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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dh_edu - 사용자 기여 [ko]</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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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btitle>사용자 기여</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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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한인소년병학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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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12-21T16:47:1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Matnyeom: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교육구국운동기관&lt;br /&gt;
|기관명=한인소년병학교&lt;br /&gt;
|사진=한인소년병학교.jpg&lt;br /&gt;
|한자표기=韓人少年兵學校&lt;br /&gt;
|설립일=1909년 6월&lt;br /&gt;
|설립자=박용만&lt;br /&gt;
|설립위치=미국 네브래스카(Nebraska)주 커니(Kearney)시 -&amp;gt; 미국 미시간 주 헤이스팅스 시&lt;br /&gt;
|계승=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로 계승됨&lt;br /&gt;
|관련링크=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1902}}&lt;br /&gt;
&lt;br /&gt;
한인소년병학교는 1909년 6월 박용만의 주도로 미국 네브래스카주 커니시에 설립된 해외 최초의 한인 독립군 양성 학교이다. 독립군 장교 양성을 목표로 하였으며, 1914년까지 6년간 운영되었다. 이 학교는 미국 독립전쟁 당시의 민병대 시스템에서 영감을 받아 설립되었으며, [[둔전병제]]를 바탕으로 한 독립전쟁 준비의 일환이었다.&lt;br /&gt;
&lt;br /&gt;
=='''설립 배경'''==&lt;br /&gt;
&lt;br /&gt;
1908년 박용만이 주도한 애국동지대표회의에서 한인군사훈련양성소 설립이 결정되었다. 이는 독립전쟁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려는 박용만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었다. 당시 한국의 국권이 일본에 의해 침탈되는 상황에서, 박용만은 무장투쟁을 통한 독립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lt;br /&gt;
&lt;br /&gt;
박용만은 미국 독립전쟁의 역사를 연구하며, 민병대 시스템이 한국의 독립운동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독립군 양성이 시급하다고 보았고, 이를 위해 체계적인 군사교육 기관의 설립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lt;br /&gt;
&lt;br /&gt;
=='''학교 운영'''==&lt;br /&gt;
==='''위치 및 시설'''===&lt;br /&gt;
&lt;br /&gt;
* '''초기''': 네브래스카주 커니시의 임대농장에서 시작했다. 이 농장은 약 160에이커(약 65헥타르) 규모였으며, 학생들의 실습과 생활 공간으로 활용되었다.&lt;br /&gt;
* '''1910년 6월 이후''': ''헤이스팅스대학 기숙사와 학교 시설''로 이전했다. 이는 더 나은 교육 환경을 제공하기 위한 조치였다.&lt;br /&gt;
&lt;br /&gt;
==='''교육 과정'''===&lt;br /&gt;
학교의 일과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lt;br /&gt;
&lt;br /&gt;
'''오전''': 농장 노동 (5시간)&lt;br /&gt;
&amp;lt;br/&amp;gt;&lt;br /&gt;
'''오후''': 학과 수업 및 군사 훈련 (5시간)&lt;br /&gt;
&amp;lt;br/&amp;gt;&lt;br /&gt;
'''저녁''': 자습 (2시간)&lt;br /&gt;
&lt;br /&gt;
&lt;br /&gt;
이러한 일과는 [[둔전병제]]의 원리를 반영한 것으로, 학생들이 ''농사와 학업, 군사훈련을 병행'' 하도록 했다.&lt;br /&gt;
&lt;br /&gt;
==='''교육 내용'''===&lt;br /&gt;
&lt;br /&gt;
학교의 교육 내용은 크게 세 가지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lt;br /&gt;
&lt;br /&gt;
'''1. 학과목'''&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width:100%; 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0%&amp;quot;| 과목명 || style=&amp;quot;width:80%&amp;quot;| 내용&lt;br /&gt;
|-&lt;br /&gt;
|국어||한국의 언어와 문화에 대한 이해를 심화 목적&lt;br /&gt;
|-&lt;br /&gt;
|영어|| 국제적인 소통 능력 증진의 목적&lt;br /&gt;
|-&lt;br /&gt;
|중국어와 일본어 || 동아시아의 정세를 이해하고 대응하기 위함&lt;br /&gt;
|-&lt;br /&gt;
|수학, 역사, 지리, 과학 || 기본적인 학문적 소양을 갖추기 위함&lt;br /&gt;
|-&lt;br /&gt;
|성서|| 당시 미국 사회의 특성을 반영한 교육 내용&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2. 군사 교육'''&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width:100%; 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0%&amp;quot;| 과목명 || style=&amp;quot;width:80%&amp;quot;| 내용&lt;br /&gt;
|-&lt;br /&gt;
|보병조련||기본적인 군사 훈련&lt;br /&gt;
|-&lt;br /&gt;
|군대내무서|| 군대 내부의 규율과 질서에 대한 교육&lt;br /&gt;
|-&lt;br /&gt;
|육군예식 || 군대 의례와 예절에 대한 교육&lt;br /&gt;
|-&lt;br /&gt;
|군인위생 || 전장에서의 위생 관리에 대한 교육&lt;br /&gt;
|-&lt;br /&gt;
|군법통용|| 군대 법규에 대한 이해&lt;br /&gt;
|-&lt;br /&gt;
|명장전법|| 유명한 장수들의 전략과 전술에 대한 학습&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3. 정신 교육'''&lt;br /&gt;
* 독립군 장교로서의 자질 함양 &lt;br /&gt;
* 애국심과 민족의식 고취 &lt;br /&gt;
* 리더십 훈련&lt;br /&gt;
&lt;br /&gt;
&lt;br /&gt;
이러한 종합적인 교육을 통해 학생들은 독립운동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 정신을 갖출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학생 현황'''==&lt;br /&gt;
&lt;br /&gt;
* 첫 해: 13명 입학 (14세부터 50세 이상까지 다양한 연령층)&lt;br /&gt;
* 1910년: 26명으로 증가 (미국 각지에서 한인 유학생들이 자원 입학)&lt;br /&gt;
* 총 졸업생: 6년간 약 90명 배출&lt;br /&gt;
&lt;br /&gt;
&lt;br /&gt;
학생들의 연령대가 다양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독립운동에 대한 ''한인 사회 전반의 열의''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특히 미국 각지에서 유학생들이 자원 입학했다는 사실은 이 학교의 명성과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lt;br /&gt;
&lt;br /&gt;
=='''폐교'''==&lt;br /&gt;
&lt;br /&gt;
1914년 8월 마지막 졸업식을 끝으로 한인소년병학교는 폐교되었다. 폐교의 주요 이유는 다음과 같다.&lt;br /&gt;
&lt;br /&gt;
* '''후원자와 지도교사들의 이주''': 학교 운영에 필요한 인적 자원의 부족&lt;br /&gt;
* '''장기적 무장독립투쟁 여건 부족''': 재정적, 물질적 지원의 한계&lt;br /&gt;
* '''일본의 항의''': 미국 정부에 대한 일본의 외교적 압력&lt;br /&gt;
* '''제 1차 세계대전의 발발''': 국제 정세의 변화로 인한 운영의 어려움&lt;br /&gt;
&lt;br /&gt;
&lt;br /&gt;
비록 학교는 폐교되었지만, 그 정신과 영향력은 이후의 독립운동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한인소년병학교의 졸업생들은 다양한 독립운동 단체에서 활약하며, 한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한인소년병학교의 역사적 의의는 다음과 같다.&lt;br /&gt;
&lt;br /&gt;
*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해외 최초의 한인 독립군 양성 학교'''&amp;lt;/span&amp;gt;: 이는 해외에서의 조직적인 독립운동의 시작을 의미했다.&lt;br /&gt;
* '''[[둔전병제]]를 바탕으로 한 독립전쟁 준비''': 학생들이 농사와 학업, 군사훈련을 병행함으로써 자급자족하면서도 독립군으로서의 역량을 키울 수 있었다.&lt;br /&gt;
* '''미국 독립전쟁의 민병대 시스템에서 영감을 받음''': 이는 박용만의 선견지명을 보여주는 것으로, 한국의 독립운동에 서구의 혁명 경험을 접목하려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lt;br /&gt;
* '''독립운동가 양성소로서의 역할''': 이 학교 출신들은 이후 다양한 독립운동 단체에서 활약했다.&lt;br /&gt;
* '''한인 사회의 결속력 강화''': 학교의 운영과 지원 과정에서 미주 한인 사회의 단결력이 높아졌다.&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 「한인소년병학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1902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국사편찬위원회, 「한인소년병학교」,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s://db.history.go.kr/diachronic/level.do?levelId=nh_047_0030_0020_0040_0030_0010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인소년병학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3624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박용만의 소년병학교: 군사적 구국운동」,  『호남人월드』, 2009.05.19, http://www.honaminworld.kr/307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박용만 1881 ~ 1928」,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code=kc_age_40&amp;amp;levelId=kc_n401200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가. 한인소년병학교」, 『국사편찬위원회』, https://db.history.go.kr/diachronic/level.do?levelId=nh_047_0030_0020_0040_0030_0010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한인소년병학교의 교육 과정」, 『국사편찬위원회』, http://contents.history.go.kr/front/nh/print.do?levelId=nh_047_0030_0020_0040_0030_0010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이민희]] [[분류:독립운동사의 근간, 교육구국운동(敎育救國運動)]]&lt;/div&gt;</summary>
		<author><name>Matnyeom</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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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한국광복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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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12-21T16:47:0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Matnyeom: &lt;/p&gt;
&lt;hr /&gt;
&lt;div&gt;[[분류:이민희]] [[분류:독립운동사의 근간, 교육구국운동(敎育救國運動)]]&lt;br /&gt;
&lt;br /&gt;
=='''개요'''==&lt;br /&gt;
[[파일:한국광복군.jpg|가운데]]&lt;br /&gt;
한국광복군은 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重慶)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창설한 정규군사조직이다. 항일운동과 한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했으며, 연합국의 일원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광복군은 독립운동의 군사적 기반을 마련하고, 해방 후 대한민국 국군의 모체가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창설 배경'''==&lt;br /&gt;
&lt;br /&gt;
1940년 당시 일본의 침략이 확대되고 제2차 세계대전이 본격화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의 군사적 기반을 강화할 필요성을 느꼈다. 또한 연합국과의 협력을 통해 독립을 쟁취하고자 하는 전략적 판단도 작용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조직 구성'''==&lt;br /&gt;
&lt;br /&gt;
한국광복군의 조직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lt;br /&gt;
&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width:100%; 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50%&amp;quot;| 지위 || style=&amp;quot;width:50%&amp;quot;| 인물&lt;br /&gt;
|-&lt;br /&gt;
|총사령관||지청천(池靑天)&lt;br /&gt;
|-&lt;br /&gt;
|참모장 || 이범석(李範奭)&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총사령부 예하에 4개 지대를 편성했다.&amp;lt;ref&amp;gt; 제4 지대는 계획만 있었을 뿐 실제로 편성되지 않았다. &amp;lt;/ref&amp;gt;&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width:100%; 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50%&amp;quot;| 지위 || style=&amp;quot;width:50%&amp;quot;| 인물&lt;br /&gt;
|-&lt;br /&gt;
|제1 지대장||이준식(李俊植)&lt;br /&gt;
|-&lt;br /&gt;
|제2 지대장 || 김학규(金學奎)&lt;br /&gt;
|-&lt;br /&gt;
|제3 지대장 || 공진원(孔鎭元)&lt;br /&gt;
|-&lt;br /&gt;
|제5 지대장 || 나월환(羅月煥)&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병력 모집'''==&lt;br /&gt;
&lt;br /&gt;
광복군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병력을 모집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 '''5개의 징모분처 설치''': 산서성(山西省), 수원성(綏遠省), 절강성(浙江省), 안휘성(安徽省) 등지에 징모분처를 설치하여 초모 활동을 펼쳤다.&lt;br /&gt;
* '''한인 교포 대상 모집''': 중국 각지에 거주하는 한인 교포들을 대상으로 입대를 독려했다.&lt;br /&gt;
* '''기존 독립운동 단체 흡수''': 조선의용대 등 기존의 독립운동 단체 병력을 흡수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러한 노력으로 창설 1년 만에 300여 명의 병력을 확보했으며, 이후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해방 직전에는 약 3,000명의 병력을 보유했다.&lt;br /&gt;
&lt;br /&gt;
=='''주요 활동'''==&lt;br /&gt;
&lt;br /&gt;
한국광복군의 주요 활동은 다음과 같다&lt;br /&gt;
&lt;br /&gt;
&lt;br /&gt;
'''항일전투 참여''': 중국 국민당군과 연합하여 항일전에 참여했다. 특히 1945년 인도-버마 전선에 파견되어 영국군과 함께 일본군에 대항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정보수집 활동''': 일본군의 동향과 전략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연합국에 제공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선전 및 교육 활동''': 항일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선전 활동과 군사훈련을 실시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OSS(미국 전략사무국)와의 협력''': 미국 OSS와 협력하여 특수작전을 준비했으나, 일본의 항복으로 실행되지는 못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국내진공작전 계획''': 해방을 앞두고 국내 진입을 위한 작전을 계획했으나, 일본의 갑작스러운 항복으로 실행되지 못했다.&lt;br /&gt;
&lt;br /&gt;
=='''해방 이후'''==&lt;br /&gt;
&lt;br /&gt;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면서 한국광복군의 주요 임무는 종료되었다. 해방 이후 광복군은 다음과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 '''귀국 지원''': 해외에 있던 한인들의 귀국을 지원했다.&lt;br /&gt;
* '''치안 유지''': 해방 직후의 혼란한 상황에서 치안 유지에 기여했다.&lt;br /&gt;
* '''국군의 모체''': 대한민국 국군의 창설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많은 광복군 출신들이 건군 과정에 참여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역사적 의의'''&amp;lt;/span&amp;gt;==&lt;br /&gt;
한국광복군의 역사적 의의는 다음과 같다.&lt;br /&gt;
&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width:100%; 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30%&amp;quot;| 의의 || style=&amp;quot;width:70%&amp;quot;| 내용&lt;br /&gt;
|-&lt;br /&gt;
|'''독립운동의 정통성'''||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규군으로서 독립운동의 정통성을 상징한다.&lt;br /&gt;
|-&lt;br /&gt;
|'''연합국과의 협력''' ||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함으로써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을 높였다.&lt;br /&gt;
|-&lt;br /&gt;
|'''군사력 확보''' || 독립 이후를 대비한 군사력을 확보했다.&lt;br /&gt;
|-&lt;br /&gt;
|'''국군의 기원''' || 대한민국 국군의 직접적인 모체가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광복군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현대 한국 군사의 뿌리로 인식되고 있다.&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lt;br /&gt;
*  「광복군의 창설」,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nh/view.do?levelId=nh_050_0050_0020_0010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한국 광복군의 활동」,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ta/view.do?levelId=ta_m71_0100_0030_0030_0020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한국광복군 1940」,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code=kc_age_40&amp;amp;levelId=kc_o403810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심옥주,  「나라를 되찾기 위해 총을 든 여성들, 한국광복군의 여성 대원들」,  『국립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 https://www.nmkpg.go.kr/webzine/story/cn.do?rid=259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손염홍,  「광복군의 기억: 나는 이렇게 광복군이 되었다」,  『국립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 https://imjung0411.com/story/cn.do?rid=305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김록환, 「[커버스토리]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만든 광복군, 어떤 군대였을까」,  『중앙일보』, 2016.11.16., https://www.joongang.co.kr/article/20863567 (검색일: 2024년 12월 4일)&lt;/div&gt;</summary>
		<author><name>Matnyeom</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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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조선의용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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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12-21T16:46:4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Matnyeom: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파일:조선의용대.jpg|가운데]]&lt;br /&gt;
&lt;br /&gt;
조선의용대는 1938년 10월 10일 중국 한커우(漢口)에서 김원봉에 의해 창설된 항일무장단체이다.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활동했으며,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우며 한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 조선의용대는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이후 한국광복군의 모체가 되었다.&lt;br /&gt;
&lt;br /&gt;
=='''창설 배경'''==&lt;br /&gt;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1938년 일본군이 난징을 함락한 후 우한삼진(武漢三鎭)을 공략하는 상황에서, 중국 당국과 조선청년들의 협의로 의용대 구성이 결정되었다. 당시 중국 국민당 정부는 항일전선을 확대하기 위해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의 참여를 원했고,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은 이를 독립운동의 기회로 삼고자 했다.&lt;br /&gt;
&lt;br /&gt;
=='''조직 구성'''==&lt;br /&gt;
조선의용대의 조직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lt;br /&gt;
&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width:100%; 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50%&amp;quot;| 지위 || style=&amp;quot;width:50%&amp;quot;| 인물&lt;br /&gt;
|-&lt;br /&gt;
|총대장||김원봉&lt;br /&gt;
|-&lt;br /&gt;
|부대장 || 신악&lt;br /&gt;
|-&lt;br /&gt;
|정치조 || 김학무&lt;br /&gt;
|-&lt;br /&gt;
|총무대장 || 이집중&lt;br /&gt;
|-&lt;br /&gt;
|선전대장|| 김창제&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초기 병력은 200여 명이었으나, 지속적인 모집 활동을 통해 1940년 2월에는 314명으로 증가했다. 조직은 총사령부 아래 3개 지대로 편성되었으며, 각 지대는 2개 중대로 구성되었다.&lt;br /&gt;
&lt;br /&gt;
=='''주요 활동'''==&lt;br /&gt;
조선의용대의 주요 활동은 다음과 같다.&lt;br /&gt;
&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width:100%;&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0%&amp;quot;| 활동 || style=&amp;quot;width:80%&amp;quot;| 내용&lt;br /&gt;
|-&lt;br /&gt;
|전투 참여||중국군과 연합하여 일본군에 대항한 실제 전투에 참가했다. 특히 1939년 4월 산시성(山西省) 린펀(臨汾) 전투, 1940년 8월 산시성 운청(運城) 전투 등에서 활약했다.&lt;br /&gt;
|-&lt;br /&gt;
|정보 수집 || 일본군의 동향과 전략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중국군에 제공했다.&lt;br /&gt;
|-&lt;br /&gt;
|포로 취조 및 사상공작 || 일본군 포로를 심문하고, 그들에게 항일사상을 주입하는 활동을 펼쳤다.&lt;br /&gt;
|-&lt;br /&gt;
|선전 활동 || 항일 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다양한 선전 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조선의용대통신'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하여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알렸다.&lt;br /&gt;
|-&lt;br /&gt;
|적문서 번역|| 일본어로 된 문서를 중국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수행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변천과 해산'''==&lt;br /&gt;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조선의용대의 활동 범위가 확대되었다. 그러나 1942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결의에 따라 조선의용대는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의용대는 두 갈래로 나뉘어졌다.&lt;br /&gt;
&lt;br /&gt;
&lt;br /&gt;
1. 일부는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어 계속해서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중국 국민당과 협력&amp;lt;/span&amp;gt;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2. 주력 부대는 김원봉의 지휘 하에 중국 공산당 지역으로 이동하여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조선의용군'' 으로 개편&amp;lt;/span&amp;gt;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러한 변화는 당시 복잡한 국제 정세와 한국 독립운동 내부의 노선 차이를 반영한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역사적 의의'''&amp;lt;/span&amp;gt;==&lt;br /&gt;
조선의용대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lt;br /&gt;
&lt;br /&gt;
* 항일무장투쟁의 상징: 해외에서 조직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사례이다.&lt;br /&gt;
* 독립운동의 국제화: 중국과의 협력을 통해 한국 독립운동의 국제적 지지기반을 확대했다.&lt;br /&gt;
* 광복군의 모체: 이후 [[한국광복군]]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lt;br /&gt;
* 독립운동가 양성: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조선의용대를 거쳐 성장했다.&lt;br /&gt;
* 조선의용대의 활동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한 페이지를 차지하며, 항일투쟁의 정신을 상징하는 존재로 평가받고 있다.&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2178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조선의용대 1938」,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code=kc_age_40&amp;amp;levelId=kc_o403410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이종호, 「[역사 속 그곳] 의열단 의백, 조선의용대 대장 약산 김원봉」, 『울산저널』, 2020.08.15., https://m.usjournal.kr/news/articleView.html?idxno=87263 (검색일: 2024년 12월 4일)&lt;br /&gt;
&lt;br /&gt;
[[분류: 이민희]] [[분류:독립운동사의 근간, 교육구국운동(敎育救國運動)]]&lt;/div&gt;</summary>
		<author><name>Matnyeom</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E%A5%EC%A0%9C%EC%8A%A4&amp;diff=52776</id>
		<title>장제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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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12-21T16:46:3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Matnyeom: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lt;br /&gt;
&lt;br /&gt;
{{교육구국운동인물|인물명=장제스|사진=장제스.jpg|영문(한자)표기=Chiang Kai-shek(蔣介石)|호=-|출생=1887년 10월 31일|사망=1975년 4월 5일|묘소=타오위안시 다시구 츠후 능침|관련링크=https://www.khan.co.kr/article/202008042123005}}&lt;br /&gt;
&lt;br /&gt;
&lt;br /&gt;
장제스(蔣介石, 1887년 10월 31일 - 1975년 4월 5일)는 중화민국의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제2, 4대 총통 및 국부천대 이후 제1~5대 총통(1925년 ~ 1975년)을 역임하였다. 그는 20세기 중국의 근대화와 통일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국민당을 이끌고 공산당과의 내전, 일본과의 전쟁 등 격동의 시기를 겪었다. 장제스는 중국 국민당의 지도자이자 중화민국의 총통으로, 한국 독립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약력'''==&lt;br /&gt;
&lt;br /&gt;
* 1906.4. 바오딩군관학교 입교&lt;br /&gt;
* 1907. 일본육군사관학교 유학&lt;br /&gt;
* 1909.5. 일본육군사관학교 27기 졸업&lt;br /&gt;
* 1926.4. 제2대 국민정부 군사위원장 (1926.4.14.~1928.11.10.)&lt;br /&gt;
* 1926.4. 제2대 군사위원회 주석 (1926.4.16.~1927.3.10.)&lt;br /&gt;
* 1926.6. 국민혁명군 총사령관 (1926.6.5.~1927.4.1.)&lt;br /&gt;
* 1927.4. 국민혁명군 제1집단군 사령관 (1927.4.5.~1929.1.22.)&lt;br /&gt;
* 1928.2. 제4대 군사위원회 주석 (1928.2.7.~1928.11.7.)&lt;br /&gt;
* 1928.10. 제2대 국민정부 주석 (1928.10.10.~1931.12.15.)&lt;br /&gt;
* 1930.11. 제22대 국민정부 행정원장 (1930.11.18.~1931.12.15.)&lt;br /&gt;
* 1932.3. 초대 국민정부 군사위원장 (1932.3.6.~1946.5.15.)[6]&lt;br /&gt;
* 1935.12. 제22대 국민정부 행정원장 (2기, 1935.12.7.~1937.1.1.)&lt;br /&gt;
* 1938.4. 초대 중국국민당 총재 (1938.4.1.~1975.4.5.)&lt;br /&gt;
* 1939.12. 제22대 국민정부 행정원장 (3기, 1939.12.11.~1945.5.31.)&lt;br /&gt;
* 1941.12. 제12대 난징 국민정부 외교부장 (1941.12.27.~1942.10.20.)&lt;br /&gt;
* 1943.8. 제4대 국민정부 주석 (1943.8.1.~1948.5.20.)&lt;br /&gt;
* 1947.3. 국민정부 행정원장 대리 (1947.3.1.~1947.4.23.)&lt;br /&gt;
* 1948.5. 초대 중화민국 총통&lt;br /&gt;
* 1954.5. 제2대 중화민국 총통&lt;br /&gt;
* 1960.5. 제3대 중화민국 총통&lt;br /&gt;
* 1966.5. 제4대 중화민국 총통&lt;br /&gt;
* 1972.5. 제5대 중화민국 총통&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N-uppZwQdULXRRf-KblieKSgaWmKPogHElW87p7au4E&amp;amp;font=Default&amp;amp;lang=ko&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장제스는 국민당의 강력한 군사적 지도권을 가진 인물로서, 황포군관학교 교장을 맡음으로써 본격적으로 국민당 내에서 영향력을 키워왔다.&lt;br /&gt;
&lt;br /&gt;
===출생과 성장===&lt;br /&gt;
&lt;br /&gt;
장제스는 저장성 샤오싱현의 부유한 상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전통적인 유교 교육을 받았으며, 17세부터 근대식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1906년 베이징의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 교육을 받았고, 1907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유학길에 올랐다.&lt;br /&gt;
&lt;br /&gt;
&lt;br /&gt;
===1차 국공합작===&lt;br /&gt;
&lt;br /&gt;
제1차 국공합작은 1921년 중국 공산당이 창당된 이후, 코민테른이 국민당을 연합 전선의 대상으로 선정하면서 &amp;lt;font color=&amp;quot;red&amp;quot;&amp;gt;''손‧요페 선언''&amp;lt;/font&amp;gt; 을 통해 수립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1923년, 장제스는 쑨원의 혁명 이념을 계승하며 국민당 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쑨원 사후 정치적 지도권을 가지고 있던 왕정위와 군사적 지도권을 가졌던 장개석이 연합하여 북벌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북경의 군벌 중심 정부를 타도하고 통일 정부를 수립하고자 북벌을 전개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새 정부의 위치를 두고 장제스와 반장제스파가 대립하였고, 결국 1927년 4월 12일, 4.12 정변이 발생하며 장제스가 상하이에서 대규모 공산당 숙청 작전을 실시하며 제1차 국공합작이 사실상 파기되었다.&lt;br /&gt;
&lt;br /&gt;
===2차 국공합작과 중일전쟁===&lt;br /&gt;
&lt;br /&gt;
제 2차 국공합작은 일본의 침략과 함께 이루어졌다.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하여 일본이 중국에 대한 침략 전쟁을 전개하면서 국민들의 반일감정이 높아지고, 국공합작을 통한 일치항일을 요구하였다. 따라서 8.1선언 등을 통해 중국 공산당이 내전 정지와 폭넓은 민족의 연합을 주장하는 등 국민당에 대한 항일운동이 확산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하지만, 장개석은 항일여론이 심화됨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을 토벌하는 데에 더 집중했다. 따라서, 서안사변을 통해 장개석을 체포, 구금하고 내전 정지 및 체포된 구국연합회의 석방을 요구하는 8개조 요구를 통해 제 2차 국공합작이 공식적으로 선언되었다. 하지만, 장개석은 국공합작 중에도 공산당의 세력 확장을 우려하여 환남사변 등을 일으켜 공산당 군과 지속적으로 충돌이 있었다.&lt;br /&gt;
&lt;br /&gt;
===국부천대와 대만===&lt;br /&gt;
&lt;br /&gt;
1949년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장제스는 약 200만 명의 국민당 군대와 지지자들과 함께 대만으로 퇴각했다. 대만에서 그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반공 독재 체제를 구축했으며, '백색테러'로 알려진 정치적 탄압을 자행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U6tB_Wggs3M?si=GvAaVvrOw0LtIFwc&amp;quot; title=&amp;quot;YouTube video player&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amp;lt;/div&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국공합작의 과정과 국공합작 이후의 국민당의 몰락과 장개석의 대만 퇴각은 이 영상에서 더 자세히 알아볼 수 있다.'' &amp;lt;/div&amp;gt;&lt;br /&gt;
&lt;br /&gt;
=='''한국과의 관계'''==&lt;br /&gt;
&lt;br /&gt;
장제스는 한국 독립운동에 상당한 관심과 지원을 보였다.&lt;br /&gt;
&lt;br /&gt;
* 1933년 중국육군군관학교 뤄양 분교에 한국인 특별반을 설치&lt;br /&gt;
*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동 시 지방 관리들에게 협조 지시&lt;br /&gt;
*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지지&lt;br /&gt;
* 1953년 대한민국으로부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lt;br /&gt;
&lt;br /&gt;
=='''평가'''==&lt;br /&gt;
&lt;br /&gt;
장제스에 대한 평가는 매우 복합적이다. 그는 중국의 근대화와 통일에 기여했지만, 동시에 독재적 통치와 부패로 인해 비판받았다. 현대 중국 역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긍정적 평가'''&amp;lt;/span&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amp;lt;중국의 근대화 추진, 항일전쟁 지도, 국가 통합 노력&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부정적 평가'''&amp;lt;/span&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amp;lt;정치적 독재, 부패한 통치, 공산당에 대한 극렬한 반대&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장제스의 유산은 현대 중국과 대만 관계에 여전히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lt;br /&gt;
&lt;br /&gt;
* 「장제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8255&lt;br /&gt;
* 이상철, 「 &amp;lt;蔣介石일기&amp;gt;에 나타난 한국독립운동 관계 사료」  『월간조선』, 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1011100055&lt;br /&gt;
[[분류:이민희]] [[분류:독립운동사의 근간, 교육구국운동(敎育救國運動)]]&lt;/div&gt;</summary>
		<author><name>Matnyeom</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91%94%EC%A0%84%EB%B3%91%EC%A0%9C&amp;diff=52775</id>
		<title>둔전병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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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12-21T16:46:2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Matnyeom: &lt;/p&gt;
&lt;hr /&gt;
&lt;div&gt;=='''정의'''==&lt;br /&gt;
&lt;br /&gt;
둔전병제(屯田兵制)는 평시에는 토지를 경작하고 전시에는 전투원으로 동원되는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군사-농업 복합 제도''''&amp;lt;/span&amp;gt;이다.&lt;br /&gt;
&lt;br /&gt;
=='''역사적 배경'''==&lt;br /&gt;
&lt;br /&gt;
둔전병제의 기원은 중국에서 시작되었으며, 서양에서는 비잔티움 제국에서 가장 유명하게 실시되었다.&lt;br /&gt;
&lt;br /&gt;
=='''주요 특징'''==&lt;br /&gt;
&lt;br /&gt;
* 군인에게 토지 제공&lt;br /&gt;
* 평시 농사, 전시 전투 참여&lt;br /&gt;
* 자급자족 체제 구축&lt;br /&gt;
* 국가의 군사비 절감&lt;br /&gt;
&lt;br /&gt;
=='''동서양의 차이점'''==&lt;br /&gt;
&lt;br /&gt;
* 동양(중국): 주로 식량 확보가 목적&lt;br /&gt;
* 서양(비잔티움): 충성심 있는 국내 군대 확보가 목적&lt;br /&gt;
&lt;br /&gt;
=='''한국 독립운동에서의 적용'''==&lt;br /&gt;
&lt;br /&gt;
[[한인소년병학교]]와 대조선국민군단에서 둔전병제를 적용하여 운영했다.&lt;br /&gt;
&lt;br /&gt;
=== [[한인소년병학교]]에서의 둔전병제 ===&lt;br /&gt;
한인소년병학교는 미국 하와이에서 박용만이 설립한 군사학교로, 한인 청소년들에게 군사 훈련과 애국 교육을 제공했다. &lt;br /&gt;
 &lt;br /&gt;
* '''농업 활동'''&lt;br /&gt;
학교 주변의 토지를 활용해 학생들과 교직원이 함께 농사를 짓는 방식으로 경제적 자립을 꾀했다. &lt;br /&gt;
생산된 농산물은 학교의 운영 자금 및 식량으로 활용되었다.&lt;br /&gt;
&lt;br /&gt;
* '''병사와 농민의 이중 역할'''&lt;br /&gt;
학생들은 낮에는 농업 활동에 참여하고, 밤에는 군사 훈련을 받는 일정으로 구성되었다.&lt;br /&gt;
이를 통해 자립심과 체력을 배양하는 한편, 독립군으로서의 실질적 능력을 키웠다.&lt;br /&gt;
&lt;br /&gt;
* '''둔전 운영 방식'''&lt;br /&gt;
농업 활동과 군사 훈련의 비율은 6:4로 설정되었으며, 경제적 독립과 군사적 훈련 모두를 균형 있게 유지했다.&lt;br /&gt;
&lt;br /&gt;
=== 대조선국민군단에서의 둔전병제 ===&lt;br /&gt;
&lt;br /&gt;
대조선국민군단은 박용만이 1914년 하와이에서 설립한 단체로, 독립운동을 위한 군사 조직을 양성하고자 했다. 이 조직 역시 둔전병제를 활용하여 경제적 자립과 군사적 강화를 동시에 도모했다.&lt;br /&gt;
&lt;br /&gt;
* '''공동체 농업'''&lt;br /&gt;
군단은 하와이에서 대규모 토지를 확보해 병사들이 직접 농업 활동에 종사하도록 했다. 공동체 방식으로 생산물을 나누고, 이를 통해 조직 운영 자금을 충당했다.&lt;br /&gt;
&lt;br /&gt;
* '''경제적 자립 구조'''&lt;br /&gt;
둔전에서 발생한 수익은 무기 구매 및 교육 자료 제작에 사용되었다. 농업 외에도 소규모 공예품 제작 및 판매를 통해 추가적인 수익을 창출했다.&lt;br /&gt;
&lt;br /&gt;
* '''훈련과 작업의 균형'''&lt;br /&gt;
병사들은 하루 일정의 절반을 농업 활동에 할애하고 나머지 시간은 군사 훈련과 정신 교육에 집중했다. 이를 통해 병사로서의 실력을 키우면서 경제적 부담을 줄일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독립운동 과정에서 군사훈련과 경제적 자립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는 효과적인 시스템으로 활용되었다.&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 낮달, 「이승만과 결별 후 연구조차 금기시돼온 독립운동가」,  『직썰』, 2018.10.17, https://www.ziksir.com/news/articleView.html?idxno=7221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노세극, 「[독립운동가 열전 삶과 넋 92] 무장 독립투쟁의 거목, 우성 박용만」, 『노동과 세계』, 2021.01.18, https://www.labor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0893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한인소년병학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1902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이민희]] [[분류:독립운동사의 근간, 교육구국운동(敎育救國運動)]]&lt;/div&gt;</summary>
		<author><name>Matnyeom</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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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조선혁명간부학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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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12-21T16:46:0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Matnyeom: &lt;/p&gt;
&lt;hr /&gt;
&lt;div&gt;&amp;lt;onlyinclude&amp;gt;&lt;br /&gt;
=='''개요'''==&lt;br /&gt;
{{교육구국운동기관&lt;br /&gt;
|기관명=조선혁명간부학교&lt;br /&gt;
|사진=조선혁명간부학교.jpg&lt;br /&gt;
|한자표기=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lt;br /&gt;
|설립일=1932년&lt;br /&gt;
|설립자=김원봉(金元鳳)&lt;br /&gt;
|설립위치=중국 난징(南京) 교외 선사묘(善祠廟)&lt;br /&gt;
|계승=민족혁명당 군사부 훈련반 &lt;br /&gt;
|관련링크=http://www.miryang815.or.kr/bbs/board.php?bo_table=data&amp;amp;wr_id=10&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혁명간부학교(朝鮮革命幹部學校)'''는 1932년 의열단(義烈團) 단장 김원봉(金元鳳)이 중국의 [[장제스]](蔣介石)의 지원으로 독립운동 군사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중국의 난징(南京)에 설립한 군사간부양성학교이다. 1932년 개교 이래 1935년 9월 폐교까지 1기생 26명, 2기생 55명, 3기생 44명 등 총 125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lt;br /&gt;
&lt;br /&gt;
== '''설립''' ==&lt;br /&gt;
&lt;br /&gt;
1932년 단장 김원봉에 의해 중국의 난징에 설립되어, 당해 10월부터 1935년 9월에 이르는 3년여 동안 청년 투사를 양성했다. &lt;br /&gt;
&lt;br /&gt;
=== '''주요 인물과 활동'''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lt;br /&gt;
! 인물 !! 역할 및 기여&lt;br /&gt;
|-&lt;br /&gt;
|김원봉|| 단장, 조선혁명간부학교 설립 &lt;br /&gt;
|-&lt;br /&gt;
|신악|| 조선혁명간부학교 교육 주임, 군사 훈련 담당, 의열단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추후 조선의용대 부대장, 한국광복군 중교 등을 역임 &lt;br /&gt;
|-&lt;br /&gt;
|김세광|| 조선혁명간부학교 교관, 1933년 9월∼1934년 4월에 조선혁명간부학교 제2기 과정 교육을 담당하였으며 조선민족혁명당 중앙군사학 편찬위원으로 군사학 편찬에 종사&lt;br /&gt;
|-&lt;br /&gt;
|왕통 || 조선혁명간부학교 입학, 졸업 후 조선의용대 정치지도원, 조선민족혁명당 중앙위원,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 한국광복군 지대장으로 활동&lt;br /&gt;
|}&lt;br /&gt;
&lt;br /&gt;
== '''배경''' ==&lt;br /&gt;
독립운동이 실질적인 항일 투쟁의 형태로 진행되기 위해서 한인 청년들이 군벌 산하의 군사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고자 노력했다. &amp;lt;ref&amp;gt; 신규식이나 여운형은 중국의 우페이푸(吳佩孚) 등이 지휘하는 군벌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우페이푸는 친한파 군벌 중 하나로서, 중국군이 한국을 거쳐 일본에 진공해야 함을 주장했는데, 이러한 측면에서 여운형 등이 활동했던 한국노병회와 뜻이 맞아 교섭하였다. &amp;lt;/ref&amp;gt; 하지만, 명확한 결과가 나오지 못했다. 임시정부가 군사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상하이에 세웠던 육군무관학교는 6개월간의 초급장교 양성과정에서 1920년 상반기 19명, 하반기 24명 배출을 끝으로 안타깝게 폐교했고,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은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비행사양성소를 설립했으나 이 역시 비행대 편성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lt;br /&gt;
&lt;br /&gt;
이렇게 무장 투쟁을 위한 시도가 무산되자, 1919년 조직된 무장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은 중국국민당과의 합작을 통해 돌파구를 마련하고자했다. 또한, 단원 상당수가 국민당과 함께 북벌에 참가했기 때문에 국민당 입장에서도 김원봉과 의열단을 지원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lt;br /&gt;
&lt;br /&gt;
== '''특징''' ==&lt;br /&gt;
&lt;br /&gt;
조선혁명간부학교가 운영되는 3년 동안, 중국 국민당은 매월 경상비 2,000~3,000원, 수시 필요경비 1,000~1만 원, 기타 운영비 400~1,000원 등 각종 운영자금 전액과 화기·탄약·피복 등을 지원했다. 학생들은 군사학뿐 아니라 별도 신설된 정치학, 자연과학을 포함해 경제학·사회학·철학·혁명학·물리학·화학·지리학까지 다양한 학문을 공부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 '''의의''' ==&lt;br /&gt;
&lt;br /&gt;
조선혁명간부학교는 일제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하여 의열단과 중국 정부 사이에 형성된 한중연합의 결실이었다. 의열단은 중국 정부와 연대를 항일투쟁의 침체국면을 탈피할 수 있는 계기로 인식하였다. 따라서 의열단의 간부학교 운영은 국제적 연대 측면과 의열단 활동의 활성화라는 양면성을 가졌다. &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혁명간부학교의 교장인 김원봉은 개교사에서 간부학교의 설립 취지가 의열단의 항일 투쟁 정신을 계승하는 데 있음을 전제하고, 교육 목적은 군사학과 무기 사용법 등 군사 지식을 익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조선혁명간부학교의 교육 목표는 일본과의 총결전에서 투쟁의 주체가 될 조직을 구축하기 위한 선행 단계로서, 대중역량의 조직화와 체계화를 선도할 중견 간부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즉, 국지적·부분적 단계의 항일 투쟁 국면을 대중 투쟁의 단계로 발전시키는 방안이었음을 알 수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 '''졸업생들의 활동''' ===&lt;br /&gt;
&lt;br /&gt;
간부학교 졸업생들은 민족혁명당의 항일투쟁체계로 편입되어 항일 투쟁을 이어나갔다. 일부는 [[조선의용대]]의 핵심 세력으로 성장하였고, 다른 일부는 [[한국광복군]]의 주요 무장 인력이 되기도 했다. 또한, [[조선의용대]]의 일원으로서 화북 지역으로 이동하여 화북조선동맹과 조선의용군에 가담하였다.&lt;br /&gt;
&lt;br /&gt;
== 참고 자료 ==&lt;br /&gt;
* 「조선혁명간부학교 (朝鮮革命幹部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2266 (검색일: 2024년 11월 30일).&lt;br /&gt;
* 「김세광 (金世光)」,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3831 (검색일: 2024년 12월 2일).&lt;br /&gt;
* 「신악 (申岳)」,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3817 (검색일: 2024년 12월 2일).&lt;br /&gt;
*「왕통 (王通)」,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3818 (검색일: 2024년 12월 2일).&lt;br /&gt;
* 김광재,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의 결성과 활동」,  『독립기념관』, https://www.i815.or.kr/upload/kr/magazine/magazine/83/post-919.html (검색일: 2024년 12월 2일)&lt;br /&gt;
* 심용환, 「교육, 어둠을 밝힌 등불이 되다」,  『독립기념관』, https://www.i815.or.kr/upload/kr/magazine/magazine/4/post-38.html (검색일: 2024년 12월 2일)&lt;br /&gt;
* 밀양독립운동기념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밀양독립운동기념관』, http://www.miryang815.or.kr/bbs/board.php?bo_table=data&amp;amp;wr_id=10 (검색일: 2024년 12월 2일)&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lt;br /&gt;
&amp;lt;/onlyinclude&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이민희]] [[분류:독립운동사의 근간, 교육구국운동(敎育救國運動)]]&lt;/div&gt;</summary>
		<author><name>Matnyeom</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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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Matnyeom: &lt;/p&gt;
&lt;hr /&gt;
&lt;div&gt;&amp;lt;onlyinclude&amp;gt;&lt;br /&gt;
=='''개요'''==&lt;br /&gt;
{{교육구국운동기관&lt;br /&gt;
|기관명=조선혁명간부학교&lt;br /&gt;
|사진=조선혁명간부학교.jpg&lt;br /&gt;
|한자표기=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lt;br /&gt;
|설립일=1932년&lt;br /&gt;
|설립자=김원봉(金元鳳)&lt;br /&gt;
|설립위치=중국 난징(南京) 교외 선사묘(善祠廟)&lt;br /&gt;
|계승=민족혁명당 군사부 훈련반 &lt;br /&gt;
|관련링크=http://www.miryang815.or.kr/bbs/board.php?bo_table=data&amp;amp;wr_id=10&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혁명간부학교(朝鮮革命幹部學校)'''는 1932년 의열단(義烈團) 단장 김원봉(金元鳳)이 중국의 [[장제스]](蔣介石)의 지원으로 독립운동 군사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중국의 난징(南京)에 설립한 군사간부양성학교이다. 1932년 개교 이래 1935년 9월 폐교까지 1기생 26명, 2기생 55명, 3기생 44명 등 총 125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lt;br /&gt;
&lt;br /&gt;
== '''설립''' ==&lt;br /&gt;
&lt;br /&gt;
1932년 단장 김원봉에 의해 중국의 난징에 설립되어, 당해 10월부터 1935년 9월에 이르는 3년여 동안 청년 투사를 양성했다. &lt;br /&gt;
&lt;br /&gt;
=== '''주요 인물과 활동'''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lt;br /&gt;
! 인물 !! 역할 및 기여&lt;br /&gt;
|-&lt;br /&gt;
|김원봉|| 단장, 조선혁명간부학교 설립 &lt;br /&gt;
|-&lt;br /&gt;
|신악|| 조선혁명간부학교 교육 주임, 군사 훈련 담당, 의열단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추후 조선의용대 부대장, 한국광복군 중교 등을 역임 &lt;br /&gt;
|-&lt;br /&gt;
|김세광|| 조선혁명간부학교 교관, 1933년 9월∼1934년 4월에 조선혁명간부학교 제2기 과정 교육을 담당하였으며 조선민족혁명당 중앙군사학 편찬위원으로 군사학 편찬에 종사&lt;br /&gt;
|-&lt;br /&gt;
|왕통 || 조선혁명간부학교 입학, 졸업 후 조선의용대 정치지도원, 조선민족혁명당 중앙위원,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 한국광복군 지대장으로 활동&lt;br /&gt;
|}&lt;br /&gt;
&lt;br /&gt;
== '''배경''' ==&lt;br /&gt;
독립운동이 실질적인 항일 투쟁의 형태로 진행되기 위해서 한인 청년들이 군벌 산하의 군사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고자 노력했다. &amp;lt;ref&amp;gt; 신규식이나 여운형은 중국의 우페이푸(吳佩孚) 등이 지휘하는 군벌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우페이푸는 친한파 군벌 중 하나로서, 중국군이 한국을 거쳐 일본에 진공해야 함을 주장했는데, 이러한 측면에서 여운형 등이 활동했던 한국노병회와 뜻이 맞아 교섭하였다. &amp;lt;/ref&amp;gt; 하지만, 명확한 결과가 나오지 못했다. 임시정부가 군사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상하이에 세웠던 육군무관학교는 6개월간의 초급장교 양성과정에서 1920년 상반기 19명, 하반기 24명 배출을 끝으로 안타깝게 폐교했고,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은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비행사양성소를 설립했으나 이 역시 비행대 편성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lt;br /&gt;
&lt;br /&gt;
이렇게 무장 투쟁을 위한 시도가 무산되자, 1919년 조직된 무장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은 중국국민당과의 합작을 통해 돌파구를 마련하고자했다. 또한, 단원 상당수가 국민당과 함께 북벌에 참가했기 때문에 국민당 입장에서도 김원봉과 의열단을 지원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lt;br /&gt;
&lt;br /&gt;
== '''특징''' ==&lt;br /&gt;
&lt;br /&gt;
조선혁명간부학교가 운영되는 3년 동안, 중국 국민당은 매월 경상비 2,000~3,000원, 수시 필요경비 1,000~1만 원, 기타 운영비 400~1,000원 등 각종 운영자금 전액과 화기·탄약·피복 등을 지원했다. 학생들은 군사학뿐 아니라 별도 신설된 정치학, 자연과학을 포함해 경제학·사회학·철학·혁명학·물리학·화학·지리학까지 다양한 학문을 공부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 '''의의''' ==&lt;br /&gt;
&lt;br /&gt;
조선혁명간부학교는 일제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하여 의열단과 중국 정부 사이에 형성된 한중연합의 결실이었다. 의열단은 중국 정부와 연대를 항일투쟁의 침체국면을 탈피할 수 있는 계기로 인식하였다. 따라서 의열단의 간부학교 운영은 국제적 연대 측면과 의열단 활동의 활성화라는 양면성을 가졌다. &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혁명간부학교의 교장인 김원봉은 개교사에서 간부학교의 설립 취지가 의열단의 항일 투쟁 정신을 계승하는 데 있음을 전제하고, 교육 목적은 군사학과 무기 사용법 등 군사 지식을 익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조선혁명간부학교의 교육 목표는 일본과의 총결전에서 투쟁의 주체가 될 조직을 구축하기 위한 선행 단계로서, 대중역량의 조직화와 체계화를 선도할 중견 간부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즉, 국지적·부분적 단계의 항일 투쟁 국면을 대중 투쟁의 단계로 발전시키는 방안이었음을 알 수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 '''졸업생들의 활동''' ===&lt;br /&gt;
&lt;br /&gt;
간부학교 졸업생들은 민족혁명당의 항일투쟁체계로 편입되어 항일 투쟁을 이어나갔다. 일부는 [[조선의용대]]의 핵심 세력으로 성장하였고, 다른 일부는 [[한국광복군]]의 주요 무장 인력이 되기도 했다. 또한, [[조선의용대]]의 일원으로서 화북 지역으로 이동하여 화북조선동맹과 조선의용군에 가담하였다.&lt;br /&gt;
&lt;br /&gt;
== 참고 자료 ==&lt;br /&gt;
* 「조선혁명간부학교 (朝鮮革命幹部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2266 (검색일: 2024년 11월 30일).&lt;br /&gt;
* 「김세광 (金世光)」,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3831 (검색일: 2024년 12월 2일).&lt;br /&gt;
* 「신악 (申岳)」,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3817 (검색일: 2024년 12월 2일).&lt;br /&gt;
*「왕통 (王通)」,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3818 (검색일: 2024년 12월 2일).&lt;br /&gt;
* 김광재,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의 결성과 활동」,  『독립기념관』, https://www.i815.or.kr/upload/kr/magazine/magazine/83/post-919.html (검색일: 2024년 12월 2일)&lt;br /&gt;
* 심용환, 「교육, 어둠을 밝힌 등불이 되다」,  『독립기념관』, https://www.i815.or.kr/upload/kr/magazine/magazine/4/post-38.html (검색일: 2024년 12월 2일)&lt;br /&gt;
* 밀양독립운동기념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밀양독립운동기념관』, http://www.miryang815.or.kr/bbs/board.php?bo_table=data&amp;amp;wr_id=10 (검색일: 2024년 12월 2일)&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lt;br /&gt;
&amp;lt;/onlyinclude&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이민희]] [[분류:독립운동사의 근간, 교육구국운동]]&lt;/div&gt;</summary>
		<author><name>Matnyeom</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8F%85%EB%A6%BD%EC%9A%B4%EB%8F%99%EC%82%AC%EC%9D%98_%EA%B7%BC%EA%B0%84,_%EA%B5%90%EC%9C%A1%EA%B5%AC%EA%B5%AD%EC%9A%B4%EB%8F%99(%E6%95%8E%E8%82%B2%E6%95%91%E5%9C%8B%E9%81%8B%E5%8B%95)&amp;diff=52549</id>
		<title>독립운동사의 근간, 교육구국운동(敎育救國運動)</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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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12-21T04:17:5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Matnyeom: /* 군사 교육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개요==&lt;br /&gt;
[[파일:교육구국운동 표지.png|800px|가운데]]&lt;br /&gt;
&lt;br /&gt;
[[분류:신다정]]&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   text-align:center;&amp;quot;&amp;gt;기획의도===&lt;br /&gt;
&lt;br /&gt;
&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width:100%;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quot;&lt;br /&gt;
!| 기획의도&lt;br /&gt;
|-&lt;br /&gt;
| 조선의 독립운동사는 근대교육을 위한 노력과 함께 전개되어 왔다. 교육 운동은 독립 운동의 일환으로서 민중을 계몽하기도 하고, 여성 교육이 발전하여 개화 사상이 유입되기도 했으며, 가장 중요하게도 군사 교육을 통해 민족이 싸울 힘을 기르기도 했다. 우리 민족은 당면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기 위해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고, 배움에 대한 열정으로 일제강점기의 어둠을 헤쳐나갈 수 있었다. 학생들이 독립운동을 생각했을 때 교육을 가장 먼저 떠올리지는 않는 듯하다. 다만, 교육은 독립운동사의 핵심적인 부분을 뒷받침하는 지지대였다. 따라서, '''''우리가 잘 몰랐던 독립운동사에서의 다양한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을 위키 페이지로 만들어 이들의 스토리를 전달''''' 하고자 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이민희]]&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 text-align:center;&amp;quot;&amp;gt;팀원===&lt;br /&gt;
2023130036 김윤&lt;br /&gt;
2023131227 최용빈&lt;br /&gt;
2023131540 정혜나&lt;br /&gt;
2024130814 이민희&lt;br /&gt;
2024130911 신다정&lt;br /&gt;
&lt;br /&gt;
=='''교육구국운동(敎育救國運動)'''==&lt;br /&gt;
한국사에 있어서 개화기는 근대화를 추진하는 시기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개화기 교육은 종래 유학 경전 중심의 교육에서 탈피하여 신교육을 시작하는 전환기로 교육사적 의미가 있는 중요한 시기이다. 한국개화기 근대교육의 발전과정은 1880년대에서 1890년대까지 짧은 기간에 많은 변화와 개혁을 거듭하는 시기이다. 국가적으로 열강의 침략을 극복하고 신문화를 받아들여 개명하는 변혁기로 신교육 정착시키는 동시에 국권회복을 위한 교육구국운동을 통하여 민족독립을 전개하는 시기이다. &lt;br /&gt;
&lt;br /&gt;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 이후 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고 일본 통감부가 설치되어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 시기의 개화파를 계승한 애국계몽사상가들은 국권회복을 위해서는 자강지술을 고취하고, 실력을 배양하는 것이 선결과제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이것을 위해 청소년 교육, 민족산업의 육성, 각종 단체에 대한 단결 그리고 신교육을 위한 학교설립 등 광범위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를 교율(敎育)을 통해 나라를 구한다(救國)는 의미의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교육구국운동'''&amp;lt;/span&amp;gt;이라고 칭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신다정]] &lt;br /&gt;
&lt;br /&gt;
==교육기관 설립==&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민족설립 교육기관===&lt;br /&gt;
====민족사학의 의미 ====&lt;br /&gt;
'''1. 민족사학의 정의:''' 우리 민족이 설립한 교육 기관&amp;lt;br/&amp;gt;&lt;br /&gt;
본 위키 페이지에서는 민족사학(民族私學)을 '''외세나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교육기관과 구분되는 것'''으로서, 교육구국운동의 일환으로 일제강점기 전후에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우리 민족이 개인이나 사법인으로서 설립하여 경영하는 학교&amp;lt;/span&amp;gt;로 정의한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2. 민족사학의 정신 및 목적:''' 개화와 교육구국&amp;lt;br/&amp;gt;&lt;br /&gt;
민족사학의 정신과 목적은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개화&amp;lt;/span&amp;gt;와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교육구국&amp;lt;/span&amp;gt;으로 크게 두 가지 방향이 있다. 초기의 민족사학 설립 정신은 '''선진외국의 문화와 문물'''을 받아들여 나라를 개화하고 발전시키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었으나,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乙巳勒約)&amp;lt;ref&amp;gt;대한 제국 광무 9년(1905)에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기 위하여 강제적으로 맺은 조약. 고종 황제가 끝까지 재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인 무효의 조약이다.(표준국어대사전 정의)&amp;lt;/ref&amp;gt; 이후 '''교육 구국을 위한 인재 양성'''이란 민족적 희망에 기반하였다.&lt;br /&gt;
&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민족사학의 발전배경====&lt;br /&gt;
당시 개화파를 비롯한 다수 지식인은 나라를 진흥시키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함을 느끼고 있었다.&amp;lt;br/&amp;gt;&lt;br /&gt;
이와 같은 지식인들의 의식은 서재필이 『한국휘보(Korean Repository)』에 기고한 다음 글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amp;lt;br/&amp;gt;&lt;br /&gt;
{{Blockquote|정부는 국민의 실정을 알아야 하고 국민들은 정부의 목적을 알아야 한다. 정부와 국민 상호간의 이해를 갖도록 하기 위해서는 쌍방에 대한 교육뿐이다 … 교육 없이는 국민들이 정부의 좋은 의도를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교육 없이는 정부 관리들이 결코 좋은 법률을 만들지 못할 것이다.&lt;br /&gt;
|출처=서재필, 「오늘날 한국이 가장 필요로 하는 일」(What Korea needs most), 『한국휘보(Korean Repository)』, 1896.3.}}&amp;lt;br/&amp;gt;&lt;br /&gt;
&lt;br /&gt;
이러한 의식은 독립협회에서 발간한 『독립신문』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amp;lt;br/&amp;gt;&lt;br /&gt;
{{Blockquote|'''문명개화한 나라들에서들은 무론 남녀하고 학교에 가서 적어도 10년 동안에 각색 학문을 배운 후 비로소 세상에 나가''' … 조선 사람들은 겨우 배우는 것이 한문만 조금 배워 가지고 … 일본 같은 조그마한 나라가 싸움을 하여서 청국 병정 무찌르기를 풀 베는 것 같이 하고, 일본도 30년 전 같으면 나라 형세가 청국과 똑같았으니, 어찌 조그마한 나라가 청국 같은 큰 나라를 이기리오마는, 일본 사람들이 서양 각국이 부강한 곡절을 알고 곧 백성 교육하는 일을 힘써 … 당장에 적은 리(利)와 욕심을 내버리고 '''인민 교육하여 몇 해 후에는 조선도 남과 같이 되기를 바라노라'''&lt;br /&gt;
|출처=「논설」,『독립신문』1896년 4월 25일자.}}&amp;lt;br/&amp;gt;&lt;br /&gt;
위의 글들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이러한 지식인들의 자각이 민족사학 설립의 배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민족사학의 발전과정 ====&lt;br /&gt;
1800년대 후반부터 1910년 이전까지 주요 민족 주도로 설립된 교육기관의 설립 과정을 정리&amp;lt;ref&amp;gt;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민족독립운동사 국권수호운동Ⅱ Ⅳ. 국권수호를 위한 사회·문화운동 6. 사립학교의 구국운동 3) 민립학교 설립의 주체(https://db.history.go.kr/modern/level.do?levelId=hdsr_002_0010_0060_0030)의 데이터에 기반하여 자료 조사를 진행하였다. 자료조사를 통해 설립 연도가 일부 수정되었다.&amp;lt;/ref&amp;gt;하였다.&amp;lt;br/&amp;gt;&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xpvhRvJrqO8QmhwtXtUZhPRbrWskR7CqqsrToNpIPRE&amp;amp;font=Default&amp;amp;lang=ko&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amp;lt;br/&amp;gt;&lt;br /&gt;
이와 같이 1905년 이전에는 개화 및 신교육 도입 목적으로 1905년 이후에는 인재양성을 통한 교육구국을 목적으로 많은 교육기관이 설립되었다.&lt;br /&gt;
&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대표적 민족설립 교육기관====&lt;br /&gt;
아래의 표에서는 대표적인 민족설립 교육기관과 그 계승 현황을 정리하였다. &amp;lt;br/&amp;gt;&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hn:left;background:white;&amp;quot;&lt;br /&gt;
|+ [대표적 민족설립 교육 기관&amp;lt;ref&amp;gt;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민족독립운동사 국권수호운동Ⅱ Ⅳ. 국권수호를 위한 사회·문화운동 6. 사립학교의 구국운동 3) 민립학교 설립의 주체(https://db.history.go.kr/modern/level.do?levelId=hdsr_002_0010_0060_0030)의 데이터에 기반하여 자료 조사를 진행하였다. 자료조사를 통해 설립 연도 및 설립자가 일부 수정되었다.&amp;lt;/ref&amp;gt;]&lt;br /&gt;
! 교육기관명 || 설립일 || 설립자 || 계승&lt;br /&gt;
|-&lt;br /&gt;
|원산학교(元山學校) || 1883 || 덕원(德源)의 유지 || 원산소학교, 원산보통학교, 원산제일국민학교로 계승되며 1945년까지 지속됨&lt;br /&gt;
|-&lt;br /&gt;
|흥화학교(興化學校) || 1895. 11. 5. || 민영환(閔泳煥) || 1911년 폐교&lt;br /&gt;
|-&lt;br /&gt;
|중교의숙(中橋義塾) || 1896 || 민영기(閔泳綺) || 1906년 폐교&lt;br /&gt;
|-&lt;br /&gt;
|순성여학교(順成女學校) || 1898.12. || 찬양회(讚揚會) || 1905년 12월 31일 『대한매일신보』기사를 끝으로 신문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음&lt;br /&gt;
|-&lt;br /&gt;
|점진학교(漸進學校) || 1899 || 안창호(安昌浩) || .&lt;br /&gt;
|-&lt;br /&gt;
|낙연의숙(落淵義塾) || 1901 || 서광세(徐光世) || 1916년 폐교&lt;br /&gt;
|-&lt;br /&gt;
|한성법학교(漢城法學校) || 1905. 1. || 사회 유지 || 1905년 9월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가 법률학전문야학과를 신설하여 한성법학교 학생 20명을 인계받음 &amp;lt;ref&amp;gt; https://www.kunews.ac.kr/news/articleView.html?idxno=3765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양정의숙(養正義塾) || 1905. 2. 11. || 엄주익(嚴柱益) || 양정중학교(養正中學校)&lt;br /&gt;
|-&lt;br /&gt;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 1905. 4. 3. || 이용익(李容翊) || '''고려대학교(高麗大學校)'''&lt;br /&gt;
|-&lt;br /&gt;
|보창학교(普昌學校) || 1905. 5. || 이동휘(李東輝) || .&lt;br /&gt;
|-&lt;br /&gt;
|서전서숙(瑞甸書塾) || 1906 || 이상설(李相卨) || 1907년 폐교&lt;br /&gt;
|-&lt;br /&gt;
|진명여학교(進明女學校) || 1906. 4. ||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 진명여자고등학교(進明女子高等學校)&lt;br /&gt;
|-&lt;br /&gt;
|중동학교(中東學校) || 1906. 4. 2. || 신규식(申圭植) || 중동고등학교 (中東高等學校)&lt;br /&gt;
|-&lt;br /&gt;
|휘문의숙(徽文義塾) || 1906. 5. || 민영휘(閔泳徽) || 휘문고등학교(徽文髙等學校)&lt;br /&gt;
|-&lt;br /&gt;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 || 1906. 5. ||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 '''숙명여자대학교(淑明女子大學校)''', 숙명여자중학교(淑明女子中學校), 숙명여자고등학교(淑明女子高等學校)&lt;br /&gt;
|-&lt;br /&gt;
|양규의숙(養閨義塾) || 1906. 6. || 여자교육회(女子敎育會) || .&lt;br /&gt;
|-&lt;br /&gt;
|서우사범학교(西友師範學校) || 1907. 1. || 서우학회(西友學會) || 1908년에 서북협성학교(西北協成學校)로 개편됨&lt;br /&gt;
|-&lt;br /&gt;
|대성학교(大成學校) || 1907 || 안창호(安昌浩) || 1912년 폐교&lt;br /&gt;
|-&lt;br /&gt;
|협동학교(協東學校) || 1907 || 유인식(柳寅植)) || 1917년 폐교&lt;br /&gt;
|-&lt;br /&gt;
|소의학교(昭義學校) || 1907. 9. || 전경현(全景鉉), 민강(閔橿), 장경관(張敬寬) 등 || 동성고등학교 (東星高等學校)&lt;br /&gt;
|-&lt;br /&gt;
|장훈학교(長薰學校) || 1907. 11. 2. ||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 || 장훈고등학교 (長薰高等學校)&lt;br /&gt;
|-&lt;br /&gt;
|오산학교(五山學校) || 1907. 12. || 이승훈(李昇薰) || 오산고등학교 (五山高等學校)&lt;br /&gt;
|-&lt;br /&gt;
|기호학교(畿湖學校) || 1908. 6. 20. ||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 || 융희학교(隆熙學校)를 흡수하여 중앙중학교(中央中學校), 중앙고등학교(中央高等學校)로 발전함&lt;br /&gt;
|-&lt;br /&gt;
|양원여학교(養原女學校) || 1908. 6. || 여자보학원유지회(女子普學院維持會) || .&lt;br /&gt;
|-&lt;br /&gt;
|신명학당(新明學堂) || 1908. 2. || 김장호, 김홍식(金洪植) || 치문초등학교 (致文初等學校)&lt;br /&gt;
|-&lt;br /&gt;
|명동학교(明東學校) || 1908. 4. 27. || 김학연(金學淵) || 1925년 폐교&lt;br /&gt;
|-&lt;br /&gt;
|보인학교(輔仁學校) || 1908. 6. 8. || 보인학회(輔仁學會) || 보인고등학교(輔仁高等學校)&lt;br /&gt;
|-&lt;br /&gt;
|양산중학교(楊山中學校) || 1908. 10. || 김홍량(金鴻亮) ||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이상의 표에서 1910년 국권피탈 이전 설립된 민족설립 교육기관 중 적지 않은 수가 오늘날에도 현존하고 있는 중학교, 고등학교, 또는 대학교로 계승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10년 이후 많은 학교가 폐교 위기에 처한 것을 고려하였을 때, 이러한 계승은 민족설립 교육기관을 유지해 교육을 통해 나라를 구하고자 했던 당시 사람들의 투지와 열망에 대한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보성전문학교와 명신여학교====&lt;br /&gt;
1910년 이전까지 민족 주도로 설립된 교육 기관 중 주요하게 살펴보아야 할 기관으로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와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가 있다. 보성전문학교는 이용익(李容翊)이 고종의 허가 하에 설립하였고, 명신여학교는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의 지원으로 설립되었음을 고려할 때, 모두 황실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사립 교육기관으로 보기는 힘들다는 한계는 존재한다. 그러나, 1910년 이전에 설립된 학교가 폐교의 절차를 밟지 않고 이어져 오늘날까지 계승되었다는 사실이 가지는 의미는 적지 않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1910년 이후 많은 학교가 일제의 강압 아래 폐교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 두 학교의 경우 대부분의 학교가 중등교육기관으로 계승된 것과는 구분되어 '''고등교육기관으로 발전한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나아가, 보성전문학교 설립을 기점으로 '교육 구국'을 목적으로 한 민족 사학의 설립이 활성화되었다는 점과 명신여학교의 경우 민족이 설립한 많지 않은 여성 교육기관 중 하나였다는 점 역시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lt;br /&gt;
보성전문학교는 1905년 04월 03일 고종(高宗)의 재정적 후원을 받아 [[이용익李容翊]]에 의해 설립된 교육기관이다. &amp;lt;br/&amp;gt;&lt;br /&gt;
보성전문학교의 설립 배경은 설립자 이용익의 행보에서 엿볼 수 있다. 친로반일(親露反日)의 뜻 고수한 것과 조선의 중립 선언을 선언하게 한 것으로 인해 일본에 의해 납치된 이용익은 체류 중 일본의 '''근대교육기관 및 개화문물을 접한다'''. 이것이 그의 교육기관 설립의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이후 귀국할 때 '''다수의 도서와 인쇄기를 구매'''하여 가지고 온 점 역시 이러한 추측의 설득력을 높인다. &amp;lt;br/&amp;gt;&lt;br /&gt;
한편, 보성전문학교의 개교를 알리는 황성신문(皇城新聞)의 글에는 보성전문학교 설립이 그 당시에 가졌던 의미가 잘 드러나고 있다. &amp;lt;br/&amp;gt;&lt;br /&gt;
{{Blockquote|전문학교 창설. '''대한에 전문대학교는 아직 세워지지 못했다. 한성법학교(漢城法學校)가 세워졌으나 야학(夜學)이라 완전하지 못했는데, 박동(礴洞)에 신설한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는 위치가 전문대학 주간 학교로''' 대황제폐하께서 특별히 설립하신 바, 매월 수천원의 경비를 내탕전(內帑錢)으로 내려주고 도서관을 부설하여 각 전문 교과서 수천권을 새로 간행한다 한다. 그리고 신해영(申海永)·조제환(趙齊桓)·정영택(鄭永澤) 세 명에게 이상의 사무를 전담하도록 하여, 위 3명은 교육을 열심히 하여 황제의 뜻에 보답하기위해 더욱 극진하게 힘을 쓴다고 한다. 20여명의 교수는 일찍이 일본에 유학하여 졸업한 사람들을 임용하여 (중략) '''2개년 졸업기한이지만 인재를 빨리 양성하도록''' 황제의 뜻을 특별히 내리셨다하고, 오늘부터 개교한다고 한다.&lt;br /&gt;
|출처=『황성신문(皇城新聞)』 1905년 4월 1일자 2면. 현대어역: 고려대학교 도서관&amp;lt;ref&amp;gt;https://library.korea.ac.kr/datause/archiving/old-book-exhibition/release/?mod=document&amp;amp;uid=10653&amp;lt;/ref&amp;gt;}}&lt;br /&gt;
윗글에서 당시 대한제국에 중등교육기관은 존재했음에도 고등교육을 위한 기관은 야학의 형태로서만 존재하여 온전하지 못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당시 상황 속에서 이용익이 일본의 교육 현황을 접한 후 대한제국 고등교육기관의 필요성을 느껴 설립하려 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고등교육기관 설립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맞춰 등장한 학교라는 점에서 보성전문학교가 가지는 가치는 매우 크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1910년 이후 다른 학교와 마찬가지로 보성전문학교는 운영진 및 교장의 망명, 투옥과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운영난을 겪는 등 각종 수난을 겪는다. 이후 일제의 탄압 아래 격하되거나 교명을 바꾸고 학과 설립이 제한되는 등 여러 차례 존속의 고비를 넘긴다. 하지만 끊임없는 노력을 바탕으로 1921년 전문학교로 다시 승격되었으며 여러 위기를 거친 끝에 해방 후 고려대학교로 발족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lt;br /&gt;
명신여학교는 1906년 5월 22일 고종(高宗)의 후궁인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의 지원으로 왕실 별궁 용동궁에 설립된 교육기관이다. &amp;lt;br/&amp;gt;&lt;br /&gt;
순헌황귀비는 본디 교육, 특히 여성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명신여학교의 설립에 앞서 1906년 4월에 진명여학교(進明女學校)를, 1907년에 경영난에 처해 있던 양정의숙(養正義塾)을 도운 점에서 잘 드러난다. &amp;lt;br/&amp;gt;&lt;br /&gt;
한편, 당시 여성 교육 관련 배경은 다음과 같다. 앞서 기술된 바와 같이 1905년 을사늑약 전후로 교육구국이 일어나 전국 각지에서 민족사학이 설립되었으나 여성을 위한 교육기관은 부족한 실태였다. 당시 설립된 여성 교육기관으로는 이화학당, 정신여학교, 숭의학교 등이 있었으나 이는 모두 선교사, 즉 민족에 의해 설립된 학교가 아니었다.&amp;lt;ref&amp;gt;한희숙, 구한말 순헌황귀비 엄비의 생애와 활동, 아시아여성연구, 숙명여자대학교 아시아여성연구원, 제45집 2호, 2006&amp;lt;/ref&amp;gt;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여성 교육기관의 필요'''를 절감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 것은 순헌황귀비의 시대적 통찰력을 반영하는 부분이다. &amp;lt;br/&amp;gt;&lt;br /&gt;
위와 같은 순헌황귀비의 설립 목적은 대한매일신보의 글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amp;lt;br/&amp;gt;&lt;br /&gt;
{{Blockquote|황귀비 흥학:  황귀비 전하께오서 여자 교육이 없음을 크게 걱정하여 육군참장 엄주익씨 집(第)에 여학교를 설립하여 '''여자교육을 발달시키고자''' 하였다.  엄주익에게 학교 설립 일을 전담하게 하시니 '''대한여자의 교육이 앞으로 발달하기를''' 가히 볼 수 있을 지로다. &lt;br /&gt;
|출처=『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6년 4월 24일자&amp;lt;ref&amp;gt;한희숙, 구한말 순헌황귀비 엄비의 생애와 활동, 아시아여성연구, 숙명여자대학교 아시아여성연구원, 제45집 2호, 2006, 227쪽.&amp;lt;/ref&amp;gt;}}&lt;br /&gt;
광복 후 명신여학교는 숙명여자중학교(淑明女子中學校)와 숙명여자고등학교(淑明女子高等學校)로 이어졌다. 나아가, 여성 고등교육기관의 설립을 꿈꾼 교장 이정숙(李貞淑)의 뜻에 따라 1938년 숙명학원(淑明學園)에서 숙명여자전문학교를 설립하였고, 이것이 오늘날 숙명여자대학교(淑明女子大學校)로 계승되었다.&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선교사 설립 교육기관===&lt;br /&gt;
선교사들은 기독교 선교의 기반 구축을 위해 개화정책 추진 초기인 1880년대부터 고종의 각별한 관심과 지원 속에서 많은 학교를 설립하였다.  서울에 배재·이화·경신학교를 설립하였고, 기독교 선교금지정책이 이완되기 시작한 1890년대에는 지방도시로 그 범위를 넓혀 1894년 평양의 광성학교·숭덕학교·정의여학교, 1895년 서울의 정신여학교를 비롯하여 동래·인천·재령·목포·원산·개성·해주·공주·대구 등 전국 각지로 확대하였다.&lt;br /&gt;
&lt;br /&gt;
====[[연세대학교(延世大學校)]]====&lt;br /&gt;
&lt;br /&gt;
연희전문학교는 1915년 선교부연합위원회의 협의를 얻어서 북장로회 선교사인 언더우드가 조선기독교학교로 처음 설립하였다. 이후 1917년 연희전문학교로 발족하였다. 보성전문학교 이후 두 번째로 설립된 전문학교이다. 이후 3.1 운동등 다양한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1944년 일제가 경영권과 재산을 몰수하고 한국인 교수진들을 모두 추방했었다. 독립 후에는 연희대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대학교로 승격하였다.&lt;br /&gt;
&lt;br /&gt;
세브란스는 대한제국의 궁정어의였던 알렌에 의해 1885년에 설립된 제중원에서 시작하였고, 1886년부터 제중원 내 의학부를 두고 입학생을 받았다. 이후 병원장으로 취임한 선교사 에비슨이 1899년 조선 최초의 의학교인 제중원의학교를 설립하였다. 1904년 미국인 세브란스의 후원으로 세브란스 병원이 세워지며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로 개편하였다. 1906년에 간호부가 개설되었고 우리나라 최초의 간호사를 배출하였다. 세브란스와 연희전문학교 간의 병합은 1920년대에도 한차례 시도한 바 있었으나 무산되었고, 독립 후 1957년에 두 학교가 통합되어 '''연세대학교'''로 출범하였다.&lt;br /&gt;
&lt;br /&gt;
====[[배재학당]]====&lt;br /&gt;
&lt;br /&gt;
1885년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한국 최초의 근대식 사립학교로 중등과정을 담당했다. 1886년이 고종이 배재학당이라는 이름을 사하였고 미국인들의 후원을 받아 1887년에 제대로 된 건물을 세웠다. 영어교육을 중점적으로 행했으며 학생자조정책을 채택하여 가난한 학생들이 학교에서 일을 하며 수업료를 벌 수 있도록 하였다. 현재 기존의 건물은 2008년부터 배재학당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배재중학교, 배재고등학교, 배재대학교'''가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lt;br /&gt;
&lt;br /&gt;
====[[배화학당]]====&lt;br /&gt;
초,중등과정의 사립학교로 1898년 켐벨 선교사가 설립하였다. 처음엔 캐롤라이나학당으로 기독교전파와 여성교육을 목표로 세웠졌다. 1910년 배화학당으로 개칭하였다.1916년 1월 경성 누하동(지금의 서울 종로구 필운동)으로 교사를 이전하고, 1926년 12월 캠블기념관을 신축하였으며, 1938년 3월 배화고등여학교와 배화여자소학교로 분리,개편되었다. 일제의 신사참배요구를 거절한 기독교 학교 중 하나이다. 1940년대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선교사들도 학교를 떠나며 위기에 폐교 위기에 봉착했다. 학교가 경영난에 시달리자 일제는 학교의 운영권을 요구했으나, 당시 교사였던 이덕봉과 이만규가 독지가를 구하려 노력한 끝에 이민천이 춘천, 이천, 연기, 익산 등지에 있는 토지를 기부하여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독립 후 1951년 '''배화여중과 배화여고'''로 분리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김윤]]&lt;br /&gt;
&lt;br /&gt;
=='''민간 단체의 교육 운동'''==&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신민회(新民會)]]의 애국계몽운동===&lt;br /&gt;
&amp;lt;br/&amp;gt;&lt;br /&gt;
{{Blockquote| '''신민회 행동강령'''&lt;br /&gt;
1. 국민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사상 고취 &amp;lt;br /&amp;gt; 2. 동지를 발하고 단합하여 국민 운동 역량 축적 &amp;lt;br /&amp;gt; 3. 상공업 기관 건설로 국민의 부력(富力) 증진 &amp;lt;br /&amp;gt; 4. 교육 기관 설립으로 청소년 교육 진흥&lt;br /&gt;
|출처= 「헌기제501호, 「대한 신민회 취지서 및 동회 통용 장정 등 보고 건」, 1909년 3월 5일(국사편찬위원회, 『통감부문서』 6, 1991}}&lt;br /&gt;
&lt;br /&gt;
[[신민회(新民會)]]는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1907년에 [[안창호(安昌浩)]], [[양기탁(梁起鐸)]] 등의 주도로 결성된 항일 비밀결사&amp;lt;/span&amp;gt;이다. 위와 같은 신민회의 행동 강령을 바탕으로 신민회는 실력 양성을 통한 국권 회복을 주장하며, 교육, 언론 및 출판, 민족 산업 육성, 독립군 양성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lt;br /&gt;
&lt;br /&gt;
신민회는 실력 배양의 방법으로 교육 구국 운동을 두 가지 측면에서 전개하였다. 국민에게 국권회복을 위한 교육의 필요성을 계몽하여 학교설립을 고취하며 신민회도 학교를 설립하여 국권회복에 필요한 적합한 교육방침을 강구하여 민족 지도자를 양성한다는 것이다. 또한, 국외에서 독립군 기지를 창설하고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전쟁을 일으켜 국권을 회복한다는 것이다. &lt;br /&gt;
&lt;br /&gt;
신민회는 이를 위해 민중들이 설립한 학교에 대해 학교교육방침을 지도하였다. 또한, 중학교를 설립하고, 학교의 모범을 만들며 중학교에서 동시에 사범교육을 해 교사를 양성한다는 기준을 세우고 학교를 설립하였다. 당시 민간인이 자발적으로 기금을 갹출하여 설립한 학교는 대부분이 소학교였기 때문에, 신민회는 중학교를 설립하여 소학교 출신 청소년들이 더 양질의 교육을 통해 민족지도자로 발돋움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lt;br /&gt;
&lt;br /&gt;
신민회는 기본적으로 비밀결사이기 때문에 그들이 설립한 학교의 수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1907년부터 1909년 4월까지 민간인들에 의해 세운 학교가 3000여 개교에 달한다는 통계로 보아 신민회에서 세운 학교가 많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알려진 신민회가 설립한 학교는 다음과 같다.&lt;br /&gt;
&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hn:left;background:white;&amp;quot;&lt;br /&gt;
|+ [신민회가 설립한 학교]&lt;br /&gt;
! 학교명 || 설명 &lt;br /&gt;
|-&lt;br /&gt;
| '''대성학교'''|| [[안창호(安昌浩)]], 윤치호 평양에 설립. 신민회가 설립한 대표적인 민족 사학으로 입학 지원자가 500~600여 명이 되는 때도 존재. &lt;br /&gt;
|-&lt;br /&gt;
| '''오산학교'''|| 평안북도 정주군에 이승훈 설립. 김소월, 백석, 이중섭, 독립운동가 김홍일 중장 등을 배출. 현재 서울 오산고등학교로 계승됨&lt;br /&gt;
|-&lt;br /&gt;
| 점진학교|| 평안남도 강서 위치, [[안창호(安昌浩)]] 설립. 남녀공학을 실시한 최초의 소학교. &lt;br /&gt;
|-&lt;br /&gt;
| 보창학교 || 강화도 위치, [[이동휘]] 설립&lt;br /&gt;
|-&lt;br /&gt;
| 신안학교 || 정주, 신민회 정주지회 회원 설립&lt;br /&gt;
|-&lt;br /&gt;
| 양실학교 || 의주, 신민회 의주/용천지회 회원 설립&lt;br /&gt;
|-&lt;br /&gt;
| 가명학교 ||  신민회 납청정지회 회원 설립&lt;br /&gt;
|-&lt;br /&gt;
| 신흥학교 || 선천, 중학교급 학교&lt;br /&gt;
|-&lt;br /&gt;
| 홍양학교 || 신민회 곽산지회 회원 &lt;br /&gt;
|-&lt;br /&gt;
| 명륜학교|| 함경남도 영흥읍에 있던 세 개 학교 통합, [[이동휘]] 설립&lt;br /&gt;
|-&lt;br /&gt;
| 경성학교|| 함경북도 경성 위치&lt;br /&gt;
|-&lt;br /&gt;
| 양산학교|| 황해도 안악읍 향천자리, 김용제 설립, 신민회가 중학교로 개편&lt;br /&gt;
|-&lt;br /&gt;
| 오성학교 || 서울 위치, 이갑, 이종화 설립. 신민회 창건 후 각종학교인 서북협성학교로 개편&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신민회의 애국계몽은 학교 설립뿐만이 아니라 학회의 설립과 지도를 통해서도 추진되었다. 안악군면학회(安岳郡勉學會), 해서교육총회(海西敎育總會),평양청년권장회(平壤靑年勸?會), 연학회(練學會), 동제회(同濟會)등의 학회를 전국에 조직하는 데에 앞장섰다. 또한, 서우학회, 한북학회를 서북학회로 통합 재조직하는 등, 기존에 있던 학회의 통합과 재정비에도 이바지하였다. &lt;br /&gt;
&lt;br /&gt;
이와 같이 신민회의 교육계몽운동은 신민회가 1911년 105인 사건으로 해산될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그 이후에도 다른 독립운동단체에 영향을 미쳐 교육을 통한 민중 계몽으로 이루어지는 독립운동의 방향성을 제시하였다.&lt;br /&gt;
&lt;br /&gt;
[[분류:신다정]]&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농촌 계몽 운동===&lt;br /&gt;
&lt;br /&gt;
농촌 계몽 운동은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1920년대~1930년대 민족 운동과 관련한 청년 학생이나 지식층이 농민의 의식과 지식 등을 계몽하기 위해 농촌 사회에서 행한 사회 교육 운동&amp;lt;/span&amp;gt;을 의미한다. 농사일을 끝낸 후 강연회, 토론회, 야학 등의 형식으로 이루어졌으며 특히 농한기인 겨울에 많이 실시되었다. &lt;br /&gt;
&lt;br /&gt;
1920년에는 일제의 식민 지주 경영과 지주 착취로 인해 농민 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고, 이와 맞물려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이 결성되었다. 이때 사회주의 계열 청년 단체와 지식인들이 농촌으로 진출하여 농민 운동을 주도하였다. &lt;br /&gt;
민족주의 계열에서 주도한 농촌 운동은 문맹 퇴치와 생활 개선 등의 계몽적 활동이 중심이었다. 대표적으로 천도교 계열의 농촌 운동, 기독교 계열의 농촌 운동이 있다. 천도교는 1925년 조선농민사를 설립하여 농민 야학을 시행하고 전국적으로 농민에 대한 계몽 활동을 전개하였다. 기독교에서는 1926년 이후 학생 YMCA 농촌부를 중심으로 계몽 활동을 적극 추진하였다. &lt;br /&gt;
&lt;br /&gt;
1920년 후반부터 1930년대에는 언론사 또한 농촌 계몽 운동에 힘을 쏟았다. 대표적으로 1929년부터 1935년까지 이루어진 조선일보사의 문자 보급 운동과 1931년부터 1934년까지 이루어진 동아일보사의 [[브나로드 운동]]이 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이런 농촌 계몽 운동은 1930년대 들어 강화된 조선총독부의 조선어 사용 금지 정책과 지방 농촌의 몰락으로 인해 쇠퇴하였다. 또한, 농촌의 몰락 책임을 수탈 때문이 아닌 농민의 게으름과 무지에 있다며 총독부의 주도로 농촌진흥운동을 진행하며 민간 및 언론 단체의 농촌 계몽 운동을 탄압하였다. 그러나 이런 탄압 속에서도 농촌 계몽 운동은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이러한 민간 교육 활동 및 정책은 해방 이후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문맹 퇴치 운동으로 이어졌다.&lt;br /&gt;
&lt;br /&gt;
[[분류:신다정]]&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민립 대학 설립 운동===&lt;br /&gt;
&lt;br /&gt;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은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1920년대 이루어진 민족 사학 설립 운동&amp;lt;/span&amp;gt;이다.&lt;br /&gt;
&lt;br /&gt;
1920년대 초 식민지 조선에서는 민중의 자발적인 참여하에 조선인을 위한 대학을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등장하였다. 민립 대학 설립에 대한 논의는 1920년 6월 20일 한규설, 이상재, 윤치소 등 91년의 발기로 조선교육회 발기회가 개최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가 학회령을 토대로 1922년 1월 24일까지 인가를 내주지 않아 민립대학 설립에 대한 결의를 실행시키지 못했다. &lt;br /&gt;
&lt;br /&gt;
동아일보에 기고된 사설을 통해 당시의 독립을 위한 교육 계몽의 필요성과, 관립 대학과 다르게 민립 대학의 설립 필요성에 관해 확인할 수 있다. &lt;br /&gt;
&lt;br /&gt;
{{Blockquote|운명을 어떻게 개척할까. 정치냐 외교냐 산업이냐. 물론 이러한 일들 모두 다 필요하다. 그러나 그 기초가 되고 요건이 되며 가장 급무가 되고 가장 선결의 필요가 있으며 가장 힘 있고 '''가장 필요한 수단은 교육이 아니면 할 수 없다.''' &amp;lt;br /&amp;gt; … 물론 관립대학도 조만간 개교될 것이기에 대학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학문 발전의 장래는 결코 1개의 대학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요, 또한 '''그처럼 중대한 사업을 우리 민중이 직접으로 영위하는 것은 차라리 우리의 의무라 할 수 있다.''' &amp;lt;br /&amp;gt;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에 느낀 바 있어 감히 만천하 동포에게 향하여 민립대학의 설립을 제창하니 자매형제는 와서 돕고 나아가 이루어라.'''&lt;br /&gt;
|출처= 「開會된 民大總會」, 『동아일보』, 1923년 3월 30일자.}}&lt;br /&gt;
&lt;br /&gt;
이렇게 고양된 민립 대학 설립을 통한 민족 교육에 대한 필요성을 바탕으로, 1922년 1월 이상재, 이승훈, 윤치호, 김성수, 송진우 등이 조선민립대학기성준비회를 정식으로 결성하였다. 이어 1923년 3월 29일 발기인 1170명 중 462명이 참석한 가운데 3일간 총회를 개최하였다. &lt;br /&gt;
&lt;br /&gt;
총회에서는 ＇민립대학발기취지서＇를 채택하고 대학 설립 계획서를 확정하였다. 계획서에 따르면 3개년 계획으로 자본금 1000만원을 갹출하는데, 제 1차 연도에는 대지 5만 평을 구입하여 교실 10동, 대강당 1동을 건축하고, 법과/경제과/문과/이과의 4개 대학 및 예과를 설치하며, 제2차 연도에는 300만원으로 공과/이과/기타 학과를 증설하고, 제3차 연도에는 300만원으로 의과/농과를 설치한다는 것이다. 또 중앙집행위원회를 구성하고 지방에 지방부를 두기로 결의하였다. 별도로 지방순회선정위원 13평을 선정하고 파견하였다. 이와 같은 노력을 토대로 1923년 말까지 전국 100여 개소와 해외의 만주 간도, 봉천, 미국 하와이 등지에도 지방부가 조직되었다. &lt;br /&gt;
&lt;br /&gt;
기성회는 ＇한민족 1000만 한 사람 1원씩＇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기금 모금에 나섰다. 이런 모금 활동에 민족 교육을 성원하는 마음들이 모였는데, 대표적으로 전라남북도에서만 15만원이 모금되었으며 경기도 안성의 이정도는 1년 동안 매일 아침 밥짓는 쌀에서 식구 수 대로 한 숟가락씩 모아 판 돈 19원을 기부하는 등 일반 민간에서의 성원도 뜨거웠다. &lt;br /&gt;
&lt;br /&gt;
이와 같은 열기에 일제는 이를 교육 운동이 아니라 정치 운동이라고 판단하고 탄압하였다. ＇조선교육령＇을 개정하여 관립 경성제국대학의 설립을 서두르고 민립대학과 관련 있는 인사들에 대한 탄압과 기금 갹출 방해 공작을 전개하였다. 민립대학기성회 인사들을 민족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구실로 철저히 감시하고, 기금 모집을 위해 박차를 가하던 인사들의 지방 강연을 배일사상을 고취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강연 중지를 명하고 청중을 해산시켰다. &lt;br /&gt;
&lt;br /&gt;
이러한 조선총독부의 탄압이 민립대학 설립운동의 실패의 주된 원인이 되었다. 1923년 여름 수재, 9월 일본 관동 대지진으로 인한 경제 공황, 1924년 한재와 7월 전국적 수재로 인한 농촌 경제 파탄 등 자연적인 여건도 민립대학 설립운동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그러나 3.1운동 이후 전 민족이 민족 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조직체를 형성하여 교육을 통한 자주독립이라는 하나의 목표에서 단결을 보였다. 이는 이후의 민족운동 양상에서 조직적인 단체 결성의 표본이 되었다.&lt;br /&gt;
&lt;br /&gt;
[[분류:신다정]]&lt;br /&gt;
&lt;br /&gt;
=='''군사 교육'''==&lt;br /&gt;
&lt;br /&gt;
독립운동사에서 민중 계몽을 위한 교육 운동이 함께해왔지만,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군사교육도 꾸준히 이어져왔다. 독립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역량은 역시 군사였기 때문에, 군사교육은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였으며, 이에 따라 수많은 독립열사들은 무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활발한 활동을 이어왔다.  따라서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에서도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이 나타났다. 본 위키에서는 잘 다뤄지지 못했던 국외에 설립된 군사교육기관을 다뤄보고자 한다. &lt;br /&gt;
&lt;br /&gt;
[[분류:이민희]]&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lt;br /&gt;
신흥무관학교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위해 설립된 군사학교로, 독립군 양성과 무장 투쟁 기반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911년 중국 만주 서간도 지역(현재의 지린성 류허현)에서 이회영, 이시영 등 독립운동가들이 설립했으며, 군사 지도자를 양성하고 실질적인 무장 독립운동을 준비하는 데 목적을 두었습니다. &lt;br /&gt;
&lt;br /&gt;
교육 내용은 사격, 전술, 지형 분석 등 실전 중심의 군사훈련과 함께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역사 및 애국사상 교육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졸업생들은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전투 같은 독립전쟁에서 활약하며 독립운동의 주축이 되었고, 김좌진과 이범석 같은 지도자를 배출했습니다. &lt;br /&gt;
&lt;br /&gt;
1920년대에 들어 일본의 탄압이 강화되면서 학교 운영이 점차 어려워졌고, 졸업생들이 각종 독립운동 조직으로 흩어지면서 신흥무관학교는 군사훈련소 형태로 전환되다가 결국 해체되었습니다. &lt;br /&gt;
&lt;br /&gt;
졸업생들은 만주 지역에서 서로군정서, [[북로군정서]]에서 핵심 간부로 활약, [[대한독립군]], 통의부의용군, 정의부, 신민부, 국민부 등에서 활동하였고,중국 본토에서는 1919년 11월 길림에서 의열단 결성,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에서 독립운동 전개했습니다.&lt;br /&gt;
&lt;br /&gt;
신흥무관학교는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군사교육 기관으로 평가받습니다. 이 학교는 독립군의 전투력을 강화하고, 독립운동의 실질적 기반을 마련했으며, 한국 독립운동의 전환점이 된 여러 전투에서 큰 공헌을 했습니다.&lt;br /&gt;
&lt;br /&gt;
[[분류:최용빈]]&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조선혁명간부학교]]===&lt;br /&gt;
&lt;br /&gt;
1919년 조직된 무장독립운동단체 의열단은 중국국민당과의 합작을 통해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실질적인 군사 교육 기관'''&amp;lt;/span&amp;gt;을 설립하고자 노력했다. 이에 따라 [[장제스]]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의열단&amp;lt;ref&amp;gt; 급진적인 항일 투쟁을 목적으로 1919년 11월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로, 김원봉(金元鳳)이 단장을 맡았다. &amp;lt;/ref&amp;gt;의 단장인 김원봉이 1932년 중국 난징에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설립하였다. 공식 명칭은 사실 조선혁명간부학교가 아닌, ''‘중국국민당 군사위원회 간부 훈련반 제6대’''로, 국민당의 단기간부훈련소 신설반인 것처럼 위장했다. &lt;br /&gt;
&lt;br /&gt;
&lt;br /&gt;
학교는 일본과 중국의 외교관계를 고려해 학교 운영 사실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설립 초기에는 중국 외교부와 육군참모본부, 심지어 군사위원회 판공청 당사자들조차 그 존재를 모를 정도였다. 만 3년간 운영된 조선혁명간부학교는 3기에 걸쳐 총 125명의 인재를 배출했다. 국민당은 그동안 매월 경상비 2,000~3,000원·수시 필요경비 1,000~1만 원·기타 운영비 400~1,000원 등 각종 운영자금 전액과 화기·탄약·피복 등을 지원했다. 학생들은 군사학뿐 아니라 별도 신설된 정치학, 자연과학을 포함해 경제학·사회학·철학·혁명학·물리학·화학·지리학까지 다양한 학문을 공부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혁명간부학교의 졸업생들은 이후 민족혁명당의 항일투쟁체계에 편입되었으며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대]]의 핵심 세력으로 성장하였고, 일부는 화북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에 가담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단체문서한국광복군.jpg|섬네일|가운데|''&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한국 광복군의 모습&amp;lt;/div&amp;gt;'']] &lt;br /&gt;
[[파일:조선의용대김원봉.jpg|섬네일|가운데|''&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조선의용대 모습 &amp;lt;/div&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amp;lt;font color=&amp;quot;#8c8c8c&amp;quot;&amp;gt;조선의용대 깃발 가운데 있는 인물이 약산 김원봉이다.&amp;lt;/font&amp;gt;''&amp;lt;ref&amp;gt;김삼웅, &amp;quot;최후까지 총을 든 조선의용대와 김원봉&amp;quot;, 오마이뉴스, 2024.02.06.,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999602 (검색일:2024년 12월 4일)&amp;lt;/ref&amp;gt;&amp;lt;/div&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이민희]]&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한인소년병학교]]===&lt;br /&gt;
&lt;br /&gt;
한인소년병학교는 장기적인 독립 투쟁을 대비하여 군사 교육을 받은 장교를 양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박용만에 의해 설립되었다. 한인소년병학교는 1909년 6월에 세워진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최초의 국외 설립 군사학교''&amp;lt;/span&amp;gt;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으며, 각지의 군사운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lt;br /&gt;
&lt;br /&gt;
&lt;br /&gt;
한인소년병학교는 미국의 헤이스팅스(Hastins) 대학과 교섭하여 운영되었으며, 네브라스카 주에서 설립되었으나 교섭에 따라 헤이스팅스로 이전하여 한인 유학생의 활발한 참여를 이끌어냈다. 헤이스팅스 대학은 건물 한 동과 전장을 지원하여, [[둔전병제]]식 훈련을 실시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헤이스팅스대학.png|섬네일|가운데|''&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헤이스팅스 대학의 모습 &amp;lt;/div&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amp;lt;font color=&amp;quot;#8c8c8c&amp;quot;&amp;gt;한인소년병학교 학생들이 훈련했던 헤이스팅스 대학의 사진이다.&amp;lt;/font&amp;gt;''&amp;lt;/div&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ftzi6pFWzNc?si=iGbjmKk9yPuAn_Ub&amp;quot; title=&amp;quot;YouTube video player&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div&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다음의 영상에서 한인소년병학교가 있었던 헤이스팅스 대학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다.'' &amp;lt;/div&amp;gt;&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lt;br /&gt;
&lt;br /&gt;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는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한 박용만이 미국의 하와이에도 같은 군사 훈련 단체를 설립하고자 하여 1914년 4월 15일 설립되었다. 당시 학도 수는 200여명으로 군단장 역시 박용만이 맡았다. &lt;br /&gt;
&lt;br /&gt;
&lt;br /&gt;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는 [[한인소년병학교]]를 계승하여 [[둔전병제]]식 훈련을 실시하였고, 군영이 호놀룰루 시의 동북 쪽 큰 산을 넘어 해안과 아후이마누 강을 낀 계곡에 위치하여 ''&amp;quot;산 넘어 아희들&amp;quot;''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lt;br /&gt;
하와이에서 군단과 사관학교를 설치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으나, 1916년을 고비로 점차 쇠퇴하여 1917년 경 해체되었고, 지역으로 흩어져 사실상 폐교되었다.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는 제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미일(美日) 간 우호관계가 지속되면서 국민군단의 혁명적이고 군사적인 성격이 하와이 내에서 우호적인 반응을 얻지 못하였고, 이외에도 하와이 내 농장의 불경기로 수입이 급감하면서 재정 조달이 어려웠으며 1915년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의 실권이 이승만 측에 넘어가 박용만의 활동 범위가 위축된 점 등으로 인해 폐교되었다고 추측되고 있다.&lt;br /&gt;
&lt;br /&gt;
[[분류: 이민희]]&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숭무학교(崇武學校)]]===&lt;br /&gt;
숭무학교는 1910년대 멕시코로 이주한 한인들이 일제강점기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한 군사학교입니다. 멕시코에 이주한 한인들은 고된 노동 속에서도 민족 독립의 열망을 잃지 않고 독립운동을 조직적으로 지원하고자 노력했습니다. 1915년 멕시코 유카탄주 메리다 지역에서 설립된 숭무학교는 독립군 양성을 목표로, 체계적인 군사훈련과 애국 사상 교육을 실시했습니다.&lt;br /&gt;
&lt;br /&gt;
이 학교는 멕시코 한인 사회의 독립운동 기반을 강화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특히 숭무학교는 한인들의 단결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멀리 해외에서조차 독립운동을 지속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큽니다. 이러한 활동은 멕시코뿐 아니라 미주 지역의 다른 한인 독립운동 단체에도 영향을 주어 독립운동의 글로벌 네트워크 형성에 기여했습니다.&lt;br /&gt;
&lt;br /&gt;
숭무학교는 해외 독립운동의 독특한 사례로, 한인 이민사와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lt;br /&gt;
&lt;br /&gt;
[[분류:최용빈]]&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독립군으로의 발전===&lt;br /&gt;
&lt;br /&gt;
군사교육을 위해 설립된 다양한 무관학교를 기점으로, 졸업생들은 각기 다른 곳에서 독립군으로 발전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의 경우, 졸업생들은 만주 지역에서 서로군정서, 북로군정서에서 핵심 간부로 활약했을 뿐 아니라, 대한독립군,통의부의용군, 정의부, 신민부, 국민부 등에서 활동하였다. 또한, 중국 본토의 경우에서는 1919년 11월 길림에서 의열단을 결성하기도 하고, 임시정부 산하의 광복군인 한국광복군의 일원으로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졸업한 졸업생들도 독립군으로서 활약하였다. 이들은 민족혁명당의 항일투쟁체계에 편입되었는데, 대표적으로 임시정부 산하의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대의 핵심 세력으로 성장했고, 일부는 화북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에 가담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한인소년병학교]]와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 숭무학교를 졸업한 졸업생들도 독립군으로 발전하였으나, 구체적으로 어떤 기관으로 발전하였는지는 크게 알려진 바가 없다. &lt;br /&gt;
&lt;br /&gt;
[[숭무학교(崇武學校)]]는 일부 학생들은 멕시코 혁명에 참여하기 위해 군에 입대하였다.  일부 설립자들은 과테말라 혁명에 참여하려 했으나 실패로 끝났다.&lt;br /&gt;
&lt;br /&gt;
[[분류: 이민희]]&lt;br /&gt;
&lt;br /&gt;
==데이터 시각화==&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마인드맵===&lt;br /&gt;
[[파일:교육구국운동_노드_마인드맵.png|500픽셀]]&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온톨로지===&lt;br /&gt;
인물의 경우 관련 공훈전자사료관,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인명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의 관련 링크를 삽입하여 추가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하였다.&lt;br /&gt;
{{NetworkGraph | title=교육구국운동.lst}}&lt;br /&gt;
&lt;br /&gt;
[[분류:신다정]]&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콘텐츠 구조===&lt;br /&gt;
====클래스(Class)====&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width:100%;&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0%&amp;quot;| 클래스|| style=&amp;quot;width:10%&amp;quot;|모양|| style=&amp;quot;width:20%&amp;quot;|내용 ||노드 &lt;br /&gt;
|-&lt;br /&gt;
|인물 ||인물의 사진 || 독립운동사에서 교육 운동에 이바지하였던 인물을 포함한 다양한 독립운동가들을 인물로서 클래스로 설정했다. || [[이동휘]] '''[[안창호(安昌浩)]]''' [[김원봉]] '''[[장제스]]''' 박용만 이갑성 스코필드 유기준 [[주시경]] [[지청천]] [[여운형]] 차미리사 김명시 남궁억 [[이동녕]] 이용익 김성수 신해영 [[강기덕]] 손병희 [[방정환]] 이종호 윤익선 염온동 주익 이세영 고종 순헌황귀비 박자혜 신채호 김종진 이정숙 이회영 김구 이석영 이상룡 윤기섭 이근영 한성순 양귀선 조병하 서문경 윤을희 이시영 박선봉 조금옥 '''[[양기탁(梁起鐸)]]''' [[이강]] [[전덕기]]&lt;br /&gt;
|-&lt;br /&gt;
|기관 || 빨간색 상자|| 부지를 두고 설치하여 활동했던 조직을 기관으로 설정했다. ||연희전문학교 세브란스 배재학당 배화학당 보성전문학교 명신여학교 '''[[한인소년병학교]]''' 대조선국민군단사관학교 '''[[조선혁명간부학교]]''' 신흥무관학교 숭무학교 신흥강습소 동아일보&lt;br /&gt;
|-&lt;br /&gt;
|단체 || 파란색 원 ||기관보다 넓은 의미로서, 같은 뜻을 가지고 함께 활동했던 조직체를 단체로 설정했다. || '''[[신민회(新民會)]]''', 협성회, 독립협회, '''[[한국광복군]]''', '''[[조선의용대]]''', 조선의용군, 화북조선독립동맹, 대한민국임시정부, 간우회, 조선어학회, 대한인국민회&lt;br /&gt;
|-&lt;br /&gt;
|지역 || 초록색 타원|| 각 기관과 단체가 위치하거나 기관이나 단체, 인물이 활동했던 곳을 지역으로서 클래스를 설정했다. || 미국, 한반도, 난징, 멕시코, 캐나다, 상해, 만주, 중국&lt;br /&gt;
|-&lt;br /&gt;
|활동_및_사건 || 분홍색 타원 ||각 기관이나 단체, 인물의 행동 및 사건을 묶어 활동_및_사건의 클래스를 설정했다. || '''[[브나로드 운동]]''', 민립대학 설립 운동, 3.1운동, 6.10 학생 만세운동, 1920년 3.1 학생 운동, 서울 지역 학생 독립운동&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신다정]]&lt;br /&gt;
&lt;br /&gt;
====관계성(Relation)====&lt;br /&gt;
&lt;br /&gt;
'''인물 중심 관계성 설정''' &lt;br /&gt;
* '''설립했다''' 인물 → 기관, 단체 : 기관 또는 단체의 설립에 기여함을 설명하는 relation이다. &lt;br /&gt;
* '''지원했다''' 인물 → 기관, 단체, 활동 및 사건 : 단체, 기관, 활동 및 사건을 직접적으로 주도한 것은 아니나 보조적으로 지원했음을 설명하는 relation이다. 단체의 활동이나 기관의 설립 및 활동, 활동 및 사건의 전개의 지원을 모두 포괄하는 설명이다. &lt;br /&gt;
* '''출신이다''' 인물 → 기관, 단체, 지역 : 인물이 기관, 단체, 나라의 출신임을 나타내는 relation이다. 지역의 경우, 해당 인물의 국적을 의미하며 외국인의 경우에만 해당 relation을 사용해 국적을 나타냈다. &lt;br /&gt;
* '''활동했다''' 인물 → 활동 및 사건 : 인물이 특정 활동 및 사건에 주도적으로 활동했음을 나타내는 relation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기관 중심 관계성 설정'''&lt;br /&gt;
* '''소속이다''' 기관, 단체 → 인물 : 인물이 기관의 소속임을 나타내는 relation이다. 기관의 경우 교육기관을 주로 다루기 때문에, 교육기관에 재학하였던 경우에는 '출신이다.' relation을 사용하였고 교직원 등으로 재직한 경우에는 해당 relation을 사용하여 구분하였다. &lt;br /&gt;
* '''위치하다''' 기관→지역 : 기관이 특정 지역에 위치하였음을 나타내는 relation이다. 위치를 옮긴 기관의 경우 위치했던 지역에 모두 해당 relation을 사용하여 연결했다. &lt;br /&gt;
* '''발전했다''' 기관, 단체 → 기관, 단체 : 특정 기관 및 단체가 다른 기관 및 단체로 발전함을 설명하는 relation이다.  &lt;br /&gt;
* '''계승했다''' 기관, 단체 → 기관, 단체 : 기관 및 단체가 다른 기관 및 단체로 계승함을 설명하는 relation이다. 계승한 쪽을 종속 노드로 설정하였으나, 화살표 방향을 inverse로 설정해 '발전했다.' relation과 차이를 두었다.&lt;br /&gt;
&lt;br /&gt;
====온톨로지 기여====&lt;br /&gt;
[[김윤]]&amp;lt;br/&amp;gt;&lt;br /&gt;
[[신다정]]: 온톨로지 리스트 생성, 전반적인 온톨로지 코드 작성, 클래스 지정 및 설명, 릴레이션 지정 및 설명, 민간 단체의 애국 계몽 운동 관련 노드 및 관계성 정리, 인물 사진 삽입, 온톨로지 화살표 지정 &amp;lt;br/&amp;gt;&lt;br /&gt;
[[이민희]]: 군사교육 중 조선혁명간부학교, 한인소년병학교,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 관련 노드 및 관계성 정리, 인물 사진 삽입, 클래스 표에서 클래스 별 설명 작성 &amp;lt;br/&amp;gt;&lt;br /&gt;
[[최용빈]]&amp;lt;br/&amp;gt;&lt;br /&gt;
[[헤르미온느]]: 민족사학 관련 노드 및 관계성 정리, 인물 사진 삽입, 노드 색 및 모양 지정, 인물 하이퍼링크&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교육기관 지도&amp;lt;ref&amp;gt;가급적 최초 설립 위치를 기준으로 작성하였지만 초기 설립 시 다른 학교의 교사에 있다 교사를 이전한 경우 해당 위치로 표기함.&amp;lt;/ref&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src=&amp;quot;https://www.google.com/maps/d/embed?mid=1cI0D_B0oG-xrdk5kcPVCnLJ2hJpOJZw&amp;amp;ehbc=2E312F&amp;quot; width=&amp;quot;640&amp;quot; height=&amp;quot;480&amp;quot;&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기타==&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참고문헌===&lt;br /&gt;
1. 민족사학 발전과정 연대기 설명 내용&lt;br /&gt;
*「원산학사 (元山學舍)」,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0700, 접속일: 2024. 12. 9.&lt;br /&gt;
*「흥화학교(興化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6074, 접속일: 2024. 12. 9.&lt;br /&gt;
*「중교의숙(中橋義塾)」,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3699, 접속일: 2024. 12. 9.&lt;br /&gt;
*「순성학교 (順成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1901, 접속일: 2024. 12. 9.&lt;br /&gt;
*「점진학교(漸進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9857, 접속일: 2024. 12. 9.&lt;br /&gt;
*「낙연의숙(落淵義塾)」,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1639, 접속일: 2024. 12. 9.&lt;br /&gt;
&lt;br /&gt;
*「한성법학교(漢城法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426, 접속일: 2024. 12. 9.&lt;br /&gt;
&lt;br /&gt;
*「양정고등학교 (養正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731, 접속일: 2024. 12. 9.&lt;br /&gt;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3433, 접속일: 2024. 12. 9.&lt;br /&gt;
*「보창학교(普昌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3546, 접속일: 2024. 12. 9.&lt;br /&gt;
*「서전서숙 (瑞甸書塾)」,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8159, 접속일: 2024. 12. 9.&lt;br /&gt;
*「진명여자고등학교 (進明女子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4673, 접속일: 2024. 12. 9.&lt;br /&gt;
*「중동고등학교 (中東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3729, 접속일: 2024. 12. 9.&lt;br /&gt;
*「휘문고등학교 (徽文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5832, 접속일: 2024. 12. 9.&lt;br /&gt;
*「숙명여자대학교 (淑明女子大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1800, 접속일: 2024. 12. 9.&lt;br /&gt;
*「숙명여자고등학교 (淑明女子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1799, 접속일: 2024. 12. 9.&lt;br /&gt;
*「양규의숙(養閨義塾)」,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426, 접속일: 2024. 12. 9.&lt;br /&gt;
*「서북협성학교 (西北協成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7788, 접속일: 2024. 12. 9.&lt;br /&gt;
