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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Jmwshye: &lt;/p&gt;
&lt;hr /&gt;
&lt;div&gt;===&amp;lt;big&amp;gt;'''개요'''&amp;lt;/big&amp;gt;===&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파일:31운동뉴스.jpg|400px|center]]&lt;br /&gt;
&amp;lt;/br&amp;gt;&lt;br /&gt;
1919년 3월 1일을 계기로 전개된 3.1운동은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계층이 참여한 대규모 항일 독립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한국 민족의 독립 의지를 국내외에 분명히 드러내며 국제 사회의 관심을 끌었고, 그 영향으로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25-2)|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였다. &amp;lt;/br&amp;gt;&lt;br /&gt;
또한 강압적 무단통치에 대한 전면적인 저항은 일제의 통치 방식에 변화를 촉발하여 이른바 문화통치로의 전환을 가져오는 배경이 되었으며, 민족의식과 자주 의식을 크게 고취시켜 교육·문화·산업 등 사회 전반에서 민족 역량을 강화하고 자립을 추구하는 여러 사회운동이 확산되는 출발점으로 평가된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ig&amp;gt;'''배경'''&amp;lt;/big&amp;gt;===&lt;br /&gt;
----&lt;br /&gt;
1910년 강제 병탄 이후 조선총독부는 헌병·경찰을 앞세운 무단통치로 독립운동을 강하게 탄압했고, 문화 말살과 경제적 지배를 병행해 민족적 저항 기반을 약화시키려 했다. 이에 독립운동가들은 국내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거나 중국·만주·연해주·미주 등지로 망명해 활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1차 세계대전 종전 국면과 함께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알려지면서, 국제 여론에 호소해 독립을 추진할 수 있다는 기대가 확산되었다.&lt;br /&gt;
&lt;br /&gt;
특히 해외 한인 사회는 민족자결주의를 근거로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해 한국 독립을 호소하려 했고, 상하이의 신한청년단 등은 김규식 등을 파리로 보내 외교 활동을 시도했다. 국내에는 일제의 은폐로 해당 사상이 즉각 확산되진 않았으나, 유학생·해외 동포의 움직임이 알려지며 독립운동 분위기가 점차 고조되었다. 여기에 1919년 2·8 독립선언이 도화선 역할을 하며, 국내에서도 거족적 행동을 준비하려는 흐름을 촉진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ig&amp;gt;'''전개'''&amp;lt;/big&amp;gt;===&lt;br /&gt;
----&lt;br /&gt;
3.1운동은 민족자결주의의 영향, 2·8 독립선언의 파장, 그리고 고종의 갑작스러운 서거(독살설 확산)로 고조된 민심이 결합되며 거족적 항일운동으로 구체화되었다. 운동 준비 과정에서 천도교·기독교·불교계를 중심으로 ‘대중화·일원화·비폭력’의 원칙이 정리되었고, 독립선언서 발표와 만세 시위, 독립 청원 등(국내외 여론전)이 함께 구상되었다. 최남선이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종교계 인사들이 연합해 민족대표를 구성하면서 33인이 확정되었다.&lt;br /&gt;
&lt;br /&gt;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을 진행한 뒤 경찰에 연행되었고, 같은 시각 탑골공원에는 학생과 시민이 모여 독립선언서 낭독과 만세 시위를 시작했다. 시위는 서울 도심에서 행진 형태로 확산되었으며, 이후 평양·원산 등 주요 도시를 거쳐 전국 각지로 빠르게 번져 나갔다. 전개 과정에서 장날·종교 조직·학교 네트워크·지역 간 인접 영향 등 다양한 경로로 동원이 확대되었고, 국내 운동은 만주·연해주·미주 등 해외 한인 사회의 만세 시위로도 연결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ig&amp;gt;'''결과'''&amp;lt;/big&amp;gt;===&lt;br /&gt;
----&lt;br /&gt;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자 조선총독부는 헌병·경찰뿐 아니라 정규 군대까지 동원해 강경 진압에 나섰고, 그 과정에서 대규모 체포·구금과 희생이 발생했다. 참가 규모와 피해 통계는 자료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조선총독부의 공식 기록 및 당대  자료에서 참가 인원, 사망·부상·피검자 수가 다양하게 집계된다. 한편, 제암리 등 일부 지역에서는 시위 이후 보복적 성격의 살상·방화가 발생해 국제적 비난을 불러일으켰다.&lt;br /&gt;
&lt;br /&gt;
한편 일제는 국제 여론의 악화를 완화하고 향후 통치를 안정화하기 위해 통치 방식의 변화를 표방했다. 이른바 ‘문화통치’로의 전환이 제시되며 헌병경찰제의 완화, 언론·교육 정책의 조정 등이 추진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경찰력과 감시 체계를 강화하고 독립운동가 색출을 지속하는 등 식민 지배의 본질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평가도 함께 존재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ig&amp;gt;'''평가 및 의의'''&amp;lt;/big&amp;gt;===&lt;br /&gt;
----&lt;br /&gt;
3.1운동은 특정 계층에 국한되지 않고 종교계·학생·농민·상인 등 사회 전반이 참여한 대규모 민족운동으로,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국내외에 집단적으로 표출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특히 운동 과정에서 ‘비폭력’과 ‘공동 행동’의 원칙이 강조되며 거족적 항쟁의 전형을 형성했고, 일제의 식민 통치 방식과 국제 여론에 직접적인 압력을 가했다는 점이 중요하게 평가된다.&lt;br /&gt;
&lt;br /&gt;
또한 3.1운동은 독립운동의 구심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어 상하이를 중심으로 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과 독립운동 진영의 재편에 영향을 주었다. 동시에 국내에서는 민족의식의 확산과 함께 교육·언론·문화운동, 경제적 자립을 지향한 여러 사회운동이 활성화되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요약하면, 3.1운동은 즉각적인 독립 달성에는 이르지 못했더라도, 이후 독립운동의 조직화·국제화·대중화에 장기적인 동력을 제공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ig&amp;gt;'''참고문헌'''&amp;lt;/big&amp;gt;===&lt;br /&gt;
----&lt;br /&gt;
* 국사편찬위원회. 「3·1 운동」, 우리역사넷.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i400200] &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3·1운동(三一運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6772]&lt;/div&gt;</summary>
		<author><name>Jmwshye</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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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23T14:40:2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mwshye: &lt;/p&gt;
&lt;hr /&gt;
&lt;div&gt;===&amp;lt;big&amp;gt;'''개요'''&amp;lt;/big&amp;g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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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br&amp;gt;&lt;br /&gt;
[[파일:31운동뉴스.jpg|400px|center]]&lt;br /&gt;
&amp;lt;/br&amp;gt;&lt;br /&gt;
1919년 3월 1일을 계기로 전개된 3·1운동은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계층이 참여한 대규모 항일 독립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한국 민족의 독립 의지를 국내외에 분명히 드러내며 국제 사회의 관심을 끌었고, 그 영향으로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25-2)|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였다. &amp;lt;/br&amp;gt;&lt;br /&gt;
또한 강압적 무단통치에 대한 전면적인 저항은 일제의 통치 방식에 변화를 촉발하여 이른바 문화통치로의 전환을 가져오는 배경이 되었으며, 민족의식과 자주 의식을 크게 고취시켜 교육·문화·산업 등 사회 전반에서 민족 역량을 강화하고 자립을 추구하는 여러 사회운동이 확산되는 출발점으로 평가된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ig&amp;gt;'''배경'''&amp;lt;/big&amp;gt;===&lt;br /&gt;
----&lt;br /&gt;
1910년 강제 병탄 이후 조선총독부는 헌병·경찰을 앞세운 무단통치로 독립운동을 강하게 탄압했고, 문화 말살과 경제적 지배를 병행해 민족적 저항 기반을 약화시키려 했다. 이에 독립운동가들은 국내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거나 중국·만주·연해주·미주 등지로 망명해 활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1차 세계대전 종전 국면과 함께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알려지면서, 국제 여론에 호소해 독립을 추진할 수 있다는 기대가 확산되었다.&lt;br /&gt;
&lt;br /&gt;
특히 해외 한인 사회는 민족자결주의를 근거로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해 한국 독립을 호소하려 했고, 상하이의 신한청년단 등은 김규식 등을 파리로 보내 외교 활동을 시도했다. 국내에는 일제의 은폐로 해당 사상이 즉각 확산되진 않았으나, 유학생·해외 동포의 움직임이 알려지며 독립운동 분위기가 점차 고조되었다. 여기에 1919년 2·8 독립선언이 도화선 역할을 하며, 국내에서도 거족적 행동을 준비하려는 흐름을 촉진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ig&amp;gt;'''전개'''&amp;lt;/big&amp;gt;===&lt;br /&gt;
----&lt;br /&gt;
3·1운동은 민족자결주의의 영향, 2·8 독립선언의 파장, 그리고 고종의 갑작스러운 서거(독살설 확산)로 고조된 민심이 결합되며 거족적 항일운동으로 구체화되었다. 운동 준비 과정에서 천도교·기독교·불교계를 중심으로 ‘대중화·일원화·비폭력’의 원칙이 정리되었고, 독립선언서 발표와 만세 시위, 독립 청원 등(국내외 여론전)이 함께 구상되었다. 최남선이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종교계 인사들이 연합해 민족대표를 구성하면서 33인이 확정되었다.&lt;br /&gt;
&lt;br /&gt;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을 진행한 뒤 경찰에 연행되었고, 같은 시각 탑골공원에는 학생과 시민이 모여 독립선언서 낭독과 만세 시위를 시작했다. 시위는 서울 도심에서 행진 형태로 확산되었으며, 이후 평양·원산 등 주요 도시를 거쳐 전국 각지로 빠르게 번져 나갔다. 전개 과정에서 장날·종교 조직·학교 네트워크·지역 간 인접 영향 등 다양한 경로로 동원이 확대되었고, 국내 운동은 만주·연해주·미주 등 해외 한인 사회의 만세 시위로도 연결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ig&amp;gt;'''결과'''&amp;lt;/big&amp;gt;===&lt;br /&gt;
----&lt;br /&gt;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자 조선총독부는 헌병·경찰뿐 아니라 정규 군대까지 동원해 강경 진압에 나섰고, 그 과정에서 대규모 체포·구금과 희생이 발생했다. 참가 규모와 피해 통계는 자료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조선총독부의 공식 기록 및 당대 보고·회고 자료 등에서 참가 인원, 사망·부상·피검자 수가 다양하게 집계된다. 또한 제암리 등 일부 지역에서는 시위 이후 보복적 성격의 살상·방화가 발생해 국제적 비난을 불러일으켰다.&lt;br /&gt;
&lt;br /&gt;
한편 일제는 국제 여론의 악화를 완화하고 향후 통치를 안정화하기 위해 통치 방식의 변화를 표방했다. 이른바 ‘문화통치’로의 전환이 제시되며 헌병경찰제의 완화, 언론·교육 정책의 조정 등이 추진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경찰력과 감시 체계를 강화하고 독립운동가 색출을 지속하는 등 식민 지배의 본질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평가도 함께 존재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ig&amp;gt;'''평가 및 의의'''&amp;lt;/big&amp;gt;===&lt;br /&gt;
----&lt;br /&gt;
3·1운동은 특정 계층에 국한되지 않고 종교계·학생·농민·상인 등 사회 전반이 참여한 대규모 민족운동으로,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국내외에 집단적으로 표출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특히 운동 과정에서 ‘비폭력’과 ‘공동 행동’의 원칙이 강조되며 거족적 항쟁의 전형을 형성했고, 일제의 식민 통치 방식과 국제 여론에 직접적인 압력을 가했다는 점이 중요하게 평가된다.&lt;br /&gt;
&lt;br /&gt;
또한 3·1운동은 독립운동의 구심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어 상하이를 중심으로 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과 독립운동 진영의 재편에 영향을 주었다. 동시에 국내에서는 민족의식의 확산과 함께 교육·언론·문화운동, 경제적 자립을 지향한 여러 사회운동이 활성화되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요약하면, 3·1운동은 즉각적인 독립 달성에는 이르지 못했더라도, 이후 독립운동의 조직화·국제화·대중화에 장기적인 동력을 제공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ig&amp;gt;'''참고문헌'''&amp;lt;/big&amp;gt;===&lt;br /&gt;
----&lt;br /&gt;
* 국사편찬위원회. 「3·1 운동」, 우리역사넷.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i400200] &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3·1운동(三一運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6772]&lt;/div&gt;</summary>
		<author><name>Jmwshye</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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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23T14:40:0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mwshye: &lt;/p&gt;
&lt;hr /&gt;
&lt;div&gt;===&amp;lt;big&amp;gt;'''개요'''&amp;lt;/big&amp;g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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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31운동뉴스.jpg|400px|center]]&lt;br /&gt;
&lt;br /&gt;
1919년 3월 1일을 계기로 전개된 3·1운동은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계층이 참여한 대규모 항일 독립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한국 민족의 독립 의지를 국내외에 분명히 드러내며 국제 사회의 관심을 끌었고, 그 영향으로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25-2)|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였다. &amp;lt;/br&amp;gt;&lt;br /&gt;
또한 강압적 무단통치에 대한 전면적인 저항은 일제의 통치 방식에 변화를 촉발하여 이른바 문화통치로의 전환을 가져오는 배경이 되었으며, 민족의식과 자주 의식을 크게 고취시켜 교육·문화·산업 등 사회 전반에서 민족 역량을 강화하고 자립을 추구하는 여러 사회운동이 확산되는 출발점으로 평가된다.&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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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big&amp;gt;'''배경'''&amp;lt;/big&amp;g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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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강제 병탄 이후 조선총독부는 헌병·경찰을 앞세운 무단통치로 독립운동을 강하게 탄압했고, 문화 말살과 경제적 지배를 병행해 민족적 저항 기반을 약화시키려 했다. 이에 독립운동가들은 국내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거나 중국·만주·연해주·미주 등지로 망명해 활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1차 세계대전 종전 국면과 함께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알려지면서, 국제 여론에 호소해 독립을 추진할 수 있다는 기대가 확산되었다.&lt;br /&gt;
&lt;br /&gt;
특히 해외 한인 사회는 민족자결주의를 근거로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해 한국 독립을 호소하려 했고, 상하이의 신한청년단 등은 김규식 등을 파리로 보내 외교 활동을 시도했다. 국내에는 일제의 은폐로 해당 사상이 즉각 확산되진 않았으나, 유학생·해외 동포의 움직임이 알려지며 독립운동 분위기가 점차 고조되었다. 여기에 1919년 2·8 독립선언이 도화선 역할을 하며, 국내에서도 거족적 행동을 준비하려는 흐름을 촉진했다.&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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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big&amp;gt;'''전개'''&amp;lt;/big&amp;g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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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은 민족자결주의의 영향, 2·8 독립선언의 파장, 그리고 고종의 갑작스러운 서거(독살설 확산)로 고조된 민심이 결합되며 거족적 항일운동으로 구체화되었다. 운동 준비 과정에서 천도교·기독교·불교계를 중심으로 ‘대중화·일원화·비폭력’의 원칙이 정리되었고, 독립선언서 발표와 만세 시위, 독립 청원 등(국내외 여론전)이 함께 구상되었다. 최남선이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종교계 인사들이 연합해 민족대표를 구성하면서 33인이 확정되었다.&lt;br /&gt;
&lt;br /&gt;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을 진행한 뒤 경찰에 연행되었고, 같은 시각 탑골공원에는 학생과 시민이 모여 독립선언서 낭독과 만세 시위를 시작했다. 시위는 서울 도심에서 행진 형태로 확산되었으며, 이후 평양·원산 등 주요 도시를 거쳐 전국 각지로 빠르게 번져 나갔다. 전개 과정에서 장날·종교 조직·학교 네트워크·지역 간 인접 영향 등 다양한 경로로 동원이 확대되었고, 국내 운동은 만주·연해주·미주 등 해외 한인 사회의 만세 시위로도 연결되었다.&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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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big&amp;gt;'''결과'''&amp;lt;/big&amp;g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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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자 조선총독부는 헌병·경찰뿐 아니라 정규 군대까지 동원해 강경 진압에 나섰고, 그 과정에서 대규모 체포·구금과 희생이 발생했다. 참가 규모와 피해 통계는 자료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조선총독부의 공식 기록 및 당대 보고·회고 자료 등에서 참가 인원, 사망·부상·피검자 수가 다양하게 집계된다. 또한 제암리 등 일부 지역에서는 시위 이후 보복적 성격의 살상·방화가 발생해 국제적 비난을 불러일으켰다.&lt;br /&gt;
&lt;br /&gt;
한편 일제는 국제 여론의 악화를 완화하고 향후 통치를 안정화하기 위해 통치 방식의 변화를 표방했다. 이른바 ‘문화통치’로의 전환이 제시되며 헌병경찰제의 완화, 언론·교육 정책의 조정 등이 추진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경찰력과 감시 체계를 강화하고 독립운동가 색출을 지속하는 등 식민 지배의 본질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평가도 함께 존재한다.&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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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big&amp;gt;'''평가 및 의의'''&amp;lt;/big&amp;g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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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은 특정 계층에 국한되지 않고 종교계·학생·농민·상인 등 사회 전반이 참여한 대규모 민족운동으로,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국내외에 집단적으로 표출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특히 운동 과정에서 ‘비폭력’과 ‘공동 행동’의 원칙이 강조되며 거족적 항쟁의 전형을 형성했고, 일제의 식민 통치 방식과 국제 여론에 직접적인 압력을 가했다는 점이 중요하게 평가된다.&lt;br /&gt;
&lt;br /&gt;
또한 3·1운동은 독립운동의 구심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어 상하이를 중심으로 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과 독립운동 진영의 재편에 영향을 주었다. 동시에 국내에서는 민족의식의 확산과 함께 교육·언론·문화운동, 경제적 자립을 지향한 여러 사회운동이 활성화되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요약하면, 3·1운동은 즉각적인 독립 달성에는 이르지 못했더라도, 이후 독립운동의 조직화·국제화·대중화에 장기적인 동력을 제공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ig&amp;gt;'''참고문헌'''&amp;lt;/big&amp;gt;===&lt;br /&gt;
----&lt;br /&gt;
* 국사편찬위원회. 「3·1 운동」, 우리역사넷.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i400200] &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3·1운동(三一運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6772]&lt;/div&gt;</summary>
		<author><name>Jmwshye</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3.1%EC%9A%B4%EB%8F%99&amp;diff=66831</id>
		<title>3.1운동</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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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23T14:39:4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mwshye: &lt;/p&gt;
&lt;hr /&gt;
&lt;div&gt;===&amp;lt;big&amp;gt;'''개요'''&amp;lt;/big&amp;gt;===&lt;br /&gt;
----&lt;br /&gt;
[[파일:31운동뉴스.jpg|400px|center]]&lt;br /&gt;
1919년 3월 1일을 계기로 전개된 3·1운동은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계층이 참여한 대규모 항일 독립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한국 민족의 독립 의지를 국내외에 분명히 드러내며 국제 사회의 관심을 끌었고, 그 영향으로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25-2)|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였다. &amp;lt;/br&amp;gt;&lt;br /&gt;
또한 강압적 무단통치에 대한 전면적인 저항은 일제의 통치 방식에 변화를 촉발하여 이른바 문화통치로의 전환을 가져오는 배경이 되었으며, 민족의식과 자주 의식을 크게 고취시켜 교육·문화·산업 등 사회 전반에서 민족 역량을 강화하고 자립을 추구하는 여러 사회운동이 확산되는 출발점으로 평가된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ig&amp;gt;'''배경'''&amp;lt;/big&amp;gt;===&lt;br /&gt;
----&lt;br /&gt;
1910년 강제 병탄 이후 조선총독부는 헌병·경찰을 앞세운 무단통치로 독립운동을 강하게 탄압했고, 문화 말살과 경제적 지배를 병행해 민족적 저항 기반을 약화시키려 했다. 이에 독립운동가들은 국내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거나 중국·만주·연해주·미주 등지로 망명해 활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1차 세계대전 종전 국면과 함께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알려지면서, 국제 여론에 호소해 독립을 추진할 수 있다는 기대가 확산되었다.&lt;br /&gt;
&lt;br /&gt;
특히 해외 한인 사회는 민족자결주의를 근거로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해 한국 독립을 호소하려 했고, 상하이의 신한청년단 등은 김규식 등을 파리로 보내 외교 활동을 시도했다. 국내에는 일제의 은폐로 해당 사상이 즉각 확산되진 않았으나, 유학생·해외 동포의 움직임이 알려지며 독립운동 분위기가 점차 고조되었다. 여기에 1919년 2·8 독립선언이 도화선 역할을 하며, 국내에서도 거족적 행동을 준비하려는 흐름을 촉진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ig&amp;gt;'''전개'''&amp;lt;/big&amp;gt;===&lt;br /&gt;
----&lt;br /&gt;
3·1운동은 민족자결주의의 영향, 2·8 독립선언의 파장, 그리고 고종의 갑작스러운 서거(독살설 확산)로 고조된 민심이 결합되며 거족적 항일운동으로 구체화되었다. 운동 준비 과정에서 천도교·기독교·불교계를 중심으로 ‘대중화·일원화·비폭력’의 원칙이 정리되었고, 독립선언서 발표와 만세 시위, 독립 청원 등(국내외 여론전)이 함께 구상되었다. 최남선이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종교계 인사들이 연합해 민족대표를 구성하면서 33인이 확정되었다.&lt;br /&gt;
&lt;br /&gt;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을 진행한 뒤 경찰에 연행되었고, 같은 시각 탑골공원에는 학생과 시민이 모여 독립선언서 낭독과 만세 시위를 시작했다. 시위는 서울 도심에서 행진 형태로 확산되었으며, 이후 평양·원산 등 주요 도시를 거쳐 전국 각지로 빠르게 번져 나갔다. 전개 과정에서 장날·종교 조직·학교 네트워크·지역 간 인접 영향 등 다양한 경로로 동원이 확대되었고, 국내 운동은 만주·연해주·미주 등 해외 한인 사회의 만세 시위로도 연결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ig&amp;gt;'''결과'''&amp;lt;/big&amp;gt;===&lt;br /&gt;
----&lt;br /&gt;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자 조선총독부는 헌병·경찰뿐 아니라 정규 군대까지 동원해 강경 진압에 나섰고, 그 과정에서 대규모 체포·구금과 희생이 발생했다. 참가 규모와 피해 통계는 자료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조선총독부의 공식 기록 및 당대 보고·회고 자료 등에서 참가 인원, 사망·부상·피검자 수가 다양하게 집계된다. 또한 제암리 등 일부 지역에서는 시위 이후 보복적 성격의 살상·방화가 발생해 국제적 비난을 불러일으켰다.&lt;br /&gt;
&lt;br /&gt;
한편 일제는 국제 여론의 악화를 완화하고 향후 통치를 안정화하기 위해 통치 방식의 변화를 표방했다. 이른바 ‘문화통치’로의 전환이 제시되며 헌병경찰제의 완화, 언론·교육 정책의 조정 등이 추진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경찰력과 감시 체계를 강화하고 독립운동가 색출을 지속하는 등 식민 지배의 본질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평가도 함께 존재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ig&amp;gt;'''평가 및 의의'''&amp;lt;/big&amp;gt;===&lt;br /&gt;
----&lt;br /&gt;
3·1운동은 특정 계층에 국한되지 않고 종교계·학생·농민·상인 등 사회 전반이 참여한 대규모 민족운동으로,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국내외에 집단적으로 표출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특히 운동 과정에서 ‘비폭력’과 ‘공동 행동’의 원칙이 강조되며 거족적 항쟁의 전형을 형성했고, 일제의 식민 통치 방식과 국제 여론에 직접적인 압력을 가했다는 점이 중요하게 평가된다.&lt;br /&gt;
&lt;br /&gt;
또한 3·1운동은 독립운동의 구심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어 상하이를 중심으로 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과 독립운동 진영의 재편에 영향을 주었다. 동시에 국내에서는 민족의식의 확산과 함께 교육·언론·문화운동, 경제적 자립을 지향한 여러 사회운동이 활성화되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요약하면, 3·1운동은 즉각적인 독립 달성에는 이르지 못했더라도, 이후 독립운동의 조직화·국제화·대중화에 장기적인 동력을 제공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ig&amp;gt;'''참고문헌'''&amp;lt;/big&amp;gt;===&lt;br /&gt;
----&lt;br /&gt;
* 국사편찬위원회. 「3·1 운동」, 우리역사넷.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i400200] &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3·1운동(三一運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6772]&lt;/div&gt;</summary>
		<author><name>Jmwshye</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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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3.1%EC%9A%B4%EB%8F%99&amp;diff=66830</id>
		<title>3.1운동</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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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23T14:39:2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mwshye: &lt;/p&gt;
&lt;hr /&gt;
&lt;div&gt;===&amp;lt;big&amp;gt;'''개요'''&amp;lt;/big&amp;gt;===&lt;br /&gt;
----&lt;br /&gt;
[[파일:31운동뉴스.jpg|400px|center]]&lt;br /&gt;
1919년 3월 1일을 계기로 전개된 3·1운동은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계층이 참여한 대규모 항일 독립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한국 민족의 독립 의지를 국내외에 분명히 드러내며 국제 사회의 관심을 끌었고, 그 영향으로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25-2)|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였다. &amp;lt;/br&amp;gt;&lt;br /&gt;
또한 강압적 무단통치에 대한 전면적인 저항은 일제의 통치 방식에 변화를 촉발하여 이른바 문화통치로의 전환을 가져오는 배경이 되었으며, 민족의식과 자주 의식을 크게 고취시켜 교육·문화·산업 등 사회 전반에서 민족 역량을 강화하고 자립을 추구하는 여러 사회운동이 확산되는 출발점으로 평가된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ig&amp;gt;'''배경'''&amp;lt;/big&amp;gt;===&lt;br /&gt;
----&lt;br /&gt;
1910년 강제 병탄 이후 조선총독부는 헌병·경찰을 앞세운 무단통치로 독립운동을 강하게 탄압했고, 문화 말살과 경제적 지배를 병행해 민족적 저항 기반을 약화시키려 했다. 이에 독립운동가들은 국내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거나 중국·만주·연해주·미주 등지로 망명해 활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1차 세계대전 종전 국면과 함께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알려지면서, 국제 여론에 호소해 독립을 추진할 수 있다는 기대가 확산되었다.&lt;br /&gt;
&lt;br /&gt;
특히 해외 한인 사회는 민족자결주의를 근거로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해 한국 독립을 호소하려 했고, 상하이의 신한청년단 등은 김규식 등을 파리로 보내 외교 활동을 시도했다. 국내에는 일제의 은폐로 해당 사상이 즉각 확산되진 않았으나, 유학생·해외 동포의 움직임이 알려지며 독립운동 분위기가 점차 고조되었다. 여기에 1919년 2·8 독립선언이 도화선 역할을 하며, 국내에서도 거족적 행동을 준비하려는 흐름을 촉진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ig&amp;gt;'''전개'''&amp;lt;/big&amp;gt;===&lt;br /&gt;
----&lt;br /&gt;
3·1운동은 민족자결주의의 영향, 2·8 독립선언의 파장, 그리고 고종의 갑작스러운 서거(독살설 확산)로 고조된 민심이 결합되며 거족적 항일운동으로 구체화되었다. 운동 준비 과정에서 천도교·기독교·불교계를 중심으로 ‘대중화·일원화·비폭력’의 원칙이 정리되었고, 독립선언서 발표와 만세 시위, 독립 청원 등(국내외 여론전)이 함께 구상되었다. 최남선이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종교계 인사들이 연합해 민족대표를 구성하면서 33인이 확정되었다.&lt;br /&gt;
&lt;br /&gt;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을 진행한 뒤 경찰에 연행되었고, 같은 시각 탑골공원에는 학생과 시민이 모여 독립선언서 낭독과 만세 시위를 시작했다. 시위는 서울 도심에서 행진 형태로 확산되었으며, 이후 평양·원산 등 주요 도시를 거쳐 전국 각지로 빠르게 번져 나갔다. 전개 과정에서 장날·종교 조직·학교 네트워크·지역 간 인접 영향 등 다양한 경로로 동원이 확대되었고, 국내 운동은 만주·연해주·미주 등 해외 한인 사회의 만세 시위로도 연결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ig&amp;gt;'''결과'''&amp;lt;/big&amp;gt;===&lt;br /&gt;
----&lt;br /&gt;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자 조선총독부는 헌병·경찰뿐 아니라 정규 군대까지 동원해 강경 진압에 나섰고, 그 과정에서 대규모 체포·구금과 희생이 발생했다. 참가 규모와 피해 통계는 자료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조선총독부의 공식 기록 및 당대 보고·회고 자료 등에서 참가 인원, 사망·부상·피검자 수가 다양하게 집계된다. 또한 제암리 등 일부 지역에서는 시위 이후 보복적 성격의 살상·방화가 발생해 국제적 비난을 불러일으켰다.&lt;br /&gt;
&lt;br /&gt;
한편 일제는 국제 여론의 악화를 완화하고 향후 통치를 안정화하기 위해 통치 방식의 변화를 표방했다. 이른바 ‘문화통치’로의 전환이 제시되며 헌병경찰제의 완화, 언론·교육 정책의 조정 등이 추진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경찰력과 감시 체계를 강화하고 독립운동가 색출을 지속하는 등 식민 지배의 본질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평가도 함께 존재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ig&amp;gt;'''평가 및 의의'''&amp;lt;/big&amp;gt;===&lt;br /&gt;
----&lt;br /&gt;
3·1운동은 특정 계층에 국한되지 않고 종교계·학생·농민·상인 등 사회 전반이 참여한 대규모 민족운동으로,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국내외에 집단적으로 표출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특히 운동 과정에서 ‘비폭력’과 ‘공동 행동’의 원칙이 강조되며 거족적 항쟁의 전형을 형성했고, 일제의 식민 통치 방식과 국제 여론에 직접적인 압력을 가했다는 점이 중요하게 평가된다.&lt;br /&gt;
&lt;br /&gt;
또한 3·1운동은 독립운동의 구심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어 상하이를 중심으로 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과 독립운동 진영의 재편에 영향을 주었다. 동시에 국내에서는 민족의식의 확산과 함께 교육·언론·문화운동, 경제적 자립을 지향한 여러 사회운동이 활성화되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요약하면, 3·1운동은 즉각적인 독립 달성에는 이르지 못했더라도, 이후 독립운동의 조직화·국제화·대중화에 장기적인 동력을 제공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ig&amp;gt;'''참고문헌'''&amp;lt;/big&amp;gt;===&lt;br /&gt;
----&lt;br /&gt;
* 국사편찬위원회. 「3·1 운동」, *우리역사넷*.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i400200] &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3·1운동(三一運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6772]&lt;/div&gt;</summary>
		<author><name>Jmwshye</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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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대한민국임시정부(25-2)</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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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23T14:35:5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mwshye: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amp;lt;big&amp;gt;'''개요'''&amp;lt;/big&amp;gt;===&lt;br /&gt;
----&lt;br /&gt;
[[파일: 임시임시정부.jpg|400px|center]]&lt;br /&gt;
1919년부터 1945년까지 27년간 중국에서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된 이후 1945년 11월 김구 등이 환국할 때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다. 임시정부 수립일은 기념일 제정 시에는 4월 13일이라고 여겨 왔으나 근거 자료의 확대와 이에 대한 역사학적 분석에 따라 2019년부터 4월 11일로 바로잡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ig&amp;gt;'''수립배경'''&amp;lt;/big&amp;gt;===&lt;br /&gt;
----&lt;br /&gt;
===='''신한민보와 무형국가론'''====&lt;br /&gt;
미국에서 대한인국민회가 발행하던 신문 『신한민보』는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임시정부 수립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한일병합조약 체결을 앞둔 1910년 7월 6일 자 사설에서는 기존 정부가 이미 일본에 굴복한 상황임을 지적하며, 인민의 의지를 대표해 민족의 복리를 도모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어 병합 직후인 같은 해 9월 21일에는 자치적 법률 제정과 공법에 준하는 임시정부 설치가 시급하다는 논설을 게재하였고, 10월 5일 자에는 ‘대한인의 자치기관’이라는 글을 통해 대한인국민회가 장차 임시정부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자치 역량을 축적해야 한다는 구상을 밝혔다.&amp;lt;/br&amp;gt;&lt;br /&gt;
1911년에는 『신한민보』의 주필이던 박용만이 무형국가론을 제창하였다. 무형국가론은 국외에 거주하는 조선 민족을 하나의 무형적 국가와 정부 체제로 결집시켜 헌법을 제정하고 행정 구역과 행정기관을 설정하며, 구성원에게 권리와 의무를 부여하자는 구상이었다. 박용만은 이러한 무형국가를 운영하는 무형정부, 즉 임시정부의 기능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부가 담당해야 한다고 보았다.&lt;br /&gt;
&lt;br /&gt;
&lt;br /&gt;
===='''대동단결선언'''====&lt;br /&gt;
1910년대 초 독립운동 세력은 국내외 각지에서 개별적으로 활동하며 상호 간의 연계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이로 인해 통합적이고 효율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1917년 박은식·신채호·윤세복·조소앙·신석우·한진교·박용만 등이 참여한 ‘대동단결선언’이 발표되었다.&amp;lt;/br&amp;gt;&lt;br /&gt;
대동단결선언은 순종의 주권 포기 행위를 국민 전체에게 귀속된 것으로 해석함으로써, 국민을 주체로 한 임시정부 수립의 정당성을 논증하였다. 아울러 일제의 국권 침탈로 인해 국내에서의 주권 행사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해외에서의 주권 행사가 불가피한 선택임을 강조하였다. 이 선언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의지를 분명히 드러낸 최초의 문건으로 평가된다.&lt;br /&gt;
 &lt;br /&gt;
&lt;br /&gt;
===='''[[3.1운동]] 이전'''====&lt;br /&gt;
[[3.1운동]] 직전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는 임시정부의 성격을 지닌 ‘대한국민의회’가 준비되고 있었다. 1919년 2월 25일 니콜리스크에서는 러시아, 간도, 국내 등지에서 모인 약 130명의 독립운동 단체 대표들이 회의를 열어 대한국민의회 결성을 결의하였다. 이후 대한국민의회는 [[3.1운동]]이 진행 중이던 3월 17일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며 공식적으로 출범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3.1운동]] 이후'''====&lt;br /&gt;
[[3.1운동]]을 주도한 천도교는 1919년 3월 3일 자 『조선독립신문』을 통해 임시정부 조직과 임시 대통령 선출 계획을 알렸다. 이 과정에서 천도교 교주 손병희를 임시정부의 수반인 정도령으로, 미국에서 활동하던 이승만을 부도령으로 지명하였다.&amp;lt;/br&amp;gt;&lt;br /&gt;
이후 4월 10일 상하이에서는 임시의정원이 구성되어 정부 수립을 위한 제도적 절차가 마련되었다. 국호는 국권 회복의 의미를 담은 ‘대한’과 공화제 국가임을 명확히 드러내는 ‘민국’을 결합한 ‘대한민국’으로 결정되었다. 다음 날인 4월 11일에는 ｢대한민국임시헌장｣이 반포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공식적으로 수립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3개 임시정부의 통합으로 탄생한 '대한민국임시정부''''====&lt;br /&gt;
[[3.1운동]] 이후 국내외에서는 한성정부,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 여러 형태의 임시정부가 각각 수립되었다. 이에 상하이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은 독립운동의 중심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 정부 통합을 추진하였다.&amp;lt;/br&amp;gt;&lt;br /&gt;
통합 과정에서는 법통의 계승과 현실적인 운영 기반을 함께 고려하여, 한성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되 정부의 활동 거점은 상하이에 두는 방안이 채택되었다. 안창호의 주도로 상하이 임시정부와 대한국민의회 간의 협의가 진전되었고, 그 결과 대한국민의회는 1919년 8월 30일 해산을 결의하였다. 이후 임시의정원은 정부 체제를 통합 임시정부에 맞게 개편하고 1차 개헌을 단행하여, 1919년 9월 11일 ｢대한민국임시헌법｣을 공포함으로써 통합된 대한민국임시정부 체제를 공식적으로 출범시켰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ig&amp;gt;'''주요 활동'''&amp;lt;/big&amp;gt;===&lt;br /&gt;
----&lt;br /&gt;
임시정부 27년은 크게 상하이시대(1919~1932), 이동시대(1932~1940), 충칭시대(1940~1945)로 나눌 수 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상하이시대(1919~1932)'''====&lt;br /&gt;
상하이 시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정부 조직의 구축과 외교·군사 활동의 기초를 마련하는 데 주력하였다. 임시정부는 연통제와 교통국을 설치하여 국내와의 비밀 행정·통신망을 구축하고, 지방선전부와 특파원을 통해 독립운동 자금 모집과 선전 활동을 전개하였다. 외교적으로는 파리강화회의, 워싱턴 회의, 국제연맹 등을 무대로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고자 하였으며, 파리위원부와 구미위원부를 설치해 대미·대유럽 외교를 추진하였다. 군사적으로는 만주 지역 독립군과의 연계를 시도하고 광복군사령부와 육군주만참의부를 조직하였으나, 재정난과 국내 연락망 붕괴로 본격적인 독립전쟁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 시기 임시정부는 내부 갈등과 국민대표회의 결렬, 이승만 탄핵 등으로 심각한 위기를 겪었으나, 1932년 한인애국단의 의열 투쟁을 계기로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amp;lt;/br&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이동시대(1932~1940)'''====&lt;br /&gt;
이동 시대는 윤봉길 의거 이후 일본의 추격을 피해 임시정부가 상하이를 떠나 중국 각지를 전전한 시기로, 생존과 재정비가 핵심 과제였다. 임시정부는 항저우, 전장,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 등을 거쳐 8년간 이동하며 활동을 지속하였다. 이 시기에는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을 목표로 한 정당 통일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어 조선민족혁명당,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 등 여러 정당과 단체가 결성과 해체를 반복하였다. 그러나 통일 방식과 노선 차이로 갈등이 지속되었고, 임시정부는 한때 여당과 국무위원 다수를 상실하며 무정부 상태에 빠지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김구를 중심으로 한 세력은 임시정부를 유지하며 군사 기반과 정치적 명맥을 보존하는 데 주력하였다.&amp;lt;/br&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충칭시대(1940~1945)'''====&lt;br /&gt;
충칭 시대의 임시정부는 당·정·군 체제를 확립하고 독립 국가 수립을 위한 실질적 준비에 집중하였다. 임시정부는 1940년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여 항일 무장 투쟁의 구심을 마련하고, 1941년에는 삼균주의를 반영한 「건국강령」을 발표하여 해방 이후 국가 건설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또한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일본과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여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 의지를 분명히 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좌우 합작을 통해 임시의정원을 재편하고, 1944년 좌우 세력이 합의한 개헌으로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선포하여 연합 정부 체제를 완성하였다. 이와 함께 중국과 미국을 상대로 승인 외교를 전개하였으나 국제 정세와 미군정의 방침으로 공식 승인은 얻지 못한 채, 1945년 광복을 맞아 지도자들이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 &amp;lt;big&amp;gt;'''참고문헌'''&amp;lt;/big&amp;gt; ===&lt;br /&gt;
----&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대한민국 임시정부 (大韓民國 臨時政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5017] &lt;br /&gt;
* 독립기념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탄생」, *월간 독립기념관* (15호). [https://www.i815.or.kr/upload/kr/magazine/magazine/15/post-153.html] &lt;br /&gt;
* 국사편찬위원회. 「1919년 - 대한민국 임시 정부」, *우리역사넷*.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o400800&amp;amp;code=kc_age_40]&lt;/div&gt;</summary>
		<author><name>Jmwshye</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8C%80%ED%95%9C%EB%AF%BC%EA%B5%AD%EC%9E%84%EC%8B%9C%EC%A0%95%EB%B6%80(25-2)&amp;diff=66826</id>
		<title>대한민국임시정부(25-2)</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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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23T14:35:1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mwshye: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amp;lt;big&amp;gt;'''개요'''&amp;lt;/big&amp;gt;===&lt;br /&gt;
----&lt;br /&gt;
[[파일: 임시임시정부.jpg|400px|center]]&lt;br /&gt;
1919년부터 1945년까지 27년간 중국에서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된 이후 1945년 11월 김구 등이 환국할 때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다. 임시정부 수립일은 기념일 제정 시에는 4월 13일이라고 여겨 왔으나 근거 자료의 확대와 이에 대한 역사학적 분석에 따라 2019년부터 4월 11일로 바로잡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ig&amp;gt;'''수립배경'''&amp;lt;/big&amp;gt;===&lt;br /&gt;
----&lt;br /&gt;
===='''신한민보와 무형국가론'''====&lt;br /&gt;
미국에서 대한인국민회가 발행하던 신문 『신한민보』는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임시정부 수립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한일병합조약 체결을 앞둔 1910년 7월 6일 자 사설에서는 기존 정부가 이미 일본에 굴복한 상황임을 지적하며, 인민의 의지를 대표해 민족의 복리를 도모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어 병합 직후인 같은 해 9월 21일에는 자치적 법률 제정과 공법에 준하는 임시정부 설치가 시급하다는 논설을 게재하였고, 10월 5일 자에는 ‘대한인의 자치기관’이라는 글을 통해 대한인국민회가 장차 임시정부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자치 역량을 축적해야 한다는 구상을 밝혔다.&amp;lt;/br&amp;gt;&lt;br /&gt;
1911년에는 『신한민보』의 주필이던 박용만이 무형국가론을 제창하였다. 무형국가론은 국외에 거주하는 조선 민족을 하나의 무형적 국가와 정부 체제로 결집시켜 헌법을 제정하고 행정 구역과 행정기관을 설정하며, 구성원에게 권리와 의무를 부여하자는 구상이었다. 박용만은 이러한 무형국가를 운영하는 무형정부, 즉 임시정부의 기능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부가 담당해야 한다고 보았다.&lt;br /&gt;
&lt;br /&gt;
&lt;br /&gt;
===='''대동단결선언'''====&lt;br /&gt;
1910년대 초 독립운동 세력은 국내외 각지에서 개별적으로 활동하며 상호 간의 연계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이로 인해 통합적이고 효율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1917년 박은식·신채호·윤세복·조소앙·신석우·한진교·박용만 등이 참여한 ‘대동단결선언’이 발표되었다.&amp;lt;/br&amp;gt;&lt;br /&gt;
대동단결선언은 순종의 주권 포기 행위를 국민 전체에게 귀속된 것으로 해석함으로써, 국민을 주체로 한 임시정부 수립의 정당성을 논증하였다. 아울러 일제의 국권 침탈로 인해 국내에서의 주권 행사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해외에서의 주권 행사가 불가피한 선택임을 강조하였다. 이 선언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의지를 분명히 드러낸 최초의 문건으로 평가된다.&lt;br /&gt;
 &lt;br /&gt;
&lt;br /&gt;
===='''[[3.1운동]] 이전'''====&lt;br /&gt;
