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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dh_edu - 사용자 기여 [ko]</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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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이육사의 기자 생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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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Imgpdnjs: &lt;/p&gt;
&lt;hr /&gt;
&lt;div&gt;[[분류:imgpdnjs]]&lt;br /&gt;
=='''이육사의 기자생활'''==&lt;br /&gt;
출소한 뒤에는 중외일보와 조선일보 대구지국에서 기자로 일했고, 1930년에는 ‘이활’이라는 이름으로 첫 시 &amp;lt;말&amp;gt;을 조선일보에 발표했다. 이 시기는 훗날 교보생명을 세우는 신용호에게도 영향을 주어 독립운동 자금 지원과 교육 사업 구상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알려져 있다.&lt;br /&gt;
&lt;br /&gt;
1930년, 이육사는 조선일보 지면을 통해 생애 첫 시 「말」을 발표하며 문단에 모습을 드러냈다. 1월 3일자 조선일보 7면 하단에 실린 이 짧은 작품에서 그는 매질에 지쳐 쓰러질 것 같은 말이지만 새해에는 다시 우렁차게 질주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이 작품이 바로 그와 조선일보의 첫 연결고리였다.&lt;br /&gt;
&lt;br /&gt;
=='''중외일보 대구지국'''==&lt;br /&gt;
1929년 6월 [[장진홍_1895]] 의거 관련 혐의로 복역 후 1930년에 출소한 이육사는 곧바로 언론계에 투신했다. 그는 시 발표 직후 중외일보(中外日報) 대구지국에서 기자로 일하기 시작했다. 중외일보는 1926년 조선중앙일보가 제호를 변경하여 창간된 신문으로, 1931년까지 발행되었다. 이육사가 활동하던 시기는 일제강점기 언론 탄압 속에서도 민족의식을 고취하려던 분위기가 남아있던 때였다. 지방지국 기자로서 지역 사회의 현안을 취재하고 보도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기간의 활동은 그가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사회 현실에 대한 인식을 심화하는 데 기여했다.&lt;br /&gt;
&lt;br /&gt;
=='''조선일보 대구지국'''==&lt;br /&gt;
중외일보에서 근무한 뒤, 이육사는 1931년 8월 조선일보 대구지국으로 자리를 옮겼다. 일제강점기 지방의 신문 지국은 단순한 연락소가 아닌, 지방 취재와 기사 송고의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이육사는 이곳에서 현장 기자로서의 전문적인 경험을 쌓았다. 조선일보에서 자신의 이름(필명)을 걸고 처음으로 쓴 기사는 1932년 초에 연재되었다. 첫 기사인「대구의 자랑 약령시의 유래」는 1932년 1월 14일부터 네 차례에 걸쳐 연재되었다. 이 기사를 쓸 때 그는 본명 대신‘육사생(肉瀉生)’이라는 독특한 필명을 사용했다. '육사'라는 필명이 여기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으며, 이는 그의 상징적인 수인(囚人) 번호(264)와 연결되는 '이육사'라는 이름의 유래 중 하나로 간주되기도 한다. 이 기사는 대구의 대표적인 전통 시장인 약령시의 역사와 유래를 소개하는 향토색 짙은 글이었으며 이육사가 기자로서 대구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lt;br /&gt;
&lt;br /&gt;
[[파일:이육사기사.jpg|500픽셀|섬네일|center| 이육사가 조선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근무하면서 쓴 1932년 1월 14일 자 ‘대구의 자랑 약령시의 유래’ 기사. ‘육사생’이란 필명 사용. ⓒ 조선일보]]&lt;br /&gt;
&lt;br /&gt;
그는 스포츠 기사에서도 민족적 정서를 드러냈다. 1932년 3월 6일과 9일자 스포츠란에서 「대구 ‘장’ 연구회 창립을 보고서」라는 글을 연속으로 기고하며 이번에는 ‘이활(李活)’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여기서 그는 조상 대대로 이어오던 우리 겨레의 전통 놀이 ‘장치기’를 소개하며 경기 방식뿐 아니라 점수 계산 용어까지 온전히 우리말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더 나아가 이 놀이를 세계 농민 사회에까지 널리 보급하자고 주장했다.&lt;br /&gt;
&lt;br /&gt;
그는 1934년 무렵 조선일보로 다시 합류했고, 이후에도 꾸준히 조선일보 지면에 글을 남겼다. 1930년대 후반에서 신문이 폐간되기 직전인 1940년까지 발표된 글들은 다양했다. 5회 연재된 「노신 추도문」(1936년 10월 23~29일자), 「문외한의 수첩」(1937년 8월 3~6일자, 3회), 「황엽전」(1937년 10월 31일~11월 5일자, 4회), 「전조기」(1938년 3월 2일자), 그리고 1940년 발표된 「계절의 오행」 등이 대표적이다.&lt;br /&gt;
&lt;br /&gt;
=='''타임라인으로 보는 이육사의 기자 발자취'''==&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v2%3A2PACX-1vScyeelknnBUflE4gCcqr0d_p4jIpl00AVBmBzhC5cgKY8GPsH4h-JZmzezN5VoQTKsJGw76vWgsA7O&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width=100%25&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대구(大邱)의 자랑 약령시(藥令市)의 유래(由來)'''=&lt;br /&gt;
대구(大邱)의자랑&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의유래(由來)&lt;br /&gt;
&lt;br /&gt;
대구지국(大邱支局) 육(肉) 사(瀉) 생(生)&lt;br /&gt;
&lt;br /&gt;
대구의자랑이 무엇이냐?고 뭇는사람이 잇스면 지금사람들은아이어룬할것업시 대구능금(평과(苹果))을말할것이다 그러나 대구능금은 최근의 한명산물로서완전한 자랑의자위를 점령할수는업는것이다 여긔서우리는중학교지리교과서(중학교지리교과서(中學校地理敎科書))에도잇는대구의유명한약령시(연령시(燕令市))를자랑으로들어놋코그에대한력사적유래를먼저아라보자&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의사적유래(史的由來)&lt;br /&gt;
&lt;br /&gt;
대구의 약령시는 일년얼차의정긔시장으로서 그시장에 집산되는 산물은 맛치『도루고』(토이기(土耳其))나『코—카쓰』(고가삭(高加索))나중앙아세아(중앙아세아(中央亞細亞))내외몽고(내외몽고(內外蒙古))등지에서 일년 일차혹이차식 열니는 모피물(모피물(毛皮物))의시장과가티대성황을일우나 이상에말한 각지의시장은인류사회의생활형태가차차목집함을따라필요한물품을서로서로밧구고저일정한장소와시일에모히는말하자면물물교환(물물교환(物物交換))시대로부터교통의관계라는지긔후의관계라든지또는일반사희생활의형태가오히려아직까지녯날의그것을면치못하고현대자본주의국제간의무역관계(무역관계(貿易關係))가극도로발달된 오날까지에 원시경제(원시경제(原始經濟))를 연구하는학자들의 연구재료가 되는것은휴미잇는 사실이지만은 대구의약렁시는 물품의집산과 교환의량식이 그와방불하여도 일홉부터 약시(약시(藥市))가아니고 약렁시(약령시(藥令市))란령(영(令))자에대하야우리는직각적으로 이시장의긔원은엇던권력(권력(權力))의 지배(지배(支配))맛해일게된것을 알수가잇다그러면 이약렁시가 처음시직된것은 언제부터인가 그야말로중학교교과서에까지『고래(고래(古來))로유명』이라고만씨여잇고 적확한년대를 쓰지안엇슴으로 대담하게 그년대를 내어노을수는업스나 비교적정확한수자를 조사한대로쓰면 서력일천륙백오십팔년(이조개국이백육십팔년효종조(李朝開國二百六十八年孝宗朝))거금이백칠십 사년전부터개시하게 되엿다고한다 그때야말로 조선을팔도(팔도(八道))에 닌후아노코 다시칠십일주로 난호아노흔 경상도의 정치적수부(수부(首府))도대구려니와 경상도(경상도(慶尚道))를둘너 남부조선각지는 산수명랑하고긔후온화하야각색약초(약초(藥草))의배양에지질이알맛기도하고 교통도편의하야(그때로보아서는)물산의집산에최적의지대도 대구엿스며 그때야말로임진병란(임진병란(壬辰兵亂) 이끗을막고모든볼회와 시설이 차자정돈뇌고발전을 보이며따라황실중심(성실중심(星室中心))으로끄으려는당시의위정사(위정자(爲政者))들은□□□□조금이라도 관계잇는 물품이면무엇이나물론하고 먼저진상(진상(進上))이란일흠아래최상의생산품을골너 서울도보내고 일반백성이먹고 입고쓰게되는 것이다그리고엇던 계□을물는하고병업시일생을 살수도업는것은 생리상자연의 리치엄으로 일국의지존(지존(至尊))인왕(왕(王))도병마의무서움은면치못 하는것이다 그래서황실에서일년동안쓸 약품을이곳에서 구하고저 국가의명령으로개시케한것이 오날날 우리가보고듯고 하는약령시의 처음이다그때는 약령이서면 감사(감사(監使))(현도지사(現道知事))가약재를골다봉하야중앙 정부 사약원(중앙정부사약원(中央政府司藥院))에 보낸후에 팔도에서모혀든 약재를일반 약국(약국(藥局))이사서완조선안의병든사락들이 그해그해의 치료를하게다엿다고한다(속(續))&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와경기(景氣)(이(二))&lt;br /&gt;
&lt;br /&gt;
대구지국육(大邱支局肉) 사(瀉) 생(生)&lt;br /&gt;
&lt;br /&gt;
【대구(大邱)】대구의약령시(약령시(藥令市))는다른상품시장에서는볼수업는특수한 유래를가지고 발달하여온만큼 지방의정청에서도일년춘추두차레에정긔적으로모여드는 지방생산자들을 위하야지방경제발달을 조장하고저 계획을세우고 제도의개선과 개시(개시(開市))긔간의 연장등 모든방면으로힘을써 보앗스나 모다뜻과갓지못하고 서구(서구(西歐))렬국의동양(동양(東洋))침입으로의학(의학(醫學))약학(약학(藥學))등학문이발달됨에침(침(針))은주사(주사(注射))로변하고바쇠는『메—쓰』로화하는바람에한약(한약(漢藥))의 가치는 전연그권위를일케되면서 대구의 약령시도차차워마하야 매매되는 약재료도주러지기만 하든중『후—버』겅긔가세계의주식시장(주식시장(株式市場))을혼란케하듯이 대구의 약령시장도 대타격의한때가 지나가게되엿스니 그는무엇일가?지금부터이십이년전(신해년(辛亥年))에중산손문 중산손우(中山孫又))씨혁명으로대청황실)대청황실(大清皇室))을넘어지면서부터는 청황실이 조선정부(조선정부(朝鮮政府))에의뢰하야사가든약품은실로막대한것이엿스나전부그매도의길이 막히게된 여러가지조건밋헤매매가 축소하여 전성시대의반도못되게 되얏다 그나마최근에는전주(전주(全州))대전(대전(大田))진주(진주(晋州))원산(원산(元山))등지에군소시장이개설되여이를약령시로밀미암아대구에떠러지는돈은매우감소되엿스나아직도령시가개설되면동성정입구(동성정입구(東城町入口))로부터남성정입구(남성정입구(南城町入口))까지 십여정(십여정(十餘町))에 처당재(당재(唐材))초재(초재(草材))등삼백여종의 약품도만흐려니와 그근처에림시려인숙(임시여인숙(臨時旅人宿))이무수히설치되고 포백기타 일용생활에필요한물품이면 평상시의 멧배나더잘팔리는 호경긔를 연설한다 그리하야 촌양빈들의낫서른돈을 먹어보겟다는 술집색시들까지 헐직한인조견으로 봄을싸고 도스리고안저서 열분애교를 술잔에담어보내는것도『넌센스』한징면인지는모르겟다마는 흡객술(흡객술(吸客術))이 졸열한다기보니 시대에뒤처진 기생들은본바닥에 거주하는손님들은『카페—』붉은녀급(여급(女給))들의자주(자(紫))빗유혹에다 뛰우고 음력과세를압서초조하는중 때맛침사재(시재(時哉))시재를불러 시내 각요리집 극장할것업시 대만원의성황을 이루는것은 그럴듯도한일이지마는 여긔에는 순진한산간에서 새노래물소리에 거치른세상일은 □도꾸지못한 산아이와도갓치 힘드려작만한 약재를도시구경겹 하여와와서판돈은『메리·픽포—드』안일망정어엽분녀자를맛나 잇는대로 다쓴후에명년의약령시 개설되기를 손을꼬바기다려서 와서보면 그녀자는어느하늘밋헤서 잇든남자와 단꿈을꾸는지 알길조차 바이업고작년구든맹서가 찬□(회(灰))처럼살어잘때화낌에 한잔무어라 먹자부어라 먹자하는연긔가튼 경긔는 견양경긔(견양경기(犬養景氣))이상으로 흥성거린나 그러기에여긔에최근오개년간의매매고외출동인원수와□적어본다&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와경기(景氣)&lt;br /&gt;
&lt;br /&gt;
(삼(三))&lt;br /&gt;
&lt;br /&gt;
대구지국(大邱支局) 육(肉) 사(瀉) 생(生)&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의현재(現在)&lt;br /&gt;
&lt;br /&gt;
약령시의 밋치는바 경제관계는실로 다방면으로 황금왕시대를연줄하며 발달하여오는만큼 녯날에는 조선안에서 생산하는재료가 매매되는이외에 당재(당재(唐材))라고하야 증국으로부터금석지재(금석지재(金石之材))가만히수입되는외에는 벌로볼만한것이 업섯스나 교통의발날노 국제무역이빈번하야지게된 오날에는일본,중국,몽고등시는말할것도 업거니와동부『아푸리카』의찌는둣한열대지방에서 생산되는 소철(소철(蘇鐵))을비롯하야 황막한시베리아의천지를 내집가티 도라다니는웅담(웅담(熊膽))까지모혀들게되는것은이약정□를통해본□류문와사의 한로막이라고도 할수잇는것이다 이러케 약령시에모혀드는약재료가 교통의 혜택을임어거의 파멸에 갑가운약령시가새로히왕성하게되자 지금이야말로 시장의 량입구에 마천두(마천루(摩天樓))가튼『리—딍』(유도탑(誘導塔))을세우고『일미네—숀』(대전식(大電飾))사이에 흥긔청긔가나붓기며 지방으로부터 모혀드는 생산자들을끄려드리는것은 확실히 일반상업전술의발달을의미한다 그러나 원래이시장는 약을재료그대로가지고와서 매매케 되는것이 특질의엿스나 지금은천일령신환,조고약과어을빈만병수까지 시장목판에서 인긔를집중하고잇는것은 아모리보아도 조뵈 화지관는 사실이다 이가튼변천가운데도 특긔하야들것은 령시의개설의래 장구한년월을 지남에따라 그본래의 성질에배반하야 부업적상인게놉을 령시의주요구성 요소로하게되고 부터는 경상도내지방에밋치는 양령시의영향은 일반 소비경제상에크다란 파문을그리게되여 약텽시본래목적인 약새생산에 효과가적게되고 시장내의 불당중개인으로말미암아 일사 평판이조치못하엿슴으로 이러한 페풍을 일소하기위하야 지금부터이십여년선에 생긴 한약상조합한약상조합(漢藥商組合))과칠년전전주(전주(全州))에양령시가처음뇌려고할때에 대함키위하야생긴약령&lt;br /&gt;
&lt;br /&gt;
흉회(약령시진흥회(藥令市振興會))가지금은약령시번영회(약령시번영회(藥令市繁榮會))로변경되여 최선의로력을 다하야오며 감독한결과 지금은어느정도까지 통제가되여간다고한다 그리하야 지금이야말로동력(동력(動力)의위력밋해거대한공장뉼이날로늘어남조선의『메드로포리쓰』를만드려는 대구현네과학(현대과학(現代科學))의태반(태반(胎盤))가튼대구의한복판에서 조선의 자랑이라고도할수잇는원시시장(원시시장(原始市塲))의한개가 벌서오늘날의 □제권내에발을듸듸고장차을래일의세계를향하야나가는것은홍미김흔일이다(속(續))&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의유래(由來)&lt;br /&gt;
&lt;br /&gt;
(사(四))&lt;br /&gt;
&lt;br /&gt;
대구지국육사생(大邱支局肉瀉生)&lt;br /&gt;
&lt;br /&gt;
삼백년동안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복잡다단한 필연적 과정을경과하여오며 자본주의 경제의현계단에서의연히그존재가필요하게된대구약령시의발달사는완연히금일경제의발달사(발달사(發達史))라고보지안을수업다 그럼으로여긔특긔할것은 그성실상 순박함이짝이업는 죽말하면 매매하는시람들의아관박대(아관박대(雅冠博帶))라든지 생산품 포장가튼것까지도(물론변천된것도만흐나)삼백년전의 녯날을 그려볼만한순박한이서장에도현대금융자본의붉은혀(설(舌))는내밀기시작하엿다지금부터 시년전엇던 외래지본벌이자긔소유의따에시장의위치를옴기려고 현위치는 도시교통상불편하다는구실로써다방면으로술책을써보앗스나현장소에서긔십년간상권을 잡고잇는 대가들의명렬한반대로그만뜻을일우지못한일도잇다그러면내구약령시를 지배하고 따라전조선의한약상계에우이를삽고잇는 이는누구일가여긔는 누구보다도 김홍조(김홍조(金弘祖))씨를아침수가업다씨는 전선적으로보아 제이위가기를설허할만하다고하며그다음순서업시치면 신태문(신태문(申泰文))김종수(김종수(金宗洙))지이원(심의원(沈義元))리치욱(이치욱(李致旭))두병은(두병은(杜炳殷))김내명(김내명(金乃明))방규진(방규진(方圭鎭))제씨를칠수잇고 그중에도 두병은(두병은(杜炳殷))씨가튼이는여러대를나려오며 사업에 종사하야 그문패는 실로일백오십년 이란력사를가저 대구의 동인당(동인당(同人堂))이란 일홈이잇다&lt;br /&gt;
&lt;br /&gt;
북평(北平)의동인당(同仁堂)은팔백년(八百年)의역사(歷史)가잇슴)그래서 대구의약텽시인긔는 이들의손에 좌우된다하여도과언이아니며 금년의약가는 금재금(김재금(金再禁))에따르는 제불가의폭등과 일중사변(일중사변(日中事變))의영향과중국은가(중국은가(中國銀價))의변동으로인하야소위당재(당재(唐材))는 폭동하엿고 조재(초재(草材))에잇서서 도변조로올은것이 불소하다는바 금후에드 더욱시세는오를무양이라고한다 여긔에당초재를물론하고 시세를 적어보앗스면좃켓스나 약명이한업시만코 날로변동이만흠으로 약렁시세표가 잇다는것만말한후에 특수한고저를보이는 몃가지를 적어보면 당재의원상산약(원상산약(元常山藥))은작년에는 매근에일원륙십전하든것이 금년은 단오십전에폭락되여 이십년레에 처음보는헐가라하며 산수유(산수유(山茱萸))는작년에 매근사십전하든것이 금년은십전에폭락되고 토사자(토사자(兎絲子))가튼것도 작년사오십전에매매되든것이 금년은십전에 폭락되여 자방생산자의 저울(형(衡))에 예긔치못한 광란(광란(狂亂))을보이고잇다고한다&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의장래(將來)&lt;br /&gt;
&lt;br /&gt;
그러면 다음날의약텅시는 엇더케될것인가?이문제는 결코예언자의 심심푸리와가튼 헛된소리는아니다적어도현세계의경제관계 와그에따라 일어나는모든사정이 쇄신된다면 모르지마는현계단의 경제제도가 그량존속되는한에는 세계적으로 한약에대한연구가왕성하여지고한약의권위가나날이놉하가는만큼약텅시의장래는압흐도세계에그일홈이놉하진다고일부인사들이말하고잇는것이그다지허언이아닐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지금은시장의형세가 산만하게생산자가 중개인울거처 도매상에게 팔게되여중간에책취를 당하게된다 하여도 장래는 현시장의대자벌들이주식(주식(株式))이나 혹은학자(합자(合資))의형식으로시장을상설하고도매와 개인생산자사이에 직접취인하게되여 지방경제의 윤택과약초생산의 장려의 약텅시본래의목적을 소개하려는것이 당업자간의 의도(의도(意圖))인 동시에매우현명한 의견인듯하다 그래서참된 대구자랑을 만들고조선의자랑을만들자——(완(完))&lt;br /&gt;
&lt;br /&gt;
=='''주요 내용 요약'''==&lt;br /&gt;
유래: 대구의 자랑으로 능금(사과) 대신 약령시를 들며 그 유래를 설명한다. 약령시는 1년에 한두 번 열리는 정기 시장이며, 조선시대 효종(1658년) 때 국가 명령(令)으로 개시된 것이다. 당시 경상도의 정치적 수부였던 대구는 약초 재배에 적합한 기후와 편리한 교통으로 물산 집산의 최적지였다. 궁중에서 쓸 약품을 이곳에서 구하기 위해 감사가 약재를 골라 사약원(司藥院)에 진상한 후, 팔도 약재를 일반 약국에서 구매하여 조선 전역의 환자 치료에 사용하게 한 것이 시초이다.&lt;br /&gt;
&lt;br /&gt;
쇠퇴와 현황: 서구 열강의 동양 침입과 함께 의학 및 약학이 발달하며 한약의 권위가 약해졌고, 약령시는 점차 쇠퇴하였다. 특히 22년 전(1915년경) 신해혁명으로 청황실이 무너지면서 조선 정부에 의뢰하던 막대한 약품 매도 길이 막힌 것이 큰 타격이었다. 최근 전주, 대전 등지에 군소 시장이 개설되어 대구 약령시의 경제적 이익이 감소했지만, 여전히 시장 개설 시에는 많은 약재가 모이고(당재, 초재 등 300여 종), 인근 상권에 호경기를 가져오는 것이다. 당시 약령시의 주요 구성 요소가 부업적 상인 계층으로 변질되고 불량 중개인 문제가 발생하자, 한약상조합과 약령시진흥회(현재 약령시번영회)가 결성되어 통제를 시도하고 있었다.&lt;br /&gt;
&lt;br /&gt;
약재 가격 변동: 당시(1937년) 일중사변(日中事變)의 영향과 중국 은가 변동으로 당재(唐材) 가격이 폭등했지만, 일부 국내 초재(草材)인 산약(山藥), 산수유(山茱萸), 토사자(兎絲子) 등은 폭락하여 생산자들에게 광란(狂亂)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lt;br /&gt;
&lt;br /&gt;
=='''분석 및 특징'''==&lt;br /&gt;
역사성 강조: 대구 약령시를 단순한 시장이 아닌 '국가 명령(令)'으로 시작된 역사적 시장으로 규정하며, 정치적, 지리적 배경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시대적 배경 반영: 서양 의학의 도입, 중국 혁명(청 황실 붕퇴), 당시 국제 정세(일중사변, 중국 은가) 등이 시장의 흥망성쇠에 미친 영향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여 식민지 시대의 경제 상황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시장 변화: 전통적인 약재 거래 방식에서 완제품 거래가 늘어나는 등 근대화에 따른 시장의 변화 양상도 포착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원시 시장'의 현대적 생존: 대구 약령시를 '조선의 자랑'이자 '원시 시장' 중 하나로 보면서도, 현대 자본주의 경제권에 발을 디디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평가하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대구(大邱)장연구회(硏究會) 창립(創立)을보고서'''=&lt;br /&gt;
구지국(大邱支局)&lt;br /&gt;
&lt;br /&gt;
이활(李活)&lt;br /&gt;
&lt;br /&gt;
민중(民衆)의보건운동(保建運動)은 요사이각계인사(各界人士)들의 크다른관심(關心)거리로어듸서 엇더케 무슨방법(方法)으로『억세인조선(朝鮮)』을건설(建設) 할수잇슬가 함에연구(硏究)를거듭하게되엿다회상(回想)하면 조선(朝鮮)에새로운운동경기(運動競技)가 수입(輸入)된지도 일반문화(一般文化)와갓치 벌서 반세기(半世紀)란역사(歷史)를가지고잇다 그중(中)에는 야구(野球)·정구(庭球)·축구(蹴球)·농구등(籠球等)을비롯하야 유도(柔道)·격검(擊劒)·권투등(拳鬪等)모든경기(競技)가들어와서 장족(長足)의진보(進步)도하엿스러니와 세계적무대(世界的舞臺)를향(向)하야 진출(進出)한선수(選手)도업지안타 그러나 그것은극소수(極小數)인동시(同時)에 지금(至今)까지의 조선(朝鮮)의운동경기(運動競技)는 한갓도회(都會)를중심(中心)으로잘어왓다 물론(勿論)다그럿타는것은아니지만은 현하운경기(現下運競技)그것은 조선(朝鮮)이나 혹(或)은다른나라에서라도 학교(學校)를중심(中心)으로발전(發展)되여오는만큼 교내(校內)의『스포—스맨』들은 완연(宛然)『떼파—트』진열장(陳列場)속에서 고객(顧客)을호리는『마네킹』처럼 상품화(商品化)한교육제도하(敎育制度下)에서 달큼하게 그상품(商品)의가격(價格)을놉혀주엇스며 그학교(學校)를버저나와 실사회(實社會)에취직(就職)을하면 역시(亦是)그와갓튼『마네킹』노릇을하여왓다 이러는동안 조선(朝鮮)의운동경기(運動競技)는 그발생(發生)으맹아(萌芽)가 힘것생장(生長)하기도전(前)에현제도(現制度)의 독아(毒牙)에여지(餘地)업는약관(躍關)을당(當)한절대(絕對)의원인(原因)과 그밧게사회(社會) 경제(經濟) 정치적제정세(政治的諸情勢)의착잡(錯雜)한모순(矛盾)이 너무나철업시이운동경기(運動競技)의발달(發達)까지 조해(阻害)하여왓다그러나 노력(勞力)과인내(忍耐)는갑이잇서이때까지외래품(外來品)이라면 아무비판(批判)도업시 실행(實行)하야오든우리도야구(野球)의전원(全員)이일시(一時)에활약(活躍)할수업는폐(廢)와정구(庭球)의시후(時候)에대(對)한불편(不便)과『꼴프』의귀족적(貴族的)인것등(等) 모든운동(運動)의단점(短點)만을빼고 장점(長點)만을취(取)하야 조선적운동(朝鮮的運動)을창출(創出)하려는이이 경성(京城)서는중앙체육연구소(中央體育研究所)가생(生)기고 금반대구(今般大邱)에서『장』연구회(硏究會)가생(生)기게된것이다&lt;br /&gt;
&lt;br /&gt;
장이란북조선(北朝鮮)의궁벽(窮僻)한지대(地帶)의인사(人士)들은 잘알지못할는지모르나이장만은 오래동안 우리조선(朝鮮)으로부터 그들의자손(子孫)인우리들에게부(傅)하아은 국기(國技)의하나이다물론(勿論) 국기(國技)란단순(單純)한의미(意味)로서만필자(筆者)가그것을추장(推獎)하는것은인니다 딸아서 운동(運動)의영향(影響)이문화창조(文化創造)에잇더한역할(役割)을한다는것을새로히논(論)하려는것도안니다&lt;br /&gt;
&lt;br /&gt;
대구지국(大邱支局) 이(李) 활(活)&lt;br /&gt;
&lt;br /&gt;
그러나일반문화(一般文化)가 그지리(地理)와풍토(風土)에영향(影響)되는바만흔것과가티운동경기(運動競技)도 또한그러히다 그것은『필랜드』사람들이『스켓틩』을잘하는것과『낙위(諾威)』사람의『스키-』를잘하는것이라든지『정말(丁抹)』사람의체조(體操)기튼것이 이점(點)을잘실증(實證)하고잇다 그러면조선(朝鮮)에는 조선적(朝鮮的)인자연세력(自然勢力)도 그러하러니와 더욱이 금일(今日)의사회적경제적(社會的經濟的)모든조건(條件)이 조선인(朝鮮人)에적합(適合)한것이안니면 안될것으다 그래서 최소(最少)의노력(努力)으로최대(最大)의 효과(効果)를발현(發現)치안으면안될것이다&lt;br /&gt;
&lt;br /&gt;
아에우리는생각한다 오날날까지조선(朝鮮)에수입(輸入)된운동경기(運動竸技)의종목(種目)은그대(臺)를매거(枚擧)키난(難)하나 그중(中)한가지도 우리에게 적합(適合)한것이업고 더욱이농민(農民)들에게 추장(推獎)할만힌운동(運動)은업섯다 그러나이장만은 오날날까지 그들농민(農民)의손에서전(傳)해왓다 그러면서도그진정가치(眞正價値)를돌낫든것이 오날이야 사계(斯界)의권위제씨(權威諸氏)가 적년연구(積年硏究)를거듭하야 발표(發表)한결과(結果)를보면 운동(運動)으로시 제일망각(第一忘却)치못할생리학상(生理學上)으로보아 전체(全體)가균형적(均衡的)으로활동(活動)되고 경제적(經濟的)으로도 기구(器具)를작만히는데 돈이들지안코 어느곳에서든지『장채』를직만하고『장방울』을다드무면논바닥에서나 밧기운데서라도 할수잇는농민본위(農民本位)의운동(運動)이라고한다 그리고다른운동경기(運動競技)가티『씨—슨』이잇는것도안니고 춘하추동(春夏秋冬)어느때라도 되는경기(競技)인즉 농번기(農繁期)는 못히드라도 농한기(農閑期)갓트면 그들의육체(肉體)를 하련(鍜鍊)하는데 매우적당(適當)한것이다 수(數)만흔경기중(竸技中)에능(能)히경제조건(經濟條件)이 어느정도(程度)까지용인(容認)한다하여도 그들의게생전(生前)듯자못하든말로『핸드뽈』이니『꼴』이니『라인』이니하여보아도 결(决)크그들에게취미(趣味)가잇슬이(理)가만무(萬無)하고취미(趣味)가업스면 그들에게발전(發展)될이(理)도만무(萬無)한것이다 그러나『장』연구회동인(硏究會同人)들의말을들으면경기(竸技)에계산(計算)하는용어(用語)까지도순조선(純朝鮮)말로한다는것의경하(慶賀)할일이다 이『장치기』를국기(國技)로서추장(推獎)하야세계(世界)에널니선전(宣傳)하는것도좃치만은먼저안으로그들이이국기(國技)를직혀왓는만큼 그들에게조직적(組織的)으로보급(普及)하라 그리서조선농민(朝鮮農民)의경기(競技)를만들고 따라 세계(世界)의농민대중(農民大衆)에게 보급(普及)식하라!그래서『장』연구회(硏究會)의본래(本來)의사명(使命)을다하기를바란다(종(終))&lt;br /&gt;
&lt;br /&gt;
=='''주요 내용 요약'''==&lt;br /&gt;
배경: 조선에 수입된 야구, 축구, 유도 등 서양식 운동 경기는 학교 중심, 도시 중심으로 발전하며 '상품화'되었고, 농민 등 대중에게 적합하지 않은 것이다.&lt;br /&gt;
&lt;br /&gt;
'장치기'의 가치: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 **'조선적 운동'**을 창출하려는 노력으로 경성에서는 중앙체육연구소가, 대구에서는 '장' 연구회가 생긴 것이다. '장'은 조선의 국기(國技) 중 하나로, 농민의 손에서 전해 내려온 것이다. 생리학적으로 전신 균형 활동이 가능하고, 경제적으로 기구가 필요 없어 비용이 들지 않으며, 논바닥이나 밭에서도 가능하여 농민 본위의 운동이라고 한다. 계절을 타지 않고 농한기에 육체 단련에 매우 적합하며, 경기 용어까지 순 조선말을 사용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연구회의 사명: 연구회 동인들에게 '장치기'를 국기로 추장(추천)하여 세계에 선전하는 것도 좋지만, 먼저 이 국기를 지켜온 농민들에게 조직적으로 보급하여 '조선 농민의 경기'를 만들고 나아가 세계 농민 대중에게 보급해야 한다는 사명을 부여하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분석 및 특징'''==&lt;br /&gt;
민족주의적 시각: 서구 문물인 스포츠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한국의 전통 운동인 '장치기'의 토착적, 민족적 가치를 재조명하려는 의도가 뚜렷한 것이다.&lt;br /&gt;
&lt;br /&gt;
대중성/실용성 강조: '장치기'의 장점을 경제적 부담 없음, 장소 제약 없음, 계절 제약 없음, 쉬운 용어 등 농민 대중에게 적합한 실용성에 초점을 맞춰 설명하고 있다.&lt;br /&gt;
&lt;br /&gt;
'마네킹' 비유: 현대 교육 제도가 배출하는 스포츠맨을 '떼파-트 진열장의 마네킹'에 비유하며, 당시 상업화된 교육 및 스포츠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드러내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노신추도문(魯迅追悼文)'''=&lt;br /&gt;
(일(一))&lt;br /&gt;
&lt;br /&gt;
이(李) 육(陸) 사(史)&lt;br /&gt;
&lt;br /&gt;
『아(阿)Q정전(正傳)』의 작자(作者)로서 세계적작가(世界的作家)이며 중국신문학(中國新文學)의 최고봉(最高峰)인 노신(魯迅)이지난십구일(十九日) 오전오시(午前五時)에상해(上海)에서 숙아(宿疴)로 영면(永眠)하엿다는 실음(實音)이전(傳)한지 삼일(三日)되는날에 우리는 간단(簡單)한일문(一文)을 비러 삼가추도(追悼)의뜻을 표(表)하거니와 만년(晩年)에그의 정치적불우(政治的不遇)로인(因)하야 문학자(文學者)로서의 성명(聲名)조차가 우리에게 널니퍼지지못한것을 더유감(遺憾)으로생각한다.　　　　 (일(一) 기(記) 자(者))&lt;br /&gt;
&lt;br /&gt;
일구삼이연육월초(一九三二年六月初) 어느토요일(土曜日)아츰이엿다 식관(食舘)에서나온 나와M은 네거리의 담배가가에서조간신문(朝刊新聞)을 사서들고 근육신경(筋肉神經)이떨니도록 굴근활자(活字)를 함숨에나려읽은것은 당시중국과학원부주석(當時中國科學院副主席)이요 민국혁명(民國革命)의 원로(元老)이든양행불(楊杏佛)이 남의사원(藍衣社員)에게 암살(暗殺)을당(當)하엿다는 기사(記事)이엿다.&lt;br /&gt;
&lt;br /&gt;
우리들은 거리마다 삼엄(森嚴)하게늘어선 불란서공무국(佛蘭西工務局) 순경(巡警)들의예리(銳利)한눈초리를 등으로하나 갓득늣기면서 여반로(侶伴路)의 서국(書局)까지을동안은 침묵(沈默)이 계속(繼續)되엿다&lt;br /&gt;
&lt;br /&gt;
문(門)안에 들어서자마자 편집원(編輯員)R씨(氏)는 우리들에게 다음과가튼말을 들여주엇다.&lt;br /&gt;
&lt;br /&gt;
중국좌익작가연맹(中國左翼作家聯盟)의 발안(發案)에의(依)하야 전세계(全世界)의 진보적(進步的)인 학자(學者)와 작가(作家)들이 상해(上海)에모혀서중국(中國)의 문화(文化)를 옹호(擁護)할대회(大會)를그해팔월(八月)에 갓게 된다는것과이에 불안(不安)을 늣기는 국민당통치자(國民黨統治者)들이 먼저 진보적작가진영(進步的作家陣營)의 중요분자(重要分子)인 반재년(潘梓年)(현재남경유폐(現在南京幽廢))과 인제는 고인(故人)이된 여류작가(女流作家) 정영(丁玲)을 체포(逮捕)하여행방(行方)을 불명(不明)케한것이며 여기동정(同情)을 가지는 송경령여사(宋慶齡女史)를 중심(中心)으로한 일련(一聯)의 자유주의자(自由主義者)들과 작가연맹(作家聯盟)이 맹렬(猛烈)한 구명운동(救命運動)을한사실(事實)이며 그것이 국민당통치자(國民黨統治者)들의 눈쌀에 거슬려서 양행불(楊杏彿)이 희생(犧牲) 된것과 그외(外)에도 송경령(宋慶齡) 채원(蔡元) 배(培) 노신등등(魯迅等等) 상해(上海)안에서만삼(三) 십명(十名)에갓가운 지명지사(知名之士)들이 남(藍) 의사(衣社)의『뿔랙·리스트』에 올라잇 다는것이엿다.&lt;br /&gt;
&lt;br /&gt;
그리고 그뒤삼일(三日)이 지난후(後)R씨(氏)와 내가탄자동차(自動車)는 만국빈의사(萬國殯儀社)아페다엇다,간단(簡單)한 소향(燒香)의예(禮)가 끗나고도라설때 젊은두여자(女子)의수원(隨員)과함게드러오는송경령여사(宋慶齡女史)의일행(一行)과가티 연회색(軟灰色)두루막에 검은『마괘아(馬掛兒)』을 입은중년(中年)늙은이생화(生化)에 싸인관(棺)을 붓들고 통곡(痛哭)을하든그를 나는문득 노신(魯迅)인것을알엇스며 엽헤섯든 R씨(氏)도 그가노신(魯迅)이란것을 말하고난 십분(十分)쯤뒤에 R씨(氏)는나를 노신(魯迅)에게소개(紹介)하여주엇다&lt;br /&gt;
&lt;br /&gt;
그때노신(魯迅)은 R씨(氏)로부터 내가조선청년(朝鮮靑年)이란것과 늘한번대면(對面)의기회(機會)를가지려고 햇드란말을듯고외국(外國)의선배(先輩)압히며 처소(處所)가 처소(處所)인만치 다만 근신(謹愼)과공손(恭遜)할뿐인나의손을 다시한번 잡아줄때는그는매우 익숙하고 친절(親切)한친구이엿다&lt;br /&gt;
&lt;br /&gt;
아!그가벌서 오십육세(五十六歲)를일기(一期)로 상해시고탑구호(上海施高塔九號)에서 영서(永逝)하엿다는 부보(訃報)를바들때에 암연(暗然)한줄기 눈물을지우느니 엇지조선(朝鮮)의 한사람후배(後輩)로써 이붓을잡는나뿐이랴&lt;br /&gt;
&lt;br /&gt;
(이(二))&lt;br /&gt;
&lt;br /&gt;
이육사(李陸史)&lt;br /&gt;
&lt;br /&gt;
중국문학사상(中國文學史上)에남긴 그의 위치(位置)『아(阿)Q의 정전(正傳)을 다읽고낫슬때나는 아즉까지 아(阿)Q의 운명(運命)이걱정되여 못견듸겟다』고한『로망·로—랑』의 말과가티 현대중국문학(現代中國文學)의 아버지인 노신(魯迅)을&lt;br /&gt;
&lt;br /&gt;
이해(理解)하기 위(爲)해서는 우리는 먼저 아(阿)Q의 정전(正傳)을 이해(理解)하지안흐면 안된다 그러나 지금의 중국(中國)의 아(阿)Q들은 벌서『로망·로—라』으로하야금 그운명(運命)을 걱정할 필요(必要)는 업시되엿다실(實)로 수만흔 아(阿)Q들은 벌서 자신(自身)들의 운명(運命)을 열어갈길을노신(魯迅)에게서배웟다 그래서중국(中國)의 모든근로층(勤勞層)들은 남경로(南京路)의『아스필트』가자신(自身)들의 발미테 흔들리는것을늣기며 시고탑로신촌(施高塔路新邨)의구호(九號)로그들이가젓든 위대(偉大)한문호(文豪)의최후(最後)를애도(哀悼)하는마음들은 황포탄(黃浦灘)의붉은파도(波濤)와가티 밀려가고잇는것이다&lt;br /&gt;
&lt;br /&gt;
그럼으로 아(阿)Q시대(時代)를 고찰(考察)하여보는데따라서 노신정신(魯迅精神)의 삼단적변천(三段的變遷)과아울러 현대중국문학(現代中國文學)의 발전과정(發展過程)을 알어보는것도그를추억(追憶)하는의미(意味)에서 그다지 허무(虛無)한 일은아닐것이다,&lt;br /&gt;
&lt;br /&gt;
중국(中國)에는 고래(古來)로 소설(小說)이라는오늘날우리가 보는것과가튼 완전(完全)한예술적형태(藝術的形態)는 존재(存在)하지못햇다 삼국연의(三國演義)나 수호지(水滸誌)가아니면홍루몽(紅樓夢)쯤이잇섯고 다소(多少)의전기(傳記)가잇섯을뿐으로서 일반교양(一般敎養)잇는집자제(子弟)들은 과거제도(科擧制度)에 화(禍)를바더문어체(文語體)의&lt;br /&gt;
&lt;br /&gt;
고(古)&lt;br /&gt;
&lt;br /&gt;
문(文)만숭상(崇尙)하고백화소설(白話小說)가튼것은속인(俗人)의할일이라햐야나치아는하편소위문단(所謂文壇)은당송팔가(唐宋八家)와팔반(八般)의혼합체(混合體)인상성파(相城派)와사기당(思綺堂)과 원수원(袁隨園)의유파(流派)를따라가는 사륙변체문(四六騈體文)과황산곡(黃山谷)을본존(本尊)으로하는 강서파등등(江西派等等)이 당시정통파(當時正統派)의문학(文學)으로서 과장(誇張)과 허위(虛偽)와 아유(阿諛)로서 고전문학(古典文學)을 모방(模倣)한데지나지못하엿스며 새로운사회(社會)를 창생(創生)할하등(何等)의 힘도가지지못한것은 미루어알기도 어렵지안흔 분위기(雰圍氣)속에 중국문학사상(中國文學史上)에 찬연(燦然)한봉화(烽火)가 일어난것은일구일오년(一九一五年) 잡지(雜誌)『신청년(新靑年)』의 창간(創刊)이그것이다&lt;br /&gt;
&lt;br /&gt;
이것이처음발간(發刊)되자 당시(當時)『아메리카』에잇든호적지박토(胡適之博土)는『문학개량추의(文學改良蒭議)』라는『문학혁명론(文學革命論)』을일구일칠년신연호(一九一七年新年號)에 게재(揭載)하야진독수(陳獨秀)가 이에찬의(賛意)를표(表)하고 북경대학(北京大學)을 중심(中心)으로한 진보적(進步的)인교수(敎授)들이 합류(合流)하게되자 종래(從來)의고문가(古文家)들은 이운동(運動)을방해(防害)코저 가진야비(野卑)한 정치적수단(政治的手段)을 써도보앗스나 일구팔년사월호(一九八年四月號)에 노신(魯迅)의『광인일기(狂人日記)』란 백화소설(白話小說)이&lt;br /&gt;
&lt;br /&gt;
발(發)&lt;br /&gt;
&lt;br /&gt;
표(表)되엿슬때는 문학혁명운동(文學革命運動)은 실천(實踐)의거대보무(巨大步武)를옴기게되고 벌서고문가(古文家)들은 그추악(醜惡)한꼬라를 감주지안흐면안되엿다는것은 그후(後)얼마뒤에 노신(魯迅)이광동(廣東)에갓슬때에어&lt;br /&gt;
&lt;br /&gt;
떤흥분(興奮)한청년(靑年)은 그를마지하는문장(文章)속에『광인일기(狂人日記)』를 처음읽엇슬때 문학(文學)이란것이 무엇인지몰랏든나는 차차읽어나려가면서이상(異常)한흥분(興奮)을 늣겻다 그래서 동무를만나기만하면 곳붓들고말하기를——중국(中國)의문학(文學)은 이제바야흐로 한시대(時代)를 짓고잇다 그대는『광인일기(狂人日記)』를 읽어보앗는가 또거리를거러가면 길가는사람이라도붓들고 내의견(意見)을발표(發表)하리라고생각한적도잇섯다……』(노신재광동(魯迅在廣東))&lt;br /&gt;
&lt;br /&gt;
이문제(問題)의소설(小說)『광인일기(狂人日記)』의내용(內容)은 한개망상광(妄想狂)의 일기체(日記體)의소설(小說)로서 이주인공(主人公)은 실(實)로대담(大膽)하게또명확(明確)하게 봉건적(封建的)인 중국구사회(中國舊社會)의 악폐(惡弊)를통매(痛罵)한다 자기(自己)의 이웃사람은 물론(勿論)말할것도업고 특(特)히자기가정(自己家庭)을 격렬(激烈)히 공격(攻擊)하는것이다 가정(家庭)—가족제도(家族制度)라는것이중국봉건사회(中國封建社會)의 사회적단위(社會的單位)로서일반(一般)에열마나한 해독(害毒)을끼처왓는가.봉건적가족제도(封建的家族制度)는 고형화(固型化)한유교류(儒敎流)의&lt;br /&gt;
&lt;br /&gt;
종(宗)&lt;br /&gt;
&lt;br /&gt;
법사회관념하(法社會觀念下)에 당연(當然)히붕괴(崩壞)돠여야할것이면서 붕괴(崩壞)되지못하고 근대적사회(近代的社會)의성장(成長)에 가장근본적(根本的)인 장애(障碍)로되여잇는 날근도덕(道德)과 인습(因襲)을 여지(餘地)업시 통매(痛罵)햇다,이에『광인일기(狂人日記)』중(中)에 한절(節)을 초(抄)하면『나 는 역사(歷史)를 뒤적거려 보앗다 역사(歷史)란건 어느시대(時代)에나 인의(仁義) 도덕(道德)이란몃줄로 치더치덕씨여 저잇섯다 나는 밤잠도안자고 딍굴딍굴러가며 생각하여보 앗스나 겨우글자와 글자사이 에서『사람을먹는다』는 몃자 가쓰여잇섯슬뿐이엿다』&lt;br /&gt;
&lt;br /&gt;
이가티추악(醜惡)한 사회면(社會面)을폭로(暴露)한다음 오는시대(時代)의건설(建設)은 젊은사람들의손에 맛걱저야한다는것을암시(暗示)하면서 이소설(小說)의일편(一篇)은『어린이를구(救)하자』는 말로서끗을막엇다.실(實)로이한말은 당시(當時)의『어린이』인 중국청년(中國靑年)들에게는 사상적(思想的)으로는『폭탄선언(暴彈宣言)』이상(以上)으로 충격(衝擊)을주엇스며이러한작품(作品)이 백화(白話)로쓰여지는데 따라 문학혁명(文學革命)이완전(完全)히승리(勝利)의 개가(凱歌)를 부르게된공적(功績)도 태반(太半)은노신(魯迅)에 돌려야하는것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삼(三))&lt;br /&gt;
&lt;br /&gt;
이육사(李陸史)&lt;br /&gt;
&lt;br /&gt;
『광인일기(狂人日氣)』의다음 연속(連續)해나온작품(作品)으로『공을사(孔乙巳)』『약(藥)』『명일(明日)』『일개소사건(一個小事件)』『두발적고사(頭髮的故事)』『풍파(風波)』『고향(故鄕)』등(等)은모다 신청년(新靑年)을통(通)해서세상(世上)에물의(物議)를 이르켯스나 그후일구이일년(後一九二一年) 북경신보문학부간(北京新報文學副刊)에그유명(有名)한『아(阿)Q정전(正傳)』이 연재(連載)되면서부터는 노신(魯迅)은자타(自他)가공인(共認)하는 문단제일인적작가(文壇第一人的作家)엿다.&lt;br /&gt;
&lt;br /&gt;
그리고 이러한대작(大作)은 모다신해혁명전후(辛亥革命前後)의&lt;br /&gt;
&lt;br /&gt;
봉(封)&lt;br /&gt;
&lt;br /&gt;
건사회(建社會)의생활(生活)을 그린것으로 어떠케필연적(必然的)으로 붕괴(崩壞)하지안흐면안될 특징(特徵)을가젓는가를묘사(描寫)하고 어떠케새로운사회(社會)를 살어갈가를 암시(暗示)하고잇다.뿐만아니라 당시(當時)의혁명(革命)과 혁명적(革命的)인사조(思潮)가 민중(民衆)의심리(心理)에 생활(生活)의『데테일슨』에 어떠케표현(表現)되는가를 가장『레알』하게묘사(描寫)한것이다.더구나 그는 농민작가(農民作家)라고할만치 농민생활(農民生活)을그리는데 교묘(巧妙)하다는것도 한가지조건(條件)이되겟지만은 그의소설(小說)에는주장(主張)이개념(槪念)에 흐른다거나 조금도무리(無理)가업는것은 그의작가적수완(作家的手腕)이 탁월(卓越)하다는것을 말하지안홀수업다.&lt;br /&gt;
&lt;br /&gt;
그리고 그의작품(作品)은 늘 농민(農民)을주인공(主人公)으로하는것과 때로는『인테리』일지라도 예(例)를들면『공을사(孔乙巳)』의 공을사(孔乙巳)나『아(阿)Q정전(正傳)』의아(阿)Q가모다 일맥(一脈)이상통(相通)하는 성격(性格)을가지는것이니 공을사(孔乙巳)는 구시대(舊時代)의지식인(知識人)으로 시대(時代)에떠러저서 무슨일에도 쓰여지지못하고기품(氣品)만은노펏스나 생활력(生活力)은업고걸인(乞人)이되야 선술집술상대(臺)에 일금십구조(一金十九吊)의주채(酒債)가 어느때까지쓰여저잇는대로 언제인지&lt;br /&gt;
&lt;br /&gt;
행(行)&lt;br /&gt;
&lt;br /&gt;
방(方)이 불명(不明)된채로 나중에죽어젓든것이라든지『룸펜』농민(農民)인 일용노동자아(日傭勞働者阿)Q가 또한 쑥스러운년석으로혁명혁명(革命革命)떠들어놋코는 그것이몹시유쾌해서 반취(半醉)한기분(氣分)이 폭동대(暴動隊)의일군(一群)에 참가(參加)는하려고하엿스나 결국(結局)헛풍만치고 아무것도못하다다가 때마츰 일어난 폭도(暴徒)의약탈사건(掠奪事件)에 도당(徒黨)으로오해(誤解)되여(피(彼)의평소(平素)삼가지못한 언동(言動)에의(依)하야)피살(被殺)되는 아(阿)Q의성격(性格)은 그때중국(中國)의 누구라도가 전부혹(全部或)은일부분식(一部分式)은 소유(所有)하고잇섯든것이다다시말하면 아(阿)Q나공을사(孔乙巳)가모다사고(思考)와행동(行動)이 루—즈하고 확호(確乎)한한개의 정신(精神)도업스며 우약(愚弱)하면서도 몹시건방지고 남에게한개쥐여질리면 아무런반항(反抗)도못하면서 남이자신(自身)을 연민(憐憫)하면 제도량(度量)이커서 남이못덤비는것이라고제대로도취(陶醉)하야 남을 되는대로해(害)치는 무지(無知)하고우수면서도 가엽고 괴팩스러운것을 노신(魯迅)은그『레알리스틕』한문장(文章)으로폭로(暴露)한것이 특징(特徵)이엿스니 당시(當時)『아(阿)Q정전(正傳)』이발표(發表)될때&lt;br /&gt;
&lt;br /&gt;
평(平)&lt;br /&gt;
&lt;br /&gt;
소노신(素魯迅)과 교분(交分)이좃치못한사람들은 모다자기(自己)를모—델로 고의(故意)로쓴것이라고들 떠드는자(者)가잇은것을 보아도알수가잇는것이다&lt;br /&gt;
&lt;br /&gt;
그래서당시중국(當時中國)은 시대적(時代的)으로『아(阿)Q시대(時代)』이엿스며 노신(魯迅)의『아(阿)Q정전(正傳)』이 발표(發表)될때는 비평계(批評界)를비롯하야 일반지식군(一般知識群)들은『아(阿)Q상(相)』이라거나『아(阿)Q시대(時代)』라는말을평상대화(平常對話)에사용(使用)하기를 항다반(恒茶飯)으로하게된것은 중국문학사상(中國文學史上)에남겨노흔노신(魯迅)의 위치(位置)를 짐작하기에 조흔 한개의재료(材料)이거니와그의작가(作家)로서의 태도(態度)를통(通)하야 일관(一貫)하여잇는 노신정신(魯迅精神)을 다시한번음미(吟味)해보는데 적지안흔흥미(興味)를갓게된다는것은 오늘날우리의조선문단(朝鮮文壇)에는 누구나할것업시 예술(藝術)과정치(政治)의 혼동(混同)이니 분립(分立)이니하야 문제(問題)가엇지보면 결말(决末)이난듯도하고 어찌보면 미해결(未解决)그대로 잇는듯도한 현상(現狀)인데 노신(魯迅)가티 자기신념(自己信念)이 구든사람은이예술(藝術)과정치(政治)란것을 어떠케해결(解决)하엿는가?이문제(問題)는 그의작가(作家)로서의 출발점(出發點)부터 구명(究明)해야한다.&lt;br /&gt;
&lt;br /&gt;
노신(魯迅)은&lt;br /&gt;
&lt;br /&gt;
본(本)&lt;br /&gt;
&lt;br /&gt;
내의사(來醫師)가 되려고하엿다 그것은자기(自己)의『할일』이 무엇이라는것을 알엇기때문이엇다 물론(勿論)그때의 자기(自己)의『할일』이란것은 민족개량(民族改良)이라는 신념(信念)이엿든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후년(後年)『납함(吶喊)』서문(序文)에 다음가티써다.&lt;br /&gt;
&lt;br /&gt;
『나의학적(學籍)은 일본(日本)어느 지방(地方)의 의학전문학교(醫學專門學校)에 두엇다 나의 꿈은 이것으로 매우 아름답 고 만족(滿足)햇다 졸업(卒業)만하고 고(故) 국(國)에 도라오면 아버지와가티 치료(治療)못하는 병인(病人)을살리고 전(戰) 쟁(爭)이나면 출정(出征)도하려니와 국(國) 인(人)의 유신(維新)에대(對)한 신앙(信仰)에까지 나어갈것……』이라고&lt;br /&gt;
&lt;br /&gt;
이것은물론(勿論) 소년(少年)다운노신(魯迅)의로맨틕한 인도주의적흥분(人道主義的興奮)이엿겟지만은 이꿈도결국(結局)은 깨여지고말엇다.&lt;br /&gt;
&lt;br /&gt;
——의학(醫學)은결(决)코 긴요(緊要)하지안타 우약(愚弱)한 국민(國民)은 체격(體格)이 아모 리 조타고해도 또 아모리강(强) 장(壯)해도 무의미(無意味)한 구경거리나 또는 구경군이 되는박게는아 무것도아니다—중략(中略)—그럼으로 긴요(緊要)한것은 그들을 정신적(精神的)으 로 잘개조(改造)할것은 무엇일가나 는그때당연(當然) 문예(文藝)라고생각햇다 그리고 문예운동(文藝運動)을 제창(提唱)하기 로햇다(납함서문(吶喊序文))&lt;br /&gt;
&lt;br /&gt;
이리하야 그가 당시동경(當時東京)에망명(亡命)해잇는 중국(中國)사람들의 기관지(機關紙)인『절강조(浙江潮)』『하남(河南)』등(等)에 쓰든과학사(科學史)나 진화론(進化論)의 해설(解說)을 집어치우고 문학서적(文學書籍)을 번역(飜譯)한것은희랍(希臘)의 독립운동(獨立運動)을 원조(援助)한『빠이론』과 파란(波蘭)의복수시인(復讐詩人)『아담·미케뷧치』『향가리』의 애국시인(愛國詩人)『베트피·산더—』『필립핀』의문인(文人)으로 서반아정부(西班牙政府)에 사형(死刑)바는『리샬』등(等)의 작품(作品)이엿다.&lt;br /&gt;
&lt;br /&gt;
(사(四))&lt;br /&gt;
&lt;br /&gt;
이육사(李陸史)&lt;br /&gt;
&lt;br /&gt;
그리고이것은 노신(魯迅)의 문학행정(文學行程)에잇서서 가장초기(初期)에 속(屬)하는것이지만은 이러한번역(飜譯)까지라도그의 일정(一定)한목적(目的) 즉정치적목적(即政治的目的)미테 수행(遂行)된것을 엿볼수잇는것이며 우에말한『광인일기(狂人日記)』의『어린이를구(救)하자』는말도 순결(純潔)한 청년(靑年)들에의(依)하야 새로운중국(中國)을 건설(建設)하자는 그의이상(理想)을&lt;br /&gt;
&lt;br /&gt;
단적(端的)으로 고백(告白)한것으로써 이말은당시일반청년(當時一般靑年)들에게 무거운 책임감(責任感)을깨닷게한것은물론(勿論) 이래기천년(爾來幾千年)동안의 봉건사회(封建社會)로부터 청년(靑年)을해방(解放)하랴는 슬로—간으로 널리쓰여젓고 사실(事實)그뒤의 중국청년학생(中國靑年學生)들은 모든대중적사회운동(大衆的社會運動)의최전선(最戰線)에서 활발과감(活潑果敢)한 지도(指導)와조직(組織)을하엿스며 그유명(有名)한 오사운동(五四運動)이나 오주운동(五州運動)이나 국민혁명(國民革命)까지도 늘최전선(最前線)에서서 대중(大衆)을지도(指導)한것은 이들청년학생(靑年學生)이엿다&lt;br /&gt;
&lt;br /&gt;
그럼으로 노신(魯迅)에잇서서는 예술(藝術)은정치(政治)의 노예(奴隸)가 아닐뿐아니라 적어도예술(藝術)이 정치(政治)의 선구자(先驅者)인 동시(同時)에혼동(混同)도 분립(分立)도아닌즉(即) 우수(優秀)한작품(作品) 진보적(進步的)인 작품(作品)을 산출(產出)하는데만 문호(文豪) 노신(魯迅)의지위(地位)는노퍼갓고 아(阿)Q도 여기서비로소탄생(誕生)하엿스며 일세(一世)의 비평가(批評家)를도 감(敢)히 그에게는 함부로 머리를 들지못하엿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여기에 한가지 조흔예(例)가잇다 일구이팔년경(一九二八年頃) 무한(武漢)을쪼겨와서 상해(上海)에서 태양사(太陽社)를조직(組織)한 청년비평가(青年批評家) 전행촌(錢杏村)이 때마춤 푸로문학론(文學論)이 드셀때인만큼 노신(魯迅)을 대담(大膽)하게&lt;br /&gt;
&lt;br /&gt;
공격(攻擊)을 시작(始作)해보앗다그소론(所論)에 의(依)하면노신(魯迅)의 작품(作品)은 비계급적(非階級的)이다 아(阿)Q에게어데 계급성(階級性)이잇느냐는것이다.&lt;br /&gt;
&lt;br /&gt;
물론(勿論)그것은 정당(正當)한말이다,노신(魯迅)의작품(作品)에서 우리는눈딱고보아도 푸로레타리아적특성(的特性)은 조금도 볼수가 업는것은 사실(事實)이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우리가 한사람의작품(作品)을 비평(批評)할때는 그시대적배경(時代的背景)을고려(考慮)하지안흘수는업는것이니 노신(魯迅)이작가(作家)로활동(活動)을 하고잇슬때는중국(中國)에는 오늘날우리가 정의(定義)를나릴수잇는 푸로레타리아는 업슬뿐아니라 그때쯤은 뿌르조아민주주의적(民主主義的)인 정치사조(政治思潮)조차도아즉계선(界線)이분명(分明)하지못하엿다는것은뿌르조아혁명(革命)이라는 소위국민혁명(所謂國民革命)도 정직(正直)하게말하자면 사오운동(四五運動)을 전초전(前哨戰)으로한것만큼 여기서 역시중국(亦是中國)의 비상가(批詳家)인병신(丙申)은자미잇는말을하고잇다&lt;br /&gt;
&lt;br /&gt;
『그가현재(現在) 중국좌익작가연맹(中國左翼作家聯盟)을지지(支持)하고잇다해서 그의『사오(四五)』전후(前後)의&lt;br /&gt;
&lt;br /&gt;
작품(作品)을 푸로문학(文學)이라고 지목(指目)할것은아니&lt;br /&gt;
&lt;br /&gt;
다 그러나 그를우수(優秀)한 농민작가(農民作家)라고 하는것이 타당(妥當)타고—』그러타 이말은 어느정도(程度)까지&lt;br /&gt;
&lt;br /&gt;
정당(正當)에 가까운말로서 그를푸로작가(作家)가아니고 농민작가(農民作家)라고해서작가노신(作家魯迅)의 명예(名譽)를 더럽힐조건(條件)은 되지못하는것이다 다만문제(問題)는 그가얼마나 창작(創作)에 잇서서진실(眞實)하게 명확(明確)하게 묘사(描寫)하는태도(態度)를 가지는가 그의한말을 써보기로하자&lt;br /&gt;
&lt;br /&gt;
『——현재(現在) 좌익작가(左翼作家)는 훌륭한자신(自身)들의 문학(文學)을 쓸수잇슬가?생각컨대 이것은 매우곤란(困難)하다.현재(現在)의 이런 부류(部類)의 작가(作家)들은 모다『인테리』다 그들은 현실(現實)의 진실(眞實)한 정형(情形)은쓸려고해도 용이(容易)치안타 어떤사람이 일즉 이런 문제(問題)를제출(提出)한것이잇섯다『작가(作家)가 묘사(描寫)하는것은 반드시 자기(自己)가 경험(經驗)한것이라야만될것인가?그러나 그는 스스로 답(答)하기를반드시 안그래도조타웨러러냐하면 그들은 잘 추찰(推察)할수가잇스므로 절도(窃盜)하는장면(塲面)을 묘사(描寫)하랴면 작가(作家)는 반드시 자신(自身)이 절도(窃盜)질할 필요(必要)도업고 간통(姦通)하는&lt;br /&gt;
&lt;br /&gt;
장면(塲面)을 묘사(描寫)할 필요(必要)를늣길때 작가(作家) 자신(自身)이간통(姦通)할 필요(必要)도 업다고』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작가(作家)가 구사회(舊社會)속에서 생장(生長)해서그 사회(社會)의 모든 일을 잘알고 그사회(社會)의 인간(人間)들에게 익숙해저서 잇는때문에 추찰(推察)이되는것이다 그러나 종래(從來)아무런 관계(關係)도업는새사회(社會)의 정형(情形)과인물(人物)에 대(對)해서는 작가(作家)가무능(無能)하다면 아마그릇된 묘사(描寫)를할것이다 그럼으로 푸로문학가(文學家)는 반드시 참된현실(現實)과 생명(生命)을 가티하고 혹(或)은 보다기피현실(現實)의맥박(脈搏)을 감수(感受)하지안흐면 안된다고하면서 또다시말을 계속(繼續)하는것이다.&lt;br /&gt;
&lt;br /&gt;
그러나구사회(舊社會)를 조그만치공격(攻擊)하는작품(作品)일지라도 만약(萬若)그결점(缺點)을 분명(分明)히모르고 그병근(病根)을투철(透澈)히파악(把握)치못하면 그것은유해(有害)할뿐이다 애석한일이나마현재(現在)의푸로작가(作家)들은 비평가(批評家)까지도 왕왕(往往) 그것을못한다 혹사회(或社會)를 정시(正視)해서 그진상(眞相)을 알려고도안코 그중(中)에는 상대자(相對者)라고 생각하는편의 실정(實情)도알려고하지안는다.&lt;br /&gt;
&lt;br /&gt;
(오(五))&lt;br /&gt;
&lt;br /&gt;
이육사(李陸史)&lt;br /&gt;
&lt;br /&gt;
차근(車近)한 예(例)로는 얼마전 모지상(某紙上)에 중국문학계(中國文學界)를 비평(批評)한문장(文章)을 한편(篇)보앗는데 중국문학계(中國文學界)를 삼파(三派)에 난워서 먼저창조파(創造派)를 들어 푸로파(派)라하야매우상세(詳細)하게 논급(論及)하고 다음어사사(語絲社)를 소(小)뿌르파(派)라고 조그만치 말한후(後)&lt;br /&gt;
&lt;br /&gt;
신월사(新月社)를 뿌르문학파(文學派)라 해서 겨우 붓 을 대다가만 젊은비평가(批評家)가잇 섯다 이것은 젊은기질(氣質)의 상(相) 대자(對者)라고 생각는파(派)에 대(對)해서 는 무어세(細)□□□고구(考究)할필요(必要)가 업다는뜻을 표명(表明)한것이다 물(勿) 논(論)우리는 서적(書籍)을볼때 상대자(相對者) 의것을 보는것은 동파(同派)의것을 보는안심(安心)과 유쾌(愉快)와 유익(有益)한데 밋치지 못하는것은 사실(事實)이다 그러나 만약(萬若) 일개전투자(一個戰鬪者)라면 나는 생각컨대 현실(現實)과 상대(相對) 자(者)를 이해(理解)하는 편의상(便宜上) 보담 만은 당면(當面)의 상대자(相對者)에 대(對)한 해부(解剖)를 필요(必要)로 하지안으면안 될것이다.옛것을 분명(分明)히 알 고 새로운것에 간도(看到)하고 과(過) 거(去)를 요해(了解)하야 장래(將來)를 추단(推斷) 하는데서만 우리들의 문학적(文學的) 발전(發展)은 희망(希望)이잇다 생각건대 이것만은 현재(現在)와 가튼 환경(環境) 에잇는 작가(作家)들은 부단(不斷)히 노(努) 역(力)할것이고 그래야만 참된작(作) 품(品)이 나오는것이다』라 고&lt;br /&gt;
&lt;br /&gt;
이간단(簡單)한 몃마듸만히 문호노신(文豪魯迅)의 창작(創作)에 대(對)한『모랄』인것이다 이얼마나 우리의 뼈에 사무치고도 남을만한시사(示唆)인고!이리해서&lt;br /&gt;
&lt;br /&gt;
현대중국문단(現代中國文壇)의부(父)이며비평가(批評家)의비평(批評)으로서자타(自他)가 그지위(地位)를 함께긍정(肯定)하든그의작가(作家)로서의 생애(生涯)는 너무나쩔으것이엿스니 일구이육연삼월(一九二六年三月)『이혼(離婚)』이란작품(作品)을 최후(最後)로남긴그는 교수(敎授)로서 작가(作家)로서의 화려(華麗)한 생애(生涯)는 종언(終焉)을고(告)하지 안흐면안될때가왓다 그는 지금부터『손으로쓰기보다는 발로 다라나기가 더밧벗다』&lt;br /&gt;
&lt;br /&gt;
일구이육년(一九二六年) 북양군벌(北洋軍閥)을 배경(背景)오로한 안복파(安福派)의수령(首領) 단기서(段祺瑞)의정부(政府)는 급진적(急進的)인좌파(左派)의 교수(敎授)와우수(優秀)한 지식분자오십여명(知識分子五十餘名) 체포령(逮捕令)을 나렷다 우리노신(魯迅)은 이오십명중(五十名中)의 한사람이엿다 그것은일구이사년(一九二四年) 국민당(國民黨)의 연아용공책(聯俄容共策)이 결정(决定)되야그익년(翌年)가을『뽀로된』등(等)이고문(顧問)으로광동(廣東)에오고『전국민적공동전선(全國民的共同戰線)』이엿든 국민혁명(國民革命)의제일계단(第一階段)인 광동시기(廣東時期)에는 푸로레타라아의 동맹자(同盟者)는 농민도시빈민(農民都市貧民) 소(小)뿌로지식계급(知識階級) 국민적(國民的)뿌르조아지—엿다』&lt;br /&gt;
&lt;br /&gt;
그래서 급진교수(急進敎授)들은 교육부총장(敎育部總長) 군벌정부(軍閥政府)를 육박(肉迫)하엿스며이러한&lt;br /&gt;
&lt;br /&gt;
신흥세력(新興勢力)에 낭패(狼狽)와공포(恐布)를 늣긴군벌정부(軍閥政府)는 이러한교수(敎授)들과 학생(學生)들에게체포령(逮捕令)을나리고 학생(學生)들의행렬(行列)은정부위병(政府衛兵)들의 발포(發砲)로인(因)하야 남여수백여명(男女數百餘名)의 사상자(死傷者)가낫다 그때노신(魯迅)은 북경동교민항(北京東交民巷)의 공사관구역(公使舘區域)의 외국인병원(外國人病院)이나 공장(工塲)안으로 도라단이며 찬물로기아(飢餓)를 참아가면서도 신문(新聞)과 잡지(雜誌)에 기고(寄稿)를하야 군벌정부(軍閥政府)를 맹렬(猛烈)히 공격(攻擊)하얏다 그중(中)에도『국민이래(國民以來) 최암흑일(最暗黑日)에지(誌)』하엿다는 명문(名文)은 단기서(段祺瑞)로하여금 의자(椅子)에나려안게되엿다&lt;br /&gt;
&lt;br /&gt;
——붓으로쓰헛소리는 피로쓴 사실(事實)을 만착(瞞着)하지못한다——중(中) 약(略)——붓으로쓴것이 무슨힘이 잇스랴 실탄(實彈)을쏘는것은 오즉 청년(靑年)의피다(속화개집(續華盖集))&lt;br /&gt;
&lt;br /&gt;
오늘날까지 중국문단(中國文壇)의『막심콜키—』이든그는 지금부터는문화(文化)의전사(戰士)로서『앙리·발뷰스』보다비장(悲壯)한생애(生涯)가 시작(始作)되는것이엿다&lt;br /&gt;
&lt;br /&gt;
그의말과가티&lt;br /&gt;
&lt;br /&gt;
최청흑(最晴黑)한오십일(五十日)이지나고 그는북경(北京)을탈출(脫出)햇다 하문대학(夏門大學)에 초청(招請)을바□갓으나 대학기업가(大學企業家)의 음흉수(陰凶手)것인것을 안그는광동중산대학(廣東中山大學)으로갓다 그러나 일구이육년사월십오일(一九二六年四月十五日) 장개석(蔣介石)의쿠—데타—는 광동일성(廣東一省)만 노동자농민급진지식분자삼천여명(勞働者農民急進知識分子三千餘名)을—하엿 으며 한때는『혁명(革命)의전사(戰士)』라고 간판(看板)을지인노신(魯迅)도상해(上海)로 다라나야만 되엿다여기서우리가 다시한번그에게흥미(興味)보다는 최대(最大)의 경의(敬意)를갓게되는것은 다음의일문(一文)이다&lt;br /&gt;
&lt;br /&gt;
——나의 일종망상(一種妄想)은 깨여젓 다 나는지금까지 때때로낙관(樂觀) 을가젓섯다 청년(靑年)을 압박(壓迫)하고 ——하는것은 대개노인(大槪老人)이다이 들노물(老物)들이 다죽어지면 중국(中國) 은보담더 생기(生氣)잇는것이되리라 고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 르치안은것을 알엇다 청년(靑年)을 ——하는것은 대개(大槪)는 청년(靑年)인 듯하다 또달이 재조(再造)할수업는 생명(生命)과 청춘(靑春)에 대(對)해서 한층(層) 더애낌이업시…(이기집(而己集))&lt;br /&gt;
&lt;br /&gt;
이글은그가 침묵(沈默)하고잇는것을『공포(恐怖)』때문이라고 조소(嘲笑)한 사람에게답(答)한 통신문(通信文)의 일절(一節)로서 이때까지&lt;br /&gt;
&lt;br /&gt;
진화론자(進化論者)이든 그자신(自身)의 사상적립장(思想的立塲)을양기(揚棄)하고 새로운 성장(成長)의 일단계(一段階)로보인것이라고 해석(解釋)해도 틀러지안흘것이다.&lt;br /&gt;
&lt;br /&gt;
그가상해(上海)에 왓슬때는 국민당(國民黨)의 쿠—데타—로 혁명군(革命軍)에서쪼겨온 젊은푸로문학자(文學者)가 만엇다『혁명문학론(革命文學論)』이 효효(囂囂)히 불러지고 실제정치행동(實際政治行動)의 전선(前線)을 떠난그들은 총칼대신에 펜을잡엇다,원기왕성(元氣旺盛)하게 실제공작(實際工作)의경험(經驗)에서 매우견실(堅實)한것도 잇섯스나 때로는 자부적(自負的)인 영웅주의(英雄主義)가 화(禍)를끼치고——에실패(失敗)한 분만(憤瞞)과 극좌적(極左的)인 기회주의자(機會主義者)들은노신(魯迅)을 공격(攻擊)햇다 그러나 그는푸로문학(文學)이란 어떤것인가 또는어찌해야 될것인가를 알리기위(爲)하야 아버지가튼 애무(愛撫)로서『푸레하노프』,『루나챨스키—』들의 문학론(文學論)과『싸벳트』의 문예정책(文藝政策)을번역소개(飜譯紹介)하야 중국(中國)푸로문학(文學)을건설(建設)하고잇는동안에『노신(魯迅)을타도(打倒)치안흐면 중국(中國)에푸로문학(文學)은생기지못한다』는 문학소아병자(文學小兒病者)들은 그자신(自身)들이 먼저너머지고 이제그가마자가고말엇다 이위대(偉大)한중국문학가(中國文學家)의영(靈)아페 고요히머리를숙이면서 나의개인적(個人的)으로 곤란(困難)한정형(情形)에의(依)하야 문호노신(文豪魯迅)의윤곽(輪廓)을뚜렷이그리지못함을 참괴(慚愧)히알며붓을놋키로한다 —요(了)—&lt;br /&gt;
&lt;br /&gt;
=='''주요 내용 요약'''==&lt;br /&gt;
추도 배경: 중국 신문학의 최고봉인 루쉰(魯迅)의 서거(1936년 10월 19일)를 추도하며, 작가와의 개인적 인연(1932년 양행불 암살 사건 직후 만국빈의사에서의 만남)을 회상하는 글이다.&lt;br /&gt;
&lt;br /&gt;
문학적 위치 - 아Q 정전: 루쉰 이해의 핵심으로 그의 대표작《아Q정전(阿Q正傳)을 제시하고 있다. '아Q'는 사고와 행동이 나약하고 우매하면서도 건방진, 당시 중국인의 집단적 성격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루쉰은 이 '아Q 상(相)'을 폭로하여 중국 지식 군중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루쉰은 '아Q 시대'를 종식시키고 새로운 중국을 열어갈 길을 제시한 인물로 평가된다.&lt;br /&gt;
&lt;br /&gt;
문학 혁명과 루쉰의 역할: 중국의 고루한 고문학을 비판하고 백화소설(白話小說)을 통해 문학 혁명의 선두에 선 것이다.《광인일기(狂人日記)를 통해 봉건적 가족 제도와 유교의 종법 사회 관념을 통렬히 비판하며 &amp;quot;어린이를 구하자&amp;quot;는 메시지를 던져 청년들에게 혁명적 충격을 주었다.&lt;br /&gt;
&lt;br /&gt;
예술과 정치: 루쉰은 본래 의사(醫師)가 되려 했으나, '우매한 국민은 체격이 강해도 무의미한 구경꾼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으로 정신 개조를 위한 문예 운동으로 전향하였다. 그에게 예술은 정치의 노예가 아니라, 적어도 정치의 선구자였으며, 정치적 목적 아래 수행된 것이다.&lt;br /&gt;
&lt;br /&gt;
후기 생애와 투쟁: 군벌 정부(단기서)와 국민당(장개석)의 탄압을 피해 쫓겨 다니는 비장한 '문화의 전사'로서의 삶을 살았다. 젊은 프로문학 비평가들에게 '비계급적 작가'로 공격받기도 했으나, 그는 현실과의 동떨어짐을 비판하며 진실된 현실을 기반으로 한 창작의 '모랄(도덕성)'을 강조한 것이다.&lt;br /&gt;
&lt;br /&gt;
=='''분석 및 특징'''==&lt;br /&gt;
이육사의 지식인 면모: 이육사(본명 이활, 기고명 '이육사(李陸史)')가 당대 중국의 최고 지성 및 정치 상황에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글이다. 루쉰의 문학적, 사상적 변천 과정(의학 → 문예 → 현실 참여)을 심도 있게 분석하고 있다. 루쉰 문학의 핵심 통찰: 루쉰의 작품을 단순히 서사로 보는 것이 아니라, 봉건 사회에 대한 투쟁, 계급성, 지식인의 역할 등 당대 사회 변혁의 맥락에서 분석하는 것이다. 한국 문단에 대한 시사: 글 말미에 '예술과 정치'의 관계에 대해 루쉰의 태도를 재조명하며, 당시 조선 문단에서 첨예하게 논의되던 이 문제에 대한 이육사의 입장을 간접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수필문외한(隨筆門外漢)의수첩(手帖)'''=&lt;br /&gt;
문(門) 외(外) 한(漢) 의 수(手) 첩(帖)&lt;br /&gt;
&lt;br /&gt;
(칠(七))&lt;br /&gt;
&lt;br /&gt;
이(李) 육(陸) 사(史)&lt;br /&gt;
&lt;br /&gt;
R이란 사람은 나와는 매우친(親)한 동무엿다 그럼으로 우리두사람 사이에는 결(决)코 무슨비밀(秘密)이란것은 잇을터수가 아니엿다 그러나 지금은 나의교우록(交友錄)속에 씨여저잇는 그의『호패(號牌)』에 붉은줄을 그은지도 벌써한달이 다되엿다.&lt;br /&gt;
&lt;br /&gt;
이러한 간단한사실(事實)이 모르는사람으로본다면 가렵지도 아프지도안흘지모르겟으나 남달리상처(相處)해오든 벗을한사람 일허버린나의흐젓한 마음은 어데도 비길수업시 서러운것이다.&lt;br /&gt;
&lt;br /&gt;
그뿐만아니라 이글을 쓰려는오늘아침에 이제는 고인(故人)인 R의동생으로부터 나에게 간단한편지한장과『문외한(門外漢)의수첩(手帖)』이란유고(遺稿)한권(卷)이 보내여왓다.&lt;br /&gt;
&lt;br /&gt;
그유고(遺稿)는 이래십년(爾來十年)에 쓴 고인(故人)의 일기(日記)인 모양인데 그도축일(逐日)해서 쓰것도 아니고 때때로마음이 내킬때마다 써둔것이며그맨끗페—지에『〇〇형(兄)에게』라는 이세상(世上)사람으로서의 절필(絶筆)인듯한 글시가 묵흔(墨痕)이임리(淋漓)한것은소리업는 내눈물을더욱짜내는것이엿다 그리고이글내용(內容)은 일기(日記)는 일기(日記)면서도 대부분(大部分)은 나에게 보내는 편지이엿다.그편지가운데서 지금이라도 흥미(興味)잇게생각나는 부분(部分)만을 써서보기로한다면 그도처음에는 문학청년(文學青年)이엿든 사실(事實)이잇섯다.그러나그는자기가 하고저한 문학(文學)을 끗끗내 완성(完成)할수잇는 행복(幸福)된사람은 아니엿다.그러나 그사람은죽든날까지도문학(文學)을 단념(斷念)하지는안헛다는것은 어느해겨울 그와나는 우연(偶然)히도 어느 온천(溫泉)에서만낫다 그때는 바로동경(東京)에서들풍자문학론(諷刺文學論)이 한참대두(擡頭)할때 이엿슴으로 그도또한 예(例)에삐지지안코 이것의 조선(朝鮮)에잇서서 가능(可能)하다는 설교(說敎)를 하는것이엿다그때좀더 생각해볼 여지(餘地)가잇다고한 나의말에 그는말하기를조선(朝鮮)사람은 생활(生活)그자체(自體)가 풍랄적(諷剌的)으로 되여잇다고 떠둘어대기에나는그에게 더진지(眞摯)한태도(態度)로 사물(事物)을 대(對)할필요(必要)가 잇다는것을말하엿고 그다음날 우리는 서로갈린체 영원(永遠)히 보지못할 사람이되엿다.&lt;br /&gt;
&lt;br /&gt;
이글은 그때나와 갈려서 몃칠동안에 쓴것이라고 생각난다 일구삼(一九三)×연(年)×월(月)×일(日)—〇형(兄)!S역(驛)에서 형(兄)과갈려서나는〇동(洞)까지 오십리(五十里)나되는 산(山)길을 걸어왓소.동리(洞里)거리에 피곤(疲困)한 다리를 쉬이면서 생각하기를 아무데나 큼직한집 초당(草堂)방을 차저드러가면 이밤을 뜻뜻한 아랫목에서 지낼수도 잇겟거니와 그들과함께 살을맛대이고지나며 그들의 생활(生活)을체득(體得)할수가 잇다면……얼마나 유쾌(愉快)한일이겟습니까?&lt;br /&gt;
&lt;br /&gt;
나는 여기서 형(兄)이일직이 하든말을 생각해보앗소 상해(上海)어데선가?목욕(沐浴)을 갓슬때 불란서(佛蘭西)사람과 서반아(西班牙)사람과 가트욕조(浴漕)에 들어갓슬때의 감정(感情)을 얘기한것을 기억(記憶)이나 하시는지요.그때는 적나라(赤裸裸)한 몸둥이들이모두꼭가튼 온도(溫度)를 느낄수잇더라고.세계(世界)는 모름직이 목간통가티 되어야 한다고.&lt;br /&gt;
&lt;br /&gt;
그러나 오늘의 나의심경(心境)은그와는 정반대(正反對)로 어데까지나 육친애(肉親愛)를 느껴볼 결심(决心)이엿소 그래서 세계(世界)는 차라리 초당(草堂)방가티되라고까지 생각해도 보앗소이러한 생각을 하노라면 또다른 한생각이 꼬리를 물고나오는동안에 나는가젓든 담배를모조리 다피워 바렷소.담배라도피우지 안흐면 첫겨우의눈우바람이몹시도 옷깃을 새여들고 발끄티저리기도해서 담빠도살겸 주막(酒幕)집잇는대로 가까이 차저갓소.그곳에는 마침담배 가개가잇고젊은농부(農夫)인듯한 사람이잇기에오전(五錢)짜리 한푼을던지고『마코』한갑을 달라고 하엿더니만 나는여기서 뜻하지못한 실패(失敗)를 하엿소 그것은 나행동(行動)이 몸차림과 어울리지안는데가 잇섯든지또는언어(言語)에 무의식적(無意識的)인 불손(不遜)이잇섯든지 그젊은 농부(農夫)는 내얼굴을 자세히 보더니만……『문(門)안에 들어와서 담배를 가저가오』……하며 코우슴을 피하며『마코』한갑을 내아프로 툭던지는것이엿소.&lt;br /&gt;
&lt;br /&gt;
나는처음 이농부(農夫)의 말을듯고한참동안 어름어름하엿소 그것은 담배가개라고하는것이 우리가 도회(都會)에서 보는담배가개와가티 백색(白色)『타일』타로 대(臺)를싸올리고『네온』등(燈)을 달고 유리창(窓)을단것이 아니고 첨하끄테다 석유(石油)궤로 목판을짜서 장수연(長壽煙),희연(囍煙),『마코』단풍(丹楓) 이런것들을몃갑식(式) 너허둔것이엿소,그래 내가들어갈 문(門)이란 어데잇겟소,&lt;br /&gt;
&lt;br /&gt;
&lt;br /&gt;
(칠(七))&lt;br /&gt;
&lt;br /&gt;
이(李) 육(陸) 사(史)&lt;br /&gt;
&lt;br /&gt;
R이란 사람은 나와는 매우친(親)한 동무엿다 그럼으로 우리두사람 사이에는 결(决)코 무슨비밀(秘密)이란것은 잇을터수가 아니엿다 그러나 지금은 나의교우록(交友錄)속에 씨여저잇는 그의『호패(號牌)』에 붉은줄을 그은지도 벌써한달이 다되엿다.&lt;br /&gt;
&lt;br /&gt;
이러한 간단한사실(事實)이 모르는사람으로본다면 가렵지도 아프지도안흘지모르겟으나 남달리상처(相處)해오든 벗을한사람 일허버린나의흐젓한 마음은 어데도 비길수업시 서러운것이다.&lt;br /&gt;
&lt;br /&gt;
그뿐만아니라 이글을 쓰려는오늘아침에 이제는 고인(故人)인 R의동생으로부터 나에게 간단한편지한장과『문외한(門外漢)의수첩(手帖)』이란유고(遺稿)한권(卷)이 보내여왓다.&lt;br /&gt;
&lt;br /&gt;
그유고(遺稿)는 이래십년(爾來十年)에 쓴 고인(故人)의 일기(日記)인 모양인데 그도축일(逐日)해서 쓰것도 아니고 때때로마음이 내킬때마다 써둔것이며그맨끗페—지에『〇〇형(兄)에게』라는 이세상(世上)사람으로서의 절필(絶筆)인듯한 글시가 묵흔(墨痕)이임리(淋漓)한것은소리업는 내눈물을더욱짜내는것이엿다 그리고이글내용(內容)은 일기(日記)는 일기(日記)면서도 대부분(大部分)은 나에게 보내는 편지이엿다.그편지가운데서 지금이라도 흥미(興味)잇게생각나는 부분(部分)만을 써서보기로한다면 그도처음에는 문학청년(文學青年)이엿든 사실(事實)이잇섯다.그러나그는자기가 하고저한 문학(文學)을 끗끗내 완성(完成)할수잇는 행복(幸福)된사람은 아니엿다.그러나 그사람은죽든날까지도문학(文學)을 단념(斷念)하지는안헛다는것은 어느해겨울 그와나는 우연(偶然)히도 어느 온천(溫泉)에서만낫다 그때는 바로동경(東京)에서들풍자문학론(諷刺文學論)이 한참대두(擡頭)할때 이엿슴으로 그도또한 예(例)에삐지지안코 이것의 조선(朝鮮)에잇서서 가능(可能)하다는 설교(說敎)를 하는것이엿다그때좀더 생각해볼 여지(餘地)가잇다고한 나의말에 그는말하기를조선(朝鮮)사람은 생활(生活)그자체(自體)가 풍랄적(諷剌的)으로 되여잇다고 떠둘어대기에나는그에게 더진지(眞摯)한태도(態度)로 사물(事物)을 대(對)할필요(必要)가 잇다는것을말하엿고 그다음날 우리는 서로갈린체 영원(永遠)히 보지못할 사람이되엿다.&lt;br /&gt;
&lt;br /&gt;
이글은 그때나와 갈려서 몃칠동안에 쓴것이라고 생각난다 일구삼(一九三)×연(年)×월(月)×일(日)—〇형(兄)!S역(驛)에서 형(兄)과갈려서나는〇동(洞)까지 오십리(五十里)나되는 산(山)길을 걸어왓소.동리(洞里)거리에 피곤(疲困)한 다리를 쉬이면서 생각하기를 아무데나 큼직한집 초당(草堂)방을 차저드러가면 이밤을 뜻뜻한 아랫목에서 지낼수도 잇겟거니와 그들과함께 살을맛대이고지나며 그들의 생활(生活)을체득(體得)할수가 잇다면……얼마나 유쾌(愉快)한일이겟습니까?&lt;br /&gt;
&lt;br /&gt;
나는 여기서 형(兄)이일직이 하든말을 생각해보앗소 상해(上海)어데선가?목욕(沐浴)을 갓슬때 불란서(佛蘭西)사람과 서반아(西班牙)사람과 가트욕조(浴漕)에 들어갓슬때의 감정(感情)을 얘기한것을 기억(記憶)이나 하시는지요.그때는 적나라(赤裸裸)한 몸둥이들이모두꼭가튼 온도(溫度)를 느낄수잇더라고.세계(世界)는 모름직이 목간통가티 되어야 한다고.&lt;br /&gt;
&lt;br /&gt;
그러나 오늘의 나의심경(心境)은그와는 정반대(正反對)로 어데까지나 육친애(肉親愛)를 느껴볼 결심(决心)이엿소 그래서 세계(世界)는 차라리 초당(草堂)방가티되라고까지 생각해도 보앗소이러한 생각을 하노라면 또다른 한생각이 꼬리를 물고나오는동안에 나는가젓든 담배를모조리 다피워 바렷소.담배라도피우지 안흐면 첫겨우의눈우바람이몹시도 옷깃을 새여들고 발끄티저리기도해서 담빠도살겸 주막(酒幕)집잇는대로 가까이 차저갓소.그곳에는 마침담배 가개가잇고젊은농부(農夫)인듯한 사람이잇기에오전(五錢)짜리 한푼을던지고『마코』한갑을 달라고 하엿더니만 나는여기서 뜻하지못한 실패(失敗)를 하엿소 그것은 나행동(行動)이 몸차림과 어울리지안는데가 잇섯든지또는언어(言語)에 무의식적(無意識的)인 불손(不遜)이잇섯든지 그젊은 농부(農夫)는 내얼굴을 자세히 보더니만……『문(門)안에 들어와서 담배를 가저가오』……하며 코우슴을 피하며『마코』한갑을 내아프로 툭던지는것이엿소.&lt;br /&gt;
&lt;br /&gt;
나는처음 이농부(農夫)의 말을듯고한참동안 어름어름하엿소 그것은 담배가개라고하는것이 우리가 도회(都會)에서 보는담배가개와가티 백색(白色)『타일』타로 대(臺)를싸올리고『네온』등(燈)을 달고 유리창(窓)을단것이 아니고 첨하끄테다 석유(石油)궤로 목판을짜서 장수연(長壽煙),희연(囍煙),『마코』단풍(丹楓) 이런것들을몃갑식(式) 너허둔것이엿소,그래 내가들어갈 문(門)이란 어데잇겟소,&lt;br /&gt;
&lt;br /&gt;
(중(中))&lt;br /&gt;
&lt;br /&gt;
이육사(李陸史)&lt;br /&gt;
&lt;br /&gt;
그날은 그곳에서 멀지안흔곳에 장날이엿나부오,장꾼들이들신들신하고 그집으로 들어오기에 나는그만 그곳을떠나 도라나오랴니까 바로내머리 뒤에서『건방진여석 눈에유리창(窓)을 부치고』……하면서 별러대는것이엿소.그때나는 모든것을 다알엇소,&lt;br /&gt;
&lt;br /&gt;
시골산촌(山村)에선 유리라는것은들창(窓)에나 부치는것인데 네눈에부친 들창을열고 다시말하면 문(門)안에 들어와서(안경(眼鏡)을벗고)담배를 가저가란 말엿소.&lt;br /&gt;
&lt;br /&gt;
내가 안경(眼鏡)을 쓰게된것은 시력(視力)이 부족(不足)한 탓이엿고 그젊은농부(農夫)가 내안경(眼鏡)쓴것을 못맛당히역이는것은 고루(固陋)한 인습(因習)의 소치(所致)라고 하드래도 그표현방법(表現方法)이얼마나 내뼈를 저리도록 쑤시는풍랄(諷剌)이엿겟소 과연(果然)여기에 남과나라는 투명(透明)한 장벽(墻壁)이 서서잇다는것을 나는안듯하엿소.&lt;br /&gt;
&lt;br /&gt;
그리고 내발길은 무겁게옴겨젓소.아주몃해를두고 어느사막(沙漠)이라도 걸어온듯한 피로(疲勞)를 깨다랏소.하늘은 점점어두어오고눈조차 함박으로 퍼붓는듯 하엿스나 나는다시 옷것을 단속지는 안헛소 될수엇스면 차디천 눈보라가 내보드러운 목덜미살을 염이듯이 얼어부트라고하여본것은 일종(一種)의 자기잔학(自己殘虐)일른지도 모르겟소.&lt;br /&gt;
&lt;br /&gt;
두시간(時間)이나 지낫을가 나는과연(果然) 어느집초당(草堂)방에 손이되엿소방안에는 초말(醋抹)냄새가 코를찌를망정 모이는사람은 대략육칠명(六七名)이나 되엿고 연령(年齡)은최저십팔(最低十八)로최고삼십이(最高三十二),인품(人品)은 모두순후(純厚)하고황소가티 질박(質朴)한놈도 잇스며암사슴가티 외로운 면석도잇섯소.그날밤은 내라는존재(存在)가 그들로보면 낫서른손이여서 일동일정(一動一靜)을 주의(注意)는 하면서도 조금도 악의(惡意)는 갓지안헛든 모양이엿소 그러기에 나더러 세상(世上)의자미잇는 얘기를 들려달라는것이오&lt;br /&gt;
&lt;br /&gt;
이때 나는 어떠한 얘기를들려줄까 하고 망서리는판에 그들중에도 연령(年齡)과 지식(知識)의 정도(程度)가잇서서 삼십(三十)에 가까운 사람들은『화용도(華容道)』를 들려달라하고그중한사람은『춘향전(春香傳)』을 얘기하라하엿소만은 여기도 또한의견(意見)은 일치(一致)되지안헛소 그중에도제일(第一)얼굴이 말숙하고 나이가이십오세(二十五歲)쯤 되여보이는 농부(農夫)한사람 말을드르면 보통학교(普通學校)를 중도퇴학(中途退學)은 하엿서도 그들가운데서는 식자연(識者然)하고 내로라는드시뽑내면서『서양(西洋)』얘기를 무에나들리라는것이오 그해서 결국(結局)은『춘향전(春香傳)』파(派)와『서양(西洋)』파(派)가 절충(折衷)한결과(結果) 나는이진귀(珍貴)한『서양춘향전(西洋春香傳)』을 친절(親切)하게도 강좌(講座)를담임(擔任)하게되엿스며 그는 득의만면(得意滿面)하야 내담배갑에서『마코』한개들 빼여물고 인조견(人造絹) 옥색(玉色)관사홋족기에서 석낭을꺼내여 담배를 피우는것이엿소 이방에서는모두들이사람을『하이카라상』이라고 부르는데 그『상』짜가나에게는 조금귀익지못하나 아마이것을 도시(都市)말로번역(飜譯)하면『모—던뽀이』란 말도갓소.&lt;br /&gt;
&lt;br /&gt;
그러나 이『서양춘향전(西洋春香傳)』이란진본서(珍本書)는 가난한 나의문헌학지식(文獻學知識)으로는 도저(到底)히 알어낼 자신(自信)도업고 그러타고 그들에게『린드뻑』이 대서양(大西洋)을 어떠케 횡단(橫斷)하엿다든지『크레오파트라』의국적(國籍)이 어느나라냐고 설왕설래(說往說來)를 하여보앗자『하이카라상』이라는 이방의『쏘크라테쓰』도그까지는 흥미(興味)를느끼지못할것갓터소.&lt;br /&gt;
&lt;br /&gt;
그래서나는 생각다못해『쉑스피어』의『로미오와쭈리엣트』를얘기하기로하고 위선그주인공(主人公)의이름을 그들이 알어듯기 쉽게『노미』이와『준』이가 이러케얘기를하니 그래도 모두그것이자미가 잇섯든지『준』이가추방당(追放當)튼날새벽에『노미』를 차저가이별(離別)을하는판인데 이곳에야『나이팅껠』이울수가 잇슬리도 업겟고 생각다못해 속담(俗談)에 꿩갑에 닭이라니 닭을울리고『준』이를 떠나보냇구려!그래도 이때는 모두들감탄(感歎)해서 흥흥코소리를치며 신삼고 가만이치든손을쉬이는구려!&lt;br /&gt;
&lt;br /&gt;
(하(下))&lt;br /&gt;
&lt;br /&gt;
이육사(李陸史)&lt;br /&gt;
&lt;br /&gt;
밤은벌써 오전(午前)두시(時)나 되엿는데 박가테서는 눈보래가 조금도 쉬지안코 나렷소,사람들은차차 긴하픔을 하다가는 제대로 팔을배고 자는이도잇고 또그자는이의 다리를베고 자는사람도잇스며 나중에는『하이카라상』과 나만이남어서 나는 이동리(洞里)의 서러운전설(傳說)을 듯는것이오『옛날에 이동리(洞里)와 건너마을이편을갈러서 정초(正初)이면『줄댕기』가 시작(始作)되엿고 그때는 사람들이 수—백명식(百名式) 모혀서 그중에도 젊은 사람들은 처녀(處女)나 총각이 제각기 마음잇는 사람들과 사랑을 속삭이면서 영원(永遠)히그자손(子孫)들은 변(變)함업시 이동리(洞里)를직혀왓건만은 지금(至今)은 어쩐일인지 그사람들은 누가 오란말도업고 가란말도 업건만은 다들어데인지 한집식 두집식 동리(洞里)를떠나고 그럴때마다 젊은이들의 싹트기시작(始作)한 사랑은 그봄이 다가기도전에 덧업시 흘러가고 만다는말을 다마치지도못하야 이사람은 창졸간에 미친듯이 쓸어저 흑흑 느껴가며우는것이엿소.나는 이것을 웨우느냐 물어볼힘도업고 울지말라고 위안(慰安)을 줄수도 업섯스며다만나 혼자 생각기를 너도 또한불상한 미완성초연(未完成初戀)의 순정자(殉情者)로 구나하고 동정(動靜)을 살피노라니 이사람도 그냥잠이 들고먼데닭이 자즌홰치는 소리가들리며 눈은끗첫는지 박가튼 바람이 몹시부럿소.&lt;br /&gt;
&lt;br /&gt;
나는몃시간(時間) 남지안흔 이밤을도저(到底)히 잘수는업섯소,내머리는해저(海底)와가티 아득하고 내가슴은운모(雲母)와가티 무거웟소.도라누을내야 도라누을수도 업스려니와여페사람들의 코고는소리는 검은시체(屍體)를 실흔마군(馬軍)의 수레박휘를 갈고가는듯하오,그럴수록방안의 정적(靜寂)은 무거워저서 자꾸만 지구(地球)의 중심(中心)으로 침전(沈澱)되는듯하엿소,나는 참다못하야 눈을감고 두손으로 얼굴을 가리웟소.바로 그때엿소,누구인지내머리마테서 말하는 사람이잇섯소,그사람이 누구인지는 기억(記憶)할수 업스나 혹(或)은 저녁전에담배가개에서본 농부(農夫)일른지도모르겟소 그가 나에게 한말은분명(分明)코『문(門)안에 드러와서……』엿소.나는 여기서 눈을번쩍뜨고가만히 생각해 보앗소.&lt;br /&gt;
&lt;br /&gt;
『오!그러타,나는 문외한(門外漢) 여다』아무리하여도 인생(人生)의 문(門)안에들어서지못할 나이라면 차라리영원(永遠)한 문외한(門外漢)으로 이세상(世上)을수박것할트시 지나갈일이지 그좁은문(門)을 들어가려고 애를쓸필요(必要)가 어데잇겟소 문(門)박게서 살어가면 책임(責任)과 부담(負擔)도 가벼우려니와 문(門)안에 우리가 직혀야할 보물(寶物)이잇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모두 문(門)안에서 직힐때에나혼자만 문(門)박게서 그모든것을파수본다면 그것도 나의한가지임무(任務)가아니겟소 그러타면 나는달게&lt;br /&gt;
&lt;br /&gt;
인생(人生)외 문외한(門外漢)이 되겟소.&lt;br /&gt;
&lt;br /&gt;
그래서 남들이모두 문(門)안에서보는세상(世上)을 나는문(門)박게서 보겟소 남들은 기피보는 세상(世上)을나는널리보면 또그만한 자긍(自矜)이잇을것갓소.오늘은 고기압(高氣壓)이어데잇는지 풍속(風速)은 육십사(六十四)미리오이동리(洞里)를 떠나아무도 발을대지안흔 대설원(大雪原)을 걸어가겟소,전인미도(前人未到)의 원시경(原始境)을 가는느낌이오,누가나를 따라이길을 올사람이 잇슬른지?업서도 나는이길을 영원(永遠)히가겟소.』&lt;br /&gt;
&lt;br /&gt;
나는이까지보고 위선이유고(遺稿)를더펏다,그리고 생각해보앗다 이것은 한사람이 인생(人生)의문(門)안에 들어오지못하고 영원(永遠)히 걸어간기록(記錄)이다 오!그러면 나도역시문외한(亦是門外漢)인가?정축(丁丑) 칠(七),이구(二九)&lt;br /&gt;
&lt;br /&gt;
=='''주요 내용 요약'''==&lt;br /&gt;
구성: 죽은 친구 'R'의 유고(遺稿)인 '문외한의 수첩' 속에 담긴, 'R'이 '〇형(兄)'(필자)에게 쓴 편지 형식의 수필이다. '문안'과 '문밖': 화자는 'S역'에서 '형'과 헤어져 산길을 걸으며 초당방에서 서민의 삶을 체득하고 싶다는 '육친애'적 소망을 가진다. 이때 담배를 사려다 한 젊은 농부에게 &amp;quot;문 안에 들어와서 담배를 가져가오&amp;quot;라는 말을 듣는다. '문안'은 농부가 '안경(유리창)'을 쓴 자신을 '도시의 문명인'으로 여기고 '안경을 벗고(유리창을 떼고) 들어와'라는 풍자적 표현이었음을 깨닫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자아 성찰: 이 경험을 통해 도시 지식인인 자신과 농민 사이에 투명한 '장벽'이 서 있다는 것을 인지하며, 자신이 '인생의 문외한(門外漢)'임을 깨닫는다. '문외한'의 결심: '문안'에 들어서지 못할 바엔 영원한 문외한이 되어 문밖에서 살아가겠다고 결심한다. 문밖에서 사는 것은 책임과 부담이 가볍고, 남들이 모두 문안에서 보는 세상을 자신은 문밖에서 '널리' 보며 '자긍(自矜)'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절필: &amp;quot;전인미도(前人未到)의 원시경(原始境)을 가는 느낌&amp;quot;으로 '대설원'을 걸어 나가는 것으로 글을 맺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분석 및 특징'''==&lt;br /&gt;
풍자 문학론의 실천: 농부의 '안경 쓴 눈(유리창)'에 대한 풍자는 지식인과 대중 사이의 괴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지식인의 고뇌와 성찰: 도시화된 지식인(안경 쓴 자)이 농민의 삶에 진입하려 했으나 거부당하고, 결국 자신을 '문외한'으로 규정하며 고립을 선택하는 지식인의 고뇌를 드러내는 자의식의 표현이다.&lt;br /&gt;
&lt;br /&gt;
낭만적 비장미: '대설원', '전인미도의 원시경' 등 비장하고 낭만적인 이미지로 결말을 맺으며, 이육사 특유의 고독한 결단의 미학을 보여주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소품(小品) 황엽전(黃葉箋)'''=&lt;br /&gt;
소품(小品)①&lt;br /&gt;
&lt;br /&gt;
황엽전(黃葉箋)&lt;br /&gt;
&lt;br /&gt;
이(李) 육(陸) 사(史)&lt;br /&gt;
&lt;br /&gt;
사람들은 어름알보다 더냉담(冷淡)하고 주사침(注射針)가티 촉발라도 그래도 제대로는 인정(人情)도잇고 눈담(曇)노잇서 친(親)한사람을 사이에는못보 보고저하고 보면빨아먹을듯이도 형형색색(形形色色)의 표정(表情)을비저내며 계절(季節)에 따라서는 눈물겨울만큼 간절한모양이나 『내』라는 위인(爲人)은 자질(資質)도 소박(素朴)하고교양(敎養)도 고매(高邁)하지못데 요즘은엇전지 신경(神經)이 차를보다 단단해저서 압흐고 슯흔것도 못견듸게늣겨지지도 안커니와 보지못해 못견딀사람도업고 소식(消息)이라도 못알려 탈이될,더친(親)하고덜친(親)한이가업다.그러나 행(幸)혀이세상(世上)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잇다고하면 나는 의무(義務)로라도그대에게 나의소식을 알려야하지만은 지금의 나에게는 그러한미덕(美德)을 수행(遂行)할 야망(野望)조차업다.다만 야망(野望)을용서(容恕)한 사람이잇거든 가을바락에 무한(無限)히 흘러가는 황엽(黃葉)의 쪼각쪼각이 모두나의 편지라고 생각을 해라그리고 그어느한쪼각이라도 주어다가 그대들의책상(冊床)우에 꼬처두고 그황엽(黃葉)이 바람에 나붓기며울며부르짓는 서러운전기(傳記)를 들어보아라……&lt;br /&gt;
&lt;br /&gt;
‥‥그놈의 거리를 말할것도업고 저는하여(何如)든 가로수(街路樹)에서떨어저 왓습니다.그래서 거리에 서잇는동안 형형색색(形形色色)의 인간(人間)들을 다보앗습니다.그러나대개(大槪)는 모다비슷비슷한 인간(人間)들이엿고 별다른 놈은 못보앗습니다 그것은 십년전(十年前)일이라고생각됩니다.어느날오후(午後) 내발밋흘지나가는 소년(少年)이 잇섯습니다,미친놈가티 중얼대는 말을가만히듯자니『루나—ㄹ』의 일기(日記)를외이는겐지『불상한놈! 불상한놈!』 고거즛말하엿습니다,그뒤로는 매일(每日)가티 아침에도 내발밋홀지나고 저녁에도 내발미틀지나는동안에 나는어느사이에그만그녀석하고 친(親)해젓습니다,그래서 그녀석의 정체(正體)를 알수가잇섯습니다&lt;br /&gt;
&lt;br /&gt;
그녀석은 어느시골에서 출가(出家)를해서 서울을왓다는데 그출가(出家)한 이유(理由)가 어린녀석하고는 맹랑햇습니다 그녀석의 집은어느해안(海岸)이든가봐요 아침으로 조수(潮水)가 밀려나가면 끗업시 널려잇는 백(白)모래바티 너무도 허무(虛無)서 오기는왓스나 섬들을 건너간 갈메기가 몹시그립다고 하는것을보면 그래도 어린향수(鄉愁)가머리를 글거가는모양이겟지요&lt;br /&gt;
&lt;br /&gt;
그후(後)나는 우리들이 늘만나는시간(時間)이되면 그녀석이 하마나오나하고 기달리기도햇습니다 그럴때 멀리에 발자욱 소리가나고 그녀석이 『하이네』 니 『꾀—테』 니의 시(詩)를외이고 올때도잇섯습니다 그리고 몃해가 지난어느해봄날 내가긴 동면(冬眠)으로부터 영롱(玲瓏)한 첫눈을텃슬때 또그녀석을만낫습니다 그때는벌서그녀석은 십부게볼 소년(少年)이아니라 의례(依例)히 그상대자(相對者)를 다리고어둑어둑한 황혼(黃昏)에 내엽헤와서간즈려울만큼 종알대며 행복(幸福)의『메뉴—』를 전람회(展覽會)의『프로그람』보다 화려(華麗)하게꾸미는것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이것어 한여름을 지나며 비가오나 바람이부나 계속(繼續)이 되엿습니다 그러나 인간(人間)들에게잇서서는 행복(幸福)의 절정(絕頂)은 최대(最大)의비극(悲劇)과 서로통(通)해 잇나봐요 그해의 첫가을 어느으스름달밤에나는이비극(悲劇)을 바로 내눈헤서보는것입니다&lt;br /&gt;
&lt;br /&gt;
『여보우리두사람이 서로사랑하면 그만이지 사랑을 부모(父母)에대(對)한 효행(孝行)으로 하는데가 어데잇소.』&lt;br /&gt;
&lt;br /&gt;
이러케 그녀석은 폐(嬖)하는것이 엿습니다.&lt;br /&gt;
&lt;br /&gt;
그것도 고이치안흔게 그때쯤은 그녀석의 기분(氣分)이란 불꼿치타오를둣도 하얏거니와 제애비말을 안듯기로 유명(有名)하야 집을나선놈이니까.&lt;br /&gt;
&lt;br /&gt;
『그러치만은 엇절수가 잇서야 지요』&lt;br /&gt;
&lt;br /&gt;
이것이 그더석의 말에갑허진보수이엿습니다.그뒤나는 십년(十年)이란 긴동안 이사람들의 속삭임을 들을수는 업섯습니다.&lt;br /&gt;
&lt;br /&gt;
아마그것이 그들의 비극(悲劇)의시초(始初)FP동시(同時)에 나의『로—맨틔시슴』도 종언(終焉)이엿든 것입니다 나는그날부터 새로운 생활(生活)을 경험(經驗)하지안으면 안되엿읍니다 이때까지는 그들가운데에 엇던한두사람의 주활(主活)을 말로서 들엇으나 인제는 어느특정(特定)한 사람의사랑이라든지 그런달착지근 한것이아니라 그저그놈도 그놈갓고 그놈도 그놈갓흔 뭇사람의생활전체(生活全體)가 내풋입새의 거울보다 반드라운 쪼각쪼각에 빗치는 것이엿읍니다 이전갓흐면멀리서 삽분삽분 발자욱 소리가들려오고 그발자욱 소리가갓가워 지는데따라 쟁반에 구슬을굴리는듯한 목소리도 들엇건만은 또그럴때면 나도 입사귀를흔들어서 업김가티 보드러운바람을 부러도 주엇건만은 이때는 내가 바람을 불기는커녕그들의지나가는 위풍(威風)에 나는전율(戰慄)하지 안을수 업섯읍니다.구슬을 굴리는듯한 목소린들 어데가듯겟읍니가?뭇사람의 포효(咆哮)하는소리란 아주바다에서 이러나는노도(怒濤)의 교향악(交響樂)가탯습니다.&lt;br /&gt;
&lt;br /&gt;
그래서 나는알기를 인간(人間)이란위대(偉大)한 작란(作亂)군이라고 하엿습니다.어떠케 그들의 얼골이 크게보이고 힘차게 늣겨것든것인가 지금은 생각만하여도 왼몸이 으슬으슬합니다.그러는중(中)에그들의 행렬(行列)은 대강(大江)가티 홀러가고 나는 또다시 노랏케 단풍이들어 한닙두닙 떨어지는것입니다.얼마나 소조(蕭條)하고 적막한거리겟습니가? 내엽헤는 괴수(怪獸)가티 늘어선 삘딍들의 거믄그림자가『팔아스트 에 얼어부튼거지들의 싸늘한꿈을 죽엄가티덥허논때업니다.밤도삼경(三更)은 지난때이지요 더벅더벅 거러오는무거운 발자욱 소리와함께 나는고요한『그림자』하나를 발견(發見)햇습니다.안개에 촉촉히 저진차림자러와 힘업시 옴겨지는발자욱이 아주무슨 패잔병(敗殘兵)의 유령(幽靈)이엿슬지도 모릅니다.나는지금 그유령(幽靈)을 따라 굴러 갑니다.그러나 그유령(幽靈)은 내가미행(尾行)을 한다는것은 모르고 또는알엇다해도 아무저항(抵抗)도 할필요(必要)가업다는듯이 방향(方向)도업시것는것이엿습니다.때로는 시내도건너고들판도 지나 힘이지치고 밤이깁프면 산(山)기슭 나무등얼 밋헤누어서 하늘에 수(數)업시만흔 별들을 헤아려도 보는것이겟지요그러나 그어느별도그에게 행운(幸運)을 점제한별은 업섯나봐요 그리다간 그는그만 흑흑늣기고 울며울다가는 자는것이엿습니다.아마도 기적(奇蹟)을 이즌순간(瞬間)이 그에게는 자장행복(幸福)된순간(瞬間)이든가봐요,산(山)속은 찬기운만 가득하고벌레소리는 정적(靜寂)을 삼림(森林)가티무성(茂盛)하게하는것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그다음날도 아츰햇발이 속새입홀 흔들면 그는일어나 것는것이엿습니나.이러는 동안에 나는이유령(幽靈)에게서 무엇을 보앗스리라고 생각하심니가?어느큰강(江)가이엿습니다.여을어 목노아울고가는 강(江)가이엿습니다.그는이강(江)가에 안저서 무엇을 생각하엿는지 눈을깜은채로 하늘을치여다보는 것이엇고 초생달은교만(嬌慢)한 게집의눈자위처름 그를흘겨보는것은 한층(層)더창백(蒼白)한 비우슴갓햇습니다 그러치만은 그는그광망(光芒)을 피(避)하려고도 안엇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내생각에 따른다면 그래도 못잇처지는 날ㄹ기억(記憶)을 모조리 물소리에 씨처흘려보내려는 노력(勞力)이엿슬지도모릅니나&lt;br /&gt;
&lt;br /&gt;
그때 먼데마을에는 개짓는소리가 어즈러히 들여오고 새바람도 유달리 옷깃을 새여드는데 그는 일어셔 한발한발 물가으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때나는 그의운명(運命)을거의들여다보는것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자살(自殺)이란 광경(光景)이 내머리속에번개가티 일어낫습니다.그리고그는물가의 널직한 반석(盤石)우에올러안저서 물속에비친 자기(自己)의얼골을 자세히 들어다보는 것이엿습니다,그러나 그물속에는자기(自己)의 얼골은 차저볼수가 업섯든것이겟지요,증오(憎惡)를 참지못하는 그는그만 뼈만남은 두손으로 물결을 훗치고는 돌우에업더저 우는것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그는 또다시 일어나 모둔것을 이저버린듯이 걸어가는 것이엿습니다.일기(日氣)는점점 흐려지고 회색(灰色)으로 물드린 천공(天空)은 그의최후(最後)의 희망(希望)까지라도 빼서바릴듯이 싸늘한 압박(壓迫)을더하는것이엿습니다.그러타고해서 그에게는 아무런 격정(激情)도 반발(反撥)도잇는것갓지는 안엇습니다 만은 주먹을 쥐여서는 주머니속에 너은체로 간간히 머리를 흔드는것은 과거(過去)에대(對)한 회한(悔恨)이라든지그런것들이 머리속을 할터가는것이겟지요?&lt;br /&gt;
&lt;br /&gt;
그것은 어느동리(洞里)압이엿습니다만흔사람들이 모엿다가는 다들도라가고 큰버드나무에『사지오리』를 부친색기를 걸처맨밋헤는 기름종지에 빤—한심지불이타고잇스섯며 아해들 몃사람이그것을 직히고 잇섯습니다.그는아해들에게 무엇을하는것이냐고 물엇습니다.&lt;br /&gt;
&lt;br /&gt;
아해들의 대답이란 너무나 묘(妙)한것이 안이겟습니가?그동리(洞里)에는 십년(十年)만에 한번식은 유령(幽靈)이 난다는 전설(傳說)이 잇섯습니다그래서 그날은 동리(洞里)사람들이정성을 다하야 한데모혀서 기도(祈禱)를 올리고 고사(告祀)를 지내는것이엿는데 그날이마츰 십년(十年)에 해당(該當)한날이며 방금 의식(儀式)을 맛친때라고 말을마천 아해들은 그를 한참동안 자세히 보다가는그만 인가(人家)를 향(向)하야 다어나는것이엿습다.아마도 그것은참으로 이동리(洞里)에 유령(幽靈)이 나타낫다는것을 알리기 때문일런지도모름니다.&lt;br /&gt;
&lt;br /&gt;
그는 한번 크제우섯습니다나는 그가 웃는것을 보는것은처음이엿습니다,그러나 그웃슴이란 곳변해저서 므슨쓰듸쓴 약물을 먹은뒤의 입모습가리 변해지며 얼골전체가 크다란 환상(幻想)에 사로잡히는것 갓햇습니다그리다가 그는 그언덕 미테서잠이들어 자면서 꿈을 꾸는것여엿습니다,그꿈이란 이러햇습니다,몹시더운 여름날 몃칠을두고 비가따루엇습니다,그래서큰물이나고 하루밤사이에 왼동리(洞里)가 물에쓸려 갓읍니다 왼여름 피담을홀려 지은농사(農事)도 한포거업시 사람마다 두주먹과한개의 목슴박게는 남지안엇음니다 주림과 치위가 매운챗죽갓치 그들을 휘갈겻읍니다 그래서 동리(洞里)사람들은 제각기 이고향(故鄕)을 떠나지안호면 안되엿읍니다 물론(勿論)녯날에야 부모(父母)의 품속갓치 포근하고 사랑스런 땅이엿지만은 지금은 참담(慘憺)과 고통(苦痛)의 회억이외(回憶以外)에 아부것도 그들의 애착(愛着)을 붓잡어 두□는 못하엿읍니다.그들은지금 한개촌락(個村落)에서 다른촌락(村落)으로 한성시(城市)에서 또다른성시(城市)에 표박(標泊)□ 길을가는것이엿지만은 그어느□곳도그들이발을 부칠곳은 어□읍니다 모든집들어 그들압헤는 문(門)들을 잠것읍니다.그리고 오즉그들에게는 한오리 끗어는 길이엿음니다 어느때나 □□갈수잇는 길이엿읍니다 하□□또하루 한달에또한달 꼭가티 그들은 하늘을 치여다보고 □을갓읍니다.벌서초본(草本)도 다□□이들고 낙엽(落葉)이 나리나 그들의발길은 머므를수는 업섯습니다 어느마을이나 성시(城市)에서 그들에게 일주일(一週日)이나 유(留)할수가□고한오리의 희망(希望)을 주엇다면 다시그순간(瞬間)이 지나면 그들에게는서름이외(以外)에 아무것도 □는것은업섯습니다.그러나 이□름과주림과 치위는 그들늙은이와 어린이와 남자여자(男子女子)를 모다한마음에 얼거맬수가 잇섯습니다 바탐과비에 바래인 그들이마음에한개의희망(希望)이란 오즉 일거리와생활(生活)이엿습니다 이것이 그들을고무(皷舞)하고 추진(推進)하는 힘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마치한떼의 표유(瓢游)하는『집시』와가티 마을을지내나 산(山)을너무나 마른풀을뜨더 그것을 덥고깔고 혹(或)은낙엽(落葉)을 쓰러다가 욕(褥)와 이불을삼어 한랭(寒冷)을 지나는하루밤 더욱이 비오는밤……밤은영원(永遠)히 차운것이며 뜨신것은다만그들의『마음』뿐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날과밤은 그넷줄처럼 밧구엿습니다.해도점점 쩔러지고 물들이 어러부트며 첫눈이 나린것도 발서 열흘전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그들은 아즉까지도 발무칠땅과한가지의 일거리도 찻지는못하엿스며 끗간데를모를 길만을보고 걸어가는것입니다.&lt;br /&gt;
&lt;br /&gt;
『여기라도 좀쉬여갓스면』모다들이러케 마음으로 부르지젓습니다.그러나 또몃사람운 말하는것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가자 압흐로 더가보자』이것도모든사람의 말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그들은 여전히 경사(傾斜)진 산(山)빗탈을걸어가며 길다란 곡선(曲線)의행렬(行列)이 계속(繼續)되는것입니다.그때는바람도 조골 잔잔해지고 햇발도구름밧글나와 열분광선(光線)이 뭇사람의 얼골을 다소명낭(多少明朗)하게하엿스나 일행(一行)이바로 산(山)미루턱에올너다엇슬때는 정세(情勢)는 디무도급(急)히변(變)하야 눈이퍼붓기 시작(始作)햇습니다.&lt;br /&gt;
&lt;br /&gt;
『눈이또나린다』이러케 부르짓고는모다들 놀나는 것이엿습니다.눈송이는 목화(木花)를 뜨더뿌리는듯이왼공중(空中)에 미만(瀰漫)하야지척을가릴수가 업섯습니다.바람에몰려오는 눈송이가 얼골에 부다치면 낫살을 어이는듯하고 손이빠질듯이 스린것입니다.시력(視力)조차 모호(糢糊)하야 발아래길도 알어보기는 어려웟습니다 재를오를때에 비(比)하면 산(山)을나려오는것은조금용이(容易)하엿스나 길이질대로 질어서 업더지락 잡버지락하는 사람들도잇스며 등에업힌 어린애들은 배가몹시 곱흐다고 우는것이며 그럴때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다들 산(山)밋헤 동리(洞里)집에 나려가서 드신밥을 준다고달래는것이엿습니다 그러나 산(山)미테 동리(洞里)집은 모다제각기 제마음에 그려보는 집들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가자 조금이라두 빨리가자불빗을 볼때까지』그들중(中)에서 한사람이 굴근목소리로 외치는것입니다&lt;br /&gt;
&lt;br /&gt;
『암그래야지』또 몃사람의 대답이 끗나면 모다들 침묵(沈默)은하면서 마음속으로는역시(亦是)『가자』고 대답하는것입니다&lt;br /&gt;
&lt;br /&gt;
사람들은 이빨을물고 잇는힘을다하야 전진(前進)합니다 지나온길이얼마이며가야할길이 얼마인것도모르면서 죽으나사나 가야한다는 것박게는 그들은 한사람도자기(自己)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업섯습니다.그들의 동반자(同伴者)의 발소리와 호흡(呼吸)이 그들의가튼 운명(運命)을결정(决定)한다는것은 이잔혹(殘酷)한 자연(自然)과 싸워가는 무리들의 금과옥조(金科玉條)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눈보래는 끗첫습니다.그러나아즉도 그들에게는 조그마한희망(希望)도 보이지는 안헛습니다.압도캄캄하고 뒤도그랫습니다.아득한 삼림(森林)속을 허우덕이는 암담(暗膽)은 영원(永遠)한흑야(黑夜)가 새이지도안코 영원(永遠)한 미로(迷路)도 끗막지도못할것 갓햇습니다.&lt;br /&gt;
&lt;br /&gt;
피로(疲勞)는 그들의몸을 풀솜가티만들엇습니다.참다가 못참는몃사람이 땅이라도 꺼지란듯이한숨을 쉬는것이엿습니다.그리고는 부르짓는 사람도업고 중얼대는 사람도업스며 눈물도마르고 공포(恐怖)도 사라진 그들은 발목에 잇는 힘을 다해서 눈과진흙우를 쉬임업시 이동(移動)하는것입니다.』&lt;br /&gt;
&lt;br /&gt;
