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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dh_edu - 사용자 기여 [ko]</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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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5-24T14:19:41Z</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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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조선 후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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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06-23T23:01:2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inhyang: &lt;/p&gt;
&lt;hr /&gt;
&lt;div&gt;==주요 키워드==&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color:#FFFACD&amp;quot;&lt;br /&gt;
|+ &amp;lt;조선 후기 주요 키워드&amp;gt;&lt;br /&gt;
|+ style=&amp;quot;caption-side:bottom; text-align:left;&amp;quot;|&lt;br /&gt;
| 정치적 변화 || 임진왜란, 병자호란, 탕평책, 북벌론, 북학론, 세도정치, 쇄국정책, 개항&lt;br /&gt;
|-&lt;br /&gt;
| 사회적 변화 || 신분제 붕괴, 양반수 증가, 상품화폐경제 발달&lt;br /&gt;
|-&lt;br /&gt;
| 사상적 변화 || 양명학, 실학&lt;br /&gt;
|-&lt;br /&gt;
| 문화적 변화 || 서민문화 발달, 한글소설, 사설시조, 판소리, 탈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치적 변화==&lt;br /&gt;
'''임진왜란 이후'''&lt;br /&gt;
&lt;br /&gt;
임진왜란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총 7년간 이루어진 전쟁이다.&lt;br /&gt;
 &lt;br /&gt;
7년 간의 전쟁으로 인해 조선, 명, 일본 등 동아시아 국제 관계의 변화가 생겼으며, 모두 큰 피해를 입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의 경우, 전쟁이 본토에서 이루어졌으므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할 수 있다. &lt;br /&gt;
국토는 황폐화되었고 토지를 기록한 장부마저 사라져 임진왜란 이후 제대로 된 세금조차 거둘 수 없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일본의 경우, 도요토미히데요시 죽음 이후 도쿠가와이에야스가 새로운 쇼군으로 오른 후 '에도막부'시대를 열었다. &lt;br /&gt;
도쿠가와이에야스는 도요토미히데요시 정권과 반대의 입장을 표하며, 새로운 권위를 세우고자 조선과 화친을 맺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도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화친에 응했으며, 이후 쇼군이 요청할 때마다 '''통신사'''를 파견하여 교류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초기 통신사는 일본에 끌려간 포로를 송환하기 위해서였고, 이후 유학 등 선진문물 전파도 이어졌다. &lt;br /&gt;
&lt;br /&gt;
&lt;br /&gt;
명의 경우, 조선의 군대 파병으로 군사력이 매우 약화되었다. &lt;br /&gt;
&lt;br /&gt;
이에 반해 북방의 여진 세력은 점점 커져가며 점점 명이 외부세력을 방어하기 힘들어졌고, 이후 여진이 성장하여 국가인 '청'을 세우자 명과의 사대관계를 유지하던 조선도 혼란에 빠졌다. &lt;br /&gt;
&lt;br /&gt;
이는 1636년의 병자호란의 배경과도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병자호란'''&lt;br /&gt;
&lt;br /&gt;
병자호란은 1636년에 일어난 조선과 청 사이에 일어난 전쟁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1627년 정묘호란 시기, 청과 형제관계를 맺은 이후, 청은 조선과 '''군신관계'''를 청했고 조선 내에서는 척화론과 주화론이 대립하며 시간을 끌었다.&lt;br /&gt;
&lt;br /&gt;
결국 척화론이 우세하여 조선은 청의 군신관계 요구를 거절하였고, 이에 화가 난 청나라 황제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조선으로 쳐 들어왔다. &lt;br /&gt;
&lt;br /&gt;
당시 최고의 대선책은 임금이 강화도로 피난을 가는 것이었지만, 실패로 끝이 났고 인조는 첩첩한 산 중의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lt;br /&gt;
&lt;br /&gt;
고립된 산성은 빠르게 포위되었고, 결국 '''군신관계'''를 맺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병자호란은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왕이 출성항복하는 사건이다.&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이후 조선은 사대 상대가 명에서 청으로 바뀌어야 했지만, 결코 쉽지 않았고 명의 중화의식을 가장 잘 계승한 나라라는 &amp;lt;font color=&amp;quot;#FFD700&amp;quot;&amp;gt;'''소중화'''&amp;lt;/font&amp;gt;의식이 조선 사대부들 사이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북벌론과 북학론'''&lt;br /&gt;
&lt;br /&gt;
''북벌론''&lt;br /&gt;
&lt;br /&gt;
북벌론은 오랑캐인 청나라를 정복하여 치욕을 씻고, 중화의식을 회복하자는 의미에서 추진된 담론이다. &lt;br /&gt;
&lt;br /&gt;
북벌론은 병자호란 이후 싹트기 시작했고, 명나라가 사라진 17세기 쯤에 성행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인조이후, 효종은 북벌을 시행하기 위해 정치적, 군사적으로 노력하였다. &lt;br /&gt;
&lt;br /&gt;
효종은 척화계열의 산당 세력들을 대거 등용하여 북벌 계획을 세웠으나, 청나라가 조선의 정세를 다 파악할 수 있었기에 청나라는 치는 북벌계획은 구체적으로 시행되기 어려웠다. &lt;br /&gt;
&lt;br /&gt;
또한 거듭된 흉년과 자연재해로 전쟁을 준비할 경제적인 여력이 충분하지 않았고, 결국 북벌론은 소중화 의식을 지닌 조선 사대부들 사이에 퍼져 여전히 '''청은 오랑캐이다'''라고 주장하게 만들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북학론''&lt;br /&gt;
&lt;br /&gt;
북한론이란,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담론으로, 이를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은 북학파, 연암일파라고 불려지는 홍대용(洪大容), 성대중(成大中), 박지원(朴趾源), 박제가(朴齊家), 유득공(柳得恭), 이덕무(李德懋), 이서구(李書九), [이희경(李喜經)] 등이다.&lt;br /&gt;
북학의 주요 내용은 벽돌과 수레의 사용, 농기구의 개량, 둔전의 설치, 대외 무역의 장려, 서양인의 초빙과 실제적인 농 · 상업 기술론이었다.&amp;lt;ref&amp;gt;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북학」,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4783,2025.6.24. &amp;lt;/ref&amp;gt; 하지만,기술 도입에 관한 구체적인 방법론이 부족했고 조선의 실정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졌다. 예를 들어 수레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도로가 정비가 앞서 진행되어야 하는데, 도로 구축을 하지 않고 수레 사용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탕평책'''&lt;br /&gt;
&lt;br /&gt;
탕평 정치는 영조 때 자리잡았다. 탕평(蕩平)이란? 서경에서 나온 말로, 임금의 정치가 한쪽을 편들지 않고 사심이 없으며, 당을 이루지도 않는 상태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lt;br /&gt;
영조는 왕과 신하 사이의 의리를 바로 세워야 한다며, 붕당을 없애자는 논리에 동의하는 탕평파를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였다. 그리고 붕당의 뿌리를 제거하기 위하여 공론의 주재자로서 인식되던 산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들의 본거지인 서원을 대폭 정리하였다. 아울러 이조 전랑의 권한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그들이 자신의 후임자를 천거하고, 3사의 관리를 선발할 수 있게 해 주던 관행을 없앴다. 그러나 이조 전랑의 후임자 천거권은 이후 정조대에 가서야 완전히 폐지되었다.&amp;lt;ref&amp;gt; 우리역사넷, 「영조와 정조의 탕평 정치」,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ta/view.do?levelId=ta_h71_0040_0040_0030_0030, 2025. 6. 24.&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영조 때 시행한 탕평책은 정조 때에 더욱 강화하였다. 정조는 누가 옳은지 그른지 명백히 규명하여 적극적으로 탕평책을 주도하였으며, 영조 때 세력을 키운 척신과 환관 등을 제거하였다. 게다가 권력에서 배제되었던 소론과 남인 계열의 관리들도 정치에 참여하도록 독려하였다. 붕당정치 세력이 커질 것을 우려하여 새로운 신진 인물을 등용하고, 이들을 비롯한 중, 하급 관리에서 유능한 인재를 뽑아 교육을 시키는 초계문신제를 도입하였다. &lt;br /&gt;
&lt;br /&gt;
'''세도정치'''&lt;br /&gt;
&lt;br /&gt;
19세기에는 특정 가문이 관직을 독점하는 세도정치가 시행되었다. &lt;br /&gt;
&lt;br /&gt;
이는 탕평정치의 지속에 불만을 품었던 귀족세력의 반발심에 의한 것이다. &lt;br /&gt;
&lt;br /&gt;
대표적인 세도 가문은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반남 박씨, 대구 서씨, 연안 이씨, 풍산 홍씨 등이다. &lt;br /&gt;
&lt;br /&gt;
세도가문의 중심 배경은 임진왜란 이후 강화된 비변사의 기능과 관련이 있다. &lt;br /&gt;
&lt;br /&gt;
비변사는 초기에 왜구·여진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해 국방 관련 일을 처리하는 임시기구로 출발하였지만,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권한이 더욱 확대되어 임시 군사대책기관에서 정책결정기구로까지 그 성격이 변하였다. &lt;br /&gt;
&lt;br /&gt;
이후 조선 후기에는 국정을 총괄하는 기구로써 그 기능이 중요해졌는데, 세도 가문이 비변사를 독점하면서 마음대로 일을 결정하고 왕에게 보고할 수 있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예를들면, 안동 김씨 가문의 대표적 인물인 김조순은 국왕의 장인, 왕비의 친아버지에다가 정조가 친히 국왕(그 당시 세자)을 돌볼 임무를 맡겼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홍문관 대제학(大提學)과 규장각 검교제학(檢校提學)을 오랫동안 맡아 학술과 정치이념을 이끌었고, 당시 최정예 군사력인 훈련도감의 훈련대장을 오래 지내다 심복에게 넘겨주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또한 비변사 주교사당상(舟橋司堂上)을 맡았는데 그것을 통해 대상인의 상업 행위를 감독하고 경제적 실권을 장악했던 것으로 판단된다.&amp;lt;ref&amp;gt; 우리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세도정치」,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9786, 2025. 6. 24.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쇄국정책'''&lt;br /&gt;
&lt;br /&gt;
쇄국정책은 세도정치가 득세했던 철종 사후, 어린 정조가 왕위를 승계하고 그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정치를 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lt;br /&gt;
&lt;br /&gt;
사실 애초에 조선이 활발히 문호를 개방한 것은 아니었으나, 일명 '쇄국정책'은 흥선대원군이 실행한 외교 정책이라 할 수 있다. &lt;br /&gt;
&lt;br /&gt;
흥선대원군은 안으로는 왕권 강화 정책을 펴는 한편, 밖으로는 외세의 침략과 문물을 거부하는 쇄국정책을 강력히 실행하였다. &lt;br /&gt;
&lt;br /&gt;
따라서 세도정치 가문의 주류였던 안동 김씨 세력을 정계에서 몰아내고 다양한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외세의 문호 개방에 응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lt;br /&gt;
&lt;br /&gt;
하지만, 이는 열강 세력들이 조선을 군사적으로 침략하는 계기가 되었다. &lt;br /&gt;
&lt;br /&gt;
'''개항'''&lt;br /&gt;
&lt;br /&gt;
18세기 조선 해안에는 서양의 함선인 '이양선'이 빈번히 출몰하면서 개항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lt;br /&gt;
&lt;br /&gt;
처음에는 탐험과 측량을 목적으로 하였지만, 19세기가 되자 배를 끌고와 통상을 요구하였다. &lt;br /&gt;
&lt;br /&gt;
조선은 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 독일 등등 여러 나라에게 통상을 요구받았으나,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말미암아 허가해주지 않았다. &lt;br /&gt;
&lt;br /&gt;
이에 서양 열강 국가들과 조선 사이에 여러차례 전쟁을 발생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프랑스 선교사의 죽음을 문제로 프랑스가 일으킨 전쟁은 '병인양요'이며, 독일 상인 옵페르트는 통상 허가를 받지 못하자 흥선 대원군 아버지인 남연군의 무덤을 파 부장품을 훔쳐갔다. &lt;br /&gt;
&lt;br /&gt;
또한, 미국의 제너럴 셔먼호가 조선인과 전투를 벌이던 도중 침몰되자 그 배상을 요구하는 문제로 '신미양요'가 일어났다. &lt;br /&gt;
&lt;br /&gt;
흥선 대원군의 쇄국에 대한 강한 결심과 백성들의 끝없는 항전 덕분에 끝내 쇄국을 지킬 순 있었으나, 결국 조선은 일본의 강화도 사건으로 통상을 허용하면서 잇따라 서양 열강 국가들도 조선과 교류하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사회적 변화==&lt;br /&gt;
&lt;br /&gt;
'''신분제 붕괴와 양반수 증가'''&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 전기에는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의 네 신분이 형성되어 있었다. 양반의 사회적 지위와 특권이 강화되면서, 조선 사회는 양반 중심의 사회로 굳어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신분의 변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어 이러한 신분 구조에 변화가 일어났다. 신분의 변동은 양반층 내부에서 심각하게 일어났는데, 조선 후기에 들어와 노론이 장기간 집권하면서 이들은 정치의 실권을 독점하고 부정한 수단으로 자제들을 과거에 합격시켜 그 지위를 세습시켰다. 이러한 현상은 세도 정치가 시작되면서 더욱 심화되어 신분제의 붕괴가 일어났다.&amp;lt;ref&amp;gt; 우리역사넷, 「신분제의 변화」,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ta/view.do?levelId=ta_m62_0040_0010, 2024. 6. 24.&amp;lt;/ref&amp;gt; 이후 임진왜란의 영향으로 국가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공명첩'이라는 신분을 사고 팔 수 있는 문서가 생겼다. 돈이 많은 평민들은 신분을 사 양반이 되는 경우가 많았고, 따라서 양반의 수가 증가하게 되었다. 이와 반대로 양반층 내에서도 돈이 부족해 일반 농민이나 소작농으로 생계를 이어가거나 신분을 팔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상품화폐경제 발달'''&lt;br /&gt;
&lt;br /&gt;
상품화폐경제는 조선 후기 상업의 발달과 함께 교환 수단으로 '동전'이 발행되면서 시작되었다. 동전이 교환수단으로 정착하기 이전에는 쌀이 화폐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쌀은 무거워서 많이 가지고 다닐 수 없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가벼운 화폐는 소비의 편리함을 주었고, 따라서 판매와 소비가 촉진하였다. 동전은 숙종 때 발행을 결정하였는데, 불과 몇 십년 되지 않아 많이 유통되었고, 조세 수치를 동전으로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매년 수백냥에 이르는 동전 수취로, 농민들에게 부담을 지게 하여 몰락을 초래하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사상적 변화==&lt;br /&gt;
&lt;br /&gt;
&lt;br /&gt;
'''양명학'''&lt;br /&gt;
&lt;br /&gt;
명나라 왕수인에 의해 집대성된 학문이다. 양명학을 대표하는 키워드는 '지행합일'과 '심즉리'이다. &lt;br /&gt;
이는 주희의 성리학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으나, 성리학과 내용적으로 대립을 이룬다. 주희는 성을 이로, 마음을 기로 파악하였지만, 왕수인은 마음안에 이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lt;br /&gt;
또한 주희는 세상 만물에 안에 이가 있으므로, 격물치지 만물의 이치를 깨달아야 하며 그 진리를 깨닫고 행동해야 한다는 '선지후행'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왕수인의 양명학은 만물에게서 이치를 찾지 않고 이미 마음 속에 이가 있기 때문에 지행합일을 주요 이론으로 정립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실학'''&lt;br /&gt;
&lt;br /&gt;
실학은 조선 후기 사회 경제적 문제들에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 등장한 사상이다. &lt;br /&gt;
실학 사상이 등장하게 된 원인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첫째 조선 왕조의 통치 질서가 위기이다. 조선 왕조는 두번의 전란을 겪으면서 무너질 위기에 쳐했으나 보수적 관료들은 대책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이에 진보적 관리들이 해결책을 내놓으면서 개혁을 주장하였다. 두번째, 성리학이 현실적인 문제에 해결책을 제시해주지 못하였다. 세번째, 조선후기 경제가 발달하면서 발전을 촉구하는 실학 사상이 등장하게 되었다. 네번째, 조선 후기 무너진 신분제로 인해 양반층과 서민들의 생활에 관심이 집중되며 실학 사상이 발달하였다. 다섯번째, 서학의 전래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상이 조선 지식인에게 퍼졌다. 여섯번째, 고증학의 '실사구시'가 영향을 주어 학문에실증적 방법에 주목하였다. &lt;br /&gt;
&lt;br /&gt;
조선의 실학은 농업과 상업 두 갈래를 주축으로 진행되었으며, 이들을 각각 중농학파와 중상학파로 부른다.&lt;br /&gt;
&lt;br /&gt;
중농학파의 경우, 농촌 경제의 안정이 한 백성의 삶과 국가의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에 농업에 주목하였다.&lt;br /&gt;
실학자들은 토지의 편중이 농업의 발달을 저해한다고 보았고, 여러 토지 균분 제도에 대해 의견을 모았다. &lt;br /&gt;
예를 들면, 유형원의 균전론, 이익의 한전론, 정약용의 여전론 등이 있다. &lt;br /&gt;
&lt;br /&gt;
중상학파는 상업의 발전에 주목하였다. 국내 상공업의 발전이 하고, 학자들이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보고 옴에 따라 새로운 경향이 생겼다. &lt;br /&gt;
중상학파 학자들은 신분제의 비효율성, 수레와 화폐 사용, 유통과 소비의 촉진을 주장하며 상업의 발전해야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lt;br /&gt;
이들의 주장과 노력은 보다 적극적인 방안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문화사적 변화==&lt;br /&gt;
&lt;br /&gt;
'''서민문화의 발달'''&lt;br /&gt;
&lt;br /&gt;
조선 후기 상업과 농업이 발달하면서 일반 평민들 중에서도 부를 축적하여 안정된 삶을 구가하였다. 부유해진 이들은 점차 여유가 생겨 예술에 시선을 돌렸고, 자식들을 서당에 나가 공부를 하도록 했는데, 이로 인해 서민문화가 꽃피우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한글소설'''&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후기 '한글소설'이 유행하였다. 한글소설은 한글로 되어 있어 서민들이 읽기 쉬웠으며, 평범한 인물이 등장하여 사회모순을 비판하거나 문제로 삼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lt;br /&gt;
한글소설의 대표적인 작품은 흥부전, 춘향전, 홍길동전, 심청전, 콩쥐와팥쥐, 장화홍련전 등이 있다.&lt;br /&gt;
한글소설은 서민들의 오락기능을 수행하였으며, 일반 서민들 뿐만 아니라 양반 부녀자들, 왕실의 여성 귀족들도 한글 소설을 많이 읽었다. 이는 창덕궁의 낙선재에서 여러 장편 한글 소설이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lt;br /&gt;
한글소설이 발달함에 따라 돈을 주고 책을 빌려주는 세책점이 흥했고, 일정한 장소와 시간에서 소설책을 낭독해주는 이야기꾼 전기수가 많이 등장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사설시조'''&lt;br /&gt;
&lt;br /&gt;
사설지로란 사대부의 대표적인 시가 장르인 기존의 평시조보다 장형화된 것을 말한다. 사설시조는 작가 층에 서민이 유입됨에 따라 발전하였는데, 남년 간의 사랑, 고달픈 삶, 양반 등 지배계층에 대한 풍자가 주요 주제로 채택되었다. 평시조보다 형식과 규칙 등 제약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서민들도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래는 대표적인 사설시조 한 편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두꺼비 파리를 물고 두엄 위에 치달아 앉아 건넛산을 바라보니 흰 송골매 떠 있거늘 가슴이 끔찍하여 풀떡 뛰어 내닫다가 두엄 아래 자빠졌구나 마침 날랜 나였기에 망정이지 피멍 들 뻔하였네''&lt;br /&gt;
&lt;br /&gt;
- 『청구영언』에 수록된 작자 미상의 사설시조 -&lt;br /&gt;
&lt;br /&gt;
&lt;br /&gt;
'''판소리'''&lt;br /&gt;
&lt;br /&gt;
조선 후기는 도시와 상업이 발달하였다. 이에 따라 시장이 활발하였는데, 판소리는 시장을 무대삼아 발달하였다. &lt;br /&gt;
판소리는 소리꾼 한 명과 북치는 사람이 고수 2명으로 구성되었고, 소리꾼은 고수의 북장단에 맞추와 창(노래)와 아니리(말)등으로 판을 이끌어나갔다. &lt;br /&gt;
19세기에 이르러 신재효가 여러 종류의 판소리를 여섯 마당으로 정리하였지만, 현재는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의 다섯 마당만 전해지고 있다. &lt;br /&gt;
판소리는 서민 중심 문화였지만, 이후 양반들까지 퍼지면서 내용이 조금 변하였다. &lt;br /&gt;
초기 판소리는 서민들의 사회 비판 의식이 잘 드러났고, 후기로 갈수록 한문 표현, 충성과 효도 등 유교 윤리 가치관이 반영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탈춤'''&lt;br /&gt;
&lt;br /&gt;
탈춤 또한 판소리와 같이 시장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탈춤은 광대라고 불리는 재주꾼들이 탈을 쓰고 연기, 노래, 춤 등 공연을 하는 것을 말한다. &lt;br /&gt;
당시 양반들에 대한 비판이 주 내용이었고, 전해져오는 탈춤은 안동의 하회 별신굿 탈춤, 황해도의 봉산 탈춤과 강령 탈춤, 북청의 사자놀이가 유명하다. &lt;br /&gt;
탈춤 외에 시장에서 솟대나 줄을 타기도 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Jinhyang</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A1%B0%EC%84%A0_%ED%9B%84%EA%B8%B0&amp;diff=60839</id>
		<title>조선 후기</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A1%B0%EC%84%A0_%ED%9B%84%EA%B8%B0&amp;diff=60839"/>
		<updated>2025-06-23T23:00:2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inhyang: &lt;/p&gt;
&lt;hr /&gt;
&lt;div&gt;==주요 키워드==&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color:#FFFACD&amp;quot;&lt;br /&gt;
|+ &amp;lt;조선 후기 주요 키워드&amp;gt;&lt;br /&gt;
|+ style=&amp;quot;caption-side:bottom; text-align:left;&amp;quot;|&lt;br /&gt;
| 정치적 변화 || 임진왜란, 병자호란, 탕평책, 북벌론, 북학론, 세도정치, 쇄국정책, 개항&lt;br /&gt;
|-&lt;br /&gt;
| 사회적 변화 || 신분제 붕괴, 양반수 증가, 상품화폐경제 발달&lt;br /&gt;
|-&lt;br /&gt;
| 사상적 변화 || 양명학, 실학&lt;br /&gt;
|-&lt;br /&gt;
| 문화적 변화 || 서민문화 발달, 한글소설, 사설시조, 판소리, 탈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치적 변화==&lt;br /&gt;
'''임진왜란 이후'''&lt;br /&gt;
&lt;br /&gt;
임진왜란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총 7년간 이루어진 전쟁이다.&lt;br /&gt;
 &lt;br /&gt;
7년 간의 전쟁으로 인해 조선, 명, 일본 등 동아시아 국제 관계의 변화가 생겼으며, 모두 큰 피해를 입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의 경우, 전쟁이 본토에서 이루어졌으므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할 수 있다. &lt;br /&gt;
국토는 황폐화되었고 토지를 기록한 장부마저 사라져 임진왜란 이후 제대로 된 세금조차 거둘 수 없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일본의 경우, 도요토미히데요시 죽음 이후 도쿠가와이에야스가 새로운 쇼군으로 오른 후 '에도막부'시대를 열었다. &lt;br /&gt;
도쿠가와이에야스는 도요토미히데요시 정권과 반대의 입장을 표하며, 새로운 권위를 세우고자 조선과 화친을 맺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도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화친에 응했으며, 이후 쇼군이 요청할 때마다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통신사'''&amp;lt;/font&amp;gt;를 파견하여 교류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초기 통신사는 일본에 끌려간 포로를 송환하기 위해서였고, 이후 유학 등 선진문물 전파도 이어졌다. &lt;br /&gt;
&lt;br /&gt;
&lt;br /&gt;
명의 경우, 조선의 군대 파병으로 군사력이 매우 약화되었다. &lt;br /&gt;
&lt;br /&gt;
이에 반해 북방의 여진 세력은 점점 커져가며 점점 명이 외부세력을 방어하기 힘들어졌고, 이후 여진이 성장하여 국가인 '청'을 세우자 명과의 사대관계를 유지하던 조선도 혼란에 빠졌다. &lt;br /&gt;
&lt;br /&gt;
이는 1636년의 병자호란의 배경과도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병자호란'''&lt;br /&gt;
&lt;br /&gt;
&amp;lt;ins&amp;gt;병자호란은 1636년에 일어난 조선과 청 사이에 일어난 전쟁이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lt;br /&gt;
1627년 정묘호란 시기, 청과 형제관계를 맺은 이후, 청은 조선과 '''군신관계'''를 청했고 조선 내에서는 척화론과 주화론이 대립하며 시간을 끌었다.&lt;br /&gt;
&lt;br /&gt;
결국 척화론이 우세하여 조선은 청의 군신관계 요구를 거절하였고, 이에 화가 난 청나라 황제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조선으로 쳐 들어왔다. &lt;br /&gt;
&lt;br /&gt;
당시 최고의 대선책은 임금이 강화도로 피난을 가는 것이었지만, 실패로 끝이 났고 인조는 첩첩한 산 중의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lt;br /&gt;
&lt;br /&gt;
고립된 산성은 빠르게 포위되었고, 결국 '''군신관계'''를 맺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병자호란은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왕이 출성항복하는 사건이다.&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이후 조선은 사대 상대가 명에서 청으로 바뀌어야 했지만, 결코 쉽지 않았고 명의 중화의식을 가장 잘 계승한 나라라는 &amp;lt;font color=&amp;quot;#FFD700&amp;quot;&amp;gt;'''소중화'''&amp;lt;/font&amp;gt;의식이 조선 사대부들 사이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북벌론과 북학론'''&lt;br /&gt;
&lt;br /&gt;
''북벌론''&lt;br /&gt;
&lt;br /&gt;
북벌론은 오랑캐인 청나라를 정복하여 치욕을 씻고, 중화의식을 회복하자는 의미에서 추진된 담론이다. &lt;br /&gt;
&lt;br /&gt;
북벌론은 병자호란 이후 싹트기 시작했고, 명나라가 사라진 17세기 쯤에 성행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인조이후, 효종은 북벌을 시행하기 위해 정치적, 군사적으로 노력하였다. &lt;br /&gt;
&lt;br /&gt;
효종은 척화계열의 산당 세력들을 대거 등용하여 북벌 계획을 세웠으나, 청나라가 조선의 정세를 다 파악할 수 있었기에 청나라는 치는 북벌계획은 구체적으로 시행되기 어려웠다. &lt;br /&gt;
&lt;br /&gt;
또한 거듭된 흉년과 자연재해로 전쟁을 준비할 경제적인 여력이 충분하지 않았고, 결국 북벌론은 소중화 의식을 지닌 조선 사대부들 사이에 퍼져 여전히 '''청은 오랑캐이다'''라고 주장하게 만들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북학론''&lt;br /&gt;
&lt;br /&gt;
북한론이란,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담론으로, 이를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은 북학파, 연암일파라고 불려지는 홍대용(洪大容), 성대중(成大中), 박지원(朴趾源), 박제가(朴齊家), 유득공(柳得恭), 이덕무(李德懋), 이서구(李書九), [이희경(李喜經)] 등이다.&lt;br /&gt;
북학의 주요 내용은 벽돌과 수레의 사용, 농기구의 개량, 둔전의 설치, 대외 무역의 장려, 서양인의 초빙과 실제적인 농 · 상업 기술론이었다.&amp;lt;ref&amp;gt;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북학」,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4783,2025.6.24. &amp;lt;/ref&amp;gt; 하지만,기술 도입에 관한 구체적인 방법론이 부족했고 조선의 실정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졌다. 예를 들어 수레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도로가 정비가 앞서 진행되어야 하는데, 도로 구축을 하지 않고 수레 사용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탕평책'''&lt;br /&gt;
&lt;br /&gt;
탕평 정치는 영조 때 자리잡았다. 탕평(蕩平)이란? 서경에서 나온 말로, 임금의 정치가 한쪽을 편들지 않고 사심이 없으며, 당을 이루지도 않는 상태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lt;br /&gt;
영조는 왕과 신하 사이의 의리를 바로 세워야 한다며, 붕당을 없애자는 논리에 동의하는 탕평파를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였다. 그리고 붕당의 뿌리를 제거하기 위하여 공론의 주재자로서 인식되던 산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들의 본거지인 서원을 대폭 정리하였다. 아울러 이조 전랑의 권한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그들이 자신의 후임자를 천거하고, 3사의 관리를 선발할 수 있게 해 주던 관행을 없앴다. 그러나 이조 전랑의 후임자 천거권은 이후 정조대에 가서야 완전히 폐지되었다.&amp;lt;ref&amp;gt; 우리역사넷, 「영조와 정조의 탕평 정치」,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ta/view.do?levelId=ta_h71_0040_0040_0030_0030, 2025. 6. 24.&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영조 때 시행한 탕평책은 정조 때에 더욱 강화하였다. 정조는 누가 옳은지 그른지 명백히 규명하여 적극적으로 탕평책을 주도하였으며, 영조 때 세력을 키운 척신과 환관 등을 제거하였다. 게다가 권력에서 배제되었던 소론과 남인 계열의 관리들도 정치에 참여하도록 독려하였다. 붕당정치 세력이 커질 것을 우려하여 새로운 신진 인물을 등용하고, 이들을 비롯한 중, 하급 관리에서 유능한 인재를 뽑아 교육을 시키는 초계문신제를 도입하였다. &lt;br /&gt;
&lt;br /&gt;
'''세도정치'''&lt;br /&gt;
&lt;br /&gt;
19세기에는 특정 가문이 관직을 독점하는 세도정치가 시행되었다. &lt;br /&gt;
&lt;br /&gt;
이는 탕평정치의 지속에 불만을 품었던 귀족세력의 반발심에 의한 것이다. &lt;br /&gt;
&lt;br /&gt;
대표적인 세도 가문은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반남 박씨, 대구 서씨, 연안 이씨, 풍산 홍씨 등이다. &lt;br /&gt;
&lt;br /&gt;
세도가문의 중심 배경은 임진왜란 이후 강화된 비변사의 기능과 관련이 있다. &lt;br /&gt;
&lt;br /&gt;
비변사는 초기에 왜구·여진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해 국방 관련 일을 처리하는 임시기구로 출발하였지만,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권한이 더욱 확대되어 임시 군사대책기관에서 정책결정기구로까지 그 성격이 변하였다. &lt;br /&gt;
&lt;br /&gt;
이후 조선 후기에는 국정을 총괄하는 기구로써 그 기능이 중요해졌는데, 세도 가문이 비변사를 독점하면서 마음대로 일을 결정하고 왕에게 보고할 수 있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예를들면, 안동 김씨 가문의 대표적 인물인 김조순은 국왕의 장인, 왕비의 친아버지에다가 정조가 친히 국왕(그 당시 세자)을 돌볼 임무를 맡겼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홍문관 대제학(大提學)과 규장각 검교제학(檢校提學)을 오랫동안 맡아 학술과 정치이념을 이끌었고, 당시 최정예 군사력인 훈련도감의 훈련대장을 오래 지내다 심복에게 넘겨주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또한 비변사 주교사당상(舟橋司堂上)을 맡았는데 그것을 통해 대상인의 상업 행위를 감독하고 경제적 실권을 장악했던 것으로 판단된다.&amp;lt;ref&amp;gt; 우리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세도정치」,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9786, 2025. 6. 24.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쇄국정책'''&lt;br /&gt;
&lt;br /&gt;
쇄국정책은 세도정치가 득세했던 철종 사후, 어린 정조가 왕위를 승계하고 그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정치를 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lt;br /&gt;
&lt;br /&gt;
사실 애초에 조선이 활발히 문호를 개방한 것은 아니었으나, 일명 '쇄국정책'은 흥선대원군이 실행한 외교 정책이라 할 수 있다. &lt;br /&gt;
&lt;br /&gt;
흥선대원군은 안으로는 왕권 강화 정책을 펴는 한편, 밖으로는 외세의 침략과 문물을 거부하는 쇄국정책을 강력히 실행하였다. &lt;br /&gt;
&lt;br /&gt;
따라서 세도정치 가문의 주류였던 안동 김씨 세력을 정계에서 몰아내고 다양한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외세의 문호 개방에 응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lt;br /&gt;
&lt;br /&gt;
하지만, 이는 열강 세력들이 조선을 군사적으로 침략하는 계기가 되었다. &lt;br /&gt;
&lt;br /&gt;
'''개항'''&lt;br /&gt;
&lt;br /&gt;
18세기 조선 해안에는 서양의 함선인 '이양선'이 빈번히 출몰하면서 개항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lt;br /&gt;
&lt;br /&gt;
처음에는 탐험과 측량을 목적으로 하였지만, 19세기가 되자 배를 끌고와 통상을 요구하였다. &lt;br /&gt;
&lt;br /&gt;
조선은 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 독일 등등 여러 나라에게 통상을 요구받았으나,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말미암아 허가해주지 않았다. &lt;br /&gt;
&lt;br /&gt;
이에 서양 열강 국가들과 조선 사이에 여러차례 전쟁을 발생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프랑스 선교사의 죽음을 문제로 프랑스가 일으킨 전쟁은 '병인양요'이며, 독일 상인 옵페르트는 통상 허가를 받지 못하자 흥선 대원군 아버지인 남연군의 무덤을 파 부장품을 훔쳐갔다. &lt;br /&gt;
&lt;br /&gt;
또한, 미국의 제너럴 셔먼호가 조선인과 전투를 벌이던 도중 침몰되자 그 배상을 요구하는 문제로 '신미양요'가 일어났다. &lt;br /&gt;
&lt;br /&gt;
흥선 대원군의 쇄국에 대한 강한 결심과 백성들의 끝없는 항전 덕분에 끝내 쇄국을 지킬 순 있었으나, 결국 조선은 일본의 강화도 사건으로 통상을 허용하면서 잇따라 서양 열강 국가들도 조선과 교류하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사회적 변화==&lt;br /&gt;
&lt;br /&gt;
'''신분제 붕괴와 양반수 증가'''&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 전기에는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의 네 신분이 형성되어 있었다. 양반의 사회적 지위와 특권이 강화되면서, 조선 사회는 양반 중심의 사회로 굳어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신분의 변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어 이러한 신분 구조에 변화가 일어났다. 신분의 변동은 양반층 내부에서 심각하게 일어났는데, 조선 후기에 들어와 노론이 장기간 집권하면서 이들은 정치의 실권을 독점하고 부정한 수단으로 자제들을 과거에 합격시켜 그 지위를 세습시켰다. 이러한 현상은 세도 정치가 시작되면서 더욱 심화되어 신분제의 붕괴가 일어났다.&amp;lt;ref&amp;gt; 우리역사넷, 「신분제의 변화」,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ta/view.do?levelId=ta_m62_0040_0010, 2024. 6. 24.&amp;lt;/ref&amp;gt; 이후 임진왜란의 영향으로 국가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공명첩'이라는 신분을 사고 팔 수 있는 문서가 생겼다. 돈이 많은 평민들은 신분을 사 양반이 되는 경우가 많았고, 따라서 양반의 수가 증가하게 되었다. 이와 반대로 양반층 내에서도 돈이 부족해 일반 농민이나 소작농으로 생계를 이어가거나 신분을 팔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상품화폐경제 발달'''&lt;br /&gt;
&lt;br /&gt;
상품화폐경제는 조선 후기 상업의 발달과 함께 교환 수단으로 '동전'이 발행되면서 시작되었다. 동전이 교환수단으로 정착하기 이전에는 쌀이 화폐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쌀은 무거워서 많이 가지고 다닐 수 없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가벼운 화폐는 소비의 편리함을 주었고, 따라서 판매와 소비가 촉진하였다. 동전은 숙종 때 발행을 결정하였는데, 불과 몇 십년 되지 않아 많이 유통되었고, 조세 수치를 동전으로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매년 수백냥에 이르는 동전 수취로, 농민들에게 부담을 지게 하여 몰락을 초래하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사상적 변화==&lt;br /&gt;
&lt;br /&gt;
&lt;br /&gt;
'''양명학'''&lt;br /&gt;
&lt;br /&gt;
명나라 왕수인에 의해 집대성된 학문이다. 양명학을 대표하는 키워드는 '지행합일'과 '심즉리'이다. &lt;br /&gt;
이는 주희의 성리학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으나, 성리학과 내용적으로 대립을 이룬다. 주희는 성을 이로, 마음을 기로 파악하였지만, 왕수인은 마음안에 이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lt;br /&gt;
또한 주희는 세상 만물에 안에 이가 있으므로, 격물치지 만물의 이치를 깨달아야 하며 그 진리를 깨닫고 행동해야 한다는 '선지후행'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왕수인의 양명학은 만물에게서 이치를 찾지 않고 이미 마음 속에 이가 있기 때문에 지행합일을 주요 이론으로 정립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실학'''&lt;br /&gt;
&lt;br /&gt;
실학은 조선 후기 사회 경제적 문제들에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 등장한 사상이다. &lt;br /&gt;
실학 사상이 등장하게 된 원인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첫째 조선 왕조의 통치 질서가 위기이다. 조선 왕조는 두번의 전란을 겪으면서 무너질 위기에 쳐했으나 보수적 관료들은 대책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이에 진보적 관리들이 해결책을 내놓으면서 개혁을 주장하였다. 두번째, 성리학이 현실적인 문제에 해결책을 제시해주지 못하였다. 세번째, 조선후기 경제가 발달하면서 발전을 촉구하는 실학 사상이 등장하게 되었다. 네번째, 조선 후기 무너진 신분제로 인해 양반층과 서민들의 생활에 관심이 집중되며 실학 사상이 발달하였다. 다섯번째, 서학의 전래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상이 조선 지식인에게 퍼졌다. 여섯번째, 고증학의 '실사구시'가 영향을 주어 학문에실증적 방법에 주목하였다. &lt;br /&gt;
&lt;br /&gt;
조선의 실학은 농업과 상업 두 갈래를 주축으로 진행되었으며, 이들을 각각 중농학파와 중상학파로 부른다.&lt;br /&gt;
&lt;br /&gt;
중농학파의 경우, 농촌 경제의 안정이 한 백성의 삶과 국가의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에 농업에 주목하였다.&lt;br /&gt;
실학자들은 토지의 편중이 농업의 발달을 저해한다고 보았고, 여러 토지 균분 제도에 대해 의견을 모았다. &lt;br /&gt;
예를 들면, 유형원의 균전론, 이익의 한전론, 정약용의 여전론 등이 있다. &lt;br /&gt;
&lt;br /&gt;
중상학파는 상업의 발전에 주목하였다. 국내 상공업의 발전이 하고, 학자들이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보고 옴에 따라 새로운 경향이 생겼다. &lt;br /&gt;
중상학파 학자들은 신분제의 비효율성, 수레와 화폐 사용, 유통과 소비의 촉진을 주장하며 상업의 발전해야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lt;br /&gt;
이들의 주장과 노력은 보다 적극적인 방안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문화사적 변화==&lt;br /&gt;
&lt;br /&gt;
'''서민문화의 발달'''&lt;br /&gt;
&lt;br /&gt;
조선 후기 상업과 농업이 발달하면서 일반 평민들 중에서도 부를 축적하여 안정된 삶을 구가하였다. 부유해진 이들은 점차 여유가 생겨 예술에 시선을 돌렸고, 자식들을 서당에 나가 공부를 하도록 했는데, 이로 인해 서민문화가 꽃피우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한글소설'''&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후기 '한글소설'이 유행하였다. 한글소설은 한글로 되어 있어 서민들이 읽기 쉬웠으며, 평범한 인물이 등장하여 사회모순을 비판하거나 문제로 삼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lt;br /&gt;
한글소설의 대표적인 작품은 흥부전, 춘향전, 홍길동전, 심청전, 콩쥐와팥쥐, 장화홍련전 등이 있다.&lt;br /&gt;
한글소설은 서민들의 오락기능을 수행하였으며, 일반 서민들 뿐만 아니라 양반 부녀자들, 왕실의 여성 귀족들도 한글 소설을 많이 읽었다. 이는 창덕궁의 낙선재에서 여러 장편 한글 소설이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lt;br /&gt;
한글소설이 발달함에 따라 돈을 주고 책을 빌려주는 세책점이 흥했고, 일정한 장소와 시간에서 소설책을 낭독해주는 이야기꾼 전기수가 많이 등장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사설시조'''&lt;br /&gt;
&lt;br /&gt;
사설지로란 사대부의 대표적인 시가 장르인 기존의 평시조보다 장형화된 것을 말한다. 사설시조는 작가 층에 서민이 유입됨에 따라 발전하였는데, 남년 간의 사랑, 고달픈 삶, 양반 등 지배계층에 대한 풍자가 주요 주제로 채택되었다. 평시조보다 형식과 규칙 등 제약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서민들도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래는 대표적인 사설시조 한 편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두꺼비 파리를 물고 두엄 위에 치달아 앉아 건넛산을 바라보니 흰 송골매 떠 있거늘 가슴이 끔찍하여 풀떡 뛰어 내닫다가 두엄 아래 자빠졌구나 마침 날랜 나였기에 망정이지 피멍 들 뻔하였네''&lt;br /&gt;
&lt;br /&gt;
- 『청구영언』에 수록된 작자 미상의 사설시조 -&lt;br /&gt;
&lt;br /&gt;
&lt;br /&gt;
'''판소리'''&lt;br /&gt;
&lt;br /&gt;
조선 후기는 도시와 상업이 발달하였다. 이에 따라 시장이 활발하였는데, 판소리는 시장을 무대삼아 발달하였다. &lt;br /&gt;
판소리는 소리꾼 한 명과 북치는 사람이 고수 2명으로 구성되었고, 소리꾼은 고수의 북장단에 맞추와 창(노래)와 아니리(말)등으로 판을 이끌어나갔다. &lt;br /&gt;
19세기에 이르러 신재효가 여러 종류의 판소리를 여섯 마당으로 정리하였지만, 현재는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의 다섯 마당만 전해지고 있다. &lt;br /&gt;
판소리는 서민 중심 문화였지만, 이후 양반들까지 퍼지면서 내용이 조금 변하였다. &lt;br /&gt;
초기 판소리는 서민들의 사회 비판 의식이 잘 드러났고, 후기로 갈수록 한문 표현, 충성과 효도 등 유교 윤리 가치관이 반영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탈춤'''&lt;br /&gt;
&lt;br /&gt;
탈춤 또한 판소리와 같이 시장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탈춤은 광대라고 불리는 재주꾼들이 탈을 쓰고 연기, 노래, 춤 등 공연을 하는 것을 말한다. &lt;br /&gt;
당시 양반들에 대한 비판이 주 내용이었고, 전해져오는 탈춤은 안동의 하회 별신굿 탈춤, 황해도의 봉산 탈춤과 강령 탈춤, 북청의 사자놀이가 유명하다. &lt;br /&gt;
탈춤 외에 시장에서 솟대나 줄을 타기도 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Jinhyang</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A1%B0%EC%84%A0_%ED%9B%84%EA%B8%B0&amp;diff=60830</id>
		<title>조선 후기</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A1%B0%EC%84%A0_%ED%9B%84%EA%B8%B0&amp;diff=60830"/>
		<updated>2025-06-23T22:55:0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inhyang: &lt;/p&gt;
&lt;hr /&gt;
&lt;div&gt;==주요 키워드==&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color:#FFFACD&amp;quot;&lt;br /&gt;
|+ &amp;lt;조선 후기 주요 키워드&amp;gt;&lt;br /&gt;
|+ style=&amp;quot;caption-side:bottom; text-align:left;&amp;quot;|&lt;br /&gt;
| 정치적 변화 || 임진왜란, 병자호란, 탕평책, 북벌론, 북학론, 세도정치, 쇄국정책, 개항&lt;br /&gt;
|-&lt;br /&gt;
| 사회적 변화 || 신분제 붕괴, 양반수 증가, 상품화폐경제 발달&lt;br /&gt;
|-&lt;br /&gt;
| 사상적 변화 || 양명학, 실학&lt;br /&gt;
|-&lt;br /&gt;
| 문화적 변화 || 서민문화 발달, 한글소설, 사설시조, 판소리, 탈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치적 변화==&lt;br /&gt;
'''임진왜란 이후'''&lt;br /&gt;
&lt;br /&gt;
임진왜란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총 7년간 이루어진 전쟁이다. &lt;br /&gt;
7년 간의 전쟁으로 인해 조선, 명, 일본 등 동아시아 국제 관계의 변화가 생겼으며, 모두 큰 피해를 입었다.&lt;br /&gt;
조선의 경우, 전쟁이 본토에서 이루어졌으므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할 수 있다. &lt;br /&gt;
국토는 황폐화되었고 토지를 기록한 장부마저 사라져 임진왜란 이후 제대로 된 세금조차 거둘 수 없었다. &lt;br /&gt;
일본의 경우, 도요토미히데요시 죽음 이후 도쿠가와이에야스가 새로운 쇼군으로 오른 후 '에도막부'시대를 열었다. &lt;br /&gt;
도쿠가와이에야스는 도요토미히데요시 정권과 반대의 입장을 표하며, 새로운 권위를 세우고자 조선과 화친을 맺었다. &lt;br /&gt;
조선도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화친에 응했으며, 이후 쇼군이 요청할 때마다 '통신사'를 파견하여 교류하였다.&lt;br /&gt;
초기 통신사는 일본에 끌려간 포로를 송환하기 위해서였고, 이후 유학 등 선진문물 전파도 이어졌다. &lt;br /&gt;
명의 경우, 조선의 군대 파병으로 군사력이 매우 약화되었다. 이에 반해 북방의 여진 세력은 점점 커져가며 점점 명이 외부세력을 방어하기 힘들어졌고, 이후 여진이 성장하여 국가인 '청'을 세우자 명과의 사대관계를 유지하던 조선도 혼란에 빠졌다. 이는 1636년의 병자호란의 배경과도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병자호란'''&lt;br /&gt;
&lt;br /&gt;
병자호란은 1636년에 일어난 조선과 청 사이에 일어난 전쟁이다. &lt;br /&gt;
1627년 정묘호란 시기, 청과 형제관계를 맺은 이후, 청은 조선과 군신관계를 청했고 조선 내에서는 척화론과 주화론이 대립하며 시간을 끌었다. 결국 척화론이 우세하여 조선은 청의 군신관계 요구를 거절하였고, 이에 화가 난 청나라 황제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조선으로 쳐 들어왔다. 당시 최고의 대선책은 임금이 강화도로 피난을 가는 것이었지만, 실패로 끝이 났고 인조는 첩첩한 산 중의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고립된 산성은 빠르게 포위되었고, 결국 군신관계를 맺게 되었다. 병자호란은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왕이 출성항복하는 사건이다. 이후 조선은 사대 상대가 명에서 청으로 바뀌어야 했지만, 결코 쉽지 않았고 명의 중화의식을 가장 잘 계승한 나라라는 '소중화'의식이 조선 사대부들 사이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북벌론과 북학론'''&lt;br /&gt;
&lt;br /&gt;
''북벌론''&lt;br /&gt;
&lt;br /&gt;
북벌론은 오랑캐인 청나라를 정복하여 치욕을 씻고, 중화의식을 회복하자는 의미에서 추진된 담론이다. 북벌론은 병자호란 이후 싹트기 시작했고, 명나라가 사라진 17세기 쯤에 성행하였다. &lt;br /&gt;
인조이후, 효종은 북벌을 시행하기 위해 정치적, 군사적으로 노력하였다. 효종은 척화계열의 산당 세력들을 대거 등용하여 북벌 계획을 세웠으나, 청나라가 조선의 정세를 다 파악할 수 있었기에 청나라는 치는 북벌계획은 구체적으로 시행되기 어려웠다. 또한 거듭된 흉년과 자연재해로 전쟁을 준비할 경제적인 여력이 충분하지 않았고, 결국 북벌론은 소중화 의식을 지닌 조선 사대부들 사이에 퍼져 여전히 '청은 오랑캐이다'라고 주장하게 만들었다. &lt;br /&gt;
&lt;br /&gt;
''북학론''&lt;br /&gt;
&lt;br /&gt;
북한론이란,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담론으로, 이를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은 북학파, 연암일파라고 불려지는 홍대용(洪大容), 성대중(成大中), 박지원(朴趾源), 박제가(朴齊家), 유득공(柳得恭), 이덕무(李德懋), 이서구(李書九), [이희경(李喜經)] 등이다.&lt;br /&gt;
북학의 주요 내용은 벽돌과 수레의 사용, 농기구의 개량, 둔전의 설치, 대외 무역의 장려, 서양인의 초빙과 실제적인 농 · 상업 기술론이었다.&amp;lt;ref&amp;gt;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북학」,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4783,2025.6.24. &amp;lt;/ref&amp;gt; 하지만,기술 도입에 관한 구체적인 방법론이 부족했고 조선의 실정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졌다. 예를 들어 수레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도로가 정비가 앞서 진행되어야 하는데, 도로 구축을 하지 않고 수레 사용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탕평책'''&lt;br /&gt;
&lt;br /&gt;
탕평 정치는 영조 때 자리잡았다. 탕평(蕩平)이란? 서경에서 나온 말로, 임금의 정치가 한쪽을 편들지 않고 사심이 없으며, 당을 이루지도 않는 상태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lt;br /&gt;
영조는 왕과 신하 사이의 의리를 바로 세워야 한다며, 붕당을 없애자는 논리에 동의하는 탕평파를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였다. 그리고 붕당의 뿌리를 제거하기 위하여 공론의 주재자로서 인식되던 산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들의 본거지인 서원을 대폭 정리하였다. 아울러 이조 전랑의 권한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그들이 자신의 후임자를 천거하고, 3사의 관리를 선발할 수 있게 해 주던 관행을 없앴다. 그러나 이조 전랑의 후임자 천거권은 이후 정조대에 가서야 완전히 폐지되었다.&amp;lt;ref&amp;gt; 우리역사넷, 「영조와 정조의 탕평 정치」,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ta/view.do?levelId=ta_h71_0040_0040_0030_0030, 2025. 6. 24.&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영조 때 시행한 탕평책은 정조 때에 더욱 강화하였다. 정조는 누가 옳은지 그른지 명백히 규명하여 적극적으로 탕평책을 주도하였으며, 영조 때 세력을 키운 척신과 환관 등을 제거하였다. 게다가 권력에서 배제되었던 소론과 남인 계열의 관리들도 정치에 참여하도록 독려하였다. 붕당정치 세력이 커질 것을 우려하여 새로운 신진 인물을 등용하고, 이들을 비롯한 중, 하급 관리에서 유능한 인재를 뽑아 교육을 시키는 초계문신제를 도입하였다. &lt;br /&gt;
&lt;br /&gt;
'''세도정치'''&lt;br /&gt;
&lt;br /&gt;
19세기에는 특정 가문이 관직을 독점하는 세도정치가 시행되었다. 이는 탕평정치의 지속에 불만을 품었던 귀족세력의 반발심에 의한 것이다. 대표적인 세도 가문은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반남 박씨, 대구 서씨, 연안 이씨, 풍산 홍씨 등이다. 세도가문의 중심 배경은 임진왜란 이후 강화된 비변사의 기능과 관련이 있다. 비변사는 초기에 왜구·여진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해 국방 관련 일을 처리하는 임시기구로 출발하였지만,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권한이 더욱 확대되어 임시 군사대책기관에서 정책결정기구로까지 그 성격이 변하였다. 이후 조선 후기에는 국정을 총괄하는 기구로써 그 기능이 중요해졌는데, 세도 가문이 비변사를 독점하면서 마음대로 일을 결정하고 왕에게 보고할 수 있었다. 예를들면, 안동 김씨 가문의 대표적 인물인 김조순은 국왕의 장인, 왕비의 친아버지에다가 정조가 친히 국왕(그 당시 세자)을 돌볼 임무를 맡겼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홍문관 대제학(大提學)과 규장각 검교제학(檢校提學)을 오랫동안 맡아 학술과 정치이념을 이끌었고, 당시 최정예 군사력인 훈련도감의 훈련대장을 오래 지내다 심복에게 넘겨주었다. 또한 비변사 주교사당상(舟橋司堂上)을 맡았는데 그것을 통해 대상인의 상업 행위를 감독하고 경제적 실권을 장악했던 것으로 판단된다.&amp;lt;ref&amp;gt; 우리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세도정치」,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9786, 2025. 6. 24.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쇄국정책'''&lt;br /&gt;
&lt;br /&gt;
쇄국정책은 세도정치가 득세했던 철종 사후, 어린 정조가 왕위를 승계하고 그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정치를 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사실 애초에 조선이 활발히 문호를 개방한 것은 아니었으나, 일명 '쇄국정책'은 흥선대원군이 실행한 외교 정책이라 할 수 있다. 흥선대원군은 안으로는 왕권 강화 정책을 펴는 한편, 밖으로는 외세의 침략과 문물을 거부하는 쇄국정책을 강력히 실행하였다. 따라서 세도정치 가문의 주류였던 안동 김씨 세력을 정계에서 몰아내고 다양한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외세의 문호 개방에 응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이는 열강 세력들이 조선을 군사적으로 침략하는 계기가 되었다. &lt;br /&gt;
&lt;br /&gt;
'''개항'''&lt;br /&gt;
&lt;br /&gt;
18세기 조선 해안에는 서양의 함선인 '이양선'이 빈번히 출몰하면서 개항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탐험과 측량을 목적으로 하였지만, 19세기가 되자 배를 끌고와 통상을 요구하였다. 조선은 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 독일 등등 여러 나라에게 통상을 요구받았으나,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말미암아 허가해주지 않았다. 이에 서양 열강 국가들과 조선 사이에 여러차례 전쟁을 발생하였다. &lt;br /&gt;
프랑스 선교사의 죽음을 문제로 프랑스가 일으킨 전쟁은 '병인양요'이며, 독일 상인 옵페르트는 통상 허가를 받지 못하자 흥선 대원군 아버지인 남연군의 무덤을 파 부장품을 훔쳐갔다. 또한, 미국의 제너럴 셔먼호가 조선인과 전투를 벌이던 도중 침몰되자 그 배상을 요구하는 문제로 '신미양요'가 일어났다. 흥선 대원군의 쇄국에 대한 강한 결심과 백성들의 끝없는 항전 덕분에 끝내 쇄국을 지킬 순 있었으나, 결국 조선은 일본의 강화도 사건으로 통상을 허용하면서 잇따라 서양 열강 국가들도 조선과 교류하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사회적 변화==&lt;br /&gt;
&lt;br /&gt;
'''신분제 붕괴와 양반수 증가'''&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 전기에는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의 네 신분이 형성되어 있었다. 양반의 사회적 지위와 특권이 강화되면서, 조선 사회는 양반 중심의 사회로 굳어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신분의 변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어 이러한 신분 구조에 변화가 일어났다. 신분의 변동은 양반층 내부에서 심각하게 일어났는데, 조선 후기에 들어와 노론이 장기간 집권하면서 이들은 정치의 실권을 독점하고 부정한 수단으로 자제들을 과거에 합격시켜 그 지위를 세습시켰다. 이러한 현상은 세도 정치가 시작되면서 더욱 심화되어 신분제의 붕괴가 일어났다.&amp;lt;ref&amp;gt; 우리역사넷, 「신분제의 변화」,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ta/view.do?levelId=ta_m62_0040_0010, 2024. 6. 24.&amp;lt;/ref&amp;gt; 이후 임진왜란의 영향으로 국가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공명첩'이라는 신분을 사고 팔 수 있는 문서가 생겼다. 돈이 많은 평민들은 신분을 사 양반이 되는 경우가 많았고, 따라서 양반의 수가 증가하게 되었다. 이와 반대로 양반층 내에서도 돈이 부족해 일반 농민이나 소작농으로 생계를 이어가거나 신분을 팔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상품화폐경제 발달'''&lt;br /&gt;
&lt;br /&gt;
상품화폐경제는 조선 후기 상업의 발달과 함께 교환 수단으로 '동전'이 발행되면서 시작되었다. 동전이 교환수단으로 정착하기 이전에는 쌀이 화폐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쌀은 무거워서 많이 가지고 다닐 수 없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가벼운 화폐는 소비의 편리함을 주었고, 따라서 판매와 소비가 촉진하였다. 동전은 숙종 때 발행을 결정하였는데, 불과 몇 십년 되지 않아 많이 유통되었고, 조세 수치를 동전으로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매년 수백냥에 이르는 동전 수취로, 농민들에게 부담을 지게 하여 몰락을 초래하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사상적 변화==&lt;br /&gt;
&lt;br /&gt;
&lt;br /&gt;
'''양명학'''&lt;br /&gt;
&lt;br /&gt;
명나라 왕수인에 의해 집대성된 학문이다. 양명학을 대표하는 키워드는 '지행합일'과 '심즉리'이다. &lt;br /&gt;
이는 주희의 성리학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으나, 성리학과 내용적으로 대립을 이룬다. 주희는 성을 이로, 마음을 기로 파악하였지만, 왕수인은 마음안에 이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lt;br /&gt;
또한 주희는 세상 만물에 안에 이가 있으므로, 격물치지 만물의 이치를 깨달아야 하며 그 진리를 깨닫고 행동해야 한다는 '선지후행'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왕수인의 양명학은 만물에게서 이치를 찾지 않고 이미 마음 속에 이가 있기 때문에 지행합일을 주요 이론으로 정립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실학'''&lt;br /&gt;
&lt;br /&gt;
실학은 조선 후기 사회 경제적 문제들에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 등장한 사상이다. &lt;br /&gt;
실학 사상이 등장하게 된 원인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첫째 조선 왕조의 통치 질서가 위기이다. 조선 왕조는 두번의 전란을 겪으면서 무너질 위기에 쳐했으나 보수적 관료들은 대책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이에 진보적 관리들이 해결책을 내놓으면서 개혁을 주장하였다. 두번째, 성리학이 현실적인 문제에 해결책을 제시해주지 못하였다. 세번째, 조선후기 경제가 발달하면서 발전을 촉구하는 실학 사상이 등장하게 되었다. 네번째, 조선 후기 무너진 신분제로 인해 양반층과 서민들의 생활에 관심이 집중되며 실학 사상이 발달하였다. 다섯번째, 서학의 전래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상이 조선 지식인에게 퍼졌다. 여섯번째, 고증학의 '실사구시'가 영향을 주어 학문에실증적 방법에 주목하였다. &lt;br /&gt;
&lt;br /&gt;
조선의 실학은 농업과 상업 두 갈래를 주축으로 진행되었으며, 이들을 각각 중농학파와 중상학파로 부른다.&lt;br /&gt;
&lt;br /&gt;
중농학파의 경우, 농촌 경제의 안정이 한 백성의 삶과 국가의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에 농업에 주목하였다.&lt;br /&gt;
실학자들은 토지의 편중이 농업의 발달을 저해한다고 보았고, 여러 토지 균분 제도에 대해 의견을 모았다. &lt;br /&gt;
예를 들면, 유형원의 균전론, 이익의 한전론, 정약용의 여전론 등이 있다. &lt;br /&gt;
&lt;br /&gt;
중상학파는 상업의 발전에 주목하였다. 국내 상공업의 발전이 하고, 학자들이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보고 옴에 따라 새로운 경향이 생겼다. &lt;br /&gt;
중상학파 학자들은 신분제의 비효율성, 수레와 화폐 사용, 유통과 소비의 촉진을 주장하며 상업의 발전해야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lt;br /&gt;
이들의 주장과 노력은 보다 적극적인 방안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문화사적 변화==&lt;br /&gt;
&lt;br /&gt;
'''서민문화의 발달'''&lt;br /&gt;
&lt;br /&gt;
조선 후기 상업과 농업이 발달하면서 일반 평민들 중에서도 부를 축적하여 안정된 삶을 구가하였다. 부유해진 이들은 점차 여유가 생겨 예술에 시선을 돌렸고, 자식들을 서당에 나가 공부를 하도록 했는데, 이로 인해 서민문화가 꽃피우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한글소설'''&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후기 '한글소설'이 유행하였다. 한글소설은 한글로 되어 있어 서민들이 읽기 쉬웠으며, 평범한 인물이 등장하여 사회모순을 비판하거나 문제로 삼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lt;br /&gt;
한글소설의 대표적인 작품은 흥부전, 춘향전, 홍길동전, 심청전, 콩쥐와팥쥐, 장화홍련전 등이 있다.&lt;br /&gt;
한글소설은 서민들의 오락기능을 수행하였으며, 일반 서민들 뿐만 아니라 양반 부녀자들, 왕실의 여성 귀족들도 한글 소설을 많이 읽었다. 이는 창덕궁의 낙선재에서 여러 장편 한글 소설이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lt;br /&gt;
한글소설이 발달함에 따라 돈을 주고 책을 빌려주는 세책점이 흥했고, 일정한 장소와 시간에서 소설책을 낭독해주는 이야기꾼 전기수가 많이 등장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사설시조'''&lt;br /&gt;
&lt;br /&gt;
사설지로란 사대부의 대표적인 시가 장르인 기존의 평시조보다 장형화된 것을 말한다. 사설시조는 작가 층에 서민이 유입됨에 따라 발전하였는데, 남년 간의 사랑, 고달픈 삶, 양반 등 지배계층에 대한 풍자가 주요 주제로 채택되었다. 평시조보다 형식과 규칙 등 제약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서민들도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래는 대표적인 사설시조 한 편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두꺼비 파리를 물고 두엄 위에 치달아 앉아 건넛산을 바라보니 흰 송골매 떠 있거늘 가슴이 끔찍하여 풀떡 뛰어 내닫다가 두엄 아래 자빠졌구나 마침 날랜 나였기에 망정이지 피멍 들 뻔하였네''&lt;br /&gt;
&lt;br /&gt;
- 『청구영언』에 수록된 작자 미상의 사설시조 -&lt;br /&gt;
&lt;br /&gt;
&lt;br /&gt;
'''판소리'''&lt;br /&gt;
&lt;br /&gt;
조선 후기는 도시와 상업이 발달하였다. 이에 따라 시장이 활발하였는데, 판소리는 시장을 무대삼아 발달하였다. &lt;br /&gt;
판소리는 소리꾼 한 명과 북치는 사람이 고수 2명으로 구성되었고, 소리꾼은 고수의 북장단에 맞추와 창(노래)와 아니리(말)등으로 판을 이끌어나갔다. &lt;br /&gt;
19세기에 이르러 신재효가 여러 종류의 판소리를 여섯 마당으로 정리하였지만, 현재는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의 다섯 마당만 전해지고 있다. &lt;br /&gt;
판소리는 서민 중심 문화였지만, 이후 양반들까지 퍼지면서 내용이 조금 변하였다. &lt;br /&gt;
초기 판소리는 서민들의 사회 비판 의식이 잘 드러났고, 후기로 갈수록 한문 표현, 충성과 효도 등 유교 윤리 가치관이 반영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탈춤'''&lt;br /&gt;
&lt;br /&gt;
탈춤 또한 판소리와 같이 시장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탈춤은 광대라고 불리는 재주꾼들이 탈을 쓰고 연기, 노래, 춤 등 공연을 하는 것을 말한다. &lt;br /&gt;
당시 양반들에 대한 비판이 주 내용이었고, 전해져오는 탈춤은 안동의 하회 별신굿 탈춤, 황해도의 봉산 탈춤과 강령 탈춤, 북청의 사자놀이가 유명하다. &lt;br /&gt;