*「사범학교 (師範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5642, 접속일: 2024. 12. 9.&lt;br /&gt;
*「대성학교(大成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4519, 접속일: 2024. 12. 9.&lt;br /&gt;
*「협동학교(協東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3491, 접속일: 2024. 12. 9.&lt;br /&gt;
*「동성고등학교 (東星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6589, 접속일: 2024. 12. 9.&lt;br /&gt;
*「장훈고등학교 (長薰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8403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8403, 접속일: 2024. 12. 9.&lt;br /&gt;
*「오산고등학교 (五山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8302, 접속일: 2024. 12. 9.&lt;br /&gt;
*「치문초등학교 (致文初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8358, 접속일: 2024. 12. 9.&lt;br /&gt;
*「명동학교(明東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8242, 접속일: 2024. 12. 9.&lt;br /&gt;
*「양원여학교(養原女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687, 접속일: 2024. 12. 9.&lt;br /&gt;
*「보인학교(輔仁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426, 접속일: 2024. 12. 9.&lt;br /&gt;
*「기호학교(畿湖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426, 접속일: 2024. 12. 9.&lt;br /&gt;
*「양산중학교(楊山中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426, 접속일: 2024. 12. 9.&lt;br /&gt;
*「서북협성학교(西北協成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426, 접속일: 2024. 12. 9.&lt;br /&gt;
&lt;br /&gt;
2. 민간단체의 교육 구국 운동&lt;br /&gt;
* 한관일. &amp;quot;한국 개화기 신민회의 교육구국 사상.&amp;quot; 교육과학연구 14.- (2000): 1-32.&lt;br /&gt;
*「민립대학 설립운동」,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i401900&amp;amp;code=kc_age_40, 접속일: 2024. 12. 9.&lt;br /&gt;
&lt;br /&gt;
5. 군사교육 중 조선혁명간부학교, 한인소년병학교,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lt;br /&gt;
* 「조선혁명간부학교 (朝鮮革命幹部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2266 (검색일: 2024년 11월 30일).&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김세광 (金世光)」,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3831 (검색일: 2024년 12월 2일).&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신악 (申岳)」,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3817 (검색일: 2024년 12월 2일).&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왕통 (王通)」,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3818 (검색일: 2024년 12월 2일).&lt;br /&gt;
* 김광재,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의 결성과 활동」,  『독립기념관』, https://www.i815.or.kr/upload/kr/magazine/magazine/83/post-919.html (검색일: 2024년 12월 2일)&lt;br /&gt;
* 심용환, 「교육, 어둠을 밝힌 등불이 되다」,  『독립기념관』, https://www.i815.or.kr/upload/kr/magazine/magazine/4/post-38.html (검색일: 2024년 12월 2일)&lt;br /&gt;
* 밀양독립운동기념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밀양독립운동기념관』, http://www.miryang815.or.kr/bbs/board.php?bo_table=data&amp;amp;wr_id=10 (검색일: 2024년 12월 2일)&lt;br /&gt;
* 「한인소년병학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1902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국사편찬위원회, 「한인소년병학교」,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s://db.history.go.kr/diachronic/level.do?levelId=nh_047_0030_0020_0040_0030_0010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인소년병학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3624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박용만의 소년병학교: 군사적 구국운동」,  『호남人월드』, 2009.05.19, http://www.honaminworld.kr/307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박용만 1881 ~ 1928」,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code=kc_age_40&amp;amp;levelId=kc_n401200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가. 한인소년병학교」, 『국사편찬위원회』, https://db.history.go.kr/diachronic/level.do?levelId=nh_047_0030_0020_0040_0030_0010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한인소년병학교의 교육 과정」, 『국사편찬위원회』, http://contents.history.go.kr/front/nh/print.do?levelId=nh_047_0030_0020_0040_0030_0010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대조선국민군단 (大朝鮮國民軍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4780 (검색일: 2024년 11월 30일).&lt;br /&gt;
&lt;br /&gt;
[[분류:독립운동사의 근간, 교육구국운동(敎育救國運動)]]&lt;/div&gt;</summary>
		<author><name>Matnyeom</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8F%85%EB%A6%BD%EC%9A%B4%EB%8F%99%EC%82%AC%EC%9D%98_%EA%B7%BC%EA%B0%84,_%EA%B5%90%EC%9C%A1%EA%B5%AC%EA%B5%AD%EC%9A%B4%EB%8F%99(%E6%95%8E%E8%82%B2%E6%95%91%E5%9C%8B%E9%81%8B%E5%8B%95)&amp;diff=52548</id>
		<title>독립운동사의 근간, 교육구국운동(敎育救國運動)</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8F%85%EB%A6%BD%EC%9A%B4%EB%8F%99%EC%82%AC%EC%9D%98_%EA%B7%BC%EA%B0%84,_%EA%B5%90%EC%9C%A1%EA%B5%AC%EA%B5%AD%EC%9A%B4%EB%8F%99(%E6%95%8E%E8%82%B2%E6%95%91%E5%9C%8B%E9%81%8B%E5%8B%95)&amp;diff=52548"/>
		<updated>2024-12-21T04:14:5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Matnyeom: /* 온톨로지 기여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개요==&lt;br /&gt;
[[파일:교육구국운동 표지.png|800px|가운데]]&lt;br /&gt;
&lt;br /&gt;
[[분류:신다정]]&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   text-align:center;&amp;quot;&amp;gt;기획의도===&lt;br /&gt;
&lt;br /&gt;
&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width:100%;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quot;&lt;br /&gt;
!| 기획의도&lt;br /&gt;
|-&lt;br /&gt;
| 조선의 독립운동사는 근대교육을 위한 노력과 함께 전개되어 왔다. 교육 운동은 독립 운동의 일환으로서 민중을 계몽하기도 하고, 여성 교육이 발전하여 개화 사상이 유입되기도 했으며, 가장 중요하게도 군사 교육을 통해 민족이 싸울 힘을 기르기도 했다. 우리 민족은 당면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기 위해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고, 배움에 대한 열정으로 일제강점기의 어둠을 헤쳐나갈 수 있었다. 학생들이 독립운동을 생각했을 때 교육을 가장 먼저 떠올리지는 않는 듯하다. 다만, 교육은 독립운동사의 핵심적인 부분을 뒷받침하는 지지대였다. 따라서, '''''우리가 잘 몰랐던 독립운동사에서의 다양한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을 위키 페이지로 만들어 이들의 스토리를 전달''''' 하고자 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이민희]]&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 text-align:center;&amp;quot;&amp;gt;팀원===&lt;br /&gt;
2023130036 김윤&lt;br /&gt;
2023131227 최용빈&lt;br /&gt;
2023131540 정혜나&lt;br /&gt;
2024130814 이민희&lt;br /&gt;
2024130911 신다정&lt;br /&gt;
&lt;br /&gt;
=='''교육구국운동(敎育救國運動)'''==&lt;br /&gt;
한국사에 있어서 개화기는 근대화를 추진하는 시기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개화기 교육은 종래 유학 경전 중심의 교육에서 탈피하여 신교육을 시작하는 전환기로 교육사적 의미가 있는 중요한 시기이다. 한국개화기 근대교육의 발전과정은 1880년대에서 1890년대까지 짧은 기간에 많은 변화와 개혁을 거듭하는 시기이다. 국가적으로 열강의 침략을 극복하고 신문화를 받아들여 개명하는 변혁기로 신교육 정착시키는 동시에 국권회복을 위한 교육구국운동을 통하여 민족독립을 전개하는 시기이다. &lt;br /&gt;
&lt;br /&gt;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 이후 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고 일본 통감부가 설치되어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 시기의 개화파를 계승한 애국계몽사상가들은 국권회복을 위해서는 자강지술을 고취하고, 실력을 배양하는 것이 선결과제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이것을 위해 청소년 교육, 민족산업의 육성, 각종 단체에 대한 단결 그리고 신교육을 위한 학교설립 등 광범위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를 교율(敎育)을 통해 나라를 구한다(救國)는 의미의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교육구국운동'''&amp;lt;/span&amp;gt;이라고 칭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신다정]] &lt;br /&gt;
&lt;br /&gt;
==교육기관 설립==&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민족설립 교육기관===&lt;br /&gt;
====민족사학의 의미 ====&lt;br /&gt;
'''1. 민족사학의 정의:''' 우리 민족이 설립한 교육 기관&amp;lt;br/&amp;gt;&lt;br /&gt;
본 위키 페이지에서는 민족사학(民族私學)을 '''외세나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교육기관과 구분되는 것'''으로서, 교육구국운동의 일환으로 일제강점기 전후에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우리 민족이 개인이나 사법인으로서 설립하여 경영하는 학교&amp;lt;/span&amp;gt;로 정의한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2. 민족사학의 정신 및 목적:''' 개화와 교육구국&amp;lt;br/&amp;gt;&lt;br /&gt;
민족사학의 정신과 목적은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개화&amp;lt;/span&amp;gt;와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교육구국&amp;lt;/span&amp;gt;으로 크게 두 가지 방향이 있다. 초기의 민족사학 설립 정신은 '''선진외국의 문화와 문물'''을 받아들여 나라를 개화하고 발전시키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었으나,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乙巳勒約)&amp;lt;ref&amp;gt;대한 제국 광무 9년(1905)에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기 위하여 강제적으로 맺은 조약. 고종 황제가 끝까지 재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인 무효의 조약이다.(표준국어대사전 정의)&amp;lt;/ref&amp;gt; 이후 '''교육 구국을 위한 인재 양성'''이란 민족적 희망에 기반하였다.&lt;br /&gt;
&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민족사학의 발전배경====&lt;br /&gt;
당시 개화파를 비롯한 다수 지식인은 나라를 진흥시키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함을 느끼고 있었다.&amp;lt;br/&amp;gt;&lt;br /&gt;
이와 같은 지식인들의 의식은 서재필이 『한국휘보(Korean Repository)』에 기고한 다음 글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amp;lt;br/&amp;gt;&lt;br /&gt;
{{Blockquote|정부는 국민의 실정을 알아야 하고 국민들은 정부의 목적을 알아야 한다. 정부와 국민 상호간의 이해를 갖도록 하기 위해서는 쌍방에 대한 교육뿐이다 … 교육 없이는 국민들이 정부의 좋은 의도를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교육 없이는 정부 관리들이 결코 좋은 법률을 만들지 못할 것이다.&lt;br /&gt;
|출처=서재필, 「오늘날 한국이 가장 필요로 하는 일」(What Korea needs most), 『한국휘보(Korean Repository)』, 1896.3.}}&amp;lt;br/&amp;gt;&lt;br /&gt;
&lt;br /&gt;
이러한 의식은 독립협회에서 발간한 『독립신문』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amp;lt;br/&amp;gt;&lt;br /&gt;
{{Blockquote|'''문명개화한 나라들에서들은 무론 남녀하고 학교에 가서 적어도 10년 동안에 각색 학문을 배운 후 비로소 세상에 나가''' … 조선 사람들은 겨우 배우는 것이 한문만 조금 배워 가지고 … 일본 같은 조그마한 나라가 싸움을 하여서 청국 병정 무찌르기를 풀 베는 것 같이 하고, 일본도 30년 전 같으면 나라 형세가 청국과 똑같았으니, 어찌 조그마한 나라가 청국 같은 큰 나라를 이기리오마는, 일본 사람들이 서양 각국이 부강한 곡절을 알고 곧 백성 교육하는 일을 힘써 … 당장에 적은 리(利)와 욕심을 내버리고 '''인민 교육하여 몇 해 후에는 조선도 남과 같이 되기를 바라노라'''&lt;br /&gt;
|출처=「논설」,『독립신문』1896년 4월 25일자.}}&amp;lt;br/&amp;gt;&lt;br /&gt;
위의 글들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이러한 지식인들의 자각이 민족사학 설립의 배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민족사학의 발전과정 ====&lt;br /&gt;
1800년대 후반부터 1910년 이전까지 주요 민족 주도로 설립된 교육기관의 설립 과정을 정리&amp;lt;ref&amp;gt;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민족독립운동사 국권수호운동Ⅱ Ⅳ. 국권수호를 위한 사회·문화운동 6. 사립학교의 구국운동 3) 민립학교 설립의 주체(https://db.history.go.kr/modern/level.do?levelId=hdsr_002_0010_0060_0030)의 데이터에 기반하여 자료 조사를 진행하였다. 자료조사를 통해 설립 연도가 일부 수정되었다.&amp;lt;/ref&amp;gt;하였다.&amp;lt;br/&amp;gt;&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xpvhRvJrqO8QmhwtXtUZhPRbrWskR7CqqsrToNpIPRE&amp;amp;font=Default&amp;amp;lang=ko&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amp;lt;br/&amp;gt;&lt;br /&gt;
이와 같이 1905년 이전에는 개화 및 신교육 도입 목적으로 1905년 이후에는 인재양성을 통한 교육구국을 목적으로 많은 교육기관이 설립되었다.&lt;br /&gt;
&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대표적 민족설립 교육기관====&lt;br /&gt;
아래의 표에서는 대표적인 민족설립 교육기관과 그 계승 현황을 정리하였다. &amp;lt;br/&amp;gt;&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hn:left;background:white;&amp;quot;&lt;br /&gt;
|+ [대표적 민족설립 교육 기관&amp;lt;ref&amp;gt;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민족독립운동사 국권수호운동Ⅱ Ⅳ. 국권수호를 위한 사회·문화운동 6. 사립학교의 구국운동 3) 민립학교 설립의 주체(https://db.history.go.kr/modern/level.do?levelId=hdsr_002_0010_0060_0030)의 데이터에 기반하여 자료 조사를 진행하였다. 자료조사를 통해 설립 연도 및 설립자가 일부 수정되었다.&amp;lt;/ref&amp;gt;]&lt;br /&gt;
! 교육기관명 || 설립일 || 설립자 || 계승&lt;br /&gt;
|-&lt;br /&gt;
|원산학교(元山學校) || 1883 || 덕원(德源)의 유지 || 원산소학교, 원산보통학교, 원산제일국민학교로 계승되며 1945년까지 지속됨&lt;br /&gt;
|-&lt;br /&gt;
|흥화학교(興化學校) || 1895. 11. 5. || 민영환(閔泳煥) || 1911년 폐교&lt;br /&gt;
|-&lt;br /&gt;
|중교의숙(中橋義塾) || 1896 || 민영기(閔泳綺) || 1906년 폐교&lt;br /&gt;
|-&lt;br /&gt;
|순성여학교(順成女學校) || 1898.12. || 찬양회(讚揚會) || 1905년 12월 31일 『대한매일신보』기사를 끝으로 신문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음&lt;br /&gt;
|-&lt;br /&gt;
|점진학교(漸進學校) || 1899 || 안창호(安昌浩) || .&lt;br /&gt;
|-&lt;br /&gt;
|낙연의숙(落淵義塾) || 1901 || 서광세(徐光世) || 1916년 폐교&lt;br /&gt;
|-&lt;br /&gt;
|한성법학교(漢城法學校) || 1905. 1. || 사회 유지 || 1905년 9월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가 법률학전문야학과를 신설하여 한성법학교 학생 20명을 인계받음 &amp;lt;ref&amp;gt; https://www.kunews.ac.kr/news/articleView.html?idxno=3765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양정의숙(養正義塾) || 1905. 2. 11. || 엄주익(嚴柱益) || 양정중학교(養正中學校)&lt;br /&gt;
|-&lt;br /&gt;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 1905. 4. 3. || 이용익(李容翊) || '''고려대학교(高麗大學校)'''&lt;br /&gt;
|-&lt;br /&gt;
|보창학교(普昌學校) || 1905. 5. || 이동휘(李東輝) || .&lt;br /&gt;
|-&lt;br /&gt;
|서전서숙(瑞甸書塾) || 1906 || 이상설(李相卨) || 1907년 폐교&lt;br /&gt;
|-&lt;br /&gt;
|진명여학교(進明女學校) || 1906. 4. ||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 진명여자고등학교(進明女子高等學校)&lt;br /&gt;
|-&lt;br /&gt;
|중동학교(中東學校) || 1906. 4. 2. || 신규식(申圭植) || 중동고등학교 (中東高等學校)&lt;br /&gt;
|-&lt;br /&gt;
|휘문의숙(徽文義塾) || 1906. 5. || 민영휘(閔泳徽) || 휘문고등학교(徽文髙等學校)&lt;br /&gt;
|-&lt;br /&gt;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 || 1906. 5. ||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 '''숙명여자대학교(淑明女子大學校)''', 숙명여자중학교(淑明女子中學校), 숙명여자고등학교(淑明女子高等學校)&lt;br /&gt;
|-&lt;br /&gt;
|양규의숙(養閨義塾) || 1906. 6. || 여자교육회(女子敎育會) || .&lt;br /&gt;
|-&lt;br /&gt;
|서우사범학교(西友師範學校) || 1907. 1. || 서우학회(西友學會) || 1908년에 서북협성학교(西北協成學校)로 개편됨&lt;br /&gt;
|-&lt;br /&gt;
|대성학교(大成學校) || 1907 || 안창호(安昌浩) || 1912년 폐교&lt;br /&gt;
|-&lt;br /&gt;
|협동학교(協東學校) || 1907 || 유인식(柳寅植)) || 1917년 폐교&lt;br /&gt;
|-&lt;br /&gt;
|소의학교(昭義學校) || 1907. 9. || 전경현(全景鉉), 민강(閔橿), 장경관(張敬寬) 등 || 동성고등학교 (東星高等學校)&lt;br /&gt;
|-&lt;br /&gt;
|장훈학교(長薰學校) || 1907. 11. 2. ||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 || 장훈고등학교 (長薰高等學校)&lt;br /&gt;
|-&lt;br /&gt;
|오산학교(五山學校) || 1907. 12. || 이승훈(李昇薰) || 오산고등학교 (五山高等學校)&lt;br /&gt;
|-&lt;br /&gt;
|기호학교(畿湖學校) || 1908. 6. 20. ||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 || 융희학교(隆熙學校)를 흡수하여 중앙중학교(中央中學校), 중앙고등학교(中央高等學校)로 발전함&lt;br /&gt;
|-&lt;br /&gt;
|양원여학교(養原女學校) || 1908. 6. || 여자보학원유지회(女子普學院維持會) || .&lt;br /&gt;
|-&lt;br /&gt;
|신명학당(新明學堂) || 1908. 2. || 김장호, 김홍식(金洪植) || 치문초등학교 (致文初等學校)&lt;br /&gt;
|-&lt;br /&gt;
|명동학교(明東學校) || 1908. 4. 27. || 김학연(金學淵) || 1925년 폐교&lt;br /&gt;
|-&lt;br /&gt;
|보인학교(輔仁學校) || 1908. 6. 8. || 보인학회(輔仁學會) || 보인고등학교(輔仁高等學校)&lt;br /&gt;
|-&lt;br /&gt;
|양산중학교(楊山中學校) || 1908. 10. || 김홍량(金鴻亮) ||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이상의 표에서 1910년 국권피탈 이전 설립된 민족설립 교육기관 중 적지 않은 수가 오늘날에도 현존하고 있는 중학교, 고등학교, 또는 대학교로 계승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10년 이후 많은 학교가 폐교 위기에 처한 것을 고려하였을 때, 이러한 계승은 민족설립 교육기관을 유지해 교육을 통해 나라를 구하고자 했던 당시 사람들의 투지와 열망에 대한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보성전문학교와 명신여학교====&lt;br /&gt;
1910년 이전까지 민족 주도로 설립된 교육 기관 중 주요하게 살펴보아야 할 기관으로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와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가 있다. 보성전문학교는 이용익(李容翊)이 고종의 허가 하에 설립하였고, 명신여학교는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의 지원으로 설립되었음을 고려할 때, 모두 황실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사립 교육기관으로 보기는 힘들다는 한계는 존재한다. 그러나, 1910년 이전에 설립된 학교가 폐교의 절차를 밟지 않고 이어져 오늘날까지 계승되었다는 사실이 가지는 의미는 적지 않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1910년 이후 많은 학교가 일제의 강압 아래 폐교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 두 학교의 경우 대부분의 학교가 중등교육기관으로 계승된 것과는 구분되어 '''고등교육기관으로 발전한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나아가, 보성전문학교 설립을 기점으로 '교육 구국'을 목적으로 한 민족 사학의 설립이 활성화되었다는 점과 명신여학교의 경우 민족이 설립한 많지 않은 여성 교육기관 중 하나였다는 점 역시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lt;br /&gt;
보성전문학교는 1905년 04월 03일 고종(高宗)의 재정적 후원을 받아 [[이용익李容翊]]에 의해 설립된 교육기관이다. &amp;lt;br/&amp;gt;&lt;br /&gt;
보성전문학교의 설립 배경은 설립자 이용익의 행보에서 엿볼 수 있다. 친로반일(親露反日)의 뜻 고수한 것과 조선의 중립 선언을 선언하게 한 것으로 인해 일본에 의해 납치된 이용익은 체류 중 일본의 '''근대교육기관 및 개화문물을 접한다'''. 이것이 그의 교육기관 설립의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이후 귀국할 때 '''다수의 도서와 인쇄기를 구매'''하여 가지고 온 점 역시 이러한 추측의 설득력을 높인다. &amp;lt;br/&amp;gt;&lt;br /&gt;
한편, 보성전문학교의 개교를 알리는 황성신문(皇城新聞)의 글에는 보성전문학교 설립이 그 당시에 가졌던 의미가 잘 드러나고 있다. &amp;lt;br/&amp;gt;&lt;br /&gt;
{{Blockquote|전문학교 창설. '''대한에 전문대학교는 아직 세워지지 못했다. 한성법학교(漢城法學校)가 세워졌으나 야학(夜學)이라 완전하지 못했는데, 박동(礴洞)에 신설한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는 위치가 전문대학 주간 학교로''' 대황제폐하께서 특별히 설립하신 바, 매월 수천원의 경비를 내탕전(內帑錢)으로 내려주고 도서관을 부설하여 각 전문 교과서 수천권을 새로 간행한다 한다. 그리고 신해영(申海永)·조제환(趙齊桓)·정영택(鄭永澤) 세 명에게 이상의 사무를 전담하도록 하여, 위 3명은 교육을 열심히 하여 황제의 뜻에 보답하기위해 더욱 극진하게 힘을 쓴다고 한다. 20여명의 교수는 일찍이 일본에 유학하여 졸업한 사람들을 임용하여 (중략) '''2개년 졸업기한이지만 인재를 빨리 양성하도록''' 황제의 뜻을 특별히 내리셨다하고, 오늘부터 개교한다고 한다.&lt;br /&gt;
|출처=『황성신문(皇城新聞)』 1905년 4월 1일자 2면. 현대어역: 고려대학교 도서관&amp;lt;ref&amp;gt;https://library.korea.ac.kr/datause/archiving/old-book-exhibition/release/?mod=document&amp;amp;uid=10653&amp;lt;/ref&amp;gt;}}&lt;br /&gt;
윗글에서 당시 대한제국에 중등교육기관은 존재했음에도 고등교육을 위한 기관은 야학의 형태로서만 존재하여 온전하지 못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당시 상황 속에서 이용익이 일본의 교육 현황을 접한 후 대한제국 고등교육기관의 필요성을 느껴 설립하려 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고등교육기관 설립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맞춰 등장한 학교라는 점에서 보성전문학교가 가지는 가치는 매우 크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1910년 이후 다른 학교와 마찬가지로 보성전문학교는 운영진 및 교장의 망명, 투옥과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운영난을 겪는 등 각종 수난을 겪는다. 이후 일제의 탄압 아래 격하되거나 교명을 바꾸고 학과 설립이 제한되는 등 여러 차례 존속의 고비를 넘긴다. 하지만 끊임없는 노력을 바탕으로 1921년 전문학교로 다시 승격되었으며 여러 위기를 거친 끝에 해방 후 고려대학교로 발족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lt;br /&gt;
명신여학교는 1906년 5월 22일 고종(高宗)의 후궁인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의 지원으로 왕실 별궁 용동궁에 설립된 교육기관이다. &amp;lt;br/&amp;gt;&lt;br /&gt;
순헌황귀비는 본디 교육, 특히 여성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명신여학교의 설립에 앞서 1906년 4월에 진명여학교(進明女學校)를, 1907년에 경영난에 처해 있던 양정의숙(養正義塾)을 도운 점에서 잘 드러난다. &amp;lt;br/&amp;gt;&lt;br /&gt;
한편, 당시 여성 교육 관련 배경은 다음과 같다. 앞서 기술된 바와 같이 1905년 을사늑약 전후로 교육구국이 일어나 전국 각지에서 민족사학이 설립되었으나 여성을 위한 교육기관은 부족한 실태였다. 당시 설립된 여성 교육기관으로는 이화학당, 정신여학교, 숭의학교 등이 있었으나 이는 모두 선교사, 즉 민족에 의해 설립된 학교가 아니었다.&amp;lt;ref&amp;gt;한희숙, 구한말 순헌황귀비 엄비의 생애와 활동, 아시아여성연구, 숙명여자대학교 아시아여성연구원, 제45집 2호, 2006&amp;lt;/ref&amp;gt;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여성 교육기관의 필요'''를 절감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 것은 순헌황귀비의 시대적 통찰력을 반영하는 부분이다. &amp;lt;br/&amp;gt;&lt;br /&gt;
위와 같은 순헌황귀비의 설립 목적은 대한매일신보의 글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amp;lt;br/&amp;gt;&lt;br /&gt;
{{Blockquote|황귀비 흥학:  황귀비 전하께오서 여자 교육이 없음을 크게 걱정하여 육군참장 엄주익씨 집(第)에 여학교를 설립하여 '''여자교육을 발달시키고자''' 하였다.  엄주익에게 학교 설립 일을 전담하게 하시니 '''대한여자의 교육이 앞으로 발달하기를''' 가히 볼 수 있을 지로다. &lt;br /&gt;
|출처=『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6년 4월 24일자&amp;lt;ref&amp;gt;한희숙, 구한말 순헌황귀비 엄비의 생애와 활동, 아시아여성연구, 숙명여자대학교 아시아여성연구원, 제45집 2호, 2006, 227쪽.&amp;lt;/ref&amp;gt;}}&lt;br /&gt;
광복 후 명신여학교는 숙명여자중학교(淑明女子中學校)와 숙명여자고등학교(淑明女子高等學校)로 이어졌다. 나아가, 여성 고등교육기관의 설립을 꿈꾼 교장 이정숙(李貞淑)의 뜻에 따라 1938년 숙명학원(淑明學園)에서 숙명여자전문학교를 설립하였고, 이것이 오늘날 숙명여자대학교(淑明女子大學校)로 계승되었다.&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선교사 설립 교육기관===&lt;br /&gt;
선교사들은 기독교 선교의 기반 구축을 위해 개화정책 추진 초기인 1880년대부터 고종의 각별한 관심과 지원 속에서 많은 학교를 설립하였다.  서울에 배재·이화·경신학교를 설립하였고, 기독교 선교금지정책이 이완되기 시작한 1890년대에는 지방도시로 그 범위를 넓혀 1894년 평양의 광성학교·숭덕학교·정의여학교, 1895년 서울의 정신여학교를 비롯하여 동래·인천·재령·목포·원산·개성·해주·공주·대구 등 전국 각지로 확대하였다.&lt;br /&gt;
&lt;br /&gt;
====[[연세대학교(延世大學校)]]====&lt;br /&gt;
&lt;br /&gt;
연희전문학교는 1915년 선교부연합위원회의 협의를 얻어서 북장로회 선교사인 언더우드가 조선기독교학교로 처음 설립하였다. 이후 1917년 연희전문학교로 발족하였다. 보성전문학교 이후 두 번째로 설립된 전문학교이다. 이후 3.1 운동등 다양한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1944년 일제가 경영권과 재산을 몰수하고 한국인 교수진들을 모두 추방했었다. 독립 후에는 연희대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대학교로 승격하였다.&lt;br /&gt;
&lt;br /&gt;
세브란스는 대한제국의 궁정어의였던 알렌에 의해 1885년에 설립된 제중원에서 시작하였고, 1886년부터 제중원 내 의학부를 두고 입학생을 받았다. 이후 병원장으로 취임한 선교사 에비슨이 1899년 조선 최초의 의학교인 제중원의학교를 설립하였다. 1904년 미국인 세브란스의 후원으로 세브란스 병원이 세워지며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로 개편하였다. 1906년에 간호부가 개설되었고 우리나라 최초의 간호사를 배출하였다. 세브란스와 연희전문학교 간의 병합은 1920년대에도 한차례 시도한 바 있었으나 무산되었고, 독립 후 1957년에 두 학교가 통합되어 '''연세대학교'''로 출범하였다.&lt;br /&gt;
&lt;br /&gt;
====[[배재학당]]====&lt;br /&gt;
&lt;br /&gt;
1885년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한국 최초의 근대식 사립학교로 중등과정을 담당했다. 1886년이 고종이 배재학당이라는 이름을 사하였고 미국인들의 후원을 받아 1887년에 제대로 된 건물을 세웠다. 영어교육을 중점적으로 행했으며 학생자조정책을 채택하여 가난한 학생들이 학교에서 일을 하며 수업료를 벌 수 있도록 하였다. 현재 기존의 건물은 2008년부터 배재학당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배재중학교, 배재고등학교, 배재대학교'''가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lt;br /&gt;
&lt;br /&gt;
====[[배화학당]]====&lt;br /&gt;
초,중등과정의 사립학교로 1898년 켐벨 선교사가 설립하였다. 처음엔 캐롤라이나학당으로 기독교전파와 여성교육을 목표로 세웠졌다. 1910년 배화학당으로 개칭하였다.1916년 1월 경성 누하동(지금의 서울 종로구 필운동)으로 교사를 이전하고, 1926년 12월 캠블기념관을 신축하였으며, 1938년 3월 배화고등여학교와 배화여자소학교로 분리,개편되었다. 일제의 신사참배요구를 거절한 기독교 학교 중 하나이다. 1940년대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선교사들도 학교를 떠나며 위기에 폐교 위기에 봉착했다. 학교가 경영난에 시달리자 일제는 학교의 운영권을 요구했으나, 당시 교사였던 이덕봉과 이만규가 독지가를 구하려 노력한 끝에 이민천이 춘천, 이천, 연기, 익산 등지에 있는 토지를 기부하여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독립 후 1951년 '''배화여중과 배화여고'''로 분리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김윤]]&lt;br /&gt;
&lt;br /&gt;
=='''민간 단체의 교육 운동'''==&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신민회(新民會)]]의 애국계몽운동===&lt;br /&gt;
&amp;lt;br/&amp;gt;&lt;br /&gt;
{{Blockquote| '''신민회 행동강령'''&lt;br /&gt;
1. 국민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사상 고취 &amp;lt;br /&amp;gt; 2. 동지를 발하고 단합하여 국민 운동 역량 축적 &amp;lt;br /&amp;gt; 3. 상공업 기관 건설로 국민의 부력(富力) 증진 &amp;lt;br /&amp;gt; 4. 교육 기관 설립으로 청소년 교육 진흥&lt;br /&gt;
|출처= 「헌기제501호, 「대한 신민회 취지서 및 동회 통용 장정 등 보고 건」, 1909년 3월 5일(국사편찬위원회, 『통감부문서』 6, 1991}}&lt;br /&gt;
&lt;br /&gt;
[[신민회(新民會)]]는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1907년에 [[안창호(安昌浩)]], [[양기탁(梁起鐸)]] 등의 주도로 결성된 항일 비밀결사&amp;lt;/span&amp;gt;이다. 위와 같은 신민회의 행동 강령을 바탕으로 신민회는 실력 양성을 통한 국권 회복을 주장하며, 교육, 언론 및 출판, 민족 산업 육성, 독립군 양성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lt;br /&gt;
&lt;br /&gt;
신민회는 실력 배양의 방법으로 교육 구국 운동을 두 가지 측면에서 전개하였다. 국민에게 국권회복을 위한 교육의 필요성을 계몽하여 학교설립을 고취하며 신민회도 학교를 설립하여 국권회복에 필요한 적합한 교육방침을 강구하여 민족 지도자를 양성한다는 것이다. 또한, 국외에서 독립군 기지를 창설하고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전쟁을 일으켜 국권을 회복한다는 것이다. &lt;br /&gt;
&lt;br /&gt;
신민회는 이를 위해 민중들이 설립한 학교에 대해 학교교육방침을 지도하였다. 또한, 중학교를 설립하고, 학교의 모범을 만들며 중학교에서 동시에 사범교육을 해 교사를 양성한다는 기준을 세우고 학교를 설립하였다. 당시 민간인이 자발적으로 기금을 갹출하여 설립한 학교는 대부분이 소학교였기 때문에, 신민회는 중학교를 설립하여 소학교 출신 청소년들이 더 양질의 교육을 통해 민족지도자로 발돋움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lt;br /&gt;
&lt;br /&gt;
신민회는 기본적으로 비밀결사이기 때문에 그들이 설립한 학교의 수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1907년부터 1909년 4월까지 민간인들에 의해 세운 학교가 3000여 개교에 달한다는 통계로 보아 신민회에서 세운 학교가 많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알려진 신민회가 설립한 학교는 다음과 같다.&lt;br /&gt;
&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hn:left;background:white;&amp;quot;&lt;br /&gt;
|+ [신민회가 설립한 학교]&lt;br /&gt;
! 학교명 || 설명 &lt;br /&gt;
|-&lt;br /&gt;
| '''대성학교'''|| [[안창호(安昌浩)]], 윤치호 평양에 설립. 신민회가 설립한 대표적인 민족 사학으로 입학 지원자가 500~600여 명이 되는 때도 존재. &lt;br /&gt;
|-&lt;br /&gt;
| '''오산학교'''|| 평안북도 정주군에 이승훈 설립. 김소월, 백석, 이중섭, 독립운동가 김홍일 중장 등을 배출. 현재 서울 오산고등학교로 계승됨&lt;br /&gt;
|-&lt;br /&gt;
| 점진학교|| 평안남도 강서 위치, [[안창호(安昌浩)]] 설립. 남녀공학을 실시한 최초의 소학교. &lt;br /&gt;
|-&lt;br /&gt;
| 보창학교 || 강화도 위치, [[이동휘]] 설립&lt;br /&gt;
|-&lt;br /&gt;
| 신안학교 || 정주, 신민회 정주지회 회원 설립&lt;br /&gt;
|-&lt;br /&gt;
| 양실학교 || 의주, 신민회 의주/용천지회 회원 설립&lt;br /&gt;
|-&lt;br /&gt;
| 가명학교 ||  신민회 납청정지회 회원 설립&lt;br /&gt;
|-&lt;br /&gt;
| 신흥학교 || 선천, 중학교급 학교&lt;br /&gt;
|-&lt;br /&gt;
| 홍양학교 || 신민회 곽산지회 회원 &lt;br /&gt;
|-&lt;br /&gt;
| 명륜학교|| 함경남도 영흥읍에 있던 세 개 학교 통합, [[이동휘]] 설립&lt;br /&gt;
|-&lt;br /&gt;
| 경성학교|| 함경북도 경성 위치&lt;br /&gt;
|-&lt;br /&gt;
| 양산학교|| 황해도 안악읍 향천자리, 김용제 설립, 신민회가 중학교로 개편&lt;br /&gt;
|-&lt;br /&gt;
| 오성학교 || 서울 위치, 이갑, 이종화 설립. 신민회 창건 후 각종학교인 서북협성학교로 개편&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신민회의 애국계몽은 학교 설립뿐만이 아니라 학회의 설립과 지도를 통해서도 추진되었다. 안악군면학회(安岳郡勉學會), 해서교육총회(海西敎育總會),평양청년권장회(平壤靑年勸?會), 연학회(練學會), 동제회(同濟會)등의 학회를 전국에 조직하는 데에 앞장섰다. 또한, 서우학회, 한북학회를 서북학회로 통합 재조직하는 등, 기존에 있던 학회의 통합과 재정비에도 이바지하였다. &lt;br /&gt;
&lt;br /&gt;
이와 같이 신민회의 교육계몽운동은 신민회가 1911년 105인 사건으로 해산될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그 이후에도 다른 독립운동단체에 영향을 미쳐 교육을 통한 민중 계몽으로 이루어지는 독립운동의 방향성을 제시하였다.&lt;br /&gt;
&lt;br /&gt;
[[분류:신다정]]&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농촌 계몽 운동===&lt;br /&gt;
&lt;br /&gt;
농촌 계몽 운동은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1920년대~1930년대 민족 운동과 관련한 청년 학생이나 지식층이 농민의 의식과 지식 등을 계몽하기 위해 농촌 사회에서 행한 사회 교육 운동&amp;lt;/span&amp;gt;을 의미한다. 농사일을 끝낸 후 강연회, 토론회, 야학 등의 형식으로 이루어졌으며 특히 농한기인 겨울에 많이 실시되었다. &lt;br /&gt;
&lt;br /&gt;
1920년에는 일제의 식민 지주 경영과 지주 착취로 인해 농민 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고, 이와 맞물려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이 결성되었다. 이때 사회주의 계열 청년 단체와 지식인들이 농촌으로 진출하여 농민 운동을 주도하였다. &lt;br /&gt;
민족주의 계열에서 주도한 농촌 운동은 문맹 퇴치와 생활 개선 등의 계몽적 활동이 중심이었다. 대표적으로 천도교 계열의 농촌 운동, 기독교 계열의 농촌 운동이 있다. 천도교는 1925년 조선농민사를 설립하여 농민 야학을 시행하고 전국적으로 농민에 대한 계몽 활동을 전개하였다. 기독교에서는 1926년 이후 학생 YMCA 농촌부를 중심으로 계몽 활동을 적극 추진하였다. &lt;br /&gt;
&lt;br /&gt;
1920년 후반부터 1930년대에는 언론사 또한 농촌 계몽 운동에 힘을 쏟았다. 대표적으로 1929년부터 1935년까지 이루어진 조선일보사의 문자 보급 운동과 1931년부터 1934년까지 이루어진 동아일보사의 [[브나로드 운동]]이 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이런 농촌 계몽 운동은 1930년대 들어 강화된 조선총독부의 조선어 사용 금지 정책과 지방 농촌의 몰락으로 인해 쇠퇴하였다. 또한, 농촌의 몰락 책임을 수탈 때문이 아닌 농민의 게으름과 무지에 있다며 총독부의 주도로 농촌진흥운동을 진행하며 민간 및 언론 단체의 농촌 계몽 운동을 탄압하였다. 그러나 이런 탄압 속에서도 농촌 계몽 운동은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이러한 민간 교육 활동 및 정책은 해방 이후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문맹 퇴치 운동으로 이어졌다.&lt;br /&gt;
&lt;br /&gt;
[[분류:신다정]]&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민립 대학 설립 운동===&lt;br /&gt;
&lt;br /&gt;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은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1920년대 이루어진 민족 사학 설립 운동&amp;lt;/span&amp;gt;이다.&lt;br /&gt;
&lt;br /&gt;
1920년대 초 식민지 조선에서는 민중의 자발적인 참여하에 조선인을 위한 대학을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등장하였다. 민립 대학 설립에 대한 논의는 1920년 6월 20일 한규설, 이상재, 윤치소 등 91년의 발기로 조선교육회 발기회가 개최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가 학회령을 토대로 1922년 1월 24일까지 인가를 내주지 않아 민립대학 설립에 대한 결의를 실행시키지 못했다. &lt;br /&gt;
&lt;br /&gt;
동아일보에 기고된 사설을 통해 당시의 독립을 위한 교육 계몽의 필요성과, 관립 대학과 다르게 민립 대학의 설립 필요성에 관해 확인할 수 있다. &lt;br /&gt;
&lt;br /&gt;
{{Blockquote|운명을 어떻게 개척할까. 정치냐 외교냐 산업이냐. 물론 이러한 일들 모두 다 필요하다. 그러나 그 기초가 되고 요건이 되며 가장 급무가 되고 가장 선결의 필요가 있으며 가장 힘 있고 '''가장 필요한 수단은 교육이 아니면 할 수 없다.''' &amp;lt;br /&amp;gt; … 물론 관립대학도 조만간 개교될 것이기에 대학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학문 발전의 장래는 결코 1개의 대학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요, 또한 '''그처럼 중대한 사업을 우리 민중이 직접으로 영위하는 것은 차라리 우리의 의무라 할 수 있다.''' &amp;lt;br /&amp;gt;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에 느낀 바 있어 감히 만천하 동포에게 향하여 민립대학의 설립을 제창하니 자매형제는 와서 돕고 나아가 이루어라.'''&lt;br /&gt;
|출처= 「開會된 民大總會」, 『동아일보』, 1923년 3월 30일자.}}&lt;br /&gt;
&lt;br /&gt;
이렇게 고양된 민립 대학 설립을 통한 민족 교육에 대한 필요성을 바탕으로, 1922년 1월 이상재, 이승훈, 윤치호, 김성수, 송진우 등이 조선민립대학기성준비회를 정식으로 결성하였다. 이어 1923년 3월 29일 발기인 1170명 중 462명이 참석한 가운데 3일간 총회를 개최하였다. &lt;br /&gt;
&lt;br /&gt;
총회에서는 ＇민립대학발기취지서＇를 채택하고 대학 설립 계획서를 확정하였다. 계획서에 따르면 3개년 계획으로 자본금 1000만원을 갹출하는데, 제 1차 연도에는 대지 5만 평을 구입하여 교실 10동, 대강당 1동을 건축하고, 법과/경제과/문과/이과의 4개 대학 및 예과를 설치하며, 제2차 연도에는 300만원으로 공과/이과/기타 학과를 증설하고, 제3차 연도에는 300만원으로 의과/농과를 설치한다는 것이다. 또 중앙집행위원회를 구성하고 지방에 지방부를 두기로 결의하였다. 별도로 지방순회선정위원 13평을 선정하고 파견하였다. 이와 같은 노력을 토대로 1923년 말까지 전국 100여 개소와 해외의 만주 간도, 봉천, 미국 하와이 등지에도 지방부가 조직되었다. &lt;br /&gt;
&lt;br /&gt;
기성회는 ＇한민족 1000만 한 사람 1원씩＇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기금 모금에 나섰다. 이런 모금 활동에 민족 교육을 성원하는 마음들이 모였는데, 대표적으로 전라남북도에서만 15만원이 모금되었으며 경기도 안성의 이정도는 1년 동안 매일 아침 밥짓는 쌀에서 식구 수 대로 한 숟가락씩 모아 판 돈 19원을 기부하는 등 일반 민간에서의 성원도 뜨거웠다. &lt;br /&gt;
&lt;br /&gt;
이와 같은 열기에 일제는 이를 교육 운동이 아니라 정치 운동이라고 판단하고 탄압하였다. ＇조선교육령＇을 개정하여 관립 경성제국대학의 설립을 서두르고 민립대학과 관련 있는 인사들에 대한 탄압과 기금 갹출 방해 공작을 전개하였다. 민립대학기성회 인사들을 민족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구실로 철저히 감시하고, 기금 모집을 위해 박차를 가하던 인사들의 지방 강연을 배일사상을 고취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강연 중지를 명하고 청중을 해산시켰다. &lt;br /&gt;
&lt;br /&gt;
이러한 조선총독부의 탄압이 민립대학 설립운동의 실패의 주된 원인이 되었다. 1923년 여름 수재, 9월 일본 관동 대지진으로 인한 경제 공황, 1924년 한재와 7월 전국적 수재로 인한 농촌 경제 파탄 등 자연적인 여건도 민립대학 설립운동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그러나 3.1운동 이후 전 민족이 민족 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조직체를 형성하여 교육을 통한 자주독립이라는 하나의 목표에서 단결을 보였다. 이는 이후의 민족운동 양상에서 조직적인 단체 결성의 표본이 되었다.&lt;br /&gt;
&lt;br /&gt;
[[분류:신다정]]&lt;br /&gt;
&lt;br /&gt;
=='''군사 교육'''==&lt;br /&gt;
&lt;br /&gt;
독립운동사에서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군사 교육도 꾸준히 이어져왔다. 수많은 독립열사들은 무관학교 설립을 위한 활발한 활동을 이어왔다. 독립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역량은 군사였기 때문에, 군사교육은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였으며 이에 따라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에서도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노력이 나타났다.&lt;br /&gt;
&lt;br /&gt;
[[분류:이민희]]&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lt;br /&gt;
신흥무관학교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위해 설립된 군사학교로, 독립군 양성과 무장 투쟁 기반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911년 중국 만주 서간도 지역(현재의 지린성 류허현)에서 이회영, 이시영 등 독립운동가들이 설립했으며, 군사 지도자를 양성하고 실질적인 무장 독립운동을 준비하는 데 목적을 두었습니다. &lt;br /&gt;
&lt;br /&gt;
교육 내용은 사격, 전술, 지형 분석 등 실전 중심의 군사훈련과 함께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역사 및 애국사상 교육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졸업생들은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전투 같은 독립전쟁에서 활약하며 독립운동의 주축이 되었고, 김좌진과 이범석 같은 지도자를 배출했습니다. &lt;br /&gt;
&lt;br /&gt;
1920년대에 들어 일본의 탄압이 강화되면서 학교 운영이 점차 어려워졌고, 졸업생들이 각종 독립운동 조직으로 흩어지면서 신흥무관학교는 군사훈련소 형태로 전환되다가 결국 해체되었습니다. &lt;br /&gt;
&lt;br /&gt;
졸업생들은 만주 지역에서 서로군정서, [[북로군정서]]에서 핵심 간부로 활약, [[대한독립군]], 통의부의용군, 정의부, 신민부, 국민부 등에서 활동하였고,중국 본토에서는 1919년 11월 길림에서 의열단 결성,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에서 독립운동 전개했습니다.&lt;br /&gt;
&lt;br /&gt;
신흥무관학교는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군사교육 기관으로 평가받습니다. 이 학교는 독립군의 전투력을 강화하고, 독립운동의 실질적 기반을 마련했으며, 한국 독립운동의 전환점이 된 여러 전투에서 큰 공헌을 했습니다.&lt;br /&gt;
&lt;br /&gt;
[[분류:최용빈]]&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조선혁명간부학교]]===&lt;br /&gt;
&lt;br /&gt;
1919년 조직된 무장독립운동단체 의열단은 중국국민당과의 합작을 통해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실질적인 군사 교육 기관'''&amp;lt;/span&amp;gt;을 설립하고자 노력했다. 이에 따라 [[장제스]]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의열단&amp;lt;ref&amp;gt; 급진적인 항일 투쟁을 목적으로 1919년 11월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로, 김원봉(金元鳳)이 단장을 맡았다. &amp;lt;/ref&amp;gt;의 단장인 김원봉이 1932년 중국 난징에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설립하였다. 공식 명칭은 사실 조선혁명간부학교가 아닌, ''‘중국국민당 군사위원회 간부 훈련반 제6대’''로, 국민당의 단기간부훈련소 신설반인 것처럼 위장했다. &lt;br /&gt;
&lt;br /&gt;
&lt;br /&gt;
학교는 일본과 중국의 외교관계를 고려해 학교 운영 사실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설립 초기에는 중국 외교부와 육군참모본부, 심지어 군사위원회 판공청 당사자들조차 그 존재를 모를 정도였다. 만 3년간 운영된 조선혁명간부학교는 3기에 걸쳐 총 125명의 인재를 배출했다. 국민당은 그동안 매월 경상비 2,000~3,000원·수시 필요경비 1,000~1만 원·기타 운영비 400~1,000원 등 각종 운영자금 전액과 화기·탄약·피복 등을 지원했다. 학생들은 군사학뿐 아니라 별도 신설된 정치학, 자연과학을 포함해 경제학·사회학·철학·혁명학·물리학·화학·지리학까지 다양한 학문을 공부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혁명간부학교의 졸업생들은 이후 민족혁명당의 항일투쟁체계에 편입되었으며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대]]의 핵심 세력으로 성장하였고, 일부는 화북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에 가담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단체문서한국광복군.jpg|섬네일|가운데|''&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한국 광복군의 모습&amp;lt;/div&amp;gt;'']] &lt;br /&gt;
[[파일:조선의용대김원봉.jpg|섬네일|가운데|''&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조선의용대 모습 &amp;lt;/div&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amp;lt;font color=&amp;quot;#8c8c8c&amp;quot;&amp;gt;조선의용대 깃발 가운데 있는 인물이 약산 김원봉이다.&amp;lt;/font&amp;gt;''&amp;lt;ref&amp;gt;김삼웅, &amp;quot;최후까지 총을 든 조선의용대와 김원봉&amp;quot;, 오마이뉴스, 2024.02.06.,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999602 (검색일:2024년 12월 4일)&amp;lt;/ref&amp;gt;&amp;lt;/div&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이민희]]&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한인소년병학교]]===&lt;br /&gt;
&lt;br /&gt;
한인소년병학교는 장기적인 독립 투쟁을 대비하여 군사 교육을 받은 장교를 양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박용만에 의해 설립되었다. 한인소년병학교는 1909년 6월에 세워진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최초의 국외 설립 군사학교''&amp;lt;/span&amp;gt;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으며, 각지의 군사운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lt;br /&gt;
&lt;br /&gt;
&lt;br /&gt;
한인소년병학교는 미국의 헤이스팅스(Hastins) 대학과 교섭하여 운영되었으며, 네브라스카 주에서 설립되었으나 교섭에 따라 헤이스팅스로 이전하여 한인 유학생의 활발한 참여를 이끌어냈다. 헤이스팅스 대학은 건물 한 동과 전장을 지원하여, [[둔전병제]]식 훈련을 실시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헤이스팅스대학.png|섬네일|가운데|''&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헤이스팅스 대학의 모습 &amp;lt;/div&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amp;lt;font color=&amp;quot;#8c8c8c&amp;quot;&amp;gt;한인소년병학교 학생들이 훈련했던 헤이스팅스 대학의 사진이다.&amp;lt;/font&amp;gt;''&amp;lt;/div&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ftzi6pFWzNc?si=iGbjmKk9yPuAn_Ub&amp;quot; title=&amp;quot;YouTube video player&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div&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다음의 영상에서 한인소년병학교가 있었던 헤이스팅스 대학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다.'' &amp;lt;/div&amp;gt;&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lt;br /&gt;
&lt;br /&gt;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는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한 박용만이 미국의 하와이에도 같은 군사 훈련 단체를 설립하고자 하여 1914년 4월 15일 설립되었다. 당시 학도 수는 200여명으로 군단장 역시 박용만이 맡았다. &lt;br /&gt;
&lt;br /&gt;
&lt;br /&gt;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는 [[한인소년병학교]]를 계승하여 [[둔전병제]]식 훈련을 실시하였고, 군영이 호놀룰루 시의 동북 쪽 큰 산을 넘어 해안과 아후이마누 강을 낀 계곡에 위치하여 ''&amp;quot;산 넘어 아희들&amp;quot;''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lt;br /&gt;
하와이에서 군단과 사관학교를 설치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으나, 1916년을 고비로 점차 쇠퇴하여 1917년 경 해체되었고, 지역으로 흩어져 사실상 폐교되었다.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는 제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미일(美日) 간 우호관계가 지속되면서 국민군단의 혁명적이고 군사적인 성격이 하와이 내에서 우호적인 반응을 얻지 못하였고, 이외에도 하와이 내 농장의 불경기로 수입이 급감하면서 재정 조달이 어려웠으며 1915년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의 실권이 이승만 측에 넘어가 박용만의 활동 범위가 위축된 점 등으로 인해 폐교되었다고 추측되고 있다.&lt;br /&gt;
&lt;br /&gt;
[[분류: 이민희]]&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숭무학교(崇武學校)]]===&lt;br /&gt;
숭무학교는 1910년대 멕시코로 이주한 한인들이 일제강점기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한 군사학교입니다. 멕시코에 이주한 한인들은 고된 노동 속에서도 민족 독립의 열망을 잃지 않고 독립운동을 조직적으로 지원하고자 노력했습니다. 1915년 멕시코 유카탄주 메리다 지역에서 설립된 숭무학교는 독립군 양성을 목표로, 체계적인 군사훈련과 애국 사상 교육을 실시했습니다.&lt;br /&gt;
&lt;br /&gt;
이 학교는 멕시코 한인 사회의 독립운동 기반을 강화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특히 숭무학교는 한인들의 단결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멀리 해외에서조차 독립운동을 지속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큽니다. 이러한 활동은 멕시코뿐 아니라 미주 지역의 다른 한인 독립운동 단체에도 영향을 주어 독립운동의 글로벌 네트워크 형성에 기여했습니다.&lt;br /&gt;
&lt;br /&gt;
숭무학교는 해외 독립운동의 독특한 사례로, 한인 이민사와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lt;br /&gt;
&lt;br /&gt;
[[분류:최용빈]]&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독립군으로의 발전===&lt;br /&gt;
&lt;br /&gt;
군사교육을 위해 설립된 다양한 무관학교를 기점으로, 졸업생들은 각기 다른 곳에서 독립군으로 발전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의 경우, 졸업생들은 만주 지역에서 서로군정서, 북로군정서에서 핵심 간부로 활약했을 뿐 아니라, 대한독립군,통의부의용군, 정의부, 신민부, 국민부 등에서 활동하였다. 또한, 중국 본토의 경우에서는 1919년 11월 길림에서 의열단을 결성하기도 하고, 임시정부 산하의 광복군인 한국광복군의 일원으로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졸업한 졸업생들도 독립군으로서 활약하였다. 이들은 민족혁명당의 항일투쟁체계에 편입되었는데, 대표적으로 임시정부 산하의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대의 핵심 세력으로 성장했고, 일부는 화북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에 가담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한인소년병학교]]와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 숭무학교를 졸업한 졸업생들도 독립군으로 발전하였으나, 구체적으로 어떤 기관으로 발전하였는지는 크게 알려진 바가 없다. &lt;br /&gt;
&lt;br /&gt;
[[숭무학교(崇武學校)]]는 일부 학생들은 멕시코 혁명에 참여하기 위해 군에 입대하였다.  일부 설립자들은 과테말라 혁명에 참여하려 했으나 실패로 끝났다.&lt;br /&gt;
&lt;br /&gt;
[[분류: 이민희]]&lt;br /&gt;
&lt;br /&gt;
==데이터 시각화==&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마인드맵===&lt;br /&gt;
[[파일:교육구국운동_노드_마인드맵.png|500픽셀]]&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온톨로지===&lt;br /&gt;
인물의 경우 관련 공훈전자사료관,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인명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의 관련 링크를 삽입하여 추가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하였다.&lt;br /&gt;
{{NetworkGraph | title=교육구국운동.lst}}&lt;br /&gt;
&lt;br /&gt;
[[분류:신다정]]&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콘텐츠 구조===&lt;br /&gt;
====클래스(Class)====&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width:100%;&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0%&amp;quot;| 클래스|| style=&amp;quot;width:10%&amp;quot;|모양|| style=&amp;quot;width:20%&amp;quot;|내용 ||노드 &lt;br /&gt;
|-&lt;br /&gt;
|인물 ||인물의 사진 || 독립운동사에서 교육 운동에 이바지하였던 인물을 포함한 다양한 독립운동가들을 인물로서 클래스로 설정했다. || [[이동휘]] '''[[안창호(安昌浩)]]''' [[김원봉]] '''[[장제스]]''' 박용만 이갑성 스코필드 유기준 [[주시경]] [[지청천]] [[여운형]] 차미리사 김명시 남궁억 [[이동녕]] 이용익 김성수 신해영 [[강기덕]] 손병희 [[방정환]] 이종호 윤익선 염온동 주익 이세영 고종 순헌황귀비 박자혜 신채호 김종진 이정숙 이회영 김구 이석영 이상룡 윤기섭 이근영 한성순 양귀선 조병하 서문경 윤을희 이시영 박선봉 조금옥 '''[[양기탁(梁起鐸)]]''' [[이강]] [[전덕기]]&lt;br /&gt;
|-&lt;br /&gt;
|기관 || 빨간색 상자|| 부지를 두고 설치하여 활동했던 조직을 기관으로 설정했다. ||연희전문학교 세브란스 배재학당 배화학당 보성전문학교 명신여학교 '''[[한인소년병학교]]''' 대조선국민군단사관학교 '''[[조선혁명간부학교]]''' 신흥무관학교 숭무학교 신흥강습소 동아일보&lt;br /&gt;
|-&lt;br /&gt;
|단체 || 파란색 원 ||기관보다 넓은 의미로서, 같은 뜻을 가지고 함께 활동했던 조직체를 단체로 설정했다. || '''[[신민회(新民會)]]''', 협성회, 독립협회, '''[[한국광복군]]''', '''[[조선의용대]]''', 조선의용군, 화북조선독립동맹, 대한민국임시정부, 간우회, 조선어학회, 대한인국민회&lt;br /&gt;
|-&lt;br /&gt;
|지역 || 초록색 타원|| 각 기관과 단체가 위치하거나 기관이나 단체, 인물이 활동했던 곳을 지역으로서 클래스를 설정했다. || 미국, 한반도, 난징, 멕시코, 캐나다, 상해, 만주, 중국&lt;br /&gt;
|-&lt;br /&gt;
|활동_및_사건 || 분홍색 타원 ||각 기관이나 단체, 인물의 행동 및 사건을 묶어 활동_및_사건의 클래스를 설정했다. || '''[[브나로드 운동]]''', 민립대학 설립 운동, 3.1운동, 6.10 학생 만세운동, 1920년 3.1 학생 운동, 서울 지역 학생 독립운동&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신다정]]&lt;br /&gt;
&lt;br /&gt;
====관계성(Relation)====&lt;br /&gt;
&lt;br /&gt;
'''인물 중심 관계성 설정''' &lt;br /&gt;
* '''설립했다''' 인물 → 기관, 단체 : 기관 또는 단체의 설립에 기여함을 설명하는 relation이다. &lt;br /&gt;
* '''지원했다''' 인물 → 기관, 단체, 활동 및 사건 : 단체, 기관, 활동 및 사건을 직접적으로 주도한 것은 아니나 보조적으로 지원했음을 설명하는 relation이다. 단체의 활동이나 기관의 설립 및 활동, 활동 및 사건의 전개의 지원을 모두 포괄하는 설명이다. &lt;br /&gt;
* '''출신이다''' 인물 → 기관, 단체, 지역 : 인물이 기관, 단체, 나라의 출신임을 나타내는 relation이다. 지역의 경우, 해당 인물의 국적을 의미하며 외국인의 경우에만 해당 relation을 사용해 국적을 나타냈다. &lt;br /&gt;
* '''활동했다''' 인물 → 활동 및 사건 : 인물이 특정 활동 및 사건에 주도적으로 활동했음을 나타내는 relation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기관 중심 관계성 설정'''&lt;br /&gt;
* '''소속이다''' 기관, 단체 → 인물 : 인물이 기관의 소속임을 나타내는 relation이다. 기관의 경우 교육기관을 주로 다루기 때문에, 교육기관에 재학하였던 경우에는 '출신이다.' relation을 사용하였고 교직원 등으로 재직한 경우에는 해당 relation을 사용하여 구분하였다. &lt;br /&gt;
* '''위치하다''' 기관→지역 : 기관이 특정 지역에 위치하였음을 나타내는 relation이다. 위치를 옮긴 기관의 경우 위치했던 지역에 모두 해당 relation을 사용하여 연결했다. &lt;br /&gt;
* '''발전했다''' 기관, 단체 → 기관, 단체 : 특정 기관 및 단체가 다른 기관 및 단체로 발전함을 설명하는 relation이다.  &lt;br /&gt;
* '''계승했다''' 기관, 단체 → 기관, 단체 : 기관 및 단체가 다른 기관 및 단체로 계승함을 설명하는 relation이다. 계승한 쪽을 종속 노드로 설정하였으나, 화살표 방향을 inverse로 설정해 '발전했다.' relation과 차이를 두었다.&lt;br /&gt;
&lt;br /&gt;
====온톨로지 기여====&lt;br /&gt;
[[김윤]]&amp;lt;br/&amp;gt;&lt;br /&gt;
[[신다정]]: 온톨로지 리스트 생성, 전반적인 온톨로지 코드 작성, 클래스 지정 및 설명, 릴레이션 지정 및 설명, 민간 단체의 애국 계몽 운동 관련 노드 및 관계성 정리, 인물 사진 삽입, 온톨로지 화살표 지정 &amp;lt;br/&amp;gt;&lt;br /&gt;
[[이민희]]: 군사교육 중 조선혁명간부학교, 한인소년병학교,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 관련 노드 및 관계성 정리, 인물 사진 삽입, 클래스 표에서 클래스 별 설명 작성 &amp;lt;br/&amp;gt;&lt;br /&gt;
[[최용빈]]&amp;lt;br/&amp;gt;&lt;br /&gt;
[[헤르미온느]]: 민족사학 관련 노드 및 관계성 정리, 인물 사진 삽입, 노드 색 및 모양 지정, 인물 하이퍼링크&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교육기관 지도&amp;lt;ref&amp;gt;가급적 최초 설립 위치를 기준으로 작성하였지만 초기 설립 시 다른 학교의 교사에 있다 교사를 이전한 경우 해당 위치로 표기함.&amp;lt;/ref&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src=&amp;quot;https://www.google.com/maps/d/embed?mid=1cI0D_B0oG-xrdk5kcPVCnLJ2hJpOJZw&amp;amp;ehbc=2E312F&amp;quot; width=&amp;quot;640&amp;quot; height=&amp;quot;480&amp;quot;&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기타==&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참고문헌===&lt;br /&gt;
1. 민족사학 발전과정 연대기 설명 내용&lt;br /&gt;
*「원산학사 (元山學舍)」,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0700, 접속일: 2024. 12. 9.&lt;br /&gt;
*「흥화학교(興化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6074, 접속일: 2024. 12. 9.&lt;br /&gt;
*「중교의숙(中橋義塾)」,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3699, 접속일: 2024. 12. 9.&lt;br /&gt;
*「순성학교 (順成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1901, 접속일: 2024. 12. 9.&lt;br /&gt;
*「점진학교(漸進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9857, 접속일: 2024. 12. 9.&lt;br /&gt;
*「낙연의숙(落淵義塾)」,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1639, 접속일: 2024. 12. 9.&lt;br /&gt;
&lt;br /&gt;
*「한성법학교(漢城法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426, 접속일: 2024. 12. 9.&lt;br /&gt;
&lt;br /&gt;
*「양정고등학교 (養正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731, 접속일: 2024. 12. 9.&lt;br /&gt;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3433, 접속일: 2024. 12. 9.&lt;br /&gt;
*「보창학교(普昌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3546, 접속일: 2024. 12. 9.&lt;br /&gt;
*「서전서숙 (瑞甸書塾)」,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8159, 접속일: 2024. 12. 9.&lt;br /&gt;
*「진명여자고등학교 (進明女子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4673, 접속일: 2024. 12. 9.&lt;br /&gt;
*「중동고등학교 (中東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3729, 접속일: 2024. 12. 9.&lt;br /&gt;
*「휘문고등학교 (徽文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5832, 접속일: 2024. 12. 9.&lt;br /&gt;
*「숙명여자대학교 (淑明女子大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1800, 접속일: 2024. 12. 9.&lt;br /&gt;
*「숙명여자고등학교 (淑明女子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1799, 접속일: 2024. 12. 9.&lt;br /&gt;
*「양규의숙(養閨義塾)」,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426, 접속일: 2024. 12. 9.&lt;br /&gt;
*「서북협성학교 (西北協成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7788, 접속일: 2024. 12. 9.&lt;br /&gt;
*「사범학교 (師範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5642, 접속일: 2024. 12. 9.&lt;br /&gt;
*「대성학교(大成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4519, 접속일: 2024. 12. 9.&lt;br /&gt;
*「협동학교(協東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3491, 접속일: 2024. 12. 9.&lt;br /&gt;
*「동성고등학교 (東星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6589, 접속일: 2024. 12. 9.&lt;br /&gt;
*「장훈고등학교 (長薰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8403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8403, 접속일: 2024. 12. 9.&lt;br /&gt;
*「오산고등학교 (五山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8302, 접속일: 2024. 12. 9.&lt;br /&gt;
*「치문초등학교 (致文初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8358, 접속일: 2024. 12. 9.&lt;br /&gt;
*「명동학교(明東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8242, 접속일: 2024. 12. 9.&lt;br /&gt;
*「양원여학교(養原女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687, 접속일: 2024. 12. 9.&lt;br /&gt;
*「보인학교(輔仁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426, 접속일: 2024. 12. 9.&lt;br /&gt;
*「기호학교(畿湖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426, 접속일: 2024. 12. 9.&lt;br /&gt;
*「양산중학교(楊山中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426, 접속일: 2024. 12. 9.&lt;br /&gt;
*「서북협성학교(西北協成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426, 접속일: 2024. 12. 9.&lt;br /&gt;
&lt;br /&gt;
2. 민간단체의 교육 구국 운동&lt;br /&gt;
* 한관일. &amp;quot;한국 개화기 신민회의 교육구국 사상.&amp;quot; 교육과학연구 14.- (2000): 1-32.&lt;br /&gt;
*「민립대학 설립운동」,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i401900&amp;amp;code=kc_age_40, 접속일: 2024. 12. 9.&lt;br /&gt;
&lt;br /&gt;
5. 군사교육 중 조선혁명간부학교, 한인소년병학교,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lt;br /&gt;
* 「조선혁명간부학교 (朝鮮革命幹部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2266 (검색일: 2024년 11월 30일).&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김세광 (金世光)」,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3831 (검색일: 2024년 12월 2일).&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신악 (申岳)」,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3817 (검색일: 2024년 12월 2일).&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왕통 (王通)」,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3818 (검색일: 2024년 12월 2일).&lt;br /&gt;
* 김광재,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의 결성과 활동」,  『독립기념관』, https://www.i815.or.kr/upload/kr/magazine/magazine/83/post-919.html (검색일: 2024년 12월 2일)&lt;br /&gt;
* 심용환, 「교육, 어둠을 밝힌 등불이 되다」,  『독립기념관』, https://www.i815.or.kr/upload/kr/magazine/magazine/4/post-38.html (검색일: 2024년 12월 2일)&lt;br /&gt;
* 밀양독립운동기념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밀양독립운동기념관』, http://www.miryang815.or.kr/bbs/board.php?bo_table=data&amp;amp;wr_id=10 (검색일: 2024년 12월 2일)&lt;br /&gt;
* 「한인소년병학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1902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국사편찬위원회, 「한인소년병학교」,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s://db.history.go.kr/diachronic/level.do?levelId=nh_047_0030_0020_0040_0030_0010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인소년병학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3624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박용만의 소년병학교: 군사적 구국운동」,  『호남人월드』, 2009.05.19, http://www.honaminworld.kr/307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박용만 1881 ~ 1928」,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code=kc_age_40&amp;amp;levelId=kc_n401200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가. 한인소년병학교」, 『국사편찬위원회』, https://db.history.go.kr/diachronic/level.do?levelId=nh_047_0030_0020_0040_0030_0010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한인소년병학교의 교육 과정」, 『국사편찬위원회』, http://contents.history.go.kr/front/nh/print.do?levelId=nh_047_0030_0020_0040_0030_0010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대조선국민군단 (大朝鮮國民軍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4780 (검색일: 2024년 11월 30일).&lt;br /&gt;
&lt;br /&gt;
[[분류:독립운동사의 근간, 교육구국운동(敎育救國運動)]]&lt;/div&gt;</summary>
		<author><name>Matnyeom</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8F%85%EB%A6%BD%EC%9A%B4%EB%8F%99%EC%82%AC%EC%9D%98_%EA%B7%BC%EA%B0%84,_%EA%B5%90%EC%9C%A1%EA%B5%AC%EA%B5%AD%EC%9A%B4%EB%8F%99(%E6%95%8E%E8%82%B2%E6%95%91%E5%9C%8B%E9%81%8B%E5%8B%95)&amp;diff=52547</id>
		<title>독립운동사의 근간, 교육구국운동(敎育救國運動)</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8F%85%EB%A6%BD%EC%9A%B4%EB%8F%99%EC%82%AC%EC%9D%98_%EA%B7%BC%EA%B0%84,_%EA%B5%90%EC%9C%A1%EA%B5%AC%EA%B5%AD%EC%9A%B4%EB%8F%99(%E6%95%8E%E8%82%B2%E6%95%91%E5%9C%8B%E9%81%8B%E5%8B%95)&amp;diff=52547"/>
		<updated>2024-12-21T04:09:4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Matnyeom: /* &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온톨로지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개요==&lt;br /&gt;
[[파일:교육구국운동 표지.png|800px|가운데]]&lt;br /&gt;
&lt;br /&gt;
[[분류:신다정]]&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   text-align:center;&amp;quot;&amp;gt;기획의도===&lt;br /&gt;
&lt;br /&gt;
&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width:100%;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quot;&lt;br /&gt;
!| 기획의도&lt;br /&gt;
|-&lt;br /&gt;
| 조선의 독립운동사는 근대교육을 위한 노력과 함께 전개되어 왔다. 교육 운동은 독립 운동의 일환으로서 민중을 계몽하기도 하고, 여성 교육이 발전하여 개화 사상이 유입되기도 했으며, 가장 중요하게도 군사 교육을 통해 민족이 싸울 힘을 기르기도 했다. 우리 민족은 당면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기 위해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고, 배움에 대한 열정으로 일제강점기의 어둠을 헤쳐나갈 수 있었다. 학생들이 독립운동을 생각했을 때 교육을 가장 먼저 떠올리지는 않는 듯하다. 다만, 교육은 독립운동사의 핵심적인 부분을 뒷받침하는 지지대였다. 따라서, '''''우리가 잘 몰랐던 독립운동사에서의 다양한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을 위키 페이지로 만들어 이들의 스토리를 전달''''' 하고자 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이민희]]&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 text-align:center;&amp;quot;&amp;gt;팀원===&lt;br /&gt;
2023130036 김윤&lt;br /&gt;
2023131227 최용빈&lt;br /&gt;
2023131540 정혜나&lt;br /&gt;
2024130814 이민희&lt;br /&gt;
2024130911 신다정&lt;br /&gt;
&lt;br /&gt;
=='''교육구국운동(敎育救國運動)'''==&lt;br /&gt;
한국사에 있어서 개화기는 근대화를 추진하는 시기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개화기 교육은 종래 유학 경전 중심의 교육에서 탈피하여 신교육을 시작하는 전환기로 교육사적 의미가 있는 중요한 시기이다. 한국개화기 근대교육의 발전과정은 1880년대에서 1890년대까지 짧은 기간에 많은 변화와 개혁을 거듭하는 시기이다. 국가적으로 열강의 침략을 극복하고 신문화를 받아들여 개명하는 변혁기로 신교육 정착시키는 동시에 국권회복을 위한 교육구국운동을 통하여 민족독립을 전개하는 시기이다. &lt;br /&gt;
&lt;br /&gt;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 이후 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고 일본 통감부가 설치되어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 시기의 개화파를 계승한 애국계몽사상가들은 국권회복을 위해서는 자강지술을 고취하고, 실력을 배양하는 것이 선결과제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이것을 위해 청소년 교육, 민족산업의 육성, 각종 단체에 대한 단결 그리고 신교육을 위한 학교설립 등 광범위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를 교율(敎育)을 통해 나라를 구한다(救國)는 의미의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교육구국운동'''&amp;lt;/span&amp;gt;이라고 칭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신다정]] &lt;br /&gt;
&lt;br /&gt;
==교육기관 설립==&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민족설립 교육기관===&lt;br /&gt;
====민족사학의 의미 ====&lt;br /&gt;
'''1. 민족사학의 정의:''' 우리 민족이 설립한 교육 기관&amp;lt;br/&amp;gt;&lt;br /&gt;
본 위키 페이지에서는 민족사학(民族私學)을 '''외세나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교육기관과 구분되는 것'''으로서, 교육구국운동의 일환으로 일제강점기 전후에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우리 민족이 개인이나 사법인으로서 설립하여 경영하는 학교&amp;lt;/span&amp;gt;로 정의한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2. 민족사학의 정신 및 목적:''' 개화와 교육구국&amp;lt;br/&amp;gt;&lt;br /&gt;
민족사학의 정신과 목적은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개화&amp;lt;/span&amp;gt;와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교육구국&amp;lt;/span&amp;gt;으로 크게 두 가지 방향이 있다. 초기의 민족사학 설립 정신은 '''선진외국의 문화와 문물'''을 받아들여 나라를 개화하고 발전시키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었으나,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乙巳勒約)&amp;lt;ref&amp;gt;대한 제국 광무 9년(1905)에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기 위하여 강제적으로 맺은 조약. 고종 황제가 끝까지 재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인 무효의 조약이다.(표준국어대사전 정의)&amp;lt;/ref&amp;gt; 이후 '''교육 구국을 위한 인재 양성'''이란 민족적 희망에 기반하였다.&lt;br /&gt;
&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민족사학의 발전배경====&lt;br /&gt;
당시 개화파를 비롯한 다수 지식인은 나라를 진흥시키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함을 느끼고 있었다.&amp;lt;br/&amp;gt;&lt;br /&gt;
이와 같은 지식인들의 의식은 서재필이 『한국휘보(Korean Repository)』에 기고한 다음 글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amp;lt;br/&amp;gt;&lt;br /&gt;
{{Blockquote|정부는 국민의 실정을 알아야 하고 국민들은 정부의 목적을 알아야 한다. 정부와 국민 상호간의 이해를 갖도록 하기 위해서는 쌍방에 대한 교육뿐이다 … 교육 없이는 국민들이 정부의 좋은 의도를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교육 없이는 정부 관리들이 결코 좋은 법률을 만들지 못할 것이다.&lt;br /&gt;
|출처=서재필, 「오늘날 한국이 가장 필요로 하는 일」(What Korea needs most), 『한국휘보(Korean Repository)』, 1896.3.}}&amp;lt;br/&amp;gt;&lt;br /&gt;
&lt;br /&gt;
이러한 의식은 독립협회에서 발간한 『독립신문』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amp;lt;br/&amp;gt;&lt;br /&gt;
{{Blockquote|'''문명개화한 나라들에서들은 무론 남녀하고 학교에 가서 적어도 10년 동안에 각색 학문을 배운 후 비로소 세상에 나가''' … 조선 사람들은 겨우 배우는 것이 한문만 조금 배워 가지고 … 일본 같은 조그마한 나라가 싸움을 하여서 청국 병정 무찌르기를 풀 베는 것 같이 하고, 일본도 30년 전 같으면 나라 형세가 청국과 똑같았으니, 어찌 조그마한 나라가 청국 같은 큰 나라를 이기리오마는, 일본 사람들이 서양 각국이 부강한 곡절을 알고 곧 백성 교육하는 일을 힘써 … 당장에 적은 리(利)와 욕심을 내버리고 '''인민 교육하여 몇 해 후에는 조선도 남과 같이 되기를 바라노라'''&lt;br /&gt;
|출처=「논설」,『독립신문』1896년 4월 25일자.}}&amp;lt;br/&amp;gt;&lt;br /&gt;
위의 글들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이러한 지식인들의 자각이 민족사학 설립의 배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민족사학의 발전과정 ====&lt;br /&gt;
1800년대 후반부터 1910년 이전까지 주요 민족 주도로 설립된 교육기관의 설립 과정을 정리&amp;lt;ref&amp;gt;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민족독립운동사 국권수호운동Ⅱ Ⅳ. 국권수호를 위한 사회·문화운동 6. 사립학교의 구국운동 3) 민립학교 설립의 주체(https://db.history.go.kr/modern/level.do?levelId=hdsr_002_0010_0060_0030)의 데이터에 기반하여 자료 조사를 진행하였다. 자료조사를 통해 설립 연도가 일부 수정되었다.&amp;lt;/ref&amp;gt;하였다.&amp;lt;br/&amp;gt;&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xpvhRvJrqO8QmhwtXtUZhPRbrWskR7CqqsrToNpIPRE&amp;amp;font=Default&amp;amp;lang=ko&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amp;lt;br/&amp;gt;&lt;br /&gt;
이와 같이 1905년 이전에는 개화 및 신교육 도입 목적으로 1905년 이후에는 인재양성을 통한 교육구국을 목적으로 많은 교육기관이 설립되었다.&lt;br /&gt;
&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대표적 민족설립 교육기관====&lt;br /&gt;
아래의 표에서는 대표적인 민족설립 교육기관과 그 계승 현황을 정리하였다. &amp;lt;br/&amp;gt;&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hn:left;background:white;&amp;quot;&lt;br /&gt;
|+ [대표적 민족설립 교육 기관&amp;lt;ref&amp;gt;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민족독립운동사 국권수호운동Ⅱ Ⅳ. 국권수호를 위한 사회·문화운동 6. 사립학교의 구국운동 3) 민립학교 설립의 주체(https://db.history.go.kr/modern/level.do?levelId=hdsr_002_0010_0060_0030)의 데이터에 기반하여 자료 조사를 진행하였다. 자료조사를 통해 설립 연도 및 설립자가 일부 수정되었다.&amp;lt;/ref&amp;gt;]&lt;br /&gt;
! 교육기관명 || 설립일 || 설립자 || 계승&lt;br /&gt;
|-&lt;br /&gt;
|원산학교(元山學校) || 1883 || 덕원(德源)의 유지 || 원산소학교, 원산보통학교, 원산제일국민학교로 계승되며 1945년까지 지속됨&lt;br /&gt;
|-&lt;br /&gt;
|흥화학교(興化學校) || 1895. 11. 5. || 민영환(閔泳煥) || 1911년 폐교&lt;br /&gt;
|-&lt;br /&gt;
|중교의숙(中橋義塾) || 1896 || 민영기(閔泳綺) || 1906년 폐교&lt;br /&gt;
|-&lt;br /&gt;
|순성여학교(順成女學校) || 1898.12. || 찬양회(讚揚會) || 1905년 12월 31일 『대한매일신보』기사를 끝으로 신문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음&lt;br /&gt;
|-&lt;br /&gt;
|점진학교(漸進學校) || 1899 || 안창호(安昌浩) || .&lt;br /&gt;
|-&lt;br /&gt;
|낙연의숙(落淵義塾) || 1901 || 서광세(徐光世) || 1916년 폐교&lt;br /&gt;
|-&lt;br /&gt;
|한성법학교(漢城法學校) || 1905. 1. || 사회 유지 || 1905년 9월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가 법률학전문야학과를 신설하여 한성법학교 학생 20명을 인계받음 &amp;lt;ref&amp;gt; https://www.kunews.ac.kr/news/articleView.html?idxno=3765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양정의숙(養正義塾) || 1905. 2. 11. || 엄주익(嚴柱益) || 양정중학교(養正中學校)&lt;br /&gt;
|-&lt;br /&gt;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 1905. 4. 3. || 이용익(李容翊) || '''고려대학교(高麗大學校)'''&lt;br /&gt;
|-&lt;br /&gt;
|보창학교(普昌學校) || 1905. 5. || 이동휘(李東輝) || .&lt;br /&gt;
|-&lt;br /&gt;
|서전서숙(瑞甸書塾) || 1906 || 이상설(李相卨) || 1907년 폐교&lt;br /&gt;
|-&lt;br /&gt;
|진명여학교(進明女學校) || 1906. 4. ||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 진명여자고등학교(進明女子高等學校)&lt;br /&gt;
|-&lt;br /&gt;
|중동학교(中東學校) || 1906. 4. 2. || 신규식(申圭植) || 중동고등학교 (中東高等學校)&lt;br /&gt;
|-&lt;br /&gt;
|휘문의숙(徽文義塾) || 1906. 5. || 민영휘(閔泳徽) || 휘문고등학교(徽文髙等學校)&lt;br /&gt;
|-&lt;br /&gt;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 || 1906. 5. ||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 '''숙명여자대학교(淑明女子大學校)''', 숙명여자중학교(淑明女子中學校), 숙명여자고등학교(淑明女子高等學校)&lt;br /&gt;
|-&lt;br /&gt;
|양규의숙(養閨義塾) || 1906. 6. || 여자교육회(女子敎育會) || .&lt;br /&gt;
|-&lt;br /&gt;
|서우사범학교(西友師範學校) || 1907. 1. || 서우학회(西友學會) || 1908년에 서북협성학교(西北協成學校)로 개편됨&lt;br /&gt;
|-&lt;br /&gt;
|대성학교(大成學校) || 1907 || 안창호(安昌浩) || 1912년 폐교&lt;br /&gt;
|-&lt;br /&gt;
|협동학교(協東學校) || 1907 || 유인식(柳寅植)) || 1917년 폐교&lt;br /&gt;
|-&lt;br /&gt;
|소의학교(昭義學校) || 1907. 9. || 전경현(全景鉉), 민강(閔橿), 장경관(張敬寬) 등 || 동성고등학교 (東星高等學校)&lt;br /&gt;
|-&lt;br /&gt;
|장훈학교(長薰學校) || 1907. 11. 2. ||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 || 장훈고등학교 (長薰高等學校)&lt;br /&gt;
|-&lt;br /&gt;
|오산학교(五山學校) || 1907. 12. || 이승훈(李昇薰) || 오산고등학교 (五山高等學校)&lt;br /&gt;
|-&lt;br /&gt;
|기호학교(畿湖學校) || 1908. 6. 20. ||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 || 융희학교(隆熙學校)를 흡수하여 중앙중학교(中央中學校), 중앙고등학교(中央高等學校)로 발전함&lt;br /&gt;
|-&lt;br /&gt;
|양원여학교(養原女學校) || 1908. 6. || 여자보학원유지회(女子普學院維持會) || .&lt;br /&gt;
|-&lt;br /&gt;
|신명학당(新明學堂) || 1908. 2. || 김장호, 김홍식(金洪植) || 치문초등학교 (致文初等學校)&lt;br /&gt;
|-&lt;br /&gt;
|명동학교(明東學校) || 1908. 4. 27. || 김학연(金學淵) || 1925년 폐교&lt;br /&gt;
|-&lt;br /&gt;
|보인학교(輔仁學校) || 1908. 6. 8. || 보인학회(輔仁學會) || 보인고등학교(輔仁高等學校)&lt;br /&gt;
|-&lt;br /&gt;
|양산중학교(楊山中學校) || 1908. 10. || 김홍량(金鴻亮) ||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이상의 표에서 1910년 국권피탈 이전 설립된 민족설립 교육기관 중 적지 않은 수가 오늘날에도 현존하고 있는 중학교, 고등학교, 또는 대학교로 계승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10년 이후 많은 학교가 폐교 위기에 처한 것을 고려하였을 때, 이러한 계승은 민족설립 교육기관을 유지해 교육을 통해 나라를 구하고자 했던 당시 사람들의 투지와 열망에 대한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보성전문학교와 명신여학교====&lt;br /&gt;
1910년 이전까지 민족 주도로 설립된 교육 기관 중 주요하게 살펴보아야 할 기관으로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와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가 있다. 보성전문학교는 이용익(李容翊)이 고종의 허가 하에 설립하였고, 명신여학교는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의 지원으로 설립되었음을 고려할 때, 모두 황실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사립 교육기관으로 보기는 힘들다는 한계는 존재한다. 그러나, 1910년 이전에 설립된 학교가 폐교의 절차를 밟지 않고 이어져 오늘날까지 계승되었다는 사실이 가지는 의미는 적지 않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1910년 이후 많은 학교가 일제의 강압 아래 폐교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 두 학교의 경우 대부분의 학교가 중등교육기관으로 계승된 것과는 구분되어 '''고등교육기관으로 발전한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나아가, 보성전문학교 설립을 기점으로 '교육 구국'을 목적으로 한 민족 사학의 설립이 활성화되었다는 점과 명신여학교의 경우 민족이 설립한 많지 않은 여성 교육기관 중 하나였다는 점 역시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lt;br /&gt;
보성전문학교는 1905년 04월 03일 고종(高宗)의 재정적 후원을 받아 [[이용익李容翊]]에 의해 설립된 교육기관이다. &amp;lt;br/&amp;gt;&lt;br /&gt;
보성전문학교의 설립 배경은 설립자 이용익의 행보에서 엿볼 수 있다. 친로반일(親露反日)의 뜻 고수한 것과 조선의 중립 선언을 선언하게 한 것으로 인해 일본에 의해 납치된 이용익은 체류 중 일본의 '''근대교육기관 및 개화문물을 접한다'''. 이것이 그의 교육기관 설립의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이후 귀국할 때 '''다수의 도서와 인쇄기를 구매'''하여 가지고 온 점 역시 이러한 추측의 설득력을 높인다. &amp;lt;br/&amp;gt;&lt;br /&gt;
한편, 보성전문학교의 개교를 알리는 황성신문(皇城新聞)의 글에는 보성전문학교 설립이 그 당시에 가졌던 의미가 잘 드러나고 있다. &amp;lt;br/&amp;gt;&lt;br /&gt;
{{Blockquote|전문학교 창설. '''대한에 전문대학교는 아직 세워지지 못했다. 한성법학교(漢城法學校)가 세워졌으나 야학(夜學)이라 완전하지 못했는데, 박동(礴洞)에 신설한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는 위치가 전문대학 주간 학교로''' 대황제폐하께서 특별히 설립하신 바, 매월 수천원의 경비를 내탕전(內帑錢)으로 내려주고 도서관을 부설하여 각 전문 교과서 수천권을 새로 간행한다 한다. 그리고 신해영(申海永)·조제환(趙齊桓)·정영택(鄭永澤) 세 명에게 이상의 사무를 전담하도록 하여, 위 3명은 교육을 열심히 하여 황제의 뜻에 보답하기위해 더욱 극진하게 힘을 쓴다고 한다. 20여명의 교수는 일찍이 일본에 유학하여 졸업한 사람들을 임용하여 (중략) '''2개년 졸업기한이지만 인재를 빨리 양성하도록''' 황제의 뜻을 특별히 내리셨다하고, 오늘부터 개교한다고 한다.&lt;br /&gt;
|출처=『황성신문(皇城新聞)』 1905년 4월 1일자 2면. 현대어역: 고려대학교 도서관&amp;lt;ref&amp;gt;https://library.korea.ac.kr/datause/archiving/old-book-exhibition/release/?mod=document&amp;amp;uid=10653&amp;lt;/ref&amp;gt;}}&lt;br /&gt;
윗글에서 당시 대한제국에 중등교육기관은 존재했음에도 고등교육을 위한 기관은 야학의 형태로서만 존재하여 온전하지 못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당시 상황 속에서 이용익이 일본의 교육 현황을 접한 후 대한제국 고등교육기관의 필요성을 느껴 설립하려 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고등교육기관 설립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맞춰 등장한 학교라는 점에서 보성전문학교가 가지는 가치는 매우 크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1910년 이후 다른 학교와 마찬가지로 보성전문학교는 운영진 및 교장의 망명, 투옥과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운영난을 겪는 등 각종 수난을 겪는다. 이후 일제의 탄압 아래 격하되거나 교명을 바꾸고 학과 설립이 제한되는 등 여러 차례 존속의 고비를 넘긴다. 하지만 끊임없는 노력을 바탕으로 1921년 전문학교로 다시 승격되었으며 여러 위기를 거친 끝에 해방 후 고려대학교로 발족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lt;br /&gt;
명신여학교는 1906년 5월 22일 고종(高宗)의 후궁인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의 지원으로 왕실 별궁 용동궁에 설립된 교육기관이다. &amp;lt;br/&amp;gt;&lt;br /&gt;
순헌황귀비는 본디 교육, 특히 여성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명신여학교의 설립에 앞서 1906년 4월에 진명여학교(進明女學校)를, 1907년에 경영난에 처해 있던 양정의숙(養正義塾)을 도운 점에서 잘 드러난다. &amp;lt;br/&amp;gt;&lt;br /&gt;
한편, 당시 여성 교육 관련 배경은 다음과 같다. 앞서 기술된 바와 같이 1905년 을사늑약 전후로 교육구국이 일어나 전국 각지에서 민족사학이 설립되었으나 여성을 위한 교육기관은 부족한 실태였다. 당시 설립된 여성 교육기관으로는 이화학당, 정신여학교, 숭의학교 등이 있었으나 이는 모두 선교사, 즉 민족에 의해 설립된 학교가 아니었다.&amp;lt;ref&amp;gt;한희숙, 구한말 순헌황귀비 엄비의 생애와 활동, 아시아여성연구, 숙명여자대학교 아시아여성연구원, 제45집 2호, 2006&amp;lt;/ref&amp;gt;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여성 교육기관의 필요'''를 절감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 것은 순헌황귀비의 시대적 통찰력을 반영하는 부분이다. &amp;lt;br/&amp;gt;&lt;br /&gt;
위와 같은 순헌황귀비의 설립 목적은 대한매일신보의 글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amp;lt;br/&amp;gt;&lt;br /&gt;
{{Blockquote|황귀비 흥학:  황귀비 전하께오서 여자 교육이 없음을 크게 걱정하여 육군참장 엄주익씨 집(第)에 여학교를 설립하여 '''여자교육을 발달시키고자''' 하였다.  엄주익에게 학교 설립 일을 전담하게 하시니 '''대한여자의 교육이 앞으로 발달하기를''' 가히 볼 수 있을 지로다. &lt;br /&gt;
|출처=『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6년 4월 24일자&amp;lt;ref&amp;gt;한희숙, 구한말 순헌황귀비 엄비의 생애와 활동, 아시아여성연구, 숙명여자대학교 아시아여성연구원, 제45집 2호, 2006, 227쪽.&amp;lt;/ref&amp;gt;}}&lt;br /&gt;
광복 후 명신여학교는 숙명여자중학교(淑明女子中學校)와 숙명여자고등학교(淑明女子高等學校)로 이어졌다. 나아가, 여성 고등교육기관의 설립을 꿈꾼 교장 이정숙(李貞淑)의 뜻에 따라 1938년 숙명학원(淑明學園)에서 숙명여자전문학교를 설립하였고, 이것이 오늘날 숙명여자대학교(淑明女子大學校)로 계승되었다.&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선교사 설립 교육기관===&lt;br /&gt;
선교사들은 기독교 선교의 기반 구축을 위해 개화정책 추진 초기인 1880년대부터 고종의 각별한 관심과 지원 속에서 많은 학교를 설립하였다.  서울에 배재·이화·경신학교를 설립하였고, 기독교 선교금지정책이 이완되기 시작한 1890년대에는 지방도시로 그 범위를 넓혀 1894년 평양의 광성학교·숭덕학교·정의여학교, 1895년 서울의 정신여학교를 비롯하여 동래·인천·재령·목포·원산·개성·해주·공주·대구 등 전국 각지로 확대하였다.&lt;br /&gt;
&lt;br /&gt;
====[[연세대학교(延世大學校)]]====&lt;br /&gt;
&lt;br /&gt;
연희전문학교는 1915년 선교부연합위원회의 협의를 얻어서 북장로회 선교사인 언더우드가 조선기독교학교로 처음 설립하였다. 이후 1917년 연희전문학교로 발족하였다. 보성전문학교 이후 두 번째로 설립된 전문학교이다. 이후 3.1 운동등 다양한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1944년 일제가 경영권과 재산을 몰수하고 한국인 교수진들을 모두 추방했었다. 독립 후에는 연희대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대학교로 승격하였다.&lt;br /&gt;
&lt;br /&gt;
세브란스는 대한제국의 궁정어의였던 알렌에 의해 1885년에 설립된 제중원에서 시작하였고, 1886년부터 제중원 내 의학부를 두고 입학생을 받았다. 이후 병원장으로 취임한 선교사 에비슨이 1899년 조선 최초의 의학교인 제중원의학교를 설립하였다. 1904년 미국인 세브란스의 후원으로 세브란스 병원이 세워지며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로 개편하였다. 1906년에 간호부가 개설되었고 우리나라 최초의 간호사를 배출하였다. 세브란스와 연희전문학교 간의 병합은 1920년대에도 한차례 시도한 바 있었으나 무산되었고, 독립 후 1957년에 두 학교가 통합되어 '''연세대학교'''로 출범하였다.&lt;br /&gt;
&lt;br /&gt;
====[[배재학당]]====&lt;br /&gt;
&lt;br /&gt;
1885년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한국 최초의 근대식 사립학교로 중등과정을 담당했다. 1886년이 고종이 배재학당이라는 이름을 사하였고 미국인들의 후원을 받아 1887년에 제대로 된 건물을 세웠다. 영어교육을 중점적으로 행했으며 학생자조정책을 채택하여 가난한 학생들이 학교에서 일을 하며 수업료를 벌 수 있도록 하였다. 현재 기존의 건물은 2008년부터 배재학당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배재중학교, 배재고등학교, 배재대학교'''가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lt;br /&gt;
&lt;br /&gt;
====[[배화학당]]====&lt;br /&gt;
초,중등과정의 사립학교로 1898년 켐벨 선교사가 설립하였다. 처음엔 캐롤라이나학당으로 기독교전파와 여성교육을 목표로 세웠졌다. 1910년 배화학당으로 개칭하였다.1916년 1월 경성 누하동(지금의 서울 종로구 필운동)으로 교사를 이전하고, 1926년 12월 캠블기념관을 신축하였으며, 1938년 3월 배화고등여학교와 배화여자소학교로 분리,개편되었다. 일제의 신사참배요구를 거절한 기독교 학교 중 하나이다. 1940년대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선교사들도 학교를 떠나며 위기에 폐교 위기에 봉착했다. 학교가 경영난에 시달리자 일제는 학교의 운영권을 요구했으나, 당시 교사였던 이덕봉과 이만규가 독지가를 구하려 노력한 끝에 이민천이 춘천, 이천, 연기, 익산 등지에 있는 토지를 기부하여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독립 후 1951년 '''배화여중과 배화여고'''로 분리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김윤]]&lt;br /&gt;
&lt;br /&gt;
=='''민간 단체의 교육 운동'''==&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신민회(新民會)]]의 애국계몽운동===&lt;br /&gt;
&amp;lt;br/&amp;gt;&lt;br /&gt;
{{Blockquote| '''신민회 행동강령'''&lt;br /&gt;
1. 국민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사상 고취 &amp;lt;br /&amp;gt; 2. 동지를 발하고 단합하여 국민 운동 역량 축적 &amp;lt;br /&amp;gt; 3. 상공업 기관 건설로 국민의 부력(富力) 증진 &amp;lt;br /&amp;gt; 4. 교육 기관 설립으로 청소년 교육 진흥&lt;br /&gt;
|출처= 「헌기제501호, 「대한 신민회 취지서 및 동회 통용 장정 등 보고 건」, 1909년 3월 5일(국사편찬위원회, 『통감부문서』 6, 1991}}&lt;br /&gt;
&lt;br /&gt;
[[신민회(新民會)]]는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1907년에 [[안창호(安昌浩)]], [[양기탁(梁起鐸)]] 등의 주도로 결성된 항일 비밀결사&amp;lt;/span&amp;gt;이다. 위와 같은 신민회의 행동 강령을 바탕으로 신민회는 실력 양성을 통한 국권 회복을 주장하며, 교육, 언론 및 출판, 민족 산업 육성, 독립군 양성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lt;br /&gt;
&lt;br /&gt;
신민회는 실력 배양의 방법으로 교육 구국 운동을 두 가지 측면에서 전개하였다. 국민에게 국권회복을 위한 교육의 필요성을 계몽하여 학교설립을 고취하며 신민회도 학교를 설립하여 국권회복에 필요한 적합한 교육방침을 강구하여 민족 지도자를 양성한다는 것이다. 또한, 국외에서 독립군 기지를 창설하고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전쟁을 일으켜 국권을 회복한다는 것이다. &lt;br /&gt;
&lt;br /&gt;
신민회는 이를 위해 민중들이 설립한 학교에 대해 학교교육방침을 지도하였다. 또한, 중학교를 설립하고, 학교의 모범을 만들며 중학교에서 동시에 사범교육을 해 교사를 양성한다는 기준을 세우고 학교를 설립하였다. 당시 민간인이 자발적으로 기금을 갹출하여 설립한 학교는 대부분이 소학교였기 때문에, 신민회는 중학교를 설립하여 소학교 출신 청소년들이 더 양질의 교육을 통해 민족지도자로 발돋움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lt;br /&gt;
&lt;br /&gt;
신민회는 기본적으로 비밀결사이기 때문에 그들이 설립한 학교의 수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1907년부터 1909년 4월까지 민간인들에 의해 세운 학교가 3000여 개교에 달한다는 통계로 보아 신민회에서 세운 학교가 많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알려진 신민회가 설립한 학교는 다음과 같다.&lt;br /&gt;
&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hn:left;background:white;&amp;quot;&lt;br /&gt;
|+ [신민회가 설립한 학교]&lt;br /&gt;
! 학교명 || 설명 &lt;br /&gt;
|-&lt;br /&gt;
| '''대성학교'''|| [[안창호(安昌浩)]], 윤치호 평양에 설립. 신민회가 설립한 대표적인 민족 사학으로 입학 지원자가 500~600여 명이 되는 때도 존재. &lt;br /&gt;
|-&lt;br /&gt;
| '''오산학교'''|| 평안북도 정주군에 이승훈 설립. 김소월, 백석, 이중섭, 독립운동가 김홍일 중장 등을 배출. 현재 서울 오산고등학교로 계승됨&lt;br /&gt;
|-&lt;br /&gt;
| 점진학교|| 평안남도 강서 위치, [[안창호(安昌浩)]] 설립. 남녀공학을 실시한 최초의 소학교. &lt;br /&gt;
|-&lt;br /&gt;
| 보창학교 || 강화도 위치, [[이동휘]] 설립&lt;br /&gt;
|-&lt;br /&gt;
| 신안학교 || 정주, 신민회 정주지회 회원 설립&lt;br /&gt;
|-&lt;br /&gt;
| 양실학교 || 의주, 신민회 의주/용천지회 회원 설립&lt;br /&gt;
|-&lt;br /&gt;
| 가명학교 ||  신민회 납청정지회 회원 설립&lt;br /&gt;
|-&lt;br /&gt;
| 신흥학교 || 선천, 중학교급 학교&lt;br /&gt;
|-&lt;br /&gt;
| 홍양학교 || 신민회 곽산지회 회원 &lt;br /&gt;
|-&lt;br /&gt;
| 명륜학교|| 함경남도 영흥읍에 있던 세 개 학교 통합, [[이동휘]] 설립&lt;br /&gt;
|-&lt;br /&gt;
| 경성학교|| 함경북도 경성 위치&lt;br /&gt;
|-&lt;br /&gt;
| 양산학교|| 황해도 안악읍 향천자리, 김용제 설립, 신민회가 중학교로 개편&lt;br /&gt;
|-&lt;br /&gt;
| 오성학교 || 서울 위치, 이갑, 이종화 설립. 신민회 창건 후 각종학교인 서북협성학교로 개편&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신민회의 애국계몽은 학교 설립뿐만이 아니라 학회의 설립과 지도를 통해서도 추진되었다. 안악군면학회(安岳郡勉學會), 해서교육총회(海西敎育總會),평양청년권장회(平壤靑年勸?會), 연학회(練學會), 동제회(同濟會)등의 학회를 전국에 조직하는 데에 앞장섰다. 또한, 서우학회, 한북학회를 서북학회로 통합 재조직하는 등, 기존에 있던 학회의 통합과 재정비에도 이바지하였다. &lt;br /&gt;
&lt;br /&gt;
이와 같이 신민회의 교육계몽운동은 신민회가 1911년 105인 사건으로 해산될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그 이후에도 다른 독립운동단체에 영향을 미쳐 교육을 통한 민중 계몽으로 이루어지는 독립운동의 방향성을 제시하였다.&lt;br /&gt;
&lt;br /&gt;
[[분류:신다정]]&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농촌 계몽 운동===&lt;br /&gt;
&lt;br /&gt;
농촌 계몽 운동은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1920년대~1930년대 민족 운동과 관련한 청년 학생이나 지식층이 농민의 의식과 지식 등을 계몽하기 위해 농촌 사회에서 행한 사회 교육 운동&amp;lt;/span&amp;gt;을 의미한다. 농사일을 끝낸 후 강연회, 토론회, 야학 등의 형식으로 이루어졌으며 특히 농한기인 겨울에 많이 실시되었다. &lt;br /&gt;
&lt;br /&gt;
1920년에는 일제의 식민 지주 경영과 지주 착취로 인해 농민 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고, 이와 맞물려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이 결성되었다. 이때 사회주의 계열 청년 단체와 지식인들이 농촌으로 진출하여 농민 운동을 주도하였다. &lt;br /&gt;
민족주의 계열에서 주도한 농촌 운동은 문맹 퇴치와 생활 개선 등의 계몽적 활동이 중심이었다. 대표적으로 천도교 계열의 농촌 운동, 기독교 계열의 농촌 운동이 있다. 천도교는 1925년 조선농민사를 설립하여 농민 야학을 시행하고 전국적으로 농민에 대한 계몽 활동을 전개하였다. 기독교에서는 1926년 이후 학생 YMCA 농촌부를 중심으로 계몽 활동을 적극 추진하였다. &lt;br /&gt;
&lt;br /&gt;
1920년 후반부터 1930년대에는 언론사 또한 농촌 계몽 운동에 힘을 쏟았다. 대표적으로 1929년부터 1935년까지 이루어진 조선일보사의 문자 보급 운동과 1931년부터 1934년까지 이루어진 동아일보사의 [[브나로드 운동]]이 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이런 농촌 계몽 운동은 1930년대 들어 강화된 조선총독부의 조선어 사용 금지 정책과 지방 농촌의 몰락으로 인해 쇠퇴하였다. 또한, 농촌의 몰락 책임을 수탈 때문이 아닌 농민의 게으름과 무지에 있다며 총독부의 주도로 농촌진흥운동을 진행하며 민간 및 언론 단체의 농촌 계몽 운동을 탄압하였다. 그러나 이런 탄압 속에서도 농촌 계몽 운동은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이러한 민간 교육 활동 및 정책은 해방 이후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문맹 퇴치 운동으로 이어졌다.&lt;br /&gt;
&lt;br /&gt;
[[분류:신다정]]&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민립 대학 설립 운동===&lt;br /&gt;
&lt;br /&gt;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은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1920년대 이루어진 민족 사학 설립 운동&amp;lt;/span&amp;gt;이다.&lt;br /&gt;
&lt;br /&gt;
1920년대 초 식민지 조선에서는 민중의 자발적인 참여하에 조선인을 위한 대학을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등장하였다. 민립 대학 설립에 대한 논의는 1920년 6월 20일 한규설, 이상재, 윤치소 등 91년의 발기로 조선교육회 발기회가 개최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가 학회령을 토대로 1922년 1월 24일까지 인가를 내주지 않아 민립대학 설립에 대한 결의를 실행시키지 못했다. &lt;br /&gt;
&lt;br /&gt;
동아일보에 기고된 사설을 통해 당시의 독립을 위한 교육 계몽의 필요성과, 관립 대학과 다르게 민립 대학의 설립 필요성에 관해 확인할 수 있다. &lt;br /&gt;
&lt;br /&gt;
{{Blockquote|운명을 어떻게 개척할까. 정치냐 외교냐 산업이냐. 물론 이러한 일들 모두 다 필요하다. 그러나 그 기초가 되고 요건이 되며 가장 급무가 되고 가장 선결의 필요가 있으며 가장 힘 있고 '''가장 필요한 수단은 교육이 아니면 할 수 없다.''' &amp;lt;br /&amp;gt; … 물론 관립대학도 조만간 개교될 것이기에 대학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학문 발전의 장래는 결코 1개의 대학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요, 또한 '''그처럼 중대한 사업을 우리 민중이 직접으로 영위하는 것은 차라리 우리의 의무라 할 수 있다.''' &amp;lt;br /&amp;gt;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에 느낀 바 있어 감히 만천하 동포에게 향하여 민립대학의 설립을 제창하니 자매형제는 와서 돕고 나아가 이루어라.'''&lt;br /&gt;
|출처= 「開會된 民大總會」, 『동아일보』, 1923년 3월 30일자.}}&lt;br /&gt;
&lt;br /&gt;
이렇게 고양된 민립 대학 설립을 통한 민족 교육에 대한 필요성을 바탕으로, 1922년 1월 이상재, 이승훈, 윤치호, 김성수, 송진우 등이 조선민립대학기성준비회를 정식으로 결성하였다. 이어 1923년 3월 29일 발기인 1170명 중 462명이 참석한 가운데 3일간 총회를 개최하였다. &lt;br /&gt;
&lt;br /&gt;
총회에서는 ＇민립대학발기취지서＇를 채택하고 대학 설립 계획서를 확정하였다. 계획서에 따르면 3개년 계획으로 자본금 1000만원을 갹출하는데, 제 1차 연도에는 대지 5만 평을 구입하여 교실 10동, 대강당 1동을 건축하고, 법과/경제과/문과/이과의 4개 대학 및 예과를 설치하며, 제2차 연도에는 300만원으로 공과/이과/기타 학과를 증설하고, 제3차 연도에는 300만원으로 의과/농과를 설치한다는 것이다. 또 중앙집행위원회를 구성하고 지방에 지방부를 두기로 결의하였다. 별도로 지방순회선정위원 13평을 선정하고 파견하였다. 이와 같은 노력을 토대로 1923년 말까지 전국 100여 개소와 해외의 만주 간도, 봉천, 미국 하와이 등지에도 지방부가 조직되었다. &lt;br /&gt;
&lt;br /&gt;
기성회는 ＇한민족 1000만 한 사람 1원씩＇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기금 모금에 나섰다. 이런 모금 활동에 민족 교육을 성원하는 마음들이 모였는데, 대표적으로 전라남북도에서만 15만원이 모금되었으며 경기도 안성의 이정도는 1년 동안 매일 아침 밥짓는 쌀에서 식구 수 대로 한 숟가락씩 모아 판 돈 19원을 기부하는 등 일반 민간에서의 성원도 뜨거웠다. &lt;br /&gt;
&lt;br /&gt;
이와 같은 열기에 일제는 이를 교육 운동이 아니라 정치 운동이라고 판단하고 탄압하였다. ＇조선교육령＇을 개정하여 관립 경성제국대학의 설립을 서두르고 민립대학과 관련 있는 인사들에 대한 탄압과 기금 갹출 방해 공작을 전개하였다. 민립대학기성회 인사들을 민족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구실로 철저히 감시하고, 기금 모집을 위해 박차를 가하던 인사들의 지방 강연을 배일사상을 고취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강연 중지를 명하고 청중을 해산시켰다. &lt;br /&gt;
&lt;br /&gt;
이러한 조선총독부의 탄압이 민립대학 설립운동의 실패의 주된 원인이 되었다. 1923년 여름 수재, 9월 일본 관동 대지진으로 인한 경제 공황, 1924년 한재와 7월 전국적 수재로 인한 농촌 경제 파탄 등 자연적인 여건도 민립대학 설립운동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그러나 3.1운동 이후 전 민족이 민족 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조직체를 형성하여 교육을 통한 자주독립이라는 하나의 목표에서 단결을 보였다. 이는 이후의 민족운동 양상에서 조직적인 단체 결성의 표본이 되었다.&lt;br /&gt;
&lt;br /&gt;
[[분류:신다정]]&lt;br /&gt;
&lt;br /&gt;
=='''군사 교육'''==&lt;br /&gt;
&lt;br /&gt;
독립운동사에서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군사 교육도 꾸준히 이어져왔다. 수많은 독립열사들은 무관학교 설립을 위한 활발한 활동을 이어왔다. 독립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역량은 군사였기 때문에, 군사교육은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였으며 이에 따라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에서도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노력이 나타났다.&lt;br /&gt;
&lt;br /&gt;
[[분류:이민희]]&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lt;br /&gt;
신흥무관학교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위해 설립된 군사학교로, 독립군 양성과 무장 투쟁 기반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911년 중국 만주 서간도 지역(현재의 지린성 류허현)에서 이회영, 이시영 등 독립운동가들이 설립했으며, 군사 지도자를 양성하고 실질적인 무장 독립운동을 준비하는 데 목적을 두었습니다. &lt;br /&gt;
&lt;br /&gt;
교육 내용은 사격, 전술, 지형 분석 등 실전 중심의 군사훈련과 함께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역사 및 애국사상 교육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졸업생들은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전투 같은 독립전쟁에서 활약하며 독립운동의 주축이 되었고, 김좌진과 이범석 같은 지도자를 배출했습니다. &lt;br /&gt;
&lt;br /&gt;
1920년대에 들어 일본의 탄압이 강화되면서 학교 운영이 점차 어려워졌고, 졸업생들이 각종 독립운동 조직으로 흩어지면서 신흥무관학교는 군사훈련소 형태로 전환되다가 결국 해체되었습니다. &lt;br /&gt;
&lt;br /&gt;
졸업생들은 만주 지역에서 서로군정서, [[북로군정서]]에서 핵심 간부로 활약, [[대한독립군]], 통의부의용군, 정의부, 신민부, 국민부 등에서 활동하였고,중국 본토에서는 1919년 11월 길림에서 의열단 결성,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에서 독립운동 전개했습니다.&lt;br /&gt;
&lt;br /&gt;
신흥무관학교는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군사교육 기관으로 평가받습니다. 이 학교는 독립군의 전투력을 강화하고, 독립운동의 실질적 기반을 마련했으며, 한국 독립운동의 전환점이 된 여러 전투에서 큰 공헌을 했습니다.&lt;br /&gt;
&lt;br /&gt;
[[분류:최용빈]]&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조선혁명간부학교]]===&lt;br /&gt;
&lt;br /&gt;
1919년 조직된 무장독립운동단체 의열단은 중국국민당과의 합작을 통해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실질적인 군사 교육 기관'''&amp;lt;/span&amp;gt;을 설립하고자 노력했다. 이에 따라 [[장제스]]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의열단&amp;lt;ref&amp;gt; 급진적인 항일 투쟁을 목적으로 1919년 11월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로, 김원봉(金元鳳)이 단장을 맡았다. &amp;lt;/ref&amp;gt;의 단장인 김원봉이 1932년 중국 난징에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설립하였다. 공식 명칭은 사실 조선혁명간부학교가 아닌, ''‘중국국민당 군사위원회 간부 훈련반 제6대’''로, 국민당의 단기간부훈련소 신설반인 것처럼 위장했다. &lt;br /&gt;
&lt;br /&gt;
&lt;br /&gt;
학교는 일본과 중국의 외교관계를 고려해 학교 운영 사실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설립 초기에는 중국 외교부와 육군참모본부, 심지어 군사위원회 판공청 당사자들조차 그 존재를 모를 정도였다. 만 3년간 운영된 조선혁명간부학교는 3기에 걸쳐 총 125명의 인재를 배출했다. 국민당은 그동안 매월 경상비 2,000~3,000원·수시 필요경비 1,000~1만 원·기타 운영비 400~1,000원 등 각종 운영자금 전액과 화기·탄약·피복 등을 지원했다. 학생들은 군사학뿐 아니라 별도 신설된 정치학, 자연과학을 포함해 경제학·사회학·철학·혁명학·물리학·화학·지리학까지 다양한 학문을 공부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혁명간부학교의 졸업생들은 이후 민족혁명당의 항일투쟁체계에 편입되었으며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대]]의 핵심 세력으로 성장하였고, 일부는 화북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에 가담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단체문서한국광복군.jpg|섬네일|가운데|''&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한국 광복군의 모습&amp;lt;/div&amp;gt;'']] &lt;br /&gt;
[[파일:조선의용대김원봉.jpg|섬네일|가운데|''&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조선의용대 모습 &amp;lt;/div&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amp;lt;font color=&amp;quot;#8c8c8c&amp;quot;&amp;gt;조선의용대 깃발 가운데 있는 인물이 약산 김원봉이다.&amp;lt;/font&amp;gt;''&amp;lt;ref&amp;gt;김삼웅, &amp;quot;최후까지 총을 든 조선의용대와 김원봉&amp;quot;, 오마이뉴스, 2024.02.06.,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999602 (검색일:2024년 12월 4일)&amp;lt;/ref&amp;gt;&amp;lt;/div&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이민희]]&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한인소년병학교]]===&lt;br /&gt;
&lt;br /&gt;
한인소년병학교는 장기적인 독립 투쟁을 대비하여 군사 교육을 받은 장교를 양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박용만에 의해 설립되었다. 한인소년병학교는 1909년 6월에 세워진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최초의 국외 설립 군사학교''&amp;lt;/span&amp;gt;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으며, 각지의 군사운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lt;br /&gt;
&lt;br /&gt;
&lt;br /&gt;
한인소년병학교는 미국의 헤이스팅스(Hastins) 대학과 교섭하여 운영되었으며, 네브라스카 주에서 설립되었으나 교섭에 따라 헤이스팅스로 이전하여 한인 유학생의 활발한 참여를 이끌어냈다. 헤이스팅스 대학은 건물 한 동과 전장을 지원하여, [[둔전병제]]식 훈련을 실시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헤이스팅스대학.png|섬네일|가운데|''&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헤이스팅스 대학의 모습 &amp;lt;/div&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amp;lt;font color=&amp;quot;#8c8c8c&amp;quot;&amp;gt;한인소년병학교 학생들이 훈련했던 헤이스팅스 대학의 사진이다.&amp;lt;/font&amp;gt;''&amp;lt;/div&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ftzi6pFWzNc?si=iGbjmKk9yPuAn_Ub&amp;quot; title=&amp;quot;YouTube video player&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div&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다음의 영상에서 한인소년병학교가 있었던 헤이스팅스 대학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다.'' &amp;lt;/div&amp;gt;&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lt;br /&gt;