[[3·1운동]] 직전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는 임시정부의 성격을 지닌 ‘대한국민의회’가 준비되고 있었다. 1919년 2월 25일 니콜리스크에서는 러시아, 간도, 국내 등지에서 모인 약 130명의 독립운동 단체 대표들이 회의를 열어 대한국민의회 결성을 결의하였다. 이후 대한국민의회는 [[3·1운동]]이 진행 중이던 3월 17일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며 공식적으로 출범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3.1운동]] 이후'''====&lt;br /&gt;
[[3·1운동]]을 주도한 천도교는 1919년 3월 3일 자 『조선독립신문』을 통해 임시정부 조직과 임시 대통령 선출 계획을 알렸다. 이 과정에서 천도교 교주 손병희를 임시정부의 수반인 정도령으로, 미국에서 활동하던 이승만을 부도령으로 지명하였다.&amp;lt;/br&amp;gt;&lt;br /&gt;
이후 4월 10일 상하이에서는 임시의정원이 구성되어 정부 수립을 위한 제도적 절차가 마련되었다. 국호는 국권 회복의 의미를 담은 ‘대한’과 공화제 국가임을 명확히 드러내는 ‘민국’을 결합한 ‘대한민국’으로 결정되었다. 다음 날인 4월 11일에는 ｢대한민국임시헌장｣이 반포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공식적으로 수립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3개 임시정부의 통합으로 탄생한 '대한민국임시정부''''====&lt;br /&gt;
[[3·1운동]] 이후 국내외에서는 한성정부,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 여러 형태의 임시정부가 각각 수립되었다. 이에 상하이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은 독립운동의 중심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 정부 통합을 추진하였다.&amp;lt;/br&amp;gt;&lt;br /&gt;
통합 과정에서는 법통의 계승과 현실적인 운영 기반을 함께 고려하여, 한성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되 정부의 활동 거점은 상하이에 두는 방안이 채택되었다. 안창호의 주도로 상하이 임시정부와 대한국민의회 간의 협의가 진전되었고, 그 결과 대한국민의회는 1919년 8월 30일 해산을 결의하였다. 이후 임시의정원은 정부 체제를 통합 임시정부에 맞게 개편하고 1차 개헌을 단행하여, 1919년 9월 11일 ｢대한민국임시헌법｣을 공포함으로써 통합된 대한민국임시정부 체제를 공식적으로 출범시켰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ig&amp;gt;'''주요 활동'''&amp;lt;/big&amp;gt;===&lt;br /&gt;
----&lt;br /&gt;
임시정부 27년은 크게 상하이시대(1919~1932), 이동시대(1932~1940), 충칭시대(1940~1945)로 나눌 수 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상하이시대(1919~1932)'''====&lt;br /&gt;
상하이 시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정부 조직의 구축과 외교·군사 활동의 기초를 마련하는 데 주력하였다. 임시정부는 연통제와 교통국을 설치하여 국내와의 비밀 행정·통신망을 구축하고, 지방선전부와 특파원을 통해 독립운동 자금 모집과 선전 활동을 전개하였다. 외교적으로는 파리강화회의, 워싱턴 회의, 국제연맹 등을 무대로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고자 하였으며, 파리위원부와 구미위원부를 설치해 대미·대유럽 외교를 추진하였다. 군사적으로는 만주 지역 독립군과의 연계를 시도하고 광복군사령부와 육군주만참의부를 조직하였으나, 재정난과 국내 연락망 붕괴로 본격적인 독립전쟁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 시기 임시정부는 내부 갈등과 국민대표회의 결렬, 이승만 탄핵 등으로 심각한 위기를 겪었으나, 1932년 한인애국단의 의열 투쟁을 계기로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amp;lt;/br&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이동시대(1932~1940)'''====&lt;br /&gt;
이동 시대는 윤봉길 의거 이후 일본의 추격을 피해 임시정부가 상하이를 떠나 중국 각지를 전전한 시기로, 생존과 재정비가 핵심 과제였다. 임시정부는 항저우, 전장,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 등을 거쳐 8년간 이동하며 활동을 지속하였다. 이 시기에는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을 목표로 한 정당 통일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어 조선민족혁명당,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 등 여러 정당과 단체가 결성과 해체를 반복하였다. 그러나 통일 방식과 노선 차이로 갈등이 지속되었고, 임시정부는 한때 여당과 국무위원 다수를 상실하며 무정부 상태에 빠지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김구를 중심으로 한 세력은 임시정부를 유지하며 군사 기반과 정치적 명맥을 보존하는 데 주력하였다.&amp;lt;/br&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충칭시대(1940~1945)'''====&lt;br /&gt;
충칭 시대의 임시정부는 당·정·군 체제를 확립하고 독립 국가 수립을 위한 실질적 준비에 집중하였다. 임시정부는 1940년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여 항일 무장 투쟁의 구심을 마련하고, 1941년에는 삼균주의를 반영한 「건국강령」을 발표하여 해방 이후 국가 건설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또한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일본과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여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 의지를 분명히 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좌우 합작을 통해 임시의정원을 재편하고, 1944년 좌우 세력이 합의한 개헌으로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선포하여 연합 정부 체제를 완성하였다. 이와 함께 중국과 미국을 상대로 승인 외교를 전개하였으나 국제 정세와 미군정의 방침으로 공식 승인은 얻지 못한 채, 1945년 광복을 맞아 지도자들이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 &amp;lt;big&amp;gt;'''참고문헌'''&amp;lt;/big&amp;gt; ===&lt;br /&gt;
----&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대한민국 임시정부 (大韓民國 臨時政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5017] &lt;br /&gt;
* 독립기념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탄생」, *월간 독립기념관* (15호). [https://www.i815.or.kr/upload/kr/magazine/magazine/15/post-153.html] &lt;br /&gt;
* 국사편찬위원회. 「1919년 - 대한민국 임시 정부」, *우리역사넷*.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o400800&amp;amp;code=kc_age_40]&lt;/div&gt;</summary>
		<author><name>Jmwshye</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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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대한민국임시정부(25-2)</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8C%80%ED%95%9C%EB%AF%BC%EA%B5%AD%EC%9E%84%EC%8B%9C%EC%A0%95%EB%B6%80(25-2)&amp;diff=66825"/>
		<updated>2025-12-23T14:34:2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mwshye: &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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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big&amp;gt;'''개요'''&amp;lt;/big&amp;gt;===&lt;br /&gt;
----&lt;br /&gt;
[[파일: 임시임시정부.jpg|400px|center]]&lt;br /&gt;
1919년부터 1945년까지 27년간 중국에서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된 이후 1945년 11월 김구 등이 환국할 때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다. 임시정부 수립일은 기념일 제정 시에는 4월 13일이라고 여겨 왔으나 근거 자료의 확대와 이에 대한 역사학적 분석에 따라 2019년부터 4월 11일로 바로잡게 되었다.&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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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big&amp;gt;'''수립배경'''&amp;lt;/big&amp;gt;===&lt;br /&gt;
----&lt;br /&gt;
===='''신한민보와 무형국가론'''====&lt;br /&gt;
미국에서 대한인국민회가 발행하던 신문 『신한민보』는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임시정부 수립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한일병합조약 체결을 앞둔 1910년 7월 6일 자 사설에서는 기존 정부가 이미 일본에 굴복한 상황임을 지적하며, 인민의 의지를 대표해 민족의 복리를 도모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어 병합 직후인 같은 해 9월 21일에는 자치적 법률 제정과 공법에 준하는 임시정부 설치가 시급하다는 논설을 게재하였고, 10월 5일 자에는 ‘대한인의 자치기관’이라는 글을 통해 대한인국민회가 장차 임시정부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자치 역량을 축적해야 한다는 구상을 밝혔다.&amp;lt;/br&amp;gt;&lt;br /&gt;
1911년에는 『신한민보』의 주필이던 박용만이 무형국가론을 제창하였다. 무형국가론은 국외에 거주하는 조선 민족을 하나의 무형적 국가와 정부 체제로 결집시켜 헌법을 제정하고 행정 구역과 행정기관을 설정하며, 구성원에게 권리와 의무를 부여하자는 구상이었다. 박용만은 이러한 무형국가를 운영하는 무형정부, 즉 임시정부의 기능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부가 담당해야 한다고 보았다.&lt;br /&gt;
&lt;br /&gt;
&lt;br /&gt;
===='''대동단결선언'''====&lt;br /&gt;
1910년대 초 독립운동 세력은 국내외 각지에서 개별적으로 활동하며 상호 간의 연계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이로 인해 통합적이고 효율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1917년 박은식·신채호·윤세복·조소앙·신석우·한진교·박용만 등이 참여한 ‘대동단결선언’이 발표되었다.&amp;lt;/br&amp;gt;&lt;br /&gt;
대동단결선언은 순종의 주권 포기 행위를 국민 전체에게 귀속된 것으로 해석함으로써, 국민을 주체로 한 임시정부 수립의 정당성을 논증하였다. 아울러 일제의 국권 침탈로 인해 국내에서의 주권 행사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해외에서의 주권 행사가 불가피한 선택임을 강조하였다. 이 선언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의지를 분명히 드러낸 최초의 문건으로 평가된다.&lt;br /&gt;
 &lt;br /&gt;
&lt;br /&gt;
===='''[[3.1운동]] 이전'''====&lt;br /&gt;
3·1운동 직전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는 임시정부의 성격을 지닌 ‘대한국민의회’가 준비되고 있었다. 1919년 2월 25일 니콜리스크에서는 러시아, 간도, 국내 등지에서 모인 약 130명의 독립운동 단체 대표들이 회의를 열어 대한국민의회 결성을 결의하였다. 이후 대한국민의회는 3·1운동이 진행 중이던 3월 17일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며 공식적으로 출범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3.1운동]] 이후'''====&lt;br /&gt;
3·1운동을 주도한 천도교는 1919년 3월 3일 자 『조선독립신문』을 통해 임시정부 조직과 임시 대통령 선출 계획을 알렸다. 이 과정에서 천도교 교주 손병희를 임시정부의 수반인 정도령으로, 미국에서 활동하던 이승만을 부도령으로 지명하였다.&amp;lt;/br&amp;gt;&lt;br /&gt;
이후 4월 10일 상하이에서는 임시의정원이 구성되어 정부 수립을 위한 제도적 절차가 마련되었다. 국호는 국권 회복의 의미를 담은 ‘대한’과 공화제 국가임을 명확히 드러내는 ‘민국’을 결합한 ‘대한민국’으로 결정되었다. 다음 날인 4월 11일에는 ｢대한민국임시헌장｣이 반포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공식적으로 수립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3개 임시정부의 통합으로 탄생한 '대한민국임시정부''''====&lt;br /&gt;
3·1운동 이후 국내외에서는 한성정부,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 여러 형태의 임시정부가 각각 수립되었다. 이에 상하이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은 독립운동의 중심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 정부 통합을 추진하였다.&amp;lt;/br&amp;gt;&lt;br /&gt;
통합 과정에서는 법통의 계승과 현실적인 운영 기반을 함께 고려하여, 한성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되 정부의 활동 거점은 상하이에 두는 방안이 채택되었다. 안창호의 주도로 상하이 임시정부와 대한국민의회 간의 협의가 진전되었고, 그 결과 대한국민의회는 1919년 8월 30일 해산을 결의하였다. 이후 임시의정원은 정부 체제를 통합 임시정부에 맞게 개편하고 1차 개헌을 단행하여, 1919년 9월 11일 ｢대한민국임시헌법｣을 공포함으로써 통합된 대한민국임시정부 체제를 공식적으로 출범시켰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ig&amp;gt;'''주요 활동'''&amp;lt;/big&amp;gt;===&lt;br /&gt;
----&lt;br /&gt;
임시정부 27년은 크게 상하이시대(1919~1932), 이동시대(1932~1940), 충칭시대(1940~1945)로 나눌 수 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상하이시대(1919~1932)'''====&lt;br /&gt;
상하이 시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정부 조직의 구축과 외교·군사 활동의 기초를 마련하는 데 주력하였다. 임시정부는 연통제와 교통국을 설치하여 국내와의 비밀 행정·통신망을 구축하고, 지방선전부와 특파원을 통해 독립운동 자금 모집과 선전 활동을 전개하였다. 외교적으로는 파리강화회의, 워싱턴 회의, 국제연맹 등을 무대로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고자 하였으며, 파리위원부와 구미위원부를 설치해 대미·대유럽 외교를 추진하였다. 군사적으로는 만주 지역 독립군과의 연계를 시도하고 광복군사령부와 육군주만참의부를 조직하였으나, 재정난과 국내 연락망 붕괴로 본격적인 독립전쟁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 시기 임시정부는 내부 갈등과 국민대표회의 결렬, 이승만 탄핵 등으로 심각한 위기를 겪었으나, 1932년 한인애국단의 의열 투쟁을 계기로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amp;lt;/br&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이동시대(1932~1940)'''====&lt;br /&gt;
이동 시대는 윤봉길 의거 이후 일본의 추격을 피해 임시정부가 상하이를 떠나 중국 각지를 전전한 시기로, 생존과 재정비가 핵심 과제였다. 임시정부는 항저우, 전장,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 등을 거쳐 8년간 이동하며 활동을 지속하였다. 이 시기에는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을 목표로 한 정당 통일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어 조선민족혁명당,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 등 여러 정당과 단체가 결성과 해체를 반복하였다. 그러나 통일 방식과 노선 차이로 갈등이 지속되었고, 임시정부는 한때 여당과 국무위원 다수를 상실하며 무정부 상태에 빠지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김구를 중심으로 한 세력은 임시정부를 유지하며 군사 기반과 정치적 명맥을 보존하는 데 주력하였다.&amp;lt;/br&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충칭시대(1940~1945)'''====&lt;br /&gt;
충칭 시대의 임시정부는 당·정·군 체제를 확립하고 독립 국가 수립을 위한 실질적 준비에 집중하였다. 임시정부는 1940년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여 항일 무장 투쟁의 구심을 마련하고, 1941년에는 삼균주의를 반영한 「건국강령」을 발표하여 해방 이후 국가 건설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또한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일본과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여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 의지를 분명히 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좌우 합작을 통해 임시의정원을 재편하고, 1944년 좌우 세력이 합의한 개헌으로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선포하여 연합 정부 체제를 완성하였다. 이와 함께 중국과 미국을 상대로 승인 외교를 전개하였으나 국제 정세와 미군정의 방침으로 공식 승인은 얻지 못한 채, 1945년 광복을 맞아 지도자들이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 &amp;lt;big&amp;gt;'''참고문헌'''&amp;lt;/big&amp;gt; ===&lt;br /&gt;
----&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대한민국 임시정부 (大韓民國 臨時政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5017] &lt;br /&gt;
* 독립기념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탄생」, *월간 독립기념관* (15호). [https://www.i815.or.kr/upload/kr/magazine/magazine/15/post-153.html] &lt;br /&gt;
* 국사편찬위원회. 「1919년 - 대한민국 임시 정부」, *우리역사넷*.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o400800&amp;amp;code=kc_age_40]&lt;/div&gt;</summary>
		<author><name>Jmwshye</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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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문장(文章)</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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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23T14:27:2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mwshye: &lt;/p&gt;
&lt;h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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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lass=&amp;quot;metadata&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f9f9f9; width:300px; margin: 0 0 10px 10px; border:1px solid #aaa; float:right; clear:right;&amp;quot; cellspacing=&amp;quot;5&amp;quo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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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amp;quot;2&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 | [[파일:문장.jpg|250px|가운데]] &amp;lt;br /&amp;gt; &amp;lt;span style=&amp;quot;font-size:90%;&amp;quot;&amp;gt;{{{상징설명|}}}&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창간''' || 1939년 2월&lt;br /&gt;
|-&lt;br /&gt;
|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폐간''' || 1941년 4월&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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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간행주기''' || 1개월&lt;br /&gt;
|-&lt;br /&gt;
|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총호수''' || 26호&lt;br /&gt;
|-&lt;br /&gt;
|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간행자''' || 김연만(金鍊萬)&lt;br /&gt;
|-&lt;br /&gt;
|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주간(主幹)''' || 이태준(李泰俊)&lt;br /&gt;
|-&lt;br /&gt;
|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제자(題字)''' || 김정희(金正喜)&lt;br /&gt;
|-&lt;br /&gt;
|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권두화(卷頭畫)''' || 김용준(金溶俊)&lt;br /&gt;
|-&lt;br /&gt;
|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표지화(表紙畫)''' || 길진섭(吉鎭燮)&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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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big&amp;gt;'''개요'''&amp;lt;/big&amp;gt;===&lt;br /&gt;
----&lt;br /&gt;
소설가 이태준(李泰俊)이 경북 김천 출신의 부호(富豪) 김연만(金鍊萬)에게 권유하여 1939년 창간한 식민지 후반기의 대표적 문학 잡지&amp;lt;br /&amp;gt;&lt;br /&gt;
이태준이 주간(主幹)을 맡아 소설 편집에 관여했으며, 시에 [[정지용(鄭芝溶)|정지용]], 시조 및 고전 분야에 이병기(李秉岐)가 편집위원으로 참여해 발표 작품 및 글의 선정, 신인 추천에 있어 돋보이는 결과를 냈다. 또한, 권두화(卷頭畫)·표지화(表紙畫)는 당대 미술계의 한 축을 이룬 김용준(金瑢俊)과 길진섭(吉鎭燮)이 맡았다.&amp;lt;br /&amp;gt;&lt;br /&gt;
‘조선적인 것’, ‘조선적 전통’을 발견하려는 지향을 드러냈다. 고전 관련 글들이 다수 게재되었지만, 『문장』 전체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문예 관련 글들이다. 『문장』은 개방성을 원칙으로 삼았지만, 작품성을 최우선적 기준으로 삼아 문학 작품을 선별 게재했으며 추천제를 두어 신인을 발굴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ig&amp;gt;'''창간 경위'''&amp;lt;/big&amp;gt;===&lt;br /&gt;
----&lt;br /&gt;
'''1939년 2월''' 창간&amp;lt;br /&amp;gt;&lt;br /&gt;
'''1939년 7월''' 임시 중간호 발행&amp;lt;br /&amp;gt;&lt;br /&gt;
'''1940년 6월, 8월''' 용지난으로 휴간&amp;lt;br /&amp;gt;&lt;br /&gt;
'''1941년''' 일제 당국의 『문장』 · 『인문평론』 · 『신세기』 병합과 함께 ‘일선어(日鮮語)를 반분하여 황도정신(皇道精神) 앙양에 적극 협력하라.’는 데 불응하고 통권 25호로 폐간&amp;lt;br /&amp;gt;&lt;br /&gt;
'''1945년 8월''' 해방&amp;lt;br /&amp;gt;&lt;br /&gt;
'''1948년 10월''' [[정지용(鄭芝溶)|정지용]]이 속간하였으나, 제1호로 종간&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ig&amp;gt;'''구성 및 내용'''&amp;lt;/big&amp;gt;===&lt;br /&gt;
----&lt;br /&gt;
『문장』은 학술적 탐구, 정전의 제시, 창작적 실천 등을 통해 조선의 문학적 · 문화적 전통을 확립하고 재생하려 시도했다.&amp;lt;br /&amp;gt; 문장은 시·소설의 창작만이 아니라 우리 고전문학의 주해(註解)와 연구논문, 희귀자료를 발굴 및 게재했다.&amp;lt;br /&amp;gt;『문장』에 실린 논문 및 자료들 중 이희승(李熙昇)의 「조선문학연구초(朝鮮文學硏究抄)」(총 3호, 1939.4.), 이태준의 「문장강화(文章講話)」(창간호∼총 9호), 송석하(宋錫夏)의 「봉산가면극각본( 鳳山假面劇脚本)」(총 17호, 1940.7.), 조윤제(趙潤濟)의 「조선소설사개요(朝鮮小說史槪要)」(총 18호, 1940.9.), 손진태(孫晉泰)의 「무격(巫覡)의 신가(神歌)」(총 18호), 조남령(曺南嶺)의 「현대시조론(現代時調論)」(총 19호, 1940.10.), 이병기(李秉岐)의 「조선어문학명저해제(朝鮮語文學名著解題)」(총 19호), 양주동(梁柱東)의 「사뇌가석주서설(詞腦歌釋注序說)」(총 21호, 1940.12.), 정인승(鄭寅承)의 「고본훈민정음(古本訓民正音)의 연구」(총 21호, 1940.3.), 조윤제의 「설화문학고(說話文學考)」(총 24호, 1941.3.), 최현배(崔鉉培)의 「한글의 비교 연구」(총 25호, 1941.4.) 및 자료 「춘향전집」(고사본 · 고본 · 고대본, 총 21∼25호) 등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amp;lt;br /&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문장』에는 고전 관련 글들이 다수 게재되었지만, 『문장』 전체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문예 관련 글들이었다. 『문장』은 개방성을 원칙으로 삼았지만, 작품성을 최우선적 기준으로 삼아 문학 작품을 선별 게재했다. 문장에 발표된 작품으로는 소설 182편, 국문학 35편, 시 172편, 시조 25편, 평론·학예 129편, 수필 187편, 기타 172편 등이 있다. &amp;lt;br /&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추천제'''를 두어 신인을 발굴하였으며 그 제도의 정착 과정에서 심사자였던 이병기, [[정지용(鄭芝溶)|정지용]], 이태준이 획득한 대중적 · 문학적 권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lt;br /&gt;
추천된 신인으로는 &amp;lt;br /&amp;gt;&lt;br /&gt;
'''소설'''에 최태응(崔泰應) · 곽하신(郭夏信) · 임옥인(林玉仁) · 지하련(池河蓮) · 정진엽(鄭鎭葉) · 한병각(韓柄珏) · 선진수(宣鎭秀) · 유운경(劉雲卿) · 허민(許民) · 임서하(任西河)&amp;lt;br /&amp;gt;&lt;br /&gt;
'''시'''에 이한직(李漢稷) · 김종한(金鍾漢) · 박남수(朴南秀) · 박두진(朴斗鎭) · 박목월(朴木月) · 조지훈(趙芝薰) · 박일연(朴一淵) · 조정순(趙貞順) · 최남령(崔嵐嶺) · 허민(許民) · 황민(黃民)&amp;lt;br /&amp;gt;&lt;br /&gt;
'''시조'''에 조남령(曺南嶺) · 김영기(金永起) · 김상옥(金相沃) · 이호우(李鎬雨) · 장응두(張應斗) · 오신혜(吳信惠)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ig&amp;gt;의의 및 평가&amp;lt;/big&amp;gt;'''===&lt;br /&gt;
----&lt;br /&gt;
『인문평론』과 『문장』은 둘 다 식민지 후반기에 발표되었기에 여러 지점에서 비교 대상이 되고 있다. 『인문평론』이 전향 지식인의 친서구적 경향을 드러냈다면 『문장』은 친한국적, 친동양적인 전통적 미학주의를 드러냈다는 시각은 기존의 문학사 서술에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lt;br /&gt;
2000년대 이후에는 『문장』이 『인문평론』과 달리 ‘서양의 근대'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지만, ‘동양(일본)’이라는 또 다른 보편과의 연관 관계 속에서 조선적 전통의 특수성을 탐색하려고 했다는 관점 또한 발견된다. 이와 달리 『문장』 역시 『인문평론』과 마찬가지로 반근대적 전통주의, 모더니즘의 토착화 경향, 총동원 체제의 협력 담론으로서의 ‘동양론’이 모호하게 뒤섞인 문화 지평 위에서 간행되고 있음을 지적한 관점 또한 나타나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 &amp;lt;big&amp;gt;'''참고문헌'''&amp;lt;/big&amp;gt; ===&lt;br /&gt;
----&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문장(文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9646]&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문장파(文章派)」,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0734]&lt;/div&gt;</summary>
		<author><name>Jmwshye</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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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문장(文章)</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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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23T14:26:2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mwshye: &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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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colspan=&amp;quot;2&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5a4632; color:#ffffff; font-size:120%; text-align:center; padding:5px;&amp;quot; | '''문장(文章)'''&lt;br /&gt;
|-&lt;br /&gt;
| colspan=&amp;quot;2&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 | [[파일:문장.jpg|250px|가운데]] &amp;lt;br /&amp;gt; &amp;lt;span style=&amp;quot;font-size:90%;&amp;quot;&amp;gt;{{{상징설명|}}}&amp;lt;/span&amp;g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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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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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lt;br /&gt;
----&lt;br /&gt;
소설가 이태준(李泰俊)이 경북 김천 출신의 부호(富豪) 김연만(金鍊萬)에게 권유하여 1939년 창간한 식민지 후반기의 대표적 문학 잡지&amp;lt;br /&amp;gt;&lt;br /&gt;
이태준이 주간(主幹)을 맡아 소설 편집에 관여했으며, 시에 [[정지용(鄭芝溶)|정지용]], 시조 및 고전 분야에 이병기(李秉岐)가 편집위원으로 참여해 발표 작품 및 글의 선정, 신인 추천에 있어 돋보이는 결과를 냈다. 또한, 권두화(卷頭畫)·표지화(表紙畫)는 당대 미술계의 한 축을 이룬 김용준(金瑢俊)과 길진섭(吉鎭燮)이 맡았다.&amp;lt;br /&amp;gt;&lt;br /&gt;
‘조선적인 것’, ‘조선적 전통’을 발견하려는 지향을 드러냈다. 고전 관련 글들이 다수 게재되었지만, 『문장』 전체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문예 관련 글들이다. 『문장』은 개방성을 원칙으로 삼았지만, 작품성을 최우선적 기준으로 삼아 문학 작품을 선별 게재했으며 추천제를 두어 신인을 발굴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창간 경위===&lt;br /&gt;
----&lt;br /&gt;
'''1939년 2월''' 창간&amp;lt;br /&amp;gt;&lt;br /&gt;
'''1939년 7월''' 임시 중간호 발행&amp;lt;br /&amp;gt;&lt;br /&gt;
'''1940년 6월, 8월''' 용지난으로 휴간&amp;lt;br /&amp;gt;&lt;br /&gt;
'''1941년''' 일제 당국의 『문장』 · 『인문평론』 · 『신세기』 병합과 함께 ‘일선어(日鮮語)를 반분하여 황도정신(皇道精神) 앙양에 적극 협력하라.’는 데 불응하고 통권 25호로 폐간&amp;lt;br /&amp;gt;&lt;br /&gt;
'''1945년 8월''' 해방&amp;lt;br /&amp;gt;&lt;br /&gt;
'''1948년 10월''' [[정지용(鄭芝溶)|정지용]]이 속간하였으나, 제1호로 종간&lt;br /&gt;
&lt;br /&gt;
&lt;br /&gt;
===구성 및 내용===&lt;br /&gt;
----&lt;br /&gt;
『문장』은 학술적 탐구, 정전의 제시, 창작적 실천 등을 통해 조선의 문학적 · 문화적 전통을 확립하고 재생하려 시도했다.&amp;lt;br /&amp;gt; 문장은 시·소설의 창작만이 아니라 우리 고전문학의 주해(註解)와 연구논문, 희귀자료를 발굴 및 게재했다.&amp;lt;br /&amp;gt;『문장』에 실린 논문 및 자료들 중 이희승(李熙昇)의 「조선문학연구초(朝鮮文學硏究抄)」(총 3호, 1939.4.), 이태준의 「문장강화(文章講話)」(창간호∼총 9호), 송석하(宋錫夏)의 「봉산가면극각본( 鳳山假面劇脚本)」(총 17호, 1940.7.), 조윤제(趙潤濟)의 「조선소설사개요(朝鮮小說史槪要)」(총 18호, 1940.9.), 손진태(孫晉泰)의 「무격(巫覡)의 신가(神歌)」(총 18호), 조남령(曺南嶺)의 「현대시조론(現代時調論)」(총 19호, 1940.10.), 이병기(李秉岐)의 「조선어문학명저해제(朝鮮語文學名著解題)」(총 19호), 양주동(梁柱東)의 「사뇌가석주서설(詞腦歌釋注序說)」(총 21호, 1940.12.), 정인승(鄭寅承)의 「고본훈민정음(古本訓民正音)의 연구」(총 21호, 1940.3.), 조윤제의 「설화문학고(說話文學考)」(총 24호, 1941.3.), 최현배(崔鉉培)의 「한글의 비교 연구」(총 25호, 1941.4.) 및 자료 「춘향전집」(고사본 · 고본 · 고대본, 총 21∼25호) 등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amp;lt;br /&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문장』에는 고전 관련 글들이 다수 게재되었지만, 『문장』 전체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문예 관련 글들이었다. 『문장』은 개방성을 원칙으로 삼았지만, 작품성을 최우선적 기준으로 삼아 문학 작품을 선별 게재했다. 문장에 발표된 작품으로는 소설 182편, 국문학 35편, 시 172편, 시조 25편, 평론·학예 129편, 수필 187편, 기타 172편 등이 있다. &amp;lt;br /&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추천제'''를 두어 신인을 발굴하였으며 그 제도의 정착 과정에서 심사자였던 이병기, [[정지용(鄭芝溶)|정지용]], 이태준이 획득한 대중적 · 문학적 권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lt;br /&gt;
추천된 신인으로는 &amp;lt;br /&amp;gt;&lt;br /&gt;
'''소설'''에 최태응(崔泰應) · 곽하신(郭夏信) · 임옥인(林玉仁) · 지하련(池河蓮) · 정진엽(鄭鎭葉) · 한병각(韓柄珏) · 선진수(宣鎭秀) · 유운경(劉雲卿) · 허민(許民) · 임서하(任西河)&amp;lt;br /&amp;gt;&lt;br /&gt;
'''시'''에 이한직(李漢稷) · 김종한(金鍾漢) · 박남수(朴南秀) · 박두진(朴斗鎭) · 박목월(朴木月) · 조지훈(趙芝薰) · 박일연(朴一淵) · 조정순(趙貞順) · 최남령(崔嵐嶺) · 허민(許民) · 황민(黃民)&amp;lt;br /&amp;gt;&lt;br /&gt;
'''시조'''에 조남령(曺南嶺) · 김영기(金永起) · 김상옥(金相沃) · 이호우(李鎬雨) · 장응두(張應斗) · 오신혜(吳信惠)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의의 및 평가===&lt;br /&gt;
----&lt;br /&gt;
『인문평론』과 『문장』은 둘 다 식민지 후반기에 발표되었기에 여러 지점에서 비교 대상이 되고 있다. 『인문평론』이 전향 지식인의 친서구적 경향을 드러냈다면 『문장』은 친한국적, 친동양적인 전통적 미학주의를 드러냈다는 시각은 기존의 문학사 서술에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lt;br /&gt;
2000년대 이후에는 『문장』이 『인문평론』과 달리 ‘서양의 근대'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지만, ‘동양(일본)’이라는 또 다른 보편과의 연관 관계 속에서 조선적 전통의 특수성을 탐색하려고 했다는 관점 또한 발견된다. 이와 달리 『문장』 역시 『인문평론』과 마찬가지로 반근대적 전통주의, 모더니즘의 토착화 경향, 총동원 체제의 협력 담론으로서의 ‘동양론’이 모호하게 뒤섞인 문화 지평 위에서 간행되고 있음을 지적한 관점 또한 나타나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 참고문헌 ===&lt;br /&gt;
----&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문장(文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9646]&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문장파(文章派)」,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0734]&lt;/div&gt;</summary>
		<author><name>Jmwshye</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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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문장(文章)</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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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23T14:26:1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mwshye: /* 구성 및 내용 */&lt;/p&gt;
&lt;h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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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colspan=&amp;quot;2&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5a4632; color:#ffffff; font-size:120%; text-align:center; padding:5px;&amp;quot; | '''문장(文章)'''&lt;br /&gt;
|-&lt;br /&gt;
| colspan=&amp;quot;2&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 | [[파일:문장.jpg|250px|가운데]] &amp;lt;br /&amp;gt; &amp;lt;span style=&amp;quot;font-size:90%;&amp;quot;&amp;gt;{{{상징설명|}}}&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창간''' || 1939년 2월&lt;br /&gt;
|-&lt;br /&gt;
|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폐간''' || 1941년 4월&lt;br /&gt;
|-&lt;br /&gt;
|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간행주기''' || 1개월&lt;br /&gt;
|-&lt;br /&gt;
|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총호수''' || 26호&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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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주간(主幹)''' || 이태준(李泰俊)&lt;br /&gt;
|-&lt;br /&gt;
|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제자(題字)''' || 김정희(金正喜)&lt;br /&gt;
|-&lt;br /&gt;
|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권두화(卷頭畫)''' || 김용준(金溶俊)&lt;br /&gt;
|-&lt;br /&gt;
|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표지화(表紙畫)''' || 길진섭(吉鎭燮)&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onlyinclude&amp;gt;&lt;br /&gt;
&lt;br /&gt;
&lt;br /&gt;
===개요===&lt;br /&gt;
----&lt;br /&gt;
소설가 이태준(李泰俊)이 경북 김천 출신의 부호(富豪) 김연만(金鍊萬)에게 권유하여 1939년 창간한 식민지 후반기의 대표적 문학 잡지&amp;lt;br /&amp;gt;&lt;br /&gt;
이태준이 주간(主幹)을 맡아 소설 편집에 관여했으며, 시에 [[정지용(鄭芝溶)|정지용]], 시조 및 고전 분야에 이병기(李秉岐)가 편집위원으로 참여해 발표 작품 및 글의 선정, 신인 추천에 있어 돋보이는 결과를 냈다. 또한, 권두화(卷頭畫)·표지화(表紙畫)는 당대 미술계의 한 축을 이룬 김용준(金瑢俊)과 길진섭(吉鎭燮)이 맡았다.&amp;lt;br /&amp;gt;&lt;br /&gt;
‘조선적인 것’, ‘조선적 전통’을 발견하려는 지향을 드러냈다. 고전 관련 글들이 다수 게재되었지만, 『문장』 전체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문예 관련 글들이다. 『문장』은 개방성을 원칙으로 삼았지만, 작품성을 최우선적 기준으로 삼아 문학 작품을 선별 게재했으며 추천제를 두어 신인을 발굴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창간 경위===&lt;br /&gt;
----&lt;br /&gt;
'''1939년 2월''' 창간&amp;lt;br /&amp;gt;&lt;br /&gt;
'''1939년 7월''' 임시 중간호 발행&amp;lt;br /&amp;gt;&lt;br /&gt;
'''1940년 6월, 8월''' 용지난으로 휴간&amp;lt;br /&amp;gt;&lt;br /&gt;
'''1941년''' 일제 당국의 『문장』 · 『인문평론』 · 『신세기』 병합과 함께 ‘일선어(日鮮語)를 반분하여 황도정신(皇道精神) 앙양에 적극 협력하라.’는 데 불응하고 통권 25호로 폐간&amp;lt;br /&amp;gt;&lt;br /&gt;
'''1945년 8월''' 해방&amp;lt;br /&amp;gt;&lt;br /&gt;
'''1948년 10월''' [[정지용(鄭芝溶)|정지용]]이 속간하였으나, 제1호로 종간&lt;br /&gt;
&lt;br /&gt;
&lt;br /&gt;
===구성 및 내용===&lt;br /&gt;
----&lt;br /&gt;
『문장』은 학술적 탐구, 정전의 제시, 창작적 실천 등을 통해 조선의 문학적 · 문화적 전통을 확립하고 재생하려 시도했다.&amp;lt;br /&amp;gt; 문장은 시·소설의 창작만이 아니라 우리 고전문학의 주해(註解)와 연구논문, 희귀자료를 발굴 및 게재했다.&amp;lt;br /&amp;gt;『문장』에 실린 논문 및 자료들 중 이희승(李熙昇)의 「조선문학연구초(朝鮮文學硏究抄)」(총 3호, 1939.4.), 이태준의 「문장강화(文章講話)」(창간호∼총 9호), 송석하(宋錫夏)의 「봉산가면극각본( 鳳山假面劇脚本)」(총 17호, 1940.7.), 조윤제(趙潤濟)의 「조선소설사개요(朝鮮小說史槪要)」(총 18호, 1940.9.), 손진태(孫晉泰)의 「무격(巫覡)의 신가(神歌)」(총 18호), 조남령(曺南嶺)의 「현대시조론(現代時調論)」(총 19호, 1940.10.), 이병기(李秉岐)의 「조선어문학명저해제(朝鮮語文學名著解題)」(총 19호), 양주동(梁柱東)의 「사뇌가석주서설(詞腦歌釋注序說)」(총 21호, 1940.12.), 정인승(鄭寅承)의 「고본훈민정음(古本訓民正音)의 연구」(총 21호, 1940.3.), 조윤제의 「설화문학고(說話文學考)」(총 24호, 1941.3.), 최현배(崔鉉培)의 「한글의 비교 연구」(총 25호, 1941.4.) 및 자료 「춘향전집」(고사본 · 고본 · 고대본, 총 21∼25호) 등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amp;lt;br /&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문장』에는 고전 관련 글들이 다수 게재되었지만, 『문장』 전체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문예 관련 글들이었다. 『문장』은 개방성을 원칙으로 삼았지만, 작품성을 최우선적 기준으로 삼아 문학 작품을 선별 게재했다. 문장에 발표된 작품으로는 소설 182편, 국문학 35편, 시 172편, 시조 25편, 평론·학예 129편, 수필 187편, 기타 172편 등이 있다. &amp;lt;br /&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추천제'''를 두어 신인을 발굴하였으며 그 제도의 정착 과정에서 심사자였던 이병기, [[정지용(鄭芝溶)|정지용]], 이태준이 획득한 대중적 · 문학적 권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lt;br /&gt;
추천된 신인으로는 &amp;lt;br /&amp;gt;&lt;br /&gt;
'''소설'''에 최태응(崔泰應) · 곽하신(郭夏信) · 임옥인(林玉仁) · 지하련(池河蓮) · 정진엽(鄭鎭葉) · 한병각(韓柄珏) · 선진수(宣鎭秀) · 유운경(劉雲卿) · 허민(許民) · 임서하(任西河)&amp;lt;br /&amp;gt;&lt;br /&gt;
'''시'''에 이한직(李漢稷) · 김종한(金鍾漢) · 박남수(朴南秀) · 박두진(朴斗鎭) · 박목월(朴木月) · 조지훈(趙芝薰) · 박일연(朴一淵) · 조정순(趙貞順) · 최남령(崔嵐嶺) · 허민(許民) · 황민(黃民)&amp;lt;br /&amp;gt;&lt;br /&gt;
'''시조'''에 조남령(曺南嶺) · 김영기(金永起) · 김상옥(金相沃) · 이호우(李鎬雨) · 장응두(張應斗) · 오신혜(吳信惠)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의의 및 평가===&lt;br /&gt;
----&lt;br /&gt;
『인문평론』과 『문장』은 둘 다 식민지 후반기에 발표되었기에 여러 지점에서 비교 대상이 되고 있다. 『인문평론』이 전향 지식인의 친서구적 경향을 드러냈다면 『문장』은 친한국적, 친동양적인 전통적 미학주의를 드러냈다는 시각은 기존의 문학사 서술에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lt;br /&gt;
2000년대 이후에는 『문장』이 『인문평론』과 달리 ‘서양의 근대'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지만, ‘동양(일본)’이라는 또 다른 보편과의 연관 관계 속에서 조선적 전통의 특수성을 탐색하려고 했다는 관점 또한 발견된다. 이와 달리 『문장』 역시 『인문평론』과 마찬가지로 반근대적 전통주의, 모더니즘의 토착화 경향, 총동원 체제의 협력 담론으로서의 ‘동양론’이 모호하게 뒤섞인 문화 지평 위에서 간행되고 있음을 지적한 관점 또한 나타나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 참고문헌 ===&lt;br /&gt;
----&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문장(文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9646]&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문장파(文章派)」,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0734]&lt;/div&gt;</summary>
		<author><name>Jmwshye</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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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문장(文章)</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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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23T14:25:4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mwshye: &lt;/p&gt;
&lt;h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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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colspan=&amp;quot;2&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5a4632; color:#ffffff; font-size:120%; text-align:center; padding:5px;&amp;quot; | '''문장(文章)'''&lt;br /&gt;
|-&lt;br /&gt;
| colspan=&amp;quot;2&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 | [[파일:문장.jpg|250px|가운데]] &amp;lt;br /&amp;gt; &amp;lt;span style=&amp;quot;font-size:90%;&amp;quot;&amp;gt;{{{상징설명|}}}&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창간''' || 1939년 2월&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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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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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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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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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lt;br /&gt;
===개요===&lt;br /&gt;
----&lt;br /&gt;
소설가 이태준(李泰俊)이 경북 김천 출신의 부호(富豪) 김연만(金鍊萬)에게 권유하여 1939년 창간한 식민지 후반기의 대표적 문학 잡지&amp;lt;br /&amp;gt;&lt;br /&gt;
이태준이 주간(主幹)을 맡아 소설 편집에 관여했으며, 시에 [[정지용(鄭芝溶)|정지용]], 시조 및 고전 분야에 이병기(李秉岐)가 편집위원으로 참여해 발표 작품 및 글의 선정, 신인 추천에 있어 돋보이는 결과를 냈다. 또한, 권두화(卷頭畫)·표지화(表紙畫)는 당대 미술계의 한 축을 이룬 김용준(金瑢俊)과 길진섭(吉鎭燮)이 맡았다.&amp;lt;br /&amp;gt;&lt;br /&gt;
‘조선적인 것’, ‘조선적 전통’을 발견하려는 지향을 드러냈다. 고전 관련 글들이 다수 게재되었지만, 『문장』 전체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문예 관련 글들이다. 『문장』은 개방성을 원칙으로 삼았지만, 작품성을 최우선적 기준으로 삼아 문학 작품을 선별 게재했으며 추천제를 두어 신인을 발굴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창간 경위===&lt;br /&gt;
----&lt;br /&gt;
'''1939년 2월''' 창간&amp;lt;br /&amp;gt;&lt;br /&gt;
'''1939년 7월''' 임시 중간호 발행&amp;lt;br /&amp;gt;&lt;br /&gt;
'''1940년 6월, 8월''' 용지난으로 휴간&amp;lt;br /&amp;gt;&lt;br /&gt;
'''1941년''' 일제 당국의 『문장』 · 『인문평론』 · 『신세기』 병합과 함께 ‘일선어(日鮮語)를 반분하여 황도정신(皇道精神) 앙양에 적극 협력하라.’는 데 불응하고 통권 25호로 폐간&amp;lt;br /&amp;gt;&lt;br /&gt;
'''1945년 8월''' 해방&amp;lt;br /&amp;gt;&lt;br /&gt;
'''1948년 10월''' [[정지용(鄭芝溶)|정지용]]이 속간하였으나, 제1호로 종간&lt;br /&gt;
&lt;br /&gt;
&lt;br /&gt;
===구성 및 내용===&lt;br /&gt;
----&lt;br /&gt;
『문장』은 학술적 탐구, 정전의 제시, 창작적 실천 등을 통해 조선의 문학적 · 문화적 전통을 확립하고 재생하려 시도했다.&amp;lt;br /&amp;gt; 문장은 시·소설의 창작만이 아니라 우리 고전문학의 주해(註解)와 연구논문, 희귀자료를 발굴 및 게재했다.&amp;lt;br /&amp;gt;『문장』에 실린 논문 및 자료들 중 이희승(李熙昇)의 「조선문학연구초(朝鮮文學硏究抄)」(총 3호, 1939.4.), 이태준의 「문장강화(文章講話)」(창간호∼총 9호), 송석하(宋錫夏)의 「봉산가면극각본( 鳳山假面劇脚本)」(총 17호, 1940.7.), 조윤제(趙潤濟)의 「조선소설사개요(朝鮮小說史槪要)」(총 18호, 1940.9.), 손진태(孫晉泰)의 「무격(巫覡)의 신가(神歌)」(총 18호), 조남령(曺南嶺)의 「현대시조론(現代時調論)」(총 19호, 1940.10.), 이병기(李秉岐)의 「조선어문학명저해제(朝鮮語文學名著解題)」(총 19호), 양주동(梁柱東)의 「사뇌가석주서설(詞腦歌釋注序說)」(총 21호, 1940.12.), 정인승(鄭寅承)의 「고본훈민정음(古本訓民正音)의 연구」(총 21호, 1940.3.), 조윤제의 「설화문학고(說話文學考)」(총 24호, 1941.3.), 최현배(崔鉉培)의 「한글의 비교 연구」(총 25호, 1941.4.) 및 자료 「춘향전집」(고사본 · 고본 · 고대본, 총 21∼25호) 등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amp;lt;br /&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문장』에는 고전 관련 글들이 다수 게재되었지만, 『문장』 전체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문예 관련 글들이었다. 『문장』은 개방성을 원칙으로 삼았지만, 작품성을 최우선적 기준으로 삼아 문학 작품을 선별 게재했다. 문장에 발표된 작품으로는 소설 182편, 국문학 35편, 시 172편, 시조 25편, 평론·학예 129편, 수필 187편, 기타 172편 등이 있다. &amp;lt;br /&amp;gt;&lt;br /&gt;
&lt;br /&gt;
'''추천제'''를 두어 신인을 발굴하였으며 그 제도의 정착 과정에서 심사자였던 이병기, [[정지용(鄭芝溶)|정지용]], 이태준이 획득한 대중적 · 문학적 권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lt;br /&gt;
추천된 신인으로는 &amp;lt;br /&amp;gt;&lt;br /&gt;
'''소설'''에 최태응(崔泰應) · 곽하신(郭夏信) · 임옥인(林玉仁) · 지하련(池河蓮) · 정진엽(鄭鎭葉) · 한병각(韓柄珏) · 선진수(宣鎭秀) · 유운경(劉雲卿) · 허민(許民) · 임서하(任西河)&amp;lt;br /&amp;gt;&lt;br /&gt;