탈춤 외에 시장에서 솟대나 줄을 타기도 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Jinhyang</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82%9C%EC%A4%91%EC%9D%BC%EA%B8%B0%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827</id>
		<title>난중일기ᐧ༚̮ᐧ</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82%9C%EC%A4%91%EC%9D%BC%EA%B8%B0%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827"/>
		<updated>2025-06-23T22:53:2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inhyang: &lt;/p&gt;
&lt;hr /&gt;
&lt;div&gt;==작가==&lt;br /&gt;
===이순신===&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이순신. jpg|섬네일|왼쪽]]&amp;lt;ref&amp;gt;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이순신의 혁신적 사고, 국가 위기를 극복하다」, https://nrc.re.kr/board.es?mid=a10301000000&amp;amp;bid=0008&amp;amp;act=view&amp;amp;list_no=170019&amp;amp;otp_id=, 2025. 6. 24.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가계====&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 &amp;lt;이순신&amp;gt;&lt;br /&gt;
| 본관 || 덕수&lt;br /&gt;
|-&lt;br /&gt;
| 자 || 여해&lt;br /&gt;
|-&lt;br /&gt;
|혈통 || 이돈수 12대손&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유년시절====&lt;br /&gt;
&lt;br /&gt;
&amp;lt;ins&amp;gt;이순신은 어릴 때부터 기개와 용맹함이 뛰어났으며, 문관의 자질을 보였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같은 마을에 살았던 유성룡의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징비록(懲毖錄)』&amp;lt;/font&amp;gt;은 이순신의 어린 시절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DCDCDC&amp;quot;&amp;gt;''''“이순신은 어린 시절 얼굴 모양이 뛰어나고 기풍이 있었으며 남에게 구속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DCDCDC&amp;quot;&amp;gt;''''다른 아이들과 모여 놀라치면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들고 그것을 가지고 동리에서 전쟁놀이를 하였으며,''''&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DCDCDC&amp;quot;&amp;gt;''''자기 뜻에 맞지 않는 자가 있으면 그 눈을 쏘려고 하여 어른들도 꺼려 감히 이순신의 문앞을 지나려 하지 않았다.''''&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DCDCDC&amp;quot;&amp;gt;''''또 자라면서 활을 잘 쏘았으며 무과에 급제하여 발신(發身)하려 하였다.''''&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DCDCDC&amp;quot;&amp;gt;''''또 자라면서 말타고 활쏘기를 좋아하였으며 더욱이 글씨를 잘 썼다.”''''&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유성룡 &amp;lt;징비록&amp;gt;-'''&lt;br /&gt;
&lt;br /&gt;
&lt;br /&gt;
====관직생활====&lt;br /&gt;
&lt;br /&gt;
이순신은 선조 9년 식년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鍊院奉事)'''로 관직에 나갔다. &lt;br /&gt;
&lt;br /&gt;
여러 관직을 거쳐 조산보만호 겸 '''녹도둔전사의'''가 되었다.&lt;br /&gt;
&lt;br /&gt;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중앙에 군사를 요청을 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고, 갑자기 호인이 침범하여 막을 수 없게 되자 피하였다.&lt;br /&gt;
&lt;br /&gt;
이 일로 이순신은 죄를 문책당하였고, &amp;lt;ins&amp;gt;백의종군&amp;lt;/ins&amp;gt;의 길을 걷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후 추천으로 관직 생활을 이어가다가 47세에 되던 해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lt;br /&gt;
&lt;br /&gt;
왜침이 있을 거란 소문에 전쟁을 미리 대비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임진왜란 전쟁====&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전쟁지도|섬네일|왼쪽]]&amp;lt;ref&amp;gt; 진현경, 「[시사체크! 키워드 / 이순신 어록] &amp;quot;산처럼 무겁게 침착하라!&amp;quot;」, https://www.chosun.com/kid/kid_literacy/kid_sisanews/2024/01/04/5ZUZ72LEBUMBVLQKPX4NFZGQ4Y/, 2025. 6. 24.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이순신은 옥포에 정박중인 일본인 함대 30여척을 불화살로 격파하는데 성공하였다. &lt;br /&gt;
이를 &amp;lt;font color=&amp;quot;#228B22&amp;quot;&amp;gt;옥포해전&amp;lt;/font&amp;gt;이라 부르며, &amp;lt;ins&amp;gt;이순신의 최초의 해전이라고 칭해진다.&amp;lt;/ins&amp;gt; &lt;br /&gt;
&lt;br /&gt;
&lt;br /&gt;
이순신은 계속해서 해전의 압승을 거두었다.&lt;br /&gt;
&lt;br /&gt;
한산도 대첩의 경우에는 이순신의 전략전술이 돋보이는 해전이었다.&lt;br /&gt;
한산도 대첩이란, 한산도 바다에 일본배를 유인하여 격파한 전투이다.&lt;br /&gt;
&lt;br /&gt;
이순신은 일본배를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기 위해 견내량으로 판옥선 몇 척을 보내었다.&lt;br /&gt;
일본배는 판옥선을 집중 공격하며 조선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예상하였으나, 한산도 앞바다에 조선 배를 보고 함정에 빠졌음을 깨닫는다.&lt;br /&gt;
일본배를 유인한 판옥선은 기다리고 있던 조선 배와 연합하여 진영을 이루고, 일본배는 오도가도 못한 채 조선의 포에 무참히 배가 깨어졌다. &lt;br /&gt;
&lt;br /&gt;
한산도 대첩 이후 이순신은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삼도수군통제사'''&amp;lt;/font&amp;gt;로 임명받았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후 일본과 명 사이에 '''강화교섭'''이 이루어졌지만, 서로의 요구를 충족하지 못한 채 결렬되었다. &lt;br /&gt;
&lt;br /&gt;
1597년 일본은 다시 한 번 조선을 침략하여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정유재란&amp;lt;/font&amp;gt;을 일으켰다.&lt;br /&gt;
&lt;br /&gt;
고니시 유키나와와 그의 부하 요시라는 경쟁자인 가토 기요마사를 제거하기 위해 조선에게 그의 도해 날짜를 알려주었다.&lt;br /&gt;
조정은 이순신에게 나가 싸울 것을 명령했으나, 이순신은 불확실한 정보라 생각해 출전은 주저하였다. &lt;br /&gt;
이순신이 마지못해 출전을 했지만, 이미 요시라는 조선에 도착한 뒤였다. &lt;br /&gt;
이에 조정은 이순신을 다시 문책했고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를 대신하였으며 &amp;lt;ins&amp;gt;다시 백의종군을 하게 됐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lt;br /&gt;
하지만, 원균이 칠천량에서 대패를 하자, 조선은 다시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기용할 수 밖에 없었다.&lt;br /&gt;
 &lt;br /&gt;
복귀된 이순신은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명랑해전&amp;lt;/font&amp;gt;에서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08080&amp;quot;&amp;gt;일본 함대 133척을 단 31척의 배로 격파한 성과를 올렸다.&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이후 도요토미히데요시가 죽자 일본군에게 철수 명령이 떨어졌다. &lt;br /&gt;
고니시 유키나가는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자신의 탈출을 도와달라고 요청을 했고, 시마즈는 유키나가를 구하기 위해 순천으로 나아갔다.&lt;br /&gt;
&lt;br /&gt;
&lt;br /&gt;
1598년 이순신은 고니시 유키나가와 구원군을 공격했다.&lt;br /&gt;
이순신은 이 전투에서 탄환을 맞아 죽게 되었는데, 자신이 죽으면 군대가 동요할까 두려워 전투가 끝나기 전에 &amp;lt;ins&amp;gt;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amp;lt;/ins&amp;gt;&lt;br /&gt;
이순신의 죽음을 본 몇 병사들은 유언에 따라 전투가 끝날 때까지 이순신이 죽었음을 알리지 않았고, 전투가 끝난 이후에야 소식을 듣고 통곡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lt;br /&gt;
&lt;br /&gt;
====사후====&lt;br /&gt;
&lt;br /&gt;
이순신의 죽음이 조정에 알려지자 선조는 관원을 보내어 조의를 표하였다. &lt;br /&gt;
1604년 선무공신 1등으로 봉해졌고, 덕풍부원군에 추봉,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lt;br /&gt;
1793년 다시 영의정이 더해졌다.&lt;br /&gt;
이순신의 묘소는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어라산에 있으며, 왕이 친히 지은 비문과 충신문이 건립되었다.&amp;lt;ref&amp;gt;우리역사넷,「이순신-1545~1598」,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n309000&amp;amp;code=kc_age_30,2025, 6, 23.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사건==&lt;br /&gt;
===임진왜란===&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lt;br /&gt;
1592년(선조25)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쳐서 우리나라에 침입한 일본과 싸운 사건이다. &lt;br /&gt;
1차는 임진년에 일어난 전쟁으로, ‘임진왜란’이라 부르며 2차는 정유년에 일본의 침략으로 시작되어 ‘정유재란’으로 부른다. &lt;br /&gt;
하지만 임진왜란은 대게 정유재란의 내용을 포함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lt;br /&gt;
&lt;br /&gt;
====배경====&lt;br /&gt;
&lt;br /&gt;
조선이 초기 국방 체제 붕괴 및 당쟁으로 정치적 운영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 시대를 종결하고 지배권을 강화하였다. &lt;br /&gt;
국내 통일에 성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amp;lt;ins&amp;gt;내부적인 불만을 외부로 돌리고자 조선 침략을 실행하게 되었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순서====&lt;br /&gt;
&lt;br /&gt;
임진왜란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진행되었다.&lt;br /&gt;
&lt;br /&gt;
'''임진왜란 발발-&amp;gt;충주 탄금대 전투-&amp;gt;서울 함락-&amp;gt;옥포해전-&amp;gt;사천전투-&amp;gt;한산도대첩-&amp;gt;명나라 원군 지원, 평양성 탈환-&amp;gt;행주대첩-&amp;gt;휴전협상-&amp;gt;결렬, 정유재란-&amp;gt;명량해전-&amp;gt;노량해전-&amp;gt;임진왜란 종결'''&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v2%3A2PACX-1vRbTwvGkTgvE7WBy9ARb-wU1-xuL7ngW4HUgcDnJGuVn9wwW4EpX2ZtbPBPqZ3o8puOiSWtpgpAwrGz&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width=100%25&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 명장 이순신이 임진왜란 중에 작성한 일기이다. &lt;br /&gt;
구체적인 작성 시기는 1592년(선조25) 5월 1일부터 1598년 10월 7일까지로 알려져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난중일기|섬네일|왼쪽]]&amp;lt;ref&amp;gt;유네스코와 유산, 「난중일기(亂中日記)』: 이순신 장군의 진중일기(陣中日記)」,https://heritage.unesco.or.kr/『난중일기亂中日記』-이순신-장군의-진중일기陣/,2025. 6. 24.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개인의 일기 형식의 기록이지만, 전쟁 기간 중 해군의 최고 지휘관이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08080&amp;quot;&amp;gt;매일 날씨, 군대 생활, 전쟁 상황&amp;lt;/span&amp;gt;''' 등을 기록하였다. &lt;br /&gt;
&lt;br /&gt;
따라서 난중일기는 &amp;lt;ins&amp;gt;임진왜란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amp;lt;/ins&amp;gt;로 알려져 있다. &lt;br /&gt;
&lt;br /&gt;
게다가 일반 서민들의 삶에 대한 기록도 일부 전해지고 있어 과거의 환경 및 서민의 생활상을 연구하는 데 사용된다. &lt;br /&gt;
&lt;br /&gt;
&lt;br /&gt;
난중일기는 군대 생활 기록과 더불어 건강문제와 가족에 대한 염려 등을 자유롭게 일기에 표현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A9A9A9&amp;quot;&amp;gt;이순신 장군은 몸을 사리지 않고 일하며 전쟁 중 어깨에 총상을 입었음에도 쉬지않고 전장을 누볐기에 상처는 더더욱 심해졌다.''&amp;lt;/font&amp;gt;&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A9A9A9&amp;quot;&amp;gt;그래서 난중일기를 보다보면, 몸이 불편하여 잠에서 깼다. 식은땀이 나 이부자리를 적셨다. 등의 문장을 발견할 수 있다.''&amp;lt;/font&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이 일기의 원래 이름은 없었으나, 1795년 정조시기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하면서 편찬자가 '''난중일기'''라는 이름을 붙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다만 이순신의 친필 초고에 수록된 일기를 비교해보면 상당한 차이가 존재하며, 이는 정자로 베겨 판각할 때 글의 내용을 많이 생략한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lt;br /&gt;
&lt;br /&gt;
따라서 난중일기의 전모를 알기 위해서는 친필 초고를 표준으로 삼되, 초고의 망실로 인해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되어 있는 내용은 확인이 불가하다는 점을 고려하여 그대로 보충할 수밖에 없다.&lt;br /&gt;
&lt;br /&gt;
==가치==&lt;br /&gt;
&lt;br /&gt;
난중일기는 1592년부터 1598년 동안 이순신이 거의 매일 빠지지 않고 일기를 써 매우 방대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lt;br /&gt;
&lt;br /&gt;
또한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 군대의 상황과 날씨, 일반 서민들의 삶 등 다양한 기록을 한 번에 담았다.&lt;br /&gt;
&lt;br /&gt;
이에 난중일기는 임진왜란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사용되었고,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08080&amp;quot;&amp;gt;그 가치를 인정받아 201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Jinhyang</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A1%B0%EC%84%A0_%ED%9B%84%EA%B8%B0&amp;diff=60753</id>
		<title>조선 후기</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A1%B0%EC%84%A0_%ED%9B%84%EA%B8%B0&amp;diff=60753"/>
		<updated>2025-06-23T21:44:1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inhyang: &lt;/p&gt;
&lt;hr /&gt;
&lt;div&gt;==주요 키워드==&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lt;br /&gt;
|+ &amp;lt;조선 후기 주요 키워드&amp;gt;&lt;br /&gt;
|+ style=&amp;quot;caption-side:bottom; text-align:left;&amp;quot;|&lt;br /&gt;
| 정치적 변화 || 임진왜란, 병자호란, 탕평책, 북벌론, 북학론, 세도정치, 쇄국정책, 개항&lt;br /&gt;
|-&lt;br /&gt;
| 사회적 변화 || 신분제 붕괴, 양반수 증가, 상품화폐경제 발달&lt;br /&gt;
|-&lt;br /&gt;
| 사상적 변화 || 양명학, 실학&lt;br /&gt;
|-&lt;br /&gt;
| 문화적 변화 || 서민문화 발달, 한글소설, 사설시조, 판소리, 탈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치적 변화==&lt;br /&gt;
'''임진왜란 이후'''&lt;br /&gt;
&lt;br /&gt;
임진왜란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총 7년간 이루어진 전쟁이다. &lt;br /&gt;
7년 간의 전쟁으로 인해 조선, 명, 일본 등 동아시아 국제 관계의 변화가 생겼으며, 모두 큰 피해를 입었다.&lt;br /&gt;
조선의 경우, 전쟁이 본토에서 이루어졌으므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할 수 있다. &lt;br /&gt;
국토는 황폐화되었고 토지를 기록한 장부마저 사라져 임진왜란 이후 제대로 된 세금조차 거둘 수 없었다. &lt;br /&gt;
일본의 경우, 도요토미히데요시 죽음 이후 도쿠가와이에야스가 새로운 쇼군으로 오른 후 '에도막부'시대를 열었다. &lt;br /&gt;
도쿠가와이에야스는 도요토미히데요시 정권과 반대의 입장을 표하며, 새로운 권위를 세우고자 조선과 화친을 맺었다. &lt;br /&gt;
조선도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화친에 응했으며, 이후 쇼군이 요청할 때마다 '통신사'를 파견하여 교류하였다.&lt;br /&gt;
초기 통신사는 일본에 끌려간 포로를 송환하기 위해서였고, 이후 유학 등 선진문물 전파도 이어졌다. &lt;br /&gt;
명의 경우, 조선의 군대 파병으로 군사력이 매우 약화되었다. 이에 반해 북방의 여진 세력은 점점 커져가며 점점 명이 외부세력을 방어하기 힘들어졌고, 이후 여진이 성장하여 국가인 '청'을 세우자 명과의 사대관계를 유지하던 조선도 혼란에 빠졌다. 이는 1636년의 병자호란의 배경과도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병자호란'''&lt;br /&gt;
&lt;br /&gt;
병자호란은 1636년에 일어난 조선과 청 사이에 일어난 전쟁이다. &lt;br /&gt;
1627년 정묘호란 시기, 청과 형제관계를 맺은 이후, 청은 조선과 군신관계를 청했고 조선 내에서는 척화론과 주화론이 대립하며 시간을 끌었다. 결국 척화론이 우세하여 조선은 청의 군신관계 요구를 거절하였고, 이에 화가 난 청나라 황제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조선으로 쳐 들어왔다. 당시 최고의 대선책은 임금이 강화도로 피난을 가는 것이었지만, 실패로 끝이 났고 인조는 첩첩한 산 중의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고립된 산성은 빠르게 포위되었고, 결국 군신관계를 맺게 되었다. 병자호란은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왕이 출성항복하는 사건이다. 이후 조선은 사대 상대가 명에서 청으로 바뀌어야 했지만, 결코 쉽지 않았고 명의 중화의식을 가장 잘 계승한 나라라는 '소중화'의식이 조선 사대부들 사이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북벌론과 북학론'''&lt;br /&gt;
&lt;br /&gt;
''북벌론''&lt;br /&gt;
&lt;br /&gt;
북벌론은 오랑캐인 청나라를 정복하여 치욕을 씻고, 중화의식을 회복하자는 의미에서 추진된 담론이다. 북벌론은 병자호란 이후 싹트기 시작했고, 명나라가 사라진 17세기 쯤에 성행하였다. &lt;br /&gt;
인조이후, 효종은 북벌을 시행하기 위해 정치적, 군사적으로 노력하였다. 효종은 척화계열의 산당 세력들을 대거 등용하여 북벌 계획을 세웠으나, 청나라가 조선의 정세를 다 파악할 수 있었기에 청나라는 치는 북벌계획은 구체적으로 시행되기 어려웠다. 또한 거듭된 흉년과 자연재해로 전쟁을 준비할 경제적인 여력이 충분하지 않았고, 결국 북벌론은 소중화 의식을 지닌 조선 사대부들 사이에 퍼져 여전히 '청은 오랑캐이다'라고 주장하게 만들었다. &lt;br /&gt;
&lt;br /&gt;
''북학론''&lt;br /&gt;
&lt;br /&gt;
북한론이란,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담론으로, 이를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은 북학파, 연암일파라고 불려지는 홍대용(洪大容), 성대중(成大中), 박지원(朴趾源), 박제가(朴齊家), 유득공(柳得恭), 이덕무(李德懋), 이서구(李書九), [이희경(李喜經)] 등이다.&lt;br /&gt;
북학의 주요 내용은 벽돌과 수레의 사용, 농기구의 개량, 둔전의 설치, 대외 무역의 장려, 서양인의 초빙과 실제적인 농 · 상업 기술론이었다.&amp;lt;ref&amp;gt;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북학」,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4783,2025.6.24. &amp;lt;/ref&amp;gt; 하지만,기술 도입에 관한 구체적인 방법론이 부족했고 조선의 실정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졌다. 예를 들어 수레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도로가 정비가 앞서 진행되어야 하는데, 도로 구축을 하지 않고 수레 사용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탕평책'''&lt;br /&gt;
&lt;br /&gt;
탕평 정치는 영조 때 자리잡았다. 탕평(蕩平)이란? 서경에서 나온 말로, 임금의 정치가 한쪽을 편들지 않고 사심이 없으며, 당을 이루지도 않는 상태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lt;br /&gt;
영조는 왕과 신하 사이의 의리를 바로 세워야 한다며, 붕당을 없애자는 논리에 동의하는 탕평파를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였다. 그리고 붕당의 뿌리를 제거하기 위하여 공론의 주재자로서 인식되던 산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들의 본거지인 서원을 대폭 정리하였다. 아울러 이조 전랑의 권한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그들이 자신의 후임자를 천거하고, 3사의 관리를 선발할 수 있게 해 주던 관행을 없앴다. 그러나 이조 전랑의 후임자 천거권은 이후 정조대에 가서야 완전히 폐지되었다.&amp;lt;ref&amp;gt; 우리역사넷, 「영조와 정조의 탕평 정치」,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ta/view.do?levelId=ta_h71_0040_0040_0030_0030, 2025. 6. 24.&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영조 때 시행한 탕평책은 정조 때에 더욱 강화하였다. 정조는 누가 옳은지 그른지 명백히 규명하여 적극적으로 탕평책을 주도하였으며, 영조 때 세력을 키운 척신과 환관 등을 제거하였다. 게다가 권력에서 배제되었던 소론과 남인 계열의 관리들도 정치에 참여하도록 독려하였다. 붕당정치 세력이 커질 것을 우려하여 새로운 신진 인물을 등용하고, 이들을 비롯한 중, 하급 관리에서 유능한 인재를 뽑아 교육을 시키는 초계문신제를 도입하였다. &lt;br /&gt;
&lt;br /&gt;
'''세도정치'''&lt;br /&gt;
&lt;br /&gt;
19세기에는 특정 가문이 관직을 독점하는 세도정치가 시행되었다. 이는 탕평정치의 지속에 불만을 품었던 귀족세력의 반발심에 의한 것이다. 대표적인 세도 가문은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반남 박씨, 대구 서씨, 연안 이씨, 풍산 홍씨 등이다. 세도가문의 중심 배경은 임진왜란 이후 강화된 비변사의 기능과 관련이 있다. 비변사는 초기에 왜구·여진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해 국방 관련 일을 처리하는 임시기구로 출발하였지만,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권한이 더욱 확대되어 임시 군사대책기관에서 정책결정기구로까지 그 성격이 변하였다. 이후 조선 후기에는 국정을 총괄하는 기구로써 그 기능이 중요해졌는데, 세도 가문이 비변사를 독점하면서 마음대로 일을 결정하고 왕에게 보고할 수 있었다. 예를들면, 안동 김씨 가문의 대표적 인물인 김조순은 국왕의 장인, 왕비의 친아버지에다가 정조가 친히 국왕(그 당시 세자)을 돌볼 임무를 맡겼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홍문관 대제학(大提學)과 규장각 검교제학(檢校提學)을 오랫동안 맡아 학술과 정치이념을 이끌었고, 당시 최정예 군사력인 훈련도감의 훈련대장을 오래 지내다 심복에게 넘겨주었다. 또한 비변사 주교사당상(舟橋司堂上)을 맡았는데 그것을 통해 대상인의 상업 행위를 감독하고 경제적 실권을 장악했던 것으로 판단된다.&amp;lt;ref&amp;gt; 우리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세도정치」,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9786, 2025. 6. 24.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쇄국정책'''&lt;br /&gt;
&lt;br /&gt;
쇄국정책은 세도정치가 득세했던 철종 사후, 어린 정조가 왕위를 승계하고 그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정치를 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사실 애초에 조선이 활발히 문호를 개방한 것은 아니었으나, 일명 '쇄국정책'은 흥선대원군이 실행한 외교 정책이라 할 수 있다. 흥선대원군은 안으로는 왕권 강화 정책을 펴는 한편, 밖으로는 외세의 침략과 문물을 거부하는 쇄국정책을 강력히 실행하였다. 따라서 세도정치 가문의 주류였던 안동 김씨 세력을 정계에서 몰아내고 다양한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외세의 문호 개방에 응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이는 열강 세력들이 조선을 군사적으로 침략하는 계기가 되었다. &lt;br /&gt;
&lt;br /&gt;
'''개항'''&lt;br /&gt;
&lt;br /&gt;
18세기 조선 해안에는 서양의 함선인 '이양선'이 빈번히 출몰하면서 개항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탐험과 측량을 목적으로 하였지만, 19세기가 되자 배를 끌고와 통상을 요구하였다. 조선은 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 독일 등등 여러 나라에게 통상을 요구받았으나,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말미암아 허가해주지 않았다. 이에 서양 열강 국가들과 조선 사이에 여러차례 전쟁을 발생하였다. &lt;br /&gt;
프랑스 선교사의 죽음을 문제로 프랑스가 일으킨 전쟁은 '병인양요'이며, 독일 상인 옵페르트는 통상 허가를 받지 못하자 흥선 대원군 아버지인 남연군의 무덤을 파 부장품을 훔쳐갔다. 또한, 미국의 제너럴 셔먼호가 조선인과 전투를 벌이던 도중 침몰되자 그 배상을 요구하는 문제로 '신미양요'가 일어났다. 흥선 대원군의 쇄국에 대한 강한 결심과 백성들의 끝없는 항전 덕분에 끝내 쇄국을 지킬 순 있었으나, 결국 조선은 일본의 강화도 사건으로 통상을 허용하면서 잇따라 서양 열강 국가들도 조선과 교류하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사회적 변화==&lt;br /&gt;
&lt;br /&gt;
'''신분제 붕괴와 양반수 증가'''&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 전기에는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의 네 신분이 형성되어 있었다. 양반의 사회적 지위와 특권이 강화되면서, 조선 사회는 양반 중심의 사회로 굳어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신분의 변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어 이러한 신분 구조에 변화가 일어났다. 신분의 변동은 양반층 내부에서 심각하게 일어났는데, 조선 후기에 들어와 노론이 장기간 집권하면서 이들은 정치의 실권을 독점하고 부정한 수단으로 자제들을 과거에 합격시켜 그 지위를 세습시켰다. 이러한 현상은 세도 정치가 시작되면서 더욱 심화되어 신분제의 붕괴가 일어났다.&amp;lt;ref&amp;gt; 우리역사넷, 「신분제의 변화」,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ta/view.do?levelId=ta_m62_0040_0010, 2024. 6. 24.&amp;lt;/ref&amp;gt; 이후 임진왜란의 영향으로 국가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공명첩'이라는 신분을 사고 팔 수 있는 문서가 생겼다. 돈이 많은 평민들은 신분을 사 양반이 되는 경우가 많았고, 따라서 양반의 수가 증가하게 되었다. 이와 반대로 양반층 내에서도 돈이 부족해 일반 농민이나 소작농으로 생계를 이어가거나 신분을 팔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상품화폐경제 발달'''&lt;br /&gt;
&lt;br /&gt;
상품화폐경제는 조선 후기 상업의 발달과 함께 교환 수단으로 '동전'이 발행되면서 시작되었다. 동전이 교환수단으로 정착하기 이전에는 쌀이 화폐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쌀은 무거워서 많이 가지고 다닐 수 없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가벼운 화폐는 소비의 편리함을 주었고, 따라서 판매와 소비가 촉진하였다. 동전은 숙종 때 발행을 결정하였는데, 불과 몇 십년 되지 않아 많이 유통되었고, 조세 수치를 동전으로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매년 수백냥에 이르는 동전 수취로, 농민들에게 부담을 지게 하여 몰락을 초래하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사상적 변화==&lt;br /&gt;
&lt;br /&gt;
&lt;br /&gt;
'''양명학'''&lt;br /&gt;
&lt;br /&gt;
명나라 왕수인에 의해 집대성된 학문이다. 양명학을 대표하는 키워드는 '지행합일'과 '심즉리'이다. &lt;br /&gt;
이는 주희의 성리학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으나, 성리학과 내용적으로 대립을 이룬다. 주희는 성을 이로, 마음을 기로 파악하였지만, 왕수인은 마음안에 이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lt;br /&gt;
또한 주희는 세상 만물에 안에 이가 있으므로, 격물치지 만물의 이치를 깨달아야 하며 그 진리를 깨닫고 행동해야 한다는 '선지후행'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왕수인의 양명학은 만물에게서 이치를 찾지 않고 이미 마음 속에 이가 있기 때문에 지행합일을 주요 이론으로 정립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실학'''&lt;br /&gt;
&lt;br /&gt;
실학은 조선 후기 사회 경제적 문제들에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 등장한 사상이다. &lt;br /&gt;
실학 사상이 등장하게 된 원인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첫째 조선 왕조의 통치 질서가 위기이다. 조선 왕조는 두번의 전란을 겪으면서 무너질 위기에 쳐했으나 보수적 관료들은 대책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이에 진보적 관리들이 해결책을 내놓으면서 개혁을 주장하였다. 두번째, 성리학이 현실적인 문제에 해결책을 제시해주지 못하였다. 세번째, 조선후기 경제가 발달하면서 발전을 촉구하는 실학 사상이 등장하게 되었다. 네번째, 조선 후기 무너진 신분제로 인해 양반층과 서민들의 생활에 관심이 집중되며 실학 사상이 발달하였다. 다섯번째, 서학의 전래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상이 조선 지식인에게 퍼졌다. 여섯번째, 고증학의 '실사구시'가 영향을 주어 학문에실증적 방법에 주목하였다. &lt;br /&gt;
&lt;br /&gt;
조선의 실학은 농업과 상업 두 갈래를 주축으로 진행되었으며, 이들을 각각 중농학파와 중상학파로 부른다.&lt;br /&gt;
&lt;br /&gt;
중농학파의 경우, 농촌 경제의 안정이 한 백성의 삶과 국가의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에 농업에 주목하였다.&lt;br /&gt;
실학자들은 토지의 편중이 농업의 발달을 저해한다고 보았고, 여러 토지 균분 제도에 대해 의견을 모았다. &lt;br /&gt;
예를 들면, 유형원의 균전론, 이익의 한전론, 정약용의 여전론 등이 있다. &lt;br /&gt;
&lt;br /&gt;
중상학파는 상업의 발전에 주목하였다. 국내 상공업의 발전이 하고, 학자들이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보고 옴에 따라 새로운 경향이 생겼다. &lt;br /&gt;
중상학파 학자들은 신분제의 비효율성, 수레와 화폐 사용, 유통과 소비의 촉진을 주장하며 상업의 발전해야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lt;br /&gt;
이들의 주장과 노력은 보다 적극적인 방안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문화사적 변화==&lt;br /&gt;
&lt;br /&gt;
'''서민문화의 발달'''&lt;br /&gt;
&lt;br /&gt;
조선 후기 상업과 농업이 발달하면서 일반 평민들 중에서도 부를 축적하여 안정된 삶을 구가하였다. 부유해진 이들은 점차 여유가 생겨 예술에 시선을 돌렸고, 자식들을 서당에 나가 공부를 하도록 했는데, 이로 인해 서민문화가 꽃피우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한글소설'''&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후기 '한글소설'이 유행하였다. 한글소설은 한글로 되어 있어 서민들이 읽기 쉬웠으며, 평범한 인물이 등장하여 사회모순을 비판하거나 문제로 삼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lt;br /&gt;
한글소설의 대표적인 작품은 흥부전, 춘향전, 홍길동전, 심청전, 콩쥐와팥쥐, 장화홍련전 등이 있다.&lt;br /&gt;
한글소설은 서민들의 오락기능을 수행하였으며, 일반 서민들 뿐만 아니라 양반 부녀자들, 왕실의 여성 귀족들도 한글 소설을 많이 읽었다. 이는 창덕궁의 낙선재에서 여러 장편 한글 소설이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lt;br /&gt;
한글소설이 발달함에 따라 돈을 주고 책을 빌려주는 세책점이 흥했고, 일정한 장소와 시간에서 소설책을 낭독해주는 이야기꾼 전기수가 많이 등장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사설시조'''&lt;br /&gt;
&lt;br /&gt;
사설지로란 사대부의 대표적인 시가 장르인 기존의 평시조보다 장형화된 것을 말한다. 사설시조는 작가 층에 서민이 유입됨에 따라 발전하였는데, 남년 간의 사랑, 고달픈 삶, 양반 등 지배계층에 대한 풍자가 주요 주제로 채택되었다. 평시조보다 형식과 규칙 등 제약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서민들도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래는 대표적인 사설시조 한 편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두꺼비 파리를 물고 두엄 위에 치달아 앉아 건넛산을 바라보니 흰 송골매 떠 있거늘 가슴이 끔찍하여 풀떡 뛰어 내닫다가 두엄 아래 자빠졌구나 마침 날랜 나였기에 망정이지 피멍 들 뻔하였네''&lt;br /&gt;
&lt;br /&gt;
- 『청구영언』에 수록된 작자 미상의 사설시조 -&lt;br /&gt;
&lt;br /&gt;
&lt;br /&gt;
'''판소리'''&lt;br /&gt;
&lt;br /&gt;
조선 후기는 도시와 상업이 발달하였다. 이에 따라 시장이 활발하였는데, 판소리는 시장을 무대삼아 발달하였다. &lt;br /&gt;
판소리는 소리꾼 한 명과 북치는 사람이 고수 2명으로 구성되었고, 소리꾼은 고수의 북장단에 맞추와 창(노래)와 아니리(말)등으로 판을 이끌어나갔다. &lt;br /&gt;
19세기에 이르러 신재효가 여러 종류의 판소리를 여섯 마당으로 정리하였지만, 현재는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의 다섯 마당만 전해지고 있다. &lt;br /&gt;
판소리는 서민 중심 문화였지만, 이후 양반들까지 퍼지면서 내용이 조금 변하였다. &lt;br /&gt;
초기 판소리는 서민들의 사회 비판 의식이 잘 드러났고, 후기로 갈수록 한문 표현, 충성과 효도 등 유교 윤리 가치관이 반영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탈춤'''&lt;br /&gt;
&lt;br /&gt;
탈춤 또한 판소리와 같이 시장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탈춤은 광대라고 불리는 재주꾼들이 탈을 쓰고 연기, 노래, 춤 등 공연을 하는 것을 말한다. &lt;br /&gt;
당시 양반들에 대한 비판이 주 내용이었고, 전해져오는 탈춤은 안동의 하회 별신굿 탈춤, 황해도의 봉산 탈춤과 강령 탈춤, 북청의 사자놀이가 유명하다. &lt;br /&gt;
탈춤 외에 시장에서 솟대나 줄을 타기도 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Jinhyang</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A1%B0%EC%84%A0_%ED%9B%84%EA%B8%B0&amp;diff=60752</id>
		<title>조선 후기</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A1%B0%EC%84%A0_%ED%9B%84%EA%B8%B0&amp;diff=60752"/>
		<updated>2025-06-23T21:40:0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inhyang: &lt;/p&gt;
&lt;hr /&gt;
&lt;div&gt;==주요 키워드==&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lt;br /&gt;
|+ &amp;lt;조선 후기 주요 키워드&amp;gt;&lt;br /&gt;
|+ style=&amp;quot;caption-side:bottom; text-align:left;&amp;quot;|&lt;br /&gt;
| 정치적 변화 || 임진왜란, 병자호란, 탕평책, 북벌론, 북학론, 세도정치, 쇄국정책, 개항&lt;br /&gt;
|-&lt;br /&gt;
| 사회적 변화 || 신분제 붕괴, 양반수 증가, 상품화폐경제 발달&lt;br /&gt;
|-&lt;br /&gt;
| 사상적 변화 || 양명학, 실학&lt;br /&gt;
|-&lt;br /&gt;
| 문화적 변화 || 서민문화 발달, 한글소설, 사설시조, 판소리, 탈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치적 변화==&lt;br /&gt;
'''임진왜란 이후'''&lt;br /&gt;
&lt;br /&gt;
임진왜란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총 7년간 이루어진 전쟁이다. &lt;br /&gt;
7년 간의 전쟁으로 인해 조선, 명, 일본 등 동아시아 국제 관계의 변화가 생겼으며, 모두 큰 피해를 입었다.&lt;br /&gt;
조선의 경우, 전쟁이 본토에서 이루어졌으므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할 수 있다. &lt;br /&gt;
국토는 황폐화되었고 토지를 기록한 장부마저 사라져 임진왜란 이후 제대로 된 세금조차 거둘 수 없었다. &lt;br /&gt;
일본의 경우, 도요토미히데요시 죽음 이후 도쿠가와이에야스가 새로운 쇼군으로 오른 후 '에도막부'시대를 열었다. &lt;br /&gt;
도쿠가와이에야스는 도요토미히데요시 정권과 반대의 입장을 표하며, 새로운 권위를 세우고자 조선과 화친을 맺었다. &lt;br /&gt;
조선도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화친에 응했으며, 이후 쇼군이 요청할 때마다 '통신사'를 파견하여 교류하였다.&lt;br /&gt;
초기 통신사는 일본에 끌려간 포로를 송환하기 위해서였고, 이후 유학 등 선진문물 전파도 이어졌다. &lt;br /&gt;
명의 경우, 조선의 군대 파병으로 군사력이 매우 약화되었다. 이에 반해 북방의 여진 세력은 점점 커져가며 점점 명이 외부세력을 방어하기 힘들어졌고, 이후 여진이 성장하여 국가인 '청'을 세우자 명과의 사대관계를 유지하던 조선도 혼란에 빠졌다. 이는 1636년의 병자호란의 배경과도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병자호란'''&lt;br /&gt;
&lt;br /&gt;
병자호란은 1636년에 일어난 조선과 청 사이에 일어난 전쟁이다. &lt;br /&gt;
1627년 정묘호란 시기, 청과 형제관계를 맺은 이후, 청은 조선과 군신관계를 청했고 조선 내에서는 척화론과 주화론이 대립하며 시간을 끌었다. 결국 척화론이 우세하여 조선은 청의 군신관계 요구를 거절하였고, 이에 화가 난 청나라 황제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조선으로 쳐 들어왔다. 당시 최고의 대선책은 임금이 강화도로 피난을 가는 것이었지만, 실패로 끝이 났고 인조는 첩첩한 산 중의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고립된 산성은 빠르게 포위되었고, 결국 군신관계를 맺게 되었다. 병자호란은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왕이 출성항복하는 사건이다. 이후 조선은 사대 상대가 명에서 청으로 바뀌어야 했지만, 결코 쉽지 않았고 명의 중화의식을 가장 잘 계승한 나라라는 '소중화'의식이 조선 사대부들 사이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북벌론과 북학론'''&lt;br /&gt;
&lt;br /&gt;
''북벌론''&lt;br /&gt;
&lt;br /&gt;
북벌론은 오랑캐인 청나라를 정복하여 치욕을 씻고, 중화의식을 회복하자는 의미에서 추진된 담론이다. 북벌론은 병자호란 이후 싹트기 시작했고, 명나라가 사라진 17세기 쯤에 성행하였다. &lt;br /&gt;
인조이후, 효종은 북벌을 시행하기 위해 정치적, 군사적으로 노력하였다. 효종은 척화계열의 산당 세력들을 대거 등용하여 북벌 계획을 세웠으나, 청나라가 조선의 정세를 다 파악할 수 있었기에 청나라는 치는 북벌계획은 구체적으로 시행되기 어려웠다. 또한 거듭된 흉년과 자연재해로 전쟁을 준비할 경제적인 여력이 충분하지 않았고, 결국 북벌론은 소중화 의식을 지닌 조선 사대부들 사이에 퍼져 여전히 '청은 오랑캐이다'라고 주장하게 만들었다. &lt;br /&gt;
&lt;br /&gt;
''북학론''&lt;br /&gt;
&lt;br /&gt;
북한론이란,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담론으로, 이를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은 북학파, 연암일파라고 불려지는 홍대용(洪大容), 성대중(成大中), 박지원(朴趾源), 박제가(朴齊家), 유득공(柳得恭), 이덕무(李德懋), 이서구(李書九), [이희경(李喜經)] 등이다.&lt;br /&gt;
북학의 주요 내용은 벽돌과 수레의 사용, 농기구의 개량, 둔전의 설치, 대외 무역의 장려, 서양인의 초빙과 실제적인 농 · 상업 기술론이었다.&amp;lt;ref&amp;gt;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북학」,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4783,2025.6.24. &amp;lt;/ref&amp;gt; 하지만,기술 도입에 관한 구체적인 방법론이 부족했고 조선의 실정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졌다. 예를 들어 수레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도로가 정비가 앞서 진행되어야 하는데, 도로 구축을 하지 않고 수레 사용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탕평책'''&lt;br /&gt;
&lt;br /&gt;
탕평 정치는 영조 때 자리잡았다. 탕평(蕩平)이란? 서경에서 나온 말로, 임금의 정치가 한쪽을 편들지 않고 사심이 없으며, 당을 이루지도 않는 상태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lt;br /&gt;
영조는 왕과 신하 사이의 의리를 바로 세워야 한다며, 붕당을 없애자는 논리에 동의하는 탕평파를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였다. 그리고 붕당의 뿌리를 제거하기 위하여 공론의 주재자로서 인식되던 산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들의 본거지인 서원을 대폭 정리하였다. 아울러 이조 전랑의 권한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그들이 자신의 후임자를 천거하고, 3사의 관리를 선발할 수 있게 해 주던 관행을 없앴다. 그러나 이조 전랑의 후임자 천거권은 이후 정조대에 가서야 완전히 폐지되었다.&amp;lt;ref&amp;gt; 우리역사넷, 「영조와 정조의 탕평 정치」,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ta/view.do?levelId=ta_h71_0040_0040_0030_0030, 2025. 6. 24.&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영조 때 시행한 탕평책은 정조 때에 더욱 강화하였다. 정조는 누가 옳은지 그른지 명백히 규명하여 적극적으로 탕평책을 주도하였으며, 영조 때 세력을 키운 척신과 환관 등을 제거하였다. 게다가 권력에서 배제되었던 소론과 남인 계열의 관리들도 정치에 참여하도록 독려하였다. 붕당정치 세력이 커질 것을 우려하여 새로운 신진 인물을 등용하고, 이들을 비롯한 중, 하급 관리에서 유능한 인재를 뽑아 교육을 시키는 초계문신제를 도입하였다. &lt;br /&gt;
&lt;br /&gt;
'''세도정치'''&lt;br /&gt;
&lt;br /&gt;
19세기에는 특정 가문이 관직을 독점하는 세도정치가 시행되었다. 이는 탕평정치의 지속에 불만을 품었던 귀족세력의 반발심에 의한 것이다. 대표적인 세도 가문은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반남 박씨, 대구 서씨, 연안 이씨, 풍산 홍씨 등이다. 세도가문의 중심 배경은 임진왜란 이후 강화된 비변사의 기능과 관련이 있다. 비변사는 초기에 왜구·여진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해 국방 관련 일을 처리하는 임시기구로 출발하였지만,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권한이 더욱 확대되어 임시 군사대책기관에서 정책결정기구로까지 그 성격이 변하였다. 이후 조선 후기에는 국정을 총괄하는 기구로써 그 기능이 중요해졌는데, 세도 가문이 비변사를 독점하면서 마음대로 일을 결정하고 왕에게 보고할 수 있었다. 예를들면, 안동 김씨 가문의 대표적 인물인 김조순은 국왕의 장인, 왕비의 친아버지에다가 정조가 친히 국왕(그 당시 세자)을 돌볼 임무를 맡겼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홍문관 대제학(大提學)과 규장각 검교제학(檢校提學)을 오랫동안 맡아 학술과 정치이념을 이끌었고, 당시 최정예 군사력인 훈련도감의 훈련대장을 오래 지내다 심복에게 넘겨주었다. 또한 비변사 주교사당상(舟橋司堂上)을 맡았는데 그것을 통해 대상인의 상업 행위를 감독하고 경제적 실권을 장악했던 것으로 판단된다.&amp;lt;ref&amp;gt; 우리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세도정치」,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9786, 2025. 6. 24.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쇄국정책'''&lt;br /&gt;
&lt;br /&gt;
쇄국정책은 세도정치가 득세했던 철종 사후, 어린 정조가 왕위를 승계하고 그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정치를 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사실 애초에 조선이 활발히 문호를 개방한 것은 아니었으나, 일명 '쇄국정책'은 흥선대원군이 실행한 외교 정책이라 할 수 있다. 흥선대원군은 안으로는 왕권 강화 정책을 펴는 한편, 밖으로는 외세의 침략과 문물을 거부하는 쇄국정책을 강력히 실행하였다. 따라서 세도정치 가문의 주류였던 안동 김씨 세력을 정계에서 몰아내고 다양한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외세의 문호 개방에 응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이는 열강 세력들이 조선을 군사적으로 침략하는 계기가 되었다. &lt;br /&gt;
&lt;br /&gt;
'''개항'''&lt;br /&gt;
&lt;br /&gt;
18세기 조선 해안에는 서양의 함선인 '이양선'이 빈번히 출몰하면서 개항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탐험과 측량을 목적으로 하였지만, 19세기가 되자 배를 끌고와 통상을 요구하였다. 조선은 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 독일 등등 여러 나라에게 통상을 요구받았으나,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말미암아 허가해주지 않았다. 이에 서양 열강 국가들과 조선 사이에 여러차례 전쟁을 발생하였다. &lt;br /&gt;
프랑스 선교사의 죽음을 문제로 프랑스가 일으킨 전쟁은 '병인양요'이며, 독일 상인 옵페르트는 통상 허가를 받지 못하자 흥선 대원군 아버지인 남연군의 무덤을 파 부장품을 훔쳐갔다. 또한, 미국의 제너럴 셔먼호가 조선인과 전투를 벌이던 도중 침몰되자 그 배상을 요구하는 문제로 '신미양요'가 일어났다. 흥선 대원군의 쇄국에 대한 강한 결심과 백성들의 끝없는 항전 덕분에 끝내 쇄국을 지킬 순 있었으나, 결국 조선은 일본의 강화도 사건으로 통상을 허용하면서 잇따라 서양 열강 국가들도 조선과 교류하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사회적 변화==&lt;br /&gt;
&lt;br /&gt;
'''신분제 붕괴와 양반수 증가'''&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 전기에는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의 네 신분이 형성되어 있었다. 양반의 사회적 지위와 특권이 강화되면서, 조선 사회는 양반 중심의 사회로 굳어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신분의 변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어 이러한 신분 구조에 변화가 일어났다. 신분의 변동은 양반층 내부에서 심각하게 일어났는데, 조선 후기에 들어와 노론이 장기간 집권하면서 이들은 정치의 실권을 독점하고 부정한 수단으로 자제들을 과거에 합격시켜 그 지위를 세습시켰다. 이러한 현상은 세도 정치가 시작되면서 더욱 심화되어 신분제의 붕괴가 일어났다.&amp;lt;ref&amp;gt; &amp;lt;/ref&amp;gt; 이후 임진왜란의 영향으로 국가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공명첩'이라는 신분을 사고 팔 수 있는 문서가 생겼다. 돈이 많은 평민들은 신분을 사 양반이 되는 경우가 많았고, 따라서 양반의 수가 증가하게 되었다. 이와 반대로 양반층 내에서도 돈이 부족해 일반 농민이나 소작농으로 생계를 이어가거나 신분을 팔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상품화폐경제 발달'''&lt;br /&gt;
&lt;br /&gt;
상품화폐경제는 조선 후기 상업의 발달과 함께 교환 수단으로 '동전'이 발행되면서 시작되었다. 동전이 교환수단으로 정착하기 이전에는 쌀이 화폐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쌀은 무거워서 많이 가지고 다닐 수 없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가벼운 화폐는 소비의 편리함을 주었고, 따라서 판매와 소비가 촉진하였다. 동전은 숙종 때 발행을 결정하였는데, 불과 몇 십년 되지 않아 많이 유통되었고, 조세 수치를 동전으로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매년 수백냥에 이르는 동전 수취로, 농민들에게 부담을 지게 하여 몰락을 초래하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사상적 변화==&lt;br /&gt;
&lt;br /&gt;
&lt;br /&gt;
'''양명학'''&lt;br /&gt;
&lt;br /&gt;
명나라 왕수인에 의해 집대성된 학문이다. 양명학을 대표하는 키워드는 '지행합일'과 '심즉리'이다. &lt;br /&gt;
이는 주희의 성리학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으나, 성리학과 내용적으로 대립을 이룬다. 주희는 성을 이로, 마음을 기로 파악하였지만, 왕수인은 마음안에 이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lt;br /&gt;
또한 주희는 세상 만물에 안에 이가 있으므로, 격물치지 만물의 이치를 깨달아야 하며 그 진리를 깨닫고 행동해야 한다는 '선지후행'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왕수인의 양명학은 만물에게서 이치를 찾지 않고 이미 마음 속에 이가 있기 때문에 지행합일을 주요 이론으로 정립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실학'''&lt;br /&gt;
&lt;br /&gt;
실학은 조선 후기 사회 경제적 문제들에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 등장한 사상이다. &lt;br /&gt;
실학 사상이 등장하게 된 원인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첫째 조선 왕조의 통치 질서가 위기이다. 조선 왕조는 두번의 전란을 겪으면서 무너질 위기에 쳐했으나 보수적 관료들은 대책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이에 진보적 관리들이 해결책을 내놓으면서 개혁을 주장하였다. 두번째, 성리학이 현실적인 문제에 해결책을 제시해주지 못하였다. 세번째, 조선후기 경제가 발달하면서 발전을 촉구하는 실학 사상이 등장하게 되었다. 네번째, 조선 후기 무너진 신분제로 인해 양반층과 서민들의 생활에 관심이 집중되며 실학 사상이 발달하였다. 다섯번째, 서학의 전래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상이 조선 지식인에게 퍼졌다. 여섯번째, 고증학의 '실사구시'가 영향을 주어 학문에실증적 방법에 주목하였다. &lt;br /&gt;
&lt;br /&gt;
조선의 실학은 농업과 상업 두 갈래를 주축으로 진행되었으며, 이들을 각각 중농학파와 중상학파로 부른다.&lt;br /&gt;
&lt;br /&gt;
중농학파의 경우, 농촌 경제의 안정이 한 백성의 삶과 국가의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에 농업에 주목하였다.&lt;br /&gt;
실학자들은 토지의 편중이 농업의 발달을 저해한다고 보았고, 여러 토지 균분 제도에 대해 의견을 모았다. &lt;br /&gt;
예를 들면, 유형원의 균전론, 이익의 한전론, 정약용의 여전론 등이 있다. &lt;br /&gt;
&lt;br /&gt;
중상학파는 상업의 발전에 주목하였다. 국내 상공업의 발전이 하고, 학자들이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보고 옴에 따라 새로운 경향이 생겼다. &lt;br /&gt;
중상학파 학자들은 신분제의 비효율성, 수레와 화폐 사용, 유통과 소비의 촉진을 주장하며 상업의 발전해야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lt;br /&gt;
이들의 주장과 노력은 보다 적극적인 방안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문화사적 변화==&lt;br /&gt;
&lt;br /&gt;
'''서민문화의 발달'''&lt;br /&gt;
&lt;br /&gt;
조선 후기 상업과 농업이 발달하면서 일반 평민들 중에서도 부를 축적하여 안정된 삶을 구가하였다. 부유해진 이들은 점차 여유가 생겨 예술에 시선을 돌렸고, 자식들을 서당에 나가 공부를 하도록 했는데, 이로 인해 서민문화가 꽃피우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한글소설'''&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후기 '한글소설'이 유행하였다. 한글소설은 한글로 되어 있어 서민들이 읽기 쉬웠으며, 평범한 인물이 등장하여 사회모순을 비판하거나 문제로 삼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lt;br /&gt;
한글소설의 대표적인 작품은 흥부전, 춘향전, 홍길동전, 심청전, 콩쥐와팥쥐, 장화홍련전 등이 있다.&lt;br /&gt;
한글소설은 서민들의 오락기능을 수행하였으며, 일반 서민들 뿐만 아니라 양반 부녀자들, 왕실의 여성 귀족들도 한글 소설을 많이 읽었다. 이는 창덕궁의 낙선재에서 여러 장편 한글 소설이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lt;br /&gt;
한글소설이 발달함에 따라 돈을 주고 책을 빌려주는 세책점이 흥했고, 일정한 장소와 시간에서 소설책을 낭독해주는 이야기꾼 전기수가 많이 등장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사설시조'''&lt;br /&gt;
&lt;br /&gt;
사설지로란 사대부의 대표적인 시가 장르인 기존의 평시조보다 장형화된 것을 말한다. 사설시조는 작가 층에 서민이 유입됨에 따라 발전하였는데, 남년 간의 사랑, 고달픈 삶, 양반 등 지배계층에 대한 풍자가 주요 주제로 채택되었다. 평시조보다 형식과 규칙 등 제약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서민들도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래는 대표적인 사설시조 한 편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두꺼비 파리를 물고 두엄 위에 치달아 앉아 건넛산을 바라보니 흰 송골매 떠 있거늘 가슴이 끔찍하여 풀떡 뛰어 내닫다가 두엄 아래 자빠졌구나 마침 날랜 나였기에 망정이지 피멍 들 뻔하였네''&lt;br /&gt;
&lt;br /&gt;
- 『청구영언』에 수록된 작자 미상의 사설시조 -&lt;br /&gt;
&lt;br /&gt;
&lt;br /&gt;
'''판소리'''&lt;br /&gt;
&lt;br /&gt;
조선 후기는 도시와 상업이 발달하였다. 이에 따라 시장이 활발하였는데, 판소리는 시장을 무대삼아 발달하였다. &lt;br /&gt;
판소리는 소리꾼 한 명과 북치는 사람이 고수 2명으로 구성되었고, 소리꾼은 고수의 북장단에 맞추와 창(노래)와 아니리(말)등으로 판을 이끌어나갔다. &lt;br /&gt;
19세기에 이르러 신재효가 여러 종류의 판소리를 여섯 마당으로 정리하였지만, 현재는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의 다섯 마당만 전해지고 있다. &lt;br /&gt;
판소리는 서민 중심 문화였지만, 이후 양반들까지 퍼지면서 내용이 조금 변하였다. &lt;br /&gt;
초기 판소리는 서민들의 사회 비판 의식이 잘 드러났고, 후기로 갈수록 한문 표현, 충성과 효도 등 유교 윤리 가치관이 반영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탈춤'''&lt;br /&gt;
&lt;br /&gt;
탈춤 또한 판소리와 같이 시장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탈춤은 광대라고 불리는 재주꾼들이 탈을 쓰고 연기, 노래, 춤 등 공연을 하는 것을 말한다. &lt;br /&gt;
당시 양반들에 대한 비판이 주 내용이었고, 전해져오는 탈춤은 안동의 하회 별신굿 탈춤, 황해도의 봉산 탈춤과 강령 탈춤, 북청의 사자놀이가 유명하다. &lt;br /&gt;
탈춤 외에 시장에서 솟대나 줄을 타기도 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4783&lt;br /&gt;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ta/view.do?levelId=ta_h71_0040_0040_0030_0030&lt;br /&gt;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9786&lt;br /&gt;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ta/view.do?levelId=ta_h71_0040_0040_0030_0030&lt;/div&gt;</summary>
		<author><name>Jinhyang</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A1%B0%EC%84%A0_%ED%9B%84%EA%B8%B0&amp;diff=60749</id>
		<title>조선 후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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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06-23T21:37:4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inhyang: &lt;/p&gt;
&lt;hr /&gt;
&lt;div&gt;==주요 키워드==&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lt;br /&gt;
|+ &amp;lt;조선 후기 주요 키워드&amp;gt;&lt;br /&gt;
|+ style=&amp;quot;caption-side:bottom; text-align:left;&amp;quot;|&lt;br /&gt;
| 정치적 변화 || 임진왜란, 병자호란, 탕평책, 북벌론, 북학론, 세도정치, 쇄국정책, 개항&lt;br /&gt;
|-&lt;br /&gt;
| 사회적 변화 || 신분제 붕괴, 양반수 증가, 상품화폐경제 발달&lt;br /&gt;
|-&lt;br /&gt;
| 사상적 변화 || 양명학, 실학&lt;br /&gt;
|-&lt;br /&gt;
| 문화적 변화 || 서민문화 발달, 한글소설, 사설시조, 판소리, 탈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치적 변화==&lt;br /&gt;
'''임진왜란 이후'''&lt;br /&gt;
&lt;br /&gt;
임진왜란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총 7년간 이루어진 전쟁이다. &lt;br /&gt;
7년 간의 전쟁으로 인해 조선, 명, 일본 등 동아시아 국제 관계의 변화가 생겼으며, 모두 큰 피해를 입었다.&lt;br /&gt;
조선의 경우, 전쟁이 본토에서 이루어졌으므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할 수 있다. &lt;br /&gt;
국토는 황폐화되었고 토지를 기록한 장부마저 사라져 임진왜란 이후 제대로 된 세금조차 거둘 수 없었다. &lt;br /&gt;
일본의 경우, 도요토미히데요시 죽음 이후 도쿠가와이에야스가 새로운 쇼군으로 오른 후 '에도막부'시대를 열었다. &lt;br /&gt;
도쿠가와이에야스는 도요토미히데요시 정권과 반대의 입장을 표하며, 새로운 권위를 세우고자 조선과 화친을 맺었다. &lt;br /&gt;
조선도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화친에 응했으며, 이후 쇼군이 요청할 때마다 '통신사'를 파견하여 교류하였다.&lt;br /&gt;
초기 통신사는 일본에 끌려간 포로를 송환하기 위해서였고, 이후 유학 등 선진문물 전파도 이어졌다. &lt;br /&gt;
명의 경우, 조선의 군대 파병으로 군사력이 매우 약화되었다. 이에 반해 북방의 여진 세력은 점점 커져가며 점점 명이 외부세력을 방어하기 힘들어졌고, 이후 여진이 성장하여 국가인 '청'을 세우자 명과의 사대관계를 유지하던 조선도 혼란에 빠졌다. 이는 1636년의 병자호란의 배경과도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병자호란'''&lt;br /&gt;
&lt;br /&gt;
병자호란은 1636년에 일어난 조선과 청 사이에 일어난 전쟁이다. &lt;br /&gt;
1627년 정묘호란 시기, 청과 형제관계를 맺은 이후, 청은 조선과 군신관계를 청했고 조선 내에서는 척화론과 주화론이 대립하며 시간을 끌었다. 결국 척화론이 우세하여 조선은 청의 군신관계 요구를 거절하였고, 이에 화가 난 청나라 황제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조선으로 쳐 들어왔다 =. 당시 최고의 대선책은 임금이 강화도로 피난을 가는 것이었지만, 실패로 끝이 났고 인조는 첩첩한 산 중의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고립된 산성은 빠르게 포위되었고, 결국 군신관계를 맺게 되었다. 병자호란은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왕이 출성항복하는 사건이다. 이후 조선은 사대 상대가 명에서 청으로 바뀌어야 했지만, 결코 쉽지 않았고 명의 중화의식을 가장 잘 계승한 나라라는 '소중화'의식이 조선 사대부들 사이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북벌론과 북학론'''&lt;br /&gt;
&lt;br /&gt;
''북벌론''&lt;br /&gt;
&lt;br /&gt;
북벌론은 오랑캐인 청나라를 정복하여 치욕을 씻고, 중화의식을 회복하자는 의미에서 추진된 담론이다. 북벌론은 병자호란 이후 싹트기 시작했고, 명나라가 사라진 17세기 쯤에 성행하였다. &lt;br /&gt;
인조이후, 효종은 북벌을 시행하기 위해 정치적, 군사적으로 노력하였다. 효종은 척화계열의 산당 세력들을 대거 등용하여 북벌 계획을 세웠으나, 청나라가 조선의 정세를 다 파악할 수 있었기에 청나라는 치는 북벌계획은 구체적으로 시행되기 어려웠다. 또한 거듭된 흉년과 자연재해로 전쟁을 준비할 경제적인 여력이 충분하지 않았고, 결국 북벌론은 소중화 의식을 지닌 조선 사대부들 사이에 퍼져 여전히 '청은 오랑캐이다'라고 주장하게 만들었다. &lt;br /&gt;
&lt;br /&gt;
''북학론''&lt;br /&gt;
&lt;br /&gt;
북한론이란,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담론으로, 이를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은 북학파, 연암일파라고 불려지는 홍대용(洪大容), 성대중(成大中), 박지원(朴趾源), 박제가(朴齊家), 유득공(柳得恭), 이덕무(李德懋), 이서구(李書九), [이희경(李喜經)] 등이다.&lt;br /&gt;
북학의 주요 내용은 벽돌과 수레의 사용, 농기구의 개량, 둔전의 설치, 대외 무역의 장려, 서양인의 초빙과 실제적인 농 · 상업 기술론이었다.&amp;lt;ref&amp;gt;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북학」,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4783,2025.6.24. &amp;lt;/ref&amp;gt; 하지만,기술 도입에 관한 구체적인 방법론이 부족했고 조선의 실정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졌다. 예를 들어 수레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도로가 정비가 앞서 진행되어야 하는데, 도로 구축을 하지 않고 수레 사용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탕평책'''&lt;br /&gt;
&lt;br /&gt;
탕평 정치는 영조 때 자리잡았다. 탕평(蕩平)이란? 서경에서 나온 말로, 임금의 정치가 한쪽을 편들지 않고 사심이 없으며, 당을 이루지도 않는 상태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lt;br /&gt;
영조는 왕과 신하 사이의 의리를 바로 세워야 한다며, 붕당을 없애자는 논리에 동의하는 탕평파를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였다. 그리고 붕당의 뿌리를 제거하기 위하여 공론의 주재자로서 인식되던 산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들의 본거지인 서원을 대폭 정리하였다. 아울러 이조 전랑의 권한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그들이 자신의 후임자를 천거하고, 3사의 관리를 선발할 수 있게 해 주던 관행을 없앴다. 그러나 이조 전랑의 후임자 천거권은 이후 정조대에 가서야 완전히 폐지되었다.&amp;lt;ref&amp;gt; 우리역사넷, 「영조와 정조의 탕평 정치」,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ta/view.do?levelId=ta_h71_0040_0040_0030_0030, 2025. 6. 24.&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영조 때 시행한 탕평책은 정조 때에 더욱 강화하였다. 정조는 누가 옳은지 그른지 명백히 규명하여 적극적으로 탕평책을 주도하였으며, 영조 때 세력을 키운 척신과 환관 등을 제거하였다. 게다가 권력에서 배제되었던 소론과 남인 계열의 관리들도 정치에 참여하도록 독려하였다. 붕당정치 세력이 커질 것을 우려하여 새로운 신진 인물을 등용하고, 이들을 비롯한 중, 하급 관리에서 유능한 인재를 뽑아 교육을 시키는 초계문신제를 도입하였다. &lt;br /&gt;
&lt;br /&gt;
'''세도정치'''&lt;br /&gt;
&lt;br /&gt;
19세기에는 특정 가문이 관직을 독점하는 세도정치가 시행되었다. 이는 탕평정치의 지속에 불만을 품었던 귀족세력의 반발심에 의한 것이다. 대표적인 세도 가문은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반남 박씨, 대구 서씨, 연안 이씨, 풍산 홍씨 등이다. 세도가문의 중심 배경은 임진왜란 이후 강화된 비변사의 기능과 관련이 있다. 비변사는 초기에 왜구·여진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해 국방 관련 일을 처리하는 임시기구로 출발하였지만,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권한이 더욱 확대되어 임시 군사대책기관에서 정책결정기구로까지 그 성격이 변하였다. 이후 조선 후기에는 국정을 총괄하는 기구로써 그 기능이 중요해졌는데, 세도 가문이 비변사를 독점하면서 마음대로 일을 결정하고 왕에게 보고할 수 있었다. 예를들면, 안동 김씨 가문의 대표적 인물인 김조순은 국왕의 장인, 왕비의 친아버지에다가 정조가 친히 국왕(그 당시 세자)을 돌볼 임무를 맡겼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홍문관 대제학(大提學)과 규장각 검교제학(檢校提學)을 오랫동안 맡아 학술과 정치이념을 이끌었고, 당시 최정예 군사력인 훈련도감의 훈련대장을 오래 지내다 심복에게 넘겨주었다. 또한 비변사 주교사당상(舟橋司堂上)을 맡았는데 그것을 통해 대상인의 상업 행위를 감독하고 경제적 실권을 장악했던 것으로 판단된다.&amp;lt;ref&amp;gt;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쇄국정책'''&lt;br /&gt;