&lt;br /&gt;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는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한 박용만이 미국의 하와이에도 같은 군사 훈련 단체를 설립하고자 하여 1914년 4월 15일 설립되었다. 당시 학도 수는 200여명으로 군단장 역시 박용만이 맡았다. &lt;br /&gt;
&lt;br /&gt;
&lt;br /&gt;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는 [[한인소년병학교]]를 계승하여 [[둔전병제]]식 훈련을 실시하였고, 군영이 호놀룰루 시의 동북 쪽 큰 산을 넘어 해안과 아후이마누 강을 낀 계곡에 위치하여 ''&amp;quot;산 넘어 아희들&amp;quot;''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lt;br /&gt;
하와이에서 군단과 사관학교를 설치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으나, 1916년을 고비로 점차 쇠퇴하여 1917년 경 해체되었고, 지역으로 흩어져 사실상 폐교되었다.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는 제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미일(美日) 간 우호관계가 지속되면서 국민군단의 혁명적이고 군사적인 성격이 하와이 내에서 우호적인 반응을 얻지 못하였고, 이외에도 하와이 내 농장의 불경기로 수입이 급감하면서 재정 조달이 어려웠으며 1915년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의 실권이 이승만 측에 넘어가 박용만의 활동 범위가 위축된 점 등으로 인해 폐교되었다고 추측되고 있다.&lt;br /&gt;
&lt;br /&gt;
[[분류: 이민희]]&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숭무학교(崇武學校)]]===&lt;br /&gt;
숭무학교는 1910년대 멕시코로 이주한 한인들이 일제강점기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한 군사학교입니다. 멕시코에 이주한 한인들은 고된 노동 속에서도 민족 독립의 열망을 잃지 않고 독립운동을 조직적으로 지원하고자 노력했습니다. 1915년 멕시코 유카탄주 메리다 지역에서 설립된 숭무학교는 독립군 양성을 목표로, 체계적인 군사훈련과 애국 사상 교육을 실시했습니다.&lt;br /&gt;
&lt;br /&gt;
이 학교는 멕시코 한인 사회의 독립운동 기반을 강화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특히 숭무학교는 한인들의 단결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멀리 해외에서조차 독립운동을 지속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큽니다. 이러한 활동은 멕시코뿐 아니라 미주 지역의 다른 한인 독립운동 단체에도 영향을 주어 독립운동의 글로벌 네트워크 형성에 기여했습니다.&lt;br /&gt;
&lt;br /&gt;
숭무학교는 해외 독립운동의 독특한 사례로, 한인 이민사와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lt;br /&gt;
&lt;br /&gt;
[[분류:최용빈]]&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독립군으로의 발전===&lt;br /&gt;
&lt;br /&gt;
군사교육을 위해 설립된 다양한 무관학교를 기점으로, 졸업생들은 각기 다른 곳에서 독립군으로 발전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의 경우, 졸업생들은 만주 지역에서 서로군정서, 북로군정서에서 핵심 간부로 활약했을 뿐 아니라, 대한독립군,통의부의용군, 정의부, 신민부, 국민부 등에서 활동하였다. 또한, 중국 본토의 경우에서는 1919년 11월 길림에서 의열단을 결성하기도 하고, 임시정부 산하의 광복군인 한국광복군의 일원으로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졸업한 졸업생들도 독립군으로서 활약하였다. 이들은 민족혁명당의 항일투쟁체계에 편입되었는데, 대표적으로 임시정부 산하의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대의 핵심 세력으로 성장했고, 일부는 화북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에 가담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한인소년병학교]]와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 숭무학교를 졸업한 졸업생들도 독립군으로 발전하였으나, 구체적으로 어떤 기관으로 발전하였는지는 크게 알려진 바가 없다. &lt;br /&gt;
&lt;br /&gt;
[[숭무학교(崇武學校)]]는 일부 학생들은 멕시코 혁명에 참여하기 위해 군에 입대하였다.  일부 설립자들은 과테말라 혁명에 참여하려 했으나 실패로 끝났다.&lt;br /&gt;
&lt;br /&gt;
[[분류: 이민희]]&lt;br /&gt;
&lt;br /&gt;
==데이터 시각화==&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마인드맵===&lt;br /&gt;
[[파일:교육구국운동_노드_마인드맵.png|500픽셀]]&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온톨로지===&lt;br /&gt;
인물의 경우 관련 공훈전자사료관,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인명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의 관련 링크를 삽입하여 추가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하였다.&lt;br /&gt;
{{NetworkGraph | title=교육구국운동.lst}}&lt;br /&gt;
&lt;br /&gt;
[[분류:신다정]]&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콘텐츠 구조===&lt;br /&gt;
====클래스(Class)====&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width:100%;&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0%&amp;quot;| 클래스|| style=&amp;quot;width:10%&amp;quot;|모양|| style=&amp;quot;width:20%&amp;quot;|내용 ||노드 &lt;br /&gt;
|-&lt;br /&gt;
|인물 ||인물의 사진 || 독립운동사에서 교육 운동에 이바지하였던 인물을 포함한 다양한 독립운동가들을 인물로서 클래스로 설정했다. || [[이동휘]] '''[[안창호(安昌浩)]]''' [[김원봉]] '''[[장제스]]''' 박용만 이갑성 스코필드 유기준 [[주시경]] [[지청천]] [[여운형]] 차미리사 김명시 남궁억 [[이동녕]] 이용익 김성수 신해영 [[강기덕]] 손병희 [[방정환]] 이종호 윤익선 염온동 주익 이세영 고종 순헌황귀비 박자혜 신채호 김종진 이정숙 이회영 김구 이석영 이상룡 윤기섭 이근영 한성순 양귀선 조병하 서문경 윤을희 이시영 박선봉 조금옥 '''[[양기탁(梁起鐸)]]''' [[이강]] [[전덕기]]&lt;br /&gt;
|-&lt;br /&gt;
|기관 || 빨간색 상자|| 부지를 두고 설치하여 활동했던 조직을 기관으로 설정했다. ||연희전문학교 세브란스 배재학당 배화학당 보성전문학교 명신여학교 '''[[한인소년병학교]]''' 대조선국민군단사관학교 '''[[조선혁명간부학교]]''' 신흥무관학교 숭무학교 신흥강습소 동아일보&lt;br /&gt;
|-&lt;br /&gt;
|단체 || 파란색 원 ||기관보다 넓은 의미로서, 같은 뜻을 가지고 함께 활동했던 조직체를 단체로 설정했다. || '''[[신민회(新民會)]]''', 협성회, 독립협회, '''[[한국광복군]]''', '''[[조선의용대]]''', 조선의용군, 화북조선독립동맹, 대한민국임시정부, 간우회, 조선어학회, 대한인국민회&lt;br /&gt;
|-&lt;br /&gt;
|지역 || 초록색 타원|| 각 기관과 단체가 위치하거나 기관이나 단체, 인물이 활동했던 곳을 지역으로서 클래스를 설정했다. || 미국, 한반도, 난징, 멕시코, 캐나다, 상해, 만주, 중국&lt;br /&gt;
|-&lt;br /&gt;
|활동_및_사건 || 분홍색 타원 ||각 기관이나 단체, 인물의 행동 및 사건을 묶어 활동_및_사건의 클래스를 설정했다. || '''[[브나로드 운동]]''', 민립대학 설립 운동, 3.1운동, 6.10 학생 만세운동, 1920년 3.1 학생 운동, 서울 지역 학생 독립운동&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신다정]]&lt;br /&gt;
&lt;br /&gt;
====관계성(Relation)====&lt;br /&gt;
&lt;br /&gt;
'''인물 중심 관계성 설정''' &lt;br /&gt;
* '''설립했다''' 인물 → 기관, 단체 : 기관 또는 단체의 설립에 기여함을 설명하는 relation이다. &lt;br /&gt;
* '''지원했다''' 인물 → 기관, 단체, 활동 및 사건 : 단체, 기관, 활동 및 사건을 직접적으로 주도한 것은 아니나 보조적으로 지원했음을 설명하는 relation이다. 단체의 활동이나 기관의 설립 및 활동, 활동 및 사건의 전개의 지원을 모두 포괄하는 설명이다. &lt;br /&gt;
* '''출신이다''' 인물 → 기관, 단체, 지역 : 인물이 기관, 단체, 나라의 출신임을 나타내는 relation이다. 지역의 경우, 해당 인물의 국적을 의미하며 외국인의 경우에만 해당 relation을 사용해 국적을 나타냈다. &lt;br /&gt;
* '''활동했다''' 인물 → 활동 및 사건 : 인물이 특정 활동 및 사건에 주도적으로 활동했음을 나타내는 relation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기관 중심 관계성 설정'''&lt;br /&gt;
* '''소속이다''' 기관, 단체 → 인물 : 인물이 기관의 소속임을 나타내는 relation이다. 기관의 경우 교육기관을 주로 다루기 때문에, 교육기관에 재학하였던 경우에는 '출신이다.' relation을 사용하였고 교직원 등으로 재직한 경우에는 해당 relation을 사용하여 구분하였다. &lt;br /&gt;
* '''위치하다''' 기관→지역 : 기관이 특정 지역에 위치하였음을 나타내는 relation이다. 위치를 옮긴 기관의 경우 위치했던 지역에 모두 해당 relation을 사용하여 연결했다. &lt;br /&gt;
* '''발전했다''' 기관, 단체 → 기관, 단체 : 특정 기관 및 단체가 다른 기관 및 단체로 발전함을 설명하는 relation이다.  &lt;br /&gt;
* '''계승했다''' 기관, 단체 → 기관, 단체 : 기관 및 단체가 다른 기관 및 단체로 계승함을 설명하는 relation이다. 계승한 쪽을 종속 노드로 설정하였으나, 화살표 방향을 inverse로 설정해 '발전했다.' relation과 차이를 두었다.&lt;br /&gt;
&lt;br /&gt;
====온톨로지 기여====&lt;br /&gt;
[[김윤]]&amp;lt;br/&amp;gt;&lt;br /&gt;
[[신다정]]: 온톨로지 리스트 생성, 전반적인 온톨로지 코드 작성, 클래스 지정 및 설명, 릴레이션 지정 및 설명, 민간 단체의 애국 계몽 운동 관련 노드 및 관계성 정리, 인물 사진 삽입, 온톨로지 화살표 지정 &amp;lt;br/&amp;gt;&lt;br /&gt;
[[이민희]]: 군사교육 중 조선혁명간부학교, 한인소년병학교,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 관련 노드 및 관계성 정리, 인물 사진 삽입 &amp;lt;br/&amp;gt;&lt;br /&gt;
[[최용빈]]&amp;lt;br/&amp;gt;&lt;br /&gt;
[[헤르미온느]]: 민족사학 관련 노드 및 관계성 정리, 인물 사진 삽입, 노드 색 및 모양 지정, 인물 하이퍼링크&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교육기관 지도&amp;lt;ref&amp;gt;가급적 최초 설립 위치를 기준으로 작성하였지만 초기 설립 시 다른 학교의 교사에 있다 교사를 이전한 경우 해당 위치로 표기함.&amp;lt;/ref&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src=&amp;quot;https://www.google.com/maps/d/embed?mid=1cI0D_B0oG-xrdk5kcPVCnLJ2hJpOJZw&amp;amp;ehbc=2E312F&amp;quot; width=&amp;quot;640&amp;quot; height=&amp;quot;480&amp;quot;&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기타==&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참고문헌===&lt;br /&gt;
1. 민족사학 발전과정 연대기 설명 내용&lt;br /&gt;
*「원산학사 (元山學舍)」,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0700, 접속일: 2024. 12. 9.&lt;br /&gt;
*「흥화학교(興化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6074, 접속일: 2024. 12. 9.&lt;br /&gt;
*「중교의숙(中橋義塾)」,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3699, 접속일: 2024. 12. 9.&lt;br /&gt;
*「순성학교 (順成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1901, 접속일: 2024. 12. 9.&lt;br /&gt;
*「점진학교(漸進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9857, 접속일: 2024. 12. 9.&lt;br /&gt;
*「낙연의숙(落淵義塾)」,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1639, 접속일: 2024. 12. 9.&lt;br /&gt;
&lt;br /&gt;
*「한성법학교(漢城法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426, 접속일: 2024. 12. 9.&lt;br /&gt;
&lt;br /&gt;
*「양정고등학교 (養正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731, 접속일: 2024. 12. 9.&lt;br /&gt;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3433, 접속일: 2024. 12. 9.&lt;br /&gt;
*「보창학교(普昌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3546, 접속일: 2024. 12. 9.&lt;br /&gt;
*「서전서숙 (瑞甸書塾)」,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8159, 접속일: 2024. 12. 9.&lt;br /&gt;
*「진명여자고등학교 (進明女子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4673, 접속일: 2024. 12. 9.&lt;br /&gt;
*「중동고등학교 (中東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3729, 접속일: 2024. 12. 9.&lt;br /&gt;
*「휘문고등학교 (徽文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5832, 접속일: 2024. 12. 9.&lt;br /&gt;
*「숙명여자대학교 (淑明女子大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1800, 접속일: 2024. 12. 9.&lt;br /&gt;
*「숙명여자고등학교 (淑明女子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1799, 접속일: 2024. 12. 9.&lt;br /&gt;
*「양규의숙(養閨義塾)」,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426, 접속일: 2024. 12. 9.&lt;br /&gt;
*「서북협성학교 (西北協成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7788, 접속일: 2024. 12. 9.&lt;br /&gt;
*「사범학교 (師範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5642, 접속일: 2024. 12. 9.&lt;br /&gt;
*「대성학교(大成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4519, 접속일: 2024. 12. 9.&lt;br /&gt;
*「협동학교(協東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3491, 접속일: 2024. 12. 9.&lt;br /&gt;
*「동성고등학교 (東星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6589, 접속일: 2024. 12. 9.&lt;br /&gt;
*「장훈고등학교 (長薰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8403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8403, 접속일: 2024. 12. 9.&lt;br /&gt;
*「오산고등학교 (五山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8302, 접속일: 2024. 12. 9.&lt;br /&gt;
*「치문초등학교 (致文初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8358, 접속일: 2024. 12. 9.&lt;br /&gt;
*「명동학교(明東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8242, 접속일: 2024. 12. 9.&lt;br /&gt;
*「양원여학교(養原女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687, 접속일: 2024. 12. 9.&lt;br /&gt;
*「보인학교(輔仁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426, 접속일: 2024. 12. 9.&lt;br /&gt;
*「기호학교(畿湖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426, 접속일: 2024. 12. 9.&lt;br /&gt;
*「양산중학교(楊山中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426, 접속일: 2024. 12. 9.&lt;br /&gt;
*「서북협성학교(西北協成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426, 접속일: 2024. 12. 9.&lt;br /&gt;
&lt;br /&gt;
2. 민간단체의 교육 구국 운동&lt;br /&gt;
* 한관일. &amp;quot;한국 개화기 신민회의 교육구국 사상.&amp;quot; 교육과학연구 14.- (2000): 1-32.&lt;br /&gt;
*「민립대학 설립운동」,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i401900&amp;amp;code=kc_age_40, 접속일: 2024. 12. 9.&lt;br /&gt;
&lt;br /&gt;
5. 군사교육 중 조선혁명간부학교, 한인소년병학교,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lt;br /&gt;
* 「조선혁명간부학교 (朝鮮革命幹部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2266 (검색일: 2024년 11월 30일).&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김세광 (金世光)」,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3831 (검색일: 2024년 12월 2일).&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신악 (申岳)」,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3817 (검색일: 2024년 12월 2일).&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왕통 (王通)」,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3818 (검색일: 2024년 12월 2일).&lt;br /&gt;
* 김광재,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의 결성과 활동」,  『독립기념관』, https://www.i815.or.kr/upload/kr/magazine/magazine/83/post-919.html (검색일: 2024년 12월 2일)&lt;br /&gt;
* 심용환, 「교육, 어둠을 밝힌 등불이 되다」,  『독립기념관』, https://www.i815.or.kr/upload/kr/magazine/magazine/4/post-38.html (검색일: 2024년 12월 2일)&lt;br /&gt;
* 밀양독립운동기념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밀양독립운동기념관』, http://www.miryang815.or.kr/bbs/board.php?bo_table=data&amp;amp;wr_id=10 (검색일: 2024년 12월 2일)&lt;br /&gt;
* 「한인소년병학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1902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국사편찬위원회, 「한인소년병학교」,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s://db.history.go.kr/diachronic/level.do?levelId=nh_047_0030_0020_0040_0030_0010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인소년병학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3624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박용만의 소년병학교: 군사적 구국운동」,  『호남人월드』, 2009.05.19, http://www.honaminworld.kr/307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박용만 1881 ~ 1928」,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code=kc_age_40&amp;amp;levelId=kc_n401200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가. 한인소년병학교」, 『국사편찬위원회』, https://db.history.go.kr/diachronic/level.do?levelId=nh_047_0030_0020_0040_0030_0010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한인소년병학교의 교육 과정」, 『국사편찬위원회』, http://contents.history.go.kr/front/nh/print.do?levelId=nh_047_0030_0020_0040_0030_0010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대조선국민군단 (大朝鮮國民軍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4780 (검색일: 2024년 11월 30일).&lt;br /&gt;
&lt;br /&gt;
[[분류:독립운동사의 근간, 교육구국운동(敎育救國運動)]]&lt;/div&gt;</summary>
		<author><name>Matnyeom</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5%90%EC%9C%A1%EA%B5%AC%EA%B5%AD%EC%9A%B4%EB%8F%99.lst&amp;diff=52546</id>
		<title>교육구국운동.lst</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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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12-21T04:09:1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Matnyeom: &lt;/p&gt;
&lt;hr /&gt;
&lt;div&gt;&amp;lt;pre&amp;gt;&lt;br /&gt;
#Class&lt;br /&gt;
인물 &lt;br /&gt;
기관 red box&lt;br /&gt;
단체 blue circle&lt;br /&gt;
지역 green ellipse&lt;br /&gt;
활동_및_사건 #FF99FF&lt;br /&gt;
&lt;br /&gt;
#Relation&lt;br /&gt;
설립했다 arrow &lt;br /&gt;
소속이다 arrow &lt;br /&gt;
지원했다 moving-arrows&lt;br /&gt;
출신이다 arrow &lt;br /&gt;
위치했다 arrow &lt;br /&gt;
활동했다 arrow &lt;br /&gt;
관련있다 both &lt;br /&gt;
발전했다 arrow &lt;br /&gt;
계승했다 inverse &lt;br /&gt;
&lt;br /&gt;
#Nodes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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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지역 미국&lt;br /&gt;
한반도 지역 한반도&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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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지역 멕시코&lt;br /&gt;
캐나다 지역 캐나다&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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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지역 만주&lt;br /&gt;
중국 지역 중국&lt;br /&gt;
연희전문학교 기관 연희전문학교&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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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재학당 기관 배재학당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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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을희 명신여학교 출신이다&lt;br /&gt;
윤을희 서울_지역_학생_독립운동 활동했다&lt;br /&gt;
동아일보 브나로드운동 활동했다&lt;br /&gt;
양기탁 대한민국임시정부 소속이다&lt;br /&gt;
이강 신민회 설립했다&lt;br /&gt;
이강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했다&lt;br /&gt;
이강 대한인국민회 활동했다&lt;br /&gt;
전덕기 신민회 설립했다&lt;br /&gt;
전덕기 독립협회 활동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이갑성 세브란스 출신이다  &lt;br /&gt;
스코필드 세브란스 소속이다 &lt;br /&gt;
유기준 연희전문학교 출신이다&lt;br /&gt;
주시경 배재학당 출신이다 &lt;br /&gt;
여운형 배재학당 출신이다 &lt;br /&gt;
지청천 배재학당 출신이다 &lt;br /&gt;
차미리사 배화학당 소속이다 &lt;br /&gt;
남궁억 배화학당 소속이다 &lt;br /&gt;
김명시 배화학당 출신이다 &lt;br /&gt;
스코필드 캐나다 출신이다 &lt;br /&gt;
배재학당 협성회 관련있다 &lt;br /&gt;
협성회 독립협회 관련있다&lt;br /&gt;
차미리사 1920년_3·1학생운동 활동했다 &lt;br /&gt;
김명시 1920년_3·1학생운동 활동했다 &lt;br /&gt;
이갑성 3·1운동 활동했다 &lt;br /&gt;
유기준 3·1운동 활동했다 &lt;br /&gt;
스코필드 3·1운동 활동했다&lt;br /&gt;
연희전문학교 6·10_만세운동 활동했다&lt;br /&gt;
배화학당 서울_지역_학생_독립운동 활동했다&lt;br /&gt;
&lt;br /&gt;
이회영 신흥강습소 설립했다&lt;br /&gt;
이동녕 신민회 설립했다&lt;br /&gt;
이회영 신민회 소속이다&lt;br /&gt;
이회영 이동녕 관련있다&lt;br /&gt;
이동녕 신흥강습소 설립했다&lt;br /&gt;
이동녕 신흥무관학교 설립했다&lt;br /&gt;
이상룡 신흥강습소 설립했다&lt;br /&gt;
이상룡 신흥무관학교 설립했다&lt;br /&gt;
윤기섭 신흥강습소 설립했다&lt;br /&gt;
윤기섭 신흥무관학교 소속이다&lt;br /&gt;
이동휘 신흥무관학교 설립했다&lt;br /&gt;
이세영 신흥무관학교 소속이다&lt;br /&gt;
윤기섭 신흥무관학교 소속이다&lt;br /&gt;
숭무학교 멕시코 위치했다 &lt;br /&gt;
이회영 한국광복군 소속이다&lt;br /&gt;
이근영 숭무학교 설립했다&lt;br /&gt;
한성순 숭무학교 출신이다&lt;br /&gt;
양귀선 숭무학교 출신이다&lt;br /&gt;
조병하 숭무학교 출신이다&lt;br /&gt;
서문경 숭무학교 출신이다&lt;br /&gt;
주시경 조선어학회 소속이다 &lt;br /&gt;
이석영 신흥무관학교 관련있다&lt;br /&gt;
남궁억 민립대학설립운동 활동했다&lt;br /&gt;
안창호 대한인국민회 설립했다&lt;br /&gt;
박용만 대한인국민회 설립했다&lt;br /&gt;
대한인국민회 미국 활동했다&lt;br /&gt;
대한인국민회 숭무학교 지원했다&lt;br /&gt;
양기탁 신민회 설립했다&lt;br /&gt;
양기탁 대한민국임시정부 소속이다&lt;br /&gt;
&lt;br /&gt;
&amp;lt;/pre&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Matnyeom</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A1%B0%EC%84%A0%ED%98%81%EB%AA%85%EA%B0%84%EB%B6%80%ED%95%99%EA%B5%90&amp;diff=52202</id>
		<title>조선혁명간부학교</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A1%B0%EC%84%A0%ED%98%81%EB%AA%85%EA%B0%84%EB%B6%80%ED%95%99%EA%B5%90&amp;diff=52202"/>
		<updated>2024-12-20T11:54:2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Matnyeom: /* 참고 자료 */&lt;/p&gt;
&lt;hr /&gt;
&lt;div&gt;&amp;lt;onlyinclude&amp;gt;&lt;br /&gt;
=='''개요'''==&lt;br /&gt;
{{교육구국운동기관&lt;br /&gt;
|기관명=조선혁명간부학교&lt;br /&gt;
|사진=조선혁명간부학교.jpg&lt;br /&gt;
|한자표기=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lt;br /&gt;
|설립일=1932년&lt;br /&gt;
|설립자=김원봉(金元鳳)&lt;br /&gt;
|설립위치=중국 난징(南京) 교외 선사묘(善祠廟)&lt;br /&gt;
|계승=민족혁명당 군사부 훈련반 &lt;br /&gt;
|관련링크=http://www.miryang815.or.kr/bbs/board.php?bo_table=data&amp;amp;wr_id=10&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혁명간부학교(朝鮮革命幹部學校)'''는 1932년 의열단(義烈團) 단장 김원봉(金元鳳)이 중국의 [[장제스]](蔣介石)의 지원으로 독립운동 군사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중국의 난징(南京)에 설립한 군사간부양성학교이다. 1932년 개교 이래 1935년 9월 폐교까지 1기생 26명, 2기생 55명, 3기생 44명 등 총 125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lt;br /&gt;
&lt;br /&gt;
== '''설립''' ==&lt;br /&gt;
&lt;br /&gt;
1932년 단장 김원봉에 의해 중국의 난징에 설립되어, 당해 10월부터 1935년 9월에 이르는 3년여 동안 청년 투사를 양성했다. &lt;br /&gt;
&lt;br /&gt;
=== '''주요 인물과 활동'''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lt;br /&gt;
! 인물 !! 역할 및 기여&lt;br /&gt;
|-&lt;br /&gt;
|김원봉|| 단장, 조선혁명간부학교 설립 &lt;br /&gt;
|-&lt;br /&gt;
|신악|| 조선혁명간부학교 교육 주임, 군사 훈련 담당, 의열단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추후 조선의용대 부대장, 한국광복군 중교 등을 역임 &lt;br /&gt;
|-&lt;br /&gt;
|김세광|| 조선혁명간부학교 교관, 1933년 9월∼1934년 4월에 조선혁명간부학교 제2기 과정 교육을 담당하였으며 조선민족혁명당 중앙군사학 편찬위원으로 군사학 편찬에 종사&lt;br /&gt;
|-&lt;br /&gt;
|왕통 || 조선혁명간부학교 입학, 졸업 후 조선의용대 정치지도원, 조선민족혁명당 중앙위원,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 한국광복군 지대장으로 활동&lt;br /&gt;
|}&lt;br /&gt;
&lt;br /&gt;
== '''배경''' ==&lt;br /&gt;
독립운동이 실질적인 항일 투쟁의 형태로 진행되기 위해서 한인 청년들이 군벌 산하의 군사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고자 노력했다. &amp;lt;ref&amp;gt; 신규식이나 여운형은 중국의 우페이푸(吳佩孚) 등이 지휘하는 군벌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우페이푸는 친한파 군벌 중 하나로서, 중국군이 한국을 거쳐 일본에 진공해야 함을 주장했는데, 이러한 측면에서 여운형 등이 활동했던 한국노병회와 뜻이 맞아 교섭하였다. &amp;lt;/ref&amp;gt; 하지만, 명확한 결과가 나오지 못했다. 임시정부가 군사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상하이에 세웠던 육군무관학교는 6개월간의 초급장교 양성과정에서 1920년 상반기 19명, 하반기 24명 배출을 끝으로 안타깝게 폐교했고,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은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비행사양성소를 설립했으나 이 역시 비행대 편성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lt;br /&gt;
&lt;br /&gt;
이렇게 무장 투쟁을 위한 시도가 무산되자, 1919년 조직된 무장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은 중국국민당과의 합작을 통해 돌파구를 마련하고자했다. 또한, 단원 상당수가 국민당과 함께 북벌에 참가했기 때문에 국민당 입장에서도 김원봉과 의열단을 지원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lt;br /&gt;
&lt;br /&gt;
== '''특징''' ==&lt;br /&gt;
&lt;br /&gt;
조선혁명간부학교가 운영되는 3년 동안, 중국 국민당은 매월 경상비 2,000~3,000원, 수시 필요경비 1,000~1만 원, 기타 운영비 400~1,000원 등 각종 운영자금 전액과 화기·탄약·피복 등을 지원했다. 학생들은 군사학뿐 아니라 별도 신설된 정치학, 자연과학을 포함해 경제학·사회학·철학·혁명학·물리학·화학·지리학까지 다양한 학문을 공부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 '''의의''' ==&lt;br /&gt;
&lt;br /&gt;
조선혁명간부학교는 일제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하여 의열단과 중국 정부 사이에 형성된 한중연합의 결실이었다. 의열단은 중국 정부와 연대를 항일투쟁의 침체국면을 탈피할 수 있는 계기로 인식하였다. 따라서 의열단의 간부학교 운영은 국제적 연대 측면과 의열단 활동의 활성화라는 양면성을 가졌다. &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혁명간부학교의 교장인 김원봉은 개교사에서 간부학교의 설립 취지가 의열단의 항일 투쟁 정신을 계승하는 데 있음을 전제하고, 교육 목적은 군사학과 무기 사용법 등 군사 지식을 익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조선혁명간부학교의 교육 목표는 일본과의 총결전에서 투쟁의 주체가 될 조직을 구축하기 위한 선행 단계로서, 대중역량의 조직화와 체계화를 선도할 중견 간부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즉, 국지적·부분적 단계의 항일 투쟁 국면을 대중 투쟁의 단계로 발전시키는 방안이었음을 알 수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 '''졸업생들의 활동''' ===&lt;br /&gt;
&lt;br /&gt;
간부학교 졸업생들은 민족혁명당의 항일투쟁체계로 편입되어 항일 투쟁을 이어나갔다. 일부는 [[조선의용대]]의 핵심 세력으로 성장하였고, 다른 일부는 [[한국광복군]]의 주요 무장 인력이 되기도 했다. 또한, [[조선의용대]]의 일원으로서 화북 지역으로 이동하여 화북조선동맹과 조선의용군에 가담하였다.&lt;br /&gt;
&lt;br /&gt;
== 참고 자료 ==&lt;br /&gt;
* 「조선혁명간부학교 (朝鮮革命幹部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2266 (검색일: 2024년 11월 30일).&lt;br /&gt;
* 「김세광 (金世光)」,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3831 (검색일: 2024년 12월 2일).&lt;br /&gt;
* 「신악 (申岳)」,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3817 (검색일: 2024년 12월 2일).&lt;br /&gt;
*「왕통 (王通)」,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3818 (검색일: 2024년 12월 2일).&lt;br /&gt;
* 김광재,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의 결성과 활동」,  『독립기념관』, https://www.i815.or.kr/upload/kr/magazine/magazine/83/post-919.html (검색일: 2024년 12월 2일)&lt;br /&gt;
* 심용환, 「교육, 어둠을 밝힌 등불이 되다」,  『독립기념관』, https://www.i815.or.kr/upload/kr/magazine/magazine/4/post-38.html (검색일: 2024년 12월 2일)&lt;br /&gt;
* 밀양독립운동기념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밀양독립운동기념관』, http://www.miryang815.or.kr/bbs/board.php?bo_table=data&amp;amp;wr_id=10 (검색일: 2024년 12월 2일)&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lt;br /&gt;
&amp;lt;/onlyinclude&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이민희]]&lt;/div&gt;</summary>
		<author><name>Matnyeom</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8F%85%EB%A6%BD%EC%9A%B4%EB%8F%99%EC%82%AC%EC%9D%98_%EA%B7%BC%EA%B0%84,_%EA%B5%90%EC%9C%A1%EA%B5%AC%EA%B5%AD%EC%9A%B4%EB%8F%99(%E6%95%8E%E8%82%B2%E6%95%91%E5%9C%8B%E9%81%8B%E5%8B%95)&amp;diff=52201</id>
		<title>독립운동사의 근간, 교육구국운동(敎育救國運動)</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8F%85%EB%A6%BD%EC%9A%B4%EB%8F%99%EC%82%AC%EC%9D%98_%EA%B7%BC%EA%B0%84,_%EA%B5%90%EC%9C%A1%EA%B5%AC%EA%B5%AD%EC%9A%B4%EB%8F%99(%E6%95%8E%E8%82%B2%E6%95%91%E5%9C%8B%E9%81%8B%E5%8B%95)&amp;diff=52201"/>
		<updated>2024-12-20T11:53:2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Matnyeom: /* &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개요==&lt;br /&gt;
[[파일:교육구국운동 표지.png|800px|가운데]]&lt;br /&gt;
&lt;br /&gt;
[[분류:신다정]]&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   text-align:center;&amp;quot;&amp;gt;기획의도===&lt;br /&gt;
&lt;br /&gt;
&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width:100%;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quot;&lt;br /&gt;
!| 기획의도&lt;br /&gt;
|-&lt;br /&gt;
| 조선의 독립운동사는 근대교육을 위한 노력과 함께 전개되어 왔다. 교육 운동은 독립 운동의 일환으로서 민중을 계몽하기도 하고, 여성 교육이 발전하여 개화 사상이 유입되기도 했으며, 가장 중요하게도 군사 교육을 통해 민족이 싸울 힘을 기르기도 했다. 우리 민족은 당면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기 위해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고, 배움에 대한 열정으로 일제강점기의 어둠을 헤쳐나갈 수 있었다. 학생들이 독립운동을 생각했을 때 교육을 가장 먼저 떠올리지는 않는 듯하다. 다만, 교육은 독립운동사의 핵심적인 부분을 뒷받침하는 지지대였다. 따라서, '''''우리가 잘 몰랐던 독립운동사에서의 다양한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을 위키 페이지로 만들어 이들의 스토리를 전달''''' 하고자 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이민희]]&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 text-align:center;&amp;quot;&amp;gt;팀원===&lt;br /&gt;
2023130036 김윤&lt;br /&gt;
2023131227 최용빈&lt;br /&gt;
2023131540 정혜나&lt;br /&gt;
2024130814 이민희&lt;br /&gt;
2024130911 신다정&lt;br /&gt;
&lt;br /&gt;
=='''교육구국운동(敎育救國運動)'''==&lt;br /&gt;
한국사에 있어서 개화기는 근대화를 추진하는 시기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개화기 교육은 종래 유학 경전 중심의 교육에서 탈피하여 신교육을 시작하는 전환기로 교육사적 의미가 있는 중요한 시기이다. 한국개화기 근대교육의 발전과정은 1880년대에서 1890년대까지 짧은 기간에 많은 변화와 개혁을 거듭하는 시기이다. 국가적으로 열강의 침략을 극복하고 신문화를 받아들여 개명하는 변혁기로 신교육 정착시키는 동시에 국권회복을 위한 교육구국운동을 통하여 민족독립을 전개하는 시기이다. &lt;br /&gt;
&lt;br /&gt;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 이후 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고 일본 통감부가 설치되어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 시기의 개화파를 계승한 애국계몽사상가들은 국권회복을 위해서는 자강지술을 고취하고, 실력을 배양하는 것이 선결과제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이것을 위해 청소년 교육, 민족산업의 육성, 각종 단체에 대한 단결 그리고 신교육을 위한 학교설립 등 광범위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를 교율(敎育)을 통해 나라를 구한다(救國)는 의미의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교육구국운동'''&amp;lt;/span&amp;gt;이라고 칭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신다정]] &lt;br /&gt;
&lt;br /&gt;
==교육기관 설립==&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민족설립 교육기관===&lt;br /&gt;
====민족사학의 의미 ====&lt;br /&gt;
'''1. 민족사학의 정의:''' 우리 민족이 설립한 교육 기관&amp;lt;br/&amp;gt;&lt;br /&gt;
본 위키 페이지에서는 민족사학(民族私學)을 '''외세나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교육기관과 구분되는 것'''으로서, 교육구국운동의 일환으로 일제강점기 전후에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우리 민족이 개인이나 사법인으로서 설립하여 경영하는 학교&amp;lt;/span&amp;gt;로 정의한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2. 민족사학의 정신 및 목적:''' 개화와 교육구국&amp;lt;br/&amp;gt;&lt;br /&gt;
민족사학의 정신과 목적은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개화&amp;lt;/span&amp;gt;와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교육구국&amp;lt;/span&amp;gt;으로 크게 두 가지 방향이 있다. 초기의 민족사학 설립 정신은 '''선진외국의 문화와 문물'''을 받아들여 나라를 개화하고 발전시키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었으나,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乙巳勒約)&amp;lt;ref&amp;gt;대한 제국 광무 9년(1905)에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기 위하여 강제적으로 맺은 조약. 고종 황제가 끝까지 재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인 무효의 조약이다.(표준국어대사전 정의)&amp;lt;/ref&amp;gt; 이후 '''교육 구국을 위한 인재 양성'''이란 민족적 희망에 기반하였다.&lt;br /&gt;
&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민족사학의 발전배경====&lt;br /&gt;
당시 개화파를 비롯한 다수 지식인은 나라를 진흥시키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함을 느끼고 있었다.&amp;lt;br/&amp;gt;&lt;br /&gt;
이와 같은 지식인들의 의식은 서재필이 『한국휘보(Korean Repository)』에 기고한 다음 글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amp;lt;br/&amp;gt;&lt;br /&gt;
{{Blockquote|정부는 국민의 실정을 알아야 하고 국민들은 정부의 목적을 알아야 한다. 정부와 국민 상호간의 이해를 갖도록 하기 위해서는 쌍방에 대한 교육뿐이다 … 교육 없이는 국민들이 정부의 좋은 의도를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교육 없이는 정부 관리들이 결코 좋은 법률을 만들지 못할 것이다.&lt;br /&gt;
|출처=서재필, 「오늘날 한국이 가장 필요로 하는 일」(What Korea needs most), 『한국휘보(Korean Repository)』, 1896.3.}}&amp;lt;br/&amp;gt;&lt;br /&gt;
&lt;br /&gt;
이러한 의식은 독립협회에서 발간한 『독립신문』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amp;lt;br/&amp;gt;&lt;br /&gt;
{{Blockquote|'''문명개화한 나라들에서들은 무론 남녀하고 학교에 가서 적어도 10년 동안에 각색 학문을 배운 후 비로소 세상에 나가''' … 조선 사람들은 겨우 배우는 것이 한문만 조금 배워 가지고 … 일본 같은 조그마한 나라가 싸움을 하여서 청국 병정 무찌르기를 풀 베는 것 같이 하고, 일본도 30년 전 같으면 나라 형세가 청국과 똑같았으니, 어찌 조그마한 나라가 청국 같은 큰 나라를 이기리오마는, 일본 사람들이 서양 각국이 부강한 곡절을 알고 곧 백성 교육하는 일을 힘써 … 당장에 적은 리(利)와 욕심을 내버리고 '''인민 교육하여 몇 해 후에는 조선도 남과 같이 되기를 바라노라'''&lt;br /&gt;
|출처=「논설」,『독립신문』1896년 4월 25일자.}}&amp;lt;br/&amp;gt;&lt;br /&gt;
위의 글들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이러한 지식인들의 자각이 민족사학 설립의 배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민족사학의 발전과정 ====&lt;br /&gt;
1800년대 후반부터 1910년 이전까지 주요 민족 주도로 설립된 교육기관의 설립 과정을 정리&amp;lt;ref&amp;gt;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민족독립운동사 국권수호운동Ⅱ Ⅳ. 국권수호를 위한 사회·문화운동 6. 사립학교의 구국운동 3) 민립학교 설립의 주체(https://db.history.go.kr/modern/level.do?levelId=hdsr_002_0010_0060_0030)의 데이터에 기반하여 자료 조사를 진행하였다. 자료조사를 통해 설립 연도가 일부 수정되었다.&amp;lt;/ref&amp;gt;하였다.&amp;lt;br/&amp;gt;&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xpvhRvJrqO8QmhwtXtUZhPRbrWskR7CqqsrToNpIPRE&amp;amp;font=Default&amp;amp;lang=ko&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amp;lt;br/&amp;gt;&lt;br /&gt;
이와 같이 1905년 이전에는 개화 및 신교육 도입 목적으로 1905년 이후에는 인재양성을 통한 교육구국을 목적으로 많은 교육기관이 설립되었다.&lt;br /&gt;
&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대표적 민족설립 교육기관====&lt;br /&gt;
아래의 표에서는 대표적인 민족설립 교육기관과 그 계승 현황을 정리하였다. &amp;lt;br/&amp;gt;&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hn:left;background:white;&amp;quot;&lt;br /&gt;
|+ [대표적 민족설립 교육 기관&amp;lt;ref&amp;gt;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민족독립운동사 국권수호운동Ⅱ Ⅳ. 국권수호를 위한 사회·문화운동 6. 사립학교의 구국운동 3) 민립학교 설립의 주체(https://db.history.go.kr/modern/level.do?levelId=hdsr_002_0010_0060_0030)의 데이터에 기반하여 자료 조사를 진행하였다. 자료조사를 통해 설립 연도 및 설립자가 일부 수정되었다.&amp;lt;/ref&amp;gt;]&lt;br /&gt;
! 교육기관명 || 설립일 || 설립자 || 계승&lt;br /&gt;
|-&lt;br /&gt;
|원산학교(元山學校) || 1883 || 덕원(德源)의 유지 || 원산소학교, 원산보통학교, 원산제일국민학교로 계승되며 1945년까지 지속됨&lt;br /&gt;
|-&lt;br /&gt;
|흥화학교(興化學校) || 1895. 11. 5. || 민영환(閔泳煥) || 1911년 폐교&lt;br /&gt;
|-&lt;br /&gt;
|중교의숙(中橋義塾) || 1896 || 민영기(閔泳綺) || 1906년 폐교&lt;br /&gt;
|-&lt;br /&gt;
|순성여학교(順成女學校) || 1898.12. || 찬양회(讚揚會) || 1905년 12월 31일 『대한매일신보』기사를 끝으로 신문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음&lt;br /&gt;
|-&lt;br /&gt;
|점진학교(漸進學校) || 1899 || 안창호(安昌浩) || .&lt;br /&gt;
|-&lt;br /&gt;
|낙연의숙(落淵義塾) || 1901 || 서광세(徐光世) || 1916년 폐교&lt;br /&gt;
|-&lt;br /&gt;
|한성법학교(漢城法學校) || 1905. 1. || 사회 유지 || 1905년 9월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가 법률학전문야학과를 신설하여 한성법학교 학생 20명을 인계받음 &amp;lt;ref&amp;gt; https://www.kunews.ac.kr/news/articleView.html?idxno=3765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양정의숙(養正義塾) || 1905. 2. 11. || 엄주익(嚴柱益) || 양정중학교(養正中學校)&lt;br /&gt;
|-&lt;br /&gt;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 1905. 4. 3. || 이용익(李容翊) || '''고려대학교(高麗大學校)'''&lt;br /&gt;
|-&lt;br /&gt;
|보창학교(普昌學校) || 1905. 5. || 이동휘(李東輝) || .&lt;br /&gt;
|-&lt;br /&gt;
|서전서숙(瑞甸書塾) || 1906 || 이상설(李相卨) || 1907년 폐교&lt;br /&gt;
|-&lt;br /&gt;
|진명여학교(進明女學校) || 1906. 4. ||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 진명여자고등학교(進明女子高等學校)&lt;br /&gt;
|-&lt;br /&gt;
|중동학교(中東學校) || 1906. 4. 2. || 신규식(申圭植) || 중동고등학교 (中東高等學校)&lt;br /&gt;
|-&lt;br /&gt;
|휘문의숙(徽文義塾) || 1906. 5. || 민영휘(閔泳徽) || 휘문고등학교(徽文髙等學校)&lt;br /&gt;
|-&lt;br /&gt;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 || 1906. 5. ||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 '''숙명여자대학교(淑明女子大學校)''', 숙명여자중학교(淑明女子中學校), 숙명여자고등학교(淑明女子高等學校)&lt;br /&gt;
|-&lt;br /&gt;
|양규의숙(養閨義塾) || 1906. 6. || 여자교육회(女子敎育會) || .&lt;br /&gt;
|-&lt;br /&gt;
|서우사범학교(西友師範學校) || 1907. 1. || 서우학회(西友學會) || 1908년에 서북협성학교(西北協成學校)로 개편됨&lt;br /&gt;
|-&lt;br /&gt;
|대성학교(大成學校) || 1907 || 안창호(安昌浩) || 1912년 폐교&lt;br /&gt;
|-&lt;br /&gt;
|협동학교(協東學校) || 1907 || 유인식(柳寅植)) || 1917년 폐교&lt;br /&gt;
|-&lt;br /&gt;
|소의학교(昭義學校) || 1907. 9. || 전경현(全景鉉), 민강(閔橿), 장경관(張敬寬) 등 || 동성고등학교 (東星高等學校)&lt;br /&gt;
|-&lt;br /&gt;
|장훈학교(長薰學校) || 1907. 11. 2. ||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 || 장훈고등학교 (長薰高等學校)&lt;br /&gt;
|-&lt;br /&gt;
|오산학교(五山學校) || 1907. 12. || 이승훈(李昇薰) || 오산고등학교 (五山高等學校)&lt;br /&gt;
|-&lt;br /&gt;
|기호학교(畿湖學校) || 1908. 6. 20. ||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 || 융희학교(隆熙學校)를 흡수하여 중앙중학교(中央中學校), 중앙고등학교(中央高等學校)로 발전함&lt;br /&gt;
|-&lt;br /&gt;
|양원여학교(養原女學校) || 1908. 6. || 여자보학원유지회(女子普學院維持會) || .&lt;br /&gt;
|-&lt;br /&gt;
|신명학당(新明學堂) || 1908. 2. || 김장호, 김홍식(金洪植) || 치문초등학교 (致文初等學校)&lt;br /&gt;
|-&lt;br /&gt;
|명동학교(明東學校) || 1908. 4. 27. || 김학연(金學淵) || 1925년 폐교&lt;br /&gt;
|-&lt;br /&gt;
|보인학교(輔仁學校) || 1908. 6. 8. || 보인학회(輔仁學會) || 보인고등학교(輔仁高等學校)&lt;br /&gt;
|-&lt;br /&gt;
|양산중학교(楊山中學校) || 1908. 10. || 김홍량(金鴻亮) ||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이상의 표에서 1910년 국권피탈 이전 설립된 민족설립 교육기관 중 적지 않은 수가 오늘날에도 현존하고 있는 중학교, 고등학교, 또는 대학교로 계승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10년 이후 많은 학교가 폐교 위기에 처한 것을 고려하였을 때, 이러한 계승은 민족설립 교육기관을 유지해 교육을 통해 나라를 구하고자 했던 당시 사람들의 투지와 열망에 대한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보성전문학교와 명신여학교====&lt;br /&gt;
1910년 이전까지 민족 주도로 설립된 교육 기관 중 주요하게 살펴보아야 할 기관으로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와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가 있다. 보성전문학교는 이용익(李容翊)이 고종의 허가 하에 설립하였고, 명신여학교는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의 지원으로 설립되었음을 고려할 때, 모두 황실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사립 교육기관으로 보기는 힘들다는 한계는 존재한다. 그러나, 1910년 이전에 설립된 학교가 폐교의 절차를 밟지 않고 이어져 오늘날까지 계승되었다는 사실이 가지는 의미는 적지 않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1910년 이후 많은 학교가 일제의 강압 아래 폐교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 두 학교의 경우 대부분의 학교가 중등교육기관으로 계승된 것과는 구분되어 '''고등교육기관으로 발전한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나아가, 보성전문학교 설립을 기점으로 '교육 구국'을 목적으로 한 민족 사학의 설립이 활성화되었다는 점과 명신여학교의 경우 민족이 설립한 많지 않은 여성 교육기관 중 하나였다는 점 역시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lt;br /&gt;
보성전문학교는 1905년 04월 03일 고종(高宗)의 재정적 후원을 받아 [[이용익李容翊]]에 의해 설립된 교육기관이다. &amp;lt;br/&amp;gt;&lt;br /&gt;
보성전문학교의 설립 배경은 설립자 이용익의 행보에서 엿볼 수 있다. 친로반일(親露反日)의 뜻 고수한 것과 조선의 중립 선언을 선언하게 한 것으로 인해 일본에 의해 납치된 이용익은 체류 중 일본의 '''근대교육기관 및 개화문물을 접한다'''. 이것이 그의 교육기관 설립의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이후 귀국할 때 '''다수의 도서와 인쇄기를 구매'''하여 가지고 온 점 역시 이러한 추측의 설득력을 높인다. &amp;lt;br/&amp;gt;&lt;br /&gt;
한편, 보성전문학교의 개교를 알리는 황성신문(皇城新聞)의 글에는 보성전문학교 설립이 그 당시에 가졌던 의미가 잘 드러나고 있다. &amp;lt;br/&amp;gt;&lt;br /&gt;
{{Blockquote|전문학교 창설. '''대한에 전문대학교는 아직 세워지지 못했다. 한성법학교(漢城法學校)가 세워졌으나 야학(夜學)이라 완전하지 못했는데, 박동(礴洞)에 신설한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는 위치가 전문대학 주간 학교로''' 대황제폐하께서 특별히 설립하신 바, 매월 수천원의 경비를 내탕전(內帑錢)으로 내려주고 도서관을 부설하여 각 전문 교과서 수천권을 새로 간행한다 한다. 그리고 신해영(申海永)·조제환(趙齊桓)·정영택(鄭永澤) 세 명에게 이상의 사무를 전담하도록 하여, 위 3명은 교육을 열심히 하여 황제의 뜻에 보답하기위해 더욱 극진하게 힘을 쓴다고 한다. 20여명의 교수는 일찍이 일본에 유학하여 졸업한 사람들을 임용하여 (중략) '''2개년 졸업기한이지만 인재를 빨리 양성하도록''' 황제의 뜻을 특별히 내리셨다하고, 오늘부터 개교한다고 한다.&lt;br /&gt;
|출처=『황성신문(皇城新聞)』 1905년 4월 1일자 2면. 현대어역: 고려대학교 도서관&amp;lt;ref&amp;gt;https://library.korea.ac.kr/datause/archiving/old-book-exhibition/release/?mod=document&amp;amp;uid=10653&amp;lt;/ref&amp;gt;}}&lt;br /&gt;
윗글에서 당시 대한제국에 중등교육기관은 존재했음에도 고등교육을 위한 기관은 야학의 형태로서만 존재하여 온전하지 못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당시 상황 속에서 이용익이 일본의 교육 현황을 접한 후 대한제국 고등교육기관의 필요성을 느껴 설립하려 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고등교육기관 설립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맞춰 등장한 학교라는 점에서 보성전문학교가 가지는 가치는 매우 크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1910년 이후 다른 학교와 마찬가지로 보성전문학교는 운영진 및 교장의 망명, 투옥과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운영난을 겪는 등 각종 수난을 겪는다. 이후 일제의 탄압 아래 격하되거나 교명을 바꾸고 학과 설립이 제한되는 등 여러 차례 존속의 고비를 넘긴다. 하지만 끊임없는 노력을 바탕으로 1921년 전문학교로 다시 승격되었으며 여러 위기를 거친 끝에 해방 후 고려대학교로 발족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lt;br /&gt;
명신여학교는 1906년 5월 22일 고종(高宗)의 후궁인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의 지원으로 왕실 별궁 용동궁에 설립된 교육기관이다. &amp;lt;br/&amp;gt;&lt;br /&gt;
순헌황귀비는 본디 교육, 특히 여성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명신여학교의 설립에 앞서 1906년 4월에 진명여학교(進明女學校)를, 1907년에 경영난에 처해 있던 양정의숙(養正義塾)을 도운 점에서 잘 드러난다. &amp;lt;br/&amp;gt;&lt;br /&gt;
한편, 당시 여성 교육 관련 배경은 다음과 같다. 앞서 기술된 바와 같이 1905년 을사늑약 전후로 교육구국이 일어나 전국 각지에서 민족사학이 설립되었으나 여성을 위한 교육기관은 부족한 실태였다. 당시 설립된 여성 교육기관으로는 이화학당, 정신여학교, 숭의학교 등이 있었으나 이는 모두 선교사, 즉 민족에 의해 설립된 학교가 아니었다.&amp;lt;ref&amp;gt;한희숙, 구한말 순헌황귀비 엄비의 생애와 활동, 아시아여성연구, 숙명여자대학교 아시아여성연구원, 제45집 2호, 2006&amp;lt;/ref&amp;gt;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여성 교육기관의 필요'''를 절감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 것은 순헌황귀비의 시대적 통찰력을 반영하는 부분이다. &amp;lt;br/&amp;gt;&lt;br /&gt;
위와 같은 순헌황귀비의 설립 목적은 대한매일신보의 글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amp;lt;br/&amp;gt;&lt;br /&gt;
{{Blockquote|황귀비 흥학:  황귀비 전하께오서 여자 교육이 없음을 크게 걱정하여 육군참장 엄주익씨 집(第)에 여학교를 설립하여 '''여자교육을 발달시키고자''' 하였다.  엄주익에게 학교 설립 일을 전담하게 하시니 '''대한여자의 교육이 앞으로 발달하기를''' 가히 볼 수 있을 지로다. &lt;br /&gt;
|출처=『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6년 4월 24일자&amp;lt;ref&amp;gt;한희숙, 구한말 순헌황귀비 엄비의 생애와 활동, 아시아여성연구, 숙명여자대학교 아시아여성연구원, 제45집 2호, 2006, 227쪽.&amp;lt;/ref&amp;gt;}}&lt;br /&gt;
광복 후 명신여학교는 숙명여자중학교(淑明女子中學校)와 숙명여자고등학교(淑明女子高等學校)로 이어졌다. 나아가, 여성 고등교육기관의 설립을 꿈꾼 교장 이정숙(李貞淑)의 뜻에 따라 1938년 숙명학원(淑明學園)에서 숙명여자전문학교를 설립하였고, 이것이 오늘날 숙명여자대학교(淑明女子大學校)로 계승되었다.&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선교사 설립 교육기관===&lt;br /&gt;
선교사들은 기독교 선교의 기반 구축을 위해 개화정책 추진 초기인 1880년대부터 고종의 각별한 관심과 지원 속에서 많은 학교를 설립하였다.  서울에 배재·이화·경신학교를 설립하였고, 기독교 선교금지정책이 이완되기 시작한 1890년대에는 지방도시로 그 범위를 넓혀 1894년 평양의 광성학교·숭덕학교·정의여학교, 1895년 서울의 정신여학교를 비롯하여 동래·인천·재령·목포·원산·개성·해주·공주·대구 등 전국 각지로 확대하였다.&lt;br /&gt;
&lt;br /&gt;
====[[연세대학교(延世大學校)]]====&lt;br /&gt;
&lt;br /&gt;
연희전문학교는 1915년 선교부연합위원회의 협의를 얻어서 북장로회 선교사인 언더우드가 조선기독교학교로 처음 설립하였다. 이후 1917년 연희전문학교로 발족하였다. 보성전문학교 이후 두 번째로 설립된 전문학교이다. 이후 3.1 운동등 다양한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1944년 일제가 경영권과 재산을 몰수하고 한국인 교수진들을 모두 추방했었다. 독립 후에는 연희대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대학교로 승격하였다.&lt;br /&gt;
&lt;br /&gt;
세브란스는 대한제국의 궁정어의였던 알렌에 의해 1885년에 설립된 제중원에서 시작하였고, 1886년부터 제중원 내 의학부를 두고 입학생을 받았다. 이후 병원장으로 취임한 선교사 에비슨이 1899년 조선 최초의 의학교인 제중원의학교를 설립하였다. 1904년 미국인 세브란스의 후원으로 세브란스 병원이 세워지며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로 개편하였다. 1906년에 간호부가 개설되었고 우리나라 최초의 간호사를 배출하였다. 세브란스와 연희전문학교 간의 병합은 1920년대에도 한차례 시도한 바 있었으나 무산되었고, 독립 후 1957년에 두 학교가 통합되어 '''연세대학교'''로 출범하였다.&lt;br /&gt;
&lt;br /&gt;
====[[배재학당]]====&lt;br /&gt;
&lt;br /&gt;
1885년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한국 최초의 근대식 사립학교로 중등과정을 담당했다. 1886년이 고종이 배재학당이라는 이름을 사하였고 미국인들의 후원을 받아 1887년에 제대로 된 건물을 세웠다. 영어교육을 중점적으로 행했으며 학생자조정책을 채택하여 가난한 학생들이 학교에서 일을 하며 수업료를 벌 수 있도록 하였다. 현재 기존의 건물은 2008년부터 배재학당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배재중학교, 배재고등학교, 배재대학교'''가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lt;br /&gt;
&lt;br /&gt;
====[[배화학당]]====&lt;br /&gt;
초,중등과정의 사립학교로 1898년 켐벨 선교사가 설립하였다. 처음엔 캐롤라이나학당으로 기독교전파와 여성교육을 목표로 세웠졌다. 1910년 배화학당으로 개칭하였다.1916년 1월 경성 누하동(지금의 서울 종로구 필운동)으로 교사를 이전하고, 1926년 12월 캠블기념관을 신축하였으며, 1938년 3월 배화고등여학교와 배화여자소학교로 분리,개편되었다. 일제의 신사참배요구를 거절한 기독교 학교 중 하나이다. 1940년대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선교사들도 학교를 떠나며 위기에 폐교 위기에 봉착했다. 학교가 경영난에 시달리자 일제는 학교의 운영권을 요구했으나, 당시 교사였던 이덕봉과 이만규가 독지가를 구하려 노력한 끝에 이민천이 춘천, 이천, 연기, 익산 등지에 있는 토지를 기부하여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독립 후 1951년 '''배화여중과 배화여고'''로 분리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김윤]]&lt;br /&gt;
&lt;br /&gt;
=='''민간 단체의 교육 운동'''==&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신민회(新民會)]]의 애국계몽운동===&lt;br /&gt;
&amp;lt;br/&amp;gt;&lt;br /&gt;
{{Blockquote| '''신민회 행동강령'''&lt;br /&gt;
1. 국민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사상 고취 &amp;lt;br /&amp;gt; 2. 동지를 발하고 단합하여 국민 운동 역량 축적 &amp;lt;br /&amp;gt; 3. 상공업 기관 건설로 국민의 부력(富力) 증진 &amp;lt;br /&amp;gt; 4. 교육 기관 설립으로 청소년 교육 진흥&lt;br /&gt;
|출처= 「헌기제501호, 「대한 신민회 취지서 및 동회 통용 장정 등 보고 건」, 1909년 3월 5일(국사편찬위원회, 『통감부문서』 6, 1991}}&lt;br /&gt;
&lt;br /&gt;
신민회(新民會)는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1907년에 [[안창호(安昌浩)]], [[양기탁(梁起鐸)]] 등의 주도로 결성된 항일 비밀결사&amp;lt;/span&amp;gt;이다. 위와 같은 신민회의 행동 강령을 바탕으로 신민회는 실력 양성을 통한 국권 회복을 주장하며, 교육, 언론 및 출판, 민족 산업 육성, 독립군 양성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lt;br /&gt;
&lt;br /&gt;
신민회는 실력 배양의 방법으로 교육 구국 운동을 두 가지 측면에서 전개하였다. 국민에게 국권회복을 위한 교육의 필요성을 계몽하여 학교설립을 고취하며 신민회도 학교를 설립하여 국권회복에 필요한 적합한 교육방침을 강구하여 민족 지도자를 양성한다는 것이다. 또한, 국외에서 독립군 기지를 창설하고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전쟁을 일으켜 국권을 회복한다는 것이다. &lt;br /&gt;
&lt;br /&gt;
신민회는 이를 위해 민중들이 설립한 학교에 대해 학교교육방침을 지도하였다. 또한, 중학교를 설립하고, 학교의 모범을 만들며 중학교에서 동시에 사범교육을 해 교사를 양성한다는 기준을 세우고 학교를 설립하였다. 당시 민간인이 자발적으로 기금을 갹출하여 설립한 학교는 대부분이 소학교였기 때문에, 신민회는 중학교를 설립하여 소학교 출신 청소년들이 더 양질의 교육을 통해 민족지도자로 발돋움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lt;br /&gt;
&lt;br /&gt;
신민회는 기본적으로 비밀결사이기 때문에 그들이 설립한 학교의 수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1907년부터 1909년 4월까지 민간인들에 의해 세운 학교가 3000여 개교에 달한다는 통계로 보아 신민회에서 세운 학교가 많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알려진 신민회가 설립한 학교는 다음과 같다.&lt;br /&gt;
&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hn:left;background:white;&amp;quot;&lt;br /&gt;
|+ [신민회가 설립한 학교]&lt;br /&gt;
! 학교명 || 설명 &lt;br /&gt;
|-&lt;br /&gt;
| '''대성학교'''|| [[안창호(安昌浩)]], 윤치호 평양에 설립. 신민회가 설립한 대표적인 민족 사학으로 입학 지원자가 500~600여 명이 되는 때도 존재. &lt;br /&gt;
|-&lt;br /&gt;
| '''오산학교'''|| 평안북도 정주군에 이승훈 설립. 김소월, 백석, 이중섭, 독립운동가 김홍일 중장 등을 배출. 현재 서울 오산고등학교로 계승됨&lt;br /&gt;
|-&lt;br /&gt;
| 점진학교|| 평안남도 강서 위치, [[안창호(安昌浩)]] 설립. 남녀공학을 실시한 최초의 소학교. &lt;br /&gt;
|-&lt;br /&gt;
| 보창학교 || 강화도 위치, 이동휘 설립&lt;br /&gt;
|-&lt;br /&gt;
| 신안학교 || 정주, 신민회 정주지회 회원 설립&lt;br /&gt;
|-&lt;br /&gt;
| 양실학교 || 의주, 신민회 의주/용천지회 회원 설립&lt;br /&gt;
|-&lt;br /&gt;
| 가명학교 ||  신민회 납청정지회 회원 설립&lt;br /&gt;
|-&lt;br /&gt;
| 신흥학교 || 선천, 중학교급 학교&lt;br /&gt;
|-&lt;br /&gt;
| 홍양학교 || 신민회 곽산지회 회원 &lt;br /&gt;
|-&lt;br /&gt;
| 명륜학교|| 함경남도 영흥읍에 있던 세 개 학교 통합, 이동휘 설립&lt;br /&gt;
|-&lt;br /&gt;
| 경성학교|| 함경북도 경성 위치&lt;br /&gt;
|-&lt;br /&gt;
| 양산학교|| 황해도 안악읍 향천자리, 김용제 설립, 신민회가 중학교로 개편&lt;br /&gt;
|-&lt;br /&gt;
| 오성학교 || 서울 위치, 이갑, 이종화 설립. 신민회 창건 후 각종학교인 서북협성학교로 개편&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신민회의 애국계몽은 학교 설립뿐만이 아니라 학회의 설립과 지도를 통해서도 추진되었다. 안악군면학회(安岳郡勉學會), 해서교육총회(海西敎育總會),평양청년권장회(平壤靑年勸?會), 연학회(練學會), 동제회(同濟會)등의 학회를 전국에 조직하는 데에 앞장섰다. 또한, 서우학회, 한북학회를 서북학회로 통합 재조직하는 등, 기존에 있던 학회의 통합과 재정비에도 이바지하였다. &lt;br /&gt;
&lt;br /&gt;
이와 같이 신민회의 교육계몽운동은 신민회가 1912년 105인 사건으로 해산될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그 이후에도 다른 독립운동단체에 영향을 미쳐 교육을 통한 민중 계몽으로 이루어지는 독립운동의 방향성을 제시하였다.&lt;br /&gt;
&lt;br /&gt;
[[분류:신다정]]&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농촌 계몽 운동===&lt;br /&gt;
&lt;br /&gt;
농촌 계몽 운동은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1920년대~1930년대 민족 운동과 관련한 청년 학생이나 지식층이 농민의 의식과 지식 등을 계몽하기 위해 농촌 사회에서 행한 사회 교육 운동&amp;lt;/span&amp;gt;을 의미한다. 농사일을 끝낸 후 강연회, 토론회, 야학 등의 형식으로 이루어졌으며 특히 농한기인 겨울에 많이 실시되었다. &lt;br /&gt;
&lt;br /&gt;
1920년에는 일제의 식민 지주 경영과 지주 착취로 인해 농민 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고, 이와 맞물려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이 결성되었다. 이때 사회주의 계열 청년 단체와 지식인들이 농촌으로 진출하여 농민 운동을 주도하였다. &lt;br /&gt;
민족주의 계열에서 주도한 농촌 운동은 문맹 퇴치와 생활 개선 등의 계몽적 활동이 중심이었다. 대표적으로 천도교 계열의 농촌 운동, 기독교 계열의 농촌 운동이 있다. 천도교는 1925년 조선농민사를 설립하여 농민 야학을 시행하고 전국적으로 농민에 대한 계몽 활동을 전개하였다. 기독교에서는 1926년 이후 학생 YMCA 농촌부를 중심으로 계몽 활동을 적극 추진하였다. &lt;br /&gt;
&lt;br /&gt;
1920년 후반부터 1930년대에는 언론사 또한 농촌 계몽 운동에 힘을 쏟았다. 대표적으로 1929년부터 1935년까지 이루어진 조선일보사의 문자 보급 운동과 1931년부터 1934년까지 이루어진 동아일보사의 [[브나로드 운동]]이 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이런 농촌 계몽 운동은 1930년대 들어 강화된 조선총독부의 조선어 사용 금지 정책과 지방 농촌의 몰락으로 인해 쇠퇴하였다. 또한, 농촌의 몰락 책임을 수탈 때문이 아닌 농민의 게으름과 무지에 있다며 총독부의 주도로 농촌진흥운동을 진행하며 민간 및 언론 단체의 농촌 계몽 운동을 탄압하였다. 그러나 이런 탄압 속에서도 농촌 계몽 운동은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이러한 민간 교육 활동 및 정책은 해방 이후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문맹 퇴치 운동으로 이어졌다.&lt;br /&gt;
&lt;br /&gt;
[[분류:신다정]]&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민립 대학 설립 운동===&lt;br /&gt;
&lt;br /&gt;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은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1920년대 이루어진 민족 사학 설립 운동&amp;lt;/span&amp;gt;이다.&lt;br /&gt;
&lt;br /&gt;
1920년대 초 식민지 조선에서는 민중의 자발적인 참여하에 조선인을 위한 대학을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등장하였다. 민립 대학 설립에 대한 논의는 1920년 6월 20일 한규설, 이상재, 윤치소 등 91년의 발기로 조선교육회 발기회가 개최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가 학회령을 토대로 1922년 1월 24일까지 인가를 내주지 않아 민립대학 설립에 대한 결의를 실행시키지 못했다. &lt;br /&gt;
&lt;br /&gt;
동아일보에 기고된 사설을 통해 당시의 독립을 위한 교육 계몽의 필요성과, 관립 대학과 다르게 민립 대학의 설립 필요성에 관해 확인할 수 있다. &lt;br /&gt;
&lt;br /&gt;
{{Blockquote|운명을 어떻게 개척할까. 정치냐 외교냐 산업이냐. 물론 이러한 일들 모두 다 필요하다. 그러나 그 기초가 되고 요건이 되며 가장 급무가 되고 가장 선결의 필요가 있으며 가장 힘 있고 '''가장 필요한 수단은 교육이 아니면 할 수 없다.''' &amp;lt;br /&amp;gt; … 물론 관립대학도 조만간 개교될 것이기에 대학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학문 발전의 장래는 결코 1개의 대학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요, 또한 '''그처럼 중대한 사업을 우리 민중이 직접으로 영위하는 것은 차라리 우리의 의무라 할 수 있다.''' &amp;lt;br /&amp;gt;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에 느낀 바 있어 감히 만천하 동포에게 향하여 민립대학의 설립을 제창하니 자매형제는 와서 돕고 나아가 이루어라.'''&lt;br /&gt;
|출처= 「開會된 民大總會」, 『동아일보』, 1923년 3월 30일자.}}&lt;br /&gt;
&lt;br /&gt;
이렇게 고양된 민립 대학 설립을 통한 민족 교육에 대한 필요성을 바탕으로, 1922년 1월 이상재, 이승훈, 윤치호, 김성수, 송진우 등이 조선민립대학기성준비회를 정식으로 결성하였다. 이어 1923년 3월 29일 발기인 1170명 중 462명이 참석한 가운데 3일간 총회를 개최하였다. &lt;br /&gt;
&lt;br /&gt;
총회에서는 ＇민립대학발기취지서＇를 채택하고 대학 설립 계획서를 확정하였다. 계획서에 따르면 3개년 계획으로 자본금 1000만원을 갹출하는데, 제 1차 연도에는 대지 5만 평을 구입하여 교실 10동, 대강당 1동을 건축하고, 법과/경제과/문과/이과의 4개 대학 및 예과를 설치하며, 제2차 연도에는 300만원으로 공과/이과/기타 학과를 증설하고, 제3차 연도에는 300만원으로 의과/농과를 설치한다는 것이다. 또 중앙집행위원회를 구성하고 지방에 지방부를 두기로 결의하였다. 별도로 지방순회선정위원 13평을 선정하고 파견하였다. 이와 같은 노력을 토대로 1923년 말까지 전국 100여 개소와 해외의 만주 간도, 봉천, 미국 하와이 등지에도 지방부가 조직되었다. &lt;br /&gt;
&lt;br /&gt;
기성회는 ＇한민족 1000만 한 사람 1원씩＇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기금 모금에 나섰다. 이런 모금 활동에 민족 교육을 성원하는 마음들이 모였는데, 대표적으로 전라남북도에서만 15만원이 모금되었으며 경기도 안성의 이정도는 1년 동안 매일 아침 밥짓는 쌀에서 식구 수 대로 한 숟가락씩 모아 판 돈 19원을 기부하는 등 일반 민간에서의 성원도 뜨거웠다. &lt;br /&gt;
&lt;br /&gt;
이와 같은 열기에 일제는 이를 교육 운동이 아니라 정치 운동이라고 판단하고 탄압하였다. ＇조선교육령＇을 개정하여 관립 경성제국대학의 설립을 서두르고 민립대학과 관련 있는 인사들에 대한 탄압과 기금 갹출 방해 공작을 전개하였다. 민립대학기성회 인사들을 민족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구실로 철저히 감시하고, 기금 모집을 위해 박차를 가하던 인사들의 지방 강연을 배일사상을 고취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강연 중지를 명하고 청중을 해산시켰다. &lt;br /&gt;
&lt;br /&gt;
이러한 조선총독부의 탄압이 민립대학 설립운동의 실패의 주된 원인이 되었다. 1923년 여름 수재, 9월 일본 관동 대지진으로 인한 경제 공황, 1924년 한재와 7월 전국적 수재로 인한 농촌 경제 파탄 등 자연적인 여건도 민립대학 설립운동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그러나 3.1운동 이후 전 민족이 민족 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조직체를 형성하여 교육을 통한 자주독립이라는 하나의 목표에서 단결을 보였다. 이는 이후의 민족운동 양상에서 조직적인 단체 결성의 표본이 되었다.&lt;br /&gt;
&lt;br /&gt;
[[분류:신다정]]&lt;br /&gt;
&lt;br /&gt;
=='''군사 교육'''==&lt;br /&gt;
&lt;br /&gt;
독립운동사에서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군사 교육도 꾸준히 이어져왔다. 수많은 독립열사들은 무관학교 설립을 위한 활발한 활동을 이어왔다. 독립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역량은 군사였기 때문에, 군사교육은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였으며 이에 따라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에서도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노력이 나타났다.&lt;br /&gt;
&lt;br /&gt;
[[분류:이민희]]&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lt;br /&gt;
신흥무관학교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위해 설립된 군사학교로, 독립군 양성과 무장 투쟁 기반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911년 중국 만주 서간도 지역(현재의 지린성 류허현)에서 이회영, 이시영 등 독립운동가들이 설립했으며, 군사 지도자를 양성하고 실질적인 무장 독립운동을 준비하는 데 목적을 두었습니다. &lt;br /&gt;
&lt;br /&gt;
교육 내용은 사격, 전술, 지형 분석 등 실전 중심의 군사훈련과 함께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역사 및 애국사상 교육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졸업생들은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전투 같은 독립전쟁에서 활약하며 독립운동의 주축이 되었고, 김좌진과 이범석 같은 지도자를 배출했습니다. &lt;br /&gt;
&lt;br /&gt;
1920년대에 들어 일본의 탄압이 강화되면서 학교 운영이 점차 어려워졌고, 졸업생들이 각종 독립운동 조직으로 흩어지면서 신흥무관학교는 군사훈련소 형태로 전환되다가 결국 해체되었습니다. &lt;br /&gt;
&lt;br /&gt;
졸업생들은 만주 지역에서 서로군정서, [[북로군정서]]에서 핵심 간부로 활약, [[대한독립군]], 통의부의용군, 정의부, 신민부, 국민부 등에서 활동하였고,중국 본토에서는 1919년 11월 길림에서 의열단 결성,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에서 독립운동 전개했습니다.&lt;br /&gt;
&lt;br /&gt;
신흥무관학교는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군사교육 기관으로 평가받습니다. 이 학교는 독립군의 전투력을 강화하고, 독립운동의 실질적 기반을 마련했으며, 한국 독립운동의 전환점이 된 여러 전투에서 큰 공헌을 했습니다.&lt;br /&gt;
&lt;br /&gt;
[[분류:최용빈]]&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조선혁명간부학교]]===&lt;br /&gt;
&lt;br /&gt;
1919년 조직된 무장독립운동단체 의열단은 중국국민당과의 합작을 통해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실질적인 군사 교육 기관'''&amp;lt;/span&amp;gt;을 설립하고자 노력했다. 이에 따라 [[장제스]]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의열단&amp;lt;ref&amp;gt; 급진적인 항일 투쟁을 목적으로 1919년 11월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로, 김원봉(金元鳳)이 단장을 맡았다. &amp;lt;/ref&amp;gt;의 단장인 김원봉이 1932년 중국 난징에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설립하였다. 공식 명칭은 사실 조선혁명간부학교가 아닌, ''‘중국국민당 군사위원회 간부 훈련반 제6대’''로, 국민당의 단기간부훈련소 신설반인 것처럼 위장했다. &lt;br /&gt;
&lt;br /&gt;
&lt;br /&gt;
학교는 일본과 중국의 외교관계를 고려해 학교 운영 사실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설립 초기에는 중국 외교부와 육군참모본부, 심지어 군사위원회 판공청 당사자들조차 그 존재를 모를 정도였다. 만 3년간 운영된 조선혁명간부학교는 3기에 걸쳐 총 125명의 인재를 배출했다. 국민당은 그동안 매월 경상비 2,000~3,000원·수시 필요경비 1,000~1만 원·기타 운영비 400~1,000원 등 각종 운영자금 전액과 화기·탄약·피복 등을 지원했다. 학생들은 군사학뿐 아니라 별도 신설된 정치학, 자연과학을 포함해 경제학·사회학·철학·혁명학·물리학·화학·지리학까지 다양한 학문을 공부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혁명간부학교의 졸업생들은 이후 민족혁명당의 항일투쟁체계에 편입되었으며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대]]의 핵심 세력으로 성장하였고, 일부는 화북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에 가담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단체문서한국광복군.jpg|섬네일|가운데|''&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한국 광복군의 모습&amp;lt;/div&amp;gt;'']] &lt;br /&gt;
[[파일:조선의용대김원봉.jpg|섬네일|가운데|''&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조선의용대 모습 &amp;lt;/div&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amp;lt;font color=&amp;quot;#8c8c8c&amp;quot;&amp;gt;조선의용대 깃발 가운데 있는 인물이 약산 김원봉이다.&amp;lt;/font&amp;gt;''&amp;lt;ref&amp;gt;김삼웅, &amp;quot;최후까지 총을 든 조선의용대와 김원봉&amp;quot;, 오마이뉴스, 2024.02.06.,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999602 (검색일:2024년 12월 4일)&amp;lt;/ref&amp;gt;&amp;lt;/div&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이민희]]&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한인소년병학교]]===&lt;br /&gt;
&lt;br /&gt;
한인소년병학교는 장기적인 독립 투쟁을 대비하여 군사 교육을 받은 장교를 양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박용만에 의해 설립되었다. 한인소년병학교는 1909년 6월에 세워진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최초의 국외 설립 군사학교''&amp;lt;/span&amp;gt;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으며, 각지의 군사운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lt;br /&gt;
&lt;br /&gt;
&lt;br /&gt;
한인소년병학교는 미국의 헤이스팅스(Hastins) 대학과 교섭하여 운영되었으며, 네브라스카 주에서 설립되었으나 교섭에 따라 헤이스팅스로 이전하여 한인 유학생의 활발한 참여를 이끌어냈다. 헤이스팅스 대학은 건물 한 동과 전장을 지원하여, [[둔전병제]]식 훈련을 실시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헤이스팅스대학.png|섬네일|가운데|''&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헤이스팅스 대학의 모습 &amp;lt;/div&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amp;lt;font color=&amp;quot;#8c8c8c&amp;quot;&amp;gt;한인소년병학교 학생들이 훈련했던 헤이스팅스 대학의 사진이다.&amp;lt;/font&amp;gt;''&amp;lt;/div&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ftzi6pFWzNc?si=iGbjmKk9yPuAn_Ub&amp;quot; title=&amp;quot;YouTube video player&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div&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다음의 영상에서 한인소년병학교가 있었던 헤이스팅스 대학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다.'' &amp;lt;/div&amp;gt;&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lt;br /&gt;
&lt;br /&gt;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는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한 박용만이 미국의 하와이에도 같은 군사 훈련 단체를 설립하고자 하여 1914년 4월 15일 설립되었다. 당시 학도 수는 200여명으로 군단장 역시 박용만이 맡았다. &lt;br /&gt;
&lt;br /&gt;
&lt;br /&gt;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는 [[한인소년병학교]]를 계승하여 [[둔전병제]]식 훈련을 실시하였고, 군영이 호놀룰루 시의 동북 쪽 큰 산을 넘어 해안과 아후이마누 강을 낀 계곡에 위치하여 ''&amp;quot;산 넘어 아희들&amp;quot;''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lt;br /&gt;
하와이에서 군단과 사관학교를 설치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으나, 1916년을 고비로 점차 쇠퇴하여 1917년 경 해체되었고, 지역으로 흩어져 사실상 폐교되었다.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는 제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미일(美日) 간 우호관계가 지속되면서 국민군단의 혁명적이고 군사적인 성격이 하와이 내에서 우호적인 반응을 얻지 못하였고, 이외에도 하와이 내 농장의 불경기로 수입이 급감하면서 재정 조달이 어려웠으며 1915년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의 실권이 이승만 측에 넘어가 박용만의 활동 범위가 위축된 점 등으로 인해 폐교되었다고 추측되고 있다.&lt;br /&gt;
&lt;br /&gt;
[[분류: 이민희]]&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숭무학교(崇武學校)]]===&lt;br /&gt;
숭무학교는 1910년대 멕시코로 이주한 한인들이 일제강점기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한 군사학교입니다. 멕시코에 이주한 한인들은 고된 노동 속에서도 민족 독립의 열망을 잃지 않고 독립운동을 조직적으로 지원하고자 노력했습니다. 1915년 멕시코 유카탄주 메리다 지역에서 설립된 숭무학교는 독립군 양성을 목표로, 체계적인 군사훈련과 애국 사상 교육을 실시했습니다.&lt;br /&gt;
&lt;br /&gt;
이 학교는 멕시코 한인 사회의 독립운동 기반을 강화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특히 숭무학교는 한인들의 단결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멀리 해외에서조차 독립운동을 지속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큽니다. 이러한 활동은 멕시코뿐 아니라 미주 지역의 다른 한인 독립운동 단체에도 영향을 주어 독립운동의 글로벌 네트워크 형성에 기여했습니다.&lt;br /&gt;
&lt;br /&gt;
숭무학교는 해외 독립운동의 독특한 사례로, 한인 이민사와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lt;br /&gt;
&lt;br /&gt;
[[분류:최용빈]]&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독립군으로의 발전===&lt;br /&gt;
&lt;br /&gt;
군사교육을 위해 설립된 다양한 무관학교를 기점으로, 졸업생들은 각기 다른 곳에서 독립군으로 발전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의 경우, 졸업생들은 만주 지역에서 서로군정서, 북로군정서에서 핵심 간부로 활약했을 뿐 아니라, 대한독립군,통의부의용군, 정의부, 신민부, 국민부 등에서 활동하였다. 또한, 중국 본토의 경우에서는 1919년 11월 길림에서 의열단을 결성하기도 하고, 임시정부 산하의 광복군인 한국광복군의 일원으로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졸업한 졸업생들도 독립군으로서 활약하였다. 이들은 민족혁명당의 항일투쟁체계에 편입되었는데, 대표적으로 임시정부 산하의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대의 핵심 세력으로 성장했고, 일부는 화북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에 가담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한인소년병학교]]와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 숭무학교를 졸업한 졸업생들도 독립군으로 발전하였으나, 구체적으로 어떤 기관으로 발전하였는지는 크게 알려진 바가 없다. &lt;br /&gt;
&lt;br /&gt;
[[숭무학교(崇武學校)]]는 일부 학생들은 멕시코 혁명에 참여하기 위해 군에 입대하였다.  일부 설립자들은 과테말라 혁명에 참여하려 했으나 실패로 끝났다.&lt;br /&gt;
&lt;br /&gt;
[[분류: 이민희]]&lt;br /&gt;
&lt;br /&gt;
==데이터 시각화==&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마인드맵===&lt;br /&gt;
[[파일:교육구국운동_노드_마인드맵.png|500픽셀]]&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온톨로지===&lt;br /&gt;
인물의 경우 관련 공훈전자사료관,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인명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의 관련 링크를 삽입하여 추가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하였다.&lt;br /&gt;
{{NetworkGraph | title=교육구국운동.lst}}&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콘텐츠 구조===&lt;br /&gt;
====클래스(Class)====&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width:100%;&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0%&amp;quot;| 클래스|| style=&amp;quot;width:10%&amp;quot;|모양|| style=&amp;quot;width:20%&amp;quot;|내용 ||노드 &lt;br /&gt;
|-&lt;br /&gt;
|인물 ||인물의 사진 || 독립운동사에서 교육 운동에 이바지하였던 인물을 포함한 다양한 독립운동가들을 인물로서 클래스로 설정했다. || [[이동휘]] '''[[안창호(安昌浩)]]''' [[김원봉]] '''[[장제스]]''' 박용만 이갑성 스코필드 유기준 [[주시경]] [[지청천]] [[여운형]] 차미리사 김명시 남궁억 이동녕 이용익 김성수 신해영 [[강기덕]] 손병희 [[방정환]] 이종호 윤익선 염온동 주익 이세영 고종 순헌황귀비 박자혜 신채호 김종진 이정숙 이회영 김구 이석영 이상룡 윤기섭 이근영 한성순 양귀선 조병하 서문경 윤을희 이시영 박선봉 조금옥 '''[[양기탁(梁起鐸)]]'''&lt;br /&gt;
|-&lt;br /&gt;
|기관 || 빨간색 상자|| 부지를 두고 설치하여 활동했던 조직을 기관으로 설정했다. ||연희전문학교 세브란스 배재학당 배화학당 보성전문학교 명신여학교 '''[[한인소년병학교]]''' 대조선국민군단사관학교 '''[[조선혁명간부학교]]''' 신흥무관학교 숭무학교 신흥강습소 동아일보&lt;br /&gt;
|-&lt;br /&gt;
|단체 || 파란색 원 ||기관보다 넓은 의미로서, 같은 뜻을 가지고 함께 활동했던 조직체를 단체로 설정했다. || [[신민회(新民會)]] 협성회독립협회 '''[[한국광복군]]''' '''[[조선의용대]]''' 조선의용군 화북조선독립동맹 대한민국임시정부 간우회 조선어학회 대한인국민회&lt;br /&gt;
|-&lt;br /&gt;
|지역 || 초록색 타원|| 각 기관과 단체가 위치하거나 기관이나 단체, 인물이 활동했던 곳을 지역으로서 클래스를 설정했다. || 미국, 한반도, 난징, 멕시코, 캐나다, 상해, 만주, 중국&lt;br /&gt;
|-&lt;br /&gt;
|활동_및_사건 || 분홍색 타원 ||각 기관이나 단체, 인물의 행동 및 사건을 묶어 활동_및_사건의 클래스를 설정했다. || '''[[브나로드 운동]]''', 민립대학 설립 운동, 3.1운동, 6.10 학생 만세운동, 1920년 3.1 학생 운동, 서울 지역 학생 독립운동&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신다정]]&lt;br /&gt;
&lt;br /&gt;
====관계성(Relation)====&lt;br /&gt;
&lt;br /&gt;
'''인물 중심 관계성 설정''' &lt;br /&gt;
* '''설립했다''' 인물 → 기관, 단체 : 기관 또는 단체의 설립에 기여함을 설명하는 relation이다. &lt;br /&gt;
* '''지원했다''' 인물 → 기관, 단체, 활동 및 사건 : 단체, 기관, 활동 및 사건을 직접적으로 주도한 것은 아니나 보조적으로 지원했음을 설명하는 relation이다. 단체의 활동이나 기관의 설립 및 활동, 활동 및 사건의 전개의 지원을 모두 포괄하는 설명이다. &lt;br /&gt;
* '''출신이다''' 인물 → 기관, 단체, 지역 : 인물이 기관, 단체, 나라의 출신임을 나타내는 relation이다. 지역의 경우, 해당 인물의 국적을 의미하며 외국인의 경우에만 해당 relation을 사용해 국적을 나타냈다. &lt;br /&gt;
* '''활동했다''' 인물 → 활동 및 사건 : 인물이 특정 활동 및 사건에 주도적으로 활동했음을 나타내는 relation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기관 중심 관계성 설정'''&lt;br /&gt;
* '''소속이다''' 기관, 단체 → 인물 : 인물이 기관의 소속임을 나타내는 relation이다. 기관의 경우 교육기관을 주로 다루기 때문에, 교육기관에 재학하였던 경우에는 '출신이다.' relation을 사용하였고 교직원 등으로 재직한 경우에는 해당 relation을 사용하여 구분하였다. &lt;br /&gt;
* '''위치하다''' 기관→지역 : 기관이 특정 지역에 위치하였음을 나타내는 relation이다. 위치를 옮긴 기관의 경우 위치했던 지역에 모두 해당 relation을 사용하여 연결했다. &lt;br /&gt;
* '''발전했다''' 기관, 단체 → 기관, 단체 : 특정 기관 및 단체가 다른 기관 및 단체로 발전함을 설명하는 relation이다.  &lt;br /&gt;
* '''계승했다''' 기관, 단체 → 기관, 단체 : 기관 및 단체가 다른 기관 및 단체로 계승함을 설명하는 relation이다. 계승한 쪽을 종속 노드로 설정하였으나, 화살표 방향을 inverse로 설정해 '발전했다.' relation과 차이를 두었다.&lt;br /&gt;
&lt;br /&gt;
====온톨로지 기여====&lt;br /&gt;
[[김윤]]&amp;lt;br/&amp;gt;&lt;br /&gt;
[[신다정]]&amp;lt;br/&amp;gt;&lt;br /&gt;
[[이민희]]&amp;lt;br/&amp;gt;: 군사교육 중 조선혁명간부학교, 한인소년병학교,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 관련 노드 및 관계성 정리, 인물 사진 삽입&lt;br /&gt;
&amp;lt;br/&amp;gt;&lt;br /&gt;
[[최용빈]]&amp;lt;br/&amp;gt;&lt;br /&gt;
[[헤르미온느]]: 민족사학 관련 노드 및 관계성 정리, 인물 사진 삽입, 노드 색 및 모양 지정, 인물 하이퍼링크&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교육기관 지도&amp;lt;ref&amp;gt;가급적 최초 설립 위치를 기준으로 작성하였지만 초기 설립 시 다른 학교의 교사에 있다 교사를 이전한 경우 해당 위치로 표기함.&amp;lt;/ref&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src=&amp;quot;https://www.google.com/maps/d/embed?mid=1cI0D_B0oG-xrdk5kcPVCnLJ2hJpOJZw&amp;amp;ehbc=2E312F&amp;quot; width=&amp;quot;640&amp;quot; height=&amp;quot;480&amp;quot;&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기타==&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참고문헌===&lt;br /&gt;
1. 민족사학 발전과정 연대기 설명 내용&lt;br /&gt;
*「원산학사 (元山學舍)」,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0700, 접속일: 2024. 12. 9.&lt;br /&gt;
*「흥화학교(興化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6074, 접속일: 2024. 12. 9.&lt;br /&gt;
*「중교의숙(中橋義塾)」,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3699, 접속일: 2024. 12. 9.&lt;br /&gt;
*「순성학교 (順成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1901, 접속일: 2024. 12. 9.&lt;br /&gt;
*「점진학교(漸進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9857, 접속일: 2024. 12. 9.&lt;br /&gt;
*「낙연의숙(落淵義塾)」,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1639, 접속일: 2024. 12. 9.&lt;br /&gt;
&lt;br /&gt;
*「한성법학교(漢城法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426, 접속일: 2024. 12. 9.&lt;br /&gt;
&lt;br /&gt;
*「양정고등학교 (養正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731, 접속일: 2024. 12. 9.&lt;br /&gt;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3433, 접속일: 2024. 12. 9.&lt;br /&gt;
*「보창학교(普昌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3546, 접속일: 2024. 12. 9.&lt;br /&gt;
*「서전서숙 (瑞甸書塾)」,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8159, 접속일: 2024. 12. 9.&lt;br /&gt;
*「진명여자고등학교 (進明女子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4673, 접속일: 2024. 12. 9.&lt;br /&gt;
*「중동고등학교 (中東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3729, 접속일: 2024. 12. 9.&lt;br /&gt;
*「휘문고등학교 (徽文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5832, 접속일: 2024. 12. 9.&lt;br /&gt;
*「숙명여자대학교 (淑明女子大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1800, 접속일: 2024. 12. 9.&lt;br /&gt;
*「숙명여자고등학교 (淑明女子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1799, 접속일: 2024. 12. 9.&lt;br /&gt;
*「양규의숙(養閨義塾)」,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426, 접속일: 2024. 12. 9.&lt;br /&gt;
*「서북협성학교 (西北協成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7788, 접속일: 2024. 12. 9.&lt;br /&gt;
*「사범학교 (師範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5642, 접속일: 2024. 12. 9.&lt;br /&gt;
*「대성학교(大成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4519, 접속일: 2024. 12. 9.&lt;br /&gt;
*「협동학교(協東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3491, 접속일: 2024. 12. 9.&lt;br /&gt;
*「동성고등학교 (東星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6589, 접속일: 2024. 12. 9.&lt;br /&gt;
*「장훈고등학교 (長薰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8403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8403, 접속일: 2024. 12. 9.&lt;br /&gt;
*「오산고등학교 (五山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8302, 접속일: 2024. 12. 9.&lt;br /&gt;
*「치문초등학교 (致文初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8358, 접속일: 2024. 12. 9.&lt;br /&gt;
*「명동학교(明東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8242, 접속일: 2024. 12. 9.&lt;br /&gt;
*「양원여학교(養原女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687, 접속일: 2024. 12. 9.&lt;br /&gt;
*「보인학교(輔仁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426, 접속일: 2024. 12. 9.&lt;br /&gt;
*「기호학교(畿湖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426, 접속일: 2024. 12. 9.&lt;br /&gt;
*「양산중학교(楊山中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426, 접속일: 2024. 12. 9.&lt;br /&gt;
*「서북협성학교(西北協成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426, 접속일: 2024. 12. 9.&lt;br /&gt;
&lt;br /&gt;
2. 민간단체의 교육 구국 운동&lt;br /&gt;
* 한관일. &amp;quot;한국 개화기 신민회의 교육구국 사상.&amp;quot; 교육과학연구 14.- (2000): 1-32.&lt;br /&gt;
* [출처: 민립대학설립운동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lt;br /&gt;
&lt;br /&gt;
5. 군사교육 중 조선혁명간부학교, 한인소년병학교,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lt;br /&gt;
* 「조선혁명간부학교 (朝鮮革命幹部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2266 (검색일: 2024년 11월 30일).&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김세광 (金世光)」,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3831 (검색일: 2024년 12월 2일).&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신악 (申岳)」,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3817 (검색일: 2024년 12월 2일).&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왕통 (王通)」,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3818 (검색일: 2024년 12월 2일).&lt;br /&gt;
* 김광재,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의 결성과 활동」,  『독립기념관』, https://www.i815.or.kr/upload/kr/magazine/magazine/83/post-919.html (검색일: 2024년 12월 2일)&lt;br /&gt;
* 심용환, 「교육, 어둠을 밝힌 등불이 되다」,  『독립기념관』, https://www.i815.or.kr/upload/kr/magazine/magazine/4/post-38.html (검색일: 2024년 12월 2일)&lt;br /&gt;
* 밀양독립운동기념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밀양독립운동기념관』, http://www.miryang815.or.kr/bbs/board.php?bo_table=data&amp;amp;wr_id=10 (검색일: 2024년 12월 2일)&lt;br /&gt;
* 「한인소년병학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1902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국사편찬위원회, 「한인소년병학교」,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s://db.history.go.kr/diachronic/level.do?levelId=nh_047_0030_0020_0040_0030_0010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인소년병학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3624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박용만의 소년병학교: 군사적 구국운동」,  『호남人월드』, 2009.05.19, http://www.honaminworld.kr/307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박용만 1881 ~ 1928」,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code=kc_age_40&amp;amp;levelId=kc_n401200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가. 한인소년병학교」, 『국사편찬위원회』, https://db.history.go.kr/diachronic/level.do?levelId=nh_047_0030_0020_0040_0030_0010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한인소년병학교의 교육 과정」, 『국사편찬위원회』, http://contents.history.go.kr/front/nh/print.do?levelId=nh_047_0030_0020_0040_0030_0010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대조선국민군단 (大朝鮮國民軍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4780 (검색일: 2024년 11월 30일).&lt;br /&gt;
&lt;br /&gt;
[[분류:독립운동사의 근간, 교육구국운동(敎育救國運動)]]&lt;/div&gt;</summary>
		<author><name>Matnyeom</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91%94%EC%A0%84%EB%B3%91%EC%A0%9C&amp;diff=52200</id>
		<title>둔전병제</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91%94%EC%A0%84%EB%B3%91%EC%A0%9C&amp;diff=52200"/>
		<updated>2024-12-20T11:30:3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Matnyeom: /* 출처 */&lt;/p&gt;
&lt;hr /&gt;
&lt;div&gt;=='''정의'''==&lt;br /&gt;
&lt;br /&gt;
둔전병제(屯田兵制)는 평시에는 토지를 경작하고 전시에는 전투원으로 동원되는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군사-농업 복합 제도''''&amp;lt;/span&amp;gt;이다.&lt;br /&gt;
&lt;br /&gt;
=='''역사적 배경'''==&lt;br /&gt;
&lt;br /&gt;
둔전병제의 기원은 중국에서 시작되었으며, 서양에서는 비잔티움 제국에서 가장 유명하게 실시되었다.&lt;br /&gt;
&lt;br /&gt;
=='''주요 특징'''==&lt;br /&gt;
&lt;br /&gt;
* 군인에게 토지 제공&lt;br /&gt;
* 평시 농사, 전시 전투 참여&lt;br /&gt;
* 자급자족 체제 구축&lt;br /&gt;
* 국가의 군사비 절감&lt;br /&gt;
&lt;br /&gt;
=='''동서양의 차이점'''==&lt;br /&gt;
&lt;br /&gt;
* 동양(중국): 주로 식량 확보가 목적&lt;br /&gt;
* 서양(비잔티움): 충성심 있는 국내 군대 확보가 목적&lt;br /&gt;
&lt;br /&gt;
=='''한국 독립운동에서의 적용'''==&lt;br /&gt;
&lt;br /&gt;
[[한인소년병학교]]와 대조선국민군단에서 둔전병제를 적용하여 운영했다.&lt;br /&gt;
&lt;br /&gt;
=== [[한인소년병학교]]에서의 둔전병제 ===&lt;br /&gt;
한인소년병학교는 미국 하와이에서 박용만이 설립한 군사학교로, 한인 청소년들에게 군사 훈련과 애국 교육을 제공했다. &lt;br /&gt;
 &lt;br /&gt;
* '''농업 활동'''&lt;br /&gt;
학교 주변의 토지를 활용해 학생들과 교직원이 함께 농사를 짓는 방식으로 경제적 자립을 꾀했다. &lt;br /&gt;
생산된 농산물은 학교의 운영 자금 및 식량으로 활용되었다.&lt;br /&gt;
&lt;br /&gt;
* '''병사와 농민의 이중 역할'''&lt;br /&gt;
학생들은 낮에는 농업 활동에 참여하고, 밤에는 군사 훈련을 받는 일정으로 구성되었다.&lt;br /&gt;
이를 통해 자립심과 체력을 배양하는 한편, 독립군으로서의 실질적 능력을 키웠다.&lt;br /&gt;
&lt;br /&gt;
* '''둔전 운영 방식'''&lt;br /&gt;
농업 활동과 군사 훈련의 비율은 6:4로 설정되었으며, 경제적 독립과 군사적 훈련 모두를 균형 있게 유지했다.&lt;br /&gt;
&lt;br /&gt;
=== 대조선국민군단에서의 둔전병제 ===&lt;br /&gt;
&lt;br /&gt;
대조선국민군단은 박용만이 1914년 하와이에서 설립한 단체로, 독립운동을 위한 군사 조직을 양성하고자 했다. 이 조직 역시 둔전병제를 활용하여 경제적 자립과 군사적 강화를 동시에 도모했다.&lt;br /&gt;
&lt;br /&gt;
* '''공동체 농업'''&lt;br /&gt;
군단은 하와이에서 대규모 토지를 확보해 병사들이 직접 농업 활동에 종사하도록 했다. 공동체 방식으로 생산물을 나누고, 이를 통해 조직 운영 자금을 충당했다.&lt;br /&gt;
&lt;br /&gt;
* '''경제적 자립 구조'''&lt;br /&gt;
둔전에서 발생한 수익은 무기 구매 및 교육 자료 제작에 사용되었다. 농업 외에도 소규모 공예품 제작 및 판매를 통해 추가적인 수익을 창출했다.&lt;br /&gt;
&lt;br /&gt;
* '''훈련과 작업의 균형'''&lt;br /&gt;
병사들은 하루 일정의 절반을 농업 활동에 할애하고 나머지 시간은 군사 훈련과 정신 교육에 집중했다. 이를 통해 병사로서의 실력을 키우면서 경제적 부담을 줄일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독립운동 과정에서 군사훈련과 경제적 자립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는 효과적인 시스템으로 활용되었다.&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 낮달, 「이승만과 결별 후 연구조차 금기시돼온 독립운동가」,  『직썰』, 2018.10.17, https://www.ziksir.com/news/articleView.html?idxno=7221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노세극, 「[독립운동가 열전 삶과 넋 92] 무장 독립투쟁의 거목, 우성 박용만」, 『노동과 세계』, 2021.01.18, https://www.labor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0893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한인소년병학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1902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이민희]]&lt;/div&gt;</summary>
		<author><name>Matnyeom</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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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둔전병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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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12-20T11:29:1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Matnyeom: /* 대조선국민군단에서의 둔전병제 */&lt;/p&gt;
&lt;hr /&gt;
&lt;div&gt;=='''정의'''==&lt;br /&gt;
&lt;br /&gt;
둔전병제(屯田兵制)는 평시에는 토지를 경작하고 전시에는 전투원으로 동원되는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군사-농업 복합 제도''''&amp;lt;/span&amp;gt;이다.&lt;br /&gt;
&lt;br /&gt;
=='''역사적 배경'''==&lt;br /&gt;
&lt;br /&gt;
둔전병제의 기원은 중국에서 시작되었으며, 서양에서는 비잔티움 제국에서 가장 유명하게 실시되었다.&lt;br /&gt;
&lt;br /&gt;
=='''주요 특징'''==&lt;br /&gt;
&lt;br /&gt;
* 군인에게 토지 제공&lt;br /&gt;
* 평시 농사, 전시 전투 참여&lt;br /&gt;
* 자급자족 체제 구축&lt;br /&gt;
* 국가의 군사비 절감&lt;br /&gt;
&lt;br /&gt;
=='''동서양의 차이점'''==&lt;br /&gt;
&lt;br /&gt;
* 동양(중국): 주로 식량 확보가 목적&lt;br /&gt;
* 서양(비잔티움): 충성심 있는 국내 군대 확보가 목적&lt;br /&gt;
&lt;br /&gt;
=='''한국 독립운동에서의 적용'''==&lt;br /&gt;
&lt;br /&gt;
[[한인소년병학교]]와 대조선국민군단에서 둔전병제를 적용하여 운영했다.&lt;br /&gt;
&lt;br /&gt;
=== [[한인소년병학교]]에서의 둔전병제 ===&lt;br /&gt;
한인소년병학교는 미국 하와이에서 박용만이 설립한 군사학교로, 한인 청소년들에게 군사 훈련과 애국 교육을 제공했다. &lt;br /&gt;
 &lt;br /&gt;
* '''농업 활동'''&lt;br /&gt;
학교 주변의 토지를 활용해 학생들과 교직원이 함께 농사를 짓는 방식으로 경제적 자립을 꾀했다. &lt;br /&gt;
생산된 농산물은 학교의 운영 자금 및 식량으로 활용되었다.&lt;br /&gt;
&lt;br /&gt;
* '''병사와 농민의 이중 역할'''&lt;br /&gt;
학생들은 낮에는 농업 활동에 참여하고, 밤에는 군사 훈련을 받는 일정으로 구성되었다.&lt;br /&gt;
이를 통해 자립심과 체력을 배양하는 한편, 독립군으로서의 실질적 능력을 키웠다.&lt;br /&gt;
&lt;br /&gt;
* '''둔전 운영 방식'''&lt;br /&gt;
농업 활동과 군사 훈련의 비율은 6:4로 설정되었으며, 경제적 독립과 군사적 훈련 모두를 균형 있게 유지했다.&lt;br /&gt;
&lt;br /&gt;
=== 대조선국민군단에서의 둔전병제 ===&lt;br /&gt;
&lt;br /&gt;
대조선국민군단은 박용만이 1914년 하와이에서 설립한 단체로, 독립운동을 위한 군사 조직을 양성하고자 했다. 이 조직 역시 둔전병제를 활용하여 경제적 자립과 군사적 강화를 동시에 도모했다.&lt;br /&gt;
&lt;br /&gt;
* '''공동체 농업'''&lt;br /&gt;
군단은 하와이에서 대규모 토지를 확보해 병사들이 직접 농업 활동에 종사하도록 했다. 공동체 방식으로 생산물을 나누고, 이를 통해 조직 운영 자금을 충당했다.&lt;br /&gt;
&lt;br /&gt;
* '''경제적 자립 구조'''&lt;br /&gt;
둔전에서 발생한 수익은 무기 구매 및 교육 자료 제작에 사용되었다. 농업 외에도 소규모 공예품 제작 및 판매를 통해 추가적인 수익을 창출했다.&lt;br /&gt;
&lt;br /&gt;
* '''훈련과 작업의 균형'''&lt;br /&gt;
병사들은 하루 일정의 절반을 농업 활동에 할애하고 나머지 시간은 군사 훈련과 정신 교육에 집중했다. 이를 통해 병사로서의 실력을 키우면서 경제적 부담을 줄일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독립운동 과정에서 군사훈련과 경제적 자립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는 효과적인 시스템으로 활용되었다.&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 낮달, 「이승만과 결별 후 연구조차 금기시돼온 독립운동가」,  『직썰』, 2018.10.17, https://www.ziksir.com/news/articleView.html?idxno=7221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노세극, 「[독립운동가 열전 삶과 넋 92] 무장 독립투쟁의 거목, 우성 박용만」, 『노동과 세계』, 2021.01.18, https://www.labor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0893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이민희]]&lt;/div&gt;</summary>
		<author><name>Matnyeom</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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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12-20T11:28:42Z</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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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정의'''==&lt;br /&gt;
&lt;br /&gt;
둔전병제(屯田兵制)는 평시에는 토지를 경작하고 전시에는 전투원으로 동원되는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군사-농업 복합 제도''''&amp;lt;/span&amp;gt;이다.&lt;br /&gt;
&lt;br /&gt;
=='''역사적 배경'''==&lt;br /&gt;
&lt;br /&gt;
둔전병제의 기원은 중국에서 시작되었으며, 서양에서는 비잔티움 제국에서 가장 유명하게 실시되었다.&lt;br /&gt;
&lt;br /&gt;
=='''주요 특징'''==&lt;br /&gt;
&lt;br /&gt;
* 군인에게 토지 제공&lt;br /&gt;
* 평시 농사, 전시 전투 참여&lt;br /&gt;
* 자급자족 체제 구축&lt;br /&gt;
* 국가의 군사비 절감&lt;br /&gt;
&lt;br /&gt;
=='''동서양의 차이점'''==&lt;br /&gt;
&lt;br /&gt;
* 동양(중국): 주로 식량 확보가 목적&lt;br /&gt;
* 서양(비잔티움): 충성심 있는 국내 군대 확보가 목적&lt;br /&gt;
&lt;br /&gt;
=='''한국 독립운동에서의 적용'''==&lt;br /&gt;
&lt;br /&gt;
[[한인소년병학교]]와 대조선국민군단에서 둔전병제를 적용하여 운영했다.&lt;br /&gt;
&lt;br /&gt;
=== [[한인소년병학교]]에서의 둔전병제 ===&lt;br /&gt;
한인소년병학교는 미국 하와이에서 박용만이 설립한 군사학교로, 한인 청소년들에게 군사 훈련과 애국 교육을 제공했다. &lt;br /&gt;
 &lt;br /&gt;
* '''농업 활동'''&lt;br /&gt;
학교 주변의 토지를 활용해 학생들과 교직원이 함께 농사를 짓는 방식으로 경제적 자립을 꾀했다. &lt;br /&gt;
생산된 농산물은 학교의 운영 자금 및 식량으로 활용되었다.&lt;br /&gt;
&lt;br /&gt;
* '''병사와 농민의 이중 역할'''&lt;br /&gt;
학생들은 낮에는 농업 활동에 참여하고, 밤에는 군사 훈련을 받는 일정으로 구성되었다.&lt;br /&gt;
이를 통해 자립심과 체력을 배양하는 한편, 독립군으로서의 실질적 능력을 키웠다.&lt;br /&gt;
&lt;br /&gt;
* '''둔전 운영 방식'''&lt;br /&gt;
농업 활동과 군사 훈련의 비율은 6:4로 설정되었으며, 경제적 독립과 군사적 훈련 모두를 균형 있게 유지했다.&lt;br /&gt;
&lt;br /&gt;
=== 대조선국민군단에서의 둔전병제 ===&lt;br /&gt;
&lt;br /&gt;
대조선국민군단은 박용만이 1914년 하와이에서 설립한 단체로, 독립운동을 위한 군사 조직을 양성하고자 했다. 이 조직 역시 둔전병제를 활용하여 경제적 자립과 군사적 강화를 동시에 도모했다.&lt;br /&gt;
&lt;br /&gt;
* '''공동체 농업'''&lt;br /&gt;
  - 군단은 하와이에서 대규모 토지를 확보해 병사들이 직접 농업 활동에 종사하도록 했다.&lt;br /&gt;
  - 공동체 방식으로 생산물을 나누고, 이를 통해 조직 운영 자금을 충당했다.&lt;br /&gt;
&lt;br /&gt;
* '''경제적 자립 구조'''&lt;br /&gt;
  - 둔전에서 발생한 수익은 무기 구매 및 교육 자료 제작에 사용되었다.&lt;br /&gt;
  - 농업 외에도 소규모 공예품 제작 및 판매를 통해 추가적인 수익을 창출했다.&lt;br /&gt;
&lt;br /&gt;
* '''훈련과 작업의 균형'''&lt;br /&gt;
  - 병사들은 하루 일정의 절반을 농업 활동에 할애하고 나머지 시간은 군사 훈련과 정신 교육에 집중했다.&lt;br /&gt;
  - 이를 통해 병사로서의 실력을 키우면서 경제적 부담을 줄일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독립운동 과정에서 군사훈련과 경제적 자립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는 효과적인 시스템으로 활용되었다.&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 낮달, 「이승만과 결별 후 연구조차 금기시돼온 독립운동가」,  『직썰』, 2018.10.17, https://www.ziksir.com/news/articleView.html?idxno=7221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노세극, 「[독립운동가 열전 삶과 넋 92] 무장 독립투쟁의 거목, 우성 박용만」, 『노동과 세계』, 2021.01.18, https://www.labor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0893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이민희]]&lt;/div&gt;</summary>
		<author><name>Matnyeom</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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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12-20T11:28:1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Matnyeom: /* 한국 독립운동에서의 적용 */&lt;/p&gt;
&lt;hr /&gt;
&lt;div&gt;=='''정의'''==&lt;br /&gt;
&lt;br /&gt;
둔전병제(屯田兵制)는 평시에는 토지를 경작하고 전시에는 전투원으로 동원되는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군사-농업 복합 제도''''&amp;lt;/span&amp;gt;이다.&lt;br /&gt;
&lt;br /&gt;
=='''역사적 배경'''==&lt;br /&gt;
&lt;br /&gt;
둔전병제의 기원은 중국에서 시작되었으며, 서양에서는 비잔티움 제국에서 가장 유명하게 실시되었다.&lt;br /&gt;
&lt;br /&gt;
=='''주요 특징'''==&lt;br /&gt;
&lt;br /&gt;
* 군인에게 토지 제공&lt;br /&gt;
* 평시 농사, 전시 전투 참여&lt;br /&gt;
* 자급자족 체제 구축&lt;br /&gt;
* 국가의 군사비 절감&lt;br /&gt;
&lt;br /&gt;
=='''동서양의 차이점'''==&lt;br /&gt;
&lt;br /&gt;
* 동양(중국): 주로 식량 확보가 목적&lt;br /&gt;
* 서양(비잔티움): 충성심 있는 국내 군대 확보가 목적&lt;br /&gt;
&lt;br /&gt;
=='''한국 독립운동에서의 적용'''==&lt;br /&gt;
&lt;br /&gt;
[[한인소년병학교]]와 대조선국민군단에서 둔전병제를 적용하여 운영했다.&lt;br /&gt;
&lt;br /&gt;
=== [[한인소년병학교]]에서의 둔전병제 ===&lt;br /&gt;
한인소년병학교는 미국 하와이에서 박용만이 설립한 군사학교로, 한인 청소년들에게 군사 훈련과 애국 교육을 제공했다. &lt;br /&gt;
 &lt;br /&gt;
* '''농업 활동'''&lt;br /&gt;
  - 학교 주변의 토지를 활용해 학생들과 교직원이 함께 농사를 짓는 방식으로 경제적 자립을 꾀했다. &lt;br /&gt;
  - 생산된 농산물은 학교의 운영 자금 및 식량으로 활용되었다.&lt;br /&gt;
&lt;br /&gt;
* '''병사와 농민의 이중 역할'''&lt;br /&gt;
  - 학생들은 낮에는 농업 활동에 참여하고, 밤에는 군사 훈련을 받는 일정으로 구성되었다.&lt;br /&gt;
  - 이를 통해 자립심과 체력을 배양하는 한편, 독립군으로서의 실질적 능력을 키웠다.&lt;br /&gt;
&lt;br /&gt;
* '''둔전 운영 방식'''&lt;br /&gt;
  - 농업 활동과 군사 훈련의 비율은 6:4로 설정되었으며, 경제적 독립과 군사적 훈련 모두를 균형 있게 유지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 대조선국민군단에서의 둔전병제 ===&lt;br /&gt;
&lt;br /&gt;
대조선국민군단은 박용만이 1914년 하와이에서 설립한 단체로, 독립운동을 위한 군사 조직을 양성하고자 했다. 이 조직 역시 둔전병제를 활용하여 경제적 자립과 군사적 강화를 동시에 도모했다.&lt;br /&gt;
&lt;br /&gt;
* '''공동체 농업'''&lt;br /&gt;
  - 군단은 하와이에서 대규모 토지를 확보해 병사들이 직접 농업 활동에 종사하도록 했다.&lt;br /&gt;
  - 공동체 방식으로 생산물을 나누고, 이를 통해 조직 운영 자금을 충당했다.&lt;br /&gt;
&lt;br /&gt;
* '''경제적 자립 구조'''&lt;br /&gt;
  - 둔전에서 발생한 수익은 무기 구매 및 교육 자료 제작에 사용되었다.&lt;br /&gt;
  - 농업 외에도 소규모 공예품 제작 및 판매를 통해 추가적인 수익을 창출했다.&lt;br /&gt;
&lt;br /&gt;
* '''훈련과 작업의 균형'''&lt;br /&gt;
  - 병사들은 하루 일정의 절반을 농업 활동에 할애하고 나머지 시간은 군사 훈련과 정신 교육에 집중했다.&lt;br /&gt;
  - 이를 통해 병사로서의 실력을 키우면서 경제적 부담을 줄일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독립운동 과정에서 군사훈련과 경제적 자립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는 효과적인 시스템으로 활용되었다.&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 낮달, 「이승만과 결별 후 연구조차 금기시돼온 독립운동가」,  『직썰』, 2018.10.17, https://www.ziksir.com/news/articleView.html?idxno=7221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노세극, 「[독립운동가 열전 삶과 넋 92] 무장 독립투쟁의 거목, 우성 박용만」, 『노동과 세계』, 2021.01.18, https://www.labor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0893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이민희]]&lt;/div&gt;</summary>
