;p=newsis 법원 &amp;quot;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친일파 맞다&amp;quot;]뉴시스 2010년 12월 22일&amp;lt;/ref&amp;gt;&amp;quot;는 것이다.&lt;br /&gt;
&lt;br /&gt;
2012년 1월 12일 서울고법 행정7부는 방 전 사장의 손자인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이 행정안전부를 상대로 낸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처분 취소 청구소송에서 ‘일제 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의 친일 행위 판정 조항에 비추어 방 전 사장에게 적용된 모두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민족적 지도자로서 비중이 큰 만큼 그로 인한 책임도 무거울 뿐 아니라 고난의 시기를 겪은 민족으로서 그 역사를 반성하자는 입장에 설 때, 방 전 사장의 여러 행태는 반민특별법에서 규정한 친일반민족행위의 유형에 속함을 부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1·2심 재판부는 방 전 사장이 자신이 운영하던 잡지 &amp;lt;조광&amp;gt;에 일제 침략전쟁에 동조하고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문예물과 일제 침략전쟁에 협력할 것을 주문하는 논문을 게재하는 등의 ‘친일’ 행위를 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또한, 2심 재판부는 일본의 전쟁 수행을 돕기 위해 설립된 군수 제조업체 ‘조선항공공업’의 발기인과 감사를 지낸 것은 “감사는 업무집행에 관여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기관으로, 방 전 사장이 이 회사를 운영했다고 볼 수 있다”는 이유로 친일이라고 판단했다.&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4565.html법원 ‘방응모 친일’ 2심서도 인정] 인터넷한겨레 2010년 12월 22일&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기타 ==&lt;br /&gt;
그는 [[한용운]], 최남선, 정인보, 홍명희 등과 친분관계를 형성하고 어울려 지냈다 한다.&lt;br /&gt;
&lt;br /&gt;
김구의 한국독립당의 재정적 후견인 역할을 하였다 하며,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삼의사 유골봉환식 때 김구, 정인보 등과 촬영한 사진이 있다.&lt;br /&gt;
한편 임꺽정의 저자인 벽초 홍명희가 방응모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그와 깊은 친분을 맺었다는 주장이 있다. 《조광》 1938년 11월호엔 홍명희가 병중에 있는 방응모를 위로하며 지은 한시가 방응모의 답시와 함께 실려 있다고 한다.&amp;lt;ref&amp;gt;[http://weekly.chosun.com/site/data/html_dir/2004/11/05/2004110577041.html ‘임꺽정’으로 되살아난 독립운동의 魂! 주간조선 1827호 2004.11.04&amp;lt;/ref&amp;gt; 또한 [[안창호]]의 비서실장을 지낸 독립유공자 구익균은 방응모와 안창호가 친밀했다는 주장을 했다.&amp;lt;ref&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09/2008030901055.html &amp;quot;공산주의자들, 도산 비판하다가도 하숙비 떨어지면 찾아와&amp;quot;] 조선일보, 2008-03-10 03:22&amp;lt;/ref&amp;gt;&lt;br /&gt;
또한 박설산에 따르면 1943년 만해 한용운에게 학도병으로 끌려가게 되었음을 알리려 심우장으로 찾아가게 되었을 때, 한용운과 방응모가 바둑을 두고 곁에서 정인보가 훈수를 두고 있었다고 한다.&amp;lt;ref&amp;gt;박설산 저 &amp;lt;뚜껑없는 朝鮮 역사 책&amp;gt; p.226 도서출판 三藏(1994)&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 /&amp;gt;&lt;br /&gt;
&lt;br /&gt;
== 참고 자료 ==&lt;br /&gt;
* 청산하지 못한 역사: 언론 내세워 일제에 아부한 교화 정책의 하수인 (문영숙) (반민족문제연구소, 청년사, 1994)&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민족 계몽의 초석 방응모(이동욱 저, 지구촌, 1998)&lt;br /&gt;
* 계초 방응모전(계초전기간행위, 조선일보사, 1980년)&lt;br /&gt;
* 계초 방응모(이동욱, 방일영문화재단, 1996)&lt;br /&gt;
&lt;br /&gt;
== 외부 링크 ==&lt;br /&gt;
* [https://web.archive.org/web/20050123171046/http://chosunhost.com/ 계초방응모 기념사업회]&lt;br /&gt;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09145 &amp;lt;조선일보&amp;gt;, 방응모 전 사장의 '친일행적' 말한다] - 오마이뉴스 04.09.10일자&lt;br /&gt;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020302101749 방응모ㆍ 김성수 친일행적 뭔가 : &amp;lt;긴급입수&amp;gt;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 全文] - 프레시안 2002-03-02&lt;br /&gt;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54052 그가 '&amp;lt;조선&amp;gt;의 주인' 주장하는 이유] 오마이뉴스 2001년 9월 20일자&lt;br /&gt;
*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956 방재선씨, 호주·상속 원인무효소송 제기]&lt;br /&gt;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4/06/2008040601053.html '5인 친필 서첩' 발굴] 조선일보 2008년04월06일자]&lt;br /&gt;
&lt;br /&gt;
[[분류: 감자]]&lt;/div&gt;</summary>
		<author><name>Nsgjjsjsjy02</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B0%A9%EC%9D%91%EB%AA%A8&amp;diff=59402</id>
		<title>방응모</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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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06-20T00:32:4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Nsgjjsjsjy02: /* 계몽 활동과 언론 활동 */&lt;/p&gt;
&lt;hr /&gt;
&lt;div&gt;{|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width:100%&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0%&amp;quot;|사진&lt;br /&gt;
|[[파일:방응모.jpg|center|200픽셀]]&lt;br /&gt;
|+ '''방응모'''&lt;br /&gt;
|+ style=&amp;quot;caption-side:bottom;text-align:left:&amp;quot;|출처: 위키백과&lt;br /&gt;
|출생||1883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조선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또는 정부면 성내동&lt;br /&gt;
|-&lt;br /&gt;
|사망||1950년경으로 추정&lt;br /&gt;
|-&lt;br /&gt;
|사인||불명&lt;br /&gt;
|-&lt;br /&gt;
|거주지||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amp;gt; 경성부 -&amp;gt; 경기도 양주군 의정부읍&lt;br /&gt;
|-&lt;br /&gt;
|국적||대한민국&lt;br /&gt;
|-&lt;br /&gt;
|본관||온양&lt;br /&gt;
|-&lt;br /&gt;
|별칭||호: 계초(啓礎), 춘해(春海)&lt;br /&gt;
|-&lt;br /&gt;
|직업||교사, 변호사, 상인, 언론인, 기업인, 사회운동가, 정치가&lt;br /&gt;
|-&lt;br /&gt;
|배우자||승계도, 이인숙, 배영옥, 노효용&lt;br /&gt;
|-&lt;br /&gt;
|자녀||방재숙(딸), 방재욱·방재선·방재효·방재규(아들), 방재윤(양자)&lt;br /&gt;
|-&lt;br /&gt;
|부모||방계준(부), 온양박씨(모)&lt;br /&gt;
|}&lt;br /&gt;
&lt;br /&gt;
'''방응모'''(方應謨, 평안북도 정주군, 1883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 1950년 8월(추정)는 [[일제강점기]]의 교육자, 언론인, 법조인, 기업인이자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언론인이며 정치인이다. 호는 '''춘해'''(春海)이고, 뒤에 '''계초'''(啓礎)로 고쳤다.&lt;br /&gt;
&lt;br /&gt;
1922년 동아일보 정주 지국을 인수해 지국장을 지내다가 1924년 금광업에 뛰어들어 큰 부를 얻게 되었다. 1932년 6월 조선일보에 입사하였고 이후 영업국장이 되어 조선일보의 판매망을 장악하게 되고 경영권을 인수하면서 1933년 3월 조선일보 부사장이 되었다. 1933년 7월부터 1950년 7월까지 종신으로 [[조선일보]]의 사장을 역임하였다. 1935년 창간한 월간잡지 '조광(朝光)'은 친일 논란이 있다.&amp;lt;ref&amp;gt;안은필. [http://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9211 조선일보가 가장 빛나던 시기, ‘안재홍 시대’]&amp;lt;/ref&amp;gt;&amp;lt;ref name=&amp;quot;안은&amp;quot;&amp;gt;안은필. [http://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9279 방응모 친일증거, “모래밭에서 모래 찾기”]국민TV. 기사입력 2015년 4월 23일. 기사수정 2015년 4월 24일.&amp;lt;/ref&amp;gt;&amp;lt;ref&amp;gt;이민영.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1/0002255321?sid=102 고법 “방응모 前조선일보 사장 친일행적 대부분 인정”]. 서울신문. 2012년 1월 13일.&amp;lt;/ref&amp;gt;&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6/0000000413?sid=110 김성수ㆍ방응모와 친일언론인 군상]. 미디어오늘. 2002년 3월 12일.&amp;lt;/ref&amp;gt; 언론계에서 활동하면서도 사업가의 길을 함께 걸었고, 교육 장학 활동을 하였으며, 1945년 광복 직후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안재홍]]의 추천을 받아 한국독립당 중앙상무위원과 독립촉성국민회 총무부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amp;lt;ref name=&amp;quot;안은&amp;quot;/&amp;gt;&amp;lt;ref&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16/2008031600800.html 계초 방응모와의 우정도 여러 편의 시로 표현해&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해방 정국에서 김구의 재정적 후견인으로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등 삼의사 유골 봉환 사업과 신탁통치 반대 운동 등에 참여하여 활동했다.&lt;br /&gt;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 납북 후 행적은 &amp;quot;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amp;quot;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lt;br /&gt;
&lt;br /&gt;
== 생애 ==&lt;br /&gt;
=== 생애 초기 ===&lt;br /&gt;
==== 출생과 성장 ====&lt;br /&gt;
방응모는 1883년 11월 3일 또는 9월 29일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바우머리 부락 또는 정주군 정부면 성내동 425번지에서 '''방계준(方桂準)'''과 온양 박씨(溫陽朴氏)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어려서 빈곤한 가정환경으로 방응모는 정규 학교에는 입학하지 못하고, 16세 때까지 서당에 드나들며 한학을 익혔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던 중 그가 어느 정도 실력이 우수하다고 인정되자, 스승인 승창률은 잠시 방응모에게 어린아이들을 돌보게 한 후 자리를 피하곤 했다 한다. 그는 홀로 사서육경을 탐독, 독파하였다. 21세 무렵 잠시 서당 훈장을 지내기도 했다. 우연히 경성부에 갔다가 신문물을 보고 충격을 받아 17세에 독학으로 신학문과 일본어, 중국어, 수학 등을 독파하였다.&lt;br /&gt;
&lt;br /&gt;
유년시절 서당의 성리학 스승이던 승창률의 친척인 승시영(承時榮)과 조씨(趙氏)의 딸 승계도와 결혼했다. 결혼한 다음 해에도 그는 공부를 한다며 책만 사다 읽곤 했고, 부인 승계도는 생계를 위해 몸소 나섰다. 그의 아내는 남편에 대한 믿음이 절대적이었고 탓을 하거나 가출하지 않았다.&lt;br /&gt;
&lt;br /&gt;
=== 언론, 기업 활동 ===&lt;br /&gt;
==== 계몽 활동과 언론 활동 ====&lt;br /&gt;
1915년부터 1924년 방응모는 지역 지식인들, 유학파 청년, 계몽 청년들이 모여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하는데 참여했다. 민립대학기성회에서 활동하면서 조만식 등과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언변과 용모가 되었던 그의 여관에도 손님들이 몰렸고, 그가 &amp;quot;2백원도 좋고 5백원도 좋다며 보태달라&amp;lt;ref name=&amp;quot;fsfs87&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7페이지&amp;lt;/ref&amp;gt;&amp;quot;고 하면 기부금을 내는 이들이 있었다. 1919년 정주에서 3.1 만세 운동이 벌어지자, 그도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형사들의 눈을 피해 방응모는 만세운동을 하다 재빨리 몸을 피해 화를 면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8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22년 6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인수하여 분국장에 취임했다. 그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경영하는 동시에 그는 농촌 계몽운동 등에 적극 참여했다. 1922년 6월 19일&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96페이지&amp;lt;/ref&amp;gt; 동아일보 본사를 설득하여 정주분국을 동아일보사 정주지국으로 승격시켰다. 동아일보사 지부장 재직 시 그는 민립 대학 설립 자금과 농촌진흥회 회원의 여비 및 당시 운영난에 처했던 오산학교의 재개교 등을 계획했다. 총독부의 거부로 실패한 대학 설립 자금은 고스란히 오산학교의 부활 자금으로 투입되었다.&lt;br /&gt;
&lt;br /&gt;
1923년 동아일보 정주군 분국이 지국으로 승격되자 정주국을 경영하였고, 같은 해 7월 여성들의 사회 참여와 평등권 신장을 위한 여자교육회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이후 대규모 수해가 나자, 정주군 수해구제회를 결성하여 봉사활동에 가담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 광업 경영과 조선일보 입사 ====&lt;br /&gt;
1924년 봄 오산학교 교감으로 있던 전우현이 방응모와도 안면이 있던 금광 채굴업자 두 명을 데리고 그를 찾아왔다. 그들은 자신들이 봐 둔 산이 있다고 방응모에게 소개했다. 그는 선천군의 지역 유지이자 최창학의 친구이며, 그가 동아일보 지국장으로 알게 된 이봉찬을 찾아갔다. 한학자로 알고 있던 그가 금광 투자를 제의하자 &amp;quot;한문이라면 빼지 않고 알려고 드는 한학 훈도가 어떻게 금광을&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16페이지&amp;lt;/ref&amp;gt;&amp;quot; 하느냐 하였지만, 이봉찬은 그에게 금광, 광산에 대한 지식을 알려주었다. 이봉찬은 그에게 광산 지식을 알려주며 최창학의 소유지 중 폐광을 빌리는 법을 알려주었다. 방응모의 됨됨이에 감복한 듯, 그의 수많은 질문에 적잖은 충고를 자임해주었다.&amp;lt;ref name=&amp;quot;fsfs117&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5페이지&amp;lt;/ref&amp;gt; 이봉찬은 최창학에게 방응모를 소개하는 편지를 수차례에 걸쳐 보내주었다.&amp;lt;ref name=&amp;quot;fsfs117&amp;quot;/&amp;gt; 이봉찬은 방응모의 친구들이 봐 둔 갱도를 임대받도록 도와주었다. 이봉찬은 방응모의 한학 실력과 사람됨을 알아보고 있어, 자금을 쾌히 빌려주었다.&amp;lt;ref name=&amp;quot;fsfs117&amp;quot;/&amp;gt;&lt;br /&gt;
&lt;br /&gt;
이후 광산업에 뛰어들어 1924년 여름 압록강변의 최창학 소유 폐금광인 평안북도 삭주군 외남면 교동 다릿골의의 삭주 교동광업소를 찾아가 10미터 정도 땅을 파고 금맥을 발견했다. 바로 삭주 교동광업소를 인수, 경영을 확대하였다. 이때 만난 동업자의 딸이자 친구 전우현의 조카딸인 '''이인숙(李仁淑)'''을 만났다. 본처 승계도가 두 아들을 잃고 복부 수술이 잘못되어 아이를 얻지 못하게 되자 방응모에게도 수많은 중매가 들어왔다. 자식들을 병으로 잃은 것이 자신의 불찰이라고 본 승계도는 그에게 작은 부인이라도 들이자는 말을 꺼내기도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18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26년 방응모에게 광산 사업을 제안했던 두 친구가 손을 털고 나갔고, 그의 가족은 돈이 없어 쌀 대신 좁쌀로 좁쌀죽을 먹으며 연명해야 했다. 방응모는 정주군에 사는 비슷한 또래의 먼 친척 방상진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고, 방상진과 일꾼 대여섯 명, 그리고 후처 이인숙의 친정 쪽에서 얻어온 토지문서를 얻어 자금을 마련, 삭주 다릿골 광산으로 가서 다시 금광을 채굴했다. 금맥은 쉽게 나오지 않았고, 출몰하는 마적떼에게 소와 기구를 약탈당했다. 동시에 빚쟁이들의 독촉에 시달렸으나 '''''1926년 7월 지하 300m 지점에서 금맥을 확보했다. 이후 연간 300kg의 금을 생산, 그는 굴지의 광산업자로''''' 성장해 금맥을 찾아 벼락부자가 되었다. 그는 방상진을 교동금광 총감독에 맡겼다. 이때 그는 최창학에게 임대료에 이자를 쳐서 보내주었다.&lt;br /&gt;
&lt;br /&gt;
그때까지 첫 부인 승계도가 두부를 팔아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미국산 포드 T형자동차'''''를 타고 금의환향했다. 1928년 방응모는 자신의 아호인 춘해를 딴 춘해 장학회를 만들고 장학생들의 모임인 이심회를 만든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48페이지&amp;lt;/ref&amp;gt; 그 해에 방응모는 교동지역에 파출소 지소를 유치하였고, 마적단에 시달리던 주민들은 그의 송덕비를 세우기도 했다. '''''1928년에 그는 의정부 직동, 흥선대원군의 별장이 있던 곳 바로 뒤에 위치한 건물을 매입'''''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한용운]], 홍명희를 자주 초대했다.&lt;br /&gt;
&lt;br /&gt;
'''''1932년 방응모는 교동광산을 135만원이란 거액에 일본 중외광업주식회사에 매각'''''했다. 그 뒤 1932년 6월부터 조선일보 영업국장으로 활동하다 '''1933년 3월 [[조선일보]]의 경영권을 인수'''하여 부사장에 취임하였다.&lt;br /&gt;
&lt;br /&gt;
그는 교동광업소를 운영하며 모은 재력을 바탕으로 부사장 재직 중 [[조선일보]]의 대주주가 되었으며, 1933년 7월 8대 사주 조만식으로부터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제9대 [[조선일보]] 사주로 취임, 활동했다.&amp;lt;ref&amp;gt;조선일보는 1932년 7월에 조만식을 사장으로 영입했지만, 조만식은 거의 평생을 평양에서 살아왔던데다 서울에서 활동하기에는 적응을 잘하지 못했다. 조만식은 신문사 경영난과 지역감정의 혹독한 시련을 받은 채 9개월만에 퇴사했다. 그리고 조만식 후임으로 1933년, 방응모를 사장으로 추대하기에 이르렀다.&amp;lt;/ref&amp;gt;&amp;lt;ref&amp;gt;《한국사 시민강좌 제47집, 대표적 독립운동가 12인》,일조각. p145&amp;lt;/ref&amp;gt; 방응모 취임 이후의 초대 부사장은 이광수, 주필은 서춘이었다.&lt;br /&gt;
&lt;br /&gt;
=== 언론, 사업 활동 ===&lt;br /&gt;
==== 사회사업과 조선일보 인수 계획 ====&lt;br /&gt;
금광 사업에 성공한 그는 영림, 조림 사업에도 투자하였다. 방응모는 배우자 승계도에게서 더 이상 아들을 얻지 못하자 첩 이인숙을 통해 아들을 얻으려고 하였다. 이인숙은 아들을 낳았으나 이 아들은 곧 사망하였다. 아들을 잃은 이인숙은 승계도의 도움을 받다가, 그해 6월 방응모가 있는 광산으로 가 생활하였다'''. 승계도와 이인숙을 통해 자녀를 얻지못하자 42세가 되던 해인 1924년 친형인 방응곤의 둘째 아들 방재윤을 양자로 입양시켰다.'''&lt;br /&gt;
&lt;br /&gt;
[[파일:방응모장학생.jpg|섬네일|160px|오른쪽|방응모와 그의 장학금을 받던 학생들. 가운데 앉은 이가 방응모이고, 서있는 이들 중 왼쪽에서 두 번째는 방응모의 양자 방재윤.]]&lt;br /&gt;
&lt;br /&gt;
1930년 배영옥과 결혼하여 딸 방재숙을 얻었다. 1932년 광산업을 정리하였고 언론사업을 비롯하여 육영사업과 조림 및 간척사업 등을 벌였다. 또한 고아원과 사회복지단체에 후원금을 지원하면서 인망을 얻기도 했다. 삭주 지역에서는 그의 송덕비가 세워지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932년 그는 수원군 팔탄면 노하리 일대의 갯벌에 일본인이 수차례 뚝을 쌓다가 실패했다는 정보를 얻고 임삼진을 통해 조선총독부에 허가를 요청하였다. 간척 사업은 이후 1935년부터 시작되었지만 1932년부터 은밀히 착수되어 왔다.&lt;br /&gt;
&lt;br /&gt;
1933년 무렵 방응모가 [[조선일보]] 인수에 나서기 전부터 그는 [[한용운]]을 위한 일이라면 돈을 아끼지 않고 지출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성북동 222번지 언덕에 만해를 위해 기와집 한 채를 지어주었는데 심우장(尋牛莊)이 그것이다. 또한 만해가 일제의 배급을 거부해 생활이 어렵게 되자 만해에게 생활비를 지급했던 방응모는 만해가 병석에 누운 1944년에는 치료비를 지원해주기도 했다.&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6/0000043262?sid=103 만해가 일송 선생 5일장 치른 사연]&amp;lt;/ref&amp;gt; 그 외에도 방응모는 만해 한용운·벽초 홍명희 등과 함께 새해가 되면 백천온천에도 같이 다녀올 정도로 두터운 친분을 맺었다.&lt;br /&gt;
&lt;br /&gt;
방응모의 광산 매각을 일본 정부 측에 알리고 다리를 놓은 것은 고일청(高一淸)이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84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32년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사건으로 체포된 [[안창호]]의 사면 탄원과 보석을 위해 노력하였다. 안창호가 윤봉길을 사주했다는 증거가 없으며 그가 테러행위를 지시했다는 증거 자료나 문건이 없다는 것이 방응모의 안창호 탄원 이유였다. 그러나 총독부 경무국장은 그의 안창호 석방 제안을 정중히 거절한다. 1936년 동방문화학원(뒤에 숭문중학교·고등학교 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1939년 9월에는〈조선일보〉의 조간 1회, 석간 2회의 1일 3회 발행을 시작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인수와 경영 ====&lt;br /&gt;
1933년 1월 16일 그는 정식으로 주식회사 [[조선일보]]사를 창립, 1월 18일에 발표된 창립 취지서에는 창립위원장 방응모, 창립발기인 방응모, 조만식, 고일청 외 등이 참여했다. 일단 그는 조만식을 사장으로 임명하고 자신은 부사장으로 있다가, 그해 3월 13일 다시 부사장에 취임했다. 4월 25일 편집인 겸 발행인이 되고, 4월 29일에는 조선일보의 조간, 석간제 발행을 부활, 확정시켰다. 1933년 7월 10일 총독부로부터 조선일보사의 법인 등록 승인을 얻어냈다. 7월 10일 조만식의 사퇴로, [[조선일보]]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다. 1933년 그는 자신의 아호를 춘해에서 계초로 바꾸었다. 그는 유능한 문인, 필진의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 상금 1천 원을 걸고 작가를 영입하였다.&lt;br /&gt;
&lt;br /&gt;
1934년 3월 25일 이광수를 비롯하여 서춘, 김동진, 함상훈, 신태익 등을 [[조선일보]]로 영입해 왔다. 그 외에도 정주군 출신 언론인, 작가들이 조선일보로 많이 오게 되었다. 이후 동아일보와 갈등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이광수가 조선일보로 옮겨와 부사장직에서 9개월 근무했다. 당시 조선일보 내부에서는 문모 라는 이가 이광수의 등장으로 자신의 입지 약화를 우려해 오랫동안 이광수를 내보내려 흉계를 꾸몄다고 한다. 이광수는 1934년 5월 25일자로 돌연 사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65페이지&amp;lt;/ref&amp;gt; 문모는 그에게 오히려 잘 됐다는 식으로 말하다가 방응모에게 호되게 혼이 났다. 그리고 문모로 하여금 즉시 금강산에 들어가 이광수를 다시 데려오게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65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이광수는 아들 봉근(당시 8살)의 사망 등으로 실의에 빠졌고, 1935년에 가서야 이광수를 조선일보 고문이자 필진으로 재영입하게 됐다.&lt;br /&gt;
&lt;br /&gt;
==== 동방문화학원 재단 설립 ====&lt;br /&gt;
방응모는 1936년 방농장의 소유권을 기본 자산으로 하는 재단법인 동방문화학원(東邦文化學院)을 설립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6페이지&amp;lt;/ref&amp;gt; 동방문화학원은 학교 법인으로 인가된 재단 법인으로, 그뒤 고계학원과 인연을 가지고 1936년부터는 보성고등보통학교를 후견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 분리되었다. 그뒤 방응모 장학생인 서중회 회원들을 위한 방응모 장학사업을 주관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7페이지&amp;lt;/ref&amp;gt;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태평로 구 조선일보 사옥 안에 동방문화학원의 간판을 달고 조광 잡지를 계속 발행하는 조광사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7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일제 강점기 후반 ===&lt;br /&gt;
==== 중일 전쟁 전후 ====&lt;br /&gt;
중일전쟁 개전 직후인 1937년 7월 11일에 열린 [[조선일보]] 간부회의에서 주필 서춘이 '일본군, 중국군, 장개석씨'등으로 쓰던 용어를 '아군, 황군, 지나, 장개석'으로 고치고 일본 국민의 입장에서 논설을 쓸 것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편집국장 김형원과 영업국장 김광수가 적극 반대를 하기도 했으나, 방응모는 '일장기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이미 몇 십만 원의 손해를 보았을 뿐 아니라 [[3.1 운동]] 때처럼 신문이 민중을 지도할 수 없다'면서 서춘의 입장을 지지했다. 한편으로 방응모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된 [[안창호]]를 [[조선일보]]에 영입하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안창호는 옥중에서 얻은 간질환과 폐질환 등으로 고생했고, 진료비 등을 수시로 지원하고 문병했음에도 출옥후 얼마 뒤에 사망한다.&lt;br /&gt;
&lt;br /&gt;
1933년 이심회(以心會：후에 序中會, 방응모장학회 등으로 명칭이 바뀜)라는 장학회를 만들어 국내 대학생과 해외유학생들에게 학자금을 지급하기도 했으며, 재단법인 동방문화학원(東方文化學院：지금의 숭문중·고등학교 전신)의 이사장직을 맡기도 했다. 또한 자신의 막대한 재원을 들여 1936년부터 함경남도 영흥군 일대에 당시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대단위 조림사업을 벌였으며, 그 전 해인 1935년부터는 경기도 수원군 팔탄면 일대에서 만 2년간에 걸친 간척사업을 벌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937년 12월 24일 [[안창호]]는 병보석 판정을 받고 재판소가 지정한 현 서울대학교병원인 경성제국대학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안창호의 입원 중에 시중을 든 사람으로는 안창호의 외조카 김순원과 청년 박정호 두 사람이었고, 나중에는 이응준 장군의 부인 이정희가 끝까지 지성껏 간호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7페이지&amp;lt;/ref&amp;gt; [[안창호]]는 병상에서 병원비 문제로도 고초를 겪었다. 이 때문에 조만식은 일본 경찰로부터 안창호의 병원비를 대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음에도, &amp;quot;내가 먹고 살면서 그 선생을 돌보지 않을 수 없다&amp;quot;며 완강히 거절하고 안창호를 도왔다고 한다. 안창호의 간호를 같이 도와주던 이응준 장군 부인 이정희는 10일마다 계산되어 나오는 병원 입원비로 안창호 선생이 괴로워하는 표정을 지켜볼수 없었다고 진술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8페이지&amp;lt;/ref&amp;gt; 방응모는 5백원의 수표 한 장을 안창호에게 전달하였다. 50일간의 입원비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9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안창호]]는 1938년 3월 10일 밤 12시 경성제국대학 병원에서 운명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폐간 사건 ====&lt;br /&gt;
일본의 전쟁이 격화되면서 조선총독부 공보국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1940년에 강제로 폐간조치 했다. 광산을 팔아서 자신의 모든 것을 조선일보에 바쳤던 방응모는 큰 절망과 좌절을 느껴야 했다. [[한용운]]은 ‘신문이 폐간되다/ 붓이 꺾이어 모든 일이 끝나니…’로 시작하는 시를 지어 방응모를 위로했다. &amp;lt;ref&amp;gt;붓이 꺾이어 모든 일 끝나니 이제는 재갈 물린 사람들 뿔뿔이 흩어지고 아, 쓸쓸하고 쓸쓸한지고 망국 서울의 가을날 한강의 물도 흐느끼느니 울음 삼켜 흐느끼며 연지를 외면한 채 바다 향해 흐르느니&amp;lt;/ref&amp;gt; 동아일보에는 김성수 외에도 장덕수와 송진우가 있었지만 그에게는 조선일보 폐간을 막기 위해 총독부와 교섭할 인물도 없었다.&lt;br /&gt;
&lt;br /&gt;
1938년 2월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선 내 일간신문 25개사로 조직된 조선춘추회의 창립에 창립발기인으로 참가했고, 조선춘추회 간사로 활동했다. 같은 해 7월 “국민정신을 총동원하고 내선일체 전 능력을 발휘하여 국책 수행에 협력하여 성전(聖戰)의 궁극적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조직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에 참여했고, 그날 결성된 경성연맹 창립총회에서 상담역을 맡았다. 9월부터 조선방공협회 경기도연합지부 평의원을 지냈다. 10월에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주최한 비상시 국민생활 개선을 위한 제1회 생활개선위원회에서 제2부(의례와 사회풍조 쇄신부)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그러나 1938년 10월부터 조선총독부는 조선일보의 신문용지를 검열, 통제하기 시작했다.&lt;br /&gt;
&lt;br /&gt;
1940년 5월 조선총독부 총독 미나미 지로가 방송담화로 창씨개명을 권고했다. 그러나 그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성씨를 이제 와서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며 창씨개명은 완강하게 거절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조선일보에 트집이 잡힐 일이 나타나지 않자 총독부는 전국 면사무소에 조선일보 신문 구독을 거절하도록 명령을 내렸고, 동시에 조선말을 쓰는 민원인에게는 일을 처리해주지 말도록 하게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3페이지&amp;lt;/ref&amp;gt; 조선총독부는 송진우의 예금통장을 문제삼았다. 송진우 명의의 은행저금이 동아일보의 8백여 개의 지국과 분국을 통해 모금된 독립운동 자금이라며, 그리고 동아일보 간부들이 백운장이라는 요정에서 회식을 한 것을 김성수 집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려 했다는 등의 이유로 백관수 동아일보 사장을 전격 구속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3~374페이지&amp;lt;/ref&amp;gt; 동아일보는 백관수가 구속된지 10일 만에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동아일보 중역회의를 열고 폐간신청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4페이지&amp;lt;/ref&amp;gt; 총독부는 조선일보에도 자진 폐간을 권고했고, 1940년 8월 9일 편집회의를 주관, 8월 10일 조선일보의 폐간계를 내고, 8월 10일자로 폐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5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잡지 발행 활동 ====&lt;br /&gt;
신문 강제 폐간 뒤 방응모는 간판을 조광사로 바꿔 걸고, 사옥은 동방흥업주식회사로 등기를 변경해서 유지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1페이지&amp;lt;/ref&amp;gt; 이후 그는 조광 잡지 발행에 전념했다. 1943년 8월 경 일본 중앙대학의 예과를 마친 방일영이 입사&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1페이지&amp;lt;/ref&amp;gt;, 필진으로 참여했다. [[조선일보]]가 폐간된 후에도 방응모는 벽초 홍명희 부자에게 지속적으로 생활비를 대주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4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4년 6월 29일 만해 [[한용운]]이 사망했다. 그는 심우장을 찾아가 3백원을 내놓았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5페이지&amp;lt;/ref&amp;gt;당시 쌀 10가마가 100원이었지만, 심우장은 당장 현금 1원이 없었는데 거액이라서 놀랐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6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광복 이후 언론 및 정치활동 ===&lt;br /&gt;
==== 광복 직후 ====&lt;br /&gt;
1945년 8.15 광복 후에는 8월 말과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朝鮮在外戰災同胞救濟會) 고문과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9월 초 [[안재홍]] 등이 좌경화되는 건준체제에 반발하여 건준을 탈퇴하자 방응모 역시 건준을 탈퇴하였다.&lt;br /&gt;
&lt;br /&gt;
9월 2일 미군정이 주둔하자, 방응모는 윤전기를 찾기 위해 폐간 당시의 증빙서류를 미 군정청에 제시하였으나 소식이 없었다. 총독부는 조선일보 폐간 직후 인수한 윤전기를 경성일보사에 옮겨서 설치했다. 그는 동방문화재단 외 4개 사업소를 적산으로 파악한 미군정을 설득하고, 사옥 문제도 해결하였다.&lt;br /&gt;
&lt;br /&gt;
10월 1일 조선일보 편집위원회를 구성하고, 신문 복간 운동을 추진했다. 조선총독부의 폐간 지시 당시 의정부로 옮겨놓은 일부 활자 자모음이 잘 보관되어, 그해 11월 23일 조선일보를 복간시키고, 서울신문사 사옥에서 조선일보 복간호를 간행하였다. 이후 조선사회문제대책중앙협의회 중앙위원을 거쳐 10월 16일 이승만 등의 주도로 독립촉성중앙회가 결성되자 독촉에 가입하였다.&lt;br /&gt;
&lt;br /&gt;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이 귀국하자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에 입당했다. 12월 [[안재홍]]의 추천으로 한국독립당의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출되어 3~4개월 동안 활동했다.&amp;lt;ref&amp;gt;일각에서는 방응모가 '한독당 재무부장으로 지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1947년부터 한독당 재무부장을 맡은 신창균이 전면 부정했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47/0000002626?sid=102 백범 비서와 '진짜' 한독당 재정부장의 육성증언. 참고.]&amp;lt;/ref&amp;gt; 그 뒤 대한국민총회 발기인, 대한독립애국금헌성회 발기인 등으로 활동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복간 및 군정기 활동 ====&lt;br /&gt;
11월 [[조선일보]]사를 복간시켰다. 그러나 한동안 조선일보의 인쇄는 서울신문사에서 간행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1945년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추념대회에 참여하였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2&amp;quot;&amp;gt;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13&amp;lt;/ref&amp;gt; 순국선열추념대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2&amp;quot; /&amp;gt;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참여,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이 되었다.&amp;lt;ref&amp;gt;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55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6년 2월 26일 서울신문사 공무국 종업원들이 조선일보의 인쇄를 거부해버렸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436페이지&amp;lt;/ref&amp;gt; 그동안 묵시적으로 방해가 은근히 있었다. 표면상의 문제는 임금 문제이나 내용상으로는 조선일보에 대한 조선공산당의 시위의 일종이었다. 사흘간의 교섭 끝에 2월 28일에 가서야 26일자와 27일자를 소급해서 인쇄하여 신문을 한꺼번에 발행하였다. 그러나 3월 1일과 2일에 또다시 인쇄를 거부당해 결국 휴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436페이지&amp;lt;/ref&amp;gt; 조선일보를 경성일보사로 옮겨서 인쇄하기로 하고 3월 5일자로 사고로 독자에게 알렸다.&lt;br /&gt;
&lt;br /&gt;
4월 29일 김구, 김창숙, 김성수, 오세창 등과 함께 서울운동장에서 윤봉길의사 추모회의 창립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amp;lt;ref&amp;gt;&amp;quot;故尹奉吉義士의 記念式 오늘, 發起人會 열고 準備&amp;quot;, 동아일보 1946년 4월 23일자 2면, 사회면&amp;lt;/ref&amp;gt; 그해 5월 조선공업구락부 고문에 위촉되었다.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民族統一總本部) 10인협의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6월 15일 오후 5시 40분 서울역에 마중나가 서울역에 도착한 삼의사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lt;br /&gt;
&lt;br /&gt;
1945년 광복 직후 서기원이 그를 찾아왔다. 서기원은 그때 경성농상실천학교의 동창회로부터 이 학교의 교장이 되어 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이다. 방응모는 서기원의 제의를 받아들여 1946년 8월 28일 동방문화학원 이사장으로 숭문상업학교를 인수, 재단 이사장이 되었다. 후일 방응모가 6.25 전쟁 중에 납북된 후 동방문화학원과 숭문중,고교의 재단은 최용진이 운영하다가 다시 1978년에 방일영에게 인수되었다.&lt;br /&gt;
&lt;br /&gt;
1947년 1월 21일 제5회 창립위원회를 본사에서 개최하고 2월 23일 주식회사 조선일보사 주주창립총회를 열고 대표이사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공동투자 경영자로 참여시킨 전무 이종민과의 알력이 발생했다. 이종민과의 갈등이 심화되자 그해 8월 3일 방응모는 일단 사직서를 제출했다. 1947년 8월 10일 풍문여고 강당에서 개최된 한인신문기자협회에 참석, 민족청년단에서 언론계 공로자로 방응모, 김성수, 설의식을 지정하여 상을 시상받았다.&amp;lt;ref&amp;gt;&amp;quot;朝鮮 新聞記者協會&amp;quot;, 동아일보 1947년 8월 10일자 2면, 사회면&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납북과 최후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 납북 후 행적은 &amp;quot;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amp;quot;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 1950년 8월경 개성 송악산 부근에서 미군의 폭격에 희생되었고 심한 폭격으로 시신을 찾을 수 없어 묘도 만들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남한에서는 1955년 7월 7일 생사불명기간 만료로 인해 실종 처리되었다.&lt;br /&gt;
&lt;br /&gt;
=== 사후 ===&lt;br /&gt;
서울 종로에 있던 양자 방재윤의 두 아들 방일영과 방우영은 방응모의 첩 이인숙이 찾아가 피신하라고 권고하여 황급히 피신했다. &lt;br /&gt;
&lt;br /&gt;
7월 6일 그의 행방불명처리가 되고, 방응모의 사후에도 [[조선일보]]는 그의 명의로 발행되었다. 1952년 4월 28일 조선일보는 발행인겸 편집인을 장기영으로, 인쇄인을 방일영으로, 방응모는 명예사장으로 명의변경하여 휴전 후 계속 발행하게 되었다. 1954년 4월 30일 제8회 조선일보 정기주주총회에서 장기영 사장이 사퇴하면서, 명예사장 방응모가 사장으로 추대되고, 발행인 겸 대표취체역에 방일영이 선임되었다. 이후 실종 후 1959년에 법적으로 사망 처리되었다. 그리고 1970년까지는 조선일보는 그의 이름으로 발행되었다.&lt;br /&gt;
&lt;br /&gt;
1970년 2월 19일 조선일보 정기주주총회에서 방응모 이사를 사퇴 수리하였다. 그의 피폭 사망 사실은 1970년대 이후 탈북자들을 통해 대한민국에 소개되었다.&lt;br /&gt;
&lt;br /&gt;
== 친일행위 의혹 ==&lt;br /&gt;
=== 일제 전시체제기 활동 ===&lt;br /&gt;
일제 강점기 말기 언론인으로서 총독부체제에 협력한 기록과 활동이 다수 기록이 있다. 1933년 3월 [[조선일보]] 경영권을 인수하고 부사장직에 취임했을 당시 같은 달에 고사기관총 구입비용 1600원을 군에 헌납하였다. 그는 1935년 친일 잡지 《조광 (잡지)(朝光)》을 창간하였고, 1937년에는 경성방송국 제2방송에 출연하여 일제가 중국의 베일을 절멸케하여 극동평화를 지키려고 한다는 강연을 하였다. 1940년대부터 조광에 집중적으로 친일 논설을 기고하고 시국 강연에 참여하여 전쟁 지원을 독려했다. 1942년 6월에는 '징병령 실시에 일층 더 감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글을 써서 조광에 발표하였다. 애국금차회(1937),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1938), 임전대책협의회(1941), 조선임전보국단(1941) 등 대표적인 친일 단체의 회원에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그는 이런 행적으로 인해 해방정국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명단에 기록되어 있고,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해 발표한 &amp;lt;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amp;gt;에 모두 포함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lt;br /&gt;
&lt;br /&gt;
우리 [[조선일보]]는 다른 어떤 신문도 따라오지 못하는 확고한 신념에서 비국민적 행위를 단연 배격하여 종국까지 조선일보사가 이미 정해놓은 방침에 한뜻으로 매진한다.|원산에서의 순회 강연&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9478.html 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친일 다짐하다 시민에 봉변]《한겨레》2005-08-24 오후 06:13:18&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반민족행위 논란 ===&lt;br /&gt;
방응모를 친일파로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남아 있다. 조선일보 경영 이전에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방응모의 활동이 거의 없었고, 납북된 뒤 소식이 끊겨버린 까닭에 본인이 항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 동안의 행적만으로 친일파 여부를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방응모의 후손들이 영향력 있는 [[조선일보]] 언론사의 사주를 맡았기에 그의 입장에서 서술한 기록을 많이 남기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80년 발간된 그의 전기 《계초 방응모》(조선일보사) 등에는 '그가 민족주의적 선각자'로 묘사되고 있다. 방응모가 친일파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일부세력측은 그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논거로 드는 경우가 많이 있다.&amp;lt;ref&amp;gt;유석재, 계간 《유심》 (2004년 봄호) [http://yousim.buddhism.org/html/2004-spr/tamgu-yoo-seok-jae.htm 삭풍 속에 피어난 금란지교(金蘭之交) - 만해와 계초 방응모]&amp;lt;/ref&amp;gt;&amp;lt;ref&amp;gt;&amp;quot;일제 말기 계초는 시국강연에 나설 것과 창씨개명을 집요하게 강요받았으나 그때마다 묵묵부답으로 거부하며 소신을 지켰다.&amp;quot; 《조선일보》 (2001.3) 조선일보 사장열전 - 계초 방응모편, 《한겨레》 (2001.3.30) [http://www.njoyschool.net/news/article_view.asp?menu_code=s20202&amp;amp;no=1206 조선일보, 일장기를 신문제호 위에]&amp;lt;/ref&amp;gt;&lt;br /&gt;
또한 한국정토학회 고문이자 서울 정토사 주지였던 박설산(1918~2007)이 학도병에 끌려가기 직전인 1943년 12월 28일 밤 서울역에서 스스로 왼발을 선로에 올려 발가락을 절단해 징집을 기피하자 방응모는 만해와 함께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설산을 걱정하면서 입원 중 조선일보 기자를 통해 돈을 전달한 것은 물론 퇴원할 때 돈을 전달하고 뒤를 보살폈다고 한다.&amp;lt;ref&amp;gt;박설산 회고록 &amp;lt;뚜껑없는 조선역사책&amp;gt;(1994, 도서출판 삼장) p240~241&amp;lt;/ref&amp;gt;&lt;br /&gt;
&lt;br /&gt;
2010년 12월, 방응모 관계자들 및 조선일보측은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을 취소해달라'며 법원에 낸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amp;quot;1944년 조선항공업 창립발기인으로 활동한 부분에 대해 친일행위로 판단한 부분을 취소하지만 나머지 활동에 대해서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amp;quot;라고 판결했다. 그 이유인 즉 &amp;quot;방응모는 1933년 조선일보 사장으로 취임해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등으로 활동하며 친일활동을 벌였으며, 1937년 경성방송국 시국강연에서 일본제국이 극동평화를 확립시킬 것이라는 내용의 강연을 하고, 1938년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춘추회의 발기인 겸 간사로 활동하기도 했다&amp;lt;ref&amp;gt;[http://media.daum.net/breakingnews/politics/view.html?cateid=1002&amp;amp;newsid=20101222103319164&amp;amp;p=newsis 법원 &amp;quot;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친일파 맞다&amp;quot;]뉴시스 2010년 12월 22일&amp;lt;/ref&amp;gt;&amp;quot;는 것이다.&lt;br /&gt;
&lt;br /&gt;
2012년 1월 12일 서울고법 행정7부는 방 전 사장의 손자인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이 행정안전부를 상대로 낸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처분 취소 청구소송에서 ‘일제 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의 친일 행위 판정 조항에 비추어 방 전 사장에게 적용된 모두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민족적 지도자로서 비중이 큰 만큼 그로 인한 책임도 무거울 뿐 아니라 고난의 시기를 겪은 민족으로서 그 역사를 반성하자는 입장에 설 때, 방 전 사장의 여러 행태는 반민특별법에서 규정한 친일반민족행위의 유형에 속함을 부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1·2심 재판부는 방 전 사장이 자신이 운영하던 잡지 &amp;lt;조광&amp;gt;에 일제 침략전쟁에 동조하고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문예물과 일제 침략전쟁에 협력할 것을 주문하는 논문을 게재하는 등의 ‘친일’ 행위를 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또한, 2심 재판부는 일본의 전쟁 수행을 돕기 위해 설립된 군수 제조업체 ‘조선항공공업’의 발기인과 감사를 지낸 것은 “감사는 업무집행에 관여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기관으로, 방 전 사장이 이 회사를 운영했다고 볼 수 있다”는 이유로 친일이라고 판단했다.&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4565.html법원 ‘방응모 친일’ 2심서도 인정] 인터넷한겨레 2010년 12월 22일&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기타 ==&lt;br /&gt;
그는 [[한용운]], 최남선, 정인보, 홍명희 등과 친분관계를 형성하고 어울려 지냈다 한다.&lt;br /&gt;
&lt;br /&gt;
김구의 한국독립당의 재정적 후견인 역할을 하였다 하며,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삼의사 유골봉환식 때 김구, 정인보 등과 촬영한 사진이 있다.&lt;br /&gt;
한편 임꺽정의 저자인 벽초 홍명희가 방응모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그와 깊은 친분을 맺었다는 주장이 있다. 《조광》 1938년 11월호엔 홍명희가 병중에 있는 방응모를 위로하며 지은 한시가 방응모의 답시와 함께 실려 있다고 한다.&amp;lt;ref&amp;gt;[http://weekly.chosun.com/site/data/html_dir/2004/11/05/2004110577041.html ‘임꺽정’으로 되살아난 독립운동의 魂! 주간조선 1827호 2004.11.04&amp;lt;/ref&amp;gt; 또한 [[안창호]]의 비서실장을 지낸 독립유공자 구익균은 방응모와 안창호가 친밀했다는 주장을 했다.&amp;lt;ref&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09/2008030901055.html &amp;quot;공산주의자들, 도산 비판하다가도 하숙비 떨어지면 찾아와&amp;quot;] 조선일보, 2008-03-10 03:22&amp;lt;/ref&amp;gt;&lt;br /&gt;
또한 박설산에 따르면 1943년 만해 한용운에게 학도병으로 끌려가게 되었음을 알리려 심우장으로 찾아가게 되었을 때, 한용운과 방응모가 바둑을 두고 곁에서 정인보가 훈수를 두고 있었다고 한다.&amp;lt;ref&amp;gt;박설산 저 &amp;lt;뚜껑없는 朝鮮 역사 책&amp;gt; p.226 도서출판 三藏(1994)&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 /&amp;gt;&lt;br /&gt;
&lt;br /&gt;
== 참고 자료 ==&lt;br /&gt;
* 청산하지 못한 역사: 언론 내세워 일제에 아부한 교화 정책의 하수인 (문영숙) (반민족문제연구소, 청년사, 1994)&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민족 계몽의 초석 방응모(이동욱 저, 지구촌, 1998)&lt;br /&gt;
* 계초 방응모전(계초전기간행위, 조선일보사, 1980년)&lt;br /&gt;
* 계초 방응모(이동욱, 방일영문화재단, 1996)&lt;br /&gt;
&lt;br /&gt;
== 외부 링크 ==&lt;br /&gt;
* [https://web.archive.org/web/20050123171046/http://chosunhost.com/ 계초방응모 기념사업회]&lt;br /&gt;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09145 &amp;lt;조선일보&amp;gt;, 방응모 전 사장의 '친일행적' 말한다] - 오마이뉴스 04.09.10일자&lt;br /&gt;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020302101749 방응모ㆍ 김성수 친일행적 뭔가 : &amp;lt;긴급입수&amp;gt;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 全文] - 프레시안 2002-03-02&lt;br /&gt;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54052 그가 '&amp;lt;조선&amp;gt;의 주인' 주장하는 이유] 오마이뉴스 2001년 9월 20일자&lt;br /&gt;
*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956 방재선씨, 호주·상속 원인무효소송 제기]&lt;br /&gt;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4/06/2008040601053.html '5인 친필 서첩' 발굴] 조선일보 2008년04월06일자]&lt;br /&gt;
&lt;br /&gt;
[[분류: 감자]]&lt;/div&gt;</summary>
		<author><name>Nsgjjsjsjy02</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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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방응모</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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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Nsgjjsjsjy02: /* 계몽 운동 */&lt;/p&gt;
&lt;hr /&gt;
&lt;div&gt;{|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width:100%&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0%&amp;quot;|사진&lt;br /&gt;
|[[파일:방응모.jpg|center|200픽셀]]&lt;br /&gt;
|+ '''방응모'''&lt;br /&gt;
|+ style=&amp;quot;caption-side:bottom;text-align:left:&amp;quot;|출처: 위키백과&lt;br /&gt;
|출생||1883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조선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또는 정부면 성내동&lt;br /&gt;
|-&lt;br /&gt;
|사망||1950년경으로 추정&lt;br /&gt;
|-&lt;br /&gt;
|사인||불명&lt;br /&gt;
|-&lt;br /&gt;
|거주지||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amp;gt; 경성부 -&amp;gt; 경기도 양주군 의정부읍&lt;br /&gt;
|-&lt;br /&gt;
|국적||대한민국&lt;br /&gt;
|-&lt;br /&gt;
|본관||온양&lt;br /&gt;
|-&lt;br /&gt;
|별칭||호: 계초(啓礎), 춘해(春海)&lt;br /&gt;
|-&lt;br /&gt;
|직업||교사, 변호사, 상인, 언론인, 기업인, 사회운동가, 정치가&lt;br /&gt;
|-&lt;br /&gt;
|배우자||승계도, 이인숙, 배영옥, 노효용&lt;br /&gt;
|-&lt;br /&gt;
|자녀||방재숙(딸), 방재욱·방재선·방재효·방재규(아들), 방재윤(양자)&lt;br /&gt;
|-&lt;br /&gt;
|부모||방계준(부), 온양박씨(모)&lt;br /&gt;
|}&lt;br /&gt;
&lt;br /&gt;
'''방응모'''(方應謨, 평안북도 정주군, 1883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 1950년 8월(추정)는 [[일제강점기]]의 교육자, 언론인, 법조인, 기업인이자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언론인이며 정치인이다. 호는 '''춘해'''(春海)이고, 뒤에 '''계초'''(啓礎)로 고쳤다.&lt;br /&gt;
&lt;br /&gt;
1922년 동아일보 정주 지국을 인수해 지국장을 지내다가 1924년 금광업에 뛰어들어 큰 부를 얻게 되었다. 1932년 6월 조선일보에 입사하였고 이후 영업국장이 되어 조선일보의 판매망을 장악하게 되고 경영권을 인수하면서 1933년 3월 조선일보 부사장이 되었다. 1933년 7월부터 1950년 7월까지 종신으로 [[조선일보]]의 사장을 역임하였다. 1935년 창간한 월간잡지 '조광(朝光)'은 친일 논란이 있다.&amp;lt;ref&amp;gt;안은필. [http://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9211 조선일보가 가장 빛나던 시기, ‘안재홍 시대’]&amp;lt;/ref&amp;gt;&amp;lt;ref name=&amp;quot;안은&amp;quot;&amp;gt;안은필. [http://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9279 방응모 친일증거, “모래밭에서 모래 찾기”]국민TV. 기사입력 2015년 4월 23일. 기사수정 2015년 4월 24일.&amp;lt;/ref&amp;gt;&amp;lt;ref&amp;gt;이민영.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1/0002255321?sid=102 고법 “방응모 前조선일보 사장 친일행적 대부분 인정”]. 서울신문. 2012년 1월 13일.&amp;lt;/ref&amp;gt;&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6/0000000413?sid=110 김성수ㆍ방응모와 친일언론인 군상]. 미디어오늘. 2002년 3월 12일.&amp;lt;/ref&amp;gt; 언론계에서 활동하면서도 사업가의 길을 함께 걸었고, 교육 장학 활동을 하였으며, 1945년 광복 직후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안재홍]]의 추천을 받아 한국독립당 중앙상무위원과 독립촉성국민회 총무부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amp;lt;ref name=&amp;quot;안은&amp;quot;/&amp;gt;&amp;lt;ref&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16/2008031600800.html 계초 방응모와의 우정도 여러 편의 시로 표현해&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해방 정국에서 김구의 재정적 후견인으로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등 삼의사 유골 봉환 사업과 신탁통치 반대 운동 등에 참여하여 활동했다.&lt;br /&gt;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 납북 후 행적은 &amp;quot;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amp;quot;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lt;br /&gt;
&lt;br /&gt;
== 생애 ==&lt;br /&gt;
=== 생애 초기 ===&lt;br /&gt;
==== 출생과 성장 ====&lt;br /&gt;
방응모는 1883년 11월 3일 또는 9월 29일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바우머리 부락 또는 정주군 정부면 성내동 425번지에서 '''방계준(方桂準)'''과 온양 박씨(溫陽朴氏)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어려서 빈곤한 가정환경으로 방응모는 정규 학교에는 입학하지 못하고, 16세 때까지 서당에 드나들며 한학을 익혔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던 중 그가 어느 정도 실력이 우수하다고 인정되자, 스승인 승창률은 잠시 방응모에게 어린아이들을 돌보게 한 후 자리를 피하곤 했다 한다. 그는 홀로 사서육경을 탐독, 독파하였다. 21세 무렵 잠시 서당 훈장을 지내기도 했다. 우연히 경성부에 갔다가 신문물을 보고 충격을 받아 17세에 독학으로 신학문과 일본어, 중국어, 수학 등을 독파하였다.&lt;br /&gt;
&lt;br /&gt;
유년시절 서당의 성리학 스승이던 승창률의 친척인 승시영(承時榮)과 조씨(趙氏)의 딸 승계도와 결혼했다. 결혼한 다음 해에도 그는 공부를 한다며 책만 사다 읽곤 했고, 부인 승계도는 생계를 위해 몸소 나섰다. 그의 아내는 남편에 대한 믿음이 절대적이었고 탓을 하거나 가출하지 않았다.&lt;br /&gt;
&lt;br /&gt;
=== 언론, 기업 활동 ===&lt;br /&gt;
==== 계몽 활동과 언론 활동 ====&lt;br /&gt;
1915년부터 1924년 방응모는 지역 지식인들, 유학파 청년, 계몽 청년들이 모여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하는데 참여했고, 민립대학기성회 평안북도지부에서 활동하면서 민립대학기성회 중앙회 중앙위원 조만식 등과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언변과 용모가 되었던 그의 여관에도 손님들이 몰렸고, 그가 &amp;quot;2백원도 좋고 5백원도 좋다며 보태달라&amp;lt;ref name=&amp;quot;fsfs87&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7페이지&amp;lt;/ref&amp;gt;&amp;quot;고 하면 기부금을 내는 이들이 있었다. 대신 하룻밤을 의탁하려고 그의 여관을 찾은 이들에게 무료 숙식을 제공하기도 했다.&amp;lt;ref name=&amp;quot;fsfs87&amp;quot;/&amp;gt; 1919년 정주에서 3.1 만세 운동이 벌어지자, 그도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형사들의 눈을 피해 방응모는 만세운동을 하다 재빨리 몸을 피해 화를 면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8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1922년 6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인수하여 분국장에 취임했다. 6월 9일에는 정주군 지역 체육행사로 테니스 대회를 개최하였다. 그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경영하는 동시에 그는 농촌 계몽운동 등에 적극 투신하여 인망을 쌓았다. 처음 몇번은 친구 전우현의 자금을 빌려 부족분을 메우기도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02페이지&amp;lt;/ref&amp;gt; 한다. 1922년 6월 19일&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96페이지&amp;lt;/ref&amp;gt; 동아일보 본사를 설득하여 정주분국을 동아일보사 정주지국으로 승격시켰다. 동아일보사 지부장 재직 시 그는 전우현과 함께 의기투합하여 민립 대학 설립 자금과 농촌진흥회 회원의 여비와 회비를 염출하기 위한 목적 및 당시 교사도 없이 난관에 처했던 오산학교의 재개교를 위한 &amp;quot;오산학교의 부흥 운동을 목표로 한 재단법인 촉성 기금 마련&amp;quot; 등을 계획했다. 총독부의 인허가 거부로 실패한 대학 설립 자금은 고스란히 오산학교의 부활과 복교 자금으로 투입되었다. 1920년 1월에 경성형무소에서 가석방된 조만식은 이승훈을 만났고, 다시 조만식이 오산학교를 맡으면서 학교는 다시 정상 운영되었다.&lt;br /&gt;
&lt;br /&gt;
1923년 동아일보 정주군 분국이 지국으로 승격되자 정주 지국장으로 동아일보 정주지국을 경영하였고, 같은 해 7월 여성들의 사회참여와 평등권 신장을 위한 여자교육회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이후 대규모 수해가 나자, 정주군 수해구제회를 결성하여 봉사활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1923년 4월 조만식·송진우·안재홍·김성수 등의 주도로 민간 자본으로 대학교 설립을 추진하기 위한 조직인 조선민립대학기성회가 결성되자, 방응모는 민립대학 기성회에 참여하여 민립대학기성회 정주군준비회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5월에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정주지방지부가 설립되자 기성회 정주지부 상무위원을 맡았다.&lt;br /&gt;
&lt;br /&gt;
==== 광업 경영과 조선일보 입사 ====&lt;br /&gt;
1924년 봄 오산학교 교감으로 있던 전우현이 방응모와도 안면이 있던 금광 채굴업자 두 명을 데리고 그를 찾아왔다. 그들은 자신들이 봐 둔 산이 있다고 방응모에게 소개했다. 그는 선천군의 지역 유지이자 최창학의 친구이며, 그가 동아일보 지국장으로 알게 된 이봉찬을 찾아갔다. 한학자로 알고 있던 그가 금광 투자를 제의하자 &amp;quot;한문이라면 빼지 않고 알려고 드는 한학 훈도가 어떻게 금광을&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16페이지&amp;lt;/ref&amp;gt;&amp;quot; 하느냐 하였지만, 이봉찬은 그에게 금광, 광산에 대한 지식을 알려주었다. 이봉찬은 그에게 광산 지식을 알려주며 최창학의 소유지 중 폐광을 빌리는 법을 알려주었다. 방응모의 됨됨이에 감복한 듯, 그의 수많은 질문에 적잖은 충고를 자임해주었다.&amp;lt;ref name=&amp;quot;fsfs117&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5페이지&amp;lt;/ref&amp;gt; 이봉찬은 최창학에게 방응모를 소개하는 편지를 수차례에 걸쳐 보내주었다.&amp;lt;ref name=&amp;quot;fsfs117&amp;quot;/&amp;gt; 이봉찬은 방응모의 친구들이 봐 둔 갱도를 임대받도록 도와주었다. 이봉찬은 방응모의 한학 실력과 사람됨을 알아보고 있어, 자금을 쾌히 빌려주었다.&amp;lt;ref name=&amp;quot;fsfs117&amp;quot;/&amp;gt;&lt;br /&gt;
&lt;br /&gt;
이후 광산업에 뛰어들어 1924년 여름 압록강변의 최창학 소유 폐금광인 평안북도 삭주군 외남면 교동 다릿골의의 삭주 교동광업소를 찾아가 10미터 정도 땅을 파고 금맥을 발견했다. 바로 삭주 교동광업소를 인수, 경영을 확대하였다. 이때 만난 동업자의 딸이자 친구 전우현의 조카딸인 '''이인숙(李仁淑)'''을 만났다. 본처 승계도가 두 아들을 잃고 복부 수술이 잘못되어 아이를 얻지 못하게 되자 방응모에게도 수많은 중매가 들어왔다. 자식들을 병으로 잃은 것이 자신의 불찰이라고 본 승계도는 그에게 작은 부인이라도 들이자는 말을 꺼내기도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18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26년 방응모에게 광산 사업을 제안했던 두 친구가 손을 털고 나갔고, 그의 가족은 돈이 없어 쌀 대신 좁쌀로 좁쌀죽을 먹으며 연명해야 했다. 방응모는 정주군에 사는 비슷한 또래의 먼 친척 방상진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고, 방상진과 일꾼 대여섯 명, 그리고 후처 이인숙의 친정 쪽에서 얻어온 토지문서를 얻어 자금을 마련, 삭주 다릿골 광산으로 가서 다시 금광을 채굴했다. 금맥은 쉽게 나오지 않았고, 출몰하는 마적떼에게 소와 기구를 약탈당했다. 동시에 빚쟁이들의 독촉에 시달렸으나 '''''1926년 7월 지하 300m 지점에서 금맥을 확보했다. 이후 연간 300kg의 금을 생산, 그는 굴지의 광산업자로''''' 성장해 금맥을 찾아 벼락부자가 되었다. 그는 방상진을 교동금광 총감독에 맡겼다. 이때 그는 최창학에게 임대료에 이자를 쳐서 보내주었다.&lt;br /&gt;
&lt;br /&gt;
그때까지 첫 부인 승계도가 두부를 팔아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미국산 포드 T형자동차'''''를 타고 금의환향했다. 1928년 방응모는 자신의 아호인 춘해를 딴 춘해 장학회를 만들고 장학생들의 모임인 이심회를 만든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48페이지&amp;lt;/ref&amp;gt; 그 해에 방응모는 교동지역에 파출소 지소를 유치하였고, 마적단에 시달리던 주민들은 그의 송덕비를 세우기도 했다. '''''1928년에 그는 의정부 직동, 흥선대원군의 별장이 있던 곳 바로 뒤에 위치한 건물을 매입'''''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한용운]], 홍명희를 자주 초대했다.&lt;br /&gt;
&lt;br /&gt;
'''''1932년 방응모는 교동광산을 135만원이란 거액에 일본 중외광업주식회사에 매각'''''했다. 그 뒤 1932년 6월부터 조선일보 영업국장으로 활동하다 '''1933년 3월 [[조선일보]]의 경영권을 인수'''하여 부사장에 취임하였다.&lt;br /&gt;
&lt;br /&gt;
그는 교동광업소를 운영하며 모은 재력을 바탕으로 부사장 재직 중 [[조선일보]]의 대주주가 되었으며, 1933년 7월 8대 사주 조만식으로부터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제9대 [[조선일보]] 사주로 취임, 활동했다.&amp;lt;ref&amp;gt;조선일보는 1932년 7월에 조만식을 사장으로 영입했지만, 조만식은 거의 평생을 평양에서 살아왔던데다 서울에서 활동하기에는 적응을 잘하지 못했다. 조만식은 신문사 경영난과 지역감정의 혹독한 시련을 받은 채 9개월만에 퇴사했다. 그리고 조만식 후임으로 1933년, 방응모를 사장으로 추대하기에 이르렀다.&amp;lt;/ref&amp;gt;&amp;lt;ref&amp;gt;《한국사 시민강좌 제47집, 대표적 독립운동가 12인》,일조각. p145&amp;lt;/ref&amp;gt; 방응모 취임 이후의 초대 부사장은 이광수, 주필은 서춘이었다.&lt;br /&gt;
&lt;br /&gt;
=== 언론, 사업 활동 ===&lt;br /&gt;
==== 사회사업과 조선일보 인수 계획 ====&lt;br /&gt;
금광 사업에 성공한 그는 영림, 조림 사업에도 투자하였다. 방응모는 배우자 승계도에게서 더 이상 아들을 얻지 못하자 첩 이인숙을 통해 아들을 얻으려고 하였다. 이인숙은 아들을 낳았으나 이 아들은 곧 사망하였다. 아들을 잃은 이인숙은 승계도의 도움을 받다가, 그해 6월 방응모가 있는 광산으로 가 생활하였다'''. 승계도와 이인숙을 통해 자녀를 얻지못하자 42세가 되던 해인 1924년 친형인 방응곤의 둘째 아들 방재윤을 양자로 입양시켰다.'''&lt;br /&gt;
&lt;br /&gt;
[[파일:방응모장학생.jpg|섬네일|160px|오른쪽|방응모와 그의 장학금을 받던 학생들. 가운데 앉은 이가 방응모이고, 서있는 이들 중 왼쪽에서 두 번째는 방응모의 양자 방재윤.]]&lt;br /&gt;
&lt;br /&gt;
1930년 배영옥과 결혼하여 딸 방재숙을 얻었다. 1932년 광산업을 정리하였고 언론사업을 비롯하여 육영사업과 조림 및 간척사업 등을 벌였다. 또한 고아원과 사회복지단체에 후원금을 지원하면서 인망을 얻기도 했다. 삭주 지역에서는 그의 송덕비가 세워지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932년 그는 수원군 팔탄면 노하리 일대의 갯벌에 일본인이 수차례 뚝을 쌓다가 실패했다는 정보를 얻고 임삼진을 통해 조선총독부에 허가를 요청하였다. 간척 사업은 이후 1935년부터 시작되었지만 1932년부터 은밀히 착수되어 왔다.&lt;br /&gt;
&lt;br /&gt;
1933년 무렵 방응모가 [[조선일보]] 인수에 나서기 전부터 그는 [[한용운]]을 위한 일이라면 돈을 아끼지 않고 지출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성북동 222번지 언덕에 만해를 위해 기와집 한 채를 지어주었는데 심우장(尋牛莊)이 그것이다. 또한 만해가 일제의 배급을 거부해 생활이 어렵게 되자 만해에게 생활비를 지급했던 방응모는 만해가 병석에 누운 1944년에는 치료비를 지원해주기도 했다.&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6/0000043262?sid=103 만해가 일송 선생 5일장 치른 사연]&amp;lt;/ref&amp;gt; 그 외에도 방응모는 만해 한용운·벽초 홍명희 등과 함께 새해가 되면 백천온천에도 같이 다녀올 정도로 두터운 친분을 맺었다.&lt;br /&gt;
&lt;br /&gt;
방응모의 광산 매각을 일본 정부 측에 알리고 다리를 놓은 것은 고일청(高一淸)이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84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32년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사건으로 체포된 [[안창호]]의 사면 탄원과 보석을 위해 노력하였다. 안창호가 윤봉길을 사주했다는 증거가 없으며 그가 테러행위를 지시했다는 증거 자료나 문건이 없다는 것이 방응모의 안창호 탄원 이유였다. 그러나 총독부 경무국장은 그의 안창호 석방 제안을 정중히 거절한다. 1936년 동방문화학원(뒤에 숭문중학교·고등학교 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1939년 9월에는〈조선일보〉의 조간 1회, 석간 2회의 1일 3회 발행을 시작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인수와 경영 ====&lt;br /&gt;
1933년 1월 16일 그는 정식으로 주식회사 [[조선일보]]사를 창립, 1월 18일에 발표된 창립 취지서에는 창립위원장 방응모, 창립발기인 방응모, 조만식, 고일청 외 등이 참여했다. 일단 그는 조만식을 사장으로 임명하고 자신은 부사장으로 있다가, 그해 3월 13일 다시 부사장에 취임했다. 4월 25일 편집인 겸 발행인이 되고, 4월 29일에는 조선일보의 조간, 석간제 발행을 부활, 확정시켰다. 1933년 7월 10일 총독부로부터 조선일보사의 법인 등록 승인을 얻어냈다. 7월 10일 조만식의 사퇴로, [[조선일보]]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다. 1933년 그는 자신의 아호를 춘해에서 계초로 바꾸었다. 그는 유능한 문인, 필진의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 상금 1천 원을 걸고 작가를 영입하였다.&lt;br /&gt;
&lt;br /&gt;
1934년 3월 25일 이광수를 비롯하여 서춘, 김동진, 함상훈, 신태익 등을 [[조선일보]]로 영입해 왔다. 그 외에도 정주군 출신 언론인, 작가들이 조선일보로 많이 오게 되었다. 이후 동아일보와 갈등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이광수가 조선일보로 옮겨와 부사장직에서 9개월 근무했다. 당시 조선일보 내부에서는 문모 라는 이가 이광수의 등장으로 자신의 입지 약화를 우려해 오랫동안 이광수를 내보내려 흉계를 꾸몄다고 한다. 이광수는 1934년 5월 25일자로 돌연 사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65페이지&amp;lt;/ref&amp;gt; 문모는 그에게 오히려 잘 됐다는 식으로 말하다가 방응모에게 호되게 혼이 났다. 그리고 문모로 하여금 즉시 금강산에 들어가 이광수를 다시 데려오게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65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이광수는 아들 봉근(당시 8살)의 사망 등으로 실의에 빠졌고, 1935년에 가서야 이광수를 조선일보 고문이자 필진으로 재영입하게 됐다.&lt;br /&gt;
&lt;br /&gt;
==== 동방문화학원 재단 설립 ====&lt;br /&gt;
방응모는 1936년 방농장의 소유권을 기본 자산으로 하는 재단법인 동방문화학원(東邦文化學院)을 설립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6페이지&amp;lt;/ref&amp;gt; 동방문화학원은 학교 법인으로 인가된 재단 법인으로, 그뒤 고계학원과 인연을 가지고 1936년부터는 보성고등보통학교를 후견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 분리되었다. 그뒤 방응모 장학생인 서중회 회원들을 위한 방응모 장학사업을 주관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7페이지&amp;lt;/ref&amp;gt;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태평로 구 조선일보 사옥 안에 동방문화학원의 간판을 달고 조광 잡지를 계속 발행하는 조광사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7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일제 강점기 후반 ===&lt;br /&gt;
==== 중일 전쟁 전후 ====&lt;br /&gt;
중일전쟁 개전 직후인 1937년 7월 11일에 열린 [[조선일보]] 간부회의에서 주필 서춘이 '일본군, 중국군, 장개석씨'등으로 쓰던 용어를 '아군, 황군, 지나, 장개석'으로 고치고 일본 국민의 입장에서 논설을 쓸 것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편집국장 김형원과 영업국장 김광수가 적극 반대를 하기도 했으나, 방응모는 '일장기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이미 몇 십만 원의 손해를 보았을 뿐 아니라 [[3.1 운동]] 때처럼 신문이 민중을 지도할 수 없다'면서 서춘의 입장을 지지했다. 한편으로 방응모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된 [[안창호]]를 [[조선일보]]에 영입하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안창호는 옥중에서 얻은 간질환과 폐질환 등으로 고생했고, 진료비 등을 수시로 지원하고 문병했음에도 출옥후 얼마 뒤에 사망한다.&lt;br /&gt;
&lt;br /&gt;
1933년 이심회(以心會：후에 序中會, 방응모장학회 등으로 명칭이 바뀜)라는 장학회를 만들어 국내 대학생과 해외유학생들에게 학자금을 지급하기도 했으며, 재단법인 동방문화학원(東方文化學院：지금의 숭문중·고등학교 전신)의 이사장직을 맡기도 했다. 또한 자신의 막대한 재원을 들여 1936년부터 함경남도 영흥군 일대에 당시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대단위 조림사업을 벌였으며, 그 전 해인 1935년부터는 경기도 수원군 팔탄면 일대에서 만 2년간에 걸친 간척사업을 벌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937년 12월 24일 [[안창호]]는 병보석 판정을 받고 재판소가 지정한 현 서울대학교병원인 경성제국대학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안창호의 입원 중에 시중을 든 사람으로는 안창호의 외조카 김순원과 청년 박정호 두 사람이었고, 나중에는 이응준 장군의 부인 이정희가 끝까지 지성껏 간호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7페이지&amp;lt;/ref&amp;gt; [[안창호]]는 병상에서 병원비 문제로도 고초를 겪었다. 이 때문에 조만식은 일본 경찰로부터 안창호의 병원비를 대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음에도, &amp;quot;내가 먹고 살면서 그 선생을 돌보지 않을 수 없다&amp;quot;며 완강히 거절하고 안창호를 도왔다고 한다. 안창호의 간호를 같이 도와주던 이응준 장군 부인 이정희는 10일마다 계산되어 나오는 병원 입원비로 안창호 선생이 괴로워하는 표정을 지켜볼수 없었다고 진술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8페이지&amp;lt;/ref&amp;gt; 방응모는 5백원의 수표 한 장을 안창호에게 전달하였다. 50일간의 입원비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9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안창호]]는 1938년 3월 10일 밤 12시 경성제국대학 병원에서 운명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폐간 사건 ====&lt;br /&gt;
일본의 전쟁이 격화되면서 조선총독부 공보국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1940년에 강제로 폐간조치 했다. 광산을 팔아서 자신의 모든 것을 조선일보에 바쳤던 방응모는 큰 절망과 좌절을 느껴야 했다. [[한용운]]은 ‘신문이 폐간되다/ 붓이 꺾이어 모든 일이 끝나니…’로 시작하는 시를 지어 방응모를 위로했다. &amp;lt;ref&amp;gt;붓이 꺾이어 모든 일 끝나니 이제는 재갈 물린 사람들 뿔뿔이 흩어지고 아, 쓸쓸하고 쓸쓸한지고 망국 서울의 가을날 한강의 물도 흐느끼느니 울음 삼켜 흐느끼며 연지를 외면한 채 바다 향해 흐르느니&amp;lt;/ref&amp;gt; 동아일보에는 김성수 외에도 장덕수와 송진우가 있었지만 그에게는 조선일보 폐간을 막기 위해 총독부와 교섭할 인물도 없었다.&lt;br /&gt;
&lt;br /&gt;
1938년 2월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선 내 일간신문 25개사로 조직된 조선춘추회의 창립에 창립발기인으로 참가했고, 조선춘추회 간사로 활동했다. 같은 해 7월 “국민정신을 총동원하고 내선일체 전 능력을 발휘하여 국책 수행에 협력하여 성전(聖戰)의 궁극적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조직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에 참여했고, 그날 결성된 경성연맹 창립총회에서 상담역을 맡았다. 9월부터 조선방공협회 경기도연합지부 평의원을 지냈다. 10월에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주최한 비상시 국민생활 개선을 위한 제1회 생활개선위원회에서 제2부(의례와 사회풍조 쇄신부)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그러나 1938년 10월부터 조선총독부는 조선일보의 신문용지를 검열, 통제하기 시작했다.&lt;br /&gt;
&lt;br /&gt;
1940년 5월 조선총독부 총독 미나미 지로가 방송담화로 창씨개명을 권고했다. 그러나 그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성씨를 이제 와서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며 창씨개명은 완강하게 거절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조선일보에 트집이 잡힐 일이 나타나지 않자 총독부는 전국 면사무소에 조선일보 신문 구독을 거절하도록 명령을 내렸고, 동시에 조선말을 쓰는 민원인에게는 일을 처리해주지 말도록 하게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3페이지&amp;lt;/ref&amp;gt; 조선총독부는 송진우의 예금통장을 문제삼았다. 송진우 명의의 은행저금이 동아일보의 8백여 개의 지국과 분국을 통해 모금된 독립운동 자금이라며, 그리고 동아일보 간부들이 백운장이라는 요정에서 회식을 한 것을 김성수 집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려 했다는 등의 이유로 백관수 동아일보 사장을 전격 구속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3~374페이지&amp;lt;/ref&amp;gt; 동아일보는 백관수가 구속된지 10일 만에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동아일보 중역회의를 열고 폐간신청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4페이지&amp;lt;/ref&amp;gt; 총독부는 조선일보에도 자진 폐간을 권고했고, 1940년 8월 9일 편집회의를 주관, 8월 10일 조선일보의 폐간계를 내고, 8월 10일자로 폐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5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잡지 발행 활동 ====&lt;br /&gt;
신문 강제 폐간 뒤 방응모는 간판을 조광사로 바꿔 걸고, 사옥은 동방흥업주식회사로 등기를 변경해서 유지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1페이지&amp;lt;/ref&amp;gt; 이후 그는 조광 잡지 발행에 전념했다. 1943년 8월 경 일본 중앙대학의 예과를 마친 방일영이 입사&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1페이지&amp;lt;/ref&amp;gt;, 필진으로 참여했다. [[조선일보]]가 폐간된 후에도 방응모는 벽초 홍명희 부자에게 지속적으로 생활비를 대주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4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4년 6월 29일 만해 [[한용운]]이 사망했다. 그는 심우장을 찾아가 3백원을 내놓았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5페이지&amp;lt;/ref&amp;gt;당시 쌀 10가마가 100원이었지만, 심우장은 당장 현금 1원이 없었는데 거액이라서 놀랐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6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광복 이후 언론 및 정치활동 ===&lt;br /&gt;
==== 광복 직후 ====&lt;br /&gt;
1945년 8.15 광복 후에는 8월 말과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朝鮮在外戰災同胞救濟會) 고문과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9월 초 [[안재홍]] 등이 좌경화되는 건준체제에 반발하여 건준을 탈퇴하자 방응모 역시 건준을 탈퇴하였다.&lt;br /&gt;
&lt;br /&gt;
9월 2일 미군정이 주둔하자, 방응모는 윤전기를 찾기 위해 폐간 당시의 증빙서류를 미 군정청에 제시하였으나 소식이 없었다. 총독부는 조선일보 폐간 직후 인수한 윤전기를 경성일보사에 옮겨서 설치했다. 그는 동방문화재단 외 4개 사업소를 적산으로 파악한 미군정을 설득하고, 사옥 문제도 해결하였다.&lt;br /&gt;
&lt;br /&gt;
10월 1일 조선일보 편집위원회를 구성하고, 신문 복간 운동을 추진했다. 조선총독부의 폐간 지시 당시 의정부로 옮겨놓은 일부 활자 자모음이 잘 보관되어, 그해 11월 23일 조선일보를 복간시키고, 서울신문사 사옥에서 조선일보 복간호를 간행하였다. 이후 조선사회문제대책중앙협의회 중앙위원을 거쳐 10월 16일 이승만 등의 주도로 독립촉성중앙회가 결성되자 독촉에 가입하였다.&lt;br /&gt;
&lt;br /&gt;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이 귀국하자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에 입당했다. 12월 [[안재홍]]의 추천으로 한국독립당의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출되어 3~4개월 동안 활동했다.&amp;lt;ref&amp;gt;일각에서는 방응모가 '한독당 재무부장으로 지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1947년부터 한독당 재무부장을 맡은 신창균이 전면 부정했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47/0000002626?sid=102 백범 비서와 '진짜' 한독당 재정부장의 육성증언. 참고.]&amp;lt;/ref&amp;gt; 그 뒤 대한국민총회 발기인, 대한독립애국금헌성회 발기인 등으로 활동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복간 및 군정기 활동 ====&lt;br /&gt;
11월 [[조선일보]]사를 복간시켰다. 그러나 한동안 조선일보의 인쇄는 서울신문사에서 간행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1945년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추념대회에 참여하였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2&amp;quot;&amp;gt;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13&amp;lt;/ref&amp;gt; 순국선열추념대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2&amp;quot; /&amp;gt;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참여,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이 되었다.&amp;lt;ref&amp;gt;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55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6년 2월 26일 서울신문사 공무국 종업원들이 조선일보의 인쇄를 거부해버렸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436페이지&amp;lt;/ref&amp;gt; 그동안 묵시적으로 방해가 은근히 있었다. 표면상의 문제는 임금 문제이나 내용상으로는 조선일보에 대한 조선공산당의 시위의 일종이었다. 사흘간의 교섭 끝에 2월 28일에 가서야 26일자와 27일자를 소급해서 인쇄하여 신문을 한꺼번에 발행하였다. 그러나 3월 1일과 2일에 또다시 인쇄를 거부당해 결국 휴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436페이지&amp;lt;/ref&amp;gt; 조선일보를 경성일보사로 옮겨서 인쇄하기로 하고 3월 5일자로 사고로 독자에게 알렸다.&lt;br /&gt;
&lt;br /&gt;
4월 29일 김구, 김창숙, 김성수, 오세창 등과 함께 서울운동장에서 윤봉길의사 추모회의 창립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amp;lt;ref&amp;gt;&amp;quot;故尹奉吉義士의 記念式 오늘, 發起人會 열고 準備&amp;quot;, 동아일보 1946년 4월 23일자 2면, 사회면&amp;lt;/ref&amp;gt; 그해 5월 조선공업구락부 고문에 위촉되었다.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民族統一總本部) 10인협의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6월 15일 오후 5시 40분 서울역에 마중나가 서울역에 도착한 삼의사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lt;br /&gt;
&lt;br /&gt;
1945년 광복 직후 서기원이 그를 찾아왔다. 서기원은 그때 경성농상실천학교의 동창회로부터 이 학교의 교장이 되어 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이다. 방응모는 서기원의 제의를 받아들여 1946년 8월 28일 동방문화학원 이사장으로 숭문상업학교를 인수, 재단 이사장이 되었다. 후일 방응모가 6.25 전쟁 중에 납북된 후 동방문화학원과 숭문중,고교의 재단은 최용진이 운영하다가 다시 1978년에 방일영에게 인수되었다.&lt;br /&gt;
&lt;br /&gt;
1947년 1월 21일 제5회 창립위원회를 본사에서 개최하고 2월 23일 주식회사 조선일보사 주주창립총회를 열고 대표이사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공동투자 경영자로 참여시킨 전무 이종민과의 알력이 발생했다. 이종민과의 갈등이 심화되자 그해 8월 3일 방응모는 일단 사직서를 제출했다. 1947년 8월 10일 풍문여고 강당에서 개최된 한인신문기자협회에 참석, 민족청년단에서 언론계 공로자로 방응모, 김성수, 설의식을 지정하여 상을 시상받았다.&amp;lt;ref&amp;gt;&amp;quot;朝鮮 新聞記者協會&amp;quot;, 동아일보 1947년 8월 10일자 2면, 사회면&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납북과 최후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 납북 후 행적은 &amp;quot;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amp;quot;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 1950년 8월경 개성 송악산 부근에서 미군의 폭격에 희생되었고 심한 폭격으로 시신을 찾을 수 없어 묘도 만들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남한에서는 1955년 7월 7일 생사불명기간 만료로 인해 실종 처리되었다.&lt;br /&gt;
&lt;br /&gt;
=== 사후 ===&lt;br /&gt;
서울 종로에 있던 양자 방재윤의 두 아들 방일영과 방우영은 방응모의 첩 이인숙이 찾아가 피신하라고 권고하여 황급히 피신했다. &lt;br /&gt;
&lt;br /&gt;
7월 6일 그의 행방불명처리가 되고, 방응모의 사후에도 [[조선일보]]는 그의 명의로 발행되었다. 1952년 4월 28일 조선일보는 발행인겸 편집인을 장기영으로, 인쇄인을 방일영으로, 방응모는 명예사장으로 명의변경하여 휴전 후 계속 발행하게 되었다. 1954년 4월 30일 제8회 조선일보 정기주주총회에서 장기영 사장이 사퇴하면서, 명예사장 방응모가 사장으로 추대되고, 발행인 겸 대표취체역에 방일영이 선임되었다. 이후 실종 후 1959년에 법적으로 사망 처리되었다. 그리고 1970년까지는 조선일보는 그의 이름으로 발행되었다.&lt;br /&gt;
&lt;br /&gt;
1970년 2월 19일 조선일보 정기주주총회에서 방응모 이사를 사퇴 수리하였다. 그의 피폭 사망 사실은 1970년대 이후 탈북자들을 통해 대한민국에 소개되었다.&lt;br /&gt;
&lt;br /&gt;
== 친일행위 의혹 ==&lt;br /&gt;
=== 일제 전시체제기 활동 ===&lt;br /&gt;
일제 강점기 말기 언론인으로서 총독부체제에 협력한 기록과 활동이 다수 기록이 있다. 1933년 3월 [[조선일보]] 경영권을 인수하고 부사장직에 취임했을 당시 같은 달에 고사기관총 구입비용 1600원을 군에 헌납하였다. 그는 1935년 친일 잡지 《조광 (잡지)(朝光)》을 창간하였고, 1937년에는 경성방송국 제2방송에 출연하여 일제가 중국의 베일을 절멸케하여 극동평화를 지키려고 한다는 강연을 하였다. 1940년대부터 조광에 집중적으로 친일 논설을 기고하고 시국 강연에 참여하여 전쟁 지원을 독려했다. 1942년 6월에는 '징병령 실시에 일층 더 감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글을 써서 조광에 발표하였다. 애국금차회(1937),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1938), 임전대책협의회(1941), 조선임전보국단(1941) 등 대표적인 친일 단체의 회원에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그는 이런 행적으로 인해 해방정국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명단에 기록되어 있고,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해 발표한 &amp;lt;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amp;gt;에 모두 포함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lt;br /&gt;
&lt;br /&gt;
우리 [[조선일보]]는 다른 어떤 신문도 따라오지 못하는 확고한 신념에서 비국민적 행위를 단연 배격하여 종국까지 조선일보사가 이미 정해놓은 방침에 한뜻으로 매진한다.|원산에서의 순회 강연&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9478.html 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친일 다짐하다 시민에 봉변]《한겨레》2005-08-24 오후 06:13:18&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반민족행위 논란 ===&lt;br /&gt;
방응모를 친일파로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남아 있다. 조선일보 경영 이전에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방응모의 활동이 거의 없었고, 납북된 뒤 소식이 끊겨버린 까닭에 본인이 항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 동안의 행적만으로 친일파 여부를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방응모의 후손들이 영향력 있는 [[조선일보]] 언론사의 사주를 맡았기에 그의 입장에서 서술한 기록을 많이 남기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80년 발간된 그의 전기 《계초 방응모》(조선일보사) 등에는 '그가 민족주의적 선각자'로 묘사되고 있다. 방응모가 친일파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일부세력측은 그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논거로 드는 경우가 많이 있다.&amp;lt;ref&amp;gt;유석재, 계간 《유심》 (2004년 봄호) [http://yousim.buddhism.org/html/2004-spr/tamgu-yoo-seok-jae.htm 삭풍 속에 피어난 금란지교(金蘭之交) - 만해와 계초 방응모]&amp;lt;/ref&amp;gt;&amp;lt;ref&amp;gt;&amp;quot;일제 말기 계초는 시국강연에 나설 것과 창씨개명을 집요하게 강요받았으나 그때마다 묵묵부답으로 거부하며 소신을 지켰다.&amp;quot; 《조선일보》 (2001.3) 조선일보 사장열전 - 계초 방응모편, 《한겨레》 (2001.3.30) [http://www.njoyschool.net/news/article_view.asp?menu_code=s20202&amp;amp;no=1206 조선일보, 일장기를 신문제호 위에]&amp;lt;/ref&amp;gt;&lt;br /&gt;
또한 한국정토학회 고문이자 서울 정토사 주지였던 박설산(1918~2007)이 학도병에 끌려가기 직전인 1943년 12월 28일 밤 서울역에서 스스로 왼발을 선로에 올려 발가락을 절단해 징집을 기피하자 방응모는 만해와 함께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설산을 걱정하면서 입원 중 조선일보 기자를 통해 돈을 전달한 것은 물론 퇴원할 때 돈을 전달하고 뒤를 보살폈다고 한다.&amp;lt;ref&amp;gt;박설산 회고록 &amp;lt;뚜껑없는 조선역사책&amp;gt;(1994, 도서출판 삼장) p240~241&amp;lt;/ref&amp;gt;&lt;br /&gt;
&lt;br /&gt;
2010년 12월, 방응모 관계자들 및 조선일보측은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을 취소해달라'며 법원에 낸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amp;quot;1944년 조선항공업 창립발기인으로 활동한 부분에 대해 친일행위로 판단한 부분을 취소하지만 나머지 활동에 대해서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amp;quot;라고 판결했다. 그 이유인 즉 &amp;quot;방응모는 1933년 조선일보 사장으로 취임해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등으로 활동하며 친일활동을 벌였으며, 1937년 경성방송국 시국강연에서 일본제국이 극동평화를 확립시킬 것이라는 내용의 강연을 하고, 1938년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춘추회의 발기인 겸 간사로 활동하기도 했다&amp;lt;ref&amp;gt;[http://media.daum.net/breakingnews/politics/view.html?cateid=1002&amp;amp;newsid=20101222103319164&amp;amp;p=newsis 법원 &amp;quot;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친일파 맞다&amp;quot;]뉴시스 2010년 12월 22일&amp;lt;/ref&amp;gt;&amp;quot;는 것이다.&lt;br /&gt;
&lt;br /&gt;
2012년 1월 12일 서울고법 행정7부는 방 전 사장의 손자인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이 행정안전부를 상대로 낸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처분 취소 청구소송에서 ‘일제 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의 친일 행위 판정 조항에 비추어 방 전 사장에게 적용된 모두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민족적 지도자로서 비중이 큰 만큼 그로 인한 책임도 무거울 뿐 아니라 고난의 시기를 겪은 민족으로서 그 역사를 반성하자는 입장에 설 때, 방 전 사장의 여러 행태는 반민특별법에서 규정한 친일반민족행위의 유형에 속함을 부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1·2심 재판부는 방 전 사장이 자신이 운영하던 잡지 &amp;lt;조광&amp;gt;에 일제 침략전쟁에 동조하고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문예물과 일제 침략전쟁에 협력할 것을 주문하는 논문을 게재하는 등의 ‘친일’ 행위를 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또한, 2심 재판부는 일본의 전쟁 수행을 돕기 위해 설립된 군수 제조업체 ‘조선항공공업’의 발기인과 감사를 지낸 것은 “감사는 업무집행에 관여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기관으로, 방 전 사장이 이 회사를 운영했다고 볼 수 있다”는 이유로 친일이라고 판단했다.&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4565.html법원 ‘방응모 친일’ 2심서도 인정] 인터넷한겨레 2010년 12월 22일&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기타 ==&lt;br /&gt;
그는 [[한용운]], 최남선, 정인보, 홍명희 등과 친분관계를 형성하고 어울려 지냈다 한다.&lt;br /&gt;
&lt;br /&gt;
김구의 한국독립당의 재정적 후견인 역할을 하였다 하며,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삼의사 유골봉환식 때 김구, 정인보 등과 촬영한 사진이 있다.&lt;br /&gt;
한편 임꺽정의 저자인 벽초 홍명희가 방응모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그와 깊은 친분을 맺었다는 주장이 있다. 《조광》 1938년 11월호엔 홍명희가 병중에 있는 방응모를 위로하며 지은 한시가 방응모의 답시와 함께 실려 있다고 한다.&amp;lt;ref&amp;gt;[http://weekly.chosun.com/site/data/html_dir/2004/11/05/2004110577041.html ‘임꺽정’으로 되살아난 독립운동의 魂! 주간조선 1827호 2004.11.04&amp;lt;/ref&amp;gt; 또한 [[안창호]]의 비서실장을 지낸 독립유공자 구익균은 방응모와 안창호가 친밀했다는 주장을 했다.&amp;lt;ref&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09/2008030901055.html &amp;quot;공산주의자들, 도산 비판하다가도 하숙비 떨어지면 찾아와&amp;quot;] 조선일보, 2008-03-10 03:22&amp;lt;/ref&amp;gt;&lt;br /&gt;
또한 박설산에 따르면 1943년 만해 한용운에게 학도병으로 끌려가게 되었음을 알리려 심우장으로 찾아가게 되었을 때, 한용운과 방응모가 바둑을 두고 곁에서 정인보가 훈수를 두고 있었다고 한다.&amp;lt;ref&amp;gt;박설산 저 &amp;lt;뚜껑없는 朝鮮 역사 책&amp;gt; p.226 도서출판 三藏(1994)&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 /&amp;gt;&lt;br /&gt;
&lt;br /&gt;
== 참고 자료 ==&lt;br /&gt;
* 청산하지 못한 역사: 언론 내세워 일제에 아부한 교화 정책의 하수인 (문영숙) (반민족문제연구소, 청년사, 1994)&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민족 계몽의 초석 방응모(이동욱 저, 지구촌, 1998)&lt;br /&gt;
* 계초 방응모전(계초전기간행위, 조선일보사, 1980년)&lt;br /&gt;
* 계초 방응모(이동욱, 방일영문화재단, 1996)&lt;br /&gt;
&lt;br /&gt;
== 외부 링크 ==&lt;br /&gt;
* [https://web.archive.org/web/20050123171046/http://chosunhost.com/ 계초방응모 기념사업회]&lt;br /&gt;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09145 &amp;lt;조선일보&amp;gt;, 방응모 전 사장의 '친일행적' 말한다] - 오마이뉴스 04.09.10일자&lt;br /&gt;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020302101749 방응모ㆍ 김성수 친일행적 뭔가 : &amp;lt;긴급입수&amp;gt;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 全文] - 프레시안 2002-03-02&lt;br /&gt;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54052 그가 '&amp;lt;조선&amp;gt;의 주인' 주장하는 이유] 오마이뉴스 2001년 9월 20일자&lt;br /&gt;
*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956 방재선씨, 호주·상속 원인무효소송 제기]&lt;br /&gt;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4/06/2008040601053.html '5인 친필 서첩' 발굴] 조선일보 2008년04월06일자]&lt;br /&gt;
&lt;br /&gt;
[[분류: 감자]]&lt;/div&gt;</summary>
		<author><name>Nsgjjsjsjy02</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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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width:100%&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0%&amp;quot;|사진&lt;br /&gt;
|[[파일:방응모.jpg|center|200픽셀]]&lt;br /&gt;
|+ '''방응모'''&lt;br /&gt;
|+ style=&amp;quot;caption-side:bottom;text-align:left:&amp;quot;|출처: 위키백과&lt;br /&gt;
|출생||1883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조선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또는 정부면 성내동&lt;br /&gt;
|-&lt;br /&gt;
|사망||1950년경으로 추정&lt;br /&gt;
|-&lt;br /&gt;
|사인||불명&lt;br /&gt;
|-&lt;br /&gt;
|거주지||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amp;gt; 경성부 -&amp;gt; 경기도 양주군 의정부읍&lt;br /&gt;
|-&lt;br /&gt;
|국적||대한민국&lt;br /&gt;
|-&lt;br /&gt;
|본관||온양&lt;br /&gt;
|-&lt;br /&gt;
|별칭||호: 계초(啓礎), 춘해(春海)&lt;br /&gt;
|-&lt;br /&gt;
|직업||교사, 변호사, 상인, 언론인, 기업인, 사회운동가, 정치가&lt;br /&gt;
|-&lt;br /&gt;
|배우자||승계도, 이인숙, 배영옥, 노효용&lt;br /&gt;
|-&lt;br /&gt;
|자녀||방재숙(딸), 방재욱·방재선·방재효·방재규(아들), 방재윤(양자)&lt;br /&gt;
|-&lt;br /&gt;
|부모||방계준(부), 온양박씨(모)&lt;br /&gt;
|}&lt;br /&gt;
&lt;br /&gt;
'''방응모'''(方應謨, 평안북도 정주군, 1883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 1950년 8월(추정)는 [[일제강점기]]의 교육자, 언론인, 법조인, 기업인이자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언론인이며 정치인이다. 호는 '''춘해'''(春海)이고, 뒤에 '''계초'''(啓礎)로 고쳤다.&lt;br /&gt;
&lt;br /&gt;
1922년 동아일보 정주 지국을 인수해 지국장을 지내다가 1924년 금광업에 뛰어들어 큰 부를 얻게 되었다. 1932년 6월 조선일보에 입사하였고 이후 영업국장이 되어 조선일보의 판매망을 장악하게 되고 경영권을 인수하면서 1933년 3월 조선일보 부사장이 되었다. 1933년 7월부터 1950년 7월까지 종신으로 [[조선일보]]의 사장을 역임하였다. 1935년 창간한 월간잡지 '조광(朝光)'은 친일 논란이 있다.&amp;lt;ref&amp;gt;안은필. [http://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9211 조선일보가 가장 빛나던 시기, ‘안재홍 시대’]&amp;lt;/ref&amp;gt;&amp;lt;ref name=&amp;quot;안은&amp;quot;&amp;gt;안은필. [http://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9279 방응모 친일증거, “모래밭에서 모래 찾기”]국민TV. 기사입력 2015년 4월 23일. 기사수정 2015년 4월 24일.&amp;lt;/ref&amp;gt;&amp;lt;ref&amp;gt;이민영.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1/0002255321?sid=102 고법 “방응모 前조선일보 사장 친일행적 대부분 인정”]. 서울신문. 2012년 1월 13일.&amp;lt;/ref&amp;gt;&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6/0000000413?sid=110 김성수ㆍ방응모와 친일언론인 군상]. 미디어오늘. 2002년 3월 12일.&amp;lt;/ref&amp;gt; 언론계에서 활동하면서도 사업가의 길을 함께 걸었고, 교육 장학 활동을 하였으며, 1945년 광복 직후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안재홍]]의 추천을 받아 한국독립당 중앙상무위원과 독립촉성국민회 총무부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amp;lt;ref name=&amp;quot;안은&amp;quot;/&amp;gt;&amp;lt;ref&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16/2008031600800.html 계초 방응모와의 우정도 여러 편의 시로 표현해&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해방 정국에서 김구의 재정적 후견인으로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등 삼의사 유골 봉환 사업과 신탁통치 반대 운동 등에 참여하여 활동했다.&lt;br /&gt;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 납북 후 행적은 &amp;quot;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amp;quot;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lt;br /&gt;
&lt;br /&gt;
== 생애 ==&lt;br /&gt;
=== 생애 초기 ===&lt;br /&gt;
==== 출생과 성장 ====&lt;br /&gt;
방응모는 1883년 11월 3일 또는 9월 29일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바우머리 부락 또는 정주군 정부면 성내동 425번지에서 '''방계준(方桂準)'''과 온양 박씨(溫陽朴氏)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어려서 빈곤한 가정환경으로 방응모는 정규 학교에는 입학하지 못하고, 16세 때까지 서당에 드나들며 한학을 익혔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던 중 그가 어느 정도 실력이 우수하다고 인정되자, 스승인 승창률은 잠시 방응모에게 어린아이들을 돌보게 한 후 자리를 피하곤 했다 한다. 그는 홀로 사서육경을 탐독, 독파하였다. 21세 무렵 잠시 서당 훈장을 지내기도 했다. 우연히 경성부에 갔다가 신문물을 보고 충격을 받아 17세에 독학으로 신학문과 일본어, 중국어, 수학 등을 독파하였다.&lt;br /&gt;
&lt;br /&gt;
유년시절 서당의 성리학 스승이던 승창률의 친척인 승시영(承時榮)과 조씨(趙氏)의 딸 승계도와 결혼했다. 결혼한 다음 해에도 그는 공부를 한다며 책만 사다 읽곤 했고, 부인 승계도는 생계를 위해 몸소 나섰다. 그의 아내는 남편에 대한 믿음이 절대적이었고 탓을 하거나 가출하지 않았다.&lt;br /&gt;
&lt;br /&gt;
==== 계몽 운동 ====&lt;br /&gt;
도산 [[안창호]]와 남강 이승훈이 연사로 돌아다니며 애국 계몽 강연과 문맹들의 교육, 야학 사업을 하였고, 여기에 감동받은 청년들이 서당과 야학을 열고 문맹들과 여성들에게 한글 교육을 하였다. 도산 [[안창호]]의 강연과 남강 이승훈의 강연을 찾아다니며 듣다가 감동받은 방응모 역시 교육, 계몽에 참여하였다.&lt;br /&gt;
&lt;br /&gt;
그는 청년회의 활동에 몰두하였으나, 농번기에 작은 일손이라도 더 필요했던 동리 노인들은 젊은 아이들이 일은 하지 않고 무슨 모임이다 하여 어울려 돌아다니는 꼴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또한 모임 구성원들 역시 &amp;quot;의식 자체가 아직 전근대적이었고, 사고의 분화를 겪지도 않은데다가, 이들의 조직 활동이 기분 좋으면 나오고 기분 나쁘면 빠져 버리는 것이 예사&amp;quot;라 청년 모임들은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청년단체의 실패에 좌절하고 다시 귀향했으며, 이때 그는 춘해(春海)라는 아호를 스스로 지었다. 그의 집안에서는 그가 정착하기를 바라고 정주읍 성내동에 집을 얻어 주었다.&lt;br /&gt;
&lt;br /&gt;
안창호의 계몽 강연에 감동받은 남강 이승훈이 1907년(융희 1년) 8월 김덕용(金德鏞)을 초빙하여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 오산에서 신식 교육을 하는 소학교 과정의 학교 강명의숙을 세우고 산수, 수신, 역사, 지리, 체조를 가르쳤고, 그해 12월에는 중학교 과정인 오산학교를 세우고 학생 7명을 처음 받아들여 개교했다. 1908년에는 오산학교에 학생들이 모여 3개 반으로 편성되었고, 정주군 출신의 춘원 이광수가 오산중학교의 교사로 초빙되어 축구, 야구, 테니스, 배구 등을 지역에 처음 소개하였다. 방응모는 어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학교에 입학해 신학문을 접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0페이지&amp;lt;/ref&amp;gt; 그는 이승훈과 의기투합해 민립 대학을 세우는 운동을 추진했지만 조선총독부 평안북도청 학무국에서 승인을 거부하여, 대학 설립에 실패했다.&lt;br /&gt;
&lt;br /&gt;
=== 언론, 기업 활동 ===&lt;br /&gt;
==== 계몽 활동과 언론 활동 ====&lt;br /&gt;
1915년부터 1924년 방응모는 지역 지식인들, 유학파 청년, 계몽 청년들이 모여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하는데 참여했고, 민립대학기성회 평안북도지부에서 활동하면서 민립대학기성회 중앙회 중앙위원 조만식 등과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언변과 용모가 되었던 그의 여관에도 손님들이 몰렸고, 그가 &amp;quot;2백원도 좋고 5백원도 좋다며 보태달라&amp;lt;ref name=&amp;quot;fsfs87&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7페이지&amp;lt;/ref&amp;gt;&amp;quot;고 하면 기부금을 내는 이들이 있었다. 대신 하룻밤을 의탁하려고 그의 여관을 찾은 이들에게 무료 숙식을 제공하기도 했다.&amp;lt;ref name=&amp;quot;fsfs87&amp;quot;/&amp;gt; 1919년 정주에서 3.1 만세 운동이 벌어지자, 그도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형사들의 눈을 피해 방응모는 만세운동을 하다 재빨리 몸을 피해 화를 면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8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1922년 6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인수하여 분국장에 취임했다. 6월 9일에는 정주군 지역 체육행사로 테니스 대회를 개최하였다. 그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경영하는 동시에 그는 농촌 계몽운동 등에 적극 투신하여 인망을 쌓았다. 처음 몇번은 친구 전우현의 자금을 빌려 부족분을 메우기도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02페이지&amp;lt;/ref&amp;gt; 한다. 1922년 6월 19일&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96페이지&amp;lt;/ref&amp;gt; 동아일보 본사를 설득하여 정주분국을 동아일보사 정주지국으로 승격시켰다. 동아일보사 지부장 재직 시 그는 전우현과 함께 의기투합하여 민립 대학 설립 자금과 농촌진흥회 회원의 여비와 회비를 염출하기 위한 목적 및 당시 교사도 없이 난관에 처했던 오산학교의 재개교를 위한 &amp;quot;오산학교의 부흥 운동을 목표로 한 재단법인 촉성 기금 마련&amp;quot; 등을 계획했다. 총독부의 인허가 거부로 실패한 대학 설립 자금은 고스란히 오산학교의 부활과 복교 자금으로 투입되었다. 1920년 1월에 경성형무소에서 가석방된 조만식은 이승훈을 만났고, 다시 조만식이 오산학교를 맡으면서 학교는 다시 정상 운영되었다.&lt;br /&gt;
&lt;br /&gt;
1923년 동아일보 정주군 분국이 지국으로 승격되자 정주 지국장으로 동아일보 정주지국을 경영하였고, 같은 해 7월 여성들의 사회참여와 평등권 신장을 위한 여자교육회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이후 대규모 수해가 나자, 정주군 수해구제회를 결성하여 봉사활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1923년 4월 조만식·송진우·안재홍·김성수 등의 주도로 민간 자본으로 대학교 설립을 추진하기 위한 조직인 조선민립대학기성회가 결성되자, 방응모는 민립대학 기성회에 참여하여 민립대학기성회 정주군준비회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5월에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정주지방지부가 설립되자 기성회 정주지부 상무위원을 맡았다.&lt;br /&gt;
&lt;br /&gt;
==== 광업 경영과 조선일보 입사 ====&lt;br /&gt;
1924년 봄 오산학교 교감으로 있던 전우현이 방응모와도 안면이 있던 금광 채굴업자 두 명을 데리고 그를 찾아왔다. 그들은 자신들이 봐 둔 산이 있다고 방응모에게 소개했다. 그는 선천군의 지역 유지이자 최창학의 친구이며, 그가 동아일보 지국장으로 알게 된 이봉찬을 찾아갔다. 한학자로 알고 있던 그가 금광 투자를 제의하자 &amp;quot;한문이라면 빼지 않고 알려고 드는 한학 훈도가 어떻게 금광을&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16페이지&amp;lt;/ref&amp;gt;&amp;quot; 하느냐 하였지만, 이봉찬은 그에게 금광, 광산에 대한 지식을 알려주었다. 이봉찬은 그에게 광산 지식을 알려주며 최창학의 소유지 중 폐광을 빌리는 법을 알려주었다. 방응모의 됨됨이에 감복한 듯, 그의 수많은 질문에 적잖은 충고를 자임해주었다.&amp;lt;ref name=&amp;quot;fsfs117&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5페이지&amp;lt;/ref&amp;gt; 이봉찬은 최창학에게 방응모를 소개하는 편지를 수차례에 걸쳐 보내주었다.&amp;lt;ref name=&amp;quot;fsfs117&amp;quot;/&amp;gt; 이봉찬은 방응모의 친구들이 봐 둔 갱도를 임대받도록 도와주었다. 이봉찬은 방응모의 한학 실력과 사람됨을 알아보고 있어, 자금을 쾌히 빌려주었다.&amp;lt;ref name=&amp;quot;fsfs117&amp;quot;/&amp;gt;&lt;br /&gt;
&lt;br /&gt;
이후 광산업에 뛰어들어 1924년 여름 압록강변의 최창학 소유 폐금광인 평안북도 삭주군 외남면 교동 다릿골의의 삭주 교동광업소를 찾아가 10미터 정도 땅을 파고 금맥을 발견했다. 바로 삭주 교동광업소를 인수, 경영을 확대하였다. 이때 만난 동업자의 딸이자 친구 전우현의 조카딸인 '''이인숙(李仁淑)'''을 만났다. 본처 승계도가 두 아들을 잃고 복부 수술이 잘못되어 아이를 얻지 못하게 되자 방응모에게도 수많은 중매가 들어왔다. 자식들을 병으로 잃은 것이 자신의 불찰이라고 본 승계도는 그에게 작은 부인이라도 들이자는 말을 꺼내기도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18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26년 방응모에게 광산 사업을 제안했던 두 친구가 손을 털고 나갔고, 그의 가족은 돈이 없어 쌀 대신 좁쌀로 좁쌀죽을 먹으며 연명해야 했다. 방응모는 정주군에 사는 비슷한 또래의 먼 친척 방상진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고, 방상진과 일꾼 대여섯 명, 그리고 후처 이인숙의 친정 쪽에서 얻어온 토지문서를 얻어 자금을 마련, 삭주 다릿골 광산으로 가서 다시 금광을 채굴했다. 금맥은 쉽게 나오지 않았고, 출몰하는 마적떼에게 소와 기구를 약탈당했다. 동시에 빚쟁이들의 독촉에 시달렸으나 '''''1926년 7월 지하 300m 지점에서 금맥을 확보했다. 이후 연간 300kg의 금을 생산, 그는 굴지의 광산업자로''''' 성장해 금맥을 찾아 벼락부자가 되었다. 그는 방상진을 교동금광 총감독에 맡겼다. 이때 그는 최창학에게 임대료에 이자를 쳐서 보내주었다.&lt;br /&gt;
&lt;br /&gt;
그때까지 첫 부인 승계도가 두부를 팔아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미국산 포드 T형자동차'''''를 타고 금의환향했다. 1928년 방응모는 자신의 아호인 춘해를 딴 춘해 장학회를 만들고 장학생들의 모임인 이심회를 만든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48페이지&amp;lt;/ref&amp;gt; 그 해에 방응모는 교동지역에 파출소 지소를 유치하였고, 마적단에 시달리던 주민들은 그의 송덕비를 세우기도 했다. '''''1928년에 그는 의정부 직동, 흥선대원군의 별장이 있던 곳 바로 뒤에 위치한 건물을 매입'''''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한용운]], 홍명희를 자주 초대했다.&lt;br /&gt;
&lt;br /&gt;
'''''1932년 방응모는 교동광산을 135만원이란 거액에 일본 중외광업주식회사에 매각'''''했다. 그 뒤 1932년 6월부터 조선일보 영업국장으로 활동하다 '''1933년 3월 [[조선일보]]의 경영권을 인수'''하여 부사장에 취임하였다.&lt;br /&gt;
&lt;br /&gt;
그는 교동광업소를 운영하며 모은 재력을 바탕으로 부사장 재직 중 [[조선일보]]의 대주주가 되었으며, 1933년 7월 8대 사주 조만식으로부터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제9대 [[조선일보]] 사주로 취임, 활동했다.&amp;lt;ref&amp;gt;조선일보는 1932년 7월에 조만식을 사장으로 영입했지만, 조만식은 거의 평생을 평양에서 살아왔던데다 서울에서 활동하기에는 적응을 잘하지 못했다. 조만식은 신문사 경영난과 지역감정의 혹독한 시련을 받은 채 9개월만에 퇴사했다. 그리고 조만식 후임으로 1933년, 방응모를 사장으로 추대하기에 이르렀다.&amp;lt;/ref&amp;gt;&amp;lt;ref&amp;gt;《한국사 시민강좌 제47집, 대표적 독립운동가 12인》,일조각. p145&amp;lt;/ref&amp;gt; 방응모 취임 이후의 초대 부사장은 이광수, 주필은 서춘이었다.&lt;br /&gt;
&lt;br /&gt;
=== 언론, 사업 활동 ===&lt;br /&gt;
==== 사회사업과 조선일보 인수 계획 ====&lt;br /&gt;
금광 사업에 성공한 그는 영림, 조림 사업에도 투자하였다. 방응모는 배우자 승계도에게서 더 이상 아들을 얻지 못하자 첩 이인숙을 통해 아들을 얻으려고 하였다. 이인숙은 아들을 낳았으나 이 아들은 곧 사망하였다. 아들을 잃은 이인숙은 승계도의 도움을 받다가, 그해 6월 방응모가 있는 광산으로 가 생활하였다'''. 승계도와 이인숙을 통해 자녀를 얻지못하자 42세가 되던 해인 1924년 친형인 방응곤의 둘째 아들 방재윤을 양자로 입양시켰다.'''&lt;br /&gt;
&lt;br /&gt;
[[파일:방응모장학생.jpg|섬네일|160px|오른쪽|방응모와 그의 장학금을 받던 학생들. 가운데 앉은 이가 방응모이고, 서있는 이들 중 왼쪽에서 두 번째는 방응모의 양자 방재윤.]]&lt;br /&gt;
&lt;br /&gt;
1930년 배영옥과 결혼하여 딸 방재숙을 얻었다. 1932년 광산업을 정리하였고 언론사업을 비롯하여 육영사업과 조림 및 간척사업 등을 벌였다. 또한 고아원과 사회복지단체에 후원금을 지원하면서 인망을 얻기도 했다. 삭주 지역에서는 그의 송덕비가 세워지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932년 그는 수원군 팔탄면 노하리 일대의 갯벌에 일본인이 수차례 뚝을 쌓다가 실패했다는 정보를 얻고 임삼진을 통해 조선총독부에 허가를 요청하였다. 간척 사업은 이후 1935년부터 시작되었지만 1932년부터 은밀히 착수되어 왔다.&lt;br /&gt;
&lt;br /&gt;
1933년 무렵 방응모가 [[조선일보]] 인수에 나서기 전부터 그는 [[한용운]]을 위한 일이라면 돈을 아끼지 않고 지출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성북동 222번지 언덕에 만해를 위해 기와집 한 채를 지어주었는데 심우장(尋牛莊)이 그것이다. 또한 만해가 일제의 배급을 거부해 생활이 어렵게 되자 만해에게 생활비를 지급했던 방응모는 만해가 병석에 누운 1944년에는 치료비를 지원해주기도 했다.&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6/0000043262?sid=103 만해가 일송 선생 5일장 치른 사연]&amp;lt;/ref&amp;gt; 그 외에도 방응모는 만해 한용운·벽초 홍명희 등과 함께 새해가 되면 백천온천에도 같이 다녀올 정도로 두터운 친분을 맺었다.&lt;br /&gt;
&lt;br /&gt;
방응모의 광산 매각을 일본 정부 측에 알리고 다리를 놓은 것은 고일청(高一淸)이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84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32년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사건으로 체포된 [[안창호]]의 사면 탄원과 보석을 위해 노력하였다. 안창호가 윤봉길을 사주했다는 증거가 없으며 그가 테러행위를 지시했다는 증거 자료나 문건이 없다는 것이 방응모의 안창호 탄원 이유였다. 그러나 총독부 경무국장은 그의 안창호 석방 제안을 정중히 거절한다. 1936년 동방문화학원(뒤에 숭문중학교·고등학교 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1939년 9월에는〈조선일보〉의 조간 1회, 석간 2회의 1일 3회 발행을 시작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인수와 경영 ====&lt;br /&gt;
1933년 1월 16일 그는 정식으로 주식회사 [[조선일보]]사를 창립, 1월 18일에 발표된 창립 취지서에는 창립위원장 방응모, 창립발기인 방응모, 조만식, 고일청 외 등이 참여했다. 일단 그는 조만식을 사장으로 임명하고 자신은 부사장으로 있다가, 그해 3월 13일 다시 부사장에 취임했다. 4월 25일 편집인 겸 발행인이 되고, 4월 29일에는 조선일보의 조간, 석간제 발행을 부활, 확정시켰다. 1933년 7월 10일 총독부로부터 조선일보사의 법인 등록 승인을 얻어냈다. 7월 10일 조만식의 사퇴로, [[조선일보]]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다. 1933년 그는 자신의 아호를 춘해에서 계초로 바꾸었다. 그는 유능한 문인, 필진의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 상금 1천 원을 걸고 작가를 영입하였다.&lt;br /&gt;
&lt;br /&gt;
1934년 3월 25일 이광수를 비롯하여 서춘, 김동진, 함상훈, 신태익 등을 [[조선일보]]로 영입해 왔다. 그 외에도 정주군 출신 언론인, 작가들이 조선일보로 많이 오게 되었다. 이후 동아일보와 갈등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이광수가 조선일보로 옮겨와 부사장직에서 9개월 근무했다. 당시 조선일보 내부에서는 문모 라는 이가 이광수의 등장으로 자신의 입지 약화를 우려해 오랫동안 이광수를 내보내려 흉계를 꾸몄다고 한다. 이광수는 1934년 5월 25일자로 돌연 사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65페이지&amp;lt;/ref&amp;gt; 문모는 그에게 오히려 잘 됐다는 식으로 말하다가 방응모에게 호되게 혼이 났다. 그리고 문모로 하여금 즉시 금강산에 들어가 이광수를 다시 데려오게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65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이광수는 아들 봉근(당시 8살)의 사망 등으로 실의에 빠졌고, 1935년에 가서야 이광수를 조선일보 고문이자 필진으로 재영입하게 됐다.&lt;br /&gt;
&lt;br /&gt;
==== 동방문화학원 재단 설립 ====&lt;br /&gt;
방응모는 1936년 방농장의 소유권을 기본 자산으로 하는 재단법인 동방문화학원(東邦文化學院)을 설립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6페이지&amp;lt;/ref&amp;gt; 동방문화학원은 학교 법인으로 인가된 재단 법인으로, 그뒤 고계학원과 인연을 가지고 1936년부터는 보성고등보통학교를 후견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 분리되었다. 그뒤 방응모 장학생인 서중회 회원들을 위한 방응모 장학사업을 주관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7페이지&amp;lt;/ref&amp;gt;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태평로 구 조선일보 사옥 안에 동방문화학원의 간판을 달고 조광 잡지를 계속 발행하는 조광사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7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일제 강점기 후반 ===&lt;br /&gt;
==== 중일 전쟁 전후 ====&lt;br /&gt;
중일전쟁 개전 직후인 1937년 7월 11일에 열린 [[조선일보]] 간부회의에서 주필 서춘이 '일본군, 중국군, 장개석씨'등으로 쓰던 용어를 '아군, 황군, 지나, 장개석'으로 고치고 일본 국민의 입장에서 논설을 쓸 것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편집국장 김형원과 영업국장 김광수가 적극 반대를 하기도 했으나, 방응모는 '일장기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이미 몇 십만 원의 손해를 보았을 뿐 아니라 [[3.1 운동]] 때처럼 신문이 민중을 지도할 수 없다'면서 서춘의 입장을 지지했다. 한편으로 방응모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된 [[안창호]]를 [[조선일보]]에 영입하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안창호는 옥중에서 얻은 간질환과 폐질환 등으로 고생했고, 진료비 등을 수시로 지원하고 문병했음에도 출옥후 얼마 뒤에 사망한다.&lt;br /&gt;
&lt;br /&gt;
1933년 이심회(以心會：후에 序中會, 방응모장학회 등으로 명칭이 바뀜)라는 장학회를 만들어 국내 대학생과 해외유학생들에게 학자금을 지급하기도 했으며, 재단법인 동방문화학원(東方文化學院：지금의 숭문중·고등학교 전신)의 이사장직을 맡기도 했다. 또한 자신의 막대한 재원을 들여 1936년부터 함경남도 영흥군 일대에 당시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대단위 조림사업을 벌였으며, 그 전 해인 1935년부터는 경기도 수원군 팔탄면 일대에서 만 2년간에 걸친 간척사업을 벌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937년 12월 24일 [[안창호]]는 병보석 판정을 받고 재판소가 지정한 현 서울대학교병원인 경성제국대학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안창호의 입원 중에 시중을 든 사람으로는 안창호의 외조카 김순원과 청년 박정호 두 사람이었고, 나중에는 이응준 장군의 부인 이정희가 끝까지 지성껏 간호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7페이지&amp;lt;/ref&amp;gt; [[안창호]]는 병상에서 병원비 문제로도 고초를 겪었다. 이 때문에 조만식은 일본 경찰로부터 안창호의 병원비를 대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음에도, &amp;quot;내가 먹고 살면서 그 선생을 돌보지 않을 수 없다&amp;quot;며 완강히 거절하고 안창호를 도왔다고 한다. 안창호의 간호를 같이 도와주던 이응준 장군 부인 이정희는 10일마다 계산되어 나오는 병원 입원비로 안창호 선생이 괴로워하는 표정을 지켜볼수 없었다고 진술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8페이지&amp;lt;/ref&amp;gt; 방응모는 5백원의 수표 한 장을 안창호에게 전달하였다. 50일간의 입원비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9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안창호]]는 1938년 3월 10일 밤 12시 경성제국대학 병원에서 운명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폐간 사건 ====&lt;br /&gt;
일본의 전쟁이 격화되면서 조선총독부 공보국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1940년에 강제로 폐간조치 했다. 광산을 팔아서 자신의 모든 것을 조선일보에 바쳤던 방응모는 큰 절망과 좌절을 느껴야 했다. [[한용운]]은 ‘신문이 폐간되다/ 붓이 꺾이어 모든 일이 끝나니…’로 시작하는 시를 지어 방응모를 위로했다. &amp;lt;ref&amp;gt;붓이 꺾이어 모든 일 끝나니 이제는 재갈 물린 사람들 뿔뿔이 흩어지고 아, 쓸쓸하고 쓸쓸한지고 망국 서울의 가을날 한강의 물도 흐느끼느니 울음 삼켜 흐느끼며 연지를 외면한 채 바다 향해 흐르느니&amp;lt;/ref&amp;gt; 동아일보에는 김성수 외에도 장덕수와 송진우가 있었지만 그에게는 조선일보 폐간을 막기 위해 총독부와 교섭할 인물도 없었다.&lt;br /&gt;
&lt;br /&gt;
1938년 2월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선 내 일간신문 25개사로 조직된 조선춘추회의 창립에 창립발기인으로 참가했고, 조선춘추회 간사로 활동했다. 같은 해 7월 “국민정신을 총동원하고 내선일체 전 능력을 발휘하여 국책 수행에 협력하여 성전(聖戰)의 궁극적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조직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에 참여했고, 그날 결성된 경성연맹 창립총회에서 상담역을 맡았다. 9월부터 조선방공협회 경기도연합지부 평의원을 지냈다. 10월에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주최한 비상시 국민생활 개선을 위한 제1회 생활개선위원회에서 제2부(의례와 사회풍조 쇄신부)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그러나 1938년 10월부터 조선총독부는 조선일보의 신문용지를 검열, 통제하기 시작했다.&lt;br /&gt;
&lt;br /&gt;
1940년 5월 조선총독부 총독 미나미 지로가 방송담화로 창씨개명을 권고했다. 그러나 그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성씨를 이제 와서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며 창씨개명은 완강하게 거절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조선일보에 트집이 잡힐 일이 나타나지 않자 총독부는 전국 면사무소에 조선일보 신문 구독을 거절하도록 명령을 내렸고, 동시에 조선말을 쓰는 민원인에게는 일을 처리해주지 말도록 하게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3페이지&amp;lt;/ref&amp;gt; 조선총독부는 송진우의 예금통장을 문제삼았다. 송진우 명의의 은행저금이 동아일보의 8백여 개의 지국과 분국을 통해 모금된 독립운동 자금이라며, 그리고 동아일보 간부들이 백운장이라는 요정에서 회식을 한 것을 김성수 집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려 했다는 등의 이유로 백관수 동아일보 사장을 전격 구속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3~374페이지&amp;lt;/ref&amp;gt; 동아일보는 백관수가 구속된지 10일 만에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동아일보 중역회의를 열고 폐간신청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4페이지&amp;lt;/ref&amp;gt; 총독부는 조선일보에도 자진 폐간을 권고했고, 1940년 8월 9일 편집회의를 주관, 8월 10일 조선일보의 폐간계를 내고, 8월 10일자로 폐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5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잡지 발행 활동 ====&lt;br /&gt;
신문 강제 폐간 뒤 방응모는 간판을 조광사로 바꿔 걸고, 사옥은 동방흥업주식회사로 등기를 변경해서 유지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1페이지&amp;lt;/ref&amp;gt; 이후 그는 조광 잡지 발행에 전념했다. 1943년 8월 경 일본 중앙대학의 예과를 마친 방일영이 입사&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1페이지&amp;lt;/ref&amp;gt;, 필진으로 참여했다. [[조선일보]]가 폐간된 후에도 방응모는 벽초 홍명희 부자에게 지속적으로 생활비를 대주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4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4년 6월 29일 만해 [[한용운]]이 사망했다. 그는 심우장을 찾아가 3백원을 내놓았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5페이지&amp;lt;/ref&amp;gt;당시 쌀 10가마가 100원이었지만, 심우장은 당장 현금 1원이 없었는데 거액이라서 놀랐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6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광복 이후 언론 및 정치활동 ===&lt;br /&gt;
==== 광복 직후 ====&lt;br /&gt;
1945년 8.15 광복 후에는 8월 말과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朝鮮在外戰災同胞救濟會) 고문과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9월 초 [[안재홍]] 등이 좌경화되는 건준체제에 반발하여 건준을 탈퇴하자 방응모 역시 건준을 탈퇴하였다.&lt;br /&gt;
&lt;br /&gt;
9월 2일 미군정이 주둔하자, 방응모는 윤전기를 찾기 위해 폐간 당시의 증빙서류를 미 군정청에 제시하였으나 소식이 없었다. 총독부는 조선일보 폐간 직후 인수한 윤전기를 경성일보사에 옮겨서 설치했다. 그는 동방문화재단 외 4개 사업소를 적산으로 파악한 미군정을 설득하고, 사옥 문제도 해결하였다.&lt;br /&gt;
&lt;br /&gt;
10월 1일 조선일보 편집위원회를 구성하고, 신문 복간 운동을 추진했다. 조선총독부의 폐간 지시 당시 의정부로 옮겨놓은 일부 활자 자모음이 잘 보관되어, 그해 11월 23일 조선일보를 복간시키고, 서울신문사 사옥에서 조선일보 복간호를 간행하였다. 이후 조선사회문제대책중앙협의회 중앙위원을 거쳐 10월 16일 이승만 등의 주도로 독립촉성중앙회가 결성되자 독촉에 가입하였다.&lt;br /&gt;
&lt;br /&gt;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이 귀국하자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에 입당했다. 12월 [[안재홍]]의 추천으로 한국독립당의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출되어 3~4개월 동안 활동했다.&amp;lt;ref&amp;gt;일각에서는 방응모가 '한독당 재무부장으로 지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1947년부터 한독당 재무부장을 맡은 신창균이 전면 부정했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47/0000002626?sid=102 백범 비서와 '진짜' 한독당 재정부장의 육성증언. 참고.]&amp;lt;/ref&amp;gt; 그 뒤 대한국민총회 발기인, 대한독립애국금헌성회 발기인 등으로 활동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복간 및 군정기 활동 ====&lt;br /&gt;
11월 [[조선일보]]사를 복간시켰다. 그러나 한동안 조선일보의 인쇄는 서울신문사에서 간행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1945년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추념대회에 참여하였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2&amp;quot;&amp;gt;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13&amp;lt;/ref&amp;gt; 순국선열추념대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2&amp;quot; /&amp;gt;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참여,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이 되었다.&amp;lt;ref&amp;gt;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55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6년 2월 26일 서울신문사 공무국 종업원들이 조선일보의 인쇄를 거부해버렸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436페이지&amp;lt;/ref&amp;gt; 그동안 묵시적으로 방해가 은근히 있었다. 표면상의 문제는 임금 문제이나 내용상으로는 조선일보에 대한 조선공산당의 시위의 일종이었다. 사흘간의 교섭 끝에 2월 28일에 가서야 26일자와 27일자를 소급해서 인쇄하여 신문을 한꺼번에 발행하였다. 그러나 3월 1일과 2일에 또다시 인쇄를 거부당해 결국 휴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436페이지&amp;lt;/ref&amp;gt; 조선일보를 경성일보사로 옮겨서 인쇄하기로 하고 3월 5일자로 사고로 독자에게 알렸다.&lt;br /&gt;
&lt;br /&gt;
4월 29일 김구, 김창숙, 김성수, 오세창 등과 함께 서울운동장에서 윤봉길의사 추모회의 창립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amp;lt;ref&amp;gt;&amp;quot;故尹奉吉義士의 記念式 오늘, 發起人會 열고 準備&amp;quot;, 동아일보 1946년 4월 23일자 2면, 사회면&amp;lt;/ref&amp;gt; 그해 5월 조선공업구락부 고문에 위촉되었다.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民族統一總本部) 10인협의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6월 15일 오후 5시 40분 서울역에 마중나가 서울역에 도착한 삼의사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lt;br /&gt;
&lt;br /&gt;
1945년 광복 직후 서기원이 그를 찾아왔다. 서기원은 그때 경성농상실천학교의 동창회로부터 이 학교의 교장이 되어 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이다. 방응모는 서기원의 제의를 받아들여 1946년 8월 28일 동방문화학원 이사장으로 숭문상업학교를 인수, 재단 이사장이 되었다. 후일 방응모가 6.25 전쟁 중에 납북된 후 동방문화학원과 숭문중,고교의 재단은 최용진이 운영하다가 다시 1978년에 방일영에게 인수되었다.&lt;br /&gt;
&lt;br /&gt;
1947년 1월 21일 제5회 창립위원회를 본사에서 개최하고 2월 23일 주식회사 조선일보사 주주창립총회를 열고 대표이사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공동투자 경영자로 참여시킨 전무 이종민과의 알력이 발생했다. 이종민과의 갈등이 심화되자 그해 8월 3일 방응모는 일단 사직서를 제출했다. 1947년 8월 10일 풍문여고 강당에서 개최된 한인신문기자협회에 참석, 민족청년단에서 언론계 공로자로 방응모, 김성수, 설의식을 지정하여 상을 시상받았다.&amp;lt;ref&amp;gt;&amp;quot;朝鮮 新聞記者協會&amp;quot;, 동아일보 1947년 8월 10일자 2면, 사회면&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납북과 최후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 납북 후 행적은 &amp;quot;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amp;quot;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 1950년 8월경 개성 송악산 부근에서 미군의 폭격에 희생되었고 심한 폭격으로 시신을 찾을 수 없어 묘도 만들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남한에서는 1955년 7월 7일 생사불명기간 만료로 인해 실종 처리되었다.&lt;br /&gt;
&lt;br /&gt;
=== 사후 ===&lt;br /&gt;
서울 종로에 있던 양자 방재윤의 두 아들 방일영과 방우영은 방응모의 첩 이인숙이 찾아가 피신하라고 권고하여 황급히 피신했다. &lt;br /&gt;
&lt;br /&gt;
7월 6일 그의 행방불명처리가 되고, 방응모의 사후에도 [[조선일보]]는 그의 명의로 발행되었다. 1952년 4월 28일 조선일보는 발행인겸 편집인을 장기영으로, 인쇄인을 방일영으로, 방응모는 명예사장으로 명의변경하여 휴전 후 계속 발행하게 되었다. 1954년 4월 30일 제8회 조선일보 정기주주총회에서 장기영 사장이 사퇴하면서, 명예사장 방응모가 사장으로 추대되고, 발행인 겸 대표취체역에 방일영이 선임되었다. 이후 실종 후 1959년에 법적으로 사망 처리되었다. 그리고 1970년까지는 조선일보는 그의 이름으로 발행되었다.&lt;br /&gt;
&lt;br /&gt;
1970년 2월 19일 조선일보 정기주주총회에서 방응모 이사를 사퇴 수리하였다. 그의 피폭 사망 사실은 1970년대 이후 탈북자들을 통해 대한민국에 소개되었다.&lt;br /&gt;
&lt;br /&gt;
== 친일행위 의혹 ==&lt;br /&gt;
=== 일제 전시체제기 활동 ===&lt;br /&gt;
일제 강점기 말기 언론인으로서 총독부체제에 협력한 기록과 활동이 다수 기록이 있다. 1933년 3월 [[조선일보]] 경영권을 인수하고 부사장직에 취임했을 당시 같은 달에 고사기관총 구입비용 1600원을 군에 헌납하였다. 그는 1935년 친일 잡지 《조광 (잡지)(朝光)》을 창간하였고, 1937년에는 경성방송국 제2방송에 출연하여 일제가 중국의 베일을 절멸케하여 극동평화를 지키려고 한다는 강연을 하였다. 1940년대부터 조광에 집중적으로 친일 논설을 기고하고 시국 강연에 참여하여 전쟁 지원을 독려했다. 1942년 6월에는 '징병령 실시에 일층 더 감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글을 써서 조광에 발표하였다. 애국금차회(1937),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1938), 임전대책협의회(1941), 조선임전보국단(1941) 등 대표적인 친일 단체의 회원에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그는 이런 행적으로 인해 해방정국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명단에 기록되어 있고,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해 발표한 &amp;lt;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amp;gt;에 모두 포함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lt;br /&gt;
&lt;br /&gt;
우리 [[조선일보]]는 다른 어떤 신문도 따라오지 못하는 확고한 신념에서 비국민적 행위를 단연 배격하여 종국까지 조선일보사가 이미 정해놓은 방침에 한뜻으로 매진한다.|원산에서의 순회 강연&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9478.html 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친일 다짐하다 시민에 봉변]《한겨레》2005-08-24 오후 06:13:18&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반민족행위 논란 ===&lt;br /&gt;
방응모를 친일파로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남아 있다. 조선일보 경영 이전에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방응모의 활동이 거의 없었고, 납북된 뒤 소식이 끊겨버린 까닭에 본인이 항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 동안의 행적만으로 친일파 여부를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방응모의 후손들이 영향력 있는 [[조선일보]] 언론사의 사주를 맡았기에 그의 입장에서 서술한 기록을 많이 남기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80년 발간된 그의 전기 《계초 방응모》(조선일보사) 등에는 '그가 민족주의적 선각자'로 묘사되고 있다. 방응모가 친일파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일부세력측은 그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논거로 드는 경우가 많이 있다.&amp;lt;ref&amp;gt;유석재, 계간 《유심》 (2004년 봄호) [http://yousim.buddhism.org/html/2004-spr/tamgu-yoo-seok-jae.htm 삭풍 속에 피어난 금란지교(金蘭之交) - 만해와 계초 방응모]&amp;lt;/ref&amp;gt;&amp;lt;ref&amp;gt;&amp;quot;일제 말기 계초는 시국강연에 나설 것과 창씨개명을 집요하게 강요받았으나 그때마다 묵묵부답으로 거부하며 소신을 지켰다.&amp;quot; 《조선일보》 (2001.3) 조선일보 사장열전 - 계초 방응모편, 《한겨레》 (2001.3.30) [http://www.njoyschool.net/news/article_view.asp?menu_code=s20202&amp;amp;no=1206 조선일보, 일장기를 신문제호 위에]&amp;lt;/ref&amp;gt;&lt;br /&gt;
또한 한국정토학회 고문이자 서울 정토사 주지였던 박설산(1918~2007)이 학도병에 끌려가기 직전인 1943년 12월 28일 밤 서울역에서 스스로 왼발을 선로에 올려 발가락을 절단해 징집을 기피하자 방응모는 만해와 함께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설산을 걱정하면서 입원 중 조선일보 기자를 통해 돈을 전달한 것은 물론 퇴원할 때 돈을 전달하고 뒤를 보살폈다고 한다.&amp;lt;ref&amp;gt;박설산 회고록 &amp;lt;뚜껑없는 조선역사책&amp;gt;(1994, 도서출판 삼장) p240~241&amp;lt;/ref&amp;gt;&lt;br /&gt;
&lt;br /&gt;
2010년 12월, 방응모 관계자들 및 조선일보측은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을 취소해달라'며 법원에 낸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amp;quot;1944년 조선항공업 창립발기인으로 활동한 부분에 대해 친일행위로 판단한 부분을 취소하지만 나머지 활동에 대해서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amp;quot;라고 판결했다. 그 이유인 즉 &amp;quot;방응모는 1933년 조선일보 사장으로 취임해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등으로 활동하며 친일활동을 벌였으며, 1937년 경성방송국 시국강연에서 일본제국이 극동평화를 확립시킬 것이라는 내용의 강연을 하고, 1938년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춘추회의 발기인 겸 간사로 활동하기도 했다&amp;lt;ref&amp;gt;[http://media.daum.net/breakingnews/politics/view.html?cateid=1002&amp;amp;newsid=20101222103319164&amp;amp;p=newsis 법원 &amp;quot;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친일파 맞다&amp;quot;]뉴시스 2010년 12월 22일&amp;lt;/ref&amp;gt;&amp;quot;는 것이다.&lt;br /&gt;
&lt;br /&gt;
2012년 1월 12일 서울고법 행정7부는 방 전 사장의 손자인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이 행정안전부를 상대로 낸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처분 취소 청구소송에서 ‘일제 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의 친일 행위 판정 조항에 비추어 방 전 사장에게 적용된 모두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민족적 지도자로서 비중이 큰 만큼 그로 인한 책임도 무거울 뿐 아니라 고난의 시기를 겪은 민족으로서 그 역사를 반성하자는 입장에 설 때, 방 전 사장의 여러 행태는 반민특별법에서 규정한 친일반민족행위의 유형에 속함을 부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1·2심 재판부는 방 전 사장이 자신이 운영하던 잡지 &amp;lt;조광&amp;gt;에 일제 침략전쟁에 동조하고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문예물과 일제 침략전쟁에 협력할 것을 주문하는 논문을 게재하는 등의 ‘친일’ 행위를 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또한, 2심 재판부는 일본의 전쟁 수행을 돕기 위해 설립된 군수 제조업체 ‘조선항공공업’의 발기인과 감사를 지낸 것은 “감사는 업무집행에 관여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기관으로, 방 전 사장이 이 회사를 운영했다고 볼 수 있다”는 이유로 친일이라고 판단했다.&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4565.html법원 ‘방응모 친일’ 2심서도 인정] 인터넷한겨레 2010년 12월 22일&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기타 ==&lt;br /&gt;
그는 [[한용운]], 최남선, 정인보, 홍명희 등과 친분관계를 형성하고 어울려 지냈다 한다.&lt;br /&gt;
&lt;br /&gt;
김구의 한국독립당의 재정적 후견인 역할을 하였다 하며,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삼의사 유골봉환식 때 김구, 정인보 등과 촬영한 사진이 있다.&lt;br /&gt;