&lt;br /&gt;
쇄국정책은 세도정치가 득세했던 철종 사후, 어린 정조가 왕위를 승계하고 그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정치를 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사실 애초에 조선이 활발히 문호를 개방한 것은 아니었으나, 일명 '쇄국정책'은 흥선대원군이 실행한 외교 정책이라 할 수 있다. 흥선대원군은 안으로는 왕권 강화 정책을 펴는 한편, 밖으로는 외세의 침략과 문물을 거부하는 쇄국정책을 강력히 실행하였다. 따라서 세도정치 가문의 주류였던 안동 김씨 세력을 정계에서 몰아내고 다양한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외세의 문호 개방에 응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이는 열강 세력들이 조선을 군사적으로 침략하는 계기가 되었다. &lt;br /&gt;
&lt;br /&gt;
'''개항'''&lt;br /&gt;
&lt;br /&gt;
18세기 조선 해안에는 서양의 함선인 '이양선'이 빈번히 출몰하면서 개항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탐험과 측량을 목적으로 하였지만, 19세기가 되자 배를 끌고와 통상을 요구하였다. 조선은 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 독일 등등 여러 나라에게 통상을 요구받았으나,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말미암아 허가해주지 않았다. 이에 서양 열강 국가들과 조선 사이에 여러차례 전쟁을 발생하였다. &lt;br /&gt;
프랑스 선교사의 죽음을 문제로 프랑스가 일으킨 전쟁은 '병인양요'이며, 독일 상인 옵페르트는 통상 허가를 받지 못하자 흥선 대원군 아버지인 남연군의 무덤을 파 부장품을 훔쳐갔다. 또한, 미국의 제너럴 셔먼호가 조선인과 전투를 벌이던 도중 침몰되자 그 배상을 요구하는 문제로 '신미양요'가 일어났다. 흥선 대원군의 쇄국에 대한 강한 결심과 백성들의 끝없는 항전 덕분에 끝내 쇄국을 지킬 순 있었으나, 결국 조선은 일본의 강화도 사건으로 통상을 허용하면서 잇따라 서양 열강 국가들도 조선과 교류하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사회적 변화==&lt;br /&gt;
&lt;br /&gt;
'''신분제 붕괴와 양반수 증가'''&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 전기에는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의 네 신분이 형성되어 있었다. 양반의 사회적 지위와 특권이 강화되면서, 조선 사회는 양반 중심의 사회로 굳어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신분의 변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어 이러한 신분 구조에 변화가 일어났다. 신분의 변동은 양반층 내부에서 심각하게 일어났는데, 조선 후기에 들어와 노론이 장기간 집권하면서 이들은 정치의 실권을 독점하고 부정한 수단으로 자제들을 과거에 합격시켜 그 지위를 세습시켰다. 이러한 현상은 세도 정치가 시작되면서 더욱 심화되어 신분제의 붕괴가 일어났다.&amp;lt;ref&amp;gt; &amp;lt;/ref&amp;gt; 이후 임진왜란의 영향으로 국가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공명첩'이라는 신분을 사고 팔 수 있는 문서가 생겼다. 돈이 많은 평민들은 신분을 사 양반이 되는 경우가 많았고, 따라서 양반의 수가 증가하게 되었다. 이와 반대로 양반층 내에서도 돈이 부족해 일반 농민이나 소작농으로 생계를 이어가거나 신분을 팔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상품화폐경제 발달'''&lt;br /&gt;
&lt;br /&gt;
상품화폐경제는 조선 후기 상업의 발달과 함께 교환 수단으로 '동전'이 발행되면서 시작되었다. 동전이 교환수단으로 정착하기 이전에는 쌀이 화폐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쌀은 무거워서 많이 가지고 다닐 수 없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가벼운 화폐는 소비의 편리함을 주었고, 따라서 판매와 소비가 촉진하였다. 동전은 숙종 때 발행을 결정하였는데, 불과 몇 십년 되지 않아 많이 유통되었고, 조세 수치를 동전으로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매년 수백냥에 이르는 동전 수취로, 농민들에게 부담을 지게 하여 몰락을 초래하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사상적 변화==&lt;br /&gt;
&lt;br /&gt;
&lt;br /&gt;
'''양명학'''&lt;br /&gt;
&lt;br /&gt;
명나라 왕수인에 의해 집대성된 학문이다. 양명학을 대표하는 키워드는 '지행합일'과 '심즉리'이다. &lt;br /&gt;
이는 주희의 성리학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으나, 성리학과 내용적으로 대립을 이룬다. 주희는 성을 이로, 마음을 기로 파악하였지만, 왕수인은 마음안에 이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lt;br /&gt;
또한 주희는 세상 만물에 안에 이가 있으므로, 격물치지 만물의 이치를 깨달아야 하며 그 진리를 깨닫고 행동해야 한다는 '선지후행'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왕수인의 양명학은 만물에게서 이치를 찾지 않고 이미 마음 속에 이가 있기 때문에 지행합일을 주요 이론으로 정립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실학'''&lt;br /&gt;
&lt;br /&gt;
실학은 조선 후기 사회 경제적 문제들에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 등장한 사상이다. &lt;br /&gt;
실학 사상이 등장하게 된 원인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첫째 조선 왕조의 통치 질서가 위기이다. 조선 왕조는 두번의 전란을 겪으면서 무너질 위기에 쳐했으나 보수적 관료들은 대책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이에 진보적 관리들이 해결책을 내놓으면서 개혁을 주장하였다. 두번째, 성리학이 현실적인 문제에 해결책을 제시해주지 못하였다. 세번째, 조선후기 경제가 발달하면서 발전을 촉구하는 실학 사상이 등장하게 되었다. 네번째, 조선 후기 무너진 신분제로 인해 양반층과 서민들의 생활에 관심이 집중되며 실학 사상이 발달하였다. 다섯번째, 서학의 전래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상이 조선 지식인에게 퍼졌다. 여섯번째, 고증학의 '실사구시'가 영향을 주어 학문에실증적 방법에 주목하였다. &lt;br /&gt;
&lt;br /&gt;
조선의 실학은 농업과 상업 두 갈래를 주축으로 진행되었으며, 이들을 각각 중농학파와 중상학파로 부른다.&lt;br /&gt;
&lt;br /&gt;
중농학파의 경우, 농촌 경제의 안정이 한 백성의 삶과 국가의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에 농업에 주목하였다.&lt;br /&gt;
실학자들은 토지의 편중이 농업의 발달을 저해한다고 보았고, 여러 토지 균분 제도에 대해 의견을 모았다. &lt;br /&gt;
예를 들면, 유형원의 균전론, 이익의 한전론, 정약용의 여전론 등이 있다. &lt;br /&gt;
&lt;br /&gt;
중상학파는 상업의 발전에 주목하였다. 국내 상공업의 발전이 하고, 학자들이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보고 옴에 따라 새로운 경향이 생겼다. &lt;br /&gt;
중상학파 학자들은 신분제의 비효율성, 수레와 화폐 사용, 유통과 소비의 촉진을 주장하며 상업의 발전해야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lt;br /&gt;
이들의 주장과 노력은 보다 적극적인 방안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문화사적 변화==&lt;br /&gt;
&lt;br /&gt;
'''서민문화의 발달'''&lt;br /&gt;
&lt;br /&gt;
조선 후기 상업과 농업이 발달하면서 일반 평민들 중에서도 부를 축적하여 안정된 삶을 구가하였다. 부유해진 이들은 점차 여유가 생겨 예술에 시선을 돌렸고, 자식들을 서당에 나가 공부를 하도록 했는데, 이로 인해 서민문화가 꽃피우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한글소설'''&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후기 '한글소설'이 유행하였다. 한글소설은 한글로 되어 있어 서민들이 읽기 쉬웠으며, 평범한 인물이 등장하여 사회모순을 비판하거나 문제로 삼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lt;br /&gt;
한글소설의 대표적인 작품은 흥부전, 춘향전, 홍길동전, 심청전, 콩쥐와팥쥐, 장화홍련전 등이 있다.&lt;br /&gt;
한글소설은 서민들의 오락기능을 수행하였으며, 일반 서민들 뿐만 아니라 양반 부녀자들, 왕실의 여성 귀족들도 한글 소설을 많이 읽었다. 이는 창덕궁의 낙선재에서 여러 장편 한글 소설이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lt;br /&gt;
한글소설이 발달함에 따라 돈을 주고 책을 빌려주는 세책점이 흥했고, 일정한 장소와 시간에서 소설책을 낭독해주는 이야기꾼 전기수가 많이 등장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사설시조'''&lt;br /&gt;
&lt;br /&gt;
사설지로란 사대부의 대표적인 시가 장르인 기존의 평시조보다 장형화된 것을 말한다. 사설시조는 작가 층에 서민이 유입됨에 따라 발전하였는데, 남년 간의 사랑, 고달픈 삶, 양반 등 지배계층에 대한 풍자가 주요 주제로 채택되었다. 평시조보다 형식과 규칙 등 제약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서민들도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래는 대표적인 사설시조 한 편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두꺼비 파리를 물고 두엄 위에 치달아 앉아 건넛산을 바라보니 흰 송골매 떠 있거늘 가슴이 끔찍하여 풀떡 뛰어 내닫다가 두엄 아래 자빠졌구나 마침 날랜 나였기에 망정이지 피멍 들 뻔하였네''&lt;br /&gt;
&lt;br /&gt;
- 『청구영언』에 수록된 작자 미상의 사설시조 -&lt;br /&gt;
&lt;br /&gt;
&lt;br /&gt;
'''판소리'''&lt;br /&gt;
&lt;br /&gt;
조선 후기는 도시와 상업이 발달하였다. 이에 따라 시장이 활발하였는데, 판소리는 시장을 무대삼아 발달하였다. &lt;br /&gt;
판소리는 소리꾼 한 명과 북치는 사람이 고수 2명으로 구성되었고, 소리꾼은 고수의 북장단에 맞추와 창(노래)와 아니리(말)등으로 판을 이끌어나갔다. &lt;br /&gt;
19세기에 이르러 신재효가 여러 종류의 판소리를 여섯 마당으로 정리하였지만, 현재는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의 다섯 마당만 전해지고 있다. &lt;br /&gt;
판소리는 서민 중심 문화였지만, 이후 양반들까지 퍼지면서 내용이 조금 변하였다. &lt;br /&gt;
초기 판소리는 서민들의 사회 비판 의식이 잘 드러났고, 후기로 갈수록 한문 표현, 충성과 효도 등 유교 윤리 가치관이 반영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탈춤'''&lt;br /&gt;
&lt;br /&gt;
탈춤 또한 판소리와 같이 시장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탈춤은 광대라고 불리는 재주꾼들이 탈을 쓰고 연기, 노래, 춤 등 공연을 하는 것을 말한다. &lt;br /&gt;
당시 양반들에 대한 비판이 주 내용이었고, 전해져오는 탈춤은 안동의 하회 별신굿 탈춤, 황해도의 봉산 탈춤과 강령 탈춤, 북청의 사자놀이가 유명하다. &lt;br /&gt;
탈춤 외에 시장에서 솟대나 줄을 타기도 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4783&lt;br /&gt;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ta/view.do?levelId=ta_h71_0040_0040_0030_0030&lt;br /&gt;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9786&lt;br /&gt;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ta/view.do?levelId=ta_h71_0040_0040_0030_0030&lt;/div&gt;</summary>
		<author><name>Jinhyang</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A1%B0%EC%84%A0_%ED%9B%84%EA%B8%B0&amp;diff=60746</id>
		<title>조선 후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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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06-23T21:36:5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inhyang: &lt;/p&gt;
&lt;hr /&gt;
&lt;div&gt;==주요 키워드==&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lt;br /&gt;
|+ &amp;lt;조선 후기 주요 키워드&amp;gt;&lt;br /&gt;
|+ style=&amp;quot;caption-side:bottom; text-align:left;&amp;quot;|&lt;br /&gt;
| 정치적 변화 || 임진왜란, 병자호란, 탕평책, 북벌론, 북학론, 세도정치, 쇄국정책, 개항&lt;br /&gt;
|-&lt;br /&gt;
| 사회적 변화 || 신분제 붕괴, 양반수 증가, 상품화폐경제 발달&lt;br /&gt;
|-&lt;br /&gt;
| 사상적 변화 || 양명학, 실학&lt;br /&gt;
|-&lt;br /&gt;
| 문화적 변화 || 서민문화 발달, 한글소설, 사설시조, 판소리, 탈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치적 변화==&lt;br /&gt;
'''임진왜란 이후'''&lt;br /&gt;
&lt;br /&gt;
임진왜란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총 7년간 이루어진 전쟁이다. &lt;br /&gt;
7년 간의 전쟁으로 인해 조선, 명, 일본 등 동아시아 국제 관계의 변화가 생겼으며, 모두 큰 피해를 입었다.&lt;br /&gt;
조선의 경우, 전쟁이 본토에서 이루어졌으므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할 수 있다. &lt;br /&gt;
국토는 황폐화되었고 토지를 기록한 장부마저 사라져 임진왜란 이후 제대로 된 세금조차 거둘 수 없었다. &lt;br /&gt;
일본의 경우, 도요토미히데요시 죽음 이후 도쿠가와이에야스가 새로운 쇼군으로 오른 후 '에도막부'시대를 열었다. &lt;br /&gt;
도쿠가와이에야스는 도요토미히데요시 정권과 반대의 입장을 표하며, 새로운 권위를 세우고자 조선과 화친을 맺었다. &lt;br /&gt;
조선도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화친에 응했으며, 이후 쇼군이 요청할 때마다 '통신사'를 파견하여 교류하였다.&lt;br /&gt;
초기 통신사는 일본에 끌려간 포로를 송환하기 위해서였고, 이후 유학 등 선진문물 전파도 이어졌다. &lt;br /&gt;
명의 경우, 조선의 군대 파병으로 군사력이 매우 약화되었다. 이에 반해 북방의 여진 세력은 점점 커져가며 점점 명이 외부세력을 방어하기 힘들어졌고, 이후 여진이 성장하여 국가인 '청'을 세우자 명과의 사대관계를 유지하던 조선도 혼란에 빠졌다. 이는 1636년의 병자호란의 배경과도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병자호란'''&lt;br /&gt;
&lt;br /&gt;
병자호란은 1636년에 일어난 조선과 청 사이에 일어난 전쟁이다. &lt;br /&gt;
1627년 정묘호란 시기, 청과 형제관계를 맺은 이후, 청은 조선과 군신관계를 청했고 조선 내에서는 척화론과 주화론이 대립하며 시간을 끌었다. 결국 척화론이 우세하여 조선은 청의 군신관계 요구를 거절하였고, 이에 화가 난 청나라 황제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조선으로 쳐 들어왔다 =. 당시 최고의 대선책은 임금이 강화도로 피난을 가는 것이었지만, 실패로 끝이 났고 인조는 첩첩한 산 중의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고립된 산성은 빠르게 포위되었고, 결국 군신관계를 맺게 되었다. 병자호란은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왕이 출성항복하는 사건이다. 이후 조선은 사대 상대가 명에서 청으로 바뀌어야 했지만, 결코 쉽지 않았고 명의 중화의식을 가장 잘 계승한 나라라는 '소중화'의식이 조선 사대부들 사이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북벌론과 북학론'''&lt;br /&gt;
&lt;br /&gt;
''북벌론''&lt;br /&gt;
&lt;br /&gt;
북벌론은 오랑캐인 청나라를 정복하여 치욕을 씻고, 중화의식을 회복하자는 의미에서 추진된 담론이다. 북벌론은 병자호란 이후 싹트기 시작했고, 명나라가 사라진 17세기 쯤에 성행하였다. &lt;br /&gt;
인조이후, 효종은 북벌을 시행하기 위해 정치적, 군사적으로 노력하였다. 효종은 척화계열의 산당 세력들을 대거 등용하여 북벌 계획을 세웠으나, 청나라가 조선의 정세를 다 파악할 수 있었기에 청나라는 치는 북벌계획은 구체적으로 시행되기 어려웠다. 또한 거듭된 흉년과 자연재해로 전쟁을 준비할 경제적인 여력이 충분하지 않았고, 결국 북벌론은 소중화 의식을 지닌 조선 사대부들 사이에 퍼져 여전히 '청은 오랑캐이다'라고 주장하게 만들었다. &lt;br /&gt;
&lt;br /&gt;
''북학론''&lt;br /&gt;
&lt;br /&gt;
북한론이란,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담론으로, 이를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은 북학파, 연암일파라고 불려지는 홍대용(洪大容), 성대중(成大中), 박지원(朴趾源), 박제가(朴齊家), 유득공(柳得恭), 이덕무(李德懋), 이서구(李書九), [이희경(李喜經)] 등이다.&lt;br /&gt;
북학의 주요 내용은 벽돌과 수레의 사용, 농기구의 개량, 둔전의 설치, 대외 무역의 장려, 서양인의 초빙과 실제적인 농 · 상업 기술론이었다.&amp;lt;ref&amp;gt;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북학」,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4783,2025.6.24. &amp;lt;/ref&amp;gt; 하지만,기술 도입에 관한 구체적인 방법론이 부족했고 조선의 실정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졌다. 예를 들어 수레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도로가 정비가 앞서 진행되어야 하는데, 도로 구축을 하지 않고 수레 사용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탕평책'''&lt;br /&gt;
&lt;br /&gt;
탕평 정치는 영조 때 자리잡았다. 탕평(蕩平)이란? 서경에서 나온 말로, 임금의 정치가 한쪽을 편들지 않고 사심이 없으며, 당을 이루지도 않는 상태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lt;br /&gt;
영조는 왕과 신하 사이의 의리를 바로 세워야 한다며, 붕당을 없애자는 논리에 동의하는 탕평파를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였다. 그리고 붕당의 뿌리를 제거하기 위하여 공론의 주재자로서 인식되던 산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들의 본거지인 서원을 대폭 정리하였다. 아울러 이조 전랑의 권한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그들이 자신의 후임자를 천거하고, 3사의 관리를 선발할 수 있게 해 주던 관행을 없앴다. 그러나 이조 전랑의 후임자 천거권은 이후 정조대에 가서야 완전히 폐지되었다.&amp;lt;ref&amp;gt; 우리역사넷, 「탕평책」,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ta/view.do?levelId=ta_h71_0040_0040_0030_0030&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영조 때 시행한 탕평책은 정조 때에 더욱 강화하였다. 정조는 누가 옳은지 그른지 명백히 규명하여 적극적으로 탕평책을 주도하였으며, 영조 때 세력을 키운 척신과 환관 등을 제거하였다. 게다가 권력에서 배제되었던 소론과 남인 계열의 관리들도 정치에 참여하도록 독려하였다. 붕당정치 세력이 커질 것을 우려하여 새로운 신진 인물을 등용하고, 이들을 비롯한 중, 하급 관리에서 유능한 인재를 뽑아 교육을 시키는 초계문신제를 도입하였다. &lt;br /&gt;
&lt;br /&gt;
'''세도정치'''&lt;br /&gt;
&lt;br /&gt;
19세기에는 특정 가문이 관직을 독점하는 세도정치가 시행되었다. 이는 탕평정치의 지속에 불만을 품었던 귀족세력의 반발심에 의한 것이다. 대표적인 세도 가문은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반남 박씨, 대구 서씨, 연안 이씨, 풍산 홍씨 등이다. 세도가문의 중심 배경은 임진왜란 이후 강화된 비변사의 기능과 관련이 있다. 비변사는 초기에 왜구·여진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해 국방 관련 일을 처리하는 임시기구로 출발하였지만,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권한이 더욱 확대되어 임시 군사대책기관에서 정책결정기구로까지 그 성격이 변하였다. 이후 조선 후기에는 국정을 총괄하는 기구로써 그 기능이 중요해졌는데, 세도 가문이 비변사를 독점하면서 마음대로 일을 결정하고 왕에게 보고할 수 있었다. 예를들면, 안동 김씨 가문의 대표적 인물인 김조순은 국왕의 장인, 왕비의 친아버지에다가 정조가 친히 국왕(그 당시 세자)을 돌볼 임무를 맡겼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홍문관 대제학(大提學)과 규장각 검교제학(檢校提學)을 오랫동안 맡아 학술과 정치이념을 이끌었고, 당시 최정예 군사력인 훈련도감의 훈련대장을 오래 지내다 심복에게 넘겨주었다. 또한 비변사 주교사당상(舟橋司堂上)을 맡았는데 그것을 통해 대상인의 상업 행위를 감독하고 경제적 실권을 장악했던 것으로 판단된다.&amp;lt;ref&amp;gt;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쇄국정책'''&lt;br /&gt;
&lt;br /&gt;
쇄국정책은 세도정치가 득세했던 철종 사후, 어린 정조가 왕위를 승계하고 그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정치를 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사실 애초에 조선이 활발히 문호를 개방한 것은 아니었으나, 일명 '쇄국정책'은 흥선대원군이 실행한 외교 정책이라 할 수 있다. 흥선대원군은 안으로는 왕권 강화 정책을 펴는 한편, 밖으로는 외세의 침략과 문물을 거부하는 쇄국정책을 강력히 실행하였다. 따라서 세도정치 가문의 주류였던 안동 김씨 세력을 정계에서 몰아내고 다양한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외세의 문호 개방에 응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이는 열강 세력들이 조선을 군사적으로 침략하는 계기가 되었다. &lt;br /&gt;
&lt;br /&gt;
'''개항'''&lt;br /&gt;
&lt;br /&gt;
18세기 조선 해안에는 서양의 함선인 '이양선'이 빈번히 출몰하면서 개항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탐험과 측량을 목적으로 하였지만, 19세기가 되자 배를 끌고와 통상을 요구하였다. 조선은 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 독일 등등 여러 나라에게 통상을 요구받았으나,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말미암아 허가해주지 않았다. 이에 서양 열강 국가들과 조선 사이에 여러차례 전쟁을 발생하였다. &lt;br /&gt;
프랑스 선교사의 죽음을 문제로 프랑스가 일으킨 전쟁은 '병인양요'이며, 독일 상인 옵페르트는 통상 허가를 받지 못하자 흥선 대원군 아버지인 남연군의 무덤을 파 부장품을 훔쳐갔다. 또한, 미국의 제너럴 셔먼호가 조선인과 전투를 벌이던 도중 침몰되자 그 배상을 요구하는 문제로 '신미양요'가 일어났다. 흥선 대원군의 쇄국에 대한 강한 결심과 백성들의 끝없는 항전 덕분에 끝내 쇄국을 지킬 순 있었으나, 결국 조선은 일본의 강화도 사건으로 통상을 허용하면서 잇따라 서양 열강 국가들도 조선과 교류하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사회적 변화==&lt;br /&gt;
&lt;br /&gt;
'''신분제 붕괴와 양반수 증가'''&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 전기에는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의 네 신분이 형성되어 있었다. 양반의 사회적 지위와 특권이 강화되면서, 조선 사회는 양반 중심의 사회로 굳어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신분의 변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어 이러한 신분 구조에 변화가 일어났다. 신분의 변동은 양반층 내부에서 심각하게 일어났는데, 조선 후기에 들어와 노론이 장기간 집권하면서 이들은 정치의 실권을 독점하고 부정한 수단으로 자제들을 과거에 합격시켜 그 지위를 세습시켰다. 이러한 현상은 세도 정치가 시작되면서 더욱 심화되어 신분제의 붕괴가 일어났다.&amp;lt;ref&amp;gt; &amp;lt;/ref&amp;gt; 이후 임진왜란의 영향으로 국가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공명첩'이라는 신분을 사고 팔 수 있는 문서가 생겼다. 돈이 많은 평민들은 신분을 사 양반이 되는 경우가 많았고, 따라서 양반의 수가 증가하게 되었다. 이와 반대로 양반층 내에서도 돈이 부족해 일반 농민이나 소작농으로 생계를 이어가거나 신분을 팔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상품화폐경제 발달'''&lt;br /&gt;
&lt;br /&gt;
상품화폐경제는 조선 후기 상업의 발달과 함께 교환 수단으로 '동전'이 발행되면서 시작되었다. 동전이 교환수단으로 정착하기 이전에는 쌀이 화폐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쌀은 무거워서 많이 가지고 다닐 수 없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가벼운 화폐는 소비의 편리함을 주었고, 따라서 판매와 소비가 촉진하였다. 동전은 숙종 때 발행을 결정하였는데, 불과 몇 십년 되지 않아 많이 유통되었고, 조세 수치를 동전으로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매년 수백냥에 이르는 동전 수취로, 농민들에게 부담을 지게 하여 몰락을 초래하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사상적 변화==&lt;br /&gt;
&lt;br /&gt;
&lt;br /&gt;
'''양명학'''&lt;br /&gt;
&lt;br /&gt;
명나라 왕수인에 의해 집대성된 학문이다. 양명학을 대표하는 키워드는 '지행합일'과 '심즉리'이다. &lt;br /&gt;
이는 주희의 성리학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으나, 성리학과 내용적으로 대립을 이룬다. 주희는 성을 이로, 마음을 기로 파악하였지만, 왕수인은 마음안에 이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lt;br /&gt;
또한 주희는 세상 만물에 안에 이가 있으므로, 격물치지 만물의 이치를 깨달아야 하며 그 진리를 깨닫고 행동해야 한다는 '선지후행'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왕수인의 양명학은 만물에게서 이치를 찾지 않고 이미 마음 속에 이가 있기 때문에 지행합일을 주요 이론으로 정립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실학'''&lt;br /&gt;
&lt;br /&gt;
실학은 조선 후기 사회 경제적 문제들에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 등장한 사상이다. &lt;br /&gt;
실학 사상이 등장하게 된 원인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첫째 조선 왕조의 통치 질서가 위기이다. 조선 왕조는 두번의 전란을 겪으면서 무너질 위기에 쳐했으나 보수적 관료들은 대책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이에 진보적 관리들이 해결책을 내놓으면서 개혁을 주장하였다. 두번째, 성리학이 현실적인 문제에 해결책을 제시해주지 못하였다. 세번째, 조선후기 경제가 발달하면서 발전을 촉구하는 실학 사상이 등장하게 되었다. 네번째, 조선 후기 무너진 신분제로 인해 양반층과 서민들의 생활에 관심이 집중되며 실학 사상이 발달하였다. 다섯번째, 서학의 전래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상이 조선 지식인에게 퍼졌다. 여섯번째, 고증학의 '실사구시'가 영향을 주어 학문에실증적 방법에 주목하였다. &lt;br /&gt;
&lt;br /&gt;
조선의 실학은 농업과 상업 두 갈래를 주축으로 진행되었으며, 이들을 각각 중농학파와 중상학파로 부른다.&lt;br /&gt;
&lt;br /&gt;
중농학파의 경우, 농촌 경제의 안정이 한 백성의 삶과 국가의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에 농업에 주목하였다.&lt;br /&gt;
실학자들은 토지의 편중이 농업의 발달을 저해한다고 보았고, 여러 토지 균분 제도에 대해 의견을 모았다. &lt;br /&gt;
예를 들면, 유형원의 균전론, 이익의 한전론, 정약용의 여전론 등이 있다. &lt;br /&gt;
&lt;br /&gt;
중상학파는 상업의 발전에 주목하였다. 국내 상공업의 발전이 하고, 학자들이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보고 옴에 따라 새로운 경향이 생겼다. &lt;br /&gt;
중상학파 학자들은 신분제의 비효율성, 수레와 화폐 사용, 유통과 소비의 촉진을 주장하며 상업의 발전해야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lt;br /&gt;
이들의 주장과 노력은 보다 적극적인 방안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문화사적 변화==&lt;br /&gt;
&lt;br /&gt;
'''서민문화의 발달'''&lt;br /&gt;
&lt;br /&gt;
조선 후기 상업과 농업이 발달하면서 일반 평민들 중에서도 부를 축적하여 안정된 삶을 구가하였다. 부유해진 이들은 점차 여유가 생겨 예술에 시선을 돌렸고, 자식들을 서당에 나가 공부를 하도록 했는데, 이로 인해 서민문화가 꽃피우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한글소설'''&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후기 '한글소설'이 유행하였다. 한글소설은 한글로 되어 있어 서민들이 읽기 쉬웠으며, 평범한 인물이 등장하여 사회모순을 비판하거나 문제로 삼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lt;br /&gt;
한글소설의 대표적인 작품은 흥부전, 춘향전, 홍길동전, 심청전, 콩쥐와팥쥐, 장화홍련전 등이 있다.&lt;br /&gt;
한글소설은 서민들의 오락기능을 수행하였으며, 일반 서민들 뿐만 아니라 양반 부녀자들, 왕실의 여성 귀족들도 한글 소설을 많이 읽었다. 이는 창덕궁의 낙선재에서 여러 장편 한글 소설이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lt;br /&gt;
한글소설이 발달함에 따라 돈을 주고 책을 빌려주는 세책점이 흥했고, 일정한 장소와 시간에서 소설책을 낭독해주는 이야기꾼 전기수가 많이 등장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사설시조'''&lt;br /&gt;
&lt;br /&gt;
사설지로란 사대부의 대표적인 시가 장르인 기존의 평시조보다 장형화된 것을 말한다. 사설시조는 작가 층에 서민이 유입됨에 따라 발전하였는데, 남년 간의 사랑, 고달픈 삶, 양반 등 지배계층에 대한 풍자가 주요 주제로 채택되었다. 평시조보다 형식과 규칙 등 제약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서민들도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래는 대표적인 사설시조 한 편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두꺼비 파리를 물고 두엄 위에 치달아 앉아 건넛산을 바라보니 흰 송골매 떠 있거늘 가슴이 끔찍하여 풀떡 뛰어 내닫다가 두엄 아래 자빠졌구나 마침 날랜 나였기에 망정이지 피멍 들 뻔하였네''&lt;br /&gt;
&lt;br /&gt;
- 『청구영언』에 수록된 작자 미상의 사설시조 -&lt;br /&gt;
&lt;br /&gt;
&lt;br /&gt;
'''판소리'''&lt;br /&gt;
&lt;br /&gt;
조선 후기는 도시와 상업이 발달하였다. 이에 따라 시장이 활발하였는데, 판소리는 시장을 무대삼아 발달하였다. &lt;br /&gt;
판소리는 소리꾼 한 명과 북치는 사람이 고수 2명으로 구성되었고, 소리꾼은 고수의 북장단에 맞추와 창(노래)와 아니리(말)등으로 판을 이끌어나갔다. &lt;br /&gt;
19세기에 이르러 신재효가 여러 종류의 판소리를 여섯 마당으로 정리하였지만, 현재는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의 다섯 마당만 전해지고 있다. &lt;br /&gt;
판소리는 서민 중심 문화였지만, 이후 양반들까지 퍼지면서 내용이 조금 변하였다. &lt;br /&gt;
초기 판소리는 서민들의 사회 비판 의식이 잘 드러났고, 후기로 갈수록 한문 표현, 충성과 효도 등 유교 윤리 가치관이 반영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탈춤'''&lt;br /&gt;
&lt;br /&gt;
탈춤 또한 판소리와 같이 시장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탈춤은 광대라고 불리는 재주꾼들이 탈을 쓰고 연기, 노래, 춤 등 공연을 하는 것을 말한다. &lt;br /&gt;
당시 양반들에 대한 비판이 주 내용이었고, 전해져오는 탈춤은 안동의 하회 별신굿 탈춤, 황해도의 봉산 탈춤과 강령 탈춤, 북청의 사자놀이가 유명하다. &lt;br /&gt;
탈춤 외에 시장에서 솟대나 줄을 타기도 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4783&lt;br /&gt;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ta/view.do?levelId=ta_h71_0040_0040_0030_0030&lt;br /&gt;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9786&lt;br /&gt;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ta/view.do?levelId=ta_h71_0040_0040_0030_0030&lt;/div&gt;</summary>
		<author><name>Jinhyang</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A1%B0%EC%84%A0_%ED%9B%84%EA%B8%B0&amp;diff=60742</id>
		<title>조선 후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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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06-23T21:35:3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inhyang: &lt;/p&gt;
&lt;hr /&gt;
&lt;div&gt;==주요 키워드==&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lt;br /&gt;
|+ &amp;lt;조선 후기 주요 키워드&amp;gt;&lt;br /&gt;
|+ style=&amp;quot;caption-side:bottom; text-align:left;&amp;quot;|&lt;br /&gt;
| 정치적 변화 || 임진왜란, 병자호란, 탕평책, 북벌론, 북학론, 세도정치, 쇄국정책, 개항&lt;br /&gt;
|-&lt;br /&gt;
| 사회적 변화 || 신분제 붕괴, 양반수 증가, 상품화폐경제 발달&lt;br /&gt;
|-&lt;br /&gt;
| 사상적 변화 || 양명학, 실학&lt;br /&gt;
|-&lt;br /&gt;
| 문화적 변화 || 서민문화 발달, 한글소설, 사설시조, 판소리, 탈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치적 변화==&lt;br /&gt;
'''임진왜란 이후'''&lt;br /&gt;
&lt;br /&gt;
임진왜란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총 7년간 이루어진 전쟁이다. &lt;br /&gt;
7년 간의 전쟁으로 인해 조선, 명, 일본 등 동아시아 국제 관계의 변화가 생겼으며, 모두 큰 피해를 입었다.&lt;br /&gt;
조선의 경우, 전쟁이 본토에서 이루어졌으므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할 수 있다. &lt;br /&gt;
국토는 황폐화되었고 토지를 기록한 장부마저 사라져 임진왜란 이후 제대로 된 세금조차 거둘 수 없었다. &lt;br /&gt;
일본의 경우, 도요토미히데요시 죽음 이후 도쿠가와이에야스가 새로운 쇼군으로 오른 후 '에도막부'시대를 열었다. &lt;br /&gt;
도쿠가와이에야스는 도요토미히데요시 정권과 반대의 입장을 표하며, 새로운 권위를 세우고자 조선과 화친을 맺었다. &lt;br /&gt;
조선도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화친에 응했으며, 이후 쇼군이 요청할 때마다 '통신사'를 파견하여 교류하였다.&lt;br /&gt;
초기 통신사는 일본에 끌려간 포로를 송환하기 위해서였고, 이후 유학 등 선진문물 전파도 이어졌다. &lt;br /&gt;
명의 경우, 조선의 군대 파병으로 군사력이 매우 약화되었다. 이에 반해 북방의 여진 세력은 점점 커져가며 점점 명이 외부세력을 방어하기 힘들어졌고, 이후 여진이 성장하여 국가인 '청'을 세우자 명과의 사대관계를 유지하던 조선도 혼란에 빠졌다. 이는 1636년의 병자호란의 배경과도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병자호란'''&lt;br /&gt;
&lt;br /&gt;
병자호란은 1636년에 일어난 조선과 청 사이에 일어난 전쟁이다. &lt;br /&gt;
1627년 정묘호란 시기, 청과 형제관계를 맺은 이후, 청은 조선과 군신관계를 청했고 조선 내에서는 척화론과 주화론이 대립하며 시간을 끌었다. 결국 척화론이 우세하여 조선은 청의 군신관계 요구를 거절하였고, 이에 화가 난 청나라 황제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조선으로 쳐 들어왔다 =. 당시 최고의 대선책은 임금이 강화도로 피난을 가는 것이었지만, 실패로 끝이 났고 인조는 첩첩한 산 중의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고립된 산성은 빠르게 포위되었고, 결국 군신관계를 맺게 되었다. 병자호란은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왕이 출성항복하는 사건이다. 이후 조선은 사대 상대가 명에서 청으로 바뀌어야 했지만, 결코 쉽지 않았고 명의 중화의식을 가장 잘 계승한 나라라는 '소중화'의식이 조선 사대부들 사이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북벌론과 북학론'''&lt;br /&gt;
&lt;br /&gt;
''북벌론''&lt;br /&gt;
&lt;br /&gt;
북벌론은 오랑캐인 청나라를 정복하여 치욕을 씻고, 중화의식을 회복하자는 의미에서 추진된 담론이다. 북벌론은 병자호란 이후 싹트기 시작했고, 명나라가 사라진 17세기 쯤에 성행하였다. &lt;br /&gt;
인조이후, 효종은 북벌을 시행하기 위해 정치적, 군사적으로 노력하였다. 효종은 척화계열의 산당 세력들을 대거 등용하여 북벌 계획을 세웠으나, 청나라가 조선의 정세를 다 파악할 수 있었기에 청나라는 치는 북벌계획은 구체적으로 시행되기 어려웠다. 또한 거듭된 흉년과 자연재해로 전쟁을 준비할 경제적인 여력이 충분하지 않았고, 결국 북벌론은 소중화 의식을 지닌 조선 사대부들 사이에 퍼져 여전히 '청은 오랑캐이다'라고 주장하게 만들었다. &lt;br /&gt;
&lt;br /&gt;
''북학론''&lt;br /&gt;
&lt;br /&gt;
북한론이란,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담론으로, 이를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은 북학파, 연암일파라고 불려지는 홍대용(洪大容), 성대중(成大中), 박지원(朴趾源), 박제가(朴齊家), 유득공(柳得恭), 이덕무(李德懋), 이서구(李書九), [이희경(李喜經)] 등이다.&lt;br /&gt;
북학의 주요 내용은 벽돌과 수레의 사용, 농기구의 개량, 둔전의 설치, 대외 무역의 장려, 서양인의 초빙과 실제적인 농 · 상업 기술론이었다.&amp;lt;ref&amp;gt;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북학」,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4783,2025.6.24. &amp;lt;/ref&amp;gt; 하지만,기술 도입에 관한 구체적인 방법론이 부족했고 조선의 실정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졌다. 예를 들어 수레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도로가 정비가 앞서 진행되어야 하는데, 도로 구축을 하지 않고 수레 사용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탕평책'''&lt;br /&gt;
&lt;br /&gt;
탕평 정치는 영조 때 자리잡았다. 탕평(蕩平)이란? 서경에서 나온 말로, 임금의 정치가 한쪽을 편들지 않고 사심이 없으며, 당을 이루지도 않는 상태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lt;br /&gt;
영조는 왕과 신하 사이의 의리를 바로 세워야 한다며, 붕당을 없애자는 논리에 동의하는 탕평파를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였다. 그리고 붕당의 뿌리를 제거하기 위하여 공론의 주재자로서 인식되던 산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들의 본거지인 서원을 대폭 정리하였다. 아울러 이조 전랑의 권한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그들이 자신의 후임자를 천거하고, 3사의 관리를 선발할 수 있게 해 주던 관행을 없앴다. 그러나 이조 전랑의 후임자 천거권은 이후 정조대에 가서야 완전히 폐지되었다.&amp;lt;ref&amp;gt;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영조 때 시행한 탕평책은 정조 때에 더욱 강화하였다. 정조는 누가 옳은지 그른지 명백히 규명하여 적극적으로 탕평책을 주도하였으며, 영조 때 세력을 키운 척신과 환관 등을 제거하였다. 게다가 권력에서 배제되었던 소론과 남인 계열의 관리들도 정치에 참여하도록 독려하였다. 붕당정치 세력이 커질 것을 우려하여 새로운 신진 인물을 등용하고, 이들을 비롯한 중, 하급 관리에서 유능한 인재를 뽑아 교육을 시키는 초계문신제를 도입하였다. &lt;br /&gt;
&lt;br /&gt;
'''세도정치'''&lt;br /&gt;
&lt;br /&gt;
19세기에는 특정 가문이 관직을 독점하는 세도정치가 시행되었다. 이는 탕평정치의 지속에 불만을 품었던 귀족세력의 반발심에 의한 것이다. 대표적인 세도 가문은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반남 박씨, 대구 서씨, 연안 이씨, 풍산 홍씨 등이다. 세도가문의 중심 배경은 임진왜란 이후 강화된 비변사의 기능과 관련이 있다. 비변사는 초기에 왜구·여진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해 국방 관련 일을 처리하는 임시기구로 출발하였지만,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권한이 더욱 확대되어 임시 군사대책기관에서 정책결정기구로까지 그 성격이 변하였다. 이후 조선 후기에는 국정을 총괄하는 기구로써 그 기능이 중요해졌는데, 세도 가문이 비변사를 독점하면서 마음대로 일을 결정하고 왕에게 보고할 수 있었다. 예를들면, 안동 김씨 가문의 대표적 인물인 김조순은 국왕의 장인, 왕비의 친아버지에다가 정조가 친히 국왕(그 당시 세자)을 돌볼 임무를 맡겼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홍문관 대제학(大提學)과 규장각 검교제학(檢校提學)을 오랫동안 맡아 학술과 정치이념을 이끌었고, 당시 최정예 군사력인 훈련도감의 훈련대장을 오래 지내다 심복에게 넘겨주었다. 또한 비변사 주교사당상(舟橋司堂上)을 맡았는데 그것을 통해 대상인의 상업 행위를 감독하고 경제적 실권을 장악했던 것으로 판단된다.&amp;lt;ref&amp;gt;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쇄국정책'''&lt;br /&gt;
&lt;br /&gt;
쇄국정책은 세도정치가 득세했던 철종 사후, 어린 정조가 왕위를 승계하고 그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정치를 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사실 애초에 조선이 활발히 문호를 개방한 것은 아니었으나, 일명 '쇄국정책'은 흥선대원군이 실행한 외교 정책이라 할 수 있다. 흥선대원군은 안으로는 왕권 강화 정책을 펴는 한편, 밖으로는 외세의 침략과 문물을 거부하는 쇄국정책을 강력히 실행하였다. 따라서 세도정치 가문의 주류였던 안동 김씨 세력을 정계에서 몰아내고 다양한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외세의 문호 개방에 응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이는 열강 세력들이 조선을 군사적으로 침략하는 계기가 되었다. &lt;br /&gt;
&lt;br /&gt;
'''개항'''&lt;br /&gt;
&lt;br /&gt;
18세기 조선 해안에는 서양의 함선인 '이양선'이 빈번히 출몰하면서 개항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탐험과 측량을 목적으로 하였지만, 19세기가 되자 배를 끌고와 통상을 요구하였다. 조선은 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 독일 등등 여러 나라에게 통상을 요구받았으나,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말미암아 허가해주지 않았다. 이에 서양 열강 국가들과 조선 사이에 여러차례 전쟁을 발생하였다. &lt;br /&gt;
프랑스 선교사의 죽음을 문제로 프랑스가 일으킨 전쟁은 '병인양요'이며, 독일 상인 옵페르트는 통상 허가를 받지 못하자 흥선 대원군 아버지인 남연군의 무덤을 파 부장품을 훔쳐갔다. 또한, 미국의 제너럴 셔먼호가 조선인과 전투를 벌이던 도중 침몰되자 그 배상을 요구하는 문제로 '신미양요'가 일어났다. 흥선 대원군의 쇄국에 대한 강한 결심과 백성들의 끝없는 항전 덕분에 끝내 쇄국을 지킬 순 있었으나, 결국 조선은 일본의 강화도 사건으로 통상을 허용하면서 잇따라 서양 열강 국가들도 조선과 교류하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사회적 변화==&lt;br /&gt;
&lt;br /&gt;
'''신분제 붕괴와 양반수 증가'''&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 전기에는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의 네 신분이 형성되어 있었다. 양반의 사회적 지위와 특권이 강화되면서, 조선 사회는 양반 중심의 사회로 굳어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신분의 변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어 이러한 신분 구조에 변화가 일어났다. 신분의 변동은 양반층 내부에서 심각하게 일어났는데, 조선 후기에 들어와 노론이 장기간 집권하면서 이들은 정치의 실권을 독점하고 부정한 수단으로 자제들을 과거에 합격시켜 그 지위를 세습시켰다. 이러한 현상은 세도 정치가 시작되면서 더욱 심화되어 신분제의 붕괴가 일어났다.&amp;lt;ref&amp;gt; &amp;lt;/ref&amp;gt; 이후 임진왜란의 영향으로 국가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공명첩'이라는 신분을 사고 팔 수 있는 문서가 생겼다. 돈이 많은 평민들은 신분을 사 양반이 되는 경우가 많았고, 따라서 양반의 수가 증가하게 되었다. 이와 반대로 양반층 내에서도 돈이 부족해 일반 농민이나 소작농으로 생계를 이어가거나 신분을 팔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상품화폐경제 발달'''&lt;br /&gt;
&lt;br /&gt;
상품화폐경제는 조선 후기 상업의 발달과 함께 교환 수단으로 '동전'이 발행되면서 시작되었다. 동전이 교환수단으로 정착하기 이전에는 쌀이 화폐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쌀은 무거워서 많이 가지고 다닐 수 없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가벼운 화폐는 소비의 편리함을 주었고, 따라서 판매와 소비가 촉진하였다. 동전은 숙종 때 발행을 결정하였는데, 불과 몇 십년 되지 않아 많이 유통되었고, 조세 수치를 동전으로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매년 수백냥에 이르는 동전 수취로, 농민들에게 부담을 지게 하여 몰락을 초래하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사상적 변화==&lt;br /&gt;
&lt;br /&gt;
&lt;br /&gt;
'''양명학'''&lt;br /&gt;
&lt;br /&gt;
명나라 왕수인에 의해 집대성된 학문이다. 양명학을 대표하는 키워드는 '지행합일'과 '심즉리'이다. &lt;br /&gt;
이는 주희의 성리학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으나, 성리학과 내용적으로 대립을 이룬다. 주희는 성을 이로, 마음을 기로 파악하였지만, 왕수인은 마음안에 이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lt;br /&gt;
또한 주희는 세상 만물에 안에 이가 있으므로, 격물치지 만물의 이치를 깨달아야 하며 그 진리를 깨닫고 행동해야 한다는 '선지후행'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왕수인의 양명학은 만물에게서 이치를 찾지 않고 이미 마음 속에 이가 있기 때문에 지행합일을 주요 이론으로 정립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실학'''&lt;br /&gt;
&lt;br /&gt;
실학은 조선 후기 사회 경제적 문제들에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 등장한 사상이다. &lt;br /&gt;
실학 사상이 등장하게 된 원인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첫째 조선 왕조의 통치 질서가 위기이다. 조선 왕조는 두번의 전란을 겪으면서 무너질 위기에 쳐했으나 보수적 관료들은 대책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이에 진보적 관리들이 해결책을 내놓으면서 개혁을 주장하였다. 두번째, 성리학이 현실적인 문제에 해결책을 제시해주지 못하였다. 세번째, 조선후기 경제가 발달하면서 발전을 촉구하는 실학 사상이 등장하게 되었다. 네번째, 조선 후기 무너진 신분제로 인해 양반층과 서민들의 생활에 관심이 집중되며 실학 사상이 발달하였다. 다섯번째, 서학의 전래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상이 조선 지식인에게 퍼졌다. 여섯번째, 고증학의 '실사구시'가 영향을 주어 학문에실증적 방법에 주목하였다. &lt;br /&gt;
&lt;br /&gt;
조선의 실학은 농업과 상업 두 갈래를 주축으로 진행되었으며, 이들을 각각 중농학파와 중상학파로 부른다.&lt;br /&gt;
&lt;br /&gt;
중농학파의 경우, 농촌 경제의 안정이 한 백성의 삶과 국가의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에 농업에 주목하였다.&lt;br /&gt;
실학자들은 토지의 편중이 농업의 발달을 저해한다고 보았고, 여러 토지 균분 제도에 대해 의견을 모았다. &lt;br /&gt;
예를 들면, 유형원의 균전론, 이익의 한전론, 정약용의 여전론 등이 있다. &lt;br /&gt;
&lt;br /&gt;
중상학파는 상업의 발전에 주목하였다. 국내 상공업의 발전이 하고, 학자들이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보고 옴에 따라 새로운 경향이 생겼다. &lt;br /&gt;
중상학파 학자들은 신분제의 비효율성, 수레와 화폐 사용, 유통과 소비의 촉진을 주장하며 상업의 발전해야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lt;br /&gt;
이들의 주장과 노력은 보다 적극적인 방안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문화사적 변화==&lt;br /&gt;
&lt;br /&gt;
'''서민문화의 발달'''&lt;br /&gt;
&lt;br /&gt;
조선 후기 상업과 농업이 발달하면서 일반 평민들 중에서도 부를 축적하여 안정된 삶을 구가하였다. 부유해진 이들은 점차 여유가 생겨 예술에 시선을 돌렸고, 자식들을 서당에 나가 공부를 하도록 했는데, 이로 인해 서민문화가 꽃피우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한글소설'''&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후기 '한글소설'이 유행하였다. 한글소설은 한글로 되어 있어 서민들이 읽기 쉬웠으며, 평범한 인물이 등장하여 사회모순을 비판하거나 문제로 삼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lt;br /&gt;
한글소설의 대표적인 작품은 흥부전, 춘향전, 홍길동전, 심청전, 콩쥐와팥쥐, 장화홍련전 등이 있다.&lt;br /&gt;
한글소설은 서민들의 오락기능을 수행하였으며, 일반 서민들 뿐만 아니라 양반 부녀자들, 왕실의 여성 귀족들도 한글 소설을 많이 읽었다. 이는 창덕궁의 낙선재에서 여러 장편 한글 소설이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lt;br /&gt;
한글소설이 발달함에 따라 돈을 주고 책을 빌려주는 세책점이 흥했고, 일정한 장소와 시간에서 소설책을 낭독해주는 이야기꾼 전기수가 많이 등장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사설시조'''&lt;br /&gt;
&lt;br /&gt;
사설지로란 사대부의 대표적인 시가 장르인 기존의 평시조보다 장형화된 것을 말한다. 사설시조는 작가 층에 서민이 유입됨에 따라 발전하였는데, 남년 간의 사랑, 고달픈 삶, 양반 등 지배계층에 대한 풍자가 주요 주제로 채택되었다. 평시조보다 형식과 규칙 등 제약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서민들도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래는 대표적인 사설시조 한 편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두꺼비 파리를 물고 두엄 위에 치달아 앉아 건넛산을 바라보니 흰 송골매 떠 있거늘 가슴이 끔찍하여 풀떡 뛰어 내닫다가 두엄 아래 자빠졌구나 마침 날랜 나였기에 망정이지 피멍 들 뻔하였네''&lt;br /&gt;
&lt;br /&gt;
- 『청구영언』에 수록된 작자 미상의 사설시조 -&lt;br /&gt;
&lt;br /&gt;
&lt;br /&gt;
'''판소리'''&lt;br /&gt;
&lt;br /&gt;
조선 후기는 도시와 상업이 발달하였다. 이에 따라 시장이 활발하였는데, 판소리는 시장을 무대삼아 발달하였다. &lt;br /&gt;
판소리는 소리꾼 한 명과 북치는 사람이 고수 2명으로 구성되었고, 소리꾼은 고수의 북장단에 맞추와 창(노래)와 아니리(말)등으로 판을 이끌어나갔다. &lt;br /&gt;
19세기에 이르러 신재효가 여러 종류의 판소리를 여섯 마당으로 정리하였지만, 현재는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의 다섯 마당만 전해지고 있다. &lt;br /&gt;
판소리는 서민 중심 문화였지만, 이후 양반들까지 퍼지면서 내용이 조금 변하였다. &lt;br /&gt;
초기 판소리는 서민들의 사회 비판 의식이 잘 드러났고, 후기로 갈수록 한문 표현, 충성과 효도 등 유교 윤리 가치관이 반영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탈춤'''&lt;br /&gt;
&lt;br /&gt;
탈춤 또한 판소리와 같이 시장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탈춤은 광대라고 불리는 재주꾼들이 탈을 쓰고 연기, 노래, 춤 등 공연을 하는 것을 말한다. &lt;br /&gt;
당시 양반들에 대한 비판이 주 내용이었고, 전해져오는 탈춤은 안동의 하회 별신굿 탈춤, 황해도의 봉산 탈춤과 강령 탈춤, 북청의 사자놀이가 유명하다. &lt;br /&gt;
탈춤 외에 시장에서 솟대나 줄을 타기도 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4783&lt;br /&gt;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ta/view.do?levelId=ta_h71_0040_0040_0030_0030&lt;br /&gt;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9786&lt;br /&gt;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ta/view.do?levelId=ta_h71_0040_0040_0030_0030&lt;/div&gt;</summary>
		<author><name>Jinhyang</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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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D%99%8D%EA%B8%B8%EB%8F%99%EC%A0%84%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738</id>
		<title>홍길동전ᐧ༚̮ᐧ</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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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06-23T21:32:4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inhyang: &lt;/p&gt;
&lt;hr /&gt;
&lt;div&gt;==작가==&lt;br /&gt;
&lt;br /&gt;
[[파일:허균.jpeg|섬네일|왼쪽]]&amp;lt;ref&amp;gt; 「김현민, 조선의 계급혁명 고뇌한 ’허균의 생각‘」,『아틀라스뉴스』,2024, 7, 20, http://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8445,2025, 6, 24 접속.&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 &amp;lt;허균&amp;gt;&lt;br /&gt;
| 호 || 백월거사&lt;br /&gt;
|-&lt;br /&gt;
| 자 || 단보&lt;br /&gt;
|-&lt;br /&gt;
| 본관 || 양천&lt;br /&gt;
|-&lt;br /&gt;
| 출생 || 1569년&lt;br /&gt;
|-&lt;br /&gt;
| 사망 || 1618년&lt;br /&gt;
|}&lt;br /&gt;
&lt;br /&gt;
'''허균'''은 어릴 때부터 시문에 능했다.&lt;br /&gt;
&lt;br /&gt;
5세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해 9세 때에는 시를 지을 줄 알았다. &lt;br /&gt;
&lt;br /&gt;
&lt;br /&gt;
그가 12살 되는 때에 아버지를 잃었고, 이에 더욱 문학 공부에 전념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학문은 '''유성룡'''에게, 시는 삼당시인 중 한 명인 '''이달'''에게 배웠다고 한다. &lt;br /&gt;
&lt;br /&gt;
&lt;br /&gt;
1594년 26세 때에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고, 1597년 문과 중시에 장원을 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듬해 황해도도사가 되었으나 기생을 끌어들여 가까이 했다는 일로 6달 만에 파직됐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후 여러 벼슬을 하였으나, 불교를 믿는다는 탄핵을 받아 다시 벼슬길에서 물러났다. &lt;br /&gt;
&lt;br /&gt;
&lt;br /&gt;
종사관, 형조참의를 하였으나, 1610년 전시의 시험을 주관하면서 조카와 사위를 합격시켰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전라도 함열로 유배를 갔다. &lt;br /&gt;
&lt;br /&gt;
&lt;br /&gt;
'''계축옥사'''가 일어나고 평소 친했던 서양갑, 심우영 등이 처형당하자 신변의 위험을 느낀 허균은 대북에 참여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1617년 '''좌참찬'''이 되었다. &lt;br /&gt;
&lt;br /&gt;
폐모론을 주장하다가 폐모론의 반대 입장인 영의정 기자헌이 길주로 유배를 갔다. &lt;br /&gt;
&lt;br /&gt;
&lt;br /&gt;
1618년 남대문에 격문을 붙인 사건이 일어났는데, 허균의 심복이 붙였다는 것으로 알려졌다.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허균이 역적모의하였다 하여 저자거리에서 능지처참형을 받았다.&amp;lt;/span&amp;gt;''' &amp;lt;ref&amp;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허균」,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3030,2025, 6, 24.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배경==&lt;br /&gt;
&lt;br /&gt;
====적서차별====&lt;br /&gt;
&lt;br /&gt;
조선후기 조선 사회가 가지는 문제 중 하나가 바로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적서차별'''&amp;lt;/font&amp;gt;이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서자와 얼자는 '''서얼차대법'''에 의해 과거를 응시하지 못했고 관리로 등용될 수 있는 길이 제한적이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서얼차대법은 후기로 내려올수록 완화되었지만, 서얼에 대한 차별은 관행으로 굳어져 사람들의 인식 속에 사라지지 않았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ins&amp;gt;적서 간의 갈등은 공적, 사적인 자리 가리지 않고 드러났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만일 서자가 문중의 회의에 참석하면 나이에 상관없이 적자 아래에 앉고, 반말을 들어야 했다. &lt;br /&gt;
&lt;br /&gt;
선조의 제사를 지낼 때는 술을 올리지도 못하였다.&amp;lt;ref&amp;gt; 우리역사넷, 「적서의문제」,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m/view.do?levelId=km_028_0040_0040_0030_0010, 2025, 6, 24.&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허균은 조선 후기 적서차별 문제를 비판하고자 홍길동을 서자 출신으로 설정하여 작품을 창작한 것으로 보인다.'''&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지배층 억압====&lt;br /&gt;
&lt;br /&gt;
조선 후기 사회가 문란해지면서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탐관오리들의 횡포가 극심'''&amp;lt;/span&amp;gt;해졌다. &lt;br /&gt;
&lt;br /&gt;
탐관오리들은 백성의 재산과 재물을 약탈하여 자기 재산을 채우기 바빴다.&lt;br /&gt;
&lt;br /&gt;
이에 백성의 삶은 피폐해졌고 어딘가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영웅'''&amp;lt;/font&amp;gt;이 나타나 구원해 주길 바랬다. &lt;br /&gt;
&lt;br /&gt;
백성의 이런 바람을 담아 탄생된 주인공이 '''홍길동'''이며, &lt;br /&gt;
&lt;br /&gt;
&amp;lt;ins&amp;gt;홍길동은 '''활빈당 무리'''를 이끌고 탐관오리들을 정벌하여 그들이 빼앗아간 재산들을 백성들에게 돌려주었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왕도정치====&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왕도정치'''&amp;lt;/font&amp;gt;란 &amp;lt;ins&amp;gt;군주가 공평하고 사사로움이 없는 태도로 정치를 운영해 이상적 사회를 수립하는 것을 의미하는 유교의 대표적 정치사상이다.&amp;lt;/ins&amp;gt; &amp;lt;ref&amp;gt;우리역사넷, 「왕도정치」, https://contents.history.go.kr/front/tg/view.do?treeId=0201&amp;amp;levelId=tg_003_1320&amp;amp;ganada=&amp;amp;pageUnit=10, 2025, 6, 24.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왕도’는 공자이전에 '''치우침이 없는 공정함’''을 의미했다. &lt;br /&gt;
&lt;br /&gt;
하지만 공자가 이상적인 인간과 정치의 목표로 인(仁)을 제시한 이후, 인정(仁政)이 왕도 정치의 핵심으로 위치하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맹자는 각축전인 전국시대를 경험하면서 패도(覇道) 정치에 대비되는 개념으로서 인정(仁政)을 내용으로 하는 '''왕도 정치'''를 주장하였다. &lt;br /&gt;
&lt;br /&gt;
특히 맹자는 왕도 정치 실현을 위해 백성들이 기본적으로 &amp;lt;font color=&amp;quot;#008000&amp;quot;&amp;gt;'''경제적 문제를 해결'''&amp;lt;/font&amp;gt;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lt;br /&gt;
&lt;br /&gt;
&lt;br /&gt;
군주가 백성들의 안정된 생업을 보장해 주고 이들을 덕으로 감화시킬 때 진정한 왕도 정치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홍길동은 조선을 벗어나 이상국가인 '''율도국'''을 세워 왕도 정치를 실현하려고 하였다.&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lt;br /&gt;
[[파일:홍길동전.jpeg|섬네일|왼쪽]]&amp;lt;ref&amp;gt;디지털강릉문화대전, 「홍길동전」, https://gangneung.grandculture.net/gangneung/toc/GC00304015, 2025, 6, 24.&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홍길동은 홍 판서와 시비 춘섬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 아이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홍 판서의 꿈처럼, 길동은 어려서부터 특출난 면모를 보였다.&lt;br /&gt;
&lt;br /&gt;
도술을 사용할 수 있었고, 무술 솜씨도 뛰어났다. &lt;br /&gt;
&lt;br /&gt;
&lt;br /&gt;
하지만, '''서자'''라는 이유로 호부호형하지 못하였고, 길동은 이에 한이 맺혔다. &lt;br /&gt;
&lt;br /&gt;
&lt;br /&gt;
가족들은 길동의 재주가 화근이 될까 두려워 자객을 시켜 길동을 없애고자 하였다. &lt;br /&gt;
&lt;br /&gt;
길동은 자객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났고, 집을 떠나기로 다짐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집을 떠난 길동은 '''활빈당'''이라는 도적의 우두머리가 되어 탐관오리들이 백성들에게 빼앗아간 재물을 탈취하여 돌려주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이에 전국에서 길동을 잡으라는 체포령이 내려졌는데, 바람과 비를 부리고 둔갑술 등에 아무도 당해내지 못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결국 조정은 길동의 가족을 통해 회유하고, 길동이 원하는 바인 '''병조판서'''의 꿈을 이루게 해주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하지만 길동은 병조판서 직에 머물지 않고 홀연히 떠나 율도국의 왕이 된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981&amp;quot; height=&amp;quot;552&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oiuNe8rl7xc&amp;quot; title=&amp;quot;홍길동전 줄거리 요약 | 100초 문학 | 학교를 떠난 이채움쌤&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amp;lt;ref&amp;gt;[학교를 떠난 채움쌤][홍길동전 줄거리 요약] [2023. 2. 9.]&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한글로 쓰여 있어 민중의 생각을 반영하고 독자층을 확보하였다.&lt;br /&gt;
&lt;br /&gt;
진보적이고 현실주의적인 경향을 보여준 소설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Jinhyang</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B5%9C%EC%B2%99%EC%A0%84%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737</id>
		<title>최척전ᐧ༚̮ᐧ</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B5%9C%EC%B2%99%EC%A0%84%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737"/>
		<updated>2025-06-23T21:32:1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inhyang: &lt;/p&gt;
&lt;hr /&gt;
&lt;div&gt;[[파일:임진왜란|섬네일]]&lt;br /&gt;
==작가==&lt;br /&gt;
===조위한===&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 자 || 지세&lt;br /&gt;
|-&lt;br /&gt;
| 호 || 현곡&lt;br /&gt;
|-&lt;br /&gt;
| 출생 || 1567(명종 22년)&lt;br /&gt;
|-&lt;br /&gt;
| 사망 || 1649(인조 27년)&lt;br /&gt;
|-&lt;br /&gt;
| 본관 || 한양&lt;br /&gt;
|-&lt;br /&gt;
| 관직 || 공조참판, 지중추부사&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종군하였고, 1609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주부, 감찰 등 관직 생활을 하다가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계축옥사'''&amp;lt;/font&amp;gt;에 연류되어 구금되었다. &lt;br /&gt;
&lt;br /&gt;
이후 인조반정으로 재등용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1624년 &amp;lt;font color=&amp;quot;#008000&amp;quot;&amp;gt;'''이괄의 난'''&amp;lt;/font&amp;gt; 토벌에 참여하여 수도를 지켰다. &lt;br /&gt;
&lt;br /&gt;
&lt;br /&gt;
정묘, 병자호란 때에도 출전하였으며, 난이 끝난 뒤 벼슬길에서 물러났지만 다시 등용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동부승지, 직제학을 지내고 &amp;lt;font color=&amp;quot;#B22222&amp;quot;&amp;gt;'''공조참판'''&amp;lt;/font&amp;gt;까지 벼슬이 올랐다. &lt;br /&gt;
&lt;br /&gt;
&lt;br /&gt;