		<author><name>Matnyeom</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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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12-20T11:27:2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Matnyeom: /* 한국 독립운동에서의 적용 */&lt;/p&gt;
&lt;hr /&gt;
&lt;div&gt;=='''정의'''==&lt;br /&gt;
&lt;br /&gt;
둔전병제(屯田兵制)는 평시에는 토지를 경작하고 전시에는 전투원으로 동원되는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군사-농업 복합 제도''''&amp;lt;/span&amp;gt;이다.&lt;br /&gt;
&lt;br /&gt;
=='''역사적 배경'''==&lt;br /&gt;
&lt;br /&gt;
둔전병제의 기원은 중국에서 시작되었으며, 서양에서는 비잔티움 제국에서 가장 유명하게 실시되었다.&lt;br /&gt;
&lt;br /&gt;
=='''주요 특징'''==&lt;br /&gt;
&lt;br /&gt;
* 군인에게 토지 제공&lt;br /&gt;
* 평시 농사, 전시 전투 참여&lt;br /&gt;
* 자급자족 체제 구축&lt;br /&gt;
* 국가의 군사비 절감&lt;br /&gt;
&lt;br /&gt;
=='''동서양의 차이점'''==&lt;br /&gt;
&lt;br /&gt;
* 동양(중국): 주로 식량 확보가 목적&lt;br /&gt;
* 서양(비잔티움): 충성심 있는 국내 군대 확보가 목적&lt;br /&gt;
&lt;br /&gt;
=='''한국 독립운동에서의 적용'''==&lt;br /&gt;
&lt;br /&gt;
[[한인소년병학교]]와 대조선국민군단에서 둔전병제를 적용하여 운영했다.&lt;br /&gt;
&lt;br /&gt;
=== [[한인소년병학교]]에서의 둔전병제 ===&lt;br /&gt;
한인소년병학교는 미국 하와이에서 박용만이 설립한 군사학교로, 한인 청소년들에게 군사 훈련과 애국 교육을 제공했다. &lt;br /&gt;
 &lt;br /&gt;
* **농업 활동**&lt;br /&gt;
  - 학교 주변의 토지를 활용해 학생들과 교직원이 함께 농사를 짓는 방식으로 경제적 자립을 꾀했다. &lt;br /&gt;
  - 생산된 농산물은 학교의 운영 자금 및 식량으로 활용되었다.&lt;br /&gt;
&lt;br /&gt;
* **병사와 농민의 이중 역할**&lt;br /&gt;
  - 학생들은 낮에는 농업 활동에 참여하고, 밤에는 군사 훈련을 받는 일정으로 구성되었다.&lt;br /&gt;
  - 이를 통해 자립심과 체력을 배양하는 한편, 독립군으로서의 실질적 능력을 키웠다.&lt;br /&gt;
&lt;br /&gt;
* **둔전 운영 방식**&lt;br /&gt;
  - 농업 활동과 군사 훈련의 비율은 6:4로 설정되었으며, 경제적 독립과 군사적 훈련 모두를 균형 있게 유지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 대조선국민군단에서의 둔전병제 ===&lt;br /&gt;
&lt;br /&gt;
대조선국민군단은 박용만이 1914년 하와이에서 설립한 단체로, 독립운동을 위한 군사 조직을 양성하고자 했다. 이 조직 역시 둔전병제를 활용하여 경제적 자립과 군사적 강화를 동시에 도모했다.&lt;br /&gt;
&lt;br /&gt;
* **공동체 농업**&lt;br /&gt;
  - 군단은 하와이에서 대규모 토지를 확보해 병사들이 직접 농업 활동에 종사하도록 했다.&lt;br /&gt;
  - 공동체 방식으로 생산물을 나누고, 이를 통해 조직 운영 자금을 충당했다.&lt;br /&gt;
&lt;br /&gt;
* **경제적 자립 구조**&lt;br /&gt;
  - 둔전에서 발생한 수익은 무기 구매 및 교육 자료 제작에 사용되었다.&lt;br /&gt;
  - 농업 외에도 소규모 공예품 제작 및 판매를 통해 추가적인 수익을 창출했다.&lt;br /&gt;
&lt;br /&gt;
* **훈련과 작업의 균형**&lt;br /&gt;
  - 병사들은 하루 일정의 절반을 농업 활동에 할애하고 나머지 시간은 군사 훈련과 정신 교육에 집중했다.&lt;br /&gt;
  - 이를 통해 병사로서의 실력을 키우면서 경제적 부담을 줄일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독립운동 과정에서 군사훈련과 경제적 자립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는 효과적인 시스템으로 활용되었다.&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 낮달, 「이승만과 결별 후 연구조차 금기시돼온 독립운동가」,  『직썰』, 2018.10.17, https://www.ziksir.com/news/articleView.html?idxno=7221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노세극, 「[독립운동가 열전 삶과 넋 92] 무장 독립투쟁의 거목, 우성 박용만」, 『노동과 세계』, 2021.01.18, https://www.labor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0893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이민희]]&lt;/div&gt;</summary>
		<author><name>Matnyeom</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8F%85%EB%A6%BD%EC%9A%B4%EB%8F%99%EC%82%AC%EC%9D%98_%EA%B7%BC%EA%B0%84,_%EA%B5%90%EC%9C%A1%EA%B5%AC%EA%B5%AD%EC%9A%B4%EB%8F%99(%E6%95%8E%E8%82%B2%E6%95%91%E5%9C%8B%E9%81%8B%E5%8B%95)&amp;diff=52195</id>
		<title>독립운동사의 근간, 교육구국운동(敎育救國運動)</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8F%85%EB%A6%BD%EC%9A%B4%EB%8F%99%EC%82%AC%EC%9D%98_%EA%B7%BC%EA%B0%84,_%EA%B5%90%EC%9C%A1%EA%B5%AC%EA%B5%AD%EC%9A%B4%EB%8F%99(%E6%95%8E%E8%82%B2%E6%95%91%E5%9C%8B%E9%81%8B%E5%8B%95)&amp;diff=52195"/>
		<updated>2024-12-20T11:00:4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Matnyeom: /* 기획의도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개요==&lt;br /&gt;
[[파일:교육구국운동 표지.png|800px|가운데]]&lt;br /&gt;
&lt;br /&gt;
[[분류:신다정]]&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   text-align:center;&amp;quot;&amp;gt;기획의도===&lt;br /&gt;
&lt;br /&gt;
&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width:100%;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quot;&lt;br /&gt;
!| 기획의도&lt;br /&gt;
|-&lt;br /&gt;
| 조선의 독립운동사는 근대교육을 위한 노력과 함께 전개되어 왔다. 교육 운동은 독립 운동의 일환으로서 민중을 계몽하기도 하고, 여성 교육이 발전하여 개화 사상이 유입되기도 했으며, 가장 중요하게도 군사 교육을 통해 민족이 싸울 힘을 기르기도 했다. 우리 민족은 당면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기 위해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고, 배움에 대한 열정으로 일제강점기의 어둠을 헤쳐나갈 수 있었다. 학생들이 독립운동을 생각했을 때 교육을 가장 먼저 떠올리지는 않는 듯하다. 다만, 교육은 독립운동사의 핵심적인 부분을 뒷받침하는 지지대였다. 따라서, '''''우리가 잘 몰랐던 독립운동사에서의 다양한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을 위키 페이지로 만들어 이들의 스토리를 전달''''' 하고자 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이민희]]&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 text-align:center;&amp;quot;&amp;gt;팀원===&lt;br /&gt;
2023130036 김윤&lt;br /&gt;
2023131227 최용빈&lt;br /&gt;
2023131540 정혜나&lt;br /&gt;
2024130814 이민희&lt;br /&gt;
2024130911 신다정&lt;br /&gt;
&lt;br /&gt;
=='''교육구국운동(敎育救國運動)'''==&lt;br /&gt;
한국사에 있어서 개화기는 근대화를 추진하는 시기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개화기 교육은 종래 유학 경전 중심의 교육에서 탈피하여 신교육을 시작하는 전환기로 교육사적 의미가 있는 중요한 시기이다. 한국개화기 근대교육의 발전과정은 1880년대에서 1890년대까지 짧은 기간에 많은 변화와 개혁을 거듭하는 시기이다. 국가적으로 열강의 침략을 극복하고 신문화를 받아들여 개명하는 변혁기로 신교육 정착시키는 동시에 국권회복을 위한 교육구국운동을 통하여 민족독립을 전개하는 시기이다. &lt;br /&gt;
&lt;br /&gt;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 이후 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고 일본 통감부가 설치되어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 시기의 개화파를 계승한 애국계몽사상가들은 국권회복을 위해서는 자강지술을 고취하고, 실력을 배양하는 것이 선결과제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이것을 위해 청소년 교육, 민족산업의 육성, 각종 단체에 대한 단결 그리고 신교육을 위한 학교설립 등 광범위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를 교율(敎育)을 통해 나라를 구한다(救國)는 의미의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교육구국운동'''&amp;lt;/span&amp;gt;이라고 칭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신다정]] &lt;br /&gt;
&lt;br /&gt;
==교육기관 설립==&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민족설립 교육기관===&lt;br /&gt;
====민족사학의 의미 ====&lt;br /&gt;
'''1. 민족사학의 정의:''' 우리 민족이 설립한 교육 기관&amp;lt;br/&amp;gt;&lt;br /&gt;
본 위키 페이지에서는 민족사학(民族私學)을 '''외세나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교육기관과 구분되는 것'''으로서, 교육구국운동의 일환으로 일제강점기 전후에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우리 민족이 개인이나 사법인으로서 설립하여 경영하는 학교&amp;lt;/span&amp;gt;로 정의한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2. 민족사학의 정신 및 목적:''' 개화와 교육구국&amp;lt;br/&amp;gt;&lt;br /&gt;
민족사학의 정신과 목적은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개화&amp;lt;/span&amp;gt;와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교육구국&amp;lt;/span&amp;gt;으로 크게 두 가지 방향이 있다. 초기의 민족사학 설립 정신은 '''선진외국의 문화와 문물'''을 받아들여 나라를 개화하고 발전시키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었으나,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乙巳勒約)&amp;lt;ref&amp;gt;대한 제국 광무 9년(1905)에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기 위하여 강제적으로 맺은 조약. 고종 황제가 끝까지 재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인 무효의 조약이다.(표준국어대사전 정의)&amp;lt;/ref&amp;gt; 이후 '''교육 구국을 위한 인재 양성'''이란 민족적 희망에 기반하였다.&lt;br /&gt;
&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민족사학의 발전배경====&lt;br /&gt;
당시 개화파를 비롯한 다수 지식인은 나라를 진흥시키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함을 느끼고 있었다.&amp;lt;br/&amp;gt;&lt;br /&gt;
이와 같은 지식인들의 의식은 서재필이 『한국휘보(Korean Repository)』에 기고한 다음 글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amp;lt;br/&amp;gt;&lt;br /&gt;
{{Blockquote|정부는 국민의 실정을 알아야 하고 국민들은 정부의 목적을 알아야 한다. 정부와 국민 상호간의 이해를 갖도록 하기 위해서는 쌍방에 대한 교육뿐이다 … 교육 없이는 국민들이 정부의 좋은 의도를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교육 없이는 정부 관리들이 결코 좋은 법률을 만들지 못할 것이다.&lt;br /&gt;
|출처=서재필, 「오늘날 한국이 가장 필요로 하는 일」(What Korea needs most), 『한국휘보(Korean Repository)』, 1896.3.}}&amp;lt;br/&amp;gt;&lt;br /&gt;
&lt;br /&gt;
이러한 의식은 독립협회에서 발간한 『독립신문』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amp;lt;br/&amp;gt;&lt;br /&gt;
{{Blockquote|'''문명개화한 나라들에서들은 무론 남녀하고 학교에 가서 적어도 10년 동안에 각색 학문을 배운 후 비로소 세상에 나가''' … 조선 사람들은 겨우 배우는 것이 한문만 조금 배워 가지고 … 일본 같은 조그마한 나라가 싸움을 하여서 청국 병정 무찌르기를 풀 베는 것 같이 하고, 일본도 30년 전 같으면 나라 형세가 청국과 똑같았으니, 어찌 조그마한 나라가 청국 같은 큰 나라를 이기리오마는, 일본 사람들이 서양 각국이 부강한 곡절을 알고 곧 백성 교육하는 일을 힘써 … 당장에 적은 리(利)와 욕심을 내버리고 '''인민 교육하여 몇 해 후에는 조선도 남과 같이 되기를 바라노라'''&lt;br /&gt;
|출처=「논설」,『독립신문』1896년 4월 25일자.}}&amp;lt;br/&amp;gt;&lt;br /&gt;
위의 글들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이러한 지식인들의 자각이 민족사학 설립의 배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민족사학의 발전과정 ====&lt;br /&gt;
1800년대 후반부터 1910년 이전까지 주요 민족 주도로 설립된 교육기관의 설립 과정을 정리&amp;lt;ref&amp;gt;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민족독립운동사 국권수호운동Ⅱ Ⅳ. 국권수호를 위한 사회·문화운동 6. 사립학교의 구국운동 3) 민립학교 설립의 주체(https://db.history.go.kr/modern/level.do?levelId=hdsr_002_0010_0060_0030)의 데이터에 기반하여 자료 조사를 진행하였다. 자료조사를 통해 설립 연도가 일부 수정되었다.&amp;lt;/ref&amp;gt;하였다.&amp;lt;br/&amp;gt;&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xpvhRvJrqO8QmhwtXtUZhPRbrWskR7CqqsrToNpIPRE&amp;amp;font=Default&amp;amp;lang=ko&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amp;lt;br/&amp;gt;&lt;br /&gt;
이와 같이 1905년 이전에는 개화 및 신교육 도입 목적으로 1905년 이후에는 인재양성을 통한 교육구국을 목적으로 많은 교육기관이 설립되었다.&lt;br /&gt;
&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대표적 민족설립 교육기관====&lt;br /&gt;
아래의 표에서는 대표적인 민족설립 교육기관과 그 계승 현황을 정리하였다. &amp;lt;br/&amp;gt;&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hn:left;background:white;&amp;quot;&lt;br /&gt;
|+ [대표적 민족설립 교육 기관&amp;lt;ref&amp;gt;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민족독립운동사 국권수호운동Ⅱ Ⅳ. 국권수호를 위한 사회·문화운동 6. 사립학교의 구국운동 3) 민립학교 설립의 주체(https://db.history.go.kr/modern/level.do?levelId=hdsr_002_0010_0060_0030)의 데이터에 기반하여 자료 조사를 진행하였다. 자료조사를 통해 설립 연도 및 설립자가 일부 수정되었다.&amp;lt;/ref&amp;gt;]&lt;br /&gt;
! 교육기관명 || 설립일 || 설립자 || 계승&lt;br /&gt;
|-&lt;br /&gt;
|원산학교(元山學校) || 1883 || 덕원(德源)의 유지 || 원산소학교, 원산보통학교, 원산제일국민학교로 계승되며 1945년까지 지속됨&lt;br /&gt;
|-&lt;br /&gt;
|흥화학교(興化學校) || 1895. 11. 5. || 민영환(閔泳煥) || 1911년 폐교&lt;br /&gt;
|-&lt;br /&gt;
|중교의숙(中橋義塾) || 1896 || 민영기(閔泳綺) || 1906년 폐교&lt;br /&gt;
|-&lt;br /&gt;
|순성여학교(順成女學校) || 1898.12. || 찬양회(讚揚會) || 1905년 12월 31일 『대한매일신보』기사를 끝으로 신문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음&lt;br /&gt;
|-&lt;br /&gt;
|점진학교(漸進學校) || 1899 || 안창호(安昌浩) || .&lt;br /&gt;
|-&lt;br /&gt;
|낙연의숙(落淵義塾) || 1901 || 서광세(徐光世) || 1916년 폐교&lt;br /&gt;
|-&lt;br /&gt;
|한성법학교(漢城法學校) || 1905. 1. || 사회 유지 || 1905년 9월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가 법률학전문야학과를 신설하여 한성법학교 학생 20명을 인계받음 &amp;lt;ref&amp;gt; https://www.kunews.ac.kr/news/articleView.html?idxno=3765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양정의숙(養正義塾) || 1905. 2. 11. || 엄주익(嚴柱益) || 양정중학교(養正中學校)&lt;br /&gt;
|-&lt;br /&gt;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 1905. 4. 3. || 이용익(李容翊) || '''고려대학교(高麗大學校)'''&lt;br /&gt;
|-&lt;br /&gt;
|보창학교(普昌學校) || 1905. 5. || 이동휘(李東輝) || .&lt;br /&gt;
|-&lt;br /&gt;
|서전서숙(瑞甸書塾) || 1906 || 이상설(李相卨) || 1907년 폐교&lt;br /&gt;
|-&lt;br /&gt;
|진명여학교(進明女學校) || 1906. 4. ||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 진명여자고등학교(進明女子高等學校)&lt;br /&gt;
|-&lt;br /&gt;
|중동학교(中東學校) || 1906. 4. 2. || 신규식(申圭植) || 중동고등학교 (中東高等學校)&lt;br /&gt;
|-&lt;br /&gt;
|휘문의숙(徽文義塾) || 1906. 5. || 민영휘(閔泳徽) || 휘문고등학교(徽文髙等學校)&lt;br /&gt;
|-&lt;br /&gt;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 || 1906. 5. ||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 '''숙명여자대학교(淑明女子大學校)''', 숙명여자중학교(淑明女子中學校), 숙명여자고등학교(淑明女子高等學校)&lt;br /&gt;
|-&lt;br /&gt;
|양규의숙(養閨義塾) || 1906. 6. || 여자교육회(女子敎育會) || .&lt;br /&gt;
|-&lt;br /&gt;
|서우사범학교(西友師範學校) || 1907. 1. || 서우학회(西友學會) || 1908년에 서북협성학교(西北協成學校)로 개편됨&lt;br /&gt;
|-&lt;br /&gt;
|대성학교(大成學校) || 1907 || 안창호(安昌浩) || 1912년 폐교&lt;br /&gt;
|-&lt;br /&gt;
|협동학교(協東學校) || 1907 || 유인식(柳寅植)) || 1917년 폐교&lt;br /&gt;
|-&lt;br /&gt;
|소의학교(昭義學校) || 1907. 9. || 전경현(全景鉉), 민강(閔橿), 장경관(張敬寬) 등 || 동성고등학교 (東星高等學校)&lt;br /&gt;
|-&lt;br /&gt;
|장훈학교(長薰學校) || 1907. 11. 2. ||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 || 장훈고등학교 (長薰高等學校)&lt;br /&gt;
|-&lt;br /&gt;
|오산학교(五山學校) || 1907. 12. || 이승훈(李昇薰) || 오산고등학교 (五山高等學校)&lt;br /&gt;
|-&lt;br /&gt;
|기호학교(畿湖學校) || 1908. 6. 20. ||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 || 융희학교(隆熙學校)를 흡수하여 중앙중학교(中央中學校), 중앙고등학교(中央高等學校)로 발전함&lt;br /&gt;
|-&lt;br /&gt;
|양원여학교(養原女學校) || 1908. 6. || 여자보학원유지회(女子普學院維持會) || .&lt;br /&gt;
|-&lt;br /&gt;
|신명학당(新明學堂) || 1908. 2. || 김장호, 김홍식(金洪植) || 치문초등학교 (致文初等學校)&lt;br /&gt;
|-&lt;br /&gt;
|명동학교(明東學校) || 1908. 4. 27. || 김학연(金學淵) || 1925년 폐교&lt;br /&gt;
|-&lt;br /&gt;
|보인학교(輔仁學校) || 1908. 6. 8. || 보인학회(輔仁學會) || 보인고등학교(輔仁高等學校)&lt;br /&gt;
|-&lt;br /&gt;
|양산중학교(楊山中學校) || 1908. 10. || 김홍량(金鴻亮) ||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이상의 표에서 1910년 국권피탈 이전 설립된 민족설립 교육기관 중 적지 않은 수가 오늘날에도 현존하고 있는 중학교, 고등학교, 또는 대학교로 계승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10년 이후 많은 학교가 폐교 위기에 처한 것을 고려하였을 때, 이러한 계승은 민족설립 교육기관을 유지해 교육을 통해 나라를 구하고자 했던 당시 사람들의 투지와 열망에 대한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보성전문학교와 명신여학교====&lt;br /&gt;
1910년 이전까지 민족 주도로 설립된 교육 기관 중 주요하게 살펴보아야 할 기관으로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와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가 있다. 보성전문학교는 이용익(李容翊)이 고종의 허가 하에 설립하였고, 명신여학교는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의 지원으로 설립되었음을 고려할 때, 모두 황실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사립 교육기관으로 보기는 힘들다는 한계는 존재한다. 그러나, 1910년 이전에 설립된 학교가 폐교의 절차를 밟지 않고 이어져 오늘날까지 계승되었다는 사실이 가지는 의미는 적지 않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1910년 이후 많은 학교가 일제의 강압 아래 폐교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 두 학교의 경우 대부분의 학교가 중등교육기관으로 계승된 것과는 구분되어 '''고등교육기관으로 발전한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나아가, 보성전문학교 설립을 기점으로 '교육 구국'을 목적으로 한 민족 사학의 설립이 활성화되었다는 점과 명신여학교의 경우 민족이 설립한 많지 않은 여성 교육기관 중 하나였다는 점 역시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lt;br /&gt;
보성전문학교는 1905년 04월 03일 고종(高宗)의 재정적 후원을 받아 [[이용익李容翊]]에 의해 설립된 교육기관이다. &amp;lt;br/&amp;gt;&lt;br /&gt;
보성전문학교의 설립 배경은 설립자 이용익의 행보에서 엿볼 수 있다. 친로반일(親露反日)의 뜻 고수한 것과 조선의 중립 선언을 선언하게 한 것으로 인해 일본에 의해 납치된 이용익은 체류 중 일본의 '''근대교육기관 및 개화문물을 접한다'''. 이것이 그의 교육기관 설립의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이후 귀국할 때 '''다수의 도서와 인쇄기를 구매'''하여 가지고 온 점 역시 이러한 추측의 설득력을 높인다. &amp;lt;br/&amp;gt;&lt;br /&gt;
한편, 보성전문학교의 개교를 알리는 황성신문(皇城新聞)의 글에는 보성전문학교 설립이 그 당시에 가졌던 의미가 잘 드러나고 있다. &amp;lt;br/&amp;gt;&lt;br /&gt;
{{Blockquote|전문학교 창설. '''대한에 전문대학교는 아직 세워지지 못했다. 한성법학교(漢城法學校)가 세워졌으나 야학(夜學)이라 완전하지 못했는데, 박동(礴洞)에 신설한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는 위치가 전문대학 주간 학교로''' 대황제폐하께서 특별히 설립하신 바, 매월 수천원의 경비를 내탕전(內帑錢)으로 내려주고 도서관을 부설하여 각 전문 교과서 수천권을 새로 간행한다 한다. 그리고 신해영(申海永)·조제환(趙齊桓)·정영택(鄭永澤) 세 명에게 이상의 사무를 전담하도록 하여, 위 3명은 교육을 열심히 하여 황제의 뜻에 보답하기위해 더욱 극진하게 힘을 쓴다고 한다. 20여명의 교수는 일찍이 일본에 유학하여 졸업한 사람들을 임용하여 (중략) '''2개년 졸업기한이지만 인재를 빨리 양성하도록''' 황제의 뜻을 특별히 내리셨다하고, 오늘부터 개교한다고 한다.&lt;br /&gt;
|출처=『황성신문(皇城新聞)』 1905년 4월 1일자 2면. 현대어역: 고려대학교 도서관&amp;lt;ref&amp;gt;https://library.korea.ac.kr/datause/archiving/old-book-exhibition/release/?mod=document&amp;amp;uid=10653&amp;lt;/ref&amp;gt;}}&lt;br /&gt;
윗글에서 당시 대한제국에 중등교육기관은 존재했음에도 고등교육을 위한 기관은 야학의 형태로서만 존재하여 온전하지 못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당시 상황 속에서 이용익이 일본의 교육 현황을 접한 후 대한제국 고등교육기관의 필요성을 느껴 설립하려 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고등교육기관 설립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맞춰 등장한 학교라는 점에서 보성전문학교가 가지는 가치는 매우 크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1910년 이후 다른 학교와 마찬가지로 보성전문학교는 운영진 및 교장의 망명, 투옥과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운영난을 겪는 등 각종 수난을 겪는다. 이후 일제의 탄압 아래 격하되거나 교명을 바꾸고 학과 설립이 제한되는 등 여러 차례 존속의 고비를 넘긴다. 하지만 끊임없는 노력을 바탕으로 1921년 전문학교로 다시 승격되었으며 여러 위기를 거친 끝에 해방 후 고려대학교로 발족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lt;br /&gt;
명신여학교는 1906년 5월 22일 고종(高宗)의 후궁인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의 지원으로 왕실 별궁 용동궁에 설립된 교육기관이다. &amp;lt;br/&amp;gt;&lt;br /&gt;
순헌황귀비는 본디 교육, 특히 여성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명신여학교의 설립에 앞서 1906년 4월에 진명여학교(進明女學校)를, 1907년에 경영난에 처해 있던 양정의숙(養正義塾)을 도운 점에서 잘 드러난다. &amp;lt;br/&amp;gt;&lt;br /&gt;
한편, 당시 여성 교육 관련 배경은 다음과 같다. 앞서 기술된 바와 같이 1905년 을사늑약 전후로 교육구국이 일어나 전국 각지에서 민족사학이 설립되었으나 여성을 위한 교육기관은 부족한 실태였다. 당시 설립된 여성 교육기관으로는 이화학당, 정신여학교, 숭의학교 등이 있었으나 이는 모두 선교사, 즉 민족에 의해 설립된 학교가 아니었다.&amp;lt;ref&amp;gt;한희숙, 구한말 순헌황귀비 엄비의 생애와 활동, 아시아여성연구, 숙명여자대학교 아시아여성연구원, 제45집 2호, 2006&amp;lt;/ref&amp;gt;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여성 교육기관의 필요'''를 절감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 것은 순헌황귀비의 시대적 통찰력을 반영하는 부분이다. &amp;lt;br/&amp;gt;&lt;br /&gt;
위와 같은 순헌황귀비의 설립 목적은 대한매일신보의 글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amp;lt;br/&amp;gt;&lt;br /&gt;
{{Blockquote|황귀비 흥학:  황귀비 전하께오서 여자 교육이 없음을 크게 걱정하여 육군참장 엄주익씨 집(第)에 여학교를 설립하여 '''여자교육을 발달시키고자''' 하였다.  엄주익에게 학교 설립 일을 전담하게 하시니 '''대한여자의 교육이 앞으로 발달하기를''' 가히 볼 수 있을 지로다. &lt;br /&gt;
|출처=『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6년 4월 24일자&amp;lt;ref&amp;gt;한희숙, 구한말 순헌황귀비 엄비의 생애와 활동, 아시아여성연구, 숙명여자대학교 아시아여성연구원, 제45집 2호, 2006, 227쪽.&amp;lt;/ref&amp;gt;}}&lt;br /&gt;
광복 후 명신여학교는 숙명여자중학교(淑明女子中學校)와 숙명여자고등학교(淑明女子高等學校)로 이어졌다. 나아가, 여성 고등교육기관의 설립을 꿈꾼 교장 이정숙(李貞淑)의 뜻에 따라 1938년 숙명학원(淑明學園)에서 숙명여자전문학교를 설립하였고, 이것이 오늘날 숙명여자대학교(淑明女子大學校)로 계승되었다.&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선교사 설립 교육기관===&lt;br /&gt;
선교사들은 기독교 선교의 기반 구축을 위해 개화정책 추진 초기인 1880년대부터 고종의 각별한 관심과 지원 속에서 많은 학교를 설립하였다.  서울에 배재·이화·경신학교를 설립하였고, 기독교 선교금지정책이 이완되기 시작한 1890년대에는 지방도시로 그 범위를 넓혀 1894년 평양의 광성학교·숭덕학교·정의여학교, 1895년 서울의 정신여학교를 비롯하여 동래·인천·재령·목포·원산·개성·해주·공주·대구 등 전국 각지로 확대하였다.&lt;br /&gt;
&lt;br /&gt;
====[[연세대학교(延世大學校)]]====&lt;br /&gt;
&lt;br /&gt;
연희전문학교는 1915년 선교부연합위원회의 협의를 얻어서 북장로회 선교사인 언더우드가 조선기독교학교로 처음 설립하였다. 이후 1917년 연희전문학교로 발족하였다. 보성전문학교 이후 두 번째로 설립된 전문학교이다. 이후 3.1 운동등 다양한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1944년 일제가 경영권과 재산을 몰수하고 한국인 교수진들을 모두 추방했었다. 독립 후에는 연희대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대학교로 승격하였다.&lt;br /&gt;
&lt;br /&gt;
세브란스는 대한제국의 궁정어의였던 알렌에 의해 1885년에 설립된 제중원에서 시작하였고, 1886년부터 제중원 내 의학부를 두고 입학생을 받았다. 이후 병원장으로 취임한 선교사 에비슨이 1899년 조선 최초의 의학교인 제중원의학교를 설립하였다. 1904년 미국인 세브란스의 후원으로 세브란스 병원이 세워지며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로 개편하였다. 1906년에 간호부가 개설되었고 우리나라 최초의 간호사를 배출하였다. 세브란스와 연희전문학교 간의 병합은 1920년대에도 한차례 시도한 바 있었으나 무산되었고, 독립 후 1957년에 두 학교가 통합되어 '''연세대학교'''로 출범하였다.&lt;br /&gt;
&lt;br /&gt;
====[[배재학당]]====&lt;br /&gt;
&lt;br /&gt;
1885년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한국 최초의 근대식 사립학교로 중등과정을 담당했다. 1886년이 고종이 배재학당이라는 이름을 사하였고 미국인들의 후원을 받아 1887년에 제대로 된 건물을 세웠다. 영어교육을 중점적으로 행했으며 학생자조정책을 채택하여 가난한 학생들이 학교에서 일을 하며 수업료를 벌 수 있도록 하였다. 현재 기존의 건물은 2008년부터 배재학당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배재중학교, 배재고등학교, 배재대학교'''가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lt;br /&gt;
&lt;br /&gt;
====[[배화학당]]====&lt;br /&gt;
초,중등과정의 사립학교로 1898년 켐벨 선교사가 설립하였다. 처음엔 캐롤라이나학당으로 기독교전파와 여성교육을 목표로 세웠졌다. 1910년 배화학당으로 개칭하였다.1916년 1월 경성 누하동(지금의 서울 종로구 필운동)으로 교사를 이전하고, 1926년 12월 캠블기념관을 신축하였으며, 1938년 3월 배화고등여학교와 배화여자소학교로 분리,개편되었다. 일제의 신사참배요구를 거절한 기독교 학교 중 하나이다. 1940년대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선교사들도 학교를 떠나며 위기에 폐교 위기에 봉착했다. 학교가 경영난에 시달리자 일제는 학교의 운영권을 요구했으나, 당시 교사였던 이덕봉과 이만규가 독지가를 구하려 노력한 끝에 이민천이 춘천, 이천, 연기, 익산 등지에 있는 토지를 기부하여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독립 후 1951년 '''배화여중과 배화여고'''로 분리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김윤]]&lt;br /&gt;
&lt;br /&gt;
=='''민간 단체의 교육 운동'''==&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신민회(新民會)]]의 애국계몽운동===&lt;br /&gt;
&amp;lt;br/&amp;gt;&lt;br /&gt;
{{Blockquote| '''신민회 행동강령'''&lt;br /&gt;
1. 국민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사상 고취 &amp;lt;br /&amp;gt; 2. 동지를 발하고 단합하여 국민 운동 역량 축적 &amp;lt;br /&amp;gt; 3. 상공업 기관 건설로 국민의 부력(富力) 증진 &amp;lt;br /&amp;gt; 4. 교육 기관 설립으로 청소년 교육 진흥&lt;br /&gt;
|출처= 「헌기제501호, 「대한 신민회 취지서 및 동회 통용 장정 등 보고 건」, 1909년 3월 5일(국사편찬위원회, 『통감부문서』 6, 1991}}&lt;br /&gt;
&lt;br /&gt;
신민회(新民會)는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1907년에 [[안창호(安昌浩)]], [[양기탁(梁起鐸)]] 등의 주도로 결성된 항일 비밀결사&amp;lt;/span&amp;gt;이다. 위와 같은 신민회의 행동 강령을 바탕으로 신민회는 실력 양성을 통한 국권 회복을 주장하며, 교육, 언론 및 출판, 민족 산업 육성, 독립군 양성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lt;br /&gt;
&lt;br /&gt;
신민회는 실력 배양의 방법으로 교육 구국 운동을 두 가지 측면에서 전개하였다. 국민에게 국권회복을 위한 교육의 필요성을 계몽하여 학교설립을 고취하며 신민회도 학교를 설립하여 국권회복에 필요한 적합한 교육방침을 강구하여 민족 지도자를 양성한다는 것이다. 또한, 국외에서 독립군 기지를 창설하고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전쟁을 일으켜 국권을 회복한다는 것이다. &lt;br /&gt;
&lt;br /&gt;
신민회는 이를 위해 민중들이 설립한 학교에 대해 학교교육방침을 지도하였다. 또한, 중학교를 설립하고, 학교의 모범을 만들며 중학교에서 동시에 사범교육을 해 교사를 양성한다는 기준을 세우고 학교를 설립하였다. 당시 민간인이 자발적으로 기금을 갹출하여 설립한 학교는 대부분이 소학교였기 때문에, 신민회는 중학교를 설립하여 소학교 출신 청소년들이 더 양질의 교육을 통해 민족지도자로 발돋움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lt;br /&gt;
&lt;br /&gt;
신민회는 기본적으로 비밀결사이기 때문에 그들이 설립한 학교의 수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1907년부터 1909년 4월까지 민간인들에 의해 세운 학교가 3000여 개교에 달한다는 통계로 보아 신민회에서 세운 학교가 많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알려진 신민회가 설립한 학교는 다음과 같다.&lt;br /&gt;
&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hn:left;background:white;&amp;quot;&lt;br /&gt;
|+ [신민회가 설립한 학교]&lt;br /&gt;
! 학교명 || 설명 &lt;br /&gt;
|-&lt;br /&gt;
| '''대성학교'''|| [[안창호(安昌浩)]], 윤치호 평양에 설립. 신민회가 설립한 대표적인 민족 사학으로 입학 지원자가 500~600여 명이 되는 때도 존재. &lt;br /&gt;
|-&lt;br /&gt;
| '''오산학교'''|| 평안북도 정주군에 이승훈 설립. 김소월, 백석, 이중섭, 독립운동가 김홍일 중장 등을 배출. 현재 서울 오산고등학교로 계승됨&lt;br /&gt;
|-&lt;br /&gt;
| 점진학교|| 평안남도 강서 위치, [[안창호(安昌浩)]] 설립. 남녀공학을 실시한 최초의 소학교. &lt;br /&gt;
|-&lt;br /&gt;
| 보창학교 || 강화도 위치, 이동휘 설립&lt;br /&gt;
|-&lt;br /&gt;
| 신안학교 || 정주, 신민회 정주지회 회원 설립&lt;br /&gt;
|-&lt;br /&gt;
| 양실학교 || 의주, 신민회 의주/용천지회 회원 설립&lt;br /&gt;
|-&lt;br /&gt;
| 가명학교 ||  신민회 납청정지회 회원 설립&lt;br /&gt;
|-&lt;br /&gt;
| 신흥학교 || 선천, 중학교급 학교&lt;br /&gt;
|-&lt;br /&gt;
| 홍양학교 || 신민회 곽산지회 회원 &lt;br /&gt;
|-&lt;br /&gt;
| 명륜학교|| 함경남도 영흥읍에 있던 세 개 학교 통합, 이동휘 설립&lt;br /&gt;
|-&lt;br /&gt;
| 경성학교|| 함경북도 경성 위치&lt;br /&gt;
|-&lt;br /&gt;
| 양산학교|| 황해도 안악읍 향천자리, 김용제 설립, 신민회가 중학교로 개편&lt;br /&gt;
|-&lt;br /&gt;
| 오성학교 || 서울 위치, 이갑, 이종화 설립. 신민회 창건 후 각종학교인 서북협성학교로 개편&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신민회의 애국계몽은 학교 설립뿐만이 아니라 학회의 설립과 지도를 통해서도 추진되었다. 안악군면학회(安岳郡勉學會), 해서교육총회(海西敎育總會),평양청년권장회(平壤靑年勸?會), 연학회(練學會), 동제회(同濟會)등의 학회를 전국에 조직하는 데에 앞장섰다. 또한, 서우학회, 한북학회를 서북학회로 통합 재조직하는 등, 기존에 있던 학회의 통합과 재정비에도 이바지하였다. &lt;br /&gt;
&lt;br /&gt;
이와 같이 신민회의 교육계몽운동은 신민회가 1912년 105인 사건으로 해산될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그 이후에도 다른 독립운동단체에 영향을 미쳐 교육을 통한 민중 계몽으로 이루어지는 독립운동의 방향성을 제시하였다.&lt;br /&gt;
&lt;br /&gt;
[[분류:신다정]]&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농촌 계몽 운동===&lt;br /&gt;
&lt;br /&gt;
농촌 계몽 운동은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1920년대~1930년대 민족 운동과 관련한 청년 학생이나 지식층이 농민의 의식과 지식 등을 계몽하기 위해 농촌 사회에서 행한 사회 교육 운동&amp;lt;/span&amp;gt;을 의미한다. 농사일을 끝낸 후 강연회, 토론회, 야학 등의 형식으로 이루어졌으며 특히 농한기인 겨울에 많이 실시되었다. &lt;br /&gt;
&lt;br /&gt;
1920년에는 일제의 식민 지주 경영과 지주 착취로 인해 농민 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고, 이와 맞물려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이 결성되었다. 이때 사회주의 계열 청년 단체와 지식인들이 농촌으로 진출하여 농민 운동을 주도하였다. &lt;br /&gt;
민족주의 계열에서 주도한 농촌 운동은 문맹 퇴치와 생활 개선 등의 계몽적 활동이 중심이었다. 대표적으로 천도교 계열의 농촌 운동, 기독교 계열의 농촌 운동이 있다. 천도교는 1925년 조선농민사를 설립하여 농민 야학을 시행하고 전국적으로 농민에 대한 계몽 활동을 전개하였다. 기독교에서는 1926년 이후 학생 YMCA 농촌부를 중심으로 계몽 활동을 적극 추진하였다. &lt;br /&gt;
&lt;br /&gt;
1920년 후반부터 1930년대에는 언론사 또한 농촌 계몽 운동에 힘을 쏟았다. 대표적으로 1929년부터 1935년까지 이루어진 조선일보사의 문자 보급 운동과 1931년부터 1934년까지 이루어진 동아일보사의 [[브나로드 운동]]이 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이런 농촌 계몽 운동은 1930년대 들어 강화된 조선총독부의 조선어 사용 금지 정책과 지방 농촌의 몰락으로 인해 쇠퇴하였다. 또한, 농촌의 몰락 책임을 수탈 때문이 아닌 농민의 게으름과 무지에 있다며 총독부의 주도로 농촌진흥운동을 진행하며 민간 및 언론 단체의 농촌 계몽 운동을 탄압하였다. 그러나 이런 탄압 속에서도 농촌 계몽 운동은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이러한 민간 교육 활동 및 정책은 해방 이후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문맹 퇴치 운동으로 이어졌다.&lt;br /&gt;
&lt;br /&gt;
[[분류:신다정]]&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민립 대학 설립 운동===&lt;br /&gt;
&lt;br /&gt;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은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1920년대 이루어진 민족 사학 설립 운동&amp;lt;/span&amp;gt;이다.&lt;br /&gt;
&lt;br /&gt;
1920년대 초 식민지 조선에서는 민중의 자발적인 참여하에 조선인을 위한 대학을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등장하였다. 민립 대학 설립에 대한 논의는 1920년 6월 20일 한규설, 이상재, 윤치소 등 91년의 발기로 조선교육회 발기회가 개최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가 학회령을 토대로 1922년 1월 24일까지 인가를 내주지 않아 민립대학 설립에 대한 결의를 실행시키지 못했다. &lt;br /&gt;
&lt;br /&gt;
동아일보에 기고된 사설을 통해 당시의 독립을 위한 교육 계몽의 필요성과, 관립 대학과 다르게 민립 대학의 설립 필요성에 관해 확인할 수 있다. &lt;br /&gt;
&lt;br /&gt;
{{Blockquote|운명을 어떻게 개척할까. 정치냐 외교냐 산업이냐. 물론 이러한 일들 모두 다 필요하다. 그러나 그 기초가 되고 요건이 되며 가장 급무가 되고 가장 선결의 필요가 있으며 가장 힘 있고 '''가장 필요한 수단은 교육이 아니면 할 수 없다.''' &amp;lt;br /&amp;gt; … 물론 관립대학도 조만간 개교될 것이기에 대학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학문 발전의 장래는 결코 1개의 대학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요, 또한 '''그처럼 중대한 사업을 우리 민중이 직접으로 영위하는 것은 차라리 우리의 의무라 할 수 있다.''' &amp;lt;br /&amp;gt;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에 느낀 바 있어 감히 만천하 동포에게 향하여 민립대학의 설립을 제창하니 자매형제는 와서 돕고 나아가 이루어라.'''&lt;br /&gt;
|출처= 「開會된 民大總會」, 『동아일보』, 1923년 3월 30일자.}}&lt;br /&gt;
&lt;br /&gt;
이렇게 고양된 민립 대학 설립을 통한 민족 교육에 대한 필요성을 바탕으로, 1922년 1월 이상재, 이승훈, 윤치호, 김성수, 송진우 등이 조선민립대학기성준비회를 정식으로 결성하였다. 이어 1923년 3월 29일 발기인 1170명 중 462명이 참석한 가운데 3일간 총회를 개최하였다. &lt;br /&gt;
&lt;br /&gt;
총회에서는 ＇민립대학발기취지서＇를 채택하고 대학 설립 계획서를 확정하였다. 계획서에 따르면 3개년 계획으로 자본금 1000만원을 갹출하는데, 제 1차 연도에는 대지 5만 평을 구입하여 교실 10동, 대강당 1동을 건축하고, 법과/경제과/문과/이과의 4개 대학 및 예과를 설치하며, 제2차 연도에는 300만원으로 공과/이과/기타 학과를 증설하고, 제3차 연도에는 300만원으로 의과/농과를 설치한다는 것이다. 또 중앙집행위원회를 구성하고 지방에 지방부를 두기로 결의하였다. 별도로 지방순회선정위원 13평을 선정하고 파견하였다. 이와 같은 노력을 토대로 1923년 말까지 전국 100여 개소와 해외의 만주 간도, 봉천, 미국 하와이 등지에도 지방부가 조직되었다. &lt;br /&gt;
&lt;br /&gt;
기성회는 ＇한민족 1000만 한 사람 1원씩＇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기금 모금에 나섰다. 이런 모금 활동에 민족 교육을 성원하는 마음들이 모였는데, 대표적으로 전라남북도에서만 15만원이 모금되었으며 경기도 안성의 이정도는 1년 동안 매일 아침 밥짓는 쌀에서 식구 수 대로 한 숟가락씩 모아 판 돈 19원을 기부하는 등 일반 민간에서의 성원도 뜨거웠다. &lt;br /&gt;
&lt;br /&gt;
이와 같은 열기에 일제는 이를 교육 운동이 아니라 정치 운동이라고 판단하고 탄압하였다. ＇조선교육령＇을 개정하여 관립 경성제국대학의 설립을 서두르고 민립대학과 관련 있는 인사들에 대한 탄압과 기금 갹출 방해 공작을 전개하였다. 민립대학기성회 인사들을 민족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구실로 철저히 감시하고, 기금 모집을 위해 박차를 가하던 인사들의 지방 강연을 배일사상을 고취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강연 중지를 명하고 청중을 해산시켰다. &lt;br /&gt;
&lt;br /&gt;
이러한 조선총독부의 탄압이 민립대학 설립운동의 실패의 주된 원인이 되었다. 1923년 여름 수재, 9월 일본 관동 대지진으로 인한 경제 공황, 1924년 한재와 7월 전국적 수재로 인한 농촌 경제 파탄 등 자연적인 여건도 민립대학 설립운동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그러나 3.1운동 이후 전 민족이 민족 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조직체를 형성하여 교육을 통한 자주독립이라는 하나의 목표에서 단결을 보였다. 이는 이후의 민족운동 양상에서 조직적인 단체 결성의 표본이 되었다.&lt;br /&gt;
&lt;br /&gt;
[[분류:신다정]]&lt;br /&gt;
&lt;br /&gt;
=='''군사 교육'''==&lt;br /&gt;
&lt;br /&gt;
독립운동사에서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군사 교육도 꾸준히 이어져왔다. 수많은 독립열사들은 무관학교 설립을 위한 활발한 활동을 이어왔다. 독립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역량은 군사였기 때문에, 군사교육은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였으며 이에 따라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에서도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노력이 나타났다.&lt;br /&gt;
&lt;br /&gt;
[[분류:이민희]]&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lt;br /&gt;
신흥무관학교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위해 설립된 군사학교로, 독립군 양성과 무장 투쟁 기반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911년 중국 만주 서간도 지역(현재의 지린성 류허현)에서 이회영, 이시영 등 독립운동가들이 설립했으며, 군사 지도자를 양성하고 실질적인 무장 독립운동을 준비하는 데 목적을 두었습니다. &lt;br /&gt;
&lt;br /&gt;
교육 내용은 사격, 전술, 지형 분석 등 실전 중심의 군사훈련과 함께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역사 및 애국사상 교육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졸업생들은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전투 같은 독립전쟁에서 활약하며 독립운동의 주축이 되었고, 김좌진과 이범석 같은 지도자를 배출했습니다. &lt;br /&gt;
&lt;br /&gt;
1920년대에 들어 일본의 탄압이 강화되면서 학교 운영이 점차 어려워졌고, 졸업생들이 각종 독립운동 조직으로 흩어지면서 신흥무관학교는 군사훈련소 형태로 전환되다가 결국 해체되었습니다. &lt;br /&gt;
&lt;br /&gt;
졸업생들은 만주 지역에서 서로군정서, [[북로군정서]]에서 핵심 간부로 활약, [[대한독립군]], 통의부의용군, 정의부, 신민부, 국민부 등에서 활동하였고,중국 본토에서는 1919년 11월 길림에서 의열단 결성,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에서 독립운동 전개했습니다.&lt;br /&gt;
&lt;br /&gt;
신흥무관학교는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군사교육 기관으로 평가받습니다. 이 학교는 독립군의 전투력을 강화하고, 독립운동의 실질적 기반을 마련했으며, 한국 독립운동의 전환점이 된 여러 전투에서 큰 공헌을 했습니다.&lt;br /&gt;
&lt;br /&gt;
[[분류:최용빈]]&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조선혁명간부학교]]===&lt;br /&gt;
&lt;br /&gt;
1919년 조직된 무장독립운동단체 의열단은 중국국민당과의 합작을 통해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실질적인 군사 교육 기관'''&amp;lt;/span&amp;gt;을 설립하고자 노력했다. 이에 따라 [[장제스]]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의열단&amp;lt;ref&amp;gt; 급진적인 항일 투쟁을 목적으로 1919년 11월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로, 김원봉(金元鳳)이 단장을 맡았다. &amp;lt;/ref&amp;gt;의 단장인 김원봉이 1932년 중국 난징에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설립하였다. 공식 명칭은 사실 조선혁명간부학교가 아닌, ''‘중국국민당 군사위원회 간부 훈련반 제6대’''로, 국민당의 단기간부훈련소 신설반인 것처럼 위장했다. &lt;br /&gt;
&lt;br /&gt;
&lt;br /&gt;
학교는 일본과 중국의 외교관계를 고려해 학교 운영 사실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설립 초기에는 중국 외교부와 육군참모본부, 심지어 군사위원회 판공청 당사자들조차 그 존재를 모를 정도였다. 만 3년간 운영된 조선혁명간부학교는 3기에 걸쳐 총 125명의 인재를 배출했다. 국민당은 그동안 매월 경상비 2,000~3,000원·수시 필요경비 1,000~1만 원·기타 운영비 400~1,000원 등 각종 운영자금 전액과 화기·탄약·피복 등을 지원했다. 학생들은 군사학뿐 아니라 별도 신설된 정치학, 자연과학을 포함해 경제학·사회학·철학·혁명학·물리학·화학·지리학까지 다양한 학문을 공부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혁명간부학교의 졸업생들은 이후 민족혁명당의 항일투쟁체계에 편입되었으며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대]]의 핵심 세력으로 성장하였고, 일부는 화북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에 가담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단체문서한국광복군.jpg|섬네일|가운데|''&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한국 광복군의 모습&amp;lt;/div&amp;gt;'']] &lt;br /&gt;
[[파일:조선의용대김원봉.jpg|섬네일|가운데|''&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조선의용대 모습 &amp;lt;/div&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amp;lt;font color=&amp;quot;#8c8c8c&amp;quot;&amp;gt;조선의용대 깃발 가운데 있는 인물이 약산 김원봉이다.&amp;lt;/font&amp;gt;''&amp;lt;ref&amp;gt;김삼웅, &amp;quot;최후까지 총을 든 조선의용대와 김원봉&amp;quot;, 오마이뉴스, 2024.02.06.,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999602 (검색일:2024년 12월 4일)&amp;lt;/ref&amp;gt;&amp;lt;/div&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이민희]]&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한인소년병학교]]===&lt;br /&gt;
&lt;br /&gt;
한인소년병학교는 장기적인 독립 투쟁을 대비하여 군사 교육을 받은 장교를 양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박용만에 의해 설립되었다. 한인소년병학교는 1909년 6월에 세워진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최초의 국외 설립 군사학교''&amp;lt;/span&amp;gt;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으며, 각지의 군사운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lt;br /&gt;
&lt;br /&gt;
&lt;br /&gt;
한인소년병학교는 미국의 헤이스팅스(Hastins) 대학과 교섭하여 운영되었으며, 네브라스카 주에서 설립되었으나 교섭에 따라 헤이스팅스로 이전하여 한인 유학생의 활발한 참여를 이끌어냈다. 헤이스팅스 대학은 건물 한 동과 전장을 지원하여, [[둔전병제]]식 훈련을 실시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헤이스팅스대학.png|섬네일|가운데|''&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헤이스팅스 대학의 모습 &amp;lt;/div&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amp;lt;font color=&amp;quot;#8c8c8c&amp;quot;&amp;gt;한인소년병학교 학생들이 훈련했던 헤이스팅스 대학의 사진이다.&amp;lt;/font&amp;gt;''&amp;lt;/div&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ftzi6pFWzNc?si=iGbjmKk9yPuAn_Ub&amp;quot; title=&amp;quot;YouTube video player&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div&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다음의 영상에서 한인소년병학교가 있었던 헤이스팅스 대학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다.'' &amp;lt;/div&amp;gt;&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lt;br /&gt;
&lt;br /&gt;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는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한 박용만이 미국의 하와이에도 같은 군사 훈련 단체를 설립하고자 하여 1914년 4월 15일 설립되었다. 당시 학도 수는 200여명으로 군단장 역시 박용만이 맡았다. &lt;br /&gt;
&lt;br /&gt;
&lt;br /&gt;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는 [[한인소년병학교]]를 계승하여 [[둔전병제]]식 훈련을 실시하였고, 군영이 호놀룰루 시의 동북 쪽 큰 산을 넘어 해안과 아후이마누 강을 낀 계곡에 위치하여 ''&amp;quot;산 넘어 아희들&amp;quot;''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lt;br /&gt;
하와이에서 군단과 사관학교를 설치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으나, 1916년을 고비로 점차 쇠퇴하여 1917년 경 해체되었고, 지역으로 흩어져 사실상 폐교되었다.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는 제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미일(美日) 간 우호관계가 지속되면서 국민군단의 혁명적이고 군사적인 성격이 하와이 내에서 우호적인 반응을 얻지 못하였고, 이외에도 하와이 내 농장의 불경기로 수입이 급감하면서 재정 조달이 어려웠으며 1915년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의 실권이 이승만 측에 넘어가 박용만의 활동 범위가 위축된 점 등으로 인해 폐교되었다고 추측되고 있다.&lt;br /&gt;
&lt;br /&gt;
[[분류: 이민희]]&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숭무학교(崇武學校)]]===&lt;br /&gt;
숭무학교는 1910년대 멕시코로 이주한 한인들이 일제강점기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한 군사학교입니다. 멕시코에 이주한 한인들은 고된 노동 속에서도 민족 독립의 열망을 잃지 않고 독립운동을 조직적으로 지원하고자 노력했습니다. 1915년 멕시코 유카탄주 메리다 지역에서 설립된 숭무학교는 독립군 양성을 목표로, 체계적인 군사훈련과 애국 사상 교육을 실시했습니다.&lt;br /&gt;
&lt;br /&gt;
이 학교는 멕시코 한인 사회의 독립운동 기반을 강화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특히 숭무학교는 한인들의 단결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멀리 해외에서조차 독립운동을 지속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큽니다. 이러한 활동은 멕시코뿐 아니라 미주 지역의 다른 한인 독립운동 단체에도 영향을 주어 독립운동의 글로벌 네트워크 형성에 기여했습니다.&lt;br /&gt;
&lt;br /&gt;
숭무학교는 해외 독립운동의 독특한 사례로, 한인 이민사와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lt;br /&gt;
&lt;br /&gt;
[[분류:최용빈]]&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독립군으로의 발전===&lt;br /&gt;
&lt;br /&gt;
군사교육을 위해 설립된 다양한 무관학교를 기점으로, 졸업생들은 각기 다른 곳에서 독립군으로 발전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의 경우, 졸업생들은 만주 지역에서 서로군정서, 북로군정서에서 핵심 간부로 활약했을 뿐 아니라, 대한독립군,통의부의용군, 정의부, 신민부, 국민부 등에서 활동하였다. 또한, 중국 본토의 경우에서는 1919년 11월 길림에서 의열단을 결성하기도 하고, 임시정부 산하의 광복군인 한국광복군의 일원으로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졸업한 졸업생들도 독립군으로서 활약하였다. 이들은 민족혁명당의 항일투쟁체계에 편입되었는데, 대표적으로 임시정부 산하의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대의 핵심 세력으로 성장했고, 일부는 화북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에 가담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한인소년병학교]]와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 숭무학교를 졸업한 졸업생들도 독립군으로 발전하였으나, 구체적으로 어떤 기관으로 발전하였는지는 크게 알려진 바가 없다. &lt;br /&gt;
&lt;br /&gt;
[[숭무학교(崇武學校)]]는 일부 학생들은 멕시코 혁명에 참여하기 위해 군에 입대하였다.  일부 설립자들은 과테말라 혁명에 참여하려 했으나 실패로 끝났다.&lt;br /&gt;
&lt;br /&gt;
[[분류: 이민희]]&lt;br /&gt;
&lt;br /&gt;
==데이터 시각화==&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마인드맵===&lt;br /&gt;
[[파일:교육구국운동_노드_마인드맵.png|500픽셀]]&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온톨로지===&lt;br /&gt;
인물의 경우 관련 공훈전자사료관,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인명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의 관련 링크를 삽입하여 추가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하였다.&lt;br /&gt;
{{NetworkGraph | title=교육구국운동.lst}}&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콘텐츠 구조===&lt;br /&gt;
====클래스(Class)====&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width:100%;&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0%&amp;quot;| 클래스|| style=&amp;quot;width:10%&amp;quot;|모양|| style=&amp;quot;width:20%&amp;quot;|내용 ||노드 &lt;br /&gt;
|-&lt;br /&gt;
|인물 ||인물의 사진 || 독립운동사에서 교육 운동에 이바지하였던 인물을 포함한 다양한 독립운동가들을 인물로서 클래스로 설정했다. || [[이동휘]] '''[[안창호(安昌浩)]]''' [[김원봉]] '''[[장제스]]''' 박용만 이갑성 스코필드 유기준 [[주시경]] [[지청천]] [[여운형]] 차미리사 김명시 남궁억 이동녕 이용익 김성수 신해영 [[강기덕]] 손병희 [[방정환]] 이종호 윤익선 염온동 주익 이세영 고종 순헌황귀비 박자혜 신채호 김종진 이정숙 이회영 김구 이석영 이상룡 윤기섭 이근영 한성순 양귀선 조병하 서문경 윤을희 이시영 박선봉 조금옥 '''[[양기탁(梁起鐸)]]'''&lt;br /&gt;
|-&lt;br /&gt;
|기관 || 빨간색 상자|| 부지를 두고 설치하여 활동했던 조직을 기관으로 설정했다. ||연희전문학교 세브란스 배재학당 배화학당 보성전문학교 명신여학교 '''[[한인소년병학교]]''' 대조선국민군단사관학교 '''[[조선혁명간부학교]]''' 신흥무관학교 숭무학교 신흥강습소 동아일보&lt;br /&gt;
|-&lt;br /&gt;
|단체 || 파란색 원 ||기관보다 넓은 의미로서, 같은 뜻을 가지고 함께 활동했던 조직체를 단체로 설정했다. || [[신민회(新民會)]] 협성회독립협회 '''[[한국광복군]]''' '''[[조선의용대]]''' 조선의용군 화북조선독립동맹 대한민국임시정부 간우회 조선어학회 대한인국민회&lt;br /&gt;
|-&lt;br /&gt;
|지역 || 초록색 타원|| 각 기관과 단체가 위치하거나 기관이나 단체, 인물이 활동했던 곳을 지역으로서 클래스를 설정했다. || 미국, 한반도, 난징, 멕시코, 캐나다, 상해, 만주, 중국&lt;br /&gt;
|-&lt;br /&gt;
|활동_및_사건 || 분홍색 타원 ||각 기관이나 단체, 인물의 행동 및 사건을 묶어 활동_및_사건의 클래스를 설정했다. || '''[[브나로드 운동]]''', 민립대학 설립 운동, 3.1운동, 6.10 학생 만세운동, 1920년 3.1 학생 운동, 서울 지역 학생 독립운동&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신다정]]&lt;br /&gt;
&lt;br /&gt;
====관계성(Relation)====&lt;br /&gt;
&lt;br /&gt;
'''인물 중심 관계성 설정''' &lt;br /&gt;
* '''설립했다''' 인물 → 기관, 단체 : 기관 또는 단체의 설립에 기여함을 설명하는 relation이다. &lt;br /&gt;
* '''지원했다''' 인물 → 기관, 단체, 활동 및 사건 : 단체, 기관, 활동 및 사건을 직접적으로 주도한 것은 아니나 보조적으로 지원했음을 설명하는 relation이다. 단체의 활동이나 기관의 설립 및 활동, 활동 및 사건의 전개의 지원을 모두 포괄하는 설명이다. &lt;br /&gt;
* '''출신이다''' 인물 → 기관, 단체, 지역 : 인물이 기관, 단체, 나라의 출신임을 나타내는 relation이다. 지역의 경우, 해당 인물의 국적을 의미하며 외국인의 경우에만 해당 relation을 사용해 국적을 나타냈다. &lt;br /&gt;
* '''활동했다''' 인물 → 활동 및 사건 : 인물이 특정 활동 및 사건에 주도적으로 활동했음을 나타내는 relation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기관 중심 관계성 설정'''&lt;br /&gt;
* '''소속이다''' 기관, 단체 → 인물 : 인물이 기관의 소속임을 나타내는 relation이다. 기관의 경우 교육기관을 주로 다루기 때문에, 교육기관에 재학하였던 경우에는 '출신이다.' relation을 사용하였고 교직원 등으로 재직한 경우에는 해당 relation을 사용하여 구분하였다. &lt;br /&gt;
* '''위치하다''' 기관→지역 : 기관이 특정 지역에 위치하였음을 나타내는 relation이다. 위치를 옮긴 기관의 경우 위치했던 지역에 모두 해당 relation을 사용하여 연결했다. &lt;br /&gt;
* '''발전했다''' 기관, 단체 → 기관, 단체 : 특정 기관 및 단체가 다른 기관 및 단체로 발전함을 설명하는 relation이다.  &lt;br /&gt;
* '''계승했다''' 기관, 단체 → 기관, 단체 : 기관 및 단체가 다른 기관 및 단체로 계승함을 설명하는 relation이다. 계승한 쪽을 종속 노드로 설정하였으나, 화살표 방향을 inverse로 설정해 '발전했다.' relation과 차이를 두었다.&lt;br /&gt;
&lt;br /&gt;
====온톨로지 기여====&lt;br /&gt;
[[김윤]]&amp;lt;br/&amp;gt;&lt;br /&gt;
[[신다정]]&amp;lt;br/&amp;gt;&lt;br /&gt;
[[이민희]]&amp;lt;br/&amp;gt;: 군사교육 중 조선혁명간부학교, 한인소년병학교,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 관련 노드 및 관계성 정리, 인물 사진 삽입&lt;br /&gt;
&amp;lt;br/&amp;gt;&lt;br /&gt;
[[최용빈]]&amp;lt;br/&amp;gt;&lt;br /&gt;
[[헤르미온느]]: 민족사학 관련 노드 및 관계성 정리, 인물 사진 삽입, 노드 색 및 모양 지정, 인물 하이퍼링크&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교육기관 지도&amp;lt;ref&amp;gt;가급적 최초 설립 위치를 기준으로 작성하였지만 초기 설립 시 다른 학교의 교사에 있다 교사를 이전한 경우 해당 위치로 표기함.&amp;lt;/ref&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src=&amp;quot;https://www.google.com/maps/d/embed?mid=1cI0D_B0oG-xrdk5kcPVCnLJ2hJpOJZw&amp;amp;ehbc=2E312F&amp;quot; width=&amp;quot;640&amp;quot; height=&amp;quot;480&amp;quot;&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기타==&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참고문헌===&lt;br /&gt;
1. 민족사학 발전과정 연대기 설명 내용&lt;br /&gt;
*「원산학사 (元山學舍)」,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0700, 접속일: 2024. 12. 9.&lt;br /&gt;
*「흥화학교(興化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6074, 접속일: 2024. 12. 9.&lt;br /&gt;
*「중교의숙(中橋義塾)」,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3699, 접속일: 2024. 12. 9.&lt;br /&gt;
*「순성학교 (順成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1901, 접속일: 2024. 12. 9.&lt;br /&gt;
*「점진학교(漸進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9857, 접속일: 2024. 12. 9.&lt;br /&gt;
*「낙연의숙(落淵義塾)」,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1639, 접속일: 2024. 12. 9.&lt;br /&gt;
&lt;br /&gt;
*「한성법학교(漢城法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426, 접속일: 2024. 12. 9.&lt;br /&gt;
&lt;br /&gt;
*「양정고등학교 (養正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731, 접속일: 2024. 12. 9.&lt;br /&gt;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3433, 접속일: 2024. 12. 9.&lt;br /&gt;
*「보창학교(普昌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3546, 접속일: 2024. 12. 9.&lt;br /&gt;
*「서전서숙 (瑞甸書塾)」,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8159, 접속일: 2024. 12. 9.&lt;br /&gt;
*「진명여자고등학교 (進明女子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4673, 접속일: 2024. 12. 9.&lt;br /&gt;
*「중동고등학교 (中東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3729, 접속일: 2024. 12. 9.&lt;br /&gt;
*「휘문고등학교 (徽文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5832, 접속일: 2024. 12. 9.&lt;br /&gt;
*「숙명여자대학교 (淑明女子大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1800, 접속일: 2024. 12. 9.&lt;br /&gt;
*「숙명여자고등학교 (淑明女子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1799, 접속일: 2024. 12. 9.&lt;br /&gt;
*「양규의숙(養閨義塾)」,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426, 접속일: 2024. 12. 9.&lt;br /&gt;
*「서북협성학교 (西北協成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7788, 접속일: 2024. 12. 9.&lt;br /&gt;
*「사범학교 (師範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5642, 접속일: 2024. 12. 9.&lt;br /&gt;
*「대성학교(大成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4519, 접속일: 2024. 12. 9.&lt;br /&gt;
*「협동학교(協東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3491, 접속일: 2024. 12. 9.&lt;br /&gt;
*「동성고등학교 (東星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6589, 접속일: 2024. 12. 9.&lt;br /&gt;
*「장훈고등학교 (長薰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8403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8403, 접속일: 2024. 12. 9.&lt;br /&gt;
*「오산고등학교 (五山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8302, 접속일: 2024. 12. 9.&lt;br /&gt;
*「치문초등학교 (致文初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8358, 접속일: 2024. 12. 9.&lt;br /&gt;
*「명동학교(明東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8242, 접속일: 2024. 12. 9.&lt;br /&gt;
*「양원여학교(養原女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687, 접속일: 2024. 12. 9.&lt;br /&gt;
*「보인학교(輔仁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426, 접속일: 2024. 12. 9.&lt;br /&gt;
*「기호학교(畿湖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426, 접속일: 2024. 12. 9.&lt;br /&gt;
*「양산중학교(楊山中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426, 접속일: 2024. 12. 9.&lt;br /&gt;
*「서북협성학교(西北協成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426, 접속일: 2024. 12. 9.&lt;br /&gt;
&lt;br /&gt;
2. 민간단체의 교육 구국 운동&lt;br /&gt;
* 한관일. &amp;quot;한국 개화기 신민회의 교육구국 사상.&amp;quot; 교육과학연구 14.- (2000): 1-32.&lt;br /&gt;
* [출처: 민립대학설립운동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lt;br /&gt;
[[분류:독립운동사의 근간, 교육구국운동(敎育救國運動)]]&lt;/div&gt;</summary>
		<author><name>Matnyeom</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8F%85%EB%A6%BD%EC%9A%B4%EB%8F%99%EC%82%AC%EC%9D%98_%EA%B7%BC%EA%B0%84,_%EA%B5%90%EC%9C%A1%EA%B5%AC%EA%B5%AD%EC%9A%B4%EB%8F%99(%E6%95%8E%E8%82%B2%E6%95%91%E5%9C%8B%E9%81%8B%E5%8B%95)&amp;diff=52194</id>
		<title>독립운동사의 근간, 교육구국운동(敎育救國運動)</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8F%85%EB%A6%BD%EC%9A%B4%EB%8F%99%EC%82%AC%EC%9D%98_%EA%B7%BC%EA%B0%84,_%EA%B5%90%EC%9C%A1%EA%B5%AC%EA%B5%AD%EC%9A%B4%EB%8F%99(%E6%95%8E%E8%82%B2%E6%95%91%E5%9C%8B%E9%81%8B%E5%8B%95)&amp;diff=52194"/>
		<updated>2024-12-20T10:57:2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Matnyeom: /* 기획의도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개요==&lt;br /&gt;
[[파일:교육구국운동 표지.png|800px|가운데]]&lt;br /&gt;
&lt;br /&gt;
[[분류:신다정]]&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   text-align:center;&amp;quot;&amp;gt;기획의도===&lt;br /&gt;
&lt;br /&gt;
 조선의 독립운동사는 근대교육을 위한 노력과 함께 전개되어 왔다. 교육 운동은 독립 운동의 일환으로서 민중을 계몽하기도 하고, 여성 교육이 발전하여 개화 사상이 유입되기도 했으며, 가장 중요하게도 군사 교육을 통해 민족이 싸울 힘을 기르기도 했다. 우리 민족은 당면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기 위해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고, 배움에 대한 열정으로 일제강점기의 어둠을 헤쳐나갈 수 있었다. 학생들이 독립운동을 생각했을 때 교육을 가장 먼저 떠올리지는 않는 듯하다. 다만, 교육은 독립운동사의 핵심적인 부분을 뒷받침하는 지지대였다. 따라서, '''''우리가 잘 몰랐던 독립운동사에서의 다양한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을 위키 페이지로 만들어 이들의 스토리를 전달''''' 하고자 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이민희]]&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 text-align:center;&amp;quot;&amp;gt;팀원===&lt;br /&gt;
2023130036 김윤&lt;br /&gt;
2023131227 최용빈&lt;br /&gt;
2023131540 정혜나&lt;br /&gt;
2024130814 이민희&lt;br /&gt;
2024130911 신다정&lt;br /&gt;
&lt;br /&gt;
=='''교육구국운동(敎育救國運動)'''==&lt;br /&gt;
한국사에 있어서 개화기는 근대화를 추진하는 시기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개화기 교육은 종래 유학 경전 중심의 교육에서 탈피하여 신교육을 시작하는 전환기로 교육사적 의미가 있는 중요한 시기이다. 한국개화기 근대교육의 발전과정은 1880년대에서 1890년대까지 짧은 기간에 많은 변화와 개혁을 거듭하는 시기이다. 국가적으로 열강의 침략을 극복하고 신문화를 받아들여 개명하는 변혁기로 신교육 정착시키는 동시에 국권회복을 위한 교육구국운동을 통하여 민족독립을 전개하는 시기이다. &lt;br /&gt;
&lt;br /&gt;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 이후 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고 일본 통감부가 설치되어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 시기의 개화파를 계승한 애국계몽사상가들은 국권회복을 위해서는 자강지술을 고취하고, 실력을 배양하는 것이 선결과제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이것을 위해 청소년 교육, 민족산업의 육성, 각종 단체에 대한 단결 그리고 신교육을 위한 학교설립 등 광범위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를 교율(敎育)을 통해 나라를 구한다(救國)는 의미의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교육구국운동'''&amp;lt;/span&amp;gt;이라고 칭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신다정]] &lt;br /&gt;
&lt;br /&gt;
==교육기관 설립==&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민족설립 교육기관===&lt;br /&gt;
====민족사학의 의미 ====&lt;br /&gt;
'''1. 민족사학의 정의:''' 우리 민족이 설립한 교육 기관&amp;lt;br/&amp;gt;&lt;br /&gt;
본 위키 페이지에서는 민족사학(民族私學)을 '''외세나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교육기관과 구분되는 것'''으로서, 교육구국운동의 일환으로 일제강점기 전후에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우리 민족이 개인이나 사법인으로서 설립하여 경영하는 학교&amp;lt;/span&amp;gt;로 정의한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2. 민족사학의 정신 및 목적:''' 개화와 교육구국&amp;lt;br/&amp;gt;&lt;br /&gt;
민족사학의 정신과 목적은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개화&amp;lt;/span&amp;gt;와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교육구국&amp;lt;/span&amp;gt;으로 크게 두 가지 방향이 있다. 초기의 민족사학 설립 정신은 '''선진외국의 문화와 문물'''을 받아들여 나라를 개화하고 발전시키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었으나,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乙巳勒約)&amp;lt;ref&amp;gt;대한 제국 광무 9년(1905)에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기 위하여 강제적으로 맺은 조약. 고종 황제가 끝까지 재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인 무효의 조약이다.(표준국어대사전 정의)&amp;lt;/ref&amp;gt; 이후 '''교육 구국을 위한 인재 양성'''이란 민족적 희망에 기반하였다.&lt;br /&gt;
&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민족사학의 발전배경====&lt;br /&gt;
당시 개화파를 비롯한 다수 지식인은 나라를 진흥시키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함을 느끼고 있었다.&amp;lt;br/&amp;gt;&lt;br /&gt;
이와 같은 지식인들의 의식은 서재필이 『한국휘보(Korean Repository)』에 기고한 다음 글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amp;lt;br/&amp;gt;&lt;br /&gt;
{{Blockquote|정부는 국민의 실정을 알아야 하고 국민들은 정부의 목적을 알아야 한다. 정부와 국민 상호간의 이해를 갖도록 하기 위해서는 쌍방에 대한 교육뿐이다 … 교육 없이는 국민들이 정부의 좋은 의도를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교육 없이는 정부 관리들이 결코 좋은 법률을 만들지 못할 것이다.&lt;br /&gt;
|출처=서재필, 「오늘날 한국이 가장 필요로 하는 일」(What Korea needs most), 『한국휘보(Korean Repository)』, 1896.3.}}&amp;lt;br/&amp;gt;&lt;br /&gt;
&lt;br /&gt;
이러한 의식은 독립협회에서 발간한 『독립신문』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amp;lt;br/&amp;gt;&lt;br /&gt;
{{Blockquote|'''문명개화한 나라들에서들은 무론 남녀하고 학교에 가서 적어도 10년 동안에 각색 학문을 배운 후 비로소 세상에 나가''' … 조선 사람들은 겨우 배우는 것이 한문만 조금 배워 가지고 … 일본 같은 조그마한 나라가 싸움을 하여서 청국 병정 무찌르기를 풀 베는 것 같이 하고, 일본도 30년 전 같으면 나라 형세가 청국과 똑같았으니, 어찌 조그마한 나라가 청국 같은 큰 나라를 이기리오마는, 일본 사람들이 서양 각국이 부강한 곡절을 알고 곧 백성 교육하는 일을 힘써 … 당장에 적은 리(利)와 욕심을 내버리고 '''인민 교육하여 몇 해 후에는 조선도 남과 같이 되기를 바라노라'''&lt;br /&gt;
|출처=「논설」,『독립신문』1896년 4월 25일자.}}&amp;lt;br/&amp;gt;&lt;br /&gt;
위의 글들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이러한 지식인들의 자각이 민족사학 설립의 배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민족사학의 발전과정 ====&lt;br /&gt;
1800년대 후반부터 1910년 이전까지 주요 민족 주도로 설립된 교육기관의 설립 과정을 정리&amp;lt;ref&amp;gt;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민족독립운동사 국권수호운동Ⅱ Ⅳ. 국권수호를 위한 사회·문화운동 6. 사립학교의 구국운동 3) 민립학교 설립의 주체(https://db.history.go.kr/modern/level.do?levelId=hdsr_002_0010_0060_0030)의 데이터에 기반하여 자료 조사를 진행하였다. 자료조사를 통해 설립 연도가 일부 수정되었다.&amp;lt;/ref&amp;gt;하였다.&amp;lt;br/&amp;gt;&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xpvhRvJrqO8QmhwtXtUZhPRbrWskR7CqqsrToNpIPRE&amp;amp;font=Default&amp;amp;lang=ko&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amp;lt;br/&amp;gt;&lt;br /&gt;
이와 같이 1905년 이전에는 개화 및 신교육 도입 목적으로 1905년 이후에는 인재양성을 통한 교육구국을 목적으로 많은 교육기관이 설립되었다.&lt;br /&gt;
&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대표적 민족설립 교육기관====&lt;br /&gt;
아래의 표에서는 대표적인 민족설립 교육기관과 그 계승 현황을 정리하였다. &amp;lt;br/&amp;gt;&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hn:left;background:white;&amp;quot;&lt;br /&gt;
|+ [대표적 민족설립 교육 기관&amp;lt;ref&amp;gt;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민족독립운동사 국권수호운동Ⅱ Ⅳ. 국권수호를 위한 사회·문화운동 6. 사립학교의 구국운동 3) 민립학교 설립의 주체(https://db.history.go.kr/modern/level.do?levelId=hdsr_002_0010_0060_0030)의 데이터에 기반하여 자료 조사를 진행하였다. 자료조사를 통해 설립 연도 및 설립자가 일부 수정되었다.&amp;lt;/ref&amp;gt;]&lt;br /&gt;
! 교육기관명 || 설립일 || 설립자 || 계승&lt;br /&gt;
|-&lt;br /&gt;
|원산학교(元山學校) || 1883 || 덕원(德源)의 유지 || 원산소학교, 원산보통학교, 원산제일국민학교로 계승되며 1945년까지 지속됨&lt;br /&gt;
|-&lt;br /&gt;
|흥화학교(興化學校) || 1895. 11. 5. || 민영환(閔泳煥) || 1911년 폐교&lt;br /&gt;
|-&lt;br /&gt;
|중교의숙(中橋義塾) || 1896 || 민영기(閔泳綺) || 1906년 폐교&lt;br /&gt;
|-&lt;br /&gt;
|순성여학교(順成女學校) || 1898.12. || 찬양회(讚揚會) || 1905년 12월 31일 『대한매일신보』기사를 끝으로 신문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음&lt;br /&gt;
|-&lt;br /&gt;
|점진학교(漸進學校) || 1899 || 안창호(安昌浩) || .&lt;br /&gt;
|-&lt;br /&gt;
|낙연의숙(落淵義塾) || 1901 || 서광세(徐光世) || 1916년 폐교&lt;br /&gt;
|-&lt;br /&gt;
|한성법학교(漢城法學校) || 1905. 1. || 사회 유지 || 1905년 9월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가 법률학전문야학과를 신설하여 한성법학교 학생 20명을 인계받음 &amp;lt;ref&amp;gt; https://www.kunews.ac.kr/news/articleView.html?idxno=3765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양정의숙(養正義塾) || 1905. 2. 11. || 엄주익(嚴柱益) || 양정중학교(養正中學校)&lt;br /&gt;
|-&lt;br /&gt;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 1905. 4. 3. || 이용익(李容翊) || '''고려대학교(高麗大學校)'''&lt;br /&gt;
|-&lt;br /&gt;
|보창학교(普昌學校) || 1905. 5. || 이동휘(李東輝) || .&lt;br /&gt;
|-&lt;br /&gt;
|서전서숙(瑞甸書塾) || 1906 || 이상설(李相卨) || 1907년 폐교&lt;br /&gt;
|-&lt;br /&gt;
|진명여학교(進明女學校) || 1906. 4. ||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 진명여자고등학교(進明女子高等學校)&lt;br /&gt;
|-&lt;br /&gt;
|중동학교(中東學校) || 1906. 4. 2. || 신규식(申圭植) || 중동고등학교 (中東高等學校)&lt;br /&gt;
|-&lt;br /&gt;
|휘문의숙(徽文義塾) || 1906. 5. || 민영휘(閔泳徽) || 휘문고등학교(徽文髙等學校)&lt;br /&gt;
|-&lt;br /&gt;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 || 1906. 5. ||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 '''숙명여자대학교(淑明女子大學校)''', 숙명여자중학교(淑明女子中學校), 숙명여자고등학교(淑明女子高等學校)&lt;br /&gt;
|-&lt;br /&gt;
|양규의숙(養閨義塾) || 1906. 6. || 여자교육회(女子敎育會) || .&lt;br /&gt;
|-&lt;br /&gt;
|서우사범학교(西友師範學校) || 1907. 1. || 서우학회(西友學會) || 1908년에 서북협성학교(西北協成學校)로 개편됨&lt;br /&gt;
|-&lt;br /&gt;
|대성학교(大成學校) || 1907 || 안창호(安昌浩) || 1912년 폐교&lt;br /&gt;
|-&lt;br /&gt;
|협동학교(協東學校) || 1907 || 유인식(柳寅植)) || 1917년 폐교&lt;br /&gt;
|-&lt;br /&gt;
|소의학교(昭義學校) || 1907. 9. || 전경현(全景鉉), 민강(閔橿), 장경관(張敬寬) 등 || 동성고등학교 (東星高等學校)&lt;br /&gt;
|-&lt;br /&gt;
|장훈학교(長薰學校) || 1907. 11. 2. ||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 || 장훈고등학교 (長薰高等學校)&lt;br /&gt;
|-&lt;br /&gt;
|오산학교(五山學校) || 1907. 12. || 이승훈(李昇薰) || 오산고등학교 (五山高等學校)&lt;br /&gt;
|-&lt;br /&gt;
|기호학교(畿湖學校) || 1908. 6. 20. ||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 || 융희학교(隆熙學校)를 흡수하여 중앙중학교(中央中學校), 중앙고등학교(中央高等學校)로 발전함&lt;br /&gt;
|-&lt;br /&gt;
|양원여학교(養原女學校) || 1908. 6. || 여자보학원유지회(女子普學院維持會) || .&lt;br /&gt;
|-&lt;br /&gt;
|신명학당(新明學堂) || 1908. 2. || 김장호, 김홍식(金洪植) || 치문초등학교 (致文初等學校)&lt;br /&gt;
|-&lt;br /&gt;
|명동학교(明東學校) || 1908. 4. 27. || 김학연(金學淵) || 1925년 폐교&lt;br /&gt;
|-&lt;br /&gt;
|보인학교(輔仁學校) || 1908. 6. 8. || 보인학회(輔仁學會) || 보인고등학교(輔仁高等學校)&lt;br /&gt;
|-&lt;br /&gt;
|양산중학교(楊山中學校) || 1908. 10. || 김홍량(金鴻亮) ||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이상의 표에서 1910년 국권피탈 이전 설립된 민족설립 교육기관 중 적지 않은 수가 오늘날에도 현존하고 있는 중학교, 고등학교, 또는 대학교로 계승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10년 이후 많은 학교가 폐교 위기에 처한 것을 고려하였을 때, 이러한 계승은 민족설립 교육기관을 유지해 교육을 통해 나라를 구하고자 했던 당시 사람들의 투지와 열망에 대한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보성전문학교와 명신여학교====&lt;br /&gt;
1910년 이전까지 민족 주도로 설립된 교육 기관 중 주요하게 살펴보아야 할 기관으로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와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가 있다. 보성전문학교는 이용익(李容翊)이 고종의 허가 하에 설립하였고, 명신여학교는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의 지원으로 설립되었음을 고려할 때, 모두 황실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사립 교육기관으로 보기는 힘들다는 한계는 존재한다. 그러나, 1910년 이전에 설립된 학교가 폐교의 절차를 밟지 않고 이어져 오늘날까지 계승되었다는 사실이 가지는 의미는 적지 않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1910년 이후 많은 학교가 일제의 강압 아래 폐교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 두 학교의 경우 대부분의 학교가 중등교육기관으로 계승된 것과는 구분되어 '''고등교육기관으로 발전한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나아가, 보성전문학교 설립을 기점으로 '교육 구국'을 목적으로 한 민족 사학의 설립이 활성화되었다는 점과 명신여학교의 경우 민족이 설립한 많지 않은 여성 교육기관 중 하나였다는 점 역시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lt;br /&gt;
보성전문학교는 1905년 04월 03일 고종(高宗)의 재정적 후원을 받아 [[이용익李容翊]]에 의해 설립된 교육기관이다. &amp;lt;br/&amp;gt;&lt;br /&gt;
보성전문학교의 설립 배경은 설립자 이용익의 행보에서 엿볼 수 있다. 친로반일(親露反日)의 뜻 고수한 것과 조선의 중립 선언을 선언하게 한 것으로 인해 일본에 의해 납치된 이용익은 체류 중 일본의 '''근대교육기관 및 개화문물을 접한다'''. 이것이 그의 교육기관 설립의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이후 귀국할 때 '''다수의 도서와 인쇄기를 구매'''하여 가지고 온 점 역시 이러한 추측의 설득력을 높인다. &amp;lt;br/&amp;gt;&lt;br /&gt;
한편, 보성전문학교의 개교를 알리는 황성신문(皇城新聞)의 글에는 보성전문학교 설립이 그 당시에 가졌던 의미가 잘 드러나고 있다. &amp;lt;br/&amp;gt;&lt;br /&gt;
{{Blockquote|전문학교 창설. '''대한에 전문대학교는 아직 세워지지 못했다. 한성법학교(漢城法學校)가 세워졌으나 야학(夜學)이라 완전하지 못했는데, 박동(礴洞)에 신설한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는 위치가 전문대학 주간 학교로''' 대황제폐하께서 특별히 설립하신 바, 매월 수천원의 경비를 내탕전(內帑錢)으로 내려주고 도서관을 부설하여 각 전문 교과서 수천권을 새로 간행한다 한다. 그리고 신해영(申海永)·조제환(趙齊桓)·정영택(鄭永澤) 세 명에게 이상의 사무를 전담하도록 하여, 위 3명은 교육을 열심히 하여 황제의 뜻에 보답하기위해 더욱 극진하게 힘을 쓴다고 한다. 20여명의 교수는 일찍이 일본에 유학하여 졸업한 사람들을 임용하여 (중략) '''2개년 졸업기한이지만 인재를 빨리 양성하도록''' 황제의 뜻을 특별히 내리셨다하고, 오늘부터 개교한다고 한다.&lt;br /&gt;
|출처=『황성신문(皇城新聞)』 1905년 4월 1일자 2면. 현대어역: 고려대학교 도서관&amp;lt;ref&amp;gt;https://library.korea.ac.kr/datause/archiving/old-book-exhibition/release/?mod=document&amp;amp;uid=10653&amp;lt;/ref&amp;gt;}}&lt;br /&gt;
윗글에서 당시 대한제국에 중등교육기관은 존재했음에도 고등교육을 위한 기관은 야학의 형태로서만 존재하여 온전하지 못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당시 상황 속에서 이용익이 일본의 교육 현황을 접한 후 대한제국 고등교육기관의 필요성을 느껴 설립하려 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고등교육기관 설립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맞춰 등장한 학교라는 점에서 보성전문학교가 가지는 가치는 매우 크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1910년 이후 다른 학교와 마찬가지로 보성전문학교는 운영진 및 교장의 망명, 투옥과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운영난을 겪는 등 각종 수난을 겪는다. 이후 일제의 탄압 아래 격하되거나 교명을 바꾸고 학과 설립이 제한되는 등 여러 차례 존속의 고비를 넘긴다. 하지만 끊임없는 노력을 바탕으로 1921년 전문학교로 다시 승격되었으며 여러 위기를 거친 끝에 해방 후 고려대학교로 발족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lt;br /&gt;
명신여학교는 1906년 5월 22일 고종(高宗)의 후궁인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의 지원으로 왕실 별궁 용동궁에 설립된 교육기관이다. &amp;lt;br/&amp;gt;&lt;br /&gt;
순헌황귀비는 본디 교육, 특히 여성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명신여학교의 설립에 앞서 1906년 4월에 진명여학교(進明女學校)를, 1907년에 경영난에 처해 있던 양정의숙(養正義塾)을 도운 점에서 잘 드러난다. &amp;lt;br/&amp;gt;&lt;br /&gt;
한편, 당시 여성 교육 관련 배경은 다음과 같다. 앞서 기술된 바와 같이 1905년 을사늑약 전후로 교육구국이 일어나 전국 각지에서 민족사학이 설립되었으나 여성을 위한 교육기관은 부족한 실태였다. 당시 설립된 여성 교육기관으로는 이화학당, 정신여학교, 숭의학교 등이 있었으나 이는 모두 선교사, 즉 민족에 의해 설립된 학교가 아니었다.&amp;lt;ref&amp;gt;한희숙, 구한말 순헌황귀비 엄비의 생애와 활동, 아시아여성연구, 숙명여자대학교 아시아여성연구원, 제45집 2호, 2006&amp;lt;/ref&amp;gt;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여성 교육기관의 필요'''를 절감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 것은 순헌황귀비의 시대적 통찰력을 반영하는 부분이다. &amp;lt;br/&amp;gt;&lt;br /&gt;
위와 같은 순헌황귀비의 설립 목적은 대한매일신보의 글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amp;lt;br/&amp;gt;&lt;br /&gt;
{{Blockquote|황귀비 흥학:  황귀비 전하께오서 여자 교육이 없음을 크게 걱정하여 육군참장 엄주익씨 집(第)에 여학교를 설립하여 '''여자교육을 발달시키고자''' 하였다.  엄주익에게 학교 설립 일을 전담하게 하시니 '''대한여자의 교육이 앞으로 발달하기를''' 가히 볼 수 있을 지로다. &lt;br /&gt;
|출처=『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6년 4월 24일자&amp;lt;ref&amp;gt;한희숙, 구한말 순헌황귀비 엄비의 생애와 활동, 아시아여성연구, 숙명여자대학교 아시아여성연구원, 제45집 2호, 2006, 227쪽.&amp;lt;/ref&amp;gt;}}&lt;br /&gt;
광복 후 명신여학교는 숙명여자중학교(淑明女子中學校)와 숙명여자고등학교(淑明女子高等學校)로 이어졌다. 나아가, 여성 고등교육기관의 설립을 꿈꾼 교장 이정숙(李貞淑)의 뜻에 따라 1938년 숙명학원(淑明學園)에서 숙명여자전문학교를 설립하였고, 이것이 오늘날 숙명여자대학교(淑明女子大學校)로 계승되었다.&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선교사 설립 교육기관===&lt;br /&gt;
선교사들은 기독교 선교의 기반 구축을 위해 개화정책 추진 초기인 1880년대부터 고종의 각별한 관심과 지원 속에서 많은 학교를 설립하였다.  서울에 배재·이화·경신학교를 설립하였고, 기독교 선교금지정책이 이완되기 시작한 1890년대에는 지방도시로 그 범위를 넓혀 1894년 평양의 광성학교·숭덕학교·정의여학교, 1895년 서울의 정신여학교를 비롯하여 동래·인천·재령·목포·원산·개성·해주·공주·대구 등 전국 각지로 확대하였다.&lt;br /&gt;
&lt;br /&gt;
====[[연세대학교(延世大學校)]]====&lt;br /&gt;
&lt;br /&gt;
연희전문학교는 1915년 선교부연합위원회의 협의를 얻어서 북장로회 선교사인 언더우드가 조선기독교학교로 처음 설립하였다. 이후 1917년 연희전문학교로 발족하였다. 보성전문학교 이후 두 번째로 설립된 전문학교이다. 이후 3.1 운동등 다양한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1944년 일제가 경영권과 재산을 몰수하고 한국인 교수진들을 모두 추방했었다. 독립 후에는 연희대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대학교로 승격하였다.&lt;br /&gt;
&lt;br /&gt;
세브란스는 대한제국의 궁정어의였던 알렌에 의해 1885년에 설립된 제중원에서 시작하였고, 1886년부터 제중원 내 의학부를 두고 입학생을 받았다. 이후 병원장으로 취임한 선교사 에비슨이 1899년 조선 최초의 의학교인 제중원의학교를 설립하였다. 1904년 미국인 세브란스의 후원으로 세브란스 병원이 세워지며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로 개편하였다. 1906년에 간호부가 개설되었고 우리나라 최초의 간호사를 배출하였다. 세브란스와 연희전문학교 간의 병합은 1920년대에도 한차례 시도한 바 있었으나 무산되었고, 독립 후 1957년에 두 학교가 통합되어 '''연세대학교'''로 출범하였다.&lt;br /&gt;
&lt;br /&gt;
====[[배재학당]]====&lt;br /&gt;
&lt;br /&gt;
1885년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한국 최초의 근대식 사립학교로 중등과정을 담당했다. 1886년이 고종이 배재학당이라는 이름을 사하였고 미국인들의 후원을 받아 1887년에 제대로 된 건물을 세웠다. 영어교육을 중점적으로 행했으며 학생자조정책을 채택하여 가난한 학생들이 학교에서 일을 하며 수업료를 벌 수 있도록 하였다. 현재 기존의 건물은 2008년부터 배재학당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배재중학교, 배재고등학교, 배재대학교'''가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lt;br /&gt;
&lt;br /&gt;
====[[배화학당]]====&lt;br /&gt;
초,중등과정의 사립학교로 1898년 켐벨 선교사가 설립하였다. 처음엔 캐롤라이나학당으로 기독교전파와 여성교육을 목표로 세웠졌다. 1910년 배화학당으로 개칭하였다.1916년 1월 경성 누하동(지금의 서울 종로구 필운동)으로 교사를 이전하고, 1926년 12월 캠블기념관을 신축하였으며, 1938년 3월 배화고등여학교와 배화여자소학교로 분리,개편되었다. 일제의 신사참배요구를 거절한 기독교 학교 중 하나이다. 1940년대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선교사들도 학교를 떠나며 위기에 폐교 위기에 봉착했다. 학교가 경영난에 시달리자 일제는 학교의 운영권을 요구했으나, 당시 교사였던 이덕봉과 이만규가 독지가를 구하려 노력한 끝에 이민천이 춘천, 이천, 연기, 익산 등지에 있는 토지를 기부하여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독립 후 1951년 '''배화여중과 배화여고'''로 분리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김윤]]&lt;br /&gt;
&lt;br /&gt;
=='''민간 단체의 교육 운동'''==&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신민회(新民會)]]의 애국계몽운동===&lt;br /&gt;
&amp;lt;br/&amp;gt;&lt;br /&gt;
{{Blockquote| '''신민회 행동강령'''&lt;br /&gt;
1. 국민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사상 고취 &amp;lt;br /&amp;gt; 2. 동지를 발하고 단합하여 국민 운동 역량 축적 &amp;lt;br /&amp;gt; 3. 상공업 기관 건설로 국민의 부력(富力) 증진 &amp;lt;br /&amp;gt; 4. 교육 기관 설립으로 청소년 교육 진흥&lt;br /&gt;
|출처= 「헌기제501호, 「대한 신민회 취지서 및 동회 통용 장정 등 보고 건」, 1909년 3월 5일(국사편찬위원회, 『통감부문서』 6, 1991}}&lt;br /&gt;
&lt;br /&gt;
신민회(新民會)는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1907년에 [[안창호(安昌浩)]], [[양기탁(梁起鐸)]] 등의 주도로 결성된 항일 비밀결사&amp;lt;/span&amp;gt;이다. 위와 같은 신민회의 행동 강령을 바탕으로 신민회는 실력 양성을 통한 국권 회복을 주장하며, 교육, 언론 및 출판, 민족 산업 육성, 독립군 양성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lt;br /&gt;
&lt;br /&gt;
신민회는 실력 배양의 방법으로 교육 구국 운동을 두 가지 측면에서 전개하였다. 국민에게 국권회복을 위한 교육의 필요성을 계몽하여 학교설립을 고취하며 신민회도 학교를 설립하여 국권회복에 필요한 적합한 교육방침을 강구하여 민족 지도자를 양성한다는 것이다. 또한, 국외에서 독립군 기지를 창설하고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전쟁을 일으켜 국권을 회복한다는 것이다. &lt;br /&gt;
&lt;br /&gt;
신민회는 이를 위해 민중들이 설립한 학교에 대해 학교교육방침을 지도하였다. 또한, 중학교를 설립하고, 학교의 모범을 만들며 중학교에서 동시에 사범교육을 해 교사를 양성한다는 기준을 세우고 학교를 설립하였다. 당시 민간인이 자발적으로 기금을 갹출하여 설립한 학교는 대부분이 소학교였기 때문에, 신민회는 중학교를 설립하여 소학교 출신 청소년들이 더 양질의 교육을 통해 민족지도자로 발돋움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lt;br /&gt;
&lt;br /&gt;
신민회는 기본적으로 비밀결사이기 때문에 그들이 설립한 학교의 수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1907년부터 1909년 4월까지 민간인들에 의해 세운 학교가 3000여 개교에 달한다는 통계로 보아 신민회에서 세운 학교가 많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알려진 신민회가 설립한 학교는 다음과 같다.&lt;br /&gt;
&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hn:left;background:white;&amp;quot;&lt;br /&gt;
|+ [신민회가 설립한 학교]&lt;br /&gt;
! 학교명 || 설명 &lt;br /&gt;
|-&lt;br /&gt;
| '''대성학교'''|| [[안창호(安昌浩)]], 윤치호 평양에 설립. 신민회가 설립한 대표적인 민족 사학으로 입학 지원자가 500~600여 명이 되는 때도 존재. &lt;br /&gt;
|-&lt;br /&gt;
| '''오산학교'''|| 평안북도 정주군에 이승훈 설립. 김소월, 백석, 이중섭, 독립운동가 김홍일 중장 등을 배출. 현재 서울 오산고등학교로 계승됨&lt;br /&gt;
|-&lt;br /&gt;
| 점진학교|| 평안남도 강서 위치, [[안창호(安昌浩)]] 설립. 남녀공학을 실시한 최초의 소학교. &lt;br /&gt;
|-&lt;br /&gt;
| 보창학교 || 강화도 위치, 이동휘 설립&lt;br /&gt;
|-&lt;br /&gt;
| 신안학교 || 정주, 신민회 정주지회 회원 설립&lt;br /&gt;
|-&lt;br /&gt;
| 양실학교 || 의주, 신민회 의주/용천지회 회원 설립&lt;br /&gt;
|-&lt;br /&gt;
| 가명학교 ||  신민회 납청정지회 회원 설립&lt;br /&gt;
|-&lt;br /&gt;
| 신흥학교 || 선천, 중학교급 학교&lt;br /&gt;
|-&lt;br /&gt;
| 홍양학교 || 신민회 곽산지회 회원 &lt;br /&gt;
|-&lt;br /&gt;
| 명륜학교|| 함경남도 영흥읍에 있던 세 개 학교 통합, 이동휘 설립&lt;br /&gt;
|-&lt;br /&gt;
| 경성학교|| 함경북도 경성 위치&lt;br /&gt;
|-&lt;br /&gt;
| 양산학교|| 황해도 안악읍 향천자리, 김용제 설립, 신민회가 중학교로 개편&lt;br /&gt;
|-&lt;br /&gt;
| 오성학교 || 서울 위치, 이갑, 이종화 설립. 신민회 창건 후 각종학교인 서북협성학교로 개편&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신민회의 애국계몽은 학교 설립뿐만이 아니라 학회의 설립과 지도를 통해서도 추진되었다. 안악군면학회(安岳郡勉學會), 해서교육총회(海西敎育總會),평양청년권장회(平壤靑年勸?會), 연학회(練學會), 동제회(同濟會)등의 학회를 전국에 조직하는 데에 앞장섰다. 또한, 서우학회, 한북학회를 서북학회로 통합 재조직하는 등, 기존에 있던 학회의 통합과 재정비에도 이바지하였다. &lt;br /&gt;
&lt;br /&gt;
이와 같이 신민회의 교육계몽운동은 신민회가 1912년 105인 사건으로 해산될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그 이후에도 다른 독립운동단체에 영향을 미쳐 교육을 통한 민중 계몽으로 이루어지는 독립운동의 방향성을 제시하였다.&lt;br /&gt;
&lt;br /&gt;
[[분류:신다정]]&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농촌 계몽 운동===&lt;br /&gt;
&lt;br /&gt;
농촌 계몽 운동은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1920년대~1930년대 민족 운동과 관련한 청년 학생이나 지식층이 농민의 의식과 지식 등을 계몽하기 위해 농촌 사회에서 행한 사회 교육 운동&amp;lt;/span&amp;gt;을 의미한다. 농사일을 끝낸 후 강연회, 토론회, 야학 등의 형식으로 이루어졌으며 특히 농한기인 겨울에 많이 실시되었다. &lt;br /&gt;
&lt;br /&gt;
1920년에는 일제의 식민 지주 경영과 지주 착취로 인해 농민 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고, 이와 맞물려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이 결성되었다. 이때 사회주의 계열 청년 단체와 지식인들이 농촌으로 진출하여 농민 운동을 주도하였다. &lt;br /&gt;
민족주의 계열에서 주도한 농촌 운동은 문맹 퇴치와 생활 개선 등의 계몽적 활동이 중심이었다. 대표적으로 천도교 계열의 농촌 운동, 기독교 계열의 농촌 운동이 있다. 천도교는 1925년 조선농민사를 설립하여 농민 야학을 시행하고 전국적으로 농민에 대한 계몽 활동을 전개하였다. 기독교에서는 1926년 이후 학생 YMCA 농촌부를 중심으로 계몽 활동을 적극 추진하였다. &lt;br /&gt;
&lt;br /&gt;
1920년 후반부터 1930년대에는 언론사 또한 농촌 계몽 운동에 힘을 쏟았다. 대표적으로 1929년부터 1935년까지 이루어진 조선일보사의 문자 보급 운동과 1931년부터 1934년까지 이루어진 동아일보사의 [[브나로드 운동]]이 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이런 농촌 계몽 운동은 1930년대 들어 강화된 조선총독부의 조선어 사용 금지 정책과 지방 농촌의 몰락으로 인해 쇠퇴하였다. 또한, 농촌의 몰락 책임을 수탈 때문이 아닌 농민의 게으름과 무지에 있다며 총독부의 주도로 농촌진흥운동을 진행하며 민간 및 언론 단체의 농촌 계몽 운동을 탄압하였다. 그러나 이런 탄압 속에서도 농촌 계몽 운동은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이러한 민간 교육 활동 및 정책은 해방 이후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문맹 퇴치 운동으로 이어졌다.&lt;br /&gt;
&lt;br /&gt;
[[분류:신다정]]&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민립 대학 설립 운동===&lt;br /&gt;
&lt;br /&gt;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은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1920년대 이루어진 민족 사학 설립 운동&amp;lt;/span&amp;gt;이다.&lt;br /&gt;
&lt;br /&gt;
1920년대 초 식민지 조선에서는 민중의 자발적인 참여하에 조선인을 위한 대학을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등장하였다. 민립 대학 설립에 대한 논의는 1920년 6월 20일 한규설, 이상재, 윤치소 등 91년의 발기로 조선교육회 발기회가 개최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가 학회령을 토대로 1922년 1월 24일까지 인가를 내주지 않아 민립대학 설립에 대한 결의를 실행시키지 못했다. &lt;br /&gt;
&lt;br /&gt;
동아일보에 기고된 사설을 통해 당시의 독립을 위한 교육 계몽의 필요성과, 관립 대학과 다르게 민립 대학의 설립 필요성에 관해 확인할 수 있다. &lt;br /&gt;
&lt;br /&gt;
{{Blockquote|운명을 어떻게 개척할까. 정치냐 외교냐 산업이냐. 물론 이러한 일들 모두 다 필요하다. 그러나 그 기초가 되고 요건이 되며 가장 급무가 되고 가장 선결의 필요가 있으며 가장 힘 있고 '''가장 필요한 수단은 교육이 아니면 할 수 없다.''' &amp;lt;br /&amp;gt; … 물론 관립대학도 조만간 개교될 것이기에 대학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학문 발전의 장래는 결코 1개의 대학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요, 또한 '''그처럼 중대한 사업을 우리 민중이 직접으로 영위하는 것은 차라리 우리의 의무라 할 수 있다.''' &amp;lt;br /&amp;gt;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에 느낀 바 있어 감히 만천하 동포에게 향하여 민립대학의 설립을 제창하니 자매형제는 와서 돕고 나아가 이루어라.'''&lt;br /&gt;
|출처= 「開會된 民大總會」, 『동아일보』, 1923년 3월 30일자.}}&lt;br /&gt;
&lt;br /&gt;
이렇게 고양된 민립 대학 설립을 통한 민족 교육에 대한 필요성을 바탕으로, 1922년 1월 이상재, 이승훈, 윤치호, 김성수, 송진우 등이 조선민립대학기성준비회를 정식으로 결성하였다. 이어 1923년 3월 29일 발기인 1170명 중 462명이 참석한 가운데 3일간 총회를 개최하였다. &lt;br /&gt;
&lt;br /&gt;
총회에서는 ＇민립대학발기취지서＇를 채택하고 대학 설립 계획서를 확정하였다. 계획서에 따르면 3개년 계획으로 자본금 1000만원을 갹출하는데, 제 1차 연도에는 대지 5만 평을 구입하여 교실 10동, 대강당 1동을 건축하고, 법과/경제과/문과/이과의 4개 대학 및 예과를 설치하며, 제2차 연도에는 300만원으로 공과/이과/기타 학과를 증설하고, 제3차 연도에는 300만원으로 의과/농과를 설치한다는 것이다. 또 중앙집행위원회를 구성하고 지방에 지방부를 두기로 결의하였다. 별도로 지방순회선정위원 13평을 선정하고 파견하였다. 이와 같은 노력을 토대로 1923년 말까지 전국 100여 개소와 해외의 만주 간도, 봉천, 미국 하와이 등지에도 지방부가 조직되었다. &lt;br /&gt;
&lt;br /&gt;
기성회는 ＇한민족 1000만 한 사람 1원씩＇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기금 모금에 나섰다. 이런 모금 활동에 민족 교육을 성원하는 마음들이 모였는데, 대표적으로 전라남북도에서만 15만원이 모금되었으며 경기도 안성의 이정도는 1년 동안 매일 아침 밥짓는 쌀에서 식구 수 대로 한 숟가락씩 모아 판 돈 19원을 기부하는 등 일반 민간에서의 성원도 뜨거웠다. &lt;br /&gt;
&lt;br /&gt;
이와 같은 열기에 일제는 이를 교육 운동이 아니라 정치 운동이라고 판단하고 탄압하였다. ＇조선교육령＇을 개정하여 관립 경성제국대학의 설립을 서두르고 민립대학과 관련 있는 인사들에 대한 탄압과 기금 갹출 방해 공작을 전개하였다. 민립대학기성회 인사들을 민족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구실로 철저히 감시하고, 기금 모집을 위해 박차를 가하던 인사들의 지방 강연을 배일사상을 고취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강연 중지를 명하고 청중을 해산시켰다. &lt;br /&gt;
&lt;br /&gt;
이러한 조선총독부의 탄압이 민립대학 설립운동의 실패의 주된 원인이 되었다. 1923년 여름 수재, 9월 일본 관동 대지진으로 인한 경제 공황, 1924년 한재와 7월 전국적 수재로 인한 농촌 경제 파탄 등 자연적인 여건도 민립대학 설립운동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그러나 3.1운동 이후 전 민족이 민족 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조직체를 형성하여 교육을 통한 자주독립이라는 하나의 목표에서 단결을 보였다. 이는 이후의 민족운동 양상에서 조직적인 단체 결성의 표본이 되었다.&lt;br /&gt;
&lt;br /&gt;
[[분류:신다정]]&lt;br /&gt;
&lt;br /&gt;
=='''군사 교육'''==&lt;br /&gt;
&lt;br /&gt;
독립운동사에서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군사 교육도 꾸준히 이어져왔다. 수많은 독립열사들은 무관학교 설립을 위한 활발한 활동을 이어왔다. 독립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역량은 군사였기 때문에, 군사교육은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였으며 이에 따라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에서도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노력이 나타났다.&lt;br /&gt;
&lt;br /&gt;
[[분류:이민희]]&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lt;br /&gt;
신흥무관학교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위해 설립된 군사학교로, 독립군 양성과 무장 투쟁 기반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911년 중국 만주 서간도 지역(현재의 지린성 류허현)에서 이회영, 이시영 등 독립운동가들이 설립했으며, 군사 지도자를 양성하고 실질적인 무장 독립운동을 준비하는 데 목적을 두었습니다. &lt;br /&gt;
&lt;br /&gt;
교육 내용은 사격, 전술, 지형 분석 등 실전 중심의 군사훈련과 함께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역사 및 애국사상 교육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졸업생들은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전투 같은 독립전쟁에서 활약하며 독립운동의 주축이 되었고, 김좌진과 이범석 같은 지도자를 배출했습니다. &lt;br /&gt;
&lt;br /&gt;
1920년대에 들어 일본의 탄압이 강화되면서 학교 운영이 점차 어려워졌고, 졸업생들이 각종 독립운동 조직으로 흩어지면서 신흥무관학교는 군사훈련소 형태로 전환되다가 결국 해체되었습니다. &lt;br /&gt;
&lt;br /&gt;
졸업생들은 만주 지역에서 서로군정서, [[북로군정서]]에서 핵심 간부로 활약, [[대한독립군]], 통의부의용군, 정의부, 신민부, 국민부 등에서 활동하였고,중국 본토에서는 1919년 11월 길림에서 의열단 결성,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에서 독립운동 전개했습니다.&lt;br /&gt;
&lt;br /&gt;
신흥무관학교는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군사교육 기관으로 평가받습니다. 이 학교는 독립군의 전투력을 강화하고, 독립운동의 실질적 기반을 마련했으며, 한국 독립운동의 전환점이 된 여러 전투에서 큰 공헌을 했습니다.&lt;br /&gt;
&lt;br /&gt;
[[분류:최용빈]]&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조선혁명간부학교]]===&lt;br /&gt;
&lt;br /&gt;
1919년 조직된 무장독립운동단체 의열단은 중국국민당과의 합작을 통해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실질적인 군사 교육 기관'''&amp;lt;/span&amp;gt;을 설립하고자 노력했다. 이에 따라 [[장제스]]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의열단&amp;lt;ref&amp;gt; 급진적인 항일 투쟁을 목적으로 1919년 11월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로, 김원봉(金元鳳)이 단장을 맡았다. &amp;lt;/ref&amp;gt;의 단장인 김원봉이 1932년 중국 난징에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설립하였다. 공식 명칭은 사실 조선혁명간부학교가 아닌, ''‘중국국민당 군사위원회 간부 훈련반 제6대’''로, 국민당의 단기간부훈련소 신설반인 것처럼 위장했다. &lt;br /&gt;
&lt;br /&gt;
&lt;br /&gt;
학교는 일본과 중국의 외교관계를 고려해 학교 운영 사실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설립 초기에는 중국 외교부와 육군참모본부, 심지어 군사위원회 판공청 당사자들조차 그 존재를 모를 정도였다. 만 3년간 운영된 조선혁명간부학교는 3기에 걸쳐 총 125명의 인재를 배출했다. 국민당은 그동안 매월 경상비 2,000~3,000원·수시 필요경비 1,000~1만 원·기타 운영비 400~1,000원 등 각종 운영자금 전액과 화기·탄약·피복 등을 지원했다. 학생들은 군사학뿐 아니라 별도 신설된 정치학, 자연과학을 포함해 경제학·사회학·철학·혁명학·물리학·화학·지리학까지 다양한 학문을 공부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혁명간부학교의 졸업생들은 이후 민족혁명당의 항일투쟁체계에 편입되었으며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대]]의 핵심 세력으로 성장하였고, 일부는 화북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에 가담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단체문서한국광복군.jpg|섬네일|가운데|''&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한국 광복군의 모습&amp;lt;/div&amp;gt;'']] &lt;br /&gt;
[[파일:조선의용대김원봉.jpg|섬네일|가운데|''&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조선의용대 모습 &amp;lt;/div&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amp;lt;font color=&amp;quot;#8c8c8c&amp;quot;&amp;gt;조선의용대 깃발 가운데 있는 인물이 약산 김원봉이다.&amp;lt;/font&amp;gt;''&amp;lt;ref&amp;gt;김삼웅, &amp;quot;최후까지 총을 든 조선의용대와 김원봉&amp;quot;, 오마이뉴스, 2024.02.06.,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999602 (검색일:2024년 12월 4일)&amp;lt;/ref&amp;gt;&amp;lt;/div&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이민희]]&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한인소년병학교]]===&lt;br /&gt;
&lt;br /&gt;
한인소년병학교는 장기적인 독립 투쟁을 대비하여 군사 교육을 받은 장교를 양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박용만에 의해 설립되었다. 한인소년병학교는 1909년 6월에 세워진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최초의 국외 설립 군사학교''&amp;lt;/span&amp;gt;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으며, 각지의 군사운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lt;br /&gt;
&lt;br /&gt;
&lt;br /&gt;
한인소년병학교는 미국의 헤이스팅스(Hastins) 대학과 교섭하여 운영되었으며, 네브라스카 주에서 설립되었으나 교섭에 따라 헤이스팅스로 이전하여 한인 유학생의 활발한 참여를 이끌어냈다. 헤이스팅스 대학은 건물 한 동과 전장을 지원하여, [[둔전병제]]식 훈련을 실시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헤이스팅스대학.png|섬네일|가운데|''&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헤이스팅스 대학의 모습 &amp;lt;/div&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amp;lt;font color=&amp;quot;#8c8c8c&amp;quot;&amp;gt;한인소년병학교 학생들이 훈련했던 헤이스팅스 대학의 사진이다.&amp;lt;/font&amp;gt;''&amp;lt;/div&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ftzi6pFWzNc?si=iGbjmKk9yPuAn_Ub&amp;quot; title=&amp;quot;YouTube video player&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div&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다음의 영상에서 한인소년병학교가 있었던 헤이스팅스 대학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다.'' &amp;lt;/div&amp;gt;&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lt;br /&gt;
&lt;br /&gt;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는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한 박용만이 미국의 하와이에도 같은 군사 훈련 단체를 설립하고자 하여 1914년 4월 15일 설립되었다. 당시 학도 수는 200여명으로 군단장 역시 박용만이 맡았다. &lt;br /&gt;
&lt;br /&gt;
&lt;br /&gt;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는 [[한인소년병학교]]를 계승하여 [[둔전병제]]식 훈련을 실시하였고, 군영이 호놀룰루 시의 동북 쪽 큰 산을 넘어 해안과 아후이마누 강을 낀 계곡에 위치하여 ''&amp;quot;산 넘어 아희들&amp;quot;''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lt;br /&gt;
하와이에서 군단과 사관학교를 설치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으나, 1916년을 고비로 점차 쇠퇴하여 1917년 경 해체되었고, 지역으로 흩어져 사실상 폐교되었다.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는 제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미일(美日) 간 우호관계가 지속되면서 국민군단의 혁명적이고 군사적인 성격이 하와이 내에서 우호적인 반응을 얻지 못하였고, 이외에도 하와이 내 농장의 불경기로 수입이 급감하면서 재정 조달이 어려웠으며 1915년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의 실권이 이승만 측에 넘어가 박용만의 활동 범위가 위축된 점 등으로 인해 폐교되었다고 추측되고 있다.&lt;br /&gt;
&lt;br /&gt;
[[분류: 이민희]]&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숭무학교(崇武學校)]]===&lt;br /&gt;
숭무학교는 1910년대 멕시코로 이주한 한인들이 일제강점기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한 군사학교입니다. 멕시코에 이주한 한인들은 고된 노동 속에서도 민족 독립의 열망을 잃지 않고 독립운동을 조직적으로 지원하고자 노력했습니다. 1915년 멕시코 유카탄주 메리다 지역에서 설립된 숭무학교는 독립군 양성을 목표로, 체계적인 군사훈련과 애국 사상 교육을 실시했습니다.&lt;br /&gt;
&lt;br /&gt;
이 학교는 멕시코 한인 사회의 독립운동 기반을 강화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특히 숭무학교는 한인들의 단결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멀리 해외에서조차 독립운동을 지속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큽니다. 이러한 활동은 멕시코뿐 아니라 미주 지역의 다른 한인 독립운동 단체에도 영향을 주어 독립운동의 글로벌 네트워크 형성에 기여했습니다.&lt;br /&gt;
&lt;br /&gt;
숭무학교는 해외 독립운동의 독특한 사례로, 한인 이민사와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lt;br /&gt;
&lt;br /&gt;
[[분류:최용빈]]&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독립군으로의 발전===&lt;br /&gt;
&lt;br /&gt;
군사교육을 위해 설립된 다양한 무관학교를 기점으로, 졸업생들은 각기 다른 곳에서 독립군으로 발전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의 경우, 졸업생들은 만주 지역에서 서로군정서, 북로군정서에서 핵심 간부로 활약했을 뿐 아니라, 대한독립군,통의부의용군, 정의부, 신민부, 국민부 등에서 활동하였다. 또한, 중국 본토의 경우에서는 1919년 11월 길림에서 의열단을 결성하기도 하고, 임시정부 산하의 광복군인 한국광복군의 일원으로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졸업한 졸업생들도 독립군으로서 활약하였다. 이들은 민족혁명당의 항일투쟁체계에 편입되었는데, 대표적으로 임시정부 산하의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대의 핵심 세력으로 성장했고, 일부는 화북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에 가담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한인소년병학교]]와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 숭무학교를 졸업한 졸업생들도 독립군으로 발전하였으나, 구체적으로 어떤 기관으로 발전하였는지는 크게 알려진 바가 없다. &lt;br /&gt;
&lt;br /&gt;
[[숭무학교(崇武學校)]]는 일부 학생들은 멕시코 혁명에 참여하기 위해 군에 입대하였다.  일부 설립자들은 과테말라 혁명에 참여하려 했으나 실패로 끝났다.&lt;br /&gt;
&lt;br /&gt;
[[분류: 이민희]]&lt;br /&gt;
&lt;br /&gt;
==데이터 시각화==&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마인드맵===&lt;br /&gt;
[[파일:교육구국운동_노드_마인드맵.png|500픽셀]]&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온톨로지===&lt;br /&gt;
인물의 경우 관련 공훈전자사료관,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인명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의 관련 링크를 삽입하여 추가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하였다.&lt;br /&gt;
{{NetworkGraph | title=교육구국운동.lst}}&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콘텐츠 구조===&lt;br /&gt;
====클래스(Class)====&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width:100%;&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0%&amp;quot;| 클래스|| style=&amp;quot;width:10%&amp;quot;|모양|| style=&amp;quot;width:20%&amp;quot;|내용 ||노드 &lt;br /&gt;
|-&lt;br /&gt;