'''시'''에 이한직(李漢稷) · 김종한(金鍾漢) · 박남수(朴南秀) · 박두진(朴斗鎭) · 박목월(朴木月) · 조지훈(趙芝薰) · 박일연(朴一淵) · 조정순(趙貞順) · 최남령(崔嵐嶺) · 허민(許民) · 황민(黃民)&amp;lt;br /&amp;gt;&lt;br /&gt;
'''시조'''에 조남령(曺南嶺) · 김영기(金永起) · 김상옥(金相沃) · 이호우(李鎬雨) · 장응두(張應斗) · 오신혜(吳信惠)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의의 및 평가===&lt;br /&gt;
----&lt;br /&gt;
『인문평론』과 『문장』은 둘 다 식민지 후반기에 발표되었기에 여러 지점에서 비교 대상이 되고 있다. 『인문평론』이 전향 지식인의 친서구적 경향을 드러냈다면 『문장』은 친한국적, 친동양적인 전통적 미학주의를 드러냈다는 시각은 기존의 문학사 서술에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lt;br /&gt;
2000년대 이후에는 『문장』이 『인문평론』과 달리 ‘서양의 근대'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지만, ‘동양(일본)’이라는 또 다른 보편과의 연관 관계 속에서 조선적 전통의 특수성을 탐색하려고 했다는 관점 또한 발견된다. 이와 달리 『문장』 역시 『인문평론』과 마찬가지로 반근대적 전통주의, 모더니즘의 토착화 경향, 총동원 체제의 협력 담론으로서의 ‘동양론’이 모호하게 뒤섞인 문화 지평 위에서 간행되고 있음을 지적한 관점 또한 나타나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 참고문헌 ===&lt;br /&gt;
----&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문장(文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9646]&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문장파(文章派)」,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0734]&lt;/div&gt;</summary>
		<author><name>Jmwshye</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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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성북구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저항문학</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84%B1%EB%B6%81%EA%B5%AC%EC%9D%98_%EC%9D%BC%EC%A0%9C%EA%B0%95%EC%A0%90%EA%B8%B0_%EB%8F%85%EB%A6%BD%EC%9A%B4%EB%8F%99%EA%B3%BC_%EC%A0%80%ED%95%AD%EB%AC%B8%ED%95%99&amp;diff=66820"/>
		<updated>2025-12-23T14:24:0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mwshye: /* 기여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주제=&lt;br /&gt;
[[파일:진관사 태극기.jpg|프레임|가운데|진관사 태극기]]&lt;br /&gt;
&amp;lt;poem&amp;gt;&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 width:auto; margin-left:auto; margin-right:auto;&amp;quot;&amp;gt;&amp;lt;big&amp;gt;1910년 경술국치와 1945년 광복 사이에는 35년이라는 시간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한반도와 세계 각지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항일 독립운동을 펼친 독립 운동가들이 있었다. &amp;lt;br&amp;gt;상하이의 외교 활동이나 만주 벌판의 치열한 무장 투쟁 말고도 한반도, 각자의 교실과 공장의 작업대, 작가의 책상에서도 독립 운동은 펼쳐졌다.&lt;br /&gt;
&amp;lt;/big&amp;gt;&amp;lt;/poem&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일제 강점기 조선인의 저항은 전방위적이었다. 상하이의 임시정부와 만주 벌판뿐 아니라, 각자의 교실에서, 끊임없이 돌아가는 공장의 작업대 위에서, 책이 가득한 등잔불 밑 원고지에서도 독립의 의지는 나타났다. 그러나 우리는 교과서 지면의 한계때문에, 그리고 학문적 중요도의 차이때문에 중국 관내와 만주의 역사만큼 한반도 내의 역사를 잘 안다고 할 수 없다. &lt;br /&gt;
이번 프로젝트는 국내에서 전개된 독립운동 중에서도, 민족의 문화를 지키려던 일련의 노력들(민족 문학과 종교적 투쟁)과 사회를 개혁하려던 노력들(사회주의적 노동 운동과 학생운동)을 중점으로 살핀다. 근대화 과정에서 미약하게나마 성장한 민권의식을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기여한 여성 독립운동가들에 대해서도 다룬다.&amp;lt;/div&amp;gt;&lt;br /&gt;
&lt;br /&gt;
=기획의도=&lt;br /&gt;
우리 조의 기획은 독립운동가 한용운에 주목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성북구에 위치한 심우장에 살고 있었기에 성북마을아카이브에서 찾을 수 있었다. 한용운은 일제의 압력에 굴하지 않으며 문학과 불교를 통해 저항해나간 인물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이러한 사실에서 뻗어나가 6조는 독립운동의 양상 중에서도 여성독립운동 / 노동운동 / 저항문학 등에 주목하여 전형적인 투쟁이 아닌 다채로운 일제에 반대하는 독립운동을 포착해보고자 한다.&lt;br /&gt;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약 35년간의 일제 강점기 역사와 독립운동사를 생각해보면, 1930년대 이후 해외가 아닌 한반도 내에서 어떤 움직임이 있었는지 우리는 제대로 알고 있을까?&amp;lt;br&amp;gt;&lt;br /&gt;
실제로 2025년 8월 한국갤럽이 실시한 &amp;quot;'항일 독립운동가'하면 생각나는 인물&amp;quot; 설문조사에서, 1930년대 이후 주로 한반도 내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는 10위권 내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더라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저항해온 독립운동가가 더 많지만 대부분은 역사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것이다. 경술국치 이전 독립운동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 안중근, 3.1운동을 대표하는 유관순, 그리고 임시정부계열의 김구 및 한인애국단 독립운동가 말고도 더 넓은 시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lt;br /&gt;
[[파일:2025 8 독립운동가인식.png|프레임|200px]]&lt;br /&gt;
&lt;br /&gt;
=온톨로지=&lt;br /&gt;
==네트워크 그래프==&lt;br /&gt;
{{NetworkGraph|title=6조.lst}}&lt;br /&gt;
&lt;br /&gt;
&lt;br /&gt;
==콘텐츠구조==&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ig&amp;gt;'''클래스(Class)'''&amp;lt;/big&amp;gt;&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lt;br /&gt;
! 클래스 !! 설명 !! 노드&lt;br /&gt;
|-&lt;br /&gt;
| 인물 || 독립운동 또는 저항문학·문화운동에 참여한 인물 || 한용운, [[이육사(25-2)|이육사]], 조지훈, 이병희, 이효정, 박진홍, 김항규, 김용준, 이병우, 백용성, [[박시목(朴詩穆)|박시목]], [[정지용(鄭芝溶)|정지용]], 이순금, [[이관술]], 김원봉, [[이재유]]&lt;br /&gt;
|-&lt;br /&gt;
| 조직 || 독립운동 조직·사회단체·정당·문예운동 단체 || [[신간회(新幹會)|신간회]], 민족대표_33인, [[의열단]], [[경성 트로이카]], 근우회, [[대한민국임시정부(25-2)|대한민국임시정부]], [[조선공산당]], 경성콤그룹, [[조선일보(朝鮮日報)|조선일보]], KAPF&lt;br /&gt;
|-&lt;br /&gt;
| 사건 || 독립운동·학생운동·파업·문화운동 등 사건 || 광주학생운동, [[종연방적_경성제사공장_파업|종연방적 경성제사공장 파업]], [[경성_여학생_운동|경성여학생운동]], 임제종운동, [[3.1운동]]&lt;br /&gt;
|-&lt;br /&gt;
| 장소 || 인물 및 조직과 관련된 장소 || [[심우장(尋牛莊)|심우장]], 인당약방,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lt;br /&gt;
|-&lt;br /&gt;
| 출판물 || 문예잡지·출판물 || [[문장(文章)|문장]], 문예운동, 흑풍&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ig&amp;gt;'''관계성(Relation)'''&amp;lt;/big&amp;gt;&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lt;br /&gt;
! 관계성(Relation) !! 의미 !! 구조 !! 노드1 !! 노드2&lt;br /&gt;
|-&lt;br /&gt;
| rowspan=&amp;quot;16&amp;quot; | isMemberOf || rowspan=&amp;quot;16&amp;quot; | ~의_일원이다 || rowspan=&amp;quot;16&amp;quot; | 인물-&amp;gt;조직&lt;br /&gt;
| 한용운 || 신간회&lt;br /&gt;
|-&lt;br /&gt;
| 한용운 || 민족대표_33인&lt;br /&gt;
|-&lt;br /&gt;
| 이육사 || 의열단&lt;br /&gt;
|-&lt;br /&gt;
| 이병희 || 의열단&lt;br /&gt;
|-&lt;br /&gt;
| 이효정 || 경성트로이카&lt;br /&gt;
|-&lt;br /&gt;
| 박진홍 || 경성트로이카&lt;br /&gt;
|-&lt;br /&gt;
| 김항규 || 신간회&lt;br /&gt;
|-&lt;br /&gt;
| 백용성 || 민족대표_33인&lt;br /&gt;
|-&lt;br /&gt;
| 박시목 || 신간회&lt;br /&gt;
|-&lt;br /&gt;
| 박시목 || 대한민국임시정부&lt;br /&gt;
|-&lt;br /&gt;
| 김원봉 || 의열단&lt;br /&gt;
|-&lt;br /&gt;
| 김원봉 || 대한민국임시정부&lt;br /&gt;
|-&lt;br /&gt;
| 이재유 || 조선공산당&lt;br /&gt;
|-&lt;br /&gt;
| 이재유 || 경성트로이카&lt;br /&gt;
|-&lt;br /&gt;
| 이재유 || 경성콤그룹&lt;br /&gt;
|-&lt;br /&gt;
| 이관술 || 조선공산당&lt;br /&gt;
|-&lt;br /&gt;
| livesIn || ~에_살다 || 인물-&amp;gt;장소 || 한용운 || 심우장&lt;br /&gt;
|-&lt;br /&gt;
| rowspan=&amp;quot;3&amp;quot; | visits || rowspan=&amp;quot;3&amp;quot; | ~에_방문하다 || rowspan=&amp;quot;3&amp;quot; | 인물-&amp;gt;장소&lt;br /&gt;
| 한용운 || 인당약방&lt;br /&gt;
|-&lt;br /&gt;
| 조지훈 || 심우장&lt;br /&gt;
|-&lt;br /&gt;
| 이병우 || 인당약방&lt;br /&gt;
|-&lt;br /&gt;
| leads || 사건_~을_주도하다 || 인물-&amp;gt;사건 || 한용운 || 임제종운동&lt;br /&gt;
|-&lt;br /&gt;
| rowspan=&amp;quot;3&amp;quot; | isLineageKinOf || rowspan=&amp;quot;3&amp;quot; | ~의_친척이다 || rowspan=&amp;quot;3&amp;quot; | 인물&amp;lt;-&amp;gt;인물&lt;br /&gt;
| 이육사 || 이병희&lt;br /&gt;
|-&lt;br /&gt;
| 이육사 || 이효정&lt;br /&gt;
|-&lt;br /&gt;
| 이병희 || 이효정&lt;br /&gt;
|-&lt;br /&gt;
| rowspan=&amp;quot;10&amp;quot; | participatesIn || rowspan=&amp;quot;10&amp;quot; | ~에_참여하다 || rowspan=&amp;quot;10&amp;quot; | 인물/사건-&amp;gt;사건/조직&lt;br /&gt;
| 이병희 || 종연방적_경성제사공장_파업&lt;br /&gt;
|-&lt;br /&gt;
| 이병희 || 경성_여학생_운동&lt;br /&gt;
|-&lt;br /&gt;
| 이효정 || 경성_여학생_운동&lt;br /&gt;
|-&lt;br /&gt;
| 박진홍 || 경성_여학생_운동&lt;br /&gt;
|-&lt;br /&gt;
| 김항규 || 광주학생운동&lt;br /&gt;
|-&lt;br /&gt;
| 김용준 || 광주학생운동&lt;br /&gt;
|-&lt;br /&gt;
| 백용성 || 임제종운동&lt;br /&gt;
|-&lt;br /&gt;
| 정지용 || 3.1운동&lt;br /&gt;
|-&lt;br /&gt;
| 3.1운동 || 대한민국임시정부&lt;br /&gt;
|-&lt;br /&gt;
| 조지훈 || 3.1운동  &amp;lt;!-- 참여 여부 정보 없어서 제거 원하면 알려줘 --&amp;gt;&lt;br /&gt;
|-&lt;br /&gt;
| hasbrother || ~의_형제이다 || 인물&amp;lt;-&amp;gt;인물 || 이순금 || 이관술&lt;br /&gt;
|-&lt;br /&gt;
| marries || ~와_결혼하다 || 인물&amp;lt;-&amp;gt;인물 || 이순금 || 이재유&lt;br /&gt;
|-&lt;br /&gt;
| studiesat || ~에서_학교다니다 || 인물-&amp;gt;장소 || 이순금 ||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lt;br /&gt;
|-&lt;br /&gt;
| rowspan = &amp;quot;2&amp;quot; | publishes || rowspan = &amp;quot;2&amp;quot; | ~을_출판하다 || rowspan = &amp;quot;2&amp;quot; | 조직-&amp;gt;출판물&lt;br /&gt;
| 조선일보 || 흑풍&lt;br /&gt;
|-&lt;br /&gt;
| KAPF || 문예운동&lt;br /&gt;
|-&lt;br /&gt;
| rowspan = &amp;quot;3&amp;quot; | writes || rowspan = &amp;quot;3&amp;quot; | ~를_쓰다 || rowspan = &amp;quot;3&amp;quot; | 인물-&amp;gt;출판물&lt;br /&gt;
| 한용운 || 흑풍&lt;br /&gt;
|-&lt;br /&gt;
| 정지용 || 문장&lt;br /&gt;
|-&lt;br /&gt;
| 조지훈 || 문장&lt;br /&gt;
|-&lt;br /&gt;
| rowspan=&amp;quot;3&amp;quot; | attributes || rowspan=&amp;quot;3&amp;quot; | ~에_기여하다 || rowspan=&amp;quot;3&amp;quot; | 조직-&amp;gt;조직/장소&lt;br /&gt;
| 조선일보 || 신간회&lt;br /&gt;
|-&lt;br /&gt;
| 조선일보 || 심우장&lt;br /&gt;
|-&lt;br /&gt;
| 근우회 || 신간회&lt;br /&gt;
|-&lt;br /&gt;
| affects || ~에_영향을_주다 || 사건-&amp;gt;조직 || 3.1운동 || 대한민국임시정부&lt;br /&gt;
|-&lt;br /&gt;
| rowspan=&amp;quot;2&amp;quot; | isSuccessorOf || rowspan=&amp;quot;2&amp;quot; | ~의_후신이다 || rowspan=&amp;quot;2&amp;quot; | 조직-&amp;gt;조직&lt;br /&gt;
| 경성콤그룹 || 경성트로이카&lt;br /&gt;
|-&lt;br /&gt;
| 경성트로이카 || 조선공산당&lt;br /&gt;
|}&lt;br /&gt;
&lt;br /&gt;
=타임라인=&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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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지도=&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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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독립운동=&lt;br /&gt;
==학생독립운동==&lt;br /&gt;
김항규&lt;br /&gt;
이병우&lt;br /&gt;
백용성&lt;br /&gt;
[[박시목(朴詩穆)|박시목]]&lt;br /&gt;
&lt;br /&gt;
==여성독립운동==&lt;br /&gt;
이효정&lt;br /&gt;
[[이관술]]&lt;br /&gt;
이순금&lt;br /&gt;
[[신간회(新幹會)|신간회]]&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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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덕여자보통고등학교&lt;br /&gt;
이병희&lt;br /&gt;
경성여학생운동&lt;br /&gt;
&lt;br /&gt;
==노동운동==&lt;br /&gt;
이병희&lt;br /&gt;
박진홍&lt;br /&gt;
이재유&lt;br /&gt;
[[경성 트로이카]]&lt;br /&gt;
조선공산당&lt;br /&gt;
경성콤그룹&lt;br /&gt;
종연방적 경성제사공장 파업&lt;br /&gt;
&lt;br /&gt;
==저항문학==&lt;br /&gt;
한용운&lt;br /&gt;
[[이육사(25-2)|이육사]]&lt;br /&gt;
조지훈&lt;br /&gt;
[[정지용(鄭芝溶)|정지용]]&lt;br /&gt;
KAPF&lt;br /&gt;
문장&lt;br /&gt;
문예운동&lt;br /&gt;
흑풍&lt;br /&gt;
&lt;br /&gt;
==국외투쟁==&lt;br /&gt;
[[대한민국임시정부(25-2)|대한민국임시정부]]&lt;br /&gt;
김원봉&lt;br /&gt;
이병희&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lt;br /&gt;
|-&lt;br /&gt;
! 기여자 !! 기여 항목&lt;br /&gt;
|-&lt;br /&gt;
| 이예린 || 기획의도 작성,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및 이관술 문서 작성&lt;br /&gt;
|-&lt;br /&gt;
| 박지혜 || [[성북구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저항문학#온톨로지]], [[3.1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25-2)]] [[문장(文章)]] [[정지용(鄭芝溶)]]&lt;br /&gt;
|-&lt;br /&gt;
| [[Dihu04|차제겸]] || [[성북구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저항문학#주제]], [[성북구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저항문학#타임라인]], [[경성 트로이카]], [[이육사(25-2)|이육사]], [[임제종운동]], [[KAPF]], [[틀:장소]], [[틀:역사인물]], [[틀:역사조직]]&lt;br /&gt;
|-&lt;br /&gt;
| 윤준상 || [[성북구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저항문학#콘텐츠구조]], [[심우장(尋牛莊)|심우장]], [[신간회(新幹會)|신간회]], [[성북구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저항문학#지도]], [[조선일보(朝鮮日報)|조선일보]], [[박시목(朴詩穆)|박시목]]&lt;br /&gt;
|-&lt;br /&gt;
| 한성준 || [[의열단(義烈團)]], [[이재유]], [[조선공산당]], [[종연방적 파업]]&lt;br /&gt;
|}&lt;/div&gt;</summary>
		<author><name>Jmwshye</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84%B1%EB%B6%81%EA%B5%AC%EC%9D%98_%EC%9D%BC%EC%A0%9C%EA%B0%95%EC%A0%90%EA%B8%B0_%EB%8F%85%EB%A6%BD%EC%9A%B4%EB%8F%99%EA%B3%BC_%EC%A0%80%ED%95%AD%EB%AC%B8%ED%95%99&amp;diff=66817</id>
		<title>성북구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저항문학</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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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23T14:23:0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mwshye: /* 저항문학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주제=&lt;br /&gt;
[[파일:진관사 태극기.jpg|프레임|가운데|진관사 태극기]]&lt;br /&gt;
&amp;lt;poem&amp;gt;&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 width:auto; margin-left:auto; margin-right:auto;&amp;quot;&amp;gt;&amp;lt;big&amp;gt;1910년 경술국치와 1945년 광복 사이에는 35년이라는 시간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한반도와 세계 각지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항일 독립운동을 펼친 독립 운동가들이 있었다. &amp;lt;br&amp;gt;상하이의 외교 활동이나 만주 벌판의 치열한 무장 투쟁 말고도 한반도, 각자의 교실과 공장의 작업대, 작가의 책상에서도 독립 운동은 펼쳐졌다.&lt;br /&gt;
&amp;lt;/big&amp;gt;&amp;lt;/poem&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일제 강점기 조선인의 저항은 전방위적이었다. 상하이의 임시정부와 만주 벌판뿐 아니라, 각자의 교실에서, 끊임없이 돌아가는 공장의 작업대 위에서, 책이 가득한 등잔불 밑 원고지에서도 독립의 의지는 나타났다. 그러나 우리는 교과서 지면의 한계때문에, 그리고 학문적 중요도의 차이때문에 중국 관내와 만주의 역사만큼 한반도 내의 역사를 잘 안다고 할 수 없다. &lt;br /&gt;
이번 프로젝트는 국내에서 전개된 독립운동 중에서도, 민족의 문화를 지키려던 일련의 노력들(민족 문학과 종교적 투쟁)과 사회를 개혁하려던 노력들(사회주의적 노동 운동과 학생운동)을 중점으로 살핀다. 근대화 과정에서 미약하게나마 성장한 민권의식을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기여한 여성 독립운동가들에 대해서도 다룬다.&amp;lt;/div&amp;gt;&lt;br /&gt;
&lt;br /&gt;
=기획의도=&lt;br /&gt;
우리 조의 기획은 독립운동가 한용운에 주목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성북구에 위치한 심우장에 살고 있었기에 성북마을아카이브에서 찾을 수 있었다. 한용운은 일제의 압력에 굴하지 않으며 문학과 불교를 통해 저항해나간 인물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이러한 사실에서 뻗어나가 6조는 독립운동의 양상 중에서도 여성독립운동 / 노동운동 / 저항문학 등에 주목하여 전형적인 투쟁이 아닌 다채로운 일제에 반대하는 독립운동을 포착해보고자 한다.&lt;br /&gt;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약 35년간의 일제 강점기 역사와 독립운동사를 생각해보면, 1930년대 이후 해외가 아닌 한반도 내에서 어떤 움직임이 있었는지 우리는 제대로 알고 있을까?&amp;lt;br&amp;gt;&lt;br /&gt;
실제로 2025년 8월 한국갤럽이 실시한 &amp;quot;'항일 독립운동가'하면 생각나는 인물&amp;quot; 설문조사에서, 1930년대 이후 주로 한반도 내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는 10위권 내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더라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저항해온 독립운동가가 더 많지만 대부분은 역사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것이다. 경술국치 이전 독립운동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 안중근, 3.1운동을 대표하는 유관순, 그리고 임시정부계열의 김구 및 한인애국단 독립운동가 말고도 더 넓은 시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lt;br /&gt;
[[파일:2025 8 독립운동가인식.png|프레임|200px]]&lt;br /&gt;
&lt;br /&gt;
=온톨로지=&lt;br /&gt;
==네트워크 그래프==&lt;br /&gt;
{{NetworkGraph|title=6조.lst}}&lt;br /&gt;
&lt;br /&gt;
&lt;br /&gt;
==콘텐츠구조==&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ig&amp;gt;'''클래스(Class)'''&amp;lt;/big&amp;gt;&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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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인물 || 독립운동 또는 저항문학·문화운동에 참여한 인물 || 한용운, [[이육사(25-2)|이육사]], 조지훈, 이병희, 이효정, 박진홍, 김항규, 김용준, 이병우, 백용성, [[박시목(朴詩穆)|박시목]], [[정지용(鄭芝溶)|정지용]], 이순금, [[이관술]], 김원봉, [[이재유]]&lt;br /&gt;
|-&lt;br /&gt;
| 조직 || 독립운동 조직·사회단체·정당·문예운동 단체 || [[신간회(新幹會)|신간회]], 민족대표_33인, [[의열단]], [[경성 트로이카]], 근우회, [[대한민국임시정부(25-2)|대한민국임시정부]], [[조선공산당]], 경성콤그룹, [[조선일보(朝鮮日報)|조선일보]], KAPF&lt;br /&gt;
|-&lt;br /&gt;
| 사건 || 독립운동·학생운동·파업·문화운동 등 사건 || 광주학생운동, [[종연방적_경성제사공장_파업|종연방적 경성제사공장 파업]], [[경성_여학생_운동|경성여학생운동]], 임제종운동, [[3.1운동]]&lt;br /&gt;
|-&lt;br /&gt;
| 장소 || 인물 및 조직과 관련된 장소 || [[심우장(尋牛莊)|심우장]], 인당약방,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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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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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wspan = &amp;quot;2&amp;quot; | publishes || rowspan = &amp;quot;2&amp;quot; | ~을_출판하다 || rowspan = &amp;quot;2&amp;quot; | 조직-&amp;gt;출판물&lt;br /&gt;
| 조선일보 || 흑풍&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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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용운 || 흑풍&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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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지용 || 문장&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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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라인=&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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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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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독립운동=&lt;br /&gt;
==학생독립운동==&lt;br /&gt;
김항규&lt;br /&gt;
이병우&lt;br /&gt;
백용성&lt;br /&gt;
[[박시목(朴詩穆)|박시목]]&lt;br /&gt;
&lt;br /&gt;
==여성독립운동==&lt;br /&gt;
이효정&lt;br /&gt;
[[이관술]]&lt;br /&gt;
이순금&lt;br /&gt;
[[신간회(新幹會)|신간회]]&lt;br /&gt;
근우회&lt;br /&gt;
동덕여자보통고등학교&lt;br /&gt;
이병희&lt;br /&gt;
경성여학생운동&lt;br /&gt;
&lt;br /&gt;
==노동운동==&lt;br /&gt;
이병희&lt;br /&gt;
박진홍&lt;br /&gt;
이재유&lt;br /&gt;
[[경성 트로이카]]&lt;br /&gt;
조선공산당&lt;br /&gt;
경성콤그룹&lt;br /&gt;
종연방적 경성제사공장 파업&lt;br /&gt;
&lt;br /&gt;
==저항문학==&lt;br /&gt;
한용운&lt;br /&gt;
[[이육사(25-2)|이육사]]&lt;br /&gt;
조지훈&lt;br /&gt;
[[정지용(鄭芝溶)|정지용]]&lt;br /&gt;
KAPF&lt;br /&gt;
문장&lt;br /&gt;
문예운동&lt;br /&gt;
흑풍&lt;br /&gt;
&lt;br /&gt;
==국외투쟁==&lt;br /&gt;
[[대한민국임시정부(25-2)|대한민국임시정부]]&lt;br /&gt;
김원봉&lt;br /&gt;
이병희&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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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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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예린 || 기획의도 작성,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및 이관술 문서 작성&lt;br /&gt;
|-&lt;br /&gt;
| 박지혜 || 온톨로지, [[3.1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25-2)]] [[문장(文章)]] [[정지용(鄭池龍)]]&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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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윤준상 || [[성북구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저항문학#콘텐츠구조]], [[심우장(尋牛莊)|심우장]], [[신간회(新幹會)|신간회]], [[성북구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저항문학#지도]], [[조선일보(朝鮮日報)|조선일보]], [[박시목(朴詩穆)|박시목]]&lt;br /&gt;
|-&lt;br /&gt;
| 한성준 || [[의열단(義烈團)]], [[이재유]], [[조선공산당]], [[종연방적 파업]]&lt;br /&gt;
|}&lt;/div&gt;</summary>
		<author><name>Jmwshye</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84%B1%EB%B6%81%EA%B5%AC%EC%9D%98_%EC%9D%BC%EC%A0%9C%EA%B0%95%EC%A0%90%EA%B8%B0_%EB%8F%85%EB%A6%BD%EC%9A%B4%EB%8F%99%EA%B3%BC_%EC%A0%80%ED%95%AD%EB%AC%B8%ED%95%99&amp;diff=66816</id>
		<title>성북구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저항문학</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84%B1%EB%B6%81%EA%B5%AC%EC%9D%98_%EC%9D%BC%EC%A0%9C%EA%B0%95%EC%A0%90%EA%B8%B0_%EB%8F%85%EB%A6%BD%EC%9A%B4%EB%8F%99%EA%B3%BC_%EC%A0%80%ED%95%AD%EB%AC%B8%ED%95%99&amp;diff=66816"/>
		<updated>2025-12-23T14:22:2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mwshye: /* 콘텐츠구조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주제=&lt;br /&gt;
[[파일:진관사 태극기.jpg|프레임|가운데|진관사 태극기]]&lt;br /&gt;
&amp;lt;poem&amp;gt;&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 width:auto; margin-left:auto; margin-right:auto;&amp;quot;&amp;gt;&amp;lt;big&amp;gt;1910년 경술국치와 1945년 광복 사이에는 35년이라는 시간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한반도와 세계 각지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항일 독립운동을 펼친 독립 운동가들이 있었다. &amp;lt;br&amp;gt;상하이의 외교 활동이나 만주 벌판의 치열한 무장 투쟁 말고도 한반도, 각자의 교실과 공장의 작업대, 작가의 책상에서도 독립 운동은 펼쳐졌다.&lt;br /&gt;
&amp;lt;/big&amp;gt;&amp;lt;/poem&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일제 강점기 조선인의 저항은 전방위적이었다. 상하이의 임시정부와 만주 벌판뿐 아니라, 각자의 교실에서, 끊임없이 돌아가는 공장의 작업대 위에서, 책이 가득한 등잔불 밑 원고지에서도 독립의 의지는 나타났다. 그러나 우리는 교과서 지면의 한계때문에, 그리고 학문적 중요도의 차이때문에 중국 관내와 만주의 역사만큼 한반도 내의 역사를 잘 안다고 할 수 없다. &lt;br /&gt;
이번 프로젝트는 국내에서 전개된 독립운동 중에서도, 민족의 문화를 지키려던 일련의 노력들(민족 문학과 종교적 투쟁)과 사회를 개혁하려던 노력들(사회주의적 노동 운동과 학생운동)을 중점으로 살핀다. 근대화 과정에서 미약하게나마 성장한 민권의식을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기여한 여성 독립운동가들에 대해서도 다룬다.&amp;lt;/div&amp;gt;&lt;br /&gt;
&lt;br /&gt;
=기획의도=&lt;br /&gt;
우리 조의 기획은 독립운동가 한용운에 주목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성북구에 위치한 심우장에 살고 있었기에 성북마을아카이브에서 찾을 수 있었다. 한용운은 일제의 압력에 굴하지 않으며 문학과 불교를 통해 저항해나간 인물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이러한 사실에서 뻗어나가 6조는 독립운동의 양상 중에서도 여성독립운동 / 노동운동 / 저항문학 등에 주목하여 전형적인 투쟁이 아닌 다채로운 일제에 반대하는 독립운동을 포착해보고자 한다.&lt;br /&gt;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약 35년간의 일제 강점기 역사와 독립운동사를 생각해보면, 1930년대 이후 해외가 아닌 한반도 내에서 어떤 움직임이 있었는지 우리는 제대로 알고 있을까?&amp;lt;br&amp;gt;&lt;br /&gt;
실제로 2025년 8월 한국갤럽이 실시한 &amp;quot;'항일 독립운동가'하면 생각나는 인물&amp;quot; 설문조사에서, 1930년대 이후 주로 한반도 내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는 10위권 내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더라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저항해온 독립운동가가 더 많지만 대부분은 역사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것이다. 경술국치 이전 독립운동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 안중근, 3.1운동을 대표하는 유관순, 그리고 임시정부계열의 김구 및 한인애국단 독립운동가 말고도 더 넓은 시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lt;br /&gt;
[[파일:2025 8 독립운동가인식.png|프레임|200px]]&lt;br /&gt;
&lt;br /&gt;
=온톨로지=&lt;br /&gt;
==네트워크 그래프==&lt;br /&gt;
{{NetworkGraph|title=6조.lst}}&lt;br /&gt;
&lt;br /&gt;
&lt;br /&gt;
==콘텐츠구조==&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ig&amp;gt;'''클래스(Class)'''&amp;lt;/big&amp;g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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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물 || 독립운동 또는 저항문학·문화운동에 참여한 인물 || 한용운, [[이육사(25-2)|이육사]], 조지훈, 이병희, 이효정, 박진홍, 김항규, 김용준, 이병우, 백용성, [[박시목(朴詩穆)|박시목]], [[정지용(鄭芝溶)|정지용]], 이순금, [[이관술]], 김원봉, [[이재유]]&lt;br /&gt;
|-&lt;br /&gt;
| 조직 || 독립운동 조직·사회단체·정당·문예운동 단체 || [[신간회(新幹會)|신간회]], 민족대표_33인, [[의열단]], [[경성 트로이카]], 근우회, [[대한민국임시정부(25-2)|대한민국임시정부]], [[조선공산당]], 경성콤그룹, [[조선일보(朝鮮日報)|조선일보]], KAPF&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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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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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big&amp;gt;'''관계성(Relation)'''&amp;lt;/big&amp;g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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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lt;br /&gt;
==학생독립운동==&lt;br /&gt;
김항규&lt;br /&gt;
이병우&lt;br /&gt;
백용성&lt;br /&gt;
[[박시목(朴詩穆)|박시목]]&lt;br /&gt;
&lt;br /&gt;
==여성독립운동==&lt;br /&gt;
이효정&lt;br /&gt;
[[이관술]]&lt;br /&gt;
이순금&lt;br /&gt;
[[신간회(新幹會)|신간회]]&lt;br /&gt;
근우회&lt;br /&gt;
동덕여자보통고등학교&lt;br /&gt;
이병희&lt;br /&gt;
경성여학생운동&lt;br /&gt;
&lt;br /&gt;
==노동운동==&lt;br /&gt;
이병희&lt;br /&gt;
박진홍&lt;br /&gt;
이재유&lt;br /&gt;
[[경성 트로이카]]&lt;br /&gt;
조선공산당&lt;br /&gt;
경성콤그룹&lt;br /&gt;
종연방적 경성제사공장 파업&lt;br /&gt;
&lt;br /&gt;
==저항문학==&lt;br /&gt;
한용운&lt;br /&gt;
[[이육사(25-2)|이육사]]&lt;br /&gt;
조지훈&lt;br /&gt;
[[정지용(鄭池龍)|정지용]]&lt;br /&gt;
KAPF&lt;br /&gt;
문장&lt;br /&gt;
문예운동&lt;br /&gt;
흑풍&lt;br /&gt;
&lt;br /&gt;
==국외투쟁==&lt;br /&gt;
[[대한민국임시정부(25-2)|대한민국임시정부]]&lt;br /&gt;
김원봉&lt;br /&gt;
이병희&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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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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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이예린 || 기획의도 작성,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및 이관술 문서 작성&lt;br /&gt;
|-&lt;br /&gt;
| 박지혜 || 온톨로지, [[3.1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25-2)]] [[문장(文章)]] [[정지용(鄭池龍)]]&lt;br /&gt;
|-&lt;br /&gt;
| [[Dihu04|차제겸]] || [[성북구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저항문학#주제]], [[성북구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저항문학#타임라인]], [[경성 트로이카]], [[이육사(25-2)|이육사]], [[임제종운동]], [[KAPF]], [[틀:장소]], [[틀:역사인물]], [[틀:역사조직]]&lt;br /&gt;
|-&lt;br /&gt;
| 윤준상 || [[성북구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저항문학#콘텐츠구조]], [[심우장(尋牛莊)|심우장]], [[신간회(新幹會)|신간회]], [[성북구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저항문학#지도]], [[조선일보(朝鮮日報)|조선일보]], [[박시목(朴詩穆)|박시목]]&lt;br /&gt;
|-&lt;br /&gt;
| 한성준 || [[의열단(義烈團)]], [[이재유]], [[조선공산당]], [[종연방적 파업]]&lt;br /&gt;
|}&lt;/div&gt;</summary>
		<author><name>Jmwshye</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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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성북구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저항문학</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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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23T14:21:2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mwshye: /* 콘텐츠구조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주제=&lt;br /&gt;
[[파일:진관사 태극기.jpg|프레임|가운데|진관사 태극기]]&lt;br /&gt;
&amp;lt;poem&amp;gt;&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 width:auto; margin-left:auto; margin-right:auto;&amp;quot;&amp;gt;&amp;lt;big&amp;gt;1910년 경술국치와 1945년 광복 사이에는 35년이라는 시간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한반도와 세계 각지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항일 독립운동을 펼친 독립 운동가들이 있었다. &amp;lt;br&amp;gt;상하이의 외교 활동이나 만주 벌판의 치열한 무장 투쟁 말고도 한반도, 각자의 교실과 공장의 작업대, 작가의 책상에서도 독립 운동은 펼쳐졌다.&lt;br /&gt;
&amp;lt;/big&amp;gt;&amp;lt;/poem&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일제 강점기 조선인의 저항은 전방위적이었다. 상하이의 임시정부와 만주 벌판뿐 아니라, 각자의 교실에서, 끊임없이 돌아가는 공장의 작업대 위에서, 책이 가득한 등잔불 밑 원고지에서도 독립의 의지는 나타났다. 그러나 우리는 교과서 지면의 한계때문에, 그리고 학문적 중요도의 차이때문에 중국 관내와 만주의 역사만큼 한반도 내의 역사를 잘 안다고 할 수 없다. &lt;br /&gt;
이번 프로젝트는 국내에서 전개된 독립운동 중에서도, 민족의 문화를 지키려던 일련의 노력들(민족 문학과 종교적 투쟁)과 사회를 개혁하려던 노력들(사회주의적 노동 운동과 학생운동)을 중점으로 살핀다. 근대화 과정에서 미약하게나마 성장한 민권의식을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기여한 여성 독립운동가들에 대해서도 다룬다.&amp;lt;/div&amp;gt;&lt;br /&gt;
&lt;br /&gt;
=기획의도=&lt;br /&gt;
우리 조의 기획은 독립운동가 한용운에 주목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성북구에 위치한 심우장에 살고 있었기에 성북마을아카이브에서 찾을 수 있었다. 한용운은 일제의 압력에 굴하지 않으며 문학과 불교를 통해 저항해나간 인물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이러한 사실에서 뻗어나가 6조는 독립운동의 양상 중에서도 여성독립운동 / 노동운동 / 저항문학 등에 주목하여 전형적인 투쟁이 아닌 다채로운 일제에 반대하는 독립운동을 포착해보고자 한다.&lt;br /&gt;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약 35년간의 일제 강점기 역사와 독립운동사를 생각해보면, 1930년대 이후 해외가 아닌 한반도 내에서 어떤 움직임이 있었는지 우리는 제대로 알고 있을까?&amp;lt;br&amp;gt;&lt;br /&gt;
실제로 2025년 8월 한국갤럽이 실시한 &amp;quot;'항일 독립운동가'하면 생각나는 인물&amp;quot; 설문조사에서, 1930년대 이후 주로 한반도 내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는 10위권 내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더라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저항해온 독립운동가가 더 많지만 대부분은 역사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것이다. 경술국치 이전 독립운동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 안중근, 3.1운동을 대표하는 유관순, 그리고 임시정부계열의 김구 및 한인애국단 독립운동가 말고도 더 넓은 시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lt;br /&gt;
[[파일:2025 8 독립운동가인식.png|프레임|200px]]&lt;br /&gt;
&lt;br /&gt;
=온톨로지=&lt;br /&gt;
==네트워크 그래프==&lt;br /&gt;
{{NetworkGraph|title=6조.lst}}&lt;br /&gt;
&lt;br /&gt;
&lt;br /&gt;
==콘텐츠구조==&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ig&amp;gt;'''클래스(Class)'''&amp;lt;/big&amp;g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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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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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div&gt;</summary>
		<author><name>Jmwshye</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A0%95%EC%A7%80%EC%9A%A9(%E9%84%AD%E8%8A%9D%E6%BA%B6)&amp;diff=66813</id>
		<title>정지용(鄭芝溶)</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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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23T14:20:5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mwshye: 새 문서: &amp;lt;onlyinclude&amp;gt; {| class=&amp;quot;metadata&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ffffff; width:300px; margin: 0 0 10px 10px; border:1px solid #aaa; float:right; clear:right;&amp;quot; cellspacing=&amp;quot;5&amp;quot; |- ! colspan=&amp;quot;2&amp;quot; sty...&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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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colspan=&amp;quot;2&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664b00; color:#ffffff; font-size:120%; text-align:center; padding:5px;&amp;quot; | '''정지용(鄭芝溶)'''&lt;br /&gt;
|-&lt;br /&gt;
| colspan=&amp;quot;2&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 | [[파일:정지용.jpeg|250px]] &amp;lt;br /&amp;gt; &amp;lt;span style=&amp;quot;font-size:90%;&amp;quot;&amp;gt;{{{초상화설명|}}}&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출생''' || 1902년 6월 20일&lt;br /&gt;
|-&lt;br /&gt;
|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사망''' || 1950년 9월 25일(향년 48세) 추정&lt;br /&gt;
|-&lt;br /&gt;
|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자''' || 영지(靈之)&lt;br /&gt;
|-&lt;br /&gt;
|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본관''' || 연일 정씨&lt;br /&gt;
|-&lt;br /&gt;
|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학력''' || 옥천공립보통학교&amp;lt;br /&amp;gt; 휘문고등보통학교&amp;lt;br /&amp;gt; 도시샤(同志社)대학&lt;br /&gt;
|-&lt;br /&gt;
|}&lt;br /&gt;
&amp;lt;/onlyinclude&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ig&amp;gt;'''개요'''&amp;lt;/big&amp;gt;===&lt;br /&gt;
----&lt;br /&gt;
정지용(鄭芝溶)은 일제강점기에 『정지용시집』, 『백록담』, 『문학독본』, 『산문』 등을 저술한 시인이자 번역가, 교육자이다. &lt;br /&gt;
『시문학』 동인, '구인회' 회원, 『문장』 시 부문 심사위원, 경향신문사 주간으로 활동하였으며, 휘문고등보통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ig&amp;gt;'''생애'''&amp;lt;/big&amp;gt;===&lt;br /&gt;
----&lt;br /&gt;
'''1902년'''  충북 옥천군 옥천면 하계리 40번지, 약종상을 하는 아버지 정태국과 어머니 정미하의 장남으로 출생&amp;lt;/br&amp;gt;&lt;br /&gt;
'''1910년'''  옥천공립보통학교 입학 &amp;lt;/br&amp;gt;&lt;br /&gt;
'''1918년'''  휘문고등보통학교 입학&amp;lt;/br&amp;gt;&lt;br /&gt;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휘문사태'의 주동으로 무기정학을 받아 수업을 받지 못함.&amp;lt;/br&amp;gt;&lt;br /&gt;
'''1922년'''  휘문고등보통학교 졸업, 첫 시&amp;lt;풍랑몽&amp;gt;을 씀. &amp;lt;/br&amp;gt;&lt;br /&gt;
'''1923년'''  일본 도시샤 대학의 영문과에 입학. 재학 당시 &amp;lt;석류&amp;gt;, &amp;lt;바다&amp;gt; 등을 씀.&amp;lt;/br&amp;gt;&lt;br /&gt;
'''1926년'''  &amp;lt;&amp;lt;학조&amp;gt;&amp;gt; 창간호에 &amp;lt;카페 프란스&amp;gt;등 9편의 시를, 그리고 &amp;lt;&amp;lt;신민&amp;gt;&amp;gt;, &amp;lt;&amp;lt;문예시대&amp;gt;&amp;gt;에 &amp;lt;홍춘&amp;gt;, &amp;lt;산엣색시 들녘사내&amp;gt; 등을 발표 시인으로 등단&amp;lt;/br&amp;gt;&lt;br /&gt;
'''1929년'''  도시샤 대학 졸업 후 고국에 돌아와 휘문고등보통학교의 영어교사로 부임. 박용철, 김영랑과 함께 동인지 &amp;lt;&amp;lt;시문학&amp;gt;&amp;gt;을 창간 &amp;lt;/br&amp;gt;&lt;br /&gt;
'''1933년'''  &amp;lt;&amp;lt;가톨릭청년&amp;gt;&amp;gt; 창간, 편집고문을 맡아 신앙시를 발표하고, 이태준, 이무영, 김기림 등과 함께‘9인회' 결성&amp;lt;/br&amp;gt;&lt;br /&gt;
'''1945년'''  해방과 함께 사임하고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 부임&amp;lt;/br&amp;gt;&lt;br /&gt;
'''1948년'''  사임하고 녹번리(현재 서울시 은평구 녹번동) 초당에서 생활&amp;lt;/br&amp;gt;&lt;br /&gt;
'''1950년'''  한국전쟁 중 사망 (추정)&lt;br /&gt;
&lt;br /&gt;
===&amp;lt;big&amp;gt;'''주요활동'''&amp;lt;/big&amp;gt;===&lt;br /&gt;
---- &lt;br /&gt;
휘문고등보통학교 재학 당시 『요람』동인을 결성하여 활동하였으며, '문우회(文友會)'의 학예부장직을 맡아 『휘문(徽文)』창간호의 편집 위원으로 활동했다.&amp;lt;/br&amp;gt;&lt;br /&gt;
도시샤대학 재학 중 동인지『가(街)』에 일본어시 &amp;lt;신라의 석류&amp;gt;를 발표했으며, 이는 정지용의 첫 발표 시편이다. 일본 유학 당시에도 조선어 시를 다수 발표했다. 이 때의 대표작으로는 &amp;lt;바다&amp;gt;, &amp;lt;향수&amp;gt;, &amp;lt;선취&amp;gt;, &amp;lt;압천&amp;gt; 등이 있다. &amp;lt;/br&amp;gt;&lt;br /&gt;
도시샤대학 졸업 후 고국으로 돌아와『시문학(詩文學)』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구인회(九人會)를 결성하여 1936년 3월 구인회의 동인지 『시와 소설』에 ｢유선애상(流線哀傷)｣을 발표했다. &amp;lt;/br&amp;gt;&lt;br /&gt;
일제강점기 후반 높은 성과를 거둔 문예잡지 『[[문장]]』의 추천심사위원으로 참여하여 훗날 '청록파'라는 한국시사의 한 유파를 형성한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 등 신인을 발굴하였다. 이 외에도 이한직, 박남수, 김종한 등 역량 있는 시인들을 시단에 내놓는 데 기여했다. &amp;lt;/br&amp;gt;&lt;br /&gt;
경향신문사의 주간을 맡았으며, 『경향신문』에 휘트먼 등의 시를 번역하여 발표했다.&amp;lt;/br&amp;gt; &lt;br /&gt;
1950년 6월 『문예(文藝)』에 발표한 시와 『국도신문(國都新聞)』에 연재한 남해 기행 산문을 마지막으로 발표했다.&lt;br /&gt;
&lt;br /&gt;
=== &amp;lt;big&amp;gt;'''작품'''&amp;lt;/big&amp;gt; ===&lt;br /&gt;
----&lt;br /&gt;
정지용의 대표작을 시, 시집, 평론·산문으로 구분했다. &lt;br /&gt;
==== 시 ====&lt;br /&gt;
* 〈석류〉&lt;br /&gt;
* 〈바다〉&lt;br /&gt;
* 〈유리창〉&lt;br /&gt;
* 〈불사조〉&lt;br /&gt;
* 〈향수〉&lt;br /&gt;
* 〈고향〉&lt;br /&gt;
* 〈장수산〉&lt;br /&gt;
* 〈백록담〉&lt;br /&gt;
&lt;br /&gt;
==== 시집 ====&lt;br /&gt;
* 『정지용 시집』(1935): 정지용의 첫 시집, 대부분 1925년부터 1935년까지 발표한 작품을 선별하여 수록.&amp;lt;/br&amp;gt; - 1부는 가톨릭 개종 이후의 시편, 2부는 초기 시편, 3부는 초기 시편과 같은 시기 창작한 동요류와 민요풍 시편, 4부는 신앙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시편, 5부는 산문 2편을 수록&lt;br /&gt;