유령(幽靈)은 그들가운데서 제일나이만흔 노인(老人)을 발견(發見)햇습니다그리고 그것은십년전(十年前) 그가고향(故鄕)을떠나올때 아즉도 그다지늙지안흔 그의아버지인것도 알엇습니다 그리고 모든사람은 그의어린시절(時節)의 동무엿습니다 그는참다못해『아버지』하고 소리를첫&lt;br /&gt;
&lt;br /&gt;
습니다 그러나그들은 어느한사람도 그를상대(相對)로 반겨마저주는사람은 업섯습니다.&lt;br /&gt;
&lt;br /&gt;
모다제각기 제갈길을 가고만잇섯습니다.&lt;br /&gt;
&lt;br /&gt;
유령(幽靈)도 그때야 잠이깨엿습니다 그리고 몸써리를 치는것입니다 얼마나 지리(支離)한꿈이며 괴로운 꿈이겟습니까?유령(幽靈)은다시일어나 것는것입니다 캄캄암흑(暗黑)속을 영원(永遠)히차고 영원(永遠)히 새지못할듯한밤을 제혼자가는것입니다 십년전(十年前) 내발밋흘 지나단이며 사랑을 속삭이든 소년(少年)은지금도 밤길을 제혼자 가고잇겟지요 황엽(黃葉)은 그래서 서러운일생(一生)을 울고만잇습니다&lt;br /&gt;
&lt;br /&gt;
정축십일(丁丑十一),일(一)&lt;br /&gt;
&lt;br /&gt;
=='''주요 내용 요약'''==&lt;br /&gt;
주제: 작가(필자)의 소식을 세상에 전하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이다.&lt;br /&gt;
&lt;br /&gt;
소식 전달: '내'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가을 바람에 흘러가는 '황엽(黃葉, 누런 잎)' 조각을 자신의 편지라고 생각하고 그 서러운 전기를 들어보라고 한다.&lt;br /&gt;
&lt;br /&gt;
'황엽'의 관찰: 황엽(필자)은 자신이 거리에서 겪은 두 가지 경험을 이야기한다.&lt;br /&gt;
&lt;br /&gt;
소년의 성장과 비극: 어린 소년이 성장하여 연인과 행복을 속삭였으나, 부모에 대한 효행 문제로 헤어지는 비극을 목격하는 것이다. 황엽은 이를 '행복의 절정은 최대의 비극과 통한다'고 표현하며 자신의 '로-맨틔시슴'의 종언이라고 말한다.&lt;br /&gt;
&lt;br /&gt;
군중의 포효와 유령: 이후 황엽은 개별적인 사랑 이야기가 아닌, '뭇사람의 생활 전체'와 **'노도(怒濤)의 교향악'**을 목도한다. 황엽은 이 거대하고 위대한 '작란군(作亂群)'의 행렬에 전율을 느낀다. 행렬이 사라진 후, 황엽은 '패잔병의 유령' 같은 힘없는 한 사람의 고독하고 고통스러운 표류와 꿈을 따라가며, 꿈속에서 홍수로 고향을 떠난 농민들이 희망 없이 떠돌지만 '가자 압흐로 더가보자'는 그들의 단합된 의지를 발견하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마무리: 유령이 깬 후 다시 홀로 밤길을 걷는 모습을 보며, 황엽은 '서러운 일생을 울고만' 있다고 글을 마무리하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분석 및 특징'''==&lt;br /&gt;
메타포(은유)적 글쓰기: '황엽(낙엽)'이라는 매개를 통해 자신의 소식과 감정을 전달하는 고도의 은유적인 글이다. '황엽'은 작가 자신의 고독하고 소외된 자의식, 혹은 시대를 표류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시대의식의 투영: 개인적 낭만(소년의 사랑)의 종언과 함께,'뭇사람의 생활 전체'와 '노도의 교향악'을 목도하며 당대의 격변하는 사회상과 민중의 힘을 인식하는 작가 의식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이육사의 서정성: 후반부 꿈속에서 펼쳐지는 농민들의 표류와 그들의 굳건한 생존 의지는 당시 농촌의 피폐함과 함께 암울한 현실 속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을 비장하게 포착해내는 이육사 특유의 서정성을 보여주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전과기'''=&lt;br /&gt;
누구나 버릇이란 쉽사리 곳처지는것은아니다 그러므로 세살쩍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말도 잇지 안는가?.그런데도흔히 다른사람의 한가지 버릇을 새로히 발현햇슬때는 아—저사람은 저런버릇이 잇구나하고 속으로 비우서보거나 그버릇이 조치못한종류의것이면 대개는 업수히역이는 수도잇는가봐!.그럿컨만 나에게는 아무리 곤처보려도 곤처지지안는버릇이란 손톱을 깍고 줄로 으르고 수건으로 닥고하는것이다그것도 때와곳을 가릴것도업시조욕(漕浴)나 다방(茶房)이나는 말할것업고기차(汽車)나 배를타고 멀리여행(旅行)이라도하면 심심푸리도되고 봄날도서관(圖書舘)가튼데서 서너시간(時間) 안저백이면 제아무리 게른뱅이는 아닐지라도 웃눈섭이 기중기(起重機)처름아래눈섭을 끄러다닐때도 잇는것이고 그럴때에 손톱을 잘르고줄로 살살으르면 자릿자릿한 자미에 왼몸에게틈이 다풀리는것이다.그야내나이 어릴때는아침일직이손톱을 잘르면어룬들은질색을하시며 말리기도하엿다,그리고 말릴때에 누구인지지금에기억되지는 안어도 우리집에자주오는 손이 말하기를 아침에손톱깍고 밤에 머리빗는것은몸에해롭다고 하는것이엿고 내생각에도 그런방문은『동의보감(東醫寳鑑)』에라도 싸여 잇는줄 아럿기에그뒤로는 힘써시간(時間)을 한나절지난뒤에 손톱을 닥곤하엿지만나도내대로 세상맛을 보게된뒤로는 쓴맛단맛을 다보고 시고떨븐 구석과 휘추고초가튼 광경에 부닥길때가 시작이되고는손톱치레를 할만한 여가도 업섯고 어느사이에 손톱은 제대로자라 긴놈 쩌른놈 삐뚜러진놈꼬부러진놈 벌덕잡버진놈 앙당마스러진놈 이러케되야 내손이란 그꼴이 맛치 오증어를 뒤집어 삶어논것이 되엿다.&lt;br /&gt;
&lt;br /&gt;
그럴때에 나는 또 다시 손톱을 잘를것은 잘르고 으를놈은 으르곤하엿스며 이른아츰이라도 가리지는 안엇다.그것은밤으로 머리를 깍거보아도 몸에 해로운것도 업스니까 아츰에 손톱을 깍는것조차 위생(衞生)과는 관게업는것을 안까닭이다.&lt;br /&gt;
&lt;br /&gt;
그런대 내가이손톱을 잘르는버릇은 언제부터 시작되엿는가를 생각해보면 그도벌서 삼십년(三十年)이 더지낫다,내가난지 백일(百日)이나 되엿겟지 이란저고리박게빨간내손이 나와서 내얼골을 햅여뜻고는 나는자스려질듯이 울엇다.어머니가 놀라서가위로 내손톱을 잘러주신것이 처음이고그것이 늘거듭하야 지는동안에봄철이오면 어머니는 우리형제(兄弟)를 차례로불러 퇴ㅅ마루 양지쪽에 안치고 손톱을 잘러주시고 머리도빗기고 귀도휩여 주섯스며 이것도 내나이 여섯살때 소학(小學)을 배우고는 이런일의한반(半)은 할아버님께 이관(移管)이 되엿다 예날 내고장 우리집에는그다지 크지는못해두 허무히 적지안은 화단(花壇)이 잇섯다 그리고그화단(花壇)은 이때쯤되면 일이밧벗다 깍지로긁고호미로 매고 씨갑씨를 뿌리고총생이를 옴겨심고 적당한 거름도 주엇다 요즘가티『시크라맨이나『카—비손』이나『추리프』가튼것은 업서도 옥매화(玉梅花) 분홍매화(粉紅梅花) 홍도(紅桃) 벽도(碧桃) 해당화(海棠花) 장미화(薔薇花) 촉규화(蜀葵花) 백일홍등등(百日紅等等) 빗도보고 향(香)내도맛고꼿도보고 입도볼 말하면 일년(一年)을 다즐길수가잇는것이엿는데 내할아버지 생각은 이제 헤아려보면 우리들에게 글읽고 글시씨인사이로노력(勞力)을 몸소맛보이는것도 되려니와 그것이 정서교육(情緒敎育)도될겸(兼) 당신의 노래(老來)를 화려(華麗)하게 꾸밀수도 잇섯든 모양이엿다 그럴때마다 우리들은 이다지 가볍고고흔 노동(勞働)이 끗나면 할아버지는 우리들게 손을씨슬것과 손톱에끼인흙을 끌어내도록 손톱을닥그라 하섯다.&lt;br /&gt;
&lt;br /&gt;
이러든 내손톱이기에 나는손톱을 소중히하고 잘르고 으르고 닥고하는 동안에 한가지방편을 어덧다 그것은 나에게거북한일을말하는 사람아페서 손톱을 닥는것이다.빤히 얼굴을맛대이고 배알에 거슬이거나듯기실흔 말을듯고 억지로 참을수도업고 그러타고 언잔흔표정(表情)을 할수도업서 손톱을 닥노라면 시굴게신 어머니도 그려보고 도라가신 할아버지의 모습을 우러러 뵈일수도잇다.내고장의 푸른하늘아래 봄이 왓슬것도 가트니&lt;br /&gt;
&lt;br /&gt;
——(완(完))——&lt;br /&gt;
&lt;br /&gt;
=='''주요 내용 요약'''==&lt;br /&gt;
손톱 깎는 버릇: 화자(나)에게는 아무리 고치려 해도 고쳐지지 않는 버릇, 즉 손톱을 깎고 줄로 다듬고 닦는 행위가 있다. 이 행위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으며, 특히 심심하거나 피로할 때 긴장을 풀어주는 '자릿자릿한 재미'를 준다. &lt;br /&gt;
&lt;br /&gt;
버릇의 변화와 세상 경험: 어릴 때는 '아침에 손톱 깎는 것은 몸에 해롭다'는 옛말 때문에 어른들이 말렸고, 화자도 이를 믿었다. 그러나 세상을 경험하며 '쓴맛 단맛'을 다 본 후, 손톱 관리에 신경 쓸 여유가 없어 손이 엉망이 되기도 했다. 이후 미신이나 위생보다는 개인의 필요에 따라 언제든 손톱을 다듬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버릇의 기원과 따뜻한 기억: 이 버릇은 태어난 지 백일 무렵 어머니가 처음 손톱을 깎아준 것에서 시작되었다. 봄철이 되면 어머니는 형제들의 손톱을 깎고 머리를 빗겨주셨다. 여섯 살 때부터는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화단(花壇)을 가꾸는 노동을 했다. 할아버지는 이 노동을 노력(勞働)을 몸소 맛보게 하고 정서 교육을 시키는 수단으로 여겼다. 노동이 끝난 후에는 손톱에 낀 흙을 닦도록 하셨는데, 이는 정돈과 청결의 습관으로 이어졌다.&lt;br /&gt;
&lt;br /&gt;
손톱 관리의 '방편': 손톱을 닦는 행위는 시간이 흐른 뒤 화자에게 '방편(方便)'의 의미를 얻게 되었다. 듣기 싫거나 거북한 말을 하는 사람 앞에서 이 행위를 하면, 억지로 표정을 관리할 필요 없이 그 행위에 몰두하며 고향의 어머니와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분석 및 특징'''==&lt;br /&gt;
일상적 소재의 상징성: '손톱 깎는 행위'라는 극히 일상적인 소재를 통해 삶의 태도, 유년 시절의 기억, 그리고 현재의 심리적 방어 기제까지 끌어내는 수필이다.&lt;br /&gt;
&lt;br /&gt;
세대 간의 경험 대비: 수필은 크게 세 시기를 대비시킨다.&lt;br /&gt;
&lt;br /&gt;
유년기 (어머니/할아버지): 손톱 관리가 사랑과 보호, 그리고 정서 교육의 매개였다. (전통적이고 순수한 가치)&lt;br /&gt;
&lt;br /&gt;
성인기 (세상 맛을 봄): 손톱 관리가 소홀해지고 삶의 고난과 시련 속에서 잊혔다.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운 현실)&lt;br /&gt;
&lt;br /&gt;
현재 (손톱을 닦는 '방편'): 손톱 관리가 현실의 고통을 회피하고 내면의 안정을 찾는 심리적 '방편'이 되었다. (현실과의 거리 두기)&lt;br /&gt;
&lt;br /&gt;
정서적 위안: 화자가 불편한 상황에서 손톱을 닦는 행위는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힘들었던 현실 속에서 유년기의 평화로웠던 기억(어머니, 할아버지, 화단)을 소환하여 현재의 감정을 통제하고 마음을 지키는 자기 치유의 과정인 것이다.&lt;br /&gt;
&lt;br /&gt;
향토적 정서: 화단에 핀 옥매화, 장미화, 백일홍 등과 퇴마루 양지쪽 같은 토착적인 이미지를 통해 과거의 아름다웠던 고향과 가족의 정을 회상하며, 전통적 가치에 대한 향수를 드러낸다.&lt;/div&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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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이육사와 독립운동</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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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10T09:21:1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Imgpdnjs: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목차==&lt;br /&gt;
# 여는 말&lt;br /&gt;
# 기획 의도&lt;br /&gt;
# 독립운동가들&lt;br /&gt;
&lt;br /&gt;
==여는 말==&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파일:이육사.jpg]]&lt;br /&gt;
&amp;lt;/div&amp;gt;&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이 페이지는 시인이자 강인한 독립운동가였던 [[이육사(李陸史)]]라는 상징적인 인물을 중심으로, &amp;lt;/div&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그와 운명적으로 얽혀 격동의 시대를 함께 살아낸 주요 인물들의 삶과 활동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기 위해 기획되었습니다. &amp;lt;/div&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저희는 이육사를 무장 투쟁 노선과 문화적 저항을 모두 관통했던 '연결 고리'로 설정했습니다. &amp;lt;/div&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위키를 통해 알아보는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가들, 그 안에 중심 &amp;lt;font color=&amp;quot;red&amp;quot;&amp;gt; '''''[[이육사(李陸史)]]'''''&amp;lt;/font&amp;gt;&amp;lt;/div&amp;gt;&lt;br /&gt;
&lt;br /&gt;
==기획 의도==&lt;br /&gt;
본 위키 페이지는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이육사(李陸史)]]&amp;lt;/div&amp;gt;라는 상징적인 인물을 중심으로, 그가 교류하고 영향을 주고받았던 주요 인물들의 삶과 활동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것을 기획 의도로 삼습니다. 일반적인 위인전 형식에서 벗어나, 이육사를 연결고리로 삼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문학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주변 인물들의 복합적인 업적과 시대적 맥락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하고자 합니다.&lt;br /&gt;
&lt;br /&gt;
==독립운동가들==&lt;br /&gt;
#[[장진홍_1895]]&amp;lt;/div&amp;gt;&lt;br /&gt;
#[[김원봉_1898]]&amp;lt;/div&amp;gt;&lt;br /&gt;
#[[윤세주_1901]]&amp;lt;/div&amp;gt;&lt;br /&gt;
#[[김광섭_1905]]&amp;lt;/div&amp;gt;&lt;br /&gt;
&lt;br /&gt;
==Visualization==&lt;br /&gt;
{{NetworkGraph|title=3조.lst}}&lt;/div&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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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이육사와 독립운동</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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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lt;br /&gt;
==목차==&lt;br /&gt;
# 여는 말&lt;br /&gt;
# 기획 의도&lt;br /&gt;
# 독립운동가들&lt;br /&gt;
&lt;br /&gt;
==여는 말==&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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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일:이육사.jpg]]&lt;br /&gt;
&amp;lt;/div&amp;gt;&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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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기획 의도==&lt;br /&gt;
본 위키 페이지는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이육사(李陸史)]]&amp;lt;/div&amp;gt;라는 상징적인 인물을 중심으로, 그가 교류하고 영향을 주고받았던 주요 인물들의 삶과 활동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것을 기획 의도로 삼습니다. 일반적인 위인전 형식에서 벗어나, 이육사를 연결고리로 삼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문학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주변 인물들의 복합적인 업적과 시대적 맥락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하고자 합니다.&lt;br /&gt;
&lt;br /&gt;
==독립운동가들==&lt;br /&gt;
#[[장진홍_1895]]&amp;lt;/div&amp;gt;&lt;br /&gt;
#[[김광섭_1905]]&amp;lt;/div&amp;gt;&lt;br /&gt;
#[[김원봉_1898]]&amp;lt;/div&amp;gt;&lt;br /&gt;
#[[윤세주_1901]]&amp;lt;/div&amp;gt;&lt;br /&gt;
==Visualization==&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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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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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분류:imgpdnjs]]&lt;br /&gt;
&lt;br /&gt;
[[파일:조선은행대구지점사진.jpg|500픽셀|섬네일|center|조선은행 대구지점 전경 ⓒ 대구역사문화대전]]&lt;br /&gt;
&lt;br /&gt;
&lt;br /&gt;
==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 ==&lt;br /&gt;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은 1927년 10월 18일 대구에서 발생한 무장 독립운동으로, 장진홍이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시한폭탄을 배달하여 폭발시킨 사건이다. 당시 조선은행은 조선 내 금융·화폐 정책의 핵심 기관이며, 식민경제 지배의 상징적 공간이었다. 폭발은 은행원과 일본 경찰 등 5명에게 중상을 입혔고, 창문 70여 장이 파손될 정도로 강력해 대구 도심 전체가 흔들렸다.&lt;br /&gt;
&lt;br /&gt;
&amp;quot;1927년 한낮, 조선은행 대구지점에서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이 울렸다. 이는 한 민족에게 독립의 외침이었으며, 민족혼을 일깨운 우뢰와도 같았다.&amp;quot;는 기록도 남아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 '''역사적 배경''' ==&lt;br /&gt;
3·1운동 이후 1920년대 조선의 무장 독립운동은 의열단 활동을 중심으로 급진화되고 있었다. 이 시기 투쟁의 주요 대상은 경찰서·도청 같은 행정기관뿐 아니라, 식민 금융 지배의 핵심이던 조선은행과 식산은행 등 경제착취 기관이었다.&lt;br /&gt;
&lt;br /&gt;
조선은행 대구지점은 1910년대 중반 대구 중심부에 건립되었으며, 일제의 세금 관리·화폐 유통·대규모 자금 대출을 담당하는 지역 경제 지배의 핵심 기관이었다. 직원의 상당수가 일본인이었고, 군 복무 경험자도 많아 보안 체계가 강화되어 있었다. 건물은 붉은 벽돌과 석재를 혼합한 2층 구조였으며, 외부에서 수상한 물체가 반입될 경우 쉽게 눈에 띌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lt;br /&gt;
&lt;br /&gt;
1927년 4월, 무장투쟁을 준비하던 장진홍은 일본인 좌파 활동가 굴절무삼랑(堀切茂三郞)을 통해 폭탄 제조법과 뇌관, 도화선, 자금을 제공받았다. 일제는 이 사건을 ‘국제공산당 배후설’로 몰아갔으나, 실제로는 일본 내 혁명운동 잔존 세력과의 연결에 가깝다는 평가가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 '''사건 준비''' ==&lt;br /&gt;
장진홍은 폭탄 제조법을 익힌 뒤 경북 칠곡·선산 경계의 봉화산에서 시한폭탄 성능 시험을 실시했다. 테스트 결과를 토대로 그는 대형 폭탄 4개와 소형 자결용 폭탄 1개를 추가로 제작했다. 장진홍의 목표는 대구의 핵심 식민통치 기관 네 곳이었다.&lt;br /&gt;
&lt;br /&gt;
* 조선은행 대구지점  &lt;br /&gt;
* 경북도청  &lt;br /&gt;
* 식산은행 대구지점  &lt;br /&gt;
* 경북경찰부  &lt;br /&gt;
&lt;br /&gt;
1927년 10월 17일, 그는 폭탄을 자전거에 싣고 대구로 이동해 덕흥여관에 투숙했다. 일제의 수사를 교란하기 위해 다리를 저는 척하고 서울말을 사용한 것은 의도된 위장이었다.&lt;br /&gt;
&lt;br /&gt;
여관 사환 박노선은 장진홍이 넘어진 부상자라고 믿었고, 다음 날 그가 부탁한 ‘벌꿀 상자’ 배달 심부름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 상자들 속에는 모두 폭탄이 들어 있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 '''사건 전개''' ==&lt;br /&gt;
10월 18일 오전 9시경, 박노선은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상자 한 개를 전달했다. 상자는 국고계 주임 복지흥삼에게 전달되었으나, 건물 안에 있던 일본인 은행원 길촌결(吉村潔)이 화약 냄새를 감지하여 즉시 포장을 풀어 확인했다. 그는 도화선을 잘라냈지만, 이미 점화된 폭탄은 11시 50분경 내부에서 폭발했다.&lt;br /&gt;
&lt;br /&gt;
* 창문 70여 장 파손  &lt;br /&gt;
* 은행 직원 및 일본 경찰 포함 5명 중상  &lt;br /&gt;
* 충격파가 대구역까지 도달  &lt;br /&gt;
* 은행 주변 기와지붕 파손, 유리 파편이 수십 m 반경으로 확산  &lt;br /&gt;
&lt;br /&gt;
폭발 직후 은행은 극심한 혼란에 빠졌고, 경찰과 소방 인력이 긴급 투입되었다. 인근 상점과 시장 상인들은 대규모 폭동으로 오인하여 대피했고, 대구 도심 전체가 한동안 마비되었다는 보도도 있다.&lt;br /&gt;
&lt;br /&gt;
나머지 세 건물(도청·식산은행·경북경찰부)의 폭발이 실패한 이유는 길촌결의 조기 발견으로 추가 전달이 중단되었기 때문이었다.&lt;br /&gt;
아래 지도에서 빨간색인 곳은 실제로 폭발이 일어난 조선은행 대구지점이고, 나머지 파란색인 곳은 폭발 예정이지만 실패했던 경북도청, 식산은행 대구지점, 경북경찰부이다.&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amp;quot;https://www.google.com/maps/d/embed?mid=1Vbme0Wt5tZNnQRcv9tCNeZ6x62FsuF8&amp;amp;ehbc=2E312F&amp;quot; width=&amp;quot;640&amp;quot; height=&amp;quot;480&amp;quot;&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lt;br /&gt;
== '''언론 보도와 사회적 반응''' ==&lt;br /&gt;
* '''매일신보'''(총독부 기관지): 사건을 &amp;quot;공산주의자의 파괴 음모&amp;quot;로 규정, 치안유지법 강화를 촉구  &lt;br /&gt;
* '''조선일보·동아일보''': 의거 자체의 배후를 명확히 알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며 보도  &lt;br /&gt;
* 대구 지역 상공인: 은행의 업무 마비와 금융 거래 지연으로 경제적 혼란 경험  &lt;br /&gt;
* 민중 여론: 표면적 침묵 속에서도 식민 금융기관을 겨냥한 공격이라는 점에서 은근한 지지 분위기 존재  &lt;br /&gt;
&lt;br /&gt;
이처럼 같은 사건을 두고 신문마다 다른 관점을 보였으며, 이후 일제가 지방 경찰권 강화의 명분으로 사건을 적극 활용하였다.&lt;br /&gt;
&lt;br /&gt;
== '''초기 수사와 검거''' ==&lt;br /&gt;
폭발 직후 일제 경찰은 대규모 검거 작전을 실시하고, 1928년 1월 이정기 등 8명을 체포했다. 이 과정에서 여러 조선인 독립운동가가 고문과 조작된 자백으로 억울하게 연루되었으며, 당시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인물 중에는 시인 [[이육사]]도 포함되었다.  &lt;br /&gt;
이육사는 이때 부여받은 수인번호 ‘264’를 자신의 아호 ‘육사(陸史)’의 유래로 삼게 된다.&lt;br /&gt;
&lt;br /&gt;
조선은행 사건은 이육사에게 첫 투옥 경험을 안겨준 사건이자, 그의 이후 독립운동 및 문학 활동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사건으로 평가된다.&lt;br /&gt;
&lt;br /&gt;
&lt;br /&gt;
== '''폭발 이후 대구 지역 독립운동의 변화''' ==&lt;br /&gt;
조선은행 폭파 사건은 대구 지역 항일운동에 다음과 같은 영향을 미쳤다.&lt;br /&gt;
&lt;br /&gt;
* 비밀결사 조직망 와해 및 재편  &lt;br /&gt;
* 경찰·헌병의 사상 탄압 확대  &lt;br /&gt;
* 경북·대구 지역에서 폭발물 관련 규제 강화  &lt;br /&gt;
* 지역 사회의 방범 조직 확대  &lt;br /&gt;
&lt;br /&gt;
신고 체계가 강화되면서 무장독립운동은 더 은밀한 underground 조직 형태로 변화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 '''조선은행 대구지점 건물의 이후''' ==&lt;br /&gt;
폭발 후 조선은행 대구지점은 여러 차례 개·보수를 거쳤으며, 해방 이후 한국은행 대구지점으로 잠시 사용된 기록도 있다. 이후 원 건물은 도시 개발 과정에서 철거되거나 개축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건물의 정확한 형태는 사진 자료를 통해 일부만 확인된다.&lt;br /&gt;
&lt;br /&gt;
&lt;br /&gt;
== '''결과와 의의''' ==&lt;br /&gt;
장진홍은 폭발 확인 후 피신했으나, 1929년 2월 일본 오사카에서 경북경찰부 형사들에게 체포되었다. 본국으로 송환된 장진홍은 자신을 취조하는 조선인 경관들의 행태를 질타하며 불굴의 독립의지를 과시했다. 그는 고문을 받은 끝에 1심과 2심에서 사형이 선고되자 &amp;quot;조선독립만세&amp;quot;를 외쳤다. 1930년 7월 31일 밤, 장진홍은 일제에 대한 마지막 항거로 자신의 손으로 목숨을 끊어 옥중 자결 순국했다. 이 사건의 여파로, 시인 [[이육사(李陸史)]]는 1927년 장진홍 의거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어 1년 7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그는 이때 받은 수인번호 264에서 따서 자신의 호를 '육사(陸史)'라고 지었다. 이육사 시인 외에도 장진홍의 어머니가 이 일로 체포된 바 있으며, 인동 장씨 일가인 장용희가 동료와 가족의 피해를 줄이고자 자결했고, 그의 친척인 장효식이 행방불명되는 등 주변 인물들이 이 사건으로 인해 큰 고초를 겪었다. 이 사건은 1920년대 말 대구 지역의 대표적인 무장 독립운동이었으며, 거사가 국제공산당과 연계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장진홍판결문.jpg|300px|섬네일|center|장진홍 사건 관련 판결문 ⓒ 대구역사문화대전]]&lt;br /&gt;
&lt;br /&gt;
&lt;br /&gt;
=='''소설로 다시 재현해보는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lt;br /&gt;
&lt;br /&gt;
덕흥여관에 처음 들어갈 때 장진홍은 겨우 걷는 사람처럼 심하게 다리를 절뚝거렸다. 자전거를 나무 아래에 세우고 묶는 일도 간신히 해냈다. 사환 박노선이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이윽고 말을 걸었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1e90ff&amp;quot;&amp;gt;&amp;quot;와 카심니까(왜 그러십니까)? 크게 다친 거 같은데 자정건 우째 타고 오싰능교(자전거는 어떻게 타고 오셨습니까)?&amp;quot;&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ff8c00&amp;quot;&amp;gt;&amp;quot;내가 선물을 꼭 보내야 할 고마운 곳들이 몇 군데 있는데, 모두들 이 인근에 있다오. 그래서 이렇게 자전거에 선물들을 싣고 왔는데,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을 기약해야지요. 내리막길에서 자전거를 타다가 심하게 넘어지는 바람에 이리 다쳤지요.&amp;quot;&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장진홍이 서울말로 대답했다. 그렇게 다리를 전 것과 서울말을 쓴 것은 의거 후 일제 경찰의 수사에 혼선을 주려는 의도된 언행이었다. 자신을 노출하지 않으려면 다른 사람을 동원해야 하는데, 박노선에게 심부름을 시키면 적당하겠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다시 이튿날(18일), 장진홍은 박노선에게 '심부름값'을 주면서 부탁했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ff8c00&amp;quot;&amp;gt;&amp;quot;자고 나면 낫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다리가 퉁퉁 붓고 통증이 더 심해져서 아주 걷기가 힘들게 되었다오. 이것들이 모두 벌꿀상자인데 조선은행, 도청, 식산은행, 경찰서에 순서대로 급히 배달을 좀 해 주시오.&amp;quot;&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벌꿀 선물로 위장된 상자들 안에는 장진홍이 직접 제조한 시한폭탄들이 들어 있었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박노선은 짭짤한 심부름값이 흐뭇해 부랴부랴 상자들을 챙겨들고 조선은행 대구지점으로 갔다. 박노선은 장진홍이 시킨 대로 국고계 주임 복지흥삼(福地興三)을 찾았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1e90ff&amp;quot;&amp;gt;&amp;quot;선물 가꼬(가지고) 심부름 왔어에(왔어요), 주임님!&amp;quot;&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박노선은 평소 안면이 있는 복지흥삼에게 벌꿀 상자 하나를 건넸다. 그때 복지흥삼 곁에 군인 출신 일본인 은행원 길촌결(吉村潔)이 앉아 있었다. 그가 군인 출신답게 화약 냄새를 맡았다. 길촌결이 재빨리 포장 끈을 풀었다. 상자 안에는 도화선에 불이 붙은 폭탄이 이글거리고 있었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a020f0&amp;quot;&amp;gt;&amp;quot;으악! 이게 뭐야? 이게 뭐야!&amp;quot;&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복지흥삼이 비명을 질러댔다. 길촌결이 재빠르게 도화선을 잘랐다. 아직 불이 옮겨 붙지 않은 나머지 세 상자는 황급히 은행 앞뜰 자전거 주차장로 옮겨졌다. 신고를 받은 경찰이 달려왔고, 박노선은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lt;br /&gt;
&lt;br /&gt;
경찰은 주차장에 있는 폭탄 셋을 다시 한길로 내놓았다. 옮긴 지 1∼2분 만에 폭탄 셋은 요란한 굉음을 내며 잇따라 폭발했다. 은행원, 경찰 등 5명이 파편에 맞아 중상을 입었고, 은행 창문 70여 개가 박살이 나면서 파편이 대구역까지 날아갔다.&lt;br /&gt;
&lt;br /&gt;
폭파 의거는 '절반의 성공'에 멈추었지만 세상을 흔들었다. 일제 경찰은 1928년 1월 장진홍이 '범인'인 줄 파악하지 못한 채, 이정기 등 독립운동가 8명을 검거해 대구 형무소에 투옥했다. 이때 이원록(이육사)도 자신의 형·동생과 더불어 옥고를 겪었다. 일경은 악독한 고문 끝에 이들을 진범으로 조작해 재판에 회부했다.&lt;br /&gt;
&lt;br /&gt;
의거가 완전한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을 한탄한 장진홍 지사는 1927년 11월과 1928년 1월 안동 경찰서와 영천 경찰서 폭파를 계획했다. 그러나 끝내 실행에 옮기지 못한 상태에서, 검거의 포위망이 좁혀오자 몸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갔다.&lt;br /&gt;
&lt;br /&gt;
일본에서도 장진홍은 새로운 거사 준비에 골몰했다. 하지만 동생의 오사카 소재 안경점에서 마침내 검거되었다. 장 지사를 체포한 일제 경찰은 조선인이었다. 조선인 형사 최덕술은 1929년 2월 19일 의기양양하게 장 지사를 대구로 압송했다.&lt;br /&gt;
&lt;br /&gt;
혹독한 고문이 시작되었다. 더 많은 관련자들을 체포해 공적을 쌓으려는 조선인 형사들의 광분은 그야말로 '필설로 형언'하기 어려울 만큼 비인간적이었다. 하지만 장 지사는 오직 자신의 단독 의거라는 점만 되풀이해서 강조하며 오히려 그들을 꾸짖었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ff8c00&amp;quot;&amp;gt;&amp;quot;조선 민족의 피를 받은 자로서 일제 경찰의 주구가 되어 동족의 해방운동을 이다지도 방해하는 악질 조선인 경관의 죄상이야말로 나의 죽은 혼이라도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amp;quot;&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여섯 달이나 악랄한 고문을 당한 끝에 장 지사는 재판에 회부되었다. 1930년 2월 17일 대구지방법원 1심 재판은 '사형'을 언도했다. 그 뒤 대구복심법원 재판도, 고등법원 상고 결과도 마찬가지로 '사형'이었다. 장 지사는 사형 선고가 내려질 때마다 재판정에서 &amp;lt;span style=&amp;quot;color:#ff8c00&amp;quot;&amp;gt;&amp;quot;대한독립만세!!!&amp;quot;&amp;lt;/span&amp;gt;를 외쳤다.&lt;br /&gt;
&lt;br /&gt;
1930년 7월 31일, 장 지사는 &amp;lt;span style=&amp;quot;color:#ff8c00&amp;quot;&amp;gt;&amp;quot;일제에게 치욕스러운 죽음을 당하느니 차라리 내 손으로 목숨을 끊는 것이 일제에 대한 마지막 항거가 아니겠는가!&amp;quot;&amp;lt;/span&amp;gt; 하고 결심했다. 이윽고 그날 밤 11시경 장 지사가 자결·순국하였다.&lt;/div&gt;</summary>
		<author><name>Imgpdnjs</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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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A1%B0%EC%84%A0%EC%9D%80%ED%96%89_%EB%8C%80%EA%B5%AC%EC%A7%80%EC%A0%90_%ED%8F%AD%ED%8C%8C_%EC%82%AC%EA%B1%B4&amp;diff=66007</id>
		<title>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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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10T09:13:3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Imgpdnjs: &lt;/p&gt;
&lt;hr /&gt;
&lt;div&gt;[[분류:imgpdnjs]]&lt;br /&gt;
&lt;br /&gt;
[[파일:조선은행대구지점사진.jpg|500픽셀|섬네일|center|조선은행 대구지점 전경 ⓒ 대구역사문화대전]]&lt;br /&gt;
&lt;br /&gt;
&lt;br /&gt;
==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 ==&lt;br /&gt;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은 1927년 10월 18일 대구에서 발생한 무장 독립운동으로, 장진홍이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시한폭탄을 배달하여 폭발시킨 사건이다. 당시 조선은행은 조선 내 금융·화폐 정책의 핵심 기관이며, 식민경제 지배의 상징적 공간이었다. 폭발은 은행원과 일본 경찰 등 5명에게 중상을 입혔고, 창문 70여 장이 파손될 정도로 강력해 대구 도심 전체가 흔들렸다.&lt;br /&gt;
&lt;br /&gt;
&amp;quot;1927년 한낮, 조선은행 대구지점에서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이 울렸다. 이는 한 민족에게 독립의 외침이었으며, 민족혼을 일깨운 우뢰와도 같았다.&amp;quot;는 기록도 남아 있다.&lt;br /&gt;
&lt;br /&gt;
== 역사적 배경 ==&lt;br /&gt;
3·1운동 이후 1920년대 조선의 무장 독립운동은 의열단 활동을 중심으로 급진화되고 있었다. 이 시기 투쟁의 주요 대상은 경찰서·도청 같은 행정기관뿐 아니라, 식민 금융 지배의 핵심이던 조선은행과 식산은행 등 경제착취 기관이었다.&lt;br /&gt;
&lt;br /&gt;
조선은행 대구지점은 1910년대 중반 대구 중심부에 건립되었으며, 일제의 세금 관리·화폐 유통·대규모 자금 대출을 담당하는 지역 경제 지배의 핵심 기관이었다. 직원의 상당수가 일본인이었고, 군 복무 경험자도 많아 보안 체계가 강화되어 있었다. 건물은 붉은 벽돌과 석재를 혼합한 2층 구조였으며, 외부에서 수상한 물체가 반입될 경우 쉽게 눈에 띌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lt;br /&gt;
&lt;br /&gt;
1927년 4월, 무장투쟁을 준비하던 장진홍은 일본인 좌파 활동가 굴절무삼랑(堀切茂三郞)을 통해 폭탄 제조법과 뇌관, 도화선, 자금을 제공받았다. 일제는 이 사건을 ‘국제공산당 배후설’로 몰아갔으나, 실제로는 일본 내 혁명운동 잔존 세력과의 연결에 가깝다는 평가가 있다.&lt;br /&gt;
&lt;br /&gt;
== 사건 준비 ==&lt;br /&gt;
장진홍은 폭탄 제조법을 익힌 뒤 경북 칠곡·선산 경계의 봉화산에서 시한폭탄 성능 시험을 실시했다. 테스트 결과를 토대로 그는 대형 폭탄 4개와 소형 자결용 폭탄 1개를 추가로 제작했다. 장진홍의 목표는 대구의 핵심 식민통치 기관 네 곳이었다.&lt;br /&gt;
&lt;br /&gt;
* 조선은행 대구지점  &lt;br /&gt;
* 경북도청  &lt;br /&gt;
* 식산은행 대구지점  &lt;br /&gt;
* 경북경찰부  &lt;br /&gt;
&lt;br /&gt;
1927년 10월 17일, 그는 폭탄을 자전거에 싣고 대구로 이동해 덕흥여관에 투숙했다. 일제의 수사를 교란하기 위해 다리를 저는 척하고 서울말을 사용한 것은 의도된 위장이었다.&lt;br /&gt;
&lt;br /&gt;
여관 사환 박노선은 장진홍이 넘어진 부상자라고 믿었고, 다음 날 그가 부탁한 ‘벌꿀 상자’ 배달 심부름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 상자들 속에는 모두 폭탄이 들어 있었다.&lt;br /&gt;
&lt;br /&gt;
== 사건 전개 ==&lt;br /&gt;
10월 18일 오전 9시경, 박노선은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상자 한 개를 전달했다. 상자는 국고계 주임 복지흥삼에게 전달되었으나, 건물 안에 있던 일본인 은행원 길촌결(吉村潔)이 화약 냄새를 감지하여 즉시 포장을 풀어 확인했다. 그는 도화선을 잘라냈지만, 이미 점화된 폭탄은 11시 50분경 내부에서 폭발했다.&lt;br /&gt;
&lt;br /&gt;
* 창문 70여 장 파손  &lt;br /&gt;
* 은행 직원 및 일본 경찰 포함 5명 중상  &lt;br /&gt;
* 충격파가 대구역까지 도달  &lt;br /&gt;
* 은행 주변 기와지붕 파손, 유리 파편이 수십 m 반경으로 확산  &lt;br /&gt;
&lt;br /&gt;
폭발 직후 은행은 극심한 혼란에 빠졌고, 경찰과 소방 인력이 긴급 투입되었다. 인근 상점과 시장 상인들은 대규모 폭동으로 오인하여 대피했고, 대구 도심 전체가 한동안 마비되었다는 보도도 있다.&lt;br /&gt;
&lt;br /&gt;
나머지 세 건물(도청·식산은행·경북경찰부)의 폭발이 실패한 이유는 길촌결의 조기 발견으로 추가 전달이 중단되었기 때문이었다.&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amp;quot;https://www.google.com/maps/d/embed?mid=1Vbme0Wt5tZNnQRcv9tCNeZ6x62FsuF8&amp;amp;ehbc=2E312F&amp;quot; width=&amp;quot;640&amp;quot; height=&amp;quot;480&amp;quot;&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 언론 보도와 사회적 반응 ==&lt;br /&gt;
* '''매일신보'''(총독부 기관지): 사건을 &amp;quot;공산주의자의 파괴 음모&amp;quot;로 규정, 치안유지법 강화를 촉구  &lt;br /&gt;
* '''조선일보·동아일보''': 의거 자체의 배후를 명확히 알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며 보도  &lt;br /&gt;
* 대구 지역 상공인: 은행의 업무 마비와 금융 거래 지연으로 경제적 혼란 경험  &lt;br /&gt;
* 민중 여론: 표면적 침묵 속에서도 식민 금융기관을 겨냥한 공격이라는 점에서 은근한 지지 분위기 존재  &lt;br /&gt;
&lt;br /&gt;
이처럼 같은 사건을 두고 신문마다 다른 관점을 보였으며, 이후 일제가 지방 경찰권 강화의 명분으로 사건을 적극 활용하였다.&lt;br /&gt;
&lt;br /&gt;
== 초기 수사와 검거 ==&lt;br /&gt;
폭발 직후 일제 경찰은 대규모 검거 작전을 실시하고, 1928년 1월 이정기 등 8명을 체포했다. 이 과정에서 여러 조선인 독립운동가가 고문과 조작된 자백으로 억울하게 연루되었으며, 당시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인물 중에는 시인 [[이육사]]도 포함되었다.  &lt;br /&gt;
이육사는 이때 부여받은 수인번호 ‘264’를 자신의 아호 ‘육사(陸史)’의 유래로 삼게 된다.&lt;br /&gt;
&lt;br /&gt;
조선은행 사건은 이육사에게 첫 투옥 경험을 안겨준 사건이자, 그의 이후 독립운동 및 문학 활동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사건으로 평가된다.&lt;br /&gt;
&lt;br /&gt;
== 폭발 이후 대구 지역 독립운동의 변화 ==&lt;br /&gt;
조선은행 폭파 사건은 대구 지역 항일운동에 다음과 같은 영향을 미쳤다.&lt;br /&gt;
&lt;br /&gt;
* 비밀결사 조직망 와해 및 재편  &lt;br /&gt;
* 경찰·헌병의 사상 탄압 확대  &lt;br /&gt;
* 경북·대구 지역에서 폭발물 관련 규제 강화  &lt;br /&gt;
* 지역 사회의 방범 조직 확대  &lt;br /&gt;
&lt;br /&gt;
신고 체계가 강화되면서 무장독립운동은 더 은밀한 underground 조직 형태로 변화했다.&lt;br /&gt;
&lt;br /&gt;
== 조선은행 대구지점 건물의 이후 ==&lt;br /&gt;
폭발 후 조선은행 대구지점은 여러 차례 개·보수를 거쳤으며, 해방 이후 한국은행 대구지점으로 잠시 사용된 기록도 있다. 이후 원 건물은 도시 개발 과정에서 철거되거나 개축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건물의 정확한 형태는 사진 자료를 통해 일부만 확인된다.&lt;br /&gt;
&lt;br /&gt;
== 사건의 의의 ==&lt;br /&gt;
이 사건은 다음과 같은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lt;br /&gt;
&lt;br /&gt;
* 1920년대 후반 조선 내 무장 투쟁의 대표적 사례  &lt;br /&gt;
* 식민 금융 지배의 핵심 기관을 직접 타격했다는 상징성  &lt;br /&gt;
* 일본 경찰력과 행정 조직 강화의 계기  &lt;br /&gt;
* 이육사 등 여러 독립운동가들의 투옥 및 향후 활동에 영향을 미침  &lt;br /&gt;
* 국제공산당 배후설 제기 등 당시 동아시아 사상투쟁 구도의 반영  &lt;br /&gt;
&lt;br /&gt;
==결과와 의의== &lt;br /&gt;
장진홍은 폭발 확인 후 피신했으나, 1929년 2월 일본 오사카에서 경북경찰부 형사들에게 체포되었다. 본국으로 송환된 장진홍은 자신을 취조하는 조선인 경관들의 행태를 질타하며 불굴의 독립의지를 과시했다. 그는 고문을 받은 끝에 1심과 2심에서 사형이 선고되자 &amp;quot;조선독립만세&amp;quot;를 외쳤다. 1930년 7월 31일 밤, 장진홍은 일제에 대한 마지막 항거로 자신의 손으로 목숨을 끊어 옥중 자결 순국했다. 이 사건의 여파로, 시인 [[이육사(李陸史)]]는 1927년 장진홍 의거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어 1년 7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그는 이때 받은 수인번호 264에서 따서 자신의 호를 '육사(陸史)'라고 지었다. 이육사 시인 외에도 장진홍의 어머니가 이 일로 체포된 바 있으며, 인동 장씨 일가인 장용희가 동료와 가족의 피해를 줄이고자 자결했고, 그의 친척인 장효식이 행방불명되는 등 주변 인물들이 이 사건으로 인해 큰 고초를 겪었다. 이 사건은 1920년대 말 대구 지역의 대표적인 무장 독립운동이었으며, 거사가 국제공산당과 연계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장진홍판결문.jpg|300px|섬네일|center|장진홍 사건 관련 판결문 ⓒ 대구역사문화대전]]&lt;br /&gt;
&lt;br /&gt;
&lt;br /&gt;
==소설로 다시 재현해보는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lt;br /&gt;
&lt;br /&gt;
덕흥여관에 처음 들어갈 때 장진홍은 겨우 걷는 사람처럼 심하게 다리를 절뚝거렸다. 자전거를 나무 아래에 세우고 묶는 일도 간신히 해냈다. 사환 박노선이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이윽고 말을 걸었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1e90ff&amp;quot;&amp;gt;&amp;quot;와 카심니까(왜 그러십니까)? 크게 다친 거 같은데 자정건 우째 타고 오싰능교(자전거는 어떻게 타고 오셨습니까)?&amp;quot;&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ff8c00&amp;quot;&amp;gt;&amp;quot;내가 선물을 꼭 보내야 할 고마운 곳들이 몇 군데 있는데, 모두들 이 인근에 있다오. 그래서 이렇게 자전거에 선물들을 싣고 왔는데,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을 기약해야지요. 내리막길에서 자전거를 타다가 심하게 넘어지는 바람에 이리 다쳤지요.&amp;quot;&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장진홍이 서울말로 대답했다. 그렇게 다리를 전 것과 서울말을 쓴 것은 의거 후 일제 경찰의 수사에 혼선을 주려는 의도된 언행이었다. 자신을 노출하지 않으려면 다른 사람을 동원해야 하는데, 박노선에게 심부름을 시키면 적당하겠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다시 이튿날(18일), 장진홍은 박노선에게 '심부름값'을 주면서 부탁했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ff8c00&amp;quot;&amp;gt;&amp;quot;자고 나면 낫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다리가 퉁퉁 붓고 통증이 더 심해져서 아주 걷기가 힘들게 되었다오. 이것들이 모두 벌꿀상자인데 조선은행, 도청, 식산은행, 경찰서에 순서대로 급히 배달을 좀 해 주시오.&amp;quot;&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벌꿀 선물로 위장된 상자들 안에는 장진홍이 직접 제조한 시한폭탄들이 들어 있었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박노선은 짭짤한 심부름값이 흐뭇해 부랴부랴 상자들을 챙겨들고 조선은행 대구지점으로 갔다. 박노선은 장진홍이 시킨 대로 국고계 주임 복지흥삼(福地興三)을 찾았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1e90ff&amp;quot;&amp;gt;&amp;quot;선물 가꼬(가지고) 심부름 왔어에(왔어요), 주임님!&amp;quot;&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박노선은 평소 안면이 있는 복지흥삼에게 벌꿀 상자 하나를 건넸다. 그때 복지흥삼 곁에 군인 출신 일본인 은행원 길촌결(吉村潔)이 앉아 있었다. 그가 군인 출신답게 화약 냄새를 맡았다. 길촌결이 재빨리 포장 끈을 풀었다. 상자 안에는 도화선에 불이 붙은 폭탄이 이글거리고 있었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a020f0&amp;quot;&amp;gt;&amp;quot;으악! 이게 뭐야? 이게 뭐야!&amp;quot;&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복지흥삼이 비명을 질러댔다. 길촌결이 재빠르게 도화선을 잘랐다. 아직 불이 옮겨 붙지 않은 나머지 세 상자는 황급히 은행 앞뜰 자전거 주차장로 옮겨졌다. 신고를 받은 경찰이 달려왔고, 박노선은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lt;br /&gt;
&lt;br /&gt;
경찰은 주차장에 있는 폭탄 셋을 다시 한길로 내놓았다. 옮긴 지 1∼2분 만에 폭탄 셋은 요란한 굉음을 내며 잇따라 폭발했다. 은행원, 경찰 등 5명이 파편에 맞아 중상을 입었고, 은행 창문 70여 개가 박살이 나면서 파편이 대구역까지 날아갔다.&lt;br /&gt;
&lt;br /&gt;
폭파 의거는 '절반의 성공'에 멈추었지만 세상을 흔들었다. 일제 경찰은 1928년 1월 장진홍이 '범인'인 줄 파악하지 못한 채, 이정기 등 독립운동가 8명을 검거해 대구 형무소에 투옥했다. 이때 이원록(이육사)도 자신의 형·동생과 더불어 옥고를 겪었다. 일경은 악독한 고문 끝에 이들을 진범으로 조작해 재판에 회부했다.&lt;br /&gt;
&lt;br /&gt;
의거가 완전한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을 한탄한 장진홍 지사는 1927년 11월과 1928년 1월 안동 경찰서와 영천 경찰서 폭파를 계획했다. 그러나 끝내 실행에 옮기지 못한 상태에서, 검거의 포위망이 좁혀오자 몸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갔다.&lt;br /&gt;
&lt;br /&gt;
일본에서도 장진홍은 새로운 거사 준비에 골몰했다. 하지만 동생의 오사카 소재 안경점에서 마침내 검거되었다. 장 지사를 체포한 일제 경찰은 조선인이었다. 조선인 형사 최덕술은 1929년 2월 19일 의기양양하게 장 지사를 대구로 압송했다.&lt;br /&gt;
&lt;br /&gt;
혹독한 고문이 시작되었다. 더 많은 관련자들을 체포해 공적을 쌓으려는 조선인 형사들의 광분은 그야말로 '필설로 형언'하기 어려울 만큼 비인간적이었다. 하지만 장 지사는 오직 자신의 단독 의거라는 점만 되풀이해서 강조하며 오히려 그들을 꾸짖었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ff8c00&amp;quot;&amp;gt;&amp;quot;조선 민족의 피를 받은 자로서 일제 경찰의 주구가 되어 동족의 해방운동을 이다지도 방해하는 악질 조선인 경관의 죄상이야말로 나의 죽은 혼이라도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amp;quot;&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여섯 달이나 악랄한 고문을 당한 끝에 장 지사는 재판에 회부되었다. 1930년 2월 17일 대구지방법원 1심 재판은 '사형'을 언도했다. 그 뒤 대구복심법원 재판도, 고등법원 상고 결과도 마찬가지로 '사형'이었다. 장 지사는 사형 선고가 내려질 때마다 재판정에서 &amp;lt;span style=&amp;quot;color:#ff8c00&amp;quot;&amp;gt;&amp;quot;대한독립만세!!!&amp;quot;&amp;lt;/span&amp;gt;를 외쳤다.&lt;br /&gt;
&lt;br /&gt;
1930년 7월 31일, 장 지사는 &amp;lt;span style=&amp;quot;color:#ff8c00&amp;quot;&amp;gt;&amp;quot;일제에게 치욕스러운 죽음을 당하느니 차라리 내 손으로 목숨을 끊는 것이 일제에 대한 마지막 항거가 아니겠는가!&amp;quot;&amp;lt;/span&amp;gt; 하고 결심했다. 이윽고 그날 밤 11시경 장 지사가 자결·순국하였다.&lt;/div&gt;</summary>
		<author><name>Imgpdnjs</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D%B4%EC%9C%A1%EC%82%AC(%E6%9D%8E%E9%99%B8%E5%8F%B2)&amp;diff=66003</id>
		<title>이육사(李陸史)</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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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10T09:13:0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Imgpdnjs: &lt;/p&gt;
&lt;hr /&gt;
&lt;div&gt;[[분류:imgpdnjs]]&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파일:이육사.jpg]]&lt;br /&gt;
&amp;lt;/div&amp;gt;&lt;br /&gt;
=='''기본 정보'''==&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margin:auto;&amp;quot;&lt;br /&gt;
|+ '''이육사'''&lt;br /&gt;
! 항목 !! 내용&lt;br /&gt;
|-&lt;br /&gt;
| 본명 || 이원록&lt;br /&gt;
|-&lt;br /&gt;
| 출생 || 1904년 5월 18일&lt;br /&gt;
|-&lt;br /&gt;
| 출생지 || 경상북도 예안군 의동면 원촌동 원촌마을&lt;br /&gt;
|-&lt;br /&gt;
| 사망 || 1944년 1월 16일&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이육사는 1904년 5월 18일, 지금의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인 옛 예안군 일대에서 태어났다. 퇴계 이황의 후손인 아버지 이가호와 어머니 허길 사이에서 여섯 형제 중 둘째였다. 훗날 그는 영천 화북면 오동리 출신인 안일양과 결혼하게 된다.&lt;br /&gt;
&lt;br /&gt;
어린 시절 그는 조부 이중직에게서 소학을 배우며 한학을 익혔다. 조부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진성이씨 문중에서 운영하던 보문의숙(훗날 도산공립보통학교)에서 공부했고, 이때 배운 한학의 영향은 그의 문학 세계에도 묻어난다. 졸업 후 가족이 대구로 이주했고, 그는 열아홉에 영천의 백학학원에서 교원으로 잠시 일했다. 1924년에는 일본 도쿄에서 예비학교 과정을 수학했으나 중도에 그만두고, 다음 해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 사회학을 공부했지만 역시 2학년 때 학업을 접었다.&lt;br /&gt;
&lt;br /&gt;
1927년 그는 [[장진홍_1895]]이 일으킨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과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대구형무소에서 약 1년 반을 지냈다. 이때의 수인번호 ‘264’를 따서 훗날 자신의 호를 ‘육사’라 짓는다.&lt;br /&gt;
&lt;br /&gt;
1932년 그는 만주 펑톈으로 건너가 [[윤세주_1901]]를 만나 의열단 입단 권유를 받았고, 난징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으로 들어가 폭탄 제조와 투척, 변장, 무기 운반, 피신 기술 등 다양한 실전 교육을 받았다. 사격 실력은 특히 뛰어났다고 전해진다.&lt;br /&gt;
&lt;br /&gt;
1933년 귀국 후에는 신문·잡지를 오가며 시와 논문, 시나리오 등 여러 글을 썼고, 루쉰의 소설 《고향》을 번역하기도 했다. 하지만 1934년 의열단 출신이라는 이유로 다시 검거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을 당했고, 몇 달 뒤 기소유예로 풀려났다.&lt;br /&gt;
&lt;br /&gt;
1943년 베이징으로 건너갔다가 어머니와 큰형의 소상을 위해 5월에 귀국했다. 그러 이 해 6월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었고, 결국 1944년 1월 16일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교도소에서 옥사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https://www.youtube.com/watch?v=gCcfvA4fGKY 광복 79주년 특별영상 : 행동하는 지성, 저항시인 이육사 이야기]&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937&amp;quot; height=&amp;quot;527&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gCcfvA4fGKY&amp;quot; title=&amp;quot;광복 79주년 특별영상 : 행동하는 지성, 저항시인 이육사 이야기&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amp;lt;/div&amp;gt;&lt;br /&gt;
&lt;br /&gt;
=='''[[이육사의 기자 생활]]'''==&lt;br /&gt;
많은 사람들이 이육사의 문학 작품만을 알고 기자 생활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위 페이지에서는 이육사의 기자 생활에 대해 더 자세히 서술한다.&lt;br /&gt;
&lt;br /&gt;
='''이육사의 문학작품'''=&lt;br /&gt;
==''''청포도'에 스민 가족에 대한 향수와 해방의 염원'''==&lt;br /&gt;
[[이육사의 '청포도']]&amp;lt;/div&amp;gt;는 이육사가 일제강점기에 경험한 상실과 분리를 바탕으로,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해방에 대한 염원을 동시에 그려낸 시이다. 시에서 드러난 익어가는 청포도의 모습과 돌아올 이를 기다리는 마음은 개인의 정서와 민족적인 바람이 자연스럽게 중첩되는 지점을 보여준다.&lt;br /&gt;
&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v2%3A2PACX-1vTBMVIXErpB6OYWbzC-nzv_0t_UNL2Q64IzD8TI-b1EywFJnOKdoMzdLiVC3NeAgyn4NLe-NEfPjK34&amp;amp;font=Default&amp;amp;lang=ko&amp;amp;initial_zoom=2&amp;amp;width=100%25&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이육사를 기억하는 장소'''=&lt;br /&gt;
이육사는 경상북도에서 태어났지만 전국적으로 이육사와 관련된 장소들이 많다. 아래 지도는 이육사와 관련된 모든 장소들을 정리한 지도이다. 대단한 시인 이육사를 기억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방문하기를 추천하한다.&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amp;quot;https://www.google.com/maps/d/embed?mid=1h1k2e9-GTfl5Bzcv0D2CRQG12cR998o&amp;amp;ehbc=2E312F&amp;quot; width=&amp;quot;640&amp;quot; height=&amp;quot;480&amp;quot;&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amp;lt;/div&amp;gt;&lt;br /&gt;
&lt;br /&gt;
:::::&amp;lt;p&amp;gt; '''1. 청포도 문학공원'''&lt;br /&gt;
&amp;lt;/p&amp;gt;&lt;br /&gt;
&amp;lt;p&amp;gt;&lt;br /&gt;
:::::이육사의 대표 시 「청포도」의 영감을 얻은 장소로 알려져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청림동 일대에 조성되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포항 청림동 일대(현재 해병사단 내 일월지 주변)에 동양 최대의 포도원이 있었는데, 이육사가 이곳에서 영일만을 바라보며 시를 구상했다는 문헌 기록을 바탕으로 한다. 공원에는 청포도 시비와 함께 문화축제가 열리며 시인의 문학 정신을 기리고 있다.&lt;br /&gt;
&amp;lt;/p&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p&amp;gt; '''2. 이육사문학관'''&lt;br /&gt;
&amp;lt;/p&amp;gt;&lt;br /&gt;
&amp;lt;p&amp;gt;&lt;br /&gt;
:::::이육사 시인의 고향인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에 2004년 탄신 100주년을 맞아 설립되었다. 그의 민족정신과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한 공간으로, 친필 원고, 시집, 독립운동 관련 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다. 문학관 주변에는 복원된 생가, 청포도 샘, 절정 시비 등이 함께 조성되어 있다.&lt;br /&gt;
&amp;lt;/p&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p&amp;gt; '''3. 이육사 생가'''&lt;br /&gt;
&amp;lt;/p&amp;gt;&lt;br /&gt;
&amp;lt;p&amp;gt;&lt;br /&gt;
:::::이육사가 태어난 집이다. 원래 안동댐 건설로 인해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1976년 안동시 태화동으로 옮겨졌다. 이후 육사 탄신 100주년(2004년)을 기념하여 이육사문학관 옆(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에 원래의 건축 양식을 살려 복원되었다. 조선 후기 전통적인 반가(班家)의 건축 양식을 띄고 있으며, 특히 사랑채와 안채의 크기와 구조가 거의 동일하게 대칭을 이루는 독특한 특징이 있다.&lt;br /&gt;
&amp;lt;/p&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p&amp;gt; '''4. 문화공간 이육사'''&lt;br /&gt;
&amp;lt;/p&amp;gt;&lt;br /&gt;
&amp;lt;p&amp;gt;&lt;br /&gt;
:::::이육사가 1939년 무렵 가족과 거주하며 「청포도」 등 주요 작품을 발표했던 서울특별시 성북구 종암동의 역사적 의의를 기념하여 2019년에 개관한 복합 문화 공간이다. 각 층의 명칭을 '청포도', '교목', '절정' 등 그의 대표 시 제목에서 따왔으며, 전시, 강좌, 문화 행사 등을 통해 시인의 삶과 문학을 시민들과 공유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lt;br /&gt;
&amp;lt;/p&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p&amp;gt; '''5. 264작은문학관'''&lt;br /&gt;
&amp;lt;/p&amp;gt;&lt;br /&gt;
&amp;lt;p&amp;gt;&lt;br /&gt;
:::::이육사의 필명이 된 수인번호 '264'를 기려 대구광역시 중구 북성로에 조성된 작은 문학관이다. 이육사는 1927년 장진홍 의거로 인해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이곳에서 '264'라는 수감번호를 받았다. 일제강점기 적산가옥을 리모델링하여 1층은 카페와 기획전시실, 2층은 상설전시실로 운영되며, 이육사의 생애와 작품을 살펴볼 수 있다.&lt;br /&gt;
&amp;lt;/p&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Imgpdnjs</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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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이육사(李陸史)</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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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10T09:12:3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Imgpdnjs: &lt;/p&gt;
&lt;hr /&gt;
&lt;div&gt;[[분류:imgpdnjs]]&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파일:이육사.jpg]]&lt;br /&gt;
&amp;lt;/div&amp;gt;&lt;br /&gt;
=='''기본 정보'''==&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margin:auto;&amp;quot;&lt;br /&gt;
|+ '''이육사'''&lt;br /&gt;
! 항목 !! 내용&lt;br /&gt;
|-&lt;br /&gt;
| 본명 || 이원록&lt;br /&gt;
|-&lt;br /&gt;
| 출생 || 1904년 5월 18일&lt;br /&gt;
|-&lt;br /&gt;
| 출생지 || 경상북도 예안군 의동면 원촌동 원촌마을&lt;br /&gt;
|-&lt;br /&gt;
| 사망 || 1944년 1월 16일&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이육사는 1904년 5월 18일, 지금의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인 옛 예안군 일대에서 태어났다. 퇴계 이황의 후손인 아버지 이가호와 어머니 허길 사이에서 여섯 형제 중 둘째였다. 훗날 그는 영천 화북면 오동리 출신인 안일양과 결혼하게 된다.&lt;br /&gt;
&lt;br /&gt;
어린 시절 그는 조부 이중직에게서 소학을 배우며 한학을 익혔다. 조부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진성이씨 문중에서 운영하던 보문의숙(훗날 도산공립보통학교)에서 공부했고, 이때 배운 한학의 영향은 그의 문학 세계에도 묻어난다. 졸업 후 가족이 대구로 이주했고, 그는 열아홉에 영천의 백학학원에서 교원으로 잠시 일했다. 1924년에는 일본 도쿄에서 예비학교 과정을 수학했으나 중도에 그만두고, 다음 해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 사회학을 공부했지만 역시 2학년 때 학업을 접었다.&lt;br /&gt;
&lt;br /&gt;
1927년 그는 [[장진홍_1895]]이 일으킨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과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대구형무소에서 약 1년 반을 지냈다. 이때의 수인번호 ‘264’를 따서 훗날 자신의 호를 ‘육사’라 짓는다.&lt;br /&gt;
&lt;br /&gt;
1932년 그는 만주 펑톈으로 건너가 [[윤세주_1901]]를 만나 의열단 입단 권유를 받았고, 난징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으로 들어가 폭탄 제조와 투척, 변장, 무기 운반, 피신 기술 등 다양한 실전 교육을 받았다. 사격 실력은 특히 뛰어났다고 전해진다.&lt;br /&gt;
&lt;br /&gt;
1933년 귀국 후에는 신문·잡지를 오가며 시와 논문, 시나리오 등 여러 글을 썼고, 루쉰의 소설 《고향》을 번역하기도 했다. 하지만 1934년 의열단 출신이라는 이유로 다시 검거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을 당했고, 몇 달 뒤 기소유예로 풀려났다.&lt;br /&gt;
&lt;br /&gt;
1943년 베이징으로 건너갔다가 어머니와 큰형의 소상을 위해 5월에 귀국했다. 그러 이 해 6월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었고, 결국 1944년 1월 16일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교도소에서 옥사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https://www.youtube.com/watch?v=gCcfvA4fGKY 광복 79주년 특별영상 : 행동하는 지성, 저항시인 이육사 이야기]&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937&amp;quot; height=&amp;quot;527&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gCcfvA4fGKY&amp;quot; title=&amp;quot;광복 79주년 특별영상 : 행동하는 지성, 저항시인 이육사 이야기&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amp;lt;/div&amp;gt;&lt;br /&gt;
&lt;br /&gt;
=='''[[이육사의 기자 생활]]'''==&lt;br /&gt;
많은 사람들이 이육사의 문학 작품만을 알고 기자 생활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위 페이지에서는 이육사의 기자 생활에 대해 더 자세히 서술한다.&lt;br /&gt;
&lt;br /&gt;
='''이육사의 문학작품'''=&lt;br /&gt;
==''''청포도'에 스민 가족에 대한 향수와 해방의 염원'''==&lt;br /&gt;
[[이육사의 '청포도']]&amp;lt;/div&amp;gt;는 이육사가 일제강점기에 경험한 상실과 분리를 바탕으로,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해방에 대한 염원을 동시에 그려낸 시이다. 시에서 드러난 익어가는 청포도의 모습과 돌아올 이를 기다리는 마음은 개인의 정서와 민족적인 바람이 자연스럽게 중첩되는 지점을 보여준다.&lt;br /&gt;
&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v2%3A2PACX-1vTBMVIXErpB6OYWbzC-nzv_0t_UNL2Q64IzD8TI-b1EywFJnOKdoMzdLiVC3NeAgyn4NLe-NEfPjK34&amp;amp;font=Default&amp;amp;lang=ko&amp;amp;initial_zoom=2&amp;amp;width=100%25&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이육사를 기억하는 장소'''==&lt;br /&gt;
이육사는 경상북도에서 태어났지만 전국적으로 이육사와 관련된 장소들이 많다. 아래 지도는 이육사와 관련된 모든 장소들을 정리한 지도이다. 대단한 시인 이육사를 기억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방문하기를 추천하한다.&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amp;quot;https://www.google.com/maps/d/embed?mid=1h1k2e9-GTfl5Bzcv0D2CRQG12cR998o&amp;amp;ehbc=2E312F&amp;quot; width=&amp;quot;640&amp;quot; height=&amp;quot;480&amp;quot;&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amp;lt;/div&amp;gt;&lt;br /&gt;
&lt;br /&gt;
:::::&amp;lt;p&amp;gt; '''1. 청포도 문학공원'''&lt;br /&gt;
&amp;lt;/p&amp;gt;&lt;br /&gt;
&amp;lt;p&amp;gt;&lt;br /&gt;
:::::이육사의 대표 시 「청포도」의 영감을 얻은 장소로 알려져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청림동 일대에 조성되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포항 청림동 일대(현재 해병사단 내 일월지 주변)에 동양 최대의 포도원이 있었는데, 이육사가 이곳에서 영일만을 바라보며 시를 구상했다는 문헌 기록을 바탕으로 한다. 공원에는 청포도 시비와 함께 문화축제가 열리며 시인의 문학 정신을 기리고 있다.&lt;br /&gt;
&amp;lt;/p&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p&amp;gt; '''2. 이육사문학관'''&lt;br /&gt;
&amp;lt;/p&amp;gt;&lt;br /&gt;
&amp;lt;p&amp;gt;&lt;br /&gt;
:::::이육사 시인의 고향인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에 2004년 탄신 100주년을 맞아 설립되었다. 그의 민족정신과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한 공간으로, 친필 원고, 시집, 독립운동 관련 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다. 문학관 주변에는 복원된 생가, 청포도 샘, 절정 시비 등이 함께 조성되어 있다.&lt;br /&gt;
&amp;lt;/p&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p&amp;gt; '''3. 이육사 생가'''&lt;br /&gt;
&amp;lt;/p&amp;gt;&lt;br /&gt;
&amp;lt;p&amp;gt;&lt;br /&gt;
:::::이육사가 태어난 집이다. 원래 안동댐 건설로 인해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1976년 안동시 태화동으로 옮겨졌다. 이후 육사 탄신 100주년(2004년)을 기념하여 이육사문학관 옆(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에 원래의 건축 양식을 살려 복원되었다. 조선 후기 전통적인 반가(班家)의 건축 양식을 띄고 있으며, 특히 사랑채와 안채의 크기와 구조가 거의 동일하게 대칭을 이루는 독특한 특징이 있다.&lt;br /&gt;
&amp;lt;/p&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p&amp;gt; '''4. 문화공간 이육사'''&lt;br /&gt;
&amp;lt;/p&amp;gt;&lt;br /&gt;
&amp;lt;p&amp;gt;&lt;br /&gt;
:::::이육사가 1939년 무렵 가족과 거주하며 「청포도」 등 주요 작품을 발표했던 서울특별시 성북구 종암동의 역사적 의의를 기념하여 2019년에 개관한 복합 문화 공간이다. 각 층의 명칭을 '청포도', '교목', '절정' 등 그의 대표 시 제목에서 따왔으며, 전시, 강좌, 문화 행사 등을 통해 시인의 삶과 문학을 시민들과 공유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lt;br /&gt;
&amp;lt;/p&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p&amp;gt; '''5. 264작은문학관'''&lt;br /&gt;
&amp;lt;/p&amp;gt;&lt;br /&gt;
&amp;lt;p&amp;gt;&lt;br /&gt;
:::::이육사의 필명이 된 수인번호 '264'를 기려 대구광역시 중구 북성로에 조성된 작은 문학관이다. 이육사는 1927년 장진홍 의거로 인해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이곳에서 '264'라는 수감번호를 받았다. 일제강점기 적산가옥을 리모델링하여 1층은 카페와 기획전시실, 2층은 상설전시실로 운영되며, 이육사의 생애와 작품을 살펴볼 수 있다.&lt;br /&gt;
&amp;lt;/p&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Imgpdnjs</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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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이육사의 기자 생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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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10T09:10:4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Imgpdnjs: /* =주요 내용 요약 */&lt;/p&gt;
&lt;hr /&gt;
&lt;div&gt;[[분류:imgpdnjs]]&lt;br /&gt;
=='''이육사의 기자생활'''==&lt;br /&gt;
출소한 뒤에는 중외일보와 조선일보 대구지국에서 기자로 일했고, 1930년에는 ‘이활’이라는 이름으로 첫 시 &amp;lt;말&amp;gt;을 조선일보에 발표했다. 이 시기는 훗날 교보생명을 세우는 신용호에게도 영향을 주어 독립운동 자금 지원과 교육 사업 구상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알려져 있다.&lt;br /&gt;
&lt;br /&gt;
1930년, 이육사는 조선일보 지면을 통해 생애 첫 시 「말」을 발표하며 문단에 모습을 드러냈다. 1월 3일자 조선일보 7면 하단에 실린 이 짧은 작품에서 그는 매질에 지쳐 쓰러질 것 같은 말이지만 새해에는 다시 우렁차게 질주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이 작품이 바로 그와 조선일보의 첫 연결고리였다.&lt;br /&gt;
&lt;br /&gt;
=='''중외일보 대구지국'''==&lt;br /&gt;
1929년 6월 장진홍 의거 관련 혐의로 복역 후 1930년에 출소한 이육사는 곧바로 언론계에 투신했다. 그는 시 발표 직후 중외일보(中外日報) 대구지국에서 기자로 일하기 시작했다. 중외일보는 1926년 조선중앙일보가 제호를 변경하여 창간된 신문으로, 1931년까지 발행되었다. 이육사가 활동하던 시기는 일제강점기 언론 탄압 속에서도 민족의식을 고취하려던 분위기가 남아있던 때였다. 지방지국 기자로서 지역 사회의 현안을 취재하고 보도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기간의 활동은 그가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사회 현실에 대한 인식을 심화하는 데 기여했다.&lt;br /&gt;
&lt;br /&gt;
=='''조선일보 대구지국'''==&lt;br /&gt;
중외일보에서 근무한 뒤, 이육사는 1931년 8월 조선일보 대구지국으로 자리를 옮겼다. 일제강점기 지방의 신문 지국은 단순한 연락소가 아닌, 지방 취재와 기사 송고의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이육사는 이곳에서 현장 기자로서의 전문적인 경험을 쌓았다. 조선일보에서 자신의 이름(필명)을 걸고 처음으로 쓴 기사는 1932년 초에 연재되었다. 첫 기사인「대구의 자랑 약령시의 유래」는 1932년 1월 14일부터 네 차례에 걸쳐 연재되었다. 이 기사를 쓸 때 그는 본명 대신‘육사생(肉瀉生)’이라는 독특한 필명을 사용했다. '육사'라는 필명이 여기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으며, 이는 그의 상징적인 수인(囚人) 번호(264)와 연결되는 '이육사'라는 이름의 유래 중 하나로 간주되기도 한다. 이 기사는 대구의 대표적인 전통 시장인 약령시의 역사와 유래를 소개하는 향토색 짙은 글이었으며 이육사가 기자로서 대구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lt;br /&gt;
&lt;br /&gt;
[[파일:이육사기사.jpg|500픽셀|섬네일|center| 이육사가 조선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근무하면서 쓴 1932년 1월 14일 자 ‘대구의 자랑 약령시의 유래’ 기사. ‘육사생’이란 필명 사용. ⓒ 조선일보]]&lt;br /&gt;
&lt;br /&gt;
그는 스포츠 기사에서도 민족적 정서를 드러냈다. 1932년 3월 6일과 9일자 스포츠란에서 「대구 ‘장’ 연구회 창립을 보고서」라는 글을 연속으로 기고하며 이번에는 ‘이활(李活)’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여기서 그는 조상 대대로 이어오던 우리 겨레의 전통 놀이 ‘장치기’를 소개하며 경기 방식뿐 아니라 점수 계산 용어까지 온전히 우리말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더 나아가 이 놀이를 세계 농민 사회에까지 널리 보급하자고 주장했다.&lt;br /&gt;
&lt;br /&gt;
그는 1934년 무렵 조선일보로 다시 합류했고, 이후에도 꾸준히 조선일보 지면에 글을 남겼다. 1930년대 후반에서 신문이 폐간되기 직전인 1940년까지 발표된 글들은 다양했다. 5회 연재된 「노신 추도문」(1936년 10월 23~29일자), 「문외한의 수첩」(1937년 8월 3~6일자, 3회), 「황엽전」(1937년 10월 31일~11월 5일자, 4회), 「전조기」(1938년 3월 2일자), 그리고 1940년 발표된 「계절의 오행」 등이 대표적이다.&lt;br /&gt;
&lt;br /&gt;
=='''타임라인으로 보는 이육사의 기자 발자취'''==&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v2%3A2PACX-1vScyeelknnBUflE4gCcqr0d_p4jIpl00AVBmBzhC5cgKY8GPsH4h-JZmzezN5VoQTKsJGw76vWgsA7O&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width=100%25&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대구(大邱)의 자랑 약령시(藥令市)의 유래(由來)'''=&lt;br /&gt;
대구(大邱)의자랑&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의유래(由來)&lt;br /&gt;
&lt;br /&gt;
대구지국(大邱支局) 육(肉) 사(瀉) 생(生)&lt;br /&gt;
&lt;br /&gt;
대구의자랑이 무엇이냐?고 뭇는사람이 잇스면 지금사람들은아이어룬할것업시 대구능금(평과(苹果))을말할것이다 그러나 대구능금은 최근의 한명산물로서완전한 자랑의자위를 점령할수는업는것이다 여긔서우리는중학교지리교과서(중학교지리교과서(中學校地理敎科書))에도잇는대구의유명한약령시(연령시(燕令市))를자랑으로들어놋코그에대한력사적유래를먼저아라보자&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의사적유래(史的由來)&lt;br /&gt;
&lt;br /&gt;
대구의 약령시는 일년얼차의정긔시장으로서 그시장에 집산되는 산물은 맛치『도루고』(토이기(土耳其))나『코—카쓰』(고가삭(高加索))나중앙아세아(중앙아세아(中央亞細亞))내외몽고(내외몽고(內外蒙古))등지에서 일년 일차혹이차식 열니는 모피물(모피물(毛皮物))의시장과가티대성황을일우나 이상에말한 각지의시장은인류사회의생활형태가차차목집함을따라필요한물품을서로서로밧구고저일정한장소와시일에모히는말하자면물물교환(물물교환(物物交換))시대로부터교통의관계라는지긔후의관계라든지또는일반사희생활의형태가오히려아직까지녯날의그것을면치못하고현대자본주의국제간의무역관계(무역관계(貿易關係))가극도로발달된 오날까지에 원시경제(원시경제(原始經濟))를 연구하는학자들의 연구재료가 되는것은휴미잇는 사실이지만은 대구의약렁시는 물품의집산과 교환의량식이 그와방불하여도 일홉부터 약시(약시(藥市))가아니고 약렁시(약령시(藥令市))란령(영(令))자에대하야우리는직각적으로 이시장의긔원은엇던권력(권력(權力))의 지배(지배(支配))맛해일게된것을 알수가잇다그러면 이약렁시가 처음시직된것은 언제부터인가 그야말로중학교교과서에까지『고래(고래(古來))로유명』이라고만씨여잇고 적확한년대를 쓰지안엇슴으로 대담하게 그년대를 내어노을수는업스나 비교적정확한수자를 조사한대로쓰면 서력일천륙백오십팔년(이조개국이백육십팔년효종조(李朝開國二百六十八年孝宗朝))거금이백칠십 사년전부터개시하게 되엿다고한다 그때야말로 조선을팔도(팔도(八道))에 닌후아노코 다시칠십일주로 난호아노흔 경상도의 정치적수부(수부(首府))도대구려니와 경상도(경상도(慶尚道))를둘너 남부조선각지는 산수명랑하고긔후온화하야각색약초(약초(藥草))의배양에지질이알맛기도하고 교통도편의하야(그때로보아서는)물산의집산에최적의지대도 대구엿스며 그때야말로임진병란(임진병란(壬辰兵亂) 이끗을막고모든볼회와 시설이 차자정돈뇌고발전을 보이며따라황실중심(성실중심(星室中心))으로끄으려는당시의위정사(위정자(爲政者))들은□□□□조금이라도 관계잇는 물품이면무엇이나물론하고 먼저진상(진상(進上))이란일흠아래최상의생산품을골너 서울도보내고 일반백성이먹고 입고쓰게되는 것이다그리고엇던 계□을물는하고병업시일생을 살수도업는것은 생리상자연의 리치엄으로 일국의지존(지존(至尊))인왕(왕(王))도병마의무서움은면치못 하는것이다 그래서황실에서일년동안쓸 약품을이곳에서 구하고저 국가의명령으로개시케한것이 오날날 우리가보고듯고 하는약령시의 처음이다그때는 약령이서면 감사(감사(監使))(현도지사(現道知事))가약재를골다봉하야중앙 정부 사약원(중앙정부사약원(中央政府司藥院))에 보낸후에 팔도에서모혀든 약재를일반 약국(약국(藥局))이사서완조선안의병든사락들이 그해그해의 치료를하게다엿다고한다(속(續))&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와경기(景氣)(이(二))&lt;br /&gt;
&lt;br /&gt;
대구지국육(大邱支局肉) 사(瀉) 생(生)&lt;br /&gt;
&lt;br /&gt;
【대구(大邱)】대구의약령시(약령시(藥令市))는다른상품시장에서는볼수업는특수한 유래를가지고 발달하여온만큼 지방의정청에서도일년춘추두차레에정긔적으로모여드는 지방생산자들을 위하야지방경제발달을 조장하고저 계획을세우고 제도의개선과 개시(개시(開市))긔간의 연장등 모든방면으로힘을써 보앗스나 모다뜻과갓지못하고 서구(서구(西歐))렬국의동양(동양(東洋))침입으로의학(의학(醫學))약학(약학(藥學))등학문이발달됨에침(침(針))은주사(주사(注射))로변하고바쇠는『메—쓰』로화하는바람에한약(한약(漢藥))의 가치는 전연그권위를일케되면서 대구의 약령시도차차워마하야 매매되는 약재료도주러지기만 하든중『후—버』겅긔가세계의주식시장(주식시장(株式市場))을혼란케하듯이 대구의 약령시장도 대타격의한때가 지나가게되엿스니 그는무엇일가?지금부터이십이년전(신해년(辛亥年))에중산손문 중산손우(中山孫又))씨혁명으로대청황실)대청황실(大清皇室))을넘어지면서부터는 청황실이 조선정부(조선정부(朝鮮政府))에의뢰하야사가든약품은실로막대한것이엿스나전부그매도의길이 막히게된 여러가지조건밋헤매매가 축소하여 전성시대의반도못되게 되얏다 그나마최근에는전주(전주(全州))대전(대전(大田))진주(진주(晋州))원산(원산(元山))등지에군소시장이개설되여이를약령시로밀미암아대구에떠러지는돈은매우감소되엿스나아직도령시가개설되면동성정입구(동성정입구(東城町入口))로부터남성정입구(남성정입구(南城町入口))까지 십여정(십여정(十餘町))에 처당재(당재(唐材))초재(초재(草材))등삼백여종의 약품도만흐려니와 그근처에림시려인숙(임시여인숙(臨時旅人宿))이무수히설치되고 포백기타 일용생활에필요한물품이면 평상시의 멧배나더잘팔리는 호경긔를 연설한다 그리하야 촌양빈들의낫서른돈을 먹어보겟다는 술집색시들까지 헐직한인조견으로 봄을싸고 도스리고안저서 열분애교를 술잔에담어보내는것도『넌센스』한징면인지는모르겟다마는 흡객술(흡객술(吸客術))이 졸열한다기보니 시대에뒤처진 기생들은본바닥에 거주하는손님들은『카페—』붉은녀급(여급(女給))들의자주(자(紫))빗유혹에다 뛰우고 음력과세를압서초조하는중 때맛침사재(시재(時哉))시재를불러 시내 각요리집 극장할것업시 대만원의성황을 이루는것은 그럴듯도한일이지마는 여긔에는 순진한산간에서 새노래물소리에 거치른세상일은 □도꾸지못한 산아이와도갓치 힘드려작만한 약재를도시구경겹 하여와와서판돈은『메리·픽포—드』안일망정어엽분녀자를맛나 잇는대로 다쓴후에명년의약령시 개설되기를 손을꼬바기다려서 와서보면 그녀자는어느하늘밋헤서 잇든남자와 단꿈을꾸는지 알길조차 바이업고작년구든맹서가 찬□(회(灰))처럼살어잘때화낌에 한잔무어라 먹자부어라 먹자하는연긔가튼 경긔는 견양경긔(견양경기(犬養景氣))이상으로 흥성거린나 그러기에여긔에최근오개년간의매매고외출동인원수와□적어본다&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와경기(景氣)&lt;br /&gt;
&lt;br /&gt;
(삼(三))&lt;br /&gt;
&lt;br /&gt;
대구지국(大邱支局) 육(肉) 사(瀉) 생(生)&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의현재(現在)&lt;br /&gt;
&lt;br /&gt;
약령시의 밋치는바 경제관계는실로 다방면으로 황금왕시대를연줄하며 발달하여오는만큼 녯날에는 조선안에서 생산하는재료가 매매되는이외에 당재(당재(唐材))라고하야 증국으로부터금석지재(금석지재(金石之材))가만히수입되는외에는 벌로볼만한것이 업섯스나 교통의발날노 국제무역이빈번하야지게된 오날에는일본,중국,몽고등시는말할것도 업거니와동부『아푸리카』의찌는둣한열대지방에서 생산되는 소철(소철(蘇鐵))을비롯하야 황막한시베리아의천지를 내집가티 도라다니는웅담(웅담(熊膽))까지모혀들게되는것은이약정□를통해본□류문와사의 한로막이라고도 할수잇는것이다 이러케 약령시에모혀드는약재료가 교통의 혜택을임어거의 파멸에 갑가운약령시가새로히왕성하게되자 지금이야말로 시장의 량입구에 마천두(마천루(摩天樓))가튼『리—딍』(유도탑(誘導塔))을세우고『일미네—숀』(대전식(大電飾))사이에 흥긔청긔가나붓기며 지방으로부터 모혀드는 생산자들을끄려드리는것은 확실히 일반상업전술의발달을의미한다 그러나 원래이시장는 약을재료그대로가지고와서 매매케 되는것이 특질의엿스나 지금은천일령신환,조고약과어을빈만병수까지 시장목판에서 인긔를집중하고잇는것은 아모리보아도 조뵈 화지관는 사실이다 이가튼변천가운데도 특긔하야들것은 령시의개설의래 장구한년월을 지남에따라 그본래의 성질에배반하야 부업적상인게놉을 령시의주요구성 요소로하게되고 부터는 경상도내지방에밋치는 양령시의영향은 일반 소비경제상에크다란 파문을그리게되여 약텽시본래목적인 약새생산에 효과가적게되고 시장내의 불당중개인으로말미암아 일사 평판이조치못하엿슴으로 이러한 페풍을 일소하기위하야 지금부터이십여년선에 생긴 한약상조합한약상조합(漢藥商組合))과칠년전전주(전주(全州))에양령시가처음뇌려고할때에 대함키위하야생긴약령&lt;br /&gt;
&lt;br /&gt;
흉회(약령시진흥회(藥令市振興會))가지금은약령시번영회(약령시번영회(藥令市繁榮會))로변경되여 최선의로력을 다하야오며 감독한결과 지금은어느정도까지 통제가되여간다고한다 그리하야 지금이야말로동력(동력(動力)의위력밋해거대한공장뉼이날로늘어남조선의『메드로포리쓰』를만드려는 대구현네과학(현대과학(現代科學))의태반(태반(胎盤))가튼대구의한복판에서 조선의 자랑이라고도할수잇는원시시장(원시시장(原始市塲))의한개가 벌서오늘날의 □제권내에발을듸듸고장차을래일의세계를향하야나가는것은홍미김흔일이다(속(續))&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의유래(由來)&lt;br /&gt;
&lt;br /&gt;
(사(四))&lt;br /&gt;
&lt;br /&gt;
대구지국육사생(大邱支局肉瀉生)&lt;br /&gt;
&lt;br /&gt;
삼백년동안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복잡다단한 필연적 과정을경과하여오며 자본주의 경제의현계단에서의연히그존재가필요하게된대구약령시의발달사는완연히금일경제의발달사(발달사(發達史))라고보지안을수업다 그럼으로여긔특긔할것은 그성실상 순박함이짝이업는 죽말하면 매매하는시람들의아관박대(아관박대(雅冠博帶))라든지 생산품 포장가튼것까지도(물론변천된것도만흐나)삼백년전의 녯날을 그려볼만한순박한이서장에도현대금융자본의붉은혀(설(舌))는내밀기시작하엿다지금부터 시년전엇던 외래지본벌이자긔소유의따에시장의위치를옴기려고 현위치는 도시교통상불편하다는구실로써다방면으로술책을써보앗스나현장소에서긔십년간상권을 잡고잇는 대가들의명렬한반대로그만뜻을일우지못한일도잇다그러면내구약령시를 지배하고 따라전조선의한약상계에우이를삽고잇는 이는누구일가여긔는 누구보다도 김홍조(김홍조(金弘祖))씨를아침수가업다씨는 전선적으로보아 제이위가기를설허할만하다고하며그다음순서업시치면 신태문(신태문(申泰文))김종수(김종수(金宗洙))지이원(심의원(沈義元))리치욱(이치욱(李致旭))두병은(두병은(杜炳殷))김내명(김내명(金乃明))방규진(방규진(方圭鎭))제씨를칠수잇고 그중에도 두병은(두병은(杜炳殷))씨가튼이는여러대를나려오며 사업에 종사하야 그문패는 실로일백오십년 이란력사를가저 대구의 동인당(동인당(同人堂))이란 일홈이잇다&lt;br /&gt;
&lt;br /&gt;
북평(北平)의동인당(同仁堂)은팔백년(八百年)의역사(歷史)가잇슴)그래서 대구의약텽시인긔는 이들의손에 좌우된다하여도과언이아니며 금년의약가는 금재금(김재금(金再禁))에따르는 제불가의폭등과 일중사변(일중사변(日中事變))의영향과중국은가(중국은가(中國銀價))의변동으로인하야소위당재(당재(唐材))는 폭동하엿고 조재(초재(草材))에잇서서 도변조로올은것이 불소하다는바 금후에드 더욱시세는오를무양이라고한다 여긔에당초재를물론하고 시세를 적어보앗스면좃켓스나 약명이한업시만코 날로변동이만흠으로 약렁시세표가 잇다는것만말한후에 특수한고저를보이는 몃가지를 적어보면 당재의원상산약(원상산약(元常山藥))은작년에는 매근에일원륙십전하든것이 금년은 단오십전에폭락되여 이십년레에 처음보는헐가라하며 산수유(산수유(山茱萸))는작년에 매근사십전하든것이 금년은십전에폭락되고 토사자(토사자(兎絲子))가튼것도 작년사오십전에매매되든것이 금년은십전에 폭락되여 자방생산자의 저울(형(衡))에 예긔치못한 광란(광란(狂亂))을보이고잇다고한다&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의장래(將來)&lt;br /&gt;
&lt;br /&gt;
그러면 다음날의약텅시는 엇더케될것인가?이문제는 결코예언자의 심심푸리와가튼 헛된소리는아니다적어도현세계의경제관계 와그에따라 일어나는모든사정이 쇄신된다면 모르지마는현계단의 경제제도가 그량존속되는한에는 세계적으로 한약에대한연구가왕성하여지고한약의권위가나날이놉하가는만큼약텅시의장래는압흐도세계에그일홈이놉하진다고일부인사들이말하고잇는것이그다지허언이아닐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지금은시장의형세가 산만하게생산자가 중개인울거처 도매상에게 팔게되여중간에책취를 당하게된다 하여도 장래는 현시장의대자벌들이주식(주식(株式))이나 혹은학자(합자(合資))의형식으로시장을상설하고도매와 개인생산자사이에 직접취인하게되여 지방경제의 윤택과약초생산의 장려의 약텅시본래의목적을 소개하려는것이 당업자간의 의도(의도(意圖))인 동시에매우현명한 의견인듯하다 그래서참된 대구자랑을 만들고조선의자랑을만들자——(완(完))&lt;br /&gt;