한편 임꺽정의 저자인 벽초 홍명희가 방응모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그와 깊은 친분을 맺었다는 주장이 있다. 《조광》 1938년 11월호엔 홍명희가 병중에 있는 방응모를 위로하며 지은 한시가 방응모의 답시와 함께 실려 있다고 한다.&amp;lt;ref&amp;gt;[http://weekly.chosun.com/site/data/html_dir/2004/11/05/2004110577041.html ‘임꺽정’으로 되살아난 독립운동의 魂! 주간조선 1827호 2004.11.04&amp;lt;/ref&amp;gt; 또한 [[안창호]]의 비서실장을 지낸 독립유공자 구익균은 방응모와 안창호가 친밀했다는 주장을 했다.&amp;lt;ref&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09/2008030901055.html &amp;quot;공산주의자들, 도산 비판하다가도 하숙비 떨어지면 찾아와&amp;quot;] 조선일보, 2008-03-10 03:22&amp;lt;/ref&amp;gt;&lt;br /&gt;
또한 박설산에 따르면 1943년 만해 한용운에게 학도병으로 끌려가게 되었음을 알리려 심우장으로 찾아가게 되었을 때, 한용운과 방응모가 바둑을 두고 곁에서 정인보가 훈수를 두고 있었다고 한다.&amp;lt;ref&amp;gt;박설산 저 &amp;lt;뚜껑없는 朝鮮 역사 책&amp;gt; p.226 도서출판 三藏(1994)&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 /&amp;gt;&lt;br /&gt;
&lt;br /&gt;
== 참고 자료 ==&lt;br /&gt;
* 청산하지 못한 역사: 언론 내세워 일제에 아부한 교화 정책의 하수인 (문영숙) (반민족문제연구소, 청년사, 1994)&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민족 계몽의 초석 방응모(이동욱 저, 지구촌, 1998)&lt;br /&gt;
* 계초 방응모전(계초전기간행위, 조선일보사, 1980년)&lt;br /&gt;
* 계초 방응모(이동욱, 방일영문화재단, 1996)&lt;br /&gt;
&lt;br /&gt;
== 외부 링크 ==&lt;br /&gt;
* [https://web.archive.org/web/20050123171046/http://chosunhost.com/ 계초방응모 기념사업회]&lt;br /&gt;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09145 &amp;lt;조선일보&amp;gt;, 방응모 전 사장의 '친일행적' 말한다] - 오마이뉴스 04.09.10일자&lt;br /&gt;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020302101749 방응모ㆍ 김성수 친일행적 뭔가 : &amp;lt;긴급입수&amp;gt;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 全文] - 프레시안 2002-03-02&lt;br /&gt;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54052 그가 '&amp;lt;조선&amp;gt;의 주인' 주장하는 이유] 오마이뉴스 2001년 9월 20일자&lt;br /&gt;
*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956 방재선씨, 호주·상속 원인무효소송 제기]&lt;br /&gt;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4/06/2008040601053.html '5인 친필 서첩' 발굴] 조선일보 2008년04월06일자]&lt;br /&gt;
&lt;br /&gt;
[[분류: 감자]]&lt;/div&gt;</summary>
		<author><name>Nsgjjsjsjy02</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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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Nsgjjsjsjy02: &lt;/p&gt;
&lt;hr /&gt;
&lt;div&gt;{|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width:100%&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8%&amp;quot;|사진&lt;br /&gt;
|[[파일:유심1호.jpg|center|200픽셀]]&lt;br /&gt;
|+ 불교 잡지 &amp;lt;유심&amp;gt;&lt;br /&gt;
|한글||유심&lt;br /&gt;
|-&lt;br /&gt;
|한자||惟心&lt;br /&gt;
|-&lt;br /&gt;
|판본||활자본&lt;br /&gt;
|-&lt;br /&gt;
|시대||일제강점기&lt;br /&gt;
|-&lt;br /&gt;
|간행연도||1918년&lt;br /&gt;
|-&lt;br /&gt;
|간행처||경성&lt;br /&gt;
|}&lt;br /&gt;
&lt;br /&gt;
'''만해 [[한용운]]이 유심사에서 조선 청년들을 계몽하기 위해 간행한 잡지'''&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만해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이 청년들의 수양을 독려하고 계몽하기 위해 간행한 수양 잡지이다.&lt;br /&gt;
&lt;br /&gt;
1918년 9월에 창간되어 1918년 12월에 제3호로 종간되었다. 1910년대 불교 잡지들은 대부분 기관지 형태로 간행되었는데, 『유심』은 한용운 개인의 의지로 발간한 잡지라는 점이 특징이다. 게다가 청년 세대를 고려한 잡지라는 점에서 올바른 수양과 사고를 통해 청년들이 새 시대의 주역이 되기를 희망하는 한용운의 기획 의도를 엿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한용운은 1910년대에 조선불교의 전통을 수호하기 위한 운동을 이끌었고, 『조선불교유신론』(1913), 『불교대전』(1914), 『정선강의 채근담』(1917) 등의 저술을 발표했다. 조선불교의 지도자로서 개혁을 꿈꿨던 그이기에 많은 불교 청년이 그를 따랐고, 한용운은 젊은 세대를 위한 올바른 수양 담론의 장으로서 『유심』을 창간하였다. 이후 한용운은 3.1운동에 민족 대표로 참여했고, 젊은 세대의 정신적 지주로서 자리를 잡았다.&lt;br /&gt;
&lt;br /&gt;
편집 겸 발행인은 한용운(韓龍雲)이다. 집필진은 대부분 불교도이며 한용운, 최린, 최남선, 유근, 이광종, 이능우, 김남천, 강도봉, 서광전, 김문연, 임규, 박한영, 백용성, 권상로, 현상윤, 홍남표 등이다.&lt;br /&gt;
&lt;br /&gt;
『유심』은 특별한 편목이나 분류 없이, '수양'이라는 주제 아래 사설이나 문학 작품 등으로 구성되었다.&lt;br /&gt;
&lt;br /&gt;
한용운은 「조선 청년과 수양」이라는 글에서 물질문명에 휩쓸려 방황하는 조선 청년들에게 행동 규범으로서 ‘마음의 수양’을 제시하였다. 창간호의 가장 앞에 실린 글인 만큼 『유심』이 지향하는 목표를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유심』은 청년들의 문예 작품 발표의 장으로서도 의미를 지닌다. 그중에는 나중에 아동문학가로 알려질 방정환(方定煥)도 있었고, 김법린, 이영재 등 신진 불교 청년들도 확인된다. 『유심』은 젊은 인재들이 자신의 꿈을 키우는 공간이기도 했다. 이처럼 『유심』은 조선 청년의 각성과 실천을 추구했고, 청년들로부터 호응을 이끌어 냈던 잡지였다.&lt;br /&gt;
&lt;br /&gt;
== 사진 ==&lt;br /&gt;
[[파일:유심사진.jpg|center|200픽셀]]&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불교 잡지 유심1호&amp;lt;/div&amp;gt;&lt;br /&gt;
&lt;br /&gt;
[[파일:유심2호.jpg|center|200픽셀]]&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불교 잡지 유심2호 표지&amp;lt;/div&amp;gt;&lt;br /&gt;
&lt;br /&gt;
== 참고문헌 ==&lt;br /&gt;
* [https://buddhaland.dongguk.edu/bulVoca/view?dataId=KBDI0002080 유심:불교문화포털]&lt;br /&gt;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1626 유심-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lt;br /&gt;
[[분류:감자]]&lt;/div&gt;</summary>
		<author><name>Nsgjjsjsjy02</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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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흑풍</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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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06-19T12:34:3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Nsgjjsjsjy02: /* 내용 */&lt;/p&gt;
&lt;hr /&gt;
&lt;div&gt;'''만해 [[한용운]]이 지은 장편소설이다.'''&lt;br /&gt;
&lt;br /&gt;
[[파일:흑풍.jpg|center|200픽셀]]&lt;br /&gt;
&lt;br /&gt;
== 개설 ==&lt;br /&gt;
1935년 4월 9일부터 1936년 2월 4일까지 약 10개월간 [[조선일보]]에 연재하였다.&lt;br /&gt;
&lt;br /&gt;
청나라 말기를 배경으로 혁명적인 주인공의 활약상을 그려, 간접적으로 일제에 대한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독립투쟁을 고취하려 한 작품이다.&lt;br /&gt;
&lt;br /&gt;
표제의 '흑풍'도 암울한 사회상과 변혁의 의지를 암시한 것이다.&lt;br /&gt;
&lt;br /&gt;
지주와 소작인·구직·강도·유학·초연·정탐·해후·광동·여성해방회·결혼·미인계·복수·윤락·참사랑 등 14장으로 구분되어 있다.&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정치사회가 극도로 피폐한 청 말, 중국 항저우의 가난한 소작인의 아들 서왕한이 가혹한 착취를 일삼는 지주를 응징하고 상하이로 간다. 왕한은 여기서 재벌 장지성을 총살하고 미국으로 유학가서 혁명운동에 가담한다. 그리고 고국에 돌아와 적극적인 혁명투쟁에 헌신한다.&lt;br /&gt;
&lt;br /&gt;
저항과 혁명, 사랑과 희생, 배반과 복수 등이 사건의 주된 흐름이다. 자본가나 지주계급의 착취를 일소하고 하층계급의 권리를 찾기 위해서는 사회제도의 개혁, 곧 혁명이 필요하다는 점과, 국민정신의 기저에는 애국사상과 독립정신의 고취가 필요하다는 점이 주된 사상이다.&lt;br /&gt;
&lt;br /&gt;
== 의의와 평가 ==&lt;br /&gt;
계몽적 의지가 너무 노골적으로 표현되고, 인물들이 전형적이며, 단조롭고 평면적인 사건 전개 외에도 장황하고 지리한 묘사와 대화, 사건 발전의 계기에 있어 내면적인 필연성의 결여 등은 이 소설이 지니는 한계로 지적될 수 있다. 그러나 1930년대 식민지 현실에서는 언급하기조차 민감한 '혁명'이라는 테마를 정면에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특이한 소설이다.&lt;br /&gt;
&lt;br /&gt;
== 참고문헌 ==&lt;br /&gt;
*『만해한용운연구』(인권환·박노준, 통문관, 1960)&lt;br /&gt;
* 김원규. (2018). 식민지 시기 소설에 나타난 혁명의 상상력―한용운의 『흑풍』을 중심으로. 한국문예비평연구, 59, 271-300.&lt;br /&gt;
&lt;br /&gt;
[[분류:감자]]&lt;/div&gt;</summary>
		<author><name>Nsgjjsjsjy02</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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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흑풍</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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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06-19T12:33:4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Nsgjjsjsjy02: /* 개설 */&lt;/p&gt;
&lt;hr /&gt;
&lt;div&gt;'''만해 [[한용운]]이 지은 장편소설이다.'''&lt;br /&gt;
&lt;br /&gt;
[[파일:흑풍.jpg|center|200픽셀]]&lt;br /&gt;
&lt;br /&gt;
== 개설 ==&lt;br /&gt;
1935년 4월 9일부터 1936년 2월 4일까지 약 10개월간 [[조선일보]]에 연재하였다.&lt;br /&gt;
&lt;br /&gt;
청나라 말기를 배경으로 혁명적인 주인공의 활약상을 그려, 간접적으로 일제에 대한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독립투쟁을 고취하려 한 작품이다.&lt;br /&gt;
&lt;br /&gt;
표제의 '흑풍'도 암울한 사회상과 변혁의 의지를 암시한 것이다.&lt;br /&gt;
&lt;br /&gt;
지주와 소작인·구직·강도·유학·초연·정탐·해후·광동·여성해방회·결혼·미인계·복수·윤락·참사랑 등 14장으로 구분되어 있다.&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정치사회가 극도로 피폐한 청 말, 중국 항저우의 가난한 소작인의 아들 서왕한이 가혹한 착취를 일삼는 지주를 응징하고 상하이로 간다. 왕한은 여기서 재벌 장지성을 총살하고 미국으로 유학가서 혁명운동에 가담한다. 그리고 고국에 돌아와 적극적인 혁명투쟁에 헌신한다는 것으로 되어 있다.&lt;br /&gt;
&lt;br /&gt;
저항과 혁명, 사랑과 희생, 배반과 복수 등이 사건의 주된 흐름이다. 자본가나 지주계급의 착취를 일소하고 유린된 하층계급의 권리를 찾기 위해서는 사회제도의 개혁, 곧 혁명이 필요하다는 점과, 국민정신의 근저에는 애국사상과 독립정신의 고취가 필요하다는 점이 주된 사상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 의의와 평가 ==&lt;br /&gt;
계몽적 의지가 너무 노골적으로 표현되고, 인물들이 전형적이며, 단조롭고 평면적인 사건 전개 외에도 장황하고 지리한 묘사와 대화, 사건 발전의 계기에 있어 내면적인 필연성의 결여 등은 이 소설이 지니는 한계로 지적될 수 있다. 그러나 1930년대 식민지 현실에서는 언급하기조차 민감한 '혁명'이라는 테마를 정면에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특이한 소설이다.&lt;br /&gt;
&lt;br /&gt;
== 참고문헌 ==&lt;br /&gt;
*『만해한용운연구』(인권환·박노준, 통문관, 1960)&lt;br /&gt;
* 김원규. (2018). 식민지 시기 소설에 나타난 혁명의 상상력―한용운의 『흑풍』을 중심으로. 한국문예비평연구, 59, 271-300.&lt;br /&gt;
&lt;br /&gt;
[[분류:감자]]&lt;/div&gt;</summary>
		<author><name>Nsgjjsjsjy02</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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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불교 잡지 유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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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Nsgjjsjsjy02: /* 내용 */&lt;/p&gt;
&lt;hr /&gt;
&lt;div&gt;{|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width:100%&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8%&amp;quot;|사진&lt;br /&gt;
|[[파일:유심1호.jpg|center|200픽셀]]&lt;br /&gt;
|+ 불교 잡지 &amp;lt;유심&amp;gt;&lt;br /&gt;
|한글||유심&lt;br /&gt;
|-&lt;br /&gt;
|한자||惟心&lt;br /&gt;
|-&lt;br /&gt;
|판본||활자본&lt;br /&gt;
|-&lt;br /&gt;
|시대||일제강점기&lt;br /&gt;
|-&lt;br /&gt;
|간행연도||1918년&lt;br /&gt;
|-&lt;br /&gt;
|간행처||경성&lt;br /&gt;
|}&lt;br /&gt;
&lt;br /&gt;
'''만해 [[한용운]]이 유심사에서 조선 청년들을 계몽하기 위해 간행한 잡지'''&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만해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이 청년들의 수양을 독려하고 계몽하기 위해 간행한 수양 잡지이다.&lt;br /&gt;
&lt;br /&gt;
1918년 9월에 창간되어 1918년 12월에 제3호로 종간되었다. 1910년대 불교 잡지들은 대부분 기관지 형태로 간행되었는데, 『유심』은 한용운 개인의 의지로 발간한 잡지라는 점이 특징이다. 게다가 청년 세대를 고려한 잡지라는 점에서 올바른 수양과 사고를 통해 청년들이 새 시대의 주역이 되기를 희망하는 한용운의 기획 의도를 엿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한용운은 1910년대에 조선불교의 전통을 수호하기 위한 운동을 이끌었고, 『조선불교유신론』(1913), 『불교대전』(1914), 『정선강의 채근담』(1917) 등의 저술을 발표했다. 조선불교의 지도자로서 개혁을 꿈꿨던 그이기에 많은 불교 청년이 그를 따랐고, 한용운은 젊은 세대를 위한 올바른 수양 담론의 장으로서 『유심』을 창간하였다. 이후 한용운은 3.1운동에 민족 대표로 참여했고, 젊은 세대의 정신적 지주로서 자리를 잡았다.&lt;br /&gt;
&lt;br /&gt;
편집 겸 발행인은 한용운(韓龍雲)이다. 집필진은 대부분 불교도이며 한용운, 최린, 최남선, 유근, 이광종, 이능우, 김남천, 강도봉, 서광전, 김문연, 임규, 박한영, 백용성, 권상로, 현상윤, 홍남표 등이다.&lt;br /&gt;
&lt;br /&gt;
『유심』은 특별한 편목이나 분류 없이, '수양'이라는 주제 아래 사설이나 문학 작품 등으로 구성되었다.&lt;br /&gt;
&lt;br /&gt;
한용운은 「조선 청년과 수양」이라는 글에서 물질문명에 휩쓸려 방황하는 조선 청년들에게 행동 규범으로서 ‘마음의 수양’을 제시하였다. 창간호의 가장 앞에 실린 글인 만큼 『유심』이 지향하는 목표를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유심』은 청년들의 문예 작품 발표의 장으로서도 의미를 지닌다. 그중에는 나중에 아동문학가로 알려질 방정환(方定煥)도 있었고, 김법린, 이영재 등 신진 불교 청년들도 확인된다. 『유심』은 젊은 인재들이 자신의 꿈을 키우는 공간이기도 했다. 이처럼 『유심』은 조선 청년의 각성과 실천을 추구했고, 청년들로부터 호응을 이끌어 냈던 잡지였다.&lt;br /&gt;
&lt;br /&gt;
== 사진 ==&lt;br /&gt;
[[파일:유심사진.jpg|center|200픽셀]]&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불교 잡지 유심1호&amp;lt;/div&amp;gt;&lt;br /&gt;
&lt;br /&gt;
[[파일:유심2호.jpg|center|200픽셀]]&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불교 잡지 유심2호 표지&amp;lt;/div&amp;gt;&lt;br /&gt;
&lt;br /&gt;
== 참고문헌 ==&lt;br /&gt;
* [https://buddhaland.dongguk.edu/bulVoca/view?dataId=KBDI0002080 유심:불교문화포털]&lt;br /&gt;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1626 유심-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lt;br /&gt;
[[분류:감자]]&lt;/div&gt;</summary>
		<author><name>Nsgjjsjsjy02</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8B%98%EC%9D%98_%EC%B9%A8%EB%AC%B5&amp;diff=59395</id>
		<title>님의 침묵</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8B%98%EC%9D%98_%EC%B9%A8%EB%AC%B5&amp;diff=59395"/>
		<updated>2025-06-19T12:20:3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Nsgjjsjsjy02: /* 내용 */&lt;/p&gt;
&lt;hr /&gt;
&lt;div&gt;{|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 width:100%&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8%&amp;quot;|사진&lt;br /&gt;
|[[파일:님의침묵.jpg|center|200픽셀]]&lt;br /&gt;
|+ 시집 &amp;lt;님의 沈黙&amp;gt;&lt;br /&gt;
|한글||님의 침묵&lt;br /&gt;
|-&lt;br /&gt;
|한자||님의 沈黙&lt;br /&gt;
|-&lt;br /&gt;
|판본||활자본&lt;br /&gt;
|-&lt;br /&gt;
|시대||일제강점기&lt;br /&gt;
|-&lt;br /&gt;
|간행연도||1926년&lt;br /&gt;
|-&lt;br /&gt;
|간행처||경성 회동서관&lt;br /&gt;
|}&lt;br /&gt;
&lt;br /&gt;
'''만해 [[한용운]]이 1926년에 출간한 시집이다.'''&lt;br /&gt;
&lt;br /&gt;
== 구성 및 형식 ==&lt;br /&gt;
1925년 내설악 백담사에서 쓰여져서 1926년 회동서관에서 간행하였고, 1934년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재판하였다. 광복 후 1950년에 다시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재간되었다.&lt;br /&gt;
&lt;br /&gt;
시집 『님의 침묵』의 구성은 앞에 ‘군말’과 뒤에 ‘독자에게’가 붙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군말’에는 창작 동기가 제시되어 있다.&lt;br /&gt;
&lt;br /&gt;
본문은 「님의 침묵」을 비롯하여,「알 수 없어요」·「자유정조」등 모두 88편의 시가 기승전결의 극적 구성을 취한 연작시 형태로 배열되어 있다. 이것은 첫 시 「님의 침묵」이 기(이별의 제시), 승(이별 후의 고통과 슬픔), 전(슬픔의 희망으로의 전이), 결(만남의 성취)이라는 전개 과정을 지닌 것과 대응된다.&lt;br /&gt;
&lt;br /&gt;
즉, 시집 『님의 침묵』은 88편의 시가 대체로 기(이별의 시편), 승(슬픔과 고통의 시편), 전(희망으로의 전환시편), 결(만남을 향한 시편)이라는 연작시와 같은 구성방식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첫 시 「님의 침묵」에서의 첫 구절은 “님은 갓슴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갓슴니다.”라는 이별의 시로 시작되어, 끝 시 「사랑의 끗판」에서의 마지막 행이 “녜 녜 가요 이제 곳 가요.”라는 만남의 시로 귀결되는 특징을 지닌다.&lt;br /&gt;
&lt;br /&gt;
시의 본문 뒤에 붙어 있는 ‘독자에게’는 탈고 소감을 적어놓은 일종의 후기인데, 시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점 또한 특이하다.&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창작 동기는 민족항일기인 1920년대의 극심한 언론 탄압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에 문학적으로 저항하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시의 비유와 상징을 통해 보다 높은 정신적 차원에서 문학적 저항을 시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점은 “해저믄 벌판에서 도러가는 길을 일코 헤매는 어린양이 긔루어서 이 시를 쓴다.”라는 &amp;lt;군말&amp;gt;에 극명히 제시되어 있다.&lt;br /&gt;
&lt;br /&gt;
“님만 님이 아니라 긔룬 것은 다 님이다.”라는 구절에서 이미 알 수 있듯이 임은 연인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연인일 수도 있지만 ‘길을 잃은 어린양’, 즉 당대 식민지 하에서 방황하는 민족의 모습일 수도 있으며, 또한 빼앗긴 조국의 모습이기도 하고, 아울러 실현되지 않고 있는 이념이거나 진리일 수도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님'은 연인이라는 개인적 의미일 수도 있고, 조국 · 민족 등의 규범적 의미일 수도 있으며, 정의 · 진리 등의 의미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이 시집의 형상적 우수성이 드러난다.&lt;br /&gt;
&lt;br /&gt;
이렇게 볼 때 전체적인 내용은 이별이나 사랑의 고통 그 자체만을 노래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별과 그 고통 속에서 참다운 삶의 의미를 깨닫고, 마침내 임과 사랑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함으로써 크고 빛나는 만남을 성취한 생성과 극복의 시로서의 성격을 지니는 것이다. '님의 침묵'이라는 표제에서 침묵의 의미는 단순한 명상의 침묵이 아니라 생생한 삶의 몸부림과 깨달음을 생성하는 적극적 침묵인 것이다.&lt;br /&gt;
&lt;br /&gt;
방법론적인 면에서의 특징은 은유와 역설을 탁월하게 구사함으로써 현대시적인 면모를 확보한 데서 드러난다. 1920년대 중반에 독창적인 은유와 역설을 시의 중심 방법으로 삼음으로써 우리 현대시의 한 기점이 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였다.&lt;br /&gt;
&lt;br /&gt;
== 수록 작품 ==&lt;br /&gt;
* 군말&lt;br /&gt;
* 님의 침묵&lt;br /&gt;
* 이별은 미의 창조 &lt;br /&gt;
* 알 수 없어요&lt;br /&gt;
* 나는 잊고자&lt;br /&gt;
* 가지 마서요&lt;br /&gt;
* 고적한 밤&lt;br /&gt;
* 나의 길&lt;br /&gt;
* 꿈 깨고서&lt;br /&gt;
* 예술가&lt;br /&gt;
* 이별&lt;br /&gt;
* 길이 막혀&lt;br /&gt;
* 자유정조&lt;br /&gt;
* 하나가 되어 주서요&lt;br /&gt;
* 나룻배와 행인&lt;br /&gt;
* 차라리&lt;br /&gt;
* 당신이 아니더면&lt;br /&gt;
* 나의 노래&lt;br /&gt;
* 잠 없는 꿈&lt;br /&gt;
* 생명&lt;br /&gt;
* 사랑의 측량&lt;br /&gt;
* 진주&lt;br /&gt;
* 슬픔의 삼매&lt;br /&gt;
* 의심하지 마서요&lt;br /&gt;
* 당신은&lt;br /&gt;
* 행복&lt;br /&gt;
* 착인&lt;br /&gt;
* 밤은 고요하고&lt;br /&gt;
* 비밀&lt;br /&gt;
* 사랑의 존재&lt;br /&gt;
* 꿈과 근심&lt;br /&gt;
* 포도주&lt;br /&gt;
* 비방&lt;br /&gt;
* 님의 손길&lt;br /&gt;
* 해당화&lt;br /&gt;
* 비&lt;br /&gt;
* 복종&lt;br /&gt;
* 참아 주서요&lt;br /&gt;
* 어느 것이 참이냐&lt;br /&gt;
* 정천한해&lt;br /&gt;
* 첫 ‘키스’&lt;br /&gt;
* 선사의 설법&lt;br /&gt;
* 그를 보내며&lt;br /&gt;
* 금강산&lt;br /&gt;
* 님의 얼굴&lt;br /&gt;
* 심은 버들&lt;br /&gt;
* 낙원은 가시덤불에서&lt;br /&gt;
* 참말인가요&lt;br /&gt;
* 꽃이 먼저 알아&lt;br /&gt;
* 찬송&lt;br /&gt;
* 논개의 애인이 되어서 그의 묘에&lt;br /&gt;
* 후회&lt;br /&gt;
* 사랑하는 까닭&lt;br /&gt;
* 당신의 편지&lt;br /&gt;
* 거짓 이별&lt;br /&gt;
* 꿈이라면&lt;br /&gt;
* 달을 보며&lt;br /&gt;
* 인과율&lt;br /&gt;
* 반비례&lt;br /&gt;
* 잠꼬대&lt;br /&gt;
* 계월향에게&lt;br /&gt;
* 만족&lt;br /&gt;
* 눈물&lt;br /&gt;
* 어디라도&lt;br /&gt;
* 떠날 때의 님의 얼굴&lt;br /&gt;
* 최초의 님&lt;br /&gt;
* 두견새&lt;br /&gt;
* 나의 꿈&lt;br /&gt;
* 우는 때&lt;br /&gt;
* 버리지 아니하면&lt;br /&gt;
* 타고르의 시(GARDENISTO)를 읽고&lt;br /&gt;
* 수의 비밀&lt;br /&gt;
* 당신은&lt;br /&gt;
* 사랑의 불&lt;br /&gt;
* ‘사랑’을 사랑하여요&lt;br /&gt;
* 당신 가신 때&lt;br /&gt;
* 여름밤이 길어요&lt;br /&gt;
* 요술&lt;br /&gt;
* 당신의 마음&lt;br /&gt;
* 명상&lt;br /&gt;
* 생의 예술&lt;br /&gt;
* 칠석&lt;br /&gt;
* 꽃싸움&lt;br /&gt;
* 거문고 탈 때&lt;br /&gt;
* 오서요&lt;br /&gt;
* 쾌락&lt;br /&gt;
* 고시&lt;br /&gt;
* 사랑의 끝판&lt;br /&gt;
* 독자에게&lt;br /&gt;
&lt;br /&gt;
== 님의 침묵(시) ==&lt;br /&gt;
=== 원문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 center&amp;quot;&amp;gt;'''님의 沈默'''&amp;lt;/div&amp;gt;&lt;br /&gt;
----&lt;br /&gt;
님은갓슴니다 아々 사랑하는나의님은 갓슴니다&amp;lt;br/&amp;gt;&lt;br /&gt;
푸른산빗을ᄭᅢ치고 단풍나무숩을향하야난 적은길을 거러서 참어ᄯᅥᆯ치고 갓슴니다&amp;lt;br/&amp;gt;&lt;br /&gt;
黃金의ᄭᅩᆺ가티 굿고빗나든 옛盟誓는 차듸찬ᄯᅴᄭᅳᆯ이되야서 한숨의微風에 나러갓슴니다&amp;lt;br/&amp;gt;&lt;br /&gt;
날카로은 첫「키쓰」의追憶은 나의運命의指針을 돌너너코 뒤ㅅ거름처서 사러젓슴니다&amp;lt;br/&amp;gt;&lt;br /&gt;
나는 향긔로은 님의말소리에 귀먹고 ᄭᅩᆺ다은 님의얼골에 눈머럿슴니다&amp;lt;br/&amp;gt;&lt;br /&gt;
사랑도 사람의일이라 맛날ᄯᅢ에 미리 ᄯᅥ날것을 염녀하고경계하지 아니한것은아니지만 리별은 ᄯᅳᆺ밧긔일이되고 놀난가슴은 새로은슯음에 터짐니다&amp;lt;br/&amp;gt;&lt;br /&gt;
그러나 리별을 쓸데업는 눈물의源泉을만들고 마는 것은 스々로 사랑을ᄭᅢ치는 것인줄 아는ᄭᅡ닭에 것잡을수업는 슯음의힘을 옴겨서 새希望의 정수박이에 드러부엇슴니다&amp;lt;br/&amp;gt;&lt;br /&gt;
우리는 맛날ᄯᅢ에 ᄯᅥ날것을염녀하는 것과가티 ᄯᅥ날ᄯᅢ에 다시맛날것을 밋슴니다&amp;lt;br/&amp;gt;&lt;br /&gt;
아々 님은갓지마는 나는 님을보내지 아니하얏슴니다&amp;lt;br/&amp;gt;&lt;br /&gt;
제곡조를못이기는 사랑의노래는 님의沈默을 휩싸고돔니다&amp;lt;br/&amp;gt;&lt;br /&gt;
&lt;br /&gt;
=== 현대어역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 center&amp;quot;&amp;gt;'''님의 침묵'''&amp;lt;/div&amp;gt;&lt;br /&gt;
----&lt;br /&gt;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amp;lt;br/&amp;gt;&lt;br /&gt;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amp;lt;br/&amp;gt;&lt;br /&gt;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amp;lt;br/&amp;gt;&lt;br /&gt;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amp;lt;br/&amp;gt;&lt;br /&gt;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amp;lt;br/&amp;gt;&lt;br /&gt;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amp;lt;br/&amp;gt;&lt;br /&gt;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amp;lt;br/&amp;gt;&lt;br /&gt;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amp;lt;br/&amp;gt;&lt;br /&gt;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amp;lt;br/&amp;gt;&lt;br /&gt;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amp;lt;br/&amp;gt;&lt;br /&gt;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amp;lt;br/&amp;gt;&lt;br /&gt;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amp;lt;br/&amp;gt;&lt;br /&gt;
&lt;br /&gt;
== 의의와 평가 ==&lt;br /&gt;
전통적인 정신과 방법을 현대적인 것으로 확대, 심화시킴으로써 현대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 것은 중요한 일이다. 『님의 침묵』이 성취한 사랑 · 자유 · 평등 · 평화의 깊이 있는 사상성과 방법론적인 예술성의 조화야말로 이 땅 현대시의 바람직한 지평이다.&lt;br /&gt;
&lt;br /&gt;
== 사진 ==&lt;br /&gt;
[[파일:님의침묵본문.jpg|center|200픽셀]]&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님의 침묵 본문&amp;lt;/div&amp;gt;&lt;br /&gt;
&lt;br /&gt;
[[파일:님의침묵초판본.jpg|center|200픽셀]]&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님의 침묵 초판본&amp;lt;/div&amp;gt;&lt;br /&gt;
&lt;br /&gt;
&lt;br /&gt;
== 참고문헌 ==&lt;br /&gt;
* [https://ko.wikipedia.org/wiki/%EB%8B%98%EC%9D%98_%EC%B9%A8%EB%AC%B5_(%EC%8B%9C%EC%A7%91) 위키백과_님의 침묵(시)]&lt;br /&gt;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3398 님의 침묵(님의 침묵(沈黙))-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 『님의 침묵연구』(윤재근, 민족문화사, 1985)&lt;br /&gt;
* 『한용운문학연구』(김재홍, 일지사, 1982)&lt;br /&gt;
* 『궁핍한 시대의 시인』(김우창, 민음사, 1977)&lt;br /&gt;
* 『님의 침묵 전편해설』(송욱, 과학사, 1974)&lt;br /&gt;
* 『한용운전집』(신구문화사, 1973)&lt;br /&gt;
* 『한용운연구』(박노준·인권환, 통문관, 1960)&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분류:감자]]&lt;/div&gt;</summary>
		<author><name>Nsgjjsjsjy02</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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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님의 침묵</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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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Nsgjjsjsjy02: /* 구성 및 형식 */&lt;/p&gt;
&lt;hr /&gt;
&lt;div&gt;{|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 width:100%&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8%&amp;quot;|사진&lt;br /&gt;
|[[파일:님의침묵.jpg|center|200픽셀]]&lt;br /&gt;
|+ 시집 &amp;lt;님의 沈黙&amp;gt;&lt;br /&gt;
|한글||님의 침묵&lt;br /&gt;
|-&lt;br /&gt;
|한자||님의 沈黙&lt;br /&gt;
|-&lt;br /&gt;
|판본||활자본&lt;br /&gt;
|-&lt;br /&gt;
|시대||일제강점기&lt;br /&gt;
|-&lt;br /&gt;
|간행연도||1926년&lt;br /&gt;
|-&lt;br /&gt;
|간행처||경성 회동서관&lt;br /&gt;
|}&lt;br /&gt;
&lt;br /&gt;
'''만해 [[한용운]]이 1926년에 출간한 시집이다.'''&lt;br /&gt;
&lt;br /&gt;
== 구성 및 형식 ==&lt;br /&gt;
1925년 내설악 백담사에서 쓰여져서 1926년 회동서관에서 간행하였고, 1934년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재판하였다. 광복 후 1950년에 다시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재간되었다.&lt;br /&gt;
&lt;br /&gt;
시집 『님의 침묵』의 구성은 앞에 ‘군말’과 뒤에 ‘독자에게’가 붙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군말’에는 창작 동기가 제시되어 있다.&lt;br /&gt;
&lt;br /&gt;
본문은 「님의 침묵」을 비롯하여,「알 수 없어요」·「자유정조」등 모두 88편의 시가 기승전결의 극적 구성을 취한 연작시 형태로 배열되어 있다. 이것은 첫 시 「님의 침묵」이 기(이별의 제시), 승(이별 후의 고통과 슬픔), 전(슬픔의 희망으로의 전이), 결(만남의 성취)이라는 전개 과정을 지닌 것과 대응된다.&lt;br /&gt;
&lt;br /&gt;
즉, 시집 『님의 침묵』은 88편의 시가 대체로 기(이별의 시편), 승(슬픔과 고통의 시편), 전(희망으로의 전환시편), 결(만남을 향한 시편)이라는 연작시와 같은 구성방식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첫 시 「님의 침묵」에서의 첫 구절은 “님은 갓슴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갓슴니다.”라는 이별의 시로 시작되어, 끝 시 「사랑의 끗판」에서의 마지막 행이 “녜 녜 가요 이제 곳 가요.”라는 만남의 시로 귀결되는 특징을 지닌다.&lt;br /&gt;
&lt;br /&gt;
시의 본문 뒤에 붙어 있는 ‘독자에게’는 탈고 소감을 적어놓은 일종의 후기인데, 시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점 또한 특이하다.&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창작 동기는 민족항일기인 1920년대의 혹심한 언론 탄압 내지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에 문학적으로 저항하기 위해서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시라는 비유 내지 상징양식을 통해서 보다 높은 정신적 차원에서 문학적 저항을 시도한 것이라 하겠다. 이 점은 “해저믄 벌판에서 도러가는 길을 일코 헤매는 어린양이 긔루어서 이 시를 쓴다.”라는 ‘군말’에 극명(克明)히 제시되어 있다.&lt;br /&gt;
&lt;br /&gt;
“님만 님이 아니라 긔룬 것은 다 님이다.”라는 구절에서 이미 알 수 있듯이 연인만이 임은 아닌 것이다. 그것은 연인일 수도 있지만 ‘길을 잃은 어린양’, 즉 당대 식민지하에서 방황하는 민족의 모습일 수도 있으며, 또한 빼앗긴 조국의 모습이기도 하고, 아울러 실현되지 않고 있는 이념이거나 진리일 수도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님’은 연인이라는 개인적 의미일 수도 있고, 조국 · 민족 등의 규범적 의미일 수도 있으며, 정의 · 진리 등의 이념적 · 지향적 의미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이 시집의 형상적 우수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전체적인 내용은 이별이나 사랑의 고통 그 자체를 노래한 것은 아니다.&lt;br /&gt;
&lt;br /&gt;
오히려 이별과 그 고통 속에서 참다운 삶의 의미를 깨닫고, 마침내 임과 사랑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함으로써 크고 빛나는 만남을 성취한 생성과 극복의 시로서의 성격을 지니는 것이다. ‘님의 침묵’이라는 표제에서 침묵의 의미는 단순한 명상의 침묵이 아니라 생생한 삶의 몸부림과 깨달음이 용솟음치는 생성의 적극적 침묵인 것이다.&lt;br /&gt;
&lt;br /&gt;
표면적으로는 남녀간의 아기자기한 사랑의 애환을 노래하면서, 그 심층에 당대의 빼앗긴 현실과 민족을 되찾으려는 끈질긴 극복의지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예술성과 사상성의 조화를 성공적으로 성취하고 있다. 임을 상실한 아픔과 비극적 현실의 쓰라림을 기다림과 희망의 철학, 사랑과 평화의 사상으로 극복하고 있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방법론적인 면에서의 특징은 은유와 역설을 탁월하게 구사함으로써 현대시적인 면모를 확보한 데서 드러난다. 시단의 형성 단계인 1920년대 중반에 독창적인 은유와 역설을 시의 중심 방법으로 삼아 적극 계발함으로써 우리 현대시의 한 기점이 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였다.&lt;br /&gt;
&lt;br /&gt;
또한, 시어에서 충청도 방언을 활용하고 개인 시어를 구사한 것도 민중적 정감을 드러내는 데 효과적이며, 특히 독창적인 시 형태를 개척한 것은 주목할만한 일이다. 지금까지 한용운의 시는 산문시라고 막연히 불려져왔다. 그러나 그의 시는 행과 연의 구성이 독자적인 법칙과 체계를 지닌다는 점에서 산문시가 아닌 자유시의 전형에 해당하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아울러 이미지면에 있어서도 식물적 이미지, 광물적 이미지, 천체적 이미지 등을 섬세하게 조형하여 시적인 심미감을 고양시켜주는 특징을 지닌다. 시사적인 면에서도 소중한 의미를 지닌다. 이는 시정신과 방법 · 문체 · 구조 등에서 전통시와 깊이 접맥되어 있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향가 · 고려가요 · 시조 · 가사는 물론, 한시 · 불경에 흐르는 정신사적 형질과 시적 방법이 『님의 침묵』에 계승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육당시(六堂詩) · 소월시(素月詩) 등 당대의 시와도 폭넓은 상관관계가 인정되며, 이육사(李陸史) · 조지훈(趙芝薰) · 서정주(徐廷柱) 등 후대의 시와도 영향 관계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 수록 작품 ==&lt;br /&gt;
* 군말&lt;br /&gt;
* 님의 침묵&lt;br /&gt;
* 이별은 미의 창조 &lt;br /&gt;
* 알 수 없어요&lt;br /&gt;
* 나는 잊고자&lt;br /&gt;
* 가지 마서요&lt;br /&gt;
* 고적한 밤&lt;br /&gt;
* 나의 길&lt;br /&gt;
* 꿈 깨고서&lt;br /&gt;
* 예술가&lt;br /&gt;
* 이별&lt;br /&gt;
* 길이 막혀&lt;br /&gt;
* 자유정조&lt;br /&gt;
* 하나가 되어 주서요&lt;br /&gt;
* 나룻배와 행인&lt;br /&gt;
* 차라리&lt;br /&gt;
* 당신이 아니더면&lt;br /&gt;
* 나의 노래&lt;br /&gt;
* 잠 없는 꿈&lt;br /&gt;
* 생명&lt;br /&gt;
* 사랑의 측량&lt;br /&gt;
* 진주&lt;br /&gt;
* 슬픔의 삼매&lt;br /&gt;
* 의심하지 마서요&lt;br /&gt;
* 당신은&lt;br /&gt;
* 행복&lt;br /&gt;
* 착인&lt;br /&gt;
* 밤은 고요하고&lt;br /&gt;
* 비밀&lt;br /&gt;
* 사랑의 존재&lt;br /&gt;
* 꿈과 근심&lt;br /&gt;
* 포도주&lt;br /&gt;
* 비방&lt;br /&gt;
* 님의 손길&lt;br /&gt;
* 해당화&lt;br /&gt;
* 비&lt;br /&gt;
* 복종&lt;br /&gt;
* 참아 주서요&lt;br /&gt;
* 어느 것이 참이냐&lt;br /&gt;
* 정천한해&lt;br /&gt;
* 첫 ‘키스’&lt;br /&gt;
* 선사의 설법&lt;br /&gt;
* 그를 보내며&lt;br /&gt;
* 금강산&lt;br /&gt;
* 님의 얼굴&lt;br /&gt;
* 심은 버들&lt;br /&gt;
* 낙원은 가시덤불에서&lt;br /&gt;
* 참말인가요&lt;br /&gt;
* 꽃이 먼저 알아&lt;br /&gt;
* 찬송&lt;br /&gt;
* 논개의 애인이 되어서 그의 묘에&lt;br /&gt;
* 후회&lt;br /&gt;
* 사랑하는 까닭&lt;br /&gt;
* 당신의 편지&lt;br /&gt;
* 거짓 이별&lt;br /&gt;
* 꿈이라면&lt;br /&gt;
* 달을 보며&lt;br /&gt;
* 인과율&lt;br /&gt;
* 반비례&lt;br /&gt;
* 잠꼬대&lt;br /&gt;
* 계월향에게&lt;br /&gt;
* 만족&lt;br /&gt;
* 눈물&lt;br /&gt;
* 어디라도&lt;br /&gt;
* 떠날 때의 님의 얼굴&lt;br /&gt;
* 최초의 님&lt;br /&gt;
* 두견새&lt;br /&gt;
* 나의 꿈&lt;br /&gt;
* 우는 때&lt;br /&gt;
* 버리지 아니하면&lt;br /&gt;
* 타고르의 시(GARDENISTO)를 읽고&lt;br /&gt;
* 수의 비밀&lt;br /&gt;
* 당신은&lt;br /&gt;
* 사랑의 불&lt;br /&gt;
* ‘사랑’을 사랑하여요&lt;br /&gt;
* 당신 가신 때&lt;br /&gt;
* 여름밤이 길어요&lt;br /&gt;
* 요술&lt;br /&gt;
* 당신의 마음&lt;br /&gt;
* 명상&lt;br /&gt;
* 생의 예술&lt;br /&gt;
* 칠석&lt;br /&gt;
* 꽃싸움&lt;br /&gt;
* 거문고 탈 때&lt;br /&gt;
* 오서요&lt;br /&gt;
* 쾌락&lt;br /&gt;
* 고시&lt;br /&gt;
* 사랑의 끝판&lt;br /&gt;
* 독자에게&lt;br /&gt;
&lt;br /&gt;
== 님의 침묵(시) ==&lt;br /&gt;
=== 원문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 center&amp;quot;&amp;gt;'''님의 沈默'''&amp;lt;/div&amp;gt;&lt;br /&gt;
----&lt;br /&gt;
님은갓슴니다 아々 사랑하는나의님은 갓슴니다&amp;lt;br/&amp;gt;&lt;br /&gt;
푸른산빗을ᄭᅢ치고 단풍나무숩을향하야난 적은길을 거러서 참어ᄯᅥᆯ치고 갓슴니다&amp;lt;br/&amp;gt;&lt;br /&gt;
黃金의ᄭᅩᆺ가티 굿고빗나든 옛盟誓는 차듸찬ᄯᅴᄭᅳᆯ이되야서 한숨의微風에 나러갓슴니다&amp;lt;br/&amp;gt;&lt;br /&gt;
날카로은 첫「키쓰」의追憶은 나의運命의指針을 돌너너코 뒤ㅅ거름처서 사러젓슴니다&amp;lt;br/&amp;gt;&lt;br /&gt;
나는 향긔로은 님의말소리에 귀먹고 ᄭᅩᆺ다은 님의얼골에 눈머럿슴니다&amp;lt;br/&amp;gt;&lt;br /&gt;
사랑도 사람의일이라 맛날ᄯᅢ에 미리 ᄯᅥ날것을 염녀하고경계하지 아니한것은아니지만 리별은 ᄯᅳᆺ밧긔일이되고 놀난가슴은 새로은슯음에 터짐니다&amp;lt;br/&amp;gt;&lt;br /&gt;
그러나 리별을 쓸데업는 눈물의源泉을만들고 마는 것은 스々로 사랑을ᄭᅢ치는 것인줄 아는ᄭᅡ닭에 것잡을수업는 슯음의힘을 옴겨서 새希望의 정수박이에 드러부엇슴니다&amp;lt;br/&amp;gt;&lt;br /&gt;
우리는 맛날ᄯᅢ에 ᄯᅥ날것을염녀하는 것과가티 ᄯᅥ날ᄯᅢ에 다시맛날것을 밋슴니다&amp;lt;br/&amp;gt;&lt;br /&gt;
아々 님은갓지마는 나는 님을보내지 아니하얏슴니다&amp;lt;br/&amp;gt;&lt;br /&gt;
제곡조를못이기는 사랑의노래는 님의沈默을 휩싸고돔니다&amp;lt;br/&amp;gt;&lt;br /&gt;
&lt;br /&gt;
=== 현대어역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 center&amp;quot;&amp;gt;'''님의 침묵'''&amp;lt;/div&amp;gt;&lt;br /&gt;
----&lt;br /&gt;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amp;lt;br/&amp;gt;&lt;br /&gt;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amp;lt;br/&amp;gt;&lt;br /&gt;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amp;lt;br/&amp;gt;&lt;br /&gt;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amp;lt;br/&amp;gt;&lt;br /&gt;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amp;lt;br/&amp;gt;&lt;br /&gt;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amp;lt;br/&amp;gt;&lt;br /&gt;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amp;lt;br/&amp;gt;&lt;br /&gt;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amp;lt;br/&amp;gt;&lt;br /&gt;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amp;lt;br/&amp;gt;&lt;br /&gt;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amp;lt;br/&amp;gt;&lt;br /&gt;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amp;lt;br/&amp;gt;&lt;br /&gt;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amp;lt;br/&amp;gt;&lt;br /&gt;
&lt;br /&gt;
== 의의와 평가 ==&lt;br /&gt;
전통적인 정신과 방법을 현대적인 것으로 확대, 심화시킴으로써 현대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 것은 중요한 일이다. 『님의 침묵』이 성취한 사랑 · 자유 · 평등 · 평화의 깊이 있는 사상성과 방법론적인 예술성의 조화야말로 이 땅 현대시의 바람직한 지평이다.&lt;br /&gt;
&lt;br /&gt;
== 사진 ==&lt;br /&gt;
[[파일:님의침묵본문.jpg|center|200픽셀]]&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님의 침묵 본문&amp;lt;/div&amp;gt;&lt;br /&gt;
&lt;br /&gt;
[[파일:님의침묵초판본.jpg|center|200픽셀]]&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님의 침묵 초판본&amp;lt;/div&amp;gt;&lt;br /&gt;
&lt;br /&gt;
&lt;br /&gt;
== 참고문헌 ==&lt;br /&gt;
* [https://ko.wikipedia.org/wiki/%EB%8B%98%EC%9D%98_%EC%B9%A8%EB%AC%B5_(%EC%8B%9C%EC%A7%91) 위키백과_님의 침묵(시)]&lt;br /&gt;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3398 님의 침묵(님의 침묵(沈黙))-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 『님의 침묵연구』(윤재근, 민족문화사, 1985)&lt;br /&gt;
* 『한용운문학연구』(김재홍, 일지사, 1982)&lt;br /&gt;
* 『궁핍한 시대의 시인』(김우창, 민음사, 1977)&lt;br /&gt;
* 『님의 침묵 전편해설』(송욱, 과학사, 1974)&lt;br /&gt;
* 『한용운전집』(신구문화사, 1973)&lt;br /&gt;
* 『한용운연구』(박노준·인권환, 통문관, 1960)&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분류:감자]]&lt;/div&gt;</summary>
		<author><name>Nsgjjsjsjy02</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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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분류:감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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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06-16T02:13:49Z</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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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lt;/div&gt;</summary>
		<author><name>Nsgjjsjsjy02</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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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B6%84%EB%A5%98:%EB%AF%BC%EC%A7%80&amp;diff=59165</id>
		<title>분류:민지</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B6%84%EB%A5%98:%EB%AF%BC%EC%A7%80&amp;diff=59165"/>
		<updated>2025-06-16T02:13:2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Nsgjjsjsjy02: 문서를 비움&lt;/p&gt;
&lt;hr /&gt;
&lt;div&gt;&lt;/div&gt;</summary>
		<author><name>Nsgjjsjsjy02</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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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분류:민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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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분류:해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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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분류:해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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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방응모</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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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width:100%&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0%&amp;quot;|사진&lt;br /&gt;
|[[파일:방응모.jpg|center|200픽셀]]&lt;br /&gt;
|+ '''방응모'''&lt;br /&gt;
|+ style=&amp;quot;caption-side:bottom;text-align:left:&amp;quot;|출처: 위키백과&lt;br /&gt;
|출생||1883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조선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또는 정부면 성내동&lt;br /&gt;
|-&lt;br /&gt;
|사망||1950년경으로 추정&lt;br /&gt;
|-&lt;br /&gt;
|사인||불명&lt;br /&gt;
|-&lt;br /&gt;
|거주지||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amp;gt; 경성부 -&amp;gt; 경기도 양주군 의정부읍&lt;br /&gt;
|-&lt;br /&gt;
|국적||대한민국&lt;br /&gt;
|-&lt;br /&gt;
|본관||온양&lt;br /&gt;
|-&lt;br /&gt;
|별칭||호: 계초(啓礎), 춘해(春海)&lt;br /&gt;
|-&lt;br /&gt;
|직업||교사, 변호사, 상인, 언론인, 기업인, 사회운동가, 정치가&lt;br /&gt;
|-&lt;br /&gt;
|배우자||승계도, 이인숙, 배영옥, 노효용&lt;br /&gt;
|-&lt;br /&gt;
|자녀||방재숙(딸), 방재욱·방재선·방재효·방재규(아들), 방재윤(양자)&lt;br /&gt;
|-&lt;br /&gt;
|부모||방계준(부), 온양박씨(모)&lt;br /&gt;
|}&lt;br /&gt;
&lt;br /&gt;
'''방응모'''(方應謨, 평안북도 정주군, 1883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 1950년 8월(추정)는 [[일제강점기]]의 교육자, 언론인, 법조인, 기업인이자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언론인이며 정치인이다. 호는 '''춘해'''(春海)이고, 뒤에 '''계초'''(啓礎)로 고쳤다.&lt;br /&gt;
&lt;br /&gt;
1922년 동아일보 정주 지국을 인수해 지국장을 지내다가 1924년 금광업에 뛰어들어 큰 부를 얻게 되었다. 1932년 6월 조선일보에 입사하였고 이후 영업국장이 되어 조선일보의 판매망을 장악하게 되고 경영권을 인수하면서 1933년 3월 조선일보 부사장이 되었다. 1933년 7월부터 1950년 7월까지 종신으로 [[조선일보]]의 사장을 역임하였다. 1935년 창간한 월간잡지 '조광(朝光)'은 친일 논란이 있다.&amp;lt;ref&amp;gt;안은필. [http://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9211 조선일보가 가장 빛나던 시기, ‘안재홍 시대’]&amp;lt;/ref&amp;gt;&amp;lt;ref name=&amp;quot;안은&amp;quot;&amp;gt;안은필. [http://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9279 방응모 친일증거, “모래밭에서 모래 찾기”]국민TV. 기사입력 2015년 4월 23일. 기사수정 2015년 4월 24일.&amp;lt;/ref&amp;gt;&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2/0002006080?sid=102 한홍구 &amp;quot;박정희는 공포와 욕망의 정치를 했다&amp;quot;]. 프레시안. 2015년 4월 13일.&amp;lt;/ref&amp;gt;&amp;lt;ref&amp;gt;이민영.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1/0002255321?sid=102 고법 “방응모 前조선일보 사장 친일행적 대부분 인정”]. 서울신문. 2012년 1월 13일.&amp;lt;/ref&amp;gt;&amp;lt;ref&amp;gt;노현웅.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8/0002251781?sid=102 조선 방응모·동아 김성수의 ‘친일’…수년째 결론 안 내고 미루는 법원]. 한겨레. 2014년 11월 3일.&amp;lt;/ref&amp;gt;&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6/0000000413?sid=110 김성수ㆍ방응모와 친일언론인 군상]. 미디어오늘. 2002년 3월 12일.&amp;lt;/ref&amp;gt; 언론계에서 활동하면서도 사업가의 길을 함께 걸었고, 교육 장학 활동을 하였으며, 1945년 광복 직후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 고문과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안재홍]]의 추천을 받아 한국독립당 중앙상무위원과 독립촉성국민회 총무부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amp;lt;ref name=&amp;quot;안은&amp;quot;/&amp;gt;&amp;lt;ref&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16/2008031600800.html 계초 방응모와의 우정도 여러 편의 시로 표현해&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해방 정국에서 김구의 재정적 후견인으로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등 삼의사 유골 봉환 사업과 신탁통치 반대 운동 등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대한민국 수립 이후 사회민주주의 정치가인 조소앙과 사회당을 결성해 문교정책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lt;br /&gt;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 납북 후 행적은 &amp;quot;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amp;quot;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lt;br /&gt;
&lt;br /&gt;
== 생애 ==&lt;br /&gt;
=== 생애 초기 ===&lt;br /&gt;
==== 출생과 성장 ====&lt;br /&gt;
방응모는 1883년 11월 3일 또는 9월 29일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바우머리 부락 또는 정주군 정부면 성내동 425번지에서 '''방계준(方桂準)'''과 온양 박씨(溫陽朴氏)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그는 어려서 집중력이 남달리 뛰어난 반면 고집이 셌다는 평이 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페이지&amp;lt;/ref&amp;gt; 그의 '''삼촌 방계묵(方啓默)'''은 그의 고집있는 기질을 두고 저놈은 쇠작두 말고 나무 작두로 잘라 죽여야 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3~54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친척들의 야멸찬 말들이 그에게 상처를 주거나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4페이지&amp;lt;/ref&amp;gt; 또한 그의 유년시절을 본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가 태어날 당시 태몽도 없었고, 신동이라는 말도 별다르게 듣지 않았다고 한다. 어려서 빈곤한 가정환경으로 방응모는 정규 학교에는 입학하지 못하고, 16세 때까지 서당에 드나들며 한학을 익혔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던 중 그가 어느정도 실력이 우수하다고 인정되자, 스승인 승창률은 잠시 방응모에게 어린아이들을 돌보게 한 후 자리를 피하곤 했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1페이지&amp;lt;/ref&amp;gt; 그는 홀로 사서육경을 탐독, 독파하였다. 21세 무렵 잠시 서당 훈장을 지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896년 독립협회의 활동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5페이지&amp;lt;/ref&amp;gt; 형 방응곤이 예배당에 다니게 되자&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2페이지&amp;lt;/ref&amp;gt;, 그를 통해 신문물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다. 그 뒤 우연히 경성부에 갔다가 신문물을 보고 충격을 받아 17세에 독학으로 신학문과 일본어, 중국어, 수학 등을 독파하였다. 유년시절 서당의 성리학 스승이던 승창률의 친척인 승시영(承時榮)과 조씨(趙氏)의 딸 승계도와 결혼했다.&lt;br /&gt;
&lt;br /&gt;
결혼한 다음 해에도 그는 공부를 한다며 책만 사다 읽곤 했고&amp;lt;ref name=&amp;quot;fsfs60&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60페이지&amp;lt;/ref&amp;gt;, 부인 승계도는 생계를 위해 몸소 나섰다.&amp;lt;ref name=&amp;quot;fsfs60&amp;quot;/&amp;gt; 부인 승계도는 친척 가운데 콩을 싸게 넘겨주는 이들이 있어 그 콩으로 두부를 만들거나 콩나물을 키워 장사를 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61페이지&amp;lt;/ref&amp;gt; 그의 아내 승계도는 남편에 대한 믿음이 절대적이었고 탓을 하거나 가출하지 않았다. 이후 그는 서당 훈장으로 초빙되었으나, 그가 가는 마을의 기존 훈장, 한학자들은 그를 적대적으로 대했다. 그렇다고 마을 사람들의 일부 지명이 있었으나 자신의 스승의 자리를 침해할 수 없다 하여 그는 자신의 동리의 훈장일은 사양하였다. 그는 마을을 나가 신학문을 하는 친구들과 어울렸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62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계몽 운동 ====&lt;br /&gt;
도산 [[안창호]]와 남강 이승훈이 연사로 돌아다니며 애국 계몽 강연과 문맹들의 교육, 야학 사업을 하였고, 여기에 감동받은 청년들이 서당과 야학을 열고 문맹들과 여성들에게 한글 교육을 하였다. 도산 [[안창호]]의 강연과 남강 이승훈의 강연을 찾아다니며 듣다가 감동받은 방응모 역시 교육, 계몽에 참여하였다.&lt;br /&gt;
&lt;br /&gt;
그는 청년회의 활동에 몰두하였으나, 농번기에 작은 일손이라도 더 필요했던 동리 노인들은 젊은 아이들이 일은 하지 않고 무슨 모임이다 하여 어울려 돌아다니는 꼴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또한 모임 구성원들 역시 &amp;quot;의식 자체가 아직 전근대적이었고, 사고의 분화를 겪지도 않은데다가, 이들의 조직 활동이 기분 좋으면 나오고 기분 나쁘면 빠져 버리는 것이 예사&amp;quot;라 청년 모임들은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청년단체의 실패에 좌절하고 다시 귀향했으며, 이때 그는 춘해(春海)라는 아호를 스스로 지었다. 그의 집안에서는 그가 정착하기를 바라고 정주읍 성내동에 집을 얻어 주었다.&lt;br /&gt;
&lt;br /&gt;
안창호의 계몽 강연에 감동받은 남강 이승훈이 1907년(융희 1년) 8월 김덕용(金德鏞)을 초빙하여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 오산에서 신식 교육을 하는 소학교 과정의 학교 강명의숙을 세우고 산수, 수신, 역사, 지리, 체조를 가르쳤고, 그해 12월에는 중학교 과정인 오산학교를 세우고 학생 7명을 처음 받아들여 개교했다. 1908년에는 오산학교에 학생들이 모여 3개 반으로 편성되었고, 정주군 출신의 춘원 이광수가 오산중학교의 교사로 초빙되어 축구, 야구, 테니스, 배구 등을 지역에 처음 소개하였다. 방응모는 어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학교에 입학해 신학문을 접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0페이지&amp;lt;/ref&amp;gt; 그는 이승훈과 의기투합해 민립 대학을 세우는 운동을 추진했지만 조선총독부 평안북도청 학무국에서 승인을 거부하여, 대학 설립에 실패했다.&lt;br /&gt;
&lt;br /&gt;
=== 언론, 기업 활동 ===&lt;br /&gt;
==== 계몽 활동과 언론 활동 ====&lt;br /&gt;
1915년부터 1924년 방응모는 지역 지식인들, 유학파 청년, 계몽 청년들이 모여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하는데 참여했고, 민립대학기성회 평안북도지부에서 활동하면서 민립대학기성회 중앙회 중앙위원 조만식 등과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언변과 용모가 되었던 그의 여관에도 손님들이 몰렸고, 그가 &amp;quot;2백원도 좋고 5백원도 좋다며 보태달라&amp;lt;ref name=&amp;quot;fsfs87&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7페이지&amp;lt;/ref&amp;gt;&amp;quot;고 하면 기부금을 내는 이들이 있었다. 대신 하룻밤을 의탁하려고 그의 여관을 찾은 이들에게 무료 숙식을 제공하기도 했다.&amp;lt;ref name=&amp;quot;fsfs87&amp;quot;/&amp;gt; 1919년 정주에서 3.1 만세 운동이 벌어지자, 그도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형사들의 눈을 피해 방응모는 만세운동을 하다 재빨리 몸을 피해 화를 면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8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1922년 6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인수하여 분국장에 취임했다. 6월 9일에는 정주군 지역 체육행사로 테니스 대회를 개최하였다. 그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경영하는 동시에 그는 농촌 계몽운동 등에 적극 투신하여 인망을 쌓았다. 처음 몇번은 친구 전우현의 자금을 빌려 부족분을 메우기도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02페이지&amp;lt;/ref&amp;gt; 한다. 1922년 6월 19일&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96페이지&amp;lt;/ref&amp;gt; 동아일보 본사를 설득하여 정주분국을 동아일보사 정주지국으로 승격시켰다. 동아일보사 지부장 재직 시 그는 전우현과 함께 의기투합하여 민립 대학 설립 자금과 농촌진흥회 회원의 여비와 회비를 염출하기 위한 목적 및 당시 교사도 없이 난관에 처했던 오산학교의 재개교를 위한 &amp;quot;오산학교의 부흥 운동을 목표로 한 재단법인 촉성 기금 마련&amp;quot; 등을 계획했다. 총독부의 인허가 거부로 실패한 대학 설립 자금은 고스란히 오산학교의 부활과 복교 자금으로 투입되었다. 1920년 1월에 경성형무소에서 가석방된 조만식은 이승훈을 만났고, 다시 조만식이 오산학교를 맡으면서 학교는 다시 정상 운영되었다.&lt;br /&gt;
&lt;br /&gt;
1923년 동아일보 정주군 분국이 지국으로 승격되자 정주 지국장으로 동아일보 정주지국을 경영하였고, 같은 해 7월 여성들의 사회참여와 평등권 신장을 위한 여자교육회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이후 대규모 수해가 나자, 정주군 수해구제회를 결성하여 봉사활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1923년 4월 조만식·송진우·안재홍·김성수 등의 주도로 민간 자본으로 대학교 설립을 추진하기 위한 조직인 조선민립대학기성회가 결성되자, 방응모는 민립대학 기성회에 참여하여 민립대학기성회 정주군준비회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5월에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정주지방지부가 설립되자 기성회 정주지부 상무위원을 맡았다.&lt;br /&gt;
&lt;br /&gt;
==== 광업 경영과 조선일보 입사 ====&lt;br /&gt;
1924년 봄 오산학교 교감으로 있던 전우현이 방응모와도 안면이 있던 금광 채굴업자 두 명을 데리고 그를 찾아왔다. 그들은 자신들이 봐 둔 산이 있다고 방응모에게 소개했다. 그는 선천군의 지역 유지이자 최창학의 친구이며, 그가 동아일보 지국장으로 알게 된 이봉찬을 찾아갔다. 한학자로 알고 있던 그가 금광 투자를 제의하자 &amp;quot;한문이라면 빼지 않고 알려고 드는 한학 훈도가 어떻게 금광을&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16페이지&amp;lt;/ref&amp;gt;&amp;quot; 하느냐 하였지만, 이봉찬은 그에게 금광, 광산에 대한 지식을 알려주었다. 이봉찬은 그에게 광산 지식을 알려주며 최창학의 소유지 중 폐광을 빌리는 법을 알려주었다. 방응모의 됨됨이에 감복한 듯, 그의 수많은 질문에 적잖은 충고를 자임해주었다.&amp;lt;ref name=&amp;quot;fsfs117&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5페이지&amp;lt;/ref&amp;gt; 이봉찬은 최창학에게 방응모를 소개하는 편지를 수차례에 걸쳐 보내주었다.&amp;lt;ref name=&amp;quot;fsfs117&amp;quot;/&amp;gt; 이봉찬은 방응모의 친구들이 봐 둔 갱도를 임대받도록 도와주었다. 이봉찬은 방응모의 한학 실력과 사람됨을 알아보고 있어, 자금을 쾌히 빌려주었다.&amp;lt;ref name=&amp;quot;fsfs117&amp;quot;/&amp;gt;&lt;br /&gt;
&lt;br /&gt;
이후 광산업에 뛰어들어 1924년 여름 압록강변의 최창학 소유 폐금광인 평안북도 삭주군 외남면 교동 다릿골의의 삭주 교동광업소를 찾아가 10미터 정도 땅을 파고 금맥을 발견했다. 바로 삭주 교동광업소를 인수, 경영을 확대하였다. 이때 만난 동업자의 딸이자 친구 전우현의 조카딸인 '''이인숙(李仁淑)'''을 만났다. 본처 승계도가 두 아들을 잃고 복부 수술이 잘못되어 아이를 얻지 못하게 되자 방응모에게도 수많은 중매가 들어왔다. 자식들을 병으로 잃은 것이 자신의 불찰이라고 본 승계도는 그에게 작은 부인이라도 들이자는 말을 꺼내기도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18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26년 방응모에게 광산 사업을 제안했던 두 친구가 손을 털고 나갔고, 그의 가족은 돈이 없어 쌀 대신 좁쌀로 좁쌀죽을 먹으며 연명해야 했다. 방응모는 정주군에 사는 비슷한 또래의 먼 친척 방상진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고, 방상진과 일꾼 대여섯 명, 그리고 후처 이인숙의 친정 쪽에서 얻어온 토지문서를 얻어 자금을 마련, 삭주 다릿골 광산으로 가서 다시 금광을 채굴했다. 금맥은 쉽게 나오지 않았고, 출몰하는 마적떼에게 소와 기구를 약탈당했다. 동시에 빚쟁이들의 독촉에 시달렸으나 '''''1926년 7월 지하 300m 지점에서 금맥을 확보했다. 이후 연간 300kg의 금을 생산, 그는 굴지의 광산업자로''''' 성장해 금맥을 찾아 벼락부자가 되었다. 그는 방상진을 교동금광 총감독에 맡겼다. 이때 그는 최창학에게 임대료에 이자를 쳐서 보내주었다.&lt;br /&gt;
&lt;br /&gt;
그때까지 첫 부인 승계도가 두부를 팔아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미국산 포드 T형자동차'''''를 타고 금의환향했다. 1928년 방응모는 자신의 아호인 춘해를 딴 춘해 장학회를 만들고 장학생들의 모임인 이심회를 만든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48페이지&amp;lt;/ref&amp;gt; 그 해에 방응모는 교동지역에 파출소 지소를 유치하였고, 마적단에 시달리던 주민들은 그의 송덕비를 세우기도 했다. '''''1928년에 그는 의정부 직동, 흥선대원군의 별장이 있던 곳 바로 뒤에 위치한 건물을 매입'''''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한용운]], 홍명희를 자주 초대했다.&lt;br /&gt;
&lt;br /&gt;
'''''1932년 방응모는 교동광산을 135만원이란 거액에 일본 중외광업주식회사에 매각'''''했다. 그 뒤 1932년 6월부터 조선일보 영업국장으로 활동하다 '''1933년 3월 [[조선일보]]의 경영권을 인수'''하여 부사장에 취임하였다.&lt;br /&gt;
&lt;br /&gt;
그는 교동광업소를 운영하며 모은 재력을 바탕으로 부사장 재직 중 [[조선일보]]의 대주주가 되었으며, 1933년 7월 8대 사주 조만식으로부터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제9대 [[조선일보]] 사주로 취임, 활동했다.&amp;lt;ref&amp;gt;조선일보는 1932년 7월에 조만식을 사장으로 영입했지만, 조만식은 거의 평생을 평양에서 살아왔던데다 서울에서 활동하기에는 적응을 잘하지 못했다. 조만식은 신문사 경영난과 지역감정의 혹독한 시련을 받은 채 9개월만에 퇴사했다. 그리고 조만식 후임으로 1933년, 방응모를 사장으로 추대하기에 이르렀다.&amp;lt;/ref&amp;gt;&amp;lt;ref&amp;gt;《한국사 시민강좌 제47집, 대표적 독립운동가 12인》,일조각. p145&amp;lt;/ref&amp;gt; 방응모 취임 이후의 초대 부사장은 이광수, 주필은 서춘이었다.&lt;br /&gt;
&lt;br /&gt;
=== 언론, 사업 활동 ===&lt;br /&gt;
==== 사회사업과 조선일보 인수 계획 ====&lt;br /&gt;
금광 사업에 성공한 그는 영림, 조림 사업에도 투자하였다. 방응모는 배우자 승계도에게서 더 이상 아들을 얻지 못하자 첩 이인숙을 통해 아들을 얻으려고 하였다. 이인숙은 아들을 낳았으나 이 아들은 곧 사망하였다. 아들을 잃은 이인숙은 승계도의 도움을 받다가, 그해 6월 방응모가 있는 광산으로 가 생활하였다'''. 승계도와 이인숙을 통해 자녀를 얻지못하자 42세가 되던 해인 1924년 친형인 방응곤의 둘째 아들 방재윤을 양자로 입양시켰다.'''&lt;br /&gt;
&lt;br /&gt;
[[파일:방응모장학생.jpg|섬네일|160px|오른쪽|방응모와 그의 장학금을 받던 학생들. 가운데 앉은 이가 방응모이고, 서있는 이들 중 왼쪽에서 두 번째는 방응모의 양자 방재윤.]]&lt;br /&gt;
&lt;br /&gt;
1930년 배영옥과 결혼하여 딸 방재숙을 얻었다. 1932년 광산업을 정리하였고 언론사업을 비롯하여 육영사업과 조림 및 간척사업 등을 벌였다. 또한 고아원과 사회복지단체에 후원금을 지원하면서 인망을 얻기도 했다. 삭주 지역에서는 그의 송덕비가 세워지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932년 그는 수원군 팔탄면 노하리 일대의 갯벌에 일본인이 수차례 뚝을 쌓다가 실패했다는 정보를 얻고 임삼진을 통해 조선총독부에 허가를 요청하였다. 간척 사업은 이후 1935년부터 시작되었지만 1932년부터 은밀히 착수되어 왔다.&lt;br /&gt;
&lt;br /&gt;
1933년 무렵 방응모가 [[조선일보]] 인수에 나서기 전부터 그는 [[한용운]]을 위한 일이라면 돈을 아끼지 않고 지출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성북동 222번지 언덕에 만해를 위해 기와집 한 채를 지어주었는데 심우장(尋牛莊)이 그것이다. 또한 만해가 일제의 배급을 거부해 생활이 어렵게 되자 만해에게 생활비를 지급했던 방응모는 만해가 병석에 누운 1944년에는 치료비를 지원해주기도 했다.&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6/0000043262?sid=103 만해가 일송 선생 5일장 치른 사연]&amp;lt;/ref&amp;gt; 그 외에도 방응모는 만해 한용운·벽초 홍명희 등과 함께 새해가 되면 백천온천에도 같이 다녀올 정도로 두터운 친분을 맺었다.&lt;br /&gt;
&lt;br /&gt;
방응모의 광산 매각을 일본 정부 측에 알리고 다리를 놓은 것은 고일청(高一淸)이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84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32년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사건으로 체포된 [[안창호]]의 사면 탄원과 보석을 위해 노력하였다. 안창호가 윤봉길을 사주했다는 증거가 없으며 그가 테러행위를 지시했다는 증거 자료나 문건이 없다는 것이 방응모의 안창호 탄원 이유였다. 그러나 총독부 경무국장은 그의 안창호 석방 제안을 정중히 거절한다. 1936년 동방문화학원(뒤에 숭문중학교·고등학교 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1939년 9월에는〈조선일보〉의 조간 1회, 석간 2회의 1일 3회 발행을 시작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인수와 경영 ====&lt;br /&gt;
1933년 1월 16일 그는 정식으로 주식회사 [[조선일보]]사를 창립, 1월 18일에 발표된 창립 취지서에는 창립위원장 방응모, 창립발기인 방응모, 조만식, 고일청 외 등이 참여했다. 일단 그는 조만식을 사장으로 임명하고 자신은 부사장으로 있다가, 그해 3월 13일 다시 부사장에 취임했다. 4월 25일 편집인 겸 발행인이 되고, 4월 29일에는 조선일보의 조간, 석간제 발행을 부활, 확정시켰다. 1933년 7월 10일 총독부로부터 조선일보사의 법인 등록 승인을 얻어냈다. 7월 10일 조만식의 사퇴로, [[조선일보]]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다. 1933년 그는 자신의 아호를 춘해에서 계초로 바꾸었다. 그는 유능한 문인, 필진의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 상금 1천 원을 걸고 작가를 영입하였다.&lt;br /&gt;
&lt;br /&gt;
1934년 3월 25일 이광수를 비롯하여 서춘, 김동진, 함상훈, 신태익 등을 [[조선일보]]로 영입해 왔다. 그 외에도 정주군 출신 언론인, 작가들이 조선일보로 많이 오게 되었다. 이후 동아일보와 갈등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이광수가 조선일보로 옮겨와 부사장직에서 9개월 근무했다. 당시 조선일보 내부에서는 문모 라는 이가 이광수의 등장으로 자신의 입지 약화를 우려해 오랫동안 이광수를 내보내려 흉계를 꾸몄다고 한다. 이광수는 1934년 5월 25일자로 돌연 사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65페이지&amp;lt;/ref&amp;gt; 문모는 그에게 오히려 잘 됐다는 식으로 말하다가 방응모에게 호되게 혼이 났다. 그리고 문모로 하여금 즉시 금강산에 들어가 이광수를 다시 데려오게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65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이광수는 아들 봉근(당시 8살)의 사망 등으로 실의에 빠졌고, 1935년에 가서야 이광수를 조선일보 고문이자 필진으로 재영입하게 됐다.&lt;br /&gt;
&lt;br /&gt;
==== 동방문화학원 재단 설립 ====&lt;br /&gt;
방응모는 1936년 방농장의 소유권을 기본 자산으로 하는 재단법인 동방문화학원(東邦文化學院)을 설립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6페이지&amp;lt;/ref&amp;gt; 동방문화학원은 학교 법인으로 인가된 재단 법인으로, 그뒤 고계학원과 인연을 가지고 1936년부터는 보성고등보통학교를 후견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 분리되었다. 그뒤 방응모 장학생인 서중회 회원들을 위한 방응모 장학사업을 주관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7페이지&amp;lt;/ref&amp;gt;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태평로 구 조선일보 사옥 안에 동방문화학원의 간판을 달고 조광 잡지를 계속 발행하는 조광사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7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일제 강점기 후반 ===&lt;br /&gt;
==== 중일 전쟁 전후 ====&lt;br /&gt;
중일전쟁 개전 직후인 1937년 7월 11일에 열린 [[조선일보]] 간부회의에서 주필 서춘이 '일본군, 중국군, 장개석씨'등으로 쓰던 용어를 '아군, 황군, 지나, 장개석'으로 고치고 일본 국민의 입장에서 논설을 쓸 것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편집국장 김형원과 영업국장 김광수가 적극 반대를 하기도 했으나, 방응모는 '일장기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이미 몇 십만 원의 손해를 보았을 뿐 아니라 [[3.1 운동]] 때처럼 신문이 민중을 지도할 수 없다'면서 서춘의 입장을 지지했다. 한편으로 방응모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된 [[안창호]]를 [[조선일보]]에 영입하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안창호는 옥중에서 얻은 간질환과 폐질환 등으로 고생했고, 진료비 등을 수시로 지원하고 문병했음에도 출옥후 얼마 뒤에 사망한다.&lt;br /&gt;
&lt;br /&gt;
1933년 이심회(以心會：후에 序中會, 방응모장학회 등으로 명칭이 바뀜)라는 장학회를 만들어 국내 대학생과 해외유학생들에게 학자금을 지급하기도 했으며, 재단법인 동방문화학원(東方文化學院：지금의 숭문중·고등학교 전신)의 이사장직을 맡기도 했다. 또한 자신의 막대한 재원을 들여 1936년부터 함경남도 영흥군 일대에 당시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대단위 조림사업을 벌였으며, 그 전 해인 1935년부터는 경기도 수원군 팔탄면 일대에서 만 2년간에 걸친 간척사업을 벌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937년 12월 24일 [[안창호]]는 병보석 판정을 받고 재판소가 지정한 현 서울대학교병원인 경성제국대학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안창호의 입원 중에 시중을 든 사람으로는 안창호의 외조카 김순원과 청년 박정호 두 사람이었고, 나중에는 이응준 장군의 부인 이정희가 끝까지 지성껏 간호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7페이지&amp;lt;/ref&amp;gt; [[안창호]]는 병상에서 병원비 문제로도 고초를 겪었다. 이 때문에 조만식은 일본 경찰로부터 안창호의 병원비를 대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음에도, &amp;quot;내가 먹고 살면서 그 선생을 돌보지 않을 수 없다&amp;quot;며 완강히 거절하고 안창호를 도왔다고 한다. 안창호의 간호를 같이 도와주던 이응준 장군 부인 이정희는 10일마다 계산되어 나오는 병원 입원비로 안창호 선생이 괴로워하는 표정을 지켜볼수 없었다고 진술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8페이지&amp;lt;/ref&amp;gt; 방응모는 5백원의 수표 한 장을 안창호에게 전달하였다. 50일간의 입원비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9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안창호]]는 1938년 3월 10일 밤 12시 경성제국대학 병원에서 운명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폐간 사건 ====&lt;br /&gt;
일본의 전쟁이 격화되면서 조선총독부 공보국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1940년에 강제로 폐간조치 했다. 광산을 팔아서 자신의 모든 것을 조선일보에 바쳤던 방응모는 큰 절망과 좌절을 느껴야 했다. [[한용운]]은 ‘신문이 폐간되다/ 붓이 꺾이어 모든 일이 끝나니…’로 시작하는 시를 지어 방응모를 위로했다. &amp;lt;ref&amp;gt;붓이 꺾이어 모든 일 끝나니 이제는 재갈 물린 사람들 뿔뿔이 흩어지고 아, 쓸쓸하고 쓸쓸한지고 망국 서울의 가을날 한강의 물도 흐느끼느니 울음 삼켜 흐느끼며 연지를 외면한 채 바다 향해 흐르느니&amp;lt;/ref&amp;gt; 동아일보에는 김성수 외에도 장덕수와 송진우가 있었지만 그에게는 조선일보 폐간을 막기 위해 총독부와 교섭할 인물도 없었다.&lt;br /&gt;
&lt;br /&gt;
1938년 2월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선 내 일간신문 25개사로 조직된 조선춘추회의 창립에 창립발기인으로 참가했고, 조선춘추회 간사로 활동했다. 같은 해 7월 “국민정신을 총동원하고 내선일체 전 능력을 발휘하여 국책 수행에 협력하여 성전(聖戰)의 궁극적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조직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에 참여했고, 그날 결성된 경성연맹 창립총회에서 상담역을 맡았다. 9월부터 조선방공협회 경기도연합지부 평의원을 지냈다. 10월에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주최한 비상시 국민생활 개선을 위한 제1회 생활개선위원회에서 제2부(의례와 사회풍조 쇄신부)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그러나 1938년 10월부터 조선총독부는 조선일보의 신문용지를 검열, 통제하기 시작했다.&lt;br /&gt;
&lt;br /&gt;
1940년 5월 조선총독부 총독 미나미 지로가 방송담화로 창씨개명을 권고했다. 그러나 그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성씨를 이제 와서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며 창씨개명은 완강하게 거절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조선일보에 트집이 잡힐 일이 나타나지 않자 총독부는 전국 면사무소에 조선일보 신문 구독을 거절하도록 명령을 내렸고, 동시에 조선말을 쓰는 민원인에게는 일을 처리해주지 말도록 하게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3페이지&amp;lt;/ref&amp;gt; 조선총독부는 송진우의 예금통장을 문제삼았다. 송진우 명의의 은행저금이 동아일보의 8백여 개의 지국과 분국을 통해 모금된 독립운동 자금이라며, 그리고 동아일보 간부들이 백운장이라는 요정에서 회식을 한 것을 김성수 집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려 했다는 등의 이유로 백관수 동아일보 사장을 전격 구속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3~374페이지&amp;lt;/ref&amp;gt; 동아일보는 백관수가 구속된지 10일 만에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동아일보 중역회의를 열고 폐간신청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4페이지&amp;lt;/ref&amp;gt; 총독부는 조선일보에도 자진 폐간을 권고했고, 1940년 8월 9일 편집회의를 주관, 8월 10일 조선일보의 폐간계를 내고, 8월 10일자로 폐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5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잡지 발행 활동 ====&lt;br /&gt;
신문 강제 폐간 뒤 방응모는 간판을 조광사로 바꿔 걸고, 사옥은 동방흥업주식회사로 등기를 변경해서 유지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1페이지&amp;lt;/ref&amp;gt; 이후 그는 조광 잡지 발행에 전념했다. 1943년 8월 경 일본 중앙대학의 예과를 마친 방일영이 입사&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1페이지&amp;lt;/ref&amp;gt;, 필진으로 참여했다. [[조선일보]]가 폐간된 후에도 방응모는 벽초 홍명희 부자에게 지속적으로 생활비를 대주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4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4년 6월 29일 만해 [[한용운]]이 사망했다. 그는 심우장을 찾아가 3백원을 내놓았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5페이지&amp;lt;/ref&amp;gt;당시 쌀 10가마가 100원이었지만, 심우장은 당장 현금 1원이 없었는데 거액이라서 놀랐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6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광복 이후 언론 및 정치활동 ===&lt;br /&gt;
==== 광복 직후 ====&lt;br /&gt;
1945년 8.15 광복 후에는 8월 말과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朝鮮在外戰災同胞救濟會) 고문과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9월 초 [[안재홍]] 등이 좌경화되는 건준체제에 반발하여 건준을 탈퇴하자 방응모 역시 건준을 탈퇴하였다.&lt;br /&gt;
&lt;br /&gt;
9월 2일 미군정이 주둔하자, 방응모는 윤전기를 찾기 위해 폐간 당시의 증빙서류를 미 군정청에 제시하였으나 소식이 없었다. 총독부는 조선일보 폐간 직후 인수한 윤전기를 경성일보사에 옮겨서 설치했다. 그는 동방문화재단 외 4개 사업소를 적산으로 파악한 미군정을 설득하고, 사옥 문제도 해결하였다.&lt;br /&gt;
&lt;br /&gt;
10월 1일 조선일보 편집위원회를 구성하고, 신문 복간 운동을 추진했다. 조선총독부의 폐간 지시 당시 의정부로 옮겨놓은 일부 활자 자모음이 잘 보관되어, 그해 11월 23일 조선일보를 복간시키고, 서울신문사 사옥에서 조선일보 복간호를 간행하였다. 이후 조선사회문제대책중앙협의회 중앙위원을 거쳐 10월 16일 이승만 등의 주도로 독립촉성중앙회가 결성되자 독촉에 가입하였다.&lt;br /&gt;
&lt;br /&gt;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이 귀국하자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에 입당했다. 12월 [[안재홍]]의 추천으로 한국독립당의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출되어 3~4개월 동안 활동했다.&amp;lt;ref&amp;gt;일각에서는 방응모가 '한독당 재무부장으로 지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1947년부터 한독당 재무부장을 맡은 신창균이 전면 부정했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47/0000002626?sid=102 백범 비서와 '진짜' 한독당 재정부장의 육성증언. 참고.]&amp;lt;/ref&amp;gt; 그 뒤 대한국민총회 발기인, 대한독립애국금헌성회 발기인 등으로 활동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복간 및 군정기 활동 ====&lt;br /&gt;
11월 [[조선일보]]사를 복간시켰다. 그러나 한동안 조선일보의 인쇄는 서울신문사에서 간행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1945년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추념대회에 참여하였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2&amp;quot;&amp;gt;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13&amp;lt;/ref&amp;gt; 순국선열추념대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2&amp;quot; /&amp;gt;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참여,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이 되었다.&amp;lt;ref&amp;gt;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55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6년 2월 26일 서울신문사 공무국 종업원들이 조선일보의 인쇄를 거부해버렸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436페이지&amp;lt;/ref&amp;gt; 그동안 묵시적으로 방해가 은근히 있었다. 표면상의 문제는 임금 문제이나 내용상으로는 조선일보에 대한 조선공산당의 시위의 일종이었다. 사흘간의 교섭 끝에 2월 28일에 가서야 26일자와 27일자를 소급해서 인쇄하여 신문을 한꺼번에 발행하였다. 그러나 3월 1일과 2일에 또다시 인쇄를 거부당해 결국 휴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436페이지&amp;lt;/ref&amp;gt; 조선일보를 경성일보사로 옮겨서 인쇄하기로 하고 3월 5일자로 사고로 독자에게 알렸다.&lt;br /&gt;
&lt;br /&gt;
4월 29일 김구, 김창숙, 김성수, 오세창 등과 함께 서울운동장에서 윤봉길의사 추모회의 창립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amp;lt;ref&amp;gt;&amp;quot;故尹奉吉義士의 記念式 오늘, 發起人會 열고 準備&amp;quot;, 동아일보 1946년 4월 23일자 2면, 사회면&amp;lt;/ref&amp;gt; 그해 5월 조선공업구락부 고문에 위촉되었다.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民族統一總本部) 10인협의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6월 15일 오후 5시 40분 서울역에 마중나가 서울역에 도착한 삼의사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lt;br /&gt;
&lt;br /&gt;
1945년 광복 직후 서기원이 그를 찾아왔다. 서기원은 그때 경성농상실천학교의 동창회로부터 이 학교의 교장이 되어 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이다. 방응모는 서기원의 제의를 받아들여 1946년 8월 28일 동방문화학원 이사장으로 숭문상업학교를 인수, 재단 이사장이 되었다. 후일 방응모가 6.25 전쟁 중에 납북된 후 동방문화학원과 숭문중,고교의 재단은 최용진이 운영하다가 다시 1978년에 방일영에게 인수되었다.&lt;br /&gt;
&lt;br /&gt;
1947년 1월 21일 제5회 창립위원회를 본사에서 개최하고 2월 23일 주식회사 조선일보사 주주창립총회를 열고 대표이사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공동투자 경영자로 참여시킨 전무 이종민과의 알력이 발생했다. 이종민과의 갈등이 심화되자 그해 8월 3일 방응모는 일단 사직서를 제출했다. 1947년 8월 10일 풍문여고 강당에서 개최된 한인신문기자협회에 참석, 민족청년단에서 언론계 공로자로 방응모, 김성수, 설의식을 지정하여 상을 시상받았다.&amp;lt;ref&amp;gt;&amp;quot;朝鮮 新聞記者協會&amp;quot;, 동아일보 1947년 8월 10일자 2면, 사회면&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납북과 최후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 납북 후 행적은 &amp;quot;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amp;quot;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 1950년 8월경 개성 송악산 부근에서 미군의 폭격에 희생되었고 심한 폭격으로 시신을 찾을 수 없어 묘도 만들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남한에서는 1955년 7월 7일 생사불명기간 만료로 인해 실종 처리되었다.&lt;br /&gt;
&lt;br /&gt;
=== 사후 ===&lt;br /&gt;
서울 종로에 있던 양자 방재윤의 두 아들 방일영과 방우영은 방응모의 첩 이인숙이 찾아가 피신하라고 권고하여 황급히 피신했다. &lt;br /&gt;
&lt;br /&gt;
7월 6일 그의 행방불명처리가 되고, 방응모의 사후에도 [[조선일보]]는 그의 명의로 발행되었다. 1952년 4월 28일 조선일보는 발행인겸 편집인을 장기영으로, 인쇄인을 방일영으로, 방응모는 명예사장으로 명의변경하여 휴전 후 계속 발행하게 되었다. 1954년 4월 30일 제8회 조선일보 정기주주총회에서 장기영 사장이 사퇴하면서, 명예사장 방응모가 사장으로 추대되고, 발행인 겸 대표취체역에 방일영이 선임되었다. 이후 실종 후 1959년에 법적으로 사망 처리되었다. 그리고 1970년까지는 조선일보는 그의 이름으로 발행되었다.&lt;br /&gt;
&lt;br /&gt;
1970년 2월 19일 조선일보 정기주주총회에서 방응모 이사를 사퇴 수리하였다. 그의 피폭 사망 사실은 1970년대 이후 탈북자들을 통해 대한민국에 소개되었다.&lt;br /&gt;
&lt;br /&gt;
== 친일행위 의혹 ==&lt;br /&gt;
=== 일제 전시체제기 활동 ===&lt;br /&gt;
일제 강점기 말기 언론인으로서 총독부체제에 협력한 기록과 활동이 다수 기록이 있다. 1933년 3월 [[조선일보]] 경영권을 인수하고 부사장직에 취임했을 당시 같은 달에 고사기관총 구입비용 1600원을 군에 헌납하였다. 그는 1935년 친일 잡지 《조광 (잡지)(朝光)》을 창간하였고, 1937년에는 경성방송국 제2방송에 출연하여 일제가 중국의 베일을 절멸케하여 극동평화를 지키려고 한다는 강연을 하였다. 1940년대부터 조광에 집중적으로 친일 논설을 기고하고 시국 강연에 참여하여 전쟁 지원을 독려했다. 1942년 6월에는 '징병령 실시에 일층 더 감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글을 써서 조광에 발표하였다. 애국금차회(1937),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1938), 임전대책협의회(1941), 조선임전보국단(1941) 등 대표적인 친일 단체의 회원에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그는 이런 행적으로 인해 해방정국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명단에 기록되어 있고,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해 발표한 &amp;lt;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amp;gt;에 모두 포함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lt;br /&gt;
&lt;br /&gt;
우리 [[조선일보]]는 다른 어떤 신문도 따라오지 못하는 확고한 신념에서 비국민적 행위를 단연 배격하여 종국까지 조선일보사가 이미 정해놓은 방침에 한뜻으로 매진한다.|원산에서의 순회 강연&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9478.html 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친일 다짐하다 시민에 봉변]《한겨레》2005-08-24 오후 06:13:18&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반민족행위 논란 ===&lt;br /&gt;
방응모를 친일파로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남아 있다. 조선일보 경영 이전에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방응모의 활동이 거의 없었고, 납북된 뒤 소식이 끊겨버린 까닭에 본인이 항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 동안의 행적만으로 친일파 여부를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방응모의 후손들이 영향력 있는 [[조선일보]] 언론사의 사주를 맡았기에 그의 입장에서 서술한 기록을 많이 남기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80년 발간된 그의 전기 《계초 방응모》(조선일보사) 등에는 '그가 민족주의적 선각자'로 묘사되고 있다. 방응모가 친일파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일부세력측은 그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논거로 드는 경우가 많이 있다.&amp;lt;ref&amp;gt;유석재, 계간 《유심》 (2004년 봄호) [http://yousim.buddhism.org/html/2004-spr/tamgu-yoo-seok-jae.htm 삭풍 속에 피어난 금란지교(金蘭之交) - 만해와 계초 방응모]&amp;lt;/ref&amp;gt;&amp;lt;ref&amp;gt;&amp;quot;일제 말기 계초는 시국강연에 나설 것과 창씨개명을 집요하게 강요받았으나 그때마다 묵묵부답으로 거부하며 소신을 지켰다.&amp;quot; 《조선일보》 (2001.3) 조선일보 사장열전 - 계초 방응모편, 《한겨레》 (2001.3.30) [http://www.njoyschool.net/news/article_view.asp?menu_code=s20202&amp;amp;no=1206 조선일보, 일장기를 신문제호 위에]&amp;lt;/ref&amp;gt;&lt;br /&gt;
또한 한국정토학회 고문이자 서울 정토사 주지였던 박설산(1918~2007)이 학도병에 끌려가기 직전인 1943년 12월 28일 밤 서울역에서 스스로 왼발을 선로에 올려 발가락을 절단해 징집을 기피하자 방응모는 만해와 함께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설산을 걱정하면서 입원 중 조선일보 기자를 통해 돈을 전달한 것은 물론 퇴원할 때 돈을 전달하고 뒤를 보살폈다고 한다.&amp;lt;ref&amp;gt;박설산 회고록 &amp;lt;뚜껑없는 조선역사책&amp;gt;(1994, 도서출판 삼장) p240~241&amp;lt;/ref&amp;gt;&lt;br /&gt;
&lt;br /&gt;
2010년 12월, 방응모 관계자들 및 조선일보측은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을 취소해달라'며 법원에 낸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amp;quot;1944년 조선항공업 창립발기인으로 활동한 부분에 대해 친일행위로 판단한 부분을 취소하지만 나머지 활동에 대해서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amp;quot;라고 판결했다. 그 이유인 즉 &amp;quot;방응모는 1933년 조선일보 사장으로 취임해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등으로 활동하며 친일활동을 벌였으며, 1937년 경성방송국 시국강연에서 일본제국이 극동평화를 확립시킬 것이라는 내용의 강연을 하고, 1938년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춘추회의 발기인 겸 간사로 활동하기도 했다&amp;lt;ref&amp;gt;[http://media.daum.net/breakingnews/politics/view.html?cateid=1002&amp;amp;newsid=20101222103319164&amp;amp;p=newsis 법원 &amp;quot;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친일파 맞다&amp;quot;]뉴시스 2010년 12월 22일&amp;lt;/ref&amp;gt;&amp;quot;는 것이다.&lt;br /&gt;
&lt;br /&gt;
2012년 1월 12일 서울고법 행정7부는 방 전 사장의 손자인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이 행정안전부를 상대로 낸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처분 취소 청구소송에서 ‘일제 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의 친일 행위 판정 조항에 비추어 방 전 사장에게 적용된 모두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민족적 지도자로서 비중이 큰 만큼 그로 인한 책임도 무거울 뿐 아니라 고난의 시기를 겪은 민족으로서 그 역사를 반성하자는 입장에 설 때, 방 전 사장의 여러 행태는 반민특별법에서 규정한 친일반민족행위의 유형에 속함을 부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1·2심 재판부는 방 전 사장이 자신이 운영하던 잡지 &amp;lt;조광&amp;gt;에 일제 침략전쟁에 동조하고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문예물과 일제 침략전쟁에 협력할 것을 주문하는 논문을 게재하는 등의 ‘친일’ 행위를 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또한, 2심 재판부는 일본의 전쟁 수행을 돕기 위해 설립된 군수 제조업체 ‘조선항공공업’의 발기인과 감사를 지낸 것은 “감사는 업무집행에 관여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기관으로, 방 전 사장이 이 회사를 운영했다고 볼 수 있다”는 이유로 친일이라고 판단했다.&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4565.html법원 ‘방응모 친일’ 2심서도 인정] 인터넷한겨레 2010년 12월 22일&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가족 관계 ==&lt;br /&gt;
* 아버지 : 방계준(方桂準)&lt;br /&gt;
* 어머니 : 온양 박씨&lt;br /&gt;
** 형 : 방응곤(方應坤)&lt;br /&gt;
** 배우자 : 승계도&lt;br /&gt;
*** 아들 2명 요절&lt;br /&gt;
** 배우자 : 이인숙(李仁淑, 1901년 ~ ?)&lt;br /&gt;
*** 아들 : 방재욱(方在旭, 1925년 ~ 1926년 9월)&lt;br /&gt;
** 배우자 : 배영옥(裵英玉)&lt;br /&gt;
*** 장녀 : 방재숙(方在淑)&lt;br /&gt;
** 배우자 : 노호용(盧鎬龍)&lt;br /&gt;
*** 장남 : 방재선(方在善, 1944년 ~)&lt;br /&gt;
*** 차남 : 방재효(方在孝, 1946년 ~)&lt;br /&gt;
*** 삼남 : 방재규(方在奎, 1948년 ~)&lt;br /&gt;
&lt;br /&gt;
** 양자 : 방재윤(方在允 또는 方在胤, 1901년 ~ 1940년, 형 방응곤의 차남)&lt;br /&gt;
*** 손자 : 방일영(方一榮, 1923년 ~ 2003년)&lt;br /&gt;
**** 증손 : 방상훈(方相勳, 1948년 ~)&lt;br /&gt;
**** 증손부 : 윤순명 - 윤치호(尹致昊, 1865년 ~ 1945년)의 증손녀&lt;br /&gt;
***** 현손 : 방준오(方俊吾, 1974년)&lt;br /&gt;
***** 현손 : 방정오(方政吾, 1978년)&lt;br /&gt;
**** 증손 : 방용훈(方容勳, 1952년 ~)&lt;br /&gt;
*** 손자 : 방필영(方必榮, 1924년 ~ 1926년)&lt;br /&gt;
*** 손녀 : 방숙영(? ~ 1951년 1월)&lt;br /&gt;
*** 손자 : 방우영(方又榮, 1928년 ~ 2016년)&lt;br /&gt;
**** 증손 : 방성훈(方聖勳, 1973년 ~)&lt;br /&gt;
&lt;br /&gt;
== 기타 ==&lt;br /&gt;
그는 [[한용운]], 최남선, 정인보, 홍명희 등과 친분관계를 형성하고 어울려 지냈다 한다.&lt;br /&gt;
&lt;br /&gt;
김구의 한국독립당의 재정적 후견인 역할을 하였다 하며,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삼의사 유골봉환식 때 김구, 정인보 등과 촬영한 사진이 있다.&amp;lt;ref&amp;gt;백범어록 참조&amp;lt;/ref&amp;gt; 그리고 1945년 11월 23일 조선일보가 복간되자 백범 김구는 '有志者事竟成' 뜻을 지닌 자 성취할 수 있다'는 친필 휘호를 보내며 축하했다.&amp;lt;ref&amp;gt;[http://www.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4060370241 '조선일보 역사 읽기'《조선일보》2004.06.03]&amp;lt;/ref&amp;gt;&lt;br /&gt;
한편 임꺽정의 저자인 벽초 홍명희가 방응모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그와 깊은 친분을 맺었다는 주장이 있다. 《조광》 1938년 11월호엔 홍명희가 병중에 있는 방응모를 위로하며 지은 한시가 방응모의 답시와 함께 실려 있다고 한다.&amp;lt;ref&amp;gt;[http://weekly.chosun.com/site/data/html_dir/2004/11/05/2004110577041.html ‘임꺽정’으로 되살아난 독립운동의 魂! 주간조선 1827호 2004.11.04&amp;lt;/ref&amp;gt; 또한 [[안창호]]의 비서실장을 지낸 독립유공자 구익균은 방응모와 안창호가 친밀했다는 주장을 했다.&amp;lt;ref&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09/2008030901055.html &amp;quot;공산주의자들, 도산 비판하다가도 하숙비 떨어지면 찾아와&amp;quot;] 조선일보, 2008-03-10 03:22&amp;lt;/ref&amp;gt;&lt;br /&gt;
또한 박설산에 따르면 1943년 만해 한용운에게 학도병으로 끌려가게 되었음을 알리려 심우장으로 찾아가게 되었을 때, 한용운과 방응모가 바둑을 두고 곁에서 정인보가 훈수를 두고 있었다고 한다.&amp;lt;ref&amp;gt;박설산 저 &amp;lt;뚜껑없는 朝鮮 역사 책&amp;gt; p.226 도서출판 三藏(1994)&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30년대~1940년대 방응모에게서 장학금을 지원받은 학생 모임인 서중회의 회원들의 그의 인물평은 &amp;quot;첫 인상은 좀 깡마른 모습이었으나 의지가 강한 인물&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56페이지&amp;lt;/ref&amp;gt;&amp;quot;이라는 평을 남기기도 했다.&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 /&amp;gt;&lt;br /&gt;
&lt;br /&gt;
== 참고 자료 ==&lt;br /&gt;
* 청산하지 못한 역사: 언론 내세워 일제에 아부한 교화 정책의 하수인 (문영숙) (반민족문제연구소, 청년사, 1994)&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민족 계몽의 초석 방응모(이동욱 저, 지구촌, 1998)&lt;br /&gt;
* 계초 방응모전(계초전기간행위, 조선일보사, 1980년)&lt;br /&gt;
* 계초 방응모(이동욱, 방일영문화재단, 1996)&lt;br /&gt;
&lt;br /&gt;
== 외부 링크 ==&lt;br /&gt;
* [https://web.archive.org/web/20050123171046/http://chosunhost.com/ 계초방응모 기념사업회]&lt;br /&gt;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09145 &amp;lt;조선일보&amp;gt;, 방응모 전 사장의 '친일행적' 말한다] - 오마이뉴스 04.09.10일자&lt;br /&gt;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020302101749 방응모ㆍ 김성수 친일행적 뭔가 : &amp;lt;긴급입수&amp;gt;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 全文] - 프레시안 2002-03-02&lt;br /&gt;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54052 그가 '&amp;lt;조선&amp;gt;의 주인' 주장하는 이유] 오마이뉴스 2001년 9월 20일자&lt;br /&gt;
*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956 방재선씨, 호주·상속 원인무효소송 제기]&lt;br /&gt;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4/06/2008040601053.html '5인 친필 서첩' 발굴] 조선일보 2008년04월06일자]&lt;br /&gt;
&lt;br /&gt;
[[분류: 감자]]&lt;/div&gt;</summary>
		<author><name>Nsgjjsjsjy02</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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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방응모</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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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width:100%&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0%&amp;quot;|사진&lt;br /&gt;
|[[파일:방응모.jpg|center|200픽셀]]&lt;br /&gt;
|+ '''방응모'''&lt;br /&gt;
|+ style=&amp;quot;caption-side:bottom;text-align:left:&amp;quot;|출처: 위키백과&lt;br /&gt;
|출생||1883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조선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또는 정부면 성내동&lt;br /&gt;
|-&lt;br /&gt;
|사망||1950년경으로 추정&lt;br /&gt;
|-&lt;br /&gt;
|사인||불명&lt;br /&gt;
|-&lt;br /&gt;
|거주지||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amp;gt; 경성부 -&amp;gt; 경기도 양주군 의정부읍&lt;br /&gt;
|-&lt;br /&gt;
|국적||대한민국&lt;br /&gt;
|-&lt;br /&gt;
|본관||온양&lt;br /&gt;
|-&lt;br /&gt;
|별칭||호: 계초(啓礎), 춘해(春海)&lt;br /&gt;
|-&lt;br /&gt;
|직업||교사, 변호사, 상인, 언론인, 기업인, 사회운동가, 정치가&lt;br /&gt;
|-&lt;br /&gt;
|배우자||승계도, 이인숙, 배영옥, 노효용&lt;br /&gt;
|-&lt;br /&gt;
|자녀||방재숙(딸), 방재욱·방재선·방재효·방재규(아들), 방재윤(양자)&lt;br /&gt;
|-&lt;br /&gt;
|부모||방계준(부), 온양박씨(모)&lt;br /&gt;
|}&lt;br /&gt;
&lt;br /&gt;
'''방응모'''(方應謨, 평안북도 정주군, 1883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 1950년 8월(추정)는 [[일제강점기]]의 교육자, 언론인, 법조인, 기업인이자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언론인이며 정치인이다. 호는 '''춘해'''(春海)이고, 뒤에 '''계초'''(啓礎)로 고쳤다.&lt;br /&gt;
&lt;br /&gt;
1922년 동아일보 정주 지국을 인수해 지국장을 지내다가 1924년 금광업에 뛰어들어 큰 부를 얻게 되었다. 1932년 6월 조선일보에 입사하였고 이후 영업국장이 되어 조선일보의 판매망을 장악하게 되고 경영권을 인수하면서 1933년 3월 조선일보 부사장이 되었다. 1933년 7월부터 1950년 7월까지 종신으로 [[조선일보]]의 사장을 역임하였다. 1935년 창간한 월간잡지 '조광(朝光)'은 친일 논란이 있다.&amp;lt;ref&amp;gt;안은필. [http://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9211 조선일보가 가장 빛나던 시기, ‘안재홍 시대’]&amp;lt;/ref&amp;gt;&amp;lt;ref name=&amp;quot;안은&amp;quot;&amp;gt;안은필. [http://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9279 방응모 친일증거, “모래밭에서 모래 찾기”]국민TV. 기사입력 2015년 4월 23일. 기사수정 2015년 4월 24일.&amp;lt;/ref&amp;gt;&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2/0002006080?sid=102 한홍구 &amp;quot;박정희는 공포와 욕망의 정치를 했다&amp;quot;]. 프레시안. 2015년 4월 13일.&amp;lt;/ref&amp;gt;&amp;lt;ref&amp;gt;이민영.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1/0002255321?sid=102 고법 “방응모 前조선일보 사장 친일행적 대부분 인정”]. 서울신문. 2012년 1월 13일.&amp;lt;/ref&amp;gt;&amp;lt;ref&amp;gt;노현웅.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8/0002251781?sid=102 조선 방응모·동아 김성수의 ‘친일’…수년째 결론 안 내고 미루는 법원]. 한겨레. 2014년 11월 3일.&amp;lt;/ref&amp;gt;&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6/0000000413?sid=110 김성수ㆍ방응모와 친일언론인 군상]. 미디어오늘. 2002년 3월 12일.&amp;lt;/ref&amp;gt; 언론계에서 활동하면서도 사업가의 길을 함께 걸었고, 교육 장학 활동을 하였으며, 1945년 광복 직후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 고문과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안재홍]]의 추천을 받아 한국독립당 중앙상무위원과 독립촉성국민회 총무부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amp;lt;ref name=&amp;quot;안은&amp;quot;/&amp;gt;&amp;lt;ref&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16/2008031600800.html 계초 방응모와의 우정도 여러 편의 시로 표현해&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해방 정국에서 김구의 재정적 후견인으로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등 삼의사 유골 봉환 사업과 신탁통치 반대 운동 등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대한민국 수립 이후 사회민주주의 정치가인 조소앙과 사회당을 결성해 문교정책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lt;br /&gt;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 납북 후 행적은 &amp;quot;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amp;quot;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lt;br /&gt;
&lt;br /&gt;
== 생애 ==&lt;br /&gt;
=== 생애 초기 ===&lt;br /&gt;
==== 출생과 성장 ====&lt;br /&gt;
방응모는 1883년 11월 3일 또는 9월 29일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바우머리 부락 또는 정주군 정부면 성내동 425번지에서 '''방계준(方桂準)'''과 온양 박씨(溫陽朴氏)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그는 어려서 집중력이 남달리 뛰어난 반면 고집이 셌다는 평이 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페이지&amp;lt;/ref&amp;gt; 그의 '''삼촌 방계묵(方啓默)'''은 그의 고집있는 기질을 두고 저놈은 쇠작두 말고 나무 작두로 잘라 죽여야 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3~54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친척들의 야멸찬 말들이 그에게 상처를 주거나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4페이지&amp;lt;/ref&amp;gt; 또한 그의 유년시절을 본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가 태어날 당시 태몽도 없었고, 신동이라는 말도 별다르게 듣지 않았다고 한다. 어려서 빈곤한 가정환경으로 방응모는 정규 학교에는 입학하지 못하고, 16세 때까지 서당에 드나들며 한학을 익혔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던 중 그가 어느정도 실력이 우수하다고 인정되자, 스승인 승창률은 잠시 방응모에게 어린아이들을 돌보게 한 후 자리를 피하곤 했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1페이지&amp;lt;/ref&amp;gt; 그는 홀로 사서육경을 탐독, 독파하였다. 21세 무렵 잠시 서당 훈장을 지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896년 독립협회의 활동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5페이지&amp;lt;/ref&amp;gt; 형 방응곤이 예배당에 다니게 되자&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2페이지&amp;lt;/ref&amp;gt;, 그를 통해 신문물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다. 그 뒤 우연히 경성부에 갔다가 신문물을 보고 충격을 받아 17세에 독학으로 신학문과 일본어, 중국어, 수학 등을 독파하였다. 유년시절 서당의 성리학 스승이던 승창률의 친척인 승시영(承時榮)과 조씨(趙氏)의 딸 승계도와 결혼했다.&lt;br /&gt;
&lt;br /&gt;
결혼한 다음 해에도 그는 공부를 한다며 책만 사다 읽곤 했고&amp;lt;ref name=&amp;quot;fsfs60&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60페이지&amp;lt;/ref&amp;gt;, 부인 승계도는 생계를 위해 몸소 나섰다.&amp;lt;ref name=&amp;quot;fsfs60&amp;quot;/&amp;gt; 부인 승계도는 친척 가운데 콩을 싸게 넘겨주는 이들이 있어 그 콩으로 두부를 만들거나 콩나물을 키워 장사를 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61페이지&amp;lt;/ref&amp;gt; 그의 아내 승계도는 남편에 대한 믿음이 절대적이었고 탓을 하거나 가출하지 않았다. 이후 그는 서당 훈장으로 초빙되었으나, 그가 가는 마을의 기존 훈장, 한학자들은 그를 적대적으로 대했다. 그렇다고 마을 사람들의 일부 지명이 있었으나 자신의 스승의 자리를 침해할 수 없다 하여 그는 자신의 동리의 훈장일은 사양하였다. 그는 마을을 나가 신학문을 하는 친구들과 어울렸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62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계몽 운동 ====&lt;br /&gt;
도산 [[안창호]]와 남강 이승훈이 연사로 돌아다니며 애국 계몽 강연과 문맹들의 교육, 야학 사업을 하였고, 여기에 감동받은 청년들이 서당과 야학을 열고 문맹들과 여성들에게 한글 교육을 하였다. 도산 [[안창호]]의 강연과 남강 이승훈의 강연을 찾아다니며 듣다가 감동받은 방응모 역시 교육, 계몽에 참여하였다.&lt;br /&gt;
&lt;br /&gt;
그는 청년회의 활동에 몰두하였으나, 농번기에 작은 일손이라도 더 필요했던 동리 노인들은 젊은 아이들이 일은 하지 않고 무슨 모임이다 하여 어울려 돌아다니는 꼴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또한 모임 구성원들 역시 &amp;quot;의식 자체가 아직 전근대적이었고, 사고의 분화를 겪지도 않은데다가, 이들의 조직 활동이 기분 좋으면 나오고 기분 나쁘면 빠져 버리는 것이 예사&amp;quot;라 청년 모임들은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청년단체의 실패에 좌절하고 다시 귀향했으며, 이때 그는 춘해(春海)라는 아호를 스스로 지었다. 그의 집안에서는 그가 정착하기를 바라고 정주읍 성내동에 집을 얻어 주었다.&lt;br /&gt;
&lt;br /&gt;
안창호의 계몽 강연에 감동받은 남강 이승훈이 1907년(융희 1년) 8월 김덕용(金德鏞)을 초빙하여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 오산에서 신식 교육을 하는 소학교 과정의 학교 강명의숙을 세우고 산수, 수신, 역사, 지리, 체조를 가르쳤고, 그해 12월에는 중학교 과정인 오산학교를 세우고 학생 7명을 처음 받아들여 개교했다. 1908년에는 오산학교에 학생들이 모여 3개 반으로 편성되었고, 정주군 출신의 춘원 이광수가 오산중학교의 교사로 초빙되어 축구, 야구, 테니스, 배구 등을 지역에 처음 소개하였다. 방응모는 어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학교에 입학해 신학문을 접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0페이지&amp;lt;/ref&amp;gt; 그는 이승훈과 의기투합해 민립 대학을 세우는 운동을 추진했지만 조선총독부 평안북도청 학무국에서 승인을 거부하여, 대학 설립에 실패했다.&lt;br /&gt;
&lt;br /&gt;
=== 언론, 기업 활동 ===&lt;br /&gt;
==== 계몽 활동과 언론 활동 ====&lt;br /&gt;
1915년부터 1924년 방응모는 지역 지식인들, 유학파 청년, 계몽 청년들이 모여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하는데 참여했고, 민립대학기성회 평안북도지부에서 활동하면서 민립대학기성회 중앙회 중앙위원 조만식 등과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언변과 용모가 되었던 그의 여관에도 손님들이 몰렸고, 그가 &amp;quot;2백원도 좋고 5백원도 좋다며 보태달라&amp;lt;ref name=&amp;quot;fsfs87&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7페이지&amp;lt;/ref&amp;gt;&amp;quot;고 하면 기부금을 내는 이들이 있었다. 대신 하룻밤을 의탁하려고 그의 여관을 찾은 이들에게 무료 숙식을 제공하기도 했다.&amp;lt;ref name=&amp;quot;fsfs87&amp;quot;/&amp;gt; 1919년 정주에서 3.1 만세 운동이 벌어지자, 그도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형사들의 눈을 피해 방응모는 만세운동을 하다 재빨리 몸을 피해 화를 면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8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1922년 6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인수하여 분국장에 취임했다. 6월 9일에는 정주군 지역 체육행사로 테니스 대회를 개최하였다. 그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경영하는 동시에 그는 농촌 계몽운동 등에 적극 투신하여 인망을 쌓았다. 처음 몇번은 친구 전우현의 자금을 빌려 부족분을 메우기도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02페이지&amp;lt;/ref&amp;gt; 한다. 1922년 6월 19일&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96페이지&amp;lt;/ref&amp;gt; 동아일보 본사를 설득하여 정주분국을 동아일보사 정주지국으로 승격시켰다. 동아일보사 지부장 재직 시 그는 전우현과 함께 의기투합하여 민립 대학 설립 자금과 농촌진흥회 회원의 여비와 회비를 염출하기 위한 목적 및 당시 교사도 없이 난관에 처했던 오산학교의 재개교를 위한 &amp;quot;오산학교의 부흥 운동을 목표로 한 재단법인 촉성 기금 마련&amp;quot; 등을 계획했다. 총독부의 인허가 거부로 실패한 대학 설립 자금은 고스란히 오산학교의 부활과 복교 자금으로 투입되었다. 1920년 1월에 경성형무소에서 가석방된 조만식은 이승훈을 만났고, 다시 조만식이 오산학교를 맡으면서 학교는 다시 정상 운영되었다.&lt;br /&gt;
&lt;br /&gt;
1923년 동아일보 정주군 분국이 지국으로 승격되자 정주 지국장으로 동아일보 정주지국을 경영하였고, 같은 해 7월 여성들의 사회참여와 평등권 신장을 위한 여자교육회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이후 대규모 수해가 나자, 정주군 수해구제회를 결성하여 봉사활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1923년 4월 조만식·송진우·안재홍·김성수 등의 주도로 민간 자본으로 대학교 설립을 추진하기 위한 조직인 조선민립대학기성회가 결성되자, 방응모는 민립대학 기성회에 참여하여 민립대학기성회 정주군준비회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5월에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정주지방지부가 설립되자 기성회 정주지부 상무위원을 맡았다.&lt;br /&gt;
&lt;br /&gt;
==== 광업 경영과 조선일보 입사 ====&lt;br /&gt;
1924년 봄 오산학교 교감으로 있던 전우현이 방응모와도 안면이 있던 금광 채굴업자 두 명을 데리고 그를 찾아왔다. 그들은 자신들이 봐 둔 산이 있다고 방응모에게 소개했다. 그는 선천군의 지역 유지이자 최창학의 친구이며, 그가 동아일보 지국장으로 알게 된 이봉찬을 찾아갔다. 한학자로 알고 있던 그가 금광 투자를 제의하자 &amp;quot;한문이라면 빼지 않고 알려고 드는 한학 훈도가 어떻게 금광을&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16페이지&amp;lt;/ref&amp;gt;&amp;quot; 하느냐 하였지만, 이봉찬은 그에게 금광, 광산에 대한 지식을 알려주었다. 이봉찬은 그에게 광산 지식을 알려주며 최창학의 소유지 중 폐광을 빌리는 법을 알려주었다. 방응모의 됨됨이에 감복한 듯, 그의 수많은 질문에 적잖은 충고를 자임해주었다.&amp;lt;ref name=&amp;quot;fsfs117&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5페이지&amp;lt;/ref&amp;gt; 이봉찬은 최창학에게 방응모를 소개하는 편지를 수차례에 걸쳐 보내주었다.&amp;lt;ref name=&amp;quot;fsfs117&amp;quot;/&amp;gt; 이봉찬은 방응모의 친구들이 봐 둔 갱도를 임대받도록 도와주었다. 이봉찬은 방응모의 한학 실력과 사람됨을 알아보고 있어, 자금을 쾌히 빌려주었다.&amp;lt;ref name=&amp;quot;fsfs117&amp;quot;/&amp;gt;&lt;br /&gt;
&lt;br /&gt;
이후 광산업에 뛰어들어 1924년 여름 압록강변의 최창학 소유 폐금광인 평안북도 삭주군 외남면 교동 다릿골의의 삭주 교동광업소를 찾아가 10미터 정도 땅을 파고 금맥을 발견했다. 바로 삭주 교동광업소를 인수, 경영을 확대하였다. 이때 만난 동업자의 딸이자 친구 전우현의 조카딸인 '''이인숙(李仁淑)'''을 만났다. 본처 승계도가 두 아들을 잃고 복부 수술이 잘못되어 아이를 얻지 못하게 되자 방응모에게도 수많은 중매가 들어왔다. 자식들을 병으로 잃은 것이 자신의 불찰이라고 본 승계도는 그에게 작은 부인이라도 들이자는 말을 꺼내기도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18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26년 방응모에게 광산 사업을 제안했던 두 친구가 손을 털고 나갔고, 그의 가족은 돈이 없어 쌀 대신 좁쌀로 좁쌀죽을 먹으며 연명해야 했다. 방응모는 정주군에 사는 비슷한 또래의 먼 친척 방상진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고, 방상진과 일꾼 대여섯 명, 그리고 후처 이인숙의 친정 쪽에서 얻어온 토지문서를 얻어 자금을 마련, 삭주 다릿골 광산으로 가서 다시 금광을 채굴했다. 금맥은 쉽게 나오지 않았고, 출몰하는 마적떼에게 소와 기구를 약탈당했다. 동시에 빚쟁이들의 독촉에 시달렸으나 '''''1926년 7월 지하 300m 지점에서 금맥을 확보했다. 이후 연간 300kg의 금을 생산, 그는 굴지의 광산업자로''''' 성장해 금맥을 찾아 벼락부자가 되었다. 그는 방상진을 교동금광 총감독에 맡겼다. 이때 그는 최창학에게 임대료에 이자를 쳐서 보내주었다.&lt;br /&gt;
&lt;br /&gt;
그때까지 첫 부인 승계도가 두부를 팔아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미국산 포드 T형자동차'''''를 타고 금의환향했다. 1928년 방응모는 자신의 아호인 춘해를 딴 춘해 장학회를 만들고 장학생들의 모임인 이심회를 만든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48페이지&amp;lt;/ref&amp;gt; 그 해에 방응모는 교동지역에 파출소 지소를 유치하였고, 마적단에 시달리던 주민들은 그의 송덕비를 세우기도 했다. '''''1928년에 그는 의정부 직동, 흥선대원군의 별장이 있던 곳 바로 뒤에 위치한 건물을 매입'''''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한용운]], 홍명희를 자주 초대했다.&lt;br /&gt;
&lt;br /&gt;
'''''1932년 방응모는 교동광산을 135만원이란 거액에 일본 중외광업주식회사에 매각'''''했다. 그 뒤 1932년 6월부터 조선일보 영업국장으로 활동하다 '''1933년 3월 [[조선일보]]의 경영권을 인수'''하여 부사장에 취임하였다.&lt;br /&gt;
&lt;br /&gt;
그는 교동광업소를 운영하며 모은 재력을 바탕으로 부사장 재직 중 [[조선일보]]의 대주주가 되었으며, 1933년 7월 8대 사주 조만식으로부터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제9대 [[조선일보]] 사주로 취임, 활동했다.&amp;lt;ref&amp;gt;조선일보는 1932년 7월에 조만식을 사장으로 영입했지만, 조만식은 거의 평생을 평양에서 살아왔던데다 서울에서 활동하기에는 적응을 잘하지 못했다. 조만식은 신문사 경영난과 지역감정의 혹독한 시련을 받은 채 9개월만에 퇴사했다. 그리고 조만식 후임으로 1933년, 방응모를 사장으로 추대하기에 이르렀다.&amp;lt;/ref&amp;gt;&amp;lt;ref&amp;gt;《한국사 시민강좌 제47집, 대표적 독립운동가 12인》,일조각. p145&amp;lt;/ref&amp;gt; 방응모 취임 이후의 초대 부사장은 이광수, 주필은 서춘이었다.&lt;br /&gt;
&lt;br /&gt;
=== 언론, 사업 활동 ===&lt;br /&gt;
==== 사회사업과 조선일보 인수 계획 ====&lt;br /&gt;
금광 사업에 성공한 그는 영림, 조림 사업에도 투자하였다. 방응모는 배우자 승계도에게서 더 이상 아들을 얻지 못하자 첩 이인숙을 통해 아들을 얻으려고 하였다. 이인숙은 아들을 낳았으나 이 아들은 곧 사망하였다. 아들을 잃은 이인숙은 승계도의 도움을 받다가, 그해 6월 방응모가 있는 광산으로 가 생활하였다'''. 승계도와 이인숙을 통해 자녀를 얻지못하자 42세가 되던 해인 1924년 친형인 방응곤의 둘째 아들 방재윤을 양자로 입양시켰다.'''&lt;br /&gt;
&lt;br /&gt;
[[파일:방응모장학생.jpg|섬네일|160px|오른쪽|방응모와 그의 장학금을 받던 학생들. 가운데 앉은 이가 방응모이고, 서있는 이들 중 왼쪽에서 두 번째는 방응모의 양자 방재윤.]]&lt;br /&gt;
&lt;br /&gt;
1930년 배영옥과 결혼하여 딸 방재숙을 얻었다. 1932년 광산업을 정리하였고 언론사업을 비롯하여 육영사업과 조림 및 간척사업 등을 벌였다. 또한 고아원과 사회복지단체에 후원금을 지원하면서 인망을 얻기도 했다. 삭주 지역에서는 그의 송덕비가 세워지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932년 그는 수원군 팔탄면 노하리 일대의 갯벌에 일본인이 수차례 뚝을 쌓다가 실패했다는 정보를 얻고 임삼진을 통해 조선총독부에 허가를 요청하였다. 간척 사업은 이후 1935년부터 시작되었지만 1932년부터 은밀히 착수되어 왔다.&lt;br /&gt;
&lt;br /&gt;
1933년 무렵 방응모가 [[조선일보]] 인수에 나서기 전부터 그는 [[한용운]]을 위한 일이라면 돈을 아끼지 않고 지출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성북동 222번지 언덕에 만해를 위해 기와집 한 채를 지어주었는데 심우장(尋牛莊)이 그것이다. 또한 만해가 일제의 배급을 거부해 생활이 어렵게 되자 만해에게 생활비를 지급했던 방응모는 만해가 병석에 누운 1944년에는 치료비를 지원해주기도 했다.&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6/0000043262?sid=103 만해가 일송 선생 5일장 치른 사연]&amp;lt;/ref&amp;gt; 그 외에도 방응모는 만해 한용운·벽초 홍명희 등과 함께 새해가 되면 백천온천에도 같이 다녀올 정도로 두터운 친분을 맺었다.&lt;br /&gt;
&lt;br /&gt;
방응모의 광산 매각을 일본 정부 측에 알리고 다리를 놓은 것은 고일청(高一淸)이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84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32년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사건으로 체포된 [[안창호]]의 사면 탄원과 보석을 위해 노력하였다. 안창호가 윤봉길을 사주했다는 증거가 없으며 그가 테러행위를 지시했다는 증거 자료나 문건이 없다는 것이 방응모의 안창호 탄원 이유였다. 그러나 총독부 경무국장은 그의 안창호 석방 제안을 정중히 거절한다. 1936년 동방문화학원(뒤에 숭문중학교·고등학교 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1939년 9월에는〈조선일보〉의 조간 1회, 석간 2회의 1일 3회 발행을 시작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인수와 경영 ====&lt;br /&gt;
1933년 1월 16일 그는 정식으로 주식회사 [[조선일보]]사를 창립, 1월 18일에 발표된 창립 취지서에는 창립위원장 방응모, 창립발기인 방응모, 조만식, 고일청 외 등이 참여했다. 일단 그는 조만식을 사장으로 임명하고 자신은 부사장으로 있다가, 그해 3월 13일 다시 부사장에 취임했다. 4월 25일 편집인 겸 발행인이 되고, 4월 29일에는 조선일보의 조간, 석간제 발행을 부활, 확정시켰다. 1933년 7월 10일 총독부로부터 조선일보사의 법인 등록 승인을 얻어냈다. 7월 10일 조만식의 사퇴로, [[조선일보]]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다. 1933년 그는 자신의 아호를 춘해에서 계초로 바꾸었다. 그는 유능한 문인, 필진의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 상금 1천 원을 걸고 작가를 영입하였다.&lt;br /&gt;
&lt;br /&gt;
1934년 3월 25일 이광수를 비롯하여 서춘, 김동진, 함상훈, 신태익 등을 [[조선일보]]로 영입해 왔다. 그 외에도 정주군 출신 언론인, 작가들이 조선일보로 많이 오게 되었다. 이후 동아일보와 갈등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이광수가 조선일보로 옮겨와 부사장직에서 9개월 근무했다. 당시 조선일보 내부에서는 문모 라는 이가 이광수의 등장으로 자신의 입지 약화를 우려해 오랫동안 이광수를 내보내려 흉계를 꾸몄다고 한다. 이광수는 1934년 5월 25일자로 돌연 사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65페이지&amp;lt;/ref&amp;gt; 문모는 그에게 오히려 잘 됐다는 식으로 말하다가 방응모에게 호되게 혼이 났다. 그리고 문모로 하여금 즉시 금강산에 들어가 이광수를 다시 데려오게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65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이광수는 아들 봉근(당시 8살)의 사망 등으로 실의에 빠졌고, 1935년에 가서야 이광수를 조선일보 고문이자 필진으로 재영입하게 됐다.&lt;br /&gt;
&lt;br /&gt;
==== 동방문화학원 재단 설립 ====&lt;br /&gt;
방응모는 1936년 방농장의 소유권을 기본 자산으로 하는 재단법인 동방문화학원(東邦文化學院)을 설립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6페이지&amp;lt;/ref&amp;gt; 동방문화학원은 학교 법인으로 인가된 재단 법인으로, 그뒤 고계학원과 인연을 가지고 1936년부터는 보성고등보통학교를 후견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 분리되었다. 그뒤 방응모 장학생인 서중회 회원들을 위한 방응모 장학사업을 주관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7페이지&amp;lt;/ref&amp;gt;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태평로 구 조선일보 사옥 안에 동방문화학원의 간판을 달고 조광 잡지를 계속 발행하는 조광사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7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일제 강점기 후반 ===&lt;br /&gt;
==== 중일 전쟁 전후 ====&lt;br /&gt;
중일전쟁 개전 직후인 1937년 7월 11일에 열린 [[조선일보]] 간부회의에서 주필 서춘이 '일본군, 중국군, 장개석씨'등으로 쓰던 용어를 '아군, 황군, 지나, 장개석'으로 고치고 일본 국민의 입장에서 논설을 쓸 것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편집국장 김형원과 영업국장 김광수가 적극 반대를 하기도 했으나, 방응모는 '일장기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이미 몇 십만 원의 손해를 보았을 뿐 아니라 [[3.1 운동]] 때처럼 신문이 민중을 지도할 수 없다'면서 서춘의 입장을 지지했다. 한편으로 방응모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된 [[안창호]]를 [[조선일보]]에 영입하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안창호는 옥중에서 얻은 간질환과 폐질환 등으로 고생했고, 진료비 등을 수시로 지원하고 문병했음에도 출옥후 얼마 뒤에 사망한다.&lt;br /&gt;
&lt;br /&gt;
1933년 이심회(以心會：후에 序中會, 방응모장학회 등으로 명칭이 바뀜)라는 장학회를 만들어 국내 대학생과 해외유학생들에게 학자금을 지급하기도 했으며, 재단법인 동방문화학원(東方文化學院：지금의 숭문중·고등학교 전신)의 이사장직을 맡기도 했다. 또한 자신의 막대한 재원을 들여 1936년부터 함경남도 영흥군 일대에 당시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대단위 조림사업을 벌였으며, 그 전 해인 1935년부터는 경기도 수원군 팔탄면 일대에서 만 2년간에 걸친 간척사업을 벌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937년 12월 24일 [[안창호]]는 병보석 판정을 받고 재판소가 지정한 현 서울대학교병원인 경성제국대학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안창호의 입원 중에 시중을 든 사람으로는 안창호의 외조카 김순원과 청년 박정호 두 사람이었고, 나중에는 이응준 장군의 부인 이정희가 끝까지 지성껏 간호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7페이지&amp;lt;/ref&amp;gt; [[안창호]]는 병상에서 병원비 문제로도 고초를 겪었다. 이 때문에 조만식은 일본 경찰로부터 안창호의 병원비를 대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음에도, &amp;quot;내가 먹고 살면서 그 선생을 돌보지 않을 수 없다&amp;quot;며 완강히 거절하고 안창호를 도왔다고 한다. 안창호의 간호를 같이 도와주던 이응준 장군 부인 이정희는 10일마다 계산되어 나오는 병원 입원비로 안창호 선생이 괴로워하는 표정을 지켜볼수 없었다고 진술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8페이지&amp;lt;/ref&amp;gt; 방응모는 5백원의 수표 한 장을 안창호에게 전달하였다. 50일간의 입원비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9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안창호]]는 1938년 3월 10일 밤 12시 경성제국대학 병원에서 운명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폐간 사건 ====&lt;br /&gt;
일본의 전쟁이 격화되면서 조선총독부 공보국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1940년에 강제로 폐간조치 했다. 광산을 팔아서 자신의 모든 것을 조선일보에 바쳤던 방응모는 큰 절망과 좌절을 느껴야 했다. [[한용운]]은 ‘신문이 폐간되다/ 붓이 꺾이어 모든 일이 끝나니…’로 시작하는 시를 지어 방응모를 위로했다. &amp;lt;ref&amp;gt;붓이 꺾이어 모든 일 끝나니 이제는 재갈 물린 사람들 뿔뿔이 흩어지고 아, 쓸쓸하고 쓸쓸한지고 망국 서울의 가을날 한강의 물도 흐느끼느니 울음 삼켜 흐느끼며 연지를 외면한 채 바다 향해 흐르느니&amp;lt;/ref&amp;gt; 동아일보에는 김성수 외에도 장덕수와 송진우가 있었지만 그에게는 조선일보 폐간을 막기 위해 총독부와 교섭할 인물도 없었다.&lt;br /&gt;
&lt;br /&gt;
1938년 2월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선 내 일간신문 25개사로 조직된 조선춘추회의 창립에 창립발기인으로 참가했고, 조선춘추회 간사로 활동했다. 같은 해 7월 “국민정신을 총동원하고 내선일체 전 능력을 발휘하여 국책 수행에 협력하여 성전(聖戰)의 궁극적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조직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에 참여했고, 그날 결성된 경성연맹 창립총회에서 상담역을 맡았다. 9월부터 조선방공협회 경기도연합지부 평의원을 지냈다. 10월에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주최한 비상시 국민생활 개선을 위한 제1회 생활개선위원회에서 제2부(의례와 사회풍조 쇄신부)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그러나 1938년 10월부터 조선총독부는 조선일보의 신문용지를 검열, 통제하기 시작했다.&lt;br /&gt;
&lt;br /&gt;
1940년 5월 조선총독부 총독 미나미 지로가 방송담화로 창씨개명을 권고했다. 그러나 그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성씨를 이제 와서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며 창씨개명은 완강하게 거절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조선일보에 트집이 잡힐 일이 나타나지 않자 총독부는 전국 면사무소에 조선일보 신문 구독을 거절하도록 명령을 내렸고, 동시에 조선말을 쓰는 민원인에게는 일을 처리해주지 말도록 하게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3페이지&amp;lt;/ref&amp;gt; 조선총독부는 송진우의 예금통장을 문제삼았다. 송진우 명의의 은행저금이 동아일보의 8백여 개의 지국과 분국을 통해 모금된 독립운동 자금이라며, 그리고 동아일보 간부들이 백운장이라는 요정에서 회식을 한 것을 김성수 집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려 했다는 등의 이유로 백관수 동아일보 사장을 전격 구속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3~374페이지&amp;lt;/ref&amp;gt; 동아일보는 백관수가 구속된지 10일 만에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동아일보 중역회의를 열고 폐간신청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4페이지&amp;lt;/ref&amp;gt; 총독부는 조선일보에도 자진 폐간을 권고했고, 1940년 8월 9일 편집회의를 주관, 8월 10일 조선일보의 폐간계를 내고, 8월 10일자로 폐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5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잡지 발행 활동 ====&lt;br /&gt;
신문 강제 폐간 뒤 방응모는 간판을 조광사로 바꿔 걸고, 사옥은 동방흥업주식회사로 등기를 변경해서 유지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1페이지&amp;lt;/ref&amp;gt; 이후 그는 조광 잡지 발행에 전념했다. 1943년 8월 경 일본 중앙대학의 예과를 마친 방일영이 입사&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1페이지&amp;lt;/ref&amp;gt;, 필진으로 참여했다. [[조선일보]]가 폐간된 후에도 방응모는 벽초 홍명희 부자에게 지속적으로 생활비를 대주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4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4년 6월 29일 만해 [[한용운]]이 사망했다. 그는 심우장을 찾아가 3백원을 내놓았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5페이지&amp;lt;/ref&amp;gt;당시 쌀 10가마가 100원이었지만, 심우장은 당장 현금 1원이 없었는데 거액이라서 놀랐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6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광복 이후 언론 및 정치활동 ===&lt;br /&gt;
==== 광복 직후 ====&lt;br /&gt;
1945년 8.15 광복 후에는 8월 말과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朝鮮在外戰災同胞救濟會) 고문과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9월 초 [[안재홍]] 등이 좌경화되는 건준체제에 반발하여 건준을 탈퇴하자 방응모 역시 건준을 탈퇴하였다.&lt;br /&gt;
&lt;br /&gt;
9월 2일 미군정이 주둔하자, 방응모는 윤전기를 찾기 위해 폐간 당시의 증빙서류를 미 군정청에 제시하였으나 소식이 없었다. 총독부는 조선일보 폐간 직후 인수한 윤전기를 경성일보사에 옮겨서 설치했다. 그는 동방문화재단 외 4개 사업소를 적산으로 파악한 미군정을 설득하고, 사옥 문제도 해결하였다.&lt;br /&gt;
&lt;br /&gt;
10월 1일 조선일보 편집위원회를 구성하고, 신문 복간 운동을 추진했다. 조선총독부의 폐간 지시 당시 의정부로 옮겨놓은 일부 활자 자모음이 잘 보관되어, 그해 11월 23일 조선일보를 복간시키고, 서울신문사 사옥에서 조선일보 복간호를 간행하였다. 이후 조선사회문제대책중앙협의회 중앙위원을 거쳐 10월 16일 이승만 등의 주도로 독립촉성중앙회가 결성되자 독촉에 가입하였다.&lt;br /&gt;
&lt;br /&gt;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이 귀국하자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에 입당했다. 12월 [[안재홍]]의 추천으로 한국독립당의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출되어 3~4개월 동안 활동했다.&amp;lt;ref&amp;gt;일각에서는 방응모가 '한독당 재무부장으로 지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1947년부터 한독당 재무부장을 맡은 신창균이 전면 부정했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47/0000002626?sid=102 백범 비서와 '진짜' 한독당 재정부장의 육성증언. 참고.]&amp;lt;/ref&amp;gt; 그 뒤 대한국민총회 발기인, 대한독립애국금헌성회 발기인 등으로 활동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복간 및 군정기 활동 ====&lt;br /&gt;
11월 [[조선일보]]사를 복간시켰다. 그러나 한동안 조선일보의 인쇄는 서울신문사에서 간행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1945년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추념대회에 참여하였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2&amp;quot;&amp;gt;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13&amp;lt;/ref&amp;gt; 순국선열추념대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2&amp;quot; /&amp;gt;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참여,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이 되었다.&amp;lt;ref&amp;gt;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55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6년 2월 26일 서울신문사 공무국 종업원들이 조선일보의 인쇄를 거부해버렸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436페이지&amp;lt;/ref&amp;gt; 그동안 묵시적으로 방해가 은근히 있었다. 표면상의 문제는 임금 문제이나 내용상으로는 조선일보에 대한 조선공산당의 시위의 일종이었다. 사흘간의 교섭 끝에 2월 28일에 가서야 26일자와 27일자를 소급해서 인쇄하여 신문을 한꺼번에 발행하였다. 그러나 3월 1일과 2일에 또다시 인쇄를 거부당해 결국 휴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436페이지&amp;lt;/ref&amp;gt; 조선일보를 경성일보사로 옮겨서 인쇄하기로 하고 3월 5일자로 사고로 독자에게 알렸다.&lt;br /&gt;
&lt;br /&gt;
4월 29일 김구, 김창숙, 김성수, 오세창 등과 함께 서울운동장에서 윤봉길의사 추모회의 창립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amp;lt;ref&amp;gt;&amp;quot;故尹奉吉義士의 記念式 오늘, 發起人會 열고 準備&amp;quot;, 동아일보 1946년 4월 23일자 2면, 사회면&amp;lt;/ref&amp;gt; 그해 5월 조선공업구락부 고문에 위촉되었다.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民族統一總本部) 10인협의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6월 15일 오후 5시 40분 서울역에 마중나가 서울역에 도착한 삼의사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lt;br /&gt;
&lt;br /&gt;
1945년 광복 직후 서기원이 그를 찾아왔다. 서기원은 그때 경성농상실천학교의 동창회로부터 이 학교의 교장이 되어 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이다. 방응모는 서기원의 제의를 받아들여 1946년 8월 28일 동방문화학원 이사장으로 숭문상업학교를 인수, 재단 이사장이 되었다. 후일 방응모가 6.25 전쟁 중에 납북된 후 동방문화학원과 숭문중,고교의 재단은 최용진이 운영하다가 다시 1978년에 방일영에게 인수되었다.&lt;br /&gt;
&lt;br /&gt;
1947년 1월 21일 제5회 창립위원회를 본사에서 개최하고 2월 23일 주식회사 조선일보사 주주창립총회를 열고 대표이사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공동투자 경영자로 참여시킨 전무 이종민과의 알력이 발생했다. 이종민과의 갈등이 심화되자 그해 8월 3일 방응모는 일단 사직서를 제출했다. 1947년 8월 10일 풍문여고 강당에서 개최된 한인신문기자협회에 참석, 민족청년단에서 언론계 공로자로 방응모, 김성수, 설의식을 지정하여 상을 시상받았다.&amp;lt;ref&amp;gt;&amp;quot;朝鮮 新聞記者協會&amp;quot;, 동아일보 1947년 8월 10일자 2면, 사회면&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납북과 최후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 납북 후 행적은 &amp;quot;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amp;quot;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amp;lt;ref name=&amp;quot;김장&amp;quot;/&amp;gt; 1950년 8월경 개성 송악산 부근에서 미군의 폭격에 희생되었고 심한 폭격으로 시신을 찾을 수 없어 묘도 만들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남한에서는 1955년 7월 7일 생사불명기간 만료로 인해 실종 처리되었다.&lt;br /&gt;
&lt;br /&gt;
=== 사후 ===&lt;br /&gt;