80세에 자헌대부에 오르고, &amp;lt;font color=&amp;quot;#B22222&amp;quot;&amp;gt;'''지중추부사'''&amp;lt;/font&amp;gt;를 지내었다.&amp;lt;ref&amp;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위한」,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2465, 2025, 6, 24.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사건==&lt;br /&gt;
====임진왜란====&lt;br /&gt;
&lt;br /&gt;
[[파일:임진왜란|섬네일|왼쪽]]&amp;lt;ref&amp;gt; 유용하,「임진왜란 당시 조선군 ‘MOAB’(모든폭탄의 어머니) 사용했다」, 『서울신문』,2019, 11, 19, https://www.seoul.co.kr/news/society/science-news/2019/11/19/20191119500075, 2025, 6, 24, 접속.&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임진왜란'''은 일본이 조선과 &amp;lt;ins&amp;gt;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동안 싸운 장기 전투이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조선은 오랫동안 평화가 유지되었기에 임진왜란 전쟁은 조선 백성들에게 가장 큰 충격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임진왜란 이후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인구 감소, 민생 불안정, 토지 황폐화'''&amp;lt;/span&amp;gt; 등 여러 문제가 발생하였고 살기 힘들어졌다.&lt;br /&gt;
&lt;br /&gt;
또한 전쟁이 일어나면서 서로 각자도생을 하며 뿔뿔이 흩어졌고 이에 따라 가족을 생사를 알 수 없는 사람 또한 있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최척전은 임진왜란 등 전쟁을 배경으로 흩어진 가족들의 이별과 재회를 생생히 그려내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심하 전투====&lt;br /&gt;
&lt;br /&gt;
[[파일:심하 전투|섬네일|왼쪽]]&amp;lt;ref&amp;gt; 「[한국사 인물 탐험] 비범한 外交力의 光海君明과 後金의 충돌 속에 줄타기 외교로 胡亂 예방」, 『월간조선』, 2006, 10, 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print.asp?ctcd=&amp;amp;nNewsNumb=200610100025, 2025, 6, 24, 접속.&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심하전투'''는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1619년 명과 조선의 연합군이 누르하치의 후금군에게 패한 사건을 말한다.&amp;lt;/span&amp;gt; &lt;br /&gt;
&lt;br /&gt;
&lt;br /&gt;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의 국력이 쇠약해진 틈을 타 북방의 여진족은 세력을 규합하여 국가를 세울 정도가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ins&amp;gt;누르하치가 여진 세력을 통일하여 후금을 세우고, 독립국을 선포하였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누르하치는 명에게 일곱 가지 큰 원한이라는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칠종뇌한'''&amp;lt;/font&amp;gt;을 내세워 명에게 선전포고를 하였고 후금과 명은 전쟁을 시작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명나라는 &amp;lt;font color=&amp;quot;#FFD700&amp;quot;&amp;gt;'''재조지은'''&amp;lt;/font&amp;gt;이라는 명분으로 조선에게 원군 파병을 요청하였다. &lt;br /&gt;
조선 또한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도와준 은혜를 생각하여 당연히 파병을 하려고 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단, 임금인 광해군이 당시 정세가 명나라는 쇠약해지고 청나라가 득세하고 있는 판이라, 강홍립 장군을 파병하여 상황을 보고 적절하게 대처하도록 지시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심하전투에서 청나라의 승리는 우세했고, 이후 청나라가 항복을 종용하자 &amp;lt;ins&amp;gt;'''강홍립은 항복'''&amp;lt;/ins&amp;gt;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파견된 조선군인들은 모두 '''청나라의 포로'''가 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lt;br /&gt;
남원에 사는 최척이 옥영(玉英)을 사랑하여 약혼을 한다. &lt;br /&gt;
&lt;br /&gt;
그러나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임진왜란'''&amp;lt;/font&amp;gt;이 일어나고 최척이 징발되어 전쟁에 나가게 된다. &lt;br /&gt;
&lt;br /&gt;
&lt;br /&gt;
이에 옥영의 부모는 이웃의 양생을 사위로 맞이하려고 하였으나, 이 사실을 알게 된 최척이 돌아와 옥영과 혼인을 하고 첫째 아들 몽석을 낳는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정유재란'''&amp;lt;/font&amp;gt;이 발발하고 남원이 함락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ins&amp;gt;옥영은 왜병의 포로가 되어 끌려가고, 최척은 명장인 여유문을 따라 중국으로 갔으며 아들인 몽석 또한 흩어져 자취를 알 수 없게 되었다.&amp;lt;/ins&amp;gt; &lt;br /&gt;
&lt;br /&gt;
&lt;br /&gt;
옥영은 남장을 하고 여러 지역을 떠돌다 '''&amp;lt;font color=&amp;quot;#4169E1&amp;quot;&amp;gt;안남(베트남)'''&amp;lt;/font&amp;gt;으로 오게 되었다. &lt;br /&gt;
최척 또한 상선을 타고 &amp;lt;font color=&amp;quot;#4169E1&amp;quot;&amp;gt;'''안남(베트남)'''&amp;lt;/font&amp;gt;에 왔고, 최척과 옥영은 기적적으로 만나게 된다. &lt;br /&gt;
&lt;br /&gt;
&lt;br /&gt;
이들은 각자의 동료와 이별을 고한 뒤, &amp;lt;font color=&amp;quot;#4169E1&amp;quot;&amp;gt;'''중국'''&amp;lt;/font&amp;gt;으로 건너가 아들 '''몽선'''을 낳는다. &lt;br /&gt;
몽선이 장성하여 임진왜란 때 조선에 출전한 '''진위경'''의 딸 홍도와 결혼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최척은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사르후 전투'''&amp;lt;/font&amp;gt;에서 명군으로 출전하였다가 청군의 포로가 되어 수용소에 갖힌다.&lt;br /&gt;
&lt;br /&gt;
그러다 우연히 조선에서 강홍립을 따라 파병되었다가 항복하여 포로가 된 &amp;lt;ins&amp;gt;첫째 아들 '''몽석'''과 극적으로 만나게 된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최척과 몽석은 수용소를 탈출하여 고향으로 향했는데, 중간에 최척이 심하게 아팠다. &lt;br /&gt;
&lt;br /&gt;
같은 배를 탄 사람 중 의술에 능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도움으로 최척이 씻은 듯이 낫게 되었다.&lt;br /&gt;
&lt;br /&gt;
몽석과 최척은 의원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amp;lt;ins&amp;gt;그가 최척의 이웃이자 둘째 아들 몽선의 장인, '''진위경'''인 것을 알게 된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이후 최척과 몽석, 진위경은 무사히 집에 도착했고 헤어진 가족들은 모두 재회를 하게 된다.&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981&amp;quot; height=&amp;quot;552&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3N6DoC16I7A&amp;quot; title=&amp;quot;최척전의  전체 줄거리를 10분의 문학으로 만나보세요!🍋&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amp;lt;ref&amp;gt; [10분의 문학] [최척전의 전체 줄거리를 10분의 문학으로 만나보세요!🍋] [2020.9.7.]&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실제 일어난 사건'''을 기반으로 하여, 가족의 이별과 재회를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최척전을 기점으로 하여 이전 시기 고전 소설에서 도외시되었던 &amp;lt;font color=&amp;quot;#006400&amp;quot;&amp;gt;'''역사성'''&amp;lt;/font&amp;gt;과 &amp;lt;font color=&amp;quot;#006400&amp;quot;&amp;gt;'''지리 감각'''&amp;lt;/font&amp;gt;이 사실적으로 표현되기 시작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포로가 된 주인공의 행적을 중심으로 하는 '피로 문학'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가능성을 열었다. &amp;lt;ref&amp;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최척전」,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7689, 2025, 6, 24.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전쟁으로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진 백성들의 마음을 대변하여 &amp;lt;font color=&amp;quot;#4169E1&amp;quot;&amp;gt;'''가족 회복에 대한 이상'''&amp;lt;/font&amp;gt;이 잘 드러나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Jinhyang</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82%9C%EC%A4%91%EC%9D%BC%EA%B8%B0%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734</id>
		<title>난중일기ᐧ༚̮ᐧ</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82%9C%EC%A4%91%EC%9D%BC%EA%B8%B0%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734"/>
		<updated>2025-06-23T21:31:3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inhyang: &lt;/p&gt;
&lt;hr /&gt;
&lt;div&gt;==작가==&lt;br /&gt;
===이순신===&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이순신. jpg|섬네일|왼쪽]]&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가계====&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 &amp;lt;이순신&amp;gt;&lt;br /&gt;
| 본관 || 덕수&lt;br /&gt;
|-&lt;br /&gt;
| 자 || 여해&lt;br /&gt;
|-&lt;br /&gt;
|혈통 || 이돈수 12대손&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유년시절====&lt;br /&gt;
&lt;br /&gt;
&amp;lt;ins&amp;gt;이순신은 어릴 때부터 기개와 용맹함이 뛰어났으며, 문관의 자질을 보였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같은 마을에 살았던 유성룡의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징비록(懲毖錄)』&amp;lt;/font&amp;gt;은 이순신의 어린 시절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DCDCDC&amp;quot;&amp;gt;''''“이순신은 어린 시절 얼굴 모양이 뛰어나고 기풍이 있었으며 남에게 구속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DCDCDC&amp;quot;&amp;gt;''''다른 아이들과 모여 놀라치면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들고 그것을 가지고 동리에서 전쟁놀이를 하였으며,''''&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DCDCDC&amp;quot;&amp;gt;''''자기 뜻에 맞지 않는 자가 있으면 그 눈을 쏘려고 하여 어른들도 꺼려 감히 이순신의 문앞을 지나려 하지 않았다.''''&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DCDCDC&amp;quot;&amp;gt;''''또 자라면서 활을 잘 쏘았으며 무과에 급제하여 발신(發身)하려 하였다.''''&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DCDCDC&amp;quot;&amp;gt;''''또 자라면서 말타고 활쏘기를 좋아하였으며 더욱이 글씨를 잘 썼다.”''''&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유성룡 &amp;lt;징비록&amp;gt;-'''&lt;br /&gt;
&lt;br /&gt;
&lt;br /&gt;
====관직생활====&lt;br /&gt;
&lt;br /&gt;
이순신은 선조 9년 식년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鍊院奉事)'''로 관직에 나갔다. &lt;br /&gt;
&lt;br /&gt;
여러 관직을 거쳐 조산보만호 겸 '''녹도둔전사의'''가 되었다.&lt;br /&gt;
&lt;br /&gt;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중앙에 군사를 요청을 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고, 갑자기 호인이 침범하여 막을 수 없게 되자 피하였다.&lt;br /&gt;
&lt;br /&gt;
이 일로 이순신은 죄를 문책당하였고, &amp;lt;ins&amp;gt;백의종군&amp;lt;/ins&amp;gt;의 길을 걷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후 추천으로 관직 생활을 이어가다가 47세에 되던 해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lt;br /&gt;
&lt;br /&gt;
왜침이 있을 거란 소문에 전쟁을 미리 대비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임진왜란 전쟁====&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전쟁지도|섬네일|왼쪽]]&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이순신은 옥포에 정박중인 일본인 함대 30여척을 불화살로 격파하는데 성공하였다. &lt;br /&gt;
이를 &amp;lt;font color=&amp;quot;#228B22&amp;quot;&amp;gt;옥포해전&amp;lt;/font&amp;gt;이라 부르며, &amp;lt;ins&amp;gt;이순신의 최초의 해전이라고 칭해진다.&amp;lt;/ins&amp;gt; &lt;br /&gt;
&lt;br /&gt;
&lt;br /&gt;
이순신은 계속해서 해전의 압승을 거두었다.&lt;br /&gt;
&lt;br /&gt;
한산도 대첩의 경우에는 이순신의 전략전술이 돋보이는 해전이었다.&lt;br /&gt;
한산도 대첩이란, 한산도 바다에 일본배를 유인하여 격파한 전투이다.&lt;br /&gt;
&lt;br /&gt;
이순신은 일본배를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기 위해 견내량으로 판옥선 몇 척을 보내었다.&lt;br /&gt;
일본배는 판옥선을 집중 공격하며 조선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예상하였으나, 한산도 앞바다에 조선 배를 보고 함정에 빠졌음을 깨닫는다.&lt;br /&gt;
일본배를 유인한 판옥선은 기다리고 있던 조선 배와 연합하여 진영을 이루고, 일본배는 오도가도 못한 채 조선의 포에 무참히 배가 깨어졌다. &lt;br /&gt;
&lt;br /&gt;
한산도 대첩 이후 이순신은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삼도수군통제사'''&amp;lt;/font&amp;gt;로 임명받았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후 일본과 명 사이에 '''강화교섭'''이 이루어졌지만, 서로의 요구를 충족하지 못한 채 결렬되었다. &lt;br /&gt;
&lt;br /&gt;
1597년 일본은 다시 한 번 조선을 침략하여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정유재란&amp;lt;/font&amp;gt;을 일으켰다.&lt;br /&gt;
&lt;br /&gt;
고니시 유키나와와 그의 부하 요시라는 경쟁자인 가토 기요마사를 제거하기 위해 조선에게 그의 도해 날짜를 알려주었다.&lt;br /&gt;
조정은 이순신에게 나가 싸울 것을 명령했으나, 이순신은 불확실한 정보라 생각해 출전은 주저하였다. &lt;br /&gt;
이순신이 마지못해 출전을 했지만, 이미 요시라는 조선에 도착한 뒤였다. &lt;br /&gt;
이에 조정은 이순신을 다시 문책했고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를 대신하였으며 &amp;lt;ins&amp;gt;다시 백의종군을 하게 됐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lt;br /&gt;
하지만, 원균이 칠천량에서 대패를 하자, 조선은 다시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기용할 수 밖에 없었다.&lt;br /&gt;
 &lt;br /&gt;
복귀된 이순신은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명랑해전&amp;lt;/font&amp;gt;에서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08080&amp;quot;&amp;gt;일본 함대 133척을 단 31척의 배로 격파한 성과를 올렸다.&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이후 도요토미히데요시가 죽자 일본군에게 철수 명령이 떨어졌다. &lt;br /&gt;
고니시 유키나가는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자신의 탈출을 도와달라고 요청을 했고, 시마즈는 유키나가를 구하기 위해 순천으로 나아갔다.&lt;br /&gt;
&lt;br /&gt;
&lt;br /&gt;
1598년 이순신은 고니시 유키나가와 구원군을 공격했다.&lt;br /&gt;
이순신은 이 전투에서 탄환을 맞아 죽게 되었는데, 자신이 죽으면 군대가 동요할까 두려워 전투가 끝나기 전에 &amp;lt;ins&amp;gt;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amp;lt;/ins&amp;gt;&lt;br /&gt;
이순신의 죽음을 본 몇 병사들은 유언에 따라 전투가 끝날 때까지 이순신이 죽었음을 알리지 않았고, 전투가 끝난 이후에야 소식을 듣고 통곡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lt;br /&gt;
&lt;br /&gt;
====사후====&lt;br /&gt;
&lt;br /&gt;
이순신의 죽음이 조정에 알려지자 선조는 관원을 보내어 조의를 표하였다. &lt;br /&gt;
1604년 선무공신 1등으로 봉해졌고, 덕풍부원군에 추봉,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lt;br /&gt;
1793년 다시 영의정이 더해졌다.&lt;br /&gt;
이순신의 묘소는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어라산에 있으며, 왕이 친히 지은 비문과 충신문이 건립되었다.&amp;lt;ref&amp;gt;우리역사넷,「이순신-1545~1598」,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n309000&amp;amp;code=kc_age_30,2025, 6, 23.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사건==&lt;br /&gt;
===임진왜란===&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lt;br /&gt;
1592년(선조25)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쳐서 우리나라에 침입한 일본과 싸운 사건이다. &lt;br /&gt;
1차는 임진년에 일어난 전쟁으로, ‘임진왜란’이라 부르며 2차는 정유년에 일본의 침략으로 시작되어 ‘정유재란’으로 부른다. &lt;br /&gt;
하지만 임진왜란은 대게 정유재란의 내용을 포함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lt;br /&gt;
&lt;br /&gt;
====배경====&lt;br /&gt;
&lt;br /&gt;
조선이 초기 국방 체제 붕괴 및 당쟁으로 정치적 운영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 시대를 종결하고 지배권을 강화하였다. &lt;br /&gt;
국내 통일에 성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amp;lt;ins&amp;gt;내부적인 불만을 외부로 돌리고자 조선 침략을 실행하게 되었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순서====&lt;br /&gt;
&lt;br /&gt;
임진왜란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진행되었다.&lt;br /&gt;
&lt;br /&gt;
'''임진왜란 발발-&amp;gt;충주 탄금대 전투-&amp;gt;서울 함락-&amp;gt;옥포해전-&amp;gt;사천전투-&amp;gt;한산도대첩-&amp;gt;명나라 원군 지원, 평양성 탈환-&amp;gt;행주대첩-&amp;gt;휴전협상-&amp;gt;결렬, 정유재란-&amp;gt;명량해전-&amp;gt;노량해전-&amp;gt;임진왜란 종결'''&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v2%3A2PACX-1vRbTwvGkTgvE7WBy9ARb-wU1-xuL7ngW4HUgcDnJGuVn9wwW4EpX2ZtbPBPqZ3o8puOiSWtpgpAwrGz&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width=100%25&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 명장 이순신이 임진왜란 중에 작성한 일기이다. &lt;br /&gt;
구체적인 작성 시기는 1592년(선조25) 5월 1일부터 1598년 10월 7일까지로 알려져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난중일기|섬네일|왼쪽]]&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개인의 일기 형식의 기록이지만, 전쟁 기간 중 해군의 최고 지휘관이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08080&amp;quot;&amp;gt;매일 날씨, 군대 생활, 전쟁 상황&amp;lt;/span&amp;gt;''' 등을 기록하였다. &lt;br /&gt;
&lt;br /&gt;
따라서 난중일기는 &amp;lt;ins&amp;gt;임진왜란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amp;lt;/ins&amp;gt;로 알려져 있다. &lt;br /&gt;
&lt;br /&gt;
게다가 일반 서민들의 삶에 대한 기록도 일부 전해지고 있어 과거의 환경 및 서민의 생활상을 연구하는 데 사용된다. &lt;br /&gt;
&lt;br /&gt;
&lt;br /&gt;
난중일기는 군대 생활 기록과 더불어 건강문제와 가족에 대한 염려 등을 자유롭게 일기에 표현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A9A9A9&amp;quot;&amp;gt;이순신 장군은 몸을 사리지 않고 일하며 전쟁 중 어깨에 총상을 입었음에도 쉬지않고 전장을 누볐기에 상처는 더더욱 심해졌다.''&amp;lt;/font&amp;gt;&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A9A9A9&amp;quot;&amp;gt;그래서 난중일기를 보다보면, 몸이 불편하여 잠에서 깼다. 식은땀이 나 이부자리를 적셨다. 등의 문장을 발견할 수 있다.''&amp;lt;/font&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이 일기의 원래 이름은 없었으나, 1795년 정조시기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하면서 편찬자가 '''난중일기'''라는 이름을 붙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다만 이순신의 친필 초고에 수록된 일기를 비교해보면 상당한 차이가 존재하며, 이는 정자로 베겨 판각할 때 글의 내용을 많이 생략한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lt;br /&gt;
&lt;br /&gt;
따라서 난중일기의 전모를 알기 위해서는 친필 초고를 표준으로 삼되, 초고의 망실로 인해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되어 있는 내용은 확인이 불가하다는 점을 고려하여 그대로 보충할 수밖에 없다.&lt;br /&gt;
&lt;br /&gt;
==가치==&lt;br /&gt;
&lt;br /&gt;
난중일기는 1592년부터 1598년 동안 이순신이 거의 매일 빠지지 않고 일기를 써 매우 방대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lt;br /&gt;
&lt;br /&gt;
또한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 군대의 상황과 날씨, 일반 서민들의 삶 등 다양한 기록을 한 번에 담았다.&lt;br /&gt;
&lt;br /&gt;
이에 난중일기는 임진왜란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사용되었고,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08080&amp;quot;&amp;gt;그 가치를 인정받아 201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Jinhyang</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6%91%EB%B0%98%EC%A0%84%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733</id>
		<title>양반전ᐧ༚̮ᐧ</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6%91%EB%B0%98%EC%A0%84%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733"/>
		<updated>2025-06-23T21:30:4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inhyang: &lt;/p&gt;
&lt;hr /&gt;
&lt;div&gt;==작가==&lt;br /&gt;
&lt;br /&gt;
[[파일:연암_박지원.jpeg|섬네일|왼쪽]]&amp;lt;ref&amp;gt;박진홍,「[고전으로 세상 읽기] 14. 한민족 최고 기행문 ‘열하일기'」, 『부산일보』, 2019, 6, 27, https://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2019062718100166734, 2025. 6. 24. 접속.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 &amp;lt;박지원&amp;gt;&lt;br /&gt;
| 호 || 연암&lt;br /&gt;
|-&lt;br /&gt;
| 자 || 미중, 중미&lt;br /&gt;
|-&lt;br /&gt;
| 본관 || 반남&lt;br /&gt;
|-&lt;br /&gt;
| 출생 || 1737 &lt;br /&gt;
|-&lt;br /&gt;
| 사망 || 1805&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박지원은 서울의 서쪽인 반송방 야동에서 태어났다.&lt;br /&gt;
&lt;br /&gt;
&lt;br /&gt;
어릴 때부터 몸이 건강하였고 영민하였다고 전해진다. &lt;br /&gt;
&lt;br /&gt;
&lt;br /&gt;
아버지가 벼슬 없이 선비로 지냈으며, &amp;lt;ins&amp;gt;박지원 또한 과거에 실패한 후 뜻을 두지 않고 학문과 저술에 힘썼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박제가, 이서구, 서상수, 유득공, 유금''' 등과 이웃하며 어울려 지냈다.&lt;br /&gt;
&lt;br /&gt;
홍대용, 이덕무, 정철조 등과 &amp;lt;font color=&amp;quot;#00FFFF&amp;quot;&amp;gt;'''이용후생'''&amp;lt;/font&amp;gt;에 대해 자주 토론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1780년에는 삼종형 '''박명원'''을 따라 연행사의 '''자제군관'''으로 임명받아 청나라에 갔다.&lt;br /&gt;
&lt;br /&gt;
청나라를 시찰하고 온 경험을 바탕으로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amp;lt;열하일기&amp;gt;'''&amp;lt;/span&amp;gt;를 작성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청나라를 갔다 온 이후에는 조선에서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가져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박지원은 &amp;lt;ins&amp;gt;조선 후기의 시대상을 비판하고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amp;lt;/ins&amp;gt;하기 위해 '''한문 단편 소설'''을 지었고, 그 중에 양반전이 포함된다. &amp;lt;ref&amp;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박지원」,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1216, 2025, 6, 24.&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배경==&lt;br /&gt;
&lt;br /&gt;
조선 후기 상업과 농업이 발전함에 따라 평민들 중에서 양반가와 맞먹는 재산을 가진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부농'''&amp;lt;/font&amp;gt;이 등장하였다.&lt;br /&gt;
&lt;br /&gt;
이들은 재산이 많아지니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신분상승'''&amp;lt;/font&amp;gt;을 꾀하게 되었고, 양반의 신분을 사려는 시도가 이어졌다.&lt;br /&gt;
&lt;br /&gt;
이에 반해 조선 후기 여러 전란을 겪으면서 양반들의 위세가 약해지고, 재산의 규모가 줄어들어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몰락양반'''&amp;lt;/font&amp;gt;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lt;br /&gt;
&lt;br /&gt;
작가 박지원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기반으로 양반의 신분을 사려는 부농의 이야기,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amp;lt;양반전&amp;gt;'''&amp;lt;/span&amp;gt;을 지었다고 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lt;br /&gt;
[[파일:양반전.jpeg|섬네일|왼쪽]]&amp;lt;ref&amp;gt; 「양반전 (兩班傳) _ 연암 박지원 저」, 『크리스천 라이프』, 9, 3, https://chedulife.com.au/양반전-兩班傳-_-연암-박지원-저/,2025. 6. 24. 접속.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양반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lt;br /&gt;
&lt;br /&gt;
&lt;br /&gt;
정선에 어질고 책읽기를 좋아하지만, 가난한 양반이 살고 있었다. &lt;br /&gt;
&lt;br /&gt;
군수가 도임하면 반드시 찾아갈 예를 차릴 만큼 덕망이 높은 인물이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하지만, 그 양반의 집이 너무 가난하여 관곡을 빌려 살았다. &lt;br /&gt;
&lt;br /&gt;
양반의 상황이 나아지지 않자, 빌린 관곡은 쌓이고 쌓여 '''1,000석'''에 이르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관찰사는 양반을 당장 가두라는 명령을 내렸고, 군수는 차마 덕망 있는 선비를 가둘 수 없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그러던 중, 마을의 부자가 양반의 신분을 사겠다고 제안하였다. &lt;br /&gt;
&lt;br /&gt;
양반은 이를 기쁘게 받아들였고, 부자의 관곡으로 양반의 빚은 사라지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 소식을 들은 군수는 양반이 지켜야 할 규율이 빼곡힌 적힌 '''문권'''을 부자에게 건넨다. &lt;br /&gt;
&lt;br /&gt;
문권을 읽어본 부자는 양반이라는 신분이 그저 좋은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신분을 바꾸지 않기로 결정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해당 문권은 양반의 사회적 가치와 덕목을 강조한 내용으로, &amp;lt;ins&amp;gt;저자는 &amp;lt;양반전&amp;gt;을 통해서 당시 신분을 사고 팔던 시대상을 비판하였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또한, 선비의 지조를 잃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며, 양반으로서 신분을 지킬 것을 역설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981&amp;quot; height=&amp;quot;552&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qzItNe_-1Rk&amp;quot; title=&amp;quot;양반으로 &amp;amp;#39;FLEX&amp;amp;#39; 해버렸지 뭐야~ | 10cut 고전소설, 양반전, 박지원, 양반제도, 사농공상, 조선의 갑 | EBSi 고교강의&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amp;lt;ref&amp;gt;[EBSi] [양반으로 'FLEX' 해버렸지 뭐야~] [2020. 2. 4.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조선후기 '''양반 신분 매매 사회상'''을 간결한 필취로 그린 작품이다. &lt;br /&gt;
&lt;br /&gt;
또한 당시 신분질서 문란을 유발했던 신분 매매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며, '''양반의 덕목과 지조를 강조'''하였다. &lt;br /&gt;
&lt;br /&gt;
중간중간 '''익살스러운 표현'''은 독자에게 웃음을 유발하여 더욱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Jinhyang</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6%91%EB%B0%98%EC%A0%84%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732</id>
		<title>양반전ᐧ༚̮ᐧ</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6%91%EB%B0%98%EC%A0%84%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732"/>
		<updated>2025-06-23T21:30:2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inhyang: &lt;/p&gt;
&lt;hr /&gt;
&lt;div&gt;==작가==&lt;br /&gt;
&lt;br /&gt;
[[파일:연암_박지원.jpeg|섬네일|왼쪽]]&amp;lt;ref&amp;gt;박진홍,「[고전으로 세상 읽기] 14. 한민족 최고 기행문 ‘열하일기'」, 『부산일보』, 2019, 6, 27, https://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2019062718100166734, 2025. 6. 24. 접속.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 &amp;lt;박지원&amp;gt;&lt;br /&gt;
| 호 || 연암&lt;br /&gt;
|-&lt;br /&gt;
| 자 || 미중, 중미&lt;br /&gt;
|-&lt;br /&gt;
| 본관 || 반남&lt;br /&gt;
|-&lt;br /&gt;
| 출생 || 1737 &lt;br /&gt;
|-&lt;br /&gt;
| 사망 || 1805&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박지원은 서울의 서쪽인 반송방 야동에서 태어났다.&lt;br /&gt;
&lt;br /&gt;
&lt;br /&gt;
어릴 때부터 몸이 건강하였고 영민하였다고 전해진다. &lt;br /&gt;
&lt;br /&gt;
&lt;br /&gt;
아버지가 벼슬 없이 선비로 지냈으며, &amp;lt;ins&amp;gt;박지원 또한 과거에 실패한 후 뜻을 두지 않고 학문과 저술에 힘썼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박제가, 이서구, 서상수, 유득공, 유금''' 등과 이웃하며 어울려 지냈다.&lt;br /&gt;
&lt;br /&gt;
홍대용, 이덕무, 정철조 등과 &amp;lt;font color=&amp;quot;#00FFFF&amp;quot;&amp;gt;'''이용후생'''&amp;lt;/font&amp;gt;에 대해 자주 토론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1780년에는 삼종형 '''박명원'''을 따라 연행사의 '''자제군관'''으로 임명받아 청나라에 갔다.&lt;br /&gt;
&lt;br /&gt;
청나라를 시찰하고 온 경험을 바탕으로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amp;lt;열하일기&amp;gt;'''&amp;lt;/span&amp;gt;를 작성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청나라를 갔다 온 이후에는 조선에서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가져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박지원은 &amp;lt;ins&amp;gt;조선 후기의 시대상을 비판하고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amp;lt;/ins&amp;gt;하기 위해 '''한문 단편 소설'''을 지었고, 그 중에 양반전이 포함된다. &amp;lt;ref&amp;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박지원」,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1216, 2025, 6, 24.&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배경==&lt;br /&gt;
&lt;br /&gt;
조선 후기 상업과 농업이 발전함에 따라 평민들 중에서 양반가와 맞먹는 재산을 가진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부농'''&amp;lt;/font&amp;gt;이 등장하였다.&lt;br /&gt;
&lt;br /&gt;
이들은 재산이 많아지니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신분상승'''&amp;lt;/font&amp;gt;을 꾀하게 되었고, 양반의 신분을 사려는 시도가 이어졌다.&lt;br /&gt;
&lt;br /&gt;
이에 반해 조선 후기 여러 전란을 겪으면서 양반들의 위세가 약해지고, 재산의 규모가 줄어들어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몰락양반'''&amp;lt;/font&amp;gt;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lt;br /&gt;
&lt;br /&gt;
작가 박지원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기반으로 양반의 신분을 사려는 부농의 이야기,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amp;lt;양반전&amp;gt;'''&amp;lt;/span&amp;gt;을 지었다고 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lt;br /&gt;
[[파일:양반전.jpeg|섬네일|왼쪽]]&amp;lt;ref&amp;gt; 「양반전 (兩班傳) _ 연암 박지원 저」, 『크리스천 라이프』, 9, 3, https://chedulife.com.au/양반전-兩班傳-_-연암-박지원-저/,2025. 6. 24. 접속.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양반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lt;br /&gt;
&lt;br /&gt;
&lt;br /&gt;
정선에 어질고 책읽기를 좋아하지만, 가난한 양반이 살고 있었다. &lt;br /&gt;
&lt;br /&gt;
군수가 도임하면 반드시 찾아갈 예를 차릴 만큼 덕망이 높은 인물이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하지만, 그 양반의 집이 너무 가난하여 관곡을 빌려 살았다. &lt;br /&gt;
&lt;br /&gt;
양반의 상황이 나아지지 않자, 빌린 관곡은 쌓이고 쌓여 '''1,000석'''에 이르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관찰사는 양반을 당장 가두라는 명령을 내렸고, 군수는 차마 덕망 있는 선비를 가둘 수 없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그러던 중, 마을의 부자가 양반의 신분을 사겠다고 제안하였다. &lt;br /&gt;
&lt;br /&gt;
양반은 이를 기쁘게 받아들였고, 부자의 관곡으로 양반의 빚은 사라지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 소식을 들은 군수는 양반이 지켜야 할 규율이 빼곡힌 적힌 '''문권'''을 부자에게 건넨다. &lt;br /&gt;
&lt;br /&gt;
문권을 읽어본 부자는 양반이라는 신분이 그저 좋은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신분을 바꾸지 않기로 결정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해당 문권은 양반의 사회적 가치와 덕목을 강조한 내용으로, &amp;lt;ins&amp;gt;저자는 &amp;lt;양반전&amp;gt;을 통해서 당시 신분을 사고 팔던 시대상을 비판하였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또한, 선비의 지조를 잃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며, 양반으로서 신분을 지킬 것을 역설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981&amp;quot; height=&amp;quot;552&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qzItNe_-1Rk&amp;quot; title=&amp;quot;양반으로 &amp;amp;#39;FLEX&amp;amp;#39; 해버렸지 뭐야~ | 10cut 고전소설, 양반전, 박지원, 양반제도, 사농공상, 조선의 갑 | EBSi 고교강의&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amp;lt;ref&amp;gt;[EBSi] [양반으로 'FLEX' 해버렸지 뭐야~] [2020. 2. 4.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조선후기 '''양반 신분 매매 사회상'''을 간결한 필취로 그린 작품이다. &lt;br /&gt;
&lt;br /&gt;
또한 당시 신분질서 문란을 유발했던 신분 매매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며, '''양반의 덕목과 지조를 강조'''하였다. &lt;br /&gt;
&lt;br /&gt;
중간중간 '''익살스러운 표현'''은 독자에게 웃음을 유발하여 더욱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lt;br /&gt;
&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Jinhyang</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6%91%EB%B0%98%EC%A0%84%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730</id>
		<title>양반전ᐧ༚̮ᐧ</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6%91%EB%B0%98%EC%A0%84%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730"/>
		<updated>2025-06-23T21:29:2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inhyang: &lt;/p&gt;
&lt;hr /&gt;
&lt;div&gt;==작가==&lt;br /&gt;
&lt;br /&gt;
[[파일:연암_박지원.jpeg|섬네일|왼쪽]]&amp;lt;ref&amp;gt;박진홍,「[고전으로 세상 읽기] 14. 한민족 최고 기행문 ‘열하일기'」, 『부산일보』, 2019, 6, 27, https://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2019062718100166734, 2025. 6. 24. 접속.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 &amp;lt;박지원&amp;gt;&lt;br /&gt;
| 호 || 연암&lt;br /&gt;
|-&lt;br /&gt;
| 자 || 미중, 중미&lt;br /&gt;
|-&lt;br /&gt;
| 본관 || 반남&lt;br /&gt;
|-&lt;br /&gt;
| 출생 || 1737 &lt;br /&gt;
|-&lt;br /&gt;
| 사망 || 1805&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박지원은 서울의 서쪽인 반송방 야동에서 태어났다.&lt;br /&gt;
&lt;br /&gt;
&lt;br /&gt;
어릴 때부터 몸이 건강하였고 영민하였다고 전해진다. &lt;br /&gt;
&lt;br /&gt;
&lt;br /&gt;
아버지가 벼슬 없이 선비로 지냈으며, &amp;lt;ins&amp;gt;박지원 또한 과거에 실패한 후 뜻을 두지 않고 학문과 저술에 힘썼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박제가, 이서구, 서상수, 유득공, 유금''' 등과 이웃하며 어울려 지냈다.&lt;br /&gt;
&lt;br /&gt;
홍대용, 이덕무, 정철조 등과 &amp;lt;font color=&amp;quot;#00FFFF&amp;quot;&amp;gt;'''이용후생'''&amp;lt;/font&amp;gt;에 대해 자주 토론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1780년에는 삼종형 '''박명원'''을 따라 연행사의 '''자제군관'''으로 임명받아 청나라에 갔다.&lt;br /&gt;
&lt;br /&gt;
청나라를 시찰하고 온 경험을 바탕으로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amp;lt;열하일기&amp;gt;'''&amp;lt;/span&amp;gt;를 작성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청나라를 갔다 온 이후에는 조선에서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가져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박지원은 &amp;lt;ins&amp;gt;조선 후기의 시대상을 비판하고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amp;lt;/ins&amp;gt;하기 위해 '''한문 단편 소설'''을 지었고, 그 중에 양반전이 포함된다. &amp;lt;ref&amp;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박지원」,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1216, 2025, 6, 24.&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배경==&lt;br /&gt;
&lt;br /&gt;
조선 후기 상업과 농업이 발전함에 따라 평민들 중에서 양반가와 맞먹는 재산을 가진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부농'''&amp;lt;/font&amp;gt;이 등장하였다.&lt;br /&gt;
&lt;br /&gt;
이들은 재산이 많아지니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신분상승'''&amp;lt;/font&amp;gt;을 꾀하게 되었고, 양반의 신분을 사려는 시도가 이어졌다.&lt;br /&gt;
&lt;br /&gt;
이에 반해 조선 후기 여러 전란을 겪으면서 양반들의 위세가 약해지고, 재산의 규모가 줄어들어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몰락양반'''&amp;lt;/font&amp;gt;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lt;br /&gt;
&lt;br /&gt;
작가 박지원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기반으로 양반의 신분을 사려는 부농의 이야기,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amp;lt;양반전&amp;gt;'''&amp;lt;/span&amp;gt;을 지었다고 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lt;br /&gt;
[[파일:양반전.jpeg|섬네일|왼쪽]]&amp;lt;ref&amp;gt; 「양반전 (兩班傳) _ 연암 박지원 저」, 『크리스천 라이프』, 9, 3, https://chedulife.com.au/양반전-兩班傳-_-연암-박지원-저/,2025. 6. 24. 접속.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양반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lt;br /&gt;
&lt;br /&gt;
&lt;br /&gt;
정선에 어질고 책읽기를 좋아하지만, 가난한 양반이 살고 있었다. &lt;br /&gt;
&lt;br /&gt;
군수가 도임하면 반드시 찾아갈 예를 차릴 만큼 덕망이 높은 인물이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하지만, 그 양반의 집이 너무 가난하여 관곡을 빌려 살았다. &lt;br /&gt;
&lt;br /&gt;
양반의 상황이 나아지지 않자, 빌린 관곡은 쌓이고 쌓여 '''1,000석'''에 이르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관찰사는 양반을 당장 가두라는 명령을 내렸고, 군수는 차마 덕망 있는 선비를 가둘 수 없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그러던 중, 마을의 부자가 양반의 신분을 사겠다고 제안하였다. &lt;br /&gt;
&lt;br /&gt;
양반은 이를 기쁘게 받아들였고, 부자의 관곡으로 양반의 빚은 사라지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 소식을 들은 군수는 양반이 지켜야 할 규율이 빼곡힌 적힌 '''문권'''을 부자에게 건넨다. &lt;br /&gt;
&lt;br /&gt;
문권을 읽어본 부자는 양반이라는 신분이 그저 좋은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신분을 바꾸지 않기로 결정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해당 문권은 양반의 사회적 가치와 덕목을 강조한 내용으로, &amp;lt;ins&amp;gt;저자는 &amp;lt;양반전&amp;gt;을 통해서 당시 신분을 사고 팔던 시대상을 비판하였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또한, 선비의 지조를 잃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며, 양반으로서 신분을 지킬 것을 역설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981&amp;quot; height=&amp;quot;552&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qzItNe_-1Rk&amp;quot; title=&amp;quot;양반으로 &amp;amp;#39;FLEX&amp;amp;#39; 해버렸지 뭐야~ | 10cut 고전소설, 양반전, 박지원, 양반제도, 사농공상, 조선의 갑 | EBSi 고교강의&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amp;lt;ref&amp;gt;[EBSi] [양반으로 'FLEX' 해버렸지 뭐야~] [2020. 2. 4.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조선후기 '''양반 신분 매매 사회상'''을 간결한 필취로 그린 작품이다. &lt;br /&gt;
&lt;br /&gt;
또한 당시 신분질서 문란을 유발했던 신분 매매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며, '''양반의 덕목과 지조를 강조'''하였다. &lt;br /&gt;
&lt;br /&gt;
중간중간 '''익살스러운 표현'''은 독자에게 웃음을 유발하여 더욱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lt;/div&gt;</summary>
		<author><name>Jinhyang</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6%91%EB%B0%98%EC%A0%84%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726</id>
		<title>양반전ᐧ༚̮ᐧ</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6%91%EB%B0%98%EC%A0%84%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726"/>
		<updated>2025-06-23T21:21:3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inhyang: &lt;/p&gt;
&lt;hr /&gt;
&lt;div&gt;==작가==&lt;br /&gt;
&lt;br /&gt;
[[파일:연암_박지원.jpeg|섬네일|왼쪽]]&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 &amp;lt;박지원&amp;gt;&lt;br /&gt;
| 호 || 연암&lt;br /&gt;
|-&lt;br /&gt;
| 자 || 미중, 중미&lt;br /&gt;
|-&lt;br /&gt;
| 본관 || 반남&lt;br /&gt;
|-&lt;br /&gt;
| 출생 || 1737 &lt;br /&gt;
|-&lt;br /&gt;
| 사망 || 1805&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박지원은 서울의 서쪽인 반송방 야동에서 태어났다.&lt;br /&gt;
&lt;br /&gt;
&lt;br /&gt;
어릴 때부터 몸이 건강하였고 영민하였다고 전해진다. &lt;br /&gt;
&lt;br /&gt;
&lt;br /&gt;
아버지가 벼슬 없이 선비로 지냈으며, &amp;lt;ins&amp;gt;박지원 또한 과거에 실패한 후 뜻을 두지 않고 학문과 저술에 힘썼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박제가, 이서구, 서상수, 유득공, 유금''' 등과 이웃하며 어울려 지냈다.&lt;br /&gt;
&lt;br /&gt;
홍대용, 이덕무, 정철조 등과 &amp;lt;font color=&amp;quot;#00FFFF&amp;quot;&amp;gt;'''이용후생'''&amp;lt;/font&amp;gt;에 대해 자주 토론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1780년에는 삼종형 '''박명원'''을 따라 연행사의 '''자제군관'''으로 임명받아 청나라에 갔다.&lt;br /&gt;
&lt;br /&gt;
청나라를 시찰하고 온 경험을 바탕으로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amp;lt;열하일기&amp;gt;'''&amp;lt;/span&amp;gt;를 작성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청나라를 갔다 온 이후에는 조선에서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가져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박지원은 &amp;lt;ins&amp;gt;조선 후기의 시대상을 비판하고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amp;lt;/ins&amp;gt;하기 위해 '''한문 단편 소설'''을 지었고, 그 중에 양반전이 포함된다. &amp;lt;ref&amp;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박지원」,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1216, 2025, 6, 24.&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배경==&lt;br /&gt;
&lt;br /&gt;
조선 후기 상업과 농업이 발전함에 따라 평민들 중에서 양반가와 맞먹는 재산을 가진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부농'''&amp;lt;/font&amp;gt;이 등장하였다.&lt;br /&gt;
&lt;br /&gt;
이들은 재산이 많아지니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신분상승'''&amp;lt;/font&amp;gt;을 꾀하게 되었고, 양반의 신분을 사려는 시도가 이어졌다.&lt;br /&gt;
&lt;br /&gt;
이에 반해 조선 후기 여러 전란을 겪으면서 양반들의 위세가 약해지고, 재산의 규모가 줄어들어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몰락양반'''&amp;lt;/font&amp;gt;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lt;br /&gt;
&lt;br /&gt;
작가 박지원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기반으로 양반의 신분을 사려는 부농의 이야기,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amp;lt;양반전&amp;gt;'''&amp;lt;/span&amp;gt;을 지었다고 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lt;br /&gt;
[[파일:양반전.jpeg|섬네일|왼쪽]]&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양반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lt;br /&gt;
&lt;br /&gt;
&lt;br /&gt;
정선에 어질고 책읽기를 좋아하지만, 가난한 양반이 살고 있었다. &lt;br /&gt;
&lt;br /&gt;
군수가 도임하면 반드시 찾아갈 예를 차릴 만큼 덕망이 높은 인물이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하지만, 그 양반의 집이 너무 가난하여 관곡을 빌려 살았다. &lt;br /&gt;
&lt;br /&gt;
양반의 상황이 나아지지 않자, 빌린 관곡은 쌓이고 쌓여 '''1,000석'''에 이르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관찰사는 양반을 당장 가두라는 명령을 내렸고, 군수는 차마 덕망 있는 선비를 가둘 수 없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그러던 중, 마을의 부자가 양반의 신분을 사겠다고 제안하였다. &lt;br /&gt;
&lt;br /&gt;
양반은 이를 기쁘게 받아들였고, 부자의 관곡으로 양반의 빚은 사라지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 소식을 들은 군수는 양반이 지켜야 할 규율이 빼곡힌 적힌 '''문권'''을 부자에게 건넨다. &lt;br /&gt;
&lt;br /&gt;
문권을 읽어본 부자는 양반이라는 신분이 그저 좋은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신분을 바꾸지 않기로 결정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해당 문권은 양반의 사회적 가치와 덕목을 강조한 내용으로, &amp;lt;ins&amp;gt;저자는 &amp;lt;양반전&amp;gt;을 통해서 당시 신분을 사고 팔던 시대상을 비판하였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또한, 선비의 지조를 잃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며, 양반으로서 신분을 지킬 것을 역설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981&amp;quot; height=&amp;quot;552&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qzItNe_-1Rk&amp;quot; title=&amp;quot;양반으로 &amp;amp;#39;FLEX&amp;amp;#39; 해버렸지 뭐야~ | 10cut 고전소설, 양반전, 박지원, 양반제도, 사농공상, 조선의 갑 | EBSi 고교강의&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amp;lt;ref&amp;gt;[EBSi] [양반으로 'FLEX' 해버렸지 뭐야~] [2020. 2. 4.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조선후기 '''양반 신분 매매 사회상'''을 간결한 필취로 그린 작품이다. &lt;br /&gt;
&lt;br /&gt;
또한 당시 신분질서 문란을 유발했던 신분 매매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며, '''양반의 덕목과 지조를 강조'''하였다. &lt;br /&gt;
&lt;br /&gt;
중간중간 '''익살스러운 표현'''은 독자에게 웃음을 유발하여 더욱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lt;/div&gt;</summary>
		<author><name>Jinhyang</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6%91%EB%B0%98%EC%A0%84%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725</id>
		<title>양반전ᐧ༚̮ᐧ</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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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06-23T21:20:2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inhyang: &lt;/p&gt;
&lt;hr /&gt;
&lt;div&gt;==작가==&lt;br /&gt;
&lt;br /&gt;
[[파일:박지원|섬네일|왼쪽]]&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 &amp;lt;박지원&amp;gt;&lt;br /&gt;
| 호 || 연암&lt;br /&gt;
|-&lt;br /&gt;
| 자 || 미중, 중미&lt;br /&gt;
|-&lt;br /&gt;
| 본관 || 반남&lt;br /&gt;
|-&lt;br /&gt;
| 출생 || 1737 &lt;br /&gt;
|-&lt;br /&gt;
| 사망 || 1805&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박지원은 서울의 서쪽인 반송방 야동에서 태어났다.&lt;br /&gt;
&lt;br /&gt;
&lt;br /&gt;
어릴 때부터 몸이 건강하였고 영민하였다고 전해진다. &lt;br /&gt;
&lt;br /&gt;
&lt;br /&gt;
아버지가 벼슬 없이 선비로 지냈으며, &amp;lt;ins&amp;gt;박지원 또한 과거에 실패한 후 뜻을 두지 않고 학문과 저술에 힘썼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박제가, 이서구, 서상수, 유득공, 유금''' 등과 이웃하며 어울려 지냈다.&lt;br /&gt;
&lt;br /&gt;
홍대용, 이덕무, 정철조 등과 &amp;lt;font color=&amp;quot;#00FFFF&amp;quot;&amp;gt;'''이용후생'''&amp;lt;/font&amp;gt;에 대해 자주 토론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1780년에는 삼종형 '''박명원'''을 따라 연행사의 '''자제군관'''으로 임명받아 청나라에 갔다.&lt;br /&gt;
&lt;br /&gt;
청나라를 시찰하고 온 경험을 바탕으로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amp;lt;열하일기&amp;gt;'''&amp;lt;/span&amp;gt;를 작성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청나라를 갔다 온 이후에는 조선에서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가져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박지원은 &amp;lt;ins&amp;gt;조선 후기의 시대상을 비판하고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amp;lt;/ins&amp;gt;하기 위해 '''한문 단편 소설'''을 지었고, 그 중에 양반전이 포함된다. &amp;lt;ref&amp;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박지원」,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1216, 2025, 6, 24.&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배경==&lt;br /&gt;
&lt;br /&gt;
조선 후기 상업과 농업이 발전함에 따라 평민들 중에서 양반가와 맞먹는 재산을 가진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부농'''&amp;lt;/font&amp;gt;이 등장하였다.&lt;br /&gt;
&lt;br /&gt;
이들은 재산이 많아지니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신분상승'''&amp;lt;/font&amp;gt;을 꾀하게 되었고, 양반의 신분을 사려는 시도가 이어졌다.&lt;br /&gt;
&lt;br /&gt;
이에 반해 조선 후기 여러 전란을 겪으면서 양반들의 위세가 약해지고, 재산의 규모가 줄어들어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몰락양반'''&amp;lt;/font&amp;gt;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lt;br /&gt;
&lt;br /&gt;
작가 박지원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기반으로 양반의 신분을 사려는 부농의 이야기,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amp;lt;양반전&amp;gt;'''&amp;lt;/span&amp;gt;을 지었다고 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lt;br /&gt;
[[파일:양반전.jpeg|섬네일|왼쪽]]&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양반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lt;br /&gt;
&lt;br /&gt;
&lt;br /&gt;
정선에 어질고 책읽기를 좋아하지만, 가난한 양반이 살고 있었다. &lt;br /&gt;
&lt;br /&gt;
군수가 도임하면 반드시 찾아갈 예를 차릴 만큼 덕망이 높은 인물이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하지만, 그 양반의 집이 너무 가난하여 관곡을 빌려 살았다. &lt;br /&gt;
&lt;br /&gt;
양반의 상황이 나아지지 않자, 빌린 관곡은 쌓이고 쌓여 '''1,000석'''에 이르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관찰사는 양반을 당장 가두라는 명령을 내렸고, 군수는 차마 덕망 있는 선비를 가둘 수 없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그러던 중, 마을의 부자가 양반의 신분을 사겠다고 제안하였다. &lt;br /&gt;
&lt;br /&gt;
양반은 이를 기쁘게 받아들였고, 부자의 관곡으로 양반의 빚은 사라지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 소식을 들은 군수는 양반이 지켜야 할 규율이 빼곡힌 적힌 '''문권'''을 부자에게 건넨다. &lt;br /&gt;
&lt;br /&gt;
문권을 읽어본 부자는 양반이라는 신분이 그저 좋은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신분을 바꾸지 않기로 결정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해당 문권은 양반의 사회적 가치와 덕목을 강조한 내용으로, &amp;lt;ins&amp;gt;저자는 &amp;lt;양반전&amp;gt;을 통해서 당시 신분을 사고 팔던 시대상을 비판하였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또한, 선비의 지조를 잃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며, 양반으로서 신분을 지킬 것을 역설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981&amp;quot; height=&amp;quot;552&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qzItNe_-1Rk&amp;quot; title=&amp;quot;양반으로 &amp;amp;#39;FLEX&amp;amp;#39; 해버렸지 뭐야~ | 10cut 고전소설, 양반전, 박지원, 양반제도, 사농공상, 조선의 갑 | EBSi 고교강의&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amp;lt;ref&amp;gt;[EBSi] [양반으로 'FLEX' 해버렸지 뭐야~] [2020. 2. 4.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조선후기 '''양반 신분 매매 사회상'''을 간결한 필취로 그린 작품이다. &lt;br /&gt;
&lt;br /&gt;
또한 당시 신분질서 문란을 유발했던 신분 매매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며, '''양반의 덕목과 지조를 강조'''하였다. &lt;br /&gt;
&lt;br /&gt;
중간중간 '''익살스러운 표현'''은 독자에게 웃음을 유발하여 더욱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lt;/div&gt;</summary>
		<author><name>Jinhyang</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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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양반전ᐧ༚̮ᐧ</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6%91%EB%B0%98%EC%A0%84%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722"/>
		<updated>2025-06-23T21:18:3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inhyang: &lt;/p&gt;
&lt;hr /&gt;
&lt;div&gt;==작가==&lt;br /&gt;
&lt;br /&gt;