&lt;br /&gt;
=='''주요 내용 요약'''==&lt;br /&gt;
유래: 대구의 자랑으로 능금(사과) 대신 약령시를 들며 그 유래를 설명한다. 약령시는 1년에 한두 번 열리는 정기 시장이며, 조선시대 효종(1658년) 때 국가 명령(令)으로 개시된 것이다. 당시 경상도의 정치적 수부였던 대구는 약초 재배에 적합한 기후와 편리한 교통으로 물산 집산의 최적지였다. 궁중에서 쓸 약품을 이곳에서 구하기 위해 감사가 약재를 골라 사약원(司藥院)에 진상한 후, 팔도 약재를 일반 약국에서 구매하여 조선 전역의 환자 치료에 사용하게 한 것이 시초이다.&lt;br /&gt;
&lt;br /&gt;
쇠퇴와 현황: 서구 열강의 동양 침입과 함께 의학 및 약학이 발달하며 한약의 권위가 약해졌고, 약령시는 점차 쇠퇴하였다. 특히 22년 전(1915년경) 신해혁명으로 청황실이 무너지면서 조선 정부에 의뢰하던 막대한 약품 매도 길이 막힌 것이 큰 타격이었다. 최근 전주, 대전 등지에 군소 시장이 개설되어 대구 약령시의 경제적 이익이 감소했지만, 여전히 시장 개설 시에는 많은 약재가 모이고(당재, 초재 등 300여 종), 인근 상권에 호경기를 가져오는 것이다. 당시 약령시의 주요 구성 요소가 부업적 상인 계층으로 변질되고 불량 중개인 문제가 발생하자, 한약상조합과 약령시진흥회(현재 약령시번영회)가 결성되어 통제를 시도하고 있었다.&lt;br /&gt;
&lt;br /&gt;
약재 가격 변동: 당시(1937년) 일중사변(日中事變)의 영향과 중국 은가 변동으로 당재(唐材) 가격이 폭등했지만, 일부 국내 초재(草材)인 산약(山藥), 산수유(山茱萸), 토사자(兎絲子) 등은 폭락하여 생산자들에게 광란(狂亂)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lt;br /&gt;
&lt;br /&gt;
=='''분석 및 특징'''==&lt;br /&gt;
역사성 강조: 대구 약령시를 단순한 시장이 아닌 '국가 명령(令)'으로 시작된 역사적 시장으로 규정하며, 정치적, 지리적 배경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시대적 배경 반영: 서양 의학의 도입, 중국 혁명(청 황실 붕퇴), 당시 국제 정세(일중사변, 중국 은가) 등이 시장의 흥망성쇠에 미친 영향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여 식민지 시대의 경제 상황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시장 변화: 전통적인 약재 거래 방식에서 완제품 거래가 늘어나는 등 근대화에 따른 시장의 변화 양상도 포착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원시 시장'의 현대적 생존: 대구 약령시를 '조선의 자랑'이자 '원시 시장' 중 하나로 보면서도, 현대 자본주의 경제권에 발을 디디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평가하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대구(大邱)장연구회(硏究會) 창립(創立)을보고서'''=&lt;br /&gt;
구지국(大邱支局)&lt;br /&gt;
&lt;br /&gt;
이활(李活)&lt;br /&gt;
&lt;br /&gt;
민중(民衆)의보건운동(保建運動)은 요사이각계인사(各界人士)들의 크다른관심(關心)거리로어듸서 엇더케 무슨방법(方法)으로『억세인조선(朝鮮)』을건설(建設) 할수잇슬가 함에연구(硏究)를거듭하게되엿다회상(回想)하면 조선(朝鮮)에새로운운동경기(運動競技)가 수입(輸入)된지도 일반문화(一般文化)와갓치 벌서 반세기(半世紀)란역사(歷史)를가지고잇다 그중(中)에는 야구(野球)·정구(庭球)·축구(蹴球)·농구등(籠球等)을비롯하야 유도(柔道)·격검(擊劒)·권투등(拳鬪等)모든경기(競技)가들어와서 장족(長足)의진보(進步)도하엿스러니와 세계적무대(世界的舞臺)를향(向)하야 진출(進出)한선수(選手)도업지안타 그러나 그것은극소수(極小數)인동시(同時)에 지금(至今)까지의 조선(朝鮮)의운동경기(運動競技)는 한갓도회(都會)를중심(中心)으로잘어왓다 물론(勿論)다그럿타는것은아니지만은 현하운경기(現下運競技)그것은 조선(朝鮮)이나 혹(或)은다른나라에서라도 학교(學校)를중심(中心)으로발전(發展)되여오는만큼 교내(校內)의『스포—스맨』들은 완연(宛然)『떼파—트』진열장(陳列場)속에서 고객(顧客)을호리는『마네킹』처럼 상품화(商品化)한교육제도하(敎育制度下)에서 달큼하게 그상품(商品)의가격(價格)을놉혀주엇스며 그학교(學校)를버저나와 실사회(實社會)에취직(就職)을하면 역시(亦是)그와갓튼『마네킹』노릇을하여왓다 이러는동안 조선(朝鮮)의운동경기(運動競技)는 그발생(發生)으맹아(萌芽)가 힘것생장(生長)하기도전(前)에현제도(現制度)의 독아(毒牙)에여지(餘地)업는약관(躍關)을당(當)한절대(絕對)의원인(原因)과 그밧게사회(社會) 경제(經濟) 정치적제정세(政治的諸情勢)의착잡(錯雜)한모순(矛盾)이 너무나철업시이운동경기(運動競技)의발달(發達)까지 조해(阻害)하여왓다그러나 노력(勞力)과인내(忍耐)는갑이잇서이때까지외래품(外來品)이라면 아무비판(批判)도업시 실행(實行)하야오든우리도야구(野球)의전원(全員)이일시(一時)에활약(活躍)할수업는폐(廢)와정구(庭球)의시후(時候)에대(對)한불편(不便)과『꼴프』의귀족적(貴族的)인것등(等) 모든운동(運動)의단점(短點)만을빼고 장점(長點)만을취(取)하야 조선적운동(朝鮮的運動)을창출(創出)하려는이이 경성(京城)서는중앙체육연구소(中央體育研究所)가생(生)기고 금반대구(今般大邱)에서『장』연구회(硏究會)가생(生)기게된것이다&lt;br /&gt;
&lt;br /&gt;
장이란북조선(北朝鮮)의궁벽(窮僻)한지대(地帶)의인사(人士)들은 잘알지못할는지모르나이장만은 오래동안 우리조선(朝鮮)으로부터 그들의자손(子孫)인우리들에게부(傅)하아은 국기(國技)의하나이다물론(勿論) 국기(國技)란단순(單純)한의미(意味)로서만필자(筆者)가그것을추장(推獎)하는것은인니다 딸아서 운동(運動)의영향(影響)이문화창조(文化創造)에잇더한역할(役割)을한다는것을새로히논(論)하려는것도안니다&lt;br /&gt;
&lt;br /&gt;
대구지국(大邱支局) 이(李) 활(活)&lt;br /&gt;
&lt;br /&gt;
그러나일반문화(一般文化)가 그지리(地理)와풍토(風土)에영향(影響)되는바만흔것과가티운동경기(運動競技)도 또한그러히다 그것은『필랜드』사람들이『스켓틩』을잘하는것과『낙위(諾威)』사람의『스키-』를잘하는것이라든지『정말(丁抹)』사람의체조(體操)기튼것이 이점(點)을잘실증(實證)하고잇다 그러면조선(朝鮮)에는 조선적(朝鮮的)인자연세력(自然勢力)도 그러하러니와 더욱이 금일(今日)의사회적경제적(社會的經濟的)모든조건(條件)이 조선인(朝鮮人)에적합(適合)한것이안니면 안될것으다 그래서 최소(最少)의노력(努力)으로최대(最大)의 효과(効果)를발현(發現)치안으면안될것이다&lt;br /&gt;
&lt;br /&gt;
아에우리는생각한다 오날날까지조선(朝鮮)에수입(輸入)된운동경기(運動竸技)의종목(種目)은그대(臺)를매거(枚擧)키난(難)하나 그중(中)한가지도 우리에게 적합(適合)한것이업고 더욱이농민(農民)들에게 추장(推獎)할만힌운동(運動)은업섯다 그러나이장만은 오날날까지 그들농민(農民)의손에서전(傳)해왓다 그러면서도그진정가치(眞正價値)를돌낫든것이 오날이야 사계(斯界)의권위제씨(權威諸氏)가 적년연구(積年硏究)를거듭하야 발표(發表)한결과(結果)를보면 운동(運動)으로시 제일망각(第一忘却)치못할생리학상(生理學上)으로보아 전체(全體)가균형적(均衡的)으로활동(活動)되고 경제적(經濟的)으로도 기구(器具)를작만히는데 돈이들지안코 어느곳에서든지『장채』를직만하고『장방울』을다드무면논바닥에서나 밧기운데서라도 할수잇는농민본위(農民本位)의운동(運動)이라고한다 그리고다른운동경기(運動競技)가티『씨—슨』이잇는것도안니고 춘하추동(春夏秋冬)어느때라도 되는경기(競技)인즉 농번기(農繁期)는 못히드라도 농한기(農閑期)갓트면 그들의육체(肉體)를 하련(鍜鍊)하는데 매우적당(適當)한것이다 수(數)만흔경기중(竸技中)에능(能)히경제조건(經濟條件)이 어느정도(程度)까지용인(容認)한다하여도 그들의게생전(生前)듯자못하든말로『핸드뽈』이니『꼴』이니『라인』이니하여보아도 결(决)크그들에게취미(趣味)가잇슬이(理)가만무(萬無)하고취미(趣味)가업스면 그들에게발전(發展)될이(理)도만무(萬無)한것이다 그러나『장』연구회동인(硏究會同人)들의말을들으면경기(竸技)에계산(計算)하는용어(用語)까지도순조선(純朝鮮)말로한다는것의경하(慶賀)할일이다 이『장치기』를국기(國技)로서추장(推獎)하야세계(世界)에널니선전(宣傳)하는것도좃치만은먼저안으로그들이이국기(國技)를직혀왓는만큼 그들에게조직적(組織的)으로보급(普及)하라 그리서조선농민(朝鮮農民)의경기(競技)를만들고 따라 세계(世界)의농민대중(農民大衆)에게 보급(普及)식하라!그래서『장』연구회(硏究會)의본래(本來)의사명(使命)을다하기를바란다(종(終))&lt;br /&gt;
&lt;br /&gt;
=='''주요 내용 요약'''==&lt;br /&gt;
배경: 조선에 수입된 야구, 축구, 유도 등 서양식 운동 경기는 학교 중심, 도시 중심으로 발전하며 '상품화'되었고, 농민 등 대중에게 적합하지 않은 것이다.&lt;br /&gt;
&lt;br /&gt;
'장치기'의 가치: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 **'조선적 운동'**을 창출하려는 노력으로 경성에서는 중앙체육연구소가, 대구에서는 '장' 연구회가 생긴 것이다. '장'은 조선의 국기(國技) 중 하나로, 농민의 손에서 전해 내려온 것이다. 생리학적으로 전신 균형 활동이 가능하고, 경제적으로 기구가 필요 없어 비용이 들지 않으며, 논바닥이나 밭에서도 가능하여 농민 본위의 운동이라고 한다. 계절을 타지 않고 농한기에 육체 단련에 매우 적합하며, 경기 용어까지 순 조선말을 사용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연구회의 사명: 연구회 동인들에게 '장치기'를 국기로 추장(추천)하여 세계에 선전하는 것도 좋지만, 먼저 이 국기를 지켜온 농민들에게 조직적으로 보급하여 '조선 농민의 경기'를 만들고 나아가 세계 농민 대중에게 보급해야 한다는 사명을 부여하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분석 및 특징'''==&lt;br /&gt;
민족주의적 시각: 서구 문물인 스포츠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한국의 전통 운동인 '장치기'의 토착적, 민족적 가치를 재조명하려는 의도가 뚜렷한 것이다.&lt;br /&gt;
&lt;br /&gt;
대중성/실용성 강조: '장치기'의 장점을 경제적 부담 없음, 장소 제약 없음, 계절 제약 없음, 쉬운 용어 등 농민 대중에게 적합한 실용성에 초점을 맞춰 설명하고 있다.&lt;br /&gt;
&lt;br /&gt;
'마네킹' 비유: 현대 교육 제도가 배출하는 스포츠맨을 '떼파-트 진열장의 마네킹'에 비유하며, 당시 상업화된 교육 및 스포츠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드러내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노신추도문(魯迅追悼文)'''=&lt;br /&gt;
(일(一))&lt;br /&gt;
&lt;br /&gt;
이(李) 육(陸) 사(史)&lt;br /&gt;
&lt;br /&gt;
『아(阿)Q정전(正傳)』의 작자(作者)로서 세계적작가(世界的作家)이며 중국신문학(中國新文學)의 최고봉(最高峰)인 노신(魯迅)이지난십구일(十九日) 오전오시(午前五時)에상해(上海)에서 숙아(宿疴)로 영면(永眠)하엿다는 실음(實音)이전(傳)한지 삼일(三日)되는날에 우리는 간단(簡單)한일문(一文)을 비러 삼가추도(追悼)의뜻을 표(表)하거니와 만년(晩年)에그의 정치적불우(政治的不遇)로인(因)하야 문학자(文學者)로서의 성명(聲名)조차가 우리에게 널니퍼지지못한것을 더유감(遺憾)으로생각한다.　　　　 (일(一) 기(記) 자(者))&lt;br /&gt;
&lt;br /&gt;
일구삼이연육월초(一九三二年六月初) 어느토요일(土曜日)아츰이엿다 식관(食舘)에서나온 나와M은 네거리의 담배가가에서조간신문(朝刊新聞)을 사서들고 근육신경(筋肉神經)이떨니도록 굴근활자(活字)를 함숨에나려읽은것은 당시중국과학원부주석(當時中國科學院副主席)이요 민국혁명(民國革命)의 원로(元老)이든양행불(楊杏佛)이 남의사원(藍衣社員)에게 암살(暗殺)을당(當)하엿다는 기사(記事)이엿다.&lt;br /&gt;
&lt;br /&gt;
우리들은 거리마다 삼엄(森嚴)하게늘어선 불란서공무국(佛蘭西工務局) 순경(巡警)들의예리(銳利)한눈초리를 등으로하나 갓득늣기면서 여반로(侶伴路)의 서국(書局)까지을동안은 침묵(沈默)이 계속(繼續)되엿다&lt;br /&gt;
&lt;br /&gt;
문(門)안에 들어서자마자 편집원(編輯員)R씨(氏)는 우리들에게 다음과가튼말을 들여주엇다.&lt;br /&gt;
&lt;br /&gt;
중국좌익작가연맹(中國左翼作家聯盟)의 발안(發案)에의(依)하야 전세계(全世界)의 진보적(進步的)인 학자(學者)와 작가(作家)들이 상해(上海)에모혀서중국(中國)의 문화(文化)를 옹호(擁護)할대회(大會)를그해팔월(八月)에 갓게 된다는것과이에 불안(不安)을 늣기는 국민당통치자(國民黨統治者)들이 먼저 진보적작가진영(進步的作家陣營)의 중요분자(重要分子)인 반재년(潘梓年)(현재남경유폐(現在南京幽廢))과 인제는 고인(故人)이된 여류작가(女流作家) 정영(丁玲)을 체포(逮捕)하여행방(行方)을 불명(不明)케한것이며 여기동정(同情)을 가지는 송경령여사(宋慶齡女史)를 중심(中心)으로한 일련(一聯)의 자유주의자(自由主義者)들과 작가연맹(作家聯盟)이 맹렬(猛烈)한 구명운동(救命運動)을한사실(事實)이며 그것이 국민당통치자(國民黨統治者)들의 눈쌀에 거슬려서 양행불(楊杏彿)이 희생(犧牲) 된것과 그외(外)에도 송경령(宋慶齡) 채원(蔡元) 배(培) 노신등등(魯迅等等) 상해(上海)안에서만삼(三) 십명(十名)에갓가운 지명지사(知名之士)들이 남(藍) 의사(衣社)의『뿔랙·리스트』에 올라잇 다는것이엿다.&lt;br /&gt;
&lt;br /&gt;
그리고 그뒤삼일(三日)이 지난후(後)R씨(氏)와 내가탄자동차(自動車)는 만국빈의사(萬國殯儀社)아페다엇다,간단(簡單)한 소향(燒香)의예(禮)가 끗나고도라설때 젊은두여자(女子)의수원(隨員)과함게드러오는송경령여사(宋慶齡女史)의일행(一行)과가티 연회색(軟灰色)두루막에 검은『마괘아(馬掛兒)』을 입은중년(中年)늙은이생화(生化)에 싸인관(棺)을 붓들고 통곡(痛哭)을하든그를 나는문득 노신(魯迅)인것을알엇스며 엽헤섯든 R씨(氏)도 그가노신(魯迅)이란것을 말하고난 십분(十分)쯤뒤에 R씨(氏)는나를 노신(魯迅)에게소개(紹介)하여주엇다&lt;br /&gt;
&lt;br /&gt;
그때노신(魯迅)은 R씨(氏)로부터 내가조선청년(朝鮮靑年)이란것과 늘한번대면(對面)의기회(機會)를가지려고 햇드란말을듯고외국(外國)의선배(先輩)압히며 처소(處所)가 처소(處所)인만치 다만 근신(謹愼)과공손(恭遜)할뿐인나의손을 다시한번 잡아줄때는그는매우 익숙하고 친절(親切)한친구이엿다&lt;br /&gt;
&lt;br /&gt;
아!그가벌서 오십육세(五十六歲)를일기(一期)로 상해시고탑구호(上海施高塔九號)에서 영서(永逝)하엿다는 부보(訃報)를바들때에 암연(暗然)한줄기 눈물을지우느니 엇지조선(朝鮮)의 한사람후배(後輩)로써 이붓을잡는나뿐이랴&lt;br /&gt;
&lt;br /&gt;
(이(二))&lt;br /&gt;
&lt;br /&gt;
이육사(李陸史)&lt;br /&gt;
&lt;br /&gt;
중국문학사상(中國文學史上)에남긴 그의 위치(位置)『아(阿)Q의 정전(正傳)을 다읽고낫슬때나는 아즉까지 아(阿)Q의 운명(運命)이걱정되여 못견듸겟다』고한『로망·로—랑』의 말과가티 현대중국문학(現代中國文學)의 아버지인 노신(魯迅)을&lt;br /&gt;
&lt;br /&gt;
이해(理解)하기 위(爲)해서는 우리는 먼저 아(阿)Q의 정전(正傳)을 이해(理解)하지안흐면 안된다 그러나 지금의 중국(中國)의 아(阿)Q들은 벌서『로망·로—라』으로하야금 그운명(運命)을 걱정할 필요(必要)는 업시되엿다실(實)로 수만흔 아(阿)Q들은 벌서 자신(自身)들의 운명(運命)을 열어갈길을노신(魯迅)에게서배웟다 그래서중국(中國)의 모든근로층(勤勞層)들은 남경로(南京路)의『아스필트』가자신(自身)들의 발미테 흔들리는것을늣기며 시고탑로신촌(施高塔路新邨)의구호(九號)로그들이가젓든 위대(偉大)한문호(文豪)의최후(最後)를애도(哀悼)하는마음들은 황포탄(黃浦灘)의붉은파도(波濤)와가티 밀려가고잇는것이다&lt;br /&gt;
&lt;br /&gt;
그럼으로 아(阿)Q시대(時代)를 고찰(考察)하여보는데따라서 노신정신(魯迅精神)의 삼단적변천(三段的變遷)과아울러 현대중국문학(現代中國文學)의 발전과정(發展過程)을 알어보는것도그를추억(追憶)하는의미(意味)에서 그다지 허무(虛無)한 일은아닐것이다,&lt;br /&gt;
&lt;br /&gt;
중국(中國)에는 고래(古來)로 소설(小說)이라는오늘날우리가 보는것과가튼 완전(完全)한예술적형태(藝術的形態)는 존재(存在)하지못햇다 삼국연의(三國演義)나 수호지(水滸誌)가아니면홍루몽(紅樓夢)쯤이잇섯고 다소(多少)의전기(傳記)가잇섯을뿐으로서 일반교양(一般敎養)잇는집자제(子弟)들은 과거제도(科擧制度)에 화(禍)를바더문어체(文語體)의&lt;br /&gt;
&lt;br /&gt;
고(古)&lt;br /&gt;
&lt;br /&gt;
문(文)만숭상(崇尙)하고백화소설(白話小說)가튼것은속인(俗人)의할일이라햐야나치아는하편소위문단(所謂文壇)은당송팔가(唐宋八家)와팔반(八般)의혼합체(混合體)인상성파(相城派)와사기당(思綺堂)과 원수원(袁隨園)의유파(流派)를따라가는 사륙변체문(四六騈體文)과황산곡(黃山谷)을본존(本尊)으로하는 강서파등등(江西派等等)이 당시정통파(當時正統派)의문학(文學)으로서 과장(誇張)과 허위(虛偽)와 아유(阿諛)로서 고전문학(古典文學)을 모방(模倣)한데지나지못하엿스며 새로운사회(社會)를 창생(創生)할하등(何等)의 힘도가지지못한것은 미루어알기도 어렵지안흔 분위기(雰圍氣)속에 중국문학사상(中國文學史上)에 찬연(燦然)한봉화(烽火)가 일어난것은일구일오년(一九一五年) 잡지(雜誌)『신청년(新靑年)』의 창간(創刊)이그것이다&lt;br /&gt;
&lt;br /&gt;
이것이처음발간(發刊)되자 당시(當時)『아메리카』에잇든호적지박토(胡適之博土)는『문학개량추의(文學改良蒭議)』라는『문학혁명론(文學革命論)』을일구일칠년신연호(一九一七年新年號)에 게재(揭載)하야진독수(陳獨秀)가 이에찬의(賛意)를표(表)하고 북경대학(北京大學)을 중심(中心)으로한 진보적(進步的)인교수(敎授)들이 합류(合流)하게되자 종래(從來)의고문가(古文家)들은 이운동(運動)을방해(防害)코저 가진야비(野卑)한 정치적수단(政治的手段)을 써도보앗스나 일구팔년사월호(一九八年四月號)에 노신(魯迅)의『광인일기(狂人日記)』란 백화소설(白話小說)이&lt;br /&gt;
&lt;br /&gt;
발(發)&lt;br /&gt;
&lt;br /&gt;
표(表)되엿슬때는 문학혁명운동(文學革命運動)은 실천(實踐)의거대보무(巨大步武)를옴기게되고 벌서고문가(古文家)들은 그추악(醜惡)한꼬라를 감주지안흐면안되엿다는것은 그후(後)얼마뒤에 노신(魯迅)이광동(廣東)에갓슬때에어&lt;br /&gt;
&lt;br /&gt;
떤흥분(興奮)한청년(靑年)은 그를마지하는문장(文章)속에『광인일기(狂人日記)』를 처음읽엇슬때 문학(文學)이란것이 무엇인지몰랏든나는 차차읽어나려가면서이상(異常)한흥분(興奮)을 늣겻다 그래서 동무를만나기만하면 곳붓들고말하기를——중국(中國)의문학(文學)은 이제바야흐로 한시대(時代)를 짓고잇다 그대는『광인일기(狂人日記)』를 읽어보앗는가 또거리를거러가면 길가는사람이라도붓들고 내의견(意見)을발표(發表)하리라고생각한적도잇섯다……』(노신재광동(魯迅在廣東))&lt;br /&gt;
&lt;br /&gt;
이문제(問題)의소설(小說)『광인일기(狂人日記)』의내용(內容)은 한개망상광(妄想狂)의 일기체(日記體)의소설(小說)로서 이주인공(主人公)은 실(實)로대담(大膽)하게또명확(明確)하게 봉건적(封建的)인 중국구사회(中國舊社會)의 악폐(惡弊)를통매(痛罵)한다 자기(自己)의 이웃사람은 물론(勿論)말할것도업고 특(特)히자기가정(自己家庭)을 격렬(激烈)히 공격(攻擊)하는것이다 가정(家庭)—가족제도(家族制度)라는것이중국봉건사회(中國封建社會)의 사회적단위(社會的單位)로서일반(一般)에열마나한 해독(害毒)을끼처왓는가.봉건적가족제도(封建的家族制度)는 고형화(固型化)한유교류(儒敎流)의&lt;br /&gt;
&lt;br /&gt;
종(宗)&lt;br /&gt;
&lt;br /&gt;
법사회관념하(法社會觀念下)에 당연(當然)히붕괴(崩壞)돠여야할것이면서 붕괴(崩壞)되지못하고 근대적사회(近代的社會)의성장(成長)에 가장근본적(根本的)인 장애(障碍)로되여잇는 날근도덕(道德)과 인습(因襲)을 여지(餘地)업시 통매(痛罵)햇다,이에『광인일기(狂人日記)』중(中)에 한절(節)을 초(抄)하면『나 는 역사(歷史)를 뒤적거려 보앗다 역사(歷史)란건 어느시대(時代)에나 인의(仁義) 도덕(道德)이란몃줄로 치더치덕씨여 저잇섯다 나는 밤잠도안자고 딍굴딍굴러가며 생각하여보 앗스나 겨우글자와 글자사이 에서『사람을먹는다』는 몃자 가쓰여잇섯슬뿐이엿다』&lt;br /&gt;
&lt;br /&gt;
이가티추악(醜惡)한 사회면(社會面)을폭로(暴露)한다음 오는시대(時代)의건설(建設)은 젊은사람들의손에 맛걱저야한다는것을암시(暗示)하면서 이소설(小說)의일편(一篇)은『어린이를구(救)하자』는 말로서끗을막엇다.실(實)로이한말은 당시(當時)의『어린이』인 중국청년(中國靑年)들에게는 사상적(思想的)으로는『폭탄선언(暴彈宣言)』이상(以上)으로 충격(衝擊)을주엇스며이러한작품(作品)이 백화(白話)로쓰여지는데 따라 문학혁명(文學革命)이완전(完全)히승리(勝利)의 개가(凱歌)를 부르게된공적(功績)도 태반(太半)은노신(魯迅)에 돌려야하는것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삼(三))&lt;br /&gt;
&lt;br /&gt;
이육사(李陸史)&lt;br /&gt;
&lt;br /&gt;
『광인일기(狂人日氣)』의다음 연속(連續)해나온작품(作品)으로『공을사(孔乙巳)』『약(藥)』『명일(明日)』『일개소사건(一個小事件)』『두발적고사(頭髮的故事)』『풍파(風波)』『고향(故鄕)』등(等)은모다 신청년(新靑年)을통(通)해서세상(世上)에물의(物議)를 이르켯스나 그후일구이일년(後一九二一年) 북경신보문학부간(北京新報文學副刊)에그유명(有名)한『아(阿)Q정전(正傳)』이 연재(連載)되면서부터는 노신(魯迅)은자타(自他)가공인(共認)하는 문단제일인적작가(文壇第一人的作家)엿다.&lt;br /&gt;
&lt;br /&gt;
그리고 이러한대작(大作)은 모다신해혁명전후(辛亥革命前後)의&lt;br /&gt;
&lt;br /&gt;
봉(封)&lt;br /&gt;
&lt;br /&gt;
건사회(建社會)의생활(生活)을 그린것으로 어떠케필연적(必然的)으로 붕괴(崩壞)하지안흐면안될 특징(特徵)을가젓는가를묘사(描寫)하고 어떠케새로운사회(社會)를 살어갈가를 암시(暗示)하고잇다.뿐만아니라 당시(當時)의혁명(革命)과 혁명적(革命的)인사조(思潮)가 민중(民衆)의심리(心理)에 생활(生活)의『데테일슨』에 어떠케표현(表現)되는가를 가장『레알』하게묘사(描寫)한것이다.더구나 그는 농민작가(農民作家)라고할만치 농민생활(農民生活)을그리는데 교묘(巧妙)하다는것도 한가지조건(條件)이되겟지만은 그의소설(小說)에는주장(主張)이개념(槪念)에 흐른다거나 조금도무리(無理)가업는것은 그의작가적수완(作家的手腕)이 탁월(卓越)하다는것을 말하지안홀수업다.&lt;br /&gt;
&lt;br /&gt;
그리고 그의작품(作品)은 늘 농민(農民)을주인공(主人公)으로하는것과 때로는『인테리』일지라도 예(例)를들면『공을사(孔乙巳)』의 공을사(孔乙巳)나『아(阿)Q정전(正傳)』의아(阿)Q가모다 일맥(一脈)이상통(相通)하는 성격(性格)을가지는것이니 공을사(孔乙巳)는 구시대(舊時代)의지식인(知識人)으로 시대(時代)에떠러저서 무슨일에도 쓰여지지못하고기품(氣品)만은노펏스나 생활력(生活力)은업고걸인(乞人)이되야 선술집술상대(臺)에 일금십구조(一金十九吊)의주채(酒債)가 어느때까지쓰여저잇는대로 언제인지&lt;br /&gt;
&lt;br /&gt;
행(行)&lt;br /&gt;
&lt;br /&gt;
방(方)이 불명(不明)된채로 나중에죽어젓든것이라든지『룸펜』농민(農民)인 일용노동자아(日傭勞働者阿)Q가 또한 쑥스러운년석으로혁명혁명(革命革命)떠들어놋코는 그것이몹시유쾌해서 반취(半醉)한기분(氣分)이 폭동대(暴動隊)의일군(一群)에 참가(參加)는하려고하엿스나 결국(結局)헛풍만치고 아무것도못하다다가 때마츰 일어난 폭도(暴徒)의약탈사건(掠奪事件)에 도당(徒黨)으로오해(誤解)되여(피(彼)의평소(平素)삼가지못한 언동(言動)에의(依)하야)피살(被殺)되는 아(阿)Q의성격(性格)은 그때중국(中國)의 누구라도가 전부혹(全部或)은일부분식(一部分式)은 소유(所有)하고잇섯든것이다다시말하면 아(阿)Q나공을사(孔乙巳)가모다사고(思考)와행동(行動)이 루—즈하고 확호(確乎)한한개의 정신(精神)도업스며 우약(愚弱)하면서도 몹시건방지고 남에게한개쥐여질리면 아무런반항(反抗)도못하면서 남이자신(自身)을 연민(憐憫)하면 제도량(度量)이커서 남이못덤비는것이라고제대로도취(陶醉)하야 남을 되는대로해(害)치는 무지(無知)하고우수면서도 가엽고 괴팩스러운것을 노신(魯迅)은그『레알리스틕』한문장(文章)으로폭로(暴露)한것이 특징(特徵)이엿스니 당시(當時)『아(阿)Q정전(正傳)』이발표(發表)될때&lt;br /&gt;
&lt;br /&gt;
평(平)&lt;br /&gt;
&lt;br /&gt;
소노신(素魯迅)과 교분(交分)이좃치못한사람들은 모다자기(自己)를모—델로 고의(故意)로쓴것이라고들 떠드는자(者)가잇은것을 보아도알수가잇는것이다&lt;br /&gt;
&lt;br /&gt;
그래서당시중국(當時中國)은 시대적(時代的)으로『아(阿)Q시대(時代)』이엿스며 노신(魯迅)의『아(阿)Q정전(正傳)』이 발표(發表)될때는 비평계(批評界)를비롯하야 일반지식군(一般知識群)들은『아(阿)Q상(相)』이라거나『아(阿)Q시대(時代)』라는말을평상대화(平常對話)에사용(使用)하기를 항다반(恒茶飯)으로하게된것은 중국문학사상(中國文學史上)에남겨노흔노신(魯迅)의 위치(位置)를 짐작하기에 조흔 한개의재료(材料)이거니와그의작가(作家)로서의 태도(態度)를통(通)하야 일관(一貫)하여잇는 노신정신(魯迅精神)을 다시한번음미(吟味)해보는데 적지안흔흥미(興味)를갓게된다는것은 오늘날우리의조선문단(朝鮮文壇)에는 누구나할것업시 예술(藝術)과정치(政治)의 혼동(混同)이니 분립(分立)이니하야 문제(問題)가엇지보면 결말(决末)이난듯도하고 어찌보면 미해결(未解决)그대로 잇는듯도한 현상(現狀)인데 노신(魯迅)가티 자기신념(自己信念)이 구든사람은이예술(藝術)과정치(政治)란것을 어떠케해결(解决)하엿는가?이문제(問題)는 그의작가(作家)로서의 출발점(出發點)부터 구명(究明)해야한다.&lt;br /&gt;
&lt;br /&gt;
노신(魯迅)은&lt;br /&gt;
&lt;br /&gt;
본(本)&lt;br /&gt;
&lt;br /&gt;
내의사(來醫師)가 되려고하엿다 그것은자기(自己)의『할일』이 무엇이라는것을 알엇기때문이엇다 물론(勿論)그때의 자기(自己)의『할일』이란것은 민족개량(民族改良)이라는 신념(信念)이엿든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후년(後年)『납함(吶喊)』서문(序文)에 다음가티써다.&lt;br /&gt;
&lt;br /&gt;
『나의학적(學籍)은 일본(日本)어느 지방(地方)의 의학전문학교(醫學專門學校)에 두엇다 나의 꿈은 이것으로 매우 아름답 고 만족(滿足)햇다 졸업(卒業)만하고 고(故) 국(國)에 도라오면 아버지와가티 치료(治療)못하는 병인(病人)을살리고 전(戰) 쟁(爭)이나면 출정(出征)도하려니와 국(國) 인(人)의 유신(維新)에대(對)한 신앙(信仰)에까지 나어갈것……』이라고&lt;br /&gt;
&lt;br /&gt;
이것은물론(勿論) 소년(少年)다운노신(魯迅)의로맨틕한 인도주의적흥분(人道主義的興奮)이엿겟지만은 이꿈도결국(結局)은 깨여지고말엇다.&lt;br /&gt;
&lt;br /&gt;
——의학(醫學)은결(决)코 긴요(緊要)하지안타 우약(愚弱)한 국민(國民)은 체격(體格)이 아모 리 조타고해도 또 아모리강(强) 장(壯)해도 무의미(無意味)한 구경거리나 또는 구경군이 되는박게는아 무것도아니다—중략(中略)—그럼으로 긴요(緊要)한것은 그들을 정신적(精神的)으 로 잘개조(改造)할것은 무엇일가나 는그때당연(當然) 문예(文藝)라고생각햇다 그리고 문예운동(文藝運動)을 제창(提唱)하기 로햇다(납함서문(吶喊序文))&lt;br /&gt;
&lt;br /&gt;
이리하야 그가 당시동경(當時東京)에망명(亡命)해잇는 중국(中國)사람들의 기관지(機關紙)인『절강조(浙江潮)』『하남(河南)』등(等)에 쓰든과학사(科學史)나 진화론(進化論)의 해설(解說)을 집어치우고 문학서적(文學書籍)을 번역(飜譯)한것은희랍(希臘)의 독립운동(獨立運動)을 원조(援助)한『빠이론』과 파란(波蘭)의복수시인(復讐詩人)『아담·미케뷧치』『향가리』의 애국시인(愛國詩人)『베트피·산더—』『필립핀』의문인(文人)으로 서반아정부(西班牙政府)에 사형(死刑)바는『리샬』등(等)의 작품(作品)이엿다.&lt;br /&gt;
&lt;br /&gt;
(사(四))&lt;br /&gt;
&lt;br /&gt;
이육사(李陸史)&lt;br /&gt;
&lt;br /&gt;
그리고이것은 노신(魯迅)의 문학행정(文學行程)에잇서서 가장초기(初期)에 속(屬)하는것이지만은 이러한번역(飜譯)까지라도그의 일정(一定)한목적(目的) 즉정치적목적(即政治的目的)미테 수행(遂行)된것을 엿볼수잇는것이며 우에말한『광인일기(狂人日記)』의『어린이를구(救)하자』는말도 순결(純潔)한 청년(靑年)들에의(依)하야 새로운중국(中國)을 건설(建設)하자는 그의이상(理想)을&lt;br /&gt;
&lt;br /&gt;
단적(端的)으로 고백(告白)한것으로써 이말은당시일반청년(當時一般靑年)들에게 무거운 책임감(責任感)을깨닷게한것은물론(勿論) 이래기천년(爾來幾千年)동안의 봉건사회(封建社會)로부터 청년(靑年)을해방(解放)하랴는 슬로—간으로 널리쓰여젓고 사실(事實)그뒤의 중국청년학생(中國靑年學生)들은 모든대중적사회운동(大衆的社會運動)의최전선(最戰線)에서 활발과감(活潑果敢)한 지도(指導)와조직(組織)을하엿스며 그유명(有名)한 오사운동(五四運動)이나 오주운동(五州運動)이나 국민혁명(國民革命)까지도 늘최전선(最前線)에서서 대중(大衆)을지도(指導)한것은 이들청년학생(靑年學生)이엿다&lt;br /&gt;
&lt;br /&gt;
그럼으로 노신(魯迅)에잇서서는 예술(藝術)은정치(政治)의 노예(奴隸)가 아닐뿐아니라 적어도예술(藝術)이 정치(政治)의 선구자(先驅者)인 동시(同時)에혼동(混同)도 분립(分立)도아닌즉(即) 우수(優秀)한작품(作品) 진보적(進步的)인 작품(作品)을 산출(產出)하는데만 문호(文豪) 노신(魯迅)의지위(地位)는노퍼갓고 아(阿)Q도 여기서비로소탄생(誕生)하엿스며 일세(一世)의 비평가(批評家)를도 감(敢)히 그에게는 함부로 머리를 들지못하엿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여기에 한가지 조흔예(例)가잇다 일구이팔년경(一九二八年頃) 무한(武漢)을쪼겨와서 상해(上海)에서 태양사(太陽社)를조직(組織)한 청년비평가(青年批評家) 전행촌(錢杏村)이 때마춤 푸로문학론(文學論)이 드셀때인만큼 노신(魯迅)을 대담(大膽)하게&lt;br /&gt;
&lt;br /&gt;
공격(攻擊)을 시작(始作)해보앗다그소론(所論)에 의(依)하면노신(魯迅)의 작품(作品)은 비계급적(非階級的)이다 아(阿)Q에게어데 계급성(階級性)이잇느냐는것이다.&lt;br /&gt;
&lt;br /&gt;
물론(勿論)그것은 정당(正當)한말이다,노신(魯迅)의작품(作品)에서 우리는눈딱고보아도 푸로레타리아적특성(的特性)은 조금도 볼수가 업는것은 사실(事實)이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우리가 한사람의작품(作品)을 비평(批評)할때는 그시대적배경(時代的背景)을고려(考慮)하지안흘수는업는것이니 노신(魯迅)이작가(作家)로활동(活動)을 하고잇슬때는중국(中國)에는 오늘날우리가 정의(定義)를나릴수잇는 푸로레타리아는 업슬뿐아니라 그때쯤은 뿌르조아민주주의적(民主主義的)인 정치사조(政治思潮)조차도아즉계선(界線)이분명(分明)하지못하엿다는것은뿌르조아혁명(革命)이라는 소위국민혁명(所謂國民革命)도 정직(正直)하게말하자면 사오운동(四五運動)을 전초전(前哨戰)으로한것만큼 여기서 역시중국(亦是中國)의 비상가(批詳家)인병신(丙申)은자미잇는말을하고잇다&lt;br /&gt;
&lt;br /&gt;
『그가현재(現在) 중국좌익작가연맹(中國左翼作家聯盟)을지지(支持)하고잇다해서 그의『사오(四五)』전후(前後)의&lt;br /&gt;
&lt;br /&gt;
작품(作品)을 푸로문학(文學)이라고 지목(指目)할것은아니&lt;br /&gt;
&lt;br /&gt;
다 그러나 그를우수(優秀)한 농민작가(農民作家)라고 하는것이 타당(妥當)타고—』그러타 이말은 어느정도(程度)까지&lt;br /&gt;
&lt;br /&gt;
정당(正當)에 가까운말로서 그를푸로작가(作家)가아니고 농민작가(農民作家)라고해서작가노신(作家魯迅)의 명예(名譽)를 더럽힐조건(條件)은 되지못하는것이다 다만문제(問題)는 그가얼마나 창작(創作)에 잇서서진실(眞實)하게 명확(明確)하게 묘사(描寫)하는태도(態度)를 가지는가 그의한말을 써보기로하자&lt;br /&gt;
&lt;br /&gt;
『——현재(現在) 좌익작가(左翼作家)는 훌륭한자신(自身)들의 문학(文學)을 쓸수잇슬가?생각컨대 이것은 매우곤란(困難)하다.현재(現在)의 이런 부류(部類)의 작가(作家)들은 모다『인테리』다 그들은 현실(現實)의 진실(眞實)한 정형(情形)은쓸려고해도 용이(容易)치안타 어떤사람이 일즉 이런 문제(問題)를제출(提出)한것이잇섯다『작가(作家)가 묘사(描寫)하는것은 반드시 자기(自己)가 경험(經驗)한것이라야만될것인가?그러나 그는 스스로 답(答)하기를반드시 안그래도조타웨러러냐하면 그들은 잘 추찰(推察)할수가잇스므로 절도(窃盜)하는장면(塲面)을 묘사(描寫)하랴면 작가(作家)는 반드시 자신(自身)이 절도(窃盜)질할 필요(必要)도업고 간통(姦通)하는&lt;br /&gt;
&lt;br /&gt;
장면(塲面)을 묘사(描寫)할 필요(必要)를늣길때 작가(作家) 자신(自身)이간통(姦通)할 필요(必要)도 업다고』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작가(作家)가 구사회(舊社會)속에서 생장(生長)해서그 사회(社會)의 모든 일을 잘알고 그사회(社會)의 인간(人間)들에게 익숙해저서 잇는때문에 추찰(推察)이되는것이다 그러나 종래(從來)아무런 관계(關係)도업는새사회(社會)의 정형(情形)과인물(人物)에 대(對)해서는 작가(作家)가무능(無能)하다면 아마그릇된 묘사(描寫)를할것이다 그럼으로 푸로문학가(文學家)는 반드시 참된현실(現實)과 생명(生命)을 가티하고 혹(或)은 보다기피현실(現實)의맥박(脈搏)을 감수(感受)하지안흐면 안된다고하면서 또다시말을 계속(繼續)하는것이다.&lt;br /&gt;
&lt;br /&gt;
그러나구사회(舊社會)를 조그만치공격(攻擊)하는작품(作品)일지라도 만약(萬若)그결점(缺點)을 분명(分明)히모르고 그병근(病根)을투철(透澈)히파악(把握)치못하면 그것은유해(有害)할뿐이다 애석한일이나마현재(現在)의푸로작가(作家)들은 비평가(批評家)까지도 왕왕(往往) 그것을못한다 혹사회(或社會)를 정시(正視)해서 그진상(眞相)을 알려고도안코 그중(中)에는 상대자(相對者)라고 생각하는편의 실정(實情)도알려고하지안는다.&lt;br /&gt;
&lt;br /&gt;
(오(五))&lt;br /&gt;
&lt;br /&gt;
이육사(李陸史)&lt;br /&gt;
&lt;br /&gt;
차근(車近)한 예(例)로는 얼마전 모지상(某紙上)에 중국문학계(中國文學界)를 비평(批評)한문장(文章)을 한편(篇)보앗는데 중국문학계(中國文學界)를 삼파(三派)에 난워서 먼저창조파(創造派)를 들어 푸로파(派)라하야매우상세(詳細)하게 논급(論及)하고 다음어사사(語絲社)를 소(小)뿌르파(派)라고 조그만치 말한후(後)&lt;br /&gt;
&lt;br /&gt;
신월사(新月社)를 뿌르문학파(文學派)라 해서 겨우 붓 을 대다가만 젊은비평가(批評家)가잇 섯다 이것은 젊은기질(氣質)의 상(相) 대자(對者)라고 생각는파(派)에 대(對)해서 는 무어세(細)□□□고구(考究)할필요(必要)가 업다는뜻을 표명(表明)한것이다 물(勿) 논(論)우리는 서적(書籍)을볼때 상대자(相對者) 의것을 보는것은 동파(同派)의것을 보는안심(安心)과 유쾌(愉快)와 유익(有益)한데 밋치지 못하는것은 사실(事實)이다 그러나 만약(萬若) 일개전투자(一個戰鬪者)라면 나는 생각컨대 현실(現實)과 상대(相對) 자(者)를 이해(理解)하는 편의상(便宜上) 보담 만은 당면(當面)의 상대자(相對者)에 대(對)한 해부(解剖)를 필요(必要)로 하지안으면안 될것이다.옛것을 분명(分明)히 알 고 새로운것에 간도(看到)하고 과(過) 거(去)를 요해(了解)하야 장래(將來)를 추단(推斷) 하는데서만 우리들의 문학적(文學的) 발전(發展)은 희망(希望)이잇다 생각건대 이것만은 현재(現在)와 가튼 환경(環境) 에잇는 작가(作家)들은 부단(不斷)히 노(努) 역(力)할것이고 그래야만 참된작(作) 품(品)이 나오는것이다』라 고&lt;br /&gt;
&lt;br /&gt;
이간단(簡單)한 몃마듸만히 문호노신(文豪魯迅)의 창작(創作)에 대(對)한『모랄』인것이다 이얼마나 우리의 뼈에 사무치고도 남을만한시사(示唆)인고!이리해서&lt;br /&gt;
&lt;br /&gt;
현대중국문단(現代中國文壇)의부(父)이며비평가(批評家)의비평(批評)으로서자타(自他)가 그지위(地位)를 함께긍정(肯定)하든그의작가(作家)로서의 생애(生涯)는 너무나쩔으것이엿스니 일구이육연삼월(一九二六年三月)『이혼(離婚)』이란작품(作品)을 최후(最後)로남긴그는 교수(敎授)로서 작가(作家)로서의 화려(華麗)한 생애(生涯)는 종언(終焉)을고(告)하지 안흐면안될때가왓다 그는 지금부터『손으로쓰기보다는 발로 다라나기가 더밧벗다』&lt;br /&gt;
&lt;br /&gt;
일구이육년(一九二六年) 북양군벌(北洋軍閥)을 배경(背景)오로한 안복파(安福派)의수령(首領) 단기서(段祺瑞)의정부(政府)는 급진적(急進的)인좌파(左派)의 교수(敎授)와우수(優秀)한 지식분자오십여명(知識分子五十餘名) 체포령(逮捕令)을 나렷다 우리노신(魯迅)은 이오십명중(五十名中)의 한사람이엿다 그것은일구이사년(一九二四年) 국민당(國民黨)의 연아용공책(聯俄容共策)이 결정(决定)되야그익년(翌年)가을『뽀로된』등(等)이고문(顧問)으로광동(廣東)에오고『전국민적공동전선(全國民的共同戰線)』이엿든 국민혁명(國民革命)의제일계단(第一階段)인 광동시기(廣東時期)에는 푸로레타라아의 동맹자(同盟者)는 농민도시빈민(農民都市貧民) 소(小)뿌로지식계급(知識階級) 국민적(國民的)뿌르조아지—엿다』&lt;br /&gt;
&lt;br /&gt;
그래서 급진교수(急進敎授)들은 교육부총장(敎育部總長) 군벌정부(軍閥政府)를 육박(肉迫)하엿스며이러한&lt;br /&gt;
&lt;br /&gt;
신흥세력(新興勢力)에 낭패(狼狽)와공포(恐布)를 늣긴군벌정부(軍閥政府)는 이러한교수(敎授)들과 학생(學生)들에게체포령(逮捕令)을나리고 학생(學生)들의행렬(行列)은정부위병(政府衛兵)들의 발포(發砲)로인(因)하야 남여수백여명(男女數百餘名)의 사상자(死傷者)가낫다 그때노신(魯迅)은 북경동교민항(北京東交民巷)의 공사관구역(公使舘區域)의 외국인병원(外國人病院)이나 공장(工塲)안으로 도라단이며 찬물로기아(飢餓)를 참아가면서도 신문(新聞)과 잡지(雜誌)에 기고(寄稿)를하야 군벌정부(軍閥政府)를 맹렬(猛烈)히 공격(攻擊)하얏다 그중(中)에도『국민이래(國民以來) 최암흑일(最暗黑日)에지(誌)』하엿다는 명문(名文)은 단기서(段祺瑞)로하여금 의자(椅子)에나려안게되엿다&lt;br /&gt;
&lt;br /&gt;
——붓으로쓰헛소리는 피로쓴 사실(事實)을 만착(瞞着)하지못한다——중(中) 약(略)——붓으로쓴것이 무슨힘이 잇스랴 실탄(實彈)을쏘는것은 오즉 청년(靑年)의피다(속화개집(續華盖集))&lt;br /&gt;
&lt;br /&gt;
오늘날까지 중국문단(中國文壇)의『막심콜키—』이든그는 지금부터는문화(文化)의전사(戰士)로서『앙리·발뷰스』보다비장(悲壯)한생애(生涯)가 시작(始作)되는것이엿다&lt;br /&gt;
&lt;br /&gt;
그의말과가티&lt;br /&gt;
&lt;br /&gt;
최청흑(最晴黑)한오십일(五十日)이지나고 그는북경(北京)을탈출(脫出)햇다 하문대학(夏門大學)에 초청(招請)을바□갓으나 대학기업가(大學企業家)의 음흉수(陰凶手)것인것을 안그는광동중산대학(廣東中山大學)으로갓다 그러나 일구이육년사월십오일(一九二六年四月十五日) 장개석(蔣介石)의쿠—데타—는 광동일성(廣東一省)만 노동자농민급진지식분자삼천여명(勞働者農民急進知識分子三千餘名)을—하엿 으며 한때는『혁명(革命)의전사(戰士)』라고 간판(看板)을지인노신(魯迅)도상해(上海)로 다라나야만 되엿다여기서우리가 다시한번그에게흥미(興味)보다는 최대(最大)의 경의(敬意)를갓게되는것은 다음의일문(一文)이다&lt;br /&gt;
&lt;br /&gt;
——나의 일종망상(一種妄想)은 깨여젓 다 나는지금까지 때때로낙관(樂觀) 을가젓섯다 청년(靑年)을 압박(壓迫)하고 ——하는것은 대개노인(大槪老人)이다이 들노물(老物)들이 다죽어지면 중국(中國) 은보담더 생기(生氣)잇는것이되리라 고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 르치안은것을 알엇다 청년(靑年)을 ——하는것은 대개(大槪)는 청년(靑年)인 듯하다 또달이 재조(再造)할수업는 생명(生命)과 청춘(靑春)에 대(對)해서 한층(層) 더애낌이업시…(이기집(而己集))&lt;br /&gt;
&lt;br /&gt;
이글은그가 침묵(沈默)하고잇는것을『공포(恐怖)』때문이라고 조소(嘲笑)한 사람에게답(答)한 통신문(通信文)의 일절(一節)로서 이때까지&lt;br /&gt;
&lt;br /&gt;
진화론자(進化論者)이든 그자신(自身)의 사상적립장(思想的立塲)을양기(揚棄)하고 새로운 성장(成長)의 일단계(一段階)로보인것이라고 해석(解釋)해도 틀러지안흘것이다.&lt;br /&gt;
&lt;br /&gt;
그가상해(上海)에 왓슬때는 국민당(國民黨)의 쿠—데타—로 혁명군(革命軍)에서쪼겨온 젊은푸로문학자(文學者)가 만엇다『혁명문학론(革命文學論)』이 효효(囂囂)히 불러지고 실제정치행동(實際政治行動)의 전선(前線)을 떠난그들은 총칼대신에 펜을잡엇다,원기왕성(元氣旺盛)하게 실제공작(實際工作)의경험(經驗)에서 매우견실(堅實)한것도 잇섯스나 때로는 자부적(自負的)인 영웅주의(英雄主義)가 화(禍)를끼치고——에실패(失敗)한 분만(憤瞞)과 극좌적(極左的)인 기회주의자(機會主義者)들은노신(魯迅)을 공격(攻擊)햇다 그러나 그는푸로문학(文學)이란 어떤것인가 또는어찌해야 될것인가를 알리기위(爲)하야 아버지가튼 애무(愛撫)로서『푸레하노프』,『루나챨스키—』들의 문학론(文學論)과『싸벳트』의 문예정책(文藝政策)을번역소개(飜譯紹介)하야 중국(中國)푸로문학(文學)을건설(建設)하고잇는동안에『노신(魯迅)을타도(打倒)치안흐면 중국(中國)에푸로문학(文學)은생기지못한다』는 문학소아병자(文學小兒病者)들은 그자신(自身)들이 먼저너머지고 이제그가마자가고말엇다 이위대(偉大)한중국문학가(中國文學家)의영(靈)아페 고요히머리를숙이면서 나의개인적(個人的)으로 곤란(困難)한정형(情形)에의(依)하야 문호노신(文豪魯迅)의윤곽(輪廓)을뚜렷이그리지못함을 참괴(慚愧)히알며붓을놋키로한다 —요(了)—&lt;br /&gt;
&lt;br /&gt;
=='''주요 내용 요약'''==&lt;br /&gt;
추도 배경: 중국 신문학의 최고봉인 루쉰(魯迅)의 서거(1936년 10월 19일)를 추도하며, 작가와의 개인적 인연(1932년 양행불 암살 사건 직후 만국빈의사에서의 만남)을 회상하는 글이다.&lt;br /&gt;
&lt;br /&gt;
문학적 위치 - 아Q 정전: 루쉰 이해의 핵심으로 그의 대표작《아Q정전(阿Q正傳)을 제시하고 있다. '아Q'는 사고와 행동이 나약하고 우매하면서도 건방진, 당시 중국인의 집단적 성격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루쉰은 이 '아Q 상(相)'을 폭로하여 중국 지식 군중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루쉰은 '아Q 시대'를 종식시키고 새로운 중국을 열어갈 길을 제시한 인물로 평가된다.&lt;br /&gt;
&lt;br /&gt;
문학 혁명과 루쉰의 역할: 중국의 고루한 고문학을 비판하고 백화소설(白話小說)을 통해 문학 혁명의 선두에 선 것이다.《광인일기(狂人日記)를 통해 봉건적 가족 제도와 유교의 종법 사회 관념을 통렬히 비판하며 &amp;quot;어린이를 구하자&amp;quot;는 메시지를 던져 청년들에게 혁명적 충격을 주었다.&lt;br /&gt;
&lt;br /&gt;
예술과 정치: 루쉰은 본래 의사(醫師)가 되려 했으나, '우매한 국민은 체격이 강해도 무의미한 구경꾼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으로 정신 개조를 위한 문예 운동으로 전향하였다. 그에게 예술은 정치의 노예가 아니라, 적어도 정치의 선구자였으며, 정치적 목적 아래 수행된 것이다.&lt;br /&gt;
&lt;br /&gt;
후기 생애와 투쟁: 군벌 정부(단기서)와 국민당(장개석)의 탄압을 피해 쫓겨 다니는 비장한 '문화의 전사'로서의 삶을 살았다. 젊은 프로문학 비평가들에게 '비계급적 작가'로 공격받기도 했으나, 그는 현실과의 동떨어짐을 비판하며 진실된 현실을 기반으로 한 창작의 '모랄(도덕성)'을 강조한 것이다.&lt;br /&gt;
&lt;br /&gt;
=='''분석 및 특징'''==&lt;br /&gt;
이육사의 지식인 면모: 이육사(본명 이활, 기고명 '이육사(李陸史)')가 당대 중국의 최고 지성 및 정치 상황에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글이다. 루쉰의 문학적, 사상적 변천 과정(의학 → 문예 → 현실 참여)을 심도 있게 분석하고 있다. 루쉰 문학의 핵심 통찰: 루쉰의 작품을 단순히 서사로 보는 것이 아니라, 봉건 사회에 대한 투쟁, 계급성, 지식인의 역할 등 당대 사회 변혁의 맥락에서 분석하는 것이다. 한국 문단에 대한 시사: 글 말미에 '예술과 정치'의 관계에 대해 루쉰의 태도를 재조명하며, 당시 조선 문단에서 첨예하게 논의되던 이 문제에 대한 이육사의 입장을 간접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수필문외한(隨筆門外漢)의수첩(手帖)'''=&lt;br /&gt;
문(門) 외(外) 한(漢) 의 수(手) 첩(帖)&lt;br /&gt;
&lt;br /&gt;
(칠(七))&lt;br /&gt;
&lt;br /&gt;
이(李) 육(陸) 사(史)&lt;br /&gt;
&lt;br /&gt;
R이란 사람은 나와는 매우친(親)한 동무엿다 그럼으로 우리두사람 사이에는 결(决)코 무슨비밀(秘密)이란것은 잇을터수가 아니엿다 그러나 지금은 나의교우록(交友錄)속에 씨여저잇는 그의『호패(號牌)』에 붉은줄을 그은지도 벌써한달이 다되엿다.&lt;br /&gt;
&lt;br /&gt;
이러한 간단한사실(事實)이 모르는사람으로본다면 가렵지도 아프지도안흘지모르겟으나 남달리상처(相處)해오든 벗을한사람 일허버린나의흐젓한 마음은 어데도 비길수업시 서러운것이다.&lt;br /&gt;
&lt;br /&gt;
그뿐만아니라 이글을 쓰려는오늘아침에 이제는 고인(故人)인 R의동생으로부터 나에게 간단한편지한장과『문외한(門外漢)의수첩(手帖)』이란유고(遺稿)한권(卷)이 보내여왓다.&lt;br /&gt;
&lt;br /&gt;
그유고(遺稿)는 이래십년(爾來十年)에 쓴 고인(故人)의 일기(日記)인 모양인데 그도축일(逐日)해서 쓰것도 아니고 때때로마음이 내킬때마다 써둔것이며그맨끗페—지에『〇〇형(兄)에게』라는 이세상(世上)사람으로서의 절필(絶筆)인듯한 글시가 묵흔(墨痕)이임리(淋漓)한것은소리업는 내눈물을더욱짜내는것이엿다 그리고이글내용(內容)은 일기(日記)는 일기(日記)면서도 대부분(大部分)은 나에게 보내는 편지이엿다.그편지가운데서 지금이라도 흥미(興味)잇게생각나는 부분(部分)만을 써서보기로한다면 그도처음에는 문학청년(文學青年)이엿든 사실(事實)이잇섯다.그러나그는자기가 하고저한 문학(文學)을 끗끗내 완성(完成)할수잇는 행복(幸福)된사람은 아니엿다.그러나 그사람은죽든날까지도문학(文學)을 단념(斷念)하지는안헛다는것은 어느해겨울 그와나는 우연(偶然)히도 어느 온천(溫泉)에서만낫다 그때는 바로동경(東京)에서들풍자문학론(諷刺文學論)이 한참대두(擡頭)할때 이엿슴으로 그도또한 예(例)에삐지지안코 이것의 조선(朝鮮)에잇서서 가능(可能)하다는 설교(說敎)를 하는것이엿다그때좀더 생각해볼 여지(餘地)가잇다고한 나의말에 그는말하기를조선(朝鮮)사람은 생활(生活)그자체(自體)가 풍랄적(諷剌的)으로 되여잇다고 떠둘어대기에나는그에게 더진지(眞摯)한태도(態度)로 사물(事物)을 대(對)할필요(必要)가 잇다는것을말하엿고 그다음날 우리는 서로갈린체 영원(永遠)히 보지못할 사람이되엿다.&lt;br /&gt;
&lt;br /&gt;
이글은 그때나와 갈려서 몃칠동안에 쓴것이라고 생각난다 일구삼(一九三)×연(年)×월(月)×일(日)—〇형(兄)!S역(驛)에서 형(兄)과갈려서나는〇동(洞)까지 오십리(五十里)나되는 산(山)길을 걸어왓소.동리(洞里)거리에 피곤(疲困)한 다리를 쉬이면서 생각하기를 아무데나 큼직한집 초당(草堂)방을 차저드러가면 이밤을 뜻뜻한 아랫목에서 지낼수도 잇겟거니와 그들과함께 살을맛대이고지나며 그들의 생활(生活)을체득(體得)할수가 잇다면……얼마나 유쾌(愉快)한일이겟습니까?&lt;br /&gt;
&lt;br /&gt;
나는 여기서 형(兄)이일직이 하든말을 생각해보앗소 상해(上海)어데선가?목욕(沐浴)을 갓슬때 불란서(佛蘭西)사람과 서반아(西班牙)사람과 가트욕조(浴漕)에 들어갓슬때의 감정(感情)을 얘기한것을 기억(記憶)이나 하시는지요.그때는 적나라(赤裸裸)한 몸둥이들이모두꼭가튼 온도(溫度)를 느낄수잇더라고.세계(世界)는 모름직이 목간통가티 되어야 한다고.&lt;br /&gt;
&lt;br /&gt;
그러나 오늘의 나의심경(心境)은그와는 정반대(正反對)로 어데까지나 육친애(肉親愛)를 느껴볼 결심(决心)이엿소 그래서 세계(世界)는 차라리 초당(草堂)방가티되라고까지 생각해도 보앗소이러한 생각을 하노라면 또다른 한생각이 꼬리를 물고나오는동안에 나는가젓든 담배를모조리 다피워 바렷소.담배라도피우지 안흐면 첫겨우의눈우바람이몹시도 옷깃을 새여들고 발끄티저리기도해서 담빠도살겸 주막(酒幕)집잇는대로 가까이 차저갓소.그곳에는 마침담배 가개가잇고젊은농부(農夫)인듯한 사람이잇기에오전(五錢)짜리 한푼을던지고『마코』한갑을 달라고 하엿더니만 나는여기서 뜻하지못한 실패(失敗)를 하엿소 그것은 나행동(行動)이 몸차림과 어울리지안는데가 잇섯든지또는언어(言語)에 무의식적(無意識的)인 불손(不遜)이잇섯든지 그젊은 농부(農夫)는 내얼굴을 자세히 보더니만……『문(門)안에 들어와서 담배를 가저가오』……하며 코우슴을 피하며『마코』한갑을 내아프로 툭던지는것이엿소.&lt;br /&gt;
&lt;br /&gt;
나는처음 이농부(農夫)의 말을듯고한참동안 어름어름하엿소 그것은 담배가개라고하는것이 우리가 도회(都會)에서 보는담배가개와가티 백색(白色)『타일』타로 대(臺)를싸올리고『네온』등(燈)을 달고 유리창(窓)을단것이 아니고 첨하끄테다 석유(石油)궤로 목판을짜서 장수연(長壽煙),희연(囍煙),『마코』단풍(丹楓) 이런것들을몃갑식(式) 너허둔것이엿소,그래 내가들어갈 문(門)이란 어데잇겟소,&lt;br /&gt;
&lt;br /&gt;
&lt;br /&gt;
(칠(七))&lt;br /&gt;
&lt;br /&gt;
이(李) 육(陸) 사(史)&lt;br /&gt;
&lt;br /&gt;
R이란 사람은 나와는 매우친(親)한 동무엿다 그럼으로 우리두사람 사이에는 결(决)코 무슨비밀(秘密)이란것은 잇을터수가 아니엿다 그러나 지금은 나의교우록(交友錄)속에 씨여저잇는 그의『호패(號牌)』에 붉은줄을 그은지도 벌써한달이 다되엿다.&lt;br /&gt;
&lt;br /&gt;
이러한 간단한사실(事實)이 모르는사람으로본다면 가렵지도 아프지도안흘지모르겟으나 남달리상처(相處)해오든 벗을한사람 일허버린나의흐젓한 마음은 어데도 비길수업시 서러운것이다.&lt;br /&gt;
&lt;br /&gt;
그뿐만아니라 이글을 쓰려는오늘아침에 이제는 고인(故人)인 R의동생으로부터 나에게 간단한편지한장과『문외한(門外漢)의수첩(手帖)』이란유고(遺稿)한권(卷)이 보내여왓다.&lt;br /&gt;
&lt;br /&gt;
그유고(遺稿)는 이래십년(爾來十年)에 쓴 고인(故人)의 일기(日記)인 모양인데 그도축일(逐日)해서 쓰것도 아니고 때때로마음이 내킬때마다 써둔것이며그맨끗페—지에『〇〇형(兄)에게』라는 이세상(世上)사람으로서의 절필(絶筆)인듯한 글시가 묵흔(墨痕)이임리(淋漓)한것은소리업는 내눈물을더욱짜내는것이엿다 그리고이글내용(內容)은 일기(日記)는 일기(日記)면서도 대부분(大部分)은 나에게 보내는 편지이엿다.그편지가운데서 지금이라도 흥미(興味)잇게생각나는 부분(部分)만을 써서보기로한다면 그도처음에는 문학청년(文學青年)이엿든 사실(事實)이잇섯다.그러나그는자기가 하고저한 문학(文學)을 끗끗내 완성(完成)할수잇는 행복(幸福)된사람은 아니엿다.그러나 그사람은죽든날까지도문학(文學)을 단념(斷念)하지는안헛다는것은 어느해겨울 그와나는 우연(偶然)히도 어느 온천(溫泉)에서만낫다 그때는 바로동경(東京)에서들풍자문학론(諷刺文學論)이 한참대두(擡頭)할때 이엿슴으로 그도또한 예(例)에삐지지안코 이것의 조선(朝鮮)에잇서서 가능(可能)하다는 설교(說敎)를 하는것이엿다그때좀더 생각해볼 여지(餘地)가잇다고한 나의말에 그는말하기를조선(朝鮮)사람은 생활(生活)그자체(自體)가 풍랄적(諷剌的)으로 되여잇다고 떠둘어대기에나는그에게 더진지(眞摯)한태도(態度)로 사물(事物)을 대(對)할필요(必要)가 잇다는것을말하엿고 그다음날 우리는 서로갈린체 영원(永遠)히 보지못할 사람이되엿다.&lt;br /&gt;
&lt;br /&gt;
이글은 그때나와 갈려서 몃칠동안에 쓴것이라고 생각난다 일구삼(一九三)×연(年)×월(月)×일(日)—〇형(兄)!S역(驛)에서 형(兄)과갈려서나는〇동(洞)까지 오십리(五十里)나되는 산(山)길을 걸어왓소.동리(洞里)거리에 피곤(疲困)한 다리를 쉬이면서 생각하기를 아무데나 큼직한집 초당(草堂)방을 차저드러가면 이밤을 뜻뜻한 아랫목에서 지낼수도 잇겟거니와 그들과함께 살을맛대이고지나며 그들의 생활(生活)을체득(體得)할수가 잇다면……얼마나 유쾌(愉快)한일이겟습니까?&lt;br /&gt;
&lt;br /&gt;
나는 여기서 형(兄)이일직이 하든말을 생각해보앗소 상해(上海)어데선가?목욕(沐浴)을 갓슬때 불란서(佛蘭西)사람과 서반아(西班牙)사람과 가트욕조(浴漕)에 들어갓슬때의 감정(感情)을 얘기한것을 기억(記憶)이나 하시는지요.그때는 적나라(赤裸裸)한 몸둥이들이모두꼭가튼 온도(溫度)를 느낄수잇더라고.세계(世界)는 모름직이 목간통가티 되어야 한다고.&lt;br /&gt;
&lt;br /&gt;
그러나 오늘의 나의심경(心境)은그와는 정반대(正反對)로 어데까지나 육친애(肉親愛)를 느껴볼 결심(决心)이엿소 그래서 세계(世界)는 차라리 초당(草堂)방가티되라고까지 생각해도 보앗소이러한 생각을 하노라면 또다른 한생각이 꼬리를 물고나오는동안에 나는가젓든 담배를모조리 다피워 바렷소.담배라도피우지 안흐면 첫겨우의눈우바람이몹시도 옷깃을 새여들고 발끄티저리기도해서 담빠도살겸 주막(酒幕)집잇는대로 가까이 차저갓소.그곳에는 마침담배 가개가잇고젊은농부(農夫)인듯한 사람이잇기에오전(五錢)짜리 한푼을던지고『마코』한갑을 달라고 하엿더니만 나는여기서 뜻하지못한 실패(失敗)를 하엿소 그것은 나행동(行動)이 몸차림과 어울리지안는데가 잇섯든지또는언어(言語)에 무의식적(無意識的)인 불손(不遜)이잇섯든지 그젊은 농부(農夫)는 내얼굴을 자세히 보더니만……『문(門)안에 들어와서 담배를 가저가오』……하며 코우슴을 피하며『마코』한갑을 내아프로 툭던지는것이엿소.&lt;br /&gt;
&lt;br /&gt;
나는처음 이농부(農夫)의 말을듯고한참동안 어름어름하엿소 그것은 담배가개라고하는것이 우리가 도회(都會)에서 보는담배가개와가티 백색(白色)『타일』타로 대(臺)를싸올리고『네온』등(燈)을 달고 유리창(窓)을단것이 아니고 첨하끄테다 석유(石油)궤로 목판을짜서 장수연(長壽煙),희연(囍煙),『마코』단풍(丹楓) 이런것들을몃갑식(式) 너허둔것이엿소,그래 내가들어갈 문(門)이란 어데잇겟소,&lt;br /&gt;
&lt;br /&gt;
(중(中))&lt;br /&gt;
&lt;br /&gt;
이육사(李陸史)&lt;br /&gt;
&lt;br /&gt;
그날은 그곳에서 멀지안흔곳에 장날이엿나부오,장꾼들이들신들신하고 그집으로 들어오기에 나는그만 그곳을떠나 도라나오랴니까 바로내머리 뒤에서『건방진여석 눈에유리창(窓)을 부치고』……하면서 별러대는것이엿소.그때나는 모든것을 다알엇소,&lt;br /&gt;
&lt;br /&gt;
시골산촌(山村)에선 유리라는것은들창(窓)에나 부치는것인데 네눈에부친 들창을열고 다시말하면 문(門)안에 들어와서(안경(眼鏡)을벗고)담배를 가저가란 말엿소.&lt;br /&gt;
&lt;br /&gt;
내가 안경(眼鏡)을 쓰게된것은 시력(視力)이 부족(不足)한 탓이엿고 그젊은농부(農夫)가 내안경(眼鏡)쓴것을 못맛당히역이는것은 고루(固陋)한 인습(因習)의 소치(所致)라고 하드래도 그표현방법(表現方法)이얼마나 내뼈를 저리도록 쑤시는풍랄(諷剌)이엿겟소 과연(果然)여기에 남과나라는 투명(透明)한 장벽(墻壁)이 서서잇다는것을 나는안듯하엿소.&lt;br /&gt;
&lt;br /&gt;
그리고 내발길은 무겁게옴겨젓소.아주몃해를두고 어느사막(沙漠)이라도 걸어온듯한 피로(疲勞)를 깨다랏소.하늘은 점점어두어오고눈조차 함박으로 퍼붓는듯 하엿스나 나는다시 옷것을 단속지는 안헛소 될수엇스면 차디천 눈보라가 내보드러운 목덜미살을 염이듯이 얼어부트라고하여본것은 일종(一種)의 자기잔학(自己殘虐)일른지도 모르겟소.&lt;br /&gt;
&lt;br /&gt;
두시간(時間)이나 지낫을가 나는과연(果然) 어느집초당(草堂)방에 손이되엿소방안에는 초말(醋抹)냄새가 코를찌를망정 모이는사람은 대략육칠명(六七名)이나 되엿고 연령(年齡)은최저십팔(最低十八)로최고삼십이(最高三十二),인품(人品)은 모두순후(純厚)하고황소가티 질박(質朴)한놈도 잇스며암사슴가티 외로운 면석도잇섯소.그날밤은 내라는존재(存在)가 그들로보면 낫서른손이여서 일동일정(一動一靜)을 주의(注意)는 하면서도 조금도 악의(惡意)는 갓지안헛든 모양이엿소 그러기에 나더러 세상(世上)의자미잇는 얘기를 들려달라는것이오&lt;br /&gt;
&lt;br /&gt;
이때 나는 어떠한 얘기를들려줄까 하고 망서리는판에 그들중에도 연령(年齡)과 지식(知識)의 정도(程度)가잇서서 삼십(三十)에 가까운 사람들은『화용도(華容道)』를 들려달라하고그중한사람은『춘향전(春香傳)』을 얘기하라하엿소만은 여기도 또한의견(意見)은 일치(一致)되지안헛소 그중에도제일(第一)얼굴이 말숙하고 나이가이십오세(二十五歲)쯤 되여보이는 농부(農夫)한사람 말을드르면 보통학교(普通學校)를 중도퇴학(中途退學)은 하엿서도 그들가운데서는 식자연(識者然)하고 내로라는드시뽑내면서『서양(西洋)』얘기를 무에나들리라는것이오 그해서 결국(結局)은『춘향전(春香傳)』파(派)와『서양(西洋)』파(派)가 절충(折衷)한결과(結果) 나는이진귀(珍貴)한『서양춘향전(西洋春香傳)』을 친절(親切)하게도 강좌(講座)를담임(擔任)하게되엿스며 그는 득의만면(得意滿面)하야 내담배갑에서『마코』한개들 빼여물고 인조견(人造絹) 옥색(玉色)관사홋족기에서 석낭을꺼내여 담배를 피우는것이엿소 이방에서는모두들이사람을『하이카라상』이라고 부르는데 그『상』짜가나에게는 조금귀익지못하나 아마이것을 도시(都市)말로번역(飜譯)하면『모—던뽀이』란 말도갓소.&lt;br /&gt;
&lt;br /&gt;
그러나 이『서양춘향전(西洋春香傳)』이란진본서(珍本書)는 가난한 나의문헌학지식(文獻學知識)으로는 도저(到底)히 알어낼 자신(自信)도업고 그러타고 그들에게『린드뻑』이 대서양(大西洋)을 어떠케 횡단(橫斷)하엿다든지『크레오파트라』의국적(國籍)이 어느나라냐고 설왕설래(說往說來)를 하여보앗자『하이카라상』이라는 이방의『쏘크라테쓰』도그까지는 흥미(興味)를느끼지못할것갓터소.&lt;br /&gt;
&lt;br /&gt;
그래서나는 생각다못해『쉑스피어』의『로미오와쭈리엣트』를얘기하기로하고 위선그주인공(主人公)의이름을 그들이 알어듯기 쉽게『노미』이와『준』이가 이러케얘기를하니 그래도 모두그것이자미가 잇섯든지『준』이가추방당(追放當)튼날새벽에『노미』를 차저가이별(離別)을하는판인데 이곳에야『나이팅껠』이울수가 잇슬리도 업겟고 생각다못해 속담(俗談)에 꿩갑에 닭이라니 닭을울리고『준』이를 떠나보냇구려!그래도 이때는 모두들감탄(感歎)해서 흥흥코소리를치며 신삼고 가만이치든손을쉬이는구려!&lt;br /&gt;
&lt;br /&gt;
(하(下))&lt;br /&gt;
&lt;br /&gt;
이육사(李陸史)&lt;br /&gt;
&lt;br /&gt;
밤은벌써 오전(午前)두시(時)나 되엿는데 박가테서는 눈보래가 조금도 쉬지안코 나렷소,사람들은차차 긴하픔을 하다가는 제대로 팔을배고 자는이도잇고 또그자는이의 다리를베고 자는사람도잇스며 나중에는『하이카라상』과 나만이남어서 나는 이동리(洞里)의 서러운전설(傳說)을 듯는것이오『옛날에 이동리(洞里)와 건너마을이편을갈러서 정초(正初)이면『줄댕기』가 시작(始作)되엿고 그때는 사람들이 수—백명식(百名式) 모혀서 그중에도 젊은 사람들은 처녀(處女)나 총각이 제각기 마음잇는 사람들과 사랑을 속삭이면서 영원(永遠)히그자손(子孫)들은 변(變)함업시 이동리(洞里)를직혀왓건만은 지금(至今)은 어쩐일인지 그사람들은 누가 오란말도업고 가란말도 업건만은 다들어데인지 한집식 두집식 동리(洞里)를떠나고 그럴때마다 젊은이들의 싹트기시작(始作)한 사랑은 그봄이 다가기도전에 덧업시 흘러가고 만다는말을 다마치지도못하야 이사람은 창졸간에 미친듯이 쓸어저 흑흑 느껴가며우는것이엿소.나는 이것을 웨우느냐 물어볼힘도업고 울지말라고 위안(慰安)을 줄수도 업섯스며다만나 혼자 생각기를 너도 또한불상한 미완성초연(未完成初戀)의 순정자(殉情者)로 구나하고 동정(動靜)을 살피노라니 이사람도 그냥잠이 들고먼데닭이 자즌홰치는 소리가들리며 눈은끗첫는지 박가튼 바람이 몹시부럿소.&lt;br /&gt;
&lt;br /&gt;
나는몃시간(時間) 남지안흔 이밤을도저(到底)히 잘수는업섯소,내머리는해저(海底)와가티 아득하고 내가슴은운모(雲母)와가티 무거웟소.도라누을내야 도라누을수도 업스려니와여페사람들의 코고는소리는 검은시체(屍體)를 실흔마군(馬軍)의 수레박휘를 갈고가는듯하오,그럴수록방안의 정적(靜寂)은 무거워저서 자꾸만 지구(地球)의 중심(中心)으로 침전(沈澱)되는듯하엿소,나는 참다못하야 눈을감고 두손으로 얼굴을 가리웟소.바로 그때엿소,누구인지내머리마테서 말하는 사람이잇섯소,그사람이 누구인지는 기억(記憶)할수 업스나 혹(或)은 저녁전에담배가개에서본 농부(農夫)일른지도모르겟소 그가 나에게 한말은분명(分明)코『문(門)안에 드러와서……』엿소.나는 여기서 눈을번쩍뜨고가만히 생각해 보앗소.&lt;br /&gt;
&lt;br /&gt;
『오!그러타,나는 문외한(門外漢) 여다』아무리하여도 인생(人生)의 문(門)안에들어서지못할 나이라면 차라리영원(永遠)한 문외한(門外漢)으로 이세상(世上)을수박것할트시 지나갈일이지 그좁은문(門)을 들어가려고 애를쓸필요(必要)가 어데잇겟소 문(門)박게서 살어가면 책임(責任)과 부담(負擔)도 가벼우려니와 문(門)안에 우리가 직혀야할 보물(寶物)이잇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모두 문(門)안에서 직힐때에나혼자만 문(門)박게서 그모든것을파수본다면 그것도 나의한가지임무(任務)가아니겟소 그러타면 나는달게&lt;br /&gt;
&lt;br /&gt;
인생(人生)외 문외한(門外漢)이 되겟소.&lt;br /&gt;
&lt;br /&gt;
그래서 남들이모두 문(門)안에서보는세상(世上)을 나는문(門)박게서 보겟소 남들은 기피보는 세상(世上)을나는널리보면 또그만한 자긍(自矜)이잇을것갓소.오늘은 고기압(高氣壓)이어데잇는지 풍속(風速)은 육십사(六十四)미리오이동리(洞里)를 떠나아무도 발을대지안흔 대설원(大雪原)을 걸어가겟소,전인미도(前人未到)의 원시경(原始境)을 가는느낌이오,누가나를 따라이길을 올사람이 잇슬른지?업서도 나는이길을 영원(永遠)히가겟소.』&lt;br /&gt;
&lt;br /&gt;
나는이까지보고 위선이유고(遺稿)를더펏다,그리고 생각해보앗다 이것은 한사람이 인생(人生)의문(門)안에 들어오지못하고 영원(永遠)히 걸어간기록(記錄)이다 오!그러면 나도역시문외한(亦是門外漢)인가?정축(丁丑) 칠(七),이구(二九)&lt;br /&gt;
&lt;br /&gt;
=='''주요 내용 요약'''==&lt;br /&gt;
구성: 죽은 친구 'R'의 유고(遺稿)인 '문외한의 수첩' 속에 담긴, 'R'이 '〇형(兄)'(필자)에게 쓴 편지 형식의 수필이다. '문안'과 '문밖': 화자는 'S역'에서 '형'과 헤어져 산길을 걸으며 초당방에서 서민의 삶을 체득하고 싶다는 '육친애'적 소망을 가진다. 이때 담배를 사려다 한 젊은 농부에게 &amp;quot;문 안에 들어와서 담배를 가져가오&amp;quot;라는 말을 듣는다. '문안'은 농부가 '안경(유리창)'을 쓴 자신을 '도시의 문명인'으로 여기고 '안경을 벗고(유리창을 떼고) 들어와'라는 풍자적 표현이었음을 깨닫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자아 성찰: 이 경험을 통해 도시 지식인인 자신과 농민 사이에 투명한 '장벽'이 서 있다는 것을 인지하며, 자신이 '인생의 문외한(門外漢)'임을 깨닫는다. '문외한'의 결심: '문안'에 들어서지 못할 바엔 영원한 문외한이 되어 문밖에서 살아가겠다고 결심한다. 문밖에서 사는 것은 책임과 부담이 가볍고, 남들이 모두 문안에서 보는 세상을 자신은 문밖에서 '널리' 보며 '자긍(自矜)'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절필: &amp;quot;전인미도(前人未到)의 원시경(原始境)을 가는 느낌&amp;quot;으로 '대설원'을 걸어 나가는 것으로 글을 맺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분석 및 특징'''==&lt;br /&gt;
풍자 문학론의 실천: 농부의 '안경 쓴 눈(유리창)'에 대한 풍자는 지식인과 대중 사이의 괴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지식인의 고뇌와 성찰: 도시화된 지식인(안경 쓴 자)이 농민의 삶에 진입하려 했으나 거부당하고, 결국 자신을 '문외한'으로 규정하며 고립을 선택하는 지식인의 고뇌를 드러내는 자의식의 표현이다.&lt;br /&gt;
&lt;br /&gt;
낭만적 비장미: '대설원', '전인미도의 원시경' 등 비장하고 낭만적인 이미지로 결말을 맺으며, 이육사 특유의 고독한 결단의 미학을 보여주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소품(小品) 황엽전(黃葉箋)'''=&lt;br /&gt;
소품(小品)①&lt;br /&gt;
&lt;br /&gt;
황엽전(黃葉箋)&lt;br /&gt;
&lt;br /&gt;
이(李) 육(陸) 사(史)&lt;br /&gt;
&lt;br /&gt;
사람들은 어름알보다 더냉담(冷淡)하고 주사침(注射針)가티 촉발라도 그래도 제대로는 인정(人情)도잇고 눈담(曇)노잇서 친(親)한사람을 사이에는못보 보고저하고 보면빨아먹을듯이도 형형색색(形形色色)의 표정(表情)을비저내며 계절(季節)에 따라서는 눈물겨울만큼 간절한모양이나 『내』라는 위인(爲人)은 자질(資質)도 소박(素朴)하고교양(敎養)도 고매(高邁)하지못데 요즘은엇전지 신경(神經)이 차를보다 단단해저서 압흐고 슯흔것도 못견듸게늣겨지지도 안커니와 보지못해 못견딀사람도업고 소식(消息)이라도 못알려 탈이될,더친(親)하고덜친(親)한이가업다.그러나 행(幸)혀이세상(世上)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잇다고하면 나는 의무(義務)로라도그대에게 나의소식을 알려야하지만은 지금의 나에게는 그러한미덕(美德)을 수행(遂行)할 야망(野望)조차업다.다만 야망(野望)을용서(容恕)한 사람이잇거든 가을바락에 무한(無限)히 흘러가는 황엽(黃葉)의 쪼각쪼각이 모두나의 편지라고 생각을 해라그리고 그어느한쪼각이라도 주어다가 그대들의책상(冊床)우에 꼬처두고 그황엽(黃葉)이 바람에 나붓기며울며부르짓는 서러운전기(傳記)를 들어보아라……&lt;br /&gt;
&lt;br /&gt;
‥‥그놈의 거리를 말할것도업고 저는하여(何如)든 가로수(街路樹)에서떨어저 왓습니다.그래서 거리에 서잇는동안 형형색색(形形色色)의 인간(人間)들을 다보앗습니다.그러나대개(大槪)는 모다비슷비슷한 인간(人間)들이엿고 별다른 놈은 못보앗습니다 그것은 십년전(十年前)일이라고생각됩니다.어느날오후(午後) 내발밋흘지나가는 소년(少年)이 잇섯습니다,미친놈가티 중얼대는 말을가만히듯자니『루나—ㄹ』의 일기(日記)를외이는겐지『불상한놈! 불상한놈!』 고거즛말하엿습니다,그뒤로는 매일(每日)가티 아침에도 내발밋홀지나고 저녁에도 내발미틀지나는동안에 나는어느사이에그만그녀석하고 친(親)해젓습니다,그래서 그녀석의 정체(正體)를 알수가잇섯습니다&lt;br /&gt;
&lt;br /&gt;
그녀석은 어느시골에서 출가(出家)를해서 서울을왓다는데 그출가(出家)한 이유(理由)가 어린녀석하고는 맹랑햇습니다 그녀석의 집은어느해안(海岸)이든가봐요 아침으로 조수(潮水)가 밀려나가면 끗업시 널려잇는 백(白)모래바티 너무도 허무(虛無)서 오기는왓스나 섬들을 건너간 갈메기가 몹시그립다고 하는것을보면 그래도 어린향수(鄉愁)가머리를 글거가는모양이겟지요&lt;br /&gt;
&lt;br /&gt;
그후(後)나는 우리들이 늘만나는시간(時間)이되면 그녀석이 하마나오나하고 기달리기도햇습니다 그럴때 멀리에 발자욱 소리가나고 그녀석이 『하이네』 니 『꾀—테』 니의 시(詩)를외이고 올때도잇섯습니다 그리고 몃해가 지난어느해봄날 내가긴 동면(冬眠)으로부터 영롱(玲瓏)한 첫눈을텃슬때 또그녀석을만낫습니다 그때는벌서그녀석은 십부게볼 소년(少年)이아니라 의례(依例)히 그상대자(相對者)를 다리고어둑어둑한 황혼(黃昏)에 내엽헤와서간즈려울만큼 종알대며 행복(幸福)의『메뉴—』를 전람회(展覽會)의『프로그람』보다 화려(華麗)하게꾸미는것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이것어 한여름을 지나며 비가오나 바람이부나 계속(繼續)이 되엿습니다 그러나 인간(人間)들에게잇서서는 행복(幸福)의 절정(絕頂)은 최대(最大)의비극(悲劇)과 서로통(通)해 잇나봐요 그해의 첫가을 어느으스름달밤에나는이비극(悲劇)을 바로 내눈헤서보는것입니다&lt;br /&gt;
&lt;br /&gt;
『여보우리두사람이 서로사랑하면 그만이지 사랑을 부모(父母)에대(對)한 효행(孝行)으로 하는데가 어데잇소.』&lt;br /&gt;
&lt;br /&gt;
이러케 그녀석은 폐(嬖)하는것이 엿습니다.&lt;br /&gt;
&lt;br /&gt;
그것도 고이치안흔게 그때쯤은 그녀석의 기분(氣分)이란 불꼿치타오를둣도 하얏거니와 제애비말을 안듯기로 유명(有名)하야 집을나선놈이니까.&lt;br /&gt;
&lt;br /&gt;
『그러치만은 엇절수가 잇서야 지요』&lt;br /&gt;
&lt;br /&gt;
이것이 그더석의 말에갑허진보수이엿습니다.그뒤나는 십년(十年)이란 긴동안 이사람들의 속삭임을 들을수는 업섯습니다.&lt;br /&gt;
&lt;br /&gt;
아마그것이 그들의 비극(悲劇)의시초(始初)FP동시(同時)에 나의『로—맨틔시슴』도 종언(終焉)이엿든 것입니다 나는그날부터 새로운 생활(生活)을 경험(經驗)하지안으면 안되엿읍니다 이때까지는 그들가운데에 엇던한두사람의 주활(主活)을 말로서 들엇으나 인제는 어느특정(特定)한 사람의사랑이라든지 그런달착지근 한것이아니라 그저그놈도 그놈갓고 그놈도 그놈갓흔 뭇사람의생활전체(生活全體)가 내풋입새의 거울보다 반드라운 쪼각쪼각에 빗치는 것이엿읍니다 이전갓흐면멀리서 삽분삽분 발자욱 소리가들려오고 그발자욱 소리가갓가워 지는데따라 쟁반에 구슬을굴리는듯한 목소리도 들엇건만은 또그럴때면 나도 입사귀를흔들어서 업김가티 보드러운바람을 부러도 주엇건만은 이때는 내가 바람을 불기는커녕그들의지나가는 위풍(威風)에 나는전율(戰慄)하지 안을수 업섯읍니다.구슬을 굴리는듯한 목소린들 어데가듯겟읍니가?뭇사람의 포효(咆哮)하는소리란 아주바다에서 이러나는노도(怒濤)의 교향악(交響樂)가탯습니다.&lt;br /&gt;
&lt;br /&gt;
그래서 나는알기를 인간(人間)이란위대(偉大)한 작란(作亂)군이라고 하엿습니다.어떠케 그들의 얼골이 크게보이고 힘차게 늣겨것든것인가 지금은 생각만하여도 왼몸이 으슬으슬합니다.그러는중(中)에그들의 행렬(行列)은 대강(大江)가티 홀러가고 나는 또다시 노랏케 단풍이들어 한닙두닙 떨어지는것입니다.얼마나 소조(蕭條)하고 적막한거리겟습니가? 내엽헤는 괴수(怪獸)가티 늘어선 삘딍들의 거믄그림자가『팔아스트 에 얼어부튼거지들의 싸늘한꿈을 죽엄가티덥허논때업니다.밤도삼경(三更)은 지난때이지요 더벅더벅 거러오는무거운 발자욱 소리와함께 나는고요한『그림자』하나를 발견(發見)햇습니다.안개에 촉촉히 저진차림자러와 힘업시 옴겨지는발자욱이 아주무슨 패잔병(敗殘兵)의 유령(幽靈)이엿슬지도 모릅니다.나는지금 그유령(幽靈)을 따라 굴러 갑니다.그러나 그유령(幽靈)은 내가미행(尾行)을 한다는것은 모르고 또는알엇다해도 아무저항(抵抗)도 할필요(必要)가업다는듯이 방향(方向)도업시것는것이엿습니다.때로는 시내도건너고들판도 지나 힘이지치고 밤이깁프면 산(山)기슭 나무등얼 밋헤누어서 하늘에 수(數)업시만흔 별들을 헤아려도 보는것이겟지요그러나 그어느별도그에게 행운(幸運)을 점제한별은 업섯나봐요 그리다간 그는그만 흑흑늣기고 울며울다가는 자는것이엿습니다.아마도 기적(奇蹟)을 이즌순간(瞬間)이 그에게는 자장행복(幸福)된순간(瞬間)이든가봐요,산(山)속은 찬기운만 가득하고벌레소리는 정적(靜寂)을 삼림(森林)가티무성(茂盛)하게하는것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그다음날도 아츰햇발이 속새입홀 흔들면 그는일어나 것는것이엿습니나.이러는 동안에 나는이유령(幽靈)에게서 무엇을 보앗스리라고 생각하심니가?어느큰강(江)가이엿습니다.여을어 목노아울고가는 강(江)가이엿습니다.그는이강(江)가에 안저서 무엇을 생각하엿는지 눈을깜은채로 하늘을치여다보는 것이엇고 초생달은교만(嬌慢)한 게집의눈자위처름 그를흘겨보는것은 한층(層)더창백(蒼白)한 비우슴갓햇습니다 그러치만은 그는그광망(光芒)을 피(避)하려고도 안엇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내생각에 따른다면 그래도 못잇처지는 날ㄹ기억(記憶)을 모조리 물소리에 씨처흘려보내려는 노력(勞力)이엿슬지도모릅니나&lt;br /&gt;
&lt;br /&gt;
그때 먼데마을에는 개짓는소리가 어즈러히 들여오고 새바람도 유달리 옷깃을 새여드는데 그는 일어셔 한발한발 물가으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때나는 그의운명(運命)을거의들여다보는것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자살(自殺)이란 광경(光景)이 내머리속에번개가티 일어낫습니다.그리고그는물가의 널직한 반석(盤石)우에올러안저서 물속에비친 자기(自己)의얼골을 자세히 들어다보는 것이엿습니다,그러나 그물속에는자기(自己)의 얼골은 차저볼수가 업섯든것이겟지요,증오(憎惡)를 참지못하는 그는그만 뼈만남은 두손으로 물결을 훗치고는 돌우에업더저 우는것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그는 또다시 일어나 모둔것을 이저버린듯이 걸어가는 것이엿습니다.일기(日氣)는점점 흐려지고 회색(灰色)으로 물드린 천공(天空)은 그의최후(最後)의 희망(希望)까지라도 빼서바릴듯이 싸늘한 압박(壓迫)을더하는것이엿습니다.그러타고해서 그에게는 아무런 격정(激情)도 반발(反撥)도잇는것갓지는 안엇습니다 만은 주먹을 쥐여서는 주머니속에 너은체로 간간히 머리를 흔드는것은 과거(過去)에대(對)한 회한(悔恨)이라든지그런것들이 머리속을 할터가는것이겟지요?&lt;br /&gt;
&lt;br /&gt;
그것은 어느동리(洞里)압이엿습니다만흔사람들이 모엿다가는 다들도라가고 큰버드나무에『사지오리』를 부친색기를 걸처맨밋헤는 기름종지에 빤—한심지불이타고잇스섯며 아해들 몃사람이그것을 직히고 잇섯습니다.그는아해들에게 무엇을하는것이냐고 물엇습니다.&lt;br /&gt;
&lt;br /&gt;
아해들의 대답이란 너무나 묘(妙)한것이 안이겟습니가?그동리(洞里)에는 십년(十年)만에 한번식은 유령(幽靈)이 난다는 전설(傳說)이 잇섯습니다그래서 그날은 동리(洞里)사람들이정성을 다하야 한데모혀서 기도(祈禱)를 올리고 고사(告祀)를 지내는것이엿는데 그날이마츰 십년(十年)에 해당(該當)한날이며 방금 의식(儀式)을 맛친때라고 말을마천 아해들은 그를 한참동안 자세히 보다가는그만 인가(人家)를 향(向)하야 다어나는것이엿습다.아마도 그것은참으로 이동리(洞里)에 유령(幽靈)이 나타낫다는것을 알리기 때문일런지도모름니다.&lt;br /&gt;
&lt;br /&gt;
그는 한번 크제우섯습니다나는 그가 웃는것을 보는것은처음이엿습니다,그러나 그웃슴이란 곳변해저서 므슨쓰듸쓴 약물을 먹은뒤의 입모습가리 변해지며 얼골전체가 크다란 환상(幻想)에 사로잡히는것 갓햇습니다그리다가 그는 그언덕 미테서잠이들어 자면서 꿈을 꾸는것여엿습니다,그꿈이란 이러햇습니다,몹시더운 여름날 몃칠을두고 비가따루엇습니다,그래서큰물이나고 하루밤사이에 왼동리(洞里)가 물에쓸려 갓읍니다 왼여름 피담을홀려 지은농사(農事)도 한포거업시 사람마다 두주먹과한개의 목슴박게는 남지안엇음니다 주림과 치위가 매운챗죽갓치 그들을 휘갈겻읍니다 그래서 동리(洞里)사람들은 제각기 이고향(故鄕)을 떠나지안호면 안되엿읍니다 물론(勿論)녯날에야 부모(父母)의 품속갓치 포근하고 사랑스런 땅이엿지만은 지금은 참담(慘憺)과 고통(苦痛)의 회억이외(回憶以外)에 아부것도 그들의 애착(愛着)을 붓잡어 두□는 못하엿읍니다.그들은지금 한개촌락(個村落)에서 다른촌락(村落)으로 한성시(城市)에서 또다른성시(城市)에 표박(標泊)□ 길을가는것이엿지만은 그어느□곳도그들이발을 부칠곳은 어□읍니다 모든집들어 그들압헤는 문(門)들을 잠것읍니다.그리고 오즉그들에게는 한오리 끗어는 길이엿음니다 어느때나 □□갈수잇는 길이엿읍니다 하□□또하루 한달에또한달 꼭가티 그들은 하늘을 치여다보고 □을갓읍니다.벌서초본(草本)도 다□□이들고 낙엽(落葉)이 나리나 그들의발길은 머므를수는 업섯습니다 어느마을이나 성시(城市)에서 그들에게 일주일(一週日)이나 유(留)할수가□고한오리의 희망(希望)을 주엇다면 다시그순간(瞬間)이 지나면 그들에게는서름이외(以外)에 아무것도 □는것은업섯습니다.그러나 이□름과주림과 치위는 그들늙은이와 어린이와 남자여자(男子女子)를 모다한마음에 얼거맬수가 잇섯습니다 바탐과비에 바래인 그들이마음에한개의희망(希望)이란 오즉 일거리와생활(生活)이엿습니다 이것이 그들을고무(皷舞)하고 추진(推進)하는 힘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마치한떼의 표유(瓢游)하는『집시』와가티 마을을지내나 산(山)을너무나 마른풀을뜨더 그것을 덥고깔고 혹(或)은낙엽(落葉)을 쓰러다가 욕(褥)와 이불을삼어 한랭(寒冷)을 지나는하루밤 더욱이 비오는밤……밤은영원(永遠)히 차운것이며 뜨신것은다만그들의『마음』뿐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날과밤은 그넷줄처럼 밧구엿습니다.해도점점 쩔러지고 물들이 어러부트며 첫눈이 나린것도 발서 열흘전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그들은 아즉까지도 발무칠땅과한가지의 일거리도 찻지는못하엿스며 끗간데를모를 길만을보고 걸어가는것입니다.&lt;br /&gt;
&lt;br /&gt;
『여기라도 좀쉬여갓스면』모다들이러케 마음으로 부르지젓습니다.그러나 또몃사람운 말하는것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가자 압흐로 더가보자』이것도모든사람의 말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그들은 여전히 경사(傾斜)진 산(山)빗탈을걸어가며 길다란 곡선(曲線)의행렬(行列)이 계속(繼續)되는것입니다.그때는바람도 조골 잔잔해지고 햇발도구름밧글나와 열분광선(光線)이 뭇사람의 얼골을 다소명낭(多少明朗)하게하엿스나 일행(一行)이바로 산(山)미루턱에올너다엇슬때는 정세(情勢)는 디무도급(急)히변(變)하야 눈이퍼붓기 시작(始作)햇습니다.&lt;br /&gt;
&lt;br /&gt;
『눈이또나린다』이러케 부르짓고는모다들 놀나는 것이엿습니다.눈송이는 목화(木花)를 뜨더뿌리는듯이왼공중(空中)에 미만(瀰漫)하야지척을가릴수가 업섯습니다.바람에몰려오는 눈송이가 얼골에 부다치면 낫살을 어이는듯하고 손이빠질듯이 스린것입니다.시력(視力)조차 모호(糢糊)하야 발아래길도 알어보기는 어려웟습니다 재를오를때에 비(比)하면 산(山)을나려오는것은조금용이(容易)하엿스나 길이질대로 질어서 업더지락 잡버지락하는 사람들도잇스며 등에업힌 어린애들은 배가몹시 곱흐다고 우는것이며 그럴때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다들 산(山)밋헤 동리(洞里)집에 나려가서 드신밥을 준다고달래는것이엿습니다 그러나 산(山)미테 동리(洞里)집은 모다제각기 제마음에 그려보는 집들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가자 조금이라두 빨리가자불빗을 볼때까지』그들중(中)에서 한사람이 굴근목소리로 외치는것입니다&lt;br /&gt;
&lt;br /&gt;
『암그래야지』또 몃사람의 대답이 끗나면 모다들 침묵(沈默)은하면서 마음속으로는역시(亦是)『가자』고 대답하는것입니다&lt;br /&gt;
&lt;br /&gt;
사람들은 이빨을물고 잇는힘을다하야 전진(前進)합니다 지나온길이얼마이며가야할길이 얼마인것도모르면서 죽으나사나 가야한다는 것박게는 그들은 한사람도자기(自己)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업섯습니다.그들의 동반자(同伴者)의 발소리와 호흡(呼吸)이 그들의가튼 운명(運命)을결정(决定)한다는것은 이잔혹(殘酷)한 자연(自然)과 싸워가는 무리들의 금과옥조(金科玉條)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눈보래는 끗첫습니다.그러나아즉도 그들에게는 조그마한희망(希望)도 보이지는 안헛습니다.압도캄캄하고 뒤도그랫습니다.아득한 삼림(森林)속을 허우덕이는 암담(暗膽)은 영원(永遠)한흑야(黑夜)가 새이지도안코 영원(永遠)한 미로(迷路)도 끗막지도못할것 갓햇습니다.&lt;br /&gt;
&lt;br /&gt;
피로(疲勞)는 그들의몸을 풀솜가티만들엇습니다.참다가 못참는몃사람이 땅이라도 꺼지란듯이한숨을 쉬는것이엿습니다.그리고는 부르짓는 사람도업고 중얼대는 사람도업스며 눈물도마르고 공포(恐怖)도 사라진 그들은 발목에 잇는 힘을 다해서 눈과진흙우를 쉬임업시 이동(移動)하는것입니다.』&lt;br /&gt;
&lt;br /&gt;
유령(幽靈)은 그들가운데서 제일나이만흔 노인(老人)을 발견(發見)햇습니다그리고 그것은십년전(十年前) 그가고향(故鄕)을떠나올때 아즉도 그다지늙지안흔 그의아버지인것도 알엇습니다 그리고 모든사람은 그의어린시절(時節)의 동무엿습니다 그는참다못해『아버지』하고 소리를첫&lt;br /&gt;
&lt;br /&gt;
습니다 그러나그들은 어느한사람도 그를상대(相對)로 반겨마저주는사람은 업섯습니다.&lt;br /&gt;
&lt;br /&gt;
모다제각기 제갈길을 가고만잇섯습니다.&lt;br /&gt;
&lt;br /&gt;
유령(幽靈)도 그때야 잠이깨엿습니다 그리고 몸써리를 치는것입니다 얼마나 지리(支離)한꿈이며 괴로운 꿈이겟습니까?유령(幽靈)은다시일어나 것는것입니다 캄캄암흑(暗黑)속을 영원(永遠)히차고 영원(永遠)히 새지못할듯한밤을 제혼자가는것입니다 십년전(十年前) 내발밋흘 지나단이며 사랑을 속삭이든 소년(少年)은지금도 밤길을 제혼자 가고잇겟지요 황엽(黃葉)은 그래서 서러운일생(一生)을 울고만잇습니다&lt;br /&gt;
&lt;br /&gt;
정축십일(丁丑十一),일(一)&lt;br /&gt;
&lt;br /&gt;
=='''주요 내용 요약'''==&lt;br /&gt;
주제: 작가(필자)의 소식을 세상에 전하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이다.&lt;br /&gt;
&lt;br /&gt;
소식 전달: '내'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가을 바람에 흘러가는 '황엽(黃葉, 누런 잎)' 조각을 자신의 편지라고 생각하고 그 서러운 전기를 들어보라고 한다.&lt;br /&gt;
&lt;br /&gt;
'황엽'의 관찰: 황엽(필자)은 자신이 거리에서 겪은 두 가지 경험을 이야기한다.&lt;br /&gt;
&lt;br /&gt;
소년의 성장과 비극: 어린 소년이 성장하여 연인과 행복을 속삭였으나, 부모에 대한 효행 문제로 헤어지는 비극을 목격하는 것이다. 황엽은 이를 '행복의 절정은 최대의 비극과 통한다'고 표현하며 자신의 '로-맨틔시슴'의 종언이라고 말한다.&lt;br /&gt;
&lt;br /&gt;
군중의 포효와 유령: 이후 황엽은 개별적인 사랑 이야기가 아닌, '뭇사람의 생활 전체'와 **'노도(怒濤)의 교향악'**을 목도한다. 황엽은 이 거대하고 위대한 '작란군(作亂群)'의 행렬에 전율을 느낀다. 행렬이 사라진 후, 황엽은 '패잔병의 유령' 같은 힘없는 한 사람의 고독하고 고통스러운 표류와 꿈을 따라가며, 꿈속에서 홍수로 고향을 떠난 농민들이 희망 없이 떠돌지만 '가자 압흐로 더가보자'는 그들의 단합된 의지를 발견하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마무리: 유령이 깬 후 다시 홀로 밤길을 걷는 모습을 보며, 황엽은 '서러운 일생을 울고만' 있다고 글을 마무리하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분석 및 특징'''==&lt;br /&gt;
메타포(은유)적 글쓰기: '황엽(낙엽)'이라는 매개를 통해 자신의 소식과 감정을 전달하는 고도의 은유적인 글이다. '황엽'은 작가 자신의 고독하고 소외된 자의식, 혹은 시대를 표류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시대의식의 투영: 개인적 낭만(소년의 사랑)의 종언과 함께,'뭇사람의 생활 전체'와 '노도의 교향악'을 목도하며 당대의 격변하는 사회상과 민중의 힘을 인식하는 작가 의식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이육사의 서정성: 후반부 꿈속에서 펼쳐지는 농민들의 표류와 그들의 굳건한 생존 의지는 당시 농촌의 피폐함과 함께 암울한 현실 속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을 비장하게 포착해내는 이육사 특유의 서정성을 보여주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전과기'''=&lt;br /&gt;
누구나 버릇이란 쉽사리 곳처지는것은아니다 그러므로 세살쩍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말도 잇지 안는가?.그런데도흔히 다른사람의 한가지 버릇을 새로히 발현햇슬때는 아—저사람은 저런버릇이 잇구나하고 속으로 비우서보거나 그버릇이 조치못한종류의것이면 대개는 업수히역이는 수도잇는가봐!.그럿컨만 나에게는 아무리 곤처보려도 곤처지지안는버릇이란 손톱을 깍고 줄로 으르고 수건으로 닥고하는것이다그것도 때와곳을 가릴것도업시조욕(漕浴)나 다방(茶房)이나는 말할것업고기차(汽車)나 배를타고 멀리여행(旅行)이라도하면 심심푸리도되고 봄날도서관(圖書舘)가튼데서 서너시간(時間) 안저백이면 제아무리 게른뱅이는 아닐지라도 웃눈섭이 기중기(起重機)처름아래눈섭을 끄러다닐때도 잇는것이고 그럴때에 손톱을 잘르고줄로 살살으르면 자릿자릿한 자미에 왼몸에게틈이 다풀리는것이다.그야내나이 어릴때는아침일직이손톱을 잘르면어룬들은질색을하시며 말리기도하엿다,그리고 말릴때에 누구인지지금에기억되지는 안어도 우리집에자주오는 손이 말하기를 아침에손톱깍고 밤에 머리빗는것은몸에해롭다고 하는것이엿고 내생각에도 그런방문은『동의보감(東醫寳鑑)』에라도 싸여 잇는줄 아럿기에그뒤로는 힘써시간(時間)을 한나절지난뒤에 손톱을 닥곤하엿지만나도내대로 세상맛을 보게된뒤로는 쓴맛단맛을 다보고 시고떨븐 구석과 휘추고초가튼 광경에 부닥길때가 시작이되고는손톱치레를 할만한 여가도 업섯고 어느사이에 손톱은 제대로자라 긴놈 쩌른놈 삐뚜러진놈꼬부러진놈 벌덕잡버진놈 앙당마스러진놈 이러케되야 내손이란 그꼴이 맛치 오증어를 뒤집어 삶어논것이 되엿다.&lt;br /&gt;
&lt;br /&gt;
그럴때에 나는 또 다시 손톱을 잘를것은 잘르고 으를놈은 으르곤하엿스며 이른아츰이라도 가리지는 안엇다.그것은밤으로 머리를 깍거보아도 몸에 해로운것도 업스니까 아츰에 손톱을 깍는것조차 위생(衞生)과는 관게업는것을 안까닭이다.&lt;br /&gt;
&lt;br /&gt;
그런대 내가이손톱을 잘르는버릇은 언제부터 시작되엿는가를 생각해보면 그도벌서 삼십년(三十年)이 더지낫다,내가난지 백일(百日)이나 되엿겟지 이란저고리박게빨간내손이 나와서 내얼골을 햅여뜻고는 나는자스려질듯이 울엇다.어머니가 놀라서가위로 내손톱을 잘러주신것이 처음이고그것이 늘거듭하야 지는동안에봄철이오면 어머니는 우리형제(兄弟)를 차례로불러 퇴ㅅ마루 양지쪽에 안치고 손톱을 잘러주시고 머리도빗기고 귀도휩여 주섯스며 이것도 내나이 여섯살때 소학(小學)을 배우고는 이런일의한반(半)은 할아버님께 이관(移管)이 되엿다 예날 내고장 우리집에는그다지 크지는못해두 허무히 적지안은 화단(花壇)이 잇섯다 그리고그화단(花壇)은 이때쯤되면 일이밧벗다 깍지로긁고호미로 매고 씨갑씨를 뿌리고총생이를 옴겨심고 적당한 거름도 주엇다 요즘가티『시크라맨이나『카—비손』이나『추리프』가튼것은 업서도 옥매화(玉梅花) 분홍매화(粉紅梅花) 홍도(紅桃) 벽도(碧桃) 해당화(海棠花) 장미화(薔薇花) 촉규화(蜀葵花) 백일홍등등(百日紅等等) 빗도보고 향(香)내도맛고꼿도보고 입도볼 말하면 일년(一年)을 다즐길수가잇는것이엿는데 내할아버지 생각은 이제 헤아려보면 우리들에게 글읽고 글시씨인사이로노력(勞力)을 몸소맛보이는것도 되려니와 그것이 정서교육(情緒敎育)도될겸(兼) 당신의 노래(老來)를 화려(華麗)하게 꾸밀수도 잇섯든 모양이엿다 그럴때마다 우리들은 이다지 가볍고고흔 노동(勞働)이 끗나면 할아버지는 우리들게 손을씨슬것과 손톱에끼인흙을 끌어내도록 손톱을닥그라 하섯다.&lt;br /&gt;
&lt;br /&gt;
이러든 내손톱이기에 나는손톱을 소중히하고 잘르고 으르고 닥고하는 동안에 한가지방편을 어덧다 그것은 나에게거북한일을말하는 사람아페서 손톱을 닥는것이다.빤히 얼굴을맛대이고 배알에 거슬이거나듯기실흔 말을듯고 억지로 참을수도업고 그러타고 언잔흔표정(表情)을 할수도업서 손톱을 닥노라면 시굴게신 어머니도 그려보고 도라가신 할아버지의 모습을 우러러 뵈일수도잇다.내고장의 푸른하늘아래 봄이 왓슬것도 가트니&lt;br /&gt;
&lt;br /&gt;
——(완(完))——&lt;br /&gt;
&lt;br /&gt;
=='''주요 내용 요약'''==&lt;br /&gt;
손톱 깎는 버릇: 화자(나)에게는 아무리 고치려 해도 고쳐지지 않는 버릇, 즉 손톱을 깎고 줄로 다듬고 닦는 행위가 있다. 이 행위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으며, 특히 심심하거나 피로할 때 긴장을 풀어주는 '자릿자릿한 재미'를 준다. &lt;br /&gt;
&lt;br /&gt;
버릇의 변화와 세상 경험: 어릴 때는 '아침에 손톱 깎는 것은 몸에 해롭다'는 옛말 때문에 어른들이 말렸고, 화자도 이를 믿었다. 그러나 세상을 경험하며 '쓴맛 단맛'을 다 본 후, 손톱 관리에 신경 쓸 여유가 없어 손이 엉망이 되기도 했다. 이후 미신이나 위생보다는 개인의 필요에 따라 언제든 손톱을 다듬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버릇의 기원과 따뜻한 기억: 이 버릇은 태어난 지 백일 무렵 어머니가 처음 손톱을 깎아준 것에서 시작되었다. 봄철이 되면 어머니는 형제들의 손톱을 깎고 머리를 빗겨주셨다. 여섯 살 때부터는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화단(花壇)을 가꾸는 노동을 했다. 할아버지는 이 노동을 노력(勞働)을 몸소 맛보게 하고 정서 교육을 시키는 수단으로 여겼다. 노동이 끝난 후에는 손톱에 낀 흙을 닦도록 하셨는데, 이는 정돈과 청결의 습관으로 이어졌다.&lt;br /&gt;
&lt;br /&gt;
손톱 관리의 '방편': 손톱을 닦는 행위는 시간이 흐른 뒤 화자에게 '방편(方便)'의 의미를 얻게 되었다. 듣기 싫거나 거북한 말을 하는 사람 앞에서 이 행위를 하면, 억지로 표정을 관리할 필요 없이 그 행위에 몰두하며 고향의 어머니와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분석 및 특징'''==&lt;br /&gt;
일상적 소재의 상징성: '손톱 깎는 행위'라는 극히 일상적인 소재를 통해 삶의 태도, 유년 시절의 기억, 그리고 현재의 심리적 방어 기제까지 끌어내는 수필이다.&lt;br /&gt;
&lt;br /&gt;
세대 간의 경험 대비: 수필은 크게 세 시기를 대비시킨다.&lt;br /&gt;
&lt;br /&gt;
유년기 (어머니/할아버지): 손톱 관리가 사랑과 보호, 그리고 정서 교육의 매개였다. (전통적이고 순수한 가치)&lt;br /&gt;
&lt;br /&gt;
성인기 (세상 맛을 봄): 손톱 관리가 소홀해지고 삶의 고난과 시련 속에서 잊혔다.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운 현실)&lt;br /&gt;
&lt;br /&gt;
현재 (손톱을 닦는 '방편'): 손톱 관리가 현실의 고통을 회피하고 내면의 안정을 찾는 심리적 '방편'이 되었다. (현실과의 거리 두기)&lt;br /&gt;
&lt;br /&gt;
정서적 위안: 화자가 불편한 상황에서 손톱을 닦는 행위는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힘들었던 현실 속에서 유년기의 평화로웠던 기억(어머니, 할아버지, 화단)을 소환하여 현재의 감정을 통제하고 마음을 지키는 자기 치유의 과정인 것이다.&lt;br /&gt;
&lt;br /&gt;
향토적 정서: 화단에 핀 옥매화, 장미화, 백일홍 등과 퇴마루 양지쪽 같은 토착적인 이미지를 통해 과거의 아름다웠던 고향과 가족의 정을 회상하며, 전통적 가치에 대한 향수를 드러낸다.&lt;/div&gt;</summary>
		<author><name>Imgpdnjs</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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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이육사의 기자 생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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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10T09:10:1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Imgpdnjs: /* 주요 내용 요약 */&lt;/p&gt;
&lt;hr /&gt;
&lt;div&gt;[[분류:imgpdnjs]]&lt;br /&gt;
=='''이육사의 기자생활'''==&lt;br /&gt;
출소한 뒤에는 중외일보와 조선일보 대구지국에서 기자로 일했고, 1930년에는 ‘이활’이라는 이름으로 첫 시 &amp;lt;말&amp;gt;을 조선일보에 발표했다. 이 시기는 훗날 교보생명을 세우는 신용호에게도 영향을 주어 독립운동 자금 지원과 교육 사업 구상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알려져 있다.&lt;br /&gt;
&lt;br /&gt;
1930년, 이육사는 조선일보 지면을 통해 생애 첫 시 「말」을 발표하며 문단에 모습을 드러냈다. 1월 3일자 조선일보 7면 하단에 실린 이 짧은 작품에서 그는 매질에 지쳐 쓰러질 것 같은 말이지만 새해에는 다시 우렁차게 질주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이 작품이 바로 그와 조선일보의 첫 연결고리였다.&lt;br /&gt;
&lt;br /&gt;
=='''중외일보 대구지국'''==&lt;br /&gt;
1929년 6월 장진홍 의거 관련 혐의로 복역 후 1930년에 출소한 이육사는 곧바로 언론계에 투신했다. 그는 시 발표 직후 중외일보(中外日報) 대구지국에서 기자로 일하기 시작했다. 중외일보는 1926년 조선중앙일보가 제호를 변경하여 창간된 신문으로, 1931년까지 발행되었다. 이육사가 활동하던 시기는 일제강점기 언론 탄압 속에서도 민족의식을 고취하려던 분위기가 남아있던 때였다. 지방지국 기자로서 지역 사회의 현안을 취재하고 보도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기간의 활동은 그가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사회 현실에 대한 인식을 심화하는 데 기여했다.&lt;br /&gt;
&lt;br /&gt;
=='''조선일보 대구지국'''==&lt;br /&gt;
중외일보에서 근무한 뒤, 이육사는 1931년 8월 조선일보 대구지국으로 자리를 옮겼다. 일제강점기 지방의 신문 지국은 단순한 연락소가 아닌, 지방 취재와 기사 송고의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이육사는 이곳에서 현장 기자로서의 전문적인 경험을 쌓았다. 조선일보에서 자신의 이름(필명)을 걸고 처음으로 쓴 기사는 1932년 초에 연재되었다. 첫 기사인「대구의 자랑 약령시의 유래」는 1932년 1월 14일부터 네 차례에 걸쳐 연재되었다. 이 기사를 쓸 때 그는 본명 대신‘육사생(肉瀉生)’이라는 독특한 필명을 사용했다. '육사'라는 필명이 여기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으며, 이는 그의 상징적인 수인(囚人) 번호(264)와 연결되는 '이육사'라는 이름의 유래 중 하나로 간주되기도 한다. 이 기사는 대구의 대표적인 전통 시장인 약령시의 역사와 유래를 소개하는 향토색 짙은 글이었으며 이육사가 기자로서 대구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lt;br /&gt;
&lt;br /&gt;
[[파일:이육사기사.jpg|500픽셀|섬네일|center| 이육사가 조선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근무하면서 쓴 1932년 1월 14일 자 ‘대구의 자랑 약령시의 유래’ 기사. ‘육사생’이란 필명 사용. ⓒ 조선일보]]&lt;br /&gt;
&lt;br /&gt;
그는 스포츠 기사에서도 민족적 정서를 드러냈다. 1932년 3월 6일과 9일자 스포츠란에서 「대구 ‘장’ 연구회 창립을 보고서」라는 글을 연속으로 기고하며 이번에는 ‘이활(李活)’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여기서 그는 조상 대대로 이어오던 우리 겨레의 전통 놀이 ‘장치기’를 소개하며 경기 방식뿐 아니라 점수 계산 용어까지 온전히 우리말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더 나아가 이 놀이를 세계 농민 사회에까지 널리 보급하자고 주장했다.&lt;br /&gt;
&lt;br /&gt;
그는 1934년 무렵 조선일보로 다시 합류했고, 이후에도 꾸준히 조선일보 지면에 글을 남겼다. 1930년대 후반에서 신문이 폐간되기 직전인 1940년까지 발표된 글들은 다양했다. 5회 연재된 「노신 추도문」(1936년 10월 23~29일자), 「문외한의 수첩」(1937년 8월 3~6일자, 3회), 「황엽전」(1937년 10월 31일~11월 5일자, 4회), 「전조기」(1938년 3월 2일자), 그리고 1940년 발표된 「계절의 오행」 등이 대표적이다.&lt;br /&gt;
&lt;br /&gt;
=='''타임라인으로 보는 이육사의 기자 발자취'''==&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v2%3A2PACX-1vScyeelknnBUflE4gCcqr0d_p4jIpl00AVBmBzhC5cgKY8GPsH4h-JZmzezN5VoQTKsJGw76vWgsA7O&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width=100%25&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대구(大邱)의 자랑 약령시(藥令市)의 유래(由來)'''=&lt;br /&gt;
대구(大邱)의자랑&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의유래(由來)&lt;br /&gt;
&lt;br /&gt;
대구지국(大邱支局) 육(肉) 사(瀉) 생(生)&lt;br /&gt;
&lt;br /&gt;
대구의자랑이 무엇이냐?고 뭇는사람이 잇스면 지금사람들은아이어룬할것업시 대구능금(평과(苹果))을말할것이다 그러나 대구능금은 최근의 한명산물로서완전한 자랑의자위를 점령할수는업는것이다 여긔서우리는중학교지리교과서(중학교지리교과서(中學校地理敎科書))에도잇는대구의유명한약령시(연령시(燕令市))를자랑으로들어놋코그에대한력사적유래를먼저아라보자&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의사적유래(史的由來)&lt;br /&gt;
&lt;br /&gt;