* 『백록담』(1941): 정지용의 두 번째 시집, 1936년부터 1941년까지 발표한 작품 선별하여 수록. &amp;lt;/br&amp;gt; - 1부에서 4부까지는 25편의 시를, 5부에는 8편의 산문을 수록&lt;br /&gt;
* 『지용시선』(1946)&lt;br /&gt;
&lt;br /&gt;
==== 평론·산문 ====&lt;br /&gt;
* 『문학독본』(1948): 정지용의 첫 산문집 &lt;br /&gt;
* 『산문』(1949): 평문과 수필, 역시 등 수록&lt;br /&gt;
&lt;br /&gt;
===&amp;lt;big&amp;gt;'''평가'''&amp;lt;/big&amp;gt;===&lt;br /&gt;
---- &lt;br /&gt;
한국전쟁 발발 당시 서울을 떠나지 못했던 정지용은 정치보위부에 의해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뒤 북한으로 이송되었다. 이후 그는 월북 문인으로 분류되면서 오랫동안 작품 활동과 문학적 성과가 공식적으로 조명되지 못하였다. &amp;lt;/br&amp;gt;그러나 1982년 장남 정구관이 정지용이 자의로 월북한 것이 아니라 강제로 납북되었다는 사실을 밝히며 저작물 복간을 요청하는 진정서를 제출하였고, 이에 원로 문인과 학계가 동참하면서 정지용 문학의 재평가와 복권을 위한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amp;lt;/br&amp;gt;&lt;br /&gt;
&lt;br /&gt;
이후 사회 전반에서 이데올로기적 긴장이 완화되고 대학을 중심으로 월북 문인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1987년 10월에는 관련 연구 성과의 발표와 출판이 허용되었고, 『정지용연구』가 간행되었다. 1988년에는 『정지용 시와 산문』과 함께 시와 소설을 분리한 『정지용전집』 2권이 민음사에서 출판되었다.&amp;lt;/br&amp;gt; 1988년 3월 31일 문화공보부가 정지용 작품의 해금을 공식 발표하면서 그의 문학은 제도적으로도 복권되었다.&amp;lt;/br&amp;gt; 이를 계기로 1988년 ‘지용회’가 창립되고 ‘제1회 지용제’가 열렸으며, 1989년에는 ‘지용 시문학상’이 제정되어 박두진 시인이 초대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이후 1995년에는 정지용기념사업이 추진되었고, 1996년 그의 생가가 복원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amp;lt;big&amp;gt;'''참고문헌'''&amp;lt;/big&amp;gt; ===&lt;br /&gt;
----&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지용(鄭芝溶)」,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0954]&lt;br /&gt;
* 전통문화포털. 「정지용(鄭芝溶)」, 『한국의 문화인물(연도별)』, 한국문화진흥. [https://www.kculture.or.kr/brd/board/252/L/menu/465?brdType=R&amp;amp;thisPage=14&amp;amp;bbIdx=8574]&lt;/div&gt;</summary>
		<author><name>Jmwshye</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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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정지용(鄭池龍)</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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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23T14:20:1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mwshye: &lt;/p&gt;
&lt;h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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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amp;quot;2&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664b00; color:#ffffff; font-size:120%; text-align:center; padding:5px;&amp;quot; | '''정지용(鄭芝溶)'''&lt;br /&gt;
|-&lt;br /&gt;
| colspan=&amp;quot;2&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 | [[파일:정지용.jpeg|250px]] &amp;lt;br /&amp;gt; &amp;lt;span style=&amp;quot;font-size:90%;&amp;quot;&amp;gt;{{{초상화설명|}}}&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출생''' || 1902년 6월 20일&lt;br /&gt;
|-&lt;br /&gt;
|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사망''' || 1950년 9월 25일(향년 48세) 추정&lt;br /&gt;
|-&lt;br /&gt;
|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자''' || 영지(靈之)&lt;br /&gt;
|-&lt;br /&gt;
|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본관''' || 연일 정씨&lt;br /&gt;
|-&lt;br /&gt;
|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학력''' || 옥천공립보통학교&amp;lt;br /&amp;gt; 휘문고등보통학교&amp;lt;br /&amp;gt; 도시샤(同志社)대학&lt;br /&gt;
|-&lt;br /&gt;
|}&lt;br /&gt;
&amp;lt;/onlyinclude&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ig&amp;gt;'''개요'''&amp;lt;/big&amp;gt;===&lt;br /&gt;
----&lt;br /&gt;
정지용(鄭芝溶)은 일제강점기에 『정지용시집』, 『백록담』, 『문학독본』, 『산문』 등을 저술한 시인이자 번역가, 교육자이다. &lt;br /&gt;
『시문학』 동인, '구인회' 회원, 『문장』 시 부문 심사위원, 경향신문사 주간으로 활동하였으며, 휘문고등보통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ig&amp;gt;'''생애'''&amp;lt;/big&amp;gt;===&lt;br /&gt;
----&lt;br /&gt;
'''1902년'''  충북 옥천군 옥천면 하계리 40번지, 약종상을 하는 아버지 정태국과 어머니 정미하의 장남으로 출생&amp;lt;/br&amp;gt;&lt;br /&gt;
'''1910년'''  옥천공립보통학교 입학 &amp;lt;/br&amp;gt;&lt;br /&gt;
'''1918년'''  휘문고등보통학교 입학&amp;lt;/br&amp;gt;&lt;br /&gt;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휘문사태'의 주동으로 무기정학을 받아 수업을 받지 못함.&amp;lt;/br&amp;gt;&lt;br /&gt;
'''1922년'''  휘문고등보통학교 졸업, 첫 시&amp;lt;풍랑몽&amp;gt;을 씀. &amp;lt;/br&amp;gt;&lt;br /&gt;
'''1923년'''  일본 도시샤 대학의 영문과에 입학. 재학 당시 &amp;lt;석류&amp;gt;, &amp;lt;바다&amp;gt; 등을 씀.&amp;lt;/br&amp;gt;&lt;br /&gt;
'''1926년'''  &amp;lt;&amp;lt;학조&amp;gt;&amp;gt; 창간호에 &amp;lt;카페 프란스&amp;gt;등 9편의 시를, 그리고 &amp;lt;&amp;lt;신민&amp;gt;&amp;gt;, &amp;lt;&amp;lt;문예시대&amp;gt;&amp;gt;에 &amp;lt;홍춘&amp;gt;, &amp;lt;산엣색시 들녘사내&amp;gt; 등을 발표 시인으로 등단&amp;lt;/br&amp;gt;&lt;br /&gt;
'''1929년'''  도시샤 대학 졸업 후 고국에 돌아와 휘문고등보통학교의 영어교사로 부임. 박용철, 김영랑과 함께 동인지 &amp;lt;&amp;lt;시문학&amp;gt;&amp;gt;을 창간 &amp;lt;/br&amp;gt;&lt;br /&gt;
'''1933년'''  &amp;lt;&amp;lt;가톨릭청년&amp;gt;&amp;gt; 창간, 편집고문을 맡아 신앙시를 발표하고, 이태준, 이무영, 김기림 등과 함께‘9인회' 결성&amp;lt;/br&amp;gt;&lt;br /&gt;
'''1945년'''  해방과 함께 사임하고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 부임&amp;lt;/br&amp;gt;&lt;br /&gt;
'''1948년'''  사임하고 녹번리(현재 서울시 은평구 녹번동) 초당에서 생활&amp;lt;/br&amp;gt;&lt;br /&gt;
'''1950년'''  한국전쟁 중 사망 (추정)&lt;br /&gt;
&lt;br /&gt;
===&amp;lt;big&amp;gt;'''주요활동'''&amp;lt;/big&amp;gt;===&lt;br /&gt;
---- &lt;br /&gt;
휘문고등보통학교 재학 당시 『요람』동인을 결성하여 활동하였으며, '문우회(文友會)'의 학예부장직을 맡아 『휘문(徽文)』창간호의 편집 위원으로 활동했다.&amp;lt;/br&amp;gt;&lt;br /&gt;
도시샤대학 재학 중 동인지『가(街)』에 일본어시 &amp;lt;신라의 석류&amp;gt;를 발표했으며, 이는 정지용의 첫 발표 시편이다. 일본 유학 당시에도 조선어 시를 다수 발표했다. 이 때의 대표작으로는 &amp;lt;바다&amp;gt;, &amp;lt;향수&amp;gt;, &amp;lt;선취&amp;gt;, &amp;lt;압천&amp;gt; 등이 있다. &amp;lt;/br&amp;gt;&lt;br /&gt;
도시샤대학 졸업 후 고국으로 돌아와『시문학(詩文學)』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구인회(九人會)를 결성하여 1936년 3월 구인회의 동인지 『시와 소설』에 ｢유선애상(流線哀傷)｣을 발표했다. &amp;lt;/br&amp;gt;&lt;br /&gt;
일제강점기 후반 높은 성과를 거둔 문예잡지 『[[문장]]』의 추천심사위원으로 참여하여 훗날 '청록파'라는 한국시사의 한 유파를 형성한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 등 신인을 발굴하였다. 이 외에도 이한직, 박남수, 김종한 등 역량 있는 시인들을 시단에 내놓는 데 기여했다. &amp;lt;/br&amp;gt;&lt;br /&gt;
경향신문사의 주간을 맡았으며, 『경향신문』에 휘트먼 등의 시를 번역하여 발표했다.&amp;lt;/br&amp;gt; &lt;br /&gt;
1950년 6월 『문예(文藝)』에 발표한 시와 『국도신문(國都新聞)』에 연재한 남해 기행 산문을 마지막으로 발표했다.&lt;br /&gt;
&lt;br /&gt;
=== &amp;lt;big&amp;gt;'''작품'''&amp;lt;/big&amp;gt; ===&lt;br /&gt;
----&lt;br /&gt;
정지용의 대표작을 시, 시집, 평론·산문으로 구분했다. &lt;br /&gt;
==== 시 ====&lt;br /&gt;
* 〈석류〉&lt;br /&gt;
* 〈바다〉&lt;br /&gt;
* 〈유리창〉&lt;br /&gt;
* 〈불사조〉&lt;br /&gt;
* 〈향수〉&lt;br /&gt;
* 〈고향〉&lt;br /&gt;
* 〈장수산〉&lt;br /&gt;
* 〈백록담〉&lt;br /&gt;
&lt;br /&gt;
==== 시집 ====&lt;br /&gt;
* 『정지용 시집』(1935): 정지용의 첫 시집, 대부분 1925년부터 1935년까지 발표한 작품을 선별하여 수록.&amp;lt;/br&amp;gt; - 1부는 가톨릭 개종 이후의 시편, 2부는 초기 시편, 3부는 초기 시편과 같은 시기 창작한 동요류와 민요풍 시편, 4부는 신앙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시편, 5부는 산문 2편을 수록&lt;br /&gt;
* 『백록담』(1941): 정지용의 두 번째 시집, 1936년부터 1941년까지 발표한 작품 선별하여 수록. &amp;lt;/br&amp;gt; - 1부에서 4부까지는 25편의 시를, 5부에는 8편의 산문을 수록&lt;br /&gt;
* 『지용시선』(1946)&lt;br /&gt;
&lt;br /&gt;
==== 평론·산문 ====&lt;br /&gt;
* 『문학독본』(1948): 정지용의 첫 산문집 &lt;br /&gt;
* 『산문』(1949): 평문과 수필, 역시 등 수록&lt;br /&gt;
&lt;br /&gt;
===&amp;lt;big&amp;gt;'''평가'''&amp;lt;/big&amp;gt;===&lt;br /&gt;
---- &lt;br /&gt;
한국전쟁 발발 당시 서울을 떠나지 못했던 정지용은 정치보위부에 의해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뒤 북한으로 이송되었다. 이후 그는 월북 문인으로 분류되면서 오랫동안 작품 활동과 문학적 성과가 공식적으로 조명되지 못하였다. &amp;lt;/br&amp;gt;그러나 1982년 장남 정구관이 정지용이 자의로 월북한 것이 아니라 강제로 납북되었다는 사실을 밝히며 저작물 복간을 요청하는 진정서를 제출하였고, 이에 원로 문인과 학계가 동참하면서 정지용 문학의 재평가와 복권을 위한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amp;lt;/br&amp;gt;&lt;br /&gt;
&lt;br /&gt;
이후 사회 전반에서 이데올로기적 긴장이 완화되고 대학을 중심으로 월북 문인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1987년 10월에는 관련 연구 성과의 발표와 출판이 허용되었고, 『정지용연구』가 간행되었다. 1988년에는 『정지용 시와 산문』과 함께 시와 소설을 분리한 『정지용전집』 2권이 민음사에서 출판되었다.&amp;lt;/br&amp;gt; 1988년 3월 31일 문화공보부가 정지용 작품의 해금을 공식 발표하면서 그의 문학은 제도적으로도 복권되었다.&amp;lt;/br&amp;gt; 이를 계기로 1988년 ‘지용회’가 창립되고 ‘제1회 지용제’가 열렸으며, 1989년에는 ‘지용 시문학상’이 제정되어 박두진 시인이 초대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이후 1995년에는 정지용기념사업이 추진되었고, 1996년 그의 생가가 복원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amp;lt;big&amp;gt;'''참고문헌'''&amp;lt;/big&amp;gt; ===&lt;br /&gt;
----&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지용(鄭芝溶)」,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0954]&lt;br /&gt;
* 전통문화포털. 「정지용(鄭芝溶)」, 『한국의 문화인물(연도별)』, 한국문화진흥. [https://www.kculture.or.kr/brd/board/252/L/menu/465?brdType=R&amp;amp;thisPage=14&amp;amp;bbIdx=8574]&lt;/div&gt;</summary>
		<author><name>Jmwshye</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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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25-2)]]&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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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鄭芝溶)]]&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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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big&amp;gt;&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인문사회&amp;lt;/div&amp;gt;&amp;lt;/big&amp;g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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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C8A2C8&amp;quot;&amp;gt;&lt;br /&gt;
본교 [https://libart.korea.ac.kr/libart/index.do 문과대학]은 2023년부터 '''교육부''' &amp;lt;인문사회 융합인재양성사업&amp;gt;의 디지털 분야 주관대학으로 선정되어 연간 28억의 사업비를 수주하여 본격적으로 [인문사회 디지털융합전공]을 신설하고 ICT 및 문화콘텐츠 기업, 공공기업과 더불어 다양한 비교과프로그램을 운영합니다.&lt;br /&gt;
&amp;lt;/font&amp;gt;&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6699FF&amp;quot;&amp;gt;&lt;br /&gt;
'좋아하는' 색깔 소개&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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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파일:마루.jpg]]&lt;br /&gt;
&lt;br /&gt;
맛있는 음식&lt;br /&gt;
#한식&lt;br /&gt;
##국밥&lt;br /&gt;
##고른햇살&lt;br /&gt;
#일식&lt;br /&gt;
##텐동&lt;br /&gt;
##카츠&lt;br /&gt;
##라멘&lt;br /&gt;
#중식&lt;br /&gt;
##용초수&lt;br /&gt;
##마라샹궈&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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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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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name>Jmwshye</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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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문장(文章)</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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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lass=&amp;quot;metadata&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f9f9f9; width:300px; margin: 0 0 10px 10px; border:1px solid #aaa; float:right; clear:right;&amp;quot; cellspacing=&amp;quot;5&amp;quo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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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amp;quot;2&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5a4632; color:#ffffff; font-size:120%; text-align:center; padding:5px;&amp;quot; | '''문장(文章)'''&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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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amp;quot;2&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 | [[파일:문장.jpg|250px|가운데]] &amp;lt;br /&amp;gt; &amp;lt;span style=&amp;quot;font-size:90%;&amp;quot;&amp;gt;{{{상징설명|}}}&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창간''' || 1939년 2월&lt;br /&gt;
|-&lt;br /&gt;
|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폐간''' || 1941년 4월&lt;br /&gt;
|-&lt;br /&gt;
|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간행주기''' || 1개월&lt;br /&gt;
|-&lt;br /&gt;
|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총호수''' || 26호&lt;br /&gt;
|-&lt;br /&gt;
|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간행자''' || 김연만(金鍊萬)&lt;br /&gt;
|-&lt;br /&gt;
|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주간(主幹)''' || 이태준(李泰俊)&lt;br /&gt;
|-&lt;br /&gt;
|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제자(題字)''' || 김정희(金正喜)&lt;br /&gt;
|-&lt;br /&gt;
|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권두화(卷頭畫)''' || 김용준(金溶俊)&lt;br /&gt;
|-&lt;br /&gt;
|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표지화(表紙畫)''' || 길진섭(吉鎭燮)&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onlyinclude&amp;gt;&lt;br /&gt;
&lt;br /&gt;
&lt;br /&gt;
===개요===&lt;br /&gt;
----&lt;br /&gt;
소설가 이태준(李泰俊)이 경북 김천 출신의 부호(富豪) 김연만(金鍊萬)에게 권유하여 1939년 창간한 식민지 후반기의 대표적 문학 잡지&amp;lt;br /&amp;gt;&lt;br /&gt;
이태준이 주간(主幹)을 맡아 소설 편집에 관여했으며, 시에 [[정지용(鄭芝溶)]], 시조 및 고전 분야에 이병기(李秉岐)가 편집위원으로 참여해 발표 작품 및 글의 선정, 신인 추천에 있어 돋보이는 결과를 냈다. 또한, 권두화(卷頭畫)·표지화(表紙畫)는 당대 미술계의 한 축을 이룬 김용준(金瑢俊)과 길진섭(吉鎭燮)이 맡았다.&amp;lt;br /&amp;gt;&lt;br /&gt;
‘조선적인 것’, ‘조선적 전통’을 발견하려는 지향을 드러냈다. 고전 관련 글들이 다수 게재되었지만, 『문장』 전체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문예 관련 글들이다. 『문장』은 개방성을 원칙으로 삼았지만, 작품성을 최우선적 기준으로 삼아 문학 작품을 선별 게재했으며 추천제를 두어 신인을 발굴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창간 경위===&lt;br /&gt;
----&lt;br /&gt;
'''1939년 2월''' 창간&amp;lt;br /&amp;gt;&lt;br /&gt;
'''1939년 7월''' 임시 중간호 발행&amp;lt;br /&amp;gt;&lt;br /&gt;
'''1940년 6월, 8월''' 용지난으로 휴간&amp;lt;br /&amp;gt;&lt;br /&gt;
'''1941년''' 일제 당국의 『문장』 · 『인문평론』 · 『신세기』 병합과 함께 ‘일선어(日鮮語)를 반분하여 황도정신(皇道精神) 앙양에 적극 협력하라.’는 데 불응하고 통권 25호로 폐간&amp;lt;br /&amp;gt;&lt;br /&gt;
'''1945년 8월''' 해방&amp;lt;br /&amp;gt;&lt;br /&gt;
'''1948년 10월''' [[정지용(鄭芝溶)]]이 속간하였으나, 제1호로 종간&lt;br /&gt;
&lt;br /&gt;
&lt;br /&gt;
===구성 및 내용===&lt;br /&gt;
----&lt;br /&gt;
『문장』은 학술적 탐구, 정전의 제시, 창작적 실천 등을 통해 조선의 문학적 · 문화적 전통을 확립하고 재생하려 시도했다.&amp;lt;br /&amp;gt; 문장은 시·소설의 창작만이 아니라 우리 고전문학의 주해(註解)와 연구논문, 희귀자료를 발굴 및 게재했다.&amp;lt;br /&amp;gt;『문장』에 실린 논문 및 자료들 중 이희승(李熙昇)의 「조선문학연구초(朝鮮文學硏究抄)」(총 3호, 1939.4.), 이태준의 「문장강화(文章講話)」(창간호∼총 9호), 송석하(宋錫夏)의 「봉산가면극각본( 鳳山假面劇脚本)」(총 17호, 1940.7.), 조윤제(趙潤濟)의 「조선소설사개요(朝鮮小說史槪要)」(총 18호, 1940.9.), 손진태(孫晉泰)의 「무격(巫覡)의 신가(神歌)」(총 18호), 조남령(曺南嶺)의 「현대시조론(現代時調論)」(총 19호, 1940.10.), 이병기(李秉岐)의 「조선어문학명저해제(朝鮮語文學名著解題)」(총 19호), 양주동(梁柱東)의 「사뇌가석주서설(詞腦歌釋注序說)」(총 21호, 1940.12.), 정인승(鄭寅承)의 「고본훈민정음(古本訓民正音)의 연구」(총 21호, 1940.3.), 조윤제의 「설화문학고(說話文學考)」(총 24호, 1941.3.), 최현배(崔鉉培)의 「한글의 비교 연구」(총 25호, 1941.4.) 및 자료 「춘향전집」(고사본 · 고본 · 고대본, 총 21∼25호) 등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amp;lt;br /&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문장』에는 고전 관련 글들이 다수 게재되었지만, 『문장』 전체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문예 관련 글들이었다. 『문장』은 개방성을 원칙으로 삼았지만, 작품성을 최우선적 기준으로 삼아 문학 작품을 선별 게재했다. 문장에 발표된 작품으로는 소설 182편, 국문학 35편, 시 172편, 시조 25편, 평론·학예 129편, 수필 187편, 기타 172편 등이 있다. &amp;lt;br /&amp;gt;&lt;br /&gt;
&lt;br /&gt;
'''추천제'''를 두어 신인을 발굴하였으며 그 제도의 정착 과정에서 심사자였던 이병기, [[정지용(鄭芝溶)|정지용]], 이태준이 획득한 대중적 · 문학적 권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lt;br /&gt;
추천된 신인으로는 &amp;lt;br /&amp;gt;&lt;br /&gt;
'''소설'''에 최태응(崔泰應) · 곽하신(郭夏信) · 임옥인(林玉仁) · 지하련(池河蓮) · 정진엽(鄭鎭葉) · 한병각(韓柄珏) · 선진수(宣鎭秀) · 유운경(劉雲卿) · 허민(許民) · 임서하(任西河)&amp;lt;br /&amp;gt;&lt;br /&gt;
'''시'''에 이한직(李漢稷) · 김종한(金鍾漢) · 박남수(朴南秀) · 박두진(朴斗鎭) · 박목월(朴木月) · 조지훈(趙芝薰) · 박일연(朴一淵) · 조정순(趙貞順) · 최남령(崔嵐嶺) · 허민(許民) · 황민(黃民)&amp;lt;br /&amp;gt;&lt;br /&gt;
'''시조'''에 조남령(曺南嶺) · 김영기(金永起) · 김상옥(金相沃) · 이호우(李鎬雨) · 장응두(張應斗) · 오신혜(吳信惠)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의의 및 평가===&lt;br /&gt;
----&lt;br /&gt;
『인문평론』과 『문장』은 둘 다 식민지 후반기에 발표되었기에 여러 지점에서 비교 대상이 되고 있다. 『인문평론』이 전향 지식인의 친서구적 경향을 드러냈다면 『문장』은 친한국적, 친동양적인 전통적 미학주의를 드러냈다는 시각은 기존의 문학사 서술에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lt;br /&gt;
2000년대 이후에는 『문장』이 『인문평론』과 달리 ‘서양의 근대'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지만, ‘동양(일본)’이라는 또 다른 보편과의 연관 관계 속에서 조선적 전통의 특수성을 탐색하려고 했다는 관점 또한 발견된다. 이와 달리 『문장』 역시 『인문평론』과 마찬가지로 반근대적 전통주의, 모더니즘의 토착화 경향, 총동원 체제의 협력 담론으로서의 ‘동양론’이 모호하게 뒤섞인 문화 지평 위에서 간행되고 있음을 지적한 관점 또한 나타나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 참고문헌 ===&lt;br /&gt;
----&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문장(文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9646]&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문장파(文章派)」,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0734]&lt;/div&gt;</summary>
		<author><name>Jmwshye</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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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문장(文章)</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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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23T14:17:1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mwshye: &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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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div&gt;&amp;lt;onlyinclude&amp;g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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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amp;quot;2&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5a4632; color:#ffffff; font-size:120%; text-align:center; padding:5px;&amp;quot; | '''문장(文章)'''&lt;br /&gt;
|-&lt;br /&gt;
| colspan=&amp;quot;2&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 | [[파일:문장.jpg|250px|가운데]] &amp;lt;br /&amp;gt; &amp;lt;span style=&amp;quot;font-size:90%;&amp;quot;&amp;gt;{{{상징설명|}}}&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창간''' || 1939년 2월&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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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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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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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권두화(卷頭畫)''' || 김용준(金溶俊)&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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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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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개요===&lt;br /&gt;
----&lt;br /&gt;
소설가 이태준(李泰俊)이 경북 김천 출신의 부호(富豪) 김연만(金鍊萬)에게 권유하여 1939년 창간한 식민지 후반기의 대표적 문학 잡지&amp;lt;br /&amp;gt;&lt;br /&gt;
이태준이 주간(主幹)을 맡아 소설 편집에 관여했으며, 시에 정지용(鄭芝溶), 시조 및 고전 분야에 이병기(李秉岐)가 편집위원으로 참여해 발표 작품 및 글의 선정, 신인 추천에 있어 돋보이는 결과를 냈다. 또한, 권두화(卷頭畫)·표지화(表紙畫)는 당대 미술계의 한 축을 이룬 김용준(金瑢俊)과 길진섭(吉鎭燮)이 맡았다.&amp;lt;br /&amp;gt;&lt;br /&gt;
‘조선적인 것’, ‘조선적 전통’을 발견하려는 지향을 드러냈다. 고전 관련 글들이 다수 게재되었지만, 『문장』 전체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문예 관련 글들이다. 『문장』은 개방성을 원칙으로 삼았지만, 작품성을 최우선적 기준으로 삼아 문학 작품을 선별 게재했으며 추천제를 두어 신인을 발굴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창간 경위===&lt;br /&gt;
----&lt;br /&gt;
'''1939년 2월''' 창간&amp;lt;br /&amp;gt;&lt;br /&gt;
'''1939년 7월''' 임시 중간호 발행&amp;lt;br /&amp;gt;&lt;br /&gt;
'''1940년 6월, 8월''' 용지난으로 휴간&amp;lt;br /&amp;gt;&lt;br /&gt;
'''1941년''' 일제 당국의 『문장』 · 『인문평론』 · 『신세기』 병합과 함께 ‘일선어(日鮮語)를 반분하여 황도정신(皇道精神) 앙양에 적극 협력하라.’는 데 불응하고 통권 25호로 폐간&amp;lt;br /&amp;gt;&lt;br /&gt;
'''1945년 8월''' 해방&amp;lt;br /&amp;gt;&lt;br /&gt;
'''1948년 10월''' 정지용(鄭芝溶)이 속간하였으나, 제1호로 종간&lt;br /&gt;
&lt;br /&gt;
&lt;br /&gt;
===구성 및 내용===&lt;br /&gt;
----&lt;br /&gt;
『문장』은 학술적 탐구, 정전의 제시, 창작적 실천 등을 통해 조선의 문학적 · 문화적 전통을 확립하고 재생하려 시도했다.&amp;lt;br /&amp;gt; 문장은 시·소설의 창작만이 아니라 우리 고전문학의 주해(註解)와 연구논문, 희귀자료를 발굴 및 게재했다.&amp;lt;br /&amp;gt;『문장』에 실린 논문 및 자료들 중 이희승(李熙昇)의 「조선문학연구초(朝鮮文學硏究抄)」(총 3호, 1939.4.), 이태준의 「문장강화(文章講話)」(창간호∼총 9호), 송석하(宋錫夏)의 「봉산가면극각본( 鳳山假面劇脚本)」(총 17호, 1940.7.), 조윤제(趙潤濟)의 「조선소설사개요(朝鮮小說史槪要)」(총 18호, 1940.9.), 손진태(孫晉泰)의 「무격(巫覡)의 신가(神歌)」(총 18호), 조남령(曺南嶺)의 「현대시조론(現代時調論)」(총 19호, 1940.10.), 이병기(李秉岐)의 「조선어문학명저해제(朝鮮語文學名著解題)」(총 19호), 양주동(梁柱東)의 「사뇌가석주서설(詞腦歌釋注序說)」(총 21호, 1940.12.), 정인승(鄭寅承)의 「고본훈민정음(古本訓民正音)의 연구」(총 21호, 1940.3.), 조윤제의 「설화문학고(說話文學考)」(총 24호, 1941.3.), 최현배(崔鉉培)의 「한글의 비교 연구」(총 25호, 1941.4.) 및 자료 「춘향전집」(고사본 · 고본 · 고대본, 총 21∼25호) 등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amp;lt;br /&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문장』에는 고전 관련 글들이 다수 게재되었지만, 『문장』 전체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문예 관련 글들이었다. 『문장』은 개방성을 원칙으로 삼았지만, 작품성을 최우선적 기준으로 삼아 문학 작품을 선별 게재했다. 문장에 발표된 작품으로는 소설 182편, 국문학 35편, 시 172편, 시조 25편, 평론·학예 129편, 수필 187편, 기타 172편 등이 있다. &amp;lt;br /&amp;gt;&lt;br /&gt;
&lt;br /&gt;
'''추천제'''를 두어 신인을 발굴하였으며 그 제도의 정착 과정에서 심사자였던 이병기, 정지용, 이태준이 획득한 대중적 · 문학적 권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lt;br /&gt;
추천된 신인으로는 &amp;lt;br /&amp;gt;&lt;br /&gt;
'''소설'''에 최태응(崔泰應) · 곽하신(郭夏信) · 임옥인(林玉仁) · 지하련(池河蓮) · 정진엽(鄭鎭葉) · 한병각(韓柄珏) · 선진수(宣鎭秀) · 유운경(劉雲卿) · 허민(許民) · 임서하(任西河)&amp;lt;br /&amp;gt;&lt;br /&gt;
'''시'''에 이한직(李漢稷) · 김종한(金鍾漢) · 박남수(朴南秀) · 박두진(朴斗鎭) · 박목월(朴木月) · 조지훈(趙芝薰) · 박일연(朴一淵) · 조정순(趙貞順) · 최남령(崔嵐嶺) · 허민(許民) · 황민(黃民)&amp;lt;br /&amp;gt;&lt;br /&gt;
'''시조'''에 조남령(曺南嶺) · 김영기(金永起) · 김상옥(金相沃) · 이호우(李鎬雨) · 장응두(張應斗) · 오신혜(吳信惠)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의의 및 평가===&lt;br /&gt;
----&lt;br /&gt;
『인문평론』과 『문장』은 둘 다 식민지 후반기에 발표되었기에 여러 지점에서 비교 대상이 되고 있다. 『인문평론』이 전향 지식인의 친서구적 경향을 드러냈다면 『문장』은 친한국적, 친동양적인 전통적 미학주의를 드러냈다는 시각은 기존의 문학사 서술에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lt;br /&gt;
2000년대 이후에는 『문장』이 『인문평론』과 달리 ‘서양의 근대'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지만, ‘동양(일본)’이라는 또 다른 보편과의 연관 관계 속에서 조선적 전통의 특수성을 탐색하려고 했다는 관점 또한 발견된다. 이와 달리 『문장』 역시 『인문평론』과 마찬가지로 반근대적 전통주의, 모더니즘의 토착화 경향, 총동원 체제의 협력 담론으로서의 ‘동양론’이 모호하게 뒤섞인 문화 지평 위에서 간행되고 있음을 지적한 관점 또한 나타나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 참고문헌 ===&lt;br /&gt;
----&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문장(文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9646]&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문장파(文章派)」,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0734]&lt;/div&gt;</summary>
		<author><name>Jmwshye</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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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정지용(鄭池龍)</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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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23T14:14:5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mwshye: &lt;/p&gt;
&lt;hr /&gt;
&lt;div&gt;&amp;lt;onlyinclude&amp;gt;&lt;br /&gt;
{| class=&amp;quot;metadata&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ffffff; width:300px; margin: 0 0 10px 10px; border:1px solid #aaa; float:right; clear:right;&amp;quot; cellspacing=&amp;quot;5&amp;quot;&lt;br /&gt;
|-&lt;br /&gt;
! colspan=&amp;quot;2&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664b00; color:#ffffff; font-size:120%; text-align:center; padding:5px;&amp;quot; | '''정지용(鄭池龍)'''&lt;br /&gt;
|-&lt;br /&gt;
| colspan=&amp;quot;2&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 | [[파일:정지용.jpeg|250px]] &amp;lt;br /&amp;gt; &amp;lt;span style=&amp;quot;font-size:90%;&amp;quot;&amp;gt;{{{초상화설명|}}}&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출생''' || 1902년 6월 20일&lt;br /&gt;
|-&lt;br /&gt;
|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사망''' || 1950년 9월 25일(향년 48세) 추정&lt;br /&gt;
|-&lt;br /&gt;
|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자''' || 영지(靈之)&lt;br /&gt;
|-&lt;br /&gt;
|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본관''' || 연일 정씨&lt;br /&gt;
|-&lt;br /&gt;
|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학력''' || 옥천공립보통학교&amp;lt;br /&amp;gt; 휘문고등보통학교&amp;lt;br /&amp;gt; 도시샤(同志社)대학&lt;br /&gt;
|-&lt;br /&gt;
|}&lt;br /&gt;
&amp;lt;/onlyinclude&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ig&amp;gt;'''개요'''&amp;lt;/big&amp;gt;===&lt;br /&gt;
----&lt;br /&gt;
정지용(鄭芝溶)은 일제강점기에 『정지용시집』, 『백록담』, 『문학독본』, 『산문』 등을 저술한 시인이자 번역가, 교육자이다. &lt;br /&gt;
『시문학』 동인, '구인회' 회원, 『문장』 시 부문 심사위원, 경향신문사 주간으로 활동하였으며, 휘문고등보통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ig&amp;gt;'''생애'''&amp;lt;/big&amp;gt;===&lt;br /&gt;
----&lt;br /&gt;
'''1902년'''  충북 옥천군 옥천면 하계리 40번지, 약종상을 하는 아버지 정태국과 어머니 정미하의 장남으로 출생&amp;lt;/br&amp;gt;&lt;br /&gt;
'''1910년'''  옥천공립보통학교 입학 &amp;lt;/br&amp;gt;&lt;br /&gt;
'''1918년'''  휘문고등보통학교 입학&amp;lt;/br&amp;gt;&lt;br /&gt;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휘문사태'의 주동으로 무기정학을 받아 수업을 받지 못함.&amp;lt;/br&amp;gt;&lt;br /&gt;
'''1922년'''  휘문고등보통학교 졸업, 첫 시&amp;lt;풍랑몽&amp;gt;을 씀. &amp;lt;/br&amp;gt;&lt;br /&gt;
'''1923년'''  일본 도시샤 대학의 영문과에 입학. 재학 당시 &amp;lt;석류&amp;gt;, &amp;lt;바다&amp;gt; 등을 씀.&amp;lt;/br&amp;gt;&lt;br /&gt;
'''1926년'''  &amp;lt;&amp;lt;학조&amp;gt;&amp;gt; 창간호에 &amp;lt;카페 프란스&amp;gt;등 9편의 시를, 그리고 &amp;lt;&amp;lt;신민&amp;gt;&amp;gt;, &amp;lt;&amp;lt;문예시대&amp;gt;&amp;gt;에 &amp;lt;홍춘&amp;gt;, &amp;lt;산엣색시 들녘사내&amp;gt; 등을 발표 시인으로 등단&amp;lt;/br&amp;gt;&lt;br /&gt;
'''1929년'''  도시샤 대학 졸업 후 고국에 돌아와 휘문고등보통학교의 영어교사로 부임. 박용철, 김영랑과 함께 동인지 &amp;lt;&amp;lt;시문학&amp;gt;&amp;gt;을 창간 &amp;lt;/br&amp;gt;&lt;br /&gt;
'''1933년'''  &amp;lt;&amp;lt;가톨릭청년&amp;gt;&amp;gt; 창간, 편집고문을 맡아 신앙시를 발표하고, 이태준, 이무영, 김기림 등과 함께‘9인회' 결성&amp;lt;/br&amp;gt;&lt;br /&gt;
'''1945년'''  해방과 함께 사임하고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 부임&amp;lt;/br&amp;gt;&lt;br /&gt;
'''1948년'''  사임하고 녹번리(현재 서울시 은평구 녹번동) 초당에서 생활&amp;lt;/br&amp;gt;&lt;br /&gt;
'''1950년'''  한국전쟁 중 사망 (추정)&lt;br /&gt;
&lt;br /&gt;
===&amp;lt;big&amp;gt;'''주요활동'''&amp;lt;/big&amp;gt;===&lt;br /&gt;
---- &lt;br /&gt;
휘문고등보통학교 재학 당시 『요람』동인을 결성하여 활동하였으며, '문우회(文友會)'의 학예부장직을 맡아 『휘문(徽文)』창간호의 편집 위원으로 활동했다.&amp;lt;/br&amp;gt;&lt;br /&gt;
도시샤대학 재학 중 동인지『가(街)』에 일본어시 &amp;lt;신라의 석류&amp;gt;를 발표했으며, 이는 정지용의 첫 발표 시편이다. 일본 유학 당시에도 조선어 시를 다수 발표했다. 이 때의 대표작으로는 &amp;lt;바다&amp;gt;, &amp;lt;향수&amp;gt;, &amp;lt;선취&amp;gt;, &amp;lt;압천&amp;gt; 등이 있다. &amp;lt;/br&amp;gt;&lt;br /&gt;
도시샤대학 졸업 후 고국으로 돌아와『시문학(詩文學)』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구인회(九人會)를 결성하여 1936년 3월 구인회의 동인지 『시와 소설』에 ｢유선애상(流線哀傷)｣을 발표했다. &amp;lt;/br&amp;gt;&lt;br /&gt;
일제강점기 후반 높은 성과를 거둔 문예잡지 『[[문장]]』의 추천심사위원으로 참여하여 훗날 '청록파'라는 한국시사의 한 유파를 형성한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 등 신인을 발굴하였다. 이 외에도 이한직, 박남수, 김종한 등 역량 있는 시인들을 시단에 내놓는 데 기여했다. &amp;lt;/br&amp;gt;&lt;br /&gt;
경향신문사의 주간을 맡았으며, 『경향신문』에 휘트먼 등의 시를 번역하여 발표했다.&amp;lt;/br&amp;gt; &lt;br /&gt;
1950년 6월 『문예(文藝)』에 발표한 시와 『국도신문(國都新聞)』에 연재한 남해 기행 산문을 마지막으로 발표했다.&lt;br /&gt;
&lt;br /&gt;
=== &amp;lt;big&amp;gt;'''작품'''&amp;lt;/big&amp;gt; ===&lt;br /&gt;
----&lt;br /&gt;
정지용의 대표작을 시, 시집, 평론·산문으로 구분했다. &lt;br /&gt;
==== 시 ====&lt;br /&gt;
* 〈석류〉&lt;br /&gt;
* 〈바다〉&lt;br /&gt;
* 〈유리창〉&lt;br /&gt;
* 〈불사조〉&lt;br /&gt;
* 〈향수〉&lt;br /&gt;
* 〈고향〉&lt;br /&gt;
* 〈장수산〉&lt;br /&gt;
* 〈백록담〉&lt;br /&gt;
&lt;br /&gt;
==== 시집 ====&lt;br /&gt;
* 『정지용 시집』(1935): 정지용의 첫 시집, 대부분 1925년부터 1935년까지 발표한 작품을 선별하여 수록.&amp;lt;/br&amp;gt; - 1부는 가톨릭 개종 이후의 시편, 2부는 초기 시편, 3부는 초기 시편과 같은 시기 창작한 동요류와 민요풍 시편, 4부는 신앙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시편, 5부는 산문 2편을 수록&lt;br /&gt;
* 『백록담』(1941): 정지용의 두 번째 시집, 1936년부터 1941년까지 발표한 작품 선별하여 수록. &amp;lt;/br&amp;gt; - 1부에서 4부까지는 25편의 시를, 5부에는 8편의 산문을 수록&lt;br /&gt;
* 『지용시선』(1946)&lt;br /&gt;
&lt;br /&gt;
==== 평론·산문 ====&lt;br /&gt;
* 『문학독본』(1948): 정지용의 첫 산문집 &lt;br /&gt;
* 『산문』(1949): 평문과 수필, 역시 등 수록&lt;br /&gt;
&lt;br /&gt;
===&amp;lt;big&amp;gt;'''평가'''&amp;lt;/big&amp;gt;===&lt;br /&gt;
---- &lt;br /&gt;
한국전쟁 발발 당시 서울을 떠나지 못했던 정지용은 정치보위부에 의해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뒤 북한으로 이송되었다. 이후 그는 월북 문인으로 분류되면서 오랫동안 작품 활동과 문학적 성과가 공식적으로 조명되지 못하였다. &amp;lt;/br&amp;gt;그러나 1982년 장남 정구관이 정지용이 자의로 월북한 것이 아니라 강제로 납북되었다는 사실을 밝히며 저작물 복간을 요청하는 진정서를 제출하였고, 이에 원로 문인과 학계가 동참하면서 정지용 문학의 재평가와 복권을 위한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amp;lt;/br&amp;gt;&lt;br /&gt;
&lt;br /&gt;
이후 사회 전반에서 이데올로기적 긴장이 완화되고 대학을 중심으로 월북 문인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1987년 10월에는 관련 연구 성과의 발표와 출판이 허용되었고, 『정지용연구』가 간행되었다. 1988년에는 『정지용 시와 산문』과 함께 시와 소설을 분리한 『정지용전집』 2권이 민음사에서 출판되었다.&amp;lt;/br&amp;gt; 1988년 3월 31일 문화공보부가 정지용 작품의 해금을 공식 발표하면서 그의 문학은 제도적으로도 복권되었다.&amp;lt;/br&amp;gt; 이를 계기로 1988년 ‘지용회’가 창립되고 ‘제1회 지용제’가 열렸으며, 1989년에는 ‘지용 시문학상’이 제정되어 박두진 시인이 초대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이후 1995년에는 정지용기념사업이 추진되었고, 1996년 그의 생가가 복원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amp;lt;big&amp;gt;'''참고문헌'''&amp;lt;/big&amp;gt; ===&lt;br /&gt;
----&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지용(鄭芝溶)」,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0954]&lt;br /&gt;
* 전통문화포털. 「정지용(鄭芝溶)」, 『한국의 문화인물(연도별)』, 한국문화진흥. [https://www.kculture.or.kr/brd/board/252/L/menu/465?brdType=R&amp;amp;thisPage=14&amp;amp;bbIdx=8574]&lt;/div&gt;</summary>
		<author><name>Jmwshye</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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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정지용(鄭池龍)</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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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23T14:14:1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mwshye: &lt;/p&gt;
&lt;hr /&gt;
&lt;div&gt;&amp;lt;onlyinclude&amp;gt;&lt;br /&gt;
{| class=&amp;quot;metadata&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ffffff; width:300px; margin: 0 0 10px 10px; border:1px solid #aaa; float:right; clear:right;&amp;quot; cellspacing=&amp;quot;5&amp;quot;&lt;br /&gt;
|-&lt;br /&gt;
! colspan=&amp;quot;2&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664b00; color:#ffffff; font-size:120%; text-align:center; padding:5px;&amp;quot; | '''정지용(鄭池龍)'''&lt;br /&gt;
|-&lt;br /&gt;
| colspan=&amp;quot;2&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 | [[파일:정지용.jpeg|250px]] &amp;lt;br /&amp;gt; &amp;lt;span style=&amp;quot;font-size:90%;&amp;quot;&amp;gt;{{{초상화설명|}}}&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출생''' || 1902년 6월 20일&lt;br /&gt;
|-&lt;br /&gt;
|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사망''' || 1950년 9월 25일(향년 48세) 추정&lt;br /&gt;
|-&lt;br /&gt;
|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자''' || 영지(靈之)&lt;br /&gt;
|-&lt;br /&gt;
|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본관''' || 연일 정씨&lt;br /&gt;
|-&lt;br /&gt;
|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학력''' || 옥천공립보통학교&amp;lt;br /&amp;gt; 휘문고등보통학교&amp;lt;br /&amp;gt; 도시샤(同志社)대학&lt;br /&gt;
|-&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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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lt;br /&gt;
===&amp;lt;big&amp;gt;'''개요'''&amp;lt;/big&amp;gt;===&lt;br /&gt;
----&lt;br /&gt;
정지용(鄭芝溶)은 일제강점기에 『정지용시집』, 『백록담』, 『문학독본』, 『산문』 등을 저술한 시인이자 번역가, 교육자이다. &lt;br /&gt;
『시문학』 동인, '구인회' 회원, 『문장』 시 부문 심사위원, 경향신문사 주간으로 활동하였으며, 휘문고등보통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ig&amp;gt;'''생애'''&amp;lt;/big&amp;gt;===&lt;br /&gt;
----&lt;br /&gt;
'''1902년'''  충북 옥천군 옥천면 하계리 40번지, 약종상을 하는 아버지 정태국과 어머니 정미하의 장남으로 출생&amp;lt;/br&amp;gt;&lt;br /&gt;
'''1910년'''  옥천공립보통학교 입학 &amp;lt;/br&amp;gt;&lt;br /&gt;
'''1918년'''  휘문고등보통학교 입학&amp;lt;/br&amp;gt;&lt;br /&gt;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휘문사태'의 주동으로 무기정학을 받아 수업을 받지 못함.&amp;lt;/br&amp;gt;&lt;br /&gt;
'''1922년'''  휘문고등보통학교 졸업, 첫 시&amp;lt;풍랑몽&amp;gt;을 씀. &amp;lt;/br&amp;gt;&lt;br /&gt;
'''1923년'''  일본 도시샤 대학의 영문과에 입학. 재학 당시 &amp;lt;석류&amp;gt;, &amp;lt;바다&amp;gt; 등을 씀.&amp;lt;/br&amp;gt;&lt;br /&gt;
'''1926년'''  &amp;lt;&amp;lt;학조&amp;gt;&amp;gt; 창간호에 &amp;lt;카페 프란스&amp;gt;등 9편의 시를, 그리고 &amp;lt;&amp;lt;신민&amp;gt;&amp;gt;, &amp;lt;&amp;lt;문예시대&amp;gt;&amp;gt;에 &amp;lt;홍춘&amp;gt;, &amp;lt;산엣색시 들녘사내&amp;gt; 등을 발표 시인으로 등단&amp;lt;/br&amp;gt;&lt;br /&gt;
'''1929년'''  도시샤 대학 졸업 후 고국에 돌아와 휘문고등보통학교의 영어교사로 부임. 박용철, 김영랑과 함께 동인지 &amp;lt;&amp;lt;시문학&amp;gt;&amp;gt;을 창간 &amp;lt;/br&amp;gt;&lt;br /&gt;
'''1933년'''  &amp;lt;&amp;lt;가톨릭청년&amp;gt;&amp;gt; 창간, 편집고문을 맡아 신앙시를 발표하고, 이태준, 이무영, 김기림 등과 함께‘9인회' 결성&amp;lt;/br&amp;gt;&lt;br /&gt;
'''1945년'''  해방과 함께 사임하고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 부임&amp;lt;/br&amp;gt;&lt;br /&gt;
'''1948년'''  사임하고 녹번리(현재 서울시 은평구 녹번동) 초당에서 생활&amp;lt;/br&amp;gt;&lt;br /&gt;
'''1950년'''  한국전쟁 중 사망 (추정)&lt;br /&gt;
&lt;br /&gt;
===&amp;lt;big&amp;gt;'''주요활동'''&amp;lt;/big&amp;gt;===&lt;br /&gt;
---- &lt;br /&gt;
휘문고등보통학교 재학 당시 『요람』동인을 결성하여 활동하였으며, '문우회(文友會)'의 학예부장직을 맡아 『휘문(徽文)』창간호의 편집 위원으로 활동했다.&amp;lt;/br&amp;gt;&lt;br /&gt;
도시샤대학 재학 중 동인지『가(街)』에 일본어시 &amp;lt;신라의 석류&amp;gt;를 발표했으며, 이는 정지용의 첫 발표 시편이다. 일본 유학 당시에도 조선어 시를 다수 발표했다. 이 때의 대표작으로는 &amp;lt;바다&amp;gt;, &amp;lt;향수&amp;gt;, &amp;lt;선취&amp;gt;, &amp;lt;압천&amp;gt; 등이 있다. &amp;lt;/br&amp;gt;&lt;br /&gt;