서울 종로에 있던 양자 방재윤의 두 아들 방일영과 방우영은 방응모의 첩 이인숙이 찾아가 피신하라고 권고하여 황급히 피신했다. &lt;br /&gt;
&lt;br /&gt;
7월 6일 그의 행방불명처리가 되고, 방응모의 사후에도 [[조선일보]]는 그의 명의로 발행되었다. 1952년 4월 28일 조선일보는 발행인겸 편집인을 장기영으로, 인쇄인을 방일영으로, 방응모는 명예사장으로 명의변경하여 휴전 후 계속 발행하게 되었다. 1954년 4월 30일 제8회 조선일보 정기주주총회에서 장기영 사장이 사퇴하면서, 명예사장 방응모가 사장으로 추대되고, 발행인 겸 대표취체역에 방일영이 선임되었다. 이후 실종 후 1959년에 법적으로 사망 처리되었다. 그리고 1970년까지는 조선일보는 그의 이름으로 발행되었다.&lt;br /&gt;
&lt;br /&gt;
1970년 2월 19일 조선일보 정기주주총회에서 방응모 이사를 사퇴 수리하였다. 그의 피폭 사망 사실은 1970년대 이후 탈북자들을 통해 대한민국에 소개되었다.&lt;br /&gt;
&lt;br /&gt;
== 친일행위 의혹 ==&lt;br /&gt;
=== 일제 전시체제기 활동 ===&lt;br /&gt;
일제 강점기 말기 언론인으로서 총독부체제에 협력한 기록과 활동이 다수 기록이 있다. 1933년 3월 [[조선일보]] 경영권을 인수하고 부사장직에 취임했을 당시 같은 달에 고사기관총 구입비용 1600원을 군에 헌납하였다. 그는 1935년 친일 잡지 《조광 (잡지)(朝光)》을 창간하였고, 1937년에는 경성방송국 제2방송에 출연하여 일제가 중국의 베일을 절멸케하여 극동평화를 지키려고 한다는 강연을 하였다. 1940년대부터 조광에 집중적으로 친일 논설을 기고하고 시국 강연에 참여하여 전쟁 지원을 독려했다. 1942년 6월에는 '징병령 실시에 일층 더 감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글을 써서 조광에 발표하였다. 애국금차회(1937),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1938), 임전대책협의회(1941), 조선임전보국단(1941) 등 대표적인 친일 단체의 회원에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그는 이런 행적으로 인해 해방정국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명단에 기록되어 있고,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해 발표한 &amp;lt;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amp;gt;에 모두 포함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lt;br /&gt;
&lt;br /&gt;
우리 [[조선일보]]는 다른 어떤 신문도 따라오지 못하는 확고한 신념에서 비국민적 행위를 단연 배격하여 종국까지 조선일보사가 이미 정해놓은 방침에 한뜻으로 매진한다.|원산에서의 순회 강연&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9478.html 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친일 다짐하다 시민에 봉변]《한겨레》2005-08-24 오후 06:13:18&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반민족행위 논란 ===&lt;br /&gt;
방응모를 친일파로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남아 있다. 조선일보 경영 이전에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방응모의 활동이 거의 없었고, 납북된 뒤 소식이 끊겨버린 까닭에 본인이 항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 동안의 행적만으로 친일파 여부를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방응모의 후손들이 영향력 있는 [[조선일보]] 언론사의 사주를 맡았기에 그의 입장에서 서술한 기록을 많이 남기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80년 발간된 그의 전기 《계초 방응모》(조선일보사) 등에는 '그가 민족주의적 선각자'로 묘사되고 있다. 방응모가 친일파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일부세력측은 그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논거로 드는 경우가 많이 있다.&amp;lt;ref&amp;gt;유석재, 계간 《유심》 (2004년 봄호) [http://yousim.buddhism.org/html/2004-spr/tamgu-yoo-seok-jae.htm 삭풍 속에 피어난 금란지교(金蘭之交) - 만해와 계초 방응모]&amp;lt;/ref&amp;gt;&amp;lt;ref&amp;gt;&amp;quot;일제 말기 계초는 시국강연에 나설 것과 창씨개명을 집요하게 강요받았으나 그때마다 묵묵부답으로 거부하며 소신을 지켰다.&amp;quot; 《조선일보》 (2001.3) 조선일보 사장열전 - 계초 방응모편, 《한겨레》 (2001.3.30) [http://www.njoyschool.net/news/article_view.asp?menu_code=s20202&amp;amp;no=1206 조선일보, 일장기를 신문제호 위에]&amp;lt;/ref&amp;gt;&lt;br /&gt;
또한 한국정토학회 고문이자 서울 정토사 주지였던 박설산(1918~2007)이 학도병에 끌려가기 직전인 1943년 12월 28일 밤 서울역에서 스스로 왼발을 선로에 올려 발가락을 절단해 징집을 기피하자 방응모는 만해와 함께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설산을 걱정하면서 입원 중 조선일보 기자를 통해 돈을 전달한 것은 물론 퇴원할 때 돈을 전달하고 뒤를 보살폈다고 한다.&amp;lt;ref&amp;gt;박설산 회고록 &amp;lt;뚜껑없는 조선역사책&amp;gt;(1994, 도서출판 삼장) p240~241&amp;lt;/ref&amp;gt;&lt;br /&gt;
&lt;br /&gt;
2010년 12월, 방응모 관계자들 및 조선일보측은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을 취소해달라'며 법원에 낸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amp;quot;1944년 조선항공업 창립발기인으로 활동한 부분에 대해 친일행위로 판단한 부분을 취소하지만 나머지 활동에 대해서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amp;quot;라고 판결했다. 그 이유인 즉 &amp;quot;방응모는 1933년 조선일보 사장으로 취임해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등으로 활동하며 친일활동을 벌였으며, 1937년 경성방송국 시국강연에서 일본제국이 극동평화를 확립시킬 것이라는 내용의 강연을 하고, 1938년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춘추회의 발기인 겸 간사로 활동하기도 했다&amp;lt;ref&amp;gt;[http://media.daum.net/breakingnews/politics/view.html?cateid=1002&amp;amp;newsid=20101222103319164&amp;amp;p=newsis 법원 &amp;quot;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친일파 맞다&amp;quot;]뉴시스 2010년 12월 22일&amp;lt;/ref&amp;gt;&amp;quot;는 것이다.&lt;br /&gt;
&lt;br /&gt;
2012년 1월 12일 서울고법 행정7부는 방 전 사장의 손자인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이 행정안전부를 상대로 낸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처분 취소 청구소송에서 ‘일제 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의 친일 행위 판정 조항에 비추어 방 전 사장에게 적용된 모두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민족적 지도자로서 비중이 큰 만큼 그로 인한 책임도 무거울 뿐 아니라 고난의 시기를 겪은 민족으로서 그 역사를 반성하자는 입장에 설 때, 방 전 사장의 여러 행태는 반민특별법에서 규정한 친일반민족행위의 유형에 속함을 부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1·2심 재판부는 방 전 사장이 자신이 운영하던 잡지 &amp;lt;조광&amp;gt;에 일제 침략전쟁에 동조하고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문예물과 일제 침략전쟁에 협력할 것을 주문하는 논문을 게재하는 등의 ‘친일’ 행위를 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또한, 2심 재판부는 일본의 전쟁 수행을 돕기 위해 설립된 군수 제조업체 ‘조선항공공업’의 발기인과 감사를 지낸 것은 “감사는 업무집행에 관여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기관으로, 방 전 사장이 이 회사를 운영했다고 볼 수 있다”는 이유로 친일이라고 판단했다.&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4565.html법원 ‘방응모 친일’ 2심서도 인정] 인터넷한겨레 2010년 12월 22일&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가족 관계 ==&lt;br /&gt;
* 아버지 : 방계준(方桂準)&lt;br /&gt;
* 어머니 : 온양 박씨&lt;br /&gt;
** 형 : 방응곤(方應坤)&lt;br /&gt;
** 배우자 : 승계도&lt;br /&gt;
*** 아들 2명 요절&lt;br /&gt;
** 배우자 : 이인숙(李仁淑, 1901년 ~ ?)&lt;br /&gt;
*** 아들 : 방재욱(方在旭, 1925년 ~ 1926년 9월)&lt;br /&gt;
** 배우자 : 배영옥(裵英玉)&lt;br /&gt;
*** 장녀 : 방재숙(方在淑)&lt;br /&gt;
** 배우자 : 노호용(盧鎬龍)&lt;br /&gt;
*** 장남 : 방재선(方在善, 1944년 ~)&lt;br /&gt;
*** 차남 : 방재효(方在孝, 1946년 ~)&lt;br /&gt;
*** 삼남 : 방재규(方在奎, 1948년 ~)&lt;br /&gt;
&lt;br /&gt;
** 양자 : 방재윤(方在允 또는 方在胤, 1901년 ~ 1940년, 형 방응곤의 차남)&lt;br /&gt;
*** 손자 : 방일영(方一榮, 1923년 ~ 2003년)&lt;br /&gt;
**** 증손 : 방상훈(方相勳, 1948년 ~)&lt;br /&gt;
**** 증손부 : 윤순명 - 윤치호(尹致昊, 1865년 ~ 1945년)의 증손녀&lt;br /&gt;
***** 현손 : 방준오(方俊吾, 1974년)&lt;br /&gt;
***** 현손 : 방정오(方政吾, 1978년)&lt;br /&gt;
**** 증손 : 방용훈(方容勳, 1952년 ~)&lt;br /&gt;
*** 손자 : 방필영(方必榮, 1924년 ~ 1926년)&lt;br /&gt;
*** 손녀 : 방숙영(? ~ 1951년 1월)&lt;br /&gt;
*** 손자 : 방우영(方又榮, 1928년 ~ 2016년)&lt;br /&gt;
**** 증손 : 방성훈(方聖勳, 1973년 ~)&lt;br /&gt;
&lt;br /&gt;
== 기타 ==&lt;br /&gt;
그는 [[한용운]], 최남선, 정인보, 홍명희 등과 친분관계를 형성하고 어울려 지냈다 한다.&lt;br /&gt;
&lt;br /&gt;
김구의 한국독립당의 재정적 후견인 역할을 하였다 하며,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삼의사 유골봉환식 때 김구, 정인보 등과 촬영한 사진이 있다.&amp;lt;ref&amp;gt;백범어록 참조&amp;lt;/ref&amp;gt; 그리고 1945년 11월 23일 조선일보가 복간되자 백범 김구는 '有志者事竟成' 뜻을 지닌 자 성취할 수 있다'는 친필 휘호를 보내며 축하했다.&amp;lt;ref&amp;gt;[http://www.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4060370241 '조선일보 역사 읽기'《조선일보》2004.06.03]&amp;lt;/ref&amp;gt;&lt;br /&gt;
한편 임꺽정의 저자인 벽초 홍명희가 방응모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그와 깊은 친분을 맺었다는 주장이 있다. 《조광》 1938년 11월호엔 홍명희가 병중에 있는 방응모를 위로하며 지은 한시가 방응모의 답시와 함께 실려 있다고 한다.&amp;lt;ref&amp;gt;[http://weekly.chosun.com/site/data/html_dir/2004/11/05/2004110577041.html ‘임꺽정’으로 되살아난 독립운동의 魂! 주간조선 1827호 2004.11.04&amp;lt;/ref&amp;gt; 또한 [[안창호]]의 비서실장을 지낸 독립유공자 구익균은 방응모와 안창호가 친밀했다는 주장을 했다.&amp;lt;ref&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09/2008030901055.html &amp;quot;공산주의자들, 도산 비판하다가도 하숙비 떨어지면 찾아와&amp;quot;] 조선일보, 2008-03-10 03:22&amp;lt;/ref&amp;gt;&lt;br /&gt;
또한 박설산에 따르면 1943년 만해 한용운에게 학도병으로 끌려가게 되었음을 알리려 심우장으로 찾아가게 되었을 때, 한용운과 방응모가 바둑을 두고 곁에서 정인보가 훈수를 두고 있었다고 한다.&amp;lt;ref&amp;gt;박설산 저 &amp;lt;뚜껑없는 朝鮮 역사 책&amp;gt; p.226 도서출판 三藏(1994)&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30년대~1940년대 방응모에게서 장학금을 지원받은 학생 모임인 서중회의 회원들의 그의 인물평은 &amp;quot;첫 인상은 좀 깡마른 모습이었으나 의지가 강한 인물&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56페이지&amp;lt;/ref&amp;gt;&amp;quot;이라는 평을 남기기도 했다.&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 /&amp;gt;&lt;br /&gt;
&lt;br /&gt;
== 참고 자료 ==&lt;br /&gt;
* 청산하지 못한 역사: 언론 내세워 일제에 아부한 교화 정책의 하수인 (문영숙) (반민족문제연구소, 청년사, 1994)&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민족 계몽의 초석 방응모(이동욱 저, 지구촌, 1998)&lt;br /&gt;
* 계초 방응모전(계초전기간행위, 조선일보사, 1980년)&lt;br /&gt;
* 계초 방응모(이동욱, 방일영문화재단, 1996)&lt;br /&gt;
&lt;br /&gt;
== 외부 링크 ==&lt;br /&gt;
* [https://web.archive.org/web/20050123171046/http://chosunhost.com/ 계초방응모 기념사업회]&lt;br /&gt;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09145 &amp;lt;조선일보&amp;gt;, 방응모 전 사장의 '친일행적' 말한다] - 오마이뉴스 04.09.10일자&lt;br /&gt;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020302101749 방응모ㆍ 김성수 친일행적 뭔가 : &amp;lt;긴급입수&amp;gt;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 全文] - 프레시안 2002-03-02&lt;br /&gt;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54052 그가 '&amp;lt;조선&amp;gt;의 주인' 주장하는 이유] 오마이뉴스 2001년 9월 20일자&lt;br /&gt;
*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956 방재선씨, 호주·상속 원인무효소송 제기]&lt;br /&gt;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4/06/2008040601053.html '5인 친필 서첩' 발굴] 조선일보 2008년04월06일자]&lt;br /&gt;
&lt;br /&gt;
[[분류: 감자]]&lt;/div&gt;</summary>
		<author><name>Nsgjjsjsjy02</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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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방응모</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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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Nsgjjsjsjy02: /* 조선일보 폐간 사건 */&lt;/p&gt;
&lt;hr /&gt;
&lt;div&gt;{|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width:100%&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0%&amp;quot;|사진&lt;br /&gt;
|[[파일:방응모.jpg|center|200픽셀]]&lt;br /&gt;
|+ '''방응모'''&lt;br /&gt;
|+ style=&amp;quot;caption-side:bottom;text-align:left:&amp;quot;|출처: 위키백과&lt;br /&gt;
|출생||1883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조선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또는 정부면 성내동&lt;br /&gt;
|-&lt;br /&gt;
|사망||1950년경으로 추정&lt;br /&gt;
|-&lt;br /&gt;
|사인||불명&lt;br /&gt;
|-&lt;br /&gt;
|거주지||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amp;gt; 경성부 -&amp;gt; 경기도 양주군 의정부읍&lt;br /&gt;
|-&lt;br /&gt;
|국적||대한민국&lt;br /&gt;
|-&lt;br /&gt;
|본관||온양&lt;br /&gt;
|-&lt;br /&gt;
|별칭||호: 계초(啓礎), 춘해(春海)&lt;br /&gt;
|-&lt;br /&gt;
|직업||교사, 변호사, 상인, 언론인, 기업인, 사회운동가, 정치가&lt;br /&gt;
|-&lt;br /&gt;
|배우자||승계도, 이인숙, 배영옥, 노효용&lt;br /&gt;
|-&lt;br /&gt;
|자녀||방재숙(딸), 방재욱·방재선·방재효·방재규(아들), 방재윤(양자)&lt;br /&gt;
|-&lt;br /&gt;
|부모||방계준(부), 온양박씨(모)&lt;br /&gt;
|}&lt;br /&gt;
&lt;br /&gt;
'''방응모'''(方應謨, 평안북도 정주군, 1883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 1950년 8월(추정)는 [[일제강점기]]의 교육자, 언론인, 법조인, 기업인이자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언론인이며 정치인이다. 호는 '''춘해'''(春海)이고, 뒤에 '''계초'''(啓礎)로 고쳤다.&lt;br /&gt;
&lt;br /&gt;
1922년 동아일보 정주 지국을 인수해 지국장을 지내다가 1924년 금광업에 뛰어들어 큰 부를 얻게 되었다. 1932년 6월 조선일보에 입사하였고 이후 영업국장이 되어 조선일보의 판매망을 장악하게 되고 경영권을 인수하면서 1933년 3월 조선일보 부사장이 되었다. 1933년 7월부터 1950년 7월까지 종신으로 [[조선일보]]의 사장을 역임하였다. 1935년 창간한 월간잡지 '조광(朝光)'은 친일 논란이 있다.&amp;lt;ref&amp;gt;안은필. [http://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9211 조선일보가 가장 빛나던 시기, ‘안재홍 시대’]&amp;lt;/ref&amp;gt;&amp;lt;ref name=&amp;quot;안은&amp;quot;&amp;gt;안은필. [http://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9279 방응모 친일증거, “모래밭에서 모래 찾기”]국민TV. 기사입력 2015년 4월 23일. 기사수정 2015년 4월 24일.&amp;lt;/ref&amp;gt;&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2/0002006080?sid=102 한홍구 &amp;quot;박정희는 공포와 욕망의 정치를 했다&amp;quot;]. 프레시안. 2015년 4월 13일.&amp;lt;/ref&amp;gt;&amp;lt;ref&amp;gt;이민영.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1/0002255321?sid=102 고법 “방응모 前조선일보 사장 친일행적 대부분 인정”]. 서울신문. 2012년 1월 13일.&amp;lt;/ref&amp;gt;&amp;lt;ref&amp;gt;노현웅.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8/0002251781?sid=102 조선 방응모·동아 김성수의 ‘친일’…수년째 결론 안 내고 미루는 법원]. 한겨레. 2014년 11월 3일.&amp;lt;/ref&amp;gt;&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6/0000000413?sid=110 김성수ㆍ방응모와 친일언론인 군상]. 미디어오늘. 2002년 3월 12일.&amp;lt;/ref&amp;gt; 언론계에서 활동하면서도 사업가의 길을 함께 걸었고, 교육 장학 활동을 하였으며, 1945년 광복 직후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 고문과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안재홍]]의 추천을 받아 한국독립당 중앙상무위원과 독립촉성국민회 총무부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amp;lt;ref name=&amp;quot;안은&amp;quot;/&amp;gt;&amp;lt;ref&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16/2008031600800.html 계초 방응모와의 우정도 여러 편의 시로 표현해&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해방 정국에서 김구의 재정적 후견인으로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등 삼의사 유골 봉환 사업과 신탁통치 반대 운동 등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대한민국 수립 이후 사회민주주의 정치가인 조소앙과 사회당을 결성해 문교정책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lt;br /&gt;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 납북 후 행적은 &amp;quot;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amp;quot;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lt;br /&gt;
&lt;br /&gt;
== 생애 ==&lt;br /&gt;
=== 생애 초기 ===&lt;br /&gt;
==== 출생과 성장 ====&lt;br /&gt;
방응모는 1883년 11월 3일 또는 9월 29일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바우머리 부락 또는 정주군 정부면 성내동 425번지에서 '''방계준(方桂準)'''과 온양 박씨(溫陽朴氏)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그는 어려서 집중력이 남달리 뛰어난 반면 고집이 셌다는 평이 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페이지&amp;lt;/ref&amp;gt; 그의 '''삼촌 방계묵(方啓默)'''은 그의 고집있는 기질을 두고 저놈은 쇠작두 말고 나무 작두로 잘라 죽여야 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3~54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친척들의 야멸찬 말들이 그에게 상처를 주거나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4페이지&amp;lt;/ref&amp;gt; 또한 그의 유년시절을 본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가 태어날 당시 태몽도 없었고, 신동이라는 말도 별다르게 듣지 않았다고 한다. 어려서 빈곤한 가정환경으로 방응모는 정규 학교에는 입학하지 못하고, 16세 때까지 서당에 드나들며 한학을 익혔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던 중 그가 어느정도 실력이 우수하다고 인정되자, 스승인 승창률은 잠시 방응모에게 어린아이들을 돌보게 한 후 자리를 피하곤 했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1페이지&amp;lt;/ref&amp;gt; 그는 홀로 사서육경을 탐독, 독파하였다. 21세 무렵 잠시 서당 훈장을 지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896년 독립협회의 활동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5페이지&amp;lt;/ref&amp;gt; 형 방응곤이 예배당에 다니게 되자&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2페이지&amp;lt;/ref&amp;gt;, 그를 통해 신문물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다. 그 뒤 우연히 경성부에 갔다가 신문물을 보고 충격을 받아 17세에 독학으로 신학문과 일본어, 중국어, 수학 등을 독파하였다. 유년시절 서당의 성리학 스승이던 승창률의 친척인 승시영(承時榮)과 조씨(趙氏)의 딸 승계도와 결혼했다.&lt;br /&gt;
&lt;br /&gt;
결혼한 다음 해에도 그는 공부를 한다며 책만 사다 읽곤 했고&amp;lt;ref name=&amp;quot;fsfs60&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60페이지&amp;lt;/ref&amp;gt;, 부인 승계도는 생계를 위해 몸소 나섰다.&amp;lt;ref name=&amp;quot;fsfs60&amp;quot;/&amp;gt; 부인 승계도는 친척 가운데 콩을 싸게 넘겨주는 이들이 있어 그 콩으로 두부를 만들거나 콩나물을 키워 장사를 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61페이지&amp;lt;/ref&amp;gt; 그의 아내 승계도는 남편에 대한 믿음이 절대적이었고 탓을 하거나 가출하지 않았다. 이후 그는 서당 훈장으로 초빙되었으나, 그가 가는 마을의 기존 훈장, 한학자들은 그를 적대적으로 대했다. 그렇다고 마을 사람들의 일부 지명이 있었으나 자신의 스승의 자리를 침해할 수 없다 하여 그는 자신의 동리의 훈장일은 사양하였다. 그는 마을을 나가 신학문을 하는 친구들과 어울렸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62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계몽 운동 ====&lt;br /&gt;
도산 [[안창호]]와 남강 이승훈이 연사로 돌아다니며 애국 계몽 강연과 문맹들의 교육, 야학 사업을 하였고, 여기에 감동받은 청년들이 서당과 야학을 열고 문맹들과 여성들에게 한글 교육을 하였다. 도산 [[안창호]]의 강연과 남강 이승훈의 강연을 찾아다니며 듣다가 감동받은 방응모 역시 교육, 계몽에 참여하였다.&lt;br /&gt;
&lt;br /&gt;
그는 청년회의 활동에 몰두하였으나, 농번기에 작은 일손이라도 더 필요했던 동리 노인들은 젊은 아이들이 일은 하지 않고 무슨 모임이다 하여 어울려 돌아다니는 꼴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또한 모임 구성원들 역시 &amp;quot;의식 자체가 아직 전근대적이었고, 사고의 분화를 겪지도 않은데다가, 이들의 조직 활동이 기분 좋으면 나오고 기분 나쁘면 빠져 버리는 것이 예사&amp;quot;라 청년 모임들은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청년단체의 실패에 좌절하고 다시 귀향했으며, 이때 그는 춘해(春海)라는 아호를 스스로 지었다. 그의 집안에서는 그가 정착하기를 바라고 정주읍 성내동에 집을 얻어 주었다.&lt;br /&gt;
&lt;br /&gt;
안창호의 계몽 강연에 감동받은 남강 이승훈이 1907년(융희 1년) 8월 김덕용(金德鏞)을 초빙하여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 오산에서 신식 교육을 하는 소학교 과정의 학교 강명의숙을 세우고 산수, 수신, 역사, 지리, 체조를 가르쳤고, 그해 12월에는 중학교 과정인 오산학교를 세우고 학생 7명을 처음 받아들여 개교했다. 1908년에는 오산학교에 학생들이 모여 3개 반으로 편성되었고, 정주군 출신의 춘원 이광수가 오산중학교의 교사로 초빙되어 축구, 야구, 테니스, 배구 등을 지역에 처음 소개하였다. 방응모는 어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학교에 입학해 신학문을 접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0페이지&amp;lt;/ref&amp;gt; 그는 이승훈과 의기투합해 민립 대학을 세우는 운동을 추진했지만 조선총독부 평안북도청 학무국에서 승인을 거부하여, 대학 설립에 실패했다.&lt;br /&gt;
&lt;br /&gt;
=== 언론, 기업 활동 ===&lt;br /&gt;
==== 계몽 활동과 언론 활동 ====&lt;br /&gt;
1915년부터 1924년 방응모는 지역 지식인들, 유학파 청년, 계몽 청년들이 모여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하는데 참여했고, 민립대학기성회 평안북도지부에서 활동하면서 민립대학기성회 중앙회 중앙위원 조만식 등과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언변과 용모가 되었던 그의 여관에도 손님들이 몰렸고, 그가 &amp;quot;2백원도 좋고 5백원도 좋다며 보태달라&amp;lt;ref name=&amp;quot;fsfs87&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7페이지&amp;lt;/ref&amp;gt;&amp;quot;고 하면 기부금을 내는 이들이 있었다. 대신 하룻밤을 의탁하려고 그의 여관을 찾은 이들에게 무료 숙식을 제공하기도 했다.&amp;lt;ref name=&amp;quot;fsfs87&amp;quot;/&amp;gt; 1919년 정주에서 3.1 만세 운동이 벌어지자, 그도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형사들의 눈을 피해 방응모는 만세운동을 하다 재빨리 몸을 피해 화를 면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8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1922년 6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인수하여 분국장에 취임했다. 6월 9일에는 정주군 지역 체육행사로 테니스 대회를 개최하였다. 그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경영하는 동시에 그는 농촌 계몽운동 등에 적극 투신하여 인망을 쌓았다. 처음 몇번은 친구 전우현의 자금을 빌려 부족분을 메우기도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02페이지&amp;lt;/ref&amp;gt; 한다. 1922년 6월 19일&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96페이지&amp;lt;/ref&amp;gt; 동아일보 본사를 설득하여 정주분국을 동아일보사 정주지국으로 승격시켰다. 동아일보사 지부장 재직 시 그는 전우현과 함께 의기투합하여 민립 대학 설립 자금과 농촌진흥회 회원의 여비와 회비를 염출하기 위한 목적 및 당시 교사도 없이 난관에 처했던 오산학교의 재개교를 위한 &amp;quot;오산학교의 부흥 운동을 목표로 한 재단법인 촉성 기금 마련&amp;quot; 등을 계획했다. 총독부의 인허가 거부로 실패한 대학 설립 자금은 고스란히 오산학교의 부활과 복교 자금으로 투입되었다. 1920년 1월에 경성형무소에서 가석방된 조만식은 이승훈을 만났고, 다시 조만식이 오산학교를 맡으면서 학교는 다시 정상 운영되었다.&lt;br /&gt;
&lt;br /&gt;
1923년 동아일보 정주군 분국이 지국으로 승격되자 정주 지국장으로 동아일보 정주지국을 경영하였고, 같은 해 7월 여성들의 사회참여와 평등권 신장을 위한 여자교육회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이후 대규모 수해가 나자, 정주군 수해구제회를 결성하여 봉사활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1923년 4월 조만식·송진우·안재홍·김성수 등의 주도로 민간 자본으로 대학교 설립을 추진하기 위한 조직인 조선민립대학기성회가 결성되자, 방응모는 민립대학 기성회에 참여하여 민립대학기성회 정주군준비회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5월에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정주지방지부가 설립되자 기성회 정주지부 상무위원을 맡았다.&lt;br /&gt;
&lt;br /&gt;
==== 광업 경영과 조선일보 입사 ====&lt;br /&gt;
1924년 봄 오산학교 교감으로 있던 전우현이 방응모와도 안면이 있던 금광 채굴업자 두 명을 데리고 그를 찾아왔다. 그들은 자신들이 봐 둔 산이 있다고 방응모에게 소개했다. 그는 선천군의 지역 유지이자 최창학의 친구이며, 그가 동아일보 지국장으로 알게 된 이봉찬을 찾아갔다. 한학자로 알고 있던 그가 금광 투자를 제의하자 &amp;quot;한문이라면 빼지 않고 알려고 드는 한학 훈도가 어떻게 금광을&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16페이지&amp;lt;/ref&amp;gt;&amp;quot; 하느냐 하였지만, 이봉찬은 그에게 금광, 광산에 대한 지식을 알려주었다. 이봉찬은 그에게 광산 지식을 알려주며 최창학의 소유지 중 폐광을 빌리는 법을 알려주었다. 방응모의 됨됨이에 감복한 듯, 그의 수많은 질문에 적잖은 충고를 자임해주었다.&amp;lt;ref name=&amp;quot;fsfs117&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5페이지&amp;lt;/ref&amp;gt; 이봉찬은 최창학에게 방응모를 소개하는 편지를 수차례에 걸쳐 보내주었다.&amp;lt;ref name=&amp;quot;fsfs117&amp;quot;/&amp;gt; 이봉찬은 방응모의 친구들이 봐 둔 갱도를 임대받도록 도와주었다. 이봉찬은 방응모의 한학 실력과 사람됨을 알아보고 있어, 자금을 쾌히 빌려주었다.&amp;lt;ref name=&amp;quot;fsfs117&amp;quot;/&amp;gt;&lt;br /&gt;
&lt;br /&gt;
이후 광산업에 뛰어들어 1924년 여름 압록강변의 최창학 소유 폐금광인 평안북도 삭주군 외남면 교동 다릿골의의 삭주 교동광업소를 찾아가 10미터 정도 땅을 파고 금맥을 발견했다. 바로 삭주 교동광업소를 인수, 경영을 확대하였다. 이때 만난 동업자의 딸이자 친구 전우현의 조카딸인 '''이인숙(李仁淑)'''을 만났다. 본처 승계도가 두 아들을 잃고 복부 수술이 잘못되어 아이를 얻지 못하게 되자 방응모에게도 수많은 중매가 들어왔다. 자식들을 병으로 잃은 것이 자신의 불찰이라고 본 승계도는 그에게 작은 부인이라도 들이자는 말을 꺼내기도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18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26년 방응모에게 광산 사업을 제안했던 두 친구가 손을 털고 나갔고, 그의 가족은 돈이 없어 쌀 대신 좁쌀로 좁쌀죽을 먹으며 연명해야 했다. 방응모는 정주군에 사는 비슷한 또래의 먼 친척 방상진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고, 방상진과 일꾼 대여섯 명, 그리고 후처 이인숙의 친정 쪽에서 얻어온 토지문서를 얻어 자금을 마련, 삭주 다릿골 광산으로 가서 다시 금광을 채굴했다. 금맥은 쉽게 나오지 않았고, 출몰하는 마적떼에게 소와 기구를 약탈당했다. 동시에 빚쟁이들의 독촉에 시달렸으나 '''''1926년 7월 지하 300m 지점에서 금맥을 확보했다. 이후 연간 300kg의 금을 생산, 그는 굴지의 광산업자로''''' 성장해 금맥을 찾아 벼락부자가 되었다. 그는 방상진을 교동금광 총감독에 맡겼다. 이때 그는 최창학에게 임대료에 이자를 쳐서 보내주었다.&lt;br /&gt;
&lt;br /&gt;
그때까지 첫 부인 승계도가 두부를 팔아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미국산 포드 T형자동차'''''를 타고 금의환향했다. 1928년 방응모는 자신의 아호인 춘해를 딴 춘해 장학회를 만들고 장학생들의 모임인 이심회를 만든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48페이지&amp;lt;/ref&amp;gt; 그 해에 방응모는 교동지역에 파출소 지소를 유치하였고, 마적단에 시달리던 주민들은 그의 송덕비를 세우기도 했다. '''''1928년에 그는 의정부 직동, 흥선대원군의 별장이 있던 곳 바로 뒤에 위치한 건물을 매입'''''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한용운]], 홍명희를 자주 초대했다.&lt;br /&gt;
&lt;br /&gt;
'''''1932년 방응모는 교동광산을 135만원이란 거액에 일본 중외광업주식회사에 매각'''''했다. 그 뒤 1932년 6월부터 조선일보 영업국장으로 활동하다 '''1933년 3월 [[조선일보]]의 경영권을 인수'''하여 부사장에 취임하였다.&lt;br /&gt;
&lt;br /&gt;
그는 교동광업소를 운영하며 모은 재력을 바탕으로 부사장 재직 중 [[조선일보]]의 대주주가 되었으며, 1933년 7월 8대 사주 조만식으로부터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제9대 [[조선일보]] 사주로 취임, 활동했다.&amp;lt;ref&amp;gt;조선일보는 1932년 7월에 조만식을 사장으로 영입했지만, 조만식은 거의 평생을 평양에서 살아왔던데다 서울에서 활동하기에는 적응을 잘하지 못했다. 조만식은 신문사 경영난과 지역감정의 혹독한 시련을 받은 채 9개월만에 퇴사했다. 그리고 조만식 후임으로 1933년, 방응모를 사장으로 추대하기에 이르렀다.&amp;lt;/ref&amp;gt;&amp;lt;ref&amp;gt;《한국사 시민강좌 제47집, 대표적 독립운동가 12인》,일조각. p145&amp;lt;/ref&amp;gt; 방응모 취임 이후의 초대 부사장은 이광수, 주필은 서춘이었다.&lt;br /&gt;
&lt;br /&gt;
=== 언론, 사업 활동 ===&lt;br /&gt;
==== 사회사업과 조선일보 인수 계획 ====&lt;br /&gt;
금광 사업에 성공한 그는 영림, 조림 사업에도 투자하였다. 방응모는 배우자 승계도에게서 더 이상 아들을 얻지 못하자 첩 이인숙을 통해 아들을 얻으려고 하였다. 이인숙은 아들을 낳았으나 이 아들은 곧 사망하였다. 아들을 잃은 이인숙은 승계도의 도움을 받다가, 그해 6월 방응모가 있는 광산으로 가 생활하였다'''. 승계도와 이인숙을 통해 자녀를 얻지못하자 42세가 되던 해인 1924년 친형인 방응곤의 둘째 아들 방재윤을 양자로 입양시켰다.'''&lt;br /&gt;
&lt;br /&gt;
[[파일:방응모장학생.jpg|섬네일|160px|오른쪽|방응모와 그의 장학금을 받던 학생들. 가운데 앉은 이가 방응모이고, 서있는 이들 중 왼쪽에서 두 번째는 방응모의 양자 방재윤.]]&lt;br /&gt;
&lt;br /&gt;
1930년 배영옥과 결혼하여 딸 방재숙을 얻었다. 1932년 광산업을 정리하였고 언론사업을 비롯하여 육영사업과 조림 및 간척사업 등을 벌였다. 또한 고아원과 사회복지단체에 후원금을 지원하면서 인망을 얻기도 했다. 삭주 지역에서는 그의 송덕비가 세워지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932년 그는 수원군 팔탄면 노하리 일대의 갯벌에 일본인이 수차례 뚝을 쌓다가 실패했다는 정보를 얻고 임삼진을 통해 조선총독부에 허가를 요청하였다. 간척 사업은 이후 1935년부터 시작되었지만 1932년부터 은밀히 착수되어 왔다.&lt;br /&gt;
&lt;br /&gt;
1933년 무렵 방응모가 [[조선일보]] 인수에 나서기 전부터 그는 [[한용운]]을 위한 일이라면 돈을 아끼지 않고 지출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성북동 222번지 언덕에 만해를 위해 기와집 한 채를 지어주었는데 심우장(尋牛莊)이 그것이다. 또한 만해가 일제의 배급을 거부해 생활이 어렵게 되자 만해에게 생활비를 지급했던 방응모는 만해가 병석에 누운 1944년에는 치료비를 지원해주기도 했다.&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6/0000043262?sid=103 만해가 일송 선생 5일장 치른 사연]&amp;lt;/ref&amp;gt; 그 외에도 방응모는 만해 한용운·벽초 홍명희 등과 함께 새해가 되면 백천온천에도 같이 다녀올 정도로 두터운 친분을 맺었다.&lt;br /&gt;
&lt;br /&gt;
방응모의 광산 매각을 일본 정부 측에 알리고 다리를 놓은 것은 고일청(高一淸)이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84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32년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사건으로 체포된 [[안창호]]의 사면 탄원과 보석을 위해 노력하였다. 안창호가 윤봉길을 사주했다는 증거가 없으며 그가 테러행위를 지시했다는 증거 자료나 문건이 없다는 것이 방응모의 안창호 탄원 이유였다. 그러나 총독부 경무국장은 그의 안창호 석방 제안을 정중히 거절한다. 1936년 동방문화학원(뒤에 숭문중학교·고등학교 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1939년 9월에는〈조선일보〉의 조간 1회, 석간 2회의 1일 3회 발행을 시작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인수와 경영 ====&lt;br /&gt;
1933년 1월 16일 그는 정식으로 주식회사 [[조선일보]]사를 창립, 1월 18일에 발표된 창립 취지서에는 창립위원장 방응모, 창립발기인 방응모, 조만식, 고일청 외 등이 참여했다. 일단 그는 조만식을 사장으로 임명하고 자신은 부사장으로 있다가, 그해 3월 13일 다시 부사장에 취임했다. 4월 25일 편집인 겸 발행인이 되고, 4월 29일에는 조선일보의 조간, 석간제 발행을 부활, 확정시켰다. 1933년 7월 10일 총독부로부터 조선일보사의 법인 등록 승인을 얻어냈다. 7월 10일 조만식의 사퇴로, [[조선일보]]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다. 1933년 그는 자신의 아호를 춘해에서 계초로 바꾸었다. 그는 유능한 문인, 필진의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 상금 1천 원을 걸고 작가를 영입하였다.&lt;br /&gt;
&lt;br /&gt;
1934년 3월 25일 이광수를 비롯하여 서춘, 김동진, 함상훈, 신태익 등을 [[조선일보]]로 영입해 왔다. 그 외에도 정주군 출신 언론인, 작가들이 조선일보로 많이 오게 되었다. 이후 동아일보와 갈등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이광수가 조선일보로 옮겨와 부사장직에서 9개월 근무했다. 당시 조선일보 내부에서는 문모 라는 이가 이광수의 등장으로 자신의 입지 약화를 우려해 오랫동안 이광수를 내보내려 흉계를 꾸몄다고 한다. 이광수는 1934년 5월 25일자로 돌연 사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65페이지&amp;lt;/ref&amp;gt; 문모는 그에게 오히려 잘 됐다는 식으로 말하다가 방응모에게 호되게 혼이 났다. 그리고 문모로 하여금 즉시 금강산에 들어가 이광수를 다시 데려오게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65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이광수는 아들 봉근(당시 8살)의 사망 등으로 실의에 빠졌고, 1935년에 가서야 이광수를 조선일보 고문이자 필진으로 재영입하게 됐다.&lt;br /&gt;
&lt;br /&gt;
==== 동방문화학원 재단 설립 ====&lt;br /&gt;
방응모는 1936년 방농장의 소유권을 기본 자산으로 하는 재단법인 동방문화학원(東邦文化學院)을 설립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6페이지&amp;lt;/ref&amp;gt; 동방문화학원은 학교 법인으로 인가된 재단 법인으로, 그뒤 고계학원과 인연을 가지고 1936년부터는 보성고등보통학교를 후견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 분리되었다. 그뒤 방응모 장학생인 서중회 회원들을 위한 방응모 장학사업을 주관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7페이지&amp;lt;/ref&amp;gt;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태평로 구 조선일보 사옥 안에 동방문화학원의 간판을 달고 조광 잡지를 계속 발행하는 조광사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7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일제 강점기 후반 ===&lt;br /&gt;
==== 중일 전쟁 전후 ====&lt;br /&gt;
중일전쟁 개전 직후인 1937년 7월 11일에 열린 [[조선일보]] 간부회의에서 주필 서춘이 '일본군, 중국군, 장개석씨'등으로 쓰던 용어를 '아군, 황군, 지나, 장개석'으로 고치고 일본 국민의 입장에서 논설을 쓸 것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편집국장 김형원과 영업국장 김광수가 적극 반대를 하기도 했으나, 방응모는 '일장기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이미 몇 십만 원의 손해를 보았을 뿐 아니라 [[3.1 운동]] 때처럼 신문이 민중을 지도할 수 없다'면서 서춘의 입장을 지지했다. 한편으로 방응모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된 [[안창호]]를 [[조선일보]]에 영입하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안창호는 옥중에서 얻은 간질환과 폐질환 등으로 고생했고, 진료비 등을 수시로 지원하고 문병했음에도 출옥후 얼마 뒤에 사망한다.&lt;br /&gt;
&lt;br /&gt;
1933년 이심회(以心會：후에 序中會, 방응모장학회 등으로 명칭이 바뀜)라는 장학회를 만들어 국내 대학생과 해외유학생들에게 학자금을 지급하기도 했으며, 재단법인 동방문화학원(東方文化學院：지금의 숭문중·고등학교 전신)의 이사장직을 맡기도 했다. 또한 자신의 막대한 재원을 들여 1936년부터 함경남도 영흥군 일대에 당시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대단위 조림사업을 벌였으며, 그 전 해인 1935년부터는 경기도 수원군 팔탄면 일대에서 만 2년간에 걸친 간척사업을 벌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937년 12월 24일 [[안창호]]는 병보석 판정을 받고 재판소가 지정한 현 서울대학교병원인 경성제국대학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안창호의 입원 중에 시중을 든 사람으로는 안창호의 외조카 김순원과 청년 박정호 두 사람이었고, 나중에는 이응준 장군의 부인 이정희가 끝까지 지성껏 간호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7페이지&amp;lt;/ref&amp;gt; [[안창호]]는 병상에서 병원비 문제로도 고초를 겪었다. 이 때문에 조만식은 일본 경찰로부터 안창호의 병원비를 대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음에도, &amp;quot;내가 먹고 살면서 그 선생을 돌보지 않을 수 없다&amp;quot;며 완강히 거절하고 안창호를 도왔다고 한다. 안창호의 간호를 같이 도와주던 이응준 장군 부인 이정희는 10일마다 계산되어 나오는 병원 입원비로 안창호 선생이 괴로워하는 표정을 지켜볼수 없었다고 진술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8페이지&amp;lt;/ref&amp;gt; 방응모는 5백원의 수표 한 장을 안창호에게 전달하였다. 50일간의 입원비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9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안창호]]는 1938년 3월 10일 밤 12시 경성제국대학 병원에서 운명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폐간 사건 ====&lt;br /&gt;
일본의 전쟁이 격화되면서 조선총독부 공보국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1940년에 강제로 폐간조치 했다. 광산을 팔아서 자신의 모든 것을 조선일보에 바쳤던 방응모는 큰 절망과 좌절을 느껴야 했다. [[한용운]]은 ‘신문이 폐간되다/ 붓이 꺾이어 모든 일이 끝나니…’로 시작하는 시를 지어 방응모를 위로했다. &amp;lt;ref&amp;gt;붓이 꺾이어 모든 일 끝나니 이제는 재갈 물린 사람들 뿔뿔이 흩어지고 아, 쓸쓸하고 쓸쓸한지고 망국 서울의 가을날 한강의 물도 흐느끼느니 울음 삼켜 흐느끼며 연지를 외면한 채 바다 향해 흐르느니&amp;lt;/ref&amp;gt; 동아일보에는 김성수 외에도 장덕수와 송진우가 있었지만 그에게는 조선일보 폐간을 막기 위해 총독부와 교섭할 인물도 없었다.&lt;br /&gt;
&lt;br /&gt;
1938년 2월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선 내 일간신문 25개사로 조직된 조선춘추회의 창립에 창립발기인으로 참가했고, 조선춘추회 간사로 활동했다. 같은 해 7월 “국민정신을 총동원하고 내선일체 전 능력을 발휘하여 국책 수행에 협력하여 성전(聖戰)의 궁극적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조직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에 참여했고, 그날 결성된 경성연맹 창립총회에서 상담역을 맡았다. 9월부터 조선방공협회 경기도연합지부 평의원을 지냈다. 10월에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주최한 비상시 국민생활 개선을 위한 제1회 생활개선위원회에서 제2부(의례와 사회풍조 쇄신부)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그러나 1938년 10월부터 조선총독부는 조선일보의 신문용지를 검열, 통제하기 시작했다.&lt;br /&gt;
&lt;br /&gt;
1940년 5월 조선총독부 총독 미나미 지로가 방송담화로 창씨개명을 권고했다. 그러나 그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성씨를 이제 와서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며 창씨개명은 완강하게 거절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조선일보에 트집이 잡힐 일이 나타나지 않자 총독부는 전국 면사무소에 조선일보 신문 구독을 거절하도록 명령을 내렸고, 동시에 조선말을 쓰는 민원인에게는 일을 처리해주지 말도록 하게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3페이지&amp;lt;/ref&amp;gt; 조선총독부는 송진우의 예금통장을 문제삼았다. 송진우 명의의 은행저금이 동아일보의 8백여 개의 지국과 분국을 통해 모금된 독립운동 자금이라며, 그리고 동아일보 간부들이 백운장이라는 요정에서 회식을 한 것을 김성수 집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려 했다는 등의 이유로 백관수 동아일보 사장을 전격 구속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3~374페이지&amp;lt;/ref&amp;gt; 동아일보는 백관수가 구속된지 10일 만에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동아일보 중역회의를 열고 폐간신청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4페이지&amp;lt;/ref&amp;gt; 총독부는 조선일보에도 자진 폐간을 권고했고, 1940년 8월 9일 편집회의를 주관, 8월 10일 조선일보의 폐간계를 내고, 8월 10일자로 폐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5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잡지 발행 활동 ====&lt;br /&gt;
신문 강제 폐간 뒤 방응모는 간판을 조광사로 바꿔 걸고, 사옥은 동방흥업주식회사로 등기를 변경해서 유지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1페이지&amp;lt;/ref&amp;gt; 이후 그는 조광 잡지 발행에 전념했다. 1943년 8월 경 일본 중앙대학의 예과를 마친 방일영이 입사&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1페이지&amp;lt;/ref&amp;gt;, 필진으로 참여했다. [[조선일보]]가 폐간된 후에도 방응모는 벽초 홍명희 부자에게 지속적으로 생활비를 대주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4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4년 6월 29일 만해 [[한용운]]이 사망했다. 그는 심우장을 찾아가 3백원을 내놓았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5페이지&amp;lt;/ref&amp;gt;당시 쌀 10가마가 100원이었지만, 심우장은 당장 현금 1원이 없었는데 거액이라서 놀랐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6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광복 이후 언론 및 정치활동 ===&lt;br /&gt;
==== 광복 직후 ====&lt;br /&gt;
1945년 8.15 광복 후에는 8월 말과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朝鮮在外戰災同胞救濟會) 고문과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9월 초 [[안재홍]] 등이 좌경화되는 건준체제에 반발하여 건준을 탈퇴하자 방응모 역시 건준을 탈퇴하였다.&lt;br /&gt;
&lt;br /&gt;
9월 2일 미군정이 주둔하자, 방응모는 윤전기를 찾기 위해 폐간 당시의 증빙서류를 미 군정청에 제시하였으나 소식이 없었다. 총독부는 조선일보 폐간 직후 인수한 윤전기를 경성일보사에 옮겨서 설치했다. 그는 동방문화재단 외 4개 사업소를 적산으로 파악한 미군정을 설득하고, 사옥 문제도 해결하였다.&lt;br /&gt;
&lt;br /&gt;
10월 1일 조선일보 편집위원회를 구성하고, 신문 복간 운동을 추진했다. 조선총독부의 폐간 지시 당시 의정부로 옮겨놓은 일부 활자 자모음이 잘 보관되어, 그해 11월 23일 조선일보를 복간시키고, 서울신문사 사옥에서 조선일보 복간호를 간행하였다. 이후 조선사회문제대책중앙협의회 중앙위원을 거쳐 10월 16일 이승만 등의 주도로 독립촉성중앙회가 결성되자 독촉에 가입하였다.&lt;br /&gt;
&lt;br /&gt;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이 귀국하자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에 입당했다. 12월 [[안재홍]]의 추천으로 한국독립당의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출되어 3~4개월 동안 활동했다.&amp;lt;ref&amp;gt;일각에서는 방응모가 '한독당 재무부장으로 지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1947년부터 한독당 재무부장을 맡은 신창균이 전면 부정했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47/0000002626?sid=102 백범 비서와 '진짜' 한독당 재정부장의 육성증언. 참고.]&amp;lt;/ref&amp;gt; 그 뒤 대한국민총회 발기인, 대한독립애국금헌성회 발기인 등으로 활동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복간 및 군정기 활동 ====&lt;br /&gt;
11월 [[조선일보]]사를 복간시켰다. 그러나 한동안 조선일보의 인쇄는 서울신문사에서 간행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1945년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추념대회에 참여하였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2&amp;quot;&amp;gt;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13&amp;lt;/ref&amp;gt; 순국선열추념대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2&amp;quot; /&amp;gt;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참여,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이 되었다.&amp;lt;ref&amp;gt;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55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6년 2월 26일 서울신문사 공무국 종업원들이 조선일보의 인쇄를 거부해버렸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436페이지&amp;lt;/ref&amp;gt; 그동안 묵시적으로 방해가 은근히 있었다. 표면상의 문제는 임금 문제이나 내용상으로는 조선일보에 대한 조선공산당의 시위의 일종이었다. 사흘간의 교섭 끝에 2월 28일에 가서야 26일자와 27일자를 소급해서 인쇄하여 신문을 한꺼번에 발행하였다. 그러나 3월 1일과 2일에 또다시 인쇄를 거부당해 결국 휴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436페이지&amp;lt;/ref&amp;gt; 조선일보를 경성일보사로 옮겨서 인쇄하기로 하고 3월 5일자로 사고로 독자에게 알렸다.&lt;br /&gt;
&lt;br /&gt;
4월 29일 김구, 김창숙, 김성수, 오세창 등과 함께 서울운동장에서 윤봉길의사 추모회의 창립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amp;lt;ref&amp;gt;&amp;quot;故尹奉吉義士의 記念式 오늘, 發起人會 열고 準備&amp;quot;, 동아일보 1946년 4월 23일자 2면, 사회면&amp;lt;/ref&amp;gt; 그해 5월 조선공업구락부 고문에 위촉되었다.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民族統一總本部) 10인협의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6월 15일 오후 5시 40분 서울역에 마중나가 서울역에 도착한 삼의사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lt;br /&gt;
&lt;br /&gt;
1945년 광복 직후 서기원이 그를 찾아왔다. 서기원은 그때 경성농상실천학교의 동창회로부터 이 학교의 교장이 되어 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이다. 방응모는 서기원의 제의를 받아들여 1946년 8월 28일 동방문화학원 이사장으로 숭문상업학교를 인수, 재단 이사장이 되었다. 후일 방응모가 6.25 전쟁 중에 납북된 후 동방문화학원과 숭문중,고교의 재단은 최용진이 운영하다가 다시 1978년에 방일영에게 인수되었다.&lt;br /&gt;
&lt;br /&gt;
1947년 1월 21일 제5회 창립위원회를 본사에서 개최하고 2월 23일 주식회사 조선일보사 주주창립총회를 열고 대표이사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공동투자 경영자로 참여시킨 전무 이종민과의 알력이 발생했다. 이종민과의 갈등이 심화되자 그해 8월 3일 방응모는 일단 사직서를 제출했다. 1947년 8월 10일 풍문여고 강당에서 개최된 한인신문기자협회에 참석, 민족청년단에서 언론계 공로자로 방응모, 김성수, 설의식을 지정하여 상을 시상받았다.&amp;lt;ref&amp;gt;&amp;quot;朝鮮 新聞記者協會&amp;quot;, 동아일보 1947년 8월 10일자 2면, 사회면&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납북과 최후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 납북 후 행적은 &amp;quot;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amp;quot;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amp;lt;ref name=&amp;quot;김장&amp;quot;/&amp;gt; 1950년 8월경 개성 송악산 부근에서 미군의 폭격에 희생되었고 심한 폭격으로 시신을 찾을 수 없어 묘도 만들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남한에서는 1955년 7월 7일 생사불명기간 만료로 인해 실종 처리되었다.&lt;br /&gt;
&lt;br /&gt;
=== 사후 ===&lt;br /&gt;
서울 종로에 있던 양자 방재윤의 두 아들 방일영과 방우영은 방응모의 첩 이인숙이 찾아가 피신하라고 권고하여 황급히 피신했다. &lt;br /&gt;
&lt;br /&gt;
7월 6일 그의 행방불명처리가 되고, 방응모의 사후에도 [[조선일보]]는 그의 명의로 발행되었다. 1952년 4월 28일 조선일보는 발행인겸 편집인을 장기영으로, 인쇄인을 방일영으로, 방응모는 명예사장으로 명의변경하여 휴전 후 계속 발행하게 되었다. 1954년 4월 30일 제8회 조선일보 정기주주총회에서 장기영 사장이 사퇴하면서, 명예사장 방응모가 사장으로 추대되고, 발행인 겸 대표취체역에 방일영이 선임되었다. 이후 실종 후 1959년에 법적으로 사망 처리되었다. 그리고 1970년까지는 조선일보는 그의 이름으로 발행되었다.&lt;br /&gt;
&lt;br /&gt;
1970년 2월 19일 조선일보 정기주주총회에서 방응모 이사를 사퇴 수리하였다. 그의 피폭 사망 사실은 1970년대 이후 탈북자들을 통해 대한민국에 소개되었다.&lt;br /&gt;
&lt;br /&gt;
== 친일행위 의혹 ==&lt;br /&gt;
=== 일제 전시체제기 활동 ===&lt;br /&gt;
일제 강점기 말기 언론인으로서 총독부체제에 협력한 기록과 활동이 다수 기록이 있다. 1933년 3월 [[조선일보]] 경영권을 인수하고 부사장직에 취임했을 당시 같은 달에 고사기관총 구입비용 1600원을 군에 헌납하였다. 그는 1935년 친일 잡지 《조광 (잡지)(朝光)》을 창간하였고, 1937년에는 경성방송국 제2방송에 출연하여 일제가 중국의 베일을 절멸케하여 극동평화를 지키려고 한다는 강연을 하였다. 1940년대부터 조광에 집중적으로 친일 논설을 기고하고 시국 강연에 참여하여 전쟁 지원을 독려했다. 1942년 6월에는 '징병령 실시에 일층 더 감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글을 써서 조광에 발표하였다. 애국금차회(1937),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1938), 임전대책협의회(1941), 조선임전보국단(1941) 등 대표적인 친일 단체의 회원에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그는 이런 행적으로 인해 해방정국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명단에 기록되어 있고,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해 발표한 &amp;lt;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amp;gt;에 모두 포함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lt;br /&gt;
&lt;br /&gt;
우리 [[조선일보]]는 다른 어떤 신문도 따라오지 못하는 확고한 신념에서 비국민적 행위를 단연 배격하여 종국까지 조선일보사가 이미 정해놓은 방침에 한뜻으로 매진한다.|원산에서의 순회 강연&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9478.html 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친일 다짐하다 시민에 봉변]《한겨레》2005-08-24 오후 06:13:18&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반민족행위 논란 ===&lt;br /&gt;
방응모를 친일파로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남아 있다. 조선일보 경영 이전에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방응모의 활동이 거의 없었고, 납북된 뒤 소식이 끊겨버린 까닭에 본인이 항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 동안의 행적만으로 친일파 여부를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방응모의 후손들이 영향력 있는 [[조선일보]] 언론사의 사주를 맡았기에 그의 입장에서 서술한 기록을 많이 남기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80년 발간된 그의 전기 《계초 방응모》(조선일보사) 등에는 '그가 민족주의적 선각자'로 묘사되고 있다. 방응모가 친일파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일부세력측은 그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논거로 드는 경우가 많이 있다.&amp;lt;ref&amp;gt;유석재, 계간 《유심》 (2004년 봄호) [http://yousim.buddhism.org/html/2004-spr/tamgu-yoo-seok-jae.htm 삭풍 속에 피어난 금란지교(金蘭之交) - 만해와 계초 방응모]&amp;lt;/ref&amp;gt;&amp;lt;ref&amp;gt;&amp;quot;일제 말기 계초는 시국강연에 나설 것과 창씨개명을 집요하게 강요받았으나 그때마다 묵묵부답으로 거부하며 소신을 지켰다.&amp;quot; 《조선일보》 (2001.3) 조선일보 사장열전 - 계초 방응모편, 《한겨레》 (2001.3.30) [http://www.njoyschool.net/news/article_view.asp?menu_code=s20202&amp;amp;no=1206 조선일보, 일장기를 신문제호 위에]&amp;lt;/ref&amp;gt;&lt;br /&gt;
또한 한국정토학회 고문이자 서울 정토사 주지였던 박설산(1918~2007)이 학도병에 끌려가기 직전인 1943년 12월 28일 밤 서울역에서 스스로 왼발을 선로에 올려 발가락을 절단해 징집을 기피하자 방응모는 만해와 함께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설산을 걱정하면서 입원 중 조선일보 기자를 통해 돈을 전달한 것은 물론 퇴원할 때 돈을 전달하고 뒤를 보살폈다고 한다.&amp;lt;ref&amp;gt;박설산 회고록 &amp;lt;뚜껑없는 조선역사책&amp;gt;(1994, 도서출판 삼장) p240~241&amp;lt;/ref&amp;gt;&lt;br /&gt;
&lt;br /&gt;
2010년 12월, 방응모 관계자들 및 조선일보측은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을 취소해달라'며 법원에 낸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amp;quot;1944년 조선항공업 창립발기인으로 활동한 부분에 대해 친일행위로 판단한 부분을 취소하지만 나머지 활동에 대해서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amp;quot;라고 판결했다. 그 이유인 즉 &amp;quot;방응모는 1933년 조선일보 사장으로 취임해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등으로 활동하며 친일활동을 벌였으며, 1937년 경성방송국 시국강연에서 일본제국이 극동평화를 확립시킬 것이라는 내용의 강연을 하고, 1938년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춘추회의 발기인 겸 간사로 활동하기도 했다&amp;lt;ref&amp;gt;[http://media.daum.net/breakingnews/politics/view.html?cateid=1002&amp;amp;newsid=20101222103319164&amp;amp;p=newsis 법원 &amp;quot;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친일파 맞다&amp;quot;]뉴시스 2010년 12월 22일&amp;lt;/ref&amp;gt;&amp;quot;는 것이다.&lt;br /&gt;
&lt;br /&gt;
2012년 1월 12일 서울고법 행정7부는 방 전 사장의 손자인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이 행정안전부를 상대로 낸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처분 취소 청구소송에서 ‘일제 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의 친일 행위 판정 조항에 비추어 방 전 사장에게 적용된 모두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민족적 지도자로서 비중이 큰 만큼 그로 인한 책임도 무거울 뿐 아니라 고난의 시기를 겪은 민족으로서 그 역사를 반성하자는 입장에 설 때, 방 전 사장의 여러 행태는 반민특별법에서 규정한 친일반민족행위의 유형에 속함을 부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1·2심 재판부는 방 전 사장이 자신이 운영하던 잡지 &amp;lt;조광&amp;gt;에 일제 침략전쟁에 동조하고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문예물과 일제 침략전쟁에 협력할 것을 주문하는 논문을 게재하는 등의 ‘친일’ 행위를 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또한, 2심 재판부는 일본의 전쟁 수행을 돕기 위해 설립된 군수 제조업체 ‘조선항공공업’의 발기인과 감사를 지낸 것은 “감사는 업무집행에 관여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기관으로, 방 전 사장이 이 회사를 운영했다고 볼 수 있다”는 이유로 친일이라고 판단했다.&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4565.html법원 ‘방응모 친일’ 2심서도 인정] 인터넷한겨레 2010년 12월 22일&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가족 관계 ==&lt;br /&gt;
* 아버지 : 방계준(方桂準)&lt;br /&gt;
* 어머니 : 온양 박씨&lt;br /&gt;
** 형 : 방응곤(方應坤)&lt;br /&gt;
** 배우자 : 승계도&lt;br /&gt;
*** 아들 2명 요절&lt;br /&gt;
** 배우자 : 이인숙(李仁淑, 1901년 ~ ?)&lt;br /&gt;
*** 아들 : 방재욱(方在旭, 1925년 ~ 1926년 9월)&lt;br /&gt;
** 배우자 : 배영옥(裵英玉)&lt;br /&gt;
*** 장녀 : 방재숙(方在淑)&lt;br /&gt;
** 배우자 : 노호용(盧鎬龍)&lt;br /&gt;
*** 장남 : 방재선(方在善, 1944년 ~)&lt;br /&gt;
*** 차남 : 방재효(方在孝, 1946년 ~)&lt;br /&gt;
*** 삼남 : 방재규(方在奎, 1948년 ~)&lt;br /&gt;
&lt;br /&gt;
** 양자 : 방재윤(方在允 또는 方在胤, 1901년 ~ 1940년, 형 방응곤의 차남)&lt;br /&gt;
*** 손자 : 방일영(方一榮, 1923년 ~ 2003년)&lt;br /&gt;
**** 증손 : 방상훈(方相勳, 1948년 ~)&lt;br /&gt;
**** 증손부 : 윤순명 - 윤치호(尹致昊, 1865년 ~ 1945년)의 증손녀&lt;br /&gt;
***** 현손 : 방준오(方俊吾, 1974년)&lt;br /&gt;
***** 현손 : 방정오(方政吾, 1978년)&lt;br /&gt;
**** 증손 : 방용훈(方容勳, 1952년 ~)&lt;br /&gt;
*** 손자 : 방필영(方必榮, 1924년 ~ 1926년)&lt;br /&gt;
*** 손녀 : 방숙영(? ~ 1951년 1월)&lt;br /&gt;
*** 손자 : 방우영(方又榮, 1928년 ~ 2016년)&lt;br /&gt;
**** 증손 : 방성훈(方聖勳, 1973년 ~)&lt;br /&gt;
&lt;br /&gt;
== 기타 ==&lt;br /&gt;
그는 [[한용운]], 최남선, 정인보, 홍명희 등과 친분관계를 형성하고 어울려 지냈다 한다.&lt;br /&gt;
&lt;br /&gt;
[[김구]]의 한국독립당의 재정적 후견인 역할을 하였다 하며,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삼의사 유골봉환식 때 [[김구]], [[정인보]] 등과 촬영한 사진이 있다.&amp;lt;ref&amp;gt;백범어록 참조&amp;lt;/ref&amp;gt; 그리고 1945년 11월 23일 조선일보가 복간되자 백범 김구는 '有志者事竟成' 뜻을 지닌 자 성취할 수 있다'는 친필 휘호를 보내며 축하했다.&amp;lt;ref&amp;gt;[http://www.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4060370241 '조선일보 역사 읽기'《조선일보》2004.06.03]&amp;lt;/ref&amp;gt;&lt;br /&gt;
한편 임꺽정의 저자인 벽초 홍명희가 방응모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그와 깊은 친분을 맺었다는 주장이 있다. 《조광》 1938년 11월호엔 홍명희가 병중에 있는 방응모를 위로하며 지은 한시가 방응모의 답시와 함께 실려 있다고 한다.&amp;lt;ref&amp;gt;[http://weekly.chosun.com/site/data/html_dir/2004/11/05/2004110577041.html ‘임꺽정’으로 되살아난 독립운동의 魂! 주간조선 1827호 2004.11.04&amp;lt;/ref&amp;gt; 또한 [[안창호]]의 비서실장을 지낸 독립유공자 구익균은 방응모와 안창호가 친밀했다는 주장을 했다.&amp;lt;ref&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09/2008030901055.html &amp;quot;공산주의자들, 도산 비판하다가도 하숙비 떨어지면 찾아와&amp;quot;] 조선일보, 2008-03-10 03:22&amp;lt;/ref&amp;gt;&lt;br /&gt;
또한 박설산에 따르면 1943년 만해 한용운에게 학도병으로 끌려가게 되었음을 알리려 심우장으로 찾아가게 되었을 때, 한용운과 방응모가 바둑을 두고 곁에서 정인보가 훈수를 두고 있었다고 한다.&amp;lt;ref&amp;gt;박설산 저 &amp;lt;뚜껑없는 朝鮮 역사 책&amp;gt; p.226 도서출판 三藏(1994)&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30년대~1940년대 방응모에게서 장학금을 지원받은 학생 모임인 서중회의 회원들의 그의 인물평은 &amp;quot;첫 인상은 좀 깡마른 모습이었으나 의지가 강한 인물&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56페이지&amp;lt;/ref&amp;gt;&amp;quot;이라는 평을 남기기도 했다.&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 /&amp;gt;&lt;br /&gt;
&lt;br /&gt;
== 참고 자료 ==&lt;br /&gt;
* 청산하지 못한 역사: 언론 내세워 일제에 아부한 교화 정책의 하수인 (문영숙) (반민족문제연구소, 청년사, 1994)&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민족 계몽의 초석 방응모(이동욱 저, 지구촌, 1998)&lt;br /&gt;
* 계초 방응모전(계초전기간행위, 조선일보사, 1980년)&lt;br /&gt;
* 계초 방응모(이동욱, 방일영문화재단, 1996)&lt;br /&gt;
&lt;br /&gt;
== 외부 링크 ==&lt;br /&gt;
* [https://web.archive.org/web/20050123171046/http://chosunhost.com/ 계초방응모 기념사업회]&lt;br /&gt;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09145 &amp;lt;조선일보&amp;gt;, 방응모 전 사장의 '친일행적' 말한다] - 오마이뉴스 04.09.10일자&lt;br /&gt;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020302101749 방응모ㆍ 김성수 친일행적 뭔가 : &amp;lt;긴급입수&amp;gt;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 全文] - 프레시안 2002-03-02&lt;br /&gt;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54052 그가 '&amp;lt;조선&amp;gt;의 주인' 주장하는 이유] 오마이뉴스 2001년 9월 20일자&lt;br /&gt;
*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956 방재선씨, 호주·상속 원인무효소송 제기]&lt;br /&gt;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4/06/2008040601053.html '5인 친필 서첩' 발굴] 조선일보 2008년04월06일자]&lt;br /&gt;
&lt;br /&gt;
[[분류: 감자]]&lt;/div&gt;</summary>
		<author><name>Nsgjjsjsjy02</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B0%A9%EC%9D%91%EB%AA%A8&amp;diff=58896</id>
		<title>방응모</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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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06-11T02:41:0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Nsgjjsjsjy02: /* 중일 전쟁 전후 */&lt;/p&gt;
&lt;hr /&gt;
&lt;div&gt;{|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width:100%&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0%&amp;quot;|사진&lt;br /&gt;
|[[파일:방응모.jpg|center|200픽셀]]&lt;br /&gt;
|+ '''방응모'''&lt;br /&gt;
|+ style=&amp;quot;caption-side:bottom;text-align:left:&amp;quot;|출처: 위키백과&lt;br /&gt;
|출생||1883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조선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또는 정부면 성내동&lt;br /&gt;
|-&lt;br /&gt;
|사망||1950년경으로 추정&lt;br /&gt;
|-&lt;br /&gt;
|사인||불명&lt;br /&gt;
|-&lt;br /&gt;
|거주지||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amp;gt; 경성부 -&amp;gt; 경기도 양주군 의정부읍&lt;br /&gt;
|-&lt;br /&gt;
|국적||대한민국&lt;br /&gt;
|-&lt;br /&gt;
|본관||온양&lt;br /&gt;
|-&lt;br /&gt;
|별칭||호: 계초(啓礎), 춘해(春海)&lt;br /&gt;
|-&lt;br /&gt;
|직업||교사, 변호사, 상인, 언론인, 기업인, 사회운동가, 정치가&lt;br /&gt;
|-&lt;br /&gt;
|배우자||승계도, 이인숙, 배영옥, 노효용&lt;br /&gt;
|-&lt;br /&gt;
|자녀||방재숙(딸), 방재욱·방재선·방재효·방재규(아들), 방재윤(양자)&lt;br /&gt;
|-&lt;br /&gt;
|부모||방계준(부), 온양박씨(모)&lt;br /&gt;
|}&lt;br /&gt;
&lt;br /&gt;
'''방응모'''(方應謨, 평안북도 정주군, 1883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 1950년 8월(추정)는 [[일제강점기]]의 교육자, 언론인, 법조인, 기업인이자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언론인이며 정치인이다. 호는 '''춘해'''(春海)이고, 뒤에 '''계초'''(啓礎)로 고쳤다.&lt;br /&gt;
&lt;br /&gt;
1922년 동아일보 정주 지국을 인수해 지국장을 지내다가 1924년 금광업에 뛰어들어 큰 부를 얻게 되었다. 1932년 6월 조선일보에 입사하였고 이후 영업국장이 되어 조선일보의 판매망을 장악하게 되고 경영권을 인수하면서 1933년 3월 조선일보 부사장이 되었다. 1933년 7월부터 1950년 7월까지 종신으로 [[조선일보]]의 사장을 역임하였다. 1935년 창간한 월간잡지 '조광(朝光)'은 친일 논란이 있다.&amp;lt;ref&amp;gt;안은필. [http://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9211 조선일보가 가장 빛나던 시기, ‘안재홍 시대’]&amp;lt;/ref&amp;gt;&amp;lt;ref name=&amp;quot;안은&amp;quot;&amp;gt;안은필. [http://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9279 방응모 친일증거, “모래밭에서 모래 찾기”]국민TV. 기사입력 2015년 4월 23일. 기사수정 2015년 4월 24일.&amp;lt;/ref&amp;gt;&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2/0002006080?sid=102 한홍구 &amp;quot;박정희는 공포와 욕망의 정치를 했다&amp;quot;]. 프레시안. 2015년 4월 13일.&amp;lt;/ref&amp;gt;&amp;lt;ref&amp;gt;이민영.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1/0002255321?sid=102 고법 “방응모 前조선일보 사장 친일행적 대부분 인정”]. 서울신문. 2012년 1월 13일.&amp;lt;/ref&amp;gt;&amp;lt;ref&amp;gt;노현웅.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8/0002251781?sid=102 조선 방응모·동아 김성수의 ‘친일’…수년째 결론 안 내고 미루는 법원]. 한겨레. 2014년 11월 3일.&amp;lt;/ref&amp;gt;&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6/0000000413?sid=110 김성수ㆍ방응모와 친일언론인 군상]. 미디어오늘. 2002년 3월 12일.&amp;lt;/ref&amp;gt; 언론계에서 활동하면서도 사업가의 길을 함께 걸었고, 교육 장학 활동을 하였으며, 1945년 광복 직후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 고문과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안재홍]]의 추천을 받아 한국독립당 중앙상무위원과 독립촉성국민회 총무부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amp;lt;ref name=&amp;quot;안은&amp;quot;/&amp;gt;&amp;lt;ref&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16/2008031600800.html 계초 방응모와의 우정도 여러 편의 시로 표현해&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해방 정국에서 김구의 재정적 후견인으로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등 삼의사 유골 봉환 사업과 신탁통치 반대 운동 등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대한민국 수립 이후 사회민주주의 정치가인 조소앙과 사회당을 결성해 문교정책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lt;br /&gt;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 납북 후 행적은 &amp;quot;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amp;quot;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lt;br /&gt;
&lt;br /&gt;
== 생애 ==&lt;br /&gt;
=== 생애 초기 ===&lt;br /&gt;
==== 출생과 성장 ====&lt;br /&gt;
방응모는 1883년 11월 3일 또는 9월 29일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바우머리 부락 또는 정주군 정부면 성내동 425번지에서 '''방계준(方桂準)'''과 온양 박씨(溫陽朴氏)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그는 어려서 집중력이 남달리 뛰어난 반면 고집이 셌다는 평이 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페이지&amp;lt;/ref&amp;gt; 그의 '''삼촌 방계묵(方啓默)'''은 그의 고집있는 기질을 두고 저놈은 쇠작두 말고 나무 작두로 잘라 죽여야 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3~54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친척들의 야멸찬 말들이 그에게 상처를 주거나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4페이지&amp;lt;/ref&amp;gt; 또한 그의 유년시절을 본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가 태어날 당시 태몽도 없었고, 신동이라는 말도 별다르게 듣지 않았다고 한다. 어려서 빈곤한 가정환경으로 방응모는 정규 학교에는 입학하지 못하고, 16세 때까지 서당에 드나들며 한학을 익혔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던 중 그가 어느정도 실력이 우수하다고 인정되자, 스승인 승창률은 잠시 방응모에게 어린아이들을 돌보게 한 후 자리를 피하곤 했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1페이지&amp;lt;/ref&amp;gt; 그는 홀로 사서육경을 탐독, 독파하였다. 21세 무렵 잠시 서당 훈장을 지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896년 독립협회의 활동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5페이지&amp;lt;/ref&amp;gt; 형 방응곤이 예배당에 다니게 되자&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2페이지&amp;lt;/ref&amp;gt;, 그를 통해 신문물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다. 그 뒤 우연히 경성부에 갔다가 신문물을 보고 충격을 받아 17세에 독학으로 신학문과 일본어, 중국어, 수학 등을 독파하였다. 유년시절 서당의 성리학 스승이던 승창률의 친척인 승시영(承時榮)과 조씨(趙氏)의 딸 승계도와 결혼했다.&lt;br /&gt;
&lt;br /&gt;
결혼한 다음 해에도 그는 공부를 한다며 책만 사다 읽곤 했고&amp;lt;ref name=&amp;quot;fsfs60&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60페이지&amp;lt;/ref&amp;gt;, 부인 승계도는 생계를 위해 몸소 나섰다.&amp;lt;ref name=&amp;quot;fsfs60&amp;quot;/&amp;gt; 부인 승계도는 친척 가운데 콩을 싸게 넘겨주는 이들이 있어 그 콩으로 두부를 만들거나 콩나물을 키워 장사를 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61페이지&amp;lt;/ref&amp;gt; 그의 아내 승계도는 남편에 대한 믿음이 절대적이었고 탓을 하거나 가출하지 않았다. 이후 그는 서당 훈장으로 초빙되었으나, 그가 가는 마을의 기존 훈장, 한학자들은 그를 적대적으로 대했다. 그렇다고 마을 사람들의 일부 지명이 있었으나 자신의 스승의 자리를 침해할 수 없다 하여 그는 자신의 동리의 훈장일은 사양하였다. 그는 마을을 나가 신학문을 하는 친구들과 어울렸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62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계몽 운동 ====&lt;br /&gt;
도산 [[안창호]]와 남강 이승훈이 연사로 돌아다니며 애국 계몽 강연과 문맹들의 교육, 야학 사업을 하였고, 여기에 감동받은 청년들이 서당과 야학을 열고 문맹들과 여성들에게 한글 교육을 하였다. 도산 [[안창호]]의 강연과 남강 이승훈의 강연을 찾아다니며 듣다가 감동받은 방응모 역시 교육, 계몽에 참여하였다.&lt;br /&gt;
&lt;br /&gt;
그는 청년회의 활동에 몰두하였으나, 농번기에 작은 일손이라도 더 필요했던 동리 노인들은 젊은 아이들이 일은 하지 않고 무슨 모임이다 하여 어울려 돌아다니는 꼴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또한 모임 구성원들 역시 &amp;quot;의식 자체가 아직 전근대적이었고, 사고의 분화를 겪지도 않은데다가, 이들의 조직 활동이 기분 좋으면 나오고 기분 나쁘면 빠져 버리는 것이 예사&amp;quot;라 청년 모임들은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청년단체의 실패에 좌절하고 다시 귀향했으며, 이때 그는 춘해(春海)라는 아호를 스스로 지었다. 그의 집안에서는 그가 정착하기를 바라고 정주읍 성내동에 집을 얻어 주었다.&lt;br /&gt;
&lt;br /&gt;
안창호의 계몽 강연에 감동받은 남강 이승훈이 1907년(융희 1년) 8월 김덕용(金德鏞)을 초빙하여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 오산에서 신식 교육을 하는 소학교 과정의 학교 강명의숙을 세우고 산수, 수신, 역사, 지리, 체조를 가르쳤고, 그해 12월에는 중학교 과정인 오산학교를 세우고 학생 7명을 처음 받아들여 개교했다. 1908년에는 오산학교에 학생들이 모여 3개 반으로 편성되었고, 정주군 출신의 춘원 이광수가 오산중학교의 교사로 초빙되어 축구, 야구, 테니스, 배구 등을 지역에 처음 소개하였다. 방응모는 어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학교에 입학해 신학문을 접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0페이지&amp;lt;/ref&amp;gt; 그는 이승훈과 의기투합해 민립 대학을 세우는 운동을 추진했지만 조선총독부 평안북도청 학무국에서 승인을 거부하여, 대학 설립에 실패했다.&lt;br /&gt;
&lt;br /&gt;
=== 언론, 기업 활동 ===&lt;br /&gt;
==== 계몽 활동과 언론 활동 ====&lt;br /&gt;
1915년부터 1924년 방응모는 지역 지식인들, 유학파 청년, 계몽 청년들이 모여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하는데 참여했고, 민립대학기성회 평안북도지부에서 활동하면서 민립대학기성회 중앙회 중앙위원 조만식 등과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언변과 용모가 되었던 그의 여관에도 손님들이 몰렸고, 그가 &amp;quot;2백원도 좋고 5백원도 좋다며 보태달라&amp;lt;ref name=&amp;quot;fsfs87&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7페이지&amp;lt;/ref&amp;gt;&amp;quot;고 하면 기부금을 내는 이들이 있었다. 대신 하룻밤을 의탁하려고 그의 여관을 찾은 이들에게 무료 숙식을 제공하기도 했다.&amp;lt;ref name=&amp;quot;fsfs87&amp;quot;/&amp;gt; 1919년 정주에서 3.1 만세 운동이 벌어지자, 그도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형사들의 눈을 피해 방응모는 만세운동을 하다 재빨리 몸을 피해 화를 면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8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1922년 6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인수하여 분국장에 취임했다. 6월 9일에는 정주군 지역 체육행사로 테니스 대회를 개최하였다. 그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경영하는 동시에 그는 농촌 계몽운동 등에 적극 투신하여 인망을 쌓았다. 처음 몇번은 친구 전우현의 자금을 빌려 부족분을 메우기도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02페이지&amp;lt;/ref&amp;gt; 한다. 1922년 6월 19일&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96페이지&amp;lt;/ref&amp;gt; 동아일보 본사를 설득하여 정주분국을 동아일보사 정주지국으로 승격시켰다. 동아일보사 지부장 재직 시 그는 전우현과 함께 의기투합하여 민립 대학 설립 자금과 농촌진흥회 회원의 여비와 회비를 염출하기 위한 목적 및 당시 교사도 없이 난관에 처했던 오산학교의 재개교를 위한 &amp;quot;오산학교의 부흥 운동을 목표로 한 재단법인 촉성 기금 마련&amp;quot; 등을 계획했다. 총독부의 인허가 거부로 실패한 대학 설립 자금은 고스란히 오산학교의 부활과 복교 자금으로 투입되었다. 1920년 1월에 경성형무소에서 가석방된 조만식은 이승훈을 만났고, 다시 조만식이 오산학교를 맡으면서 학교는 다시 정상 운영되었다.&lt;br /&gt;
&lt;br /&gt;
1923년 동아일보 정주군 분국이 지국으로 승격되자 정주 지국장으로 동아일보 정주지국을 경영하였고, 같은 해 7월 여성들의 사회참여와 평등권 신장을 위한 여자교육회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이후 대규모 수해가 나자, 정주군 수해구제회를 결성하여 봉사활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1923년 4월 조만식·송진우·안재홍·김성수 등의 주도로 민간 자본으로 대학교 설립을 추진하기 위한 조직인 조선민립대학기성회가 결성되자, 방응모는 민립대학 기성회에 참여하여 민립대학기성회 정주군준비회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5월에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정주지방지부가 설립되자 기성회 정주지부 상무위원을 맡았다.&lt;br /&gt;
&lt;br /&gt;
==== 광업 경영과 조선일보 입사 ====&lt;br /&gt;
1924년 봄 오산학교 교감으로 있던 전우현이 방응모와도 안면이 있던 금광 채굴업자 두 명을 데리고 그를 찾아왔다. 그들은 자신들이 봐 둔 산이 있다고 방응모에게 소개했다. 그는 선천군의 지역 유지이자 최창학의 친구이며, 그가 동아일보 지국장으로 알게 된 이봉찬을 찾아갔다. 한학자로 알고 있던 그가 금광 투자를 제의하자 &amp;quot;한문이라면 빼지 않고 알려고 드는 한학 훈도가 어떻게 금광을&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16페이지&amp;lt;/ref&amp;gt;&amp;quot; 하느냐 하였지만, 이봉찬은 그에게 금광, 광산에 대한 지식을 알려주었다. 이봉찬은 그에게 광산 지식을 알려주며 최창학의 소유지 중 폐광을 빌리는 법을 알려주었다. 방응모의 됨됨이에 감복한 듯, 그의 수많은 질문에 적잖은 충고를 자임해주었다.&amp;lt;ref name=&amp;quot;fsfs117&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5페이지&amp;lt;/ref&amp;gt; 이봉찬은 최창학에게 방응모를 소개하는 편지를 수차례에 걸쳐 보내주었다.&amp;lt;ref name=&amp;quot;fsfs117&amp;quot;/&amp;gt; 이봉찬은 방응모의 친구들이 봐 둔 갱도를 임대받도록 도와주었다. 이봉찬은 방응모의 한학 실력과 사람됨을 알아보고 있어, 자금을 쾌히 빌려주었다.&amp;lt;ref name=&amp;quot;fsfs117&amp;quot;/&amp;gt;&lt;br /&gt;
&lt;br /&gt;
이후 광산업에 뛰어들어 1924년 여름 압록강변의 최창학 소유 폐금광인 평안북도 삭주군 외남면 교동 다릿골의의 삭주 교동광업소를 찾아가 10미터 정도 땅을 파고 금맥을 발견했다. 바로 삭주 교동광업소를 인수, 경영을 확대하였다. 이때 만난 동업자의 딸이자 친구 전우현의 조카딸인 '''이인숙(李仁淑)'''을 만났다. 본처 승계도가 두 아들을 잃고 복부 수술이 잘못되어 아이를 얻지 못하게 되자 방응모에게도 수많은 중매가 들어왔다. 자식들을 병으로 잃은 것이 자신의 불찰이라고 본 승계도는 그에게 작은 부인이라도 들이자는 말을 꺼내기도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18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26년 방응모에게 광산 사업을 제안했던 두 친구가 손을 털고 나갔고, 그의 가족은 돈이 없어 쌀 대신 좁쌀로 좁쌀죽을 먹으며 연명해야 했다. 방응모는 정주군에 사는 비슷한 또래의 먼 친척 방상진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고, 방상진과 일꾼 대여섯 명, 그리고 후처 이인숙의 친정 쪽에서 얻어온 토지문서를 얻어 자금을 마련, 삭주 다릿골 광산으로 가서 다시 금광을 채굴했다. 금맥은 쉽게 나오지 않았고, 출몰하는 마적떼에게 소와 기구를 약탈당했다. 동시에 빚쟁이들의 독촉에 시달렸으나 '''''1926년 7월 지하 300m 지점에서 금맥을 확보했다. 이후 연간 300kg의 금을 생산, 그는 굴지의 광산업자로''''' 성장해 금맥을 찾아 벼락부자가 되었다. 그는 방상진을 교동금광 총감독에 맡겼다. 이때 그는 최창학에게 임대료에 이자를 쳐서 보내주었다.&lt;br /&gt;
&lt;br /&gt;
그때까지 첫 부인 승계도가 두부를 팔아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미국산 포드 T형자동차'''''를 타고 금의환향했다. 1928년 방응모는 자신의 아호인 춘해를 딴 춘해 장학회를 만들고 장학생들의 모임인 이심회를 만든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48페이지&amp;lt;/ref&amp;gt; 그 해에 방응모는 교동지역에 파출소 지소를 유치하였고, 마적단에 시달리던 주민들은 그의 송덕비를 세우기도 했다. '''''1928년에 그는 의정부 직동, 흥선대원군의 별장이 있던 곳 바로 뒤에 위치한 건물을 매입'''''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한용운]], 홍명희를 자주 초대했다.&lt;br /&gt;
&lt;br /&gt;
'''''1932년 방응모는 교동광산을 135만원이란 거액에 일본 중외광업주식회사에 매각'''''했다. 그 뒤 1932년 6월부터 조선일보 영업국장으로 활동하다 '''1933년 3월 [[조선일보]]의 경영권을 인수'''하여 부사장에 취임하였다.&lt;br /&gt;
&lt;br /&gt;
그는 교동광업소를 운영하며 모은 재력을 바탕으로 부사장 재직 중 [[조선일보]]의 대주주가 되었으며, 1933년 7월 8대 사주 조만식으로부터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제9대 [[조선일보]] 사주로 취임, 활동했다.&amp;lt;ref&amp;gt;조선일보는 1932년 7월에 조만식을 사장으로 영입했지만, 조만식은 거의 평생을 평양에서 살아왔던데다 서울에서 활동하기에는 적응을 잘하지 못했다. 조만식은 신문사 경영난과 지역감정의 혹독한 시련을 받은 채 9개월만에 퇴사했다. 그리고 조만식 후임으로 1933년, 방응모를 사장으로 추대하기에 이르렀다.&amp;lt;/ref&amp;gt;&amp;lt;ref&amp;gt;《한국사 시민강좌 제47집, 대표적 독립운동가 12인》,일조각. p145&amp;lt;/ref&amp;gt; 방응모 취임 이후의 초대 부사장은 이광수, 주필은 서춘이었다.&lt;br /&gt;
&lt;br /&gt;
=== 언론, 사업 활동 ===&lt;br /&gt;
==== 사회사업과 조선일보 인수 계획 ====&lt;br /&gt;
금광 사업에 성공한 그는 영림, 조림 사업에도 투자하였다. 방응모는 배우자 승계도에게서 더 이상 아들을 얻지 못하자 첩 이인숙을 통해 아들을 얻으려고 하였다. 이인숙은 아들을 낳았으나 이 아들은 곧 사망하였다. 아들을 잃은 이인숙은 승계도의 도움을 받다가, 그해 6월 방응모가 있는 광산으로 가 생활하였다'''. 승계도와 이인숙을 통해 자녀를 얻지못하자 42세가 되던 해인 1924년 친형인 방응곤의 둘째 아들 방재윤을 양자로 입양시켰다.'''&lt;br /&gt;
&lt;br /&gt;
[[파일:방응모장학생.jpg|섬네일|160px|오른쪽|방응모와 그의 장학금을 받던 학생들. 가운데 앉은 이가 방응모이고, 서있는 이들 중 왼쪽에서 두 번째는 방응모의 양자 방재윤.]]&lt;br /&gt;
&lt;br /&gt;
1930년 배영옥과 결혼하여 딸 방재숙을 얻었다. 1932년 광산업을 정리하였고 언론사업을 비롯하여 육영사업과 조림 및 간척사업 등을 벌였다. 또한 고아원과 사회복지단체에 후원금을 지원하면서 인망을 얻기도 했다. 삭주 지역에서는 그의 송덕비가 세워지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932년 그는 수원군 팔탄면 노하리 일대의 갯벌에 일본인이 수차례 뚝을 쌓다가 실패했다는 정보를 얻고 임삼진을 통해 조선총독부에 허가를 요청하였다. 간척 사업은 이후 1935년부터 시작되었지만 1932년부터 은밀히 착수되어 왔다.&lt;br /&gt;
&lt;br /&gt;
1933년 무렵 방응모가 [[조선일보]] 인수에 나서기 전부터 그는 [[한용운]]을 위한 일이라면 돈을 아끼지 않고 지출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성북동 222번지 언덕에 만해를 위해 기와집 한 채를 지어주었는데 심우장(尋牛莊)이 그것이다. 또한 만해가 일제의 배급을 거부해 생활이 어렵게 되자 만해에게 생활비를 지급했던 방응모는 만해가 병석에 누운 1944년에는 치료비를 지원해주기도 했다.&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6/0000043262?sid=103 만해가 일송 선생 5일장 치른 사연]&amp;lt;/ref&amp;gt; 그 외에도 방응모는 만해 한용운·벽초 홍명희 등과 함께 새해가 되면 백천온천에도 같이 다녀올 정도로 두터운 친분을 맺었다.&lt;br /&gt;
&lt;br /&gt;
방응모의 광산 매각을 일본 정부 측에 알리고 다리를 놓은 것은 고일청(高一淸)이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84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32년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사건으로 체포된 [[안창호]]의 사면 탄원과 보석을 위해 노력하였다. 안창호가 윤봉길을 사주했다는 증거가 없으며 그가 테러행위를 지시했다는 증거 자료나 문건이 없다는 것이 방응모의 안창호 탄원 이유였다. 그러나 총독부 경무국장은 그의 안창호 석방 제안을 정중히 거절한다. 1936년 동방문화학원(뒤에 숭문중학교·고등학교 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1939년 9월에는〈조선일보〉의 조간 1회, 석간 2회의 1일 3회 발행을 시작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인수와 경영 ====&lt;br /&gt;
1933년 1월 16일 그는 정식으로 주식회사 [[조선일보]]사를 창립, 1월 18일에 발표된 창립 취지서에는 창립위원장 방응모, 창립발기인 방응모, 조만식, 고일청 외 등이 참여했다. 일단 그는 조만식을 사장으로 임명하고 자신은 부사장으로 있다가, 그해 3월 13일 다시 부사장에 취임했다. 4월 25일 편집인 겸 발행인이 되고, 4월 29일에는 조선일보의 조간, 석간제 발행을 부활, 확정시켰다. 1933년 7월 10일 총독부로부터 조선일보사의 법인 등록 승인을 얻어냈다. 7월 10일 조만식의 사퇴로, [[조선일보]]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다. 1933년 그는 자신의 아호를 춘해에서 계초로 바꾸었다. 그는 유능한 문인, 필진의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 상금 1천 원을 걸고 작가를 영입하였다.&lt;br /&gt;
&lt;br /&gt;
1934년 3월 25일 이광수를 비롯하여 서춘, 김동진, 함상훈, 신태익 등을 [[조선일보]]로 영입해 왔다. 그 외에도 정주군 출신 언론인, 작가들이 조선일보로 많이 오게 되었다. 이후 동아일보와 갈등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이광수가 조선일보로 옮겨와 부사장직에서 9개월 근무했다. 당시 조선일보 내부에서는 문모 라는 이가 이광수의 등장으로 자신의 입지 약화를 우려해 오랫동안 이광수를 내보내려 흉계를 꾸몄다고 한다. 이광수는 1934년 5월 25일자로 돌연 사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65페이지&amp;lt;/ref&amp;gt; 문모는 그에게 오히려 잘 됐다는 식으로 말하다가 방응모에게 호되게 혼이 났다. 그리고 문모로 하여금 즉시 금강산에 들어가 이광수를 다시 데려오게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65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이광수는 아들 봉근(당시 8살)의 사망 등으로 실의에 빠졌고, 1935년에 가서야 이광수를 조선일보 고문이자 필진으로 재영입하게 됐다.&lt;br /&gt;
&lt;br /&gt;
==== 동방문화학원 재단 설립 ====&lt;br /&gt;
방응모는 1936년 방농장의 소유권을 기본 자산으로 하는 재단법인 동방문화학원(東邦文化學院)을 설립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6페이지&amp;lt;/ref&amp;gt; 동방문화학원은 학교 법인으로 인가된 재단 법인으로, 그뒤 고계학원과 인연을 가지고 1936년부터는 보성고등보통학교를 후견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 분리되었다. 그뒤 방응모 장학생인 서중회 회원들을 위한 방응모 장학사업을 주관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7페이지&amp;lt;/ref&amp;gt;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태평로 구 조선일보 사옥 안에 동방문화학원의 간판을 달고 조광 잡지를 계속 발행하는 조광사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7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일제 강점기 후반 ===&lt;br /&gt;
==== 중일 전쟁 전후 ====&lt;br /&gt;
중일전쟁 개전 직후인 1937년 7월 11일에 열린 [[조선일보]] 간부회의에서 주필 서춘이 '일본군, 중국군, 장개석씨'등으로 쓰던 용어를 '아군, 황군, 지나, 장개석'으로 고치고 일본 국민의 입장에서 논설을 쓸 것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편집국장 김형원과 영업국장 김광수가 적극 반대를 하기도 했으나, 방응모는 '일장기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이미 몇 십만 원의 손해를 보았을 뿐 아니라 [[3.1 운동]] 때처럼 신문이 민중을 지도할 수 없다'면서 서춘의 입장을 지지했다. 한편으로 방응모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된 [[안창호]]를 [[조선일보]]에 영입하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안창호는 옥중에서 얻은 간질환과 폐질환 등으로 고생했고, 진료비 등을 수시로 지원하고 문병했음에도 출옥후 얼마 뒤에 사망한다.&lt;br /&gt;
&lt;br /&gt;
1933년 이심회(以心會：후에 序中會, 방응모장학회 등으로 명칭이 바뀜)라는 장학회를 만들어 국내 대학생과 해외유학생들에게 학자금을 지급하기도 했으며, 재단법인 동방문화학원(東方文化學院：지금의 숭문중·고등학교 전신)의 이사장직을 맡기도 했다. 또한 자신의 막대한 재원을 들여 1936년부터 함경남도 영흥군 일대에 당시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대단위 조림사업을 벌였으며, 그 전 해인 1935년부터는 경기도 수원군 팔탄면 일대에서 만 2년간에 걸친 간척사업을 벌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937년 12월 24일 [[안창호]]는 병보석 판정을 받고 재판소가 지정한 현 서울대학교병원인 경성제국대학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안창호의 입원 중에 시중을 든 사람으로는 안창호의 외조카 김순원과 청년 박정호 두 사람이었고, 나중에는 이응준 장군의 부인 이정희가 끝까지 지성껏 간호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7페이지&amp;lt;/ref&amp;gt; [[안창호]]는 병상에서 병원비 문제로도 고초를 겪었다. 이 때문에 조만식은 일본 경찰로부터 안창호의 병원비를 대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음에도, &amp;quot;내가 먹고 살면서 그 선생을 돌보지 않을 수 없다&amp;quot;며 완강히 거절하고 안창호를 도왔다고 한다. 안창호의 간호를 같이 도와주던 이응준 장군 부인 이정희는 10일마다 계산되어 나오는 병원 입원비로 안창호 선생이 괴로워하는 표정을 지켜볼수 없었다고 진술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8페이지&amp;lt;/ref&amp;gt; 방응모는 5백원의 수표 한 장을 안창호에게 전달하였다. 50일간의 입원비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9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안창호]]는 1938년 3월 10일 밤 12시 경성제국대학 병원에서 운명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폐간 사건 ====&lt;br /&gt;
일본의 전쟁이 격화되면서 조선총독부 공보국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1940년에 강제로 폐간조치 했다. 광산을 팔아서 자신의 모든 것을 조선일보에 바쳤던 방응모는 큰 절망과 좌절을 느껴야 했다. [[한용운]]은 ‘신문이 폐간되다/ 붓이 꺾이어 모든 일이 끝나니…’로 시작하는 시를 지어 방응모를 위로했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1&amp;quot; /&amp;gt;&amp;lt;ref&amp;gt;붓이 꺾이어 모든 일 끝나니 이제는 재갈 물린 사람들 뿔뿔이 흩어지고 아, 쓸쓸하고 쓸쓸한지고 망국 서울의 가을날 한강의 물도 흐느끼느니 울음 삼켜 흐느끼며 연지를 외면한 채 바다 향해 흐르느니&amp;lt;/ref&amp;gt; 동아일보에는 김성수 외에도 장덕수와 송진우가 있었지만 그에게는 조선일보 폐간을 막기 위해 총독부와 교섭할 인물도 없었다.&lt;br /&gt;
&lt;br /&gt;
1938년 2월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선 내 일간신문 25개사로 조직된 조선춘추회의 창립에 창립발기인으로 참가했고, 조선춘추회 간사로 활동했다. 같은 해 7월 “국민정신을 총동원하고 내선일체 전 능력을 발휘하여 국책 수행에 협력하여 성전(聖戰)의 궁극적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조직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에 참여했고, 그날 결성된 경성연맹 창립총회에서 상담역을 맡았다. 9월부터 조선방공협회 경기도연합지부 평의원을 지냈다. 10월에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주최한 비상시 국민생활 개선을 위한 제1회 생활개선위원회에서 제2부(의례와 사회풍조 쇄신부)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그러나 1938년 10월부터 조선총독부는 조선일보의 신문용지를 검열, 통제하기 시작했다.&lt;br /&gt;
&lt;br /&gt;
1940년 5월 조선총독부 총독 미나미 지로가 방송담화로 창씨개명을 권고했다. 그러나 그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성씨를 이제 와서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며 창씨개명은 완강하게 거절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조선일보에 트집이 잡힐 일이 나타나지 않자 총독부는 전국 면사무소에 조선일보 신문 구독을 거절하도록 명령을 내렸고, 동시에 조선말을 쓰는 민원인에게는 일을 처리해주지 말도록 하게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3페이지&amp;lt;/ref&amp;gt; 조선총독부는 송진우의 예금통장을 문제삼았다. 송진우 명의의 은행저금이 동아일보의 8백여 개의 지국과 분국을 통해 모금된 독립운동 자금이라며, 그리고 동아일보 간부들이 백운장이라는 요정에서 회식을 한 것을 김성수 집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려 했다는 등의 이유로 백관수 동아일보 사장을 전격 구속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3~374페이지&amp;lt;/ref&amp;gt; 동아일보는 백관수가 구속된지 10일 만에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동아일보 중역회의를 열고 폐간신청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4페이지&amp;lt;/ref&amp;gt; 총독부는 조선일보에도 자진 폐간을 권고했고, 1940년 8월 9일 편집회의를 주관, 8월 10일 조선일보의 폐간계를 내고, 8월 10일자로 폐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5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잡지 발행 활동 ====&lt;br /&gt;
신문 강제 폐간 뒤 방응모는 간판을 조광사로 바꿔 걸고, 사옥은 동방흥업주식회사로 등기를 변경해서 유지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1페이지&amp;lt;/ref&amp;gt; 이후 그는 조광 잡지 발행에 전념했다. 1943년 8월 경 일본 중앙대학의 예과를 마친 방일영이 입사&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1페이지&amp;lt;/ref&amp;gt;, 필진으로 참여했다. [[조선일보]]가 폐간된 후에도 방응모는 벽초 홍명희 부자에게 지속적으로 생활비를 대주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4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4년 6월 29일 만해 [[한용운]]이 사망했다. 그는 심우장을 찾아가 3백원을 내놓았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5페이지&amp;lt;/ref&amp;gt;당시 쌀 10가마가 100원이었지만, 심우장은 당장 현금 1원이 없었는데 거액이라서 놀랐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6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광복 이후 언론 및 정치활동 ===&lt;br /&gt;
==== 광복 직후 ====&lt;br /&gt;
1945년 8.15 광복 후에는 8월 말과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朝鮮在外戰災同胞救濟會) 고문과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9월 초 [[안재홍]] 등이 좌경화되는 건준체제에 반발하여 건준을 탈퇴하자 방응모 역시 건준을 탈퇴하였다.&lt;br /&gt;
&lt;br /&gt;
9월 2일 미군정이 주둔하자, 방응모는 윤전기를 찾기 위해 폐간 당시의 증빙서류를 미 군정청에 제시하였으나 소식이 없었다. 총독부는 조선일보 폐간 직후 인수한 윤전기를 경성일보사에 옮겨서 설치했다. 그는 동방문화재단 외 4개 사업소를 적산으로 파악한 미군정을 설득하고, 사옥 문제도 해결하였다.&lt;br /&gt;
&lt;br /&gt;
10월 1일 조선일보 편집위원회를 구성하고, 신문 복간 운동을 추진했다. 조선총독부의 폐간 지시 당시 의정부로 옮겨놓은 일부 활자 자모음이 잘 보관되어, 그해 11월 23일 조선일보를 복간시키고, 서울신문사 사옥에서 조선일보 복간호를 간행하였다. 이후 조선사회문제대책중앙협의회 중앙위원을 거쳐 10월 16일 이승만 등의 주도로 독립촉성중앙회가 결성되자 독촉에 가입하였다.&lt;br /&gt;
&lt;br /&gt;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이 귀국하자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에 입당했다. 12월 [[안재홍]]의 추천으로 한국독립당의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출되어 3~4개월 동안 활동했다.&amp;lt;ref&amp;gt;일각에서는 방응모가 '한독당 재무부장으로 지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1947년부터 한독당 재무부장을 맡은 신창균이 전면 부정했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47/0000002626?sid=102 백범 비서와 '진짜' 한독당 재정부장의 육성증언. 참고.]&amp;lt;/ref&amp;gt; 그 뒤 대한국민총회 발기인, 대한독립애국금헌성회 발기인 등으로 활동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복간 및 군정기 활동 ====&lt;br /&gt;
11월 [[조선일보]]사를 복간시켰다. 그러나 한동안 조선일보의 인쇄는 서울신문사에서 간행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1945년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추념대회에 참여하였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2&amp;quot;&amp;gt;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13&amp;lt;/ref&amp;gt; 순국선열추념대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2&amp;quot; /&amp;gt;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참여,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이 되었다.&amp;lt;ref&amp;gt;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55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6년 2월 26일 서울신문사 공무국 종업원들이 조선일보의 인쇄를 거부해버렸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436페이지&amp;lt;/ref&amp;gt; 그동안 묵시적으로 방해가 은근히 있었다. 표면상의 문제는 임금 문제이나 내용상으로는 조선일보에 대한 조선공산당의 시위의 일종이었다. 사흘간의 교섭 끝에 2월 28일에 가서야 26일자와 27일자를 소급해서 인쇄하여 신문을 한꺼번에 발행하였다. 그러나 3월 1일과 2일에 또다시 인쇄를 거부당해 결국 휴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436페이지&amp;lt;/ref&amp;gt; 조선일보를 경성일보사로 옮겨서 인쇄하기로 하고 3월 5일자로 사고로 독자에게 알렸다.&lt;br /&gt;
&lt;br /&gt;
4월 29일 김구, 김창숙, 김성수, 오세창 등과 함께 서울운동장에서 윤봉길의사 추모회의 창립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amp;lt;ref&amp;gt;&amp;quot;故尹奉吉義士의 記念式 오늘, 發起人會 열고 準備&amp;quot;, 동아일보 1946년 4월 23일자 2면, 사회면&amp;lt;/ref&amp;gt; 그해 5월 조선공업구락부 고문에 위촉되었다.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民族統一總本部) 10인협의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6월 15일 오후 5시 40분 서울역에 마중나가 서울역에 도착한 삼의사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lt;br /&gt;
&lt;br /&gt;
1945년 광복 직후 서기원이 그를 찾아왔다. 서기원은 그때 경성농상실천학교의 동창회로부터 이 학교의 교장이 되어 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이다. 방응모는 서기원의 제의를 받아들여 1946년 8월 28일 동방문화학원 이사장으로 숭문상업학교를 인수, 재단 이사장이 되었다. 후일 방응모가 6.25 전쟁 중에 납북된 후 동방문화학원과 숭문중,고교의 재단은 최용진이 운영하다가 다시 1978년에 방일영에게 인수되었다.&lt;br /&gt;
&lt;br /&gt;
1947년 1월 21일 제5회 창립위원회를 본사에서 개최하고 2월 23일 주식회사 조선일보사 주주창립총회를 열고 대표이사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공동투자 경영자로 참여시킨 전무 이종민과의 알력이 발생했다. 이종민과의 갈등이 심화되자 그해 8월 3일 방응모는 일단 사직서를 제출했다. 1947년 8월 10일 풍문여고 강당에서 개최된 한인신문기자협회에 참석, 민족청년단에서 언론계 공로자로 방응모, 김성수, 설의식을 지정하여 상을 시상받았다.&amp;lt;ref&amp;gt;&amp;quot;朝鮮 新聞記者協會&amp;quot;, 동아일보 1947년 8월 10일자 2면, 사회면&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납북과 최후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 납북 후 행적은 &amp;quot;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amp;quot;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amp;lt;ref name=&amp;quot;김장&amp;quot;/&amp;gt; 1950년 8월경 개성 송악산 부근에서 미군의 폭격에 희생되었고 심한 폭격으로 시신을 찾을 수 없어 묘도 만들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남한에서는 1955년 7월 7일 생사불명기간 만료로 인해 실종 처리되었다.&lt;br /&gt;
&lt;br /&gt;
=== 사후 ===&lt;br /&gt;
서울 종로에 있던 양자 방재윤의 두 아들 방일영과 방우영은 방응모의 첩 이인숙이 찾아가 피신하라고 권고하여 황급히 피신했다. &lt;br /&gt;
&lt;br /&gt;
7월 6일 그의 행방불명처리가 되고, 방응모의 사후에도 [[조선일보]]는 그의 명의로 발행되었다. 1952년 4월 28일 조선일보는 발행인겸 편집인을 장기영으로, 인쇄인을 방일영으로, 방응모는 명예사장으로 명의변경하여 휴전 후 계속 발행하게 되었다. 1954년 4월 30일 제8회 조선일보 정기주주총회에서 장기영 사장이 사퇴하면서, 명예사장 방응모가 사장으로 추대되고, 발행인 겸 대표취체역에 방일영이 선임되었다. 이후 실종 후 1959년에 법적으로 사망 처리되었다. 그리고 1970년까지는 조선일보는 그의 이름으로 발행되었다.&lt;br /&gt;
&lt;br /&gt;
1970년 2월 19일 조선일보 정기주주총회에서 방응모 이사를 사퇴 수리하였다. 그의 피폭 사망 사실은 1970년대 이후 탈북자들을 통해 대한민국에 소개되었다.&lt;br /&gt;
&lt;br /&gt;
== 친일행위 의혹 ==&lt;br /&gt;
=== 일제 전시체제기 활동 ===&lt;br /&gt;
일제 강점기 말기 언론인으로서 총독부체제에 협력한 기록과 활동이 다수 기록이 있다. 1933년 3월 [[조선일보]] 경영권을 인수하고 부사장직에 취임했을 당시 같은 달에 고사기관총 구입비용 1600원을 군에 헌납하였다. 그는 1935년 친일 잡지 《조광 (잡지)(朝光)》을 창간하였고, 1937년에는 경성방송국 제2방송에 출연하여 일제가 중국의 베일을 절멸케하여 극동평화를 지키려고 한다는 강연을 하였다. 1940년대부터 조광에 집중적으로 친일 논설을 기고하고 시국 강연에 참여하여 전쟁 지원을 독려했다. 1942년 6월에는 '징병령 실시에 일층 더 감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글을 써서 조광에 발표하였다. 애국금차회(1937),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1938), 임전대책협의회(1941), 조선임전보국단(1941) 등 대표적인 친일 단체의 회원에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그는 이런 행적으로 인해 해방정국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명단에 기록되어 있고,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해 발표한 &amp;lt;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amp;gt;에 모두 포함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lt;br /&gt;
&lt;br /&gt;
우리 [[조선일보]]는 다른 어떤 신문도 따라오지 못하는 확고한 신념에서 비국민적 행위를 단연 배격하여 종국까지 조선일보사가 이미 정해놓은 방침에 한뜻으로 매진한다.|원산에서의 순회 강연&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9478.html 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친일 다짐하다 시민에 봉변]《한겨레》2005-08-24 오후 06:13:18&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반민족행위 논란 ===&lt;br /&gt;
방응모를 친일파로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남아 있다. 조선일보 경영 이전에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방응모의 활동이 거의 없었고, 납북된 뒤 소식이 끊겨버린 까닭에 본인이 항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 동안의 행적만으로 친일파 여부를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방응모의 후손들이 영향력 있는 [[조선일보]] 언론사의 사주를 맡았기에 그의 입장에서 서술한 기록을 많이 남기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80년 발간된 그의 전기 《계초 방응모》(조선일보사) 등에는 '그가 민족주의적 선각자'로 묘사되고 있다. 방응모가 친일파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일부세력측은 그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논거로 드는 경우가 많이 있다.&amp;lt;ref&amp;gt;유석재, 계간 《유심》 (2004년 봄호) [http://yousim.buddhism.org/html/2004-spr/tamgu-yoo-seok-jae.htm 삭풍 속에 피어난 금란지교(金蘭之交) - 만해와 계초 방응모]&amp;lt;/ref&amp;gt;&amp;lt;ref&amp;gt;&amp;quot;일제 말기 계초는 시국강연에 나설 것과 창씨개명을 집요하게 강요받았으나 그때마다 묵묵부답으로 거부하며 소신을 지켰다.&amp;quot; 《조선일보》 (2001.3) 조선일보 사장열전 - 계초 방응모편, 《한겨레》 (2001.3.30) [http://www.njoyschool.net/news/article_view.asp?menu_code=s20202&amp;amp;no=1206 조선일보, 일장기를 신문제호 위에]&amp;lt;/ref&amp;gt;&lt;br /&gt;
또한 한국정토학회 고문이자 서울 정토사 주지였던 박설산(1918~2007)이 학도병에 끌려가기 직전인 1943년 12월 28일 밤 서울역에서 스스로 왼발을 선로에 올려 발가락을 절단해 징집을 기피하자 방응모는 만해와 함께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설산을 걱정하면서 입원 중 조선일보 기자를 통해 돈을 전달한 것은 물론 퇴원할 때 돈을 전달하고 뒤를 보살폈다고 한다.&amp;lt;ref&amp;gt;박설산 회고록 &amp;lt;뚜껑없는 조선역사책&amp;gt;(1994, 도서출판 삼장) p240~241&amp;lt;/ref&amp;gt;&lt;br /&gt;
&lt;br /&gt;
2010년 12월, 방응모 관계자들 및 조선일보측은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을 취소해달라'며 법원에 낸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amp;quot;1944년 조선항공업 창립발기인으로 활동한 부분에 대해 친일행위로 판단한 부분을 취소하지만 나머지 활동에 대해서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amp;quot;라고 판결했다. 그 이유인 즉 &amp;quot;방응모는 1933년 조선일보 사장으로 취임해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등으로 활동하며 친일활동을 벌였으며, 1937년 경성방송국 시국강연에서 일본제국이 극동평화를 확립시킬 것이라는 내용의 강연을 하고, 1938년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춘추회의 발기인 겸 간사로 활동하기도 했다&amp;lt;ref&amp;gt;[http://media.daum.net/breakingnews/politics/view.html?cateid=1002&amp;amp;newsid=20101222103319164&amp;amp;p=newsis 법원 &amp;quot;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친일파 맞다&amp;quot;]뉴시스 2010년 12월 22일&amp;lt;/ref&amp;gt;&amp;quot;는 것이다.&lt;br /&gt;
&lt;br /&gt;
2012년 1월 12일 서울고법 행정7부는 방 전 사장의 손자인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이 행정안전부를 상대로 낸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처분 취소 청구소송에서 ‘일제 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의 친일 행위 판정 조항에 비추어 방 전 사장에게 적용된 모두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민족적 지도자로서 비중이 큰 만큼 그로 인한 책임도 무거울 뿐 아니라 고난의 시기를 겪은 민족으로서 그 역사를 반성하자는 입장에 설 때, 방 전 사장의 여러 행태는 반민특별법에서 규정한 친일반민족행위의 유형에 속함을 부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1·2심 재판부는 방 전 사장이 자신이 운영하던 잡지 &amp;lt;조광&amp;gt;에 일제 침략전쟁에 동조하고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문예물과 일제 침략전쟁에 협력할 것을 주문하는 논문을 게재하는 등의 ‘친일’ 행위를 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또한, 2심 재판부는 일본의 전쟁 수행을 돕기 위해 설립된 군수 제조업체 ‘조선항공공업’의 발기인과 감사를 지낸 것은 “감사는 업무집행에 관여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기관으로, 방 전 사장이 이 회사를 운영했다고 볼 수 있다”는 이유로 친일이라고 판단했다.&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4565.html법원 ‘방응모 친일’ 2심서도 인정] 인터넷한겨레 2010년 12월 22일&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가족 관계 ==&lt;br /&gt;
* 아버지 : 방계준(方桂準)&lt;br /&gt;
* 어머니 : 온양 박씨&lt;br /&gt;
** 형 : 방응곤(方應坤)&lt;br /&gt;
** 배우자 : 승계도&lt;br /&gt;
*** 아들 2명 요절&lt;br /&gt;
** 배우자 : 이인숙(李仁淑, 1901년 ~ ?)&lt;br /&gt;
*** 아들 : 방재욱(方在旭, 1925년 ~ 1926년 9월)&lt;br /&gt;
** 배우자 : 배영옥(裵英玉)&lt;br /&gt;
*** 장녀 : 방재숙(方在淑)&lt;br /&gt;
** 배우자 : 노호용(盧鎬龍)&lt;br /&gt;
*** 장남 : 방재선(方在善, 1944년 ~)&lt;br /&gt;
*** 차남 : 방재효(方在孝, 1946년 ~)&lt;br /&gt;
*** 삼남 : 방재규(方在奎, 1948년 ~)&lt;br /&gt;
&lt;br /&gt;
** 양자 : 방재윤(方在允 또는 方在胤, 1901년 ~ 1940년, 형 방응곤의 차남)&lt;br /&gt;
*** 손자 : 방일영(方一榮, 1923년 ~ 2003년)&lt;br /&gt;
**** 증손 : 방상훈(方相勳, 1948년 ~)&lt;br /&gt;
**** 증손부 : 윤순명 - 윤치호(尹致昊, 1865년 ~ 1945년)의 증손녀&lt;br /&gt;
***** 현손 : 방준오(方俊吾, 1974년)&lt;br /&gt;
***** 현손 : 방정오(方政吾, 1978년)&lt;br /&gt;
**** 증손 : 방용훈(方容勳, 1952년 ~)&lt;br /&gt;
*** 손자 : 방필영(方必榮, 1924년 ~ 1926년)&lt;br /&gt;
*** 손녀 : 방숙영(? ~ 1951년 1월)&lt;br /&gt;
*** 손자 : 방우영(方又榮, 1928년 ~ 2016년)&lt;br /&gt;
**** 증손 : 방성훈(方聖勳, 1973년 ~)&lt;br /&gt;
&lt;br /&gt;
== 기타 ==&lt;br /&gt;
그는 [[한용운]], 최남선, 정인보, 홍명희 등과 친분관계를 형성하고 어울려 지냈다 한다.&lt;br /&gt;
&lt;br /&gt;
[[김구]]의 한국독립당의 재정적 후견인 역할을 하였다 하며,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삼의사 유골봉환식 때 [[김구]], [[정인보]] 등과 촬영한 사진이 있다.&amp;lt;ref&amp;gt;백범어록 참조&amp;lt;/ref&amp;gt; 그리고 1945년 11월 23일 조선일보가 복간되자 백범 김구는 '有志者事竟成' 뜻을 지닌 자 성취할 수 있다'는 친필 휘호를 보내며 축하했다.&amp;lt;ref&amp;gt;[http://www.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4060370241 '조선일보 역사 읽기'《조선일보》2004.06.03]&amp;lt;/ref&amp;gt;&lt;br /&gt;
한편 임꺽정의 저자인 벽초 홍명희가 방응모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그와 깊은 친분을 맺었다는 주장이 있다. 《조광》 1938년 11월호엔 홍명희가 병중에 있는 방응모를 위로하며 지은 한시가 방응모의 답시와 함께 실려 있다고 한다.&amp;lt;ref&amp;gt;[http://weekly.chosun.com/site/data/html_dir/2004/11/05/2004110577041.html ‘임꺽정’으로 되살아난 독립운동의 魂! 주간조선 1827호 2004.11.04&amp;lt;/ref&amp;gt; 또한 [[안창호]]의 비서실장을 지낸 독립유공자 구익균은 방응모와 안창호가 친밀했다는 주장을 했다.&amp;lt;ref&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09/2008030901055.html &amp;quot;공산주의자들, 도산 비판하다가도 하숙비 떨어지면 찾아와&amp;quot;] 조선일보, 2008-03-10 03:22&amp;lt;/ref&amp;gt;&lt;br /&gt;
또한 박설산에 따르면 1943년 만해 한용운에게 학도병으로 끌려가게 되었음을 알리려 심우장으로 찾아가게 되었을 때, 한용운과 방응모가 바둑을 두고 곁에서 정인보가 훈수를 두고 있었다고 한다.&amp;lt;ref&amp;gt;박설산 저 &amp;lt;뚜껑없는 朝鮮 역사 책&amp;gt; p.226 도서출판 三藏(1994)&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30년대~1940년대 방응모에게서 장학금을 지원받은 학생 모임인 서중회의 회원들의 그의 인물평은 &amp;quot;첫 인상은 좀 깡마른 모습이었으나 의지가 강한 인물&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56페이지&amp;lt;/ref&amp;gt;&amp;quot;이라는 평을 남기기도 했다.&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 /&amp;gt;&lt;br /&gt;
&lt;br /&gt;
== 참고 자료 ==&lt;br /&gt;
* 청산하지 못한 역사: 언론 내세워 일제에 아부한 교화 정책의 하수인 (문영숙) (반민족문제연구소, 청년사, 1994)&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민족 계몽의 초석 방응모(이동욱 저, 지구촌, 1998)&lt;br /&gt;
* 계초 방응모전(계초전기간행위, 조선일보사, 1980년)&lt;br /&gt;
* 계초 방응모(이동욱, 방일영문화재단, 1996)&lt;br /&gt;
&lt;br /&gt;
== 외부 링크 ==&lt;br /&gt;
* [https://web.archive.org/web/20050123171046/http://chosunhost.com/ 계초방응모 기념사업회]&lt;br /&gt;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09145 &amp;lt;조선일보&amp;gt;, 방응모 전 사장의 '친일행적' 말한다] - 오마이뉴스 04.09.10일자&lt;br /&gt;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020302101749 방응모ㆍ 김성수 친일행적 뭔가 : &amp;lt;긴급입수&amp;gt;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 全文] - 프레시안 2002-03-02&lt;br /&gt;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54052 그가 '&amp;lt;조선&amp;gt;의 주인' 주장하는 이유] 오마이뉴스 2001년 9월 20일자&lt;br /&gt;
*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956 방재선씨, 호주·상속 원인무효소송 제기]&lt;br /&gt;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4/06/2008040601053.html '5인 친필 서첩' 발굴] 조선일보 2008년04월06일자]&lt;br /&gt;
&lt;br /&gt;
[[분류: 감자]]&lt;/div&gt;</summary>
		<author><name>Nsgjjsjsjy02</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B0%A9%EC%9D%91%EB%AA%A8&amp;diff=58892</id>
		<title>방응모</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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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Nsgjjsjsjy02: /* 사회사업과 조선일보 인수 계획 */&lt;/p&gt;
&lt;hr /&gt;
&lt;div&gt;{|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width:100%&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0%&amp;quot;|사진&lt;br /&gt;
|[[파일:방응모.jpg|center|200픽셀]]&lt;br /&gt;
|+ '''방응모'''&lt;br /&gt;
|+ style=&amp;quot;caption-side:bottom;text-align:left:&amp;quot;|출처: 위키백과&lt;br /&gt;
|출생||1883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조선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또는 정부면 성내동&lt;br /&gt;
|-&lt;br /&gt;
|사망||1950년경으로 추정&lt;br /&gt;
|-&lt;br /&gt;
|사인||불명&lt;br /&gt;
|-&lt;br /&gt;
|거주지||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amp;gt; 경성부 -&amp;gt; 경기도 양주군 의정부읍&lt;br /&gt;
|-&lt;br /&gt;
|국적||대한민국&lt;br /&gt;
|-&lt;br /&gt;
|본관||온양&lt;br /&gt;
|-&lt;br /&gt;
|별칭||호: 계초(啓礎), 춘해(春海)&lt;br /&gt;
|-&lt;br /&gt;
|직업||교사, 변호사, 상인, 언론인, 기업인, 사회운동가, 정치가&lt;br /&gt;
|-&lt;br /&gt;
|배우자||승계도, 이인숙, 배영옥, 노효용&lt;br /&gt;
|-&lt;br /&gt;
|자녀||방재숙(딸), 방재욱·방재선·방재효·방재규(아들), 방재윤(양자)&lt;br /&gt;
|-&lt;br /&gt;
|부모||방계준(부), 온양박씨(모)&lt;br /&gt;
|}&lt;br /&gt;
&lt;br /&gt;
'''방응모'''(方應謨, 평안북도 정주군, 1883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 1950년 8월(추정)는 [[일제강점기]]의 교육자, 언론인, 법조인, 기업인이자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언론인이며 정치인이다. 호는 '''춘해'''(春海)이고, 뒤에 '''계초'''(啓礎)로 고쳤다.&lt;br /&gt;
&lt;br /&gt;
1922년 동아일보 정주 지국을 인수해 지국장을 지내다가 1924년 금광업에 뛰어들어 큰 부를 얻게 되었다. 1932년 6월 조선일보에 입사하였고 이후 영업국장이 되어 조선일보의 판매망을 장악하게 되고 경영권을 인수하면서 1933년 3월 조선일보 부사장이 되었다. 1933년 7월부터 1950년 7월까지 종신으로 [[조선일보]]의 사장을 역임하였다. 1935년 창간한 월간잡지 '조광(朝光)'은 친일 논란이 있다.&amp;lt;ref&amp;gt;안은필. [http://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9211 조선일보가 가장 빛나던 시기, ‘안재홍 시대’]&amp;lt;/ref&amp;gt;&amp;lt;ref name=&amp;quot;안은&amp;quot;&amp;gt;안은필. [http://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9279 방응모 친일증거, “모래밭에서 모래 찾기”]국민TV. 기사입력 2015년 4월 23일. 기사수정 2015년 4월 24일.&amp;lt;/ref&amp;gt;&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2/0002006080?sid=102 한홍구 &amp;quot;박정희는 공포와 욕망의 정치를 했다&amp;quot;]. 프레시안. 2015년 4월 13일.&amp;lt;/ref&amp;gt;&amp;lt;ref&amp;gt;이민영.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1/0002255321?sid=102 고법 “방응모 前조선일보 사장 친일행적 대부분 인정”]. 서울신문. 2012년 1월 13일.&amp;lt;/ref&amp;gt;&amp;lt;ref&amp;gt;노현웅.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8/0002251781?sid=102 조선 방응모·동아 김성수의 ‘친일’…수년째 결론 안 내고 미루는 법원]. 한겨레. 2014년 11월 3일.&amp;lt;/ref&amp;gt;&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6/0000000413?sid=110 김성수ㆍ방응모와 친일언론인 군상]. 미디어오늘. 2002년 3월 12일.&amp;lt;/ref&amp;gt; 언론계에서 활동하면서도 사업가의 길을 함께 걸었고, 교육 장학 활동을 하였으며, 1945년 광복 직후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 고문과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안재홍]]의 추천을 받아 한국독립당 중앙상무위원과 독립촉성국민회 총무부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amp;lt;ref name=&amp;quot;안은&amp;quot;/&amp;gt;&amp;lt;ref&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16/2008031600800.html 계초 방응모와의 우정도 여러 편의 시로 표현해&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해방 정국에서 김구의 재정적 후견인으로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등 삼의사 유골 봉환 사업과 신탁통치 반대 운동 등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대한민국 수립 이후 사회민주주의 정치가인 조소앙과 사회당을 결성해 문교정책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lt;br /&gt;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 납북 후 행적은 &amp;quot;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amp;quot;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lt;br /&gt;
&lt;br /&gt;
== 생애 ==&lt;br /&gt;
=== 생애 초기 ===&lt;br /&gt;
==== 출생과 성장 ====&lt;br /&gt;
방응모는 1883년 11월 3일 또는 9월 29일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바우머리 부락 또는 정주군 정부면 성내동 425번지에서 '''방계준(方桂準)'''과 온양 박씨(溫陽朴氏)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그는 어려서 집중력이 남달리 뛰어난 반면 고집이 셌다는 평이 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페이지&amp;lt;/ref&amp;gt; 그의 '''삼촌 방계묵(方啓默)'''은 그의 고집있는 기질을 두고 저놈은 쇠작두 말고 나무 작두로 잘라 죽여야 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3~54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친척들의 야멸찬 말들이 그에게 상처를 주거나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4페이지&amp;lt;/ref&amp;gt; 또한 그의 유년시절을 본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가 태어날 당시 태몽도 없었고, 신동이라는 말도 별다르게 듣지 않았다고 한다. 어려서 빈곤한 가정환경으로 방응모는 정규 학교에는 입학하지 못하고, 16세 때까지 서당에 드나들며 한학을 익혔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던 중 그가 어느정도 실력이 우수하다고 인정되자, 스승인 승창률은 잠시 방응모에게 어린아이들을 돌보게 한 후 자리를 피하곤 했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1페이지&amp;lt;/ref&amp;gt; 그는 홀로 사서육경을 탐독, 독파하였다. 21세 무렵 잠시 서당 훈장을 지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896년 독립협회의 활동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5페이지&amp;lt;/ref&amp;gt; 형 방응곤이 예배당에 다니게 되자&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2페이지&amp;lt;/ref&amp;gt;, 그를 통해 신문물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다. 그 뒤 우연히 경성부에 갔다가 신문물을 보고 충격을 받아 17세에 독학으로 신학문과 일본어, 중국어, 수학 등을 독파하였다. 유년시절 서당의 성리학 스승이던 승창률의 친척인 승시영(承時榮)과 조씨(趙氏)의 딸 승계도와 결혼했다.&lt;br /&gt;
&lt;br /&gt;
결혼한 다음 해에도 그는 공부를 한다며 책만 사다 읽곤 했고&amp;lt;ref name=&amp;quot;fsfs60&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60페이지&amp;lt;/ref&amp;gt;, 부인 승계도는 생계를 위해 몸소 나섰다.&amp;lt;ref name=&amp;quot;fsfs60&amp;quot;/&amp;gt; 부인 승계도는 친척 가운데 콩을 싸게 넘겨주는 이들이 있어 그 콩으로 두부를 만들거나 콩나물을 키워 장사를 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61페이지&amp;lt;/ref&amp;gt; 그의 아내 승계도는 남편에 대한 믿음이 절대적이었고 탓을 하거나 가출하지 않았다. 이후 그는 서당 훈장으로 초빙되었으나, 그가 가는 마을의 기존 훈장, 한학자들은 그를 적대적으로 대했다. 그렇다고 마을 사람들의 일부 지명이 있었으나 자신의 스승의 자리를 침해할 수 없다 하여 그는 자신의 동리의 훈장일은 사양하였다. 그는 마을을 나가 신학문을 하는 친구들과 어울렸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62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계몽 운동 ====&lt;br /&gt;
도산 [[안창호]]와 남강 이승훈이 연사로 돌아다니며 애국 계몽 강연과 문맹들의 교육, 야학 사업을 하였고, 여기에 감동받은 청년들이 서당과 야학을 열고 문맹들과 여성들에게 한글 교육을 하였다. 도산 [[안창호]]의 강연과 남강 이승훈의 강연을 찾아다니며 듣다가 감동받은 방응모 역시 교육, 계몽에 참여하였다.&lt;br /&gt;
&lt;br /&gt;
그는 청년회의 활동에 몰두하였으나, 농번기에 작은 일손이라도 더 필요했던 동리 노인들은 젊은 아이들이 일은 하지 않고 무슨 모임이다 하여 어울려 돌아다니는 꼴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또한 모임 구성원들 역시 &amp;quot;의식 자체가 아직 전근대적이었고, 사고의 분화를 겪지도 않은데다가, 이들의 조직 활동이 기분 좋으면 나오고 기분 나쁘면 빠져 버리는 것이 예사&amp;quot;라 청년 모임들은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청년단체의 실패에 좌절하고 다시 귀향했으며, 이때 그는 춘해(春海)라는 아호를 스스로 지었다. 그의 집안에서는 그가 정착하기를 바라고 정주읍 성내동에 집을 얻어 주었다.&lt;br /&gt;
&lt;br /&gt;
안창호의 계몽 강연에 감동받은 남강 이승훈이 1907년(융희 1년) 8월 김덕용(金德鏞)을 초빙하여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 오산에서 신식 교육을 하는 소학교 과정의 학교 강명의숙을 세우고 산수, 수신, 역사, 지리, 체조를 가르쳤고, 그해 12월에는 중학교 과정인 오산학교를 세우고 학생 7명을 처음 받아들여 개교했다. 1908년에는 오산학교에 학생들이 모여 3개 반으로 편성되었고, 정주군 출신의 춘원 이광수가 오산중학교의 교사로 초빙되어 축구, 야구, 테니스, 배구 등을 지역에 처음 소개하였다. 방응모는 어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학교에 입학해 신학문을 접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0페이지&amp;lt;/ref&amp;gt; 그는 이승훈과 의기투합해 민립 대학을 세우는 운동을 추진했지만 조선총독부 평안북도청 학무국에서 승인을 거부하여, 대학 설립에 실패했다.&lt;br /&gt;
&lt;br /&gt;
=== 언론, 기업 활동 ===&lt;br /&gt;
==== 계몽 활동과 언론 활동 ====&lt;br /&gt;
1915년부터 1924년 방응모는 지역 지식인들, 유학파 청년, 계몽 청년들이 모여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하는데 참여했고, 민립대학기성회 평안북도지부에서 활동하면서 민립대학기성회 중앙회 중앙위원 조만식 등과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언변과 용모가 되었던 그의 여관에도 손님들이 몰렸고, 그가 &amp;quot;2백원도 좋고 5백원도 좋다며 보태달라&amp;lt;ref name=&amp;quot;fsfs87&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7페이지&amp;lt;/ref&amp;gt;&amp;quot;고 하면 기부금을 내는 이들이 있었다. 대신 하룻밤을 의탁하려고 그의 여관을 찾은 이들에게 무료 숙식을 제공하기도 했다.&amp;lt;ref name=&amp;quot;fsfs87&amp;quot;/&amp;gt; 1919년 정주에서 3.1 만세 운동이 벌어지자, 그도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형사들의 눈을 피해 방응모는 만세운동을 하다 재빨리 몸을 피해 화를 면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8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1922년 6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인수하여 분국장에 취임했다. 6월 9일에는 정주군 지역 체육행사로 테니스 대회를 개최하였다. 그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경영하는 동시에 그는 농촌 계몽운동 등에 적극 투신하여 인망을 쌓았다. 처음 몇번은 친구 전우현의 자금을 빌려 부족분을 메우기도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02페이지&amp;lt;/ref&amp;gt; 한다. 1922년 6월 19일&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96페이지&amp;lt;/ref&amp;gt; 동아일보 본사를 설득하여 정주분국을 동아일보사 정주지국으로 승격시켰다. 동아일보사 지부장 재직 시 그는 전우현과 함께 의기투합하여 민립 대학 설립 자금과 농촌진흥회 회원의 여비와 회비를 염출하기 위한 목적 및 당시 교사도 없이 난관에 처했던 오산학교의 재개교를 위한 &amp;quot;오산학교의 부흥 운동을 목표로 한 재단법인 촉성 기금 마련&amp;quot; 등을 계획했다. 총독부의 인허가 거부로 실패한 대학 설립 자금은 고스란히 오산학교의 부활과 복교 자금으로 투입되었다. 1920년 1월에 경성형무소에서 가석방된 조만식은 이승훈을 만났고, 다시 조만식이 오산학교를 맡으면서 학교는 다시 정상 운영되었다.&lt;br /&gt;
&lt;br /&gt;
1923년 동아일보 정주군 분국이 지국으로 승격되자 정주 지국장으로 동아일보 정주지국을 경영하였고, 같은 해 7월 여성들의 사회참여와 평등권 신장을 위한 여자교육회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이후 대규모 수해가 나자, 정주군 수해구제회를 결성하여 봉사활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1923년 4월 조만식·송진우·안재홍·김성수 등의 주도로 민간 자본으로 대학교 설립을 추진하기 위한 조직인 조선민립대학기성회가 결성되자, 방응모는 민립대학 기성회에 참여하여 민립대학기성회 정주군준비회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5월에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정주지방지부가 설립되자 기성회 정주지부 상무위원을 맡았다.&lt;br /&gt;
&lt;br /&gt;
==== 광업 경영과 조선일보 입사 ====&lt;br /&gt;
1924년 봄 오산학교 교감으로 있던 전우현이 방응모와도 안면이 있던 금광 채굴업자 두 명을 데리고 그를 찾아왔다. 그들은 자신들이 봐 둔 산이 있다고 방응모에게 소개했다. 그는 선천군의 지역 유지이자 최창학의 친구이며, 그가 동아일보 지국장으로 알게 된 이봉찬을 찾아갔다. 한학자로 알고 있던 그가 금광 투자를 제의하자 &amp;quot;한문이라면 빼지 않고 알려고 드는 한학 훈도가 어떻게 금광을&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16페이지&amp;lt;/ref&amp;gt;&amp;quot; 하느냐 하였지만, 이봉찬은 그에게 금광, 광산에 대한 지식을 알려주었다. 이봉찬은 그에게 광산 지식을 알려주며 최창학의 소유지 중 폐광을 빌리는 법을 알려주었다. 방응모의 됨됨이에 감복한 듯, 그의 수많은 질문에 적잖은 충고를 자임해주었다.&amp;lt;ref name=&amp;quot;fsfs117&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5페이지&amp;lt;/ref&amp;gt; 이봉찬은 최창학에게 방응모를 소개하는 편지를 수차례에 걸쳐 보내주었다.&amp;lt;ref name=&amp;quot;fsfs117&amp;quot;/&amp;gt; 이봉찬은 방응모의 친구들이 봐 둔 갱도를 임대받도록 도와주었다. 이봉찬은 방응모의 한학 실력과 사람됨을 알아보고 있어, 자금을 쾌히 빌려주었다.&amp;lt;ref name=&amp;quot;fsfs117&amp;quot;/&amp;gt;&lt;br /&gt;
&lt;br /&gt;
이후 광산업에 뛰어들어 1924년 여름 압록강변의 최창학 소유 폐금광인 평안북도 삭주군 외남면 교동 다릿골의의 삭주 교동광업소를 찾아가 10미터 정도 땅을 파고 금맥을 발견했다. 바로 삭주 교동광업소를 인수, 경영을 확대하였다. 이때 만난 동업자의 딸이자 친구 전우현의 조카딸인 '''이인숙(李仁淑)'''을 만났다. 본처 승계도가 두 아들을 잃고 복부 수술이 잘못되어 아이를 얻지 못하게 되자 방응모에게도 수많은 중매가 들어왔다. 자식들을 병으로 잃은 것이 자신의 불찰이라고 본 승계도는 그에게 작은 부인이라도 들이자는 말을 꺼내기도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18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26년 방응모에게 광산 사업을 제안했던 두 친구가 손을 털고 나갔고, 그의 가족은 돈이 없어 쌀 대신 좁쌀로 좁쌀죽을 먹으며 연명해야 했다. 방응모는 정주군에 사는 비슷한 또래의 먼 친척 방상진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고, 방상진과 일꾼 대여섯 명, 그리고 후처 이인숙의 친정 쪽에서 얻어온 토지문서를 얻어 자금을 마련, 삭주 다릿골 광산으로 가서 다시 금광을 채굴했다. 금맥은 쉽게 나오지 않았고, 출몰하는 마적떼에게 소와 기구를 약탈당했다. 동시에 빚쟁이들의 독촉에 시달렸으나 '''''1926년 7월 지하 300m 지점에서 금맥을 확보했다. 이후 연간 300kg의 금을 생산, 그는 굴지의 광산업자로''''' 성장해 금맥을 찾아 벼락부자가 되었다. 그는 방상진을 교동금광 총감독에 맡겼다. 이때 그는 최창학에게 임대료에 이자를 쳐서 보내주었다.&lt;br /&gt;
&lt;br /&gt;
그때까지 첫 부인 승계도가 두부를 팔아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미국산 포드 T형자동차'''''를 타고 금의환향했다. 1928년 방응모는 자신의 아호인 춘해를 딴 춘해 장학회를 만들고 장학생들의 모임인 이심회를 만든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48페이지&amp;lt;/ref&amp;gt; 그 해에 방응모는 교동지역에 파출소 지소를 유치하였고, 마적단에 시달리던 주민들은 그의 송덕비를 세우기도 했다. '''''1928년에 그는 의정부 직동, 흥선대원군의 별장이 있던 곳 바로 뒤에 위치한 건물을 매입'''''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한용운]], 홍명희를 자주 초대했다.&lt;br /&gt;
&lt;br /&gt;
'''''1932년 방응모는 교동광산을 135만원이란 거액에 일본 중외광업주식회사에 매각'''''했다. 그 뒤 1932년 6월부터 조선일보 영업국장으로 활동하다 '''1933년 3월 [[조선일보]]의 경영권을 인수'''하여 부사장에 취임하였다.&lt;br /&gt;
&lt;br /&gt;
그는 교동광업소를 운영하며 모은 재력을 바탕으로 부사장 재직 중 [[조선일보]]의 대주주가 되었으며, 1933년 7월 8대 사주 조만식으로부터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제9대 [[조선일보]] 사주로 취임, 활동했다.&amp;lt;ref&amp;gt;조선일보는 1932년 7월에 조만식을 사장으로 영입했지만, 조만식은 거의 평생을 평양에서 살아왔던데다 서울에서 활동하기에는 적응을 잘하지 못했다. 조만식은 신문사 경영난과 지역감정의 혹독한 시련을 받은 채 9개월만에 퇴사했다. 그리고 조만식 후임으로 1933년, 방응모를 사장으로 추대하기에 이르렀다.&amp;lt;/ref&amp;gt;&amp;lt;ref&amp;gt;《한국사 시민강좌 제47집, 대표적 독립운동가 12인》,일조각. p145&amp;lt;/ref&amp;gt; 방응모 취임 이후의 초대 부사장은 이광수, 주필은 서춘이었다.&lt;br /&gt;
&lt;br /&gt;
=== 언론, 사업 활동 ===&lt;br /&gt;