대구의 약령시는 일년얼차의정긔시장으로서 그시장에 집산되는 산물은 맛치『도루고』(토이기(土耳其))나『코—카쓰』(고가삭(高加索))나중앙아세아(중앙아세아(中央亞細亞))내외몽고(내외몽고(內外蒙古))등지에서 일년 일차혹이차식 열니는 모피물(모피물(毛皮物))의시장과가티대성황을일우나 이상에말한 각지의시장은인류사회의생활형태가차차목집함을따라필요한물품을서로서로밧구고저일정한장소와시일에모히는말하자면물물교환(물물교환(物物交換))시대로부터교통의관계라는지긔후의관계라든지또는일반사희생활의형태가오히려아직까지녯날의그것을면치못하고현대자본주의국제간의무역관계(무역관계(貿易關係))가극도로발달된 오날까지에 원시경제(원시경제(原始經濟))를 연구하는학자들의 연구재료가 되는것은휴미잇는 사실이지만은 대구의약렁시는 물품의집산과 교환의량식이 그와방불하여도 일홉부터 약시(약시(藥市))가아니고 약렁시(약령시(藥令市))란령(영(令))자에대하야우리는직각적으로 이시장의긔원은엇던권력(권력(權力))의 지배(지배(支配))맛해일게된것을 알수가잇다그러면 이약렁시가 처음시직된것은 언제부터인가 그야말로중학교교과서에까지『고래(고래(古來))로유명』이라고만씨여잇고 적확한년대를 쓰지안엇슴으로 대담하게 그년대를 내어노을수는업스나 비교적정확한수자를 조사한대로쓰면 서력일천륙백오십팔년(이조개국이백육십팔년효종조(李朝開國二百六十八年孝宗朝))거금이백칠십 사년전부터개시하게 되엿다고한다 그때야말로 조선을팔도(팔도(八道))에 닌후아노코 다시칠십일주로 난호아노흔 경상도의 정치적수부(수부(首府))도대구려니와 경상도(경상도(慶尚道))를둘너 남부조선각지는 산수명랑하고긔후온화하야각색약초(약초(藥草))의배양에지질이알맛기도하고 교통도편의하야(그때로보아서는)물산의집산에최적의지대도 대구엿스며 그때야말로임진병란(임진병란(壬辰兵亂) 이끗을막고모든볼회와 시설이 차자정돈뇌고발전을 보이며따라황실중심(성실중심(星室中心))으로끄으려는당시의위정사(위정자(爲政者))들은□□□□조금이라도 관계잇는 물품이면무엇이나물론하고 먼저진상(진상(進上))이란일흠아래최상의생산품을골너 서울도보내고 일반백성이먹고 입고쓰게되는 것이다그리고엇던 계□을물는하고병업시일생을 살수도업는것은 생리상자연의 리치엄으로 일국의지존(지존(至尊))인왕(왕(王))도병마의무서움은면치못 하는것이다 그래서황실에서일년동안쓸 약품을이곳에서 구하고저 국가의명령으로개시케한것이 오날날 우리가보고듯고 하는약령시의 처음이다그때는 약령이서면 감사(감사(監使))(현도지사(現道知事))가약재를골다봉하야중앙 정부 사약원(중앙정부사약원(中央政府司藥院))에 보낸후에 팔도에서모혀든 약재를일반 약국(약국(藥局))이사서완조선안의병든사락들이 그해그해의 치료를하게다엿다고한다(속(續))&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와경기(景氣)(이(二))&lt;br /&gt;
&lt;br /&gt;
대구지국육(大邱支局肉) 사(瀉) 생(生)&lt;br /&gt;
&lt;br /&gt;
【대구(大邱)】대구의약령시(약령시(藥令市))는다른상품시장에서는볼수업는특수한 유래를가지고 발달하여온만큼 지방의정청에서도일년춘추두차레에정긔적으로모여드는 지방생산자들을 위하야지방경제발달을 조장하고저 계획을세우고 제도의개선과 개시(개시(開市))긔간의 연장등 모든방면으로힘을써 보앗스나 모다뜻과갓지못하고 서구(서구(西歐))렬국의동양(동양(東洋))침입으로의학(의학(醫學))약학(약학(藥學))등학문이발달됨에침(침(針))은주사(주사(注射))로변하고바쇠는『메—쓰』로화하는바람에한약(한약(漢藥))의 가치는 전연그권위를일케되면서 대구의 약령시도차차워마하야 매매되는 약재료도주러지기만 하든중『후—버』겅긔가세계의주식시장(주식시장(株式市場))을혼란케하듯이 대구의 약령시장도 대타격의한때가 지나가게되엿스니 그는무엇일가?지금부터이십이년전(신해년(辛亥年))에중산손문 중산손우(中山孫又))씨혁명으로대청황실)대청황실(大清皇室))을넘어지면서부터는 청황실이 조선정부(조선정부(朝鮮政府))에의뢰하야사가든약품은실로막대한것이엿스나전부그매도의길이 막히게된 여러가지조건밋헤매매가 축소하여 전성시대의반도못되게 되얏다 그나마최근에는전주(전주(全州))대전(대전(大田))진주(진주(晋州))원산(원산(元山))등지에군소시장이개설되여이를약령시로밀미암아대구에떠러지는돈은매우감소되엿스나아직도령시가개설되면동성정입구(동성정입구(東城町入口))로부터남성정입구(남성정입구(南城町入口))까지 십여정(십여정(十餘町))에 처당재(당재(唐材))초재(초재(草材))등삼백여종의 약품도만흐려니와 그근처에림시려인숙(임시여인숙(臨時旅人宿))이무수히설치되고 포백기타 일용생활에필요한물품이면 평상시의 멧배나더잘팔리는 호경긔를 연설한다 그리하야 촌양빈들의낫서른돈을 먹어보겟다는 술집색시들까지 헐직한인조견으로 봄을싸고 도스리고안저서 열분애교를 술잔에담어보내는것도『넌센스』한징면인지는모르겟다마는 흡객술(흡객술(吸客術))이 졸열한다기보니 시대에뒤처진 기생들은본바닥에 거주하는손님들은『카페—』붉은녀급(여급(女給))들의자주(자(紫))빗유혹에다 뛰우고 음력과세를압서초조하는중 때맛침사재(시재(時哉))시재를불러 시내 각요리집 극장할것업시 대만원의성황을 이루는것은 그럴듯도한일이지마는 여긔에는 순진한산간에서 새노래물소리에 거치른세상일은 □도꾸지못한 산아이와도갓치 힘드려작만한 약재를도시구경겹 하여와와서판돈은『메리·픽포—드』안일망정어엽분녀자를맛나 잇는대로 다쓴후에명년의약령시 개설되기를 손을꼬바기다려서 와서보면 그녀자는어느하늘밋헤서 잇든남자와 단꿈을꾸는지 알길조차 바이업고작년구든맹서가 찬□(회(灰))처럼살어잘때화낌에 한잔무어라 먹자부어라 먹자하는연긔가튼 경긔는 견양경긔(견양경기(犬養景氣))이상으로 흥성거린나 그러기에여긔에최근오개년간의매매고외출동인원수와□적어본다&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와경기(景氣)&lt;br /&gt;
&lt;br /&gt;
(삼(三))&lt;br /&gt;
&lt;br /&gt;
대구지국(大邱支局) 육(肉) 사(瀉) 생(生)&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의현재(現在)&lt;br /&gt;
&lt;br /&gt;
약령시의 밋치는바 경제관계는실로 다방면으로 황금왕시대를연줄하며 발달하여오는만큼 녯날에는 조선안에서 생산하는재료가 매매되는이외에 당재(당재(唐材))라고하야 증국으로부터금석지재(금석지재(金石之材))가만히수입되는외에는 벌로볼만한것이 업섯스나 교통의발날노 국제무역이빈번하야지게된 오날에는일본,중국,몽고등시는말할것도 업거니와동부『아푸리카』의찌는둣한열대지방에서 생산되는 소철(소철(蘇鐵))을비롯하야 황막한시베리아의천지를 내집가티 도라다니는웅담(웅담(熊膽))까지모혀들게되는것은이약정□를통해본□류문와사의 한로막이라고도 할수잇는것이다 이러케 약령시에모혀드는약재료가 교통의 혜택을임어거의 파멸에 갑가운약령시가새로히왕성하게되자 지금이야말로 시장의 량입구에 마천두(마천루(摩天樓))가튼『리—딍』(유도탑(誘導塔))을세우고『일미네—숀』(대전식(大電飾))사이에 흥긔청긔가나붓기며 지방으로부터 모혀드는 생산자들을끄려드리는것은 확실히 일반상업전술의발달을의미한다 그러나 원래이시장는 약을재료그대로가지고와서 매매케 되는것이 특질의엿스나 지금은천일령신환,조고약과어을빈만병수까지 시장목판에서 인긔를집중하고잇는것은 아모리보아도 조뵈 화지관는 사실이다 이가튼변천가운데도 특긔하야들것은 령시의개설의래 장구한년월을 지남에따라 그본래의 성질에배반하야 부업적상인게놉을 령시의주요구성 요소로하게되고 부터는 경상도내지방에밋치는 양령시의영향은 일반 소비경제상에크다란 파문을그리게되여 약텽시본래목적인 약새생산에 효과가적게되고 시장내의 불당중개인으로말미암아 일사 평판이조치못하엿슴으로 이러한 페풍을 일소하기위하야 지금부터이십여년선에 생긴 한약상조합한약상조합(漢藥商組合))과칠년전전주(전주(全州))에양령시가처음뇌려고할때에 대함키위하야생긴약령&lt;br /&gt;
&lt;br /&gt;
흉회(약령시진흥회(藥令市振興會))가지금은약령시번영회(약령시번영회(藥令市繁榮會))로변경되여 최선의로력을 다하야오며 감독한결과 지금은어느정도까지 통제가되여간다고한다 그리하야 지금이야말로동력(동력(動力)의위력밋해거대한공장뉼이날로늘어남조선의『메드로포리쓰』를만드려는 대구현네과학(현대과학(現代科學))의태반(태반(胎盤))가튼대구의한복판에서 조선의 자랑이라고도할수잇는원시시장(원시시장(原始市塲))의한개가 벌서오늘날의 □제권내에발을듸듸고장차을래일의세계를향하야나가는것은홍미김흔일이다(속(續))&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의유래(由來)&lt;br /&gt;
&lt;br /&gt;
(사(四))&lt;br /&gt;
&lt;br /&gt;
대구지국육사생(大邱支局肉瀉生)&lt;br /&gt;
&lt;br /&gt;
삼백년동안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복잡다단한 필연적 과정을경과하여오며 자본주의 경제의현계단에서의연히그존재가필요하게된대구약령시의발달사는완연히금일경제의발달사(발달사(發達史))라고보지안을수업다 그럼으로여긔특긔할것은 그성실상 순박함이짝이업는 죽말하면 매매하는시람들의아관박대(아관박대(雅冠博帶))라든지 생산품 포장가튼것까지도(물론변천된것도만흐나)삼백년전의 녯날을 그려볼만한순박한이서장에도현대금융자본의붉은혀(설(舌))는내밀기시작하엿다지금부터 시년전엇던 외래지본벌이자긔소유의따에시장의위치를옴기려고 현위치는 도시교통상불편하다는구실로써다방면으로술책을써보앗스나현장소에서긔십년간상권을 잡고잇는 대가들의명렬한반대로그만뜻을일우지못한일도잇다그러면내구약령시를 지배하고 따라전조선의한약상계에우이를삽고잇는 이는누구일가여긔는 누구보다도 김홍조(김홍조(金弘祖))씨를아침수가업다씨는 전선적으로보아 제이위가기를설허할만하다고하며그다음순서업시치면 신태문(신태문(申泰文))김종수(김종수(金宗洙))지이원(심의원(沈義元))리치욱(이치욱(李致旭))두병은(두병은(杜炳殷))김내명(김내명(金乃明))방규진(방규진(方圭鎭))제씨를칠수잇고 그중에도 두병은(두병은(杜炳殷))씨가튼이는여러대를나려오며 사업에 종사하야 그문패는 실로일백오십년 이란력사를가저 대구의 동인당(동인당(同人堂))이란 일홈이잇다&lt;br /&gt;
&lt;br /&gt;
북평(北平)의동인당(同仁堂)은팔백년(八百年)의역사(歷史)가잇슴)그래서 대구의약텽시인긔는 이들의손에 좌우된다하여도과언이아니며 금년의약가는 금재금(김재금(金再禁))에따르는 제불가의폭등과 일중사변(일중사변(日中事變))의영향과중국은가(중국은가(中國銀價))의변동으로인하야소위당재(당재(唐材))는 폭동하엿고 조재(초재(草材))에잇서서 도변조로올은것이 불소하다는바 금후에드 더욱시세는오를무양이라고한다 여긔에당초재를물론하고 시세를 적어보앗스면좃켓스나 약명이한업시만코 날로변동이만흠으로 약렁시세표가 잇다는것만말한후에 특수한고저를보이는 몃가지를 적어보면 당재의원상산약(원상산약(元常山藥))은작년에는 매근에일원륙십전하든것이 금년은 단오십전에폭락되여 이십년레에 처음보는헐가라하며 산수유(산수유(山茱萸))는작년에 매근사십전하든것이 금년은십전에폭락되고 토사자(토사자(兎絲子))가튼것도 작년사오십전에매매되든것이 금년은십전에 폭락되여 자방생산자의 저울(형(衡))에 예긔치못한 광란(광란(狂亂))을보이고잇다고한다&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의장래(將來)&lt;br /&gt;
&lt;br /&gt;
그러면 다음날의약텅시는 엇더케될것인가?이문제는 결코예언자의 심심푸리와가튼 헛된소리는아니다적어도현세계의경제관계 와그에따라 일어나는모든사정이 쇄신된다면 모르지마는현계단의 경제제도가 그량존속되는한에는 세계적으로 한약에대한연구가왕성하여지고한약의권위가나날이놉하가는만큼약텅시의장래는압흐도세계에그일홈이놉하진다고일부인사들이말하고잇는것이그다지허언이아닐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지금은시장의형세가 산만하게생산자가 중개인울거처 도매상에게 팔게되여중간에책취를 당하게된다 하여도 장래는 현시장의대자벌들이주식(주식(株式))이나 혹은학자(합자(合資))의형식으로시장을상설하고도매와 개인생산자사이에 직접취인하게되여 지방경제의 윤택과약초생산의 장려의 약텅시본래의목적을 소개하려는것이 당업자간의 의도(의도(意圖))인 동시에매우현명한 의견인듯하다 그래서참된 대구자랑을 만들고조선의자랑을만들자——(완(完))&lt;br /&gt;
&lt;br /&gt;
=='''주요 내용 요약'''==&lt;br /&gt;
유래: 대구의 자랑으로 능금(사과) 대신 약령시를 들며 그 유래를 설명한다. 약령시는 1년에 한두 번 열리는 정기 시장이며, 조선시대 효종(1658년) 때 국가 명령(令)으로 개시된 것이다. 당시 경상도의 정치적 수부였던 대구는 약초 재배에 적합한 기후와 편리한 교통으로 물산 집산의 최적지였다. 궁중에서 쓸 약품을 이곳에서 구하기 위해 감사가 약재를 골라 사약원(司藥院)에 진상한 후, 팔도 약재를 일반 약국에서 구매하여 조선 전역의 환자 치료에 사용하게 한 것이 시초이다.&lt;br /&gt;
&lt;br /&gt;
쇠퇴와 현황: 서구 열강의 동양 침입과 함께 의학 및 약학이 발달하며 한약의 권위가 약해졌고, 약령시는 점차 쇠퇴하였다. 특히 22년 전(1915년경) 신해혁명으로 청황실이 무너지면서 조선 정부에 의뢰하던 막대한 약품 매도 길이 막힌 것이 큰 타격이었다. 최근 전주, 대전 등지에 군소 시장이 개설되어 대구 약령시의 경제적 이익이 감소했지만, 여전히 시장 개설 시에는 많은 약재가 모이고(당재, 초재 등 300여 종), 인근 상권에 호경기를 가져오는 것이다. 당시 약령시의 주요 구성 요소가 부업적 상인 계층으로 변질되고 불량 중개인 문제가 발생하자, 한약상조합과 약령시진흥회(현재 약령시번영회)가 결성되어 통제를 시도하고 있었다.&lt;br /&gt;
&lt;br /&gt;
약재 가격 변동: 당시(1937년) 일중사변(日中事變)의 영향과 중국 은가 변동으로 당재(唐材) 가격이 폭등했지만, 일부 국내 초재(草材)인 산약(山藥), 산수유(山茱萸), 토사자(兎絲子) 등은 폭락하여 생산자들에게 광란(狂亂)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lt;br /&gt;
&lt;br /&gt;
=='''분석 및 특징'''==&lt;br /&gt;
역사성 강조: 대구 약령시를 단순한 시장이 아닌 '국가 명령(令)'으로 시작된 역사적 시장으로 규정하며, 정치적, 지리적 배경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시대적 배경 반영: 서양 의학의 도입, 중국 혁명(청 황실 붕퇴), 당시 국제 정세(일중사변, 중국 은가) 등이 시장의 흥망성쇠에 미친 영향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여 식민지 시대의 경제 상황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시장 변화: 전통적인 약재 거래 방식에서 완제품 거래가 늘어나는 등 근대화에 따른 시장의 변화 양상도 포착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원시 시장'의 현대적 생존: 대구 약령시를 '조선의 자랑'이자 '원시 시장' 중 하나로 보면서도, 현대 자본주의 경제권에 발을 디디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평가하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대구(大邱)장연구회(硏究會) 창립(創立)을보고서'''=&lt;br /&gt;
구지국(大邱支局)&lt;br /&gt;
&lt;br /&gt;
이활(李活)&lt;br /&gt;
&lt;br /&gt;
민중(民衆)의보건운동(保建運動)은 요사이각계인사(各界人士)들의 크다른관심(關心)거리로어듸서 엇더케 무슨방법(方法)으로『억세인조선(朝鮮)』을건설(建設) 할수잇슬가 함에연구(硏究)를거듭하게되엿다회상(回想)하면 조선(朝鮮)에새로운운동경기(運動競技)가 수입(輸入)된지도 일반문화(一般文化)와갓치 벌서 반세기(半世紀)란역사(歷史)를가지고잇다 그중(中)에는 야구(野球)·정구(庭球)·축구(蹴球)·농구등(籠球等)을비롯하야 유도(柔道)·격검(擊劒)·권투등(拳鬪等)모든경기(競技)가들어와서 장족(長足)의진보(進步)도하엿스러니와 세계적무대(世界的舞臺)를향(向)하야 진출(進出)한선수(選手)도업지안타 그러나 그것은극소수(極小數)인동시(同時)에 지금(至今)까지의 조선(朝鮮)의운동경기(運動競技)는 한갓도회(都會)를중심(中心)으로잘어왓다 물론(勿論)다그럿타는것은아니지만은 현하운경기(現下運競技)그것은 조선(朝鮮)이나 혹(或)은다른나라에서라도 학교(學校)를중심(中心)으로발전(發展)되여오는만큼 교내(校內)의『스포—스맨』들은 완연(宛然)『떼파—트』진열장(陳列場)속에서 고객(顧客)을호리는『마네킹』처럼 상품화(商品化)한교육제도하(敎育制度下)에서 달큼하게 그상품(商品)의가격(價格)을놉혀주엇스며 그학교(學校)를버저나와 실사회(實社會)에취직(就職)을하면 역시(亦是)그와갓튼『마네킹』노릇을하여왓다 이러는동안 조선(朝鮮)의운동경기(運動競技)는 그발생(發生)으맹아(萌芽)가 힘것생장(生長)하기도전(前)에현제도(現制度)의 독아(毒牙)에여지(餘地)업는약관(躍關)을당(當)한절대(絕對)의원인(原因)과 그밧게사회(社會) 경제(經濟) 정치적제정세(政治的諸情勢)의착잡(錯雜)한모순(矛盾)이 너무나철업시이운동경기(運動競技)의발달(發達)까지 조해(阻害)하여왓다그러나 노력(勞力)과인내(忍耐)는갑이잇서이때까지외래품(外來品)이라면 아무비판(批判)도업시 실행(實行)하야오든우리도야구(野球)의전원(全員)이일시(一時)에활약(活躍)할수업는폐(廢)와정구(庭球)의시후(時候)에대(對)한불편(不便)과『꼴프』의귀족적(貴族的)인것등(等) 모든운동(運動)의단점(短點)만을빼고 장점(長點)만을취(取)하야 조선적운동(朝鮮的運動)을창출(創出)하려는이이 경성(京城)서는중앙체육연구소(中央體育研究所)가생(生)기고 금반대구(今般大邱)에서『장』연구회(硏究會)가생(生)기게된것이다&lt;br /&gt;
&lt;br /&gt;
장이란북조선(北朝鮮)의궁벽(窮僻)한지대(地帶)의인사(人士)들은 잘알지못할는지모르나이장만은 오래동안 우리조선(朝鮮)으로부터 그들의자손(子孫)인우리들에게부(傅)하아은 국기(國技)의하나이다물론(勿論) 국기(國技)란단순(單純)한의미(意味)로서만필자(筆者)가그것을추장(推獎)하는것은인니다 딸아서 운동(運動)의영향(影響)이문화창조(文化創造)에잇더한역할(役割)을한다는것을새로히논(論)하려는것도안니다&lt;br /&gt;
&lt;br /&gt;
대구지국(大邱支局) 이(李) 활(活)&lt;br /&gt;
&lt;br /&gt;
그러나일반문화(一般文化)가 그지리(地理)와풍토(風土)에영향(影響)되는바만흔것과가티운동경기(運動競技)도 또한그러히다 그것은『필랜드』사람들이『스켓틩』을잘하는것과『낙위(諾威)』사람의『스키-』를잘하는것이라든지『정말(丁抹)』사람의체조(體操)기튼것이 이점(點)을잘실증(實證)하고잇다 그러면조선(朝鮮)에는 조선적(朝鮮的)인자연세력(自然勢力)도 그러하러니와 더욱이 금일(今日)의사회적경제적(社會的經濟的)모든조건(條件)이 조선인(朝鮮人)에적합(適合)한것이안니면 안될것으다 그래서 최소(最少)의노력(努力)으로최대(最大)의 효과(効果)를발현(發現)치안으면안될것이다&lt;br /&gt;
&lt;br /&gt;
아에우리는생각한다 오날날까지조선(朝鮮)에수입(輸入)된운동경기(運動竸技)의종목(種目)은그대(臺)를매거(枚擧)키난(難)하나 그중(中)한가지도 우리에게 적합(適合)한것이업고 더욱이농민(農民)들에게 추장(推獎)할만힌운동(運動)은업섯다 그러나이장만은 오날날까지 그들농민(農民)의손에서전(傳)해왓다 그러면서도그진정가치(眞正價値)를돌낫든것이 오날이야 사계(斯界)의권위제씨(權威諸氏)가 적년연구(積年硏究)를거듭하야 발표(發表)한결과(結果)를보면 운동(運動)으로시 제일망각(第一忘却)치못할생리학상(生理學上)으로보아 전체(全體)가균형적(均衡的)으로활동(活動)되고 경제적(經濟的)으로도 기구(器具)를작만히는데 돈이들지안코 어느곳에서든지『장채』를직만하고『장방울』을다드무면논바닥에서나 밧기운데서라도 할수잇는농민본위(農民本位)의운동(運動)이라고한다 그리고다른운동경기(運動競技)가티『씨—슨』이잇는것도안니고 춘하추동(春夏秋冬)어느때라도 되는경기(競技)인즉 농번기(農繁期)는 못히드라도 농한기(農閑期)갓트면 그들의육체(肉體)를 하련(鍜鍊)하는데 매우적당(適當)한것이다 수(數)만흔경기중(竸技中)에능(能)히경제조건(經濟條件)이 어느정도(程度)까지용인(容認)한다하여도 그들의게생전(生前)듯자못하든말로『핸드뽈』이니『꼴』이니『라인』이니하여보아도 결(决)크그들에게취미(趣味)가잇슬이(理)가만무(萬無)하고취미(趣味)가업스면 그들에게발전(發展)될이(理)도만무(萬無)한것이다 그러나『장』연구회동인(硏究會同人)들의말을들으면경기(竸技)에계산(計算)하는용어(用語)까지도순조선(純朝鮮)말로한다는것의경하(慶賀)할일이다 이『장치기』를국기(國技)로서추장(推獎)하야세계(世界)에널니선전(宣傳)하는것도좃치만은먼저안으로그들이이국기(國技)를직혀왓는만큼 그들에게조직적(組織的)으로보급(普及)하라 그리서조선농민(朝鮮農民)의경기(競技)를만들고 따라 세계(世界)의농민대중(農民大衆)에게 보급(普及)식하라!그래서『장』연구회(硏究會)의본래(本來)의사명(使命)을다하기를바란다(종(終))&lt;br /&gt;
&lt;br /&gt;
=='''주요 내용 요약'''==&lt;br /&gt;
배경: 조선에 수입된 야구, 축구, 유도 등 서양식 운동 경기는 학교 중심, 도시 중심으로 발전하며 '상품화'되었고, 농민 등 대중에게 적합하지 않은 것이다.&lt;br /&gt;
&lt;br /&gt;
'장치기'의 가치: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 **'조선적 운동'**을 창출하려는 노력으로 경성에서는 중앙체육연구소가, 대구에서는 '장' 연구회가 생긴 것이다. '장'은 조선의 국기(國技) 중 하나로, 농민의 손에서 전해 내려온 것이다. 생리학적으로 전신 균형 활동이 가능하고, 경제적으로 기구가 필요 없어 비용이 들지 않으며, 논바닥이나 밭에서도 가능하여 농민 본위의 운동이라고 한다. 계절을 타지 않고 농한기에 육체 단련에 매우 적합하며, 경기 용어까지 순 조선말을 사용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연구회의 사명: 연구회 동인들에게 '장치기'를 국기로 추장(추천)하여 세계에 선전하는 것도 좋지만, 먼저 이 국기를 지켜온 농민들에게 조직적으로 보급하여 '조선 농민의 경기'를 만들고 나아가 세계 농민 대중에게 보급해야 한다는 사명을 부여하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분석 및 특징'''==&lt;br /&gt;
민족주의적 시각: 서구 문물인 스포츠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한국의 전통 운동인 '장치기'의 토착적, 민족적 가치를 재조명하려는 의도가 뚜렷한 것이다.&lt;br /&gt;
&lt;br /&gt;
대중성/실용성 강조: '장치기'의 장점을 경제적 부담 없음, 장소 제약 없음, 계절 제약 없음, 쉬운 용어 등 농민 대중에게 적합한 실용성에 초점을 맞춰 설명하고 있다.&lt;br /&gt;
&lt;br /&gt;
'마네킹' 비유: 현대 교육 제도가 배출하는 스포츠맨을 '떼파-트 진열장의 마네킹'에 비유하며, 당시 상업화된 교육 및 스포츠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드러내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노신추도문(魯迅追悼文)'''=&lt;br /&gt;
(일(一))&lt;br /&gt;
&lt;br /&gt;
이(李) 육(陸) 사(史)&lt;br /&gt;
&lt;br /&gt;
『아(阿)Q정전(正傳)』의 작자(作者)로서 세계적작가(世界的作家)이며 중국신문학(中國新文學)의 최고봉(最高峰)인 노신(魯迅)이지난십구일(十九日) 오전오시(午前五時)에상해(上海)에서 숙아(宿疴)로 영면(永眠)하엿다는 실음(實音)이전(傳)한지 삼일(三日)되는날에 우리는 간단(簡單)한일문(一文)을 비러 삼가추도(追悼)의뜻을 표(表)하거니와 만년(晩年)에그의 정치적불우(政治的不遇)로인(因)하야 문학자(文學者)로서의 성명(聲名)조차가 우리에게 널니퍼지지못한것을 더유감(遺憾)으로생각한다.　　　　 (일(一) 기(記) 자(者))&lt;br /&gt;
&lt;br /&gt;
일구삼이연육월초(一九三二年六月初) 어느토요일(土曜日)아츰이엿다 식관(食舘)에서나온 나와M은 네거리의 담배가가에서조간신문(朝刊新聞)을 사서들고 근육신경(筋肉神經)이떨니도록 굴근활자(活字)를 함숨에나려읽은것은 당시중국과학원부주석(當時中國科學院副主席)이요 민국혁명(民國革命)의 원로(元老)이든양행불(楊杏佛)이 남의사원(藍衣社員)에게 암살(暗殺)을당(當)하엿다는 기사(記事)이엿다.&lt;br /&gt;
&lt;br /&gt;
우리들은 거리마다 삼엄(森嚴)하게늘어선 불란서공무국(佛蘭西工務局) 순경(巡警)들의예리(銳利)한눈초리를 등으로하나 갓득늣기면서 여반로(侶伴路)의 서국(書局)까지을동안은 침묵(沈默)이 계속(繼續)되엿다&lt;br /&gt;
&lt;br /&gt;
문(門)안에 들어서자마자 편집원(編輯員)R씨(氏)는 우리들에게 다음과가튼말을 들여주엇다.&lt;br /&gt;
&lt;br /&gt;
중국좌익작가연맹(中國左翼作家聯盟)의 발안(發案)에의(依)하야 전세계(全世界)의 진보적(進步的)인 학자(學者)와 작가(作家)들이 상해(上海)에모혀서중국(中國)의 문화(文化)를 옹호(擁護)할대회(大會)를그해팔월(八月)에 갓게 된다는것과이에 불안(不安)을 늣기는 국민당통치자(國民黨統治者)들이 먼저 진보적작가진영(進步的作家陣營)의 중요분자(重要分子)인 반재년(潘梓年)(현재남경유폐(現在南京幽廢))과 인제는 고인(故人)이된 여류작가(女流作家) 정영(丁玲)을 체포(逮捕)하여행방(行方)을 불명(不明)케한것이며 여기동정(同情)을 가지는 송경령여사(宋慶齡女史)를 중심(中心)으로한 일련(一聯)의 자유주의자(自由主義者)들과 작가연맹(作家聯盟)이 맹렬(猛烈)한 구명운동(救命運動)을한사실(事實)이며 그것이 국민당통치자(國民黨統治者)들의 눈쌀에 거슬려서 양행불(楊杏彿)이 희생(犧牲) 된것과 그외(外)에도 송경령(宋慶齡) 채원(蔡元) 배(培) 노신등등(魯迅等等) 상해(上海)안에서만삼(三) 십명(十名)에갓가운 지명지사(知名之士)들이 남(藍) 의사(衣社)의『뿔랙·리스트』에 올라잇 다는것이엿다.&lt;br /&gt;
&lt;br /&gt;
그리고 그뒤삼일(三日)이 지난후(後)R씨(氏)와 내가탄자동차(自動車)는 만국빈의사(萬國殯儀社)아페다엇다,간단(簡單)한 소향(燒香)의예(禮)가 끗나고도라설때 젊은두여자(女子)의수원(隨員)과함게드러오는송경령여사(宋慶齡女史)의일행(一行)과가티 연회색(軟灰色)두루막에 검은『마괘아(馬掛兒)』을 입은중년(中年)늙은이생화(生化)에 싸인관(棺)을 붓들고 통곡(痛哭)을하든그를 나는문득 노신(魯迅)인것을알엇스며 엽헤섯든 R씨(氏)도 그가노신(魯迅)이란것을 말하고난 십분(十分)쯤뒤에 R씨(氏)는나를 노신(魯迅)에게소개(紹介)하여주엇다&lt;br /&gt;
&lt;br /&gt;
그때노신(魯迅)은 R씨(氏)로부터 내가조선청년(朝鮮靑年)이란것과 늘한번대면(對面)의기회(機會)를가지려고 햇드란말을듯고외국(外國)의선배(先輩)압히며 처소(處所)가 처소(處所)인만치 다만 근신(謹愼)과공손(恭遜)할뿐인나의손을 다시한번 잡아줄때는그는매우 익숙하고 친절(親切)한친구이엿다&lt;br /&gt;
&lt;br /&gt;
아!그가벌서 오십육세(五十六歲)를일기(一期)로 상해시고탑구호(上海施高塔九號)에서 영서(永逝)하엿다는 부보(訃報)를바들때에 암연(暗然)한줄기 눈물을지우느니 엇지조선(朝鮮)의 한사람후배(後輩)로써 이붓을잡는나뿐이랴&lt;br /&gt;
&lt;br /&gt;
(이(二))&lt;br /&gt;
&lt;br /&gt;
이육사(李陸史)&lt;br /&gt;
&lt;br /&gt;
중국문학사상(中國文學史上)에남긴 그의 위치(位置)『아(阿)Q의 정전(正傳)을 다읽고낫슬때나는 아즉까지 아(阿)Q의 운명(運命)이걱정되여 못견듸겟다』고한『로망·로—랑』의 말과가티 현대중국문학(現代中國文學)의 아버지인 노신(魯迅)을&lt;br /&gt;
&lt;br /&gt;
이해(理解)하기 위(爲)해서는 우리는 먼저 아(阿)Q의 정전(正傳)을 이해(理解)하지안흐면 안된다 그러나 지금의 중국(中國)의 아(阿)Q들은 벌서『로망·로—라』으로하야금 그운명(運命)을 걱정할 필요(必要)는 업시되엿다실(實)로 수만흔 아(阿)Q들은 벌서 자신(自身)들의 운명(運命)을 열어갈길을노신(魯迅)에게서배웟다 그래서중국(中國)의 모든근로층(勤勞層)들은 남경로(南京路)의『아스필트』가자신(自身)들의 발미테 흔들리는것을늣기며 시고탑로신촌(施高塔路新邨)의구호(九號)로그들이가젓든 위대(偉大)한문호(文豪)의최후(最後)를애도(哀悼)하는마음들은 황포탄(黃浦灘)의붉은파도(波濤)와가티 밀려가고잇는것이다&lt;br /&gt;
&lt;br /&gt;
그럼으로 아(阿)Q시대(時代)를 고찰(考察)하여보는데따라서 노신정신(魯迅精神)의 삼단적변천(三段的變遷)과아울러 현대중국문학(現代中國文學)의 발전과정(發展過程)을 알어보는것도그를추억(追憶)하는의미(意味)에서 그다지 허무(虛無)한 일은아닐것이다,&lt;br /&gt;
&lt;br /&gt;
중국(中國)에는 고래(古來)로 소설(小說)이라는오늘날우리가 보는것과가튼 완전(完全)한예술적형태(藝術的形態)는 존재(存在)하지못햇다 삼국연의(三國演義)나 수호지(水滸誌)가아니면홍루몽(紅樓夢)쯤이잇섯고 다소(多少)의전기(傳記)가잇섯을뿐으로서 일반교양(一般敎養)잇는집자제(子弟)들은 과거제도(科擧制度)에 화(禍)를바더문어체(文語體)의&lt;br /&gt;
&lt;br /&gt;
고(古)&lt;br /&gt;
&lt;br /&gt;
문(文)만숭상(崇尙)하고백화소설(白話小說)가튼것은속인(俗人)의할일이라햐야나치아는하편소위문단(所謂文壇)은당송팔가(唐宋八家)와팔반(八般)의혼합체(混合體)인상성파(相城派)와사기당(思綺堂)과 원수원(袁隨園)의유파(流派)를따라가는 사륙변체문(四六騈體文)과황산곡(黃山谷)을본존(本尊)으로하는 강서파등등(江西派等等)이 당시정통파(當時正統派)의문학(文學)으로서 과장(誇張)과 허위(虛偽)와 아유(阿諛)로서 고전문학(古典文學)을 모방(模倣)한데지나지못하엿스며 새로운사회(社會)를 창생(創生)할하등(何等)의 힘도가지지못한것은 미루어알기도 어렵지안흔 분위기(雰圍氣)속에 중국문학사상(中國文學史上)에 찬연(燦然)한봉화(烽火)가 일어난것은일구일오년(一九一五年) 잡지(雜誌)『신청년(新靑年)』의 창간(創刊)이그것이다&lt;br /&gt;
&lt;br /&gt;
이것이처음발간(發刊)되자 당시(當時)『아메리카』에잇든호적지박토(胡適之博土)는『문학개량추의(文學改良蒭議)』라는『문학혁명론(文學革命論)』을일구일칠년신연호(一九一七年新年號)에 게재(揭載)하야진독수(陳獨秀)가 이에찬의(賛意)를표(表)하고 북경대학(北京大學)을 중심(中心)으로한 진보적(進步的)인교수(敎授)들이 합류(合流)하게되자 종래(從來)의고문가(古文家)들은 이운동(運動)을방해(防害)코저 가진야비(野卑)한 정치적수단(政治的手段)을 써도보앗스나 일구팔년사월호(一九八年四月號)에 노신(魯迅)의『광인일기(狂人日記)』란 백화소설(白話小說)이&lt;br /&gt;
&lt;br /&gt;
발(發)&lt;br /&gt;
&lt;br /&gt;
표(表)되엿슬때는 문학혁명운동(文學革命運動)은 실천(實踐)의거대보무(巨大步武)를옴기게되고 벌서고문가(古文家)들은 그추악(醜惡)한꼬라를 감주지안흐면안되엿다는것은 그후(後)얼마뒤에 노신(魯迅)이광동(廣東)에갓슬때에어&lt;br /&gt;
&lt;br /&gt;
떤흥분(興奮)한청년(靑年)은 그를마지하는문장(文章)속에『광인일기(狂人日記)』를 처음읽엇슬때 문학(文學)이란것이 무엇인지몰랏든나는 차차읽어나려가면서이상(異常)한흥분(興奮)을 늣겻다 그래서 동무를만나기만하면 곳붓들고말하기를——중국(中國)의문학(文學)은 이제바야흐로 한시대(時代)를 짓고잇다 그대는『광인일기(狂人日記)』를 읽어보앗는가 또거리를거러가면 길가는사람이라도붓들고 내의견(意見)을발표(發表)하리라고생각한적도잇섯다……』(노신재광동(魯迅在廣東))&lt;br /&gt;
&lt;br /&gt;
이문제(問題)의소설(小說)『광인일기(狂人日記)』의내용(內容)은 한개망상광(妄想狂)의 일기체(日記體)의소설(小說)로서 이주인공(主人公)은 실(實)로대담(大膽)하게또명확(明確)하게 봉건적(封建的)인 중국구사회(中國舊社會)의 악폐(惡弊)를통매(痛罵)한다 자기(自己)의 이웃사람은 물론(勿論)말할것도업고 특(特)히자기가정(自己家庭)을 격렬(激烈)히 공격(攻擊)하는것이다 가정(家庭)—가족제도(家族制度)라는것이중국봉건사회(中國封建社會)의 사회적단위(社會的單位)로서일반(一般)에열마나한 해독(害毒)을끼처왓는가.봉건적가족제도(封建的家族制度)는 고형화(固型化)한유교류(儒敎流)의&lt;br /&gt;
&lt;br /&gt;
종(宗)&lt;br /&gt;
&lt;br /&gt;
법사회관념하(法社會觀念下)에 당연(當然)히붕괴(崩壞)돠여야할것이면서 붕괴(崩壞)되지못하고 근대적사회(近代的社會)의성장(成長)에 가장근본적(根本的)인 장애(障碍)로되여잇는 날근도덕(道德)과 인습(因襲)을 여지(餘地)업시 통매(痛罵)햇다,이에『광인일기(狂人日記)』중(中)에 한절(節)을 초(抄)하면『나 는 역사(歷史)를 뒤적거려 보앗다 역사(歷史)란건 어느시대(時代)에나 인의(仁義) 도덕(道德)이란몃줄로 치더치덕씨여 저잇섯다 나는 밤잠도안자고 딍굴딍굴러가며 생각하여보 앗스나 겨우글자와 글자사이 에서『사람을먹는다』는 몃자 가쓰여잇섯슬뿐이엿다』&lt;br /&gt;
&lt;br /&gt;
이가티추악(醜惡)한 사회면(社會面)을폭로(暴露)한다음 오는시대(時代)의건설(建設)은 젊은사람들의손에 맛걱저야한다는것을암시(暗示)하면서 이소설(小說)의일편(一篇)은『어린이를구(救)하자』는 말로서끗을막엇다.실(實)로이한말은 당시(當時)의『어린이』인 중국청년(中國靑年)들에게는 사상적(思想的)으로는『폭탄선언(暴彈宣言)』이상(以上)으로 충격(衝擊)을주엇스며이러한작품(作品)이 백화(白話)로쓰여지는데 따라 문학혁명(文學革命)이완전(完全)히승리(勝利)의 개가(凱歌)를 부르게된공적(功績)도 태반(太半)은노신(魯迅)에 돌려야하는것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삼(三))&lt;br /&gt;
&lt;br /&gt;
이육사(李陸史)&lt;br /&gt;
&lt;br /&gt;
『광인일기(狂人日氣)』의다음 연속(連續)해나온작품(作品)으로『공을사(孔乙巳)』『약(藥)』『명일(明日)』『일개소사건(一個小事件)』『두발적고사(頭髮的故事)』『풍파(風波)』『고향(故鄕)』등(等)은모다 신청년(新靑年)을통(通)해서세상(世上)에물의(物議)를 이르켯스나 그후일구이일년(後一九二一年) 북경신보문학부간(北京新報文學副刊)에그유명(有名)한『아(阿)Q정전(正傳)』이 연재(連載)되면서부터는 노신(魯迅)은자타(自他)가공인(共認)하는 문단제일인적작가(文壇第一人的作家)엿다.&lt;br /&gt;
&lt;br /&gt;
그리고 이러한대작(大作)은 모다신해혁명전후(辛亥革命前後)의&lt;br /&gt;
&lt;br /&gt;
봉(封)&lt;br /&gt;
&lt;br /&gt;
건사회(建社會)의생활(生活)을 그린것으로 어떠케필연적(必然的)으로 붕괴(崩壞)하지안흐면안될 특징(特徵)을가젓는가를묘사(描寫)하고 어떠케새로운사회(社會)를 살어갈가를 암시(暗示)하고잇다.뿐만아니라 당시(當時)의혁명(革命)과 혁명적(革命的)인사조(思潮)가 민중(民衆)의심리(心理)에 생활(生活)의『데테일슨』에 어떠케표현(表現)되는가를 가장『레알』하게묘사(描寫)한것이다.더구나 그는 농민작가(農民作家)라고할만치 농민생활(農民生活)을그리는데 교묘(巧妙)하다는것도 한가지조건(條件)이되겟지만은 그의소설(小說)에는주장(主張)이개념(槪念)에 흐른다거나 조금도무리(無理)가업는것은 그의작가적수완(作家的手腕)이 탁월(卓越)하다는것을 말하지안홀수업다.&lt;br /&gt;
&lt;br /&gt;
그리고 그의작품(作品)은 늘 농민(農民)을주인공(主人公)으로하는것과 때로는『인테리』일지라도 예(例)를들면『공을사(孔乙巳)』의 공을사(孔乙巳)나『아(阿)Q정전(正傳)』의아(阿)Q가모다 일맥(一脈)이상통(相通)하는 성격(性格)을가지는것이니 공을사(孔乙巳)는 구시대(舊時代)의지식인(知識人)으로 시대(時代)에떠러저서 무슨일에도 쓰여지지못하고기품(氣品)만은노펏스나 생활력(生活力)은업고걸인(乞人)이되야 선술집술상대(臺)에 일금십구조(一金十九吊)의주채(酒債)가 어느때까지쓰여저잇는대로 언제인지&lt;br /&gt;
&lt;br /&gt;
행(行)&lt;br /&gt;
&lt;br /&gt;
방(方)이 불명(不明)된채로 나중에죽어젓든것이라든지『룸펜』농민(農民)인 일용노동자아(日傭勞働者阿)Q가 또한 쑥스러운년석으로혁명혁명(革命革命)떠들어놋코는 그것이몹시유쾌해서 반취(半醉)한기분(氣分)이 폭동대(暴動隊)의일군(一群)에 참가(參加)는하려고하엿스나 결국(結局)헛풍만치고 아무것도못하다다가 때마츰 일어난 폭도(暴徒)의약탈사건(掠奪事件)에 도당(徒黨)으로오해(誤解)되여(피(彼)의평소(平素)삼가지못한 언동(言動)에의(依)하야)피살(被殺)되는 아(阿)Q의성격(性格)은 그때중국(中國)의 누구라도가 전부혹(全部或)은일부분식(一部分式)은 소유(所有)하고잇섯든것이다다시말하면 아(阿)Q나공을사(孔乙巳)가모다사고(思考)와행동(行動)이 루—즈하고 확호(確乎)한한개의 정신(精神)도업스며 우약(愚弱)하면서도 몹시건방지고 남에게한개쥐여질리면 아무런반항(反抗)도못하면서 남이자신(自身)을 연민(憐憫)하면 제도량(度量)이커서 남이못덤비는것이라고제대로도취(陶醉)하야 남을 되는대로해(害)치는 무지(無知)하고우수면서도 가엽고 괴팩스러운것을 노신(魯迅)은그『레알리스틕』한문장(文章)으로폭로(暴露)한것이 특징(特徵)이엿스니 당시(當時)『아(阿)Q정전(正傳)』이발표(發表)될때&lt;br /&gt;
&lt;br /&gt;
평(平)&lt;br /&gt;
&lt;br /&gt;
소노신(素魯迅)과 교분(交分)이좃치못한사람들은 모다자기(自己)를모—델로 고의(故意)로쓴것이라고들 떠드는자(者)가잇은것을 보아도알수가잇는것이다&lt;br /&gt;
&lt;br /&gt;
그래서당시중국(當時中國)은 시대적(時代的)으로『아(阿)Q시대(時代)』이엿스며 노신(魯迅)의『아(阿)Q정전(正傳)』이 발표(發表)될때는 비평계(批評界)를비롯하야 일반지식군(一般知識群)들은『아(阿)Q상(相)』이라거나『아(阿)Q시대(時代)』라는말을평상대화(平常對話)에사용(使用)하기를 항다반(恒茶飯)으로하게된것은 중국문학사상(中國文學史上)에남겨노흔노신(魯迅)의 위치(位置)를 짐작하기에 조흔 한개의재료(材料)이거니와그의작가(作家)로서의 태도(態度)를통(通)하야 일관(一貫)하여잇는 노신정신(魯迅精神)을 다시한번음미(吟味)해보는데 적지안흔흥미(興味)를갓게된다는것은 오늘날우리의조선문단(朝鮮文壇)에는 누구나할것업시 예술(藝術)과정치(政治)의 혼동(混同)이니 분립(分立)이니하야 문제(問題)가엇지보면 결말(决末)이난듯도하고 어찌보면 미해결(未解决)그대로 잇는듯도한 현상(現狀)인데 노신(魯迅)가티 자기신념(自己信念)이 구든사람은이예술(藝術)과정치(政治)란것을 어떠케해결(解决)하엿는가?이문제(問題)는 그의작가(作家)로서의 출발점(出發點)부터 구명(究明)해야한다.&lt;br /&gt;
&lt;br /&gt;
노신(魯迅)은&lt;br /&gt;
&lt;br /&gt;
본(本)&lt;br /&gt;
&lt;br /&gt;
내의사(來醫師)가 되려고하엿다 그것은자기(自己)의『할일』이 무엇이라는것을 알엇기때문이엇다 물론(勿論)그때의 자기(自己)의『할일』이란것은 민족개량(民族改良)이라는 신념(信念)이엿든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후년(後年)『납함(吶喊)』서문(序文)에 다음가티써다.&lt;br /&gt;
&lt;br /&gt;
『나의학적(學籍)은 일본(日本)어느 지방(地方)의 의학전문학교(醫學專門學校)에 두엇다 나의 꿈은 이것으로 매우 아름답 고 만족(滿足)햇다 졸업(卒業)만하고 고(故) 국(國)에 도라오면 아버지와가티 치료(治療)못하는 병인(病人)을살리고 전(戰) 쟁(爭)이나면 출정(出征)도하려니와 국(國) 인(人)의 유신(維新)에대(對)한 신앙(信仰)에까지 나어갈것……』이라고&lt;br /&gt;
&lt;br /&gt;
이것은물론(勿論) 소년(少年)다운노신(魯迅)의로맨틕한 인도주의적흥분(人道主義的興奮)이엿겟지만은 이꿈도결국(結局)은 깨여지고말엇다.&lt;br /&gt;
&lt;br /&gt;
——의학(醫學)은결(决)코 긴요(緊要)하지안타 우약(愚弱)한 국민(國民)은 체격(體格)이 아모 리 조타고해도 또 아모리강(强) 장(壯)해도 무의미(無意味)한 구경거리나 또는 구경군이 되는박게는아 무것도아니다—중략(中略)—그럼으로 긴요(緊要)한것은 그들을 정신적(精神的)으 로 잘개조(改造)할것은 무엇일가나 는그때당연(當然) 문예(文藝)라고생각햇다 그리고 문예운동(文藝運動)을 제창(提唱)하기 로햇다(납함서문(吶喊序文))&lt;br /&gt;
&lt;br /&gt;
이리하야 그가 당시동경(當時東京)에망명(亡命)해잇는 중국(中國)사람들의 기관지(機關紙)인『절강조(浙江潮)』『하남(河南)』등(等)에 쓰든과학사(科學史)나 진화론(進化論)의 해설(解說)을 집어치우고 문학서적(文學書籍)을 번역(飜譯)한것은희랍(希臘)의 독립운동(獨立運動)을 원조(援助)한『빠이론』과 파란(波蘭)의복수시인(復讐詩人)『아담·미케뷧치』『향가리』의 애국시인(愛國詩人)『베트피·산더—』『필립핀』의문인(文人)으로 서반아정부(西班牙政府)에 사형(死刑)바는『리샬』등(等)의 작품(作品)이엿다.&lt;br /&gt;
&lt;br /&gt;
(사(四))&lt;br /&gt;
&lt;br /&gt;
이육사(李陸史)&lt;br /&gt;
&lt;br /&gt;
그리고이것은 노신(魯迅)의 문학행정(文學行程)에잇서서 가장초기(初期)에 속(屬)하는것이지만은 이러한번역(飜譯)까지라도그의 일정(一定)한목적(目的) 즉정치적목적(即政治的目的)미테 수행(遂行)된것을 엿볼수잇는것이며 우에말한『광인일기(狂人日記)』의『어린이를구(救)하자』는말도 순결(純潔)한 청년(靑年)들에의(依)하야 새로운중국(中國)을 건설(建設)하자는 그의이상(理想)을&lt;br /&gt;
&lt;br /&gt;
단적(端的)으로 고백(告白)한것으로써 이말은당시일반청년(當時一般靑年)들에게 무거운 책임감(責任感)을깨닷게한것은물론(勿論) 이래기천년(爾來幾千年)동안의 봉건사회(封建社會)로부터 청년(靑年)을해방(解放)하랴는 슬로—간으로 널리쓰여젓고 사실(事實)그뒤의 중국청년학생(中國靑年學生)들은 모든대중적사회운동(大衆的社會運動)의최전선(最戰線)에서 활발과감(活潑果敢)한 지도(指導)와조직(組織)을하엿스며 그유명(有名)한 오사운동(五四運動)이나 오주운동(五州運動)이나 국민혁명(國民革命)까지도 늘최전선(最前線)에서서 대중(大衆)을지도(指導)한것은 이들청년학생(靑年學生)이엿다&lt;br /&gt;
&lt;br /&gt;
그럼으로 노신(魯迅)에잇서서는 예술(藝術)은정치(政治)의 노예(奴隸)가 아닐뿐아니라 적어도예술(藝術)이 정치(政治)의 선구자(先驅者)인 동시(同時)에혼동(混同)도 분립(分立)도아닌즉(即) 우수(優秀)한작품(作品) 진보적(進步的)인 작품(作品)을 산출(產出)하는데만 문호(文豪) 노신(魯迅)의지위(地位)는노퍼갓고 아(阿)Q도 여기서비로소탄생(誕生)하엿스며 일세(一世)의 비평가(批評家)를도 감(敢)히 그에게는 함부로 머리를 들지못하엿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여기에 한가지 조흔예(例)가잇다 일구이팔년경(一九二八年頃) 무한(武漢)을쪼겨와서 상해(上海)에서 태양사(太陽社)를조직(組織)한 청년비평가(青年批評家) 전행촌(錢杏村)이 때마춤 푸로문학론(文學論)이 드셀때인만큼 노신(魯迅)을 대담(大膽)하게&lt;br /&gt;
&lt;br /&gt;
공격(攻擊)을 시작(始作)해보앗다그소론(所論)에 의(依)하면노신(魯迅)의 작품(作品)은 비계급적(非階級的)이다 아(阿)Q에게어데 계급성(階級性)이잇느냐는것이다.&lt;br /&gt;
&lt;br /&gt;
물론(勿論)그것은 정당(正當)한말이다,노신(魯迅)의작품(作品)에서 우리는눈딱고보아도 푸로레타리아적특성(的特性)은 조금도 볼수가 업는것은 사실(事實)이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우리가 한사람의작품(作品)을 비평(批評)할때는 그시대적배경(時代的背景)을고려(考慮)하지안흘수는업는것이니 노신(魯迅)이작가(作家)로활동(活動)을 하고잇슬때는중국(中國)에는 오늘날우리가 정의(定義)를나릴수잇는 푸로레타리아는 업슬뿐아니라 그때쯤은 뿌르조아민주주의적(民主主義的)인 정치사조(政治思潮)조차도아즉계선(界線)이분명(分明)하지못하엿다는것은뿌르조아혁명(革命)이라는 소위국민혁명(所謂國民革命)도 정직(正直)하게말하자면 사오운동(四五運動)을 전초전(前哨戰)으로한것만큼 여기서 역시중국(亦是中國)의 비상가(批詳家)인병신(丙申)은자미잇는말을하고잇다&lt;br /&gt;
&lt;br /&gt;
『그가현재(現在) 중국좌익작가연맹(中國左翼作家聯盟)을지지(支持)하고잇다해서 그의『사오(四五)』전후(前後)의&lt;br /&gt;
&lt;br /&gt;
작품(作品)을 푸로문학(文學)이라고 지목(指目)할것은아니&lt;br /&gt;
&lt;br /&gt;
다 그러나 그를우수(優秀)한 농민작가(農民作家)라고 하는것이 타당(妥當)타고—』그러타 이말은 어느정도(程度)까지&lt;br /&gt;
&lt;br /&gt;
정당(正當)에 가까운말로서 그를푸로작가(作家)가아니고 농민작가(農民作家)라고해서작가노신(作家魯迅)의 명예(名譽)를 더럽힐조건(條件)은 되지못하는것이다 다만문제(問題)는 그가얼마나 창작(創作)에 잇서서진실(眞實)하게 명확(明確)하게 묘사(描寫)하는태도(態度)를 가지는가 그의한말을 써보기로하자&lt;br /&gt;
&lt;br /&gt;
『——현재(現在) 좌익작가(左翼作家)는 훌륭한자신(自身)들의 문학(文學)을 쓸수잇슬가?생각컨대 이것은 매우곤란(困難)하다.현재(現在)의 이런 부류(部類)의 작가(作家)들은 모다『인테리』다 그들은 현실(現實)의 진실(眞實)한 정형(情形)은쓸려고해도 용이(容易)치안타 어떤사람이 일즉 이런 문제(問題)를제출(提出)한것이잇섯다『작가(作家)가 묘사(描寫)하는것은 반드시 자기(自己)가 경험(經驗)한것이라야만될것인가?그러나 그는 스스로 답(答)하기를반드시 안그래도조타웨러러냐하면 그들은 잘 추찰(推察)할수가잇스므로 절도(窃盜)하는장면(塲面)을 묘사(描寫)하랴면 작가(作家)는 반드시 자신(自身)이 절도(窃盜)질할 필요(必要)도업고 간통(姦通)하는&lt;br /&gt;
&lt;br /&gt;
장면(塲面)을 묘사(描寫)할 필요(必要)를늣길때 작가(作家) 자신(自身)이간통(姦通)할 필요(必要)도 업다고』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작가(作家)가 구사회(舊社會)속에서 생장(生長)해서그 사회(社會)의 모든 일을 잘알고 그사회(社會)의 인간(人間)들에게 익숙해저서 잇는때문에 추찰(推察)이되는것이다 그러나 종래(從來)아무런 관계(關係)도업는새사회(社會)의 정형(情形)과인물(人物)에 대(對)해서는 작가(作家)가무능(無能)하다면 아마그릇된 묘사(描寫)를할것이다 그럼으로 푸로문학가(文學家)는 반드시 참된현실(現實)과 생명(生命)을 가티하고 혹(或)은 보다기피현실(現實)의맥박(脈搏)을 감수(感受)하지안흐면 안된다고하면서 또다시말을 계속(繼續)하는것이다.&lt;br /&gt;
&lt;br /&gt;
그러나구사회(舊社會)를 조그만치공격(攻擊)하는작품(作品)일지라도 만약(萬若)그결점(缺點)을 분명(分明)히모르고 그병근(病根)을투철(透澈)히파악(把握)치못하면 그것은유해(有害)할뿐이다 애석한일이나마현재(現在)의푸로작가(作家)들은 비평가(批評家)까지도 왕왕(往往) 그것을못한다 혹사회(或社會)를 정시(正視)해서 그진상(眞相)을 알려고도안코 그중(中)에는 상대자(相對者)라고 생각하는편의 실정(實情)도알려고하지안는다.&lt;br /&gt;
&lt;br /&gt;
(오(五))&lt;br /&gt;
&lt;br /&gt;
이육사(李陸史)&lt;br /&gt;
&lt;br /&gt;
차근(車近)한 예(例)로는 얼마전 모지상(某紙上)에 중국문학계(中國文學界)를 비평(批評)한문장(文章)을 한편(篇)보앗는데 중국문학계(中國文學界)를 삼파(三派)에 난워서 먼저창조파(創造派)를 들어 푸로파(派)라하야매우상세(詳細)하게 논급(論及)하고 다음어사사(語絲社)를 소(小)뿌르파(派)라고 조그만치 말한후(後)&lt;br /&gt;
&lt;br /&gt;
신월사(新月社)를 뿌르문학파(文學派)라 해서 겨우 붓 을 대다가만 젊은비평가(批評家)가잇 섯다 이것은 젊은기질(氣質)의 상(相) 대자(對者)라고 생각는파(派)에 대(對)해서 는 무어세(細)□□□고구(考究)할필요(必要)가 업다는뜻을 표명(表明)한것이다 물(勿) 논(論)우리는 서적(書籍)을볼때 상대자(相對者) 의것을 보는것은 동파(同派)의것을 보는안심(安心)과 유쾌(愉快)와 유익(有益)한데 밋치지 못하는것은 사실(事實)이다 그러나 만약(萬若) 일개전투자(一個戰鬪者)라면 나는 생각컨대 현실(現實)과 상대(相對) 자(者)를 이해(理解)하는 편의상(便宜上) 보담 만은 당면(當面)의 상대자(相對者)에 대(對)한 해부(解剖)를 필요(必要)로 하지안으면안 될것이다.옛것을 분명(分明)히 알 고 새로운것에 간도(看到)하고 과(過) 거(去)를 요해(了解)하야 장래(將來)를 추단(推斷) 하는데서만 우리들의 문학적(文學的) 발전(發展)은 희망(希望)이잇다 생각건대 이것만은 현재(現在)와 가튼 환경(環境) 에잇는 작가(作家)들은 부단(不斷)히 노(努) 역(力)할것이고 그래야만 참된작(作) 품(品)이 나오는것이다』라 고&lt;br /&gt;
&lt;br /&gt;
이간단(簡單)한 몃마듸만히 문호노신(文豪魯迅)의 창작(創作)에 대(對)한『모랄』인것이다 이얼마나 우리의 뼈에 사무치고도 남을만한시사(示唆)인고!이리해서&lt;br /&gt;
&lt;br /&gt;
현대중국문단(現代中國文壇)의부(父)이며비평가(批評家)의비평(批評)으로서자타(自他)가 그지위(地位)를 함께긍정(肯定)하든그의작가(作家)로서의 생애(生涯)는 너무나쩔으것이엿스니 일구이육연삼월(一九二六年三月)『이혼(離婚)』이란작품(作品)을 최후(最後)로남긴그는 교수(敎授)로서 작가(作家)로서의 화려(華麗)한 생애(生涯)는 종언(終焉)을고(告)하지 안흐면안될때가왓다 그는 지금부터『손으로쓰기보다는 발로 다라나기가 더밧벗다』&lt;br /&gt;
&lt;br /&gt;
일구이육년(一九二六年) 북양군벌(北洋軍閥)을 배경(背景)오로한 안복파(安福派)의수령(首領) 단기서(段祺瑞)의정부(政府)는 급진적(急進的)인좌파(左派)의 교수(敎授)와우수(優秀)한 지식분자오십여명(知識分子五十餘名) 체포령(逮捕令)을 나렷다 우리노신(魯迅)은 이오십명중(五十名中)의 한사람이엿다 그것은일구이사년(一九二四年) 국민당(國民黨)의 연아용공책(聯俄容共策)이 결정(决定)되야그익년(翌年)가을『뽀로된』등(等)이고문(顧問)으로광동(廣東)에오고『전국민적공동전선(全國民的共同戰線)』이엿든 국민혁명(國民革命)의제일계단(第一階段)인 광동시기(廣東時期)에는 푸로레타라아의 동맹자(同盟者)는 농민도시빈민(農民都市貧民) 소(小)뿌로지식계급(知識階級) 국민적(國民的)뿌르조아지—엿다』&lt;br /&gt;
&lt;br /&gt;
그래서 급진교수(急進敎授)들은 교육부총장(敎育部總長) 군벌정부(軍閥政府)를 육박(肉迫)하엿스며이러한&lt;br /&gt;
&lt;br /&gt;
신흥세력(新興勢力)에 낭패(狼狽)와공포(恐布)를 늣긴군벌정부(軍閥政府)는 이러한교수(敎授)들과 학생(學生)들에게체포령(逮捕令)을나리고 학생(學生)들의행렬(行列)은정부위병(政府衛兵)들의 발포(發砲)로인(因)하야 남여수백여명(男女數百餘名)의 사상자(死傷者)가낫다 그때노신(魯迅)은 북경동교민항(北京東交民巷)의 공사관구역(公使舘區域)의 외국인병원(外國人病院)이나 공장(工塲)안으로 도라단이며 찬물로기아(飢餓)를 참아가면서도 신문(新聞)과 잡지(雜誌)에 기고(寄稿)를하야 군벌정부(軍閥政府)를 맹렬(猛烈)히 공격(攻擊)하얏다 그중(中)에도『국민이래(國民以來) 최암흑일(最暗黑日)에지(誌)』하엿다는 명문(名文)은 단기서(段祺瑞)로하여금 의자(椅子)에나려안게되엿다&lt;br /&gt;
&lt;br /&gt;
——붓으로쓰헛소리는 피로쓴 사실(事實)을 만착(瞞着)하지못한다——중(中) 약(略)——붓으로쓴것이 무슨힘이 잇스랴 실탄(實彈)을쏘는것은 오즉 청년(靑年)의피다(속화개집(續華盖集))&lt;br /&gt;
&lt;br /&gt;
오늘날까지 중국문단(中國文壇)의『막심콜키—』이든그는 지금부터는문화(文化)의전사(戰士)로서『앙리·발뷰스』보다비장(悲壯)한생애(生涯)가 시작(始作)되는것이엿다&lt;br /&gt;
&lt;br /&gt;
그의말과가티&lt;br /&gt;
&lt;br /&gt;
최청흑(最晴黑)한오십일(五十日)이지나고 그는북경(北京)을탈출(脫出)햇다 하문대학(夏門大學)에 초청(招請)을바□갓으나 대학기업가(大學企業家)의 음흉수(陰凶手)것인것을 안그는광동중산대학(廣東中山大學)으로갓다 그러나 일구이육년사월십오일(一九二六年四月十五日) 장개석(蔣介石)의쿠—데타—는 광동일성(廣東一省)만 노동자농민급진지식분자삼천여명(勞働者農民急進知識分子三千餘名)을—하엿 으며 한때는『혁명(革命)의전사(戰士)』라고 간판(看板)을지인노신(魯迅)도상해(上海)로 다라나야만 되엿다여기서우리가 다시한번그에게흥미(興味)보다는 최대(最大)의 경의(敬意)를갓게되는것은 다음의일문(一文)이다&lt;br /&gt;
&lt;br /&gt;
——나의 일종망상(一種妄想)은 깨여젓 다 나는지금까지 때때로낙관(樂觀) 을가젓섯다 청년(靑年)을 압박(壓迫)하고 ——하는것은 대개노인(大槪老人)이다이 들노물(老物)들이 다죽어지면 중국(中國) 은보담더 생기(生氣)잇는것이되리라 고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 르치안은것을 알엇다 청년(靑年)을 ——하는것은 대개(大槪)는 청년(靑年)인 듯하다 또달이 재조(再造)할수업는 생명(生命)과 청춘(靑春)에 대(對)해서 한층(層) 더애낌이업시…(이기집(而己集))&lt;br /&gt;
&lt;br /&gt;
이글은그가 침묵(沈默)하고잇는것을『공포(恐怖)』때문이라고 조소(嘲笑)한 사람에게답(答)한 통신문(通信文)의 일절(一節)로서 이때까지&lt;br /&gt;
&lt;br /&gt;
진화론자(進化論者)이든 그자신(自身)의 사상적립장(思想的立塲)을양기(揚棄)하고 새로운 성장(成長)의 일단계(一段階)로보인것이라고 해석(解釋)해도 틀러지안흘것이다.&lt;br /&gt;
&lt;br /&gt;
그가상해(上海)에 왓슬때는 국민당(國民黨)의 쿠—데타—로 혁명군(革命軍)에서쪼겨온 젊은푸로문학자(文學者)가 만엇다『혁명문학론(革命文學論)』이 효효(囂囂)히 불러지고 실제정치행동(實際政治行動)의 전선(前線)을 떠난그들은 총칼대신에 펜을잡엇다,원기왕성(元氣旺盛)하게 실제공작(實際工作)의경험(經驗)에서 매우견실(堅實)한것도 잇섯스나 때로는 자부적(自負的)인 영웅주의(英雄主義)가 화(禍)를끼치고——에실패(失敗)한 분만(憤瞞)과 극좌적(極左的)인 기회주의자(機會主義者)들은노신(魯迅)을 공격(攻擊)햇다 그러나 그는푸로문학(文學)이란 어떤것인가 또는어찌해야 될것인가를 알리기위(爲)하야 아버지가튼 애무(愛撫)로서『푸레하노프』,『루나챨스키—』들의 문학론(文學論)과『싸벳트』의 문예정책(文藝政策)을번역소개(飜譯紹介)하야 중국(中國)푸로문학(文學)을건설(建設)하고잇는동안에『노신(魯迅)을타도(打倒)치안흐면 중국(中國)에푸로문학(文學)은생기지못한다』는 문학소아병자(文學小兒病者)들은 그자신(自身)들이 먼저너머지고 이제그가마자가고말엇다 이위대(偉大)한중국문학가(中國文學家)의영(靈)아페 고요히머리를숙이면서 나의개인적(個人的)으로 곤란(困難)한정형(情形)에의(依)하야 문호노신(文豪魯迅)의윤곽(輪廓)을뚜렷이그리지못함을 참괴(慚愧)히알며붓을놋키로한다 —요(了)—&lt;br /&gt;
&lt;br /&gt;
=='''주요 내용 요약'''==&lt;br /&gt;
추도 배경: 중국 신문학의 최고봉인 루쉰(魯迅)의 서거(1936년 10월 19일)를 추도하며, 작가와의 개인적 인연(1932년 양행불 암살 사건 직후 만국빈의사에서의 만남)을 회상하는 글이다.&lt;br /&gt;
&lt;br /&gt;
문학적 위치 - 아Q 정전: 루쉰 이해의 핵심으로 그의 대표작《아Q정전(阿Q正傳)을 제시하고 있다. '아Q'는 사고와 행동이 나약하고 우매하면서도 건방진, 당시 중국인의 집단적 성격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루쉰은 이 '아Q 상(相)'을 폭로하여 중국 지식 군중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루쉰은 '아Q 시대'를 종식시키고 새로운 중국을 열어갈 길을 제시한 인물로 평가된다.&lt;br /&gt;
&lt;br /&gt;
문학 혁명과 루쉰의 역할: 중국의 고루한 고문학을 비판하고 백화소설(白話小說)을 통해 문학 혁명의 선두에 선 것이다.《광인일기(狂人日記)를 통해 봉건적 가족 제도와 유교의 종법 사회 관념을 통렬히 비판하며 &amp;quot;어린이를 구하자&amp;quot;는 메시지를 던져 청년들에게 혁명적 충격을 주었다.&lt;br /&gt;
&lt;br /&gt;
예술과 정치: 루쉰은 본래 의사(醫師)가 되려 했으나, '우매한 국민은 체격이 강해도 무의미한 구경꾼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으로 정신 개조를 위한 문예 운동으로 전향하였다. 그에게 예술은 정치의 노예가 아니라, 적어도 정치의 선구자였으며, 정치적 목적 아래 수행된 것이다.&lt;br /&gt;
&lt;br /&gt;
후기 생애와 투쟁: 군벌 정부(단기서)와 국민당(장개석)의 탄압을 피해 쫓겨 다니는 비장한 '문화의 전사'로서의 삶을 살았다. 젊은 프로문학 비평가들에게 '비계급적 작가'로 공격받기도 했으나, 그는 현실과의 동떨어짐을 비판하며 진실된 현실을 기반으로 한 창작의 '모랄(도덕성)'을 강조한 것이다.&lt;br /&gt;
&lt;br /&gt;
=='''분석 및 특징'''==&lt;br /&gt;
이육사의 지식인 면모: 이육사(본명 이활, 기고명 '이육사(李陸史)')가 당대 중국의 최고 지성 및 정치 상황에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글이다. 루쉰의 문학적, 사상적 변천 과정(의학 → 문예 → 현실 참여)을 심도 있게 분석하고 있다. 루쉰 문학의 핵심 통찰: 루쉰의 작품을 단순히 서사로 보는 것이 아니라, 봉건 사회에 대한 투쟁, 계급성, 지식인의 역할 등 당대 사회 변혁의 맥락에서 분석하는 것이다. 한국 문단에 대한 시사: 글 말미에 '예술과 정치'의 관계에 대해 루쉰의 태도를 재조명하며, 당시 조선 문단에서 첨예하게 논의되던 이 문제에 대한 이육사의 입장을 간접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수필문외한(隨筆門外漢)의수첩(手帖)'''=&lt;br /&gt;
문(門) 외(外) 한(漢) 의 수(手) 첩(帖)&lt;br /&gt;
&lt;br /&gt;
(칠(七))&lt;br /&gt;
&lt;br /&gt;
이(李) 육(陸) 사(史)&lt;br /&gt;
&lt;br /&gt;
R이란 사람은 나와는 매우친(親)한 동무엿다 그럼으로 우리두사람 사이에는 결(决)코 무슨비밀(秘密)이란것은 잇을터수가 아니엿다 그러나 지금은 나의교우록(交友錄)속에 씨여저잇는 그의『호패(號牌)』에 붉은줄을 그은지도 벌써한달이 다되엿다.&lt;br /&gt;
&lt;br /&gt;
이러한 간단한사실(事實)이 모르는사람으로본다면 가렵지도 아프지도안흘지모르겟으나 남달리상처(相處)해오든 벗을한사람 일허버린나의흐젓한 마음은 어데도 비길수업시 서러운것이다.&lt;br /&gt;
&lt;br /&gt;
그뿐만아니라 이글을 쓰려는오늘아침에 이제는 고인(故人)인 R의동생으로부터 나에게 간단한편지한장과『문외한(門外漢)의수첩(手帖)』이란유고(遺稿)한권(卷)이 보내여왓다.&lt;br /&gt;
&lt;br /&gt;
그유고(遺稿)는 이래십년(爾來十年)에 쓴 고인(故人)의 일기(日記)인 모양인데 그도축일(逐日)해서 쓰것도 아니고 때때로마음이 내킬때마다 써둔것이며그맨끗페—지에『〇〇형(兄)에게』라는 이세상(世上)사람으로서의 절필(絶筆)인듯한 글시가 묵흔(墨痕)이임리(淋漓)한것은소리업는 내눈물을더욱짜내는것이엿다 그리고이글내용(內容)은 일기(日記)는 일기(日記)면서도 대부분(大部分)은 나에게 보내는 편지이엿다.그편지가운데서 지금이라도 흥미(興味)잇게생각나는 부분(部分)만을 써서보기로한다면 그도처음에는 문학청년(文學青年)이엿든 사실(事實)이잇섯다.그러나그는자기가 하고저한 문학(文學)을 끗끗내 완성(完成)할수잇는 행복(幸福)된사람은 아니엿다.그러나 그사람은죽든날까지도문학(文學)을 단념(斷念)하지는안헛다는것은 어느해겨울 그와나는 우연(偶然)히도 어느 온천(溫泉)에서만낫다 그때는 바로동경(東京)에서들풍자문학론(諷刺文學論)이 한참대두(擡頭)할때 이엿슴으로 그도또한 예(例)에삐지지안코 이것의 조선(朝鮮)에잇서서 가능(可能)하다는 설교(說敎)를 하는것이엿다그때좀더 생각해볼 여지(餘地)가잇다고한 나의말에 그는말하기를조선(朝鮮)사람은 생활(生活)그자체(自體)가 풍랄적(諷剌的)으로 되여잇다고 떠둘어대기에나는그에게 더진지(眞摯)한태도(態度)로 사물(事物)을 대(對)할필요(必要)가 잇다는것을말하엿고 그다음날 우리는 서로갈린체 영원(永遠)히 보지못할 사람이되엿다.&lt;br /&gt;
&lt;br /&gt;
이글은 그때나와 갈려서 몃칠동안에 쓴것이라고 생각난다 일구삼(一九三)×연(年)×월(月)×일(日)—〇형(兄)!S역(驛)에서 형(兄)과갈려서나는〇동(洞)까지 오십리(五十里)나되는 산(山)길을 걸어왓소.동리(洞里)거리에 피곤(疲困)한 다리를 쉬이면서 생각하기를 아무데나 큼직한집 초당(草堂)방을 차저드러가면 이밤을 뜻뜻한 아랫목에서 지낼수도 잇겟거니와 그들과함께 살을맛대이고지나며 그들의 생활(生活)을체득(體得)할수가 잇다면……얼마나 유쾌(愉快)한일이겟습니까?&lt;br /&gt;
&lt;br /&gt;
나는 여기서 형(兄)이일직이 하든말을 생각해보앗소 상해(上海)어데선가?목욕(沐浴)을 갓슬때 불란서(佛蘭西)사람과 서반아(西班牙)사람과 가트욕조(浴漕)에 들어갓슬때의 감정(感情)을 얘기한것을 기억(記憶)이나 하시는지요.그때는 적나라(赤裸裸)한 몸둥이들이모두꼭가튼 온도(溫度)를 느낄수잇더라고.세계(世界)는 모름직이 목간통가티 되어야 한다고.&lt;br /&gt;
&lt;br /&gt;
그러나 오늘의 나의심경(心境)은그와는 정반대(正反對)로 어데까지나 육친애(肉親愛)를 느껴볼 결심(决心)이엿소 그래서 세계(世界)는 차라리 초당(草堂)방가티되라고까지 생각해도 보앗소이러한 생각을 하노라면 또다른 한생각이 꼬리를 물고나오는동안에 나는가젓든 담배를모조리 다피워 바렷소.담배라도피우지 안흐면 첫겨우의눈우바람이몹시도 옷깃을 새여들고 발끄티저리기도해서 담빠도살겸 주막(酒幕)집잇는대로 가까이 차저갓소.그곳에는 마침담배 가개가잇고젊은농부(農夫)인듯한 사람이잇기에오전(五錢)짜리 한푼을던지고『마코』한갑을 달라고 하엿더니만 나는여기서 뜻하지못한 실패(失敗)를 하엿소 그것은 나행동(行動)이 몸차림과 어울리지안는데가 잇섯든지또는언어(言語)에 무의식적(無意識的)인 불손(不遜)이잇섯든지 그젊은 농부(農夫)는 내얼굴을 자세히 보더니만……『문(門)안에 들어와서 담배를 가저가오』……하며 코우슴을 피하며『마코』한갑을 내아프로 툭던지는것이엿소.&lt;br /&gt;
&lt;br /&gt;
나는처음 이농부(農夫)의 말을듯고한참동안 어름어름하엿소 그것은 담배가개라고하는것이 우리가 도회(都會)에서 보는담배가개와가티 백색(白色)『타일』타로 대(臺)를싸올리고『네온』등(燈)을 달고 유리창(窓)을단것이 아니고 첨하끄테다 석유(石油)궤로 목판을짜서 장수연(長壽煙),희연(囍煙),『마코』단풍(丹楓) 이런것들을몃갑식(式) 너허둔것이엿소,그래 내가들어갈 문(門)이란 어데잇겟소,&lt;br /&gt;
&lt;br /&gt;
&lt;br /&gt;
(칠(七))&lt;br /&gt;
&lt;br /&gt;
이(李) 육(陸) 사(史)&lt;br /&gt;
&lt;br /&gt;
R이란 사람은 나와는 매우친(親)한 동무엿다 그럼으로 우리두사람 사이에는 결(决)코 무슨비밀(秘密)이란것은 잇을터수가 아니엿다 그러나 지금은 나의교우록(交友錄)속에 씨여저잇는 그의『호패(號牌)』에 붉은줄을 그은지도 벌써한달이 다되엿다.&lt;br /&gt;
&lt;br /&gt;
이러한 간단한사실(事實)이 모르는사람으로본다면 가렵지도 아프지도안흘지모르겟으나 남달리상처(相處)해오든 벗을한사람 일허버린나의흐젓한 마음은 어데도 비길수업시 서러운것이다.&lt;br /&gt;
&lt;br /&gt;
그뿐만아니라 이글을 쓰려는오늘아침에 이제는 고인(故人)인 R의동생으로부터 나에게 간단한편지한장과『문외한(門外漢)의수첩(手帖)』이란유고(遺稿)한권(卷)이 보내여왓다.&lt;br /&gt;
&lt;br /&gt;
그유고(遺稿)는 이래십년(爾來十年)에 쓴 고인(故人)의 일기(日記)인 모양인데 그도축일(逐日)해서 쓰것도 아니고 때때로마음이 내킬때마다 써둔것이며그맨끗페—지에『〇〇형(兄)에게』라는 이세상(世上)사람으로서의 절필(絶筆)인듯한 글시가 묵흔(墨痕)이임리(淋漓)한것은소리업는 내눈물을더욱짜내는것이엿다 그리고이글내용(內容)은 일기(日記)는 일기(日記)면서도 대부분(大部分)은 나에게 보내는 편지이엿다.그편지가운데서 지금이라도 흥미(興味)잇게생각나는 부분(部分)만을 써서보기로한다면 그도처음에는 문학청년(文學青年)이엿든 사실(事實)이잇섯다.그러나그는자기가 하고저한 문학(文學)을 끗끗내 완성(完成)할수잇는 행복(幸福)된사람은 아니엿다.그러나 그사람은죽든날까지도문학(文學)을 단념(斷念)하지는안헛다는것은 어느해겨울 그와나는 우연(偶然)히도 어느 온천(溫泉)에서만낫다 그때는 바로동경(東京)에서들풍자문학론(諷刺文學論)이 한참대두(擡頭)할때 이엿슴으로 그도또한 예(例)에삐지지안코 이것의 조선(朝鮮)에잇서서 가능(可能)하다는 설교(說敎)를 하는것이엿다그때좀더 생각해볼 여지(餘地)가잇다고한 나의말에 그는말하기를조선(朝鮮)사람은 생활(生活)그자체(自體)가 풍랄적(諷剌的)으로 되여잇다고 떠둘어대기에나는그에게 더진지(眞摯)한태도(態度)로 사물(事物)을 대(對)할필요(必要)가 잇다는것을말하엿고 그다음날 우리는 서로갈린체 영원(永遠)히 보지못할 사람이되엿다.&lt;br /&gt;
&lt;br /&gt;
이글은 그때나와 갈려서 몃칠동안에 쓴것이라고 생각난다 일구삼(一九三)×연(年)×월(月)×일(日)—〇형(兄)!S역(驛)에서 형(兄)과갈려서나는〇동(洞)까지 오십리(五十里)나되는 산(山)길을 걸어왓소.동리(洞里)거리에 피곤(疲困)한 다리를 쉬이면서 생각하기를 아무데나 큼직한집 초당(草堂)방을 차저드러가면 이밤을 뜻뜻한 아랫목에서 지낼수도 잇겟거니와 그들과함께 살을맛대이고지나며 그들의 생활(生活)을체득(體得)할수가 잇다면……얼마나 유쾌(愉快)한일이겟습니까?&lt;br /&gt;
&lt;br /&gt;
나는 여기서 형(兄)이일직이 하든말을 생각해보앗소 상해(上海)어데선가?목욕(沐浴)을 갓슬때 불란서(佛蘭西)사람과 서반아(西班牙)사람과 가트욕조(浴漕)에 들어갓슬때의 감정(感情)을 얘기한것을 기억(記憶)이나 하시는지요.그때는 적나라(赤裸裸)한 몸둥이들이모두꼭가튼 온도(溫度)를 느낄수잇더라고.세계(世界)는 모름직이 목간통가티 되어야 한다고.&lt;br /&gt;
&lt;br /&gt;
그러나 오늘의 나의심경(心境)은그와는 정반대(正反對)로 어데까지나 육친애(肉親愛)를 느껴볼 결심(决心)이엿소 그래서 세계(世界)는 차라리 초당(草堂)방가티되라고까지 생각해도 보앗소이러한 생각을 하노라면 또다른 한생각이 꼬리를 물고나오는동안에 나는가젓든 담배를모조리 다피워 바렷소.담배라도피우지 안흐면 첫겨우의눈우바람이몹시도 옷깃을 새여들고 발끄티저리기도해서 담빠도살겸 주막(酒幕)집잇는대로 가까이 차저갓소.그곳에는 마침담배 가개가잇고젊은농부(農夫)인듯한 사람이잇기에오전(五錢)짜리 한푼을던지고『마코』한갑을 달라고 하엿더니만 나는여기서 뜻하지못한 실패(失敗)를 하엿소 그것은 나행동(行動)이 몸차림과 어울리지안는데가 잇섯든지또는언어(言語)에 무의식적(無意識的)인 불손(不遜)이잇섯든지 그젊은 농부(農夫)는 내얼굴을 자세히 보더니만……『문(門)안에 들어와서 담배를 가저가오』……하며 코우슴을 피하며『마코』한갑을 내아프로 툭던지는것이엿소.&lt;br /&gt;
&lt;br /&gt;
나는처음 이농부(農夫)의 말을듯고한참동안 어름어름하엿소 그것은 담배가개라고하는것이 우리가 도회(都會)에서 보는담배가개와가티 백색(白色)『타일』타로 대(臺)를싸올리고『네온』등(燈)을 달고 유리창(窓)을단것이 아니고 첨하끄테다 석유(石油)궤로 목판을짜서 장수연(長壽煙),희연(囍煙),『마코』단풍(丹楓) 이런것들을몃갑식(式) 너허둔것이엿소,그래 내가들어갈 문(門)이란 어데잇겟소,&lt;br /&gt;
&lt;br /&gt;
(중(中))&lt;br /&gt;
&lt;br /&gt;
이육사(李陸史)&lt;br /&gt;
&lt;br /&gt;
그날은 그곳에서 멀지안흔곳에 장날이엿나부오,장꾼들이들신들신하고 그집으로 들어오기에 나는그만 그곳을떠나 도라나오랴니까 바로내머리 뒤에서『건방진여석 눈에유리창(窓)을 부치고』……하면서 별러대는것이엿소.그때나는 모든것을 다알엇소,&lt;br /&gt;
&lt;br /&gt;
시골산촌(山村)에선 유리라는것은들창(窓)에나 부치는것인데 네눈에부친 들창을열고 다시말하면 문(門)안에 들어와서(안경(眼鏡)을벗고)담배를 가저가란 말엿소.&lt;br /&gt;
&lt;br /&gt;
내가 안경(眼鏡)을 쓰게된것은 시력(視力)이 부족(不足)한 탓이엿고 그젊은농부(農夫)가 내안경(眼鏡)쓴것을 못맛당히역이는것은 고루(固陋)한 인습(因習)의 소치(所致)라고 하드래도 그표현방법(表現方法)이얼마나 내뼈를 저리도록 쑤시는풍랄(諷剌)이엿겟소 과연(果然)여기에 남과나라는 투명(透明)한 장벽(墻壁)이 서서잇다는것을 나는안듯하엿소.&lt;br /&gt;
&lt;br /&gt;
그리고 내발길은 무겁게옴겨젓소.아주몃해를두고 어느사막(沙漠)이라도 걸어온듯한 피로(疲勞)를 깨다랏소.하늘은 점점어두어오고눈조차 함박으로 퍼붓는듯 하엿스나 나는다시 옷것을 단속지는 안헛소 될수엇스면 차디천 눈보라가 내보드러운 목덜미살을 염이듯이 얼어부트라고하여본것은 일종(一種)의 자기잔학(自己殘虐)일른지도 모르겟소.&lt;br /&gt;
&lt;br /&gt;
두시간(時間)이나 지낫을가 나는과연(果然) 어느집초당(草堂)방에 손이되엿소방안에는 초말(醋抹)냄새가 코를찌를망정 모이는사람은 대략육칠명(六七名)이나 되엿고 연령(年齡)은최저십팔(最低十八)로최고삼십이(最高三十二),인품(人品)은 모두순후(純厚)하고황소가티 질박(質朴)한놈도 잇스며암사슴가티 외로운 면석도잇섯소.그날밤은 내라는존재(存在)가 그들로보면 낫서른손이여서 일동일정(一動一靜)을 주의(注意)는 하면서도 조금도 악의(惡意)는 갓지안헛든 모양이엿소 그러기에 나더러 세상(世上)의자미잇는 얘기를 들려달라는것이오&lt;br /&gt;
&lt;br /&gt;
이때 나는 어떠한 얘기를들려줄까 하고 망서리는판에 그들중에도 연령(年齡)과 지식(知識)의 정도(程度)가잇서서 삼십(三十)에 가까운 사람들은『화용도(華容道)』를 들려달라하고그중한사람은『춘향전(春香傳)』을 얘기하라하엿소만은 여기도 또한의견(意見)은 일치(一致)되지안헛소 그중에도제일(第一)얼굴이 말숙하고 나이가이십오세(二十五歲)쯤 되여보이는 농부(農夫)한사람 말을드르면 보통학교(普通學校)를 중도퇴학(中途退學)은 하엿서도 그들가운데서는 식자연(識者然)하고 내로라는드시뽑내면서『서양(西洋)』얘기를 무에나들리라는것이오 그해서 결국(結局)은『춘향전(春香傳)』파(派)와『서양(西洋)』파(派)가 절충(折衷)한결과(結果) 나는이진귀(珍貴)한『서양춘향전(西洋春香傳)』을 친절(親切)하게도 강좌(講座)를담임(擔任)하게되엿스며 그는 득의만면(得意滿面)하야 내담배갑에서『마코』한개들 빼여물고 인조견(人造絹) 옥색(玉色)관사홋족기에서 석낭을꺼내여 담배를 피우는것이엿소 이방에서는모두들이사람을『하이카라상』이라고 부르는데 그『상』짜가나에게는 조금귀익지못하나 아마이것을 도시(都市)말로번역(飜譯)하면『모—던뽀이』란 말도갓소.&lt;br /&gt;
&lt;br /&gt;
그러나 이『서양춘향전(西洋春香傳)』이란진본서(珍本書)는 가난한 나의문헌학지식(文獻學知識)으로는 도저(到底)히 알어낼 자신(自信)도업고 그러타고 그들에게『린드뻑』이 대서양(大西洋)을 어떠케 횡단(橫斷)하엿다든지『크레오파트라』의국적(國籍)이 어느나라냐고 설왕설래(說往說來)를 하여보앗자『하이카라상』이라는 이방의『쏘크라테쓰』도그까지는 흥미(興味)를느끼지못할것갓터소.&lt;br /&gt;
&lt;br /&gt;
그래서나는 생각다못해『쉑스피어』의『로미오와쭈리엣트』를얘기하기로하고 위선그주인공(主人公)의이름을 그들이 알어듯기 쉽게『노미』이와『준』이가 이러케얘기를하니 그래도 모두그것이자미가 잇섯든지『준』이가추방당(追放當)튼날새벽에『노미』를 차저가이별(離別)을하는판인데 이곳에야『나이팅껠』이울수가 잇슬리도 업겟고 생각다못해 속담(俗談)에 꿩갑에 닭이라니 닭을울리고『준』이를 떠나보냇구려!그래도 이때는 모두들감탄(感歎)해서 흥흥코소리를치며 신삼고 가만이치든손을쉬이는구려!&lt;br /&gt;
&lt;br /&gt;
(하(下))&lt;br /&gt;
&lt;br /&gt;
이육사(李陸史)&lt;br /&gt;
&lt;br /&gt;
밤은벌써 오전(午前)두시(時)나 되엿는데 박가테서는 눈보래가 조금도 쉬지안코 나렷소,사람들은차차 긴하픔을 하다가는 제대로 팔을배고 자는이도잇고 또그자는이의 다리를베고 자는사람도잇스며 나중에는『하이카라상』과 나만이남어서 나는 이동리(洞里)의 서러운전설(傳說)을 듯는것이오『옛날에 이동리(洞里)와 건너마을이편을갈러서 정초(正初)이면『줄댕기』가 시작(始作)되엿고 그때는 사람들이 수—백명식(百名式) 모혀서 그중에도 젊은 사람들은 처녀(處女)나 총각이 제각기 마음잇는 사람들과 사랑을 속삭이면서 영원(永遠)히그자손(子孫)들은 변(變)함업시 이동리(洞里)를직혀왓건만은 지금(至今)은 어쩐일인지 그사람들은 누가 오란말도업고 가란말도 업건만은 다들어데인지 한집식 두집식 동리(洞里)를떠나고 그럴때마다 젊은이들의 싹트기시작(始作)한 사랑은 그봄이 다가기도전에 덧업시 흘러가고 만다는말을 다마치지도못하야 이사람은 창졸간에 미친듯이 쓸어저 흑흑 느껴가며우는것이엿소.나는 이것을 웨우느냐 물어볼힘도업고 울지말라고 위안(慰安)을 줄수도 업섯스며다만나 혼자 생각기를 너도 또한불상한 미완성초연(未完成初戀)의 순정자(殉情者)로 구나하고 동정(動靜)을 살피노라니 이사람도 그냥잠이 들고먼데닭이 자즌홰치는 소리가들리며 눈은끗첫는지 박가튼 바람이 몹시부럿소.&lt;br /&gt;
&lt;br /&gt;
나는몃시간(時間) 남지안흔 이밤을도저(到底)히 잘수는업섯소,내머리는해저(海底)와가티 아득하고 내가슴은운모(雲母)와가티 무거웟소.도라누을내야 도라누을수도 업스려니와여페사람들의 코고는소리는 검은시체(屍體)를 실흔마군(馬軍)의 수레박휘를 갈고가는듯하오,그럴수록방안의 정적(靜寂)은 무거워저서 자꾸만 지구(地球)의 중심(中心)으로 침전(沈澱)되는듯하엿소,나는 참다못하야 눈을감고 두손으로 얼굴을 가리웟소.바로 그때엿소,누구인지내머리마테서 말하는 사람이잇섯소,그사람이 누구인지는 기억(記憶)할수 업스나 혹(或)은 저녁전에담배가개에서본 농부(農夫)일른지도모르겟소 그가 나에게 한말은분명(分明)코『문(門)안에 드러와서……』엿소.나는 여기서 눈을번쩍뜨고가만히 생각해 보앗소.&lt;br /&gt;
&lt;br /&gt;
『오!그러타,나는 문외한(門外漢) 여다』아무리하여도 인생(人生)의 문(門)안에들어서지못할 나이라면 차라리영원(永遠)한 문외한(門外漢)으로 이세상(世上)을수박것할트시 지나갈일이지 그좁은문(門)을 들어가려고 애를쓸필요(必要)가 어데잇겟소 문(門)박게서 살어가면 책임(責任)과 부담(負擔)도 가벼우려니와 문(門)안에 우리가 직혀야할 보물(寶物)이잇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모두 문(門)안에서 직힐때에나혼자만 문(門)박게서 그모든것을파수본다면 그것도 나의한가지임무(任務)가아니겟소 그러타면 나는달게&lt;br /&gt;
&lt;br /&gt;
인생(人生)외 문외한(門外漢)이 되겟소.&lt;br /&gt;
&lt;br /&gt;
그래서 남들이모두 문(門)안에서보는세상(世上)을 나는문(門)박게서 보겟소 남들은 기피보는 세상(世上)을나는널리보면 또그만한 자긍(自矜)이잇을것갓소.오늘은 고기압(高氣壓)이어데잇는지 풍속(風速)은 육십사(六十四)미리오이동리(洞里)를 떠나아무도 발을대지안흔 대설원(大雪原)을 걸어가겟소,전인미도(前人未到)의 원시경(原始境)을 가는느낌이오,누가나를 따라이길을 올사람이 잇슬른지?업서도 나는이길을 영원(永遠)히가겟소.』&lt;br /&gt;
&lt;br /&gt;
나는이까지보고 위선이유고(遺稿)를더펏다,그리고 생각해보앗다 이것은 한사람이 인생(人生)의문(門)안에 들어오지못하고 영원(永遠)히 걸어간기록(記錄)이다 오!그러면 나도역시문외한(亦是門外漢)인가?정축(丁丑) 칠(七),이구(二九)&lt;br /&gt;
&lt;br /&gt;
=='''주요 내용 요약'''==&lt;br /&gt;
구성: 죽은 친구 'R'의 유고(遺稿)인 '문외한의 수첩' 속에 담긴, 'R'이 '〇형(兄)'(필자)에게 쓴 편지 형식의 수필이다. '문안'과 '문밖': 화자는 'S역'에서 '형'과 헤어져 산길을 걸으며 초당방에서 서민의 삶을 체득하고 싶다는 '육친애'적 소망을 가진다. 이때 담배를 사려다 한 젊은 농부에게 &amp;quot;문 안에 들어와서 담배를 가져가오&amp;quot;라는 말을 듣는다. '문안'은 농부가 '안경(유리창)'을 쓴 자신을 '도시의 문명인'으로 여기고 '안경을 벗고(유리창을 떼고) 들어와'라는 풍자적 표현이었음을 깨닫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자아 성찰: 이 경험을 통해 도시 지식인인 자신과 농민 사이에 투명한 '장벽'이 서 있다는 것을 인지하며, 자신이 '인생의 문외한(門外漢)'임을 깨닫는다. '문외한'의 결심: '문안'에 들어서지 못할 바엔 영원한 문외한이 되어 문밖에서 살아가겠다고 결심한다. 문밖에서 사는 것은 책임과 부담이 가볍고, 남들이 모두 문안에서 보는 세상을 자신은 문밖에서 '널리' 보며 '자긍(自矜)'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절필: &amp;quot;전인미도(前人未到)의 원시경(原始境)을 가는 느낌&amp;quot;으로 '대설원'을 걸어 나가는 것으로 글을 맺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분석 및 특징'''==&lt;br /&gt;
풍자 문학론의 실천: 농부의 '안경 쓴 눈(유리창)'에 대한 풍자는 지식인과 대중 사이의 괴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지식인의 고뇌와 성찰: 도시화된 지식인(안경 쓴 자)이 농민의 삶에 진입하려 했으나 거부당하고, 결국 자신을 '문외한'으로 규정하며 고립을 선택하는 지식인의 고뇌를 드러내는 자의식의 표현이다.&lt;br /&gt;
&lt;br /&gt;
낭만적 비장미: '대설원', '전인미도의 원시경' 등 비장하고 낭만적인 이미지로 결말을 맺으며, 이육사 특유의 고독한 결단의 미학을 보여주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소품(小品) 황엽전(黃葉箋)'''=&lt;br /&gt;
소품(小品)①&lt;br /&gt;
&lt;br /&gt;
황엽전(黃葉箋)&lt;br /&gt;
&lt;br /&gt;
이(李) 육(陸) 사(史)&lt;br /&gt;
&lt;br /&gt;
사람들은 어름알보다 더냉담(冷淡)하고 주사침(注射針)가티 촉발라도 그래도 제대로는 인정(人情)도잇고 눈담(曇)노잇서 친(親)한사람을 사이에는못보 보고저하고 보면빨아먹을듯이도 형형색색(形形色色)의 표정(表情)을비저내며 계절(季節)에 따라서는 눈물겨울만큼 간절한모양이나 『내』라는 위인(爲人)은 자질(資質)도 소박(素朴)하고교양(敎養)도 고매(高邁)하지못데 요즘은엇전지 신경(神經)이 차를보다 단단해저서 압흐고 슯흔것도 못견듸게늣겨지지도 안커니와 보지못해 못견딀사람도업고 소식(消息)이라도 못알려 탈이될,더친(親)하고덜친(親)한이가업다.그러나 행(幸)혀이세상(世上)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잇다고하면 나는 의무(義務)로라도그대에게 나의소식을 알려야하지만은 지금의 나에게는 그러한미덕(美德)을 수행(遂行)할 야망(野望)조차업다.다만 야망(野望)을용서(容恕)한 사람이잇거든 가을바락에 무한(無限)히 흘러가는 황엽(黃葉)의 쪼각쪼각이 모두나의 편지라고 생각을 해라그리고 그어느한쪼각이라도 주어다가 그대들의책상(冊床)우에 꼬처두고 그황엽(黃葉)이 바람에 나붓기며울며부르짓는 서러운전기(傳記)를 들어보아라……&lt;br /&gt;
&lt;br /&gt;
‥‥그놈의 거리를 말할것도업고 저는하여(何如)든 가로수(街路樹)에서떨어저 왓습니다.그래서 거리에 서잇는동안 형형색색(形形色色)의 인간(人間)들을 다보앗습니다.그러나대개(大槪)는 모다비슷비슷한 인간(人間)들이엿고 별다른 놈은 못보앗습니다 그것은 십년전(十年前)일이라고생각됩니다.어느날오후(午後) 내발밋흘지나가는 소년(少年)이 잇섯습니다,미친놈가티 중얼대는 말을가만히듯자니『루나—ㄹ』의 일기(日記)를외이는겐지『불상한놈! 불상한놈!』 고거즛말하엿습니다,그뒤로는 매일(每日)가티 아침에도 내발밋홀지나고 저녁에도 내발미틀지나는동안에 나는어느사이에그만그녀석하고 친(親)해젓습니다,그래서 그녀석의 정체(正體)를 알수가잇섯습니다&lt;br /&gt;
&lt;br /&gt;
그녀석은 어느시골에서 출가(出家)를해서 서울을왓다는데 그출가(出家)한 이유(理由)가 어린녀석하고는 맹랑햇습니다 그녀석의 집은어느해안(海岸)이든가봐요 아침으로 조수(潮水)가 밀려나가면 끗업시 널려잇는 백(白)모래바티 너무도 허무(虛無)서 오기는왓스나 섬들을 건너간 갈메기가 몹시그립다고 하는것을보면 그래도 어린향수(鄉愁)가머리를 글거가는모양이겟지요&lt;br /&gt;
&lt;br /&gt;
그후(後)나는 우리들이 늘만나는시간(時間)이되면 그녀석이 하마나오나하고 기달리기도햇습니다 그럴때 멀리에 발자욱 소리가나고 그녀석이 『하이네』 니 『꾀—테』 니의 시(詩)를외이고 올때도잇섯습니다 그리고 몃해가 지난어느해봄날 내가긴 동면(冬眠)으로부터 영롱(玲瓏)한 첫눈을텃슬때 또그녀석을만낫습니다 그때는벌서그녀석은 십부게볼 소년(少年)이아니라 의례(依例)히 그상대자(相對者)를 다리고어둑어둑한 황혼(黃昏)에 내엽헤와서간즈려울만큼 종알대며 행복(幸福)의『메뉴—』를 전람회(展覽會)의『프로그람』보다 화려(華麗)하게꾸미는것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이것어 한여름을 지나며 비가오나 바람이부나 계속(繼續)이 되엿습니다 그러나 인간(人間)들에게잇서서는 행복(幸福)의 절정(絕頂)은 최대(最大)의비극(悲劇)과 서로통(通)해 잇나봐요 그해의 첫가을 어느으스름달밤에나는이비극(悲劇)을 바로 내눈헤서보는것입니다&lt;br /&gt;
&lt;br /&gt;
『여보우리두사람이 서로사랑하면 그만이지 사랑을 부모(父母)에대(對)한 효행(孝行)으로 하는데가 어데잇소.』&lt;br /&gt;
&lt;br /&gt;
이러케 그녀석은 폐(嬖)하는것이 엿습니다.&lt;br /&gt;
&lt;br /&gt;
그것도 고이치안흔게 그때쯤은 그녀석의 기분(氣分)이란 불꼿치타오를둣도 하얏거니와 제애비말을 안듯기로 유명(有名)하야 집을나선놈이니까.&lt;br /&gt;
&lt;br /&gt;
『그러치만은 엇절수가 잇서야 지요』&lt;br /&gt;
&lt;br /&gt;
이것이 그더석의 말에갑허진보수이엿습니다.그뒤나는 십년(十年)이란 긴동안 이사람들의 속삭임을 들을수는 업섯습니다.&lt;br /&gt;
&lt;br /&gt;
아마그것이 그들의 비극(悲劇)의시초(始初)FP동시(同時)에 나의『로—맨틔시슴』도 종언(終焉)이엿든 것입니다 나는그날부터 새로운 생활(生活)을 경험(經驗)하지안으면 안되엿읍니다 이때까지는 그들가운데에 엇던한두사람의 주활(主活)을 말로서 들엇으나 인제는 어느특정(特定)한 사람의사랑이라든지 그런달착지근 한것이아니라 그저그놈도 그놈갓고 그놈도 그놈갓흔 뭇사람의생활전체(生活全體)가 내풋입새의 거울보다 반드라운 쪼각쪼각에 빗치는 것이엿읍니다 이전갓흐면멀리서 삽분삽분 발자욱 소리가들려오고 그발자욱 소리가갓가워 지는데따라 쟁반에 구슬을굴리는듯한 목소리도 들엇건만은 또그럴때면 나도 입사귀를흔들어서 업김가티 보드러운바람을 부러도 주엇건만은 이때는 내가 바람을 불기는커녕그들의지나가는 위풍(威風)에 나는전율(戰慄)하지 안을수 업섯읍니다.구슬을 굴리는듯한 목소린들 어데가듯겟읍니가?뭇사람의 포효(咆哮)하는소리란 아주바다에서 이러나는노도(怒濤)의 교향악(交響樂)가탯습니다.&lt;br /&gt;
&lt;br /&gt;
그래서 나는알기를 인간(人間)이란위대(偉大)한 작란(作亂)군이라고 하엿습니다.어떠케 그들의 얼골이 크게보이고 힘차게 늣겨것든것인가 지금은 생각만하여도 왼몸이 으슬으슬합니다.그러는중(中)에그들의 행렬(行列)은 대강(大江)가티 홀러가고 나는 또다시 노랏케 단풍이들어 한닙두닙 떨어지는것입니다.얼마나 소조(蕭條)하고 적막한거리겟습니가? 내엽헤는 괴수(怪獸)가티 늘어선 삘딍들의 거믄그림자가『팔아스트 에 얼어부튼거지들의 싸늘한꿈을 죽엄가티덥허논때업니다.밤도삼경(三更)은 지난때이지요 더벅더벅 거러오는무거운 발자욱 소리와함께 나는고요한『그림자』하나를 발견(發見)햇습니다.안개에 촉촉히 저진차림자러와 힘업시 옴겨지는발자욱이 아주무슨 패잔병(敗殘兵)의 유령(幽靈)이엿슬지도 모릅니다.나는지금 그유령(幽靈)을 따라 굴러 갑니다.그러나 그유령(幽靈)은 내가미행(尾行)을 한다는것은 모르고 또는알엇다해도 아무저항(抵抗)도 할필요(必要)가업다는듯이 방향(方向)도업시것는것이엿습니다.때로는 시내도건너고들판도 지나 힘이지치고 밤이깁프면 산(山)기슭 나무등얼 밋헤누어서 하늘에 수(數)업시만흔 별들을 헤아려도 보는것이겟지요그러나 그어느별도그에게 행운(幸運)을 점제한별은 업섯나봐요 그리다간 그는그만 흑흑늣기고 울며울다가는 자는것이엿습니다.아마도 기적(奇蹟)을 이즌순간(瞬間)이 그에게는 자장행복(幸福)된순간(瞬間)이든가봐요,산(山)속은 찬기운만 가득하고벌레소리는 정적(靜寂)을 삼림(森林)가티무성(茂盛)하게하는것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그다음날도 아츰햇발이 속새입홀 흔들면 그는일어나 것는것이엿습니나.이러는 동안에 나는이유령(幽靈)에게서 무엇을 보앗스리라고 생각하심니가?어느큰강(江)가이엿습니다.여을어 목노아울고가는 강(江)가이엿습니다.그는이강(江)가에 안저서 무엇을 생각하엿는지 눈을깜은채로 하늘을치여다보는 것이엇고 초생달은교만(嬌慢)한 게집의눈자위처름 그를흘겨보는것은 한층(層)더창백(蒼白)한 비우슴갓햇습니다 그러치만은 그는그광망(光芒)을 피(避)하려고도 안엇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내생각에 따른다면 그래도 못잇처지는 날ㄹ기억(記憶)을 모조리 물소리에 씨처흘려보내려는 노력(勞力)이엿슬지도모릅니나&lt;br /&gt;
&lt;br /&gt;
그때 먼데마을에는 개짓는소리가 어즈러히 들여오고 새바람도 유달리 옷깃을 새여드는데 그는 일어셔 한발한발 물가으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때나는 그의운명(運命)을거의들여다보는것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자살(自殺)이란 광경(光景)이 내머리속에번개가티 일어낫습니다.그리고그는물가의 널직한 반석(盤石)우에올러안저서 물속에비친 자기(自己)의얼골을 자세히 들어다보는 것이엿습니다,그러나 그물속에는자기(自己)의 얼골은 차저볼수가 업섯든것이겟지요,증오(憎惡)를 참지못하는 그는그만 뼈만남은 두손으로 물결을 훗치고는 돌우에업더저 우는것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그는 또다시 일어나 모둔것을 이저버린듯이 걸어가는 것이엿습니다.일기(日氣)는점점 흐려지고 회색(灰色)으로 물드린 천공(天空)은 그의최후(最後)의 희망(希望)까지라도 빼서바릴듯이 싸늘한 압박(壓迫)을더하는것이엿습니다.그러타고해서 그에게는 아무런 격정(激情)도 반발(反撥)도잇는것갓지는 안엇습니다 만은 주먹을 쥐여서는 주머니속에 너은체로 간간히 머리를 흔드는것은 과거(過去)에대(對)한 회한(悔恨)이라든지그런것들이 머리속을 할터가는것이겟지요?&lt;br /&gt;
&lt;br /&gt;
그것은 어느동리(洞里)압이엿습니다만흔사람들이 모엿다가는 다들도라가고 큰버드나무에『사지오리』를 부친색기를 걸처맨밋헤는 기름종지에 빤—한심지불이타고잇스섯며 아해들 몃사람이그것을 직히고 잇섯습니다.그는아해들에게 무엇을하는것이냐고 물엇습니다.&lt;br /&gt;
&lt;br /&gt;
아해들의 대답이란 너무나 묘(妙)한것이 안이겟습니가?그동리(洞里)에는 십년(十年)만에 한번식은 유령(幽靈)이 난다는 전설(傳說)이 잇섯습니다그래서 그날은 동리(洞里)사람들이정성을 다하야 한데모혀서 기도(祈禱)를 올리고 고사(告祀)를 지내는것이엿는데 그날이마츰 십년(十年)에 해당(該當)한날이며 방금 의식(儀式)을 맛친때라고 말을마천 아해들은 그를 한참동안 자세히 보다가는그만 인가(人家)를 향(向)하야 다어나는것이엿습다.아마도 그것은참으로 이동리(洞里)에 유령(幽靈)이 나타낫다는것을 알리기 때문일런지도모름니다.&lt;br /&gt;
&lt;br /&gt;
그는 한번 크제우섯습니다나는 그가 웃는것을 보는것은처음이엿습니다,그러나 그웃슴이란 곳변해저서 므슨쓰듸쓴 약물을 먹은뒤의 입모습가리 변해지며 얼골전체가 크다란 환상(幻想)에 사로잡히는것 갓햇습니다그리다가 그는 그언덕 미테서잠이들어 자면서 꿈을 꾸는것여엿습니다,그꿈이란 이러햇습니다,몹시더운 여름날 몃칠을두고 비가따루엇습니다,그래서큰물이나고 하루밤사이에 왼동리(洞里)가 물에쓸려 갓읍니다 왼여름 피담을홀려 지은농사(農事)도 한포거업시 사람마다 두주먹과한개의 목슴박게는 남지안엇음니다 주림과 치위가 매운챗죽갓치 그들을 휘갈겻읍니다 그래서 동리(洞里)사람들은 제각기 이고향(故鄕)을 떠나지안호면 안되엿읍니다 물론(勿論)녯날에야 부모(父母)의 품속갓치 포근하고 사랑스런 땅이엿지만은 지금은 참담(慘憺)과 고통(苦痛)의 회억이외(回憶以外)에 아부것도 그들의 애착(愛着)을 붓잡어 두□는 못하엿읍니다.그들은지금 한개촌락(個村落)에서 다른촌락(村落)으로 한성시(城市)에서 또다른성시(城市)에 표박(標泊)□ 길을가는것이엿지만은 그어느□곳도그들이발을 부칠곳은 어□읍니다 모든집들어 그들압헤는 문(門)들을 잠것읍니다.그리고 오즉그들에게는 한오리 끗어는 길이엿음니다 어느때나 □□갈수잇는 길이엿읍니다 하□□또하루 한달에또한달 꼭가티 그들은 하늘을 치여다보고 □을갓읍니다.벌서초본(草本)도 다□□이들고 낙엽(落葉)이 나리나 그들의발길은 머므를수는 업섯습니다 어느마을이나 성시(城市)에서 그들에게 일주일(一週日)이나 유(留)할수가□고한오리의 희망(希望)을 주엇다면 다시그순간(瞬間)이 지나면 그들에게는서름이외(以外)에 아무것도 □는것은업섯습니다.그러나 이□름과주림과 치위는 그들늙은이와 어린이와 남자여자(男子女子)를 모다한마음에 얼거맬수가 잇섯습니다 바탐과비에 바래인 그들이마음에한개의희망(希望)이란 오즉 일거리와생활(生活)이엿습니다 이것이 그들을고무(皷舞)하고 추진(推進)하는 힘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마치한떼의 표유(瓢游)하는『집시』와가티 마을을지내나 산(山)을너무나 마른풀을뜨더 그것을 덥고깔고 혹(或)은낙엽(落葉)을 쓰러다가 욕(褥)와 이불을삼어 한랭(寒冷)을 지나는하루밤 더욱이 비오는밤……밤은영원(永遠)히 차운것이며 뜨신것은다만그들의『마음』뿐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날과밤은 그넷줄처럼 밧구엿습니다.해도점점 쩔러지고 물들이 어러부트며 첫눈이 나린것도 발서 열흘전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그들은 아즉까지도 발무칠땅과한가지의 일거리도 찻지는못하엿스며 끗간데를모를 길만을보고 걸어가는것입니다.&lt;br /&gt;
&lt;br /&gt;
『여기라도 좀쉬여갓스면』모다들이러케 마음으로 부르지젓습니다.그러나 또몃사람운 말하는것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가자 압흐로 더가보자』이것도모든사람의 말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그들은 여전히 경사(傾斜)진 산(山)빗탈을걸어가며 길다란 곡선(曲線)의행렬(行列)이 계속(繼續)되는것입니다.그때는바람도 조골 잔잔해지고 햇발도구름밧글나와 열분광선(光線)이 뭇사람의 얼골을 다소명낭(多少明朗)하게하엿스나 일행(一行)이바로 산(山)미루턱에올너다엇슬때는 정세(情勢)는 디무도급(急)히변(變)하야 눈이퍼붓기 시작(始作)햇습니다.&lt;br /&gt;
&lt;br /&gt;
『눈이또나린다』이러케 부르짓고는모다들 놀나는 것이엿습니다.눈송이는 목화(木花)를 뜨더뿌리는듯이왼공중(空中)에 미만(瀰漫)하야지척을가릴수가 업섯습니다.바람에몰려오는 눈송이가 얼골에 부다치면 낫살을 어이는듯하고 손이빠질듯이 스린것입니다.시력(視力)조차 모호(糢糊)하야 발아래길도 알어보기는 어려웟습니다 재를오를때에 비(比)하면 산(山)을나려오는것은조금용이(容易)하엿스나 길이질대로 질어서 업더지락 잡버지락하는 사람들도잇스며 등에업힌 어린애들은 배가몹시 곱흐다고 우는것이며 그럴때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다들 산(山)밋헤 동리(洞里)집에 나려가서 드신밥을 준다고달래는것이엿습니다 그러나 산(山)미테 동리(洞里)집은 모다제각기 제마음에 그려보는 집들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가자 조금이라두 빨리가자불빗을 볼때까지』그들중(中)에서 한사람이 굴근목소리로 외치는것입니다&lt;br /&gt;
&lt;br /&gt;
『암그래야지』또 몃사람의 대답이 끗나면 모다들 침묵(沈默)은하면서 마음속으로는역시(亦是)『가자』고 대답하는것입니다&lt;br /&gt;
&lt;br /&gt;
사람들은 이빨을물고 잇는힘을다하야 전진(前進)합니다 지나온길이얼마이며가야할길이 얼마인것도모르면서 죽으나사나 가야한다는 것박게는 그들은 한사람도자기(自己)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업섯습니다.그들의 동반자(同伴者)의 발소리와 호흡(呼吸)이 그들의가튼 운명(運命)을결정(决定)한다는것은 이잔혹(殘酷)한 자연(自然)과 싸워가는 무리들의 금과옥조(金科玉條)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눈보래는 끗첫습니다.그러나아즉도 그들에게는 조그마한희망(希望)도 보이지는 안헛습니다.압도캄캄하고 뒤도그랫습니다.아득한 삼림(森林)속을 허우덕이는 암담(暗膽)은 영원(永遠)한흑야(黑夜)가 새이지도안코 영원(永遠)한 미로(迷路)도 끗막지도못할것 갓햇습니다.&lt;br /&gt;
&lt;br /&gt;
피로(疲勞)는 그들의몸을 풀솜가티만들엇습니다.참다가 못참는몃사람이 땅이라도 꺼지란듯이한숨을 쉬는것이엿습니다.그리고는 부르짓는 사람도업고 중얼대는 사람도업스며 눈물도마르고 공포(恐怖)도 사라진 그들은 발목에 잇는 힘을 다해서 눈과진흙우를 쉬임업시 이동(移動)하는것입니다.』&lt;br /&gt;
&lt;br /&gt;
유령(幽靈)은 그들가운데서 제일나이만흔 노인(老人)을 발견(發見)햇습니다그리고 그것은십년전(十年前) 그가고향(故鄕)을떠나올때 아즉도 그다지늙지안흔 그의아버지인것도 알엇습니다 그리고 모든사람은 그의어린시절(時節)의 동무엿습니다 그는참다못해『아버지』하고 소리를첫&lt;br /&gt;
&lt;br /&gt;
습니다 그러나그들은 어느한사람도 그를상대(相對)로 반겨마저주는사람은 업섯습니다.&lt;br /&gt;
&lt;br /&gt;
모다제각기 제갈길을 가고만잇섯습니다.&lt;br /&gt;
&lt;br /&gt;
유령(幽靈)도 그때야 잠이깨엿습니다 그리고 몸써리를 치는것입니다 얼마나 지리(支離)한꿈이며 괴로운 꿈이겟습니까?유령(幽靈)은다시일어나 것는것입니다 캄캄암흑(暗黑)속을 영원(永遠)히차고 영원(永遠)히 새지못할듯한밤을 제혼자가는것입니다 십년전(十年前) 내발밋흘 지나단이며 사랑을 속삭이든 소년(少年)은지금도 밤길을 제혼자 가고잇겟지요 황엽(黃葉)은 그래서 서러운일생(一生)을 울고만잇습니다&lt;br /&gt;
&lt;br /&gt;
정축십일(丁丑十一),일(一)&lt;br /&gt;
&lt;br /&gt;
=='''주요 내용 요약'''=&lt;br /&gt;
주제: 작가(필자)의 소식을 세상에 전하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이다.&lt;br /&gt;
&lt;br /&gt;
소식 전달: '내'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가을 바람에 흘러가는 '황엽(黃葉, 누런 잎)' 조각을 자신의 편지라고 생각하고 그 서러운 전기를 들어보라고 한다.&lt;br /&gt;
&lt;br /&gt;
'황엽'의 관찰: 황엽(필자)은 자신이 거리에서 겪은 두 가지 경험을 이야기한다.&lt;br /&gt;
&lt;br /&gt;
소년의 성장과 비극: 어린 소년이 성장하여 연인과 행복을 속삭였으나, 부모에 대한 효행 문제로 헤어지는 비극을 목격하는 것이다. 황엽은 이를 '행복의 절정은 최대의 비극과 통한다'고 표현하며 자신의 '로-맨틔시슴'의 종언이라고 말한다.&lt;br /&gt;
&lt;br /&gt;
군중의 포효와 유령: 이후 황엽은 개별적인 사랑 이야기가 아닌, '뭇사람의 생활 전체'와 **'노도(怒濤)의 교향악'**을 목도한다. 황엽은 이 거대하고 위대한 '작란군(作亂群)'의 행렬에 전율을 느낀다. 행렬이 사라진 후, 황엽은 '패잔병의 유령' 같은 힘없는 한 사람의 고독하고 고통스러운 표류와 꿈을 따라가며, 꿈속에서 홍수로 고향을 떠난 농민들이 희망 없이 떠돌지만 '가자 압흐로 더가보자'는 그들의 단합된 의지를 발견하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마무리: 유령이 깬 후 다시 홀로 밤길을 걷는 모습을 보며, 황엽은 '서러운 일생을 울고만' 있다고 글을 마무리하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분석 및 특징'''==&lt;br /&gt;
메타포(은유)적 글쓰기: '황엽(낙엽)'이라는 매개를 통해 자신의 소식과 감정을 전달하는 고도의 은유적인 글이다. '황엽'은 작가 자신의 고독하고 소외된 자의식, 혹은 시대를 표류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시대의식의 투영: 개인적 낭만(소년의 사랑)의 종언과 함께,'뭇사람의 생활 전체'와 '노도의 교향악'을 목도하며 당대의 격변하는 사회상과 민중의 힘을 인식하는 작가 의식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이육사의 서정성: 후반부 꿈속에서 펼쳐지는 농민들의 표류와 그들의 굳건한 생존 의지는 당시 농촌의 피폐함과 함께 암울한 현실 속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을 비장하게 포착해내는 이육사 특유의 서정성을 보여주는 것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전과기'''=&lt;br /&gt;
누구나 버릇이란 쉽사리 곳처지는것은아니다 그러므로 세살쩍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말도 잇지 안는가?.그런데도흔히 다른사람의 한가지 버릇을 새로히 발현햇슬때는 아—저사람은 저런버릇이 잇구나하고 속으로 비우서보거나 그버릇이 조치못한종류의것이면 대개는 업수히역이는 수도잇는가봐!.그럿컨만 나에게는 아무리 곤처보려도 곤처지지안는버릇이란 손톱을 깍고 줄로 으르고 수건으로 닥고하는것이다그것도 때와곳을 가릴것도업시조욕(漕浴)나 다방(茶房)이나는 말할것업고기차(汽車)나 배를타고 멀리여행(旅行)이라도하면 심심푸리도되고 봄날도서관(圖書舘)가튼데서 서너시간(時間) 안저백이면 제아무리 게른뱅이는 아닐지라도 웃눈섭이 기중기(起重機)처름아래눈섭을 끄러다닐때도 잇는것이고 그럴때에 손톱을 잘르고줄로 살살으르면 자릿자릿한 자미에 왼몸에게틈이 다풀리는것이다.그야내나이 어릴때는아침일직이손톱을 잘르면어룬들은질색을하시며 말리기도하엿다,그리고 말릴때에 누구인지지금에기억되지는 안어도 우리집에자주오는 손이 말하기를 아침에손톱깍고 밤에 머리빗는것은몸에해롭다고 하는것이엿고 내생각에도 그런방문은『동의보감(東醫寳鑑)』에라도 싸여 잇는줄 아럿기에그뒤로는 힘써시간(時間)을 한나절지난뒤에 손톱을 닥곤하엿지만나도내대로 세상맛을 보게된뒤로는 쓴맛단맛을 다보고 시고떨븐 구석과 휘추고초가튼 광경에 부닥길때가 시작이되고는손톱치레를 할만한 여가도 업섯고 어느사이에 손톱은 제대로자라 긴놈 쩌른놈 삐뚜러진놈꼬부러진놈 벌덕잡버진놈 앙당마스러진놈 이러케되야 내손이란 그꼴이 맛치 오증어를 뒤집어 삶어논것이 되엿다.&lt;br /&gt;
&lt;br /&gt;
그럴때에 나는 또 다시 손톱을 잘를것은 잘르고 으를놈은 으르곤하엿스며 이른아츰이라도 가리지는 안엇다.그것은밤으로 머리를 깍거보아도 몸에 해로운것도 업스니까 아츰에 손톱을 깍는것조차 위생(衞生)과는 관게업는것을 안까닭이다.&lt;br /&gt;
&lt;br /&gt;
그런대 내가이손톱을 잘르는버릇은 언제부터 시작되엿는가를 생각해보면 그도벌서 삼십년(三十年)이 더지낫다,내가난지 백일(百日)이나 되엿겟지 이란저고리박게빨간내손이 나와서 내얼골을 햅여뜻고는 나는자스려질듯이 울엇다.어머니가 놀라서가위로 내손톱을 잘러주신것이 처음이고그것이 늘거듭하야 지는동안에봄철이오면 어머니는 우리형제(兄弟)를 차례로불러 퇴ㅅ마루 양지쪽에 안치고 손톱을 잘러주시고 머리도빗기고 귀도휩여 주섯스며 이것도 내나이 여섯살때 소학(小學)을 배우고는 이런일의한반(半)은 할아버님께 이관(移管)이 되엿다 예날 내고장 우리집에는그다지 크지는못해두 허무히 적지안은 화단(花壇)이 잇섯다 그리고그화단(花壇)은 이때쯤되면 일이밧벗다 깍지로긁고호미로 매고 씨갑씨를 뿌리고총생이를 옴겨심고 적당한 거름도 주엇다 요즘가티『시크라맨이나『카—비손』이나『추리프』가튼것은 업서도 옥매화(玉梅花) 분홍매화(粉紅梅花) 홍도(紅桃) 벽도(碧桃) 해당화(海棠花) 장미화(薔薇花) 촉규화(蜀葵花) 백일홍등등(百日紅等等) 빗도보고 향(香)내도맛고꼿도보고 입도볼 말하면 일년(一年)을 다즐길수가잇는것이엿는데 내할아버지 생각은 이제 헤아려보면 우리들에게 글읽고 글시씨인사이로노력(勞力)을 몸소맛보이는것도 되려니와 그것이 정서교육(情緒敎育)도될겸(兼) 당신의 노래(老來)를 화려(華麗)하게 꾸밀수도 잇섯든 모양이엿다 그럴때마다 우리들은 이다지 가볍고고흔 노동(勞働)이 끗나면 할아버지는 우리들게 손을씨슬것과 손톱에끼인흙을 끌어내도록 손톱을닥그라 하섯다.&lt;br /&gt;
&lt;br /&gt;
이러든 내손톱이기에 나는손톱을 소중히하고 잘르고 으르고 닥고하는 동안에 한가지방편을 어덧다 그것은 나에게거북한일을말하는 사람아페서 손톱을 닥는것이다.빤히 얼굴을맛대이고 배알에 거슬이거나듯기실흔 말을듯고 억지로 참을수도업고 그러타고 언잔흔표정(表情)을 할수도업서 손톱을 닥노라면 시굴게신 어머니도 그려보고 도라가신 할아버지의 모습을 우러러 뵈일수도잇다.내고장의 푸른하늘아래 봄이 왓슬것도 가트니&lt;br /&gt;