[[파일:박지원|섬네일|왼쪽]]&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 &amp;lt;박지원&amp;gt;&lt;br /&gt;
| 호 || 연암&lt;br /&gt;
|-&lt;br /&gt;
| 자 || 미중, 중미&lt;br /&gt;
|-&lt;br /&gt;
| 본관 || 반남&lt;br /&gt;
|-&lt;br /&gt;
| 출생 || 1737 &lt;br /&gt;
|-&lt;br /&gt;
| 사망 || 1805&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박지원은 서울의 서쪽인 반송방 야동에서 태어났다.&lt;br /&gt;
&lt;br /&gt;
&lt;br /&gt;
어릴 때부터 몸이 건강하였고 영민하였다고 전해진다. &lt;br /&gt;
&lt;br /&gt;
&lt;br /&gt;
아버지가 벼슬 없이 선비로 지냈으며, &amp;lt;ins&amp;gt;박지원 또한 과거에 실패한 후 뜻을 두지 않고 학문과 저술에 힘썼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박제가, 이서구, 서상수, 유득공, 유금''' 등과 이웃하며 어울려 지냈다.&lt;br /&gt;
&lt;br /&gt;
홍대용, 이덕무, 정철조 등과 &amp;lt;font color=&amp;quot;#00FFFF&amp;quot;&amp;gt;'''이용후생'''&amp;lt;/font&amp;gt;에 대해 자주 토론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1780년에는 삼종형 '''박명원'''을 따라 연행사의 '''자제군관'''으로 임명받아 청나라에 갔다.&lt;br /&gt;
&lt;br /&gt;
청나라를 시찰하고 온 경험을 바탕으로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amp;lt;열하일기&amp;gt;'''&amp;lt;/span&amp;gt;를 작성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청나라를 갔다 온 이후에는 조선에서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가져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박지원은 &amp;lt;ins&amp;gt;조선 후기의 시대상을 비판하고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amp;lt;/ins&amp;gt;하기 위해 '''한문 단편 소설'''을 지었고, 그 중에 양반전이 포함된다. &amp;lt;ref&amp;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박지원」,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1216, 2025, 6, 24.&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배경==&lt;br /&gt;
&lt;br /&gt;
조선 후기 상업과 농업이 발전함에 따라 평민들 중에서 양반가와 맞먹는 재산을 가진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부농'''&amp;lt;/font&amp;gt;이 등장하였다.&lt;br /&gt;
&lt;br /&gt;
이들은 재산이 많아지니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신분상승'''&amp;lt;/font&amp;gt;을 꾀하게 되었고, 양반의 신분을 사려는 시도가 이어졌다.&lt;br /&gt;
&lt;br /&gt;
이에 반해 조선 후기 여러 전란을 겪으면서 양반들의 위세가 약해지고, 재산의 규모가 줄어들어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몰락양반'''&amp;lt;/font&amp;gt;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lt;br /&gt;
&lt;br /&gt;
작가 박지원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기반으로 양반의 신분을 사려는 부농의 이야기,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amp;lt;양반전&amp;gt;'''&amp;lt;/span&amp;gt;을 지었다고 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lt;br /&gt;
[[파일:양반전.webp|섬네일|왼쪽]]&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양반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lt;br /&gt;
&lt;br /&gt;
&lt;br /&gt;
정선에 어질고 책읽기를 좋아하지만, 가난한 양반이 살고 있었다. &lt;br /&gt;
&lt;br /&gt;
군수가 도임하면 반드시 찾아갈 예를 차릴 만큼 덕망이 높은 인물이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하지만, 그 양반의 집이 너무 가난하여 관곡을 빌려 살았다. &lt;br /&gt;
&lt;br /&gt;
양반의 상황이 나아지지 않자, 빌린 관곡은 쌓이고 쌓여 '''1,000석'''에 이르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관찰사는 양반을 당장 가두라는 명령을 내렸고, 군수는 차마 덕망 있는 선비를 가둘 수 없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그러던 중, 마을의 부자가 양반의 신분을 사겠다고 제안하였다. &lt;br /&gt;
&lt;br /&gt;
양반은 이를 기쁘게 받아들였고, 부자의 관곡으로 양반의 빚은 사라지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 소식을 들은 군수는 양반이 지켜야 할 규율이 빼곡힌 적힌 '''문권'''을 부자에게 건넨다. &lt;br /&gt;
&lt;br /&gt;
문권을 읽어본 부자는 양반이라는 신분이 그저 좋은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신분을 바꾸지 않기로 결정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해당 문권은 양반의 사회적 가치와 덕목을 강조한 내용으로, &amp;lt;ins&amp;gt;저자는 &amp;lt;양반전&amp;gt;을 통해서 당시 신분을 사고 팔던 시대상을 비판하였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또한, 선비의 지조를 잃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며, 양반으로서 신분을 지킬 것을 역설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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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조선후기 '''양반 신분 매매 사회상'''을 간결한 필취로 그린 작품이다. &lt;br /&gt;
&lt;br /&gt;
또한 당시 신분질서 문란을 유발했던 신분 매매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며, '''양반의 덕목과 지조를 강조'''하였다. &lt;br /&gt;
&lt;br /&gt;
중간중간 '''익살스러운 표현'''은 독자에게 웃음을 유발하여 더욱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lt;/div&gt;</summary>
		<author><name>Jinhyang</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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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양반전ᐧ༚̮ᐧ</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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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06-23T21:18:2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inhyang: &lt;/p&gt;
&lt;hr /&gt;
&lt;div&gt;==작가==&lt;br /&gt;
&lt;br /&gt;
[[파일:양반전.webp|섬네일|왼쪽]]&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 &amp;lt;박지원&amp;gt;&lt;br /&gt;
| 호 || 연암&lt;br /&gt;
|-&lt;br /&gt;
| 자 || 미중, 중미&lt;br /&gt;
|-&lt;br /&gt;
| 본관 || 반남&lt;br /&gt;
|-&lt;br /&gt;
| 출생 || 1737 &lt;br /&gt;
|-&lt;br /&gt;
| 사망 || 1805&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박지원은 서울의 서쪽인 반송방 야동에서 태어났다.&lt;br /&gt;
&lt;br /&gt;
&lt;br /&gt;
어릴 때부터 몸이 건강하였고 영민하였다고 전해진다. &lt;br /&gt;
&lt;br /&gt;
&lt;br /&gt;
아버지가 벼슬 없이 선비로 지냈으며, &amp;lt;ins&amp;gt;박지원 또한 과거에 실패한 후 뜻을 두지 않고 학문과 저술에 힘썼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박제가, 이서구, 서상수, 유득공, 유금''' 등과 이웃하며 어울려 지냈다.&lt;br /&gt;
&lt;br /&gt;
홍대용, 이덕무, 정철조 등과 &amp;lt;font color=&amp;quot;#00FFFF&amp;quot;&amp;gt;'''이용후생'''&amp;lt;/font&amp;gt;에 대해 자주 토론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1780년에는 삼종형 '''박명원'''을 따라 연행사의 '''자제군관'''으로 임명받아 청나라에 갔다.&lt;br /&gt;
&lt;br /&gt;
청나라를 시찰하고 온 경험을 바탕으로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amp;lt;열하일기&amp;gt;'''&amp;lt;/span&amp;gt;를 작성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청나라를 갔다 온 이후에는 조선에서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가져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박지원은 &amp;lt;ins&amp;gt;조선 후기의 시대상을 비판하고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amp;lt;/ins&amp;gt;하기 위해 '''한문 단편 소설'''을 지었고, 그 중에 양반전이 포함된다. &amp;lt;ref&amp;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박지원」,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1216, 2025, 6, 24.&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배경==&lt;br /&gt;
&lt;br /&gt;
조선 후기 상업과 농업이 발전함에 따라 평민들 중에서 양반가와 맞먹는 재산을 가진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부농'''&amp;lt;/font&amp;gt;이 등장하였다.&lt;br /&gt;
&lt;br /&gt;
이들은 재산이 많아지니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신분상승'''&amp;lt;/font&amp;gt;을 꾀하게 되었고, 양반의 신분을 사려는 시도가 이어졌다.&lt;br /&gt;
&lt;br /&gt;
이에 반해 조선 후기 여러 전란을 겪으면서 양반들의 위세가 약해지고, 재산의 규모가 줄어들어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몰락양반'''&amp;lt;/font&amp;gt;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lt;br /&gt;
&lt;br /&gt;
작가 박지원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기반으로 양반의 신분을 사려는 부농의 이야기,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amp;lt;양반전&amp;gt;'''&amp;lt;/span&amp;gt;을 지었다고 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lt;br /&gt;
[[파일:양반전|섬네일|왼쪽]]&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양반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lt;br /&gt;
&lt;br /&gt;
&lt;br /&gt;
정선에 어질고 책읽기를 좋아하지만, 가난한 양반이 살고 있었다. &lt;br /&gt;
&lt;br /&gt;
군수가 도임하면 반드시 찾아갈 예를 차릴 만큼 덕망이 높은 인물이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하지만, 그 양반의 집이 너무 가난하여 관곡을 빌려 살았다. &lt;br /&gt;
&lt;br /&gt;
양반의 상황이 나아지지 않자, 빌린 관곡은 쌓이고 쌓여 '''1,000석'''에 이르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관찰사는 양반을 당장 가두라는 명령을 내렸고, 군수는 차마 덕망 있는 선비를 가둘 수 없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그러던 중, 마을의 부자가 양반의 신분을 사겠다고 제안하였다. &lt;br /&gt;
&lt;br /&gt;
양반은 이를 기쁘게 받아들였고, 부자의 관곡으로 양반의 빚은 사라지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 소식을 들은 군수는 양반이 지켜야 할 규율이 빼곡힌 적힌 '''문권'''을 부자에게 건넨다. &lt;br /&gt;
&lt;br /&gt;
문권을 읽어본 부자는 양반이라는 신분이 그저 좋은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신분을 바꾸지 않기로 결정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해당 문권은 양반의 사회적 가치와 덕목을 강조한 내용으로, &amp;lt;ins&amp;gt;저자는 &amp;lt;양반전&amp;gt;을 통해서 당시 신분을 사고 팔던 시대상을 비판하였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또한, 선비의 지조를 잃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며, 양반으로서 신분을 지킬 것을 역설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981&amp;quot; height=&amp;quot;552&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qzItNe_-1Rk&amp;quot; title=&amp;quot;양반으로 &amp;amp;#39;FLEX&amp;amp;#39; 해버렸지 뭐야~ | 10cut 고전소설, 양반전, 박지원, 양반제도, 사농공상, 조선의 갑 | EBSi 고교강의&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amp;lt;ref&amp;gt;[EBSi] [양반으로 'FLEX' 해버렸지 뭐야~] [2020. 2. 4.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조선후기 '''양반 신분 매매 사회상'''을 간결한 필취로 그린 작품이다. &lt;br /&gt;
&lt;br /&gt;
또한 당시 신분질서 문란을 유발했던 신분 매매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며, '''양반의 덕목과 지조를 강조'''하였다. &lt;br /&gt;
&lt;br /&gt;
중간중간 '''익살스러운 표현'''은 독자에게 웃음을 유발하여 더욱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lt;/div&gt;</summary>
		<author><name>Jinhyang</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6%91%EB%B0%98%EC%A0%84%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718</id>
		<title>양반전ᐧ༚̮ᐧ</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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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06-23T21:16:2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inhyang: &lt;/p&gt;
&lt;hr /&gt;
&lt;div&gt;==작가==&lt;br /&gt;
&lt;br /&gt;
[[파일:박지원|섬네일|왼쪽]]&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 &amp;lt;박지원&amp;gt;&lt;br /&gt;
| 호 || 연암&lt;br /&gt;
|-&lt;br /&gt;
| 자 || 미중, 중미&lt;br /&gt;
|-&lt;br /&gt;
| 본관 || 반남&lt;br /&gt;
|-&lt;br /&gt;
| 출생 || 1737 &lt;br /&gt;
|-&lt;br /&gt;
| 사망 || 1805&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박지원은 서울의 서쪽인 반송방 야동에서 태어났다.&lt;br /&gt;
&lt;br /&gt;
&lt;br /&gt;
어릴 때부터 몸이 건강하였고 영민하였다고 전해진다. &lt;br /&gt;
&lt;br /&gt;
&lt;br /&gt;
아버지가 벼슬 없이 선비로 지냈으며, &amp;lt;ins&amp;gt;박지원 또한 과거에 실패한 후 뜻을 두지 않고 학문과 저술에 힘썼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박제가, 이서구, 서상수, 유득공, 유금''' 등과 이웃하며 어울려 지냈다.&lt;br /&gt;
&lt;br /&gt;
홍대용, 이덕무, 정철조 등과 &amp;lt;font color=&amp;quot;#00FFFF&amp;quot;&amp;gt;'''이용후생'''&amp;lt;/font&amp;gt;에 대해 자주 토론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1780년에는 삼종형 '''박명원'''을 따라 연행사의 '''자제군관'''으로 임명받아 청나라에 갔다.&lt;br /&gt;
&lt;br /&gt;
청나라를 시찰하고 온 경험을 바탕으로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amp;lt;열하일기&amp;gt;'''&amp;lt;/span&amp;gt;를 작성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청나라를 갔다 온 이후에는 조선에서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가져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박지원은 &amp;lt;ins&amp;gt;조선 후기의 시대상을 비판하고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amp;lt;/ins&amp;gt;하기 위해 '''한문 단편 소설'''을 지었고, 그 중에 양반전이 포함된다. &amp;lt;ref&amp;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박지원」,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1216, 2025, 6, 24.&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배경==&lt;br /&gt;
&lt;br /&gt;
조선 후기 상업과 농업이 발전함에 따라 평민들 중에서 양반가와 맞먹는 재산을 가진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부농'''&amp;lt;/font&amp;gt;이 등장하였다.&lt;br /&gt;
&lt;br /&gt;
이들은 재산이 많아지니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신분상승'''&amp;lt;/font&amp;gt;을 꾀하게 되었고, 양반의 신분을 사려는 시도가 이어졌다.&lt;br /&gt;
&lt;br /&gt;
이에 반해 조선 후기 여러 전란을 겪으면서 양반들의 위세가 약해지고, 재산의 규모가 줄어들어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몰락양반'''&amp;lt;/font&amp;gt;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lt;br /&gt;
&lt;br /&gt;
작가 박지원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기반으로 양반의 신분을 사려는 부농의 이야기,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amp;lt;양반전&amp;gt;'''&amp;lt;/span&amp;gt;을 지었다고 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lt;br /&gt;
[[파일:양반전|섬네일|왼쪽]]&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양반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lt;br /&gt;
&lt;br /&gt;
&lt;br /&gt;
정선에 어질고 책읽기를 좋아하지만, 가난한 양반이 살고 있었다. &lt;br /&gt;
&lt;br /&gt;
군수가 도임하면 반드시 찾아갈 예를 차릴 만큼 덕망이 높은 인물이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하지만, 그 양반의 집이 너무 가난하여 관곡을 빌려 살았다. &lt;br /&gt;
&lt;br /&gt;
양반의 상황이 나아지지 않자, 빌린 관곡은 쌓이고 쌓여 '''1,000석'''에 이르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관찰사는 양반을 당장 가두라는 명령을 내렸고, 군수는 차마 덕망 있는 선비를 가둘 수 없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그러던 중, 마을의 부자가 양반의 신분을 사겠다고 제안하였다. &lt;br /&gt;
&lt;br /&gt;
양반은 이를 기쁘게 받아들였고, 부자의 관곡으로 양반의 빚은 사라지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 소식을 들은 군수는 양반이 지켜야 할 규율이 빼곡힌 적힌 '''문권'''을 부자에게 건넨다. &lt;br /&gt;
&lt;br /&gt;
문권을 읽어본 부자는 양반이라는 신분이 그저 좋은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신분을 바꾸지 않기로 결정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해당 문권은 양반의 사회적 가치와 덕목을 강조한 내용으로, &amp;lt;ins&amp;gt;저자는 &amp;lt;양반전&amp;gt;을 통해서 당시 신분을 사고 팔던 시대상을 비판하였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또한, 선비의 지조를 잃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며, 양반으로서 신분을 지킬 것을 역설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981&amp;quot; height=&amp;quot;552&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qzItNe_-1Rk&amp;quot; title=&amp;quot;양반으로 &amp;amp;#39;FLEX&amp;amp;#39; 해버렸지 뭐야~ | 10cut 고전소설, 양반전, 박지원, 양반제도, 사농공상, 조선의 갑 | EBSi 고교강의&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amp;lt;ref&amp;gt;[EBSi] [양반으로 'FLEX' 해버렸지 뭐야~] [2020. 2. 4.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조선후기 '''양반 신분 매매 사회상'''을 간결한 필취로 그린 작품이다. &lt;br /&gt;
&lt;br /&gt;
또한 당시 신분질서 문란을 유발했던 신분 매매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며, '''양반의 덕목과 지조를 강조'''하였다. &lt;br /&gt;
&lt;br /&gt;
중간중간 '''익살스러운 표현'''은 독자에게 웃음을 유발하여 더욱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lt;/div&gt;</summary>
		<author><name>Jinhyang</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6%91%EB%B0%98%EC%A0%84%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716</id>
		<title>양반전ᐧ༚̮ᐧ</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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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06-23T21:14:1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inhyang: &lt;/p&gt;
&lt;hr /&gt;
&lt;div&gt;==작가==&lt;br /&gt;
&lt;br /&gt;
[[파일:박지원|섬네일|왼쪽]]&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 &amp;lt;박지원&amp;gt;&lt;br /&gt;
| 호 || 연암&lt;br /&gt;
|-&lt;br /&gt;
| 자 || 미중, 중미&lt;br /&gt;
|-&lt;br /&gt;
| 본관 || 반남&lt;br /&gt;
|-&lt;br /&gt;
| 출생 || 1737 &lt;br /&gt;
|-&lt;br /&gt;
| 사망 || 1805&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박지원은 서울의 서쪽인 반송방 야동에서 태어났다.&lt;br /&gt;
&lt;br /&gt;
&lt;br /&gt;
어릴 때부터 몸이 건강하였고 영민하였다고 전해진다. &lt;br /&gt;
&lt;br /&gt;
&lt;br /&gt;
아버지가 벼슬 없이 선비로 지냈으며, &amp;lt;ins&amp;gt;박지원 또한 과거에 실패한 후 뜻을 두지 않고 학문과 저술에 힘썼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박제가, 이서구, 서상수, 유득공, 유금''' 등과 이웃하며 어울려 지냈다.&lt;br /&gt;
&lt;br /&gt;
홍대용, 이덕무, 정철조 등과 &amp;lt;font color=&amp;quot;#00FFFF&amp;quot;&amp;gt;'''이용후생'''&amp;lt;/font&amp;gt;에 대해 자주 토론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1780년에는 삼종형 '''박명원'''을 따라 연행사의 '''자제군관'''으로 임명받아 청나라에 갔다.&lt;br /&gt;
&lt;br /&gt;
청나라를 시찰하고 온 경험을 바탕으로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amp;lt;열하일기&amp;gt;'''&amp;lt;/span&amp;gt;를 작성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청나라를 갔다 온 이후에는 조선에서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가져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박지원은 &amp;lt;ins&amp;gt;조선 후기의 시대상을 비판하고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amp;lt;/ins&amp;gt;하기 위해 '''한문 단편 소설'''을 지었고, 그 중에 양반전이 포함된다. &amp;lt;ref&amp;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박지원」,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1216, 2025, 6, 24.&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배경==&lt;br /&gt;
&lt;br /&gt;
조선 후기 상업과 농업이 발전함에 따라 평민들 중에서 양반가와 맞먹는 재산을 가진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부농'''&amp;lt;/font&amp;gt;이 등장하였다.&lt;br /&gt;
&lt;br /&gt;
이들은 재산이 많아지니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신분상승'''&amp;lt;/font&amp;gt;을 꾀하게 되었고, 양반의 신분을 사려는 시도가 이어졌다.&lt;br /&gt;
&lt;br /&gt;
이에 반해 조선 후기 여러 전란을 겪으면서 양반들의 위세가 약해지고, 재산의 규모가 줄어들어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몰락양반'''&amp;lt;/font&amp;gt;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lt;br /&gt;
&lt;br /&gt;
작가 박지원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기반으로 양반의 신분을 사려는 부농의 이야기,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amp;lt;양반전&amp;gt;'''&amp;lt;/span&amp;gt;을 지었다고 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lt;br /&gt;
[[파일:양반전|섬네일|왼쪽]]&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양반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lt;br /&gt;
&lt;br /&gt;
&lt;br /&gt;
정선에 어질고 책읽기를 좋아하지만, 가난한 양반이 살고 있었다. &lt;br /&gt;
&lt;br /&gt;
군수가 도임하면 반드시 찾아갈 예를 차릴 만큼 덕망이 높은 인물이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하지만, 그 양반의 집이 너무 가난하여 관곡을 빌려 살았다. &lt;br /&gt;
&lt;br /&gt;
양반의 상황이 나아지지 않자, 빌린 관곡은 쌓이고 쌓여 '''1,000석'''에 이르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관찰사는 양반을 당장 가두라는 명령을 내렸고, 군수는 차마 덕망 있는 선비를 가둘 수 없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그러던 중, 마을의 부자가 양반의 신분을 사겠다고 제안하였다. &lt;br /&gt;
&lt;br /&gt;
양반은 이를 기쁘게 받아들였고, 부자의 관곡으로 양반의 빚은 사라지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 소식을 들은 군수는 양반이 지켜야 할 규율이 빼곡힌 적힌 '''문권'''을 부자에게 건넨다. &lt;br /&gt;
&lt;br /&gt;
문권을 읽어본 부자는 양반이라는 신분이 그저 좋은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신분을 바꾸지 않기로 결정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해당 문권은 양반의 사회적 가치와 덕목을 강조한 내용으로, &amp;lt;ins&amp;gt;저자는 &amp;lt;양반전&amp;gt;을 통해서 당시 신분을 사고 팔던 시대상을 비판하였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또한, 선비의 지조를 잃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며, 양반으로서 신분을 지킬 것을 역설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조선후기 '''양반 신분 매매 사회상'''을 간결한 필취로 그린 작품이다. &lt;br /&gt;
&lt;br /&gt;
또한 당시 신분질서 문란을 유발했던 신분 매매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며, '''양반의 덕목과 지조를 강조'''하였다. &lt;br /&gt;
&lt;br /&gt;
중간중간 '''익살스러운 표현'''은 독자에게 웃음을 유발하여 더욱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lt;/div&gt;</summary>
		<author><name>Jinhyang</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6%91%EB%B0%98%EC%A0%84%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713</id>
		<title>양반전ᐧ༚̮ᐧ</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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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06-23T21:01:1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inhyang: /* 배경 */&lt;/p&gt;
&lt;hr /&gt;
&lt;div&gt;==작가==&lt;br /&gt;
&lt;br /&gt;
[[파일:박지원|섬네일|왼쪽]]&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 &amp;lt;박지원&amp;gt;&lt;br /&gt;
| 호 || 연암&lt;br /&gt;
|-&lt;br /&gt;
| 자 || 미중, 중미&lt;br /&gt;
|-&lt;br /&gt;
| 본관 || 반남&lt;br /&gt;
|-&lt;br /&gt;
| 출생 || 1737 &lt;br /&gt;
|-&lt;br /&gt;
| 사망 || 1805&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박지원은 서울의 서쪽인 반송방 야동에서 태어났다.&lt;br /&gt;
&lt;br /&gt;
&lt;br /&gt;
어릴 때부터 몸이 건강하였고 영민하였다고 전해진다. &lt;br /&gt;
&lt;br /&gt;
&lt;br /&gt;
아버지가 벼슬 없이 선비로 지냈으며, &amp;lt;ins&amp;gt;박지원 또한 과거에 실패한 후 뜻을 두지 않고 학문과 저술에 힘썼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박제가, 이서구, 서상수, 유득공, 유금''' 등과 이웃하며 어울려 지냈다.&lt;br /&gt;
&lt;br /&gt;
홍대용, 이덕무, 정철조 등과 &amp;lt;font color=&amp;quot;#00FFFF&amp;quot;&amp;gt;'''이용후생'''&amp;lt;/font&amp;gt;에 대해 자주 토론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1780년에는 삼종형 '''박명원'''을 따라 연행사의 '''자제군관'''으로 임명받아 청나라에 갔다.&lt;br /&gt;
&lt;br /&gt;
청나라를 시찰하고 온 경험을 바탕으로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amp;lt;열하일기&amp;gt;'''&amp;lt;/span&amp;gt;를 작성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청나라를 갔다 온 이후에는 조선에서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가져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박지원은 &amp;lt;ins&amp;gt;조선 후기의 시대상을 비판하고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amp;lt;/ins&amp;gt;하기 위해 '''한문 단편 소설'''을 지었고, 그 중에 양반전이 포함된다. &amp;lt;ref&amp;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박지원」,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1216, 2025, 6, 24.&amp;lt;/ref&amp;gt;&lt;br /&gt;
&lt;br /&gt;
==배경==&lt;br /&gt;
&lt;br /&gt;
조선 후기 상업과 농업이 발전함에 따라 평민들 중에서 양반가와 맞먹는 재산을 가진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부농'''&amp;lt;/font&amp;gt;이 등장하였다.&lt;br /&gt;
&lt;br /&gt;
이들은 재산이 많아지니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신분상승'''&amp;lt;/font&amp;gt;을 꾀하게 되었고, 양반의 신분을 사려는 시도가 이어졌다.&lt;br /&gt;
&lt;br /&gt;
이에 반해 조선 후기 여러 전란을 겪으면서 양반들의 위세가 약해지고, 재산의 규모가 줄어들어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몰락양반'''&amp;lt;/font&amp;gt;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lt;br /&gt;
&lt;br /&gt;
작가 박지원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기반으로 양반의 신분을 사려는 부농의 이야기,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amp;lt;양반전&amp;gt;'''&amp;lt;/span&amp;gt;을 지었다고 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의의==&lt;/div&gt;</summary>
		<author><name>Jinhyang</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6%91%EB%B0%98%EC%A0%84%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712</id>
		<title>양반전ᐧ༚̮ᐧ</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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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06-23T20:55:5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inhyang: /* 작가 */&lt;/p&gt;
&lt;hr /&gt;
&lt;div&gt;==작가==&lt;br /&gt;
&lt;br /&gt;
[[파일:박지원|섬네일|왼쪽]]&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 &amp;lt;박지원&amp;gt;&lt;br /&gt;
| 호 || 연암&lt;br /&gt;
|-&lt;br /&gt;
| 자 || 미중, 중미&lt;br /&gt;
|-&lt;br /&gt;
| 본관 || 반남&lt;br /&gt;
|-&lt;br /&gt;
| 출생 || 1737 &lt;br /&gt;
|-&lt;br /&gt;
| 사망 || 1805&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박지원은 서울의 서쪽인 반송방 야동에서 태어났다.&lt;br /&gt;
&lt;br /&gt;
&lt;br /&gt;
어릴 때부터 몸이 건강하였고 영민하였다고 전해진다. &lt;br /&gt;
&lt;br /&gt;
&lt;br /&gt;
아버지가 벼슬 없이 선비로 지냈으며, &amp;lt;ins&amp;gt;박지원 또한 과거에 실패한 후 뜻을 두지 않고 학문과 저술에 힘썼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박제가, 이서구, 서상수, 유득공, 유금''' 등과 이웃하며 어울려 지냈다.&lt;br /&gt;
&lt;br /&gt;
홍대용, 이덕무, 정철조 등과 &amp;lt;font color=&amp;quot;#00FFFF&amp;quot;&amp;gt;'''이용후생'''&amp;lt;/font&amp;gt;에 대해 자주 토론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1780년에는 삼종형 '''박명원'''을 따라 연행사의 '''자제군관'''으로 임명받아 청나라에 갔다.&lt;br /&gt;
&lt;br /&gt;
청나라를 시찰하고 온 경험을 바탕으로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amp;lt;열하일기&amp;gt;'''&amp;lt;/span&amp;gt;를 작성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청나라를 갔다 온 이후에는 조선에서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가져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박지원은 &amp;lt;ins&amp;gt;조선 후기의 시대상을 비판하고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amp;lt;/ins&amp;gt;하기 위해 '''한문 단편 소설'''을 지었고, 그 중에 양반전이 포함된다. &amp;lt;ref&amp;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박지원」,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1216, 2025, 6, 24.&amp;lt;/ref&amp;gt;&lt;br /&gt;
&lt;br /&gt;
==배경==&lt;br /&gt;
==내용==&lt;br /&gt;
==의의==&lt;/div&gt;</summary>
		<author><name>Jinhyang</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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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D%99%8D%EA%B8%B8%EB%8F%99%EC%A0%84%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706</id>
		<title>홍길동전ᐧ༚̮ᐧ</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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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06-23T20:39:4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inhyang: &lt;/p&gt;
&lt;hr /&gt;
&lt;div&gt;==작가==&lt;br /&gt;
&lt;br /&gt;
[[파일:허균.jpeg|섬네일|왼쪽]]&amp;lt;ref&amp;gt; 「김현민, 조선의 계급혁명 고뇌한 ’허균의 생각‘」,『아틀라스뉴스』,2024, 7, 20, http://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8445,2025, 6, 24 접속.&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 &amp;lt;허균&amp;gt;&lt;br /&gt;
| 호 || 백월거사&lt;br /&gt;
|-&lt;br /&gt;
| 자 || 단보&lt;br /&gt;
|-&lt;br /&gt;
| 본관 || 양천&lt;br /&gt;
|-&lt;br /&gt;
| 출생 || 1569년&lt;br /&gt;
|-&lt;br /&gt;
| 사망 || 1618년&lt;br /&gt;
|}&lt;br /&gt;
&lt;br /&gt;
'''허균'''은 어릴 때부터 시문에 능했다.&lt;br /&gt;
&lt;br /&gt;
5세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해 9세 때에는 시를 지을 줄 알았다. &lt;br /&gt;
&lt;br /&gt;
&lt;br /&gt;
그가 12살 되는 때에 아버지를 잃었고, 이에 더욱 문학 공부에 전념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학문은 '''유성룡'''에게, 시는 삼당시인 중 한 명인 '''이달'''에게 배웠다고 한다. &lt;br /&gt;
&lt;br /&gt;
&lt;br /&gt;
1594년 26세 때에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고, 1597년 문과 중시에 장원을 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듬해 황해도도사가 되었으나 기생을 끌어들여 가까이 했다는 일로 6달 만에 파직됐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후 여러 벼슬을 하였으나, 불교를 믿는다는 탄핵을 받아 다시 벼슬길에서 물러났다. &lt;br /&gt;
&lt;br /&gt;
&lt;br /&gt;
종사관, 형조참의를 하였으나, 1610년 전시의 시험을 주관하면서 조카와 사위를 합격시켰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전라도 함열로 유배를 갔다. &lt;br /&gt;
&lt;br /&gt;
&lt;br /&gt;
'''계축옥사'''가 일어나고 평소 친했던 서양갑, 심우영 등이 처형당하자 신변의 위험을 느낀 허균은 대북에 참여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1617년 '''좌참찬'''이 되었다. &lt;br /&gt;
&lt;br /&gt;
폐모론을 주장하다가 폐모론의 반대 입장인 영의정 기자헌이 길주로 유배를 갔다. &lt;br /&gt;
&lt;br /&gt;
&lt;br /&gt;
1618년 남대문에 격문을 붙인 사건이 일어났는데, 허균의 심복이 붙였다는 것으로 알려졌다.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허균이 역적모의하였다 하여 저자거리에서 능지처참형을 받았다.&amp;lt;/span&amp;gt;''' &amp;lt;ref&amp;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허균」,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3030,2025, 6, 24.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배경==&lt;br /&gt;
&lt;br /&gt;
====적서차별====&lt;br /&gt;
&lt;br /&gt;
조선후기 조선 사회가 가지는 문제 중 하나가 바로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적서차별'''&amp;lt;/font&amp;gt;이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서자와 얼자는 '''서얼차대법'''에 의해 과거를 응시하지 못했고 관리로 등용될 수 있는 길이 제한적이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서얼차대법은 후기로 내려올수록 완화되었지만, 서얼에 대한 차별은 관행으로 굳어져 사람들의 인식 속에 사라지지 않았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ins&amp;gt;적서 간의 갈등은 공적, 사적인 자리 가리지 않고 드러났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만일 서자가 문중의 회의에 참석하면 나이에 상관없이 적자 아래에 앉고, 반말을 들어야 했다. &lt;br /&gt;
&lt;br /&gt;
선조의 제사를 지낼 때는 술을 올리지도 못하였다.&amp;lt;ref&amp;gt; 우리역사넷, 「적서의문제」,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m/view.do?levelId=km_028_0040_0040_0030_0010, 2025, 6, 24.&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허균은 조선 후기 적서차별 문제를 비판하고자 홍길동을 서자 출신으로 설정하여 작품을 창작한 것으로 보인다.'''&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지배층 억압====&lt;br /&gt;
&lt;br /&gt;
조선 후기 사회가 문란해지면서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탐관오리들의 횡포가 극심'''&amp;lt;/span&amp;gt;해졌다. &lt;br /&gt;
&lt;br /&gt;
탐관오리들은 백성의 재산과 재물을 약탈하여 자기 재산을 채우기 바빴다.&lt;br /&gt;
&lt;br /&gt;
이에 백성의 삶은 피폐해졌고 어딘가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영웅'''&amp;lt;/font&amp;gt;이 나타나 구원해 주길 바랬다. &lt;br /&gt;
&lt;br /&gt;
백성의 이런 바람을 담아 탄생된 주인공이 '''홍길동'''이며, &lt;br /&gt;
&lt;br /&gt;
&amp;lt;ins&amp;gt;홍길동은 '''활빈당 무리'''를 이끌고 탐관오리들을 정벌하여 그들이 빼앗아간 재산들을 백성들에게 돌려주었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왕도정치====&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왕도정치'''&amp;lt;/font&amp;gt;란 &amp;lt;ins&amp;gt;군주가 공평하고 사사로움이 없는 태도로 정치를 운영해 이상적 사회를 수립하는 것을 의미하는 유교의 대표적 정치사상이다.&amp;lt;/ins&amp;gt; &amp;lt;ref&amp;gt;우리역사넷, 「왕도정치」, https://contents.history.go.kr/front/tg/view.do?treeId=0201&amp;amp;levelId=tg_003_1320&amp;amp;ganada=&amp;amp;pageUnit=10, 2025, 6, 24.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왕도’는 공자이전에 '''치우침이 없는 공정함’''을 의미했다. &lt;br /&gt;
&lt;br /&gt;
하지만 공자가 이상적인 인간과 정치의 목표로 인(仁)을 제시한 이후, 인정(仁政)이 왕도 정치의 핵심으로 위치하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맹자는 각축전인 전국시대를 경험하면서 패도(覇道) 정치에 대비되는 개념으로서 인정(仁政)을 내용으로 하는 '''왕도 정치'''를 주장하였다. &lt;br /&gt;
&lt;br /&gt;
특히 맹자는 왕도 정치 실현을 위해 백성들이 기본적으로 &amp;lt;font color=&amp;quot;#008000&amp;quot;&amp;gt;'''경제적 문제를 해결'''&amp;lt;/font&amp;gt;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lt;br /&gt;
&lt;br /&gt;
&lt;br /&gt;
군주가 백성들의 안정된 생업을 보장해 주고 이들을 덕으로 감화시킬 때 진정한 왕도 정치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홍길동은 조선을 벗어나 이상국가인 '''율도국'''을 세워 왕도 정치를 실현하려고 하였다.&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lt;br /&gt;
[[파일:홍길동전.jpeg|섬네일|왼쪽]]&amp;lt;ref&amp;gt;디지털강릉문화대전, 「홍길동전」, https://gangneung.grandculture.net/gangneung/toc/GC00304015, 2025, 6, 24.&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홍길동은 홍 판서와 시비 춘섬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 아이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홍 판서의 꿈처럼, 길동은 어려서부터 특출난 면모를 보였다.&lt;br /&gt;
&lt;br /&gt;
도술을 사용할 수 있었고, 무술 솜씨도 뛰어났다. &lt;br /&gt;
&lt;br /&gt;
&lt;br /&gt;
하지만, '''서자'''라는 이유로 호부호형하지 못하였고, 길동은 이에 한이 맺혔다. &lt;br /&gt;
&lt;br /&gt;
&lt;br /&gt;
가족들은 길동의 재주가 화근이 될까 두려워 자객을 시켜 길동을 없애고자 하였다. &lt;br /&gt;
&lt;br /&gt;
길동은 자객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났고, 집을 떠나기로 다짐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집을 떠난 길동은 '''활빈당'''이라는 도적의 우두머리가 되어 탐관오리들이 백성들에게 빼앗아간 재물을 탈취하여 돌려주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이에 전국에서 길동을 잡으라는 체포령이 내려졌는데, 바람과 비를 부리고 둔갑술 등에 아무도 당해내지 못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결국 조정은 길동의 가족을 통해 회유하고, 길동이 원하는 바인 '''병조판서'''의 꿈을 이루게 해주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하지만 길동은 병조판서 직에 머물지 않고 홀연히 떠나 율도국의 왕이 된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981&amp;quot; height=&amp;quot;552&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oiuNe8rl7xc&amp;quot; title=&amp;quot;홍길동전 줄거리 요약 | 100초 문학 | 학교를 떠난 이채움쌤&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amp;lt;ref&amp;gt;[학교를 떠난 채움쌤][홍길동전 줄거리 요약] [2023. 2. 9.]&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한글로 쓰여 있어 민중의 생각을 반영하고 독자층을 확보하였다.&lt;br /&gt;
&lt;br /&gt;
진보적이고 현실주의적인 경향을 보여준 소설이다.&lt;/div&gt;</summary>
		<author><name>Jinhyang</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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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양반전ᐧ༚̮ᐧ</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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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06-23T20:30:4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inhyang: 새 문서: ==작가== ==배경== ==내용== ==의의==&lt;/p&gt;
&lt;hr /&gt;
&lt;div&gt;==작가==&lt;br /&gt;
==배경==&lt;br /&gt;
==내용==&lt;br /&gt;
==의의==&lt;/div&gt;</summary>
		<author><name>Jinhyang</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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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홍길동전ᐧ༚̮ᐧ</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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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06-23T20:29:4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inhyang: &lt;/p&gt;
&lt;hr /&gt;
&lt;div&gt;==작가==&lt;br /&gt;
&lt;br /&gt;
[[파일:허균.jpeg|섬네일|왼쪽]]&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 &amp;lt;허균&amp;gt;&lt;br /&gt;
| 호 || 백월거사&lt;br /&gt;
|-&lt;br /&gt;
| 자 || 단보&lt;br /&gt;
|-&lt;br /&gt;
| 본관 || 양천&lt;br /&gt;
|-&lt;br /&gt;
| 출생 || 1569년&lt;br /&gt;
|-&lt;br /&gt;
| 사망 || 1618년&lt;br /&gt;
|}&lt;br /&gt;
&lt;br /&gt;
'''허균'''은 어릴 때부터 시문에 능했다.&lt;br /&gt;
&lt;br /&gt;
5세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해 9세 때에는 시를 지을 줄 알았다. &lt;br /&gt;
&lt;br /&gt;
&lt;br /&gt;
그가 12살 되는 때에 아버지를 잃었고, 이에 더욱 문학 공부에 전념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학문은 '''유성룡'''에게, 시는 삼당시인 중 한 명인 '''이달'''에게 배웠다고 한다. &lt;br /&gt;
&lt;br /&gt;
&lt;br /&gt;
1594년 26세 때에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고, 1597년 문과 중시에 장원을 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듬해 황해도도사가 되었으나 기생을 끌어들여 가까이 했다는 일로 6달 만에 파직됐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후 여러 벼슬을 하였으나, 불교를 믿는다는 탄핵을 받아 다시 벼슬길에서 물러났다. &lt;br /&gt;
&lt;br /&gt;
&lt;br /&gt;
종사관, 형조참의를 하였으나, 1610년 전시의 시험을 주관하면서 조카와 사위를 합격시켰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전라도 함열로 유배를 갔다. &lt;br /&gt;
&lt;br /&gt;
&lt;br /&gt;
'''계축옥사'''가 일어나고 평소 친했던 서양갑, 심우영 등이 처형당하자 신변의 위험을 느낀 허균은 대북에 참여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1617년 '''좌참찬'''이 되었다. &lt;br /&gt;
&lt;br /&gt;
폐모론을 주장하다가 폐모론의 반대 입장인 영의정 기자헌이 길주로 유배를 갔다. &lt;br /&gt;
&lt;br /&gt;
&lt;br /&gt;
1618년 남대문에 격문을 붙인 사건이 일어났는데, 허균의 심복이 붙였다는 것으로 알려졌다.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허균이 역적모의하였다 하여 저자거리에서 능지처참형을 받았다.&amp;lt;/span&amp;gt;''' &amp;lt;ref&amp;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허균」,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3030,2025, 6, 24.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배경==&lt;br /&gt;
&lt;br /&gt;
====적서차별====&lt;br /&gt;
&lt;br /&gt;
조선후기 조선 사회가 가지는 문제 중 하나가 바로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적서차별'''&amp;lt;/font&amp;gt;이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서자와 얼자는 '''서얼차대법'''에 의해 과거를 응시하지 못했고 관리로 등용될 수 있는 길이 제한적이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서얼차대법은 후기로 내려올수록 완화되었지만, 서얼에 대한 차별은 관행으로 굳어져 사람들의 인식 속에 사라지지 않았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ins&amp;gt;적서 간의 갈등은 공적, 사적인 자리 가리지 않고 드러났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만일 서자가 문중의 회의에 참석하면 나이에 상관없이 적자 아래에 앉고, 반말을 들어야 했다. &lt;br /&gt;
&lt;br /&gt;
선조의 제사를 지낼 때는 술을 올리지도 못하였다.&amp;lt;ref&amp;gt; 우리역사넷, 「적서의문제」,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m/view.do?levelId=km_028_0040_0040_0030_0010, 2025, 6, 24.&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허균은 조선 후기 적서차별 문제를 비판하고자 홍길동을 서자 출신으로 설정하여 작품을 창작한 것으로 보인다.'''&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지배층 억압====&lt;br /&gt;
&lt;br /&gt;
조선 후기 사회가 문란해지면서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탐관오리들의 횡포가 극심'''&amp;lt;/span&amp;gt;해졌다. &lt;br /&gt;
&lt;br /&gt;
탐관오리들은 백성의 재산과 재물을 약탈하여 자기 재산을 채우기 바빴다.&lt;br /&gt;
&lt;br /&gt;
이에 백성의 삶은 피폐해졌고 어딘가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영웅'''&amp;lt;/font&amp;gt;이 나타나 구원해 주길 바랬다. &lt;br /&gt;
&lt;br /&gt;
백성의 이런 바람을 담아 탄생된 주인공이 '''홍길동'''이며, &lt;br /&gt;
&lt;br /&gt;
&amp;lt;ins&amp;gt;홍길동은 '''활빈당 무리'''를 이끌고 탐관오리들을 정벌하여 그들이 빼앗아간 재산들을 백성들에게 돌려주었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왕도정치====&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왕도정치'''&amp;lt;/font&amp;gt;란 &amp;lt;ins&amp;gt;군주가 공평하고 사사로움이 없는 태도로 정치를 운영해 이상적 사회를 수립하는 것을 의미하는 유교의 대표적 정치사상이다.&amp;lt;/ins&amp;gt; &amp;lt;ref&amp;gt;우리역사넷, 「왕도정치」, https://contents.history.go.kr/front/tg/view.do?treeId=0201&amp;amp;levelId=tg_003_1320&amp;amp;ganada=&amp;amp;pageUnit=10, 2025, 6, 24.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왕도’는 공자이전에 '''치우침이 없는 공정함’''을 의미했다. &lt;br /&gt;
&lt;br /&gt;
하지만 공자가 이상적인 인간과 정치의 목표로 인(仁)을 제시한 이후, 인정(仁政)이 왕도 정치의 핵심으로 위치하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맹자는 각축전인 전국시대를 경험하면서 패도(覇道) 정치에 대비되는 개념으로서 인정(仁政)을 내용으로 하는 '''왕도 정치'''를 주장하였다. &lt;br /&gt;
&lt;br /&gt;
특히 맹자는 왕도 정치 실현을 위해 백성들이 기본적으로 &amp;lt;font color=&amp;quot;#008000&amp;quot;&amp;gt;'''경제적 문제를 해결'''&amp;lt;/font&amp;gt;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lt;br /&gt;
&lt;br /&gt;
&lt;br /&gt;
군주가 백성들의 안정된 생업을 보장해 주고 이들을 덕으로 감화시킬 때 진정한 왕도 정치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홍길동은 조선을 벗어나 이상국가인 '''율도국'''을 세워 왕도 정치를 실현하려고 하였다.&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lt;br /&gt;
[[파일:홍길동전.jpeg|섬네일|왼쪽]]&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홍길동은 홍 판서와 시비 춘섬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 아이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홍 판서의 꿈처럼, 길동은 어려서부터 특출난 면모를 보였다.&lt;br /&gt;
&lt;br /&gt;
도술을 사용할 수 있었고, 무술 솜씨도 뛰어났다. &lt;br /&gt;
&lt;br /&gt;
&lt;br /&gt;
하지만, '''서자'''라는 이유로 호부호형하지 못하였고, 길동은 이에 한이 맺혔다. &lt;br /&gt;
&lt;br /&gt;
&lt;br /&gt;
가족들은 길동의 재주가 화근이 될까 두려워 자객을 시켜 길동을 없애고자 하였다. &lt;br /&gt;
&lt;br /&gt;
길동은 자객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났고, 집을 떠나기로 다짐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집을 떠난 길동은 '''활빈당'''이라는 도적의 우두머리가 되어 탐관오리들이 백성들에게 빼앗아간 재물을 탈취하여 돌려주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이에 전국에서 길동을 잡으라는 체포령이 내려졌는데, 바람과 비를 부리고 둔갑술 등에 아무도 당해내지 못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결국 조정은 길동의 가족을 통해 회유하고, 길동이 원하는 바인 '''병조판서'''의 꿈을 이루게 해주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하지만 길동은 병조판서 직에 머물지 않고 홀연히 떠나 율도국의 왕이 된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981&amp;quot; height=&amp;quot;552&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oiuNe8rl7xc&amp;quot; title=&amp;quot;홍길동전 줄거리 요약 | 100초 문학 | 학교를 떠난 이채움쌤&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amp;lt;ref&amp;gt;[학교를 떠난 채움쌤][홍길동전 줄거리 요약] [2023. 2. 9.]&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한글로 쓰여 있어 민중의 생각을 반영하고 독자층을 확보하였다.&lt;br /&gt;
&lt;br /&gt;
진보적이고 현실주의적인 경향을 보여준 소설이다.&lt;/div&gt;</summary>
		<author><name>Jinhyang</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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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홍길동전ᐧ༚̮ᐧ</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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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06-23T20:28:5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inhyang: &lt;/p&gt;
&lt;hr /&gt;
&lt;div&gt;==작가==&lt;br /&gt;
&lt;br /&gt;
[[파일:허균.jpeg|섬네일|왼쪽]]&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 &amp;lt;허균&amp;gt;&lt;br /&gt;
| 호 || 백월거사&lt;br /&gt;
|-&lt;br /&gt;
| 자 || 단보&lt;br /&gt;
|-&lt;br /&gt;
| 본관 || 양천&lt;br /&gt;
|-&lt;br /&gt;
| 출생 || 1569년&lt;br /&gt;
|-&lt;br /&gt;
| 사망 || 1618년&lt;br /&gt;
|}&lt;br /&gt;
&lt;br /&gt;
'''허균'''은 어릴 때부터 시문에 능했다.&lt;br /&gt;
&lt;br /&gt;
5세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해 9세 때에는 시를 지을 줄 알았다. &lt;br /&gt;
&lt;br /&gt;
&lt;br /&gt;
그가 12살 되는 때에 아버지를 잃었고, 이에 더욱 문학 공부에 전념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학문은 '''유성룡'''에게, 시는 삼당시인 중 한 명인 '''이달'''에게 배웠다고 한다. &lt;br /&gt;
&lt;br /&gt;
&lt;br /&gt;
1594년 26세 때에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고, 1597년 문과 중시에 장원을 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듬해 황해도도사가 되었으나 기생을 끌어들여 가까이 했다는 일로 6달 만에 파직됐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후 여러 벼슬을 하였으나, 불교를 믿는다는 탄핵을 받아 다시 벼슬길에서 물러났다. &lt;br /&gt;
&lt;br /&gt;
&lt;br /&gt;
종사관, 형조참의를 하였으나, 1610년 전시의 시험을 주관하면서 조카와 사위를 합격시켰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전라도 함열로 유배를 갔다. &lt;br /&gt;
&lt;br /&gt;
&lt;br /&gt;
'''계축옥사'''가 일어나고 평소 친했던 서양갑, 심우영 등이 처형당하자 신변의 위험을 느낀 허균은 대북에 참여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1617년 '''좌참찬'''이 되었다. &lt;br /&gt;
&lt;br /&gt;
폐모론을 주장하다가 폐모론의 반대 입장인 영의정 기자헌이 길주로 유배를 갔다. &lt;br /&gt;
&lt;br /&gt;
&lt;br /&gt;
1618년 남대문에 격문을 붙인 사건이 일어났는데, 허균의 심복이 붙였다는 것으로 알려졌다.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허균이 역적모의하였다 하여 저자거리에서 능지처참형을 받았다.&amp;lt;/span&amp;gt;''' &amp;lt;ref&amp;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허균」,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3030,2025, 6, 24.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배경==&lt;br /&gt;
&lt;br /&gt;
====적서차별====&lt;br /&gt;
&lt;br /&gt;
조선후기 조선 사회가 가지는 문제 중 하나가 바로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적서차별'''&amp;lt;/font&amp;gt;이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서자와 얼자는 '''서얼차대법'''에 의해 과거를 응시하지 못했고 관리로 등용될 수 있는 길이 제한적이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서얼차대법은 후기로 내려올수록 완화되었지만, 서얼에 대한 차별은 관행으로 굳어져 사람들의 인식 속에 사라지지 않았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ins&amp;gt;적서 간의 갈등은 공적, 사적인 자리 가리지 않고 드러났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만일 서자가 문중의 회의에 참석하면 나이에 상관없이 적자 아래에 앉고, 반말을 들어야 했다. &lt;br /&gt;
&lt;br /&gt;
선조의 제사를 지낼 때는 술을 올리지도 못하였다.&amp;lt;ref&amp;gt; 우리역사넷, 「적서의문제」,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m/view.do?levelId=km_028_0040_0040_0030_0010, 2025, 6, 24.&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허균은 조선 후기 적서차별 문제를 비판하고자 홍길동을 서자 출신으로 설정하여 작품을 창작한 것으로 보인다.'''&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지배층 억압====&lt;br /&gt;
&lt;br /&gt;
조선 후기 사회가 문란해지면서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탐관오리들의 횡포가 극심'''&amp;lt;/span&amp;gt;해졌다. &lt;br /&gt;
&lt;br /&gt;
탐관오리들은 백성의 재산과 재물을 약탈하여 자기 재산을 채우기 바빴다.&lt;br /&gt;
&lt;br /&gt;
이에 백성의 삶은 피폐해졌고 어딘가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영웅'''&amp;lt;/font&amp;gt;이 나타나 구원해 주길 바랬다. &lt;br /&gt;