|인물 ||인물의 사진 || 독립운동사에서 교육 운동에 이바지하였던 인물을 포함한 다양한 독립운동가들을 인물로서 클래스로 설정했다. || [[이동휘]] '''[[안창호(安昌浩)]]''' [[김원봉]] '''[[장제스]]''' 박용만 이갑성 스코필드 유기준 [[주시경]] [[지청천]] [[여운형]] 차미리사 김명시 남궁억 이동녕 이용익 김성수 신해영 [[강기덕]] 손병희 [[방정환]] 이종호 윤익선 염온동 주익 이세영 고종 순헌황귀비 박자혜 신채호 김종진 이정숙 이회영 김구 이석영 이상룡 윤기섭 이근영 한성순 양귀선 조병하 서문경 윤을희 이시영 박선봉 조금옥 '''[[양기탁(梁起鐸)]]'''&lt;br /&gt;
|-&lt;br /&gt;
|기관 || 빨간색 상자|| 부지를 두고 설치하여 활동했던 조직을 기관으로 설정했다. ||연희전문학교 세브란스 배재학당 배화학당 보성전문학교 명신여학교 '''[[한인소년병학교]]''' 대조선국민군단사관학교 '''[[조선혁명간부학교]]''' 신흥무관학교 숭무학교 신흥강습소 동아일보&lt;br /&gt;
|-&lt;br /&gt;
|단체 || 파란색 원 ||기관보다 넓은 의미로서, 같은 뜻을 가지고 함께 활동했던 조직체를 단체로 설정했다. || [[신민회(新民會)]] 협성회독립협회 '''[[한국광복군]]''' '''[[조선의용대]]''' 조선의용군 화북조선독립동맹 대한민국임시정부 간우회 조선어학회 대한인국민회&lt;br /&gt;
|-&lt;br /&gt;
|지역 || 초록색 타원|| 각 기관과 단체가 위치하거나 기관이나 단체, 인물이 활동했던 곳을 지역으로서 클래스를 설정했다. || 미국, 한반도, 난징, 멕시코, 캐나다, 상해, 만주, 중국&lt;br /&gt;
|-&lt;br /&gt;
|활동_및_사건 || 분홍색 타원 ||각 기관이나 단체, 인물의 행동 및 사건을 묶어 활동_및_사건의 클래스를 설정했다. || '''[[브나로드 운동]]''', 민립대학 설립 운동, 3.1운동, 6.10 학생 만세운동, 1920년 3.1 학생 운동, 서울 지역 학생 독립운동&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신다정]]&lt;br /&gt;
&lt;br /&gt;
====관계성(Relation)====&lt;br /&gt;
&lt;br /&gt;
'''인물 중심 관계성 설정''' &lt;br /&gt;
* '''설립했다''' 인물 → 기관, 단체 : 기관 또는 단체의 설립에 기여함을 설명하는 relation이다. &lt;br /&gt;
* '''지원했다''' 인물 → 기관, 단체, 활동 및 사건 : 단체, 기관, 활동 및 사건을 직접적으로 주도한 것은 아니나 보조적으로 지원했음을 설명하는 relation이다. 단체의 활동이나 기관의 설립 및 활동, 활동 및 사건의 전개의 지원을 모두 포괄하는 설명이다. &lt;br /&gt;
* '''출신이다''' 인물 → 기관, 단체, 지역 : 인물이 기관, 단체, 나라의 출신임을 나타내는 relation이다. 지역의 경우, 해당 인물의 국적을 의미하며 외국인의 경우에만 해당 relation을 사용해 국적을 나타냈다. &lt;br /&gt;
* '''활동했다''' 인물 → 활동 및 사건 : 인물이 특정 활동 및 사건에 주도적으로 활동했음을 나타내는 relation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기관 중심 관계성 설정'''&lt;br /&gt;
* '''소속이다''' 기관, 단체 → 인물 : 인물이 기관의 소속임을 나타내는 relation이다. 기관의 경우 교육기관을 주로 다루기 때문에, 교육기관에 재학하였던 경우에는 '출신이다.' relation을 사용하였고 교직원 등으로 재직한 경우에는 해당 relation을 사용하여 구분하였다. &lt;br /&gt;
* '''위치하다''' 기관→지역 : 기관이 특정 지역에 위치하였음을 나타내는 relation이다. 위치를 옮긴 기관의 경우 위치했던 지역에 모두 해당 relation을 사용하여 연결했다. &lt;br /&gt;
* '''발전했다''' 기관, 단체 → 기관, 단체 : 특정 기관 및 단체가 다른 기관 및 단체로 발전함을 설명하는 relation이다.  &lt;br /&gt;
* '''계승했다''' 기관, 단체 → 기관, 단체 : 기관 및 단체가 다른 기관 및 단체로 계승함을 설명하는 relation이다. 계승한 쪽을 종속 노드로 설정하였으나, 화살표 방향을 inverse로 설정해 '발전했다.' relation과 차이를 두었다.&lt;br /&gt;
&lt;br /&gt;
====온톨로지 기여====&lt;br /&gt;
[[김윤]]&amp;lt;br/&amp;gt;&lt;br /&gt;
[[신다정]]&amp;lt;br/&amp;gt;&lt;br /&gt;
[[이민희]]&amp;lt;br/&amp;gt;: 군사교육 중 조선혁명간부학교, 한인소년병학교,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 관련 노드 및 관계성 정리, 인물 사진 삽입&lt;br /&gt;
&amp;lt;br/&amp;gt;&lt;br /&gt;
[[최용빈]]&amp;lt;br/&amp;gt;&lt;br /&gt;
[[헤르미온느]]: 민족사학 관련 노드 및 관계성 정리, 인물 사진 삽입, 노드 색 및 모양 지정, 인물 하이퍼링크&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교육기관 지도&amp;lt;ref&amp;gt;가급적 최초 설립 위치를 기준으로 작성하였지만 초기 설립 시 다른 학교의 교사에 있다 교사를 이전한 경우 해당 위치로 표기함.&amp;lt;/ref&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src=&amp;quot;https://www.google.com/maps/d/embed?mid=1cI0D_B0oG-xrdk5kcPVCnLJ2hJpOJZw&amp;amp;ehbc=2E312F&amp;quot; width=&amp;quot;640&amp;quot; height=&amp;quot;480&amp;quot;&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기타==&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참고문헌===&lt;br /&gt;
1. 민족사학 발전과정 연대기 설명 내용&lt;br /&gt;
*「원산학사 (元山學舍)」,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0700, 접속일: 2024. 12. 9.&lt;br /&gt;
*「흥화학교(興化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6074, 접속일: 2024. 12. 9.&lt;br /&gt;
*「중교의숙(中橋義塾)」,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3699, 접속일: 2024. 12. 9.&lt;br /&gt;
*「순성학교 (順成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1901, 접속일: 2024. 12. 9.&lt;br /&gt;
*「점진학교(漸進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9857, 접속일: 2024. 12. 9.&lt;br /&gt;
*「낙연의숙(落淵義塾)」,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1639, 접속일: 2024. 12. 9.&lt;br /&gt;
&lt;br /&gt;
*「한성법학교(漢城法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426, 접속일: 2024. 12. 9.&lt;br /&gt;
&lt;br /&gt;
*「양정고등학교 (養正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731, 접속일: 2024. 12. 9.&lt;br /&gt;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3433, 접속일: 2024. 12. 9.&lt;br /&gt;
*「보창학교(普昌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3546, 접속일: 2024. 12. 9.&lt;br /&gt;
*「서전서숙 (瑞甸書塾)」,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8159, 접속일: 2024. 12. 9.&lt;br /&gt;
*「진명여자고등학교 (進明女子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4673, 접속일: 2024. 12. 9.&lt;br /&gt;
*「중동고등학교 (中東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3729, 접속일: 2024. 12. 9.&lt;br /&gt;
*「휘문고등학교 (徽文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5832, 접속일: 2024. 12. 9.&lt;br /&gt;
*「숙명여자대학교 (淑明女子大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1800, 접속일: 2024. 12. 9.&lt;br /&gt;
*「숙명여자고등학교 (淑明女子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1799, 접속일: 2024. 12. 9.&lt;br /&gt;
*「양규의숙(養閨義塾)」,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426, 접속일: 2024. 12. 9.&lt;br /&gt;
*「서북협성학교 (西北協成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7788, 접속일: 2024. 12. 9.&lt;br /&gt;
*「사범학교 (師範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5642, 접속일: 2024. 12. 9.&lt;br /&gt;
*「대성학교(大成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4519, 접속일: 2024. 12. 9.&lt;br /&gt;
*「협동학교(協東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3491, 접속일: 2024. 12. 9.&lt;br /&gt;
*「동성고등학교 (東星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6589, 접속일: 2024. 12. 9.&lt;br /&gt;
*「장훈고등학교 (長薰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8403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8403, 접속일: 2024. 12. 9.&lt;br /&gt;
*「오산고등학교 (五山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8302, 접속일: 2024. 12. 9.&lt;br /&gt;
*「치문초등학교 (致文初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8358, 접속일: 2024. 12. 9.&lt;br /&gt;
*「명동학교(明東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8242, 접속일: 2024. 12. 9.&lt;br /&gt;
*「양원여학교(養原女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687, 접속일: 2024. 12. 9.&lt;br /&gt;
*「보인학교(輔仁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426, 접속일: 2024. 12. 9.&lt;br /&gt;
*「기호학교(畿湖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426, 접속일: 2024. 12. 9.&lt;br /&gt;
*「양산중학교(楊山中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426, 접속일: 2024. 12. 9.&lt;br /&gt;
*「서북협성학교(西北協成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426, 접속일: 2024. 12. 9.&lt;br /&gt;
&lt;br /&gt;
2. 민간단체의 교육 구국 운동&lt;br /&gt;
* 한관일. &amp;quot;한국 개화기 신민회의 교육구국 사상.&amp;quot; 교육과학연구 14.- (2000): 1-32.&lt;br /&gt;
* [출처: 민립대학설립운동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lt;br /&gt;
[[분류:독립운동사의 근간, 교육구국운동(敎育救國運動)]]&lt;/div&gt;</summary>
		<author><name>Matnyeom</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8F%85%EB%A6%BD%EC%9A%B4%EB%8F%99%EC%82%AC%EC%9D%98_%EA%B7%BC%EA%B0%84,_%EA%B5%90%EC%9C%A1%EA%B5%AC%EA%B5%AD%EC%9A%B4%EB%8F%99(%E6%95%8E%E8%82%B2%E6%95%91%E5%9C%8B%E9%81%8B%E5%8B%95)&amp;diff=52193</id>
		<title>독립운동사의 근간, 교육구국운동(敎育救國運動)</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8F%85%EB%A6%BD%EC%9A%B4%EB%8F%99%EC%82%AC%EC%9D%98_%EA%B7%BC%EA%B0%84,_%EA%B5%90%EC%9C%A1%EA%B5%AC%EA%B5%AD%EC%9A%B4%EB%8F%99(%E6%95%8E%E8%82%B2%E6%95%91%E5%9C%8B%E9%81%8B%E5%8B%95)&amp;diff=52193"/>
		<updated>2024-12-20T10:57:0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Matnyeom: /* 기획의도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개요==&lt;br /&gt;
[[파일:교육구국운동 표지.png|800px|가운데]]&lt;br /&gt;
&lt;br /&gt;
[[분류:신다정]]&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   text-align:center;&amp;quot;&amp;gt;기획의도===&lt;br /&gt;
&lt;br /&gt;
 조선의 독립운동사는 근대교육을 위한 노력과 함께 전개되어 왔다. 교육 운동은 독립 운동의 일환으로서 민중을 계몽하기도 하고, 여성 교육이 발전하여 개화 사상이 유입되기도 했으며, 가장 중요하게도 군사 교육을 통해 민족이 싸울 힘을 기르기도 했다. 우리 민족은 당면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기 위해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고, 배움에 대한 열정으로 일제강점기의 어둠을 헤쳐나갈 수 있었다. 학생들이 독립운동을 생각했을 때 교육을 가장 먼저 떠올리지는 않는 듯하다. 다만, 교육은 독립운동사의 핵심적인 부분을 뒷받침하는 지지대였다. 따라서, ''우리가 잘 몰랐던 독립운동사에서의 다양한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을 위키 페이지로 만들어 이들의 스토리를 전달'' 하고자 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이민희]]&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 text-align:center;&amp;quot;&amp;gt;팀원===&lt;br /&gt;
2023130036 김윤&lt;br /&gt;
2023131227 최용빈&lt;br /&gt;
2023131540 정혜나&lt;br /&gt;
2024130814 이민희&lt;br /&gt;
2024130911 신다정&lt;br /&gt;
&lt;br /&gt;
=='''교육구국운동(敎育救國運動)'''==&lt;br /&gt;
한국사에 있어서 개화기는 근대화를 추진하는 시기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개화기 교육은 종래 유학 경전 중심의 교육에서 탈피하여 신교육을 시작하는 전환기로 교육사적 의미가 있는 중요한 시기이다. 한국개화기 근대교육의 발전과정은 1880년대에서 1890년대까지 짧은 기간에 많은 변화와 개혁을 거듭하는 시기이다. 국가적으로 열강의 침략을 극복하고 신문화를 받아들여 개명하는 변혁기로 신교육 정착시키는 동시에 국권회복을 위한 교육구국운동을 통하여 민족독립을 전개하는 시기이다. &lt;br /&gt;
&lt;br /&gt;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 이후 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고 일본 통감부가 설치되어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 시기의 개화파를 계승한 애국계몽사상가들은 국권회복을 위해서는 자강지술을 고취하고, 실력을 배양하는 것이 선결과제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이것을 위해 청소년 교육, 민족산업의 육성, 각종 단체에 대한 단결 그리고 신교육을 위한 학교설립 등 광범위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를 교율(敎育)을 통해 나라를 구한다(救國)는 의미의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교육구국운동'''&amp;lt;/span&amp;gt;이라고 칭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신다정]] &lt;br /&gt;
&lt;br /&gt;
==교육기관 설립==&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민족설립 교육기관===&lt;br /&gt;
====민족사학의 의미 ====&lt;br /&gt;
'''1. 민족사학의 정의:''' 우리 민족이 설립한 교육 기관&amp;lt;br/&amp;gt;&lt;br /&gt;
본 위키 페이지에서는 민족사학(民族私學)을 '''외세나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교육기관과 구분되는 것'''으로서, 교육구국운동의 일환으로 일제강점기 전후에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우리 민족이 개인이나 사법인으로서 설립하여 경영하는 학교&amp;lt;/span&amp;gt;로 정의한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2. 민족사학의 정신 및 목적:''' 개화와 교육구국&amp;lt;br/&amp;gt;&lt;br /&gt;
민족사학의 정신과 목적은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개화&amp;lt;/span&amp;gt;와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교육구국&amp;lt;/span&amp;gt;으로 크게 두 가지 방향이 있다. 초기의 민족사학 설립 정신은 '''선진외국의 문화와 문물'''을 받아들여 나라를 개화하고 발전시키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었으나,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乙巳勒約)&amp;lt;ref&amp;gt;대한 제국 광무 9년(1905)에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기 위하여 강제적으로 맺은 조약. 고종 황제가 끝까지 재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인 무효의 조약이다.(표준국어대사전 정의)&amp;lt;/ref&amp;gt; 이후 '''교육 구국을 위한 인재 양성'''이란 민족적 희망에 기반하였다.&lt;br /&gt;
&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민족사학의 발전배경====&lt;br /&gt;
당시 개화파를 비롯한 다수 지식인은 나라를 진흥시키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함을 느끼고 있었다.&amp;lt;br/&amp;gt;&lt;br /&gt;
이와 같은 지식인들의 의식은 서재필이 『한국휘보(Korean Repository)』에 기고한 다음 글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amp;lt;br/&amp;gt;&lt;br /&gt;
{{Blockquote|정부는 국민의 실정을 알아야 하고 국민들은 정부의 목적을 알아야 한다. 정부와 국민 상호간의 이해를 갖도록 하기 위해서는 쌍방에 대한 교육뿐이다 … 교육 없이는 국민들이 정부의 좋은 의도를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교육 없이는 정부 관리들이 결코 좋은 법률을 만들지 못할 것이다.&lt;br /&gt;
|출처=서재필, 「오늘날 한국이 가장 필요로 하는 일」(What Korea needs most), 『한국휘보(Korean Repository)』, 1896.3.}}&amp;lt;br/&amp;gt;&lt;br /&gt;
&lt;br /&gt;
이러한 의식은 독립협회에서 발간한 『독립신문』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amp;lt;br/&amp;gt;&lt;br /&gt;
{{Blockquote|'''문명개화한 나라들에서들은 무론 남녀하고 학교에 가서 적어도 10년 동안에 각색 학문을 배운 후 비로소 세상에 나가''' … 조선 사람들은 겨우 배우는 것이 한문만 조금 배워 가지고 … 일본 같은 조그마한 나라가 싸움을 하여서 청국 병정 무찌르기를 풀 베는 것 같이 하고, 일본도 30년 전 같으면 나라 형세가 청국과 똑같았으니, 어찌 조그마한 나라가 청국 같은 큰 나라를 이기리오마는, 일본 사람들이 서양 각국이 부강한 곡절을 알고 곧 백성 교육하는 일을 힘써 … 당장에 적은 리(利)와 욕심을 내버리고 '''인민 교육하여 몇 해 후에는 조선도 남과 같이 되기를 바라노라'''&lt;br /&gt;
|출처=「논설」,『독립신문』1896년 4월 25일자.}}&amp;lt;br/&amp;gt;&lt;br /&gt;
위의 글들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이러한 지식인들의 자각이 민족사학 설립의 배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민족사학의 발전과정 ====&lt;br /&gt;
1800년대 후반부터 1910년 이전까지 주요 민족 주도로 설립된 교육기관의 설립 과정을 정리&amp;lt;ref&amp;gt;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민족독립운동사 국권수호운동Ⅱ Ⅳ. 국권수호를 위한 사회·문화운동 6. 사립학교의 구국운동 3) 민립학교 설립의 주체(https://db.history.go.kr/modern/level.do?levelId=hdsr_002_0010_0060_0030)의 데이터에 기반하여 자료 조사를 진행하였다. 자료조사를 통해 설립 연도가 일부 수정되었다.&amp;lt;/ref&amp;gt;하였다.&amp;lt;br/&amp;gt;&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xpvhRvJrqO8QmhwtXtUZhPRbrWskR7CqqsrToNpIPRE&amp;amp;font=Default&amp;amp;lang=ko&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amp;lt;br/&amp;gt;&lt;br /&gt;
이와 같이 1905년 이전에는 개화 및 신교육 도입 목적으로 1905년 이후에는 인재양성을 통한 교육구국을 목적으로 많은 교육기관이 설립되었다.&lt;br /&gt;
&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대표적 민족설립 교육기관====&lt;br /&gt;
아래의 표에서는 대표적인 민족설립 교육기관과 그 계승 현황을 정리하였다. &amp;lt;br/&amp;gt;&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hn:left;background:white;&amp;quot;&lt;br /&gt;
|+ [대표적 민족설립 교육 기관&amp;lt;ref&amp;gt;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민족독립운동사 국권수호운동Ⅱ Ⅳ. 국권수호를 위한 사회·문화운동 6. 사립학교의 구국운동 3) 민립학교 설립의 주체(https://db.history.go.kr/modern/level.do?levelId=hdsr_002_0010_0060_0030)의 데이터에 기반하여 자료 조사를 진행하였다. 자료조사를 통해 설립 연도 및 설립자가 일부 수정되었다.&amp;lt;/ref&amp;gt;]&lt;br /&gt;
! 교육기관명 || 설립일 || 설립자 || 계승&lt;br /&gt;
|-&lt;br /&gt;
|원산학교(元山學校) || 1883 || 덕원(德源)의 유지 || 원산소학교, 원산보통학교, 원산제일국민학교로 계승되며 1945년까지 지속됨&lt;br /&gt;
|-&lt;br /&gt;
|흥화학교(興化學校) || 1895. 11. 5. || 민영환(閔泳煥) || 1911년 폐교&lt;br /&gt;
|-&lt;br /&gt;
|중교의숙(中橋義塾) || 1896 || 민영기(閔泳綺) || 1906년 폐교&lt;br /&gt;
|-&lt;br /&gt;
|순성여학교(順成女學校) || 1898.12. || 찬양회(讚揚會) || 1905년 12월 31일 『대한매일신보』기사를 끝으로 신문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음&lt;br /&gt;
|-&lt;br /&gt;
|점진학교(漸進學校) || 1899 || 안창호(安昌浩) || .&lt;br /&gt;
|-&lt;br /&gt;
|낙연의숙(落淵義塾) || 1901 || 서광세(徐光世) || 1916년 폐교&lt;br /&gt;
|-&lt;br /&gt;
|한성법학교(漢城法學校) || 1905. 1. || 사회 유지 || 1905년 9월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가 법률학전문야학과를 신설하여 한성법학교 학생 20명을 인계받음 &amp;lt;ref&amp;gt; https://www.kunews.ac.kr/news/articleView.html?idxno=3765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양정의숙(養正義塾) || 1905. 2. 11. || 엄주익(嚴柱益) || 양정중학교(養正中學校)&lt;br /&gt;
|-&lt;br /&gt;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 1905. 4. 3. || 이용익(李容翊) || '''고려대학교(高麗大學校)'''&lt;br /&gt;
|-&lt;br /&gt;
|보창학교(普昌學校) || 1905. 5. || 이동휘(李東輝) || .&lt;br /&gt;
|-&lt;br /&gt;
|서전서숙(瑞甸書塾) || 1906 || 이상설(李相卨) || 1907년 폐교&lt;br /&gt;
|-&lt;br /&gt;
|진명여학교(進明女學校) || 1906. 4. ||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 진명여자고등학교(進明女子高等學校)&lt;br /&gt;
|-&lt;br /&gt;
|중동학교(中東學校) || 1906. 4. 2. || 신규식(申圭植) || 중동고등학교 (中東高等學校)&lt;br /&gt;
|-&lt;br /&gt;
|휘문의숙(徽文義塾) || 1906. 5. || 민영휘(閔泳徽) || 휘문고등학교(徽文髙等學校)&lt;br /&gt;
|-&lt;br /&gt;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 || 1906. 5. ||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 '''숙명여자대학교(淑明女子大學校)''', 숙명여자중학교(淑明女子中學校), 숙명여자고등학교(淑明女子高等學校)&lt;br /&gt;
|-&lt;br /&gt;
|양규의숙(養閨義塾) || 1906. 6. || 여자교육회(女子敎育會) || .&lt;br /&gt;
|-&lt;br /&gt;
|서우사범학교(西友師範學校) || 1907. 1. || 서우학회(西友學會) || 1908년에 서북협성학교(西北協成學校)로 개편됨&lt;br /&gt;
|-&lt;br /&gt;
|대성학교(大成學校) || 1907 || 안창호(安昌浩) || 1912년 폐교&lt;br /&gt;
|-&lt;br /&gt;
|협동학교(協東學校) || 1907 || 유인식(柳寅植)) || 1917년 폐교&lt;br /&gt;
|-&lt;br /&gt;
|소의학교(昭義學校) || 1907. 9. || 전경현(全景鉉), 민강(閔橿), 장경관(張敬寬) 등 || 동성고등학교 (東星高等學校)&lt;br /&gt;
|-&lt;br /&gt;
|장훈학교(長薰學校) || 1907. 11. 2. ||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 || 장훈고등학교 (長薰高等學校)&lt;br /&gt;
|-&lt;br /&gt;
|오산학교(五山學校) || 1907. 12. || 이승훈(李昇薰) || 오산고등학교 (五山高等學校)&lt;br /&gt;
|-&lt;br /&gt;
|기호학교(畿湖學校) || 1908. 6. 20. ||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 || 융희학교(隆熙學校)를 흡수하여 중앙중학교(中央中學校), 중앙고등학교(中央高等學校)로 발전함&lt;br /&gt;
|-&lt;br /&gt;
|양원여학교(養原女學校) || 1908. 6. || 여자보학원유지회(女子普學院維持會) || .&lt;br /&gt;
|-&lt;br /&gt;
|신명학당(新明學堂) || 1908. 2. || 김장호, 김홍식(金洪植) || 치문초등학교 (致文初等學校)&lt;br /&gt;
|-&lt;br /&gt;
|명동학교(明東學校) || 1908. 4. 27. || 김학연(金學淵) || 1925년 폐교&lt;br /&gt;
|-&lt;br /&gt;
|보인학교(輔仁學校) || 1908. 6. 8. || 보인학회(輔仁學會) || 보인고등학교(輔仁高等學校)&lt;br /&gt;
|-&lt;br /&gt;
|양산중학교(楊山中學校) || 1908. 10. || 김홍량(金鴻亮) ||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이상의 표에서 1910년 국권피탈 이전 설립된 민족설립 교육기관 중 적지 않은 수가 오늘날에도 현존하고 있는 중학교, 고등학교, 또는 대학교로 계승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10년 이후 많은 학교가 폐교 위기에 처한 것을 고려하였을 때, 이러한 계승은 민족설립 교육기관을 유지해 교육을 통해 나라를 구하고자 했던 당시 사람들의 투지와 열망에 대한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보성전문학교와 명신여학교====&lt;br /&gt;
1910년 이전까지 민족 주도로 설립된 교육 기관 중 주요하게 살펴보아야 할 기관으로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와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가 있다. 보성전문학교는 이용익(李容翊)이 고종의 허가 하에 설립하였고, 명신여학교는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의 지원으로 설립되었음을 고려할 때, 모두 황실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사립 교육기관으로 보기는 힘들다는 한계는 존재한다. 그러나, 1910년 이전에 설립된 학교가 폐교의 절차를 밟지 않고 이어져 오늘날까지 계승되었다는 사실이 가지는 의미는 적지 않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1910년 이후 많은 학교가 일제의 강압 아래 폐교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 두 학교의 경우 대부분의 학교가 중등교육기관으로 계승된 것과는 구분되어 '''고등교육기관으로 발전한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나아가, 보성전문학교 설립을 기점으로 '교육 구국'을 목적으로 한 민족 사학의 설립이 활성화되었다는 점과 명신여학교의 경우 민족이 설립한 많지 않은 여성 교육기관 중 하나였다는 점 역시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lt;br /&gt;
보성전문학교는 1905년 04월 03일 고종(高宗)의 재정적 후원을 받아 [[이용익李容翊]]에 의해 설립된 교육기관이다. &amp;lt;br/&amp;gt;&lt;br /&gt;
보성전문학교의 설립 배경은 설립자 이용익의 행보에서 엿볼 수 있다. 친로반일(親露反日)의 뜻 고수한 것과 조선의 중립 선언을 선언하게 한 것으로 인해 일본에 의해 납치된 이용익은 체류 중 일본의 '''근대교육기관 및 개화문물을 접한다'''. 이것이 그의 교육기관 설립의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이후 귀국할 때 '''다수의 도서와 인쇄기를 구매'''하여 가지고 온 점 역시 이러한 추측의 설득력을 높인다. &amp;lt;br/&amp;gt;&lt;br /&gt;
한편, 보성전문학교의 개교를 알리는 황성신문(皇城新聞)의 글에는 보성전문학교 설립이 그 당시에 가졌던 의미가 잘 드러나고 있다. &amp;lt;br/&amp;gt;&lt;br /&gt;
{{Blockquote|전문학교 창설. '''대한에 전문대학교는 아직 세워지지 못했다. 한성법학교(漢城法學校)가 세워졌으나 야학(夜學)이라 완전하지 못했는데, 박동(礴洞)에 신설한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는 위치가 전문대학 주간 학교로''' 대황제폐하께서 특별히 설립하신 바, 매월 수천원의 경비를 내탕전(內帑錢)으로 내려주고 도서관을 부설하여 각 전문 교과서 수천권을 새로 간행한다 한다. 그리고 신해영(申海永)·조제환(趙齊桓)·정영택(鄭永澤) 세 명에게 이상의 사무를 전담하도록 하여, 위 3명은 교육을 열심히 하여 황제의 뜻에 보답하기위해 더욱 극진하게 힘을 쓴다고 한다. 20여명의 교수는 일찍이 일본에 유학하여 졸업한 사람들을 임용하여 (중략) '''2개년 졸업기한이지만 인재를 빨리 양성하도록''' 황제의 뜻을 특별히 내리셨다하고, 오늘부터 개교한다고 한다.&lt;br /&gt;
|출처=『황성신문(皇城新聞)』 1905년 4월 1일자 2면. 현대어역: 고려대학교 도서관&amp;lt;ref&amp;gt;https://library.korea.ac.kr/datause/archiving/old-book-exhibition/release/?mod=document&amp;amp;uid=10653&amp;lt;/ref&amp;gt;}}&lt;br /&gt;
윗글에서 당시 대한제국에 중등교육기관은 존재했음에도 고등교육을 위한 기관은 야학의 형태로서만 존재하여 온전하지 못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당시 상황 속에서 이용익이 일본의 교육 현황을 접한 후 대한제국 고등교육기관의 필요성을 느껴 설립하려 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고등교육기관 설립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맞춰 등장한 학교라는 점에서 보성전문학교가 가지는 가치는 매우 크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1910년 이후 다른 학교와 마찬가지로 보성전문학교는 운영진 및 교장의 망명, 투옥과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운영난을 겪는 등 각종 수난을 겪는다. 이후 일제의 탄압 아래 격하되거나 교명을 바꾸고 학과 설립이 제한되는 등 여러 차례 존속의 고비를 넘긴다. 하지만 끊임없는 노력을 바탕으로 1921년 전문학교로 다시 승격되었으며 여러 위기를 거친 끝에 해방 후 고려대학교로 발족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lt;br /&gt;
명신여학교는 1906년 5월 22일 고종(高宗)의 후궁인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의 지원으로 왕실 별궁 용동궁에 설립된 교육기관이다. &amp;lt;br/&amp;gt;&lt;br /&gt;
순헌황귀비는 본디 교육, 특히 여성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명신여학교의 설립에 앞서 1906년 4월에 진명여학교(進明女學校)를, 1907년에 경영난에 처해 있던 양정의숙(養正義塾)을 도운 점에서 잘 드러난다. &amp;lt;br/&amp;gt;&lt;br /&gt;
한편, 당시 여성 교육 관련 배경은 다음과 같다. 앞서 기술된 바와 같이 1905년 을사늑약 전후로 교육구국이 일어나 전국 각지에서 민족사학이 설립되었으나 여성을 위한 교육기관은 부족한 실태였다. 당시 설립된 여성 교육기관으로는 이화학당, 정신여학교, 숭의학교 등이 있었으나 이는 모두 선교사, 즉 민족에 의해 설립된 학교가 아니었다.&amp;lt;ref&amp;gt;한희숙, 구한말 순헌황귀비 엄비의 생애와 활동, 아시아여성연구, 숙명여자대학교 아시아여성연구원, 제45집 2호, 2006&amp;lt;/ref&amp;gt;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여성 교육기관의 필요'''를 절감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 것은 순헌황귀비의 시대적 통찰력을 반영하는 부분이다. &amp;lt;br/&amp;gt;&lt;br /&gt;
위와 같은 순헌황귀비의 설립 목적은 대한매일신보의 글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amp;lt;br/&amp;gt;&lt;br /&gt;
{{Blockquote|황귀비 흥학:  황귀비 전하께오서 여자 교육이 없음을 크게 걱정하여 육군참장 엄주익씨 집(第)에 여학교를 설립하여 '''여자교육을 발달시키고자''' 하였다.  엄주익에게 학교 설립 일을 전담하게 하시니 '''대한여자의 교육이 앞으로 발달하기를''' 가히 볼 수 있을 지로다. &lt;br /&gt;
|출처=『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6년 4월 24일자&amp;lt;ref&amp;gt;한희숙, 구한말 순헌황귀비 엄비의 생애와 활동, 아시아여성연구, 숙명여자대학교 아시아여성연구원, 제45집 2호, 2006, 227쪽.&amp;lt;/ref&amp;gt;}}&lt;br /&gt;
광복 후 명신여학교는 숙명여자중학교(淑明女子中學校)와 숙명여자고등학교(淑明女子高等學校)로 이어졌다. 나아가, 여성 고등교육기관의 설립을 꿈꾼 교장 이정숙(李貞淑)의 뜻에 따라 1938년 숙명학원(淑明學園)에서 숙명여자전문학교를 설립하였고, 이것이 오늘날 숙명여자대학교(淑明女子大學校)로 계승되었다.&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선교사 설립 교육기관===&lt;br /&gt;
선교사들은 기독교 선교의 기반 구축을 위해 개화정책 추진 초기인 1880년대부터 고종의 각별한 관심과 지원 속에서 많은 학교를 설립하였다.  서울에 배재·이화·경신학교를 설립하였고, 기독교 선교금지정책이 이완되기 시작한 1890년대에는 지방도시로 그 범위를 넓혀 1894년 평양의 광성학교·숭덕학교·정의여학교, 1895년 서울의 정신여학교를 비롯하여 동래·인천·재령·목포·원산·개성·해주·공주·대구 등 전국 각지로 확대하였다.&lt;br /&gt;
&lt;br /&gt;
====[[연세대학교(延世大學校)]]====&lt;br /&gt;
&lt;br /&gt;
연희전문학교는 1915년 선교부연합위원회의 협의를 얻어서 북장로회 선교사인 언더우드가 조선기독교학교로 처음 설립하였다. 이후 1917년 연희전문학교로 발족하였다. 보성전문학교 이후 두 번째로 설립된 전문학교이다. 이후 3.1 운동등 다양한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1944년 일제가 경영권과 재산을 몰수하고 한국인 교수진들을 모두 추방했었다. 독립 후에는 연희대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대학교로 승격하였다.&lt;br /&gt;
&lt;br /&gt;
세브란스는 대한제국의 궁정어의였던 알렌에 의해 1885년에 설립된 제중원에서 시작하였고, 1886년부터 제중원 내 의학부를 두고 입학생을 받았다. 이후 병원장으로 취임한 선교사 에비슨이 1899년 조선 최초의 의학교인 제중원의학교를 설립하였다. 1904년 미국인 세브란스의 후원으로 세브란스 병원이 세워지며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로 개편하였다. 1906년에 간호부가 개설되었고 우리나라 최초의 간호사를 배출하였다. 세브란스와 연희전문학교 간의 병합은 1920년대에도 한차례 시도한 바 있었으나 무산되었고, 독립 후 1957년에 두 학교가 통합되어 '''연세대학교'''로 출범하였다.&lt;br /&gt;
&lt;br /&gt;
====[[배재학당]]====&lt;br /&gt;
&lt;br /&gt;
1885년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한국 최초의 근대식 사립학교로 중등과정을 담당했다. 1886년이 고종이 배재학당이라는 이름을 사하였고 미국인들의 후원을 받아 1887년에 제대로 된 건물을 세웠다. 영어교육을 중점적으로 행했으며 학생자조정책을 채택하여 가난한 학생들이 학교에서 일을 하며 수업료를 벌 수 있도록 하였다. 현재 기존의 건물은 2008년부터 배재학당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배재중학교, 배재고등학교, 배재대학교'''가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lt;br /&gt;
&lt;br /&gt;
====[[배화학당]]====&lt;br /&gt;
초,중등과정의 사립학교로 1898년 켐벨 선교사가 설립하였다. 처음엔 캐롤라이나학당으로 기독교전파와 여성교육을 목표로 세웠졌다. 1910년 배화학당으로 개칭하였다.1916년 1월 경성 누하동(지금의 서울 종로구 필운동)으로 교사를 이전하고, 1926년 12월 캠블기념관을 신축하였으며, 1938년 3월 배화고등여학교와 배화여자소학교로 분리,개편되었다. 일제의 신사참배요구를 거절한 기독교 학교 중 하나이다. 1940년대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선교사들도 학교를 떠나며 위기에 폐교 위기에 봉착했다. 학교가 경영난에 시달리자 일제는 학교의 운영권을 요구했으나, 당시 교사였던 이덕봉과 이만규가 독지가를 구하려 노력한 끝에 이민천이 춘천, 이천, 연기, 익산 등지에 있는 토지를 기부하여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독립 후 1951년 '''배화여중과 배화여고'''로 분리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김윤]]&lt;br /&gt;
&lt;br /&gt;
=='''민간 단체의 교육 운동'''==&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신민회(新民會)]]의 애국계몽운동===&lt;br /&gt;
&amp;lt;br/&amp;gt;&lt;br /&gt;
{{Blockquote| '''신민회 행동강령'''&lt;br /&gt;
1. 국민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사상 고취 &amp;lt;br /&amp;gt; 2. 동지를 발하고 단합하여 국민 운동 역량 축적 &amp;lt;br /&amp;gt; 3. 상공업 기관 건설로 국민의 부력(富力) 증진 &amp;lt;br /&amp;gt; 4. 교육 기관 설립으로 청소년 교육 진흥&lt;br /&gt;
|출처= 「헌기제501호, 「대한 신민회 취지서 및 동회 통용 장정 등 보고 건」, 1909년 3월 5일(국사편찬위원회, 『통감부문서』 6, 1991}}&lt;br /&gt;
&lt;br /&gt;
신민회(新民會)는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1907년에 [[안창호(安昌浩)]], [[양기탁(梁起鐸)]] 등의 주도로 결성된 항일 비밀결사&amp;lt;/span&amp;gt;이다. 위와 같은 신민회의 행동 강령을 바탕으로 신민회는 실력 양성을 통한 국권 회복을 주장하며, 교육, 언론 및 출판, 민족 산업 육성, 독립군 양성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lt;br /&gt;
&lt;br /&gt;
신민회는 실력 배양의 방법으로 교육 구국 운동을 두 가지 측면에서 전개하였다. 국민에게 국권회복을 위한 교육의 필요성을 계몽하여 학교설립을 고취하며 신민회도 학교를 설립하여 국권회복에 필요한 적합한 교육방침을 강구하여 민족 지도자를 양성한다는 것이다. 또한, 국외에서 독립군 기지를 창설하고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전쟁을 일으켜 국권을 회복한다는 것이다. &lt;br /&gt;
&lt;br /&gt;
신민회는 이를 위해 민중들이 설립한 학교에 대해 학교교육방침을 지도하였다. 또한, 중학교를 설립하고, 학교의 모범을 만들며 중학교에서 동시에 사범교육을 해 교사를 양성한다는 기준을 세우고 학교를 설립하였다. 당시 민간인이 자발적으로 기금을 갹출하여 설립한 학교는 대부분이 소학교였기 때문에, 신민회는 중학교를 설립하여 소학교 출신 청소년들이 더 양질의 교육을 통해 민족지도자로 발돋움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lt;br /&gt;
&lt;br /&gt;
신민회는 기본적으로 비밀결사이기 때문에 그들이 설립한 학교의 수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1907년부터 1909년 4월까지 민간인들에 의해 세운 학교가 3000여 개교에 달한다는 통계로 보아 신민회에서 세운 학교가 많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알려진 신민회가 설립한 학교는 다음과 같다.&lt;br /&gt;
&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hn:left;background:white;&amp;quot;&lt;br /&gt;
|+ [신민회가 설립한 학교]&lt;br /&gt;
! 학교명 || 설명 &lt;br /&gt;
|-&lt;br /&gt;
| '''대성학교'''|| [[안창호(安昌浩)]], 윤치호 평양에 설립. 신민회가 설립한 대표적인 민족 사학으로 입학 지원자가 500~600여 명이 되는 때도 존재. &lt;br /&gt;
|-&lt;br /&gt;
| '''오산학교'''|| 평안북도 정주군에 이승훈 설립. 김소월, 백석, 이중섭, 독립운동가 김홍일 중장 등을 배출. 현재 서울 오산고등학교로 계승됨&lt;br /&gt;
|-&lt;br /&gt;
| 점진학교|| 평안남도 강서 위치, [[안창호(安昌浩)]] 설립. 남녀공학을 실시한 최초의 소학교. &lt;br /&gt;
|-&lt;br /&gt;
| 보창학교 || 강화도 위치, 이동휘 설립&lt;br /&gt;
|-&lt;br /&gt;
| 신안학교 || 정주, 신민회 정주지회 회원 설립&lt;br /&gt;
|-&lt;br /&gt;
| 양실학교 || 의주, 신민회 의주/용천지회 회원 설립&lt;br /&gt;
|-&lt;br /&gt;
| 가명학교 ||  신민회 납청정지회 회원 설립&lt;br /&gt;
|-&lt;br /&gt;
| 신흥학교 || 선천, 중학교급 학교&lt;br /&gt;
|-&lt;br /&gt;
| 홍양학교 || 신민회 곽산지회 회원 &lt;br /&gt;
|-&lt;br /&gt;
| 명륜학교|| 함경남도 영흥읍에 있던 세 개 학교 통합, 이동휘 설립&lt;br /&gt;
|-&lt;br /&gt;
| 경성학교|| 함경북도 경성 위치&lt;br /&gt;
|-&lt;br /&gt;
| 양산학교|| 황해도 안악읍 향천자리, 김용제 설립, 신민회가 중학교로 개편&lt;br /&gt;
|-&lt;br /&gt;
| 오성학교 || 서울 위치, 이갑, 이종화 설립. 신민회 창건 후 각종학교인 서북협성학교로 개편&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신민회의 애국계몽은 학교 설립뿐만이 아니라 학회의 설립과 지도를 통해서도 추진되었다. 안악군면학회(安岳郡勉學會), 해서교육총회(海西敎育總會),평양청년권장회(平壤靑年勸?會), 연학회(練學會), 동제회(同濟會)등의 학회를 전국에 조직하는 데에 앞장섰다. 또한, 서우학회, 한북학회를 서북학회로 통합 재조직하는 등, 기존에 있던 학회의 통합과 재정비에도 이바지하였다. &lt;br /&gt;
&lt;br /&gt;
이와 같이 신민회의 교육계몽운동은 신민회가 1912년 105인 사건으로 해산될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그 이후에도 다른 독립운동단체에 영향을 미쳐 교육을 통한 민중 계몽으로 이루어지는 독립운동의 방향성을 제시하였다.&lt;br /&gt;
&lt;br /&gt;
[[분류:신다정]]&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농촌 계몽 운동===&lt;br /&gt;
&lt;br /&gt;
농촌 계몽 운동은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1920년대~1930년대 민족 운동과 관련한 청년 학생이나 지식층이 농민의 의식과 지식 등을 계몽하기 위해 농촌 사회에서 행한 사회 교육 운동&amp;lt;/span&amp;gt;을 의미한다. 농사일을 끝낸 후 강연회, 토론회, 야학 등의 형식으로 이루어졌으며 특히 농한기인 겨울에 많이 실시되었다. &lt;br /&gt;
&lt;br /&gt;
1920년에는 일제의 식민 지주 경영과 지주 착취로 인해 농민 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고, 이와 맞물려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이 결성되었다. 이때 사회주의 계열 청년 단체와 지식인들이 농촌으로 진출하여 농민 운동을 주도하였다. &lt;br /&gt;
민족주의 계열에서 주도한 농촌 운동은 문맹 퇴치와 생활 개선 등의 계몽적 활동이 중심이었다. 대표적으로 천도교 계열의 농촌 운동, 기독교 계열의 농촌 운동이 있다. 천도교는 1925년 조선농민사를 설립하여 농민 야학을 시행하고 전국적으로 농민에 대한 계몽 활동을 전개하였다. 기독교에서는 1926년 이후 학생 YMCA 농촌부를 중심으로 계몽 활동을 적극 추진하였다. &lt;br /&gt;
&lt;br /&gt;
1920년 후반부터 1930년대에는 언론사 또한 농촌 계몽 운동에 힘을 쏟았다. 대표적으로 1929년부터 1935년까지 이루어진 조선일보사의 문자 보급 운동과 1931년부터 1934년까지 이루어진 동아일보사의 [[브나로드 운동]]이 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이런 농촌 계몽 운동은 1930년대 들어 강화된 조선총독부의 조선어 사용 금지 정책과 지방 농촌의 몰락으로 인해 쇠퇴하였다. 또한, 농촌의 몰락 책임을 수탈 때문이 아닌 농민의 게으름과 무지에 있다며 총독부의 주도로 농촌진흥운동을 진행하며 민간 및 언론 단체의 농촌 계몽 운동을 탄압하였다. 그러나 이런 탄압 속에서도 농촌 계몽 운동은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이러한 민간 교육 활동 및 정책은 해방 이후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문맹 퇴치 운동으로 이어졌다.&lt;br /&gt;
&lt;br /&gt;
[[분류:신다정]]&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민립 대학 설립 운동===&lt;br /&gt;
&lt;br /&gt;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은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1920년대 이루어진 민족 사학 설립 운동&amp;lt;/span&amp;gt;이다.&lt;br /&gt;
&lt;br /&gt;
1920년대 초 식민지 조선에서는 민중의 자발적인 참여하에 조선인을 위한 대학을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등장하였다. 민립 대학 설립에 대한 논의는 1920년 6월 20일 한규설, 이상재, 윤치소 등 91년의 발기로 조선교육회 발기회가 개최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가 학회령을 토대로 1922년 1월 24일까지 인가를 내주지 않아 민립대학 설립에 대한 결의를 실행시키지 못했다. &lt;br /&gt;
&lt;br /&gt;
동아일보에 기고된 사설을 통해 당시의 독립을 위한 교육 계몽의 필요성과, 관립 대학과 다르게 민립 대학의 설립 필요성에 관해 확인할 수 있다. &lt;br /&gt;
&lt;br /&gt;
{{Blockquote|운명을 어떻게 개척할까. 정치냐 외교냐 산업이냐. 물론 이러한 일들 모두 다 필요하다. 그러나 그 기초가 되고 요건이 되며 가장 급무가 되고 가장 선결의 필요가 있으며 가장 힘 있고 '''가장 필요한 수단은 교육이 아니면 할 수 없다.''' &amp;lt;br /&amp;gt; … 물론 관립대학도 조만간 개교될 것이기에 대학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학문 발전의 장래는 결코 1개의 대학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요, 또한 '''그처럼 중대한 사업을 우리 민중이 직접으로 영위하는 것은 차라리 우리의 의무라 할 수 있다.''' &amp;lt;br /&amp;gt;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에 느낀 바 있어 감히 만천하 동포에게 향하여 민립대학의 설립을 제창하니 자매형제는 와서 돕고 나아가 이루어라.'''&lt;br /&gt;
|출처= 「開會된 民大總會」, 『동아일보』, 1923년 3월 30일자.}}&lt;br /&gt;
&lt;br /&gt;
이렇게 고양된 민립 대학 설립을 통한 민족 교육에 대한 필요성을 바탕으로, 1922년 1월 이상재, 이승훈, 윤치호, 김성수, 송진우 등이 조선민립대학기성준비회를 정식으로 결성하였다. 이어 1923년 3월 29일 발기인 1170명 중 462명이 참석한 가운데 3일간 총회를 개최하였다. &lt;br /&gt;
&lt;br /&gt;
총회에서는 ＇민립대학발기취지서＇를 채택하고 대학 설립 계획서를 확정하였다. 계획서에 따르면 3개년 계획으로 자본금 1000만원을 갹출하는데, 제 1차 연도에는 대지 5만 평을 구입하여 교실 10동, 대강당 1동을 건축하고, 법과/경제과/문과/이과의 4개 대학 및 예과를 설치하며, 제2차 연도에는 300만원으로 공과/이과/기타 학과를 증설하고, 제3차 연도에는 300만원으로 의과/농과를 설치한다는 것이다. 또 중앙집행위원회를 구성하고 지방에 지방부를 두기로 결의하였다. 별도로 지방순회선정위원 13평을 선정하고 파견하였다. 이와 같은 노력을 토대로 1923년 말까지 전국 100여 개소와 해외의 만주 간도, 봉천, 미국 하와이 등지에도 지방부가 조직되었다. &lt;br /&gt;
&lt;br /&gt;
기성회는 ＇한민족 1000만 한 사람 1원씩＇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기금 모금에 나섰다. 이런 모금 활동에 민족 교육을 성원하는 마음들이 모였는데, 대표적으로 전라남북도에서만 15만원이 모금되었으며 경기도 안성의 이정도는 1년 동안 매일 아침 밥짓는 쌀에서 식구 수 대로 한 숟가락씩 모아 판 돈 19원을 기부하는 등 일반 민간에서의 성원도 뜨거웠다. &lt;br /&gt;
&lt;br /&gt;
이와 같은 열기에 일제는 이를 교육 운동이 아니라 정치 운동이라고 판단하고 탄압하였다. ＇조선교육령＇을 개정하여 관립 경성제국대학의 설립을 서두르고 민립대학과 관련 있는 인사들에 대한 탄압과 기금 갹출 방해 공작을 전개하였다. 민립대학기성회 인사들을 민족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구실로 철저히 감시하고, 기금 모집을 위해 박차를 가하던 인사들의 지방 강연을 배일사상을 고취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강연 중지를 명하고 청중을 해산시켰다. &lt;br /&gt;
&lt;br /&gt;
이러한 조선총독부의 탄압이 민립대학 설립운동의 실패의 주된 원인이 되었다. 1923년 여름 수재, 9월 일본 관동 대지진으로 인한 경제 공황, 1924년 한재와 7월 전국적 수재로 인한 농촌 경제 파탄 등 자연적인 여건도 민립대학 설립운동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그러나 3.1운동 이후 전 민족이 민족 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조직체를 형성하여 교육을 통한 자주독립이라는 하나의 목표에서 단결을 보였다. 이는 이후의 민족운동 양상에서 조직적인 단체 결성의 표본이 되었다.&lt;br /&gt;
&lt;br /&gt;
[[분류:신다정]]&lt;br /&gt;
&lt;br /&gt;
=='''군사 교육'''==&lt;br /&gt;
&lt;br /&gt;
독립운동사에서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군사 교육도 꾸준히 이어져왔다. 수많은 독립열사들은 무관학교 설립을 위한 활발한 활동을 이어왔다. 독립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역량은 군사였기 때문에, 군사교육은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였으며 이에 따라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에서도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노력이 나타났다.&lt;br /&gt;
&lt;br /&gt;
[[분류:이민희]]&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lt;br /&gt;
신흥무관학교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위해 설립된 군사학교로, 독립군 양성과 무장 투쟁 기반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911년 중국 만주 서간도 지역(현재의 지린성 류허현)에서 이회영, 이시영 등 독립운동가들이 설립했으며, 군사 지도자를 양성하고 실질적인 무장 독립운동을 준비하는 데 목적을 두었습니다. &lt;br /&gt;
&lt;br /&gt;
교육 내용은 사격, 전술, 지형 분석 등 실전 중심의 군사훈련과 함께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역사 및 애국사상 교육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졸업생들은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전투 같은 독립전쟁에서 활약하며 독립운동의 주축이 되었고, 김좌진과 이범석 같은 지도자를 배출했습니다. &lt;br /&gt;
&lt;br /&gt;
1920년대에 들어 일본의 탄압이 강화되면서 학교 운영이 점차 어려워졌고, 졸업생들이 각종 독립운동 조직으로 흩어지면서 신흥무관학교는 군사훈련소 형태로 전환되다가 결국 해체되었습니다. &lt;br /&gt;
&lt;br /&gt;
졸업생들은 만주 지역에서 서로군정서, [[북로군정서]]에서 핵심 간부로 활약, [[대한독립군]], 통의부의용군, 정의부, 신민부, 국민부 등에서 활동하였고,중국 본토에서는 1919년 11월 길림에서 의열단 결성,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에서 독립운동 전개했습니다.&lt;br /&gt;
&lt;br /&gt;
신흥무관학교는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군사교육 기관으로 평가받습니다. 이 학교는 독립군의 전투력을 강화하고, 독립운동의 실질적 기반을 마련했으며, 한국 독립운동의 전환점이 된 여러 전투에서 큰 공헌을 했습니다.&lt;br /&gt;
&lt;br /&gt;
[[분류:최용빈]]&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조선혁명간부학교]]===&lt;br /&gt;
&lt;br /&gt;
1919년 조직된 무장독립운동단체 의열단은 중국국민당과의 합작을 통해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실질적인 군사 교육 기관'''&amp;lt;/span&amp;gt;을 설립하고자 노력했다. 이에 따라 [[장제스]]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의열단&amp;lt;ref&amp;gt; 급진적인 항일 투쟁을 목적으로 1919년 11월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로, 김원봉(金元鳳)이 단장을 맡았다. &amp;lt;/ref&amp;gt;의 단장인 김원봉이 1932년 중국 난징에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설립하였다. 공식 명칭은 사실 조선혁명간부학교가 아닌, ''‘중국국민당 군사위원회 간부 훈련반 제6대’''로, 국민당의 단기간부훈련소 신설반인 것처럼 위장했다. &lt;br /&gt;
&lt;br /&gt;
&lt;br /&gt;
학교는 일본과 중국의 외교관계를 고려해 학교 운영 사실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설립 초기에는 중국 외교부와 육군참모본부, 심지어 군사위원회 판공청 당사자들조차 그 존재를 모를 정도였다. 만 3년간 운영된 조선혁명간부학교는 3기에 걸쳐 총 125명의 인재를 배출했다. 국민당은 그동안 매월 경상비 2,000~3,000원·수시 필요경비 1,000~1만 원·기타 운영비 400~1,000원 등 각종 운영자금 전액과 화기·탄약·피복 등을 지원했다. 학생들은 군사학뿐 아니라 별도 신설된 정치학, 자연과학을 포함해 경제학·사회학·철학·혁명학·물리학·화학·지리학까지 다양한 학문을 공부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혁명간부학교의 졸업생들은 이후 민족혁명당의 항일투쟁체계에 편입되었으며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대]]의 핵심 세력으로 성장하였고, 일부는 화북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에 가담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단체문서한국광복군.jpg|섬네일|가운데|''&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한국 광복군의 모습&amp;lt;/div&amp;gt;'']] &lt;br /&gt;
[[파일:조선의용대김원봉.jpg|섬네일|가운데|''&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조선의용대 모습 &amp;lt;/div&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amp;lt;font color=&amp;quot;#8c8c8c&amp;quot;&amp;gt;조선의용대 깃발 가운데 있는 인물이 약산 김원봉이다.&amp;lt;/font&amp;gt;''&amp;lt;ref&amp;gt;김삼웅, &amp;quot;최후까지 총을 든 조선의용대와 김원봉&amp;quot;, 오마이뉴스, 2024.02.06.,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999602 (검색일:2024년 12월 4일)&amp;lt;/ref&amp;gt;&amp;lt;/div&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이민희]]&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한인소년병학교]]===&lt;br /&gt;
&lt;br /&gt;
한인소년병학교는 장기적인 독립 투쟁을 대비하여 군사 교육을 받은 장교를 양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박용만에 의해 설립되었다. 한인소년병학교는 1909년 6월에 세워진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최초의 국외 설립 군사학교''&amp;lt;/span&amp;gt;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으며, 각지의 군사운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lt;br /&gt;
&lt;br /&gt;
&lt;br /&gt;
한인소년병학교는 미국의 헤이스팅스(Hastins) 대학과 교섭하여 운영되었으며, 네브라스카 주에서 설립되었으나 교섭에 따라 헤이스팅스로 이전하여 한인 유학생의 활발한 참여를 이끌어냈다. 헤이스팅스 대학은 건물 한 동과 전장을 지원하여, [[둔전병제]]식 훈련을 실시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헤이스팅스대학.png|섬네일|가운데|''&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헤이스팅스 대학의 모습 &amp;lt;/div&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amp;lt;font color=&amp;quot;#8c8c8c&amp;quot;&amp;gt;한인소년병학교 학생들이 훈련했던 헤이스팅스 대학의 사진이다.&amp;lt;/font&amp;gt;''&amp;lt;/div&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ftzi6pFWzNc?si=iGbjmKk9yPuAn_Ub&amp;quot; title=&amp;quot;YouTube video player&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div&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다음의 영상에서 한인소년병학교가 있었던 헤이스팅스 대학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다.'' &amp;lt;/div&amp;gt;&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lt;br /&gt;
&lt;br /&gt;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는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한 박용만이 미국의 하와이에도 같은 군사 훈련 단체를 설립하고자 하여 1914년 4월 15일 설립되었다. 당시 학도 수는 200여명으로 군단장 역시 박용만이 맡았다. &lt;br /&gt;
&lt;br /&gt;
&lt;br /&gt;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는 [[한인소년병학교]]를 계승하여 [[둔전병제]]식 훈련을 실시하였고, 군영이 호놀룰루 시의 동북 쪽 큰 산을 넘어 해안과 아후이마누 강을 낀 계곡에 위치하여 ''&amp;quot;산 넘어 아희들&amp;quot;''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lt;br /&gt;
하와이에서 군단과 사관학교를 설치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으나, 1916년을 고비로 점차 쇠퇴하여 1917년 경 해체되었고, 지역으로 흩어져 사실상 폐교되었다.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는 제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미일(美日) 간 우호관계가 지속되면서 국민군단의 혁명적이고 군사적인 성격이 하와이 내에서 우호적인 반응을 얻지 못하였고, 이외에도 하와이 내 농장의 불경기로 수입이 급감하면서 재정 조달이 어려웠으며 1915년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의 실권이 이승만 측에 넘어가 박용만의 활동 범위가 위축된 점 등으로 인해 폐교되었다고 추측되고 있다.&lt;br /&gt;
&lt;br /&gt;
[[분류: 이민희]]&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숭무학교(崇武學校)]]===&lt;br /&gt;
숭무학교는 1910년대 멕시코로 이주한 한인들이 일제강점기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한 군사학교입니다. 멕시코에 이주한 한인들은 고된 노동 속에서도 민족 독립의 열망을 잃지 않고 독립운동을 조직적으로 지원하고자 노력했습니다. 1915년 멕시코 유카탄주 메리다 지역에서 설립된 숭무학교는 독립군 양성을 목표로, 체계적인 군사훈련과 애국 사상 교육을 실시했습니다.&lt;br /&gt;
&lt;br /&gt;
이 학교는 멕시코 한인 사회의 독립운동 기반을 강화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특히 숭무학교는 한인들의 단결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멀리 해외에서조차 독립운동을 지속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큽니다. 이러한 활동은 멕시코뿐 아니라 미주 지역의 다른 한인 독립운동 단체에도 영향을 주어 독립운동의 글로벌 네트워크 형성에 기여했습니다.&lt;br /&gt;
&lt;br /&gt;
숭무학교는 해외 독립운동의 독특한 사례로, 한인 이민사와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lt;br /&gt;
&lt;br /&gt;
[[분류:최용빈]]&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독립군으로의 발전===&lt;br /&gt;
&lt;br /&gt;
군사교육을 위해 설립된 다양한 무관학교를 기점으로, 졸업생들은 각기 다른 곳에서 독립군으로 발전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의 경우, 졸업생들은 만주 지역에서 서로군정서, 북로군정서에서 핵심 간부로 활약했을 뿐 아니라, 대한독립군,통의부의용군, 정의부, 신민부, 국민부 등에서 활동하였다. 또한, 중국 본토의 경우에서는 1919년 11월 길림에서 의열단을 결성하기도 하고, 임시정부 산하의 광복군인 한국광복군의 일원으로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졸업한 졸업생들도 독립군으로서 활약하였다. 이들은 민족혁명당의 항일투쟁체계에 편입되었는데, 대표적으로 임시정부 산하의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대의 핵심 세력으로 성장했고, 일부는 화북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에 가담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한인소년병학교]]와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 숭무학교를 졸업한 졸업생들도 독립군으로 발전하였으나, 구체적으로 어떤 기관으로 발전하였는지는 크게 알려진 바가 없다. &lt;br /&gt;
&lt;br /&gt;
[[숭무학교(崇武學校)]]는 일부 학생들은 멕시코 혁명에 참여하기 위해 군에 입대하였다.  일부 설립자들은 과테말라 혁명에 참여하려 했으나 실패로 끝났다.&lt;br /&gt;
&lt;br /&gt;
[[분류: 이민희]]&lt;br /&gt;
&lt;br /&gt;
==데이터 시각화==&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마인드맵===&lt;br /&gt;
[[파일:교육구국운동_노드_마인드맵.png|500픽셀]]&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온톨로지===&lt;br /&gt;
인물의 경우 관련 공훈전자사료관,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인명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의 관련 링크를 삽입하여 추가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하였다.&lt;br /&gt;
{{NetworkGraph | title=교육구국운동.lst}}&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콘텐츠 구조===&lt;br /&gt;
====클래스(Class)====&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width:100%;&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0%&amp;quot;| 클래스|| style=&amp;quot;width:10%&amp;quot;|모양|| style=&amp;quot;width:20%&amp;quot;|내용 ||노드 &lt;br /&gt;
|-&lt;br /&gt;
|인물 ||인물의 사진 || 독립운동사에서 교육 운동에 이바지하였던 인물을 포함한 다양한 독립운동가들을 인물로서 클래스로 설정했다. || [[이동휘]] '''[[안창호(安昌浩)]]''' [[김원봉]] '''[[장제스]]''' 박용만 이갑성 스코필드 유기준 [[주시경]] [[지청천]] [[여운형]] 차미리사 김명시 남궁억 이동녕 이용익 김성수 신해영 [[강기덕]] 손병희 [[방정환]] 이종호 윤익선 염온동 주익 이세영 고종 순헌황귀비 박자혜 신채호 김종진 이정숙 이회영 김구 이석영 이상룡 윤기섭 이근영 한성순 양귀선 조병하 서문경 윤을희 이시영 박선봉 조금옥 '''[[양기탁(梁起鐸)]]'''&lt;br /&gt;
|-&lt;br /&gt;
|기관 || 빨간색 상자|| 부지를 두고 설치하여 활동했던 조직을 기관으로 설정했다. ||연희전문학교 세브란스 배재학당 배화학당 보성전문학교 명신여학교 '''[[한인소년병학교]]''' 대조선국민군단사관학교 '''[[조선혁명간부학교]]''' 신흥무관학교 숭무학교 신흥강습소 동아일보&lt;br /&gt;
|-&lt;br /&gt;
|단체 || 파란색 원 ||기관보다 넓은 의미로서, 같은 뜻을 가지고 함께 활동했던 조직체를 단체로 설정했다. || [[신민회(新民會)]] 협성회독립협회 '''[[한국광복군]]''' '''[[조선의용대]]''' 조선의용군 화북조선독립동맹 대한민국임시정부 간우회 조선어학회 대한인국민회&lt;br /&gt;
|-&lt;br /&gt;
|지역 || 초록색 타원|| 각 기관과 단체가 위치하거나 기관이나 단체, 인물이 활동했던 곳을 지역으로서 클래스를 설정했다. || 미국, 한반도, 난징, 멕시코, 캐나다, 상해, 만주, 중국&lt;br /&gt;
|-&lt;br /&gt;
|활동_및_사건 || 분홍색 타원 ||각 기관이나 단체, 인물의 행동 및 사건을 묶어 활동_및_사건의 클래스를 설정했다. || '''[[브나로드 운동]]''', 민립대학 설립 운동, 3.1운동, 6.10 학생 만세운동, 1920년 3.1 학생 운동, 서울 지역 학생 독립운동&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신다정]]&lt;br /&gt;
&lt;br /&gt;
====관계성(Relation)====&lt;br /&gt;
&lt;br /&gt;
'''인물 중심 관계성 설정''' &lt;br /&gt;
* '''설립했다''' 인물 → 기관, 단체 : 기관 또는 단체의 설립에 기여함을 설명하는 relation이다. &lt;br /&gt;
* '''지원했다''' 인물 → 기관, 단체, 활동 및 사건 : 단체, 기관, 활동 및 사건을 직접적으로 주도한 것은 아니나 보조적으로 지원했음을 설명하는 relation이다. 단체의 활동이나 기관의 설립 및 활동, 활동 및 사건의 전개의 지원을 모두 포괄하는 설명이다. &lt;br /&gt;
* '''출신이다''' 인물 → 기관, 단체, 지역 : 인물이 기관, 단체, 나라의 출신임을 나타내는 relation이다. 지역의 경우, 해당 인물의 국적을 의미하며 외국인의 경우에만 해당 relation을 사용해 국적을 나타냈다. &lt;br /&gt;
* '''활동했다''' 인물 → 활동 및 사건 : 인물이 특정 활동 및 사건에 주도적으로 활동했음을 나타내는 relation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기관 중심 관계성 설정'''&lt;br /&gt;
* '''소속이다''' 기관, 단체 → 인물 : 인물이 기관의 소속임을 나타내는 relation이다. 기관의 경우 교육기관을 주로 다루기 때문에, 교육기관에 재학하였던 경우에는 '출신이다.' relation을 사용하였고 교직원 등으로 재직한 경우에는 해당 relation을 사용하여 구분하였다. &lt;br /&gt;
* '''위치하다''' 기관→지역 : 기관이 특정 지역에 위치하였음을 나타내는 relation이다. 위치를 옮긴 기관의 경우 위치했던 지역에 모두 해당 relation을 사용하여 연결했다. &lt;br /&gt;
* '''발전했다''' 기관, 단체 → 기관, 단체 : 특정 기관 및 단체가 다른 기관 및 단체로 발전함을 설명하는 relation이다.  &lt;br /&gt;
* '''계승했다''' 기관, 단체 → 기관, 단체 : 기관 및 단체가 다른 기관 및 단체로 계승함을 설명하는 relation이다. 계승한 쪽을 종속 노드로 설정하였으나, 화살표 방향을 inverse로 설정해 '발전했다.' relation과 차이를 두었다.&lt;br /&gt;
&lt;br /&gt;
====온톨로지 기여====&lt;br /&gt;
[[김윤]]&amp;lt;br/&amp;gt;&lt;br /&gt;
[[신다정]]&amp;lt;br/&amp;gt;&lt;br /&gt;
[[이민희]]&amp;lt;br/&amp;gt;: 군사교육 중 조선혁명간부학교, 한인소년병학교,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 관련 노드 및 관계성 정리, 인물 사진 삽입&lt;br /&gt;
&amp;lt;br/&amp;gt;&lt;br /&gt;
[[최용빈]]&amp;lt;br/&amp;gt;&lt;br /&gt;
[[헤르미온느]]: 민족사학 관련 노드 및 관계성 정리, 인물 사진 삽입, 노드 색 및 모양 지정, 인물 하이퍼링크&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교육기관 지도&amp;lt;ref&amp;gt;가급적 최초 설립 위치를 기준으로 작성하였지만 초기 설립 시 다른 학교의 교사에 있다 교사를 이전한 경우 해당 위치로 표기함.&amp;lt;/ref&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src=&amp;quot;https://www.google.com/maps/d/embed?mid=1cI0D_B0oG-xrdk5kcPVCnLJ2hJpOJZw&amp;amp;ehbc=2E312F&amp;quot; width=&amp;quot;640&amp;quot; height=&amp;quot;480&amp;quot;&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기타==&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참고문헌===&lt;br /&gt;
1. 민족사학 발전과정 연대기 설명 내용&lt;br /&gt;
*「원산학사 (元山學舍)」,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0700, 접속일: 2024. 12. 9.&lt;br /&gt;
*「흥화학교(興化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6074, 접속일: 2024. 12. 9.&lt;br /&gt;
*「중교의숙(中橋義塾)」,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3699, 접속일: 2024. 12. 9.&lt;br /&gt;
*「순성학교 (順成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1901, 접속일: 2024. 12. 9.&lt;br /&gt;
*「점진학교(漸進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9857, 접속일: 2024. 12. 9.&lt;br /&gt;
*「낙연의숙(落淵義塾)」,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1639, 접속일: 2024. 12. 9.&lt;br /&gt;
&lt;br /&gt;
*「한성법학교(漢城法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426, 접속일: 2024. 12. 9.&lt;br /&gt;
&lt;br /&gt;
*「양정고등학교 (養正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731, 접속일: 2024. 12. 9.&lt;br /&gt;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3433, 접속일: 2024. 12. 9.&lt;br /&gt;
*「보창학교(普昌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3546, 접속일: 2024. 12. 9.&lt;br /&gt;
*「서전서숙 (瑞甸書塾)」,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8159, 접속일: 2024. 12. 9.&lt;br /&gt;
*「진명여자고등학교 (進明女子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4673, 접속일: 2024. 12. 9.&lt;br /&gt;
*「중동고등학교 (中東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3729, 접속일: 2024. 12. 9.&lt;br /&gt;
*「휘문고등학교 (徽文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5832, 접속일: 2024. 12. 9.&lt;br /&gt;
*「숙명여자대학교 (淑明女子大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1800, 접속일: 2024. 12. 9.&lt;br /&gt;
*「숙명여자고등학교 (淑明女子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1799, 접속일: 2024. 12. 9.&lt;br /&gt;
*「양규의숙(養閨義塾)」,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426, 접속일: 2024. 12. 9.&lt;br /&gt;
*「서북협성학교 (西北協成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7788, 접속일: 2024. 12. 9.&lt;br /&gt;
*「사범학교 (師範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5642, 접속일: 2024. 12. 9.&lt;br /&gt;
*「대성학교(大成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4519, 접속일: 2024. 12. 9.&lt;br /&gt;
*「협동학교(協東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3491, 접속일: 2024. 12. 9.&lt;br /&gt;
*「동성고등학교 (東星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6589, 접속일: 2024. 12. 9.&lt;br /&gt;
*「장훈고등학교 (長薰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8403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8403, 접속일: 2024. 12. 9.&lt;br /&gt;
*「오산고등학교 (五山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8302, 접속일: 2024. 12. 9.&lt;br /&gt;
*「치문초등학교 (致文初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8358, 접속일: 2024. 12. 9.&lt;br /&gt;
*「명동학교(明東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8242, 접속일: 2024. 12. 9.&lt;br /&gt;
*「양원여학교(養原女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687, 접속일: 2024. 12. 9.&lt;br /&gt;
*「보인학교(輔仁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426, 접속일: 2024. 12. 9.&lt;br /&gt;
*「기호학교(畿湖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426, 접속일: 2024. 12. 9.&lt;br /&gt;
*「양산중학교(楊山中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426, 접속일: 2024. 12. 9.&lt;br /&gt;
*「서북협성학교(西北協成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426, 접속일: 2024. 12. 9.&lt;br /&gt;
&lt;br /&gt;
2. 민간단체의 교육 구국 운동&lt;br /&gt;
* 한관일. &amp;quot;한국 개화기 신민회의 교육구국 사상.&amp;quot; 교육과학연구 14.- (2000): 1-32.&lt;br /&gt;
* [출처: 민립대학설립운동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lt;br /&gt;
[[분류:독립운동사의 근간, 교육구국운동(敎育救國運動)]]&lt;/div&gt;</summary>
		<author><name>Matnyeom</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8F%85%EB%A6%BD%EC%9A%B4%EB%8F%99%EC%82%AC%EC%9D%98_%EA%B7%BC%EA%B0%84,_%EA%B5%90%EC%9C%A1%EA%B5%AC%EA%B5%AD%EC%9A%B4%EB%8F%99(%E6%95%8E%E8%82%B2%E6%95%91%E5%9C%8B%E9%81%8B%E5%8B%95)&amp;diff=52192</id>
		<title>독립운동사의 근간, 교육구국운동(敎育救國運動)</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8F%85%EB%A6%BD%EC%9A%B4%EB%8F%99%EC%82%AC%EC%9D%98_%EA%B7%BC%EA%B0%84,_%EA%B5%90%EC%9C%A1%EA%B5%AC%EA%B5%AD%EC%9A%B4%EB%8F%99(%E6%95%8E%E8%82%B2%E6%95%91%E5%9C%8B%E9%81%8B%E5%8B%95)&amp;diff=52192"/>
		<updated>2024-12-20T10:56:3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Matnyeom: /* 온톨로지 기여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개요==&lt;br /&gt;
[[파일:교육구국운동 표지.png|800px|가운데]]&lt;br /&gt;
&lt;br /&gt;
[[분류:신다정]]&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   text-align:center;&amp;quot;&amp;gt;기획의도===&lt;br /&gt;
&lt;br /&gt;
 조선의 독립운동사는 근대교육을 위한 노력과 함께 전개되어 왔다. 교육 운동은 독립 운동의 일환으로서 민중을 계몽하기도 하고, 여성 교육이 발전하여 개화 사상이 유입되기도 했으며, 가장 중요하게도 군사 교육을 통해 민족이 싸울 힘을 기르기도 했다. 우리 민족은 당면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기 위해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고, 배움에 대한 열정으로 일제강점기의 어둠을 헤쳐나갈 수 있었다. 학생들이 독립운동을 생각했을 때 교육을 가장 먼저 떠올리지는 않는 듯하다. 다만, 교육은 독립운동사의 핵심적인 부분을 뒷받침하는 지지대였다. 따라서, 우리가 잘 몰랐던 독립운동사에서의 다양한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을 위키 페이지로 만들어 이들의 스토리를 전달하고자 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이민희]]&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 text-align:center;&amp;quot;&amp;gt;팀원===&lt;br /&gt;
2023130036 김윤&lt;br /&gt;
2023131227 최용빈&lt;br /&gt;
2023131540 정혜나&lt;br /&gt;
2024130814 이민희&lt;br /&gt;
2024130911 신다정&lt;br /&gt;
&lt;br /&gt;
=='''교육구국운동(敎育救國運動)'''==&lt;br /&gt;
한국사에 있어서 개화기는 근대화를 추진하는 시기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개화기 교육은 종래 유학 경전 중심의 교육에서 탈피하여 신교육을 시작하는 전환기로 교육사적 의미가 있는 중요한 시기이다. 한국개화기 근대교육의 발전과정은 1880년대에서 1890년대까지 짧은 기간에 많은 변화와 개혁을 거듭하는 시기이다. 국가적으로 열강의 침략을 극복하고 신문화를 받아들여 개명하는 변혁기로 신교육 정착시키는 동시에 국권회복을 위한 교육구국운동을 통하여 민족독립을 전개하는 시기이다. &lt;br /&gt;
&lt;br /&gt;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 이후 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고 일본 통감부가 설치되어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 시기의 개화파를 계승한 애국계몽사상가들은 국권회복을 위해서는 자강지술을 고취하고, 실력을 배양하는 것이 선결과제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이것을 위해 청소년 교육, 민족산업의 육성, 각종 단체에 대한 단결 그리고 신교육을 위한 학교설립 등 광범위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를 교율(敎育)을 통해 나라를 구한다(救國)는 의미의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교육구국운동'''&amp;lt;/span&amp;gt;이라고 칭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신다정]] &lt;br /&gt;
&lt;br /&gt;
==교육기관 설립==&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민족설립 교육기관===&lt;br /&gt;
====민족사학의 의미 ====&lt;br /&gt;
'''1. 민족사학의 정의:''' 우리 민족이 설립한 교육 기관&amp;lt;br/&amp;gt;&lt;br /&gt;
본 위키 페이지에서는 민족사학(民族私學)을 '''외세나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교육기관과 구분되는 것'''으로서, 교육구국운동의 일환으로 일제강점기 전후에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우리 민족이 개인이나 사법인으로서 설립하여 경영하는 학교&amp;lt;/span&amp;gt;로 정의한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2. 민족사학의 정신 및 목적:''' 개화와 교육구국&amp;lt;br/&amp;gt;&lt;br /&gt;
민족사학의 정신과 목적은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개화&amp;lt;/span&amp;gt;와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교육구국&amp;lt;/span&amp;gt;으로 크게 두 가지 방향이 있다. 초기의 민족사학 설립 정신은 '''선진외국의 문화와 문물'''을 받아들여 나라를 개화하고 발전시키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었으나,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乙巳勒約)&amp;lt;ref&amp;gt;대한 제국 광무 9년(1905)에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기 위하여 강제적으로 맺은 조약. 고종 황제가 끝까지 재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인 무효의 조약이다.(표준국어대사전 정의)&amp;lt;/ref&amp;gt; 이후 '''교육 구국을 위한 인재 양성'''이란 민족적 희망에 기반하였다.&lt;br /&gt;
&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민족사학의 발전배경====&lt;br /&gt;
당시 개화파를 비롯한 다수 지식인은 나라를 진흥시키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함을 느끼고 있었다.&amp;lt;br/&amp;gt;&lt;br /&gt;
이와 같은 지식인들의 의식은 서재필이 『한국휘보(Korean Repository)』에 기고한 다음 글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amp;lt;br/&amp;gt;&lt;br /&gt;
{{Blockquote|정부는 국민의 실정을 알아야 하고 국민들은 정부의 목적을 알아야 한다. 정부와 국민 상호간의 이해를 갖도록 하기 위해서는 쌍방에 대한 교육뿐이다 … 교육 없이는 국민들이 정부의 좋은 의도를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교육 없이는 정부 관리들이 결코 좋은 법률을 만들지 못할 것이다.&lt;br /&gt;
|출처=서재필, 「오늘날 한국이 가장 필요로 하는 일」(What Korea needs most), 『한국휘보(Korean Repository)』, 1896.3.}}&amp;lt;br/&amp;gt;&lt;br /&gt;
&lt;br /&gt;
이러한 의식은 독립협회에서 발간한 『독립신문』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amp;lt;br/&amp;gt;&lt;br /&gt;
{{Blockquote|'''문명개화한 나라들에서들은 무론 남녀하고 학교에 가서 적어도 10년 동안에 각색 학문을 배운 후 비로소 세상에 나가''' … 조선 사람들은 겨우 배우는 것이 한문만 조금 배워 가지고 … 일본 같은 조그마한 나라가 싸움을 하여서 청국 병정 무찌르기를 풀 베는 것 같이 하고, 일본도 30년 전 같으면 나라 형세가 청국과 똑같았으니, 어찌 조그마한 나라가 청국 같은 큰 나라를 이기리오마는, 일본 사람들이 서양 각국이 부강한 곡절을 알고 곧 백성 교육하는 일을 힘써 … 당장에 적은 리(利)와 욕심을 내버리고 '''인민 교육하여 몇 해 후에는 조선도 남과 같이 되기를 바라노라'''&lt;br /&gt;
|출처=「논설」,『독립신문』1896년 4월 25일자.}}&amp;lt;br/&amp;gt;&lt;br /&gt;
위의 글들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이러한 지식인들의 자각이 민족사학 설립의 배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민족사학의 발전과정 ====&lt;br /&gt;
1800년대 후반부터 1910년 이전까지 주요 민족 주도로 설립된 교육기관의 설립 과정을 정리&amp;lt;ref&amp;gt;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민족독립운동사 국권수호운동Ⅱ Ⅳ. 국권수호를 위한 사회·문화운동 6. 사립학교의 구국운동 3) 민립학교 설립의 주체(https://db.history.go.kr/modern/level.do?levelId=hdsr_002_0010_0060_0030)의 데이터에 기반하여 자료 조사를 진행하였다. 자료조사를 통해 설립 연도가 일부 수정되었다.&amp;lt;/ref&amp;gt;하였다.&amp;lt;br/&amp;gt;&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xpvhRvJrqO8QmhwtXtUZhPRbrWskR7CqqsrToNpIPRE&amp;amp;font=Default&amp;amp;lang=ko&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amp;lt;br/&amp;gt;&lt;br /&gt;
이와 같이 1905년 이전에는 개화 및 신교육 도입 목적으로 1905년 이후에는 인재양성을 통한 교육구국을 목적으로 많은 교육기관이 설립되었다.&lt;br /&gt;
&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대표적 민족설립 교육기관====&lt;br /&gt;
아래의 표에서는 대표적인 민족설립 교육기관과 그 계승 현황을 정리하였다. &amp;lt;br/&amp;gt;&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hn:left;background:white;&amp;quot;&lt;br /&gt;
|+ [대표적 민족설립 교육 기관&amp;lt;ref&amp;gt;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민족독립운동사 국권수호운동Ⅱ Ⅳ. 국권수호를 위한 사회·문화운동 6. 사립학교의 구국운동 3) 민립학교 설립의 주체(https://db.history.go.kr/modern/level.do?levelId=hdsr_002_0010_0060_0030)의 데이터에 기반하여 자료 조사를 진행하였다. 자료조사를 통해 설립 연도 및 설립자가 일부 수정되었다.&amp;lt;/ref&amp;gt;]&lt;br /&gt;
! 교육기관명 || 설립일 || 설립자 || 계승&lt;br /&gt;
|-&lt;br /&gt;
|원산학교(元山學校) || 1883 || 덕원(德源)의 유지 || 원산소학교, 원산보통학교, 원산제일국민학교로 계승되며 1945년까지 지속됨&lt;br /&gt;
|-&lt;br /&gt;
|흥화학교(興化學校) || 1895. 11. 5. || 민영환(閔泳煥) || 1911년 폐교&lt;br /&gt;
|-&lt;br /&gt;
|중교의숙(中橋義塾) || 1896 || 민영기(閔泳綺) || 1906년 폐교&lt;br /&gt;
|-&lt;br /&gt;
|순성여학교(順成女學校) || 1898.12. || 찬양회(讚揚會) || 1905년 12월 31일 『대한매일신보』기사를 끝으로 신문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음&lt;br /&gt;
|-&lt;br /&gt;
|점진학교(漸進學校) || 1899 || 안창호(安昌浩) || .&lt;br /&gt;
|-&lt;br /&gt;
|낙연의숙(落淵義塾) || 1901 || 서광세(徐光世) || 1916년 폐교&lt;br /&gt;
|-&lt;br /&gt;
|한성법학교(漢城法學校) || 1905. 1. || 사회 유지 || 1905년 9월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가 법률학전문야학과를 신설하여 한성법학교 학생 20명을 인계받음 &amp;lt;ref&amp;gt; https://www.kunews.ac.kr/news/articleView.html?idxno=3765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양정의숙(養正義塾) || 1905. 2. 11. || 엄주익(嚴柱益) || 양정중학교(養正中學校)&lt;br /&gt;
|-&lt;br /&gt;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 1905. 4. 3. || 이용익(李容翊) || '''고려대학교(高麗大學校)'''&lt;br /&gt;
|-&lt;br /&gt;
|보창학교(普昌學校) || 1905. 5. || 이동휘(李東輝) || .&lt;br /&gt;
|-&lt;br /&gt;
|서전서숙(瑞甸書塾) || 1906 || 이상설(李相卨) || 1907년 폐교&lt;br /&gt;
|-&lt;br /&gt;
|진명여학교(進明女學校) || 1906. 4. ||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 진명여자고등학교(進明女子高等學校)&lt;br /&gt;
|-&lt;br /&gt;
|중동학교(中東學校) || 1906. 4. 2. || 신규식(申圭植) || 중동고등학교 (中東高等學校)&lt;br /&gt;
|-&lt;br /&gt;
|휘문의숙(徽文義塾) || 1906. 5. || 민영휘(閔泳徽) || 휘문고등학교(徽文髙等學校)&lt;br /&gt;
|-&lt;br /&gt;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 || 1906. 5. ||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 '''숙명여자대학교(淑明女子大學校)''', 숙명여자중학교(淑明女子中學校), 숙명여자고등학교(淑明女子高等學校)&lt;br /&gt;
|-&lt;br /&gt;
|양규의숙(養閨義塾) || 1906. 6. || 여자교육회(女子敎育會) || .&lt;br /&gt;
|-&lt;br /&gt;
|서우사범학교(西友師範學校) || 1907. 1. || 서우학회(西友學會) || 1908년에 서북협성학교(西北協成學校)로 개편됨&lt;br /&gt;
|-&lt;br /&gt;
|대성학교(大成學校) || 1907 || 안창호(安昌浩) || 1912년 폐교&lt;br /&gt;
|-&lt;br /&gt;
|협동학교(協東學校) || 1907 || 유인식(柳寅植)) || 1917년 폐교&lt;br /&gt;
|-&lt;br /&gt;
|소의학교(昭義學校) || 1907. 9. || 전경현(全景鉉), 민강(閔橿), 장경관(張敬寬) 등 || 동성고등학교 (東星高等學校)&lt;br /&gt;
|-&lt;br /&gt;
|장훈학교(長薰學校) || 1907. 11. 2. ||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 || 장훈고등학교 (長薰高等學校)&lt;br /&gt;
|-&lt;br /&gt;
|오산학교(五山學校) || 1907. 12. || 이승훈(李昇薰) || 오산고등학교 (五山高等學校)&lt;br /&gt;
|-&lt;br /&gt;
|기호학교(畿湖學校) || 1908. 6. 20. ||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 || 융희학교(隆熙學校)를 흡수하여 중앙중학교(中央中學校), 중앙고등학교(中央高等學校)로 발전함&lt;br /&gt;
|-&lt;br /&gt;
|양원여학교(養原女學校) || 1908. 6. || 여자보학원유지회(女子普學院維持會) || .&lt;br /&gt;
|-&lt;br /&gt;
|신명학당(新明學堂) || 1908. 2. || 김장호, 김홍식(金洪植) || 치문초등학교 (致文初等學校)&lt;br /&gt;
|-&lt;br /&gt;
|명동학교(明東學校) || 1908. 4. 27. || 김학연(金學淵) || 1925년 폐교&lt;br /&gt;
|-&lt;br /&gt;
|보인학교(輔仁學校) || 1908. 6. 8. || 보인학회(輔仁學會) || 보인고등학교(輔仁高等學校)&lt;br /&gt;
|-&lt;br /&gt;
|양산중학교(楊山中學校) || 1908. 10. || 김홍량(金鴻亮) ||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이상의 표에서 1910년 국권피탈 이전 설립된 민족설립 교육기관 중 적지 않은 수가 오늘날에도 현존하고 있는 중학교, 고등학교, 또는 대학교로 계승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10년 이후 많은 학교가 폐교 위기에 처한 것을 고려하였을 때, 이러한 계승은 민족설립 교육기관을 유지해 교육을 통해 나라를 구하고자 했던 당시 사람들의 투지와 열망에 대한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보성전문학교와 명신여학교====&lt;br /&gt;
1910년 이전까지 민족 주도로 설립된 교육 기관 중 주요하게 살펴보아야 할 기관으로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와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가 있다. 보성전문학교는 이용익(李容翊)이 고종의 허가 하에 설립하였고, 명신여학교는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의 지원으로 설립되었음을 고려할 때, 모두 황실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사립 교육기관으로 보기는 힘들다는 한계는 존재한다. 그러나, 1910년 이전에 설립된 학교가 폐교의 절차를 밟지 않고 이어져 오늘날까지 계승되었다는 사실이 가지는 의미는 적지 않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1910년 이후 많은 학교가 일제의 강압 아래 폐교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 두 학교의 경우 대부분의 학교가 중등교육기관으로 계승된 것과는 구분되어 '''고등교육기관으로 발전한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나아가, 보성전문학교 설립을 기점으로 '교육 구국'을 목적으로 한 민족 사학의 설립이 활성화되었다는 점과 명신여학교의 경우 민족이 설립한 많지 않은 여성 교육기관 중 하나였다는 점 역시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lt;br /&gt;
보성전문학교는 1905년 04월 03일 고종(高宗)의 재정적 후원을 받아 [[이용익李容翊]]에 의해 설립된 교육기관이다. &amp;lt;br/&amp;gt;&lt;br /&gt;
보성전문학교의 설립 배경은 설립자 이용익의 행보에서 엿볼 수 있다. 친로반일(親露反日)의 뜻 고수한 것과 조선의 중립 선언을 선언하게 한 것으로 인해 일본에 의해 납치된 이용익은 체류 중 일본의 '''근대교육기관 및 개화문물을 접한다'''. 이것이 그의 교육기관 설립의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이후 귀국할 때 '''다수의 도서와 인쇄기를 구매'''하여 가지고 온 점 역시 이러한 추측의 설득력을 높인다. &amp;lt;br/&amp;gt;&lt;br /&gt;
한편, 보성전문학교의 개교를 알리는 황성신문(皇城新聞)의 글에는 보성전문학교 설립이 그 당시에 가졌던 의미가 잘 드러나고 있다. &amp;lt;br/&amp;gt;&lt;br /&gt;
{{Blockquote|전문학교 창설. '''대한에 전문대학교는 아직 세워지지 못했다. 한성법학교(漢城法學校)가 세워졌으나 야학(夜學)이라 완전하지 못했는데, 박동(礴洞)에 신설한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는 위치가 전문대학 주간 학교로''' 대황제폐하께서 특별히 설립하신 바, 매월 수천원의 경비를 내탕전(內帑錢)으로 내려주고 도서관을 부설하여 각 전문 교과서 수천권을 새로 간행한다 한다. 그리고 신해영(申海永)·조제환(趙齊桓)·정영택(鄭永澤) 세 명에게 이상의 사무를 전담하도록 하여, 위 3명은 교육을 열심히 하여 황제의 뜻에 보답하기위해 더욱 극진하게 힘을 쓴다고 한다. 20여명의 교수는 일찍이 일본에 유학하여 졸업한 사람들을 임용하여 (중략) '''2개년 졸업기한이지만 인재를 빨리 양성하도록''' 황제의 뜻을 특별히 내리셨다하고, 오늘부터 개교한다고 한다.&lt;br /&gt;
|출처=『황성신문(皇城新聞)』 1905년 4월 1일자 2면. 현대어역: 고려대학교 도서관&amp;lt;ref&amp;gt;https://library.korea.ac.kr/datause/archiving/old-book-exhibition/release/?mod=document&amp;amp;uid=10653&amp;lt;/ref&amp;gt;}}&lt;br /&gt;
윗글에서 당시 대한제국에 중등교육기관은 존재했음에도 고등교육을 위한 기관은 야학의 형태로서만 존재하여 온전하지 못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당시 상황 속에서 이용익이 일본의 교육 현황을 접한 후 대한제국 고등교육기관의 필요성을 느껴 설립하려 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고등교육기관 설립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맞춰 등장한 학교라는 점에서 보성전문학교가 가지는 가치는 매우 크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1910년 이후 다른 학교와 마찬가지로 보성전문학교는 운영진 및 교장의 망명, 투옥과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운영난을 겪는 등 각종 수난을 겪는다. 이후 일제의 탄압 아래 격하되거나 교명을 바꾸고 학과 설립이 제한되는 등 여러 차례 존속의 고비를 넘긴다. 하지만 끊임없는 노력을 바탕으로 1921년 전문학교로 다시 승격되었으며 여러 위기를 거친 끝에 해방 후 고려대학교로 발족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lt;br /&gt;
명신여학교는 1906년 5월 22일 고종(高宗)의 후궁인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의 지원으로 왕실 별궁 용동궁에 설립된 교육기관이다. &amp;lt;br/&amp;gt;&lt;br /&gt;
순헌황귀비는 본디 교육, 특히 여성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명신여학교의 설립에 앞서 1906년 4월에 진명여학교(進明女學校)를, 1907년에 경영난에 처해 있던 양정의숙(養正義塾)을 도운 점에서 잘 드러난다. &amp;lt;br/&amp;gt;&lt;br /&gt;
한편, 당시 여성 교육 관련 배경은 다음과 같다. 앞서 기술된 바와 같이 1905년 을사늑약 전후로 교육구국이 일어나 전국 각지에서 민족사학이 설립되었으나 여성을 위한 교육기관은 부족한 실태였다. 당시 설립된 여성 교육기관으로는 이화학당, 정신여학교, 숭의학교 등이 있었으나 이는 모두 선교사, 즉 민족에 의해 설립된 학교가 아니었다.&amp;lt;ref&amp;gt;한희숙, 구한말 순헌황귀비 엄비의 생애와 활동, 아시아여성연구, 숙명여자대학교 아시아여성연구원, 제45집 2호, 2006&amp;lt;/ref&amp;gt;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여성 교육기관의 필요'''를 절감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 것은 순헌황귀비의 시대적 통찰력을 반영하는 부분이다. &amp;lt;br/&amp;gt;&lt;br /&gt;
위와 같은 순헌황귀비의 설립 목적은 대한매일신보의 글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amp;lt;br/&amp;gt;&lt;br /&gt;
{{Blockquote|황귀비 흥학:  황귀비 전하께오서 여자 교육이 없음을 크게 걱정하여 육군참장 엄주익씨 집(第)에 여학교를 설립하여 '''여자교육을 발달시키고자''' 하였다.  엄주익에게 학교 설립 일을 전담하게 하시니 '''대한여자의 교육이 앞으로 발달하기를''' 가히 볼 수 있을 지로다. &lt;br /&gt;
|출처=『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6년 4월 24일자&amp;lt;ref&amp;gt;한희숙, 구한말 순헌황귀비 엄비의 생애와 활동, 아시아여성연구, 숙명여자대학교 아시아여성연구원, 제45집 2호, 2006, 227쪽.&amp;lt;/ref&amp;gt;}}&lt;br /&gt;
광복 후 명신여학교는 숙명여자중학교(淑明女子中學校)와 숙명여자고등학교(淑明女子高等學校)로 이어졌다. 나아가, 여성 고등교육기관의 설립을 꿈꾼 교장 이정숙(李貞淑)의 뜻에 따라 1938년 숙명학원(淑明學園)에서 숙명여자전문학교를 설립하였고, 이것이 오늘날 숙명여자대학교(淑明女子大學校)로 계승되었다.&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선교사 설립 교육기관===&lt;br /&gt;
선교사들은 기독교 선교의 기반 구축을 위해 개화정책 추진 초기인 1880년대부터 고종의 각별한 관심과 지원 속에서 많은 학교를 설립하였다.  서울에 배재·이화·경신학교를 설립하였고, 기독교 선교금지정책이 이완되기 시작한 1890년대에는 지방도시로 그 범위를 넓혀 1894년 평양의 광성학교·숭덕학교·정의여학교, 1895년 서울의 정신여학교를 비롯하여 동래·인천·재령·목포·원산·개성·해주·공주·대구 등 전국 각지로 확대하였다.&lt;br /&gt;
&lt;br /&gt;
====[[연세대학교(延世大學校)]]====&lt;br /&gt;
&lt;br /&gt;
연희전문학교는 1915년 선교부연합위원회의 협의를 얻어서 북장로회 선교사인 언더우드가 조선기독교학교로 처음 설립하였다. 이후 1917년 연희전문학교로 발족하였다. 보성전문학교 이후 두 번째로 설립된 전문학교이다. 이후 3.1 운동등 다양한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1944년 일제가 경영권과 재산을 몰수하고 한국인 교수진들을 모두 추방했었다. 독립 후에는 연희대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대학교로 승격하였다.&lt;br /&gt;
&lt;br /&gt;
세브란스는 대한제국의 궁정어의였던 알렌에 의해 1885년에 설립된 제중원에서 시작하였고, 1886년부터 제중원 내 의학부를 두고 입학생을 받았다. 이후 병원장으로 취임한 선교사 에비슨이 1899년 조선 최초의 의학교인 제중원의학교를 설립하였다. 1904년 미국인 세브란스의 후원으로 세브란스 병원이 세워지며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로 개편하였다. 1906년에 간호부가 개설되었고 우리나라 최초의 간호사를 배출하였다. 세브란스와 연희전문학교 간의 병합은 1920년대에도 한차례 시도한 바 있었으나 무산되었고, 독립 후 1957년에 두 학교가 통합되어 '''연세대학교'''로 출범하였다.&lt;br /&gt;
&lt;br /&gt;
====[[배재학당]]====&lt;br /&gt;
&lt;br /&gt;
1885년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한국 최초의 근대식 사립학교로 중등과정을 담당했다. 1886년이 고종이 배재학당이라는 이름을 사하였고 미국인들의 후원을 받아 1887년에 제대로 된 건물을 세웠다. 영어교육을 중점적으로 행했으며 학생자조정책을 채택하여 가난한 학생들이 학교에서 일을 하며 수업료를 벌 수 있도록 하였다. 현재 기존의 건물은 2008년부터 배재학당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배재중학교, 배재고등학교, 배재대학교'''가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lt;br /&gt;
&lt;br /&gt;
====[[배화학당]]====&lt;br /&gt;
초,중등과정의 사립학교로 1898년 켐벨 선교사가 설립하였다. 처음엔 캐롤라이나학당으로 기독교전파와 여성교육을 목표로 세웠졌다. 1910년 배화학당으로 개칭하였다.1916년 1월 경성 누하동(지금의 서울 종로구 필운동)으로 교사를 이전하고, 1926년 12월 캠블기념관을 신축하였으며, 1938년 3월 배화고등여학교와 배화여자소학교로 분리,개편되었다. 일제의 신사참배요구를 거절한 기독교 학교 중 하나이다. 1940년대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선교사들도 학교를 떠나며 위기에 폐교 위기에 봉착했다. 학교가 경영난에 시달리자 일제는 학교의 운영권을 요구했으나, 당시 교사였던 이덕봉과 이만규가 독지가를 구하려 노력한 끝에 이민천이 춘천, 이천, 연기, 익산 등지에 있는 토지를 기부하여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독립 후 1951년 '''배화여중과 배화여고'''로 분리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김윤]]&lt;br /&gt;
&lt;br /&gt;
=='''민간 단체의 교육 운동'''==&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신민회(新民會)]]의 애국계몽운동===&lt;br /&gt;
&amp;lt;br/&amp;gt;&lt;br /&gt;
{{Blockquote| '''신민회 행동강령'''&lt;br /&gt;
1. 국민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사상 고취 &amp;lt;br /&amp;gt; 2. 동지를 발하고 단합하여 국민 운동 역량 축적 &amp;lt;br /&amp;gt; 3. 상공업 기관 건설로 국민의 부력(富力) 증진 &amp;lt;br /&amp;gt; 4. 교육 기관 설립으로 청소년 교육 진흥&lt;br /&gt;
|출처= 「헌기제501호, 「대한 신민회 취지서 및 동회 통용 장정 등 보고 건」, 1909년 3월 5일(국사편찬위원회, 『통감부문서』 6, 1991}}&lt;br /&gt;
&lt;br /&gt;
신민회(新民會)는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1907년에 [[안창호(安昌浩)]], [[양기탁(梁起鐸)]] 등의 주도로 결성된 항일 비밀결사&amp;lt;/span&amp;gt;이다. 위와 같은 신민회의 행동 강령을 바탕으로 신민회는 실력 양성을 통한 국권 회복을 주장하며, 교육, 언론 및 출판, 민족 산업 육성, 독립군 양성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lt;br /&gt;
&lt;br /&gt;
신민회는 실력 배양의 방법으로 교육 구국 운동을 두 가지 측면에서 전개하였다. 국민에게 국권회복을 위한 교육의 필요성을 계몽하여 학교설립을 고취하며 신민회도 학교를 설립하여 국권회복에 필요한 적합한 교육방침을 강구하여 민족 지도자를 양성한다는 것이다. 또한, 국외에서 독립군 기지를 창설하고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전쟁을 일으켜 국권을 회복한다는 것이다. &lt;br /&gt;
&lt;br /&gt;
신민회는 이를 위해 민중들이 설립한 학교에 대해 학교교육방침을 지도하였다. 또한, 중학교를 설립하고, 학교의 모범을 만들며 중학교에서 동시에 사범교육을 해 교사를 양성한다는 기준을 세우고 학교를 설립하였다. 당시 민간인이 자발적으로 기금을 갹출하여 설립한 학교는 대부분이 소학교였기 때문에, 신민회는 중학교를 설립하여 소학교 출신 청소년들이 더 양질의 교육을 통해 민족지도자로 발돋움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lt;br /&gt;
&lt;br /&gt;
신민회는 기본적으로 비밀결사이기 때문에 그들이 설립한 학교의 수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1907년부터 1909년 4월까지 민간인들에 의해 세운 학교가 3000여 개교에 달한다는 통계로 보아 신민회에서 세운 학교가 많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알려진 신민회가 설립한 학교는 다음과 같다.&lt;br /&gt;
&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hn:left;background:white;&amp;quot;&lt;br /&gt;
|+ [신민회가 설립한 학교]&lt;br /&gt;
! 학교명 || 설명 &lt;br /&gt;
|-&lt;br /&gt;
| '''대성학교'''|| [[안창호(安昌浩)]], 윤치호 평양에 설립. 신민회가 설립한 대표적인 민족 사학으로 입학 지원자가 500~600여 명이 되는 때도 존재. &lt;br /&gt;
|-&lt;br /&gt;
| '''오산학교'''|| 평안북도 정주군에 이승훈 설립. 김소월, 백석, 이중섭, 독립운동가 김홍일 중장 등을 배출. 현재 서울 오산고등학교로 계승됨&lt;br /&gt;
|-&lt;br /&gt;
| 점진학교|| 평안남도 강서 위치, [[안창호(安昌浩)]] 설립. 남녀공학을 실시한 최초의 소학교. &lt;br /&gt;
|-&lt;br /&gt;
| 보창학교 || 강화도 위치, 이동휘 설립&lt;br /&gt;
|-&lt;br /&gt;
| 신안학교 || 정주, 신민회 정주지회 회원 설립&lt;br /&gt;
|-&lt;br /&gt;
| 양실학교 || 의주, 신민회 의주/용천지회 회원 설립&lt;br /&gt;
|-&lt;br /&gt;
| 가명학교 ||  신민회 납청정지회 회원 설립&lt;br /&gt;
|-&lt;br /&gt;
| 신흥학교 || 선천, 중학교급 학교&lt;br /&gt;
|-&lt;br /&gt;
| 홍양학교 || 신민회 곽산지회 회원 &lt;br /&gt;
|-&lt;br /&gt;
| 명륜학교|| 함경남도 영흥읍에 있던 세 개 학교 통합, 이동휘 설립&lt;br /&gt;
|-&lt;br /&gt;
| 경성학교|| 함경북도 경성 위치&lt;br /&gt;
|-&lt;br /&gt;
| 양산학교|| 황해도 안악읍 향천자리, 김용제 설립, 신민회가 중학교로 개편&lt;br /&gt;
|-&lt;br /&gt;
| 오성학교 || 서울 위치, 이갑, 이종화 설립. 신민회 창건 후 각종학교인 서북협성학교로 개편&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신민회의 애국계몽은 학교 설립뿐만이 아니라 학회의 설립과 지도를 통해서도 추진되었다. 안악군면학회(安岳郡勉學會), 해서교육총회(海西敎育總會),평양청년권장회(平壤靑年勸?會), 연학회(練學會), 동제회(同濟會)등의 학회를 전국에 조직하는 데에 앞장섰다. 또한, 서우학회, 한북학회를 서북학회로 통합 재조직하는 등, 기존에 있던 학회의 통합과 재정비에도 이바지하였다. &lt;br /&gt;
&lt;br /&gt;
이와 같이 신민회의 교육계몽운동은 신민회가 1912년 105인 사건으로 해산될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그 이후에도 다른 독립운동단체에 영향을 미쳐 교육을 통한 민중 계몽으로 이루어지는 독립운동의 방향성을 제시하였다.&lt;br /&gt;
&lt;br /&gt;
[[분류:신다정]]&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농촌 계몽 운동===&lt;br /&gt;
&lt;br /&gt;
농촌 계몽 운동은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1920년대~1930년대 민족 운동과 관련한 청년 학생이나 지식층이 농민의 의식과 지식 등을 계몽하기 위해 농촌 사회에서 행한 사회 교육 운동&amp;lt;/span&amp;gt;을 의미한다. 농사일을 끝낸 후 강연회, 토론회, 야학 등의 형식으로 이루어졌으며 특히 농한기인 겨울에 많이 실시되었다. &lt;br /&gt;
&lt;br /&gt;
1920년에는 일제의 식민 지주 경영과 지주 착취로 인해 농민 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고, 이와 맞물려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이 결성되었다. 이때 사회주의 계열 청년 단체와 지식인들이 농촌으로 진출하여 농민 운동을 주도하였다. &lt;br /&gt;
민족주의 계열에서 주도한 농촌 운동은 문맹 퇴치와 생활 개선 등의 계몽적 활동이 중심이었다. 대표적으로 천도교 계열의 농촌 운동, 기독교 계열의 농촌 운동이 있다. 천도교는 1925년 조선농민사를 설립하여 농민 야학을 시행하고 전국적으로 농민에 대한 계몽 활동을 전개하였다. 기독교에서는 1926년 이후 학생 YMCA 농촌부를 중심으로 계몽 활동을 적극 추진하였다. &lt;br /&gt;
&lt;br /&gt;
1920년 후반부터 1930년대에는 언론사 또한 농촌 계몽 운동에 힘을 쏟았다. 대표적으로 1929년부터 1935년까지 이루어진 조선일보사의 문자 보급 운동과 1931년부터 1934년까지 이루어진 동아일보사의 [[브나로드 운동]]이 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이런 농촌 계몽 운동은 1930년대 들어 강화된 조선총독부의 조선어 사용 금지 정책과 지방 농촌의 몰락으로 인해 쇠퇴하였다. 또한, 농촌의 몰락 책임을 수탈 때문이 아닌 농민의 게으름과 무지에 있다며 총독부의 주도로 농촌진흥운동을 진행하며 민간 및 언론 단체의 농촌 계몽 운동을 탄압하였다. 그러나 이런 탄압 속에서도 농촌 계몽 운동은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이러한 민간 교육 활동 및 정책은 해방 이후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문맹 퇴치 운동으로 이어졌다.&lt;br /&gt;
&lt;br /&gt;
[[분류:신다정]]&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민립 대학 설립 운동===&lt;br /&gt;
&lt;br /&gt;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은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1920년대 이루어진 민족 사학 설립 운동&amp;lt;/span&amp;gt;이다.&lt;br /&gt;
&lt;br /&gt;
1920년대 초 식민지 조선에서는 민중의 자발적인 참여하에 조선인을 위한 대학을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등장하였다. 민립 대학 설립에 대한 논의는 1920년 6월 20일 한규설, 이상재, 윤치소 등 91년의 발기로 조선교육회 발기회가 개최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가 학회령을 토대로 1922년 1월 24일까지 인가를 내주지 않아 민립대학 설립에 대한 결의를 실행시키지 못했다. &lt;br /&gt;
&lt;br /&gt;
동아일보에 기고된 사설을 통해 당시의 독립을 위한 교육 계몽의 필요성과, 관립 대학과 다르게 민립 대학의 설립 필요성에 관해 확인할 수 있다. &lt;br /&gt;
&lt;br /&gt;
{{Blockquote|운명을 어떻게 개척할까. 정치냐 외교냐 산업이냐. 물론 이러한 일들 모두 다 필요하다. 그러나 그 기초가 되고 요건이 되며 가장 급무가 되고 가장 선결의 필요가 있으며 가장 힘 있고 '''가장 필요한 수단은 교육이 아니면 할 수 없다.''' &amp;lt;br /&amp;gt; … 물론 관립대학도 조만간 개교될 것이기에 대학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학문 발전의 장래는 결코 1개의 대학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요, 또한 '''그처럼 중대한 사업을 우리 민중이 직접으로 영위하는 것은 차라리 우리의 의무라 할 수 있다.''' &amp;lt;br /&amp;gt;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에 느낀 바 있어 감히 만천하 동포에게 향하여 민립대학의 설립을 제창하니 자매형제는 와서 돕고 나아가 이루어라.'''&lt;br /&gt;
|출처= 「開會된 民大總會」, 『동아일보』, 1923년 3월 30일자.}}&lt;br /&gt;
&lt;br /&gt;
이렇게 고양된 민립 대학 설립을 통한 민족 교육에 대한 필요성을 바탕으로, 1922년 1월 이상재, 이승훈, 윤치호, 김성수, 송진우 등이 조선민립대학기성준비회를 정식으로 결성하였다. 이어 1923년 3월 29일 발기인 1170명 중 462명이 참석한 가운데 3일간 총회를 개최하였다. &lt;br /&gt;
&lt;br /&gt;
총회에서는 ＇민립대학발기취지서＇를 채택하고 대학 설립 계획서를 확정하였다. 계획서에 따르면 3개년 계획으로 자본금 1000만원을 갹출하는데, 제 1차 연도에는 대지 5만 평을 구입하여 교실 10동, 대강당 1동을 건축하고, 법과/경제과/문과/이과의 4개 대학 및 예과를 설치하며, 제2차 연도에는 300만원으로 공과/이과/기타 학과를 증설하고, 제3차 연도에는 300만원으로 의과/농과를 설치한다는 것이다. 또 중앙집행위원회를 구성하고 지방에 지방부를 두기로 결의하였다. 별도로 지방순회선정위원 13평을 선정하고 파견하였다. 이와 같은 노력을 토대로 1923년 말까지 전국 100여 개소와 해외의 만주 간도, 봉천, 미국 하와이 등지에도 지방부가 조직되었다. &lt;br /&gt;
&lt;br /&gt;
기성회는 ＇한민족 1000만 한 사람 1원씩＇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기금 모금에 나섰다. 이런 모금 활동에 민족 교육을 성원하는 마음들이 모였는데, 대표적으로 전라남북도에서만 15만원이 모금되었으며 경기도 안성의 이정도는 1년 동안 매일 아침 밥짓는 쌀에서 식구 수 대로 한 숟가락씩 모아 판 돈 19원을 기부하는 등 일반 민간에서의 성원도 뜨거웠다. &lt;br /&gt;
&lt;br /&gt;
이와 같은 열기에 일제는 이를 교육 운동이 아니라 정치 운동이라고 판단하고 탄압하였다. ＇조선교육령＇을 개정하여 관립 경성제국대학의 설립을 서두르고 민립대학과 관련 있는 인사들에 대한 탄압과 기금 갹출 방해 공작을 전개하였다. 민립대학기성회 인사들을 민족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구실로 철저히 감시하고, 기금 모집을 위해 박차를 가하던 인사들의 지방 강연을 배일사상을 고취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강연 중지를 명하고 청중을 해산시켰다. &lt;br /&gt;
&lt;br /&gt;
이러한 조선총독부의 탄압이 민립대학 설립운동의 실패의 주된 원인이 되었다. 1923년 여름 수재, 9월 일본 관동 대지진으로 인한 경제 공황, 1924년 한재와 7월 전국적 수재로 인한 농촌 경제 파탄 등 자연적인 여건도 민립대학 설립운동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그러나 3.1운동 이후 전 민족이 민족 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조직체를 형성하여 교육을 통한 자주독립이라는 하나의 목표에서 단결을 보였다. 이는 이후의 민족운동 양상에서 조직적인 단체 결성의 표본이 되었다.&lt;br /&gt;
&lt;br /&gt;
[[분류:신다정]]&lt;br /&gt;
&lt;br /&gt;
=='''군사 교육'''==&lt;br /&gt;
&lt;br /&gt;
독립운동사에서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군사 교육도 꾸준히 이어져왔다. 수많은 독립열사들은 무관학교 설립을 위한 활발한 활동을 이어왔다. 독립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역량은 군사였기 때문에, 군사교육은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였으며 이에 따라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에서도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노력이 나타났다.&lt;br /&gt;
&lt;br /&gt;
[[분류:이민희]]&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lt;br /&gt;
신흥무관학교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위해 설립된 군사학교로, 독립군 양성과 무장 투쟁 기반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911년 중국 만주 서간도 지역(현재의 지린성 류허현)에서 이회영, 이시영 등 독립운동가들이 설립했으며, 군사 지도자를 양성하고 실질적인 무장 독립운동을 준비하는 데 목적을 두었습니다. &lt;br /&gt;
&lt;br /&gt;
교육 내용은 사격, 전술, 지형 분석 등 실전 중심의 군사훈련과 함께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역사 및 애국사상 교육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졸업생들은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전투 같은 독립전쟁에서 활약하며 독립운동의 주축이 되었고, 김좌진과 이범석 같은 지도자를 배출했습니다. &lt;br /&gt;
&lt;br /&gt;
1920년대에 들어 일본의 탄압이 강화되면서 학교 운영이 점차 어려워졌고, 졸업생들이 각종 독립운동 조직으로 흩어지면서 신흥무관학교는 군사훈련소 형태로 전환되다가 결국 해체되었습니다. &lt;br /&gt;
&lt;br /&gt;
졸업생들은 만주 지역에서 서로군정서, [[북로군정서]]에서 핵심 간부로 활약, [[대한독립군]], 통의부의용군, 정의부, 신민부, 국민부 등에서 활동하였고,중국 본토에서는 1919년 11월 길림에서 의열단 결성,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에서 독립운동 전개했습니다.&lt;br /&gt;
&lt;br /&gt;
신흥무관학교는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군사교육 기관으로 평가받습니다. 이 학교는 독립군의 전투력을 강화하고, 독립운동의 실질적 기반을 마련했으며, 한국 독립운동의 전환점이 된 여러 전투에서 큰 공헌을 했습니다.&lt;br /&gt;
&lt;br /&gt;
[[분류:최용빈]]&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조선혁명간부학교]]===&lt;br /&gt;
&lt;br /&gt;
1919년 조직된 무장독립운동단체 의열단은 중국국민당과의 합작을 통해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실질적인 군사 교육 기관'''&amp;lt;/span&amp;gt;을 설립하고자 노력했다. 이에 따라 [[장제스]]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의열단&amp;lt;ref&amp;gt; 급진적인 항일 투쟁을 목적으로 1919년 11월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로, 김원봉(金元鳳)이 단장을 맡았다. &amp;lt;/ref&amp;gt;의 단장인 김원봉이 1932년 중국 난징에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설립하였다. 공식 명칭은 사실 조선혁명간부학교가 아닌, ''‘중국국민당 군사위원회 간부 훈련반 제6대’''로, 국민당의 단기간부훈련소 신설반인 것처럼 위장했다. &lt;br /&gt;
&lt;br /&gt;
&lt;br /&gt;
학교는 일본과 중국의 외교관계를 고려해 학교 운영 사실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설립 초기에는 중국 외교부와 육군참모본부, 심지어 군사위원회 판공청 당사자들조차 그 존재를 모를 정도였다. 만 3년간 운영된 조선혁명간부학교는 3기에 걸쳐 총 125명의 인재를 배출했다. 국민당은 그동안 매월 경상비 2,000~3,000원·수시 필요경비 1,000~1만 원·기타 운영비 400~1,000원 등 각종 운영자금 전액과 화기·탄약·피복 등을 지원했다. 학생들은 군사학뿐 아니라 별도 신설된 정치학, 자연과학을 포함해 경제학·사회학·철학·혁명학·물리학·화학·지리학까지 다양한 학문을 공부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혁명간부학교의 졸업생들은 이후 민족혁명당의 항일투쟁체계에 편입되었으며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대]]의 핵심 세력으로 성장하였고, 일부는 화북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에 가담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단체문서한국광복군.jpg|섬네일|가운데|''&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한국 광복군의 모습&amp;lt;/div&amp;gt;'']] &lt;br /&gt;
[[파일:조선의용대김원봉.jpg|섬네일|가운데|''&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조선의용대 모습 &amp;lt;/div&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amp;lt;font color=&amp;quot;#8c8c8c&amp;quot;&amp;gt;조선의용대 깃발 가운데 있는 인물이 약산 김원봉이다.&amp;lt;/font&amp;gt;''&amp;lt;ref&amp;gt;김삼웅, &amp;quot;최후까지 총을 든 조선의용대와 김원봉&amp;quot;, 오마이뉴스, 2024.02.06.,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999602 (검색일:2024년 12월 4일)&amp;lt;/ref&amp;gt;&amp;lt;/div&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이민희]]&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한인소년병학교]]===&lt;br /&gt;
&lt;br /&gt;
한인소년병학교는 장기적인 독립 투쟁을 대비하여 군사 교육을 받은 장교를 양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박용만에 의해 설립되었다. 한인소년병학교는 1909년 6월에 세워진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최초의 국외 설립 군사학교''&amp;lt;/span&amp;gt;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으며, 각지의 군사운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lt;br /&gt;
&lt;br /&gt;
&lt;br /&gt;
한인소년병학교는 미국의 헤이스팅스(Hastins) 대학과 교섭하여 운영되었으며, 네브라스카 주에서 설립되었으나 교섭에 따라 헤이스팅스로 이전하여 한인 유학생의 활발한 참여를 이끌어냈다. 헤이스팅스 대학은 건물 한 동과 전장을 지원하여, [[둔전병제]]식 훈련을 실시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헤이스팅스대학.png|섬네일|가운데|''&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헤이스팅스 대학의 모습 &amp;lt;/div&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amp;lt;font color=&amp;quot;#8c8c8c&amp;quot;&amp;gt;한인소년병학교 학생들이 훈련했던 헤이스팅스 대학의 사진이다.&amp;lt;/font&amp;gt;''&amp;lt;/div&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ftzi6pFWzNc?si=iGbjmKk9yPuAn_Ub&amp;quot; title=&amp;quot;YouTube video player&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div&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다음의 영상에서 한인소년병학교가 있었던 헤이스팅스 대학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다.'' &amp;lt;/div&amp;gt;&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lt;br /&gt;
&lt;br /&gt;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는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한 박용만이 미국의 하와이에도 같은 군사 훈련 단체를 설립하고자 하여 1914년 4월 15일 설립되었다. 당시 학도 수는 200여명으로 군단장 역시 박용만이 맡았다. &lt;br /&gt;
&lt;br /&gt;
&lt;br /&gt;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는 [[한인소년병학교]]를 계승하여 [[둔전병제]]식 훈련을 실시하였고, 군영이 호놀룰루 시의 동북 쪽 큰 산을 넘어 해안과 아후이마누 강을 낀 계곡에 위치하여 ''&amp;quot;산 넘어 아희들&amp;quot;''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lt;br /&gt;