&lt;br /&gt;
——(완(完))——&lt;br /&gt;
&lt;br /&gt;
=='''주요 내용 요약'''==&lt;br /&gt;
손톱 깎는 버릇: 화자(나)에게는 아무리 고치려 해도 고쳐지지 않는 버릇, 즉 손톱을 깎고 줄로 다듬고 닦는 행위가 있다. 이 행위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으며, 특히 심심하거나 피로할 때 긴장을 풀어주는 '자릿자릿한 재미'를 준다. &lt;br /&gt;
&lt;br /&gt;
버릇의 변화와 세상 경험: 어릴 때는 '아침에 손톱 깎는 것은 몸에 해롭다'는 옛말 때문에 어른들이 말렸고, 화자도 이를 믿었다. 그러나 세상을 경험하며 '쓴맛 단맛'을 다 본 후, 손톱 관리에 신경 쓸 여유가 없어 손이 엉망이 되기도 했다. 이후 미신이나 위생보다는 개인의 필요에 따라 언제든 손톱을 다듬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버릇의 기원과 따뜻한 기억: 이 버릇은 태어난 지 백일 무렵 어머니가 처음 손톱을 깎아준 것에서 시작되었다. 봄철이 되면 어머니는 형제들의 손톱을 깎고 머리를 빗겨주셨다. 여섯 살 때부터는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화단(花壇)을 가꾸는 노동을 했다. 할아버지는 이 노동을 노력(勞働)을 몸소 맛보게 하고 정서 교육을 시키는 수단으로 여겼다. 노동이 끝난 후에는 손톱에 낀 흙을 닦도록 하셨는데, 이는 정돈과 청결의 습관으로 이어졌다.&lt;br /&gt;
&lt;br /&gt;
손톱 관리의 '방편': 손톱을 닦는 행위는 시간이 흐른 뒤 화자에게 '방편(方便)'의 의미를 얻게 되었다. 듣기 싫거나 거북한 말을 하는 사람 앞에서 이 행위를 하면, 억지로 표정을 관리할 필요 없이 그 행위에 몰두하며 고향의 어머니와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분석 및 특징'''==&lt;br /&gt;
일상적 소재의 상징성: '손톱 깎는 행위'라는 극히 일상적인 소재를 통해 삶의 태도, 유년 시절의 기억, 그리고 현재의 심리적 방어 기제까지 끌어내는 수필이다.&lt;br /&gt;
&lt;br /&gt;
세대 간의 경험 대비: 수필은 크게 세 시기를 대비시킨다.&lt;br /&gt;
&lt;br /&gt;
유년기 (어머니/할아버지): 손톱 관리가 사랑과 보호, 그리고 정서 교육의 매개였다. (전통적이고 순수한 가치)&lt;br /&gt;
&lt;br /&gt;
성인기 (세상 맛을 봄): 손톱 관리가 소홀해지고 삶의 고난과 시련 속에서 잊혔다.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운 현실)&lt;br /&gt;
&lt;br /&gt;
현재 (손톱을 닦는 '방편'): 손톱 관리가 현실의 고통을 회피하고 내면의 안정을 찾는 심리적 '방편'이 되었다. (현실과의 거리 두기)&lt;br /&gt;
&lt;br /&gt;
정서적 위안: 화자가 불편한 상황에서 손톱을 닦는 행위는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힘들었던 현실 속에서 유년기의 평화로웠던 기억(어머니, 할아버지, 화단)을 소환하여 현재의 감정을 통제하고 마음을 지키는 자기 치유의 과정인 것이다.&lt;br /&gt;
&lt;br /&gt;
향토적 정서: 화단에 핀 옥매화, 장미화, 백일홍 등과 퇴마루 양지쪽 같은 토착적인 이미지를 통해 과거의 아름다웠던 고향과 가족의 정을 회상하며, 전통적 가치에 대한 향수를 드러낸다.&lt;/div&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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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이육사의 기자 생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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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10T09:10:0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Imgpdnjs: &lt;/p&gt;
&lt;hr /&gt;
&lt;div&gt;[[분류:imgpdnjs]]&lt;br /&gt;
=='''이육사의 기자생활'''==&lt;br /&gt;
출소한 뒤에는 중외일보와 조선일보 대구지국에서 기자로 일했고, 1930년에는 ‘이활’이라는 이름으로 첫 시 &amp;lt;말&amp;gt;을 조선일보에 발표했다. 이 시기는 훗날 교보생명을 세우는 신용호에게도 영향을 주어 독립운동 자금 지원과 교육 사업 구상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알려져 있다.&lt;br /&gt;
&lt;br /&gt;
1930년, 이육사는 조선일보 지면을 통해 생애 첫 시 「말」을 발표하며 문단에 모습을 드러냈다. 1월 3일자 조선일보 7면 하단에 실린 이 짧은 작품에서 그는 매질에 지쳐 쓰러질 것 같은 말이지만 새해에는 다시 우렁차게 질주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이 작품이 바로 그와 조선일보의 첫 연결고리였다.&lt;br /&gt;
&lt;br /&gt;
=='''중외일보 대구지국'''==&lt;br /&gt;
1929년 6월 장진홍 의거 관련 혐의로 복역 후 1930년에 출소한 이육사는 곧바로 언론계에 투신했다. 그는 시 발표 직후 중외일보(中外日報) 대구지국에서 기자로 일하기 시작했다. 중외일보는 1926년 조선중앙일보가 제호를 변경하여 창간된 신문으로, 1931년까지 발행되었다. 이육사가 활동하던 시기는 일제강점기 언론 탄압 속에서도 민족의식을 고취하려던 분위기가 남아있던 때였다. 지방지국 기자로서 지역 사회의 현안을 취재하고 보도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기간의 활동은 그가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사회 현실에 대한 인식을 심화하는 데 기여했다.&lt;br /&gt;
&lt;br /&gt;
=='''조선일보 대구지국'''==&lt;br /&gt;
중외일보에서 근무한 뒤, 이육사는 1931년 8월 조선일보 대구지국으로 자리를 옮겼다. 일제강점기 지방의 신문 지국은 단순한 연락소가 아닌, 지방 취재와 기사 송고의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이육사는 이곳에서 현장 기자로서의 전문적인 경험을 쌓았다. 조선일보에서 자신의 이름(필명)을 걸고 처음으로 쓴 기사는 1932년 초에 연재되었다. 첫 기사인「대구의 자랑 약령시의 유래」는 1932년 1월 14일부터 네 차례에 걸쳐 연재되었다. 이 기사를 쓸 때 그는 본명 대신‘육사생(肉瀉生)’이라는 독특한 필명을 사용했다. '육사'라는 필명이 여기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으며, 이는 그의 상징적인 수인(囚人) 번호(264)와 연결되는 '이육사'라는 이름의 유래 중 하나로 간주되기도 한다. 이 기사는 대구의 대표적인 전통 시장인 약령시의 역사와 유래를 소개하는 향토색 짙은 글이었으며 이육사가 기자로서 대구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lt;br /&gt;
&lt;br /&gt;
[[파일:이육사기사.jpg|500픽셀|섬네일|center| 이육사가 조선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근무하면서 쓴 1932년 1월 14일 자 ‘대구의 자랑 약령시의 유래’ 기사. ‘육사생’이란 필명 사용. ⓒ 조선일보]]&lt;br /&gt;
&lt;br /&gt;
그는 스포츠 기사에서도 민족적 정서를 드러냈다. 1932년 3월 6일과 9일자 스포츠란에서 「대구 ‘장’ 연구회 창립을 보고서」라는 글을 연속으로 기고하며 이번에는 ‘이활(李活)’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여기서 그는 조상 대대로 이어오던 우리 겨레의 전통 놀이 ‘장치기’를 소개하며 경기 방식뿐 아니라 점수 계산 용어까지 온전히 우리말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더 나아가 이 놀이를 세계 농민 사회에까지 널리 보급하자고 주장했다.&lt;br /&gt;
&lt;br /&gt;
그는 1934년 무렵 조선일보로 다시 합류했고, 이후에도 꾸준히 조선일보 지면에 글을 남겼다. 1930년대 후반에서 신문이 폐간되기 직전인 1940년까지 발표된 글들은 다양했다. 5회 연재된 「노신 추도문」(1936년 10월 23~29일자), 「문외한의 수첩」(1937년 8월 3~6일자, 3회), 「황엽전」(1937년 10월 31일~11월 5일자, 4회), 「전조기」(1938년 3월 2일자), 그리고 1940년 발표된 「계절의 오행」 등이 대표적이다.&lt;br /&gt;
&lt;br /&gt;
=='''타임라인으로 보는 이육사의 기자 발자취'''==&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v2%3A2PACX-1vScyeelknnBUflE4gCcqr0d_p4jIpl00AVBmBzhC5cgKY8GPsH4h-JZmzezN5VoQTKsJGw76vWgsA7O&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width=100%25&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대구(大邱)의 자랑 약령시(藥令市)의 유래(由來)'''=&lt;br /&gt;
대구(大邱)의자랑&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의유래(由來)&lt;br /&gt;
&lt;br /&gt;
대구지국(大邱支局) 육(肉) 사(瀉) 생(生)&lt;br /&gt;
&lt;br /&gt;
대구의자랑이 무엇이냐?고 뭇는사람이 잇스면 지금사람들은아이어룬할것업시 대구능금(평과(苹果))을말할것이다 그러나 대구능금은 최근의 한명산물로서완전한 자랑의자위를 점령할수는업는것이다 여긔서우리는중학교지리교과서(중학교지리교과서(中學校地理敎科書))에도잇는대구의유명한약령시(연령시(燕令市))를자랑으로들어놋코그에대한력사적유래를먼저아라보자&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의사적유래(史的由來)&lt;br /&gt;
&lt;br /&gt;
대구의 약령시는 일년얼차의정긔시장으로서 그시장에 집산되는 산물은 맛치『도루고』(토이기(土耳其))나『코—카쓰』(고가삭(高加索))나중앙아세아(중앙아세아(中央亞細亞))내외몽고(내외몽고(內外蒙古))등지에서 일년 일차혹이차식 열니는 모피물(모피물(毛皮物))의시장과가티대성황을일우나 이상에말한 각지의시장은인류사회의생활형태가차차목집함을따라필요한물품을서로서로밧구고저일정한장소와시일에모히는말하자면물물교환(물물교환(物物交換))시대로부터교통의관계라는지긔후의관계라든지또는일반사희생활의형태가오히려아직까지녯날의그것을면치못하고현대자본주의국제간의무역관계(무역관계(貿易關係))가극도로발달된 오날까지에 원시경제(원시경제(原始經濟))를 연구하는학자들의 연구재료가 되는것은휴미잇는 사실이지만은 대구의약렁시는 물품의집산과 교환의량식이 그와방불하여도 일홉부터 약시(약시(藥市))가아니고 약렁시(약령시(藥令市))란령(영(令))자에대하야우리는직각적으로 이시장의긔원은엇던권력(권력(權力))의 지배(지배(支配))맛해일게된것을 알수가잇다그러면 이약렁시가 처음시직된것은 언제부터인가 그야말로중학교교과서에까지『고래(고래(古來))로유명』이라고만씨여잇고 적확한년대를 쓰지안엇슴으로 대담하게 그년대를 내어노을수는업스나 비교적정확한수자를 조사한대로쓰면 서력일천륙백오십팔년(이조개국이백육십팔년효종조(李朝開國二百六十八年孝宗朝))거금이백칠십 사년전부터개시하게 되엿다고한다 그때야말로 조선을팔도(팔도(八道))에 닌후아노코 다시칠십일주로 난호아노흔 경상도의 정치적수부(수부(首府))도대구려니와 경상도(경상도(慶尚道))를둘너 남부조선각지는 산수명랑하고긔후온화하야각색약초(약초(藥草))의배양에지질이알맛기도하고 교통도편의하야(그때로보아서는)물산의집산에최적의지대도 대구엿스며 그때야말로임진병란(임진병란(壬辰兵亂) 이끗을막고모든볼회와 시설이 차자정돈뇌고발전을 보이며따라황실중심(성실중심(星室中心))으로끄으려는당시의위정사(위정자(爲政者))들은□□□□조금이라도 관계잇는 물품이면무엇이나물론하고 먼저진상(진상(進上))이란일흠아래최상의생산품을골너 서울도보내고 일반백성이먹고 입고쓰게되는 것이다그리고엇던 계□을물는하고병업시일생을 살수도업는것은 생리상자연의 리치엄으로 일국의지존(지존(至尊))인왕(왕(王))도병마의무서움은면치못 하는것이다 그래서황실에서일년동안쓸 약품을이곳에서 구하고저 국가의명령으로개시케한것이 오날날 우리가보고듯고 하는약령시의 처음이다그때는 약령이서면 감사(감사(監使))(현도지사(現道知事))가약재를골다봉하야중앙 정부 사약원(중앙정부사약원(中央政府司藥院))에 보낸후에 팔도에서모혀든 약재를일반 약국(약국(藥局))이사서완조선안의병든사락들이 그해그해의 치료를하게다엿다고한다(속(續))&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와경기(景氣)(이(二))&lt;br /&gt;
&lt;br /&gt;
대구지국육(大邱支局肉) 사(瀉) 생(生)&lt;br /&gt;
&lt;br /&gt;
【대구(大邱)】대구의약령시(약령시(藥令市))는다른상품시장에서는볼수업는특수한 유래를가지고 발달하여온만큼 지방의정청에서도일년춘추두차레에정긔적으로모여드는 지방생산자들을 위하야지방경제발달을 조장하고저 계획을세우고 제도의개선과 개시(개시(開市))긔간의 연장등 모든방면으로힘을써 보앗스나 모다뜻과갓지못하고 서구(서구(西歐))렬국의동양(동양(東洋))침입으로의학(의학(醫學))약학(약학(藥學))등학문이발달됨에침(침(針))은주사(주사(注射))로변하고바쇠는『메—쓰』로화하는바람에한약(한약(漢藥))의 가치는 전연그권위를일케되면서 대구의 약령시도차차워마하야 매매되는 약재료도주러지기만 하든중『후—버』겅긔가세계의주식시장(주식시장(株式市場))을혼란케하듯이 대구의 약령시장도 대타격의한때가 지나가게되엿스니 그는무엇일가?지금부터이십이년전(신해년(辛亥年))에중산손문 중산손우(中山孫又))씨혁명으로대청황실)대청황실(大清皇室))을넘어지면서부터는 청황실이 조선정부(조선정부(朝鮮政府))에의뢰하야사가든약품은실로막대한것이엿스나전부그매도의길이 막히게된 여러가지조건밋헤매매가 축소하여 전성시대의반도못되게 되얏다 그나마최근에는전주(전주(全州))대전(대전(大田))진주(진주(晋州))원산(원산(元山))등지에군소시장이개설되여이를약령시로밀미암아대구에떠러지는돈은매우감소되엿스나아직도령시가개설되면동성정입구(동성정입구(東城町入口))로부터남성정입구(남성정입구(南城町入口))까지 십여정(십여정(十餘町))에 처당재(당재(唐材))초재(초재(草材))등삼백여종의 약품도만흐려니와 그근처에림시려인숙(임시여인숙(臨時旅人宿))이무수히설치되고 포백기타 일용생활에필요한물품이면 평상시의 멧배나더잘팔리는 호경긔를 연설한다 그리하야 촌양빈들의낫서른돈을 먹어보겟다는 술집색시들까지 헐직한인조견으로 봄을싸고 도스리고안저서 열분애교를 술잔에담어보내는것도『넌센스』한징면인지는모르겟다마는 흡객술(흡객술(吸客術))이 졸열한다기보니 시대에뒤처진 기생들은본바닥에 거주하는손님들은『카페—』붉은녀급(여급(女給))들의자주(자(紫))빗유혹에다 뛰우고 음력과세를압서초조하는중 때맛침사재(시재(時哉))시재를불러 시내 각요리집 극장할것업시 대만원의성황을 이루는것은 그럴듯도한일이지마는 여긔에는 순진한산간에서 새노래물소리에 거치른세상일은 □도꾸지못한 산아이와도갓치 힘드려작만한 약재를도시구경겹 하여와와서판돈은『메리·픽포—드』안일망정어엽분녀자를맛나 잇는대로 다쓴후에명년의약령시 개설되기를 손을꼬바기다려서 와서보면 그녀자는어느하늘밋헤서 잇든남자와 단꿈을꾸는지 알길조차 바이업고작년구든맹서가 찬□(회(灰))처럼살어잘때화낌에 한잔무어라 먹자부어라 먹자하는연긔가튼 경긔는 견양경긔(견양경기(犬養景氣))이상으로 흥성거린나 그러기에여긔에최근오개년간의매매고외출동인원수와□적어본다&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와경기(景氣)&lt;br /&gt;
&lt;br /&gt;
(삼(三))&lt;br /&gt;
&lt;br /&gt;
대구지국(大邱支局) 육(肉) 사(瀉) 생(生)&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의현재(現在)&lt;br /&gt;
&lt;br /&gt;
약령시의 밋치는바 경제관계는실로 다방면으로 황금왕시대를연줄하며 발달하여오는만큼 녯날에는 조선안에서 생산하는재료가 매매되는이외에 당재(당재(唐材))라고하야 증국으로부터금석지재(금석지재(金石之材))가만히수입되는외에는 벌로볼만한것이 업섯스나 교통의발날노 국제무역이빈번하야지게된 오날에는일본,중국,몽고등시는말할것도 업거니와동부『아푸리카』의찌는둣한열대지방에서 생산되는 소철(소철(蘇鐵))을비롯하야 황막한시베리아의천지를 내집가티 도라다니는웅담(웅담(熊膽))까지모혀들게되는것은이약정□를통해본□류문와사의 한로막이라고도 할수잇는것이다 이러케 약령시에모혀드는약재료가 교통의 혜택을임어거의 파멸에 갑가운약령시가새로히왕성하게되자 지금이야말로 시장의 량입구에 마천두(마천루(摩天樓))가튼『리—딍』(유도탑(誘導塔))을세우고『일미네—숀』(대전식(大電飾))사이에 흥긔청긔가나붓기며 지방으로부터 모혀드는 생산자들을끄려드리는것은 확실히 일반상업전술의발달을의미한다 그러나 원래이시장는 약을재료그대로가지고와서 매매케 되는것이 특질의엿스나 지금은천일령신환,조고약과어을빈만병수까지 시장목판에서 인긔를집중하고잇는것은 아모리보아도 조뵈 화지관는 사실이다 이가튼변천가운데도 특긔하야들것은 령시의개설의래 장구한년월을 지남에따라 그본래의 성질에배반하야 부업적상인게놉을 령시의주요구성 요소로하게되고 부터는 경상도내지방에밋치는 양령시의영향은 일반 소비경제상에크다란 파문을그리게되여 약텽시본래목적인 약새생산에 효과가적게되고 시장내의 불당중개인으로말미암아 일사 평판이조치못하엿슴으로 이러한 페풍을 일소하기위하야 지금부터이십여년선에 생긴 한약상조합한약상조합(漢藥商組合))과칠년전전주(전주(全州))에양령시가처음뇌려고할때에 대함키위하야생긴약령&lt;br /&gt;
&lt;br /&gt;
흉회(약령시진흥회(藥令市振興會))가지금은약령시번영회(약령시번영회(藥令市繁榮會))로변경되여 최선의로력을 다하야오며 감독한결과 지금은어느정도까지 통제가되여간다고한다 그리하야 지금이야말로동력(동력(動力)의위력밋해거대한공장뉼이날로늘어남조선의『메드로포리쓰』를만드려는 대구현네과학(현대과학(現代科學))의태반(태반(胎盤))가튼대구의한복판에서 조선의 자랑이라고도할수잇는원시시장(원시시장(原始市塲))의한개가 벌서오늘날의 □제권내에발을듸듸고장차을래일의세계를향하야나가는것은홍미김흔일이다(속(續))&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의유래(由來)&lt;br /&gt;
&lt;br /&gt;
(사(四))&lt;br /&gt;
&lt;br /&gt;
대구지국육사생(大邱支局肉瀉生)&lt;br /&gt;
&lt;br /&gt;
삼백년동안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복잡다단한 필연적 과정을경과하여오며 자본주의 경제의현계단에서의연히그존재가필요하게된대구약령시의발달사는완연히금일경제의발달사(발달사(發達史))라고보지안을수업다 그럼으로여긔특긔할것은 그성실상 순박함이짝이업는 죽말하면 매매하는시람들의아관박대(아관박대(雅冠博帶))라든지 생산품 포장가튼것까지도(물론변천된것도만흐나)삼백년전의 녯날을 그려볼만한순박한이서장에도현대금융자본의붉은혀(설(舌))는내밀기시작하엿다지금부터 시년전엇던 외래지본벌이자긔소유의따에시장의위치를옴기려고 현위치는 도시교통상불편하다는구실로써다방면으로술책을써보앗스나현장소에서긔십년간상권을 잡고잇는 대가들의명렬한반대로그만뜻을일우지못한일도잇다그러면내구약령시를 지배하고 따라전조선의한약상계에우이를삽고잇는 이는누구일가여긔는 누구보다도 김홍조(김홍조(金弘祖))씨를아침수가업다씨는 전선적으로보아 제이위가기를설허할만하다고하며그다음순서업시치면 신태문(신태문(申泰文))김종수(김종수(金宗洙))지이원(심의원(沈義元))리치욱(이치욱(李致旭))두병은(두병은(杜炳殷))김내명(김내명(金乃明))방규진(방규진(方圭鎭))제씨를칠수잇고 그중에도 두병은(두병은(杜炳殷))씨가튼이는여러대를나려오며 사업에 종사하야 그문패는 실로일백오십년 이란력사를가저 대구의 동인당(동인당(同人堂))이란 일홈이잇다&lt;br /&gt;
&lt;br /&gt;
북평(北平)의동인당(同仁堂)은팔백년(八百年)의역사(歷史)가잇슴)그래서 대구의약텽시인긔는 이들의손에 좌우된다하여도과언이아니며 금년의약가는 금재금(김재금(金再禁))에따르는 제불가의폭등과 일중사변(일중사변(日中事變))의영향과중국은가(중국은가(中國銀價))의변동으로인하야소위당재(당재(唐材))는 폭동하엿고 조재(초재(草材))에잇서서 도변조로올은것이 불소하다는바 금후에드 더욱시세는오를무양이라고한다 여긔에당초재를물론하고 시세를 적어보앗스면좃켓스나 약명이한업시만코 날로변동이만흠으로 약렁시세표가 잇다는것만말한후에 특수한고저를보이는 몃가지를 적어보면 당재의원상산약(원상산약(元常山藥))은작년에는 매근에일원륙십전하든것이 금년은 단오십전에폭락되여 이십년레에 처음보는헐가라하며 산수유(산수유(山茱萸))는작년에 매근사십전하든것이 금년은십전에폭락되고 토사자(토사자(兎絲子))가튼것도 작년사오십전에매매되든것이 금년은십전에 폭락되여 자방생산자의 저울(형(衡))에 예긔치못한 광란(광란(狂亂))을보이고잇다고한다&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의장래(將來)&lt;br /&gt;
&lt;br /&gt;
그러면 다음날의약텅시는 엇더케될것인가?이문제는 결코예언자의 심심푸리와가튼 헛된소리는아니다적어도현세계의경제관계 와그에따라 일어나는모든사정이 쇄신된다면 모르지마는현계단의 경제제도가 그량존속되는한에는 세계적으로 한약에대한연구가왕성하여지고한약의권위가나날이놉하가는만큼약텅시의장래는압흐도세계에그일홈이놉하진다고일부인사들이말하고잇는것이그다지허언이아닐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지금은시장의형세가 산만하게생산자가 중개인울거처 도매상에게 팔게되여중간에책취를 당하게된다 하여도 장래는 현시장의대자벌들이주식(주식(株式))이나 혹은학자(합자(合資))의형식으로시장을상설하고도매와 개인생산자사이에 직접취인하게되여 지방경제의 윤택과약초생산의 장려의 약텅시본래의목적을 소개하려는것이 당업자간의 의도(의도(意圖))인 동시에매우현명한 의견인듯하다 그래서참된 대구자랑을 만들고조선의자랑을만들자——(완(完))&lt;br /&gt;
&lt;br /&gt;
=='''주요 내용 요약'''==&lt;br /&gt;
유래: 대구의 자랑으로 능금(사과) 대신 약령시를 들며 그 유래를 설명한다. 약령시는 1년에 한두 번 열리는 정기 시장이며, 조선시대 효종(1658년) 때 국가 명령(令)으로 개시된 것이다. 당시 경상도의 정치적 수부였던 대구는 약초 재배에 적합한 기후와 편리한 교통으로 물산 집산의 최적지였다. 궁중에서 쓸 약품을 이곳에서 구하기 위해 감사가 약재를 골라 사약원(司藥院)에 진상한 후, 팔도 약재를 일반 약국에서 구매하여 조선 전역의 환자 치료에 사용하게 한 것이 시초이다.&lt;br /&gt;
&lt;br /&gt;
쇠퇴와 현황: 서구 열강의 동양 침입과 함께 의학 및 약학이 발달하며 한약의 권위가 약해졌고, 약령시는 점차 쇠퇴하였다. 특히 22년 전(1915년경) 신해혁명으로 청황실이 무너지면서 조선 정부에 의뢰하던 막대한 약품 매도 길이 막힌 것이 큰 타격이었다. 최근 전주, 대전 등지에 군소 시장이 개설되어 대구 약령시의 경제적 이익이 감소했지만, 여전히 시장 개설 시에는 많은 약재가 모이고(당재, 초재 등 300여 종), 인근 상권에 호경기를 가져오는 것이다. 당시 약령시의 주요 구성 요소가 부업적 상인 계층으로 변질되고 불량 중개인 문제가 발생하자, 한약상조합과 약령시진흥회(현재 약령시번영회)가 결성되어 통제를 시도하고 있었다.&lt;br /&gt;
&lt;br /&gt;
약재 가격 변동: 당시(1937년) 일중사변(日中事變)의 영향과 중국 은가 변동으로 당재(唐材) 가격이 폭등했지만, 일부 국내 초재(草材)인 산약(山藥), 산수유(山茱萸), 토사자(兎絲子) 등은 폭락하여 생산자들에게 광란(狂亂)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lt;br /&gt;
&lt;br /&gt;
=='''분석 및 특징'''==&lt;br /&gt;
역사성 강조: 대구 약령시를 단순한 시장이 아닌 '국가 명령(令)'으로 시작된 역사적 시장으로 규정하며, 정치적, 지리적 배경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시대적 배경 반영: 서양 의학의 도입, 중국 혁명(청 황실 붕퇴), 당시 국제 정세(일중사변, 중국 은가) 등이 시장의 흥망성쇠에 미친 영향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여 식민지 시대의 경제 상황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시장 변화: 전통적인 약재 거래 방식에서 완제품 거래가 늘어나는 등 근대화에 따른 시장의 변화 양상도 포착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원시 시장'의 현대적 생존: 대구 약령시를 '조선의 자랑'이자 '원시 시장' 중 하나로 보면서도, 현대 자본주의 경제권에 발을 디디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평가하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대구(大邱)장연구회(硏究會) 창립(創立)을보고서'''=&lt;br /&gt;
구지국(大邱支局)&lt;br /&gt;
&lt;br /&gt;
이활(李活)&lt;br /&gt;
&lt;br /&gt;
민중(民衆)의보건운동(保建運動)은 요사이각계인사(各界人士)들의 크다른관심(關心)거리로어듸서 엇더케 무슨방법(方法)으로『억세인조선(朝鮮)』을건설(建設) 할수잇슬가 함에연구(硏究)를거듭하게되엿다회상(回想)하면 조선(朝鮮)에새로운운동경기(運動競技)가 수입(輸入)된지도 일반문화(一般文化)와갓치 벌서 반세기(半世紀)란역사(歷史)를가지고잇다 그중(中)에는 야구(野球)·정구(庭球)·축구(蹴球)·농구등(籠球等)을비롯하야 유도(柔道)·격검(擊劒)·권투등(拳鬪等)모든경기(競技)가들어와서 장족(長足)의진보(進步)도하엿스러니와 세계적무대(世界的舞臺)를향(向)하야 진출(進出)한선수(選手)도업지안타 그러나 그것은극소수(極小數)인동시(同時)에 지금(至今)까지의 조선(朝鮮)의운동경기(運動競技)는 한갓도회(都會)를중심(中心)으로잘어왓다 물론(勿論)다그럿타는것은아니지만은 현하운경기(現下運競技)그것은 조선(朝鮮)이나 혹(或)은다른나라에서라도 학교(學校)를중심(中心)으로발전(發展)되여오는만큼 교내(校內)의『스포—스맨』들은 완연(宛然)『떼파—트』진열장(陳列場)속에서 고객(顧客)을호리는『마네킹』처럼 상품화(商品化)한교육제도하(敎育制度下)에서 달큼하게 그상품(商品)의가격(價格)을놉혀주엇스며 그학교(學校)를버저나와 실사회(實社會)에취직(就職)을하면 역시(亦是)그와갓튼『마네킹』노릇을하여왓다 이러는동안 조선(朝鮮)의운동경기(運動競技)는 그발생(發生)으맹아(萌芽)가 힘것생장(生長)하기도전(前)에현제도(現制度)의 독아(毒牙)에여지(餘地)업는약관(躍關)을당(當)한절대(絕對)의원인(原因)과 그밧게사회(社會) 경제(經濟) 정치적제정세(政治的諸情勢)의착잡(錯雜)한모순(矛盾)이 너무나철업시이운동경기(運動競技)의발달(發達)까지 조해(阻害)하여왓다그러나 노력(勞力)과인내(忍耐)는갑이잇서이때까지외래품(外來品)이라면 아무비판(批判)도업시 실행(實行)하야오든우리도야구(野球)의전원(全員)이일시(一時)에활약(活躍)할수업는폐(廢)와정구(庭球)의시후(時候)에대(對)한불편(不便)과『꼴프』의귀족적(貴族的)인것등(等) 모든운동(運動)의단점(短點)만을빼고 장점(長點)만을취(取)하야 조선적운동(朝鮮的運動)을창출(創出)하려는이이 경성(京城)서는중앙체육연구소(中央體育研究所)가생(生)기고 금반대구(今般大邱)에서『장』연구회(硏究會)가생(生)기게된것이다&lt;br /&gt;
&lt;br /&gt;
장이란북조선(北朝鮮)의궁벽(窮僻)한지대(地帶)의인사(人士)들은 잘알지못할는지모르나이장만은 오래동안 우리조선(朝鮮)으로부터 그들의자손(子孫)인우리들에게부(傅)하아은 국기(國技)의하나이다물론(勿論) 국기(國技)란단순(單純)한의미(意味)로서만필자(筆者)가그것을추장(推獎)하는것은인니다 딸아서 운동(運動)의영향(影響)이문화창조(文化創造)에잇더한역할(役割)을한다는것을새로히논(論)하려는것도안니다&lt;br /&gt;
&lt;br /&gt;
대구지국(大邱支局) 이(李) 활(活)&lt;br /&gt;
&lt;br /&gt;
그러나일반문화(一般文化)가 그지리(地理)와풍토(風土)에영향(影響)되는바만흔것과가티운동경기(運動競技)도 또한그러히다 그것은『필랜드』사람들이『스켓틩』을잘하는것과『낙위(諾威)』사람의『스키-』를잘하는것이라든지『정말(丁抹)』사람의체조(體操)기튼것이 이점(點)을잘실증(實證)하고잇다 그러면조선(朝鮮)에는 조선적(朝鮮的)인자연세력(自然勢力)도 그러하러니와 더욱이 금일(今日)의사회적경제적(社會的經濟的)모든조건(條件)이 조선인(朝鮮人)에적합(適合)한것이안니면 안될것으다 그래서 최소(最少)의노력(努力)으로최대(最大)의 효과(効果)를발현(發現)치안으면안될것이다&lt;br /&gt;
&lt;br /&gt;
아에우리는생각한다 오날날까지조선(朝鮮)에수입(輸入)된운동경기(運動竸技)의종목(種目)은그대(臺)를매거(枚擧)키난(難)하나 그중(中)한가지도 우리에게 적합(適合)한것이업고 더욱이농민(農民)들에게 추장(推獎)할만힌운동(運動)은업섯다 그러나이장만은 오날날까지 그들농민(農民)의손에서전(傳)해왓다 그러면서도그진정가치(眞正價値)를돌낫든것이 오날이야 사계(斯界)의권위제씨(權威諸氏)가 적년연구(積年硏究)를거듭하야 발표(發表)한결과(結果)를보면 운동(運動)으로시 제일망각(第一忘却)치못할생리학상(生理學上)으로보아 전체(全體)가균형적(均衡的)으로활동(活動)되고 경제적(經濟的)으로도 기구(器具)를작만히는데 돈이들지안코 어느곳에서든지『장채』를직만하고『장방울』을다드무면논바닥에서나 밧기운데서라도 할수잇는농민본위(農民本位)의운동(運動)이라고한다 그리고다른운동경기(運動競技)가티『씨—슨』이잇는것도안니고 춘하추동(春夏秋冬)어느때라도 되는경기(競技)인즉 농번기(農繁期)는 못히드라도 농한기(農閑期)갓트면 그들의육체(肉體)를 하련(鍜鍊)하는데 매우적당(適當)한것이다 수(數)만흔경기중(竸技中)에능(能)히경제조건(經濟條件)이 어느정도(程度)까지용인(容認)한다하여도 그들의게생전(生前)듯자못하든말로『핸드뽈』이니『꼴』이니『라인』이니하여보아도 결(决)크그들에게취미(趣味)가잇슬이(理)가만무(萬無)하고취미(趣味)가업스면 그들에게발전(發展)될이(理)도만무(萬無)한것이다 그러나『장』연구회동인(硏究會同人)들의말을들으면경기(竸技)에계산(計算)하는용어(用語)까지도순조선(純朝鮮)말로한다는것의경하(慶賀)할일이다 이『장치기』를국기(國技)로서추장(推獎)하야세계(世界)에널니선전(宣傳)하는것도좃치만은먼저안으로그들이이국기(國技)를직혀왓는만큼 그들에게조직적(組織的)으로보급(普及)하라 그리서조선농민(朝鮮農民)의경기(競技)를만들고 따라 세계(世界)의농민대중(農民大衆)에게 보급(普及)식하라!그래서『장』연구회(硏究會)의본래(本來)의사명(使命)을다하기를바란다(종(終))&lt;br /&gt;
&lt;br /&gt;
==주요 내용 요약==&lt;br /&gt;
배경: 조선에 수입된 야구, 축구, 유도 등 서양식 운동 경기는 학교 중심, 도시 중심으로 발전하며 '상품화'되었고, 농민 등 대중에게 적합하지 않은 것이다.&lt;br /&gt;
&lt;br /&gt;
'장치기'의 가치: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 **'조선적 운동'**을 창출하려는 노력으로 경성에서는 중앙체육연구소가, 대구에서는 '장' 연구회가 생긴 것이다. '장'은 조선의 국기(國技) 중 하나로, 농민의 손에서 전해 내려온 것이다. 생리학적으로 전신 균형 활동이 가능하고, 경제적으로 기구가 필요 없어 비용이 들지 않으며, 논바닥이나 밭에서도 가능하여 농민 본위의 운동이라고 한다. 계절을 타지 않고 농한기에 육체 단련에 매우 적합하며, 경기 용어까지 순 조선말을 사용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연구회의 사명: 연구회 동인들에게 '장치기'를 국기로 추장(추천)하여 세계에 선전하는 것도 좋지만, 먼저 이 국기를 지켜온 농민들에게 조직적으로 보급하여 '조선 농민의 경기'를 만들고 나아가 세계 농민 대중에게 보급해야 한다는 사명을 부여하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분석 및 특징'''==&lt;br /&gt;
민족주의적 시각: 서구 문물인 스포츠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한국의 전통 운동인 '장치기'의 토착적, 민족적 가치를 재조명하려는 의도가 뚜렷한 것이다.&lt;br /&gt;
&lt;br /&gt;
대중성/실용성 강조: '장치기'의 장점을 경제적 부담 없음, 장소 제약 없음, 계절 제약 없음, 쉬운 용어 등 농민 대중에게 적합한 실용성에 초점을 맞춰 설명하고 있다.&lt;br /&gt;
&lt;br /&gt;
'마네킹' 비유: 현대 교육 제도가 배출하는 스포츠맨을 '떼파-트 진열장의 마네킹'에 비유하며, 당시 상업화된 교육 및 스포츠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드러내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노신추도문(魯迅追悼文)'''=&lt;br /&gt;
(일(一))&lt;br /&gt;
&lt;br /&gt;
이(李) 육(陸) 사(史)&lt;br /&gt;
&lt;br /&gt;
『아(阿)Q정전(正傳)』의 작자(作者)로서 세계적작가(世界的作家)이며 중국신문학(中國新文學)의 최고봉(最高峰)인 노신(魯迅)이지난십구일(十九日) 오전오시(午前五時)에상해(上海)에서 숙아(宿疴)로 영면(永眠)하엿다는 실음(實音)이전(傳)한지 삼일(三日)되는날에 우리는 간단(簡單)한일문(一文)을 비러 삼가추도(追悼)의뜻을 표(表)하거니와 만년(晩年)에그의 정치적불우(政治的不遇)로인(因)하야 문학자(文學者)로서의 성명(聲名)조차가 우리에게 널니퍼지지못한것을 더유감(遺憾)으로생각한다.　　　　 (일(一) 기(記) 자(者))&lt;br /&gt;
&lt;br /&gt;
일구삼이연육월초(一九三二年六月初) 어느토요일(土曜日)아츰이엿다 식관(食舘)에서나온 나와M은 네거리의 담배가가에서조간신문(朝刊新聞)을 사서들고 근육신경(筋肉神經)이떨니도록 굴근활자(活字)를 함숨에나려읽은것은 당시중국과학원부주석(當時中國科學院副主席)이요 민국혁명(民國革命)의 원로(元老)이든양행불(楊杏佛)이 남의사원(藍衣社員)에게 암살(暗殺)을당(當)하엿다는 기사(記事)이엿다.&lt;br /&gt;
&lt;br /&gt;
우리들은 거리마다 삼엄(森嚴)하게늘어선 불란서공무국(佛蘭西工務局) 순경(巡警)들의예리(銳利)한눈초리를 등으로하나 갓득늣기면서 여반로(侶伴路)의 서국(書局)까지을동안은 침묵(沈默)이 계속(繼續)되엿다&lt;br /&gt;
&lt;br /&gt;
문(門)안에 들어서자마자 편집원(編輯員)R씨(氏)는 우리들에게 다음과가튼말을 들여주엇다.&lt;br /&gt;
&lt;br /&gt;
중국좌익작가연맹(中國左翼作家聯盟)의 발안(發案)에의(依)하야 전세계(全世界)의 진보적(進步的)인 학자(學者)와 작가(作家)들이 상해(上海)에모혀서중국(中國)의 문화(文化)를 옹호(擁護)할대회(大會)를그해팔월(八月)에 갓게 된다는것과이에 불안(不安)을 늣기는 국민당통치자(國民黨統治者)들이 먼저 진보적작가진영(進步的作家陣營)의 중요분자(重要分子)인 반재년(潘梓年)(현재남경유폐(現在南京幽廢))과 인제는 고인(故人)이된 여류작가(女流作家) 정영(丁玲)을 체포(逮捕)하여행방(行方)을 불명(不明)케한것이며 여기동정(同情)을 가지는 송경령여사(宋慶齡女史)를 중심(中心)으로한 일련(一聯)의 자유주의자(自由主義者)들과 작가연맹(作家聯盟)이 맹렬(猛烈)한 구명운동(救命運動)을한사실(事實)이며 그것이 국민당통치자(國民黨統治者)들의 눈쌀에 거슬려서 양행불(楊杏彿)이 희생(犧牲) 된것과 그외(外)에도 송경령(宋慶齡) 채원(蔡元) 배(培) 노신등등(魯迅等等) 상해(上海)안에서만삼(三) 십명(十名)에갓가운 지명지사(知名之士)들이 남(藍) 의사(衣社)의『뿔랙·리스트』에 올라잇 다는것이엿다.&lt;br /&gt;
&lt;br /&gt;
그리고 그뒤삼일(三日)이 지난후(後)R씨(氏)와 내가탄자동차(自動車)는 만국빈의사(萬國殯儀社)아페다엇다,간단(簡單)한 소향(燒香)의예(禮)가 끗나고도라설때 젊은두여자(女子)의수원(隨員)과함게드러오는송경령여사(宋慶齡女史)의일행(一行)과가티 연회색(軟灰色)두루막에 검은『마괘아(馬掛兒)』을 입은중년(中年)늙은이생화(生化)에 싸인관(棺)을 붓들고 통곡(痛哭)을하든그를 나는문득 노신(魯迅)인것을알엇스며 엽헤섯든 R씨(氏)도 그가노신(魯迅)이란것을 말하고난 십분(十分)쯤뒤에 R씨(氏)는나를 노신(魯迅)에게소개(紹介)하여주엇다&lt;br /&gt;
&lt;br /&gt;
그때노신(魯迅)은 R씨(氏)로부터 내가조선청년(朝鮮靑年)이란것과 늘한번대면(對面)의기회(機會)를가지려고 햇드란말을듯고외국(外國)의선배(先輩)압히며 처소(處所)가 처소(處所)인만치 다만 근신(謹愼)과공손(恭遜)할뿐인나의손을 다시한번 잡아줄때는그는매우 익숙하고 친절(親切)한친구이엿다&lt;br /&gt;
&lt;br /&gt;
아!그가벌서 오십육세(五十六歲)를일기(一期)로 상해시고탑구호(上海施高塔九號)에서 영서(永逝)하엿다는 부보(訃報)를바들때에 암연(暗然)한줄기 눈물을지우느니 엇지조선(朝鮮)의 한사람후배(後輩)로써 이붓을잡는나뿐이랴&lt;br /&gt;
&lt;br /&gt;
(이(二))&lt;br /&gt;
&lt;br /&gt;
이육사(李陸史)&lt;br /&gt;
&lt;br /&gt;
중국문학사상(中國文學史上)에남긴 그의 위치(位置)『아(阿)Q의 정전(正傳)을 다읽고낫슬때나는 아즉까지 아(阿)Q의 운명(運命)이걱정되여 못견듸겟다』고한『로망·로—랑』의 말과가티 현대중국문학(現代中國文學)의 아버지인 노신(魯迅)을&lt;br /&gt;
&lt;br /&gt;
이해(理解)하기 위(爲)해서는 우리는 먼저 아(阿)Q의 정전(正傳)을 이해(理解)하지안흐면 안된다 그러나 지금의 중국(中國)의 아(阿)Q들은 벌서『로망·로—라』으로하야금 그운명(運命)을 걱정할 필요(必要)는 업시되엿다실(實)로 수만흔 아(阿)Q들은 벌서 자신(自身)들의 운명(運命)을 열어갈길을노신(魯迅)에게서배웟다 그래서중국(中國)의 모든근로층(勤勞層)들은 남경로(南京路)의『아스필트』가자신(自身)들의 발미테 흔들리는것을늣기며 시고탑로신촌(施高塔路新邨)의구호(九號)로그들이가젓든 위대(偉大)한문호(文豪)의최후(最後)를애도(哀悼)하는마음들은 황포탄(黃浦灘)의붉은파도(波濤)와가티 밀려가고잇는것이다&lt;br /&gt;
&lt;br /&gt;
그럼으로 아(阿)Q시대(時代)를 고찰(考察)하여보는데따라서 노신정신(魯迅精神)의 삼단적변천(三段的變遷)과아울러 현대중국문학(現代中國文學)의 발전과정(發展過程)을 알어보는것도그를추억(追憶)하는의미(意味)에서 그다지 허무(虛無)한 일은아닐것이다,&lt;br /&gt;
&lt;br /&gt;
중국(中國)에는 고래(古來)로 소설(小說)이라는오늘날우리가 보는것과가튼 완전(完全)한예술적형태(藝術的形態)는 존재(存在)하지못햇다 삼국연의(三國演義)나 수호지(水滸誌)가아니면홍루몽(紅樓夢)쯤이잇섯고 다소(多少)의전기(傳記)가잇섯을뿐으로서 일반교양(一般敎養)잇는집자제(子弟)들은 과거제도(科擧制度)에 화(禍)를바더문어체(文語體)의&lt;br /&gt;
&lt;br /&gt;
고(古)&lt;br /&gt;
&lt;br /&gt;
문(文)만숭상(崇尙)하고백화소설(白話小說)가튼것은속인(俗人)의할일이라햐야나치아는하편소위문단(所謂文壇)은당송팔가(唐宋八家)와팔반(八般)의혼합체(混合體)인상성파(相城派)와사기당(思綺堂)과 원수원(袁隨園)의유파(流派)를따라가는 사륙변체문(四六騈體文)과황산곡(黃山谷)을본존(本尊)으로하는 강서파등등(江西派等等)이 당시정통파(當時正統派)의문학(文學)으로서 과장(誇張)과 허위(虛偽)와 아유(阿諛)로서 고전문학(古典文學)을 모방(模倣)한데지나지못하엿스며 새로운사회(社會)를 창생(創生)할하등(何等)의 힘도가지지못한것은 미루어알기도 어렵지안흔 분위기(雰圍氣)속에 중국문학사상(中國文學史上)에 찬연(燦然)한봉화(烽火)가 일어난것은일구일오년(一九一五年) 잡지(雜誌)『신청년(新靑年)』의 창간(創刊)이그것이다&lt;br /&gt;
&lt;br /&gt;
이것이처음발간(發刊)되자 당시(當時)『아메리카』에잇든호적지박토(胡適之博土)는『문학개량추의(文學改良蒭議)』라는『문학혁명론(文學革命論)』을일구일칠년신연호(一九一七年新年號)에 게재(揭載)하야진독수(陳獨秀)가 이에찬의(賛意)를표(表)하고 북경대학(北京大學)을 중심(中心)으로한 진보적(進步的)인교수(敎授)들이 합류(合流)하게되자 종래(從來)의고문가(古文家)들은 이운동(運動)을방해(防害)코저 가진야비(野卑)한 정치적수단(政治的手段)을 써도보앗스나 일구팔년사월호(一九八年四月號)에 노신(魯迅)의『광인일기(狂人日記)』란 백화소설(白話小說)이&lt;br /&gt;
&lt;br /&gt;
발(發)&lt;br /&gt;
&lt;br /&gt;
표(表)되엿슬때는 문학혁명운동(文學革命運動)은 실천(實踐)의거대보무(巨大步武)를옴기게되고 벌서고문가(古文家)들은 그추악(醜惡)한꼬라를 감주지안흐면안되엿다는것은 그후(後)얼마뒤에 노신(魯迅)이광동(廣東)에갓슬때에어&lt;br /&gt;
&lt;br /&gt;
떤흥분(興奮)한청년(靑年)은 그를마지하는문장(文章)속에『광인일기(狂人日記)』를 처음읽엇슬때 문학(文學)이란것이 무엇인지몰랏든나는 차차읽어나려가면서이상(異常)한흥분(興奮)을 늣겻다 그래서 동무를만나기만하면 곳붓들고말하기를——중국(中國)의문학(文學)은 이제바야흐로 한시대(時代)를 짓고잇다 그대는『광인일기(狂人日記)』를 읽어보앗는가 또거리를거러가면 길가는사람이라도붓들고 내의견(意見)을발표(發表)하리라고생각한적도잇섯다……』(노신재광동(魯迅在廣東))&lt;br /&gt;
&lt;br /&gt;
이문제(問題)의소설(小說)『광인일기(狂人日記)』의내용(內容)은 한개망상광(妄想狂)의 일기체(日記體)의소설(小說)로서 이주인공(主人公)은 실(實)로대담(大膽)하게또명확(明確)하게 봉건적(封建的)인 중국구사회(中國舊社會)의 악폐(惡弊)를통매(痛罵)한다 자기(自己)의 이웃사람은 물론(勿論)말할것도업고 특(特)히자기가정(自己家庭)을 격렬(激烈)히 공격(攻擊)하는것이다 가정(家庭)—가족제도(家族制度)라는것이중국봉건사회(中國封建社會)의 사회적단위(社會的單位)로서일반(一般)에열마나한 해독(害毒)을끼처왓는가.봉건적가족제도(封建的家族制度)는 고형화(固型化)한유교류(儒敎流)의&lt;br /&gt;
&lt;br /&gt;
종(宗)&lt;br /&gt;
&lt;br /&gt;
법사회관념하(法社會觀念下)에 당연(當然)히붕괴(崩壞)돠여야할것이면서 붕괴(崩壞)되지못하고 근대적사회(近代的社會)의성장(成長)에 가장근본적(根本的)인 장애(障碍)로되여잇는 날근도덕(道德)과 인습(因襲)을 여지(餘地)업시 통매(痛罵)햇다,이에『광인일기(狂人日記)』중(中)에 한절(節)을 초(抄)하면『나 는 역사(歷史)를 뒤적거려 보앗다 역사(歷史)란건 어느시대(時代)에나 인의(仁義) 도덕(道德)이란몃줄로 치더치덕씨여 저잇섯다 나는 밤잠도안자고 딍굴딍굴러가며 생각하여보 앗스나 겨우글자와 글자사이 에서『사람을먹는다』는 몃자 가쓰여잇섯슬뿐이엿다』&lt;br /&gt;
&lt;br /&gt;
이가티추악(醜惡)한 사회면(社會面)을폭로(暴露)한다음 오는시대(時代)의건설(建設)은 젊은사람들의손에 맛걱저야한다는것을암시(暗示)하면서 이소설(小說)의일편(一篇)은『어린이를구(救)하자』는 말로서끗을막엇다.실(實)로이한말은 당시(當時)의『어린이』인 중국청년(中國靑年)들에게는 사상적(思想的)으로는『폭탄선언(暴彈宣言)』이상(以上)으로 충격(衝擊)을주엇스며이러한작품(作品)이 백화(白話)로쓰여지는데 따라 문학혁명(文學革命)이완전(完全)히승리(勝利)의 개가(凱歌)를 부르게된공적(功績)도 태반(太半)은노신(魯迅)에 돌려야하는것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삼(三))&lt;br /&gt;
&lt;br /&gt;
이육사(李陸史)&lt;br /&gt;
&lt;br /&gt;
『광인일기(狂人日氣)』의다음 연속(連續)해나온작품(作品)으로『공을사(孔乙巳)』『약(藥)』『명일(明日)』『일개소사건(一個小事件)』『두발적고사(頭髮的故事)』『풍파(風波)』『고향(故鄕)』등(等)은모다 신청년(新靑年)을통(通)해서세상(世上)에물의(物議)를 이르켯스나 그후일구이일년(後一九二一年) 북경신보문학부간(北京新報文學副刊)에그유명(有名)한『아(阿)Q정전(正傳)』이 연재(連載)되면서부터는 노신(魯迅)은자타(自他)가공인(共認)하는 문단제일인적작가(文壇第一人的作家)엿다.&lt;br /&gt;
&lt;br /&gt;
그리고 이러한대작(大作)은 모다신해혁명전후(辛亥革命前後)의&lt;br /&gt;
&lt;br /&gt;
봉(封)&lt;br /&gt;
&lt;br /&gt;
건사회(建社會)의생활(生活)을 그린것으로 어떠케필연적(必然的)으로 붕괴(崩壞)하지안흐면안될 특징(特徵)을가젓는가를묘사(描寫)하고 어떠케새로운사회(社會)를 살어갈가를 암시(暗示)하고잇다.뿐만아니라 당시(當時)의혁명(革命)과 혁명적(革命的)인사조(思潮)가 민중(民衆)의심리(心理)에 생활(生活)의『데테일슨』에 어떠케표현(表現)되는가를 가장『레알』하게묘사(描寫)한것이다.더구나 그는 농민작가(農民作家)라고할만치 농민생활(農民生活)을그리는데 교묘(巧妙)하다는것도 한가지조건(條件)이되겟지만은 그의소설(小說)에는주장(主張)이개념(槪念)에 흐른다거나 조금도무리(無理)가업는것은 그의작가적수완(作家的手腕)이 탁월(卓越)하다는것을 말하지안홀수업다.&lt;br /&gt;
&lt;br /&gt;
그리고 그의작품(作品)은 늘 농민(農民)을주인공(主人公)으로하는것과 때로는『인테리』일지라도 예(例)를들면『공을사(孔乙巳)』의 공을사(孔乙巳)나『아(阿)Q정전(正傳)』의아(阿)Q가모다 일맥(一脈)이상통(相通)하는 성격(性格)을가지는것이니 공을사(孔乙巳)는 구시대(舊時代)의지식인(知識人)으로 시대(時代)에떠러저서 무슨일에도 쓰여지지못하고기품(氣品)만은노펏스나 생활력(生活力)은업고걸인(乞人)이되야 선술집술상대(臺)에 일금십구조(一金十九吊)의주채(酒債)가 어느때까지쓰여저잇는대로 언제인지&lt;br /&gt;
&lt;br /&gt;
행(行)&lt;br /&gt;
&lt;br /&gt;
방(方)이 불명(不明)된채로 나중에죽어젓든것이라든지『룸펜』농민(農民)인 일용노동자아(日傭勞働者阿)Q가 또한 쑥스러운년석으로혁명혁명(革命革命)떠들어놋코는 그것이몹시유쾌해서 반취(半醉)한기분(氣分)이 폭동대(暴動隊)의일군(一群)에 참가(參加)는하려고하엿스나 결국(結局)헛풍만치고 아무것도못하다다가 때마츰 일어난 폭도(暴徒)의약탈사건(掠奪事件)에 도당(徒黨)으로오해(誤解)되여(피(彼)의평소(平素)삼가지못한 언동(言動)에의(依)하야)피살(被殺)되는 아(阿)Q의성격(性格)은 그때중국(中國)의 누구라도가 전부혹(全部或)은일부분식(一部分式)은 소유(所有)하고잇섯든것이다다시말하면 아(阿)Q나공을사(孔乙巳)가모다사고(思考)와행동(行動)이 루—즈하고 확호(確乎)한한개의 정신(精神)도업스며 우약(愚弱)하면서도 몹시건방지고 남에게한개쥐여질리면 아무런반항(反抗)도못하면서 남이자신(自身)을 연민(憐憫)하면 제도량(度量)이커서 남이못덤비는것이라고제대로도취(陶醉)하야 남을 되는대로해(害)치는 무지(無知)하고우수면서도 가엽고 괴팩스러운것을 노신(魯迅)은그『레알리스틕』한문장(文章)으로폭로(暴露)한것이 특징(特徵)이엿스니 당시(當時)『아(阿)Q정전(正傳)』이발표(發表)될때&lt;br /&gt;
&lt;br /&gt;
평(平)&lt;br /&gt;
&lt;br /&gt;
소노신(素魯迅)과 교분(交分)이좃치못한사람들은 모다자기(自己)를모—델로 고의(故意)로쓴것이라고들 떠드는자(者)가잇은것을 보아도알수가잇는것이다&lt;br /&gt;
&lt;br /&gt;
그래서당시중국(當時中國)은 시대적(時代的)으로『아(阿)Q시대(時代)』이엿스며 노신(魯迅)의『아(阿)Q정전(正傳)』이 발표(發表)될때는 비평계(批評界)를비롯하야 일반지식군(一般知識群)들은『아(阿)Q상(相)』이라거나『아(阿)Q시대(時代)』라는말을평상대화(平常對話)에사용(使用)하기를 항다반(恒茶飯)으로하게된것은 중국문학사상(中國文學史上)에남겨노흔노신(魯迅)의 위치(位置)를 짐작하기에 조흔 한개의재료(材料)이거니와그의작가(作家)로서의 태도(態度)를통(通)하야 일관(一貫)하여잇는 노신정신(魯迅精神)을 다시한번음미(吟味)해보는데 적지안흔흥미(興味)를갓게된다는것은 오늘날우리의조선문단(朝鮮文壇)에는 누구나할것업시 예술(藝術)과정치(政治)의 혼동(混同)이니 분립(分立)이니하야 문제(問題)가엇지보면 결말(决末)이난듯도하고 어찌보면 미해결(未解决)그대로 잇는듯도한 현상(現狀)인데 노신(魯迅)가티 자기신념(自己信念)이 구든사람은이예술(藝術)과정치(政治)란것을 어떠케해결(解决)하엿는가?이문제(問題)는 그의작가(作家)로서의 출발점(出發點)부터 구명(究明)해야한다.&lt;br /&gt;
&lt;br /&gt;
노신(魯迅)은&lt;br /&gt;
&lt;br /&gt;
본(本)&lt;br /&gt;
&lt;br /&gt;
내의사(來醫師)가 되려고하엿다 그것은자기(自己)의『할일』이 무엇이라는것을 알엇기때문이엇다 물론(勿論)그때의 자기(自己)의『할일』이란것은 민족개량(民族改良)이라는 신념(信念)이엿든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후년(後年)『납함(吶喊)』서문(序文)에 다음가티써다.&lt;br /&gt;
&lt;br /&gt;
『나의학적(學籍)은 일본(日本)어느 지방(地方)의 의학전문학교(醫學專門學校)에 두엇다 나의 꿈은 이것으로 매우 아름답 고 만족(滿足)햇다 졸업(卒業)만하고 고(故) 국(國)에 도라오면 아버지와가티 치료(治療)못하는 병인(病人)을살리고 전(戰) 쟁(爭)이나면 출정(出征)도하려니와 국(國) 인(人)의 유신(維新)에대(對)한 신앙(信仰)에까지 나어갈것……』이라고&lt;br /&gt;
&lt;br /&gt;
이것은물론(勿論) 소년(少年)다운노신(魯迅)의로맨틕한 인도주의적흥분(人道主義的興奮)이엿겟지만은 이꿈도결국(結局)은 깨여지고말엇다.&lt;br /&gt;
&lt;br /&gt;
——의학(醫學)은결(决)코 긴요(緊要)하지안타 우약(愚弱)한 국민(國民)은 체격(體格)이 아모 리 조타고해도 또 아모리강(强) 장(壯)해도 무의미(無意味)한 구경거리나 또는 구경군이 되는박게는아 무것도아니다—중략(中略)—그럼으로 긴요(緊要)한것은 그들을 정신적(精神的)으 로 잘개조(改造)할것은 무엇일가나 는그때당연(當然) 문예(文藝)라고생각햇다 그리고 문예운동(文藝運動)을 제창(提唱)하기 로햇다(납함서문(吶喊序文))&lt;br /&gt;
&lt;br /&gt;
이리하야 그가 당시동경(當時東京)에망명(亡命)해잇는 중국(中國)사람들의 기관지(機關紙)인『절강조(浙江潮)』『하남(河南)』등(等)에 쓰든과학사(科學史)나 진화론(進化論)의 해설(解說)을 집어치우고 문학서적(文學書籍)을 번역(飜譯)한것은희랍(希臘)의 독립운동(獨立運動)을 원조(援助)한『빠이론』과 파란(波蘭)의복수시인(復讐詩人)『아담·미케뷧치』『향가리』의 애국시인(愛國詩人)『베트피·산더—』『필립핀』의문인(文人)으로 서반아정부(西班牙政府)에 사형(死刑)바는『리샬』등(等)의 작품(作品)이엿다.&lt;br /&gt;
&lt;br /&gt;
(사(四))&lt;br /&gt;
&lt;br /&gt;
이육사(李陸史)&lt;br /&gt;
&lt;br /&gt;
그리고이것은 노신(魯迅)의 문학행정(文學行程)에잇서서 가장초기(初期)에 속(屬)하는것이지만은 이러한번역(飜譯)까지라도그의 일정(一定)한목적(目的) 즉정치적목적(即政治的目的)미테 수행(遂行)된것을 엿볼수잇는것이며 우에말한『광인일기(狂人日記)』의『어린이를구(救)하자』는말도 순결(純潔)한 청년(靑年)들에의(依)하야 새로운중국(中國)을 건설(建設)하자는 그의이상(理想)을&lt;br /&gt;
&lt;br /&gt;
단적(端的)으로 고백(告白)한것으로써 이말은당시일반청년(當時一般靑年)들에게 무거운 책임감(責任感)을깨닷게한것은물론(勿論) 이래기천년(爾來幾千年)동안의 봉건사회(封建社會)로부터 청년(靑年)을해방(解放)하랴는 슬로—간으로 널리쓰여젓고 사실(事實)그뒤의 중국청년학생(中國靑年學生)들은 모든대중적사회운동(大衆的社會運動)의최전선(最戰線)에서 활발과감(活潑果敢)한 지도(指導)와조직(組織)을하엿스며 그유명(有名)한 오사운동(五四運動)이나 오주운동(五州運動)이나 국민혁명(國民革命)까지도 늘최전선(最前線)에서서 대중(大衆)을지도(指導)한것은 이들청년학생(靑年學生)이엿다&lt;br /&gt;
&lt;br /&gt;
그럼으로 노신(魯迅)에잇서서는 예술(藝術)은정치(政治)의 노예(奴隸)가 아닐뿐아니라 적어도예술(藝術)이 정치(政治)의 선구자(先驅者)인 동시(同時)에혼동(混同)도 분립(分立)도아닌즉(即) 우수(優秀)한작품(作品) 진보적(進步的)인 작품(作品)을 산출(產出)하는데만 문호(文豪) 노신(魯迅)의지위(地位)는노퍼갓고 아(阿)Q도 여기서비로소탄생(誕生)하엿스며 일세(一世)의 비평가(批評家)를도 감(敢)히 그에게는 함부로 머리를 들지못하엿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여기에 한가지 조흔예(例)가잇다 일구이팔년경(一九二八年頃) 무한(武漢)을쪼겨와서 상해(上海)에서 태양사(太陽社)를조직(組織)한 청년비평가(青年批評家) 전행촌(錢杏村)이 때마춤 푸로문학론(文學論)이 드셀때인만큼 노신(魯迅)을 대담(大膽)하게&lt;br /&gt;
&lt;br /&gt;
공격(攻擊)을 시작(始作)해보앗다그소론(所論)에 의(依)하면노신(魯迅)의 작품(作品)은 비계급적(非階級的)이다 아(阿)Q에게어데 계급성(階級性)이잇느냐는것이다.&lt;br /&gt;
&lt;br /&gt;
물론(勿論)그것은 정당(正當)한말이다,노신(魯迅)의작품(作品)에서 우리는눈딱고보아도 푸로레타리아적특성(的特性)은 조금도 볼수가 업는것은 사실(事實)이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우리가 한사람의작품(作品)을 비평(批評)할때는 그시대적배경(時代的背景)을고려(考慮)하지안흘수는업는것이니 노신(魯迅)이작가(作家)로활동(活動)을 하고잇슬때는중국(中國)에는 오늘날우리가 정의(定義)를나릴수잇는 푸로레타리아는 업슬뿐아니라 그때쯤은 뿌르조아민주주의적(民主主義的)인 정치사조(政治思潮)조차도아즉계선(界線)이분명(分明)하지못하엿다는것은뿌르조아혁명(革命)이라는 소위국민혁명(所謂國民革命)도 정직(正直)하게말하자면 사오운동(四五運動)을 전초전(前哨戰)으로한것만큼 여기서 역시중국(亦是中國)의 비상가(批詳家)인병신(丙申)은자미잇는말을하고잇다&lt;br /&gt;
&lt;br /&gt;
『그가현재(現在) 중국좌익작가연맹(中國左翼作家聯盟)을지지(支持)하고잇다해서 그의『사오(四五)』전후(前後)의&lt;br /&gt;
&lt;br /&gt;
작품(作品)을 푸로문학(文學)이라고 지목(指目)할것은아니&lt;br /&gt;
&lt;br /&gt;
다 그러나 그를우수(優秀)한 농민작가(農民作家)라고 하는것이 타당(妥當)타고—』그러타 이말은 어느정도(程度)까지&lt;br /&gt;
&lt;br /&gt;
정당(正當)에 가까운말로서 그를푸로작가(作家)가아니고 농민작가(農民作家)라고해서작가노신(作家魯迅)의 명예(名譽)를 더럽힐조건(條件)은 되지못하는것이다 다만문제(問題)는 그가얼마나 창작(創作)에 잇서서진실(眞實)하게 명확(明確)하게 묘사(描寫)하는태도(態度)를 가지는가 그의한말을 써보기로하자&lt;br /&gt;
&lt;br /&gt;
『——현재(現在) 좌익작가(左翼作家)는 훌륭한자신(自身)들의 문학(文學)을 쓸수잇슬가?생각컨대 이것은 매우곤란(困難)하다.현재(現在)의 이런 부류(部類)의 작가(作家)들은 모다『인테리』다 그들은 현실(現實)의 진실(眞實)한 정형(情形)은쓸려고해도 용이(容易)치안타 어떤사람이 일즉 이런 문제(問題)를제출(提出)한것이잇섯다『작가(作家)가 묘사(描寫)하는것은 반드시 자기(自己)가 경험(經驗)한것이라야만될것인가?그러나 그는 스스로 답(答)하기를반드시 안그래도조타웨러러냐하면 그들은 잘 추찰(推察)할수가잇스므로 절도(窃盜)하는장면(塲面)을 묘사(描寫)하랴면 작가(作家)는 반드시 자신(自身)이 절도(窃盜)질할 필요(必要)도업고 간통(姦通)하는&lt;br /&gt;
&lt;br /&gt;
장면(塲面)을 묘사(描寫)할 필요(必要)를늣길때 작가(作家) 자신(自身)이간통(姦通)할 필요(必要)도 업다고』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작가(作家)가 구사회(舊社會)속에서 생장(生長)해서그 사회(社會)의 모든 일을 잘알고 그사회(社會)의 인간(人間)들에게 익숙해저서 잇는때문에 추찰(推察)이되는것이다 그러나 종래(從來)아무런 관계(關係)도업는새사회(社會)의 정형(情形)과인물(人物)에 대(對)해서는 작가(作家)가무능(無能)하다면 아마그릇된 묘사(描寫)를할것이다 그럼으로 푸로문학가(文學家)는 반드시 참된현실(現實)과 생명(生命)을 가티하고 혹(或)은 보다기피현실(現實)의맥박(脈搏)을 감수(感受)하지안흐면 안된다고하면서 또다시말을 계속(繼續)하는것이다.&lt;br /&gt;
&lt;br /&gt;
그러나구사회(舊社會)를 조그만치공격(攻擊)하는작품(作品)일지라도 만약(萬若)그결점(缺點)을 분명(分明)히모르고 그병근(病根)을투철(透澈)히파악(把握)치못하면 그것은유해(有害)할뿐이다 애석한일이나마현재(現在)의푸로작가(作家)들은 비평가(批評家)까지도 왕왕(往往) 그것을못한다 혹사회(或社會)를 정시(正視)해서 그진상(眞相)을 알려고도안코 그중(中)에는 상대자(相對者)라고 생각하는편의 실정(實情)도알려고하지안는다.&lt;br /&gt;
&lt;br /&gt;
(오(五))&lt;br /&gt;
&lt;br /&gt;
이육사(李陸史)&lt;br /&gt;
&lt;br /&gt;
차근(車近)한 예(例)로는 얼마전 모지상(某紙上)에 중국문학계(中國文學界)를 비평(批評)한문장(文章)을 한편(篇)보앗는데 중국문학계(中國文學界)를 삼파(三派)에 난워서 먼저창조파(創造派)를 들어 푸로파(派)라하야매우상세(詳細)하게 논급(論及)하고 다음어사사(語絲社)를 소(小)뿌르파(派)라고 조그만치 말한후(後)&lt;br /&gt;
&lt;br /&gt;
신월사(新月社)를 뿌르문학파(文學派)라 해서 겨우 붓 을 대다가만 젊은비평가(批評家)가잇 섯다 이것은 젊은기질(氣質)의 상(相) 대자(對者)라고 생각는파(派)에 대(對)해서 는 무어세(細)□□□고구(考究)할필요(必要)가 업다는뜻을 표명(表明)한것이다 물(勿) 논(論)우리는 서적(書籍)을볼때 상대자(相對者) 의것을 보는것은 동파(同派)의것을 보는안심(安心)과 유쾌(愉快)와 유익(有益)한데 밋치지 못하는것은 사실(事實)이다 그러나 만약(萬若) 일개전투자(一個戰鬪者)라면 나는 생각컨대 현실(現實)과 상대(相對) 자(者)를 이해(理解)하는 편의상(便宜上) 보담 만은 당면(當面)의 상대자(相對者)에 대(對)한 해부(解剖)를 필요(必要)로 하지안으면안 될것이다.옛것을 분명(分明)히 알 고 새로운것에 간도(看到)하고 과(過) 거(去)를 요해(了解)하야 장래(將來)를 추단(推斷) 하는데서만 우리들의 문학적(文學的) 발전(發展)은 희망(希望)이잇다 생각건대 이것만은 현재(現在)와 가튼 환경(環境) 에잇는 작가(作家)들은 부단(不斷)히 노(努) 역(力)할것이고 그래야만 참된작(作) 품(品)이 나오는것이다』라 고&lt;br /&gt;
&lt;br /&gt;
이간단(簡單)한 몃마듸만히 문호노신(文豪魯迅)의 창작(創作)에 대(對)한『모랄』인것이다 이얼마나 우리의 뼈에 사무치고도 남을만한시사(示唆)인고!이리해서&lt;br /&gt;
&lt;br /&gt;
현대중국문단(現代中國文壇)의부(父)이며비평가(批評家)의비평(批評)으로서자타(自他)가 그지위(地位)를 함께긍정(肯定)하든그의작가(作家)로서의 생애(生涯)는 너무나쩔으것이엿스니 일구이육연삼월(一九二六年三月)『이혼(離婚)』이란작품(作品)을 최후(最後)로남긴그는 교수(敎授)로서 작가(作家)로서의 화려(華麗)한 생애(生涯)는 종언(終焉)을고(告)하지 안흐면안될때가왓다 그는 지금부터『손으로쓰기보다는 발로 다라나기가 더밧벗다』&lt;br /&gt;
&lt;br /&gt;
일구이육년(一九二六年) 북양군벌(北洋軍閥)을 배경(背景)오로한 안복파(安福派)의수령(首領) 단기서(段祺瑞)의정부(政府)는 급진적(急進的)인좌파(左派)의 교수(敎授)와우수(優秀)한 지식분자오십여명(知識分子五十餘名) 체포령(逮捕令)을 나렷다 우리노신(魯迅)은 이오십명중(五十名中)의 한사람이엿다 그것은일구이사년(一九二四年) 국민당(國民黨)의 연아용공책(聯俄容共策)이 결정(决定)되야그익년(翌年)가을『뽀로된』등(等)이고문(顧問)으로광동(廣東)에오고『전국민적공동전선(全國民的共同戰線)』이엿든 국민혁명(國民革命)의제일계단(第一階段)인 광동시기(廣東時期)에는 푸로레타라아의 동맹자(同盟者)는 농민도시빈민(農民都市貧民) 소(小)뿌로지식계급(知識階級) 국민적(國民的)뿌르조아지—엿다』&lt;br /&gt;
&lt;br /&gt;
그래서 급진교수(急進敎授)들은 교육부총장(敎育部總長) 군벌정부(軍閥政府)를 육박(肉迫)하엿스며이러한&lt;br /&gt;
&lt;br /&gt;
신흥세력(新興勢力)에 낭패(狼狽)와공포(恐布)를 늣긴군벌정부(軍閥政府)는 이러한교수(敎授)들과 학생(學生)들에게체포령(逮捕令)을나리고 학생(學生)들의행렬(行列)은정부위병(政府衛兵)들의 발포(發砲)로인(因)하야 남여수백여명(男女數百餘名)의 사상자(死傷者)가낫다 그때노신(魯迅)은 북경동교민항(北京東交民巷)의 공사관구역(公使舘區域)의 외국인병원(外國人病院)이나 공장(工塲)안으로 도라단이며 찬물로기아(飢餓)를 참아가면서도 신문(新聞)과 잡지(雜誌)에 기고(寄稿)를하야 군벌정부(軍閥政府)를 맹렬(猛烈)히 공격(攻擊)하얏다 그중(中)에도『국민이래(國民以來) 최암흑일(最暗黑日)에지(誌)』하엿다는 명문(名文)은 단기서(段祺瑞)로하여금 의자(椅子)에나려안게되엿다&lt;br /&gt;
&lt;br /&gt;
——붓으로쓰헛소리는 피로쓴 사실(事實)을 만착(瞞着)하지못한다——중(中) 약(略)——붓으로쓴것이 무슨힘이 잇스랴 실탄(實彈)을쏘는것은 오즉 청년(靑年)의피다(속화개집(續華盖集))&lt;br /&gt;
&lt;br /&gt;
오늘날까지 중국문단(中國文壇)의『막심콜키—』이든그는 지금부터는문화(文化)의전사(戰士)로서『앙리·발뷰스』보다비장(悲壯)한생애(生涯)가 시작(始作)되는것이엿다&lt;br /&gt;
&lt;br /&gt;
그의말과가티&lt;br /&gt;
&lt;br /&gt;
최청흑(最晴黑)한오십일(五十日)이지나고 그는북경(北京)을탈출(脫出)햇다 하문대학(夏門大學)에 초청(招請)을바□갓으나 대학기업가(大學企業家)의 음흉수(陰凶手)것인것을 안그는광동중산대학(廣東中山大學)으로갓다 그러나 일구이육년사월십오일(一九二六年四月十五日) 장개석(蔣介石)의쿠—데타—는 광동일성(廣東一省)만 노동자농민급진지식분자삼천여명(勞働者農民急進知識分子三千餘名)을—하엿 으며 한때는『혁명(革命)의전사(戰士)』라고 간판(看板)을지인노신(魯迅)도상해(上海)로 다라나야만 되엿다여기서우리가 다시한번그에게흥미(興味)보다는 최대(最大)의 경의(敬意)를갓게되는것은 다음의일문(一文)이다&lt;br /&gt;
&lt;br /&gt;
——나의 일종망상(一種妄想)은 깨여젓 다 나는지금까지 때때로낙관(樂觀) 을가젓섯다 청년(靑年)을 압박(壓迫)하고 ——하는것은 대개노인(大槪老人)이다이 들노물(老物)들이 다죽어지면 중국(中國) 은보담더 생기(生氣)잇는것이되리라 고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 르치안은것을 알엇다 청년(靑年)을 ——하는것은 대개(大槪)는 청년(靑年)인 듯하다 또달이 재조(再造)할수업는 생명(生命)과 청춘(靑春)에 대(對)해서 한층(層) 더애낌이업시…(이기집(而己集))&lt;br /&gt;
&lt;br /&gt;
이글은그가 침묵(沈默)하고잇는것을『공포(恐怖)』때문이라고 조소(嘲笑)한 사람에게답(答)한 통신문(通信文)의 일절(一節)로서 이때까지&lt;br /&gt;
&lt;br /&gt;
진화론자(進化論者)이든 그자신(自身)의 사상적립장(思想的立塲)을양기(揚棄)하고 새로운 성장(成長)의 일단계(一段階)로보인것이라고 해석(解釋)해도 틀러지안흘것이다.&lt;br /&gt;
&lt;br /&gt;
그가상해(上海)에 왓슬때는 국민당(國民黨)의 쿠—데타—로 혁명군(革命軍)에서쪼겨온 젊은푸로문학자(文學者)가 만엇다『혁명문학론(革命文學論)』이 효효(囂囂)히 불러지고 실제정치행동(實際政治行動)의 전선(前線)을 떠난그들은 총칼대신에 펜을잡엇다,원기왕성(元氣旺盛)하게 실제공작(實際工作)의경험(經驗)에서 매우견실(堅實)한것도 잇섯스나 때로는 자부적(自負的)인 영웅주의(英雄主義)가 화(禍)를끼치고——에실패(失敗)한 분만(憤瞞)과 극좌적(極左的)인 기회주의자(機會主義者)들은노신(魯迅)을 공격(攻擊)햇다 그러나 그는푸로문학(文學)이란 어떤것인가 또는어찌해야 될것인가를 알리기위(爲)하야 아버지가튼 애무(愛撫)로서『푸레하노프』,『루나챨스키—』들의 문학론(文學論)과『싸벳트』의 문예정책(文藝政策)을번역소개(飜譯紹介)하야 중국(中國)푸로문학(文學)을건설(建設)하고잇는동안에『노신(魯迅)을타도(打倒)치안흐면 중국(中國)에푸로문학(文學)은생기지못한다』는 문학소아병자(文學小兒病者)들은 그자신(自身)들이 먼저너머지고 이제그가마자가고말엇다 이위대(偉大)한중국문학가(中國文學家)의영(靈)아페 고요히머리를숙이면서 나의개인적(個人的)으로 곤란(困難)한정형(情形)에의(依)하야 문호노신(文豪魯迅)의윤곽(輪廓)을뚜렷이그리지못함을 참괴(慚愧)히알며붓을놋키로한다 —요(了)—&lt;br /&gt;
&lt;br /&gt;
=='''주요 내용 요약'''==&lt;br /&gt;
추도 배경: 중국 신문학의 최고봉인 루쉰(魯迅)의 서거(1936년 10월 19일)를 추도하며, 작가와의 개인적 인연(1932년 양행불 암살 사건 직후 만국빈의사에서의 만남)을 회상하는 글이다.&lt;br /&gt;
&lt;br /&gt;
문학적 위치 - 아Q 정전: 루쉰 이해의 핵심으로 그의 대표작《아Q정전(阿Q正傳)을 제시하고 있다. '아Q'는 사고와 행동이 나약하고 우매하면서도 건방진, 당시 중국인의 집단적 성격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루쉰은 이 '아Q 상(相)'을 폭로하여 중국 지식 군중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루쉰은 '아Q 시대'를 종식시키고 새로운 중국을 열어갈 길을 제시한 인물로 평가된다.&lt;br /&gt;
&lt;br /&gt;
문학 혁명과 루쉰의 역할: 중국의 고루한 고문학을 비판하고 백화소설(白話小說)을 통해 문학 혁명의 선두에 선 것이다.《광인일기(狂人日記)를 통해 봉건적 가족 제도와 유교의 종법 사회 관념을 통렬히 비판하며 &amp;quot;어린이를 구하자&amp;quot;는 메시지를 던져 청년들에게 혁명적 충격을 주었다.&lt;br /&gt;
&lt;br /&gt;
예술과 정치: 루쉰은 본래 의사(醫師)가 되려 했으나, '우매한 국민은 체격이 강해도 무의미한 구경꾼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으로 정신 개조를 위한 문예 운동으로 전향하였다. 그에게 예술은 정치의 노예가 아니라, 적어도 정치의 선구자였으며, 정치적 목적 아래 수행된 것이다.&lt;br /&gt;
&lt;br /&gt;
후기 생애와 투쟁: 군벌 정부(단기서)와 국민당(장개석)의 탄압을 피해 쫓겨 다니는 비장한 '문화의 전사'로서의 삶을 살았다. 젊은 프로문학 비평가들에게 '비계급적 작가'로 공격받기도 했으나, 그는 현실과의 동떨어짐을 비판하며 진실된 현실을 기반으로 한 창작의 '모랄(도덕성)'을 강조한 것이다.&lt;br /&gt;
&lt;br /&gt;
=='''분석 및 특징'''==&lt;br /&gt;
이육사의 지식인 면모: 이육사(본명 이활, 기고명 '이육사(李陸史)')가 당대 중국의 최고 지성 및 정치 상황에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글이다. 루쉰의 문학적, 사상적 변천 과정(의학 → 문예 → 현실 참여)을 심도 있게 분석하고 있다. 루쉰 문학의 핵심 통찰: 루쉰의 작품을 단순히 서사로 보는 것이 아니라, 봉건 사회에 대한 투쟁, 계급성, 지식인의 역할 등 당대 사회 변혁의 맥락에서 분석하는 것이다. 한국 문단에 대한 시사: 글 말미에 '예술과 정치'의 관계에 대해 루쉰의 태도를 재조명하며, 당시 조선 문단에서 첨예하게 논의되던 이 문제에 대한 이육사의 입장을 간접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수필문외한(隨筆門外漢)의수첩(手帖)'''=&lt;br /&gt;
문(門) 외(外) 한(漢) 의 수(手) 첩(帖)&lt;br /&gt;
&lt;br /&gt;
(칠(七))&lt;br /&gt;
&lt;br /&gt;
이(李) 육(陸) 사(史)&lt;br /&gt;
&lt;br /&gt;
R이란 사람은 나와는 매우친(親)한 동무엿다 그럼으로 우리두사람 사이에는 결(决)코 무슨비밀(秘密)이란것은 잇을터수가 아니엿다 그러나 지금은 나의교우록(交友錄)속에 씨여저잇는 그의『호패(號牌)』에 붉은줄을 그은지도 벌써한달이 다되엿다.&lt;br /&gt;
&lt;br /&gt;
이러한 간단한사실(事實)이 모르는사람으로본다면 가렵지도 아프지도안흘지모르겟으나 남달리상처(相處)해오든 벗을한사람 일허버린나의흐젓한 마음은 어데도 비길수업시 서러운것이다.&lt;br /&gt;
&lt;br /&gt;
그뿐만아니라 이글을 쓰려는오늘아침에 이제는 고인(故人)인 R의동생으로부터 나에게 간단한편지한장과『문외한(門外漢)의수첩(手帖)』이란유고(遺稿)한권(卷)이 보내여왓다.&lt;br /&gt;
&lt;br /&gt;
그유고(遺稿)는 이래십년(爾來十年)에 쓴 고인(故人)의 일기(日記)인 모양인데 그도축일(逐日)해서 쓰것도 아니고 때때로마음이 내킬때마다 써둔것이며그맨끗페—지에『〇〇형(兄)에게』라는 이세상(世上)사람으로서의 절필(絶筆)인듯한 글시가 묵흔(墨痕)이임리(淋漓)한것은소리업는 내눈물을더욱짜내는것이엿다 그리고이글내용(內容)은 일기(日記)는 일기(日記)면서도 대부분(大部分)은 나에게 보내는 편지이엿다.그편지가운데서 지금이라도 흥미(興味)잇게생각나는 부분(部分)만을 써서보기로한다면 그도처음에는 문학청년(文學青年)이엿든 사실(事實)이잇섯다.그러나그는자기가 하고저한 문학(文學)을 끗끗내 완성(完成)할수잇는 행복(幸福)된사람은 아니엿다.그러나 그사람은죽든날까지도문학(文學)을 단념(斷念)하지는안헛다는것은 어느해겨울 그와나는 우연(偶然)히도 어느 온천(溫泉)에서만낫다 그때는 바로동경(東京)에서들풍자문학론(諷刺文學論)이 한참대두(擡頭)할때 이엿슴으로 그도또한 예(例)에삐지지안코 이것의 조선(朝鮮)에잇서서 가능(可能)하다는 설교(說敎)를 하는것이엿다그때좀더 생각해볼 여지(餘地)가잇다고한 나의말에 그는말하기를조선(朝鮮)사람은 생활(生活)그자체(自體)가 풍랄적(諷剌的)으로 되여잇다고 떠둘어대기에나는그에게 더진지(眞摯)한태도(態度)로 사물(事物)을 대(對)할필요(必要)가 잇다는것을말하엿고 그다음날 우리는 서로갈린체 영원(永遠)히 보지못할 사람이되엿다.&lt;br /&gt;
&lt;br /&gt;
이글은 그때나와 갈려서 몃칠동안에 쓴것이라고 생각난다 일구삼(一九三)×연(年)×월(月)×일(日)—〇형(兄)!S역(驛)에서 형(兄)과갈려서나는〇동(洞)까지 오십리(五十里)나되는 산(山)길을 걸어왓소.동리(洞里)거리에 피곤(疲困)한 다리를 쉬이면서 생각하기를 아무데나 큼직한집 초당(草堂)방을 차저드러가면 이밤을 뜻뜻한 아랫목에서 지낼수도 잇겟거니와 그들과함께 살을맛대이고지나며 그들의 생활(生活)을체득(體得)할수가 잇다면……얼마나 유쾌(愉快)한일이겟습니까?&lt;br /&gt;
&lt;br /&gt;
나는 여기서 형(兄)이일직이 하든말을 생각해보앗소 상해(上海)어데선가?목욕(沐浴)을 갓슬때 불란서(佛蘭西)사람과 서반아(西班牙)사람과 가트욕조(浴漕)에 들어갓슬때의 감정(感情)을 얘기한것을 기억(記憶)이나 하시는지요.그때는 적나라(赤裸裸)한 몸둥이들이모두꼭가튼 온도(溫度)를 느낄수잇더라고.세계(世界)는 모름직이 목간통가티 되어야 한다고.&lt;br /&gt;
&lt;br /&gt;
그러나 오늘의 나의심경(心境)은그와는 정반대(正反對)로 어데까지나 육친애(肉親愛)를 느껴볼 결심(决心)이엿소 그래서 세계(世界)는 차라리 초당(草堂)방가티되라고까지 생각해도 보앗소이러한 생각을 하노라면 또다른 한생각이 꼬리를 물고나오는동안에 나는가젓든 담배를모조리 다피워 바렷소.담배라도피우지 안흐면 첫겨우의눈우바람이몹시도 옷깃을 새여들고 발끄티저리기도해서 담빠도살겸 주막(酒幕)집잇는대로 가까이 차저갓소.그곳에는 마침담배 가개가잇고젊은농부(農夫)인듯한 사람이잇기에오전(五錢)짜리 한푼을던지고『마코』한갑을 달라고 하엿더니만 나는여기서 뜻하지못한 실패(失敗)를 하엿소 그것은 나행동(行動)이 몸차림과 어울리지안는데가 잇섯든지또는언어(言語)에 무의식적(無意識的)인 불손(不遜)이잇섯든지 그젊은 농부(農夫)는 내얼굴을 자세히 보더니만……『문(門)안에 들어와서 담배를 가저가오』……하며 코우슴을 피하며『마코』한갑을 내아프로 툭던지는것이엿소.&lt;br /&gt;
&lt;br /&gt;
나는처음 이농부(農夫)의 말을듯고한참동안 어름어름하엿소 그것은 담배가개라고하는것이 우리가 도회(都會)에서 보는담배가개와가티 백색(白色)『타일』타로 대(臺)를싸올리고『네온』등(燈)을 달고 유리창(窓)을단것이 아니고 첨하끄테다 석유(石油)궤로 목판을짜서 장수연(長壽煙),희연(囍煙),『마코』단풍(丹楓) 이런것들을몃갑식(式) 너허둔것이엿소,그래 내가들어갈 문(門)이란 어데잇겟소,&lt;br /&gt;
&lt;br /&gt;
&lt;br /&gt;
(칠(七))&lt;br /&gt;
&lt;br /&gt;
이(李) 육(陸) 사(史)&lt;br /&gt;
&lt;br /&gt;
R이란 사람은 나와는 매우친(親)한 동무엿다 그럼으로 우리두사람 사이에는 결(决)코 무슨비밀(秘密)이란것은 잇을터수가 아니엿다 그러나 지금은 나의교우록(交友錄)속에 씨여저잇는 그의『호패(號牌)』에 붉은줄을 그은지도 벌써한달이 다되엿다.&lt;br /&gt;
&lt;br /&gt;
이러한 간단한사실(事實)이 모르는사람으로본다면 가렵지도 아프지도안흘지모르겟으나 남달리상처(相處)해오든 벗을한사람 일허버린나의흐젓한 마음은 어데도 비길수업시 서러운것이다.&lt;br /&gt;
&lt;br /&gt;
그뿐만아니라 이글을 쓰려는오늘아침에 이제는 고인(故人)인 R의동생으로부터 나에게 간단한편지한장과『문외한(門外漢)의수첩(手帖)』이란유고(遺稿)한권(卷)이 보내여왓다.&lt;br /&gt;
&lt;br /&gt;
그유고(遺稿)는 이래십년(爾來十年)에 쓴 고인(故人)의 일기(日記)인 모양인데 그도축일(逐日)해서 쓰것도 아니고 때때로마음이 내킬때마다 써둔것이며그맨끗페—지에『〇〇형(兄)에게』라는 이세상(世上)사람으로서의 절필(絶筆)인듯한 글시가 묵흔(墨痕)이임리(淋漓)한것은소리업는 내눈물을더욱짜내는것이엿다 그리고이글내용(內容)은 일기(日記)는 일기(日記)면서도 대부분(大部分)은 나에게 보내는 편지이엿다.그편지가운데서 지금이라도 흥미(興味)잇게생각나는 부분(部分)만을 써서보기로한다면 그도처음에는 문학청년(文學青年)이엿든 사실(事實)이잇섯다.그러나그는자기가 하고저한 문학(文學)을 끗끗내 완성(完成)할수잇는 행복(幸福)된사람은 아니엿다.그러나 그사람은죽든날까지도문학(文學)을 단념(斷念)하지는안헛다는것은 어느해겨울 그와나는 우연(偶然)히도 어느 온천(溫泉)에서만낫다 그때는 바로동경(東京)에서들풍자문학론(諷刺文學論)이 한참대두(擡頭)할때 이엿슴으로 그도또한 예(例)에삐지지안코 이것의 조선(朝鮮)에잇서서 가능(可能)하다는 설교(說敎)를 하는것이엿다그때좀더 생각해볼 여지(餘地)가잇다고한 나의말에 그는말하기를조선(朝鮮)사람은 생활(生活)그자체(自體)가 풍랄적(諷剌的)으로 되여잇다고 떠둘어대기에나는그에게 더진지(眞摯)한태도(態度)로 사물(事物)을 대(對)할필요(必要)가 잇다는것을말하엿고 그다음날 우리는 서로갈린체 영원(永遠)히 보지못할 사람이되엿다.&lt;br /&gt;
&lt;br /&gt;
이글은 그때나와 갈려서 몃칠동안에 쓴것이라고 생각난다 일구삼(一九三)×연(年)×월(月)×일(日)—〇형(兄)!S역(驛)에서 형(兄)과갈려서나는〇동(洞)까지 오십리(五十里)나되는 산(山)길을 걸어왓소.동리(洞里)거리에 피곤(疲困)한 다리를 쉬이면서 생각하기를 아무데나 큼직한집 초당(草堂)방을 차저드러가면 이밤을 뜻뜻한 아랫목에서 지낼수도 잇겟거니와 그들과함께 살을맛대이고지나며 그들의 생활(生活)을체득(體得)할수가 잇다면……얼마나 유쾌(愉快)한일이겟습니까?&lt;br /&gt;
&lt;br /&gt;
나는 여기서 형(兄)이일직이 하든말을 생각해보앗소 상해(上海)어데선가?목욕(沐浴)을 갓슬때 불란서(佛蘭西)사람과 서반아(西班牙)사람과 가트욕조(浴漕)에 들어갓슬때의 감정(感情)을 얘기한것을 기억(記憶)이나 하시는지요.그때는 적나라(赤裸裸)한 몸둥이들이모두꼭가튼 온도(溫度)를 느낄수잇더라고.세계(世界)는 모름직이 목간통가티 되어야 한다고.&lt;br /&gt;
&lt;br /&gt;
그러나 오늘의 나의심경(心境)은그와는 정반대(正反對)로 어데까지나 육친애(肉親愛)를 느껴볼 결심(决心)이엿소 그래서 세계(世界)는 차라리 초당(草堂)방가티되라고까지 생각해도 보앗소이러한 생각을 하노라면 또다른 한생각이 꼬리를 물고나오는동안에 나는가젓든 담배를모조리 다피워 바렷소.담배라도피우지 안흐면 첫겨우의눈우바람이몹시도 옷깃을 새여들고 발끄티저리기도해서 담빠도살겸 주막(酒幕)집잇는대로 가까이 차저갓소.그곳에는 마침담배 가개가잇고젊은농부(農夫)인듯한 사람이잇기에오전(五錢)짜리 한푼을던지고『마코』한갑을 달라고 하엿더니만 나는여기서 뜻하지못한 실패(失敗)를 하엿소 그것은 나행동(行動)이 몸차림과 어울리지안는데가 잇섯든지또는언어(言語)에 무의식적(無意識的)인 불손(不遜)이잇섯든지 그젊은 농부(農夫)는 내얼굴을 자세히 보더니만……『문(門)안에 들어와서 담배를 가저가오』……하며 코우슴을 피하며『마코』한갑을 내아프로 툭던지는것이엿소.&lt;br /&gt;
&lt;br /&gt;
나는처음 이농부(農夫)의 말을듯고한참동안 어름어름하엿소 그것은 담배가개라고하는것이 우리가 도회(都會)에서 보는담배가개와가티 백색(白色)『타일』타로 대(臺)를싸올리고『네온』등(燈)을 달고 유리창(窓)을단것이 아니고 첨하끄테다 석유(石油)궤로 목판을짜서 장수연(長壽煙),희연(囍煙),『마코』단풍(丹楓) 이런것들을몃갑식(式) 너허둔것이엿소,그래 내가들어갈 문(門)이란 어데잇겟소,&lt;br /&gt;
&lt;br /&gt;
(중(中))&lt;br /&gt;
&lt;br /&gt;
이육사(李陸史)&lt;br /&gt;
&lt;br /&gt;
그날은 그곳에서 멀지안흔곳에 장날이엿나부오,장꾼들이들신들신하고 그집으로 들어오기에 나는그만 그곳을떠나 도라나오랴니까 바로내머리 뒤에서『건방진여석 눈에유리창(窓)을 부치고』……하면서 별러대는것이엿소.그때나는 모든것을 다알엇소,&lt;br /&gt;
&lt;br /&gt;
시골산촌(山村)에선 유리라는것은들창(窓)에나 부치는것인데 네눈에부친 들창을열고 다시말하면 문(門)안에 들어와서(안경(眼鏡)을벗고)담배를 가저가란 말엿소.&lt;br /&gt;
&lt;br /&gt;
내가 안경(眼鏡)을 쓰게된것은 시력(視力)이 부족(不足)한 탓이엿고 그젊은농부(農夫)가 내안경(眼鏡)쓴것을 못맛당히역이는것은 고루(固陋)한 인습(因習)의 소치(所致)라고 하드래도 그표현방법(表現方法)이얼마나 내뼈를 저리도록 쑤시는풍랄(諷剌)이엿겟소 과연(果然)여기에 남과나라는 투명(透明)한 장벽(墻壁)이 서서잇다는것을 나는안듯하엿소.&lt;br /&gt;
&lt;br /&gt;
그리고 내발길은 무겁게옴겨젓소.아주몃해를두고 어느사막(沙漠)이라도 걸어온듯한 피로(疲勞)를 깨다랏소.하늘은 점점어두어오고눈조차 함박으로 퍼붓는듯 하엿스나 나는다시 옷것을 단속지는 안헛소 될수엇스면 차디천 눈보라가 내보드러운 목덜미살을 염이듯이 얼어부트라고하여본것은 일종(一種)의 자기잔학(自己殘虐)일른지도 모르겟소.&lt;br /&gt;
&lt;br /&gt;
두시간(時間)이나 지낫을가 나는과연(果然) 어느집초당(草堂)방에 손이되엿소방안에는 초말(醋抹)냄새가 코를찌를망정 모이는사람은 대략육칠명(六七名)이나 되엿고 연령(年齡)은최저십팔(最低十八)로최고삼십이(最高三十二),인품(人品)은 모두순후(純厚)하고황소가티 질박(質朴)한놈도 잇스며암사슴가티 외로운 면석도잇섯소.그날밤은 내라는존재(存在)가 그들로보면 낫서른손이여서 일동일정(一動一靜)을 주의(注意)는 하면서도 조금도 악의(惡意)는 갓지안헛든 모양이엿소 그러기에 나더러 세상(世上)의자미잇는 얘기를 들려달라는것이오&lt;br /&gt;
&lt;br /&gt;
이때 나는 어떠한 얘기를들려줄까 하고 망서리는판에 그들중에도 연령(年齡)과 지식(知識)의 정도(程度)가잇서서 삼십(三十)에 가까운 사람들은『화용도(華容道)』를 들려달라하고그중한사람은『춘향전(春香傳)』을 얘기하라하엿소만은 여기도 또한의견(意見)은 일치(一致)되지안헛소 그중에도제일(第一)얼굴이 말숙하고 나이가이십오세(二十五歲)쯤 되여보이는 농부(農夫)한사람 말을드르면 보통학교(普通學校)를 중도퇴학(中途退學)은 하엿서도 그들가운데서는 식자연(識者然)하고 내로라는드시뽑내면서『서양(西洋)』얘기를 무에나들리라는것이오 그해서 결국(結局)은『춘향전(春香傳)』파(派)와『서양(西洋)』파(派)가 절충(折衷)한결과(結果) 나는이진귀(珍貴)한『서양춘향전(西洋春香傳)』을 친절(親切)하게도 강좌(講座)를담임(擔任)하게되엿스며 그는 득의만면(得意滿面)하야 내담배갑에서『마코』한개들 빼여물고 인조견(人造絹) 옥색(玉色)관사홋족기에서 석낭을꺼내여 담배를 피우는것이엿소 이방에서는모두들이사람을『하이카라상』이라고 부르는데 그『상』짜가나에게는 조금귀익지못하나 아마이것을 도시(都市)말로번역(飜譯)하면『모—던뽀이』란 말도갓소.&lt;br /&gt;
&lt;br /&gt;
그러나 이『서양춘향전(西洋春香傳)』이란진본서(珍本書)는 가난한 나의문헌학지식(文獻學知識)으로는 도저(到底)히 알어낼 자신(自信)도업고 그러타고 그들에게『린드뻑』이 대서양(大西洋)을 어떠케 횡단(橫斷)하엿다든지『크레오파트라』의국적(國籍)이 어느나라냐고 설왕설래(說往說來)를 하여보앗자『하이카라상』이라는 이방의『쏘크라테쓰』도그까지는 흥미(興味)를느끼지못할것갓터소.&lt;br /&gt;
&lt;br /&gt;
그래서나는 생각다못해『쉑스피어』의『로미오와쭈리엣트』를얘기하기로하고 위선그주인공(主人公)의이름을 그들이 알어듯기 쉽게『노미』이와『준』이가 이러케얘기를하니 그래도 모두그것이자미가 잇섯든지『준』이가추방당(追放當)튼날새벽에『노미』를 차저가이별(離別)을하는판인데 이곳에야『나이팅껠』이울수가 잇슬리도 업겟고 생각다못해 속담(俗談)에 꿩갑에 닭이라니 닭을울리고『준』이를 떠나보냇구려!그래도 이때는 모두들감탄(感歎)해서 흥흥코소리를치며 신삼고 가만이치든손을쉬이는구려!&lt;br /&gt;
&lt;br /&gt;
(하(下))&lt;br /&gt;
&lt;br /&gt;
이육사(李陸史)&lt;br /&gt;
&lt;br /&gt;
밤은벌써 오전(午前)두시(時)나 되엿는데 박가테서는 눈보래가 조금도 쉬지안코 나렷소,사람들은차차 긴하픔을 하다가는 제대로 팔을배고 자는이도잇고 또그자는이의 다리를베고 자는사람도잇스며 나중에는『하이카라상』과 나만이남어서 나는 이동리(洞里)의 서러운전설(傳說)을 듯는것이오『옛날에 이동리(洞里)와 건너마을이편을갈러서 정초(正初)이면『줄댕기』가 시작(始作)되엿고 그때는 사람들이 수—백명식(百名式) 모혀서 그중에도 젊은 사람들은 처녀(處女)나 총각이 제각기 마음잇는 사람들과 사랑을 속삭이면서 영원(永遠)히그자손(子孫)들은 변(變)함업시 이동리(洞里)를직혀왓건만은 지금(至今)은 어쩐일인지 그사람들은 누가 오란말도업고 가란말도 업건만은 다들어데인지 한집식 두집식 동리(洞里)를떠나고 그럴때마다 젊은이들의 싹트기시작(始作)한 사랑은 그봄이 다가기도전에 덧업시 흘러가고 만다는말을 다마치지도못하야 이사람은 창졸간에 미친듯이 쓸어저 흑흑 느껴가며우는것이엿소.나는 이것을 웨우느냐 물어볼힘도업고 울지말라고 위안(慰安)을 줄수도 업섯스며다만나 혼자 생각기를 너도 또한불상한 미완성초연(未完成初戀)의 순정자(殉情者)로 구나하고 동정(動靜)을 살피노라니 이사람도 그냥잠이 들고먼데닭이 자즌홰치는 소리가들리며 눈은끗첫는지 박가튼 바람이 몹시부럿소.&lt;br /&gt;
&lt;br /&gt;
나는몃시간(時間) 남지안흔 이밤을도저(到底)히 잘수는업섯소,내머리는해저(海底)와가티 아득하고 내가슴은운모(雲母)와가티 무거웟소.도라누을내야 도라누을수도 업스려니와여페사람들의 코고는소리는 검은시체(屍體)를 실흔마군(馬軍)의 수레박휘를 갈고가는듯하오,그럴수록방안의 정적(靜寂)은 무거워저서 자꾸만 지구(地球)의 중심(中心)으로 침전(沈澱)되는듯하엿소,나는 참다못하야 눈을감고 두손으로 얼굴을 가리웟소.바로 그때엿소,누구인지내머리마테서 말하는 사람이잇섯소,그사람이 누구인지는 기억(記憶)할수 업스나 혹(或)은 저녁전에담배가개에서본 농부(農夫)일른지도모르겟소 그가 나에게 한말은분명(分明)코『문(門)안에 드러와서……』엿소.나는 여기서 눈을번쩍뜨고가만히 생각해 보앗소.&lt;br /&gt;
&lt;br /&gt;
『오!그러타,나는 문외한(門外漢) 여다』아무리하여도 인생(人生)의 문(門)안에들어서지못할 나이라면 차라리영원(永遠)한 문외한(門外漢)으로 이세상(世上)을수박것할트시 지나갈일이지 그좁은문(門)을 들어가려고 애를쓸필요(必要)가 어데잇겟소 문(門)박게서 살어가면 책임(責任)과 부담(負擔)도 가벼우려니와 문(門)안에 우리가 직혀야할 보물(寶物)이잇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모두 문(門)안에서 직힐때에나혼자만 문(門)박게서 그모든것을파수본다면 그것도 나의한가지임무(任務)가아니겟소 그러타면 나는달게&lt;br /&gt;
&lt;br /&gt;
인생(人生)외 문외한(門外漢)이 되겟소.&lt;br /&gt;
&lt;br /&gt;
그래서 남들이모두 문(門)안에서보는세상(世上)을 나는문(門)박게서 보겟소 남들은 기피보는 세상(世上)을나는널리보면 또그만한 자긍(自矜)이잇을것갓소.오늘은 고기압(高氣壓)이어데잇는지 풍속(風速)은 육십사(六十四)미리오이동리(洞里)를 떠나아무도 발을대지안흔 대설원(大雪原)을 걸어가겟소,전인미도(前人未到)의 원시경(原始境)을 가는느낌이오,누가나를 따라이길을 올사람이 잇슬른지?업서도 나는이길을 영원(永遠)히가겟소.』&lt;br /&gt;
&lt;br /&gt;
나는이까지보고 위선이유고(遺稿)를더펏다,그리고 생각해보앗다 이것은 한사람이 인생(人生)의문(門)안에 들어오지못하고 영원(永遠)히 걸어간기록(記錄)이다 오!그러면 나도역시문외한(亦是門外漢)인가?정축(丁丑) 칠(七),이구(二九)&lt;br /&gt;
&lt;br /&gt;
=='''주요 내용 요약'''==&lt;br /&gt;
구성: 죽은 친구 'R'의 유고(遺稿)인 '문외한의 수첩' 속에 담긴, 'R'이 '〇형(兄)'(필자)에게 쓴 편지 형식의 수필이다. '문안'과 '문밖': 화자는 'S역'에서 '형'과 헤어져 산길을 걸으며 초당방에서 서민의 삶을 체득하고 싶다는 '육친애'적 소망을 가진다. 이때 담배를 사려다 한 젊은 농부에게 &amp;quot;문 안에 들어와서 담배를 가져가오&amp;quot;라는 말을 듣는다. '문안'은 농부가 '안경(유리창)'을 쓴 자신을 '도시의 문명인'으로 여기고 '안경을 벗고(유리창을 떼고) 들어와'라는 풍자적 표현이었음을 깨닫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자아 성찰: 이 경험을 통해 도시 지식인인 자신과 농민 사이에 투명한 '장벽'이 서 있다는 것을 인지하며, 자신이 '인생의 문외한(門外漢)'임을 깨닫는다. '문외한'의 결심: '문안'에 들어서지 못할 바엔 영원한 문외한이 되어 문밖에서 살아가겠다고 결심한다. 문밖에서 사는 것은 책임과 부담이 가볍고, 남들이 모두 문안에서 보는 세상을 자신은 문밖에서 '널리' 보며 '자긍(自矜)'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절필: &amp;quot;전인미도(前人未到)의 원시경(原始境)을 가는 느낌&amp;quot;으로 '대설원'을 걸어 나가는 것으로 글을 맺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분석 및 특징'''==&lt;br /&gt;
풍자 문학론의 실천: 농부의 '안경 쓴 눈(유리창)'에 대한 풍자는 지식인과 대중 사이의 괴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지식인의 고뇌와 성찰: 도시화된 지식인(안경 쓴 자)이 농민의 삶에 진입하려 했으나 거부당하고, 결국 자신을 '문외한'으로 규정하며 고립을 선택하는 지식인의 고뇌를 드러내는 자의식의 표현이다.&lt;br /&gt;
&lt;br /&gt;
낭만적 비장미: '대설원', '전인미도의 원시경' 등 비장하고 낭만적인 이미지로 결말을 맺으며, 이육사 특유의 고독한 결단의 미학을 보여주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소품(小品) 황엽전(黃葉箋)'''=&lt;br /&gt;
소품(小品)①&lt;br /&gt;
&lt;br /&gt;
황엽전(黃葉箋)&lt;br /&gt;
&lt;br /&gt;
이(李) 육(陸) 사(史)&lt;br /&gt;
&lt;br /&gt;
사람들은 어름알보다 더냉담(冷淡)하고 주사침(注射針)가티 촉발라도 그래도 제대로는 인정(人情)도잇고 눈담(曇)노잇서 친(親)한사람을 사이에는못보 보고저하고 보면빨아먹을듯이도 형형색색(形形色色)의 표정(表情)을비저내며 계절(季節)에 따라서는 눈물겨울만큼 간절한모양이나 『내』라는 위인(爲人)은 자질(資質)도 소박(素朴)하고교양(敎養)도 고매(高邁)하지못데 요즘은엇전지 신경(神經)이 차를보다 단단해저서 압흐고 슯흔것도 못견듸게늣겨지지도 안커니와 보지못해 못견딀사람도업고 소식(消息)이라도 못알려 탈이될,더친(親)하고덜친(親)한이가업다.그러나 행(幸)혀이세상(世上)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잇다고하면 나는 의무(義務)로라도그대에게 나의소식을 알려야하지만은 지금의 나에게는 그러한미덕(美德)을 수행(遂行)할 야망(野望)조차업다.다만 야망(野望)을용서(容恕)한 사람이잇거든 가을바락에 무한(無限)히 흘러가는 황엽(黃葉)의 쪼각쪼각이 모두나의 편지라고 생각을 해라그리고 그어느한쪼각이라도 주어다가 그대들의책상(冊床)우에 꼬처두고 그황엽(黃葉)이 바람에 나붓기며울며부르짓는 서러운전기(傳記)를 들어보아라……&lt;br /&gt;
&lt;br /&gt;
‥‥그놈의 거리를 말할것도업고 저는하여(何如)든 가로수(街路樹)에서떨어저 왓습니다.그래서 거리에 서잇는동안 형형색색(形形色色)의 인간(人間)들을 다보앗습니다.그러나대개(大槪)는 모다비슷비슷한 인간(人間)들이엿고 별다른 놈은 못보앗습니다 그것은 십년전(十年前)일이라고생각됩니다.어느날오후(午後) 내발밋흘지나가는 소년(少年)이 잇섯습니다,미친놈가티 중얼대는 말을가만히듯자니『루나—ㄹ』의 일기(日記)를외이는겐지『불상한놈! 불상한놈!』 고거즛말하엿습니다,그뒤로는 매일(每日)가티 아침에도 내발밋홀지나고 저녁에도 내발미틀지나는동안에 나는어느사이에그만그녀석하고 친(親)해젓습니다,그래서 그녀석의 정체(正體)를 알수가잇섯습니다&lt;br /&gt;
&lt;br /&gt;
그녀석은 어느시골에서 출가(出家)를해서 서울을왓다는데 그출가(出家)한 이유(理由)가 어린녀석하고는 맹랑햇습니다 그녀석의 집은어느해안(海岸)이든가봐요 아침으로 조수(潮水)가 밀려나가면 끗업시 널려잇는 백(白)모래바티 너무도 허무(虛無)서 오기는왓스나 섬들을 건너간 갈메기가 몹시그립다고 하는것을보면 그래도 어린향수(鄉愁)가머리를 글거가는모양이겟지요&lt;br /&gt;
&lt;br /&gt;
그후(後)나는 우리들이 늘만나는시간(時間)이되면 그녀석이 하마나오나하고 기달리기도햇습니다 그럴때 멀리에 발자욱 소리가나고 그녀석이 『하이네』 니 『꾀—테』 니의 시(詩)를외이고 올때도잇섯습니다 그리고 몃해가 지난어느해봄날 내가긴 동면(冬眠)으로부터 영롱(玲瓏)한 첫눈을텃슬때 또그녀석을만낫습니다 그때는벌서그녀석은 십부게볼 소년(少年)이아니라 의례(依例)히 그상대자(相對者)를 다리고어둑어둑한 황혼(黃昏)에 내엽헤와서간즈려울만큼 종알대며 행복(幸福)의『메뉴—』를 전람회(展覽會)의『프로그람』보다 화려(華麗)하게꾸미는것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이것어 한여름을 지나며 비가오나 바람이부나 계속(繼續)이 되엿습니다 그러나 인간(人間)들에게잇서서는 행복(幸福)의 절정(絕頂)은 최대(最大)의비극(悲劇)과 서로통(通)해 잇나봐요 그해의 첫가을 어느으스름달밤에나는이비극(悲劇)을 바로 내눈헤서보는것입니다&lt;br /&gt;
&lt;br /&gt;
『여보우리두사람이 서로사랑하면 그만이지 사랑을 부모(父母)에대(對)한 효행(孝行)으로 하는데가 어데잇소.』&lt;br /&gt;
&lt;br /&gt;
이러케 그녀석은 폐(嬖)하는것이 엿습니다.&lt;br /&gt;
&lt;br /&gt;
그것도 고이치안흔게 그때쯤은 그녀석의 기분(氣分)이란 불꼿치타오를둣도 하얏거니와 제애비말을 안듯기로 유명(有名)하야 집을나선놈이니까.&lt;br /&gt;
&lt;br /&gt;
『그러치만은 엇절수가 잇서야 지요』&lt;br /&gt;
&lt;br /&gt;
이것이 그더석의 말에갑허진보수이엿습니다.그뒤나는 십년(十年)이란 긴동안 이사람들의 속삭임을 들을수는 업섯습니다.&lt;br /&gt;
&lt;br /&gt;
아마그것이 그들의 비극(悲劇)의시초(始初)FP동시(同時)에 나의『로—맨틔시슴』도 종언(終焉)이엿든 것입니다 나는그날부터 새로운 생활(生活)을 경험(經驗)하지안으면 안되엿읍니다 이때까지는 그들가운데에 엇던한두사람의 주활(主活)을 말로서 들엇으나 인제는 어느특정(特定)한 사람의사랑이라든지 그런달착지근 한것이아니라 그저그놈도 그놈갓고 그놈도 그놈갓흔 뭇사람의생활전체(生活全體)가 내풋입새의 거울보다 반드라운 쪼각쪼각에 빗치는 것이엿읍니다 이전갓흐면멀리서 삽분삽분 발자욱 소리가들려오고 그발자욱 소리가갓가워 지는데따라 쟁반에 구슬을굴리는듯한 목소리도 들엇건만은 또그럴때면 나도 입사귀를흔들어서 업김가티 보드러운바람을 부러도 주엇건만은 이때는 내가 바람을 불기는커녕그들의지나가는 위풍(威風)에 나는전율(戰慄)하지 안을수 업섯읍니다.구슬을 굴리는듯한 목소린들 어데가듯겟읍니가?뭇사람의 포효(咆哮)하는소리란 아주바다에서 이러나는노도(怒濤)의 교향악(交響樂)가탯습니다.&lt;br /&gt;
&lt;br /&gt;
그래서 나는알기를 인간(人間)이란위대(偉大)한 작란(作亂)군이라고 하엿습니다.어떠케 그들의 얼골이 크게보이고 힘차게 늣겨것든것인가 지금은 생각만하여도 왼몸이 으슬으슬합니다.그러는중(中)에그들의 행렬(行列)은 대강(大江)가티 홀러가고 나는 또다시 노랏케 단풍이들어 한닙두닙 떨어지는것입니다.얼마나 소조(蕭條)하고 적막한거리겟습니가? 내엽헤는 괴수(怪獸)가티 늘어선 삘딍들의 거믄그림자가『팔아스트 에 얼어부튼거지들의 싸늘한꿈을 죽엄가티덥허논때업니다.밤도삼경(三更)은 지난때이지요 더벅더벅 거러오는무거운 발자욱 소리와함께 나는고요한『그림자』하나를 발견(發見)햇습니다.안개에 촉촉히 저진차림자러와 힘업시 옴겨지는발자욱이 아주무슨 패잔병(敗殘兵)의 유령(幽靈)이엿슬지도 모릅니다.나는지금 그유령(幽靈)을 따라 굴러 갑니다.그러나 그유령(幽靈)은 내가미행(尾行)을 한다는것은 모르고 또는알엇다해도 아무저항(抵抗)도 할필요(必要)가업다는듯이 방향(方向)도업시것는것이엿습니다.때로는 시내도건너고들판도 지나 힘이지치고 밤이깁프면 산(山)기슭 나무등얼 밋헤누어서 하늘에 수(數)업시만흔 별들을 헤아려도 보는것이겟지요그러나 그어느별도그에게 행운(幸運)을 점제한별은 업섯나봐요 그리다간 그는그만 흑흑늣기고 울며울다가는 자는것이엿습니다.아마도 기적(奇蹟)을 이즌순간(瞬間)이 그에게는 자장행복(幸福)된순간(瞬間)이든가봐요,산(山)속은 찬기운만 가득하고벌레소리는 정적(靜寂)을 삼림(森林)가티무성(茂盛)하게하는것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그다음날도 아츰햇발이 속새입홀 흔들면 그는일어나 것는것이엿습니나.이러는 동안에 나는이유령(幽靈)에게서 무엇을 보앗스리라고 생각하심니가?어느큰강(江)가이엿습니다.여을어 목노아울고가는 강(江)가이엿습니다.그는이강(江)가에 안저서 무엇을 생각하엿는지 눈을깜은채로 하늘을치여다보는 것이엇고 초생달은교만(嬌慢)한 게집의눈자위처름 그를흘겨보는것은 한층(層)더창백(蒼白)한 비우슴갓햇습니다 그러치만은 그는그광망(光芒)을 피(避)하려고도 안엇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내생각에 따른다면 그래도 못잇처지는 날ㄹ기억(記憶)을 모조리 물소리에 씨처흘려보내려는 노력(勞力)이엿슬지도모릅니나&lt;br /&gt;
&lt;br /&gt;
그때 먼데마을에는 개짓는소리가 어즈러히 들여오고 새바람도 유달리 옷깃을 새여드는데 그는 일어셔 한발한발 물가으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때나는 그의운명(運命)을거의들여다보는것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자살(自殺)이란 광경(光景)이 내머리속에번개가티 일어낫습니다.그리고그는물가의 널직한 반석(盤石)우에올러안저서 물속에비친 자기(自己)의얼골을 자세히 들어다보는 것이엿습니다,그러나 그물속에는자기(自己)의 얼골은 차저볼수가 업섯든것이겟지요,증오(憎惡)를 참지못하는 그는그만 뼈만남은 두손으로 물결을 훗치고는 돌우에업더저 우는것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그는 또다시 일어나 모둔것을 이저버린듯이 걸어가는 것이엿습니다.일기(日氣)는점점 흐려지고 회색(灰色)으로 물드린 천공(天空)은 그의최후(最後)의 희망(希望)까지라도 빼서바릴듯이 싸늘한 압박(壓迫)을더하는것이엿습니다.그러타고해서 그에게는 아무런 격정(激情)도 반발(反撥)도잇는것갓지는 안엇습니다 만은 주먹을 쥐여서는 주머니속에 너은체로 간간히 머리를 흔드는것은 과거(過去)에대(對)한 회한(悔恨)이라든지그런것들이 머리속을 할터가는것이겟지요?&lt;br /&gt;
&lt;br /&gt;
그것은 어느동리(洞里)압이엿습니다만흔사람들이 모엿다가는 다들도라가고 큰버드나무에『사지오리』를 부친색기를 걸처맨밋헤는 기름종지에 빤—한심지불이타고잇스섯며 아해들 몃사람이그것을 직히고 잇섯습니다.그는아해들에게 무엇을하는것이냐고 물엇습니다.&lt;br /&gt;
&lt;br /&gt;
아해들의 대답이란 너무나 묘(妙)한것이 안이겟습니가?그동리(洞里)에는 십년(十年)만에 한번식은 유령(幽靈)이 난다는 전설(傳說)이 잇섯습니다그래서 그날은 동리(洞里)사람들이정성을 다하야 한데모혀서 기도(祈禱)를 올리고 고사(告祀)를 지내는것이엿는데 그날이마츰 십년(十年)에 해당(該當)한날이며 방금 의식(儀式)을 맛친때라고 말을마천 아해들은 그를 한참동안 자세히 보다가는그만 인가(人家)를 향(向)하야 다어나는것이엿습다.아마도 그것은참으로 이동리(洞里)에 유령(幽靈)이 나타낫다는것을 알리기 때문일런지도모름니다.&lt;br /&gt;
&lt;br /&gt;
그는 한번 크제우섯습니다나는 그가 웃는것을 보는것은처음이엿습니다,그러나 그웃슴이란 곳변해저서 므슨쓰듸쓴 약물을 먹은뒤의 입모습가리 변해지며 얼골전체가 크다란 환상(幻想)에 사로잡히는것 갓햇습니다그리다가 그는 그언덕 미테서잠이들어 자면서 꿈을 꾸는것여엿습니다,그꿈이란 이러햇습니다,몹시더운 여름날 몃칠을두고 비가따루엇습니다,그래서큰물이나고 하루밤사이에 왼동리(洞里)가 물에쓸려 갓읍니다 왼여름 피담을홀려 지은농사(農事)도 한포거업시 사람마다 두주먹과한개의 목슴박게는 남지안엇음니다 주림과 치위가 매운챗죽갓치 그들을 휘갈겻읍니다 그래서 동리(洞里)사람들은 제각기 이고향(故鄕)을 떠나지안호면 안되엿읍니다 물론(勿論)녯날에야 부모(父母)의 품속갓치 포근하고 사랑스런 땅이엿지만은 지금은 참담(慘憺)과 고통(苦痛)의 회억이외(回憶以外)에 아부것도 그들의 애착(愛着)을 붓잡어 두□는 못하엿읍니다.그들은지금 한개촌락(個村落)에서 다른촌락(村落)으로 한성시(城市)에서 또다른성시(城市)에 표박(標泊)□ 길을가는것이엿지만은 그어느□곳도그들이발을 부칠곳은 어□읍니다 모든집들어 그들압헤는 문(門)들을 잠것읍니다.그리고 오즉그들에게는 한오리 끗어는 길이엿음니다 어느때나 □□갈수잇는 길이엿읍니다 하□□또하루 한달에또한달 꼭가티 그들은 하늘을 치여다보고 □을갓읍니다.벌서초본(草本)도 다□□이들고 낙엽(落葉)이 나리나 그들의발길은 머므를수는 업섯습니다 어느마을이나 성시(城市)에서 그들에게 일주일(一週日)이나 유(留)할수가□고한오리의 희망(希望)을 주엇다면 다시그순간(瞬間)이 지나면 그들에게는서름이외(以外)에 아무것도 □는것은업섯습니다.그러나 이□름과주림과 치위는 그들늙은이와 어린이와 남자여자(男子女子)를 모다한마음에 얼거맬수가 잇섯습니다 바탐과비에 바래인 그들이마음에한개의희망(希望)이란 오즉 일거리와생활(生活)이엿습니다 이것이 그들을고무(皷舞)하고 추진(推進)하는 힘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마치한떼의 표유(瓢游)하는『집시』와가티 마을을지내나 산(山)을너무나 마른풀을뜨더 그것을 덥고깔고 혹(或)은낙엽(落葉)을 쓰러다가 욕(褥)와 이불을삼어 한랭(寒冷)을 지나는하루밤 더욱이 비오는밤……밤은영원(永遠)히 차운것이며 뜨신것은다만그들의『마음』뿐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날과밤은 그넷줄처럼 밧구엿습니다.해도점점 쩔러지고 물들이 어러부트며 첫눈이 나린것도 발서 열흘전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그들은 아즉까지도 발무칠땅과한가지의 일거리도 찻지는못하엿스며 끗간데를모를 길만을보고 걸어가는것입니다.&lt;br /&gt;