==== 사회사업과 조선일보 인수 계획 ====&lt;br /&gt;
금광 사업에 성공한 그는 영림, 조림 사업에도 투자하였다. 방응모는 배우자 승계도에게서 더 이상 아들을 얻지 못하자 첩 이인숙을 통해 아들을 얻으려고 하였다. 이인숙은 아들을 낳았으나 이 아들은 곧 사망하였다. 아들을 잃은 이인숙은 승계도의 도움을 받다가, 그해 6월 방응모가 있는 광산으로 가 생활하였다'''. 승계도와 이인숙을 통해 자녀를 얻지못하자 42세가 되던 해인 1924년 친형인 방응곤의 둘째 아들 방재윤을 양자로 입양시켰다.'''&lt;br /&gt;
&lt;br /&gt;
[[파일:방응모장학생.jpg|섬네일|160px|오른쪽|방응모와 그의 장학금을 받던 학생들. 가운데 앉은 이가 방응모이고, 서있는 이들 중 왼쪽에서 두 번째는 방응모의 양자 방재윤.]]&lt;br /&gt;
&lt;br /&gt;
1930년 배영옥과 결혼하여 딸 방재숙을 얻었다. 1932년 광산업을 정리하였고 언론사업을 비롯하여 육영사업과 조림 및 간척사업 등을 벌였다. 또한 고아원과 사회복지단체에 후원금을 지원하면서 인망을 얻기도 했다. 삭주 지역에서는 그의 송덕비가 세워지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932년 그는 수원군 팔탄면 노하리 일대의 갯벌에 일본인이 수차례 뚝을 쌓다가 실패했다는 정보를 얻고 임삼진을 통해 조선총독부에 허가를 요청하였다. 간척 사업은 이후 1935년부터 시작되었지만 1932년부터 은밀히 착수되어 왔다.&lt;br /&gt;
&lt;br /&gt;
1933년 무렵 방응모가 [[조선일보]] 인수에 나서기 전부터 그는 [[한용운]]을 위한 일이라면 돈을 아끼지 않고 지출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성북동 222번지 언덕에 만해를 위해 기와집 한 채를 지어주었는데 심우장(尋牛莊)이 그것이다. 또한 만해가 일제의 배급을 거부해 생활이 어렵게 되자 만해에게 생활비를 지급했던 방응모는 만해가 병석에 누운 1944년에는 치료비를 지원해주기도 했다.&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6/0000043262?sid=103 만해가 일송 선생 5일장 치른 사연]&amp;lt;/ref&amp;gt; 그 외에도 방응모는 만해 한용운·벽초 홍명희 등과 함께 새해가 되면 백천온천에도 같이 다녀올 정도로 두터운 친분을 맺었다.&lt;br /&gt;
&lt;br /&gt;
방응모의 광산 매각을 일본 정부 측에 알리고 다리를 놓은 것은 고일청(高一淸)이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84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32년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사건으로 체포된 [[안창호]]의 사면 탄원과 보석을 위해 노력하였다. 안창호가 윤봉길을 사주했다는 증거가 없으며 그가 테러행위를 지시했다는 증거 자료나 문건이 없다는 것이 방응모의 안창호 탄원 이유였다. 그러나 총독부 경무국장은 그의 안창호 석방 제안을 정중히 거절한다. 1936년 동방문화학원(뒤에 숭문중학교·고등학교 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1939년 9월에는〈조선일보〉의 조간 1회, 석간 2회의 1일 3회 발행을 시작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인수와 경영 ====&lt;br /&gt;
1933년 1월 16일 그는 정식으로 주식회사 [[조선일보]]사를 창립, 1월 18일에 발표된 창립 취지서에는 창립위원장 방응모, 창립발기인 방응모, 조만식, 고일청 외 등이 참여했다. 일단 그는 조만식을 사장으로 임명하고 자신은 부사장으로 있다가, 그해 3월 13일 다시 부사장에 취임했다. 4월 25일 편집인 겸 발행인이 되고, 4월 29일에는 조선일보의 조간, 석간제 발행을 부활, 확정시켰다. 1933년 7월 10일 총독부로부터 조선일보사의 법인 등록 승인을 얻어냈다. 7월 10일 조만식의 사퇴로, [[조선일보]]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다. 1933년 그는 자신의 아호를 춘해에서 계초로 바꾸었다. 그는 유능한 문인, 필진의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 상금 1천 원을 걸고 작가를 영입하였다.&lt;br /&gt;
&lt;br /&gt;
1934년 3월 25일 이광수를 비롯하여 서춘, 김동진, 함상훈, 신태익 등을 [[조선일보]]로 영입해 왔다. 그 외에도 정주군 출신 언론인, 작가들이 조선일보로 많이 오게 되었다. 이후 동아일보와 갈등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이광수가 조선일보로 옮겨와 부사장직에서 9개월 근무했다. 당시 조선일보 내부에서는 문모 라는 이가 이광수의 등장으로 자신의 입지 약화를 우려해 오랫동안 이광수를 내보내려 흉계를 꾸몄다고 한다. 이광수는 1934년 5월 25일자로 돌연 사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65페이지&amp;lt;/ref&amp;gt; 문모는 그에게 오히려 잘 됐다는 식으로 말하다가 방응모에게 호되게 혼이 났다. 그리고 문모로 하여금 즉시 금강산에 들어가 이광수를 다시 데려오게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65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이광수는 아들 봉근(당시 8살)의 사망 등으로 실의에 빠졌고, 1935년에 가서야 이광수를 조선일보 고문이자 필진으로 재영입하게 됐다.&lt;br /&gt;
&lt;br /&gt;
==== 동방문화학원 재단 설립 ====&lt;br /&gt;
방응모는 1936년 방농장의 소유권을 기본 자산으로 하는 재단법인 동방문화학원(東邦文化學院)을 설립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6페이지&amp;lt;/ref&amp;gt; 동방문화학원은 학교 법인으로 인가된 재단 법인으로, 그뒤 고계학원과 인연을 가지고 1936년부터는 보성고등보통학교를 후견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 분리되었다. 그뒤 방응모 장학생인 서중회 회원들을 위한 방응모 장학사업을 주관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7페이지&amp;lt;/ref&amp;gt;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태평로 구 조선일보 사옥 안에 동방문화학원의 간판을 달고 조광 잡지를 계속 발행하는 조광사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7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일제 강점기 후반 ===&lt;br /&gt;
==== 중일 전쟁 전후 ====&lt;br /&gt;
중일전쟁 개전 직후인 1937년 7월 11일에 열린 [[조선일보]] 간부회의에서 주필 서춘이 '일본군, 중국군, 장개석씨'등으로 쓰던 용어를 '아군, 황군, 지나, 장개석'으로 고치고 일본 국민의 입장에서 논설을 쓸 것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편집국장 김형원과 영업국장 김광수가 적극 반대를 하기도 했으나, 방응모는 '일장기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이미 몇 십만 원의 손해를 보았을 뿐 아니라 [[3.1 운동]] 때처럼 신문이 민중을 지도할 수 없다'면서 서춘의 입장을 지지했다. 한편으로 방응모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된 [[안창호]]를 [[조선일보]]에 영입하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안창호는 옥중에서 얻은 간질환과 폐질환 등으로 고생했고, 진료비 등을 수시로 지원하고 문병했음에도 출옥후 얼마 뒤에 사망한다.&lt;br /&gt;
&lt;br /&gt;
1933년 이심회(以心會：후에 序中會, 방응모장학회 등으로 명칭이 바뀜)라는 장학회를 만들어 국내 대학생과 해외유학생들에게 학자금을 지급하기도 했으며, 재단법인 동방문화학원(東方文化學院：지금의 숭문중·고등학교 전신)의 이사장직을 맡기도 했다.&amp;lt;ref name=&amp;quot;dam1&amp;quot; /&amp;gt; 또한 자신의 막대한 재원을 들여 1936년부터 함경남도 영흥군 일대에 당시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대단위 조림사업을 벌였으며, 그 전 해인 1935년부터는 경기도 수원군 팔탄면 일대에서 만 2년간에 걸친 간척사업을 벌이기도 했다.&amp;lt;ref name=&amp;quot;dam1&amp;quot; /&amp;gt;&lt;br /&gt;
&lt;br /&gt;
1937년 12월 24일 [[안창호]]는 병보석 판정을 받고 재판소가 지정한 현 서울대학교병원인 경성제국대학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안창호의 입원 중에 시중을 든 사람으로는 안창호의 외조카 김순원과 청년 박정호 두 사람이었고, 나중에는 이응준 장군의 부인 이정희가 끝까지 지성껏 간호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7페이지&amp;lt;/ref&amp;gt; [[안창호]]는 병상에서 병원비 문제로도 고초를 겪었다. 이 때문에 조만식은 일본 경찰로부터 안창호의 병원비를 대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음에도, &amp;quot;내가 먹고 살면서 그 선생을 돌보지 않을 수 없다&amp;quot;며 완강히 거절하고 안창호를 도왔다고 한다. 안창호의 간호를 같이 도와주던 이응준 장군 부인 이정희는 10일마다 계산되어 나오는 병원 입원비로 안창호 선생이 괴로워하는 표정을 지켜볼수 없었다고 진술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8페이지&amp;lt;/ref&amp;gt; 방응모는 5백원의 수표 한 장을 안창호에게 전달하였다. 50일간의 입원비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9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안창호]]는 1938년 3월 10일 밤 12시 경성제국대학 병원에서 운명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폐간 사건 ====&lt;br /&gt;
일본의 전쟁이 격화되면서 조선총독부 공보국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1940년에 강제로 폐간조치 했다. 광산을 팔아서 자신의 모든 것을 조선일보에 바쳤던 방응모는 큰 절망과 좌절을 느껴야 했다. [[한용운]]은 ‘신문이 폐간되다/ 붓이 꺾이어 모든 일이 끝나니…’로 시작하는 시를 지어 방응모를 위로했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1&amp;quot; /&amp;gt;&amp;lt;ref&amp;gt;붓이 꺾이어 모든 일 끝나니 이제는 재갈 물린 사람들 뿔뿔이 흩어지고 아, 쓸쓸하고 쓸쓸한지고 망국 서울의 가을날 한강의 물도 흐느끼느니 울음 삼켜 흐느끼며 연지를 외면한 채 바다 향해 흐르느니&amp;lt;/ref&amp;gt; 동아일보에는 김성수 외에도 장덕수와 송진우가 있었지만 그에게는 조선일보 폐간을 막기 위해 총독부와 교섭할 인물도 없었다.&lt;br /&gt;
&lt;br /&gt;
1938년 2월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선 내 일간신문 25개사로 조직된 조선춘추회의 창립에 창립발기인으로 참가했고, 조선춘추회 간사로 활동했다. 같은 해 7월 “국민정신을 총동원하고 내선일체 전 능력을 발휘하여 국책 수행에 협력하여 성전(聖戰)의 궁극적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조직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에 참여했고, 그날 결성된 경성연맹 창립총회에서 상담역을 맡았다. 9월부터 조선방공협회 경기도연합지부 평의원을 지냈다. 10월에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주최한 비상시 국민생활 개선을 위한 제1회 생활개선위원회에서 제2부(의례와 사회풍조 쇄신부)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그러나 1938년 10월부터 조선총독부는 조선일보의 신문용지를 검열, 통제하기 시작했다.&lt;br /&gt;
&lt;br /&gt;
1940년 5월 조선총독부 총독 미나미 지로가 방송담화로 창씨개명을 권고했다. 그러나 그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성씨를 이제 와서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며 창씨개명은 완강하게 거절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조선일보에 트집이 잡힐 일이 나타나지 않자 총독부는 전국 면사무소에 조선일보 신문 구독을 거절하도록 명령을 내렸고, 동시에 조선말을 쓰는 민원인에게는 일을 처리해주지 말도록 하게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3페이지&amp;lt;/ref&amp;gt; 조선총독부는 송진우의 예금통장을 문제삼았다. 송진우 명의의 은행저금이 동아일보의 8백여 개의 지국과 분국을 통해 모금된 독립운동 자금이라며, 그리고 동아일보 간부들이 백운장이라는 요정에서 회식을 한 것을 김성수 집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려 했다는 등의 이유로 백관수 동아일보 사장을 전격 구속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3~374페이지&amp;lt;/ref&amp;gt; 동아일보는 백관수가 구속된지 10일 만에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동아일보 중역회의를 열고 폐간신청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4페이지&amp;lt;/ref&amp;gt; 총독부는 조선일보에도 자진 폐간을 권고했고, 1940년 8월 9일 편집회의를 주관, 8월 10일 조선일보의 폐간계를 내고, 8월 10일자로 폐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5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잡지 발행 활동 ====&lt;br /&gt;
신문 강제 폐간 뒤 방응모는 간판을 조광사로 바꿔 걸고, 사옥은 동방흥업주식회사로 등기를 변경해서 유지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1페이지&amp;lt;/ref&amp;gt; 이후 그는 조광 잡지 발행에 전념했다. 1943년 8월 경 일본 중앙대학의 예과를 마친 방일영이 입사&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1페이지&amp;lt;/ref&amp;gt;, 필진으로 참여했다. [[조선일보]]가 폐간된 후에도 방응모는 벽초 홍명희 부자에게 지속적으로 생활비를 대주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4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4년 6월 29일 만해 [[한용운]]이 사망했다. 그는 심우장을 찾아가 3백원을 내놓았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5페이지&amp;lt;/ref&amp;gt;당시 쌀 10가마가 100원이었지만, 심우장은 당장 현금 1원이 없었는데 거액이라서 놀랐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6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광복 이후 언론 및 정치활동 ===&lt;br /&gt;
==== 광복 직후 ====&lt;br /&gt;
1945년 8.15 광복 후에는 8월 말과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朝鮮在外戰災同胞救濟會) 고문과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9월 초 [[안재홍]] 등이 좌경화되는 건준체제에 반발하여 건준을 탈퇴하자 방응모 역시 건준을 탈퇴하였다.&lt;br /&gt;
&lt;br /&gt;
9월 2일 미군정이 주둔하자, 방응모는 윤전기를 찾기 위해 폐간 당시의 증빙서류를 미 군정청에 제시하였으나 소식이 없었다. 총독부는 조선일보 폐간 직후 인수한 윤전기를 경성일보사에 옮겨서 설치했다. 그는 동방문화재단 외 4개 사업소를 적산으로 파악한 미군정을 설득하고, 사옥 문제도 해결하였다.&lt;br /&gt;
&lt;br /&gt;
10월 1일 조선일보 편집위원회를 구성하고, 신문 복간 운동을 추진했다. 조선총독부의 폐간 지시 당시 의정부로 옮겨놓은 일부 활자 자모음이 잘 보관되어, 그해 11월 23일 조선일보를 복간시키고, 서울신문사 사옥에서 조선일보 복간호를 간행하였다. 이후 조선사회문제대책중앙협의회 중앙위원을 거쳐 10월 16일 이승만 등의 주도로 독립촉성중앙회가 결성되자 독촉에 가입하였다.&lt;br /&gt;
&lt;br /&gt;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이 귀국하자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에 입당했다. 12월 [[안재홍]]의 추천으로 한국독립당의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출되어 3~4개월 동안 활동했다.&amp;lt;ref&amp;gt;일각에서는 방응모가 '한독당 재무부장으로 지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1947년부터 한독당 재무부장을 맡은 신창균이 전면 부정했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47/0000002626?sid=102 백범 비서와 '진짜' 한독당 재정부장의 육성증언. 참고.]&amp;lt;/ref&amp;gt; 그 뒤 대한국민총회 발기인, 대한독립애국금헌성회 발기인 등으로 활동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복간 및 군정기 활동 ====&lt;br /&gt;
11월 [[조선일보]]사를 복간시켰다. 그러나 한동안 조선일보의 인쇄는 서울신문사에서 간행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1945년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추념대회에 참여하였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2&amp;quot;&amp;gt;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13&amp;lt;/ref&amp;gt; 순국선열추념대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2&amp;quot; /&amp;gt;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참여,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이 되었다.&amp;lt;ref&amp;gt;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55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6년 2월 26일 서울신문사 공무국 종업원들이 조선일보의 인쇄를 거부해버렸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436페이지&amp;lt;/ref&amp;gt; 그동안 묵시적으로 방해가 은근히 있었다. 표면상의 문제는 임금 문제이나 내용상으로는 조선일보에 대한 조선공산당의 시위의 일종이었다. 사흘간의 교섭 끝에 2월 28일에 가서야 26일자와 27일자를 소급해서 인쇄하여 신문을 한꺼번에 발행하였다. 그러나 3월 1일과 2일에 또다시 인쇄를 거부당해 결국 휴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436페이지&amp;lt;/ref&amp;gt; 조선일보를 경성일보사로 옮겨서 인쇄하기로 하고 3월 5일자로 사고로 독자에게 알렸다.&lt;br /&gt;
&lt;br /&gt;
4월 29일 김구, 김창숙, 김성수, 오세창 등과 함께 서울운동장에서 윤봉길의사 추모회의 창립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amp;lt;ref&amp;gt;&amp;quot;故尹奉吉義士의 記念式 오늘, 發起人會 열고 準備&amp;quot;, 동아일보 1946년 4월 23일자 2면, 사회면&amp;lt;/ref&amp;gt; 그해 5월 조선공업구락부 고문에 위촉되었다.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民族統一總本部) 10인협의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6월 15일 오후 5시 40분 서울역에 마중나가 서울역에 도착한 삼의사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lt;br /&gt;
&lt;br /&gt;
1945년 광복 직후 서기원이 그를 찾아왔다. 서기원은 그때 경성농상실천학교의 동창회로부터 이 학교의 교장이 되어 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이다. 방응모는 서기원의 제의를 받아들여 1946년 8월 28일 동방문화학원 이사장으로 숭문상업학교를 인수, 재단 이사장이 되었다. 후일 방응모가 6.25 전쟁 중에 납북된 후 동방문화학원과 숭문중,고교의 재단은 최용진이 운영하다가 다시 1978년에 방일영에게 인수되었다.&lt;br /&gt;
&lt;br /&gt;
1947년 1월 21일 제5회 창립위원회를 본사에서 개최하고 2월 23일 주식회사 조선일보사 주주창립총회를 열고 대표이사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공동투자 경영자로 참여시킨 전무 이종민과의 알력이 발생했다. 이종민과의 갈등이 심화되자 그해 8월 3일 방응모는 일단 사직서를 제출했다. 1947년 8월 10일 풍문여고 강당에서 개최된 한인신문기자협회에 참석, 민족청년단에서 언론계 공로자로 방응모, 김성수, 설의식을 지정하여 상을 시상받았다.&amp;lt;ref&amp;gt;&amp;quot;朝鮮 新聞記者協會&amp;quot;, 동아일보 1947년 8월 10일자 2면, 사회면&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납북과 최후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 납북 후 행적은 &amp;quot;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amp;quot;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amp;lt;ref name=&amp;quot;김장&amp;quot;/&amp;gt; 1950년 8월경 개성 송악산 부근에서 미군의 폭격에 희생되었고 심한 폭격으로 시신을 찾을 수 없어 묘도 만들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남한에서는 1955년 7월 7일 생사불명기간 만료로 인해 실종 처리되었다.&lt;br /&gt;
&lt;br /&gt;
=== 사후 ===&lt;br /&gt;
서울 종로에 있던 양자 방재윤의 두 아들 방일영과 방우영은 방응모의 첩 이인숙이 찾아가 피신하라고 권고하여 황급히 피신했다. &lt;br /&gt;
&lt;br /&gt;
7월 6일 그의 행방불명처리가 되고, 방응모의 사후에도 [[조선일보]]는 그의 명의로 발행되었다. 1952년 4월 28일 조선일보는 발행인겸 편집인을 장기영으로, 인쇄인을 방일영으로, 방응모는 명예사장으로 명의변경하여 휴전 후 계속 발행하게 되었다. 1954년 4월 30일 제8회 조선일보 정기주주총회에서 장기영 사장이 사퇴하면서, 명예사장 방응모가 사장으로 추대되고, 발행인 겸 대표취체역에 방일영이 선임되었다. 이후 실종 후 1959년에 법적으로 사망 처리되었다. 그리고 1970년까지는 조선일보는 그의 이름으로 발행되었다.&lt;br /&gt;
&lt;br /&gt;
1970년 2월 19일 조선일보 정기주주총회에서 방응모 이사를 사퇴 수리하였다. 그의 피폭 사망 사실은 1970년대 이후 탈북자들을 통해 대한민국에 소개되었다.&lt;br /&gt;
&lt;br /&gt;
== 친일행위 의혹 ==&lt;br /&gt;
=== 일제 전시체제기 활동 ===&lt;br /&gt;
일제 강점기 말기 언론인으로서 총독부체제에 협력한 기록과 활동이 다수 기록이 있다. 1933년 3월 [[조선일보]] 경영권을 인수하고 부사장직에 취임했을 당시 같은 달에 고사기관총 구입비용 1600원을 군에 헌납하였다. 그는 1935년 친일 잡지 《조광 (잡지)(朝光)》을 창간하였고, 1937년에는 경성방송국 제2방송에 출연하여 일제가 중국의 베일을 절멸케하여 극동평화를 지키려고 한다는 강연을 하였다. 1940년대부터 조광에 집중적으로 친일 논설을 기고하고 시국 강연에 참여하여 전쟁 지원을 독려했다. 1942년 6월에는 '징병령 실시에 일층 더 감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글을 써서 조광에 발표하였다. 애국금차회(1937),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1938), 임전대책협의회(1941), 조선임전보국단(1941) 등 대표적인 친일 단체의 회원에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그는 이런 행적으로 인해 해방정국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명단에 기록되어 있고,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해 발표한 &amp;lt;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amp;gt;에 모두 포함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lt;br /&gt;
&lt;br /&gt;
우리 [[조선일보]]는 다른 어떤 신문도 따라오지 못하는 확고한 신념에서 비국민적 행위를 단연 배격하여 종국까지 조선일보사가 이미 정해놓은 방침에 한뜻으로 매진한다.|원산에서의 순회 강연&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9478.html 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친일 다짐하다 시민에 봉변]《한겨레》2005-08-24 오후 06:13:18&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반민족행위 논란 ===&lt;br /&gt;
방응모를 친일파로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남아 있다. 조선일보 경영 이전에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방응모의 활동이 거의 없었고, 납북된 뒤 소식이 끊겨버린 까닭에 본인이 항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 동안의 행적만으로 친일파 여부를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방응모의 후손들이 영향력 있는 [[조선일보]] 언론사의 사주를 맡았기에 그의 입장에서 서술한 기록을 많이 남기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80년 발간된 그의 전기 《계초 방응모》(조선일보사) 등에는 '그가 민족주의적 선각자'로 묘사되고 있다. 방응모가 친일파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일부세력측은 그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논거로 드는 경우가 많이 있다.&amp;lt;ref&amp;gt;유석재, 계간 《유심》 (2004년 봄호) [http://yousim.buddhism.org/html/2004-spr/tamgu-yoo-seok-jae.htm 삭풍 속에 피어난 금란지교(金蘭之交) - 만해와 계초 방응모]&amp;lt;/ref&amp;gt;&amp;lt;ref&amp;gt;&amp;quot;일제 말기 계초는 시국강연에 나설 것과 창씨개명을 집요하게 강요받았으나 그때마다 묵묵부답으로 거부하며 소신을 지켰다.&amp;quot; 《조선일보》 (2001.3) 조선일보 사장열전 - 계초 방응모편, 《한겨레》 (2001.3.30) [http://www.njoyschool.net/news/article_view.asp?menu_code=s20202&amp;amp;no=1206 조선일보, 일장기를 신문제호 위에]&amp;lt;/ref&amp;gt;&lt;br /&gt;
또한 한국정토학회 고문이자 서울 정토사 주지였던 박설산(1918~2007)이 학도병에 끌려가기 직전인 1943년 12월 28일 밤 서울역에서 스스로 왼발을 선로에 올려 발가락을 절단해 징집을 기피하자 방응모는 만해와 함께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설산을 걱정하면서 입원 중 조선일보 기자를 통해 돈을 전달한 것은 물론 퇴원할 때 돈을 전달하고 뒤를 보살폈다고 한다.&amp;lt;ref&amp;gt;박설산 회고록 &amp;lt;뚜껑없는 조선역사책&amp;gt;(1994, 도서출판 삼장) p240~241&amp;lt;/ref&amp;gt;&lt;br /&gt;
&lt;br /&gt;
2010년 12월, 방응모 관계자들 및 조선일보측은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을 취소해달라'며 법원에 낸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amp;quot;1944년 조선항공업 창립발기인으로 활동한 부분에 대해 친일행위로 판단한 부분을 취소하지만 나머지 활동에 대해서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amp;quot;라고 판결했다. 그 이유인 즉 &amp;quot;방응모는 1933년 조선일보 사장으로 취임해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등으로 활동하며 친일활동을 벌였으며, 1937년 경성방송국 시국강연에서 일본제국이 극동평화를 확립시킬 것이라는 내용의 강연을 하고, 1938년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춘추회의 발기인 겸 간사로 활동하기도 했다&amp;lt;ref&amp;gt;[http://media.daum.net/breakingnews/politics/view.html?cateid=1002&amp;amp;newsid=20101222103319164&amp;amp;p=newsis 법원 &amp;quot;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친일파 맞다&amp;quot;]뉴시스 2010년 12월 22일&amp;lt;/ref&amp;gt;&amp;quot;는 것이다.&lt;br /&gt;
&lt;br /&gt;
2012년 1월 12일 서울고법 행정7부는 방 전 사장의 손자인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이 행정안전부를 상대로 낸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처분 취소 청구소송에서 ‘일제 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의 친일 행위 판정 조항에 비추어 방 전 사장에게 적용된 모두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민족적 지도자로서 비중이 큰 만큼 그로 인한 책임도 무거울 뿐 아니라 고난의 시기를 겪은 민족으로서 그 역사를 반성하자는 입장에 설 때, 방 전 사장의 여러 행태는 반민특별법에서 규정한 친일반민족행위의 유형에 속함을 부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1·2심 재판부는 방 전 사장이 자신이 운영하던 잡지 &amp;lt;조광&amp;gt;에 일제 침략전쟁에 동조하고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문예물과 일제 침략전쟁에 협력할 것을 주문하는 논문을 게재하는 등의 ‘친일’ 행위를 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또한, 2심 재판부는 일본의 전쟁 수행을 돕기 위해 설립된 군수 제조업체 ‘조선항공공업’의 발기인과 감사를 지낸 것은 “감사는 업무집행에 관여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기관으로, 방 전 사장이 이 회사를 운영했다고 볼 수 있다”는 이유로 친일이라고 판단했다.&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4565.html법원 ‘방응모 친일’ 2심서도 인정] 인터넷한겨레 2010년 12월 22일&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가족 관계 ==&lt;br /&gt;
* 아버지 : 방계준(方桂準)&lt;br /&gt;
* 어머니 : 온양 박씨&lt;br /&gt;
** 형 : 방응곤(方應坤)&lt;br /&gt;
** 배우자 : 승계도&lt;br /&gt;
*** 아들 2명 요절&lt;br /&gt;
** 배우자 : 이인숙(李仁淑, 1901년 ~ ?)&lt;br /&gt;
*** 아들 : 방재욱(方在旭, 1925년 ~ 1926년 9월)&lt;br /&gt;
** 배우자 : 배영옥(裵英玉)&lt;br /&gt;
*** 장녀 : 방재숙(方在淑)&lt;br /&gt;
** 배우자 : 노호용(盧鎬龍)&lt;br /&gt;
*** 장남 : 방재선(方在善, 1944년 ~)&lt;br /&gt;
*** 차남 : 방재효(方在孝, 1946년 ~)&lt;br /&gt;
*** 삼남 : 방재규(方在奎, 1948년 ~)&lt;br /&gt;
&lt;br /&gt;
** 양자 : 방재윤(方在允 또는 方在胤, 1901년 ~ 1940년, 형 방응곤의 차남)&lt;br /&gt;
*** 손자 : 방일영(方一榮, 1923년 ~ 2003년)&lt;br /&gt;
**** 증손 : 방상훈(方相勳, 1948년 ~)&lt;br /&gt;
**** 증손부 : 윤순명 - 윤치호(尹致昊, 1865년 ~ 1945년)의 증손녀&lt;br /&gt;
***** 현손 : 방준오(方俊吾, 1974년)&lt;br /&gt;
***** 현손 : 방정오(方政吾, 1978년)&lt;br /&gt;
**** 증손 : 방용훈(方容勳, 1952년 ~)&lt;br /&gt;
*** 손자 : 방필영(方必榮, 1924년 ~ 1926년)&lt;br /&gt;
*** 손녀 : 방숙영(? ~ 1951년 1월)&lt;br /&gt;
*** 손자 : 방우영(方又榮, 1928년 ~ 2016년)&lt;br /&gt;
**** 증손 : 방성훈(方聖勳, 1973년 ~)&lt;br /&gt;
&lt;br /&gt;
== 기타 ==&lt;br /&gt;
그는 [[한용운]], 최남선, 정인보, 홍명희 등과 친분관계를 형성하고 어울려 지냈다 한다.&lt;br /&gt;
&lt;br /&gt;
[[김구]]의 한국독립당의 재정적 후견인 역할을 하였다 하며,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삼의사 유골봉환식 때 [[김구]], [[정인보]] 등과 촬영한 사진이 있다.&amp;lt;ref&amp;gt;백범어록 참조&amp;lt;/ref&amp;gt; 그리고 1945년 11월 23일 조선일보가 복간되자 백범 김구는 '有志者事竟成' 뜻을 지닌 자 성취할 수 있다'는 친필 휘호를 보내며 축하했다.&amp;lt;ref&amp;gt;[http://www.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4060370241 '조선일보 역사 읽기'《조선일보》2004.06.03]&amp;lt;/ref&amp;gt;&lt;br /&gt;
한편 임꺽정의 저자인 벽초 홍명희가 방응모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그와 깊은 친분을 맺었다는 주장이 있다. 《조광》 1938년 11월호엔 홍명희가 병중에 있는 방응모를 위로하며 지은 한시가 방응모의 답시와 함께 실려 있다고 한다.&amp;lt;ref&amp;gt;[http://weekly.chosun.com/site/data/html_dir/2004/11/05/2004110577041.html ‘임꺽정’으로 되살아난 독립운동의 魂! 주간조선 1827호 2004.11.04&amp;lt;/ref&amp;gt; 또한 [[안창호]]의 비서실장을 지낸 독립유공자 구익균은 방응모와 안창호가 친밀했다는 주장을 했다.&amp;lt;ref&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09/2008030901055.html &amp;quot;공산주의자들, 도산 비판하다가도 하숙비 떨어지면 찾아와&amp;quot;] 조선일보, 2008-03-10 03:22&amp;lt;/ref&amp;gt;&lt;br /&gt;
또한 박설산에 따르면 1943년 만해 한용운에게 학도병으로 끌려가게 되었음을 알리려 심우장으로 찾아가게 되었을 때, 한용운과 방응모가 바둑을 두고 곁에서 정인보가 훈수를 두고 있었다고 한다.&amp;lt;ref&amp;gt;박설산 저 &amp;lt;뚜껑없는 朝鮮 역사 책&amp;gt; p.226 도서출판 三藏(1994)&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30년대~1940년대 방응모에게서 장학금을 지원받은 학생 모임인 서중회의 회원들의 그의 인물평은 &amp;quot;첫 인상은 좀 깡마른 모습이었으나 의지가 강한 인물&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56페이지&amp;lt;/ref&amp;gt;&amp;quot;이라는 평을 남기기도 했다.&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 /&amp;gt;&lt;br /&gt;
&lt;br /&gt;
== 참고 자료 ==&lt;br /&gt;
* 청산하지 못한 역사: 언론 내세워 일제에 아부한 교화 정책의 하수인 (문영숙) (반민족문제연구소, 청년사, 1994)&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민족 계몽의 초석 방응모(이동욱 저, 지구촌, 1998)&lt;br /&gt;
* 계초 방응모전(계초전기간행위, 조선일보사, 1980년)&lt;br /&gt;
* 계초 방응모(이동욱, 방일영문화재단, 1996)&lt;br /&gt;
&lt;br /&gt;
== 외부 링크 ==&lt;br /&gt;
* [https://web.archive.org/web/20050123171046/http://chosunhost.com/ 계초방응모 기념사업회]&lt;br /&gt;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09145 &amp;lt;조선일보&amp;gt;, 방응모 전 사장의 '친일행적' 말한다] - 오마이뉴스 04.09.10일자&lt;br /&gt;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020302101749 방응모ㆍ 김성수 친일행적 뭔가 : &amp;lt;긴급입수&amp;gt;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 全文] - 프레시안 2002-03-02&lt;br /&gt;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54052 그가 '&amp;lt;조선&amp;gt;의 주인' 주장하는 이유] 오마이뉴스 2001년 9월 20일자&lt;br /&gt;
*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956 방재선씨, 호주·상속 원인무효소송 제기]&lt;br /&gt;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4/06/2008040601053.html '5인 친필 서첩' 발굴] 조선일보 2008년04월06일자]&lt;br /&gt;
&lt;br /&gt;
[[분류: 감자]]&lt;/div&gt;</summary>
		<author><name>Nsgjjsjsjy02</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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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방응모</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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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06-11T02:38:5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Nsgjjsjsjy02: /* 계몽 운동 */&lt;/p&gt;
&lt;hr /&gt;
&lt;div&gt;{|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width:100%&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0%&amp;quot;|사진&lt;br /&gt;
|[[파일:방응모.jpg|center|200픽셀]]&lt;br /&gt;
|+ '''방응모'''&lt;br /&gt;
|+ style=&amp;quot;caption-side:bottom;text-align:left:&amp;quot;|출처: 위키백과&lt;br /&gt;
|출생||1883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조선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또는 정부면 성내동&lt;br /&gt;
|-&lt;br /&gt;
|사망||1950년경으로 추정&lt;br /&gt;
|-&lt;br /&gt;
|사인||불명&lt;br /&gt;
|-&lt;br /&gt;
|거주지||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amp;gt; 경성부 -&amp;gt; 경기도 양주군 의정부읍&lt;br /&gt;
|-&lt;br /&gt;
|국적||대한민국&lt;br /&gt;
|-&lt;br /&gt;
|본관||온양&lt;br /&gt;
|-&lt;br /&gt;
|별칭||호: 계초(啓礎), 춘해(春海)&lt;br /&gt;
|-&lt;br /&gt;
|직업||교사, 변호사, 상인, 언론인, 기업인, 사회운동가, 정치가&lt;br /&gt;
|-&lt;br /&gt;
|배우자||승계도, 이인숙, 배영옥, 노효용&lt;br /&gt;
|-&lt;br /&gt;
|자녀||방재숙(딸), 방재욱·방재선·방재효·방재규(아들), 방재윤(양자)&lt;br /&gt;
|-&lt;br /&gt;
|부모||방계준(부), 온양박씨(모)&lt;br /&gt;
|}&lt;br /&gt;
&lt;br /&gt;
'''방응모'''(方應謨, 평안북도 정주군, 1883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 1950년 8월(추정)는 [[일제강점기]]의 교육자, 언론인, 법조인, 기업인이자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언론인이며 정치인이다. 호는 '''춘해'''(春海)이고, 뒤에 '''계초'''(啓礎)로 고쳤다.&lt;br /&gt;
&lt;br /&gt;
1922년 동아일보 정주 지국을 인수해 지국장을 지내다가 1924년 금광업에 뛰어들어 큰 부를 얻게 되었다. 1932년 6월 조선일보에 입사하였고 이후 영업국장이 되어 조선일보의 판매망을 장악하게 되고 경영권을 인수하면서 1933년 3월 조선일보 부사장이 되었다. 1933년 7월부터 1950년 7월까지 종신으로 [[조선일보]]의 사장을 역임하였다. 1935년 창간한 월간잡지 '조광(朝光)'은 친일 논란이 있다.&amp;lt;ref&amp;gt;안은필. [http://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9211 조선일보가 가장 빛나던 시기, ‘안재홍 시대’]&amp;lt;/ref&amp;gt;&amp;lt;ref name=&amp;quot;안은&amp;quot;&amp;gt;안은필. [http://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9279 방응모 친일증거, “모래밭에서 모래 찾기”]국민TV. 기사입력 2015년 4월 23일. 기사수정 2015년 4월 24일.&amp;lt;/ref&amp;gt;&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2/0002006080?sid=102 한홍구 &amp;quot;박정희는 공포와 욕망의 정치를 했다&amp;quot;]. 프레시안. 2015년 4월 13일.&amp;lt;/ref&amp;gt;&amp;lt;ref&amp;gt;이민영.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1/0002255321?sid=102 고법 “방응모 前조선일보 사장 친일행적 대부분 인정”]. 서울신문. 2012년 1월 13일.&amp;lt;/ref&amp;gt;&amp;lt;ref&amp;gt;노현웅.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8/0002251781?sid=102 조선 방응모·동아 김성수의 ‘친일’…수년째 결론 안 내고 미루는 법원]. 한겨레. 2014년 11월 3일.&amp;lt;/ref&amp;gt;&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6/0000000413?sid=110 김성수ㆍ방응모와 친일언론인 군상]. 미디어오늘. 2002년 3월 12일.&amp;lt;/ref&amp;gt; 언론계에서 활동하면서도 사업가의 길을 함께 걸었고, 교육 장학 활동을 하였으며, 1945년 광복 직후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 고문과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안재홍]]의 추천을 받아 한국독립당 중앙상무위원과 독립촉성국민회 총무부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amp;lt;ref name=&amp;quot;안은&amp;quot;/&amp;gt;&amp;lt;ref&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16/2008031600800.html 계초 방응모와의 우정도 여러 편의 시로 표현해&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해방 정국에서 김구의 재정적 후견인으로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등 삼의사 유골 봉환 사업과 신탁통치 반대 운동 등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대한민국 수립 이후 사회민주주의 정치가인 조소앙과 사회당을 결성해 문교정책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lt;br /&gt;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 납북 후 행적은 &amp;quot;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amp;quot;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lt;br /&gt;
&lt;br /&gt;
== 생애 ==&lt;br /&gt;
=== 생애 초기 ===&lt;br /&gt;
==== 출생과 성장 ====&lt;br /&gt;
방응모는 1883년 11월 3일 또는 9월 29일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바우머리 부락 또는 정주군 정부면 성내동 425번지에서 '''방계준(方桂準)'''과 온양 박씨(溫陽朴氏)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그는 어려서 집중력이 남달리 뛰어난 반면 고집이 셌다는 평이 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페이지&amp;lt;/ref&amp;gt; 그의 '''삼촌 방계묵(方啓默)'''은 그의 고집있는 기질을 두고 저놈은 쇠작두 말고 나무 작두로 잘라 죽여야 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3~54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친척들의 야멸찬 말들이 그에게 상처를 주거나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4페이지&amp;lt;/ref&amp;gt; 또한 그의 유년시절을 본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가 태어날 당시 태몽도 없었고, 신동이라는 말도 별다르게 듣지 않았다고 한다. 어려서 빈곤한 가정환경으로 방응모는 정규 학교에는 입학하지 못하고, 16세 때까지 서당에 드나들며 한학을 익혔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던 중 그가 어느정도 실력이 우수하다고 인정되자, 스승인 승창률은 잠시 방응모에게 어린아이들을 돌보게 한 후 자리를 피하곤 했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1페이지&amp;lt;/ref&amp;gt; 그는 홀로 사서육경을 탐독, 독파하였다. 21세 무렵 잠시 서당 훈장을 지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896년 독립협회의 활동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5페이지&amp;lt;/ref&amp;gt; 형 방응곤이 예배당에 다니게 되자&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2페이지&amp;lt;/ref&amp;gt;, 그를 통해 신문물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다. 그 뒤 우연히 경성부에 갔다가 신문물을 보고 충격을 받아 17세에 독학으로 신학문과 일본어, 중국어, 수학 등을 독파하였다. 유년시절 서당의 성리학 스승이던 승창률의 친척인 승시영(承時榮)과 조씨(趙氏)의 딸 승계도와 결혼했다.&lt;br /&gt;
&lt;br /&gt;
결혼한 다음 해에도 그는 공부를 한다며 책만 사다 읽곤 했고&amp;lt;ref name=&amp;quot;fsfs60&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60페이지&amp;lt;/ref&amp;gt;, 부인 승계도는 생계를 위해 몸소 나섰다.&amp;lt;ref name=&amp;quot;fsfs60&amp;quot;/&amp;gt; 부인 승계도는 친척 가운데 콩을 싸게 넘겨주는 이들이 있어 그 콩으로 두부를 만들거나 콩나물을 키워 장사를 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61페이지&amp;lt;/ref&amp;gt; 그의 아내 승계도는 남편에 대한 믿음이 절대적이었고 탓을 하거나 가출하지 않았다. 이후 그는 서당 훈장으로 초빙되었으나, 그가 가는 마을의 기존 훈장, 한학자들은 그를 적대적으로 대했다. 그렇다고 마을 사람들의 일부 지명이 있었으나 자신의 스승의 자리를 침해할 수 없다 하여 그는 자신의 동리의 훈장일은 사양하였다. 그는 마을을 나가 신학문을 하는 친구들과 어울렸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62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계몽 운동 ====&lt;br /&gt;
도산 [[안창호]]와 남강 이승훈이 연사로 돌아다니며 애국 계몽 강연과 문맹들의 교육, 야학 사업을 하였고, 여기에 감동받은 청년들이 서당과 야학을 열고 문맹들과 여성들에게 한글 교육을 하였다. 도산 [[안창호]]의 강연과 남강 이승훈의 강연을 찾아다니며 듣다가 감동받은 방응모 역시 교육, 계몽에 참여하였다.&lt;br /&gt;
&lt;br /&gt;
그는 청년회의 활동에 몰두하였으나, 농번기에 작은 일손이라도 더 필요했던 동리 노인들은 젊은 아이들이 일은 하지 않고 무슨 모임이다 하여 어울려 돌아다니는 꼴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또한 모임 구성원들 역시 &amp;quot;의식 자체가 아직 전근대적이었고, 사고의 분화를 겪지도 않은데다가, 이들의 조직 활동이 기분 좋으면 나오고 기분 나쁘면 빠져 버리는 것이 예사&amp;quot;라 청년 모임들은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청년단체의 실패에 좌절하고 다시 귀향했으며, 이때 그는 춘해(春海)라는 아호를 스스로 지었다. 그의 집안에서는 그가 정착하기를 바라고 정주읍 성내동에 집을 얻어 주었다.&lt;br /&gt;
&lt;br /&gt;
안창호의 계몽 강연에 감동받은 남강 이승훈이 1907년(융희 1년) 8월 김덕용(金德鏞)을 초빙하여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 오산에서 신식 교육을 하는 소학교 과정의 학교 강명의숙을 세우고 산수, 수신, 역사, 지리, 체조를 가르쳤고, 그해 12월에는 중학교 과정인 오산학교를 세우고 학생 7명을 처음 받아들여 개교했다. 1908년에는 오산학교에 학생들이 모여 3개 반으로 편성되었고, 정주군 출신의 춘원 이광수가 오산중학교의 교사로 초빙되어 축구, 야구, 테니스, 배구 등을 지역에 처음 소개하였다. 방응모는 어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학교에 입학해 신학문을 접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0페이지&amp;lt;/ref&amp;gt; 그는 이승훈과 의기투합해 민립 대학을 세우는 운동을 추진했지만 조선총독부 평안북도청 학무국에서 승인을 거부하여, 대학 설립에 실패했다.&lt;br /&gt;
&lt;br /&gt;
=== 언론, 기업 활동 ===&lt;br /&gt;
==== 계몽 활동과 언론 활동 ====&lt;br /&gt;
1915년부터 1924년 방응모는 지역 지식인들, 유학파 청년, 계몽 청년들이 모여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하는데 참여했고, 민립대학기성회 평안북도지부에서 활동하면서 민립대학기성회 중앙회 중앙위원 조만식 등과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언변과 용모가 되었던 그의 여관에도 손님들이 몰렸고, 그가 &amp;quot;2백원도 좋고 5백원도 좋다며 보태달라&amp;lt;ref name=&amp;quot;fsfs87&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7페이지&amp;lt;/ref&amp;gt;&amp;quot;고 하면 기부금을 내는 이들이 있었다. 대신 하룻밤을 의탁하려고 그의 여관을 찾은 이들에게 무료 숙식을 제공하기도 했다.&amp;lt;ref name=&amp;quot;fsfs87&amp;quot;/&amp;gt; 1919년 정주에서 3.1 만세 운동이 벌어지자, 그도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형사들의 눈을 피해 방응모는 만세운동을 하다 재빨리 몸을 피해 화를 면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8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1922년 6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인수하여 분국장에 취임했다. 6월 9일에는 정주군 지역 체육행사로 테니스 대회를 개최하였다. 그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경영하는 동시에 그는 농촌 계몽운동 등에 적극 투신하여 인망을 쌓았다. 처음 몇번은 친구 전우현의 자금을 빌려 부족분을 메우기도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02페이지&amp;lt;/ref&amp;gt; 한다. 1922년 6월 19일&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96페이지&amp;lt;/ref&amp;gt; 동아일보 본사를 설득하여 정주분국을 동아일보사 정주지국으로 승격시켰다. 동아일보사 지부장 재직 시 그는 전우현과 함께 의기투합하여 민립 대학 설립 자금과 농촌진흥회 회원의 여비와 회비를 염출하기 위한 목적 및 당시 교사도 없이 난관에 처했던 오산학교의 재개교를 위한 &amp;quot;오산학교의 부흥 운동을 목표로 한 재단법인 촉성 기금 마련&amp;quot; 등을 계획했다. 총독부의 인허가 거부로 실패한 대학 설립 자금은 고스란히 오산학교의 부활과 복교 자금으로 투입되었다. 1920년 1월에 경성형무소에서 가석방된 조만식은 이승훈을 만났고, 다시 조만식이 오산학교를 맡으면서 학교는 다시 정상 운영되었다.&lt;br /&gt;
&lt;br /&gt;
1923년 동아일보 정주군 분국이 지국으로 승격되자 정주 지국장으로 동아일보 정주지국을 경영하였고, 같은 해 7월 여성들의 사회참여와 평등권 신장을 위한 여자교육회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이후 대규모 수해가 나자, 정주군 수해구제회를 결성하여 봉사활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1923년 4월 조만식·송진우·안재홍·김성수 등의 주도로 민간 자본으로 대학교 설립을 추진하기 위한 조직인 조선민립대학기성회가 결성되자, 방응모는 민립대학 기성회에 참여하여 민립대학기성회 정주군준비회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5월에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정주지방지부가 설립되자 기성회 정주지부 상무위원을 맡았다.&lt;br /&gt;
&lt;br /&gt;
==== 광업 경영과 조선일보 입사 ====&lt;br /&gt;
1924년 봄 오산학교 교감으로 있던 전우현이 방응모와도 안면이 있던 금광 채굴업자 두 명을 데리고 그를 찾아왔다. 그들은 자신들이 봐 둔 산이 있다고 방응모에게 소개했다. 그는 선천군의 지역 유지이자 최창학의 친구이며, 그가 동아일보 지국장으로 알게 된 이봉찬을 찾아갔다. 한학자로 알고 있던 그가 금광 투자를 제의하자 &amp;quot;한문이라면 빼지 않고 알려고 드는 한학 훈도가 어떻게 금광을&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16페이지&amp;lt;/ref&amp;gt;&amp;quot; 하느냐 하였지만, 이봉찬은 그에게 금광, 광산에 대한 지식을 알려주었다. 이봉찬은 그에게 광산 지식을 알려주며 최창학의 소유지 중 폐광을 빌리는 법을 알려주었다. 방응모의 됨됨이에 감복한 듯, 그의 수많은 질문에 적잖은 충고를 자임해주었다.&amp;lt;ref name=&amp;quot;fsfs117&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5페이지&amp;lt;/ref&amp;gt; 이봉찬은 최창학에게 방응모를 소개하는 편지를 수차례에 걸쳐 보내주었다.&amp;lt;ref name=&amp;quot;fsfs117&amp;quot;/&amp;gt; 이봉찬은 방응모의 친구들이 봐 둔 갱도를 임대받도록 도와주었다. 이봉찬은 방응모의 한학 실력과 사람됨을 알아보고 있어, 자금을 쾌히 빌려주었다.&amp;lt;ref name=&amp;quot;fsfs117&amp;quot;/&amp;gt;&lt;br /&gt;
&lt;br /&gt;
이후 광산업에 뛰어들어 1924년 여름 압록강변의 최창학 소유 폐금광인 평안북도 삭주군 외남면 교동 다릿골의의 삭주 교동광업소를 찾아가 10미터 정도 땅을 파고 금맥을 발견했다. 바로 삭주 교동광업소를 인수, 경영을 확대하였다. 이때 만난 동업자의 딸이자 친구 전우현의 조카딸인 '''이인숙(李仁淑)'''을 만났다. 본처 승계도가 두 아들을 잃고 복부 수술이 잘못되어 아이를 얻지 못하게 되자 방응모에게도 수많은 중매가 들어왔다. 자식들을 병으로 잃은 것이 자신의 불찰이라고 본 승계도는 그에게 작은 부인이라도 들이자는 말을 꺼내기도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18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26년 방응모에게 광산 사업을 제안했던 두 친구가 손을 털고 나갔고, 그의 가족은 돈이 없어 쌀 대신 좁쌀로 좁쌀죽을 먹으며 연명해야 했다. 방응모는 정주군에 사는 비슷한 또래의 먼 친척 방상진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고, 방상진과 일꾼 대여섯 명, 그리고 후처 이인숙의 친정 쪽에서 얻어온 토지문서를 얻어 자금을 마련, 삭주 다릿골 광산으로 가서 다시 금광을 채굴했다. 금맥은 쉽게 나오지 않았고, 출몰하는 마적떼에게 소와 기구를 약탈당했다. 동시에 빚쟁이들의 독촉에 시달렸으나 '''''1926년 7월 지하 300m 지점에서 금맥을 확보했다. 이후 연간 300kg의 금을 생산, 그는 굴지의 광산업자로''''' 성장해 금맥을 찾아 벼락부자가 되었다. 그는 방상진을 교동금광 총감독에 맡겼다. 이때 그는 최창학에게 임대료에 이자를 쳐서 보내주었다.&lt;br /&gt;
&lt;br /&gt;
그때까지 첫 부인 승계도가 두부를 팔아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미국산 포드 T형자동차'''''를 타고 금의환향했다. 1928년 방응모는 자신의 아호인 춘해를 딴 춘해 장학회를 만들고 장학생들의 모임인 이심회를 만든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48페이지&amp;lt;/ref&amp;gt; 그 해에 방응모는 교동지역에 파출소 지소를 유치하였고, 마적단에 시달리던 주민들은 그의 송덕비를 세우기도 했다. '''''1928년에 그는 의정부 직동, 흥선대원군의 별장이 있던 곳 바로 뒤에 위치한 건물을 매입'''''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한용운]], 홍명희를 자주 초대했다.&lt;br /&gt;
&lt;br /&gt;
'''''1932년 방응모는 교동광산을 135만원이란 거액에 일본 중외광업주식회사에 매각'''''했다. 그 뒤 1932년 6월부터 조선일보 영업국장으로 활동하다 '''1933년 3월 [[조선일보]]의 경영권을 인수'''하여 부사장에 취임하였다.&lt;br /&gt;
&lt;br /&gt;
그는 교동광업소를 운영하며 모은 재력을 바탕으로 부사장 재직 중 [[조선일보]]의 대주주가 되었으며, 1933년 7월 8대 사주 조만식으로부터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제9대 [[조선일보]] 사주로 취임, 활동했다.&amp;lt;ref&amp;gt;조선일보는 1932년 7월에 조만식을 사장으로 영입했지만, 조만식은 거의 평생을 평양에서 살아왔던데다 서울에서 활동하기에는 적응을 잘하지 못했다. 조만식은 신문사 경영난과 지역감정의 혹독한 시련을 받은 채 9개월만에 퇴사했다. 그리고 조만식 후임으로 1933년, 방응모를 사장으로 추대하기에 이르렀다.&amp;lt;/ref&amp;gt;&amp;lt;ref&amp;gt;《한국사 시민강좌 제47집, 대표적 독립운동가 12인》,일조각. p145&amp;lt;/ref&amp;gt; 방응모 취임 이후의 초대 부사장은 이광수, 주필은 서춘이었다.&lt;br /&gt;
&lt;br /&gt;
=== 언론, 사업 활동 ===&lt;br /&gt;
==== 사회사업과 조선일보 인수 계획 ====&lt;br /&gt;
금광 사업에 성공한 그는 영림, 조림 사업에도 투자하였다. 방응모는 배우자 승계도에게서 더 이상 아들을 얻지 못하자 첩 이인숙을 통해 아들을 얻으려고 하였다. 이인숙은 아들을 낳았으나 이 아들은 곧 사망하였다. 아들을 잃은 이인숙은 승계도의 도움을 받다가, 그해 6월 방응모가 있는 광산으로 가 생활하였다'''. 승계도와 이인숙을 통해 자녀를 얻지못하자 42세가 되던 해인 1924년 친형인 방응곤의 둘째 아들 방재윤을 양자로 입양시켰다.'''&lt;br /&gt;
&lt;br /&gt;
[[파일:방응모장학생.jpg|섬네일|160px|오른쪽|방응모와 그의 장학금을 받던 학생들. 가운데 앉은 이가 방응모이고, 서있는 이들 중 왼쪽에서 두 번째는 방응모의 양자 방재윤.]]&lt;br /&gt;
&lt;br /&gt;
1930년 배영옥과 결혼하여 딸 방재숙을 얻었다. 1932년 광산업을 정리하였고 언론사업을 비롯하여 육영사업과 조림 및 간척사업 등을 벌였다. 또한 고아원과 사회복지단체에 후원금을 지원하면서 인망을 얻기도 했다. 삭주 지역에서는 그의 송덕비가 세워지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932년 그는 수원군 팔탄면 노하리 일대의 갯벌에 일본인이 수차례 뚝을 쌓다가 실패했다는 정보를 얻고 임삼진을 통해 조선총독부에 허가를 요청하였다.&amp;lt;ref name=&amp;quot;pp186&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86페이지&amp;lt;/ref&amp;gt; 간척 사업은 이후 1935년부터 시작되었지만 1932년부터 은밀히 착수되어 왔다.&amp;lt;ref name=&amp;quot;pp186&amp;quot;/&amp;gt;&lt;br /&gt;
&lt;br /&gt;
1933년 무렵 방응모가 [[조선일보]] 인수에 나서기 전부터 그는 [[한용운]]을 위한 일이라면 돈을 아끼지 않고 지출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성북동 222번지 언덕에 만해를 위해 기와집 한 채를 지어주었는데 심우장(尋牛莊)이 그것이다. 또한 만해가 일제의 배급을 거부해 생활이 어렵게 되자 만해에게 생활비를 지급했던 방응모는 만해가 병석에 누운 1944년에는 치료비를 지원해주기도 했다.&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6/0000043262?sid=103 만해가 일송 선생 5일장 치른 사연]&amp;lt;/ref&amp;gt; 그 외에도 방응모는 만해 한용운·벽초 홍명희 등과 함께 새해가 되면 백천온천에도 같이 다녀올 정도로 두터운 친분을 맺었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1&amp;quot;&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8/07/2007080700002.html 만해와 계초 방응모 선생]&amp;lt;/ref&amp;gt; 1935년 7월에는 경성 태평로1가에 새 사옥을 준공하는 한편, 출판부를 신설해 〈조광〉(1935. 10)·〈여성〉(1936. 6)·〈소년〉(1937. 4) 등의 월간 잡지를 차례로 창간했으며&amp;lt;ref name=&amp;quot;dam1&amp;quot; /&amp;gt; 운영하였다. 한편 [[1932년]] 교동 광업소를 정리하여 매각하였다.&lt;br /&gt;
&lt;br /&gt;
방응모의 광산 매각을 일본 정부 측에 알리고 다리를 놓은 것은 고일청(高一淸)이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84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32년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사건으로 체포된 [[안창호]]의 사면 탄원과 보석을 위해 노력하였다. 안창호가 윤봉길을 사주했다는 증거가 없으며 그가 테러행위를 지시했다는 증거 자료나 문건이 없다는 것이 방응모의 안창호 탄원 이유였다. 그러나 총독부 경무국장은 그의 안창호 석방 제안을 정중히 거절한다. 1936년 동방문화학원(뒤에 숭문중학교·고등학교 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1939년 9월에는〈조선일보〉의 조간 1회, 석간 2회의 1일 3회 발행을 시작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인수와 경영 ====&lt;br /&gt;
1933년 1월 16일 그는 정식으로 주식회사 [[조선일보]]사를 창립, 1월 18일에 발표된 창립 취지서에는 창립위원장 방응모, 창립발기인 방응모, 조만식, 고일청 외 등이 참여했다. 일단 그는 조만식을 사장으로 임명하고 자신은 부사장으로 있다가, 그해 3월 13일 다시 부사장에 취임했다. 4월 25일 편집인 겸 발행인이 되고, 4월 29일에는 조선일보의 조간, 석간제 발행을 부활, 확정시켰다. 1933년 7월 10일 총독부로부터 조선일보사의 법인 등록 승인을 얻어냈다. 7월 10일 조만식의 사퇴로, [[조선일보]]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다. 1933년 그는 자신의 아호를 춘해에서 계초로 바꾸었다. 그는 유능한 문인, 필진의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 상금 1천 원을 걸고 작가를 영입하였다.&lt;br /&gt;
&lt;br /&gt;
1934년 3월 25일 이광수를 비롯하여 서춘, 김동진, 함상훈, 신태익 등을 [[조선일보]]로 영입해 왔다. 그 외에도 정주군 출신 언론인, 작가들이 조선일보로 많이 오게 되었다. 이후 동아일보와 갈등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이광수가 조선일보로 옮겨와 부사장직에서 9개월 근무했다. 당시 조선일보 내부에서는 문모 라는 이가 이광수의 등장으로 자신의 입지 약화를 우려해 오랫동안 이광수를 내보내려 흉계를 꾸몄다고 한다. 이광수는 1934년 5월 25일자로 돌연 사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65페이지&amp;lt;/ref&amp;gt; 문모는 그에게 오히려 잘 됐다는 식으로 말하다가 방응모에게 호되게 혼이 났다. 그리고 문모로 하여금 즉시 금강산에 들어가 이광수를 다시 데려오게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65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이광수는 아들 봉근(당시 8살)의 사망 등으로 실의에 빠졌고, 1935년에 가서야 이광수를 조선일보 고문이자 필진으로 재영입하게 됐다.&lt;br /&gt;
&lt;br /&gt;
==== 동방문화학원 재단 설립 ====&lt;br /&gt;
방응모는 1936년 방농장의 소유권을 기본 자산으로 하는 재단법인 동방문화학원(東邦文化學院)을 설립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6페이지&amp;lt;/ref&amp;gt; 동방문화학원은 학교 법인으로 인가된 재단 법인으로, 그뒤 고계학원과 인연을 가지고 1936년부터는 보성고등보통학교를 후견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 분리되었다. 그뒤 방응모 장학생인 서중회 회원들을 위한 방응모 장학사업을 주관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7페이지&amp;lt;/ref&amp;gt;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태평로 구 조선일보 사옥 안에 동방문화학원의 간판을 달고 조광 잡지를 계속 발행하는 조광사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7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일제 강점기 후반 ===&lt;br /&gt;
==== 중일 전쟁 전후 ====&lt;br /&gt;
중일전쟁 개전 직후인 1937년 7월 11일에 열린 [[조선일보]] 간부회의에서 주필 서춘이 '일본군, 중국군, 장개석씨'등으로 쓰던 용어를 '아군, 황군, 지나, 장개석'으로 고치고 일본 국민의 입장에서 논설을 쓸 것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편집국장 김형원과 영업국장 김광수가 적극 반대를 하기도 했으나, 방응모는 '일장기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이미 몇 십만 원의 손해를 보았을 뿐 아니라 [[3.1 운동]] 때처럼 신문이 민중을 지도할 수 없다'면서 서춘의 입장을 지지했다. 한편으로 방응모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된 [[안창호]]를 [[조선일보]]에 영입하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안창호는 옥중에서 얻은 간질환과 폐질환 등으로 고생했고, 진료비 등을 수시로 지원하고 문병했음에도 출옥후 얼마 뒤에 사망한다.&lt;br /&gt;
&lt;br /&gt;
1933년 이심회(以心會：후에 序中會, 방응모장학회 등으로 명칭이 바뀜)라는 장학회를 만들어 국내 대학생과 해외유학생들에게 학자금을 지급하기도 했으며, 재단법인 동방문화학원(東方文化學院：지금의 숭문중·고등학교 전신)의 이사장직을 맡기도 했다.&amp;lt;ref name=&amp;quot;dam1&amp;quot; /&amp;gt; 또한 자신의 막대한 재원을 들여 1936년부터 함경남도 영흥군 일대에 당시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대단위 조림사업을 벌였으며, 그 전 해인 1935년부터는 경기도 수원군 팔탄면 일대에서 만 2년간에 걸친 간척사업을 벌이기도 했다.&amp;lt;ref name=&amp;quot;dam1&amp;quot; /&amp;gt;&lt;br /&gt;
&lt;br /&gt;
1937년 12월 24일 [[안창호]]는 병보석 판정을 받고 재판소가 지정한 현 서울대학교병원인 경성제국대학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안창호의 입원 중에 시중을 든 사람으로는 안창호의 외조카 김순원과 청년 박정호 두 사람이었고, 나중에는 이응준 장군의 부인 이정희가 끝까지 지성껏 간호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7페이지&amp;lt;/ref&amp;gt; [[안창호]]는 병상에서 병원비 문제로도 고초를 겪었다. 이 때문에 조만식은 일본 경찰로부터 안창호의 병원비를 대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음에도, &amp;quot;내가 먹고 살면서 그 선생을 돌보지 않을 수 없다&amp;quot;며 완강히 거절하고 안창호를 도왔다고 한다. 안창호의 간호를 같이 도와주던 이응준 장군 부인 이정희는 10일마다 계산되어 나오는 병원 입원비로 안창호 선생이 괴로워하는 표정을 지켜볼수 없었다고 진술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8페이지&amp;lt;/ref&amp;gt; 방응모는 5백원의 수표 한 장을 안창호에게 전달하였다. 50일간의 입원비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9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안창호]]는 1938년 3월 10일 밤 12시 경성제국대학 병원에서 운명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폐간 사건 ====&lt;br /&gt;
일본의 전쟁이 격화되면서 조선총독부 공보국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1940년에 강제로 폐간조치 했다. 광산을 팔아서 자신의 모든 것을 조선일보에 바쳤던 방응모는 큰 절망과 좌절을 느껴야 했다. [[한용운]]은 ‘신문이 폐간되다/ 붓이 꺾이어 모든 일이 끝나니…’로 시작하는 시를 지어 방응모를 위로했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1&amp;quot; /&amp;gt;&amp;lt;ref&amp;gt;붓이 꺾이어 모든 일 끝나니 이제는 재갈 물린 사람들 뿔뿔이 흩어지고 아, 쓸쓸하고 쓸쓸한지고 망국 서울의 가을날 한강의 물도 흐느끼느니 울음 삼켜 흐느끼며 연지를 외면한 채 바다 향해 흐르느니&amp;lt;/ref&amp;gt; 동아일보에는 김성수 외에도 장덕수와 송진우가 있었지만 그에게는 조선일보 폐간을 막기 위해 총독부와 교섭할 인물도 없었다.&lt;br /&gt;
&lt;br /&gt;
1938년 2월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선 내 일간신문 25개사로 조직된 조선춘추회의 창립에 창립발기인으로 참가했고, 조선춘추회 간사로 활동했다. 같은 해 7월 “국민정신을 총동원하고 내선일체 전 능력을 발휘하여 국책 수행에 협력하여 성전(聖戰)의 궁극적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조직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에 참여했고, 그날 결성된 경성연맹 창립총회에서 상담역을 맡았다. 9월부터 조선방공협회 경기도연합지부 평의원을 지냈다. 10월에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주최한 비상시 국민생활 개선을 위한 제1회 생활개선위원회에서 제2부(의례와 사회풍조 쇄신부)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그러나 1938년 10월부터 조선총독부는 조선일보의 신문용지를 검열, 통제하기 시작했다.&lt;br /&gt;
&lt;br /&gt;
1940년 5월 조선총독부 총독 미나미 지로가 방송담화로 창씨개명을 권고했다. 그러나 그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성씨를 이제 와서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며 창씨개명은 완강하게 거절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조선일보에 트집이 잡힐 일이 나타나지 않자 총독부는 전국 면사무소에 조선일보 신문 구독을 거절하도록 명령을 내렸고, 동시에 조선말을 쓰는 민원인에게는 일을 처리해주지 말도록 하게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3페이지&amp;lt;/ref&amp;gt; 조선총독부는 송진우의 예금통장을 문제삼았다. 송진우 명의의 은행저금이 동아일보의 8백여 개의 지국과 분국을 통해 모금된 독립운동 자금이라며, 그리고 동아일보 간부들이 백운장이라는 요정에서 회식을 한 것을 김성수 집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려 했다는 등의 이유로 백관수 동아일보 사장을 전격 구속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3~374페이지&amp;lt;/ref&amp;gt; 동아일보는 백관수가 구속된지 10일 만에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동아일보 중역회의를 열고 폐간신청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4페이지&amp;lt;/ref&amp;gt; 총독부는 조선일보에도 자진 폐간을 권고했고, 1940년 8월 9일 편집회의를 주관, 8월 10일 조선일보의 폐간계를 내고, 8월 10일자로 폐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5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잡지 발행 활동 ====&lt;br /&gt;
신문 강제 폐간 뒤 방응모는 간판을 조광사로 바꿔 걸고, 사옥은 동방흥업주식회사로 등기를 변경해서 유지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1페이지&amp;lt;/ref&amp;gt; 이후 그는 조광 잡지 발행에 전념했다. 1943년 8월 경 일본 중앙대학의 예과를 마친 방일영이 입사&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1페이지&amp;lt;/ref&amp;gt;, 필진으로 참여했다. [[조선일보]]가 폐간된 후에도 방응모는 벽초 홍명희 부자에게 지속적으로 생활비를 대주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4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4년 6월 29일 만해 [[한용운]]이 사망했다. 그는 심우장을 찾아가 3백원을 내놓았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5페이지&amp;lt;/ref&amp;gt;당시 쌀 10가마가 100원이었지만, 심우장은 당장 현금 1원이 없었는데 거액이라서 놀랐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6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광복 이후 언론 및 정치활동 ===&lt;br /&gt;
==== 광복 직후 ====&lt;br /&gt;
1945년 8.15 광복 후에는 8월 말과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朝鮮在外戰災同胞救濟會) 고문과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9월 초 [[안재홍]] 등이 좌경화되는 건준체제에 반발하여 건준을 탈퇴하자 방응모 역시 건준을 탈퇴하였다.&lt;br /&gt;
&lt;br /&gt;
9월 2일 미군정이 주둔하자, 방응모는 윤전기를 찾기 위해 폐간 당시의 증빙서류를 미 군정청에 제시하였으나 소식이 없었다. 총독부는 조선일보 폐간 직후 인수한 윤전기를 경성일보사에 옮겨서 설치했다. 그는 동방문화재단 외 4개 사업소를 적산으로 파악한 미군정을 설득하고, 사옥 문제도 해결하였다.&lt;br /&gt;
&lt;br /&gt;
10월 1일 조선일보 편집위원회를 구성하고, 신문 복간 운동을 추진했다. 조선총독부의 폐간 지시 당시 의정부로 옮겨놓은 일부 활자 자모음이 잘 보관되어, 그해 11월 23일 조선일보를 복간시키고, 서울신문사 사옥에서 조선일보 복간호를 간행하였다. 이후 조선사회문제대책중앙협의회 중앙위원을 거쳐 10월 16일 이승만 등의 주도로 독립촉성중앙회가 결성되자 독촉에 가입하였다.&lt;br /&gt;
&lt;br /&gt;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이 귀국하자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에 입당했다. 12월 [[안재홍]]의 추천으로 한국독립당의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출되어 3~4개월 동안 활동했다.&amp;lt;ref&amp;gt;일각에서는 방응모가 '한독당 재무부장으로 지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1947년부터 한독당 재무부장을 맡은 신창균이 전면 부정했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47/0000002626?sid=102 백범 비서와 '진짜' 한독당 재정부장의 육성증언. 참고.]&amp;lt;/ref&amp;gt; 그 뒤 대한국민총회 발기인, 대한독립애국금헌성회 발기인 등으로 활동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복간 및 군정기 활동 ====&lt;br /&gt;
11월 [[조선일보]]사를 복간시켰다. 그러나 한동안 조선일보의 인쇄는 서울신문사에서 간행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1945년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추념대회에 참여하였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2&amp;quot;&amp;gt;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13&amp;lt;/ref&amp;gt; 순국선열추념대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2&amp;quot; /&amp;gt;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참여,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이 되었다.&amp;lt;ref&amp;gt;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55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6년 2월 26일 서울신문사 공무국 종업원들이 조선일보의 인쇄를 거부해버렸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436페이지&amp;lt;/ref&amp;gt; 그동안 묵시적으로 방해가 은근히 있었다. 표면상의 문제는 임금 문제이나 내용상으로는 조선일보에 대한 조선공산당의 시위의 일종이었다. 사흘간의 교섭 끝에 2월 28일에 가서야 26일자와 27일자를 소급해서 인쇄하여 신문을 한꺼번에 발행하였다. 그러나 3월 1일과 2일에 또다시 인쇄를 거부당해 결국 휴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436페이지&amp;lt;/ref&amp;gt; 조선일보를 경성일보사로 옮겨서 인쇄하기로 하고 3월 5일자로 사고로 독자에게 알렸다.&lt;br /&gt;
&lt;br /&gt;
4월 29일 김구, 김창숙, 김성수, 오세창 등과 함께 서울운동장에서 윤봉길의사 추모회의 창립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amp;lt;ref&amp;gt;&amp;quot;故尹奉吉義士의 記念式 오늘, 發起人會 열고 準備&amp;quot;, 동아일보 1946년 4월 23일자 2면, 사회면&amp;lt;/ref&amp;gt; 그해 5월 조선공업구락부 고문에 위촉되었다.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民族統一總本部) 10인협의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6월 15일 오후 5시 40분 서울역에 마중나가 서울역에 도착한 삼의사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lt;br /&gt;
&lt;br /&gt;
1945년 광복 직후 서기원이 그를 찾아왔다. 서기원은 그때 경성농상실천학교의 동창회로부터 이 학교의 교장이 되어 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이다. 방응모는 서기원의 제의를 받아들여 1946년 8월 28일 동방문화학원 이사장으로 숭문상업학교를 인수, 재단 이사장이 되었다. 후일 방응모가 6.25 전쟁 중에 납북된 후 동방문화학원과 숭문중,고교의 재단은 최용진이 운영하다가 다시 1978년에 방일영에게 인수되었다.&lt;br /&gt;
&lt;br /&gt;
1947년 1월 21일 제5회 창립위원회를 본사에서 개최하고 2월 23일 주식회사 조선일보사 주주창립총회를 열고 대표이사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공동투자 경영자로 참여시킨 전무 이종민과의 알력이 발생했다. 이종민과의 갈등이 심화되자 그해 8월 3일 방응모는 일단 사직서를 제출했다. 1947년 8월 10일 풍문여고 강당에서 개최된 한인신문기자협회에 참석, 민족청년단에서 언론계 공로자로 방응모, 김성수, 설의식을 지정하여 상을 시상받았다.&amp;lt;ref&amp;gt;&amp;quot;朝鮮 新聞記者協會&amp;quot;, 동아일보 1947년 8월 10일자 2면, 사회면&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납북과 최후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 납북 후 행적은 &amp;quot;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amp;quot;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amp;lt;ref name=&amp;quot;김장&amp;quot;/&amp;gt; 1950년 8월경 개성 송악산 부근에서 미군의 폭격에 희생되었고 심한 폭격으로 시신을 찾을 수 없어 묘도 만들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남한에서는 1955년 7월 7일 생사불명기간 만료로 인해 실종 처리되었다.&lt;br /&gt;
&lt;br /&gt;
=== 사후 ===&lt;br /&gt;
서울 종로에 있던 양자 방재윤의 두 아들 방일영과 방우영은 방응모의 첩 이인숙이 찾아가 피신하라고 권고하여 황급히 피신했다. &lt;br /&gt;
&lt;br /&gt;
7월 6일 그의 행방불명처리가 되고, 방응모의 사후에도 [[조선일보]]는 그의 명의로 발행되었다. 1952년 4월 28일 조선일보는 발행인겸 편집인을 장기영으로, 인쇄인을 방일영으로, 방응모는 명예사장으로 명의변경하여 휴전 후 계속 발행하게 되었다. 1954년 4월 30일 제8회 조선일보 정기주주총회에서 장기영 사장이 사퇴하면서, 명예사장 방응모가 사장으로 추대되고, 발행인 겸 대표취체역에 방일영이 선임되었다. 이후 실종 후 1959년에 법적으로 사망 처리되었다. 그리고 1970년까지는 조선일보는 그의 이름으로 발행되었다.&lt;br /&gt;
&lt;br /&gt;
1970년 2월 19일 조선일보 정기주주총회에서 방응모 이사를 사퇴 수리하였다. 그의 피폭 사망 사실은 1970년대 이후 탈북자들을 통해 대한민국에 소개되었다.&lt;br /&gt;
&lt;br /&gt;
== 친일행위 의혹 ==&lt;br /&gt;
=== 일제 전시체제기 활동 ===&lt;br /&gt;
일제 강점기 말기 언론인으로서 총독부체제에 협력한 기록과 활동이 다수 기록이 있다. 1933년 3월 [[조선일보]] 경영권을 인수하고 부사장직에 취임했을 당시 같은 달에 고사기관총 구입비용 1600원을 군에 헌납하였다. 그는 1935년 친일 잡지 《조광 (잡지)(朝光)》을 창간하였고, 1937년에는 경성방송국 제2방송에 출연하여 일제가 중국의 베일을 절멸케하여 극동평화를 지키려고 한다는 강연을 하였다. 1940년대부터 조광에 집중적으로 친일 논설을 기고하고 시국 강연에 참여하여 전쟁 지원을 독려했다. 1942년 6월에는 '징병령 실시에 일층 더 감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글을 써서 조광에 발표하였다. 애국금차회(1937),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1938), 임전대책협의회(1941), 조선임전보국단(1941) 등 대표적인 친일 단체의 회원에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그는 이런 행적으로 인해 해방정국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명단에 기록되어 있고,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해 발표한 &amp;lt;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amp;gt;에 모두 포함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lt;br /&gt;
&lt;br /&gt;
우리 [[조선일보]]는 다른 어떤 신문도 따라오지 못하는 확고한 신념에서 비국민적 행위를 단연 배격하여 종국까지 조선일보사가 이미 정해놓은 방침에 한뜻으로 매진한다.|원산에서의 순회 강연&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9478.html 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친일 다짐하다 시민에 봉변]《한겨레》2005-08-24 오후 06:13:18&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반민족행위 논란 ===&lt;br /&gt;
방응모를 친일파로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남아 있다. 조선일보 경영 이전에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방응모의 활동이 거의 없었고, 납북된 뒤 소식이 끊겨버린 까닭에 본인이 항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 동안의 행적만으로 친일파 여부를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방응모의 후손들이 영향력 있는 [[조선일보]] 언론사의 사주를 맡았기에 그의 입장에서 서술한 기록을 많이 남기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80년 발간된 그의 전기 《계초 방응모》(조선일보사) 등에는 '그가 민족주의적 선각자'로 묘사되고 있다. 방응모가 친일파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일부세력측은 그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논거로 드는 경우가 많이 있다.&amp;lt;ref&amp;gt;유석재, 계간 《유심》 (2004년 봄호) [http://yousim.buddhism.org/html/2004-spr/tamgu-yoo-seok-jae.htm 삭풍 속에 피어난 금란지교(金蘭之交) - 만해와 계초 방응모]&amp;lt;/ref&amp;gt;&amp;lt;ref&amp;gt;&amp;quot;일제 말기 계초는 시국강연에 나설 것과 창씨개명을 집요하게 강요받았으나 그때마다 묵묵부답으로 거부하며 소신을 지켰다.&amp;quot; 《조선일보》 (2001.3) 조선일보 사장열전 - 계초 방응모편, 《한겨레》 (2001.3.30) [http://www.njoyschool.net/news/article_view.asp?menu_code=s20202&amp;amp;no=1206 조선일보, 일장기를 신문제호 위에]&amp;lt;/ref&amp;gt;&lt;br /&gt;
또한 한국정토학회 고문이자 서울 정토사 주지였던 박설산(1918~2007)이 학도병에 끌려가기 직전인 1943년 12월 28일 밤 서울역에서 스스로 왼발을 선로에 올려 발가락을 절단해 징집을 기피하자 방응모는 만해와 함께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설산을 걱정하면서 입원 중 조선일보 기자를 통해 돈을 전달한 것은 물론 퇴원할 때 돈을 전달하고 뒤를 보살폈다고 한다.&amp;lt;ref&amp;gt;박설산 회고록 &amp;lt;뚜껑없는 조선역사책&amp;gt;(1994, 도서출판 삼장) p240~241&amp;lt;/ref&amp;gt;&lt;br /&gt;
&lt;br /&gt;
2010년 12월, 방응모 관계자들 및 조선일보측은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을 취소해달라'며 법원에 낸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amp;quot;1944년 조선항공업 창립발기인으로 활동한 부분에 대해 친일행위로 판단한 부분을 취소하지만 나머지 활동에 대해서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amp;quot;라고 판결했다. 그 이유인 즉 &amp;quot;방응모는 1933년 조선일보 사장으로 취임해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등으로 활동하며 친일활동을 벌였으며, 1937년 경성방송국 시국강연에서 일본제국이 극동평화를 확립시킬 것이라는 내용의 강연을 하고, 1938년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춘추회의 발기인 겸 간사로 활동하기도 했다&amp;lt;ref&amp;gt;[http://media.daum.net/breakingnews/politics/view.html?cateid=1002&amp;amp;newsid=20101222103319164&amp;amp;p=newsis 법원 &amp;quot;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친일파 맞다&amp;quot;]뉴시스 2010년 12월 22일&amp;lt;/ref&amp;gt;&amp;quot;는 것이다.&lt;br /&gt;
&lt;br /&gt;
2012년 1월 12일 서울고법 행정7부는 방 전 사장의 손자인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이 행정안전부를 상대로 낸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처분 취소 청구소송에서 ‘일제 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의 친일 행위 판정 조항에 비추어 방 전 사장에게 적용된 모두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민족적 지도자로서 비중이 큰 만큼 그로 인한 책임도 무거울 뿐 아니라 고난의 시기를 겪은 민족으로서 그 역사를 반성하자는 입장에 설 때, 방 전 사장의 여러 행태는 반민특별법에서 규정한 친일반민족행위의 유형에 속함을 부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1·2심 재판부는 방 전 사장이 자신이 운영하던 잡지 &amp;lt;조광&amp;gt;에 일제 침략전쟁에 동조하고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문예물과 일제 침략전쟁에 협력할 것을 주문하는 논문을 게재하는 등의 ‘친일’ 행위를 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또한, 2심 재판부는 일본의 전쟁 수행을 돕기 위해 설립된 군수 제조업체 ‘조선항공공업’의 발기인과 감사를 지낸 것은 “감사는 업무집행에 관여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기관으로, 방 전 사장이 이 회사를 운영했다고 볼 수 있다”는 이유로 친일이라고 판단했다.&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4565.html법원 ‘방응모 친일’ 2심서도 인정] 인터넷한겨레 2010년 12월 22일&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가족 관계 ==&lt;br /&gt;
* 아버지 : 방계준(方桂準)&lt;br /&gt;
* 어머니 : 온양 박씨&lt;br /&gt;
** 형 : 방응곤(方應坤)&lt;br /&gt;
** 배우자 : 승계도&lt;br /&gt;
*** 아들 2명 요절&lt;br /&gt;
** 배우자 : 이인숙(李仁淑, 1901년 ~ ?)&lt;br /&gt;
*** 아들 : 방재욱(方在旭, 1925년 ~ 1926년 9월)&lt;br /&gt;
** 배우자 : 배영옥(裵英玉)&lt;br /&gt;
*** 장녀 : 방재숙(方在淑)&lt;br /&gt;
** 배우자 : 노호용(盧鎬龍)&lt;br /&gt;
*** 장남 : 방재선(方在善, 1944년 ~)&lt;br /&gt;
*** 차남 : 방재효(方在孝, 1946년 ~)&lt;br /&gt;
*** 삼남 : 방재규(方在奎, 1948년 ~)&lt;br /&gt;
&lt;br /&gt;
** 양자 : 방재윤(方在允 또는 方在胤, 1901년 ~ 1940년, 형 방응곤의 차남)&lt;br /&gt;
*** 손자 : 방일영(方一榮, 1923년 ~ 2003년)&lt;br /&gt;
**** 증손 : 방상훈(方相勳, 1948년 ~)&lt;br /&gt;
**** 증손부 : 윤순명 - 윤치호(尹致昊, 1865년 ~ 1945년)의 증손녀&lt;br /&gt;
***** 현손 : 방준오(方俊吾, 1974년)&lt;br /&gt;
***** 현손 : 방정오(方政吾, 1978년)&lt;br /&gt;
**** 증손 : 방용훈(方容勳, 1952년 ~)&lt;br /&gt;
*** 손자 : 방필영(方必榮, 1924년 ~ 1926년)&lt;br /&gt;
*** 손녀 : 방숙영(? ~ 1951년 1월)&lt;br /&gt;
*** 손자 : 방우영(方又榮, 1928년 ~ 2016년)&lt;br /&gt;
**** 증손 : 방성훈(方聖勳, 1973년 ~)&lt;br /&gt;
&lt;br /&gt;
== 기타 ==&lt;br /&gt;
그는 [[한용운]], 최남선, 정인보, 홍명희 등과 친분관계를 형성하고 어울려 지냈다 한다.&lt;br /&gt;
&lt;br /&gt;
[[김구]]의 한국독립당의 재정적 후견인 역할을 하였다 하며,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삼의사 유골봉환식 때 [[김구]], [[정인보]] 등과 촬영한 사진이 있다.&amp;lt;ref&amp;gt;백범어록 참조&amp;lt;/ref&amp;gt; 그리고 1945년 11월 23일 조선일보가 복간되자 백범 김구는 '有志者事竟成' 뜻을 지닌 자 성취할 수 있다'는 친필 휘호를 보내며 축하했다.&amp;lt;ref&amp;gt;[http://www.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4060370241 '조선일보 역사 읽기'《조선일보》2004.06.03]&amp;lt;/ref&amp;gt;&lt;br /&gt;
한편 임꺽정의 저자인 벽초 홍명희가 방응모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그와 깊은 친분을 맺었다는 주장이 있다. 《조광》 1938년 11월호엔 홍명희가 병중에 있는 방응모를 위로하며 지은 한시가 방응모의 답시와 함께 실려 있다고 한다.&amp;lt;ref&amp;gt;[http://weekly.chosun.com/site/data/html_dir/2004/11/05/2004110577041.html ‘임꺽정’으로 되살아난 독립운동의 魂! 주간조선 1827호 2004.11.04&amp;lt;/ref&amp;gt; 또한 [[안창호]]의 비서실장을 지낸 독립유공자 구익균은 방응모와 안창호가 친밀했다는 주장을 했다.&amp;lt;ref&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09/2008030901055.html &amp;quot;공산주의자들, 도산 비판하다가도 하숙비 떨어지면 찾아와&amp;quot;] 조선일보, 2008-03-10 03:22&amp;lt;/ref&amp;gt;&lt;br /&gt;
또한 박설산에 따르면 1943년 만해 한용운에게 학도병으로 끌려가게 되었음을 알리려 심우장으로 찾아가게 되었을 때, 한용운과 방응모가 바둑을 두고 곁에서 정인보가 훈수를 두고 있었다고 한다.&amp;lt;ref&amp;gt;박설산 저 &amp;lt;뚜껑없는 朝鮮 역사 책&amp;gt; p.226 도서출판 三藏(1994)&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30년대~1940년대 방응모에게서 장학금을 지원받은 학생 모임인 서중회의 회원들의 그의 인물평은 &amp;quot;첫 인상은 좀 깡마른 모습이었으나 의지가 강한 인물&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56페이지&amp;lt;/ref&amp;gt;&amp;quot;이라는 평을 남기기도 했다.&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 /&amp;gt;&lt;br /&gt;
&lt;br /&gt;
== 참고 자료 ==&lt;br /&gt;
* 청산하지 못한 역사: 언론 내세워 일제에 아부한 교화 정책의 하수인 (문영숙) (반민족문제연구소, 청년사, 1994)&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민족 계몽의 초석 방응모(이동욱 저, 지구촌, 1998)&lt;br /&gt;
* 계초 방응모전(계초전기간행위, 조선일보사, 1980년)&lt;br /&gt;
* 계초 방응모(이동욱, 방일영문화재단, 1996)&lt;br /&gt;
&lt;br /&gt;
== 외부 링크 ==&lt;br /&gt;
* [https://web.archive.org/web/20050123171046/http://chosunhost.com/ 계초방응모 기념사업회]&lt;br /&gt;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09145 &amp;lt;조선일보&amp;gt;, 방응모 전 사장의 '친일행적' 말한다] - 오마이뉴스 04.09.10일자&lt;br /&gt;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020302101749 방응모ㆍ 김성수 친일행적 뭔가 : &amp;lt;긴급입수&amp;gt;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 全文] - 프레시안 2002-03-02&lt;br /&gt;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54052 그가 '&amp;lt;조선&amp;gt;의 주인' 주장하는 이유] 오마이뉴스 2001년 9월 20일자&lt;br /&gt;
*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956 방재선씨, 호주·상속 원인무효소송 제기]&lt;br /&gt;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4/06/2008040601053.html '5인 친필 서첩' 발굴] 조선일보 2008년04월06일자]&lt;br /&gt;
&lt;br /&gt;
[[분류: 감자]]&lt;/div&gt;</summary>
		<author><name>Nsgjjsjsjy02</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B0%A9%EC%9D%91%EB%AA%A8&amp;diff=58882</id>
		<title>방응모</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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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06-11T02:38:3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Nsgjjsjsjy02: /* 사후 */&lt;/p&gt;
&lt;hr /&gt;
&lt;div&gt;{|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width:100%&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0%&amp;quot;|사진&lt;br /&gt;
|[[파일:방응모.jpg|center|200픽셀]]&lt;br /&gt;
|+ '''방응모'''&lt;br /&gt;
|+ style=&amp;quot;caption-side:bottom;text-align:left:&amp;quot;|출처: 위키백과&lt;br /&gt;
|출생||1883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조선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또는 정부면 성내동&lt;br /&gt;
|-&lt;br /&gt;
|사망||1950년경으로 추정&lt;br /&gt;
|-&lt;br /&gt;
|사인||불명&lt;br /&gt;
|-&lt;br /&gt;
|거주지||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amp;gt; 경성부 -&amp;gt; 경기도 양주군 의정부읍&lt;br /&gt;
|-&lt;br /&gt;
|국적||대한민국&lt;br /&gt;
|-&lt;br /&gt;
|본관||온양&lt;br /&gt;
|-&lt;br /&gt;
|별칭||호: 계초(啓礎), 춘해(春海)&lt;br /&gt;
|-&lt;br /&gt;
|직업||교사, 변호사, 상인, 언론인, 기업인, 사회운동가, 정치가&lt;br /&gt;
|-&lt;br /&gt;
|배우자||승계도, 이인숙, 배영옥, 노효용&lt;br /&gt;
|-&lt;br /&gt;
|자녀||방재숙(딸), 방재욱·방재선·방재효·방재규(아들), 방재윤(양자)&lt;br /&gt;
|-&lt;br /&gt;
|부모||방계준(부), 온양박씨(모)&lt;br /&gt;
|}&lt;br /&gt;
&lt;br /&gt;
'''방응모'''(方應謨, 평안북도 정주군, 1883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 1950년 8월(추정)는 [[일제강점기]]의 교육자, 언론인, 법조인, 기업인이자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언론인이며 정치인이다. 호는 '''춘해'''(春海)이고, 뒤에 '''계초'''(啓礎)로 고쳤다.&lt;br /&gt;
&lt;br /&gt;
1922년 동아일보 정주 지국을 인수해 지국장을 지내다가 1924년 금광업에 뛰어들어 큰 부를 얻게 되었다. 1932년 6월 조선일보에 입사하였고 이후 영업국장이 되어 조선일보의 판매망을 장악하게 되고 경영권을 인수하면서 1933년 3월 조선일보 부사장이 되었다. 1933년 7월부터 1950년 7월까지 종신으로 [[조선일보]]의 사장을 역임하였다. 1935년 창간한 월간잡지 '조광(朝光)'은 친일 논란이 있다.&amp;lt;ref&amp;gt;안은필. [http://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9211 조선일보가 가장 빛나던 시기, ‘안재홍 시대’]&amp;lt;/ref&amp;gt;&amp;lt;ref name=&amp;quot;안은&amp;quot;&amp;gt;안은필. [http://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9279 방응모 친일증거, “모래밭에서 모래 찾기”]국민TV. 기사입력 2015년 4월 23일. 기사수정 2015년 4월 24일.&amp;lt;/ref&amp;gt;&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2/0002006080?sid=102 한홍구 &amp;quot;박정희는 공포와 욕망의 정치를 했다&amp;quot;]. 프레시안. 2015년 4월 13일.&amp;lt;/ref&amp;gt;&amp;lt;ref&amp;gt;이민영.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1/0002255321?sid=102 고법 “방응모 前조선일보 사장 친일행적 대부분 인정”]. 서울신문. 2012년 1월 13일.&amp;lt;/ref&amp;gt;&amp;lt;ref&amp;gt;노현웅.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8/0002251781?sid=102 조선 방응모·동아 김성수의 ‘친일’…수년째 결론 안 내고 미루는 법원]. 한겨레. 2014년 11월 3일.&amp;lt;/ref&amp;gt;&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6/0000000413?sid=110 김성수ㆍ방응모와 친일언론인 군상]. 미디어오늘. 2002년 3월 12일.&amp;lt;/ref&amp;gt; 언론계에서 활동하면서도 사업가의 길을 함께 걸었고, 교육 장학 활동을 하였으며, 1945년 광복 직후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 고문과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안재홍]]의 추천을 받아 한국독립당 중앙상무위원과 독립촉성국민회 총무부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amp;lt;ref name=&amp;quot;안은&amp;quot;/&amp;gt;&amp;lt;ref&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16/2008031600800.html 계초 방응모와의 우정도 여러 편의 시로 표현해&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해방 정국에서 김구의 재정적 후견인으로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등 삼의사 유골 봉환 사업과 신탁통치 반대 운동 등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대한민국 수립 이후 사회민주주의 정치가인 조소앙과 사회당을 결성해 문교정책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lt;br /&gt;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 납북 후 행적은 &amp;quot;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amp;quot;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lt;br /&gt;
&lt;br /&gt;
== 생애 ==&lt;br /&gt;
=== 생애 초기 ===&lt;br /&gt;
==== 출생과 성장 ====&lt;br /&gt;
방응모는 1883년 11월 3일 또는 9월 29일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바우머리 부락 또는 정주군 정부면 성내동 425번지에서 '''방계준(方桂準)'''과 온양 박씨(溫陽朴氏)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그는 어려서 집중력이 남달리 뛰어난 반면 고집이 셌다는 평이 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페이지&amp;lt;/ref&amp;gt; 그의 '''삼촌 방계묵(方啓默)'''은 그의 고집있는 기질을 두고 저놈은 쇠작두 말고 나무 작두로 잘라 죽여야 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3~54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친척들의 야멸찬 말들이 그에게 상처를 주거나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4페이지&amp;lt;/ref&amp;gt; 또한 그의 유년시절을 본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가 태어날 당시 태몽도 없었고, 신동이라는 말도 별다르게 듣지 않았다고 한다. 어려서 빈곤한 가정환경으로 방응모는 정규 학교에는 입학하지 못하고, 16세 때까지 서당에 드나들며 한학을 익혔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던 중 그가 어느정도 실력이 우수하다고 인정되자, 스승인 승창률은 잠시 방응모에게 어린아이들을 돌보게 한 후 자리를 피하곤 했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1페이지&amp;lt;/ref&amp;gt; 그는 홀로 사서육경을 탐독, 독파하였다. 21세 무렵 잠시 서당 훈장을 지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896년 독립협회의 활동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5페이지&amp;lt;/ref&amp;gt; 형 방응곤이 예배당에 다니게 되자&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2페이지&amp;lt;/ref&amp;gt;, 그를 통해 신문물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다. 그 뒤 우연히 경성부에 갔다가 신문물을 보고 충격을 받아 17세에 독학으로 신학문과 일본어, 중국어, 수학 등을 독파하였다. 유년시절 서당의 성리학 스승이던 승창률의 친척인 승시영(承時榮)과 조씨(趙氏)의 딸 승계도와 결혼했다.&lt;br /&gt;
&lt;br /&gt;
결혼한 다음 해에도 그는 공부를 한다며 책만 사다 읽곤 했고&amp;lt;ref name=&amp;quot;fsfs60&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60페이지&amp;lt;/ref&amp;gt;, 부인 승계도는 생계를 위해 몸소 나섰다.&amp;lt;ref name=&amp;quot;fsfs60&amp;quot;/&amp;gt; 부인 승계도는 친척 가운데 콩을 싸게 넘겨주는 이들이 있어 그 콩으로 두부를 만들거나 콩나물을 키워 장사를 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61페이지&amp;lt;/ref&amp;gt; 그의 아내 승계도는 남편에 대한 믿음이 절대적이었고 탓을 하거나 가출하지 않았다. 이후 그는 서당 훈장으로 초빙되었으나, 그가 가는 마을의 기존 훈장, 한학자들은 그를 적대적으로 대했다. 그렇다고 마을 사람들의 일부 지명이 있었으나 자신의 스승의 자리를 침해할 수 없다 하여 그는 자신의 동리의 훈장일은 사양하였다. 그는 마을을 나가 신학문을 하는 친구들과 어울렸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62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계몽 운동 ====&lt;br /&gt;
도산 [[안창호]]와 남강 이승훈이 연사로 돌아다니며 애국 계몽 강연과 문맹들의 교육, 야학 사업을 하였고, 여기에 감동받은 청년들이 서당과 야학을 열고 문맹들과 여성들에게 한글 교육을 하였다. 도산 [[안창호]]의 강연과 남강 이승훈의 강연을 찾아다니며 듣다가 감동받은 방응모 역시 교육, 계몽에 참여하였다.&lt;br /&gt;
&lt;br /&gt;
그는 청년회의 활동에 몰두하였으나, 농번기에 작은 일손이라도 더 필요했던 동리 노인들은 젊은 아이들이 일은 하지 않고 무슨 모임이다 하여 어울려 돌아다니는 꼴&amp;lt;ref name=&amp;quot;fsfs75&amp;quot;/&amp;gt;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또한 모임 구성원들 역시 &amp;quot;의식 자체가 아직 전근대적이었고, 사고의 분화를 겪지도 않은데다가, 이들의 조직 활동이 기분 좋으면 나오고 기분 나쁘면 빠져 버리는 것이 예사&amp;quot;라 청년 모임들은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청년단체의 실패에 좌절하고 다시 귀향했으며, 이때 그는 춘해(春海)라는 아호를 스스로 지었다. 그의 집안에서는 그가 정착하기를 바라고 정주읍 성내동에 집을 얻어 주었다.&lt;br /&gt;
&lt;br /&gt;
안창호의 계몽 강연에 감동받은 남강 이승훈이 1907년(융희 1년) 8월 김덕용(金德鏞)을 초빙하여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 오산에서 신식 교육을 하는 소학교 과정의 학교 강명의숙을 세우고 산수, 수신, 역사, 지리, 체조를 가르쳤고, 그해 12월에는 중학교 과정인 오산학교를 세우고 학생 7명을 처음 받아들여 개교했다. 1908년에는 오산학교에 학생들이 모여 3개 반으로 편성되었고, 정주군 출신의 춘원 이광수가 오산중학교의 교사로 초빙되어 축구, 야구, 테니스, 배구 등을 지역에 처음 소개하였다. 방응모는 어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학교에 입학해 신학문을 접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0페이지&amp;lt;/ref&amp;gt; 그는 이승훈과 의기투합해 민립 대학을 세우는 운동을 추진했지만 조선총독부 평안북도청 학무국에서 승인을 거부하여, 대학 설립에 실패했다.&lt;br /&gt;
&lt;br /&gt;
=== 언론, 기업 활동 ===&lt;br /&gt;
==== 계몽 활동과 언론 활동 ====&lt;br /&gt;
1915년부터 1924년 방응모는 지역 지식인들, 유학파 청년, 계몽 청년들이 모여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하는데 참여했고, 민립대학기성회 평안북도지부에서 활동하면서 민립대학기성회 중앙회 중앙위원 조만식 등과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언변과 용모가 되었던 그의 여관에도 손님들이 몰렸고, 그가 &amp;quot;2백원도 좋고 5백원도 좋다며 보태달라&amp;lt;ref name=&amp;quot;fsfs87&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7페이지&amp;lt;/ref&amp;gt;&amp;quot;고 하면 기부금을 내는 이들이 있었다. 대신 하룻밤을 의탁하려고 그의 여관을 찾은 이들에게 무료 숙식을 제공하기도 했다.&amp;lt;ref name=&amp;quot;fsfs87&amp;quot;/&amp;gt; 1919년 정주에서 3.1 만세 운동이 벌어지자, 그도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형사들의 눈을 피해 방응모는 만세운동을 하다 재빨리 몸을 피해 화를 면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8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1922년 6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인수하여 분국장에 취임했다. 6월 9일에는 정주군 지역 체육행사로 테니스 대회를 개최하였다. 그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경영하는 동시에 그는 농촌 계몽운동 등에 적극 투신하여 인망을 쌓았다. 처음 몇번은 친구 전우현의 자금을 빌려 부족분을 메우기도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02페이지&amp;lt;/ref&amp;gt; 한다. 1922년 6월 19일&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96페이지&amp;lt;/ref&amp;gt; 동아일보 본사를 설득하여 정주분국을 동아일보사 정주지국으로 승격시켰다. 동아일보사 지부장 재직 시 그는 전우현과 함께 의기투합하여 민립 대학 설립 자금과 농촌진흥회 회원의 여비와 회비를 염출하기 위한 목적 및 당시 교사도 없이 난관에 처했던 오산학교의 재개교를 위한 &amp;quot;오산학교의 부흥 운동을 목표로 한 재단법인 촉성 기금 마련&amp;quot; 등을 계획했다. 총독부의 인허가 거부로 실패한 대학 설립 자금은 고스란히 오산학교의 부활과 복교 자금으로 투입되었다. 1920년 1월에 경성형무소에서 가석방된 조만식은 이승훈을 만났고, 다시 조만식이 오산학교를 맡으면서 학교는 다시 정상 운영되었다.&lt;br /&gt;
&lt;br /&gt;
1923년 동아일보 정주군 분국이 지국으로 승격되자 정주 지국장으로 동아일보 정주지국을 경영하였고, 같은 해 7월 여성들의 사회참여와 평등권 신장을 위한 여자교육회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이후 대규모 수해가 나자, 정주군 수해구제회를 결성하여 봉사활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1923년 4월 조만식·송진우·안재홍·김성수 등의 주도로 민간 자본으로 대학교 설립을 추진하기 위한 조직인 조선민립대학기성회가 결성되자, 방응모는 민립대학 기성회에 참여하여 민립대학기성회 정주군준비회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5월에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정주지방지부가 설립되자 기성회 정주지부 상무위원을 맡았다.&lt;br /&gt;
&lt;br /&gt;
==== 광업 경영과 조선일보 입사 ====&lt;br /&gt;
1924년 봄 오산학교 교감으로 있던 전우현이 방응모와도 안면이 있던 금광 채굴업자 두 명을 데리고 그를 찾아왔다. 그들은 자신들이 봐 둔 산이 있다고 방응모에게 소개했다. 그는 선천군의 지역 유지이자 최창학의 친구이며, 그가 동아일보 지국장으로 알게 된 이봉찬을 찾아갔다. 한학자로 알고 있던 그가 금광 투자를 제의하자 &amp;quot;한문이라면 빼지 않고 알려고 드는 한학 훈도가 어떻게 금광을&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16페이지&amp;lt;/ref&amp;gt;&amp;quot; 하느냐 하였지만, 이봉찬은 그에게 금광, 광산에 대한 지식을 알려주었다. 이봉찬은 그에게 광산 지식을 알려주며 최창학의 소유지 중 폐광을 빌리는 법을 알려주었다. 방응모의 됨됨이에 감복한 듯, 그의 수많은 질문에 적잖은 충고를 자임해주었다.&amp;lt;ref name=&amp;quot;fsfs117&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5페이지&amp;lt;/ref&amp;gt; 이봉찬은 최창학에게 방응모를 소개하는 편지를 수차례에 걸쳐 보내주었다.&amp;lt;ref name=&amp;quot;fsfs117&amp;quot;/&amp;gt; 이봉찬은 방응모의 친구들이 봐 둔 갱도를 임대받도록 도와주었다. 이봉찬은 방응모의 한학 실력과 사람됨을 알아보고 있어, 자금을 쾌히 빌려주었다.&amp;lt;ref name=&amp;quot;fsfs117&amp;quot;/&amp;gt;&lt;br /&gt;
&lt;br /&gt;
이후 광산업에 뛰어들어 1924년 여름 압록강변의 최창학 소유 폐금광인 평안북도 삭주군 외남면 교동 다릿골의의 삭주 교동광업소를 찾아가 10미터 정도 땅을 파고 금맥을 발견했다. 바로 삭주 교동광업소를 인수, 경영을 확대하였다. 이때 만난 동업자의 딸이자 친구 전우현의 조카딸인 '''이인숙(李仁淑)'''을 만났다. 본처 승계도가 두 아들을 잃고 복부 수술이 잘못되어 아이를 얻지 못하게 되자 방응모에게도 수많은 중매가 들어왔다. 자식들을 병으로 잃은 것이 자신의 불찰이라고 본 승계도는 그에게 작은 부인이라도 들이자는 말을 꺼내기도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18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26년 방응모에게 광산 사업을 제안했던 두 친구가 손을 털고 나갔고, 그의 가족은 돈이 없어 쌀 대신 좁쌀로 좁쌀죽을 먹으며 연명해야 했다. 방응모는 정주군에 사는 비슷한 또래의 먼 친척 방상진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고, 방상진과 일꾼 대여섯 명, 그리고 후처 이인숙의 친정 쪽에서 얻어온 토지문서를 얻어 자금을 마련, 삭주 다릿골 광산으로 가서 다시 금광을 채굴했다. 금맥은 쉽게 나오지 않았고, 출몰하는 마적떼에게 소와 기구를 약탈당했다. 동시에 빚쟁이들의 독촉에 시달렸으나 '''''1926년 7월 지하 300m 지점에서 금맥을 확보했다. 이후 연간 300kg의 금을 생산, 그는 굴지의 광산업자로''''' 성장해 금맥을 찾아 벼락부자가 되었다. 그는 방상진을 교동금광 총감독에 맡겼다. 이때 그는 최창학에게 임대료에 이자를 쳐서 보내주었다.&lt;br /&gt;
&lt;br /&gt;
그때까지 첫 부인 승계도가 두부를 팔아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미국산 포드 T형자동차'''''를 타고 금의환향했다. 1928년 방응모는 자신의 아호인 춘해를 딴 춘해 장학회를 만들고 장학생들의 모임인 이심회를 만든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48페이지&amp;lt;/ref&amp;gt; 그 해에 방응모는 교동지역에 파출소 지소를 유치하였고, 마적단에 시달리던 주민들은 그의 송덕비를 세우기도 했다. '''''1928년에 그는 의정부 직동, 흥선대원군의 별장이 있던 곳 바로 뒤에 위치한 건물을 매입'''''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한용운]], 홍명희를 자주 초대했다.&lt;br /&gt;
&lt;br /&gt;
'''''1932년 방응모는 교동광산을 135만원이란 거액에 일본 중외광업주식회사에 매각'''''했다. 그 뒤 1932년 6월부터 조선일보 영업국장으로 활동하다 '''1933년 3월 [[조선일보]]의 경영권을 인수'''하여 부사장에 취임하였다.&lt;br /&gt;
&lt;br /&gt;
그는 교동광업소를 운영하며 모은 재력을 바탕으로 부사장 재직 중 [[조선일보]]의 대주주가 되었으며, 1933년 7월 8대 사주 조만식으로부터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제9대 [[조선일보]] 사주로 취임, 활동했다.&amp;lt;ref&amp;gt;조선일보는 1932년 7월에 조만식을 사장으로 영입했지만, 조만식은 거의 평생을 평양에서 살아왔던데다 서울에서 활동하기에는 적응을 잘하지 못했다. 조만식은 신문사 경영난과 지역감정의 혹독한 시련을 받은 채 9개월만에 퇴사했다. 그리고 조만식 후임으로 1933년, 방응모를 사장으로 추대하기에 이르렀다.&amp;lt;/ref&amp;gt;&amp;lt;ref&amp;gt;《한국사 시민강좌 제47집, 대표적 독립운동가 12인》,일조각. p145&amp;lt;/ref&amp;gt; 방응모 취임 이후의 초대 부사장은 이광수, 주필은 서춘이었다.&lt;br /&gt;
&lt;br /&gt;
=== 언론, 사업 활동 ===&lt;br /&gt;
==== 사회사업과 조선일보 인수 계획 ====&lt;br /&gt;
금광 사업에 성공한 그는 영림, 조림 사업에도 투자하였다. 방응모는 배우자 승계도에게서 더 이상 아들을 얻지 못하자 첩 이인숙을 통해 아들을 얻으려고 하였다. 이인숙은 아들을 낳았으나 이 아들은 곧 사망하였다. 아들을 잃은 이인숙은 승계도의 도움을 받다가, 그해 6월 방응모가 있는 광산으로 가 생활하였다'''. 승계도와 이인숙을 통해 자녀를 얻지못하자 42세가 되던 해인 1924년 친형인 방응곤의 둘째 아들 방재윤을 양자로 입양시켰다.'''&lt;br /&gt;
&lt;br /&gt;
[[파일:방응모장학생.jpg|섬네일|160px|오른쪽|방응모와 그의 장학금을 받던 학생들. 가운데 앉은 이가 방응모이고, 서있는 이들 중 왼쪽에서 두 번째는 방응모의 양자 방재윤.]]&lt;br /&gt;
&lt;br /&gt;
1930년 배영옥과 결혼하여 딸 방재숙을 얻었다. 1932년 광산업을 정리하였고 언론사업을 비롯하여 육영사업과 조림 및 간척사업 등을 벌였다. 또한 고아원과 사회복지단체에 후원금을 지원하면서 인망을 얻기도 했다. 삭주 지역에서는 그의 송덕비가 세워지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932년 그는 수원군 팔탄면 노하리 일대의 갯벌에 일본인이 수차례 뚝을 쌓다가 실패했다는 정보를 얻고 임삼진을 통해 조선총독부에 허가를 요청하였다.&amp;lt;ref name=&amp;quot;pp186&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86페이지&amp;lt;/ref&amp;gt; 간척 사업은 이후 1935년부터 시작되었지만 1932년부터 은밀히 착수되어 왔다.&amp;lt;ref name=&amp;quot;pp186&amp;quot;/&amp;gt;&lt;br /&gt;
&lt;br /&gt;
1933년 무렵 방응모가 [[조선일보]] 인수에 나서기 전부터 그는 [[한용운]]을 위한 일이라면 돈을 아끼지 않고 지출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성북동 222번지 언덕에 만해를 위해 기와집 한 채를 지어주었는데 심우장(尋牛莊)이 그것이다. 또한 만해가 일제의 배급을 거부해 생활이 어렵게 되자 만해에게 생활비를 지급했던 방응모는 만해가 병석에 누운 1944년에는 치료비를 지원해주기도 했다.&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6/0000043262?sid=103 만해가 일송 선생 5일장 치른 사연]&amp;lt;/ref&amp;gt; 그 외에도 방응모는 만해 한용운·벽초 홍명희 등과 함께 새해가 되면 백천온천에도 같이 다녀올 정도로 두터운 친분을 맺었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1&amp;quot;&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8/07/2007080700002.html 만해와 계초 방응모 선생]&amp;lt;/ref&amp;gt; 1935년 7월에는 경성 태평로1가에 새 사옥을 준공하는 한편, 출판부를 신설해 〈조광〉(1935. 10)·〈여성〉(1936. 6)·〈소년〉(1937. 4) 등의 월간 잡지를 차례로 창간했으며&amp;lt;ref name=&amp;quot;dam1&amp;quot; /&amp;gt; 운영하였다. 한편 [[1932년]] 교동 광업소를 정리하여 매각하였다.&lt;br /&gt;
&lt;br /&gt;
방응모의 광산 매각을 일본 정부 측에 알리고 다리를 놓은 것은 고일청(高一淸)이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84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32년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사건으로 체포된 [[안창호]]의 사면 탄원과 보석을 위해 노력하였다. 안창호가 윤봉길을 사주했다는 증거가 없으며 그가 테러행위를 지시했다는 증거 자료나 문건이 없다는 것이 방응모의 안창호 탄원 이유였다. 그러나 총독부 경무국장은 그의 안창호 석방 제안을 정중히 거절한다. 1936년 동방문화학원(뒤에 숭문중학교·고등학교 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1939년 9월에는〈조선일보〉의 조간 1회, 석간 2회의 1일 3회 발행을 시작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인수와 경영 ====&lt;br /&gt;
1933년 1월 16일 그는 정식으로 주식회사 [[조선일보]]사를 창립, 1월 18일에 발표된 창립 취지서에는 창립위원장 방응모, 창립발기인 방응모, 조만식, 고일청 외 등이 참여했다. 일단 그는 조만식을 사장으로 임명하고 자신은 부사장으로 있다가, 그해 3월 13일 다시 부사장에 취임했다. 4월 25일 편집인 겸 발행인이 되고, 4월 29일에는 조선일보의 조간, 석간제 발행을 부활, 확정시켰다. 1933년 7월 10일 총독부로부터 조선일보사의 법인 등록 승인을 얻어냈다. 7월 10일 조만식의 사퇴로, [[조선일보]]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다. 1933년 그는 자신의 아호를 춘해에서 계초로 바꾸었다. 그는 유능한 문인, 필진의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 상금 1천 원을 걸고 작가를 영입하였다.&lt;br /&gt;
&lt;br /&gt;
1934년 3월 25일 이광수를 비롯하여 서춘, 김동진, 함상훈, 신태익 등을 [[조선일보]]로 영입해 왔다. 그 외에도 정주군 출신 언론인, 작가들이 조선일보로 많이 오게 되었다. 이후 동아일보와 갈등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이광수가 조선일보로 옮겨와 부사장직에서 9개월 근무했다. 당시 조선일보 내부에서는 문모 라는 이가 이광수의 등장으로 자신의 입지 약화를 우려해 오랫동안 이광수를 내보내려 흉계를 꾸몄다고 한다. 이광수는 1934년 5월 25일자로 돌연 사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65페이지&amp;lt;/ref&amp;gt; 문모는 그에게 오히려 잘 됐다는 식으로 말하다가 방응모에게 호되게 혼이 났다. 그리고 문모로 하여금 즉시 금강산에 들어가 이광수를 다시 데려오게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65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이광수는 아들 봉근(당시 8살)의 사망 등으로 실의에 빠졌고, 1935년에 가서야 이광수를 조선일보 고문이자 필진으로 재영입하게 됐다.&lt;br /&gt;
&lt;br /&gt;
==== 동방문화학원 재단 설립 ====&lt;br /&gt;
방응모는 1936년 방농장의 소유권을 기본 자산으로 하는 재단법인 동방문화학원(東邦文化學院)을 설립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6페이지&amp;lt;/ref&amp;gt; 동방문화학원은 학교 법인으로 인가된 재단 법인으로, 그뒤 고계학원과 인연을 가지고 1936년부터는 보성고등보통학교를 후견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 분리되었다. 그뒤 방응모 장학생인 서중회 회원들을 위한 방응모 장학사업을 주관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7페이지&amp;lt;/ref&amp;gt;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태평로 구 조선일보 사옥 안에 동방문화학원의 간판을 달고 조광 잡지를 계속 발행하는 조광사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7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일제 강점기 후반 ===&lt;br /&gt;
==== 중일 전쟁 전후 ====&lt;br /&gt;
중일전쟁 개전 직후인 1937년 7월 11일에 열린 [[조선일보]] 간부회의에서 주필 서춘이 '일본군, 중국군, 장개석씨'등으로 쓰던 용어를 '아군, 황군, 지나, 장개석'으로 고치고 일본 국민의 입장에서 논설을 쓸 것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편집국장 김형원과 영업국장 김광수가 적극 반대를 하기도 했으나, 방응모는 '일장기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이미 몇 십만 원의 손해를 보았을 뿐 아니라 [[3.1 운동]] 때처럼 신문이 민중을 지도할 수 없다'면서 서춘의 입장을 지지했다. 한편으로 방응모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된 [[안창호]]를 [[조선일보]]에 영입하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안창호는 옥중에서 얻은 간질환과 폐질환 등으로 고생했고, 진료비 등을 수시로 지원하고 문병했음에도 출옥후 얼마 뒤에 사망한다.&lt;br /&gt;
&lt;br /&gt;
1933년 이심회(以心會：후에 序中會, 방응모장학회 등으로 명칭이 바뀜)라는 장학회를 만들어 국내 대학생과 해외유학생들에게 학자금을 지급하기도 했으며, 재단법인 동방문화학원(東方文化學院：지금의 숭문중·고등학교 전신)의 이사장직을 맡기도 했다.&amp;lt;ref name=&amp;quot;dam1&amp;quot; /&amp;gt; 또한 자신의 막대한 재원을 들여 1936년부터 함경남도 영흥군 일대에 당시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대단위 조림사업을 벌였으며, 그 전 해인 1935년부터는 경기도 수원군 팔탄면 일대에서 만 2년간에 걸친 간척사업을 벌이기도 했다.&amp;lt;ref name=&amp;quot;dam1&amp;quot; /&amp;gt;&lt;br /&gt;
&lt;br /&gt;
1937년 12월 24일 [[안창호]]는 병보석 판정을 받고 재판소가 지정한 현 서울대학교병원인 경성제국대학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안창호의 입원 중에 시중을 든 사람으로는 안창호의 외조카 김순원과 청년 박정호 두 사람이었고, 나중에는 이응준 장군의 부인 이정희가 끝까지 지성껏 간호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7페이지&amp;lt;/ref&amp;gt; [[안창호]]는 병상에서 병원비 문제로도 고초를 겪었다. 이 때문에 조만식은 일본 경찰로부터 안창호의 병원비를 대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음에도, &amp;quot;내가 먹고 살면서 그 선생을 돌보지 않을 수 없다&amp;quot;며 완강히 거절하고 안창호를 도왔다고 한다. 안창호의 간호를 같이 도와주던 이응준 장군 부인 이정희는 10일마다 계산되어 나오는 병원 입원비로 안창호 선생이 괴로워하는 표정을 지켜볼수 없었다고 진술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8페이지&amp;lt;/ref&amp;gt; 방응모는 5백원의 수표 한 장을 안창호에게 전달하였다. 50일간의 입원비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9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안창호]]는 1938년 3월 10일 밤 12시 경성제국대학 병원에서 운명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폐간 사건 ====&lt;br /&gt;
일본의 전쟁이 격화되면서 조선총독부 공보국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1940년에 강제로 폐간조치 했다. 광산을 팔아서 자신의 모든 것을 조선일보에 바쳤던 방응모는 큰 절망과 좌절을 느껴야 했다. [[한용운]]은 ‘신문이 폐간되다/ 붓이 꺾이어 모든 일이 끝나니…’로 시작하는 시를 지어 방응모를 위로했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1&amp;quot; /&amp;gt;&amp;lt;ref&amp;gt;붓이 꺾이어 모든 일 끝나니 이제는 재갈 물린 사람들 뿔뿔이 흩어지고 아, 쓸쓸하고 쓸쓸한지고 망국 서울의 가을날 한강의 물도 흐느끼느니 울음 삼켜 흐느끼며 연지를 외면한 채 바다 향해 흐르느니&amp;lt;/ref&amp;gt; 동아일보에는 김성수 외에도 장덕수와 송진우가 있었지만 그에게는 조선일보 폐간을 막기 위해 총독부와 교섭할 인물도 없었다.&lt;br /&gt;
&lt;br /&gt;
1938년 2월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선 내 일간신문 25개사로 조직된 조선춘추회의 창립에 창립발기인으로 참가했고, 조선춘추회 간사로 활동했다. 같은 해 7월 “국민정신을 총동원하고 내선일체 전 능력을 발휘하여 국책 수행에 협력하여 성전(聖戰)의 궁극적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조직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에 참여했고, 그날 결성된 경성연맹 창립총회에서 상담역을 맡았다. 9월부터 조선방공협회 경기도연합지부 평의원을 지냈다. 10월에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주최한 비상시 국민생활 개선을 위한 제1회 생활개선위원회에서 제2부(의례와 사회풍조 쇄신부)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그러나 1938년 10월부터 조선총독부는 조선일보의 신문용지를 검열, 통제하기 시작했다.&lt;br /&gt;
&lt;br /&gt;
1940년 5월 조선총독부 총독 미나미 지로가 방송담화로 창씨개명을 권고했다. 그러나 그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성씨를 이제 와서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며 창씨개명은 완강하게 거절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조선일보에 트집이 잡힐 일이 나타나지 않자 총독부는 전국 면사무소에 조선일보 신문 구독을 거절하도록 명령을 내렸고, 동시에 조선말을 쓰는 민원인에게는 일을 처리해주지 말도록 하게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3페이지&amp;lt;/ref&amp;gt; 조선총독부는 송진우의 예금통장을 문제삼았다. 송진우 명의의 은행저금이 동아일보의 8백여 개의 지국과 분국을 통해 모금된 독립운동 자금이라며, 그리고 동아일보 간부들이 백운장이라는 요정에서 회식을 한 것을 김성수 집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려 했다는 등의 이유로 백관수 동아일보 사장을 전격 구속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3~374페이지&amp;lt;/ref&amp;gt; 동아일보는 백관수가 구속된지 10일 만에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동아일보 중역회의를 열고 폐간신청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4페이지&amp;lt;/ref&amp;gt; 총독부는 조선일보에도 자진 폐간을 권고했고, 1940년 8월 9일 편집회의를 주관, 8월 10일 조선일보의 폐간계를 내고, 8월 10일자로 폐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5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잡지 발행 활동 ====&lt;br /&gt;
신문 강제 폐간 뒤 방응모는 간판을 조광사로 바꿔 걸고, 사옥은 동방흥업주식회사로 등기를 변경해서 유지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1페이지&amp;lt;/ref&amp;gt; 이후 그는 조광 잡지 발행에 전념했다. 1943년 8월 경 일본 중앙대학의 예과를 마친 방일영이 입사&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1페이지&amp;lt;/ref&amp;gt;, 필진으로 참여했다. [[조선일보]]가 폐간된 후에도 방응모는 벽초 홍명희 부자에게 지속적으로 생활비를 대주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4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4년 6월 29일 만해 [[한용운]]이 사망했다. 그는 심우장을 찾아가 3백원을 내놓았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5페이지&amp;lt;/ref&amp;gt;당시 쌀 10가마가 100원이었지만, 심우장은 당장 현금 1원이 없었는데 거액이라서 놀랐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6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광복 이후 언론 및 정치활동 ===&lt;br /&gt;
==== 광복 직후 ====&lt;br /&gt;
1945년 8.15 광복 후에는 8월 말과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朝鮮在外戰災同胞救濟會) 고문과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9월 초 [[안재홍]] 등이 좌경화되는 건준체제에 반발하여 건준을 탈퇴하자 방응모 역시 건준을 탈퇴하였다.&lt;br /&gt;
&lt;br /&gt;
9월 2일 미군정이 주둔하자, 방응모는 윤전기를 찾기 위해 폐간 당시의 증빙서류를 미 군정청에 제시하였으나 소식이 없었다. 총독부는 조선일보 폐간 직후 인수한 윤전기를 경성일보사에 옮겨서 설치했다. 그는 동방문화재단 외 4개 사업소를 적산으로 파악한 미군정을 설득하고, 사옥 문제도 해결하였다.&lt;br /&gt;
&lt;br /&gt;
10월 1일 조선일보 편집위원회를 구성하고, 신문 복간 운동을 추진했다. 조선총독부의 폐간 지시 당시 의정부로 옮겨놓은 일부 활자 자모음이 잘 보관되어, 그해 11월 23일 조선일보를 복간시키고, 서울신문사 사옥에서 조선일보 복간호를 간행하였다. 이후 조선사회문제대책중앙협의회 중앙위원을 거쳐 10월 16일 이승만 등의 주도로 독립촉성중앙회가 결성되자 독촉에 가입하였다.&lt;br /&gt;
&lt;br /&gt;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이 귀국하자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에 입당했다. 12월 [[안재홍]]의 추천으로 한국독립당의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출되어 3~4개월 동안 활동했다.&amp;lt;ref&amp;gt;일각에서는 방응모가 '한독당 재무부장으로 지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1947년부터 한독당 재무부장을 맡은 신창균이 전면 부정했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47/0000002626?sid=102 백범 비서와 '진짜' 한독당 재정부장의 육성증언. 참고.]&amp;lt;/ref&amp;gt; 그 뒤 대한국민총회 발기인, 대한독립애국금헌성회 발기인 등으로 활동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복간 및 군정기 활동 ====&lt;br /&gt;
11월 [[조선일보]]사를 복간시켰다. 그러나 한동안 조선일보의 인쇄는 서울신문사에서 간행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1945년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추념대회에 참여하였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2&amp;quot;&amp;gt;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13&amp;lt;/ref&amp;gt; 순국선열추념대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2&amp;quot; /&amp;gt;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참여,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이 되었다.&amp;lt;ref&amp;gt;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55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6년 2월 26일 서울신문사 공무국 종업원들이 조선일보의 인쇄를 거부해버렸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436페이지&amp;lt;/ref&amp;gt; 그동안 묵시적으로 방해가 은근히 있었다. 표면상의 문제는 임금 문제이나 내용상으로는 조선일보에 대한 조선공산당의 시위의 일종이었다. 사흘간의 교섭 끝에 2월 28일에 가서야 26일자와 27일자를 소급해서 인쇄하여 신문을 한꺼번에 발행하였다. 그러나 3월 1일과 2일에 또다시 인쇄를 거부당해 결국 휴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436페이지&amp;lt;/ref&amp;gt; 조선일보를 경성일보사로 옮겨서 인쇄하기로 하고 3월 5일자로 사고로 독자에게 알렸다.&lt;br /&gt;
&lt;br /&gt;
4월 29일 김구, 김창숙, 김성수, 오세창 등과 함께 서울운동장에서 윤봉길의사 추모회의 창립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amp;lt;ref&amp;gt;&amp;quot;故尹奉吉義士의 記念式 오늘, 發起人會 열고 準備&amp;quot;, 동아일보 1946년 4월 23일자 2면, 사회면&amp;lt;/ref&amp;gt; 그해 5월 조선공업구락부 고문에 위촉되었다.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民族統一總本部) 10인협의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6월 15일 오후 5시 40분 서울역에 마중나가 서울역에 도착한 삼의사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lt;br /&gt;
&lt;br /&gt;
1945년 광복 직후 서기원이 그를 찾아왔다. 서기원은 그때 경성농상실천학교의 동창회로부터 이 학교의 교장이 되어 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이다. 방응모는 서기원의 제의를 받아들여 1946년 8월 28일 동방문화학원 이사장으로 숭문상업학교를 인수, 재단 이사장이 되었다. 후일 방응모가 6.25 전쟁 중에 납북된 후 동방문화학원과 숭문중,고교의 재단은 최용진이 운영하다가 다시 1978년에 방일영에게 인수되었다.&lt;br /&gt;
&lt;br /&gt;
1947년 1월 21일 제5회 창립위원회를 본사에서 개최하고 2월 23일 주식회사 조선일보사 주주창립총회를 열고 대표이사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공동투자 경영자로 참여시킨 전무 이종민과의 알력이 발생했다. 이종민과의 갈등이 심화되자 그해 8월 3일 방응모는 일단 사직서를 제출했다. 1947년 8월 10일 풍문여고 강당에서 개최된 한인신문기자협회에 참석, 민족청년단에서 언론계 공로자로 방응모, 김성수, 설의식을 지정하여 상을 시상받았다.&amp;lt;ref&amp;gt;&amp;quot;朝鮮 新聞記者協會&amp;quot;, 동아일보 1947년 8월 10일자 2면, 사회면&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납북과 최후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 납북 후 행적은 &amp;quot;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amp;quot;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amp;lt;ref name=&amp;quot;김장&amp;quot;/&amp;gt; 1950년 8월경 개성 송악산 부근에서 미군의 폭격에 희생되었고 심한 폭격으로 시신을 찾을 수 없어 묘도 만들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남한에서는 1955년 7월 7일 생사불명기간 만료로 인해 실종 처리되었다.&lt;br /&gt;
&lt;br /&gt;
=== 사후 ===&lt;br /&gt;
서울 종로에 있던 양자 방재윤의 두 아들 방일영과 방우영은 방응모의 첩 이인숙이 찾아가 피신하라고 권고하여 황급히 피신했다. &lt;br /&gt;
&lt;br /&gt;
7월 6일 그의 행방불명처리가 되고, 방응모의 사후에도 [[조선일보]]는 그의 명의로 발행되었다. 1952년 4월 28일 조선일보는 발행인겸 편집인을 장기영으로, 인쇄인을 방일영으로, 방응모는 명예사장으로 명의변경하여 휴전 후 계속 발행하게 되었다. 1954년 4월 30일 제8회 조선일보 정기주주총회에서 장기영 사장이 사퇴하면서, 명예사장 방응모가 사장으로 추대되고, 발행인 겸 대표취체역에 방일영이 선임되었다. 이후 실종 후 1959년에 법적으로 사망 처리되었다. 그리고 1970년까지는 조선일보는 그의 이름으로 발행되었다.&lt;br /&gt;
&lt;br /&gt;
1970년 2월 19일 조선일보 정기주주총회에서 방응모 이사를 사퇴 수리하였다. 그의 피폭 사망 사실은 1970년대 이후 탈북자들을 통해 대한민국에 소개되었다.&lt;br /&gt;
&lt;br /&gt;
== 친일행위 의혹 ==&lt;br /&gt;
=== 일제 전시체제기 활동 ===&lt;br /&gt;
일제 강점기 말기 언론인으로서 총독부체제에 협력한 기록과 활동이 다수 기록이 있다. 1933년 3월 [[조선일보]] 경영권을 인수하고 부사장직에 취임했을 당시 같은 달에 고사기관총 구입비용 1600원을 군에 헌납하였다. 그는 1935년 친일 잡지 《조광 (잡지)(朝光)》을 창간하였고, 1937년에는 경성방송국 제2방송에 출연하여 일제가 중국의 베일을 절멸케하여 극동평화를 지키려고 한다는 강연을 하였다. 1940년대부터 조광에 집중적으로 친일 논설을 기고하고 시국 강연에 참여하여 전쟁 지원을 독려했다. 1942년 6월에는 '징병령 실시에 일층 더 감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글을 써서 조광에 발표하였다. 애국금차회(1937),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1938), 임전대책협의회(1941), 조선임전보국단(1941) 등 대표적인 친일 단체의 회원에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그는 이런 행적으로 인해 해방정국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명단에 기록되어 있고,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해 발표한 &amp;lt;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amp;gt;에 모두 포함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lt;br /&gt;
&lt;br /&gt;
우리 [[조선일보]]는 다른 어떤 신문도 따라오지 못하는 확고한 신념에서 비국민적 행위를 단연 배격하여 종국까지 조선일보사가 이미 정해놓은 방침에 한뜻으로 매진한다.|원산에서의 순회 강연&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9478.html 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친일 다짐하다 시민에 봉변]《한겨레》2005-08-24 오후 06:13:18&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반민족행위 논란 ===&lt;br /&gt;
방응모를 친일파로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남아 있다. 조선일보 경영 이전에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방응모의 활동이 거의 없었고, 납북된 뒤 소식이 끊겨버린 까닭에 본인이 항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 동안의 행적만으로 친일파 여부를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방응모의 후손들이 영향력 있는 [[조선일보]] 언론사의 사주를 맡았기에 그의 입장에서 서술한 기록을 많이 남기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80년 발간된 그의 전기 《계초 방응모》(조선일보사) 등에는 '그가 민족주의적 선각자'로 묘사되고 있다. 방응모가 친일파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일부세력측은 그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논거로 드는 경우가 많이 있다.&amp;lt;ref&amp;gt;유석재, 계간 《유심》 (2004년 봄호) [http://yousim.buddhism.org/html/2004-spr/tamgu-yoo-seok-jae.htm 삭풍 속에 피어난 금란지교(金蘭之交) - 만해와 계초 방응모]&amp;lt;/ref&amp;gt;&amp;lt;ref&amp;gt;&amp;quot;일제 말기 계초는 시국강연에 나설 것과 창씨개명을 집요하게 강요받았으나 그때마다 묵묵부답으로 거부하며 소신을 지켰다.&amp;quot; 《조선일보》 (2001.3) 조선일보 사장열전 - 계초 방응모편, 《한겨레》 (2001.3.30) [http://www.njoyschool.net/news/article_view.asp?menu_code=s20202&amp;amp;no=1206 조선일보, 일장기를 신문제호 위에]&amp;lt;/ref&amp;gt;&lt;br /&gt;
또한 한국정토학회 고문이자 서울 정토사 주지였던 박설산(1918~2007)이 학도병에 끌려가기 직전인 1943년 12월 28일 밤 서울역에서 스스로 왼발을 선로에 올려 발가락을 절단해 징집을 기피하자 방응모는 만해와 함께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설산을 걱정하면서 입원 중 조선일보 기자를 통해 돈을 전달한 것은 물론 퇴원할 때 돈을 전달하고 뒤를 보살폈다고 한다.&amp;lt;ref&amp;gt;박설산 회고록 &amp;lt;뚜껑없는 조선역사책&amp;gt;(1994, 도서출판 삼장) p240~241&amp;lt;/ref&amp;gt;&lt;br /&gt;
&lt;br /&gt;
2010년 12월, 방응모 관계자들 및 조선일보측은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을 취소해달라'며 법원에 낸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amp;quot;1944년 조선항공업 창립발기인으로 활동한 부분에 대해 친일행위로 판단한 부분을 취소하지만 나머지 활동에 대해서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amp;quot;라고 판결했다. 그 이유인 즉 &amp;quot;방응모는 1933년 조선일보 사장으로 취임해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등으로 활동하며 친일활동을 벌였으며, 1937년 경성방송국 시국강연에서 일본제국이 극동평화를 확립시킬 것이라는 내용의 강연을 하고, 1938년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춘추회의 발기인 겸 간사로 활동하기도 했다&amp;lt;ref&amp;gt;[http://media.daum.net/breakingnews/politics/view.html?cateid=1002&amp;amp;newsid=20101222103319164&amp;amp;p=newsis 법원 &amp;quot;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친일파 맞다&amp;quot;]뉴시스 2010년 12월 22일&amp;lt;/ref&amp;gt;&amp;quot;는 것이다.&lt;br /&gt;
&lt;br /&gt;
2012년 1월 12일 서울고법 행정7부는 방 전 사장의 손자인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이 행정안전부를 상대로 낸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처분 취소 청구소송에서 ‘일제 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의 친일 행위 판정 조항에 비추어 방 전 사장에게 적용된 모두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민족적 지도자로서 비중이 큰 만큼 그로 인한 책임도 무거울 뿐 아니라 고난의 시기를 겪은 민족으로서 그 역사를 반성하자는 입장에 설 때, 방 전 사장의 여러 행태는 반민특별법에서 규정한 친일반민족행위의 유형에 속함을 부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1·2심 재판부는 방 전 사장이 자신이 운영하던 잡지 &amp;lt;조광&amp;gt;에 일제 침략전쟁에 동조하고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문예물과 일제 침략전쟁에 협력할 것을 주문하는 논문을 게재하는 등의 ‘친일’ 행위를 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또한, 2심 재판부는 일본의 전쟁 수행을 돕기 위해 설립된 군수 제조업체 ‘조선항공공업’의 발기인과 감사를 지낸 것은 “감사는 업무집행에 관여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기관으로, 방 전 사장이 이 회사를 운영했다고 볼 수 있다”는 이유로 친일이라고 판단했다.&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4565.html법원 ‘방응모 친일’ 2심서도 인정] 인터넷한겨레 2010년 12월 22일&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가족 관계 ==&lt;br /&gt;
* 아버지 : 방계준(方桂準)&lt;br /&gt;
* 어머니 : 온양 박씨&lt;br /&gt;
** 형 : 방응곤(方應坤)&lt;br /&gt;
** 배우자 : 승계도&lt;br /&gt;
*** 아들 2명 요절&lt;br /&gt;
** 배우자 : 이인숙(李仁淑, 1901년 ~ ?)&lt;br /&gt;
*** 아들 : 방재욱(方在旭, 1925년 ~ 1926년 9월)&lt;br /&gt;
** 배우자 : 배영옥(裵英玉)&lt;br /&gt;
*** 장녀 : 방재숙(方在淑)&lt;br /&gt;
** 배우자 : 노호용(盧鎬龍)&lt;br /&gt;
*** 장남 : 방재선(方在善, 1944년 ~)&lt;br /&gt;
*** 차남 : 방재효(方在孝, 1946년 ~)&lt;br /&gt;
*** 삼남 : 방재규(方在奎, 1948년 ~)&lt;br /&gt;
&lt;br /&gt;
** 양자 : 방재윤(方在允 또는 方在胤, 1901년 ~ 1940년, 형 방응곤의 차남)&lt;br /&gt;
*** 손자 : 방일영(方一榮, 1923년 ~ 2003년)&lt;br /&gt;
**** 증손 : 방상훈(方相勳, 1948년 ~)&lt;br /&gt;
**** 증손부 : 윤순명 - 윤치호(尹致昊, 1865년 ~ 1945년)의 증손녀&lt;br /&gt;
***** 현손 : 방준오(方俊吾, 1974년)&lt;br /&gt;
***** 현손 : 방정오(方政吾, 1978년)&lt;br /&gt;
**** 증손 : 방용훈(方容勳, 1952년 ~)&lt;br /&gt;
*** 손자 : 방필영(方必榮, 1924년 ~ 1926년)&lt;br /&gt;
*** 손녀 : 방숙영(? ~ 1951년 1월)&lt;br /&gt;
*** 손자 : 방우영(方又榮, 1928년 ~ 2016년)&lt;br /&gt;
**** 증손 : 방성훈(方聖勳, 1973년 ~)&lt;br /&gt;
&lt;br /&gt;
== 기타 ==&lt;br /&gt;
그는 [[한용운]], 최남선, 정인보, 홍명희 등과 친분관계를 형성하고 어울려 지냈다 한다.&lt;br /&gt;
&lt;br /&gt;
[[김구]]의 한국독립당의 재정적 후견인 역할을 하였다 하며,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삼의사 유골봉환식 때 [[김구]], [[정인보]] 등과 촬영한 사진이 있다.&amp;lt;ref&amp;gt;백범어록 참조&amp;lt;/ref&amp;gt; 그리고 1945년 11월 23일 조선일보가 복간되자 백범 김구는 '有志者事竟成' 뜻을 지닌 자 성취할 수 있다'는 친필 휘호를 보내며 축하했다.&amp;lt;ref&amp;gt;[http://www.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4060370241 '조선일보 역사 읽기'《조선일보》2004.06.03]&amp;lt;/ref&amp;gt;&lt;br /&gt;
한편 임꺽정의 저자인 벽초 홍명희가 방응모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그와 깊은 친분을 맺었다는 주장이 있다. 《조광》 1938년 11월호엔 홍명희가 병중에 있는 방응모를 위로하며 지은 한시가 방응모의 답시와 함께 실려 있다고 한다.&amp;lt;ref&amp;gt;[http://weekly.chosun.com/site/data/html_dir/2004/11/05/2004110577041.html ‘임꺽정’으로 되살아난 독립운동의 魂! 주간조선 1827호 2004.11.04&amp;lt;/ref&amp;gt; 또한 [[안창호]]의 비서실장을 지낸 독립유공자 구익균은 방응모와 안창호가 친밀했다는 주장을 했다.&amp;lt;ref&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09/2008030901055.html &amp;quot;공산주의자들, 도산 비판하다가도 하숙비 떨어지면 찾아와&amp;quot;] 조선일보, 2008-03-10 03:22&amp;lt;/ref&amp;gt;&lt;br /&gt;