하와이에서 군단과 사관학교를 설치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으나, 1916년을 고비로 점차 쇠퇴하여 1917년 경 해체되었고, 지역으로 흩어져 사실상 폐교되었다.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는 제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미일(美日) 간 우호관계가 지속되면서 국민군단의 혁명적이고 군사적인 성격이 하와이 내에서 우호적인 반응을 얻지 못하였고, 이외에도 하와이 내 농장의 불경기로 수입이 급감하면서 재정 조달이 어려웠으며 1915년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의 실권이 이승만 측에 넘어가 박용만의 활동 범위가 위축된 점 등으로 인해 폐교되었다고 추측되고 있다.&lt;br /&gt;
&lt;br /&gt;
[[분류: 이민희]]&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숭무학교(崇武學校)]]===&lt;br /&gt;
숭무학교는 1910년대 멕시코로 이주한 한인들이 일제강점기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한 군사학교입니다. 멕시코에 이주한 한인들은 고된 노동 속에서도 민족 독립의 열망을 잃지 않고 독립운동을 조직적으로 지원하고자 노력했습니다. 1915년 멕시코 유카탄주 메리다 지역에서 설립된 숭무학교는 독립군 양성을 목표로, 체계적인 군사훈련과 애국 사상 교육을 실시했습니다.&lt;br /&gt;
&lt;br /&gt;
이 학교는 멕시코 한인 사회의 독립운동 기반을 강화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특히 숭무학교는 한인들의 단결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멀리 해외에서조차 독립운동을 지속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큽니다. 이러한 활동은 멕시코뿐 아니라 미주 지역의 다른 한인 독립운동 단체에도 영향을 주어 독립운동의 글로벌 네트워크 형성에 기여했습니다.&lt;br /&gt;
&lt;br /&gt;
숭무학교는 해외 독립운동의 독특한 사례로, 한인 이민사와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lt;br /&gt;
&lt;br /&gt;
[[분류:최용빈]]&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독립군으로의 발전===&lt;br /&gt;
&lt;br /&gt;
군사교육을 위해 설립된 다양한 무관학교를 기점으로, 졸업생들은 각기 다른 곳에서 독립군으로 발전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의 경우, 졸업생들은 만주 지역에서 서로군정서, 북로군정서에서 핵심 간부로 활약했을 뿐 아니라, 대한독립군,통의부의용군, 정의부, 신민부, 국민부 등에서 활동하였다. 또한, 중국 본토의 경우에서는 1919년 11월 길림에서 의열단을 결성하기도 하고, 임시정부 산하의 광복군인 한국광복군의 일원으로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졸업한 졸업생들도 독립군으로서 활약하였다. 이들은 민족혁명당의 항일투쟁체계에 편입되었는데, 대표적으로 임시정부 산하의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대의 핵심 세력으로 성장했고, 일부는 화북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에 가담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한인소년병학교]]와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 숭무학교를 졸업한 졸업생들도 독립군으로 발전하였으나, 구체적으로 어떤 기관으로 발전하였는지는 크게 알려진 바가 없다. &lt;br /&gt;
&lt;br /&gt;
[[숭무학교(崇武學校)]]는 일부 학생들은 멕시코 혁명에 참여하기 위해 군에 입대하였다.  일부 설립자들은 과테말라 혁명에 참여하려 했으나 실패로 끝났다.&lt;br /&gt;
&lt;br /&gt;
[[분류: 이민희]]&lt;br /&gt;
&lt;br /&gt;
==데이터 시각화==&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마인드맵===&lt;br /&gt;
[[파일:교육구국운동_노드_마인드맵.png|500픽셀]]&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온톨로지===&lt;br /&gt;
인물의 경우 관련 공훈전자사료관,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인명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의 관련 링크를 삽입하여 추가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하였다.&lt;br /&gt;
{{NetworkGraph | title=교육구국운동.lst}}&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콘텐츠 구조===&lt;br /&gt;
====클래스(Class)====&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width:100%;&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0%&amp;quot;| 클래스|| style=&amp;quot;width:10%&amp;quot;|모양|| style=&amp;quot;width:20%&amp;quot;|내용 ||노드 &lt;br /&gt;
|-&lt;br /&gt;
|인물 ||인물의 사진 || 독립운동사에서 교육 운동에 이바지하였던 인물을 포함한 다양한 독립운동가들을 인물로서 클래스로 설정했다. || [[이동휘]] '''[[안창호(安昌浩)]]''' [[김원봉]] '''[[장제스]]''' 박용만 이갑성 스코필드 유기준 [[주시경]] [[지청천]] [[여운형]] 차미리사 김명시 남궁억 이동녕 이용익 김성수 신해영 [[강기덕]] 손병희 [[방정환]] 이종호 윤익선 염온동 주익 이세영 고종 순헌황귀비 박자혜 신채호 김종진 이정숙 이회영 김구 이석영 이상룡 윤기섭 이근영 한성순 양귀선 조병하 서문경 윤을희 이시영 박선봉 조금옥 '''[[양기탁(梁起鐸)]]'''&lt;br /&gt;
|-&lt;br /&gt;
|기관 || 빨간색 상자|| 부지를 두고 설치하여 활동했던 조직을 기관으로 설정했다. ||연희전문학교 세브란스 배재학당 배화학당 보성전문학교 명신여학교 '''[[한인소년병학교]]''' 대조선국민군단사관학교 '''[[조선혁명간부학교]]''' 신흥무관학교 숭무학교 신흥강습소 동아일보&lt;br /&gt;
|-&lt;br /&gt;
|단체 || 파란색 원 ||기관보다 넓은 의미로서, 같은 뜻을 가지고 함께 활동했던 조직체를 단체로 설정했다. || [[신민회(新民會)]] 협성회독립협회 '''[[한국광복군]]''' '''[[조선의용대]]''' 조선의용군 화북조선독립동맹 대한민국임시정부 간우회 조선어학회 대한인국민회&lt;br /&gt;
|-&lt;br /&gt;
|지역 || 초록색 타원|| 각 기관과 단체가 위치하거나 기관이나 단체, 인물이 활동했던 곳을 지역으로서 클래스를 설정했다. || 미국, 한반도, 난징, 멕시코, 캐나다, 상해, 만주, 중국&lt;br /&gt;
|-&lt;br /&gt;
|활동_및_사건 || 분홍색 타원 ||각 기관이나 단체, 인물의 행동 및 사건을 묶어 활동_및_사건의 클래스를 설정했다. || '''[[브나로드 운동]]''', 민립대학 설립 운동, 3.1운동, 6.10 학생 만세운동, 1920년 3.1 학생 운동, 서울 지역 학생 독립운동&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신다정]]&lt;br /&gt;
&lt;br /&gt;
====관계성(Relation)====&lt;br /&gt;
&lt;br /&gt;
'''인물 중심 관계성 설정''' &lt;br /&gt;
* '''설립했다''' 인물 → 기관, 단체 : 기관 또는 단체의 설립에 기여함을 설명하는 relation이다. &lt;br /&gt;
* '''지원했다''' 인물 → 기관, 단체, 활동 및 사건 : 단체, 기관, 활동 및 사건을 직접적으로 주도한 것은 아니나 보조적으로 지원했음을 설명하는 relation이다. 단체의 활동이나 기관의 설립 및 활동, 활동 및 사건의 전개의 지원을 모두 포괄하는 설명이다. &lt;br /&gt;
* '''출신이다''' 인물 → 기관, 단체, 지역 : 인물이 기관, 단체, 나라의 출신임을 나타내는 relation이다. 지역의 경우, 해당 인물의 국적을 의미하며 외국인의 경우에만 해당 relation을 사용해 국적을 나타냈다. &lt;br /&gt;
* '''활동했다''' 인물 → 활동 및 사건 : 인물이 특정 활동 및 사건에 주도적으로 활동했음을 나타내는 relation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기관 중심 관계성 설정'''&lt;br /&gt;
* '''소속이다''' 기관, 단체 → 인물 : 인물이 기관의 소속임을 나타내는 relation이다. 기관의 경우 교육기관을 주로 다루기 때문에, 교육기관에 재학하였던 경우에는 '출신이다.' relation을 사용하였고 교직원 등으로 재직한 경우에는 해당 relation을 사용하여 구분하였다. &lt;br /&gt;
* '''위치하다''' 기관→지역 : 기관이 특정 지역에 위치하였음을 나타내는 relation이다. 위치를 옮긴 기관의 경우 위치했던 지역에 모두 해당 relation을 사용하여 연결했다. &lt;br /&gt;
* '''발전했다''' 기관, 단체 → 기관, 단체 : 특정 기관 및 단체가 다른 기관 및 단체로 발전함을 설명하는 relation이다.  &lt;br /&gt;
* '''계승했다''' 기관, 단체 → 기관, 단체 : 기관 및 단체가 다른 기관 및 단체로 계승함을 설명하는 relation이다. 계승한 쪽을 종속 노드로 설정하였으나, 화살표 방향을 inverse로 설정해 '발전했다.' relation과 차이를 두었다.&lt;br /&gt;
&lt;br /&gt;
====온톨로지 기여====&lt;br /&gt;
[[김윤]]&amp;lt;br/&amp;gt;&lt;br /&gt;
[[신다정]]&amp;lt;br/&amp;gt;&lt;br /&gt;
[[이민희]]&amp;lt;br/&amp;gt;: 군사교육 중 조선혁명간부학교, 한인소년병학교,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 관련 노드 및 관계성 정리, 인물 사진 삽입&lt;br /&gt;
&amp;lt;br/&amp;gt;&lt;br /&gt;
[[최용빈]]&amp;lt;br/&amp;gt;&lt;br /&gt;
[[헤르미온느]]: 민족사학 관련 노드 및 관계성 정리, 인물 사진 삽입, 노드 색 및 모양 지정, 인물 하이퍼링크&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교육기관 지도&amp;lt;ref&amp;gt;가급적 최초 설립 위치를 기준으로 작성하였지만 초기 설립 시 다른 학교의 교사에 있다 교사를 이전한 경우 해당 위치로 표기함.&amp;lt;/ref&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src=&amp;quot;https://www.google.com/maps/d/embed?mid=1cI0D_B0oG-xrdk5kcPVCnLJ2hJpOJZw&amp;amp;ehbc=2E312F&amp;quot; width=&amp;quot;640&amp;quot; height=&amp;quot;480&amp;quot;&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기타==&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참고문헌===&lt;br /&gt;
1. 민족사학 발전과정 연대기 설명 내용&lt;br /&gt;
*「원산학사 (元山學舍)」,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0700, 접속일: 2024. 12. 9.&lt;br /&gt;
*「흥화학교(興化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6074, 접속일: 2024. 12. 9.&lt;br /&gt;
*「중교의숙(中橋義塾)」,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3699, 접속일: 2024. 12. 9.&lt;br /&gt;
*「순성학교 (順成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1901, 접속일: 2024. 12. 9.&lt;br /&gt;
*「점진학교(漸進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9857, 접속일: 2024. 12. 9.&lt;br /&gt;
*「낙연의숙(落淵義塾)」,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1639, 접속일: 2024. 12. 9.&lt;br /&gt;
&lt;br /&gt;
*「한성법학교(漢城法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426, 접속일: 2024. 12. 9.&lt;br /&gt;
&lt;br /&gt;
*「양정고등학교 (養正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731, 접속일: 2024. 12. 9.&lt;br /&gt;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3433, 접속일: 2024. 12. 9.&lt;br /&gt;
*「보창학교(普昌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3546, 접속일: 2024. 12. 9.&lt;br /&gt;
*「서전서숙 (瑞甸書塾)」,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8159, 접속일: 2024. 12. 9.&lt;br /&gt;
*「진명여자고등학교 (進明女子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4673, 접속일: 2024. 12. 9.&lt;br /&gt;
*「중동고등학교 (中東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3729, 접속일: 2024. 12. 9.&lt;br /&gt;
*「휘문고등학교 (徽文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5832, 접속일: 2024. 12. 9.&lt;br /&gt;
*「숙명여자대학교 (淑明女子大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1800, 접속일: 2024. 12. 9.&lt;br /&gt;
*「숙명여자고등학교 (淑明女子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1799, 접속일: 2024. 12. 9.&lt;br /&gt;
*「양규의숙(養閨義塾)」,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426, 접속일: 2024. 12. 9.&lt;br /&gt;
*「서북협성학교 (西北協成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7788, 접속일: 2024. 12. 9.&lt;br /&gt;
*「사범학교 (師範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5642, 접속일: 2024. 12. 9.&lt;br /&gt;
*「대성학교(大成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4519, 접속일: 2024. 12. 9.&lt;br /&gt;
*「협동학교(協東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3491, 접속일: 2024. 12. 9.&lt;br /&gt;
*「동성고등학교 (東星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6589, 접속일: 2024. 12. 9.&lt;br /&gt;
*「장훈고등학교 (長薰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8403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8403, 접속일: 2024. 12. 9.&lt;br /&gt;
*「오산고등학교 (五山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8302, 접속일: 2024. 12. 9.&lt;br /&gt;
*「치문초등학교 (致文初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8358, 접속일: 2024. 12. 9.&lt;br /&gt;
*「명동학교(明東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8242, 접속일: 2024. 12. 9.&lt;br /&gt;
*「양원여학교(養原女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687, 접속일: 2024. 12. 9.&lt;br /&gt;
*「보인학교(輔仁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426, 접속일: 2024. 12. 9.&lt;br /&gt;
*「기호학교(畿湖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426, 접속일: 2024. 12. 9.&lt;br /&gt;
*「양산중학교(楊山中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426, 접속일: 2024. 12. 9.&lt;br /&gt;
*「서북협성학교(西北協成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426, 접속일: 2024. 12. 9.&lt;br /&gt;
&lt;br /&gt;
2. 민간단체의 교육 구국 운동&lt;br /&gt;
* 한관일. &amp;quot;한국 개화기 신민회의 교육구국 사상.&amp;quot; 교육과학연구 14.- (2000): 1-32.&lt;br /&gt;
* [출처: 민립대학설립운동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lt;br /&gt;
[[분류:독립운동사의 근간, 교육구국운동(敎育救國運動)]]&lt;/div&gt;</summary>
		<author><name>Matnyeom</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8F%85%EB%A6%BD%EC%9A%B4%EB%8F%99%EC%82%AC%EC%9D%98_%EA%B7%BC%EA%B0%84,_%EA%B5%90%EC%9C%A1%EA%B5%AC%EA%B5%AD%EC%9A%B4%EB%8F%99(%E6%95%8E%E8%82%B2%E6%95%91%E5%9C%8B%E9%81%8B%E5%8B%95)&amp;diff=52191</id>
		<title>독립운동사의 근간, 교육구국운동(敎育救國運動)</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8F%85%EB%A6%BD%EC%9A%B4%EB%8F%99%EC%82%AC%EC%9D%98_%EA%B7%BC%EA%B0%84,_%EA%B5%90%EC%9C%A1%EA%B5%AC%EA%B5%AD%EC%9A%B4%EB%8F%99(%E6%95%8E%E8%82%B2%E6%95%91%E5%9C%8B%E9%81%8B%E5%8B%95)&amp;diff=52191"/>
		<updated>2024-12-20T10:56:1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Matnyeom: /* 온톨로지 기여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개요==&lt;br /&gt;
[[파일:교육구국운동 표지.png|800px|가운데]]&lt;br /&gt;
&lt;br /&gt;
[[분류:신다정]]&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   text-align:center;&amp;quot;&amp;gt;기획의도===&lt;br /&gt;
&lt;br /&gt;
 조선의 독립운동사는 근대교육을 위한 노력과 함께 전개되어 왔다. 교육 운동은 독립 운동의 일환으로서 민중을 계몽하기도 하고, 여성 교육이 발전하여 개화 사상이 유입되기도 했으며, 가장 중요하게도 군사 교육을 통해 민족이 싸울 힘을 기르기도 했다. 우리 민족은 당면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기 위해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고, 배움에 대한 열정으로 일제강점기의 어둠을 헤쳐나갈 수 있었다. 학생들이 독립운동을 생각했을 때 교육을 가장 먼저 떠올리지는 않는 듯하다. 다만, 교육은 독립운동사의 핵심적인 부분을 뒷받침하는 지지대였다. 따라서, 우리가 잘 몰랐던 독립운동사에서의 다양한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을 위키 페이지로 만들어 이들의 스토리를 전달하고자 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이민희]]&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 text-align:center;&amp;quot;&amp;gt;팀원===&lt;br /&gt;
2023130036 김윤&lt;br /&gt;
2023131227 최용빈&lt;br /&gt;
2023131540 정혜나&lt;br /&gt;
2024130814 이민희&lt;br /&gt;
2024130911 신다정&lt;br /&gt;
&lt;br /&gt;
=='''교육구국운동(敎育救國運動)'''==&lt;br /&gt;
한국사에 있어서 개화기는 근대화를 추진하는 시기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개화기 교육은 종래 유학 경전 중심의 교육에서 탈피하여 신교육을 시작하는 전환기로 교육사적 의미가 있는 중요한 시기이다. 한국개화기 근대교육의 발전과정은 1880년대에서 1890년대까지 짧은 기간에 많은 변화와 개혁을 거듭하는 시기이다. 국가적으로 열강의 침략을 극복하고 신문화를 받아들여 개명하는 변혁기로 신교육 정착시키는 동시에 국권회복을 위한 교육구국운동을 통하여 민족독립을 전개하는 시기이다. &lt;br /&gt;
&lt;br /&gt;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 이후 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고 일본 통감부가 설치되어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 시기의 개화파를 계승한 애국계몽사상가들은 국권회복을 위해서는 자강지술을 고취하고, 실력을 배양하는 것이 선결과제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이것을 위해 청소년 교육, 민족산업의 육성, 각종 단체에 대한 단결 그리고 신교육을 위한 학교설립 등 광범위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를 교율(敎育)을 통해 나라를 구한다(救國)는 의미의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교육구국운동'''&amp;lt;/span&amp;gt;이라고 칭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신다정]] &lt;br /&gt;
&lt;br /&gt;
==교육기관 설립==&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민족설립 교육기관===&lt;br /&gt;
====민족사학의 의미 ====&lt;br /&gt;
'''1. 민족사학의 정의:''' 우리 민족이 설립한 교육 기관&amp;lt;br/&amp;gt;&lt;br /&gt;
본 위키 페이지에서는 민족사학(民族私學)을 '''외세나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교육기관과 구분되는 것'''으로서, 교육구국운동의 일환으로 일제강점기 전후에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우리 민족이 개인이나 사법인으로서 설립하여 경영하는 학교&amp;lt;/span&amp;gt;로 정의한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2. 민족사학의 정신 및 목적:''' 개화와 교육구국&amp;lt;br/&amp;gt;&lt;br /&gt;
민족사학의 정신과 목적은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개화&amp;lt;/span&amp;gt;와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교육구국&amp;lt;/span&amp;gt;으로 크게 두 가지 방향이 있다. 초기의 민족사학 설립 정신은 '''선진외국의 문화와 문물'''을 받아들여 나라를 개화하고 발전시키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었으나,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乙巳勒約)&amp;lt;ref&amp;gt;대한 제국 광무 9년(1905)에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기 위하여 강제적으로 맺은 조약. 고종 황제가 끝까지 재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인 무효의 조약이다.(표준국어대사전 정의)&amp;lt;/ref&amp;gt; 이후 '''교육 구국을 위한 인재 양성'''이란 민족적 희망에 기반하였다.&lt;br /&gt;
&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민족사학의 발전배경====&lt;br /&gt;
당시 개화파를 비롯한 다수 지식인은 나라를 진흥시키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함을 느끼고 있었다.&amp;lt;br/&amp;gt;&lt;br /&gt;
이와 같은 지식인들의 의식은 서재필이 『한국휘보(Korean Repository)』에 기고한 다음 글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amp;lt;br/&amp;gt;&lt;br /&gt;
{{Blockquote|정부는 국민의 실정을 알아야 하고 국민들은 정부의 목적을 알아야 한다. 정부와 국민 상호간의 이해를 갖도록 하기 위해서는 쌍방에 대한 교육뿐이다 … 교육 없이는 국민들이 정부의 좋은 의도를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교육 없이는 정부 관리들이 결코 좋은 법률을 만들지 못할 것이다.&lt;br /&gt;
|출처=서재필, 「오늘날 한국이 가장 필요로 하는 일」(What Korea needs most), 『한국휘보(Korean Repository)』, 1896.3.}}&amp;lt;br/&amp;gt;&lt;br /&gt;
&lt;br /&gt;
이러한 의식은 독립협회에서 발간한 『독립신문』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amp;lt;br/&amp;gt;&lt;br /&gt;
{{Blockquote|'''문명개화한 나라들에서들은 무론 남녀하고 학교에 가서 적어도 10년 동안에 각색 학문을 배운 후 비로소 세상에 나가''' … 조선 사람들은 겨우 배우는 것이 한문만 조금 배워 가지고 … 일본 같은 조그마한 나라가 싸움을 하여서 청국 병정 무찌르기를 풀 베는 것 같이 하고, 일본도 30년 전 같으면 나라 형세가 청국과 똑같았으니, 어찌 조그마한 나라가 청국 같은 큰 나라를 이기리오마는, 일본 사람들이 서양 각국이 부강한 곡절을 알고 곧 백성 교육하는 일을 힘써 … 당장에 적은 리(利)와 욕심을 내버리고 '''인민 교육하여 몇 해 후에는 조선도 남과 같이 되기를 바라노라'''&lt;br /&gt;
|출처=「논설」,『독립신문』1896년 4월 25일자.}}&amp;lt;br/&amp;gt;&lt;br /&gt;
위의 글들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이러한 지식인들의 자각이 민족사학 설립의 배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민족사학의 발전과정 ====&lt;br /&gt;
1800년대 후반부터 1910년 이전까지 주요 민족 주도로 설립된 교육기관의 설립 과정을 정리&amp;lt;ref&amp;gt;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민족독립운동사 국권수호운동Ⅱ Ⅳ. 국권수호를 위한 사회·문화운동 6. 사립학교의 구국운동 3) 민립학교 설립의 주체(https://db.history.go.kr/modern/level.do?levelId=hdsr_002_0010_0060_0030)의 데이터에 기반하여 자료 조사를 진행하였다. 자료조사를 통해 설립 연도가 일부 수정되었다.&amp;lt;/ref&amp;gt;하였다.&amp;lt;br/&amp;gt;&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xpvhRvJrqO8QmhwtXtUZhPRbrWskR7CqqsrToNpIPRE&amp;amp;font=Default&amp;amp;lang=ko&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amp;lt;br/&amp;gt;&lt;br /&gt;
이와 같이 1905년 이전에는 개화 및 신교육 도입 목적으로 1905년 이후에는 인재양성을 통한 교육구국을 목적으로 많은 교육기관이 설립되었다.&lt;br /&gt;
&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대표적 민족설립 교육기관====&lt;br /&gt;
아래의 표에서는 대표적인 민족설립 교육기관과 그 계승 현황을 정리하였다. &amp;lt;br/&amp;gt;&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hn:left;background:white;&amp;quot;&lt;br /&gt;
|+ [대표적 민족설립 교육 기관&amp;lt;ref&amp;gt;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민족독립운동사 국권수호운동Ⅱ Ⅳ. 국권수호를 위한 사회·문화운동 6. 사립학교의 구국운동 3) 민립학교 설립의 주체(https://db.history.go.kr/modern/level.do?levelId=hdsr_002_0010_0060_0030)의 데이터에 기반하여 자료 조사를 진행하였다. 자료조사를 통해 설립 연도 및 설립자가 일부 수정되었다.&amp;lt;/ref&amp;gt;]&lt;br /&gt;
! 교육기관명 || 설립일 || 설립자 || 계승&lt;br /&gt;
|-&lt;br /&gt;
|원산학교(元山學校) || 1883 || 덕원(德源)의 유지 || 원산소학교, 원산보통학교, 원산제일국민학교로 계승되며 1945년까지 지속됨&lt;br /&gt;
|-&lt;br /&gt;
|흥화학교(興化學校) || 1895. 11. 5. || 민영환(閔泳煥) || 1911년 폐교&lt;br /&gt;
|-&lt;br /&gt;
|중교의숙(中橋義塾) || 1896 || 민영기(閔泳綺) || 1906년 폐교&lt;br /&gt;
|-&lt;br /&gt;
|순성여학교(順成女學校) || 1898.12. || 찬양회(讚揚會) || 1905년 12월 31일 『대한매일신보』기사를 끝으로 신문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음&lt;br /&gt;
|-&lt;br /&gt;
|점진학교(漸進學校) || 1899 || 안창호(安昌浩) || .&lt;br /&gt;
|-&lt;br /&gt;
|낙연의숙(落淵義塾) || 1901 || 서광세(徐光世) || 1916년 폐교&lt;br /&gt;
|-&lt;br /&gt;
|한성법학교(漢城法學校) || 1905. 1. || 사회 유지 || 1905년 9월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가 법률학전문야학과를 신설하여 한성법학교 학생 20명을 인계받음 &amp;lt;ref&amp;gt; https://www.kunews.ac.kr/news/articleView.html?idxno=3765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양정의숙(養正義塾) || 1905. 2. 11. || 엄주익(嚴柱益) || 양정중학교(養正中學校)&lt;br /&gt;
|-&lt;br /&gt;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 1905. 4. 3. || 이용익(李容翊) || '''고려대학교(高麗大學校)'''&lt;br /&gt;
|-&lt;br /&gt;
|보창학교(普昌學校) || 1905. 5. || 이동휘(李東輝) || .&lt;br /&gt;
|-&lt;br /&gt;
|서전서숙(瑞甸書塾) || 1906 || 이상설(李相卨) || 1907년 폐교&lt;br /&gt;
|-&lt;br /&gt;
|진명여학교(進明女學校) || 1906. 4. ||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 진명여자고등학교(進明女子高等學校)&lt;br /&gt;
|-&lt;br /&gt;
|중동학교(中東學校) || 1906. 4. 2. || 신규식(申圭植) || 중동고등학교 (中東高等學校)&lt;br /&gt;
|-&lt;br /&gt;
|휘문의숙(徽文義塾) || 1906. 5. || 민영휘(閔泳徽) || 휘문고등학교(徽文髙等學校)&lt;br /&gt;
|-&lt;br /&gt;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 || 1906. 5. ||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 '''숙명여자대학교(淑明女子大學校)''', 숙명여자중학교(淑明女子中學校), 숙명여자고등학교(淑明女子高等學校)&lt;br /&gt;
|-&lt;br /&gt;
|양규의숙(養閨義塾) || 1906. 6. || 여자교육회(女子敎育會) || .&lt;br /&gt;
|-&lt;br /&gt;
|서우사범학교(西友師範學校) || 1907. 1. || 서우학회(西友學會) || 1908년에 서북협성학교(西北協成學校)로 개편됨&lt;br /&gt;
|-&lt;br /&gt;
|대성학교(大成學校) || 1907 || 안창호(安昌浩) || 1912년 폐교&lt;br /&gt;
|-&lt;br /&gt;
|협동학교(協東學校) || 1907 || 유인식(柳寅植)) || 1917년 폐교&lt;br /&gt;
|-&lt;br /&gt;
|소의학교(昭義學校) || 1907. 9. || 전경현(全景鉉), 민강(閔橿), 장경관(張敬寬) 등 || 동성고등학교 (東星高等學校)&lt;br /&gt;
|-&lt;br /&gt;
|장훈학교(長薰學校) || 1907. 11. 2. ||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 || 장훈고등학교 (長薰高等學校)&lt;br /&gt;
|-&lt;br /&gt;
|오산학교(五山學校) || 1907. 12. || 이승훈(李昇薰) || 오산고등학교 (五山高等學校)&lt;br /&gt;
|-&lt;br /&gt;
|기호학교(畿湖學校) || 1908. 6. 20. ||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 || 융희학교(隆熙學校)를 흡수하여 중앙중학교(中央中學校), 중앙고등학교(中央高等學校)로 발전함&lt;br /&gt;
|-&lt;br /&gt;
|양원여학교(養原女學校) || 1908. 6. || 여자보학원유지회(女子普學院維持會) || .&lt;br /&gt;
|-&lt;br /&gt;
|신명학당(新明學堂) || 1908. 2. || 김장호, 김홍식(金洪植) || 치문초등학교 (致文初等學校)&lt;br /&gt;
|-&lt;br /&gt;
|명동학교(明東學校) || 1908. 4. 27. || 김학연(金學淵) || 1925년 폐교&lt;br /&gt;
|-&lt;br /&gt;
|보인학교(輔仁學校) || 1908. 6. 8. || 보인학회(輔仁學會) || 보인고등학교(輔仁高等學校)&lt;br /&gt;
|-&lt;br /&gt;
|양산중학교(楊山中學校) || 1908. 10. || 김홍량(金鴻亮) ||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이상의 표에서 1910년 국권피탈 이전 설립된 민족설립 교육기관 중 적지 않은 수가 오늘날에도 현존하고 있는 중학교, 고등학교, 또는 대학교로 계승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10년 이후 많은 학교가 폐교 위기에 처한 것을 고려하였을 때, 이러한 계승은 민족설립 교육기관을 유지해 교육을 통해 나라를 구하고자 했던 당시 사람들의 투지와 열망에 대한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보성전문학교와 명신여학교====&lt;br /&gt;
1910년 이전까지 민족 주도로 설립된 교육 기관 중 주요하게 살펴보아야 할 기관으로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와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가 있다. 보성전문학교는 이용익(李容翊)이 고종의 허가 하에 설립하였고, 명신여학교는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의 지원으로 설립되었음을 고려할 때, 모두 황실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사립 교육기관으로 보기는 힘들다는 한계는 존재한다. 그러나, 1910년 이전에 설립된 학교가 폐교의 절차를 밟지 않고 이어져 오늘날까지 계승되었다는 사실이 가지는 의미는 적지 않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1910년 이후 많은 학교가 일제의 강압 아래 폐교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 두 학교의 경우 대부분의 학교가 중등교육기관으로 계승된 것과는 구분되어 '''고등교육기관으로 발전한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나아가, 보성전문학교 설립을 기점으로 '교육 구국'을 목적으로 한 민족 사학의 설립이 활성화되었다는 점과 명신여학교의 경우 민족이 설립한 많지 않은 여성 교육기관 중 하나였다는 점 역시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lt;br /&gt;
보성전문학교는 1905년 04월 03일 고종(高宗)의 재정적 후원을 받아 [[이용익李容翊]]에 의해 설립된 교육기관이다. &amp;lt;br/&amp;gt;&lt;br /&gt;
보성전문학교의 설립 배경은 설립자 이용익의 행보에서 엿볼 수 있다. 친로반일(親露反日)의 뜻 고수한 것과 조선의 중립 선언을 선언하게 한 것으로 인해 일본에 의해 납치된 이용익은 체류 중 일본의 '''근대교육기관 및 개화문물을 접한다'''. 이것이 그의 교육기관 설립의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이후 귀국할 때 '''다수의 도서와 인쇄기를 구매'''하여 가지고 온 점 역시 이러한 추측의 설득력을 높인다. &amp;lt;br/&amp;gt;&lt;br /&gt;
한편, 보성전문학교의 개교를 알리는 황성신문(皇城新聞)의 글에는 보성전문학교 설립이 그 당시에 가졌던 의미가 잘 드러나고 있다. &amp;lt;br/&amp;gt;&lt;br /&gt;
{{Blockquote|전문학교 창설. '''대한에 전문대학교는 아직 세워지지 못했다. 한성법학교(漢城法學校)가 세워졌으나 야학(夜學)이라 완전하지 못했는데, 박동(礴洞)에 신설한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는 위치가 전문대학 주간 학교로''' 대황제폐하께서 특별히 설립하신 바, 매월 수천원의 경비를 내탕전(內帑錢)으로 내려주고 도서관을 부설하여 각 전문 교과서 수천권을 새로 간행한다 한다. 그리고 신해영(申海永)·조제환(趙齊桓)·정영택(鄭永澤) 세 명에게 이상의 사무를 전담하도록 하여, 위 3명은 교육을 열심히 하여 황제의 뜻에 보답하기위해 더욱 극진하게 힘을 쓴다고 한다. 20여명의 교수는 일찍이 일본에 유학하여 졸업한 사람들을 임용하여 (중략) '''2개년 졸업기한이지만 인재를 빨리 양성하도록''' 황제의 뜻을 특별히 내리셨다하고, 오늘부터 개교한다고 한다.&lt;br /&gt;
|출처=『황성신문(皇城新聞)』 1905년 4월 1일자 2면. 현대어역: 고려대학교 도서관&amp;lt;ref&amp;gt;https://library.korea.ac.kr/datause/archiving/old-book-exhibition/release/?mod=document&amp;amp;uid=10653&amp;lt;/ref&amp;gt;}}&lt;br /&gt;
윗글에서 당시 대한제국에 중등교육기관은 존재했음에도 고등교육을 위한 기관은 야학의 형태로서만 존재하여 온전하지 못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당시 상황 속에서 이용익이 일본의 교육 현황을 접한 후 대한제국 고등교육기관의 필요성을 느껴 설립하려 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고등교육기관 설립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맞춰 등장한 학교라는 점에서 보성전문학교가 가지는 가치는 매우 크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1910년 이후 다른 학교와 마찬가지로 보성전문학교는 운영진 및 교장의 망명, 투옥과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운영난을 겪는 등 각종 수난을 겪는다. 이후 일제의 탄압 아래 격하되거나 교명을 바꾸고 학과 설립이 제한되는 등 여러 차례 존속의 고비를 넘긴다. 하지만 끊임없는 노력을 바탕으로 1921년 전문학교로 다시 승격되었으며 여러 위기를 거친 끝에 해방 후 고려대학교로 발족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lt;br /&gt;
명신여학교는 1906년 5월 22일 고종(高宗)의 후궁인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의 지원으로 왕실 별궁 용동궁에 설립된 교육기관이다. &amp;lt;br/&amp;gt;&lt;br /&gt;
순헌황귀비는 본디 교육, 특히 여성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명신여학교의 설립에 앞서 1906년 4월에 진명여학교(進明女學校)를, 1907년에 경영난에 처해 있던 양정의숙(養正義塾)을 도운 점에서 잘 드러난다. &amp;lt;br/&amp;gt;&lt;br /&gt;
한편, 당시 여성 교육 관련 배경은 다음과 같다. 앞서 기술된 바와 같이 1905년 을사늑약 전후로 교육구국이 일어나 전국 각지에서 민족사학이 설립되었으나 여성을 위한 교육기관은 부족한 실태였다. 당시 설립된 여성 교육기관으로는 이화학당, 정신여학교, 숭의학교 등이 있었으나 이는 모두 선교사, 즉 민족에 의해 설립된 학교가 아니었다.&amp;lt;ref&amp;gt;한희숙, 구한말 순헌황귀비 엄비의 생애와 활동, 아시아여성연구, 숙명여자대학교 아시아여성연구원, 제45집 2호, 2006&amp;lt;/ref&amp;gt;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여성 교육기관의 필요'''를 절감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 것은 순헌황귀비의 시대적 통찰력을 반영하는 부분이다. &amp;lt;br/&amp;gt;&lt;br /&gt;
위와 같은 순헌황귀비의 설립 목적은 대한매일신보의 글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amp;lt;br/&amp;gt;&lt;br /&gt;
{{Blockquote|황귀비 흥학:  황귀비 전하께오서 여자 교육이 없음을 크게 걱정하여 육군참장 엄주익씨 집(第)에 여학교를 설립하여 '''여자교육을 발달시키고자''' 하였다.  엄주익에게 학교 설립 일을 전담하게 하시니 '''대한여자의 교육이 앞으로 발달하기를''' 가히 볼 수 있을 지로다. &lt;br /&gt;
|출처=『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6년 4월 24일자&amp;lt;ref&amp;gt;한희숙, 구한말 순헌황귀비 엄비의 생애와 활동, 아시아여성연구, 숙명여자대학교 아시아여성연구원, 제45집 2호, 2006, 227쪽.&amp;lt;/ref&amp;gt;}}&lt;br /&gt;
광복 후 명신여학교는 숙명여자중학교(淑明女子中學校)와 숙명여자고등학교(淑明女子高等學校)로 이어졌다. 나아가, 여성 고등교육기관의 설립을 꿈꾼 교장 이정숙(李貞淑)의 뜻에 따라 1938년 숙명학원(淑明學園)에서 숙명여자전문학교를 설립하였고, 이것이 오늘날 숙명여자대학교(淑明女子大學校)로 계승되었다.&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선교사 설립 교육기관===&lt;br /&gt;
선교사들은 기독교 선교의 기반 구축을 위해 개화정책 추진 초기인 1880년대부터 고종의 각별한 관심과 지원 속에서 많은 학교를 설립하였다.  서울에 배재·이화·경신학교를 설립하였고, 기독교 선교금지정책이 이완되기 시작한 1890년대에는 지방도시로 그 범위를 넓혀 1894년 평양의 광성학교·숭덕학교·정의여학교, 1895년 서울의 정신여학교를 비롯하여 동래·인천·재령·목포·원산·개성·해주·공주·대구 등 전국 각지로 확대하였다.&lt;br /&gt;
&lt;br /&gt;
====[[연세대학교(延世大學校)]]====&lt;br /&gt;
&lt;br /&gt;
연희전문학교는 1915년 선교부연합위원회의 협의를 얻어서 북장로회 선교사인 언더우드가 조선기독교학교로 처음 설립하였다. 이후 1917년 연희전문학교로 발족하였다. 보성전문학교 이후 두 번째로 설립된 전문학교이다. 이후 3.1 운동등 다양한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1944년 일제가 경영권과 재산을 몰수하고 한국인 교수진들을 모두 추방했었다. 독립 후에는 연희대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대학교로 승격하였다.&lt;br /&gt;
&lt;br /&gt;
세브란스는 대한제국의 궁정어의였던 알렌에 의해 1885년에 설립된 제중원에서 시작하였고, 1886년부터 제중원 내 의학부를 두고 입학생을 받았다. 이후 병원장으로 취임한 선교사 에비슨이 1899년 조선 최초의 의학교인 제중원의학교를 설립하였다. 1904년 미국인 세브란스의 후원으로 세브란스 병원이 세워지며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로 개편하였다. 1906년에 간호부가 개설되었고 우리나라 최초의 간호사를 배출하였다. 세브란스와 연희전문학교 간의 병합은 1920년대에도 한차례 시도한 바 있었으나 무산되었고, 독립 후 1957년에 두 학교가 통합되어 '''연세대학교'''로 출범하였다.&lt;br /&gt;
&lt;br /&gt;
====[[배재학당]]====&lt;br /&gt;
&lt;br /&gt;
1885년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한국 최초의 근대식 사립학교로 중등과정을 담당했다. 1886년이 고종이 배재학당이라는 이름을 사하였고 미국인들의 후원을 받아 1887년에 제대로 된 건물을 세웠다. 영어교육을 중점적으로 행했으며 학생자조정책을 채택하여 가난한 학생들이 학교에서 일을 하며 수업료를 벌 수 있도록 하였다. 현재 기존의 건물은 2008년부터 배재학당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배재중학교, 배재고등학교, 배재대학교'''가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lt;br /&gt;
&lt;br /&gt;
====[[배화학당]]====&lt;br /&gt;
초,중등과정의 사립학교로 1898년 켐벨 선교사가 설립하였다. 처음엔 캐롤라이나학당으로 기독교전파와 여성교육을 목표로 세웠졌다. 1910년 배화학당으로 개칭하였다.1916년 1월 경성 누하동(지금의 서울 종로구 필운동)으로 교사를 이전하고, 1926년 12월 캠블기념관을 신축하였으며, 1938년 3월 배화고등여학교와 배화여자소학교로 분리,개편되었다. 일제의 신사참배요구를 거절한 기독교 학교 중 하나이다. 1940년대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선교사들도 학교를 떠나며 위기에 폐교 위기에 봉착했다. 학교가 경영난에 시달리자 일제는 학교의 운영권을 요구했으나, 당시 교사였던 이덕봉과 이만규가 독지가를 구하려 노력한 끝에 이민천이 춘천, 이천, 연기, 익산 등지에 있는 토지를 기부하여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독립 후 1951년 '''배화여중과 배화여고'''로 분리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김윤]]&lt;br /&gt;
&lt;br /&gt;
=='''민간 단체의 교육 운동'''==&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신민회(新民會)]]의 애국계몽운동===&lt;br /&gt;
&amp;lt;br/&amp;gt;&lt;br /&gt;
{{Blockquote| '''신민회 행동강령'''&lt;br /&gt;
1. 국민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사상 고취 &amp;lt;br /&amp;gt; 2. 동지를 발하고 단합하여 국민 운동 역량 축적 &amp;lt;br /&amp;gt; 3. 상공업 기관 건설로 국민의 부력(富力) 증진 &amp;lt;br /&amp;gt; 4. 교육 기관 설립으로 청소년 교육 진흥&lt;br /&gt;
|출처= 「헌기제501호, 「대한 신민회 취지서 및 동회 통용 장정 등 보고 건」, 1909년 3월 5일(국사편찬위원회, 『통감부문서』 6, 1991}}&lt;br /&gt;
&lt;br /&gt;
신민회(新民會)는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1907년에 [[안창호(安昌浩)]], [[양기탁(梁起鐸)]] 등의 주도로 결성된 항일 비밀결사&amp;lt;/span&amp;gt;이다. 위와 같은 신민회의 행동 강령을 바탕으로 신민회는 실력 양성을 통한 국권 회복을 주장하며, 교육, 언론 및 출판, 민족 산업 육성, 독립군 양성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lt;br /&gt;
&lt;br /&gt;
신민회는 실력 배양의 방법으로 교육 구국 운동을 두 가지 측면에서 전개하였다. 국민에게 국권회복을 위한 교육의 필요성을 계몽하여 학교설립을 고취하며 신민회도 학교를 설립하여 국권회복에 필요한 적합한 교육방침을 강구하여 민족 지도자를 양성한다는 것이다. 또한, 국외에서 독립군 기지를 창설하고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전쟁을 일으켜 국권을 회복한다는 것이다. &lt;br /&gt;
&lt;br /&gt;
신민회는 이를 위해 민중들이 설립한 학교에 대해 학교교육방침을 지도하였다. 또한, 중학교를 설립하고, 학교의 모범을 만들며 중학교에서 동시에 사범교육을 해 교사를 양성한다는 기준을 세우고 학교를 설립하였다. 당시 민간인이 자발적으로 기금을 갹출하여 설립한 학교는 대부분이 소학교였기 때문에, 신민회는 중학교를 설립하여 소학교 출신 청소년들이 더 양질의 교육을 통해 민족지도자로 발돋움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lt;br /&gt;
&lt;br /&gt;
신민회는 기본적으로 비밀결사이기 때문에 그들이 설립한 학교의 수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1907년부터 1909년 4월까지 민간인들에 의해 세운 학교가 3000여 개교에 달한다는 통계로 보아 신민회에서 세운 학교가 많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알려진 신민회가 설립한 학교는 다음과 같다.&lt;br /&gt;
&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hn:left;background:white;&amp;quot;&lt;br /&gt;
|+ [신민회가 설립한 학교]&lt;br /&gt;
! 학교명 || 설명 &lt;br /&gt;
|-&lt;br /&gt;
| '''대성학교'''|| [[안창호(安昌浩)]], 윤치호 평양에 설립. 신민회가 설립한 대표적인 민족 사학으로 입학 지원자가 500~600여 명이 되는 때도 존재. &lt;br /&gt;
|-&lt;br /&gt;
| '''오산학교'''|| 평안북도 정주군에 이승훈 설립. 김소월, 백석, 이중섭, 독립운동가 김홍일 중장 등을 배출. 현재 서울 오산고등학교로 계승됨&lt;br /&gt;
|-&lt;br /&gt;
| 점진학교|| 평안남도 강서 위치, [[안창호(安昌浩)]] 설립. 남녀공학을 실시한 최초의 소학교. &lt;br /&gt;
|-&lt;br /&gt;
| 보창학교 || 강화도 위치, 이동휘 설립&lt;br /&gt;
|-&lt;br /&gt;
| 신안학교 || 정주, 신민회 정주지회 회원 설립&lt;br /&gt;
|-&lt;br /&gt;
| 양실학교 || 의주, 신민회 의주/용천지회 회원 설립&lt;br /&gt;
|-&lt;br /&gt;
| 가명학교 ||  신민회 납청정지회 회원 설립&lt;br /&gt;
|-&lt;br /&gt;
| 신흥학교 || 선천, 중학교급 학교&lt;br /&gt;
|-&lt;br /&gt;
| 홍양학교 || 신민회 곽산지회 회원 &lt;br /&gt;
|-&lt;br /&gt;
| 명륜학교|| 함경남도 영흥읍에 있던 세 개 학교 통합, 이동휘 설립&lt;br /&gt;
|-&lt;br /&gt;
| 경성학교|| 함경북도 경성 위치&lt;br /&gt;
|-&lt;br /&gt;
| 양산학교|| 황해도 안악읍 향천자리, 김용제 설립, 신민회가 중학교로 개편&lt;br /&gt;
|-&lt;br /&gt;
| 오성학교 || 서울 위치, 이갑, 이종화 설립. 신민회 창건 후 각종학교인 서북협성학교로 개편&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신민회의 애국계몽은 학교 설립뿐만이 아니라 학회의 설립과 지도를 통해서도 추진되었다. 안악군면학회(安岳郡勉學會), 해서교육총회(海西敎育總會),평양청년권장회(平壤靑年勸?會), 연학회(練學會), 동제회(同濟會)등의 학회를 전국에 조직하는 데에 앞장섰다. 또한, 서우학회, 한북학회를 서북학회로 통합 재조직하는 등, 기존에 있던 학회의 통합과 재정비에도 이바지하였다. &lt;br /&gt;
&lt;br /&gt;
이와 같이 신민회의 교육계몽운동은 신민회가 1912년 105인 사건으로 해산될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그 이후에도 다른 독립운동단체에 영향을 미쳐 교육을 통한 민중 계몽으로 이루어지는 독립운동의 방향성을 제시하였다.&lt;br /&gt;
&lt;br /&gt;
[[분류:신다정]]&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농촌 계몽 운동===&lt;br /&gt;
&lt;br /&gt;
농촌 계몽 운동은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1920년대~1930년대 민족 운동과 관련한 청년 학생이나 지식층이 농민의 의식과 지식 등을 계몽하기 위해 농촌 사회에서 행한 사회 교육 운동&amp;lt;/span&amp;gt;을 의미한다. 농사일을 끝낸 후 강연회, 토론회, 야학 등의 형식으로 이루어졌으며 특히 농한기인 겨울에 많이 실시되었다. &lt;br /&gt;
&lt;br /&gt;
1920년에는 일제의 식민 지주 경영과 지주 착취로 인해 농민 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고, 이와 맞물려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이 결성되었다. 이때 사회주의 계열 청년 단체와 지식인들이 농촌으로 진출하여 농민 운동을 주도하였다. &lt;br /&gt;
민족주의 계열에서 주도한 농촌 운동은 문맹 퇴치와 생활 개선 등의 계몽적 활동이 중심이었다. 대표적으로 천도교 계열의 농촌 운동, 기독교 계열의 농촌 운동이 있다. 천도교는 1925년 조선농민사를 설립하여 농민 야학을 시행하고 전국적으로 농민에 대한 계몽 활동을 전개하였다. 기독교에서는 1926년 이후 학생 YMCA 농촌부를 중심으로 계몽 활동을 적극 추진하였다. &lt;br /&gt;
&lt;br /&gt;
1920년 후반부터 1930년대에는 언론사 또한 농촌 계몽 운동에 힘을 쏟았다. 대표적으로 1929년부터 1935년까지 이루어진 조선일보사의 문자 보급 운동과 1931년부터 1934년까지 이루어진 동아일보사의 [[브나로드 운동]]이 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이런 농촌 계몽 운동은 1930년대 들어 강화된 조선총독부의 조선어 사용 금지 정책과 지방 농촌의 몰락으로 인해 쇠퇴하였다. 또한, 농촌의 몰락 책임을 수탈 때문이 아닌 농민의 게으름과 무지에 있다며 총독부의 주도로 농촌진흥운동을 진행하며 민간 및 언론 단체의 농촌 계몽 운동을 탄압하였다. 그러나 이런 탄압 속에서도 농촌 계몽 운동은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이러한 민간 교육 활동 및 정책은 해방 이후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문맹 퇴치 운동으로 이어졌다.&lt;br /&gt;
&lt;br /&gt;
[[분류:신다정]]&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민립 대학 설립 운동===&lt;br /&gt;
&lt;br /&gt;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은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1920년대 이루어진 민족 사학 설립 운동&amp;lt;/span&amp;gt;이다.&lt;br /&gt;
&lt;br /&gt;
1920년대 초 식민지 조선에서는 민중의 자발적인 참여하에 조선인을 위한 대학을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등장하였다. 민립 대학 설립에 대한 논의는 1920년 6월 20일 한규설, 이상재, 윤치소 등 91년의 발기로 조선교육회 발기회가 개최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가 학회령을 토대로 1922년 1월 24일까지 인가를 내주지 않아 민립대학 설립에 대한 결의를 실행시키지 못했다. &lt;br /&gt;
&lt;br /&gt;
동아일보에 기고된 사설을 통해 당시의 독립을 위한 교육 계몽의 필요성과, 관립 대학과 다르게 민립 대학의 설립 필요성에 관해 확인할 수 있다. &lt;br /&gt;
&lt;br /&gt;
{{Blockquote|운명을 어떻게 개척할까. 정치냐 외교냐 산업이냐. 물론 이러한 일들 모두 다 필요하다. 그러나 그 기초가 되고 요건이 되며 가장 급무가 되고 가장 선결의 필요가 있으며 가장 힘 있고 '''가장 필요한 수단은 교육이 아니면 할 수 없다.''' &amp;lt;br /&amp;gt; … 물론 관립대학도 조만간 개교될 것이기에 대학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학문 발전의 장래는 결코 1개의 대학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요, 또한 '''그처럼 중대한 사업을 우리 민중이 직접으로 영위하는 것은 차라리 우리의 의무라 할 수 있다.''' &amp;lt;br /&amp;gt;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에 느낀 바 있어 감히 만천하 동포에게 향하여 민립대학의 설립을 제창하니 자매형제는 와서 돕고 나아가 이루어라.'''&lt;br /&gt;
|출처= 「開會된 民大總會」, 『동아일보』, 1923년 3월 30일자.}}&lt;br /&gt;
&lt;br /&gt;
이렇게 고양된 민립 대학 설립을 통한 민족 교육에 대한 필요성을 바탕으로, 1922년 1월 이상재, 이승훈, 윤치호, 김성수, 송진우 등이 조선민립대학기성준비회를 정식으로 결성하였다. 이어 1923년 3월 29일 발기인 1170명 중 462명이 참석한 가운데 3일간 총회를 개최하였다. &lt;br /&gt;
&lt;br /&gt;
총회에서는 ＇민립대학발기취지서＇를 채택하고 대학 설립 계획서를 확정하였다. 계획서에 따르면 3개년 계획으로 자본금 1000만원을 갹출하는데, 제 1차 연도에는 대지 5만 평을 구입하여 교실 10동, 대강당 1동을 건축하고, 법과/경제과/문과/이과의 4개 대학 및 예과를 설치하며, 제2차 연도에는 300만원으로 공과/이과/기타 학과를 증설하고, 제3차 연도에는 300만원으로 의과/농과를 설치한다는 것이다. 또 중앙집행위원회를 구성하고 지방에 지방부를 두기로 결의하였다. 별도로 지방순회선정위원 13평을 선정하고 파견하였다. 이와 같은 노력을 토대로 1923년 말까지 전국 100여 개소와 해외의 만주 간도, 봉천, 미국 하와이 등지에도 지방부가 조직되었다. &lt;br /&gt;
&lt;br /&gt;
기성회는 ＇한민족 1000만 한 사람 1원씩＇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기금 모금에 나섰다. 이런 모금 활동에 민족 교육을 성원하는 마음들이 모였는데, 대표적으로 전라남북도에서만 15만원이 모금되었으며 경기도 안성의 이정도는 1년 동안 매일 아침 밥짓는 쌀에서 식구 수 대로 한 숟가락씩 모아 판 돈 19원을 기부하는 등 일반 민간에서의 성원도 뜨거웠다. &lt;br /&gt;
&lt;br /&gt;
이와 같은 열기에 일제는 이를 교육 운동이 아니라 정치 운동이라고 판단하고 탄압하였다. ＇조선교육령＇을 개정하여 관립 경성제국대학의 설립을 서두르고 민립대학과 관련 있는 인사들에 대한 탄압과 기금 갹출 방해 공작을 전개하였다. 민립대학기성회 인사들을 민족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구실로 철저히 감시하고, 기금 모집을 위해 박차를 가하던 인사들의 지방 강연을 배일사상을 고취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강연 중지를 명하고 청중을 해산시켰다. &lt;br /&gt;
&lt;br /&gt;
이러한 조선총독부의 탄압이 민립대학 설립운동의 실패의 주된 원인이 되었다. 1923년 여름 수재, 9월 일본 관동 대지진으로 인한 경제 공황, 1924년 한재와 7월 전국적 수재로 인한 농촌 경제 파탄 등 자연적인 여건도 민립대학 설립운동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그러나 3.1운동 이후 전 민족이 민족 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조직체를 형성하여 교육을 통한 자주독립이라는 하나의 목표에서 단결을 보였다. 이는 이후의 민족운동 양상에서 조직적인 단체 결성의 표본이 되었다.&lt;br /&gt;
&lt;br /&gt;
[[분류:신다정]]&lt;br /&gt;
&lt;br /&gt;
=='''군사 교육'''==&lt;br /&gt;
&lt;br /&gt;
독립운동사에서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군사 교육도 꾸준히 이어져왔다. 수많은 독립열사들은 무관학교 설립을 위한 활발한 활동을 이어왔다. 독립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역량은 군사였기 때문에, 군사교육은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였으며 이에 따라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에서도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노력이 나타났다.&lt;br /&gt;
&lt;br /&gt;
[[분류:이민희]]&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lt;br /&gt;
신흥무관학교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위해 설립된 군사학교로, 독립군 양성과 무장 투쟁 기반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911년 중국 만주 서간도 지역(현재의 지린성 류허현)에서 이회영, 이시영 등 독립운동가들이 설립했으며, 군사 지도자를 양성하고 실질적인 무장 독립운동을 준비하는 데 목적을 두었습니다. &lt;br /&gt;
&lt;br /&gt;
교육 내용은 사격, 전술, 지형 분석 등 실전 중심의 군사훈련과 함께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역사 및 애국사상 교육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졸업생들은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전투 같은 독립전쟁에서 활약하며 독립운동의 주축이 되었고, 김좌진과 이범석 같은 지도자를 배출했습니다. &lt;br /&gt;
&lt;br /&gt;
1920년대에 들어 일본의 탄압이 강화되면서 학교 운영이 점차 어려워졌고, 졸업생들이 각종 독립운동 조직으로 흩어지면서 신흥무관학교는 군사훈련소 형태로 전환되다가 결국 해체되었습니다. &lt;br /&gt;
&lt;br /&gt;
졸업생들은 만주 지역에서 서로군정서, [[북로군정서]]에서 핵심 간부로 활약, [[대한독립군]], 통의부의용군, 정의부, 신민부, 국민부 등에서 활동하였고,중국 본토에서는 1919년 11월 길림에서 의열단 결성,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에서 독립운동 전개했습니다.&lt;br /&gt;
&lt;br /&gt;
신흥무관학교는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군사교육 기관으로 평가받습니다. 이 학교는 독립군의 전투력을 강화하고, 독립운동의 실질적 기반을 마련했으며, 한국 독립운동의 전환점이 된 여러 전투에서 큰 공헌을 했습니다.&lt;br /&gt;
&lt;br /&gt;
[[분류:최용빈]]&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조선혁명간부학교]]===&lt;br /&gt;
&lt;br /&gt;
1919년 조직된 무장독립운동단체 의열단은 중국국민당과의 합작을 통해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실질적인 군사 교육 기관'''&amp;lt;/span&amp;gt;을 설립하고자 노력했다. 이에 따라 [[장제스]]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의열단&amp;lt;ref&amp;gt; 급진적인 항일 투쟁을 목적으로 1919년 11월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로, 김원봉(金元鳳)이 단장을 맡았다. &amp;lt;/ref&amp;gt;의 단장인 김원봉이 1932년 중국 난징에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설립하였다. 공식 명칭은 사실 조선혁명간부학교가 아닌, ''‘중국국민당 군사위원회 간부 훈련반 제6대’''로, 국민당의 단기간부훈련소 신설반인 것처럼 위장했다. &lt;br /&gt;
&lt;br /&gt;
&lt;br /&gt;
학교는 일본과 중국의 외교관계를 고려해 학교 운영 사실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설립 초기에는 중국 외교부와 육군참모본부, 심지어 군사위원회 판공청 당사자들조차 그 존재를 모를 정도였다. 만 3년간 운영된 조선혁명간부학교는 3기에 걸쳐 총 125명의 인재를 배출했다. 국민당은 그동안 매월 경상비 2,000~3,000원·수시 필요경비 1,000~1만 원·기타 운영비 400~1,000원 등 각종 운영자금 전액과 화기·탄약·피복 등을 지원했다. 학생들은 군사학뿐 아니라 별도 신설된 정치학, 자연과학을 포함해 경제학·사회학·철학·혁명학·물리학·화학·지리학까지 다양한 학문을 공부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혁명간부학교의 졸업생들은 이후 민족혁명당의 항일투쟁체계에 편입되었으며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대]]의 핵심 세력으로 성장하였고, 일부는 화북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에 가담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단체문서한국광복군.jpg|섬네일|가운데|''&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한국 광복군의 모습&amp;lt;/div&amp;gt;'']] &lt;br /&gt;
[[파일:조선의용대김원봉.jpg|섬네일|가운데|''&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조선의용대 모습 &amp;lt;/div&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amp;lt;font color=&amp;quot;#8c8c8c&amp;quot;&amp;gt;조선의용대 깃발 가운데 있는 인물이 약산 김원봉이다.&amp;lt;/font&amp;gt;''&amp;lt;ref&amp;gt;김삼웅, &amp;quot;최후까지 총을 든 조선의용대와 김원봉&amp;quot;, 오마이뉴스, 2024.02.06.,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999602 (검색일:2024년 12월 4일)&amp;lt;/ref&amp;gt;&amp;lt;/div&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이민희]]&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한인소년병학교]]===&lt;br /&gt;
&lt;br /&gt;
한인소년병학교는 장기적인 독립 투쟁을 대비하여 군사 교육을 받은 장교를 양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박용만에 의해 설립되었다. 한인소년병학교는 1909년 6월에 세워진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최초의 국외 설립 군사학교''&amp;lt;/span&amp;gt;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으며, 각지의 군사운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lt;br /&gt;
&lt;br /&gt;
&lt;br /&gt;
한인소년병학교는 미국의 헤이스팅스(Hastins) 대학과 교섭하여 운영되었으며, 네브라스카 주에서 설립되었으나 교섭에 따라 헤이스팅스로 이전하여 한인 유학생의 활발한 참여를 이끌어냈다. 헤이스팅스 대학은 건물 한 동과 전장을 지원하여, [[둔전병제]]식 훈련을 실시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헤이스팅스대학.png|섬네일|가운데|''&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헤이스팅스 대학의 모습 &amp;lt;/div&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amp;lt;font color=&amp;quot;#8c8c8c&amp;quot;&amp;gt;한인소년병학교 학생들이 훈련했던 헤이스팅스 대학의 사진이다.&amp;lt;/font&amp;gt;''&amp;lt;/div&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ftzi6pFWzNc?si=iGbjmKk9yPuAn_Ub&amp;quot; title=&amp;quot;YouTube video player&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div&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다음의 영상에서 한인소년병학교가 있었던 헤이스팅스 대학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다.'' &amp;lt;/div&amp;gt;&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lt;br /&gt;
&lt;br /&gt;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는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한 박용만이 미국의 하와이에도 같은 군사 훈련 단체를 설립하고자 하여 1914년 4월 15일 설립되었다. 당시 학도 수는 200여명으로 군단장 역시 박용만이 맡았다. &lt;br /&gt;
&lt;br /&gt;
&lt;br /&gt;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는 [[한인소년병학교]]를 계승하여 [[둔전병제]]식 훈련을 실시하였고, 군영이 호놀룰루 시의 동북 쪽 큰 산을 넘어 해안과 아후이마누 강을 낀 계곡에 위치하여 ''&amp;quot;산 넘어 아희들&amp;quot;''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lt;br /&gt;
하와이에서 군단과 사관학교를 설치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으나, 1916년을 고비로 점차 쇠퇴하여 1917년 경 해체되었고, 지역으로 흩어져 사실상 폐교되었다.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는 제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미일(美日) 간 우호관계가 지속되면서 국민군단의 혁명적이고 군사적인 성격이 하와이 내에서 우호적인 반응을 얻지 못하였고, 이외에도 하와이 내 농장의 불경기로 수입이 급감하면서 재정 조달이 어려웠으며 1915년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의 실권이 이승만 측에 넘어가 박용만의 활동 범위가 위축된 점 등으로 인해 폐교되었다고 추측되고 있다.&lt;br /&gt;
&lt;br /&gt;
[[분류: 이민희]]&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숭무학교(崇武學校)]]===&lt;br /&gt;
숭무학교는 1910년대 멕시코로 이주한 한인들이 일제강점기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한 군사학교입니다. 멕시코에 이주한 한인들은 고된 노동 속에서도 민족 독립의 열망을 잃지 않고 독립운동을 조직적으로 지원하고자 노력했습니다. 1915년 멕시코 유카탄주 메리다 지역에서 설립된 숭무학교는 독립군 양성을 목표로, 체계적인 군사훈련과 애국 사상 교육을 실시했습니다.&lt;br /&gt;
&lt;br /&gt;
이 학교는 멕시코 한인 사회의 독립운동 기반을 강화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특히 숭무학교는 한인들의 단결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멀리 해외에서조차 독립운동을 지속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큽니다. 이러한 활동은 멕시코뿐 아니라 미주 지역의 다른 한인 독립운동 단체에도 영향을 주어 독립운동의 글로벌 네트워크 형성에 기여했습니다.&lt;br /&gt;
&lt;br /&gt;
숭무학교는 해외 독립운동의 독특한 사례로, 한인 이민사와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lt;br /&gt;
&lt;br /&gt;
[[분류:최용빈]]&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독립군으로의 발전===&lt;br /&gt;
&lt;br /&gt;
군사교육을 위해 설립된 다양한 무관학교를 기점으로, 졸업생들은 각기 다른 곳에서 독립군으로 발전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의 경우, 졸업생들은 만주 지역에서 서로군정서, 북로군정서에서 핵심 간부로 활약했을 뿐 아니라, 대한독립군,통의부의용군, 정의부, 신민부, 국민부 등에서 활동하였다. 또한, 중국 본토의 경우에서는 1919년 11월 길림에서 의열단을 결성하기도 하고, 임시정부 산하의 광복군인 한국광복군의 일원으로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졸업한 졸업생들도 독립군으로서 활약하였다. 이들은 민족혁명당의 항일투쟁체계에 편입되었는데, 대표적으로 임시정부 산하의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대의 핵심 세력으로 성장했고, 일부는 화북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에 가담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한인소년병학교]]와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 숭무학교를 졸업한 졸업생들도 독립군으로 발전하였으나, 구체적으로 어떤 기관으로 발전하였는지는 크게 알려진 바가 없다. &lt;br /&gt;
&lt;br /&gt;
[[숭무학교(崇武學校)]]는 일부 학생들은 멕시코 혁명에 참여하기 위해 군에 입대하였다.  일부 설립자들은 과테말라 혁명에 참여하려 했으나 실패로 끝났다.&lt;br /&gt;
&lt;br /&gt;
[[분류: 이민희]]&lt;br /&gt;
&lt;br /&gt;
==데이터 시각화==&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마인드맵===&lt;br /&gt;
[[파일:교육구국운동_노드_마인드맵.png|500픽셀]]&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온톨로지===&lt;br /&gt;
인물의 경우 관련 공훈전자사료관,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인명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의 관련 링크를 삽입하여 추가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하였다.&lt;br /&gt;
{{NetworkGraph | title=교육구국운동.lst}}&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콘텐츠 구조===&lt;br /&gt;
====클래스(Class)====&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width:100%;&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0%&amp;quot;| 클래스|| style=&amp;quot;width:10%&amp;quot;|모양|| style=&amp;quot;width:20%&amp;quot;|내용 ||노드 &lt;br /&gt;
|-&lt;br /&gt;
|인물 ||인물의 사진 || 독립운동사에서 교육 운동에 이바지하였던 인물을 포함한 다양한 독립운동가들을 인물로서 클래스로 설정했다. || [[이동휘]] '''[[안창호(安昌浩)]]''' [[김원봉]] '''[[장제스]]''' 박용만 이갑성 스코필드 유기준 [[주시경]] [[지청천]] [[여운형]] 차미리사 김명시 남궁억 이동녕 이용익 김성수 신해영 [[강기덕]] 손병희 [[방정환]] 이종호 윤익선 염온동 주익 이세영 고종 순헌황귀비 박자혜 신채호 김종진 이정숙 이회영 김구 이석영 이상룡 윤기섭 이근영 한성순 양귀선 조병하 서문경 윤을희 이시영 박선봉 조금옥 '''[[양기탁(梁起鐸)]]'''&lt;br /&gt;
|-&lt;br /&gt;
|기관 || 빨간색 상자|| 부지를 두고 설치하여 활동했던 조직을 기관으로 설정했다. ||연희전문학교 세브란스 배재학당 배화학당 보성전문학교 명신여학교 '''[[한인소년병학교]]''' 대조선국민군단사관학교 '''[[조선혁명간부학교]]''' 신흥무관학교 숭무학교 신흥강습소 동아일보&lt;br /&gt;
|-&lt;br /&gt;
|단체 || 파란색 원 ||기관보다 넓은 의미로서, 같은 뜻을 가지고 함께 활동했던 조직체를 단체로 설정했다. || [[신민회(新民會)]] 협성회독립협회 '''[[한국광복군]]''' '''[[조선의용대]]''' 조선의용군 화북조선독립동맹 대한민국임시정부 간우회 조선어학회 대한인국민회&lt;br /&gt;
|-&lt;br /&gt;
|지역 || 초록색 타원|| 각 기관과 단체가 위치하거나 기관이나 단체, 인물이 활동했던 곳을 지역으로서 클래스를 설정했다. || 미국, 한반도, 난징, 멕시코, 캐나다, 상해, 만주, 중국&lt;br /&gt;
|-&lt;br /&gt;
|활동_및_사건 || 분홍색 타원 ||각 기관이나 단체, 인물의 행동 및 사건을 묶어 활동_및_사건의 클래스를 설정했다. || '''[[브나로드 운동]]''', 민립대학 설립 운동, 3.1운동, 6.10 학생 만세운동, 1920년 3.1 학생 운동, 서울 지역 학생 독립운동&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신다정]]&lt;br /&gt;
&lt;br /&gt;
====관계성(Relation)====&lt;br /&gt;
&lt;br /&gt;
'''인물 중심 관계성 설정''' &lt;br /&gt;
* '''설립했다''' 인물 → 기관, 단체 : 기관 또는 단체의 설립에 기여함을 설명하는 relation이다. &lt;br /&gt;
* '''지원했다''' 인물 → 기관, 단체, 활동 및 사건 : 단체, 기관, 활동 및 사건을 직접적으로 주도한 것은 아니나 보조적으로 지원했음을 설명하는 relation이다. 단체의 활동이나 기관의 설립 및 활동, 활동 및 사건의 전개의 지원을 모두 포괄하는 설명이다. &lt;br /&gt;
* '''출신이다''' 인물 → 기관, 단체, 지역 : 인물이 기관, 단체, 나라의 출신임을 나타내는 relation이다. 지역의 경우, 해당 인물의 국적을 의미하며 외국인의 경우에만 해당 relation을 사용해 국적을 나타냈다. &lt;br /&gt;
* '''활동했다''' 인물 → 활동 및 사건 : 인물이 특정 활동 및 사건에 주도적으로 활동했음을 나타내는 relation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기관 중심 관계성 설정'''&lt;br /&gt;
* '''소속이다''' 기관, 단체 → 인물 : 인물이 기관의 소속임을 나타내는 relation이다. 기관의 경우 교육기관을 주로 다루기 때문에, 교육기관에 재학하였던 경우에는 '출신이다.' relation을 사용하였고 교직원 등으로 재직한 경우에는 해당 relation을 사용하여 구분하였다. &lt;br /&gt;
* '''위치하다''' 기관→지역 : 기관이 특정 지역에 위치하였음을 나타내는 relation이다. 위치를 옮긴 기관의 경우 위치했던 지역에 모두 해당 relation을 사용하여 연결했다. &lt;br /&gt;
* '''발전했다''' 기관, 단체 → 기관, 단체 : 특정 기관 및 단체가 다른 기관 및 단체로 발전함을 설명하는 relation이다.  &lt;br /&gt;
* '''계승했다''' 기관, 단체 → 기관, 단체 : 기관 및 단체가 다른 기관 및 단체로 계승함을 설명하는 relation이다. 계승한 쪽을 종속 노드로 설정하였으나, 화살표 방향을 inverse로 설정해 '발전했다.' relation과 차이를 두었다.&lt;br /&gt;
&lt;br /&gt;
====온톨로지 기여====&lt;br /&gt;
[[김윤]]&amp;lt;br/&amp;gt;&lt;br /&gt;
[[신다정]]&amp;lt;br/&amp;gt;&lt;br /&gt;
[[이민희]]&amp;lt;br/&amp;gt;: 군사교육 중 조선혁명간부학교, 한인소년병학교,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 관련 노드 및 관계성 정리, 인물 사진 삽입 &lt;br /&gt;
[[최용빈]]&amp;lt;br/&amp;gt;&lt;br /&gt;
[[헤르미온느]]: 민족사학 관련 노드 및 관계성 정리, 인물 사진 삽입, 노드 색 및 모양 지정, 인물 하이퍼링크&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교육기관 지도&amp;lt;ref&amp;gt;가급적 최초 설립 위치를 기준으로 작성하였지만 초기 설립 시 다른 학교의 교사에 있다 교사를 이전한 경우 해당 위치로 표기함.&amp;lt;/ref&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src=&amp;quot;https://www.google.com/maps/d/embed?mid=1cI0D_B0oG-xrdk5kcPVCnLJ2hJpOJZw&amp;amp;ehbc=2E312F&amp;quot; width=&amp;quot;640&amp;quot; height=&amp;quot;480&amp;quot;&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기타==&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참고문헌===&lt;br /&gt;
1. 민족사학 발전과정 연대기 설명 내용&lt;br /&gt;
*「원산학사 (元山學舍)」,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0700, 접속일: 2024. 12. 9.&lt;br /&gt;
*「흥화학교(興化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6074, 접속일: 2024. 12. 9.&lt;br /&gt;
*「중교의숙(中橋義塾)」,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3699, 접속일: 2024. 12. 9.&lt;br /&gt;
*「순성학교 (順成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1901, 접속일: 2024. 12. 9.&lt;br /&gt;
*「점진학교(漸進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9857, 접속일: 2024. 12. 9.&lt;br /&gt;
*「낙연의숙(落淵義塾)」,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1639, 접속일: 2024. 12. 9.&lt;br /&gt;
&lt;br /&gt;
*「한성법학교(漢城法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426, 접속일: 2024. 12. 9.&lt;br /&gt;
&lt;br /&gt;
*「양정고등학교 (養正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731, 접속일: 2024. 12. 9.&lt;br /&gt;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3433, 접속일: 2024. 12. 9.&lt;br /&gt;
*「보창학교(普昌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3546, 접속일: 2024. 12. 9.&lt;br /&gt;
*「서전서숙 (瑞甸書塾)」,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8159, 접속일: 2024. 12. 9.&lt;br /&gt;
*「진명여자고등학교 (進明女子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4673, 접속일: 2024. 12. 9.&lt;br /&gt;
*「중동고등학교 (中東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3729, 접속일: 2024. 12. 9.&lt;br /&gt;
*「휘문고등학교 (徽文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5832, 접속일: 2024. 12. 9.&lt;br /&gt;
*「숙명여자대학교 (淑明女子大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1800, 접속일: 2024. 12. 9.&lt;br /&gt;
*「숙명여자고등학교 (淑明女子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1799, 접속일: 2024. 12. 9.&lt;br /&gt;
*「양규의숙(養閨義塾)」,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426, 접속일: 2024. 12. 9.&lt;br /&gt;
*「서북협성학교 (西北協成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7788, 접속일: 2024. 12. 9.&lt;br /&gt;
*「사범학교 (師範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5642, 접속일: 2024. 12. 9.&lt;br /&gt;
*「대성학교(大成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4519, 접속일: 2024. 12. 9.&lt;br /&gt;
*「협동학교(協東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3491, 접속일: 2024. 12. 9.&lt;br /&gt;
*「동성고등학교 (東星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6589, 접속일: 2024. 12. 9.&lt;br /&gt;
*「장훈고등학교 (長薰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8403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8403, 접속일: 2024. 12. 9.&lt;br /&gt;
*「오산고등학교 (五山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8302, 접속일: 2024. 12. 9.&lt;br /&gt;
*「치문초등학교 (致文初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8358, 접속일: 2024. 12. 9.&lt;br /&gt;
*「명동학교(明東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8242, 접속일: 2024. 12. 9.&lt;br /&gt;
*「양원여학교(養原女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687, 접속일: 2024. 12. 9.&lt;br /&gt;
*「보인학교(輔仁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426, 접속일: 2024. 12. 9.&lt;br /&gt;
*「기호학교(畿湖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426, 접속일: 2024. 12. 9.&lt;br /&gt;
*「양산중학교(楊山中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426, 접속일: 2024. 12. 9.&lt;br /&gt;
*「서북협성학교(西北協成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426, 접속일: 2024. 12. 9.&lt;br /&gt;
&lt;br /&gt;
2. 민간단체의 교육 구국 운동&lt;br /&gt;
* 한관일. &amp;quot;한국 개화기 신민회의 교육구국 사상.&amp;quot; 교육과학연구 14.- (2000): 1-32.&lt;br /&gt;
* [출처: 민립대학설립운동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lt;br /&gt;
[[분류:독립운동사의 근간, 교육구국운동(敎育救國運動)]]&lt;/div&gt;</summary>
		<author><name>Matnyeom</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8F%85%EB%A6%BD%EC%9A%B4%EB%8F%99%EC%82%AC%EC%9D%98_%EA%B7%BC%EA%B0%84,_%EA%B5%90%EC%9C%A1%EA%B5%AC%EA%B5%AD%EC%9A%B4%EB%8F%99(%E6%95%8E%E8%82%B2%E6%95%91%E5%9C%8B%E9%81%8B%E5%8B%95)&amp;diff=52190</id>
		<title>독립운동사의 근간, 교육구국운동(敎育救國運動)</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8F%85%EB%A6%BD%EC%9A%B4%EB%8F%99%EC%82%AC%EC%9D%98_%EA%B7%BC%EA%B0%84,_%EA%B5%90%EC%9C%A1%EA%B5%AC%EA%B5%AD%EC%9A%B4%EB%8F%99(%E6%95%8E%E8%82%B2%E6%95%91%E5%9C%8B%E9%81%8B%E5%8B%95)&amp;diff=52190"/>
		<updated>2024-12-20T10:55:5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Matnyeom: /* 온톨로지 기여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개요==&lt;br /&gt;
[[파일:교육구국운동 표지.png|800px|가운데]]&lt;br /&gt;
&lt;br /&gt;
[[분류:신다정]]&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   text-align:center;&amp;quot;&amp;gt;기획의도===&lt;br /&gt;
&lt;br /&gt;
 조선의 독립운동사는 근대교육을 위한 노력과 함께 전개되어 왔다. 교육 운동은 독립 운동의 일환으로서 민중을 계몽하기도 하고, 여성 교육이 발전하여 개화 사상이 유입되기도 했으며, 가장 중요하게도 군사 교육을 통해 민족이 싸울 힘을 기르기도 했다. 우리 민족은 당면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기 위해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고, 배움에 대한 열정으로 일제강점기의 어둠을 헤쳐나갈 수 있었다. 학생들이 독립운동을 생각했을 때 교육을 가장 먼저 떠올리지는 않는 듯하다. 다만, 교육은 독립운동사의 핵심적인 부분을 뒷받침하는 지지대였다. 따라서, 우리가 잘 몰랐던 독립운동사에서의 다양한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을 위키 페이지로 만들어 이들의 스토리를 전달하고자 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이민희]]&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 text-align:center;&amp;quot;&amp;gt;팀원===&lt;br /&gt;
2023130036 김윤&lt;br /&gt;
2023131227 최용빈&lt;br /&gt;
2023131540 정혜나&lt;br /&gt;
2024130814 이민희&lt;br /&gt;
2024130911 신다정&lt;br /&gt;
&lt;br /&gt;
=='''교육구국운동(敎育救國運動)'''==&lt;br /&gt;
한국사에 있어서 개화기는 근대화를 추진하는 시기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개화기 교육은 종래 유학 경전 중심의 교육에서 탈피하여 신교육을 시작하는 전환기로 교육사적 의미가 있는 중요한 시기이다. 한국개화기 근대교육의 발전과정은 1880년대에서 1890년대까지 짧은 기간에 많은 변화와 개혁을 거듭하는 시기이다. 국가적으로 열강의 침략을 극복하고 신문화를 받아들여 개명하는 변혁기로 신교육 정착시키는 동시에 국권회복을 위한 교육구국운동을 통하여 민족독립을 전개하는 시기이다. &lt;br /&gt;
&lt;br /&gt;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 이후 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고 일본 통감부가 설치되어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 시기의 개화파를 계승한 애국계몽사상가들은 국권회복을 위해서는 자강지술을 고취하고, 실력을 배양하는 것이 선결과제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이것을 위해 청소년 교육, 민족산업의 육성, 각종 단체에 대한 단결 그리고 신교육을 위한 학교설립 등 광범위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를 교율(敎育)을 통해 나라를 구한다(救國)는 의미의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교육구국운동'''&amp;lt;/span&amp;gt;이라고 칭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신다정]] &lt;br /&gt;
&lt;br /&gt;
==교육기관 설립==&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민족설립 교육기관===&lt;br /&gt;
====민족사학의 의미 ====&lt;br /&gt;
'''1. 민족사학의 정의:''' 우리 민족이 설립한 교육 기관&amp;lt;br/&amp;gt;&lt;br /&gt;
본 위키 페이지에서는 민족사학(民族私學)을 '''외세나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교육기관과 구분되는 것'''으로서, 교육구국운동의 일환으로 일제강점기 전후에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우리 민족이 개인이나 사법인으로서 설립하여 경영하는 학교&amp;lt;/span&amp;gt;로 정의한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2. 민족사학의 정신 및 목적:''' 개화와 교육구국&amp;lt;br/&amp;gt;&lt;br /&gt;
민족사학의 정신과 목적은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개화&amp;lt;/span&amp;gt;와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교육구국&amp;lt;/span&amp;gt;으로 크게 두 가지 방향이 있다. 초기의 민족사학 설립 정신은 '''선진외국의 문화와 문물'''을 받아들여 나라를 개화하고 발전시키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었으나,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乙巳勒約)&amp;lt;ref&amp;gt;대한 제국 광무 9년(1905)에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기 위하여 강제적으로 맺은 조약. 고종 황제가 끝까지 재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인 무효의 조약이다.(표준국어대사전 정의)&amp;lt;/ref&amp;gt; 이후 '''교육 구국을 위한 인재 양성'''이란 민족적 희망에 기반하였다.&lt;br /&gt;
&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민족사학의 발전배경====&lt;br /&gt;
당시 개화파를 비롯한 다수 지식인은 나라를 진흥시키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함을 느끼고 있었다.&amp;lt;br/&amp;gt;&lt;br /&gt;
이와 같은 지식인들의 의식은 서재필이 『한국휘보(Korean Repository)』에 기고한 다음 글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amp;lt;br/&amp;gt;&lt;br /&gt;
{{Blockquote|정부는 국민의 실정을 알아야 하고 국민들은 정부의 목적을 알아야 한다. 정부와 국민 상호간의 이해를 갖도록 하기 위해서는 쌍방에 대한 교육뿐이다 … 교육 없이는 국민들이 정부의 좋은 의도를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교육 없이는 정부 관리들이 결코 좋은 법률을 만들지 못할 것이다.&lt;br /&gt;
|출처=서재필, 「오늘날 한국이 가장 필요로 하는 일」(What Korea needs most), 『한국휘보(Korean Repository)』, 1896.3.}}&amp;lt;br/&amp;gt;&lt;br /&gt;
&lt;br /&gt;
이러한 의식은 독립협회에서 발간한 『독립신문』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amp;lt;br/&amp;gt;&lt;br /&gt;
{{Blockquote|'''문명개화한 나라들에서들은 무론 남녀하고 학교에 가서 적어도 10년 동안에 각색 학문을 배운 후 비로소 세상에 나가''' … 조선 사람들은 겨우 배우는 것이 한문만 조금 배워 가지고 … 일본 같은 조그마한 나라가 싸움을 하여서 청국 병정 무찌르기를 풀 베는 것 같이 하고, 일본도 30년 전 같으면 나라 형세가 청국과 똑같았으니, 어찌 조그마한 나라가 청국 같은 큰 나라를 이기리오마는, 일본 사람들이 서양 각국이 부강한 곡절을 알고 곧 백성 교육하는 일을 힘써 … 당장에 적은 리(利)와 욕심을 내버리고 '''인민 교육하여 몇 해 후에는 조선도 남과 같이 되기를 바라노라'''&lt;br /&gt;
|출처=「논설」,『독립신문』1896년 4월 25일자.}}&amp;lt;br/&amp;gt;&lt;br /&gt;
위의 글들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이러한 지식인들의 자각이 민족사학 설립의 배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민족사학의 발전과정 ====&lt;br /&gt;
1800년대 후반부터 1910년 이전까지 주요 민족 주도로 설립된 교육기관의 설립 과정을 정리&amp;lt;ref&amp;gt;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민족독립운동사 국권수호운동Ⅱ Ⅳ. 국권수호를 위한 사회·문화운동 6. 사립학교의 구국운동 3) 민립학교 설립의 주체(https://db.history.go.kr/modern/level.do?levelId=hdsr_002_0010_0060_0030)의 데이터에 기반하여 자료 조사를 진행하였다. 자료조사를 통해 설립 연도가 일부 수정되었다.&amp;lt;/ref&amp;gt;하였다.&amp;lt;br/&amp;gt;&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xpvhRvJrqO8QmhwtXtUZhPRbrWskR7CqqsrToNpIPRE&amp;amp;font=Default&amp;amp;lang=ko&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amp;lt;br/&amp;gt;&lt;br /&gt;
이와 같이 1905년 이전에는 개화 및 신교육 도입 목적으로 1905년 이후에는 인재양성을 통한 교육구국을 목적으로 많은 교육기관이 설립되었다.&lt;br /&gt;
&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대표적 민족설립 교육기관====&lt;br /&gt;
아래의 표에서는 대표적인 민족설립 교육기관과 그 계승 현황을 정리하였다. &amp;lt;br/&amp;gt;&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hn:left;background:white;&amp;quot;&lt;br /&gt;
|+ [대표적 민족설립 교육 기관&amp;lt;ref&amp;gt;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민족독립운동사 국권수호운동Ⅱ Ⅳ. 국권수호를 위한 사회·문화운동 6. 사립학교의 구국운동 3) 민립학교 설립의 주체(https://db.history.go.kr/modern/level.do?levelId=hdsr_002_0010_0060_0030)의 데이터에 기반하여 자료 조사를 진행하였다. 자료조사를 통해 설립 연도 및 설립자가 일부 수정되었다.&amp;lt;/ref&amp;gt;]&lt;br /&gt;
! 교육기관명 || 설립일 || 설립자 || 계승&lt;br /&gt;
|-&lt;br /&gt;
|원산학교(元山學校) || 1883 || 덕원(德源)의 유지 || 원산소학교, 원산보통학교, 원산제일국민학교로 계승되며 1945년까지 지속됨&lt;br /&gt;
|-&lt;br /&gt;
|흥화학교(興化學校) || 1895. 11. 5. || 민영환(閔泳煥) || 1911년 폐교&lt;br /&gt;
|-&lt;br /&gt;
|중교의숙(中橋義塾) || 1896 || 민영기(閔泳綺) || 1906년 폐교&lt;br /&gt;
|-&lt;br /&gt;
|순성여학교(順成女學校) || 1898.12. || 찬양회(讚揚會) || 1905년 12월 31일 『대한매일신보』기사를 끝으로 신문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음&lt;br /&gt;
|-&lt;br /&gt;
|점진학교(漸進學校) || 1899 || 안창호(安昌浩) || .&lt;br /&gt;
|-&lt;br /&gt;
|낙연의숙(落淵義塾) || 1901 || 서광세(徐光世) || 1916년 폐교&lt;br /&gt;
|-&lt;br /&gt;
|한성법학교(漢城法學校) || 1905. 1. || 사회 유지 || 1905년 9월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가 법률학전문야학과를 신설하여 한성법학교 학생 20명을 인계받음 &amp;lt;ref&amp;gt; https://www.kunews.ac.kr/news/articleView.html?idxno=3765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양정의숙(養正義塾) || 1905. 2. 11. || 엄주익(嚴柱益) || 양정중학교(養正中學校)&lt;br /&gt;
|-&lt;br /&gt;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 1905. 4. 3. || 이용익(李容翊) || '''고려대학교(高麗大學校)'''&lt;br /&gt;
|-&lt;br /&gt;
|보창학교(普昌學校) || 1905. 5. || 이동휘(李東輝) || .&lt;br /&gt;
|-&lt;br /&gt;
|서전서숙(瑞甸書塾) || 1906 || 이상설(李相卨) || 1907년 폐교&lt;br /&gt;
|-&lt;br /&gt;
|진명여학교(進明女學校) || 1906. 4. ||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 진명여자고등학교(進明女子高等學校)&lt;br /&gt;
|-&lt;br /&gt;
|중동학교(中東學校) || 1906. 4. 2. || 신규식(申圭植) || 중동고등학교 (中東高等學校)&lt;br /&gt;
|-&lt;br /&gt;
|휘문의숙(徽文義塾) || 1906. 5. || 민영휘(閔泳徽) || 휘문고등학교(徽文髙等學校)&lt;br /&gt;
|-&lt;br /&gt;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 || 1906. 5. ||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 '''숙명여자대학교(淑明女子大學校)''', 숙명여자중학교(淑明女子中學校), 숙명여자고등학교(淑明女子高等學校)&lt;br /&gt;
|-&lt;br /&gt;
|양규의숙(養閨義塾) || 1906. 6. || 여자교육회(女子敎育會) || .&lt;br /&gt;
|-&lt;br /&gt;
|서우사범학교(西友師範學校) || 1907. 1. || 서우학회(西友學會) || 1908년에 서북협성학교(西北協成學校)로 개편됨&lt;br /&gt;
|-&lt;br /&gt;
|대성학교(大成學校) || 1907 || 안창호(安昌浩) || 1912년 폐교&lt;br /&gt;
|-&lt;br /&gt;
|협동학교(協東學校) || 1907 || 유인식(柳寅植)) || 1917년 폐교&lt;br /&gt;
|-&lt;br /&gt;
|소의학교(昭義學校) || 1907. 9. || 전경현(全景鉉), 민강(閔橿), 장경관(張敬寬) 등 || 동성고등학교 (東星高等學校)&lt;br /&gt;
|-&lt;br /&gt;
|장훈학교(長薰學校) || 1907. 11. 2. ||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 || 장훈고등학교 (長薰高等學校)&lt;br /&gt;
|-&lt;br /&gt;
|오산학교(五山學校) || 1907. 12. || 이승훈(李昇薰) || 오산고등학교 (五山高等學校)&lt;br /&gt;
|-&lt;br /&gt;
|기호학교(畿湖學校) || 1908. 6. 20. ||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 || 융희학교(隆熙學校)를 흡수하여 중앙중학교(中央中學校), 중앙고등학교(中央高等學校)로 발전함&lt;br /&gt;
|-&lt;br /&gt;
|양원여학교(養原女學校) || 1908. 6. || 여자보학원유지회(女子普學院維持會) || .&lt;br /&gt;
|-&lt;br /&gt;
|신명학당(新明學堂) || 1908. 2. || 김장호, 김홍식(金洪植) || 치문초등학교 (致文初等學校)&lt;br /&gt;
|-&lt;br /&gt;
|명동학교(明東學校) || 1908. 4. 27. || 김학연(金學淵) || 1925년 폐교&lt;br /&gt;
|-&lt;br /&gt;
|보인학교(輔仁學校) || 1908. 6. 8. || 보인학회(輔仁學會) || 보인고등학교(輔仁高等學校)&lt;br /&gt;
|-&lt;br /&gt;
|양산중학교(楊山中學校) || 1908. 10. || 김홍량(金鴻亮) ||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이상의 표에서 1910년 국권피탈 이전 설립된 민족설립 교육기관 중 적지 않은 수가 오늘날에도 현존하고 있는 중학교, 고등학교, 또는 대학교로 계승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10년 이후 많은 학교가 폐교 위기에 처한 것을 고려하였을 때, 이러한 계승은 민족설립 교육기관을 유지해 교육을 통해 나라를 구하고자 했던 당시 사람들의 투지와 열망에 대한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보성전문학교와 명신여학교====&lt;br /&gt;
1910년 이전까지 민족 주도로 설립된 교육 기관 중 주요하게 살펴보아야 할 기관으로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와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가 있다. 보성전문학교는 이용익(李容翊)이 고종의 허가 하에 설립하였고, 명신여학교는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의 지원으로 설립되었음을 고려할 때, 모두 황실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사립 교육기관으로 보기는 힘들다는 한계는 존재한다. 그러나, 1910년 이전에 설립된 학교가 폐교의 절차를 밟지 않고 이어져 오늘날까지 계승되었다는 사실이 가지는 의미는 적지 않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1910년 이후 많은 학교가 일제의 강압 아래 폐교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 두 학교의 경우 대부분의 학교가 중등교육기관으로 계승된 것과는 구분되어 '''고등교육기관으로 발전한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나아가, 보성전문학교 설립을 기점으로 '교육 구국'을 목적으로 한 민족 사학의 설립이 활성화되었다는 점과 명신여학교의 경우 민족이 설립한 많지 않은 여성 교육기관 중 하나였다는 점 역시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lt;br /&gt;
보성전문학교는 1905년 04월 03일 고종(高宗)의 재정적 후원을 받아 [[이용익李容翊]]에 의해 설립된 교육기관이다. &amp;lt;br/&amp;gt;&lt;br /&gt;
보성전문학교의 설립 배경은 설립자 이용익의 행보에서 엿볼 수 있다. 친로반일(親露反日)의 뜻 고수한 것과 조선의 중립 선언을 선언하게 한 것으로 인해 일본에 의해 납치된 이용익은 체류 중 일본의 '''근대교육기관 및 개화문물을 접한다'''. 이것이 그의 교육기관 설립의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이후 귀국할 때 '''다수의 도서와 인쇄기를 구매'''하여 가지고 온 점 역시 이러한 추측의 설득력을 높인다. &amp;lt;br/&amp;gt;&lt;br /&gt;
한편, 보성전문학교의 개교를 알리는 황성신문(皇城新聞)의 글에는 보성전문학교 설립이 그 당시에 가졌던 의미가 잘 드러나고 있다. &amp;lt;br/&amp;gt;&lt;br /&gt;
{{Blockquote|전문학교 창설. '''대한에 전문대학교는 아직 세워지지 못했다. 한성법학교(漢城法學校)가 세워졌으나 야학(夜學)이라 완전하지 못했는데, 박동(礴洞)에 신설한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는 위치가 전문대학 주간 학교로''' 대황제폐하께서 특별히 설립하신 바, 매월 수천원의 경비를 내탕전(內帑錢)으로 내려주고 도서관을 부설하여 각 전문 교과서 수천권을 새로 간행한다 한다. 그리고 신해영(申海永)·조제환(趙齊桓)·정영택(鄭永澤) 세 명에게 이상의 사무를 전담하도록 하여, 위 3명은 교육을 열심히 하여 황제의 뜻에 보답하기위해 더욱 극진하게 힘을 쓴다고 한다. 20여명의 교수는 일찍이 일본에 유학하여 졸업한 사람들을 임용하여 (중략) '''2개년 졸업기한이지만 인재를 빨리 양성하도록''' 황제의 뜻을 특별히 내리셨다하고, 오늘부터 개교한다고 한다.&lt;br /&gt;
|출처=『황성신문(皇城新聞)』 1905년 4월 1일자 2면. 현대어역: 고려대학교 도서관&amp;lt;ref&amp;gt;https://library.korea.ac.kr/datause/archiving/old-book-exhibition/release/?mod=document&amp;amp;uid=10653&amp;lt;/ref&amp;gt;}}&lt;br /&gt;
윗글에서 당시 대한제국에 중등교육기관은 존재했음에도 고등교육을 위한 기관은 야학의 형태로서만 존재하여 온전하지 못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당시 상황 속에서 이용익이 일본의 교육 현황을 접한 후 대한제국 고등교육기관의 필요성을 느껴 설립하려 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고등교육기관 설립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맞춰 등장한 학교라는 점에서 보성전문학교가 가지는 가치는 매우 크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1910년 이후 다른 학교와 마찬가지로 보성전문학교는 운영진 및 교장의 망명, 투옥과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운영난을 겪는 등 각종 수난을 겪는다. 이후 일제의 탄압 아래 격하되거나 교명을 바꾸고 학과 설립이 제한되는 등 여러 차례 존속의 고비를 넘긴다. 하지만 끊임없는 노력을 바탕으로 1921년 전문학교로 다시 승격되었으며 여러 위기를 거친 끝에 해방 후 고려대학교로 발족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lt;br /&gt;
명신여학교는 1906년 5월 22일 고종(高宗)의 후궁인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의 지원으로 왕실 별궁 용동궁에 설립된 교육기관이다. &amp;lt;br/&amp;gt;&lt;br /&gt;
순헌황귀비는 본디 교육, 특히 여성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명신여학교의 설립에 앞서 1906년 4월에 진명여학교(進明女學校)를, 1907년에 경영난에 처해 있던 양정의숙(養正義塾)을 도운 점에서 잘 드러난다. &amp;lt;br/&amp;gt;&lt;br /&gt;
한편, 당시 여성 교육 관련 배경은 다음과 같다. 앞서 기술된 바와 같이 1905년 을사늑약 전후로 교육구국이 일어나 전국 각지에서 민족사학이 설립되었으나 여성을 위한 교육기관은 부족한 실태였다. 당시 설립된 여성 교육기관으로는 이화학당, 정신여학교, 숭의학교 등이 있었으나 이는 모두 선교사, 즉 민족에 의해 설립된 학교가 아니었다.&amp;lt;ref&amp;gt;한희숙, 구한말 순헌황귀비 엄비의 생애와 활동, 아시아여성연구, 숙명여자대학교 아시아여성연구원, 제45집 2호, 2006&amp;lt;/ref&amp;gt;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여성 교육기관의 필요'''를 절감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 것은 순헌황귀비의 시대적 통찰력을 반영하는 부분이다. &amp;lt;br/&amp;gt;&lt;br /&gt;
위와 같은 순헌황귀비의 설립 목적은 대한매일신보의 글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amp;lt;br/&amp;gt;&lt;br /&gt;
{{Blockquote|황귀비 흥학:  황귀비 전하께오서 여자 교육이 없음을 크게 걱정하여 육군참장 엄주익씨 집(第)에 여학교를 설립하여 '''여자교육을 발달시키고자''' 하였다.  엄주익에게 학교 설립 일을 전담하게 하시니 '''대한여자의 교육이 앞으로 발달하기를''' 가히 볼 수 있을 지로다. &lt;br /&gt;
|출처=『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6년 4월 24일자&amp;lt;ref&amp;gt;한희숙, 구한말 순헌황귀비 엄비의 생애와 활동, 아시아여성연구, 숙명여자대학교 아시아여성연구원, 제45집 2호, 2006, 227쪽.&amp;lt;/ref&amp;gt;}}&lt;br /&gt;
광복 후 명신여학교는 숙명여자중학교(淑明女子中學校)와 숙명여자고등학교(淑明女子高等學校)로 이어졌다. 나아가, 여성 고등교육기관의 설립을 꿈꾼 교장 이정숙(李貞淑)의 뜻에 따라 1938년 숙명학원(淑明學園)에서 숙명여자전문학교를 설립하였고, 이것이 오늘날 숙명여자대학교(淑明女子大學校)로 계승되었다.&lt;br /&gt;
[[분류: 헤르미온느]]&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선교사 설립 교육기관===&lt;br /&gt;
선교사들은 기독교 선교의 기반 구축을 위해 개화정책 추진 초기인 1880년대부터 고종의 각별한 관심과 지원 속에서 많은 학교를 설립하였다.  서울에 배재·이화·경신학교를 설립하였고, 기독교 선교금지정책이 이완되기 시작한 1890년대에는 지방도시로 그 범위를 넓혀 1894년 평양의 광성학교·숭덕학교·정의여학교, 1895년 서울의 정신여학교를 비롯하여 동래·인천·재령·목포·원산·개성·해주·공주·대구 등 전국 각지로 확대하였다.&lt;br /&gt;
&lt;br /&gt;
====[[연세대학교(延世大學校)]]====&lt;br /&gt;
&lt;br /&gt;
연희전문학교는 1915년 선교부연합위원회의 협의를 얻어서 북장로회 선교사인 언더우드가 조선기독교학교로 처음 설립하였다. 이후 1917년 연희전문학교로 발족하였다. 보성전문학교 이후 두 번째로 설립된 전문학교이다. 이후 3.1 운동등 다양한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1944년 일제가 경영권과 재산을 몰수하고 한국인 교수진들을 모두 추방했었다. 독립 후에는 연희대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대학교로 승격하였다.&lt;br /&gt;
&lt;br /&gt;
세브란스는 대한제국의 궁정어의였던 알렌에 의해 1885년에 설립된 제중원에서 시작하였고, 1886년부터 제중원 내 의학부를 두고 입학생을 받았다. 이후 병원장으로 취임한 선교사 에비슨이 1899년 조선 최초의 의학교인 제중원의학교를 설립하였다. 1904년 미국인 세브란스의 후원으로 세브란스 병원이 세워지며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로 개편하였다. 1906년에 간호부가 개설되었고 우리나라 최초의 간호사를 배출하였다. 세브란스와 연희전문학교 간의 병합은 1920년대에도 한차례 시도한 바 있었으나 무산되었고, 독립 후 1957년에 두 학교가 통합되어 '''연세대학교'''로 출범하였다.&lt;br /&gt;
&lt;br /&gt;
====[[배재학당]]====&lt;br /&gt;
&lt;br /&gt;
1885년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한국 최초의 근대식 사립학교로 중등과정을 담당했다. 1886년이 고종이 배재학당이라는 이름을 사하였고 미국인들의 후원을 받아 1887년에 제대로 된 건물을 세웠다. 영어교육을 중점적으로 행했으며 학생자조정책을 채택하여 가난한 학생들이 학교에서 일을 하며 수업료를 벌 수 있도록 하였다. 현재 기존의 건물은 2008년부터 배재학당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배재중학교, 배재고등학교, 배재대학교'''가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lt;br /&gt;
&lt;br /&gt;
====[[배화학당]]====&lt;br /&gt;
초,중등과정의 사립학교로 1898년 켐벨 선교사가 설립하였다. 처음엔 캐롤라이나학당으로 기독교전파와 여성교육을 목표로 세웠졌다. 1910년 배화학당으로 개칭하였다.1916년 1월 경성 누하동(지금의 서울 종로구 필운동)으로 교사를 이전하고, 1926년 12월 캠블기념관을 신축하였으며, 1938년 3월 배화고등여학교와 배화여자소학교로 분리,개편되었다. 일제의 신사참배요구를 거절한 기독교 학교 중 하나이다. 1940년대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선교사들도 학교를 떠나며 위기에 폐교 위기에 봉착했다. 학교가 경영난에 시달리자 일제는 학교의 운영권을 요구했으나, 당시 교사였던 이덕봉과 이만규가 독지가를 구하려 노력한 끝에 이민천이 춘천, 이천, 연기, 익산 등지에 있는 토지를 기부하여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독립 후 1951년 '''배화여중과 배화여고'''로 분리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김윤]]&lt;br /&gt;
&lt;br /&gt;
=='''민간 단체의 교육 운동'''==&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신민회(新民會)]]의 애국계몽운동===&lt;br /&gt;
&amp;lt;br/&amp;gt;&lt;br /&gt;
{{Blockquote| '''신민회 행동강령'''&lt;br /&gt;
1. 국민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사상 고취 &amp;lt;br /&amp;gt; 2. 동지를 발하고 단합하여 국민 운동 역량 축적 &amp;lt;br /&amp;gt; 3. 상공업 기관 건설로 국민의 부력(富力) 증진 &amp;lt;br /&amp;gt; 4. 교육 기관 설립으로 청소년 교육 진흥&lt;br /&gt;
|출처= 「헌기제501호, 「대한 신민회 취지서 및 동회 통용 장정 등 보고 건」, 1909년 3월 5일(국사편찬위원회, 『통감부문서』 6, 1991}}&lt;br /&gt;
&lt;br /&gt;
신민회(新民會)는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1907년에 [[안창호(安昌浩)]], [[양기탁(梁起鐸)]] 등의 주도로 결성된 항일 비밀결사&amp;lt;/span&amp;gt;이다. 위와 같은 신민회의 행동 강령을 바탕으로 신민회는 실력 양성을 통한 국권 회복을 주장하며, 교육, 언론 및 출판, 민족 산업 육성, 독립군 양성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lt;br /&gt;
&lt;br /&gt;
신민회는 실력 배양의 방법으로 교육 구국 운동을 두 가지 측면에서 전개하였다. 국민에게 국권회복을 위한 교육의 필요성을 계몽하여 학교설립을 고취하며 신민회도 학교를 설립하여 국권회복에 필요한 적합한 교육방침을 강구하여 민족 지도자를 양성한다는 것이다. 또한, 국외에서 독립군 기지를 창설하고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전쟁을 일으켜 국권을 회복한다는 것이다. &lt;br /&gt;
&lt;br /&gt;
신민회는 이를 위해 민중들이 설립한 학교에 대해 학교교육방침을 지도하였다. 또한, 중학교를 설립하고, 학교의 모범을 만들며 중학교에서 동시에 사범교육을 해 교사를 양성한다는 기준을 세우고 학교를 설립하였다. 당시 민간인이 자발적으로 기금을 갹출하여 설립한 학교는 대부분이 소학교였기 때문에, 신민회는 중학교를 설립하여 소학교 출신 청소년들이 더 양질의 교육을 통해 민족지도자로 발돋움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lt;br /&gt;
&lt;br /&gt;
신민회는 기본적으로 비밀결사이기 때문에 그들이 설립한 학교의 수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1907년부터 1909년 4월까지 민간인들에 의해 세운 학교가 3000여 개교에 달한다는 통계로 보아 신민회에서 세운 학교가 많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알려진 신민회가 설립한 학교는 다음과 같다.&lt;br /&gt;
&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hn:left;background:white;&amp;quot;&lt;br /&gt;
|+ [신민회가 설립한 학교]&lt;br /&gt;
! 학교명 || 설명 &lt;br /&gt;
|-&lt;br /&gt;
| '''대성학교'''|| [[안창호(安昌浩)]], 윤치호 평양에 설립. 신민회가 설립한 대표적인 민족 사학으로 입학 지원자가 500~600여 명이 되는 때도 존재. &lt;br /&gt;
|-&lt;br /&gt;
| '''오산학교'''|| 평안북도 정주군에 이승훈 설립. 김소월, 백석, 이중섭, 독립운동가 김홍일 중장 등을 배출. 현재 서울 오산고등학교로 계승됨&lt;br /&gt;
|-&lt;br /&gt;
| 점진학교|| 평안남도 강서 위치, [[안창호(安昌浩)]] 설립. 남녀공학을 실시한 최초의 소학교. &lt;br /&gt;
|-&lt;br /&gt;
| 보창학교 || 강화도 위치, 이동휘 설립&lt;br /&gt;
|-&lt;br /&gt;
| 신안학교 || 정주, 신민회 정주지회 회원 설립&lt;br /&gt;
|-&lt;br /&gt;
| 양실학교 || 의주, 신민회 의주/용천지회 회원 설립&lt;br /&gt;
|-&lt;br /&gt;
| 가명학교 ||  신민회 납청정지회 회원 설립&lt;br /&gt;
|-&lt;br /&gt;
| 신흥학교 || 선천, 중학교급 학교&lt;br /&gt;
|-&lt;br /&gt;
| 홍양학교 || 신민회 곽산지회 회원 &lt;br /&gt;
|-&lt;br /&gt;
| 명륜학교|| 함경남도 영흥읍에 있던 세 개 학교 통합, 이동휘 설립&lt;br /&gt;
|-&lt;br /&gt;
| 경성학교|| 함경북도 경성 위치&lt;br /&gt;
|-&lt;br /&gt;
| 양산학교|| 황해도 안악읍 향천자리, 김용제 설립, 신민회가 중학교로 개편&lt;br /&gt;
|-&lt;br /&gt;
| 오성학교 || 서울 위치, 이갑, 이종화 설립. 신민회 창건 후 각종학교인 서북협성학교로 개편&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신민회의 애국계몽은 학교 설립뿐만이 아니라 학회의 설립과 지도를 통해서도 추진되었다. 안악군면학회(安岳郡勉學會), 해서교육총회(海西敎育總會),평양청년권장회(平壤靑年勸?會), 연학회(練學會), 동제회(同濟會)등의 학회를 전국에 조직하는 데에 앞장섰다. 또한, 서우학회, 한북학회를 서북학회로 통합 재조직하는 등, 기존에 있던 학회의 통합과 재정비에도 이바지하였다. &lt;br /&gt;
&lt;br /&gt;
이와 같이 신민회의 교육계몽운동은 신민회가 1912년 105인 사건으로 해산될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그 이후에도 다른 독립운동단체에 영향을 미쳐 교육을 통한 민중 계몽으로 이루어지는 독립운동의 방향성을 제시하였다.&lt;br /&gt;
&lt;br /&gt;
[[분류:신다정]]&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농촌 계몽 운동===&lt;br /&gt;
&lt;br /&gt;
농촌 계몽 운동은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1920년대~1930년대 민족 운동과 관련한 청년 학생이나 지식층이 농민의 의식과 지식 등을 계몽하기 위해 농촌 사회에서 행한 사회 교육 운동&amp;lt;/span&amp;gt;을 의미한다. 농사일을 끝낸 후 강연회, 토론회, 야학 등의 형식으로 이루어졌으며 특히 농한기인 겨울에 많이 실시되었다. &lt;br /&gt;
&lt;br /&gt;
1920년에는 일제의 식민 지주 경영과 지주 착취로 인해 농민 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고, 이와 맞물려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이 결성되었다. 이때 사회주의 계열 청년 단체와 지식인들이 농촌으로 진출하여 농민 운동을 주도하였다. &lt;br /&gt;
민족주의 계열에서 주도한 농촌 운동은 문맹 퇴치와 생활 개선 등의 계몽적 활동이 중심이었다. 대표적으로 천도교 계열의 농촌 운동, 기독교 계열의 농촌 운동이 있다. 천도교는 1925년 조선농민사를 설립하여 농민 야학을 시행하고 전국적으로 농민에 대한 계몽 활동을 전개하였다. 기독교에서는 1926년 이후 학생 YMCA 농촌부를 중심으로 계몽 활동을 적극 추진하였다. &lt;br /&gt;
&lt;br /&gt;
1920년 후반부터 1930년대에는 언론사 또한 농촌 계몽 운동에 힘을 쏟았다. 대표적으로 1929년부터 1935년까지 이루어진 조선일보사의 문자 보급 운동과 1931년부터 1934년까지 이루어진 동아일보사의 [[브나로드 운동]]이 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이런 농촌 계몽 운동은 1930년대 들어 강화된 조선총독부의 조선어 사용 금지 정책과 지방 농촌의 몰락으로 인해 쇠퇴하였다. 또한, 농촌의 몰락 책임을 수탈 때문이 아닌 농민의 게으름과 무지에 있다며 총독부의 주도로 농촌진흥운동을 진행하며 민간 및 언론 단체의 농촌 계몽 운동을 탄압하였다. 그러나 이런 탄압 속에서도 농촌 계몽 운동은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이러한 민간 교육 활동 및 정책은 해방 이후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문맹 퇴치 운동으로 이어졌다.&lt;br /&gt;
&lt;br /&gt;
[[분류:신다정]]&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민립 대학 설립 운동===&lt;br /&gt;
&lt;br /&gt;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은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1920년대 이루어진 민족 사학 설립 운동&amp;lt;/span&amp;gt;이다.&lt;br /&gt;
&lt;br /&gt;
1920년대 초 식민지 조선에서는 민중의 자발적인 참여하에 조선인을 위한 대학을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등장하였다. 민립 대학 설립에 대한 논의는 1920년 6월 20일 한규설, 이상재, 윤치소 등 91년의 발기로 조선교육회 발기회가 개최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가 학회령을 토대로 1922년 1월 24일까지 인가를 내주지 않아 민립대학 설립에 대한 결의를 실행시키지 못했다. &lt;br /&gt;
&lt;br /&gt;
동아일보에 기고된 사설을 통해 당시의 독립을 위한 교육 계몽의 필요성과, 관립 대학과 다르게 민립 대학의 설립 필요성에 관해 확인할 수 있다. &lt;br /&gt;
&lt;br /&gt;
{{Blockquote|운명을 어떻게 개척할까. 정치냐 외교냐 산업이냐. 물론 이러한 일들 모두 다 필요하다. 그러나 그 기초가 되고 요건이 되며 가장 급무가 되고 가장 선결의 필요가 있으며 가장 힘 있고 '''가장 필요한 수단은 교육이 아니면 할 수 없다.''' &amp;lt;br /&amp;gt; … 물론 관립대학도 조만간 개교될 것이기에 대학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학문 발전의 장래는 결코 1개의 대학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요, 또한 '''그처럼 중대한 사업을 우리 민중이 직접으로 영위하는 것은 차라리 우리의 의무라 할 수 있다.''' &amp;lt;br /&amp;gt;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에 느낀 바 있어 감히 만천하 동포에게 향하여 민립대학의 설립을 제창하니 자매형제는 와서 돕고 나아가 이루어라.'''&lt;br /&gt;
|출처= 「開會된 民大總會」, 『동아일보』, 1923년 3월 30일자.}}&lt;br /&gt;
&lt;br /&gt;
이렇게 고양된 민립 대학 설립을 통한 민족 교육에 대한 필요성을 바탕으로, 1922년 1월 이상재, 이승훈, 윤치호, 김성수, 송진우 등이 조선민립대학기성준비회를 정식으로 결성하였다. 이어 1923년 3월 29일 발기인 1170명 중 462명이 참석한 가운데 3일간 총회를 개최하였다. &lt;br /&gt;
&lt;br /&gt;
총회에서는 ＇민립대학발기취지서＇를 채택하고 대학 설립 계획서를 확정하였다. 계획서에 따르면 3개년 계획으로 자본금 1000만원을 갹출하는데, 제 1차 연도에는 대지 5만 평을 구입하여 교실 10동, 대강당 1동을 건축하고, 법과/경제과/문과/이과의 4개 대학 및 예과를 설치하며, 제2차 연도에는 300만원으로 공과/이과/기타 학과를 증설하고, 제3차 연도에는 300만원으로 의과/농과를 설치한다는 것이다. 또 중앙집행위원회를 구성하고 지방에 지방부를 두기로 결의하였다. 별도로 지방순회선정위원 13평을 선정하고 파견하였다. 이와 같은 노력을 토대로 1923년 말까지 전국 100여 개소와 해외의 만주 간도, 봉천, 미국 하와이 등지에도 지방부가 조직되었다. &lt;br /&gt;
&lt;br /&gt;
기성회는 ＇한민족 1000만 한 사람 1원씩＇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기금 모금에 나섰다. 이런 모금 활동에 민족 교육을 성원하는 마음들이 모였는데, 대표적으로 전라남북도에서만 15만원이 모금되었으며 경기도 안성의 이정도는 1년 동안 매일 아침 밥짓는 쌀에서 식구 수 대로 한 숟가락씩 모아 판 돈 19원을 기부하는 등 일반 민간에서의 성원도 뜨거웠다. &lt;br /&gt;
&lt;br /&gt;
이와 같은 열기에 일제는 이를 교육 운동이 아니라 정치 운동이라고 판단하고 탄압하였다. ＇조선교육령＇을 개정하여 관립 경성제국대학의 설립을 서두르고 민립대학과 관련 있는 인사들에 대한 탄압과 기금 갹출 방해 공작을 전개하였다. 민립대학기성회 인사들을 민족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구실로 철저히 감시하고, 기금 모집을 위해 박차를 가하던 인사들의 지방 강연을 배일사상을 고취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강연 중지를 명하고 청중을 해산시켰다. &lt;br /&gt;
&lt;br /&gt;
이러한 조선총독부의 탄압이 민립대학 설립운동의 실패의 주된 원인이 되었다. 1923년 여름 수재, 9월 일본 관동 대지진으로 인한 경제 공황, 1924년 한재와 7월 전국적 수재로 인한 농촌 경제 파탄 등 자연적인 여건도 민립대학 설립운동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그러나 3.1운동 이후 전 민족이 민족 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조직체를 형성하여 교육을 통한 자주독립이라는 하나의 목표에서 단결을 보였다. 이는 이후의 민족운동 양상에서 조직적인 단체 결성의 표본이 되었다.&lt;br /&gt;
&lt;br /&gt;
[[분류:신다정]]&lt;br /&gt;
&lt;br /&gt;
=='''군사 교육'''==&lt;br /&gt;
&lt;br /&gt;
독립운동사에서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군사 교육도 꾸준히 이어져왔다. 수많은 독립열사들은 무관학교 설립을 위한 활발한 활동을 이어왔다. 독립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역량은 군사였기 때문에, 군사교육은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였으며 이에 따라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에서도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노력이 나타났다.&lt;br /&gt;
&lt;br /&gt;
[[분류:이민희]]&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lt;br /&gt;
신흥무관학교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위해 설립된 군사학교로, 독립군 양성과 무장 투쟁 기반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911년 중국 만주 서간도 지역(현재의 지린성 류허현)에서 이회영, 이시영 등 독립운동가들이 설립했으며, 군사 지도자를 양성하고 실질적인 무장 독립운동을 준비하는 데 목적을 두었습니다. &lt;br /&gt;
&lt;br /&gt;
교육 내용은 사격, 전술, 지형 분석 등 실전 중심의 군사훈련과 함께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역사 및 애국사상 교육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졸업생들은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전투 같은 독립전쟁에서 활약하며 독립운동의 주축이 되었고, 김좌진과 이범석 같은 지도자를 배출했습니다. &lt;br /&gt;
&lt;br /&gt;
1920년대에 들어 일본의 탄압이 강화되면서 학교 운영이 점차 어려워졌고, 졸업생들이 각종 독립운동 조직으로 흩어지면서 신흥무관학교는 군사훈련소 형태로 전환되다가 결국 해체되었습니다. &lt;br /&gt;
&lt;br /&gt;
졸업생들은 만주 지역에서 서로군정서, [[북로군정서]]에서 핵심 간부로 활약, [[대한독립군]], 통의부의용군, 정의부, 신민부, 국민부 등에서 활동하였고,중국 본토에서는 1919년 11월 길림에서 의열단 결성,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에서 독립운동 전개했습니다.&lt;br /&gt;
&lt;br /&gt;
신흥무관학교는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군사교육 기관으로 평가받습니다. 이 학교는 독립군의 전투력을 강화하고, 독립운동의 실질적 기반을 마련했으며, 한국 독립운동의 전환점이 된 여러 전투에서 큰 공헌을 했습니다.&lt;br /&gt;
&lt;br /&gt;
[[분류:최용빈]]&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조선혁명간부학교]]===&lt;br /&gt;
&lt;br /&gt;
1919년 조직된 무장독립운동단체 의열단은 중국국민당과의 합작을 통해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실질적인 군사 교육 기관'''&amp;lt;/span&amp;gt;을 설립하고자 노력했다. 이에 따라 [[장제스]]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의열단&amp;lt;ref&amp;gt; 급진적인 항일 투쟁을 목적으로 1919년 11월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로, 김원봉(金元鳳)이 단장을 맡았다. &amp;lt;/ref&amp;gt;의 단장인 김원봉이 1932년 중국 난징에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설립하였다. 공식 명칭은 사실 조선혁명간부학교가 아닌, ''‘중국국민당 군사위원회 간부 훈련반 제6대’''로, 국민당의 단기간부훈련소 신설반인 것처럼 위장했다. &lt;br /&gt;