도시샤대학 졸업 후 고국으로 돌아와『시문학(詩文學)』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구인회(九人會)를 결성하여 1936년 3월 구인회의 동인지 『시와 소설』에 ｢유선애상(流線哀傷)｣을 발표했다. &amp;lt;/br&amp;gt;&lt;br /&gt;
일제강점기 후반 높은 성과를 거둔 문예잡지 『[[문장]]』의 추천심사위원으로 참여하여 훗날 '청록파'라는 한국시사의 한 유파를 형성한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 등 신인을 발굴하였다. 이 외에도 이한직, 박남수, 김종한 등 역량 있는 시인들을 시단에 내놓는 데 기여했다. &amp;lt;/br&amp;gt;&lt;br /&gt;
경향신문사의 주간을 맡았으며, 『경향신문』에 휘트먼 등의 시를 번역하여 발표했다.&amp;lt;/br&amp;gt; &lt;br /&gt;
1950년 6월 『문예(文藝)』에 발표한 시와 『국도신문(國都新聞)』에 연재한 남해 기행 산문을 마지막으로 발표했다.&lt;br /&gt;
&lt;br /&gt;
=== &amp;lt;big&amp;gt;'''작품'''&amp;lt;/big&amp;gt; ===&lt;br /&gt;
----&lt;br /&gt;
정지용의 대표작을 시, 시집, 평론·산문으로 구분했다. &lt;br /&gt;
==== 시 ====&lt;br /&gt;
* 〈석류〉&lt;br /&gt;
* 〈바다〉&lt;br /&gt;
* 〈유리창〉&lt;br /&gt;
* 〈불사조〉&lt;br /&gt;
* 〈향수〉&lt;br /&gt;
* 〈고향〉&lt;br /&gt;
* 〈장수산〉&lt;br /&gt;
* 〈백록담〉&lt;br /&gt;
&lt;br /&gt;
==== 시집 ====&lt;br /&gt;
* 『정지용 시집』(1935): 정지용의 첫 시집, 대부분 1925년부터 1935년까지 발표한 작품을 선별하여 수록.&amp;lt;/br&amp;gt;1부는 가톨릭 개종 이후의 시편, 2부는 초기 시편, 3부는 초기 시편과 같은 시기 창작한 동요류와 민요풍 시편, 4부는 신앙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시편, 5부는 산문 2편을 수록&lt;br /&gt;
* 『백록담』(1941): 정지용의 두 번째 시집, 1936년부터 1941년까지 발표한 작품 선별하여 수록. &amp;lt;/br&amp;gt;1부에서 4부까지는 25편의 시를, 5부에는 8편의 산문을 수록&lt;br /&gt;
* 『지용시선』(1946)&lt;br /&gt;
&lt;br /&gt;
==== 평론·산문 ====&lt;br /&gt;
* 『문학독본』(1948): 정지용의 첫 산문집 &lt;br /&gt;
* 『산문』(1949): 평문과 수필, 역시 등 수록&lt;br /&gt;
&lt;br /&gt;
===&amp;lt;big&amp;gt;'''평가'''&amp;lt;/big&amp;gt;===&lt;br /&gt;
---- &lt;br /&gt;
한국전쟁 발발 당시 서울을 떠나지 못했던 정지용은 정치보위부에 의해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뒤 북한으로 이송되었다. 이후 그는 월북 문인으로 분류되면서 오랫동안 작품 활동과 문학적 성과가 공식적으로 조명되지 못하였다. &amp;lt;/br&amp;gt;그러나 1982년 장남 정구관이 정지용이 자의로 월북한 것이 아니라 강제로 납북되었다는 사실을 밝히며 저작물 복간을 요청하는 진정서를 제출하였고, 이에 원로 문인과 학계가 동참하면서 정지용 문학의 재평가와 복권을 위한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amp;lt;/br&amp;gt;&lt;br /&gt;
&lt;br /&gt;
이후 사회 전반에서 이데올로기적 긴장이 완화되고 대학을 중심으로 월북 문인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1987년 10월에는 관련 연구 성과의 발표와 출판이 허용되었고, 『정지용연구』가 간행되었다. 1988년에는 『정지용 시와 산문』과 함께 시와 소설을 분리한 『정지용전집』 2권이 민음사에서 출판되었다.&amp;lt;/br&amp;gt; 1988년 3월 31일 문화공보부가 정지용 작품의 해금을 공식 발표하면서 그의 문학은 제도적으로도 복권되었다.&amp;lt;/br&amp;gt; 이를 계기로 1988년 ‘지용회’가 창립되고 ‘제1회 지용제’가 열렸으며, 1989년에는 ‘지용 시문학상’이 제정되어 박두진 시인이 초대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이후 1995년에는 정지용기념사업이 추진되었고, 1996년 그의 생가가 복원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amp;lt;big&amp;gt;'''참고문헌'''&amp;lt;/big&amp;gt; ===&lt;br /&gt;
----&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지용(鄭芝溶)」,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0954]&lt;br /&gt;
* 전통문화포털. 「정지용(鄭芝溶)」, 『한국의 문화인물(연도별)』, 한국문화진흥. [https://www.kculture.or.kr/brd/board/252/L/menu/465?brdType=R&amp;amp;thisPage=14&amp;amp;bbIdx=8574]&lt;/div&gt;</summary>
		<author><name>Jmwshye</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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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정지용(鄭池龍)</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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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23T14:11:2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mwshye: &lt;/p&gt;
&lt;hr /&gt;
&lt;div&gt;&amp;lt;onlyinclude&amp;gt;&lt;br /&gt;
{| class=&amp;quot;metadata&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ffffff; width:300px; margin: 0 0 10px 10px; border:1px solid #aaa; float:right; clear:right;&amp;quot; cellspacing=&amp;quot;5&amp;quot;&lt;br /&gt;
|-&lt;br /&gt;
! colspan=&amp;quot;2&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664b00; color:#ffffff; font-size:120%; text-align:center; padding:5px;&amp;quot; | '''정지용(鄭池龍)'''&lt;br /&gt;
|-&lt;br /&gt;
| colspan=&amp;quot;2&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 | [[파일:정지용.jpeg|250px]] &amp;lt;br /&amp;gt; &amp;lt;span style=&amp;quot;font-size:90%;&amp;quot;&amp;gt;{{{초상화설명|}}}&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출생''' || 1902년 6월 20일&lt;br /&gt;
|-&lt;br /&gt;
|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사망''' || 1950년 9월 25일(향년 48세) 추정&lt;br /&gt;
|-&lt;br /&gt;
|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자''' || 영지(靈之)&lt;br /&gt;
|-&lt;br /&gt;
|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본관''' || 연일 정씨&lt;br /&gt;
|-&lt;br /&gt;
|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학력''' || 옥천공립보통학교&amp;lt;br /&amp;gt; 휘문고등보통학교&amp;lt;br /&amp;gt; 도시샤(同志社)대학&lt;br /&gt;
|-&lt;br /&gt;
|}&lt;br /&gt;
&amp;lt;/onlyinclude&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ig&amp;gt;'''개요'''&amp;lt;/big&amp;gt;===&lt;br /&gt;
----&lt;br /&gt;
정지용(鄭芝溶)은 일제강점기에 『정지용시집』, 『백록담』, 『문학독본』, 『산문』 등을 저술한 시인이자 번역가, 교육자이다. &lt;br /&gt;
『시문학』 동인, '구인회' 회원, 『문장』 시 부문 심사위원, 경향신문사 주간으로 활동하였으며, 휘문고등보통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ig&amp;gt;'''생애'''&amp;lt;/big&amp;gt;===&lt;br /&gt;
----&lt;br /&gt;
'''1902년''' 충북 옥천군 옥천면 하계리 40번지, 약종상을 하는 아버지 정태국과 어머니 정미하의 장남으로 출생&amp;lt;/br&amp;gt;&lt;br /&gt;
'''1910년''' 옥천공립보통학교 입학 &amp;lt;/br&amp;gt;&lt;br /&gt;
'''1918년''' 휘문고등보통학교 입학&amp;lt;/br&amp;gt;&lt;br /&gt;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휘문사태'의 주동으로 무기정학을 받아 수업을 받지 못함.&amp;lt;/br&amp;gt;&lt;br /&gt;
'''1922년''' 휘문고등보통학교 졸업, 첫 시&amp;lt;풍랑몽&amp;gt;을 씀. &amp;lt;/br&amp;gt;&lt;br /&gt;
'''1923년''' 일본 도시샤 대학의 영문과에 입학. 재학 당시 &amp;lt;석류&amp;gt;, &amp;lt;바다&amp;gt; 등을 씀.&amp;lt;/br&amp;gt;&lt;br /&gt;
'''1926년''' &amp;lt;&amp;lt;학조&amp;gt;&amp;gt; 창간호에 &amp;lt;카페 프란스&amp;gt;등 9편의 시를, 그리고 &amp;lt;&amp;lt;신민&amp;gt;&amp;gt;, &amp;lt;&amp;lt;문예시대&amp;gt;&amp;gt;에 &amp;lt;홍춘&amp;gt;, &amp;lt;산엣색시 들녘사내&amp;gt; 등을 발표 시인으로 등단&amp;lt;/br&amp;gt;&lt;br /&gt;
'''1929년''' 도시샤 대학 졸업 후 고국에 돌아와 휘문고등보통학교의 영어교사로 부임. 박용철, 김영랑과 함께 동인지 &amp;lt;&amp;lt;시문학&amp;gt;&amp;gt;을 창간 &amp;lt;/br&amp;gt;&lt;br /&gt;
'''1933년''' &amp;lt;&amp;lt;가톨릭청년&amp;gt;&amp;gt; 창간, 편집고문을 맡아 신앙시를 발표하고, 이태준, 이무영, 김기림 등과 함께‘9인회' 결성&amp;lt;/br&amp;gt;&lt;br /&gt;
'''1945년''' 해방과 함께 사임하고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 부임&amp;lt;/br&amp;gt;&lt;br /&gt;
'''1948년''' 사임하고 녹번리(현재 서울시 은평구 녹번동) 초당에서 생활&amp;lt;/br&amp;gt;&lt;br /&gt;
'''1950년''' 한국전쟁 중 사망 (추정)&lt;br /&gt;
&lt;br /&gt;
===&amp;lt;big&amp;gt;'''주요활동'''&amp;lt;/big&amp;gt;===&lt;br /&gt;
---- &lt;br /&gt;
휘문고등보통학교 재학 당시 『요람』동인을 결성하여 활동하였으며, '문우회(文友會)'의 학예부장직을 맡아 『휘문(徽文)』창간호의 편집 위원으로 활동했다.&amp;lt;/br&amp;gt;&lt;br /&gt;
도시샤대학 재학 중 동인지『가(街)』에 일본어시 &amp;lt;신라의 석류&amp;gt;를 발표했으며, 이는 정지용의 첫 발표 시편이다. 일본 유학 당시에도 조선어 시를 다수 발표했다. 이 때의 대표작으로는 &amp;lt;바다&amp;gt;, &amp;lt;향수&amp;gt;, &amp;lt;선취&amp;gt;, &amp;lt;압천&amp;gt; 등이 있다. &amp;lt;/br&amp;gt;&lt;br /&gt;
도시샤대학 졸업 후 고국으로 돌아와『시문학(詩文學)』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구인회(九人會)를 결성하여 1936년 3월 구인회의 동인지 『시와 소설』에 ｢유선애상(流線哀傷)｣을 발표했다. &amp;lt;/br&amp;gt;&lt;br /&gt;
일제강점기 후반 높은 성과를 거둔 문예잡지 『[[문장]]』의 추천심사위원으로 참여하여 훗날 '청록파'라는 한국시사의 한 유파를 형성한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 등 신인을 발굴하였다. 이 외에도 이한직, 박남수, 김종한 등 역량 있는 시인들을 시단에 내놓는 데 기여했다. &amp;lt;/br&amp;gt;&lt;br /&gt;
경향신문사의 주간을 맡았으며, 『경향신문』에 휘트먼 등의 시를 번역하여 발표했다.&amp;lt;/br&amp;gt; &lt;br /&gt;
1950년 6월 『문예(文藝)』에 발표한 시와 『국도신문(國都新聞)』에 연재한 남해 기행 산문을 마지막으로 발표했다.&lt;br /&gt;
&lt;br /&gt;
=== &amp;lt;big&amp;gt;'''작품'''&amp;lt;/big&amp;gt; ===&lt;br /&gt;
----&lt;br /&gt;
정지용의 대표작을 시, 시집, 평론·산문으로 구분했다. &lt;br /&gt;
==== 시 ====&lt;br /&gt;
* 〈석류〉&lt;br /&gt;
* 〈바다〉&lt;br /&gt;
* 〈유리창〉&lt;br /&gt;
* 〈불사조〉&lt;br /&gt;
* 〈향수〉&lt;br /&gt;
* 〈고향〉&lt;br /&gt;
* 〈장수산〉&lt;br /&gt;
* 〈백록담〉&lt;br /&gt;
&lt;br /&gt;
==== 시집 ====&lt;br /&gt;
* 『정지용 시집』(1935): 정지용의 첫 시집, 대부분 1925년부터 1935년까지 발표한 작품을 선별하여 수록.&amp;lt;/br&amp;gt;1부는 가톨릭 개종 이후의 시편, 2부는 초기 시편, 3부는 초기 시편과 같은 시기 창작한 동요류와 민요풍 시편, 4부는 신앙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시편, 5부는 산문 2편을 수록&lt;br /&gt;
* 『백록담』(1941): 정지용의 두 번째 시집, 1936년부터 1941년까지 발표한 작품 선별하여 수록. &amp;lt;/br&amp;gt;1부에서 4부까지는 25편의 시를, 5부에는 8편의 산문을 수록&lt;br /&gt;
* 『지용시선』(1946)&lt;br /&gt;
&lt;br /&gt;
==== 평론·산문 ====&lt;br /&gt;
* 『문학독본』(1948): 정지용의 첫 산문집 &lt;br /&gt;
* 『산문』(1949): 평문과 수필, 역시 등 수록&lt;br /&gt;
&lt;br /&gt;
===&amp;lt;big&amp;gt;'''평가'''&amp;lt;/big&amp;gt;===&lt;br /&gt;
---- &lt;br /&gt;
한국전쟁 발발 당시 서울을 떠나지 못했던 정지용은 정치보위부에 의해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뒤 북한으로 이송되었다. 이후 그는 월북 문인으로 분류되면서 오랫동안 작품 활동과 문학적 성과가 공식적으로 조명되지 못하였다. &amp;lt;/br&amp;gt;그러나 1982년 장남 정구관이 정지용이 자의로 월북한 것이 아니라 강제로 납북되었다는 사실을 밝히며 저작물 복간을 요청하는 진정서를 제출하였고, 이에 원로 문인과 학계가 동참하면서 정지용 문학의 재평가와 복권을 위한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amp;lt;/br&amp;gt;&lt;br /&gt;
&lt;br /&gt;
이후 사회 전반에서 이데올로기적 긴장이 완화되고, 대학을 중심으로 월북 문인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1987년 10월에는 관련 연구 성과의 발표와 출판이 허용되었다. 같은 해 『정지용연구』가 간행되었고, 이듬해인 1988년에는 『정지용 시와 산문』과 함께 민음사에서 시와 소설을 분리한 『정지용전집』 2권이 출판되었다. 또한 1988년 3월 31일 문화공보부가 정지용 작품의 해금을 공식 발표하면서 그의 문학은 제도적으로도 복권되었다.&amp;lt;/br&amp;gt; 이를 계기로 1988년 ‘지용회’가 창립되고 ‘제1회 지용제’가 열렸으며, 1989년에는 ‘지용 시문학상’이 제정되어 박두진 시인이 초대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이후 1995년에는 정지용기념사업이 추진되었고, 1996년에는 그의 생가가 복원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amp;lt;big&amp;gt;'''참고문헌'''&amp;lt;/big&amp;gt; ===&lt;br /&gt;
----&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지용(鄭芝溶)」,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0954]&lt;br /&gt;
* 전통문화포털. 「정지용(鄭芝溶)」, 『한국의 문화인물(연도별)』, 한국문화진흥. [https://www.kculture.or.kr/brd/board/252/L/menu/465?brdType=R&amp;amp;thisPage=14&amp;amp;bbIdx=8574]&lt;/div&gt;</summary>
		<author><name>Jmwshye</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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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정지용(鄭池龍)</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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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Jmwshye: &lt;/p&gt;
&lt;h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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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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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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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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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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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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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lt;br /&gt;
===&amp;lt;big&amp;gt;'''개요'''&amp;lt;/big&amp;gt;===&lt;br /&gt;
----&lt;br /&gt;
정지용(鄭芝溶)은 일제강점기에 『정지용시집』, 『백록담』, 『문학독본』, 『산문』 등을 저술한 시인이자 번역가, 교육자이다. &lt;br /&gt;
『시문학』 동인, '구인회' 회원, 『문장』 시 부문 심사위원, 경향신문사 주간으로 활동하였으며, 휘문고등보통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ig&amp;gt;'''생애'''&amp;lt;/big&amp;gt;===&lt;br /&gt;
----&lt;br /&gt;
'''1902년''' 충북 옥천군 옥천면 하계리 40번지, 약종상을 하는 아버지 정태국과 어머니 정미하의 장남으로 출생&amp;lt;/br&amp;gt;&lt;br /&gt;
'''1910년''' 옥천공립보통학교 입학 &amp;lt;/br&amp;gt;&lt;br /&gt;
'''1918년''' 휘문고등보통학교 입학&amp;lt;/br&amp;gt;&lt;br /&gt;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휘문사태'의 주동으로 무기정학을 받아 수업을 받지 못함.&amp;lt;/br&amp;gt;&lt;br /&gt;
'''1922년''' 휘문고등보통학교 졸업, 첫 시&amp;lt;풍랑몽&amp;gt;을 씀. &amp;lt;/br&amp;gt;&lt;br /&gt;
'''1923년''' 일본 도시샤 대학의 영문과에 입학. 재학 당시 &amp;lt;석류&amp;gt;, &amp;lt;바다&amp;gt; 등을 씀.&amp;lt;/br&amp;gt;&lt;br /&gt;
'''1926년''' &amp;lt;&amp;lt;학조&amp;gt;&amp;gt; 창간호에 &amp;lt;카페 프란스&amp;gt;등 9편의 시를, 그리고 &amp;lt;&amp;lt;신민&amp;gt;&amp;gt;, &amp;lt;&amp;lt;문예시대&amp;gt;&amp;gt;에 &amp;lt;홍춘&amp;gt;, &amp;lt;산엣색시 들녘사내&amp;gt; 등을 발표 시인으로 등단&amp;lt;/br&amp;gt;&lt;br /&gt;
'''1929년''' 도시샤 대학 졸업 후 고국에 돌아와 휘문고등보통학교의 영어교사로 부임. 박용철, 김영랑과 함께 동인지 &amp;lt;&amp;lt;시문학&amp;gt;&amp;gt;을 창간 &amp;lt;/br&amp;gt;&lt;br /&gt;
'''1933년''' &amp;lt;&amp;lt;가톨릭청년&amp;gt;&amp;gt; 창간, 편집고문을 맡아 신앙시를 발표하고, 이태준, 이무영, 김기림 등과 함께‘9인회' 결성&amp;lt;/br&amp;gt;&lt;br /&gt;
'''1945년''' 해방과 함께 사임하고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 부임&amp;lt;/br&amp;gt;&lt;br /&gt;
'''1948년''' 사임하고 녹번리(현재 서울시 은평구 녹번동) 초당에서 생활&amp;lt;/br&amp;gt;&lt;br /&gt;
'''1950년''' 한국전쟁 중 사망 (추정)&lt;br /&gt;
&lt;br /&gt;
===&amp;lt;big&amp;gt;'''주요활동'''&amp;lt;/big&amp;gt;===&lt;br /&gt;
---- &lt;br /&gt;
휘문고등보통학교 재학 당시 『요람』동인을 결성하여 활동하였으며, '문우회(文友會)'의 학예부장직을 맡아 『휘문(徽文)』창간호의 편집 위원으로 활동했다.&amp;lt;/br&amp;gt;&lt;br /&gt;
도시샤대학 재학 중 동인지『가(街)』에 일본어시 &amp;lt;신라의 석류&amp;gt;를 발표했으며, 이는 정지용의 첫 발표 시편이다. 일본 유학 당시에도 조선어 시를 다수 발표했다. 이 때의 대표작으로는 &amp;lt;바다&amp;gt;, &amp;lt;향수&amp;gt;, &amp;lt;선취&amp;gt;, &amp;lt;압천&amp;gt; 등이 있다. &amp;lt;/br&amp;gt;&lt;br /&gt;
도시샤대학 졸업 후 고국으로 돌아와『시문학(詩文學)』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구인회(九人會)를 결성하여 1936년 3월 구인회의 동인지 『시와 소설』에 ｢유선애상(流線哀傷)｣을 발표했다. &lt;br /&gt;
일제강점기 후반 높은 성과를 거둔 문예잡지 『[[문장]]』의 추천심사위원으로 참여하여 훗날 '청록파'라는 한국시사의 한 유파를 형성한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 등 신인을 발굴하였다. 이 외에도 이한직, 박남수, 김종한 등 역량 있는 시인들을 시단에 내놓는 데 기여했다. &lt;br /&gt;
경향신문사의 주간을 맡았으며, 『경향신문』에 휘트먼 등의 시를 번역하여 발표했다. &lt;br /&gt;
1950년 6월 『문예(文藝)』에 발표한 시와 『국도신문(國都新聞)』에 연재한 남해 기행 산문을 마지막으로 발표했다.&lt;br /&gt;
&lt;br /&gt;
=== &amp;lt;big&amp;gt;'''작품'''&amp;lt;/big&amp;gt; ===&lt;br /&gt;
----&lt;br /&gt;
정지용의 대표작을 시, 시집, 평론·산문으로 구분했다. &lt;br /&gt;
==== 시 ====&lt;br /&gt;
* 〈석류〉&lt;br /&gt;
* 〈바다〉&lt;br /&gt;
* 〈유리창〉&lt;br /&gt;
* 〈불사조〉&lt;br /&gt;
* 〈향수〉&lt;br /&gt;
* 〈고향〉&lt;br /&gt;
* 〈장수산〉&lt;br /&gt;
* 〈백록담〉&lt;br /&gt;
&lt;br /&gt;
==== 시집 ====&lt;br /&gt;
* 『정지용 시집』(1935): 정지용의 첫 시집, 대부분 1925년부터 1935년까지 발표한 작품을 선별하여 수록.&amp;lt;/br&amp;gt;1부는 가톨릭 개종 이후의 시편, 2부는 초기 시편, 3부는 초기 시편과 같은 시기 창작한 동요류와 민요풍 시편, 4부는 신앙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시편, 5부는 산문 2편을 수록&lt;br /&gt;
* 『백록담』(1941): 정지용의 두 번째 시집, 1936년부터 1941년까지 발표한 작품 선별하여 수록. &amp;lt;/br&amp;gt;1부에서 4부까지는 25편의 시를, 5부에는 8편의 산문을 수록&lt;br /&gt;
* 『지용시선』(1946)&lt;br /&gt;
&lt;br /&gt;
==== 평론·산문 ====&lt;br /&gt;
* 『문학독본』(1948): 정지용의 첫 산문집 &lt;br /&gt;
* 『산문』(1949): 평문과 수필, 역시 등 수록&lt;br /&gt;
&lt;br /&gt;
===&amp;lt;big&amp;gt;'''평가'''&amp;lt;/big&amp;gt;===&lt;br /&gt;
---- &lt;br /&gt;
한국전쟁 발발 당시 서울을 떠나지 못했던 정지용은 정치보위부에 의해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뒤 북한으로 이송되었다. 이후 그는 월북 문인으로 분류되면서 오랫동안 작품 활동과 문학적 성과가 공식적으로 조명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1982년 장남 정구관이 정지용이 자의로 월북한 것이 아니라 강제로 납북되었다는 사실을 밝히며 저작물 복간을 요청하는 진정서를 제출하였고, 이에 원로 문인과 학계가 동참하면서 정지용 문학의 재평가와 복권을 위한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lt;br /&gt;
&lt;br /&gt;
이후 사회 전반에서 이데올로기적 긴장이 완화되고, 대학을 중심으로 월북 문인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1987년 10월에는 관련 연구 성과의 발표와 출판이 허용되었다. 같은 해 『정지용연구』가 간행되었고, 이듬해인 1988년에는 『정지용 시와 산문』과 함께 민음사에서 시와 소설을 분리한 『정지용전집』 2권이 출판되었다. 또한 1988년 3월 31일 문화공보부가 정지용 작품의 해금을 공식 발표하면서 그의 문학은 제도적으로도 복권되었다. 이를 계기로 1988년 ‘지용회’가 창립되고 ‘제1회 지용제’가 열렸으며, 1989년에는 ‘지용 시문학상’이 제정되어 박두진 시인이 초대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이후 1995년에는 정지용기념사업이 추진되었고, 1996년에는 그의 생가가 복원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amp;lt;big&amp;gt;'''참고문헌'''&amp;lt;/big&amp;gt; ===&lt;br /&gt;
----&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지용(鄭芝溶)」,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0954]&lt;br /&gt;
* 전통문화포털. 「정지용(鄭芝溶)」, 『한국의 문화인물(연도별)』, 한국문화진흥. [https://www.kculture.or.kr/brd/board/252/L/menu/465?brdType=R&amp;amp;thisPage=14&amp;amp;bbIdx=8574]&lt;/div&gt;</summary>
		<author><name>Jmwshye</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3.1%EC%9A%B4%EB%8F%99&amp;diff=66788</id>
		<title>3.1운동</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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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23T12:09:0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mwshye: &lt;/p&gt;
&lt;hr /&gt;
&lt;div&gt;===&amp;lt;big&amp;gt;'''개요'''&amp;lt;/big&amp;gt;===&lt;br /&gt;
----&lt;br /&gt;
[[파일:31운동뉴스.jpg|300px|center]]&lt;br /&gt;
1919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전개된 대규모 독립 만세 운동으로,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계층이 참여한 항일 운동이다. 3.1운동은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국내외에 널리 알리며 국제 사회의 주목을 받았고, 그 결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는 데 영향을 주었다. 또한 일제의 강압적인 무단통치에 균열을 가해 통치 방식이 이른바 문화통치로 전환되는 데 영향을 주었다. 3·1운동은 민족의식과 자주 의식을 크게 고양시켜 교육·문화·산업 분야 전반에서 민족 역량을 강화하고 자립을 모색하는 다양한 사회운동이 확산되는 출발점이 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big&amp;gt;'''배경'''&amp;lt;/big&amp;gt;===&lt;br /&gt;
----&lt;br /&gt;
1910년 강제 병탄 이후 조선총독부는 헌병·경찰을 앞세운 무단통치로 독립운동을 강하게 탄압했고, 문화 말살과 경제적 지배를 병행해 민족적 저항 기반을 약화시키려 했다. 이에 독립운동가들은 국내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거나 중국·만주·연해주·미주 등지로 망명해 활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1차 세계대전 종전 국면과 함께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알려지면서, 국제 여론에 호소해 독립을 추진할 수 있다는 기대가 확산되었다.&lt;br /&gt;
&lt;br /&gt;
특히 해외 한인 사회는 민족자결주의를 근거로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해 한국 독립을 호소하려 했고, 상하이의 신한청년단 등은 김규식 등을 파리로 보내 외교 활동을 시도했다. 국내에는 일제의 은폐로 해당 사상이 즉각 확산되진 않았으나, 유학생·해외 동포의 움직임이 알려지며 독립운동 분위기가 점차 고조되었다. 여기에 1919년 2·8 독립선언이 도화선 역할을 하며, 국내에서도 거족적 행동을 준비하려는 흐름을 촉진했다.&lt;br /&gt;
&lt;br /&gt;
===&amp;lt;big&amp;gt;'''전개'''&amp;lt;/big&amp;gt;===&lt;br /&gt;
----&lt;br /&gt;
3·1운동은 민족자결주의의 영향, 2·8 독립선언의 파장, 그리고 고종의 갑작스러운 서거(독살설 확산)로 고조된 민심이 결합되며 거족적 항일운동으로 구체화되었다. 운동 준비 과정에서 천도교·기독교·불교계를 중심으로 ‘대중화·일원화·비폭력’의 원칙이 정리되었고, 독립선언서 발표와 만세 시위, 독립 청원 등(국내외 여론전)이 함께 구상되었다. 최남선이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종교계 인사들이 연합해 민족대표를 구성하면서 33인이 확정되었다.&lt;br /&gt;
&lt;br /&gt;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을 진행한 뒤 경찰에 연행되었고, 같은 시각 탑골공원에는 학생과 시민이 모여 독립선언서 낭독과 만세 시위를 시작했다. 시위는 서울 도심에서 행진 형태로 확산되었으며, 이후 평양·원산 등 주요 도시를 거쳐 전국 각지로 빠르게 번져 나갔다. 전개 과정에서 장날·종교 조직·학교 네트워크·지역 간 인접 영향 등 다양한 경로로 동원이 확대되었고, 국내 운동은 만주·연해주·미주 등 해외 한인 사회의 만세 시위로도 연결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big&amp;gt;'''결과'''&amp;lt;/big&amp;gt;===&lt;br /&gt;
----&lt;br /&gt;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자 조선총독부는 헌병·경찰뿐 아니라 정규 군대까지 동원해 강경 진압에 나섰고, 그 과정에서 대규모 체포·구금과 희생이 발생했다. 참가 규모와 피해 통계는 자료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조선총독부의 공식 기록 및 당대 보고·회고 자료 등에서 참가 인원, 사망·부상·피검자 수가 다양하게 집계된다. 또한 제암리 등 일부 지역에서는 시위 이후 보복적 성격의 살상·방화가 발생해 국제적 비난을 불러일으켰다.&lt;br /&gt;
&lt;br /&gt;
한편 일제는 국제 여론의 악화를 완화하고 향후 통치를 안정화하기 위해 통치 방식의 변화를 표방했다. 이른바 ‘문화통치’로의 전환이 제시되며 헌병경찰제의 완화, 언론·교육 정책의 조정 등이 추진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경찰력과 감시 체계를 강화하고 독립운동가 색출을 지속하는 등 식민 지배의 본질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평가도 함께 존재한다.&lt;br /&gt;
&lt;br /&gt;
===&amp;lt;big&amp;gt;'''평가 및 의의'''&amp;lt;/big&amp;gt;===&lt;br /&gt;
----&lt;br /&gt;
3·1운동은 특정 계층에 국한되지 않고 종교계·학생·농민·상인 등 사회 전반이 참여한 대규모 민족운동으로,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국내외에 집단적으로 표출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특히 운동 과정에서 ‘비폭력’과 ‘공동 행동’의 원칙이 강조되며 거족적 항쟁의 전형을 형성했고, 일제의 식민 통치 방식과 국제 여론에 직접적인 압력을 가했다는 점이 중요하게 평가된다.&lt;br /&gt;
&lt;br /&gt;
또한 3·1운동은 독립운동의 구심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어 상하이를 중심으로 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과 독립운동 진영의 재편에 영향을 주었다. 동시에 국내에서는 민족의식의 확산과 함께 교육·언론·문화운동, 경제적 자립을 지향한 여러 사회운동이 활성화되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요약하면, 3·1운동은 즉각적인 독립 달성에는 이르지 못했더라도, 이후 독립운동의 조직화·국제화·대중화에 장기적인 동력을 제공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lt;br /&gt;
&lt;br /&gt;
===&amp;lt;big&amp;gt;'''참고문헌'''&amp;lt;/big&amp;gt;===&lt;br /&gt;
----&lt;br /&gt;
* 국사편찬위원회. 「3·1 운동」, *우리역사넷*.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i400200] &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3·1운동(三一運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6772]&lt;/div&gt;</summary>
		<author><name>Jmwshye</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84%B1%EB%B6%81%EA%B5%AC%EC%9D%98_%EC%9D%BC%EC%A0%9C%EA%B0%95%EC%A0%90%EA%B8%B0_%EB%8F%85%EB%A6%BD%EC%9A%B4%EB%8F%99%EA%B3%BC_%EC%A0%80%ED%95%AD%EB%AC%B8%ED%95%99&amp;diff=66787</id>
		<title>성북구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저항문학</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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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23T11:38:3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mwshye: /* 콘텐츠구조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주제=&lt;br /&gt;
[[파일:진관사 태극기.jpg|프레임|가운데|진관사 태극기]]&lt;br /&gt;
&amp;lt;poem&amp;gt;&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 width:auto; margin-left:auto; margin-right:auto;&amp;quot;&amp;gt;&amp;lt;big&amp;gt;1910년 경술국치와 1945년 광복 사이에는 35년이라는 시간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한반도와 세계 각지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항일 독립운동을 펼친 독립 운동가들이 있었다. &amp;lt;br&amp;gt;상하이의 외교 활동이나 만주 벌판의 치열한 무장 투쟁 말고도 한반도, 각자의 교실과 공장의 작업대, 작가의 책상에서도 독립 운동은 펼쳐졌다.&lt;br /&gt;
&amp;lt;/big&amp;gt;&amp;lt;/poem&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일제 강점기 조선인의 저항은 전방위적이었다. 상하이의 임시정부와 만주 벌판뿐 아니라, 각자의 교실에서, 끊임없이 돌아가는 공장의 작업대 위에서, 책이 가득한 등잔불 밑 원고지에서도 독립의 의지는 나타났다. 그러나 우리는 교과서 지면의 한계때문에, 그리고 학문적 중요도의 차이때문에 중국 관내와 만주의 역사만큼 한반도 내의 역사를 잘 안다고 할 수 없다. &lt;br /&gt;
이번 프로젝트는 국내에서 전개된 독립운동 중에서도, 민족의 문화를 지키려던 일련의 노력들(민족 문학과 종교적 투쟁)과 사회를 개혁하려던 노력들(사회주의적 노동 운동과 학생운동)을 중점으로 살핀다. 근대화 과정에서 미약하게나마 성장한 민권의식을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기여한 여성 독립운동가들에 대해서도 다룬다.&amp;lt;/div&amp;gt;&lt;br /&gt;
&lt;br /&gt;
=기획의도=&lt;br /&gt;
우리 조의 기획은 독립운동가 한용운에 주목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성북구에 위치한 심우장에 살고 있었기에 성북마을아카이브에서 찾을 수 있었다. 한용운은 일제의 압력에 굴하지 않으며 문학과 불교를 통해 저항해나간 인물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이러한 사실에서 뻗어나가 6조는 독립운동의 양상 중에서도 여성독립운동 / 노동운동 / 저항문학 등에 주목하여 전형적인 투쟁이 아닌 다채로운 일제에 반대하는 독립운동을 포착해보고자 한다.&lt;br /&gt;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약 35년간의 일제 강점기 역사와 독립운동사를 생각해보면, 1930년대 이후 해외가 아닌 한반도 내에서 어떤 움직임이 있었는지 우리는 제대로 알고 있을까?&amp;lt;br&amp;gt;&lt;br /&gt;
실제로 2025년 8월 한국갤럽이 실시한 &amp;quot;'항일 독립운동가'하면 생각나는 인물&amp;quot; 설문조사에서, 1930년대 이후 주로 한반도 내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는 10위권 내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더라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저항해온 독립운동가가 더 많지만 대부분은 역사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것이다. 경술국치 이전 독립운동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 안중근, 3.1운동을 대표하는 유관순, 그리고 임시정부계열의 김구 및 한인애국단 독립운동가 말고도 더 넓은 시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lt;br /&gt;
[[파일:2025 8 독립운동가인식.png|프레임|200px]]&lt;br /&gt;
&lt;br /&gt;
=온톨로지=&lt;br /&gt;
==네트워크 그래프==&lt;br /&gt;
{{NetworkGraph|title=6조.ls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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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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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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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타임라인=&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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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지도=&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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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독립운동=&lt;br /&gt;
==학생독립운동==&lt;br /&gt;
김항규&lt;br /&gt;
이병우&lt;br /&gt;
백용성&lt;br /&gt;
[[박시목(朴詩穆)|박시목]]&lt;br /&gt;
&lt;br /&gt;
==여성독립운동==&lt;br /&gt;
이효정&lt;br /&gt;
[[이관술]]&lt;br /&gt;
이순금&lt;br /&gt;
[[신간회(新幹會)|신간회]]&lt;br /&gt;
근우회&lt;br /&gt;
동덕여자보통고등학교&lt;br /&gt;
이병희&lt;br /&gt;
경성여학생운동&lt;br /&gt;
&lt;br /&gt;
==노동운동==&lt;br /&gt;
이병희&lt;br /&gt;
박진홍&lt;br /&gt;
이재유&lt;br /&gt;
[[경성 트로이카]]&lt;br /&gt;
조선공산당&lt;br /&gt;
경성콤그룹&lt;br /&gt;
종연방적 경성제사공장 파업&lt;br /&gt;
&lt;br /&gt;
==저항문학==&lt;br /&gt;
한용운&lt;br /&gt;
[[이육사(25-2)|이육사]]&lt;br /&gt;
조지훈&lt;br /&gt;
[[정지용(鄭池龍)|정지용]]&lt;br /&gt;
KAPF&lt;br /&gt;
문장&lt;br /&gt;
문예운동&lt;br /&gt;
흑풍&lt;br /&gt;
&lt;br /&gt;
==국외투쟁==&lt;br /&gt;
[[대한민국임시정부(25-2)|대한민국임시정부]]&lt;br /&gt;
김원봉&lt;br /&gt;
이병희&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lt;br /&gt;
|-&lt;br /&gt;
! 기여자 !! 기여 항목&lt;br /&gt;
|-&lt;br /&gt;
| 이예린 || 기획의도 작성,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및 이관술 문서 작성&lt;br /&gt;
|-&lt;br /&gt;
| 박지혜 || 온톨로지, [[3.1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25-2)]] [[문장(文章)]] [[정지용(鄭池龍)]]&lt;br /&gt;
|-&lt;br /&gt;
| [[Dihu04|차제겸]] || [[성북구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저항문학#주제]], [[성북구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저항문학#타임라인]], [[경성 트로이카]], [[이육사(25-2)|이육사]], [[임제종운동]], [[KAPF]], [[틀:장소]], [[틀:역사인물]], [[틀:역사조직]]&lt;br /&gt;
|-&lt;br /&gt;
| 윤준상 || [[성북구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저항문학#콘텐츠구조]], [[심우장(尋牛莊)|심우장]], [[신간회(新幹會)|신간회]], [[성북구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저항문학#지도]], [[조선일보(朝鮮日報)|조선일보]], [[박시목(朴詩穆)|박시목]]&lt;br /&gt;
|-&lt;br /&gt;
| 한성준 || [[의열단(義烈團)]], [[이재유]], [[조선공산당]], [[종연방적 파업]]&lt;br /&gt;
|}&lt;/div&gt;</summary>
		<author><name>Jmwshye</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3.1%EC%9A%B4%EB%8F%99&amp;diff=66786</id>
		<title>3.1운동</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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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23T10:50:4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mwshye: /* 진행 */&lt;/p&gt;
&lt;hr /&gt;
&lt;div&gt;===&amp;lt;big&amp;gt;'''개요'''&amp;lt;/big&amp;gt;===&lt;br /&gt;
----&lt;br /&gt;
[[파일:31운동뉴스.jpg|300px|center]]&lt;br /&gt;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을 기해 일어난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이다. 전국적인 범위에서 각계각층을 망라하여 전개된 3·1운동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켜 한국민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였고, 중국 상하이에서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다. 이민족에 대한 끈질기고 강렬한 독립투쟁정신을 고취하였을 뿐 아니라, 일제의 무단통치방법을 이른바 문화통치로 바꾸게 하였다. 나아가 민족의식과 민족정신에 새로운 자각과 힘을 주어 교육의 진흥, 신문예운동·산업운동이 활성화하고 민족 자립의 기초를 다지게 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big&amp;gt;'''배경'''&amp;lt;/big&amp;gt;===&lt;br /&gt;
----&lt;br /&gt;
1910년 강제 병탄 이후 조선총독부는 헌병·경찰을 앞세운 무단통치로 독립운동을 강하게 탄압했고, 문화 말살과 경제적 지배를 병행해 민족적 저항 기반을 약화시키려 했다. 이에 독립운동가들은 국내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거나 중국·만주·연해주·미주 등지로 망명해 활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1차 세계대전 종전 국면과 함께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알려지면서, 국제 여론에 호소해 독립을 추진할 수 있다는 기대가 확산되었다.&lt;br /&gt;
&lt;br /&gt;
특히 해외 한인 사회는 민족자결주의를 근거로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해 한국 독립을 호소하려 했고, 상하이의 신한청년단 등은 김규식 등을 파리로 보내 외교 활동을 시도했다. 국내에는 일제의 은폐로 해당 사상이 즉각 확산되진 않았으나, 유학생·해외 동포의 움직임이 알려지며 독립운동 분위기가 점차 고조되었다. 여기에 1919년 2·8 독립선언이 도화선 역할을 하며, 국내에서도 거족적 행동을 준비하려는 흐름을 촉진했다.&lt;br /&gt;
&lt;br /&gt;
===&amp;lt;big&amp;gt;'''전개'''&amp;lt;/big&amp;gt;===&lt;br /&gt;
----&lt;br /&gt;
3·1운동은 민족자결주의의 영향, 2·8 독립선언의 파장, 그리고 고종의 갑작스러운 서거(독살설 확산)로 고조된 민심이 결합되며 거족적 항일운동으로 구체화되었다. 운동 준비 과정에서 천도교·기독교·불교계를 중심으로 ‘대중화·일원화·비폭력’의 원칙이 정리되었고, 독립선언서 발표와 만세 시위, 독립 청원 등(국내외 여론전)이 함께 구상되었다. 최남선이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종교계 인사들이 연합해 민족대표를 구성하면서 33인이 확정되었다.&lt;br /&gt;
&lt;br /&gt;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을 진행한 뒤 경찰에 연행되었고, 같은 시각 탑골공원에는 학생과 시민이 모여 독립선언서 낭독과 만세 시위를 시작했다. 시위는 서울 도심에서 행진 형태로 확산되었으며, 이후 평양·원산 등 주요 도시를 거쳐 전국 각지로 빠르게 번져 나갔다. 전개 과정에서 장날·종교 조직·학교 네트워크·지역 간 인접 영향 등 다양한 경로로 동원이 확대되었고, 국내 운동은 만주·연해주·미주 등 해외 한인 사회의 만세 시위로도 연결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big&amp;gt;'''결과'''&amp;lt;/big&amp;gt;===&lt;br /&gt;
----&lt;br /&gt;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자 조선총독부는 헌병·경찰뿐 아니라 정규 군대까지 동원해 강경 진압에 나섰고, 그 과정에서 대규모 체포·구금과 희생이 발생했다. 참가 규모와 피해 통계는 자료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조선총독부의 공식 기록 및 당대 보고·회고 자료 등에서 참가 인원, 사망·부상·피검자 수가 다양하게 집계된다. 또한 제암리 등 일부 지역에서는 시위 이후 보복적 성격의 살상·방화가 발생해 국제적 비난을 불러일으켰다.&lt;br /&gt;
&lt;br /&gt;
한편 일제는 국제 여론의 악화를 완화하고 향후 통치를 안정화하기 위해 통치 방식의 변화를 표방했다. 이른바 ‘문화통치’로의 전환이 제시되며 헌병경찰제의 완화, 언론·교육 정책의 조정 등이 추진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경찰력과 감시 체계를 강화하고 독립운동가 색출을 지속하는 등 식민 지배의 본질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평가도 함께 존재한다.&lt;br /&gt;
&lt;br /&gt;
===&amp;lt;big&amp;gt;'''평가 및 의의'''&amp;lt;/big&amp;gt;===&lt;br /&gt;
----&lt;br /&gt;
3·1운동은 특정 계층에 국한되지 않고 종교계·학생·농민·상인 등 사회 전반이 참여한 대규모 민족운동으로,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국내외에 집단적으로 표출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특히 운동 과정에서 ‘비폭력’과 ‘공동 행동’의 원칙이 강조되며 거족적 항쟁의 전형을 형성했고, 일제의 식민 통치 방식과 국제 여론에 직접적인 압력을 가했다는 점이 중요하게 평가된다.&lt;br /&gt;
&lt;br /&gt;
또한 3·1운동은 독립운동의 구심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어 상하이를 중심으로 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과 독립운동 진영의 재편에 영향을 주었다. 동시에 국내에서는 민족의식의 확산과 함께 교육·언론·문화운동, 경제적 자립을 지향한 여러 사회운동이 활성화되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요약하면, 3·1운동은 즉각적인 독립 달성에는 이르지 못했더라도, 이후 독립운동의 조직화·국제화·대중화에 장기적인 동력을 제공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lt;br /&gt;
&lt;br /&gt;
===&amp;lt;big&amp;gt;'''참고문헌'''&amp;lt;/big&amp;gt;===&lt;br /&gt;
----&lt;br /&gt;
* 국사편찬위원회. 「3·1 운동」, *우리역사넷*.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i400200] &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3·1운동(三一運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6772]&lt;/div&gt;</summary>
		<author><name>Jmwshye</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84%B1%EB%B6%81%EA%B5%AC%EC%9D%98_%EC%9D%BC%EC%A0%9C%EA%B0%95%EC%A0%90%EA%B8%B0_%EB%8F%85%EB%A6%BD%EC%9A%B4%EB%8F%99%EA%B3%BC_%EC%A0%80%ED%95%AD%EB%AC%B8%ED%95%99&amp;diff=66785</id>
		<title>성북구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저항문학</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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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23T10:42:0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mwshye: /* 기여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주제=&lt;br /&gt;
[[파일:진관사 태극기.jpg|프레임|가운데|진관사 태극기]]&lt;br /&gt;
&amp;lt;poem&amp;gt;&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 width:auto; margin-left:auto; margin-right:auto;&amp;quot;&amp;gt;&amp;lt;big&amp;gt;1910년 경술국치와 1945년 광복 사이에는 35년이라는 시간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한반도와 세계 각지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항일 독립운동을 펼친 독립 운동가들이 있었다. &amp;lt;br&amp;gt;상하이의 외교 활동이나 만주 벌판의 치열한 무장 투쟁 말고도 한반도, 각자의 교실과 공장의 작업대, 작가의 책상에서도 독립 운동은 펼쳐졌다.&lt;br /&gt;
&amp;lt;/big&amp;gt;&amp;lt;/poem&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일제 강점기 조선인의 저항은 전방위적이었다. 상하이의 임시정부와 만주 벌판뿐 아니라, 각자의 교실에서, 끊임없이 돌아가는 공장의 작업대 위에서, 책이 가득한 등잔불 밑 원고지에서도 독립의 의지는 나타났다. 그러나 우리는 교과서 지면의 한계때문에, 그리고 학문적 중요도의 차이때문에 중국 관내와 만주의 역사만큼 한반도 내의 역사를 잘 안다고 할 수 없다. &lt;br /&gt;
이번 프로젝트는 국내에서 전개된 독립운동 중에서도, 민족의 문화를 지키려던 일련의 노력들(민족 문학과 종교적 투쟁)과 사회를 개혁하려던 노력들(사회주의적 노동 운동과 학생운동)을 중점으로 살핀다. 근대화 과정에서 미약하게나마 성장한 민권의식을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기여한 여성 독립운동가들에 대해서도 다룬다.&amp;lt;/div&amp;gt;&lt;br /&gt;
&lt;br /&gt;
=기획의도=&lt;br /&gt;
우리 조의 기획은 독립운동가 한용운에 주목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성북구에 위치한 심우장에 살고 있었기에 성북마을아카이브에서 찾을 수 있었다. 한용운은 일제의 압력에 굴하지 않으며 문학과 불교를 통해 저항해나간 인물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이러한 사실에서 뻗어나가 6조는 독립운동의 양상 중에서도 여성독립운동 / 노동운동 / 저항문학 등에 주목하여 전형적인 투쟁이 아닌 다채로운 일제에 반대하는 독립운동을 포착해보고자 한다.&lt;br /&gt;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약 35년간의 일제 강점기 역사와 독립운동사를 생각해보면, 1930년대 이후 해외가 아닌 한반도 내에서 어떤 움직임이 있었는지 우리는 제대로 알고 있을까?&amp;lt;br&amp;gt;&lt;br /&gt;
실제로 2025년 8월 한국갤럽이 실시한 &amp;quot;'항일 독립운동가'하면 생각나는 인물&amp;quot; 설문조사에서, 1930년대 이후 주로 한반도 내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는 10위권 내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더라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저항해온 독립운동가가 더 많지만 대부분은 역사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것이다. 경술국치 이전 독립운동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 안중근, 3.1운동을 대표하는 유관순, 그리고 임시정부계열의 김구 및 한인애국단 독립운동가 말고도 더 넓은 시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lt;br /&gt;