또한 박설산에 따르면 1943년 만해 한용운에게 학도병으로 끌려가게 되었음을 알리려 심우장으로 찾아가게 되었을 때, 한용운과 방응모가 바둑을 두고 곁에서 정인보가 훈수를 두고 있었다고 한다.&amp;lt;ref&amp;gt;박설산 저 &amp;lt;뚜껑없는 朝鮮 역사 책&amp;gt; p.226 도서출판 三藏(1994)&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30년대~1940년대 방응모에게서 장학금을 지원받은 학생 모임인 서중회의 회원들의 그의 인물평은 &amp;quot;첫 인상은 좀 깡마른 모습이었으나 의지가 강한 인물&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56페이지&amp;lt;/ref&amp;gt;&amp;quot;이라는 평을 남기기도 했다.&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 /&amp;gt;&lt;br /&gt;
&lt;br /&gt;
== 참고 자료 ==&lt;br /&gt;
* 청산하지 못한 역사: 언론 내세워 일제에 아부한 교화 정책의 하수인 (문영숙) (반민족문제연구소, 청년사, 1994)&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민족 계몽의 초석 방응모(이동욱 저, 지구촌, 1998)&lt;br /&gt;
* 계초 방응모전(계초전기간행위, 조선일보사, 1980년)&lt;br /&gt;
* 계초 방응모(이동욱, 방일영문화재단, 1996)&lt;br /&gt;
&lt;br /&gt;
== 외부 링크 ==&lt;br /&gt;
* [https://web.archive.org/web/20050123171046/http://chosunhost.com/ 계초방응모 기념사업회]&lt;br /&gt;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09145 &amp;lt;조선일보&amp;gt;, 방응모 전 사장의 '친일행적' 말한다] - 오마이뉴스 04.09.10일자&lt;br /&gt;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020302101749 방응모ㆍ 김성수 친일행적 뭔가 : &amp;lt;긴급입수&amp;gt;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 全文] - 프레시안 2002-03-02&lt;br /&gt;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54052 그가 '&amp;lt;조선&amp;gt;의 주인' 주장하는 이유] 오마이뉴스 2001년 9월 20일자&lt;br /&gt;
*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956 방재선씨, 호주·상속 원인무효소송 제기]&lt;br /&gt;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4/06/2008040601053.html '5인 친필 서첩' 발굴] 조선일보 2008년04월06일자]&lt;br /&gt;
&lt;br /&gt;
[[분류: 감자]]&lt;/div&gt;</summary>
		<author><name>Nsgjjsjsjy02</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B0%A9%EC%9D%91%EB%AA%A8&amp;diff=58878</id>
		<title>방응모</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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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Nsgjjsjsjy02: /* 납북과 최후 */&lt;/p&gt;
&lt;hr /&gt;
&lt;div&gt;{|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width:100%&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0%&amp;quot;|사진&lt;br /&gt;
|[[파일:방응모.jpg|center|200픽셀]]&lt;br /&gt;
|+ '''방응모'''&lt;br /&gt;
|+ style=&amp;quot;caption-side:bottom;text-align:left:&amp;quot;|출처: 위키백과&lt;br /&gt;
|출생||1883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조선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또는 정부면 성내동&lt;br /&gt;
|-&lt;br /&gt;
|사망||1950년경으로 추정&lt;br /&gt;
|-&lt;br /&gt;
|사인||불명&lt;br /&gt;
|-&lt;br /&gt;
|거주지||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amp;gt; 경성부 -&amp;gt; 경기도 양주군 의정부읍&lt;br /&gt;
|-&lt;br /&gt;
|국적||대한민국&lt;br /&gt;
|-&lt;br /&gt;
|본관||온양&lt;br /&gt;
|-&lt;br /&gt;
|별칭||호: 계초(啓礎), 춘해(春海)&lt;br /&gt;
|-&lt;br /&gt;
|직업||교사, 변호사, 상인, 언론인, 기업인, 사회운동가, 정치가&lt;br /&gt;
|-&lt;br /&gt;
|배우자||승계도, 이인숙, 배영옥, 노효용&lt;br /&gt;
|-&lt;br /&gt;
|자녀||방재숙(딸), 방재욱·방재선·방재효·방재규(아들), 방재윤(양자)&lt;br /&gt;
|-&lt;br /&gt;
|부모||방계준(부), 온양박씨(모)&lt;br /&gt;
|}&lt;br /&gt;
&lt;br /&gt;
'''방응모'''(方應謨, 평안북도 정주군, 1883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 1950년 8월(추정)는 [[일제강점기]]의 교육자, 언론인, 법조인, 기업인이자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언론인이며 정치인이다. 호는 '''춘해'''(春海)이고, 뒤에 '''계초'''(啓礎)로 고쳤다.&lt;br /&gt;
&lt;br /&gt;
1922년 동아일보 정주 지국을 인수해 지국장을 지내다가 1924년 금광업에 뛰어들어 큰 부를 얻게 되었다. 1932년 6월 조선일보에 입사하였고 이후 영업국장이 되어 조선일보의 판매망을 장악하게 되고 경영권을 인수하면서 1933년 3월 조선일보 부사장이 되었다. 1933년 7월부터 1950년 7월까지 종신으로 [[조선일보]]의 사장을 역임하였다. 1935년 창간한 월간잡지 '조광(朝光)'은 친일 논란이 있다.&amp;lt;ref&amp;gt;안은필. [http://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9211 조선일보가 가장 빛나던 시기, ‘안재홍 시대’]&amp;lt;/ref&amp;gt;&amp;lt;ref name=&amp;quot;안은&amp;quot;&amp;gt;안은필. [http://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9279 방응모 친일증거, “모래밭에서 모래 찾기”]국민TV. 기사입력 2015년 4월 23일. 기사수정 2015년 4월 24일.&amp;lt;/ref&amp;gt;&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2/0002006080?sid=102 한홍구 &amp;quot;박정희는 공포와 욕망의 정치를 했다&amp;quot;]. 프레시안. 2015년 4월 13일.&amp;lt;/ref&amp;gt;&amp;lt;ref&amp;gt;이민영.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1/0002255321?sid=102 고법 “방응모 前조선일보 사장 친일행적 대부분 인정”]. 서울신문. 2012년 1월 13일.&amp;lt;/ref&amp;gt;&amp;lt;ref&amp;gt;노현웅.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8/0002251781?sid=102 조선 방응모·동아 김성수의 ‘친일’…수년째 결론 안 내고 미루는 법원]. 한겨레. 2014년 11월 3일.&amp;lt;/ref&amp;gt;&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6/0000000413?sid=110 김성수ㆍ방응모와 친일언론인 군상]. 미디어오늘. 2002년 3월 12일.&amp;lt;/ref&amp;gt; 언론계에서 활동하면서도 사업가의 길을 함께 걸었고, 교육 장학 활동을 하였으며, 1945년 광복 직후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 고문과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안재홍]]의 추천을 받아 한국독립당 중앙상무위원과 독립촉성국민회 총무부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amp;lt;ref name=&amp;quot;안은&amp;quot;/&amp;gt;&amp;lt;ref&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16/2008031600800.html 계초 방응모와의 우정도 여러 편의 시로 표현해&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해방 정국에서 김구의 재정적 후견인으로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등 삼의사 유골 봉환 사업과 신탁통치 반대 운동 등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대한민국 수립 이후 사회민주주의 정치가인 조소앙과 사회당을 결성해 문교정책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lt;br /&gt;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 납북 후 행적은 &amp;quot;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amp;quot;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lt;br /&gt;
&lt;br /&gt;
== 생애 ==&lt;br /&gt;
=== 생애 초기 ===&lt;br /&gt;
==== 출생과 성장 ====&lt;br /&gt;
방응모는 1883년 11월 3일 또는 9월 29일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바우머리 부락 또는 정주군 정부면 성내동 425번지에서 '''방계준(方桂準)'''과 온양 박씨(溫陽朴氏)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그는 어려서 집중력이 남달리 뛰어난 반면 고집이 셌다는 평이 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페이지&amp;lt;/ref&amp;gt; 그의 '''삼촌 방계묵(方啓默)'''은 그의 고집있는 기질을 두고 저놈은 쇠작두 말고 나무 작두로 잘라 죽여야 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3~54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친척들의 야멸찬 말들이 그에게 상처를 주거나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4페이지&amp;lt;/ref&amp;gt; 또한 그의 유년시절을 본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가 태어날 당시 태몽도 없었고, 신동이라는 말도 별다르게 듣지 않았다고 한다. 어려서 빈곤한 가정환경으로 방응모는 정규 학교에는 입학하지 못하고, 16세 때까지 서당에 드나들며 한학을 익혔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던 중 그가 어느정도 실력이 우수하다고 인정되자, 스승인 승창률은 잠시 방응모에게 어린아이들을 돌보게 한 후 자리를 피하곤 했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1페이지&amp;lt;/ref&amp;gt; 그는 홀로 사서육경을 탐독, 독파하였다. 21세 무렵 잠시 서당 훈장을 지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896년 독립협회의 활동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5페이지&amp;lt;/ref&amp;gt; 형 방응곤이 예배당에 다니게 되자&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2페이지&amp;lt;/ref&amp;gt;, 그를 통해 신문물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다. 그 뒤 우연히 경성부에 갔다가 신문물을 보고 충격을 받아 17세에 독학으로 신학문과 일본어, 중국어, 수학 등을 독파하였다. 유년시절 서당의 성리학 스승이던 승창률의 친척인 승시영(承時榮)과 조씨(趙氏)의 딸 승계도와 결혼했다.&lt;br /&gt;
&lt;br /&gt;
결혼한 다음 해에도 그는 공부를 한다며 책만 사다 읽곤 했고&amp;lt;ref name=&amp;quot;fsfs60&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60페이지&amp;lt;/ref&amp;gt;, 부인 승계도는 생계를 위해 몸소 나섰다.&amp;lt;ref name=&amp;quot;fsfs60&amp;quot;/&amp;gt; 부인 승계도는 친척 가운데 콩을 싸게 넘겨주는 이들이 있어 그 콩으로 두부를 만들거나 콩나물을 키워 장사를 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61페이지&amp;lt;/ref&amp;gt; 그의 아내 승계도는 남편에 대한 믿음이 절대적이었고 탓을 하거나 가출하지 않았다. 이후 그는 서당 훈장으로 초빙되었으나, 그가 가는 마을의 기존 훈장, 한학자들은 그를 적대적으로 대했다. 그렇다고 마을 사람들의 일부 지명이 있었으나 자신의 스승의 자리를 침해할 수 없다 하여 그는 자신의 동리의 훈장일은 사양하였다. 그는 마을을 나가 신학문을 하는 친구들과 어울렸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62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계몽 운동 ====&lt;br /&gt;
도산 [[안창호]]와 남강 이승훈이 연사로 돌아다니며 애국 계몽 강연과 문맹들의 교육, 야학 사업을 하였고, 여기에 감동받은 청년들이 서당과 야학을 열고 문맹들과 여성들에게 한글 교육을 하였다. 도산 [[안창호]]의 강연과 남강 이승훈의 강연을 찾아다니며 듣다가 감동받은 방응모 역시 교육, 계몽에 참여하였다.&lt;br /&gt;
&lt;br /&gt;
그는 청년회의 활동에 몰두하였으나, 농번기에 작은 일손이라도 더 필요했던 동리 노인들은 젊은 아이들이 일은 하지 않고 무슨 모임이다 하여 어울려 돌아다니는 꼴&amp;lt;ref name=&amp;quot;fsfs75&amp;quot;/&amp;gt;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또한 모임 구성원들 역시 &amp;quot;의식 자체가 아직 전근대적이었고, 사고의 분화를 겪지도 않은데다가, 이들의 조직 활동이 기분 좋으면 나오고 기분 나쁘면 빠져 버리는 것이 예사&amp;quot;라 청년 모임들은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청년단체의 실패에 좌절하고 다시 귀향했으며, 이때 그는 춘해(春海)라는 아호를 스스로 지었다. 그의 집안에서는 그가 정착하기를 바라고 정주읍 성내동에 집을 얻어 주었다.&lt;br /&gt;
&lt;br /&gt;
안창호의 계몽 강연에 감동받은 남강 이승훈이 1907년(융희 1년) 8월 김덕용(金德鏞)을 초빙하여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 오산에서 신식 교육을 하는 소학교 과정의 학교 강명의숙을 세우고 산수, 수신, 역사, 지리, 체조를 가르쳤고, 그해 12월에는 중학교 과정인 오산학교를 세우고 학생 7명을 처음 받아들여 개교했다. 1908년에는 오산학교에 학생들이 모여 3개 반으로 편성되었고, 정주군 출신의 춘원 이광수가 오산중학교의 교사로 초빙되어 축구, 야구, 테니스, 배구 등을 지역에 처음 소개하였다. 방응모는 어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학교에 입학해 신학문을 접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0페이지&amp;lt;/ref&amp;gt; 그는 이승훈과 의기투합해 민립 대학을 세우는 운동을 추진했지만 조선총독부 평안북도청 학무국에서 승인을 거부하여, 대학 설립에 실패했다.&lt;br /&gt;
&lt;br /&gt;
=== 언론, 기업 활동 ===&lt;br /&gt;
==== 계몽 활동과 언론 활동 ====&lt;br /&gt;
1915년부터 1924년 방응모는 지역 지식인들, 유학파 청년, 계몽 청년들이 모여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하는데 참여했고, 민립대학기성회 평안북도지부에서 활동하면서 민립대학기성회 중앙회 중앙위원 조만식 등과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언변과 용모가 되었던 그의 여관에도 손님들이 몰렸고, 그가 &amp;quot;2백원도 좋고 5백원도 좋다며 보태달라&amp;lt;ref name=&amp;quot;fsfs87&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7페이지&amp;lt;/ref&amp;gt;&amp;quot;고 하면 기부금을 내는 이들이 있었다. 대신 하룻밤을 의탁하려고 그의 여관을 찾은 이들에게 무료 숙식을 제공하기도 했다.&amp;lt;ref name=&amp;quot;fsfs87&amp;quot;/&amp;gt; 1919년 정주에서 3.1 만세 운동이 벌어지자, 그도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형사들의 눈을 피해 방응모는 만세운동을 하다 재빨리 몸을 피해 화를 면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8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1922년 6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인수하여 분국장에 취임했다. 6월 9일에는 정주군 지역 체육행사로 테니스 대회를 개최하였다. 그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경영하는 동시에 그는 농촌 계몽운동 등에 적극 투신하여 인망을 쌓았다. 처음 몇번은 친구 전우현의 자금을 빌려 부족분을 메우기도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02페이지&amp;lt;/ref&amp;gt; 한다. 1922년 6월 19일&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96페이지&amp;lt;/ref&amp;gt; 동아일보 본사를 설득하여 정주분국을 동아일보사 정주지국으로 승격시켰다. 동아일보사 지부장 재직 시 그는 전우현과 함께 의기투합하여 민립 대학 설립 자금과 농촌진흥회 회원의 여비와 회비를 염출하기 위한 목적 및 당시 교사도 없이 난관에 처했던 오산학교의 재개교를 위한 &amp;quot;오산학교의 부흥 운동을 목표로 한 재단법인 촉성 기금 마련&amp;quot; 등을 계획했다. 총독부의 인허가 거부로 실패한 대학 설립 자금은 고스란히 오산학교의 부활과 복교 자금으로 투입되었다. 1920년 1월에 경성형무소에서 가석방된 조만식은 이승훈을 만났고, 다시 조만식이 오산학교를 맡으면서 학교는 다시 정상 운영되었다.&lt;br /&gt;
&lt;br /&gt;
1923년 동아일보 정주군 분국이 지국으로 승격되자 정주 지국장으로 동아일보 정주지국을 경영하였고, 같은 해 7월 여성들의 사회참여와 평등권 신장을 위한 여자교육회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이후 대규모 수해가 나자, 정주군 수해구제회를 결성하여 봉사활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1923년 4월 조만식·송진우·안재홍·김성수 등의 주도로 민간 자본으로 대학교 설립을 추진하기 위한 조직인 조선민립대학기성회가 결성되자, 방응모는 민립대학 기성회에 참여하여 민립대학기성회 정주군준비회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5월에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정주지방지부가 설립되자 기성회 정주지부 상무위원을 맡았다.&lt;br /&gt;
&lt;br /&gt;
==== 광업 경영과 조선일보 입사 ====&lt;br /&gt;
1924년 봄 오산학교 교감으로 있던 전우현이 방응모와도 안면이 있던 금광 채굴업자 두 명을 데리고 그를 찾아왔다. 그들은 자신들이 봐 둔 산이 있다고 방응모에게 소개했다. 그는 선천군의 지역 유지이자 최창학의 친구이며, 그가 동아일보 지국장으로 알게 된 이봉찬을 찾아갔다. 한학자로 알고 있던 그가 금광 투자를 제의하자 &amp;quot;한문이라면 빼지 않고 알려고 드는 한학 훈도가 어떻게 금광을&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16페이지&amp;lt;/ref&amp;gt;&amp;quot; 하느냐 하였지만, 이봉찬은 그에게 금광, 광산에 대한 지식을 알려주었다. 이봉찬은 그에게 광산 지식을 알려주며 최창학의 소유지 중 폐광을 빌리는 법을 알려주었다. 방응모의 됨됨이에 감복한 듯, 그의 수많은 질문에 적잖은 충고를 자임해주었다.&amp;lt;ref name=&amp;quot;fsfs117&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5페이지&amp;lt;/ref&amp;gt; 이봉찬은 최창학에게 방응모를 소개하는 편지를 수차례에 걸쳐 보내주었다.&amp;lt;ref name=&amp;quot;fsfs117&amp;quot;/&amp;gt; 이봉찬은 방응모의 친구들이 봐 둔 갱도를 임대받도록 도와주었다. 이봉찬은 방응모의 한학 실력과 사람됨을 알아보고 있어, 자금을 쾌히 빌려주었다.&amp;lt;ref name=&amp;quot;fsfs117&amp;quot;/&amp;gt;&lt;br /&gt;
&lt;br /&gt;
이후 광산업에 뛰어들어 1924년 여름 압록강변의 최창학 소유 폐금광인 평안북도 삭주군 외남면 교동 다릿골의의 삭주 교동광업소를 찾아가 10미터 정도 땅을 파고 금맥을 발견했다. 바로 삭주 교동광업소를 인수, 경영을 확대하였다. 이때 만난 동업자의 딸이자 친구 전우현의 조카딸인 '''이인숙(李仁淑)'''을 만났다. 본처 승계도가 두 아들을 잃고 복부 수술이 잘못되어 아이를 얻지 못하게 되자 방응모에게도 수많은 중매가 들어왔다. 자식들을 병으로 잃은 것이 자신의 불찰이라고 본 승계도는 그에게 작은 부인이라도 들이자는 말을 꺼내기도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18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26년 방응모에게 광산 사업을 제안했던 두 친구가 손을 털고 나갔고, 그의 가족은 돈이 없어 쌀 대신 좁쌀로 좁쌀죽을 먹으며 연명해야 했다. 방응모는 정주군에 사는 비슷한 또래의 먼 친척 방상진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고, 방상진과 일꾼 대여섯 명, 그리고 후처 이인숙의 친정 쪽에서 얻어온 토지문서를 얻어 자금을 마련, 삭주 다릿골 광산으로 가서 다시 금광을 채굴했다. 금맥은 쉽게 나오지 않았고, 출몰하는 마적떼에게 소와 기구를 약탈당했다. 동시에 빚쟁이들의 독촉에 시달렸으나 '''''1926년 7월 지하 300m 지점에서 금맥을 확보했다. 이후 연간 300kg의 금을 생산, 그는 굴지의 광산업자로''''' 성장해 금맥을 찾아 벼락부자가 되었다. 그는 방상진을 교동금광 총감독에 맡겼다. 이때 그는 최창학에게 임대료에 이자를 쳐서 보내주었다.&lt;br /&gt;
&lt;br /&gt;
그때까지 첫 부인 승계도가 두부를 팔아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미국산 포드 T형자동차'''''를 타고 금의환향했다. 1928년 방응모는 자신의 아호인 춘해를 딴 춘해 장학회를 만들고 장학생들의 모임인 이심회를 만든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48페이지&amp;lt;/ref&amp;gt; 그 해에 방응모는 교동지역에 파출소 지소를 유치하였고, 마적단에 시달리던 주민들은 그의 송덕비를 세우기도 했다. '''''1928년에 그는 의정부 직동, 흥선대원군의 별장이 있던 곳 바로 뒤에 위치한 건물을 매입'''''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한용운]], 홍명희를 자주 초대했다.&lt;br /&gt;
&lt;br /&gt;
'''''1932년 방응모는 교동광산을 135만원이란 거액에 일본 중외광업주식회사에 매각'''''했다. 그 뒤 1932년 6월부터 조선일보 영업국장으로 활동하다 '''1933년 3월 [[조선일보]]의 경영권을 인수'''하여 부사장에 취임하였다.&lt;br /&gt;
&lt;br /&gt;
그는 교동광업소를 운영하며 모은 재력을 바탕으로 부사장 재직 중 [[조선일보]]의 대주주가 되었으며, 1933년 7월 8대 사주 조만식으로부터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제9대 [[조선일보]] 사주로 취임, 활동했다.&amp;lt;ref&amp;gt;조선일보는 1932년 7월에 조만식을 사장으로 영입했지만, 조만식은 거의 평생을 평양에서 살아왔던데다 서울에서 활동하기에는 적응을 잘하지 못했다. 조만식은 신문사 경영난과 지역감정의 혹독한 시련을 받은 채 9개월만에 퇴사했다. 그리고 조만식 후임으로 1933년, 방응모를 사장으로 추대하기에 이르렀다.&amp;lt;/ref&amp;gt;&amp;lt;ref&amp;gt;《한국사 시민강좌 제47집, 대표적 독립운동가 12인》,일조각. p145&amp;lt;/ref&amp;gt; 방응모 취임 이후의 초대 부사장은 이광수, 주필은 서춘이었다.&lt;br /&gt;
&lt;br /&gt;
=== 언론, 사업 활동 ===&lt;br /&gt;
==== 사회사업과 조선일보 인수 계획 ====&lt;br /&gt;
금광 사업에 성공한 그는 영림, 조림 사업에도 투자하였다. 방응모는 배우자 승계도에게서 더 이상 아들을 얻지 못하자 첩 이인숙을 통해 아들을 얻으려고 하였다. 이인숙은 아들을 낳았으나 이 아들은 곧 사망하였다. 아들을 잃은 이인숙은 승계도의 도움을 받다가, 그해 6월 방응모가 있는 광산으로 가 생활하였다'''. 승계도와 이인숙을 통해 자녀를 얻지못하자 42세가 되던 해인 1924년 친형인 방응곤의 둘째 아들 방재윤을 양자로 입양시켰다.'''&lt;br /&gt;
&lt;br /&gt;
[[파일:방응모장학생.jpg|섬네일|160px|오른쪽|방응모와 그의 장학금을 받던 학생들. 가운데 앉은 이가 방응모이고, 서있는 이들 중 왼쪽에서 두 번째는 방응모의 양자 방재윤.]]&lt;br /&gt;
&lt;br /&gt;
1930년 배영옥과 결혼하여 딸 방재숙을 얻었다. 1932년 광산업을 정리하였고 언론사업을 비롯하여 육영사업과 조림 및 간척사업 등을 벌였다. 또한 고아원과 사회복지단체에 후원금을 지원하면서 인망을 얻기도 했다. 삭주 지역에서는 그의 송덕비가 세워지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932년 그는 수원군 팔탄면 노하리 일대의 갯벌에 일본인이 수차례 뚝을 쌓다가 실패했다는 정보를 얻고 임삼진을 통해 조선총독부에 허가를 요청하였다.&amp;lt;ref name=&amp;quot;pp186&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86페이지&amp;lt;/ref&amp;gt; 간척 사업은 이후 1935년부터 시작되었지만 1932년부터 은밀히 착수되어 왔다.&amp;lt;ref name=&amp;quot;pp186&amp;quot;/&amp;gt;&lt;br /&gt;
&lt;br /&gt;
1933년 무렵 방응모가 [[조선일보]] 인수에 나서기 전부터 그는 [[한용운]]을 위한 일이라면 돈을 아끼지 않고 지출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성북동 222번지 언덕에 만해를 위해 기와집 한 채를 지어주었는데 심우장(尋牛莊)이 그것이다. 또한 만해가 일제의 배급을 거부해 생활이 어렵게 되자 만해에게 생활비를 지급했던 방응모는 만해가 병석에 누운 1944년에는 치료비를 지원해주기도 했다.&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6/0000043262?sid=103 만해가 일송 선생 5일장 치른 사연]&amp;lt;/ref&amp;gt; 그 외에도 방응모는 만해 한용운·벽초 홍명희 등과 함께 새해가 되면 백천온천에도 같이 다녀올 정도로 두터운 친분을 맺었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1&amp;quot;&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8/07/2007080700002.html 만해와 계초 방응모 선생]&amp;lt;/ref&amp;gt; 1935년 7월에는 경성 태평로1가에 새 사옥을 준공하는 한편, 출판부를 신설해 〈조광〉(1935. 10)·〈여성〉(1936. 6)·〈소년〉(1937. 4) 등의 월간 잡지를 차례로 창간했으며&amp;lt;ref name=&amp;quot;dam1&amp;quot; /&amp;gt; 운영하였다. 한편 [[1932년]] 교동 광업소를 정리하여 매각하였다.&lt;br /&gt;
&lt;br /&gt;
방응모의 광산 매각을 일본 정부 측에 알리고 다리를 놓은 것은 고일청(高一淸)이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84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32년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사건으로 체포된 [[안창호]]의 사면 탄원과 보석을 위해 노력하였다. 안창호가 윤봉길을 사주했다는 증거가 없으며 그가 테러행위를 지시했다는 증거 자료나 문건이 없다는 것이 방응모의 안창호 탄원 이유였다. 그러나 총독부 경무국장은 그의 안창호 석방 제안을 정중히 거절한다. 1936년 동방문화학원(뒤에 숭문중학교·고등학교 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1939년 9월에는〈조선일보〉의 조간 1회, 석간 2회의 1일 3회 발행을 시작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인수와 경영 ====&lt;br /&gt;
1933년 1월 16일 그는 정식으로 주식회사 [[조선일보]]사를 창립, 1월 18일에 발표된 창립 취지서에는 창립위원장 방응모, 창립발기인 방응모, 조만식, 고일청 외 등이 참여했다. 일단 그는 조만식을 사장으로 임명하고 자신은 부사장으로 있다가, 그해 3월 13일 다시 부사장에 취임했다. 4월 25일 편집인 겸 발행인이 되고, 4월 29일에는 조선일보의 조간, 석간제 발행을 부활, 확정시켰다. 1933년 7월 10일 총독부로부터 조선일보사의 법인 등록 승인을 얻어냈다. 7월 10일 조만식의 사퇴로, [[조선일보]]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다. 1933년 그는 자신의 아호를 춘해에서 계초로 바꾸었다. 그는 유능한 문인, 필진의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 상금 1천 원을 걸고 작가를 영입하였다.&lt;br /&gt;
&lt;br /&gt;
1934년 3월 25일 이광수를 비롯하여 서춘, 김동진, 함상훈, 신태익 등을 [[조선일보]]로 영입해 왔다. 그 외에도 정주군 출신 언론인, 작가들이 조선일보로 많이 오게 되었다. 이후 동아일보와 갈등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이광수가 조선일보로 옮겨와 부사장직에서 9개월 근무했다. 당시 조선일보 내부에서는 문모 라는 이가 이광수의 등장으로 자신의 입지 약화를 우려해 오랫동안 이광수를 내보내려 흉계를 꾸몄다고 한다. 이광수는 1934년 5월 25일자로 돌연 사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65페이지&amp;lt;/ref&amp;gt; 문모는 그에게 오히려 잘 됐다는 식으로 말하다가 방응모에게 호되게 혼이 났다. 그리고 문모로 하여금 즉시 금강산에 들어가 이광수를 다시 데려오게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65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이광수는 아들 봉근(당시 8살)의 사망 등으로 실의에 빠졌고, 1935년에 가서야 이광수를 조선일보 고문이자 필진으로 재영입하게 됐다.&lt;br /&gt;
&lt;br /&gt;
==== 동방문화학원 재단 설립 ====&lt;br /&gt;
방응모는 1936년 방농장의 소유권을 기본 자산으로 하는 재단법인 동방문화학원(東邦文化學院)을 설립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6페이지&amp;lt;/ref&amp;gt; 동방문화학원은 학교 법인으로 인가된 재단 법인으로, 그뒤 고계학원과 인연을 가지고 1936년부터는 보성고등보통학교를 후견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 분리되었다. 그뒤 방응모 장학생인 서중회 회원들을 위한 방응모 장학사업을 주관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7페이지&amp;lt;/ref&amp;gt;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태평로 구 조선일보 사옥 안에 동방문화학원의 간판을 달고 조광 잡지를 계속 발행하는 조광사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7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일제 강점기 후반 ===&lt;br /&gt;
==== 중일 전쟁 전후 ====&lt;br /&gt;
중일전쟁 개전 직후인 1937년 7월 11일에 열린 [[조선일보]] 간부회의에서 주필 서춘이 '일본군, 중국군, 장개석씨'등으로 쓰던 용어를 '아군, 황군, 지나, 장개석'으로 고치고 일본 국민의 입장에서 논설을 쓸 것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편집국장 김형원과 영업국장 김광수가 적극 반대를 하기도 했으나, 방응모는 '일장기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이미 몇 십만 원의 손해를 보았을 뿐 아니라 [[3.1 운동]] 때처럼 신문이 민중을 지도할 수 없다'면서 서춘의 입장을 지지했다. 한편으로 방응모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된 [[안창호]]를 [[조선일보]]에 영입하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안창호는 옥중에서 얻은 간질환과 폐질환 등으로 고생했고, 진료비 등을 수시로 지원하고 문병했음에도 출옥후 얼마 뒤에 사망한다.&lt;br /&gt;
&lt;br /&gt;
1933년 이심회(以心會：후에 序中會, 방응모장학회 등으로 명칭이 바뀜)라는 장학회를 만들어 국내 대학생과 해외유학생들에게 학자금을 지급하기도 했으며, 재단법인 동방문화학원(東方文化學院：지금의 숭문중·고등학교 전신)의 이사장직을 맡기도 했다.&amp;lt;ref name=&amp;quot;dam1&amp;quot; /&amp;gt; 또한 자신의 막대한 재원을 들여 1936년부터 함경남도 영흥군 일대에 당시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대단위 조림사업을 벌였으며, 그 전 해인 1935년부터는 경기도 수원군 팔탄면 일대에서 만 2년간에 걸친 간척사업을 벌이기도 했다.&amp;lt;ref name=&amp;quot;dam1&amp;quot; /&amp;gt;&lt;br /&gt;
&lt;br /&gt;
1937년 12월 24일 [[안창호]]는 병보석 판정을 받고 재판소가 지정한 현 서울대학교병원인 경성제국대학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안창호의 입원 중에 시중을 든 사람으로는 안창호의 외조카 김순원과 청년 박정호 두 사람이었고, 나중에는 이응준 장군의 부인 이정희가 끝까지 지성껏 간호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7페이지&amp;lt;/ref&amp;gt; [[안창호]]는 병상에서 병원비 문제로도 고초를 겪었다. 이 때문에 조만식은 일본 경찰로부터 안창호의 병원비를 대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음에도, &amp;quot;내가 먹고 살면서 그 선생을 돌보지 않을 수 없다&amp;quot;며 완강히 거절하고 안창호를 도왔다고 한다. 안창호의 간호를 같이 도와주던 이응준 장군 부인 이정희는 10일마다 계산되어 나오는 병원 입원비로 안창호 선생이 괴로워하는 표정을 지켜볼수 없었다고 진술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8페이지&amp;lt;/ref&amp;gt; 방응모는 5백원의 수표 한 장을 안창호에게 전달하였다. 50일간의 입원비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9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안창호]]는 1938년 3월 10일 밤 12시 경성제국대학 병원에서 운명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폐간 사건 ====&lt;br /&gt;
일본의 전쟁이 격화되면서 조선총독부 공보국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1940년에 강제로 폐간조치 했다. 광산을 팔아서 자신의 모든 것을 조선일보에 바쳤던 방응모는 큰 절망과 좌절을 느껴야 했다. [[한용운]]은 ‘신문이 폐간되다/ 붓이 꺾이어 모든 일이 끝나니…’로 시작하는 시를 지어 방응모를 위로했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1&amp;quot; /&amp;gt;&amp;lt;ref&amp;gt;붓이 꺾이어 모든 일 끝나니 이제는 재갈 물린 사람들 뿔뿔이 흩어지고 아, 쓸쓸하고 쓸쓸한지고 망국 서울의 가을날 한강의 물도 흐느끼느니 울음 삼켜 흐느끼며 연지를 외면한 채 바다 향해 흐르느니&amp;lt;/ref&amp;gt; 동아일보에는 김성수 외에도 장덕수와 송진우가 있었지만 그에게는 조선일보 폐간을 막기 위해 총독부와 교섭할 인물도 없었다.&lt;br /&gt;
&lt;br /&gt;
1938년 2월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선 내 일간신문 25개사로 조직된 조선춘추회의 창립에 창립발기인으로 참가했고, 조선춘추회 간사로 활동했다. 같은 해 7월 “국민정신을 총동원하고 내선일체 전 능력을 발휘하여 국책 수행에 협력하여 성전(聖戰)의 궁극적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조직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에 참여했고, 그날 결성된 경성연맹 창립총회에서 상담역을 맡았다. 9월부터 조선방공협회 경기도연합지부 평의원을 지냈다. 10월에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주최한 비상시 국민생활 개선을 위한 제1회 생활개선위원회에서 제2부(의례와 사회풍조 쇄신부)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그러나 1938년 10월부터 조선총독부는 조선일보의 신문용지를 검열, 통제하기 시작했다.&lt;br /&gt;
&lt;br /&gt;
1940년 5월 조선총독부 총독 미나미 지로가 방송담화로 창씨개명을 권고했다. 그러나 그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성씨를 이제 와서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며 창씨개명은 완강하게 거절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조선일보에 트집이 잡힐 일이 나타나지 않자 총독부는 전국 면사무소에 조선일보 신문 구독을 거절하도록 명령을 내렸고, 동시에 조선말을 쓰는 민원인에게는 일을 처리해주지 말도록 하게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3페이지&amp;lt;/ref&amp;gt; 조선총독부는 송진우의 예금통장을 문제삼았다. 송진우 명의의 은행저금이 동아일보의 8백여 개의 지국과 분국을 통해 모금된 독립운동 자금이라며, 그리고 동아일보 간부들이 백운장이라는 요정에서 회식을 한 것을 김성수 집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려 했다는 등의 이유로 백관수 동아일보 사장을 전격 구속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3~374페이지&amp;lt;/ref&amp;gt; 동아일보는 백관수가 구속된지 10일 만에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동아일보 중역회의를 열고 폐간신청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4페이지&amp;lt;/ref&amp;gt; 총독부는 조선일보에도 자진 폐간을 권고했고, 1940년 8월 9일 편집회의를 주관, 8월 10일 조선일보의 폐간계를 내고, 8월 10일자로 폐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5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잡지 발행 활동 ====&lt;br /&gt;
신문 강제 폐간 뒤 방응모는 간판을 조광사로 바꿔 걸고, 사옥은 동방흥업주식회사로 등기를 변경해서 유지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1페이지&amp;lt;/ref&amp;gt; 이후 그는 조광 잡지 발행에 전념했다. 1943년 8월 경 일본 중앙대학의 예과를 마친 방일영이 입사&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1페이지&amp;lt;/ref&amp;gt;, 필진으로 참여했다. [[조선일보]]가 폐간된 후에도 방응모는 벽초 홍명희 부자에게 지속적으로 생활비를 대주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4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4년 6월 29일 만해 [[한용운]]이 사망했다. 그는 심우장을 찾아가 3백원을 내놓았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5페이지&amp;lt;/ref&amp;gt;당시 쌀 10가마가 100원이었지만, 심우장은 당장 현금 1원이 없었는데 거액이라서 놀랐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6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광복 이후 언론 및 정치활동 ===&lt;br /&gt;
==== 광복 직후 ====&lt;br /&gt;
1945년 8.15 광복 후에는 8월 말과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朝鮮在外戰災同胞救濟會) 고문과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9월 초 [[안재홍]] 등이 좌경화되는 건준체제에 반발하여 건준을 탈퇴하자 방응모 역시 건준을 탈퇴하였다.&lt;br /&gt;
&lt;br /&gt;
9월 2일 미군정이 주둔하자, 방응모는 윤전기를 찾기 위해 폐간 당시의 증빙서류를 미 군정청에 제시하였으나 소식이 없었다. 총독부는 조선일보 폐간 직후 인수한 윤전기를 경성일보사에 옮겨서 설치했다. 그는 동방문화재단 외 4개 사업소를 적산으로 파악한 미군정을 설득하고, 사옥 문제도 해결하였다.&lt;br /&gt;
&lt;br /&gt;
10월 1일 조선일보 편집위원회를 구성하고, 신문 복간 운동을 추진했다. 조선총독부의 폐간 지시 당시 의정부로 옮겨놓은 일부 활자 자모음이 잘 보관되어, 그해 11월 23일 조선일보를 복간시키고, 서울신문사 사옥에서 조선일보 복간호를 간행하였다. 이후 조선사회문제대책중앙협의회 중앙위원을 거쳐 10월 16일 이승만 등의 주도로 독립촉성중앙회가 결성되자 독촉에 가입하였다.&lt;br /&gt;
&lt;br /&gt;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이 귀국하자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에 입당했다. 12월 [[안재홍]]의 추천으로 한국독립당의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출되어 3~4개월 동안 활동했다.&amp;lt;ref&amp;gt;일각에서는 방응모가 '한독당 재무부장으로 지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1947년부터 한독당 재무부장을 맡은 신창균이 전면 부정했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47/0000002626?sid=102 백범 비서와 '진짜' 한독당 재정부장의 육성증언. 참고.]&amp;lt;/ref&amp;gt; 그 뒤 대한국민총회 발기인, 대한독립애국금헌성회 발기인 등으로 활동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복간 및 군정기 활동 ====&lt;br /&gt;
11월 [[조선일보]]사를 복간시켰다. 그러나 한동안 조선일보의 인쇄는 서울신문사에서 간행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1945년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추념대회에 참여하였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2&amp;quot;&amp;gt;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13&amp;lt;/ref&amp;gt; 순국선열추념대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2&amp;quot; /&amp;gt;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참여,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이 되었다.&amp;lt;ref&amp;gt;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55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6년 2월 26일 서울신문사 공무국 종업원들이 조선일보의 인쇄를 거부해버렸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436페이지&amp;lt;/ref&amp;gt; 그동안 묵시적으로 방해가 은근히 있었다. 표면상의 문제는 임금 문제이나 내용상으로는 조선일보에 대한 조선공산당의 시위의 일종이었다. 사흘간의 교섭 끝에 2월 28일에 가서야 26일자와 27일자를 소급해서 인쇄하여 신문을 한꺼번에 발행하였다. 그러나 3월 1일과 2일에 또다시 인쇄를 거부당해 결국 휴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436페이지&amp;lt;/ref&amp;gt; 조선일보를 경성일보사로 옮겨서 인쇄하기로 하고 3월 5일자로 사고로 독자에게 알렸다.&lt;br /&gt;
&lt;br /&gt;
4월 29일 김구, 김창숙, 김성수, 오세창 등과 함께 서울운동장에서 윤봉길의사 추모회의 창립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amp;lt;ref&amp;gt;&amp;quot;故尹奉吉義士의 記念式 오늘, 發起人會 열고 準備&amp;quot;, 동아일보 1946년 4월 23일자 2면, 사회면&amp;lt;/ref&amp;gt; 그해 5월 조선공업구락부 고문에 위촉되었다.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民族統一總本部) 10인협의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6월 15일 오후 5시 40분 서울역에 마중나가 서울역에 도착한 삼의사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lt;br /&gt;
&lt;br /&gt;
1945년 광복 직후 서기원이 그를 찾아왔다. 서기원은 그때 경성농상실천학교의 동창회로부터 이 학교의 교장이 되어 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이다. 방응모는 서기원의 제의를 받아들여 1946년 8월 28일 동방문화학원 이사장으로 숭문상업학교를 인수, 재단 이사장이 되었다. 후일 방응모가 6.25 전쟁 중에 납북된 후 동방문화학원과 숭문중,고교의 재단은 최용진이 운영하다가 다시 1978년에 방일영에게 인수되었다.&lt;br /&gt;
&lt;br /&gt;
1947년 1월 21일 제5회 창립위원회를 본사에서 개최하고 2월 23일 주식회사 조선일보사 주주창립총회를 열고 대표이사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공동투자 경영자로 참여시킨 전무 이종민과의 알력이 발생했다. 이종민과의 갈등이 심화되자 그해 8월 3일 방응모는 일단 사직서를 제출했다. 1947년 8월 10일 풍문여고 강당에서 개최된 한인신문기자협회에 참석, 민족청년단에서 언론계 공로자로 방응모, 김성수, 설의식을 지정하여 상을 시상받았다.&amp;lt;ref&amp;gt;&amp;quot;朝鮮 新聞記者協會&amp;quot;, 동아일보 1947년 8월 10일자 2면, 사회면&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납북과 최후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 납북 후 행적은 &amp;quot;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amp;quot;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amp;lt;ref name=&amp;quot;김장&amp;quot;/&amp;gt; 1950년 8월경 개성 송악산 부근에서 미군의 폭격에 희생되었고 심한 폭격으로 시신을 찾을 수 없어 묘도 만들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남한에서는 1955년 7월 7일 생사불명기간 만료로 인해 실종 처리되었다.&lt;br /&gt;
&lt;br /&gt;
=== 사후 ===&lt;br /&gt;
[[서울]] 종로에 있던 양자 방재윤의 두 아들 [[방일영]]과 [[방우영]]은 방응모의 첩 이인숙이 찾아가 피신하라고 권고하여 황급히 피신했다. &lt;br /&gt;
&lt;br /&gt;
[[9월 28일]] [[개성시]] 북쪽을 지나 [[황해남도]] [[서흥군]]에서 트럭으로 강제 북송되었다. 이후 9월 28일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lt;br /&gt;
&lt;br /&gt;
7월 6일 그의 행방불명처리가 되고, 방응모의 사후에도 [[조선일보]]는 그의 명의로 발행되었다. 1952년 4월 28일 조선일보는 발행인겸 편집인을 장기영으로, 인쇄인을 방일영으로, 방응모는 명예사장으로 명의변경하여 휴전 후 계속 발행하게 되었다. 1954년 4월 30일 제8회 조선일보 정기주주총회에서 장기영 사장이 사퇴하면서, 명예사장 방응모가 사장으로 추대되고, 발행인 겸 대표취체역에 방일영이 선임되었다. 이후 실종 후 [[1959년]]에 법적으로 사망 처리되었다. 그리고 [[1970년]]까지는 조선일보는 그의 이름으로 발행되었다.&lt;br /&gt;
&lt;br /&gt;
[[1970년]] [[2월 19일]] 조선일보 정기주주총회에서 방응모 이사를 사퇴 수리하였다. 그의 피폭사망 사실은 1970년대 이후 탈북자들을 통해 대한민국에 소개되었다.&lt;br /&gt;
&lt;br /&gt;
== 친일행위 의혹 ==&lt;br /&gt;
=== 일제 전시체제기 활동 ===&lt;br /&gt;
일제 강점기 말기 언론인으로서 총독부체제에 협력한 기록과 활동이 다수 기록이 있다. 1933년 3월 [[조선일보]] 경영권을 인수하고 부사장직에 취임했을 당시 같은 달에 고사기관총 구입비용 1600원을 군에 헌납하였다. 그는 1935년 친일 잡지 《조광 (잡지)(朝光)》을 창간하였고, 1937년에는 경성방송국 제2방송에 출연하여 일제가 중국의 베일을 절멸케하여 극동평화를 지키려고 한다는 강연을 하였다. 1940년대부터 조광에 집중적으로 친일 논설을 기고하고 시국 강연에 참여하여 전쟁 지원을 독려했다. 1942년 6월에는 '징병령 실시에 일층 더 감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글을 써서 조광에 발표하였다. 애국금차회(1937),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1938), 임전대책협의회(1941), 조선임전보국단(1941) 등 대표적인 친일 단체의 회원에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그는 이런 행적으로 인해 해방정국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명단에 기록되어 있고,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해 발표한 &amp;lt;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amp;gt;에 모두 포함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lt;br /&gt;
&lt;br /&gt;
우리 [[조선일보]]는 다른 어떤 신문도 따라오지 못하는 확고한 신념에서 비국민적 행위를 단연 배격하여 종국까지 조선일보사가 이미 정해놓은 방침에 한뜻으로 매진한다.|원산에서의 순회 강연&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9478.html 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친일 다짐하다 시민에 봉변]《한겨레》2005-08-24 오후 06:13:18&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반민족행위 논란 ===&lt;br /&gt;
방응모를 친일파로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남아 있다. 조선일보 경영 이전에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방응모의 활동이 거의 없었고, 납북된 뒤 소식이 끊겨버린 까닭에 본인이 항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 동안의 행적만으로 친일파 여부를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방응모의 후손들이 영향력 있는 [[조선일보]] 언론사의 사주를 맡았기에 그의 입장에서 서술한 기록을 많이 남기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80년 발간된 그의 전기 《계초 방응모》(조선일보사) 등에는 '그가 민족주의적 선각자'로 묘사되고 있다. 방응모가 친일파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일부세력측은 그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논거로 드는 경우가 많이 있다.&amp;lt;ref&amp;gt;유석재, 계간 《유심》 (2004년 봄호) [http://yousim.buddhism.org/html/2004-spr/tamgu-yoo-seok-jae.htm 삭풍 속에 피어난 금란지교(金蘭之交) - 만해와 계초 방응모]&amp;lt;/ref&amp;gt;&amp;lt;ref&amp;gt;&amp;quot;일제 말기 계초는 시국강연에 나설 것과 창씨개명을 집요하게 강요받았으나 그때마다 묵묵부답으로 거부하며 소신을 지켰다.&amp;quot; 《조선일보》 (2001.3) 조선일보 사장열전 - 계초 방응모편, 《한겨레》 (2001.3.30) [http://www.njoyschool.net/news/article_view.asp?menu_code=s20202&amp;amp;no=1206 조선일보, 일장기를 신문제호 위에]&amp;lt;/ref&amp;gt;&lt;br /&gt;
또한 한국정토학회 고문이자 서울 정토사 주지였던 박설산(1918~2007)이 학도병에 끌려가기 직전인 1943년 12월 28일 밤 서울역에서 스스로 왼발을 선로에 올려 발가락을 절단해 징집을 기피하자 방응모는 만해와 함께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설산을 걱정하면서 입원 중 조선일보 기자를 통해 돈을 전달한 것은 물론 퇴원할 때 돈을 전달하고 뒤를 보살폈다고 한다.&amp;lt;ref&amp;gt;박설산 회고록 &amp;lt;뚜껑없는 조선역사책&amp;gt;(1994, 도서출판 삼장) p240~241&amp;lt;/ref&amp;gt;&lt;br /&gt;
&lt;br /&gt;
2010년 12월, 방응모 관계자들 및 조선일보측은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을 취소해달라'며 법원에 낸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amp;quot;1944년 조선항공업 창립발기인으로 활동한 부분에 대해 친일행위로 판단한 부분을 취소하지만 나머지 활동에 대해서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amp;quot;라고 판결했다. 그 이유인 즉 &amp;quot;방응모는 1933년 조선일보 사장으로 취임해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등으로 활동하며 친일활동을 벌였으며, 1937년 경성방송국 시국강연에서 일본제국이 극동평화를 확립시킬 것이라는 내용의 강연을 하고, 1938년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춘추회의 발기인 겸 간사로 활동하기도 했다&amp;lt;ref&amp;gt;[http://media.daum.net/breakingnews/politics/view.html?cateid=1002&amp;amp;newsid=20101222103319164&amp;amp;p=newsis 법원 &amp;quot;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친일파 맞다&amp;quot;]뉴시스 2010년 12월 22일&amp;lt;/ref&amp;gt;&amp;quot;는 것이다.&lt;br /&gt;
&lt;br /&gt;
2012년 1월 12일 서울고법 행정7부는 방 전 사장의 손자인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이 행정안전부를 상대로 낸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처분 취소 청구소송에서 ‘일제 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의 친일 행위 판정 조항에 비추어 방 전 사장에게 적용된 모두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민족적 지도자로서 비중이 큰 만큼 그로 인한 책임도 무거울 뿐 아니라 고난의 시기를 겪은 민족으로서 그 역사를 반성하자는 입장에 설 때, 방 전 사장의 여러 행태는 반민특별법에서 규정한 친일반민족행위의 유형에 속함을 부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1·2심 재판부는 방 전 사장이 자신이 운영하던 잡지 &amp;lt;조광&amp;gt;에 일제 침략전쟁에 동조하고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문예물과 일제 침략전쟁에 협력할 것을 주문하는 논문을 게재하는 등의 ‘친일’ 행위를 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또한, 2심 재판부는 일본의 전쟁 수행을 돕기 위해 설립된 군수 제조업체 ‘조선항공공업’의 발기인과 감사를 지낸 것은 “감사는 업무집행에 관여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기관으로, 방 전 사장이 이 회사를 운영했다고 볼 수 있다”는 이유로 친일이라고 판단했다.&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4565.html법원 ‘방응모 친일’ 2심서도 인정] 인터넷한겨레 2010년 12월 22일&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가족 관계 ==&lt;br /&gt;
* 아버지 : 방계준(方桂準)&lt;br /&gt;
* 어머니 : 온양 박씨&lt;br /&gt;
** 형 : 방응곤(方應坤)&lt;br /&gt;
** 배우자 : 승계도&lt;br /&gt;
*** 아들 2명 요절&lt;br /&gt;
** 배우자 : 이인숙(李仁淑, 1901년 ~ ?)&lt;br /&gt;
*** 아들 : 방재욱(方在旭, 1925년 ~ 1926년 9월)&lt;br /&gt;
** 배우자 : 배영옥(裵英玉)&lt;br /&gt;
*** 장녀 : 방재숙(方在淑)&lt;br /&gt;
** 배우자 : 노호용(盧鎬龍)&lt;br /&gt;
*** 장남 : 방재선(方在善, 1944년 ~)&lt;br /&gt;
*** 차남 : 방재효(方在孝, 1946년 ~)&lt;br /&gt;
*** 삼남 : 방재규(方在奎, 1948년 ~)&lt;br /&gt;
&lt;br /&gt;
** 양자 : 방재윤(方在允 또는 方在胤, 1901년 ~ 1940년, 형 방응곤의 차남)&lt;br /&gt;
*** 손자 : 방일영(方一榮, 1923년 ~ 2003년)&lt;br /&gt;
**** 증손 : 방상훈(方相勳, 1948년 ~)&lt;br /&gt;
**** 증손부 : 윤순명 - 윤치호(尹致昊, 1865년 ~ 1945년)의 증손녀&lt;br /&gt;
***** 현손 : 방준오(方俊吾, 1974년)&lt;br /&gt;
***** 현손 : 방정오(方政吾, 1978년)&lt;br /&gt;
**** 증손 : 방용훈(方容勳, 1952년 ~)&lt;br /&gt;
*** 손자 : 방필영(方必榮, 1924년 ~ 1926년)&lt;br /&gt;
*** 손녀 : 방숙영(? ~ 1951년 1월)&lt;br /&gt;
*** 손자 : 방우영(方又榮, 1928년 ~ 2016년)&lt;br /&gt;
**** 증손 : 방성훈(方聖勳, 1973년 ~)&lt;br /&gt;
&lt;br /&gt;
== 기타 ==&lt;br /&gt;
그는 [[한용운]], 최남선, 정인보, 홍명희 등과 친분관계를 형성하고 어울려 지냈다 한다.&lt;br /&gt;
&lt;br /&gt;
[[김구]]의 한국독립당의 재정적 후견인 역할을 하였다 하며,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삼의사 유골봉환식 때 [[김구]], [[정인보]] 등과 촬영한 사진이 있다.&amp;lt;ref&amp;gt;백범어록 참조&amp;lt;/ref&amp;gt; 그리고 1945년 11월 23일 조선일보가 복간되자 백범 김구는 '有志者事竟成' 뜻을 지닌 자 성취할 수 있다'는 친필 휘호를 보내며 축하했다.&amp;lt;ref&amp;gt;[http://www.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4060370241 '조선일보 역사 읽기'《조선일보》2004.06.03]&amp;lt;/ref&amp;gt;&lt;br /&gt;
한편 임꺽정의 저자인 벽초 홍명희가 방응모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그와 깊은 친분을 맺었다는 주장이 있다. 《조광》 1938년 11월호엔 홍명희가 병중에 있는 방응모를 위로하며 지은 한시가 방응모의 답시와 함께 실려 있다고 한다.&amp;lt;ref&amp;gt;[http://weekly.chosun.com/site/data/html_dir/2004/11/05/2004110577041.html ‘임꺽정’으로 되살아난 독립운동의 魂! 주간조선 1827호 2004.11.04&amp;lt;/ref&amp;gt; 또한 [[안창호]]의 비서실장을 지낸 독립유공자 구익균은 방응모와 안창호가 친밀했다는 주장을 했다.&amp;lt;ref&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09/2008030901055.html &amp;quot;공산주의자들, 도산 비판하다가도 하숙비 떨어지면 찾아와&amp;quot;] 조선일보, 2008-03-10 03:22&amp;lt;/ref&amp;gt;&lt;br /&gt;
또한 박설산에 따르면 1943년 만해 한용운에게 학도병으로 끌려가게 되었음을 알리려 심우장으로 찾아가게 되었을 때, 한용운과 방응모가 바둑을 두고 곁에서 정인보가 훈수를 두고 있었다고 한다.&amp;lt;ref&amp;gt;박설산 저 &amp;lt;뚜껑없는 朝鮮 역사 책&amp;gt; p.226 도서출판 三藏(1994)&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30년대~1940년대 방응모에게서 장학금을 지원받은 학생 모임인 서중회의 회원들의 그의 인물평은 &amp;quot;첫 인상은 좀 깡마른 모습이었으나 의지가 강한 인물&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56페이지&amp;lt;/ref&amp;gt;&amp;quot;이라는 평을 남기기도 했다.&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 /&amp;gt;&lt;br /&gt;
&lt;br /&gt;
== 참고 자료 ==&lt;br /&gt;
* 청산하지 못한 역사: 언론 내세워 일제에 아부한 교화 정책의 하수인 (문영숙) (반민족문제연구소, 청년사, 1994)&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민족 계몽의 초석 방응모(이동욱 저, 지구촌, 1998)&lt;br /&gt;
* 계초 방응모전(계초전기간행위, 조선일보사, 1980년)&lt;br /&gt;
* 계초 방응모(이동욱, 방일영문화재단, 1996)&lt;br /&gt;
&lt;br /&gt;
== 외부 링크 ==&lt;br /&gt;
* [https://web.archive.org/web/20050123171046/http://chosunhost.com/ 계초방응모 기념사업회]&lt;br /&gt;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09145 &amp;lt;조선일보&amp;gt;, 방응모 전 사장의 '친일행적' 말한다] - 오마이뉴스 04.09.10일자&lt;br /&gt;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020302101749 방응모ㆍ 김성수 친일행적 뭔가 : &amp;lt;긴급입수&amp;gt;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 全文] - 프레시안 2002-03-02&lt;br /&gt;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54052 그가 '&amp;lt;조선&amp;gt;의 주인' 주장하는 이유] 오마이뉴스 2001년 9월 20일자&lt;br /&gt;
*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956 방재선씨, 호주·상속 원인무효소송 제기]&lt;br /&gt;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4/06/2008040601053.html '5인 친필 서첩' 발굴] 조선일보 2008년04월06일자]&lt;br /&gt;
&lt;br /&gt;
[[분류: 감자]]&lt;/div&gt;</summary>
		<author><name>Nsgjjsjsjy02</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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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방응모</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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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Nsgjjsjsjy02: /* 김구와의 결별과 만년 */&lt;/p&gt;
&lt;hr /&gt;
&lt;div&gt;{|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width:100%&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0%&amp;quot;|사진&lt;br /&gt;
|[[파일:방응모.jpg|center|200픽셀]]&lt;br /&gt;
|+ '''방응모'''&lt;br /&gt;
|+ style=&amp;quot;caption-side:bottom;text-align:left:&amp;quot;|출처: 위키백과&lt;br /&gt;
|출생||1883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조선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또는 정부면 성내동&lt;br /&gt;
|-&lt;br /&gt;
|사망||1950년경으로 추정&lt;br /&gt;
|-&lt;br /&gt;
|사인||불명&lt;br /&gt;
|-&lt;br /&gt;
|거주지||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amp;gt; 경성부 -&amp;gt; 경기도 양주군 의정부읍&lt;br /&gt;
|-&lt;br /&gt;
|국적||대한민국&lt;br /&gt;
|-&lt;br /&gt;
|본관||온양&lt;br /&gt;
|-&lt;br /&gt;
|별칭||호: 계초(啓礎), 춘해(春海)&lt;br /&gt;
|-&lt;br /&gt;
|직업||교사, 변호사, 상인, 언론인, 기업인, 사회운동가, 정치가&lt;br /&gt;
|-&lt;br /&gt;
|배우자||승계도, 이인숙, 배영옥, 노효용&lt;br /&gt;
|-&lt;br /&gt;
|자녀||방재숙(딸), 방재욱·방재선·방재효·방재규(아들), 방재윤(양자)&lt;br /&gt;
|-&lt;br /&gt;
|부모||방계준(부), 온양박씨(모)&lt;br /&gt;
|}&lt;br /&gt;
&lt;br /&gt;
'''방응모'''(方應謨, 평안북도 정주군, 1883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 1950년 8월(추정)는 [[일제강점기]]의 교육자, 언론인, 법조인, 기업인이자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언론인이며 정치인이다. 호는 '''춘해'''(春海)이고, 뒤에 '''계초'''(啓礎)로 고쳤다.&lt;br /&gt;
&lt;br /&gt;
1922년 동아일보 정주 지국을 인수해 지국장을 지내다가 1924년 금광업에 뛰어들어 큰 부를 얻게 되었다. 1932년 6월 조선일보에 입사하였고 이후 영업국장이 되어 조선일보의 판매망을 장악하게 되고 경영권을 인수하면서 1933년 3월 조선일보 부사장이 되었다. 1933년 7월부터 1950년 7월까지 종신으로 [[조선일보]]의 사장을 역임하였다. 1935년 창간한 월간잡지 '조광(朝光)'은 친일 논란이 있다.&amp;lt;ref&amp;gt;안은필. [http://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9211 조선일보가 가장 빛나던 시기, ‘안재홍 시대’]&amp;lt;/ref&amp;gt;&amp;lt;ref name=&amp;quot;안은&amp;quot;&amp;gt;안은필. [http://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9279 방응모 친일증거, “모래밭에서 모래 찾기”]국민TV. 기사입력 2015년 4월 23일. 기사수정 2015년 4월 24일.&amp;lt;/ref&amp;gt;&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2/0002006080?sid=102 한홍구 &amp;quot;박정희는 공포와 욕망의 정치를 했다&amp;quot;]. 프레시안. 2015년 4월 13일.&amp;lt;/ref&amp;gt;&amp;lt;ref&amp;gt;이민영.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1/0002255321?sid=102 고법 “방응모 前조선일보 사장 친일행적 대부분 인정”]. 서울신문. 2012년 1월 13일.&amp;lt;/ref&amp;gt;&amp;lt;ref&amp;gt;노현웅.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8/0002251781?sid=102 조선 방응모·동아 김성수의 ‘친일’…수년째 결론 안 내고 미루는 법원]. 한겨레. 2014년 11월 3일.&amp;lt;/ref&amp;gt;&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6/0000000413?sid=110 김성수ㆍ방응모와 친일언론인 군상]. 미디어오늘. 2002년 3월 12일.&amp;lt;/ref&amp;gt; 언론계에서 활동하면서도 사업가의 길을 함께 걸었고, 교육 장학 활동을 하였으며, 1945년 광복 직후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 고문과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안재홍]]의 추천을 받아 한국독립당 중앙상무위원과 독립촉성국민회 총무부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amp;lt;ref name=&amp;quot;안은&amp;quot;/&amp;gt;&amp;lt;ref&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16/2008031600800.html 계초 방응모와의 우정도 여러 편의 시로 표현해&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해방 정국에서 김구의 재정적 후견인으로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등 삼의사 유골 봉환 사업과 신탁통치 반대 운동 등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대한민국 수립 이후 사회민주주의 정치가인 조소앙과 사회당을 결성해 문교정책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lt;br /&gt;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 납북 후 행적은 &amp;quot;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amp;quot;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lt;br /&gt;
&lt;br /&gt;
== 생애 ==&lt;br /&gt;
=== 생애 초기 ===&lt;br /&gt;
==== 출생과 성장 ====&lt;br /&gt;
방응모는 1883년 11월 3일 또는 9월 29일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바우머리 부락 또는 정주군 정부면 성내동 425번지에서 '''방계준(方桂準)'''과 온양 박씨(溫陽朴氏)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그는 어려서 집중력이 남달리 뛰어난 반면 고집이 셌다는 평이 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페이지&amp;lt;/ref&amp;gt; 그의 '''삼촌 방계묵(方啓默)'''은 그의 고집있는 기질을 두고 저놈은 쇠작두 말고 나무 작두로 잘라 죽여야 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3~54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친척들의 야멸찬 말들이 그에게 상처를 주거나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4페이지&amp;lt;/ref&amp;gt; 또한 그의 유년시절을 본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가 태어날 당시 태몽도 없었고, 신동이라는 말도 별다르게 듣지 않았다고 한다. 어려서 빈곤한 가정환경으로 방응모는 정규 학교에는 입학하지 못하고, 16세 때까지 서당에 드나들며 한학을 익혔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던 중 그가 어느정도 실력이 우수하다고 인정되자, 스승인 승창률은 잠시 방응모에게 어린아이들을 돌보게 한 후 자리를 피하곤 했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1페이지&amp;lt;/ref&amp;gt; 그는 홀로 사서육경을 탐독, 독파하였다. 21세 무렵 잠시 서당 훈장을 지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896년 독립협회의 활동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5페이지&amp;lt;/ref&amp;gt; 형 방응곤이 예배당에 다니게 되자&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2페이지&amp;lt;/ref&amp;gt;, 그를 통해 신문물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다. 그 뒤 우연히 경성부에 갔다가 신문물을 보고 충격을 받아 17세에 독학으로 신학문과 일본어, 중국어, 수학 등을 독파하였다. 유년시절 서당의 성리학 스승이던 승창률의 친척인 승시영(承時榮)과 조씨(趙氏)의 딸 승계도와 결혼했다.&lt;br /&gt;
&lt;br /&gt;
결혼한 다음 해에도 그는 공부를 한다며 책만 사다 읽곤 했고&amp;lt;ref name=&amp;quot;fsfs60&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60페이지&amp;lt;/ref&amp;gt;, 부인 승계도는 생계를 위해 몸소 나섰다.&amp;lt;ref name=&amp;quot;fsfs60&amp;quot;/&amp;gt; 부인 승계도는 친척 가운데 콩을 싸게 넘겨주는 이들이 있어 그 콩으로 두부를 만들거나 콩나물을 키워 장사를 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61페이지&amp;lt;/ref&amp;gt; 그의 아내 승계도는 남편에 대한 믿음이 절대적이었고 탓을 하거나 가출하지 않았다. 이후 그는 서당 훈장으로 초빙되었으나, 그가 가는 마을의 기존 훈장, 한학자들은 그를 적대적으로 대했다. 그렇다고 마을 사람들의 일부 지명이 있었으나 자신의 스승의 자리를 침해할 수 없다 하여 그는 자신의 동리의 훈장일은 사양하였다. 그는 마을을 나가 신학문을 하는 친구들과 어울렸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62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계몽 운동 ====&lt;br /&gt;
도산 [[안창호]]와 남강 이승훈이 연사로 돌아다니며 애국 계몽 강연과 문맹들의 교육, 야학 사업을 하였고, 여기에 감동받은 청년들이 서당과 야학을 열고 문맹들과 여성들에게 한글 교육을 하였다. 도산 [[안창호]]의 강연과 남강 이승훈의 강연을 찾아다니며 듣다가 감동받은 방응모 역시 교육, 계몽에 참여하였다.&lt;br /&gt;
&lt;br /&gt;
그는 청년회의 활동에 몰두하였으나, 농번기에 작은 일손이라도 더 필요했던 동리 노인들은 젊은 아이들이 일은 하지 않고 무슨 모임이다 하여 어울려 돌아다니는 꼴&amp;lt;ref name=&amp;quot;fsfs75&amp;quot;/&amp;gt;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또한 모임 구성원들 역시 &amp;quot;의식 자체가 아직 전근대적이었고, 사고의 분화를 겪지도 않은데다가, 이들의 조직 활동이 기분 좋으면 나오고 기분 나쁘면 빠져 버리는 것이 예사&amp;quot;라 청년 모임들은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청년단체의 실패에 좌절하고 다시 귀향했으며, 이때 그는 춘해(春海)라는 아호를 스스로 지었다. 그의 집안에서는 그가 정착하기를 바라고 정주읍 성내동에 집을 얻어 주었다.&lt;br /&gt;
&lt;br /&gt;
안창호의 계몽 강연에 감동받은 남강 이승훈이 1907년(융희 1년) 8월 김덕용(金德鏞)을 초빙하여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 오산에서 신식 교육을 하는 소학교 과정의 학교 강명의숙을 세우고 산수, 수신, 역사, 지리, 체조를 가르쳤고, 그해 12월에는 중학교 과정인 오산학교를 세우고 학생 7명을 처음 받아들여 개교했다. 1908년에는 오산학교에 학생들이 모여 3개 반으로 편성되었고, 정주군 출신의 춘원 이광수가 오산중학교의 교사로 초빙되어 축구, 야구, 테니스, 배구 등을 지역에 처음 소개하였다. 방응모는 어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학교에 입학해 신학문을 접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0페이지&amp;lt;/ref&amp;gt; 그는 이승훈과 의기투합해 민립 대학을 세우는 운동을 추진했지만 조선총독부 평안북도청 학무국에서 승인을 거부하여, 대학 설립에 실패했다.&lt;br /&gt;
&lt;br /&gt;
=== 언론, 기업 활동 ===&lt;br /&gt;
==== 계몽 활동과 언론 활동 ====&lt;br /&gt;
1915년부터 1924년 방응모는 지역 지식인들, 유학파 청년, 계몽 청년들이 모여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하는데 참여했고, 민립대학기성회 평안북도지부에서 활동하면서 민립대학기성회 중앙회 중앙위원 조만식 등과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언변과 용모가 되었던 그의 여관에도 손님들이 몰렸고, 그가 &amp;quot;2백원도 좋고 5백원도 좋다며 보태달라&amp;lt;ref name=&amp;quot;fsfs87&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7페이지&amp;lt;/ref&amp;gt;&amp;quot;고 하면 기부금을 내는 이들이 있었다. 대신 하룻밤을 의탁하려고 그의 여관을 찾은 이들에게 무료 숙식을 제공하기도 했다.&amp;lt;ref name=&amp;quot;fsfs87&amp;quot;/&amp;gt; 1919년 정주에서 3.1 만세 운동이 벌어지자, 그도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형사들의 눈을 피해 방응모는 만세운동을 하다 재빨리 몸을 피해 화를 면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8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1922년 6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인수하여 분국장에 취임했다. 6월 9일에는 정주군 지역 체육행사로 테니스 대회를 개최하였다. 그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경영하는 동시에 그는 농촌 계몽운동 등에 적극 투신하여 인망을 쌓았다. 처음 몇번은 친구 전우현의 자금을 빌려 부족분을 메우기도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02페이지&amp;lt;/ref&amp;gt; 한다. 1922년 6월 19일&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96페이지&amp;lt;/ref&amp;gt; 동아일보 본사를 설득하여 정주분국을 동아일보사 정주지국으로 승격시켰다. 동아일보사 지부장 재직 시 그는 전우현과 함께 의기투합하여 민립 대학 설립 자금과 농촌진흥회 회원의 여비와 회비를 염출하기 위한 목적 및 당시 교사도 없이 난관에 처했던 오산학교의 재개교를 위한 &amp;quot;오산학교의 부흥 운동을 목표로 한 재단법인 촉성 기금 마련&amp;quot; 등을 계획했다. 총독부의 인허가 거부로 실패한 대학 설립 자금은 고스란히 오산학교의 부활과 복교 자금으로 투입되었다. 1920년 1월에 경성형무소에서 가석방된 조만식은 이승훈을 만났고, 다시 조만식이 오산학교를 맡으면서 학교는 다시 정상 운영되었다.&lt;br /&gt;
&lt;br /&gt;
1923년 동아일보 정주군 분국이 지국으로 승격되자 정주 지국장으로 동아일보 정주지국을 경영하였고, 같은 해 7월 여성들의 사회참여와 평등권 신장을 위한 여자교육회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이후 대규모 수해가 나자, 정주군 수해구제회를 결성하여 봉사활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1923년 4월 조만식·송진우·안재홍·김성수 등의 주도로 민간 자본으로 대학교 설립을 추진하기 위한 조직인 조선민립대학기성회가 결성되자, 방응모는 민립대학 기성회에 참여하여 민립대학기성회 정주군준비회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5월에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정주지방지부가 설립되자 기성회 정주지부 상무위원을 맡았다.&lt;br /&gt;
&lt;br /&gt;
==== 광업 경영과 조선일보 입사 ====&lt;br /&gt;
1924년 봄 오산학교 교감으로 있던 전우현이 방응모와도 안면이 있던 금광 채굴업자 두 명을 데리고 그를 찾아왔다. 그들은 자신들이 봐 둔 산이 있다고 방응모에게 소개했다. 그는 선천군의 지역 유지이자 최창학의 친구이며, 그가 동아일보 지국장으로 알게 된 이봉찬을 찾아갔다. 한학자로 알고 있던 그가 금광 투자를 제의하자 &amp;quot;한문이라면 빼지 않고 알려고 드는 한학 훈도가 어떻게 금광을&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16페이지&amp;lt;/ref&amp;gt;&amp;quot; 하느냐 하였지만, 이봉찬은 그에게 금광, 광산에 대한 지식을 알려주었다. 이봉찬은 그에게 광산 지식을 알려주며 최창학의 소유지 중 폐광을 빌리는 법을 알려주었다. 방응모의 됨됨이에 감복한 듯, 그의 수많은 질문에 적잖은 충고를 자임해주었다.&amp;lt;ref name=&amp;quot;fsfs117&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5페이지&amp;lt;/ref&amp;gt; 이봉찬은 최창학에게 방응모를 소개하는 편지를 수차례에 걸쳐 보내주었다.&amp;lt;ref name=&amp;quot;fsfs117&amp;quot;/&amp;gt; 이봉찬은 방응모의 친구들이 봐 둔 갱도를 임대받도록 도와주었다. 이봉찬은 방응모의 한학 실력과 사람됨을 알아보고 있어, 자금을 쾌히 빌려주었다.&amp;lt;ref name=&amp;quot;fsfs117&amp;quot;/&amp;gt;&lt;br /&gt;
&lt;br /&gt;
이후 광산업에 뛰어들어 1924년 여름 압록강변의 최창학 소유 폐금광인 평안북도 삭주군 외남면 교동 다릿골의의 삭주 교동광업소를 찾아가 10미터 정도 땅을 파고 금맥을 발견했다. 바로 삭주 교동광업소를 인수, 경영을 확대하였다. 이때 만난 동업자의 딸이자 친구 전우현의 조카딸인 '''이인숙(李仁淑)'''을 만났다. 본처 승계도가 두 아들을 잃고 복부 수술이 잘못되어 아이를 얻지 못하게 되자 방응모에게도 수많은 중매가 들어왔다. 자식들을 병으로 잃은 것이 자신의 불찰이라고 본 승계도는 그에게 작은 부인이라도 들이자는 말을 꺼내기도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18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26년 방응모에게 광산 사업을 제안했던 두 친구가 손을 털고 나갔고, 그의 가족은 돈이 없어 쌀 대신 좁쌀로 좁쌀죽을 먹으며 연명해야 했다. 방응모는 정주군에 사는 비슷한 또래의 먼 친척 방상진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고, 방상진과 일꾼 대여섯 명, 그리고 후처 이인숙의 친정 쪽에서 얻어온 토지문서를 얻어 자금을 마련, 삭주 다릿골 광산으로 가서 다시 금광을 채굴했다. 금맥은 쉽게 나오지 않았고, 출몰하는 마적떼에게 소와 기구를 약탈당했다. 동시에 빚쟁이들의 독촉에 시달렸으나 '''''1926년 7월 지하 300m 지점에서 금맥을 확보했다. 이후 연간 300kg의 금을 생산, 그는 굴지의 광산업자로''''' 성장해 금맥을 찾아 벼락부자가 되었다. 그는 방상진을 교동금광 총감독에 맡겼다. 이때 그는 최창학에게 임대료에 이자를 쳐서 보내주었다.&lt;br /&gt;
&lt;br /&gt;
그때까지 첫 부인 승계도가 두부를 팔아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미국산 포드 T형자동차'''''를 타고 금의환향했다. 1928년 방응모는 자신의 아호인 춘해를 딴 춘해 장학회를 만들고 장학생들의 모임인 이심회를 만든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48페이지&amp;lt;/ref&amp;gt; 그 해에 방응모는 교동지역에 파출소 지소를 유치하였고, 마적단에 시달리던 주민들은 그의 송덕비를 세우기도 했다. '''''1928년에 그는 의정부 직동, 흥선대원군의 별장이 있던 곳 바로 뒤에 위치한 건물을 매입'''''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한용운]], 홍명희를 자주 초대했다.&lt;br /&gt;
&lt;br /&gt;
'''''1932년 방응모는 교동광산을 135만원이란 거액에 일본 중외광업주식회사에 매각'''''했다. 그 뒤 1932년 6월부터 조선일보 영업국장으로 활동하다 '''1933년 3월 [[조선일보]]의 경영권을 인수'''하여 부사장에 취임하였다.&lt;br /&gt;
&lt;br /&gt;
그는 교동광업소를 운영하며 모은 재력을 바탕으로 부사장 재직 중 [[조선일보]]의 대주주가 되었으며, 1933년 7월 8대 사주 조만식으로부터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제9대 [[조선일보]] 사주로 취임, 활동했다.&amp;lt;ref&amp;gt;조선일보는 1932년 7월에 조만식을 사장으로 영입했지만, 조만식은 거의 평생을 평양에서 살아왔던데다 서울에서 활동하기에는 적응을 잘하지 못했다. 조만식은 신문사 경영난과 지역감정의 혹독한 시련을 받은 채 9개월만에 퇴사했다. 그리고 조만식 후임으로 1933년, 방응모를 사장으로 추대하기에 이르렀다.&amp;lt;/ref&amp;gt;&amp;lt;ref&amp;gt;《한국사 시민강좌 제47집, 대표적 독립운동가 12인》,일조각. p145&amp;lt;/ref&amp;gt; 방응모 취임 이후의 초대 부사장은 이광수, 주필은 서춘이었다.&lt;br /&gt;
&lt;br /&gt;
=== 언론, 사업 활동 ===&lt;br /&gt;
==== 사회사업과 조선일보 인수 계획 ====&lt;br /&gt;
금광 사업에 성공한 그는 영림, 조림 사업에도 투자하였다. 방응모는 배우자 승계도에게서 더 이상 아들을 얻지 못하자 첩 이인숙을 통해 아들을 얻으려고 하였다. 이인숙은 아들을 낳았으나 이 아들은 곧 사망하였다. 아들을 잃은 이인숙은 승계도의 도움을 받다가, 그해 6월 방응모가 있는 광산으로 가 생활하였다'''. 승계도와 이인숙을 통해 자녀를 얻지못하자 42세가 되던 해인 1924년 친형인 방응곤의 둘째 아들 방재윤을 양자로 입양시켰다.'''&lt;br /&gt;
&lt;br /&gt;
[[파일:방응모장학생.jpg|섬네일|160px|오른쪽|방응모와 그의 장학금을 받던 학생들. 가운데 앉은 이가 방응모이고, 서있는 이들 중 왼쪽에서 두 번째는 방응모의 양자 방재윤.]]&lt;br /&gt;
&lt;br /&gt;
1930년 배영옥과 결혼하여 딸 방재숙을 얻었다. 1932년 광산업을 정리하였고 언론사업을 비롯하여 육영사업과 조림 및 간척사업 등을 벌였다. 또한 고아원과 사회복지단체에 후원금을 지원하면서 인망을 얻기도 했다. 삭주 지역에서는 그의 송덕비가 세워지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932년 그는 수원군 팔탄면 노하리 일대의 갯벌에 일본인이 수차례 뚝을 쌓다가 실패했다는 정보를 얻고 임삼진을 통해 조선총독부에 허가를 요청하였다.&amp;lt;ref name=&amp;quot;pp186&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86페이지&amp;lt;/ref&amp;gt; 간척 사업은 이후 1935년부터 시작되었지만 1932년부터 은밀히 착수되어 왔다.&amp;lt;ref name=&amp;quot;pp186&amp;quot;/&amp;gt;&lt;br /&gt;
&lt;br /&gt;
1933년 무렵 방응모가 [[조선일보]] 인수에 나서기 전부터 그는 [[한용운]]을 위한 일이라면 돈을 아끼지 않고 지출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성북동 222번지 언덕에 만해를 위해 기와집 한 채를 지어주었는데 심우장(尋牛莊)이 그것이다. 또한 만해가 일제의 배급을 거부해 생활이 어렵게 되자 만해에게 생활비를 지급했던 방응모는 만해가 병석에 누운 1944년에는 치료비를 지원해주기도 했다.&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6/0000043262?sid=103 만해가 일송 선생 5일장 치른 사연]&amp;lt;/ref&amp;gt; 그 외에도 방응모는 만해 한용운·벽초 홍명희 등과 함께 새해가 되면 백천온천에도 같이 다녀올 정도로 두터운 친분을 맺었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1&amp;quot;&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8/07/2007080700002.html 만해와 계초 방응모 선생]&amp;lt;/ref&amp;gt; 1935년 7월에는 경성 태평로1가에 새 사옥을 준공하는 한편, 출판부를 신설해 〈조광〉(1935. 10)·〈여성〉(1936. 6)·〈소년〉(1937. 4) 등의 월간 잡지를 차례로 창간했으며&amp;lt;ref name=&amp;quot;dam1&amp;quot; /&amp;gt; 운영하였다. 한편 [[1932년]] 교동 광업소를 정리하여 매각하였다.&lt;br /&gt;
&lt;br /&gt;
방응모의 광산 매각을 일본 정부 측에 알리고 다리를 놓은 것은 고일청(高一淸)이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84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32년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사건으로 체포된 [[안창호]]의 사면 탄원과 보석을 위해 노력하였다. 안창호가 윤봉길을 사주했다는 증거가 없으며 그가 테러행위를 지시했다는 증거 자료나 문건이 없다는 것이 방응모의 안창호 탄원 이유였다. 그러나 총독부 경무국장은 그의 안창호 석방 제안을 정중히 거절한다. 1936년 동방문화학원(뒤에 숭문중학교·고등학교 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1939년 9월에는〈조선일보〉의 조간 1회, 석간 2회의 1일 3회 발행을 시작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인수와 경영 ====&lt;br /&gt;
1933년 1월 16일 그는 정식으로 주식회사 [[조선일보]]사를 창립, 1월 18일에 발표된 창립 취지서에는 창립위원장 방응모, 창립발기인 방응모, 조만식, 고일청 외 등이 참여했다. 일단 그는 조만식을 사장으로 임명하고 자신은 부사장으로 있다가, 그해 3월 13일 다시 부사장에 취임했다. 4월 25일 편집인 겸 발행인이 되고, 4월 29일에는 조선일보의 조간, 석간제 발행을 부활, 확정시켰다. 1933년 7월 10일 총독부로부터 조선일보사의 법인 등록 승인을 얻어냈다. 7월 10일 조만식의 사퇴로, [[조선일보]]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다. 1933년 그는 자신의 아호를 춘해에서 계초로 바꾸었다. 그는 유능한 문인, 필진의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 상금 1천 원을 걸고 작가를 영입하였다.&lt;br /&gt;
&lt;br /&gt;
1934년 3월 25일 이광수를 비롯하여 서춘, 김동진, 함상훈, 신태익 등을 [[조선일보]]로 영입해 왔다. 그 외에도 정주군 출신 언론인, 작가들이 조선일보로 많이 오게 되었다. 이후 동아일보와 갈등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이광수가 조선일보로 옮겨와 부사장직에서 9개월 근무했다. 당시 조선일보 내부에서는 문모 라는 이가 이광수의 등장으로 자신의 입지 약화를 우려해 오랫동안 이광수를 내보내려 흉계를 꾸몄다고 한다. 이광수는 1934년 5월 25일자로 돌연 사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65페이지&amp;lt;/ref&amp;gt; 문모는 그에게 오히려 잘 됐다는 식으로 말하다가 방응모에게 호되게 혼이 났다. 그리고 문모로 하여금 즉시 금강산에 들어가 이광수를 다시 데려오게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65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이광수는 아들 봉근(당시 8살)의 사망 등으로 실의에 빠졌고, 1935년에 가서야 이광수를 조선일보 고문이자 필진으로 재영입하게 됐다.&lt;br /&gt;
&lt;br /&gt;
==== 동방문화학원 재단 설립 ====&lt;br /&gt;
방응모는 1936년 방농장의 소유권을 기본 자산으로 하는 재단법인 동방문화학원(東邦文化學院)을 설립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6페이지&amp;lt;/ref&amp;gt; 동방문화학원은 학교 법인으로 인가된 재단 법인으로, 그뒤 고계학원과 인연을 가지고 1936년부터는 보성고등보통학교를 후견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 분리되었다. 그뒤 방응모 장학생인 서중회 회원들을 위한 방응모 장학사업을 주관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7페이지&amp;lt;/ref&amp;gt;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태평로 구 조선일보 사옥 안에 동방문화학원의 간판을 달고 조광 잡지를 계속 발행하는 조광사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7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일제 강점기 후반 ===&lt;br /&gt;
==== 중일 전쟁 전후 ====&lt;br /&gt;
중일전쟁 개전 직후인 1937년 7월 11일에 열린 [[조선일보]] 간부회의에서 주필 서춘이 '일본군, 중국군, 장개석씨'등으로 쓰던 용어를 '아군, 황군, 지나, 장개석'으로 고치고 일본 국민의 입장에서 논설을 쓸 것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편집국장 김형원과 영업국장 김광수가 적극 반대를 하기도 했으나, 방응모는 '일장기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이미 몇 십만 원의 손해를 보았을 뿐 아니라 [[3.1 운동]] 때처럼 신문이 민중을 지도할 수 없다'면서 서춘의 입장을 지지했다. 한편으로 방응모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된 [[안창호]]를 [[조선일보]]에 영입하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안창호는 옥중에서 얻은 간질환과 폐질환 등으로 고생했고, 진료비 등을 수시로 지원하고 문병했음에도 출옥후 얼마 뒤에 사망한다.&lt;br /&gt;
&lt;br /&gt;
1933년 이심회(以心會：후에 序中會, 방응모장학회 등으로 명칭이 바뀜)라는 장학회를 만들어 국내 대학생과 해외유학생들에게 학자금을 지급하기도 했으며, 재단법인 동방문화학원(東方文化學院：지금의 숭문중·고등학교 전신)의 이사장직을 맡기도 했다.&amp;lt;ref name=&amp;quot;dam1&amp;quot; /&amp;gt; 또한 자신의 막대한 재원을 들여 1936년부터 함경남도 영흥군 일대에 당시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대단위 조림사업을 벌였으며, 그 전 해인 1935년부터는 경기도 수원군 팔탄면 일대에서 만 2년간에 걸친 간척사업을 벌이기도 했다.&amp;lt;ref name=&amp;quot;dam1&amp;quot; /&amp;gt;&lt;br /&gt;
&lt;br /&gt;
1937년 12월 24일 [[안창호]]는 병보석 판정을 받고 재판소가 지정한 현 서울대학교병원인 경성제국대학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안창호의 입원 중에 시중을 든 사람으로는 안창호의 외조카 김순원과 청년 박정호 두 사람이었고, 나중에는 이응준 장군의 부인 이정희가 끝까지 지성껏 간호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7페이지&amp;lt;/ref&amp;gt; [[안창호]]는 병상에서 병원비 문제로도 고초를 겪었다. 이 때문에 조만식은 일본 경찰로부터 안창호의 병원비를 대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음에도, &amp;quot;내가 먹고 살면서 그 선생을 돌보지 않을 수 없다&amp;quot;며 완강히 거절하고 안창호를 도왔다고 한다. 안창호의 간호를 같이 도와주던 이응준 장군 부인 이정희는 10일마다 계산되어 나오는 병원 입원비로 안창호 선생이 괴로워하는 표정을 지켜볼수 없었다고 진술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8페이지&amp;lt;/ref&amp;gt; 방응모는 5백원의 수표 한 장을 안창호에게 전달하였다. 50일간의 입원비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9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안창호]]는 1938년 3월 10일 밤 12시 경성제국대학 병원에서 운명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폐간 사건 ====&lt;br /&gt;
일본의 전쟁이 격화되면서 조선총독부 공보국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1940년에 강제로 폐간조치 했다. 광산을 팔아서 자신의 모든 것을 조선일보에 바쳤던 방응모는 큰 절망과 좌절을 느껴야 했다. [[한용운]]은 ‘신문이 폐간되다/ 붓이 꺾이어 모든 일이 끝나니…’로 시작하는 시를 지어 방응모를 위로했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1&amp;quot; /&amp;gt;&amp;lt;ref&amp;gt;붓이 꺾이어 모든 일 끝나니 이제는 재갈 물린 사람들 뿔뿔이 흩어지고 아, 쓸쓸하고 쓸쓸한지고 망국 서울의 가을날 한강의 물도 흐느끼느니 울음 삼켜 흐느끼며 연지를 외면한 채 바다 향해 흐르느니&amp;lt;/ref&amp;gt; 동아일보에는 김성수 외에도 장덕수와 송진우가 있었지만 그에게는 조선일보 폐간을 막기 위해 총독부와 교섭할 인물도 없었다.&lt;br /&gt;
&lt;br /&gt;
1938년 2월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선 내 일간신문 25개사로 조직된 조선춘추회의 창립에 창립발기인으로 참가했고, 조선춘추회 간사로 활동했다. 같은 해 7월 “국민정신을 총동원하고 내선일체 전 능력을 발휘하여 국책 수행에 협력하여 성전(聖戰)의 궁극적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조직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에 참여했고, 그날 결성된 경성연맹 창립총회에서 상담역을 맡았다. 9월부터 조선방공협회 경기도연합지부 평의원을 지냈다. 10월에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주최한 비상시 국민생활 개선을 위한 제1회 생활개선위원회에서 제2부(의례와 사회풍조 쇄신부)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그러나 1938년 10월부터 조선총독부는 조선일보의 신문용지를 검열, 통제하기 시작했다.&lt;br /&gt;
&lt;br /&gt;
1940년 5월 조선총독부 총독 미나미 지로가 방송담화로 창씨개명을 권고했다. 그러나 그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성씨를 이제 와서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며 창씨개명은 완강하게 거절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조선일보에 트집이 잡힐 일이 나타나지 않자 총독부는 전국 면사무소에 조선일보 신문 구독을 거절하도록 명령을 내렸고, 동시에 조선말을 쓰는 민원인에게는 일을 처리해주지 말도록 하게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3페이지&amp;lt;/ref&amp;gt; 조선총독부는 송진우의 예금통장을 문제삼았다. 송진우 명의의 은행저금이 동아일보의 8백여 개의 지국과 분국을 통해 모금된 독립운동 자금이라며, 그리고 동아일보 간부들이 백운장이라는 요정에서 회식을 한 것을 김성수 집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려 했다는 등의 이유로 백관수 동아일보 사장을 전격 구속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3~374페이지&amp;lt;/ref&amp;gt; 동아일보는 백관수가 구속된지 10일 만에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동아일보 중역회의를 열고 폐간신청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4페이지&amp;lt;/ref&amp;gt; 총독부는 조선일보에도 자진 폐간을 권고했고, 1940년 8월 9일 편집회의를 주관, 8월 10일 조선일보의 폐간계를 내고, 8월 10일자로 폐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5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잡지 발행 활동 ====&lt;br /&gt;
신문 강제 폐간 뒤 방응모는 간판을 조광사로 바꿔 걸고, 사옥은 동방흥업주식회사로 등기를 변경해서 유지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1페이지&amp;lt;/ref&amp;gt; 이후 그는 조광 잡지 발행에 전념했다. 1943년 8월 경 일본 중앙대학의 예과를 마친 방일영이 입사&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1페이지&amp;lt;/ref&amp;gt;, 필진으로 참여했다. [[조선일보]]가 폐간된 후에도 방응모는 벽초 홍명희 부자에게 지속적으로 생활비를 대주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4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4년 6월 29일 만해 [[한용운]]이 사망했다. 그는 심우장을 찾아가 3백원을 내놓았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5페이지&amp;lt;/ref&amp;gt;당시 쌀 10가마가 100원이었지만, 심우장은 당장 현금 1원이 없었는데 거액이라서 놀랐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6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광복 이후 언론 및 정치활동 ===&lt;br /&gt;
==== 광복 직후 ====&lt;br /&gt;
1945년 8.15 광복 후에는 8월 말과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朝鮮在外戰災同胞救濟會) 고문과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9월 초 [[안재홍]] 등이 좌경화되는 건준체제에 반발하여 건준을 탈퇴하자 방응모 역시 건준을 탈퇴하였다.&lt;br /&gt;
&lt;br /&gt;
9월 2일 미군정이 주둔하자, 방응모는 윤전기를 찾기 위해 폐간 당시의 증빙서류를 미 군정청에 제시하였으나 소식이 없었다. 총독부는 조선일보 폐간 직후 인수한 윤전기를 경성일보사에 옮겨서 설치했다. 그는 동방문화재단 외 4개 사업소를 적산으로 파악한 미군정을 설득하고, 사옥 문제도 해결하였다.&lt;br /&gt;
&lt;br /&gt;
10월 1일 조선일보 편집위원회를 구성하고, 신문 복간 운동을 추진했다. 조선총독부의 폐간 지시 당시 의정부로 옮겨놓은 일부 활자 자모음이 잘 보관되어, 그해 11월 23일 조선일보를 복간시키고, 서울신문사 사옥에서 조선일보 복간호를 간행하였다. 이후 조선사회문제대책중앙협의회 중앙위원을 거쳐 10월 16일 이승만 등의 주도로 독립촉성중앙회가 결성되자 독촉에 가입하였다.&lt;br /&gt;
&lt;br /&gt;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이 귀국하자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에 입당했다. 12월 [[안재홍]]의 추천으로 한국독립당의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출되어 3~4개월 동안 활동했다.&amp;lt;ref&amp;gt;일각에서는 방응모가 '한독당 재무부장으로 지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1947년부터 한독당 재무부장을 맡은 신창균이 전면 부정했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47/0000002626?sid=102 백범 비서와 '진짜' 한독당 재정부장의 육성증언. 참고.]&amp;lt;/ref&amp;gt; 그 뒤 대한국민총회 발기인, 대한독립애국금헌성회 발기인 등으로 활동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복간 및 군정기 활동 ====&lt;br /&gt;
11월 [[조선일보]]사를 복간시켰다. 그러나 한동안 조선일보의 인쇄는 서울신문사에서 간행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1945년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추념대회에 참여하였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2&amp;quot;&amp;gt;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13&amp;lt;/ref&amp;gt; 순국선열추념대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2&amp;quot; /&amp;gt;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참여,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이 되었다.&amp;lt;ref&amp;gt;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55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6년 2월 26일 서울신문사 공무국 종업원들이 조선일보의 인쇄를 거부해버렸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436페이지&amp;lt;/ref&amp;gt; 그동안 묵시적으로 방해가 은근히 있었다. 표면상의 문제는 임금 문제이나 내용상으로는 조선일보에 대한 조선공산당의 시위의 일종이었다. 사흘간의 교섭 끝에 2월 28일에 가서야 26일자와 27일자를 소급해서 인쇄하여 신문을 한꺼번에 발행하였다. 그러나 3월 1일과 2일에 또다시 인쇄를 거부당해 결국 휴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436페이지&amp;lt;/ref&amp;gt; 조선일보를 경성일보사로 옮겨서 인쇄하기로 하고 3월 5일자로 사고로 독자에게 알렸다.&lt;br /&gt;
&lt;br /&gt;
4월 29일 김구, 김창숙, 김성수, 오세창 등과 함께 서울운동장에서 윤봉길의사 추모회의 창립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amp;lt;ref&amp;gt;&amp;quot;故尹奉吉義士의 記念式 오늘, 發起人會 열고 準備&amp;quot;, 동아일보 1946년 4월 23일자 2면, 사회면&amp;lt;/ref&amp;gt; 그해 5월 조선공업구락부 고문에 위촉되었다.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民族統一總本部) 10인협의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6월 15일 오후 5시 40분 서울역에 마중나가 서울역에 도착한 삼의사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lt;br /&gt;
&lt;br /&gt;
1945년 광복 직후 서기원이 그를 찾아왔다. 서기원은 그때 경성농상실천학교의 동창회로부터 이 학교의 교장이 되어 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이다. 방응모는 서기원의 제의를 받아들여 1946년 8월 28일 동방문화학원 이사장으로 숭문상업학교를 인수, 재단 이사장이 되었다. 후일 방응모가 6.25 전쟁 중에 납북된 후 동방문화학원과 숭문중,고교의 재단은 최용진이 운영하다가 다시 1978년에 방일영에게 인수되었다.&lt;br /&gt;
&lt;br /&gt;
1947년 1월 21일 제5회 창립위원회를 본사에서 개최하고 2월 23일 주식회사 조선일보사 주주창립총회를 열고 대표이사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공동투자 경영자로 참여시킨 전무 이종민과의 알력이 발생했다. 이종민과의 갈등이 심화되자 그해 8월 3일 방응모는 일단 사직서를 제출했다. 1947년 8월 10일 풍문여고 강당에서 개최된 한인신문기자협회에 참석, 민족청년단에서 언론계 공로자로 방응모, 김성수, 설의식을 지정하여 상을 시상받았다.&amp;lt;ref&amp;gt;&amp;quot;朝鮮 新聞記者協會&amp;quot;, 동아일보 1947년 8월 10일자 2면, 사회면&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납북과 최후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 납북 후 행적은 &amp;quot;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amp;quot;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amp;lt;ref name=&amp;quot;김장&amp;quot;/&amp;gt; [[1950년]] [[8월]]경 [[개성]] 송악산 부근에서 미군의 폭격에 희생되었고 심한 폭격으로 시신을 찾을 수 없어 묘도 만들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다.&amp;lt;ref&amp;gt;{{뉴스 인용&lt;br /&gt;
 |url          = http://www.minjog21.com/news/articleView.html?idxno=1140&lt;br /&gt;
 |제목       = &amp;quot;누워서도 남쪽하늘만 보십니다&amp;quot; - 평양시 신미리 재북통협 특설묘지&lt;br /&gt;
 |출판사    = 민족21&lt;br /&gt;
 |저자       = 신준영&lt;br /&gt;
 |날짜       = 2002-07-01&lt;br /&gt;
 |확인날짜 = 2008-05-15&lt;br /&gt;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40420015541/http://www.minjog21.com/news/articleView.html?idxno=1140#&lt;br /&gt;
 |보존날짜 = 2014-04-20&lt;br /&gt;
 |url-status = dead&lt;br /&gt;
}}&amp;lt;/ref&amp;gt;&amp;lt;ref&amp;gt;[http://www.minjog21.com/news/articleView.html?idxno=686 민족21&amp;lt;!-- 봇이 따온 제목 --&amp;gt;]{{깨진 링크|url=http://www.minjog21.com/news/articleView.html?idxno=686 }}&amp;lt;/ref&amp;gt; 남한에서는 [[1955년]] [[7월 7일]] 생사불명기간 만료로 인해 실종 처리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주변에서 피신하라고 권했지만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느냐'며 완강하게 버티다가 1950년 [[7월 6일]] [[경기도]] [[양주군]] 시둔면 가능리(현, [[의정부시]] [[가능동]]) 자택에 들이닥친 [[조선인민군]]에 의해 끌려갔다.&lt;br /&gt;
&lt;br /&gt;
=== 사후 ===&lt;br /&gt;
[[서울]] 종로에 있던 양자 방재윤의 두 아들 [[방일영]]과 [[방우영]]은 방응모의 첩 이인숙이 찾아가 피신하라고 권고하여 황급히 피신했다. &lt;br /&gt;
&lt;br /&gt;
[[9월 28일]] [[개성시]] 북쪽을 지나 [[황해남도]] [[서흥군]]에서 트럭으로 강제 북송되었다. 이후 9월 28일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lt;br /&gt;
&lt;br /&gt;
7월 6일 그의 행방불명처리가 되고, 방응모의 사후에도 [[조선일보]]는 그의 명의로 발행되었다. 1952년 4월 28일 조선일보는 발행인겸 편집인을 장기영으로, 인쇄인을 방일영으로, 방응모는 명예사장으로 명의변경하여 휴전 후 계속 발행하게 되었다. 1954년 4월 30일 제8회 조선일보 정기주주총회에서 장기영 사장이 사퇴하면서, 명예사장 방응모가 사장으로 추대되고, 발행인 겸 대표취체역에 방일영이 선임되었다. 이후 실종 후 [[1959년]]에 법적으로 사망 처리되었다. 그리고 [[1970년]]까지는 조선일보는 그의 이름으로 발행되었다.&lt;br /&gt;
&lt;br /&gt;
[[1970년]] [[2월 19일]] 조선일보 정기주주총회에서 방응모 이사를 사퇴 수리하였다. 그의 피폭사망 사실은 1970년대 이후 탈북자들을 통해 대한민국에 소개되었다.&lt;br /&gt;
&lt;br /&gt;
== 친일행위 의혹 ==&lt;br /&gt;
=== 일제 전시체제기 활동 ===&lt;br /&gt;
일제 강점기 말기 언론인으로서 총독부체제에 협력한 기록과 활동이 다수 기록이 있다. 1933년 3월 [[조선일보]] 경영권을 인수하고 부사장직에 취임했을 당시 같은 달에 고사기관총 구입비용 1600원을 군에 헌납하였다. 그는 1935년 친일 잡지 《조광 (잡지)(朝光)》을 창간하였고, 1937년에는 경성방송국 제2방송에 출연하여 일제가 중국의 베일을 절멸케하여 극동평화를 지키려고 한다는 강연을 하였다. 1940년대부터 조광에 집중적으로 친일 논설을 기고하고 시국 강연에 참여하여 전쟁 지원을 독려했다. 1942년 6월에는 '징병령 실시에 일층 더 감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글을 써서 조광에 발표하였다. 애국금차회(1937),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1938), 임전대책협의회(1941), 조선임전보국단(1941) 등 대표적인 친일 단체의 회원에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그는 이런 행적으로 인해 해방정국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명단에 기록되어 있고,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해 발표한 &amp;lt;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amp;gt;에 모두 포함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lt;br /&gt;
&lt;br /&gt;
우리 [[조선일보]]는 다른 어떤 신문도 따라오지 못하는 확고한 신념에서 비국민적 행위를 단연 배격하여 종국까지 조선일보사가 이미 정해놓은 방침에 한뜻으로 매진한다.|원산에서의 순회 강연&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9478.html 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친일 다짐하다 시민에 봉변]《한겨레》2005-08-24 오후 06:13:18&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반민족행위 논란 ===&lt;br /&gt;
방응모를 친일파로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남아 있다. 조선일보 경영 이전에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방응모의 활동이 거의 없었고, 납북된 뒤 소식이 끊겨버린 까닭에 본인이 항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 동안의 행적만으로 친일파 여부를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방응모의 후손들이 영향력 있는 [[조선일보]] 언론사의 사주를 맡았기에 그의 입장에서 서술한 기록을 많이 남기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80년 발간된 그의 전기 《계초 방응모》(조선일보사) 등에는 '그가 민족주의적 선각자'로 묘사되고 있다. 방응모가 친일파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일부세력측은 그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논거로 드는 경우가 많이 있다.&amp;lt;ref&amp;gt;유석재, 계간 《유심》 (2004년 봄호) [http://yousim.buddhism.org/html/2004-spr/tamgu-yoo-seok-jae.htm 삭풍 속에 피어난 금란지교(金蘭之交) - 만해와 계초 방응모]&amp;lt;/ref&amp;gt;&amp;lt;ref&amp;gt;&amp;quot;일제 말기 계초는 시국강연에 나설 것과 창씨개명을 집요하게 강요받았으나 그때마다 묵묵부답으로 거부하며 소신을 지켰다.&amp;quot; 《조선일보》 (2001.3) 조선일보 사장열전 - 계초 방응모편, 《한겨레》 (2001.3.30) [http://www.njoyschool.net/news/article_view.asp?menu_code=s20202&amp;amp;no=1206 조선일보, 일장기를 신문제호 위에]&amp;lt;/ref&amp;gt;&lt;br /&gt;
또한 한국정토학회 고문이자 서울 정토사 주지였던 박설산(1918~2007)이 학도병에 끌려가기 직전인 1943년 12월 28일 밤 서울역에서 스스로 왼발을 선로에 올려 발가락을 절단해 징집을 기피하자 방응모는 만해와 함께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설산을 걱정하면서 입원 중 조선일보 기자를 통해 돈을 전달한 것은 물론 퇴원할 때 돈을 전달하고 뒤를 보살폈다고 한다.&amp;lt;ref&amp;gt;박설산 회고록 &amp;lt;뚜껑없는 조선역사책&amp;gt;(1994, 도서출판 삼장) p240~241&amp;lt;/ref&amp;gt;&lt;br /&gt;
&lt;br /&gt;
2010년 12월, 방응모 관계자들 및 조선일보측은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을 취소해달라'며 법원에 낸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amp;quot;1944년 조선항공업 창립발기인으로 활동한 부분에 대해 친일행위로 판단한 부분을 취소하지만 나머지 활동에 대해서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amp;quot;라고 판결했다. 그 이유인 즉 &amp;quot;방응모는 1933년 조선일보 사장으로 취임해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등으로 활동하며 친일활동을 벌였으며, 1937년 경성방송국 시국강연에서 일본제국이 극동평화를 확립시킬 것이라는 내용의 강연을 하고, 1938년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춘추회의 발기인 겸 간사로 활동하기도 했다&amp;lt;ref&amp;gt;[http://media.daum.net/breakingnews/politics/view.html?cateid=1002&amp;amp;newsid=20101222103319164&amp;amp;p=newsis 법원 &amp;quot;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친일파 맞다&amp;quot;]뉴시스 2010년 12월 22일&amp;lt;/ref&amp;gt;&amp;quot;는 것이다.&lt;br /&gt;
&lt;br /&gt;
2012년 1월 12일 서울고법 행정7부는 방 전 사장의 손자인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이 행정안전부를 상대로 낸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처분 취소 청구소송에서 ‘일제 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의 친일 행위 판정 조항에 비추어 방 전 사장에게 적용된 모두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민족적 지도자로서 비중이 큰 만큼 그로 인한 책임도 무거울 뿐 아니라 고난의 시기를 겪은 민족으로서 그 역사를 반성하자는 입장에 설 때, 방 전 사장의 여러 행태는 반민특별법에서 규정한 친일반민족행위의 유형에 속함을 부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1·2심 재판부는 방 전 사장이 자신이 운영하던 잡지 &amp;lt;조광&amp;gt;에 일제 침략전쟁에 동조하고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문예물과 일제 침략전쟁에 협력할 것을 주문하는 논문을 게재하는 등의 ‘친일’ 행위를 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또한, 2심 재판부는 일본의 전쟁 수행을 돕기 위해 설립된 군수 제조업체 ‘조선항공공업’의 발기인과 감사를 지낸 것은 “감사는 업무집행에 관여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기관으로, 방 전 사장이 이 회사를 운영했다고 볼 수 있다”는 이유로 친일이라고 판단했다.&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4565.html법원 ‘방응모 친일’ 2심서도 인정] 인터넷한겨레 2010년 12월 22일&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가족 관계 ==&lt;br /&gt;
* 아버지 : 방계준(方桂準)&lt;br /&gt;
* 어머니 : 온양 박씨&lt;br /&gt;
** 형 : 방응곤(方應坤)&lt;br /&gt;
** 배우자 : 승계도&lt;br /&gt;
*** 아들 2명 요절&lt;br /&gt;
** 배우자 : 이인숙(李仁淑, 1901년 ~ ?)&lt;br /&gt;
*** 아들 : 방재욱(方在旭, 1925년 ~ 1926년 9월)&lt;br /&gt;
** 배우자 : 배영옥(裵英玉)&lt;br /&gt;
*** 장녀 : 방재숙(方在淑)&lt;br /&gt;
** 배우자 : 노호용(盧鎬龍)&lt;br /&gt;
*** 장남 : 방재선(方在善, 1944년 ~)&lt;br /&gt;
*** 차남 : 방재효(方在孝, 1946년 ~)&lt;br /&gt;
*** 삼남 : 방재규(方在奎, 1948년 ~)&lt;br /&gt;
&lt;br /&gt;
** 양자 : 방재윤(方在允 또는 方在胤, 1901년 ~ 1940년, 형 방응곤의 차남)&lt;br /&gt;
*** 손자 : 방일영(方一榮, 1923년 ~ 2003년)&lt;br /&gt;
**** 증손 : 방상훈(方相勳, 1948년 ~)&lt;br /&gt;
**** 증손부 : 윤순명 - 윤치호(尹致昊, 1865년 ~ 1945년)의 증손녀&lt;br /&gt;
***** 현손 : 방준오(方俊吾, 1974년)&lt;br /&gt;
***** 현손 : 방정오(方政吾, 1978년)&lt;br /&gt;
**** 증손 : 방용훈(方容勳, 1952년 ~)&lt;br /&gt;
*** 손자 : 방필영(方必榮, 1924년 ~ 1926년)&lt;br /&gt;
*** 손녀 : 방숙영(? ~ 1951년 1월)&lt;br /&gt;
*** 손자 : 방우영(方又榮, 1928년 ~ 2016년)&lt;br /&gt;
**** 증손 : 방성훈(方聖勳, 1973년 ~)&lt;br /&gt;
&lt;br /&gt;
== 기타 ==&lt;br /&gt;
그는 [[한용운]], 최남선, 정인보, 홍명희 등과 친분관계를 형성하고 어울려 지냈다 한다.&lt;br /&gt;
&lt;br /&gt;
[[김구]]의 한국독립당의 재정적 후견인 역할을 하였다 하며,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삼의사 유골봉환식 때 [[김구]], [[정인보]] 등과 촬영한 사진이 있다.&amp;lt;ref&amp;gt;백범어록 참조&amp;lt;/ref&amp;gt; 그리고 1945년 11월 23일 조선일보가 복간되자 백범 김구는 '有志者事竟成' 뜻을 지닌 자 성취할 수 있다'는 친필 휘호를 보내며 축하했다.&amp;lt;ref&amp;gt;[http://www.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4060370241 '조선일보 역사 읽기'《조선일보》2004.06.03]&amp;lt;/ref&amp;gt;&lt;br /&gt;
한편 임꺽정의 저자인 벽초 홍명희가 방응모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그와 깊은 친분을 맺었다는 주장이 있다. 《조광》 1938년 11월호엔 홍명희가 병중에 있는 방응모를 위로하며 지은 한시가 방응모의 답시와 함께 실려 있다고 한다.&amp;lt;ref&amp;gt;[http://weekly.chosun.com/site/data/html_dir/2004/11/05/2004110577041.html ‘임꺽정’으로 되살아난 독립운동의 魂! 주간조선 1827호 2004.11.04&amp;lt;/ref&amp;gt; 또한 [[안창호]]의 비서실장을 지낸 독립유공자 구익균은 방응모와 안창호가 친밀했다는 주장을 했다.&amp;lt;ref&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09/2008030901055.html &amp;quot;공산주의자들, 도산 비판하다가도 하숙비 떨어지면 찾아와&amp;quot;] 조선일보, 2008-03-10 03:22&amp;lt;/ref&amp;gt;&lt;br /&gt;
또한 박설산에 따르면 1943년 만해 한용운에게 학도병으로 끌려가게 되었음을 알리려 심우장으로 찾아가게 되었을 때, 한용운과 방응모가 바둑을 두고 곁에서 정인보가 훈수를 두고 있었다고 한다.&amp;lt;ref&amp;gt;박설산 저 &amp;lt;뚜껑없는 朝鮮 역사 책&amp;gt; p.226 도서출판 三藏(1994)&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30년대~1940년대 방응모에게서 장학금을 지원받은 학생 모임인 서중회의 회원들의 그의 인물평은 &amp;quot;첫 인상은 좀 깡마른 모습이었으나 의지가 강한 인물&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56페이지&amp;lt;/ref&amp;gt;&amp;quot;이라는 평을 남기기도 했다.&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 /&amp;gt;&lt;br /&gt;
&lt;br /&gt;
== 참고 자료 ==&lt;br /&gt;
* 청산하지 못한 역사: 언론 내세워 일제에 아부한 교화 정책의 하수인 (문영숙) (반민족문제연구소, 청년사, 1994)&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민족 계몽의 초석 방응모(이동욱 저, 지구촌, 1998)&lt;br /&gt;
* 계초 방응모전(계초전기간행위, 조선일보사, 1980년)&lt;br /&gt;
* 계초 방응모(이동욱, 방일영문화재단, 1996)&lt;br /&gt;
&lt;br /&gt;
== 외부 링크 ==&lt;br /&gt;
* [https://web.archive.org/web/20050123171046/http://chosunhost.com/ 계초방응모 기념사업회]&lt;br /&gt;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09145 &amp;lt;조선일보&amp;gt;, 방응모 전 사장의 '친일행적' 말한다] - 오마이뉴스 04.09.10일자&lt;br /&gt;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020302101749 방응모ㆍ 김성수 친일행적 뭔가 : &amp;lt;긴급입수&amp;gt;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 全文] - 프레시안 2002-03-02&lt;br /&gt;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54052 그가 '&amp;lt;조선&amp;gt;의 주인' 주장하는 이유] 오마이뉴스 2001년 9월 20일자&lt;br /&gt;
*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956 방재선씨, 호주·상속 원인무효소송 제기]&lt;br /&gt;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4/06/2008040601053.html '5인 친필 서첩' 발굴] 조선일보 2008년04월06일자]&lt;br /&gt;
&lt;br /&gt;
[[분류: 감자]]&lt;/div&gt;</summary>
		<author><name>Nsgjjsjsjy02</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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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B0%A9%EC%9D%91%EB%AA%A8&amp;diff=58875</id>
		<title>방응모</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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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06-11T02:36:2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Nsgjjsjsjy02: /* 조선일보 복간 및 군정기 활동 */&lt;/p&gt;
&lt;hr /&gt;
&lt;div&gt;{|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width:100%&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0%&amp;quot;|사진&lt;br /&gt;
|[[파일:방응모.jpg|center|200픽셀]]&lt;br /&gt;
|+ '''방응모'''&lt;br /&gt;
|+ style=&amp;quot;caption-side:bottom;text-align:left:&amp;quot;|출처: 위키백과&lt;br /&gt;
|출생||1883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조선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또는 정부면 성내동&lt;br /&gt;
|-&lt;br /&gt;
|사망||1950년경으로 추정&lt;br /&gt;
|-&lt;br /&gt;
|사인||불명&lt;br /&gt;
|-&lt;br /&gt;
|거주지||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amp;gt; 경성부 -&amp;gt; 경기도 양주군 의정부읍&lt;br /&gt;
|-&lt;br /&gt;
|국적||대한민국&lt;br /&gt;
|-&lt;br /&gt;
|본관||온양&lt;br /&gt;
|-&lt;br /&gt;
|별칭||호: 계초(啓礎), 춘해(春海)&lt;br /&gt;
|-&lt;br /&gt;
|직업||교사, 변호사, 상인, 언론인, 기업인, 사회운동가, 정치가&lt;br /&gt;
|-&lt;br /&gt;
|배우자||승계도, 이인숙, 배영옥, 노효용&lt;br /&gt;
|-&lt;br /&gt;
|자녀||방재숙(딸), 방재욱·방재선·방재효·방재규(아들), 방재윤(양자)&lt;br /&gt;
|-&lt;br /&gt;
|부모||방계준(부), 온양박씨(모)&lt;br /&gt;
|}&lt;br /&gt;
&lt;br /&gt;
'''방응모'''(方應謨, 평안북도 정주군, 1883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 1950년 8월(추정)는 [[일제강점기]]의 교육자, 언론인, 법조인, 기업인이자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언론인이며 정치인이다. 호는 '''춘해'''(春海)이고, 뒤에 '''계초'''(啓礎)로 고쳤다.&lt;br /&gt;
&lt;br /&gt;
1922년 동아일보 정주 지국을 인수해 지국장을 지내다가 1924년 금광업에 뛰어들어 큰 부를 얻게 되었다. 1932년 6월 조선일보에 입사하였고 이후 영업국장이 되어 조선일보의 판매망을 장악하게 되고 경영권을 인수하면서 1933년 3월 조선일보 부사장이 되었다. 1933년 7월부터 1950년 7월까지 종신으로 [[조선일보]]의 사장을 역임하였다. 1935년 창간한 월간잡지 '조광(朝光)'은 친일 논란이 있다.&amp;lt;ref&amp;gt;안은필. [http://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9211 조선일보가 가장 빛나던 시기, ‘안재홍 시대’]&amp;lt;/ref&amp;gt;&amp;lt;ref name=&amp;quot;안은&amp;quot;&amp;gt;안은필. [http://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9279 방응모 친일증거, “모래밭에서 모래 찾기”]국민TV. 기사입력 2015년 4월 23일. 기사수정 2015년 4월 24일.&amp;lt;/ref&amp;gt;&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2/0002006080?sid=102 한홍구 &amp;quot;박정희는 공포와 욕망의 정치를 했다&amp;quot;]. 프레시안. 2015년 4월 13일.&amp;lt;/ref&amp;gt;&amp;lt;ref&amp;gt;이민영.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1/0002255321?sid=102 고법 “방응모 前조선일보 사장 친일행적 대부분 인정”]. 서울신문. 2012년 1월 13일.&amp;lt;/ref&amp;gt;&amp;lt;ref&amp;gt;노현웅.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8/0002251781?sid=102 조선 방응모·동아 김성수의 ‘친일’…수년째 결론 안 내고 미루는 법원]. 한겨레. 2014년 11월 3일.&amp;lt;/ref&amp;gt;&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6/0000000413?sid=110 김성수ㆍ방응모와 친일언론인 군상]. 미디어오늘. 2002년 3월 12일.&amp;lt;/ref&amp;gt; 언론계에서 활동하면서도 사업가의 길을 함께 걸었고, 교육 장학 활동을 하였으며, 1945년 광복 직후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 고문과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안재홍]]의 추천을 받아 한국독립당 중앙상무위원과 독립촉성국민회 총무부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amp;lt;ref name=&amp;quot;안은&amp;quot;/&amp;gt;&amp;lt;ref&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16/2008031600800.html 계초 방응모와의 우정도 여러 편의 시로 표현해&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해방 정국에서 김구의 재정적 후견인으로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등 삼의사 유골 봉환 사업과 신탁통치 반대 운동 등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대한민국 수립 이후 사회민주주의 정치가인 조소앙과 사회당을 결성해 문교정책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lt;br /&gt;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 납북 후 행적은 &amp;quot;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amp;quot;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lt;br /&gt;
&lt;br /&gt;
== 생애 ==&lt;br /&gt;
=== 생애 초기 ===&lt;br /&gt;
==== 출생과 성장 ====&lt;br /&gt;
방응모는 1883년 11월 3일 또는 9월 29일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바우머리 부락 또는 정주군 정부면 성내동 425번지에서 '''방계준(方桂準)'''과 온양 박씨(溫陽朴氏)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그는 어려서 집중력이 남달리 뛰어난 반면 고집이 셌다는 평이 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페이지&amp;lt;/ref&amp;gt; 그의 '''삼촌 방계묵(方啓默)'''은 그의 고집있는 기질을 두고 저놈은 쇠작두 말고 나무 작두로 잘라 죽여야 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3~54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친척들의 야멸찬 말들이 그에게 상처를 주거나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4페이지&amp;lt;/ref&amp;gt; 또한 그의 유년시절을 본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가 태어날 당시 태몽도 없었고, 신동이라는 말도 별다르게 듣지 않았다고 한다. 어려서 빈곤한 가정환경으로 방응모는 정규 학교에는 입학하지 못하고, 16세 때까지 서당에 드나들며 한학을 익혔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던 중 그가 어느정도 실력이 우수하다고 인정되자, 스승인 승창률은 잠시 방응모에게 어린아이들을 돌보게 한 후 자리를 피하곤 했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1페이지&amp;lt;/ref&amp;gt; 그는 홀로 사서육경을 탐독, 독파하였다. 21세 무렵 잠시 서당 훈장을 지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896년 독립협회의 활동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5페이지&amp;lt;/ref&amp;gt; 형 방응곤이 예배당에 다니게 되자&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2페이지&amp;lt;/ref&amp;gt;, 그를 통해 신문물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다. 그 뒤 우연히 경성부에 갔다가 신문물을 보고 충격을 받아 17세에 독학으로 신학문과 일본어, 중국어, 수학 등을 독파하였다. 유년시절 서당의 성리학 스승이던 승창률의 친척인 승시영(承時榮)과 조씨(趙氏)의 딸 승계도와 결혼했다.&lt;br /&gt;
&lt;br /&gt;
결혼한 다음 해에도 그는 공부를 한다며 책만 사다 읽곤 했고&amp;lt;ref name=&amp;quot;fsfs60&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60페이지&amp;lt;/ref&amp;gt;, 부인 승계도는 생계를 위해 몸소 나섰다.&amp;lt;ref name=&amp;quot;fsfs60&amp;quot;/&amp;gt; 부인 승계도는 친척 가운데 콩을 싸게 넘겨주는 이들이 있어 그 콩으로 두부를 만들거나 콩나물을 키워 장사를 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61페이지&amp;lt;/ref&amp;gt; 그의 아내 승계도는 남편에 대한 믿음이 절대적이었고 탓을 하거나 가출하지 않았다. 이후 그는 서당 훈장으로 초빙되었으나, 그가 가는 마을의 기존 훈장, 한학자들은 그를 적대적으로 대했다. 그렇다고 마을 사람들의 일부 지명이 있었으나 자신의 스승의 자리를 침해할 수 없다 하여 그는 자신의 동리의 훈장일은 사양하였다. 그는 마을을 나가 신학문을 하는 친구들과 어울렸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62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계몽 운동 ====&lt;br /&gt;
도산 [[안창호]]와 남강 이승훈이 연사로 돌아다니며 애국 계몽 강연과 문맹들의 교육, 야학 사업을 하였고, 여기에 감동받은 청년들이 서당과 야학을 열고 문맹들과 여성들에게 한글 교육을 하였다. 도산 [[안창호]]의 강연과 남강 이승훈의 강연을 찾아다니며 듣다가 감동받은 방응모 역시 교육, 계몽에 참여하였다.&lt;br /&gt;
&lt;br /&gt;
그는 청년회의 활동에 몰두하였으나, 농번기에 작은 일손이라도 더 필요했던 동리 노인들은 젊은 아이들이 일은 하지 않고 무슨 모임이다 하여 어울려 돌아다니는 꼴&amp;lt;ref name=&amp;quot;fsfs75&amp;quot;/&amp;gt;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또한 모임 구성원들 역시 &amp;quot;의식 자체가 아직 전근대적이었고, 사고의 분화를 겪지도 않은데다가, 이들의 조직 활동이 기분 좋으면 나오고 기분 나쁘면 빠져 버리는 것이 예사&amp;quot;라 청년 모임들은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청년단체의 실패에 좌절하고 다시 귀향했으며, 이때 그는 춘해(春海)라는 아호를 스스로 지었다. 그의 집안에서는 그가 정착하기를 바라고 정주읍 성내동에 집을 얻어 주었다.&lt;br /&gt;
&lt;br /&gt;
안창호의 계몽 강연에 감동받은 남강 이승훈이 1907년(융희 1년) 8월 김덕용(金德鏞)을 초빙하여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 오산에서 신식 교육을 하는 소학교 과정의 학교 강명의숙을 세우고 산수, 수신, 역사, 지리, 체조를 가르쳤고, 그해 12월에는 중학교 과정인 오산학교를 세우고 학생 7명을 처음 받아들여 개교했다. 1908년에는 오산학교에 학생들이 모여 3개 반으로 편성되었고, 정주군 출신의 춘원 이광수가 오산중학교의 교사로 초빙되어 축구, 야구, 테니스, 배구 등을 지역에 처음 소개하였다. 방응모는 어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학교에 입학해 신학문을 접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0페이지&amp;lt;/ref&amp;gt; 그는 이승훈과 의기투합해 민립 대학을 세우는 운동을 추진했지만 조선총독부 평안북도청 학무국에서 승인을 거부하여, 대학 설립에 실패했다.&lt;br /&gt;
&lt;br /&gt;
=== 언론, 기업 활동 ===&lt;br /&gt;
==== 계몽 활동과 언론 활동 ====&lt;br /&gt;
1915년부터 1924년 방응모는 지역 지식인들, 유학파 청년, 계몽 청년들이 모여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하는데 참여했고, 민립대학기성회 평안북도지부에서 활동하면서 민립대학기성회 중앙회 중앙위원 조만식 등과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언변과 용모가 되었던 그의 여관에도 손님들이 몰렸고, 그가 &amp;quot;2백원도 좋고 5백원도 좋다며 보태달라&amp;lt;ref name=&amp;quot;fsfs87&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7페이지&amp;lt;/ref&amp;gt;&amp;quot;고 하면 기부금을 내는 이들이 있었다. 대신 하룻밤을 의탁하려고 그의 여관을 찾은 이들에게 무료 숙식을 제공하기도 했다.&amp;lt;ref name=&amp;quot;fsfs87&amp;quot;/&amp;gt; 1919년 정주에서 3.1 만세 운동이 벌어지자, 그도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형사들의 눈을 피해 방응모는 만세운동을 하다 재빨리 몸을 피해 화를 면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8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1922년 6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인수하여 분국장에 취임했다. 6월 9일에는 정주군 지역 체육행사로 테니스 대회를 개최하였다. 그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경영하는 동시에 그는 농촌 계몽운동 등에 적극 투신하여 인망을 쌓았다. 처음 몇번은 친구 전우현의 자금을 빌려 부족분을 메우기도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02페이지&amp;lt;/ref&amp;gt; 한다. 1922년 6월 19일&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96페이지&amp;lt;/ref&amp;gt; 동아일보 본사를 설득하여 정주분국을 동아일보사 정주지국으로 승격시켰다. 동아일보사 지부장 재직 시 그는 전우현과 함께 의기투합하여 민립 대학 설립 자금과 농촌진흥회 회원의 여비와 회비를 염출하기 위한 목적 및 당시 교사도 없이 난관에 처했던 오산학교의 재개교를 위한 &amp;quot;오산학교의 부흥 운동을 목표로 한 재단법인 촉성 기금 마련&amp;quot; 등을 계획했다. 총독부의 인허가 거부로 실패한 대학 설립 자금은 고스란히 오산학교의 부활과 복교 자금으로 투입되었다. 1920년 1월에 경성형무소에서 가석방된 조만식은 이승훈을 만났고, 다시 조만식이 오산학교를 맡으면서 학교는 다시 정상 운영되었다.&lt;br /&gt;
&lt;br /&gt;
1923년 동아일보 정주군 분국이 지국으로 승격되자 정주 지국장으로 동아일보 정주지국을 경영하였고, 같은 해 7월 여성들의 사회참여와 평등권 신장을 위한 여자교육회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이후 대규모 수해가 나자, 정주군 수해구제회를 결성하여 봉사활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1923년 4월 조만식·송진우·안재홍·김성수 등의 주도로 민간 자본으로 대학교 설립을 추진하기 위한 조직인 조선민립대학기성회가 결성되자, 방응모는 민립대학 기성회에 참여하여 민립대학기성회 정주군준비회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5월에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정주지방지부가 설립되자 기성회 정주지부 상무위원을 맡았다.&lt;br /&gt;
&lt;br /&gt;
==== 광업 경영과 조선일보 입사 ====&lt;br /&gt;
1924년 봄 오산학교 교감으로 있던 전우현이 방응모와도 안면이 있던 금광 채굴업자 두 명을 데리고 그를 찾아왔다. 그들은 자신들이 봐 둔 산이 있다고 방응모에게 소개했다. 그는 선천군의 지역 유지이자 최창학의 친구이며, 그가 동아일보 지국장으로 알게 된 이봉찬을 찾아갔다. 한학자로 알고 있던 그가 금광 투자를 제의하자 &amp;quot;한문이라면 빼지 않고 알려고 드는 한학 훈도가 어떻게 금광을&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16페이지&amp;lt;/ref&amp;gt;&amp;quot; 하느냐 하였지만, 이봉찬은 그에게 금광, 광산에 대한 지식을 알려주었다. 이봉찬은 그에게 광산 지식을 알려주며 최창학의 소유지 중 폐광을 빌리는 법을 알려주었다. 방응모의 됨됨이에 감복한 듯, 그의 수많은 질문에 적잖은 충고를 자임해주었다.&amp;lt;ref name=&amp;quot;fsfs117&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5페이지&amp;lt;/ref&amp;gt; 이봉찬은 최창학에게 방응모를 소개하는 편지를 수차례에 걸쳐 보내주었다.&amp;lt;ref name=&amp;quot;fsfs117&amp;quot;/&amp;gt; 이봉찬은 방응모의 친구들이 봐 둔 갱도를 임대받도록 도와주었다. 이봉찬은 방응모의 한학 실력과 사람됨을 알아보고 있어, 자금을 쾌히 빌려주었다.&amp;lt;ref name=&amp;quot;fsfs117&amp;quot;/&amp;gt;&lt;br /&gt;
&lt;br /&gt;
이후 광산업에 뛰어들어 1924년 여름 압록강변의 최창학 소유 폐금광인 평안북도 삭주군 외남면 교동 다릿골의의 삭주 교동광업소를 찾아가 10미터 정도 땅을 파고 금맥을 발견했다. 바로 삭주 교동광업소를 인수, 경영을 확대하였다. 이때 만난 동업자의 딸이자 친구 전우현의 조카딸인 '''이인숙(李仁淑)'''을 만났다. 본처 승계도가 두 아들을 잃고 복부 수술이 잘못되어 아이를 얻지 못하게 되자 방응모에게도 수많은 중매가 들어왔다. 자식들을 병으로 잃은 것이 자신의 불찰이라고 본 승계도는 그에게 작은 부인이라도 들이자는 말을 꺼내기도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18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26년 방응모에게 광산 사업을 제안했던 두 친구가 손을 털고 나갔고, 그의 가족은 돈이 없어 쌀 대신 좁쌀로 좁쌀죽을 먹으며 연명해야 했다. 방응모는 정주군에 사는 비슷한 또래의 먼 친척 방상진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고, 방상진과 일꾼 대여섯 명, 그리고 후처 이인숙의 친정 쪽에서 얻어온 토지문서를 얻어 자금을 마련, 삭주 다릿골 광산으로 가서 다시 금광을 채굴했다. 금맥은 쉽게 나오지 않았고, 출몰하는 마적떼에게 소와 기구를 약탈당했다. 동시에 빚쟁이들의 독촉에 시달렸으나 '''''1926년 7월 지하 300m 지점에서 금맥을 확보했다. 이후 연간 300kg의 금을 생산, 그는 굴지의 광산업자로''''' 성장해 금맥을 찾아 벼락부자가 되었다. 그는 방상진을 교동금광 총감독에 맡겼다. 이때 그는 최창학에게 임대료에 이자를 쳐서 보내주었다.&lt;br /&gt;
&lt;br /&gt;
그때까지 첫 부인 승계도가 두부를 팔아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미국산 포드 T형자동차'''''를 타고 금의환향했다. 1928년 방응모는 자신의 아호인 춘해를 딴 춘해 장학회를 만들고 장학생들의 모임인 이심회를 만든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48페이지&amp;lt;/ref&amp;gt; 그 해에 방응모는 교동지역에 파출소 지소를 유치하였고, 마적단에 시달리던 주민들은 그의 송덕비를 세우기도 했다. '''''1928년에 그는 의정부 직동, 흥선대원군의 별장이 있던 곳 바로 뒤에 위치한 건물을 매입'''''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한용운]], 홍명희를 자주 초대했다.&lt;br /&gt;
&lt;br /&gt;
'''''1932년 방응모는 교동광산을 135만원이란 거액에 일본 중외광업주식회사에 매각'''''했다. 그 뒤 1932년 6월부터 조선일보 영업국장으로 활동하다 '''1933년 3월 [[조선일보]]의 경영권을 인수'''하여 부사장에 취임하였다.&lt;br /&gt;
&lt;br /&gt;
그는 교동광업소를 운영하며 모은 재력을 바탕으로 부사장 재직 중 [[조선일보]]의 대주주가 되었으며, 1933년 7월 8대 사주 조만식으로부터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제9대 [[조선일보]] 사주로 취임, 활동했다.&amp;lt;ref&amp;gt;조선일보는 1932년 7월에 조만식을 사장으로 영입했지만, 조만식은 거의 평생을 평양에서 살아왔던데다 서울에서 활동하기에는 적응을 잘하지 못했다. 조만식은 신문사 경영난과 지역감정의 혹독한 시련을 받은 채 9개월만에 퇴사했다. 그리고 조만식 후임으로 1933년, 방응모를 사장으로 추대하기에 이르렀다.&amp;lt;/ref&amp;gt;&amp;lt;ref&amp;gt;《한국사 시민강좌 제47집, 대표적 독립운동가 12인》,일조각. p145&amp;lt;/ref&amp;gt; 방응모 취임 이후의 초대 부사장은 이광수, 주필은 서춘이었다.&lt;br /&gt;
&lt;br /&gt;
=== 언론, 사업 활동 ===&lt;br /&gt;
==== 사회사업과 조선일보 인수 계획 ====&lt;br /&gt;
금광 사업에 성공한 그는 영림, 조림 사업에도 투자하였다. 방응모는 배우자 승계도에게서 더 이상 아들을 얻지 못하자 첩 이인숙을 통해 아들을 얻으려고 하였다. 이인숙은 아들을 낳았으나 이 아들은 곧 사망하였다. 아들을 잃은 이인숙은 승계도의 도움을 받다가, 그해 6월 방응모가 있는 광산으로 가 생활하였다'''. 승계도와 이인숙을 통해 자녀를 얻지못하자 42세가 되던 해인 1924년 친형인 방응곤의 둘째 아들 방재윤을 양자로 입양시켰다.'''&lt;br /&gt;
&lt;br /&gt;
[[파일:방응모장학생.jpg|섬네일|160px|오른쪽|방응모와 그의 장학금을 받던 학생들. 가운데 앉은 이가 방응모이고, 서있는 이들 중 왼쪽에서 두 번째는 방응모의 양자 방재윤.]]&lt;br /&gt;
&lt;br /&gt;
1930년 배영옥과 결혼하여 딸 방재숙을 얻었다. 1932년 광산업을 정리하였고 언론사업을 비롯하여 육영사업과 조림 및 간척사업 등을 벌였다. 또한 고아원과 사회복지단체에 후원금을 지원하면서 인망을 얻기도 했다. 삭주 지역에서는 그의 송덕비가 세워지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932년 그는 수원군 팔탄면 노하리 일대의 갯벌에 일본인이 수차례 뚝을 쌓다가 실패했다는 정보를 얻고 임삼진을 통해 조선총독부에 허가를 요청하였다.&amp;lt;ref name=&amp;quot;pp186&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86페이지&amp;lt;/ref&amp;gt; 간척 사업은 이후 1935년부터 시작되었지만 1932년부터 은밀히 착수되어 왔다.&amp;lt;ref name=&amp;quot;pp186&amp;quot;/&amp;gt;&lt;br /&gt;
&lt;br /&gt;
1933년 무렵 방응모가 [[조선일보]] 인수에 나서기 전부터 그는 [[한용운]]을 위한 일이라면 돈을 아끼지 않고 지출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성북동 222번지 언덕에 만해를 위해 기와집 한 채를 지어주었는데 심우장(尋牛莊)이 그것이다. 또한 만해가 일제의 배급을 거부해 생활이 어렵게 되자 만해에게 생활비를 지급했던 방응모는 만해가 병석에 누운 1944년에는 치료비를 지원해주기도 했다.&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6/0000043262?sid=103 만해가 일송 선생 5일장 치른 사연]&amp;lt;/ref&amp;gt; 그 외에도 방응모는 만해 한용운·벽초 홍명희 등과 함께 새해가 되면 백천온천에도 같이 다녀올 정도로 두터운 친분을 맺었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1&amp;quot;&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8/07/2007080700002.html 만해와 계초 방응모 선생]&amp;lt;/ref&amp;gt; 1935년 7월에는 경성 태평로1가에 새 사옥을 준공하는 한편, 출판부를 신설해 〈조광〉(1935. 10)·〈여성〉(1936. 6)·〈소년〉(1937. 4) 등의 월간 잡지를 차례로 창간했으며&amp;lt;ref name=&amp;quot;dam1&amp;quot; /&amp;gt; 운영하였다. 한편 [[1932년]] 교동 광업소를 정리하여 매각하였다.&lt;br /&gt;
&lt;br /&gt;
방응모의 광산 매각을 일본 정부 측에 알리고 다리를 놓은 것은 고일청(高一淸)이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84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32년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사건으로 체포된 [[안창호]]의 사면 탄원과 보석을 위해 노력하였다. 안창호가 윤봉길을 사주했다는 증거가 없으며 그가 테러행위를 지시했다는 증거 자료나 문건이 없다는 것이 방응모의 안창호 탄원 이유였다. 그러나 총독부 경무국장은 그의 안창호 석방 제안을 정중히 거절한다. 1936년 동방문화학원(뒤에 숭문중학교·고등학교 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1939년 9월에는〈조선일보〉의 조간 1회, 석간 2회의 1일 3회 발행을 시작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인수와 경영 ====&lt;br /&gt;
1933년 1월 16일 그는 정식으로 주식회사 [[조선일보]]사를 창립, 1월 18일에 발표된 창립 취지서에는 창립위원장 방응모, 창립발기인 방응모, 조만식, 고일청 외 등이 참여했다. 일단 그는 조만식을 사장으로 임명하고 자신은 부사장으로 있다가, 그해 3월 13일 다시 부사장에 취임했다. 4월 25일 편집인 겸 발행인이 되고, 4월 29일에는 조선일보의 조간, 석간제 발행을 부활, 확정시켰다. 1933년 7월 10일 총독부로부터 조선일보사의 법인 등록 승인을 얻어냈다. 7월 10일 조만식의 사퇴로, [[조선일보]]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다. 1933년 그는 자신의 아호를 춘해에서 계초로 바꾸었다. 그는 유능한 문인, 필진의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 상금 1천 원을 걸고 작가를 영입하였다.&lt;br /&gt;
&lt;br /&gt;
1934년 3월 25일 이광수를 비롯하여 서춘, 김동진, 함상훈, 신태익 등을 [[조선일보]]로 영입해 왔다. 그 외에도 정주군 출신 언론인, 작가들이 조선일보로 많이 오게 되었다. 이후 동아일보와 갈등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이광수가 조선일보로 옮겨와 부사장직에서 9개월 근무했다. 당시 조선일보 내부에서는 문모 라는 이가 이광수의 등장으로 자신의 입지 약화를 우려해 오랫동안 이광수를 내보내려 흉계를 꾸몄다고 한다. 이광수는 1934년 5월 25일자로 돌연 사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65페이지&amp;lt;/ref&amp;gt; 문모는 그에게 오히려 잘 됐다는 식으로 말하다가 방응모에게 호되게 혼이 났다. 그리고 문모로 하여금 즉시 금강산에 들어가 이광수를 다시 데려오게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65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이광수는 아들 봉근(당시 8살)의 사망 등으로 실의에 빠졌고, 1935년에 가서야 이광수를 조선일보 고문이자 필진으로 재영입하게 됐다.&lt;br /&gt;
&lt;br /&gt;
==== 동방문화학원 재단 설립 ====&lt;br /&gt;
방응모는 1936년 방농장의 소유권을 기본 자산으로 하는 재단법인 동방문화학원(東邦文化學院)을 설립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6페이지&amp;lt;/ref&amp;gt; 동방문화학원은 학교 법인으로 인가된 재단 법인으로, 그뒤 고계학원과 인연을 가지고 1936년부터는 보성고등보통학교를 후견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 분리되었다. 그뒤 방응모 장학생인 서중회 회원들을 위한 방응모 장학사업을 주관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7페이지&amp;lt;/ref&amp;gt;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태평로 구 조선일보 사옥 안에 동방문화학원의 간판을 달고 조광 잡지를 계속 발행하는 조광사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7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일제 강점기 후반 ===&lt;br /&gt;