&lt;br /&gt;
&lt;br /&gt;
학교는 일본과 중국의 외교관계를 고려해 학교 운영 사실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설립 초기에는 중국 외교부와 육군참모본부, 심지어 군사위원회 판공청 당사자들조차 그 존재를 모를 정도였다. 만 3년간 운영된 조선혁명간부학교는 3기에 걸쳐 총 125명의 인재를 배출했다. 국민당은 그동안 매월 경상비 2,000~3,000원·수시 필요경비 1,000~1만 원·기타 운영비 400~1,000원 등 각종 운영자금 전액과 화기·탄약·피복 등을 지원했다. 학생들은 군사학뿐 아니라 별도 신설된 정치학, 자연과학을 포함해 경제학·사회학·철학·혁명학·물리학·화학·지리학까지 다양한 학문을 공부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혁명간부학교의 졸업생들은 이후 민족혁명당의 항일투쟁체계에 편입되었으며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대]]의 핵심 세력으로 성장하였고, 일부는 화북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에 가담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단체문서한국광복군.jpg|섬네일|가운데|''&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한국 광복군의 모습&amp;lt;/div&amp;gt;'']] &lt;br /&gt;
[[파일:조선의용대김원봉.jpg|섬네일|가운데|''&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조선의용대 모습 &amp;lt;/div&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amp;lt;font color=&amp;quot;#8c8c8c&amp;quot;&amp;gt;조선의용대 깃발 가운데 있는 인물이 약산 김원봉이다.&amp;lt;/font&amp;gt;''&amp;lt;ref&amp;gt;김삼웅, &amp;quot;최후까지 총을 든 조선의용대와 김원봉&amp;quot;, 오마이뉴스, 2024.02.06.,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999602 (검색일:2024년 12월 4일)&amp;lt;/ref&amp;gt;&amp;lt;/div&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이민희]]&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한인소년병학교]]===&lt;br /&gt;
&lt;br /&gt;
한인소년병학교는 장기적인 독립 투쟁을 대비하여 군사 교육을 받은 장교를 양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박용만에 의해 설립되었다. 한인소년병학교는 1909년 6월에 세워진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최초의 국외 설립 군사학교''&amp;lt;/span&amp;gt;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으며, 각지의 군사운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lt;br /&gt;
&lt;br /&gt;
&lt;br /&gt;
한인소년병학교는 미국의 헤이스팅스(Hastins) 대학과 교섭하여 운영되었으며, 네브라스카 주에서 설립되었으나 교섭에 따라 헤이스팅스로 이전하여 한인 유학생의 활발한 참여를 이끌어냈다. 헤이스팅스 대학은 건물 한 동과 전장을 지원하여, [[둔전병제]]식 훈련을 실시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헤이스팅스대학.png|섬네일|가운데|''&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헤이스팅스 대학의 모습 &amp;lt;/div&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amp;lt;font color=&amp;quot;#8c8c8c&amp;quot;&amp;gt;한인소년병학교 학생들이 훈련했던 헤이스팅스 대학의 사진이다.&amp;lt;/font&amp;gt;''&amp;lt;/div&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ftzi6pFWzNc?si=iGbjmKk9yPuAn_Ub&amp;quot; title=&amp;quot;YouTube video player&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div&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다음의 영상에서 한인소년병학교가 있었던 헤이스팅스 대학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다.'' &amp;lt;/div&amp;gt;&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lt;br /&gt;
&lt;br /&gt;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는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한 박용만이 미국의 하와이에도 같은 군사 훈련 단체를 설립하고자 하여 1914년 4월 15일 설립되었다. 당시 학도 수는 200여명으로 군단장 역시 박용만이 맡았다. &lt;br /&gt;
&lt;br /&gt;
&lt;br /&gt;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는 [[한인소년병학교]]를 계승하여 [[둔전병제]]식 훈련을 실시하였고, 군영이 호놀룰루 시의 동북 쪽 큰 산을 넘어 해안과 아후이마누 강을 낀 계곡에 위치하여 ''&amp;quot;산 넘어 아희들&amp;quot;''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lt;br /&gt;
하와이에서 군단과 사관학교를 설치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으나, 1916년을 고비로 점차 쇠퇴하여 1917년 경 해체되었고, 지역으로 흩어져 사실상 폐교되었다.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는 제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미일(美日) 간 우호관계가 지속되면서 국민군단의 혁명적이고 군사적인 성격이 하와이 내에서 우호적인 반응을 얻지 못하였고, 이외에도 하와이 내 농장의 불경기로 수입이 급감하면서 재정 조달이 어려웠으며 1915년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의 실권이 이승만 측에 넘어가 박용만의 활동 범위가 위축된 점 등으로 인해 폐교되었다고 추측되고 있다.&lt;br /&gt;
&lt;br /&gt;
[[분류: 이민희]]&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숭무학교(崇武學校)]]===&lt;br /&gt;
숭무학교는 1910년대 멕시코로 이주한 한인들이 일제강점기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한 군사학교입니다. 멕시코에 이주한 한인들은 고된 노동 속에서도 민족 독립의 열망을 잃지 않고 독립운동을 조직적으로 지원하고자 노력했습니다. 1915년 멕시코 유카탄주 메리다 지역에서 설립된 숭무학교는 독립군 양성을 목표로, 체계적인 군사훈련과 애국 사상 교육을 실시했습니다.&lt;br /&gt;
&lt;br /&gt;
이 학교는 멕시코 한인 사회의 독립운동 기반을 강화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특히 숭무학교는 한인들의 단결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멀리 해외에서조차 독립운동을 지속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큽니다. 이러한 활동은 멕시코뿐 아니라 미주 지역의 다른 한인 독립운동 단체에도 영향을 주어 독립운동의 글로벌 네트워크 형성에 기여했습니다.&lt;br /&gt;
&lt;br /&gt;
숭무학교는 해외 독립운동의 독특한 사례로, 한인 이민사와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lt;br /&gt;
&lt;br /&gt;
[[분류:최용빈]]&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독립군으로의 발전===&lt;br /&gt;
&lt;br /&gt;
군사교육을 위해 설립된 다양한 무관학교를 기점으로, 졸업생들은 각기 다른 곳에서 독립군으로 발전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의 경우, 졸업생들은 만주 지역에서 서로군정서, 북로군정서에서 핵심 간부로 활약했을 뿐 아니라, 대한독립군,통의부의용군, 정의부, 신민부, 국민부 등에서 활동하였다. 또한, 중국 본토의 경우에서는 1919년 11월 길림에서 의열단을 결성하기도 하고, 임시정부 산하의 광복군인 한국광복군의 일원으로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졸업한 졸업생들도 독립군으로서 활약하였다. 이들은 민족혁명당의 항일투쟁체계에 편입되었는데, 대표적으로 임시정부 산하의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대의 핵심 세력으로 성장했고, 일부는 화북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에 가담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한인소년병학교]]와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 숭무학교를 졸업한 졸업생들도 독립군으로 발전하였으나, 구체적으로 어떤 기관으로 발전하였는지는 크게 알려진 바가 없다. &lt;br /&gt;
&lt;br /&gt;
[[숭무학교(崇武學校)]]는 일부 학생들은 멕시코 혁명에 참여하기 위해 군에 입대하였다.  일부 설립자들은 과테말라 혁명에 참여하려 했으나 실패로 끝났다.&lt;br /&gt;
&lt;br /&gt;
[[분류: 이민희]]&lt;br /&gt;
&lt;br /&gt;
==데이터 시각화==&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마인드맵===&lt;br /&gt;
[[파일:교육구국운동_노드_마인드맵.png|500픽셀]]&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온톨로지===&lt;br /&gt;
인물의 경우 관련 공훈전자사료관,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인명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의 관련 링크를 삽입하여 추가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하였다.&lt;br /&gt;
{{NetworkGraph | title=교육구국운동.lst}}&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콘텐츠 구조===&lt;br /&gt;
====클래스(Class)====&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width:100%;&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0%&amp;quot;| 클래스|| style=&amp;quot;width:10%&amp;quot;|모양|| style=&amp;quot;width:20%&amp;quot;|내용 ||노드 &lt;br /&gt;
|-&lt;br /&gt;
|인물 ||인물의 사진 || 독립운동사에서 교육 운동에 이바지하였던 인물을 포함한 다양한 독립운동가들을 인물로서 클래스로 설정했다. || [[이동휘]] '''[[안창호(安昌浩)]]''' [[김원봉]] '''[[장제스]]''' 박용만 이갑성 스코필드 유기준 [[주시경]] [[지청천]] [[여운형]] 차미리사 김명시 남궁억 이동녕 이용익 김성수 신해영 [[강기덕]] 손병희 [[방정환]] 이종호 윤익선 염온동 주익 이세영 고종 순헌황귀비 박자혜 신채호 김종진 이정숙 이회영 김구 이석영 이상룡 윤기섭 이근영 한성순 양귀선 조병하 서문경 윤을희 이시영 박선봉 조금옥 '''[[양기탁(梁起鐸)]]'''&lt;br /&gt;
|-&lt;br /&gt;
|기관 || 빨간색 상자|| 부지를 두고 설치하여 활동했던 조직을 기관으로 설정했다. ||연희전문학교 세브란스 배재학당 배화학당 보성전문학교 명신여학교 '''[[한인소년병학교]]''' 대조선국민군단사관학교 '''[[조선혁명간부학교]]''' 신흥무관학교 숭무학교 신흥강습소 동아일보&lt;br /&gt;
|-&lt;br /&gt;
|단체 || 파란색 원 ||기관보다 넓은 의미로서, 같은 뜻을 가지고 함께 활동했던 조직체를 단체로 설정했다. || [[신민회(新民會)]] 협성회독립협회 '''[[한국광복군]]''' '''[[조선의용대]]''' 조선의용군 화북조선독립동맹 대한민국임시정부 간우회 조선어학회 대한인국민회&lt;br /&gt;
|-&lt;br /&gt;
|지역 || 초록색 타원|| 각 기관과 단체가 위치하거나 기관이나 단체, 인물이 활동했던 곳을 지역으로서 클래스를 설정했다. || 미국, 한반도, 난징, 멕시코, 캐나다, 상해, 만주, 중국&lt;br /&gt;
|-&lt;br /&gt;
|활동_및_사건 || 분홍색 타원 ||각 기관이나 단체, 인물의 행동 및 사건을 묶어 활동_및_사건의 클래스를 설정했다. || '''[[브나로드 운동]]''', 민립대학 설립 운동, 3.1운동, 6.10 학생 만세운동, 1920년 3.1 학생 운동, 서울 지역 학생 독립운동&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신다정]]&lt;br /&gt;
&lt;br /&gt;
====관계성(Relation)====&lt;br /&gt;
&lt;br /&gt;
'''인물 중심 관계성 설정''' &lt;br /&gt;
* '''설립했다''' 인물 → 기관, 단체 : 기관 또는 단체의 설립에 기여함을 설명하는 relation이다. &lt;br /&gt;
* '''지원했다''' 인물 → 기관, 단체, 활동 및 사건 : 단체, 기관, 활동 및 사건을 직접적으로 주도한 것은 아니나 보조적으로 지원했음을 설명하는 relation이다. 단체의 활동이나 기관의 설립 및 활동, 활동 및 사건의 전개의 지원을 모두 포괄하는 설명이다. &lt;br /&gt;
* '''출신이다''' 인물 → 기관, 단체, 지역 : 인물이 기관, 단체, 나라의 출신임을 나타내는 relation이다. 지역의 경우, 해당 인물의 국적을 의미하며 외국인의 경우에만 해당 relation을 사용해 국적을 나타냈다. &lt;br /&gt;
* '''활동했다''' 인물 → 활동 및 사건 : 인물이 특정 활동 및 사건에 주도적으로 활동했음을 나타내는 relation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기관 중심 관계성 설정'''&lt;br /&gt;
* '''소속이다''' 기관, 단체 → 인물 : 인물이 기관의 소속임을 나타내는 relation이다. 기관의 경우 교육기관을 주로 다루기 때문에, 교육기관에 재학하였던 경우에는 '출신이다.' relation을 사용하였고 교직원 등으로 재직한 경우에는 해당 relation을 사용하여 구분하였다. &lt;br /&gt;
* '''위치하다''' 기관→지역 : 기관이 특정 지역에 위치하였음을 나타내는 relation이다. 위치를 옮긴 기관의 경우 위치했던 지역에 모두 해당 relation을 사용하여 연결했다. &lt;br /&gt;
* '''발전했다''' 기관, 단체 → 기관, 단체 : 특정 기관 및 단체가 다른 기관 및 단체로 발전함을 설명하는 relation이다.  &lt;br /&gt;
* '''계승했다''' 기관, 단체 → 기관, 단체 : 기관 및 단체가 다른 기관 및 단체로 계승함을 설명하는 relation이다. 계승한 쪽을 종속 노드로 설정하였으나, 화살표 방향을 inverse로 설정해 '발전했다.' relation과 차이를 두었다.&lt;br /&gt;
&lt;br /&gt;
====온톨로지 기여====&lt;br /&gt;
[[김윤]]&amp;lt;br/&amp;gt;&lt;br /&gt;
[[신다정]]&amp;lt;br/&amp;gt;&lt;br /&gt;
[[이민희]]&amp;lt;br/&amp;gt;: 군사교육 중 조선혁명간부학교, 한인소년병학교,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 관련 노드 및 관계성 정리, 인물 사진 삽입&lt;br /&gt;
[[최용빈]]&amp;lt;br/&amp;gt;&lt;br /&gt;
[[헤르미온느]]: 민족사학 관련 노드 및 관계성 정리, 인물 사진 삽입, 노드 색 및 모양 지정, 인물 하이퍼링크&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교육기관 지도&amp;lt;ref&amp;gt;가급적 최초 설립 위치를 기준으로 작성하였지만 초기 설립 시 다른 학교의 교사에 있다 교사를 이전한 경우 해당 위치로 표기함.&amp;lt;/ref&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src=&amp;quot;https://www.google.com/maps/d/embed?mid=1cI0D_B0oG-xrdk5kcPVCnLJ2hJpOJZw&amp;amp;ehbc=2E312F&amp;quot; width=&amp;quot;640&amp;quot; height=&amp;quot;480&amp;quot;&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기타==&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CEF2F2; margin: 0; border: 3px solid #aee1e1; padding: 3px;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참고문헌===&lt;br /&gt;
1. 민족사학 발전과정 연대기 설명 내용&lt;br /&gt;
*「원산학사 (元山學舍)」,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0700, 접속일: 2024. 12. 9.&lt;br /&gt;
*「흥화학교(興化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6074, 접속일: 2024. 12. 9.&lt;br /&gt;
*「중교의숙(中橋義塾)」,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3699, 접속일: 2024. 12. 9.&lt;br /&gt;
*「순성학교 (順成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1901, 접속일: 2024. 12. 9.&lt;br /&gt;
*「점진학교(漸進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9857, 접속일: 2024. 12. 9.&lt;br /&gt;
*「낙연의숙(落淵義塾)」,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1639, 접속일: 2024. 12. 9.&lt;br /&gt;
&lt;br /&gt;
*「한성법학교(漢城法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426, 접속일: 2024. 12. 9.&lt;br /&gt;
&lt;br /&gt;
*「양정고등학교 (養正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731, 접속일: 2024. 12. 9.&lt;br /&gt;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3433, 접속일: 2024. 12. 9.&lt;br /&gt;
*「보창학교(普昌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3546, 접속일: 2024. 12. 9.&lt;br /&gt;
*「서전서숙 (瑞甸書塾)」,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8159, 접속일: 2024. 12. 9.&lt;br /&gt;
*「진명여자고등학교 (進明女子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4673, 접속일: 2024. 12. 9.&lt;br /&gt;
*「중동고등학교 (中東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3729, 접속일: 2024. 12. 9.&lt;br /&gt;
*「휘문고등학교 (徽文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5832, 접속일: 2024. 12. 9.&lt;br /&gt;
*「숙명여자대학교 (淑明女子大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1800, 접속일: 2024. 12. 9.&lt;br /&gt;
*「숙명여자고등학교 (淑明女子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1799, 접속일: 2024. 12. 9.&lt;br /&gt;
*「양규의숙(養閨義塾)」,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426, 접속일: 2024. 12. 9.&lt;br /&gt;
*「서북협성학교 (西北協成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7788, 접속일: 2024. 12. 9.&lt;br /&gt;
*「사범학교 (師範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5642, 접속일: 2024. 12. 9.&lt;br /&gt;
*「대성학교(大成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4519, 접속일: 2024. 12. 9.&lt;br /&gt;
*「협동학교(協東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3491, 접속일: 2024. 12. 9.&lt;br /&gt;
*「동성고등학교 (東星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6589, 접속일: 2024. 12. 9.&lt;br /&gt;
*「장훈고등학교 (長薰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8403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8403, 접속일: 2024. 12. 9.&lt;br /&gt;
*「오산고등학교 (五山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8302, 접속일: 2024. 12. 9.&lt;br /&gt;
*「치문초등학교 (致文初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8358, 접속일: 2024. 12. 9.&lt;br /&gt;
*「명동학교(明東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8242, 접속일: 2024. 12. 9.&lt;br /&gt;
*「양원여학교(養原女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687, 접속일: 2024. 12. 9.&lt;br /&gt;
*「보인학교(輔仁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426, 접속일: 2024. 12. 9.&lt;br /&gt;
*「기호학교(畿湖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426, 접속일: 2024. 12. 9.&lt;br /&gt;
*「양산중학교(楊山中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426, 접속일: 2024. 12. 9.&lt;br /&gt;
*「서북협성학교(西北協成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426, 접속일: 2024. 12. 9.&lt;br /&gt;
&lt;br /&gt;
2. 민간단체의 교육 구국 운동&lt;br /&gt;
* 한관일. &amp;quot;한국 개화기 신민회의 교육구국 사상.&amp;quot; 교육과학연구 14.- (2000): 1-32.&lt;br /&gt;
* [출처: 민립대학설립운동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lt;br /&gt;
&lt;br /&gt;
[[분류:독립운동사의 근간, 교육구국운동(敎育救國運動)]]&lt;/div&gt;</summary>
		<author><name>Matnyeom</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D%95%9C%EC%9D%B8%EC%86%8C%EB%85%84%EB%B3%91%ED%95%99%EA%B5%90&amp;diff=52189</id>
		<title>한인소년병학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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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12-20T10:50:1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Matnyeom: /* 폐교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교육구국운동기관&lt;br /&gt;
|기관명=한인소년병학교&lt;br /&gt;
|사진=한인소년병학교.jpg&lt;br /&gt;
|한자표기=韓人少年兵學校&lt;br /&gt;
|설립일=1909년 6월&lt;br /&gt;
|설립자=박용만&lt;br /&gt;
|설립위치=미국 네브래스카(Nebraska)주 커니(Kearney)시 -&amp;gt; 미국 미시간 주 헤이스팅스 시&lt;br /&gt;
|계승=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로 계승됨&lt;br /&gt;
|관련링크=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1902}}&lt;br /&gt;
&lt;br /&gt;
한인소년병학교는 1909년 6월 박용만의 주도로 미국 네브래스카주 커니시에 설립된 해외 최초의 한인 독립군 양성 학교이다. 독립군 장교 양성을 목표로 하였으며, 1914년까지 6년간 운영되었다. 이 학교는 미국 독립전쟁 당시의 민병대 시스템에서 영감을 받아 설립되었으며, [[둔전병제]]를 바탕으로 한 독립전쟁 준비의 일환이었다.&lt;br /&gt;
&lt;br /&gt;
=='''설립 배경'''==&lt;br /&gt;
&lt;br /&gt;
1908년 박용만이 주도한 애국동지대표회의에서 한인군사훈련양성소 설립이 결정되었다. 이는 독립전쟁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려는 박용만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었다. 당시 한국의 국권이 일본에 의해 침탈되는 상황에서, 박용만은 무장투쟁을 통한 독립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lt;br /&gt;
&lt;br /&gt;
박용만은 미국 독립전쟁의 역사를 연구하며, 민병대 시스템이 한국의 독립운동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독립군 양성이 시급하다고 보았고, 이를 위해 체계적인 군사교육 기관의 설립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lt;br /&gt;
&lt;br /&gt;
=='''학교 운영'''==&lt;br /&gt;
==='''위치 및 시설'''===&lt;br /&gt;
&lt;br /&gt;
* '''초기''': 네브래스카주 커니시의 임대농장에서 시작했다. 이 농장은 약 160에이커(약 65헥타르) 규모였으며, 학생들의 실습과 생활 공간으로 활용되었다.&lt;br /&gt;
* '''1910년 6월 이후''': ''헤이스팅스대학 기숙사와 학교 시설''로 이전했다. 이는 더 나은 교육 환경을 제공하기 위한 조치였다.&lt;br /&gt;
&lt;br /&gt;
==='''교육 과정'''===&lt;br /&gt;
학교의 일과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lt;br /&gt;
&lt;br /&gt;
'''오전''': 농장 노동 (5시간)&lt;br /&gt;
&amp;lt;br/&amp;gt;&lt;br /&gt;
'''오후''': 학과 수업 및 군사 훈련 (5시간)&lt;br /&gt;
&amp;lt;br/&amp;gt;&lt;br /&gt;
'''저녁''': 자습 (2시간)&lt;br /&gt;
&lt;br /&gt;
&lt;br /&gt;
이러한 일과는 [[둔전병제]]의 원리를 반영한 것으로, 학생들이 ''농사와 학업, 군사훈련을 병행'' 하도록 했다.&lt;br /&gt;
&lt;br /&gt;
==='''교육 내용'''===&lt;br /&gt;
&lt;br /&gt;
학교의 교육 내용은 크게 세 가지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lt;br /&gt;
&lt;br /&gt;
'''1. 학과목'''&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width:100%; 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0%&amp;quot;| 과목명 || style=&amp;quot;width:80%&amp;quot;| 내용&lt;br /&gt;
|-&lt;br /&gt;
|국어||한국의 언어와 문화에 대한 이해를 심화 목적&lt;br /&gt;
|-&lt;br /&gt;
|영어|| 국제적인 소통 능력 증진의 목적&lt;br /&gt;
|-&lt;br /&gt;
|중국어와 일본어 || 동아시아의 정세를 이해하고 대응하기 위함&lt;br /&gt;
|-&lt;br /&gt;
|수학, 역사, 지리, 과학 || 기본적인 학문적 소양을 갖추기 위함&lt;br /&gt;
|-&lt;br /&gt;
|성서|| 당시 미국 사회의 특성을 반영한 교육 내용&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2. 군사 교육'''&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width:100%; 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0%&amp;quot;| 과목명 || style=&amp;quot;width:80%&amp;quot;| 내용&lt;br /&gt;
|-&lt;br /&gt;
|보병조련||기본적인 군사 훈련&lt;br /&gt;
|-&lt;br /&gt;
|군대내무서|| 군대 내부의 규율과 질서에 대한 교육&lt;br /&gt;
|-&lt;br /&gt;
|육군예식 || 군대 의례와 예절에 대한 교육&lt;br /&gt;
|-&lt;br /&gt;
|군인위생 || 전장에서의 위생 관리에 대한 교육&lt;br /&gt;
|-&lt;br /&gt;
|군법통용|| 군대 법규에 대한 이해&lt;br /&gt;
|-&lt;br /&gt;
|명장전법|| 유명한 장수들의 전략과 전술에 대한 학습&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3. 정신 교육'''&lt;br /&gt;
* 독립군 장교로서의 자질 함양 &lt;br /&gt;
* 애국심과 민족의식 고취 &lt;br /&gt;
* 리더십 훈련&lt;br /&gt;
&lt;br /&gt;
&lt;br /&gt;
이러한 종합적인 교육을 통해 학생들은 독립운동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 정신을 갖출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학생 현황'''==&lt;br /&gt;
&lt;br /&gt;
* 첫 해: 13명 입학 (14세부터 50세 이상까지 다양한 연령층)&lt;br /&gt;
* 1910년: 26명으로 증가 (미국 각지에서 한인 유학생들이 자원 입학)&lt;br /&gt;
* 총 졸업생: 6년간 약 90명 배출&lt;br /&gt;
&lt;br /&gt;
&lt;br /&gt;
학생들의 연령대가 다양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독립운동에 대한 ''한인 사회 전반의 열의''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특히 미국 각지에서 유학생들이 자원 입학했다는 사실은 이 학교의 명성과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lt;br /&gt;
&lt;br /&gt;
=='''폐교'''==&lt;br /&gt;
&lt;br /&gt;
1914년 8월 마지막 졸업식을 끝으로 한인소년병학교는 폐교되었다. 폐교의 주요 이유는 다음과 같다.&lt;br /&gt;
&lt;br /&gt;
* '''후원자와 지도교사들의 이주''': 학교 운영에 필요한 인적 자원의 부족&lt;br /&gt;
* '''장기적 무장독립투쟁 여건 부족''': 재정적, 물질적 지원의 한계&lt;br /&gt;
* '''일본의 항의''': 미국 정부에 대한 일본의 외교적 압력&lt;br /&gt;
* '''제 1차 세계대전의 발발''': 국제 정세의 변화로 인한 운영의 어려움&lt;br /&gt;
&lt;br /&gt;
&lt;br /&gt;
비록 학교는 폐교되었지만, 그 정신과 영향력은 이후의 독립운동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한인소년병학교의 졸업생들은 다양한 독립운동 단체에서 활약하며, 한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한인소년병학교의 역사적 의의는 다음과 같다.&lt;br /&gt;
&lt;br /&gt;
*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해외 최초의 한인 독립군 양성 학교'''&amp;lt;/span&amp;gt;: 이는 해외에서의 조직적인 독립운동의 시작을 의미했다.&lt;br /&gt;
* '''[[둔전병제]]를 바탕으로 한 독립전쟁 준비''': 학생들이 농사와 학업, 군사훈련을 병행함으로써 자급자족하면서도 독립군으로서의 역량을 키울 수 있었다.&lt;br /&gt;
* '''미국 독립전쟁의 민병대 시스템에서 영감을 받음''': 이는 박용만의 선견지명을 보여주는 것으로, 한국의 독립운동에 서구의 혁명 경험을 접목하려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lt;br /&gt;
* '''독립운동가 양성소로서의 역할''': 이 학교 출신들은 이후 다양한 독립운동 단체에서 활약했다.&lt;br /&gt;
* '''한인 사회의 결속력 강화''': 학교의 운영과 지원 과정에서 미주 한인 사회의 단결력이 높아졌다.&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 「한인소년병학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1902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국사편찬위원회, 「한인소년병학교」,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s://db.history.go.kr/diachronic/level.do?levelId=nh_047_0030_0020_0040_0030_0010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인소년병학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3624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박용만의 소년병학교: 군사적 구국운동」,  『호남人월드』, 2009.05.19, http://www.honaminworld.kr/307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박용만 1881 ~ 1928」,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code=kc_age_40&amp;amp;levelId=kc_n401200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가. 한인소년병학교」, 『국사편찬위원회』, https://db.history.go.kr/diachronic/level.do?levelId=nh_047_0030_0020_0040_0030_0010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한인소년병학교의 교육 과정」, 『국사편찬위원회』, http://contents.history.go.kr/front/nh/print.do?levelId=nh_047_0030_0020_0040_0030_0010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이민희]]&lt;/div&gt;</summary>
		<author><name>Matnyeom</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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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D%95%9C%EC%9D%B8%EC%86%8C%EB%85%84%EB%B3%91%ED%95%99%EA%B5%90&amp;diff=52188</id>
		<title>한인소년병학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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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12-20T10:49:5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Matnyeom: /* 교육 내용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교육구국운동기관&lt;br /&gt;
|기관명=한인소년병학교&lt;br /&gt;
|사진=한인소년병학교.jpg&lt;br /&gt;
|한자표기=韓人少年兵學校&lt;br /&gt;
|설립일=1909년 6월&lt;br /&gt;
|설립자=박용만&lt;br /&gt;
|설립위치=미국 네브래스카(Nebraska)주 커니(Kearney)시 -&amp;gt; 미국 미시간 주 헤이스팅스 시&lt;br /&gt;
|계승=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로 계승됨&lt;br /&gt;
|관련링크=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1902}}&lt;br /&gt;
&lt;br /&gt;
한인소년병학교는 1909년 6월 박용만의 주도로 미국 네브래스카주 커니시에 설립된 해외 최초의 한인 독립군 양성 학교이다. 독립군 장교 양성을 목표로 하였으며, 1914년까지 6년간 운영되었다. 이 학교는 미국 독립전쟁 당시의 민병대 시스템에서 영감을 받아 설립되었으며, [[둔전병제]]를 바탕으로 한 독립전쟁 준비의 일환이었다.&lt;br /&gt;
&lt;br /&gt;
=='''설립 배경'''==&lt;br /&gt;
&lt;br /&gt;
1908년 박용만이 주도한 애국동지대표회의에서 한인군사훈련양성소 설립이 결정되었다. 이는 독립전쟁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려는 박용만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었다. 당시 한국의 국권이 일본에 의해 침탈되는 상황에서, 박용만은 무장투쟁을 통한 독립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lt;br /&gt;
&lt;br /&gt;
박용만은 미국 독립전쟁의 역사를 연구하며, 민병대 시스템이 한국의 독립운동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독립군 양성이 시급하다고 보았고, 이를 위해 체계적인 군사교육 기관의 설립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lt;br /&gt;
&lt;br /&gt;
=='''학교 운영'''==&lt;br /&gt;
==='''위치 및 시설'''===&lt;br /&gt;
&lt;br /&gt;
* '''초기''': 네브래스카주 커니시의 임대농장에서 시작했다. 이 농장은 약 160에이커(약 65헥타르) 규모였으며, 학생들의 실습과 생활 공간으로 활용되었다.&lt;br /&gt;
* '''1910년 6월 이후''': ''헤이스팅스대학 기숙사와 학교 시설''로 이전했다. 이는 더 나은 교육 환경을 제공하기 위한 조치였다.&lt;br /&gt;
&lt;br /&gt;
==='''교육 과정'''===&lt;br /&gt;
학교의 일과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lt;br /&gt;
&lt;br /&gt;
'''오전''': 농장 노동 (5시간)&lt;br /&gt;
&amp;lt;br/&amp;gt;&lt;br /&gt;
'''오후''': 학과 수업 및 군사 훈련 (5시간)&lt;br /&gt;
&amp;lt;br/&amp;gt;&lt;br /&gt;
'''저녁''': 자습 (2시간)&lt;br /&gt;
&lt;br /&gt;
&lt;br /&gt;
이러한 일과는 [[둔전병제]]의 원리를 반영한 것으로, 학생들이 ''농사와 학업, 군사훈련을 병행'' 하도록 했다.&lt;br /&gt;
&lt;br /&gt;
==='''교육 내용'''===&lt;br /&gt;
&lt;br /&gt;
학교의 교육 내용은 크게 세 가지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lt;br /&gt;
&lt;br /&gt;
'''1. 학과목'''&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width:100%; 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0%&amp;quot;| 과목명 || style=&amp;quot;width:80%&amp;quot;| 내용&lt;br /&gt;
|-&lt;br /&gt;
|국어||한국의 언어와 문화에 대한 이해를 심화 목적&lt;br /&gt;
|-&lt;br /&gt;
|영어|| 국제적인 소통 능력 증진의 목적&lt;br /&gt;
|-&lt;br /&gt;
|중국어와 일본어 || 동아시아의 정세를 이해하고 대응하기 위함&lt;br /&gt;
|-&lt;br /&gt;
|수학, 역사, 지리, 과학 || 기본적인 학문적 소양을 갖추기 위함&lt;br /&gt;
|-&lt;br /&gt;
|성서|| 당시 미국 사회의 특성을 반영한 교육 내용&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2. 군사 교육'''&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width:100%; 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0%&amp;quot;| 과목명 || style=&amp;quot;width:80%&amp;quot;| 내용&lt;br /&gt;
|-&lt;br /&gt;
|보병조련||기본적인 군사 훈련&lt;br /&gt;
|-&lt;br /&gt;
|군대내무서|| 군대 내부의 규율과 질서에 대한 교육&lt;br /&gt;
|-&lt;br /&gt;
|육군예식 || 군대 의례와 예절에 대한 교육&lt;br /&gt;
|-&lt;br /&gt;
|군인위생 || 전장에서의 위생 관리에 대한 교육&lt;br /&gt;
|-&lt;br /&gt;
|군법통용|| 군대 법규에 대한 이해&lt;br /&gt;
|-&lt;br /&gt;
|명장전법|| 유명한 장수들의 전략과 전술에 대한 학습&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3. 정신 교육'''&lt;br /&gt;
* 독립군 장교로서의 자질 함양 &lt;br /&gt;
* 애국심과 민족의식 고취 &lt;br /&gt;
* 리더십 훈련&lt;br /&gt;
&lt;br /&gt;
&lt;br /&gt;
이러한 종합적인 교육을 통해 학생들은 독립운동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 정신을 갖출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학생 현황'''==&lt;br /&gt;
&lt;br /&gt;
* 첫 해: 13명 입학 (14세부터 50세 이상까지 다양한 연령층)&lt;br /&gt;
* 1910년: 26명으로 증가 (미국 각지에서 한인 유학생들이 자원 입학)&lt;br /&gt;
* 총 졸업생: 6년간 약 90명 배출&lt;br /&gt;
&lt;br /&gt;
&lt;br /&gt;
학생들의 연령대가 다양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독립운동에 대한 ''한인 사회 전반의 열의''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특히 미국 각지에서 유학생들이 자원 입학했다는 사실은 이 학교의 명성과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lt;br /&gt;
&lt;br /&gt;
=='''폐교'''==&lt;br /&gt;
&lt;br /&gt;
1914년 8월 마지막 졸업식을 끝으로 한인소년병학교는 폐교되었다. 폐교의 주요 이유는 다음과 같다.&lt;br /&gt;
&lt;br /&gt;
* '''후원자와 지도교사들의 이주''': 학교 운영에 필요한 인적 자원의 부족&lt;br /&gt;
* '''장기적 무장독립투쟁 여건 부족''': 재정적, 물질적 지원의 한계&lt;br /&gt;
* '''일본의 항의''': 미국 정부에 대한 일본의 외교적 압력&lt;br /&gt;
* '''제 1차 세계대전의 발발''': 국제 정세의 변화로 인한 운영의 어려움&lt;br /&gt;
&lt;br /&gt;
&lt;br /&gt;
비록 학교는 폐교되었지만, 그 정신과 영향력은 이후의 독립운동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한인소년병학교의 졸업생들은 다양한 독립운동 단체에서 활약하며, 한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한인소년병학교의 역사적 의의는 다음과 같다.&lt;br /&gt;
&lt;br /&gt;
*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해외 최초의 한인 독립군 양성 학교'''&amp;lt;/span&amp;gt;: 이는 해외에서의 조직적인 독립운동의 시작을 의미했다.&lt;br /&gt;
* '''[[둔전병제]]를 바탕으로 한 독립전쟁 준비''': 학생들이 농사와 학업, 군사훈련을 병행함으로써 자급자족하면서도 독립군으로서의 역량을 키울 수 있었다.&lt;br /&gt;
* '''미국 독립전쟁의 민병대 시스템에서 영감을 받음''': 이는 박용만의 선견지명을 보여주는 것으로, 한국의 독립운동에 서구의 혁명 경험을 접목하려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lt;br /&gt;
* '''독립운동가 양성소로서의 역할''': 이 학교 출신들은 이후 다양한 독립운동 단체에서 활약했다.&lt;br /&gt;
* '''한인 사회의 결속력 강화''': 학교의 운영과 지원 과정에서 미주 한인 사회의 단결력이 높아졌다.&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 「한인소년병학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1902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국사편찬위원회, 「한인소년병학교」,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s://db.history.go.kr/diachronic/level.do?levelId=nh_047_0030_0020_0040_0030_0010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인소년병학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3624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박용만의 소년병학교: 군사적 구국운동」,  『호남人월드』, 2009.05.19, http://www.honaminworld.kr/307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박용만 1881 ~ 1928」,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code=kc_age_40&amp;amp;levelId=kc_n401200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가. 한인소년병학교」, 『국사편찬위원회』, https://db.history.go.kr/diachronic/level.do?levelId=nh_047_0030_0020_0040_0030_0010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한인소년병학교의 교육 과정」, 『국사편찬위원회』, http://contents.history.go.kr/front/nh/print.do?levelId=nh_047_0030_0020_0040_0030_0010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이민희]]&lt;/div&gt;</summary>
		<author><name>Matnyeom</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D%95%9C%EA%B5%AD%EA%B4%91%EB%B3%B5%EA%B5%B0&amp;diff=52187</id>
		<title>한국광복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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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12-20T10:48:3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Matnyeom: &lt;/p&gt;
&lt;hr /&gt;
&lt;div&gt;[[분류:이민희]]&lt;br /&gt;
&lt;br /&gt;
=='''개요'''==&lt;br /&gt;
[[파일:한국광복군.jpg|가운데]]&lt;br /&gt;
한국광복군은 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重慶)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창설한 정규군사조직이다. 항일운동과 한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했으며, 연합국의 일원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광복군은 독립운동의 군사적 기반을 마련하고, 해방 후 대한민국 국군의 모체가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창설 배경'''==&lt;br /&gt;
&lt;br /&gt;
1940년 당시 일본의 침략이 확대되고 제2차 세계대전이 본격화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의 군사적 기반을 강화할 필요성을 느꼈다. 또한 연합국과의 협력을 통해 독립을 쟁취하고자 하는 전략적 판단도 작용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조직 구성'''==&lt;br /&gt;
&lt;br /&gt;
한국광복군의 조직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lt;br /&gt;
&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width:100%; 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50%&amp;quot;| 지위 || style=&amp;quot;width:50%&amp;quot;| 인물&lt;br /&gt;
|-&lt;br /&gt;
|총사령관||지청천(池靑天)&lt;br /&gt;
|-&lt;br /&gt;
|참모장 || 이범석(李範奭)&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총사령부 예하에 4개 지대를 편성했다.&amp;lt;ref&amp;gt; 제4 지대는 계획만 있었을 뿐 실제로 편성되지 않았다. &amp;lt;/ref&amp;gt;&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width:100%; 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50%&amp;quot;| 지위 || style=&amp;quot;width:50%&amp;quot;| 인물&lt;br /&gt;
|-&lt;br /&gt;
|제1 지대장||이준식(李俊植)&lt;br /&gt;
|-&lt;br /&gt;
|제2 지대장 || 김학규(金學奎)&lt;br /&gt;
|-&lt;br /&gt;
|제3 지대장 || 공진원(孔鎭元)&lt;br /&gt;
|-&lt;br /&gt;
|제5 지대장 || 나월환(羅月煥)&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병력 모집'''==&lt;br /&gt;
&lt;br /&gt;
광복군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병력을 모집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 '''5개의 징모분처 설치''': 산서성(山西省), 수원성(綏遠省), 절강성(浙江省), 안휘성(安徽省) 등지에 징모분처를 설치하여 초모 활동을 펼쳤다.&lt;br /&gt;
* '''한인 교포 대상 모집''': 중국 각지에 거주하는 한인 교포들을 대상으로 입대를 독려했다.&lt;br /&gt;
* '''기존 독립운동 단체 흡수''': 조선의용대 등 기존의 독립운동 단체 병력을 흡수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러한 노력으로 창설 1년 만에 300여 명의 병력을 확보했으며, 이후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해방 직전에는 약 3,000명의 병력을 보유했다.&lt;br /&gt;
&lt;br /&gt;
=='''주요 활동'''==&lt;br /&gt;
&lt;br /&gt;
한국광복군의 주요 활동은 다음과 같다&lt;br /&gt;
&lt;br /&gt;
&lt;br /&gt;
'''항일전투 참여''': 중국 국민당군과 연합하여 항일전에 참여했다. 특히 1945년 인도-버마 전선에 파견되어 영국군과 함께 일본군에 대항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정보수집 활동''': 일본군의 동향과 전략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연합국에 제공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선전 및 교육 활동''': 항일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선전 활동과 군사훈련을 실시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OSS(미국 전략사무국)와의 협력''': 미국 OSS와 협력하여 특수작전을 준비했으나, 일본의 항복으로 실행되지는 못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국내진공작전 계획''': 해방을 앞두고 국내 진입을 위한 작전을 계획했으나, 일본의 갑작스러운 항복으로 실행되지 못했다.&lt;br /&gt;
&lt;br /&gt;
=='''해방 이후'''==&lt;br /&gt;
&lt;br /&gt;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면서 한국광복군의 주요 임무는 종료되었다. 해방 이후 광복군은 다음과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 '''귀국 지원''': 해외에 있던 한인들의 귀국을 지원했다.&lt;br /&gt;
* '''치안 유지''': 해방 직후의 혼란한 상황에서 치안 유지에 기여했다.&lt;br /&gt;
* '''국군의 모체''': 대한민국 국군의 창설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많은 광복군 출신들이 건군 과정에 참여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역사적 의의'''&amp;lt;/span&amp;gt;==&lt;br /&gt;
한국광복군의 역사적 의의는 다음과 같다.&lt;br /&gt;
&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width:100%; 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30%&amp;quot;| 의의 || style=&amp;quot;width:70%&amp;quot;| 내용&lt;br /&gt;
|-&lt;br /&gt;
|'''독립운동의 정통성'''||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규군으로서 독립운동의 정통성을 상징한다.&lt;br /&gt;
|-&lt;br /&gt;
|'''연합국과의 협력''' ||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함으로써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을 높였다.&lt;br /&gt;
|-&lt;br /&gt;
|'''군사력 확보''' || 독립 이후를 대비한 군사력을 확보했다.&lt;br /&gt;
|-&lt;br /&gt;
|'''국군의 기원''' || 대한민국 국군의 직접적인 모체가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광복군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현대 한국 군사의 뿌리로 인식되고 있다.&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lt;br /&gt;
*  「광복군의 창설」,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nh/view.do?levelId=nh_050_0050_0020_0010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한국 광복군의 활동」,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ta/view.do?levelId=ta_m71_0100_0030_0030_0020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한국광복군 1940」,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code=kc_age_40&amp;amp;levelId=kc_o403810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심옥주,  「나라를 되찾기 위해 총을 든 여성들, 한국광복군의 여성 대원들」,  『국립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 https://www.nmkpg.go.kr/webzine/story/cn.do?rid=259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손염홍,  「광복군의 기억: 나는 이렇게 광복군이 되었다」,  『국립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 https://imjung0411.com/story/cn.do?rid=305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김록환, 「[커버스토리]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만든 광복군, 어떤 군대였을까」,  『중앙일보』, 2016.11.16., https://www.joongang.co.kr/article/20863567 (검색일: 2024년 12월 4일)&lt;/div&gt;</summary>
		<author><name>Matnyeom</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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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D%95%9C%EA%B5%AD%EA%B4%91%EB%B3%B5%EA%B5%B0&amp;diff=52186</id>
		<title>한국광복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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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12-20T10:46:1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Matnyeom: /* 역사적 의의 */&lt;/p&gt;
&lt;hr /&gt;
&lt;div&gt;[[분류:이민희]]&lt;br /&gt;
&lt;br /&gt;
=='''개요'''==&lt;br /&gt;
[[파일:한국광복군.jpg|가운데]]&lt;br /&gt;
한국광복군은 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重慶)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창설한 정규군사조직이다. 항일운동과 한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했으며, 연합국의 일원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광복군은 독립운동의 군사적 기반을 마련하고, 해방 후 대한민국 국군의 모체가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창설 배경'''==&lt;br /&gt;
&lt;br /&gt;
1940년 당시 일본의 침략이 확대되고 제2차 세계대전이 본격화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의 군사적 기반을 강화할 필요성을 느꼈다. 또한 연합국과의 협력을 통해 독립을 쟁취하고자 하는 전략적 판단도 작용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조직 구성'''==&lt;br /&gt;
&lt;br /&gt;
한국광복군의 조직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lt;br /&gt;
&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width:100%; 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50%&amp;quot;| 지위 || style=&amp;quot;width:50%&amp;quot;| 인물&lt;br /&gt;
|-&lt;br /&gt;
|총사령관||지청천(池靑天)&lt;br /&gt;
|-&lt;br /&gt;
|참모장 || 이범석(李範奭)&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총사령부 예하에 4개 지대를 편성했다.&amp;lt;ref&amp;gt; 제4 지대는 계획만 있었을 뿐 실제로 편성되지 않았다. &amp;lt;/ref&amp;gt;&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width:100%; 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50%&amp;quot;| 지위 || style=&amp;quot;width:50%&amp;quot;| 인물&lt;br /&gt;
|-&lt;br /&gt;
|제1 지대장||이준식(李俊植)&lt;br /&gt;
|-&lt;br /&gt;
|제2 지대장 || 김학규(金學奎)&lt;br /&gt;
|-&lt;br /&gt;
|제3 지대장 || 공진원(孔鎭元)&lt;br /&gt;
|-&lt;br /&gt;
|제5 지대장 || 나월환(羅月煥)&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병력 모집'''==&lt;br /&gt;
&lt;br /&gt;
광복군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병력을 모집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 '''5개의 징모분처 설치''': 산서성(山西省), 수원성(綏遠省), 절강성(浙江省), 안휘성(安徽省) 등지에 징모분처를 설치하여 초모 활동을 펼쳤다.&lt;br /&gt;
* '''한인 교포 대상 모집''': 중국 각지에 거주하는 한인 교포들을 대상으로 입대를 독려했다.&lt;br /&gt;
* '''기존 독립운동 단체 흡수''': 조선의용대 등 기존의 독립운동 단체 병력을 흡수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러한 노력으로 창설 1년 만에 300여 명의 병력을 확보했으며, 이후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해방 직전에는 약 3,000명의 병력을 보유했다.&lt;br /&gt;
&lt;br /&gt;
=='''주요 활동'''==&lt;br /&gt;
&lt;br /&gt;
한국광복군의 주요 활동은 다음과 같다&lt;br /&gt;
&lt;br /&gt;
&lt;br /&gt;
'''항일전투 참여''': 중국 국민당군과 연합하여 항일전에 참여했다. 특히 1945년 인도-버마 전선에 파견되어 영국군과 함께 일본군에 대항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정보수집 활동''': 일본군의 동향과 전략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연합국에 제공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선전 및 교육 활동''': 항일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선전 활동과 군사훈련을 실시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OSS(미국 전략사무국)와의 협력''': 미국 OSS와 협력하여 특수작전을 준비했으나, 일본의 항복으로 실행되지는 못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국내진공작전 계획''': 해방을 앞두고 국내 진입을 위한 작전을 계획했으나, 일본의 갑작스러운 항복으로 실행되지 못했다.&lt;br /&gt;
&lt;br /&gt;
=='''해방 이후'''==&lt;br /&gt;
&lt;br /&gt;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면서 한국광복군의 주요 임무는 종료되었다. 해방 이후 광복군은 다음과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 '''귀국 지원''': 해외에 있던 한인들의 귀국을 지원했다.&lt;br /&gt;
* '''치안 유지''': 해방 직후의 혼란한 상황에서 치안 유지에 기여했다.&lt;br /&gt;
* '''국군의 모체''': 대한민국 국군의 창설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많은 광복군 출신들이 건군 과정에 참여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역사적 의의'''&amp;lt;/span&amp;gt;==&lt;br /&gt;
한국광복군의 역사적 의의는 다음과 같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독립운동의 정통성''':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규군으로서 독립운동의 정통성을 상징한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연합국과의 협력''':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함으로써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을 높였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군사력 확보''': 독립 이후를 대비한 군사력을 확보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국군의 기원''': 대한민국 국군의 직접적인 모체가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광복군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현대 한국 군사의 뿌리로 인식되고 있다.&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lt;br /&gt;
*  「광복군의 창설」,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nh/view.do?levelId=nh_050_0050_0020_0010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한국 광복군의 활동」,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ta/view.do?levelId=ta_m71_0100_0030_0030_0020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한국광복군 1940」,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code=kc_age_40&amp;amp;levelId=kc_o403810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심옥주,  「나라를 되찾기 위해 총을 든 여성들, 한국광복군의 여성 대원들」,  『국립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 https://www.nmkpg.go.kr/webzine/story/cn.do?rid=259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손염홍,  「광복군의 기억: 나는 이렇게 광복군이 되었다」,  『국립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 https://imjung0411.com/story/cn.do?rid=305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김록환, 「[커버스토리]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만든 광복군, 어떤 군대였을까」,  『중앙일보』, 2016.11.16., https://www.joongang.co.kr/article/20863567 (검색일: 2024년 12월 4일)&lt;/div&gt;</summary>
		<author><name>Matnyeom</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A1%B0%EC%84%A0%EC%9D%98%EC%9A%A9%EB%8C%80&amp;diff=52185</id>
		<title>조선의용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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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12-20T10:44:5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Matnyeom: /* 역사적 의의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파일:조선의용대.jpg|가운데]]&lt;br /&gt;
&lt;br /&gt;
조선의용대는 1938년 10월 10일 중국 한커우(漢口)에서 김원봉에 의해 창설된 항일무장단체이다.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활동했으며,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우며 한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 조선의용대는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이후 한국광복군의 모체가 되었다.&lt;br /&gt;
&lt;br /&gt;
=='''창설 배경'''==&lt;br /&gt;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1938년 일본군이 난징을 함락한 후 우한삼진(武漢三鎭)을 공략하는 상황에서, 중국 당국과 조선청년들의 협의로 의용대 구성이 결정되었다. 당시 중국 국민당 정부는 항일전선을 확대하기 위해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의 참여를 원했고,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은 이를 독립운동의 기회로 삼고자 했다.&lt;br /&gt;
&lt;br /&gt;
=='''조직 구성'''==&lt;br /&gt;
조선의용대의 조직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lt;br /&gt;
&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width:100%; 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50%&amp;quot;| 지위 || style=&amp;quot;width:50%&amp;quot;| 인물&lt;br /&gt;
|-&lt;br /&gt;
|총대장||김원봉&lt;br /&gt;
|-&lt;br /&gt;
|부대장 || 신악&lt;br /&gt;
|-&lt;br /&gt;
|정치조 || 김학무&lt;br /&gt;
|-&lt;br /&gt;
|총무대장 || 이집중&lt;br /&gt;
|-&lt;br /&gt;
|선전대장|| 김창제&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초기 병력은 200여 명이었으나, 지속적인 모집 활동을 통해 1940년 2월에는 314명으로 증가했다. 조직은 총사령부 아래 3개 지대로 편성되었으며, 각 지대는 2개 중대로 구성되었다.&lt;br /&gt;
&lt;br /&gt;
=='''주요 활동'''==&lt;br /&gt;
조선의용대의 주요 활동은 다음과 같다.&lt;br /&gt;
&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width:100%;&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0%&amp;quot;| 활동 || style=&amp;quot;width:80%&amp;quot;| 내용&lt;br /&gt;
|-&lt;br /&gt;
|전투 참여||중국군과 연합하여 일본군에 대항한 실제 전투에 참가했다. 특히 1939년 4월 산시성(山西省) 린펀(臨汾) 전투, 1940년 8월 산시성 운청(運城) 전투 등에서 활약했다.&lt;br /&gt;
|-&lt;br /&gt;
|정보 수집 || 일본군의 동향과 전략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중국군에 제공했다.&lt;br /&gt;
|-&lt;br /&gt;
|포로 취조 및 사상공작 || 일본군 포로를 심문하고, 그들에게 항일사상을 주입하는 활동을 펼쳤다.&lt;br /&gt;
|-&lt;br /&gt;
|선전 활동 || 항일 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다양한 선전 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조선의용대통신'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하여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알렸다.&lt;br /&gt;
|-&lt;br /&gt;
|적문서 번역|| 일본어로 된 문서를 중국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수행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변천과 해산'''==&lt;br /&gt;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조선의용대의 활동 범위가 확대되었다. 그러나 1942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결의에 따라 조선의용대는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의용대는 두 갈래로 나뉘어졌다.&lt;br /&gt;
&lt;br /&gt;
&lt;br /&gt;
1. 일부는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어 계속해서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중국 국민당과 협력&amp;lt;/span&amp;gt;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2. 주력 부대는 김원봉의 지휘 하에 중국 공산당 지역으로 이동하여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조선의용군'' 으로 개편&amp;lt;/span&amp;gt;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러한 변화는 당시 복잡한 국제 정세와 한국 독립운동 내부의 노선 차이를 반영한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역사적 의의'''&amp;lt;/span&amp;gt;==&lt;br /&gt;
조선의용대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lt;br /&gt;
&lt;br /&gt;
* 항일무장투쟁의 상징: 해외에서 조직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사례이다.&lt;br /&gt;
* 독립운동의 국제화: 중국과의 협력을 통해 한국 독립운동의 국제적 지지기반을 확대했다.&lt;br /&gt;
* 광복군의 모체: 이후 [[한국광복군]]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lt;br /&gt;
* 독립운동가 양성: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조선의용대를 거쳐 성장했다.&lt;br /&gt;
* 조선의용대의 활동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한 페이지를 차지하며, 항일투쟁의 정신을 상징하는 존재로 평가받고 있다.&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2178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조선의용대 1938」,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code=kc_age_40&amp;amp;levelId=kc_o403410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이종호, 「[역사 속 그곳] 의열단 의백, 조선의용대 대장 약산 김원봉」, 『울산저널』, 2020.08.15., https://m.usjournal.kr/news/articleView.html?idxno=87263 (검색일: 2024년 12월 4일)&lt;br /&gt;
&lt;br /&gt;
[[분류: 이민희]]&lt;/div&gt;</summary>
		<author><name>Matnyeom</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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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조선의용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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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12-20T10:44:4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Matnyeom: /* 역사적 의의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파일:조선의용대.jpg|가운데]]&lt;br /&gt;
&lt;br /&gt;
조선의용대는 1938년 10월 10일 중국 한커우(漢口)에서 김원봉에 의해 창설된 항일무장단체이다.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활동했으며,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우며 한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 조선의용대는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이후 한국광복군의 모체가 되었다.&lt;br /&gt;
&lt;br /&gt;
=='''창설 배경'''==&lt;br /&gt;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1938년 일본군이 난징을 함락한 후 우한삼진(武漢三鎭)을 공략하는 상황에서, 중국 당국과 조선청년들의 협의로 의용대 구성이 결정되었다. 당시 중국 국민당 정부는 항일전선을 확대하기 위해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의 참여를 원했고,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은 이를 독립운동의 기회로 삼고자 했다.&lt;br /&gt;
&lt;br /&gt;
=='''조직 구성'''==&lt;br /&gt;
조선의용대의 조직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lt;br /&gt;
&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width:100%; 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50%&amp;quot;| 지위 || style=&amp;quot;width:50%&amp;quot;| 인물&lt;br /&gt;
|-&lt;br /&gt;
|총대장||김원봉&lt;br /&gt;
|-&lt;br /&gt;
|부대장 || 신악&lt;br /&gt;
|-&lt;br /&gt;
|정치조 || 김학무&lt;br /&gt;
|-&lt;br /&gt;
|총무대장 || 이집중&lt;br /&gt;
|-&lt;br /&gt;
|선전대장|| 김창제&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초기 병력은 200여 명이었으나, 지속적인 모집 활동을 통해 1940년 2월에는 314명으로 증가했다. 조직은 총사령부 아래 3개 지대로 편성되었으며, 각 지대는 2개 중대로 구성되었다.&lt;br /&gt;
&lt;br /&gt;
=='''주요 활동'''==&lt;br /&gt;
조선의용대의 주요 활동은 다음과 같다.&lt;br /&gt;
&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width:100%;&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0%&amp;quot;| 활동 || style=&amp;quot;width:80%&amp;quot;| 내용&lt;br /&gt;
|-&lt;br /&gt;
|전투 참여||중국군과 연합하여 일본군에 대항한 실제 전투에 참가했다. 특히 1939년 4월 산시성(山西省) 린펀(臨汾) 전투, 1940년 8월 산시성 운청(運城) 전투 등에서 활약했다.&lt;br /&gt;
|-&lt;br /&gt;
|정보 수집 || 일본군의 동향과 전략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중국군에 제공했다.&lt;br /&gt;
|-&lt;br /&gt;
|포로 취조 및 사상공작 || 일본군 포로를 심문하고, 그들에게 항일사상을 주입하는 활동을 펼쳤다.&lt;br /&gt;
|-&lt;br /&gt;
|선전 활동 || 항일 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다양한 선전 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조선의용대통신'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하여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알렸다.&lt;br /&gt;
|-&lt;br /&gt;
|적문서 번역|| 일본어로 된 문서를 중국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수행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변천과 해산'''==&lt;br /&gt;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조선의용대의 활동 범위가 확대되었다. 그러나 1942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결의에 따라 조선의용대는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의용대는 두 갈래로 나뉘어졌다.&lt;br /&gt;
&lt;br /&gt;
&lt;br /&gt;
1. 일부는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어 계속해서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중국 국민당과 협력&amp;lt;/span&amp;gt;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2. 주력 부대는 김원봉의 지휘 하에 중국 공산당 지역으로 이동하여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조선의용군'' 으로 개편&amp;lt;/span&amp;gt;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러한 변화는 당시 복잡한 국제 정세와 한국 독립운동 내부의 노선 차이를 반영한다.&lt;br /&gt;
&lt;br /&gt;
=='''역사적 의의'''==&lt;br /&gt;
조선의용대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lt;br /&gt;
&lt;br /&gt;
* 항일무장투쟁의 상징: 해외에서 조직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사례이다.&lt;br /&gt;
* 독립운동의 국제화: 중국과의 협력을 통해 한국 독립운동의 국제적 지지기반을 확대했다.&lt;br /&gt;
* 광복군의 모체: 이후 [[한국광복군]]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lt;br /&gt;
* 독립운동가 양성: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조선의용대를 거쳐 성장했다.&lt;br /&gt;
* 조선의용대의 활동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한 페이지를 차지하며, 항일투쟁의 정신을 상징하는 존재로 평가받고 있다.&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2178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조선의용대 1938」,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code=kc_age_40&amp;amp;levelId=kc_o403410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이종호, 「[역사 속 그곳] 의열단 의백, 조선의용대 대장 약산 김원봉」, 『울산저널』, 2020.08.15., https://m.usjournal.kr/news/articleView.html?idxno=87263 (검색일: 2024년 12월 4일)&lt;br /&gt;
&lt;br /&gt;
[[분류: 이민희]]&lt;/div&gt;</summary>
		<author><name>Matnyeom</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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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조선의용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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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12-20T10:43:5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Matnyeom: /* 변천과 해산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파일:조선의용대.jpg|가운데]]&lt;br /&gt;
&lt;br /&gt;
조선의용대는 1938년 10월 10일 중국 한커우(漢口)에서 김원봉에 의해 창설된 항일무장단체이다.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활동했으며,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우며 한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 조선의용대는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이후 한국광복군의 모체가 되었다.&lt;br /&gt;
&lt;br /&gt;
=='''창설 배경'''==&lt;br /&gt;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1938년 일본군이 난징을 함락한 후 우한삼진(武漢三鎭)을 공략하는 상황에서, 중국 당국과 조선청년들의 협의로 의용대 구성이 결정되었다. 당시 중국 국민당 정부는 항일전선을 확대하기 위해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의 참여를 원했고,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은 이를 독립운동의 기회로 삼고자 했다.&lt;br /&gt;
&lt;br /&gt;
=='''조직 구성'''==&lt;br /&gt;
조선의용대의 조직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lt;br /&gt;
&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width:100%; 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50%&amp;quot;| 지위 || style=&amp;quot;width:50%&amp;quot;| 인물&lt;br /&gt;
|-&lt;br /&gt;
|총대장||김원봉&lt;br /&gt;
|-&lt;br /&gt;
|부대장 || 신악&lt;br /&gt;
|-&lt;br /&gt;
|정치조 || 김학무&lt;br /&gt;
|-&lt;br /&gt;
|총무대장 || 이집중&lt;br /&gt;
|-&lt;br /&gt;
|선전대장|| 김창제&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초기 병력은 200여 명이었으나, 지속적인 모집 활동을 통해 1940년 2월에는 314명으로 증가했다. 조직은 총사령부 아래 3개 지대로 편성되었으며, 각 지대는 2개 중대로 구성되었다.&lt;br /&gt;
&lt;br /&gt;
=='''주요 활동'''==&lt;br /&gt;
조선의용대의 주요 활동은 다음과 같다.&lt;br /&gt;
&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width:100%;&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0%&amp;quot;| 활동 || style=&amp;quot;width:80%&amp;quot;| 내용&lt;br /&gt;
|-&lt;br /&gt;
|전투 참여||중국군과 연합하여 일본군에 대항한 실제 전투에 참가했다. 특히 1939년 4월 산시성(山西省) 린펀(臨汾) 전투, 1940년 8월 산시성 운청(運城) 전투 등에서 활약했다.&lt;br /&gt;
|-&lt;br /&gt;
|정보 수집 || 일본군의 동향과 전략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중국군에 제공했다.&lt;br /&gt;
|-&lt;br /&gt;
|포로 취조 및 사상공작 || 일본군 포로를 심문하고, 그들에게 항일사상을 주입하는 활동을 펼쳤다.&lt;br /&gt;
|-&lt;br /&gt;
|선전 활동 || 항일 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다양한 선전 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조선의용대통신'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하여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알렸다.&lt;br /&gt;
|-&lt;br /&gt;
|적문서 번역|| 일본어로 된 문서를 중국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수행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변천과 해산'''==&lt;br /&gt;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조선의용대의 활동 범위가 확대되었다. 그러나 1942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결의에 따라 조선의용대는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의용대는 두 갈래로 나뉘어졌다.&lt;br /&gt;
&lt;br /&gt;
&lt;br /&gt;
1. 일부는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어 계속해서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중국 국민당과 협력&amp;lt;/span&amp;gt;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2. 주력 부대는 김원봉의 지휘 하에 중국 공산당 지역으로 이동하여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조선의용군'' 으로 개편&amp;lt;/span&amp;gt;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러한 변화는 당시 복잡한 국제 정세와 한국 독립운동 내부의 노선 차이를 반영한다.&lt;br /&gt;
&lt;br /&gt;
=='''역사적 의의'''==&lt;br /&gt;
조선의용대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lt;br /&gt;
항일무장투쟁의 상징: 해외에서 조직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사례이다.&lt;br /&gt;
독립운동의 국제화: 중국과의 협력을 통해 한국 독립운동의 국제적 지지기반을 확대했다.&lt;br /&gt;
광복군의 모체: 이후 한국광복군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lt;br /&gt;
독립운동가 양성: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조선의용대를 거쳐 성장했다.&lt;br /&gt;
조선의용대의 활동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한 페이지를 차지하며, 항일투쟁의 정신을 상징하는 존재로 평가받고 있다.&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2178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조선의용대 1938」,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code=kc_age_40&amp;amp;levelId=kc_o403410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이종호, 「[역사 속 그곳] 의열단 의백, 조선의용대 대장 약산 김원봉」, 『울산저널』, 2020.08.15., https://m.usjournal.kr/news/articleView.html?idxno=87263 (검색일: 2024년 12월 4일)&lt;br /&gt;
&lt;br /&gt;
[[분류: 이민희]]&lt;/div&gt;</summary>
		<author><name>Matnyeom</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A1%B0%EC%84%A0%EC%9D%98%EC%9A%A9%EB%8C%80&amp;diff=52182</id>
		<title>조선의용대</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A1%B0%EC%84%A0%EC%9D%98%EC%9A%A9%EB%8C%80&amp;diff=52182"/>
		<updated>2024-12-20T10:42:3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Matnyeom: /* 변천과 해산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파일:조선의용대.jpg|가운데]]&lt;br /&gt;
&lt;br /&gt;
조선의용대는 1938년 10월 10일 중국 한커우(漢口)에서 김원봉에 의해 창설된 항일무장단체이다.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활동했으며,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우며 한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 조선의용대는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이후 한국광복군의 모체가 되었다.&lt;br /&gt;
&lt;br /&gt;
=='''창설 배경'''==&lt;br /&gt;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1938년 일본군이 난징을 함락한 후 우한삼진(武漢三鎭)을 공략하는 상황에서, 중국 당국과 조선청년들의 협의로 의용대 구성이 결정되었다. 당시 중국 국민당 정부는 항일전선을 확대하기 위해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의 참여를 원했고,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은 이를 독립운동의 기회로 삼고자 했다.&lt;br /&gt;
&lt;br /&gt;
=='''조직 구성'''==&lt;br /&gt;
조선의용대의 조직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lt;br /&gt;
&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width:100%; 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50%&amp;quot;| 지위 || style=&amp;quot;width:50%&amp;quot;| 인물&lt;br /&gt;
|-&lt;br /&gt;
|총대장||김원봉&lt;br /&gt;
|-&lt;br /&gt;
|부대장 || 신악&lt;br /&gt;
|-&lt;br /&gt;
|정치조 || 김학무&lt;br /&gt;
|-&lt;br /&gt;
|총무대장 || 이집중&lt;br /&gt;
|-&lt;br /&gt;
|선전대장|| 김창제&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초기 병력은 200여 명이었으나, 지속적인 모집 활동을 통해 1940년 2월에는 314명으로 증가했다. 조직은 총사령부 아래 3개 지대로 편성되었으며, 각 지대는 2개 중대로 구성되었다.&lt;br /&gt;
&lt;br /&gt;
=='''주요 활동'''==&lt;br /&gt;
조선의용대의 주요 활동은 다음과 같다.&lt;br /&gt;
&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width:100%;&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0%&amp;quot;| 활동 || style=&amp;quot;width:80%&amp;quot;| 내용&lt;br /&gt;
|-&lt;br /&gt;
|전투 참여||중국군과 연합하여 일본군에 대항한 실제 전투에 참가했다. 특히 1939년 4월 산시성(山西省) 린펀(臨汾) 전투, 1940년 8월 산시성 운청(運城) 전투 등에서 활약했다.&lt;br /&gt;
|-&lt;br /&gt;
|정보 수집 || 일본군의 동향과 전략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중국군에 제공했다.&lt;br /&gt;
|-&lt;br /&gt;
|포로 취조 및 사상공작 || 일본군 포로를 심문하고, 그들에게 항일사상을 주입하는 활동을 펼쳤다.&lt;br /&gt;
|-&lt;br /&gt;
|선전 활동 || 항일 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다양한 선전 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조선의용대통신'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하여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알렸다.&lt;br /&gt;
|-&lt;br /&gt;
|적문서 번역|| 일본어로 된 문서를 중국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수행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변천과 해산'''==&lt;br /&gt;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조선의용대의 활동 범위가 확대되었다. 그러나 1942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결의에 따라 조선의용대는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의용대는 두 갈래로 나뉘어졌다.&lt;br /&gt;
&lt;br /&gt;
&lt;br /&gt;
1. 일부는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어 계속해서 &amp;lt;span style=&amp;quot;color:색상코드 또는 색상이름&amp;quot;&amp;gt;중국 국민당과 협력&amp;lt;/span&amp;gt;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2. 주력 부대는 김원봉의 지휘 하에 중국 공산당 지역으로 이동하여 &amp;lt;span style=&amp;quot;color:색상코드 또는 색상이름&amp;quot;&amp;gt;''조선의용군'' 으로 개편&amp;lt;/span&amp;gt;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러한 변화는 당시 복잡한 국제 정세와 한국 독립운동 내부의 노선 차이를 반영한다.&lt;br /&gt;
&lt;br /&gt;
=='''역사적 의의'''==&lt;br /&gt;
조선의용대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lt;br /&gt;
항일무장투쟁의 상징: 해외에서 조직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사례이다.&lt;br /&gt;
독립운동의 국제화: 중국과의 협력을 통해 한국 독립운동의 국제적 지지기반을 확대했다.&lt;br /&gt;
광복군의 모체: 이후 한국광복군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lt;br /&gt;
독립운동가 양성: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조선의용대를 거쳐 성장했다.&lt;br /&gt;
조선의용대의 활동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한 페이지를 차지하며, 항일투쟁의 정신을 상징하는 존재로 평가받고 있다.&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2178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조선의용대 1938」,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code=kc_age_40&amp;amp;levelId=kc_o403410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이종호, 「[역사 속 그곳] 의열단 의백, 조선의용대 대장 약산 김원봉」, 『울산저널』, 2020.08.15., https://m.usjournal.kr/news/articleView.html?idxno=87263 (검색일: 2024년 12월 4일)&lt;br /&gt;
&lt;br /&gt;
[[분류: 이민희]]&lt;/div&gt;</summary>
		<author><name>Matnyeom</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A1%B0%EC%84%A0%EC%9D%98%EC%9A%A9%EB%8C%80&amp;diff=52181</id>
		<title>조선의용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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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12-20T10:41:4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Matnyeom: /* 변천과 해산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파일:조선의용대.jpg|가운데]]&lt;br /&gt;
&lt;br /&gt;
조선의용대는 1938년 10월 10일 중국 한커우(漢口)에서 김원봉에 의해 창설된 항일무장단체이다.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활동했으며,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우며 한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 조선의용대는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이후 한국광복군의 모체가 되었다.&lt;br /&gt;
&lt;br /&gt;
=='''창설 배경'''==&lt;br /&gt;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1938년 일본군이 난징을 함락한 후 우한삼진(武漢三鎭)을 공략하는 상황에서, 중국 당국과 조선청년들의 협의로 의용대 구성이 결정되었다. 당시 중국 국민당 정부는 항일전선을 확대하기 위해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의 참여를 원했고,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은 이를 독립운동의 기회로 삼고자 했다.&lt;br /&gt;
&lt;br /&gt;
=='''조직 구성'''==&lt;br /&gt;
조선의용대의 조직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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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총대장||김원봉&lt;br /&gt;
|-&lt;br /&gt;
|부대장 || 신악&lt;br /&gt;
|-&lt;br /&gt;
|정치조 || 김학무&lt;br /&gt;
|-&lt;br /&gt;
|총무대장 || 이집중&lt;br /&gt;
|-&lt;br /&gt;
|선전대장|| 김창제&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초기 병력은 200여 명이었으나, 지속적인 모집 활동을 통해 1940년 2월에는 314명으로 증가했다. 조직은 총사령부 아래 3개 지대로 편성되었으며, 각 지대는 2개 중대로 구성되었다.&lt;br /&gt;
&lt;br /&gt;
=='''주요 활동'''==&lt;br /&gt;
조선의용대의 주요 활동은 다음과 같다.&lt;br /&gt;
&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width:100%;&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0%&amp;quot;| 활동 || style=&amp;quot;width:80%&amp;quot;| 내용&lt;br /&gt;
|-&lt;br /&gt;
|전투 참여||중국군과 연합하여 일본군에 대항한 실제 전투에 참가했다. 특히 1939년 4월 산시성(山西省) 린펀(臨汾) 전투, 1940년 8월 산시성 운청(運城) 전투 등에서 활약했다.&lt;br /&gt;
|-&lt;br /&gt;
|정보 수집 || 일본군의 동향과 전략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중국군에 제공했다.&lt;br /&gt;
|-&lt;br /&gt;
|포로 취조 및 사상공작 || 일본군 포로를 심문하고, 그들에게 항일사상을 주입하는 활동을 펼쳤다.&lt;br /&gt;
|-&lt;br /&gt;
|선전 활동 || 항일 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다양한 선전 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조선의용대통신'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하여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알렸다.&lt;br /&gt;
|-&lt;br /&gt;
|적문서 번역|| 일본어로 된 문서를 중국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수행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변천과 해산'''==&lt;br /&gt;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조선의용대의 활동 범위가 확대되었다. 그러나 1942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결의에 따라 조선의용대는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의용대는 두 갈래로 나뉘어졌다.&lt;br /&gt;
&lt;br /&gt;
&lt;br /&gt;
1. 일부는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어 계속해서 중국 국민당과 협력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2. 주력 부대는 김원봉의 지휘 하에 중국 공산당 지역으로 이동하여 ''조선의용군'' 으로 개편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러한 변화는 당시 복잡한 국제 정세와 한국 독립운동 내부의 노선 차이를 반영한다.&lt;br /&gt;
&lt;br /&gt;
=='''역사적 의의'''==&lt;br /&gt;
조선의용대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lt;br /&gt;
항일무장투쟁의 상징: 해외에서 조직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사례이다.&lt;br /&gt;
독립운동의 국제화: 중국과의 협력을 통해 한국 독립운동의 국제적 지지기반을 확대했다.&lt;br /&gt;
광복군의 모체: 이후 한국광복군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lt;br /&gt;
독립운동가 양성: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조선의용대를 거쳐 성장했다.&lt;br /&gt;
조선의용대의 활동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한 페이지를 차지하며, 항일투쟁의 정신을 상징하는 존재로 평가받고 있다.&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2178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조선의용대 1938」,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code=kc_age_40&amp;amp;levelId=kc_o403410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이종호, 「[역사 속 그곳] 의열단 의백, 조선의용대 대장 약산 김원봉」, 『울산저널』, 2020.08.15., https://m.usjournal.kr/news/articleView.html?idxno=87263 (검색일: 2024년 12월 4일)&lt;br /&gt;
&lt;br /&gt;
[[분류: 이민희]]&lt;/div&gt;</summary>
		<author><name>Matnyeom</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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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12-20T10:41:16Z</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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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개요'''==&lt;br /&gt;
[[파일:조선의용대.jpg|가운데]]&lt;br /&gt;
&lt;br /&gt;
조선의용대는 1938년 10월 10일 중국 한커우(漢口)에서 김원봉에 의해 창설된 항일무장단체이다.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활동했으며,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우며 한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 조선의용대는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이후 한국광복군의 모체가 되었다.&lt;br /&gt;
&lt;br /&gt;
=='''창설 배경'''==&lt;br /&gt;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1938년 일본군이 난징을 함락한 후 우한삼진(武漢三鎭)을 공략하는 상황에서, 중국 당국과 조선청년들의 협의로 의용대 구성이 결정되었다. 당시 중국 국민당 정부는 항일전선을 확대하기 위해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의 참여를 원했고,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은 이를 독립운동의 기회로 삼고자 했다.&lt;br /&gt;
&lt;br /&gt;
=='''조직 구성'''==&lt;br /&gt;
조선의용대의 조직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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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yle=&amp;quot;width:50%&amp;quot;| 지위 || style=&amp;quot;width:50%&amp;quot;| 인물&lt;br /&gt;
|-&lt;br /&gt;
|총대장||김원봉&lt;br /&gt;
|-&lt;br /&gt;
|부대장 || 신악&lt;br /&gt;
|-&lt;br /&gt;
|정치조 || 김학무&lt;br /&gt;
|-&lt;br /&gt;
|총무대장 || 이집중&lt;br /&gt;
|-&lt;br /&gt;
|선전대장|| 김창제&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초기 병력은 200여 명이었으나, 지속적인 모집 활동을 통해 1940년 2월에는 314명으로 증가했다. 조직은 총사령부 아래 3개 지대로 편성되었으며, 각 지대는 2개 중대로 구성되었다.&lt;br /&gt;
&lt;br /&gt;
=='''주요 활동'''==&lt;br /&gt;
조선의용대의 주요 활동은 다음과 같다.&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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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전투 참여||중국군과 연합하여 일본군에 대항한 실제 전투에 참가했다. 특히 1939년 4월 산시성(山西省) 린펀(臨汾) 전투, 1940년 8월 산시성 운청(運城) 전투 등에서 활약했다.&lt;br /&gt;
|-&lt;br /&gt;
|정보 수집 || 일본군의 동향과 전략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중국군에 제공했다.&lt;br /&gt;
|-&lt;br /&gt;
|포로 취조 및 사상공작 || 일본군 포로를 심문하고, 그들에게 항일사상을 주입하는 활동을 펼쳤다.&lt;br /&gt;
|-&lt;br /&gt;
|선전 활동 || 항일 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다양한 선전 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조선의용대통신'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하여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알렸다.&lt;br /&gt;
|-&lt;br /&gt;
|적문서 번역|| 일본어로 된 문서를 중국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수행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변천과 해산'''==&lt;br /&gt;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조선의용대의 활동 범위가 확대되었다. 그러나 1942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결의에 따라 조선의용대는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의용대는 두 갈래로 나뉘어졌다.&lt;br /&gt;
&lt;br /&gt;
&lt;br /&gt;
1. 일부는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어 계속해서 중국 국민당과 협력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2. 주력 부대는 김원봉의 지휘 하에 중국 공산당 지역으로 이동하여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러한 변화는 당시 복잡한 국제 정세와 한국 독립운동 내부의 노선 차이를 반영한다.&lt;br /&gt;
&lt;br /&gt;
=='''역사적 의의'''==&lt;br /&gt;
조선의용대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lt;br /&gt;
항일무장투쟁의 상징: 해외에서 조직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사례이다.&lt;br /&gt;
독립운동의 국제화: 중국과의 협력을 통해 한국 독립운동의 국제적 지지기반을 확대했다.&lt;br /&gt;
광복군의 모체: 이후 한국광복군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lt;br /&gt;
독립운동가 양성: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조선의용대를 거쳐 성장했다.&lt;br /&gt;
조선의용대의 활동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한 페이지를 차지하며, 항일투쟁의 정신을 상징하는 존재로 평가받고 있다.&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2178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조선의용대 1938」,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code=kc_age_40&amp;amp;levelId=kc_o403410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이종호, 「[역사 속 그곳] 의열단 의백, 조선의용대 대장 약산 김원봉」, 『울산저널』, 2020.08.15., https://m.usjournal.kr/news/articleView.html?idxno=87263 (검색일: 2024년 12월 4일)&lt;br /&gt;
&lt;br /&gt;
[[분류: 이민희]]&lt;/div&gt;</summary>
		<author><name>Matnyeom</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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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12-20T10:41:0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Matnyeom: /* 변천과 해산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파일:조선의용대.jpg|가운데]]&lt;br /&gt;
&lt;br /&gt;
조선의용대는 1938년 10월 10일 중국 한커우(漢口)에서 김원봉에 의해 창설된 항일무장단체이다.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활동했으며,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우며 한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 조선의용대는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이후 한국광복군의 모체가 되었다.&lt;br /&gt;
&lt;br /&gt;
=='''창설 배경'''==&lt;br /&gt;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1938년 일본군이 난징을 함락한 후 우한삼진(武漢三鎭)을 공략하는 상황에서, 중국 당국과 조선청년들의 협의로 의용대 구성이 결정되었다. 당시 중국 국민당 정부는 항일전선을 확대하기 위해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의 참여를 원했고,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은 이를 독립운동의 기회로 삼고자 했다.&lt;br /&gt;
&lt;br /&gt;
=='''조직 구성'''==&lt;br /&gt;
조선의용대의 조직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lt;br /&gt;
&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width:100%; 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50%&amp;quot;| 지위 || style=&amp;quot;width:50%&amp;quot;| 인물&lt;br /&gt;
|-&lt;br /&gt;
|총대장||김원봉&lt;br /&gt;
|-&lt;br /&gt;
|부대장 || 신악&lt;br /&gt;
|-&lt;br /&gt;
|정치조 || 김학무&lt;br /&gt;
|-&lt;br /&gt;
|총무대장 || 이집중&lt;br /&gt;
|-&lt;br /&gt;
|선전대장|| 김창제&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초기 병력은 200여 명이었으나, 지속적인 모집 활동을 통해 1940년 2월에는 314명으로 증가했다. 조직은 총사령부 아래 3개 지대로 편성되었으며, 각 지대는 2개 중대로 구성되었다.&lt;br /&gt;
&lt;br /&gt;
=='''주요 활동'''==&lt;br /&gt;
조선의용대의 주요 활동은 다음과 같다.&lt;br /&gt;
&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width:100%;&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0%&amp;quot;| 활동 || style=&amp;quot;width:80%&amp;quot;| 내용&lt;br /&gt;
|-&lt;br /&gt;
|전투 참여||중국군과 연합하여 일본군에 대항한 실제 전투에 참가했다. 특히 1939년 4월 산시성(山西省) 린펀(臨汾) 전투, 1940년 8월 산시성 운청(運城) 전투 등에서 활약했다.&lt;br /&gt;
|-&lt;br /&gt;
|정보 수집 || 일본군의 동향과 전략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중국군에 제공했다.&lt;br /&gt;
|-&lt;br /&gt;
|포로 취조 및 사상공작 || 일본군 포로를 심문하고, 그들에게 항일사상을 주입하는 활동을 펼쳤다.&lt;br /&gt;
|-&lt;br /&gt;
|선전 활동 || 항일 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다양한 선전 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조선의용대통신'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하여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알렸다.&lt;br /&gt;
|-&lt;br /&gt;
|적문서 번역|| 일본어로 된 문서를 중국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수행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변천과 해산'''==&lt;br /&gt;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조선의용대의 활동 범위가 확대되었다. 그러나 1942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결의에 따라 조선의용대는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의용대는 두 갈래로 나뉘어졌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1. 일부는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어 계속해서 중국 국민당과 협력했다.&lt;br /&gt;
2. 주력 부대는 김원봉의 지휘 하에 중국 공산당 지역으로 이동하여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러한 변화는 당시 복잡한 국제 정세와 한국 독립운동 내부의 노선 차이를 반영한다.&lt;br /&gt;
&lt;br /&gt;
=='''역사적 의의'''==&lt;br /&gt;
조선의용대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lt;br /&gt;
항일무장투쟁의 상징: 해외에서 조직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사례이다.&lt;br /&gt;
독립운동의 국제화: 중국과의 협력을 통해 한국 독립운동의 국제적 지지기반을 확대했다.&lt;br /&gt;
광복군의 모체: 이후 한국광복군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lt;br /&gt;
독립운동가 양성: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조선의용대를 거쳐 성장했다.&lt;br /&gt;
조선의용대의 활동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한 페이지를 차지하며, 항일투쟁의 정신을 상징하는 존재로 평가받고 있다.&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2178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조선의용대 1938」,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code=kc_age_40&amp;amp;levelId=kc_o403410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이종호, 「[역사 속 그곳] 의열단 의백, 조선의용대 대장 약산 김원봉」, 『울산저널』, 2020.08.15., https://m.usjournal.kr/news/articleView.html?idxno=87263 (검색일: 2024년 12월 4일)&lt;br /&gt;
&lt;br /&gt;
[[분류: 이민희]]&lt;/div&gt;</summary>
		<author><name>Matnyeom</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A1%B0%EC%84%A0%EC%9D%98%EC%9A%A9%EB%8C%80&amp;diff=52178</id>
		<title>조선의용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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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12-20T10:40:3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Matnyeom: /* 창설 배경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파일:조선의용대.jpg|가운데]]&lt;br /&gt;
&lt;br /&gt;
조선의용대는 1938년 10월 10일 중국 한커우(漢口)에서 김원봉에 의해 창설된 항일무장단체이다.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활동했으며,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우며 한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 조선의용대는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이후 한국광복군의 모체가 되었다.&lt;br /&gt;
&lt;br /&gt;
=='''창설 배경'''==&lt;br /&gt;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1938년 일본군이 난징을 함락한 후 우한삼진(武漢三鎭)을 공략하는 상황에서, 중국 당국과 조선청년들의 협의로 의용대 구성이 결정되었다. 당시 중국 국민당 정부는 항일전선을 확대하기 위해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의 참여를 원했고,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은 이를 독립운동의 기회로 삼고자 했다.&lt;br /&gt;
&lt;br /&gt;
=='''조직 구성'''==&lt;br /&gt;
조선의용대의 조직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lt;br /&gt;
&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width:100%; 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50%&amp;quot;| 지위 || style=&amp;quot;width:50%&amp;quot;| 인물&lt;br /&gt;
|-&lt;br /&gt;
|총대장||김원봉&lt;br /&gt;
|-&lt;br /&gt;
|부대장 || 신악&lt;br /&gt;
|-&lt;br /&gt;
|정치조 || 김학무&lt;br /&gt;
|-&lt;br /&gt;
|총무대장 || 이집중&lt;br /&gt;
|-&lt;br /&gt;
|선전대장|| 김창제&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초기 병력은 200여 명이었으나, 지속적인 모집 활동을 통해 1940년 2월에는 314명으로 증가했다. 조직은 총사령부 아래 3개 지대로 편성되었으며, 각 지대는 2개 중대로 구성되었다.&lt;br /&gt;
&lt;br /&gt;
=='''주요 활동'''==&lt;br /&gt;
조선의용대의 주요 활동은 다음과 같다.&lt;br /&gt;
&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width:100%;&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0%&amp;quot;| 활동 || style=&amp;quot;width:80%&amp;quot;| 내용&lt;br /&gt;
|-&lt;br /&gt;
|전투 참여||중국군과 연합하여 일본군에 대항한 실제 전투에 참가했다. 특히 1939년 4월 산시성(山西省) 린펀(臨汾) 전투, 1940년 8월 산시성 운청(運城) 전투 등에서 활약했다.&lt;br /&gt;
|-&lt;br /&gt;
|정보 수집 || 일본군의 동향과 전략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중국군에 제공했다.&lt;br /&gt;
|-&lt;br /&gt;
|포로 취조 및 사상공작 || 일본군 포로를 심문하고, 그들에게 항일사상을 주입하는 활동을 펼쳤다.&lt;br /&gt;
|-&lt;br /&gt;
|선전 활동 || 항일 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다양한 선전 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조선의용대통신'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하여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알렸다.&lt;br /&gt;
|-&lt;br /&gt;
|적문서 번역|| 일본어로 된 문서를 중국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수행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변천과 해산'''==&lt;br /&gt;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조선의용대의 활동 범위가 확대되었다. 그러나 1942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결의에 따라 조선의용대는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의용대는 두 갈래로 나뉘어졌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1. 일부는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어 계속해서 중국 국민당과 협력했다.&lt;br /&gt;
2. 주력 부대는 김원봉의 지휘 하에 중국 공산당 지역으로 이동하여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러한 변화는 당시 복잡한 국제 정세와 한국 독립운동 내부의 노선 차이를 반영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역사적 의의'''==&lt;br /&gt;
조선의용대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lt;br /&gt;
항일무장투쟁의 상징: 해외에서 조직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사례이다.&lt;br /&gt;
독립운동의 국제화: 중국과의 협력을 통해 한국 독립운동의 국제적 지지기반을 확대했다.&lt;br /&gt;
광복군의 모체: 이후 한국광복군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lt;br /&gt;
독립운동가 양성: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조선의용대를 거쳐 성장했다.&lt;br /&gt;
조선의용대의 활동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한 페이지를 차지하며, 항일투쟁의 정신을 상징하는 존재로 평가받고 있다.&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2178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조선의용대 1938」,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code=kc_age_40&amp;amp;levelId=kc_o403410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이종호, 「[역사 속 그곳] 의열단 의백, 조선의용대 대장 약산 김원봉」, 『울산저널』, 2020.08.15., https://m.usjournal.kr/news/articleView.html?idxno=87263 (검색일: 2024년 12월 4일)&lt;br /&gt;
&lt;br /&gt;
[[분류: 이민희]]&lt;/div&gt;</summary>
		<author><name>Matnyeom</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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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장제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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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12-20T10:40:1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Matnyeom: /* 1차 국공합작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lt;br /&gt;
&lt;br /&gt;
{{교육구국운동인물|인물명=장제스|사진=장제스.jpg|영문(한자)표기=Chiang Kai-shek(蔣介石)|호=-|출생=1887년 10월 31일|사망=1975년 4월 5일|묘소=타오위안시 다시구 츠후 능침|관련링크=https://www.khan.co.kr/article/202008042123005}}&lt;br /&gt;