[[파일:2025 8 독립운동가인식.png|프레임|200px]]&lt;br /&gt;
&lt;br /&gt;
=온톨로지=&lt;br /&gt;
==네트워크 그래프==&lt;br /&gt;
{{NetworkGraph|title=6조.lst}}&lt;br /&gt;
&lt;br /&gt;
&lt;br /&gt;
==콘텐츠구조==&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ig&amp;gt;'''클래스(Class)'''&amp;lt;/big&amp;gt;&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lt;br /&gt;
! 클래스 !! 설명 !! 노드&lt;br /&gt;
|-&lt;br /&gt;
| 인물 || 독립운동 또는 저항문학·문화운동에 참여한 인물 || 한용운, [[이육사(25-2)|이육사]], 조지훈, 이병희, 이효정, 박진홍, 김항규, 김용준, 이병우, 백용성, [[박시목(朴詩穆)|박시목]], [[정지용(鄭池龍)|정지용]], 이순금, [[이관술]], 김원봉, [[이재유]]&lt;br /&gt;
|-&lt;br /&gt;
| 조직 || 독립운동 조직·사회단체·정당·문예운동 단체 || [[신간회(新幹會)|신간회]], 민족대표_33인, [[의열단]], [[경성 트로이카]], 근우회,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선공산당]], 경성콤그룹, [[조선일보(朝鮮日報)|조선일보]], KAPF&lt;br /&gt;
|-&lt;br /&gt;
| 사건 || 독립운동·학생운동·파업·문화운동 등 사건 || 광주학생운동, [[종연방적_경성제사공장_파업|종연방적 경성제사공장 파업]], [[경성_여학생_운동|경성여학생운동]], 임제종운동, [[3.1운동]]&lt;br /&gt;
|-&lt;br /&gt;
| 장소 || 인물 및 조직과 관련된 장소 || [[심우장(尋牛莊)|심우장]], 인당약방,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lt;br /&gt;
|-&lt;br /&gt;
| 출판물 || 문예잡지·출판물 || [[문장(文章)|문장]], 문예운동, 흑풍&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ig&amp;gt;'''관계성(Relation)'''&amp;lt;/big&amp;gt;&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lt;br /&gt;
! 관계성(Relation) !! 의미 !! 구조 !! 노드1 !! 노드2&lt;br /&gt;
|-&lt;br /&gt;
| rowspan=&amp;quot;16&amp;quot; | isMemberOf || rowspan=&amp;quot;16&amp;quot; | ~의_일원이다 || rowspan=&amp;quot;16&amp;quot; | 인물-&amp;gt;조직&lt;br /&gt;
| 한용운 || 신간회&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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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육사 || 의열단&lt;br /&gt;
|-&lt;br /&gt;
| 이병희 || 의열단&lt;br /&gt;
|-&lt;br /&gt;
| 이효정 || 경성트로이카&lt;br /&gt;
|-&lt;br /&gt;
| 박진홍 || 경성트로이카&lt;br /&gt;
|-&lt;br /&gt;
| 김항규 || 신간회&lt;br /&gt;
|-&lt;br /&gt;
| 백용성 || 민족대표_33인&lt;br /&gt;
|-&lt;br /&gt;
| 박시목 || 신간회&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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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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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김원봉 || 대한민국임시정부&lt;br /&gt;
|-&lt;br /&gt;
| 이재유 || 조선공산당&lt;br /&gt;
|-&lt;br /&gt;
| 이재유 || 경성트로이카&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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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이관술 || 조선공산당&lt;br /&gt;
|-&lt;br /&gt;
| livesIn || ~에_살다 || 인물-&amp;gt;장소 || 한용운 || 심우장&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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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용운 || 인당약방&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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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훈 || 심우장&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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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leads || 사건_~을_주도하다 || 인물-&amp;gt;사건 || 한용운 || 임제종운동&lt;br /&gt;
|-&lt;br /&gt;
| rowspan=&amp;quot;3&amp;quot; | isLineageKinOf || rowspan=&amp;quot;3&amp;quot; | ~의_친척이다 || rowspan=&amp;quot;3&amp;quot; | 인물&amp;lt;-&amp;gt;인물&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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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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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김항규 || 광주학생운동&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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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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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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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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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rries || ~와_결혼하다 || 인물&amp;lt;-&amp;gt;인물 || 이순금 || 이재유&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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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iesat || ~에서_학교다니다 || 인물-&amp;gt;장소 || 이순금 ||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lt;br /&gt;
|-&lt;br /&gt;
| rowspan = &amp;quot;2&amp;quot; | publishes || rowspan = &amp;quot;2&amp;quot; | ~을_출판하다 || rowspan = &amp;quot;2&amp;quot; | 조직-&amp;gt;출판물&lt;br /&gt;
| 조선일보 || 흑풍&lt;br /&gt;
|-&lt;br /&gt;
| KAPF || 문예운동&lt;br /&gt;
|-&lt;br /&gt;
| rowspan = &amp;quot;3&amp;quot; | writes || rowspan = &amp;quot;3&amp;quot; | ~를_쓰다 || rowspan = &amp;quot;3&amp;quot; | 인물-&amp;gt;출판물&lt;br /&gt;
| 한용운 || 흑풍&lt;br /&gt;
|-&lt;br /&gt;
| 정지용 || 문장&lt;br /&gt;
|-&lt;br /&gt;
| 조지훈 || 문장&lt;br /&gt;
|-&lt;br /&gt;
| rowspan=&amp;quot;3&amp;quot; | attributes || rowspan=&amp;quot;3&amp;quot; | ~에_기여하다 || rowspan=&amp;quot;3&amp;quot; | 조직-&amp;gt;조직/장소&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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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 || 심우장&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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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ffects || ~에_영향을_주다 || 사건-&amp;gt;조직 || 3.1운동 || 대한민국임시정부&lt;br /&gt;
|-&lt;br /&gt;
| rowspan=&amp;quot;2&amp;quot; | isSuccessorOf || rowspan=&amp;quot;2&amp;quot; | ~의_후신이다 || rowspan=&amp;quot;2&amp;quot; | 조직-&amp;gt;조직&lt;br /&gt;
| 경성콤그룹 || 경성트로이카&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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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lt;br /&gt;
=타임라인=&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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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지도=&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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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독립운동=&lt;br /&gt;
==학생독립운동==&lt;br /&gt;
김항규&lt;br /&gt;
이병우&lt;br /&gt;
백용성&lt;br /&gt;
[[박시목(朴詩穆)|박시목]]&lt;br /&gt;
&lt;br /&gt;
==여성독립운동==&lt;br /&gt;
이효정&lt;br /&gt;
[[이관술]]&lt;br /&gt;
이순금&lt;br /&gt;
[[신간회(新幹會)|신간회]]&lt;br /&gt;
근우회&lt;br /&gt;
동덕여자보통고등학교&lt;br /&gt;
이병희&lt;br /&gt;
경성여학생운동&lt;br /&gt;
&lt;br /&gt;
==노동운동==&lt;br /&gt;
이병희&lt;br /&gt;
박진홍&lt;br /&gt;
이재유&lt;br /&gt;
[[경성 트로이카]]&lt;br /&gt;
조선공산당&lt;br /&gt;
경성콤그룹&lt;br /&gt;
종연방적 경성제사공장 파업&lt;br /&gt;
&lt;br /&gt;
==저항문학==&lt;br /&gt;
한용운&lt;br /&gt;
[[이육사(25-2)|이육사]]&lt;br /&gt;
조지훈&lt;br /&gt;
[[정지용(鄭池龍)|정지용]]&lt;br /&gt;
KAPF&lt;br /&gt;
문장&lt;br /&gt;
문예운동&lt;br /&gt;
흑풍&lt;br /&gt;
&lt;br /&gt;
==국외투쟁==&lt;br /&gt;
[[대한민국임시정부(25-2)|대한민국임시정부]]&lt;br /&gt;
김원봉&lt;br /&gt;
이병희&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lt;br /&gt;
|-&lt;br /&gt;
! 기여자 !! 기여 항목&lt;br /&gt;
|-&lt;br /&gt;
| 이예린 || 기획의도 작성,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및 이관술 문서 작성&lt;br /&gt;
|-&lt;br /&gt;
| 박지혜 || 온톨로지, [[3.1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25-2)]] [[문장(文章)]] [[정지용(鄭池龍)]]&lt;br /&gt;
|-&lt;br /&gt;
| [[Dihu04|차제겸]] || [[성북구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저항문학#주제]], [[성북구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저항문학#타임라인]], [[경성 트로이카]], [[이육사(25-2)|이육사]], [[임제종운동]], [[KAPF]], [[틀:장소]], [[틀:역사인물]], [[틀:역사조직]]&lt;br /&gt;
|-&lt;br /&gt;
| 윤준상 || [[성북구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저항문학#콘텐츠구조]], [[심우장(尋牛莊)|심우장]], [[신간회(新幹會)|신간회]], [[성북구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저항문학#지도]], [[조선일보(朝鮮日報)|조선일보]], [[박시목(朴詩穆)|박시목]]&lt;br /&gt;
|-&lt;br /&gt;
| 한성준 || [[의열단(義烈團)]], [[이재유]], [[조선공산당]], [[종연방적 파업]]&lt;br /&gt;
|}&lt;/div&gt;</summary>
		<author><name>Jmwshye</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84%B1%EB%B6%81%EA%B5%AC%EC%9D%98_%EC%9D%BC%EC%A0%9C%EA%B0%95%EC%A0%90%EA%B8%B0_%EB%8F%85%EB%A6%BD%EC%9A%B4%EB%8F%99%EA%B3%BC_%EC%A0%80%ED%95%AD%EB%AC%B8%ED%95%99&amp;diff=66774</id>
		<title>성북구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저항문학</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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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23T09:44:4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mwshye: /* 국외투쟁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주제=&lt;br /&gt;
[[파일:진관사 태극기.jpg|프레임|가운데|진관사 태극기]]&lt;br /&gt;
&amp;lt;poem&amp;gt;&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 width:auto; margin-left:auto; margin-right:auto;&amp;quot;&amp;gt;&amp;lt;big&amp;gt;1910년 경술국치와 1945년 광복 사이에는 35년이라는 시간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한반도와 세계 각지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항일 독립운동을 펼친 독립 운동가들이 있었다. &amp;lt;br&amp;gt;상하이의 외교 활동이나 만주 벌판의 치열한 무장 투쟁 말고도 한반도, 각자의 교실과 공장의 작업대, 작가의 책상에서도 독립 운동은 펼쳐졌다.&lt;br /&gt;
&amp;lt;/big&amp;gt;&amp;lt;/poem&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일제 강점기 조선인의 저항은 전방위적이었다. 상하이의 임시정부와 만주 벌판뿐 아니라, 각자의 교실에서, 끊임없이 돌아가는 공장의 작업대 위에서, 책이 가득한 등잔불 밑 원고지에서도 독립의 의지는 나타났다. 그러나 우리는 교과서 지면의 한계때문에, 그리고 학문적 중요도의 차이때문에 중국 관내와 만주의 역사만큼 한반도 내의 역사를 잘 안다고 할 수 없다. &lt;br /&gt;
이번 프로젝트는 국내에서 전개된 독립운동 중에서도, 민족의 문화를 지키려던 일련의 노력들(민족 문학과 종교적 투쟁)과 사회를 개혁하려던 노력들(사회주의적 노동 운동과 학생운동)을 중점으로 살핀다. 근대화 과정에서 미약하게나마 성장한 민권의식을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기여한 여성 독립운동가들에 대해서도 다룬다.&amp;lt;/div&amp;gt;&lt;br /&gt;
&lt;br /&gt;
=기획의도=&lt;br /&gt;
우리 조의 기획은 독립운동가 한용운에 주목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성북구에 위치한 심우장에 살고 있었기에 성북마을아카이브에서 찾을 수 있었다. 한용운은 일제의 압력에 굴하지 않으며 문학과 불교를 통해 저항해나간 인물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이러한 사실에서 뻗어나가 6조는 독립운동의 양상 중에서도 여성독립운동 / 노동운동 / 저항문학 등에 주목하여 전형적인 투쟁이 아닌 다채로운 일제에 반대하는 독립운동을 포착해보고자 한다.&lt;br /&gt;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약 35년간의 일제 강점기 역사와 독립운동사를 생각해보면, 1930년대 이후 해외가 아닌 한반도 내에서 어떤 움직임이 있었는지 우리는 제대로 알고 있을까?&amp;lt;br&amp;gt;&lt;br /&gt;
실제로 2025년 8월 한국갤럽이 실시한 &amp;quot;'항일 독립운동가'하면 생각나는 인물&amp;quot; 설문조사에서, 1930년대 이후 주로 한반도 내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는 10위권 내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더라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저항해온 독립운동가가 더 많지만 대부분은 역사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것이다. 경술국치 이전 독립운동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 안중근, 3.1운동을 대표하는 유관순, 그리고 임시정부계열의 김구 및 한인애국단 독립운동가 말고도 더 넓은 시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lt;br /&gt;
[[파일:2025 8 독립운동가인식.png|프레임|200px]]&lt;br /&gt;
&lt;br /&gt;
=온톨로지=&lt;br /&gt;
==네트워크 그래프==&lt;br /&gt;
{{NetworkGraph|title=6조.lst}}&lt;br /&gt;
&lt;br /&gt;
&lt;br /&gt;
==콘텐츠구조==&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ig&amp;gt;'''클래스(Class)'''&amp;lt;/big&amp;gt;&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lt;br /&gt;
! 클래스 !! 설명 !! 노드&lt;br /&gt;
|-&lt;br /&gt;
| 인물 || 독립운동 또는 저항문학·문화운동에 참여한 인물 || 한용운, [[이육사(25-2)|이육사]], 조지훈, 이병희, 이효정, 박진홍, 김항규, 김용준, 이병우, 백용성, [[박시목(朴詩穆)|박시목]], [[정지용(鄭池龍)|정지용]], 이순금, [[이관술]], 김원봉, [[이재유]]&lt;br /&gt;
|-&lt;br /&gt;
| 조직 || 독립운동 조직·사회단체·정당·문예운동 단체 || [[신간회(新幹會)|신간회]], 민족대표_33인, [[의열단]], [[경성 트로이카]], 근우회,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선공산당]], 경성콤그룹, [[조선일보(朝鮮日報)|조선일보]], KAPF&lt;br /&gt;
|-&lt;br /&gt;
| 사건 || 독립운동·학생운동·파업·문화운동 등 사건 || 광주학생운동, [[종연방적_경성제사공장_파업|종연방적 경성제사공장 파업]], [[경성_여학생_운동|경성여학생운동]], 임제종운동, [[3.1운동]]&lt;br /&gt;
|-&lt;br /&gt;
| 장소 || 인물 및 조직과 관련된 장소 || [[심우장(尋牛莊)|심우장]], 인당약방,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lt;br /&gt;
|-&lt;br /&gt;
| 출판물 || 문예잡지·출판물 || [[문장(文章)|문장]], 문예운동, 흑풍&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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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big&amp;gt;'''관계성(Relation)'''&amp;lt;/big&amp;gt;&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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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wspan=&amp;quot;16&amp;quot; | isMemberOf || rowspan=&amp;quot;16&amp;quot; | ~의_일원이다 || rowspan=&amp;quot;16&amp;quot; | 인물-&amp;gt;조직&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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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독립운동=&lt;br /&gt;
==학생독립운동==&lt;br /&gt;
김항규&lt;br /&gt;
이병우&lt;br /&gt;
백용성&lt;br /&gt;
[[박시목(朴詩穆)|박시목]]&lt;br /&gt;
&lt;br /&gt;
==여성독립운동==&lt;br /&gt;
이효정&lt;br /&gt;
[[이관술]]&lt;br /&gt;
이순금&lt;br /&gt;
[[신간회(新幹會)|신간회]]&lt;br /&gt;
근우회&lt;br /&gt;
동덕여자보통고등학교&lt;br /&gt;
이병희&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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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노동운동==&lt;br /&gt;
이병희&lt;br /&gt;
박진홍&lt;br /&gt;
이재유&lt;br /&gt;
[[경성 트로이카]]&lt;br /&gt;
조선공산당&lt;br /&gt;
경성콤그룹&lt;br /&gt;
종연방적 경성제사공장 파업&lt;br /&gt;
&lt;br /&gt;
==저항문학==&lt;br /&gt;
한용운&lt;br /&gt;
[[이육사(25-2)|이육사]]&lt;br /&gt;
조지훈&lt;br /&gt;
[[정지용(鄭池龍)|정지용]]&lt;br /&gt;
KAPF&lt;br /&gt;
문장&lt;br /&gt;
문예운동&lt;br /&gt;
흑풍&lt;br /&gt;
&lt;br /&gt;
==국외투쟁==&lt;br /&gt;
[[대한민국임시정부(25-2)|대한민국임시정부]]&lt;br /&gt;
김원봉&lt;br /&gt;
이병희&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lt;br /&gt;
|-&lt;br /&gt;
! 기여자 !! 기여 항목&lt;br /&gt;
|-&lt;br /&gt;
| 이예린 || 기획의도 작성,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및 이관술 문서 작성&lt;br /&gt;
|-&lt;br /&gt;
| 박지혜 || 온톨로지, 정지용 문서 작성&lt;br /&gt;
|-&lt;br /&gt;
| [[Dihu04|차제겸]] || [[성북구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저항문학#주제]], [[성북구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저항문학#타임라인]], [[경성 트로이카]], [[이육사(25-2)|이육사]], [[임제종운동]], [[KAPF]], [[틀:장소]], [[틀:역사인물]], [[틀:역사조직]]&lt;br /&gt;
|-&lt;br /&gt;
| 윤준상 || [[성북구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저항문학#콘텐츠구조]], [[심우장(尋牛莊)|심우장]], [[신간회(新幹會)|신간회]], [[성북구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저항문학#지도]], [[조선일보(朝鮮日報)|조선일보]], [[박시목(朴詩穆)|박시목]]&lt;br /&gt;
|-&lt;br /&gt;
| 한성준 || [[의열단(義烈團)]], [[이재유]], [[조선공산당]], [[종연방적 파업]]&lt;br /&gt;
|}&lt;/div&gt;</summary>
		<author><name>Jmwshye</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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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3.1운동</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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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23T09:39:2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mwshye: &lt;/p&gt;
&lt;hr /&gt;
&lt;div&gt;===&amp;lt;big&amp;gt;'''개요'''&amp;lt;/big&amp;gt;===&lt;br /&gt;
----&lt;br /&gt;
[[파일:31운동뉴스.jpg|300px|center]]&lt;br /&gt;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을 기해 일어난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이다. 전국적인 범위에서 각계각층을 망라하여 전개된 3·1운동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켜 한국민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였고, 중국 상하이에서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다. 이민족에 대한 끈질기고 강렬한 독립투쟁정신을 고취하였을 뿐 아니라, 일제의 무단통치방법을 이른바 문화통치로 바꾸게 하였다. 나아가 민족의식과 민족정신에 새로운 자각과 힘을 주어 교육의 진흥, 신문예운동·산업운동이 활성화하고 민족 자립의 기초를 다지게 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big&amp;gt;'''배경'''&amp;lt;/big&amp;gt;===&lt;br /&gt;
----&lt;br /&gt;
1910년 강제 병탄 이후 조선총독부는 헌병·경찰을 앞세운 무단통치로 독립운동을 강하게 탄압했고, 문화 말살과 경제적 지배를 병행해 민족적 저항 기반을 약화시키려 했다. 이에 독립운동가들은 국내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거나 중국·만주·연해주·미주 등지로 망명해 활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1차 세계대전 종전 국면과 함께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알려지면서, 국제 여론에 호소해 독립을 추진할 수 있다는 기대가 확산되었다.&lt;br /&gt;
&lt;br /&gt;
특히 해외 한인 사회는 민족자결주의를 근거로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해 한국 독립을 호소하려 했고, 상하이의 신한청년단 등은 김규식 등을 파리로 보내 외교 활동을 시도했다. 국내에는 일제의 은폐로 해당 사상이 즉각 확산되진 않았으나, 유학생·해외 동포의 움직임이 알려지며 독립운동 분위기가 점차 고조되었다. 여기에 1919년 2·8 독립선언이 도화선 역할을 하며, 국내에서도 거족적 행동을 준비하려는 흐름을 촉진했다.&lt;br /&gt;
&lt;br /&gt;
===&amp;lt;big&amp;gt;'''진행'''&amp;lt;/big&amp;gt;===&lt;br /&gt;
----&lt;br /&gt;
3·1운동은 민족자결주의의 영향, 2·8 독립선언의 파장, 그리고 고종의 갑작스러운 서거(독살설 확산)로 고조된 민심이 결합되며 거족적 항일운동으로 구체화되었다. 운동 준비 과정에서 천도교·기독교·불교계를 중심으로 ‘대중화·일원화·비폭력’의 원칙이 정리되었고, 독립선언서 발표와 만세 시위, 독립 청원 등(국내외 여론전)이 함께 구상되었다. 최남선이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종교계 인사들이 연합해 민족대표를 구성하면서 33인이 확정되었다.&lt;br /&gt;
&lt;br /&gt;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을 진행한 뒤 경찰에 연행되었고, 같은 시각 탑골공원에는 학생과 시민이 모여 독립선언서 낭독과 만세 시위를 시작했다. 시위는 서울 도심에서 행진 형태로 확산되었으며, 이후 평양·원산 등 주요 도시를 거쳐 전국 각지로 빠르게 번져 나갔다. 전개 과정에서 장날·종교 조직·학교 네트워크·지역 간 인접 영향 등 다양한 경로로 동원이 확대되었고, 국내 운동은 만주·연해주·미주 등 해외 한인 사회의 만세 시위로도 연결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big&amp;gt;'''결과'''&amp;lt;/big&amp;gt;===&lt;br /&gt;
----&lt;br /&gt;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자 조선총독부는 헌병·경찰뿐 아니라 정규 군대까지 동원해 강경 진압에 나섰고, 그 과정에서 대규모 체포·구금과 희생이 발생했다. 참가 규모와 피해 통계는 자료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조선총독부의 공식 기록 및 당대 보고·회고 자료 등에서 참가 인원, 사망·부상·피검자 수가 다양하게 집계된다. 또한 제암리 등 일부 지역에서는 시위 이후 보복적 성격의 살상·방화가 발생해 국제적 비난을 불러일으켰다.&lt;br /&gt;
&lt;br /&gt;
한편 일제는 국제 여론의 악화를 완화하고 향후 통치를 안정화하기 위해 통치 방식의 변화를 표방했다. 이른바 ‘문화통치’로의 전환이 제시되며 헌병경찰제의 완화, 언론·교육 정책의 조정 등이 추진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경찰력과 감시 체계를 강화하고 독립운동가 색출을 지속하는 등 식민 지배의 본질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평가도 함께 존재한다.&lt;br /&gt;
&lt;br /&gt;
===&amp;lt;big&amp;gt;'''평가 및 의의'''&amp;lt;/big&amp;gt;===&lt;br /&gt;
----&lt;br /&gt;
3·1운동은 특정 계층에 국한되지 않고 종교계·학생·농민·상인 등 사회 전반이 참여한 대규모 민족운동으로,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국내외에 집단적으로 표출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특히 운동 과정에서 ‘비폭력’과 ‘공동 행동’의 원칙이 강조되며 거족적 항쟁의 전형을 형성했고, 일제의 식민 통치 방식과 국제 여론에 직접적인 압력을 가했다는 점이 중요하게 평가된다.&lt;br /&gt;
&lt;br /&gt;
또한 3·1운동은 독립운동의 구심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어 상하이를 중심으로 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과 독립운동 진영의 재편에 영향을 주었다. 동시에 국내에서는 민족의식의 확산과 함께 교육·언론·문화운동, 경제적 자립을 지향한 여러 사회운동이 활성화되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요약하면, 3·1운동은 즉각적인 독립 달성에는 이르지 못했더라도, 이후 독립운동의 조직화·국제화·대중화에 장기적인 동력을 제공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lt;br /&gt;
&lt;br /&gt;
===&amp;lt;big&amp;gt;'''참고문헌'''&amp;lt;/big&amp;gt;===&lt;br /&gt;
----&lt;br /&gt;
* 국사편찬위원회. 「3·1 운동」, *우리역사넷*.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i400200] &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3·1운동(三一運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6772]&lt;/div&gt;</summary>
		<author><name>Jmwshye</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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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amp;lt;big&amp;gt;'''개요'''&amp;lt;/big&amp;gt;===&lt;br /&gt;
----&lt;br /&gt;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을 기해 일어난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이다. 전국적인 범위에서 각계각층을 망라하여 전개된 3·1운동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켜 한국민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였고, 중국 상하이에서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다. 이민족에 대한 끈질기고 강렬한 독립투쟁정신을 고취하였을 뿐 아니라, 일제의 무단통치방법을 이른바 문화통치로 바꾸게 하였다. 나아가 민족의식과 민족정신에 새로운 자각과 힘을 주어 교육의 진흥, 신문예운동·산업운동이 활성화하고 민족 자립의 기초를 다지게 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big&amp;gt;'''배경'''&amp;lt;/big&amp;gt;===&lt;br /&gt;
----&lt;br /&gt;
1910년 강제 병탄 이후 조선총독부는 헌병·경찰을 앞세운 무단통치로 독립운동을 강하게 탄압했고, 문화 말살과 경제적 지배를 병행해 민족적 저항 기반을 약화시키려 했다. 이에 독립운동가들은 국내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거나 중국·만주·연해주·미주 등지로 망명해 활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1차 세계대전 종전 국면과 함께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알려지면서, 국제 여론에 호소해 독립을 추진할 수 있다는 기대가 확산되었다.&lt;br /&gt;
&lt;br /&gt;
특히 해외 한인 사회는 민족자결주의를 근거로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해 한국 독립을 호소하려 했고, 상하이의 신한청년단 등은 김규식 등을 파리로 보내 외교 활동을 시도했다. 국내에는 일제의 은폐로 해당 사상이 즉각 확산되진 않았으나, 유학생·해외 동포의 움직임이 알려지며 독립운동 분위기가 점차 고조되었다. 여기에 1919년 2·8 독립선언이 도화선 역할을 하며, 국내에서도 거족적 행동을 준비하려는 흐름을 촉진했다.&lt;br /&gt;
&lt;br /&gt;
===&amp;lt;big&amp;gt;'''진행'''&amp;lt;/big&amp;gt;===&lt;br /&gt;
----&lt;br /&gt;
3·1운동은 민족자결주의의 영향, 2·8 독립선언의 파장, 그리고 고종의 갑작스러운 서거(독살설 확산)로 고조된 민심이 결합되며 거족적 항일운동으로 구체화되었다. 운동 준비 과정에서 천도교·기독교·불교계를 중심으로 ‘대중화·일원화·비폭력’의 원칙이 정리되었고, 독립선언서 발표와 만세 시위, 독립 청원 등(국내외 여론전)이 함께 구상되었다. 최남선이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종교계 인사들이 연합해 민족대표를 구성하면서 33인이 확정되었다.&lt;br /&gt;
&lt;br /&gt;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을 진행한 뒤 경찰에 연행되었고, 같은 시각 탑골공원에는 학생과 시민이 모여 독립선언서 낭독과 만세 시위를 시작했다. 시위는 서울 도심에서 행진 형태로 확산되었으며, 이후 평양·원산 등 주요 도시를 거쳐 전국 각지로 빠르게 번져 나갔다. 전개 과정에서 장날·종교 조직·학교 네트워크·지역 간 인접 영향 등 다양한 경로로 동원이 확대되었고, 국내 운동은 만주·연해주·미주 등 해외 한인 사회의 만세 시위로도 연결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big&amp;gt;'''결과'''&amp;lt;/big&amp;gt;===&lt;br /&gt;
----&lt;br /&gt;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자 조선총독부는 헌병·경찰뿐 아니라 정규 군대까지 동원해 강경 진압에 나섰고, 그 과정에서 대규모 체포·구금과 희생이 발생했다. 참가 규모와 피해 통계는 자료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조선총독부의 공식 기록 및 당대 보고·회고 자료 등에서 참가 인원, 사망·부상·피검자 수가 다양하게 집계된다. 또한 제암리 등 일부 지역에서는 시위 이후 보복적 성격의 살상·방화가 발생해 국제적 비난을 불러일으켰다.&lt;br /&gt;
&lt;br /&gt;
한편 일제는 국제 여론의 악화를 완화하고 향후 통치를 안정화하기 위해 통치 방식의 변화를 표방했다. 이른바 ‘문화통치’로의 전환이 제시되며 헌병경찰제의 완화, 언론·교육 정책의 조정 등이 추진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경찰력과 감시 체계를 강화하고 독립운동가 색출을 지속하는 등 식민 지배의 본질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평가도 함께 존재한다.&lt;br /&gt;
&lt;br /&gt;
===&amp;lt;big&amp;gt;'''평가 및 의의'''&amp;lt;/big&amp;gt;===&lt;br /&gt;
----&lt;br /&gt;
3·1운동은 특정 계층에 국한되지 않고 종교계·학생·농민·상인 등 사회 전반이 참여한 대규모 민족운동으로,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국내외에 집단적으로 표출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특히 운동 과정에서 ‘비폭력’과 ‘공동 행동’의 원칙이 강조되며 거족적 항쟁의 전형을 형성했고, 일제의 식민 통치 방식과 국제 여론에 직접적인 압력을 가했다는 점이 중요하게 평가된다.&lt;br /&gt;
&lt;br /&gt;
또한 3·1운동은 독립운동의 구심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어 상하이를 중심으로 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과 독립운동 진영의 재편에 영향을 주었다. 동시에 국내에서는 민족의식의 확산과 함께 교육·언론·문화운동, 경제적 자립을 지향한 여러 사회운동이 활성화되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요약하면, 3·1운동은 즉각적인 독립 달성에는 이르지 못했더라도, 이후 독립운동의 조직화·국제화·대중화에 장기적인 동력을 제공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lt;br /&gt;
&lt;br /&gt;
===&amp;lt;big&amp;gt;'''참고문헌'''&amp;lt;/big&amp;gt;===&lt;br /&gt;
----&lt;br /&gt;
* 국사편찬위원회. 「3·1 운동」, *우리역사넷*.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i400200] &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3·1운동(三一運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6772]&lt;/div&gt;</summary>
		<author><name>Jmwshye</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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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대한민국임시정부(25-2)</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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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23T09:13:3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mwshye: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amp;lt;big&amp;gt;'''개요'''&amp;lt;/big&amp;gt;===&lt;br /&gt;
----&lt;br /&gt;
[[파일: 임시임시정부.jpg|300px|center]]&lt;br /&gt;
1919년부터 1945년까지 27년간 중국에서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된 이후 1945년 11월 김구 등이 환국할 때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다. 임시정부 수립일은 기념일 제정 시에는 4월 13일이라고 여겨 왔으나 근거 자료의 확대와 이에 대한 역사학적 분석에 따라 2019년부터 4월 11일로 바로잡게 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big&amp;gt;'''수립배경'''&amp;lt;/big&amp;gt;===&lt;br /&gt;
----&lt;br /&gt;
===='''신한민보와 무형국가론'''====&lt;br /&gt;
미국에서 대한인국민회가 발행한 신문인 『 신한민보』가 먼저 임시정부 수립을 주장하였다. 한일병합조약 체결 직전인 1910년 7월 6일 자 사설에서 “현 정부가 일본에 투항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은즉, 우리는 인민의 정신을 대표하여 우리의 복리를 도모할 만한 정부를 세울” 것임을 천명하였고, 체결 직후인 1910년 9월 21일 &amp;quot;우리 손으로 자치하는 법률을 제정하며, 공법에 상당하는 임시정부를 설치하는 것이 급선무&amp;quot;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연이어 10월 5일 자에는 &amp;quot;대한인의 자치기관&amp;quot;이란 논설을 실어 대한인국민회가 자치 능력을 길러 장차 임시정부의 역할을 하고자 한다는 구상을 밝혔다.&lt;br /&gt;
1911년에 들어와 『신한민보』의 주필인 박용만은 무형국가론을 주장하였다. 무형국가론은 외국에 나온 조선 민족을 무형한 국가와 무형한 정부 산하로 통합하여 헌법을 마련하고 정치적 구역을 나누어 행정기관을 마련하고 개개인에게 의무와 권리를 부여하자는 것이다. 또한, 무형국가를 이끄는 무형 정부, 즉 임시정부의 역할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부에 맡겨야 한다고 보았다.&lt;br /&gt;
&lt;br /&gt;
===='''대동단결선언'''====&lt;br /&gt;
1910년대 초반 우리나라의 독립운동 세력은 국내외에 걸쳐 독자적으로 활동하였기에 세력들 간의 소통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고 효과적인 연합활동 또한 기대할 수 없었다. 따라서 유기적이고 효율적인 독립운동을 벌이기 위해 1917년 박은식·신채호·윤세복·조소앙·신석우·한진교·박용만 등이 참가한‘대동단결선언’이 있었다. 대동단결선언문에서는 순종의 주권 포기 행위를 국민에게 양도하는 것으로 해석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이 타당함을 밝혔다. 또한 일제의 국권 침탈로 인해 해외에서의 주권 행사가 필수불가결한 선택임을 덧붙였다. 대동단결선언문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의지가 반영된 최초 문건이었던 셈이다.&lt;br /&gt;
 &lt;br /&gt;
===='''[[3.1운동]] 이전'''====&lt;br /&gt;
3.1운동 직전, 러시아 연해주에서는 임시정부 성격의 '대한국민의회'가 준비되었다. 1919년 2월 25일에는 니콜리스크에서 러시아, 간도, 국내 등에서 온 약 130명이 독립운동단체 대표회의를 열고 임시정부 성격의 대한국민의회 결성을 결의하였다. 대한국민의회는 3.1운동이 한창인 3월 17일에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서 공식출범하였다. &lt;br /&gt;
&lt;br /&gt;
===='''[[3.1운동]] 이후'''====&lt;br /&gt;
3.1운동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천도교가 1919년 3월 3일 자로 발행한 '조선독립신문'은 임시정부가 조직되고 임시 대통령을 선거할 것이라는 소식을 전했고, 천도교 교주인 손병희를 임시정부의 수석인 정도령에, 미국에서 활동하는 이승만을 부도령에 지명하였다. &lt;br /&gt;
4월 10일 상하이에서는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정부 수립 절차를 마련하였다. 국호는 일본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다는 뜻의 '대한'과 1912년에 수립한 ‘중화민국’에서 ‘민국’이 의미하는 것처럼 공화제 국가임을 분명히 한다는 결의를 담은 '대한민국'으로 정하였다.  다음날인 4월 11일에는 ｢대한민국임시헌장｣(이하 임시헌장)이 반포되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3개 임시정부의 통합으로 탄생한 '대한민국임시정부''''====&lt;br /&gt;
3·1운동 직후 국내외에서 한성정부(국내),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 여러 임시정부가 각각 수립되자, 상하이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은 독립운동의 구심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통합을 추진하였다. 통합은 ‘정통성(법통)’을 둘러싼 조정과 현실적 운영 기반 확보를 동시에 겨냥해, 한성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정부 체제를 정비하되 정부의 거점은 당분간 상하이에 두는 방향으로 진행되었고, 안창호의 주도로 상하이 임시정부와 대한국민의회 측의 통합 논의가 진전되면서 대한국민의회가 해산을 결의(1919. 8. 30)한 뒤 임시의정원은 통합 정부에 맞춘 개조와 1차 개헌을 단행하여 1919년 9월 11일 ‘대한민국임시헌법’을 공포함으로써 명실상부한 통합 임시정부 체제를 출범시켰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ig&amp;gt;'''주요 활동'''&amp;lt;/big&amp;gt;===&lt;br /&gt;
----&lt;br /&gt;
임시정부 27년은 크게 상하이시대(1919~1932), 이동시대(1932~1940), 충칭시대(1940~1945)로 나눌 수 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상하이시대(1919~1932)'''====&lt;br /&gt;
상하이 시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정부 조직의 구축과 외교·군사 활동의 기초를 마련하는 데 주력하였다. 임시정부는 연통제와 교통국을 설치하여 국내와의 비밀 행정·통신망을 구축하고, 지방선전부와 특파원을 통해 독립운동 자금 모집과 선전 활동을 전개하였다. 외교적으로는 파리강화회의, 워싱턴 회의, 국제연맹 등을 무대로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고자 하였으며, 파리위원부와 구미위원부를 설치해 대미·대유럽 외교를 추진하였다. 군사적으로는 만주 지역 독립군과의 연계를 시도하고 광복군사령부와 육군주만참의부를 조직하였으나, 재정난과 국내 연락망 붕괴로 본격적인 독립전쟁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 시기 임시정부는 내부 갈등과 국민대표회의 결렬, 이승만 탄핵 등으로 심각한 위기를 겪었으나, 1932년 한인애국단의 의열 투쟁을 계기로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amp;lt;/br&amp;gt;&lt;br /&gt;
&lt;br /&gt;
===='''이동시대(1932~1940)'''====&lt;br /&gt;
이동 시대는 윤봉길 의거 이후 일본의 추격을 피해 임시정부가 상하이를 떠나 중국 각지를 전전한 시기로, 생존과 재정비가 핵심 과제였다. 임시정부는 항저우, 전장,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 등을 거쳐 8년간 이동하며 활동을 지속하였다. 이 시기에는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을 목표로 한 정당 통일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어 조선민족혁명당,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 등 여러 정당과 단체가 결성과 해체를 반복하였다. 그러나 통일 방식과 노선 차이로 갈등이 지속되었고, 임시정부는 한때 여당과 국무위원 다수를 상실하며 무정부 상태에 빠지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김구를 중심으로 한 세력은 임시정부를 유지하며 군사 기반과 정치적 명맥을 보존하는 데 주력하였다.&amp;lt;/br&amp;gt;&lt;br /&gt;
&lt;br /&gt;
===='''충칭시대(1940~1945)'''====&lt;br /&gt;
충칭 시대의 임시정부는 당·정·군 체제를 확립하고 독립 국가 수립을 위한 실질적 준비에 집중하였다. 임시정부는 1940년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여 항일 무장 투쟁의 구심을 마련하고, 1941년에는 삼균주의를 반영한 「건국강령」을 발표하여 해방 이후 국가 건설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또한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일본과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여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 의지를 분명히 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좌우 합작을 통해 임시의정원을 재편하고, 1944년 좌우 세력이 합의한 개헌으로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선포하여 연합 정부 체제를 완성하였다. 이와 함께 중국과 미국을 상대로 승인 외교를 전개하였으나 국제 정세와 미군정의 방침으로 공식 승인은 얻지 못한 채, 1945년 광복을 맞아 지도자들이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 &amp;lt;big&amp;gt;'''참고문헌'''&amp;lt;/big&amp;gt; ===&lt;br /&gt;
----&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대한민국 임시정부 (大韓民國 臨時政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5017] &lt;br /&gt;
* 독립기념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탄생」, *월간 독립기념관* (15호). [https://www.i815.or.kr/upload/kr/magazine/magazine/15/post-153.html] &lt;br /&gt;
* 국사편찬위원회. 「1919년 - 대한민국 임시 정부」, *우리역사넷*.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o400800&amp;amp;code=kc_age_40]&lt;/div&gt;</summary>
		<author><name>Jmwshye</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8C%80%ED%95%9C%EB%AF%BC%EA%B5%AD%EC%9E%84%EC%8B%9C%EC%A0%95%EB%B6%80(25-2)&amp;diff=66754</id>
		<title>대한민국임시정부(25-2)</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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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23T09:09:4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mwshye: /* 주요 활동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개요===&lt;br /&gt;
----&lt;br /&gt;
[[파일: 임시임시정부.jpg|300px|center]]&lt;br /&gt;
1919년부터 1945년까지 27년간 중국에서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된 이후 1945년 11월 김구 등이 환국할 때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다. 임시정부 수립일은 기념일 제정 시에는 4월 13일이라고 여겨 왔으나 근거 자료의 확대와 이에 대한 역사학적 분석에 따라 2019년부터 4월 11일로 바로잡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수립배경===&lt;br /&gt;
----&lt;br /&gt;
====신한민보와 무형국가론====&lt;br /&gt;
미국에서 대한인국민회가 발행한 신문인 『 신한민보』가 먼저 임시정부 수립을 주장하였다. 한일병합조약 체결 직전인 1910년 7월 6일 자 사설에서 “현 정부가 일본에 투항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은즉, 우리는 인민의 정신을 대표하여 우리의 복리를 도모할 만한 정부를 세울” 것임을 천명하였고, 체결 직후인 1910년 9월 21일 &amp;quot;우리 손으로 자치하는 법률을 제정하며, 공법에 상당하는 임시정부를 설치하는 것이 급선무&amp;quot;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연이어 10월 5일 자에는 &amp;quot;대한인의 자치기관&amp;quot;이란 논설을 실어 대한인국민회가 자치 능력을 길러 장차 임시정부의 역할을 하고자 한다는 구상을 밝혔다.&lt;br /&gt;
1911년에 들어와 『신한민보』의 주필인 박용만은 무형국가론을 주장하였다. 무형국가론은 외국에 나온 조선 민족을 무형한 국가와 무형한 정부 산하로 통합하여 헌법을 마련하고 정치적 구역을 나누어 행정기관을 마련하고 개개인에게 의무와 권리를 부여하자는 것이다. 또한, 무형국가를 이끄는 무형 정부, 즉 임시정부의 역할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부에 맡겨야 한다고 보았다.&lt;br /&gt;
&lt;br /&gt;
====대동단결선언====&lt;br /&gt;
1910년대 초반 우리나라의 독립운동 세력은 국내외에 걸쳐 독자적으로 활동하였기에 세력들 간의 소통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고 효과적인 연합활동 또한 기대할 수 없었다. 따라서 유기적이고 효율적인 독립운동을 벌이기 위해 1917년 박은식·신채호·윤세복·조소앙·신석우·한진교·박용만 등이 참가한‘대동단결선언’이 있었다. 대동단결선언문에서는 순종의 주권 포기 행위를 국민에게 양도하는 것으로 해석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이 타당함을 밝혔다. 또한 일제의 국권 침탈로 인해 해외에서의 주권 행사가 필수불가결한 선택임을 덧붙였다. 대동단결선언문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의지가 반영된 최초 문건이었던 셈이다.&lt;br /&gt;
 &lt;br /&gt;
====[[3.1운동]] 이전====&lt;br /&gt;
3.1운동 직전, 러시아 연해주에서는 임시정부 성격의 '대한국민의회'가 준비되었다. 1919년 2월 25일에는 니콜리스크에서 러시아, 간도, 국내 등에서 온 약 130명이 독립운동단체 대표회의를 열고 임시정부 성격의 대한국민의회 결성을 결의하였다. 대한국민의회는 3.1운동이 한창인 3월 17일에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서 공식출범하였다. &lt;br /&gt;
&lt;br /&gt;
====[[3.1운동]] 이후====&lt;br /&gt;
3.1운동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천도교가 1919년 3월 3일 자로 발행한 '조선독립신문'은 임시정부가 조직되고 임시 대통령을 선거할 것이라는 소식을 전했고, 천도교 교주인 손병희를 임시정부의 수석인 정도령에, 미국에서 활동하는 이승만을 부도령에 지명하였다. &lt;br /&gt;