&lt;br /&gt;
백성의 이런 바람을 담아 탄생된 주인공이 '''홍길동'''이며, &lt;br /&gt;
&lt;br /&gt;
&amp;lt;ins&amp;gt;홍길동은 '''활빈당 무리'''를 이끌고 탐관오리들을 정벌하여 그들이 빼앗아간 재산들을 백성들에게 돌려주었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왕도정치====&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왕도정치'''&amp;lt;/font&amp;gt;란 &amp;lt;ins&amp;gt;군주가 공평하고 사사로움이 없는 태도로 정치를 운영해 이상적 사회를 수립하는 것을 의미하는 유교의 대표적 정치사상이다.&amp;lt;/ins&amp;gt; &amp;lt;ref&amp;gt;우리역사넷, 「왕도정치」, https://contents.history.go.kr/front/tg/view.do?treeId=0201&amp;amp;levelId=tg_003_1320&amp;amp;ganada=&amp;amp;pageUnit=10, 2025, 6, 24.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왕도’는 공자이전에 '''치우침이 없는 공정함’''을 의미했다. &lt;br /&gt;
&lt;br /&gt;
하지만 공자가 이상적인 인간과 정치의 목표로 인(仁)을 제시한 이후, 인정(仁政)이 왕도 정치의 핵심으로 위치하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맹자는 각축전인 전국시대를 경험하면서 패도(覇道) 정치에 대비되는 개념으로서 인정(仁政)을 내용으로 하는 '''왕도 정치'''를 주장하였다. &lt;br /&gt;
&lt;br /&gt;
특히 맹자는 왕도 정치 실현을 위해 백성들이 기본적으로 &amp;lt;font color=&amp;quot;#008000&amp;quot;&amp;gt;'''경제적 문제를 해결'''&amp;lt;/font&amp;gt;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lt;br /&gt;
&lt;br /&gt;
&lt;br /&gt;
군주가 백성들의 안정된 생업을 보장해 주고 이들을 덕으로 감화시킬 때 진정한 왕도 정치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홍길동은 조선을 벗어나 이상국가인 '''율도국'''을 세워 왕도 정치를 실현하려고 하였다.&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lt;br /&gt;
[[파일:홍길동전|섬네일|왼쪽]]&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홍길동은 홍 판서와 시비 춘섬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 아이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홍 판서의 꿈처럼, 길동은 어려서부터 특출난 면모를 보였다.&lt;br /&gt;
&lt;br /&gt;
도술을 사용할 수 있었고, 무술 솜씨도 뛰어났다. &lt;br /&gt;
&lt;br /&gt;
&lt;br /&gt;
하지만, '''서자'''라는 이유로 호부호형하지 못하였고, 길동은 이에 한이 맺혔다. &lt;br /&gt;
&lt;br /&gt;
&lt;br /&gt;
가족들은 길동의 재주가 화근이 될까 두려워 자객을 시켜 길동을 없애고자 하였다. &lt;br /&gt;
&lt;br /&gt;
길동은 자객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났고, 집을 떠나기로 다짐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집을 떠난 길동은 '''활빈당'''이라는 도적의 우두머리가 되어 탐관오리들이 백성들에게 빼앗아간 재물을 탈취하여 돌려주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이에 전국에서 길동을 잡으라는 체포령이 내려졌는데, 바람과 비를 부리고 둔갑술 등에 아무도 당해내지 못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결국 조정은 길동의 가족을 통해 회유하고, 길동이 원하는 바인 '''병조판서'''의 꿈을 이루게 해주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하지만 길동은 병조판서 직에 머물지 않고 홀연히 떠나 율도국의 왕이 된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981&amp;quot; height=&amp;quot;552&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oiuNe8rl7xc&amp;quot; title=&amp;quot;홍길동전 줄거리 요약 | 100초 문학 | 학교를 떠난 이채움쌤&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amp;lt;ref&amp;gt;[학교를 떠난 채움쌤][홍길동전 줄거리 요약] [2023. 2. 9.]&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한글로 쓰여 있어 민중의 생각을 반영하고 독자층을 확보하였다.&lt;br /&gt;
&lt;br /&gt;
진보적이고 현실주의적인 경향을 보여준 소설이다.&lt;/div&gt;</summary>
		<author><name>Jinhyang</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D%99%8D%EA%B8%B8%EB%8F%99%EC%A0%84%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691</id>
		<title>홍길동전ᐧ༚̮ᐧ</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D%99%8D%EA%B8%B8%EB%8F%99%EC%A0%84%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691"/>
		<updated>2025-06-23T20:28:4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inhyang: &lt;/p&gt;
&lt;hr /&gt;
&lt;div&gt;==작가==&lt;br /&gt;
&lt;br /&gt;
[[파일:허균.jpeg|섬네일|왼쪽]]&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 &amp;lt;허균&amp;gt;&lt;br /&gt;
| 호 || 백월거사&lt;br /&gt;
|-&lt;br /&gt;
| 자 || 단보&lt;br /&gt;
|-&lt;br /&gt;
| 본관 || 양천&lt;br /&gt;
|-&lt;br /&gt;
| 출생 || 1569년&lt;br /&gt;
|-&lt;br /&gt;
| 사망 || 1618년&lt;br /&gt;
|}&lt;br /&gt;
&lt;br /&gt;
'''허균'''은 어릴 때부터 시문에 능했다.&lt;br /&gt;
&lt;br /&gt;
5세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해 9세 때에는 시를 지을 줄 알았다. &lt;br /&gt;
&lt;br /&gt;
&lt;br /&gt;
그가 12살 되는 때에 아버지를 잃었고, 이에 더욱 문학 공부에 전념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학문은 '''유성룡'''에게, 시는 삼당시인 중 한 명인 '''이달'''에게 배웠다고 한다. &lt;br /&gt;
&lt;br /&gt;
&lt;br /&gt;
1594년 26세 때에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고, 1597년 문과 중시에 장원을 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듬해 황해도도사가 되었으나 기생을 끌어들여 가까이 했다는 일로 6달 만에 파직됐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후 여러 벼슬을 하였으나, 불교를 믿는다는 탄핵을 받아 다시 벼슬길에서 물러났다. &lt;br /&gt;
&lt;br /&gt;
&lt;br /&gt;
종사관, 형조참의를 하였으나, 1610년 전시의 시험을 주관하면서 조카와 사위를 합격시켰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전라도 함열로 유배를 갔다. &lt;br /&gt;
&lt;br /&gt;
&lt;br /&gt;
'''계축옥사'''가 일어나고 평소 친했던 서양갑, 심우영 등이 처형당하자 신변의 위험을 느낀 허균은 대북에 참여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1617년 '''좌참찬'''이 되었다. &lt;br /&gt;
&lt;br /&gt;
폐모론을 주장하다가 폐모론의 반대 입장인 영의정 기자헌이 길주로 유배를 갔다. &lt;br /&gt;
&lt;br /&gt;
&lt;br /&gt;
1618년 남대문에 격문을 붙인 사건이 일어났는데, 허균의 심복이 붙였다는 것으로 알려졌다.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허균이 역적모의하였다 하여 저자거리에서 능지처참형을 받았다.&amp;lt;/span&amp;gt;''' &amp;lt;ref&amp;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허균」,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3030,2025, 6, 24.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배경==&lt;br /&gt;
&lt;br /&gt;
====적서차별====&lt;br /&gt;
&lt;br /&gt;
조선후기 조선 사회가 가지는 문제 중 하나가 바로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적서차별'''&amp;lt;/font&amp;gt;이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서자와 얼자는 '''서얼차대법'''에 의해 과거를 응시하지 못했고 관리로 등용될 수 있는 길이 제한적이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서얼차대법은 후기로 내려올수록 완화되었지만, 서얼에 대한 차별은 관행으로 굳어져 사람들의 인식 속에 사라지지 않았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ins&amp;gt;적서 간의 갈등은 공적, 사적인 자리 가리지 않고 드러났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만일 서자가 문중의 회의에 참석하면 나이에 상관없이 적자 아래에 앉고, 반말을 들어야 했다. &lt;br /&gt;
&lt;br /&gt;
선조의 제사를 지낼 때는 술을 올리지도 못하였다.&amp;lt;ref&amp;gt; 우리역사넷, 「적서의문제」,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m/view.do?levelId=km_028_0040_0040_0030_0010, 2025, 6, 24.&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허균은 조선 후기 적서차별 문제를 비판하고자 홍길동을 서자 출신으로 설정하여 작품을 창작한 것으로 보인다.'''&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지배층 억압====&lt;br /&gt;
&lt;br /&gt;
조선 후기 사회가 문란해지면서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탐관오리들의 횡포가 극심'''&amp;lt;/span&amp;gt;해졌다. &lt;br /&gt;
&lt;br /&gt;
탐관오리들은 백성의 재산과 재물을 약탈하여 자기 재산을 채우기 바빴다.&lt;br /&gt;
&lt;br /&gt;
이에 백성의 삶은 피폐해졌고 어딘가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영웅'''&amp;lt;/font&amp;gt;이 나타나 구원해 주길 바랬다. &lt;br /&gt;
&lt;br /&gt;
백성의 이런 바람을 담아 탄생된 주인공이 '''홍길동'''이며, &lt;br /&gt;
&lt;br /&gt;
&amp;lt;ins&amp;gt;홍길동은 '''활빈당 무리'''를 이끌고 탐관오리들을 정벌하여 그들이 빼앗아간 재산들을 백성들에게 돌려주었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왕도정치====&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왕도정치'''&amp;lt;/font&amp;gt;란 &amp;lt;ins&amp;gt;군주가 공평하고 사사로움이 없는 태도로 정치를 운영해 이상적 사회를 수립하는 것을 의미하는 유교의 대표적 정치사상이다.&amp;lt;/ins&amp;gt; &amp;lt;ref&amp;gt;우리역사넷, 「왕도정치」, https://contents.history.go.kr/front/tg/view.do?treeId=0201&amp;amp;levelId=tg_003_1320&amp;amp;ganada=&amp;amp;pageUnit=10, 2025, 6, 24.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왕도’는 공자이전에 '''치우침이 없는 공정함’''을 의미했다. &lt;br /&gt;
&lt;br /&gt;
하지만 공자가 이상적인 인간과 정치의 목표로 인(仁)을 제시한 이후, 인정(仁政)이 왕도 정치의 핵심으로 위치하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맹자는 각축전인 전국시대를 경험하면서 패도(覇道) 정치에 대비되는 개념으로서 인정(仁政)을 내용으로 하는 '''왕도 정치'''를 주장하였다. &lt;br /&gt;
&lt;br /&gt;
특히 맹자는 왕도 정치 실현을 위해 백성들이 기본적으로 &amp;lt;font color=&amp;quot;#008000&amp;quot;&amp;gt;'''경제적 문제를 해결'''&amp;lt;/font&amp;gt;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lt;br /&gt;
&lt;br /&gt;
&lt;br /&gt;
군주가 백성들의 안정된 생업을 보장해 주고 이들을 덕으로 감화시킬 때 진정한 왕도 정치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홍길동은 조선을 벗어나 이상국가인 '''율도국'''을 세워 왕도 정치를 실현하려고 하였다.&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lt;br /&gt;
[[파일:홍길동전|섬네일|왼쪽]]&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홍길동은 홍 판서와 시비 춘섬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 아이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홍 판서의 꿈처럼, 길동은 어려서부터 특출난 면모를 보였다.&lt;br /&gt;
&lt;br /&gt;
도술을 사용할 수 있었고, 무술 솜씨도 뛰어났다. &lt;br /&gt;
&lt;br /&gt;
&lt;br /&gt;
하지만, '''서자'''라는 이유로 호부호형하지 못하였고, 길동은 이에 한이 맺혔다. &lt;br /&gt;
&lt;br /&gt;
&lt;br /&gt;
가족들은 길동의 재주가 화근이 될까 두려워 자객을 시켜 길동을 없애고자 하였다. &lt;br /&gt;
&lt;br /&gt;
길동은 자객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났고, 집을 떠나기로 다짐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집을 떠난 길동은 '''활빈당'''이라는 도적의 우두머리가 되어 탐관오리들이 백성들에게 빼앗아간 재물을 탈취하여 돌려주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이에 전국에서 길동을 잡으라는 체포령이 내려졌는데, 바람과 비를 부리고 둔갑술 등에 아무도 당해내지 못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결국 조정은 길동의 가족을 통해 회유하고, 길동이 원하는 바인 '''병조판서'''의 꿈을 이루게 해주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하지만 길동은 병조판서 직에 머물지 않고 홀연히 떠나 율도국의 왕이 된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981&amp;quot; height=&amp;quot;552&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oiuNe8rl7xc&amp;quot; title=&amp;quot;홍길동전 줄거리 요약 | 100초 문학 | 학교를 떠난 이채움쌤&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amp;lt;ref&amp;gt;[학교를 떠난 채움쌤][홍길동전 줄거리 요약] [2023. 2. 9.]&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한글로 쓰여 있어 민중의 생각을 반영하고 독자층을 확보하였다.&lt;br /&gt;
&lt;br /&gt;
진보적이고 현실주의적인 경향을 보여준 소설이다.&lt;/div&gt;</summary>
		<author><name>Jinhyang</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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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홍길동전ᐧ༚̮ᐧ</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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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06-23T20:28:2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inhyang: &lt;/p&gt;
&lt;hr /&gt;
&lt;div&gt;==작가==&lt;br /&gt;
&lt;br /&gt;
[[파일:허균.jpeg|섬네일|왼쪽]]&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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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 &amp;lt;허균&amp;gt;&lt;br /&gt;
| 호 || 백월거사&lt;br /&gt;
|-&lt;br /&gt;
| 자 || 단보&lt;br /&gt;
|-&lt;br /&gt;
| 본관 || 양천&lt;br /&gt;
|-&lt;br /&gt;
| 출생 || 1569년&lt;br /&gt;
|-&lt;br /&gt;
| 사망 || 1618년&lt;br /&gt;
|}&lt;br /&gt;
&lt;br /&gt;
'''허균'''은 어릴 때부터 시문에 능했다.&lt;br /&gt;
&lt;br /&gt;
5세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해 9세 때에는 시를 지을 줄 알았다. &lt;br /&gt;
&lt;br /&gt;
&lt;br /&gt;
그가 12살 되는 때에 아버지를 잃었고, 이에 더욱 문학 공부에 전념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학문은 '''유성룡'''에게, 시는 삼당시인 중 한 명인 '''이달'''에게 배웠다고 한다. &lt;br /&gt;
&lt;br /&gt;
&lt;br /&gt;
1594년 26세 때에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고, 1597년 문과 중시에 장원을 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듬해 황해도도사가 되었으나 기생을 끌어들여 가까이 했다는 일로 6달 만에 파직됐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후 여러 벼슬을 하였으나, 불교를 믿는다는 탄핵을 받아 다시 벼슬길에서 물러났다. &lt;br /&gt;
&lt;br /&gt;
&lt;br /&gt;
종사관, 형조참의를 하였으나, 1610년 전시의 시험을 주관하면서 조카와 사위를 합격시켰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전라도 함열로 유배를 갔다. &lt;br /&gt;
&lt;br /&gt;
&lt;br /&gt;
'''계축옥사'''가 일어나고 평소 친했던 서양갑, 심우영 등이 처형당하자 신변의 위험을 느낀 허균은 대북에 참여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1617년 '''좌참찬'''이 되었다. &lt;br /&gt;
&lt;br /&gt;
폐모론을 주장하다가 폐모론의 반대 입장인 영의정 기자헌이 길주로 유배를 갔다. &lt;br /&gt;
&lt;br /&gt;
&lt;br /&gt;
1618년 남대문에 격문을 붙인 사건이 일어났는데, 허균의 심복이 붙였다는 것으로 알려졌다.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허균이 역적모의하였다 하여 저자거리에서 능지처참형을 받았다.&amp;lt;/span&amp;gt;''' &amp;lt;ref&amp;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허균」,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3030,2025, 6, 24.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배경==&lt;br /&gt;
&lt;br /&gt;
====적서차별====&lt;br /&gt;
&lt;br /&gt;
조선후기 조선 사회가 가지는 문제 중 하나가 바로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적서차별'''&amp;lt;/font&amp;gt;이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서자와 얼자는 '''서얼차대법'''에 의해 과거를 응시하지 못했고 관리로 등용될 수 있는 길이 제한적이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서얼차대법은 후기로 내려올수록 완화되었지만, 서얼에 대한 차별은 관행으로 굳어져 사람들의 인식 속에 사라지지 않았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ins&amp;gt;적서 간의 갈등은 공적, 사적인 자리 가리지 않고 드러났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만일 서자가 문중의 회의에 참석하면 나이에 상관없이 적자 아래에 앉고, 반말을 들어야 했다. &lt;br /&gt;
&lt;br /&gt;
선조의 제사를 지낼 때는 술을 올리지도 못하였다.&amp;lt;ref&amp;gt; 우리역사넷, 「적서의문제」,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m/view.do?levelId=km_028_0040_0040_0030_0010, 2025, 6, 24.&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허균은 조선 후기 적서차별 문제를 비판하고자 홍길동을 서자 출신으로 설정하여 작품을 창작한 것으로 보인다.'''&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지배층 억압====&lt;br /&gt;
&lt;br /&gt;
조선 후기 사회가 문란해지면서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탐관오리들의 횡포가 극심'''&amp;lt;/span&amp;gt;해졌다. &lt;br /&gt;
&lt;br /&gt;
탐관오리들은 백성의 재산과 재물을 약탈하여 자기 재산을 채우기 바빴다.&lt;br /&gt;
&lt;br /&gt;
이에 백성의 삶은 피폐해졌고 어딘가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영웅'''&amp;lt;/font&amp;gt;이 나타나 구원해 주길 바랬다. &lt;br /&gt;
&lt;br /&gt;
백성의 이런 바람을 담아 탄생된 주인공이 '''홍길동'''이며, &lt;br /&gt;
&lt;br /&gt;
&amp;lt;ins&amp;gt;홍길동은 '''활빈당 무리'''를 이끌고 탐관오리들을 정벌하여 그들이 빼앗아간 재산들을 백성들에게 돌려주었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왕도정치====&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왕도정치'''&amp;lt;/font&amp;gt;란 &amp;lt;ins&amp;gt;군주가 공평하고 사사로움이 없는 태도로 정치를 운영해 이상적 사회를 수립하는 것을 의미하는 유교의 대표적 정치사상이다.&amp;lt;/ins&amp;gt; &amp;lt;ref&amp;gt;우리역사넷, 「왕도정치」, https://contents.history.go.kr/front/tg/view.do?treeId=0201&amp;amp;levelId=tg_003_1320&amp;amp;ganada=&amp;amp;pageUnit=10, 2025, 6, 24.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왕도’는 공자이전에 '''치우침이 없는 공정함’''을 의미했다. &lt;br /&gt;
&lt;br /&gt;
하지만 공자가 이상적인 인간과 정치의 목표로 인(仁)을 제시한 이후, 인정(仁政)이 왕도 정치의 핵심으로 위치하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맹자는 각축전인 전국시대를 경험하면서 패도(覇道) 정치에 대비되는 개념으로서 인정(仁政)을 내용으로 하는 '''왕도 정치'''를 주장하였다. &lt;br /&gt;
&lt;br /&gt;
특히 맹자는 왕도 정치 실현을 위해 백성들이 기본적으로 &amp;lt;font color=&amp;quot;#008000&amp;quot;&amp;gt;'''경제적 문제를 해결'''&amp;lt;/font&amp;gt;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lt;br /&gt;
&lt;br /&gt;
&lt;br /&gt;
군주가 백성들의 안정된 생업을 보장해 주고 이들을 덕으로 감화시킬 때 진정한 왕도 정치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홍길동은 조선을 벗어나 이상국가인 '''율도국'''을 세워 왕도 정치를 실현하려고 하였다.&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lt;br /&gt;
[[파일:홍길동전|섬네일|왼쪽]]&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홍길동은 홍 판서와 시비 춘섬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 아이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홍 판서의 꿈처럼, 길동은 어려서부터 특출난 면모를 보였다.&lt;br /&gt;
&lt;br /&gt;
도술을 사용할 수 있었고, 무술 솜씨도 뛰어났다. &lt;br /&gt;
&lt;br /&gt;
&lt;br /&gt;
하지만, '''서자'''라는 이유로 호부호형하지 못하였고, 길동은 이에 한이 맺혔다. &lt;br /&gt;
&lt;br /&gt;
&lt;br /&gt;
가족들은 길동의 재주가 화근이 될까 두려워 자객을 시켜 길동을 없애고자 하였다. &lt;br /&gt;
&lt;br /&gt;
길동은 자객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났고, 집을 떠나기로 다짐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집을 떠난 길동은 '''활빈당'''이라는 도적의 우두머리가 되어 탐관오리들이 백성들에게 빼앗아간 재물을 탈취하여 돌려주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이에 전국에서 길동을 잡으라는 체포령이 내려졌는데, 바람과 비를 부리고 둔갑술 등에 아무도 당해내지 못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결국 조정은 길동의 가족을 통해 회유하고, 길동이 원하는 바인 '''병조판서'''의 꿈을 이루게 해주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하지만 길동은 병조판서 직에 머물지 않고 홀연히 떠나 율도국의 왕이 된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981&amp;quot; height=&amp;quot;552&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oiuNe8rl7xc&amp;quot; title=&amp;quot;홍길동전 줄거리 요약 | 100초 문학 | 학교를 떠난 이채움쌤&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amp;lt;ref&amp;gt;[학교를 떠난 채움쌤][홍길동전 줄거리 요약] [2023. 2. 9.]&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한글로 쓰여 있어 민중의 생각을 반영하고 독자층을 확보하였다.&lt;br /&gt;
&lt;br /&gt;
진보적이고 현실주의적인 경향을 보여준 소설이다.&lt;/div&gt;</summary>
		<author><name>Jinhyang</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D%99%8D%EA%B8%B8%EB%8F%99%EC%A0%84%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689</id>
		<title>홍길동전ᐧ༚̮ᐧ</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D%99%8D%EA%B8%B8%EB%8F%99%EC%A0%84%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689"/>
		<updated>2025-06-23T20:28:1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inhyang: &lt;/p&gt;
&lt;hr /&gt;
&lt;div&gt;==작가==&lt;br /&gt;
&lt;br /&gt;
[[파일:허균.jpeg|섬네일|왼쪽]]&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 &amp;lt;허균&amp;gt;&lt;br /&gt;
| 호 || 백월거사&lt;br /&gt;
|-&lt;br /&gt;
| 자 || 단보&lt;br /&gt;
|-&lt;br /&gt;
| 본관 || 양천&lt;br /&gt;
|-&lt;br /&gt;
| 출생 || 1569년&lt;br /&gt;
|-&lt;br /&gt;
| 사망 || 1618년&lt;br /&gt;
|}&lt;br /&gt;
&lt;br /&gt;
'''허균'''은 어릴 때부터 시문에 능했다.&lt;br /&gt;
&lt;br /&gt;
5세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해 9세 때에는 시를 지을 줄 알았다. &lt;br /&gt;
&lt;br /&gt;
&lt;br /&gt;
그가 12살 되는 때에 아버지를 잃었고, 이에 더욱 문학 공부에 전념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학문은 '''유성룡'''에게, 시는 삼당시인 중 한 명인 '''이달'''에게 배웠다고 한다. &lt;br /&gt;
&lt;br /&gt;
&lt;br /&gt;
1594년 26세 때에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고, 1597년 문과 중시에 장원을 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듬해 황해도도사가 되었으나 기생을 끌어들여 가까이 했다는 일로 6달 만에 파직됐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후 여러 벼슬을 하였으나, 불교를 믿는다는 탄핵을 받아 다시 벼슬길에서 물러났다. &lt;br /&gt;
&lt;br /&gt;
&lt;br /&gt;
종사관, 형조참의를 하였으나, 1610년 전시의 시험을 주관하면서 조카와 사위를 합격시켰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전라도 함열로 유배를 갔다. &lt;br /&gt;
&lt;br /&gt;
&lt;br /&gt;
'''계축옥사'''가 일어나고 평소 친했던 서양갑, 심우영 등이 처형당하자 신변의 위험을 느낀 허균은 대북에 참여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1617년 '''좌참찬'''이 되었다. &lt;br /&gt;
&lt;br /&gt;
폐모론을 주장하다가 폐모론의 반대 입장인 영의정 기자헌이 길주로 유배를 갔다. &lt;br /&gt;
&lt;br /&gt;
&lt;br /&gt;
1618년 남대문에 격문을 붙인 사건이 일어났는데, 허균의 심복이 붙였다는 것으로 알려졌다.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허균이 역적모의하였다 하여 저자거리에서 능지처참형을 받았다.&amp;lt;/span&amp;gt;''' &amp;lt;ref&amp;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허균」,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3030,2025, 6, 24.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배경==&lt;br /&gt;
&lt;br /&gt;
====적서차별====&lt;br /&gt;
&lt;br /&gt;
조선후기 조선 사회가 가지는 문제 중 하나가 바로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적서차별'''&amp;lt;/font&amp;gt;이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서자와 얼자는 '''서얼차대법'''에 의해 과거를 응시하지 못했고 관리로 등용될 수 있는 길이 제한적이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서얼차대법은 후기로 내려올수록 완화되었지만, 서얼에 대한 차별은 관행으로 굳어져 사람들의 인식 속에 사라지지 않았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ins&amp;gt;적서 간의 갈등은 공적, 사적인 자리 가리지 않고 드러났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만일 서자가 문중의 회의에 참석하면 나이에 상관없이 적자 아래에 앉고, 반말을 들어야 했다. &lt;br /&gt;
&lt;br /&gt;
선조의 제사를 지낼 때는 술을 올리지도 못하였다.&amp;lt;ref&amp;gt; 우리역사넷, 「적서의문제」,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m/view.do?levelId=km_028_0040_0040_0030_0010, 2025, 6, 24.&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허균은 조선 후기 적서차별 문제를 비판하고자 홍길동을 서자 출신으로 설정하여 작품을 창작한 것으로 보인다.'''&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지배층 억압====&lt;br /&gt;
&lt;br /&gt;
조선 후기 사회가 문란해지면서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탐관오리들의 횡포가 극심'''&amp;lt;/span&amp;gt;해졌다. &lt;br /&gt;
&lt;br /&gt;
탐관오리들은 백성의 재산과 재물을 약탈하여 자기 재산을 채우기 바빴다.&lt;br /&gt;
&lt;br /&gt;
이에 백성의 삶은 피폐해졌고 어딘가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영웅'''&amp;lt;/font&amp;gt;이 나타나 구원해 주길 바랬다. &lt;br /&gt;
&lt;br /&gt;
백성의 이런 바람을 담아 탄생된 주인공이 '''홍길동'''이며, &lt;br /&gt;
&lt;br /&gt;
&amp;lt;ins&amp;gt;홍길동은 '''활빈당 무리'''를 이끌고 탐관오리들을 정벌하여 그들이 빼앗아간 재산들을 백성들에게 돌려주었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왕도정치====&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왕도정치'''&amp;lt;/font&amp;gt;란 &amp;lt;ins&amp;gt;군주가 공평하고 사사로움이 없는 태도로 정치를 운영해 이상적 사회를 수립하는 것을 의미하는 유교의 대표적 정치사상이다.&amp;lt;/ins&amp;gt; &amp;lt;ref&amp;gt;우리역사넷, 「왕도정치」, https://contents.history.go.kr/front/tg/view.do?treeId=0201&amp;amp;levelId=tg_003_1320&amp;amp;ganada=&amp;amp;pageUnit=10, 2025, 6, 24.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왕도’는 공자이전에 '''치우침이 없는 공정함’''을 의미했다. &lt;br /&gt;
&lt;br /&gt;
하지만 공자가 이상적인 인간과 정치의 목표로 인(仁)을 제시한 이후, 인정(仁政)이 왕도 정치의 핵심으로 위치하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맹자는 각축전인 전국시대를 경험하면서 패도(覇道) 정치에 대비되는 개념으로서 인정(仁政)을 내용으로 하는 '''왕도 정치'''를 주장하였다. &lt;br /&gt;
&lt;br /&gt;
특히 맹자는 왕도 정치 실현을 위해 백성들이 기본적으로 &amp;lt;font color=&amp;quot;#008000&amp;quot;&amp;gt;'''경제적 문제를 해결'''&amp;lt;/font&amp;gt;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lt;br /&gt;
&lt;br /&gt;
&lt;br /&gt;
군주가 백성들의 안정된 생업을 보장해 주고 이들을 덕으로 감화시킬 때 진정한 왕도 정치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홍길동은 조선을 벗어나 이상국가인 '''율도국'''을 세워 왕도 정치를 실현하려고 하였다.&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lt;br /&gt;
[[파일:홍길동전|섬네일|왼쪽]]&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홍길동은 홍 판서와 시비 춘섬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 아이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홍 판서의 꿈처럼, 길동은 어려서부터 특출난 면모를 보였다.&lt;br /&gt;
&lt;br /&gt;
도술을 사용할 수 있었고, 무술 솜씨도 뛰어났다. &lt;br /&gt;
&lt;br /&gt;
&lt;br /&gt;
하지만, '''서자'''라는 이유로 호부호형하지 못하였고, 길동은 이에 한이 맺혔다. &lt;br /&gt;
&lt;br /&gt;
&lt;br /&gt;
가족들은 길동의 재주가 화근이 될까 두려워 자객을 시켜 길동을 없애고자 하였다. &lt;br /&gt;
&lt;br /&gt;
길동은 자객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났고, 집을 떠나기로 다짐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집을 떠난 길동은 '''활빈당'''이라는 도적의 우두머리가 되어 탐관오리들이 백성들에게 빼앗아간 재물을 탈취하여 돌려주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이에 전국에서 길동을 잡으라는 체포령이 내려졌는데, 바람과 비를 부리고 둔갑술 등에 아무도 당해내지 못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결국 조정은 길동의 가족을 통해 회유하고, 길동이 원하는 바인 '''병조판서'''의 꿈을 이루게 해주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하지만 길동은 병조판서 직에 머물지 않고 홀연히 떠나 율도국의 왕이 된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981&amp;quot; height=&amp;quot;552&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oiuNe8rl7xc&amp;quot; title=&amp;quot;홍길동전 줄거리 요약 | 100초 문학 | 학교를 떠난 이채움쌤&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amp;lt;ref&amp;gt;[학교를 떠난 채움쌤][홍길동전 줄거리 요약] [2023. 2. 9.]&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한글로 쓰여 있어 민중의 생각을 반영하고 독자층을 확보하였다.&lt;br /&gt;
&lt;br /&gt;
진보적이고 현실주의적인 경향을 보여준 소설이다.&lt;/div&gt;</summary>
		<author><name>Jinhyang</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D%99%8D%EA%B8%B8%EB%8F%99%EC%A0%84%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688</id>
		<title>홍길동전ᐧ༚̮ᐧ</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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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06-23T20:28:0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inhyang: &lt;/p&gt;
&lt;hr /&gt;
&lt;div&gt;==작가==&lt;br /&gt;
&lt;br /&gt;
[[파일:허균.jpeg|섬네일|왼쪽]]&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 &amp;lt;허균&amp;gt;&lt;br /&gt;
| 호 || 백월거사&lt;br /&gt;
|-&lt;br /&gt;
| 자 || 단보&lt;br /&gt;
|-&lt;br /&gt;
| 본관 || 양천&lt;br /&gt;
|-&lt;br /&gt;
| 출생 || 1569년&lt;br /&gt;
|-&lt;br /&gt;
| 사망 || 1618년&lt;br /&gt;
|}&lt;br /&gt;
&lt;br /&gt;
'''허균'''은 어릴 때부터 시문에 능했다.&lt;br /&gt;
&lt;br /&gt;
5세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해 9세 때에는 시를 지을 줄 알았다. &lt;br /&gt;
&lt;br /&gt;
&lt;br /&gt;
그가 12살 되는 때에 아버지를 잃었고, 이에 더욱 문학 공부에 전념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학문은 '''유성룡'''에게, 시는 삼당시인 중 한 명인 '''이달'''에게 배웠다고 한다. &lt;br /&gt;
&lt;br /&gt;
&lt;br /&gt;
1594년 26세 때에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고, 1597년 문과 중시에 장원을 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듬해 황해도도사가 되었으나 기생을 끌어들여 가까이 했다는 일로 6달 만에 파직됐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후 여러 벼슬을 하였으나, 불교를 믿는다는 탄핵을 받아 다시 벼슬길에서 물러났다. &lt;br /&gt;
&lt;br /&gt;
&lt;br /&gt;
종사관, 형조참의를 하였으나, 1610년 전시의 시험을 주관하면서 조카와 사위를 합격시켰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전라도 함열로 유배를 갔다. &lt;br /&gt;
&lt;br /&gt;
&lt;br /&gt;
'''계축옥사'''가 일어나고 평소 친했던 서양갑, 심우영 등이 처형당하자 신변의 위험을 느낀 허균은 대북에 참여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1617년 '''좌참찬'''이 되었다. &lt;br /&gt;
&lt;br /&gt;
폐모론을 주장하다가 폐모론의 반대 입장인 영의정 기자헌이 길주로 유배를 갔다. &lt;br /&gt;
&lt;br /&gt;
&lt;br /&gt;
1618년 남대문에 격문을 붙인 사건이 일어났는데, 허균의 심복이 붙였다는 것으로 알려졌다.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허균이 역적모의하였다 하여 저자거리에서 능지처참형을 받았다.&amp;lt;/span&amp;gt;''' &amp;lt;ref&amp;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허균」,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3030,2025, 6, 24.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배경==&lt;br /&gt;
&lt;br /&gt;
====적서차별====&lt;br /&gt;
&lt;br /&gt;
조선후기 조선 사회가 가지는 문제 중 하나가 바로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적서차별'''&amp;lt;/font&amp;gt;이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서자와 얼자는 '''서얼차대법'''에 의해 과거를 응시하지 못했고 관리로 등용될 수 있는 길이 제한적이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서얼차대법은 후기로 내려올수록 완화되었지만, 서얼에 대한 차별은 관행으로 굳어져 사람들의 인식 속에 사라지지 않았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ins&amp;gt;적서 간의 갈등은 공적, 사적인 자리 가리지 않고 드러났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만일 서자가 문중의 회의에 참석하면 나이에 상관없이 적자 아래에 앉고, 반말을 들어야 했다. &lt;br /&gt;
&lt;br /&gt;
선조의 제사를 지낼 때는 술을 올리지도 못하였다.&amp;lt;ref&amp;gt; 우리역사넷, 「적서의문제」,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m/view.do?levelId=km_028_0040_0040_0030_0010, 2025, 6, 24.&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허균은 조선 후기 적서차별 문제를 비판하고자 홍길동을 서자 출신으로 설정하여 작품을 창작한 것으로 보인다.'''&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지배층 억압====&lt;br /&gt;
&lt;br /&gt;
조선 후기 사회가 문란해지면서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탐관오리들의 횡포가 극심'''&amp;lt;/span&amp;gt;해졌다. &lt;br /&gt;
&lt;br /&gt;
탐관오리들은 백성의 재산과 재물을 약탈하여 자기 재산을 채우기 바빴다.&lt;br /&gt;
&lt;br /&gt;
이에 백성의 삶은 피폐해졌고 어딘가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영웅'''&amp;lt;/font&amp;gt;이 나타나 구원해 주길 바랬다. &lt;br /&gt;
&lt;br /&gt;
백성의 이런 바람을 담아 탄생된 주인공이 '''홍길동'''이며, &lt;br /&gt;
&lt;br /&gt;
&amp;lt;ins&amp;gt;홍길동은 '''활빈당 무리'''를 이끌고 탐관오리들을 정벌하여 그들이 빼앗아간 재산들을 백성들에게 돌려주었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왕도정치====&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왕도정치'''&amp;lt;/font&amp;gt;란 &amp;lt;ins&amp;gt;군주가 공평하고 사사로움이 없는 태도로 정치를 운영해 이상적 사회를 수립하는 것을 의미하는 유교의 대표적 정치사상이다.&amp;lt;/ins&amp;gt; &amp;lt;ref&amp;gt;우리역사넷, 「왕도정치」, https://contents.history.go.kr/front/tg/view.do?treeId=0201&amp;amp;levelId=tg_003_1320&amp;amp;ganada=&amp;amp;pageUnit=10, 2025, 6, 24.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왕도’는 공자이전에 '''치우침이 없는 공정함’''을 의미했다. &lt;br /&gt;
&lt;br /&gt;
하지만 공자가 이상적인 인간과 정치의 목표로 인(仁)을 제시한 이후, 인정(仁政)이 왕도 정치의 핵심으로 위치하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맹자는 각축전인 전국시대를 경험하면서 패도(覇道) 정치에 대비되는 개념으로서 인정(仁政)을 내용으로 하는 '''왕도 정치'''를 주장하였다. &lt;br /&gt;
&lt;br /&gt;
특히 맹자는 왕도 정치 실현을 위해 백성들이 기본적으로 &amp;lt;font color=&amp;quot;#008000&amp;quot;&amp;gt;'''경제적 문제를 해결'''&amp;lt;/font&amp;gt;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lt;br /&gt;
&lt;br /&gt;
&lt;br /&gt;
군주가 백성들의 안정된 생업을 보장해 주고 이들을 덕으로 감화시킬 때 진정한 왕도 정치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홍길동은 조선을 벗어나 이상국가인 '''율도국'''을 세워 왕도 정치를 실현하려고 하였다.&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lt;br /&gt;
[[파일:홍길동전|섬네일|왼쪽]]&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홍길동은 홍 판서와 시비 춘섬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 아이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홍 판서의 꿈처럼, 길동은 어려서부터 특출난 면모를 보였다.&lt;br /&gt;
&lt;br /&gt;
도술을 사용할 수 있었고, 무술 솜씨도 뛰어났다. &lt;br /&gt;
&lt;br /&gt;
&lt;br /&gt;
하지만, '''서자'''라는 이유로 호부호형하지 못하였고, 길동은 이에 한이 맺혔다. &lt;br /&gt;
&lt;br /&gt;
&lt;br /&gt;
가족들은 길동의 재주가 화근이 될까 두려워 자객을 시켜 길동을 없애고자 하였다. &lt;br /&gt;
&lt;br /&gt;
길동은 자객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났고, 집을 떠나기로 다짐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집을 떠난 길동은 '''활빈당'''이라는 도적의 우두머리가 되어 탐관오리들이 백성들에게 빼앗아간 재물을 탈취하여 돌려주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이에 전국에서 길동을 잡으라는 체포령이 내려졌는데, 바람과 비를 부리고 둔갑술 등에 아무도 당해내지 못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결국 조정은 길동의 가족을 통해 회유하고, 길동이 원하는 바인 '''병조판서'''의 꿈을 이루게 해주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하지만 길동은 병조판서 직에 머물지 않고 홀연히 떠나 율도국의 왕이 된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981&amp;quot; height=&amp;quot;552&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oiuNe8rl7xc&amp;quot; title=&amp;quot;홍길동전 줄거리 요약 | 100초 문학 | 학교를 떠난 이채움쌤&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amp;lt;ref&amp;gt;[학교를 떠난 채움쌤][홍길동전 줄거리 요약] [2023. 2. 9.]&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한글로 쓰여 있어 민중의 생각을 반영하고 독자층을 확보하였다.&lt;br /&gt;
&lt;br /&gt;
진보적이고 현실주의적인 경향을 보여준 소설이다.&lt;/div&gt;</summary>
		<author><name>Jinhyang</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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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06-23T20:27:2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inhyang: &lt;/p&gt;
&lt;hr /&gt;
&lt;div&gt;&lt;/div&gt;</summary>
		<author><name>Jinhyang</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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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파일:홍길동전.jpeg</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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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06-23T20:26:4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inhyang: &lt;/p&gt;
&lt;hr /&gt;
&lt;div&gt;&lt;/div&gt;</summary>
		<author><name>Jinhyang</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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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D%99%8D%EA%B8%B8%EB%8F%99%EC%A0%84%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684</id>
		<title>홍길동전ᐧ༚̮ᐧ</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D%99%8D%EA%B8%B8%EB%8F%99%EC%A0%84%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684"/>
		<updated>2025-06-23T20:24:3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inhyang: &lt;/p&gt;
&lt;hr /&gt;
&lt;div&gt;==작가==&lt;br /&gt;
&lt;br /&gt;
[[파일:허균|섬네일|왼쪽]]&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 &amp;lt;허균&amp;gt;&lt;br /&gt;
| 호 || 백월거사&lt;br /&gt;
|-&lt;br /&gt;
| 자 || 단보&lt;br /&gt;
|-&lt;br /&gt;
| 본관 || 양천&lt;br /&gt;
|-&lt;br /&gt;
| 출생 || 1569년&lt;br /&gt;
|-&lt;br /&gt;
| 사망 || 1618년&lt;br /&gt;
|}&lt;br /&gt;
&lt;br /&gt;
'''허균'''은 어릴 때부터 시문에 능했다.&lt;br /&gt;
&lt;br /&gt;
5세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해 9세 때에는 시를 지을 줄 알았다. &lt;br /&gt;
&lt;br /&gt;
&lt;br /&gt;
그가 12살 되는 때에 아버지를 잃었고, 이에 더욱 문학 공부에 전념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학문은 '''유성룡'''에게, 시는 삼당시인 중 한 명인 '''이달'''에게 배웠다고 한다. &lt;br /&gt;
&lt;br /&gt;
&lt;br /&gt;
1594년 26세 때에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고, 1597년 문과 중시에 장원을 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듬해 황해도도사가 되었으나 기생을 끌어들여 가까이 했다는 일로 6달 만에 파직됐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후 여러 벼슬을 하였으나, 불교를 믿는다는 탄핵을 받아 다시 벼슬길에서 물러났다. &lt;br /&gt;
&lt;br /&gt;
&lt;br /&gt;
종사관, 형조참의를 하였으나, 1610년 전시의 시험을 주관하면서 조카와 사위를 합격시켰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전라도 함열로 유배를 갔다. &lt;br /&gt;
&lt;br /&gt;
&lt;br /&gt;
'''계축옥사'''가 일어나고 평소 친했던 서양갑, 심우영 등이 처형당하자 신변의 위험을 느낀 허균은 대북에 참여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1617년 '''좌참찬'''이 되었다. &lt;br /&gt;
&lt;br /&gt;
폐모론을 주장하다가 폐모론의 반대 입장인 영의정 기자헌이 길주로 유배를 갔다. &lt;br /&gt;
&lt;br /&gt;
&lt;br /&gt;
1618년 남대문에 격문을 붙인 사건이 일어났는데, 허균의 심복이 붙였다는 것으로 알려졌다.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허균이 역적모의하였다 하여 저자거리에서 능지처참형을 받았다.&amp;lt;/span&amp;gt;''' &amp;lt;ref&amp;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허균」,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3030,2025, 6, 24.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배경==&lt;br /&gt;
&lt;br /&gt;
====적서차별====&lt;br /&gt;
&lt;br /&gt;
조선후기 조선 사회가 가지는 문제 중 하나가 바로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적서차별'''&amp;lt;/font&amp;gt;이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서자와 얼자는 '''서얼차대법'''에 의해 과거를 응시하지 못했고 관리로 등용될 수 있는 길이 제한적이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서얼차대법은 후기로 내려올수록 완화되었지만, 서얼에 대한 차별은 관행으로 굳어져 사람들의 인식 속에 사라지지 않았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ins&amp;gt;적서 간의 갈등은 공적, 사적인 자리 가리지 않고 드러났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만일 서자가 문중의 회의에 참석하면 나이에 상관없이 적자 아래에 앉고, 반말을 들어야 했다. &lt;br /&gt;
&lt;br /&gt;
선조의 제사를 지낼 때는 술을 올리지도 못하였다.&amp;lt;ref&amp;gt; 우리역사넷, 「적서의문제」,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m/view.do?levelId=km_028_0040_0040_0030_0010, 2025, 6, 24.&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허균은 조선 후기 적서차별 문제를 비판하고자 홍길동을 서자 출신으로 설정하여 작품을 창작한 것으로 보인다.'''&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지배층 억압====&lt;br /&gt;
&lt;br /&gt;
조선 후기 사회가 문란해지면서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탐관오리들의 횡포가 극심'''&amp;lt;/span&amp;gt;해졌다. &lt;br /&gt;
&lt;br /&gt;
탐관오리들은 백성의 재산과 재물을 약탈하여 자기 재산을 채우기 바빴다.&lt;br /&gt;
&lt;br /&gt;
이에 백성의 삶은 피폐해졌고 어딘가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영웅'''&amp;lt;/font&amp;gt;이 나타나 구원해 주길 바랬다. &lt;br /&gt;
&lt;br /&gt;
백성의 이런 바람을 담아 탄생된 주인공이 '''홍길동'''이며, &lt;br /&gt;
&lt;br /&gt;
&amp;lt;ins&amp;gt;홍길동은 '''활빈당 무리'''를 이끌고 탐관오리들을 정벌하여 그들이 빼앗아간 재산들을 백성들에게 돌려주었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왕도정치====&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왕도정치'''&amp;lt;/font&amp;gt;란 &amp;lt;ins&amp;gt;군주가 공평하고 사사로움이 없는 태도로 정치를 운영해 이상적 사회를 수립하는 것을 의미하는 유교의 대표적 정치사상이다.&amp;lt;/ins&amp;gt; &amp;lt;ref&amp;gt;우리역사넷, 「왕도정치」, https://contents.history.go.kr/front/tg/view.do?treeId=0201&amp;amp;levelId=tg_003_1320&amp;amp;ganada=&amp;amp;pageUnit=10, 2025, 6, 24.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왕도’는 공자이전에 '''치우침이 없는 공정함’''을 의미했다. &lt;br /&gt;
&lt;br /&gt;
하지만 공자가 이상적인 인간과 정치의 목표로 인(仁)을 제시한 이후, 인정(仁政)이 왕도 정치의 핵심으로 위치하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맹자는 각축전인 전국시대를 경험하면서 패도(覇道) 정치에 대비되는 개념으로서 인정(仁政)을 내용으로 하는 '''왕도 정치'''를 주장하였다. &lt;br /&gt;
&lt;br /&gt;
특히 맹자는 왕도 정치 실현을 위해 백성들이 기본적으로 &amp;lt;font color=&amp;quot;#008000&amp;quot;&amp;gt;'''경제적 문제를 해결'''&amp;lt;/font&amp;gt;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lt;br /&gt;
&lt;br /&gt;
&lt;br /&gt;
군주가 백성들의 안정된 생업을 보장해 주고 이들을 덕으로 감화시킬 때 진정한 왕도 정치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홍길동은 조선을 벗어나 이상국가인 '''율도국'''을 세워 왕도 정치를 실현하려고 하였다.&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lt;br /&gt;
[[파일:홍길동전|섬네일|왼쪽]]&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홍길동은 홍 판서와 시비 춘섬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 아이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홍 판서의 꿈처럼, 길동은 어려서부터 특출난 면모를 보였다.&lt;br /&gt;
&lt;br /&gt;
도술을 사용할 수 있었고, 무술 솜씨도 뛰어났다. &lt;br /&gt;
&lt;br /&gt;
&lt;br /&gt;
하지만, '''서자'''라는 이유로 호부호형하지 못하였고, 길동은 이에 한이 맺혔다. &lt;br /&gt;
&lt;br /&gt;
&lt;br /&gt;
가족들은 길동의 재주가 화근이 될까 두려워 자객을 시켜 길동을 없애고자 하였다. &lt;br /&gt;
&lt;br /&gt;
길동은 자객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났고, 집을 떠나기로 다짐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집을 떠난 길동은 '''활빈당'''이라는 도적의 우두머리가 되어 탐관오리들이 백성들에게 빼앗아간 재물을 탈취하여 돌려주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이에 전국에서 길동을 잡으라는 체포령이 내려졌는데, 바람과 비를 부리고 둔갑술 등에 아무도 당해내지 못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결국 조정은 길동의 가족을 통해 회유하고, 길동이 원하는 바인 '''병조판서'''의 꿈을 이루게 해주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하지만 길동은 병조판서 직에 머물지 않고 홀연히 떠나 율도국의 왕이 된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981&amp;quot; height=&amp;quot;552&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oiuNe8rl7xc&amp;quot; title=&amp;quot;홍길동전 줄거리 요약 | 100초 문학 | 학교를 떠난 이채움쌤&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amp;lt;ref&amp;gt;[학교를 떠난 채움쌤][홍길동전 줄거리 요약] [2023. 2. 9.]&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한글로 쓰여 있어 민중의 생각을 반영하고 독자층을 확보하였다.&lt;br /&gt;
&lt;br /&gt;
진보적이고 현실주의적인 경향을 보여준 소설이다.&lt;/div&gt;</summary>
		<author><name>Jinhyang</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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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D%99%8D%EA%B8%B8%EB%8F%99%EC%A0%84%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680</id>
		<title>홍길동전ᐧ༚̮ᐧ</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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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06-23T20:22:2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inhyang: &lt;/p&gt;
&lt;hr /&gt;
&lt;div&gt;==작가==&lt;br /&gt;
&lt;br /&gt;
[[파일:허균|섬네일|왼쪽]]&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 &amp;lt;허균&amp;gt;&lt;br /&gt;
| 호 || 백월거사&lt;br /&gt;
|-&lt;br /&gt;
| 자 || 단보&lt;br /&gt;
|-&lt;br /&gt;
| 본관 || 양천&lt;br /&gt;
|-&lt;br /&gt;
| 출생 || 1569년&lt;br /&gt;
|-&lt;br /&gt;
| 사망 || 1618년&lt;br /&gt;
|}&lt;br /&gt;
&lt;br /&gt;
허균은 어릴 때부터 시문에 능했다.&lt;br /&gt;
&lt;br /&gt;
5세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해 9세 때에는 시를 지을 줄 알았다. &lt;br /&gt;
&lt;br /&gt;
&lt;br /&gt;
그가 12살 되는 때에 아버지를 잃었고, 이에 더욱 문학 공부에 전념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학문은 유성룡에게, 시는 삼당시인 중 한 명인 이달에게 배웠다고 한다. &lt;br /&gt;
&lt;br /&gt;
&lt;br /&gt;
1594년 26세 때에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고, 1597년 문과 중시에 장원을 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듬해 황해도도사가 되었으나 기생을 끌어들여 가까이 했다는 일로 6달 만에 파직됐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후 여러 벼슬을 하였으나, 불교를 믿는다는 탄핵을 받아 다시 벼슬길에서 물러났다. &lt;br /&gt;
&lt;br /&gt;
&lt;br /&gt;
종사관, 형조참의를 하였으나, 1610년 전시의 시험을 주관하면서 조카와 사위를 합격시켰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전라도 함열로 유배를 갔다. &lt;br /&gt;
&lt;br /&gt;
&lt;br /&gt;
계축옥사가 일어나고 평소 친했던 서양갑, 심우영 등이 처형당하자 신변의 위험을 느낀 허균은 대북에 참여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1617년 좌참찬이 되었다. &lt;br /&gt;
&lt;br /&gt;
폐모론을 주장하다가 폐모론의 반대 입장인 영의정 기자헌이 길주로 유배를 갔다. &lt;br /&gt;
&lt;br /&gt;
&lt;br /&gt;
1618년 남대문에 격문을 붙인 사건이 일어났는데, 허균의 심복이 붙였다는 것으로 알려졌다. &lt;br /&gt;
&lt;br /&gt;
허균이 역적모의하였다 하여 저자거리에서 능지처참형을 받았다. &amp;lt;ref&amp;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허균」,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3030,2025, 6, 24.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배경==&lt;br /&gt;
&lt;br /&gt;
====적서차별====&lt;br /&gt;
&lt;br /&gt;
조선후기 조선 사회가 가지는 문제 중 하나가 바로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적서차별'''&amp;lt;/font&amp;gt;이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서자와 얼자는 '''서얼차대법'''에 의해 과거를 응시하지 못했고 관리로 등용될 수 있는 길이 제한적이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서얼차대법은 후기로 내려올수록 완화되었지만, 서얼에 대한 차별은 관행으로 굳어져 사람들의 인식 속에 사라지지 않았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ins&amp;gt;적서 간의 갈등은 공적, 사적인 자리 가리지 않고 드러났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만일 서자가 문중의 회의에 참석하면 나이에 상관없이 적자 아래에 앉고, 반말을 들어야 했다. &lt;br /&gt;
&lt;br /&gt;
선조의 제사를 지낼 때는 술을 올리지도 못하였다.&amp;lt;ref&amp;gt; 우리역사넷, 「적서의문제」,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m/view.do?levelId=km_028_0040_0040_0030_0010, 2025, 6, 24.&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허균은 조선 후기 적서차별 문제를 비판하고자 홍길동을 서자 출신으로 설정하여 작품을 창작한 것으로 보인다.'''&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지배층 억압====&lt;br /&gt;
&lt;br /&gt;
조선 후기 사회가 문란해지면서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탐관오리들의 횡포가 극심'''&amp;lt;/span&amp;gt;해졌다. &lt;br /&gt;
&lt;br /&gt;
탐관오리들은 백성의 재산과 재물을 약탈하여 자기 재산을 채우기 바빴다.&lt;br /&gt;
&lt;br /&gt;
이에 백성의 삶은 피폐해졌고 어딘가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영웅'''&amp;lt;/font&amp;gt;이 나타나 구원해 주길 바랬다. &lt;br /&gt;
&lt;br /&gt;
백성의 이런 바람을 담아 탄생된 주인공이 '''홍길동'''이며, &lt;br /&gt;
&lt;br /&gt;
&amp;lt;ins&amp;gt;홍길동은 '''활빈당 무리'''를 이끌고 탐관오리들을 정벌하여 그들이 빼앗아간 재산들을 백성들에게 돌려주었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왕도정치====&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왕도정치'''&amp;lt;/font&amp;gt;란 &amp;lt;ins&amp;gt;군주가 공평하고 사사로움이 없는 태도로 정치를 운영해 이상적 사회를 수립하는 것을 의미하는 유교의 대표적 정치사상이다.&amp;lt;/ins&amp;gt; &amp;lt;ref&amp;gt;우리역사넷, 「왕도정치」, https://contents.history.go.kr/front/tg/view.do?treeId=0201&amp;amp;levelId=tg_003_1320&amp;amp;ganada=&amp;amp;pageUnit=10, 2025, 6, 24.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왕도’는 공자이전에 '''치우침이 없는 공정함’''을 의미했다. &lt;br /&gt;
&lt;br /&gt;
하지만 공자가 이상적인 인간과 정치의 목표로 인(仁)을 제시한 이후, 인정(仁政)이 왕도 정치의 핵심으로 위치하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맹자는 각축전인 전국시대를 경험하면서 패도(覇道) 정치에 대비되는 개념으로서 인정(仁政)을 내용으로 하는 '''왕도 정치'''를 주장하였다. &lt;br /&gt;