==== 중일 전쟁 전후 ====&lt;br /&gt;
중일전쟁 개전 직후인 1937년 7월 11일에 열린 [[조선일보]] 간부회의에서 주필 서춘이 '일본군, 중국군, 장개석씨'등으로 쓰던 용어를 '아군, 황군, 지나, 장개석'으로 고치고 일본 국민의 입장에서 논설을 쓸 것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편집국장 김형원과 영업국장 김광수가 적극 반대를 하기도 했으나, 방응모는 '일장기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이미 몇 십만 원의 손해를 보았을 뿐 아니라 [[3.1 운동]] 때처럼 신문이 민중을 지도할 수 없다'면서 서춘의 입장을 지지했다. 한편으로 방응모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된 [[안창호]]를 [[조선일보]]에 영입하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안창호는 옥중에서 얻은 간질환과 폐질환 등으로 고생했고, 진료비 등을 수시로 지원하고 문병했음에도 출옥후 얼마 뒤에 사망한다.&lt;br /&gt;
&lt;br /&gt;
1933년 이심회(以心會：후에 序中會, 방응모장학회 등으로 명칭이 바뀜)라는 장학회를 만들어 국내 대학생과 해외유학생들에게 학자금을 지급하기도 했으며, 재단법인 동방문화학원(東方文化學院：지금의 숭문중·고등학교 전신)의 이사장직을 맡기도 했다.&amp;lt;ref name=&amp;quot;dam1&amp;quot; /&amp;gt; 또한 자신의 막대한 재원을 들여 1936년부터 함경남도 영흥군 일대에 당시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대단위 조림사업을 벌였으며, 그 전 해인 1935년부터는 경기도 수원군 팔탄면 일대에서 만 2년간에 걸친 간척사업을 벌이기도 했다.&amp;lt;ref name=&amp;quot;dam1&amp;quot; /&amp;gt;&lt;br /&gt;
&lt;br /&gt;
1937년 12월 24일 [[안창호]]는 병보석 판정을 받고 재판소가 지정한 현 서울대학교병원인 경성제국대학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안창호의 입원 중에 시중을 든 사람으로는 안창호의 외조카 김순원과 청년 박정호 두 사람이었고, 나중에는 이응준 장군의 부인 이정희가 끝까지 지성껏 간호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7페이지&amp;lt;/ref&amp;gt; [[안창호]]는 병상에서 병원비 문제로도 고초를 겪었다. 이 때문에 조만식은 일본 경찰로부터 안창호의 병원비를 대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음에도, &amp;quot;내가 먹고 살면서 그 선생을 돌보지 않을 수 없다&amp;quot;며 완강히 거절하고 안창호를 도왔다고 한다. 안창호의 간호를 같이 도와주던 이응준 장군 부인 이정희는 10일마다 계산되어 나오는 병원 입원비로 안창호 선생이 괴로워하는 표정을 지켜볼수 없었다고 진술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8페이지&amp;lt;/ref&amp;gt; 방응모는 5백원의 수표 한 장을 안창호에게 전달하였다. 50일간의 입원비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9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안창호]]는 1938년 3월 10일 밤 12시 경성제국대학 병원에서 운명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폐간 사건 ====&lt;br /&gt;
일본의 전쟁이 격화되면서 조선총독부 공보국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1940년에 강제로 폐간조치 했다. 광산을 팔아서 자신의 모든 것을 조선일보에 바쳤던 방응모는 큰 절망과 좌절을 느껴야 했다. [[한용운]]은 ‘신문이 폐간되다/ 붓이 꺾이어 모든 일이 끝나니…’로 시작하는 시를 지어 방응모를 위로했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1&amp;quot; /&amp;gt;&amp;lt;ref&amp;gt;붓이 꺾이어 모든 일 끝나니 이제는 재갈 물린 사람들 뿔뿔이 흩어지고 아, 쓸쓸하고 쓸쓸한지고 망국 서울의 가을날 한강의 물도 흐느끼느니 울음 삼켜 흐느끼며 연지를 외면한 채 바다 향해 흐르느니&amp;lt;/ref&amp;gt; 동아일보에는 김성수 외에도 장덕수와 송진우가 있었지만 그에게는 조선일보 폐간을 막기 위해 총독부와 교섭할 인물도 없었다.&lt;br /&gt;
&lt;br /&gt;
1938년 2월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선 내 일간신문 25개사로 조직된 조선춘추회의 창립에 창립발기인으로 참가했고, 조선춘추회 간사로 활동했다. 같은 해 7월 “국민정신을 총동원하고 내선일체 전 능력을 발휘하여 국책 수행에 협력하여 성전(聖戰)의 궁극적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조직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에 참여했고, 그날 결성된 경성연맹 창립총회에서 상담역을 맡았다. 9월부터 조선방공협회 경기도연합지부 평의원을 지냈다. 10월에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주최한 비상시 국민생활 개선을 위한 제1회 생활개선위원회에서 제2부(의례와 사회풍조 쇄신부)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그러나 1938년 10월부터 조선총독부는 조선일보의 신문용지를 검열, 통제하기 시작했다.&lt;br /&gt;
&lt;br /&gt;
1940년 5월 조선총독부 총독 미나미 지로가 방송담화로 창씨개명을 권고했다. 그러나 그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성씨를 이제 와서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며 창씨개명은 완강하게 거절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조선일보에 트집이 잡힐 일이 나타나지 않자 총독부는 전국 면사무소에 조선일보 신문 구독을 거절하도록 명령을 내렸고, 동시에 조선말을 쓰는 민원인에게는 일을 처리해주지 말도록 하게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3페이지&amp;lt;/ref&amp;gt; 조선총독부는 송진우의 예금통장을 문제삼았다. 송진우 명의의 은행저금이 동아일보의 8백여 개의 지국과 분국을 통해 모금된 독립운동 자금이라며, 그리고 동아일보 간부들이 백운장이라는 요정에서 회식을 한 것을 김성수 집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려 했다는 등의 이유로 백관수 동아일보 사장을 전격 구속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3~374페이지&amp;lt;/ref&amp;gt; 동아일보는 백관수가 구속된지 10일 만에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동아일보 중역회의를 열고 폐간신청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4페이지&amp;lt;/ref&amp;gt; 총독부는 조선일보에도 자진 폐간을 권고했고, 1940년 8월 9일 편집회의를 주관, 8월 10일 조선일보의 폐간계를 내고, 8월 10일자로 폐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5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잡지 발행 활동 ====&lt;br /&gt;
신문 강제 폐간 뒤 방응모는 간판을 조광사로 바꿔 걸고, 사옥은 동방흥업주식회사로 등기를 변경해서 유지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1페이지&amp;lt;/ref&amp;gt; 이후 그는 조광 잡지 발행에 전념했다. 1943년 8월 경 일본 중앙대학의 예과를 마친 방일영이 입사&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1페이지&amp;lt;/ref&amp;gt;, 필진으로 참여했다. [[조선일보]]가 폐간된 후에도 방응모는 벽초 홍명희 부자에게 지속적으로 생활비를 대주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4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4년 6월 29일 만해 [[한용운]]이 사망했다. 그는 심우장을 찾아가 3백원을 내놓았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5페이지&amp;lt;/ref&amp;gt;당시 쌀 10가마가 100원이었지만, 심우장은 당장 현금 1원이 없었는데 거액이라서 놀랐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6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광복 이후 언론 및 정치활동 ===&lt;br /&gt;
==== 광복 직후 ====&lt;br /&gt;
1945년 8.15 광복 후에는 8월 말과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朝鮮在外戰災同胞救濟會) 고문과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9월 초 [[안재홍]] 등이 좌경화되는 건준체제에 반발하여 건준을 탈퇴하자 방응모 역시 건준을 탈퇴하였다.&lt;br /&gt;
&lt;br /&gt;
9월 2일 미군정이 주둔하자, 방응모는 윤전기를 찾기 위해 폐간 당시의 증빙서류를 미 군정청에 제시하였으나 소식이 없었다. 총독부는 조선일보 폐간 직후 인수한 윤전기를 경성일보사에 옮겨서 설치했다. 그는 동방문화재단 외 4개 사업소를 적산으로 파악한 미군정을 설득하고, 사옥 문제도 해결하였다.&lt;br /&gt;
&lt;br /&gt;
10월 1일 조선일보 편집위원회를 구성하고, 신문 복간 운동을 추진했다. 조선총독부의 폐간 지시 당시 의정부로 옮겨놓은 일부 활자 자모음이 잘 보관되어, 그해 11월 23일 조선일보를 복간시키고, 서울신문사 사옥에서 조선일보 복간호를 간행하였다. 이후 조선사회문제대책중앙협의회 중앙위원을 거쳐 10월 16일 이승만 등의 주도로 독립촉성중앙회가 결성되자 독촉에 가입하였다.&lt;br /&gt;
&lt;br /&gt;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이 귀국하자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에 입당했다. 12월 [[안재홍]]의 추천으로 한국독립당의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출되어 3~4개월 동안 활동했다.&amp;lt;ref&amp;gt;일각에서는 방응모가 '한독당 재무부장으로 지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1947년부터 한독당 재무부장을 맡은 신창균이 전면 부정했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47/0000002626?sid=102 백범 비서와 '진짜' 한독당 재정부장의 육성증언. 참고.]&amp;lt;/ref&amp;gt; 그 뒤 대한국민총회 발기인, 대한독립애국금헌성회 발기인 등으로 활동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복간 및 군정기 활동 ====&lt;br /&gt;
11월 [[조선일보]]사를 복간시켰다. 그러나 한동안 조선일보의 인쇄는 서울신문사에서 간행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1945년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추념대회에 참여하였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2&amp;quot;&amp;gt;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13&amp;lt;/ref&amp;gt; 순국선열추념대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2&amp;quot; /&amp;gt;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참여,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이 되었다.&amp;lt;ref&amp;gt;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55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6년 2월 26일 서울신문사 공무국 종업원들이 조선일보의 인쇄를 거부해버렸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436페이지&amp;lt;/ref&amp;gt; 그동안 묵시적으로 방해가 은근히 있었다. 표면상의 문제는 임금 문제이나 내용상으로는 조선일보에 대한 조선공산당의 시위의 일종이었다. 사흘간의 교섭 끝에 2월 28일에 가서야 26일자와 27일자를 소급해서 인쇄하여 신문을 한꺼번에 발행하였다. 그러나 3월 1일과 2일에 또다시 인쇄를 거부당해 결국 휴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436페이지&amp;lt;/ref&amp;gt; 조선일보를 경성일보사로 옮겨서 인쇄하기로 하고 3월 5일자로 사고로 독자에게 알렸다.&lt;br /&gt;
&lt;br /&gt;
4월 29일 김구, 김창숙, 김성수, 오세창 등과 함께 서울운동장에서 윤봉길의사 추모회의 창립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amp;lt;ref&amp;gt;&amp;quot;故尹奉吉義士의 記念式 오늘, 發起人會 열고 準備&amp;quot;, 동아일보 1946년 4월 23일자 2면, 사회면&amp;lt;/ref&amp;gt; 그해 5월 조선공업구락부 고문에 위촉되었다.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民族統一總本部) 10인협의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6월 15일 오후 5시 40분 서울역에 마중나가 서울역에 도착한 삼의사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lt;br /&gt;
&lt;br /&gt;
1945년 광복 직후 서기원이 그를 찾아왔다. 서기원은 그때 경성농상실천학교의 동창회로부터 이 학교의 교장이 되어 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이다. 방응모는 서기원의 제의를 받아들여 1946년 8월 28일 동방문화학원 이사장으로 숭문상업학교를 인수, 재단 이사장이 되었다. 후일 방응모가 6.25 전쟁 중에 납북된 후 동방문화학원과 숭문중,고교의 재단은 최용진이 운영하다가 다시 1978년에 방일영에게 인수되었다.&lt;br /&gt;
&lt;br /&gt;
1947년 1월 21일 제5회 창립위원회를 본사에서 개최하고 2월 23일 주식회사 조선일보사 주주창립총회를 열고 대표이사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공동투자 경영자로 참여시킨 전무 이종민과의 알력이 발생했다. 이종민과의 갈등이 심화되자 그해 8월 3일 방응모는 일단 사직서를 제출했다. 1947년 8월 10일 풍문여고 강당에서 개최된 한인신문기자협회에 참석, 민족청년단에서 언론계 공로자로 방응모, 김성수, 설의식을 지정하여 상을 시상받았다.&amp;lt;ref&amp;gt;&amp;quot;朝鮮 新聞記者協會&amp;quot;, 동아일보 1947년 8월 10일자 2면, 사회면&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김구와의 결별과 만년 ====&lt;br /&gt;
이후 [[한국독립당]] 중앙상무위원&amp;lt;ref&amp;gt;[http://db.history.go.kr/url.jsp?ID=dh_003_1946_08_24_0150 한국사데이터베이스]&amp;lt;/ref&amp;gt;, 당 재정부장 등을 맡기도 했으나, [[1948년]] [[1월]] 이후 [[김구]]의 노선 변경과 함께 그를 지지하던 세력이 떨어져 나가서 [[조선일보]]도 김구에게서 등을 돌리게 되었다.&amp;lt;ref name=&amp;quot;조선11&amp;quot;&amp;gt;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68~70쪽.&amp;lt;/ref&amp;gt; 그러나 김구와의 결별이 괴로웠던지 방응모도 직접 나서서 &amp;lt;김구선생의 의견에 대한 우리의 취할바 태도&amp;gt;라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amp;lt;ref name=&amp;quot;조선11&amp;quot;/&amp;gt;&lt;br /&gt;
&lt;br /&gt;
[[1949년]] [[조소앙]]이 결성한 [[사회민주주의]]성향 정당인 [[사회당 (대한민국, 1948년)|사회당]]에 입당해 동당 문교정책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amp;lt;ref&amp;gt;[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9070600209201019&amp;amp;editNo=1&amp;amp;printCount=1&amp;amp;publishDate=1949-07-06&amp;amp;officeId=00020&amp;amp;pageNo=1&amp;amp;printNo=7956&amp;amp;publishType=00020 1949년 7월 6일자 동아일보]{{깨진 링크|url=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9070600209201019&amp;amp;editNo=1&amp;amp;printCount=1&amp;amp;publishDate=1949-07-06&amp;amp;officeId=00020&amp;amp;pageNo=1&amp;amp;printNo=7956&amp;amp;publishType=00020 }}&amp;lt;/ref&amp;gt; 이듬해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경기도]] 양주군에 출마했으나 차점자로 낙선하였다.&amp;lt;ref&amp;gt;[http://db.history.go.kr/url.jsp?ID=NIKH.DB-dh_017_1950_06_01_0030 한국사데이터베이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9년 의정부 가능동 별장에 심은 뽕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랐다. 승계도의 친척 승원호에 의하면 &amp;quot;할아버지(방응모)는 사람들을 시켜 뽕나무를 2년간 키우게 했습니다. 탐스럽게 뽕나무가 자라니까 이번에는 직조 기계를 들여 직조 공장을 세우겠다고 하셨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11페이지&amp;lt;/ref&amp;gt;&amp;quot; 한다. 그러나 그의 방직공장 설립 계획은 6.25 전쟁으로 무산되고 만다.&lt;br /&gt;
==== 납북과 최후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 납북 후 행적은 &amp;quot;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amp;quot;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amp;lt;ref name=&amp;quot;김장&amp;quot;/&amp;gt; [[1950년]] [[8월]]경 [[개성]] 송악산 부근에서 미군의 폭격에 희생되었고 심한 폭격으로 시신을 찾을 수 없어 묘도 만들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다.&amp;lt;ref&amp;gt;{{뉴스 인용&lt;br /&gt;
 |url          = http://www.minjog21.com/news/articleView.html?idxno=1140&lt;br /&gt;
 |제목       = &amp;quot;누워서도 남쪽하늘만 보십니다&amp;quot; - 평양시 신미리 재북통협 특설묘지&lt;br /&gt;
 |출판사    = 민족21&lt;br /&gt;
 |저자       = 신준영&lt;br /&gt;
 |날짜       = 2002-07-01&lt;br /&gt;
 |확인날짜 = 2008-05-15&lt;br /&gt;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40420015541/http://www.minjog21.com/news/articleView.html?idxno=1140#&lt;br /&gt;
 |보존날짜 = 2014-04-20&lt;br /&gt;
 |url-status = dead&lt;br /&gt;
}}&amp;lt;/ref&amp;gt;&amp;lt;ref&amp;gt;[http://www.minjog21.com/news/articleView.html?idxno=686 민족21&amp;lt;!-- 봇이 따온 제목 --&amp;gt;]{{깨진 링크|url=http://www.minjog21.com/news/articleView.html?idxno=686 }}&amp;lt;/ref&amp;gt; 남한에서는 [[1955년]] [[7월 7일]] 생사불명기간 만료로 인해 실종 처리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주변에서 피신하라고 권했지만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느냐'며 완강하게 버티다가 1950년 [[7월 6일]] [[경기도]] [[양주군]] 시둔면 가능리(현, [[의정부시]] [[가능동]]) 자택에 들이닥친 [[조선인민군]]에 의해 끌려갔다.&lt;br /&gt;
&lt;br /&gt;
=== 사후 ===&lt;br /&gt;
[[서울]] 종로에 있던 양자 방재윤의 두 아들 [[방일영]]과 [[방우영]]은 방응모의 첩 이인숙이 찾아가 피신하라고 권고하여 황급히 피신했다. &lt;br /&gt;
&lt;br /&gt;
[[9월 28일]] [[개성시]] 북쪽을 지나 [[황해남도]] [[서흥군]]에서 트럭으로 강제 북송되었다. 이후 9월 28일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lt;br /&gt;
&lt;br /&gt;
7월 6일 그의 행방불명처리가 되고, 방응모의 사후에도 [[조선일보]]는 그의 명의로 발행되었다. 1952년 4월 28일 조선일보는 발행인겸 편집인을 장기영으로, 인쇄인을 방일영으로, 방응모는 명예사장으로 명의변경하여 휴전 후 계속 발행하게 되었다. 1954년 4월 30일 제8회 조선일보 정기주주총회에서 장기영 사장이 사퇴하면서, 명예사장 방응모가 사장으로 추대되고, 발행인 겸 대표취체역에 방일영이 선임되었다. 이후 실종 후 [[1959년]]에 법적으로 사망 처리되었다. 그리고 [[1970년]]까지는 조선일보는 그의 이름으로 발행되었다.&lt;br /&gt;
&lt;br /&gt;
[[1970년]] [[2월 19일]] 조선일보 정기주주총회에서 방응모 이사를 사퇴 수리하였다. 그의 피폭사망 사실은 1970년대 이후 탈북자들을 통해 대한민국에 소개되었다.&lt;br /&gt;
&lt;br /&gt;
== 친일행위 의혹 ==&lt;br /&gt;
=== 일제 전시체제기 활동 ===&lt;br /&gt;
일제 강점기 말기 언론인으로서 총독부체제에 협력한 기록과 활동이 다수 기록이 있다. 1933년 3월 [[조선일보]] 경영권을 인수하고 부사장직에 취임했을 당시 같은 달에 고사기관총 구입비용 1600원을 군에 헌납하였다. 그는 1935년 친일 잡지 《조광 (잡지)(朝光)》을 창간하였고, 1937년에는 경성방송국 제2방송에 출연하여 일제가 중국의 베일을 절멸케하여 극동평화를 지키려고 한다는 강연을 하였다. 1940년대부터 조광에 집중적으로 친일 논설을 기고하고 시국 강연에 참여하여 전쟁 지원을 독려했다. 1942년 6월에는 '징병령 실시에 일층 더 감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글을 써서 조광에 발표하였다. 애국금차회(1937),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1938), 임전대책협의회(1941), 조선임전보국단(1941) 등 대표적인 친일 단체의 회원에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그는 이런 행적으로 인해 해방정국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명단에 기록되어 있고,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해 발표한 &amp;lt;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amp;gt;에 모두 포함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lt;br /&gt;
&lt;br /&gt;
우리 [[조선일보]]는 다른 어떤 신문도 따라오지 못하는 확고한 신념에서 비국민적 행위를 단연 배격하여 종국까지 조선일보사가 이미 정해놓은 방침에 한뜻으로 매진한다.|원산에서의 순회 강연&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9478.html 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친일 다짐하다 시민에 봉변]《한겨레》2005-08-24 오후 06:13:18&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반민족행위 논란 ===&lt;br /&gt;
방응모를 친일파로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남아 있다. 조선일보 경영 이전에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방응모의 활동이 거의 없었고, 납북된 뒤 소식이 끊겨버린 까닭에 본인이 항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 동안의 행적만으로 친일파 여부를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방응모의 후손들이 영향력 있는 [[조선일보]] 언론사의 사주를 맡았기에 그의 입장에서 서술한 기록을 많이 남기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80년 발간된 그의 전기 《계초 방응모》(조선일보사) 등에는 '그가 민족주의적 선각자'로 묘사되고 있다. 방응모가 친일파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일부세력측은 그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논거로 드는 경우가 많이 있다.&amp;lt;ref&amp;gt;유석재, 계간 《유심》 (2004년 봄호) [http://yousim.buddhism.org/html/2004-spr/tamgu-yoo-seok-jae.htm 삭풍 속에 피어난 금란지교(金蘭之交) - 만해와 계초 방응모]&amp;lt;/ref&amp;gt;&amp;lt;ref&amp;gt;&amp;quot;일제 말기 계초는 시국강연에 나설 것과 창씨개명을 집요하게 강요받았으나 그때마다 묵묵부답으로 거부하며 소신을 지켰다.&amp;quot; 《조선일보》 (2001.3) 조선일보 사장열전 - 계초 방응모편, 《한겨레》 (2001.3.30) [http://www.njoyschool.net/news/article_view.asp?menu_code=s20202&amp;amp;no=1206 조선일보, 일장기를 신문제호 위에]&amp;lt;/ref&amp;gt;&lt;br /&gt;
또한 한국정토학회 고문이자 서울 정토사 주지였던 박설산(1918~2007)이 학도병에 끌려가기 직전인 1943년 12월 28일 밤 서울역에서 스스로 왼발을 선로에 올려 발가락을 절단해 징집을 기피하자 방응모는 만해와 함께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설산을 걱정하면서 입원 중 조선일보 기자를 통해 돈을 전달한 것은 물론 퇴원할 때 돈을 전달하고 뒤를 보살폈다고 한다.&amp;lt;ref&amp;gt;박설산 회고록 &amp;lt;뚜껑없는 조선역사책&amp;gt;(1994, 도서출판 삼장) p240~241&amp;lt;/ref&amp;gt;&lt;br /&gt;
&lt;br /&gt;
2010년 12월, 방응모 관계자들 및 조선일보측은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을 취소해달라'며 법원에 낸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amp;quot;1944년 조선항공업 창립발기인으로 활동한 부분에 대해 친일행위로 판단한 부분을 취소하지만 나머지 활동에 대해서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amp;quot;라고 판결했다. 그 이유인 즉 &amp;quot;방응모는 1933년 조선일보 사장으로 취임해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등으로 활동하며 친일활동을 벌였으며, 1937년 경성방송국 시국강연에서 일본제국이 극동평화를 확립시킬 것이라는 내용의 강연을 하고, 1938년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춘추회의 발기인 겸 간사로 활동하기도 했다&amp;lt;ref&amp;gt;[http://media.daum.net/breakingnews/politics/view.html?cateid=1002&amp;amp;newsid=20101222103319164&amp;amp;p=newsis 법원 &amp;quot;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친일파 맞다&amp;quot;]뉴시스 2010년 12월 22일&amp;lt;/ref&amp;gt;&amp;quot;는 것이다.&lt;br /&gt;
&lt;br /&gt;
2012년 1월 12일 서울고법 행정7부는 방 전 사장의 손자인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이 행정안전부를 상대로 낸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처분 취소 청구소송에서 ‘일제 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의 친일 행위 판정 조항에 비추어 방 전 사장에게 적용된 모두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민족적 지도자로서 비중이 큰 만큼 그로 인한 책임도 무거울 뿐 아니라 고난의 시기를 겪은 민족으로서 그 역사를 반성하자는 입장에 설 때, 방 전 사장의 여러 행태는 반민특별법에서 규정한 친일반민족행위의 유형에 속함을 부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1·2심 재판부는 방 전 사장이 자신이 운영하던 잡지 &amp;lt;조광&amp;gt;에 일제 침략전쟁에 동조하고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문예물과 일제 침략전쟁에 협력할 것을 주문하는 논문을 게재하는 등의 ‘친일’ 행위를 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또한, 2심 재판부는 일본의 전쟁 수행을 돕기 위해 설립된 군수 제조업체 ‘조선항공공업’의 발기인과 감사를 지낸 것은 “감사는 업무집행에 관여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기관으로, 방 전 사장이 이 회사를 운영했다고 볼 수 있다”는 이유로 친일이라고 판단했다.&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4565.html법원 ‘방응모 친일’ 2심서도 인정] 인터넷한겨레 2010년 12월 22일&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가족 관계 ==&lt;br /&gt;
* 아버지 : 방계준(方桂準)&lt;br /&gt;
* 어머니 : 온양 박씨&lt;br /&gt;
** 형 : 방응곤(方應坤)&lt;br /&gt;
** 배우자 : 승계도&lt;br /&gt;
*** 아들 2명 요절&lt;br /&gt;
** 배우자 : 이인숙(李仁淑, 1901년 ~ ?)&lt;br /&gt;
*** 아들 : 방재욱(方在旭, 1925년 ~ 1926년 9월)&lt;br /&gt;
** 배우자 : 배영옥(裵英玉)&lt;br /&gt;
*** 장녀 : 방재숙(方在淑)&lt;br /&gt;
** 배우자 : 노호용(盧鎬龍)&lt;br /&gt;
*** 장남 : 방재선(方在善, 1944년 ~)&lt;br /&gt;
*** 차남 : 방재효(方在孝, 1946년 ~)&lt;br /&gt;
*** 삼남 : 방재규(方在奎, 1948년 ~)&lt;br /&gt;
&lt;br /&gt;
** 양자 : 방재윤(方在允 또는 方在胤, 1901년 ~ 1940년, 형 방응곤의 차남)&lt;br /&gt;
*** 손자 : 방일영(方一榮, 1923년 ~ 2003년)&lt;br /&gt;
**** 증손 : 방상훈(方相勳, 1948년 ~)&lt;br /&gt;
**** 증손부 : 윤순명 - 윤치호(尹致昊, 1865년 ~ 1945년)의 증손녀&lt;br /&gt;
***** 현손 : 방준오(方俊吾, 1974년)&lt;br /&gt;
***** 현손 : 방정오(方政吾, 1978년)&lt;br /&gt;
**** 증손 : 방용훈(方容勳, 1952년 ~)&lt;br /&gt;
*** 손자 : 방필영(方必榮, 1924년 ~ 1926년)&lt;br /&gt;
*** 손녀 : 방숙영(? ~ 1951년 1월)&lt;br /&gt;
*** 손자 : 방우영(方又榮, 1928년 ~ 2016년)&lt;br /&gt;
**** 증손 : 방성훈(方聖勳, 1973년 ~)&lt;br /&gt;
&lt;br /&gt;
== 기타 ==&lt;br /&gt;
그는 [[한용운]], 최남선, 정인보, 홍명희 등과 친분관계를 형성하고 어울려 지냈다 한다.&lt;br /&gt;
&lt;br /&gt;
[[김구]]의 한국독립당의 재정적 후견인 역할을 하였다 하며,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삼의사 유골봉환식 때 [[김구]], [[정인보]] 등과 촬영한 사진이 있다.&amp;lt;ref&amp;gt;백범어록 참조&amp;lt;/ref&amp;gt; 그리고 1945년 11월 23일 조선일보가 복간되자 백범 김구는 '有志者事竟成' 뜻을 지닌 자 성취할 수 있다'는 친필 휘호를 보내며 축하했다.&amp;lt;ref&amp;gt;[http://www.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4060370241 '조선일보 역사 읽기'《조선일보》2004.06.03]&amp;lt;/ref&amp;gt;&lt;br /&gt;
한편 임꺽정의 저자인 벽초 홍명희가 방응모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그와 깊은 친분을 맺었다는 주장이 있다. 《조광》 1938년 11월호엔 홍명희가 병중에 있는 방응모를 위로하며 지은 한시가 방응모의 답시와 함께 실려 있다고 한다.&amp;lt;ref&amp;gt;[http://weekly.chosun.com/site/data/html_dir/2004/11/05/2004110577041.html ‘임꺽정’으로 되살아난 독립운동의 魂! 주간조선 1827호 2004.11.04&amp;lt;/ref&amp;gt; 또한 [[안창호]]의 비서실장을 지낸 독립유공자 구익균은 방응모와 안창호가 친밀했다는 주장을 했다.&amp;lt;ref&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09/2008030901055.html &amp;quot;공산주의자들, 도산 비판하다가도 하숙비 떨어지면 찾아와&amp;quot;] 조선일보, 2008-03-10 03:22&amp;lt;/ref&amp;gt;&lt;br /&gt;
또한 박설산에 따르면 1943년 만해 한용운에게 학도병으로 끌려가게 되었음을 알리려 심우장으로 찾아가게 되었을 때, 한용운과 방응모가 바둑을 두고 곁에서 정인보가 훈수를 두고 있었다고 한다.&amp;lt;ref&amp;gt;박설산 저 &amp;lt;뚜껑없는 朝鮮 역사 책&amp;gt; p.226 도서출판 三藏(1994)&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30년대~1940년대 방응모에게서 장학금을 지원받은 학생 모임인 서중회의 회원들의 그의 인물평은 &amp;quot;첫 인상은 좀 깡마른 모습이었으나 의지가 강한 인물&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56페이지&amp;lt;/ref&amp;gt;&amp;quot;이라는 평을 남기기도 했다.&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 /&amp;gt;&lt;br /&gt;
&lt;br /&gt;
== 참고 자료 ==&lt;br /&gt;
* 청산하지 못한 역사: 언론 내세워 일제에 아부한 교화 정책의 하수인 (문영숙) (반민족문제연구소, 청년사, 1994)&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민족 계몽의 초석 방응모(이동욱 저, 지구촌, 1998)&lt;br /&gt;
* 계초 방응모전(계초전기간행위, 조선일보사, 1980년)&lt;br /&gt;
* 계초 방응모(이동욱, 방일영문화재단, 1996)&lt;br /&gt;
&lt;br /&gt;
== 외부 링크 ==&lt;br /&gt;
* [https://web.archive.org/web/20050123171046/http://chosunhost.com/ 계초방응모 기념사업회]&lt;br /&gt;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09145 &amp;lt;조선일보&amp;gt;, 방응모 전 사장의 '친일행적' 말한다] - 오마이뉴스 04.09.10일자&lt;br /&gt;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020302101749 방응모ㆍ 김성수 친일행적 뭔가 : &amp;lt;긴급입수&amp;gt;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 全文] - 프레시안 2002-03-02&lt;br /&gt;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54052 그가 '&amp;lt;조선&amp;gt;의 주인' 주장하는 이유] 오마이뉴스 2001년 9월 20일자&lt;br /&gt;
*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956 방재선씨, 호주·상속 원인무효소송 제기]&lt;br /&gt;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4/06/2008040601053.html '5인 친필 서첩' 발굴] 조선일보 2008년04월06일자]&lt;br /&gt;
&lt;br /&gt;
[[분류: 감자]]&lt;/div&gt;</summary>
		<author><name>Nsgjjsjsjy02</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B0%A9%EC%9D%91%EB%AA%A8&amp;diff=58871</id>
		<title>방응모</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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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06-11T02:33:1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Nsgjjsjsjy02: /* 광복 직후 */&lt;/p&gt;
&lt;hr /&gt;
&lt;div&gt;{|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width:100%&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0%&amp;quot;|사진&lt;br /&gt;
|[[파일:방응모.jpg|center|200픽셀]]&lt;br /&gt;
|+ '''방응모'''&lt;br /&gt;
|+ style=&amp;quot;caption-side:bottom;text-align:left:&amp;quot;|출처: 위키백과&lt;br /&gt;
|출생||1883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조선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또는 정부면 성내동&lt;br /&gt;
|-&lt;br /&gt;
|사망||1950년경으로 추정&lt;br /&gt;
|-&lt;br /&gt;
|사인||불명&lt;br /&gt;
|-&lt;br /&gt;
|거주지||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amp;gt; 경성부 -&amp;gt; 경기도 양주군 의정부읍&lt;br /&gt;
|-&lt;br /&gt;
|국적||대한민국&lt;br /&gt;
|-&lt;br /&gt;
|본관||온양&lt;br /&gt;
|-&lt;br /&gt;
|별칭||호: 계초(啓礎), 춘해(春海)&lt;br /&gt;
|-&lt;br /&gt;
|직업||교사, 변호사, 상인, 언론인, 기업인, 사회운동가, 정치가&lt;br /&gt;
|-&lt;br /&gt;
|배우자||승계도, 이인숙, 배영옥, 노효용&lt;br /&gt;
|-&lt;br /&gt;
|자녀||방재숙(딸), 방재욱·방재선·방재효·방재규(아들), 방재윤(양자)&lt;br /&gt;
|-&lt;br /&gt;
|부모||방계준(부), 온양박씨(모)&lt;br /&gt;
|}&lt;br /&gt;
&lt;br /&gt;
'''방응모'''(方應謨, 평안북도 정주군, 1883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 1950년 8월(추정)는 [[일제강점기]]의 교육자, 언론인, 법조인, 기업인이자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언론인이며 정치인이다. 호는 '''춘해'''(春海)이고, 뒤에 '''계초'''(啓礎)로 고쳤다.&lt;br /&gt;
&lt;br /&gt;
1922년 동아일보 정주 지국을 인수해 지국장을 지내다가 1924년 금광업에 뛰어들어 큰 부를 얻게 되었다. 1932년 6월 조선일보에 입사하였고 이후 영업국장이 되어 조선일보의 판매망을 장악하게 되고 경영권을 인수하면서 1933년 3월 조선일보 부사장이 되었다. 1933년 7월부터 1950년 7월까지 종신으로 [[조선일보]]의 사장을 역임하였다. 1935년 창간한 월간잡지 '조광(朝光)'은 친일 논란이 있다.&amp;lt;ref&amp;gt;안은필. [http://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9211 조선일보가 가장 빛나던 시기, ‘안재홍 시대’]&amp;lt;/ref&amp;gt;&amp;lt;ref name=&amp;quot;안은&amp;quot;&amp;gt;안은필. [http://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9279 방응모 친일증거, “모래밭에서 모래 찾기”]국민TV. 기사입력 2015년 4월 23일. 기사수정 2015년 4월 24일.&amp;lt;/ref&amp;gt;&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2/0002006080?sid=102 한홍구 &amp;quot;박정희는 공포와 욕망의 정치를 했다&amp;quot;]. 프레시안. 2015년 4월 13일.&amp;lt;/ref&amp;gt;&amp;lt;ref&amp;gt;이민영.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1/0002255321?sid=102 고법 “방응모 前조선일보 사장 친일행적 대부분 인정”]. 서울신문. 2012년 1월 13일.&amp;lt;/ref&amp;gt;&amp;lt;ref&amp;gt;노현웅.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8/0002251781?sid=102 조선 방응모·동아 김성수의 ‘친일’…수년째 결론 안 내고 미루는 법원]. 한겨레. 2014년 11월 3일.&amp;lt;/ref&amp;gt;&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6/0000000413?sid=110 김성수ㆍ방응모와 친일언론인 군상]. 미디어오늘. 2002년 3월 12일.&amp;lt;/ref&amp;gt; 언론계에서 활동하면서도 사업가의 길을 함께 걸었고, 교육 장학 활동을 하였으며, 1945년 광복 직후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 고문과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안재홍]]의 추천을 받아 한국독립당 중앙상무위원과 독립촉성국민회 총무부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amp;lt;ref name=&amp;quot;안은&amp;quot;/&amp;gt;&amp;lt;ref&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16/2008031600800.html 계초 방응모와의 우정도 여러 편의 시로 표현해&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해방 정국에서 김구의 재정적 후견인으로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등 삼의사 유골 봉환 사업과 신탁통치 반대 운동 등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대한민국 수립 이후 사회민주주의 정치가인 조소앙과 사회당을 결성해 문교정책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lt;br /&gt;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 납북 후 행적은 &amp;quot;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amp;quot;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lt;br /&gt;
&lt;br /&gt;
== 생애 ==&lt;br /&gt;
=== 생애 초기 ===&lt;br /&gt;
==== 출생과 성장 ====&lt;br /&gt;
방응모는 1883년 11월 3일 또는 9월 29일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바우머리 부락 또는 정주군 정부면 성내동 425번지에서 '''방계준(方桂準)'''과 온양 박씨(溫陽朴氏)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그는 어려서 집중력이 남달리 뛰어난 반면 고집이 셌다는 평이 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페이지&amp;lt;/ref&amp;gt; 그의 '''삼촌 방계묵(方啓默)'''은 그의 고집있는 기질을 두고 저놈은 쇠작두 말고 나무 작두로 잘라 죽여야 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3~54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친척들의 야멸찬 말들이 그에게 상처를 주거나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4페이지&amp;lt;/ref&amp;gt; 또한 그의 유년시절을 본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가 태어날 당시 태몽도 없었고, 신동이라는 말도 별다르게 듣지 않았다고 한다. 어려서 빈곤한 가정환경으로 방응모는 정규 학교에는 입학하지 못하고, 16세 때까지 서당에 드나들며 한학을 익혔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던 중 그가 어느정도 실력이 우수하다고 인정되자, 스승인 승창률은 잠시 방응모에게 어린아이들을 돌보게 한 후 자리를 피하곤 했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1페이지&amp;lt;/ref&amp;gt; 그는 홀로 사서육경을 탐독, 독파하였다. 21세 무렵 잠시 서당 훈장을 지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896년 독립협회의 활동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5페이지&amp;lt;/ref&amp;gt; 형 방응곤이 예배당에 다니게 되자&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2페이지&amp;lt;/ref&amp;gt;, 그를 통해 신문물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다. 그 뒤 우연히 경성부에 갔다가 신문물을 보고 충격을 받아 17세에 독학으로 신학문과 일본어, 중국어, 수학 등을 독파하였다. 유년시절 서당의 성리학 스승이던 승창률의 친척인 승시영(承時榮)과 조씨(趙氏)의 딸 승계도와 결혼했다.&lt;br /&gt;
&lt;br /&gt;
결혼한 다음 해에도 그는 공부를 한다며 책만 사다 읽곤 했고&amp;lt;ref name=&amp;quot;fsfs60&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60페이지&amp;lt;/ref&amp;gt;, 부인 승계도는 생계를 위해 몸소 나섰다.&amp;lt;ref name=&amp;quot;fsfs60&amp;quot;/&amp;gt; 부인 승계도는 친척 가운데 콩을 싸게 넘겨주는 이들이 있어 그 콩으로 두부를 만들거나 콩나물을 키워 장사를 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61페이지&amp;lt;/ref&amp;gt; 그의 아내 승계도는 남편에 대한 믿음이 절대적이었고 탓을 하거나 가출하지 않았다. 이후 그는 서당 훈장으로 초빙되었으나, 그가 가는 마을의 기존 훈장, 한학자들은 그를 적대적으로 대했다. 그렇다고 마을 사람들의 일부 지명이 있었으나 자신의 스승의 자리를 침해할 수 없다 하여 그는 자신의 동리의 훈장일은 사양하였다. 그는 마을을 나가 신학문을 하는 친구들과 어울렸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62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계몽 운동 ====&lt;br /&gt;
도산 [[안창호]]와 남강 이승훈이 연사로 돌아다니며 애국 계몽 강연과 문맹들의 교육, 야학 사업을 하였고, 여기에 감동받은 청년들이 서당과 야학을 열고 문맹들과 여성들에게 한글 교육을 하였다. 도산 [[안창호]]의 강연과 남강 이승훈의 강연을 찾아다니며 듣다가 감동받은 방응모 역시 교육, 계몽에 참여하였다.&lt;br /&gt;
&lt;br /&gt;
그는 청년회의 활동에 몰두하였으나, 농번기에 작은 일손이라도 더 필요했던 동리 노인들은 젊은 아이들이 일은 하지 않고 무슨 모임이다 하여 어울려 돌아다니는 꼴&amp;lt;ref name=&amp;quot;fsfs75&amp;quot;/&amp;gt;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또한 모임 구성원들 역시 &amp;quot;의식 자체가 아직 전근대적이었고, 사고의 분화를 겪지도 않은데다가, 이들의 조직 활동이 기분 좋으면 나오고 기분 나쁘면 빠져 버리는 것이 예사&amp;quot;라 청년 모임들은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청년단체의 실패에 좌절하고 다시 귀향했으며, 이때 그는 춘해(春海)라는 아호를 스스로 지었다. 그의 집안에서는 그가 정착하기를 바라고 정주읍 성내동에 집을 얻어 주었다.&lt;br /&gt;
&lt;br /&gt;
안창호의 계몽 강연에 감동받은 남강 이승훈이 1907년(융희 1년) 8월 김덕용(金德鏞)을 초빙하여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 오산에서 신식 교육을 하는 소학교 과정의 학교 강명의숙을 세우고 산수, 수신, 역사, 지리, 체조를 가르쳤고, 그해 12월에는 중학교 과정인 오산학교를 세우고 학생 7명을 처음 받아들여 개교했다. 1908년에는 오산학교에 학생들이 모여 3개 반으로 편성되었고, 정주군 출신의 춘원 이광수가 오산중학교의 교사로 초빙되어 축구, 야구, 테니스, 배구 등을 지역에 처음 소개하였다. 방응모는 어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학교에 입학해 신학문을 접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0페이지&amp;lt;/ref&amp;gt; 그는 이승훈과 의기투합해 민립 대학을 세우는 운동을 추진했지만 조선총독부 평안북도청 학무국에서 승인을 거부하여, 대학 설립에 실패했다.&lt;br /&gt;
&lt;br /&gt;
=== 언론, 기업 활동 ===&lt;br /&gt;
==== 계몽 활동과 언론 활동 ====&lt;br /&gt;
1915년부터 1924년 방응모는 지역 지식인들, 유학파 청년, 계몽 청년들이 모여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하는데 참여했고, 민립대학기성회 평안북도지부에서 활동하면서 민립대학기성회 중앙회 중앙위원 조만식 등과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언변과 용모가 되었던 그의 여관에도 손님들이 몰렸고, 그가 &amp;quot;2백원도 좋고 5백원도 좋다며 보태달라&amp;lt;ref name=&amp;quot;fsfs87&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7페이지&amp;lt;/ref&amp;gt;&amp;quot;고 하면 기부금을 내는 이들이 있었다. 대신 하룻밤을 의탁하려고 그의 여관을 찾은 이들에게 무료 숙식을 제공하기도 했다.&amp;lt;ref name=&amp;quot;fsfs87&amp;quot;/&amp;gt; 1919년 정주에서 3.1 만세 운동이 벌어지자, 그도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형사들의 눈을 피해 방응모는 만세운동을 하다 재빨리 몸을 피해 화를 면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8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1922년 6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인수하여 분국장에 취임했다. 6월 9일에는 정주군 지역 체육행사로 테니스 대회를 개최하였다. 그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경영하는 동시에 그는 농촌 계몽운동 등에 적극 투신하여 인망을 쌓았다. 처음 몇번은 친구 전우현의 자금을 빌려 부족분을 메우기도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02페이지&amp;lt;/ref&amp;gt; 한다. 1922년 6월 19일&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96페이지&amp;lt;/ref&amp;gt; 동아일보 본사를 설득하여 정주분국을 동아일보사 정주지국으로 승격시켰다. 동아일보사 지부장 재직 시 그는 전우현과 함께 의기투합하여 민립 대학 설립 자금과 농촌진흥회 회원의 여비와 회비를 염출하기 위한 목적 및 당시 교사도 없이 난관에 처했던 오산학교의 재개교를 위한 &amp;quot;오산학교의 부흥 운동을 목표로 한 재단법인 촉성 기금 마련&amp;quot; 등을 계획했다. 총독부의 인허가 거부로 실패한 대학 설립 자금은 고스란히 오산학교의 부활과 복교 자금으로 투입되었다. 1920년 1월에 경성형무소에서 가석방된 조만식은 이승훈을 만났고, 다시 조만식이 오산학교를 맡으면서 학교는 다시 정상 운영되었다.&lt;br /&gt;
&lt;br /&gt;
1923년 동아일보 정주군 분국이 지국으로 승격되자 정주 지국장으로 동아일보 정주지국을 경영하였고, 같은 해 7월 여성들의 사회참여와 평등권 신장을 위한 여자교육회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이후 대규모 수해가 나자, 정주군 수해구제회를 결성하여 봉사활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1923년 4월 조만식·송진우·안재홍·김성수 등의 주도로 민간 자본으로 대학교 설립을 추진하기 위한 조직인 조선민립대학기성회가 결성되자, 방응모는 민립대학 기성회에 참여하여 민립대학기성회 정주군준비회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5월에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정주지방지부가 설립되자 기성회 정주지부 상무위원을 맡았다.&lt;br /&gt;
&lt;br /&gt;
==== 광업 경영과 조선일보 입사 ====&lt;br /&gt;
1924년 봄 오산학교 교감으로 있던 전우현이 방응모와도 안면이 있던 금광 채굴업자 두 명을 데리고 그를 찾아왔다. 그들은 자신들이 봐 둔 산이 있다고 방응모에게 소개했다. 그는 선천군의 지역 유지이자 최창학의 친구이며, 그가 동아일보 지국장으로 알게 된 이봉찬을 찾아갔다. 한학자로 알고 있던 그가 금광 투자를 제의하자 &amp;quot;한문이라면 빼지 않고 알려고 드는 한학 훈도가 어떻게 금광을&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16페이지&amp;lt;/ref&amp;gt;&amp;quot; 하느냐 하였지만, 이봉찬은 그에게 금광, 광산에 대한 지식을 알려주었다. 이봉찬은 그에게 광산 지식을 알려주며 최창학의 소유지 중 폐광을 빌리는 법을 알려주었다. 방응모의 됨됨이에 감복한 듯, 그의 수많은 질문에 적잖은 충고를 자임해주었다.&amp;lt;ref name=&amp;quot;fsfs117&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5페이지&amp;lt;/ref&amp;gt; 이봉찬은 최창학에게 방응모를 소개하는 편지를 수차례에 걸쳐 보내주었다.&amp;lt;ref name=&amp;quot;fsfs117&amp;quot;/&amp;gt; 이봉찬은 방응모의 친구들이 봐 둔 갱도를 임대받도록 도와주었다. 이봉찬은 방응모의 한학 실력과 사람됨을 알아보고 있어, 자금을 쾌히 빌려주었다.&amp;lt;ref name=&amp;quot;fsfs117&amp;quot;/&amp;gt;&lt;br /&gt;
&lt;br /&gt;
이후 광산업에 뛰어들어 1924년 여름 압록강변의 최창학 소유 폐금광인 평안북도 삭주군 외남면 교동 다릿골의의 삭주 교동광업소를 찾아가 10미터 정도 땅을 파고 금맥을 발견했다. 바로 삭주 교동광업소를 인수, 경영을 확대하였다. 이때 만난 동업자의 딸이자 친구 전우현의 조카딸인 '''이인숙(李仁淑)'''을 만났다. 본처 승계도가 두 아들을 잃고 복부 수술이 잘못되어 아이를 얻지 못하게 되자 방응모에게도 수많은 중매가 들어왔다. 자식들을 병으로 잃은 것이 자신의 불찰이라고 본 승계도는 그에게 작은 부인이라도 들이자는 말을 꺼내기도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18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26년 방응모에게 광산 사업을 제안했던 두 친구가 손을 털고 나갔고, 그의 가족은 돈이 없어 쌀 대신 좁쌀로 좁쌀죽을 먹으며 연명해야 했다. 방응모는 정주군에 사는 비슷한 또래의 먼 친척 방상진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고, 방상진과 일꾼 대여섯 명, 그리고 후처 이인숙의 친정 쪽에서 얻어온 토지문서를 얻어 자금을 마련, 삭주 다릿골 광산으로 가서 다시 금광을 채굴했다. 금맥은 쉽게 나오지 않았고, 출몰하는 마적떼에게 소와 기구를 약탈당했다. 동시에 빚쟁이들의 독촉에 시달렸으나 '''''1926년 7월 지하 300m 지점에서 금맥을 확보했다. 이후 연간 300kg의 금을 생산, 그는 굴지의 광산업자로''''' 성장해 금맥을 찾아 벼락부자가 되었다. 그는 방상진을 교동금광 총감독에 맡겼다. 이때 그는 최창학에게 임대료에 이자를 쳐서 보내주었다.&lt;br /&gt;
&lt;br /&gt;
그때까지 첫 부인 승계도가 두부를 팔아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미국산 포드 T형자동차'''''를 타고 금의환향했다. 1928년 방응모는 자신의 아호인 춘해를 딴 춘해 장학회를 만들고 장학생들의 모임인 이심회를 만든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48페이지&amp;lt;/ref&amp;gt; 그 해에 방응모는 교동지역에 파출소 지소를 유치하였고, 마적단에 시달리던 주민들은 그의 송덕비를 세우기도 했다. '''''1928년에 그는 의정부 직동, 흥선대원군의 별장이 있던 곳 바로 뒤에 위치한 건물을 매입'''''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한용운]], 홍명희를 자주 초대했다.&lt;br /&gt;
&lt;br /&gt;
'''''1932년 방응모는 교동광산을 135만원이란 거액에 일본 중외광업주식회사에 매각'''''했다. 그 뒤 1932년 6월부터 조선일보 영업국장으로 활동하다 '''1933년 3월 [[조선일보]]의 경영권을 인수'''하여 부사장에 취임하였다.&lt;br /&gt;
&lt;br /&gt;
그는 교동광업소를 운영하며 모은 재력을 바탕으로 부사장 재직 중 [[조선일보]]의 대주주가 되었으며, 1933년 7월 8대 사주 조만식으로부터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제9대 [[조선일보]] 사주로 취임, 활동했다.&amp;lt;ref&amp;gt;조선일보는 1932년 7월에 조만식을 사장으로 영입했지만, 조만식은 거의 평생을 평양에서 살아왔던데다 서울에서 활동하기에는 적응을 잘하지 못했다. 조만식은 신문사 경영난과 지역감정의 혹독한 시련을 받은 채 9개월만에 퇴사했다. 그리고 조만식 후임으로 1933년, 방응모를 사장으로 추대하기에 이르렀다.&amp;lt;/ref&amp;gt;&amp;lt;ref&amp;gt;《한국사 시민강좌 제47집, 대표적 독립운동가 12인》,일조각. p145&amp;lt;/ref&amp;gt; 방응모 취임 이후의 초대 부사장은 이광수, 주필은 서춘이었다.&lt;br /&gt;
&lt;br /&gt;
=== 언론, 사업 활동 ===&lt;br /&gt;
==== 사회사업과 조선일보 인수 계획 ====&lt;br /&gt;
금광 사업에 성공한 그는 영림, 조림 사업에도 투자하였다. 방응모는 배우자 승계도에게서 더 이상 아들을 얻지 못하자 첩 이인숙을 통해 아들을 얻으려고 하였다. 이인숙은 아들을 낳았으나 이 아들은 곧 사망하였다. 아들을 잃은 이인숙은 승계도의 도움을 받다가, 그해 6월 방응모가 있는 광산으로 가 생활하였다'''. 승계도와 이인숙을 통해 자녀를 얻지못하자 42세가 되던 해인 1924년 친형인 방응곤의 둘째 아들 방재윤을 양자로 입양시켰다.'''&lt;br /&gt;
&lt;br /&gt;
[[파일:방응모장학생.jpg|섬네일|160px|오른쪽|방응모와 그의 장학금을 받던 학생들. 가운데 앉은 이가 방응모이고, 서있는 이들 중 왼쪽에서 두 번째는 방응모의 양자 방재윤.]]&lt;br /&gt;
&lt;br /&gt;
1930년 배영옥과 결혼하여 딸 방재숙을 얻었다. 1932년 광산업을 정리하였고 언론사업을 비롯하여 육영사업과 조림 및 간척사업 등을 벌였다. 또한 고아원과 사회복지단체에 후원금을 지원하면서 인망을 얻기도 했다. 삭주 지역에서는 그의 송덕비가 세워지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932년 그는 수원군 팔탄면 노하리 일대의 갯벌에 일본인이 수차례 뚝을 쌓다가 실패했다는 정보를 얻고 임삼진을 통해 조선총독부에 허가를 요청하였다.&amp;lt;ref name=&amp;quot;pp186&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86페이지&amp;lt;/ref&amp;gt; 간척 사업은 이후 1935년부터 시작되었지만 1932년부터 은밀히 착수되어 왔다.&amp;lt;ref name=&amp;quot;pp186&amp;quot;/&amp;gt;&lt;br /&gt;
&lt;br /&gt;
1933년 무렵 방응모가 [[조선일보]] 인수에 나서기 전부터 그는 [[한용운]]을 위한 일이라면 돈을 아끼지 않고 지출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성북동 222번지 언덕에 만해를 위해 기와집 한 채를 지어주었는데 심우장(尋牛莊)이 그것이다. 또한 만해가 일제의 배급을 거부해 생활이 어렵게 되자 만해에게 생활비를 지급했던 방응모는 만해가 병석에 누운 1944년에는 치료비를 지원해주기도 했다.&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6/0000043262?sid=103 만해가 일송 선생 5일장 치른 사연]&amp;lt;/ref&amp;gt; 그 외에도 방응모는 만해 한용운·벽초 홍명희 등과 함께 새해가 되면 백천온천에도 같이 다녀올 정도로 두터운 친분을 맺었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1&amp;quot;&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8/07/2007080700002.html 만해와 계초 방응모 선생]&amp;lt;/ref&amp;gt; 1935년 7월에는 경성 태평로1가에 새 사옥을 준공하는 한편, 출판부를 신설해 〈조광〉(1935. 10)·〈여성〉(1936. 6)·〈소년〉(1937. 4) 등의 월간 잡지를 차례로 창간했으며&amp;lt;ref name=&amp;quot;dam1&amp;quot; /&amp;gt; 운영하였다. 한편 [[1932년]] 교동 광업소를 정리하여 매각하였다.&lt;br /&gt;
&lt;br /&gt;
방응모의 광산 매각을 일본 정부 측에 알리고 다리를 놓은 것은 고일청(高一淸)이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84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32년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사건으로 체포된 [[안창호]]의 사면 탄원과 보석을 위해 노력하였다. 안창호가 윤봉길을 사주했다는 증거가 없으며 그가 테러행위를 지시했다는 증거 자료나 문건이 없다는 것이 방응모의 안창호 탄원 이유였다. 그러나 총독부 경무국장은 그의 안창호 석방 제안을 정중히 거절한다. 1936년 동방문화학원(뒤에 숭문중학교·고등학교 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1939년 9월에는〈조선일보〉의 조간 1회, 석간 2회의 1일 3회 발행을 시작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인수와 경영 ====&lt;br /&gt;
1933년 1월 16일 그는 정식으로 주식회사 [[조선일보]]사를 창립, 1월 18일에 발표된 창립 취지서에는 창립위원장 방응모, 창립발기인 방응모, 조만식, 고일청 외 등이 참여했다. 일단 그는 조만식을 사장으로 임명하고 자신은 부사장으로 있다가, 그해 3월 13일 다시 부사장에 취임했다. 4월 25일 편집인 겸 발행인이 되고, 4월 29일에는 조선일보의 조간, 석간제 발행을 부활, 확정시켰다. 1933년 7월 10일 총독부로부터 조선일보사의 법인 등록 승인을 얻어냈다. 7월 10일 조만식의 사퇴로, [[조선일보]]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다. 1933년 그는 자신의 아호를 춘해에서 계초로 바꾸었다. 그는 유능한 문인, 필진의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 상금 1천 원을 걸고 작가를 영입하였다.&lt;br /&gt;
&lt;br /&gt;
1934년 3월 25일 이광수를 비롯하여 서춘, 김동진, 함상훈, 신태익 등을 [[조선일보]]로 영입해 왔다. 그 외에도 정주군 출신 언론인, 작가들이 조선일보로 많이 오게 되었다. 이후 동아일보와 갈등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이광수가 조선일보로 옮겨와 부사장직에서 9개월 근무했다. 당시 조선일보 내부에서는 문모 라는 이가 이광수의 등장으로 자신의 입지 약화를 우려해 오랫동안 이광수를 내보내려 흉계를 꾸몄다고 한다. 이광수는 1934년 5월 25일자로 돌연 사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65페이지&amp;lt;/ref&amp;gt; 문모는 그에게 오히려 잘 됐다는 식으로 말하다가 방응모에게 호되게 혼이 났다. 그리고 문모로 하여금 즉시 금강산에 들어가 이광수를 다시 데려오게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65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이광수는 아들 봉근(당시 8살)의 사망 등으로 실의에 빠졌고, 1935년에 가서야 이광수를 조선일보 고문이자 필진으로 재영입하게 됐다.&lt;br /&gt;
&lt;br /&gt;
==== 동방문화학원 재단 설립 ====&lt;br /&gt;
방응모는 1936년 방농장의 소유권을 기본 자산으로 하는 재단법인 동방문화학원(東邦文化學院)을 설립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6페이지&amp;lt;/ref&amp;gt; 동방문화학원은 학교 법인으로 인가된 재단 법인으로, 그뒤 고계학원과 인연을 가지고 1936년부터는 보성고등보통학교를 후견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 분리되었다. 그뒤 방응모 장학생인 서중회 회원들을 위한 방응모 장학사업을 주관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7페이지&amp;lt;/ref&amp;gt;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태평로 구 조선일보 사옥 안에 동방문화학원의 간판을 달고 조광 잡지를 계속 발행하는 조광사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7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일제 강점기 후반 ===&lt;br /&gt;
==== 중일 전쟁 전후 ====&lt;br /&gt;
중일전쟁 개전 직후인 1937년 7월 11일에 열린 [[조선일보]] 간부회의에서 주필 서춘이 '일본군, 중국군, 장개석씨'등으로 쓰던 용어를 '아군, 황군, 지나, 장개석'으로 고치고 일본 국민의 입장에서 논설을 쓸 것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편집국장 김형원과 영업국장 김광수가 적극 반대를 하기도 했으나, 방응모는 '일장기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이미 몇 십만 원의 손해를 보았을 뿐 아니라 [[3.1 운동]] 때처럼 신문이 민중을 지도할 수 없다'면서 서춘의 입장을 지지했다. 한편으로 방응모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된 [[안창호]]를 [[조선일보]]에 영입하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안창호는 옥중에서 얻은 간질환과 폐질환 등으로 고생했고, 진료비 등을 수시로 지원하고 문병했음에도 출옥후 얼마 뒤에 사망한다.&lt;br /&gt;
&lt;br /&gt;
1933년 이심회(以心會：후에 序中會, 방응모장학회 등으로 명칭이 바뀜)라는 장학회를 만들어 국내 대학생과 해외유학생들에게 학자금을 지급하기도 했으며, 재단법인 동방문화학원(東方文化學院：지금의 숭문중·고등학교 전신)의 이사장직을 맡기도 했다.&amp;lt;ref name=&amp;quot;dam1&amp;quot; /&amp;gt; 또한 자신의 막대한 재원을 들여 1936년부터 함경남도 영흥군 일대에 당시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대단위 조림사업을 벌였으며, 그 전 해인 1935년부터는 경기도 수원군 팔탄면 일대에서 만 2년간에 걸친 간척사업을 벌이기도 했다.&amp;lt;ref name=&amp;quot;dam1&amp;quot; /&amp;gt;&lt;br /&gt;
&lt;br /&gt;
1937년 12월 24일 [[안창호]]는 병보석 판정을 받고 재판소가 지정한 현 서울대학교병원인 경성제국대학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안창호의 입원 중에 시중을 든 사람으로는 안창호의 외조카 김순원과 청년 박정호 두 사람이었고, 나중에는 이응준 장군의 부인 이정희가 끝까지 지성껏 간호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7페이지&amp;lt;/ref&amp;gt; [[안창호]]는 병상에서 병원비 문제로도 고초를 겪었다. 이 때문에 조만식은 일본 경찰로부터 안창호의 병원비를 대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음에도, &amp;quot;내가 먹고 살면서 그 선생을 돌보지 않을 수 없다&amp;quot;며 완강히 거절하고 안창호를 도왔다고 한다. 안창호의 간호를 같이 도와주던 이응준 장군 부인 이정희는 10일마다 계산되어 나오는 병원 입원비로 안창호 선생이 괴로워하는 표정을 지켜볼수 없었다고 진술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8페이지&amp;lt;/ref&amp;gt; 방응모는 5백원의 수표 한 장을 안창호에게 전달하였다. 50일간의 입원비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9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안창호]]는 1938년 3월 10일 밤 12시 경성제국대학 병원에서 운명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폐간 사건 ====&lt;br /&gt;
일본의 전쟁이 격화되면서 조선총독부 공보국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1940년에 강제로 폐간조치 했다. 광산을 팔아서 자신의 모든 것을 조선일보에 바쳤던 방응모는 큰 절망과 좌절을 느껴야 했다. [[한용운]]은 ‘신문이 폐간되다/ 붓이 꺾이어 모든 일이 끝나니…’로 시작하는 시를 지어 방응모를 위로했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1&amp;quot; /&amp;gt;&amp;lt;ref&amp;gt;붓이 꺾이어 모든 일 끝나니 이제는 재갈 물린 사람들 뿔뿔이 흩어지고 아, 쓸쓸하고 쓸쓸한지고 망국 서울의 가을날 한강의 물도 흐느끼느니 울음 삼켜 흐느끼며 연지를 외면한 채 바다 향해 흐르느니&amp;lt;/ref&amp;gt; 동아일보에는 김성수 외에도 장덕수와 송진우가 있었지만 그에게는 조선일보 폐간을 막기 위해 총독부와 교섭할 인물도 없었다.&lt;br /&gt;
&lt;br /&gt;
1938년 2월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선 내 일간신문 25개사로 조직된 조선춘추회의 창립에 창립발기인으로 참가했고, 조선춘추회 간사로 활동했다. 같은 해 7월 “국민정신을 총동원하고 내선일체 전 능력을 발휘하여 국책 수행에 협력하여 성전(聖戰)의 궁극적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조직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에 참여했고, 그날 결성된 경성연맹 창립총회에서 상담역을 맡았다. 9월부터 조선방공협회 경기도연합지부 평의원을 지냈다. 10월에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주최한 비상시 국민생활 개선을 위한 제1회 생활개선위원회에서 제2부(의례와 사회풍조 쇄신부)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그러나 1938년 10월부터 조선총독부는 조선일보의 신문용지를 검열, 통제하기 시작했다.&lt;br /&gt;
&lt;br /&gt;
1940년 5월 조선총독부 총독 미나미 지로가 방송담화로 창씨개명을 권고했다. 그러나 그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성씨를 이제 와서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며 창씨개명은 완강하게 거절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조선일보에 트집이 잡힐 일이 나타나지 않자 총독부는 전국 면사무소에 조선일보 신문 구독을 거절하도록 명령을 내렸고, 동시에 조선말을 쓰는 민원인에게는 일을 처리해주지 말도록 하게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3페이지&amp;lt;/ref&amp;gt; 조선총독부는 송진우의 예금통장을 문제삼았다. 송진우 명의의 은행저금이 동아일보의 8백여 개의 지국과 분국을 통해 모금된 독립운동 자금이라며, 그리고 동아일보 간부들이 백운장이라는 요정에서 회식을 한 것을 김성수 집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려 했다는 등의 이유로 백관수 동아일보 사장을 전격 구속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3~374페이지&amp;lt;/ref&amp;gt; 동아일보는 백관수가 구속된지 10일 만에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동아일보 중역회의를 열고 폐간신청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4페이지&amp;lt;/ref&amp;gt; 총독부는 조선일보에도 자진 폐간을 권고했고, 1940년 8월 9일 편집회의를 주관, 8월 10일 조선일보의 폐간계를 내고, 8월 10일자로 폐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5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잡지 발행 활동 ====&lt;br /&gt;
신문 강제 폐간 뒤 방응모는 간판을 조광사로 바꿔 걸고, 사옥은 동방흥업주식회사로 등기를 변경해서 유지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1페이지&amp;lt;/ref&amp;gt; 이후 그는 조광 잡지 발행에 전념했다. 1943년 8월 경 일본 중앙대학의 예과를 마친 방일영이 입사&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1페이지&amp;lt;/ref&amp;gt;, 필진으로 참여했다. [[조선일보]]가 폐간된 후에도 방응모는 벽초 홍명희 부자에게 지속적으로 생활비를 대주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4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4년 6월 29일 만해 [[한용운]]이 사망했다. 그는 심우장을 찾아가 3백원을 내놓았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5페이지&amp;lt;/ref&amp;gt;당시 쌀 10가마가 100원이었지만, 심우장은 당장 현금 1원이 없었는데 거액이라서 놀랐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6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광복 이후 언론 및 정치활동 ===&lt;br /&gt;
==== 광복 직후 ====&lt;br /&gt;
1945년 8.15 광복 후에는 8월 말과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朝鮮在外戰災同胞救濟會) 고문과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9월 초 [[안재홍]] 등이 좌경화되는 건준체제에 반발하여 건준을 탈퇴하자 방응모 역시 건준을 탈퇴하였다.&lt;br /&gt;
&lt;br /&gt;
9월 2일 미군정이 주둔하자, 방응모는 윤전기를 찾기 위해 폐간 당시의 증빙서류를 미 군정청에 제시하였으나 소식이 없었다. 총독부는 조선일보 폐간 직후 인수한 윤전기를 경성일보사에 옮겨서 설치했다. 그는 동방문화재단 외 4개 사업소를 적산으로 파악한 미군정을 설득하고, 사옥 문제도 해결하였다.&lt;br /&gt;
&lt;br /&gt;
10월 1일 조선일보 편집위원회를 구성하고, 신문 복간 운동을 추진했다. 조선총독부의 폐간 지시 당시 의정부로 옮겨놓은 일부 활자 자모음이 잘 보관되어, 그해 11월 23일 조선일보를 복간시키고, 서울신문사 사옥에서 조선일보 복간호를 간행하였다. 이후 조선사회문제대책중앙협의회 중앙위원을 거쳐 10월 16일 이승만 등의 주도로 독립촉성중앙회가 결성되자 독촉에 가입하였다.&lt;br /&gt;
&lt;br /&gt;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이 귀국하자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에 입당했다. 12월 [[안재홍]]의 추천으로 한국독립당의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출되어 3~4개월 동안 활동했다.&amp;lt;ref&amp;gt;일각에서는 방응모가 '한독당 재무부장으로 지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1947년부터 한독당 재무부장을 맡은 신창균이 전면 부정했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47/0000002626?sid=102 백범 비서와 '진짜' 한독당 재정부장의 육성증언. 참고.]&amp;lt;/ref&amp;gt; 그 뒤 대한국민총회 발기인, 대한독립애국금헌성회 발기인 등으로 활동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복간 및 군정기 활동 ====&lt;br /&gt;
[[파일:Kim Gu (1947).jpg|섬네일|140px|오른쪽|임시정부 각주이자 한독당 당수 [[김구]]. 방응모는 [[한국독립당]]의 중앙상무위원과 당 재정부장으로 참여했고, [[김구]]의 반탁운동과 3의사 유해 봉환 때 자금을 댔다.]]&lt;br /&gt;
&lt;br /&gt;
[[11월]] [[조선일보]]사를 복간시켰다. 그러나 한동안 조선일보의 인쇄는 [[서울신문|서울신문사]]에서 간행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1945년]]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추념대회에 참여하였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2&amp;quot;&amp;gt;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13&amp;lt;/ref&amp;gt; 순국선열추념대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2&amp;quot; /&amp;gt;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참여,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이 되었다.&amp;lt;ref&amp;gt;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55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6년 2월 26일 서울신문사 공무국 종업원들이 조선일보의 인쇄를 거부해버렸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436페이지&amp;lt;/ref&amp;gt; 그동안 묵시적으로 방해가 은근히 있었다. 표면상의 문제는 임금 문제이나 내용상으로는 조선일보에 대한 조선공산당의 시위의 일종이었다. 사흘간의 교섭 끝에 2월 28일에 가서야 26일자와 27일자를 소급해서 인쇄하여 신문을 한꺼번에 발행하였다. 그러나 3월 1일과 2일에 또다시 인쇄를 거부당해 결국 휴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436페이지&amp;lt;/ref&amp;gt; 조선일보를 경성일보사로 옮겨서 인쇄하기로 하고 3월 5일자로 사고로 독자에게 알렸다.&lt;br /&gt;
&lt;br /&gt;
[[1946년]] [[2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회장에 선출되었고, 3월 1일 미군정은 방응모에게 경성일보사 관리인으로 위촉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437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용지난으로 한동안 신문 발행에 어려움을 겪었다.&lt;br /&gt;
&lt;br /&gt;
[[4월 29일]] [[김구]], [[김창숙]], [[김성수 (언론인)|김성수]], [[오세창]] 등과 함께 서울운동장에서 [[윤봉길]]의사 추모회의 창립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amp;lt;ref&amp;gt;&amp;quot;故尹奉吉義士의 記念式 오늘, 發起人會 열고 準備&amp;quot;, 동아일보 1946년 4월 23일자 2면, 사회면&amp;lt;/ref&amp;gt; 그해 [[5월]] 조선공업구락부 고문에 위촉되었다.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民族統一總本部) 10인협의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6월 15일]] 오후 5시 40분 [[서울역]]에 마중나가 [[서울역]]에 도착한 삼의사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 동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 협의원에 지명되고, [[1946년]] [[8월]]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8월 25일에는 [[한국독립당]] 중앙상무위원의 한 사람에 선출되었고&amp;lt;ref&amp;gt;&amp;quot;金九氏飜意 韓獨黨中委閉會&amp;quot;, 동아일보 1946년 8월 25일자 1면, 정치면&amp;lt;/ref&amp;gt; [[1946년]] [[9월]] 독립촉성국민회 총무부장에 선출되었다.&lt;br /&gt;
&lt;br /&gt;
1945년 광복 직후 서기원이 그를 찾아왔다. 서기원은 그때 경성농상실천학교의 동창회로부터 이 학교의 교장이 되어 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이다. 방응모는 서기원의 제의를 받아들여 [[1946년]] [[8월 28일]] 동방문화학원 이사장으로 숭문상업학교를 인수, 재단 이사장이 되었다. 후일 방응모가 6.25 전쟁 중에 납북된 후 동방문화학원과 숭문중,고교의 재단은 최용진이 운영하다가 다시 [[1978년]]에 [[방일영]]에게 인수되었다.&lt;br /&gt;
&lt;br /&gt;
1947년 1월 21일 제5회 창립위원회를 본사에서 개최하고 2월 23일 주식회사 조선일보사 주주창립총회를 열고 대표이사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공동투자 경영자로 참여시킨 전무 이종민과의 알력이 발생했다. 이종민과의 갈등이 심화되자 그해 8월 3일 방응모는 일단 사직서를 제출했다. 1947년 8월 10일 [[풍문여고]] 강당에서 개최된 한인신문기자협회에 참석, [[민족청년단]]에서 언론계 공로자로 방응모, 김성수, 설의식을 지정하여 상을 시상받았다.&amp;lt;ref&amp;gt;&amp;quot;朝鮮 新聞記者協會&amp;quot;, 동아일보 1947년 8월 10일자 2면, 사회면&amp;lt;/ref&amp;gt; 9월 13일의 임시 주주총회가 긴급 소집되어 회사 운영 문제가 논의되고, 이때 취체역을 재선임할 때 다시 선임되었다. 그러나 이때 전무 이종민은 재선임에서 제외되었다.&lt;br /&gt;
&lt;br /&gt;
==== 김구와의 결별과 만년 ====&lt;br /&gt;
이후 [[한국독립당]] 중앙상무위원&amp;lt;ref&amp;gt;[http://db.history.go.kr/url.jsp?ID=dh_003_1946_08_24_0150 한국사데이터베이스]&amp;lt;/ref&amp;gt;, 당 재정부장 등을 맡기도 했으나, [[1948년]] [[1월]] 이후 [[김구]]의 노선 변경과 함께 그를 지지하던 세력이 떨어져 나가서 [[조선일보]]도 김구에게서 등을 돌리게 되었다.&amp;lt;ref name=&amp;quot;조선11&amp;quot;&amp;gt;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68~70쪽.&amp;lt;/ref&amp;gt; 그러나 김구와의 결별이 괴로웠던지 방응모도 직접 나서서 &amp;lt;김구선생의 의견에 대한 우리의 취할바 태도&amp;gt;라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amp;lt;ref name=&amp;quot;조선11&amp;quot;/&amp;gt;&lt;br /&gt;
&lt;br /&gt;
[[1949년]] [[조소앙]]이 결성한 [[사회민주주의]]성향 정당인 [[사회당 (대한민국, 1948년)|사회당]]에 입당해 동당 문교정책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amp;lt;ref&amp;gt;[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9070600209201019&amp;amp;editNo=1&amp;amp;printCount=1&amp;amp;publishDate=1949-07-06&amp;amp;officeId=00020&amp;amp;pageNo=1&amp;amp;printNo=7956&amp;amp;publishType=00020 1949년 7월 6일자 동아일보]{{깨진 링크|url=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9070600209201019&amp;amp;editNo=1&amp;amp;printCount=1&amp;amp;publishDate=1949-07-06&amp;amp;officeId=00020&amp;amp;pageNo=1&amp;amp;printNo=7956&amp;amp;publishType=00020 }}&amp;lt;/ref&amp;gt; 이듬해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경기도]] 양주군에 출마했으나 차점자로 낙선하였다.&amp;lt;ref&amp;gt;[http://db.history.go.kr/url.jsp?ID=NIKH.DB-dh_017_1950_06_01_0030 한국사데이터베이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9년 의정부 가능동 별장에 심은 뽕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랐다. 승계도의 친척 승원호에 의하면 &amp;quot;할아버지(방응모)는 사람들을 시켜 뽕나무를 2년간 키우게 했습니다. 탐스럽게 뽕나무가 자라니까 이번에는 직조 기계를 들여 직조 공장을 세우겠다고 하셨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11페이지&amp;lt;/ref&amp;gt;&amp;quot; 한다. 그러나 그의 방직공장 설립 계획은 6.25 전쟁으로 무산되고 만다.&lt;br /&gt;
==== 납북과 최후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 납북 후 행적은 &amp;quot;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amp;quot;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amp;lt;ref name=&amp;quot;김장&amp;quot;/&amp;gt; [[1950년]] [[8월]]경 [[개성]] 송악산 부근에서 미군의 폭격에 희생되었고 심한 폭격으로 시신을 찾을 수 없어 묘도 만들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다.&amp;lt;ref&amp;gt;{{뉴스 인용&lt;br /&gt;
 |url          = http://www.minjog21.com/news/articleView.html?idxno=1140&lt;br /&gt;
 |제목       = &amp;quot;누워서도 남쪽하늘만 보십니다&amp;quot; - 평양시 신미리 재북통협 특설묘지&lt;br /&gt;
 |출판사    = 민족21&lt;br /&gt;
 |저자       = 신준영&lt;br /&gt;
 |날짜       = 2002-07-01&lt;br /&gt;
 |확인날짜 = 2008-05-15&lt;br /&gt;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40420015541/http://www.minjog21.com/news/articleView.html?idxno=1140#&lt;br /&gt;
 |보존날짜 = 2014-04-20&lt;br /&gt;
 |url-status = dead&lt;br /&gt;
}}&amp;lt;/ref&amp;gt;&amp;lt;ref&amp;gt;[http://www.minjog21.com/news/articleView.html?idxno=686 민족21&amp;lt;!-- 봇이 따온 제목 --&amp;gt;]{{깨진 링크|url=http://www.minjog21.com/news/articleView.html?idxno=686 }}&amp;lt;/ref&amp;gt; 남한에서는 [[1955년]] [[7월 7일]] 생사불명기간 만료로 인해 실종 처리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주변에서 피신하라고 권했지만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느냐'며 완강하게 버티다가 1950년 [[7월 6일]] [[경기도]] [[양주군]] 시둔면 가능리(현, [[의정부시]] [[가능동]]) 자택에 들이닥친 [[조선인민군]]에 의해 끌려갔다.&lt;br /&gt;
&lt;br /&gt;
=== 사후 ===&lt;br /&gt;
[[서울]] 종로에 있던 양자 방재윤의 두 아들 [[방일영]]과 [[방우영]]은 방응모의 첩 이인숙이 찾아가 피신하라고 권고하여 황급히 피신했다. &lt;br /&gt;
&lt;br /&gt;
[[9월 28일]] [[개성시]] 북쪽을 지나 [[황해남도]] [[서흥군]]에서 트럭으로 강제 북송되었다. 이후 9월 28일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lt;br /&gt;
&lt;br /&gt;
7월 6일 그의 행방불명처리가 되고, 방응모의 사후에도 [[조선일보]]는 그의 명의로 발행되었다. 1952년 4월 28일 조선일보는 발행인겸 편집인을 장기영으로, 인쇄인을 방일영으로, 방응모는 명예사장으로 명의변경하여 휴전 후 계속 발행하게 되었다. 1954년 4월 30일 제8회 조선일보 정기주주총회에서 장기영 사장이 사퇴하면서, 명예사장 방응모가 사장으로 추대되고, 발행인 겸 대표취체역에 방일영이 선임되었다. 이후 실종 후 [[1959년]]에 법적으로 사망 처리되었다. 그리고 [[1970년]]까지는 조선일보는 그의 이름으로 발행되었다.&lt;br /&gt;
&lt;br /&gt;
[[1970년]] [[2월 19일]] 조선일보 정기주주총회에서 방응모 이사를 사퇴 수리하였다. 그의 피폭사망 사실은 1970년대 이후 탈북자들을 통해 대한민국에 소개되었다.&lt;br /&gt;
&lt;br /&gt;
== 친일행위 의혹 ==&lt;br /&gt;
=== 일제 전시체제기 활동 ===&lt;br /&gt;
일제 강점기 말기 언론인으로서 총독부체제에 협력한 기록과 활동이 다수 기록이 있다. 1933년 3월 [[조선일보]] 경영권을 인수하고 부사장직에 취임했을 당시 같은 달에 고사기관총 구입비용 1600원을 군에 헌납하였다. 그는 1935년 친일 잡지 《조광 (잡지)(朝光)》을 창간하였고, 1937년에는 경성방송국 제2방송에 출연하여 일제가 중국의 베일을 절멸케하여 극동평화를 지키려고 한다는 강연을 하였다. 1940년대부터 조광에 집중적으로 친일 논설을 기고하고 시국 강연에 참여하여 전쟁 지원을 독려했다. 1942년 6월에는 '징병령 실시에 일층 더 감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글을 써서 조광에 발표하였다. 애국금차회(1937),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1938), 임전대책협의회(1941), 조선임전보국단(1941) 등 대표적인 친일 단체의 회원에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그는 이런 행적으로 인해 해방정국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명단에 기록되어 있고,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해 발표한 &amp;lt;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amp;gt;에 모두 포함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lt;br /&gt;
&lt;br /&gt;
우리 [[조선일보]]는 다른 어떤 신문도 따라오지 못하는 확고한 신념에서 비국민적 행위를 단연 배격하여 종국까지 조선일보사가 이미 정해놓은 방침에 한뜻으로 매진한다.|원산에서의 순회 강연&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9478.html 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친일 다짐하다 시민에 봉변]《한겨레》2005-08-24 오후 06:13:18&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반민족행위 논란 ===&lt;br /&gt;
방응모를 친일파로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남아 있다. 조선일보 경영 이전에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방응모의 활동이 거의 없었고, 납북된 뒤 소식이 끊겨버린 까닭에 본인이 항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 동안의 행적만으로 친일파 여부를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방응모의 후손들이 영향력 있는 [[조선일보]] 언론사의 사주를 맡았기에 그의 입장에서 서술한 기록을 많이 남기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80년 발간된 그의 전기 《계초 방응모》(조선일보사) 등에는 '그가 민족주의적 선각자'로 묘사되고 있다. 방응모가 친일파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일부세력측은 그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논거로 드는 경우가 많이 있다.&amp;lt;ref&amp;gt;유석재, 계간 《유심》 (2004년 봄호) [http://yousim.buddhism.org/html/2004-spr/tamgu-yoo-seok-jae.htm 삭풍 속에 피어난 금란지교(金蘭之交) - 만해와 계초 방응모]&amp;lt;/ref&amp;gt;&amp;lt;ref&amp;gt;&amp;quot;일제 말기 계초는 시국강연에 나설 것과 창씨개명을 집요하게 강요받았으나 그때마다 묵묵부답으로 거부하며 소신을 지켰다.&amp;quot; 《조선일보》 (2001.3) 조선일보 사장열전 - 계초 방응모편, 《한겨레》 (2001.3.30) [http://www.njoyschool.net/news/article_view.asp?menu_code=s20202&amp;amp;no=1206 조선일보, 일장기를 신문제호 위에]&amp;lt;/ref&amp;gt;&lt;br /&gt;
또한 한국정토학회 고문이자 서울 정토사 주지였던 박설산(1918~2007)이 학도병에 끌려가기 직전인 1943년 12월 28일 밤 서울역에서 스스로 왼발을 선로에 올려 발가락을 절단해 징집을 기피하자 방응모는 만해와 함께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설산을 걱정하면서 입원 중 조선일보 기자를 통해 돈을 전달한 것은 물론 퇴원할 때 돈을 전달하고 뒤를 보살폈다고 한다.&amp;lt;ref&amp;gt;박설산 회고록 &amp;lt;뚜껑없는 조선역사책&amp;gt;(1994, 도서출판 삼장) p240~241&amp;lt;/ref&amp;gt;&lt;br /&gt;
&lt;br /&gt;
2010년 12월, 방응모 관계자들 및 조선일보측은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을 취소해달라'며 법원에 낸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amp;quot;1944년 조선항공업 창립발기인으로 활동한 부분에 대해 친일행위로 판단한 부분을 취소하지만 나머지 활동에 대해서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amp;quot;라고 판결했다. 그 이유인 즉 &amp;quot;방응모는 1933년 조선일보 사장으로 취임해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등으로 활동하며 친일활동을 벌였으며, 1937년 경성방송국 시국강연에서 일본제국이 극동평화를 확립시킬 것이라는 내용의 강연을 하고, 1938년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춘추회의 발기인 겸 간사로 활동하기도 했다&amp;lt;ref&amp;gt;[http://media.daum.net/breakingnews/politics/view.html?cateid=1002&amp;amp;newsid=20101222103319164&amp;amp;p=newsis 법원 &amp;quot;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친일파 맞다&amp;quot;]뉴시스 2010년 12월 22일&amp;lt;/ref&amp;gt;&amp;quot;는 것이다.&lt;br /&gt;
&lt;br /&gt;
2012년 1월 12일 서울고법 행정7부는 방 전 사장의 손자인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이 행정안전부를 상대로 낸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처분 취소 청구소송에서 ‘일제 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의 친일 행위 판정 조항에 비추어 방 전 사장에게 적용된 모두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민족적 지도자로서 비중이 큰 만큼 그로 인한 책임도 무거울 뿐 아니라 고난의 시기를 겪은 민족으로서 그 역사를 반성하자는 입장에 설 때, 방 전 사장의 여러 행태는 반민특별법에서 규정한 친일반민족행위의 유형에 속함을 부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1·2심 재판부는 방 전 사장이 자신이 운영하던 잡지 &amp;lt;조광&amp;gt;에 일제 침략전쟁에 동조하고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문예물과 일제 침략전쟁에 협력할 것을 주문하는 논문을 게재하는 등의 ‘친일’ 행위를 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또한, 2심 재판부는 일본의 전쟁 수행을 돕기 위해 설립된 군수 제조업체 ‘조선항공공업’의 발기인과 감사를 지낸 것은 “감사는 업무집행에 관여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기관으로, 방 전 사장이 이 회사를 운영했다고 볼 수 있다”는 이유로 친일이라고 판단했다.&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4565.html법원 ‘방응모 친일’ 2심서도 인정] 인터넷한겨레 2010년 12월 22일&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가족 관계 ==&lt;br /&gt;
* 아버지 : 방계준(方桂準)&lt;br /&gt;
* 어머니 : 온양 박씨&lt;br /&gt;
** 형 : 방응곤(方應坤)&lt;br /&gt;
** 배우자 : 승계도&lt;br /&gt;
*** 아들 2명 요절&lt;br /&gt;
** 배우자 : 이인숙(李仁淑, 1901년 ~ ?)&lt;br /&gt;
*** 아들 : 방재욱(方在旭, 1925년 ~ 1926년 9월)&lt;br /&gt;
** 배우자 : 배영옥(裵英玉)&lt;br /&gt;
*** 장녀 : 방재숙(方在淑)&lt;br /&gt;
** 배우자 : 노호용(盧鎬龍)&lt;br /&gt;
*** 장남 : 방재선(方在善, 1944년 ~)&lt;br /&gt;
*** 차남 : 방재효(方在孝, 1946년 ~)&lt;br /&gt;
*** 삼남 : 방재규(方在奎, 1948년 ~)&lt;br /&gt;
&lt;br /&gt;
** 양자 : 방재윤(方在允 또는 方在胤, 1901년 ~ 1940년, 형 방응곤의 차남)&lt;br /&gt;
*** 손자 : 방일영(方一榮, 1923년 ~ 2003년)&lt;br /&gt;
**** 증손 : 방상훈(方相勳, 1948년 ~)&lt;br /&gt;
**** 증손부 : 윤순명 - 윤치호(尹致昊, 1865년 ~ 1945년)의 증손녀&lt;br /&gt;
***** 현손 : 방준오(方俊吾, 1974년)&lt;br /&gt;
***** 현손 : 방정오(方政吾, 1978년)&lt;br /&gt;
**** 증손 : 방용훈(方容勳, 1952년 ~)&lt;br /&gt;
*** 손자 : 방필영(方必榮, 1924년 ~ 1926년)&lt;br /&gt;
*** 손녀 : 방숙영(? ~ 1951년 1월)&lt;br /&gt;
*** 손자 : 방우영(方又榮, 1928년 ~ 2016년)&lt;br /&gt;
**** 증손 : 방성훈(方聖勳, 1973년 ~)&lt;br /&gt;
&lt;br /&gt;
== 기타 ==&lt;br /&gt;
그는 [[한용운]], 최남선, 정인보, 홍명희 등과 친분관계를 형성하고 어울려 지냈다 한다.&lt;br /&gt;
&lt;br /&gt;
[[김구]]의 한국독립당의 재정적 후견인 역할을 하였다 하며,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삼의사 유골봉환식 때 [[김구]], [[정인보]] 등과 촬영한 사진이 있다.&amp;lt;ref&amp;gt;백범어록 참조&amp;lt;/ref&amp;gt; 그리고 1945년 11월 23일 조선일보가 복간되자 백범 김구는 '有志者事竟成' 뜻을 지닌 자 성취할 수 있다'는 친필 휘호를 보내며 축하했다.&amp;lt;ref&amp;gt;[http://www.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4060370241 '조선일보 역사 읽기'《조선일보》2004.06.03]&amp;lt;/ref&amp;gt;&lt;br /&gt;
한편 임꺽정의 저자인 벽초 홍명희가 방응모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그와 깊은 친분을 맺었다는 주장이 있다. 《조광》 1938년 11월호엔 홍명희가 병중에 있는 방응모를 위로하며 지은 한시가 방응모의 답시와 함께 실려 있다고 한다.&amp;lt;ref&amp;gt;[http://weekly.chosun.com/site/data/html_dir/2004/11/05/2004110577041.html ‘임꺽정’으로 되살아난 독립운동의 魂! 주간조선 1827호 2004.11.04&amp;lt;/ref&amp;gt; 또한 [[안창호]]의 비서실장을 지낸 독립유공자 구익균은 방응모와 안창호가 친밀했다는 주장을 했다.&amp;lt;ref&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09/2008030901055.html &amp;quot;공산주의자들, 도산 비판하다가도 하숙비 떨어지면 찾아와&amp;quot;] 조선일보, 2008-03-10 03:22&amp;lt;/ref&amp;gt;&lt;br /&gt;
또한 박설산에 따르면 1943년 만해 한용운에게 학도병으로 끌려가게 되었음을 알리려 심우장으로 찾아가게 되었을 때, 한용운과 방응모가 바둑을 두고 곁에서 정인보가 훈수를 두고 있었다고 한다.&amp;lt;ref&amp;gt;박설산 저 &amp;lt;뚜껑없는 朝鮮 역사 책&amp;gt; p.226 도서출판 三藏(1994)&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30년대~1940년대 방응모에게서 장학금을 지원받은 학생 모임인 서중회의 회원들의 그의 인물평은 &amp;quot;첫 인상은 좀 깡마른 모습이었으나 의지가 강한 인물&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56페이지&amp;lt;/ref&amp;gt;&amp;quot;이라는 평을 남기기도 했다.&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 /&amp;gt;&lt;br /&gt;
&lt;br /&gt;
== 참고 자료 ==&lt;br /&gt;
* 청산하지 못한 역사: 언론 내세워 일제에 아부한 교화 정책의 하수인 (문영숙) (반민족문제연구소, 청년사, 1994)&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민족 계몽의 초석 방응모(이동욱 저, 지구촌, 1998)&lt;br /&gt;
* 계초 방응모전(계초전기간행위, 조선일보사, 1980년)&lt;br /&gt;
* 계초 방응모(이동욱, 방일영문화재단, 1996)&lt;br /&gt;
&lt;br /&gt;
== 외부 링크 ==&lt;br /&gt;
* [https://web.archive.org/web/20050123171046/http://chosunhost.com/ 계초방응모 기념사업회]&lt;br /&gt;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09145 &amp;lt;조선일보&amp;gt;, 방응모 전 사장의 '친일행적' 말한다] - 오마이뉴스 04.09.10일자&lt;br /&gt;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020302101749 방응모ㆍ 김성수 친일행적 뭔가 : &amp;lt;긴급입수&amp;gt;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 全文] - 프레시안 2002-03-02&lt;br /&gt;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54052 그가 '&amp;lt;조선&amp;gt;의 주인' 주장하는 이유] 오마이뉴스 2001년 9월 20일자&lt;br /&gt;
*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956 방재선씨, 호주·상속 원인무효소송 제기]&lt;br /&gt;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4/06/2008040601053.html '5인 친필 서첩' 발굴] 조선일보 2008년04월06일자]&lt;br /&gt;
&lt;br /&gt;
[[분류: 감자]]&lt;/div&gt;</summary>
		<author><name>Nsgjjsjsjy02</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B0%A9%EC%9D%91%EB%AA%A8&amp;diff=58867</id>
		<title>방응모</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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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06-11T02:31:0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Nsgjjsjsjy02: /* 잡지 발행 활동 */&lt;/p&gt;
&lt;hr /&gt;
&lt;div&gt;{|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width:100%&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0%&amp;quot;|사진&lt;br /&gt;
|[[파일:방응모.jpg|center|200픽셀]]&lt;br /&gt;
|+ '''방응모'''&lt;br /&gt;
|+ style=&amp;quot;caption-side:bottom;text-align:left:&amp;quot;|출처: 위키백과&lt;br /&gt;
|출생||1883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조선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또는 정부면 성내동&lt;br /&gt;
|-&lt;br /&gt;
|사망||1950년경으로 추정&lt;br /&gt;
|-&lt;br /&gt;
|사인||불명&lt;br /&gt;
|-&lt;br /&gt;
|거주지||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amp;gt; 경성부 -&amp;gt; 경기도 양주군 의정부읍&lt;br /&gt;
|-&lt;br /&gt;
|국적||대한민국&lt;br /&gt;
|-&lt;br /&gt;
|본관||온양&lt;br /&gt;
|-&lt;br /&gt;
|별칭||호: 계초(啓礎), 춘해(春海)&lt;br /&gt;
|-&lt;br /&gt;
|직업||교사, 변호사, 상인, 언론인, 기업인, 사회운동가, 정치가&lt;br /&gt;
|-&lt;br /&gt;
|배우자||승계도, 이인숙, 배영옥, 노효용&lt;br /&gt;
|-&lt;br /&gt;
|자녀||방재숙(딸), 방재욱·방재선·방재효·방재규(아들), 방재윤(양자)&lt;br /&gt;
|-&lt;br /&gt;
|부모||방계준(부), 온양박씨(모)&lt;br /&gt;
|}&lt;br /&gt;
&lt;br /&gt;
'''방응모'''(方應謨, 평안북도 정주군, 1883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 1950년 8월(추정)는 [[일제강점기]]의 교육자, 언론인, 법조인, 기업인이자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언론인이며 정치인이다. 호는 '''춘해'''(春海)이고, 뒤에 '''계초'''(啓礎)로 고쳤다.&lt;br /&gt;
&lt;br /&gt;
1922년 동아일보 정주 지국을 인수해 지국장을 지내다가 1924년 금광업에 뛰어들어 큰 부를 얻게 되었다. 1932년 6월 조선일보에 입사하였고 이후 영업국장이 되어 조선일보의 판매망을 장악하게 되고 경영권을 인수하면서 1933년 3월 조선일보 부사장이 되었다. 1933년 7월부터 1950년 7월까지 종신으로 [[조선일보]]의 사장을 역임하였다. 1935년 창간한 월간잡지 '조광(朝光)'은 친일 논란이 있다.&amp;lt;ref&amp;gt;안은필. [http://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9211 조선일보가 가장 빛나던 시기, ‘안재홍 시대’]&amp;lt;/ref&amp;gt;&amp;lt;ref name=&amp;quot;안은&amp;quot;&amp;gt;안은필. [http://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9279 방응모 친일증거, “모래밭에서 모래 찾기”]국민TV. 기사입력 2015년 4월 23일. 기사수정 2015년 4월 24일.&amp;lt;/ref&amp;gt;&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2/0002006080?sid=102 한홍구 &amp;quot;박정희는 공포와 욕망의 정치를 했다&amp;quot;]. 프레시안. 2015년 4월 13일.&amp;lt;/ref&amp;gt;&amp;lt;ref&amp;gt;이민영.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1/0002255321?sid=102 고법 “방응모 前조선일보 사장 친일행적 대부분 인정”]. 서울신문. 2012년 1월 13일.&amp;lt;/ref&amp;gt;&amp;lt;ref&amp;gt;노현웅.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8/0002251781?sid=102 조선 방응모·동아 김성수의 ‘친일’…수년째 결론 안 내고 미루는 법원]. 한겨레. 2014년 11월 3일.&amp;lt;/ref&amp;gt;&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6/0000000413?sid=110 김성수ㆍ방응모와 친일언론인 군상]. 미디어오늘. 2002년 3월 12일.&amp;lt;/ref&amp;gt; 언론계에서 활동하면서도 사업가의 길을 함께 걸었고, 교육 장학 활동을 하였으며, 1945년 광복 직후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 고문과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안재홍]]의 추천을 받아 한국독립당 중앙상무위원과 독립촉성국민회 총무부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amp;lt;ref name=&amp;quot;안은&amp;quot;/&amp;gt;&amp;lt;ref&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16/2008031600800.html 계초 방응모와의 우정도 여러 편의 시로 표현해&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해방 정국에서 김구의 재정적 후견인으로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등 삼의사 유골 봉환 사업과 신탁통치 반대 운동 등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대한민국 수립 이후 사회민주주의 정치가인 조소앙과 사회당을 결성해 문교정책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lt;br /&gt;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 납북 후 행적은 &amp;quot;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amp;quot;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lt;br /&gt;
&lt;br /&gt;
== 생애 ==&lt;br /&gt;
=== 생애 초기 ===&lt;br /&gt;
==== 출생과 성장 ====&lt;br /&gt;
방응모는 1883년 11월 3일 또는 9월 29일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바우머리 부락 또는 정주군 정부면 성내동 425번지에서 '''방계준(方桂準)'''과 온양 박씨(溫陽朴氏)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그는 어려서 집중력이 남달리 뛰어난 반면 고집이 셌다는 평이 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페이지&amp;lt;/ref&amp;gt; 그의 '''삼촌 방계묵(方啓默)'''은 그의 고집있는 기질을 두고 저놈은 쇠작두 말고 나무 작두로 잘라 죽여야 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3~54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친척들의 야멸찬 말들이 그에게 상처를 주거나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4페이지&amp;lt;/ref&amp;gt; 또한 그의 유년시절을 본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가 태어날 당시 태몽도 없었고, 신동이라는 말도 별다르게 듣지 않았다고 한다. 어려서 빈곤한 가정환경으로 방응모는 정규 학교에는 입학하지 못하고, 16세 때까지 서당에 드나들며 한학을 익혔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던 중 그가 어느정도 실력이 우수하다고 인정되자, 스승인 승창률은 잠시 방응모에게 어린아이들을 돌보게 한 후 자리를 피하곤 했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1페이지&amp;lt;/ref&amp;gt; 그는 홀로 사서육경을 탐독, 독파하였다. 21세 무렵 잠시 서당 훈장을 지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896년 독립협회의 활동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5페이지&amp;lt;/ref&amp;gt; 형 방응곤이 예배당에 다니게 되자&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2페이지&amp;lt;/ref&amp;gt;, 그를 통해 신문물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다. 그 뒤 우연히 경성부에 갔다가 신문물을 보고 충격을 받아 17세에 독학으로 신학문과 일본어, 중국어, 수학 등을 독파하였다. 유년시절 서당의 성리학 스승이던 승창률의 친척인 승시영(承時榮)과 조씨(趙氏)의 딸 승계도와 결혼했다.&lt;br /&gt;
&lt;br /&gt;
결혼한 다음 해에도 그는 공부를 한다며 책만 사다 읽곤 했고&amp;lt;ref name=&amp;quot;fsfs60&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60페이지&amp;lt;/ref&amp;gt;, 부인 승계도는 생계를 위해 몸소 나섰다.&amp;lt;ref name=&amp;quot;fsfs60&amp;quot;/&amp;gt; 부인 승계도는 친척 가운데 콩을 싸게 넘겨주는 이들이 있어 그 콩으로 두부를 만들거나 콩나물을 키워 장사를 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61페이지&amp;lt;/ref&amp;gt; 그의 아내 승계도는 남편에 대한 믿음이 절대적이었고 탓을 하거나 가출하지 않았다. 이후 그는 서당 훈장으로 초빙되었으나, 그가 가는 마을의 기존 훈장, 한학자들은 그를 적대적으로 대했다. 그렇다고 마을 사람들의 일부 지명이 있었으나 자신의 스승의 자리를 침해할 수 없다 하여 그는 자신의 동리의 훈장일은 사양하였다. 그는 마을을 나가 신학문을 하는 친구들과 어울렸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62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계몽 운동 ====&lt;br /&gt;
도산 [[안창호]]와 남강 이승훈이 연사로 돌아다니며 애국 계몽 강연과 문맹들의 교육, 야학 사업을 하였고, 여기에 감동받은 청년들이 서당과 야학을 열고 문맹들과 여성들에게 한글 교육을 하였다. 도산 [[안창호]]의 강연과 남강 이승훈의 강연을 찾아다니며 듣다가 감동받은 방응모 역시 교육, 계몽에 참여하였다.&lt;br /&gt;
&lt;br /&gt;
그는 청년회의 활동에 몰두하였으나, 농번기에 작은 일손이라도 더 필요했던 동리 노인들은 젊은 아이들이 일은 하지 않고 무슨 모임이다 하여 어울려 돌아다니는 꼴&amp;lt;ref name=&amp;quot;fsfs75&amp;quot;/&amp;gt;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또한 모임 구성원들 역시 &amp;quot;의식 자체가 아직 전근대적이었고, 사고의 분화를 겪지도 않은데다가, 이들의 조직 활동이 기분 좋으면 나오고 기분 나쁘면 빠져 버리는 것이 예사&amp;quot;라 청년 모임들은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청년단체의 실패에 좌절하고 다시 귀향했으며, 이때 그는 춘해(春海)라는 아호를 스스로 지었다. 그의 집안에서는 그가 정착하기를 바라고 정주읍 성내동에 집을 얻어 주었다.&lt;br /&gt;
&lt;br /&gt;
안창호의 계몽 강연에 감동받은 남강 이승훈이 1907년(융희 1년) 8월 김덕용(金德鏞)을 초빙하여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 오산에서 신식 교육을 하는 소학교 과정의 학교 강명의숙을 세우고 산수, 수신, 역사, 지리, 체조를 가르쳤고, 그해 12월에는 중학교 과정인 오산학교를 세우고 학생 7명을 처음 받아들여 개교했다. 1908년에는 오산학교에 학생들이 모여 3개 반으로 편성되었고, 정주군 출신의 춘원 이광수가 오산중학교의 교사로 초빙되어 축구, 야구, 테니스, 배구 등을 지역에 처음 소개하였다. 방응모는 어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학교에 입학해 신학문을 접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0페이지&amp;lt;/ref&amp;gt; 그는 이승훈과 의기투합해 민립 대학을 세우는 운동을 추진했지만 조선총독부 평안북도청 학무국에서 승인을 거부하여, 대학 설립에 실패했다.&lt;br /&gt;
&lt;br /&gt;
=== 언론, 기업 활동 ===&lt;br /&gt;
==== 계몽 활동과 언론 활동 ====&lt;br /&gt;
1915년부터 1924년 방응모는 지역 지식인들, 유학파 청년, 계몽 청년들이 모여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하는데 참여했고, 민립대학기성회 평안북도지부에서 활동하면서 민립대학기성회 중앙회 중앙위원 조만식 등과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언변과 용모가 되었던 그의 여관에도 손님들이 몰렸고, 그가 &amp;quot;2백원도 좋고 5백원도 좋다며 보태달라&amp;lt;ref name=&amp;quot;fsfs87&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7페이지&amp;lt;/ref&amp;gt;&amp;quot;고 하면 기부금을 내는 이들이 있었다. 대신 하룻밤을 의탁하려고 그의 여관을 찾은 이들에게 무료 숙식을 제공하기도 했다.&amp;lt;ref name=&amp;quot;fsfs87&amp;quot;/&amp;gt; 1919년 정주에서 3.1 만세 운동이 벌어지자, 그도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형사들의 눈을 피해 방응모는 만세운동을 하다 재빨리 몸을 피해 화를 면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8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1922년 6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인수하여 분국장에 취임했다. 6월 9일에는 정주군 지역 체육행사로 테니스 대회를 개최하였다. 그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경영하는 동시에 그는 농촌 계몽운동 등에 적극 투신하여 인망을 쌓았다. 처음 몇번은 친구 전우현의 자금을 빌려 부족분을 메우기도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02페이지&amp;lt;/ref&amp;gt; 한다. 1922년 6월 19일&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96페이지&amp;lt;/ref&amp;gt; 동아일보 본사를 설득하여 정주분국을 동아일보사 정주지국으로 승격시켰다. 동아일보사 지부장 재직 시 그는 전우현과 함께 의기투합하여 민립 대학 설립 자금과 농촌진흥회 회원의 여비와 회비를 염출하기 위한 목적 및 당시 교사도 없이 난관에 처했던 오산학교의 재개교를 위한 &amp;quot;오산학교의 부흥 운동을 목표로 한 재단법인 촉성 기금 마련&amp;quot; 등을 계획했다. 총독부의 인허가 거부로 실패한 대학 설립 자금은 고스란히 오산학교의 부활과 복교 자금으로 투입되었다. 1920년 1월에 경성형무소에서 가석방된 조만식은 이승훈을 만났고, 다시 조만식이 오산학교를 맡으면서 학교는 다시 정상 운영되었다.&lt;br /&gt;
&lt;br /&gt;
1923년 동아일보 정주군 분국이 지국으로 승격되자 정주 지국장으로 동아일보 정주지국을 경영하였고, 같은 해 7월 여성들의 사회참여와 평등권 신장을 위한 여자교육회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이후 대규모 수해가 나자, 정주군 수해구제회를 결성하여 봉사활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1923년 4월 조만식·송진우·안재홍·김성수 등의 주도로 민간 자본으로 대학교 설립을 추진하기 위한 조직인 조선민립대학기성회가 결성되자, 방응모는 민립대학 기성회에 참여하여 민립대학기성회 정주군준비회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5월에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정주지방지부가 설립되자 기성회 정주지부 상무위원을 맡았다.&lt;br /&gt;
&lt;br /&gt;
==== 광업 경영과 조선일보 입사 ====&lt;br /&gt;
1924년 봄 오산학교 교감으로 있던 전우현이 방응모와도 안면이 있던 금광 채굴업자 두 명을 데리고 그를 찾아왔다. 그들은 자신들이 봐 둔 산이 있다고 방응모에게 소개했다. 그는 선천군의 지역 유지이자 최창학의 친구이며, 그가 동아일보 지국장으로 알게 된 이봉찬을 찾아갔다. 한학자로 알고 있던 그가 금광 투자를 제의하자 &amp;quot;한문이라면 빼지 않고 알려고 드는 한학 훈도가 어떻게 금광을&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16페이지&amp;lt;/ref&amp;gt;&amp;quot; 하느냐 하였지만, 이봉찬은 그에게 금광, 광산에 대한 지식을 알려주었다. 이봉찬은 그에게 광산 지식을 알려주며 최창학의 소유지 중 폐광을 빌리는 법을 알려주었다. 방응모의 됨됨이에 감복한 듯, 그의 수많은 질문에 적잖은 충고를 자임해주었다.&amp;lt;ref name=&amp;quot;fsfs117&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5페이지&amp;lt;/ref&amp;gt; 이봉찬은 최창학에게 방응모를 소개하는 편지를 수차례에 걸쳐 보내주었다.&amp;lt;ref name=&amp;quot;fsfs117&amp;quot;/&amp;gt; 이봉찬은 방응모의 친구들이 봐 둔 갱도를 임대받도록 도와주었다. 이봉찬은 방응모의 한학 실력과 사람됨을 알아보고 있어, 자금을 쾌히 빌려주었다.&amp;lt;ref name=&amp;quot;fsfs117&amp;quot;/&amp;gt;&lt;br /&gt;
&lt;br /&gt;
이후 광산업에 뛰어들어 1924년 여름 압록강변의 최창학 소유 폐금광인 평안북도 삭주군 외남면 교동 다릿골의의 삭주 교동광업소를 찾아가 10미터 정도 땅을 파고 금맥을 발견했다. 바로 삭주 교동광업소를 인수, 경영을 확대하였다. 이때 만난 동업자의 딸이자 친구 전우현의 조카딸인 '''이인숙(李仁淑)'''을 만났다. 본처 승계도가 두 아들을 잃고 복부 수술이 잘못되어 아이를 얻지 못하게 되자 방응모에게도 수많은 중매가 들어왔다. 자식들을 병으로 잃은 것이 자신의 불찰이라고 본 승계도는 그에게 작은 부인이라도 들이자는 말을 꺼내기도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18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26년 방응모에게 광산 사업을 제안했던 두 친구가 손을 털고 나갔고, 그의 가족은 돈이 없어 쌀 대신 좁쌀로 좁쌀죽을 먹으며 연명해야 했다. 방응모는 정주군에 사는 비슷한 또래의 먼 친척 방상진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고, 방상진과 일꾼 대여섯 명, 그리고 후처 이인숙의 친정 쪽에서 얻어온 토지문서를 얻어 자금을 마련, 삭주 다릿골 광산으로 가서 다시 금광을 채굴했다. 금맥은 쉽게 나오지 않았고, 출몰하는 마적떼에게 소와 기구를 약탈당했다. 동시에 빚쟁이들의 독촉에 시달렸으나 '''''1926년 7월 지하 300m 지점에서 금맥을 확보했다. 이후 연간 300kg의 금을 생산, 그는 굴지의 광산업자로''''' 성장해 금맥을 찾아 벼락부자가 되었다. 그는 방상진을 교동금광 총감독에 맡겼다. 이때 그는 최창학에게 임대료에 이자를 쳐서 보내주었다.&lt;br /&gt;
&lt;br /&gt;
그때까지 첫 부인 승계도가 두부를 팔아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미국산 포드 T형자동차'''''를 타고 금의환향했다. 1928년 방응모는 자신의 아호인 춘해를 딴 춘해 장학회를 만들고 장학생들의 모임인 이심회를 만든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48페이지&amp;lt;/ref&amp;gt; 그 해에 방응모는 교동지역에 파출소 지소를 유치하였고, 마적단에 시달리던 주민들은 그의 송덕비를 세우기도 했다. '''''1928년에 그는 의정부 직동, 흥선대원군의 별장이 있던 곳 바로 뒤에 위치한 건물을 매입'''''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한용운]], 홍명희를 자주 초대했다.&lt;br /&gt;
&lt;br /&gt;
'''''1932년 방응모는 교동광산을 135만원이란 거액에 일본 중외광업주식회사에 매각'''''했다. 그 뒤 1932년 6월부터 조선일보 영업국장으로 활동하다 '''1933년 3월 [[조선일보]]의 경영권을 인수'''하여 부사장에 취임하였다.&lt;br /&gt;
&lt;br /&gt;
그는 교동광업소를 운영하며 모은 재력을 바탕으로 부사장 재직 중 [[조선일보]]의 대주주가 되었으며, 1933년 7월 8대 사주 조만식으로부터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제9대 [[조선일보]] 사주로 취임, 활동했다.&amp;lt;ref&amp;gt;조선일보는 1932년 7월에 조만식을 사장으로 영입했지만, 조만식은 거의 평생을 평양에서 살아왔던데다 서울에서 활동하기에는 적응을 잘하지 못했다. 조만식은 신문사 경영난과 지역감정의 혹독한 시련을 받은 채 9개월만에 퇴사했다. 그리고 조만식 후임으로 1933년, 방응모를 사장으로 추대하기에 이르렀다.&amp;lt;/ref&amp;gt;&amp;lt;ref&amp;gt;《한국사 시민강좌 제47집, 대표적 독립운동가 12인》,일조각. p145&amp;lt;/ref&amp;gt; 방응모 취임 이후의 초대 부사장은 이광수, 주필은 서춘이었다.&lt;br /&gt;
&lt;br /&gt;
=== 언론, 사업 활동 ===&lt;br /&gt;
==== 사회사업과 조선일보 인수 계획 ====&lt;br /&gt;
금광 사업에 성공한 그는 영림, 조림 사업에도 투자하였다. 방응모는 배우자 승계도에게서 더 이상 아들을 얻지 못하자 첩 이인숙을 통해 아들을 얻으려고 하였다. 이인숙은 아들을 낳았으나 이 아들은 곧 사망하였다. 아들을 잃은 이인숙은 승계도의 도움을 받다가, 그해 6월 방응모가 있는 광산으로 가 생활하였다'''. 승계도와 이인숙을 통해 자녀를 얻지못하자 42세가 되던 해인 1924년 친형인 방응곤의 둘째 아들 방재윤을 양자로 입양시켰다.'''&lt;br /&gt;
&lt;br /&gt;
[[파일:방응모장학생.jpg|섬네일|160px|오른쪽|방응모와 그의 장학금을 받던 학생들. 가운데 앉은 이가 방응모이고, 서있는 이들 중 왼쪽에서 두 번째는 방응모의 양자 방재윤.]]&lt;br /&gt;
&lt;br /&gt;
1930년 배영옥과 결혼하여 딸 방재숙을 얻었다. 1932년 광산업을 정리하였고 언론사업을 비롯하여 육영사업과 조림 및 간척사업 등을 벌였다. 또한 고아원과 사회복지단체에 후원금을 지원하면서 인망을 얻기도 했다. 삭주 지역에서는 그의 송덕비가 세워지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932년 그는 수원군 팔탄면 노하리 일대의 갯벌에 일본인이 수차례 뚝을 쌓다가 실패했다는 정보를 얻고 임삼진을 통해 조선총독부에 허가를 요청하였다.&amp;lt;ref name=&amp;quot;pp186&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86페이지&amp;lt;/ref&amp;gt; 간척 사업은 이후 1935년부터 시작되었지만 1932년부터 은밀히 착수되어 왔다.&amp;lt;ref name=&amp;quot;pp186&amp;quot;/&amp;gt;&lt;br /&gt;
&lt;br /&gt;
1933년 무렵 방응모가 [[조선일보]] 인수에 나서기 전부터 그는 [[한용운]]을 위한 일이라면 돈을 아끼지 않고 지출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성북동 222번지 언덕에 만해를 위해 기와집 한 채를 지어주었는데 심우장(尋牛莊)이 그것이다. 또한 만해가 일제의 배급을 거부해 생활이 어렵게 되자 만해에게 생활비를 지급했던 방응모는 만해가 병석에 누운 1944년에는 치료비를 지원해주기도 했다.&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6/0000043262?sid=103 만해가 일송 선생 5일장 치른 사연]&amp;lt;/ref&amp;gt; 그 외에도 방응모는 만해 한용운·벽초 홍명희 등과 함께 새해가 되면 백천온천에도 같이 다녀올 정도로 두터운 친분을 맺었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1&amp;quot;&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8/07/2007080700002.html 만해와 계초 방응모 선생]&amp;lt;/ref&amp;gt; 1935년 7월에는 경성 태평로1가에 새 사옥을 준공하는 한편, 출판부를 신설해 〈조광〉(1935. 10)·〈여성〉(1936. 6)·〈소년〉(1937. 4) 등의 월간 잡지를 차례로 창간했으며&amp;lt;ref name=&amp;quot;dam1&amp;quot; /&amp;gt; 운영하였다. 한편 [[1932년]] 교동 광업소를 정리하여 매각하였다.&lt;br /&gt;
&lt;br /&gt;
방응모의 광산 매각을 일본 정부 측에 알리고 다리를 놓은 것은 고일청(高一淸)이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84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32년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사건으로 체포된 [[안창호]]의 사면 탄원과 보석을 위해 노력하였다. 안창호가 윤봉길을 사주했다는 증거가 없으며 그가 테러행위를 지시했다는 증거 자료나 문건이 없다는 것이 방응모의 안창호 탄원 이유였다. 그러나 총독부 경무국장은 그의 안창호 석방 제안을 정중히 거절한다. 1936년 동방문화학원(뒤에 숭문중학교·고등학교 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1939년 9월에는〈조선일보〉의 조간 1회, 석간 2회의 1일 3회 발행을 시작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인수와 경영 ====&lt;br /&gt;
1933년 1월 16일 그는 정식으로 주식회사 [[조선일보]]사를 창립, 1월 18일에 발표된 창립 취지서에는 창립위원장 방응모, 창립발기인 방응모, 조만식, 고일청 외 등이 참여했다. 일단 그는 조만식을 사장으로 임명하고 자신은 부사장으로 있다가, 그해 3월 13일 다시 부사장에 취임했다. 4월 25일 편집인 겸 발행인이 되고, 4월 29일에는 조선일보의 조간, 석간제 발행을 부활, 확정시켰다. 1933년 7월 10일 총독부로부터 조선일보사의 법인 등록 승인을 얻어냈다. 7월 10일 조만식의 사퇴로, [[조선일보]]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다. 1933년 그는 자신의 아호를 춘해에서 계초로 바꾸었다. 그는 유능한 문인, 필진의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 상금 1천 원을 걸고 작가를 영입하였다.&lt;br /&gt;
&lt;br /&gt;
1934년 3월 25일 이광수를 비롯하여 서춘, 김동진, 함상훈, 신태익 등을 [[조선일보]]로 영입해 왔다. 그 외에도 정주군 출신 언론인, 작가들이 조선일보로 많이 오게 되었다. 이후 동아일보와 갈등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이광수가 조선일보로 옮겨와 부사장직에서 9개월 근무했다. 당시 조선일보 내부에서는 문모 라는 이가 이광수의 등장으로 자신의 입지 약화를 우려해 오랫동안 이광수를 내보내려 흉계를 꾸몄다고 한다. 이광수는 1934년 5월 25일자로 돌연 사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65페이지&amp;lt;/ref&amp;gt; 문모는 그에게 오히려 잘 됐다는 식으로 말하다가 방응모에게 호되게 혼이 났다. 그리고 문모로 하여금 즉시 금강산에 들어가 이광수를 다시 데려오게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65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이광수는 아들 봉근(당시 8살)의 사망 등으로 실의에 빠졌고, 1935년에 가서야 이광수를 조선일보 고문이자 필진으로 재영입하게 됐다.&lt;br /&gt;
&lt;br /&gt;
==== 동방문화학원 재단 설립 ====&lt;br /&gt;
방응모는 1936년 방농장의 소유권을 기본 자산으로 하는 재단법인 동방문화학원(東邦文化學院)을 설립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6페이지&amp;lt;/ref&amp;gt; 동방문화학원은 학교 법인으로 인가된 재단 법인으로, 그뒤 고계학원과 인연을 가지고 1936년부터는 보성고등보통학교를 후견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 분리되었다. 그뒤 방응모 장학생인 서중회 회원들을 위한 방응모 장학사업을 주관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7페이지&amp;lt;/ref&amp;gt;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태평로 구 조선일보 사옥 안에 동방문화학원의 간판을 달고 조광 잡지를 계속 발행하는 조광사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7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일제 강점기 후반 ===&lt;br /&gt;
==== 중일 전쟁 전후 ====&lt;br /&gt;
중일전쟁 개전 직후인 1937년 7월 11일에 열린 [[조선일보]] 간부회의에서 주필 서춘이 '일본군, 중국군, 장개석씨'등으로 쓰던 용어를 '아군, 황군, 지나, 장개석'으로 고치고 일본 국민의 입장에서 논설을 쓸 것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편집국장 김형원과 영업국장 김광수가 적극 반대를 하기도 했으나, 방응모는 '일장기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이미 몇 십만 원의 손해를 보았을 뿐 아니라 [[3.1 운동]] 때처럼 신문이 민중을 지도할 수 없다'면서 서춘의 입장을 지지했다. 한편으로 방응모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된 [[안창호]]를 [[조선일보]]에 영입하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안창호는 옥중에서 얻은 간질환과 폐질환 등으로 고생했고, 진료비 등을 수시로 지원하고 문병했음에도 출옥후 얼마 뒤에 사망한다.&lt;br /&gt;
&lt;br /&gt;
1933년 이심회(以心會：후에 序中會, 방응모장학회 등으로 명칭이 바뀜)라는 장학회를 만들어 국내 대학생과 해외유학생들에게 학자금을 지급하기도 했으며, 재단법인 동방문화학원(東方文化學院：지금의 숭문중·고등학교 전신)의 이사장직을 맡기도 했다.&amp;lt;ref name=&amp;quot;dam1&amp;quot; /&amp;gt; 또한 자신의 막대한 재원을 들여 1936년부터 함경남도 영흥군 일대에 당시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대단위 조림사업을 벌였으며, 그 전 해인 1935년부터는 경기도 수원군 팔탄면 일대에서 만 2년간에 걸친 간척사업을 벌이기도 했다.&amp;lt;ref name=&amp;quot;dam1&amp;quot; /&amp;gt;&lt;br /&gt;
&lt;br /&gt;
1937년 12월 24일 [[안창호]]는 병보석 판정을 받고 재판소가 지정한 현 서울대학교병원인 경성제국대학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안창호의 입원 중에 시중을 든 사람으로는 안창호의 외조카 김순원과 청년 박정호 두 사람이었고, 나중에는 이응준 장군의 부인 이정희가 끝까지 지성껏 간호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7페이지&amp;lt;/ref&amp;gt; [[안창호]]는 병상에서 병원비 문제로도 고초를 겪었다. 이 때문에 조만식은 일본 경찰로부터 안창호의 병원비를 대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음에도, &amp;quot;내가 먹고 살면서 그 선생을 돌보지 않을 수 없다&amp;quot;며 완강히 거절하고 안창호를 도왔다고 한다. 안창호의 간호를 같이 도와주던 이응준 장군 부인 이정희는 10일마다 계산되어 나오는 병원 입원비로 안창호 선생이 괴로워하는 표정을 지켜볼수 없었다고 진술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8페이지&amp;lt;/ref&amp;gt; 방응모는 5백원의 수표 한 장을 안창호에게 전달하였다. 50일간의 입원비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9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안창호]]는 1938년 3월 10일 밤 12시 경성제국대학 병원에서 운명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폐간 사건 ====&lt;br /&gt;
일본의 전쟁이 격화되면서 조선총독부 공보국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1940년에 강제로 폐간조치 했다. 광산을 팔아서 자신의 모든 것을 조선일보에 바쳤던 방응모는 큰 절망과 좌절을 느껴야 했다. [[한용운]]은 ‘신문이 폐간되다/ 붓이 꺾이어 모든 일이 끝나니…’로 시작하는 시를 지어 방응모를 위로했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1&amp;quot; /&amp;gt;&amp;lt;ref&amp;gt;붓이 꺾이어 모든 일 끝나니 이제는 재갈 물린 사람들 뿔뿔이 흩어지고 아, 쓸쓸하고 쓸쓸한지고 망국 서울의 가을날 한강의 물도 흐느끼느니 울음 삼켜 흐느끼며 연지를 외면한 채 바다 향해 흐르느니&amp;lt;/ref&amp;gt; 동아일보에는 김성수 외에도 장덕수와 송진우가 있었지만 그에게는 조선일보 폐간을 막기 위해 총독부와 교섭할 인물도 없었다.&lt;br /&gt;
&lt;br /&gt;
1938년 2월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선 내 일간신문 25개사로 조직된 조선춘추회의 창립에 창립발기인으로 참가했고, 조선춘추회 간사로 활동했다. 같은 해 7월 “국민정신을 총동원하고 내선일체 전 능력을 발휘하여 국책 수행에 협력하여 성전(聖戰)의 궁극적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조직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에 참여했고, 그날 결성된 경성연맹 창립총회에서 상담역을 맡았다. 9월부터 조선방공협회 경기도연합지부 평의원을 지냈다. 10월에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주최한 비상시 국민생활 개선을 위한 제1회 생활개선위원회에서 제2부(의례와 사회풍조 쇄신부)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그러나 1938년 10월부터 조선총독부는 조선일보의 신문용지를 검열, 통제하기 시작했다.&lt;br /&gt;
&lt;br /&gt;
1940년 5월 조선총독부 총독 미나미 지로가 방송담화로 창씨개명을 권고했다. 그러나 그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성씨를 이제 와서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며 창씨개명은 완강하게 거절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조선일보에 트집이 잡힐 일이 나타나지 않자 총독부는 전국 면사무소에 조선일보 신문 구독을 거절하도록 명령을 내렸고, 동시에 조선말을 쓰는 민원인에게는 일을 처리해주지 말도록 하게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3페이지&amp;lt;/ref&amp;gt; 조선총독부는 송진우의 예금통장을 문제삼았다. 송진우 명의의 은행저금이 동아일보의 8백여 개의 지국과 분국을 통해 모금된 독립운동 자금이라며, 그리고 동아일보 간부들이 백운장이라는 요정에서 회식을 한 것을 김성수 집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려 했다는 등의 이유로 백관수 동아일보 사장을 전격 구속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3~374페이지&amp;lt;/ref&amp;gt; 동아일보는 백관수가 구속된지 10일 만에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동아일보 중역회의를 열고 폐간신청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4페이지&amp;lt;/ref&amp;gt; 총독부는 조선일보에도 자진 폐간을 권고했고, 1940년 8월 9일 편집회의를 주관, 8월 10일 조선일보의 폐간계를 내고, 8월 10일자로 폐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5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잡지 발행 활동 ====&lt;br /&gt;
신문 강제 폐간 뒤 방응모는 간판을 조광사로 바꿔 걸고, 사옥은 동방흥업주식회사로 등기를 변경해서 유지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1페이지&amp;lt;/ref&amp;gt; 이후 그는 조광 잡지 발행에 전념했다. 1943년 8월 경 일본 중앙대학의 예과를 마친 방일영이 입사&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1페이지&amp;lt;/ref&amp;gt;, 필진으로 참여했다. [[조선일보]]가 폐간된 후에도 방응모는 벽초 홍명희 부자에게 지속적으로 생활비를 대주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4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4년 6월 29일 만해 [[한용운]]이 사망했다. 그는 심우장을 찾아가 3백원을 내놓았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5페이지&amp;lt;/ref&amp;gt;당시 쌀 10가마가 100원이었지만, 심우장은 당장 현금 1원이 없었는데 거액이라서 놀랐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6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광복 이후 언론 및 정치활동 ===&lt;br /&gt;
==== 광복 직후 ====&lt;br /&gt;
[[파일:1946.06 3의사 유해봉환식장.jpg|섬네일|왼쪽|200px|[[1946년]] [[3월]] 순국3의사 유해봉환일 [[김구]], 위당 [[정인보]] 등과 함께]]&lt;br /&gt;
&lt;br /&gt;
[[1945년]] 8.15 광복 후에는 [[8월]] 말과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朝鮮在外戰災同胞救濟會) 고문과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9월]] 초 [[안재홍]] 등이 좌경화되는 [[건준]]체제에 반발하여 [[건준]]을 탈퇴하자 방응모 역시 [[건준]]을 탈퇴하였다.&lt;br /&gt;
&lt;br /&gt;
[[9월 2일]] [[미군정]]이 주둔하자, 방응모는 윤전기를 찾기 위해 폐간 당시의 증빙서류를 미 군정청에 제시하였으나 소식이 없었다. 총독부는 조선일보 폐간 직후 인수한 윤전기를 경성일보사에 옮겨서 설치했다. 그는 동방문화재단 외 4개 사업소를 적산으로 파악한 미군정을 설득하고, 사옥 문제도 해결하였다.&lt;br /&gt;
&lt;br /&gt;
[[10월 1일]] 조선일보 편집위원회를 구성하고, 신문 복간 운동을 추진했다. 조선총독부의 폐간 지시 당시 의정부로 옮겨놓은 일부 활자 자모음이 잘 보관되어, 그해 11월 23일 조선일보를 복간시키고, 서울신문사 사옥에서 조선일보 복간호를 간행하였다. 이후 조선사회문제대책중앙협의회 중앙위원을 거쳐 [[10월 16일]] [[이승만]](李承晩) 등의 주도로 [[독립촉성중앙회]]가 결성되자 독촉에 가입하였다.&lt;br /&gt;
&lt;br /&gt;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 요인이 귀국하자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에 입당했다. [[12월]] [[안재홍]]의 추천으로 [[한국독립당]]의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출되어 3~4개월 동안 활동했다.&amp;lt;ref&amp;gt;일각에서는 방응모가 '한독당 재무부장으로 지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1947년부터 한독당 재무부장을 맡은 신창균이 전면 부정했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47/0000002626?sid=102 백범 비서와 '진짜' 한독당 재정부장의 육성증언. 참고.]&amp;lt;/ref&amp;gt; 그 뒤 대한국민총회 발기인, 대한독립애국금헌성회 발기인 등으로 활동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복간 및 군정기 활동 ====&lt;br /&gt;
[[파일:Kim Gu (1947).jpg|섬네일|140px|오른쪽|임시정부 각주이자 한독당 당수 [[김구]]. 방응모는 [[한국독립당]]의 중앙상무위원과 당 재정부장으로 참여했고, [[김구]]의 반탁운동과 3의사 유해 봉환 때 자금을 댔다.]]&lt;br /&gt;
&lt;br /&gt;
[[11월]] [[조선일보]]사를 복간시켰다. 그러나 한동안 조선일보의 인쇄는 [[서울신문|서울신문사]]에서 간행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1945년]]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추념대회에 참여하였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2&amp;quot;&amp;gt;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13&amp;lt;/ref&amp;gt; 순국선열추념대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2&amp;quot; /&amp;gt;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참여,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이 되었다.&amp;lt;ref&amp;gt;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55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6년 2월 26일 서울신문사 공무국 종업원들이 조선일보의 인쇄를 거부해버렸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436페이지&amp;lt;/ref&amp;gt; 그동안 묵시적으로 방해가 은근히 있었다. 표면상의 문제는 임금 문제이나 내용상으로는 조선일보에 대한 조선공산당의 시위의 일종이었다. 사흘간의 교섭 끝에 2월 28일에 가서야 26일자와 27일자를 소급해서 인쇄하여 신문을 한꺼번에 발행하였다. 그러나 3월 1일과 2일에 또다시 인쇄를 거부당해 결국 휴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436페이지&amp;lt;/ref&amp;gt; 조선일보를 경성일보사로 옮겨서 인쇄하기로 하고 3월 5일자로 사고로 독자에게 알렸다.&lt;br /&gt;
&lt;br /&gt;
[[1946년]] [[2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회장에 선출되었고, 3월 1일 미군정은 방응모에게 경성일보사 관리인으로 위촉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437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용지난으로 한동안 신문 발행에 어려움을 겪었다.&lt;br /&gt;
&lt;br /&gt;
[[4월 29일]] [[김구]], [[김창숙]], [[김성수 (언론인)|김성수]], [[오세창]] 등과 함께 서울운동장에서 [[윤봉길]]의사 추모회의 창립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amp;lt;ref&amp;gt;&amp;quot;故尹奉吉義士의 記念式 오늘, 發起人會 열고 準備&amp;quot;, 동아일보 1946년 4월 23일자 2면, 사회면&amp;lt;/ref&amp;gt; 그해 [[5월]] 조선공업구락부 고문에 위촉되었다.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民族統一總本部) 10인협의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6월 15일]] 오후 5시 40분 [[서울역]]에 마중나가 [[서울역]]에 도착한 삼의사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 동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 협의원에 지명되고, [[1946년]] [[8월]]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8월 25일에는 [[한국독립당]] 중앙상무위원의 한 사람에 선출되었고&amp;lt;ref&amp;gt;&amp;quot;金九氏飜意 韓獨黨中委閉會&amp;quot;, 동아일보 1946년 8월 25일자 1면, 정치면&amp;lt;/ref&amp;gt; [[1946년]] [[9월]] 독립촉성국민회 총무부장에 선출되었다.&lt;br /&gt;
&lt;br /&gt;
1945년 광복 직후 서기원이 그를 찾아왔다. 서기원은 그때 경성농상실천학교의 동창회로부터 이 학교의 교장이 되어 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이다. 방응모는 서기원의 제의를 받아들여 [[1946년]] [[8월 28일]] 동방문화학원 이사장으로 숭문상업학교를 인수, 재단 이사장이 되었다. 후일 방응모가 6.25 전쟁 중에 납북된 후 동방문화학원과 숭문중,고교의 재단은 최용진이 운영하다가 다시 [[1978년]]에 [[방일영]]에게 인수되었다.&lt;br /&gt;
&lt;br /&gt;
1947년 1월 21일 제5회 창립위원회를 본사에서 개최하고 2월 23일 주식회사 조선일보사 주주창립총회를 열고 대표이사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공동투자 경영자로 참여시킨 전무 이종민과의 알력이 발생했다. 이종민과의 갈등이 심화되자 그해 8월 3일 방응모는 일단 사직서를 제출했다. 1947년 8월 10일 [[풍문여고]] 강당에서 개최된 한인신문기자협회에 참석, [[민족청년단]]에서 언론계 공로자로 방응모, 김성수, 설의식을 지정하여 상을 시상받았다.&amp;lt;ref&amp;gt;&amp;quot;朝鮮 新聞記者協會&amp;quot;, 동아일보 1947년 8월 10일자 2면, 사회면&amp;lt;/ref&amp;gt; 9월 13일의 임시 주주총회가 긴급 소집되어 회사 운영 문제가 논의되고, 이때 취체역을 재선임할 때 다시 선임되었다. 그러나 이때 전무 이종민은 재선임에서 제외되었다.&lt;br /&gt;
&lt;br /&gt;
==== 김구와의 결별과 만년 ====&lt;br /&gt;
이후 [[한국독립당]] 중앙상무위원&amp;lt;ref&amp;gt;[http://db.history.go.kr/url.jsp?ID=dh_003_1946_08_24_0150 한국사데이터베이스]&amp;lt;/ref&amp;gt;, 당 재정부장 등을 맡기도 했으나, [[1948년]] [[1월]] 이후 [[김구]]의 노선 변경과 함께 그를 지지하던 세력이 떨어져 나가서 [[조선일보]]도 김구에게서 등을 돌리게 되었다.&amp;lt;ref name=&amp;quot;조선11&amp;quot;&amp;gt;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68~70쪽.&amp;lt;/ref&amp;gt; 그러나 김구와의 결별이 괴로웠던지 방응모도 직접 나서서 &amp;lt;김구선생의 의견에 대한 우리의 취할바 태도&amp;gt;라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amp;lt;ref name=&amp;quot;조선11&amp;quot;/&amp;gt;&lt;br /&gt;
&lt;br /&gt;
[[1949년]] [[조소앙]]이 결성한 [[사회민주주의]]성향 정당인 [[사회당 (대한민국, 1948년)|사회당]]에 입당해 동당 문교정책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amp;lt;ref&amp;gt;[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9070600209201019&amp;amp;editNo=1&amp;amp;printCount=1&amp;amp;publishDate=1949-07-06&amp;amp;officeId=00020&amp;amp;pageNo=1&amp;amp;printNo=7956&amp;amp;publishType=00020 1949년 7월 6일자 동아일보]{{깨진 링크|url=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9070600209201019&amp;amp;editNo=1&amp;amp;printCount=1&amp;amp;publishDate=1949-07-06&amp;amp;officeId=00020&amp;amp;pageNo=1&amp;amp;printNo=7956&amp;amp;publishType=00020 }}&amp;lt;/ref&amp;gt; 이듬해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경기도]] 양주군에 출마했으나 차점자로 낙선하였다.&amp;lt;ref&amp;gt;[http://db.history.go.kr/url.jsp?ID=NIKH.DB-dh_017_1950_06_01_0030 한국사데이터베이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9년 의정부 가능동 별장에 심은 뽕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랐다. 승계도의 친척 승원호에 의하면 &amp;quot;할아버지(방응모)는 사람들을 시켜 뽕나무를 2년간 키우게 했습니다. 탐스럽게 뽕나무가 자라니까 이번에는 직조 기계를 들여 직조 공장을 세우겠다고 하셨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11페이지&amp;lt;/ref&amp;gt;&amp;quot; 한다. 그러나 그의 방직공장 설립 계획은 6.25 전쟁으로 무산되고 만다.&lt;br /&gt;
==== 납북과 최후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 납북 후 행적은 &amp;quot;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amp;quot;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amp;lt;ref name=&amp;quot;김장&amp;quot;/&amp;gt; [[1950년]] [[8월]]경 [[개성]] 송악산 부근에서 미군의 폭격에 희생되었고 심한 폭격으로 시신을 찾을 수 없어 묘도 만들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다.&amp;lt;ref&amp;gt;{{뉴스 인용&lt;br /&gt;
 |url          = http://www.minjog21.com/news/articleView.html?idxno=1140&lt;br /&gt;
 |제목       = &amp;quot;누워서도 남쪽하늘만 보십니다&amp;quot; - 평양시 신미리 재북통협 특설묘지&lt;br /&gt;
 |출판사    = 민족21&lt;br /&gt;
 |저자       = 신준영&lt;br /&gt;
 |날짜       = 2002-07-01&lt;br /&gt;
 |확인날짜 = 2008-05-15&lt;br /&gt;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40420015541/http://www.minjog21.com/news/articleView.html?idxno=1140#&lt;br /&gt;
 |보존날짜 = 2014-04-20&lt;br /&gt;
 |url-status = dead&lt;br /&gt;
}}&amp;lt;/ref&amp;gt;&amp;lt;ref&amp;gt;[http://www.minjog21.com/news/articleView.html?idxno=686 민족21&amp;lt;!-- 봇이 따온 제목 --&amp;gt;]{{깨진 링크|url=http://www.minjog21.com/news/articleView.html?idxno=686 }}&amp;lt;/ref&amp;gt; 남한에서는 [[1955년]] [[7월 7일]] 생사불명기간 만료로 인해 실종 처리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주변에서 피신하라고 권했지만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느냐'며 완강하게 버티다가 1950년 [[7월 6일]] [[경기도]] [[양주군]] 시둔면 가능리(현, [[의정부시]] [[가능동]]) 자택에 들이닥친 [[조선인민군]]에 의해 끌려갔다.&lt;br /&gt;