4월 10일 상하이에서는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정부 수립 절차를 마련하였다. 국호는 일본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다는 뜻의 '대한'과 1912년에 수립한 ‘중화민국’에서 ‘민국’이 의미하는 것처럼 공화제 국가임을 분명히 한다는 결의를 담은 '대한민국'으로 정하였다.  다음날인 4월 11일에는 ｢대한민국임시헌장｣(이하 임시헌장)이 반포되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3개 임시정부의 통합으로 탄생한 '대한민국임시정부'====&lt;br /&gt;
3·1운동 직후 국내외에서 한성정부(국내),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 여러 임시정부가 각각 수립되자, 상하이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은 독립운동의 구심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통합을 추진하였다. 통합은 ‘정통성(법통)’을 둘러싼 조정과 현실적 운영 기반 확보를 동시에 겨냥해, 한성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정부 체제를 정비하되 정부의 거점은 당분간 상하이에 두는 방향으로 진행되었고, 안창호의 주도로 상하이 임시정부와 대한국민의회 측의 통합 논의가 진전되면서 대한국민의회가 해산을 결의(1919. 8. 30)한 뒤 임시의정원은 통합 정부에 맞춘 개조와 1차 개헌을 단행하여 1919년 9월 11일 ‘대한민국임시헌법’을 공포함으로써 명실상부한 통합 임시정부 체제를 출범시켰다.&lt;br /&gt;
&lt;br /&gt;
&lt;br /&gt;
===주요 활동===&lt;br /&gt;
----&lt;br /&gt;
임시정부 27년은 크게 상하이시대(1919~1932), 이동시대(1932~1940), 충칭시대(1940~1945)로 나눌 수 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amp;lt;big&amp;gt;'''상하이시대(1919~1932)'''&amp;lt;/big&amp;gt;&amp;lt;/br&amp;gt;&lt;br /&gt;
상하이 시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정부 조직의 구축과 외교·군사 활동의 기초를 마련하는 데 주력하였다. 임시정부는 연통제와 교통국을 설치하여 국내와의 비밀 행정·통신망을 구축하고, 지방선전부와 특파원을 통해 독립운동 자금 모집과 선전 활동을 전개하였다. 외교적으로는 파리강화회의, 워싱턴 회의, 국제연맹 등을 무대로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고자 하였으며, 파리위원부와 구미위원부를 설치해 대미·대유럽 외교를 추진하였다. 군사적으로는 만주 지역 독립군과의 연계를 시도하고 광복군사령부와 육군주만참의부를 조직하였으나, 재정난과 국내 연락망 붕괴로 본격적인 독립전쟁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 시기 임시정부는 내부 갈등과 국민대표회의 결렬, 이승만 탄핵 등으로 심각한 위기를 겪었으나, 1932년 한인애국단의 의열 투쟁을 계기로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amp;lt;/br&amp;gt;&lt;br /&gt;
&lt;br /&gt;
&amp;lt;big&amp;gt;'''이동시대(1932~1940)'''&amp;lt;/big&amp;gt;&amp;lt;/br&amp;gt;&lt;br /&gt;
이동 시대는 윤봉길 의거 이후 일본의 추격을 피해 임시정부가 상하이를 떠나 중국 각지를 전전한 시기로, 생존과 재정비가 핵심 과제였다. 임시정부는 항저우, 전장,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 등을 거쳐 8년간 이동하며 활동을 지속하였다. 이 시기에는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을 목표로 한 정당 통일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어 조선민족혁명당,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 등 여러 정당과 단체가 결성과 해체를 반복하였다. 그러나 통일 방식과 노선 차이로 갈등이 지속되었고, 임시정부는 한때 여당과 국무위원 다수를 상실하며 무정부 상태에 빠지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김구를 중심으로 한 세력은 임시정부를 유지하며 군사 기반과 정치적 명맥을 보존하는 데 주력하였다.&amp;lt;/br&amp;gt;&lt;br /&gt;
&lt;br /&gt;
&amp;lt;big&amp;gt;'''충칭시대(1940~1945)'''&amp;lt;/big&amp;gt;&amp;lt;/br&amp;gt;&lt;br /&gt;
충칭 시대의 임시정부는 당·정·군 체제를 확립하고 독립 국가 수립을 위한 실질적 준비에 집중하였다. 임시정부는 1940년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여 항일 무장 투쟁의 구심을 마련하고, 1941년에는 삼균주의를 반영한 「건국강령」을 발표하여 해방 이후 국가 건설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또한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일본과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여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 의지를 분명히 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좌우 합작을 통해 임시의정원을 재편하고, 1944년 좌우 세력이 합의한 개헌으로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선포하여 연합 정부 체제를 완성하였다. 이와 함께 중국과 미국을 상대로 승인 외교를 전개하였으나 국제 정세와 미군정의 방침으로 공식 승인은 얻지 못한 채, 1945년 광복을 맞아 지도자들이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 참고문헌 ===&lt;br /&gt;
----&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대한민국 임시정부 (大韓民國 臨時政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5017] &lt;br /&gt;
* 독립기념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탄생」, *월간 독립기념관* (15호). [https://www.i815.or.kr/upload/kr/magazine/magazine/15/post-153.html] &lt;br /&gt;
* 국사편찬위원회. 「1919년 - 대한민국 임시 정부」, *우리역사넷*.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o400800&amp;amp;code=kc_age_40]&lt;/div&gt;</summary>
		<author><name>Jmwshye</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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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대한민국임시정부(25-2)</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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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23T09:07:2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mwshye: /* 주요 활동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개요===&lt;br /&gt;
----&lt;br /&gt;
[[파일: 임시임시정부.jpg|300px|center]]&lt;br /&gt;
1919년부터 1945년까지 27년간 중국에서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된 이후 1945년 11월 김구 등이 환국할 때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다. 임시정부 수립일은 기념일 제정 시에는 4월 13일이라고 여겨 왔으나 근거 자료의 확대와 이에 대한 역사학적 분석에 따라 2019년부터 4월 11일로 바로잡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수립배경===&lt;br /&gt;
----&lt;br /&gt;
====신한민보와 무형국가론====&lt;br /&gt;
미국에서 대한인국민회가 발행한 신문인 『 신한민보』가 먼저 임시정부 수립을 주장하였다. 한일병합조약 체결 직전인 1910년 7월 6일 자 사설에서 “현 정부가 일본에 투항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은즉, 우리는 인민의 정신을 대표하여 우리의 복리를 도모할 만한 정부를 세울” 것임을 천명하였고, 체결 직후인 1910년 9월 21일 &amp;quot;우리 손으로 자치하는 법률을 제정하며, 공법에 상당하는 임시정부를 설치하는 것이 급선무&amp;quot;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연이어 10월 5일 자에는 &amp;quot;대한인의 자치기관&amp;quot;이란 논설을 실어 대한인국민회가 자치 능력을 길러 장차 임시정부의 역할을 하고자 한다는 구상을 밝혔다.&lt;br /&gt;
1911년에 들어와 『신한민보』의 주필인 박용만은 무형국가론을 주장하였다. 무형국가론은 외국에 나온 조선 민족을 무형한 국가와 무형한 정부 산하로 통합하여 헌법을 마련하고 정치적 구역을 나누어 행정기관을 마련하고 개개인에게 의무와 권리를 부여하자는 것이다. 또한, 무형국가를 이끄는 무형 정부, 즉 임시정부의 역할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부에 맡겨야 한다고 보았다.&lt;br /&gt;
&lt;br /&gt;
====대동단결선언====&lt;br /&gt;
1910년대 초반 우리나라의 독립운동 세력은 국내외에 걸쳐 독자적으로 활동하였기에 세력들 간의 소통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고 효과적인 연합활동 또한 기대할 수 없었다. 따라서 유기적이고 효율적인 독립운동을 벌이기 위해 1917년 박은식·신채호·윤세복·조소앙·신석우·한진교·박용만 등이 참가한‘대동단결선언’이 있었다. 대동단결선언문에서는 순종의 주권 포기 행위를 국민에게 양도하는 것으로 해석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이 타당함을 밝혔다. 또한 일제의 국권 침탈로 인해 해외에서의 주권 행사가 필수불가결한 선택임을 덧붙였다. 대동단결선언문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의지가 반영된 최초 문건이었던 셈이다.&lt;br /&gt;
 &lt;br /&gt;
====[[3.1운동]] 이전====&lt;br /&gt;
3.1운동 직전, 러시아 연해주에서는 임시정부 성격의 '대한국민의회'가 준비되었다. 1919년 2월 25일에는 니콜리스크에서 러시아, 간도, 국내 등에서 온 약 130명이 독립운동단체 대표회의를 열고 임시정부 성격의 대한국민의회 결성을 결의하였다. 대한국민의회는 3.1운동이 한창인 3월 17일에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서 공식출범하였다. &lt;br /&gt;
&lt;br /&gt;
====[[3.1운동]] 이후====&lt;br /&gt;
3.1운동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천도교가 1919년 3월 3일 자로 발행한 '조선독립신문'은 임시정부가 조직되고 임시 대통령을 선거할 것이라는 소식을 전했고, 천도교 교주인 손병희를 임시정부의 수석인 정도령에, 미국에서 활동하는 이승만을 부도령에 지명하였다. &lt;br /&gt;
4월 10일 상하이에서는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정부 수립 절차를 마련하였다. 국호는 일본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다는 뜻의 '대한'과 1912년에 수립한 ‘중화민국’에서 ‘민국’이 의미하는 것처럼 공화제 국가임을 분명히 한다는 결의를 담은 '대한민국'으로 정하였다.  다음날인 4월 11일에는 ｢대한민국임시헌장｣(이하 임시헌장)이 반포되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3개 임시정부의 통합으로 탄생한 '대한민국임시정부'====&lt;br /&gt;
3·1운동 직후 국내외에서 한성정부(국내),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 여러 임시정부가 각각 수립되자, 상하이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은 독립운동의 구심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통합을 추진하였다. 통합은 ‘정통성(법통)’을 둘러싼 조정과 현실적 운영 기반 확보를 동시에 겨냥해, 한성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정부 체제를 정비하되 정부의 거점은 당분간 상하이에 두는 방향으로 진행되었고, 안창호의 주도로 상하이 임시정부와 대한국민의회 측의 통합 논의가 진전되면서 대한국민의회가 해산을 결의(1919. 8. 30)한 뒤 임시의정원은 통합 정부에 맞춘 개조와 1차 개헌을 단행하여 1919년 9월 11일 ‘대한민국임시헌법’을 공포함으로써 명실상부한 통합 임시정부 체제를 출범시켰다.&lt;br /&gt;
&lt;br /&gt;
&lt;br /&gt;
===주요 활동===&lt;br /&gt;
----&lt;br /&gt;
임시정부 27년은 크게 상하이시대(1919~1932), 이동시대(1932~1940), 충칭시대(1940~1945)로 나눌 수 있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amp;lt;big&amp;gt;'''상하이시대(1919~1932)'''&amp;lt;/big&amp;gt;&amp;lt;/br&amp;gt;&lt;br /&gt;
상하이 시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정부 조직의 구축과 외교·군사 활동의 기초를 마련하는 데 주력하였다. 임시정부는 연통제와 교통국을 설치하여 국내와의 비밀 행정·통신망을 구축하고, 지방선전부와 특파원을 통해 독립운동 자금 모집과 선전 활동을 전개하였다. 외교적으로는 파리강화회의, 워싱턴 회의, 국제연맹 등을 무대로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고자 하였으며, 파리위원부와 구미위원부를 설치해 대미·대유럽 외교를 추진하였다. 군사적으로는 만주 지역 독립군과의 연계를 시도하고 광복군사령부와 육군주만참의부를 조직하였으나, 재정난과 국내 연락망 붕괴로 본격적인 독립전쟁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 시기 임시정부는 내부 갈등과 국민대표회의 결렬, 이승만 탄핵 등으로 심각한 위기를 겪었으나, 1932년 한인애국단의 의열 투쟁을 계기로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amp;lt;/br&amp;gt;&lt;br /&gt;
&lt;br /&gt;
&amp;lt;big&amp;gt;'''이동시대(1932~1940)'''&amp;lt;/big&amp;gt;&amp;lt;/br&amp;gt;&lt;br /&gt;
이동 시대는 윤봉길 의거 이후 일본의 추격을 피해 임시정부가 상하이를 떠나 중국 각지를 전전한 시기로, 생존과 재정비가 핵심 과제였다. 임시정부는 항저우, 전장,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 등을 거쳐 8년간 이동하며 활동을 지속하였다. 이 시기에는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을 목표로 한 정당 통일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어 조선민족혁명당,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 등 여러 정당과 단체가 결성과 해체를 반복하였다. 그러나 통일 방식과 노선 차이로 갈등이 지속되었고, 임시정부는 한때 여당과 국무위원 다수를 상실하며 무정부 상태에 빠지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김구를 중심으로 한 세력은 임시정부를 유지하며 군사 기반과 정치적 명맥을 보존하는 데 주력하였다.&amp;lt;/br&amp;gt;&lt;br /&gt;
&lt;br /&gt;
&amp;lt;big&amp;gt;'''충칭시대(1940~1945)'''&amp;lt;/big&amp;gt;&amp;lt;/br&amp;gt;&lt;br /&gt;
충칭 시대의 임시정부는 당·정·군 체제를 확립하고 독립 국가 수립을 위한 실질적 준비에 집중하였다. 임시정부는 1940년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여 항일 무장 투쟁의 구심을 마련하고, 1941년에는 삼균주의를 반영한 「건국강령」을 발표하여 해방 이후 국가 건설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또한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일본과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여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 의지를 분명히 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좌우 합작을 통해 임시의정원을 재편하고, 1944년 좌우 세력이 합의한 개헌으로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선포하여 연합 정부 체제를 완성하였다. 이와 함께 중국과 미국을 상대로 승인 외교를 전개하였으나 국제 정세와 미군정의 방침으로 공식 승인은 얻지 못한 채, 1945년 광복을 맞아 지도자들이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 참고문헌 ===&lt;br /&gt;
----&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대한민국 임시정부 (大韓民國 臨時政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5017] &lt;br /&gt;
* 독립기념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탄생」, *월간 독립기념관* (15호). [https://www.i815.or.kr/upload/kr/magazine/magazine/15/post-153.html] &lt;br /&gt;
* 국사편찬위원회. 「1919년 - 대한민국 임시 정부」, *우리역사넷*.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o400800&amp;amp;code=kc_age_40]&lt;/div&gt;</summary>
		<author><name>Jmwshye</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8C%80%ED%95%9C%EB%AF%BC%EA%B5%AD%EC%9E%84%EC%8B%9C%EC%A0%95%EB%B6%80(25-2)&amp;diff=66750</id>
		<title>대한민국임시정부(25-2)</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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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23T09:06:0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mwshye: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개요===&lt;br /&gt;
----&lt;br /&gt;
[[파일: 임시임시정부.jpg|300px|center]]&lt;br /&gt;
1919년부터 1945년까지 27년간 중국에서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된 이후 1945년 11월 김구 등이 환국할 때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다. 임시정부 수립일은 기념일 제정 시에는 4월 13일이라고 여겨 왔으나 근거 자료의 확대와 이에 대한 역사학적 분석에 따라 2019년부터 4월 11일로 바로잡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수립배경===&lt;br /&gt;
----&lt;br /&gt;
====신한민보와 무형국가론====&lt;br /&gt;
미국에서 대한인국민회가 발행한 신문인 『 신한민보』가 먼저 임시정부 수립을 주장하였다. 한일병합조약 체결 직전인 1910년 7월 6일 자 사설에서 “현 정부가 일본에 투항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은즉, 우리는 인민의 정신을 대표하여 우리의 복리를 도모할 만한 정부를 세울” 것임을 천명하였고, 체결 직후인 1910년 9월 21일 &amp;quot;우리 손으로 자치하는 법률을 제정하며, 공법에 상당하는 임시정부를 설치하는 것이 급선무&amp;quot;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연이어 10월 5일 자에는 &amp;quot;대한인의 자치기관&amp;quot;이란 논설을 실어 대한인국민회가 자치 능력을 길러 장차 임시정부의 역할을 하고자 한다는 구상을 밝혔다.&lt;br /&gt;
1911년에 들어와 『신한민보』의 주필인 박용만은 무형국가론을 주장하였다. 무형국가론은 외국에 나온 조선 민족을 무형한 국가와 무형한 정부 산하로 통합하여 헌법을 마련하고 정치적 구역을 나누어 행정기관을 마련하고 개개인에게 의무와 권리를 부여하자는 것이다. 또한, 무형국가를 이끄는 무형 정부, 즉 임시정부의 역할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부에 맡겨야 한다고 보았다.&lt;br /&gt;
&lt;br /&gt;
====대동단결선언====&lt;br /&gt;
1910년대 초반 우리나라의 독립운동 세력은 국내외에 걸쳐 독자적으로 활동하였기에 세력들 간의 소통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고 효과적인 연합활동 또한 기대할 수 없었다. 따라서 유기적이고 효율적인 독립운동을 벌이기 위해 1917년 박은식·신채호·윤세복·조소앙·신석우·한진교·박용만 등이 참가한‘대동단결선언’이 있었다. 대동단결선언문에서는 순종의 주권 포기 행위를 국민에게 양도하는 것으로 해석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이 타당함을 밝혔다. 또한 일제의 국권 침탈로 인해 해외에서의 주권 행사가 필수불가결한 선택임을 덧붙였다. 대동단결선언문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의지가 반영된 최초 문건이었던 셈이다.&lt;br /&gt;
 &lt;br /&gt;
====[[3.1운동]] 이전====&lt;br /&gt;
3.1운동 직전, 러시아 연해주에서는 임시정부 성격의 '대한국민의회'가 준비되었다. 1919년 2월 25일에는 니콜리스크에서 러시아, 간도, 국내 등에서 온 약 130명이 독립운동단체 대표회의를 열고 임시정부 성격의 대한국민의회 결성을 결의하였다. 대한국민의회는 3.1운동이 한창인 3월 17일에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서 공식출범하였다. &lt;br /&gt;
&lt;br /&gt;
====[[3.1운동]] 이후====&lt;br /&gt;
3.1운동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천도교가 1919년 3월 3일 자로 발행한 '조선독립신문'은 임시정부가 조직되고 임시 대통령을 선거할 것이라는 소식을 전했고, 천도교 교주인 손병희를 임시정부의 수석인 정도령에, 미국에서 활동하는 이승만을 부도령에 지명하였다. &lt;br /&gt;
4월 10일 상하이에서는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정부 수립 절차를 마련하였다. 국호는 일본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다는 뜻의 '대한'과 1912년에 수립한 ‘중화민국’에서 ‘민국’이 의미하는 것처럼 공화제 국가임을 분명히 한다는 결의를 담은 '대한민국'으로 정하였다.  다음날인 4월 11일에는 ｢대한민국임시헌장｣(이하 임시헌장)이 반포되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3개 임시정부의 통합으로 탄생한 '대한민국임시정부'====&lt;br /&gt;
3·1운동 직후 국내외에서 한성정부(국내),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 여러 임시정부가 각각 수립되자, 상하이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은 독립운동의 구심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통합을 추진하였다. 통합은 ‘정통성(법통)’을 둘러싼 조정과 현실적 운영 기반 확보를 동시에 겨냥해, 한성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정부 체제를 정비하되 정부의 거점은 당분간 상하이에 두는 방향으로 진행되었고, 안창호의 주도로 상하이 임시정부와 대한국민의회 측의 통합 논의가 진전되면서 대한국민의회가 해산을 결의(1919. 8. 30)한 뒤 임시의정원은 통합 정부에 맞춘 개조와 1차 개헌을 단행하여 1919년 9월 11일 ‘대한민국임시헌법’을 공포함으로써 명실상부한 통합 임시정부 체제를 출범시켰다.&lt;br /&gt;
&lt;br /&gt;
&lt;br /&gt;
===주요 활동===&lt;br /&gt;
----&lt;br /&gt;
임시정부 27년은 크게 상하이시대(1919~1932), 이동시대(1932~1940), 충칭시대(1940~1945)로 나눌 수 있다.&lt;br /&gt;
&amp;lt;big&amp;gt;'''상하이시대(1919~1932)'''&amp;lt;/big&amp;gt;&lt;br /&gt;
상하이 시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정부 조직의 구축과 외교·군사 활동의 기초를 마련하는 데 주력하였다. 임시정부는 연통제와 교통국을 설치하여 국내와의 비밀 행정·통신망을 구축하고, 지방선전부와 특파원을 통해 독립운동 자금 모집과 선전 활동을 전개하였다. 외교적으로는 파리강화회의, 워싱턴 회의, 국제연맹 등을 무대로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고자 하였으며, 파리위원부와 구미위원부를 설치해 대미·대유럽 외교를 추진하였다. 군사적으로는 만주 지역 독립군과의 연계를 시도하고 광복군사령부와 육군주만참의부를 조직하였으나, 재정난과 국내 연락망 붕괴로 본격적인 독립전쟁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 시기 임시정부는 내부 갈등과 국민대표회의 결렬, 이승만 탄핵 등으로 심각한 위기를 겪었으나, 1932년 한인애국단의 의열 투쟁을 계기로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big&amp;gt;'''이동시대(1932~1940)'''&amp;lt;/big&amp;gt;&lt;br /&gt;
이동 시대는 윤봉길 의거 이후 일본의 추격을 피해 임시정부가 상하이를 떠나 중국 각지를 전전한 시기로, 생존과 재정비가 핵심 과제였다. 임시정부는 항저우, 전장,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 등을 거쳐 8년간 이동하며 활동을 지속하였다. 이 시기에는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을 목표로 한 정당 통일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어 조선민족혁명당,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 등 여러 정당과 단체가 결성과 해체를 반복하였다. 그러나 통일 방식과 노선 차이로 갈등이 지속되었고, 임시정부는 한때 여당과 국무위원 다수를 상실하며 무정부 상태에 빠지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김구를 중심으로 한 세력은 임시정부를 유지하며 군사 기반과 정치적 명맥을 보존하는 데 주력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big&amp;gt;'''충칭시대(1940~1945)'''&amp;lt;/big&amp;gt;&lt;br /&gt;
충칭 시대의 임시정부는 당·정·군 체제를 확립하고 독립 국가 수립을 위한 실질적 준비에 집중하였다. 임시정부는 1940년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여 항일 무장 투쟁의 구심을 마련하고, 1941년에는 삼균주의를 반영한 「건국강령」을 발표하여 해방 이후 국가 건설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또한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일본과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여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 의지를 분명히 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좌우 합작을 통해 임시의정원을 재편하고, 1944년 좌우 세력이 합의한 개헌으로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선포하여 연합 정부 체제를 완성하였다. 이와 함께 중국과 미국을 상대로 승인 외교를 전개하였으나 국제 정세와 미군정의 방침으로 공식 승인은 얻지 못한 채, 1945년 광복을 맞아 지도자들이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 참고문헌 ===&lt;br /&gt;
----&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대한민국 임시정부 (大韓民國 臨時政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5017] &lt;br /&gt;
* 독립기념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탄생」, *월간 독립기념관* (15호). [https://www.i815.or.kr/upload/kr/magazine/magazine/15/post-153.html] &lt;br /&gt;
* 국사편찬위원회. 「1919년 - 대한민국 임시 정부」, *우리역사넷*.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o400800&amp;amp;code=kc_age_40]&lt;/div&gt;</summary>
		<author><name>Jmwshye</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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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대한민국임시정부(25-2)</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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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23T08:57:5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mwshye: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파일: 임시임시정부.jpg|300px|center]]&lt;br /&gt;
&lt;br /&gt;
===개요===&lt;br /&gt;
----&lt;br /&gt;
1919년부터 1945년까지 27년간 중국에서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된 이후 1945년 11월 김구 등이 환국할 때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다. 임시정부 수립일은 기념일 제정 시에는 4월 13일이라고 여겨 왔으나 근거 자료의 확대와 이에 대한 역사학적 분석에 따라 2019년부터 4월 11일로 바로잡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수립배경===&lt;br /&gt;
----&lt;br /&gt;
====신한민보와 무형국가론====&lt;br /&gt;
미국에서 대한인국민회가 발행한 신문인 『 신한민보』가 먼저 임시정부 수립을 주장하였다. 한일병합조약 체결 직전인 1910년 7월 6일 자 사설에서 “현 정부가 일본에 투항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은즉, 우리는 인민의 정신을 대표하여 우리의 복리를 도모할 만한 정부를 세울” 것임을 천명하였고, 체결 직후인 1910년 9월 21일 &amp;quot;우리 손으로 자치하는 법률을 제정하며, 공법에 상당하는 임시정부를 설치하는 것이 급선무&amp;quot;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연이어 10월 5일 자에는 &amp;quot;대한인의 자치기관&amp;quot;이란 논설을 실어 대한인국민회가 자치 능력을 길러 장차 임시정부의 역할을 하고자 한다는 구상을 밝혔다.&lt;br /&gt;
1911년에 들어와 『신한민보』의 주필인 박용만은 무형국가론을 주장하였다. 무형국가론은 외국에 나온 조선 민족을 무형한 국가와 무형한 정부 산하로 통합하여 헌법을 마련하고 정치적 구역을 나누어 행정기관을 마련하고 개개인에게 의무와 권리를 부여하자는 것이다. 또한, 무형국가를 이끄는 무형 정부, 즉 임시정부의 역할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부에 맡겨야 한다고 보았다.&lt;br /&gt;
&lt;br /&gt;
====대동단결선언====&lt;br /&gt;
1910년대 초반 우리나라의 독립운동 세력은 국내외에 걸쳐 독자적으로 활동하였기에 세력들 간의 소통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고 효과적인 연합활동 또한 기대할 수 없었다. 따라서 유기적이고 효율적인 독립운동을 벌이기 위해 1917년 박은식·신채호·윤세복·조소앙·신석우·한진교·박용만 등이 참가한‘대동단결선언’이 있었다. 대동단결선언문에서는 순종의 주권 포기 행위를 국민에게 양도하는 것으로 해석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이 타당함을 밝혔다. 또한 일제의 국권 침탈로 인해 해외에서의 주권 행사가 필수불가결한 선택임을 덧붙였다. 대동단결선언문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의지가 반영된 최초 문건이었던 셈이다.&lt;br /&gt;
 &lt;br /&gt;
====[[3.1운동]] 이전====&lt;br /&gt;
3.1운동 직전, 러시아 연해주에서는 임시정부 성격의 '대한국민의회'가 준비되었다. 1919년 2월 25일에는 니콜리스크에서 러시아, 간도, 국내 등에서 온 약 130명이 독립운동단체 대표회의를 열고 임시정부 성격의 대한국민의회 결성을 결의하였다. 대한국민의회는 3.1운동이 한창인 3월 17일에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서 공식출범하였다. &lt;br /&gt;
&lt;br /&gt;
====[[3.1운동]] 이후====&lt;br /&gt;
3.1운동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천도교가 1919년 3월 3일 자로 발행한 '조선독립신문'은 임시정부가 조직되고 임시 대통령을 선거할 것이라는 소식을 전했고, 천도교 교주인 손병희를 임시정부의 수석인 정도령에, 미국에서 활동하는 이승만을 부도령에 지명하였다. &lt;br /&gt;
4월 10일 상하이에서는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정부 수립 절차를 마련하였다. 국호는 일본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다는 뜻의 '대한'과 1912년에 수립한 ‘중화민국’에서 ‘민국’이 의미하는 것처럼 공화제 국가임을 분명히 한다는 결의를 담은 '대한민국'으로 정하였다.  다음날인 4월 11일에는 ｢대한민국임시헌장｣(이하 임시헌장)이 반포되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3개 임시정부의 통합으로 탄생한 '대한민국임시정부'====&lt;br /&gt;
3·1운동 직후 국내외에서 한성정부(국내),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 여러 임시정부가 각각 수립되자, 상하이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은 독립운동의 구심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통합을 추진하였다. 통합은 ‘정통성(법통)’을 둘러싼 조정과 현실적 운영 기반 확보를 동시에 겨냥해, 한성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정부 체제를 정비하되 정부의 거점은 당분간 상하이에 두는 방향으로 진행되었고, 안창호의 주도로 상하이 임시정부와 대한국민의회 측의 통합 논의가 진전되면서 대한국민의회가 해산을 결의(1919. 8. 30)한 뒤 임시의정원은 통합 정부에 맞춘 개조와 1차 개헌을 단행하여 1919년 9월 11일 ‘대한민국임시헌법’을 공포함으로써 명실상부한 통합 임시정부 체제를 출범시켰다.&lt;br /&gt;
&lt;br /&gt;
&lt;br /&gt;
===주요 활동===&lt;br /&gt;
----&lt;br /&gt;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 수립 이후 독립국가 건설을 목표로 외교·군사·행정·사상적 활동을 전개하였다. 먼저 국제사회에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해 파리강화회의와 국제연맹을 대상으로 외교 활동을 추진하고, 미국·중국 등지에 외교 거점과 구미위원부를 설치하였다. 국내외를 연결하기 위해 연통제와 교통국을 운영하며 비밀 행정망과 연락 체계를 구축하였고, 기관지 『독립신문』 등을 통해 독립운동을 선전하였다. 군사적으로는 만주와 중국 관내의 독립군 세력을 지원·연계하고, 1940년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여 연합군과 공동 항일전을 모색하였으며 국내진공작전도 준비하였다. 또한 「대한민국임시헌장」과 이후의 개헌을 통해 민주공화국과 주권재민의 원리를 명확히 하고, 좌우 합작과 민족 통합을 위한 정치적 노력을 지속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임시정부는 망명 상태에서도 정부 형태와 헌정 체제를 유지하며 대한민국 국가 정통성의 기반을 마련하였다.&lt;br /&gt;
&lt;br /&gt;
=== 참고문헌 ===&lt;br /&gt;
----&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대한민국 임시정부 (大韓民國 臨時政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5017] &lt;br /&gt;
* 독립기념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탄생」, *월간 독립기념관* (15호). [https://www.i815.or.kr/upload/kr/magazine/magazine/15/post-153.html] &lt;br /&gt;
* 국사편찬위원회. 「1919년 - 대한민국 임시 정부」, *우리역사넷*.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o400800&amp;amp;code=kc_age_40]&lt;/div&gt;</summary>
		<author><name>Jmwshye</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8C%80%ED%95%9C%EB%AF%BC%EA%B5%AD%EC%9E%84%EC%8B%9C%EC%A0%95%EB%B6%80(25-2)&amp;diff=66746</id>
		<title>대한민국임시정부(25-2)</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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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23T08:57:3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mwshye: /* 개요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개요===&lt;br /&gt;
----&lt;br /&gt;
[[파일: 임시임시정부.jpg|300px|center]]&lt;br /&gt;
1919년부터 1945년까지 27년간 중국에서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된 이후 1945년 11월 김구 등이 환국할 때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다. 임시정부 수립일은 기념일 제정 시에는 4월 13일이라고 여겨 왔으나 근거 자료의 확대와 이에 대한 역사학적 분석에 따라 2019년부터 4월 11일로 바로잡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수립배경===&lt;br /&gt;
----&lt;br /&gt;
====신한민보와 무형국가론====&lt;br /&gt;
미국에서 대한인국민회가 발행한 신문인 『 신한민보』가 먼저 임시정부 수립을 주장하였다. 한일병합조약 체결 직전인 1910년 7월 6일 자 사설에서 “현 정부가 일본에 투항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은즉, 우리는 인민의 정신을 대표하여 우리의 복리를 도모할 만한 정부를 세울” 것임을 천명하였고, 체결 직후인 1910년 9월 21일 &amp;quot;우리 손으로 자치하는 법률을 제정하며, 공법에 상당하는 임시정부를 설치하는 것이 급선무&amp;quot;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연이어 10월 5일 자에는 &amp;quot;대한인의 자치기관&amp;quot;이란 논설을 실어 대한인국민회가 자치 능력을 길러 장차 임시정부의 역할을 하고자 한다는 구상을 밝혔다.&lt;br /&gt;
1911년에 들어와 『신한민보』의 주필인 박용만은 무형국가론을 주장하였다. 무형국가론은 외국에 나온 조선 민족을 무형한 국가와 무형한 정부 산하로 통합하여 헌법을 마련하고 정치적 구역을 나누어 행정기관을 마련하고 개개인에게 의무와 권리를 부여하자는 것이다. 또한, 무형국가를 이끄는 무형 정부, 즉 임시정부의 역할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부에 맡겨야 한다고 보았다.&lt;br /&gt;
&lt;br /&gt;
====대동단결선언====&lt;br /&gt;
1910년대 초반 우리나라의 독립운동 세력은 국내외에 걸쳐 독자적으로 활동하였기에 세력들 간의 소통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고 효과적인 연합활동 또한 기대할 수 없었다. 따라서 유기적이고 효율적인 독립운동을 벌이기 위해 1917년 박은식·신채호·윤세복·조소앙·신석우·한진교·박용만 등이 참가한‘대동단결선언’이 있었다. 대동단결선언문에서는 순종의 주권 포기 행위를 국민에게 양도하는 것으로 해석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이 타당함을 밝혔다. 또한 일제의 국권 침탈로 인해 해외에서의 주권 행사가 필수불가결한 선택임을 덧붙였다. 대동단결선언문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의지가 반영된 최초 문건이었던 셈이다.&lt;br /&gt;
 &lt;br /&gt;
====[[3.1운동]] 이전====&lt;br /&gt;
3.1운동 직전, 러시아 연해주에서는 임시정부 성격의 '대한국민의회'가 준비되었다. 1919년 2월 25일에는 니콜리스크에서 러시아, 간도, 국내 등에서 온 약 130명이 독립운동단체 대표회의를 열고 임시정부 성격의 대한국민의회 결성을 결의하였다. 대한국민의회는 3.1운동이 한창인 3월 17일에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서 공식출범하였다. &lt;br /&gt;
&lt;br /&gt;
====[[3.1운동]] 이후====&lt;br /&gt;
3.1운동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천도교가 1919년 3월 3일 자로 발행한 '조선독립신문'은 임시정부가 조직되고 임시 대통령을 선거할 것이라는 소식을 전했고, 천도교 교주인 손병희를 임시정부의 수석인 정도령에, 미국에서 활동하는 이승만을 부도령에 지명하였다. &lt;br /&gt;
4월 10일 상하이에서는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정부 수립 절차를 마련하였다. 국호는 일본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다는 뜻의 '대한'과 1912년에 수립한 ‘중화민국’에서 ‘민국’이 의미하는 것처럼 공화제 국가임을 분명히 한다는 결의를 담은 '대한민국'으로 정하였다.  다음날인 4월 11일에는 ｢대한민국임시헌장｣(이하 임시헌장)이 반포되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3개 임시정부의 통합으로 탄생한 '대한민국임시정부'====&lt;br /&gt;
3·1운동 직후 국내외에서 한성정부(국내),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 여러 임시정부가 각각 수립되자, 상하이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은 독립운동의 구심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통합을 추진하였다. 통합은 ‘정통성(법통)’을 둘러싼 조정과 현실적 운영 기반 확보를 동시에 겨냥해, 한성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정부 체제를 정비하되 정부의 거점은 당분간 상하이에 두는 방향으로 진행되었고, 안창호의 주도로 상하이 임시정부와 대한국민의회 측의 통합 논의가 진전되면서 대한국민의회가 해산을 결의(1919. 8. 30)한 뒤 임시의정원은 통합 정부에 맞춘 개조와 1차 개헌을 단행하여 1919년 9월 11일 ‘대한민국임시헌법’을 공포함으로써 명실상부한 통합 임시정부 체제를 출범시켰다.&lt;br /&gt;
&lt;br /&gt;
&lt;br /&gt;
===주요 활동===&lt;br /&gt;
----&lt;br /&gt;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 수립 이후 독립국가 건설을 목표로 외교·군사·행정·사상적 활동을 전개하였다. 먼저 국제사회에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해 파리강화회의와 국제연맹을 대상으로 외교 활동을 추진하고, 미국·중국 등지에 외교 거점과 구미위원부를 설치하였다. 국내외를 연결하기 위해 연통제와 교통국을 운영하며 비밀 행정망과 연락 체계를 구축하였고, 기관지 『독립신문』 등을 통해 독립운동을 선전하였다. 군사적으로는 만주와 중국 관내의 독립군 세력을 지원·연계하고, 1940년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여 연합군과 공동 항일전을 모색하였으며 국내진공작전도 준비하였다. 또한 「대한민국임시헌장」과 이후의 개헌을 통해 민주공화국과 주권재민의 원리를 명확히 하고, 좌우 합작과 민족 통합을 위한 정치적 노력을 지속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임시정부는 망명 상태에서도 정부 형태와 헌정 체제를 유지하며 대한민국 국가 정통성의 기반을 마련하였다.&lt;br /&gt;
&lt;br /&gt;
=== 참고문헌 ===&lt;br /&gt;
----&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대한민국 임시정부 (大韓民國 臨時政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5017] &lt;br /&gt;
* 독립기념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탄생」, *월간 독립기념관* (15호). [https://www.i815.or.kr/upload/kr/magazine/magazine/15/post-153.html] &lt;br /&gt;
* 국사편찬위원회. 「1919년 - 대한민국 임시 정부」, *우리역사넷*.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o400800&amp;amp;code=kc_age_40]&lt;/div&gt;</summary>
		<author><name>Jmwshye</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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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8C%80%ED%95%9C%EB%AF%BC%EA%B5%AD%EC%9E%84%EC%8B%9C%EC%A0%95%EB%B6%80(25-2)&amp;diff=66745</id>
		<title>대한민국임시정부(25-2)</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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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Jmwshye: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개요===&lt;br /&gt;
----&lt;br /&gt;
[[파일: 임시임시정부.jpg|300px]]&lt;br /&gt;
1919년부터 1945년까지 27년간 중국에서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된 이후 1945년 11월 김구 등이 환국할 때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다. 임시정부 수립일은 기념일 제정 시에는 4월 13일이라고 여겨 왔으나 근거 자료의 확대와 이에 대한 역사학적 분석에 따라 2019년부터 4월 11일로 바로잡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수립배경===&lt;br /&gt;
----&lt;br /&gt;
====신한민보와 무형국가론====&lt;br /&gt;
미국에서 대한인국민회가 발행한 신문인 『 신한민보』가 먼저 임시정부 수립을 주장하였다. 한일병합조약 체결 직전인 1910년 7월 6일 자 사설에서 “현 정부가 일본에 투항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은즉, 우리는 인민의 정신을 대표하여 우리의 복리를 도모할 만한 정부를 세울” 것임을 천명하였고, 체결 직후인 1910년 9월 21일 &amp;quot;우리 손으로 자치하는 법률을 제정하며, 공법에 상당하는 임시정부를 설치하는 것이 급선무&amp;quot;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연이어 10월 5일 자에는 &amp;quot;대한인의 자치기관&amp;quot;이란 논설을 실어 대한인국민회가 자치 능력을 길러 장차 임시정부의 역할을 하고자 한다는 구상을 밝혔다.&lt;br /&gt;
1911년에 들어와 『신한민보』의 주필인 박용만은 무형국가론을 주장하였다. 무형국가론은 외국에 나온 조선 민족을 무형한 국가와 무형한 정부 산하로 통합하여 헌법을 마련하고 정치적 구역을 나누어 행정기관을 마련하고 개개인에게 의무와 권리를 부여하자는 것이다. 또한, 무형국가를 이끄는 무형 정부, 즉 임시정부의 역할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부에 맡겨야 한다고 보았다.&lt;br /&gt;
&lt;br /&gt;
====대동단결선언====&lt;br /&gt;
1910년대 초반 우리나라의 독립운동 세력은 국내외에 걸쳐 독자적으로 활동하였기에 세력들 간의 소통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고 효과적인 연합활동 또한 기대할 수 없었다. 따라서 유기적이고 효율적인 독립운동을 벌이기 위해 1917년 박은식·신채호·윤세복·조소앙·신석우·한진교·박용만 등이 참가한‘대동단결선언’이 있었다. 대동단결선언문에서는 순종의 주권 포기 행위를 국민에게 양도하는 것으로 해석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이 타당함을 밝혔다. 또한 일제의 국권 침탈로 인해 해외에서의 주권 행사가 필수불가결한 선택임을 덧붙였다. 대동단결선언문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의지가 반영된 최초 문건이었던 셈이다.&lt;br /&gt;
 &lt;br /&gt;
====[[3.1운동]] 이전====&lt;br /&gt;
3.1운동 직전, 러시아 연해주에서는 임시정부 성격의 '대한국민의회'가 준비되었다. 1919년 2월 25일에는 니콜리스크에서 러시아, 간도, 국내 등에서 온 약 130명이 독립운동단체 대표회의를 열고 임시정부 성격의 대한국민의회 결성을 결의하였다. 대한국민의회는 3.1운동이 한창인 3월 17일에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서 공식출범하였다. &lt;br /&gt;
&lt;br /&gt;
====[[3.1운동]] 이후====&lt;br /&gt;
3.1운동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천도교가 1919년 3월 3일 자로 발행한 '조선독립신문'은 임시정부가 조직되고 임시 대통령을 선거할 것이라는 소식을 전했고, 천도교 교주인 손병희를 임시정부의 수석인 정도령에, 미국에서 활동하는 이승만을 부도령에 지명하였다. &lt;br /&gt;
4월 10일 상하이에서는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정부 수립 절차를 마련하였다. 국호는 일본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다는 뜻의 '대한'과 1912년에 수립한 ‘중화민국’에서 ‘민국’이 의미하는 것처럼 공화제 국가임을 분명히 한다는 결의를 담은 '대한민국'으로 정하였다.  다음날인 4월 11일에는 ｢대한민국임시헌장｣(이하 임시헌장)이 반포되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3개 임시정부의 통합으로 탄생한 '대한민국임시정부'====&lt;br /&gt;
3·1운동 직후 국내외에서 한성정부(국내),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 여러 임시정부가 각각 수립되자, 상하이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은 독립운동의 구심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통합을 추진하였다. 통합은 ‘정통성(법통)’을 둘러싼 조정과 현실적 운영 기반 확보를 동시에 겨냥해, 한성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정부 체제를 정비하되 정부의 거점은 당분간 상하이에 두는 방향으로 진행되었고, 안창호의 주도로 상하이 임시정부와 대한국민의회 측의 통합 논의가 진전되면서 대한국민의회가 해산을 결의(1919. 8. 30)한 뒤 임시의정원은 통합 정부에 맞춘 개조와 1차 개헌을 단행하여 1919년 9월 11일 ‘대한민국임시헌법’을 공포함으로써 명실상부한 통합 임시정부 체제를 출범시켰다.&lt;br /&gt;
&lt;br /&gt;
&lt;br /&gt;
===주요 활동===&lt;br /&gt;
----&lt;br /&gt;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 수립 이후 독립국가 건설을 목표로 외교·군사·행정·사상적 활동을 전개하였다. 먼저 국제사회에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해 파리강화회의와 국제연맹을 대상으로 외교 활동을 추진하고, 미국·중국 등지에 외교 거점과 구미위원부를 설치하였다. 국내외를 연결하기 위해 연통제와 교통국을 운영하며 비밀 행정망과 연락 체계를 구축하였고, 기관지 『독립신문』 등을 통해 독립운동을 선전하였다. 군사적으로는 만주와 중국 관내의 독립군 세력을 지원·연계하고, 1940년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여 연합군과 공동 항일전을 모색하였으며 국내진공작전도 준비하였다. 또한 「대한민국임시헌장」과 이후의 개헌을 통해 민주공화국과 주권재민의 원리를 명확히 하고, 좌우 합작과 민족 통합을 위한 정치적 노력을 지속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임시정부는 망명 상태에서도 정부 형태와 헌정 체제를 유지하며 대한민국 국가 정통성의 기반을 마련하였다.&lt;br /&gt;
&lt;br /&gt;
=== 참고문헌 ===&lt;br /&gt;
----&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대한민국 임시정부 (大韓民國 臨時政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5017] &lt;br /&gt;
* 독립기념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탄생」, *월간 독립기념관* (15호). [https://www.i815.or.kr/upload/kr/magazine/magazine/15/post-153.html] &lt;br /&gt;
* 국사편찬위원회. 「1919년 - 대한민국 임시 정부」, *우리역사넷*.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o400800&amp;amp;code=kc_age_40]&lt;/div&gt;</summary>
		<author><name>Jmwshye</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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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lt;br /&gt;
===개요===&lt;br /&gt;
----&lt;br /&gt;
[[파일: 임시임시정부.jpg]]&lt;br /&gt;
1919년부터 1945년까지 27년간 중국에서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된 이후 1945년 11월 김구 등이 환국할 때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다. 임시정부 수립일은 기념일 제정 시에는 4월 13일이라고 여겨 왔으나 근거 자료의 확대와 이에 대한 역사학적 분석에 따라 2019년부터 4월 11일로 바로잡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수립배경===&lt;br /&gt;
----&lt;br /&gt;
====신한민보와 무형국가론====&lt;br /&gt;
미국에서 대한인국민회가 발행한 신문인 『 신한민보』가 먼저 임시정부 수립을 주장하였다. 한일병합조약 체결 직전인 1910년 7월 6일 자 사설에서 “현 정부가 일본에 투항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은즉, 우리는 인민의 정신을 대표하여 우리의 복리를 도모할 만한 정부를 세울” 것임을 천명하였고, 체결 직후인 1910년 9월 21일 &amp;quot;우리 손으로 자치하는 법률을 제정하며, 공법에 상당하는 임시정부를 설치하는 것이 급선무&amp;quot;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연이어 10월 5일 자에는 &amp;quot;대한인의 자치기관&amp;quot;이란 논설을 실어 대한인국민회가 자치 능력을 길러 장차 임시정부의 역할을 하고자 한다는 구상을 밝혔다.&lt;br /&gt;