&lt;br /&gt;
『여기라도 좀쉬여갓스면』모다들이러케 마음으로 부르지젓습니다.그러나 또몃사람운 말하는것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가자 압흐로 더가보자』이것도모든사람의 말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그들은 여전히 경사(傾斜)진 산(山)빗탈을걸어가며 길다란 곡선(曲線)의행렬(行列)이 계속(繼續)되는것입니다.그때는바람도 조골 잔잔해지고 햇발도구름밧글나와 열분광선(光線)이 뭇사람의 얼골을 다소명낭(多少明朗)하게하엿스나 일행(一行)이바로 산(山)미루턱에올너다엇슬때는 정세(情勢)는 디무도급(急)히변(變)하야 눈이퍼붓기 시작(始作)햇습니다.&lt;br /&gt;
&lt;br /&gt;
『눈이또나린다』이러케 부르짓고는모다들 놀나는 것이엿습니다.눈송이는 목화(木花)를 뜨더뿌리는듯이왼공중(空中)에 미만(瀰漫)하야지척을가릴수가 업섯습니다.바람에몰려오는 눈송이가 얼골에 부다치면 낫살을 어이는듯하고 손이빠질듯이 스린것입니다.시력(視力)조차 모호(糢糊)하야 발아래길도 알어보기는 어려웟습니다 재를오를때에 비(比)하면 산(山)을나려오는것은조금용이(容易)하엿스나 길이질대로 질어서 업더지락 잡버지락하는 사람들도잇스며 등에업힌 어린애들은 배가몹시 곱흐다고 우는것이며 그럴때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다들 산(山)밋헤 동리(洞里)집에 나려가서 드신밥을 준다고달래는것이엿습니다 그러나 산(山)미테 동리(洞里)집은 모다제각기 제마음에 그려보는 집들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가자 조금이라두 빨리가자불빗을 볼때까지』그들중(中)에서 한사람이 굴근목소리로 외치는것입니다&lt;br /&gt;
&lt;br /&gt;
『암그래야지』또 몃사람의 대답이 끗나면 모다들 침묵(沈默)은하면서 마음속으로는역시(亦是)『가자』고 대답하는것입니다&lt;br /&gt;
&lt;br /&gt;
사람들은 이빨을물고 잇는힘을다하야 전진(前進)합니다 지나온길이얼마이며가야할길이 얼마인것도모르면서 죽으나사나 가야한다는 것박게는 그들은 한사람도자기(自己)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업섯습니다.그들의 동반자(同伴者)의 발소리와 호흡(呼吸)이 그들의가튼 운명(運命)을결정(决定)한다는것은 이잔혹(殘酷)한 자연(自然)과 싸워가는 무리들의 금과옥조(金科玉條)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눈보래는 끗첫습니다.그러나아즉도 그들에게는 조그마한희망(希望)도 보이지는 안헛습니다.압도캄캄하고 뒤도그랫습니다.아득한 삼림(森林)속을 허우덕이는 암담(暗膽)은 영원(永遠)한흑야(黑夜)가 새이지도안코 영원(永遠)한 미로(迷路)도 끗막지도못할것 갓햇습니다.&lt;br /&gt;
&lt;br /&gt;
피로(疲勞)는 그들의몸을 풀솜가티만들엇습니다.참다가 못참는몃사람이 땅이라도 꺼지란듯이한숨을 쉬는것이엿습니다.그리고는 부르짓는 사람도업고 중얼대는 사람도업스며 눈물도마르고 공포(恐怖)도 사라진 그들은 발목에 잇는 힘을 다해서 눈과진흙우를 쉬임업시 이동(移動)하는것입니다.』&lt;br /&gt;
&lt;br /&gt;
유령(幽靈)은 그들가운데서 제일나이만흔 노인(老人)을 발견(發見)햇습니다그리고 그것은십년전(十年前) 그가고향(故鄕)을떠나올때 아즉도 그다지늙지안흔 그의아버지인것도 알엇습니다 그리고 모든사람은 그의어린시절(時節)의 동무엿습니다 그는참다못해『아버지』하고 소리를첫&lt;br /&gt;
&lt;br /&gt;
습니다 그러나그들은 어느한사람도 그를상대(相對)로 반겨마저주는사람은 업섯습니다.&lt;br /&gt;
&lt;br /&gt;
모다제각기 제갈길을 가고만잇섯습니다.&lt;br /&gt;
&lt;br /&gt;
유령(幽靈)도 그때야 잠이깨엿습니다 그리고 몸써리를 치는것입니다 얼마나 지리(支離)한꿈이며 괴로운 꿈이겟습니까?유령(幽靈)은다시일어나 것는것입니다 캄캄암흑(暗黑)속을 영원(永遠)히차고 영원(永遠)히 새지못할듯한밤을 제혼자가는것입니다 십년전(十年前) 내발밋흘 지나단이며 사랑을 속삭이든 소년(少年)은지금도 밤길을 제혼자 가고잇겟지요 황엽(黃葉)은 그래서 서러운일생(一生)을 울고만잇습니다&lt;br /&gt;
&lt;br /&gt;
정축십일(丁丑十一),일(一)&lt;br /&gt;
&lt;br /&gt;
=='''주요 내용 요약'''=&lt;br /&gt;
주제: 작가(필자)의 소식을 세상에 전하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이다.&lt;br /&gt;
&lt;br /&gt;
소식 전달: '내'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가을 바람에 흘러가는 '황엽(黃葉, 누런 잎)' 조각을 자신의 편지라고 생각하고 그 서러운 전기를 들어보라고 한다.&lt;br /&gt;
&lt;br /&gt;
'황엽'의 관찰: 황엽(필자)은 자신이 거리에서 겪은 두 가지 경험을 이야기한다.&lt;br /&gt;
&lt;br /&gt;
소년의 성장과 비극: 어린 소년이 성장하여 연인과 행복을 속삭였으나, 부모에 대한 효행 문제로 헤어지는 비극을 목격하는 것이다. 황엽은 이를 '행복의 절정은 최대의 비극과 통한다'고 표현하며 자신의 '로-맨틔시슴'의 종언이라고 말한다.&lt;br /&gt;
&lt;br /&gt;
군중의 포효와 유령: 이후 황엽은 개별적인 사랑 이야기가 아닌, '뭇사람의 생활 전체'와 **'노도(怒濤)의 교향악'**을 목도한다. 황엽은 이 거대하고 위대한 '작란군(作亂群)'의 행렬에 전율을 느낀다. 행렬이 사라진 후, 황엽은 '패잔병의 유령' 같은 힘없는 한 사람의 고독하고 고통스러운 표류와 꿈을 따라가며, 꿈속에서 홍수로 고향을 떠난 농민들이 희망 없이 떠돌지만 '가자 압흐로 더가보자'는 그들의 단합된 의지를 발견하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마무리: 유령이 깬 후 다시 홀로 밤길을 걷는 모습을 보며, 황엽은 '서러운 일생을 울고만' 있다고 글을 마무리하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분석 및 특징'''==&lt;br /&gt;
메타포(은유)적 글쓰기: '황엽(낙엽)'이라는 매개를 통해 자신의 소식과 감정을 전달하는 고도의 은유적인 글이다. '황엽'은 작가 자신의 고독하고 소외된 자의식, 혹은 시대를 표류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시대의식의 투영: 개인적 낭만(소년의 사랑)의 종언과 함께,'뭇사람의 생활 전체'와 '노도의 교향악'을 목도하며 당대의 격변하는 사회상과 민중의 힘을 인식하는 작가 의식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이육사의 서정성: 후반부 꿈속에서 펼쳐지는 농민들의 표류와 그들의 굳건한 생존 의지는 당시 농촌의 피폐함과 함께 암울한 현실 속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을 비장하게 포착해내는 이육사 특유의 서정성을 보여주는 것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전과기'''=&lt;br /&gt;
누구나 버릇이란 쉽사리 곳처지는것은아니다 그러므로 세살쩍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말도 잇지 안는가?.그런데도흔히 다른사람의 한가지 버릇을 새로히 발현햇슬때는 아—저사람은 저런버릇이 잇구나하고 속으로 비우서보거나 그버릇이 조치못한종류의것이면 대개는 업수히역이는 수도잇는가봐!.그럿컨만 나에게는 아무리 곤처보려도 곤처지지안는버릇이란 손톱을 깍고 줄로 으르고 수건으로 닥고하는것이다그것도 때와곳을 가릴것도업시조욕(漕浴)나 다방(茶房)이나는 말할것업고기차(汽車)나 배를타고 멀리여행(旅行)이라도하면 심심푸리도되고 봄날도서관(圖書舘)가튼데서 서너시간(時間) 안저백이면 제아무리 게른뱅이는 아닐지라도 웃눈섭이 기중기(起重機)처름아래눈섭을 끄러다닐때도 잇는것이고 그럴때에 손톱을 잘르고줄로 살살으르면 자릿자릿한 자미에 왼몸에게틈이 다풀리는것이다.그야내나이 어릴때는아침일직이손톱을 잘르면어룬들은질색을하시며 말리기도하엿다,그리고 말릴때에 누구인지지금에기억되지는 안어도 우리집에자주오는 손이 말하기를 아침에손톱깍고 밤에 머리빗는것은몸에해롭다고 하는것이엿고 내생각에도 그런방문은『동의보감(東醫寳鑑)』에라도 싸여 잇는줄 아럿기에그뒤로는 힘써시간(時間)을 한나절지난뒤에 손톱을 닥곤하엿지만나도내대로 세상맛을 보게된뒤로는 쓴맛단맛을 다보고 시고떨븐 구석과 휘추고초가튼 광경에 부닥길때가 시작이되고는손톱치레를 할만한 여가도 업섯고 어느사이에 손톱은 제대로자라 긴놈 쩌른놈 삐뚜러진놈꼬부러진놈 벌덕잡버진놈 앙당마스러진놈 이러케되야 내손이란 그꼴이 맛치 오증어를 뒤집어 삶어논것이 되엿다.&lt;br /&gt;
&lt;br /&gt;
그럴때에 나는 또 다시 손톱을 잘를것은 잘르고 으를놈은 으르곤하엿스며 이른아츰이라도 가리지는 안엇다.그것은밤으로 머리를 깍거보아도 몸에 해로운것도 업스니까 아츰에 손톱을 깍는것조차 위생(衞生)과는 관게업는것을 안까닭이다.&lt;br /&gt;
&lt;br /&gt;
그런대 내가이손톱을 잘르는버릇은 언제부터 시작되엿는가를 생각해보면 그도벌서 삼십년(三十年)이 더지낫다,내가난지 백일(百日)이나 되엿겟지 이란저고리박게빨간내손이 나와서 내얼골을 햅여뜻고는 나는자스려질듯이 울엇다.어머니가 놀라서가위로 내손톱을 잘러주신것이 처음이고그것이 늘거듭하야 지는동안에봄철이오면 어머니는 우리형제(兄弟)를 차례로불러 퇴ㅅ마루 양지쪽에 안치고 손톱을 잘러주시고 머리도빗기고 귀도휩여 주섯스며 이것도 내나이 여섯살때 소학(小學)을 배우고는 이런일의한반(半)은 할아버님께 이관(移管)이 되엿다 예날 내고장 우리집에는그다지 크지는못해두 허무히 적지안은 화단(花壇)이 잇섯다 그리고그화단(花壇)은 이때쯤되면 일이밧벗다 깍지로긁고호미로 매고 씨갑씨를 뿌리고총생이를 옴겨심고 적당한 거름도 주엇다 요즘가티『시크라맨이나『카—비손』이나『추리프』가튼것은 업서도 옥매화(玉梅花) 분홍매화(粉紅梅花) 홍도(紅桃) 벽도(碧桃) 해당화(海棠花) 장미화(薔薇花) 촉규화(蜀葵花) 백일홍등등(百日紅等等) 빗도보고 향(香)내도맛고꼿도보고 입도볼 말하면 일년(一年)을 다즐길수가잇는것이엿는데 내할아버지 생각은 이제 헤아려보면 우리들에게 글읽고 글시씨인사이로노력(勞力)을 몸소맛보이는것도 되려니와 그것이 정서교육(情緒敎育)도될겸(兼) 당신의 노래(老來)를 화려(華麗)하게 꾸밀수도 잇섯든 모양이엿다 그럴때마다 우리들은 이다지 가볍고고흔 노동(勞働)이 끗나면 할아버지는 우리들게 손을씨슬것과 손톱에끼인흙을 끌어내도록 손톱을닥그라 하섯다.&lt;br /&gt;
&lt;br /&gt;
이러든 내손톱이기에 나는손톱을 소중히하고 잘르고 으르고 닥고하는 동안에 한가지방편을 어덧다 그것은 나에게거북한일을말하는 사람아페서 손톱을 닥는것이다.빤히 얼굴을맛대이고 배알에 거슬이거나듯기실흔 말을듯고 억지로 참을수도업고 그러타고 언잔흔표정(表情)을 할수도업서 손톱을 닥노라면 시굴게신 어머니도 그려보고 도라가신 할아버지의 모습을 우러러 뵈일수도잇다.내고장의 푸른하늘아래 봄이 왓슬것도 가트니&lt;br /&gt;
&lt;br /&gt;
——(완(完))——&lt;br /&gt;
&lt;br /&gt;
=='''주요 내용 요약'''==&lt;br /&gt;
손톱 깎는 버릇: 화자(나)에게는 아무리 고치려 해도 고쳐지지 않는 버릇, 즉 손톱을 깎고 줄로 다듬고 닦는 행위가 있다. 이 행위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으며, 특히 심심하거나 피로할 때 긴장을 풀어주는 '자릿자릿한 재미'를 준다. &lt;br /&gt;
&lt;br /&gt;
버릇의 변화와 세상 경험: 어릴 때는 '아침에 손톱 깎는 것은 몸에 해롭다'는 옛말 때문에 어른들이 말렸고, 화자도 이를 믿었다. 그러나 세상을 경험하며 '쓴맛 단맛'을 다 본 후, 손톱 관리에 신경 쓸 여유가 없어 손이 엉망이 되기도 했다. 이후 미신이나 위생보다는 개인의 필요에 따라 언제든 손톱을 다듬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버릇의 기원과 따뜻한 기억: 이 버릇은 태어난 지 백일 무렵 어머니가 처음 손톱을 깎아준 것에서 시작되었다. 봄철이 되면 어머니는 형제들의 손톱을 깎고 머리를 빗겨주셨다. 여섯 살 때부터는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화단(花壇)을 가꾸는 노동을 했다. 할아버지는 이 노동을 노력(勞働)을 몸소 맛보게 하고 정서 교육을 시키는 수단으로 여겼다. 노동이 끝난 후에는 손톱에 낀 흙을 닦도록 하셨는데, 이는 정돈과 청결의 습관으로 이어졌다.&lt;br /&gt;
&lt;br /&gt;
손톱 관리의 '방편': 손톱을 닦는 행위는 시간이 흐른 뒤 화자에게 '방편(方便)'의 의미를 얻게 되었다. 듣기 싫거나 거북한 말을 하는 사람 앞에서 이 행위를 하면, 억지로 표정을 관리할 필요 없이 그 행위에 몰두하며 고향의 어머니와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분석 및 특징'''==&lt;br /&gt;
일상적 소재의 상징성: '손톱 깎는 행위'라는 극히 일상적인 소재를 통해 삶의 태도, 유년 시절의 기억, 그리고 현재의 심리적 방어 기제까지 끌어내는 수필이다.&lt;br /&gt;
&lt;br /&gt;
세대 간의 경험 대비: 수필은 크게 세 시기를 대비시킨다.&lt;br /&gt;
&lt;br /&gt;
유년기 (어머니/할아버지): 손톱 관리가 사랑과 보호, 그리고 정서 교육의 매개였다. (전통적이고 순수한 가치)&lt;br /&gt;
&lt;br /&gt;
성인기 (세상 맛을 봄): 손톱 관리가 소홀해지고 삶의 고난과 시련 속에서 잊혔다.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운 현실)&lt;br /&gt;
&lt;br /&gt;
현재 (손톱을 닦는 '방편'): 손톱 관리가 현실의 고통을 회피하고 내면의 안정을 찾는 심리적 '방편'이 되었다. (현실과의 거리 두기)&lt;br /&gt;
&lt;br /&gt;
정서적 위안: 화자가 불편한 상황에서 손톱을 닦는 행위는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힘들었던 현실 속에서 유년기의 평화로웠던 기억(어머니, 할아버지, 화단)을 소환하여 현재의 감정을 통제하고 마음을 지키는 자기 치유의 과정인 것이다.&lt;br /&gt;
&lt;br /&gt;
향토적 정서: 화단에 핀 옥매화, 장미화, 백일홍 등과 퇴마루 양지쪽 같은 토착적인 이미지를 통해 과거의 아름다웠던 고향과 가족의 정을 회상하며, 전통적 가치에 대한 향수를 드러낸다.&lt;/div&gt;</summary>
		<author><name>Imgpdnjs</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E%A5%EC%A7%84%ED%99%8D_1895&amp;diff=65977</id>
		<title>장진홍 1895</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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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10T09:06:3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Imgpdnjs: &lt;/p&gt;
&lt;hr /&gt;
&lt;div&gt;[[분류:imgpdnjs]]&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장진홍초상화.jpg|300픽셀|섬네일|center|유족이 보관하고 있는 장진홍 의사의 초상화. ⓒ 장진홍 의사 기념사업회]]&lt;br /&gt;
=='''기본정보'''==&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margin:auto;&amp;quot;&lt;br /&gt;
|+ '''장진홍 (張鎭弘)'''&lt;br /&gt;
! 항목 !! 내용&lt;br /&gt;
|-&lt;br /&gt;
| 출생 || 1895년 6월 6일&lt;br /&gt;
|-&lt;br /&gt;
| 출생지 || 경상도 인동도호부 북면 문법동&lt;br /&gt;
|-&lt;br /&gt;
| 사망 || 1930년 7월 31일 23시경&lt;br /&gt;
|-&lt;br /&gt;
| 초명 || 장재환 (張在煥)&lt;br /&gt;
|}&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그는 1895년 경상도 인동도호부 북면 문법동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고향의 인명학교에서 기초 교육을 받았으며, 이 학교를 마친 후 1914년에 조선보병대에 입대했다. 군 생활은 오래 가지 않아 1916년 제대하며 끝났다.&lt;br /&gt;
&lt;br /&gt;
1919년, 그가 귀국한 직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번져 나가자 그는 부친 소유의 논 다섯 두락을 처분해 활동 자금을 마련했다. 이후 서적 행상으로 위장해 전국을 돌아다니며 일제가 저지른 학살, 방화, 고문 등의 실태를 직접 확인하고 세세하게 기록했다. 그해 7월, 미국 군함이 인천항에 들어오자 그는 이 조사서를 경북 출신 승무원 김상철에게 건네 미국에서 영문으로 번역·배포해 달라고 부탁했다.&lt;br /&gt;
&lt;br /&gt;
[[파일:약장수장진홍.jpg|200픽셀|섬네일|right|약장수였던 장진홍의 모습]]&lt;br /&gt;
&lt;br /&gt;
그 뒤 부산에서 조선일보 지국을 운영하기도 하고 생계를 위해 약장사를 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26년 1월, 이내성을 만나 독립운동을 어떻게 펼칠지 논의했고, 1927년 봄에는 그의 소개로 경산시장에서 국제공산당원이라 자칭하는 굴절무삼랑을 만났다. 굴절은 관공서와 은행, 부호의 집에 폭탄을 던져 민심을 뒤흔들어야 혁명이 촉진된다고 주장했고, 그는 한 달쯤 뒤 굴절이 만주에서 들여온 뇌관·도화선과 50원의 자금을 받아 폭탄 제조법을 배웠다.&lt;br /&gt;
&lt;br /&gt;
그해 8월 그는 시험용 폭탄 두 개를 만들어 칠곡과 선산 경계의 봉화산에서 성능을 시험했다. 이어 10월 16일에는 실제 거사에 쓸 폭탄 네 개와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준비한 폭탄 한 개를 추가로 제조해 경북도청, 경북경찰부, 조선은행 대구지점, 식산은행 대구지점을 목표로 삼았다.&lt;br /&gt;
&lt;br /&gt;
10월 18일 오전, 그는 대구 덕흥여관에서 폭탄에 점화 준비를 한 뒤 여관 종업원 박노선에게 목표지점 네 곳에 폭탄을 배달해 달라고 전달했다. 그리고 같은 날 11시 50분경 폭발이 일어나 은행 직원과 일본 경찰 다섯 명이 중상을 입고, 은행 창문 수십 장이 산산이 부서졌다.&lt;br /&gt;
&lt;br /&gt;
경찰은 운반책이었던 박노선을 체포해 추궁했지만 그의 배후를 밝혀내지 못했다. 사건 이후 그는 선산군 해평면으로 숨어들었다가 안동과 영천에서 다시 거사를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lt;br /&gt;
&lt;br /&gt;
1928년 2월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에서 안경점을 하던 동생 장의환을 만나러 갔다가 며칠 머무는 사이, 그를 잡으려 한국에서 파견된 경북경찰부 형사들에게 1929년 2월 13일 밤 습격을 받아 붙잡혔다.&lt;br /&gt;
&lt;br /&gt;
송환된 그는 조선인 경찰들의 매국적 행태를 강하게 비난하며 “동족을 억압하는 조선인 경관의 죄악은 죽은 뒤에도 용서할 수 없다”고 외쳤다고 전해진다. 조사 과정에서도 그는 거사를 혼자 계획하고 실행했음을 분명히 했지만, 모진 고문을 피할 수는 없었다. 반년 뒤 열린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자 법정에서 바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고, 2심과 고등법원 상고까지 모두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lt;br /&gt;
&lt;br /&gt;
1930년 7월 31일, 그는 일본의 손에 의해 치욕스럽게 죽음을 맞기보다는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편이 저항의 마지막 표현이라고 판단해, 그날 밤 11시경 자결로 생을 마쳤다.&lt;br /&gt;
&lt;br /&gt;
[[파일:장진홍사형기사.jpg|500픽셀|섬네일|center|ⓒ 장진홍 의사의 사형 판결을 알리는 &amp;lt;동아일보&amp;gt; 기사(1930.2.18.) ⓒ 동아일보]]&lt;br /&gt;
&lt;br /&gt;
= '''동시대 독립운동 및 의열 투쟁 속에서의 장진홍의 위치''' =&lt;br /&gt;
장진홍(1895–1930)은 1920년대 후반 조선 내 무장투쟁 국면에서 '''의열단식 폭탄 투쟁'''과 '''사회주의 계열 혁명 전략'''이 교차하던 지점에 위치한 인물이다. 그는 의열단처럼 상징적 타격을 통해 식민 권력의 허를 찌르는 방식을 택했으나, 조직에 속하지 않고 '''단독 계획·단독 제조·단독 실행'''을 고수했다는 점에서 비정형적인 무장 독립운동가로 평가된다.&lt;br /&gt;
&lt;br /&gt;
또한,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영향을 보여주는 굴절무삼랑과의 접촉, 그리고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으로 연루된 이육사(李陸史)와의 관계는 장진홍이 놓여 있던 시대적·사상적 위치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요소로 평가된다.&lt;br /&gt;
&lt;br /&gt;
== '''시대적 배경''' ==&lt;br /&gt;
=== 의열단 투쟁의 고조 (1920~1925) ===&lt;br /&gt;
* 김원봉 중심의 의열단은 폭탄·암살 중심의 직접행동을 전개하였다.&lt;br /&gt;
*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경성경찰서 등 식민 기관을 겨냥한 공격이 이어지며 식민 권력에 충격을 주었다.&lt;br /&gt;
&lt;br /&gt;
=== '''1925년 이후의 변화: 조직 재편과 노선 분화''' ===&lt;br /&gt;
* 1925년 치안유지법 시행 이후, 의열단은 중국에서 재편되었고 조선 내에서는 소규모 무장 행동이 증가하였다.&lt;br /&gt;
* 사회주의 계열 운동이 확대되며 도시 중심부 파괴 전략 등 혁명 전술이 일부 활동가들에게 수용되었다.&lt;br /&gt;
&lt;br /&gt;
=== '''1927년 전후의 조선 내부 분위기''' ===&lt;br /&gt;
* 조선공산당 검거, 치안 강화, 경제적 불만 확산 등으로 민심이 흔들리던 시기였다.&lt;br /&gt;
* 의열단의 표적 방식이 자극이 되어 '''“소수라도 핵심을 정확히 타격하라”'''는 논리가 퍼졌다.&lt;br /&gt;
* 장진홍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개인적 결단·외부 사상·지역 경험이 결합된 독자적 노선을 형성하였다.&lt;br /&gt;
&lt;br /&gt;
== '''장진홍의 사상적 위치''' ==&lt;br /&gt;
===''' 의열단식 투쟁의 영향''' ===&lt;br /&gt;
장진홍이 노린 목표(경북도청, 경북경찰부, 조선은행, 식산은행)는 의열단의 표적 패턴과 매우 유사하다.  &lt;br /&gt;
이는 '''식민 권력의 심장을 타격해 체제를 흔든다'''는 의열단식 논리를 반영한다.&lt;br /&gt;
&lt;br /&gt;
=== '''사회주의 계열 혁명 전략의 영향''' ===&lt;br /&gt;
굴절무삼랑을 통해 폭탄 제조 기술과 도시 중심 파괴 전략을 배웠으며,  &lt;br /&gt;
'''민심 동요 → 혁명 촉발'''이라는 사회주의 혁명론의 전술을 일부 수용하였다.&lt;br /&gt;
&lt;br /&gt;
그러나 그는 특정 조직에 가입하거나 이념적으로 체계를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lt;br /&gt;
'''조직 없는 사회주의적 의열투쟁가'''라는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lt;br /&gt;
&lt;br /&gt;
=== '''개인주의적 무장행동의 성격''' ===&lt;br /&gt;
* 자금·준비·실행의 중심이 모두 본인이었다.&lt;br /&gt;
* 폭탄을 직접 제조하고, 계획도 단독으로 수행하였다.  &lt;br /&gt;
→ 의열단의 조직성도, 사회주의 운동의 집단전략도 아닌 '''독자적 단독 실행 모델'''을 형성했다.&lt;br /&gt;
&lt;br /&gt;
== '''김원봉·신채호 등과의 노선 비교''' ==&lt;br /&gt;
=== '''김원봉(의열단 단장)과의 비교'''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 항목 !! 김원봉 !! 장진홍&lt;br /&gt;
|-&lt;br /&gt;
| 조직성 || 국제적 비밀조직 운영 || 조직 없음, 개인 단독 계획&lt;br /&gt;
|-&lt;br /&gt;
| 이론 기반 || 무정부주의+민족주의 || 민족주의+사회주의 전략 일부 수용&lt;br /&gt;
|-&lt;br /&gt;
| 투쟁 방식 || 표적 선정과 국제 지원 || 지역 기반, 즉흥적·직접적&lt;br /&gt;
|-&lt;br /&gt;
| 목표 || 식민 권력의 상징 타격 || 동일하나 전략적 연속성 부족&lt;br /&gt;
|}&lt;br /&gt;
&lt;br /&gt;
=== '''신채호 노선(무정부주의 혁명론)과의 비교''' ===&lt;br /&gt;
신채호는 '''“조선 혁명은 개인의 결단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했으며,  &lt;br /&gt;
장진홍의 행동 방식은 이 결단론과 유사하다.  &lt;br /&gt;
다만 사상적 학습의 흔적은 적고, 행동 양식만 닮아 있는 수준이다.&lt;br /&gt;
&lt;br /&gt;
=== '''종합 평가''' ===&lt;br /&gt;
장진홍은&lt;br /&gt;
* 의열단의 전위적 폭력 전략&lt;br /&gt;
* 사회주의 혁명 전술의 일부&lt;br /&gt;
* 신채호식 개인결단론&lt;br /&gt;
&lt;br /&gt;
이 세 요소가 교차한 '''중간지점의 실천가'''였다고 평가된다.&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 내 투쟁 전략에 끼친 영향'''=&lt;br /&gt;
* '''개인 단독 거사''' 모델을 보여주며 무장투쟁의 다양성을 넓혔다.&lt;br /&gt;
* 1920년대 후반 침체된 내부 분위기 속에서 무장 행동이 가능함을 입증하였다.&lt;br /&gt;
* 폭발 사건 이후 일제의 치안 강경책이 강화되면서  &lt;br /&gt;
  이육사 등 무관한 조선인들도 피해를 보는 부작용이 발생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육사(李陸史)]]와의 관계'''=&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margin:auto;&amp;quot;&lt;br /&gt;
|+ 장진홍과 이육사&lt;br /&gt;
|-&lt;br /&gt;
! 구분&lt;br /&gt;
! 장진홍 (張鎭弘) 의사&lt;br /&gt;
! 이육사 (李陸史) 시인&lt;br /&gt;
|-&lt;br /&gt;
| '''주요 활동 분야'''&lt;br /&gt;
| 무장 독립운동가, 의열투쟁&lt;br /&gt;
| 시인, 독립운동가 (의열단 활동)&lt;br /&gt;
|-&lt;br /&gt;
|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 역할'''&lt;br /&gt;
| '''진범''' (주도자)&lt;br /&gt;
| '''연루자''' (허위 조작으로 옥고를 치름)&lt;br /&gt;
|-&lt;br /&gt;
| '''투옥 및 최후'''&lt;br /&gt;
| 체포 후 사형 선고, 1930년 옥중 자결 순국&lt;br /&gt;
| 1년 7개월간 옥고 후 무혐의 석방, 이후에도 투옥을 반복하며 시 활동 전개&lt;br /&gt;
|-&lt;br /&gt;
| ''''육사' 호의 유래'''&lt;br /&gt;
| -&lt;br /&gt;
|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으로 수감 당시 수인번호 '''264'''에서 호를 취함&lt;br /&gt;
|-&lt;br /&gt;
| '''독립 운동 역할'''&lt;br /&gt;
|무장실천&lt;br /&gt;
|문화·정신 투쟁&lt;br /&gt;
|}&lt;br /&gt;
&amp;lt;/div&amp;gt;&lt;br /&gt;
='''타임라인'''=&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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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name>Imgpdnjs</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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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A1%B0%EC%84%A0%EC%9D%80%ED%96%89_%EB%8C%80%EA%B5%AC%EC%A7%80%EC%A0%90_%ED%8F%AD%ED%8C%8C_%EC%82%AC%EA%B1%B4&amp;diff=65959</id>
		<title>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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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10T09:03:2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Imgpdnjs: &lt;/p&gt;
&lt;hr /&gt;
&lt;div&gt;[[분류:imgpdnjs]]&lt;br /&gt;
&lt;br /&gt;
[[파일:조선은행대구지점사진.jpg|500픽셀|섬네일|center|조선은행 대구지점 전경 ⓒ 대구역사문화대전]]&lt;br /&gt;
&lt;br /&gt;
&lt;br /&gt;
=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 =&lt;br /&gt;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은 1927년 10월 18일 대구에서 발생한 무장 독립운동으로, 장진홍이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시한폭탄을 배달하여 폭발시킨 사건이다. 당시 조선은행은 조선 내 금융·화폐 정책의 핵심 기관이며, 식민경제 지배의 상징적 공간이었다. 폭발은 은행원과 일본 경찰 등 5명에게 중상을 입혔고, 창문 70여 장이 파손될 정도로 강력해 대구 도심 전체가 흔들렸다.&lt;br /&gt;
&lt;br /&gt;
&amp;quot;1927년 한낮, 조선은행 대구지점에서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이 울렸다. 이는 한 민족에게 독립의 외침이었으며, 민족혼을 일깨운 우뢰와도 같았다.&amp;quot;는 기록도 남아 있다.&lt;br /&gt;
&lt;br /&gt;
== 역사적 배경 ==&lt;br /&gt;
3·1운동 이후 1920년대 조선의 무장 독립운동은 의열단 활동을 중심으로 급진화되고 있었다. 이 시기 투쟁의 주요 대상은 경찰서·도청 같은 행정기관뿐 아니라, 식민 금융 지배의 핵심이던 조선은행과 식산은행 등 경제착취 기관이었다.&lt;br /&gt;
&lt;br /&gt;
조선은행 대구지점은 1910년대 중반 대구 중심부에 건립되었으며, 일제의 세금 관리·화폐 유통·대규모 자금 대출을 담당하는 지역 경제 지배의 핵심 기관이었다. 직원의 상당수가 일본인이었고, 군 복무 경험자도 많아 보안 체계가 강화되어 있었다. 건물은 붉은 벽돌과 석재를 혼합한 2층 구조였으며, 외부에서 수상한 물체가 반입될 경우 쉽게 눈에 띌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lt;br /&gt;
&lt;br /&gt;
1927년 4월, 무장투쟁을 준비하던 장진홍은 일본인 좌파 활동가 굴절무삼랑(堀切茂三郞)을 통해 폭탄 제조법과 뇌관, 도화선, 자금을 제공받았다. 일제는 이 사건을 ‘국제공산당 배후설’로 몰아갔으나, 실제로는 일본 내 혁명운동 잔존 세력과의 연결에 가깝다는 평가가 있다.&lt;br /&gt;
&lt;br /&gt;
== 사건 준비 ==&lt;br /&gt;
장진홍은 폭탄 제조법을 익힌 뒤 경북 칠곡·선산 경계의 봉화산에서 시한폭탄 성능 시험을 실시했다. 테스트 결과를 토대로 그는 대형 폭탄 4개와 소형 자결용 폭탄 1개를 추가로 제작했다. 장진홍의 목표는 대구의 핵심 식민통치 기관 네 곳이었다.&lt;br /&gt;
&lt;br /&gt;
* 조선은행 대구지점  &lt;br /&gt;
* 경북도청  &lt;br /&gt;
* 식산은행 대구지점  &lt;br /&gt;
* 경북경찰부  &lt;br /&gt;
&lt;br /&gt;
1927년 10월 17일, 그는 폭탄을 자전거에 싣고 대구로 이동해 덕흥여관에 투숙했다. 일제의 수사를 교란하기 위해 다리를 저는 척하고 서울말을 사용한 것은 의도된 위장이었다.&lt;br /&gt;
&lt;br /&gt;
여관 사환 박노선은 장진홍이 넘어진 부상자라고 믿었고, 다음 날 그가 부탁한 ‘벌꿀 상자’ 배달 심부름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 상자들 속에는 모두 폭탄이 들어 있었다.&lt;br /&gt;
&lt;br /&gt;
== 사건 전개 ==&lt;br /&gt;
10월 18일 오전 9시경, 박노선은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상자 한 개를 전달했다. 상자는 국고계 주임 복지흥삼에게 전달되었으나, 건물 안에 있던 일본인 은행원 길촌결(吉村潔)이 화약 냄새를 감지하여 즉시 포장을 풀어 확인했다. 그는 도화선을 잘라냈지만, 이미 점화된 폭탄은 11시 50분경 내부에서 폭발했다.&lt;br /&gt;
&lt;br /&gt;
* 창문 70여 장 파손  &lt;br /&gt;
* 은행 직원 및 일본 경찰 포함 5명 중상  &lt;br /&gt;
* 충격파가 대구역까지 도달  &lt;br /&gt;
* 은행 주변 기와지붕 파손, 유리 파편이 수십 m 반경으로 확산  &lt;br /&gt;
&lt;br /&gt;
폭발 직후 은행은 극심한 혼란에 빠졌고, 경찰과 소방 인력이 긴급 투입되었다. 인근 상점과 시장 상인들은 대규모 폭동으로 오인하여 대피했고, 대구 도심 전체가 한동안 마비되었다는 보도도 있다.&lt;br /&gt;
&lt;br /&gt;
나머지 세 건물(도청·식산은행·경북경찰부)의 폭발이 실패한 이유는 길촌결의 조기 발견으로 추가 전달이 중단되었기 때문이었다.&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amp;quot;https://www.google.com/maps/d/embed?mid=1Vbme0Wt5tZNnQRcv9tCNeZ6x62FsuF8&amp;amp;ehbc=2E312F&amp;quot; width=&amp;quot;640&amp;quot; height=&amp;quot;480&amp;quot;&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 언론 보도와 사회적 반응 ==&lt;br /&gt;
* '''매일신보'''(총독부 기관지): 사건을 &amp;quot;공산주의자의 파괴 음모&amp;quot;로 규정, 치안유지법 강화를 촉구  &lt;br /&gt;
* '''조선일보·동아일보''': 의거 자체의 배후를 명확히 알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며 보도  &lt;br /&gt;
* 대구 지역 상공인: 은행의 업무 마비와 금융 거래 지연으로 경제적 혼란 경험  &lt;br /&gt;
* 민중 여론: 표면적 침묵 속에서도 식민 금융기관을 겨냥한 공격이라는 점에서 은근한 지지 분위기 존재  &lt;br /&gt;
&lt;br /&gt;
이처럼 같은 사건을 두고 신문마다 다른 관점을 보였으며, 이후 일제가 지방 경찰권 강화의 명분으로 사건을 적극 활용하였다.&lt;br /&gt;
&lt;br /&gt;
== 초기 수사와 검거 ==&lt;br /&gt;
폭발 직후 일제 경찰은 대규모 검거 작전을 실시하고, 1928년 1월 이정기 등 8명을 체포했다. 이 과정에서 여러 조선인 독립운동가가 고문과 조작된 자백으로 억울하게 연루되었으며, 당시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인물 중에는 시인 [[이육사]]도 포함되었다.  &lt;br /&gt;
이육사는 이때 부여받은 수인번호 ‘264’를 자신의 아호 ‘육사(陸史)’의 유래로 삼게 된다.&lt;br /&gt;
&lt;br /&gt;
조선은행 사건은 이육사에게 첫 투옥 경험을 안겨준 사건이자, 그의 이후 독립운동 및 문학 활동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사건으로 평가된다.&lt;br /&gt;
&lt;br /&gt;
== 폭발 이후 대구 지역 독립운동의 변화 ==&lt;br /&gt;
조선은행 폭파 사건은 대구 지역 항일운동에 다음과 같은 영향을 미쳤다.&lt;br /&gt;
&lt;br /&gt;
* 비밀결사 조직망 와해 및 재편  &lt;br /&gt;
* 경찰·헌병의 사상 탄압 확대  &lt;br /&gt;
* 경북·대구 지역에서 폭발물 관련 규제 강화  &lt;br /&gt;
* 지역 사회의 방범 조직 확대  &lt;br /&gt;
&lt;br /&gt;
신고 체계가 강화되면서 무장독립운동은 더 은밀한 underground 조직 형태로 변화했다.&lt;br /&gt;
&lt;br /&gt;
== 조선은행 대구지점 건물의 이후 ==&lt;br /&gt;
폭발 후 조선은행 대구지점은 여러 차례 개·보수를 거쳤으며, 해방 이후 한국은행 대구지점으로 잠시 사용된 기록도 있다. 이후 원 건물은 도시 개발 과정에서 철거되거나 개축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건물의 정확한 형태는 사진 자료를 통해 일부만 확인된다.&lt;br /&gt;
&lt;br /&gt;
== 사건의 의의 ==&lt;br /&gt;
이 사건은 다음과 같은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lt;br /&gt;
&lt;br /&gt;
* 1920년대 후반 조선 내 무장 투쟁의 대표적 사례  &lt;br /&gt;
* 식민 금융 지배의 핵심 기관을 직접 타격했다는 상징성  &lt;br /&gt;
* 일본 경찰력과 행정 조직 강화의 계기  &lt;br /&gt;
* 이육사 등 여러 독립운동가들의 투옥 및 향후 활동에 영향을 미침  &lt;br /&gt;
* 국제공산당 배후설 제기 등 당시 동아시아 사상투쟁 구도의 반영  &lt;br /&gt;
&lt;br /&gt;
==결과와 의의== &lt;br /&gt;
장진홍은 폭발 확인 후 피신했으나, 1929년 2월 일본 오사카에서 경북경찰부 형사들에게 체포되었다. 본국으로 송환된 장진홍은 자신을 취조하는 조선인 경관들의 행태를 질타하며 불굴의 독립의지를 과시했다. 그는 고문을 받은 끝에 1심과 2심에서 사형이 선고되자 &amp;quot;조선독립만세&amp;quot;를 외쳤다. 1930년 7월 31일 밤, 장진홍은 일제에 대한 마지막 항거로 자신의 손으로 목숨을 끊어 옥중 자결 순국했다. 이 사건의 여파로, 시인 [[이육사(李陸史)]]는 1927년 장진홍 의거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어 1년 7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그는 이때 받은 수인번호 264에서 따서 자신의 호를 '육사(陸史)'라고 지었다. 이육사 시인 외에도 장진홍의 어머니가 이 일로 체포된 바 있으며, 인동 장씨 일가인 장용희가 동료와 가족의 피해를 줄이고자 자결했고, 그의 친척인 장효식이 행방불명되는 등 주변 인물들이 이 사건으로 인해 큰 고초를 겪었다. 이 사건은 1920년대 말 대구 지역의 대표적인 무장 독립운동이었으며, 거사가 국제공산당과 연계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장진홍판결문.jpg|300px|섬네일|center|장진홍 사건 관련 판결문 ⓒ 대구역사문화대전]]&lt;br /&gt;
&lt;br /&gt;
&lt;br /&gt;
==소설로 다시 재현해보는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lt;br /&gt;
&lt;br /&gt;
덕흥여관에 처음 들어갈 때 장진홍은 겨우 걷는 사람처럼 심하게 다리를 절뚝거렸다. 자전거를 나무 아래에 세우고 묶는 일도 간신히 해냈다. 사환 박노선이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이윽고 말을 걸었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1e90ff&amp;quot;&amp;gt;&amp;quot;와 카심니까(왜 그러십니까)? 크게 다친 거 같은데 자정건 우째 타고 오싰능교(자전거는 어떻게 타고 오셨습니까)?&amp;quot;&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ff8c00&amp;quot;&amp;gt;&amp;quot;내가 선물을 꼭 보내야 할 고마운 곳들이 몇 군데 있는데, 모두들 이 인근에 있다오. 그래서 이렇게 자전거에 선물들을 싣고 왔는데,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을 기약해야지요. 내리막길에서 자전거를 타다가 심하게 넘어지는 바람에 이리 다쳤지요.&amp;quot;&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장진홍이 서울말로 대답했다. 그렇게 다리를 전 것과 서울말을 쓴 것은 의거 후 일제 경찰의 수사에 혼선을 주려는 의도된 언행이었다. 자신을 노출하지 않으려면 다른 사람을 동원해야 하는데, 박노선에게 심부름을 시키면 적당하겠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다시 이튿날(18일), 장진홍은 박노선에게 '심부름값'을 주면서 부탁했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ff8c00&amp;quot;&amp;gt;&amp;quot;자고 나면 낫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다리가 퉁퉁 붓고 통증이 더 심해져서 아주 걷기가 힘들게 되었다오. 이것들이 모두 벌꿀상자인데 조선은행, 도청, 식산은행, 경찰서에 순서대로 급히 배달을 좀 해 주시오.&amp;quot;&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벌꿀 선물로 위장된 상자들 안에는 장진홍이 직접 제조한 시한폭탄들이 들어 있었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박노선은 짭짤한 심부름값이 흐뭇해 부랴부랴 상자들을 챙겨들고 조선은행 대구지점으로 갔다. 박노선은 장진홍이 시킨 대로 국고계 주임 복지흥삼(福地興三)을 찾았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1e90ff&amp;quot;&amp;gt;&amp;quot;선물 가꼬(가지고) 심부름 왔어에(왔어요), 주임님!&amp;quot;&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박노선은 평소 안면이 있는 복지흥삼에게 벌꿀 상자 하나를 건넸다. 그때 복지흥삼 곁에 군인 출신 일본인 은행원 길촌결(吉村潔)이 앉아 있었다. 그가 군인 출신답게 화약 냄새를 맡았다. 길촌결이 재빨리 포장 끈을 풀었다. 상자 안에는 도화선에 불이 붙은 폭탄이 이글거리고 있었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a020f0&amp;quot;&amp;gt;&amp;quot;으악! 이게 뭐야? 이게 뭐야!&amp;quot;&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복지흥삼이 비명을 질러댔다. 길촌결이 재빠르게 도화선을 잘랐다. 아직 불이 옮겨 붙지 않은 나머지 세 상자는 황급히 은행 앞뜰 자전거 주차장로 옮겨졌다. 신고를 받은 경찰이 달려왔고, 박노선은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lt;br /&gt;
&lt;br /&gt;
경찰은 주차장에 있는 폭탄 셋을 다시 한길로 내놓았다. 옮긴 지 1∼2분 만에 폭탄 셋은 요란한 굉음을 내며 잇따라 폭발했다. 은행원, 경찰 등 5명이 파편에 맞아 중상을 입었고, 은행 창문 70여 개가 박살이 나면서 파편이 대구역까지 날아갔다.&lt;br /&gt;
&lt;br /&gt;
폭파 의거는 '절반의 성공'에 멈추었지만 세상을 흔들었다. 일제 경찰은 1928년 1월 장진홍이 '범인'인 줄 파악하지 못한 채, 이정기 등 독립운동가 8명을 검거해 대구 형무소에 투옥했다. 이때 이원록(이육사)도 자신의 형·동생과 더불어 옥고를 겪었다. 일경은 악독한 고문 끝에 이들을 진범으로 조작해 재판에 회부했다.&lt;br /&gt;
&lt;br /&gt;
의거가 완전한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을 한탄한 장진홍 지사는 1927년 11월과 1928년 1월 안동 경찰서와 영천 경찰서 폭파를 계획했다. 그러나 끝내 실행에 옮기지 못한 상태에서, 검거의 포위망이 좁혀오자 몸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갔다.&lt;br /&gt;
&lt;br /&gt;
일본에서도 장진홍은 새로운 거사 준비에 골몰했다. 하지만 동생의 오사카 소재 안경점에서 마침내 검거되었다. 장 지사를 체포한 일제 경찰은 조선인이었다. 조선인 형사 최덕술은 1929년 2월 19일 의기양양하게 장 지사를 대구로 압송했다.&lt;br /&gt;
&lt;br /&gt;
혹독한 고문이 시작되었다. 더 많은 관련자들을 체포해 공적을 쌓으려는 조선인 형사들의 광분은 그야말로 '필설로 형언'하기 어려울 만큼 비인간적이었다. 하지만 장 지사는 오직 자신의 단독 의거라는 점만 되풀이해서 강조하며 오히려 그들을 꾸짖었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ff8c00&amp;quot;&amp;gt;&amp;quot;조선 민족의 피를 받은 자로서 일제 경찰의 주구가 되어 동족의 해방운동을 이다지도 방해하는 악질 조선인 경관의 죄상이야말로 나의 죽은 혼이라도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amp;quot;&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여섯 달이나 악랄한 고문을 당한 끝에 장 지사는 재판에 회부되었다. 1930년 2월 17일 대구지방법원 1심 재판은 '사형'을 언도했다. 그 뒤 대구복심법원 재판도, 고등법원 상고 결과도 마찬가지로 '사형'이었다. 장 지사는 사형 선고가 내려질 때마다 재판정에서 &amp;lt;span style=&amp;quot;color:#ff8c00&amp;quot;&amp;gt;&amp;quot;대한독립만세!!!&amp;quot;&amp;lt;/span&amp;gt;를 외쳤다.&lt;br /&gt;
&lt;br /&gt;
1930년 7월 31일, 장 지사는 &amp;lt;span style=&amp;quot;color:#ff8c00&amp;quot;&amp;gt;&amp;quot;일제에게 치욕스러운 죽음을 당하느니 차라리 내 손으로 목숨을 끊는 것이 일제에 대한 마지막 항거가 아니겠는가!&amp;quot;&amp;lt;/span&amp;gt; 하고 결심했다. 이윽고 그날 밤 11시경 장 지사가 자결·순국하였다.&lt;/div&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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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5-2학기 디지털 인문학 응용</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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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Imgpdnjs: &lt;/p&gt;
&lt;h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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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lt;br /&gt;
&lt;br /&gt;
{{Welcom}}&lt;br /&gt;
&lt;br /&gt;
===팀구성원===&lt;br /&gt;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 width:100%&amp;quo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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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챗봇]] [[휴먼]] [[김두원]] [[아사히]] [[dldbswls]] [[jjw4957]]&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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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lst]]&lt;/div&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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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5-2학기 디지털 인문학 응용</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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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Imgpdnjs: &lt;/p&gt;
&lt;h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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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구성원===&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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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이육사와 독립운동</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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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10T08:59:4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Imgpdnjs: Imgpdnjs님이 박진현,조미정,박정원,전혜원 문서를 이육사와 독립운동 문서로 이동했습니다&lt;/p&gt;
&lt;hr /&gt;
&lt;div&gt;&lt;br /&gt;
==목차==&lt;br /&gt;
# 여는 말&lt;br /&gt;
# 기획 의도&lt;br /&gt;
# 독립운동가들&lt;br /&gt;
&lt;br /&gt;
==여는 말==&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파일:이육사.jpg]]&lt;br /&gt;
&amp;lt;/div&amp;gt;&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이 페이지는 시인이자 강인한 독립운동가였던 [[이육사(李陸史)]]라는 상징적인 인물을 중심으로, &amp;lt;/div&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그와 운명적으로 얽혀 격동의 시대를 함께 살아낸 주요 인물들의 삶과 활동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기 위해 기획되었습니다. &amp;lt;/div&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저희는 이육사를 무장 투쟁 노선과 문화적 저항을 모두 관통했던 '연결 고리'로 설정했습니다. &amp;lt;/div&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위키를 통해 알아보는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가들, 그 안에 중심 &amp;lt;font color=&amp;quot;red&amp;quot;&amp;gt; '''''[[이육사(李陸史)]]'''''&amp;lt;/font&amp;gt;&amp;lt;/div&amp;gt;&lt;br /&gt;
&lt;br /&gt;
==기획 의도==&lt;br /&gt;
본 위키 페이지는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이육사(李陸史)]]&amp;lt;/div&amp;gt;라는 상징적인 인물을 중심으로, 그가 교류하고 영향을 주고받았던 주요 인물들의 삶과 활동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것을 기획 의도로 삼습니다. 일반적인 위인전 형식에서 벗어나, 이육사를 연결고리로 삼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문학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주변 인물들의 복합적인 업적과 시대적 맥락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하고자 합니다.&lt;br /&gt;
&lt;br /&gt;
==독립운동가들==&lt;br /&gt;
#[[김광섭_1905]]&amp;lt;/div&amp;gt;&lt;br /&gt;
#[[장진홍_1895]]&amp;lt;/div&amp;gt;&lt;br /&gt;
#[[김원봉_1898]]&amp;lt;/div&amp;gt;&lt;br /&gt;
#[[윤세주_1901]]&amp;lt;/div&amp;gt;&lt;br /&gt;
==Visualization==&lt;br /&gt;
{{NetworkGraph|title=3조.lst}}&lt;/div&gt;</summary>
		<author><name>Imgpdnjs</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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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박진현,조미정,박정원,전혜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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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10T08:59:4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Imgpdnjs: Imgpdnjs님이 박진현,조미정,박정원,전혜원 문서를 이육사와 독립운동 문서로 이동했습니다&lt;/p&gt;
&lt;hr /&gt;
&lt;div&gt;#넘겨주기 [[이육사와 독립운동]]&lt;/div&gt;</summary>
		<author><name>Imgpdnjs</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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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D%B4%EC%9C%A1%EC%82%AC(%E6%9D%8E%E9%99%B8%E5%8F%B2)&amp;diff=65918</id>
		<title>이육사(李陸史)</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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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10T08:53:5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Imgpdnjs: &lt;/p&gt;
&lt;hr /&gt;
&lt;div&gt;[[분류:imgpdnjs]]&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파일:이육사.jpg]]&lt;br /&gt;
&amp;lt;/div&amp;gt;&lt;br /&gt;
==기본 정보==&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margin:auto;&amp;quot;&lt;br /&gt;
|+ '''이육사'''&lt;br /&gt;
! 항목 !! 내용&lt;br /&gt;
|-&lt;br /&gt;
| 본명 || 이원록&lt;br /&gt;
|-&lt;br /&gt;
| 출생 || 1904년 5월 18일&lt;br /&gt;
|-&lt;br /&gt;
| 출생지 || 경상북도 예안군 의동면 원촌동 원촌마을&lt;br /&gt;
|-&lt;br /&gt;
| 사망 || 1944년 1월 16일&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이육사는 1904년 5월 18일, 지금의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인 옛 예안군 일대에서 태어났다. 퇴계 이황의 후손인 아버지 이가호와 어머니 허길 사이에서 여섯 형제 중 둘째였다. 훗날 그는 영천 화북면 오동리 출신인 안일양과 결혼하게 된다.&lt;br /&gt;
&lt;br /&gt;
어린 시절 그는 조부 이중직에게서 소학을 배우며 한학을 익혔다. 조부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진성이씨 문중에서 운영하던 보문의숙(훗날 도산공립보통학교)에서 공부했고, 이때 배운 한학의 영향은 그의 문학 세계에도 묻어난다. 졸업 후 가족이 대구로 이주했고, 그는 열아홉에 영천의 백학학원에서 교원으로 잠시 일했다. 1924년에는 일본 도쿄에서 예비학교 과정을 수학했으나 중도에 그만두고, 다음 해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 사회학을 공부했지만 역시 2학년 때 학업을 접었다.&lt;br /&gt;
&lt;br /&gt;
1927년 그는 [[장진홍_1895]]이 일으킨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과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대구형무소에서 약 1년 반을 지냈다. 이때의 수인번호 ‘264’를 따서 훗날 자신의 호를 ‘육사’라 짓는다.&lt;br /&gt;
&lt;br /&gt;
1932년 그는 만주 펑톈으로 건너가 [[윤세주_1901]]를 만나 의열단 입단 권유를 받았고, 난징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으로 들어가 폭탄 제조와 투척, 변장, 무기 운반, 피신 기술 등 다양한 실전 교육을 받았다. 사격 실력은 특히 뛰어났다고 전해진다.&lt;br /&gt;
&lt;br /&gt;
1933년 귀국 후에는 신문·잡지를 오가며 시와 논문, 시나리오 등 여러 글을 썼고, 루쉰의 소설 《고향》을 번역하기도 했다. 하지만 1934년 의열단 출신이라는 이유로 다시 검거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을 당했고, 몇 달 뒤 기소유예로 풀려났다.&lt;br /&gt;
&lt;br /&gt;
1943년 베이징으로 건너갔다가 어머니와 큰형의 소상을 위해 5월에 귀국했다. 그러 이 해 6월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었고, 결국 1944년 1월 16일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교도소에서 옥사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https://www.youtube.com/watch?v=gCcfvA4fGKY 광복 79주년 특별영상 : 행동하는 지성, 저항시인 이육사 이야기]&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937&amp;quot; height=&amp;quot;527&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gCcfvA4fGKY&amp;quot; title=&amp;quot;광복 79주년 특별영상 : 행동하는 지성, 저항시인 이육사 이야기&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amp;lt;/div&amp;gt;&lt;br /&gt;
&lt;br /&gt;
==[[이육사의 기자 생활]]==&lt;br /&gt;
많은 사람들이 이육사의 문학 작품만을 알고 기자 생활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위 페이지에서는 이육사의 기자 생활에 대해 더 자세히 서술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청포도'에 스민 가족에 대한 향수와 해방의 염원==&lt;br /&gt;
[[이육사의 '청포도']]&amp;lt;/div&amp;gt;는 이육사가 일제강점기에 경험한 상실과 분리를 바탕으로,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해방에 대한 염원을 동시에 그려낸 시이다. 시에서 드러난 익어가는 청포도의 모습과 돌아올 이를 기다리는 마음은 개인의 정서와 민족적인 바람이 자연스럽게 중첩되는 지점을 보여준다.&lt;br /&gt;
&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v2%3A2PACX-1vTBMVIXErpB6OYWbzC-nzv_0t_UNL2Q64IzD8TI-b1EywFJnOKdoMzdLiVC3NeAgyn4NLe-NEfPjK34&amp;amp;font=Default&amp;amp;lang=ko&amp;amp;initial_zoom=2&amp;amp;width=100%25&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이육사를 기억하는 장소==&lt;br /&gt;
이육사는 경상북도에서 태어났지만 전국적으로 이육사와 관련된 장소들이 많다. 아래 지도는 이육사와 관련된 모든 장소들을 정리한 지도이다. 대단한 시인 이육사를 기억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방문하기를 추천하한다.&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amp;quot;https://www.google.com/maps/d/embed?mid=1h1k2e9-GTfl5Bzcv0D2CRQG12cR998o&amp;amp;ehbc=2E312F&amp;quot; width=&amp;quot;640&amp;quot; height=&amp;quot;480&amp;quot;&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amp;lt;/div&amp;gt;&lt;br /&gt;
&lt;br /&gt;
:::::&amp;lt;p&amp;gt; '''1. 청포도 문학공원'''&lt;br /&gt;
&amp;lt;/p&amp;gt;&lt;br /&gt;
&amp;lt;p&amp;gt;&lt;br /&gt;
:::::이육사의 대표 시 「청포도」의 영감을 얻은 장소로 알려져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청림동 일대에 조성되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포항 청림동 일대(현재 해병사단 내 일월지 주변)에 동양 최대의 포도원이 있었는데, 이육사가 이곳에서 영일만을 바라보며 시를 구상했다는 문헌 기록을 바탕으로 한다. 공원에는 청포도 시비와 함께 문화축제가 열리며 시인의 문학 정신을 기리고 있다.&lt;br /&gt;
&amp;lt;/p&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p&amp;gt; '''2. 이육사문학관'''&lt;br /&gt;
&amp;lt;/p&amp;gt;&lt;br /&gt;
&amp;lt;p&amp;gt;&lt;br /&gt;
:::::이육사 시인의 고향인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에 2004년 탄신 100주년을 맞아 설립되었다. 그의 민족정신과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한 공간으로, 친필 원고, 시집, 독립운동 관련 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다. 문학관 주변에는 복원된 생가, 청포도 샘, 절정 시비 등이 함께 조성되어 있다.&lt;br /&gt;
&amp;lt;/p&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p&amp;gt; '''3. 이육사 생가'''&lt;br /&gt;
&amp;lt;/p&amp;gt;&lt;br /&gt;
&amp;lt;p&amp;gt;&lt;br /&gt;
:::::이육사가 태어난 집이다. 원래 안동댐 건설로 인해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1976년 안동시 태화동으로 옮겨졌다. 이후 육사 탄신 100주년(2004년)을 기념하여 이육사문학관 옆(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에 원래의 건축 양식을 살려 복원되었다. 조선 후기 전통적인 반가(班家)의 건축 양식을 띄고 있으며, 특히 사랑채와 안채의 크기와 구조가 거의 동일하게 대칭을 이루는 독특한 특징이 있다.&lt;br /&gt;
&amp;lt;/p&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p&amp;gt; '''4. 문화공간 이육사'''&lt;br /&gt;
&amp;lt;/p&amp;gt;&lt;br /&gt;
&amp;lt;p&amp;gt;&lt;br /&gt;
:::::이육사가 1939년 무렵 가족과 거주하며 「청포도」 등 주요 작품을 발표했던 서울특별시 성북구 종암동의 역사적 의의를 기념하여 2019년에 개관한 복합 문화 공간이다. 각 층의 명칭을 '청포도', '교목', '절정' 등 그의 대표 시 제목에서 따왔으며, 전시, 강좌, 문화 행사 등을 통해 시인의 삶과 문학을 시민들과 공유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lt;br /&gt;
&amp;lt;/p&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p&amp;gt; '''5. 264작은문학관'''&lt;br /&gt;
&amp;lt;/p&amp;gt;&lt;br /&gt;
&amp;lt;p&amp;gt;&lt;br /&gt;
:::::이육사의 필명이 된 수인번호 '264'를 기려 대구광역시 중구 북성로에 조성된 작은 문학관이다. 이육사는 1927년 장진홍 의거로 인해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이곳에서 '264'라는 수감번호를 받았다. 일제강점기 적산가옥을 리모델링하여 1층은 카페와 기획전시실, 2층은 상설전시실로 운영되며, 이육사의 생애와 작품을 살펴볼 수 있다.&lt;br /&gt;
&amp;lt;/p&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Imgpdnjs</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D%B4%EC%9C%A1%EC%82%AC%EC%9D%98_%EA%B8%B0%EC%9E%90_%EC%83%9D%ED%99%9C&amp;diff=65912</id>
		<title>이육사의 기자 생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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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10T08:51:4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Imgpdnjs: /* 분석 및 특징 */&lt;/p&gt;
&lt;hr /&gt;
&lt;div&gt;[[분류:imgpdnjs]]&lt;br /&gt;
==이육사의 기자생활==&lt;br /&gt;
출소한 뒤에는 중외일보와 조선일보 대구지국에서 기자로 일했고, 1930년에는 ‘이활’이라는 이름으로 첫 시 &amp;lt;말&amp;gt;을 조선일보에 발표했다. 이 시기는 훗날 교보생명을 세우는 신용호에게도 영향을 주어 독립운동 자금 지원과 교육 사업 구상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알려져 있다.&lt;br /&gt;
&lt;br /&gt;
1930년, 이육사는 조선일보 지면을 통해 생애 첫 시 「말」을 발표하며 문단에 모습을 드러냈다. 1월 3일자 조선일보 7면 하단에 실린 이 짧은 작품에서 그는 매질에 지쳐 쓰러질 것 같은 말이지만 새해에는 다시 우렁차게 질주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이 작품이 바로 그와 조선일보의 첫 연결고리였다.&lt;br /&gt;
&lt;br /&gt;
==중외일보 대구지국==&lt;br /&gt;
1929년 6월 장진홍 의거 관련 혐의로 복역 후 1930년에 출소한 이육사는 곧바로 언론계에 투신했다. 그는 시 발표 직후 중외일보(中外日報) 대구지국에서 기자로 일하기 시작했다. 중외일보는 1926년 조선중앙일보가 제호를 변경하여 창간된 신문으로, 1931년까지 발행되었다. 이육사가 활동하던 시기는 일제강점기 언론 탄압 속에서도 민족의식을 고취하려던 분위기가 남아있던 때였다. 지방지국 기자로서 지역 사회의 현안을 취재하고 보도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기간의 활동은 그가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사회 현실에 대한 인식을 심화하는 데 기여했다.&lt;br /&gt;
&lt;br /&gt;
==조선일보 대구지국==&lt;br /&gt;
중외일보에서 근무한 뒤, 이육사는 1931년 8월 조선일보 대구지국으로 자리를 옮겼다. 일제강점기 지방의 신문 지국은 단순한 연락소가 아닌, 지방 취재와 기사 송고의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이육사는 이곳에서 현장 기자로서의 전문적인 경험을 쌓았다. 조선일보에서 자신의 이름(필명)을 걸고 처음으로 쓴 기사는 1932년 초에 연재되었다. 첫 기사인「대구의 자랑 약령시의 유래」는 1932년 1월 14일부터 네 차례에 걸쳐 연재되었다. 이 기사를 쓸 때 그는 본명 대신‘육사생(肉瀉生)’이라는 독특한 필명을 사용했다. '육사'라는 필명이 여기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으며, 이는 그의 상징적인 수인(囚人) 번호(264)와 연결되는 '이육사'라는 이름의 유래 중 하나로 간주되기도 한다. 이 기사는 대구의 대표적인 전통 시장인 약령시의 역사와 유래를 소개하는 향토색 짙은 글이었으며 이육사가 기자로서 대구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lt;br /&gt;
&lt;br /&gt;
[[파일:이육사기사.jpg|500픽셀|섬네일|center| 이육사가 조선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근무하면서 쓴 1932년 1월 14일 자 ‘대구의 자랑 약령시의 유래’ 기사. ‘육사생’이란 필명 사용. ⓒ 조선일보]]&lt;br /&gt;
&lt;br /&gt;
그는 스포츠 기사에서도 민족적 정서를 드러냈다. 1932년 3월 6일과 9일자 스포츠란에서 「대구 ‘장’ 연구회 창립을 보고서」라는 글을 연속으로 기고하며 이번에는 ‘이활(李活)’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여기서 그는 조상 대대로 이어오던 우리 겨레의 전통 놀이 ‘장치기’를 소개하며 경기 방식뿐 아니라 점수 계산 용어까지 온전히 우리말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더 나아가 이 놀이를 세계 농민 사회에까지 널리 보급하자고 주장했다.&lt;br /&gt;
&lt;br /&gt;
그는 1934년 무렵 조선일보로 다시 합류했고, 이후에도 꾸준히 조선일보 지면에 글을 남겼다. 1930년대 후반에서 신문이 폐간되기 직전인 1940년까지 발표된 글들은 다양했다. 5회 연재된 「노신 추도문」(1936년 10월 23~29일자), 「문외한의 수첩」(1937년 8월 3~6일자, 3회), 「황엽전」(1937년 10월 31일~11월 5일자, 4회), 「전조기」(1938년 3월 2일자), 그리고 1940년 발표된 「계절의 오행」 등이 대표적이다.&lt;br /&gt;
&lt;br /&gt;
==타임라인으로 보는 이육사의 기자 발자취==&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v2%3A2PACX-1vScyeelknnBUflE4gCcqr0d_p4jIpl00AVBmBzhC5cgKY8GPsH4h-JZmzezN5VoQTKsJGw76vWgsA7O&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width=100%25&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대구(大邱)의 자랑 약령시(藥令市)의 유래(由來)=&lt;br /&gt;
대구(大邱)의자랑&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의유래(由來)&lt;br /&gt;
&lt;br /&gt;
대구지국(大邱支局) 육(肉) 사(瀉) 생(生)&lt;br /&gt;
&lt;br /&gt;
대구의자랑이 무엇이냐?고 뭇는사람이 잇스면 지금사람들은아이어룬할것업시 대구능금(평과(苹果))을말할것이다 그러나 대구능금은 최근의 한명산물로서완전한 자랑의자위를 점령할수는업는것이다 여긔서우리는중학교지리교과서(중학교지리교과서(中學校地理敎科書))에도잇는대구의유명한약령시(연령시(燕令市))를자랑으로들어놋코그에대한력사적유래를먼저아라보자&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의사적유래(史的由來)&lt;br /&gt;
&lt;br /&gt;
대구의 약령시는 일년얼차의정긔시장으로서 그시장에 집산되는 산물은 맛치『도루고』(토이기(土耳其))나『코—카쓰』(고가삭(高加索))나중앙아세아(중앙아세아(中央亞細亞))내외몽고(내외몽고(內外蒙古))등지에서 일년 일차혹이차식 열니는 모피물(모피물(毛皮物))의시장과가티대성황을일우나 이상에말한 각지의시장은인류사회의생활형태가차차목집함을따라필요한물품을서로서로밧구고저일정한장소와시일에모히는말하자면물물교환(물물교환(物物交換))시대로부터교통의관계라는지긔후의관계라든지또는일반사희생활의형태가오히려아직까지녯날의그것을면치못하고현대자본주의국제간의무역관계(무역관계(貿易關係))가극도로발달된 오날까지에 원시경제(원시경제(原始經濟))를 연구하는학자들의 연구재료가 되는것은휴미잇는 사실이지만은 대구의약렁시는 물품의집산과 교환의량식이 그와방불하여도 일홉부터 약시(약시(藥市))가아니고 약렁시(약령시(藥令市))란령(영(令))자에대하야우리는직각적으로 이시장의긔원은엇던권력(권력(權力))의 지배(지배(支配))맛해일게된것을 알수가잇다그러면 이약렁시가 처음시직된것은 언제부터인가 그야말로중학교교과서에까지『고래(고래(古來))로유명』이라고만씨여잇고 적확한년대를 쓰지안엇슴으로 대담하게 그년대를 내어노을수는업스나 비교적정확한수자를 조사한대로쓰면 서력일천륙백오십팔년(이조개국이백육십팔년효종조(李朝開國二百六十八年孝宗朝))거금이백칠십 사년전부터개시하게 되엿다고한다 그때야말로 조선을팔도(팔도(八道))에 닌후아노코 다시칠십일주로 난호아노흔 경상도의 정치적수부(수부(首府))도대구려니와 경상도(경상도(慶尚道))를둘너 남부조선각지는 산수명랑하고긔후온화하야각색약초(약초(藥草))의배양에지질이알맛기도하고 교통도편의하야(그때로보아서는)물산의집산에최적의지대도 대구엿스며 그때야말로임진병란(임진병란(壬辰兵亂) 이끗을막고모든볼회와 시설이 차자정돈뇌고발전을 보이며따라황실중심(성실중심(星室中心))으로끄으려는당시의위정사(위정자(爲政者))들은□□□□조금이라도 관계잇는 물품이면무엇이나물론하고 먼저진상(진상(進上))이란일흠아래최상의생산품을골너 서울도보내고 일반백성이먹고 입고쓰게되는 것이다그리고엇던 계□을물는하고병업시일생을 살수도업는것은 생리상자연의 리치엄으로 일국의지존(지존(至尊))인왕(왕(王))도병마의무서움은면치못 하는것이다 그래서황실에서일년동안쓸 약품을이곳에서 구하고저 국가의명령으로개시케한것이 오날날 우리가보고듯고 하는약령시의 처음이다그때는 약령이서면 감사(감사(監使))(현도지사(現道知事))가약재를골다봉하야중앙 정부 사약원(중앙정부사약원(中央政府司藥院))에 보낸후에 팔도에서모혀든 약재를일반 약국(약국(藥局))이사서완조선안의병든사락들이 그해그해의 치료를하게다엿다고한다(속(續))&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와경기(景氣)(이(二))&lt;br /&gt;
&lt;br /&gt;
대구지국육(大邱支局肉) 사(瀉) 생(生)&lt;br /&gt;
&lt;br /&gt;
【대구(大邱)】대구의약령시(약령시(藥令市))는다른상품시장에서는볼수업는특수한 유래를가지고 발달하여온만큼 지방의정청에서도일년춘추두차레에정긔적으로모여드는 지방생산자들을 위하야지방경제발달을 조장하고저 계획을세우고 제도의개선과 개시(개시(開市))긔간의 연장등 모든방면으로힘을써 보앗스나 모다뜻과갓지못하고 서구(서구(西歐))렬국의동양(동양(東洋))침입으로의학(의학(醫學))약학(약학(藥學))등학문이발달됨에침(침(針))은주사(주사(注射))로변하고바쇠는『메—쓰』로화하는바람에한약(한약(漢藥))의 가치는 전연그권위를일케되면서 대구의 약령시도차차워마하야 매매되는 약재료도주러지기만 하든중『후—버』겅긔가세계의주식시장(주식시장(株式市場))을혼란케하듯이 대구의 약령시장도 대타격의한때가 지나가게되엿스니 그는무엇일가?지금부터이십이년전(신해년(辛亥年))에중산손문 중산손우(中山孫又))씨혁명으로대청황실)대청황실(大清皇室))을넘어지면서부터는 청황실이 조선정부(조선정부(朝鮮政府))에의뢰하야사가든약품은실로막대한것이엿스나전부그매도의길이 막히게된 여러가지조건밋헤매매가 축소하여 전성시대의반도못되게 되얏다 그나마최근에는전주(전주(全州))대전(대전(大田))진주(진주(晋州))원산(원산(元山))등지에군소시장이개설되여이를약령시로밀미암아대구에떠러지는돈은매우감소되엿스나아직도령시가개설되면동성정입구(동성정입구(東城町入口))로부터남성정입구(남성정입구(南城町入口))까지 십여정(십여정(十餘町))에 처당재(당재(唐材))초재(초재(草材))등삼백여종의 약품도만흐려니와 그근처에림시려인숙(임시여인숙(臨時旅人宿))이무수히설치되고 포백기타 일용생활에필요한물품이면 평상시의 멧배나더잘팔리는 호경긔를 연설한다 그리하야 촌양빈들의낫서른돈을 먹어보겟다는 술집색시들까지 헐직한인조견으로 봄을싸고 도스리고안저서 열분애교를 술잔에담어보내는것도『넌센스』한징면인지는모르겟다마는 흡객술(흡객술(吸客術))이 졸열한다기보니 시대에뒤처진 기생들은본바닥에 거주하는손님들은『카페—』붉은녀급(여급(女給))들의자주(자(紫))빗유혹에다 뛰우고 음력과세를압서초조하는중 때맛침사재(시재(時哉))시재를불러 시내 각요리집 극장할것업시 대만원의성황을 이루는것은 그럴듯도한일이지마는 여긔에는 순진한산간에서 새노래물소리에 거치른세상일은 □도꾸지못한 산아이와도갓치 힘드려작만한 약재를도시구경겹 하여와와서판돈은『메리·픽포—드』안일망정어엽분녀자를맛나 잇는대로 다쓴후에명년의약령시 개설되기를 손을꼬바기다려서 와서보면 그녀자는어느하늘밋헤서 잇든남자와 단꿈을꾸는지 알길조차 바이업고작년구든맹서가 찬□(회(灰))처럼살어잘때화낌에 한잔무어라 먹자부어라 먹자하는연긔가튼 경긔는 견양경긔(견양경기(犬養景氣))이상으로 흥성거린나 그러기에여긔에최근오개년간의매매고외출동인원수와□적어본다&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와경기(景氣)&lt;br /&gt;
&lt;br /&gt;
(삼(三))&lt;br /&gt;
&lt;br /&gt;
대구지국(大邱支局) 육(肉) 사(瀉) 생(生)&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의현재(現在)&lt;br /&gt;
&lt;br /&gt;
약령시의 밋치는바 경제관계는실로 다방면으로 황금왕시대를연줄하며 발달하여오는만큼 녯날에는 조선안에서 생산하는재료가 매매되는이외에 당재(당재(唐材))라고하야 증국으로부터금석지재(금석지재(金石之材))가만히수입되는외에는 벌로볼만한것이 업섯스나 교통의발날노 국제무역이빈번하야지게된 오날에는일본,중국,몽고등시는말할것도 업거니와동부『아푸리카』의찌는둣한열대지방에서 생산되는 소철(소철(蘇鐵))을비롯하야 황막한시베리아의천지를 내집가티 도라다니는웅담(웅담(熊膽))까지모혀들게되는것은이약정□를통해본□류문와사의 한로막이라고도 할수잇는것이다 이러케 약령시에모혀드는약재료가 교통의 혜택을임어거의 파멸에 갑가운약령시가새로히왕성하게되자 지금이야말로 시장의 량입구에 마천두(마천루(摩天樓))가튼『리—딍』(유도탑(誘導塔))을세우고『일미네—숀』(대전식(大電飾))사이에 흥긔청긔가나붓기며 지방으로부터 모혀드는 생산자들을끄려드리는것은 확실히 일반상업전술의발달을의미한다 그러나 원래이시장는 약을재료그대로가지고와서 매매케 되는것이 특질의엿스나 지금은천일령신환,조고약과어을빈만병수까지 시장목판에서 인긔를집중하고잇는것은 아모리보아도 조뵈 화지관는 사실이다 이가튼변천가운데도 특긔하야들것은 령시의개설의래 장구한년월을 지남에따라 그본래의 성질에배반하야 부업적상인게놉을 령시의주요구성 요소로하게되고 부터는 경상도내지방에밋치는 양령시의영향은 일반 소비경제상에크다란 파문을그리게되여 약텽시본래목적인 약새생산에 효과가적게되고 시장내의 불당중개인으로말미암아 일사 평판이조치못하엿슴으로 이러한 페풍을 일소하기위하야 지금부터이십여년선에 생긴 한약상조합한약상조합(漢藥商組合))과칠년전전주(전주(全州))에양령시가처음뇌려고할때에 대함키위하야생긴약령&lt;br /&gt;
&lt;br /&gt;
흉회(약령시진흥회(藥令市振興會))가지금은약령시번영회(약령시번영회(藥令市繁榮會))로변경되여 최선의로력을 다하야오며 감독한결과 지금은어느정도까지 통제가되여간다고한다 그리하야 지금이야말로동력(동력(動力)의위력밋해거대한공장뉼이날로늘어남조선의『메드로포리쓰』를만드려는 대구현네과학(현대과학(現代科學))의태반(태반(胎盤))가튼대구의한복판에서 조선의 자랑이라고도할수잇는원시시장(원시시장(原始市塲))의한개가 벌서오늘날의 □제권내에발을듸듸고장차을래일의세계를향하야나가는것은홍미김흔일이다(속(續))&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의유래(由來)&lt;br /&gt;
&lt;br /&gt;
(사(四))&lt;br /&gt;
&lt;br /&gt;
대구지국육사생(大邱支局肉瀉生)&lt;br /&gt;
&lt;br /&gt;
삼백년동안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복잡다단한 필연적 과정을경과하여오며 자본주의 경제의현계단에서의연히그존재가필요하게된대구약령시의발달사는완연히금일경제의발달사(발달사(發達史))라고보지안을수업다 그럼으로여긔특긔할것은 그성실상 순박함이짝이업는 죽말하면 매매하는시람들의아관박대(아관박대(雅冠博帶))라든지 생산품 포장가튼것까지도(물론변천된것도만흐나)삼백년전의 녯날을 그려볼만한순박한이서장에도현대금융자본의붉은혀(설(舌))는내밀기시작하엿다지금부터 시년전엇던 외래지본벌이자긔소유의따에시장의위치를옴기려고 현위치는 도시교통상불편하다는구실로써다방면으로술책을써보앗스나현장소에서긔십년간상권을 잡고잇는 대가들의명렬한반대로그만뜻을일우지못한일도잇다그러면내구약령시를 지배하고 따라전조선의한약상계에우이를삽고잇는 이는누구일가여긔는 누구보다도 김홍조(김홍조(金弘祖))씨를아침수가업다씨는 전선적으로보아 제이위가기를설허할만하다고하며그다음순서업시치면 신태문(신태문(申泰文))김종수(김종수(金宗洙))지이원(심의원(沈義元))리치욱(이치욱(李致旭))두병은(두병은(杜炳殷))김내명(김내명(金乃明))방규진(방규진(方圭鎭))제씨를칠수잇고 그중에도 두병은(두병은(杜炳殷))씨가튼이는여러대를나려오며 사업에 종사하야 그문패는 실로일백오십년 이란력사를가저 대구의 동인당(동인당(同人堂))이란 일홈이잇다&lt;br /&gt;
&lt;br /&gt;
북평(北平)의동인당(同仁堂)은팔백년(八百年)의역사(歷史)가잇슴)그래서 대구의약텽시인긔는 이들의손에 좌우된다하여도과언이아니며 금년의약가는 금재금(김재금(金再禁))에따르는 제불가의폭등과 일중사변(일중사변(日中事變))의영향과중국은가(중국은가(中國銀價))의변동으로인하야소위당재(당재(唐材))는 폭동하엿고 조재(초재(草材))에잇서서 도변조로올은것이 불소하다는바 금후에드 더욱시세는오를무양이라고한다 여긔에당초재를물론하고 시세를 적어보앗스면좃켓스나 약명이한업시만코 날로변동이만흠으로 약렁시세표가 잇다는것만말한후에 특수한고저를보이는 몃가지를 적어보면 당재의원상산약(원상산약(元常山藥))은작년에는 매근에일원륙십전하든것이 금년은 단오십전에폭락되여 이십년레에 처음보는헐가라하며 산수유(산수유(山茱萸))는작년에 매근사십전하든것이 금년은십전에폭락되고 토사자(토사자(兎絲子))가튼것도 작년사오십전에매매되든것이 금년은십전에 폭락되여 자방생산자의 저울(형(衡))에 예긔치못한 광란(광란(狂亂))을보이고잇다고한다&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의장래(將來)&lt;br /&gt;
&lt;br /&gt;
그러면 다음날의약텅시는 엇더케될것인가?이문제는 결코예언자의 심심푸리와가튼 헛된소리는아니다적어도현세계의경제관계 와그에따라 일어나는모든사정이 쇄신된다면 모르지마는현계단의 경제제도가 그량존속되는한에는 세계적으로 한약에대한연구가왕성하여지고한약의권위가나날이놉하가는만큼약텅시의장래는압흐도세계에그일홈이놉하진다고일부인사들이말하고잇는것이그다지허언이아닐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지금은시장의형세가 산만하게생산자가 중개인울거처 도매상에게 팔게되여중간에책취를 당하게된다 하여도 장래는 현시장의대자벌들이주식(주식(株式))이나 혹은학자(합자(合資))의형식으로시장을상설하고도매와 개인생산자사이에 직접취인하게되여 지방경제의 윤택과약초생산의 장려의 약텅시본래의목적을 소개하려는것이 당업자간의 의도(의도(意圖))인 동시에매우현명한 의견인듯하다 그래서참된 대구자랑을 만들고조선의자랑을만들자——(완(完))&lt;br /&gt;
&lt;br /&gt;
==주요 내용 요약==&lt;br /&gt;
유래: 대구의 자랑으로 능금(사과) 대신 약령시를 들며 그 유래를 설명한다. 약령시는 1년에 한두 번 열리는 정기 시장이며, 조선시대 효종(1658년) 때 국가 명령(令)으로 개시된 것이다. 당시 경상도의 정치적 수부였던 대구는 약초 재배에 적합한 기후와 편리한 교통으로 물산 집산의 최적지였다. 궁중에서 쓸 약품을 이곳에서 구하기 위해 감사가 약재를 골라 사약원(司藥院)에 진상한 후, 팔도 약재를 일반 약국에서 구매하여 조선 전역의 환자 치료에 사용하게 한 것이 시초이다.&lt;br /&gt;
&lt;br /&gt;
쇠퇴와 현황: 서구 열강의 동양 침입과 함께 의학 및 약학이 발달하며 한약의 권위가 약해졌고, 약령시는 점차 쇠퇴하였다. 특히 22년 전(1915년경) 신해혁명으로 청황실이 무너지면서 조선 정부에 의뢰하던 막대한 약품 매도 길이 막힌 것이 큰 타격이었다. 최근 전주, 대전 등지에 군소 시장이 개설되어 대구 약령시의 경제적 이익이 감소했지만, 여전히 시장 개설 시에는 많은 약재가 모이고(당재, 초재 등 300여 종), 인근 상권에 호경기를 가져오는 것이다. 당시 약령시의 주요 구성 요소가 부업적 상인 계층으로 변질되고 불량 중개인 문제가 발생하자, 한약상조합과 약령시진흥회(현재 약령시번영회)가 결성되어 통제를 시도하고 있었다.&lt;br /&gt;
&lt;br /&gt;
약재 가격 변동: 당시(1937년) 일중사변(日中事變)의 영향과 중국 은가 변동으로 당재(唐材) 가격이 폭등했지만, 일부 국내 초재(草材)인 산약(山藥), 산수유(山茱萸), 토사자(兎絲子) 등은 폭락하여 생산자들에게 광란(狂亂)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lt;br /&gt;
&lt;br /&gt;
==분석 및 특징==&lt;br /&gt;
역사성 강조: 대구 약령시를 단순한 시장이 아닌 '국가 명령(令)'으로 시작된 역사적 시장으로 규정하며, 정치적, 지리적 배경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시대적 배경 반영: 서양 의학의 도입, 중국 혁명(청 황실 붕퇴), 당시 국제 정세(일중사변, 중국 은가) 등이 시장의 흥망성쇠에 미친 영향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여 식민지 시대의 경제 상황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시장 변화: 전통적인 약재 거래 방식에서 완제품 거래가 늘어나는 등 근대화에 따른 시장의 변화 양상도 포착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원시 시장'의 현대적 생존: 대구 약령시를 '조선의 자랑'이자 '원시 시장' 중 하나로 보면서도, 현대 자본주의 경제권에 발을 디디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평가하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대구(大邱)장연구회(硏究會) 창립(創立)을보고서=&lt;br /&gt;
구지국(大邱支局)&lt;br /&gt;
&lt;br /&gt;
이활(李活)&lt;br /&gt;
&lt;br /&gt;
민중(民衆)의보건운동(保建運動)은 요사이각계인사(各界人士)들의 크다른관심(關心)거리로어듸서 엇더케 무슨방법(方法)으로『억세인조선(朝鮮)』을건설(建設) 할수잇슬가 함에연구(硏究)를거듭하게되엿다회상(回想)하면 조선(朝鮮)에새로운운동경기(運動競技)가 수입(輸入)된지도 일반문화(一般文化)와갓치 벌서 반세기(半世紀)란역사(歷史)를가지고잇다 그중(中)에는 야구(野球)·정구(庭球)·축구(蹴球)·농구등(籠球等)을비롯하야 유도(柔道)·격검(擊劒)·권투등(拳鬪等)모든경기(競技)가들어와서 장족(長足)의진보(進步)도하엿스러니와 세계적무대(世界的舞臺)를향(向)하야 진출(進出)한선수(選手)도업지안타 그러나 그것은극소수(極小數)인동시(同時)에 지금(至今)까지의 조선(朝鮮)의운동경기(運動競技)는 한갓도회(都會)를중심(中心)으로잘어왓다 물론(勿論)다그럿타는것은아니지만은 현하운경기(現下運競技)그것은 조선(朝鮮)이나 혹(或)은다른나라에서라도 학교(學校)를중심(中心)으로발전(發展)되여오는만큼 교내(校內)의『스포—스맨』들은 완연(宛然)『떼파—트』진열장(陳列場)속에서 고객(顧客)을호리는『마네킹』처럼 상품화(商品化)한교육제도하(敎育制度下)에서 달큼하게 그상품(商品)의가격(價格)을놉혀주엇스며 그학교(學校)를버저나와 실사회(實社會)에취직(就職)을하면 역시(亦是)그와갓튼『마네킹』노릇을하여왓다 이러는동안 조선(朝鮮)의운동경기(運動競技)는 그발생(發生)으맹아(萌芽)가 힘것생장(生長)하기도전(前)에현제도(現制度)의 독아(毒牙)에여지(餘地)업는약관(躍關)을당(當)한절대(絕對)의원인(原因)과 그밧게사회(社會) 경제(經濟) 정치적제정세(政治的諸情勢)의착잡(錯雜)한모순(矛盾)이 너무나철업시이운동경기(運動競技)의발달(發達)까지 조해(阻害)하여왓다그러나 노력(勞力)과인내(忍耐)는갑이잇서이때까지외래품(外來品)이라면 아무비판(批判)도업시 실행(實行)하야오든우리도야구(野球)의전원(全員)이일시(一時)에활약(活躍)할수업는폐(廢)와정구(庭球)의시후(時候)에대(對)한불편(不便)과『꼴프』의귀족적(貴族的)인것등(等) 모든운동(運動)의단점(短點)만을빼고 장점(長點)만을취(取)하야 조선적운동(朝鮮的運動)을창출(創出)하려는이이 경성(京城)서는중앙체육연구소(中央體育研究所)가생(生)기고 금반대구(今般大邱)에서『장』연구회(硏究會)가생(生)기게된것이다&lt;br /&gt;
&lt;br /&gt;
장이란북조선(北朝鮮)의궁벽(窮僻)한지대(地帶)의인사(人士)들은 잘알지못할는지모르나이장만은 오래동안 우리조선(朝鮮)으로부터 그들의자손(子孫)인우리들에게부(傅)하아은 국기(國技)의하나이다물론(勿論) 국기(國技)란단순(單純)한의미(意味)로서만필자(筆者)가그것을추장(推獎)하는것은인니다 딸아서 운동(運動)의영향(影響)이문화창조(文化創造)에잇더한역할(役割)을한다는것을새로히논(論)하려는것도안니다&lt;br /&gt;
&lt;br /&gt;
대구지국(大邱支局) 이(李) 활(活)&lt;br /&gt;
&lt;br /&gt;
그러나일반문화(一般文化)가 그지리(地理)와풍토(風土)에영향(影響)되는바만흔것과가티운동경기(運動競技)도 또한그러히다 그것은『필랜드』사람들이『스켓틩』을잘하는것과『낙위(諾威)』사람의『스키-』를잘하는것이라든지『정말(丁抹)』사람의체조(體操)기튼것이 이점(點)을잘실증(實證)하고잇다 그러면조선(朝鮮)에는 조선적(朝鮮的)인자연세력(自然勢力)도 그러하러니와 더욱이 금일(今日)의사회적경제적(社會的經濟的)모든조건(條件)이 조선인(朝鮮人)에적합(適合)한것이안니면 안될것으다 그래서 최소(最少)의노력(努力)으로최대(最大)의 효과(効果)를발현(發現)치안으면안될것이다&lt;br /&gt;
&lt;br /&gt;
아에우리는생각한다 오날날까지조선(朝鮮)에수입(輸入)된운동경기(運動竸技)의종목(種目)은그대(臺)를매거(枚擧)키난(難)하나 그중(中)한가지도 우리에게 적합(適合)한것이업고 더욱이농민(農民)들에게 추장(推獎)할만힌운동(運動)은업섯다 그러나이장만은 오날날까지 그들농민(農民)의손에서전(傳)해왓다 그러면서도그진정가치(眞正價値)를돌낫든것이 오날이야 사계(斯界)의권위제씨(權威諸氏)가 적년연구(積年硏究)를거듭하야 발표(發表)한결과(結果)를보면 운동(運動)으로시 제일망각(第一忘却)치못할생리학상(生理學上)으로보아 전체(全體)가균형적(均衡的)으로활동(活動)되고 경제적(經濟的)으로도 기구(器具)를작만히는데 돈이들지안코 어느곳에서든지『장채』를직만하고『장방울』을다드무면논바닥에서나 밧기운데서라도 할수잇는농민본위(農民本位)의운동(運動)이라고한다 그리고다른운동경기(運動競技)가티『씨—슨』이잇는것도안니고 춘하추동(春夏秋冬)어느때라도 되는경기(競技)인즉 농번기(農繁期)는 못히드라도 농한기(農閑期)갓트면 그들의육체(肉體)를 하련(鍜鍊)하는데 매우적당(適當)한것이다 수(數)만흔경기중(竸技中)에능(能)히경제조건(經濟條件)이 어느정도(程度)까지용인(容認)한다하여도 그들의게생전(生前)듯자못하든말로『핸드뽈』이니『꼴』이니『라인』이니하여보아도 결(决)크그들에게취미(趣味)가잇슬이(理)가만무(萬無)하고취미(趣味)가업스면 그들에게발전(發展)될이(理)도만무(萬無)한것이다 그러나『장』연구회동인(硏究會同人)들의말을들으면경기(竸技)에계산(計算)하는용어(用語)까지도순조선(純朝鮮)말로한다는것의경하(慶賀)할일이다 이『장치기』를국기(國技)로서추장(推獎)하야세계(世界)에널니선전(宣傳)하는것도좃치만은먼저안으로그들이이국기(國技)를직혀왓는만큼 그들에게조직적(組織的)으로보급(普及)하라 그리서조선농민(朝鮮農民)의경기(競技)를만들고 따라 세계(世界)의농민대중(農民大衆)에게 보급(普及)식하라!그래서『장』연구회(硏究會)의본래(本來)의사명(使命)을다하기를바란다(종(終))&lt;br /&gt;
&lt;br /&gt;
==주요 내용 요약==&lt;br /&gt;
배경: 조선에 수입된 야구, 축구, 유도 등 서양식 운동 경기는 학교 중심, 도시 중심으로 발전하며 '상품화'되었고, 농민 등 대중에게 적합하지 않은 것이다.&lt;br /&gt;
&lt;br /&gt;
'장치기'의 가치: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 **'조선적 운동'**을 창출하려는 노력으로 경성에서는 중앙체육연구소가, 대구에서는 '장' 연구회가 생긴 것이다. '장'은 조선의 국기(國技) 중 하나로, 농민의 손에서 전해 내려온 것이다. 생리학적으로 전신 균형 활동이 가능하고, 경제적으로 기구가 필요 없어 비용이 들지 않으며, 논바닥이나 밭에서도 가능하여 농민 본위의 운동이라고 한다. 계절을 타지 않고 농한기에 육체 단련에 매우 적합하며, 경기 용어까지 순 조선말을 사용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연구회의 사명: 연구회 동인들에게 '장치기'를 국기로 추장(추천)하여 세계에 선전하는 것도 좋지만, 먼저 이 국기를 지켜온 농민들에게 조직적으로 보급하여 '조선 농민의 경기'를 만들고 나아가 세계 농민 대중에게 보급해야 한다는 사명을 부여하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분석 및 특징==&lt;br /&gt;
민족주의적 시각: 서구 문물인 스포츠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한국의 전통 운동인 '장치기'의 토착적, 민족적 가치를 재조명하려는 의도가 뚜렷한 것이다.&lt;br /&gt;
&lt;br /&gt;
대중성/실용성 강조: '장치기'의 장점을 경제적 부담 없음, 장소 제약 없음, 계절 제약 없음, 쉬운 용어 등 농민 대중에게 적합한 실용성에 초점을 맞춰 설명하고 있다.&lt;br /&gt;
&lt;br /&gt;
'마네킹' 비유: 현대 교육 제도가 배출하는 스포츠맨을 '떼파-트 진열장의 마네킹'에 비유하며, 당시 상업화된 교육 및 스포츠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드러내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노신추도문(魯迅追悼文)=&lt;br /&gt;
(일(一))&lt;br /&gt;
&lt;br /&gt;
이(李) 육(陸) 사(史)&lt;br /&gt;
&lt;br /&gt;