&lt;br /&gt;
=== 사후 ===&lt;br /&gt;
[[서울]] 종로에 있던 양자 방재윤의 두 아들 [[방일영]]과 [[방우영]]은 방응모의 첩 이인숙이 찾아가 피신하라고 권고하여 황급히 피신했다. &lt;br /&gt;
&lt;br /&gt;
[[9월 28일]] [[개성시]] 북쪽을 지나 [[황해남도]] [[서흥군]]에서 트럭으로 강제 북송되었다. 이후 9월 28일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lt;br /&gt;
&lt;br /&gt;
7월 6일 그의 행방불명처리가 되고, 방응모의 사후에도 [[조선일보]]는 그의 명의로 발행되었다. 1952년 4월 28일 조선일보는 발행인겸 편집인을 장기영으로, 인쇄인을 방일영으로, 방응모는 명예사장으로 명의변경하여 휴전 후 계속 발행하게 되었다. 1954년 4월 30일 제8회 조선일보 정기주주총회에서 장기영 사장이 사퇴하면서, 명예사장 방응모가 사장으로 추대되고, 발행인 겸 대표취체역에 방일영이 선임되었다. 이후 실종 후 [[1959년]]에 법적으로 사망 처리되었다. 그리고 [[1970년]]까지는 조선일보는 그의 이름으로 발행되었다.&lt;br /&gt;
&lt;br /&gt;
[[1970년]] [[2월 19일]] 조선일보 정기주주총회에서 방응모 이사를 사퇴 수리하였다. 그의 피폭사망 사실은 1970년대 이후 탈북자들을 통해 대한민국에 소개되었다.&lt;br /&gt;
&lt;br /&gt;
== 친일행위 의혹 ==&lt;br /&gt;
=== 일제 전시체제기 활동 ===&lt;br /&gt;
일제 강점기 말기 언론인으로서 총독부체제에 협력한 기록과 활동이 다수 기록이 있다. 1933년 3월 [[조선일보]] 경영권을 인수하고 부사장직에 취임했을 당시 같은 달에 고사기관총 구입비용 1600원을 군에 헌납하였다. 그는 1935년 친일 잡지 《조광 (잡지)(朝光)》을 창간하였고, 1937년에는 경성방송국 제2방송에 출연하여 일제가 중국의 베일을 절멸케하여 극동평화를 지키려고 한다는 강연을 하였다. 1940년대부터 조광에 집중적으로 친일 논설을 기고하고 시국 강연에 참여하여 전쟁 지원을 독려했다. 1942년 6월에는 '징병령 실시에 일층 더 감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글을 써서 조광에 발표하였다. 애국금차회(1937),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1938), 임전대책협의회(1941), 조선임전보국단(1941) 등 대표적인 친일 단체의 회원에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그는 이런 행적으로 인해 해방정국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명단에 기록되어 있고,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해 발표한 &amp;lt;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amp;gt;에 모두 포함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lt;br /&gt;
&lt;br /&gt;
우리 [[조선일보]]는 다른 어떤 신문도 따라오지 못하는 확고한 신념에서 비국민적 행위를 단연 배격하여 종국까지 조선일보사가 이미 정해놓은 방침에 한뜻으로 매진한다.|원산에서의 순회 강연&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9478.html 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친일 다짐하다 시민에 봉변]《한겨레》2005-08-24 오후 06:13:18&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반민족행위 논란 ===&lt;br /&gt;
방응모를 친일파로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남아 있다. 조선일보 경영 이전에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방응모의 활동이 거의 없었고, 납북된 뒤 소식이 끊겨버린 까닭에 본인이 항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 동안의 행적만으로 친일파 여부를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방응모의 후손들이 영향력 있는 [[조선일보]] 언론사의 사주를 맡았기에 그의 입장에서 서술한 기록을 많이 남기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80년 발간된 그의 전기 《계초 방응모》(조선일보사) 등에는 '그가 민족주의적 선각자'로 묘사되고 있다. 방응모가 친일파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일부세력측은 그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논거로 드는 경우가 많이 있다.&amp;lt;ref&amp;gt;유석재, 계간 《유심》 (2004년 봄호) [http://yousim.buddhism.org/html/2004-spr/tamgu-yoo-seok-jae.htm 삭풍 속에 피어난 금란지교(金蘭之交) - 만해와 계초 방응모]&amp;lt;/ref&amp;gt;&amp;lt;ref&amp;gt;&amp;quot;일제 말기 계초는 시국강연에 나설 것과 창씨개명을 집요하게 강요받았으나 그때마다 묵묵부답으로 거부하며 소신을 지켰다.&amp;quot; 《조선일보》 (2001.3) 조선일보 사장열전 - 계초 방응모편, 《한겨레》 (2001.3.30) [http://www.njoyschool.net/news/article_view.asp?menu_code=s20202&amp;amp;no=1206 조선일보, 일장기를 신문제호 위에]&amp;lt;/ref&amp;gt;&lt;br /&gt;
또한 한국정토학회 고문이자 서울 정토사 주지였던 박설산(1918~2007)이 학도병에 끌려가기 직전인 1943년 12월 28일 밤 서울역에서 스스로 왼발을 선로에 올려 발가락을 절단해 징집을 기피하자 방응모는 만해와 함께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설산을 걱정하면서 입원 중 조선일보 기자를 통해 돈을 전달한 것은 물론 퇴원할 때 돈을 전달하고 뒤를 보살폈다고 한다.&amp;lt;ref&amp;gt;박설산 회고록 &amp;lt;뚜껑없는 조선역사책&amp;gt;(1994, 도서출판 삼장) p240~241&amp;lt;/ref&amp;gt;&lt;br /&gt;
&lt;br /&gt;
2010년 12월, 방응모 관계자들 및 조선일보측은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을 취소해달라'며 법원에 낸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amp;quot;1944년 조선항공업 창립발기인으로 활동한 부분에 대해 친일행위로 판단한 부분을 취소하지만 나머지 활동에 대해서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amp;quot;라고 판결했다. 그 이유인 즉 &amp;quot;방응모는 1933년 조선일보 사장으로 취임해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등으로 활동하며 친일활동을 벌였으며, 1937년 경성방송국 시국강연에서 일본제국이 극동평화를 확립시킬 것이라는 내용의 강연을 하고, 1938년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춘추회의 발기인 겸 간사로 활동하기도 했다&amp;lt;ref&amp;gt;[http://media.daum.net/breakingnews/politics/view.html?cateid=1002&amp;amp;newsid=20101222103319164&amp;amp;p=newsis 법원 &amp;quot;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친일파 맞다&amp;quot;]뉴시스 2010년 12월 22일&amp;lt;/ref&amp;gt;&amp;quot;는 것이다.&lt;br /&gt;
&lt;br /&gt;
2012년 1월 12일 서울고법 행정7부는 방 전 사장의 손자인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이 행정안전부를 상대로 낸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처분 취소 청구소송에서 ‘일제 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의 친일 행위 판정 조항에 비추어 방 전 사장에게 적용된 모두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민족적 지도자로서 비중이 큰 만큼 그로 인한 책임도 무거울 뿐 아니라 고난의 시기를 겪은 민족으로서 그 역사를 반성하자는 입장에 설 때, 방 전 사장의 여러 행태는 반민특별법에서 규정한 친일반민족행위의 유형에 속함을 부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1·2심 재판부는 방 전 사장이 자신이 운영하던 잡지 &amp;lt;조광&amp;gt;에 일제 침략전쟁에 동조하고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문예물과 일제 침략전쟁에 협력할 것을 주문하는 논문을 게재하는 등의 ‘친일’ 행위를 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또한, 2심 재판부는 일본의 전쟁 수행을 돕기 위해 설립된 군수 제조업체 ‘조선항공공업’의 발기인과 감사를 지낸 것은 “감사는 업무집행에 관여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기관으로, 방 전 사장이 이 회사를 운영했다고 볼 수 있다”는 이유로 친일이라고 판단했다.&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4565.html법원 ‘방응모 친일’ 2심서도 인정] 인터넷한겨레 2010년 12월 22일&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가족 관계 ==&lt;br /&gt;
* 아버지 : 방계준(方桂準)&lt;br /&gt;
* 어머니 : 온양 박씨&lt;br /&gt;
** 형 : 방응곤(方應坤)&lt;br /&gt;
** 배우자 : 승계도&lt;br /&gt;
*** 아들 2명 요절&lt;br /&gt;
** 배우자 : 이인숙(李仁淑, 1901년 ~ ?)&lt;br /&gt;
*** 아들 : 방재욱(方在旭, 1925년 ~ 1926년 9월)&lt;br /&gt;
** 배우자 : 배영옥(裵英玉)&lt;br /&gt;
*** 장녀 : 방재숙(方在淑)&lt;br /&gt;
** 배우자 : 노호용(盧鎬龍)&lt;br /&gt;
*** 장남 : 방재선(方在善, 1944년 ~)&lt;br /&gt;
*** 차남 : 방재효(方在孝, 1946년 ~)&lt;br /&gt;
*** 삼남 : 방재규(方在奎, 1948년 ~)&lt;br /&gt;
&lt;br /&gt;
** 양자 : 방재윤(方在允 또는 方在胤, 1901년 ~ 1940년, 형 방응곤의 차남)&lt;br /&gt;
*** 손자 : 방일영(方一榮, 1923년 ~ 2003년)&lt;br /&gt;
**** 증손 : 방상훈(方相勳, 1948년 ~)&lt;br /&gt;
**** 증손부 : 윤순명 - 윤치호(尹致昊, 1865년 ~ 1945년)의 증손녀&lt;br /&gt;
***** 현손 : 방준오(方俊吾, 1974년)&lt;br /&gt;
***** 현손 : 방정오(方政吾, 1978년)&lt;br /&gt;
**** 증손 : 방용훈(方容勳, 1952년 ~)&lt;br /&gt;
*** 손자 : 방필영(方必榮, 1924년 ~ 1926년)&lt;br /&gt;
*** 손녀 : 방숙영(? ~ 1951년 1월)&lt;br /&gt;
*** 손자 : 방우영(方又榮, 1928년 ~ 2016년)&lt;br /&gt;
**** 증손 : 방성훈(方聖勳, 1973년 ~)&lt;br /&gt;
&lt;br /&gt;
== 기타 ==&lt;br /&gt;
그는 [[한용운]], 최남선, 정인보, 홍명희 등과 친분관계를 형성하고 어울려 지냈다 한다.&lt;br /&gt;
&lt;br /&gt;
[[김구]]의 한국독립당의 재정적 후견인 역할을 하였다 하며,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삼의사 유골봉환식 때 [[김구]], [[정인보]] 등과 촬영한 사진이 있다.&amp;lt;ref&amp;gt;백범어록 참조&amp;lt;/ref&amp;gt; 그리고 1945년 11월 23일 조선일보가 복간되자 백범 김구는 '有志者事竟成' 뜻을 지닌 자 성취할 수 있다'는 친필 휘호를 보내며 축하했다.&amp;lt;ref&amp;gt;[http://www.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4060370241 '조선일보 역사 읽기'《조선일보》2004.06.03]&amp;lt;/ref&amp;gt;&lt;br /&gt;
한편 임꺽정의 저자인 벽초 홍명희가 방응모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그와 깊은 친분을 맺었다는 주장이 있다. 《조광》 1938년 11월호엔 홍명희가 병중에 있는 방응모를 위로하며 지은 한시가 방응모의 답시와 함께 실려 있다고 한다.&amp;lt;ref&amp;gt;[http://weekly.chosun.com/site/data/html_dir/2004/11/05/2004110577041.html ‘임꺽정’으로 되살아난 독립운동의 魂! 주간조선 1827호 2004.11.04&amp;lt;/ref&amp;gt; 또한 [[안창호]]의 비서실장을 지낸 독립유공자 구익균은 방응모와 안창호가 친밀했다는 주장을 했다.&amp;lt;ref&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09/2008030901055.html &amp;quot;공산주의자들, 도산 비판하다가도 하숙비 떨어지면 찾아와&amp;quot;] 조선일보, 2008-03-10 03:22&amp;lt;/ref&amp;gt;&lt;br /&gt;
또한 박설산에 따르면 1943년 만해 한용운에게 학도병으로 끌려가게 되었음을 알리려 심우장으로 찾아가게 되었을 때, 한용운과 방응모가 바둑을 두고 곁에서 정인보가 훈수를 두고 있었다고 한다.&amp;lt;ref&amp;gt;박설산 저 &amp;lt;뚜껑없는 朝鮮 역사 책&amp;gt; p.226 도서출판 三藏(1994)&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30년대~1940년대 방응모에게서 장학금을 지원받은 학생 모임인 서중회의 회원들의 그의 인물평은 &amp;quot;첫 인상은 좀 깡마른 모습이었으나 의지가 강한 인물&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56페이지&amp;lt;/ref&amp;gt;&amp;quot;이라는 평을 남기기도 했다.&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 /&amp;gt;&lt;br /&gt;
&lt;br /&gt;
== 참고 자료 ==&lt;br /&gt;
* 청산하지 못한 역사: 언론 내세워 일제에 아부한 교화 정책의 하수인 (문영숙) (반민족문제연구소, 청년사, 1994)&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민족 계몽의 초석 방응모(이동욱 저, 지구촌, 1998)&lt;br /&gt;
* 계초 방응모전(계초전기간행위, 조선일보사, 1980년)&lt;br /&gt;
* 계초 방응모(이동욱, 방일영문화재단, 1996)&lt;br /&gt;
&lt;br /&gt;
== 외부 링크 ==&lt;br /&gt;
* [https://web.archive.org/web/20050123171046/http://chosunhost.com/ 계초방응모 기념사업회]&lt;br /&gt;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09145 &amp;lt;조선일보&amp;gt;, 방응모 전 사장의 '친일행적' 말한다] - 오마이뉴스 04.09.10일자&lt;br /&gt;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020302101749 방응모ㆍ 김성수 친일행적 뭔가 : &amp;lt;긴급입수&amp;gt;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 全文] - 프레시안 2002-03-02&lt;br /&gt;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54052 그가 '&amp;lt;조선&amp;gt;의 주인' 주장하는 이유] 오마이뉴스 2001년 9월 20일자&lt;br /&gt;
*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956 방재선씨, 호주·상속 원인무효소송 제기]&lt;br /&gt;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4/06/2008040601053.html '5인 친필 서첩' 발굴] 조선일보 2008년04월06일자]&lt;br /&gt;
&lt;br /&gt;
[[분류: 감자]]&lt;/div&gt;</summary>
		<author><name>Nsgjjsjsjy02</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B0%A9%EC%9D%91%EB%AA%A8&amp;diff=58863</id>
		<title>방응모</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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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06-11T02:29:3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Nsgjjsjsjy02: /* 조선일보 폐간 사건 */&lt;/p&gt;
&lt;hr /&gt;
&lt;div&gt;{|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width:100%&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0%&amp;quot;|사진&lt;br /&gt;
|[[파일:방응모.jpg|center|200픽셀]]&lt;br /&gt;
|+ '''방응모'''&lt;br /&gt;
|+ style=&amp;quot;caption-side:bottom;text-align:left:&amp;quot;|출처: 위키백과&lt;br /&gt;
|출생||1883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조선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또는 정부면 성내동&lt;br /&gt;
|-&lt;br /&gt;
|사망||1950년경으로 추정&lt;br /&gt;
|-&lt;br /&gt;
|사인||불명&lt;br /&gt;
|-&lt;br /&gt;
|거주지||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amp;gt; 경성부 -&amp;gt; 경기도 양주군 의정부읍&lt;br /&gt;
|-&lt;br /&gt;
|국적||대한민국&lt;br /&gt;
|-&lt;br /&gt;
|본관||온양&lt;br /&gt;
|-&lt;br /&gt;
|별칭||호: 계초(啓礎), 춘해(春海)&lt;br /&gt;
|-&lt;br /&gt;
|직업||교사, 변호사, 상인, 언론인, 기업인, 사회운동가, 정치가&lt;br /&gt;
|-&lt;br /&gt;
|배우자||승계도, 이인숙, 배영옥, 노효용&lt;br /&gt;
|-&lt;br /&gt;
|자녀||방재숙(딸), 방재욱·방재선·방재효·방재규(아들), 방재윤(양자)&lt;br /&gt;
|-&lt;br /&gt;
|부모||방계준(부), 온양박씨(모)&lt;br /&gt;
|}&lt;br /&gt;
&lt;br /&gt;
'''방응모'''(方應謨, 평안북도 정주군, 1883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 1950년 8월(추정)는 [[일제강점기]]의 교육자, 언론인, 법조인, 기업인이자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언론인이며 정치인이다. 호는 '''춘해'''(春海)이고, 뒤에 '''계초'''(啓礎)로 고쳤다.&lt;br /&gt;
&lt;br /&gt;
1922년 동아일보 정주 지국을 인수해 지국장을 지내다가 1924년 금광업에 뛰어들어 큰 부를 얻게 되었다. 1932년 6월 조선일보에 입사하였고 이후 영업국장이 되어 조선일보의 판매망을 장악하게 되고 경영권을 인수하면서 1933년 3월 조선일보 부사장이 되었다. 1933년 7월부터 1950년 7월까지 종신으로 [[조선일보]]의 사장을 역임하였다. 1935년 창간한 월간잡지 '조광(朝光)'은 친일 논란이 있다.&amp;lt;ref&amp;gt;안은필. [http://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9211 조선일보가 가장 빛나던 시기, ‘안재홍 시대’]&amp;lt;/ref&amp;gt;&amp;lt;ref name=&amp;quot;안은&amp;quot;&amp;gt;안은필. [http://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9279 방응모 친일증거, “모래밭에서 모래 찾기”]국민TV. 기사입력 2015년 4월 23일. 기사수정 2015년 4월 24일.&amp;lt;/ref&amp;gt;&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2/0002006080?sid=102 한홍구 &amp;quot;박정희는 공포와 욕망의 정치를 했다&amp;quot;]. 프레시안. 2015년 4월 13일.&amp;lt;/ref&amp;gt;&amp;lt;ref&amp;gt;이민영.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1/0002255321?sid=102 고법 “방응모 前조선일보 사장 친일행적 대부분 인정”]. 서울신문. 2012년 1월 13일.&amp;lt;/ref&amp;gt;&amp;lt;ref&amp;gt;노현웅.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8/0002251781?sid=102 조선 방응모·동아 김성수의 ‘친일’…수년째 결론 안 내고 미루는 법원]. 한겨레. 2014년 11월 3일.&amp;lt;/ref&amp;gt;&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6/0000000413?sid=110 김성수ㆍ방응모와 친일언론인 군상]. 미디어오늘. 2002년 3월 12일.&amp;lt;/ref&amp;gt; 언론계에서 활동하면서도 사업가의 길을 함께 걸었고, 교육 장학 활동을 하였으며, 1945년 광복 직후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 고문과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안재홍]]의 추천을 받아 한국독립당 중앙상무위원과 독립촉성국민회 총무부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amp;lt;ref name=&amp;quot;안은&amp;quot;/&amp;gt;&amp;lt;ref&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16/2008031600800.html 계초 방응모와의 우정도 여러 편의 시로 표현해&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해방 정국에서 김구의 재정적 후견인으로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등 삼의사 유골 봉환 사업과 신탁통치 반대 운동 등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대한민국 수립 이후 사회민주주의 정치가인 조소앙과 사회당을 결성해 문교정책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lt;br /&gt;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 납북 후 행적은 &amp;quot;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amp;quot;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lt;br /&gt;
&lt;br /&gt;
== 생애 ==&lt;br /&gt;
=== 생애 초기 ===&lt;br /&gt;
==== 출생과 성장 ====&lt;br /&gt;
방응모는 1883년 11월 3일 또는 9월 29일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바우머리 부락 또는 정주군 정부면 성내동 425번지에서 '''방계준(方桂準)'''과 온양 박씨(溫陽朴氏)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그는 어려서 집중력이 남달리 뛰어난 반면 고집이 셌다는 평이 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페이지&amp;lt;/ref&amp;gt; 그의 '''삼촌 방계묵(方啓默)'''은 그의 고집있는 기질을 두고 저놈은 쇠작두 말고 나무 작두로 잘라 죽여야 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3~54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친척들의 야멸찬 말들이 그에게 상처를 주거나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4페이지&amp;lt;/ref&amp;gt; 또한 그의 유년시절을 본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가 태어날 당시 태몽도 없었고, 신동이라는 말도 별다르게 듣지 않았다고 한다. 어려서 빈곤한 가정환경으로 방응모는 정규 학교에는 입학하지 못하고, 16세 때까지 서당에 드나들며 한학을 익혔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던 중 그가 어느정도 실력이 우수하다고 인정되자, 스승인 승창률은 잠시 방응모에게 어린아이들을 돌보게 한 후 자리를 피하곤 했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1페이지&amp;lt;/ref&amp;gt; 그는 홀로 사서육경을 탐독, 독파하였다. 21세 무렵 잠시 서당 훈장을 지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896년 독립협회의 활동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5페이지&amp;lt;/ref&amp;gt; 형 방응곤이 예배당에 다니게 되자&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2페이지&amp;lt;/ref&amp;gt;, 그를 통해 신문물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다. 그 뒤 우연히 경성부에 갔다가 신문물을 보고 충격을 받아 17세에 독학으로 신학문과 일본어, 중국어, 수학 등을 독파하였다. 유년시절 서당의 성리학 스승이던 승창률의 친척인 승시영(承時榮)과 조씨(趙氏)의 딸 승계도와 결혼했다.&lt;br /&gt;
&lt;br /&gt;
결혼한 다음 해에도 그는 공부를 한다며 책만 사다 읽곤 했고&amp;lt;ref name=&amp;quot;fsfs60&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60페이지&amp;lt;/ref&amp;gt;, 부인 승계도는 생계를 위해 몸소 나섰다.&amp;lt;ref name=&amp;quot;fsfs60&amp;quot;/&amp;gt; 부인 승계도는 친척 가운데 콩을 싸게 넘겨주는 이들이 있어 그 콩으로 두부를 만들거나 콩나물을 키워 장사를 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61페이지&amp;lt;/ref&amp;gt; 그의 아내 승계도는 남편에 대한 믿음이 절대적이었고 탓을 하거나 가출하지 않았다. 이후 그는 서당 훈장으로 초빙되었으나, 그가 가는 마을의 기존 훈장, 한학자들은 그를 적대적으로 대했다. 그렇다고 마을 사람들의 일부 지명이 있었으나 자신의 스승의 자리를 침해할 수 없다 하여 그는 자신의 동리의 훈장일은 사양하였다. 그는 마을을 나가 신학문을 하는 친구들과 어울렸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62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계몽 운동 ====&lt;br /&gt;
도산 [[안창호]]와 남강 이승훈이 연사로 돌아다니며 애국 계몽 강연과 문맹들의 교육, 야학 사업을 하였고, 여기에 감동받은 청년들이 서당과 야학을 열고 문맹들과 여성들에게 한글 교육을 하였다. 도산 [[안창호]]의 강연과 남강 이승훈의 강연을 찾아다니며 듣다가 감동받은 방응모 역시 교육, 계몽에 참여하였다.&lt;br /&gt;
&lt;br /&gt;
그는 청년회의 활동에 몰두하였으나, 농번기에 작은 일손이라도 더 필요했던 동리 노인들은 젊은 아이들이 일은 하지 않고 무슨 모임이다 하여 어울려 돌아다니는 꼴&amp;lt;ref name=&amp;quot;fsfs75&amp;quot;/&amp;gt;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또한 모임 구성원들 역시 &amp;quot;의식 자체가 아직 전근대적이었고, 사고의 분화를 겪지도 않은데다가, 이들의 조직 활동이 기분 좋으면 나오고 기분 나쁘면 빠져 버리는 것이 예사&amp;quot;라 청년 모임들은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청년단체의 실패에 좌절하고 다시 귀향했으며, 이때 그는 춘해(春海)라는 아호를 스스로 지었다. 그의 집안에서는 그가 정착하기를 바라고 정주읍 성내동에 집을 얻어 주었다.&lt;br /&gt;
&lt;br /&gt;
안창호의 계몽 강연에 감동받은 남강 이승훈이 1907년(융희 1년) 8월 김덕용(金德鏞)을 초빙하여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 오산에서 신식 교육을 하는 소학교 과정의 학교 강명의숙을 세우고 산수, 수신, 역사, 지리, 체조를 가르쳤고, 그해 12월에는 중학교 과정인 오산학교를 세우고 학생 7명을 처음 받아들여 개교했다. 1908년에는 오산학교에 학생들이 모여 3개 반으로 편성되었고, 정주군 출신의 춘원 이광수가 오산중학교의 교사로 초빙되어 축구, 야구, 테니스, 배구 등을 지역에 처음 소개하였다. 방응모는 어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학교에 입학해 신학문을 접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0페이지&amp;lt;/ref&amp;gt; 그는 이승훈과 의기투합해 민립 대학을 세우는 운동을 추진했지만 조선총독부 평안북도청 학무국에서 승인을 거부하여, 대학 설립에 실패했다.&lt;br /&gt;
&lt;br /&gt;
=== 언론, 기업 활동 ===&lt;br /&gt;
==== 계몽 활동과 언론 활동 ====&lt;br /&gt;
1915년부터 1924년 방응모는 지역 지식인들, 유학파 청년, 계몽 청년들이 모여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하는데 참여했고, 민립대학기성회 평안북도지부에서 활동하면서 민립대학기성회 중앙회 중앙위원 조만식 등과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언변과 용모가 되었던 그의 여관에도 손님들이 몰렸고, 그가 &amp;quot;2백원도 좋고 5백원도 좋다며 보태달라&amp;lt;ref name=&amp;quot;fsfs87&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7페이지&amp;lt;/ref&amp;gt;&amp;quot;고 하면 기부금을 내는 이들이 있었다. 대신 하룻밤을 의탁하려고 그의 여관을 찾은 이들에게 무료 숙식을 제공하기도 했다.&amp;lt;ref name=&amp;quot;fsfs87&amp;quot;/&amp;gt; 1919년 정주에서 3.1 만세 운동이 벌어지자, 그도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형사들의 눈을 피해 방응모는 만세운동을 하다 재빨리 몸을 피해 화를 면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8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1922년 6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인수하여 분국장에 취임했다. 6월 9일에는 정주군 지역 체육행사로 테니스 대회를 개최하였다. 그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경영하는 동시에 그는 농촌 계몽운동 등에 적극 투신하여 인망을 쌓았다. 처음 몇번은 친구 전우현의 자금을 빌려 부족분을 메우기도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02페이지&amp;lt;/ref&amp;gt; 한다. 1922년 6월 19일&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96페이지&amp;lt;/ref&amp;gt; 동아일보 본사를 설득하여 정주분국을 동아일보사 정주지국으로 승격시켰다. 동아일보사 지부장 재직 시 그는 전우현과 함께 의기투합하여 민립 대학 설립 자금과 농촌진흥회 회원의 여비와 회비를 염출하기 위한 목적 및 당시 교사도 없이 난관에 처했던 오산학교의 재개교를 위한 &amp;quot;오산학교의 부흥 운동을 목표로 한 재단법인 촉성 기금 마련&amp;quot; 등을 계획했다. 총독부의 인허가 거부로 실패한 대학 설립 자금은 고스란히 오산학교의 부활과 복교 자금으로 투입되었다. 1920년 1월에 경성형무소에서 가석방된 조만식은 이승훈을 만났고, 다시 조만식이 오산학교를 맡으면서 학교는 다시 정상 운영되었다.&lt;br /&gt;
&lt;br /&gt;
1923년 동아일보 정주군 분국이 지국으로 승격되자 정주 지국장으로 동아일보 정주지국을 경영하였고, 같은 해 7월 여성들의 사회참여와 평등권 신장을 위한 여자교육회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이후 대규모 수해가 나자, 정주군 수해구제회를 결성하여 봉사활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1923년 4월 조만식·송진우·안재홍·김성수 등의 주도로 민간 자본으로 대학교 설립을 추진하기 위한 조직인 조선민립대학기성회가 결성되자, 방응모는 민립대학 기성회에 참여하여 민립대학기성회 정주군준비회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5월에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정주지방지부가 설립되자 기성회 정주지부 상무위원을 맡았다.&lt;br /&gt;
&lt;br /&gt;
==== 광업 경영과 조선일보 입사 ====&lt;br /&gt;
1924년 봄 오산학교 교감으로 있던 전우현이 방응모와도 안면이 있던 금광 채굴업자 두 명을 데리고 그를 찾아왔다. 그들은 자신들이 봐 둔 산이 있다고 방응모에게 소개했다. 그는 선천군의 지역 유지이자 최창학의 친구이며, 그가 동아일보 지국장으로 알게 된 이봉찬을 찾아갔다. 한학자로 알고 있던 그가 금광 투자를 제의하자 &amp;quot;한문이라면 빼지 않고 알려고 드는 한학 훈도가 어떻게 금광을&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16페이지&amp;lt;/ref&amp;gt;&amp;quot; 하느냐 하였지만, 이봉찬은 그에게 금광, 광산에 대한 지식을 알려주었다. 이봉찬은 그에게 광산 지식을 알려주며 최창학의 소유지 중 폐광을 빌리는 법을 알려주었다. 방응모의 됨됨이에 감복한 듯, 그의 수많은 질문에 적잖은 충고를 자임해주었다.&amp;lt;ref name=&amp;quot;fsfs117&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5페이지&amp;lt;/ref&amp;gt; 이봉찬은 최창학에게 방응모를 소개하는 편지를 수차례에 걸쳐 보내주었다.&amp;lt;ref name=&amp;quot;fsfs117&amp;quot;/&amp;gt; 이봉찬은 방응모의 친구들이 봐 둔 갱도를 임대받도록 도와주었다. 이봉찬은 방응모의 한학 실력과 사람됨을 알아보고 있어, 자금을 쾌히 빌려주었다.&amp;lt;ref name=&amp;quot;fsfs117&amp;quot;/&amp;gt;&lt;br /&gt;
&lt;br /&gt;
이후 광산업에 뛰어들어 1924년 여름 압록강변의 최창학 소유 폐금광인 평안북도 삭주군 외남면 교동 다릿골의의 삭주 교동광업소를 찾아가 10미터 정도 땅을 파고 금맥을 발견했다. 바로 삭주 교동광업소를 인수, 경영을 확대하였다. 이때 만난 동업자의 딸이자 친구 전우현의 조카딸인 '''이인숙(李仁淑)'''을 만났다. 본처 승계도가 두 아들을 잃고 복부 수술이 잘못되어 아이를 얻지 못하게 되자 방응모에게도 수많은 중매가 들어왔다. 자식들을 병으로 잃은 것이 자신의 불찰이라고 본 승계도는 그에게 작은 부인이라도 들이자는 말을 꺼내기도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18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26년 방응모에게 광산 사업을 제안했던 두 친구가 손을 털고 나갔고, 그의 가족은 돈이 없어 쌀 대신 좁쌀로 좁쌀죽을 먹으며 연명해야 했다. 방응모는 정주군에 사는 비슷한 또래의 먼 친척 방상진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고, 방상진과 일꾼 대여섯 명, 그리고 후처 이인숙의 친정 쪽에서 얻어온 토지문서를 얻어 자금을 마련, 삭주 다릿골 광산으로 가서 다시 금광을 채굴했다. 금맥은 쉽게 나오지 않았고, 출몰하는 마적떼에게 소와 기구를 약탈당했다. 동시에 빚쟁이들의 독촉에 시달렸으나 '''''1926년 7월 지하 300m 지점에서 금맥을 확보했다. 이후 연간 300kg의 금을 생산, 그는 굴지의 광산업자로''''' 성장해 금맥을 찾아 벼락부자가 되었다. 그는 방상진을 교동금광 총감독에 맡겼다. 이때 그는 최창학에게 임대료에 이자를 쳐서 보내주었다.&lt;br /&gt;
&lt;br /&gt;
그때까지 첫 부인 승계도가 두부를 팔아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미국산 포드 T형자동차'''''를 타고 금의환향했다. 1928년 방응모는 자신의 아호인 춘해를 딴 춘해 장학회를 만들고 장학생들의 모임인 이심회를 만든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48페이지&amp;lt;/ref&amp;gt; 그 해에 방응모는 교동지역에 파출소 지소를 유치하였고, 마적단에 시달리던 주민들은 그의 송덕비를 세우기도 했다. '''''1928년에 그는 의정부 직동, 흥선대원군의 별장이 있던 곳 바로 뒤에 위치한 건물을 매입'''''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한용운]], 홍명희를 자주 초대했다.&lt;br /&gt;
&lt;br /&gt;
'''''1932년 방응모는 교동광산을 135만원이란 거액에 일본 중외광업주식회사에 매각'''''했다. 그 뒤 1932년 6월부터 조선일보 영업국장으로 활동하다 '''1933년 3월 [[조선일보]]의 경영권을 인수'''하여 부사장에 취임하였다.&lt;br /&gt;
&lt;br /&gt;
그는 교동광업소를 운영하며 모은 재력을 바탕으로 부사장 재직 중 [[조선일보]]의 대주주가 되었으며, 1933년 7월 8대 사주 조만식으로부터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제9대 [[조선일보]] 사주로 취임, 활동했다.&amp;lt;ref&amp;gt;조선일보는 1932년 7월에 조만식을 사장으로 영입했지만, 조만식은 거의 평생을 평양에서 살아왔던데다 서울에서 활동하기에는 적응을 잘하지 못했다. 조만식은 신문사 경영난과 지역감정의 혹독한 시련을 받은 채 9개월만에 퇴사했다. 그리고 조만식 후임으로 1933년, 방응모를 사장으로 추대하기에 이르렀다.&amp;lt;/ref&amp;gt;&amp;lt;ref&amp;gt;《한국사 시민강좌 제47집, 대표적 독립운동가 12인》,일조각. p145&amp;lt;/ref&amp;gt; 방응모 취임 이후의 초대 부사장은 이광수, 주필은 서춘이었다.&lt;br /&gt;
&lt;br /&gt;
=== 언론, 사업 활동 ===&lt;br /&gt;
==== 사회사업과 조선일보 인수 계획 ====&lt;br /&gt;
금광 사업에 성공한 그는 영림, 조림 사업에도 투자하였다. 방응모는 배우자 승계도에게서 더 이상 아들을 얻지 못하자 첩 이인숙을 통해 아들을 얻으려고 하였다. 이인숙은 아들을 낳았으나 이 아들은 곧 사망하였다. 아들을 잃은 이인숙은 승계도의 도움을 받다가, 그해 6월 방응모가 있는 광산으로 가 생활하였다'''. 승계도와 이인숙을 통해 자녀를 얻지못하자 42세가 되던 해인 1924년 친형인 방응곤의 둘째 아들 방재윤을 양자로 입양시켰다.'''&lt;br /&gt;
&lt;br /&gt;
[[파일:방응모장학생.jpg|섬네일|160px|오른쪽|방응모와 그의 장학금을 받던 학생들. 가운데 앉은 이가 방응모이고, 서있는 이들 중 왼쪽에서 두 번째는 방응모의 양자 방재윤.]]&lt;br /&gt;
&lt;br /&gt;
1930년 배영옥과 결혼하여 딸 방재숙을 얻었다. 1932년 광산업을 정리하였고 언론사업을 비롯하여 육영사업과 조림 및 간척사업 등을 벌였다. 또한 고아원과 사회복지단체에 후원금을 지원하면서 인망을 얻기도 했다. 삭주 지역에서는 그의 송덕비가 세워지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932년 그는 수원군 팔탄면 노하리 일대의 갯벌에 일본인이 수차례 뚝을 쌓다가 실패했다는 정보를 얻고 임삼진을 통해 조선총독부에 허가를 요청하였다.&amp;lt;ref name=&amp;quot;pp186&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86페이지&amp;lt;/ref&amp;gt; 간척 사업은 이후 1935년부터 시작되었지만 1932년부터 은밀히 착수되어 왔다.&amp;lt;ref name=&amp;quot;pp186&amp;quot;/&amp;gt;&lt;br /&gt;
&lt;br /&gt;
1933년 무렵 방응모가 [[조선일보]] 인수에 나서기 전부터 그는 [[한용운]]을 위한 일이라면 돈을 아끼지 않고 지출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성북동 222번지 언덕에 만해를 위해 기와집 한 채를 지어주었는데 심우장(尋牛莊)이 그것이다. 또한 만해가 일제의 배급을 거부해 생활이 어렵게 되자 만해에게 생활비를 지급했던 방응모는 만해가 병석에 누운 1944년에는 치료비를 지원해주기도 했다.&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6/0000043262?sid=103 만해가 일송 선생 5일장 치른 사연]&amp;lt;/ref&amp;gt; 그 외에도 방응모는 만해 한용운·벽초 홍명희 등과 함께 새해가 되면 백천온천에도 같이 다녀올 정도로 두터운 친분을 맺었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1&amp;quot;&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8/07/2007080700002.html 만해와 계초 방응모 선생]&amp;lt;/ref&amp;gt; 1935년 7월에는 경성 태평로1가에 새 사옥을 준공하는 한편, 출판부를 신설해 〈조광〉(1935. 10)·〈여성〉(1936. 6)·〈소년〉(1937. 4) 등의 월간 잡지를 차례로 창간했으며&amp;lt;ref name=&amp;quot;dam1&amp;quot; /&amp;gt; 운영하였다. 한편 [[1932년]] 교동 광업소를 정리하여 매각하였다.&lt;br /&gt;
&lt;br /&gt;
방응모의 광산 매각을 일본 정부 측에 알리고 다리를 놓은 것은 고일청(高一淸)이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84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32년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사건으로 체포된 [[안창호]]의 사면 탄원과 보석을 위해 노력하였다. 안창호가 윤봉길을 사주했다는 증거가 없으며 그가 테러행위를 지시했다는 증거 자료나 문건이 없다는 것이 방응모의 안창호 탄원 이유였다. 그러나 총독부 경무국장은 그의 안창호 석방 제안을 정중히 거절한다. 1936년 동방문화학원(뒤에 숭문중학교·고등학교 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1939년 9월에는〈조선일보〉의 조간 1회, 석간 2회의 1일 3회 발행을 시작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인수와 경영 ====&lt;br /&gt;
1933년 1월 16일 그는 정식으로 주식회사 [[조선일보]]사를 창립, 1월 18일에 발표된 창립 취지서에는 창립위원장 방응모, 창립발기인 방응모, 조만식, 고일청 외 등이 참여했다. 일단 그는 조만식을 사장으로 임명하고 자신은 부사장으로 있다가, 그해 3월 13일 다시 부사장에 취임했다. 4월 25일 편집인 겸 발행인이 되고, 4월 29일에는 조선일보의 조간, 석간제 발행을 부활, 확정시켰다. 1933년 7월 10일 총독부로부터 조선일보사의 법인 등록 승인을 얻어냈다. 7월 10일 조만식의 사퇴로, [[조선일보]]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다. 1933년 그는 자신의 아호를 춘해에서 계초로 바꾸었다. 그는 유능한 문인, 필진의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 상금 1천 원을 걸고 작가를 영입하였다.&lt;br /&gt;
&lt;br /&gt;
1934년 3월 25일 이광수를 비롯하여 서춘, 김동진, 함상훈, 신태익 등을 [[조선일보]]로 영입해 왔다. 그 외에도 정주군 출신 언론인, 작가들이 조선일보로 많이 오게 되었다. 이후 동아일보와 갈등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이광수가 조선일보로 옮겨와 부사장직에서 9개월 근무했다. 당시 조선일보 내부에서는 문모 라는 이가 이광수의 등장으로 자신의 입지 약화를 우려해 오랫동안 이광수를 내보내려 흉계를 꾸몄다고 한다. 이광수는 1934년 5월 25일자로 돌연 사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65페이지&amp;lt;/ref&amp;gt; 문모는 그에게 오히려 잘 됐다는 식으로 말하다가 방응모에게 호되게 혼이 났다. 그리고 문모로 하여금 즉시 금강산에 들어가 이광수를 다시 데려오게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65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이광수는 아들 봉근(당시 8살)의 사망 등으로 실의에 빠졌고, 1935년에 가서야 이광수를 조선일보 고문이자 필진으로 재영입하게 됐다.&lt;br /&gt;
&lt;br /&gt;
==== 동방문화학원 재단 설립 ====&lt;br /&gt;
방응모는 1936년 방농장의 소유권을 기본 자산으로 하는 재단법인 동방문화학원(東邦文化學院)을 설립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6페이지&amp;lt;/ref&amp;gt; 동방문화학원은 학교 법인으로 인가된 재단 법인으로, 그뒤 고계학원과 인연을 가지고 1936년부터는 보성고등보통학교를 후견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 분리되었다. 그뒤 방응모 장학생인 서중회 회원들을 위한 방응모 장학사업을 주관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7페이지&amp;lt;/ref&amp;gt;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태평로 구 조선일보 사옥 안에 동방문화학원의 간판을 달고 조광 잡지를 계속 발행하는 조광사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7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일제 강점기 후반 ===&lt;br /&gt;
==== 중일 전쟁 전후 ====&lt;br /&gt;
중일전쟁 개전 직후인 1937년 7월 11일에 열린 [[조선일보]] 간부회의에서 주필 서춘이 '일본군, 중국군, 장개석씨'등으로 쓰던 용어를 '아군, 황군, 지나, 장개석'으로 고치고 일본 국민의 입장에서 논설을 쓸 것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편집국장 김형원과 영업국장 김광수가 적극 반대를 하기도 했으나, 방응모는 '일장기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이미 몇 십만 원의 손해를 보았을 뿐 아니라 [[3.1 운동]] 때처럼 신문이 민중을 지도할 수 없다'면서 서춘의 입장을 지지했다. 한편으로 방응모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된 [[안창호]]를 [[조선일보]]에 영입하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안창호는 옥중에서 얻은 간질환과 폐질환 등으로 고생했고, 진료비 등을 수시로 지원하고 문병했음에도 출옥후 얼마 뒤에 사망한다.&lt;br /&gt;
&lt;br /&gt;
1933년 이심회(以心會：후에 序中會, 방응모장학회 등으로 명칭이 바뀜)라는 장학회를 만들어 국내 대학생과 해외유학생들에게 학자금을 지급하기도 했으며, 재단법인 동방문화학원(東方文化學院：지금의 숭문중·고등학교 전신)의 이사장직을 맡기도 했다.&amp;lt;ref name=&amp;quot;dam1&amp;quot; /&amp;gt; 또한 자신의 막대한 재원을 들여 1936년부터 함경남도 영흥군 일대에 당시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대단위 조림사업을 벌였으며, 그 전 해인 1935년부터는 경기도 수원군 팔탄면 일대에서 만 2년간에 걸친 간척사업을 벌이기도 했다.&amp;lt;ref name=&amp;quot;dam1&amp;quot; /&amp;gt;&lt;br /&gt;
&lt;br /&gt;
1937년 12월 24일 [[안창호]]는 병보석 판정을 받고 재판소가 지정한 현 서울대학교병원인 경성제국대학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안창호의 입원 중에 시중을 든 사람으로는 안창호의 외조카 김순원과 청년 박정호 두 사람이었고, 나중에는 이응준 장군의 부인 이정희가 끝까지 지성껏 간호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7페이지&amp;lt;/ref&amp;gt; [[안창호]]는 병상에서 병원비 문제로도 고초를 겪었다. 이 때문에 조만식은 일본 경찰로부터 안창호의 병원비를 대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음에도, &amp;quot;내가 먹고 살면서 그 선생을 돌보지 않을 수 없다&amp;quot;며 완강히 거절하고 안창호를 도왔다고 한다. 안창호의 간호를 같이 도와주던 이응준 장군 부인 이정희는 10일마다 계산되어 나오는 병원 입원비로 안창호 선생이 괴로워하는 표정을 지켜볼수 없었다고 진술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8페이지&amp;lt;/ref&amp;gt; 방응모는 5백원의 수표 한 장을 안창호에게 전달하였다. 50일간의 입원비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9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안창호]]는 1938년 3월 10일 밤 12시 경성제국대학 병원에서 운명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폐간 사건 ====&lt;br /&gt;
일본의 전쟁이 격화되면서 조선총독부 공보국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1940년에 강제로 폐간조치 했다. 광산을 팔아서 자신의 모든 것을 조선일보에 바쳤던 방응모는 큰 절망과 좌절을 느껴야 했다. [[한용운]]은 ‘신문이 폐간되다/ 붓이 꺾이어 모든 일이 끝나니…’로 시작하는 시를 지어 방응모를 위로했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1&amp;quot; /&amp;gt;&amp;lt;ref&amp;gt;붓이 꺾이어 모든 일 끝나니 이제는 재갈 물린 사람들 뿔뿔이 흩어지고 아, 쓸쓸하고 쓸쓸한지고 망국 서울의 가을날 한강의 물도 흐느끼느니 울음 삼켜 흐느끼며 연지를 외면한 채 바다 향해 흐르느니&amp;lt;/ref&amp;gt; 동아일보에는 김성수 외에도 장덕수와 송진우가 있었지만 그에게는 조선일보 폐간을 막기 위해 총독부와 교섭할 인물도 없었다.&lt;br /&gt;
&lt;br /&gt;
1938년 2월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선 내 일간신문 25개사로 조직된 조선춘추회의 창립에 창립발기인으로 참가했고, 조선춘추회 간사로 활동했다. 같은 해 7월 “국민정신을 총동원하고 내선일체 전 능력을 발휘하여 국책 수행에 협력하여 성전(聖戰)의 궁극적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조직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에 참여했고, 그날 결성된 경성연맹 창립총회에서 상담역을 맡았다. 9월부터 조선방공협회 경기도연합지부 평의원을 지냈다. 10월에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주최한 비상시 국민생활 개선을 위한 제1회 생활개선위원회에서 제2부(의례와 사회풍조 쇄신부)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그러나 1938년 10월부터 조선총독부는 조선일보의 신문용지를 검열, 통제하기 시작했다.&lt;br /&gt;
&lt;br /&gt;
1940년 5월 조선총독부 총독 미나미 지로가 방송담화로 창씨개명을 권고했다. 그러나 그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성씨를 이제 와서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며 창씨개명은 완강하게 거절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조선일보에 트집이 잡힐 일이 나타나지 않자 총독부는 전국 면사무소에 조선일보 신문 구독을 거절하도록 명령을 내렸고, 동시에 조선말을 쓰는 민원인에게는 일을 처리해주지 말도록 하게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3페이지&amp;lt;/ref&amp;gt; 조선총독부는 송진우의 예금통장을 문제삼았다. 송진우 명의의 은행저금이 동아일보의 8백여 개의 지국과 분국을 통해 모금된 독립운동 자금이라며, 그리고 동아일보 간부들이 백운장이라는 요정에서 회식을 한 것을 김성수 집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려 했다는 등의 이유로 백관수 동아일보 사장을 전격 구속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3~374페이지&amp;lt;/ref&amp;gt; 동아일보는 백관수가 구속된지 10일 만에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동아일보 중역회의를 열고 폐간신청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4페이지&amp;lt;/ref&amp;gt; 총독부는 조선일보에도 자진 폐간을 권고했고, 1940년 8월 9일 편집회의를 주관, 8월 10일 조선일보의 폐간계를 내고, 8월 10일자로 폐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5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잡지 발행 활동 ====&lt;br /&gt;
신문 강제 폐간 뒤 방응모는 간판을 조광사로 바꿔 걸고, 사옥은 동방흥업주식회사로 등기를 변경해서 유지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1페이지&amp;lt;/ref&amp;gt; 이후 그는 [[조광 (잡지)|조광]] 잡지 발행에 전념했다. 1943년 8월 경 일본 중앙대학의 예과를 마친 [[방일영]]이 입사&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1페이지&amp;lt;/ref&amp;gt;, 필진으로 참여했다. [[조선일보]]가 폐간된 후에도 방응모는 벽초 [[홍명희]] 부자에게 지속적으로 생활비를 대주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4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0년 속담대사전, 조선창극사, 조선시조시학, 조선요리학, 세계명인전 상중하 등을 발행했다. 이후 조선사화 등을 발간했는데 다량의 부수로 간행하여 다시 흑자가 되었다.&lt;br /&gt;
&lt;br /&gt;
1943년 평안북도 정주에 있는 부인과 며느리를 비롯한 가족 전부를 상경시키고, 서울 충정로의 저택을 매각, 동대문밖 남산 밑 양사골에 전세집을 얻는다. 그리고 고향의 99칸 한옥을 헐어 양주군 의정부에 옮겨 지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7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4년 손자 [[방일영]]이 학도병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방응모는 손자의 학병 징집을 단호히 거부했다. 방응모는 백방으로 학도병을 피할 수 있는 구실을 찾으려고 연구하다가 [[경성부]]의 유명한 의사 [[백인제]]를 찾아갔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3페이지&amp;lt;/ref&amp;gt; [[백인제]]는 처음에 난처해했으나 방응모의 거듭된 간청으로, 곤란합니다 라는 말만 되풀이하다가 결론은 손자 [[방일영]]의 생살을 칼로 째는 수술을 결정했다. [[방일영]]에 의하면 &amp;quot;나의 왼쪽 뺨의 귀 밑에서 턱까지 생살을 째는 수술이 시작되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3페이지&amp;lt;/ref&amp;gt;&amp;quot; 한다. 이로 인해 [[방일영]]의 징집은 연기되었으나, 균이 들어가서 네 번이나 수술을 더 했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4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양주군수 김정제가 찾아와 학병 문제를 계속 거론하였다. 그는 할 수 없이 방일영을 징집이 면제되는 면서기로 들어가도록 합의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4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4년 6월 29일 만해 [[한용운]]이 사망했다. 그는 심우장을 찾아가 3백원을 내놓았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5페이지&amp;lt;/ref&amp;gt;당시 쌀 10가마가 100원이었지만, 심우장은 당장 현금 1원이 없었는데 거액이라서 놀랐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6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4년]] 아들 [[방재선]]을 얻었다. 이후에도 방응모는 노호용과의 사이에서 방재효, 방재규 등 두 아들을 출산하였다. [[1944년]] [[9월]] 군수산업체인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 설립에 창립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이후 조선항공공업 감사에 피선되었다.&lt;br /&gt;
&lt;br /&gt;
=== 광복 이후 언론 및 정치활동 ===&lt;br /&gt;
==== 광복 직후 ====&lt;br /&gt;
[[파일:1946.06 3의사 유해봉환식장.jpg|섬네일|왼쪽|200px|[[1946년]] [[3월]] 순국3의사 유해봉환일 [[김구]], 위당 [[정인보]] 등과 함께]]&lt;br /&gt;
&lt;br /&gt;
[[1945년]] 8.15 광복 후에는 [[8월]] 말과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朝鮮在外戰災同胞救濟會) 고문과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9월]] 초 [[안재홍]] 등이 좌경화되는 [[건준]]체제에 반발하여 [[건준]]을 탈퇴하자 방응모 역시 [[건준]]을 탈퇴하였다.&lt;br /&gt;
&lt;br /&gt;
[[9월 2일]] [[미군정]]이 주둔하자, 방응모는 윤전기를 찾기 위해 폐간 당시의 증빙서류를 미 군정청에 제시하였으나 소식이 없었다. 총독부는 조선일보 폐간 직후 인수한 윤전기를 경성일보사에 옮겨서 설치했다. 그는 동방문화재단 외 4개 사업소를 적산으로 파악한 미군정을 설득하고, 사옥 문제도 해결하였다.&lt;br /&gt;
&lt;br /&gt;
[[10월 1일]] 조선일보 편집위원회를 구성하고, 신문 복간 운동을 추진했다. 조선총독부의 폐간 지시 당시 의정부로 옮겨놓은 일부 활자 자모음이 잘 보관되어, 그해 11월 23일 조선일보를 복간시키고, 서울신문사 사옥에서 조선일보 복간호를 간행하였다. 이후 조선사회문제대책중앙협의회 중앙위원을 거쳐 [[10월 16일]] [[이승만]](李承晩) 등의 주도로 [[독립촉성중앙회]]가 결성되자 독촉에 가입하였다.&lt;br /&gt;
&lt;br /&gt;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 요인이 귀국하자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에 입당했다. [[12월]] [[안재홍]]의 추천으로 [[한국독립당]]의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출되어 3~4개월 동안 활동했다.&amp;lt;ref&amp;gt;일각에서는 방응모가 '한독당 재무부장으로 지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1947년부터 한독당 재무부장을 맡은 신창균이 전면 부정했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47/0000002626?sid=102 백범 비서와 '진짜' 한독당 재정부장의 육성증언. 참고.]&amp;lt;/ref&amp;gt; 그 뒤 대한국민총회 발기인, 대한독립애국금헌성회 발기인 등으로 활동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복간 및 군정기 활동 ====&lt;br /&gt;
[[파일:Kim Gu (1947).jpg|섬네일|140px|오른쪽|임시정부 각주이자 한독당 당수 [[김구]]. 방응모는 [[한국독립당]]의 중앙상무위원과 당 재정부장으로 참여했고, [[김구]]의 반탁운동과 3의사 유해 봉환 때 자금을 댔다.]]&lt;br /&gt;
&lt;br /&gt;
[[11월]] [[조선일보]]사를 복간시켰다. 그러나 한동안 조선일보의 인쇄는 [[서울신문|서울신문사]]에서 간행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1945년]]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추념대회에 참여하였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2&amp;quot;&amp;gt;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13&amp;lt;/ref&amp;gt; 순국선열추념대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2&amp;quot; /&amp;gt;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참여,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이 되었다.&amp;lt;ref&amp;gt;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55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6년 2월 26일 서울신문사 공무국 종업원들이 조선일보의 인쇄를 거부해버렸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436페이지&amp;lt;/ref&amp;gt; 그동안 묵시적으로 방해가 은근히 있었다. 표면상의 문제는 임금 문제이나 내용상으로는 조선일보에 대한 조선공산당의 시위의 일종이었다. 사흘간의 교섭 끝에 2월 28일에 가서야 26일자와 27일자를 소급해서 인쇄하여 신문을 한꺼번에 발행하였다. 그러나 3월 1일과 2일에 또다시 인쇄를 거부당해 결국 휴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436페이지&amp;lt;/ref&amp;gt; 조선일보를 경성일보사로 옮겨서 인쇄하기로 하고 3월 5일자로 사고로 독자에게 알렸다.&lt;br /&gt;
&lt;br /&gt;
[[1946년]] [[2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회장에 선출되었고, 3월 1일 미군정은 방응모에게 경성일보사 관리인으로 위촉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437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용지난으로 한동안 신문 발행에 어려움을 겪었다.&lt;br /&gt;
&lt;br /&gt;
[[4월 29일]] [[김구]], [[김창숙]], [[김성수 (언론인)|김성수]], [[오세창]] 등과 함께 서울운동장에서 [[윤봉길]]의사 추모회의 창립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amp;lt;ref&amp;gt;&amp;quot;故尹奉吉義士의 記念式 오늘, 發起人會 열고 準備&amp;quot;, 동아일보 1946년 4월 23일자 2면, 사회면&amp;lt;/ref&amp;gt; 그해 [[5월]] 조선공업구락부 고문에 위촉되었다.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民族統一總本部) 10인협의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6월 15일]] 오후 5시 40분 [[서울역]]에 마중나가 [[서울역]]에 도착한 삼의사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 동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 협의원에 지명되고, [[1946년]] [[8월]]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8월 25일에는 [[한국독립당]] 중앙상무위원의 한 사람에 선출되었고&amp;lt;ref&amp;gt;&amp;quot;金九氏飜意 韓獨黨中委閉會&amp;quot;, 동아일보 1946년 8월 25일자 1면, 정치면&amp;lt;/ref&amp;gt; [[1946년]] [[9월]] 독립촉성국민회 총무부장에 선출되었다.&lt;br /&gt;
&lt;br /&gt;
1945년 광복 직후 서기원이 그를 찾아왔다. 서기원은 그때 경성농상실천학교의 동창회로부터 이 학교의 교장이 되어 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이다. 방응모는 서기원의 제의를 받아들여 [[1946년]] [[8월 28일]] 동방문화학원 이사장으로 숭문상업학교를 인수, 재단 이사장이 되었다. 후일 방응모가 6.25 전쟁 중에 납북된 후 동방문화학원과 숭문중,고교의 재단은 최용진이 운영하다가 다시 [[1978년]]에 [[방일영]]에게 인수되었다.&lt;br /&gt;
&lt;br /&gt;
1947년 1월 21일 제5회 창립위원회를 본사에서 개최하고 2월 23일 주식회사 조선일보사 주주창립총회를 열고 대표이사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공동투자 경영자로 참여시킨 전무 이종민과의 알력이 발생했다. 이종민과의 갈등이 심화되자 그해 8월 3일 방응모는 일단 사직서를 제출했다. 1947년 8월 10일 [[풍문여고]] 강당에서 개최된 한인신문기자협회에 참석, [[민족청년단]]에서 언론계 공로자로 방응모, 김성수, 설의식을 지정하여 상을 시상받았다.&amp;lt;ref&amp;gt;&amp;quot;朝鮮 新聞記者協會&amp;quot;, 동아일보 1947년 8월 10일자 2면, 사회면&amp;lt;/ref&amp;gt; 9월 13일의 임시 주주총회가 긴급 소집되어 회사 운영 문제가 논의되고, 이때 취체역을 재선임할 때 다시 선임되었다. 그러나 이때 전무 이종민은 재선임에서 제외되었다.&lt;br /&gt;
&lt;br /&gt;
==== 김구와의 결별과 만년 ====&lt;br /&gt;
이후 [[한국독립당]] 중앙상무위원&amp;lt;ref&amp;gt;[http://db.history.go.kr/url.jsp?ID=dh_003_1946_08_24_0150 한국사데이터베이스]&amp;lt;/ref&amp;gt;, 당 재정부장 등을 맡기도 했으나, [[1948년]] [[1월]] 이후 [[김구]]의 노선 변경과 함께 그를 지지하던 세력이 떨어져 나가서 [[조선일보]]도 김구에게서 등을 돌리게 되었다.&amp;lt;ref name=&amp;quot;조선11&amp;quot;&amp;gt;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68~70쪽.&amp;lt;/ref&amp;gt; 그러나 김구와의 결별이 괴로웠던지 방응모도 직접 나서서 &amp;lt;김구선생의 의견에 대한 우리의 취할바 태도&amp;gt;라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amp;lt;ref name=&amp;quot;조선11&amp;quot;/&amp;gt;&lt;br /&gt;
&lt;br /&gt;
[[1949년]] [[조소앙]]이 결성한 [[사회민주주의]]성향 정당인 [[사회당 (대한민국, 1948년)|사회당]]에 입당해 동당 문교정책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amp;lt;ref&amp;gt;[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9070600209201019&amp;amp;editNo=1&amp;amp;printCount=1&amp;amp;publishDate=1949-07-06&amp;amp;officeId=00020&amp;amp;pageNo=1&amp;amp;printNo=7956&amp;amp;publishType=00020 1949년 7월 6일자 동아일보]{{깨진 링크|url=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9070600209201019&amp;amp;editNo=1&amp;amp;printCount=1&amp;amp;publishDate=1949-07-06&amp;amp;officeId=00020&amp;amp;pageNo=1&amp;amp;printNo=7956&amp;amp;publishType=00020 }}&amp;lt;/ref&amp;gt; 이듬해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경기도]] 양주군에 출마했으나 차점자로 낙선하였다.&amp;lt;ref&amp;gt;[http://db.history.go.kr/url.jsp?ID=NIKH.DB-dh_017_1950_06_01_0030 한국사데이터베이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9년 의정부 가능동 별장에 심은 뽕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랐다. 승계도의 친척 승원호에 의하면 &amp;quot;할아버지(방응모)는 사람들을 시켜 뽕나무를 2년간 키우게 했습니다. 탐스럽게 뽕나무가 자라니까 이번에는 직조 기계를 들여 직조 공장을 세우겠다고 하셨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11페이지&amp;lt;/ref&amp;gt;&amp;quot; 한다. 그러나 그의 방직공장 설립 계획은 6.25 전쟁으로 무산되고 만다.&lt;br /&gt;
==== 납북과 최후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 납북 후 행적은 &amp;quot;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amp;quot;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amp;lt;ref name=&amp;quot;김장&amp;quot;/&amp;gt; [[1950년]] [[8월]]경 [[개성]] 송악산 부근에서 미군의 폭격에 희생되었고 심한 폭격으로 시신을 찾을 수 없어 묘도 만들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다.&amp;lt;ref&amp;gt;{{뉴스 인용&lt;br /&gt;
 |url          = http://www.minjog21.com/news/articleView.html?idxno=1140&lt;br /&gt;
 |제목       = &amp;quot;누워서도 남쪽하늘만 보십니다&amp;quot; - 평양시 신미리 재북통협 특설묘지&lt;br /&gt;
 |출판사    = 민족21&lt;br /&gt;
 |저자       = 신준영&lt;br /&gt;
 |날짜       = 2002-07-01&lt;br /&gt;
 |확인날짜 = 2008-05-15&lt;br /&gt;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40420015541/http://www.minjog21.com/news/articleView.html?idxno=1140#&lt;br /&gt;
 |보존날짜 = 2014-04-20&lt;br /&gt;
 |url-status = dead&lt;br /&gt;
}}&amp;lt;/ref&amp;gt;&amp;lt;ref&amp;gt;[http://www.minjog21.com/news/articleView.html?idxno=686 민족21&amp;lt;!-- 봇이 따온 제목 --&amp;gt;]{{깨진 링크|url=http://www.minjog21.com/news/articleView.html?idxno=686 }}&amp;lt;/ref&amp;gt; 남한에서는 [[1955년]] [[7월 7일]] 생사불명기간 만료로 인해 실종 처리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주변에서 피신하라고 권했지만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느냐'며 완강하게 버티다가 1950년 [[7월 6일]] [[경기도]] [[양주군]] 시둔면 가능리(현, [[의정부시]] [[가능동]]) 자택에 들이닥친 [[조선인민군]]에 의해 끌려갔다.&lt;br /&gt;
&lt;br /&gt;
=== 사후 ===&lt;br /&gt;
[[서울]] 종로에 있던 양자 방재윤의 두 아들 [[방일영]]과 [[방우영]]은 방응모의 첩 이인숙이 찾아가 피신하라고 권고하여 황급히 피신했다. &lt;br /&gt;
&lt;br /&gt;
[[9월 28일]] [[개성시]] 북쪽을 지나 [[황해남도]] [[서흥군]]에서 트럭으로 강제 북송되었다. 이후 9월 28일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lt;br /&gt;
&lt;br /&gt;
7월 6일 그의 행방불명처리가 되고, 방응모의 사후에도 [[조선일보]]는 그의 명의로 발행되었다. 1952년 4월 28일 조선일보는 발행인겸 편집인을 장기영으로, 인쇄인을 방일영으로, 방응모는 명예사장으로 명의변경하여 휴전 후 계속 발행하게 되었다. 1954년 4월 30일 제8회 조선일보 정기주주총회에서 장기영 사장이 사퇴하면서, 명예사장 방응모가 사장으로 추대되고, 발행인 겸 대표취체역에 방일영이 선임되었다. 이후 실종 후 [[1959년]]에 법적으로 사망 처리되었다. 그리고 [[1970년]]까지는 조선일보는 그의 이름으로 발행되었다.&lt;br /&gt;
&lt;br /&gt;
[[1970년]] [[2월 19일]] 조선일보 정기주주총회에서 방응모 이사를 사퇴 수리하였다. 그의 피폭사망 사실은 1970년대 이후 탈북자들을 통해 대한민국에 소개되었다.&lt;br /&gt;
&lt;br /&gt;
== 친일행위 의혹 ==&lt;br /&gt;
=== 일제 전시체제기 활동 ===&lt;br /&gt;
일제 강점기 말기 언론인으로서 총독부체제에 협력한 기록과 활동이 다수 기록이 있다. 1933년 3월 [[조선일보]] 경영권을 인수하고 부사장직에 취임했을 당시 같은 달에 고사기관총 구입비용 1600원을 군에 헌납하였다. 그는 1935년 친일 잡지 《조광 (잡지)(朝光)》을 창간하였고, 1937년에는 경성방송국 제2방송에 출연하여 일제가 중국의 베일을 절멸케하여 극동평화를 지키려고 한다는 강연을 하였다. 1940년대부터 조광에 집중적으로 친일 논설을 기고하고 시국 강연에 참여하여 전쟁 지원을 독려했다. 1942년 6월에는 '징병령 실시에 일층 더 감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글을 써서 조광에 발표하였다. 애국금차회(1937),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1938), 임전대책협의회(1941), 조선임전보국단(1941) 등 대표적인 친일 단체의 회원에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그는 이런 행적으로 인해 해방정국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명단에 기록되어 있고,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해 발표한 &amp;lt;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amp;gt;에 모두 포함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lt;br /&gt;
&lt;br /&gt;
우리 [[조선일보]]는 다른 어떤 신문도 따라오지 못하는 확고한 신념에서 비국민적 행위를 단연 배격하여 종국까지 조선일보사가 이미 정해놓은 방침에 한뜻으로 매진한다.|원산에서의 순회 강연&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9478.html 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친일 다짐하다 시민에 봉변]《한겨레》2005-08-24 오후 06:13:18&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반민족행위 논란 ===&lt;br /&gt;
방응모를 친일파로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남아 있다. 조선일보 경영 이전에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방응모의 활동이 거의 없었고, 납북된 뒤 소식이 끊겨버린 까닭에 본인이 항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 동안의 행적만으로 친일파 여부를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방응모의 후손들이 영향력 있는 [[조선일보]] 언론사의 사주를 맡았기에 그의 입장에서 서술한 기록을 많이 남기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80년 발간된 그의 전기 《계초 방응모》(조선일보사) 등에는 '그가 민족주의적 선각자'로 묘사되고 있다. 방응모가 친일파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일부세력측은 그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논거로 드는 경우가 많이 있다.&amp;lt;ref&amp;gt;유석재, 계간 《유심》 (2004년 봄호) [http://yousim.buddhism.org/html/2004-spr/tamgu-yoo-seok-jae.htm 삭풍 속에 피어난 금란지교(金蘭之交) - 만해와 계초 방응모]&amp;lt;/ref&amp;gt;&amp;lt;ref&amp;gt;&amp;quot;일제 말기 계초는 시국강연에 나설 것과 창씨개명을 집요하게 강요받았으나 그때마다 묵묵부답으로 거부하며 소신을 지켰다.&amp;quot; 《조선일보》 (2001.3) 조선일보 사장열전 - 계초 방응모편, 《한겨레》 (2001.3.30) [http://www.njoyschool.net/news/article_view.asp?menu_code=s20202&amp;amp;no=1206 조선일보, 일장기를 신문제호 위에]&amp;lt;/ref&amp;gt;&lt;br /&gt;
또한 한국정토학회 고문이자 서울 정토사 주지였던 박설산(1918~2007)이 학도병에 끌려가기 직전인 1943년 12월 28일 밤 서울역에서 스스로 왼발을 선로에 올려 발가락을 절단해 징집을 기피하자 방응모는 만해와 함께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설산을 걱정하면서 입원 중 조선일보 기자를 통해 돈을 전달한 것은 물론 퇴원할 때 돈을 전달하고 뒤를 보살폈다고 한다.&amp;lt;ref&amp;gt;박설산 회고록 &amp;lt;뚜껑없는 조선역사책&amp;gt;(1994, 도서출판 삼장) p240~241&amp;lt;/ref&amp;gt;&lt;br /&gt;
&lt;br /&gt;
2010년 12월, 방응모 관계자들 및 조선일보측은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을 취소해달라'며 법원에 낸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amp;quot;1944년 조선항공업 창립발기인으로 활동한 부분에 대해 친일행위로 판단한 부분을 취소하지만 나머지 활동에 대해서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amp;quot;라고 판결했다. 그 이유인 즉 &amp;quot;방응모는 1933년 조선일보 사장으로 취임해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등으로 활동하며 친일활동을 벌였으며, 1937년 경성방송국 시국강연에서 일본제국이 극동평화를 확립시킬 것이라는 내용의 강연을 하고, 1938년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춘추회의 발기인 겸 간사로 활동하기도 했다&amp;lt;ref&amp;gt;[http://media.daum.net/breakingnews/politics/view.html?cateid=1002&amp;amp;newsid=20101222103319164&amp;amp;p=newsis 법원 &amp;quot;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친일파 맞다&amp;quot;]뉴시스 2010년 12월 22일&amp;lt;/ref&amp;gt;&amp;quot;는 것이다.&lt;br /&gt;
&lt;br /&gt;
2012년 1월 12일 서울고법 행정7부는 방 전 사장의 손자인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이 행정안전부를 상대로 낸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처분 취소 청구소송에서 ‘일제 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의 친일 행위 판정 조항에 비추어 방 전 사장에게 적용된 모두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민족적 지도자로서 비중이 큰 만큼 그로 인한 책임도 무거울 뿐 아니라 고난의 시기를 겪은 민족으로서 그 역사를 반성하자는 입장에 설 때, 방 전 사장의 여러 행태는 반민특별법에서 규정한 친일반민족행위의 유형에 속함을 부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1·2심 재판부는 방 전 사장이 자신이 운영하던 잡지 &amp;lt;조광&amp;gt;에 일제 침략전쟁에 동조하고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문예물과 일제 침략전쟁에 협력할 것을 주문하는 논문을 게재하는 등의 ‘친일’ 행위를 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또한, 2심 재판부는 일본의 전쟁 수행을 돕기 위해 설립된 군수 제조업체 ‘조선항공공업’의 발기인과 감사를 지낸 것은 “감사는 업무집행에 관여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기관으로, 방 전 사장이 이 회사를 운영했다고 볼 수 있다”는 이유로 친일이라고 판단했다.&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4565.html법원 ‘방응모 친일’ 2심서도 인정] 인터넷한겨레 2010년 12월 22일&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가족 관계 ==&lt;br /&gt;
* 아버지 : 방계준(方桂準)&lt;br /&gt;
* 어머니 : 온양 박씨&lt;br /&gt;
** 형 : 방응곤(方應坤)&lt;br /&gt;
** 배우자 : 승계도&lt;br /&gt;
*** 아들 2명 요절&lt;br /&gt;
** 배우자 : 이인숙(李仁淑, 1901년 ~ ?)&lt;br /&gt;
*** 아들 : 방재욱(方在旭, 1925년 ~ 1926년 9월)&lt;br /&gt;
** 배우자 : 배영옥(裵英玉)&lt;br /&gt;
*** 장녀 : 방재숙(方在淑)&lt;br /&gt;
** 배우자 : 노호용(盧鎬龍)&lt;br /&gt;
*** 장남 : 방재선(方在善, 1944년 ~)&lt;br /&gt;
*** 차남 : 방재효(方在孝, 1946년 ~)&lt;br /&gt;
*** 삼남 : 방재규(方在奎, 1948년 ~)&lt;br /&gt;
&lt;br /&gt;
** 양자 : 방재윤(方在允 또는 方在胤, 1901년 ~ 1940년, 형 방응곤의 차남)&lt;br /&gt;
*** 손자 : 방일영(方一榮, 1923년 ~ 2003년)&lt;br /&gt;
**** 증손 : 방상훈(方相勳, 1948년 ~)&lt;br /&gt;
**** 증손부 : 윤순명 - 윤치호(尹致昊, 1865년 ~ 1945년)의 증손녀&lt;br /&gt;
***** 현손 : 방준오(方俊吾, 1974년)&lt;br /&gt;
***** 현손 : 방정오(方政吾, 1978년)&lt;br /&gt;
**** 증손 : 방용훈(方容勳, 1952년 ~)&lt;br /&gt;
*** 손자 : 방필영(方必榮, 1924년 ~ 1926년)&lt;br /&gt;
*** 손녀 : 방숙영(? ~ 1951년 1월)&lt;br /&gt;
*** 손자 : 방우영(方又榮, 1928년 ~ 2016년)&lt;br /&gt;
**** 증손 : 방성훈(方聖勳, 1973년 ~)&lt;br /&gt;
&lt;br /&gt;
== 기타 ==&lt;br /&gt;
그는 [[한용운]], 최남선, 정인보, 홍명희 등과 친분관계를 형성하고 어울려 지냈다 한다.&lt;br /&gt;
&lt;br /&gt;
[[김구]]의 한국독립당의 재정적 후견인 역할을 하였다 하며,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삼의사 유골봉환식 때 [[김구]], [[정인보]] 등과 촬영한 사진이 있다.&amp;lt;ref&amp;gt;백범어록 참조&amp;lt;/ref&amp;gt; 그리고 1945년 11월 23일 조선일보가 복간되자 백범 김구는 '有志者事竟成' 뜻을 지닌 자 성취할 수 있다'는 친필 휘호를 보내며 축하했다.&amp;lt;ref&amp;gt;[http://www.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4060370241 '조선일보 역사 읽기'《조선일보》2004.06.03]&amp;lt;/ref&amp;gt;&lt;br /&gt;
한편 임꺽정의 저자인 벽초 홍명희가 방응모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그와 깊은 친분을 맺었다는 주장이 있다. 《조광》 1938년 11월호엔 홍명희가 병중에 있는 방응모를 위로하며 지은 한시가 방응모의 답시와 함께 실려 있다고 한다.&amp;lt;ref&amp;gt;[http://weekly.chosun.com/site/data/html_dir/2004/11/05/2004110577041.html ‘임꺽정’으로 되살아난 독립운동의 魂! 주간조선 1827호 2004.11.04&amp;lt;/ref&amp;gt; 또한 [[안창호]]의 비서실장을 지낸 독립유공자 구익균은 방응모와 안창호가 친밀했다는 주장을 했다.&amp;lt;ref&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09/2008030901055.html &amp;quot;공산주의자들, 도산 비판하다가도 하숙비 떨어지면 찾아와&amp;quot;] 조선일보, 2008-03-10 03:22&amp;lt;/ref&amp;gt;&lt;br /&gt;
또한 박설산에 따르면 1943년 만해 한용운에게 학도병으로 끌려가게 되었음을 알리려 심우장으로 찾아가게 되었을 때, 한용운과 방응모가 바둑을 두고 곁에서 정인보가 훈수를 두고 있었다고 한다.&amp;lt;ref&amp;gt;박설산 저 &amp;lt;뚜껑없는 朝鮮 역사 책&amp;gt; p.226 도서출판 三藏(1994)&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30년대~1940년대 방응모에게서 장학금을 지원받은 학생 모임인 서중회의 회원들의 그의 인물평은 &amp;quot;첫 인상은 좀 깡마른 모습이었으나 의지가 강한 인물&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56페이지&amp;lt;/ref&amp;gt;&amp;quot;이라는 평을 남기기도 했다.&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 /&amp;gt;&lt;br /&gt;
&lt;br /&gt;
== 참고 자료 ==&lt;br /&gt;
* 청산하지 못한 역사: 언론 내세워 일제에 아부한 교화 정책의 하수인 (문영숙) (반민족문제연구소, 청년사, 1994)&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민족 계몽의 초석 방응모(이동욱 저, 지구촌, 1998)&lt;br /&gt;
* 계초 방응모전(계초전기간행위, 조선일보사, 1980년)&lt;br /&gt;
* 계초 방응모(이동욱, 방일영문화재단, 1996)&lt;br /&gt;
&lt;br /&gt;
== 외부 링크 ==&lt;br /&gt;
* [https://web.archive.org/web/20050123171046/http://chosunhost.com/ 계초방응모 기념사업회]&lt;br /&gt;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09145 &amp;lt;조선일보&amp;gt;, 방응모 전 사장의 '친일행적' 말한다] - 오마이뉴스 04.09.10일자&lt;br /&gt;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020302101749 방응모ㆍ 김성수 친일행적 뭔가 : &amp;lt;긴급입수&amp;gt;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 全文] - 프레시안 2002-03-02&lt;br /&gt;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54052 그가 '&amp;lt;조선&amp;gt;의 주인' 주장하는 이유] 오마이뉴스 2001년 9월 20일자&lt;br /&gt;
*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956 방재선씨, 호주·상속 원인무효소송 제기]&lt;br /&gt;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4/06/2008040601053.html '5인 친필 서첩' 발굴] 조선일보 2008년04월06일자]&lt;br /&gt;
&lt;br /&gt;
[[분류: 감자]]&lt;/div&gt;</summary>
		<author><name>Nsgjjsjsjy02</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B0%A9%EC%9D%91%EB%AA%A8&amp;diff=58851</id>
		<title>방응모</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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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06-11T02:26:2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Nsgjjsjsjy02: /* 중일 전쟁 전후 */&lt;/p&gt;
&lt;hr /&gt;
&lt;div&gt;{|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width:100%&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0%&amp;quot;|사진&lt;br /&gt;
|[[파일:방응모.jpg|center|200픽셀]]&lt;br /&gt;
|+ '''방응모'''&lt;br /&gt;
|+ style=&amp;quot;caption-side:bottom;text-align:left:&amp;quot;|출처: 위키백과&lt;br /&gt;
|출생||1883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조선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또는 정부면 성내동&lt;br /&gt;
|-&lt;br /&gt;
|사망||1950년경으로 추정&lt;br /&gt;
|-&lt;br /&gt;
|사인||불명&lt;br /&gt;
|-&lt;br /&gt;
|거주지||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amp;gt; 경성부 -&amp;gt; 경기도 양주군 의정부읍&lt;br /&gt;
|-&lt;br /&gt;
|국적||대한민국&lt;br /&gt;
|-&lt;br /&gt;
|본관||온양&lt;br /&gt;
|-&lt;br /&gt;
|별칭||호: 계초(啓礎), 춘해(春海)&lt;br /&gt;
|-&lt;br /&gt;
|직업||교사, 변호사, 상인, 언론인, 기업인, 사회운동가, 정치가&lt;br /&gt;
|-&lt;br /&gt;
|배우자||승계도, 이인숙, 배영옥, 노효용&lt;br /&gt;
|-&lt;br /&gt;
|자녀||방재숙(딸), 방재욱·방재선·방재효·방재규(아들), 방재윤(양자)&lt;br /&gt;
|-&lt;br /&gt;
|부모||방계준(부), 온양박씨(모)&lt;br /&gt;
|}&lt;br /&gt;
&lt;br /&gt;
'''방응모'''(方應謨, 평안북도 정주군, 1883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 1950년 8월(추정)는 [[일제강점기]]의 교육자, 언론인, 법조인, 기업인이자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언론인이며 정치인이다. 호는 '''춘해'''(春海)이고, 뒤에 '''계초'''(啓礎)로 고쳤다.&lt;br /&gt;
&lt;br /&gt;
1922년 동아일보 정주 지국을 인수해 지국장을 지내다가 1924년 금광업에 뛰어들어 큰 부를 얻게 되었다. 1932년 6월 조선일보에 입사하였고 이후 영업국장이 되어 조선일보의 판매망을 장악하게 되고 경영권을 인수하면서 1933년 3월 조선일보 부사장이 되었다. 1933년 7월부터 1950년 7월까지 종신으로 [[조선일보]]의 사장을 역임하였다. 1935년 창간한 월간잡지 '조광(朝光)'은 친일 논란이 있다.&amp;lt;ref&amp;gt;안은필. [http://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9211 조선일보가 가장 빛나던 시기, ‘안재홍 시대’]&amp;lt;/ref&amp;gt;&amp;lt;ref name=&amp;quot;안은&amp;quot;&amp;gt;안은필. [http://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9279 방응모 친일증거, “모래밭에서 모래 찾기”]국민TV. 기사입력 2015년 4월 23일. 기사수정 2015년 4월 24일.&amp;lt;/ref&amp;gt;&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2/0002006080?sid=102 한홍구 &amp;quot;박정희는 공포와 욕망의 정치를 했다&amp;quot;]. 프레시안. 2015년 4월 13일.&amp;lt;/ref&amp;gt;&amp;lt;ref&amp;gt;이민영.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1/0002255321?sid=102 고법 “방응모 前조선일보 사장 친일행적 대부분 인정”]. 서울신문. 2012년 1월 13일.&amp;lt;/ref&amp;gt;&amp;lt;ref&amp;gt;노현웅.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8/0002251781?sid=102 조선 방응모·동아 김성수의 ‘친일’…수년째 결론 안 내고 미루는 법원]. 한겨레. 2014년 11월 3일.&amp;lt;/ref&amp;gt;&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6/0000000413?sid=110 김성수ㆍ방응모와 친일언론인 군상]. 미디어오늘. 2002년 3월 12일.&amp;lt;/ref&amp;gt; 언론계에서 활동하면서도 사업가의 길을 함께 걸었고, 교육 장학 활동을 하였으며, 1945년 광복 직후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 고문과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안재홍]]의 추천을 받아 한국독립당 중앙상무위원과 독립촉성국민회 총무부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amp;lt;ref name=&amp;quot;안은&amp;quot;/&amp;gt;&amp;lt;ref&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16/2008031600800.html 계초 방응모와의 우정도 여러 편의 시로 표현해&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해방 정국에서 김구의 재정적 후견인으로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등 삼의사 유골 봉환 사업과 신탁통치 반대 운동 등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대한민국 수립 이후 사회민주주의 정치가인 조소앙과 사회당을 결성해 문교정책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lt;br /&gt;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 납북 후 행적은 &amp;quot;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amp;quot;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lt;br /&gt;
&lt;br /&gt;
== 생애 ==&lt;br /&gt;
=== 생애 초기 ===&lt;br /&gt;
==== 출생과 성장 ====&lt;br /&gt;
방응모는 1883년 11월 3일 또는 9월 29일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바우머리 부락 또는 정주군 정부면 성내동 425번지에서 '''방계준(方桂準)'''과 온양 박씨(溫陽朴氏)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그는 어려서 집중력이 남달리 뛰어난 반면 고집이 셌다는 평이 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페이지&amp;lt;/ref&amp;gt; 그의 '''삼촌 방계묵(方啓默)'''은 그의 고집있는 기질을 두고 저놈은 쇠작두 말고 나무 작두로 잘라 죽여야 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3~54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친척들의 야멸찬 말들이 그에게 상처를 주거나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4페이지&amp;lt;/ref&amp;gt; 또한 그의 유년시절을 본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가 태어날 당시 태몽도 없었고, 신동이라는 말도 별다르게 듣지 않았다고 한다. 어려서 빈곤한 가정환경으로 방응모는 정규 학교에는 입학하지 못하고, 16세 때까지 서당에 드나들며 한학을 익혔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던 중 그가 어느정도 실력이 우수하다고 인정되자, 스승인 승창률은 잠시 방응모에게 어린아이들을 돌보게 한 후 자리를 피하곤 했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1페이지&amp;lt;/ref&amp;gt; 그는 홀로 사서육경을 탐독, 독파하였다. 21세 무렵 잠시 서당 훈장을 지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896년 독립협회의 활동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5페이지&amp;lt;/ref&amp;gt; 형 방응곤이 예배당에 다니게 되자&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2페이지&amp;lt;/ref&amp;gt;, 그를 통해 신문물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다. 그 뒤 우연히 경성부에 갔다가 신문물을 보고 충격을 받아 17세에 독학으로 신학문과 일본어, 중국어, 수학 등을 독파하였다. 유년시절 서당의 성리학 스승이던 승창률의 친척인 승시영(承時榮)과 조씨(趙氏)의 딸 승계도와 결혼했다.&lt;br /&gt;
&lt;br /&gt;
결혼한 다음 해에도 그는 공부를 한다며 책만 사다 읽곤 했고&amp;lt;ref name=&amp;quot;fsfs60&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60페이지&amp;lt;/ref&amp;gt;, 부인 승계도는 생계를 위해 몸소 나섰다.&amp;lt;ref name=&amp;quot;fsfs60&amp;quot;/&amp;gt; 부인 승계도는 친척 가운데 콩을 싸게 넘겨주는 이들이 있어 그 콩으로 두부를 만들거나 콩나물을 키워 장사를 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61페이지&amp;lt;/ref&amp;gt; 그의 아내 승계도는 남편에 대한 믿음이 절대적이었고 탓을 하거나 가출하지 않았다. 이후 그는 서당 훈장으로 초빙되었으나, 그가 가는 마을의 기존 훈장, 한학자들은 그를 적대적으로 대했다. 그렇다고 마을 사람들의 일부 지명이 있었으나 자신의 스승의 자리를 침해할 수 없다 하여 그는 자신의 동리의 훈장일은 사양하였다. 그는 마을을 나가 신학문을 하는 친구들과 어울렸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62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계몽 운동 ====&lt;br /&gt;
도산 [[안창호]]와 남강 이승훈이 연사로 돌아다니며 애국 계몽 강연과 문맹들의 교육, 야학 사업을 하였고, 여기에 감동받은 청년들이 서당과 야학을 열고 문맹들과 여성들에게 한글 교육을 하였다. 도산 [[안창호]]의 강연과 남강 이승훈의 강연을 찾아다니며 듣다가 감동받은 방응모 역시 교육, 계몽에 참여하였다.&lt;br /&gt;
&lt;br /&gt;
그는 청년회의 활동에 몰두하였으나, 농번기에 작은 일손이라도 더 필요했던 동리 노인들은 젊은 아이들이 일은 하지 않고 무슨 모임이다 하여 어울려 돌아다니는 꼴&amp;lt;ref name=&amp;quot;fsfs75&amp;quot;/&amp;gt;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또한 모임 구성원들 역시 &amp;quot;의식 자체가 아직 전근대적이었고, 사고의 분화를 겪지도 않은데다가, 이들의 조직 활동이 기분 좋으면 나오고 기분 나쁘면 빠져 버리는 것이 예사&amp;quot;라 청년 모임들은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청년단체의 실패에 좌절하고 다시 귀향했으며, 이때 그는 춘해(春海)라는 아호를 스스로 지었다. 그의 집안에서는 그가 정착하기를 바라고 정주읍 성내동에 집을 얻어 주었다.&lt;br /&gt;
&lt;br /&gt;
안창호의 계몽 강연에 감동받은 남강 이승훈이 1907년(융희 1년) 8월 김덕용(金德鏞)을 초빙하여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 오산에서 신식 교육을 하는 소학교 과정의 학교 강명의숙을 세우고 산수, 수신, 역사, 지리, 체조를 가르쳤고, 그해 12월에는 중학교 과정인 오산학교를 세우고 학생 7명을 처음 받아들여 개교했다. 1908년에는 오산학교에 학생들이 모여 3개 반으로 편성되었고, 정주군 출신의 춘원 이광수가 오산중학교의 교사로 초빙되어 축구, 야구, 테니스, 배구 등을 지역에 처음 소개하였다. 방응모는 어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학교에 입학해 신학문을 접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0페이지&amp;lt;/ref&amp;gt; 그는 이승훈과 의기투합해 민립 대학을 세우는 운동을 추진했지만 조선총독부 평안북도청 학무국에서 승인을 거부하여, 대학 설립에 실패했다.&lt;br /&gt;
&lt;br /&gt;
=== 언론, 기업 활동 ===&lt;br /&gt;
==== 계몽 활동과 언론 활동 ====&lt;br /&gt;
1915년부터 1924년 방응모는 지역 지식인들, 유학파 청년, 계몽 청년들이 모여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하는데 참여했고, 민립대학기성회 평안북도지부에서 활동하면서 민립대학기성회 중앙회 중앙위원 조만식 등과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언변과 용모가 되었던 그의 여관에도 손님들이 몰렸고, 그가 &amp;quot;2백원도 좋고 5백원도 좋다며 보태달라&amp;lt;ref name=&amp;quot;fsfs87&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7페이지&amp;lt;/ref&amp;gt;&amp;quot;고 하면 기부금을 내는 이들이 있었다. 대신 하룻밤을 의탁하려고 그의 여관을 찾은 이들에게 무료 숙식을 제공하기도 했다.&amp;lt;ref name=&amp;quot;fsfs87&amp;quot;/&amp;gt; 1919년 정주에서 3.1 만세 운동이 벌어지자, 그도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형사들의 눈을 피해 방응모는 만세운동을 하다 재빨리 몸을 피해 화를 면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8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1922년 6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인수하여 분국장에 취임했다. 6월 9일에는 정주군 지역 체육행사로 테니스 대회를 개최하였다. 그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경영하는 동시에 그는 농촌 계몽운동 등에 적극 투신하여 인망을 쌓았다. 처음 몇번은 친구 전우현의 자금을 빌려 부족분을 메우기도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02페이지&amp;lt;/ref&amp;gt; 한다. 1922년 6월 19일&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96페이지&amp;lt;/ref&amp;gt; 동아일보 본사를 설득하여 정주분국을 동아일보사 정주지국으로 승격시켰다. 동아일보사 지부장 재직 시 그는 전우현과 함께 의기투합하여 민립 대학 설립 자금과 농촌진흥회 회원의 여비와 회비를 염출하기 위한 목적 및 당시 교사도 없이 난관에 처했던 오산학교의 재개교를 위한 &amp;quot;오산학교의 부흥 운동을 목표로 한 재단법인 촉성 기금 마련&amp;quot; 등을 계획했다. 총독부의 인허가 거부로 실패한 대학 설립 자금은 고스란히 오산학교의 부활과 복교 자금으로 투입되었다. 1920년 1월에 경성형무소에서 가석방된 조만식은 이승훈을 만났고, 다시 조만식이 오산학교를 맡으면서 학교는 다시 정상 운영되었다.&lt;br /&gt;
&lt;br /&gt;
1923년 동아일보 정주군 분국이 지국으로 승격되자 정주 지국장으로 동아일보 정주지국을 경영하였고, 같은 해 7월 여성들의 사회참여와 평등권 신장을 위한 여자교육회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이후 대규모 수해가 나자, 정주군 수해구제회를 결성하여 봉사활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1923년 4월 조만식·송진우·안재홍·김성수 등의 주도로 민간 자본으로 대학교 설립을 추진하기 위한 조직인 조선민립대학기성회가 결성되자, 방응모는 민립대학 기성회에 참여하여 민립대학기성회 정주군준비회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5월에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정주지방지부가 설립되자 기성회 정주지부 상무위원을 맡았다.&lt;br /&gt;
&lt;br /&gt;
==== 광업 경영과 조선일보 입사 ====&lt;br /&gt;
1924년 봄 오산학교 교감으로 있던 전우현이 방응모와도 안면이 있던 금광 채굴업자 두 명을 데리고 그를 찾아왔다. 그들은 자신들이 봐 둔 산이 있다고 방응모에게 소개했다. 그는 선천군의 지역 유지이자 최창학의 친구이며, 그가 동아일보 지국장으로 알게 된 이봉찬을 찾아갔다. 한학자로 알고 있던 그가 금광 투자를 제의하자 &amp;quot;한문이라면 빼지 않고 알려고 드는 한학 훈도가 어떻게 금광을&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16페이지&amp;lt;/ref&amp;gt;&amp;quot; 하느냐 하였지만, 이봉찬은 그에게 금광, 광산에 대한 지식을 알려주었다. 이봉찬은 그에게 광산 지식을 알려주며 최창학의 소유지 중 폐광을 빌리는 법을 알려주었다. 방응모의 됨됨이에 감복한 듯, 그의 수많은 질문에 적잖은 충고를 자임해주었다.&amp;lt;ref name=&amp;quot;fsfs117&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5페이지&amp;lt;/ref&amp;gt; 이봉찬은 최창학에게 방응모를 소개하는 편지를 수차례에 걸쳐 보내주었다.&amp;lt;ref name=&amp;quot;fsfs117&amp;quot;/&amp;gt; 이봉찬은 방응모의 친구들이 봐 둔 갱도를 임대받도록 도와주었다. 이봉찬은 방응모의 한학 실력과 사람됨을 알아보고 있어, 자금을 쾌히 빌려주었다.&amp;lt;ref name=&amp;quot;fsfs117&amp;quot;/&amp;gt;&lt;br /&gt;
&lt;br /&gt;
이후 광산업에 뛰어들어 1924년 여름 압록강변의 최창학 소유 폐금광인 평안북도 삭주군 외남면 교동 다릿골의의 삭주 교동광업소를 찾아가 10미터 정도 땅을 파고 금맥을 발견했다. 바로 삭주 교동광업소를 인수, 경영을 확대하였다. 이때 만난 동업자의 딸이자 친구 전우현의 조카딸인 '''이인숙(李仁淑)'''을 만났다. 본처 승계도가 두 아들을 잃고 복부 수술이 잘못되어 아이를 얻지 못하게 되자 방응모에게도 수많은 중매가 들어왔다. 자식들을 병으로 잃은 것이 자신의 불찰이라고 본 승계도는 그에게 작은 부인이라도 들이자는 말을 꺼내기도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18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26년 방응모에게 광산 사업을 제안했던 두 친구가 손을 털고 나갔고, 그의 가족은 돈이 없어 쌀 대신 좁쌀로 좁쌀죽을 먹으며 연명해야 했다. 방응모는 정주군에 사는 비슷한 또래의 먼 친척 방상진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고, 방상진과 일꾼 대여섯 명, 그리고 후처 이인숙의 친정 쪽에서 얻어온 토지문서를 얻어 자금을 마련, 삭주 다릿골 광산으로 가서 다시 금광을 채굴했다. 금맥은 쉽게 나오지 않았고, 출몰하는 마적떼에게 소와 기구를 약탈당했다. 동시에 빚쟁이들의 독촉에 시달렸으나 '''''1926년 7월 지하 300m 지점에서 금맥을 확보했다. 이후 연간 300kg의 금을 생산, 그는 굴지의 광산업자로''''' 성장해 금맥을 찾아 벼락부자가 되었다. 그는 방상진을 교동금광 총감독에 맡겼다. 이때 그는 최창학에게 임대료에 이자를 쳐서 보내주었다.&lt;br /&gt;
&lt;br /&gt;
그때까지 첫 부인 승계도가 두부를 팔아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미국산 포드 T형자동차'''''를 타고 금의환향했다. 1928년 방응모는 자신의 아호인 춘해를 딴 춘해 장학회를 만들고 장학생들의 모임인 이심회를 만든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48페이지&amp;lt;/ref&amp;gt; 그 해에 방응모는 교동지역에 파출소 지소를 유치하였고, 마적단에 시달리던 주민들은 그의 송덕비를 세우기도 했다. '''''1928년에 그는 의정부 직동, 흥선대원군의 별장이 있던 곳 바로 뒤에 위치한 건물을 매입'''''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한용운]], 홍명희를 자주 초대했다.&lt;br /&gt;
&lt;br /&gt;
'''''1932년 방응모는 교동광산을 135만원이란 거액에 일본 중외광업주식회사에 매각'''''했다. 그 뒤 1932년 6월부터 조선일보 영업국장으로 활동하다 '''1933년 3월 [[조선일보]]의 경영권을 인수'''하여 부사장에 취임하였다.&lt;br /&gt;
&lt;br /&gt;
그는 교동광업소를 운영하며 모은 재력을 바탕으로 부사장 재직 중 [[조선일보]]의 대주주가 되었으며, 1933년 7월 8대 사주 조만식으로부터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제9대 [[조선일보]] 사주로 취임, 활동했다.&amp;lt;ref&amp;gt;조선일보는 1932년 7월에 조만식을 사장으로 영입했지만, 조만식은 거의 평생을 평양에서 살아왔던데다 서울에서 활동하기에는 적응을 잘하지 못했다. 조만식은 신문사 경영난과 지역감정의 혹독한 시련을 받은 채 9개월만에 퇴사했다. 그리고 조만식 후임으로 1933년, 방응모를 사장으로 추대하기에 이르렀다.&amp;lt;/ref&amp;gt;&amp;lt;ref&amp;gt;《한국사 시민강좌 제47집, 대표적 독립운동가 12인》,일조각. p145&amp;lt;/ref&amp;gt; 방응모 취임 이후의 초대 부사장은 이광수, 주필은 서춘이었다.&lt;br /&gt;
&lt;br /&gt;
=== 언론, 사업 활동 ===&lt;br /&gt;
==== 사회사업과 조선일보 인수 계획 ====&lt;br /&gt;
금광 사업에 성공한 그는 영림, 조림 사업에도 투자하였다. 방응모는 배우자 승계도에게서 더 이상 아들을 얻지 못하자 첩 이인숙을 통해 아들을 얻으려고 하였다. 이인숙은 아들을 낳았으나 이 아들은 곧 사망하였다. 아들을 잃은 이인숙은 승계도의 도움을 받다가, 그해 6월 방응모가 있는 광산으로 가 생활하였다'''. 승계도와 이인숙을 통해 자녀를 얻지못하자 42세가 되던 해인 1924년 친형인 방응곤의 둘째 아들 방재윤을 양자로 입양시켰다.'''&lt;br /&gt;
&lt;br /&gt;
[[파일:방응모장학생.jpg|섬네일|160px|오른쪽|방응모와 그의 장학금을 받던 학생들. 가운데 앉은 이가 방응모이고, 서있는 이들 중 왼쪽에서 두 번째는 방응모의 양자 방재윤.]]&lt;br /&gt;
&lt;br /&gt;
1930년 배영옥과 결혼하여 딸 방재숙을 얻었다. 1932년 광산업을 정리하였고 언론사업을 비롯하여 육영사업과 조림 및 간척사업 등을 벌였다. 또한 고아원과 사회복지단체에 후원금을 지원하면서 인망을 얻기도 했다. 삭주 지역에서는 그의 송덕비가 세워지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932년 그는 수원군 팔탄면 노하리 일대의 갯벌에 일본인이 수차례 뚝을 쌓다가 실패했다는 정보를 얻고 임삼진을 통해 조선총독부에 허가를 요청하였다.&amp;lt;ref name=&amp;quot;pp186&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86페이지&amp;lt;/ref&amp;gt; 간척 사업은 이후 1935년부터 시작되었지만 1932년부터 은밀히 착수되어 왔다.&amp;lt;ref name=&amp;quot;pp186&amp;quot;/&amp;gt;&lt;br /&gt;
&lt;br /&gt;
1933년 무렵 방응모가 [[조선일보]] 인수에 나서기 전부터 그는 [[한용운]]을 위한 일이라면 돈을 아끼지 않고 지출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성북동 222번지 언덕에 만해를 위해 기와집 한 채를 지어주었는데 심우장(尋牛莊)이 그것이다. 또한 만해가 일제의 배급을 거부해 생활이 어렵게 되자 만해에게 생활비를 지급했던 방응모는 만해가 병석에 누운 1944년에는 치료비를 지원해주기도 했다.&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6/0000043262?sid=103 만해가 일송 선생 5일장 치른 사연]&amp;lt;/ref&amp;gt; 그 외에도 방응모는 만해 한용운·벽초 홍명희 등과 함께 새해가 되면 백천온천에도 같이 다녀올 정도로 두터운 친분을 맺었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1&amp;quot;&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8/07/2007080700002.html 만해와 계초 방응모 선생]&amp;lt;/ref&amp;gt; 1935년 7월에는 경성 태평로1가에 새 사옥을 준공하는 한편, 출판부를 신설해 〈조광〉(1935. 10)·〈여성〉(1936. 6)·〈소년〉(1937. 4) 등의 월간 잡지를 차례로 창간했으며&amp;lt;ref name=&amp;quot;dam1&amp;quot; /&amp;gt; 운영하였다. 한편 [[1932년]] 교동 광업소를 정리하여 매각하였다.&lt;br /&gt;
&lt;br /&gt;
방응모의 광산 매각을 일본 정부 측에 알리고 다리를 놓은 것은 고일청(高一淸)이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84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32년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사건으로 체포된 [[안창호]]의 사면 탄원과 보석을 위해 노력하였다. 안창호가 윤봉길을 사주했다는 증거가 없으며 그가 테러행위를 지시했다는 증거 자료나 문건이 없다는 것이 방응모의 안창호 탄원 이유였다. 그러나 총독부 경무국장은 그의 안창호 석방 제안을 정중히 거절한다. 1936년 동방문화학원(뒤에 숭문중학교·고등학교 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1939년 9월에는〈조선일보〉의 조간 1회, 석간 2회의 1일 3회 발행을 시작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인수와 경영 ====&lt;br /&gt;
1933년 1월 16일 그는 정식으로 주식회사 [[조선일보]]사를 창립, 1월 18일에 발표된 창립 취지서에는 창립위원장 방응모, 창립발기인 방응모, 조만식, 고일청 외 등이 참여했다. 일단 그는 조만식을 사장으로 임명하고 자신은 부사장으로 있다가, 그해 3월 13일 다시 부사장에 취임했다. 4월 25일 편집인 겸 발행인이 되고, 4월 29일에는 조선일보의 조간, 석간제 발행을 부활, 확정시켰다. 1933년 7월 10일 총독부로부터 조선일보사의 법인 등록 승인을 얻어냈다. 7월 10일 조만식의 사퇴로, [[조선일보]]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다. 1933년 그는 자신의 아호를 춘해에서 계초로 바꾸었다. 그는 유능한 문인, 필진의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 상금 1천 원을 걸고 작가를 영입하였다.&lt;br /&gt;
&lt;br /&gt;
1934년 3월 25일 이광수를 비롯하여 서춘, 김동진, 함상훈, 신태익 등을 [[조선일보]]로 영입해 왔다. 그 외에도 정주군 출신 언론인, 작가들이 조선일보로 많이 오게 되었다. 이후 동아일보와 갈등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이광수가 조선일보로 옮겨와 부사장직에서 9개월 근무했다. 당시 조선일보 내부에서는 문모 라는 이가 이광수의 등장으로 자신의 입지 약화를 우려해 오랫동안 이광수를 내보내려 흉계를 꾸몄다고 한다. 이광수는 1934년 5월 25일자로 돌연 사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65페이지&amp;lt;/ref&amp;gt; 문모는 그에게 오히려 잘 됐다는 식으로 말하다가 방응모에게 호되게 혼이 났다. 그리고 문모로 하여금 즉시 금강산에 들어가 이광수를 다시 데려오게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65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이광수는 아들 봉근(당시 8살)의 사망 등으로 실의에 빠졌고, 1935년에 가서야 이광수를 조선일보 고문이자 필진으로 재영입하게 됐다.&lt;br /&gt;
&lt;br /&gt;
==== 동방문화학원 재단 설립 ====&lt;br /&gt;
방응모는 1936년 방농장의 소유권을 기본 자산으로 하는 재단법인 동방문화학원(東邦文化學院)을 설립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6페이지&amp;lt;/ref&amp;gt; 동방문화학원은 학교 법인으로 인가된 재단 법인으로, 그뒤 고계학원과 인연을 가지고 1936년부터는 보성고등보통학교를 후견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 분리되었다. 그뒤 방응모 장학생인 서중회 회원들을 위한 방응모 장학사업을 주관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7페이지&amp;lt;/ref&amp;gt;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태평로 구 조선일보 사옥 안에 동방문화학원의 간판을 달고 조광 잡지를 계속 발행하는 조광사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7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일제 강점기 후반 ===&lt;br /&gt;
==== 중일 전쟁 전후 ====&lt;br /&gt;
중일전쟁 개전 직후인 1937년 7월 11일에 열린 [[조선일보]] 간부회의에서 주필 서춘이 '일본군, 중국군, 장개석씨'등으로 쓰던 용어를 '아군, 황군, 지나, 장개석'으로 고치고 일본 국민의 입장에서 논설을 쓸 것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편집국장 김형원과 영업국장 김광수가 적극 반대를 하기도 했으나, 방응모는 '일장기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이미 몇 십만 원의 손해를 보았을 뿐 아니라 [[3.1 운동]] 때처럼 신문이 민중을 지도할 수 없다'면서 서춘의 입장을 지지했다. 한편으로 방응모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된 [[안창호]]를 [[조선일보]]에 영입하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안창호는 옥중에서 얻은 간질환과 폐질환 등으로 고생했고, 진료비 등을 수시로 지원하고 문병했음에도 출옥후 얼마 뒤에 사망한다.&lt;br /&gt;
&lt;br /&gt;
1933년 이심회(以心會：후에 序中會, 방응모장학회 등으로 명칭이 바뀜)라는 장학회를 만들어 국내 대학생과 해외유학생들에게 학자금을 지급하기도 했으며, 재단법인 동방문화학원(東方文化學院：지금의 숭문중·고등학교 전신)의 이사장직을 맡기도 했다.&amp;lt;ref name=&amp;quot;dam1&amp;quot; /&amp;gt; 또한 자신의 막대한 재원을 들여 1936년부터 함경남도 영흥군 일대에 당시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대단위 조림사업을 벌였으며, 그 전 해인 1935년부터는 경기도 수원군 팔탄면 일대에서 만 2년간에 걸친 간척사업을 벌이기도 했다.&amp;lt;ref name=&amp;quot;dam1&amp;quot; /&amp;gt;&lt;br /&gt;
&lt;br /&gt;
1937년 12월 24일 [[안창호]]는 병보석 판정을 받고 재판소가 지정한 현 서울대학교병원인 경성제국대학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안창호의 입원 중에 시중을 든 사람으로는 안창호의 외조카 김순원과 청년 박정호 두 사람이었고, 나중에는 이응준 장군의 부인 이정희가 끝까지 지성껏 간호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7페이지&amp;lt;/ref&amp;gt; [[안창호]]는 병상에서 병원비 문제로도 고초를 겪었다. 이 때문에 조만식은 일본 경찰로부터 안창호의 병원비를 대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음에도, &amp;quot;내가 먹고 살면서 그 선생을 돌보지 않을 수 없다&amp;quot;며 완강히 거절하고 안창호를 도왔다고 한다. 안창호의 간호를 같이 도와주던 이응준 장군 부인 이정희는 10일마다 계산되어 나오는 병원 입원비로 안창호 선생이 괴로워하는 표정을 지켜볼수 없었다고 진술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8페이지&amp;lt;/ref&amp;gt; 방응모는 5백원의 수표 한 장을 안창호에게 전달하였다. 50일간의 입원비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9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안창호]]는 1938년 3월 10일 밤 12시 경성제국대학 병원에서 운명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폐간 사건 ====&lt;br /&gt;
일본의 전쟁이 격화되면서 [[조선총독부]] 공보국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1940년]]에 강제로 폐간조치 했다. 광산을 팔아서 자신의 모든 것을 조선일보에 바쳤던 방응모는 큰 절망과 좌절을 느껴야 했다. 한용운은 ‘신문이 폐간되다/ 붓이 꺾이어 모든 일이 끝나니…’로 시작하는 시를 지어 방응모를 위로했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1&amp;quot; /&amp;gt;&amp;lt;ref&amp;gt;붓이 꺾이어 모든 일 끝나니 이제는 재갈 물린 사람들 뿔뿔이 흩어지고 아, 쓸쓸하고 쓸쓸한지고 망국 서울의 가을날 한강의 물도 흐느끼느니 울음 삼켜 흐느끼며 연지를 외면한 채 바다 향해 흐르느니&amp;lt;/ref&amp;gt; [[동아일보]]에는 [[김성수 (언론인)|김성수]] 외에도 [[장덕수]]와 [[송진우 (정치인)|송진우]]가 있었지만 그에게는 조선일보 폐간을 막기 위해 총독부와 교섭할 인물도 없었다.&lt;br /&gt;
&lt;br /&gt;
[[1938년]] [[2월]]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선 내 일간신문 25개사로 조직된 조선춘추회의 창립에 창립발기인으로 참가했고, 조선춘추회 간사로 활동했다. 같은 해 7월 “국민정신을 총동원하고 내선일체 전 능력을 발휘하여 국책 수행에 협력하여 성전(聖戰)의 궁극적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조직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에 참여했고, 그날 결성된 경성연맹 창립총회에서 상담역을 맡았다. 9월부터 조선방공협회 경기도연합지부 평의원을 지냈다. 10월에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주최한 비상시 국민생활 개선을 위한 제1회 생활개선위원회에서 제2부(의례와 사회풍조 쇄신부)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그러나 1938년 10월부터 조선총독부는 조선일보의 신문용지를 검열, 통제하기 시작했다.&lt;br /&gt;
&lt;br /&gt;
1938년 6월 14일 방응모는 음악학교나 음대를 갓 졸업한 신인 음악인을 소개하는 신인음악회를 부민관에서 개최한다. 그러나 신인음악회는 조선총독부의 금지 요청으로 3회만에 중단된다. 38년 11월 26일부터 5일간 부민관과 조선일보 본사 대강당에서 조선영화 감상회, 조선영화 전람회, 조선 영화 시나리오 현상모집의 3개 행사를 주최했다. 그러나 역시 3년만에 총독부의 압력으로 중단되고 만다.&lt;br /&gt;
&lt;br /&gt;
1939년 2월 조선인의 군사동원을 위한 지원병 참가를 독려하기 위해 조직된 경성부지원병후원회 고문에 추대되었다. 7월에 영국 타도를 주장하며 전국 차원에서 적극적 배영운동을 벌이기 위해 결성된 [[배영동지회]](排英同志會)의 상담역으로 선출되었다. [[1940년]] [[3월]] 잡지 《조광》의 발행인으로 취임했다.&lt;br /&gt;
&lt;br /&gt;
1940년 4월 30일 영흥 계초사임사업부 책임자로 있던 양자 방재윤이 간호사가 잘못 놓은 주사로 사망했다. 식중독으로 병원에 실려가 주사를 맞았다가 쇼크사하였다.&lt;br /&gt;
&lt;br /&gt;
양자 재윤을 잃고 나서 그는 허탈감을 [[뽕나무]]로 달랬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11페이지&amp;lt;/ref&amp;gt; 한다.&lt;br /&gt;
&lt;br /&gt;
[[양근환]]이 석방되어 20년만에 귀국하였다. 그는 [[막걸리]] 마실 돈도 없어 방응모를 찾아갔다. 조선일보 비서실에 양근환이라는 이름 석자의 명함을 내밀면서 &amp;quot;나는 방응모 사장을 알되, 방 사장은 나를 모르겠지만 이렇게 찾아왔소&amp;quot;라고 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4페이지&amp;lt;/ref&amp;gt; 방응모는 즉시 거액의 수표를 그에게 건네주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5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0년]] 5월 [[조선총독부]] 총독 [[미나미 지로]]가 방송담화로 창씨개명을 권고했다. 그러나 그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성씨를 이제 와서 내 마음대로 바꿀수 없다며 [[창씨개명]]은 완강하게 거절했다. [[1943년]] [[화신백화점]] 점원 출신인 노호용과 결혼하였다.&amp;lt;ref&amp;gt;정식 결혼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그에 의하면 첫 부인 승계도와 둘째 부인 이인숙이 당시 살아있었던 점을 든다.&amp;lt;/ref&amp;gt; 1940년 6월 초 명월관 요정에서 예약손님을 받을 때 흰 갱지로 음식을 덮은 것을 보고 트집잡았다. 일본 경찰 간부들은 상에 덮인 흰 갱지를 보고 이것이 어디서 나왔느냐고 따졌고, 식당 주인은 [[동아일보사]]에서 파지를 구입해 쓴다고 대답하자 통제물자인 신문용지는 배급제로 공급되는데, 이 용지를 불법처분했다 하며, 이것을 경리부정으로 몰고 갔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3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그러나 조선일보에 트집이 잡힐 일이 나타나지 않자 총독부는 전국 면사무소에 조선일보 신문 구독을 거절하도록 명령을 내렸고, 동시에 조선말을 쓰는 민원인에게는 일을 처리해주지 말도록 하게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3페이지&amp;lt;/ref&amp;gt; 조선총독부는 [[송진우]]의 예금통장을 문제삼았다. 송진우 명의의 은행저금이 동아일보의 8백여 개의 지국과 분국을 통해 모금된 독립운동 자금이라며, 그리고 동아일보 간부들이 백운장이라는 요정에서 회식을 한 것을 [[김성수 (언론인)|김성수]] 집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려 했다는 등의 이유로 [[백관수]] 동아일보 사장을 전격 구속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3~374페이지&amp;lt;/ref&amp;gt; 동아일보는 백관수가 구속된지 10일 만에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동아일보 중역회의를 열고 폐간신청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4페이지&amp;lt;/ref&amp;gt; 총독부는 조선일보에도 자진 폐간을 권고했고, 1940년 8월 9일 편집회의를 주관, 8월 10일 조선일보의 폐간계를 내고, 8월 10일자로 폐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5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잡지 발행 활동 ====&lt;br /&gt;
신문 강제 폐간 뒤 방응모는 간판을 조광사로 바꿔 걸고, 사옥은 동방흥업주식회사로 등기를 변경해서 유지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1페이지&amp;lt;/ref&amp;gt; 이후 그는 [[조광 (잡지)|조광]] 잡지 발행에 전념했다. 1943년 8월 경 일본 중앙대학의 예과를 마친 [[방일영]]이 입사&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1페이지&amp;lt;/ref&amp;gt;, 필진으로 참여했다. [[조선일보]]가 폐간된 후에도 방응모는 벽초 [[홍명희]] 부자에게 지속적으로 생활비를 대주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4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0년 속담대사전, 조선창극사, 조선시조시학, 조선요리학, 세계명인전 상중하 등을 발행했다. 이후 조선사화 등을 발간했는데 다량의 부수로 간행하여 다시 흑자가 되었다.&lt;br /&gt;
&lt;br /&gt;
1943년 평안북도 정주에 있는 부인과 며느리를 비롯한 가족 전부를 상경시키고, 서울 충정로의 저택을 매각, 동대문밖 남산 밑 양사골에 전세집을 얻는다. 그리고 고향의 99칸 한옥을 헐어 양주군 의정부에 옮겨 지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7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4년 손자 [[방일영]]이 학도병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방응모는 손자의 학병 징집을 단호히 거부했다. 방응모는 백방으로 학도병을 피할 수 있는 구실을 찾으려고 연구하다가 [[경성부]]의 유명한 의사 [[백인제]]를 찾아갔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3페이지&amp;lt;/ref&amp;gt; [[백인제]]는 처음에 난처해했으나 방응모의 거듭된 간청으로, 곤란합니다 라는 말만 되풀이하다가 결론은 손자 [[방일영]]의 생살을 칼로 째는 수술을 결정했다. [[방일영]]에 의하면 &amp;quot;나의 왼쪽 뺨의 귀 밑에서 턱까지 생살을 째는 수술이 시작되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3페이지&amp;lt;/ref&amp;gt;&amp;quot; 한다. 이로 인해 [[방일영]]의 징집은 연기되었으나, 균이 들어가서 네 번이나 수술을 더 했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4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양주군수 김정제가 찾아와 학병 문제를 계속 거론하였다. 그는 할 수 없이 방일영을 징집이 면제되는 면서기로 들어가도록 합의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4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4년 6월 29일 만해 [[한용운]]이 사망했다. 그는 심우장을 찾아가 3백원을 내놓았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5페이지&amp;lt;/ref&amp;gt;당시 쌀 10가마가 100원이었지만, 심우장은 당장 현금 1원이 없었는데 거액이라서 놀랐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6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4년]] 아들 [[방재선]]을 얻었다. 이후에도 방응모는 노호용과의 사이에서 방재효, 방재규 등 두 아들을 출산하였다. [[1944년]] [[9월]] 군수산업체인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 설립에 창립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이후 조선항공공업 감사에 피선되었다.&lt;br /&gt;
&lt;br /&gt;
=== 광복 이후 언론 및 정치활동 ===&lt;br /&gt;
==== 광복 직후 ====&lt;br /&gt;
[[파일:1946.06 3의사 유해봉환식장.jpg|섬네일|왼쪽|200px|[[1946년]] [[3월]] 순국3의사 유해봉환일 [[김구]], 위당 [[정인보]] 등과 함께]]&lt;br /&gt;
&lt;br /&gt;
[[1945년]] 8.15 광복 후에는 [[8월]] 말과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朝鮮在外戰災同胞救濟會) 고문과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9월]] 초 [[안재홍]] 등이 좌경화되는 [[건준]]체제에 반발하여 [[건준]]을 탈퇴하자 방응모 역시 [[건준]]을 탈퇴하였다.&lt;br /&gt;
&lt;br /&gt;
[[9월 2일]] [[미군정]]이 주둔하자, 방응모는 윤전기를 찾기 위해 폐간 당시의 증빙서류를 미 군정청에 제시하였으나 소식이 없었다. 총독부는 조선일보 폐간 직후 인수한 윤전기를 경성일보사에 옮겨서 설치했다. 그는 동방문화재단 외 4개 사업소를 적산으로 파악한 미군정을 설득하고, 사옥 문제도 해결하였다.&lt;br /&gt;
&lt;br /&gt;
[[10월 1일]] 조선일보 편집위원회를 구성하고, 신문 복간 운동을 추진했다. 조선총독부의 폐간 지시 당시 의정부로 옮겨놓은 일부 활자 자모음이 잘 보관되어, 그해 11월 23일 조선일보를 복간시키고, 서울신문사 사옥에서 조선일보 복간호를 간행하였다. 이후 조선사회문제대책중앙협의회 중앙위원을 거쳐 [[10월 16일]] [[이승만]](李承晩) 등의 주도로 [[독립촉성중앙회]]가 결성되자 독촉에 가입하였다.&lt;br /&gt;
&lt;br /&gt;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 요인이 귀국하자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에 입당했다. [[12월]] [[안재홍]]의 추천으로 [[한국독립당]]의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출되어 3~4개월 동안 활동했다.&amp;lt;ref&amp;gt;일각에서는 방응모가 '한독당 재무부장으로 지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1947년부터 한독당 재무부장을 맡은 신창균이 전면 부정했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47/0000002626?sid=102 백범 비서와 '진짜' 한독당 재정부장의 육성증언. 참고.]&amp;lt;/ref&amp;gt; 그 뒤 대한국민총회 발기인, 대한독립애국금헌성회 발기인 등으로 활동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복간 및 군정기 활동 ====&lt;br /&gt;
[[파일:Kim Gu (1947).jpg|섬네일|140px|오른쪽|임시정부 각주이자 한독당 당수 [[김구]]. 방응모는 [[한국독립당]]의 중앙상무위원과 당 재정부장으로 참여했고, [[김구]]의 반탁운동과 3의사 유해 봉환 때 자금을 댔다.]]&lt;br /&gt;
&lt;br /&gt;
[[11월]] [[조선일보]]사를 복간시켰다. 그러나 한동안 조선일보의 인쇄는 [[서울신문|서울신문사]]에서 간행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1945년]]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추념대회에 참여하였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2&amp;quot;&amp;gt;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13&amp;lt;/ref&amp;gt; 순국선열추념대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2&amp;quot; /&amp;gt;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참여,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이 되었다.&amp;lt;ref&amp;gt;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55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6년 2월 26일 서울신문사 공무국 종업원들이 조선일보의 인쇄를 거부해버렸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436페이지&amp;lt;/ref&amp;gt; 그동안 묵시적으로 방해가 은근히 있었다. 표면상의 문제는 임금 문제이나 내용상으로는 조선일보에 대한 조선공산당의 시위의 일종이었다. 사흘간의 교섭 끝에 2월 28일에 가서야 26일자와 27일자를 소급해서 인쇄하여 신문을 한꺼번에 발행하였다. 그러나 3월 1일과 2일에 또다시 인쇄를 거부당해 결국 휴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436페이지&amp;lt;/ref&amp;gt; 조선일보를 경성일보사로 옮겨서 인쇄하기로 하고 3월 5일자로 사고로 독자에게 알렸다.&lt;br /&gt;
&lt;br /&gt;
[[1946년]] [[2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회장에 선출되었고, 3월 1일 미군정은 방응모에게 경성일보사 관리인으로 위촉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437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용지난으로 한동안 신문 발행에 어려움을 겪었다.&lt;br /&gt;
&lt;br /&gt;
[[4월 29일]] [[김구]], [[김창숙]], [[김성수 (언론인)|김성수]], [[오세창]] 등과 함께 서울운동장에서 [[윤봉길]]의사 추모회의 창립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amp;lt;ref&amp;gt;&amp;quot;故尹奉吉義士의 記念式 오늘, 發起人會 열고 準備&amp;quot;, 동아일보 1946년 4월 23일자 2면, 사회면&amp;lt;/ref&amp;gt; 그해 [[5월]] 조선공업구락부 고문에 위촉되었다.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民族統一總本部) 10인협의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6월 15일]] 오후 5시 40분 [[서울역]]에 마중나가 [[서울역]]에 도착한 삼의사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 동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 협의원에 지명되고, [[1946년]] [[8월]]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8월 25일에는 [[한국독립당]] 중앙상무위원의 한 사람에 선출되었고&amp;lt;ref&amp;gt;&amp;quot;金九氏飜意 韓獨黨中委閉會&amp;quot;, 동아일보 1946년 8월 25일자 1면, 정치면&amp;lt;/ref&amp;gt; [[1946년]] [[9월]] 독립촉성국민회 총무부장에 선출되었다.&lt;br /&gt;
&lt;br /&gt;
1945년 광복 직후 서기원이 그를 찾아왔다. 서기원은 그때 경성농상실천학교의 동창회로부터 이 학교의 교장이 되어 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이다. 방응모는 서기원의 제의를 받아들여 [[1946년]] [[8월 28일]] 동방문화학원 이사장으로 숭문상업학교를 인수, 재단 이사장이 되었다. 후일 방응모가 6.25 전쟁 중에 납북된 후 동방문화학원과 숭문중,고교의 재단은 최용진이 운영하다가 다시 [[1978년]]에 [[방일영]]에게 인수되었다.&lt;br /&gt;
&lt;br /&gt;
1947년 1월 21일 제5회 창립위원회를 본사에서 개최하고 2월 23일 주식회사 조선일보사 주주창립총회를 열고 대표이사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공동투자 경영자로 참여시킨 전무 이종민과의 알력이 발생했다. 이종민과의 갈등이 심화되자 그해 8월 3일 방응모는 일단 사직서를 제출했다. 1947년 8월 10일 [[풍문여고]] 강당에서 개최된 한인신문기자협회에 참석, [[민족청년단]]에서 언론계 공로자로 방응모, 김성수, 설의식을 지정하여 상을 시상받았다.&amp;lt;ref&amp;gt;&amp;quot;朝鮮 新聞記者協會&amp;quot;, 동아일보 1947년 8월 10일자 2면, 사회면&amp;lt;/ref&amp;gt; 9월 13일의 임시 주주총회가 긴급 소집되어 회사 운영 문제가 논의되고, 이때 취체역을 재선임할 때 다시 선임되었다. 그러나 이때 전무 이종민은 재선임에서 제외되었다.&lt;br /&gt;
&lt;br /&gt;
==== 김구와의 결별과 만년 ====&lt;br /&gt;
이후 [[한국독립당]] 중앙상무위원&amp;lt;ref&amp;gt;[http://db.history.go.kr/url.jsp?ID=dh_003_1946_08_24_0150 한국사데이터베이스]&amp;lt;/ref&amp;gt;, 당 재정부장 등을 맡기도 했으나, [[1948년]] [[1월]] 이후 [[김구]]의 노선 변경과 함께 그를 지지하던 세력이 떨어져 나가서 [[조선일보]]도 김구에게서 등을 돌리게 되었다.&amp;lt;ref name=&amp;quot;조선11&amp;quot;&amp;gt;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68~70쪽.&amp;lt;/ref&amp;gt; 그러나 김구와의 결별이 괴로웠던지 방응모도 직접 나서서 &amp;lt;김구선생의 의견에 대한 우리의 취할바 태도&amp;gt;라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amp;lt;ref name=&amp;quot;조선11&amp;quot;/&amp;gt;&lt;br /&gt;
&lt;br /&gt;
[[1949년]] [[조소앙]]이 결성한 [[사회민주주의]]성향 정당인 [[사회당 (대한민국, 1948년)|사회당]]에 입당해 동당 문교정책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amp;lt;ref&amp;gt;[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9070600209201019&amp;amp;editNo=1&amp;amp;printCount=1&amp;amp;publishDate=1949-07-06&amp;amp;officeId=00020&amp;amp;pageNo=1&amp;amp;printNo=7956&amp;amp;publishType=00020 1949년 7월 6일자 동아일보]{{깨진 링크|url=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9070600209201019&amp;amp;editNo=1&amp;amp;printCount=1&amp;amp;publishDate=1949-07-06&amp;amp;officeId=00020&amp;amp;pageNo=1&amp;amp;printNo=7956&amp;amp;publishType=00020 }}&amp;lt;/ref&amp;gt; 이듬해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경기도]] 양주군에 출마했으나 차점자로 낙선하였다.&amp;lt;ref&amp;gt;[http://db.history.go.kr/url.jsp?ID=NIKH.DB-dh_017_1950_06_01_0030 한국사데이터베이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9년 의정부 가능동 별장에 심은 뽕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랐다. 승계도의 친척 승원호에 의하면 &amp;quot;할아버지(방응모)는 사람들을 시켜 뽕나무를 2년간 키우게 했습니다. 탐스럽게 뽕나무가 자라니까 이번에는 직조 기계를 들여 직조 공장을 세우겠다고 하셨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11페이지&amp;lt;/ref&amp;gt;&amp;quot; 한다. 그러나 그의 방직공장 설립 계획은 6.25 전쟁으로 무산되고 만다.&lt;br /&gt;
==== 납북과 최후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 납북 후 행적은 &amp;quot;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amp;quot;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amp;lt;ref name=&amp;quot;김장&amp;quot;/&amp;gt; [[1950년]] [[8월]]경 [[개성]] 송악산 부근에서 미군의 폭격에 희생되었고 심한 폭격으로 시신을 찾을 수 없어 묘도 만들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다.&amp;lt;ref&amp;gt;{{뉴스 인용&lt;br /&gt;
 |url          = http://www.minjog21.com/news/articleView.html?idxno=1140&lt;br /&gt;
 |제목       = &amp;quot;누워서도 남쪽하늘만 보십니다&amp;quot; - 평양시 신미리 재북통협 특설묘지&lt;br /&gt;
 |출판사    = 민족21&lt;br /&gt;
 |저자       = 신준영&lt;br /&gt;
 |날짜       = 2002-07-01&lt;br /&gt;
 |확인날짜 = 2008-05-15&lt;br /&gt;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40420015541/http://www.minjog21.com/news/articleView.html?idxno=1140#&lt;br /&gt;
 |보존날짜 = 2014-04-20&lt;br /&gt;
 |url-status = dead&lt;br /&gt;
}}&amp;lt;/ref&amp;gt;&amp;lt;ref&amp;gt;[http://www.minjog21.com/news/articleView.html?idxno=686 민족21&amp;lt;!-- 봇이 따온 제목 --&amp;gt;]{{깨진 링크|url=http://www.minjog21.com/news/articleView.html?idxno=686 }}&amp;lt;/ref&amp;gt; 남한에서는 [[1955년]] [[7월 7일]] 생사불명기간 만료로 인해 실종 처리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주변에서 피신하라고 권했지만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느냐'며 완강하게 버티다가 1950년 [[7월 6일]] [[경기도]] [[양주군]] 시둔면 가능리(현, [[의정부시]] [[가능동]]) 자택에 들이닥친 [[조선인민군]]에 의해 끌려갔다.&lt;br /&gt;
&lt;br /&gt;
=== 사후 ===&lt;br /&gt;
[[서울]] 종로에 있던 양자 방재윤의 두 아들 [[방일영]]과 [[방우영]]은 방응모의 첩 이인숙이 찾아가 피신하라고 권고하여 황급히 피신했다. &lt;br /&gt;
&lt;br /&gt;
[[9월 28일]] [[개성시]] 북쪽을 지나 [[황해남도]] [[서흥군]]에서 트럭으로 강제 북송되었다. 이후 9월 28일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lt;br /&gt;
&lt;br /&gt;
7월 6일 그의 행방불명처리가 되고, 방응모의 사후에도 [[조선일보]]는 그의 명의로 발행되었다. 1952년 4월 28일 조선일보는 발행인겸 편집인을 장기영으로, 인쇄인을 방일영으로, 방응모는 명예사장으로 명의변경하여 휴전 후 계속 발행하게 되었다. 1954년 4월 30일 제8회 조선일보 정기주주총회에서 장기영 사장이 사퇴하면서, 명예사장 방응모가 사장으로 추대되고, 발행인 겸 대표취체역에 방일영이 선임되었다. 이후 실종 후 [[1959년]]에 법적으로 사망 처리되었다. 그리고 [[1970년]]까지는 조선일보는 그의 이름으로 발행되었다.&lt;br /&gt;
&lt;br /&gt;
[[1970년]] [[2월 19일]] 조선일보 정기주주총회에서 방응모 이사를 사퇴 수리하였다. 그의 피폭사망 사실은 1970년대 이후 탈북자들을 통해 대한민국에 소개되었다.&lt;br /&gt;
&lt;br /&gt;
== 친일행위 의혹 ==&lt;br /&gt;
=== 일제 전시체제기 활동 ===&lt;br /&gt;
일제 강점기 말기 언론인으로서 총독부체제에 협력한 기록과 활동이 다수 기록이 있다. 1933년 3월 [[조선일보]] 경영권을 인수하고 부사장직에 취임했을 당시 같은 달에 고사기관총 구입비용 1600원을 군에 헌납하였다. 그는 1935년 친일 잡지 《조광 (잡지)(朝光)》을 창간하였고, 1937년에는 경성방송국 제2방송에 출연하여 일제가 중국의 베일을 절멸케하여 극동평화를 지키려고 한다는 강연을 하였다. 1940년대부터 조광에 집중적으로 친일 논설을 기고하고 시국 강연에 참여하여 전쟁 지원을 독려했다. 1942년 6월에는 '징병령 실시에 일층 더 감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글을 써서 조광에 발표하였다. 애국금차회(1937),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1938), 임전대책협의회(1941), 조선임전보국단(1941) 등 대표적인 친일 단체의 회원에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그는 이런 행적으로 인해 해방정국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명단에 기록되어 있고,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해 발표한 &amp;lt;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amp;gt;에 모두 포함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lt;br /&gt;
&lt;br /&gt;
우리 [[조선일보]]는 다른 어떤 신문도 따라오지 못하는 확고한 신념에서 비국민적 행위를 단연 배격하여 종국까지 조선일보사가 이미 정해놓은 방침에 한뜻으로 매진한다.|원산에서의 순회 강연&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9478.html 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친일 다짐하다 시민에 봉변]《한겨레》2005-08-24 오후 06:13:18&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반민족행위 논란 ===&lt;br /&gt;
방응모를 친일파로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남아 있다. 조선일보 경영 이전에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방응모의 활동이 거의 없었고, 납북된 뒤 소식이 끊겨버린 까닭에 본인이 항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 동안의 행적만으로 친일파 여부를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방응모의 후손들이 영향력 있는 [[조선일보]] 언론사의 사주를 맡았기에 그의 입장에서 서술한 기록을 많이 남기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80년 발간된 그의 전기 《계초 방응모》(조선일보사) 등에는 '그가 민족주의적 선각자'로 묘사되고 있다. 방응모가 친일파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일부세력측은 그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논거로 드는 경우가 많이 있다.&amp;lt;ref&amp;gt;유석재, 계간 《유심》 (2004년 봄호) [http://yousim.buddhism.org/html/2004-spr/tamgu-yoo-seok-jae.htm 삭풍 속에 피어난 금란지교(金蘭之交) - 만해와 계초 방응모]&amp;lt;/ref&amp;gt;&amp;lt;ref&amp;gt;&amp;quot;일제 말기 계초는 시국강연에 나설 것과 창씨개명을 집요하게 강요받았으나 그때마다 묵묵부답으로 거부하며 소신을 지켰다.&amp;quot; 《조선일보》 (2001.3) 조선일보 사장열전 - 계초 방응모편, 《한겨레》 (2001.3.30) [http://www.njoyschool.net/news/article_view.asp?menu_code=s20202&amp;amp;no=1206 조선일보, 일장기를 신문제호 위에]&amp;lt;/ref&amp;gt;&lt;br /&gt;
또한 한국정토학회 고문이자 서울 정토사 주지였던 박설산(1918~2007)이 학도병에 끌려가기 직전인 1943년 12월 28일 밤 서울역에서 스스로 왼발을 선로에 올려 발가락을 절단해 징집을 기피하자 방응모는 만해와 함께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설산을 걱정하면서 입원 중 조선일보 기자를 통해 돈을 전달한 것은 물론 퇴원할 때 돈을 전달하고 뒤를 보살폈다고 한다.&amp;lt;ref&amp;gt;박설산 회고록 &amp;lt;뚜껑없는 조선역사책&amp;gt;(1994, 도서출판 삼장) p240~241&amp;lt;/ref&amp;gt;&lt;br /&gt;
&lt;br /&gt;
2010년 12월, 방응모 관계자들 및 조선일보측은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을 취소해달라'며 법원에 낸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amp;quot;1944년 조선항공업 창립발기인으로 활동한 부분에 대해 친일행위로 판단한 부분을 취소하지만 나머지 활동에 대해서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amp;quot;라고 판결했다. 그 이유인 즉 &amp;quot;방응모는 1933년 조선일보 사장으로 취임해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등으로 활동하며 친일활동을 벌였으며, 1937년 경성방송국 시국강연에서 일본제국이 극동평화를 확립시킬 것이라는 내용의 강연을 하고, 1938년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춘추회의 발기인 겸 간사로 활동하기도 했다&amp;lt;ref&amp;gt;[http://media.daum.net/breakingnews/politics/view.html?cateid=1002&amp;amp;newsid=20101222103319164&amp;amp;p=newsis 법원 &amp;quot;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친일파 맞다&amp;quot;]뉴시스 2010년 12월 22일&amp;lt;/ref&amp;gt;&amp;quot;는 것이다.&lt;br /&gt;
&lt;br /&gt;
2012년 1월 12일 서울고법 행정7부는 방 전 사장의 손자인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이 행정안전부를 상대로 낸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처분 취소 청구소송에서 ‘일제 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의 친일 행위 판정 조항에 비추어 방 전 사장에게 적용된 모두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민족적 지도자로서 비중이 큰 만큼 그로 인한 책임도 무거울 뿐 아니라 고난의 시기를 겪은 민족으로서 그 역사를 반성하자는 입장에 설 때, 방 전 사장의 여러 행태는 반민특별법에서 규정한 친일반민족행위의 유형에 속함을 부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1·2심 재판부는 방 전 사장이 자신이 운영하던 잡지 &amp;lt;조광&amp;gt;에 일제 침략전쟁에 동조하고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문예물과 일제 침략전쟁에 협력할 것을 주문하는 논문을 게재하는 등의 ‘친일’ 행위를 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또한, 2심 재판부는 일본의 전쟁 수행을 돕기 위해 설립된 군수 제조업체 ‘조선항공공업’의 발기인과 감사를 지낸 것은 “감사는 업무집행에 관여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기관으로, 방 전 사장이 이 회사를 운영했다고 볼 수 있다”는 이유로 친일이라고 판단했다.&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4565.html법원 ‘방응모 친일’ 2심서도 인정] 인터넷한겨레 2010년 12월 22일&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가족 관계 ==&lt;br /&gt;
* 아버지 : 방계준(方桂準)&lt;br /&gt;
* 어머니 : 온양 박씨&lt;br /&gt;
** 형 : 방응곤(方應坤)&lt;br /&gt;
** 배우자 : 승계도&lt;br /&gt;
*** 아들 2명 요절&lt;br /&gt;
** 배우자 : 이인숙(李仁淑, 1901년 ~ ?)&lt;br /&gt;
*** 아들 : 방재욱(方在旭, 1925년 ~ 1926년 9월)&lt;br /&gt;
** 배우자 : 배영옥(裵英玉)&lt;br /&gt;
*** 장녀 : 방재숙(方在淑)&lt;br /&gt;
** 배우자 : 노호용(盧鎬龍)&lt;br /&gt;
*** 장남 : 방재선(方在善, 1944년 ~)&lt;br /&gt;
*** 차남 : 방재효(方在孝, 1946년 ~)&lt;br /&gt;
*** 삼남 : 방재규(方在奎, 1948년 ~)&lt;br /&gt;
&lt;br /&gt;
** 양자 : 방재윤(方在允 또는 方在胤, 1901년 ~ 1940년, 형 방응곤의 차남)&lt;br /&gt;
*** 손자 : 방일영(方一榮, 1923년 ~ 2003년)&lt;br /&gt;
**** 증손 : 방상훈(方相勳, 1948년 ~)&lt;br /&gt;
**** 증손부 : 윤순명 - 윤치호(尹致昊, 1865년 ~ 1945년)의 증손녀&lt;br /&gt;
***** 현손 : 방준오(方俊吾, 1974년)&lt;br /&gt;
***** 현손 : 방정오(方政吾, 1978년)&lt;br /&gt;
**** 증손 : 방용훈(方容勳, 1952년 ~)&lt;br /&gt;
*** 손자 : 방필영(方必榮, 1924년 ~ 1926년)&lt;br /&gt;
*** 손녀 : 방숙영(? ~ 1951년 1월)&lt;br /&gt;
*** 손자 : 방우영(方又榮, 1928년 ~ 2016년)&lt;br /&gt;
**** 증손 : 방성훈(方聖勳, 1973년 ~)&lt;br /&gt;
&lt;br /&gt;
== 기타 ==&lt;br /&gt;
그는 [[한용운]], 최남선, 정인보, 홍명희 등과 친분관계를 형성하고 어울려 지냈다 한다.&lt;br /&gt;
&lt;br /&gt;
[[김구]]의 한국독립당의 재정적 후견인 역할을 하였다 하며,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삼의사 유골봉환식 때 [[김구]], [[정인보]] 등과 촬영한 사진이 있다.&amp;lt;ref&amp;gt;백범어록 참조&amp;lt;/ref&amp;gt; 그리고 1945년 11월 23일 조선일보가 복간되자 백범 김구는 '有志者事竟成' 뜻을 지닌 자 성취할 수 있다'는 친필 휘호를 보내며 축하했다.&amp;lt;ref&amp;gt;[http://www.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4060370241 '조선일보 역사 읽기'《조선일보》2004.06.03]&amp;lt;/ref&amp;gt;&lt;br /&gt;