&lt;br /&gt;
특히 맹자는 왕도 정치 실현을 위해 백성들이 기본적으로 &amp;lt;font color=&amp;quot;#008000&amp;quot;&amp;gt;'''경제적 문제를 해결'''&amp;lt;/font&amp;gt;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lt;br /&gt;
&lt;br /&gt;
&lt;br /&gt;
군주가 백성들의 안정된 생업을 보장해 주고 이들을 덕으로 감화시킬 때 진정한 왕도 정치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홍길동은 조선을 벗어나 이상국가인 '''율도국'''을 세워 왕도 정치를 실현하려고 하였다.&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lt;br /&gt;
[[파일:홍길동전|섬네일|왼쪽]]&lt;br /&gt;
&lt;br /&gt;
홍길동은 홍 판서와 시비 춘섬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 아이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홍 판서의 꿈처럼, 길동은 어려서부터 특출난 면모를 보였다.&lt;br /&gt;
&lt;br /&gt;
도술을 사용할 수 있었고, 무술 솜씨도 뛰어났다. &lt;br /&gt;
&lt;br /&gt;
&lt;br /&gt;
하지만, '''서자'''라는 이유로 호부호형하지 못하였고, 길동은 이에 한이 맺혔다. &lt;br /&gt;
&lt;br /&gt;
&lt;br /&gt;
가족들은 길동의 재주가 화근이 될까 두려워 자객을 시켜 길동을 없애고자 하였다. &lt;br /&gt;
&lt;br /&gt;
길동은 자객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났고, 집을 떠나기로 다짐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집을 떠난 길동은 '''활빈당'''이라는 도적의 우두머리가 되어 탐관오리들이 백성들에게 빼앗아간 재물을 탈취하여 돌려주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이에 전국에서 길동을 잡으라는 체포령이 내려졌는데, 바람과 비를 부리고 둔갑술 등에 아무도 당해내지 못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결국 조정은 길동의 가족을 통해 회유하고, 길동이 원하는 바인 '''병조판서'''의 꿈을 이루게 해주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하지만 길동은 병조판서 직에 머물지 않고 홀연히 떠나 율도국의 왕이 된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981&amp;quot; height=&amp;quot;552&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oiuNe8rl7xc&amp;quot; title=&amp;quot;홍길동전 줄거리 요약 | 100초 문학 | 학교를 떠난 이채움쌤&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amp;lt;ref&amp;gt;[학교를 떠난 채움쌤][홍길동전 줄거리 요약] [2023. 2. 9.]&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한글로 쓰여 있어 민중의 생각을 반영하고 독자층을 확보하였다.&lt;br /&gt;
&lt;br /&gt;
진보적이고 현실주의적인 경향을 보여준 소설이다.&lt;/div&gt;</summary>
		<author><name>Jinhyang</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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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홍길동전ᐧ༚̮ᐧ</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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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06-23T19:25:5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inhyang: &lt;/p&gt;
&lt;hr /&gt;
&lt;div&gt;==작가==&lt;br /&gt;
&lt;br /&gt;
[[파일:허균|섬네일|왼쪽]]&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 &amp;lt;허균&amp;gt;&lt;br /&gt;
| 호 || 백월거사&lt;br /&gt;
|-&lt;br /&gt;
| 자 || 단보&lt;br /&gt;
|-&lt;br /&gt;
| 본관 || 양천&lt;br /&gt;
|-&lt;br /&gt;
| 출생 || 1569년&lt;br /&gt;
|-&lt;br /&gt;
| 사망 || 1618년&lt;br /&gt;
|}&lt;br /&gt;
&lt;br /&gt;
==배경==&lt;br /&gt;
==내용==&lt;br /&gt;
==의의==&lt;/div&gt;</summary>
		<author><name>Jinhyang</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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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홍길동전ᐧ༚̮ᐧ</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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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06-23T19:19:3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inhyang: 새 문서: ==작가== ==배경== ==내용== ==의의==&lt;/p&gt;
&lt;hr /&gt;
&lt;div&gt;==작가==&lt;br /&gt;
==배경==&lt;br /&gt;
==내용==&lt;br /&gt;
==의의==&lt;/div&gt;</summary>
		<author><name>Jinhyang</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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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최척전ᐧ༚̮ᐧ</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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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06-23T19:18:4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inhyang: &lt;/p&gt;
&lt;hr /&gt;
&lt;div&gt;[[파일:임진왜란|섬네일]]&lt;br /&gt;
==작가==&lt;br /&gt;
===조위한===&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 자 || 지세&lt;br /&gt;
|-&lt;br /&gt;
| 호 || 현곡&lt;br /&gt;
|-&lt;br /&gt;
| 출생 || 1567(명종 22년)&lt;br /&gt;
|-&lt;br /&gt;
| 사망 || 1649(인조 27년)&lt;br /&gt;
|-&lt;br /&gt;
| 본관 || 한양&lt;br /&gt;
|-&lt;br /&gt;
| 관직 || 공조참판, 지중추부사&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종군하였고, 1609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주부, 감찰 등 관직 생활을 하다가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계축옥사'''&amp;lt;/font&amp;gt;에 연류되어 구금되었다. &lt;br /&gt;
&lt;br /&gt;
이후 인조반정으로 재등용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1624년 &amp;lt;font color=&amp;quot;#008000&amp;quot;&amp;gt;'''이괄의 난'''&amp;lt;/font&amp;gt; 토벌에 참여하여 수도를 지켰다. &lt;br /&gt;
&lt;br /&gt;
&lt;br /&gt;
정묘, 병자호란 때에도 출전하였으며, 난이 끝난 뒤 벼슬길에서 물러났지만 다시 등용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동부승지, 직제학을 지내고 &amp;lt;font color=&amp;quot;#B22222&amp;quot;&amp;gt;'''공조참판'''&amp;lt;/font&amp;gt;까지 벼슬이 올랐다. &lt;br /&gt;
&lt;br /&gt;
&lt;br /&gt;
80세에 자헌대부에 오르고, &amp;lt;font color=&amp;quot;#B22222&amp;quot;&amp;gt;'''지중추부사'''&amp;lt;/font&amp;gt;를 지내었다.&amp;lt;ref&amp;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위한」,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2465, 2025, 6, 24.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사건==&lt;br /&gt;
====임진왜란====&lt;br /&gt;
&lt;br /&gt;
[[파일:임진왜란|섬네일|왼쪽]]&amp;lt;ref&amp;gt; 유용하,「임진왜란 당시 조선군 ‘MOAB’(모든폭탄의 어머니) 사용했다」, 『서울신문』,2019, 11, 19, https://www.seoul.co.kr/news/society/science-news/2019/11/19/20191119500075, 2025, 6, 24, 접속.&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임진왜란'''은 일본이 조선과 &amp;lt;ins&amp;gt;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동안 싸운 장기 전투이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조선은 오랫동안 평화가 유지되었기에 임진왜란 전쟁은 조선 백성들에게 가장 큰 충격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임진왜란 이후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인구 감소, 민생 불안정, 토지 황폐화'''&amp;lt;/span&amp;gt; 등 여러 문제가 발생하였고 살기 힘들어졌다.&lt;br /&gt;
&lt;br /&gt;
또한 전쟁이 일어나면서 서로 각자도생을 하며 뿔뿔이 흩어졌고 이에 따라 가족을 생사를 알 수 없는 사람 또한 있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최척전은 임진왜란 등 전쟁을 배경으로 흩어진 가족들의 이별과 재회를 생생히 그려내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심하 전투====&lt;br /&gt;
&lt;br /&gt;
[[파일:심하 전투|섬네일|왼쪽]]&amp;lt;ref&amp;gt; 「[한국사 인물 탐험] 비범한 外交力의 光海君明과 後金의 충돌 속에 줄타기 외교로 胡亂 예방」, 『월간조선』, 2006, 10, 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print.asp?ctcd=&amp;amp;nNewsNumb=200610100025, 2025, 6, 24, 접속.&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심하전투'''는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1619년 명과 조선의 연합군이 누르하치의 후금군에게 패한 사건을 말한다.&amp;lt;/span&amp;gt; &lt;br /&gt;
&lt;br /&gt;
&lt;br /&gt;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의 국력이 쇠약해진 틈을 타 북방의 여진족은 세력을 규합하여 국가를 세울 정도가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ins&amp;gt;누르하치가 여진 세력을 통일하여 후금을 세우고, 독립국을 선포하였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누르하치는 명에게 일곱 가지 큰 원한이라는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칠종뇌한'''&amp;lt;/font&amp;gt;을 내세워 명에게 선전포고를 하였고 후금과 명은 전쟁을 시작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명나라는 &amp;lt;font color=&amp;quot;#FFD700&amp;quot;&amp;gt;'''재조지은'''&amp;lt;/font&amp;gt;이라는 명분으로 조선에게 원군 파병을 요청하였다. &lt;br /&gt;
조선 또한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도와준 은혜를 생각하여 당연히 파병을 하려고 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단, 임금인 광해군이 당시 정세가 명나라는 쇠약해지고 청나라가 득세하고 있는 판이라, 강홍립 장군을 파병하여 상황을 보고 적절하게 대처하도록 지시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심하전투에서 청나라의 승리는 우세했고, 이후 청나라가 항복을 종용하자 &amp;lt;ins&amp;gt;'''강홍립은 항복'''&amp;lt;/ins&amp;gt;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파견된 조선군인들은 모두 '''청나라의 포로'''가 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lt;br /&gt;
남원에 사는 최척이 옥영(玉英)을 사랑하여 약혼을 한다. &lt;br /&gt;
&lt;br /&gt;
그러나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임진왜란'''&amp;lt;/font&amp;gt;이 일어나고 최척이 징발되어 전쟁에 나가게 된다. &lt;br /&gt;
&lt;br /&gt;
&lt;br /&gt;
이에 옥영의 부모는 이웃의 양생을 사위로 맞이하려고 하였으나, 이 사실을 알게 된 최척이 돌아와 옥영과 혼인을 하고 첫째 아들 몽석을 낳는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정유재란'''&amp;lt;/font&amp;gt;이 발발하고 남원이 함락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ins&amp;gt;옥영은 왜병의 포로가 되어 끌려가고, 최척은 명장인 여유문을 따라 중국으로 갔으며 아들인 몽석 또한 흩어져 자취를 알 수 없게 되었다.&amp;lt;/ins&amp;gt; &lt;br /&gt;
&lt;br /&gt;
&lt;br /&gt;
옥영은 남장을 하고 여러 지역을 떠돌다 '''&amp;lt;font color=&amp;quot;#4169E1&amp;quot;&amp;gt;안남(베트남)'''&amp;lt;/font&amp;gt;으로 오게 되었다. &lt;br /&gt;
최척 또한 상선을 타고 &amp;lt;font color=&amp;quot;#4169E1&amp;quot;&amp;gt;'''안남(베트남)'''&amp;lt;/font&amp;gt;에 왔고, 최척과 옥영은 기적적으로 만나게 된다. &lt;br /&gt;
&lt;br /&gt;
&lt;br /&gt;
이들은 각자의 동료와 이별을 고한 뒤, &amp;lt;font color=&amp;quot;#4169E1&amp;quot;&amp;gt;'''중국'''&amp;lt;/font&amp;gt;으로 건너가 아들 '''몽선'''을 낳는다. &lt;br /&gt;
몽선이 장성하여 임진왜란 때 조선에 출전한 '''진위경'''의 딸 홍도와 결혼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최척은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사르후 전투'''&amp;lt;/font&amp;gt;에서 명군으로 출전하였다가 청군의 포로가 되어 수용소에 갖힌다.&lt;br /&gt;
&lt;br /&gt;
그러다 우연히 조선에서 강홍립을 따라 파병되었다가 항복하여 포로가 된 &amp;lt;ins&amp;gt;첫째 아들 '''몽석'''과 극적으로 만나게 된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최척과 몽석은 수용소를 탈출하여 고향으로 향했는데, 중간에 최척이 심하게 아팠다. &lt;br /&gt;
&lt;br /&gt;
같은 배를 탄 사람 중 의술에 능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도움으로 최척이 씻은 듯이 낫게 되었다.&lt;br /&gt;
&lt;br /&gt;
몽석과 최척은 의원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amp;lt;ins&amp;gt;그가 최척의 이웃이자 둘째 아들 몽선의 장인, '''진위경'''인 것을 알게 된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이후 최척과 몽석, 진위경은 무사히 집에 도착했고 헤어진 가족들은 모두 재회를 하게 된다.&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981&amp;quot; height=&amp;quot;552&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3N6DoC16I7A&amp;quot; title=&amp;quot;최척전의  전체 줄거리를 10분의 문학으로 만나보세요!🍋&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amp;lt;ref&amp;gt; [10분의 문학] [최척전의 전체 줄거리를 10분의 문학으로 만나보세요!🍋] [2020.9.7.]&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실제 일어난 사건'''을 기반으로 하여, 가족의 이별과 재회를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최척전을 기점으로 하여 이전 시기 고전 소설에서 도외시되었던 &amp;lt;font color=&amp;quot;#006400&amp;quot;&amp;gt;'''역사성'''&amp;lt;/font&amp;gt;과 &amp;lt;font color=&amp;quot;#006400&amp;quot;&amp;gt;'''지리 감각'''&amp;lt;/font&amp;gt;이 사실적으로 표현되기 시작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포로가 된 주인공의 행적을 중심으로 하는 '피로 문학'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가능성을 열었다. &amp;lt;ref&amp;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최척전」,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7689, 2025, 6, 24.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전쟁으로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진 백성들의 마음을 대변하여 &amp;lt;font color=&amp;quot;#4169E1&amp;quot;&amp;gt;'''가족 회복에 대한 이상'''&amp;lt;/font&amp;gt;이 잘 드러나 있다.&lt;/div&gt;</summary>
		<author><name>Jinhyang</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B5%9C%EC%B2%99%EC%A0%84%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607</id>
		<title>최척전ᐧ༚̮ᐧ</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B5%9C%EC%B2%99%EC%A0%84%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607"/>
		<updated>2025-06-23T19:16:5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inhyang: &lt;/p&gt;
&lt;hr /&gt;
&lt;div&gt;==작가==&lt;br /&gt;
===조위한===&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 자 || 지세&lt;br /&gt;
|-&lt;br /&gt;
| 호 || 현곡&lt;br /&gt;
|-&lt;br /&gt;
| 출생 || 1567(명종 22년)&lt;br /&gt;
|-&lt;br /&gt;
| 사망 || 1649(인조 27년)&lt;br /&gt;
|-&lt;br /&gt;
| 본관 || 한양&lt;br /&gt;
|-&lt;br /&gt;
| 관직 || 공조참판, 지중추부사&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종군하였고, 1609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주부, 감찰 등 관직 생활을 하다가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계축옥사'''&amp;lt;/font&amp;gt;에 연류되어 구금되었다. &lt;br /&gt;
&lt;br /&gt;
이후 인조반정으로 재등용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1624년 &amp;lt;font color=&amp;quot;#008000&amp;quot;&amp;gt;'''이괄의 난'''&amp;lt;/font&amp;gt; 토벌에 참여하여 수도를 지켰다. &lt;br /&gt;
&lt;br /&gt;
&lt;br /&gt;
정묘, 병자호란 때에도 출전하였으며, 난이 끝난 뒤 벼슬길에서 물러났지만 다시 등용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동부승지, 직제학을 지내고 &amp;lt;font color=&amp;quot;#B22222&amp;quot;&amp;gt;'''공조참판'''&amp;lt;/font&amp;gt;까지 벼슬이 올랐다. &lt;br /&gt;
&lt;br /&gt;
&lt;br /&gt;
80세에 자헌대부에 오르고, &amp;lt;font color=&amp;quot;#B22222&amp;quot;&amp;gt;'''지중추부사'''&amp;lt;/font&amp;gt;를 지내었다.&amp;lt;ref&amp;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위한」,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2465, 2025, 6, 24.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사건==&lt;br /&gt;
====임진왜란====&lt;br /&gt;
&lt;br /&gt;
[[파일:임진왜란|섬네일|왼쪽]]&amp;lt;ref&amp;gt; 유용하,「임진왜란 당시 조선군 ‘MOAB’(모든폭탄의 어머니) 사용했다」, 『서울신문』,2019, 11, 19, https://www.seoul.co.kr/news/society/science-news/2019/11/19/20191119500075, 2025, 6, 24, 접속.&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임진왜란'''은 일본이 조선과 &amp;lt;ins&amp;gt;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동안 싸운 장기 전투이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조선은 오랫동안 평화가 유지되었기에 임진왜란 전쟁은 조선 백성들에게 가장 큰 충격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임진왜란 이후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인구 감소, 민생 불안정, 토지 황폐화'''&amp;lt;/span&amp;gt; 등 여러 문제가 발생하였고 살기 힘들어졌다.&lt;br /&gt;
&lt;br /&gt;
또한 전쟁이 일어나면서 서로 각자도생을 하며 뿔뿔이 흩어졌고 이에 따라 가족을 생사를 알 수 없는 사람 또한 있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최척전은 임진왜란 등 전쟁을 배경으로 흩어진 가족들의 이별과 재회를 생생히 그려내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심하 전투====&lt;br /&gt;
&lt;br /&gt;
[[파일:심하 전투|섬네일|왼쪽]]&amp;lt;ref&amp;gt; 「[한국사 인물 탐험] 비범한 外交力의 光海君明과 後金의 충돌 속에 줄타기 외교로 胡亂 예방」, 『월간조선』, 2006, 10, 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print.asp?ctcd=&amp;amp;nNewsNumb=200610100025, 2025, 6, 24, 접속.&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심하전투'''는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1619년 명과 조선의 연합군이 누르하치의 후금군에게 패한 사건을 말한다.&amp;lt;/span&amp;gt; &lt;br /&gt;
&lt;br /&gt;
&lt;br /&gt;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의 국력이 쇠약해진 틈을 타 북방의 여진족은 세력을 규합하여 국가를 세울 정도가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ins&amp;gt;누르하치가 여진 세력을 통일하여 후금을 세우고, 독립국을 선포하였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누르하치는 명에게 일곱 가지 큰 원한이라는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칠종뇌한'''&amp;lt;/font&amp;gt;을 내세워 명에게 선전포고를 하였고 후금과 명은 전쟁을 시작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명나라는 &amp;lt;font color=&amp;quot;#FFD700&amp;quot;&amp;gt;'''재조지은'''&amp;lt;/font&amp;gt;이라는 명분으로 조선에게 원군 파병을 요청하였다. &lt;br /&gt;
조선 또한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도와준 은혜를 생각하여 당연히 파병을 하려고 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단, 임금인 광해군이 당시 정세가 명나라는 쇠약해지고 청나라가 득세하고 있는 판이라, 강홍립 장군을 파병하여 상황을 보고 적절하게 대처하도록 지시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심하전투에서 청나라의 승리는 우세했고, 이후 청나라가 항복을 종용하자 &amp;lt;ins&amp;gt;'''강홍립은 항복'''&amp;lt;/ins&amp;gt;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파견된 조선군인들은 모두 '''청나라의 포로'''가 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lt;br /&gt;
남원에 사는 최척이 옥영(玉英)을 사랑하여 약혼을 한다. &lt;br /&gt;
&lt;br /&gt;
그러나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임진왜란'''&amp;lt;/font&amp;gt;이 일어나고 최척이 징발되어 전쟁에 나가게 된다. &lt;br /&gt;
&lt;br /&gt;
&lt;br /&gt;
이에 옥영의 부모는 이웃의 양생을 사위로 맞이하려고 하였으나, 이 사실을 알게 된 최척이 돌아와 옥영과 혼인을 하고 첫째 아들 몽석을 낳는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정유재란'''&amp;lt;/font&amp;gt;이 발발하고 남원이 함락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ins&amp;gt;옥영은 왜병의 포로가 되어 끌려가고, 최척은 명장인 여유문을 따라 중국으로 갔으며 아들인 몽석 또한 흩어져 자취를 알 수 없게 되었다.&amp;lt;/ins&amp;gt; &lt;br /&gt;
&lt;br /&gt;
&lt;br /&gt;
옥영은 남장을 하고 여러 지역을 떠돌다 '''&amp;lt;font color=&amp;quot;#4169E1&amp;quot;&amp;gt;안남(베트남)'''&amp;lt;/font&amp;gt;으로 오게 되었다. &lt;br /&gt;
최척 또한 상선을 타고 &amp;lt;font color=&amp;quot;#4169E1&amp;quot;&amp;gt;'''안남(베트남)'''&amp;lt;/font&amp;gt;에 왔고, 최척과 옥영은 기적적으로 만나게 된다. &lt;br /&gt;
&lt;br /&gt;
&lt;br /&gt;
이들은 각자의 동료와 이별을 고한 뒤, &amp;lt;font color=&amp;quot;#4169E1&amp;quot;&amp;gt;'''중국'''&amp;lt;/font&amp;gt;으로 건너가 아들 '''몽선'''을 낳는다. &lt;br /&gt;
몽선이 장성하여 임진왜란 때 조선에 출전한 '''진위경'''의 딸 홍도와 결혼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최척은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사르후 전투'''&amp;lt;/font&amp;gt;에서 명군으로 출전하였다가 청군의 포로가 되어 수용소에 갖힌다.&lt;br /&gt;
&lt;br /&gt;
그러다 우연히 조선에서 강홍립을 따라 파병되었다가 항복하여 포로가 된 &amp;lt;ins&amp;gt;첫째 아들 '''몽석'''과 극적으로 만나게 된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최척과 몽석은 수용소를 탈출하여 고향으로 향했는데, 중간에 최척이 심하게 아팠다. &lt;br /&gt;
&lt;br /&gt;
같은 배를 탄 사람 중 의술에 능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도움으로 최척이 씻은 듯이 낫게 되었다.&lt;br /&gt;
&lt;br /&gt;
몽석과 최척은 의원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amp;lt;ins&amp;gt;그가 최척의 이웃이자 둘째 아들 몽선의 장인, '''진위경'''인 것을 알게 된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이후 최척과 몽석, 진위경은 무사히 집에 도착했고 헤어진 가족들은 모두 재회를 하게 된다.&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981&amp;quot; height=&amp;quot;552&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3N6DoC16I7A&amp;quot; title=&amp;quot;최척전의  전체 줄거리를 10분의 문학으로 만나보세요!🍋&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amp;lt;ref&amp;gt; [10분의 문학] [최척전의 전체 줄거리를 10분의 문학으로 만나보세요!🍋] [2020.9.7.]&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실제 일어난 사건'''을 기반으로 하여, 가족의 이별과 재회를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최척전을 기점으로 하여 이전 시기 고전 소설에서 도외시되었던 &amp;lt;font color=&amp;quot;#006400&amp;quot;&amp;gt;'''역사성'''&amp;lt;/font&amp;gt;과 &amp;lt;font color=&amp;quot;#006400&amp;quot;&amp;gt;'''지리 감각'''&amp;lt;/font&amp;gt;이 사실적으로 표현되기 시작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포로가 된 주인공의 행적을 중심으로 하는 '피로 문학'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가능성을 열었다. &amp;lt;ref&amp;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최척전」,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7689, 2025, 6, 24.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전쟁으로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진 백성들의 마음을 대변하여 &amp;lt;font color=&amp;quot;#4169E1&amp;quot;&amp;gt;'''가족 회복에 대한 이상'''&amp;lt;/font&amp;gt;이 잘 드러나 있다.&lt;/div&gt;</summary>
		<author><name>Jinhyang</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B5%9C%EC%B2%99%EC%A0%84%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606</id>
		<title>최척전ᐧ༚̮ᐧ</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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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06-23T19:16:2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inhyang: &lt;/p&gt;
&lt;hr /&gt;
&lt;div&gt;==작가==&lt;br /&gt;
===조위한===&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 자 || 지세&lt;br /&gt;
|-&lt;br /&gt;
| 호 || 현곡&lt;br /&gt;
|-&lt;br /&gt;
| 출생 || 1567(명종 22년)&lt;br /&gt;
|-&lt;br /&gt;
| 사망 || 1649(인조 27년)&lt;br /&gt;
|-&lt;br /&gt;
| 본관 || 한양&lt;br /&gt;
|-&lt;br /&gt;
| 관직 || 공조참판, 지중추부사&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종군하였고, 1609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주부, 감찰 등 관직 생활을 하다가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계축옥사'''&amp;lt;/font&amp;gt;에 연류되어 구금되었다. &lt;br /&gt;
&lt;br /&gt;
이후 인조반정으로 재등용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1624년 &amp;lt;font color=&amp;quot;#008000&amp;quot;&amp;gt;'''이괄의 난'''&amp;lt;/font&amp;gt; 토벌에 참여하여 수도를 지켰다. &lt;br /&gt;
&lt;br /&gt;
&lt;br /&gt;
정묘, 병자호란 때에도 출전하였으며, 난이 끝난 뒤 벼슬길에서 물러났지만 다시 등용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동부승지, 직제학을 지내고 &amp;lt;font color=&amp;quot;#B22222&amp;quot;&amp;gt;'''공조참판'''&amp;lt;/font&amp;gt;까지 벼슬이 올랐다. &lt;br /&gt;
&lt;br /&gt;
&lt;br /&gt;
80세에 자헌대부에 오르고, &amp;lt;font color=&amp;quot;#B22222&amp;quot;&amp;gt;'''지중추부사'''&amp;lt;/font&amp;gt;를 지내었다.&amp;lt;ref&amp;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위한」,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2465, 2025, 6, 24.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사건==&lt;br /&gt;
====임진왜란====&lt;br /&gt;
&lt;br /&gt;
[[파일:임진왜란. jpg|섬네일|왼쪽]]&amp;lt;ref&amp;gt; 유용하,「임진왜란 당시 조선군 ‘MOAB’(모든폭탄의 어머니) 사용했다」, 『서울신문』,2019, 11, 19, https://www.seoul.co.kr/news/society/science-news/2019/11/19/20191119500075, 2025, 6, 24, 접속.&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임진왜란'''은 일본이 조선과 &amp;lt;ins&amp;gt;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동안 싸운 장기 전투이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조선은 오랫동안 평화가 유지되었기에 임진왜란 전쟁은 조선 백성들에게 가장 큰 충격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임진왜란 이후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인구 감소, 민생 불안정, 토지 황폐화'''&amp;lt;/span&amp;gt; 등 여러 문제가 발생하였고 살기 힘들어졌다.&lt;br /&gt;
&lt;br /&gt;
또한 전쟁이 일어나면서 서로 각자도생을 하며 뿔뿔이 흩어졌고 이에 따라 가족을 생사를 알 수 없는 사람 또한 있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최척전은 임진왜란 등 전쟁을 배경으로 흩어진 가족들의 이별과 재회를 생생히 그려내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심하 전투====&lt;br /&gt;
&lt;br /&gt;
[[파일:심하 전투|섬네일|왼쪽]]&amp;lt;ref&amp;gt; 「[한국사 인물 탐험] 비범한 外交力의 光海君明과 後金의 충돌 속에 줄타기 외교로 胡亂 예방」, 『월간조선』, 2006, 10, 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print.asp?ctcd=&amp;amp;nNewsNumb=200610100025, 2025, 6, 24, 접속.&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심하전투'''는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1619년 명과 조선의 연합군이 누르하치의 후금군에게 패한 사건을 말한다.&amp;lt;/span&amp;gt; &lt;br /&gt;
&lt;br /&gt;
&lt;br /&gt;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의 국력이 쇠약해진 틈을 타 북방의 여진족은 세력을 규합하여 국가를 세울 정도가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ins&amp;gt;누르하치가 여진 세력을 통일하여 후금을 세우고, 독립국을 선포하였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누르하치는 명에게 일곱 가지 큰 원한이라는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칠종뇌한'''&amp;lt;/font&amp;gt;을 내세워 명에게 선전포고를 하였고 후금과 명은 전쟁을 시작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명나라는 &amp;lt;font color=&amp;quot;#FFD700&amp;quot;&amp;gt;'''재조지은'''&amp;lt;/font&amp;gt;이라는 명분으로 조선에게 원군 파병을 요청하였다. &lt;br /&gt;
조선 또한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도와준 은혜를 생각하여 당연히 파병을 하려고 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단, 임금인 광해군이 당시 정세가 명나라는 쇠약해지고 청나라가 득세하고 있는 판이라, 강홍립 장군을 파병하여 상황을 보고 적절하게 대처하도록 지시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심하전투에서 청나라의 승리는 우세했고, 이후 청나라가 항복을 종용하자 &amp;lt;ins&amp;gt;'''강홍립은 항복'''&amp;lt;/ins&amp;gt;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파견된 조선군인들은 모두 '''청나라의 포로'''가 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lt;br /&gt;
남원에 사는 최척이 옥영(玉英)을 사랑하여 약혼을 한다. &lt;br /&gt;
&lt;br /&gt;
그러나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임진왜란'''&amp;lt;/font&amp;gt;이 일어나고 최척이 징발되어 전쟁에 나가게 된다. &lt;br /&gt;
&lt;br /&gt;
&lt;br /&gt;
이에 옥영의 부모는 이웃의 양생을 사위로 맞이하려고 하였으나, 이 사실을 알게 된 최척이 돌아와 옥영과 혼인을 하고 첫째 아들 몽석을 낳는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정유재란'''&amp;lt;/font&amp;gt;이 발발하고 남원이 함락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ins&amp;gt;옥영은 왜병의 포로가 되어 끌려가고, 최척은 명장인 여유문을 따라 중국으로 갔으며 아들인 몽석 또한 흩어져 자취를 알 수 없게 되었다.&amp;lt;/ins&amp;gt; &lt;br /&gt;
&lt;br /&gt;
&lt;br /&gt;
옥영은 남장을 하고 여러 지역을 떠돌다 '''&amp;lt;font color=&amp;quot;#4169E1&amp;quot;&amp;gt;안남(베트남)'''&amp;lt;/font&amp;gt;으로 오게 되었다. &lt;br /&gt;
최척 또한 상선을 타고 &amp;lt;font color=&amp;quot;#4169E1&amp;quot;&amp;gt;'''안남(베트남)'''&amp;lt;/font&amp;gt;에 왔고, 최척과 옥영은 기적적으로 만나게 된다. &lt;br /&gt;
&lt;br /&gt;
&lt;br /&gt;
이들은 각자의 동료와 이별을 고한 뒤, &amp;lt;font color=&amp;quot;#4169E1&amp;quot;&amp;gt;'''중국'''&amp;lt;/font&amp;gt;으로 건너가 아들 '''몽선'''을 낳는다. &lt;br /&gt;
몽선이 장성하여 임진왜란 때 조선에 출전한 '''진위경'''의 딸 홍도와 결혼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최척은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사르후 전투'''&amp;lt;/font&amp;gt;에서 명군으로 출전하였다가 청군의 포로가 되어 수용소에 갖힌다.&lt;br /&gt;
&lt;br /&gt;
그러다 우연히 조선에서 강홍립을 따라 파병되었다가 항복하여 포로가 된 &amp;lt;ins&amp;gt;첫째 아들 '''몽석'''과 극적으로 만나게 된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최척과 몽석은 수용소를 탈출하여 고향으로 향했는데, 중간에 최척이 심하게 아팠다. &lt;br /&gt;
&lt;br /&gt;
같은 배를 탄 사람 중 의술에 능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도움으로 최척이 씻은 듯이 낫게 되었다.&lt;br /&gt;
&lt;br /&gt;
몽석과 최척은 의원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amp;lt;ins&amp;gt;그가 최척의 이웃이자 둘째 아들 몽선의 장인, '''진위경'''인 것을 알게 된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이후 최척과 몽석, 진위경은 무사히 집에 도착했고 헤어진 가족들은 모두 재회를 하게 된다.&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981&amp;quot; height=&amp;quot;552&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3N6DoC16I7A&amp;quot; title=&amp;quot;최척전의  전체 줄거리를 10분의 문학으로 만나보세요!🍋&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amp;lt;ref&amp;gt; [10분의 문학] [최척전의 전체 줄거리를 10분의 문학으로 만나보세요!🍋] [2020.9.7.]&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실제 일어난 사건'''을 기반으로 하여, 가족의 이별과 재회를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최척전을 기점으로 하여 이전 시기 고전 소설에서 도외시되었던 &amp;lt;font color=&amp;quot;#006400&amp;quot;&amp;gt;'''역사성'''&amp;lt;/font&amp;gt;과 &amp;lt;font color=&amp;quot;#006400&amp;quot;&amp;gt;'''지리 감각'''&amp;lt;/font&amp;gt;이 사실적으로 표현되기 시작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포로가 된 주인공의 행적을 중심으로 하는 '피로 문학'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가능성을 열었다. &amp;lt;ref&amp;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최척전」,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7689, 2025, 6, 24.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전쟁으로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진 백성들의 마음을 대변하여 &amp;lt;font color=&amp;quot;#4169E1&amp;quot;&amp;gt;'''가족 회복에 대한 이상'''&amp;lt;/font&amp;gt;이 잘 드러나 있다.&lt;/div&gt;</summary>
		<author><name>Jinhyang</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B5%9C%EC%B2%99%EC%A0%84%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605</id>
		<title>최척전ᐧ༚̮ᐧ</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B5%9C%EC%B2%99%EC%A0%84%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605"/>
		<updated>2025-06-23T19:15:2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inhyang: &lt;/p&gt;
&lt;hr /&gt;
&lt;div&gt;==작가==&lt;br /&gt;
===조위한===&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 자 || 지세&lt;br /&gt;
|-&lt;br /&gt;
| 호 || 현곡&lt;br /&gt;
|-&lt;br /&gt;
| 출생 || 1567(명종 22년)&lt;br /&gt;
|-&lt;br /&gt;
| 사망 || 1649(인조 27년)&lt;br /&gt;
|-&lt;br /&gt;
| 본관 || 한양&lt;br /&gt;
|-&lt;br /&gt;
| 관직 || 공조참판, 지중추부사&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종군하였고, 1609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주부, 감찰 등 관직 생활을 하다가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계축옥사'''&amp;lt;/font&amp;gt;에 연류되어 구금되었다. &lt;br /&gt;
&lt;br /&gt;
이후 인조반정으로 재등용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1624년 &amp;lt;font color=&amp;quot;#008000&amp;quot;&amp;gt;'''이괄의 난'''&amp;lt;/font&amp;gt; 토벌에 참여하여 수도를 지켰다. &lt;br /&gt;
&lt;br /&gt;
&lt;br /&gt;
정묘, 병자호란 때에도 출전하였으며, 난이 끝난 뒤 벼슬길에서 물러났지만 다시 등용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동부승지, 직제학을 지내고 &amp;lt;font color=&amp;quot;#B22222&amp;quot;&amp;gt;'''공조참판'''&amp;lt;/font&amp;gt;까지 벼슬이 올랐다. &lt;br /&gt;
&lt;br /&gt;
&lt;br /&gt;
80세에 자헌대부에 오르고, &amp;lt;font color=&amp;quot;#B22222&amp;quot;&amp;gt;'''지중추부사'''&amp;lt;/font&amp;gt;를 지내었다.&amp;lt;ref&amp;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위한」,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2465, 2025, 6, 24.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사건==&lt;br /&gt;
====임진왜란====&lt;br /&gt;
&lt;br /&gt;
[[파일:임진왜란|섬네일|왼쪽]]&amp;lt;ref&amp;gt; 유용하,「임진왜란 당시 조선군 ‘MOAB’(모든폭탄의 어머니) 사용했다」, 『서울신문』,2019, 11, 19, https://www.seoul.co.kr/news/society/science-news/2019/11/19/20191119500075, 2025, 6, 24, 접속.&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임진왜란'''은 일본이 조선과 &amp;lt;ins&amp;gt;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동안 싸운 장기 전투이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조선은 오랫동안 평화가 유지되었기에 임진왜란 전쟁은 조선 백성들에게 가장 큰 충격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임진왜란 이후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인구 감소, 민생 불안정, 토지 황폐화'''&amp;lt;/span&amp;gt; 등 여러 문제가 발생하였고 살기 힘들어졌다.&lt;br /&gt;
&lt;br /&gt;
또한 전쟁이 일어나면서 서로 각자도생을 하며 뿔뿔이 흩어졌고 이에 따라 가족을 생사를 알 수 없는 사람 또한 있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최척전은 임진왜란 등 전쟁을 배경으로 흩어진 가족들의 이별과 재회를 생생히 그려내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심하 전투====&lt;br /&gt;
&lt;br /&gt;
[[파일:심하 전투|섬네일|왼쪽]]&amp;lt;ref&amp;gt; 「[한국사 인물 탐험] 비범한 外交力의 光海君明과 後金의 충돌 속에 줄타기 외교로 胡亂 예방」, 『월간조선』, 2006, 10, 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print.asp?ctcd=&amp;amp;nNewsNumb=200610100025, 2025, 6, 24, 접속.&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심하전투'''는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1619년 명과 조선의 연합군이 누르하치의 후금군에게 패한 사건을 말한다.&amp;lt;/span&amp;gt; &lt;br /&gt;
&lt;br /&gt;
&lt;br /&gt;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의 국력이 쇠약해진 틈을 타 북방의 여진족은 세력을 규합하여 국가를 세울 정도가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ins&amp;gt;누르하치가 여진 세력을 통일하여 후금을 세우고, 독립국을 선포하였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누르하치는 명에게 일곱 가지 큰 원한이라는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칠종뇌한'''&amp;lt;/font&amp;gt;을 내세워 명에게 선전포고를 하였고 후금과 명은 전쟁을 시작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명나라는 &amp;lt;font color=&amp;quot;#FFD700&amp;quot;&amp;gt;'''재조지은'''&amp;lt;/font&amp;gt;이라는 명분으로 조선에게 원군 파병을 요청하였다. &lt;br /&gt;
조선 또한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도와준 은혜를 생각하여 당연히 파병을 하려고 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단, 임금인 광해군이 당시 정세가 명나라는 쇠약해지고 청나라가 득세하고 있는 판이라, 강홍립 장군을 파병하여 상황을 보고 적절하게 대처하도록 지시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심하전투에서 청나라의 승리는 우세했고, 이후 청나라가 항복을 종용하자 &amp;lt;ins&amp;gt;'''강홍립은 항복'''&amp;lt;/ins&amp;gt;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파견된 조선군인들은 모두 '''청나라의 포로'''가 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lt;br /&gt;
남원에 사는 최척이 옥영(玉英)을 사랑하여 약혼을 한다. &lt;br /&gt;
&lt;br /&gt;
그러나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임진왜란'''&amp;lt;/font&amp;gt;이 일어나고 최척이 징발되어 전쟁에 나가게 된다. &lt;br /&gt;
&lt;br /&gt;
&lt;br /&gt;
이에 옥영의 부모는 이웃의 양생을 사위로 맞이하려고 하였으나, 이 사실을 알게 된 최척이 돌아와 옥영과 혼인을 하고 첫째 아들 몽석을 낳는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정유재란'''&amp;lt;/font&amp;gt;이 발발하고 남원이 함락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ins&amp;gt;옥영은 왜병의 포로가 되어 끌려가고, 최척은 명장인 여유문을 따라 중국으로 갔으며 아들인 몽석 또한 흩어져 자취를 알 수 없게 되었다.&amp;lt;/ins&amp;gt; &lt;br /&gt;
&lt;br /&gt;
&lt;br /&gt;
옥영은 남장을 하고 여러 지역을 떠돌다 '''&amp;lt;font color=&amp;quot;#4169E1&amp;quot;&amp;gt;안남(베트남)'''&amp;lt;/font&amp;gt;으로 오게 되었다. &lt;br /&gt;
최척 또한 상선을 타고 &amp;lt;font color=&amp;quot;#4169E1&amp;quot;&amp;gt;'''안남(베트남)'''&amp;lt;/font&amp;gt;에 왔고, 최척과 옥영은 기적적으로 만나게 된다. &lt;br /&gt;
&lt;br /&gt;
&lt;br /&gt;
이들은 각자의 동료와 이별을 고한 뒤, &amp;lt;font color=&amp;quot;#4169E1&amp;quot;&amp;gt;'''중국'''&amp;lt;/font&amp;gt;으로 건너가 아들 '''몽선'''을 낳는다. &lt;br /&gt;
몽선이 장성하여 임진왜란 때 조선에 출전한 '''진위경'''의 딸 홍도와 결혼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최척은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사르후 전투'''&amp;lt;/font&amp;gt;에서 명군으로 출전하였다가 청군의 포로가 되어 수용소에 갖힌다.&lt;br /&gt;
&lt;br /&gt;
그러다 우연히 조선에서 강홍립을 따라 파병되었다가 항복하여 포로가 된 &amp;lt;ins&amp;gt;첫째 아들 '''몽석'''과 극적으로 만나게 된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최척과 몽석은 수용소를 탈출하여 고향으로 향했는데, 중간에 최척이 심하게 아팠다. &lt;br /&gt;
&lt;br /&gt;
같은 배를 탄 사람 중 의술에 능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도움으로 최척이 씻은 듯이 낫게 되었다.&lt;br /&gt;
&lt;br /&gt;
몽석과 최척은 의원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amp;lt;ins&amp;gt;그가 최척의 이웃이자 둘째 아들 몽선의 장인, '''진위경'''인 것을 알게 된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이후 최척과 몽석, 진위경은 무사히 집에 도착했고 헤어진 가족들은 모두 재회를 하게 된다.&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981&amp;quot; height=&amp;quot;552&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3N6DoC16I7A&amp;quot; title=&amp;quot;최척전의  전체 줄거리를 10분의 문학으로 만나보세요!🍋&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amp;lt;ref&amp;gt; [10분의 문학] [최척전의 전체 줄거리를 10분의 문학으로 만나보세요!🍋] [2020.9.7.]&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실제 일어난 사건'''을 기반으로 하여, 가족의 이별과 재회를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최척전을 기점으로 하여 이전 시기 고전 소설에서 도외시되었던 &amp;lt;font color=&amp;quot;#006400&amp;quot;&amp;gt;'''역사성'''&amp;lt;/font&amp;gt;과 &amp;lt;font color=&amp;quot;#006400&amp;quot;&amp;gt;'''지리 감각'''&amp;lt;/font&amp;gt;이 사실적으로 표현되기 시작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포로가 된 주인공의 행적을 중심으로 하는 '피로 문학'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가능성을 열었다. &amp;lt;ref&amp;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최척전」,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7689, 2025, 6, 24.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전쟁으로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진 백성들의 마음을 대변하여 &amp;lt;font color=&amp;quot;#4169E1&amp;quot;&amp;gt;'''가족 회복에 대한 이상'''&amp;lt;/font&amp;gt;이 잘 드러나 있다.&lt;/div&gt;</summary>
		<author><name>Jinhyang</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B5%9C%EC%B2%99%EC%A0%84%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600</id>
		<title>최척전ᐧ༚̮ᐧ</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B5%9C%EC%B2%99%EC%A0%84%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600"/>
		<updated>2025-06-23T19:13:1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inhyang: &lt;/p&gt;
&lt;hr /&gt;
&lt;div&gt;==작가==&lt;br /&gt;
===조위한===&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 자 || 지세&lt;br /&gt;
|-&lt;br /&gt;
| 호 || 현곡&lt;br /&gt;
|-&lt;br /&gt;
| 출생 || 1567(명종 22년)&lt;br /&gt;
|-&lt;br /&gt;
| 사망 || 1649(인조 27년)&lt;br /&gt;
|-&lt;br /&gt;
| 본관 || 한양&lt;br /&gt;
|-&lt;br /&gt;
| 관직 || 공조참판, 지중추부사&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종군하였고, 1609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주부, 감찰 등 관직 생활을 하다가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계축옥사'''&amp;lt;/font&amp;gt;에 연류되어 구금되었다. &lt;br /&gt;
&lt;br /&gt;
이후 인조반정으로 재등용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1624년 &amp;lt;font color=&amp;quot;#008000&amp;quot;&amp;gt;'''이괄의 난'''&amp;lt;/font&amp;gt; 토벌에 참여하여 수도를 지켰다. &lt;br /&gt;
&lt;br /&gt;
&lt;br /&gt;
정묘, 병자호란 때에도 출전하였으며, 난이 끝난 뒤 벼슬길에서 물러났지만 다시 등용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동부승지, 직제학을 지내고 &amp;lt;font color=&amp;quot;#B22222&amp;quot;&amp;gt;'''공조참판'''&amp;lt;/font&amp;gt;까지 벼슬이 올랐다. &lt;br /&gt;
&lt;br /&gt;
&lt;br /&gt;
80세에 자헌대부에 오르고, &amp;lt;font color=&amp;quot;#B22222&amp;quot;&amp;gt;'''지중추부사'''&amp;lt;/font&amp;gt;를 지내었다.&amp;lt;ref&amp;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위한」,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2465, 2025, 6, 24.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사건==&lt;br /&gt;
====임진왜란====&lt;br /&gt;
&lt;br /&gt;
[[파일:임진왜란|섬네일|왼쪽]]&amp;lt;ref&amp;gt; 유용하,「임진왜란 당시 조선군 ‘MOAB’(모든폭탄의 어머니) 사용했다」, 『서울신문』,2019, 11, 19, https://www.seoul.co.kr/news/society/science-news/2019/11/19/20191119500075, 2025, 6, 24, 접속.&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임진왜란'''은 일본이 조선과 &amp;lt;ins&amp;gt;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동안 싸운 장기 전투이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조선은 오랫동안 평화가 유지되었기에 임진왜란 전쟁은 조선 백성들에게 가장 큰 충격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임진왜란 이후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인구 감소, 민생 불안정, 토지 황폐화'''&amp;lt;/span&amp;gt; 등 여러 문제가 발생하였고 살기 힘들어졌다.&lt;br /&gt;
&lt;br /&gt;
또한 전쟁이 일어나면서 서로 각자도생을 하며 뿔뿔이 흩어졌고 이에 따라 가족을 생사를 알 수 없는 사람 또한 있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최척전은 임진왜란 등 전쟁을 배경으로 흩어진 가족들의 이별과 재회를 생생히 그려내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심하 전투====&lt;br /&gt;
&lt;br /&gt;
[[파일:심하 전투|섬네일|왼쪽]]&amp;lt;ref&amp;gt; 「[한국사 인물 탐험] 비범한 外交力의 光海君明과 後金의 충돌 속에 줄타기 외교로 胡亂 예방」, 『월간조선』, 2006, 10, 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print.asp?ctcd=&amp;amp;nNewsNumb=200610100025, 2025, 6, 24, 접속.&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심하전투'''는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1619년 명과 조선의 연합군이 누르하치의 후금군에게 패한 사건을 말한다.&amp;lt;/span&amp;gt; &lt;br /&gt;
&lt;br /&gt;
&lt;br /&gt;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의 국력이 쇠약해진 틈을 타 북방의 여진족은 세력을 규합하여 국가를 세울 정도가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ins&amp;gt;누르하치가 여진 세력을 통일하여 후금을 세우고, 독립국을 선포하였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누르하치는 명에게 일곱 가지 큰 원한이라는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칠종뇌한'''&amp;lt;/font&amp;gt;을 내세워 명에게 선전포고를 하였고 후금과 명은 전쟁을 시작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명나라는 &amp;lt;font color=&amp;quot;#FFD700&amp;quot;&amp;gt;'''재조지은'''&amp;lt;/font&amp;gt;이라는 명분으로 조선에게 원군 파병을 요청하였다. &lt;br /&gt;
조선 또한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도와준 은혜를 생각하여 당연히 파병을 하려고 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단, 임금인 광해군이 당시 정세가 명나라는 쇠약해지고 청나라가 득세하고 있는 판이라, 강홍립 장군을 파병하여 상황을 보고 적절하게 대처하도록 지시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심하전투에서 청나라의 승리는 우세했고, 이후 청나라가 항복을 종용하자 &amp;lt;ins&amp;gt;'''강홍립은 항복'''&amp;lt;/ins&amp;gt;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파견된 조선군인들은 모두 '''청나라의 포로'''가 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lt;br /&gt;
남원에 사는 최척이 옥영(玉英)을 사랑하여 약혼을 한다. &lt;br /&gt;
&lt;br /&gt;
그러나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임진왜란'''&amp;lt;/font&amp;gt;이 일어나고 최척이 징발되어 전쟁에 나가게 된다. &lt;br /&gt;
&lt;br /&gt;
&lt;br /&gt;
이에 옥영의 부모는 이웃의 양생을 사위로 맞이하려고 하였으나, 이 사실을 알게 된 최척이 돌아와 옥영과 혼인을 하고 첫째 아들 몽석을 낳는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정유재란'''&amp;lt;/font&amp;gt;이 발발하고 남원이 함락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ins&amp;gt;옥영은 왜병의 포로가 되어 끌려가고, 최척은 명장인 여유문을 따라 중국으로 갔으며 아들인 몽석 또한 흩어져 자취를 알 수 없게 되었다.&amp;lt;/ins&amp;gt; &lt;br /&gt;
&lt;br /&gt;
&lt;br /&gt;
옥영은 남장을 하고 여러 지역을 떠돌다 '''&amp;lt;font color=&amp;quot;#4169E1&amp;quot;&amp;gt;안남(베트남)'''&amp;lt;/font&amp;gt;으로 오게 되었다. &lt;br /&gt;
최척 또한 상선을 타고 &amp;lt;font color=&amp;quot;#4169E1&amp;quot;&amp;gt;'''안남(베트남)'''&amp;lt;/font&amp;gt;에 왔고, 최척과 옥영은 기적적으로 만나게 된다. &lt;br /&gt;
&lt;br /&gt;
&lt;br /&gt;
이들은 각자의 동료와 이별을 고한 뒤, &amp;lt;font color=&amp;quot;#4169E1&amp;quot;&amp;gt;'''중국'''&amp;lt;/font&amp;gt;으로 건너가 아들 '''몽선'''을 낳는다. &lt;br /&gt;
몽선이 장성하여 임진왜란 때 조선에 출전한 '''진위경'''의 딸 홍도와 결혼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최척은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사르후 전투'''&amp;lt;/font&amp;gt;에서 명군으로 출전하였다가 청군의 포로가 되어 수용소에 갖힌다.&lt;br /&gt;
&lt;br /&gt;
그러다 우연히 조선에서 강홍립을 따라 파병되었다가 항복하여 포로가 된 &amp;lt;ins&amp;gt;첫째 아들 '''몽석'''과 극적으로 만나게 된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최척과 몽석은 수용소를 탈출하여 고향으로 향했는데, 중간에 최척이 심하게 아팠다. &lt;br /&gt;
&lt;br /&gt;
같은 배를 탄 사람 중 의술에 능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도움으로 최척이 씻은 듯이 낫게 되었다.&lt;br /&gt;
&lt;br /&gt;
몽석과 최척은 의원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amp;lt;ins&amp;gt;그가 최척의 이웃이자 둘째 아들 몽선의 장인, '''진위경'''인 것을 알게 된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이후 최척과 몽석, 진위경은 무사히 집에 도착했고 헤어진 가족들은 모두 재회를 하게 된다.&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981&amp;quot; height=&amp;quot;552&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3N6DoC16I7A&amp;quot; title=&amp;quot;최척전의  전체 줄거리를 10분의 문학으로 만나보세요!🍋&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실제 일어난 사건'''을 기반으로 하여, 가족의 이별과 재회를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최척전을 기점으로 하여 이전 시기 고전 소설에서 도외시되었던 &amp;lt;font color=&amp;quot;#006400&amp;quot;&amp;gt;'''역사성'''&amp;lt;/font&amp;gt;과 &amp;lt;font color=&amp;quot;#006400&amp;quot;&amp;gt;'''지리 감각'''&amp;lt;/font&amp;gt;이 사실적으로 표현되기 시작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포로가 된 주인공의 행적을 중심으로 하는 '피로 문학'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가능성을 열었다. &amp;lt;ref&amp;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최척전」,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7689, 2025, 6, 24.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전쟁으로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진 백성들의 마음을 대변하여 &amp;lt;font color=&amp;quot;#4169E1&amp;quot;&amp;gt;'''가족 회복에 대한 이상'''&amp;lt;/font&amp;gt;이 잘 드러나 있다.&lt;/div&gt;</summary>
		<author><name>Jinhyang</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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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Jinhyang: &lt;/p&gt;