『아(阿)Q정전(正傳)』의 작자(作者)로서 세계적작가(世界的作家)이며 중국신문학(中國新文學)의 최고봉(最高峰)인 노신(魯迅)이지난십구일(十九日) 오전오시(午前五時)에상해(上海)에서 숙아(宿疴)로 영면(永眠)하엿다는 실음(實音)이전(傳)한지 삼일(三日)되는날에 우리는 간단(簡單)한일문(一文)을 비러 삼가추도(追悼)의뜻을 표(表)하거니와 만년(晩年)에그의 정치적불우(政治的不遇)로인(因)하야 문학자(文學者)로서의 성명(聲名)조차가 우리에게 널니퍼지지못한것을 더유감(遺憾)으로생각한다.　　　　 (일(一) 기(記) 자(者))&lt;br /&gt;
&lt;br /&gt;
일구삼이연육월초(一九三二年六月初) 어느토요일(土曜日)아츰이엿다 식관(食舘)에서나온 나와M은 네거리의 담배가가에서조간신문(朝刊新聞)을 사서들고 근육신경(筋肉神經)이떨니도록 굴근활자(活字)를 함숨에나려읽은것은 당시중국과학원부주석(當時中國科學院副主席)이요 민국혁명(民國革命)의 원로(元老)이든양행불(楊杏佛)이 남의사원(藍衣社員)에게 암살(暗殺)을당(當)하엿다는 기사(記事)이엿다.&lt;br /&gt;
&lt;br /&gt;
우리들은 거리마다 삼엄(森嚴)하게늘어선 불란서공무국(佛蘭西工務局) 순경(巡警)들의예리(銳利)한눈초리를 등으로하나 갓득늣기면서 여반로(侶伴路)의 서국(書局)까지을동안은 침묵(沈默)이 계속(繼續)되엿다&lt;br /&gt;
&lt;br /&gt;
문(門)안에 들어서자마자 편집원(編輯員)R씨(氏)는 우리들에게 다음과가튼말을 들여주엇다.&lt;br /&gt;
&lt;br /&gt;
중국좌익작가연맹(中國左翼作家聯盟)의 발안(發案)에의(依)하야 전세계(全世界)의 진보적(進步的)인 학자(學者)와 작가(作家)들이 상해(上海)에모혀서중국(中國)의 문화(文化)를 옹호(擁護)할대회(大會)를그해팔월(八月)에 갓게 된다는것과이에 불안(不安)을 늣기는 국민당통치자(國民黨統治者)들이 먼저 진보적작가진영(進步的作家陣營)의 중요분자(重要分子)인 반재년(潘梓年)(현재남경유폐(現在南京幽廢))과 인제는 고인(故人)이된 여류작가(女流作家) 정영(丁玲)을 체포(逮捕)하여행방(行方)을 불명(不明)케한것이며 여기동정(同情)을 가지는 송경령여사(宋慶齡女史)를 중심(中心)으로한 일련(一聯)의 자유주의자(自由主義者)들과 작가연맹(作家聯盟)이 맹렬(猛烈)한 구명운동(救命運動)을한사실(事實)이며 그것이 국민당통치자(國民黨統治者)들의 눈쌀에 거슬려서 양행불(楊杏彿)이 희생(犧牲) 된것과 그외(外)에도 송경령(宋慶齡) 채원(蔡元) 배(培) 노신등등(魯迅等等) 상해(上海)안에서만삼(三) 십명(十名)에갓가운 지명지사(知名之士)들이 남(藍) 의사(衣社)의『뿔랙·리스트』에 올라잇 다는것이엿다.&lt;br /&gt;
&lt;br /&gt;
그리고 그뒤삼일(三日)이 지난후(後)R씨(氏)와 내가탄자동차(自動車)는 만국빈의사(萬國殯儀社)아페다엇다,간단(簡單)한 소향(燒香)의예(禮)가 끗나고도라설때 젊은두여자(女子)의수원(隨員)과함게드러오는송경령여사(宋慶齡女史)의일행(一行)과가티 연회색(軟灰色)두루막에 검은『마괘아(馬掛兒)』을 입은중년(中年)늙은이생화(生化)에 싸인관(棺)을 붓들고 통곡(痛哭)을하든그를 나는문득 노신(魯迅)인것을알엇스며 엽헤섯든 R씨(氏)도 그가노신(魯迅)이란것을 말하고난 십분(十分)쯤뒤에 R씨(氏)는나를 노신(魯迅)에게소개(紹介)하여주엇다&lt;br /&gt;
&lt;br /&gt;
그때노신(魯迅)은 R씨(氏)로부터 내가조선청년(朝鮮靑年)이란것과 늘한번대면(對面)의기회(機會)를가지려고 햇드란말을듯고외국(外國)의선배(先輩)압히며 처소(處所)가 처소(處所)인만치 다만 근신(謹愼)과공손(恭遜)할뿐인나의손을 다시한번 잡아줄때는그는매우 익숙하고 친절(親切)한친구이엿다&lt;br /&gt;
&lt;br /&gt;
아!그가벌서 오십육세(五十六歲)를일기(一期)로 상해시고탑구호(上海施高塔九號)에서 영서(永逝)하엿다는 부보(訃報)를바들때에 암연(暗然)한줄기 눈물을지우느니 엇지조선(朝鮮)의 한사람후배(後輩)로써 이붓을잡는나뿐이랴&lt;br /&gt;
&lt;br /&gt;
(이(二))&lt;br /&gt;
&lt;br /&gt;
이육사(李陸史)&lt;br /&gt;
&lt;br /&gt;
중국문학사상(中國文學史上)에남긴 그의 위치(位置)『아(阿)Q의 정전(正傳)을 다읽고낫슬때나는 아즉까지 아(阿)Q의 운명(運命)이걱정되여 못견듸겟다』고한『로망·로—랑』의 말과가티 현대중국문학(現代中國文學)의 아버지인 노신(魯迅)을&lt;br /&gt;
&lt;br /&gt;
이해(理解)하기 위(爲)해서는 우리는 먼저 아(阿)Q의 정전(正傳)을 이해(理解)하지안흐면 안된다 그러나 지금의 중국(中國)의 아(阿)Q들은 벌서『로망·로—라』으로하야금 그운명(運命)을 걱정할 필요(必要)는 업시되엿다실(實)로 수만흔 아(阿)Q들은 벌서 자신(自身)들의 운명(運命)을 열어갈길을노신(魯迅)에게서배웟다 그래서중국(中國)의 모든근로층(勤勞層)들은 남경로(南京路)의『아스필트』가자신(自身)들의 발미테 흔들리는것을늣기며 시고탑로신촌(施高塔路新邨)의구호(九號)로그들이가젓든 위대(偉大)한문호(文豪)의최후(最後)를애도(哀悼)하는마음들은 황포탄(黃浦灘)의붉은파도(波濤)와가티 밀려가고잇는것이다&lt;br /&gt;
&lt;br /&gt;
그럼으로 아(阿)Q시대(時代)를 고찰(考察)하여보는데따라서 노신정신(魯迅精神)의 삼단적변천(三段的變遷)과아울러 현대중국문학(現代中國文學)의 발전과정(發展過程)을 알어보는것도그를추억(追憶)하는의미(意味)에서 그다지 허무(虛無)한 일은아닐것이다,&lt;br /&gt;
&lt;br /&gt;
중국(中國)에는 고래(古來)로 소설(小說)이라는오늘날우리가 보는것과가튼 완전(完全)한예술적형태(藝術的形態)는 존재(存在)하지못햇다 삼국연의(三國演義)나 수호지(水滸誌)가아니면홍루몽(紅樓夢)쯤이잇섯고 다소(多少)의전기(傳記)가잇섯을뿐으로서 일반교양(一般敎養)잇는집자제(子弟)들은 과거제도(科擧制度)에 화(禍)를바더문어체(文語體)의&lt;br /&gt;
&lt;br /&gt;
고(古)&lt;br /&gt;
&lt;br /&gt;
문(文)만숭상(崇尙)하고백화소설(白話小說)가튼것은속인(俗人)의할일이라햐야나치아는하편소위문단(所謂文壇)은당송팔가(唐宋八家)와팔반(八般)의혼합체(混合體)인상성파(相城派)와사기당(思綺堂)과 원수원(袁隨園)의유파(流派)를따라가는 사륙변체문(四六騈體文)과황산곡(黃山谷)을본존(本尊)으로하는 강서파등등(江西派等等)이 당시정통파(當時正統派)의문학(文學)으로서 과장(誇張)과 허위(虛偽)와 아유(阿諛)로서 고전문학(古典文學)을 모방(模倣)한데지나지못하엿스며 새로운사회(社會)를 창생(創生)할하등(何等)의 힘도가지지못한것은 미루어알기도 어렵지안흔 분위기(雰圍氣)속에 중국문학사상(中國文學史上)에 찬연(燦然)한봉화(烽火)가 일어난것은일구일오년(一九一五年) 잡지(雜誌)『신청년(新靑年)』의 창간(創刊)이그것이다&lt;br /&gt;
&lt;br /&gt;
이것이처음발간(發刊)되자 당시(當時)『아메리카』에잇든호적지박토(胡適之博土)는『문학개량추의(文學改良蒭議)』라는『문학혁명론(文學革命論)』을일구일칠년신연호(一九一七年新年號)에 게재(揭載)하야진독수(陳獨秀)가 이에찬의(賛意)를표(表)하고 북경대학(北京大學)을 중심(中心)으로한 진보적(進步的)인교수(敎授)들이 합류(合流)하게되자 종래(從來)의고문가(古文家)들은 이운동(運動)을방해(防害)코저 가진야비(野卑)한 정치적수단(政治的手段)을 써도보앗스나 일구팔년사월호(一九八年四月號)에 노신(魯迅)의『광인일기(狂人日記)』란 백화소설(白話小說)이&lt;br /&gt;
&lt;br /&gt;
발(發)&lt;br /&gt;
&lt;br /&gt;
표(表)되엿슬때는 문학혁명운동(文學革命運動)은 실천(實踐)의거대보무(巨大步武)를옴기게되고 벌서고문가(古文家)들은 그추악(醜惡)한꼬라를 감주지안흐면안되엿다는것은 그후(後)얼마뒤에 노신(魯迅)이광동(廣東)에갓슬때에어&lt;br /&gt;
&lt;br /&gt;
떤흥분(興奮)한청년(靑年)은 그를마지하는문장(文章)속에『광인일기(狂人日記)』를 처음읽엇슬때 문학(文學)이란것이 무엇인지몰랏든나는 차차읽어나려가면서이상(異常)한흥분(興奮)을 늣겻다 그래서 동무를만나기만하면 곳붓들고말하기를——중국(中國)의문학(文學)은 이제바야흐로 한시대(時代)를 짓고잇다 그대는『광인일기(狂人日記)』를 읽어보앗는가 또거리를거러가면 길가는사람이라도붓들고 내의견(意見)을발표(發表)하리라고생각한적도잇섯다……』(노신재광동(魯迅在廣東))&lt;br /&gt;
&lt;br /&gt;
이문제(問題)의소설(小說)『광인일기(狂人日記)』의내용(內容)은 한개망상광(妄想狂)의 일기체(日記體)의소설(小說)로서 이주인공(主人公)은 실(實)로대담(大膽)하게또명확(明確)하게 봉건적(封建的)인 중국구사회(中國舊社會)의 악폐(惡弊)를통매(痛罵)한다 자기(自己)의 이웃사람은 물론(勿論)말할것도업고 특(特)히자기가정(自己家庭)을 격렬(激烈)히 공격(攻擊)하는것이다 가정(家庭)—가족제도(家族制度)라는것이중국봉건사회(中國封建社會)의 사회적단위(社會的單位)로서일반(一般)에열마나한 해독(害毒)을끼처왓는가.봉건적가족제도(封建的家族制度)는 고형화(固型化)한유교류(儒敎流)의&lt;br /&gt;
&lt;br /&gt;
종(宗)&lt;br /&gt;
&lt;br /&gt;
법사회관념하(法社會觀念下)에 당연(當然)히붕괴(崩壞)돠여야할것이면서 붕괴(崩壞)되지못하고 근대적사회(近代的社會)의성장(成長)에 가장근본적(根本的)인 장애(障碍)로되여잇는 날근도덕(道德)과 인습(因襲)을 여지(餘地)업시 통매(痛罵)햇다,이에『광인일기(狂人日記)』중(中)에 한절(節)을 초(抄)하면『나 는 역사(歷史)를 뒤적거려 보앗다 역사(歷史)란건 어느시대(時代)에나 인의(仁義) 도덕(道德)이란몃줄로 치더치덕씨여 저잇섯다 나는 밤잠도안자고 딍굴딍굴러가며 생각하여보 앗스나 겨우글자와 글자사이 에서『사람을먹는다』는 몃자 가쓰여잇섯슬뿐이엿다』&lt;br /&gt;
&lt;br /&gt;
이가티추악(醜惡)한 사회면(社會面)을폭로(暴露)한다음 오는시대(時代)의건설(建設)은 젊은사람들의손에 맛걱저야한다는것을암시(暗示)하면서 이소설(小說)의일편(一篇)은『어린이를구(救)하자』는 말로서끗을막엇다.실(實)로이한말은 당시(當時)의『어린이』인 중국청년(中國靑年)들에게는 사상적(思想的)으로는『폭탄선언(暴彈宣言)』이상(以上)으로 충격(衝擊)을주엇스며이러한작품(作品)이 백화(白話)로쓰여지는데 따라 문학혁명(文學革命)이완전(完全)히승리(勝利)의 개가(凱歌)를 부르게된공적(功績)도 태반(太半)은노신(魯迅)에 돌려야하는것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삼(三))&lt;br /&gt;
&lt;br /&gt;
이육사(李陸史)&lt;br /&gt;
&lt;br /&gt;
『광인일기(狂人日氣)』의다음 연속(連續)해나온작품(作品)으로『공을사(孔乙巳)』『약(藥)』『명일(明日)』『일개소사건(一個小事件)』『두발적고사(頭髮的故事)』『풍파(風波)』『고향(故鄕)』등(等)은모다 신청년(新靑年)을통(通)해서세상(世上)에물의(物議)를 이르켯스나 그후일구이일년(後一九二一年) 북경신보문학부간(北京新報文學副刊)에그유명(有名)한『아(阿)Q정전(正傳)』이 연재(連載)되면서부터는 노신(魯迅)은자타(自他)가공인(共認)하는 문단제일인적작가(文壇第一人的作家)엿다.&lt;br /&gt;
&lt;br /&gt;
그리고 이러한대작(大作)은 모다신해혁명전후(辛亥革命前後)의&lt;br /&gt;
&lt;br /&gt;
봉(封)&lt;br /&gt;
&lt;br /&gt;
건사회(建社會)의생활(生活)을 그린것으로 어떠케필연적(必然的)으로 붕괴(崩壞)하지안흐면안될 특징(特徵)을가젓는가를묘사(描寫)하고 어떠케새로운사회(社會)를 살어갈가를 암시(暗示)하고잇다.뿐만아니라 당시(當時)의혁명(革命)과 혁명적(革命的)인사조(思潮)가 민중(民衆)의심리(心理)에 생활(生活)의『데테일슨』에 어떠케표현(表現)되는가를 가장『레알』하게묘사(描寫)한것이다.더구나 그는 농민작가(農民作家)라고할만치 농민생활(農民生活)을그리는데 교묘(巧妙)하다는것도 한가지조건(條件)이되겟지만은 그의소설(小說)에는주장(主張)이개념(槪念)에 흐른다거나 조금도무리(無理)가업는것은 그의작가적수완(作家的手腕)이 탁월(卓越)하다는것을 말하지안홀수업다.&lt;br /&gt;
&lt;br /&gt;
그리고 그의작품(作品)은 늘 농민(農民)을주인공(主人公)으로하는것과 때로는『인테리』일지라도 예(例)를들면『공을사(孔乙巳)』의 공을사(孔乙巳)나『아(阿)Q정전(正傳)』의아(阿)Q가모다 일맥(一脈)이상통(相通)하는 성격(性格)을가지는것이니 공을사(孔乙巳)는 구시대(舊時代)의지식인(知識人)으로 시대(時代)에떠러저서 무슨일에도 쓰여지지못하고기품(氣品)만은노펏스나 생활력(生活力)은업고걸인(乞人)이되야 선술집술상대(臺)에 일금십구조(一金十九吊)의주채(酒債)가 어느때까지쓰여저잇는대로 언제인지&lt;br /&gt;
&lt;br /&gt;
행(行)&lt;br /&gt;
&lt;br /&gt;
방(方)이 불명(不明)된채로 나중에죽어젓든것이라든지『룸펜』농민(農民)인 일용노동자아(日傭勞働者阿)Q가 또한 쑥스러운년석으로혁명혁명(革命革命)떠들어놋코는 그것이몹시유쾌해서 반취(半醉)한기분(氣分)이 폭동대(暴動隊)의일군(一群)에 참가(參加)는하려고하엿스나 결국(結局)헛풍만치고 아무것도못하다다가 때마츰 일어난 폭도(暴徒)의약탈사건(掠奪事件)에 도당(徒黨)으로오해(誤解)되여(피(彼)의평소(平素)삼가지못한 언동(言動)에의(依)하야)피살(被殺)되는 아(阿)Q의성격(性格)은 그때중국(中國)의 누구라도가 전부혹(全部或)은일부분식(一部分式)은 소유(所有)하고잇섯든것이다다시말하면 아(阿)Q나공을사(孔乙巳)가모다사고(思考)와행동(行動)이 루—즈하고 확호(確乎)한한개의 정신(精神)도업스며 우약(愚弱)하면서도 몹시건방지고 남에게한개쥐여질리면 아무런반항(反抗)도못하면서 남이자신(自身)을 연민(憐憫)하면 제도량(度量)이커서 남이못덤비는것이라고제대로도취(陶醉)하야 남을 되는대로해(害)치는 무지(無知)하고우수면서도 가엽고 괴팩스러운것을 노신(魯迅)은그『레알리스틕』한문장(文章)으로폭로(暴露)한것이 특징(特徵)이엿스니 당시(當時)『아(阿)Q정전(正傳)』이발표(發表)될때&lt;br /&gt;
&lt;br /&gt;
평(平)&lt;br /&gt;
&lt;br /&gt;
소노신(素魯迅)과 교분(交分)이좃치못한사람들은 모다자기(自己)를모—델로 고의(故意)로쓴것이라고들 떠드는자(者)가잇은것을 보아도알수가잇는것이다&lt;br /&gt;
&lt;br /&gt;
그래서당시중국(當時中國)은 시대적(時代的)으로『아(阿)Q시대(時代)』이엿스며 노신(魯迅)의『아(阿)Q정전(正傳)』이 발표(發表)될때는 비평계(批評界)를비롯하야 일반지식군(一般知識群)들은『아(阿)Q상(相)』이라거나『아(阿)Q시대(時代)』라는말을평상대화(平常對話)에사용(使用)하기를 항다반(恒茶飯)으로하게된것은 중국문학사상(中國文學史上)에남겨노흔노신(魯迅)의 위치(位置)를 짐작하기에 조흔 한개의재료(材料)이거니와그의작가(作家)로서의 태도(態度)를통(通)하야 일관(一貫)하여잇는 노신정신(魯迅精神)을 다시한번음미(吟味)해보는데 적지안흔흥미(興味)를갓게된다는것은 오늘날우리의조선문단(朝鮮文壇)에는 누구나할것업시 예술(藝術)과정치(政治)의 혼동(混同)이니 분립(分立)이니하야 문제(問題)가엇지보면 결말(决末)이난듯도하고 어찌보면 미해결(未解决)그대로 잇는듯도한 현상(現狀)인데 노신(魯迅)가티 자기신념(自己信念)이 구든사람은이예술(藝術)과정치(政治)란것을 어떠케해결(解决)하엿는가?이문제(問題)는 그의작가(作家)로서의 출발점(出發點)부터 구명(究明)해야한다.&lt;br /&gt;
&lt;br /&gt;
노신(魯迅)은&lt;br /&gt;
&lt;br /&gt;
본(本)&lt;br /&gt;
&lt;br /&gt;
내의사(來醫師)가 되려고하엿다 그것은자기(自己)의『할일』이 무엇이라는것을 알엇기때문이엇다 물론(勿論)그때의 자기(自己)의『할일』이란것은 민족개량(民族改良)이라는 신념(信念)이엿든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후년(後年)『납함(吶喊)』서문(序文)에 다음가티써다.&lt;br /&gt;
&lt;br /&gt;
『나의학적(學籍)은 일본(日本)어느 지방(地方)의 의학전문학교(醫學專門學校)에 두엇다 나의 꿈은 이것으로 매우 아름답 고 만족(滿足)햇다 졸업(卒業)만하고 고(故) 국(國)에 도라오면 아버지와가티 치료(治療)못하는 병인(病人)을살리고 전(戰) 쟁(爭)이나면 출정(出征)도하려니와 국(國) 인(人)의 유신(維新)에대(對)한 신앙(信仰)에까지 나어갈것……』이라고&lt;br /&gt;
&lt;br /&gt;
이것은물론(勿論) 소년(少年)다운노신(魯迅)의로맨틕한 인도주의적흥분(人道主義的興奮)이엿겟지만은 이꿈도결국(結局)은 깨여지고말엇다.&lt;br /&gt;
&lt;br /&gt;
——의학(醫學)은결(决)코 긴요(緊要)하지안타 우약(愚弱)한 국민(國民)은 체격(體格)이 아모 리 조타고해도 또 아모리강(强) 장(壯)해도 무의미(無意味)한 구경거리나 또는 구경군이 되는박게는아 무것도아니다—중략(中略)—그럼으로 긴요(緊要)한것은 그들을 정신적(精神的)으 로 잘개조(改造)할것은 무엇일가나 는그때당연(當然) 문예(文藝)라고생각햇다 그리고 문예운동(文藝運動)을 제창(提唱)하기 로햇다(납함서문(吶喊序文))&lt;br /&gt;
&lt;br /&gt;
이리하야 그가 당시동경(當時東京)에망명(亡命)해잇는 중국(中國)사람들의 기관지(機關紙)인『절강조(浙江潮)』『하남(河南)』등(等)에 쓰든과학사(科學史)나 진화론(進化論)의 해설(解說)을 집어치우고 문학서적(文學書籍)을 번역(飜譯)한것은희랍(希臘)의 독립운동(獨立運動)을 원조(援助)한『빠이론』과 파란(波蘭)의복수시인(復讐詩人)『아담·미케뷧치』『향가리』의 애국시인(愛國詩人)『베트피·산더—』『필립핀』의문인(文人)으로 서반아정부(西班牙政府)에 사형(死刑)바는『리샬』등(等)의 작품(作品)이엿다.&lt;br /&gt;
&lt;br /&gt;
(사(四))&lt;br /&gt;
&lt;br /&gt;
이육사(李陸史)&lt;br /&gt;
&lt;br /&gt;
그리고이것은 노신(魯迅)의 문학행정(文學行程)에잇서서 가장초기(初期)에 속(屬)하는것이지만은 이러한번역(飜譯)까지라도그의 일정(一定)한목적(目的) 즉정치적목적(即政治的目的)미테 수행(遂行)된것을 엿볼수잇는것이며 우에말한『광인일기(狂人日記)』의『어린이를구(救)하자』는말도 순결(純潔)한 청년(靑年)들에의(依)하야 새로운중국(中國)을 건설(建設)하자는 그의이상(理想)을&lt;br /&gt;
&lt;br /&gt;
단적(端的)으로 고백(告白)한것으로써 이말은당시일반청년(當時一般靑年)들에게 무거운 책임감(責任感)을깨닷게한것은물론(勿論) 이래기천년(爾來幾千年)동안의 봉건사회(封建社會)로부터 청년(靑年)을해방(解放)하랴는 슬로—간으로 널리쓰여젓고 사실(事實)그뒤의 중국청년학생(中國靑年學生)들은 모든대중적사회운동(大衆的社會運動)의최전선(最戰線)에서 활발과감(活潑果敢)한 지도(指導)와조직(組織)을하엿스며 그유명(有名)한 오사운동(五四運動)이나 오주운동(五州運動)이나 국민혁명(國民革命)까지도 늘최전선(最前線)에서서 대중(大衆)을지도(指導)한것은 이들청년학생(靑年學生)이엿다&lt;br /&gt;
&lt;br /&gt;
그럼으로 노신(魯迅)에잇서서는 예술(藝術)은정치(政治)의 노예(奴隸)가 아닐뿐아니라 적어도예술(藝術)이 정치(政治)의 선구자(先驅者)인 동시(同時)에혼동(混同)도 분립(分立)도아닌즉(即) 우수(優秀)한작품(作品) 진보적(進步的)인 작품(作品)을 산출(產出)하는데만 문호(文豪) 노신(魯迅)의지위(地位)는노퍼갓고 아(阿)Q도 여기서비로소탄생(誕生)하엿스며 일세(一世)의 비평가(批評家)를도 감(敢)히 그에게는 함부로 머리를 들지못하엿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여기에 한가지 조흔예(例)가잇다 일구이팔년경(一九二八年頃) 무한(武漢)을쪼겨와서 상해(上海)에서 태양사(太陽社)를조직(組織)한 청년비평가(青年批評家) 전행촌(錢杏村)이 때마춤 푸로문학론(文學論)이 드셀때인만큼 노신(魯迅)을 대담(大膽)하게&lt;br /&gt;
&lt;br /&gt;
공격(攻擊)을 시작(始作)해보앗다그소론(所論)에 의(依)하면노신(魯迅)의 작품(作品)은 비계급적(非階級的)이다 아(阿)Q에게어데 계급성(階級性)이잇느냐는것이다.&lt;br /&gt;
&lt;br /&gt;
물론(勿論)그것은 정당(正當)한말이다,노신(魯迅)의작품(作品)에서 우리는눈딱고보아도 푸로레타리아적특성(的特性)은 조금도 볼수가 업는것은 사실(事實)이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우리가 한사람의작품(作品)을 비평(批評)할때는 그시대적배경(時代的背景)을고려(考慮)하지안흘수는업는것이니 노신(魯迅)이작가(作家)로활동(活動)을 하고잇슬때는중국(中國)에는 오늘날우리가 정의(定義)를나릴수잇는 푸로레타리아는 업슬뿐아니라 그때쯤은 뿌르조아민주주의적(民主主義的)인 정치사조(政治思潮)조차도아즉계선(界線)이분명(分明)하지못하엿다는것은뿌르조아혁명(革命)이라는 소위국민혁명(所謂國民革命)도 정직(正直)하게말하자면 사오운동(四五運動)을 전초전(前哨戰)으로한것만큼 여기서 역시중국(亦是中國)의 비상가(批詳家)인병신(丙申)은자미잇는말을하고잇다&lt;br /&gt;
&lt;br /&gt;
『그가현재(現在) 중국좌익작가연맹(中國左翼作家聯盟)을지지(支持)하고잇다해서 그의『사오(四五)』전후(前後)의&lt;br /&gt;
&lt;br /&gt;
작품(作品)을 푸로문학(文學)이라고 지목(指目)할것은아니&lt;br /&gt;
&lt;br /&gt;
다 그러나 그를우수(優秀)한 농민작가(農民作家)라고 하는것이 타당(妥當)타고—』그러타 이말은 어느정도(程度)까지&lt;br /&gt;
&lt;br /&gt;
정당(正當)에 가까운말로서 그를푸로작가(作家)가아니고 농민작가(農民作家)라고해서작가노신(作家魯迅)의 명예(名譽)를 더럽힐조건(條件)은 되지못하는것이다 다만문제(問題)는 그가얼마나 창작(創作)에 잇서서진실(眞實)하게 명확(明確)하게 묘사(描寫)하는태도(態度)를 가지는가 그의한말을 써보기로하자&lt;br /&gt;
&lt;br /&gt;
『——현재(現在) 좌익작가(左翼作家)는 훌륭한자신(自身)들의 문학(文學)을 쓸수잇슬가?생각컨대 이것은 매우곤란(困難)하다.현재(現在)의 이런 부류(部類)의 작가(作家)들은 모다『인테리』다 그들은 현실(現實)의 진실(眞實)한 정형(情形)은쓸려고해도 용이(容易)치안타 어떤사람이 일즉 이런 문제(問題)를제출(提出)한것이잇섯다『작가(作家)가 묘사(描寫)하는것은 반드시 자기(自己)가 경험(經驗)한것이라야만될것인가?그러나 그는 스스로 답(答)하기를반드시 안그래도조타웨러러냐하면 그들은 잘 추찰(推察)할수가잇스므로 절도(窃盜)하는장면(塲面)을 묘사(描寫)하랴면 작가(作家)는 반드시 자신(自身)이 절도(窃盜)질할 필요(必要)도업고 간통(姦通)하는&lt;br /&gt;
&lt;br /&gt;
장면(塲面)을 묘사(描寫)할 필요(必要)를늣길때 작가(作家) 자신(自身)이간통(姦通)할 필요(必要)도 업다고』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작가(作家)가 구사회(舊社會)속에서 생장(生長)해서그 사회(社會)의 모든 일을 잘알고 그사회(社會)의 인간(人間)들에게 익숙해저서 잇는때문에 추찰(推察)이되는것이다 그러나 종래(從來)아무런 관계(關係)도업는새사회(社會)의 정형(情形)과인물(人物)에 대(對)해서는 작가(作家)가무능(無能)하다면 아마그릇된 묘사(描寫)를할것이다 그럼으로 푸로문학가(文學家)는 반드시 참된현실(現實)과 생명(生命)을 가티하고 혹(或)은 보다기피현실(現實)의맥박(脈搏)을 감수(感受)하지안흐면 안된다고하면서 또다시말을 계속(繼續)하는것이다.&lt;br /&gt;
&lt;br /&gt;
그러나구사회(舊社會)를 조그만치공격(攻擊)하는작품(作品)일지라도 만약(萬若)그결점(缺點)을 분명(分明)히모르고 그병근(病根)을투철(透澈)히파악(把握)치못하면 그것은유해(有害)할뿐이다 애석한일이나마현재(現在)의푸로작가(作家)들은 비평가(批評家)까지도 왕왕(往往) 그것을못한다 혹사회(或社會)를 정시(正視)해서 그진상(眞相)을 알려고도안코 그중(中)에는 상대자(相對者)라고 생각하는편의 실정(實情)도알려고하지안는다.&lt;br /&gt;
&lt;br /&gt;
(오(五))&lt;br /&gt;
&lt;br /&gt;
이육사(李陸史)&lt;br /&gt;
&lt;br /&gt;
차근(車近)한 예(例)로는 얼마전 모지상(某紙上)에 중국문학계(中國文學界)를 비평(批評)한문장(文章)을 한편(篇)보앗는데 중국문학계(中國文學界)를 삼파(三派)에 난워서 먼저창조파(創造派)를 들어 푸로파(派)라하야매우상세(詳細)하게 논급(論及)하고 다음어사사(語絲社)를 소(小)뿌르파(派)라고 조그만치 말한후(後)&lt;br /&gt;
&lt;br /&gt;
신월사(新月社)를 뿌르문학파(文學派)라 해서 겨우 붓 을 대다가만 젊은비평가(批評家)가잇 섯다 이것은 젊은기질(氣質)의 상(相) 대자(對者)라고 생각는파(派)에 대(對)해서 는 무어세(細)□□□고구(考究)할필요(必要)가 업다는뜻을 표명(表明)한것이다 물(勿) 논(論)우리는 서적(書籍)을볼때 상대자(相對者) 의것을 보는것은 동파(同派)의것을 보는안심(安心)과 유쾌(愉快)와 유익(有益)한데 밋치지 못하는것은 사실(事實)이다 그러나 만약(萬若) 일개전투자(一個戰鬪者)라면 나는 생각컨대 현실(現實)과 상대(相對) 자(者)를 이해(理解)하는 편의상(便宜上) 보담 만은 당면(當面)의 상대자(相對者)에 대(對)한 해부(解剖)를 필요(必要)로 하지안으면안 될것이다.옛것을 분명(分明)히 알 고 새로운것에 간도(看到)하고 과(過) 거(去)를 요해(了解)하야 장래(將來)를 추단(推斷) 하는데서만 우리들의 문학적(文學的) 발전(發展)은 희망(希望)이잇다 생각건대 이것만은 현재(現在)와 가튼 환경(環境) 에잇는 작가(作家)들은 부단(不斷)히 노(努) 역(力)할것이고 그래야만 참된작(作) 품(品)이 나오는것이다』라 고&lt;br /&gt;
&lt;br /&gt;
이간단(簡單)한 몃마듸만히 문호노신(文豪魯迅)의 창작(創作)에 대(對)한『모랄』인것이다 이얼마나 우리의 뼈에 사무치고도 남을만한시사(示唆)인고!이리해서&lt;br /&gt;
&lt;br /&gt;
현대중국문단(現代中國文壇)의부(父)이며비평가(批評家)의비평(批評)으로서자타(自他)가 그지위(地位)를 함께긍정(肯定)하든그의작가(作家)로서의 생애(生涯)는 너무나쩔으것이엿스니 일구이육연삼월(一九二六年三月)『이혼(離婚)』이란작품(作品)을 최후(最後)로남긴그는 교수(敎授)로서 작가(作家)로서의 화려(華麗)한 생애(生涯)는 종언(終焉)을고(告)하지 안흐면안될때가왓다 그는 지금부터『손으로쓰기보다는 발로 다라나기가 더밧벗다』&lt;br /&gt;
&lt;br /&gt;
일구이육년(一九二六年) 북양군벌(北洋軍閥)을 배경(背景)오로한 안복파(安福派)의수령(首領) 단기서(段祺瑞)의정부(政府)는 급진적(急進的)인좌파(左派)의 교수(敎授)와우수(優秀)한 지식분자오십여명(知識分子五十餘名) 체포령(逮捕令)을 나렷다 우리노신(魯迅)은 이오십명중(五十名中)의 한사람이엿다 그것은일구이사년(一九二四年) 국민당(國民黨)의 연아용공책(聯俄容共策)이 결정(决定)되야그익년(翌年)가을『뽀로된』등(等)이고문(顧問)으로광동(廣東)에오고『전국민적공동전선(全國民的共同戰線)』이엿든 국민혁명(國民革命)의제일계단(第一階段)인 광동시기(廣東時期)에는 푸로레타라아의 동맹자(同盟者)는 농민도시빈민(農民都市貧民) 소(小)뿌로지식계급(知識階級) 국민적(國民的)뿌르조아지—엿다』&lt;br /&gt;
&lt;br /&gt;
그래서 급진교수(急進敎授)들은 교육부총장(敎育部總長) 군벌정부(軍閥政府)를 육박(肉迫)하엿스며이러한&lt;br /&gt;
&lt;br /&gt;
신흥세력(新興勢力)에 낭패(狼狽)와공포(恐布)를 늣긴군벌정부(軍閥政府)는 이러한교수(敎授)들과 학생(學生)들에게체포령(逮捕令)을나리고 학생(學生)들의행렬(行列)은정부위병(政府衛兵)들의 발포(發砲)로인(因)하야 남여수백여명(男女數百餘名)의 사상자(死傷者)가낫다 그때노신(魯迅)은 북경동교민항(北京東交民巷)의 공사관구역(公使舘區域)의 외국인병원(外國人病院)이나 공장(工塲)안으로 도라단이며 찬물로기아(飢餓)를 참아가면서도 신문(新聞)과 잡지(雜誌)에 기고(寄稿)를하야 군벌정부(軍閥政府)를 맹렬(猛烈)히 공격(攻擊)하얏다 그중(中)에도『국민이래(國民以來) 최암흑일(最暗黑日)에지(誌)』하엿다는 명문(名文)은 단기서(段祺瑞)로하여금 의자(椅子)에나려안게되엿다&lt;br /&gt;
&lt;br /&gt;
——붓으로쓰헛소리는 피로쓴 사실(事實)을 만착(瞞着)하지못한다——중(中) 약(略)——붓으로쓴것이 무슨힘이 잇스랴 실탄(實彈)을쏘는것은 오즉 청년(靑年)의피다(속화개집(續華盖集))&lt;br /&gt;
&lt;br /&gt;
오늘날까지 중국문단(中國文壇)의『막심콜키—』이든그는 지금부터는문화(文化)의전사(戰士)로서『앙리·발뷰스』보다비장(悲壯)한생애(生涯)가 시작(始作)되는것이엿다&lt;br /&gt;
&lt;br /&gt;
그의말과가티&lt;br /&gt;
&lt;br /&gt;
최청흑(最晴黑)한오십일(五十日)이지나고 그는북경(北京)을탈출(脫出)햇다 하문대학(夏門大學)에 초청(招請)을바□갓으나 대학기업가(大學企業家)의 음흉수(陰凶手)것인것을 안그는광동중산대학(廣東中山大學)으로갓다 그러나 일구이육년사월십오일(一九二六年四月十五日) 장개석(蔣介石)의쿠—데타—는 광동일성(廣東一省)만 노동자농민급진지식분자삼천여명(勞働者農民急進知識分子三千餘名)을—하엿 으며 한때는『혁명(革命)의전사(戰士)』라고 간판(看板)을지인노신(魯迅)도상해(上海)로 다라나야만 되엿다여기서우리가 다시한번그에게흥미(興味)보다는 최대(最大)의 경의(敬意)를갓게되는것은 다음의일문(一文)이다&lt;br /&gt;
&lt;br /&gt;
——나의 일종망상(一種妄想)은 깨여젓 다 나는지금까지 때때로낙관(樂觀) 을가젓섯다 청년(靑年)을 압박(壓迫)하고 ——하는것은 대개노인(大槪老人)이다이 들노물(老物)들이 다죽어지면 중국(中國) 은보담더 생기(生氣)잇는것이되리라 고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 르치안은것을 알엇다 청년(靑年)을 ——하는것은 대개(大槪)는 청년(靑年)인 듯하다 또달이 재조(再造)할수업는 생명(生命)과 청춘(靑春)에 대(對)해서 한층(層) 더애낌이업시…(이기집(而己集))&lt;br /&gt;
&lt;br /&gt;
이글은그가 침묵(沈默)하고잇는것을『공포(恐怖)』때문이라고 조소(嘲笑)한 사람에게답(答)한 통신문(通信文)의 일절(一節)로서 이때까지&lt;br /&gt;
&lt;br /&gt;
진화론자(進化論者)이든 그자신(自身)의 사상적립장(思想的立塲)을양기(揚棄)하고 새로운 성장(成長)의 일단계(一段階)로보인것이라고 해석(解釋)해도 틀러지안흘것이다.&lt;br /&gt;
&lt;br /&gt;
그가상해(上海)에 왓슬때는 국민당(國民黨)의 쿠—데타—로 혁명군(革命軍)에서쪼겨온 젊은푸로문학자(文學者)가 만엇다『혁명문학론(革命文學論)』이 효효(囂囂)히 불러지고 실제정치행동(實際政治行動)의 전선(前線)을 떠난그들은 총칼대신에 펜을잡엇다,원기왕성(元氣旺盛)하게 실제공작(實際工作)의경험(經驗)에서 매우견실(堅實)한것도 잇섯스나 때로는 자부적(自負的)인 영웅주의(英雄主義)가 화(禍)를끼치고——에실패(失敗)한 분만(憤瞞)과 극좌적(極左的)인 기회주의자(機會主義者)들은노신(魯迅)을 공격(攻擊)햇다 그러나 그는푸로문학(文學)이란 어떤것인가 또는어찌해야 될것인가를 알리기위(爲)하야 아버지가튼 애무(愛撫)로서『푸레하노프』,『루나챨스키—』들의 문학론(文學論)과『싸벳트』의 문예정책(文藝政策)을번역소개(飜譯紹介)하야 중국(中國)푸로문학(文學)을건설(建設)하고잇는동안에『노신(魯迅)을타도(打倒)치안흐면 중국(中國)에푸로문학(文學)은생기지못한다』는 문학소아병자(文學小兒病者)들은 그자신(自身)들이 먼저너머지고 이제그가마자가고말엇다 이위대(偉大)한중국문학가(中國文學家)의영(靈)아페 고요히머리를숙이면서 나의개인적(個人的)으로 곤란(困難)한정형(情形)에의(依)하야 문호노신(文豪魯迅)의윤곽(輪廓)을뚜렷이그리지못함을 참괴(慚愧)히알며붓을놋키로한다 —요(了)—&lt;br /&gt;
&lt;br /&gt;
==주요 내용 요약==&lt;br /&gt;
추도 배경: 중국 신문학의 최고봉인 루쉰(魯迅)의 서거(1936년 10월 19일)를 추도하며, 작가와의 개인적 인연(1932년 양행불 암살 사건 직후 만국빈의사에서의 만남)을 회상하는 글이다.&lt;br /&gt;
&lt;br /&gt;
문학적 위치 - 아Q 정전: 루쉰 이해의 핵심으로 그의 대표작《아Q정전(阿Q正傳)을 제시하고 있다. '아Q'는 사고와 행동이 나약하고 우매하면서도 건방진, 당시 중국인의 집단적 성격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루쉰은 이 '아Q 상(相)'을 폭로하여 중국 지식 군중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루쉰은 '아Q 시대'를 종식시키고 새로운 중국을 열어갈 길을 제시한 인물로 평가된다.&lt;br /&gt;
&lt;br /&gt;
문학 혁명과 루쉰의 역할: 중국의 고루한 고문학을 비판하고 백화소설(白話小說)을 통해 문학 혁명의 선두에 선 것이다.《광인일기(狂人日記)를 통해 봉건적 가족 제도와 유교의 종법 사회 관념을 통렬히 비판하며 &amp;quot;어린이를 구하자&amp;quot;는 메시지를 던져 청년들에게 혁명적 충격을 주었다.&lt;br /&gt;
&lt;br /&gt;
예술과 정치: 루쉰은 본래 의사(醫師)가 되려 했으나, '우매한 국민은 체격이 강해도 무의미한 구경꾼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으로 정신 개조를 위한 문예 운동으로 전향하였다. 그에게 예술은 정치의 노예가 아니라, 적어도 정치의 선구자였으며, 정치적 목적 아래 수행된 것이다.&lt;br /&gt;
&lt;br /&gt;
후기 생애와 투쟁: 군벌 정부(단기서)와 국민당(장개석)의 탄압을 피해 쫓겨 다니는 비장한 '문화의 전사'로서의 삶을 살았다. 젊은 프로문학 비평가들에게 '비계급적 작가'로 공격받기도 했으나, 그는 현실과의 동떨어짐을 비판하며 진실된 현실을 기반으로 한 창작의 '모랄(도덕성)'을 강조한 것이다.&lt;br /&gt;
&lt;br /&gt;
==분석 및 특징==&lt;br /&gt;
이육사의 지식인 면모: 이육사(본명 이활, 기고명 '이육사(李陸史)')가 당대 중국의 최고 지성 및 정치 상황에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글이다. 루쉰의 문학적, 사상적 변천 과정(의학 → 문예 → 현실 참여)을 심도 있게 분석하고 있다. 루쉰 문학의 핵심 통찰: 루쉰의 작품을 단순히 서사로 보는 것이 아니라, 봉건 사회에 대한 투쟁, 계급성, 지식인의 역할 등 당대 사회 변혁의 맥락에서 분석하는 것이다. 한국 문단에 대한 시사: 글 말미에 '예술과 정치'의 관계에 대해 루쉰의 태도를 재조명하며, 당시 조선 문단에서 첨예하게 논의되던 이 문제에 대한 이육사의 입장을 간접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수필문외한(隨筆門外漢)의수첩(手帖)=&lt;br /&gt;
문(門) 외(外) 한(漢) 의 수(手) 첩(帖)&lt;br /&gt;
&lt;br /&gt;
(칠(七))&lt;br /&gt;
&lt;br /&gt;
이(李) 육(陸) 사(史)&lt;br /&gt;
&lt;br /&gt;
R이란 사람은 나와는 매우친(親)한 동무엿다 그럼으로 우리두사람 사이에는 결(决)코 무슨비밀(秘密)이란것은 잇을터수가 아니엿다 그러나 지금은 나의교우록(交友錄)속에 씨여저잇는 그의『호패(號牌)』에 붉은줄을 그은지도 벌써한달이 다되엿다.&lt;br /&gt;
&lt;br /&gt;
이러한 간단한사실(事實)이 모르는사람으로본다면 가렵지도 아프지도안흘지모르겟으나 남달리상처(相處)해오든 벗을한사람 일허버린나의흐젓한 마음은 어데도 비길수업시 서러운것이다.&lt;br /&gt;
&lt;br /&gt;
그뿐만아니라 이글을 쓰려는오늘아침에 이제는 고인(故人)인 R의동생으로부터 나에게 간단한편지한장과『문외한(門外漢)의수첩(手帖)』이란유고(遺稿)한권(卷)이 보내여왓다.&lt;br /&gt;
&lt;br /&gt;
그유고(遺稿)는 이래십년(爾來十年)에 쓴 고인(故人)의 일기(日記)인 모양인데 그도축일(逐日)해서 쓰것도 아니고 때때로마음이 내킬때마다 써둔것이며그맨끗페—지에『〇〇형(兄)에게』라는 이세상(世上)사람으로서의 절필(絶筆)인듯한 글시가 묵흔(墨痕)이임리(淋漓)한것은소리업는 내눈물을더욱짜내는것이엿다 그리고이글내용(內容)은 일기(日記)는 일기(日記)면서도 대부분(大部分)은 나에게 보내는 편지이엿다.그편지가운데서 지금이라도 흥미(興味)잇게생각나는 부분(部分)만을 써서보기로한다면 그도처음에는 문학청년(文學青年)이엿든 사실(事實)이잇섯다.그러나그는자기가 하고저한 문학(文學)을 끗끗내 완성(完成)할수잇는 행복(幸福)된사람은 아니엿다.그러나 그사람은죽든날까지도문학(文學)을 단념(斷念)하지는안헛다는것은 어느해겨울 그와나는 우연(偶然)히도 어느 온천(溫泉)에서만낫다 그때는 바로동경(東京)에서들풍자문학론(諷刺文學論)이 한참대두(擡頭)할때 이엿슴으로 그도또한 예(例)에삐지지안코 이것의 조선(朝鮮)에잇서서 가능(可能)하다는 설교(說敎)를 하는것이엿다그때좀더 생각해볼 여지(餘地)가잇다고한 나의말에 그는말하기를조선(朝鮮)사람은 생활(生活)그자체(自體)가 풍랄적(諷剌的)으로 되여잇다고 떠둘어대기에나는그에게 더진지(眞摯)한태도(態度)로 사물(事物)을 대(對)할필요(必要)가 잇다는것을말하엿고 그다음날 우리는 서로갈린체 영원(永遠)히 보지못할 사람이되엿다.&lt;br /&gt;
&lt;br /&gt;
이글은 그때나와 갈려서 몃칠동안에 쓴것이라고 생각난다 일구삼(一九三)×연(年)×월(月)×일(日)—〇형(兄)!S역(驛)에서 형(兄)과갈려서나는〇동(洞)까지 오십리(五十里)나되는 산(山)길을 걸어왓소.동리(洞里)거리에 피곤(疲困)한 다리를 쉬이면서 생각하기를 아무데나 큼직한집 초당(草堂)방을 차저드러가면 이밤을 뜻뜻한 아랫목에서 지낼수도 잇겟거니와 그들과함께 살을맛대이고지나며 그들의 생활(生活)을체득(體得)할수가 잇다면……얼마나 유쾌(愉快)한일이겟습니까?&lt;br /&gt;
&lt;br /&gt;
나는 여기서 형(兄)이일직이 하든말을 생각해보앗소 상해(上海)어데선가?목욕(沐浴)을 갓슬때 불란서(佛蘭西)사람과 서반아(西班牙)사람과 가트욕조(浴漕)에 들어갓슬때의 감정(感情)을 얘기한것을 기억(記憶)이나 하시는지요.그때는 적나라(赤裸裸)한 몸둥이들이모두꼭가튼 온도(溫度)를 느낄수잇더라고.세계(世界)는 모름직이 목간통가티 되어야 한다고.&lt;br /&gt;
&lt;br /&gt;
그러나 오늘의 나의심경(心境)은그와는 정반대(正反對)로 어데까지나 육친애(肉親愛)를 느껴볼 결심(决心)이엿소 그래서 세계(世界)는 차라리 초당(草堂)방가티되라고까지 생각해도 보앗소이러한 생각을 하노라면 또다른 한생각이 꼬리를 물고나오는동안에 나는가젓든 담배를모조리 다피워 바렷소.담배라도피우지 안흐면 첫겨우의눈우바람이몹시도 옷깃을 새여들고 발끄티저리기도해서 담빠도살겸 주막(酒幕)집잇는대로 가까이 차저갓소.그곳에는 마침담배 가개가잇고젊은농부(農夫)인듯한 사람이잇기에오전(五錢)짜리 한푼을던지고『마코』한갑을 달라고 하엿더니만 나는여기서 뜻하지못한 실패(失敗)를 하엿소 그것은 나행동(行動)이 몸차림과 어울리지안는데가 잇섯든지또는언어(言語)에 무의식적(無意識的)인 불손(不遜)이잇섯든지 그젊은 농부(農夫)는 내얼굴을 자세히 보더니만……『문(門)안에 들어와서 담배를 가저가오』……하며 코우슴을 피하며『마코』한갑을 내아프로 툭던지는것이엿소.&lt;br /&gt;
&lt;br /&gt;
나는처음 이농부(農夫)의 말을듯고한참동안 어름어름하엿소 그것은 담배가개라고하는것이 우리가 도회(都會)에서 보는담배가개와가티 백색(白色)『타일』타로 대(臺)를싸올리고『네온』등(燈)을 달고 유리창(窓)을단것이 아니고 첨하끄테다 석유(石油)궤로 목판을짜서 장수연(長壽煙),희연(囍煙),『마코』단풍(丹楓) 이런것들을몃갑식(式) 너허둔것이엿소,그래 내가들어갈 문(門)이란 어데잇겟소,&lt;br /&gt;
&lt;br /&gt;
&lt;br /&gt;
(칠(七))&lt;br /&gt;
&lt;br /&gt;
이(李) 육(陸) 사(史)&lt;br /&gt;
&lt;br /&gt;
R이란 사람은 나와는 매우친(親)한 동무엿다 그럼으로 우리두사람 사이에는 결(决)코 무슨비밀(秘密)이란것은 잇을터수가 아니엿다 그러나 지금은 나의교우록(交友錄)속에 씨여저잇는 그의『호패(號牌)』에 붉은줄을 그은지도 벌써한달이 다되엿다.&lt;br /&gt;
&lt;br /&gt;
이러한 간단한사실(事實)이 모르는사람으로본다면 가렵지도 아프지도안흘지모르겟으나 남달리상처(相處)해오든 벗을한사람 일허버린나의흐젓한 마음은 어데도 비길수업시 서러운것이다.&lt;br /&gt;
&lt;br /&gt;
그뿐만아니라 이글을 쓰려는오늘아침에 이제는 고인(故人)인 R의동생으로부터 나에게 간단한편지한장과『문외한(門外漢)의수첩(手帖)』이란유고(遺稿)한권(卷)이 보내여왓다.&lt;br /&gt;
&lt;br /&gt;
그유고(遺稿)는 이래십년(爾來十年)에 쓴 고인(故人)의 일기(日記)인 모양인데 그도축일(逐日)해서 쓰것도 아니고 때때로마음이 내킬때마다 써둔것이며그맨끗페—지에『〇〇형(兄)에게』라는 이세상(世上)사람으로서의 절필(絶筆)인듯한 글시가 묵흔(墨痕)이임리(淋漓)한것은소리업는 내눈물을더욱짜내는것이엿다 그리고이글내용(內容)은 일기(日記)는 일기(日記)면서도 대부분(大部分)은 나에게 보내는 편지이엿다.그편지가운데서 지금이라도 흥미(興味)잇게생각나는 부분(部分)만을 써서보기로한다면 그도처음에는 문학청년(文學青年)이엿든 사실(事實)이잇섯다.그러나그는자기가 하고저한 문학(文學)을 끗끗내 완성(完成)할수잇는 행복(幸福)된사람은 아니엿다.그러나 그사람은죽든날까지도문학(文學)을 단념(斷念)하지는안헛다는것은 어느해겨울 그와나는 우연(偶然)히도 어느 온천(溫泉)에서만낫다 그때는 바로동경(東京)에서들풍자문학론(諷刺文學論)이 한참대두(擡頭)할때 이엿슴으로 그도또한 예(例)에삐지지안코 이것의 조선(朝鮮)에잇서서 가능(可能)하다는 설교(說敎)를 하는것이엿다그때좀더 생각해볼 여지(餘地)가잇다고한 나의말에 그는말하기를조선(朝鮮)사람은 생활(生活)그자체(自體)가 풍랄적(諷剌的)으로 되여잇다고 떠둘어대기에나는그에게 더진지(眞摯)한태도(態度)로 사물(事物)을 대(對)할필요(必要)가 잇다는것을말하엿고 그다음날 우리는 서로갈린체 영원(永遠)히 보지못할 사람이되엿다.&lt;br /&gt;
&lt;br /&gt;
이글은 그때나와 갈려서 몃칠동안에 쓴것이라고 생각난다 일구삼(一九三)×연(年)×월(月)×일(日)—〇형(兄)!S역(驛)에서 형(兄)과갈려서나는〇동(洞)까지 오십리(五十里)나되는 산(山)길을 걸어왓소.동리(洞里)거리에 피곤(疲困)한 다리를 쉬이면서 생각하기를 아무데나 큼직한집 초당(草堂)방을 차저드러가면 이밤을 뜻뜻한 아랫목에서 지낼수도 잇겟거니와 그들과함께 살을맛대이고지나며 그들의 생활(生活)을체득(體得)할수가 잇다면……얼마나 유쾌(愉快)한일이겟습니까?&lt;br /&gt;
&lt;br /&gt;
나는 여기서 형(兄)이일직이 하든말을 생각해보앗소 상해(上海)어데선가?목욕(沐浴)을 갓슬때 불란서(佛蘭西)사람과 서반아(西班牙)사람과 가트욕조(浴漕)에 들어갓슬때의 감정(感情)을 얘기한것을 기억(記憶)이나 하시는지요.그때는 적나라(赤裸裸)한 몸둥이들이모두꼭가튼 온도(溫度)를 느낄수잇더라고.세계(世界)는 모름직이 목간통가티 되어야 한다고.&lt;br /&gt;
&lt;br /&gt;
그러나 오늘의 나의심경(心境)은그와는 정반대(正反對)로 어데까지나 육친애(肉親愛)를 느껴볼 결심(决心)이엿소 그래서 세계(世界)는 차라리 초당(草堂)방가티되라고까지 생각해도 보앗소이러한 생각을 하노라면 또다른 한생각이 꼬리를 물고나오는동안에 나는가젓든 담배를모조리 다피워 바렷소.담배라도피우지 안흐면 첫겨우의눈우바람이몹시도 옷깃을 새여들고 발끄티저리기도해서 담빠도살겸 주막(酒幕)집잇는대로 가까이 차저갓소.그곳에는 마침담배 가개가잇고젊은농부(農夫)인듯한 사람이잇기에오전(五錢)짜리 한푼을던지고『마코』한갑을 달라고 하엿더니만 나는여기서 뜻하지못한 실패(失敗)를 하엿소 그것은 나행동(行動)이 몸차림과 어울리지안는데가 잇섯든지또는언어(言語)에 무의식적(無意識的)인 불손(不遜)이잇섯든지 그젊은 농부(農夫)는 내얼굴을 자세히 보더니만……『문(門)안에 들어와서 담배를 가저가오』……하며 코우슴을 피하며『마코』한갑을 내아프로 툭던지는것이엿소.&lt;br /&gt;
&lt;br /&gt;
나는처음 이농부(農夫)의 말을듯고한참동안 어름어름하엿소 그것은 담배가개라고하는것이 우리가 도회(都會)에서 보는담배가개와가티 백색(白色)『타일』타로 대(臺)를싸올리고『네온』등(燈)을 달고 유리창(窓)을단것이 아니고 첨하끄테다 석유(石油)궤로 목판을짜서 장수연(長壽煙),희연(囍煙),『마코』단풍(丹楓) 이런것들을몃갑식(式) 너허둔것이엿소,그래 내가들어갈 문(門)이란 어데잇겟소,&lt;br /&gt;
&lt;br /&gt;
(중(中))&lt;br /&gt;
&lt;br /&gt;
이육사(李陸史)&lt;br /&gt;
&lt;br /&gt;
그날은 그곳에서 멀지안흔곳에 장날이엿나부오,장꾼들이들신들신하고 그집으로 들어오기에 나는그만 그곳을떠나 도라나오랴니까 바로내머리 뒤에서『건방진여석 눈에유리창(窓)을 부치고』……하면서 별러대는것이엿소.그때나는 모든것을 다알엇소,&lt;br /&gt;
&lt;br /&gt;
시골산촌(山村)에선 유리라는것은들창(窓)에나 부치는것인데 네눈에부친 들창을열고 다시말하면 문(門)안에 들어와서(안경(眼鏡)을벗고)담배를 가저가란 말엿소.&lt;br /&gt;
&lt;br /&gt;
내가 안경(眼鏡)을 쓰게된것은 시력(視力)이 부족(不足)한 탓이엿고 그젊은농부(農夫)가 내안경(眼鏡)쓴것을 못맛당히역이는것은 고루(固陋)한 인습(因習)의 소치(所致)라고 하드래도 그표현방법(表現方法)이얼마나 내뼈를 저리도록 쑤시는풍랄(諷剌)이엿겟소 과연(果然)여기에 남과나라는 투명(透明)한 장벽(墻壁)이 서서잇다는것을 나는안듯하엿소.&lt;br /&gt;
&lt;br /&gt;
그리고 내발길은 무겁게옴겨젓소.아주몃해를두고 어느사막(沙漠)이라도 걸어온듯한 피로(疲勞)를 깨다랏소.하늘은 점점어두어오고눈조차 함박으로 퍼붓는듯 하엿스나 나는다시 옷것을 단속지는 안헛소 될수엇스면 차디천 눈보라가 내보드러운 목덜미살을 염이듯이 얼어부트라고하여본것은 일종(一種)의 자기잔학(自己殘虐)일른지도 모르겟소.&lt;br /&gt;
&lt;br /&gt;
두시간(時間)이나 지낫을가 나는과연(果然) 어느집초당(草堂)방에 손이되엿소방안에는 초말(醋抹)냄새가 코를찌를망정 모이는사람은 대략육칠명(六七名)이나 되엿고 연령(年齡)은최저십팔(最低十八)로최고삼십이(最高三十二),인품(人品)은 모두순후(純厚)하고황소가티 질박(質朴)한놈도 잇스며암사슴가티 외로운 면석도잇섯소.그날밤은 내라는존재(存在)가 그들로보면 낫서른손이여서 일동일정(一動一靜)을 주의(注意)는 하면서도 조금도 악의(惡意)는 갓지안헛든 모양이엿소 그러기에 나더러 세상(世上)의자미잇는 얘기를 들려달라는것이오&lt;br /&gt;
&lt;br /&gt;
이때 나는 어떠한 얘기를들려줄까 하고 망서리는판에 그들중에도 연령(年齡)과 지식(知識)의 정도(程度)가잇서서 삼십(三十)에 가까운 사람들은『화용도(華容道)』를 들려달라하고그중한사람은『춘향전(春香傳)』을 얘기하라하엿소만은 여기도 또한의견(意見)은 일치(一致)되지안헛소 그중에도제일(第一)얼굴이 말숙하고 나이가이십오세(二十五歲)쯤 되여보이는 농부(農夫)한사람 말을드르면 보통학교(普通學校)를 중도퇴학(中途退學)은 하엿서도 그들가운데서는 식자연(識者然)하고 내로라는드시뽑내면서『서양(西洋)』얘기를 무에나들리라는것이오 그해서 결국(結局)은『춘향전(春香傳)』파(派)와『서양(西洋)』파(派)가 절충(折衷)한결과(結果) 나는이진귀(珍貴)한『서양춘향전(西洋春香傳)』을 친절(親切)하게도 강좌(講座)를담임(擔任)하게되엿스며 그는 득의만면(得意滿面)하야 내담배갑에서『마코』한개들 빼여물고 인조견(人造絹) 옥색(玉色)관사홋족기에서 석낭을꺼내여 담배를 피우는것이엿소 이방에서는모두들이사람을『하이카라상』이라고 부르는데 그『상』짜가나에게는 조금귀익지못하나 아마이것을 도시(都市)말로번역(飜譯)하면『모—던뽀이』란 말도갓소.&lt;br /&gt;
&lt;br /&gt;
그러나 이『서양춘향전(西洋春香傳)』이란진본서(珍本書)는 가난한 나의문헌학지식(文獻學知識)으로는 도저(到底)히 알어낼 자신(自信)도업고 그러타고 그들에게『린드뻑』이 대서양(大西洋)을 어떠케 횡단(橫斷)하엿다든지『크레오파트라』의국적(國籍)이 어느나라냐고 설왕설래(說往說來)를 하여보앗자『하이카라상』이라는 이방의『쏘크라테쓰』도그까지는 흥미(興味)를느끼지못할것갓터소.&lt;br /&gt;
&lt;br /&gt;
그래서나는 생각다못해『쉑스피어』의『로미오와쭈리엣트』를얘기하기로하고 위선그주인공(主人公)의이름을 그들이 알어듯기 쉽게『노미』이와『준』이가 이러케얘기를하니 그래도 모두그것이자미가 잇섯든지『준』이가추방당(追放當)튼날새벽에『노미』를 차저가이별(離別)을하는판인데 이곳에야『나이팅껠』이울수가 잇슬리도 업겟고 생각다못해 속담(俗談)에 꿩갑에 닭이라니 닭을울리고『준』이를 떠나보냇구려!그래도 이때는 모두들감탄(感歎)해서 흥흥코소리를치며 신삼고 가만이치든손을쉬이는구려!&lt;br /&gt;
&lt;br /&gt;
(하(下))&lt;br /&gt;
&lt;br /&gt;
이육사(李陸史)&lt;br /&gt;
&lt;br /&gt;
밤은벌써 오전(午前)두시(時)나 되엿는데 박가테서는 눈보래가 조금도 쉬지안코 나렷소,사람들은차차 긴하픔을 하다가는 제대로 팔을배고 자는이도잇고 또그자는이의 다리를베고 자는사람도잇스며 나중에는『하이카라상』과 나만이남어서 나는 이동리(洞里)의 서러운전설(傳說)을 듯는것이오『옛날에 이동리(洞里)와 건너마을이편을갈러서 정초(正初)이면『줄댕기』가 시작(始作)되엿고 그때는 사람들이 수—백명식(百名式) 모혀서 그중에도 젊은 사람들은 처녀(處女)나 총각이 제각기 마음잇는 사람들과 사랑을 속삭이면서 영원(永遠)히그자손(子孫)들은 변(變)함업시 이동리(洞里)를직혀왓건만은 지금(至今)은 어쩐일인지 그사람들은 누가 오란말도업고 가란말도 업건만은 다들어데인지 한집식 두집식 동리(洞里)를떠나고 그럴때마다 젊은이들의 싹트기시작(始作)한 사랑은 그봄이 다가기도전에 덧업시 흘러가고 만다는말을 다마치지도못하야 이사람은 창졸간에 미친듯이 쓸어저 흑흑 느껴가며우는것이엿소.나는 이것을 웨우느냐 물어볼힘도업고 울지말라고 위안(慰安)을 줄수도 업섯스며다만나 혼자 생각기를 너도 또한불상한 미완성초연(未完成初戀)의 순정자(殉情者)로 구나하고 동정(動靜)을 살피노라니 이사람도 그냥잠이 들고먼데닭이 자즌홰치는 소리가들리며 눈은끗첫는지 박가튼 바람이 몹시부럿소.&lt;br /&gt;
&lt;br /&gt;
나는몃시간(時間) 남지안흔 이밤을도저(到底)히 잘수는업섯소,내머리는해저(海底)와가티 아득하고 내가슴은운모(雲母)와가티 무거웟소.도라누을내야 도라누을수도 업스려니와여페사람들의 코고는소리는 검은시체(屍體)를 실흔마군(馬軍)의 수레박휘를 갈고가는듯하오,그럴수록방안의 정적(靜寂)은 무거워저서 자꾸만 지구(地球)의 중심(中心)으로 침전(沈澱)되는듯하엿소,나는 참다못하야 눈을감고 두손으로 얼굴을 가리웟소.바로 그때엿소,누구인지내머리마테서 말하는 사람이잇섯소,그사람이 누구인지는 기억(記憶)할수 업스나 혹(或)은 저녁전에담배가개에서본 농부(農夫)일른지도모르겟소 그가 나에게 한말은분명(分明)코『문(門)안에 드러와서……』엿소.나는 여기서 눈을번쩍뜨고가만히 생각해 보앗소.&lt;br /&gt;
&lt;br /&gt;
『오!그러타,나는 문외한(門外漢) 여다』아무리하여도 인생(人生)의 문(門)안에들어서지못할 나이라면 차라리영원(永遠)한 문외한(門外漢)으로 이세상(世上)을수박것할트시 지나갈일이지 그좁은문(門)을 들어가려고 애를쓸필요(必要)가 어데잇겟소 문(門)박게서 살어가면 책임(責任)과 부담(負擔)도 가벼우려니와 문(門)안에 우리가 직혀야할 보물(寶物)이잇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모두 문(門)안에서 직힐때에나혼자만 문(門)박게서 그모든것을파수본다면 그것도 나의한가지임무(任務)가아니겟소 그러타면 나는달게&lt;br /&gt;
&lt;br /&gt;
인생(人生)외 문외한(門外漢)이 되겟소.&lt;br /&gt;
&lt;br /&gt;
그래서 남들이모두 문(門)안에서보는세상(世上)을 나는문(門)박게서 보겟소 남들은 기피보는 세상(世上)을나는널리보면 또그만한 자긍(自矜)이잇을것갓소.오늘은 고기압(高氣壓)이어데잇는지 풍속(風速)은 육십사(六十四)미리오이동리(洞里)를 떠나아무도 발을대지안흔 대설원(大雪原)을 걸어가겟소,전인미도(前人未到)의 원시경(原始境)을 가는느낌이오,누가나를 따라이길을 올사람이 잇슬른지?업서도 나는이길을 영원(永遠)히가겟소.』&lt;br /&gt;
&lt;br /&gt;
나는이까지보고 위선이유고(遺稿)를더펏다,그리고 생각해보앗다 이것은 한사람이 인생(人生)의문(門)안에 들어오지못하고 영원(永遠)히 걸어간기록(記錄)이다 오!그러면 나도역시문외한(亦是門外漢)인가?정축(丁丑) 칠(七),이구(二九)&lt;br /&gt;
&lt;br /&gt;
==주요 내용 요약==&lt;br /&gt;
구성: 죽은 친구 'R'의 유고(遺稿)인 '문외한의 수첩' 속에 담긴, 'R'이 '〇형(兄)'(필자)에게 쓴 편지 형식의 수필이다. '문안'과 '문밖': 화자는 'S역'에서 '형'과 헤어져 산길을 걸으며 초당방에서 서민의 삶을 체득하고 싶다는 '육친애'적 소망을 가진다. 이때 담배를 사려다 한 젊은 농부에게 &amp;quot;문 안에 들어와서 담배를 가져가오&amp;quot;라는 말을 듣는다. '문안'은 농부가 '안경(유리창)'을 쓴 자신을 '도시의 문명인'으로 여기고 '안경을 벗고(유리창을 떼고) 들어와'라는 풍자적 표현이었음을 깨닫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자아 성찰: 이 경험을 통해 도시 지식인인 자신과 농민 사이에 투명한 '장벽'이 서 있다는 것을 인지하며, 자신이 '인생의 문외한(門外漢)'임을 깨닫는다. '문외한'의 결심: '문안'에 들어서지 못할 바엔 영원한 문외한이 되어 문밖에서 살아가겠다고 결심한다. 문밖에서 사는 것은 책임과 부담이 가볍고, 남들이 모두 문안에서 보는 세상을 자신은 문밖에서 '널리' 보며 '자긍(自矜)'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절필: &amp;quot;전인미도(前人未到)의 원시경(原始境)을 가는 느낌&amp;quot;으로 '대설원'을 걸어 나가는 것으로 글을 맺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분석 및 특징==&lt;br /&gt;
풍자 문학론의 실천: 농부의 '안경 쓴 눈(유리창)'에 대한 풍자는 지식인과 대중 사이의 괴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지식인의 고뇌와 성찰: 도시화된 지식인(안경 쓴 자)이 농민의 삶에 진입하려 했으나 거부당하고, 결국 자신을 '문외한'으로 규정하며 고립을 선택하는 지식인의 고뇌를 드러내는 자의식의 표현이다.&lt;br /&gt;
&lt;br /&gt;
낭만적 비장미: '대설원', '전인미도의 원시경' 등 비장하고 낭만적인 이미지로 결말을 맺으며, 이육사 특유의 고독한 결단의 미학을 보여주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소품(小品) 황엽전(黃葉箋)=&lt;br /&gt;
소품(小品)①&lt;br /&gt;
&lt;br /&gt;
황엽전(黃葉箋)&lt;br /&gt;
&lt;br /&gt;
이(李) 육(陸) 사(史)&lt;br /&gt;
&lt;br /&gt;
사람들은 어름알보다 더냉담(冷淡)하고 주사침(注射針)가티 촉발라도 그래도 제대로는 인정(人情)도잇고 눈담(曇)노잇서 친(親)한사람을 사이에는못보 보고저하고 보면빨아먹을듯이도 형형색색(形形色色)의 표정(表情)을비저내며 계절(季節)에 따라서는 눈물겨울만큼 간절한모양이나 『내』라는 위인(爲人)은 자질(資質)도 소박(素朴)하고교양(敎養)도 고매(高邁)하지못데 요즘은엇전지 신경(神經)이 차를보다 단단해저서 압흐고 슯흔것도 못견듸게늣겨지지도 안커니와 보지못해 못견딀사람도업고 소식(消息)이라도 못알려 탈이될,더친(親)하고덜친(親)한이가업다.그러나 행(幸)혀이세상(世上)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잇다고하면 나는 의무(義務)로라도그대에게 나의소식을 알려야하지만은 지금의 나에게는 그러한미덕(美德)을 수행(遂行)할 야망(野望)조차업다.다만 야망(野望)을용서(容恕)한 사람이잇거든 가을바락에 무한(無限)히 흘러가는 황엽(黃葉)의 쪼각쪼각이 모두나의 편지라고 생각을 해라그리고 그어느한쪼각이라도 주어다가 그대들의책상(冊床)우에 꼬처두고 그황엽(黃葉)이 바람에 나붓기며울며부르짓는 서러운전기(傳記)를 들어보아라……&lt;br /&gt;
&lt;br /&gt;
‥‥그놈의 거리를 말할것도업고 저는하여(何如)든 가로수(街路樹)에서떨어저 왓습니다.그래서 거리에 서잇는동안 형형색색(形形色色)의 인간(人間)들을 다보앗습니다.그러나대개(大槪)는 모다비슷비슷한 인간(人間)들이엿고 별다른 놈은 못보앗습니다 그것은 십년전(十年前)일이라고생각됩니다.어느날오후(午後) 내발밋흘지나가는 소년(少年)이 잇섯습니다,미친놈가티 중얼대는 말을가만히듯자니『루나—ㄹ』의 일기(日記)를외이는겐지『불상한놈! 불상한놈!』 고거즛말하엿습니다,그뒤로는 매일(每日)가티 아침에도 내발밋홀지나고 저녁에도 내발미틀지나는동안에 나는어느사이에그만그녀석하고 친(親)해젓습니다,그래서 그녀석의 정체(正體)를 알수가잇섯습니다&lt;br /&gt;
&lt;br /&gt;
그녀석은 어느시골에서 출가(出家)를해서 서울을왓다는데 그출가(出家)한 이유(理由)가 어린녀석하고는 맹랑햇습니다 그녀석의 집은어느해안(海岸)이든가봐요 아침으로 조수(潮水)가 밀려나가면 끗업시 널려잇는 백(白)모래바티 너무도 허무(虛無)서 오기는왓스나 섬들을 건너간 갈메기가 몹시그립다고 하는것을보면 그래도 어린향수(鄉愁)가머리를 글거가는모양이겟지요&lt;br /&gt;
&lt;br /&gt;
그후(後)나는 우리들이 늘만나는시간(時間)이되면 그녀석이 하마나오나하고 기달리기도햇습니다 그럴때 멀리에 발자욱 소리가나고 그녀석이 『하이네』 니 『꾀—테』 니의 시(詩)를외이고 올때도잇섯습니다 그리고 몃해가 지난어느해봄날 내가긴 동면(冬眠)으로부터 영롱(玲瓏)한 첫눈을텃슬때 또그녀석을만낫습니다 그때는벌서그녀석은 십부게볼 소년(少年)이아니라 의례(依例)히 그상대자(相對者)를 다리고어둑어둑한 황혼(黃昏)에 내엽헤와서간즈려울만큼 종알대며 행복(幸福)의『메뉴—』를 전람회(展覽會)의『프로그람』보다 화려(華麗)하게꾸미는것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이것어 한여름을 지나며 비가오나 바람이부나 계속(繼續)이 되엿습니다 그러나 인간(人間)들에게잇서서는 행복(幸福)의 절정(絕頂)은 최대(最大)의비극(悲劇)과 서로통(通)해 잇나봐요 그해의 첫가을 어느으스름달밤에나는이비극(悲劇)을 바로 내눈헤서보는것입니다&lt;br /&gt;
&lt;br /&gt;
『여보우리두사람이 서로사랑하면 그만이지 사랑을 부모(父母)에대(對)한 효행(孝行)으로 하는데가 어데잇소.』&lt;br /&gt;
&lt;br /&gt;
이러케 그녀석은 폐(嬖)하는것이 엿습니다.&lt;br /&gt;
&lt;br /&gt;
그것도 고이치안흔게 그때쯤은 그녀석의 기분(氣分)이란 불꼿치타오를둣도 하얏거니와 제애비말을 안듯기로 유명(有名)하야 집을나선놈이니까.&lt;br /&gt;
&lt;br /&gt;
『그러치만은 엇절수가 잇서야 지요』&lt;br /&gt;
&lt;br /&gt;
이것이 그더석의 말에갑허진보수이엿습니다.그뒤나는 십년(十年)이란 긴동안 이사람들의 속삭임을 들을수는 업섯습니다.&lt;br /&gt;
&lt;br /&gt;
아마그것이 그들의 비극(悲劇)의시초(始初)FP동시(同時)에 나의『로—맨틔시슴』도 종언(終焉)이엿든 것입니다 나는그날부터 새로운 생활(生活)을 경험(經驗)하지안으면 안되엿읍니다 이때까지는 그들가운데에 엇던한두사람의 주활(主活)을 말로서 들엇으나 인제는 어느특정(特定)한 사람의사랑이라든지 그런달착지근 한것이아니라 그저그놈도 그놈갓고 그놈도 그놈갓흔 뭇사람의생활전체(生活全體)가 내풋입새의 거울보다 반드라운 쪼각쪼각에 빗치는 것이엿읍니다 이전갓흐면멀리서 삽분삽분 발자욱 소리가들려오고 그발자욱 소리가갓가워 지는데따라 쟁반에 구슬을굴리는듯한 목소리도 들엇건만은 또그럴때면 나도 입사귀를흔들어서 업김가티 보드러운바람을 부러도 주엇건만은 이때는 내가 바람을 불기는커녕그들의지나가는 위풍(威風)에 나는전율(戰慄)하지 안을수 업섯읍니다.구슬을 굴리는듯한 목소린들 어데가듯겟읍니가?뭇사람의 포효(咆哮)하는소리란 아주바다에서 이러나는노도(怒濤)의 교향악(交響樂)가탯습니다.&lt;br /&gt;
&lt;br /&gt;
그래서 나는알기를 인간(人間)이란위대(偉大)한 작란(作亂)군이라고 하엿습니다.어떠케 그들의 얼골이 크게보이고 힘차게 늣겨것든것인가 지금은 생각만하여도 왼몸이 으슬으슬합니다.그러는중(中)에그들의 행렬(行列)은 대강(大江)가티 홀러가고 나는 또다시 노랏케 단풍이들어 한닙두닙 떨어지는것입니다.얼마나 소조(蕭條)하고 적막한거리겟습니가? 내엽헤는 괴수(怪獸)가티 늘어선 삘딍들의 거믄그림자가『팔아스트 에 얼어부튼거지들의 싸늘한꿈을 죽엄가티덥허논때업니다.밤도삼경(三更)은 지난때이지요 더벅더벅 거러오는무거운 발자욱 소리와함께 나는고요한『그림자』하나를 발견(發見)햇습니다.안개에 촉촉히 저진차림자러와 힘업시 옴겨지는발자욱이 아주무슨 패잔병(敗殘兵)의 유령(幽靈)이엿슬지도 모릅니다.나는지금 그유령(幽靈)을 따라 굴러 갑니다.그러나 그유령(幽靈)은 내가미행(尾行)을 한다는것은 모르고 또는알엇다해도 아무저항(抵抗)도 할필요(必要)가업다는듯이 방향(方向)도업시것는것이엿습니다.때로는 시내도건너고들판도 지나 힘이지치고 밤이깁프면 산(山)기슭 나무등얼 밋헤누어서 하늘에 수(數)업시만흔 별들을 헤아려도 보는것이겟지요그러나 그어느별도그에게 행운(幸運)을 점제한별은 업섯나봐요 그리다간 그는그만 흑흑늣기고 울며울다가는 자는것이엿습니다.아마도 기적(奇蹟)을 이즌순간(瞬間)이 그에게는 자장행복(幸福)된순간(瞬間)이든가봐요,산(山)속은 찬기운만 가득하고벌레소리는 정적(靜寂)을 삼림(森林)가티무성(茂盛)하게하는것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그다음날도 아츰햇발이 속새입홀 흔들면 그는일어나 것는것이엿습니나.이러는 동안에 나는이유령(幽靈)에게서 무엇을 보앗스리라고 생각하심니가?어느큰강(江)가이엿습니다.여을어 목노아울고가는 강(江)가이엿습니다.그는이강(江)가에 안저서 무엇을 생각하엿는지 눈을깜은채로 하늘을치여다보는 것이엇고 초생달은교만(嬌慢)한 게집의눈자위처름 그를흘겨보는것은 한층(層)더창백(蒼白)한 비우슴갓햇습니다 그러치만은 그는그광망(光芒)을 피(避)하려고도 안엇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내생각에 따른다면 그래도 못잇처지는 날ㄹ기억(記憶)을 모조리 물소리에 씨처흘려보내려는 노력(勞力)이엿슬지도모릅니나&lt;br /&gt;
&lt;br /&gt;
그때 먼데마을에는 개짓는소리가 어즈러히 들여오고 새바람도 유달리 옷깃을 새여드는데 그는 일어셔 한발한발 물가으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때나는 그의운명(運命)을거의들여다보는것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자살(自殺)이란 광경(光景)이 내머리속에번개가티 일어낫습니다.그리고그는물가의 널직한 반석(盤石)우에올러안저서 물속에비친 자기(自己)의얼골을 자세히 들어다보는 것이엿습니다,그러나 그물속에는자기(自己)의 얼골은 차저볼수가 업섯든것이겟지요,증오(憎惡)를 참지못하는 그는그만 뼈만남은 두손으로 물결을 훗치고는 돌우에업더저 우는것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그는 또다시 일어나 모둔것을 이저버린듯이 걸어가는 것이엿습니다.일기(日氣)는점점 흐려지고 회색(灰色)으로 물드린 천공(天空)은 그의최후(最後)의 희망(希望)까지라도 빼서바릴듯이 싸늘한 압박(壓迫)을더하는것이엿습니다.그러타고해서 그에게는 아무런 격정(激情)도 반발(反撥)도잇는것갓지는 안엇습니다 만은 주먹을 쥐여서는 주머니속에 너은체로 간간히 머리를 흔드는것은 과거(過去)에대(對)한 회한(悔恨)이라든지그런것들이 머리속을 할터가는것이겟지요?&lt;br /&gt;
&lt;br /&gt;
그것은 어느동리(洞里)압이엿습니다만흔사람들이 모엿다가는 다들도라가고 큰버드나무에『사지오리』를 부친색기를 걸처맨밋헤는 기름종지에 빤—한심지불이타고잇스섯며 아해들 몃사람이그것을 직히고 잇섯습니다.그는아해들에게 무엇을하는것이냐고 물엇습니다.&lt;br /&gt;
&lt;br /&gt;
아해들의 대답이란 너무나 묘(妙)한것이 안이겟습니가?그동리(洞里)에는 십년(十年)만에 한번식은 유령(幽靈)이 난다는 전설(傳說)이 잇섯습니다그래서 그날은 동리(洞里)사람들이정성을 다하야 한데모혀서 기도(祈禱)를 올리고 고사(告祀)를 지내는것이엿는데 그날이마츰 십년(十年)에 해당(該當)한날이며 방금 의식(儀式)을 맛친때라고 말을마천 아해들은 그를 한참동안 자세히 보다가는그만 인가(人家)를 향(向)하야 다어나는것이엿습다.아마도 그것은참으로 이동리(洞里)에 유령(幽靈)이 나타낫다는것을 알리기 때문일런지도모름니다.&lt;br /&gt;
&lt;br /&gt;
그는 한번 크제우섯습니다나는 그가 웃는것을 보는것은처음이엿습니다,그러나 그웃슴이란 곳변해저서 므슨쓰듸쓴 약물을 먹은뒤의 입모습가리 변해지며 얼골전체가 크다란 환상(幻想)에 사로잡히는것 갓햇습니다그리다가 그는 그언덕 미테서잠이들어 자면서 꿈을 꾸는것여엿습니다,그꿈이란 이러햇습니다,몹시더운 여름날 몃칠을두고 비가따루엇습니다,그래서큰물이나고 하루밤사이에 왼동리(洞里)가 물에쓸려 갓읍니다 왼여름 피담을홀려 지은농사(農事)도 한포거업시 사람마다 두주먹과한개의 목슴박게는 남지안엇음니다 주림과 치위가 매운챗죽갓치 그들을 휘갈겻읍니다 그래서 동리(洞里)사람들은 제각기 이고향(故鄕)을 떠나지안호면 안되엿읍니다 물론(勿論)녯날에야 부모(父母)의 품속갓치 포근하고 사랑스런 땅이엿지만은 지금은 참담(慘憺)과 고통(苦痛)의 회억이외(回憶以外)에 아부것도 그들의 애착(愛着)을 붓잡어 두□는 못하엿읍니다.그들은지금 한개촌락(個村落)에서 다른촌락(村落)으로 한성시(城市)에서 또다른성시(城市)에 표박(標泊)□ 길을가는것이엿지만은 그어느□곳도그들이발을 부칠곳은 어□읍니다 모든집들어 그들압헤는 문(門)들을 잠것읍니다.그리고 오즉그들에게는 한오리 끗어는 길이엿음니다 어느때나 □□갈수잇는 길이엿읍니다 하□□또하루 한달에또한달 꼭가티 그들은 하늘을 치여다보고 □을갓읍니다.벌서초본(草本)도 다□□이들고 낙엽(落葉)이 나리나 그들의발길은 머므를수는 업섯습니다 어느마을이나 성시(城市)에서 그들에게 일주일(一週日)이나 유(留)할수가□고한오리의 희망(希望)을 주엇다면 다시그순간(瞬間)이 지나면 그들에게는서름이외(以外)에 아무것도 □는것은업섯습니다.그러나 이□름과주림과 치위는 그들늙은이와 어린이와 남자여자(男子女子)를 모다한마음에 얼거맬수가 잇섯습니다 바탐과비에 바래인 그들이마음에한개의희망(希望)이란 오즉 일거리와생활(生活)이엿습니다 이것이 그들을고무(皷舞)하고 추진(推進)하는 힘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마치한떼의 표유(瓢游)하는『집시』와가티 마을을지내나 산(山)을너무나 마른풀을뜨더 그것을 덥고깔고 혹(或)은낙엽(落葉)을 쓰러다가 욕(褥)와 이불을삼어 한랭(寒冷)을 지나는하루밤 더욱이 비오는밤……밤은영원(永遠)히 차운것이며 뜨신것은다만그들의『마음』뿐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날과밤은 그넷줄처럼 밧구엿습니다.해도점점 쩔러지고 물들이 어러부트며 첫눈이 나린것도 발서 열흘전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그들은 아즉까지도 발무칠땅과한가지의 일거리도 찻지는못하엿스며 끗간데를모를 길만을보고 걸어가는것입니다.&lt;br /&gt;
&lt;br /&gt;
『여기라도 좀쉬여갓스면』모다들이러케 마음으로 부르지젓습니다.그러나 또몃사람운 말하는것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가자 압흐로 더가보자』이것도모든사람의 말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그들은 여전히 경사(傾斜)진 산(山)빗탈을걸어가며 길다란 곡선(曲線)의행렬(行列)이 계속(繼續)되는것입니다.그때는바람도 조골 잔잔해지고 햇발도구름밧글나와 열분광선(光線)이 뭇사람의 얼골을 다소명낭(多少明朗)하게하엿스나 일행(一行)이바로 산(山)미루턱에올너다엇슬때는 정세(情勢)는 디무도급(急)히변(變)하야 눈이퍼붓기 시작(始作)햇습니다.&lt;br /&gt;
&lt;br /&gt;
『눈이또나린다』이러케 부르짓고는모다들 놀나는 것이엿습니다.눈송이는 목화(木花)를 뜨더뿌리는듯이왼공중(空中)에 미만(瀰漫)하야지척을가릴수가 업섯습니다.바람에몰려오는 눈송이가 얼골에 부다치면 낫살을 어이는듯하고 손이빠질듯이 스린것입니다.시력(視力)조차 모호(糢糊)하야 발아래길도 알어보기는 어려웟습니다 재를오를때에 비(比)하면 산(山)을나려오는것은조금용이(容易)하엿스나 길이질대로 질어서 업더지락 잡버지락하는 사람들도잇스며 등에업힌 어린애들은 배가몹시 곱흐다고 우는것이며 그럴때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다들 산(山)밋헤 동리(洞里)집에 나려가서 드신밥을 준다고달래는것이엿습니다 그러나 산(山)미테 동리(洞里)집은 모다제각기 제마음에 그려보는 집들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가자 조금이라두 빨리가자불빗을 볼때까지』그들중(中)에서 한사람이 굴근목소리로 외치는것입니다&lt;br /&gt;
&lt;br /&gt;
『암그래야지』또 몃사람의 대답이 끗나면 모다들 침묵(沈默)은하면서 마음속으로는역시(亦是)『가자』고 대답하는것입니다&lt;br /&gt;
&lt;br /&gt;
사람들은 이빨을물고 잇는힘을다하야 전진(前進)합니다 지나온길이얼마이며가야할길이 얼마인것도모르면서 죽으나사나 가야한다는 것박게는 그들은 한사람도자기(自己)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업섯습니다.그들의 동반자(同伴者)의 발소리와 호흡(呼吸)이 그들의가튼 운명(運命)을결정(决定)한다는것은 이잔혹(殘酷)한 자연(自然)과 싸워가는 무리들의 금과옥조(金科玉條)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눈보래는 끗첫습니다.그러나아즉도 그들에게는 조그마한희망(希望)도 보이지는 안헛습니다.압도캄캄하고 뒤도그랫습니다.아득한 삼림(森林)속을 허우덕이는 암담(暗膽)은 영원(永遠)한흑야(黑夜)가 새이지도안코 영원(永遠)한 미로(迷路)도 끗막지도못할것 갓햇습니다.&lt;br /&gt;
&lt;br /&gt;
피로(疲勞)는 그들의몸을 풀솜가티만들엇습니다.참다가 못참는몃사람이 땅이라도 꺼지란듯이한숨을 쉬는것이엿습니다.그리고는 부르짓는 사람도업고 중얼대는 사람도업스며 눈물도마르고 공포(恐怖)도 사라진 그들은 발목에 잇는 힘을 다해서 눈과진흙우를 쉬임업시 이동(移動)하는것입니다.』&lt;br /&gt;
&lt;br /&gt;
유령(幽靈)은 그들가운데서 제일나이만흔 노인(老人)을 발견(發見)햇습니다그리고 그것은십년전(十年前) 그가고향(故鄕)을떠나올때 아즉도 그다지늙지안흔 그의아버지인것도 알엇습니다 그리고 모든사람은 그의어린시절(時節)의 동무엿습니다 그는참다못해『아버지』하고 소리를첫&lt;br /&gt;
&lt;br /&gt;
습니다 그러나그들은 어느한사람도 그를상대(相對)로 반겨마저주는사람은 업섯습니다.&lt;br /&gt;
&lt;br /&gt;
모다제각기 제갈길을 가고만잇섯습니다.&lt;br /&gt;
&lt;br /&gt;
유령(幽靈)도 그때야 잠이깨엿습니다 그리고 몸써리를 치는것입니다 얼마나 지리(支離)한꿈이며 괴로운 꿈이겟습니까?유령(幽靈)은다시일어나 것는것입니다 캄캄암흑(暗黑)속을 영원(永遠)히차고 영원(永遠)히 새지못할듯한밤을 제혼자가는것입니다 십년전(十年前) 내발밋흘 지나단이며 사랑을 속삭이든 소년(少年)은지금도 밤길을 제혼자 가고잇겟지요 황엽(黃葉)은 그래서 서러운일생(一生)을 울고만잇습니다&lt;br /&gt;
&lt;br /&gt;
정축십일(丁丑十一),일(一)&lt;br /&gt;
&lt;br /&gt;
==주요 내용 요약==&lt;br /&gt;
주제: 작가(필자)의 소식을 세상에 전하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이다.&lt;br /&gt;
&lt;br /&gt;
소식 전달: '내'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가을 바람에 흘러가는 '황엽(黃葉, 누런 잎)' 조각을 자신의 편지라고 생각하고 그 서러운 전기를 들어보라고 한다.&lt;br /&gt;
&lt;br /&gt;
'황엽'의 관찰: 황엽(필자)은 자신이 거리에서 겪은 두 가지 경험을 이야기한다.&lt;br /&gt;
&lt;br /&gt;
소년의 성장과 비극: 어린 소년이 성장하여 연인과 행복을 속삭였으나, 부모에 대한 효행 문제로 헤어지는 비극을 목격하는 것이다. 황엽은 이를 '행복의 절정은 최대의 비극과 통한다'고 표현하며 자신의 '로-맨틔시슴'의 종언이라고 말한다.&lt;br /&gt;
&lt;br /&gt;
군중의 포효와 유령: 이후 황엽은 개별적인 사랑 이야기가 아닌, '뭇사람의 생활 전체'와 **'노도(怒濤)의 교향악'**을 목도한다. 황엽은 이 거대하고 위대한 '작란군(作亂群)'의 행렬에 전율을 느낀다. 행렬이 사라진 후, 황엽은 '패잔병의 유령' 같은 힘없는 한 사람의 고독하고 고통스러운 표류와 꿈을 따라가며, 꿈속에서 홍수로 고향을 떠난 농민들이 희망 없이 떠돌지만 '가자 압흐로 더가보자'는 그들의 단합된 의지를 발견하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마무리: 유령이 깬 후 다시 홀로 밤길을 걷는 모습을 보며, 황엽은 '서러운 일생을 울고만' 있다고 글을 마무리하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분석 및 특징==&lt;br /&gt;
메타포(은유)적 글쓰기: '황엽(낙엽)'이라는 매개를 통해 자신의 소식과 감정을 전달하는 고도의 은유적인 글이다. '황엽'은 작가 자신의 고독하고 소외된 자의식, 혹은 시대를 표류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시대의식의 투영: 개인적 낭만(소년의 사랑)의 종언과 함께,'뭇사람의 생활 전체'와 '노도의 교향악'을 목도하며 당대의 격변하는 사회상과 민중의 힘을 인식하는 작가 의식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이육사의 서정성: 후반부 꿈속에서 펼쳐지는 농민들의 표류와 그들의 굳건한 생존 의지는 당시 농촌의 피폐함과 함께 암울한 현실 속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을 비장하게 포착해내는 이육사 특유의 서정성을 보여주는 것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전과기=&lt;br /&gt;
누구나 버릇이란 쉽사리 곳처지는것은아니다 그러므로 세살쩍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말도 잇지 안는가?.그런데도흔히 다른사람의 한가지 버릇을 새로히 발현햇슬때는 아—저사람은 저런버릇이 잇구나하고 속으로 비우서보거나 그버릇이 조치못한종류의것이면 대개는 업수히역이는 수도잇는가봐!.그럿컨만 나에게는 아무리 곤처보려도 곤처지지안는버릇이란 손톱을 깍고 줄로 으르고 수건으로 닥고하는것이다그것도 때와곳을 가릴것도업시조욕(漕浴)나 다방(茶房)이나는 말할것업고기차(汽車)나 배를타고 멀리여행(旅行)이라도하면 심심푸리도되고 봄날도서관(圖書舘)가튼데서 서너시간(時間) 안저백이면 제아무리 게른뱅이는 아닐지라도 웃눈섭이 기중기(起重機)처름아래눈섭을 끄러다닐때도 잇는것이고 그럴때에 손톱을 잘르고줄로 살살으르면 자릿자릿한 자미에 왼몸에게틈이 다풀리는것이다.그야내나이 어릴때는아침일직이손톱을 잘르면어룬들은질색을하시며 말리기도하엿다,그리고 말릴때에 누구인지지금에기억되지는 안어도 우리집에자주오는 손이 말하기를 아침에손톱깍고 밤에 머리빗는것은몸에해롭다고 하는것이엿고 내생각에도 그런방문은『동의보감(東醫寳鑑)』에라도 싸여 잇는줄 아럿기에그뒤로는 힘써시간(時間)을 한나절지난뒤에 손톱을 닥곤하엿지만나도내대로 세상맛을 보게된뒤로는 쓴맛단맛을 다보고 시고떨븐 구석과 휘추고초가튼 광경에 부닥길때가 시작이되고는손톱치레를 할만한 여가도 업섯고 어느사이에 손톱은 제대로자라 긴놈 쩌른놈 삐뚜러진놈꼬부러진놈 벌덕잡버진놈 앙당마스러진놈 이러케되야 내손이란 그꼴이 맛치 오증어를 뒤집어 삶어논것이 되엿다.&lt;br /&gt;
&lt;br /&gt;
그럴때에 나는 또 다시 손톱을 잘를것은 잘르고 으를놈은 으르곤하엿스며 이른아츰이라도 가리지는 안엇다.그것은밤으로 머리를 깍거보아도 몸에 해로운것도 업스니까 아츰에 손톱을 깍는것조차 위생(衞生)과는 관게업는것을 안까닭이다.&lt;br /&gt;
&lt;br /&gt;
그런대 내가이손톱을 잘르는버릇은 언제부터 시작되엿는가를 생각해보면 그도벌서 삼십년(三十年)이 더지낫다,내가난지 백일(百日)이나 되엿겟지 이란저고리박게빨간내손이 나와서 내얼골을 햅여뜻고는 나는자스려질듯이 울엇다.어머니가 놀라서가위로 내손톱을 잘러주신것이 처음이고그것이 늘거듭하야 지는동안에봄철이오면 어머니는 우리형제(兄弟)를 차례로불러 퇴ㅅ마루 양지쪽에 안치고 손톱을 잘러주시고 머리도빗기고 귀도휩여 주섯스며 이것도 내나이 여섯살때 소학(小學)을 배우고는 이런일의한반(半)은 할아버님께 이관(移管)이 되엿다 예날 내고장 우리집에는그다지 크지는못해두 허무히 적지안은 화단(花壇)이 잇섯다 그리고그화단(花壇)은 이때쯤되면 일이밧벗다 깍지로긁고호미로 매고 씨갑씨를 뿌리고총생이를 옴겨심고 적당한 거름도 주엇다 요즘가티『시크라맨이나『카—비손』이나『추리프』가튼것은 업서도 옥매화(玉梅花) 분홍매화(粉紅梅花) 홍도(紅桃) 벽도(碧桃) 해당화(海棠花) 장미화(薔薇花) 촉규화(蜀葵花) 백일홍등등(百日紅等等) 빗도보고 향(香)내도맛고꼿도보고 입도볼 말하면 일년(一年)을 다즐길수가잇는것이엿는데 내할아버지 생각은 이제 헤아려보면 우리들에게 글읽고 글시씨인사이로노력(勞力)을 몸소맛보이는것도 되려니와 그것이 정서교육(情緒敎育)도될겸(兼) 당신의 노래(老來)를 화려(華麗)하게 꾸밀수도 잇섯든 모양이엿다 그럴때마다 우리들은 이다지 가볍고고흔 노동(勞働)이 끗나면 할아버지는 우리들게 손을씨슬것과 손톱에끼인흙을 끌어내도록 손톱을닥그라 하섯다.&lt;br /&gt;
&lt;br /&gt;
이러든 내손톱이기에 나는손톱을 소중히하고 잘르고 으르고 닥고하는 동안에 한가지방편을 어덧다 그것은 나에게거북한일을말하는 사람아페서 손톱을 닥는것이다.빤히 얼굴을맛대이고 배알에 거슬이거나듯기실흔 말을듯고 억지로 참을수도업고 그러타고 언잔흔표정(表情)을 할수도업서 손톱을 닥노라면 시굴게신 어머니도 그려보고 도라가신 할아버지의 모습을 우러러 뵈일수도잇다.내고장의 푸른하늘아래 봄이 왓슬것도 가트니&lt;br /&gt;
&lt;br /&gt;
——(완(完))——&lt;br /&gt;
&lt;br /&gt;
==주요 내용 요약==&lt;br /&gt;
손톱 깎는 버릇: 화자(나)에게는 아무리 고치려 해도 고쳐지지 않는 버릇, 즉 손톱을 깎고 줄로 다듬고 닦는 행위가 있다. 이 행위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으며, 특히 심심하거나 피로할 때 긴장을 풀어주는 '자릿자릿한 재미'를 준다. &lt;br /&gt;
&lt;br /&gt;
버릇의 변화와 세상 경험: 어릴 때는 '아침에 손톱 깎는 것은 몸에 해롭다'는 옛말 때문에 어른들이 말렸고, 화자도 이를 믿었다. 그러나 세상을 경험하며 '쓴맛 단맛'을 다 본 후, 손톱 관리에 신경 쓸 여유가 없어 손이 엉망이 되기도 했다. 이후 미신이나 위생보다는 개인의 필요에 따라 언제든 손톱을 다듬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버릇의 기원과 따뜻한 기억: 이 버릇은 태어난 지 백일 무렵 어머니가 처음 손톱을 깎아준 것에서 시작되었다. 봄철이 되면 어머니는 형제들의 손톱을 깎고 머리를 빗겨주셨다. 여섯 살 때부터는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화단(花壇)을 가꾸는 노동을 했다. 할아버지는 이 노동을 노력(勞働)을 몸소 맛보게 하고 정서 교육을 시키는 수단으로 여겼다. 노동이 끝난 후에는 손톱에 낀 흙을 닦도록 하셨는데, 이는 정돈과 청결의 습관으로 이어졌다.&lt;br /&gt;
&lt;br /&gt;
손톱 관리의 '방편': 손톱을 닦는 행위는 시간이 흐른 뒤 화자에게 '방편(方便)'의 의미를 얻게 되었다. 듣기 싫거나 거북한 말을 하는 사람 앞에서 이 행위를 하면, 억지로 표정을 관리할 필요 없이 그 행위에 몰두하며 고향의 어머니와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분석 및 특징==&lt;br /&gt;
일상적 소재의 상징성: '손톱 깎는 행위'라는 극히 일상적인 소재를 통해 삶의 태도, 유년 시절의 기억, 그리고 현재의 심리적 방어 기제까지 끌어내는 수필이다.&lt;br /&gt;
&lt;br /&gt;
세대 간의 경험 대비: 수필은 크게 세 시기를 대비시킨다.&lt;br /&gt;
&lt;br /&gt;
유년기 (어머니/할아버지): 손톱 관리가 사랑과 보호, 그리고 정서 교육의 매개였다. (전통적이고 순수한 가치)&lt;br /&gt;
&lt;br /&gt;
성인기 (세상 맛을 봄): 손톱 관리가 소홀해지고 삶의 고난과 시련 속에서 잊혔다.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운 현실)&lt;br /&gt;
&lt;br /&gt;
현재 (손톱을 닦는 '방편'): 손톱 관리가 현실의 고통을 회피하고 내면의 안정을 찾는 심리적 '방편'이 되었다. (현실과의 거리 두기)&lt;br /&gt;
&lt;br /&gt;
정서적 위안: 화자가 불편한 상황에서 손톱을 닦는 행위는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힘들었던 현실 속에서 유년기의 평화로웠던 기억(어머니, 할아버지, 화단)을 소환하여 현재의 감정을 통제하고 마음을 지키는 자기 치유의 과정인 것이다.&lt;br /&gt;
&lt;br /&gt;
향토적 정서: 화단에 핀 옥매화, 장미화, 백일홍 등과 퇴마루 양지쪽 같은 토착적인 이미지를 통해 과거의 아름다웠던 고향과 가족의 정을 회상하며, 전통적 가치에 대한 향수를 드러낸다.&lt;/div&gt;</summary>
		<author><name>Imgpdnjs</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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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이육사의 기자 생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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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10T08:51:2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Imgpdnjs: /* 주요 내용 요약 */&lt;/p&gt;
&lt;hr /&gt;
&lt;div&gt;[[분류:imgpdnjs]]&lt;br /&gt;
==이육사의 기자생활==&lt;br /&gt;
출소한 뒤에는 중외일보와 조선일보 대구지국에서 기자로 일했고, 1930년에는 ‘이활’이라는 이름으로 첫 시 &amp;lt;말&amp;gt;을 조선일보에 발표했다. 이 시기는 훗날 교보생명을 세우는 신용호에게도 영향을 주어 독립운동 자금 지원과 교육 사업 구상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알려져 있다.&lt;br /&gt;
&lt;br /&gt;
1930년, 이육사는 조선일보 지면을 통해 생애 첫 시 「말」을 발표하며 문단에 모습을 드러냈다. 1월 3일자 조선일보 7면 하단에 실린 이 짧은 작품에서 그는 매질에 지쳐 쓰러질 것 같은 말이지만 새해에는 다시 우렁차게 질주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이 작품이 바로 그와 조선일보의 첫 연결고리였다.&lt;br /&gt;
&lt;br /&gt;
==중외일보 대구지국==&lt;br /&gt;
1929년 6월 장진홍 의거 관련 혐의로 복역 후 1930년에 출소한 이육사는 곧바로 언론계에 투신했다. 그는 시 발표 직후 중외일보(中外日報) 대구지국에서 기자로 일하기 시작했다. 중외일보는 1926년 조선중앙일보가 제호를 변경하여 창간된 신문으로, 1931년까지 발행되었다. 이육사가 활동하던 시기는 일제강점기 언론 탄압 속에서도 민족의식을 고취하려던 분위기가 남아있던 때였다. 지방지국 기자로서 지역 사회의 현안을 취재하고 보도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기간의 활동은 그가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사회 현실에 대한 인식을 심화하는 데 기여했다.&lt;br /&gt;
&lt;br /&gt;
==조선일보 대구지국==&lt;br /&gt;
중외일보에서 근무한 뒤, 이육사는 1931년 8월 조선일보 대구지국으로 자리를 옮겼다. 일제강점기 지방의 신문 지국은 단순한 연락소가 아닌, 지방 취재와 기사 송고의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이육사는 이곳에서 현장 기자로서의 전문적인 경험을 쌓았다. 조선일보에서 자신의 이름(필명)을 걸고 처음으로 쓴 기사는 1932년 초에 연재되었다. 첫 기사인「대구의 자랑 약령시의 유래」는 1932년 1월 14일부터 네 차례에 걸쳐 연재되었다. 이 기사를 쓸 때 그는 본명 대신‘육사생(肉瀉生)’이라는 독특한 필명을 사용했다. '육사'라는 필명이 여기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으며, 이는 그의 상징적인 수인(囚人) 번호(264)와 연결되는 '이육사'라는 이름의 유래 중 하나로 간주되기도 한다. 이 기사는 대구의 대표적인 전통 시장인 약령시의 역사와 유래를 소개하는 향토색 짙은 글이었으며 이육사가 기자로서 대구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lt;br /&gt;
&lt;br /&gt;
[[파일:이육사기사.jpg|500픽셀|섬네일|center| 이육사가 조선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근무하면서 쓴 1932년 1월 14일 자 ‘대구의 자랑 약령시의 유래’ 기사. ‘육사생’이란 필명 사용. ⓒ 조선일보]]&lt;br /&gt;
&lt;br /&gt;
그는 스포츠 기사에서도 민족적 정서를 드러냈다. 1932년 3월 6일과 9일자 스포츠란에서 「대구 ‘장’ 연구회 창립을 보고서」라는 글을 연속으로 기고하며 이번에는 ‘이활(李活)’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여기서 그는 조상 대대로 이어오던 우리 겨레의 전통 놀이 ‘장치기’를 소개하며 경기 방식뿐 아니라 점수 계산 용어까지 온전히 우리말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더 나아가 이 놀이를 세계 농민 사회에까지 널리 보급하자고 주장했다.&lt;br /&gt;
&lt;br /&gt;
그는 1934년 무렵 조선일보로 다시 합류했고, 이후에도 꾸준히 조선일보 지면에 글을 남겼다. 1930년대 후반에서 신문이 폐간되기 직전인 1940년까지 발표된 글들은 다양했다. 5회 연재된 「노신 추도문」(1936년 10월 23~29일자), 「문외한의 수첩」(1937년 8월 3~6일자, 3회), 「황엽전」(1937년 10월 31일~11월 5일자, 4회), 「전조기」(1938년 3월 2일자), 그리고 1940년 발표된 「계절의 오행」 등이 대표적이다.&lt;br /&gt;
&lt;br /&gt;
==타임라인으로 보는 이육사의 기자 발자취==&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v2%3A2PACX-1vScyeelknnBUflE4gCcqr0d_p4jIpl00AVBmBzhC5cgKY8GPsH4h-JZmzezN5VoQTKsJGw76vWgsA7O&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width=100%25&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대구(大邱)의 자랑 약령시(藥令市)의 유래(由來)=&lt;br /&gt;
대구(大邱)의자랑&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의유래(由來)&lt;br /&gt;
&lt;br /&gt;
대구지국(大邱支局) 육(肉) 사(瀉) 생(生)&lt;br /&gt;
&lt;br /&gt;
대구의자랑이 무엇이냐?고 뭇는사람이 잇스면 지금사람들은아이어룬할것업시 대구능금(평과(苹果))을말할것이다 그러나 대구능금은 최근의 한명산물로서완전한 자랑의자위를 점령할수는업는것이다 여긔서우리는중학교지리교과서(중학교지리교과서(中學校地理敎科書))에도잇는대구의유명한약령시(연령시(燕令市))를자랑으로들어놋코그에대한력사적유래를먼저아라보자&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의사적유래(史的由來)&lt;br /&gt;
&lt;br /&gt;
대구의 약령시는 일년얼차의정긔시장으로서 그시장에 집산되는 산물은 맛치『도루고』(토이기(土耳其))나『코—카쓰』(고가삭(高加索))나중앙아세아(중앙아세아(中央亞細亞))내외몽고(내외몽고(內外蒙古))등지에서 일년 일차혹이차식 열니는 모피물(모피물(毛皮物))의시장과가티대성황을일우나 이상에말한 각지의시장은인류사회의생활형태가차차목집함을따라필요한물품을서로서로밧구고저일정한장소와시일에모히는말하자면물물교환(물물교환(物物交換))시대로부터교통의관계라는지긔후의관계라든지또는일반사희생활의형태가오히려아직까지녯날의그것을면치못하고현대자본주의국제간의무역관계(무역관계(貿易關係))가극도로발달된 오날까지에 원시경제(원시경제(原始經濟))를 연구하는학자들의 연구재료가 되는것은휴미잇는 사실이지만은 대구의약렁시는 물품의집산과 교환의량식이 그와방불하여도 일홉부터 약시(약시(藥市))가아니고 약렁시(약령시(藥令市))란령(영(令))자에대하야우리는직각적으로 이시장의긔원은엇던권력(권력(權力))의 지배(지배(支配))맛해일게된것을 알수가잇다그러면 이약렁시가 처음시직된것은 언제부터인가 그야말로중학교교과서에까지『고래(고래(古來))로유명』이라고만씨여잇고 적확한년대를 쓰지안엇슴으로 대담하게 그년대를 내어노을수는업스나 비교적정확한수자를 조사한대로쓰면 서력일천륙백오십팔년(이조개국이백육십팔년효종조(李朝開國二百六十八年孝宗朝))거금이백칠십 사년전부터개시하게 되엿다고한다 그때야말로 조선을팔도(팔도(八道))에 닌후아노코 다시칠십일주로 난호아노흔 경상도의 정치적수부(수부(首府))도대구려니와 경상도(경상도(慶尚道))를둘너 남부조선각지는 산수명랑하고긔후온화하야각색약초(약초(藥草))의배양에지질이알맛기도하고 교통도편의하야(그때로보아서는)물산의집산에최적의지대도 대구엿스며 그때야말로임진병란(임진병란(壬辰兵亂) 이끗을막고모든볼회와 시설이 차자정돈뇌고발전을 보이며따라황실중심(성실중심(星室中心))으로끄으려는당시의위정사(위정자(爲政者))들은□□□□조금이라도 관계잇는 물품이면무엇이나물론하고 먼저진상(진상(進上))이란일흠아래최상의생산품을골너 서울도보내고 일반백성이먹고 입고쓰게되는 것이다그리고엇던 계□을물는하고병업시일생을 살수도업는것은 생리상자연의 리치엄으로 일국의지존(지존(至尊))인왕(왕(王))도병마의무서움은면치못 하는것이다 그래서황실에서일년동안쓸 약품을이곳에서 구하고저 국가의명령으로개시케한것이 오날날 우리가보고듯고 하는약령시의 처음이다그때는 약령이서면 감사(감사(監使))(현도지사(現道知事))가약재를골다봉하야중앙 정부 사약원(중앙정부사약원(中央政府司藥院))에 보낸후에 팔도에서모혀든 약재를일반 약국(약국(藥局))이사서완조선안의병든사락들이 그해그해의 치료를하게다엿다고한다(속(續))&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와경기(景氣)(이(二))&lt;br /&gt;
&lt;br /&gt;
대구지국육(大邱支局肉) 사(瀉) 생(生)&lt;br /&gt;
&lt;br /&gt;
【대구(大邱)】대구의약령시(약령시(藥令市))는다른상품시장에서는볼수업는특수한 유래를가지고 발달하여온만큼 지방의정청에서도일년춘추두차레에정긔적으로모여드는 지방생산자들을 위하야지방경제발달을 조장하고저 계획을세우고 제도의개선과 개시(개시(開市))긔간의 연장등 모든방면으로힘을써 보앗스나 모다뜻과갓지못하고 서구(서구(西歐))렬국의동양(동양(東洋))침입으로의학(의학(醫學))약학(약학(藥學))등학문이발달됨에침(침(針))은주사(주사(注射))로변하고바쇠는『메—쓰』로화하는바람에한약(한약(漢藥))의 가치는 전연그권위를일케되면서 대구의 약령시도차차워마하야 매매되는 약재료도주러지기만 하든중『후—버』겅긔가세계의주식시장(주식시장(株式市場))을혼란케하듯이 대구의 약령시장도 대타격의한때가 지나가게되엿스니 그는무엇일가?지금부터이십이년전(신해년(辛亥年))에중산손문 중산손우(中山孫又))씨혁명으로대청황실)대청황실(大清皇室))을넘어지면서부터는 청황실이 조선정부(조선정부(朝鮮政府))에의뢰하야사가든약품은실로막대한것이엿스나전부그매도의길이 막히게된 여러가지조건밋헤매매가 축소하여 전성시대의반도못되게 되얏다 그나마최근에는전주(전주(全州))대전(대전(大田))진주(진주(晋州))원산(원산(元山))등지에군소시장이개설되여이를약령시로밀미암아대구에떠러지는돈은매우감소되엿스나아직도령시가개설되면동성정입구(동성정입구(東城町入口))로부터남성정입구(남성정입구(南城町入口))까지 십여정(십여정(十餘町))에 처당재(당재(唐材))초재(초재(草材))등삼백여종의 약품도만흐려니와 그근처에림시려인숙(임시여인숙(臨時旅人宿))이무수히설치되고 포백기타 일용생활에필요한물품이면 평상시의 멧배나더잘팔리는 호경긔를 연설한다 그리하야 촌양빈들의낫서른돈을 먹어보겟다는 술집색시들까지 헐직한인조견으로 봄을싸고 도스리고안저서 열분애교를 술잔에담어보내는것도『넌센스』한징면인지는모르겟다마는 흡객술(흡객술(吸客術))이 졸열한다기보니 시대에뒤처진 기생들은본바닥에 거주하는손님들은『카페—』붉은녀급(여급(女給))들의자주(자(紫))빗유혹에다 뛰우고 음력과세를압서초조하는중 때맛침사재(시재(時哉))시재를불러 시내 각요리집 극장할것업시 대만원의성황을 이루는것은 그럴듯도한일이지마는 여긔에는 순진한산간에서 새노래물소리에 거치른세상일은 □도꾸지못한 산아이와도갓치 힘드려작만한 약재를도시구경겹 하여와와서판돈은『메리·픽포—드』안일망정어엽분녀자를맛나 잇는대로 다쓴후에명년의약령시 개설되기를 손을꼬바기다려서 와서보면 그녀자는어느하늘밋헤서 잇든남자와 단꿈을꾸는지 알길조차 바이업고작년구든맹서가 찬□(회(灰))처럼살어잘때화낌에 한잔무어라 먹자부어라 먹자하는연긔가튼 경긔는 견양경긔(견양경기(犬養景氣))이상으로 흥성거린나 그러기에여긔에최근오개년간의매매고외출동인원수와□적어본다&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와경기(景氣)&lt;br /&gt;
&lt;br /&gt;
(삼(三))&lt;br /&gt;
&lt;br /&gt;
대구지국(大邱支局) 육(肉) 사(瀉) 생(生)&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의현재(現在)&lt;br /&gt;
&lt;br /&gt;
약령시의 밋치는바 경제관계는실로 다방면으로 황금왕시대를연줄하며 발달하여오는만큼 녯날에는 조선안에서 생산하는재료가 매매되는이외에 당재(당재(唐材))라고하야 증국으로부터금석지재(금석지재(金石之材))가만히수입되는외에는 벌로볼만한것이 업섯스나 교통의발날노 국제무역이빈번하야지게된 오날에는일본,중국,몽고등시는말할것도 업거니와동부『아푸리카』의찌는둣한열대지방에서 생산되는 소철(소철(蘇鐵))을비롯하야 황막한시베리아의천지를 내집가티 도라다니는웅담(웅담(熊膽))까지모혀들게되는것은이약정□를통해본□류문와사의 한로막이라고도 할수잇는것이다 이러케 약령시에모혀드는약재료가 교통의 혜택을임어거의 파멸에 갑가운약령시가새로히왕성하게되자 지금이야말로 시장의 량입구에 마천두(마천루(摩天樓))가튼『리—딍』(유도탑(誘導塔))을세우고『일미네—숀』(대전식(大電飾))사이에 흥긔청긔가나붓기며 지방으로부터 모혀드는 생산자들을끄려드리는것은 확실히 일반상업전술의발달을의미한다 그러나 원래이시장는 약을재료그대로가지고와서 매매케 되는것이 특질의엿스나 지금은천일령신환,조고약과어을빈만병수까지 시장목판에서 인긔를집중하고잇는것은 아모리보아도 조뵈 화지관는 사실이다 이가튼변천가운데도 특긔하야들것은 령시의개설의래 장구한년월을 지남에따라 그본래의 성질에배반하야 부업적상인게놉을 령시의주요구성 요소로하게되고 부터는 경상도내지방에밋치는 양령시의영향은 일반 소비경제상에크다란 파문을그리게되여 약텽시본래목적인 약새생산에 효과가적게되고 시장내의 불당중개인으로말미암아 일사 평판이조치못하엿슴으로 이러한 페풍을 일소하기위하야 지금부터이십여년선에 생긴 한약상조합한약상조합(漢藥商組合))과칠년전전주(전주(全州))에양령시가처음뇌려고할때에 대함키위하야생긴약령&lt;br /&gt;
&lt;br /&gt;
흉회(약령시진흥회(藥令市振興會))가지금은약령시번영회(약령시번영회(藥令市繁榮會))로변경되여 최선의로력을 다하야오며 감독한결과 지금은어느정도까지 통제가되여간다고한다 그리하야 지금이야말로동력(동력(動力)의위력밋해거대한공장뉼이날로늘어남조선의『메드로포리쓰』를만드려는 대구현네과학(현대과학(現代科學))의태반(태반(胎盤))가튼대구의한복판에서 조선의 자랑이라고도할수잇는원시시장(원시시장(原始市塲))의한개가 벌서오늘날의 □제권내에발을듸듸고장차을래일의세계를향하야나가는것은홍미김흔일이다(속(續))&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의유래(由來)&lt;br /&gt;
&lt;br /&gt;
(사(四))&lt;br /&gt;
&lt;br /&gt;
대구지국육사생(大邱支局肉瀉生)&lt;br /&gt;
&lt;br /&gt;
삼백년동안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복잡다단한 필연적 과정을경과하여오며 자본주의 경제의현계단에서의연히그존재가필요하게된대구약령시의발달사는완연히금일경제의발달사(발달사(發達史))라고보지안을수업다 그럼으로여긔특긔할것은 그성실상 순박함이짝이업는 죽말하면 매매하는시람들의아관박대(아관박대(雅冠博帶))라든지 생산품 포장가튼것까지도(물론변천된것도만흐나)삼백년전의 녯날을 그려볼만한순박한이서장에도현대금융자본의붉은혀(설(舌))는내밀기시작하엿다지금부터 시년전엇던 외래지본벌이자긔소유의따에시장의위치를옴기려고 현위치는 도시교통상불편하다는구실로써다방면으로술책을써보앗스나현장소에서긔십년간상권을 잡고잇는 대가들의명렬한반대로그만뜻을일우지못한일도잇다그러면내구약령시를 지배하고 따라전조선의한약상계에우이를삽고잇는 이는누구일가여긔는 누구보다도 김홍조(김홍조(金弘祖))씨를아침수가업다씨는 전선적으로보아 제이위가기를설허할만하다고하며그다음순서업시치면 신태문(신태문(申泰文))김종수(김종수(金宗洙))지이원(심의원(沈義元))리치욱(이치욱(李致旭))두병은(두병은(杜炳殷))김내명(김내명(金乃明))방규진(방규진(方圭鎭))제씨를칠수잇고 그중에도 두병은(두병은(杜炳殷))씨가튼이는여러대를나려오며 사업에 종사하야 그문패는 실로일백오십년 이란력사를가저 대구의 동인당(동인당(同人堂))이란 일홈이잇다&lt;br /&gt;
&lt;br /&gt;
북평(北平)의동인당(同仁堂)은팔백년(八百年)의역사(歷史)가잇슴)그래서 대구의약텽시인긔는 이들의손에 좌우된다하여도과언이아니며 금년의약가는 금재금(김재금(金再禁))에따르는 제불가의폭등과 일중사변(일중사변(日中事變))의영향과중국은가(중국은가(中國銀價))의변동으로인하야소위당재(당재(唐材))는 폭동하엿고 조재(초재(草材))에잇서서 도변조로올은것이 불소하다는바 금후에드 더욱시세는오를무양이라고한다 여긔에당초재를물론하고 시세를 적어보앗스면좃켓스나 약명이한업시만코 날로변동이만흠으로 약렁시세표가 잇다는것만말한후에 특수한고저를보이는 몃가지를 적어보면 당재의원상산약(원상산약(元常山藥))은작년에는 매근에일원륙십전하든것이 금년은 단오십전에폭락되여 이십년레에 처음보는헐가라하며 산수유(산수유(山茱萸))는작년에 매근사십전하든것이 금년은십전에폭락되고 토사자(토사자(兎絲子))가튼것도 작년사오십전에매매되든것이 금년은십전에 폭락되여 자방생산자의 저울(형(衡))에 예긔치못한 광란(광란(狂亂))을보이고잇다고한다&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의장래(將來)&lt;br /&gt;
&lt;br /&gt;
그러면 다음날의약텅시는 엇더케될것인가?이문제는 결코예언자의 심심푸리와가튼 헛된소리는아니다적어도현세계의경제관계 와그에따라 일어나는모든사정이 쇄신된다면 모르지마는현계단의 경제제도가 그량존속되는한에는 세계적으로 한약에대한연구가왕성하여지고한약의권위가나날이놉하가는만큼약텅시의장래는압흐도세계에그일홈이놉하진다고일부인사들이말하고잇는것이그다지허언이아닐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지금은시장의형세가 산만하게생산자가 중개인울거처 도매상에게 팔게되여중간에책취를 당하게된다 하여도 장래는 현시장의대자벌들이주식(주식(株式))이나 혹은학자(합자(合資))의형식으로시장을상설하고도매와 개인생산자사이에 직접취인하게되여 지방경제의 윤택과약초생산의 장려의 약텅시본래의목적을 소개하려는것이 당업자간의 의도(의도(意圖))인 동시에매우현명한 의견인듯하다 그래서참된 대구자랑을 만들고조선의자랑을만들자——(완(完))&lt;br /&gt;
&lt;br /&gt;
==주요 내용 요약==&lt;br /&gt;