한편 임꺽정의 저자인 벽초 홍명희가 방응모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그와 깊은 친분을 맺었다는 주장이 있다. 《조광》 1938년 11월호엔 홍명희가 병중에 있는 방응모를 위로하며 지은 한시가 방응모의 답시와 함께 실려 있다고 한다.&amp;lt;ref&amp;gt;[http://weekly.chosun.com/site/data/html_dir/2004/11/05/2004110577041.html ‘임꺽정’으로 되살아난 독립운동의 魂! 주간조선 1827호 2004.11.04&amp;lt;/ref&amp;gt; 또한 [[안창호]]의 비서실장을 지낸 독립유공자 구익균은 방응모와 안창호가 친밀했다는 주장을 했다.&amp;lt;ref&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09/2008030901055.html &amp;quot;공산주의자들, 도산 비판하다가도 하숙비 떨어지면 찾아와&amp;quot;] 조선일보, 2008-03-10 03:22&amp;lt;/ref&amp;gt;&lt;br /&gt;
또한 박설산에 따르면 1943년 만해 한용운에게 학도병으로 끌려가게 되었음을 알리려 심우장으로 찾아가게 되었을 때, 한용운과 방응모가 바둑을 두고 곁에서 정인보가 훈수를 두고 있었다고 한다.&amp;lt;ref&amp;gt;박설산 저 &amp;lt;뚜껑없는 朝鮮 역사 책&amp;gt; p.226 도서출판 三藏(1994)&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30년대~1940년대 방응모에게서 장학금을 지원받은 학생 모임인 서중회의 회원들의 그의 인물평은 &amp;quot;첫 인상은 좀 깡마른 모습이었으나 의지가 강한 인물&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56페이지&amp;lt;/ref&amp;gt;&amp;quot;이라는 평을 남기기도 했다.&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 /&amp;gt;&lt;br /&gt;
&lt;br /&gt;
== 참고 자료 ==&lt;br /&gt;
* 청산하지 못한 역사: 언론 내세워 일제에 아부한 교화 정책의 하수인 (문영숙) (반민족문제연구소, 청년사, 1994)&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민족 계몽의 초석 방응모(이동욱 저, 지구촌, 1998)&lt;br /&gt;
* 계초 방응모전(계초전기간행위, 조선일보사, 1980년)&lt;br /&gt;
* 계초 방응모(이동욱, 방일영문화재단, 1996)&lt;br /&gt;
&lt;br /&gt;
== 외부 링크 ==&lt;br /&gt;
* [https://web.archive.org/web/20050123171046/http://chosunhost.com/ 계초방응모 기념사업회]&lt;br /&gt;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09145 &amp;lt;조선일보&amp;gt;, 방응모 전 사장의 '친일행적' 말한다] - 오마이뉴스 04.09.10일자&lt;br /&gt;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020302101749 방응모ㆍ 김성수 친일행적 뭔가 : &amp;lt;긴급입수&amp;gt;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 全文] - 프레시안 2002-03-02&lt;br /&gt;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54052 그가 '&amp;lt;조선&amp;gt;의 주인' 주장하는 이유] 오마이뉴스 2001년 9월 20일자&lt;br /&gt;
*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956 방재선씨, 호주·상속 원인무효소송 제기]&lt;br /&gt;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4/06/2008040601053.html '5인 친필 서첩' 발굴] 조선일보 2008년04월06일자]&lt;br /&gt;
&lt;br /&gt;
[[분류: 감자]]&lt;/div&gt;</summary>
		<author><name>Nsgjjsjsjy02</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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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방응모</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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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Nsgjjsjsjy02: /* 향토문화 조사 사업과 국산품 애용 운동 */&lt;/p&gt;
&lt;hr /&gt;
&lt;div&gt;{|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width:100%&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0%&amp;quot;|사진&lt;br /&gt;
|[[파일:방응모.jpg|center|200픽셀]]&lt;br /&gt;
|+ '''방응모'''&lt;br /&gt;
|+ style=&amp;quot;caption-side:bottom;text-align:left:&amp;quot;|출처: 위키백과&lt;br /&gt;
|출생||1883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조선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또는 정부면 성내동&lt;br /&gt;
|-&lt;br /&gt;
|사망||1950년경으로 추정&lt;br /&gt;
|-&lt;br /&gt;
|사인||불명&lt;br /&gt;
|-&lt;br /&gt;
|거주지||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amp;gt; 경성부 -&amp;gt; 경기도 양주군 의정부읍&lt;br /&gt;
|-&lt;br /&gt;
|국적||대한민국&lt;br /&gt;
|-&lt;br /&gt;
|본관||온양&lt;br /&gt;
|-&lt;br /&gt;
|별칭||호: 계초(啓礎), 춘해(春海)&lt;br /&gt;
|-&lt;br /&gt;
|직업||교사, 변호사, 상인, 언론인, 기업인, 사회운동가, 정치가&lt;br /&gt;
|-&lt;br /&gt;
|배우자||승계도, 이인숙, 배영옥, 노효용&lt;br /&gt;
|-&lt;br /&gt;
|자녀||방재숙(딸), 방재욱·방재선·방재효·방재규(아들), 방재윤(양자)&lt;br /&gt;
|-&lt;br /&gt;
|부모||방계준(부), 온양박씨(모)&lt;br /&gt;
|}&lt;br /&gt;
&lt;br /&gt;
'''방응모'''(方應謨, 평안북도 정주군, 1883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 1950년 8월(추정)는 [[일제강점기]]의 교육자, 언론인, 법조인, 기업인이자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언론인이며 정치인이다. 호는 '''춘해'''(春海)이고, 뒤에 '''계초'''(啓礎)로 고쳤다.&lt;br /&gt;
&lt;br /&gt;
1922년 동아일보 정주 지국을 인수해 지국장을 지내다가 1924년 금광업에 뛰어들어 큰 부를 얻게 되었다. 1932년 6월 조선일보에 입사하였고 이후 영업국장이 되어 조선일보의 판매망을 장악하게 되고 경영권을 인수하면서 1933년 3월 조선일보 부사장이 되었다. 1933년 7월부터 1950년 7월까지 종신으로 [[조선일보]]의 사장을 역임하였다. 1935년 창간한 월간잡지 '조광(朝光)'은 친일 논란이 있다.&amp;lt;ref&amp;gt;안은필. [http://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9211 조선일보가 가장 빛나던 시기, ‘안재홍 시대’]&amp;lt;/ref&amp;gt;&amp;lt;ref name=&amp;quot;안은&amp;quot;&amp;gt;안은필. [http://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9279 방응모 친일증거, “모래밭에서 모래 찾기”]국민TV. 기사입력 2015년 4월 23일. 기사수정 2015년 4월 24일.&amp;lt;/ref&amp;gt;&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2/0002006080?sid=102 한홍구 &amp;quot;박정희는 공포와 욕망의 정치를 했다&amp;quot;]. 프레시안. 2015년 4월 13일.&amp;lt;/ref&amp;gt;&amp;lt;ref&amp;gt;이민영.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1/0002255321?sid=102 고법 “방응모 前조선일보 사장 친일행적 대부분 인정”]. 서울신문. 2012년 1월 13일.&amp;lt;/ref&amp;gt;&amp;lt;ref&amp;gt;노현웅.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8/0002251781?sid=102 조선 방응모·동아 김성수의 ‘친일’…수년째 결론 안 내고 미루는 법원]. 한겨레. 2014년 11월 3일.&amp;lt;/ref&amp;gt;&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6/0000000413?sid=110 김성수ㆍ방응모와 친일언론인 군상]. 미디어오늘. 2002년 3월 12일.&amp;lt;/ref&amp;gt; 언론계에서 활동하면서도 사업가의 길을 함께 걸었고, 교육 장학 활동을 하였으며, 1945년 광복 직후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 고문과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안재홍]]의 추천을 받아 한국독립당 중앙상무위원과 독립촉성국민회 총무부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amp;lt;ref name=&amp;quot;안은&amp;quot;/&amp;gt;&amp;lt;ref&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16/2008031600800.html 계초 방응모와의 우정도 여러 편의 시로 표현해&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해방 정국에서 김구의 재정적 후견인으로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등 삼의사 유골 봉환 사업과 신탁통치 반대 운동 등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대한민국 수립 이후 사회민주주의 정치가인 조소앙과 사회당을 결성해 문교정책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lt;br /&gt;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 납북 후 행적은 &amp;quot;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amp;quot;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lt;br /&gt;
&lt;br /&gt;
== 생애 ==&lt;br /&gt;
=== 생애 초기 ===&lt;br /&gt;
==== 출생과 성장 ====&lt;br /&gt;
방응모는 1883년 11월 3일 또는 9월 29일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바우머리 부락 또는 정주군 정부면 성내동 425번지에서 '''방계준(方桂準)'''과 온양 박씨(溫陽朴氏)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그는 어려서 집중력이 남달리 뛰어난 반면 고집이 셌다는 평이 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페이지&amp;lt;/ref&amp;gt; 그의 '''삼촌 방계묵(方啓默)'''은 그의 고집있는 기질을 두고 저놈은 쇠작두 말고 나무 작두로 잘라 죽여야 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3~54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친척들의 야멸찬 말들이 그에게 상처를 주거나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4페이지&amp;lt;/ref&amp;gt; 또한 그의 유년시절을 본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가 태어날 당시 태몽도 없었고, 신동이라는 말도 별다르게 듣지 않았다고 한다. 어려서 빈곤한 가정환경으로 방응모는 정규 학교에는 입학하지 못하고, 16세 때까지 서당에 드나들며 한학을 익혔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던 중 그가 어느정도 실력이 우수하다고 인정되자, 스승인 승창률은 잠시 방응모에게 어린아이들을 돌보게 한 후 자리를 피하곤 했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1페이지&amp;lt;/ref&amp;gt; 그는 홀로 사서육경을 탐독, 독파하였다. 21세 무렵 잠시 서당 훈장을 지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896년 독립협회의 활동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5페이지&amp;lt;/ref&amp;gt; 형 방응곤이 예배당에 다니게 되자&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2페이지&amp;lt;/ref&amp;gt;, 그를 통해 신문물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다. 그 뒤 우연히 경성부에 갔다가 신문물을 보고 충격을 받아 17세에 독학으로 신학문과 일본어, 중국어, 수학 등을 독파하였다. 유년시절 서당의 성리학 스승이던 승창률의 친척인 승시영(承時榮)과 조씨(趙氏)의 딸 승계도와 결혼했다.&lt;br /&gt;
&lt;br /&gt;
결혼한 다음 해에도 그는 공부를 한다며 책만 사다 읽곤 했고&amp;lt;ref name=&amp;quot;fsfs60&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60페이지&amp;lt;/ref&amp;gt;, 부인 승계도는 생계를 위해 몸소 나섰다.&amp;lt;ref name=&amp;quot;fsfs60&amp;quot;/&amp;gt; 부인 승계도는 친척 가운데 콩을 싸게 넘겨주는 이들이 있어 그 콩으로 두부를 만들거나 콩나물을 키워 장사를 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61페이지&amp;lt;/ref&amp;gt; 그의 아내 승계도는 남편에 대한 믿음이 절대적이었고 탓을 하거나 가출하지 않았다. 이후 그는 서당 훈장으로 초빙되었으나, 그가 가는 마을의 기존 훈장, 한학자들은 그를 적대적으로 대했다. 그렇다고 마을 사람들의 일부 지명이 있었으나 자신의 스승의 자리를 침해할 수 없다 하여 그는 자신의 동리의 훈장일은 사양하였다. 그는 마을을 나가 신학문을 하는 친구들과 어울렸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62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계몽 운동 ====&lt;br /&gt;
도산 [[안창호]]와 남강 이승훈이 연사로 돌아다니며 애국 계몽 강연과 문맹들의 교육, 야학 사업을 하였고, 여기에 감동받은 청년들이 서당과 야학을 열고 문맹들과 여성들에게 한글 교육을 하였다. 도산 [[안창호]]의 강연과 남강 이승훈의 강연을 찾아다니며 듣다가 감동받은 방응모 역시 교육, 계몽에 참여하였다.&lt;br /&gt;
&lt;br /&gt;
그는 청년회의 활동에 몰두하였으나, 농번기에 작은 일손이라도 더 필요했던 동리 노인들은 젊은 아이들이 일은 하지 않고 무슨 모임이다 하여 어울려 돌아다니는 꼴&amp;lt;ref name=&amp;quot;fsfs75&amp;quot;/&amp;gt;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또한 모임 구성원들 역시 &amp;quot;의식 자체가 아직 전근대적이었고, 사고의 분화를 겪지도 않은데다가, 이들의 조직 활동이 기분 좋으면 나오고 기분 나쁘면 빠져 버리는 것이 예사&amp;quot;라 청년 모임들은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청년단체의 실패에 좌절하고 다시 귀향했으며, 이때 그는 춘해(春海)라는 아호를 스스로 지었다. 그의 집안에서는 그가 정착하기를 바라고 정주읍 성내동에 집을 얻어 주었다.&lt;br /&gt;
&lt;br /&gt;
안창호의 계몽 강연에 감동받은 남강 이승훈이 1907년(융희 1년) 8월 김덕용(金德鏞)을 초빙하여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 오산에서 신식 교육을 하는 소학교 과정의 학교 강명의숙을 세우고 산수, 수신, 역사, 지리, 체조를 가르쳤고, 그해 12월에는 중학교 과정인 오산학교를 세우고 학생 7명을 처음 받아들여 개교했다. 1908년에는 오산학교에 학생들이 모여 3개 반으로 편성되었고, 정주군 출신의 춘원 이광수가 오산중학교의 교사로 초빙되어 축구, 야구, 테니스, 배구 등을 지역에 처음 소개하였다. 방응모는 어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학교에 입학해 신학문을 접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0페이지&amp;lt;/ref&amp;gt; 그는 이승훈과 의기투합해 민립 대학을 세우는 운동을 추진했지만 조선총독부 평안북도청 학무국에서 승인을 거부하여, 대학 설립에 실패했다.&lt;br /&gt;
&lt;br /&gt;
=== 언론, 기업 활동 ===&lt;br /&gt;
==== 계몽 활동과 언론 활동 ====&lt;br /&gt;
1915년부터 1924년 방응모는 지역 지식인들, 유학파 청년, 계몽 청년들이 모여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하는데 참여했고, 민립대학기성회 평안북도지부에서 활동하면서 민립대학기성회 중앙회 중앙위원 조만식 등과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언변과 용모가 되었던 그의 여관에도 손님들이 몰렸고, 그가 &amp;quot;2백원도 좋고 5백원도 좋다며 보태달라&amp;lt;ref name=&amp;quot;fsfs87&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7페이지&amp;lt;/ref&amp;gt;&amp;quot;고 하면 기부금을 내는 이들이 있었다. 대신 하룻밤을 의탁하려고 그의 여관을 찾은 이들에게 무료 숙식을 제공하기도 했다.&amp;lt;ref name=&amp;quot;fsfs87&amp;quot;/&amp;gt; 1919년 정주에서 3.1 만세 운동이 벌어지자, 그도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형사들의 눈을 피해 방응모는 만세운동을 하다 재빨리 몸을 피해 화를 면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8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1922년 6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인수하여 분국장에 취임했다. 6월 9일에는 정주군 지역 체육행사로 테니스 대회를 개최하였다. 그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경영하는 동시에 그는 농촌 계몽운동 등에 적극 투신하여 인망을 쌓았다. 처음 몇번은 친구 전우현의 자금을 빌려 부족분을 메우기도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02페이지&amp;lt;/ref&amp;gt; 한다. 1922년 6월 19일&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96페이지&amp;lt;/ref&amp;gt; 동아일보 본사를 설득하여 정주분국을 동아일보사 정주지국으로 승격시켰다. 동아일보사 지부장 재직 시 그는 전우현과 함께 의기투합하여 민립 대학 설립 자금과 농촌진흥회 회원의 여비와 회비를 염출하기 위한 목적 및 당시 교사도 없이 난관에 처했던 오산학교의 재개교를 위한 &amp;quot;오산학교의 부흥 운동을 목표로 한 재단법인 촉성 기금 마련&amp;quot; 등을 계획했다. 총독부의 인허가 거부로 실패한 대학 설립 자금은 고스란히 오산학교의 부활과 복교 자금으로 투입되었다. 1920년 1월에 경성형무소에서 가석방된 조만식은 이승훈을 만났고, 다시 조만식이 오산학교를 맡으면서 학교는 다시 정상 운영되었다.&lt;br /&gt;
&lt;br /&gt;
1923년 동아일보 정주군 분국이 지국으로 승격되자 정주 지국장으로 동아일보 정주지국을 경영하였고, 같은 해 7월 여성들의 사회참여와 평등권 신장을 위한 여자교육회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이후 대규모 수해가 나자, 정주군 수해구제회를 결성하여 봉사활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1923년 4월 조만식·송진우·안재홍·김성수 등의 주도로 민간 자본으로 대학교 설립을 추진하기 위한 조직인 조선민립대학기성회가 결성되자, 방응모는 민립대학 기성회에 참여하여 민립대학기성회 정주군준비회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5월에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정주지방지부가 설립되자 기성회 정주지부 상무위원을 맡았다.&lt;br /&gt;
&lt;br /&gt;
==== 광업 경영과 조선일보 입사 ====&lt;br /&gt;
1924년 봄 오산학교 교감으로 있던 전우현이 방응모와도 안면이 있던 금광 채굴업자 두 명을 데리고 그를 찾아왔다. 그들은 자신들이 봐 둔 산이 있다고 방응모에게 소개했다. 그는 선천군의 지역 유지이자 최창학의 친구이며, 그가 동아일보 지국장으로 알게 된 이봉찬을 찾아갔다. 한학자로 알고 있던 그가 금광 투자를 제의하자 &amp;quot;한문이라면 빼지 않고 알려고 드는 한학 훈도가 어떻게 금광을&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16페이지&amp;lt;/ref&amp;gt;&amp;quot; 하느냐 하였지만, 이봉찬은 그에게 금광, 광산에 대한 지식을 알려주었다. 이봉찬은 그에게 광산 지식을 알려주며 최창학의 소유지 중 폐광을 빌리는 법을 알려주었다. 방응모의 됨됨이에 감복한 듯, 그의 수많은 질문에 적잖은 충고를 자임해주었다.&amp;lt;ref name=&amp;quot;fsfs117&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5페이지&amp;lt;/ref&amp;gt; 이봉찬은 최창학에게 방응모를 소개하는 편지를 수차례에 걸쳐 보내주었다.&amp;lt;ref name=&amp;quot;fsfs117&amp;quot;/&amp;gt; 이봉찬은 방응모의 친구들이 봐 둔 갱도를 임대받도록 도와주었다. 이봉찬은 방응모의 한학 실력과 사람됨을 알아보고 있어, 자금을 쾌히 빌려주었다.&amp;lt;ref name=&amp;quot;fsfs117&amp;quot;/&amp;gt;&lt;br /&gt;
&lt;br /&gt;
이후 광산업에 뛰어들어 1924년 여름 압록강변의 최창학 소유 폐금광인 평안북도 삭주군 외남면 교동 다릿골의의 삭주 교동광업소를 찾아가 10미터 정도 땅을 파고 금맥을 발견했다. 바로 삭주 교동광업소를 인수, 경영을 확대하였다. 이때 만난 동업자의 딸이자 친구 전우현의 조카딸인 '''이인숙(李仁淑)'''을 만났다. 본처 승계도가 두 아들을 잃고 복부 수술이 잘못되어 아이를 얻지 못하게 되자 방응모에게도 수많은 중매가 들어왔다. 자식들을 병으로 잃은 것이 자신의 불찰이라고 본 승계도는 그에게 작은 부인이라도 들이자는 말을 꺼내기도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18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26년 방응모에게 광산 사업을 제안했던 두 친구가 손을 털고 나갔고, 그의 가족은 돈이 없어 쌀 대신 좁쌀로 좁쌀죽을 먹으며 연명해야 했다. 방응모는 정주군에 사는 비슷한 또래의 먼 친척 방상진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고, 방상진과 일꾼 대여섯 명, 그리고 후처 이인숙의 친정 쪽에서 얻어온 토지문서를 얻어 자금을 마련, 삭주 다릿골 광산으로 가서 다시 금광을 채굴했다. 금맥은 쉽게 나오지 않았고, 출몰하는 마적떼에게 소와 기구를 약탈당했다. 동시에 빚쟁이들의 독촉에 시달렸으나 '''''1926년 7월 지하 300m 지점에서 금맥을 확보했다. 이후 연간 300kg의 금을 생산, 그는 굴지의 광산업자로''''' 성장해 금맥을 찾아 벼락부자가 되었다. 그는 방상진을 교동금광 총감독에 맡겼다. 이때 그는 최창학에게 임대료에 이자를 쳐서 보내주었다.&lt;br /&gt;
&lt;br /&gt;
그때까지 첫 부인 승계도가 두부를 팔아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미국산 포드 T형자동차'''''를 타고 금의환향했다. 1928년 방응모는 자신의 아호인 춘해를 딴 춘해 장학회를 만들고 장학생들의 모임인 이심회를 만든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48페이지&amp;lt;/ref&amp;gt; 그 해에 방응모는 교동지역에 파출소 지소를 유치하였고, 마적단에 시달리던 주민들은 그의 송덕비를 세우기도 했다. '''''1928년에 그는 의정부 직동, 흥선대원군의 별장이 있던 곳 바로 뒤에 위치한 건물을 매입'''''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한용운]], 홍명희를 자주 초대했다.&lt;br /&gt;
&lt;br /&gt;
'''''1932년 방응모는 교동광산을 135만원이란 거액에 일본 중외광업주식회사에 매각'''''했다. 그 뒤 1932년 6월부터 조선일보 영업국장으로 활동하다 '''1933년 3월 [[조선일보]]의 경영권을 인수'''하여 부사장에 취임하였다.&lt;br /&gt;
&lt;br /&gt;
그는 교동광업소를 운영하며 모은 재력을 바탕으로 부사장 재직 중 [[조선일보]]의 대주주가 되었으며, 1933년 7월 8대 사주 조만식으로부터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제9대 [[조선일보]] 사주로 취임, 활동했다.&amp;lt;ref&amp;gt;조선일보는 1932년 7월에 조만식을 사장으로 영입했지만, 조만식은 거의 평생을 평양에서 살아왔던데다 서울에서 활동하기에는 적응을 잘하지 못했다. 조만식은 신문사 경영난과 지역감정의 혹독한 시련을 받은 채 9개월만에 퇴사했다. 그리고 조만식 후임으로 1933년, 방응모를 사장으로 추대하기에 이르렀다.&amp;lt;/ref&amp;gt;&amp;lt;ref&amp;gt;《한국사 시민강좌 제47집, 대표적 독립운동가 12인》,일조각. p145&amp;lt;/ref&amp;gt; 방응모 취임 이후의 초대 부사장은 이광수, 주필은 서춘이었다.&lt;br /&gt;
&lt;br /&gt;
=== 언론, 사업 활동 ===&lt;br /&gt;
==== 사회사업과 조선일보 인수 계획 ====&lt;br /&gt;
금광 사업에 성공한 그는 영림, 조림 사업에도 투자하였다. 방응모는 배우자 승계도에게서 더 이상 아들을 얻지 못하자 첩 이인숙을 통해 아들을 얻으려고 하였다. 이인숙은 아들을 낳았으나 이 아들은 곧 사망하였다. 아들을 잃은 이인숙은 승계도의 도움을 받다가, 그해 6월 방응모가 있는 광산으로 가 생활하였다'''. 승계도와 이인숙을 통해 자녀를 얻지못하자 42세가 되던 해인 1924년 친형인 방응곤의 둘째 아들 방재윤을 양자로 입양시켰다.'''&lt;br /&gt;
&lt;br /&gt;
[[파일:방응모장학생.jpg|섬네일|160px|오른쪽|방응모와 그의 장학금을 받던 학생들. 가운데 앉은 이가 방응모이고, 서있는 이들 중 왼쪽에서 두 번째는 방응모의 양자 방재윤.]]&lt;br /&gt;
&lt;br /&gt;
1930년 배영옥과 결혼하여 딸 방재숙을 얻었다. 1932년 광산업을 정리하였고 언론사업을 비롯하여 육영사업과 조림 및 간척사업 등을 벌였다. 또한 고아원과 사회복지단체에 후원금을 지원하면서 인망을 얻기도 했다. 삭주 지역에서는 그의 송덕비가 세워지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932년 그는 수원군 팔탄면 노하리 일대의 갯벌에 일본인이 수차례 뚝을 쌓다가 실패했다는 정보를 얻고 임삼진을 통해 조선총독부에 허가를 요청하였다.&amp;lt;ref name=&amp;quot;pp186&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86페이지&amp;lt;/ref&amp;gt; 간척 사업은 이후 1935년부터 시작되었지만 1932년부터 은밀히 착수되어 왔다.&amp;lt;ref name=&amp;quot;pp186&amp;quot;/&amp;gt;&lt;br /&gt;
&lt;br /&gt;
1933년 무렵 방응모가 [[조선일보]] 인수에 나서기 전부터 그는 [[한용운]]을 위한 일이라면 돈을 아끼지 않고 지출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성북동 222번지 언덕에 만해를 위해 기와집 한 채를 지어주었는데 심우장(尋牛莊)이 그것이다. 또한 만해가 일제의 배급을 거부해 생활이 어렵게 되자 만해에게 생활비를 지급했던 방응모는 만해가 병석에 누운 1944년에는 치료비를 지원해주기도 했다.&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6/0000043262?sid=103 만해가 일송 선생 5일장 치른 사연]&amp;lt;/ref&amp;gt; 그 외에도 방응모는 만해 한용운·벽초 홍명희 등과 함께 새해가 되면 백천온천에도 같이 다녀올 정도로 두터운 친분을 맺었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1&amp;quot;&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8/07/2007080700002.html 만해와 계초 방응모 선생]&amp;lt;/ref&amp;gt; 1935년 7월에는 경성 태평로1가에 새 사옥을 준공하는 한편, 출판부를 신설해 〈조광〉(1935. 10)·〈여성〉(1936. 6)·〈소년〉(1937. 4) 등의 월간 잡지를 차례로 창간했으며&amp;lt;ref name=&amp;quot;dam1&amp;quot; /&amp;gt; 운영하였다. 한편 [[1932년]] 교동 광업소를 정리하여 매각하였다.&lt;br /&gt;
&lt;br /&gt;
방응모의 광산 매각을 일본 정부 측에 알리고 다리를 놓은 것은 고일청(高一淸)이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84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32년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사건으로 체포된 [[안창호]]의 사면 탄원과 보석을 위해 노력하였다. 안창호가 윤봉길을 사주했다는 증거가 없으며 그가 테러행위를 지시했다는 증거 자료나 문건이 없다는 것이 방응모의 안창호 탄원 이유였다. 그러나 총독부 경무국장은 그의 안창호 석방 제안을 정중히 거절한다. 1936년 동방문화학원(뒤에 숭문중학교·고등학교 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1939년 9월에는〈조선일보〉의 조간 1회, 석간 2회의 1일 3회 발행을 시작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인수와 경영 ====&lt;br /&gt;
1933년 1월 16일 그는 정식으로 주식회사 [[조선일보]]사를 창립, 1월 18일에 발표된 창립 취지서에는 창립위원장 방응모, 창립발기인 방응모, 조만식, 고일청 외 등이 참여했다. 일단 그는 조만식을 사장으로 임명하고 자신은 부사장으로 있다가, 그해 3월 13일 다시 부사장에 취임했다. 4월 25일 편집인 겸 발행인이 되고, 4월 29일에는 조선일보의 조간, 석간제 발행을 부활, 확정시켰다. 1933년 7월 10일 총독부로부터 조선일보사의 법인 등록 승인을 얻어냈다. 7월 10일 조만식의 사퇴로, [[조선일보]]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다. 1933년 그는 자신의 아호를 춘해에서 계초로 바꾸었다. 그는 유능한 문인, 필진의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 상금 1천 원을 걸고 작가를 영입하였다.&lt;br /&gt;
&lt;br /&gt;
1934년 3월 25일 이광수를 비롯하여 서춘, 김동진, 함상훈, 신태익 등을 [[조선일보]]로 영입해 왔다. 그 외에도 정주군 출신 언론인, 작가들이 조선일보로 많이 오게 되었다. 이후 동아일보와 갈등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이광수가 조선일보로 옮겨와 부사장직에서 9개월 근무했다. 당시 조선일보 내부에서는 문모 라는 이가 이광수의 등장으로 자신의 입지 약화를 우려해 오랫동안 이광수를 내보내려 흉계를 꾸몄다고 한다. 이광수는 1934년 5월 25일자로 돌연 사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65페이지&amp;lt;/ref&amp;gt; 문모는 그에게 오히려 잘 됐다는 식으로 말하다가 방응모에게 호되게 혼이 났다. 그리고 문모로 하여금 즉시 금강산에 들어가 이광수를 다시 데려오게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65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이광수는 아들 봉근(당시 8살)의 사망 등으로 실의에 빠졌고, 1935년에 가서야 이광수를 조선일보 고문이자 필진으로 재영입하게 됐다.&lt;br /&gt;
&lt;br /&gt;
==== 동방문화학원 재단 설립 ====&lt;br /&gt;
방응모는 1936년 방농장의 소유권을 기본 자산으로 하는 재단법인 동방문화학원(東邦文化學院)을 설립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6페이지&amp;lt;/ref&amp;gt; 동방문화학원은 학교 법인으로 인가된 재단 법인으로, 그뒤 고계학원과 인연을 가지고 1936년부터는 보성고등보통학교를 후견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 분리되었다. 그뒤 방응모 장학생인 서중회 회원들을 위한 방응모 장학사업을 주관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7페이지&amp;lt;/ref&amp;gt;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태평로 구 조선일보 사옥 안에 동방문화학원의 간판을 달고 조광 잡지를 계속 발행하는 조광사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7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일제 강점기 후반 ===&lt;br /&gt;
==== 중일 전쟁 전후 ====&lt;br /&gt;
[[중일전쟁]] 개전 직후인 [[1937년]] [[7월 11일]]에 열린 [[조선일보]] 간부회의에서 주필 [[서춘]]이 '일본군, 중국군, [[장개석]]씨'등으로 쓰던 용어를 '아군, 황군, 지나, 장개석'으로 고치고 일본 국민의 입장에서 논설을 쓸 것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편집국장 [[김형원]]과 영업국장 [[김광수]]가 적극 반대를 하기도 했으나, 방응모는 '일장기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이미 몇 십만 원의 손해를 보았을 뿐 아니라 [[3.1 운동]] 때처럼 신문이 민중을 지도할 수 없다'면서 [[서춘]]의 입장을 지지했다.&amp;lt;ref&amp;gt;{{웹 인용 |url=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5731 |제목=시사IN 2009년 11월 21일자 |확인날짜=2011년 4월 28일 |archive-date=2016년 3월 4일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60304105544/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5731 }}&amp;lt;/ref&amp;gt; 한편으로 방응모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된 [[안창호]]를 [[조선일보]]에 영입하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안창호는 옥중에서 얻은 간질환과 폐질환 등으로 고생했고, 진료비 등을 수시로 지원하고 문병했음에도 출옥후 얼마 뒤에 사망한다.&lt;br /&gt;
&lt;br /&gt;
[[1933년]] 이심회(以心會：후에 序中會, 방응모장학회 등으로 명칭이 바뀜)라는 장학회를 만들어 국내 대학생과 해외유학생들에게 학자금을 지급하기도 했으며, 재단법인 동방문화학원(東方文化學院：지금의 숭문중·고등학교 전신)의 이사장직을 맡기도 했다.&amp;lt;ref name=&amp;quot;dam1&amp;quot; /&amp;gt; 또한 자신의 막대한 재원을 들여 1936년부터 함경남도 영흥군 일대에 당시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대단위 조림사업을 벌였으며, 그 전 해인 [[1935년]]부터는 [[경기도]] [[수원군]] 팔탄면 일대에서 만 2년간에 걸친 간척사업을 벌이기도 했다.&amp;lt;ref name=&amp;quot;dam1&amp;quot; /&amp;gt;&lt;br /&gt;
&lt;br /&gt;
1937년 12월 24일 [[안창호]]는 병보석 판정을 받고 재판소가 지정한 현 [[서울대학교병원]]인 경성제국대학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안창호의 입원 중에 시중을 든 사람으로는 안창호의 외조카 김순원과 청년 박정호 두 사람이었고, 나중에는 이응준 장군의 부인 이정희가 끝까지 지성껏 간호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7페이지&amp;lt;/ref&amp;gt; [[안창호]]는 병상에서 병원비 문제로도 고초를 겪었다. 이 때문에 [[조만식]]은 일본 경찰로부터 안창호의 병원비를 대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음에도, &amp;quot;내가 먹고 살면서 그 선생을 돌보지 않을 수 없다&amp;quot;며 완강히 거절하고 안창호를 도왔다고 한다. 입원비는 10일마다 120원씩 나왔다. 안창호의 간호를 같이 도와주던 이응준 장군 부인 이정희는 10일마다 계산되어 나오는 병원 입원비로 안창호 선생이 괴로워하는 표정을 지켜볼수 없었다고 진술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8페이지&amp;lt;/ref&amp;gt; 방응모는 5백원의 수표 한 장을 안창호에게 전달하였다. 50일간의 입원비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9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안창호]]는 [[1938년]] [[3월 10일]] 밤 12시 경성제국대학 병원에서 운명하였다.&lt;br /&gt;
&lt;br /&gt;
1938년 3월 12일 안창호의 장례는 조만식의 주관 하에 조촐하게 치러졌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60페이지&amp;lt;/ref&amp;gt; 당시 방응모는 일본경찰의 저지에 응하지 않고 자가용으로 장례행렬을 뒤따르겠다고 고집하여 총독부 경찰에서 완곡유지시켰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60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폐간 사건 ====&lt;br /&gt;
일본의 전쟁이 격화되면서 [[조선총독부]] 공보국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1940년]]에 강제로 폐간조치 했다. 광산을 팔아서 자신의 모든 것을 조선일보에 바쳤던 방응모는 큰 절망과 좌절을 느껴야 했다. 한용운은 ‘신문이 폐간되다/ 붓이 꺾이어 모든 일이 끝나니…’로 시작하는 시를 지어 방응모를 위로했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1&amp;quot; /&amp;gt;&amp;lt;ref&amp;gt;붓이 꺾이어 모든 일 끝나니 이제는 재갈 물린 사람들 뿔뿔이 흩어지고 아, 쓸쓸하고 쓸쓸한지고 망국 서울의 가을날 한강의 물도 흐느끼느니 울음 삼켜 흐느끼며 연지를 외면한 채 바다 향해 흐르느니&amp;lt;/ref&amp;gt; [[동아일보]]에는 [[김성수 (언론인)|김성수]] 외에도 [[장덕수]]와 [[송진우 (정치인)|송진우]]가 있었지만 그에게는 조선일보 폐간을 막기 위해 총독부와 교섭할 인물도 없었다.&lt;br /&gt;
&lt;br /&gt;
[[1938년]] [[2월]]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선 내 일간신문 25개사로 조직된 조선춘추회의 창립에 창립발기인으로 참가했고, 조선춘추회 간사로 활동했다. 같은 해 7월 “국민정신을 총동원하고 내선일체 전 능력을 발휘하여 국책 수행에 협력하여 성전(聖戰)의 궁극적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조직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에 참여했고, 그날 결성된 경성연맹 창립총회에서 상담역을 맡았다. 9월부터 조선방공협회 경기도연합지부 평의원을 지냈다. 10월에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주최한 비상시 국민생활 개선을 위한 제1회 생활개선위원회에서 제2부(의례와 사회풍조 쇄신부)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그러나 1938년 10월부터 조선총독부는 조선일보의 신문용지를 검열, 통제하기 시작했다.&lt;br /&gt;
&lt;br /&gt;
1938년 6월 14일 방응모는 음악학교나 음대를 갓 졸업한 신인 음악인을 소개하는 신인음악회를 부민관에서 개최한다. 그러나 신인음악회는 조선총독부의 금지 요청으로 3회만에 중단된다. 38년 11월 26일부터 5일간 부민관과 조선일보 본사 대강당에서 조선영화 감상회, 조선영화 전람회, 조선 영화 시나리오 현상모집의 3개 행사를 주최했다. 그러나 역시 3년만에 총독부의 압력으로 중단되고 만다.&lt;br /&gt;
&lt;br /&gt;
1939년 2월 조선인의 군사동원을 위한 지원병 참가를 독려하기 위해 조직된 경성부지원병후원회 고문에 추대되었다. 7월에 영국 타도를 주장하며 전국 차원에서 적극적 배영운동을 벌이기 위해 결성된 [[배영동지회]](排英同志會)의 상담역으로 선출되었다. [[1940년]] [[3월]] 잡지 《조광》의 발행인으로 취임했다.&lt;br /&gt;
&lt;br /&gt;
1940년 4월 30일 영흥 계초사임사업부 책임자로 있던 양자 방재윤이 간호사가 잘못 놓은 주사로 사망했다. 식중독으로 병원에 실려가 주사를 맞았다가 쇼크사하였다.&lt;br /&gt;
&lt;br /&gt;
양자 재윤을 잃고 나서 그는 허탈감을 [[뽕나무]]로 달랬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11페이지&amp;lt;/ref&amp;gt; 한다.&lt;br /&gt;
&lt;br /&gt;
[[양근환]]이 석방되어 20년만에 귀국하였다. 그는 [[막걸리]] 마실 돈도 없어 방응모를 찾아갔다. 조선일보 비서실에 양근환이라는 이름 석자의 명함을 내밀면서 &amp;quot;나는 방응모 사장을 알되, 방 사장은 나를 모르겠지만 이렇게 찾아왔소&amp;quot;라고 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4페이지&amp;lt;/ref&amp;gt; 방응모는 즉시 거액의 수표를 그에게 건네주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5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0년]] 5월 [[조선총독부]] 총독 [[미나미 지로]]가 방송담화로 창씨개명을 권고했다. 그러나 그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성씨를 이제 와서 내 마음대로 바꿀수 없다며 [[창씨개명]]은 완강하게 거절했다. [[1943년]] [[화신백화점]] 점원 출신인 노호용과 결혼하였다.&amp;lt;ref&amp;gt;정식 결혼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그에 의하면 첫 부인 승계도와 둘째 부인 이인숙이 당시 살아있었던 점을 든다.&amp;lt;/ref&amp;gt; 1940년 6월 초 명월관 요정에서 예약손님을 받을 때 흰 갱지로 음식을 덮은 것을 보고 트집잡았다. 일본 경찰 간부들은 상에 덮인 흰 갱지를 보고 이것이 어디서 나왔느냐고 따졌고, 식당 주인은 [[동아일보사]]에서 파지를 구입해 쓴다고 대답하자 통제물자인 신문용지는 배급제로 공급되는데, 이 용지를 불법처분했다 하며, 이것을 경리부정으로 몰고 갔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3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그러나 조선일보에 트집이 잡힐 일이 나타나지 않자 총독부는 전국 면사무소에 조선일보 신문 구독을 거절하도록 명령을 내렸고, 동시에 조선말을 쓰는 민원인에게는 일을 처리해주지 말도록 하게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3페이지&amp;lt;/ref&amp;gt; 조선총독부는 [[송진우]]의 예금통장을 문제삼았다. 송진우 명의의 은행저금이 동아일보의 8백여 개의 지국과 분국을 통해 모금된 독립운동 자금이라며, 그리고 동아일보 간부들이 백운장이라는 요정에서 회식을 한 것을 [[김성수 (언론인)|김성수]] 집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려 했다는 등의 이유로 [[백관수]] 동아일보 사장을 전격 구속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3~374페이지&amp;lt;/ref&amp;gt; 동아일보는 백관수가 구속된지 10일 만에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동아일보 중역회의를 열고 폐간신청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4페이지&amp;lt;/ref&amp;gt; 총독부는 조선일보에도 자진 폐간을 권고했고, 1940년 8월 9일 편집회의를 주관, 8월 10일 조선일보의 폐간계를 내고, 8월 10일자로 폐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5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잡지 발행 활동 ====&lt;br /&gt;
신문 강제 폐간 뒤 방응모는 간판을 조광사로 바꿔 걸고, 사옥은 동방흥업주식회사로 등기를 변경해서 유지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1페이지&amp;lt;/ref&amp;gt; 이후 그는 [[조광 (잡지)|조광]] 잡지 발행에 전념했다. 1943년 8월 경 일본 중앙대학의 예과를 마친 [[방일영]]이 입사&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1페이지&amp;lt;/ref&amp;gt;, 필진으로 참여했다. [[조선일보]]가 폐간된 후에도 방응모는 벽초 [[홍명희]] 부자에게 지속적으로 생활비를 대주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4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0년 속담대사전, 조선창극사, 조선시조시학, 조선요리학, 세계명인전 상중하 등을 발행했다. 이후 조선사화 등을 발간했는데 다량의 부수로 간행하여 다시 흑자가 되었다.&lt;br /&gt;
&lt;br /&gt;
1943년 평안북도 정주에 있는 부인과 며느리를 비롯한 가족 전부를 상경시키고, 서울 충정로의 저택을 매각, 동대문밖 남산 밑 양사골에 전세집을 얻는다. 그리고 고향의 99칸 한옥을 헐어 양주군 의정부에 옮겨 지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7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4년 손자 [[방일영]]이 학도병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방응모는 손자의 학병 징집을 단호히 거부했다. 방응모는 백방으로 학도병을 피할 수 있는 구실을 찾으려고 연구하다가 [[경성부]]의 유명한 의사 [[백인제]]를 찾아갔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3페이지&amp;lt;/ref&amp;gt; [[백인제]]는 처음에 난처해했으나 방응모의 거듭된 간청으로, 곤란합니다 라는 말만 되풀이하다가 결론은 손자 [[방일영]]의 생살을 칼로 째는 수술을 결정했다. [[방일영]]에 의하면 &amp;quot;나의 왼쪽 뺨의 귀 밑에서 턱까지 생살을 째는 수술이 시작되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3페이지&amp;lt;/ref&amp;gt;&amp;quot; 한다. 이로 인해 [[방일영]]의 징집은 연기되었으나, 균이 들어가서 네 번이나 수술을 더 했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4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양주군수 김정제가 찾아와 학병 문제를 계속 거론하였다. 그는 할 수 없이 방일영을 징집이 면제되는 면서기로 들어가도록 합의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4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4년 6월 29일 만해 [[한용운]]이 사망했다. 그는 심우장을 찾아가 3백원을 내놓았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5페이지&amp;lt;/ref&amp;gt;당시 쌀 10가마가 100원이었지만, 심우장은 당장 현금 1원이 없었는데 거액이라서 놀랐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6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4년]] 아들 [[방재선]]을 얻었다. 이후에도 방응모는 노호용과의 사이에서 방재효, 방재규 등 두 아들을 출산하였다. [[1944년]] [[9월]] 군수산업체인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 설립에 창립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이후 조선항공공업 감사에 피선되었다.&lt;br /&gt;
&lt;br /&gt;
=== 광복 이후 언론 및 정치활동 ===&lt;br /&gt;
==== 광복 직후 ====&lt;br /&gt;
[[파일:1946.06 3의사 유해봉환식장.jpg|섬네일|왼쪽|200px|[[1946년]] [[3월]] 순국3의사 유해봉환일 [[김구]], 위당 [[정인보]] 등과 함께]]&lt;br /&gt;
&lt;br /&gt;
[[1945년]] 8.15 광복 후에는 [[8월]] 말과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朝鮮在外戰災同胞救濟會) 고문과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9월]] 초 [[안재홍]] 등이 좌경화되는 [[건준]]체제에 반발하여 [[건준]]을 탈퇴하자 방응모 역시 [[건준]]을 탈퇴하였다.&lt;br /&gt;
&lt;br /&gt;
[[9월 2일]] [[미군정]]이 주둔하자, 방응모는 윤전기를 찾기 위해 폐간 당시의 증빙서류를 미 군정청에 제시하였으나 소식이 없었다. 총독부는 조선일보 폐간 직후 인수한 윤전기를 경성일보사에 옮겨서 설치했다. 그는 동방문화재단 외 4개 사업소를 적산으로 파악한 미군정을 설득하고, 사옥 문제도 해결하였다.&lt;br /&gt;
&lt;br /&gt;
[[10월 1일]] 조선일보 편집위원회를 구성하고, 신문 복간 운동을 추진했다. 조선총독부의 폐간 지시 당시 의정부로 옮겨놓은 일부 활자 자모음이 잘 보관되어, 그해 11월 23일 조선일보를 복간시키고, 서울신문사 사옥에서 조선일보 복간호를 간행하였다. 이후 조선사회문제대책중앙협의회 중앙위원을 거쳐 [[10월 16일]] [[이승만]](李承晩) 등의 주도로 [[독립촉성중앙회]]가 결성되자 독촉에 가입하였다.&lt;br /&gt;
&lt;br /&gt;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 요인이 귀국하자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에 입당했다. [[12월]] [[안재홍]]의 추천으로 [[한국독립당]]의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출되어 3~4개월 동안 활동했다.&amp;lt;ref&amp;gt;일각에서는 방응모가 '한독당 재무부장으로 지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1947년부터 한독당 재무부장을 맡은 신창균이 전면 부정했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47/0000002626?sid=102 백범 비서와 '진짜' 한독당 재정부장의 육성증언. 참고.]&amp;lt;/ref&amp;gt; 그 뒤 대한국민총회 발기인, 대한독립애국금헌성회 발기인 등으로 활동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복간 및 군정기 활동 ====&lt;br /&gt;
[[파일:Kim Gu (1947).jpg|섬네일|140px|오른쪽|임시정부 각주이자 한독당 당수 [[김구]]. 방응모는 [[한국독립당]]의 중앙상무위원과 당 재정부장으로 참여했고, [[김구]]의 반탁운동과 3의사 유해 봉환 때 자금을 댔다.]]&lt;br /&gt;
&lt;br /&gt;
[[11월]] [[조선일보]]사를 복간시켰다. 그러나 한동안 조선일보의 인쇄는 [[서울신문|서울신문사]]에서 간행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1945년]]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추념대회에 참여하였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2&amp;quot;&amp;gt;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13&amp;lt;/ref&amp;gt; 순국선열추념대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2&amp;quot; /&amp;gt;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참여,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이 되었다.&amp;lt;ref&amp;gt;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55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6년 2월 26일 서울신문사 공무국 종업원들이 조선일보의 인쇄를 거부해버렸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436페이지&amp;lt;/ref&amp;gt; 그동안 묵시적으로 방해가 은근히 있었다. 표면상의 문제는 임금 문제이나 내용상으로는 조선일보에 대한 조선공산당의 시위의 일종이었다. 사흘간의 교섭 끝에 2월 28일에 가서야 26일자와 27일자를 소급해서 인쇄하여 신문을 한꺼번에 발행하였다. 그러나 3월 1일과 2일에 또다시 인쇄를 거부당해 결국 휴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436페이지&amp;lt;/ref&amp;gt; 조선일보를 경성일보사로 옮겨서 인쇄하기로 하고 3월 5일자로 사고로 독자에게 알렸다.&lt;br /&gt;
&lt;br /&gt;
[[1946년]] [[2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회장에 선출되었고, 3월 1일 미군정은 방응모에게 경성일보사 관리인으로 위촉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437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용지난으로 한동안 신문 발행에 어려움을 겪었다.&lt;br /&gt;
&lt;br /&gt;
[[4월 29일]] [[김구]], [[김창숙]], [[김성수 (언론인)|김성수]], [[오세창]] 등과 함께 서울운동장에서 [[윤봉길]]의사 추모회의 창립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amp;lt;ref&amp;gt;&amp;quot;故尹奉吉義士의 記念式 오늘, 發起人會 열고 準備&amp;quot;, 동아일보 1946년 4월 23일자 2면, 사회면&amp;lt;/ref&amp;gt; 그해 [[5월]] 조선공업구락부 고문에 위촉되었다.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民族統一總本部) 10인협의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6월 15일]] 오후 5시 40분 [[서울역]]에 마중나가 [[서울역]]에 도착한 삼의사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 동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 협의원에 지명되고, [[1946년]] [[8월]]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8월 25일에는 [[한국독립당]] 중앙상무위원의 한 사람에 선출되었고&amp;lt;ref&amp;gt;&amp;quot;金九氏飜意 韓獨黨中委閉會&amp;quot;, 동아일보 1946년 8월 25일자 1면, 정치면&amp;lt;/ref&amp;gt; [[1946년]] [[9월]] 독립촉성국민회 총무부장에 선출되었다.&lt;br /&gt;
&lt;br /&gt;
1945년 광복 직후 서기원이 그를 찾아왔다. 서기원은 그때 경성농상실천학교의 동창회로부터 이 학교의 교장이 되어 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이다. 방응모는 서기원의 제의를 받아들여 [[1946년]] [[8월 28일]] 동방문화학원 이사장으로 숭문상업학교를 인수, 재단 이사장이 되었다. 후일 방응모가 6.25 전쟁 중에 납북된 후 동방문화학원과 숭문중,고교의 재단은 최용진이 운영하다가 다시 [[1978년]]에 [[방일영]]에게 인수되었다.&lt;br /&gt;
&lt;br /&gt;
1947년 1월 21일 제5회 창립위원회를 본사에서 개최하고 2월 23일 주식회사 조선일보사 주주창립총회를 열고 대표이사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공동투자 경영자로 참여시킨 전무 이종민과의 알력이 발생했다. 이종민과의 갈등이 심화되자 그해 8월 3일 방응모는 일단 사직서를 제출했다. 1947년 8월 10일 [[풍문여고]] 강당에서 개최된 한인신문기자협회에 참석, [[민족청년단]]에서 언론계 공로자로 방응모, 김성수, 설의식을 지정하여 상을 시상받았다.&amp;lt;ref&amp;gt;&amp;quot;朝鮮 新聞記者協會&amp;quot;, 동아일보 1947년 8월 10일자 2면, 사회면&amp;lt;/ref&amp;gt; 9월 13일의 임시 주주총회가 긴급 소집되어 회사 운영 문제가 논의되고, 이때 취체역을 재선임할 때 다시 선임되었다. 그러나 이때 전무 이종민은 재선임에서 제외되었다.&lt;br /&gt;
&lt;br /&gt;
==== 김구와의 결별과 만년 ====&lt;br /&gt;
이후 [[한국독립당]] 중앙상무위원&amp;lt;ref&amp;gt;[http://db.history.go.kr/url.jsp?ID=dh_003_1946_08_24_0150 한국사데이터베이스]&amp;lt;/ref&amp;gt;, 당 재정부장 등을 맡기도 했으나, [[1948년]] [[1월]] 이후 [[김구]]의 노선 변경과 함께 그를 지지하던 세력이 떨어져 나가서 [[조선일보]]도 김구에게서 등을 돌리게 되었다.&amp;lt;ref name=&amp;quot;조선11&amp;quot;&amp;gt;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68~70쪽.&amp;lt;/ref&amp;gt; 그러나 김구와의 결별이 괴로웠던지 방응모도 직접 나서서 &amp;lt;김구선생의 의견에 대한 우리의 취할바 태도&amp;gt;라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amp;lt;ref name=&amp;quot;조선11&amp;quot;/&amp;gt;&lt;br /&gt;
&lt;br /&gt;
[[1949년]] [[조소앙]]이 결성한 [[사회민주주의]]성향 정당인 [[사회당 (대한민국, 1948년)|사회당]]에 입당해 동당 문교정책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amp;lt;ref&amp;gt;[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9070600209201019&amp;amp;editNo=1&amp;amp;printCount=1&amp;amp;publishDate=1949-07-06&amp;amp;officeId=00020&amp;amp;pageNo=1&amp;amp;printNo=7956&amp;amp;publishType=00020 1949년 7월 6일자 동아일보]{{깨진 링크|url=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9070600209201019&amp;amp;editNo=1&amp;amp;printCount=1&amp;amp;publishDate=1949-07-06&amp;amp;officeId=00020&amp;amp;pageNo=1&amp;amp;printNo=7956&amp;amp;publishType=00020 }}&amp;lt;/ref&amp;gt; 이듬해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경기도]] 양주군에 출마했으나 차점자로 낙선하였다.&amp;lt;ref&amp;gt;[http://db.history.go.kr/url.jsp?ID=NIKH.DB-dh_017_1950_06_01_0030 한국사데이터베이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9년 의정부 가능동 별장에 심은 뽕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랐다. 승계도의 친척 승원호에 의하면 &amp;quot;할아버지(방응모)는 사람들을 시켜 뽕나무를 2년간 키우게 했습니다. 탐스럽게 뽕나무가 자라니까 이번에는 직조 기계를 들여 직조 공장을 세우겠다고 하셨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11페이지&amp;lt;/ref&amp;gt;&amp;quot; 한다. 그러나 그의 방직공장 설립 계획은 6.25 전쟁으로 무산되고 만다.&lt;br /&gt;
==== 납북과 최후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 납북 후 행적은 &amp;quot;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amp;quot;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amp;lt;ref name=&amp;quot;김장&amp;quot;/&amp;gt; [[1950년]] [[8월]]경 [[개성]] 송악산 부근에서 미군의 폭격에 희생되었고 심한 폭격으로 시신을 찾을 수 없어 묘도 만들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다.&amp;lt;ref&amp;gt;{{뉴스 인용&lt;br /&gt;
 |url          = http://www.minjog21.com/news/articleView.html?idxno=1140&lt;br /&gt;
 |제목       = &amp;quot;누워서도 남쪽하늘만 보십니다&amp;quot; - 평양시 신미리 재북통협 특설묘지&lt;br /&gt;
 |출판사    = 민족21&lt;br /&gt;
 |저자       = 신준영&lt;br /&gt;
 |날짜       = 2002-07-01&lt;br /&gt;
 |확인날짜 = 2008-05-15&lt;br /&gt;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40420015541/http://www.minjog21.com/news/articleView.html?idxno=1140#&lt;br /&gt;
 |보존날짜 = 2014-04-20&lt;br /&gt;
 |url-status = dead&lt;br /&gt;
}}&amp;lt;/ref&amp;gt;&amp;lt;ref&amp;gt;[http://www.minjog21.com/news/articleView.html?idxno=686 민족21&amp;lt;!-- 봇이 따온 제목 --&amp;gt;]{{깨진 링크|url=http://www.minjog21.com/news/articleView.html?idxno=686 }}&amp;lt;/ref&amp;gt; 남한에서는 [[1955년]] [[7월 7일]] 생사불명기간 만료로 인해 실종 처리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주변에서 피신하라고 권했지만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느냐'며 완강하게 버티다가 1950년 [[7월 6일]] [[경기도]] [[양주군]] 시둔면 가능리(현, [[의정부시]] [[가능동]]) 자택에 들이닥친 [[조선인민군]]에 의해 끌려갔다.&lt;br /&gt;
&lt;br /&gt;
=== 사후 ===&lt;br /&gt;
[[서울]] 종로에 있던 양자 방재윤의 두 아들 [[방일영]]과 [[방우영]]은 방응모의 첩 이인숙이 찾아가 피신하라고 권고하여 황급히 피신했다. &lt;br /&gt;
&lt;br /&gt;
[[9월 28일]] [[개성시]] 북쪽을 지나 [[황해남도]] [[서흥군]]에서 트럭으로 강제 북송되었다. 이후 9월 28일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lt;br /&gt;
&lt;br /&gt;
7월 6일 그의 행방불명처리가 되고, 방응모의 사후에도 [[조선일보]]는 그의 명의로 발행되었다. 1952년 4월 28일 조선일보는 발행인겸 편집인을 장기영으로, 인쇄인을 방일영으로, 방응모는 명예사장으로 명의변경하여 휴전 후 계속 발행하게 되었다. 1954년 4월 30일 제8회 조선일보 정기주주총회에서 장기영 사장이 사퇴하면서, 명예사장 방응모가 사장으로 추대되고, 발행인 겸 대표취체역에 방일영이 선임되었다. 이후 실종 후 [[1959년]]에 법적으로 사망 처리되었다. 그리고 [[1970년]]까지는 조선일보는 그의 이름으로 발행되었다.&lt;br /&gt;
&lt;br /&gt;
[[1970년]] [[2월 19일]] 조선일보 정기주주총회에서 방응모 이사를 사퇴 수리하였다. 그의 피폭사망 사실은 1970년대 이후 탈북자들을 통해 대한민국에 소개되었다.&lt;br /&gt;
&lt;br /&gt;
== 친일행위 의혹 ==&lt;br /&gt;
=== 일제 전시체제기 활동 ===&lt;br /&gt;
일제 강점기 말기 언론인으로서 총독부체제에 협력한 기록과 활동이 다수 기록이 있다. 1933년 3월 [[조선일보]] 경영권을 인수하고 부사장직에 취임했을 당시 같은 달에 고사기관총 구입비용 1600원을 군에 헌납하였다. 그는 1935년 친일 잡지 《조광 (잡지)(朝光)》을 창간하였고, 1937년에는 경성방송국 제2방송에 출연하여 일제가 중국의 베일을 절멸케하여 극동평화를 지키려고 한다는 강연을 하였다. 1940년대부터 조광에 집중적으로 친일 논설을 기고하고 시국 강연에 참여하여 전쟁 지원을 독려했다. 1942년 6월에는 '징병령 실시에 일층 더 감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글을 써서 조광에 발표하였다. 애국금차회(1937),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1938), 임전대책협의회(1941), 조선임전보국단(1941) 등 대표적인 친일 단체의 회원에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그는 이런 행적으로 인해 해방정국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명단에 기록되어 있고,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해 발표한 &amp;lt;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amp;gt;에 모두 포함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lt;br /&gt;
&lt;br /&gt;
우리 [[조선일보]]는 다른 어떤 신문도 따라오지 못하는 확고한 신념에서 비국민적 행위를 단연 배격하여 종국까지 조선일보사가 이미 정해놓은 방침에 한뜻으로 매진한다.|원산에서의 순회 강연&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9478.html 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친일 다짐하다 시민에 봉변]《한겨레》2005-08-24 오후 06:13:18&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반민족행위 논란 ===&lt;br /&gt;
방응모를 친일파로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남아 있다. 조선일보 경영 이전에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방응모의 활동이 거의 없었고, 납북된 뒤 소식이 끊겨버린 까닭에 본인이 항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 동안의 행적만으로 친일파 여부를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방응모의 후손들이 영향력 있는 [[조선일보]] 언론사의 사주를 맡았기에 그의 입장에서 서술한 기록을 많이 남기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80년 발간된 그의 전기 《계초 방응모》(조선일보사) 등에는 '그가 민족주의적 선각자'로 묘사되고 있다. 방응모가 친일파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일부세력측은 그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논거로 드는 경우가 많이 있다.&amp;lt;ref&amp;gt;유석재, 계간 《유심》 (2004년 봄호) [http://yousim.buddhism.org/html/2004-spr/tamgu-yoo-seok-jae.htm 삭풍 속에 피어난 금란지교(金蘭之交) - 만해와 계초 방응모]&amp;lt;/ref&amp;gt;&amp;lt;ref&amp;gt;&amp;quot;일제 말기 계초는 시국강연에 나설 것과 창씨개명을 집요하게 강요받았으나 그때마다 묵묵부답으로 거부하며 소신을 지켰다.&amp;quot; 《조선일보》 (2001.3) 조선일보 사장열전 - 계초 방응모편, 《한겨레》 (2001.3.30) [http://www.njoyschool.net/news/article_view.asp?menu_code=s20202&amp;amp;no=1206 조선일보, 일장기를 신문제호 위에]&amp;lt;/ref&amp;gt;&lt;br /&gt;
또한 한국정토학회 고문이자 서울 정토사 주지였던 박설산(1918~2007)이 학도병에 끌려가기 직전인 1943년 12월 28일 밤 서울역에서 스스로 왼발을 선로에 올려 발가락을 절단해 징집을 기피하자 방응모는 만해와 함께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설산을 걱정하면서 입원 중 조선일보 기자를 통해 돈을 전달한 것은 물론 퇴원할 때 돈을 전달하고 뒤를 보살폈다고 한다.&amp;lt;ref&amp;gt;박설산 회고록 &amp;lt;뚜껑없는 조선역사책&amp;gt;(1994, 도서출판 삼장) p240~241&amp;lt;/ref&amp;gt;&lt;br /&gt;
&lt;br /&gt;
2010년 12월, 방응모 관계자들 및 조선일보측은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을 취소해달라'며 법원에 낸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amp;quot;1944년 조선항공업 창립발기인으로 활동한 부분에 대해 친일행위로 판단한 부분을 취소하지만 나머지 활동에 대해서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amp;quot;라고 판결했다. 그 이유인 즉 &amp;quot;방응모는 1933년 조선일보 사장으로 취임해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등으로 활동하며 친일활동을 벌였으며, 1937년 경성방송국 시국강연에서 일본제국이 극동평화를 확립시킬 것이라는 내용의 강연을 하고, 1938년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춘추회의 발기인 겸 간사로 활동하기도 했다&amp;lt;ref&amp;gt;[http://media.daum.net/breakingnews/politics/view.html?cateid=1002&amp;amp;newsid=20101222103319164&amp;amp;p=newsis 법원 &amp;quot;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친일파 맞다&amp;quot;]뉴시스 2010년 12월 22일&amp;lt;/ref&amp;gt;&amp;quot;는 것이다.&lt;br /&gt;
&lt;br /&gt;
2012년 1월 12일 서울고법 행정7부는 방 전 사장의 손자인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이 행정안전부를 상대로 낸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처분 취소 청구소송에서 ‘일제 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의 친일 행위 판정 조항에 비추어 방 전 사장에게 적용된 모두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민족적 지도자로서 비중이 큰 만큼 그로 인한 책임도 무거울 뿐 아니라 고난의 시기를 겪은 민족으로서 그 역사를 반성하자는 입장에 설 때, 방 전 사장의 여러 행태는 반민특별법에서 규정한 친일반민족행위의 유형에 속함을 부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1·2심 재판부는 방 전 사장이 자신이 운영하던 잡지 &amp;lt;조광&amp;gt;에 일제 침략전쟁에 동조하고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문예물과 일제 침략전쟁에 협력할 것을 주문하는 논문을 게재하는 등의 ‘친일’ 행위를 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또한, 2심 재판부는 일본의 전쟁 수행을 돕기 위해 설립된 군수 제조업체 ‘조선항공공업’의 발기인과 감사를 지낸 것은 “감사는 업무집행에 관여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기관으로, 방 전 사장이 이 회사를 운영했다고 볼 수 있다”는 이유로 친일이라고 판단했다.&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4565.html법원 ‘방응모 친일’ 2심서도 인정] 인터넷한겨레 2010년 12월 22일&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가족 관계 ==&lt;br /&gt;
* 아버지 : 방계준(方桂準)&lt;br /&gt;
* 어머니 : 온양 박씨&lt;br /&gt;
** 형 : 방응곤(方應坤)&lt;br /&gt;
** 배우자 : 승계도&lt;br /&gt;
*** 아들 2명 요절&lt;br /&gt;
** 배우자 : 이인숙(李仁淑, 1901년 ~ ?)&lt;br /&gt;
*** 아들 : 방재욱(方在旭, 1925년 ~ 1926년 9월)&lt;br /&gt;
** 배우자 : 배영옥(裵英玉)&lt;br /&gt;
*** 장녀 : 방재숙(方在淑)&lt;br /&gt;
** 배우자 : 노호용(盧鎬龍)&lt;br /&gt;
*** 장남 : 방재선(方在善, 1944년 ~)&lt;br /&gt;
*** 차남 : 방재효(方在孝, 1946년 ~)&lt;br /&gt;
*** 삼남 : 방재규(方在奎, 1948년 ~)&lt;br /&gt;
&lt;br /&gt;
** 양자 : 방재윤(方在允 또는 方在胤, 1901년 ~ 1940년, 형 방응곤의 차남)&lt;br /&gt;
*** 손자 : 방일영(方一榮, 1923년 ~ 2003년)&lt;br /&gt;
**** 증손 : 방상훈(方相勳, 1948년 ~)&lt;br /&gt;
**** 증손부 : 윤순명 - 윤치호(尹致昊, 1865년 ~ 1945년)의 증손녀&lt;br /&gt;
***** 현손 : 방준오(方俊吾, 1974년)&lt;br /&gt;
***** 현손 : 방정오(方政吾, 1978년)&lt;br /&gt;
**** 증손 : 방용훈(方容勳, 1952년 ~)&lt;br /&gt;
*** 손자 : 방필영(方必榮, 1924년 ~ 1926년)&lt;br /&gt;
*** 손녀 : 방숙영(? ~ 1951년 1월)&lt;br /&gt;
*** 손자 : 방우영(方又榮, 1928년 ~ 2016년)&lt;br /&gt;
**** 증손 : 방성훈(方聖勳, 1973년 ~)&lt;br /&gt;
&lt;br /&gt;
== 기타 ==&lt;br /&gt;
그는 [[한용운]], 최남선, 정인보, 홍명희 등과 친분관계를 형성하고 어울려 지냈다 한다.&lt;br /&gt;
&lt;br /&gt;
[[김구]]의 한국독립당의 재정적 후견인 역할을 하였다 하며,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삼의사 유골봉환식 때 [[김구]], [[정인보]] 등과 촬영한 사진이 있다.&amp;lt;ref&amp;gt;백범어록 참조&amp;lt;/ref&amp;gt; 그리고 1945년 11월 23일 조선일보가 복간되자 백범 김구는 '有志者事竟成' 뜻을 지닌 자 성취할 수 있다'는 친필 휘호를 보내며 축하했다.&amp;lt;ref&amp;gt;[http://www.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4060370241 '조선일보 역사 읽기'《조선일보》2004.06.03]&amp;lt;/ref&amp;gt;&lt;br /&gt;
한편 임꺽정의 저자인 벽초 홍명희가 방응모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그와 깊은 친분을 맺었다는 주장이 있다. 《조광》 1938년 11월호엔 홍명희가 병중에 있는 방응모를 위로하며 지은 한시가 방응모의 답시와 함께 실려 있다고 한다.&amp;lt;ref&amp;gt;[http://weekly.chosun.com/site/data/html_dir/2004/11/05/2004110577041.html ‘임꺽정’으로 되살아난 독립운동의 魂! 주간조선 1827호 2004.11.04&amp;lt;/ref&amp;gt; 또한 [[안창호]]의 비서실장을 지낸 독립유공자 구익균은 방응모와 안창호가 친밀했다는 주장을 했다.&amp;lt;ref&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09/2008030901055.html &amp;quot;공산주의자들, 도산 비판하다가도 하숙비 떨어지면 찾아와&amp;quot;] 조선일보, 2008-03-10 03:22&amp;lt;/ref&amp;gt;&lt;br /&gt;
또한 박설산에 따르면 1943년 만해 한용운에게 학도병으로 끌려가게 되었음을 알리려 심우장으로 찾아가게 되었을 때, 한용운과 방응모가 바둑을 두고 곁에서 정인보가 훈수를 두고 있었다고 한다.&amp;lt;ref&amp;gt;박설산 저 &amp;lt;뚜껑없는 朝鮮 역사 책&amp;gt; p.226 도서출판 三藏(1994)&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30년대~1940년대 방응모에게서 장학금을 지원받은 학생 모임인 서중회의 회원들의 그의 인물평은 &amp;quot;첫 인상은 좀 깡마른 모습이었으나 의지가 강한 인물&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56페이지&amp;lt;/ref&amp;gt;&amp;quot;이라는 평을 남기기도 했다.&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 /&amp;gt;&lt;br /&gt;
&lt;br /&gt;
== 참고 자료 ==&lt;br /&gt;
* 청산하지 못한 역사: 언론 내세워 일제에 아부한 교화 정책의 하수인 (문영숙) (반민족문제연구소, 청년사, 1994)&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민족 계몽의 초석 방응모(이동욱 저, 지구촌, 1998)&lt;br /&gt;
* 계초 방응모전(계초전기간행위, 조선일보사, 1980년)&lt;br /&gt;
* 계초 방응모(이동욱, 방일영문화재단, 1996)&lt;br /&gt;
&lt;br /&gt;
== 외부 링크 ==&lt;br /&gt;
* [https://web.archive.org/web/20050123171046/http://chosunhost.com/ 계초방응모 기념사업회]&lt;br /&gt;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09145 &amp;lt;조선일보&amp;gt;, 방응모 전 사장의 '친일행적' 말한다] - 오마이뉴스 04.09.10일자&lt;br /&gt;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020302101749 방응모ㆍ 김성수 친일행적 뭔가 : &amp;lt;긴급입수&amp;gt;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 全文] - 프레시안 2002-03-02&lt;br /&gt;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54052 그가 '&amp;lt;조선&amp;gt;의 주인' 주장하는 이유] 오마이뉴스 2001년 9월 20일자&lt;br /&gt;
*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956 방재선씨, 호주·상속 원인무효소송 제기]&lt;br /&gt;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4/06/2008040601053.html '5인 친필 서첩' 발굴] 조선일보 2008년04월06일자]&lt;br /&gt;
&lt;br /&gt;
[[분류: 감자]]&lt;/div&gt;</summary>
		<author><name>Nsgjjsjsjy02</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B0%A9%EC%9D%91%EB%AA%A8&amp;diff=58834</id>
		<title>방응모</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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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Nsgjjsjsjy02: /* 동방문화학원 재단 설립 */&lt;/p&gt;
&lt;hr /&gt;
&lt;div&gt;{|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width:100%&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0%&amp;quot;|사진&lt;br /&gt;
|[[파일:방응모.jpg|center|200픽셀]]&lt;br /&gt;
|+ '''방응모'''&lt;br /&gt;
|+ style=&amp;quot;caption-side:bottom;text-align:left:&amp;quot;|출처: 위키백과&lt;br /&gt;
|출생||1883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조선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또는 정부면 성내동&lt;br /&gt;
|-&lt;br /&gt;
|사망||1950년경으로 추정&lt;br /&gt;
|-&lt;br /&gt;
|사인||불명&lt;br /&gt;
|-&lt;br /&gt;
|거주지||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amp;gt; 경성부 -&amp;gt; 경기도 양주군 의정부읍&lt;br /&gt;
|-&lt;br /&gt;
|국적||대한민국&lt;br /&gt;
|-&lt;br /&gt;
|본관||온양&lt;br /&gt;
|-&lt;br /&gt;
|별칭||호: 계초(啓礎), 춘해(春海)&lt;br /&gt;
|-&lt;br /&gt;
|직업||교사, 변호사, 상인, 언론인, 기업인, 사회운동가, 정치가&lt;br /&gt;
|-&lt;br /&gt;
|배우자||승계도, 이인숙, 배영옥, 노효용&lt;br /&gt;
|-&lt;br /&gt;
|자녀||방재숙(딸), 방재욱·방재선·방재효·방재규(아들), 방재윤(양자)&lt;br /&gt;
|-&lt;br /&gt;
|부모||방계준(부), 온양박씨(모)&lt;br /&gt;
|}&lt;br /&gt;
&lt;br /&gt;
'''방응모'''(方應謨, 평안북도 정주군, 1883년 1월 3일 또는 9월 29일 ~ 1950년 8월(추정)는 [[일제강점기]]의 교육자, 언론인, 법조인, 기업인이자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언론인이며 정치인이다. 호는 '''춘해'''(春海)이고, 뒤에 '''계초'''(啓礎)로 고쳤다.&lt;br /&gt;
&lt;br /&gt;
1922년 동아일보 정주 지국을 인수해 지국장을 지내다가 1924년 금광업에 뛰어들어 큰 부를 얻게 되었다. 1932년 6월 조선일보에 입사하였고 이후 영업국장이 되어 조선일보의 판매망을 장악하게 되고 경영권을 인수하면서 1933년 3월 조선일보 부사장이 되었다. 1933년 7월부터 1950년 7월까지 종신으로 [[조선일보]]의 사장을 역임하였다. 1935년 창간한 월간잡지 '조광(朝光)'은 친일 논란이 있다.&amp;lt;ref&amp;gt;안은필. [http://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9211 조선일보가 가장 빛나던 시기, ‘안재홍 시대’]&amp;lt;/ref&amp;gt;&amp;lt;ref name=&amp;quot;안은&amp;quot;&amp;gt;안은필. [http://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9279 방응모 친일증거, “모래밭에서 모래 찾기”]국민TV. 기사입력 2015년 4월 23일. 기사수정 2015년 4월 24일.&amp;lt;/ref&amp;gt;&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2/0002006080?sid=102 한홍구 &amp;quot;박정희는 공포와 욕망의 정치를 했다&amp;quot;]. 프레시안. 2015년 4월 13일.&amp;lt;/ref&amp;gt;&amp;lt;ref&amp;gt;이민영.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1/0002255321?sid=102 고법 “방응모 前조선일보 사장 친일행적 대부분 인정”]. 서울신문. 2012년 1월 13일.&amp;lt;/ref&amp;gt;&amp;lt;ref&amp;gt;노현웅.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8/0002251781?sid=102 조선 방응모·동아 김성수의 ‘친일’…수년째 결론 안 내고 미루는 법원]. 한겨레. 2014년 11월 3일.&amp;lt;/ref&amp;gt;&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6/0000000413?sid=110 김성수ㆍ방응모와 친일언론인 군상]. 미디어오늘. 2002년 3월 12일.&amp;lt;/ref&amp;gt; 언론계에서 활동하면서도 사업가의 길을 함께 걸었고, 교육 장학 활동을 하였으며, 1945년 광복 직후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 고문과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안재홍]]의 추천을 받아 한국독립당 중앙상무위원과 독립촉성국민회 총무부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amp;lt;ref name=&amp;quot;안은&amp;quot;/&amp;gt;&amp;lt;ref&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16/2008031600800.html 계초 방응모와의 우정도 여러 편의 시로 표현해&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해방 정국에서 김구의 재정적 후견인으로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등 삼의사 유골 봉환 사업과 신탁통치 반대 운동 등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대한민국 수립 이후 사회민주주의 정치가인 조소앙과 사회당을 결성해 문교정책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lt;br /&gt;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 납북 후 행적은 &amp;quot;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amp;quot;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lt;br /&gt;
&lt;br /&gt;
== 생애 ==&lt;br /&gt;
=== 생애 초기 ===&lt;br /&gt;
==== 출생과 성장 ====&lt;br /&gt;
방응모는 1883년 11월 3일 또는 9월 29일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 바우머리 부락 또는 정주군 정부면 성내동 425번지에서 '''방계준(方桂準)'''과 온양 박씨(溫陽朴氏)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그는 어려서 집중력이 남달리 뛰어난 반면 고집이 셌다는 평이 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페이지&amp;lt;/ref&amp;gt; 그의 '''삼촌 방계묵(方啓默)'''은 그의 고집있는 기질을 두고 저놈은 쇠작두 말고 나무 작두로 잘라 죽여야 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3~54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친척들의 야멸찬 말들이 그에게 상처를 주거나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4페이지&amp;lt;/ref&amp;gt; 또한 그의 유년시절을 본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가 태어날 당시 태몽도 없었고, 신동이라는 말도 별다르게 듣지 않았다고 한다. 어려서 빈곤한 가정환경으로 방응모는 정규 학교에는 입학하지 못하고, 16세 때까지 서당에 드나들며 한학을 익혔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던 중 그가 어느정도 실력이 우수하다고 인정되자, 스승인 승창률은 잠시 방응모에게 어린아이들을 돌보게 한 후 자리를 피하곤 했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1페이지&amp;lt;/ref&amp;gt; 그는 홀로 사서육경을 탐독, 독파하였다. 21세 무렵 잠시 서당 훈장을 지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896년 독립협회의 활동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5페이지&amp;lt;/ref&amp;gt; 형 방응곤이 예배당에 다니게 되자&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52페이지&amp;lt;/ref&amp;gt;, 그를 통해 신문물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다. 그 뒤 우연히 경성부에 갔다가 신문물을 보고 충격을 받아 17세에 독학으로 신학문과 일본어, 중국어, 수학 등을 독파하였다. 유년시절 서당의 성리학 스승이던 승창률의 친척인 승시영(承時榮)과 조씨(趙氏)의 딸 승계도와 결혼했다.&lt;br /&gt;
&lt;br /&gt;
결혼한 다음 해에도 그는 공부를 한다며 책만 사다 읽곤 했고&amp;lt;ref name=&amp;quot;fsfs60&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60페이지&amp;lt;/ref&amp;gt;, 부인 승계도는 생계를 위해 몸소 나섰다.&amp;lt;ref name=&amp;quot;fsfs60&amp;quot;/&amp;gt; 부인 승계도는 친척 가운데 콩을 싸게 넘겨주는 이들이 있어 그 콩으로 두부를 만들거나 콩나물을 키워 장사를 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61페이지&amp;lt;/ref&amp;gt; 그의 아내 승계도는 남편에 대한 믿음이 절대적이었고 탓을 하거나 가출하지 않았다. 이후 그는 서당 훈장으로 초빙되었으나, 그가 가는 마을의 기존 훈장, 한학자들은 그를 적대적으로 대했다. 그렇다고 마을 사람들의 일부 지명이 있었으나 자신의 스승의 자리를 침해할 수 없다 하여 그는 자신의 동리의 훈장일은 사양하였다. 그는 마을을 나가 신학문을 하는 친구들과 어울렸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62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계몽 운동 ====&lt;br /&gt;
도산 [[안창호]]와 남강 이승훈이 연사로 돌아다니며 애국 계몽 강연과 문맹들의 교육, 야학 사업을 하였고, 여기에 감동받은 청년들이 서당과 야학을 열고 문맹들과 여성들에게 한글 교육을 하였다. 도산 [[안창호]]의 강연과 남강 이승훈의 강연을 찾아다니며 듣다가 감동받은 방응모 역시 교육, 계몽에 참여하였다.&lt;br /&gt;
&lt;br /&gt;
그는 청년회의 활동에 몰두하였으나, 농번기에 작은 일손이라도 더 필요했던 동리 노인들은 젊은 아이들이 일은 하지 않고 무슨 모임이다 하여 어울려 돌아다니는 꼴&amp;lt;ref name=&amp;quot;fsfs75&amp;quot;/&amp;gt;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또한 모임 구성원들 역시 &amp;quot;의식 자체가 아직 전근대적이었고, 사고의 분화를 겪지도 않은데다가, 이들의 조직 활동이 기분 좋으면 나오고 기분 나쁘면 빠져 버리는 것이 예사&amp;quot;라 청년 모임들은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청년단체의 실패에 좌절하고 다시 귀향했으며, 이때 그는 춘해(春海)라는 아호를 스스로 지었다. 그의 집안에서는 그가 정착하기를 바라고 정주읍 성내동에 집을 얻어 주었다.&lt;br /&gt;
&lt;br /&gt;
안창호의 계몽 강연에 감동받은 남강 이승훈이 1907년(융희 1년) 8월 김덕용(金德鏞)을 초빙하여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 오산에서 신식 교육을 하는 소학교 과정의 학교 강명의숙을 세우고 산수, 수신, 역사, 지리, 체조를 가르쳤고, 그해 12월에는 중학교 과정인 오산학교를 세우고 학생 7명을 처음 받아들여 개교했다. 1908년에는 오산학교에 학생들이 모여 3개 반으로 편성되었고, 정주군 출신의 춘원 이광수가 오산중학교의 교사로 초빙되어 축구, 야구, 테니스, 배구 등을 지역에 처음 소개하였다. 방응모는 어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학교에 입학해 신학문을 접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0페이지&amp;lt;/ref&amp;gt; 그는 이승훈과 의기투합해 민립 대학을 세우는 운동을 추진했지만 조선총독부 평안북도청 학무국에서 승인을 거부하여, 대학 설립에 실패했다.&lt;br /&gt;
&lt;br /&gt;
=== 언론, 기업 활동 ===&lt;br /&gt;
==== 계몽 활동과 언론 활동 ====&lt;br /&gt;
1915년부터 1924년 방응모는 지역 지식인들, 유학파 청년, 계몽 청년들이 모여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하는데 참여했고, 민립대학기성회 평안북도지부에서 활동하면서 민립대학기성회 중앙회 중앙위원 조만식 등과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언변과 용모가 되었던 그의 여관에도 손님들이 몰렸고, 그가 &amp;quot;2백원도 좋고 5백원도 좋다며 보태달라&amp;lt;ref name=&amp;quot;fsfs87&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7페이지&amp;lt;/ref&amp;gt;&amp;quot;고 하면 기부금을 내는 이들이 있었다. 대신 하룻밤을 의탁하려고 그의 여관을 찾은 이들에게 무료 숙식을 제공하기도 했다.&amp;lt;ref name=&amp;quot;fsfs87&amp;quot;/&amp;gt; 1919년 정주에서 3.1 만세 운동이 벌어지자, 그도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형사들의 눈을 피해 방응모는 만세운동을 하다 재빨리 몸을 피해 화를 면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8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1922년 6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인수하여 분국장에 취임했다. 6월 9일에는 정주군 지역 체육행사로 테니스 대회를 개최하였다. 그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경영하는 동시에 그는 농촌 계몽운동 등에 적극 투신하여 인망을 쌓았다. 처음 몇번은 친구 전우현의 자금을 빌려 부족분을 메우기도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02페이지&amp;lt;/ref&amp;gt; 한다. 1922년 6월 19일&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96페이지&amp;lt;/ref&amp;gt; 동아일보 본사를 설득하여 정주분국을 동아일보사 정주지국으로 승격시켰다. 동아일보사 지부장 재직 시 그는 전우현과 함께 의기투합하여 민립 대학 설립 자금과 농촌진흥회 회원의 여비와 회비를 염출하기 위한 목적 및 당시 교사도 없이 난관에 처했던 오산학교의 재개교를 위한 &amp;quot;오산학교의 부흥 운동을 목표로 한 재단법인 촉성 기금 마련&amp;quot; 등을 계획했다. 총독부의 인허가 거부로 실패한 대학 설립 자금은 고스란히 오산학교의 부활과 복교 자금으로 투입되었다. 1920년 1월에 경성형무소에서 가석방된 조만식은 이승훈을 만났고, 다시 조만식이 오산학교를 맡으면서 학교는 다시 정상 운영되었다.&lt;br /&gt;
&lt;br /&gt;
1923년 동아일보 정주군 분국이 지국으로 승격되자 정주 지국장으로 동아일보 정주지국을 경영하였고, 같은 해 7월 여성들의 사회참여와 평등권 신장을 위한 여자교육회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이후 대규모 수해가 나자, 정주군 수해구제회를 결성하여 봉사활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1923년 4월 조만식·송진우·안재홍·김성수 등의 주도로 민간 자본으로 대학교 설립을 추진하기 위한 조직인 조선민립대학기성회가 결성되자, 방응모는 민립대학 기성회에 참여하여 민립대학기성회 정주군준비회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5월에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정주지방지부가 설립되자 기성회 정주지부 상무위원을 맡았다.&lt;br /&gt;
&lt;br /&gt;
==== 광업 경영과 조선일보 입사 ====&lt;br /&gt;
1924년 봄 오산학교 교감으로 있던 전우현이 방응모와도 안면이 있던 금광 채굴업자 두 명을 데리고 그를 찾아왔다. 그들은 자신들이 봐 둔 산이 있다고 방응모에게 소개했다. 그는 선천군의 지역 유지이자 최창학의 친구이며, 그가 동아일보 지국장으로 알게 된 이봉찬을 찾아갔다. 한학자로 알고 있던 그가 금광 투자를 제의하자 &amp;quot;한문이라면 빼지 않고 알려고 드는 한학 훈도가 어떻게 금광을&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16페이지&amp;lt;/ref&amp;gt;&amp;quot; 하느냐 하였지만, 이봉찬은 그에게 금광, 광산에 대한 지식을 알려주었다. 이봉찬은 그에게 광산 지식을 알려주며 최창학의 소유지 중 폐광을 빌리는 법을 알려주었다. 방응모의 됨됨이에 감복한 듯, 그의 수많은 질문에 적잖은 충고를 자임해주었다.&amp;lt;ref name=&amp;quot;fsfs117&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85페이지&amp;lt;/ref&amp;gt; 이봉찬은 최창학에게 방응모를 소개하는 편지를 수차례에 걸쳐 보내주었다.&amp;lt;ref name=&amp;quot;fsfs117&amp;quot;/&amp;gt; 이봉찬은 방응모의 친구들이 봐 둔 갱도를 임대받도록 도와주었다. 이봉찬은 방응모의 한학 실력과 사람됨을 알아보고 있어, 자금을 쾌히 빌려주었다.&amp;lt;ref name=&amp;quot;fsfs117&amp;quot;/&amp;gt;&lt;br /&gt;
&lt;br /&gt;
이후 광산업에 뛰어들어 1924년 여름 압록강변의 최창학 소유 폐금광인 평안북도 삭주군 외남면 교동 다릿골의의 삭주 교동광업소를 찾아가 10미터 정도 땅을 파고 금맥을 발견했다. 바로 삭주 교동광업소를 인수, 경영을 확대하였다. 이때 만난 동업자의 딸이자 친구 전우현의 조카딸인 '''이인숙(李仁淑)'''을 만났다. 본처 승계도가 두 아들을 잃고 복부 수술이 잘못되어 아이를 얻지 못하게 되자 방응모에게도 수많은 중매가 들어왔다. 자식들을 병으로 잃은 것이 자신의 불찰이라고 본 승계도는 그에게 작은 부인이라도 들이자는 말을 꺼내기도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18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26년 방응모에게 광산 사업을 제안했던 두 친구가 손을 털고 나갔고, 그의 가족은 돈이 없어 쌀 대신 좁쌀로 좁쌀죽을 먹으며 연명해야 했다. 방응모는 정주군에 사는 비슷한 또래의 먼 친척 방상진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고, 방상진과 일꾼 대여섯 명, 그리고 후처 이인숙의 친정 쪽에서 얻어온 토지문서를 얻어 자금을 마련, 삭주 다릿골 광산으로 가서 다시 금광을 채굴했다. 금맥은 쉽게 나오지 않았고, 출몰하는 마적떼에게 소와 기구를 약탈당했다. 동시에 빚쟁이들의 독촉에 시달렸으나 '''''1926년 7월 지하 300m 지점에서 금맥을 확보했다. 이후 연간 300kg의 금을 생산, 그는 굴지의 광산업자로''''' 성장해 금맥을 찾아 벼락부자가 되었다. 그는 방상진을 교동금광 총감독에 맡겼다. 이때 그는 최창학에게 임대료에 이자를 쳐서 보내주었다.&lt;br /&gt;
&lt;br /&gt;
그때까지 첫 부인 승계도가 두부를 팔아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미국산 포드 T형자동차'''''를 타고 금의환향했다. 1928년 방응모는 자신의 아호인 춘해를 딴 춘해 장학회를 만들고 장학생들의 모임인 이심회를 만든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48페이지&amp;lt;/ref&amp;gt; 그 해에 방응모는 교동지역에 파출소 지소를 유치하였고, 마적단에 시달리던 주민들은 그의 송덕비를 세우기도 했다. '''''1928년에 그는 의정부 직동, 흥선대원군의 별장이 있던 곳 바로 뒤에 위치한 건물을 매입'''''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한용운]], 홍명희를 자주 초대했다.&lt;br /&gt;
&lt;br /&gt;
'''''1932년 방응모는 교동광산을 135만원이란 거액에 일본 중외광업주식회사에 매각'''''했다. 그 뒤 1932년 6월부터 조선일보 영업국장으로 활동하다 '''1933년 3월 [[조선일보]]의 경영권을 인수'''하여 부사장에 취임하였다.&lt;br /&gt;
&lt;br /&gt;
그는 교동광업소를 운영하며 모은 재력을 바탕으로 부사장 재직 중 [[조선일보]]의 대주주가 되었으며, 1933년 7월 8대 사주 조만식으로부터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제9대 [[조선일보]] 사주로 취임, 활동했다.&amp;lt;ref&amp;gt;조선일보는 1932년 7월에 조만식을 사장으로 영입했지만, 조만식은 거의 평생을 평양에서 살아왔던데다 서울에서 활동하기에는 적응을 잘하지 못했다. 조만식은 신문사 경영난과 지역감정의 혹독한 시련을 받은 채 9개월만에 퇴사했다. 그리고 조만식 후임으로 1933년, 방응모를 사장으로 추대하기에 이르렀다.&amp;lt;/ref&amp;gt;&amp;lt;ref&amp;gt;《한국사 시민강좌 제47집, 대표적 독립운동가 12인》,일조각. p145&amp;lt;/ref&amp;gt; 방응모 취임 이후의 초대 부사장은 이광수, 주필은 서춘이었다.&lt;br /&gt;
&lt;br /&gt;
=== 언론, 사업 활동 ===&lt;br /&gt;
==== 사회사업과 조선일보 인수 계획 ====&lt;br /&gt;
금광 사업에 성공한 그는 영림, 조림 사업에도 투자하였다. 방응모는 배우자 승계도에게서 더 이상 아들을 얻지 못하자 첩 이인숙을 통해 아들을 얻으려고 하였다. 이인숙은 아들을 낳았으나 이 아들은 곧 사망하였다. 아들을 잃은 이인숙은 승계도의 도움을 받다가, 그해 6월 방응모가 있는 광산으로 가 생활하였다'''. 승계도와 이인숙을 통해 자녀를 얻지못하자 42세가 되던 해인 1924년 친형인 방응곤의 둘째 아들 방재윤을 양자로 입양시켰다.'''&lt;br /&gt;
&lt;br /&gt;
[[파일:방응모장학생.jpg|섬네일|160px|오른쪽|방응모와 그의 장학금을 받던 학생들. 가운데 앉은 이가 방응모이고, 서있는 이들 중 왼쪽에서 두 번째는 방응모의 양자 방재윤.]]&lt;br /&gt;
&lt;br /&gt;
1930년 배영옥과 결혼하여 딸 방재숙을 얻었다. 1932년 광산업을 정리하였고 언론사업을 비롯하여 육영사업과 조림 및 간척사업 등을 벌였다. 또한 고아원과 사회복지단체에 후원금을 지원하면서 인망을 얻기도 했다. 삭주 지역에서는 그의 송덕비가 세워지기도 했다.&lt;br /&gt;
&lt;br /&gt;
1932년 그는 수원군 팔탄면 노하리 일대의 갯벌에 일본인이 수차례 뚝을 쌓다가 실패했다는 정보를 얻고 임삼진을 통해 조선총독부에 허가를 요청하였다.&amp;lt;ref name=&amp;quot;pp186&amp;quot;&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86페이지&amp;lt;/ref&amp;gt; 간척 사업은 이후 1935년부터 시작되었지만 1932년부터 은밀히 착수되어 왔다.&amp;lt;ref name=&amp;quot;pp186&amp;quot;/&amp;gt;&lt;br /&gt;
&lt;br /&gt;
1933년 무렵 방응모가 [[조선일보]] 인수에 나서기 전부터 그는 [[한용운]]을 위한 일이라면 돈을 아끼지 않고 지출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성북동 222번지 언덕에 만해를 위해 기와집 한 채를 지어주었는데 심우장(尋牛莊)이 그것이다. 또한 만해가 일제의 배급을 거부해 생활이 어렵게 되자 만해에게 생활비를 지급했던 방응모는 만해가 병석에 누운 1944년에는 치료비를 지원해주기도 했다.&amp;lt;ref&amp;gt;[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6/0000043262?sid=103 만해가 일송 선생 5일장 치른 사연]&amp;lt;/ref&amp;gt; 그 외에도 방응모는 만해 한용운·벽초 홍명희 등과 함께 새해가 되면 백천온천에도 같이 다녀올 정도로 두터운 친분을 맺었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1&amp;quot;&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8/07/2007080700002.html 만해와 계초 방응모 선생]&amp;lt;/ref&amp;gt; 1935년 7월에는 경성 태평로1가에 새 사옥을 준공하는 한편, 출판부를 신설해 〈조광〉(1935. 10)·〈여성〉(1936. 6)·〈소년〉(1937. 4) 등의 월간 잡지를 차례로 창간했으며&amp;lt;ref name=&amp;quot;dam1&amp;quot; /&amp;gt; 운영하였다. 한편 [[1932년]] 교동 광업소를 정리하여 매각하였다.&lt;br /&gt;
&lt;br /&gt;
방응모의 광산 매각을 일본 정부 측에 알리고 다리를 놓은 것은 고일청(高一淸)이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184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32년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사건으로 체포된 [[안창호]]의 사면 탄원과 보석을 위해 노력하였다. 안창호가 윤봉길을 사주했다는 증거가 없으며 그가 테러행위를 지시했다는 증거 자료나 문건이 없다는 것이 방응모의 안창호 탄원 이유였다. 그러나 총독부 경무국장은 그의 안창호 석방 제안을 정중히 거절한다. 1936년 동방문화학원(뒤에 숭문중학교·고등학교 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1939년 9월에는〈조선일보〉의 조간 1회, 석간 2회의 1일 3회 발행을 시작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인수와 경영 ====&lt;br /&gt;
1933년 1월 16일 그는 정식으로 주식회사 [[조선일보]]사를 창립, 1월 18일에 발표된 창립 취지서에는 창립위원장 방응모, 창립발기인 방응모, 조만식, 고일청 외 등이 참여했다. 일단 그는 조만식을 사장으로 임명하고 자신은 부사장으로 있다가, 그해 3월 13일 다시 부사장에 취임했다. 4월 25일 편집인 겸 발행인이 되고, 4월 29일에는 조선일보의 조간, 석간제 발행을 부활, 확정시켰다. 1933년 7월 10일 총독부로부터 조선일보사의 법인 등록 승인을 얻어냈다. 7월 10일 조만식의 사퇴로, [[조선일보]]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다. 1933년 그는 자신의 아호를 춘해에서 계초로 바꾸었다. 그는 유능한 문인, 필진의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 상금 1천 원을 걸고 작가를 영입하였다.&lt;br /&gt;
&lt;br /&gt;
1934년 3월 25일 이광수를 비롯하여 서춘, 김동진, 함상훈, 신태익 등을 [[조선일보]]로 영입해 왔다. 그 외에도 정주군 출신 언론인, 작가들이 조선일보로 많이 오게 되었다. 이후 동아일보와 갈등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이광수가 조선일보로 옮겨와 부사장직에서 9개월 근무했다. 당시 조선일보 내부에서는 문모 라는 이가 이광수의 등장으로 자신의 입지 약화를 우려해 오랫동안 이광수를 내보내려 흉계를 꾸몄다고 한다. 이광수는 1934년 5월 25일자로 돌연 사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65페이지&amp;lt;/ref&amp;gt; 문모는 그에게 오히려 잘 됐다는 식으로 말하다가 방응모에게 호되게 혼이 났다. 그리고 문모로 하여금 즉시 금강산에 들어가 이광수를 다시 데려오게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65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이광수는 아들 봉근(당시 8살)의 사망 등으로 실의에 빠졌고, 1935년에 가서야 이광수를 조선일보 고문이자 필진으로 재영입하게 됐다.&lt;br /&gt;
&lt;br /&gt;
==== 동방문화학원 재단 설립 ====&lt;br /&gt;
방응모는 1936년 방농장의 소유권을 기본 자산으로 하는 재단법인 동방문화학원(東邦文化學院)을 설립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6페이지&amp;lt;/ref&amp;gt; 동방문화학원은 학교 법인으로 인가된 재단 법인으로, 그뒤 고계학원과 인연을 가지고 1936년부터는 보성고등보통학교를 후견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 분리되었다. 그뒤 방응모 장학생인 서중회 회원들을 위한 방응모 장학사업을 주관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7페이지&amp;lt;/ref&amp;gt;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태평로 구 조선일보 사옥 안에 동방문화학원의 간판을 달고 조광 잡지를 계속 발행하는 조광사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97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일제 강점기 후반 ===&lt;br /&gt;
==== 중일 전쟁 전후 ====&lt;br /&gt;
[[중일전쟁]] 개전 직후인 [[1937년]] [[7월 11일]]에 열린 [[조선일보]] 간부회의에서 주필 [[서춘]]이 '일본군, 중국군, [[장개석]]씨'등으로 쓰던 용어를 '아군, 황군, 지나, 장개석'으로 고치고 일본 국민의 입장에서 논설을 쓸 것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편집국장 [[김형원]]과 영업국장 [[김광수]]가 적극 반대를 하기도 했으나, 방응모는 '일장기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이미 몇 십만 원의 손해를 보았을 뿐 아니라 [[3.1 운동]] 때처럼 신문이 민중을 지도할 수 없다'면서 [[서춘]]의 입장을 지지했다.&amp;lt;ref&amp;gt;{{웹 인용 |url=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5731 |제목=시사IN 2009년 11월 21일자 |확인날짜=2011년 4월 28일 |archive-date=2016년 3월 4일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60304105544/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5731 }}&amp;lt;/ref&amp;gt; 한편으로 방응모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된 [[안창호]]를 [[조선일보]]에 영입하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안창호는 옥중에서 얻은 간질환과 폐질환 등으로 고생했고, 진료비 등을 수시로 지원하고 문병했음에도 출옥후 얼마 뒤에 사망한다.&lt;br /&gt;
&lt;br /&gt;
[[1933년]] 이심회(以心會：후에 序中會, 방응모장학회 등으로 명칭이 바뀜)라는 장학회를 만들어 국내 대학생과 해외유학생들에게 학자금을 지급하기도 했으며, 재단법인 동방문화학원(東方文化學院：지금의 숭문중·고등학교 전신)의 이사장직을 맡기도 했다.&amp;lt;ref name=&amp;quot;dam1&amp;quot; /&amp;gt; 또한 자신의 막대한 재원을 들여 1936년부터 함경남도 영흥군 일대에 당시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대단위 조림사업을 벌였으며, 그 전 해인 [[1935년]]부터는 [[경기도]] [[수원군]] 팔탄면 일대에서 만 2년간에 걸친 간척사업을 벌이기도 했다.&amp;lt;ref name=&amp;quot;dam1&amp;quot; /&amp;gt;&lt;br /&gt;
&lt;br /&gt;
1937년 12월 24일 [[안창호]]는 병보석 판정을 받고 재판소가 지정한 현 [[서울대학교병원]]인 경성제국대학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안창호의 입원 중에 시중을 든 사람으로는 안창호의 외조카 김순원과 청년 박정호 두 사람이었고, 나중에는 이응준 장군의 부인 이정희가 끝까지 지성껏 간호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7페이지&amp;lt;/ref&amp;gt; [[안창호]]는 병상에서 병원비 문제로도 고초를 겪었다. 이 때문에 [[조만식]]은 일본 경찰로부터 안창호의 병원비를 대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음에도, &amp;quot;내가 먹고 살면서 그 선생을 돌보지 않을 수 없다&amp;quot;며 완강히 거절하고 안창호를 도왔다고 한다. 입원비는 10일마다 120원씩 나왔다. 안창호의 간호를 같이 도와주던 이응준 장군 부인 이정희는 10일마다 계산되어 나오는 병원 입원비로 안창호 선생이 괴로워하는 표정을 지켜볼수 없었다고 진술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8페이지&amp;lt;/ref&amp;gt; 방응모는 5백원의 수표 한 장을 안창호에게 전달하였다. 50일간의 입원비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9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안창호]]는 [[1938년]] [[3월 10일]] 밤 12시 경성제국대학 병원에서 운명하였다.&lt;br /&gt;
&lt;br /&gt;
1938년 3월 12일 안창호의 장례는 조만식의 주관 하에 조촐하게 치러졌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60페이지&amp;lt;/ref&amp;gt; 당시 방응모는 일본경찰의 저지에 응하지 않고 자가용으로 장례행렬을 뒤따르겠다고 고집하여 총독부 경찰에서 완곡유지시켰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60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향토문화 조사 사업과 국산품 애용 운동 ====&lt;br /&gt;
1936년 봄 노산 [[이은상]]이 찾아와 향토 문화 조사 사업을 같이 벌이자고 제안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0페이지&amp;lt;/ref&amp;gt; [[이은상]]에 의하면 '총독부가 까탈스럽게 압박하는 통에 직선적인 저항은 어렵고 하니 문화운동 차원에서 우리의 정통성을 발굴할 목적으로 제안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0페이지&amp;lt;/ref&amp;gt;' 한다./ 방응모는 돈과 관계 없이 해보자고 동의하였고.&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1페이지&amp;lt;/ref&amp;gt;, 사업은 1938년 2월에 들어서 시작되었다.&lt;br /&gt;
&lt;br /&gt;
방응모는 향토문화 사업위원회를 사옥에 개설하였다. 1938년 2월 16일 서울 조선호텔에서 모임을 열고 향토문화 조사 사업의 개요를 발표하였고, 조선 각 지방의 연ㅇ혁, 지세, 유래, 연혁, 산천, 사찰, 향교, 서원, 명승고적, 민속, 민요, 춤, 방언, 속담, 신화, 전설, 인물, 토산품 등에 대한 문화 자료를 실제로 답사, 조사하여 13권의 책으로 발표할 계획이었다.&lt;br /&gt;
&lt;br /&gt;
1938년 3월 5일부터 방응모는 각 지방에 책임조사원을 보냈는데, 이은상은 전라남도에, 문일평은 경기도, 황의돈은 평안북도 등에 책임조사원으로 파견되었다. 그리고 현지에서 올라오는 보고서를 향토문화를 찾아서 라는 제하로 조선일보 지면에 연재케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2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이 사업은 조선총독부의 중지로 1940년 중단되었다.&lt;br /&gt;
&lt;br /&gt;
1938년 4월 25일부터 조선일보사 대강당에서 조선 특산품 전람회를 개최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4페이지&amp;lt;/ref&amp;gt; 관람객의 수는 10만 명이 넘었고, 당초 10일 예정인 5월 4일을 넘겨 4일을 연장한 끝에 5월 8일에 막을 내렸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5페이지&amp;lt;/ref&amp;gt; 행사 중 조선일보사 건물 공터에 가설무대를 만들어 연예인들을 초청하고, 산대도감, 봉산탈춤, 꼭두각시춤, 맹인재담, 짠지패, 걸궁패, 박춘재 재담 등의 공연을 섭외하고, 가까운 부민관에도 8도 여류 명창 경연대회, 고전무용대회, 춘향전, 심청전 등의 판소리 대회 등을 5월 4일까지 진행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55페이지&amp;lt;/ref&amp;gt; 1938년 4월부터 방응모는 [[조만식]] 등과 함께 국산품 홍보 운동을 펼쳤다. 조선일보사의 사옥 건물이자 폐간 이후에도 그가 소유하던 태평로 건물에 조선 각지의 특산품 홍보 팜플렛과 유인물, 사진 등을 전시하고 시중에 홍보하였다. 그는 조선측산품 전람회, 애독자 증정용 극동 시국지도 발간 등을 추진했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폐간 사건 ====&lt;br /&gt;
일본의 전쟁이 격화되면서 [[조선총독부]] 공보국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1940년]]에 강제로 폐간조치 했다. 광산을 팔아서 자신의 모든 것을 조선일보에 바쳤던 방응모는 큰 절망과 좌절을 느껴야 했다. 한용운은 ‘신문이 폐간되다/ 붓이 꺾이어 모든 일이 끝나니…’로 시작하는 시를 지어 방응모를 위로했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1&amp;quot; /&amp;gt;&amp;lt;ref&amp;gt;붓이 꺾이어 모든 일 끝나니 이제는 재갈 물린 사람들 뿔뿔이 흩어지고 아, 쓸쓸하고 쓸쓸한지고 망국 서울의 가을날 한강의 물도 흐느끼느니 울음 삼켜 흐느끼며 연지를 외면한 채 바다 향해 흐르느니&amp;lt;/ref&amp;gt; [[동아일보]]에는 [[김성수 (언론인)|김성수]] 외에도 [[장덕수]]와 [[송진우 (정치인)|송진우]]가 있었지만 그에게는 조선일보 폐간을 막기 위해 총독부와 교섭할 인물도 없었다.&lt;br /&gt;
&lt;br /&gt;
[[1938년]] [[2월]]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선 내 일간신문 25개사로 조직된 조선춘추회의 창립에 창립발기인으로 참가했고, 조선춘추회 간사로 활동했다. 같은 해 7월 “국민정신을 총동원하고 내선일체 전 능력을 발휘하여 국책 수행에 협력하여 성전(聖戰)의 궁극적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조직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에 참여했고, 그날 결성된 경성연맹 창립총회에서 상담역을 맡았다. 9월부터 조선방공협회 경기도연합지부 평의원을 지냈다. 10월에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주최한 비상시 국민생활 개선을 위한 제1회 생활개선위원회에서 제2부(의례와 사회풍조 쇄신부)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그러나 1938년 10월부터 조선총독부는 조선일보의 신문용지를 검열, 통제하기 시작했다.&lt;br /&gt;
&lt;br /&gt;
1938년 6월 14일 방응모는 음악학교나 음대를 갓 졸업한 신인 음악인을 소개하는 신인음악회를 부민관에서 개최한다. 그러나 신인음악회는 조선총독부의 금지 요청으로 3회만에 중단된다. 38년 11월 26일부터 5일간 부민관과 조선일보 본사 대강당에서 조선영화 감상회, 조선영화 전람회, 조선 영화 시나리오 현상모집의 3개 행사를 주최했다. 그러나 역시 3년만에 총독부의 압력으로 중단되고 만다.&lt;br /&gt;
&lt;br /&gt;
1939년 2월 조선인의 군사동원을 위한 지원병 참가를 독려하기 위해 조직된 경성부지원병후원회 고문에 추대되었다. 7월에 영국 타도를 주장하며 전국 차원에서 적극적 배영운동을 벌이기 위해 결성된 [[배영동지회]](排英同志會)의 상담역으로 선출되었다. [[1940년]] [[3월]] 잡지 《조광》의 발행인으로 취임했다.&lt;br /&gt;
&lt;br /&gt;
1940년 4월 30일 영흥 계초사임사업부 책임자로 있던 양자 방재윤이 간호사가 잘못 놓은 주사로 사망했다. 식중독으로 병원에 실려가 주사를 맞았다가 쇼크사하였다.&lt;br /&gt;
&lt;br /&gt;
양자 재윤을 잃고 나서 그는 허탈감을 [[뽕나무]]로 달랬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11페이지&amp;lt;/ref&amp;gt; 한다.&lt;br /&gt;
&lt;br /&gt;
[[양근환]]이 석방되어 20년만에 귀국하였다. 그는 [[막걸리]] 마실 돈도 없어 방응모를 찾아갔다. 조선일보 비서실에 양근환이라는 이름 석자의 명함을 내밀면서 &amp;quot;나는 방응모 사장을 알되, 방 사장은 나를 모르겠지만 이렇게 찾아왔소&amp;quot;라고 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4페이지&amp;lt;/ref&amp;gt; 방응모는 즉시 거액의 수표를 그에게 건네주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5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0년]] 5월 [[조선총독부]] 총독 [[미나미 지로]]가 방송담화로 창씨개명을 권고했다. 그러나 그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성씨를 이제 와서 내 마음대로 바꿀수 없다며 [[창씨개명]]은 완강하게 거절했다. [[1943년]] [[화신백화점]] 점원 출신인 노호용과 결혼하였다.&amp;lt;ref&amp;gt;정식 결혼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그에 의하면 첫 부인 승계도와 둘째 부인 이인숙이 당시 살아있었던 점을 든다.&amp;lt;/ref&amp;gt; 1940년 6월 초 명월관 요정에서 예약손님을 받을 때 흰 갱지로 음식을 덮은 것을 보고 트집잡았다. 일본 경찰 간부들은 상에 덮인 흰 갱지를 보고 이것이 어디서 나왔느냐고 따졌고, 식당 주인은 [[동아일보사]]에서 파지를 구입해 쓴다고 대답하자 통제물자인 신문용지는 배급제로 공급되는데, 이 용지를 불법처분했다 하며, 이것을 경리부정으로 몰고 갔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3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그러나 조선일보에 트집이 잡힐 일이 나타나지 않자 총독부는 전국 면사무소에 조선일보 신문 구독을 거절하도록 명령을 내렸고, 동시에 조선말을 쓰는 민원인에게는 일을 처리해주지 말도록 하게 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3페이지&amp;lt;/ref&amp;gt; 조선총독부는 [[송진우]]의 예금통장을 문제삼았다. 송진우 명의의 은행저금이 동아일보의 8백여 개의 지국과 분국을 통해 모금된 독립운동 자금이라며, 그리고 동아일보 간부들이 백운장이라는 요정에서 회식을 한 것을 [[김성수 (언론인)|김성수]] 집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려 했다는 등의 이유로 [[백관수]] 동아일보 사장을 전격 구속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3~374페이지&amp;lt;/ref&amp;gt; 동아일보는 백관수가 구속된지 10일 만에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동아일보 중역회의를 열고 폐간신청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4페이지&amp;lt;/ref&amp;gt; 총독부는 조선일보에도 자진 폐간을 권고했고, 1940년 8월 9일 편집회의를 주관, 8월 10일 조선일보의 폐간계를 내고, 8월 10일자로 폐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75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잡지 발행 활동 ====&lt;br /&gt;
신문 강제 폐간 뒤 방응모는 간판을 조광사로 바꿔 걸고, 사옥은 동방흥업주식회사로 등기를 변경해서 유지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1페이지&amp;lt;/ref&amp;gt; 이후 그는 [[조광 (잡지)|조광]] 잡지 발행에 전념했다. 1943년 8월 경 일본 중앙대학의 예과를 마친 [[방일영]]이 입사&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1페이지&amp;lt;/ref&amp;gt;, 필진으로 참여했다. [[조선일보]]가 폐간된 후에도 방응모는 벽초 [[홍명희]] 부자에게 지속적으로 생활비를 대주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4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0년 속담대사전, 조선창극사, 조선시조시학, 조선요리학, 세계명인전 상중하 등을 발행했다. 이후 조선사화 등을 발간했는데 다량의 부수로 간행하여 다시 흑자가 되었다.&lt;br /&gt;
&lt;br /&gt;
1943년 평안북도 정주에 있는 부인과 며느리를 비롯한 가족 전부를 상경시키고, 서울 충정로의 저택을 매각, 동대문밖 남산 밑 양사골에 전세집을 얻는다. 그리고 고향의 99칸 한옥을 헐어 양주군 의정부에 옮겨 지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87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4년 손자 [[방일영]]이 학도병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방응모는 손자의 학병 징집을 단호히 거부했다. 방응모는 백방으로 학도병을 피할 수 있는 구실을 찾으려고 연구하다가 [[경성부]]의 유명한 의사 [[백인제]]를 찾아갔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3페이지&amp;lt;/ref&amp;gt; [[백인제]]는 처음에 난처해했으나 방응모의 거듭된 간청으로, 곤란합니다 라는 말만 되풀이하다가 결론은 손자 [[방일영]]의 생살을 칼로 째는 수술을 결정했다. [[방일영]]에 의하면 &amp;quot;나의 왼쪽 뺨의 귀 밑에서 턱까지 생살을 째는 수술이 시작되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3페이지&amp;lt;/ref&amp;gt;&amp;quot; 한다. 이로 인해 [[방일영]]의 징집은 연기되었으나, 균이 들어가서 네 번이나 수술을 더 했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4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양주군수 김정제가 찾아와 학병 문제를 계속 거론하였다. 그는 할 수 없이 방일영을 징집이 면제되는 면서기로 들어가도록 합의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4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4년 6월 29일 만해 [[한용운]]이 사망했다. 그는 심우장을 찾아가 3백원을 내놓았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5페이지&amp;lt;/ref&amp;gt;당시 쌀 10가마가 100원이었지만, 심우장은 당장 현금 1원이 없었는데 거액이라서 놀랐다 한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96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4년]] 아들 [[방재선]]을 얻었다. 이후에도 방응모는 노호용과의 사이에서 방재효, 방재규 등 두 아들을 출산하였다. [[1944년]] [[9월]] 군수산업체인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 설립에 창립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이후 조선항공공업 감사에 피선되었다.&lt;br /&gt;
&lt;br /&gt;
=== 광복 이후 언론 및 정치활동 ===&lt;br /&gt;
==== 광복 직후 ====&lt;br /&gt;
[[파일:1946.06 3의사 유해봉환식장.jpg|섬네일|왼쪽|200px|[[1946년]] [[3월]] 순국3의사 유해봉환일 [[김구]], 위당 [[정인보]] 등과 함께]]&lt;br /&gt;
&lt;br /&gt;
[[1945년]] 8.15 광복 후에는 [[8월]] 말과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朝鮮在外戰災同胞救濟會) 고문과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9월]] 초 [[안재홍]] 등이 좌경화되는 [[건준]]체제에 반발하여 [[건준]]을 탈퇴하자 방응모 역시 [[건준]]을 탈퇴하였다.&lt;br /&gt;
&lt;br /&gt;
[[9월 2일]] [[미군정]]이 주둔하자, 방응모는 윤전기를 찾기 위해 폐간 당시의 증빙서류를 미 군정청에 제시하였으나 소식이 없었다. 총독부는 조선일보 폐간 직후 인수한 윤전기를 경성일보사에 옮겨서 설치했다. 그는 동방문화재단 외 4개 사업소를 적산으로 파악한 미군정을 설득하고, 사옥 문제도 해결하였다.&lt;br /&gt;
&lt;br /&gt;
[[10월 1일]] 조선일보 편집위원회를 구성하고, 신문 복간 운동을 추진했다. 조선총독부의 폐간 지시 당시 의정부로 옮겨놓은 일부 활자 자모음이 잘 보관되어, 그해 11월 23일 조선일보를 복간시키고, 서울신문사 사옥에서 조선일보 복간호를 간행하였다. 이후 조선사회문제대책중앙협의회 중앙위원을 거쳐 [[10월 16일]] [[이승만]](李承晩) 등의 주도로 [[독립촉성중앙회]]가 결성되자 독촉에 가입하였다.&lt;br /&gt;
&lt;br /&gt;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 요인이 귀국하자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에 입당했다. [[12월]] [[안재홍]]의 추천으로 [[한국독립당]]의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출되어 3~4개월 동안 활동했다.&amp;lt;ref&amp;gt;일각에서는 방응모가 '한독당 재무부장으로 지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1947년부터 한독당 재무부장을 맡은 신창균이 전면 부정했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47/0000002626?sid=102 백범 비서와 '진짜' 한독당 재정부장의 육성증언. 참고.]&amp;lt;/ref&amp;gt; 그 뒤 대한국민총회 발기인, 대한독립애국금헌성회 발기인 등으로 활동하였다.&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복간 및 군정기 활동 ====&lt;br /&gt;
[[파일:Kim Gu (1947).jpg|섬네일|140px|오른쪽|임시정부 각주이자 한독당 당수 [[김구]]. 방응모는 [[한국독립당]]의 중앙상무위원과 당 재정부장으로 참여했고, [[김구]]의 반탁운동과 3의사 유해 봉환 때 자금을 댔다.]]&lt;br /&gt;
&lt;br /&gt;
[[11월]] [[조선일보]]사를 복간시켰다. 그러나 한동안 조선일보의 인쇄는 [[서울신문|서울신문사]]에서 간행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1945년]]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추념대회에 참여하였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2&amp;quot;&amp;gt;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13&amp;lt;/ref&amp;gt; 순국선열추념대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amp;lt;ref name=&amp;quot;autogenerated2&amp;quot; /&amp;gt;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참여,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이 되었다.&amp;lt;ref&amp;gt;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55페이지&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6년 2월 26일 서울신문사 공무국 종업원들이 조선일보의 인쇄를 거부해버렸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436페이지&amp;lt;/ref&amp;gt; 그동안 묵시적으로 방해가 은근히 있었다. 표면상의 문제는 임금 문제이나 내용상으로는 조선일보에 대한 조선공산당의 시위의 일종이었다. 사흘간의 교섭 끝에 2월 28일에 가서야 26일자와 27일자를 소급해서 인쇄하여 신문을 한꺼번에 발행하였다. 그러나 3월 1일과 2일에 또다시 인쇄를 거부당해 결국 휴간하였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436페이지&amp;lt;/ref&amp;gt; 조선일보를 경성일보사로 옮겨서 인쇄하기로 하고 3월 5일자로 사고로 독자에게 알렸다.&lt;br /&gt;
&lt;br /&gt;
[[1946년]] [[2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회장에 선출되었고, 3월 1일 미군정은 방응모에게 경성일보사 관리인으로 위촉했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437페이지&amp;lt;/ref&amp;gt; 그러나 용지난으로 한동안 신문 발행에 어려움을 겪었다.&lt;br /&gt;
&lt;br /&gt;
[[4월 29일]] [[김구]], [[김창숙]], [[김성수 (언론인)|김성수]], [[오세창]] 등과 함께 서울운동장에서 [[윤봉길]]의사 추모회의 창립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amp;lt;ref&amp;gt;&amp;quot;故尹奉吉義士의 記念式 오늘, 發起人會 열고 準備&amp;quot;, 동아일보 1946년 4월 23일자 2면, 사회면&amp;lt;/ref&amp;gt; 그해 [[5월]] 조선공업구락부 고문에 위촉되었다.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民族統一總本部) 10인협의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6월 15일]] 오후 5시 40분 [[서울역]]에 마중나가 [[서울역]]에 도착한 삼의사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 동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 협의원에 지명되고, [[1946년]] [[8월]]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8월 25일에는 [[한국독립당]] 중앙상무위원의 한 사람에 선출되었고&amp;lt;ref&amp;gt;&amp;quot;金九氏飜意 韓獨黨中委閉會&amp;quot;, 동아일보 1946년 8월 25일자 1면, 정치면&amp;lt;/ref&amp;gt; [[1946년]] [[9월]] 독립촉성국민회 총무부장에 선출되었다.&lt;br /&gt;
&lt;br /&gt;
1945년 광복 직후 서기원이 그를 찾아왔다. 서기원은 그때 경성농상실천학교의 동창회로부터 이 학교의 교장이 되어 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이다. 방응모는 서기원의 제의를 받아들여 [[1946년]] [[8월 28일]] 동방문화학원 이사장으로 숭문상업학교를 인수, 재단 이사장이 되었다. 후일 방응모가 6.25 전쟁 중에 납북된 후 동방문화학원과 숭문중,고교의 재단은 최용진이 운영하다가 다시 [[1978년]]에 [[방일영]]에게 인수되었다.&lt;br /&gt;
&lt;br /&gt;
1947년 1월 21일 제5회 창립위원회를 본사에서 개최하고 2월 23일 주식회사 조선일보사 주주창립총회를 열고 대표이사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공동투자 경영자로 참여시킨 전무 이종민과의 알력이 발생했다. 이종민과의 갈등이 심화되자 그해 8월 3일 방응모는 일단 사직서를 제출했다. 1947년 8월 10일 [[풍문여고]] 강당에서 개최된 한인신문기자협회에 참석, [[민족청년단]]에서 언론계 공로자로 방응모, 김성수, 설의식을 지정하여 상을 시상받았다.&amp;lt;ref&amp;gt;&amp;quot;朝鮮 新聞記者協會&amp;quot;, 동아일보 1947년 8월 10일자 2면, 사회면&amp;lt;/ref&amp;gt; 9월 13일의 임시 주주총회가 긴급 소집되어 회사 운영 문제가 논의되고, 이때 취체역을 재선임할 때 다시 선임되었다. 그러나 이때 전무 이종민은 재선임에서 제외되었다.&lt;br /&gt;
&lt;br /&gt;
==== 김구와의 결별과 만년 ====&lt;br /&gt;
이후 [[한국독립당]] 중앙상무위원&amp;lt;ref&amp;gt;[http://db.history.go.kr/url.jsp?ID=dh_003_1946_08_24_0150 한국사데이터베이스]&amp;lt;/ref&amp;gt;, 당 재정부장 등을 맡기도 했으나, [[1948년]] [[1월]] 이후 [[김구]]의 노선 변경과 함께 그를 지지하던 세력이 떨어져 나가서 [[조선일보]]도 김구에게서 등을 돌리게 되었다.&amp;lt;ref name=&amp;quot;조선11&amp;quot;&amp;gt;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68~70쪽.&amp;lt;/ref&amp;gt; 그러나 김구와의 결별이 괴로웠던지 방응모도 직접 나서서 &amp;lt;김구선생의 의견에 대한 우리의 취할바 태도&amp;gt;라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amp;lt;ref name=&amp;quot;조선11&amp;quot;/&amp;gt;&lt;br /&gt;
&lt;br /&gt;
[[1949년]] [[조소앙]]이 결성한 [[사회민주주의]]성향 정당인 [[사회당 (대한민국, 1948년)|사회당]]에 입당해 동당 문교정책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amp;lt;ref&amp;gt;[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9070600209201019&amp;amp;editNo=1&amp;amp;printCount=1&amp;amp;publishDate=1949-07-06&amp;amp;officeId=00020&amp;amp;pageNo=1&amp;amp;printNo=7956&amp;amp;publishType=00020 1949년 7월 6일자 동아일보]{{깨진 링크|url=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9070600209201019&amp;amp;editNo=1&amp;amp;printCount=1&amp;amp;publishDate=1949-07-06&amp;amp;officeId=00020&amp;amp;pageNo=1&amp;amp;printNo=7956&amp;amp;publishType=00020 }}&amp;lt;/ref&amp;gt; 이듬해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경기도]] 양주군에 출마했으나 차점자로 낙선하였다.&amp;lt;ref&amp;gt;[http://db.history.go.kr/url.jsp?ID=NIKH.DB-dh_017_1950_06_01_0030 한국사데이터베이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9년 의정부 가능동 별장에 심은 뽕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랐다. 승계도의 친척 승원호에 의하면 &amp;quot;할아버지(방응모)는 사람들을 시켜 뽕나무를 2년간 키우게 했습니다. 탐스럽게 뽕나무가 자라니까 이번에는 직조 기계를 들여 직조 공장을 세우겠다고 하셨다.&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311페이지&amp;lt;/ref&amp;gt;&amp;quot; 한다. 그러나 그의 방직공장 설립 계획은 6.25 전쟁으로 무산되고 만다.&lt;br /&gt;
==== 납북과 최후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 납북 후 행적은 &amp;quot;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amp;quot;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amp;lt;ref name=&amp;quot;김장&amp;quot;/&amp;gt; [[1950년]] [[8월]]경 [[개성]] 송악산 부근에서 미군의 폭격에 희생되었고 심한 폭격으로 시신을 찾을 수 없어 묘도 만들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다.&amp;lt;ref&amp;gt;{{뉴스 인용&lt;br /&gt;
 |url          = http://www.minjog21.com/news/articleView.html?idxno=1140&lt;br /&gt;
 |제목       = &amp;quot;누워서도 남쪽하늘만 보십니다&amp;quot; - 평양시 신미리 재북통협 특설묘지&lt;br /&gt;
 |출판사    = 민족21&lt;br /&gt;
 |저자       = 신준영&lt;br /&gt;
 |날짜       = 2002-07-01&lt;br /&gt;
 |확인날짜 = 2008-05-15&lt;br /&gt;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40420015541/http://www.minjog21.com/news/articleView.html?idxno=1140#&lt;br /&gt;
 |보존날짜 = 2014-04-20&lt;br /&gt;
 |url-status = dead&lt;br /&gt;
}}&amp;lt;/ref&amp;gt;&amp;lt;ref&amp;gt;[http://www.minjog21.com/news/articleView.html?idxno=686 민족21&amp;lt;!-- 봇이 따온 제목 --&amp;gt;]{{깨진 링크|url=http://www.minjog21.com/news/articleView.html?idxno=686 }}&amp;lt;/ref&amp;gt; 남한에서는 [[1955년]] [[7월 7일]] 생사불명기간 만료로 인해 실종 처리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주변에서 피신하라고 권했지만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느냐'며 완강하게 버티다가 1950년 [[7월 6일]] [[경기도]] [[양주군]] 시둔면 가능리(현, [[의정부시]] [[가능동]]) 자택에 들이닥친 [[조선인민군]]에 의해 끌려갔다.&lt;br /&gt;
&lt;br /&gt;
=== 사후 ===&lt;br /&gt;
[[서울]] 종로에 있던 양자 방재윤의 두 아들 [[방일영]]과 [[방우영]]은 방응모의 첩 이인숙이 찾아가 피신하라고 권고하여 황급히 피신했다. &lt;br /&gt;
&lt;br /&gt;
[[9월 28일]] [[개성시]] 북쪽을 지나 [[황해남도]] [[서흥군]]에서 트럭으로 강제 북송되었다. 이후 9월 28일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lt;br /&gt;
&lt;br /&gt;
7월 6일 그의 행방불명처리가 되고, 방응모의 사후에도 [[조선일보]]는 그의 명의로 발행되었다. 1952년 4월 28일 조선일보는 발행인겸 편집인을 장기영으로, 인쇄인을 방일영으로, 방응모는 명예사장으로 명의변경하여 휴전 후 계속 발행하게 되었다. 1954년 4월 30일 제8회 조선일보 정기주주총회에서 장기영 사장이 사퇴하면서, 명예사장 방응모가 사장으로 추대되고, 발행인 겸 대표취체역에 방일영이 선임되었다. 이후 실종 후 [[1959년]]에 법적으로 사망 처리되었다. 그리고 [[1970년]]까지는 조선일보는 그의 이름으로 발행되었다.&lt;br /&gt;
&lt;br /&gt;
[[1970년]] [[2월 19일]] 조선일보 정기주주총회에서 방응모 이사를 사퇴 수리하였다. 그의 피폭사망 사실은 1970년대 이후 탈북자들을 통해 대한민국에 소개되었다.&lt;br /&gt;
&lt;br /&gt;
== 친일행위 의혹 ==&lt;br /&gt;
=== 일제 전시체제기 활동 ===&lt;br /&gt;
일제 강점기 말기 언론인으로서 총독부체제에 협력한 기록과 활동이 다수 기록이 있다. 1933년 3월 [[조선일보]] 경영권을 인수하고 부사장직에 취임했을 당시 같은 달에 고사기관총 구입비용 1600원을 군에 헌납하였다. 그는 1935년 친일 잡지 《조광 (잡지)(朝光)》을 창간하였고, 1937년에는 경성방송국 제2방송에 출연하여 일제가 중국의 베일을 절멸케하여 극동평화를 지키려고 한다는 강연을 하였다. 1940년대부터 조광에 집중적으로 친일 논설을 기고하고 시국 강연에 참여하여 전쟁 지원을 독려했다. 1942년 6월에는 '징병령 실시에 일층 더 감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글을 써서 조광에 발표하였다. 애국금차회(1937),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1938), 임전대책협의회(1941), 조선임전보국단(1941) 등 대표적인 친일 단체의 회원에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그는 이런 행적으로 인해 해방정국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명단에 기록되어 있고,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해 발표한 &amp;lt;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amp;gt;에 모두 포함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lt;br /&gt;
&lt;br /&gt;
우리 [[조선일보]]는 다른 어떤 신문도 따라오지 못하는 확고한 신념에서 비국민적 행위를 단연 배격하여 종국까지 조선일보사가 이미 정해놓은 방침에 한뜻으로 매진한다.|원산에서의 순회 강연&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9478.html 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친일 다짐하다 시민에 봉변]《한겨레》2005-08-24 오후 06:13:18&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반민족행위 논란 ===&lt;br /&gt;
방응모를 친일파로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남아 있다. 조선일보 경영 이전에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방응모의 활동이 거의 없었고, 납북된 뒤 소식이 끊겨버린 까닭에 본인이 항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 동안의 행적만으로 친일파 여부를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방응모의 후손들이 영향력 있는 [[조선일보]] 언론사의 사주를 맡았기에 그의 입장에서 서술한 기록을 많이 남기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80년 발간된 그의 전기 《계초 방응모》(조선일보사) 등에는 '그가 민족주의적 선각자'로 묘사되고 있다. 방응모가 친일파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일부세력측은 그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논거로 드는 경우가 많이 있다.&amp;lt;ref&amp;gt;유석재, 계간 《유심》 (2004년 봄호) [http://yousim.buddhism.org/html/2004-spr/tamgu-yoo-seok-jae.htm 삭풍 속에 피어난 금란지교(金蘭之交) - 만해와 계초 방응모]&amp;lt;/ref&amp;gt;&amp;lt;ref&amp;gt;&amp;quot;일제 말기 계초는 시국강연에 나설 것과 창씨개명을 집요하게 강요받았으나 그때마다 묵묵부답으로 거부하며 소신을 지켰다.&amp;quot; 《조선일보》 (2001.3) 조선일보 사장열전 - 계초 방응모편, 《한겨레》 (2001.3.30) [http://www.njoyschool.net/news/article_view.asp?menu_code=s20202&amp;amp;no=1206 조선일보, 일장기를 신문제호 위에]&amp;lt;/ref&amp;gt;&lt;br /&gt;
또한 한국정토학회 고문이자 서울 정토사 주지였던 박설산(1918~2007)이 학도병에 끌려가기 직전인 1943년 12월 28일 밤 서울역에서 스스로 왼발을 선로에 올려 발가락을 절단해 징집을 기피하자 방응모는 만해와 함께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설산을 걱정하면서 입원 중 조선일보 기자를 통해 돈을 전달한 것은 물론 퇴원할 때 돈을 전달하고 뒤를 보살폈다고 한다.&amp;lt;ref&amp;gt;박설산 회고록 &amp;lt;뚜껑없는 조선역사책&amp;gt;(1994, 도서출판 삼장) p240~241&amp;lt;/ref&amp;gt;&lt;br /&gt;
&lt;br /&gt;
2010년 12월, 방응모 관계자들 및 조선일보측은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을 취소해달라'며 법원에 낸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amp;quot;1944년 조선항공업 창립발기인으로 활동한 부분에 대해 친일행위로 판단한 부분을 취소하지만 나머지 활동에 대해서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amp;quot;라고 판결했다. 그 이유인 즉 &amp;quot;방응모는 1933년 조선일보 사장으로 취임해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등으로 활동하며 친일활동을 벌였으며, 1937년 경성방송국 시국강연에서 일본제국이 극동평화를 확립시킬 것이라는 내용의 강연을 하고, 1938년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춘추회의 발기인 겸 간사로 활동하기도 했다&amp;lt;ref&amp;gt;[http://media.daum.net/breakingnews/politics/view.html?cateid=1002&amp;amp;newsid=20101222103319164&amp;amp;p=newsis 법원 &amp;quot;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친일파 맞다&amp;quot;]뉴시스 2010년 12월 22일&amp;lt;/ref&amp;gt;&amp;quot;는 것이다.&lt;br /&gt;
&lt;br /&gt;
2012년 1월 12일 서울고법 행정7부는 방 전 사장의 손자인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이 행정안전부를 상대로 낸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처분 취소 청구소송에서 ‘일제 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의 친일 행위 판정 조항에 비추어 방 전 사장에게 적용된 모두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민족적 지도자로서 비중이 큰 만큼 그로 인한 책임도 무거울 뿐 아니라 고난의 시기를 겪은 민족으로서 그 역사를 반성하자는 입장에 설 때, 방 전 사장의 여러 행태는 반민특별법에서 규정한 친일반민족행위의 유형에 속함을 부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1·2심 재판부는 방 전 사장이 자신이 운영하던 잡지 &amp;lt;조광&amp;gt;에 일제 침략전쟁에 동조하고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문예물과 일제 침략전쟁에 협력할 것을 주문하는 논문을 게재하는 등의 ‘친일’ 행위를 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또한, 2심 재판부는 일본의 전쟁 수행을 돕기 위해 설립된 군수 제조업체 ‘조선항공공업’의 발기인과 감사를 지낸 것은 “감사는 업무집행에 관여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기관으로, 방 전 사장이 이 회사를 운영했다고 볼 수 있다”는 이유로 친일이라고 판단했다.&amp;lt;ref&amp;gt;[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4565.html법원 ‘방응모 친일’ 2심서도 인정] 인터넷한겨레 2010년 12월 22일&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가족 관계 ==&lt;br /&gt;
* 아버지 : 방계준(方桂準)&lt;br /&gt;
* 어머니 : 온양 박씨&lt;br /&gt;
** 형 : 방응곤(方應坤)&lt;br /&gt;
** 배우자 : 승계도&lt;br /&gt;
*** 아들 2명 요절&lt;br /&gt;
** 배우자 : 이인숙(李仁淑, 1901년 ~ ?)&lt;br /&gt;
*** 아들 : 방재욱(方在旭, 1925년 ~ 1926년 9월)&lt;br /&gt;
** 배우자 : 배영옥(裵英玉)&lt;br /&gt;
*** 장녀 : 방재숙(方在淑)&lt;br /&gt;
** 배우자 : 노호용(盧鎬龍)&lt;br /&gt;
*** 장남 : 방재선(方在善, 1944년 ~)&lt;br /&gt;
*** 차남 : 방재효(方在孝, 1946년 ~)&lt;br /&gt;
*** 삼남 : 방재규(方在奎, 1948년 ~)&lt;br /&gt;
&lt;br /&gt;
** 양자 : 방재윤(方在允 또는 方在胤, 1901년 ~ 1940년, 형 방응곤의 차남)&lt;br /&gt;
*** 손자 : 방일영(方一榮, 1923년 ~ 2003년)&lt;br /&gt;
**** 증손 : 방상훈(方相勳, 1948년 ~)&lt;br /&gt;
**** 증손부 : 윤순명 - 윤치호(尹致昊, 1865년 ~ 1945년)의 증손녀&lt;br /&gt;
***** 현손 : 방준오(方俊吾, 1974년)&lt;br /&gt;
***** 현손 : 방정오(方政吾, 1978년)&lt;br /&gt;
**** 증손 : 방용훈(方容勳, 1952년 ~)&lt;br /&gt;
*** 손자 : 방필영(方必榮, 1924년 ~ 1926년)&lt;br /&gt;
*** 손녀 : 방숙영(? ~ 1951년 1월)&lt;br /&gt;
*** 손자 : 방우영(方又榮, 1928년 ~ 2016년)&lt;br /&gt;
**** 증손 : 방성훈(方聖勳, 1973년 ~)&lt;br /&gt;
&lt;br /&gt;
== 기타 ==&lt;br /&gt;
그는 [[한용운]], 최남선, 정인보, 홍명희 등과 친분관계를 형성하고 어울려 지냈다 한다.&lt;br /&gt;
&lt;br /&gt;
[[김구]]의 한국독립당의 재정적 후견인 역할을 하였다 하며,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삼의사 유골봉환식 때 [[김구]], [[정인보]] 등과 촬영한 사진이 있다.&amp;lt;ref&amp;gt;백범어록 참조&amp;lt;/ref&amp;gt; 그리고 1945년 11월 23일 조선일보가 복간되자 백범 김구는 '有志者事竟成' 뜻을 지닌 자 성취할 수 있다'는 친필 휘호를 보내며 축하했다.&amp;lt;ref&amp;gt;[http://www.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4060370241 '조선일보 역사 읽기'《조선일보》2004.06.03]&amp;lt;/ref&amp;gt;&lt;br /&gt;
한편 임꺽정의 저자인 벽초 홍명희가 방응모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그와 깊은 친분을 맺었다는 주장이 있다. 《조광》 1938년 11월호엔 홍명희가 병중에 있는 방응모를 위로하며 지은 한시가 방응모의 답시와 함께 실려 있다고 한다.&amp;lt;ref&amp;gt;[http://weekly.chosun.com/site/data/html_dir/2004/11/05/2004110577041.html ‘임꺽정’으로 되살아난 독립운동의 魂! 주간조선 1827호 2004.11.04&amp;lt;/ref&amp;gt; 또한 [[안창호]]의 비서실장을 지낸 독립유공자 구익균은 방응모와 안창호가 친밀했다는 주장을 했다.&amp;lt;ref&amp;g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09/2008030901055.html &amp;quot;공산주의자들, 도산 비판하다가도 하숙비 떨어지면 찾아와&amp;quot;] 조선일보, 2008-03-10 03:22&amp;lt;/ref&amp;gt;&lt;br /&gt;
또한 박설산에 따르면 1943년 만해 한용운에게 학도병으로 끌려가게 되었음을 알리려 심우장으로 찾아가게 되었을 때, 한용운과 방응모가 바둑을 두고 곁에서 정인보가 훈수를 두고 있었다고 한다.&amp;lt;ref&amp;gt;박설산 저 &amp;lt;뚜껑없는 朝鮮 역사 책&amp;gt; p.226 도서출판 三藏(1994)&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30년대~1940년대 방응모에게서 장학금을 지원받은 학생 모임인 서중회의 회원들의 그의 인물평은 &amp;quot;첫 인상은 좀 깡마른 모습이었으나 의지가 강한 인물&amp;lt;ref&amp;gt;이동욱, 계초 방응모 (방일영문화재단, 1996) 256페이지&amp;lt;/ref&amp;gt;&amp;quot;이라는 평을 남기기도 했다.&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 /&amp;gt;&lt;br /&gt;
&lt;br /&gt;
== 참고 자료 ==&lt;br /&gt;
* 청산하지 못한 역사: 언론 내세워 일제에 아부한 교화 정책의 하수인 (문영숙) (반민족문제연구소, 청년사, 1994)&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lt;br /&gt;
* 민족 계몽의 초석 방응모(이동욱 저, 지구촌, 1998)&lt;br /&gt;
* 계초 방응모전(계초전기간행위, 조선일보사, 1980년)&lt;br /&gt;
* 계초 방응모(이동욱, 방일영문화재단, 1996)&lt;br /&gt;
&lt;br /&gt;
== 외부 링크 ==&lt;br /&gt;
* [https://web.archive.org/web/20050123171046/http://chosunhost.com/ 계초방응모 기념사업회]&lt;br /&gt;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09145 &amp;lt;조선일보&amp;gt;, 방응모 전 사장의 '친일행적' 말한다] - 오마이뉴스 04.09.10일자&lt;br /&gt;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020302101749 방응모ㆍ 김성수 친일행적 뭔가 : &amp;lt;긴급입수&amp;gt;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 全文] - 프레시안 2002-03-02&lt;br /&gt;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54052 그가 '&amp;lt;조선&amp;gt;의 주인' 주장하는 이유] 오마이뉴스 2001년 9월 20일자&lt;br /&gt;
*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956 방재선씨, 호주·상속 원인무효소송 제기]&lt;br /&gt;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4/06/2008040601053.html '5인 친필 서첩' 발굴] 조선일보 2008년04월06일자]&lt;br /&gt;
&lt;br /&gt;
[[분류: 감자]]&lt;/div&gt;</summary>
		<author><name>Nsgjjsjsjy02</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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