&lt;br /&gt;
&lt;br /&gt;
장제스(蔣介石, 1887년 10월 31일 - 1975년 4월 5일)는 중화민국의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제2, 4대 총통 및 국부천대 이후 제1~5대 총통(1925년 ~ 1975년)을 역임하였다. 그는 20세기 중국의 근대화와 통일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국민당을 이끌고 공산당과의 내전, 일본과의 전쟁 등 격동의 시기를 겪었다. 장제스는 중국 국민당의 지도자이자 중화민국의 총통으로, 한국 독립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약력'''==&lt;br /&gt;
&lt;br /&gt;
* 1906.4. 바오딩군관학교 입교&lt;br /&gt;
* 1907. 일본육군사관학교 유학&lt;br /&gt;
* 1909.5. 일본육군사관학교 27기 졸업&lt;br /&gt;
* 1926.4. 제2대 국민정부 군사위원장 (1926.4.14.~1928.11.10.)&lt;br /&gt;
* 1926.4. 제2대 군사위원회 주석 (1926.4.16.~1927.3.10.)&lt;br /&gt;
* 1926.6. 국민혁명군 총사령관 (1926.6.5.~1927.4.1.)&lt;br /&gt;
* 1927.4. 국민혁명군 제1집단군 사령관 (1927.4.5.~1929.1.22.)&lt;br /&gt;
* 1928.2. 제4대 군사위원회 주석 (1928.2.7.~1928.11.7.)&lt;br /&gt;
* 1928.10. 제2대 국민정부 주석 (1928.10.10.~1931.12.15.)&lt;br /&gt;
* 1930.11. 제22대 국민정부 행정원장 (1930.11.18.~1931.12.15.)&lt;br /&gt;
* 1932.3. 초대 국민정부 군사위원장 (1932.3.6.~1946.5.15.)[6]&lt;br /&gt;
* 1935.12. 제22대 국민정부 행정원장 (2기, 1935.12.7.~1937.1.1.)&lt;br /&gt;
* 1938.4. 초대 중국국민당 총재 (1938.4.1.~1975.4.5.)&lt;br /&gt;
* 1939.12. 제22대 국민정부 행정원장 (3기, 1939.12.11.~1945.5.31.)&lt;br /&gt;
* 1941.12. 제12대 난징 국민정부 외교부장 (1941.12.27.~1942.10.20.)&lt;br /&gt;
* 1943.8. 제4대 국민정부 주석 (1943.8.1.~1948.5.20.)&lt;br /&gt;
* 1947.3. 국민정부 행정원장 대리 (1947.3.1.~1947.4.23.)&lt;br /&gt;
* 1948.5. 초대 중화민국 총통&lt;br /&gt;
* 1954.5. 제2대 중화민국 총통&lt;br /&gt;
* 1960.5. 제3대 중화민국 총통&lt;br /&gt;
* 1966.5. 제4대 중화민국 총통&lt;br /&gt;
* 1972.5. 제5대 중화민국 총통&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N-uppZwQdULXRRf-KblieKSgaWmKPogHElW87p7au4E&amp;amp;font=Default&amp;amp;lang=ko&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장제스는 국민당의 강력한 군사적 지도권을 가진 인물로서, 황포군관학교 교장을 맡음으로써 본격적으로 국민당 내에서 영향력을 키워왔다.&lt;br /&gt;
&lt;br /&gt;
===출생과 성장===&lt;br /&gt;
&lt;br /&gt;
장제스는 저장성 샤오싱현의 부유한 상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전통적인 유교 교육을 받았으며, 17세부터 근대식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1906년 베이징의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 교육을 받았고, 1907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유학길에 올랐다.&lt;br /&gt;
&lt;br /&gt;
&lt;br /&gt;
===1차 국공합작===&lt;br /&gt;
&lt;br /&gt;
제1차 국공합작은 1921년 중국 공산당이 창당된 이후, 코민테른이 국민당을 연합 전선의 대상으로 선정하면서 &amp;lt;font color=&amp;quot;red&amp;quot;&amp;gt;''손‧요페 선언''&amp;lt;/font&amp;gt; 을 통해 수립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1923년, 장제스는 쑨원의 혁명 이념을 계승하며 국민당 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쑨원 사후 정치적 지도권을 가지고 있던 왕정위와 군사적 지도권을 가졌던 장개석이 연합하여 북벌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북경의 군벌 중심 정부를 타도하고 통일 정부를 수립하고자 북벌을 전개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새 정부의 위치를 두고 장제스와 반장제스파가 대립하였고, 결국 1927년 4월 12일, 4.12 정변이 발생하며 장제스가 상하이에서 대규모 공산당 숙청 작전을 실시하며 제1차 국공합작이 사실상 파기되었다.&lt;br /&gt;
&lt;br /&gt;
===2차 국공합작과 중일전쟁===&lt;br /&gt;
&lt;br /&gt;
제 2차 국공합작은 일본의 침략과 함께 이루어졌다.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하여 일본이 중국에 대한 침략 전쟁을 전개하면서 국민들의 반일감정이 높아지고, 국공합작을 통한 일치항일을 요구하였다. 따라서 8.1선언 등을 통해 중국 공산당이 내전 정지와 폭넓은 민족의 연합을 주장하는 등 국민당에 대한 항일운동이 확산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하지만, 장개석은 항일여론이 심화됨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을 토벌하는 데에 더 집중했다. 따라서, 서안사변을 통해 장개석을 체포, 구금하고 내전 정지 및 체포된 구국연합회의 석방을 요구하는 8개조 요구를 통해 제 2차 국공합작이 공식적으로 선언되었다. 하지만, 장개석은 국공합작 중에도 공산당의 세력 확장을 우려하여 환남사변 등을 일으켜 공산당 군과 지속적으로 충돌이 있었다.&lt;br /&gt;
&lt;br /&gt;
===국부천대와 대만===&lt;br /&gt;
&lt;br /&gt;
1949년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장제스는 약 200만 명의 국민당 군대와 지지자들과 함께 대만으로 퇴각했다. 대만에서 그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반공 독재 체제를 구축했으며, '백색테러'로 알려진 정치적 탄압을 자행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U6tB_Wggs3M?si=GvAaVvrOw0LtIFwc&amp;quot; title=&amp;quot;YouTube video player&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amp;lt;/div&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국공합작의 과정과 국공합작 이후의 국민당의 몰락과 장개석의 대만 퇴각은 이 영상에서 더 자세히 알아볼 수 있다.'' &amp;lt;/div&amp;gt;&lt;br /&gt;
&lt;br /&gt;
=='''한국과의 관계'''==&lt;br /&gt;
&lt;br /&gt;
장제스는 한국 독립운동에 상당한 관심과 지원을 보였다.&lt;br /&gt;
&lt;br /&gt;
* 1933년 중국육군군관학교 뤄양 분교에 한국인 특별반을 설치&lt;br /&gt;
*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동 시 지방 관리들에게 협조 지시&lt;br /&gt;
*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지지&lt;br /&gt;
* 1953년 대한민국으로부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lt;br /&gt;
&lt;br /&gt;
=='''평가'''==&lt;br /&gt;
&lt;br /&gt;
장제스에 대한 평가는 매우 복합적이다. 그는 중국의 근대화와 통일에 기여했지만, 동시에 독재적 통치와 부패로 인해 비판받았다. 현대 중국 역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긍정적 평가'''&amp;lt;/span&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amp;lt;중국의 근대화 추진, 항일전쟁 지도, 국가 통합 노력&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부정적 평가'''&amp;lt;/span&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amp;lt;정치적 독재, 부패한 통치, 공산당에 대한 극렬한 반대&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장제스의 유산은 현대 중국과 대만 관계에 여전히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lt;br /&gt;
&lt;br /&gt;
* 「장제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8255&lt;br /&gt;
* 이상철, 「 &amp;lt;蔣介石일기&amp;gt;에 나타난 한국독립운동 관계 사료」  『월간조선』, 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1011100055&lt;br /&gt;
[[분류:이민희]]&lt;/div&gt;</summary>
		<author><name>Matnyeom</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E%A5%EC%A0%9C%EC%8A%A4&amp;diff=52176</id>
		<title>장제스</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E%A5%EC%A0%9C%EC%8A%A4&amp;diff=52176"/>
		<updated>2024-12-20T10:40:0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Matnyeom: /* 1차 국공합작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lt;br /&gt;
&lt;br /&gt;
{{교육구국운동인물|인물명=장제스|사진=장제스.jpg|영문(한자)표기=Chiang Kai-shek(蔣介石)|호=-|출생=1887년 10월 31일|사망=1975년 4월 5일|묘소=타오위안시 다시구 츠후 능침|관련링크=https://www.khan.co.kr/article/202008042123005}}&lt;br /&gt;
&lt;br /&gt;
&lt;br /&gt;
장제스(蔣介石, 1887년 10월 31일 - 1975년 4월 5일)는 중화민국의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제2, 4대 총통 및 국부천대 이후 제1~5대 총통(1925년 ~ 1975년)을 역임하였다. 그는 20세기 중국의 근대화와 통일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국민당을 이끌고 공산당과의 내전, 일본과의 전쟁 등 격동의 시기를 겪었다. 장제스는 중국 국민당의 지도자이자 중화민국의 총통으로, 한국 독립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약력'''==&lt;br /&gt;
&lt;br /&gt;
* 1906.4. 바오딩군관학교 입교&lt;br /&gt;
* 1907. 일본육군사관학교 유학&lt;br /&gt;
* 1909.5. 일본육군사관학교 27기 졸업&lt;br /&gt;
* 1926.4. 제2대 국민정부 군사위원장 (1926.4.14.~1928.11.10.)&lt;br /&gt;
* 1926.4. 제2대 군사위원회 주석 (1926.4.16.~1927.3.10.)&lt;br /&gt;
* 1926.6. 국민혁명군 총사령관 (1926.6.5.~1927.4.1.)&lt;br /&gt;
* 1927.4. 국민혁명군 제1집단군 사령관 (1927.4.5.~1929.1.22.)&lt;br /&gt;
* 1928.2. 제4대 군사위원회 주석 (1928.2.7.~1928.11.7.)&lt;br /&gt;
* 1928.10. 제2대 국민정부 주석 (1928.10.10.~1931.12.15.)&lt;br /&gt;
* 1930.11. 제22대 국민정부 행정원장 (1930.11.18.~1931.12.15.)&lt;br /&gt;
* 1932.3. 초대 국민정부 군사위원장 (1932.3.6.~1946.5.15.)[6]&lt;br /&gt;
* 1935.12. 제22대 국민정부 행정원장 (2기, 1935.12.7.~1937.1.1.)&lt;br /&gt;
* 1938.4. 초대 중국국민당 총재 (1938.4.1.~1975.4.5.)&lt;br /&gt;
* 1939.12. 제22대 국민정부 행정원장 (3기, 1939.12.11.~1945.5.31.)&lt;br /&gt;
* 1941.12. 제12대 난징 국민정부 외교부장 (1941.12.27.~1942.10.20.)&lt;br /&gt;
* 1943.8. 제4대 국민정부 주석 (1943.8.1.~1948.5.20.)&lt;br /&gt;
* 1947.3. 국민정부 행정원장 대리 (1947.3.1.~1947.4.23.)&lt;br /&gt;
* 1948.5. 초대 중화민국 총통&lt;br /&gt;
* 1954.5. 제2대 중화민국 총통&lt;br /&gt;
* 1960.5. 제3대 중화민국 총통&lt;br /&gt;
* 1966.5. 제4대 중화민국 총통&lt;br /&gt;
* 1972.5. 제5대 중화민국 총통&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N-uppZwQdULXRRf-KblieKSgaWmKPogHElW87p7au4E&amp;amp;font=Default&amp;amp;lang=ko&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장제스는 국민당의 강력한 군사적 지도권을 가진 인물로서, 황포군관학교 교장을 맡음으로써 본격적으로 국민당 내에서 영향력을 키워왔다.&lt;br /&gt;
&lt;br /&gt;
===출생과 성장===&lt;br /&gt;
&lt;br /&gt;
장제스는 저장성 샤오싱현의 부유한 상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전통적인 유교 교육을 받았으며, 17세부터 근대식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1906년 베이징의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 교육을 받았고, 1907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유학길에 올랐다.&lt;br /&gt;
&lt;br /&gt;
&lt;br /&gt;
===1차 국공합작===&lt;br /&gt;
&lt;br /&gt;
제1차 국공합작은 1921년 중국 공산당이 창당된 이후, 코민테른이 국민당을 연합 전선의 대상으로 선정하면서 &amp;lt;font color=&amp;quot;red&amp;quot;&amp;gt;''손‧요페 선언''&amp;lt;/font&amp;gt;을 통해 수립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1923년, 장제스는 쑨원의 혁명 이념을 계승하며 국민당 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쑨원 사후 정치적 지도권을 가지고 있던 왕정위와 군사적 지도권을 가졌던 장개석이 연합하여 북벌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북경의 군벌 중심 정부를 타도하고 통일 정부를 수립하고자 북벌을 전개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새 정부의 위치를 두고 장제스와 반장제스파가 대립하였고, 결국 1927년 4월 12일, 4.12 정변이 발생하며 장제스가 상하이에서 대규모 공산당 숙청 작전을 실시하며 제1차 국공합작이 사실상 파기되었다.&lt;br /&gt;
&lt;br /&gt;
===2차 국공합작과 중일전쟁===&lt;br /&gt;
&lt;br /&gt;
제 2차 국공합작은 일본의 침략과 함께 이루어졌다.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하여 일본이 중국에 대한 침략 전쟁을 전개하면서 국민들의 반일감정이 높아지고, 국공합작을 통한 일치항일을 요구하였다. 따라서 8.1선언 등을 통해 중국 공산당이 내전 정지와 폭넓은 민족의 연합을 주장하는 등 국민당에 대한 항일운동이 확산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하지만, 장개석은 항일여론이 심화됨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을 토벌하는 데에 더 집중했다. 따라서, 서안사변을 통해 장개석을 체포, 구금하고 내전 정지 및 체포된 구국연합회의 석방을 요구하는 8개조 요구를 통해 제 2차 국공합작이 공식적으로 선언되었다. 하지만, 장개석은 국공합작 중에도 공산당의 세력 확장을 우려하여 환남사변 등을 일으켜 공산당 군과 지속적으로 충돌이 있었다.&lt;br /&gt;
&lt;br /&gt;
===국부천대와 대만===&lt;br /&gt;
&lt;br /&gt;
1949년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장제스는 약 200만 명의 국민당 군대와 지지자들과 함께 대만으로 퇴각했다. 대만에서 그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반공 독재 체제를 구축했으며, '백색테러'로 알려진 정치적 탄압을 자행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amp;lt;html&amp;g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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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html&amp;gt;&amp;lt;/div&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국공합작의 과정과 국공합작 이후의 국민당의 몰락과 장개석의 대만 퇴각은 이 영상에서 더 자세히 알아볼 수 있다.'' &amp;lt;/div&amp;gt;&lt;br /&gt;
&lt;br /&gt;
=='''한국과의 관계'''==&lt;br /&gt;
&lt;br /&gt;
장제스는 한국 독립운동에 상당한 관심과 지원을 보였다.&lt;br /&gt;
&lt;br /&gt;
* 1933년 중국육군군관학교 뤄양 분교에 한국인 특별반을 설치&lt;br /&gt;
*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동 시 지방 관리들에게 협조 지시&lt;br /&gt;
*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지지&lt;br /&gt;
* 1953년 대한민국으로부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lt;br /&gt;
&lt;br /&gt;
=='''평가'''==&lt;br /&gt;
&lt;br /&gt;
장제스에 대한 평가는 매우 복합적이다. 그는 중국의 근대화와 통일에 기여했지만, 동시에 독재적 통치와 부패로 인해 비판받았다. 현대 중국 역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긍정적 평가'''&amp;lt;/span&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amp;lt;중국의 근대화 추진, 항일전쟁 지도, 국가 통합 노력&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부정적 평가'''&amp;lt;/span&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amp;lt;정치적 독재, 부패한 통치, 공산당에 대한 극렬한 반대&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장제스의 유산은 현대 중국과 대만 관계에 여전히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lt;br /&gt;
&lt;br /&gt;
* 「장제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8255&lt;br /&gt;
* 이상철, 「 &amp;lt;蔣介石일기&amp;gt;에 나타난 한국독립운동 관계 사료」  『월간조선』, 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1011100055&lt;br /&gt;
[[분류:이민희]]&lt;/div&gt;</summary>
		<author><name>Matnyeom</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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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장제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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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12-20T10:39:3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Matnyeom: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lt;br /&gt;
&lt;br /&gt;
{{교육구국운동인물|인물명=장제스|사진=장제스.jpg|영문(한자)표기=Chiang Kai-shek(蔣介石)|호=-|출생=1887년 10월 31일|사망=1975년 4월 5일|묘소=타오위안시 다시구 츠후 능침|관련링크=https://www.khan.co.kr/article/202008042123005}}&lt;br /&gt;
&lt;br /&gt;
&lt;br /&gt;
장제스(蔣介石, 1887년 10월 31일 - 1975년 4월 5일)는 중화민국의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제2, 4대 총통 및 국부천대 이후 제1~5대 총통(1925년 ~ 1975년)을 역임하였다. 그는 20세기 중국의 근대화와 통일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국민당을 이끌고 공산당과의 내전, 일본과의 전쟁 등 격동의 시기를 겪었다. 장제스는 중국 국민당의 지도자이자 중화민국의 총통으로, 한국 독립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약력'''==&lt;br /&gt;
&lt;br /&gt;
* 1906.4. 바오딩군관학교 입교&lt;br /&gt;
* 1907. 일본육군사관학교 유학&lt;br /&gt;
* 1909.5. 일본육군사관학교 27기 졸업&lt;br /&gt;
* 1926.4. 제2대 국민정부 군사위원장 (1926.4.14.~1928.11.10.)&lt;br /&gt;
* 1926.4. 제2대 군사위원회 주석 (1926.4.16.~1927.3.10.)&lt;br /&gt;
* 1926.6. 국민혁명군 총사령관 (1926.6.5.~1927.4.1.)&lt;br /&gt;
* 1927.4. 국민혁명군 제1집단군 사령관 (1927.4.5.~1929.1.22.)&lt;br /&gt;
* 1928.2. 제4대 군사위원회 주석 (1928.2.7.~1928.11.7.)&lt;br /&gt;
* 1928.10. 제2대 국민정부 주석 (1928.10.10.~1931.12.15.)&lt;br /&gt;
* 1930.11. 제22대 국민정부 행정원장 (1930.11.18.~1931.12.15.)&lt;br /&gt;
* 1932.3. 초대 국민정부 군사위원장 (1932.3.6.~1946.5.15.)[6]&lt;br /&gt;
* 1935.12. 제22대 국민정부 행정원장 (2기, 1935.12.7.~1937.1.1.)&lt;br /&gt;
* 1938.4. 초대 중국국민당 총재 (1938.4.1.~1975.4.5.)&lt;br /&gt;
* 1939.12. 제22대 국민정부 행정원장 (3기, 1939.12.11.~1945.5.31.)&lt;br /&gt;
* 1941.12. 제12대 난징 국민정부 외교부장 (1941.12.27.~1942.10.20.)&lt;br /&gt;
* 1943.8. 제4대 국민정부 주석 (1943.8.1.~1948.5.20.)&lt;br /&gt;
* 1947.3. 국민정부 행정원장 대리 (1947.3.1.~1947.4.23.)&lt;br /&gt;
* 1948.5. 초대 중화민국 총통&lt;br /&gt;
* 1954.5. 제2대 중화민국 총통&lt;br /&gt;
* 1960.5. 제3대 중화민국 총통&lt;br /&gt;
* 1966.5. 제4대 중화민국 총통&lt;br /&gt;
* 1972.5. 제5대 중화민국 총통&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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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장제스는 국민당의 강력한 군사적 지도권을 가진 인물로서, 황포군관학교 교장을 맡음으로써 본격적으로 국민당 내에서 영향력을 키워왔다.&lt;br /&gt;
&lt;br /&gt;
===출생과 성장===&lt;br /&gt;
&lt;br /&gt;
장제스는 저장성 샤오싱현의 부유한 상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전통적인 유교 교육을 받았으며, 17세부터 근대식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1906년 베이징의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 교육을 받았고, 1907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유학길에 올랐다.&lt;br /&gt;
&lt;br /&gt;
&lt;br /&gt;
===1차 국공합작===&lt;br /&gt;
&lt;br /&gt;
제1차 국공합작은 1921년 중국 공산당이 창당된 이후, 코민테른이 국민당을 연합 전선의 대상으로 선정하면서 &amp;lt;font color=&amp;quot;#aee1e1&amp;quot;&amp;gt;''손‧요페 선언''&amp;lt;/font&amp;gt;을 통해 수립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1923년, 장제스는 쑨원의 혁명 이념을 계승하며 국민당 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쑨원 사후 정치적 지도권을 가지고 있던 왕정위와 군사적 지도권을 가졌던 장개석이 연합하여 북벌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북경의 군벌 중심 정부를 타도하고 통일 정부를 수립하고자 북벌을 전개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새 정부의 위치를 두고 장제스와 반장제스파가 대립하였고, 결국 1927년 4월 12일, 4.12 정변이 발생하며 장제스가 상하이에서 대규모 공산당 숙청 작전을 실시하며 제1차 국공합작이 사실상 파기되었다.&lt;br /&gt;
&lt;br /&gt;
===2차 국공합작과 중일전쟁===&lt;br /&gt;
&lt;br /&gt;
제 2차 국공합작은 일본의 침략과 함께 이루어졌다.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하여 일본이 중국에 대한 침략 전쟁을 전개하면서 국민들의 반일감정이 높아지고, 국공합작을 통한 일치항일을 요구하였다. 따라서 8.1선언 등을 통해 중국 공산당이 내전 정지와 폭넓은 민족의 연합을 주장하는 등 국민당에 대한 항일운동이 확산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하지만, 장개석은 항일여론이 심화됨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을 토벌하는 데에 더 집중했다. 따라서, 서안사변을 통해 장개석을 체포, 구금하고 내전 정지 및 체포된 구국연합회의 석방을 요구하는 8개조 요구를 통해 제 2차 국공합작이 공식적으로 선언되었다. 하지만, 장개석은 국공합작 중에도 공산당의 세력 확장을 우려하여 환남사변 등을 일으켜 공산당 군과 지속적으로 충돌이 있었다.&lt;br /&gt;
&lt;br /&gt;
===국부천대와 대만===&lt;br /&gt;
&lt;br /&gt;
1949년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장제스는 약 200만 명의 국민당 군대와 지지자들과 함께 대만으로 퇴각했다. 대만에서 그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반공 독재 체제를 구축했으며, '백색테러'로 알려진 정치적 탄압을 자행했다.&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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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한국과의 관계'''==&lt;br /&gt;
&lt;br /&gt;
장제스는 한국 독립운동에 상당한 관심과 지원을 보였다.&lt;br /&gt;
&lt;br /&gt;
* 1933년 중국육군군관학교 뤄양 분교에 한국인 특별반을 설치&lt;br /&gt;
*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동 시 지방 관리들에게 협조 지시&lt;br /&gt;
*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지지&lt;br /&gt;
* 1953년 대한민국으로부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lt;br /&gt;
&lt;br /&gt;
=='''평가'''==&lt;br /&gt;
&lt;br /&gt;
장제스에 대한 평가는 매우 복합적이다. 그는 중국의 근대화와 통일에 기여했지만, 동시에 독재적 통치와 부패로 인해 비판받았다. 현대 중국 역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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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br/&amp;gt;&lt;br /&gt;
&amp;lt;중국의 근대화 추진, 항일전쟁 지도, 국가 통합 노력&amp;gt;&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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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정치적 독재, 부패한 통치, 공산당에 대한 극렬한 반대&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장제스의 유산은 현대 중국과 대만 관계에 여전히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lt;br /&gt;
&lt;br /&gt;
* 「장제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8255&lt;br /&gt;
* 이상철, 「 &amp;lt;蔣介石일기&amp;gt;에 나타난 한국독립운동 관계 사료」  『월간조선』, 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1011100055&lt;br /&gt;
[[분류:이민희]]&lt;/div&gt;</summary>
		<author><name>Matnyeom</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E%A5%EC%A0%9C%EC%8A%A4&amp;diff=52174</id>
		<title>장제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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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12-20T10:38:4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Matnyeom: /* 1차 국공합작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lt;br /&gt;
&lt;br /&gt;
{{교육구국운동인물|인물명=장제스|사진=장제스.jpg|영문(한자)표기=Chiang Kai-shek(蔣介石)|호=-|출생=1887년 10월 31일|사망=1975년 4월 5일|묘소=타오위안시 다시구 츠후 능침|관련링크=https://www.khan.co.kr/article/202008042123005}}&lt;br /&gt;
&lt;br /&gt;
&lt;br /&gt;
장제스(蔣介石, 1887년 10월 31일 - 1975년 4월 5일)는 중화민국의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제2, 4대 총통 및 국부천대 이후 제1~5대 총통(1925년 ~ 1975년)을 역임하였다. 그는 20세기 중국의 근대화와 통일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국민당을 이끌고 공산당과의 내전, 일본과의 전쟁 등 격동의 시기를 겪었다. 장제스는 중국 국민당의 지도자이자 중화민국의 총통으로, 한국 독립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약력'''==&lt;br /&gt;
&lt;br /&gt;
* 1906.4. 바오딩군관학교 입교&lt;br /&gt;
* 1907. 일본육군사관학교 유학&lt;br /&gt;
* 1909.5. 일본육군사관학교 27기 졸업&lt;br /&gt;
* 1926.4. 제2대 국민정부 군사위원장 (1926.4.14.~1928.11.10.)&lt;br /&gt;
* 1926.4. 제2대 군사위원회 주석 (1926.4.16.~1927.3.10.)&lt;br /&gt;
* 1926.6. 국민혁명군 총사령관 (1926.6.5.~1927.4.1.)&lt;br /&gt;
* 1927.4. 국민혁명군 제1집단군 사령관 (1927.4.5.~1929.1.22.)&lt;br /&gt;
* 1928.2. 제4대 군사위원회 주석 (1928.2.7.~1928.11.7.)&lt;br /&gt;
* 1928.10. 제2대 국민정부 주석 (1928.10.10.~1931.12.15.)&lt;br /&gt;
* 1930.11. 제22대 국민정부 행정원장 (1930.11.18.~1931.12.15.)&lt;br /&gt;
* 1932.3. 초대 국민정부 군사위원장 (1932.3.6.~1946.5.15.)[6]&lt;br /&gt;
* 1935.12. 제22대 국민정부 행정원장 (2기, 1935.12.7.~1937.1.1.)&lt;br /&gt;
* 1938.4. 초대 중국국민당 총재 (1938.4.1.~1975.4.5.)&lt;br /&gt;
* 1939.12. 제22대 국민정부 행정원장 (3기, 1939.12.11.~1945.5.31.)&lt;br /&gt;
* 1941.12. 제12대 난징 국민정부 외교부장 (1941.12.27.~1942.10.20.)&lt;br /&gt;
* 1943.8. 제4대 국민정부 주석 (1943.8.1.~1948.5.20.)&lt;br /&gt;
* 1947.3. 국민정부 행정원장 대리 (1947.3.1.~1947.4.23.)&lt;br /&gt;
* 1948.5. 초대 중화민국 총통&lt;br /&gt;
* 1954.5. 제2대 중화민국 총통&lt;br /&gt;
* 1960.5. 제3대 중화민국 총통&lt;br /&gt;
* 1966.5. 제4대 중화민국 총통&lt;br /&gt;
* 1972.5. 제5대 중화민국 총통&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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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장제스는 국민당의 강력한 군사적 지도권을 가진 인물로서, 황포군관학교 교장을 맡음으로써 본격적으로 국민당 내에서 영향력을 키워왔다.&lt;br /&gt;
&lt;br /&gt;
===출생과 성장===&lt;br /&gt;
&lt;br /&gt;
장제스는 저장성 샤오싱현의 부유한 상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전통적인 유교 교육을 받았으며, 17세부터 근대식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1906년 베이징의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 교육을 받았고, 1907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유학길에 올랐다.&lt;br /&gt;
&lt;br /&gt;
&lt;br /&gt;
===1차 국공합작===&lt;br /&gt;
&lt;br /&gt;
제1차 국공합작은 1921년 중국 공산당이 창당된 이후, 코민테른이 국민당을 연합 전선의 대상으로 선정하면서 &amp;lt;font color=&amp;quot;컬러코드&amp;quot;&amp;gt;''손‧요페 선언''&amp;lt;/font&amp;gt;을 통해 수립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1923년, 장제스는 쑨원의 혁명 이념을 계승하며 국민당 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쑨원 사후 정치적 지도권을 가지고 있던 왕정위와 군사적 지도권을 가졌던 장개석이 연합하여 북벌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북경의 군벌 중심 정부를 타도하고 통일 정부를 수립하고자 북벌을 전개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새 정부의 위치를 두고 장제스와 반장제스파가 대립하였고, 결국 1927년 4월 12일, 4.12 정변이 발생하며 장제스가 상하이에서 대규모 공산당 숙청 작전을 실시하며 제1차 국공합작이 사실상 파기되었다.&lt;br /&gt;
&lt;br /&gt;
===2차 국공합작과 중일전쟁===&lt;br /&gt;
&lt;br /&gt;
제 2차 국공합작은 일본의 침략과 함께 이루어졌다.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하여 일본이 중국에 대한 침략 전쟁을 전개하면서 국민들의 반일감정이 높아지고, 국공합작을 통한 일치항일을 요구하였다. 따라서 8.1선언 등을 통해 중국 공산당이 내전 정지와 폭넓은 민족의 연합을 주장하는 등 국민당에 대한 항일운동이 확산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하지만, 장개석은 항일여론이 심화됨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을 토벌하는 데에 더 집중했다. 따라서, 서안사변을 통해 장개석을 체포, 구금하고 내전 정지 및 체포된 구국연합회의 석방을 요구하는 8개조 요구를 통해 제 2차 국공합작이 공식적으로 선언되었다. 하지만, 장개석은 국공합작 중에도 공산당의 세력 확장을 우려하여 환남사변 등을 일으켜 공산당 군과 지속적으로 충돌이 있었다.&lt;br /&gt;
&lt;br /&gt;
===국부천대와 대만===&lt;br /&gt;
&lt;br /&gt;
1949년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장제스는 약 200만 명의 국민당 군대와 지지자들과 함께 대만으로 퇴각했다. 대만에서 그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반공 독재 체제를 구축했으며, '백색테러'로 알려진 정치적 탄압을 자행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amp;lt;html&amp;g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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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html&amp;gt;&amp;lt;/div&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국공합작의 과정과 국공합작 이후의 국민당의 몰락과 장개석의 대만 퇴각은 이 영상에서 더 자세히 알아볼 수 있다.'' &amp;lt;/div&amp;gt;&lt;br /&gt;
&lt;br /&gt;
=='''한국과의 관계'''==&lt;br /&gt;
&lt;br /&gt;
장제스는 한국 독립운동에 상당한 관심과 지원을 보였다.&lt;br /&gt;
&lt;br /&gt;
* 1933년 중국육군군관학교 뤄양 분교에 한국인 특별반을 설치&lt;br /&gt;
*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동 시 지방 관리들에게 협조 지시&lt;br /&gt;
*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지지&lt;br /&gt;
* 1953년 대한민국으로부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lt;br /&gt;
&lt;br /&gt;
=='''평가'''==&lt;br /&gt;
&lt;br /&gt;
장제스에 대한 평가는 매우 복합적이다. 그는 중국의 근대화와 통일에 기여했지만, 동시에 독재적 통치와 부패로 인해 비판받았다. 현대 중국 역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긍정적 평가'''&amp;lt;/span&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amp;lt;중국의 근대화 추진, 항일전쟁 지도, 국가 통합 노력&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부정적 평가'''&amp;lt;/span&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amp;lt;정치적 독재, 부패한 통치, 공산당에 대한 극렬한 반대&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장제스의 유산은 현대 중국과 대만 관계에 여전히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lt;br /&gt;
&lt;br /&gt;
* 「장제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8255&lt;br /&gt;
* 이상철, 「 &amp;lt;蔣介石일기&amp;gt;에 나타난 한국독립운동 관계 사료」  『월간조선』, 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1011100055&lt;br /&gt;
[[분류:이민희]]&lt;/div&gt;</summary>
		<author><name>Matnyeom</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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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E%A5%EC%A0%9C%EC%8A%A4&amp;diff=52173</id>
		<title>장제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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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12-20T10:38:0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Matnyeom: /* 1차 국공합작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lt;br /&gt;
&lt;br /&gt;
{{교육구국운동인물|인물명=장제스|사진=장제스.jpg|영문(한자)표기=Chiang Kai-shek(蔣介石)|호=-|출생=1887년 10월 31일|사망=1975년 4월 5일|묘소=타오위안시 다시구 츠후 능침|관련링크=https://www.khan.co.kr/article/202008042123005}}&lt;br /&gt;
&lt;br /&gt;
&lt;br /&gt;
장제스(蔣介石, 1887년 10월 31일 - 1975년 4월 5일)는 중화민국의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제2, 4대 총통 및 국부천대 이후 제1~5대 총통(1925년 ~ 1975년)을 역임하였다. 그는 20세기 중국의 근대화와 통일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국민당을 이끌고 공산당과의 내전, 일본과의 전쟁 등 격동의 시기를 겪었다. 장제스는 중국 국민당의 지도자이자 중화민국의 총통으로, 한국 독립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약력'''==&lt;br /&gt;
&lt;br /&gt;
* 1906.4. 바오딩군관학교 입교&lt;br /&gt;
* 1907. 일본육군사관학교 유학&lt;br /&gt;
* 1909.5. 일본육군사관학교 27기 졸업&lt;br /&gt;
* 1926.4. 제2대 국민정부 군사위원장 (1926.4.14.~1928.11.10.)&lt;br /&gt;
* 1926.4. 제2대 군사위원회 주석 (1926.4.16.~1927.3.10.)&lt;br /&gt;
* 1926.6. 국민혁명군 총사령관 (1926.6.5.~1927.4.1.)&lt;br /&gt;
* 1927.4. 국민혁명군 제1집단군 사령관 (1927.4.5.~1929.1.22.)&lt;br /&gt;
* 1928.2. 제4대 군사위원회 주석 (1928.2.7.~1928.11.7.)&lt;br /&gt;
* 1928.10. 제2대 국민정부 주석 (1928.10.10.~1931.12.15.)&lt;br /&gt;
* 1930.11. 제22대 국민정부 행정원장 (1930.11.18.~1931.12.15.)&lt;br /&gt;
* 1932.3. 초대 국민정부 군사위원장 (1932.3.6.~1946.5.15.)[6]&lt;br /&gt;
* 1935.12. 제22대 국민정부 행정원장 (2기, 1935.12.7.~1937.1.1.)&lt;br /&gt;
* 1938.4. 초대 중국국민당 총재 (1938.4.1.~1975.4.5.)&lt;br /&gt;
* 1939.12. 제22대 국민정부 행정원장 (3기, 1939.12.11.~1945.5.31.)&lt;br /&gt;
* 1941.12. 제12대 난징 국민정부 외교부장 (1941.12.27.~1942.10.20.)&lt;br /&gt;
* 1943.8. 제4대 국민정부 주석 (1943.8.1.~1948.5.20.)&lt;br /&gt;
* 1947.3. 국민정부 행정원장 대리 (1947.3.1.~1947.4.23.)&lt;br /&gt;
* 1948.5. 초대 중화민국 총통&lt;br /&gt;
* 1954.5. 제2대 중화민국 총통&lt;br /&gt;
* 1960.5. 제3대 중화민국 총통&lt;br /&gt;
* 1966.5. 제4대 중화민국 총통&lt;br /&gt;
* 1972.5. 제5대 중화민국 총통&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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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장제스는 국민당의 강력한 군사적 지도권을 가진 인물로서, 황포군관학교 교장을 맡음으로써 본격적으로 국민당 내에서 영향력을 키워왔다.&lt;br /&gt;
&lt;br /&gt;
===출생과 성장===&lt;br /&gt;
&lt;br /&gt;
장제스는 저장성 샤오싱현의 부유한 상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전통적인 유교 교육을 받았으며, 17세부터 근대식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1906년 베이징의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 교육을 받았고, 1907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유학길에 올랐다.&lt;br /&gt;
&lt;br /&gt;
&lt;br /&gt;
===1차 국공합작===&lt;br /&gt;
&lt;br /&gt;
제1차 국공합작은 1921년 중국 공산당이 창당된 이후, 코민테른이 국민당을 연합 전선의 대상으로 선정하면서 ''손‧요페 선언''을 통해 수립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1923년, 장제스는 쑨원의 혁명 이념을 계승하며 국민당 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쑨원 사후 정치적 지도권을 가지고 있던 왕정위와 군사적 지도권을 가졌던 장개석이 연합하여 북벌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북경의 군벌 중심 정부를 타도하고 통일 정부를 수립하고자 북벌을 전개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새 정부의 위치를 두고 장제스와 반장제스파가 대립하였고, 결국 1927년 4월 12일, 4.12 정변이 발생하며 장제스가 상하이에서 대규모 공산당 숙청 작전을 실시하며 제1차 국공합작이 사실상 파기되었다.&lt;br /&gt;
&lt;br /&gt;
===2차 국공합작과 중일전쟁===&lt;br /&gt;
&lt;br /&gt;
제 2차 국공합작은 일본의 침략과 함께 이루어졌다.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하여 일본이 중국에 대한 침략 전쟁을 전개하면서 국민들의 반일감정이 높아지고, 국공합작을 통한 일치항일을 요구하였다. 따라서 8.1선언 등을 통해 중국 공산당이 내전 정지와 폭넓은 민족의 연합을 주장하는 등 국민당에 대한 항일운동이 확산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하지만, 장개석은 항일여론이 심화됨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을 토벌하는 데에 더 집중했다. 따라서, 서안사변을 통해 장개석을 체포, 구금하고 내전 정지 및 체포된 구국연합회의 석방을 요구하는 8개조 요구를 통해 제 2차 국공합작이 공식적으로 선언되었다. 하지만, 장개석은 국공합작 중에도 공산당의 세력 확장을 우려하여 환남사변 등을 일으켜 공산당 군과 지속적으로 충돌이 있었다.&lt;br /&gt;
&lt;br /&gt;
===국부천대와 대만===&lt;br /&gt;
&lt;br /&gt;
1949년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장제스는 약 200만 명의 국민당 군대와 지지자들과 함께 대만으로 퇴각했다. 대만에서 그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반공 독재 체제를 구축했으며, '백색테러'로 알려진 정치적 탄압을 자행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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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한국과의 관계'''==&lt;br /&gt;
&lt;br /&gt;
장제스는 한국 독립운동에 상당한 관심과 지원을 보였다.&lt;br /&gt;
&lt;br /&gt;
* 1933년 중국육군군관학교 뤄양 분교에 한국인 특별반을 설치&lt;br /&gt;
*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동 시 지방 관리들에게 협조 지시&lt;br /&gt;
*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지지&lt;br /&gt;
* 1953년 대한민국으로부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lt;br /&gt;
&lt;br /&gt;
=='''평가'''==&lt;br /&gt;
&lt;br /&gt;
장제스에 대한 평가는 매우 복합적이다. 그는 중국의 근대화와 통일에 기여했지만, 동시에 독재적 통치와 부패로 인해 비판받았다. 현대 중국 역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긍정적 평가'''&amp;lt;/span&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amp;lt;중국의 근대화 추진, 항일전쟁 지도, 국가 통합 노력&amp;gt;&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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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부정적 평가'''&amp;lt;/span&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amp;lt;정치적 독재, 부패한 통치, 공산당에 대한 극렬한 반대&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장제스의 유산은 현대 중국과 대만 관계에 여전히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lt;br /&gt;
&lt;br /&gt;
* 「장제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8255&lt;br /&gt;
* 이상철, 「 &amp;lt;蔣介石일기&amp;gt;에 나타난 한국독립운동 관계 사료」  『월간조선』, 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1011100055&lt;br /&gt;
[[분류:이민희]]&lt;/div&gt;</summary>
		<author><name>Matnyeom</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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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장제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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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12-20T10:36:5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Matnyeom: /* 국부천대와 대만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lt;br /&gt;
&lt;br /&gt;
{{교육구국운동인물|인물명=장제스|사진=장제스.jpg|영문(한자)표기=Chiang Kai-shek(蔣介石)|호=-|출생=1887년 10월 31일|사망=1975년 4월 5일|묘소=타오위안시 다시구 츠후 능침|관련링크=https://www.khan.co.kr/article/202008042123005}}&lt;br /&gt;
&lt;br /&gt;
&lt;br /&gt;
장제스(蔣介石, 1887년 10월 31일 - 1975년 4월 5일)는 중화민국의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제2, 4대 총통 및 국부천대 이후 제1~5대 총통(1925년 ~ 1975년)을 역임하였다. 그는 20세기 중국의 근대화와 통일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국민당을 이끌고 공산당과의 내전, 일본과의 전쟁 등 격동의 시기를 겪었다. 장제스는 중국 국민당의 지도자이자 중화민국의 총통으로, 한국 독립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약력'''==&lt;br /&gt;
&lt;br /&gt;
* 1906.4. 바오딩군관학교 입교&lt;br /&gt;
* 1907. 일본육군사관학교 유학&lt;br /&gt;
* 1909.5. 일본육군사관학교 27기 졸업&lt;br /&gt;
* 1926.4. 제2대 국민정부 군사위원장 (1926.4.14.~1928.11.10.)&lt;br /&gt;
* 1926.4. 제2대 군사위원회 주석 (1926.4.16.~1927.3.10.)&lt;br /&gt;
* 1926.6. 국민혁명군 총사령관 (1926.6.5.~1927.4.1.)&lt;br /&gt;
* 1927.4. 국민혁명군 제1집단군 사령관 (1927.4.5.~1929.1.22.)&lt;br /&gt;
* 1928.2. 제4대 군사위원회 주석 (1928.2.7.~1928.11.7.)&lt;br /&gt;
* 1928.10. 제2대 국민정부 주석 (1928.10.10.~1931.12.15.)&lt;br /&gt;
* 1930.11. 제22대 국민정부 행정원장 (1930.11.18.~1931.12.15.)&lt;br /&gt;
* 1932.3. 초대 국민정부 군사위원장 (1932.3.6.~1946.5.15.)[6]&lt;br /&gt;
* 1935.12. 제22대 국민정부 행정원장 (2기, 1935.12.7.~1937.1.1.)&lt;br /&gt;
* 1938.4. 초대 중국국민당 총재 (1938.4.1.~1975.4.5.)&lt;br /&gt;
* 1939.12. 제22대 국민정부 행정원장 (3기, 1939.12.11.~1945.5.31.)&lt;br /&gt;
* 1941.12. 제12대 난징 국민정부 외교부장 (1941.12.27.~1942.10.20.)&lt;br /&gt;
* 1943.8. 제4대 국민정부 주석 (1943.8.1.~1948.5.20.)&lt;br /&gt;
* 1947.3. 국민정부 행정원장 대리 (1947.3.1.~1947.4.23.)&lt;br /&gt;
* 1948.5. 초대 중화민국 총통&lt;br /&gt;
* 1954.5. 제2대 중화민국 총통&lt;br /&gt;
* 1960.5. 제3대 중화민국 총통&lt;br /&gt;
* 1966.5. 제4대 중화민국 총통&lt;br /&gt;
* 1972.5. 제5대 중화민국 총통&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N-uppZwQdULXRRf-KblieKSgaWmKPogHElW87p7au4E&amp;amp;font=Default&amp;amp;lang=ko&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장제스는 국민당의 강력한 군사적 지도권을 가진 인물로서, 황포군관학교 교장을 맡음으로써 본격적으로 국민당 내에서 영향력을 키워왔다.&lt;br /&gt;
&lt;br /&gt;
===출생과 성장===&lt;br /&gt;
&lt;br /&gt;
장제스는 저장성 샤오싱현의 부유한 상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전통적인 유교 교육을 받았으며, 17세부터 근대식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1906년 베이징의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 교육을 받았고, 1907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유학길에 올랐다.&lt;br /&gt;
&lt;br /&gt;
&lt;br /&gt;
===1차 국공합작===&lt;br /&gt;
&lt;br /&gt;
제1차 국공합작은 1921년 중국 공산당이 창당된 이후, 코민테른이 국민당을 연합 전선의 대상으로 선정하면서 손‧요페 선언을 통해 수립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1923년, 장제스는 쑨원의 혁명 이념을 계승하며 국민당 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쑨원 사후 정치적 지도권을 가지고 있던 왕정위와 군사적 지도권을 가졌던 장개석이 연합하여 북벌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북경의 군벌 중심 정부를 타도하고 통일 정부를 수립하고자 북벌을 전개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새 정부의 위치를 두고 장제스와 반장제스파가 대립하였고, 결국 1927년 4월 12일, 4.12 정변이 발생하며 장제스가 상하이에서 대규모 공산당 숙청 작전을 실시하며 제1차 국공합작이 사실상 파기되었다.&lt;br /&gt;
&lt;br /&gt;
===2차 국공합작과 중일전쟁===&lt;br /&gt;
&lt;br /&gt;
제 2차 국공합작은 일본의 침략과 함께 이루어졌다.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하여 일본이 중국에 대한 침략 전쟁을 전개하면서 국민들의 반일감정이 높아지고, 국공합작을 통한 일치항일을 요구하였다. 따라서 8.1선언 등을 통해 중국 공산당이 내전 정지와 폭넓은 민족의 연합을 주장하는 등 국민당에 대한 항일운동이 확산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하지만, 장개석은 항일여론이 심화됨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을 토벌하는 데에 더 집중했다. 따라서, 서안사변을 통해 장개석을 체포, 구금하고 내전 정지 및 체포된 구국연합회의 석방을 요구하는 8개조 요구를 통해 제 2차 국공합작이 공식적으로 선언되었다. 하지만, 장개석은 국공합작 중에도 공산당의 세력 확장을 우려하여 환남사변 등을 일으켜 공산당 군과 지속적으로 충돌이 있었다.&lt;br /&gt;
&lt;br /&gt;
===국부천대와 대만===&lt;br /&gt;
&lt;br /&gt;
1949년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장제스는 약 200만 명의 국민당 군대와 지지자들과 함께 대만으로 퇴각했다. 대만에서 그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반공 독재 체제를 구축했으며, '백색테러'로 알려진 정치적 탄압을 자행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U6tB_Wggs3M?si=GvAaVvrOw0LtIFwc&amp;quot; title=&amp;quot;YouTube video player&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amp;lt;/div&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국공합작의 과정과 국공합작 이후의 국민당의 몰락과 장개석의 대만 퇴각은 이 영상에서 더 자세히 알아볼 수 있다.'' &amp;lt;/div&amp;gt;&lt;br /&gt;
&lt;br /&gt;
=='''한국과의 관계'''==&lt;br /&gt;
&lt;br /&gt;
장제스는 한국 독립운동에 상당한 관심과 지원을 보였다.&lt;br /&gt;
&lt;br /&gt;
* 1933년 중국육군군관학교 뤄양 분교에 한국인 특별반을 설치&lt;br /&gt;
*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동 시 지방 관리들에게 협조 지시&lt;br /&gt;
*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지지&lt;br /&gt;
* 1953년 대한민국으로부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lt;br /&gt;
&lt;br /&gt;
=='''평가'''==&lt;br /&gt;
&lt;br /&gt;
장제스에 대한 평가는 매우 복합적이다. 그는 중국의 근대화와 통일에 기여했지만, 동시에 독재적 통치와 부패로 인해 비판받았다. 현대 중국 역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긍정적 평가'''&amp;lt;/span&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amp;lt;중국의 근대화 추진, 항일전쟁 지도, 국가 통합 노력&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부정적 평가'''&amp;lt;/span&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amp;lt;정치적 독재, 부패한 통치, 공산당에 대한 극렬한 반대&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장제스의 유산은 현대 중국과 대만 관계에 여전히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lt;br /&gt;
&lt;br /&gt;
* 「장제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8255&lt;br /&gt;
* 이상철, 「 &amp;lt;蔣介石일기&amp;gt;에 나타난 한국독립운동 관계 사료」  『월간조선』, 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1011100055&lt;br /&gt;
[[분류:이민희]]&lt;/div&gt;</summary>
		<author><name>Matnyeom</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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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A1%B0%EC%84%A0%ED%98%81%EB%AA%85%EA%B0%84%EB%B6%80%ED%95%99%EA%B5%90&amp;diff=52171</id>
		<title>조선혁명간부학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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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12-20T10:34:3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Matnyeom: /* 의의 */&lt;/p&gt;
&lt;hr /&gt;
&lt;div&gt;&amp;lt;onlyinclude&amp;gt;&lt;br /&gt;
=='''개요'''==&lt;br /&gt;
{{교육구국운동기관&lt;br /&gt;
|기관명=조선혁명간부학교&lt;br /&gt;
|사진=조선혁명간부학교.jpg&lt;br /&gt;
|한자표기=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lt;br /&gt;
|설립일=1932년&lt;br /&gt;
|설립자=김원봉(金元鳳)&lt;br /&gt;
|설립위치=중국 난징(南京) 교외 선사묘(善祠廟)&lt;br /&gt;
|계승=민족혁명당 군사부 훈련반 &lt;br /&gt;
|관련링크=http://www.miryang815.or.kr/bbs/board.php?bo_table=data&amp;amp;wr_id=10&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혁명간부학교(朝鮮革命幹部學校)'''는 1932년 의열단(義烈團) 단장 김원봉(金元鳳)이 중국의 [[장제스]](蔣介石)의 지원으로 독립운동 군사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중국의 난징(南京)에 설립한 군사간부양성학교이다. 1932년 개교 이래 1935년 9월 폐교까지 1기생 26명, 2기생 55명, 3기생 44명 등 총 125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lt;br /&gt;
&lt;br /&gt;
== '''설립''' ==&lt;br /&gt;
&lt;br /&gt;
1932년 단장 김원봉에 의해 중국의 난징에 설립되어, 당해 10월부터 1935년 9월에 이르는 3년여 동안 청년 투사를 양성했다. &lt;br /&gt;
&lt;br /&gt;
=== '''주요 인물과 활동'''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lt;br /&gt;
! 인물 !! 역할 및 기여&lt;br /&gt;
|-&lt;br /&gt;
|김원봉|| 단장, 조선혁명간부학교 설립 &lt;br /&gt;
|-&lt;br /&gt;
|신악|| 조선혁명간부학교 교육 주임, 군사 훈련 담당, 의열단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추후 조선의용대 부대장, 한국광복군 중교 등을 역임 &lt;br /&gt;
|-&lt;br /&gt;
|김세광|| 조선혁명간부학교 교관, 1933년 9월∼1934년 4월에 조선혁명간부학교 제2기 과정 교육을 담당하였으며 조선민족혁명당 중앙군사학 편찬위원으로 군사학 편찬에 종사&lt;br /&gt;
|-&lt;br /&gt;
|왕통 || 조선혁명간부학교 입학, 졸업 후 조선의용대 정치지도원, 조선민족혁명당 중앙위원,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 한국광복군 지대장으로 활동&lt;br /&gt;
|}&lt;br /&gt;
&lt;br /&gt;
== '''배경''' ==&lt;br /&gt;
독립운동이 실질적인 항일 투쟁의 형태로 진행되기 위해서 한인 청년들이 군벌 산하의 군사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고자 노력했다. &amp;lt;ref&amp;gt; 신규식이나 여운형은 중국의 우페이푸(吳佩孚) 등이 지휘하는 군벌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우페이푸는 친한파 군벌 중 하나로서, 중국군이 한국을 거쳐 일본에 진공해야 함을 주장했는데, 이러한 측면에서 여운형 등이 활동했던 한국노병회와 뜻이 맞아 교섭하였다. &amp;lt;/ref&amp;gt; 하지만, 명확한 결과가 나오지 못했다. 임시정부가 군사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상하이에 세웠던 육군무관학교는 6개월간의 초급장교 양성과정에서 1920년 상반기 19명, 하반기 24명 배출을 끝으로 안타깝게 폐교했고,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은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비행사양성소를 설립했으나 이 역시 비행대 편성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lt;br /&gt;
&lt;br /&gt;
이렇게 무장 투쟁을 위한 시도가 무산되자, 1919년 조직된 무장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은 중국국민당과의 합작을 통해 돌파구를 마련하고자했다. 또한, 단원 상당수가 국민당과 함께 북벌에 참가했기 때문에 국민당 입장에서도 김원봉과 의열단을 지원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lt;br /&gt;
&lt;br /&gt;
== '''특징''' ==&lt;br /&gt;
&lt;br /&gt;
조선혁명간부학교가 운영되는 3년 동안, 중국 국민당은 매월 경상비 2,000~3,000원, 수시 필요경비 1,000~1만 원, 기타 운영비 400~1,000원 등 각종 운영자금 전액과 화기·탄약·피복 등을 지원했다. 학생들은 군사학뿐 아니라 별도 신설된 정치학, 자연과학을 포함해 경제학·사회학·철학·혁명학·물리학·화학·지리학까지 다양한 학문을 공부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 '''의의''' ==&lt;br /&gt;
&lt;br /&gt;
조선혁명간부학교는 일제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하여 의열단과 중국 정부 사이에 형성된 한중연합의 결실이었다. 의열단은 중국 정부와 연대를 항일투쟁의 침체국면을 탈피할 수 있는 계기로 인식하였다. 따라서 의열단의 간부학교 운영은 국제적 연대 측면과 의열단 활동의 활성화라는 양면성을 가졌다. &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혁명간부학교의 교장인 김원봉은 개교사에서 간부학교의 설립 취지가 의열단의 항일 투쟁 정신을 계승하는 데 있음을 전제하고, 교육 목적은 군사학과 무기 사용법 등 군사 지식을 익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조선혁명간부학교의 교육 목표는 일본과의 총결전에서 투쟁의 주체가 될 조직을 구축하기 위한 선행 단계로서, 대중역량의 조직화와 체계화를 선도할 중견 간부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즉, 국지적·부분적 단계의 항일 투쟁 국면을 대중 투쟁의 단계로 발전시키는 방안이었음을 알 수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 '''졸업생들의 활동''' ===&lt;br /&gt;
&lt;br /&gt;
간부학교 졸업생들은 민족혁명당의 항일투쟁체계로 편입되어 항일 투쟁을 이어나갔다. 일부는 [[조선의용대]]의 핵심 세력으로 성장하였고, 다른 일부는 [[한국광복군]]의 주요 무장 인력이 되기도 했다. 또한, [[조선의용대]]의 일원으로서 화북 지역으로 이동하여 화북조선동맹과 조선의용군에 가담하였다.&lt;br /&gt;
&lt;br /&gt;
== 참고 자료 ==&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혁명간부학교 (朝鮮革命幹部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2266 (검색일: 2024년 11월 30일).&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김세광 (金世光)」,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3831 (검색일: 2024년 12월 2일).&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신악 (申岳)」,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3817 (검색일: 2024년 12월 2일).&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왕통 (王通)」,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3818 (검색일: 2024년 12월 2일).&lt;br /&gt;
* 김광재,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의 결성과 활동」,  『독립기념관』, https://www.i815.or.kr/upload/kr/magazine/magazine/83/post-919.html (검색일: 2024년 12월 2일)&lt;br /&gt;
* 심용환, 「교육, 어둠을 밝힌 등불이 되다」,  『독립기념관』, https://www.i815.or.kr/upload/kr/magazine/magazine/4/post-38.html (검색일: 2024년 12월 2일)&lt;br /&gt;
* 밀양독립운동기념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밀양독립운동기념관』, http://www.miryang815.or.kr/bbs/board.php?bo_table=data&amp;amp;wr_id=10 (검색일: 2024년 12월 2일)&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lt;br /&gt;
&amp;lt;/onlyinclude&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이민희]]&lt;/div&gt;</summary>
		<author><name>Matnyeom</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A1%B0%EC%84%A0%ED%98%81%EB%AA%85%EA%B0%84%EB%B6%80%ED%95%99%EA%B5%90&amp;diff=52170</id>
		<title>조선혁명간부학교</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A1%B0%EC%84%A0%ED%98%81%EB%AA%85%EA%B0%84%EB%B6%80%ED%95%99%EA%B5%90&amp;diff=52170"/>
		<updated>2024-12-20T10:33:4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Matnyeom: /* 의의 */&lt;/p&gt;
&lt;hr /&gt;
&lt;div&gt;&amp;lt;onlyinclude&amp;gt;&lt;br /&gt;
=='''개요'''==&lt;br /&gt;
{{교육구국운동기관&lt;br /&gt;
|기관명=조선혁명간부학교&lt;br /&gt;
|사진=조선혁명간부학교.jpg&lt;br /&gt;
|한자표기=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lt;br /&gt;
|설립일=1932년&lt;br /&gt;
|설립자=김원봉(金元鳳)&lt;br /&gt;
|설립위치=중국 난징(南京) 교외 선사묘(善祠廟)&lt;br /&gt;
|계승=민족혁명당 군사부 훈련반 &lt;br /&gt;
|관련링크=http://www.miryang815.or.kr/bbs/board.php?bo_table=data&amp;amp;wr_id=10&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혁명간부학교(朝鮮革命幹部學校)'''는 1932년 의열단(義烈團) 단장 김원봉(金元鳳)이 중국의 [[장제스]](蔣介石)의 지원으로 독립운동 군사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중국의 난징(南京)에 설립한 군사간부양성학교이다. 1932년 개교 이래 1935년 9월 폐교까지 1기생 26명, 2기생 55명, 3기생 44명 등 총 125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lt;br /&gt;
&lt;br /&gt;
== '''설립''' ==&lt;br /&gt;
&lt;br /&gt;
1932년 단장 김원봉에 의해 중국의 난징에 설립되어, 당해 10월부터 1935년 9월에 이르는 3년여 동안 청년 투사를 양성했다. &lt;br /&gt;
&lt;br /&gt;
=== '''주요 인물과 활동'''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lt;br /&gt;
! 인물 !! 역할 및 기여&lt;br /&gt;
|-&lt;br /&gt;
|김원봉|| 단장, 조선혁명간부학교 설립 &lt;br /&gt;
|-&lt;br /&gt;
|신악|| 조선혁명간부학교 교육 주임, 군사 훈련 담당, 의열단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추후 조선의용대 부대장, 한국광복군 중교 등을 역임 &lt;br /&gt;
|-&lt;br /&gt;
|김세광|| 조선혁명간부학교 교관, 1933년 9월∼1934년 4월에 조선혁명간부학교 제2기 과정 교육을 담당하였으며 조선민족혁명당 중앙군사학 편찬위원으로 군사학 편찬에 종사&lt;br /&gt;
|-&lt;br /&gt;
|왕통 || 조선혁명간부학교 입학, 졸업 후 조선의용대 정치지도원, 조선민족혁명당 중앙위원,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 한국광복군 지대장으로 활동&lt;br /&gt;
|}&lt;br /&gt;
&lt;br /&gt;
== '''배경''' ==&lt;br /&gt;
독립운동이 실질적인 항일 투쟁의 형태로 진행되기 위해서 한인 청년들이 군벌 산하의 군사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고자 노력했다. &amp;lt;ref&amp;gt; 신규식이나 여운형은 중국의 우페이푸(吳佩孚) 등이 지휘하는 군벌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우페이푸는 친한파 군벌 중 하나로서, 중국군이 한국을 거쳐 일본에 진공해야 함을 주장했는데, 이러한 측면에서 여운형 등이 활동했던 한국노병회와 뜻이 맞아 교섭하였다. &amp;lt;/ref&amp;gt; 하지만, 명확한 결과가 나오지 못했다. 임시정부가 군사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상하이에 세웠던 육군무관학교는 6개월간의 초급장교 양성과정에서 1920년 상반기 19명, 하반기 24명 배출을 끝으로 안타깝게 폐교했고,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은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비행사양성소를 설립했으나 이 역시 비행대 편성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lt;br /&gt;
&lt;br /&gt;
이렇게 무장 투쟁을 위한 시도가 무산되자, 1919년 조직된 무장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은 중국국민당과의 합작을 통해 돌파구를 마련하고자했다. 또한, 단원 상당수가 국민당과 함께 북벌에 참가했기 때문에 국민당 입장에서도 김원봉과 의열단을 지원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lt;br /&gt;
&lt;br /&gt;
== '''특징''' ==&lt;br /&gt;
&lt;br /&gt;
조선혁명간부학교가 운영되는 3년 동안, 중국 국민당은 매월 경상비 2,000~3,000원, 수시 필요경비 1,000~1만 원, 기타 운영비 400~1,000원 등 각종 운영자금 전액과 화기·탄약·피복 등을 지원했다. 학생들은 군사학뿐 아니라 별도 신설된 정치학, 자연과학을 포함해 경제학·사회학·철학·혁명학·물리학·화학·지리학까지 다양한 학문을 공부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 '''의의''' ==&lt;br /&gt;
&lt;br /&gt;
조선혁명간부학교는 일제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하여 의열단과 중국 정부 사이에 형성된 한중연합의 결실이었다. 의열단은 중국 정부와 연대를 항일투쟁의 침체국면을 탈피할 수 있는 계기로 인식하였다. 따라서 의열단의 간부학교 운영은 국제적 연대 측면과 의열단 활동의 활성화라는 양면성을 가졌다. &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혁명간부학교의 교장인 김원봉은 개교사에서 간부학교의 설립 취지가 의열단의 항일 투쟁 정신을 계승하는 데 있음을 전제하고, 교육 목적은 군사학과 무기 사용법 등 군사 지식을 익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조선혁명간부학교의 교육 목표는 일본과의 총결전에서 투쟁의 주체가 될 조직을 구축하기 위한 선행 단계로서, 대중역량의 조직화와 체계화를 선도할 중견 간부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즉, 국지적·부분적 단계의 항일 투쟁 국면을 대중 투쟁의 단계로 발전시키는 방안이었음을 알 수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 '''졸업생들의 활동''' ===&lt;br /&gt;
&lt;br /&gt;
간부학교 졸업생들은 민족혁명당의 항일투쟁체계로 편입되어 항일 투쟁을 이어나갔다. 일부는 [[조선의용대]]의 핵심 세력으로 성장하였고, 다른 일부는 [[한국광복군]]의 주요 무장 인력이 되기도 했다. 또한, [[조선의용대]]의 일원으로서 화북 지역으로 이동하여 화북조선동맹과 조선의용군에 가담하였다.&lt;br /&gt;
&lt;br /&gt;
== 참고 자료 ==&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혁명간부학교 (朝鮮革命幹部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2266 (검색일: 2024년 11월 30일).&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김세광 (金世光)」,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3831 (검색일: 2024년 12월 2일).&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신악 (申岳)」,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3817 (검색일: 2024년 12월 2일).&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왕통 (王通)」,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3818 (검색일: 2024년 12월 2일).&lt;br /&gt;
* 김광재,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의 결성과 활동」,  『독립기념관』, https://www.i815.or.kr/upload/kr/magazine/magazine/83/post-919.html (검색일: 2024년 12월 2일)&lt;br /&gt;
* 심용환, 「교육, 어둠을 밝힌 등불이 되다」,  『독립기념관』, https://www.i815.or.kr/upload/kr/magazine/magazine/4/post-38.html (검색일: 2024년 12월 2일)&lt;br /&gt;
* 밀양독립운동기념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밀양독립운동기념관』, http://www.miryang815.or.kr/bbs/board.php?bo_table=data&amp;amp;wr_id=10 (검색일: 2024년 12월 2일)&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lt;br /&gt;
&amp;lt;/onlyinclude&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이민희]]&lt;/div&gt;</summary>
		<author><name>Matnyeom</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91%94%EC%A0%84%EB%B3%91%EC%A0%9C&amp;diff=51742</id>
		<title>둔전병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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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12-19T14:15:0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Matnyeom: /* 출처 */&lt;/p&gt;
&lt;hr /&gt;
&lt;div&gt;=='''정의'''==&lt;br /&gt;
&lt;br /&gt;
둔전병제(屯田兵制)는 평시에는 토지를 경작하고 전시에는 전투원으로 동원되는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군사-농업 복합 제도''''&amp;lt;/span&amp;gt;이다.&lt;br /&gt;
&lt;br /&gt;
=='''역사적 배경'''==&lt;br /&gt;
&lt;br /&gt;
둔전병제의 기원은 중국에서 시작되었으며, 서양에서는 비잔티움 제국에서 가장 유명하게 실시되었다.&lt;br /&gt;
&lt;br /&gt;
=='''주요 특징'''==&lt;br /&gt;
&lt;br /&gt;
* 군인에게 토지 제공&lt;br /&gt;
* 평시 농사, 전시 전투 참여&lt;br /&gt;
* 자급자족 체제 구축&lt;br /&gt;
* 국가의 군사비 절감&lt;br /&gt;
&lt;br /&gt;
=='''동서양의 차이점'''==&lt;br /&gt;
&lt;br /&gt;
* 동양(중국): 주로 식량 확보가 목적&lt;br /&gt;
* 서양(비잔티움): 충성심 있는 국내 군대 확보가 목적&lt;br /&gt;
&lt;br /&gt;
=='''한국 독립운동에서의 적용'''==&lt;br /&gt;
&lt;br /&gt;
한인소년병학교와 대조선국민군단에서 둔전병제를 적용하여 운영했다.&lt;br /&gt;
&lt;br /&gt;
* 한인소년병학교: 1909년 미국 네브래스카주에서 설립, 학업과 군사훈련 병행&lt;br /&gt;
* 대조선국민군단: 하와이에서 설립, 농장 노동, 군사훈련, 학습을 병행&lt;br /&gt;
&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독립운동 과정에서 군사훈련과 경제적 자립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는 효과적인 시스템으로 활용되었다.&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 낮달, 「이승만과 결별 후 연구조차 금기시돼온 독립운동가」,  『직썰』, 2018.10.17, https://www.ziksir.com/news/articleView.html?idxno=7221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노세극, 「[독립운동가 열전 삶과 넋 92] 무장 독립투쟁의 거목, 우성 박용만」, 『노동과 세계』, 2021.01.18, https://www.labor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0893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이민희]]&lt;/div&gt;</summary>
		<author><name>Matnyeom</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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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장제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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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12-19T14:13:0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Matnyeom: /* 출처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lt;br /&gt;
&lt;br /&gt;
{{교육구국운동인물|인물명=장제스|사진=장제스.jpg|영문표기(한자표기)=Chiang Kai-shek(蔣介石)|호=-|출생=1887년 10월 31일|사망=1975년 4월 5일|묘소=타오위안시 다시구 츠후 능침|관련링크=https://www.khan.co.kr/article/202008042123005}}&lt;br /&gt;
&lt;br /&gt;
&lt;br /&gt;
장제스(蔣介石, 1887년 10월 31일 - 1975년 4월 5일)는 중화민국의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제2, 4대 총통 및 국부천대 이후 제1~5대 총통(1925년 ~ 1975년)을 역임하였다. 그는 20세기 중국의 근대화와 통일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국민당을 이끌고 공산당과의 내전, 일본과의 전쟁 등 격동의 시기를 겪었다. 장제스는 중국 국민당의 지도자이자 중화민국의 총통으로, 한국 독립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약력'''==&lt;br /&gt;
&lt;br /&gt;
* 1906.4. 바오딩군관학교 입교&lt;br /&gt;
* 1907. 일본육군사관학교 유학&lt;br /&gt;
* 1909.5. 일본육군사관학교 27기 졸업&lt;br /&gt;
* 1926.4. 제2대 국민정부 군사위원장 (1926.4.14.~1928.11.10.)&lt;br /&gt;
* 1926.4. 제2대 군사위원회 주석 (1926.4.16.~1927.3.10.)&lt;br /&gt;
* 1926.6. 국민혁명군 총사령관 (1926.6.5.~1927.4.1.)&lt;br /&gt;
* 1927.4. 국민혁명군 제1집단군 사령관 (1927.4.5.~1929.1.22.)&lt;br /&gt;
* 1928.2. 제4대 군사위원회 주석 (1928.2.7.~1928.11.7.)&lt;br /&gt;
* 1928.10. 제2대 국민정부 주석 (1928.10.10.~1931.12.15.)&lt;br /&gt;
* 1930.11. 제22대 국민정부 행정원장 (1930.11.18.~1931.12.15.)&lt;br /&gt;
* 1932.3. 초대 국민정부 군사위원장 (1932.3.6.~1946.5.15.)[6]&lt;br /&gt;
* 1935.12. 제22대 국민정부 행정원장 (2기, 1935.12.7.~1937.1.1.)&lt;br /&gt;
* 1938.4. 초대 중국국민당 총재 (1938.4.1.~1975.4.5.)&lt;br /&gt;
* 1939.12. 제22대 국민정부 행정원장 (3기, 1939.12.11.~1945.5.31.)&lt;br /&gt;
* 1941.12. 제12대 난징 국민정부 외교부장 (1941.12.27.~1942.10.20.)&lt;br /&gt;
* 1943.8. 제4대 국민정부 주석 (1943.8.1.~1948.5.20.)&lt;br /&gt;
* 1947.3. 국민정부 행정원장 대리 (1947.3.1.~1947.4.23.)&lt;br /&gt;
* 1948.5. 초대 중화민국 총통&lt;br /&gt;
* 1954.5. 제2대 중화민국 총통&lt;br /&gt;
* 1960.5. 제3대 중화민국 총통&lt;br /&gt;
* 1966.5. 제4대 중화민국 총통&lt;br /&gt;
* 1972.5. 제5대 중화민국 총통&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N-uppZwQdULXRRf-KblieKSgaWmKPogHElW87p7au4E&amp;amp;font=Default&amp;amp;lang=ko&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장제스는 국민당의 강력한 군사적 지도권을 가진 인물로서, 황포군관학교 교장을 맡음으로써 본격적으로 국민당 내에서 영향력을 키워왔다.&lt;br /&gt;
&lt;br /&gt;
===출생과 성장===&lt;br /&gt;
&lt;br /&gt;
장제스는 저장성 샤오싱현의 부유한 상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전통적인 유교 교육을 받았으며, 17세부터 근대식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1906년 베이징의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 교육을 받았고, 1907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유학길에 올랐다.&lt;br /&gt;
&lt;br /&gt;
&lt;br /&gt;
===1차 국공합작===&lt;br /&gt;
&lt;br /&gt;
제1차 국공합작은 1921년 중국 공산당이 창당된 이후, 코민테른이 국민당을 연합 전선의 대상으로 선정하면서 손‧요페 선언을 통해 수립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1923년, 장제스는 쑨원의 혁명 이념을 계승하며 국민당 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쑨원 사후 정치적 지도권을 가지고 있던 왕정위와 군사적 지도권을 가졌던 장개석이 연합하여 북벌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북경의 군벌 중심 정부를 타도하고 통일 정부를 수립하고자 북벌을 전개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새 정부의 위치를 두고 장제스와 반장제스파가 대립하였고, 결국 1927년 4월 12일, 4.12 정변이 발생하며 장제스가 상하이에서 대규모 공산당 숙청 작전을 실시하며 제1차 국공합작이 사실상 파기되었다.&lt;br /&gt;
&lt;br /&gt;
===2차 국공합작과 중일전쟁===&lt;br /&gt;
&lt;br /&gt;
제 2차 국공합작은 일본의 침략과 함께 이루어졌다.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하여 일본이 중국에 대한 침략 전쟁을 전개하면서 국민들의 반일감정이 높아지고, 국공합작을 통한 일치항일을 요구하였다. 따라서 8.1선언 등을 통해 중국 공산당이 내전 정지와 폭넓은 민족의 연합을 주장하는 등 국민당에 대한 항일운동이 확산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하지만, 장개석은 항일여론이 심화됨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을 토벌하는 데에 더 집중했다. 따라서, 서안사변을 통해 장개석을 체포, 구금하고 내전 정지 및 체포된 구국연합회의 석방을 요구하는 8개조 요구를 통해 제 2차 국공합작이 공식적으로 선언되었다. 하지만, 장개석은 국공합작 중에도 공산당의 세력 확장을 우려하여 환남사변 등을 일으켜 공산당 군과 지속적으로 충돌이 있었다.&lt;br /&gt;
&lt;br /&gt;
===국부천대와 대만===&lt;br /&gt;
&lt;br /&gt;
1949년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장제스는 약 200만 명의 국민당 군대와 지지자들과 함께 대만으로 퇴각했다. 대만에서 그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반공 독재 체제를 구축했으며, '백색테러'로 알려진 정치적 탄압을 자행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U6tB_Wggs3M?si=GvAaVvrOw0LtIFwc&amp;quot; title=&amp;quot;YouTube video player&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국공합작의 과정과 국공합작 이후의 국민당의 몰락과 장개석의 대만 퇴각은 이 영상에서 더 자세히 알아볼 수 있다.'' &amp;lt;/div&amp;gt;&lt;br /&gt;
&lt;br /&gt;
=='''한국과의 관계'''==&lt;br /&gt;
&lt;br /&gt;
장제스는 한국 독립운동에 상당한 관심과 지원을 보였다.&lt;br /&gt;
&lt;br /&gt;
* 1933년 중국육군군관학교 뤄양 분교에 한국인 특별반을 설치&lt;br /&gt;
*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동 시 지방 관리들에게 협조 지시&lt;br /&gt;
*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지지&lt;br /&gt;
* 1953년 대한민국으로부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lt;br /&gt;
&lt;br /&gt;
=='''평가'''==&lt;br /&gt;
&lt;br /&gt;
장제스에 대한 평가는 매우 복합적이다. 그는 중국의 근대화와 통일에 기여했지만, 동시에 독재적 통치와 부패로 인해 비판받았다. 현대 중국 역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긍정적 평가'''&amp;lt;/span&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amp;lt;중국의 근대화 추진, 항일전쟁 지도, 국가 통합 노력&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부정적 평가'''&amp;lt;/span&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amp;lt;정치적 독재, 부패한 통치, 공산당에 대한 극렬한 반대&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장제스의 유산은 현대 중국과 대만 관계에 여전히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lt;br /&gt;
&lt;br /&gt;
* 「장제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8255&lt;br /&gt;
* 이상철, 「 &amp;lt;蔣介石일기&amp;gt;에 나타난 한국독립운동 관계 사료」  『월간조선』, 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1011100055&lt;br /&gt;
[[분류:이민희]]&lt;/div&gt;</summary>
		<author><name>Matnyeom</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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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E%A5%EC%A0%9C%EC%8A%A4&amp;diff=51739</id>
		<title>장제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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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12-19T14:12:3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Matnyeom: /* 출처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lt;br /&gt;
&lt;br /&gt;
{{교육구국운동인물|인물명=장제스|사진=장제스.jpg|영문표기(한자표기)=Chiang Kai-shek(蔣介石)|호=-|출생=1887년 10월 31일|사망=1975년 4월 5일|묘소=타오위안시 다시구 츠후 능침|관련링크=https://www.khan.co.kr/article/202008042123005}}&lt;br /&gt;
&lt;br /&gt;
&lt;br /&gt;
장제스(蔣介石, 1887년 10월 31일 - 1975년 4월 5일)는 중화민국의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제2, 4대 총통 및 국부천대 이후 제1~5대 총통(1925년 ~ 1975년)을 역임하였다. 그는 20세기 중국의 근대화와 통일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국민당을 이끌고 공산당과의 내전, 일본과의 전쟁 등 격동의 시기를 겪었다. 장제스는 중국 국민당의 지도자이자 중화민국의 총통으로, 한국 독립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약력'''==&lt;br /&gt;
&lt;br /&gt;
* 1906.4. 바오딩군관학교 입교&lt;br /&gt;
* 1907. 일본육군사관학교 유학&lt;br /&gt;
* 1909.5. 일본육군사관학교 27기 졸업&lt;br /&gt;
* 1926.4. 제2대 국민정부 군사위원장 (1926.4.14.~1928.11.10.)&lt;br /&gt;
* 1926.4. 제2대 군사위원회 주석 (1926.4.16.~1927.3.10.)&lt;br /&gt;
* 1926.6. 국민혁명군 총사령관 (1926.6.5.~1927.4.1.)&lt;br /&gt;
* 1927.4. 국민혁명군 제1집단군 사령관 (1927.4.5.~1929.1.22.)&lt;br /&gt;
* 1928.2. 제4대 군사위원회 주석 (1928.2.7.~1928.11.7.)&lt;br /&gt;
* 1928.10. 제2대 국민정부 주석 (1928.10.10.~1931.12.15.)&lt;br /&gt;
* 1930.11. 제22대 국민정부 행정원장 (1930.11.18.~1931.12.15.)&lt;br /&gt;
* 1932.3. 초대 국민정부 군사위원장 (1932.3.6.~1946.5.15.)[6]&lt;br /&gt;
* 1935.12. 제22대 국민정부 행정원장 (2기, 1935.12.7.~1937.1.1.)&lt;br /&gt;
* 1938.4. 초대 중국국민당 총재 (1938.4.1.~1975.4.5.)&lt;br /&gt;
* 1939.12. 제22대 국민정부 행정원장 (3기, 1939.12.11.~1945.5.31.)&lt;br /&gt;
* 1941.12. 제12대 난징 국민정부 외교부장 (1941.12.27.~1942.10.20.)&lt;br /&gt;
* 1943.8. 제4대 국민정부 주석 (1943.8.1.~1948.5.20.)&lt;br /&gt;
* 1947.3. 국민정부 행정원장 대리 (1947.3.1.~1947.4.23.)&lt;br /&gt;
* 1948.5. 초대 중화민국 총통&lt;br /&gt;
* 1954.5. 제2대 중화민국 총통&lt;br /&gt;
* 1960.5. 제3대 중화민국 총통&lt;br /&gt;
* 1966.5. 제4대 중화민국 총통&lt;br /&gt;
* 1972.5. 제5대 중화민국 총통&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N-uppZwQdULXRRf-KblieKSgaWmKPogHElW87p7au4E&amp;amp;font=Default&amp;amp;lang=ko&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장제스는 국민당의 강력한 군사적 지도권을 가진 인물로서, 황포군관학교 교장을 맡음으로써 본격적으로 국민당 내에서 영향력을 키워왔다.&lt;br /&gt;
&lt;br /&gt;
===출생과 성장===&lt;br /&gt;
&lt;br /&gt;
장제스는 저장성 샤오싱현의 부유한 상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전통적인 유교 교육을 받았으며, 17세부터 근대식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1906년 베이징의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 교육을 받았고, 1907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유학길에 올랐다.&lt;br /&gt;
&lt;br /&gt;
&lt;br /&gt;
===1차 국공합작===&lt;br /&gt;
&lt;br /&gt;
제1차 국공합작은 1921년 중국 공산당이 창당된 이후, 코민테른이 국민당을 연합 전선의 대상으로 선정하면서 손‧요페 선언을 통해 수립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1923년, 장제스는 쑨원의 혁명 이념을 계승하며 국민당 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쑨원 사후 정치적 지도권을 가지고 있던 왕정위와 군사적 지도권을 가졌던 장개석이 연합하여 북벌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북경의 군벌 중심 정부를 타도하고 통일 정부를 수립하고자 북벌을 전개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새 정부의 위치를 두고 장제스와 반장제스파가 대립하였고, 결국 1927년 4월 12일, 4.12 정변이 발생하며 장제스가 상하이에서 대규모 공산당 숙청 작전을 실시하며 제1차 국공합작이 사실상 파기되었다.&lt;br /&gt;
&lt;br /&gt;
===2차 국공합작과 중일전쟁===&lt;br /&gt;
&lt;br /&gt;
제 2차 국공합작은 일본의 침략과 함께 이루어졌다.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하여 일본이 중국에 대한 침략 전쟁을 전개하면서 국민들의 반일감정이 높아지고, 국공합작을 통한 일치항일을 요구하였다. 따라서 8.1선언 등을 통해 중국 공산당이 내전 정지와 폭넓은 민족의 연합을 주장하는 등 국민당에 대한 항일운동이 확산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하지만, 장개석은 항일여론이 심화됨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을 토벌하는 데에 더 집중했다. 따라서, 서안사변을 통해 장개석을 체포, 구금하고 내전 정지 및 체포된 구국연합회의 석방을 요구하는 8개조 요구를 통해 제 2차 국공합작이 공식적으로 선언되었다. 하지만, 장개석은 국공합작 중에도 공산당의 세력 확장을 우려하여 환남사변 등을 일으켜 공산당 군과 지속적으로 충돌이 있었다.&lt;br /&gt;
&lt;br /&gt;
===국부천대와 대만===&lt;br /&gt;
&lt;br /&gt;
1949년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장제스는 약 200만 명의 국민당 군대와 지지자들과 함께 대만으로 퇴각했다. 대만에서 그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반공 독재 체제를 구축했으며, '백색테러'로 알려진 정치적 탄압을 자행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U6tB_Wggs3M?si=GvAaVvrOw0LtIFwc&amp;quot; title=&amp;quot;YouTube video player&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국공합작의 과정과 국공합작 이후의 국민당의 몰락과 장개석의 대만 퇴각은 이 영상에서 더 자세히 알아볼 수 있다.'' &amp;lt;/div&amp;gt;&lt;br /&gt;
&lt;br /&gt;
=='''한국과의 관계'''==&lt;br /&gt;
&lt;br /&gt;
장제스는 한국 독립운동에 상당한 관심과 지원을 보였다.&lt;br /&gt;
&lt;br /&gt;
* 1933년 중국육군군관학교 뤄양 분교에 한국인 특별반을 설치&lt;br /&gt;
*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동 시 지방 관리들에게 협조 지시&lt;br /&gt;
*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지지&lt;br /&gt;
* 1953년 대한민국으로부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lt;br /&gt;
&lt;br /&gt;
=='''평가'''==&lt;br /&gt;
&lt;br /&gt;
장제스에 대한 평가는 매우 복합적이다. 그는 중국의 근대화와 통일에 기여했지만, 동시에 독재적 통치와 부패로 인해 비판받았다. 현대 중국 역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긍정적 평가'''&amp;lt;/span&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amp;lt;중국의 근대화 추진, 항일전쟁 지도, 국가 통합 노력&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부정적 평가'''&amp;lt;/span&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amp;lt;정치적 독재, 부패한 통치, 공산당에 대한 극렬한 반대&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장제스의 유산은 현대 중국과 대만 관계에 여전히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lt;br /&gt;
&lt;br /&gt;
* 「장제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8255&lt;br /&gt;
* 이상철, 「 &amp;lt;蔣介石일기&amp;gt;에 나타난 한국독립운동 관계 사료」  『월간조선』, 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E&amp;amp;nNewsNumb=201003100007&lt;br /&gt;
[[분류:이민희]]&lt;/div&gt;</summary>
		<author><name>Matnyeom</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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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E%A5%EC%A0%9C%EC%8A%A4&amp;diff=51738</id>
		<title>장제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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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12-19T14:09:0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Matnyeom: /* 출처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lt;br /&gt;
&lt;br /&gt;
{{교육구국운동인물|인물명=장제스|사진=장제스.jpg|영문표기(한자표기)=Chiang Kai-shek(蔣介石)|호=-|출생=1887년 10월 31일|사망=1975년 4월 5일|묘소=타오위안시 다시구 츠후 능침|관련링크=https://www.khan.co.kr/article/202008042123005}}&lt;br /&gt;
&lt;br /&gt;
&lt;br /&gt;
장제스(蔣介石, 1887년 10월 31일 - 1975년 4월 5일)는 중화민국의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제2, 4대 총통 및 국부천대 이후 제1~5대 총통(1925년 ~ 1975년)을 역임하였다. 그는 20세기 중국의 근대화와 통일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국민당을 이끌고 공산당과의 내전, 일본과의 전쟁 등 격동의 시기를 겪었다. 장제스는 중국 국민당의 지도자이자 중화민국의 총통으로, 한국 독립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약력'''==&lt;br /&gt;
&lt;br /&gt;
* 1906.4. 바오딩군관학교 입교&lt;br /&gt;
* 1907. 일본육군사관학교 유학&lt;br /&gt;
* 1909.5. 일본육군사관학교 27기 졸업&lt;br /&gt;
* 1926.4. 제2대 국민정부 군사위원장 (1926.4.14.~1928.11.10.)&lt;br /&gt;
* 1926.4. 제2대 군사위원회 주석 (1926.4.16.~1927.3.10.)&lt;br /&gt;
* 1926.6. 국민혁명군 총사령관 (1926.6.5.~1927.4.1.)&lt;br /&gt;
* 1927.4. 국민혁명군 제1집단군 사령관 (1927.4.5.~1929.1.22.)&lt;br /&gt;
* 1928.2. 제4대 군사위원회 주석 (1928.2.7.~1928.11.7.)&lt;br /&gt;
* 1928.10. 제2대 국민정부 주석 (1928.10.10.~1931.12.15.)&lt;br /&gt;
* 1930.11. 제22대 국민정부 행정원장 (1930.11.18.~1931.12.15.)&lt;br /&gt;
* 1932.3. 초대 국민정부 군사위원장 (1932.3.6.~1946.5.15.)[6]&lt;br /&gt;
* 1935.12. 제22대 국민정부 행정원장 (2기, 1935.12.7.~1937.1.1.)&lt;br /&gt;
* 1938.4. 초대 중국국민당 총재 (1938.4.1.~1975.4.5.)&lt;br /&gt;
* 1939.12. 제22대 국민정부 행정원장 (3기, 1939.12.11.~1945.5.31.)&lt;br /&gt;
* 1941.12. 제12대 난징 국민정부 외교부장 (1941.12.27.~1942.10.20.)&lt;br /&gt;
* 1943.8. 제4대 국민정부 주석 (1943.8.1.~1948.5.20.)&lt;br /&gt;
* 1947.3. 국민정부 행정원장 대리 (1947.3.1.~1947.4.23.)&lt;br /&gt;
* 1948.5. 초대 중화민국 총통&lt;br /&gt;
* 1954.5. 제2대 중화민국 총통&lt;br /&gt;
* 1960.5. 제3대 중화민국 총통&lt;br /&gt;
* 1966.5. 제4대 중화민국 총통&lt;br /&gt;
* 1972.5. 제5대 중화민국 총통&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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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장제스는 국민당의 강력한 군사적 지도권을 가진 인물로서, 황포군관학교 교장을 맡음으로써 본격적으로 국민당 내에서 영향력을 키워왔다.&lt;br /&gt;
&lt;br /&gt;
===출생과 성장===&lt;br /&gt;
&lt;br /&gt;
장제스는 저장성 샤오싱현의 부유한 상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전통적인 유교 교육을 받았으며, 17세부터 근대식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1906년 베이징의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 교육을 받았고, 1907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유학길에 올랐다.&lt;br /&gt;
&lt;br /&gt;
&lt;br /&gt;
===1차 국공합작===&lt;br /&gt;
&lt;br /&gt;
제1차 국공합작은 1921년 중국 공산당이 창당된 이후, 코민테른이 국민당을 연합 전선의 대상으로 선정하면서 손‧요페 선언을 통해 수립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1923년, 장제스는 쑨원의 혁명 이념을 계승하며 국민당 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쑨원 사후 정치적 지도권을 가지고 있던 왕정위와 군사적 지도권을 가졌던 장개석이 연합하여 북벌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북경의 군벌 중심 정부를 타도하고 통일 정부를 수립하고자 북벌을 전개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새 정부의 위치를 두고 장제스와 반장제스파가 대립하였고, 결국 1927년 4월 12일, 4.12 정변이 발생하며 장제스가 상하이에서 대규모 공산당 숙청 작전을 실시하며 제1차 국공합작이 사실상 파기되었다.&lt;br /&gt;
&lt;br /&gt;
===2차 국공합작과 중일전쟁===&lt;br /&gt;
&lt;br /&gt;
제 2차 국공합작은 일본의 침략과 함께 이루어졌다.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하여 일본이 중국에 대한 침략 전쟁을 전개하면서 국민들의 반일감정이 높아지고, 국공합작을 통한 일치항일을 요구하였다. 따라서 8.1선언 등을 통해 중국 공산당이 내전 정지와 폭넓은 민족의 연합을 주장하는 등 국민당에 대한 항일운동이 확산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하지만, 장개석은 항일여론이 심화됨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을 토벌하는 데에 더 집중했다. 따라서, 서안사변을 통해 장개석을 체포, 구금하고 내전 정지 및 체포된 구국연합회의 석방을 요구하는 8개조 요구를 통해 제 2차 국공합작이 공식적으로 선언되었다. 하지만, 장개석은 국공합작 중에도 공산당의 세력 확장을 우려하여 환남사변 등을 일으켜 공산당 군과 지속적으로 충돌이 있었다.&lt;br /&gt;
&lt;br /&gt;
===국부천대와 대만===&lt;br /&gt;
&lt;br /&gt;
1949년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장제스는 약 200만 명의 국민당 군대와 지지자들과 함께 대만으로 퇴각했다. 대만에서 그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반공 독재 체제를 구축했으며, '백색테러'로 알려진 정치적 탄압을 자행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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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한국과의 관계'''==&lt;br /&gt;
&lt;br /&gt;
장제스는 한국 독립운동에 상당한 관심과 지원을 보였다.&lt;br /&gt;
&lt;br /&gt;
* 1933년 중국육군군관학교 뤄양 분교에 한국인 특별반을 설치&lt;br /&gt;
*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동 시 지방 관리들에게 협조 지시&lt;br /&gt;
*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지지&lt;br /&gt;
* 1953년 대한민국으로부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lt;br /&gt;
&lt;br /&gt;
=='''평가'''==&lt;br /&gt;
&lt;br /&gt;
장제스에 대한 평가는 매우 복합적이다. 그는 중국의 근대화와 통일에 기여했지만, 동시에 독재적 통치와 부패로 인해 비판받았다. 현대 중국 역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긍정적 평가'''&amp;lt;/span&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amp;lt;중국의 근대화 추진, 항일전쟁 지도, 국가 통합 노력&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aee1e1&amp;quot;&amp;gt;'''부정적 평가'''&amp;lt;/span&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amp;lt;정치적 독재, 부패한 통치, 공산당에 대한 극렬한 반대&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장제스의 유산은 현대 중국과 대만 관계에 여전히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lt;br /&gt;
&lt;br /&gt;
* 「장제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8255&lt;br /&gt;
* 「[현대사 史料발굴] &amp;lt;蔣介石일기&amp;gt;에 나타난 한국독립운동 관계 사료」  『월간조선''. 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E&amp;amp;nNewsNumb=201003100007&lt;br /&gt;
[[분류:이민희]]&lt;/div&gt;</summary>
		<author><name>Matnyeom</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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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A1%B0%EC%84%A0%EC%9D%98%EC%9A%A9%EB%8C%80&amp;diff=51737</id>
		<title>조선의용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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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12-19T14:00:1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Matnyeom: /* 출처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파일:조선의용대.jpg|가운데]]&lt;br /&gt;
&lt;br /&gt;
조선의용대는 1938년 10월 10일 중국 한커우(漢口)에서 김원봉에 의해 창설된 항일무장단체이다.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활동했으며,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우며 한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 조선의용대는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이후 한국광복군의 모체가 되었다.&lt;br /&gt;
&lt;br /&gt;
=='''창설 배경'''==&lt;br /&gt;
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1938년 일본군이 난징을 함락한 후 우한삼진(武漢三鎭)을 공략하는 상황에서, 중국 당국과 조선청년들의 협의로 의용대 구성이 결정되었다. 당시 중국 국민당 정부는 항일전선을 확대하기 위해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의 참여를 원했고,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은 이를 독립운동의 기회로 삼고자 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조직 구성'''==&lt;br /&gt;
조선의용대의 조직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lt;br /&gt;
&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width:100%; 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50%&amp;quot;| 지위 || style=&amp;quot;width:50%&amp;quot;| 인물&lt;br /&gt;
|-&lt;br /&gt;
|총대장||김원봉&lt;br /&gt;
|-&lt;br /&gt;
|부대장 || 신악&lt;br /&gt;
|-&lt;br /&gt;
|정치조 || 김학무&lt;br /&gt;
|-&lt;br /&gt;
|총무대장 || 이집중&lt;br /&gt;
|-&lt;br /&gt;
|선전대장|| 김창제&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초기 병력은 200여 명이었으나, 지속적인 모집 활동을 통해 1940년 2월에는 314명으로 증가했다. 조직은 총사령부 아래 3개 지대로 편성되었으며, 각 지대는 2개 중대로 구성되었다.&lt;br /&gt;
&lt;br /&gt;
=='''주요 활동'''==&lt;br /&gt;
조선의용대의 주요 활동은 다음과 같다.&lt;br /&gt;
&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width:100%;&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0%&amp;quot;| 활동 || style=&amp;quot;width:80%&amp;quot;| 내용&lt;br /&gt;
|-&lt;br /&gt;
|전투 참여||중국군과 연합하여 일본군에 대항한 실제 전투에 참가했다. 특히 1939년 4월 산시성(山西省) 린펀(臨汾) 전투, 1940년 8월 산시성 운청(運城) 전투 등에서 활약했다.&lt;br /&gt;
|-&lt;br /&gt;
|정보 수집 || 일본군의 동향과 전략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중국군에 제공했다.&lt;br /&gt;
|-&lt;br /&gt;
|포로 취조 및 사상공작 || 일본군 포로를 심문하고, 그들에게 항일사상을 주입하는 활동을 펼쳤다.&lt;br /&gt;
|-&lt;br /&gt;
|선전 활동 || 항일 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다양한 선전 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조선의용대통신'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하여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알렸다.&lt;br /&gt;
|-&lt;br /&gt;
|적문서 번역|| 일본어로 된 문서를 중국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수행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변천과 해산'''==&lt;br /&gt;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조선의용대의 활동 범위가 확대되었다. 그러나 1942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결의에 따라 조선의용대는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의용대는 두 갈래로 나뉘어졌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1. 일부는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어 계속해서 중국 국민당과 협력했다.&lt;br /&gt;
2. 주력 부대는 김원봉의 지휘 하에 중국 공산당 지역으로 이동하여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러한 변화는 당시 복잡한 국제 정세와 한국 독립운동 내부의 노선 차이를 반영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역사적 의의'''==&lt;br /&gt;
조선의용대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lt;br /&gt;
항일무장투쟁의 상징: 해외에서 조직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사례이다.&lt;br /&gt;
독립운동의 국제화: 중국과의 협력을 통해 한국 독립운동의 국제적 지지기반을 확대했다.&lt;br /&gt;
광복군의 모체: 이후 한국광복군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lt;br /&gt;
독립운동가 양성: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조선의용대를 거쳐 성장했다.&lt;br /&gt;
조선의용대의 활동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한 페이지를 차지하며, 항일투쟁의 정신을 상징하는 존재로 평가받고 있다.&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2178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조선의용대 1938」,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code=kc_age_40&amp;amp;levelId=kc_o403410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이종호, 「[역사 속 그곳] 의열단 의백, 조선의용대 대장 약산 김원봉」, 『울산저널』, 2020.08.15., https://m.usjournal.kr/news/articleView.html?idxno=87263 (검색일: 2024년 12월 4일)&lt;br /&gt;
&lt;br /&gt;
[[분류: 이민희]]&lt;/div&gt;</summary>
		<author><name>Matnyeom</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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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조선의용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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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12-19T13:59:4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Matnyeom: /* 출처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파일:조선의용대.jpg|가운데]]&lt;br /&gt;
&lt;br /&gt;
조선의용대는 1938년 10월 10일 중국 한커우(漢口)에서 김원봉에 의해 창설된 항일무장단체이다.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활동했으며,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우며 한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 조선의용대는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이후 한국광복군의 모체가 되었다.&lt;br /&gt;
&lt;br /&gt;
=='''창설 배경'''==&lt;br /&gt;
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1938년 일본군이 난징을 함락한 후 우한삼진(武漢三鎭)을 공략하는 상황에서, 중국 당국과 조선청년들의 협의로 의용대 구성이 결정되었다. 당시 중국 국민당 정부는 항일전선을 확대하기 위해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의 참여를 원했고,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은 이를 독립운동의 기회로 삼고자 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조직 구성'''==&lt;br /&gt;
조선의용대의 조직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lt;br /&gt;
&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width:100%; 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50%&amp;quot;| 지위 || style=&amp;quot;width:50%&amp;quot;| 인물&lt;br /&gt;
|-&lt;br /&gt;
|총대장||김원봉&lt;br /&gt;
|-&lt;br /&gt;
|부대장 || 신악&lt;br /&gt;
|-&lt;br /&gt;
|정치조 || 김학무&lt;br /&gt;
|-&lt;br /&gt;
|총무대장 || 이집중&lt;br /&gt;
|-&lt;br /&gt;
|선전대장|| 김창제&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초기 병력은 200여 명이었으나, 지속적인 모집 활동을 통해 1940년 2월에는 314명으로 증가했다. 조직은 총사령부 아래 3개 지대로 편성되었으며, 각 지대는 2개 중대로 구성되었다.&lt;br /&gt;
&lt;br /&gt;
=='''주요 활동'''==&lt;br /&gt;
조선의용대의 주요 활동은 다음과 같다.&lt;br /&gt;
&lt;br /&gt;
{|class=&amp;quot;sortable wikitable&amp;quot; style=&amp;quot;width:100%;&amp;quot;&lt;br /&gt;
!style=&amp;quot;width:20%&amp;quot;| 활동 || style=&amp;quot;width:80%&amp;quot;| 내용&lt;br /&gt;
|-&lt;br /&gt;
|전투 참여||중국군과 연합하여 일본군에 대항한 실제 전투에 참가했다. 특히 1939년 4월 산시성(山西省) 린펀(臨汾) 전투, 1940년 8월 산시성 운청(運城) 전투 등에서 활약했다.&lt;br /&gt;
|-&lt;br /&gt;
|정보 수집 || 일본군의 동향과 전략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중국군에 제공했다.&lt;br /&gt;
|-&lt;br /&gt;
|포로 취조 및 사상공작 || 일본군 포로를 심문하고, 그들에게 항일사상을 주입하는 활동을 펼쳤다.&lt;br /&gt;
|-&lt;br /&gt;
|선전 활동 || 항일 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다양한 선전 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조선의용대통신'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하여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알렸다.&lt;br /&gt;
|-&lt;br /&gt;
|적문서 번역|| 일본어로 된 문서를 중국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수행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변천과 해산'''==&lt;br /&gt;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조선의용대의 활동 범위가 확대되었다. 그러나 1942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결의에 따라 조선의용대는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의용대는 두 갈래로 나뉘어졌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1. 일부는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어 계속해서 중국 국민당과 협력했다.&lt;br /&gt;
2. 주력 부대는 김원봉의 지휘 하에 중국 공산당 지역으로 이동하여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러한 변화는 당시 복잡한 국제 정세와 한국 독립운동 내부의 노선 차이를 반영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역사적 의의'''==&lt;br /&gt;
조선의용대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lt;br /&gt;
항일무장투쟁의 상징: 해외에서 조직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사례이다.&lt;br /&gt;
독립운동의 국제화: 중국과의 협력을 통해 한국 독립운동의 국제적 지지기반을 확대했다.&lt;br /&gt;
광복군의 모체: 이후 한국광복군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lt;br /&gt;
독립운동가 양성: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조선의용대를 거쳐 성장했다.&lt;br /&gt;
조선의용대의 활동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한 페이지를 차지하며, 항일투쟁의 정신을 상징하는 존재로 평가받고 있다.&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2178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조선의용대 1938」,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code=kc_age_40&amp;amp;levelId=kc_o403410 (검색일: 12월 18일)&lt;br /&gt;
* 울산저널, 「[역사 속 그곳] 의열단 의백, 조선의용대 대장 약산 김원봉」'', 『울산저널』, 2020.08.15., https://m.usjournal.kr/news/articleView.html?idxno=87263 (검색일: 2024년 12월 4일)&lt;br /&gt;
&lt;br /&gt;
[[분류: 이민희]]&lt;/div&gt;</summary>
		<author><name>Matnyeom</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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