&lt;h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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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name>Jinhyang</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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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최척전ᐧ༚̮ᐧ</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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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06-23T19:08:1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inhyang: &lt;/p&gt;
&lt;hr /&gt;
&lt;div&gt;==작가==&lt;br /&gt;
===조위한===&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 자 || 지세&lt;br /&gt;
|-&lt;br /&gt;
| 호 || 현곡&lt;br /&gt;
|-&lt;br /&gt;
| 출생 || 1567(명종 22년)&lt;br /&gt;
|-&lt;br /&gt;
| 사망 || 1649(인조 27년)&lt;br /&gt;
|-&lt;br /&gt;
| 본관 || 한양&lt;br /&gt;
|-&lt;br /&gt;
| 관직 || 공조참판, 지중추부사&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종군하였고, 1609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주부, 감찰 등 관직 생활을 하다가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계축옥사'''&amp;lt;/font&amp;gt;에 연류되어 구금되었다. &lt;br /&gt;
&lt;br /&gt;
이후 인조반정으로 재등용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1624년 &amp;lt;font color=&amp;quot;#008000&amp;quot;&amp;gt;'''이괄의 난'''&amp;lt;/font&amp;gt; 토벌에 참여하여 수도를 지켰다. &lt;br /&gt;
&lt;br /&gt;
&lt;br /&gt;
정묘, 병자호란 때에도 출전하였으며, 난이 끝난 뒤 벼슬길에서 물러났지만 다시 등용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동부승지, 직제학을 지내고 &amp;lt;font color=&amp;quot;#B22222&amp;quot;&amp;gt;'''공조참판'''&amp;lt;/font&amp;gt;까지 벼슬이 올랐다. &lt;br /&gt;
&lt;br /&gt;
&lt;br /&gt;
80세에 자헌대부에 오르고, &amp;lt;font color=&amp;quot;#B22222&amp;quot;&amp;gt;'''지중추부사'''&amp;lt;/font&amp;gt;를 지내었다.&amp;lt;ref&amp;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위한」,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2465, 2025, 6, 24.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사건==&lt;br /&gt;
====임진왜란====&lt;br /&gt;
&lt;br /&gt;
[[파일:임진왜란|섬네일|왼쪽]]&amp;lt;ref&amp;gt; 유용하,「임진왜란 당시 조선군 ‘MOAB’(모든폭탄의 어머니) 사용했다」, 『서울신문』,2019, 11, 19, https://www.seoul.co.kr/news/society/science-news/2019/11/19/20191119500075, 2025, 6, 24, 접속.&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임진왜란'''은 일본이 조선과 &amp;lt;ins&amp;gt;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동안 싸운 장기 전투이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조선은 오랫동안 평화가 유지되었기에 임진왜란 전쟁은 조선 백성들에게 가장 큰 충격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임진왜란 이후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인구 감소, 민생 불안정, 토지 황폐화'''&amp;lt;/span&amp;gt; 등 여러 문제가 발생하였고 살기 힘들어졌다.&lt;br /&gt;
&lt;br /&gt;
또한 전쟁이 일어나면서 서로 각자도생을 하며 뿔뿔이 흩어졌고 이에 따라 가족을 생사를 알 수 없는 사람 또한 있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최척전은 임진왜란 등 전쟁을 배경으로 흩어진 가족들의 이별과 재회를 생생히 그려내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심하 전투====&lt;br /&gt;
&lt;br /&gt;
[[파일:심하 전투|섬네일|왼쪽]]&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심하전투'''는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1619년 명과 조선의 연합군이 누르하치의 후금군에게 패한 사건을 말한다.&amp;lt;/span&amp;gt; &lt;br /&gt;
&lt;br /&gt;
&lt;br /&gt;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의 국력이 쇠약해진 틈을 타 북방의 여진족은 세력을 규합하여 국가를 세울 정도가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ins&amp;gt;누르하치가 여진 세력을 통일하여 후금을 세우고, 독립국을 선포하였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누르하치는 명에게 일곱 가지 큰 원한이라는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칠종뇌한'''&amp;lt;/font&amp;gt;을 내세워 명에게 선전포고를 하였고 후금과 명은 전쟁을 시작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명나라는 &amp;lt;font color=&amp;quot;#FFD700&amp;quot;&amp;gt;'''재조지은'''&amp;lt;/font&amp;gt;이라는 명분으로 조선에게 원군 파병을 요청하였다. &lt;br /&gt;
조선 또한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도와준 은혜를 생각하여 당연히 파병을 하려고 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단, 임금인 광해군이 당시 정세가 명나라는 쇠약해지고 청나라가 득세하고 있는 판이라, 강홍립 장군을 파병하여 상황을 보고 적절하게 대처하도록 지시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심하전투에서 청나라의 승리는 우세했고, 이후 청나라가 항복을 종용하자 &amp;lt;ins&amp;gt;'''강홍립은 항복'''&amp;lt;/ins&amp;gt;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파견된 조선군인들은 모두 '''청나라의 포로'''가 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lt;br /&gt;
남원에 사는 최척이 옥영(玉英)을 사랑하여 약혼을 한다. &lt;br /&gt;
&lt;br /&gt;
그러나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임진왜란'''&amp;lt;/font&amp;gt;이 일어나고 최척이 징발되어 전쟁에 나가게 된다. &lt;br /&gt;
&lt;br /&gt;
&lt;br /&gt;
이에 옥영의 부모는 이웃의 양생을 사위로 맞이하려고 하였으나, 이 사실을 알게 된 최척이 돌아와 옥영과 혼인을 하고 첫째 아들 몽석을 낳는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정유재란'''&amp;lt;/font&amp;gt;이 발발하고 남원이 함락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ins&amp;gt;옥영은 왜병의 포로가 되어 끌려가고, 최척은 명장인 여유문을 따라 중국으로 갔으며 아들인 몽석 또한 흩어져 자취를 알 수 없게 되었다.&amp;lt;/ins&amp;gt; &lt;br /&gt;
&lt;br /&gt;
&lt;br /&gt;
옥영은 남장을 하고 여러 지역을 떠돌다 '''&amp;lt;font color=&amp;quot;#4169E1&amp;quot;&amp;gt;안남(베트남)'''&amp;lt;/font&amp;gt;으로 오게 되었다. &lt;br /&gt;
최척 또한 상선을 타고 &amp;lt;font color=&amp;quot;#4169E1&amp;quot;&amp;gt;'''안남(베트남)'''&amp;lt;/font&amp;gt;에 왔고, 최척과 옥영은 기적적으로 만나게 된다. &lt;br /&gt;
&lt;br /&gt;
&lt;br /&gt;
이들은 각자의 동료와 이별을 고한 뒤, &amp;lt;font color=&amp;quot;#4169E1&amp;quot;&amp;gt;'''중국'''&amp;lt;/font&amp;gt;으로 건너가 아들 '''몽선'''을 낳는다. &lt;br /&gt;
몽선이 장성하여 임진왜란 때 조선에 출전한 '''진위경'''의 딸 홍도와 결혼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최척은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사르후 전투'''&amp;lt;/font&amp;gt;에서 명군으로 출전하였다가 청군의 포로가 되어 수용소에 갖힌다.&lt;br /&gt;
&lt;br /&gt;
그러다 우연히 조선에서 강홍립을 따라 파병되었다가 항복하여 포로가 된 &amp;lt;ins&amp;gt;첫째 아들 '''몽석'''과 극적으로 만나게 된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최척과 몽석은 수용소를 탈출하여 고향으로 향했는데, 중간에 최척이 심하게 아팠다. &lt;br /&gt;
&lt;br /&gt;
같은 배를 탄 사람 중 의술에 능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도움으로 최척이 씻은 듯이 낫게 되었다.&lt;br /&gt;
&lt;br /&gt;
몽석과 최척은 의원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amp;lt;ins&amp;gt;그가 최척의 이웃이자 둘째 아들 몽선의 장인, '''진위경'''인 것을 알게 된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이후 최척과 몽석, 진위경은 무사히 집에 도착했고 헤어진 가족들은 모두 재회를 하게 된다.&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981&amp;quot; height=&amp;quot;552&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3N6DoC16I7A&amp;quot; title=&amp;quot;최척전의  전체 줄거리를 10분의 문학으로 만나보세요!🍋&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실제 일어난 사건'''을 기반으로 하여, 가족의 이별과 재회를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최척전을 기점으로 하여 이전 시기 고전 소설에서 도외시되었던 &amp;lt;font color=&amp;quot;#006400&amp;quot;&amp;gt;'''역사성'''&amp;lt;/font&amp;gt;과 &amp;lt;font color=&amp;quot;#006400&amp;quot;&amp;gt;'''지리 감각'''&amp;lt;/font&amp;gt;이 사실적으로 표현되기 시작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포로가 된 주인공의 행적을 중심으로 하는 '피로 문학'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가능성을 열었다. &amp;lt;ref&amp;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최척전」,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7689, 2025, 6, 24.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전쟁으로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진 백성들의 마음을 대변하여 &amp;lt;font color=&amp;quot;#4169E1&amp;quot;&amp;gt;'''가족 회복에 대한 이상'''&amp;lt;/font&amp;gt;이 잘 드러나 있다.&lt;/div&gt;</summary>
		<author><name>Jinhyang</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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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파일:임진왜란.jpeg</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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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06-23T19:04:2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inhyang: &lt;/p&gt;
&lt;hr /&gt;
&lt;div&gt;&lt;/div&gt;</summary>
		<author><name>Jinhyang</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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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최척전ᐧ༚̮ᐧ</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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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06-23T19:02:5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inhyang: &lt;/p&gt;
&lt;hr /&gt;
&lt;div&gt;==작가==&lt;br /&gt;
===조위한===&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 자 || 지세&lt;br /&gt;
|-&lt;br /&gt;
| 호 || 현곡&lt;br /&gt;
|-&lt;br /&gt;
| 출생 || 1567(명종 22년)&lt;br /&gt;
|-&lt;br /&gt;
| 사망 || 1649(인조 27년)&lt;br /&gt;
|-&lt;br /&gt;
| 본관 || 한양&lt;br /&gt;
|-&lt;br /&gt;
| 관직 || 공조참판, 지중추부사&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종군하였고, 1609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주부, 감찰 등 관직 생활을 하다가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계축옥사'''&amp;lt;/font&amp;gt;에 연류되어 구금되었다. &lt;br /&gt;
&lt;br /&gt;
이후 인조반정으로 재등용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1624년 &amp;lt;font color=&amp;quot;#008000&amp;quot;&amp;gt;'''이괄의 난'''&amp;lt;/font&amp;gt; 토벌에 참여하여 수도를 지켰다. &lt;br /&gt;
&lt;br /&gt;
&lt;br /&gt;
정묘, 병자호란 때에도 출전하였으며, 난이 끝난 뒤 벼슬길에서 물러났지만 다시 등용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동부승지, 직제학을 지내고 &amp;lt;font color=&amp;quot;#B22222&amp;quot;&amp;gt;'''공조참판'''&amp;lt;/font&amp;gt;까지 벼슬이 올랐다. &lt;br /&gt;
&lt;br /&gt;
&lt;br /&gt;
80세에 자헌대부에 오르고, &amp;lt;font color=&amp;quot;#B22222&amp;quot;&amp;gt;'''지중추부사'''&amp;lt;/font&amp;gt;를 지내었다.&amp;lt;ref&amp;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위한」,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2465, 2025, 6, 24.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사건==&lt;br /&gt;
====임진왜란====&lt;br /&gt;
&lt;br /&gt;
[[파일:임진왜란|섬네일|왼쪽]]&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임진왜란'''은 일본이 조선과 &amp;lt;ins&amp;gt;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동안 싸운 장기 전투이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조선은 오랫동안 평화가 유지되었기에 임진왜란 전쟁은 조선 백성들에게 가장 큰 충격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임진왜란 이후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인구 감소, 민생 불안정, 토지 황폐화'''&amp;lt;/span&amp;gt; 등 여러 문제가 발생하였고 살기 힘들어졌다.&lt;br /&gt;
&lt;br /&gt;
또한 전쟁이 일어나면서 서로 각자도생을 하며 뿔뿔이 흩어졌고 이에 따라 가족을 생사를 알 수 없는 사람 또한 있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최척전은 임진왜란 등 전쟁을 배경으로 흩어진 가족들의 이별과 재회를 생생히 그려내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심하 전투====&lt;br /&gt;
&lt;br /&gt;
[[파일:심하 전투|섬네일|왼쪽]]&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심하전투'''는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1619년 명과 조선의 연합군이 누르하치의 후금군에게 패한 사건을 말한다.&amp;lt;/span&amp;gt; &lt;br /&gt;
&lt;br /&gt;
&lt;br /&gt;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의 국력이 쇠약해진 틈을 타 북방의 여진족은 세력을 규합하여 국가를 세울 정도가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ins&amp;gt;누르하치가 여진 세력을 통일하여 후금을 세우고, 독립국을 선포하였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누르하치는 명에게 일곱 가지 큰 원한이라는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칠종뇌한'''&amp;lt;/font&amp;gt;을 내세워 명에게 선전포고를 하였고 후금과 명은 전쟁을 시작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명나라는 &amp;lt;font color=&amp;quot;#FFD700&amp;quot;&amp;gt;'''재조지은'''&amp;lt;/font&amp;gt;이라는 명분으로 조선에게 원군 파병을 요청하였다. &lt;br /&gt;
조선 또한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도와준 은혜를 생각하여 당연히 파병을 하려고 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단, 임금인 광해군이 당시 정세가 명나라는 쇠약해지고 청나라가 득세하고 있는 판이라, 강홍립 장군을 파병하여 상황을 보고 적절하게 대처하도록 지시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심하전투에서 청나라의 승리는 우세했고, 이후 청나라가 항복을 종용하자 &amp;lt;ins&amp;gt;'''강홍립은 항복'''&amp;lt;/ins&amp;gt;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파견된 조선군인들은 모두 '''청나라의 포로'''가 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lt;br /&gt;
남원에 사는 최척이 옥영(玉英)을 사랑하여 약혼을 한다. &lt;br /&gt;
&lt;br /&gt;
그러나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임진왜란'''&amp;lt;/font&amp;gt;이 일어나고 최척이 징발되어 전쟁에 나가게 된다. &lt;br /&gt;
&lt;br /&gt;
&lt;br /&gt;
이에 옥영의 부모는 이웃의 양생을 사위로 맞이하려고 하였으나, 이 사실을 알게 된 최척이 돌아와 옥영과 혼인을 하고 첫째 아들 몽석을 낳는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정유재란'''&amp;lt;/font&amp;gt;이 발발하고 남원이 함락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ins&amp;gt;옥영은 왜병의 포로가 되어 끌려가고, 최척은 명장인 여유문을 따라 중국으로 갔으며 아들인 몽석 또한 흩어져 자취를 알 수 없게 되었다.&amp;lt;/ins&amp;gt; &lt;br /&gt;
&lt;br /&gt;
&lt;br /&gt;
옥영은 남장을 하고 여러 지역을 떠돌다 '''&amp;lt;font color=&amp;quot;#4169E1&amp;quot;&amp;gt;안남(베트남)'''&amp;lt;/font&amp;gt;으로 오게 되었다. &lt;br /&gt;
최척 또한 상선을 타고 &amp;lt;font color=&amp;quot;#4169E1&amp;quot;&amp;gt;'''안남(베트남)'''&amp;lt;/font&amp;gt;에 왔고, 최척과 옥영은 기적적으로 만나게 된다. &lt;br /&gt;
&lt;br /&gt;
&lt;br /&gt;
이들은 각자의 동료와 이별을 고한 뒤, &amp;lt;font color=&amp;quot;#4169E1&amp;quot;&amp;gt;'''중국'''&amp;lt;/font&amp;gt;으로 건너가 아들 '''몽선'''을 낳는다. &lt;br /&gt;
몽선이 장성하여 임진왜란 때 조선에 출전한 '''진위경'''의 딸 홍도와 결혼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최척은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사르후 전투'''&amp;lt;/font&amp;gt;에서 명군으로 출전하였다가 청군의 포로가 되어 수용소에 갖힌다.&lt;br /&gt;
&lt;br /&gt;
그러다 우연히 조선에서 강홍립을 따라 파병되었다가 항복하여 포로가 된 &amp;lt;ins&amp;gt;첫째 아들 '''몽석'''과 극적으로 만나게 된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최척과 몽석은 수용소를 탈출하여 고향으로 향했는데, 중간에 최척이 심하게 아팠다. &lt;br /&gt;
&lt;br /&gt;
같은 배를 탄 사람 중 의술에 능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도움으로 최척이 씻은 듯이 낫게 되었다.&lt;br /&gt;
&lt;br /&gt;
몽석과 최척은 의원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amp;lt;ins&amp;gt;그가 최척의 이웃이자 둘째 아들 몽선의 장인, '''진위경'''인 것을 알게 된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이후 최척과 몽석, 진위경은 무사히 집에 도착했고 헤어진 가족들은 모두 재회를 하게 된다.&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981&amp;quot; height=&amp;quot;552&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3N6DoC16I7A&amp;quot; title=&amp;quot;최척전의  전체 줄거리를 10분의 문학으로 만나보세요!🍋&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실제 일어난 사건'''을 기반으로 하여, 가족의 이별과 재회를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최척전을 기점으로 하여 이전 시기 고전 소설에서 도외시되었던 &amp;lt;font color=&amp;quot;#006400&amp;quot;&amp;gt;'''역사성'''&amp;lt;/font&amp;gt;과 &amp;lt;font color=&amp;quot;#006400&amp;quot;&amp;gt;'''지리 감각'''&amp;lt;/font&amp;gt;이 사실적으로 표현되기 시작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포로가 된 주인공의 행적을 중심으로 하는 '피로 문학'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가능성을 열었다. &amp;lt;ref&amp;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최척전」,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7689, 2025, 6, 24.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전쟁으로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진 백성들의 마음을 대변하여 &amp;lt;font color=&amp;quot;#4169E1&amp;quot;&amp;gt;'''가족 회복에 대한 이상'''&amp;lt;/font&amp;gt;이 잘 드러나 있다.&lt;/div&gt;</summary>
		<author><name>Jinhyang</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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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최척전ᐧ༚̮ᐧ</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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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06-23T19:01:3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inhyang: &lt;/p&gt;
&lt;hr /&gt;
&lt;div&gt;==작가==&lt;br /&gt;
===조위한===&lt;br /&gt;
&lt;br /&gt;
[[파일:조위한|섬네일|왼쪽]]&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 자 || 지세&lt;br /&gt;
|-&lt;br /&gt;
| 호 || 현곡&lt;br /&gt;
|-&lt;br /&gt;
| 출생 || 1567(명종 22년)&lt;br /&gt;
|-&lt;br /&gt;
| 사망 || 1649(인조 27년)&lt;br /&gt;
|-&lt;br /&gt;
| 본관 || 한양&lt;br /&gt;
|-&lt;br /&gt;
| 관직 || 공조참판, 지중추부사&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종군하였고, 1609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주부, 감찰 등 관직 생활을 하다가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계축옥사'''&amp;lt;/font&amp;gt;에 연류되어 구금되었다. &lt;br /&gt;
&lt;br /&gt;
이후 인조반정으로 재등용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1624년 &amp;lt;font color=&amp;quot;#008000&amp;quot;&amp;gt;'''이괄의 난'''&amp;lt;/font&amp;gt; 토벌에 참여하여 수도를 지켰다. &lt;br /&gt;
&lt;br /&gt;
&lt;br /&gt;
정묘, 병자호란 때에도 출전하였으며, 난이 끝난 뒤 벼슬길에서 물러났지만 다시 등용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동부승지, 직제학을 지내고 &amp;lt;font color=&amp;quot;#B22222&amp;quot;&amp;gt;'''공조참판'''&amp;lt;/font&amp;gt;까지 벼슬이 올랐다. &lt;br /&gt;
&lt;br /&gt;
&lt;br /&gt;
80세에 자헌대부에 오르고, &amp;lt;font color=&amp;quot;#B22222&amp;quot;&amp;gt;'''지중추부사'''&amp;lt;/font&amp;gt;를 지내었다.&amp;lt;ref&amp;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위한」,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2465, 2025, 6, 24.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사건==&lt;br /&gt;
====임진왜란====&lt;br /&gt;
&lt;br /&gt;
[[파일:임진왜란|섬네일|왼쪽]]&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임진왜란'''은 일본이 조선과 &amp;lt;ins&amp;gt;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동안 싸운 장기 전투이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조선은 오랫동안 평화가 유지되었기에 임진왜란 전쟁은 조선 백성들에게 가장 큰 충격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임진왜란 이후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인구 감소, 민생 불안정, 토지 황폐화'''&amp;lt;/span&amp;gt; 등 여러 문제가 발생하였고 살기 힘들어졌다.&lt;br /&gt;
&lt;br /&gt;
또한 전쟁이 일어나면서 서로 각자도생을 하며 뿔뿔이 흩어졌고 이에 따라 가족을 생사를 알 수 없는 사람 또한 있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최척전은 임진왜란 등 전쟁을 배경으로 흩어진 가족들의 이별과 재회를 생생히 그려내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심하 전투====&lt;br /&gt;
&lt;br /&gt;
[[파일:심하 전투|섬네일|왼쪽]]&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심하전투'''는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1619년 명과 조선의 연합군이 누르하치의 후금군에게 패한 사건을 말한다.&amp;lt;/span&amp;gt; &lt;br /&gt;
&lt;br /&gt;
&lt;br /&gt;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의 국력이 쇠약해진 틈을 타 북방의 여진족은 세력을 규합하여 국가를 세울 정도가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ins&amp;gt;누르하치가 여진 세력을 통일하여 후금을 세우고, 독립국을 선포하였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누르하치는 명에게 일곱 가지 큰 원한이라는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칠종뇌한'''&amp;lt;/font&amp;gt;을 내세워 명에게 선전포고를 하였고 후금과 명은 전쟁을 시작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명나라는 &amp;lt;font color=&amp;quot;#FFD700&amp;quot;&amp;gt;'''재조지은'''&amp;lt;/font&amp;gt;이라는 명분으로 조선에게 원군 파병을 요청하였다. &lt;br /&gt;
조선 또한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도와준 은혜를 생각하여 당연히 파병을 하려고 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단, 임금인 광해군이 당시 정세가 명나라는 쇠약해지고 청나라가 득세하고 있는 판이라, 강홍립 장군을 파병하여 상황을 보고 적절하게 대처하도록 지시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심하전투에서 청나라의 승리는 우세했고, 이후 청나라가 항복을 종용하자 &amp;lt;ins&amp;gt;'''강홍립은 항복'''&amp;lt;/ins&amp;gt;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파견된 조선군인들은 모두 '''청나라의 포로'''가 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lt;br /&gt;
남원에 사는 최척이 옥영(玉英)을 사랑하여 약혼을 한다. &lt;br /&gt;
&lt;br /&gt;
그러나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임진왜란'''&amp;lt;/font&amp;gt;이 일어나고 최척이 징발되어 전쟁에 나가게 된다. &lt;br /&gt;
&lt;br /&gt;
&lt;br /&gt;
이에 옥영의 부모는 이웃의 양생을 사위로 맞이하려고 하였으나, 이 사실을 알게 된 최척이 돌아와 옥영과 혼인을 하고 첫째 아들 몽석을 낳는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정유재란'''&amp;lt;/font&amp;gt;이 발발하고 남원이 함락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ins&amp;gt;옥영은 왜병의 포로가 되어 끌려가고, 최척은 명장인 여유문을 따라 중국으로 갔으며 아들인 몽석 또한 흩어져 자취를 알 수 없게 되었다.&amp;lt;/ins&amp;gt; &lt;br /&gt;
&lt;br /&gt;
&lt;br /&gt;
옥영은 남장을 하고 여러 지역을 떠돌다 '''&amp;lt;font color=&amp;quot;#4169E1&amp;quot;&amp;gt;안남(베트남)'''&amp;lt;/font&amp;gt;으로 오게 되었다. &lt;br /&gt;
최척 또한 상선을 타고 &amp;lt;font color=&amp;quot;#4169E1&amp;quot;&amp;gt;'''안남(베트남)'''&amp;lt;/font&amp;gt;에 왔고, 최척과 옥영은 기적적으로 만나게 된다. &lt;br /&gt;
&lt;br /&gt;
&lt;br /&gt;
이들은 각자의 동료와 이별을 고한 뒤, &amp;lt;font color=&amp;quot;#4169E1&amp;quot;&amp;gt;'''중국'''&amp;lt;/font&amp;gt;으로 건너가 아들 '''몽선'''을 낳는다. &lt;br /&gt;
몽선이 장성하여 임진왜란 때 조선에 출전한 '''진위경'''의 딸 홍도와 결혼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최척은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사르후 전투'''&amp;lt;/font&amp;gt;에서 명군으로 출전하였다가 청군의 포로가 되어 수용소에 갖힌다.&lt;br /&gt;
&lt;br /&gt;
그러다 우연히 조선에서 강홍립을 따라 파병되었다가 항복하여 포로가 된 &amp;lt;ins&amp;gt;첫째 아들 '''몽석'''과 극적으로 만나게 된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최척과 몽석은 수용소를 탈출하여 고향으로 향했는데, 중간에 최척이 심하게 아팠다. &lt;br /&gt;
&lt;br /&gt;
같은 배를 탄 사람 중 의술에 능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도움으로 최척이 씻은 듯이 낫게 되었다.&lt;br /&gt;
&lt;br /&gt;
몽석과 최척은 의원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amp;lt;ins&amp;gt;그가 최척의 이웃이자 둘째 아들 몽선의 장인, '''진위경'''인 것을 알게 된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이후 최척과 몽석, 진위경은 무사히 집에 도착했고 헤어진 가족들은 모두 재회를 하게 된다.&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981&amp;quot; height=&amp;quot;552&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3N6DoC16I7A&amp;quot; title=&amp;quot;최척전의  전체 줄거리를 10분의 문학으로 만나보세요!🍋&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실제 일어난 사건'''을 기반으로 하여, 가족의 이별과 재회를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최척전을 기점으로 하여 이전 시기 고전 소설에서 도외시되었던 &amp;lt;font color=&amp;quot;#006400&amp;quot;&amp;gt;'''역사성'''&amp;lt;/font&amp;gt;과 &amp;lt;font color=&amp;quot;#006400&amp;quot;&amp;gt;'''지리 감각'''&amp;lt;/font&amp;gt;이 사실적으로 표현되기 시작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포로가 된 주인공의 행적을 중심으로 하는 '피로 문학'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가능성을 열었다. &amp;lt;ref&amp;g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최척전」,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7689, 2025, 6, 24.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전쟁으로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진 백성들의 마음을 대변하여 &amp;lt;font color=&amp;quot;#4169E1&amp;quot;&amp;gt;'''가족 회복에 대한 이상'''&amp;lt;/font&amp;gt;이 잘 드러나 있다.&lt;/div&gt;</summary>
		<author><name>Jinhyang</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B5%9C%EC%B2%99%EC%A0%84%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580</id>
		<title>최척전ᐧ༚̮ᐧ</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B5%9C%EC%B2%99%EC%A0%84%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580"/>
		<updated>2025-06-23T18:56:2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inhyang: &lt;/p&gt;
&lt;hr /&gt;
&lt;div&gt;==작가==&lt;br /&gt;
===조위한===&lt;br /&gt;
&lt;br /&gt;
[[파일:조위한|섬네일|왼쪽]]&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 자 || 지세&lt;br /&gt;
|-&lt;br /&gt;
| 호 || 현곡&lt;br /&gt;
|-&lt;br /&gt;
| 출생 || 1567(명종 22년)&lt;br /&gt;
|-&lt;br /&gt;
| 사망 || 1649(인조 27년)&lt;br /&gt;
|-&lt;br /&gt;
| 본관 || 한양&lt;br /&gt;
|-&lt;br /&gt;
| 관직 || 공조참판, 지중추부사&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종군하였고, 1609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주부, 감찰 등 관직 생활을 하다가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계축옥사'''&amp;lt;/font&amp;gt;에 연류되어 구금되었다. &lt;br /&gt;
&lt;br /&gt;
이후 인조반정으로 재등용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1624년 &amp;lt;font color=&amp;quot;#008000&amp;quot;&amp;gt;'''이괄의 난'''&amp;lt;/font&amp;gt; 토벌에 참여하여 수도를 지켰다. &lt;br /&gt;
&lt;br /&gt;
&lt;br /&gt;
정묘, 병자호란 때에도 출전하였으며, 난이 끝난 뒤 벼슬길에서 물러났지만 다시 등용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동부승지, 직제학을 지내고 &amp;lt;font color=&amp;quot;#B22222&amp;quot;&amp;gt;'''공조참판'''&amp;lt;/font&amp;gt;까지 벼슬이 올랐다. &lt;br /&gt;
&lt;br /&gt;
&lt;br /&gt;
80세에 자헌대부에 오르고, &amp;lt;font color=&amp;quot;#B22222&amp;quot;&amp;gt;'''지중추부사'''&amp;lt;/font&amp;gt;를 지내었다.&amp;lt;ref&amp;gt;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사건==&lt;br /&gt;
====임진왜란====&lt;br /&gt;
&lt;br /&gt;
[[파일:임진왜란|섬네일|왼쪽]]&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임진왜란'''은 일본이 조선과 &amp;lt;ins&amp;gt;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동안 싸운 장기 전투이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조선은 오랫동안 평화가 유지되었기에 임진왜란 전쟁은 조선 백성들에게 가장 큰 충격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임진왜란 이후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인구 감소, 민생 불안정, 토지 황폐화'''&amp;lt;/span&amp;gt; 등 여러 문제가 발생하였고 살기 힘들어졌다.&lt;br /&gt;
&lt;br /&gt;
또한 전쟁이 일어나면서 서로 각자도생을 하며 뿔뿔이 흩어졌고 이에 따라 가족을 생사를 알 수 없는 사람 또한 있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최척전은 임진왜란 등 전쟁을 배경으로 흩어진 가족들의 이별과 재회를 생생히 그려내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심하 전투====&lt;br /&gt;
&lt;br /&gt;
[[파일:심하 전투|섬네일|왼쪽]]&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심하전투'''는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1619년 명과 조선의 연합군이 누르하치의 후금군에게 패한 사건을 말한다.&amp;lt;/span&amp;gt; &lt;br /&gt;
&lt;br /&gt;
&lt;br /&gt;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의 국력이 쇠약해진 틈을 타 북방의 여진족은 세력을 규합하여 국가를 세울 정도가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ins&amp;gt;누르하치가 여진 세력을 통일하여 후금을 세우고, 독립국을 선포하였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누르하치는 명에게 일곱 가지 큰 원한이라는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칠종뇌한'''&amp;lt;/font&amp;gt;을 내세워 명에게 선전포고를 하였고 후금과 명은 전쟁을 시작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명나라는 &amp;lt;font color=&amp;quot;#FFD700&amp;quot;&amp;gt;'''재조지은'''&amp;lt;/font&amp;gt;이라는 명분으로 조선에게 원군 파병을 요청하였다. &lt;br /&gt;
조선 또한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도와준 은혜를 생각하여 당연히 파병을 하려고 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단, 임금인 광해군이 당시 정세가 명나라는 쇠약해지고 청나라가 득세하고 있는 판이라, 강홍립 장군을 파병하여 상황을 보고 적절하게 대처하도록 지시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심하전투에서 청나라의 승리는 우세했고, 이후 청나라가 항복을 종용하자 &amp;lt;ins&amp;gt;'''강홍립은 항복'''&amp;lt;/ins&amp;gt;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파견된 조선군인들은 모두 '''청나라의 포로'''가 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lt;br /&gt;
남원에 사는 최척이 옥영(玉英)을 사랑하여 약혼을 한다. &lt;br /&gt;
&lt;br /&gt;
그러나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임진왜란'''&amp;lt;/font&amp;gt;이 일어나고 최척이 징발되어 전쟁에 나가게 된다. &lt;br /&gt;
&lt;br /&gt;
&lt;br /&gt;
이에 옥영의 부모는 이웃의 양생을 사위로 맞이하려고 하였으나, 이 사실을 알게 된 최척이 돌아와 옥영과 혼인을 하고 첫째 아들 몽석을 낳는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정유재란'''&amp;lt;/font&amp;gt;이 발발하고 남원이 함락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ins&amp;gt;옥영은 왜병의 포로가 되어 끌려가고, 최척은 명장인 여유문을 따라 중국으로 갔으며 아들인 몽석 또한 흩어져 자취를 알 수 없게 되었다.&amp;lt;/ins&amp;gt; &lt;br /&gt;
&lt;br /&gt;
&lt;br /&gt;
옥영은 남장을 하고 여러 지역을 떠돌다 '''&amp;lt;font color=&amp;quot;#4169E1&amp;quot;&amp;gt;안남(베트남)'''&amp;lt;/font&amp;gt;으로 오게 되었다. &lt;br /&gt;
최척 또한 상선을 타고 &amp;lt;font color=&amp;quot;#4169E1&amp;quot;&amp;gt;'''안남(베트남)'''&amp;lt;/font&amp;gt;에 왔고, 최척과 옥영은 기적적으로 만나게 된다. &lt;br /&gt;
&lt;br /&gt;
&lt;br /&gt;
이들은 각자의 동료와 이별을 고한 뒤, &amp;lt;font color=&amp;quot;#4169E1&amp;quot;&amp;gt;'''중국'''&amp;lt;/font&amp;gt;으로 건너가 아들 '''몽선'''을 낳는다. &lt;br /&gt;
몽선이 장성하여 임진왜란 때 조선에 출전한 '''진위경'''의 딸 홍도와 결혼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최척은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사르후 전투'''&amp;lt;/font&amp;gt;에서 명군으로 출전하였다가 청군의 포로가 되어 수용소에 갖힌다.&lt;br /&gt;
&lt;br /&gt;
그러다 우연히 조선에서 강홍립을 따라 파병되었다가 항복하여 포로가 된 &amp;lt;ins&amp;gt;첫째 아들 '''몽석'''과 극적으로 만나게 된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최척과 몽석은 수용소를 탈출하여 고향으로 향했는데, 중간에 최척이 심하게 아팠다. &lt;br /&gt;
&lt;br /&gt;
같은 배를 탄 사람 중 의술에 능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도움으로 최척이 씻은 듯이 낫게 되었다.&lt;br /&gt;
&lt;br /&gt;
몽석과 최척은 의원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amp;lt;ins&amp;gt;그가 최척의 이웃이자 둘째 아들 몽선의 장인, '''진위경'''인 것을 알게 된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이후 최척과 몽석, 진위경은 무사히 집에 도착했고 헤어진 가족들은 모두 재회를 하게 된다.&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981&amp;quot; height=&amp;quot;552&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3N6DoC16I7A&amp;quot; title=&amp;quot;최척전의  전체 줄거리를 10분의 문학으로 만나보세요!🍋&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실제 일어난 사건'''을 기반으로 하여, 가족의 이별과 재회를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최척전을 기점으로 하여 이전 시기 고전 소설에서 도외시되었던 &amp;lt;font color=&amp;quot;#006400&amp;quot;&amp;gt;'''역사성'''&amp;lt;/font&amp;gt;과 &amp;lt;font color=&amp;quot;#006400&amp;quot;&amp;gt;'''지리 감각'''&amp;lt;/font&amp;gt;이 사실적으로 표현되기 시작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포로가 된 주인공의 행적을 중심으로 하는 '피로 문학'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가능성을 열었다. &amp;lt;ref&amp;gt;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전쟁으로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진 백성들의 마음을 대변하여 &amp;lt;font color=&amp;quot;#4169E1&amp;quot;&amp;gt;'''가족 회복에 대한 이상'''&amp;lt;/font&amp;gt;이 잘 드러나 있다.&lt;/div&gt;</summary>
		<author><name>Jinhyang</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B5%9C%EC%B2%99%EC%A0%84%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579</id>
		<title>최척전ᐧ༚̮ᐧ</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B5%9C%EC%B2%99%EC%A0%84%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579"/>
		<updated>2025-06-23T18:50:1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inhyang: &lt;/p&gt;
&lt;hr /&gt;
&lt;div&gt;==작가==&lt;br /&gt;
===조위한===&lt;br /&gt;
&lt;br /&gt;
[[파일:조위한|섬네일|왼쪽]]&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 자 || 지세&lt;br /&gt;
|-&lt;br /&gt;
| 호 || 현곡&lt;br /&gt;
|-&lt;br /&gt;
| 출생 || 1567(명종 22년)&lt;br /&gt;
|-&lt;br /&gt;
| 사망 || 1649(인조 27년)&lt;br /&gt;
|-&lt;br /&gt;
| 본관 || 한양&lt;br /&gt;
|-&lt;br /&gt;
| 관직 || 공조참판, 지중추부사&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종군하였고, 1609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주부, 감찰 등 관직 생활을 하다가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계축옥사'''&amp;lt;/font&amp;gt;에 연류되어 구금되었다. &lt;br /&gt;
&lt;br /&gt;
이후 인조반정으로 재등용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1624년 &amp;lt;font color=&amp;quot;#008000&amp;quot;&amp;gt;'''이괄의 난'''&amp;lt;/font&amp;gt; 토벌에 참여하여 수도를 지켰다. &lt;br /&gt;
&lt;br /&gt;
&lt;br /&gt;
정묘, 병자호란 때에도 출전하였으며, 난이 끝난 뒤 벼슬길에서 물러났지만 다시 등용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동부승지, 직제학을 지내고 &amp;lt;font color=&amp;quot;#B22222&amp;quot;&amp;gt;'''공조참판'''&amp;lt;/font&amp;gt;까지 벼슬이 올랐다. &lt;br /&gt;
&lt;br /&gt;
&lt;br /&gt;
80세에 자헌대부에 오르고, &amp;lt;font color=&amp;quot;#B22222&amp;quot;&amp;gt;'''지중추부사'''&amp;lt;/font&amp;gt;를 지내었다.&amp;lt;ref&amp;gt;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사건==&lt;br /&gt;
====임진왜란====&lt;br /&gt;
&lt;br /&gt;
[[파일:임진왜란|섬네일|왼쪽]]&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임진왜란'''은 일본이 조선과 &amp;lt;ins&amp;gt;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동안 싸운 장기 전투이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조선은 오랫동안 평화가 유지되었기에 임진왜란 전쟁은 조선 백성들에게 가장 큰 충격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임진왜란 이후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인구 감소, 민생 불안정, 토지 황폐화'''&amp;lt;/span&amp;gt; 등 여러 문제가 발생하였고 살기 힘들어졌다.&lt;br /&gt;
&lt;br /&gt;
또한 전쟁이 일어나면서 서로 각자도생을 하며 뿔뿔이 흩어졌고 이에 따라 가족을 생사를 알 수 없는 사람 또한 있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최척전은 임진왜란 등 전쟁을 배경으로 흩어진 가족들의 이별과 재회를 생생히 그려내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심하 전투====&lt;br /&gt;
&lt;br /&gt;
[[파일:심하 전투|섬네일|왼쪽]]&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심하전투'''는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1619년 명과 조선의 연합군이 누르하치의 후금군에게 패한 사건을 말한다.&amp;lt;/span&amp;gt; &lt;br /&gt;
&lt;br /&gt;
&lt;br /&gt;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의 국력이 쇠약해진 틈을 타 북방의 여진족은 세력을 규합하여 국가를 세울 정도가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ins&amp;gt;누르하치가 여진 세력을 통일하여 후금을 세우고, 독립국을 선포하였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누르하치는 명에게 일곱 가지 큰 원한이라는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칠종뇌한'''&amp;lt;/font&amp;gt;을 내세워 명에게 선전포고를 하였고 후금과 명은 전쟁을 시작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명나라는 &amp;lt;font color=&amp;quot;#FFD700&amp;quot;&amp;gt;'''재조지은'''&amp;lt;/font&amp;gt;이라는 명분으로 조선에게 원군 파병을 요청하였다. &lt;br /&gt;
조선 또한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도와준 은혜를 생각하여 당연히 파병을 하려고 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단, 임금인 광해군이 당시 정세가 명나라는 쇠약해지고 청나라가 득세하고 있는 판이라, 강홍립 장군을 파병하여 상황을 보고 적절하게 대처하도록 지시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심하전투에서 청나라의 승리는 우세했고, 이후 청나라가 항복을 종용하자 &amp;lt;ins&amp;gt;'''강홍립은 항복'''&amp;lt;/ins&amp;gt;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파견된 조선군인들은 모두 '''청나라의 포로'''가 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lt;br /&gt;
남원에 사는 최척이 옥영(玉英)을 사랑하여 약혼을 한다. &lt;br /&gt;
&lt;br /&gt;
그러나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임진왜란'''&amp;lt;/font&amp;gt;이 일어나고 최척이 징발되어 전쟁에 나가게 된다. &lt;br /&gt;
&lt;br /&gt;
&lt;br /&gt;
이에 옥영의 부모는 이웃의 양생을 사위로 맞이하려고 하였으나, 이 사실을 알게 된 최척이 돌아와 옥영과 혼인을 하고 첫째 아들 몽석을 낳는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정유재란'''&amp;lt;/font&amp;gt;이 발발하고 남원이 함락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ins&amp;gt;옥영은 왜병의 포로가 되어 끌려가고, 최척은 명장인 여유문을 따라 중국으로 갔으며 아들인 몽석 또한 흩어져 자취를 알 수 없게 되었다.&amp;lt;/ins&amp;gt; &lt;br /&gt;
&lt;br /&gt;
&lt;br /&gt;
옥영은 남장을 하고 여러 지역을 떠돌다 '''&amp;lt;font color=&amp;quot;#4169E1&amp;quot;&amp;gt;안남(베트남)'''&amp;lt;/font&amp;gt;으로 오게 되었다. &lt;br /&gt;
최척 또한 상선을 타고 &amp;lt;font color=&amp;quot;#4169E1&amp;quot;&amp;gt;'''안남(베트남)'''&amp;lt;/font&amp;gt;에 왔고, 최척과 옥영은 기적적으로 만나게 된다. &lt;br /&gt;
&lt;br /&gt;
&lt;br /&gt;
이들은 각자의 동료와 이별을 고한 뒤, &amp;lt;font color=&amp;quot;#4169E1&amp;quot;&amp;gt;'''중국'''&amp;lt;/font&amp;gt;으로 건너가 아들 '''몽선'''을 낳는다. &lt;br /&gt;
몽선이 장성하여 임진왜란 때 조선에 출전한 '''진위경'''의 딸 홍도와 결혼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최척은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사르후 전투'''&amp;lt;/font&amp;gt;에서 명군으로 출전하였다가 청군의 포로가 되어 수용소에 갖힌다.&lt;br /&gt;
&lt;br /&gt;
그러다 우연히 조선에서 강홍립을 따라 파병되었다가 항복하여 포로가 된 &amp;lt;ins&amp;gt;첫째 아들 '''몽석'''과 극적으로 만나게 된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최척과 몽석은 수용소를 탈출하여 고향으로 향했는데, 중간에 최척이 심하게 아팠다. &lt;br /&gt;
&lt;br /&gt;
같은 배를 탄 사람 중 의술에 능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도움으로 최척이 씻은 듯이 낫게 되었다.&lt;br /&gt;
&lt;br /&gt;
몽석과 최척은 의원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amp;lt;ins&amp;gt;그가 최척의 이웃이자 둘째 아들 몽선의 장인, '''진위경'''인 것을 알게 된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이후 최척과 몽석, 진위경은 무사히 집에 도착했고 헤어진 가족들은 모두 재회를 하게 된다.&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981&amp;quot; height=&amp;quot;552&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3N6DoC16I7A&amp;quot; title=&amp;quot;최척전의  전체 줄거리를 10분의 문학으로 만나보세요!🍋&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의의==&lt;/div&gt;</summary>
		<author><name>Jinhyang</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B5%9C%EC%B2%99%EC%A0%84%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578</id>
		<title>최척전ᐧ༚̮ᐧ</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B5%9C%EC%B2%99%EC%A0%84%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578"/>
		<updated>2025-06-23T18:49:1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inhyang: &lt;/p&gt;
&lt;hr /&gt;
&lt;div&gt;==작가==&lt;br /&gt;
===조위한===&lt;br /&gt;
&lt;br /&gt;
[[파일:조위한|섬네일|왼쪽]]&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 자 || 지세&lt;br /&gt;
|-&lt;br /&gt;
| 호 || 현곡&lt;br /&gt;
|-&lt;br /&gt;
| 출생 || 1567(명종 22년)&lt;br /&gt;
|-&lt;br /&gt;
| 사망 || 1649(인조 27년)&lt;br /&gt;
|-&lt;br /&gt;
| 본관 || 한양&lt;br /&gt;
|-&lt;br /&gt;
| 관직 || 공조참판, 지중추부사&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종군하였고, 1609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주부, 감찰 등 관직 생활을 하다가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계축옥사'''&amp;lt;/font&amp;gt;에 연류되어 구금되었다. &lt;br /&gt;
&lt;br /&gt;
이후 인조반정으로 재등용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1624년 &amp;lt;font color=&amp;quot;#008000&amp;quot;&amp;gt;'''이괄의 난'''&amp;lt;/font&amp;gt; 토벌에 참여하여 수도를 지켰다. &lt;br /&gt;
&lt;br /&gt;
&lt;br /&gt;
정묘, 병자호란 때에도 출전하였으며, 난이 끝난 뒤 벼슬길에서 물러났지만 다시 등용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동부승지, 직제학을 지내고 &amp;lt;font color=&amp;quot;#B22222&amp;quot;&amp;gt;'''공조참판'''&amp;lt;/font&amp;gt;까지 벼슬이 올랐다. &lt;br /&gt;
&lt;br /&gt;
&lt;br /&gt;
80세에 자헌대부에 오르고, &amp;lt;font color=&amp;quot;#B22222&amp;quot;&amp;gt;'''지중추부사'''&amp;lt;/font&amp;gt;를 지내었다.&amp;lt;ref&amp;gt;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사건==&lt;br /&gt;
====임진왜란====&lt;br /&gt;
&lt;br /&gt;
[[파일:임진왜란|섬네일|왼쪽]]&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임진왜란'''은 일본이 조선과 &amp;lt;ins&amp;gt;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동안 싸운 장기 전투이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조선은 오랫동안 평화가 유지되었기에 임진왜란 전쟁은 조선 백성들에게 가장 큰 충격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임진왜란 이후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인구 감소, 민생 불안정, 토지 황폐화'''&amp;lt;/span&amp;gt; 등 여러 문제가 발생하였고 살기 힘들어졌다.&lt;br /&gt;
&lt;br /&gt;
또한 전쟁이 일어나면서 서로 각자도생을 하며 뿔뿔이 흩어졌고 이에 따라 가족을 생사를 알 수 없는 사람 또한 있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최척전은 임진왜란 등 전쟁을 배경으로 흩어진 가족들의 이별과 재회를 생생히 그려내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심하 전투====&lt;br /&gt;
&lt;br /&gt;
[[파일:심하 전투|섬네일|왼쪽]]&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심하전투'''는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1619년 명과 조선의 연합군이 누르하치의 후금군에게 패한 사건을 말한다.&amp;lt;/span&amp;gt; &lt;br /&gt;
&lt;br /&gt;
&lt;br /&gt;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의 국력이 쇠약해진 틈을 타 북방의 여진족은 세력을 규합하여 국가를 세울 정도가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ins&amp;gt;누르하치가 여진 세력을 통일하여 후금을 세우고, 독립국을 선포하였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누르하치는 명에게 일곱 가지 큰 원한이라는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칠종뇌한'''&amp;lt;/font&amp;gt;을 내세워 명에게 선전포고를 하였고 후금과 명은 전쟁을 시작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명나라는 &amp;lt;font color=&amp;quot;#FFD700&amp;quot;&amp;gt;'''재조지은'''&amp;lt;/font&amp;gt;이라는 명분으로 조선에게 원군 파병을 요청하였다. &lt;br /&gt;
조선 또한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도와준 은혜를 생각하여 당연히 파병을 하려고 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단, 임금인 광해군이 당시 정세가 명나라는 쇠약해지고 청나라가 득세하고 있는 판이라, 강홍립 장군을 파병하여 상황을 보고 적절하게 대처하도록 지시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심하전투에서 청나라의 승리는 우세했고, 이후 청나라가 항복을 종용하자 &amp;lt;ins&amp;gt;'''강홍립은 항복'''&amp;lt;/ins&amp;gt;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파견된 조선군인들은 모두 '''청나라의 포로'''가 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lt;br /&gt;
남원에 사는 최척이 옥영(玉英)을 사랑하여 약혼을 한다. &lt;br /&gt;
그러나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임진왜란'''&amp;lt;/font&amp;gt;이 일어나고 최척이 징발되어 전쟁에 나가게 된다. &lt;br /&gt;
&lt;br /&gt;
이에 옥영의 부모는 이웃의 양생을 사위로 맞이하려고 하였으나, 이 사실을 알게 된 최척이 돌아와 옥영과 혼인을 하고 첫째 아들 몽석을 낳는다. &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정유재란'''&amp;lt;/font&amp;gt;이 발발하고 남원이 함락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ins&amp;gt;옥영은 왜병의 포로가 되어 끌려가고, 최척은 명장인 여유문을 따라 중국으로 갔으며 아들인 몽석 또한 흩어져 자취를 알 수 없게 되었다.&amp;lt;/ins&amp;gt; &lt;br /&gt;
&lt;br /&gt;
&lt;br /&gt;
옥영은 남장을 하고 여러 지역을 떠돌다 '''&amp;lt;font color=&amp;quot;#4169E1&amp;quot;&amp;gt;안남(베트남)'''&amp;lt;/font&amp;gt;으로 오게 되었다. &lt;br /&gt;
최척 또한 상선을 타고 &amp;lt;font color=&amp;quot;#4169E1&amp;quot;&amp;gt;'''안남(베트남)'''&amp;lt;/font&amp;gt;에 왔고, 최척과 옥영은 기적적으로 만나게 된다. &lt;br /&gt;
&lt;br /&gt;
&lt;br /&gt;
이들은 각자의 동료와 이별을 고한 뒤, &amp;lt;font color=&amp;quot;#4169E1&amp;quot;&amp;gt;'''중국'''&amp;lt;/font&amp;gt;으로 건너가 아들 '''몽선'''을 낳는다. &lt;br /&gt;
몽선이 장성하여 임진왜란 때 조선에 출전한 '''진위경'''의 딸 홍도와 결혼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최척은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사르후 전투'''&amp;lt;/font&amp;gt;에서 명군으로 출전하였다가 청군의 포로가 되어 수용소에 갖힌다.&lt;br /&gt;
&lt;br /&gt;
그러다 우연히 조선에서 강홍립을 따라 파병되었다가 항복하여 포로가 된 &amp;lt;ins&amp;gt;첫째 아들 '''몽석'''과 극적으로 만나게 된다.&amp;lt;/ins&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최척과 몽석은 수용소를 탈출하여 고향으로 향했는데, 중간에 최척이 심하게 아팠다. &lt;br /&gt;
&lt;br /&gt;
같은 배를 탄 사람 중 의술에 능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도움으로 최척이 씻은 듯이 낫게 되었다.&lt;br /&gt;
&lt;br /&gt;
몽석과 최척은 의원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amp;lt;ins&amp;gt;그가 최척의 이웃이자 둘째 아들 몽선의 장인, '''진위경'''인 것을 알게 된다.&amp;lt;/ins&amp;g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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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E0FFFF&amp;quot;&amp;gt;이후 최척과 몽석, 진위경은 무사히 집에 도착했고 헤어진 가족들은 모두 재회를 하게 된다.&amp;lt;/span&amp;g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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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iframe width=&amp;quot;981&amp;quot; height=&amp;quot;552&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3N6DoC16I7A&amp;quot; title=&amp;quot;최척전의  전체 줄거리를 10분의 문학으로 만나보세요!🍋&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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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의==&lt;/div&gt;</summary>
		<author><name>Jinhyang</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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