1911년에 들어와 『신한민보』의 주필인 박용만은 무형국가론을 주장하였다. 무형국가론은 외국에 나온 조선 민족을 무형한 국가와 무형한 정부 산하로 통합하여 헌법을 마련하고 정치적 구역을 나누어 행정기관을 마련하고 개개인에게 의무와 권리를 부여하자는 것이다. 또한, 무형국가를 이끄는 무형 정부, 즉 임시정부의 역할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부에 맡겨야 한다고 보았다.&lt;br /&gt;
&lt;br /&gt;
====대동단결선언====&lt;br /&gt;
1910년대 초반 우리나라의 독립운동 세력은 국내외에 걸쳐 독자적으로 활동하였기에 세력들 간의 소통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고 효과적인 연합활동 또한 기대할 수 없었다. 따라서 유기적이고 효율적인 독립운동을 벌이기 위해 1917년 박은식·신채호·윤세복·조소앙·신석우·한진교·박용만 등이 참가한‘대동단결선언’이 있었다. 대동단결선언문에서는 순종의 주권 포기 행위를 국민에게 양도하는 것으로 해석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이 타당함을 밝혔다. 또한 일제의 국권 침탈로 인해 해외에서의 주권 행사가 필수불가결한 선택임을 덧붙였다. 대동단결선언문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의지가 반영된 최초 문건이었던 셈이다.&lt;br /&gt;
 &lt;br /&gt;
====[[3.1운동]] 이전====&lt;br /&gt;
3.1운동 직전, 러시아 연해주에서는 임시정부 성격의 '대한국민의회'가 준비되었다. 1919년 2월 25일에는 니콜리스크에서 러시아, 간도, 국내 등에서 온 약 130명이 독립운동단체 대표회의를 열고 임시정부 성격의 대한국민의회 결성을 결의하였다. 대한국민의회는 3.1운동이 한창인 3월 17일에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서 공식출범하였다. &lt;br /&gt;
&lt;br /&gt;
====[[3.1운동]] 이후====&lt;br /&gt;
3.1운동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천도교가 1919년 3월 3일 자로 발행한 '조선독립신문'은 임시정부가 조직되고 임시 대통령을 선거할 것이라는 소식을 전했고, 천도교 교주인 손병희를 임시정부의 수석인 정도령에, 미국에서 활동하는 이승만을 부도령에 지명하였다. &lt;br /&gt;
4월 10일 상하이에서는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정부 수립 절차를 마련하였다. 국호는 일본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다는 뜻의 '대한'과 1912년에 수립한 ‘중화민국’에서 ‘민국’이 의미하는 것처럼 공화제 국가임을 분명히 한다는 결의를 담은 '대한민국'으로 정하였다.  다음날인 4월 11일에는 ｢대한민국임시헌장｣(이하 임시헌장)이 반포되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3개 임시정부의 통합으로 탄생한 '대한민국임시정부'====&lt;br /&gt;
3·1운동 직후 국내외에서 한성정부(국내),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 여러 임시정부가 각각 수립되자, 상하이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은 독립운동의 구심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통합을 추진하였다. 통합은 ‘정통성(법통)’을 둘러싼 조정과 현실적 운영 기반 확보를 동시에 겨냥해, 한성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정부 체제를 정비하되 정부의 거점은 당분간 상하이에 두는 방향으로 진행되었고, 안창호의 주도로 상하이 임시정부와 대한국민의회 측의 통합 논의가 진전되면서 대한국민의회가 해산을 결의(1919. 8. 30)한 뒤 임시의정원은 통합 정부에 맞춘 개조와 1차 개헌을 단행하여 1919년 9월 11일 ‘대한민국임시헌법’을 공포함으로써 명실상부한 통합 임시정부 체제를 출범시켰다.&lt;br /&gt;
&lt;br /&gt;
&lt;br /&gt;
===주요 활동===&lt;br /&gt;
----&lt;br /&gt;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 수립 이후 독립국가 건설을 목표로 외교·군사·행정·사상적 활동을 전개하였다. 먼저 국제사회에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해 파리강화회의와 국제연맹을 대상으로 외교 활동을 추진하고, 미국·중국 등지에 외교 거점과 구미위원부를 설치하였다. 국내외를 연결하기 위해 연통제와 교통국을 운영하며 비밀 행정망과 연락 체계를 구축하였고, 기관지 『독립신문』 등을 통해 독립운동을 선전하였다. 군사적으로는 만주와 중국 관내의 독립군 세력을 지원·연계하고, 1940년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여 연합군과 공동 항일전을 모색하였으며 국내진공작전도 준비하였다. 또한 「대한민국임시헌장」과 이후의 개헌을 통해 민주공화국과 주권재민의 원리를 명확히 하고, 좌우 합작과 민족 통합을 위한 정치적 노력을 지속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임시정부는 망명 상태에서도 정부 형태와 헌정 체제를 유지하며 대한민국 국가 정통성의 기반을 마련하였다.&lt;br /&gt;
&lt;br /&gt;
=== 참고문헌 ===&lt;br /&gt;
----&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대한민국 임시정부 (大韓民國 臨時政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5017] &lt;br /&gt;
* 독립기념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탄생」, *월간 독립기념관* (15호). [https://www.i815.or.kr/upload/kr/magazine/magazine/15/post-153.html] &lt;br /&gt;
* 국사편찬위원회. 「1919년 - 대한민국 임시 정부」, *우리역사넷*.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o400800&amp;amp;code=kc_age_40]&lt;/div&gt;</summary>
		<author><name>Jmwshye</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8C%80%ED%95%9C%EB%AF%BC%EA%B5%AD%EC%9E%84%EC%8B%9C%EC%A0%95%EB%B6%80(25-2)&amp;diff=66734</id>
		<title>대한민국임시정부(25-2)</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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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23T08:38:4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mwshye: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개요===&lt;br /&gt;
----&lt;br /&gt;
[[파일: 임시임시정부.jpg]]&lt;br /&gt;
 1919년부터 1945년까지 27년간 중국에서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된 이후 1945년 11월 김구 등이 환국할 때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다. 임시정부 수립일은 기념일 제정 시에는 4월 13일이라고 여겨 왔으나 근거 자료의 확대와 이에 대한 역사학적 분석에 따라 2019년부터 4월 11일로 바로잡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수립배경===&lt;br /&gt;
----&lt;br /&gt;
====신한민보와 무형국가론====&lt;br /&gt;
미국에서 대한인국민회가 발행한 신문인 『 신한민보』가 먼저 임시정부 수립을 주장하였다. 한일병합조약 체결 직전인 1910년 7월 6일 자 사설에서 “현 정부가 일본에 투항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은즉, 우리는 인민의 정신을 대표하여 우리의 복리를 도모할 만한 정부를 세울” 것임을 천명하였고, 체결 직후인 1910년 9월 21일 &amp;quot;우리 손으로 자치하는 법률을 제정하며, 공법에 상당하는 임시정부를 설치하는 것이 급선무&amp;quot;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연이어 10월 5일 자에는 &amp;quot;대한인의 자치기관&amp;quot;이란 논설을 실어 대한인국민회가 자치 능력을 길러 장차 임시정부의 역할을 하고자 한다는 구상을 밝혔다.&lt;br /&gt;
1911년에 들어와 『신한민보』의 주필인 박용만은 무형국가론을 주장하였다. &lt;br /&gt;
&lt;br /&gt;
====대동단결선언====&lt;br /&gt;
1910년대 초반 우리나라의 독립운동 세력은 국내외에 걸쳐 독자적으로 활동하였기에 세력들 간의 소통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고 효과적인 연합활동 또한 기대할 수 없었다. 따라서 유기적이고 효율적인 독립운동을 벌이기 위해 1917년 박은식·신채호·윤세복·조소앙·신석우·한진교·박용만 등이 참가한‘대동단결선언’이 있었다. 대동단결선언문에서는 순종의 주권 포기 행위를 국민에게 양도하는 것으로 해석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이 타당함을 밝혔다. 또한 일제의 국권 침탈로 인해 해외에서의 주권 행사가 필수불가결한 선택임을 덧붙였다. 대동단결선언문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의지가 반영된 최초 문건이었던 셈이다. &lt;br /&gt;
====[[3.1운동]]====&lt;br /&gt;
하지만 이는 곧바로 임시정부의 수립으로 이이지지 못했는데, 1919년 3.1운동을 기점으로 해외 언론은 한국의 독립운동에 주목하게 되었고, 해외에서 활동하던 독립투사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박차를 가했다. &lt;br /&gt;
&lt;br /&gt;
====3개 임시정부의 통합으로 탄생한 '대한민국임시정부'====&lt;br /&gt;
대한민국임시정부 탄생은 한성임시정부·상하이임시정부·노령임시정부의 통합에서 비롯되었다. 3·1운동 이후 여러 개의 임시정부가 동시다발적으로 만들어지자 이를 하나로 결합하려는 노력이 이뤄졌다.&lt;br /&gt;
&lt;br /&gt;
===의의 및 평가===&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참고문헌 ===&lt;br /&gt;
----&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대한민국 임시정부 (大韓民國 臨時政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5017] &lt;br /&gt;
* 독립기념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탄생」, *월간 독립기념관* (15호). [https://www.i815.or.kr/upload/kr/magazine/magazine/15/post-153.html] &lt;br /&gt;
* 국사편찬위원회. 「1919년 - 대한민국 임시 정부」, *우리역사넷*.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o400800&amp;amp;code=kc_age_40]&lt;br /&gt;
&lt;br /&gt;
&lt;br /&gt;
=== 참고문헌 ===&lt;br /&gt;
----&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대한민국 임시정부 (大韓民國 臨時政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5017] &lt;br /&gt;
* 독립기념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탄생」, *월간 독립기념관* (15호). [https://www.i815.or.kr/upload/kr/magazine/magazine/15/post-153.html] &lt;br /&gt;
* 국사편찬위원회. 「1919년 - 대한민국 임시 정부」, *우리역사넷*.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o400800&amp;amp;code=kc_age_40]&lt;/div&gt;</summary>
		<author><name>Jmwshye</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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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대한민국임시정부(25-2)</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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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lt;br /&gt;
===개요===&lt;br /&gt;
----&lt;br /&gt;
[[파일: 임시임시정부.jpg]]&lt;br /&gt;
 1919년부터 1945년까지 27년간 중국에서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된 이후 1945년 11월 김구 등이 환국할 때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다. 임시정부 수립일은 기념일 제정 시에는 4월 13일이라고 여겨 왔으나 근거 자료의 확대와 이에 대한 역사학적 분석에 따라 2019년부터 4월 11일로 바로잡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수립배경===&lt;br /&gt;
----&lt;br /&gt;
&lt;br /&gt;
===신한민보와 무형국가론===&lt;br /&gt;
미국에서 대한인국민회가 발행한 신문인 『 신한민보』가 먼저 임시정부 수립을 주장하였다. 한일병합조약 체결 직전인 1910년 7월 6일 자 사설에서 “현 정부가 일본에 투항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은즉, 우리는 인민의 정신을 대표하여 우리의 복리를 도모할 만한 정부를 세울” 것임을 천명하였고, 체결 직후인 1910년 9월 21일 &amp;quot;우리 손으로 자치하는 법률을 제정하며, 공법에 상당하는 임시정부를 설치하는 것이 급선무&amp;quot;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연이어 10월 5일 자에는 &amp;quot;대한인의 자치기관&amp;quot;이란 논설을 실어 대한인국민회가 자치 능력을 길러 장차 임시정부의 역할을 하고자 한다는 구상을 밝혔다.&lt;br /&gt;
1911년에 들어와 『신한민보』의 주필인 박용만은 무형국가론을 주장하였다. &lt;br /&gt;
&lt;br /&gt;
===대동단결선언===&lt;br /&gt;
1910년대 초반 우리나라의 독립운동 세력은 국내외에 걸쳐 독자적으로 활동하였기에 세력들 간의 소통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고 효과적인 연합활동 또한 기대할 수 없었다. 따라서 유기적이고 효율적인 독립운동을 벌이기 위해 1917년 박은식·신채호·윤세복·조소앙·신석우·한진교·박용만 등이 참가한‘대동단결선언’이 있었다. 대동단결선언문에서는 순종의 주권 포기 행위를 국민에게 양도하는 것으로 해석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이 타당함을 밝혔다. 또한 일제의 국권 침탈로 인해 해외에서의 주권 행사가 필수불가결한 선택임을 덧붙였다. 대동단결선언문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의지가 반영된 최초 문건이었던 셈이다. &lt;br /&gt;
===3.1운동===&lt;br /&gt;
하지만 이는 곧바로 임시정부의 수립으로 이이지지 못했는데, 1919년 3.1운동을 기점으로 해외 언론은 한국의 독립운동에 주목하게 되었고, 해외에서 활동하던 독립투사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박차를 가했다. &lt;br /&gt;
&lt;br /&gt;
===3개 임시정부의 통합으로 탄생한 '대한민국임시정부'===&lt;br /&gt;
대한민국임시정부 탄생은 한성임시정부·상하이임시정부·노령임시정부의 통합에서 비롯되었다. 3·1운동 이후 여러 개의 임시정부가 동시다발적으로 만들어지자 이를 하나로 결합하려는 노력이 이뤄졌다.&lt;br /&gt;
&lt;br /&gt;
===의의 및 평가===&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참고문헌 ===&lt;br /&gt;
----&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대한민국 임시정부 (大韓民國 臨時政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5017] &lt;br /&gt;
* 독립기념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탄생」, *월간 독립기념관* (15호). [https://www.i815.or.kr/upload/kr/magazine/magazine/15/post-153.html] &lt;br /&gt;
* 국사편찬위원회. 「1919년 - 대한민국 임시 정부」, *우리역사넷*.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o400800&amp;amp;code=kc_age_40]&lt;br /&gt;
&lt;br /&gt;
&lt;br /&gt;
=== 참고문헌 ===&lt;br /&gt;
----&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대한민국 임시정부 (大韓民國 臨時政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5017] &lt;br /&gt;
* 독립기념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탄생」, *월간 독립기념관* (15호). [https://www.i815.or.kr/upload/kr/magazine/magazine/15/post-153.html] &lt;br /&gt;
* 국사편찬위원회. 「1919년 - 대한민국 임시 정부」, *우리역사넷*.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o400800&amp;amp;code=kc_age_40]&lt;/div&gt;</summary>
		<author><name>Jmwshye</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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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대한민국임시정부(25-2)</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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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Jmwshye: 새 문서:    === 참고문헌 === ---- * 한국학중앙연구원. 「대한민국 임시정부 (大韓民國 臨時政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lt;/p&gt;
&lt;hr /&gt;
&lt;div&gt;&lt;br /&gt;
&lt;br /&gt;
&lt;br /&gt;
=== 참고문헌 ===&lt;br /&gt;
----&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대한민국 임시정부 (大韓民國 臨時政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5017] &lt;br /&gt;
* 독립기념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탄생」, *월간 독립기념관* (15호). [https://www.i815.or.kr/upload/kr/magazine/magazine/15/post-153.html] &lt;br /&gt;
* 국사편찬위원회. 「1919년 - 대한민국 임시 정부」, *우리역사넷*.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o400800&amp;amp;code=kc_age_40]&lt;/div&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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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Jmwshye: &lt;/p&gt;
&lt;hr /&gt;
&lt;div&gt;[[3.1운동]]&lt;br /&gt;
[[대한민국임시정부(25-2)]]&lt;br /&gt;
[[문장(文章)]]&lt;br /&gt;
[[정지용(鄭池龍)]]&lt;br /&gt;
&lt;br /&gt;
&amp;lt;big&amp;gt;&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인문사회&amp;lt;/div&amp;gt;&amp;lt;/big&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C8A2C8&amp;quot;&amp;gt;&lt;br /&gt;
본교 [https://libart.korea.ac.kr/libart/index.do 문과대학]은 2023년부터 '''교육부''' &amp;lt;인문사회 융합인재양성사업&amp;gt;의 디지털 분야 주관대학으로 선정되어 연간 28억의 사업비를 수주하여 본격적으로 [인문사회 디지털융합전공]을 신설하고 ICT 및 문화콘텐츠 기업, 공공기업과 더불어 다양한 비교과프로그램을 운영합니다.&lt;br /&gt;
&amp;lt;/font&amp;gt;&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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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색깔 소개&lt;br /&gt;
&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파일:마루.jpg]]&lt;br /&gt;
&lt;br /&gt;
맛있는 음식&lt;br /&gt;
#한식&lt;br /&gt;
##국밥&lt;br /&gt;
##고른햇살&lt;br /&gt;
#일식&lt;br /&gt;
##텐동&lt;br /&gt;
##카츠&lt;br /&gt;
##라멘&lt;br /&gt;
#중식&lt;br /&gt;
##용초수&lt;br /&gt;
##마라샹궈&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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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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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name>Jmwshye</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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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정지용(鄭池龍)</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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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23T07:13:4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mwshye: &lt;/p&gt;
&lt;h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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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lass=&amp;quot;metadata&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ffffff; width:300px; margin: 0 0 10px 10px; border:1px solid #aaa; float:right; clear:right;&amp;quot; cellspacing=&amp;quot;5&amp;quot;&lt;br /&gt;
|-&lt;br /&gt;
! colspan=&amp;quot;2&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664b00; color:#ffffff; font-size:120%; text-align:center; padding:5px;&amp;quot; | '''정지용(鄭池龍)'''&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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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출생''' || 1902년 6월 20일&lt;br /&gt;
|-&lt;br /&gt;
|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사망''' || 1950년 9월 25일(향년 48세) 추정&lt;br /&gt;
|-&lt;br /&gt;
|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자''' || 영지(靈之)&lt;br /&gt;
|-&lt;br /&gt;
|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본관''' || 연일 정씨&lt;br /&gt;
|-&lt;br /&gt;
|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학력''' || 옥천공립보통학교&amp;lt;br /&amp;gt; 휘문고등보통학교&amp;lt;br /&amp;gt; 도시샤(同志社)대학&lt;br /&gt;
|-&lt;br /&gt;
|}&lt;br /&gt;
&amp;lt;/onlyinclude&amp;gt;&lt;br /&gt;
&lt;br /&gt;
&lt;br /&gt;
===개요===&lt;br /&gt;
----&lt;br /&gt;
정지용(鄭芝溶)은 일제강점기에 『정지용시집』, 『백록담』, 『문학독본』, 『산문』 등을 저술한 시인이자 번역가, 교육자이다. &lt;br /&gt;
『시문학』 동인, '구인회' 회원, 『문장』 시 부문 심사위원, 경향신문사 주간으로 활동하였으며, 휘문고등보통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1902년 5월''' 충북 옥천군 옥천면 하계리 40번지에서 약종상을 하는 아버지 정태국과 어머니 정미하의 장남으로 태어남. &lt;br /&gt;
'''1910년 4월''' 옥천공립보통학교(현 죽향초등학교) 입학 &amp;lt;/br&amp;gt;&lt;br /&gt;
'''1918년 4월'''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amp;lt;/br&amp;gt;&lt;br /&gt;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교내문제로 야기된 휘문사태의 주동으로 이선근과 함께 무기정학을 받아 수업을 받지 못함.&amp;lt;/br&amp;gt;&lt;br /&gt;
'''1922년''' 휘문고등보통학교 졸업, 첫 시&amp;lt;풍랑몽&amp;gt;을 씀. &amp;lt;/br&amp;gt;&lt;br /&gt;
'''1923년''' 일본 도시샤 대학의 영문과에 입학. 재학 당시 &amp;lt;석류&amp;gt;, &amp;lt;바다&amp;gt; 등을 씀.&amp;lt;/br&amp;gt;&lt;br /&gt;
'''1926년''' &amp;lt;&amp;lt;학조&amp;gt;&amp;gt; 창간호에 &amp;lt;카페 프란스&amp;gt;등 9편의 시를, 그리고 &amp;lt;&amp;lt;신민&amp;gt;&amp;gt;, &amp;lt;&amp;lt;문예시대&amp;gt;&amp;gt;에 &amp;lt;홍춘&amp;gt;, &amp;lt;산엣색시 들녘사내&amp;gt; 등을 발표 시인으로 등단&amp;lt;/br&amp;gt;&lt;br /&gt;
'''1929년''' 도시샤 대학 졸업 후 고국에 돌아와 모교인 휘문고등보통학교의 영어교사로 부임. 박용철, 김영랑과 함께 동인지 &amp;lt;&amp;lt;시문학&amp;gt;&amp;gt; 창간하고 순수시운동의 물길을 틈. &amp;lt;/br&amp;gt;&lt;br /&gt;
'''1933년''' &amp;lt;&amp;lt;가톨릭청년&amp;gt;&amp;gt; 창간부터 편집고문을 맡아 신앙시를 발표하고, 이태준, 이무영, 김기림 등과 함께‘9인회' 결성&amp;lt;/br&amp;gt;&lt;br /&gt;
'''1945년''' 해방과 함께 사임하고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 부임&amp;lt;/br&amp;gt;&lt;br /&gt;
'''1946년''' 이화여자전문학교가 이화여자대학교로 개칭되면서 이화여자대학교 교수가 됨&amp;lt;/br&amp;gt;&lt;br /&gt;
'''1948년 2월''' 사임하고 녹번리(현재 서울시 은평구 녹번동) 초당에서 생활. &amp;lt;/br&amp;gt;&lt;br /&gt;
'''1950년''' 한국전쟁 중 사망 (추정)&lt;br /&gt;
&lt;br /&gt;
===주요활동===&lt;br /&gt;
---- &lt;br /&gt;
휘문고등보통학교 재학 당시 『요람』동인을 결성하여 활동하였으며, '문우회(文友會)'의 학예부장직을 맡아 『휘문(徽文)』창간호의 편집 위원으로 활동&amp;lt;/br&amp;gt;&lt;br /&gt;
도시샤대학 재학 중 동인지『가(街)』에 일본어시 &amp;lt;신라의 석류&amp;gt;를 발표했으며, 이는 정지용의 첫 발표 시편이다. 일본 유학 당시에도 조선어 시도 다수 발표했다. 이 때의 대표작으로는 &amp;lt;바다&amp;gt;, &amp;lt;향수&amp;gt;, &amp;lt;선취&amp;gt;, &amp;lt;압천&amp;gt; 등이 있다. &amp;lt;/br&amp;gt;&lt;br /&gt;
도시샤대학 졸업 후 고국으로 돌아와『시문학(詩文學)』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구인회(九人會)를 결성하여 1936년 3월 구인회의 동인지 『시와 소설』에 ｢유선애상(流線哀傷)｣을 발표했다. &lt;br /&gt;
일제강점기 후반 높은 성과를 거둔 문예잡지 『[[문장]]』의 추천심사위원으로 참여하여 훗날 '청록파'라는 한국시사의 한 유파를 형성한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을 발굴하였다. 이 외에도 이한직, 박남수, 김종한 등 역량 있는 시인들을 시단에 내놓는 데 기여했다. &lt;br /&gt;
경향신문사의 주간을 맡았으며, 『경향신문』에 휘트먼 등의 시를 번역하여 발표했다. &lt;br /&gt;
1950년 6월 『문예(文藝)』에 발표한 시와 『국도신문(國都新聞)』에 연재한 남해 기행 산문이 마지막 발표 작품에 해당한다.&lt;br /&gt;
&lt;br /&gt;
=== 작품 ===&lt;br /&gt;
----&lt;br /&gt;
정지용의 대표작을 시, 시집, 평론·산문으로 구분했다. &lt;br /&gt;
==== 시 ====&lt;br /&gt;
* 〈석류〉&lt;br /&gt;
* 〈바다〉&lt;br /&gt;
* 〈유리창〉&lt;br /&gt;
* 〈불사조〉&lt;br /&gt;
* 〈향수〉&lt;br /&gt;
* 〈고향〉&lt;br /&gt;
* 〈장수산〉&lt;br /&gt;
* 〈백록담〉&lt;br /&gt;
&lt;br /&gt;
==== 시집 ====&lt;br /&gt;
* 『정지용 시집』(1935): 정지용의 첫 시집, 대부분 1925년부터 1935년까지 발표한 작품을 선별하여 수록.&amp;lt;/br&amp;gt;1부는 가톨릭 개종 이후의 시편, 2부는 초기 시편, 3부는 초기 시편과 같은 시기 창작한 동요류와 민요풍 시편, 4부는 신앙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시편, 5부는 산문 2편을 수록&lt;br /&gt;
* 『백록담』(1941): 정지용의 두 번째 시집, 1936년부터 1941년까지 발표한 작품 선별하여 수록. &amp;lt;/br&amp;gt;1부에서 4부까지는 25편의 시를, 5부에는 8편의 산문을 수록&lt;br /&gt;
* 『지용시선』(1946)&lt;br /&gt;
&lt;br /&gt;
==== 평론·산문 ====&lt;br /&gt;
* 『문학독본』(1948): 정지용의 첫 산문집 &lt;br /&gt;
* 『산문』(1949): 평문과 수필, 역시 등 수록&lt;br /&gt;
&lt;br /&gt;
===평가===&lt;br /&gt;
---- &lt;br /&gt;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서울을 빠져나가지 못한 정지용은 정치보위부에 체포,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납북된다. 이후 월북 문인으로 규정되어 상당 기간 동안 정지용의 작품은 대중에게 공개되지 못했다. 1982년 장남인 정구관은 정지용이 자발적으로 북한으로 간 것이 아니라 납북되었다고 하며 정지용의 저작물 복간을 위한 진정서를 제출했고, 원로 문인들과 학계도 이에 합세하여 정지용 문학의 복권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amp;lt;/br&amp;gt;&lt;br /&gt;
시간이 지나며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점차 완화되고, 대학에서 월북 문인에 대한 논의가 상당히 진행되었다는 현실에 발맞춰 1987년 10월에 월북 문인에 대한 연구 성과물의 발표와 판매가  허용되었다. 이와 함께 1987년 『정지용연구』가 발간되었으며, 1988년 『정지용 시와 산문』, 민음사에서 시와 소설로 나뉘어 『정지용전집』 2권이 출간되었다. 그리고 1988년 3월 31일 문화공보부는 공식적으로 정지용 작품의 해금(解禁)을 발표했다. 이를 계기로 1988년 ‘지용회’가 결성되었으며, ‘제1회 지용제’가 개최되었다. 1989년에는 ‘지용 시문학상’이 제정되었으며, 박두진 시인이 제1회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1995년에는 ‘정지용기념사업’이 추진되었고, 1996년에는 정지용의 생가를 복원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참고문헌 ===&lt;br /&gt;
----&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지용(鄭芝溶)」,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0954]&lt;br /&gt;
* 전통문화포털. 「정지용(鄭芝溶)」, 『한국의 문화인물(연도별)』, 한국문화진흥. [https://www.kculture.or.kr/brd/board/252/L/menu/465?brdType=R&amp;amp;thisPage=14&amp;amp;bbIdx=8574]&lt;/div&gt;</summary>
		<author><name>Jmwshye</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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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정지용(鄭池龍)</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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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23T07:11:4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mwshye: /* 생애 */&lt;/p&gt;
&lt;hr /&gt;
&lt;div&gt;&amp;lt;onlyinclude&amp;gt;&lt;br /&gt;
{| class=&amp;quot;metadata&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ffffff; width:300px; margin: 0 0 10px 10px; border:1px solid #aaa; float:right; clear:right;&amp;quot; cellspacing=&amp;quot;5&amp;quot;&lt;br /&gt;
|-&lt;br /&gt;
! colspan=&amp;quot;2&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664b00; color:#ffffff; font-size:120%; text-align:center; padding:5px;&amp;quot; | '''정지용(鄭池龍)'''&lt;br /&gt;
|-&lt;br /&gt;
| colspan=&amp;quot;2&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 | [[파일:정지용.jpeg|250px]] &amp;lt;br /&amp;gt; &amp;lt;span style=&amp;quot;font-size:90%;&amp;quot;&amp;gt;{{{초상화설명|}}}&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출생''' || 1902년 6월 20일&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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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자''' || 영지(靈之)&lt;br /&gt;
|-&lt;br /&gt;
|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본관''' || 연일 정씨&lt;br /&gt;
|-&lt;br /&gt;
|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학력''' || 옥천공립보통학교&amp;lt;br /&amp;gt; 휘문고등보통학교&amp;lt;br /&amp;gt; 도시샤(同志社)대학&lt;br /&gt;
|-&lt;br /&gt;
|}&lt;br /&gt;
&amp;lt;/onlyinclude&amp;gt;&lt;br /&gt;
&lt;br /&gt;
&lt;br /&gt;
===개요===&lt;br /&gt;
----&lt;br /&gt;
정지용(鄭芝溶)은 일제강점기에 『정지용시집』, 『백록담』, 『문학독본』, 『산문』 등을 저술한 시인이자 번역가, 교육자이다. &lt;br /&gt;
『시문학』 동인, '구인회' 회원, 『문장』 시 부문 심사위원, 경향신문사 주간으로 활동하였으며, 휘문고등보통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1902년 5월 15일''' 충북 옥천군 옥천면 하계리 40번지에서 약종상을 하는 아버지 정태국과 어머니 정미하의 장남으로 태어남. 옥천공립보통학교(현 죽향초등학교) 졸업&amp;lt;/br&amp;gt;&lt;br /&gt;
'''1918년 4월'''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amp;lt;/br&amp;gt;&lt;br /&gt;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교내문제로 야기된 휘문사태의 주동으로 이선근과 함께 무기정학을 받아 수업을 받지 못함.&amp;lt;/br&amp;gt;&lt;br /&gt;
'''1922년''' 휘문고등보통학교 졸업, 첫 시&amp;lt;풍랑몽&amp;gt;을 씀. &amp;lt;/br&amp;gt;&lt;br /&gt;
'''1923년''' 일본 도시샤 대학의 영문과에 입학. 재학 당시 &amp;lt;석류&amp;gt;, &amp;lt;바다&amp;gt; 등을 씀.&amp;lt;/br&amp;gt;&lt;br /&gt;
'''1926년''' &amp;lt;&amp;lt;학조&amp;gt;&amp;gt; 창간호에 &amp;lt;카페 프란스&amp;gt;등 9편의 시를, 그리고 &amp;lt;&amp;lt;신민&amp;gt;&amp;gt;, &amp;lt;&amp;lt;문예시대&amp;gt;&amp;gt;에 &amp;lt;홍춘&amp;gt;, &amp;lt;산엣색시 들녘사내&amp;gt; 등을 발표 시인으로 등단&amp;lt;/br&amp;gt;&lt;br /&gt;
'''1929년''' 도시샤 대학 졸업 후 고국에 돌아와 모교인 휘문고등보통학교의 영어교사로 부임. 박용철, 김영랑과 함께 동인지 &amp;lt;&amp;lt;시문학&amp;gt;&amp;gt; 창간하고 순수시운동의 물길을 틈. &amp;lt;/br&amp;gt;&lt;br /&gt;
'''1933년''' &amp;lt;&amp;lt;가톨릭청년&amp;gt;&amp;gt; 창간부터 편집고문을 맡아 신앙시를 발표하고, 이태준, 이무영, 김기림 등과 함께‘9인회' 결성&amp;lt;/br&amp;gt;&lt;br /&gt;
'''1945년''' 해방과 함께 사임하고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 부임&amp;lt;/br&amp;gt;&lt;br /&gt;
'''1946년''' 이화여자전문학교가 이화여자대학교로 개칭되면서 이화여자대학교 교수가 됨&amp;lt;/br&amp;gt;&lt;br /&gt;
'''1948년 2월''' 사임하고 녹번리(현재 서울시 은평구 녹번동) 초당에서 생활. &amp;lt;/br&amp;gt;&lt;br /&gt;
'''1950년''' 한국전쟁 중 사망 (추정)&lt;br /&gt;
&lt;br /&gt;
===주요활동===&lt;br /&gt;
---- &lt;br /&gt;
휘문고등보통학교 재학 당시 『요람』동인을 결성하여 활동하였으며, '문우회(文友會)'의 학예부장직을 맡아 『휘문(徽文)』창간호의 편집 위원으로 활동&amp;lt;/br&amp;gt;&lt;br /&gt;
도시샤대학 재학 중 동인지『가(街)』에 일본어시 &amp;lt;신라의 석류&amp;gt;를 발표했으며, 이는 정지용의 첫 발표 시편이다. 일본 유학 당시에도 조선어 시도 다수 발표했다. 이 때의 대표작으로는 &amp;lt;바다&amp;gt;, &amp;lt;향수&amp;gt;, &amp;lt;선취&amp;gt;, &amp;lt;압천&amp;gt; 등이 있다. &amp;lt;/br&amp;gt;&lt;br /&gt;
도시샤대학 졸업 후 고국으로 돌아와『시문학(詩文學)』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구인회(九人會)를 결성하여 1936년 3월 구인회의 동인지 『시와 소설』에 ｢유선애상(流線哀傷)｣을 발표했다. &lt;br /&gt;
일제강점기 후반 높은 성과를 거둔 문예잡지 『[[문장]]』의 추천심사위원으로 참여하여 훗날 '청록파'라는 한국시사의 한 유파를 형성한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을 발굴하였다. 이 외에도 이한직, 박남수, 김종한 등 역량 있는 시인들을 시단에 내놓는 데 기여했다. &lt;br /&gt;
경향신문사의 주간을 맡았으며, 『경향신문』에 휘트먼 등의 시를 번역하여 발표했다. &lt;br /&gt;
1950년 6월 『문예(文藝)』에 발표한 시와 『국도신문(國都新聞)』에 연재한 남해 기행 산문이 마지막 발표 작품에 해당한다.&lt;br /&gt;
&lt;br /&gt;
=== 작품 ===&lt;br /&gt;
----&lt;br /&gt;
정지용의 대표작을 시, 시집, 평론·산문으로 구분했다. &lt;br /&gt;
==== 시 ====&lt;br /&gt;
* 〈석류〉&lt;br /&gt;
* 〈바다〉&lt;br /&gt;
* 〈유리창〉&lt;br /&gt;
* 〈불사조〉&lt;br /&gt;
* 〈향수〉&lt;br /&gt;
* 〈고향〉&lt;br /&gt;
* 〈장수산〉&lt;br /&gt;
* 〈백록담〉&lt;br /&gt;
&lt;br /&gt;
==== 시집 ====&lt;br /&gt;
* 『정지용 시집』(1935): 정지용의 첫 시집, 대부분 1925년부터 1935년까지 발표한 작품을 선별하여 수록.  1부는 가톨릭 개종 이후의 시편, 2부는 초기 시편, 3부는 초기 시편과 같은 시기 창작한 동요류와 민요풍 시편, 4부는 신앙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시편, 5부는 산문 2편을 수록&lt;br /&gt;
* 『백록담』(1941): 정지용의 두 번째 시집, 1936년부터 1941년까지 발표한 작품 선별하여 수록.  1부에서 4부까지는 25편의 시를, 5부에는 8편의 산문을 수록&lt;br /&gt;
* 『지용시선』(1946)&lt;br /&gt;
&lt;br /&gt;
==== 평론·산문 ====&lt;br /&gt;
* 『문학독본』(1948): 정지용의 첫 산문집 &lt;br /&gt;
* 『산문』(1949): 평문과 수필, 역시 등 수록&lt;br /&gt;
&lt;br /&gt;
===평가===&lt;br /&gt;
---- &lt;br /&gt;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서울을 빠져나가지 못한 정지용은 정치보위부에 체포,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납북된다. 이후 월북 문인으로 규정되어 상당 기간 동안 정지용의 작품은 대중에게 공개되지 못했다. 1982년 장남인 정구관은 정지용이 자발적으로 북한으로 간 것이 아니라 납북되었다고 하며 정지용의 저작물 복간을 위한 진정서를 제출했고, 원로 문인들과 학계도 이에 합세하여 정지용 문학의 복권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amp;lt;/br&amp;gt;&lt;br /&gt;
시간이 지나며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점차 완화되고, 대학에서 월북 문인에 대한 논의가 상당히 진행되었다는 현실에 발맞춰 1987년 10월에 월북 문인에 대한 연구 성과물의 발표와 판매가  허용되었다. 이와 함께 1987년 『정지용연구』가 발간되었으며, 1988년 『정지용 시와 산문』, 민음사에서 시와 소설로 나뉘어 『정지용전집』 2권이 출간되었다. 그리고 1988년 3월 31일 문화공보부는 공식적으로 정지용 작품의 해금(解禁)을 발표했다. 이를 계기로 1988년 ‘지용회’가 결성되었으며, ‘제1회 지용제’가 개최되었다. 1989년에는 ‘지용 시문학상’이 제정되었으며, 박두진 시인이 제1회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1995년에는 ‘정지용기념사업’이 추진되었고, 1996년에는 정지용의 생가를 복원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참고문헌 ===&lt;br /&gt;
----&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지용(鄭芝溶)」,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0954] :contentReference[oaicite:4]{index=4}&lt;br /&gt;
* 전통문화포털. 「정지용(鄭芝溶)」, 『한국의 문화인물(연도별)』, 한국문화진흥. [https://www.kculture.or.kr/brd/board/252/L/menu/465?brdType=R&amp;amp;thisPage=14&amp;amp;bbIdx=8574] :contentReference[oaicite:5]{index=5}&lt;/div&gt;</summary>
		<author><name>Jmwshye</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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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정지용(鄭池龍)</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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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23T07:11:2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mwshye: &lt;/p&gt;
&lt;hr /&gt;
&lt;div&gt;&amp;lt;onlyinclude&amp;gt;&lt;br /&gt;
{| class=&amp;quot;metadata&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ffffff; width:300px; margin: 0 0 10px 10px; border:1px solid #aaa; float:right; clear:right;&amp;quot; cellspacing=&amp;quot;5&amp;quot;&lt;br /&gt;
|-&lt;br /&gt;
! colspan=&amp;quot;2&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664b00; color:#ffffff; font-size:120%; text-align:center; padding:5px;&amp;quot; | '''정지용(鄭池龍)'''&lt;br /&gt;
|-&lt;br /&gt;
| colspan=&amp;quot;2&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 | [[파일:정지용.jpeg|250px]] &amp;lt;br /&amp;gt; &amp;lt;span style=&amp;quot;font-size:90%;&amp;quot;&amp;gt;{{{초상화설명|}}}&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출생''' || 1902년 6월 20일&lt;br /&gt;
|-&lt;br /&gt;
|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사망''' || 1950년 9월 25일(향년 48세) 추정&lt;br /&gt;
|-&lt;br /&gt;
|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자''' || 영지(靈之)&lt;br /&gt;
|-&lt;br /&gt;
|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본관''' || 연일 정씨&lt;br /&gt;
|-&lt;br /&gt;
| style=&amp;quot;text-align:center; background:#e0e0e0;&amp;quot; |'''학력''' || 옥천공립보통학교&amp;lt;br /&amp;gt; 휘문고등보통학교&amp;lt;br /&amp;gt; 도시샤(同志社)대학&lt;br /&gt;
|-&lt;br /&gt;
|}&lt;br /&gt;
&amp;lt;/onlyinclude&amp;gt;&lt;br /&gt;
&lt;br /&gt;
&lt;br /&gt;
===개요===&lt;br /&gt;
----&lt;br /&gt;
정지용(鄭芝溶)은 일제강점기에 『정지용시집』, 『백록담』, 『문학독본』, 『산문』 등을 저술한 시인이자 번역가, 교육자이다. &lt;br /&gt;
『시문학』 동인, '구인회' 회원, 『문장』 시 부문 심사위원, 경향신문사 주간으로 활동하였으며, 휘문고등보통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1902년 5월 15일(음력)''' 충북 옥천군 옥천면 하계리 40번지에서 약종상을 하는 아버지 정태국과 어머니 정미하의 장남으로 태어남. 옥천공립보통학교(현 죽향초등학교) 졸업&amp;lt;/br&amp;gt;&lt;br /&gt;
'''1918년 4월'''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amp;lt;/br&amp;gt;&lt;br /&gt;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교내문제로 야기된 휘문사태의 주동으로 이선근과 함께 무기정학을 받아 수업을 받지 못함.&amp;lt;/br&amp;gt;&lt;br /&gt;
'''1922년''' 휘문고등보통학교 졸업, 첫 시&amp;lt;풍랑몽&amp;gt;을 씀. &amp;lt;/br&amp;gt;&lt;br /&gt;
'''1923년''' 일본 도시샤 대학의 영문과에 입학. 재학 당시 &amp;lt;석류&amp;gt;, &amp;lt;바다&amp;gt; 등을 씀.&amp;lt;/br&amp;gt;&lt;br /&gt;
'''1926년''' &amp;lt;&amp;lt;학조&amp;gt;&amp;gt; 창간호에 &amp;lt;카페 프란스&amp;gt;등 9편의 시를, 그리고 &amp;lt;&amp;lt;신민&amp;gt;&amp;gt;, &amp;lt;&amp;lt;문예시대&amp;gt;&amp;gt;에 &amp;lt;홍춘&amp;gt;, &amp;lt;산엣색시 들녘사내&amp;gt; 등을 발표 시인으로 등단&amp;lt;/br&amp;gt;&lt;br /&gt;
'''1929년''' 도시샤 대학 졸업 후 고국에 돌아와 모교인 휘문고등보통학교의 영어교사로 부임. 박용철, 김영랑과 함께 동인지 &amp;lt;&amp;lt;시문학&amp;gt;&amp;gt; 창간하고 순수시운동의 물길을 틈. &amp;lt;/br&amp;gt;&lt;br /&gt;
'''1933년''' &amp;lt;&amp;lt;가톨릭청년&amp;gt;&amp;gt; 창간부터 편집고문을 맡아 신앙시를 발표하고, 이태준, 이무영, 김기림 등과 함께‘9인회' 결성&amp;lt;/br&amp;gt;&lt;br /&gt;
'''1945년''' 해방과 함께 사임하고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 부임&amp;lt;/br&amp;gt;&lt;br /&gt;
'''1946년''' 이화여자전문학교가 이화여자대학교로 개칭되면서 이화여자대학교 교수가 됨&amp;lt;/br&amp;gt;&lt;br /&gt;
'''1948년 2월''' 사임하고 녹번리(현재 서울시 은평구 녹번동) 초당에서 생활. &amp;lt;/br&amp;gt;&lt;br /&gt;
'''1950년''' 한국전쟁 중 사망 (추정)&lt;br /&gt;
&lt;br /&gt;
===주요활동===&lt;br /&gt;
---- &lt;br /&gt;
휘문고등보통학교 재학 당시 『요람』동인을 결성하여 활동하였으며, '문우회(文友會)'의 학예부장직을 맡아 『휘문(徽文)』창간호의 편집 위원으로 활동&amp;lt;/br&amp;gt;&lt;br /&gt;
도시샤대학 재학 중 동인지『가(街)』에 일본어시 &amp;lt;신라의 석류&amp;gt;를 발표했으며, 이는 정지용의 첫 발표 시편이다. 일본 유학 당시에도 조선어 시도 다수 발표했다. 이 때의 대표작으로는 &amp;lt;바다&amp;gt;, &amp;lt;향수&amp;gt;, &amp;lt;선취&amp;gt;, &amp;lt;압천&amp;gt; 등이 있다. &amp;lt;/br&amp;gt;&lt;br /&gt;
도시샤대학 졸업 후 고국으로 돌아와『시문학(詩文學)』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구인회(九人會)를 결성하여 1936년 3월 구인회의 동인지 『시와 소설』에 ｢유선애상(流線哀傷)｣을 발표했다. &lt;br /&gt;
일제강점기 후반 높은 성과를 거둔 문예잡지 『[[문장]]』의 추천심사위원으로 참여하여 훗날 '청록파'라는 한국시사의 한 유파를 형성한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을 발굴하였다. 이 외에도 이한직, 박남수, 김종한 등 역량 있는 시인들을 시단에 내놓는 데 기여했다. &lt;br /&gt;
경향신문사의 주간을 맡았으며, 『경향신문』에 휘트먼 등의 시를 번역하여 발표했다. &lt;br /&gt;
1950년 6월 『문예(文藝)』에 발표한 시와 『국도신문(國都新聞)』에 연재한 남해 기행 산문이 마지막 발표 작품에 해당한다.&lt;br /&gt;
&lt;br /&gt;
=== 작품 ===&lt;br /&gt;
----&lt;br /&gt;
정지용의 대표작을 시, 시집, 평론·산문으로 구분했다. &lt;br /&gt;
==== 시 ====&lt;br /&gt;
* 〈석류〉&lt;br /&gt;
* 〈바다〉&lt;br /&gt;
* 〈유리창〉&lt;br /&gt;
* 〈불사조〉&lt;br /&gt;
* 〈향수〉&lt;br /&gt;
* 〈고향〉&lt;br /&gt;
* 〈장수산〉&lt;br /&gt;
* 〈백록담〉&lt;br /&gt;
&lt;br /&gt;
==== 시집 ====&lt;br /&gt;
* 『정지용 시집』(1935): 정지용의 첫 시집, 대부분 1925년부터 1935년까지 발표한 작품을 선별하여 수록.  1부는 가톨릭 개종 이후의 시편, 2부는 초기 시편, 3부는 초기 시편과 같은 시기 창작한 동요류와 민요풍 시편, 4부는 신앙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시편, 5부는 산문 2편을 수록&lt;br /&gt;
* 『백록담』(1941): 정지용의 두 번째 시집, 1936년부터 1941년까지 발표한 작품 선별하여 수록.  1부에서 4부까지는 25편의 시를, 5부에는 8편의 산문을 수록&lt;br /&gt;
* 『지용시선』(1946)&lt;br /&gt;
&lt;br /&gt;
==== 평론·산문 ====&lt;br /&gt;
* 『문학독본』(1948): 정지용의 첫 산문집 &lt;br /&gt;
* 『산문』(1949): 평문과 수필, 역시 등 수록&lt;br /&gt;
&lt;br /&gt;
===평가===&lt;br /&gt;
---- &lt;br /&gt;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서울을 빠져나가지 못한 정지용은 정치보위부에 체포,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납북된다. 이후 월북 문인으로 규정되어 상당 기간 동안 정지용의 작품은 대중에게 공개되지 못했다. 1982년 장남인 정구관은 정지용이 자발적으로 북한으로 간 것이 아니라 납북되었다고 하며 정지용의 저작물 복간을 위한 진정서를 제출했고, 원로 문인들과 학계도 이에 합세하여 정지용 문학의 복권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amp;lt;/br&amp;gt;&lt;br /&gt;
시간이 지나며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점차 완화되고, 대학에서 월북 문인에 대한 논의가 상당히 진행되었다는 현실에 발맞춰 1987년 10월에 월북 문인에 대한 연구 성과물의 발표와 판매가  허용되었다. 이와 함께 1987년 『정지용연구』가 발간되었으며, 1988년 『정지용 시와 산문』, 민음사에서 시와 소설로 나뉘어 『정지용전집』 2권이 출간되었다. 그리고 1988년 3월 31일 문화공보부는 공식적으로 정지용 작품의 해금(解禁)을 발표했다. 이를 계기로 1988년 ‘지용회’가 결성되었으며, ‘제1회 지용제’가 개최되었다. 1989년에는 ‘지용 시문학상’이 제정되었으며, 박두진 시인이 제1회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1995년에는 ‘정지용기념사업’이 추진되었고, 1996년에는 정지용의 생가를 복원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참고문헌 ===&lt;br /&gt;
----&lt;br /&gt;
*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지용(鄭芝溶)」,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0954] :contentReference[oaicite:4]{index=4}&lt;br /&gt;
* 전통문화포털. 「정지용(鄭芝溶)」, 『한국의 문화인물(연도별)』, 한국문화진흥. [https://www.kculture.or.kr/brd/board/252/L/menu/465?brdType=R&amp;amp;thisPage=14&amp;amp;bbIdx=8574] :contentReference[oaicite:5]{index=5}&lt;/div&gt;</summary>
		<author><name>Jmwshye</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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