유래: 대구의 자랑으로 능금(사과) 대신 약령시를 들며 그 유래를 설명한다. 약령시는 1년에 한두 번 열리는 정기 시장이며, 조선시대 효종(1658년) 때 국가 명령(令)으로 개시된 것이다. 당시 경상도의 정치적 수부였던 대구는 약초 재배에 적합한 기후와 편리한 교통으로 물산 집산의 최적지였다. 궁중에서 쓸 약품을 이곳에서 구하기 위해 감사가 약재를 골라 사약원(司藥院)에 진상한 후, 팔도 약재를 일반 약국에서 구매하여 조선 전역의 환자 치료에 사용하게 한 것이 시초이다.&lt;br /&gt;
&lt;br /&gt;
쇠퇴와 현황: 서구 열강의 동양 침입과 함께 의학 및 약학이 발달하며 한약의 권위가 약해졌고, 약령시는 점차 쇠퇴하였다. 특히 22년 전(1915년경) 신해혁명으로 청황실이 무너지면서 조선 정부에 의뢰하던 막대한 약품 매도 길이 막힌 것이 큰 타격이었다. 최근 전주, 대전 등지에 군소 시장이 개설되어 대구 약령시의 경제적 이익이 감소했지만, 여전히 시장 개설 시에는 많은 약재가 모이고(당재, 초재 등 300여 종), 인근 상권에 호경기를 가져오는 것이다. 당시 약령시의 주요 구성 요소가 부업적 상인 계층으로 변질되고 불량 중개인 문제가 발생하자, 한약상조합과 약령시진흥회(현재 약령시번영회)가 결성되어 통제를 시도하고 있었다.&lt;br /&gt;
&lt;br /&gt;
약재 가격 변동: 당시(1937년) 일중사변(日中事變)의 영향과 중국 은가 변동으로 당재(唐材) 가격이 폭등했지만, 일부 국내 초재(草材)인 산약(山藥), 산수유(山茱萸), 토사자(兎絲子) 등은 폭락하여 생산자들에게 광란(狂亂)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lt;br /&gt;
&lt;br /&gt;
==분석 및 특징==&lt;br /&gt;
역사성 강조: 대구 약령시를 단순한 시장이 아닌 '국가 명령(令)'으로 시작된 역사적 시장으로 규정하며, 정치적, 지리적 배경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시대적 배경 반영: 서양 의학의 도입, 중국 혁명(청 황실 붕퇴), 당시 국제 정세(일중사변, 중국 은가) 등이 시장의 흥망성쇠에 미친 영향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여 식민지 시대의 경제 상황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시장 변화: 전통적인 약재 거래 방식에서 완제품 거래가 늘어나는 등 근대화에 따른 시장의 변화 양상도 포착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원시 시장'의 현대적 생존: 대구 약령시를 '조선의 자랑'이자 '원시 시장' 중 하나로 보면서도, 현대 자본주의 경제권에 발을 디디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평가하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대구(大邱)장연구회(硏究會) 창립(創立)을보고서=&lt;br /&gt;
구지국(大邱支局)&lt;br /&gt;
&lt;br /&gt;
이활(李活)&lt;br /&gt;
&lt;br /&gt;
민중(民衆)의보건운동(保建運動)은 요사이각계인사(各界人士)들의 크다른관심(關心)거리로어듸서 엇더케 무슨방법(方法)으로『억세인조선(朝鮮)』을건설(建設) 할수잇슬가 함에연구(硏究)를거듭하게되엿다회상(回想)하면 조선(朝鮮)에새로운운동경기(運動競技)가 수입(輸入)된지도 일반문화(一般文化)와갓치 벌서 반세기(半世紀)란역사(歷史)를가지고잇다 그중(中)에는 야구(野球)·정구(庭球)·축구(蹴球)·농구등(籠球等)을비롯하야 유도(柔道)·격검(擊劒)·권투등(拳鬪等)모든경기(競技)가들어와서 장족(長足)의진보(進步)도하엿스러니와 세계적무대(世界的舞臺)를향(向)하야 진출(進出)한선수(選手)도업지안타 그러나 그것은극소수(極小數)인동시(同時)에 지금(至今)까지의 조선(朝鮮)의운동경기(運動競技)는 한갓도회(都會)를중심(中心)으로잘어왓다 물론(勿論)다그럿타는것은아니지만은 현하운경기(現下運競技)그것은 조선(朝鮮)이나 혹(或)은다른나라에서라도 학교(學校)를중심(中心)으로발전(發展)되여오는만큼 교내(校內)의『스포—스맨』들은 완연(宛然)『떼파—트』진열장(陳列場)속에서 고객(顧客)을호리는『마네킹』처럼 상품화(商品化)한교육제도하(敎育制度下)에서 달큼하게 그상품(商品)의가격(價格)을놉혀주엇스며 그학교(學校)를버저나와 실사회(實社會)에취직(就職)을하면 역시(亦是)그와갓튼『마네킹』노릇을하여왓다 이러는동안 조선(朝鮮)의운동경기(運動競技)는 그발생(發生)으맹아(萌芽)가 힘것생장(生長)하기도전(前)에현제도(現制度)의 독아(毒牙)에여지(餘地)업는약관(躍關)을당(當)한절대(絕對)의원인(原因)과 그밧게사회(社會) 경제(經濟) 정치적제정세(政治的諸情勢)의착잡(錯雜)한모순(矛盾)이 너무나철업시이운동경기(運動競技)의발달(發達)까지 조해(阻害)하여왓다그러나 노력(勞力)과인내(忍耐)는갑이잇서이때까지외래품(外來品)이라면 아무비판(批判)도업시 실행(實行)하야오든우리도야구(野球)의전원(全員)이일시(一時)에활약(活躍)할수업는폐(廢)와정구(庭球)의시후(時候)에대(對)한불편(不便)과『꼴프』의귀족적(貴族的)인것등(等) 모든운동(運動)의단점(短點)만을빼고 장점(長點)만을취(取)하야 조선적운동(朝鮮的運動)을창출(創出)하려는이이 경성(京城)서는중앙체육연구소(中央體育研究所)가생(生)기고 금반대구(今般大邱)에서『장』연구회(硏究會)가생(生)기게된것이다&lt;br /&gt;
&lt;br /&gt;
장이란북조선(北朝鮮)의궁벽(窮僻)한지대(地帶)의인사(人士)들은 잘알지못할는지모르나이장만은 오래동안 우리조선(朝鮮)으로부터 그들의자손(子孫)인우리들에게부(傅)하아은 국기(國技)의하나이다물론(勿論) 국기(國技)란단순(單純)한의미(意味)로서만필자(筆者)가그것을추장(推獎)하는것은인니다 딸아서 운동(運動)의영향(影響)이문화창조(文化創造)에잇더한역할(役割)을한다는것을새로히논(論)하려는것도안니다&lt;br /&gt;
&lt;br /&gt;
대구지국(大邱支局) 이(李) 활(活)&lt;br /&gt;
&lt;br /&gt;
그러나일반문화(一般文化)가 그지리(地理)와풍토(風土)에영향(影響)되는바만흔것과가티운동경기(運動競技)도 또한그러히다 그것은『필랜드』사람들이『스켓틩』을잘하는것과『낙위(諾威)』사람의『스키-』를잘하는것이라든지『정말(丁抹)』사람의체조(體操)기튼것이 이점(點)을잘실증(實證)하고잇다 그러면조선(朝鮮)에는 조선적(朝鮮的)인자연세력(自然勢力)도 그러하러니와 더욱이 금일(今日)의사회적경제적(社會的經濟的)모든조건(條件)이 조선인(朝鮮人)에적합(適合)한것이안니면 안될것으다 그래서 최소(最少)의노력(努力)으로최대(最大)의 효과(効果)를발현(發現)치안으면안될것이다&lt;br /&gt;
&lt;br /&gt;
아에우리는생각한다 오날날까지조선(朝鮮)에수입(輸入)된운동경기(運動竸技)의종목(種目)은그대(臺)를매거(枚擧)키난(難)하나 그중(中)한가지도 우리에게 적합(適合)한것이업고 더욱이농민(農民)들에게 추장(推獎)할만힌운동(運動)은업섯다 그러나이장만은 오날날까지 그들농민(農民)의손에서전(傳)해왓다 그러면서도그진정가치(眞正價値)를돌낫든것이 오날이야 사계(斯界)의권위제씨(權威諸氏)가 적년연구(積年硏究)를거듭하야 발표(發表)한결과(結果)를보면 운동(運動)으로시 제일망각(第一忘却)치못할생리학상(生理學上)으로보아 전체(全體)가균형적(均衡的)으로활동(活動)되고 경제적(經濟的)으로도 기구(器具)를작만히는데 돈이들지안코 어느곳에서든지『장채』를직만하고『장방울』을다드무면논바닥에서나 밧기운데서라도 할수잇는농민본위(農民本位)의운동(運動)이라고한다 그리고다른운동경기(運動競技)가티『씨—슨』이잇는것도안니고 춘하추동(春夏秋冬)어느때라도 되는경기(競技)인즉 농번기(農繁期)는 못히드라도 농한기(農閑期)갓트면 그들의육체(肉體)를 하련(鍜鍊)하는데 매우적당(適當)한것이다 수(數)만흔경기중(竸技中)에능(能)히경제조건(經濟條件)이 어느정도(程度)까지용인(容認)한다하여도 그들의게생전(生前)듯자못하든말로『핸드뽈』이니『꼴』이니『라인』이니하여보아도 결(决)크그들에게취미(趣味)가잇슬이(理)가만무(萬無)하고취미(趣味)가업스면 그들에게발전(發展)될이(理)도만무(萬無)한것이다 그러나『장』연구회동인(硏究會同人)들의말을들으면경기(竸技)에계산(計算)하는용어(用語)까지도순조선(純朝鮮)말로한다는것의경하(慶賀)할일이다 이『장치기』를국기(國技)로서추장(推獎)하야세계(世界)에널니선전(宣傳)하는것도좃치만은먼저안으로그들이이국기(國技)를직혀왓는만큼 그들에게조직적(組織的)으로보급(普及)하라 그리서조선농민(朝鮮農民)의경기(競技)를만들고 따라 세계(世界)의농민대중(農民大衆)에게 보급(普及)식하라!그래서『장』연구회(硏究會)의본래(本來)의사명(使命)을다하기를바란다(종(終))&lt;br /&gt;
&lt;br /&gt;
==주요 내용 요약==&lt;br /&gt;
배경: 조선에 수입된 야구, 축구, 유도 등 서양식 운동 경기는 학교 중심, 도시 중심으로 발전하며 '상품화'되었고, 농민 등 대중에게 적합하지 않은 것이다.&lt;br /&gt;
&lt;br /&gt;
'장치기'의 가치: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 **'조선적 운동'**을 창출하려는 노력으로 경성에서는 중앙체육연구소가, 대구에서는 '장' 연구회가 생긴 것이다. '장'은 조선의 국기(國技) 중 하나로, 농민의 손에서 전해 내려온 것이다. 생리학적으로 전신 균형 활동이 가능하고, 경제적으로 기구가 필요 없어 비용이 들지 않으며, 논바닥이나 밭에서도 가능하여 농민 본위의 운동이라고 한다. 계절을 타지 않고 농한기에 육체 단련에 매우 적합하며, 경기 용어까지 순 조선말을 사용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연구회의 사명: 연구회 동인들에게 '장치기'를 국기로 추장(추천)하여 세계에 선전하는 것도 좋지만, 먼저 이 국기를 지켜온 농민들에게 조직적으로 보급하여 '조선 농민의 경기'를 만들고 나아가 세계 농민 대중에게 보급해야 한다는 사명을 부여하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분석 및 특징==&lt;br /&gt;
민족주의적 시각: 서구 문물인 스포츠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한국의 전통 운동인 '장치기'의 토착적, 민족적 가치를 재조명하려는 의도가 뚜렷한 것이다.&lt;br /&gt;
&lt;br /&gt;
대중성/실용성 강조: '장치기'의 장점을 경제적 부담 없음, 장소 제약 없음, 계절 제약 없음, 쉬운 용어 등 농민 대중에게 적합한 실용성에 초점을 맞춰 설명하고 있다.&lt;br /&gt;
&lt;br /&gt;
'마네킹' 비유: 현대 교육 제도가 배출하는 스포츠맨을 '떼파-트 진열장의 마네킹'에 비유하며, 당시 상업화된 교육 및 스포츠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드러내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노신추도문(魯迅追悼文)=&lt;br /&gt;
(일(一))&lt;br /&gt;
&lt;br /&gt;
이(李) 육(陸) 사(史)&lt;br /&gt;
&lt;br /&gt;
『아(阿)Q정전(正傳)』의 작자(作者)로서 세계적작가(世界的作家)이며 중국신문학(中國新文學)의 최고봉(最高峰)인 노신(魯迅)이지난십구일(十九日) 오전오시(午前五時)에상해(上海)에서 숙아(宿疴)로 영면(永眠)하엿다는 실음(實音)이전(傳)한지 삼일(三日)되는날에 우리는 간단(簡單)한일문(一文)을 비러 삼가추도(追悼)의뜻을 표(表)하거니와 만년(晩年)에그의 정치적불우(政治的不遇)로인(因)하야 문학자(文學者)로서의 성명(聲名)조차가 우리에게 널니퍼지지못한것을 더유감(遺憾)으로생각한다.　　　　 (일(一) 기(記) 자(者))&lt;br /&gt;
&lt;br /&gt;
일구삼이연육월초(一九三二年六月初) 어느토요일(土曜日)아츰이엿다 식관(食舘)에서나온 나와M은 네거리의 담배가가에서조간신문(朝刊新聞)을 사서들고 근육신경(筋肉神經)이떨니도록 굴근활자(活字)를 함숨에나려읽은것은 당시중국과학원부주석(當時中國科學院副主席)이요 민국혁명(民國革命)의 원로(元老)이든양행불(楊杏佛)이 남의사원(藍衣社員)에게 암살(暗殺)을당(當)하엿다는 기사(記事)이엿다.&lt;br /&gt;
&lt;br /&gt;
우리들은 거리마다 삼엄(森嚴)하게늘어선 불란서공무국(佛蘭西工務局) 순경(巡警)들의예리(銳利)한눈초리를 등으로하나 갓득늣기면서 여반로(侶伴路)의 서국(書局)까지을동안은 침묵(沈默)이 계속(繼續)되엿다&lt;br /&gt;
&lt;br /&gt;
문(門)안에 들어서자마자 편집원(編輯員)R씨(氏)는 우리들에게 다음과가튼말을 들여주엇다.&lt;br /&gt;
&lt;br /&gt;
중국좌익작가연맹(中國左翼作家聯盟)의 발안(發案)에의(依)하야 전세계(全世界)의 진보적(進步的)인 학자(學者)와 작가(作家)들이 상해(上海)에모혀서중국(中國)의 문화(文化)를 옹호(擁護)할대회(大會)를그해팔월(八月)에 갓게 된다는것과이에 불안(不安)을 늣기는 국민당통치자(國民黨統治者)들이 먼저 진보적작가진영(進步的作家陣營)의 중요분자(重要分子)인 반재년(潘梓年)(현재남경유폐(現在南京幽廢))과 인제는 고인(故人)이된 여류작가(女流作家) 정영(丁玲)을 체포(逮捕)하여행방(行方)을 불명(不明)케한것이며 여기동정(同情)을 가지는 송경령여사(宋慶齡女史)를 중심(中心)으로한 일련(一聯)의 자유주의자(自由主義者)들과 작가연맹(作家聯盟)이 맹렬(猛烈)한 구명운동(救命運動)을한사실(事實)이며 그것이 국민당통치자(國民黨統治者)들의 눈쌀에 거슬려서 양행불(楊杏彿)이 희생(犧牲) 된것과 그외(外)에도 송경령(宋慶齡) 채원(蔡元) 배(培) 노신등등(魯迅等等) 상해(上海)안에서만삼(三) 십명(十名)에갓가운 지명지사(知名之士)들이 남(藍) 의사(衣社)의『뿔랙·리스트』에 올라잇 다는것이엿다.&lt;br /&gt;
&lt;br /&gt;
그리고 그뒤삼일(三日)이 지난후(後)R씨(氏)와 내가탄자동차(自動車)는 만국빈의사(萬國殯儀社)아페다엇다,간단(簡單)한 소향(燒香)의예(禮)가 끗나고도라설때 젊은두여자(女子)의수원(隨員)과함게드러오는송경령여사(宋慶齡女史)의일행(一行)과가티 연회색(軟灰色)두루막에 검은『마괘아(馬掛兒)』을 입은중년(中年)늙은이생화(生化)에 싸인관(棺)을 붓들고 통곡(痛哭)을하든그를 나는문득 노신(魯迅)인것을알엇스며 엽헤섯든 R씨(氏)도 그가노신(魯迅)이란것을 말하고난 십분(十分)쯤뒤에 R씨(氏)는나를 노신(魯迅)에게소개(紹介)하여주엇다&lt;br /&gt;
&lt;br /&gt;
그때노신(魯迅)은 R씨(氏)로부터 내가조선청년(朝鮮靑年)이란것과 늘한번대면(對面)의기회(機會)를가지려고 햇드란말을듯고외국(外國)의선배(先輩)압히며 처소(處所)가 처소(處所)인만치 다만 근신(謹愼)과공손(恭遜)할뿐인나의손을 다시한번 잡아줄때는그는매우 익숙하고 친절(親切)한친구이엿다&lt;br /&gt;
&lt;br /&gt;
아!그가벌서 오십육세(五十六歲)를일기(一期)로 상해시고탑구호(上海施高塔九號)에서 영서(永逝)하엿다는 부보(訃報)를바들때에 암연(暗然)한줄기 눈물을지우느니 엇지조선(朝鮮)의 한사람후배(後輩)로써 이붓을잡는나뿐이랴&lt;br /&gt;
&lt;br /&gt;
(이(二))&lt;br /&gt;
&lt;br /&gt;
이육사(李陸史)&lt;br /&gt;
&lt;br /&gt;
중국문학사상(中國文學史上)에남긴 그의 위치(位置)『아(阿)Q의 정전(正傳)을 다읽고낫슬때나는 아즉까지 아(阿)Q의 운명(運命)이걱정되여 못견듸겟다』고한『로망·로—랑』의 말과가티 현대중국문학(現代中國文學)의 아버지인 노신(魯迅)을&lt;br /&gt;
&lt;br /&gt;
이해(理解)하기 위(爲)해서는 우리는 먼저 아(阿)Q의 정전(正傳)을 이해(理解)하지안흐면 안된다 그러나 지금의 중국(中國)의 아(阿)Q들은 벌서『로망·로—라』으로하야금 그운명(運命)을 걱정할 필요(必要)는 업시되엿다실(實)로 수만흔 아(阿)Q들은 벌서 자신(自身)들의 운명(運命)을 열어갈길을노신(魯迅)에게서배웟다 그래서중국(中國)의 모든근로층(勤勞層)들은 남경로(南京路)의『아스필트』가자신(自身)들의 발미테 흔들리는것을늣기며 시고탑로신촌(施高塔路新邨)의구호(九號)로그들이가젓든 위대(偉大)한문호(文豪)의최후(最後)를애도(哀悼)하는마음들은 황포탄(黃浦灘)의붉은파도(波濤)와가티 밀려가고잇는것이다&lt;br /&gt;
&lt;br /&gt;
그럼으로 아(阿)Q시대(時代)를 고찰(考察)하여보는데따라서 노신정신(魯迅精神)의 삼단적변천(三段的變遷)과아울러 현대중국문학(現代中國文學)의 발전과정(發展過程)을 알어보는것도그를추억(追憶)하는의미(意味)에서 그다지 허무(虛無)한 일은아닐것이다,&lt;br /&gt;
&lt;br /&gt;
중국(中國)에는 고래(古來)로 소설(小說)이라는오늘날우리가 보는것과가튼 완전(完全)한예술적형태(藝術的形態)는 존재(存在)하지못햇다 삼국연의(三國演義)나 수호지(水滸誌)가아니면홍루몽(紅樓夢)쯤이잇섯고 다소(多少)의전기(傳記)가잇섯을뿐으로서 일반교양(一般敎養)잇는집자제(子弟)들은 과거제도(科擧制度)에 화(禍)를바더문어체(文語體)의&lt;br /&gt;
&lt;br /&gt;
고(古)&lt;br /&gt;
&lt;br /&gt;
문(文)만숭상(崇尙)하고백화소설(白話小說)가튼것은속인(俗人)의할일이라햐야나치아는하편소위문단(所謂文壇)은당송팔가(唐宋八家)와팔반(八般)의혼합체(混合體)인상성파(相城派)와사기당(思綺堂)과 원수원(袁隨園)의유파(流派)를따라가는 사륙변체문(四六騈體文)과황산곡(黃山谷)을본존(本尊)으로하는 강서파등등(江西派等等)이 당시정통파(當時正統派)의문학(文學)으로서 과장(誇張)과 허위(虛偽)와 아유(阿諛)로서 고전문학(古典文學)을 모방(模倣)한데지나지못하엿스며 새로운사회(社會)를 창생(創生)할하등(何等)의 힘도가지지못한것은 미루어알기도 어렵지안흔 분위기(雰圍氣)속에 중국문학사상(中國文學史上)에 찬연(燦然)한봉화(烽火)가 일어난것은일구일오년(一九一五年) 잡지(雜誌)『신청년(新靑年)』의 창간(創刊)이그것이다&lt;br /&gt;
&lt;br /&gt;
이것이처음발간(發刊)되자 당시(當時)『아메리카』에잇든호적지박토(胡適之博土)는『문학개량추의(文學改良蒭議)』라는『문학혁명론(文學革命論)』을일구일칠년신연호(一九一七年新年號)에 게재(揭載)하야진독수(陳獨秀)가 이에찬의(賛意)를표(表)하고 북경대학(北京大學)을 중심(中心)으로한 진보적(進步的)인교수(敎授)들이 합류(合流)하게되자 종래(從來)의고문가(古文家)들은 이운동(運動)을방해(防害)코저 가진야비(野卑)한 정치적수단(政治的手段)을 써도보앗스나 일구팔년사월호(一九八年四月號)에 노신(魯迅)의『광인일기(狂人日記)』란 백화소설(白話小說)이&lt;br /&gt;
&lt;br /&gt;
발(發)&lt;br /&gt;
&lt;br /&gt;
표(表)되엿슬때는 문학혁명운동(文學革命運動)은 실천(實踐)의거대보무(巨大步武)를옴기게되고 벌서고문가(古文家)들은 그추악(醜惡)한꼬라를 감주지안흐면안되엿다는것은 그후(後)얼마뒤에 노신(魯迅)이광동(廣東)에갓슬때에어&lt;br /&gt;
&lt;br /&gt;
떤흥분(興奮)한청년(靑年)은 그를마지하는문장(文章)속에『광인일기(狂人日記)』를 처음읽엇슬때 문학(文學)이란것이 무엇인지몰랏든나는 차차읽어나려가면서이상(異常)한흥분(興奮)을 늣겻다 그래서 동무를만나기만하면 곳붓들고말하기를——중국(中國)의문학(文學)은 이제바야흐로 한시대(時代)를 짓고잇다 그대는『광인일기(狂人日記)』를 읽어보앗는가 또거리를거러가면 길가는사람이라도붓들고 내의견(意見)을발표(發表)하리라고생각한적도잇섯다……』(노신재광동(魯迅在廣東))&lt;br /&gt;
&lt;br /&gt;
이문제(問題)의소설(小說)『광인일기(狂人日記)』의내용(內容)은 한개망상광(妄想狂)의 일기체(日記體)의소설(小說)로서 이주인공(主人公)은 실(實)로대담(大膽)하게또명확(明確)하게 봉건적(封建的)인 중국구사회(中國舊社會)의 악폐(惡弊)를통매(痛罵)한다 자기(自己)의 이웃사람은 물론(勿論)말할것도업고 특(特)히자기가정(自己家庭)을 격렬(激烈)히 공격(攻擊)하는것이다 가정(家庭)—가족제도(家族制度)라는것이중국봉건사회(中國封建社會)의 사회적단위(社會的單位)로서일반(一般)에열마나한 해독(害毒)을끼처왓는가.봉건적가족제도(封建的家族制度)는 고형화(固型化)한유교류(儒敎流)의&lt;br /&gt;
&lt;br /&gt;
종(宗)&lt;br /&gt;
&lt;br /&gt;
법사회관념하(法社會觀念下)에 당연(當然)히붕괴(崩壞)돠여야할것이면서 붕괴(崩壞)되지못하고 근대적사회(近代的社會)의성장(成長)에 가장근본적(根本的)인 장애(障碍)로되여잇는 날근도덕(道德)과 인습(因襲)을 여지(餘地)업시 통매(痛罵)햇다,이에『광인일기(狂人日記)』중(中)에 한절(節)을 초(抄)하면『나 는 역사(歷史)를 뒤적거려 보앗다 역사(歷史)란건 어느시대(時代)에나 인의(仁義) 도덕(道德)이란몃줄로 치더치덕씨여 저잇섯다 나는 밤잠도안자고 딍굴딍굴러가며 생각하여보 앗스나 겨우글자와 글자사이 에서『사람을먹는다』는 몃자 가쓰여잇섯슬뿐이엿다』&lt;br /&gt;
&lt;br /&gt;
이가티추악(醜惡)한 사회면(社會面)을폭로(暴露)한다음 오는시대(時代)의건설(建設)은 젊은사람들의손에 맛걱저야한다는것을암시(暗示)하면서 이소설(小說)의일편(一篇)은『어린이를구(救)하자』는 말로서끗을막엇다.실(實)로이한말은 당시(當時)의『어린이』인 중국청년(中國靑年)들에게는 사상적(思想的)으로는『폭탄선언(暴彈宣言)』이상(以上)으로 충격(衝擊)을주엇스며이러한작품(作品)이 백화(白話)로쓰여지는데 따라 문학혁명(文學革命)이완전(完全)히승리(勝利)의 개가(凱歌)를 부르게된공적(功績)도 태반(太半)은노신(魯迅)에 돌려야하는것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삼(三))&lt;br /&gt;
&lt;br /&gt;
이육사(李陸史)&lt;br /&gt;
&lt;br /&gt;
『광인일기(狂人日氣)』의다음 연속(連續)해나온작품(作品)으로『공을사(孔乙巳)』『약(藥)』『명일(明日)』『일개소사건(一個小事件)』『두발적고사(頭髮的故事)』『풍파(風波)』『고향(故鄕)』등(等)은모다 신청년(新靑年)을통(通)해서세상(世上)에물의(物議)를 이르켯스나 그후일구이일년(後一九二一年) 북경신보문학부간(北京新報文學副刊)에그유명(有名)한『아(阿)Q정전(正傳)』이 연재(連載)되면서부터는 노신(魯迅)은자타(自他)가공인(共認)하는 문단제일인적작가(文壇第一人的作家)엿다.&lt;br /&gt;
&lt;br /&gt;
그리고 이러한대작(大作)은 모다신해혁명전후(辛亥革命前後)의&lt;br /&gt;
&lt;br /&gt;
봉(封)&lt;br /&gt;
&lt;br /&gt;
건사회(建社會)의생활(生活)을 그린것으로 어떠케필연적(必然的)으로 붕괴(崩壞)하지안흐면안될 특징(特徵)을가젓는가를묘사(描寫)하고 어떠케새로운사회(社會)를 살어갈가를 암시(暗示)하고잇다.뿐만아니라 당시(當時)의혁명(革命)과 혁명적(革命的)인사조(思潮)가 민중(民衆)의심리(心理)에 생활(生活)의『데테일슨』에 어떠케표현(表現)되는가를 가장『레알』하게묘사(描寫)한것이다.더구나 그는 농민작가(農民作家)라고할만치 농민생활(農民生活)을그리는데 교묘(巧妙)하다는것도 한가지조건(條件)이되겟지만은 그의소설(小說)에는주장(主張)이개념(槪念)에 흐른다거나 조금도무리(無理)가업는것은 그의작가적수완(作家的手腕)이 탁월(卓越)하다는것을 말하지안홀수업다.&lt;br /&gt;
&lt;br /&gt;
그리고 그의작품(作品)은 늘 농민(農民)을주인공(主人公)으로하는것과 때로는『인테리』일지라도 예(例)를들면『공을사(孔乙巳)』의 공을사(孔乙巳)나『아(阿)Q정전(正傳)』의아(阿)Q가모다 일맥(一脈)이상통(相通)하는 성격(性格)을가지는것이니 공을사(孔乙巳)는 구시대(舊時代)의지식인(知識人)으로 시대(時代)에떠러저서 무슨일에도 쓰여지지못하고기품(氣品)만은노펏스나 생활력(生活力)은업고걸인(乞人)이되야 선술집술상대(臺)에 일금십구조(一金十九吊)의주채(酒債)가 어느때까지쓰여저잇는대로 언제인지&lt;br /&gt;
&lt;br /&gt;
행(行)&lt;br /&gt;
&lt;br /&gt;
방(方)이 불명(不明)된채로 나중에죽어젓든것이라든지『룸펜』농민(農民)인 일용노동자아(日傭勞働者阿)Q가 또한 쑥스러운년석으로혁명혁명(革命革命)떠들어놋코는 그것이몹시유쾌해서 반취(半醉)한기분(氣分)이 폭동대(暴動隊)의일군(一群)에 참가(參加)는하려고하엿스나 결국(結局)헛풍만치고 아무것도못하다다가 때마츰 일어난 폭도(暴徒)의약탈사건(掠奪事件)에 도당(徒黨)으로오해(誤解)되여(피(彼)의평소(平素)삼가지못한 언동(言動)에의(依)하야)피살(被殺)되는 아(阿)Q의성격(性格)은 그때중국(中國)의 누구라도가 전부혹(全部或)은일부분식(一部分式)은 소유(所有)하고잇섯든것이다다시말하면 아(阿)Q나공을사(孔乙巳)가모다사고(思考)와행동(行動)이 루—즈하고 확호(確乎)한한개의 정신(精神)도업스며 우약(愚弱)하면서도 몹시건방지고 남에게한개쥐여질리면 아무런반항(反抗)도못하면서 남이자신(自身)을 연민(憐憫)하면 제도량(度量)이커서 남이못덤비는것이라고제대로도취(陶醉)하야 남을 되는대로해(害)치는 무지(無知)하고우수면서도 가엽고 괴팩스러운것을 노신(魯迅)은그『레알리스틕』한문장(文章)으로폭로(暴露)한것이 특징(特徵)이엿스니 당시(當時)『아(阿)Q정전(正傳)』이발표(發表)될때&lt;br /&gt;
&lt;br /&gt;
평(平)&lt;br /&gt;
&lt;br /&gt;
소노신(素魯迅)과 교분(交分)이좃치못한사람들은 모다자기(自己)를모—델로 고의(故意)로쓴것이라고들 떠드는자(者)가잇은것을 보아도알수가잇는것이다&lt;br /&gt;
&lt;br /&gt;
그래서당시중국(當時中國)은 시대적(時代的)으로『아(阿)Q시대(時代)』이엿스며 노신(魯迅)의『아(阿)Q정전(正傳)』이 발표(發表)될때는 비평계(批評界)를비롯하야 일반지식군(一般知識群)들은『아(阿)Q상(相)』이라거나『아(阿)Q시대(時代)』라는말을평상대화(平常對話)에사용(使用)하기를 항다반(恒茶飯)으로하게된것은 중국문학사상(中國文學史上)에남겨노흔노신(魯迅)의 위치(位置)를 짐작하기에 조흔 한개의재료(材料)이거니와그의작가(作家)로서의 태도(態度)를통(通)하야 일관(一貫)하여잇는 노신정신(魯迅精神)을 다시한번음미(吟味)해보는데 적지안흔흥미(興味)를갓게된다는것은 오늘날우리의조선문단(朝鮮文壇)에는 누구나할것업시 예술(藝術)과정치(政治)의 혼동(混同)이니 분립(分立)이니하야 문제(問題)가엇지보면 결말(决末)이난듯도하고 어찌보면 미해결(未解决)그대로 잇는듯도한 현상(現狀)인데 노신(魯迅)가티 자기신념(自己信念)이 구든사람은이예술(藝術)과정치(政治)란것을 어떠케해결(解决)하엿는가?이문제(問題)는 그의작가(作家)로서의 출발점(出發點)부터 구명(究明)해야한다.&lt;br /&gt;
&lt;br /&gt;
노신(魯迅)은&lt;br /&gt;
&lt;br /&gt;
본(本)&lt;br /&gt;
&lt;br /&gt;
내의사(來醫師)가 되려고하엿다 그것은자기(自己)의『할일』이 무엇이라는것을 알엇기때문이엇다 물론(勿論)그때의 자기(自己)의『할일』이란것은 민족개량(民族改良)이라는 신념(信念)이엿든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후년(後年)『납함(吶喊)』서문(序文)에 다음가티써다.&lt;br /&gt;
&lt;br /&gt;
『나의학적(學籍)은 일본(日本)어느 지방(地方)의 의학전문학교(醫學專門學校)에 두엇다 나의 꿈은 이것으로 매우 아름답 고 만족(滿足)햇다 졸업(卒業)만하고 고(故) 국(國)에 도라오면 아버지와가티 치료(治療)못하는 병인(病人)을살리고 전(戰) 쟁(爭)이나면 출정(出征)도하려니와 국(國) 인(人)의 유신(維新)에대(對)한 신앙(信仰)에까지 나어갈것……』이라고&lt;br /&gt;
&lt;br /&gt;
이것은물론(勿論) 소년(少年)다운노신(魯迅)의로맨틕한 인도주의적흥분(人道主義的興奮)이엿겟지만은 이꿈도결국(結局)은 깨여지고말엇다.&lt;br /&gt;
&lt;br /&gt;
——의학(醫學)은결(决)코 긴요(緊要)하지안타 우약(愚弱)한 국민(國民)은 체격(體格)이 아모 리 조타고해도 또 아모리강(强) 장(壯)해도 무의미(無意味)한 구경거리나 또는 구경군이 되는박게는아 무것도아니다—중략(中略)—그럼으로 긴요(緊要)한것은 그들을 정신적(精神的)으 로 잘개조(改造)할것은 무엇일가나 는그때당연(當然) 문예(文藝)라고생각햇다 그리고 문예운동(文藝運動)을 제창(提唱)하기 로햇다(납함서문(吶喊序文))&lt;br /&gt;
&lt;br /&gt;
이리하야 그가 당시동경(當時東京)에망명(亡命)해잇는 중국(中國)사람들의 기관지(機關紙)인『절강조(浙江潮)』『하남(河南)』등(等)에 쓰든과학사(科學史)나 진화론(進化論)의 해설(解說)을 집어치우고 문학서적(文學書籍)을 번역(飜譯)한것은희랍(希臘)의 독립운동(獨立運動)을 원조(援助)한『빠이론』과 파란(波蘭)의복수시인(復讐詩人)『아담·미케뷧치』『향가리』의 애국시인(愛國詩人)『베트피·산더—』『필립핀』의문인(文人)으로 서반아정부(西班牙政府)에 사형(死刑)바는『리샬』등(等)의 작품(作品)이엿다.&lt;br /&gt;
&lt;br /&gt;
(사(四))&lt;br /&gt;
&lt;br /&gt;
이육사(李陸史)&lt;br /&gt;
&lt;br /&gt;
그리고이것은 노신(魯迅)의 문학행정(文學行程)에잇서서 가장초기(初期)에 속(屬)하는것이지만은 이러한번역(飜譯)까지라도그의 일정(一定)한목적(目的) 즉정치적목적(即政治的目的)미테 수행(遂行)된것을 엿볼수잇는것이며 우에말한『광인일기(狂人日記)』의『어린이를구(救)하자』는말도 순결(純潔)한 청년(靑年)들에의(依)하야 새로운중국(中國)을 건설(建設)하자는 그의이상(理想)을&lt;br /&gt;
&lt;br /&gt;
단적(端的)으로 고백(告白)한것으로써 이말은당시일반청년(當時一般靑年)들에게 무거운 책임감(責任感)을깨닷게한것은물론(勿論) 이래기천년(爾來幾千年)동안의 봉건사회(封建社會)로부터 청년(靑年)을해방(解放)하랴는 슬로—간으로 널리쓰여젓고 사실(事實)그뒤의 중국청년학생(中國靑年學生)들은 모든대중적사회운동(大衆的社會運動)의최전선(最戰線)에서 활발과감(活潑果敢)한 지도(指導)와조직(組織)을하엿스며 그유명(有名)한 오사운동(五四運動)이나 오주운동(五州運動)이나 국민혁명(國民革命)까지도 늘최전선(最前線)에서서 대중(大衆)을지도(指導)한것은 이들청년학생(靑年學生)이엿다&lt;br /&gt;
&lt;br /&gt;
그럼으로 노신(魯迅)에잇서서는 예술(藝術)은정치(政治)의 노예(奴隸)가 아닐뿐아니라 적어도예술(藝術)이 정치(政治)의 선구자(先驅者)인 동시(同時)에혼동(混同)도 분립(分立)도아닌즉(即) 우수(優秀)한작품(作品) 진보적(進步的)인 작품(作品)을 산출(產出)하는데만 문호(文豪) 노신(魯迅)의지위(地位)는노퍼갓고 아(阿)Q도 여기서비로소탄생(誕生)하엿스며 일세(一世)의 비평가(批評家)를도 감(敢)히 그에게는 함부로 머리를 들지못하엿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여기에 한가지 조흔예(例)가잇다 일구이팔년경(一九二八年頃) 무한(武漢)을쪼겨와서 상해(上海)에서 태양사(太陽社)를조직(組織)한 청년비평가(青年批評家) 전행촌(錢杏村)이 때마춤 푸로문학론(文學論)이 드셀때인만큼 노신(魯迅)을 대담(大膽)하게&lt;br /&gt;
&lt;br /&gt;
공격(攻擊)을 시작(始作)해보앗다그소론(所論)에 의(依)하면노신(魯迅)의 작품(作品)은 비계급적(非階級的)이다 아(阿)Q에게어데 계급성(階級性)이잇느냐는것이다.&lt;br /&gt;
&lt;br /&gt;
물론(勿論)그것은 정당(正當)한말이다,노신(魯迅)의작품(作品)에서 우리는눈딱고보아도 푸로레타리아적특성(的特性)은 조금도 볼수가 업는것은 사실(事實)이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우리가 한사람의작품(作品)을 비평(批評)할때는 그시대적배경(時代的背景)을고려(考慮)하지안흘수는업는것이니 노신(魯迅)이작가(作家)로활동(活動)을 하고잇슬때는중국(中國)에는 오늘날우리가 정의(定義)를나릴수잇는 푸로레타리아는 업슬뿐아니라 그때쯤은 뿌르조아민주주의적(民主主義的)인 정치사조(政治思潮)조차도아즉계선(界線)이분명(分明)하지못하엿다는것은뿌르조아혁명(革命)이라는 소위국민혁명(所謂國民革命)도 정직(正直)하게말하자면 사오운동(四五運動)을 전초전(前哨戰)으로한것만큼 여기서 역시중국(亦是中國)의 비상가(批詳家)인병신(丙申)은자미잇는말을하고잇다&lt;br /&gt;
&lt;br /&gt;
『그가현재(現在) 중국좌익작가연맹(中國左翼作家聯盟)을지지(支持)하고잇다해서 그의『사오(四五)』전후(前後)의&lt;br /&gt;
&lt;br /&gt;
작품(作品)을 푸로문학(文學)이라고 지목(指目)할것은아니&lt;br /&gt;
&lt;br /&gt;
다 그러나 그를우수(優秀)한 농민작가(農民作家)라고 하는것이 타당(妥當)타고—』그러타 이말은 어느정도(程度)까지&lt;br /&gt;
&lt;br /&gt;
정당(正當)에 가까운말로서 그를푸로작가(作家)가아니고 농민작가(農民作家)라고해서작가노신(作家魯迅)의 명예(名譽)를 더럽힐조건(條件)은 되지못하는것이다 다만문제(問題)는 그가얼마나 창작(創作)에 잇서서진실(眞實)하게 명확(明確)하게 묘사(描寫)하는태도(態度)를 가지는가 그의한말을 써보기로하자&lt;br /&gt;
&lt;br /&gt;
『——현재(現在) 좌익작가(左翼作家)는 훌륭한자신(自身)들의 문학(文學)을 쓸수잇슬가?생각컨대 이것은 매우곤란(困難)하다.현재(現在)의 이런 부류(部類)의 작가(作家)들은 모다『인테리』다 그들은 현실(現實)의 진실(眞實)한 정형(情形)은쓸려고해도 용이(容易)치안타 어떤사람이 일즉 이런 문제(問題)를제출(提出)한것이잇섯다『작가(作家)가 묘사(描寫)하는것은 반드시 자기(自己)가 경험(經驗)한것이라야만될것인가?그러나 그는 스스로 답(答)하기를반드시 안그래도조타웨러러냐하면 그들은 잘 추찰(推察)할수가잇스므로 절도(窃盜)하는장면(塲面)을 묘사(描寫)하랴면 작가(作家)는 반드시 자신(自身)이 절도(窃盜)질할 필요(必要)도업고 간통(姦通)하는&lt;br /&gt;
&lt;br /&gt;
장면(塲面)을 묘사(描寫)할 필요(必要)를늣길때 작가(作家) 자신(自身)이간통(姦通)할 필요(必要)도 업다고』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작가(作家)가 구사회(舊社會)속에서 생장(生長)해서그 사회(社會)의 모든 일을 잘알고 그사회(社會)의 인간(人間)들에게 익숙해저서 잇는때문에 추찰(推察)이되는것이다 그러나 종래(從來)아무런 관계(關係)도업는새사회(社會)의 정형(情形)과인물(人物)에 대(對)해서는 작가(作家)가무능(無能)하다면 아마그릇된 묘사(描寫)를할것이다 그럼으로 푸로문학가(文學家)는 반드시 참된현실(現實)과 생명(生命)을 가티하고 혹(或)은 보다기피현실(現實)의맥박(脈搏)을 감수(感受)하지안흐면 안된다고하면서 또다시말을 계속(繼續)하는것이다.&lt;br /&gt;
&lt;br /&gt;
그러나구사회(舊社會)를 조그만치공격(攻擊)하는작품(作品)일지라도 만약(萬若)그결점(缺點)을 분명(分明)히모르고 그병근(病根)을투철(透澈)히파악(把握)치못하면 그것은유해(有害)할뿐이다 애석한일이나마현재(現在)의푸로작가(作家)들은 비평가(批評家)까지도 왕왕(往往) 그것을못한다 혹사회(或社會)를 정시(正視)해서 그진상(眞相)을 알려고도안코 그중(中)에는 상대자(相對者)라고 생각하는편의 실정(實情)도알려고하지안는다.&lt;br /&gt;
&lt;br /&gt;
(오(五))&lt;br /&gt;
&lt;br /&gt;
이육사(李陸史)&lt;br /&gt;
&lt;br /&gt;
차근(車近)한 예(例)로는 얼마전 모지상(某紙上)에 중국문학계(中國文學界)를 비평(批評)한문장(文章)을 한편(篇)보앗는데 중국문학계(中國文學界)를 삼파(三派)에 난워서 먼저창조파(創造派)를 들어 푸로파(派)라하야매우상세(詳細)하게 논급(論及)하고 다음어사사(語絲社)를 소(小)뿌르파(派)라고 조그만치 말한후(後)&lt;br /&gt;
&lt;br /&gt;
신월사(新月社)를 뿌르문학파(文學派)라 해서 겨우 붓 을 대다가만 젊은비평가(批評家)가잇 섯다 이것은 젊은기질(氣質)의 상(相) 대자(對者)라고 생각는파(派)에 대(對)해서 는 무어세(細)□□□고구(考究)할필요(必要)가 업다는뜻을 표명(表明)한것이다 물(勿) 논(論)우리는 서적(書籍)을볼때 상대자(相對者) 의것을 보는것은 동파(同派)의것을 보는안심(安心)과 유쾌(愉快)와 유익(有益)한데 밋치지 못하는것은 사실(事實)이다 그러나 만약(萬若) 일개전투자(一個戰鬪者)라면 나는 생각컨대 현실(現實)과 상대(相對) 자(者)를 이해(理解)하는 편의상(便宜上) 보담 만은 당면(當面)의 상대자(相對者)에 대(對)한 해부(解剖)를 필요(必要)로 하지안으면안 될것이다.옛것을 분명(分明)히 알 고 새로운것에 간도(看到)하고 과(過) 거(去)를 요해(了解)하야 장래(將來)를 추단(推斷) 하는데서만 우리들의 문학적(文學的) 발전(發展)은 희망(希望)이잇다 생각건대 이것만은 현재(現在)와 가튼 환경(環境) 에잇는 작가(作家)들은 부단(不斷)히 노(努) 역(力)할것이고 그래야만 참된작(作) 품(品)이 나오는것이다』라 고&lt;br /&gt;
&lt;br /&gt;
이간단(簡單)한 몃마듸만히 문호노신(文豪魯迅)의 창작(創作)에 대(對)한『모랄』인것이다 이얼마나 우리의 뼈에 사무치고도 남을만한시사(示唆)인고!이리해서&lt;br /&gt;
&lt;br /&gt;
현대중국문단(現代中國文壇)의부(父)이며비평가(批評家)의비평(批評)으로서자타(自他)가 그지위(地位)를 함께긍정(肯定)하든그의작가(作家)로서의 생애(生涯)는 너무나쩔으것이엿스니 일구이육연삼월(一九二六年三月)『이혼(離婚)』이란작품(作品)을 최후(最後)로남긴그는 교수(敎授)로서 작가(作家)로서의 화려(華麗)한 생애(生涯)는 종언(終焉)을고(告)하지 안흐면안될때가왓다 그는 지금부터『손으로쓰기보다는 발로 다라나기가 더밧벗다』&lt;br /&gt;
&lt;br /&gt;
일구이육년(一九二六年) 북양군벌(北洋軍閥)을 배경(背景)오로한 안복파(安福派)의수령(首領) 단기서(段祺瑞)의정부(政府)는 급진적(急進的)인좌파(左派)의 교수(敎授)와우수(優秀)한 지식분자오십여명(知識分子五十餘名) 체포령(逮捕令)을 나렷다 우리노신(魯迅)은 이오십명중(五十名中)의 한사람이엿다 그것은일구이사년(一九二四年) 국민당(國民黨)의 연아용공책(聯俄容共策)이 결정(决定)되야그익년(翌年)가을『뽀로된』등(等)이고문(顧問)으로광동(廣東)에오고『전국민적공동전선(全國民的共同戰線)』이엿든 국민혁명(國民革命)의제일계단(第一階段)인 광동시기(廣東時期)에는 푸로레타라아의 동맹자(同盟者)는 농민도시빈민(農民都市貧民) 소(小)뿌로지식계급(知識階級) 국민적(國民的)뿌르조아지—엿다』&lt;br /&gt;
&lt;br /&gt;
그래서 급진교수(急進敎授)들은 교육부총장(敎育部總長) 군벌정부(軍閥政府)를 육박(肉迫)하엿스며이러한&lt;br /&gt;
&lt;br /&gt;
신흥세력(新興勢力)에 낭패(狼狽)와공포(恐布)를 늣긴군벌정부(軍閥政府)는 이러한교수(敎授)들과 학생(學生)들에게체포령(逮捕令)을나리고 학생(學生)들의행렬(行列)은정부위병(政府衛兵)들의 발포(發砲)로인(因)하야 남여수백여명(男女數百餘名)의 사상자(死傷者)가낫다 그때노신(魯迅)은 북경동교민항(北京東交民巷)의 공사관구역(公使舘區域)의 외국인병원(外國人病院)이나 공장(工塲)안으로 도라단이며 찬물로기아(飢餓)를 참아가면서도 신문(新聞)과 잡지(雜誌)에 기고(寄稿)를하야 군벌정부(軍閥政府)를 맹렬(猛烈)히 공격(攻擊)하얏다 그중(中)에도『국민이래(國民以來) 최암흑일(最暗黑日)에지(誌)』하엿다는 명문(名文)은 단기서(段祺瑞)로하여금 의자(椅子)에나려안게되엿다&lt;br /&gt;
&lt;br /&gt;
——붓으로쓰헛소리는 피로쓴 사실(事實)을 만착(瞞着)하지못한다——중(中) 약(略)——붓으로쓴것이 무슨힘이 잇스랴 실탄(實彈)을쏘는것은 오즉 청년(靑年)의피다(속화개집(續華盖集))&lt;br /&gt;
&lt;br /&gt;
오늘날까지 중국문단(中國文壇)의『막심콜키—』이든그는 지금부터는문화(文化)의전사(戰士)로서『앙리·발뷰스』보다비장(悲壯)한생애(生涯)가 시작(始作)되는것이엿다&lt;br /&gt;
&lt;br /&gt;
그의말과가티&lt;br /&gt;
&lt;br /&gt;
최청흑(最晴黑)한오십일(五十日)이지나고 그는북경(北京)을탈출(脫出)햇다 하문대학(夏門大學)에 초청(招請)을바□갓으나 대학기업가(大學企業家)의 음흉수(陰凶手)것인것을 안그는광동중산대학(廣東中山大學)으로갓다 그러나 일구이육년사월십오일(一九二六年四月十五日) 장개석(蔣介石)의쿠—데타—는 광동일성(廣東一省)만 노동자농민급진지식분자삼천여명(勞働者農民急進知識分子三千餘名)을—하엿 으며 한때는『혁명(革命)의전사(戰士)』라고 간판(看板)을지인노신(魯迅)도상해(上海)로 다라나야만 되엿다여기서우리가 다시한번그에게흥미(興味)보다는 최대(最大)의 경의(敬意)를갓게되는것은 다음의일문(一文)이다&lt;br /&gt;
&lt;br /&gt;
——나의 일종망상(一種妄想)은 깨여젓 다 나는지금까지 때때로낙관(樂觀) 을가젓섯다 청년(靑年)을 압박(壓迫)하고 ——하는것은 대개노인(大槪老人)이다이 들노물(老物)들이 다죽어지면 중국(中國) 은보담더 생기(生氣)잇는것이되리라 고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 르치안은것을 알엇다 청년(靑年)을 ——하는것은 대개(大槪)는 청년(靑年)인 듯하다 또달이 재조(再造)할수업는 생명(生命)과 청춘(靑春)에 대(對)해서 한층(層) 더애낌이업시…(이기집(而己集))&lt;br /&gt;
&lt;br /&gt;
이글은그가 침묵(沈默)하고잇는것을『공포(恐怖)』때문이라고 조소(嘲笑)한 사람에게답(答)한 통신문(通信文)의 일절(一節)로서 이때까지&lt;br /&gt;
&lt;br /&gt;
진화론자(進化論者)이든 그자신(自身)의 사상적립장(思想的立塲)을양기(揚棄)하고 새로운 성장(成長)의 일단계(一段階)로보인것이라고 해석(解釋)해도 틀러지안흘것이다.&lt;br /&gt;
&lt;br /&gt;
그가상해(上海)에 왓슬때는 국민당(國民黨)의 쿠—데타—로 혁명군(革命軍)에서쪼겨온 젊은푸로문학자(文學者)가 만엇다『혁명문학론(革命文學論)』이 효효(囂囂)히 불러지고 실제정치행동(實際政治行動)의 전선(前線)을 떠난그들은 총칼대신에 펜을잡엇다,원기왕성(元氣旺盛)하게 실제공작(實際工作)의경험(經驗)에서 매우견실(堅實)한것도 잇섯스나 때로는 자부적(自負的)인 영웅주의(英雄主義)가 화(禍)를끼치고——에실패(失敗)한 분만(憤瞞)과 극좌적(極左的)인 기회주의자(機會主義者)들은노신(魯迅)을 공격(攻擊)햇다 그러나 그는푸로문학(文學)이란 어떤것인가 또는어찌해야 될것인가를 알리기위(爲)하야 아버지가튼 애무(愛撫)로서『푸레하노프』,『루나챨스키—』들의 문학론(文學論)과『싸벳트』의 문예정책(文藝政策)을번역소개(飜譯紹介)하야 중국(中國)푸로문학(文學)을건설(建設)하고잇는동안에『노신(魯迅)을타도(打倒)치안흐면 중국(中國)에푸로문학(文學)은생기지못한다』는 문학소아병자(文學小兒病者)들은 그자신(自身)들이 먼저너머지고 이제그가마자가고말엇다 이위대(偉大)한중국문학가(中國文學家)의영(靈)아페 고요히머리를숙이면서 나의개인적(個人的)으로 곤란(困難)한정형(情形)에의(依)하야 문호노신(文豪魯迅)의윤곽(輪廓)을뚜렷이그리지못함을 참괴(慚愧)히알며붓을놋키로한다 —요(了)—&lt;br /&gt;
&lt;br /&gt;
==주요 내용 요약==&lt;br /&gt;
추도 배경: 중국 신문학의 최고봉인 루쉰(魯迅)의 서거(1936년 10월 19일)를 추도하며, 작가와의 개인적 인연(1932년 양행불 암살 사건 직후 만국빈의사에서의 만남)을 회상하는 글이다.&lt;br /&gt;
&lt;br /&gt;
문학적 위치 - 아Q 정전: 루쉰 이해의 핵심으로 그의 대표작《아Q정전(阿Q正傳)을 제시하고 있다. '아Q'는 사고와 행동이 나약하고 우매하면서도 건방진, 당시 중국인의 집단적 성격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루쉰은 이 '아Q 상(相)'을 폭로하여 중국 지식 군중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루쉰은 '아Q 시대'를 종식시키고 새로운 중국을 열어갈 길을 제시한 인물로 평가된다.&lt;br /&gt;
&lt;br /&gt;
문학 혁명과 루쉰의 역할: 중국의 고루한 고문학을 비판하고 백화소설(白話小說)을 통해 문학 혁명의 선두에 선 것이다.《광인일기(狂人日記)를 통해 봉건적 가족 제도와 유교의 종법 사회 관념을 통렬히 비판하며 &amp;quot;어린이를 구하자&amp;quot;는 메시지를 던져 청년들에게 혁명적 충격을 주었다.&lt;br /&gt;
&lt;br /&gt;
예술과 정치: 루쉰은 본래 의사(醫師)가 되려 했으나, '우매한 국민은 체격이 강해도 무의미한 구경꾼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으로 정신 개조를 위한 문예 운동으로 전향하였다. 그에게 예술은 정치의 노예가 아니라, 적어도 정치의 선구자였으며, 정치적 목적 아래 수행된 것이다.&lt;br /&gt;
&lt;br /&gt;
후기 생애와 투쟁: 군벌 정부(단기서)와 국민당(장개석)의 탄압을 피해 쫓겨 다니는 비장한 '문화의 전사'로서의 삶을 살았다. 젊은 프로문학 비평가들에게 '비계급적 작가'로 공격받기도 했으나, 그는 현실과의 동떨어짐을 비판하며 진실된 현실을 기반으로 한 창작의 '모랄(도덕성)'을 강조한 것이다.&lt;br /&gt;
&lt;br /&gt;
==분석 및 특징==&lt;br /&gt;
이육사의 지식인 면모: 이육사(본명 이활, 기고명 '이육사(李陸史)')가 당대 중국의 최고 지성 및 정치 상황에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글이다. 루쉰의 문학적, 사상적 변천 과정(의학 → 문예 → 현실 참여)을 심도 있게 분석하고 있다. 루쉰 문학의 핵심 통찰: 루쉰의 작품을 단순히 서사로 보는 것이 아니라, 봉건 사회에 대한 투쟁, 계급성, 지식인의 역할 등 당대 사회 변혁의 맥락에서 분석하는 것이다. 한국 문단에 대한 시사: 글 말미에 '예술과 정치'의 관계에 대해 루쉰의 태도를 재조명하며, 당시 조선 문단에서 첨예하게 논의되던 이 문제에 대한 이육사의 입장을 간접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수필문외한(隨筆門外漢)의수첩(手帖)=&lt;br /&gt;
문(門) 외(外) 한(漢) 의 수(手) 첩(帖)&lt;br /&gt;
&lt;br /&gt;
(칠(七))&lt;br /&gt;
&lt;br /&gt;
이(李) 육(陸) 사(史)&lt;br /&gt;
&lt;br /&gt;
R이란 사람은 나와는 매우친(親)한 동무엿다 그럼으로 우리두사람 사이에는 결(决)코 무슨비밀(秘密)이란것은 잇을터수가 아니엿다 그러나 지금은 나의교우록(交友錄)속에 씨여저잇는 그의『호패(號牌)』에 붉은줄을 그은지도 벌써한달이 다되엿다.&lt;br /&gt;
&lt;br /&gt;
이러한 간단한사실(事實)이 모르는사람으로본다면 가렵지도 아프지도안흘지모르겟으나 남달리상처(相處)해오든 벗을한사람 일허버린나의흐젓한 마음은 어데도 비길수업시 서러운것이다.&lt;br /&gt;
&lt;br /&gt;
그뿐만아니라 이글을 쓰려는오늘아침에 이제는 고인(故人)인 R의동생으로부터 나에게 간단한편지한장과『문외한(門外漢)의수첩(手帖)』이란유고(遺稿)한권(卷)이 보내여왓다.&lt;br /&gt;
&lt;br /&gt;
그유고(遺稿)는 이래십년(爾來十年)에 쓴 고인(故人)의 일기(日記)인 모양인데 그도축일(逐日)해서 쓰것도 아니고 때때로마음이 내킬때마다 써둔것이며그맨끗페—지에『〇〇형(兄)에게』라는 이세상(世上)사람으로서의 절필(絶筆)인듯한 글시가 묵흔(墨痕)이임리(淋漓)한것은소리업는 내눈물을더욱짜내는것이엿다 그리고이글내용(內容)은 일기(日記)는 일기(日記)면서도 대부분(大部分)은 나에게 보내는 편지이엿다.그편지가운데서 지금이라도 흥미(興味)잇게생각나는 부분(部分)만을 써서보기로한다면 그도처음에는 문학청년(文學青年)이엿든 사실(事實)이잇섯다.그러나그는자기가 하고저한 문학(文學)을 끗끗내 완성(完成)할수잇는 행복(幸福)된사람은 아니엿다.그러나 그사람은죽든날까지도문학(文學)을 단념(斷念)하지는안헛다는것은 어느해겨울 그와나는 우연(偶然)히도 어느 온천(溫泉)에서만낫다 그때는 바로동경(東京)에서들풍자문학론(諷刺文學論)이 한참대두(擡頭)할때 이엿슴으로 그도또한 예(例)에삐지지안코 이것의 조선(朝鮮)에잇서서 가능(可能)하다는 설교(說敎)를 하는것이엿다그때좀더 생각해볼 여지(餘地)가잇다고한 나의말에 그는말하기를조선(朝鮮)사람은 생활(生活)그자체(自體)가 풍랄적(諷剌的)으로 되여잇다고 떠둘어대기에나는그에게 더진지(眞摯)한태도(態度)로 사물(事物)을 대(對)할필요(必要)가 잇다는것을말하엿고 그다음날 우리는 서로갈린체 영원(永遠)히 보지못할 사람이되엿다.&lt;br /&gt;
&lt;br /&gt;
이글은 그때나와 갈려서 몃칠동안에 쓴것이라고 생각난다 일구삼(一九三)×연(年)×월(月)×일(日)—〇형(兄)!S역(驛)에서 형(兄)과갈려서나는〇동(洞)까지 오십리(五十里)나되는 산(山)길을 걸어왓소.동리(洞里)거리에 피곤(疲困)한 다리를 쉬이면서 생각하기를 아무데나 큼직한집 초당(草堂)방을 차저드러가면 이밤을 뜻뜻한 아랫목에서 지낼수도 잇겟거니와 그들과함께 살을맛대이고지나며 그들의 생활(生活)을체득(體得)할수가 잇다면……얼마나 유쾌(愉快)한일이겟습니까?&lt;br /&gt;
&lt;br /&gt;
나는 여기서 형(兄)이일직이 하든말을 생각해보앗소 상해(上海)어데선가?목욕(沐浴)을 갓슬때 불란서(佛蘭西)사람과 서반아(西班牙)사람과 가트욕조(浴漕)에 들어갓슬때의 감정(感情)을 얘기한것을 기억(記憶)이나 하시는지요.그때는 적나라(赤裸裸)한 몸둥이들이모두꼭가튼 온도(溫度)를 느낄수잇더라고.세계(世界)는 모름직이 목간통가티 되어야 한다고.&lt;br /&gt;
&lt;br /&gt;
그러나 오늘의 나의심경(心境)은그와는 정반대(正反對)로 어데까지나 육친애(肉親愛)를 느껴볼 결심(决心)이엿소 그래서 세계(世界)는 차라리 초당(草堂)방가티되라고까지 생각해도 보앗소이러한 생각을 하노라면 또다른 한생각이 꼬리를 물고나오는동안에 나는가젓든 담배를모조리 다피워 바렷소.담배라도피우지 안흐면 첫겨우의눈우바람이몹시도 옷깃을 새여들고 발끄티저리기도해서 담빠도살겸 주막(酒幕)집잇는대로 가까이 차저갓소.그곳에는 마침담배 가개가잇고젊은농부(農夫)인듯한 사람이잇기에오전(五錢)짜리 한푼을던지고『마코』한갑을 달라고 하엿더니만 나는여기서 뜻하지못한 실패(失敗)를 하엿소 그것은 나행동(行動)이 몸차림과 어울리지안는데가 잇섯든지또는언어(言語)에 무의식적(無意識的)인 불손(不遜)이잇섯든지 그젊은 농부(農夫)는 내얼굴을 자세히 보더니만……『문(門)안에 들어와서 담배를 가저가오』……하며 코우슴을 피하며『마코』한갑을 내아프로 툭던지는것이엿소.&lt;br /&gt;
&lt;br /&gt;
나는처음 이농부(農夫)의 말을듯고한참동안 어름어름하엿소 그것은 담배가개라고하는것이 우리가 도회(都會)에서 보는담배가개와가티 백색(白色)『타일』타로 대(臺)를싸올리고『네온』등(燈)을 달고 유리창(窓)을단것이 아니고 첨하끄테다 석유(石油)궤로 목판을짜서 장수연(長壽煙),희연(囍煙),『마코』단풍(丹楓) 이런것들을몃갑식(式) 너허둔것이엿소,그래 내가들어갈 문(門)이란 어데잇겟소,&lt;br /&gt;
&lt;br /&gt;
&lt;br /&gt;
(칠(七))&lt;br /&gt;
&lt;br /&gt;
이(李) 육(陸) 사(史)&lt;br /&gt;
&lt;br /&gt;
R이란 사람은 나와는 매우친(親)한 동무엿다 그럼으로 우리두사람 사이에는 결(决)코 무슨비밀(秘密)이란것은 잇을터수가 아니엿다 그러나 지금은 나의교우록(交友錄)속에 씨여저잇는 그의『호패(號牌)』에 붉은줄을 그은지도 벌써한달이 다되엿다.&lt;br /&gt;
&lt;br /&gt;
이러한 간단한사실(事實)이 모르는사람으로본다면 가렵지도 아프지도안흘지모르겟으나 남달리상처(相處)해오든 벗을한사람 일허버린나의흐젓한 마음은 어데도 비길수업시 서러운것이다.&lt;br /&gt;
&lt;br /&gt;
그뿐만아니라 이글을 쓰려는오늘아침에 이제는 고인(故人)인 R의동생으로부터 나에게 간단한편지한장과『문외한(門外漢)의수첩(手帖)』이란유고(遺稿)한권(卷)이 보내여왓다.&lt;br /&gt;
&lt;br /&gt;
그유고(遺稿)는 이래십년(爾來十年)에 쓴 고인(故人)의 일기(日記)인 모양인데 그도축일(逐日)해서 쓰것도 아니고 때때로마음이 내킬때마다 써둔것이며그맨끗페—지에『〇〇형(兄)에게』라는 이세상(世上)사람으로서의 절필(絶筆)인듯한 글시가 묵흔(墨痕)이임리(淋漓)한것은소리업는 내눈물을더욱짜내는것이엿다 그리고이글내용(內容)은 일기(日記)는 일기(日記)면서도 대부분(大部分)은 나에게 보내는 편지이엿다.그편지가운데서 지금이라도 흥미(興味)잇게생각나는 부분(部分)만을 써서보기로한다면 그도처음에는 문학청년(文學青年)이엿든 사실(事實)이잇섯다.그러나그는자기가 하고저한 문학(文學)을 끗끗내 완성(完成)할수잇는 행복(幸福)된사람은 아니엿다.그러나 그사람은죽든날까지도문학(文學)을 단념(斷念)하지는안헛다는것은 어느해겨울 그와나는 우연(偶然)히도 어느 온천(溫泉)에서만낫다 그때는 바로동경(東京)에서들풍자문학론(諷刺文學論)이 한참대두(擡頭)할때 이엿슴으로 그도또한 예(例)에삐지지안코 이것의 조선(朝鮮)에잇서서 가능(可能)하다는 설교(說敎)를 하는것이엿다그때좀더 생각해볼 여지(餘地)가잇다고한 나의말에 그는말하기를조선(朝鮮)사람은 생활(生活)그자체(自體)가 풍랄적(諷剌的)으로 되여잇다고 떠둘어대기에나는그에게 더진지(眞摯)한태도(態度)로 사물(事物)을 대(對)할필요(必要)가 잇다는것을말하엿고 그다음날 우리는 서로갈린체 영원(永遠)히 보지못할 사람이되엿다.&lt;br /&gt;
&lt;br /&gt;
이글은 그때나와 갈려서 몃칠동안에 쓴것이라고 생각난다 일구삼(一九三)×연(年)×월(月)×일(日)—〇형(兄)!S역(驛)에서 형(兄)과갈려서나는〇동(洞)까지 오십리(五十里)나되는 산(山)길을 걸어왓소.동리(洞里)거리에 피곤(疲困)한 다리를 쉬이면서 생각하기를 아무데나 큼직한집 초당(草堂)방을 차저드러가면 이밤을 뜻뜻한 아랫목에서 지낼수도 잇겟거니와 그들과함께 살을맛대이고지나며 그들의 생활(生活)을체득(體得)할수가 잇다면……얼마나 유쾌(愉快)한일이겟습니까?&lt;br /&gt;
&lt;br /&gt;
나는 여기서 형(兄)이일직이 하든말을 생각해보앗소 상해(上海)어데선가?목욕(沐浴)을 갓슬때 불란서(佛蘭西)사람과 서반아(西班牙)사람과 가트욕조(浴漕)에 들어갓슬때의 감정(感情)을 얘기한것을 기억(記憶)이나 하시는지요.그때는 적나라(赤裸裸)한 몸둥이들이모두꼭가튼 온도(溫度)를 느낄수잇더라고.세계(世界)는 모름직이 목간통가티 되어야 한다고.&lt;br /&gt;
&lt;br /&gt;
그러나 오늘의 나의심경(心境)은그와는 정반대(正反對)로 어데까지나 육친애(肉親愛)를 느껴볼 결심(决心)이엿소 그래서 세계(世界)는 차라리 초당(草堂)방가티되라고까지 생각해도 보앗소이러한 생각을 하노라면 또다른 한생각이 꼬리를 물고나오는동안에 나는가젓든 담배를모조리 다피워 바렷소.담배라도피우지 안흐면 첫겨우의눈우바람이몹시도 옷깃을 새여들고 발끄티저리기도해서 담빠도살겸 주막(酒幕)집잇는대로 가까이 차저갓소.그곳에는 마침담배 가개가잇고젊은농부(農夫)인듯한 사람이잇기에오전(五錢)짜리 한푼을던지고『마코』한갑을 달라고 하엿더니만 나는여기서 뜻하지못한 실패(失敗)를 하엿소 그것은 나행동(行動)이 몸차림과 어울리지안는데가 잇섯든지또는언어(言語)에 무의식적(無意識的)인 불손(不遜)이잇섯든지 그젊은 농부(農夫)는 내얼굴을 자세히 보더니만……『문(門)안에 들어와서 담배를 가저가오』……하며 코우슴을 피하며『마코』한갑을 내아프로 툭던지는것이엿소.&lt;br /&gt;
&lt;br /&gt;
나는처음 이농부(農夫)의 말을듯고한참동안 어름어름하엿소 그것은 담배가개라고하는것이 우리가 도회(都會)에서 보는담배가개와가티 백색(白色)『타일』타로 대(臺)를싸올리고『네온』등(燈)을 달고 유리창(窓)을단것이 아니고 첨하끄테다 석유(石油)궤로 목판을짜서 장수연(長壽煙),희연(囍煙),『마코』단풍(丹楓) 이런것들을몃갑식(式) 너허둔것이엿소,그래 내가들어갈 문(門)이란 어데잇겟소,&lt;br /&gt;
&lt;br /&gt;
(중(中))&lt;br /&gt;
&lt;br /&gt;
이육사(李陸史)&lt;br /&gt;
&lt;br /&gt;
그날은 그곳에서 멀지안흔곳에 장날이엿나부오,장꾼들이들신들신하고 그집으로 들어오기에 나는그만 그곳을떠나 도라나오랴니까 바로내머리 뒤에서『건방진여석 눈에유리창(窓)을 부치고』……하면서 별러대는것이엿소.그때나는 모든것을 다알엇소,&lt;br /&gt;
&lt;br /&gt;
시골산촌(山村)에선 유리라는것은들창(窓)에나 부치는것인데 네눈에부친 들창을열고 다시말하면 문(門)안에 들어와서(안경(眼鏡)을벗고)담배를 가저가란 말엿소.&lt;br /&gt;
&lt;br /&gt;
내가 안경(眼鏡)을 쓰게된것은 시력(視力)이 부족(不足)한 탓이엿고 그젊은농부(農夫)가 내안경(眼鏡)쓴것을 못맛당히역이는것은 고루(固陋)한 인습(因習)의 소치(所致)라고 하드래도 그표현방법(表現方法)이얼마나 내뼈를 저리도록 쑤시는풍랄(諷剌)이엿겟소 과연(果然)여기에 남과나라는 투명(透明)한 장벽(墻壁)이 서서잇다는것을 나는안듯하엿소.&lt;br /&gt;
&lt;br /&gt;
그리고 내발길은 무겁게옴겨젓소.아주몃해를두고 어느사막(沙漠)이라도 걸어온듯한 피로(疲勞)를 깨다랏소.하늘은 점점어두어오고눈조차 함박으로 퍼붓는듯 하엿스나 나는다시 옷것을 단속지는 안헛소 될수엇스면 차디천 눈보라가 내보드러운 목덜미살을 염이듯이 얼어부트라고하여본것은 일종(一種)의 자기잔학(自己殘虐)일른지도 모르겟소.&lt;br /&gt;
&lt;br /&gt;
두시간(時間)이나 지낫을가 나는과연(果然) 어느집초당(草堂)방에 손이되엿소방안에는 초말(醋抹)냄새가 코를찌를망정 모이는사람은 대략육칠명(六七名)이나 되엿고 연령(年齡)은최저십팔(最低十八)로최고삼십이(最高三十二),인품(人品)은 모두순후(純厚)하고황소가티 질박(質朴)한놈도 잇스며암사슴가티 외로운 면석도잇섯소.그날밤은 내라는존재(存在)가 그들로보면 낫서른손이여서 일동일정(一動一靜)을 주의(注意)는 하면서도 조금도 악의(惡意)는 갓지안헛든 모양이엿소 그러기에 나더러 세상(世上)의자미잇는 얘기를 들려달라는것이오&lt;br /&gt;
&lt;br /&gt;
이때 나는 어떠한 얘기를들려줄까 하고 망서리는판에 그들중에도 연령(年齡)과 지식(知識)의 정도(程度)가잇서서 삼십(三十)에 가까운 사람들은『화용도(華容道)』를 들려달라하고그중한사람은『춘향전(春香傳)』을 얘기하라하엿소만은 여기도 또한의견(意見)은 일치(一致)되지안헛소 그중에도제일(第一)얼굴이 말숙하고 나이가이십오세(二十五歲)쯤 되여보이는 농부(農夫)한사람 말을드르면 보통학교(普通學校)를 중도퇴학(中途退學)은 하엿서도 그들가운데서는 식자연(識者然)하고 내로라는드시뽑내면서『서양(西洋)』얘기를 무에나들리라는것이오 그해서 결국(結局)은『춘향전(春香傳)』파(派)와『서양(西洋)』파(派)가 절충(折衷)한결과(結果) 나는이진귀(珍貴)한『서양춘향전(西洋春香傳)』을 친절(親切)하게도 강좌(講座)를담임(擔任)하게되엿스며 그는 득의만면(得意滿面)하야 내담배갑에서『마코』한개들 빼여물고 인조견(人造絹) 옥색(玉色)관사홋족기에서 석낭을꺼내여 담배를 피우는것이엿소 이방에서는모두들이사람을『하이카라상』이라고 부르는데 그『상』짜가나에게는 조금귀익지못하나 아마이것을 도시(都市)말로번역(飜譯)하면『모—던뽀이』란 말도갓소.&lt;br /&gt;
&lt;br /&gt;
그러나 이『서양춘향전(西洋春香傳)』이란진본서(珍本書)는 가난한 나의문헌학지식(文獻學知識)으로는 도저(到底)히 알어낼 자신(自信)도업고 그러타고 그들에게『린드뻑』이 대서양(大西洋)을 어떠케 횡단(橫斷)하엿다든지『크레오파트라』의국적(國籍)이 어느나라냐고 설왕설래(說往說來)를 하여보앗자『하이카라상』이라는 이방의『쏘크라테쓰』도그까지는 흥미(興味)를느끼지못할것갓터소.&lt;br /&gt;
&lt;br /&gt;
그래서나는 생각다못해『쉑스피어』의『로미오와쭈리엣트』를얘기하기로하고 위선그주인공(主人公)의이름을 그들이 알어듯기 쉽게『노미』이와『준』이가 이러케얘기를하니 그래도 모두그것이자미가 잇섯든지『준』이가추방당(追放當)튼날새벽에『노미』를 차저가이별(離別)을하는판인데 이곳에야『나이팅껠』이울수가 잇슬리도 업겟고 생각다못해 속담(俗談)에 꿩갑에 닭이라니 닭을울리고『준』이를 떠나보냇구려!그래도 이때는 모두들감탄(感歎)해서 흥흥코소리를치며 신삼고 가만이치든손을쉬이는구려!&lt;br /&gt;
&lt;br /&gt;
(하(下))&lt;br /&gt;
&lt;br /&gt;
이육사(李陸史)&lt;br /&gt;
&lt;br /&gt;
밤은벌써 오전(午前)두시(時)나 되엿는데 박가테서는 눈보래가 조금도 쉬지안코 나렷소,사람들은차차 긴하픔을 하다가는 제대로 팔을배고 자는이도잇고 또그자는이의 다리를베고 자는사람도잇스며 나중에는『하이카라상』과 나만이남어서 나는 이동리(洞里)의 서러운전설(傳說)을 듯는것이오『옛날에 이동리(洞里)와 건너마을이편을갈러서 정초(正初)이면『줄댕기』가 시작(始作)되엿고 그때는 사람들이 수—백명식(百名式) 모혀서 그중에도 젊은 사람들은 처녀(處女)나 총각이 제각기 마음잇는 사람들과 사랑을 속삭이면서 영원(永遠)히그자손(子孫)들은 변(變)함업시 이동리(洞里)를직혀왓건만은 지금(至今)은 어쩐일인지 그사람들은 누가 오란말도업고 가란말도 업건만은 다들어데인지 한집식 두집식 동리(洞里)를떠나고 그럴때마다 젊은이들의 싹트기시작(始作)한 사랑은 그봄이 다가기도전에 덧업시 흘러가고 만다는말을 다마치지도못하야 이사람은 창졸간에 미친듯이 쓸어저 흑흑 느껴가며우는것이엿소.나는 이것을 웨우느냐 물어볼힘도업고 울지말라고 위안(慰安)을 줄수도 업섯스며다만나 혼자 생각기를 너도 또한불상한 미완성초연(未完成初戀)의 순정자(殉情者)로 구나하고 동정(動靜)을 살피노라니 이사람도 그냥잠이 들고먼데닭이 자즌홰치는 소리가들리며 눈은끗첫는지 박가튼 바람이 몹시부럿소.&lt;br /&gt;
&lt;br /&gt;
나는몃시간(時間) 남지안흔 이밤을도저(到底)히 잘수는업섯소,내머리는해저(海底)와가티 아득하고 내가슴은운모(雲母)와가티 무거웟소.도라누을내야 도라누을수도 업스려니와여페사람들의 코고는소리는 검은시체(屍體)를 실흔마군(馬軍)의 수레박휘를 갈고가는듯하오,그럴수록방안의 정적(靜寂)은 무거워저서 자꾸만 지구(地球)의 중심(中心)으로 침전(沈澱)되는듯하엿소,나는 참다못하야 눈을감고 두손으로 얼굴을 가리웟소.바로 그때엿소,누구인지내머리마테서 말하는 사람이잇섯소,그사람이 누구인지는 기억(記憶)할수 업스나 혹(或)은 저녁전에담배가개에서본 농부(農夫)일른지도모르겟소 그가 나에게 한말은분명(分明)코『문(門)안에 드러와서……』엿소.나는 여기서 눈을번쩍뜨고가만히 생각해 보앗소.&lt;br /&gt;
&lt;br /&gt;
『오!그러타,나는 문외한(門外漢) 여다』아무리하여도 인생(人生)의 문(門)안에들어서지못할 나이라면 차라리영원(永遠)한 문외한(門外漢)으로 이세상(世上)을수박것할트시 지나갈일이지 그좁은문(門)을 들어가려고 애를쓸필요(必要)가 어데잇겟소 문(門)박게서 살어가면 책임(責任)과 부담(負擔)도 가벼우려니와 문(門)안에 우리가 직혀야할 보물(寶物)이잇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모두 문(門)안에서 직힐때에나혼자만 문(門)박게서 그모든것을파수본다면 그것도 나의한가지임무(任務)가아니겟소 그러타면 나는달게&lt;br /&gt;
&lt;br /&gt;
인생(人生)외 문외한(門外漢)이 되겟소.&lt;br /&gt;
&lt;br /&gt;
그래서 남들이모두 문(門)안에서보는세상(世上)을 나는문(門)박게서 보겟소 남들은 기피보는 세상(世上)을나는널리보면 또그만한 자긍(自矜)이잇을것갓소.오늘은 고기압(高氣壓)이어데잇는지 풍속(風速)은 육십사(六十四)미리오이동리(洞里)를 떠나아무도 발을대지안흔 대설원(大雪原)을 걸어가겟소,전인미도(前人未到)의 원시경(原始境)을 가는느낌이오,누가나를 따라이길을 올사람이 잇슬른지?업서도 나는이길을 영원(永遠)히가겟소.』&lt;br /&gt;
&lt;br /&gt;
나는이까지보고 위선이유고(遺稿)를더펏다,그리고 생각해보앗다 이것은 한사람이 인생(人生)의문(門)안에 들어오지못하고 영원(永遠)히 걸어간기록(記錄)이다 오!그러면 나도역시문외한(亦是門外漢)인가?정축(丁丑) 칠(七),이구(二九)&lt;br /&gt;
&lt;br /&gt;
==주요 내용 요약==&lt;br /&gt;
구성: 죽은 친구 'R'의 유고(遺稿)인 '문외한의 수첩' 속에 담긴, 'R'이 '〇형(兄)'(필자)에게 쓴 편지 형식의 수필이다. '문안'과 '문밖': 화자는 'S역'에서 '형'과 헤어져 산길을 걸으며 초당방에서 서민의 삶을 체득하고 싶다는 '육친애'적 소망을 가진다. 이때 담배를 사려다 한 젊은 농부에게 &amp;quot;문 안에 들어와서 담배를 가져가오&amp;quot;라는 말을 듣는다. '문안'은 농부가 '안경(유리창)'을 쓴 자신을 '도시의 문명인'으로 여기고 '안경을 벗고(유리창을 떼고) 들어와'라는 풍자적 표현이었음을 깨닫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자아 성찰: 이 경험을 통해 도시 지식인인 자신과 농민 사이에 투명한 '장벽'이 서 있다는 것을 인지하며, 자신이 '인생의 문외한(門外漢)'임을 깨닫는다. '문외한'의 결심: '문안'에 들어서지 못할 바엔 영원한 문외한이 되어 문밖에서 살아가겠다고 결심한다. 문밖에서 사는 것은 책임과 부담이 가볍고, 남들이 모두 문안에서 보는 세상을 자신은 문밖에서 '널리' 보며 '자긍(自矜)'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절필: &amp;quot;전인미도(前人未到)의 원시경(原始境)을 가는 느낌&amp;quot;으로 '대설원'을 걸어 나가는 것으로 글을 맺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분석 및 특징==&lt;br /&gt;
풍자 문학론의 실천: 농부의 '안경 쓴 눈(유리창)'에 대한 풍자는 지식인과 대중 사이의 괴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지식인의 고뇌와 성찰: 도시화된 지식인(안경 쓴 자)이 농민의 삶에 진입하려 했으나 거부당하고, 결국 자신을 '문외한'으로 규정하며 고립을 선택하는 지식인의 고뇌를 드러내는 자의식의 표현이다.&lt;br /&gt;
&lt;br /&gt;
낭만적 비장미: '대설원', '전인미도의 원시경' 등 비장하고 낭만적인 이미지로 결말을 맺으며, 이육사 특유의 고독한 결단의 미학을 보여주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소품(小品) 황엽전(黃葉箋)=&lt;br /&gt;
소품(小品)①&lt;br /&gt;
&lt;br /&gt;
황엽전(黃葉箋)&lt;br /&gt;
&lt;br /&gt;
이(李) 육(陸) 사(史)&lt;br /&gt;
&lt;br /&gt;
사람들은 어름알보다 더냉담(冷淡)하고 주사침(注射針)가티 촉발라도 그래도 제대로는 인정(人情)도잇고 눈담(曇)노잇서 친(親)한사람을 사이에는못보 보고저하고 보면빨아먹을듯이도 형형색색(形形色色)의 표정(表情)을비저내며 계절(季節)에 따라서는 눈물겨울만큼 간절한모양이나 『내』라는 위인(爲人)은 자질(資質)도 소박(素朴)하고교양(敎養)도 고매(高邁)하지못데 요즘은엇전지 신경(神經)이 차를보다 단단해저서 압흐고 슯흔것도 못견듸게늣겨지지도 안커니와 보지못해 못견딀사람도업고 소식(消息)이라도 못알려 탈이될,더친(親)하고덜친(親)한이가업다.그러나 행(幸)혀이세상(世上)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잇다고하면 나는 의무(義務)로라도그대에게 나의소식을 알려야하지만은 지금의 나에게는 그러한미덕(美德)을 수행(遂行)할 야망(野望)조차업다.다만 야망(野望)을용서(容恕)한 사람이잇거든 가을바락에 무한(無限)히 흘러가는 황엽(黃葉)의 쪼각쪼각이 모두나의 편지라고 생각을 해라그리고 그어느한쪼각이라도 주어다가 그대들의책상(冊床)우에 꼬처두고 그황엽(黃葉)이 바람에 나붓기며울며부르짓는 서러운전기(傳記)를 들어보아라……&lt;br /&gt;
&lt;br /&gt;
‥‥그놈의 거리를 말할것도업고 저는하여(何如)든 가로수(街路樹)에서떨어저 왓습니다.그래서 거리에 서잇는동안 형형색색(形形色色)의 인간(人間)들을 다보앗습니다.그러나대개(大槪)는 모다비슷비슷한 인간(人間)들이엿고 별다른 놈은 못보앗습니다 그것은 십년전(十年前)일이라고생각됩니다.어느날오후(午後) 내발밋흘지나가는 소년(少年)이 잇섯습니다,미친놈가티 중얼대는 말을가만히듯자니『루나—ㄹ』의 일기(日記)를외이는겐지『불상한놈! 불상한놈!』 고거즛말하엿습니다,그뒤로는 매일(每日)가티 아침에도 내발밋홀지나고 저녁에도 내발미틀지나는동안에 나는어느사이에그만그녀석하고 친(親)해젓습니다,그래서 그녀석의 정체(正體)를 알수가잇섯습니다&lt;br /&gt;
&lt;br /&gt;
그녀석은 어느시골에서 출가(出家)를해서 서울을왓다는데 그출가(出家)한 이유(理由)가 어린녀석하고는 맹랑햇습니다 그녀석의 집은어느해안(海岸)이든가봐요 아침으로 조수(潮水)가 밀려나가면 끗업시 널려잇는 백(白)모래바티 너무도 허무(虛無)서 오기는왓스나 섬들을 건너간 갈메기가 몹시그립다고 하는것을보면 그래도 어린향수(鄉愁)가머리를 글거가는모양이겟지요&lt;br /&gt;
&lt;br /&gt;
그후(後)나는 우리들이 늘만나는시간(時間)이되면 그녀석이 하마나오나하고 기달리기도햇습니다 그럴때 멀리에 발자욱 소리가나고 그녀석이 『하이네』 니 『꾀—테』 니의 시(詩)를외이고 올때도잇섯습니다 그리고 몃해가 지난어느해봄날 내가긴 동면(冬眠)으로부터 영롱(玲瓏)한 첫눈을텃슬때 또그녀석을만낫습니다 그때는벌서그녀석은 십부게볼 소년(少年)이아니라 의례(依例)히 그상대자(相對者)를 다리고어둑어둑한 황혼(黃昏)에 내엽헤와서간즈려울만큼 종알대며 행복(幸福)의『메뉴—』를 전람회(展覽會)의『프로그람』보다 화려(華麗)하게꾸미는것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이것어 한여름을 지나며 비가오나 바람이부나 계속(繼續)이 되엿습니다 그러나 인간(人間)들에게잇서서는 행복(幸福)의 절정(絕頂)은 최대(最大)의비극(悲劇)과 서로통(通)해 잇나봐요 그해의 첫가을 어느으스름달밤에나는이비극(悲劇)을 바로 내눈헤서보는것입니다&lt;br /&gt;
&lt;br /&gt;
『여보우리두사람이 서로사랑하면 그만이지 사랑을 부모(父母)에대(對)한 효행(孝行)으로 하는데가 어데잇소.』&lt;br /&gt;
&lt;br /&gt;
이러케 그녀석은 폐(嬖)하는것이 엿습니다.&lt;br /&gt;
&lt;br /&gt;
그것도 고이치안흔게 그때쯤은 그녀석의 기분(氣分)이란 불꼿치타오를둣도 하얏거니와 제애비말을 안듯기로 유명(有名)하야 집을나선놈이니까.&lt;br /&gt;
&lt;br /&gt;
『그러치만은 엇절수가 잇서야 지요』&lt;br /&gt;
&lt;br /&gt;
이것이 그더석의 말에갑허진보수이엿습니다.그뒤나는 십년(十年)이란 긴동안 이사람들의 속삭임을 들을수는 업섯습니다.&lt;br /&gt;
&lt;br /&gt;
아마그것이 그들의 비극(悲劇)의시초(始初)FP동시(同時)에 나의『로—맨틔시슴』도 종언(終焉)이엿든 것입니다 나는그날부터 새로운 생활(生活)을 경험(經驗)하지안으면 안되엿읍니다 이때까지는 그들가운데에 엇던한두사람의 주활(主活)을 말로서 들엇으나 인제는 어느특정(特定)한 사람의사랑이라든지 그런달착지근 한것이아니라 그저그놈도 그놈갓고 그놈도 그놈갓흔 뭇사람의생활전체(生活全體)가 내풋입새의 거울보다 반드라운 쪼각쪼각에 빗치는 것이엿읍니다 이전갓흐면멀리서 삽분삽분 발자욱 소리가들려오고 그발자욱 소리가갓가워 지는데따라 쟁반에 구슬을굴리는듯한 목소리도 들엇건만은 또그럴때면 나도 입사귀를흔들어서 업김가티 보드러운바람을 부러도 주엇건만은 이때는 내가 바람을 불기는커녕그들의지나가는 위풍(威風)에 나는전율(戰慄)하지 안을수 업섯읍니다.구슬을 굴리는듯한 목소린들 어데가듯겟읍니가?뭇사람의 포효(咆哮)하는소리란 아주바다에서 이러나는노도(怒濤)의 교향악(交響樂)가탯습니다.&lt;br /&gt;
&lt;br /&gt;
그래서 나는알기를 인간(人間)이란위대(偉大)한 작란(作亂)군이라고 하엿습니다.어떠케 그들의 얼골이 크게보이고 힘차게 늣겨것든것인가 지금은 생각만하여도 왼몸이 으슬으슬합니다.그러는중(中)에그들의 행렬(行列)은 대강(大江)가티 홀러가고 나는 또다시 노랏케 단풍이들어 한닙두닙 떨어지는것입니다.얼마나 소조(蕭條)하고 적막한거리겟습니가? 내엽헤는 괴수(怪獸)가티 늘어선 삘딍들의 거믄그림자가『팔아스트 에 얼어부튼거지들의 싸늘한꿈을 죽엄가티덥허논때업니다.밤도삼경(三更)은 지난때이지요 더벅더벅 거러오는무거운 발자욱 소리와함께 나는고요한『그림자』하나를 발견(發見)햇습니다.안개에 촉촉히 저진차림자러와 힘업시 옴겨지는발자욱이 아주무슨 패잔병(敗殘兵)의 유령(幽靈)이엿슬지도 모릅니다.나는지금 그유령(幽靈)을 따라 굴러 갑니다.그러나 그유령(幽靈)은 내가미행(尾行)을 한다는것은 모르고 또는알엇다해도 아무저항(抵抗)도 할필요(必要)가업다는듯이 방향(方向)도업시것는것이엿습니다.때로는 시내도건너고들판도 지나 힘이지치고 밤이깁프면 산(山)기슭 나무등얼 밋헤누어서 하늘에 수(數)업시만흔 별들을 헤아려도 보는것이겟지요그러나 그어느별도그에게 행운(幸運)을 점제한별은 업섯나봐요 그리다간 그는그만 흑흑늣기고 울며울다가는 자는것이엿습니다.아마도 기적(奇蹟)을 이즌순간(瞬間)이 그에게는 자장행복(幸福)된순간(瞬間)이든가봐요,산(山)속은 찬기운만 가득하고벌레소리는 정적(靜寂)을 삼림(森林)가티무성(茂盛)하게하는것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그다음날도 아츰햇발이 속새입홀 흔들면 그는일어나 것는것이엿습니나.이러는 동안에 나는이유령(幽靈)에게서 무엇을 보앗스리라고 생각하심니가?어느큰강(江)가이엿습니다.여을어 목노아울고가는 강(江)가이엿습니다.그는이강(江)가에 안저서 무엇을 생각하엿는지 눈을깜은채로 하늘을치여다보는 것이엇고 초생달은교만(嬌慢)한 게집의눈자위처름 그를흘겨보는것은 한층(層)더창백(蒼白)한 비우슴갓햇습니다 그러치만은 그는그광망(光芒)을 피(避)하려고도 안엇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내생각에 따른다면 그래도 못잇처지는 날ㄹ기억(記憶)을 모조리 물소리에 씨처흘려보내려는 노력(勞力)이엿슬지도모릅니나&lt;br /&gt;
&lt;br /&gt;
그때 먼데마을에는 개짓는소리가 어즈러히 들여오고 새바람도 유달리 옷깃을 새여드는데 그는 일어셔 한발한발 물가으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때나는 그의운명(運命)을거의들여다보는것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자살(自殺)이란 광경(光景)이 내머리속에번개가티 일어낫습니다.그리고그는물가의 널직한 반석(盤石)우에올러안저서 물속에비친 자기(自己)의얼골을 자세히 들어다보는 것이엿습니다,그러나 그물속에는자기(自己)의 얼골은 차저볼수가 업섯든것이겟지요,증오(憎惡)를 참지못하는 그는그만 뼈만남은 두손으로 물결을 훗치고는 돌우에업더저 우는것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그는 또다시 일어나 모둔것을 이저버린듯이 걸어가는 것이엿습니다.일기(日氣)는점점 흐려지고 회색(灰色)으로 물드린 천공(天空)은 그의최후(最後)의 희망(希望)까지라도 빼서바릴듯이 싸늘한 압박(壓迫)을더하는것이엿습니다.그러타고해서 그에게는 아무런 격정(激情)도 반발(反撥)도잇는것갓지는 안엇습니다 만은 주먹을 쥐여서는 주머니속에 너은체로 간간히 머리를 흔드는것은 과거(過去)에대(對)한 회한(悔恨)이라든지그런것들이 머리속을 할터가는것이겟지요?&lt;br /&gt;
&lt;br /&gt;
그것은 어느동리(洞里)압이엿습니다만흔사람들이 모엿다가는 다들도라가고 큰버드나무에『사지오리』를 부친색기를 걸처맨밋헤는 기름종지에 빤—한심지불이타고잇스섯며 아해들 몃사람이그것을 직히고 잇섯습니다.그는아해들에게 무엇을하는것이냐고 물엇습니다.&lt;br /&gt;
&lt;br /&gt;
아해들의 대답이란 너무나 묘(妙)한것이 안이겟습니가?그동리(洞里)에는 십년(十年)만에 한번식은 유령(幽靈)이 난다는 전설(傳說)이 잇섯습니다그래서 그날은 동리(洞里)사람들이정성을 다하야 한데모혀서 기도(祈禱)를 올리고 고사(告祀)를 지내는것이엿는데 그날이마츰 십년(十年)에 해당(該當)한날이며 방금 의식(儀式)을 맛친때라고 말을마천 아해들은 그를 한참동안 자세히 보다가는그만 인가(人家)를 향(向)하야 다어나는것이엿습다.아마도 그것은참으로 이동리(洞里)에 유령(幽靈)이 나타낫다는것을 알리기 때문일런지도모름니다.&lt;br /&gt;
&lt;br /&gt;
그는 한번 크제우섯습니다나는 그가 웃는것을 보는것은처음이엿습니다,그러나 그웃슴이란 곳변해저서 므슨쓰듸쓴 약물을 먹은뒤의 입모습가리 변해지며 얼골전체가 크다란 환상(幻想)에 사로잡히는것 갓햇습니다그리다가 그는 그언덕 미테서잠이들어 자면서 꿈을 꾸는것여엿습니다,그꿈이란 이러햇습니다,몹시더운 여름날 몃칠을두고 비가따루엇습니다,그래서큰물이나고 하루밤사이에 왼동리(洞里)가 물에쓸려 갓읍니다 왼여름 피담을홀려 지은농사(農事)도 한포거업시 사람마다 두주먹과한개의 목슴박게는 남지안엇음니다 주림과 치위가 매운챗죽갓치 그들을 휘갈겻읍니다 그래서 동리(洞里)사람들은 제각기 이고향(故鄕)을 떠나지안호면 안되엿읍니다 물론(勿論)녯날에야 부모(父母)의 품속갓치 포근하고 사랑스런 땅이엿지만은 지금은 참담(慘憺)과 고통(苦痛)의 회억이외(回憶以外)에 아부것도 그들의 애착(愛着)을 붓잡어 두□는 못하엿읍니다.그들은지금 한개촌락(個村落)에서 다른촌락(村落)으로 한성시(城市)에서 또다른성시(城市)에 표박(標泊)□ 길을가는것이엿지만은 그어느□곳도그들이발을 부칠곳은 어□읍니다 모든집들어 그들압헤는 문(門)들을 잠것읍니다.그리고 오즉그들에게는 한오리 끗어는 길이엿음니다 어느때나 □□갈수잇는 길이엿읍니다 하□□또하루 한달에또한달 꼭가티 그들은 하늘을 치여다보고 □을갓읍니다.벌서초본(草本)도 다□□이들고 낙엽(落葉)이 나리나 그들의발길은 머므를수는 업섯습니다 어느마을이나 성시(城市)에서 그들에게 일주일(一週日)이나 유(留)할수가□고한오리의 희망(希望)을 주엇다면 다시그순간(瞬間)이 지나면 그들에게는서름이외(以外)에 아무것도 □는것은업섯습니다.그러나 이□름과주림과 치위는 그들늙은이와 어린이와 남자여자(男子女子)를 모다한마음에 얼거맬수가 잇섯습니다 바탐과비에 바래인 그들이마음에한개의희망(希望)이란 오즉 일거리와생활(生活)이엿습니다 이것이 그들을고무(皷舞)하고 추진(推進)하는 힘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마치한떼의 표유(瓢游)하는『집시』와가티 마을을지내나 산(山)을너무나 마른풀을뜨더 그것을 덥고깔고 혹(或)은낙엽(落葉)을 쓰러다가 욕(褥)와 이불을삼어 한랭(寒冷)을 지나는하루밤 더욱이 비오는밤……밤은영원(永遠)히 차운것이며 뜨신것은다만그들의『마음』뿐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날과밤은 그넷줄처럼 밧구엿습니다.해도점점 쩔러지고 물들이 어러부트며 첫눈이 나린것도 발서 열흘전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그들은 아즉까지도 발무칠땅과한가지의 일거리도 찻지는못하엿스며 끗간데를모를 길만을보고 걸어가는것입니다.&lt;br /&gt;
&lt;br /&gt;
『여기라도 좀쉬여갓스면』모다들이러케 마음으로 부르지젓습니다.그러나 또몃사람운 말하는것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가자 압흐로 더가보자』이것도모든사람의 말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그들은 여전히 경사(傾斜)진 산(山)빗탈을걸어가며 길다란 곡선(曲線)의행렬(行列)이 계속(繼續)되는것입니다.그때는바람도 조골 잔잔해지고 햇발도구름밧글나와 열분광선(光線)이 뭇사람의 얼골을 다소명낭(多少明朗)하게하엿스나 일행(一行)이바로 산(山)미루턱에올너다엇슬때는 정세(情勢)는 디무도급(急)히변(變)하야 눈이퍼붓기 시작(始作)햇습니다.&lt;br /&gt;
&lt;br /&gt;
『눈이또나린다』이러케 부르짓고는모다들 놀나는 것이엿습니다.눈송이는 목화(木花)를 뜨더뿌리는듯이왼공중(空中)에 미만(瀰漫)하야지척을가릴수가 업섯습니다.바람에몰려오는 눈송이가 얼골에 부다치면 낫살을 어이는듯하고 손이빠질듯이 스린것입니다.시력(視力)조차 모호(糢糊)하야 발아래길도 알어보기는 어려웟습니다 재를오를때에 비(比)하면 산(山)을나려오는것은조금용이(容易)하엿스나 길이질대로 질어서 업더지락 잡버지락하는 사람들도잇스며 등에업힌 어린애들은 배가몹시 곱흐다고 우는것이며 그럴때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다들 산(山)밋헤 동리(洞里)집에 나려가서 드신밥을 준다고달래는것이엿습니다 그러나 산(山)미테 동리(洞里)집은 모다제각기 제마음에 그려보는 집들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가자 조금이라두 빨리가자불빗을 볼때까지』그들중(中)에서 한사람이 굴근목소리로 외치는것입니다&lt;br /&gt;
&lt;br /&gt;
『암그래야지』또 몃사람의 대답이 끗나면 모다들 침묵(沈默)은하면서 마음속으로는역시(亦是)『가자』고 대답하는것입니다&lt;br /&gt;
&lt;br /&gt;
사람들은 이빨을물고 잇는힘을다하야 전진(前進)합니다 지나온길이얼마이며가야할길이 얼마인것도모르면서 죽으나사나 가야한다는 것박게는 그들은 한사람도자기(自己)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업섯습니다.그들의 동반자(同伴者)의 발소리와 호흡(呼吸)이 그들의가튼 운명(運命)을결정(决定)한다는것은 이잔혹(殘酷)한 자연(自然)과 싸워가는 무리들의 금과옥조(金科玉條)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눈보래는 끗첫습니다.그러나아즉도 그들에게는 조그마한희망(希望)도 보이지는 안헛습니다.압도캄캄하고 뒤도그랫습니다.아득한 삼림(森林)속을 허우덕이는 암담(暗膽)은 영원(永遠)한흑야(黑夜)가 새이지도안코 영원(永遠)한 미로(迷路)도 끗막지도못할것 갓햇습니다.&lt;br /&gt;
&lt;br /&gt;
피로(疲勞)는 그들의몸을 풀솜가티만들엇습니다.참다가 못참는몃사람이 땅이라도 꺼지란듯이한숨을 쉬는것이엿습니다.그리고는 부르짓는 사람도업고 중얼대는 사람도업스며 눈물도마르고 공포(恐怖)도 사라진 그들은 발목에 잇는 힘을 다해서 눈과진흙우를 쉬임업시 이동(移動)하는것입니다.』&lt;br /&gt;
&lt;br /&gt;
유령(幽靈)은 그들가운데서 제일나이만흔 노인(老人)을 발견(發見)햇습니다그리고 그것은십년전(十年前) 그가고향(故鄕)을떠나올때 아즉도 그다지늙지안흔 그의아버지인것도 알엇습니다 그리고 모든사람은 그의어린시절(時節)의 동무엿습니다 그는참다못해『아버지』하고 소리를첫&lt;br /&gt;
&lt;br /&gt;
습니다 그러나그들은 어느한사람도 그를상대(相對)로 반겨마저주는사람은 업섯습니다.&lt;br /&gt;
&lt;br /&gt;
모다제각기 제갈길을 가고만잇섯습니다.&lt;br /&gt;
&lt;br /&gt;
유령(幽靈)도 그때야 잠이깨엿습니다 그리고 몸써리를 치는것입니다 얼마나 지리(支離)한꿈이며 괴로운 꿈이겟습니까?유령(幽靈)은다시일어나 것는것입니다 캄캄암흑(暗黑)속을 영원(永遠)히차고 영원(永遠)히 새지못할듯한밤을 제혼자가는것입니다 십년전(十年前) 내발밋흘 지나단이며 사랑을 속삭이든 소년(少年)은지금도 밤길을 제혼자 가고잇겟지요 황엽(黃葉)은 그래서 서러운일생(一生)을 울고만잇습니다&lt;br /&gt;
&lt;br /&gt;
정축십일(丁丑十一),일(一)&lt;br /&gt;
&lt;br /&gt;
==주요 내용 요약==&lt;br /&gt;
주제: 작가(필자)의 소식을 세상에 전하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이다.&lt;br /&gt;
&lt;br /&gt;
소식 전달: '내'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가을 바람에 흘러가는 '황엽(黃葉, 누런 잎)' 조각을 자신의 편지라고 생각하고 그 서러운 전기를 들어보라고 한다.&lt;br /&gt;
&lt;br /&gt;
'황엽'의 관찰: 황엽(필자)은 자신이 거리에서 겪은 두 가지 경험을 이야기한다.&lt;br /&gt;
&lt;br /&gt;
소년의 성장과 비극: 어린 소년이 성장하여 연인과 행복을 속삭였으나, 부모에 대한 효행 문제로 헤어지는 비극을 목격하는 것이다. 황엽은 이를 '행복의 절정은 최대의 비극과 통한다'고 표현하며 자신의 '로-맨틔시슴'의 종언이라고 말한다.&lt;br /&gt;
&lt;br /&gt;
군중의 포효와 유령: 이후 황엽은 개별적인 사랑 이야기가 아닌, '뭇사람의 생활 전체'와 **'노도(怒濤)의 교향악'**을 목도한다. 황엽은 이 거대하고 위대한 '작란군(作亂群)'의 행렬에 전율을 느낀다. 행렬이 사라진 후, 황엽은 '패잔병의 유령' 같은 힘없는 한 사람의 고독하고 고통스러운 표류와 꿈을 따라가며, 꿈속에서 홍수로 고향을 떠난 농민들이 희망 없이 떠돌지만 '가자 압흐로 더가보자'는 그들의 단합된 의지를 발견하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마무리: 유령이 깬 후 다시 홀로 밤길을 걷는 모습을 보며, 황엽은 '서러운 일생을 울고만' 있다고 글을 마무리하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분석 및 특징==&lt;br /&gt;
메타포(은유)적 글쓰기: '황엽(낙엽)'이라는 매개를 통해 자신의 소식과 감정을 전달하는 고도의 은유적인 글이다. '황엽'은 작가 자신의 고독하고 소외된 자의식, 혹은 시대를 표류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시대의식의 투영: 개인적 낭만(소년의 사랑)의 종언과 함께,'뭇사람의 생활 전체'와 '노도의 교향악'을 목도하며 당대의 격변하는 사회상과 민중의 힘을 인식하는 작가 의식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이육사의 서정성: 후반부 꿈속에서 펼쳐지는 농민들의 표류와 그들의 굳건한 생존 의지는 당시 농촌의 피폐함과 함께 암울한 현실 속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을 비장하게 포착해내는 이육사 특유의 서정성을 보여주는 것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전과기=&lt;br /&gt;
누구나 버릇이란 쉽사리 곳처지는것은아니다 그러므로 세살쩍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말도 잇지 안는가?.그런데도흔히 다른사람의 한가지 버릇을 새로히 발현햇슬때는 아—저사람은 저런버릇이 잇구나하고 속으로 비우서보거나 그버릇이 조치못한종류의것이면 대개는 업수히역이는 수도잇는가봐!.그럿컨만 나에게는 아무리 곤처보려도 곤처지지안는버릇이란 손톱을 깍고 줄로 으르고 수건으로 닥고하는것이다그것도 때와곳을 가릴것도업시조욕(漕浴)나 다방(茶房)이나는 말할것업고기차(汽車)나 배를타고 멀리여행(旅行)이라도하면 심심푸리도되고 봄날도서관(圖書舘)가튼데서 서너시간(時間) 안저백이면 제아무리 게른뱅이는 아닐지라도 웃눈섭이 기중기(起重機)처름아래눈섭을 끄러다닐때도 잇는것이고 그럴때에 손톱을 잘르고줄로 살살으르면 자릿자릿한 자미에 왼몸에게틈이 다풀리는것이다.그야내나이 어릴때는아침일직이손톱을 잘르면어룬들은질색을하시며 말리기도하엿다,그리고 말릴때에 누구인지지금에기억되지는 안어도 우리집에자주오는 손이 말하기를 아침에손톱깍고 밤에 머리빗는것은몸에해롭다고 하는것이엿고 내생각에도 그런방문은『동의보감(東醫寳鑑)』에라도 싸여 잇는줄 아럿기에그뒤로는 힘써시간(時間)을 한나절지난뒤에 손톱을 닥곤하엿지만나도내대로 세상맛을 보게된뒤로는 쓴맛단맛을 다보고 시고떨븐 구석과 휘추고초가튼 광경에 부닥길때가 시작이되고는손톱치레를 할만한 여가도 업섯고 어느사이에 손톱은 제대로자라 긴놈 쩌른놈 삐뚜러진놈꼬부러진놈 벌덕잡버진놈 앙당마스러진놈 이러케되야 내손이란 그꼴이 맛치 오증어를 뒤집어 삶어논것이 되엿다.&lt;br /&gt;
&lt;br /&gt;
그럴때에 나는 또 다시 손톱을 잘를것은 잘르고 으를놈은 으르곤하엿스며 이른아츰이라도 가리지는 안엇다.그것은밤으로 머리를 깍거보아도 몸에 해로운것도 업스니까 아츰에 손톱을 깍는것조차 위생(衞生)과는 관게업는것을 안까닭이다.&lt;br /&gt;
&lt;br /&gt;
그런대 내가이손톱을 잘르는버릇은 언제부터 시작되엿는가를 생각해보면 그도벌서 삼십년(三十年)이 더지낫다,내가난지 백일(百日)이나 되엿겟지 이란저고리박게빨간내손이 나와서 내얼골을 햅여뜻고는 나는자스려질듯이 울엇다.어머니가 놀라서가위로 내손톱을 잘러주신것이 처음이고그것이 늘거듭하야 지는동안에봄철이오면 어머니는 우리형제(兄弟)를 차례로불러 퇴ㅅ마루 양지쪽에 안치고 손톱을 잘러주시고 머리도빗기고 귀도휩여 주섯스며 이것도 내나이 여섯살때 소학(小學)을 배우고는 이런일의한반(半)은 할아버님께 이관(移管)이 되엿다 예날 내고장 우리집에는그다지 크지는못해두 허무히 적지안은 화단(花壇)이 잇섯다 그리고그화단(花壇)은 이때쯤되면 일이밧벗다 깍지로긁고호미로 매고 씨갑씨를 뿌리고총생이를 옴겨심고 적당한 거름도 주엇다 요즘가티『시크라맨이나『카—비손』이나『추리프』가튼것은 업서도 옥매화(玉梅花) 분홍매화(粉紅梅花) 홍도(紅桃) 벽도(碧桃) 해당화(海棠花) 장미화(薔薇花) 촉규화(蜀葵花) 백일홍등등(百日紅等等) 빗도보고 향(香)내도맛고꼿도보고 입도볼 말하면 일년(一年)을 다즐길수가잇는것이엿는데 내할아버지 생각은 이제 헤아려보면 우리들에게 글읽고 글시씨인사이로노력(勞力)을 몸소맛보이는것도 되려니와 그것이 정서교육(情緒敎育)도될겸(兼) 당신의 노래(老來)를 화려(華麗)하게 꾸밀수도 잇섯든 모양이엿다 그럴때마다 우리들은 이다지 가볍고고흔 노동(勞働)이 끗나면 할아버지는 우리들게 손을씨슬것과 손톱에끼인흙을 끌어내도록 손톱을닥그라 하섯다.&lt;br /&gt;
&lt;br /&gt;
이러든 내손톱이기에 나는손톱을 소중히하고 잘르고 으르고 닥고하는 동안에 한가지방편을 어덧다 그것은 나에게거북한일을말하는 사람아페서 손톱을 닥는것이다.빤히 얼굴을맛대이고 배알에 거슬이거나듯기실흔 말을듯고 억지로 참을수도업고 그러타고 언잔흔표정(表情)을 할수도업서 손톱을 닥노라면 시굴게신 어머니도 그려보고 도라가신 할아버지의 모습을 우러러 뵈일수도잇다.내고장의 푸른하늘아래 봄이 왓슬것도 가트니&lt;br /&gt;
&lt;br /&gt;
——(완(完))——&lt;br /&gt;
&lt;br /&gt;
==주요 내용 요약==&lt;br /&gt;
손톱 깎는 버릇: 화자(나)에게는 아무리 고치려 해도 고쳐지지 않는 버릇, 즉 손톱을 깎고 줄로 다듬고 닦는 행위가 있다. 이 행위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으며, 특히 심심하거나 피로할 때 긴장을 풀어주는 '자릿자릿한 재미'를 준다. &lt;br /&gt;
&lt;br /&gt;
버릇의 변화와 세상 경험: 어릴 때는 '아침에 손톱 깎는 것은 몸에 해롭다'는 옛말 때문에 어른들이 말렸고, 화자도 이를 믿었다. 그러나 세상을 경험하며 '쓴맛 단맛'을 다 본 후, 손톱 관리에 신경 쓸 여유가 없어 손이 엉망이 되기도 했다. 이후 미신이나 위생보다는 개인의 필요에 따라 언제든 손톱을 다듬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버릇의 기원과 따뜻한 기억: 이 버릇은 태어난 지 백일 무렵 어머니가 처음 손톱을 깎아준 것에서 시작되었다. 봄철이 되면 어머니는 형제들의 손톱을 깎고 머리를 빗겨주셨다. 여섯 살 때부터는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화단(花壇)을 가꾸는 노동을 했다. 할아버지는 이 노동을 노력(勞働)을 몸소 맛보게 하고 정서 교육을 시키는 수단으로 여겼다. 노동이 끝난 후에는 손톱에 낀 흙을 닦도록 하셨는데, 이는 정돈과 청결의 습관으로 이어졌다.&lt;br /&gt;
&lt;br /&gt;
손톱 관리의 '방편': 손톱을 닦는 행위는 시간이 흐른 뒤 화자에게 '방편(方便)'의 의미를 얻게 되었다. 듣기 싫거나 거북한 말을 하는 사람 앞에서 이 행위를 하면, 억지로 표정을 관리할 필요 없이 그 행위에 몰두하며 고향의 어머니와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분석 및 특징==&lt;br /&gt;
일상적 소재의 상징성: **'손톱 깎는 행위'**라는 극히 일상적인 소재를 통해 삶의 태도, 유년 시절의 기억, 그리고 현재의 심리적 방어 기제까지 끌어내는 수필이다.&lt;br /&gt;
&lt;br /&gt;
세대 간의 경험 대비: 수필은 크게 세 시기를 대비시킨다.&lt;br /&gt;
&lt;br /&gt;
유년기 (어머니/할아버지): 손톱 관리가 사랑과 보호, 그리고 정서 교육의 매개였다. (전통적이고 순수한 가치)&lt;br /&gt;
&lt;br /&gt;
성인기 (세상 맛을 봄): 손톱 관리가 소홀해지고 삶의 고난과 시련 속에서 잊혔다.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운 현실)&lt;br /&gt;
&lt;br /&gt;
현재 (손톱을 닦는 '방편'): 손톱 관리가 현실의 고통을 회피하고 내면의 안정을 찾는 심리적 '방편'이 되었다. (현실과의 거리 두기)&lt;br /&gt;
&lt;br /&gt;
정서적 위안: 화자가 불편한 상황에서 손톱을 닦는 행위는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힘들었던 현실 속에서 유년기의 평화로웠던 기억(어머니, 할아버지, 화단)**을 소환하여 현재의 감정을 통제하고 마음을 지키는 자기 치유의 과정인 것이다.&lt;br /&gt;
&lt;br /&gt;
향토적 정서: 화단에 핀 옥매화, 장미화, 백일홍 등과 퇴마루 양지쪽 같은 토착적인 이미지를 통해 과거의 아름다웠던 고향과 가족의 정을 회상하며, 전통적 가치에 대한 향수를 드러낸다.&lt;/div&gt;</summary>
		<author><name>Imgpdnjs</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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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이육사의 기자 생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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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10T08:50:3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Imgpdnjs: /* 전과기 */&lt;/p&gt;
&lt;hr /&gt;
&lt;div&gt;[[분류:imgpdnjs]]&lt;br /&gt;
==이육사의 기자생활==&lt;br /&gt;
출소한 뒤에는 중외일보와 조선일보 대구지국에서 기자로 일했고, 1930년에는 ‘이활’이라는 이름으로 첫 시 &amp;lt;말&amp;gt;을 조선일보에 발표했다. 이 시기는 훗날 교보생명을 세우는 신용호에게도 영향을 주어 독립운동 자금 지원과 교육 사업 구상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알려져 있다.&lt;br /&gt;
&lt;br /&gt;
1930년, 이육사는 조선일보 지면을 통해 생애 첫 시 「말」을 발표하며 문단에 모습을 드러냈다. 1월 3일자 조선일보 7면 하단에 실린 이 짧은 작품에서 그는 매질에 지쳐 쓰러질 것 같은 말이지만 새해에는 다시 우렁차게 질주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이 작품이 바로 그와 조선일보의 첫 연결고리였다.&lt;br /&gt;
&lt;br /&gt;
==중외일보 대구지국==&lt;br /&gt;
1929년 6월 장진홍 의거 관련 혐의로 복역 후 1930년에 출소한 이육사는 곧바로 언론계에 투신했다. 그는 시 발표 직후 중외일보(中外日報) 대구지국에서 기자로 일하기 시작했다. 중외일보는 1926년 조선중앙일보가 제호를 변경하여 창간된 신문으로, 1931년까지 발행되었다. 이육사가 활동하던 시기는 일제강점기 언론 탄압 속에서도 민족의식을 고취하려던 분위기가 남아있던 때였다. 지방지국 기자로서 지역 사회의 현안을 취재하고 보도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기간의 활동은 그가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사회 현실에 대한 인식을 심화하는 데 기여했다.&lt;br /&gt;
&lt;br /&gt;
==조선일보 대구지국==&lt;br /&gt;
중외일보에서 근무한 뒤, 이육사는 1931년 8월 조선일보 대구지국으로 자리를 옮겼다. 일제강점기 지방의 신문 지국은 단순한 연락소가 아닌, 지방 취재와 기사 송고의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이육사는 이곳에서 현장 기자로서의 전문적인 경험을 쌓았다. 조선일보에서 자신의 이름(필명)을 걸고 처음으로 쓴 기사는 1932년 초에 연재되었다. 첫 기사인「대구의 자랑 약령시의 유래」는 1932년 1월 14일부터 네 차례에 걸쳐 연재되었다. 이 기사를 쓸 때 그는 본명 대신‘육사생(肉瀉生)’이라는 독특한 필명을 사용했다. '육사'라는 필명이 여기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으며, 이는 그의 상징적인 수인(囚人) 번호(264)와 연결되는 '이육사'라는 이름의 유래 중 하나로 간주되기도 한다. 이 기사는 대구의 대표적인 전통 시장인 약령시의 역사와 유래를 소개하는 향토색 짙은 글이었으며 이육사가 기자로서 대구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lt;br /&gt;
&lt;br /&gt;
[[파일:이육사기사.jpg|500픽셀|섬네일|center| 이육사가 조선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근무하면서 쓴 1932년 1월 14일 자 ‘대구의 자랑 약령시의 유래’ 기사. ‘육사생’이란 필명 사용. ⓒ 조선일보]]&lt;br /&gt;
&lt;br /&gt;
그는 스포츠 기사에서도 민족적 정서를 드러냈다. 1932년 3월 6일과 9일자 스포츠란에서 「대구 ‘장’ 연구회 창립을 보고서」라는 글을 연속으로 기고하며 이번에는 ‘이활(李活)’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여기서 그는 조상 대대로 이어오던 우리 겨레의 전통 놀이 ‘장치기’를 소개하며 경기 방식뿐 아니라 점수 계산 용어까지 온전히 우리말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더 나아가 이 놀이를 세계 농민 사회에까지 널리 보급하자고 주장했다.&lt;br /&gt;
&lt;br /&gt;
그는 1934년 무렵 조선일보로 다시 합류했고, 이후에도 꾸준히 조선일보 지면에 글을 남겼다. 1930년대 후반에서 신문이 폐간되기 직전인 1940년까지 발표된 글들은 다양했다. 5회 연재된 「노신 추도문」(1936년 10월 23~29일자), 「문외한의 수첩」(1937년 8월 3~6일자, 3회), 「황엽전」(1937년 10월 31일~11월 5일자, 4회), 「전조기」(1938년 3월 2일자), 그리고 1940년 발표된 「계절의 오행」 등이 대표적이다.&lt;br /&gt;
&lt;br /&gt;
==타임라인으로 보는 이육사의 기자 발자취==&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v2%3A2PACX-1vScyeelknnBUflE4gCcqr0d_p4jIpl00AVBmBzhC5cgKY8GPsH4h-JZmzezN5VoQTKsJGw76vWgsA7O&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width=100%25&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대구(大邱)의 자랑 약령시(藥令市)의 유래(由來)=&lt;br /&gt;
대구(大邱)의자랑&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의유래(由來)&lt;br /&gt;
&lt;br /&gt;
대구지국(大邱支局) 육(肉) 사(瀉) 생(生)&lt;br /&gt;
&lt;br /&gt;
대구의자랑이 무엇이냐?고 뭇는사람이 잇스면 지금사람들은아이어룬할것업시 대구능금(평과(苹果))을말할것이다 그러나 대구능금은 최근의 한명산물로서완전한 자랑의자위를 점령할수는업는것이다 여긔서우리는중학교지리교과서(중학교지리교과서(中學校地理敎科書))에도잇는대구의유명한약령시(연령시(燕令市))를자랑으로들어놋코그에대한력사적유래를먼저아라보자&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의사적유래(史的由來)&lt;br /&gt;
&lt;br /&gt;
대구의 약령시는 일년얼차의정긔시장으로서 그시장에 집산되는 산물은 맛치『도루고』(토이기(土耳其))나『코—카쓰』(고가삭(高加索))나중앙아세아(중앙아세아(中央亞細亞))내외몽고(내외몽고(內外蒙古))등지에서 일년 일차혹이차식 열니는 모피물(모피물(毛皮物))의시장과가티대성황을일우나 이상에말한 각지의시장은인류사회의생활형태가차차목집함을따라필요한물품을서로서로밧구고저일정한장소와시일에모히는말하자면물물교환(물물교환(物物交換))시대로부터교통의관계라는지긔후의관계라든지또는일반사희생활의형태가오히려아직까지녯날의그것을면치못하고현대자본주의국제간의무역관계(무역관계(貿易關係))가극도로발달된 오날까지에 원시경제(원시경제(原始經濟))를 연구하는학자들의 연구재료가 되는것은휴미잇는 사실이지만은 대구의약렁시는 물품의집산과 교환의량식이 그와방불하여도 일홉부터 약시(약시(藥市))가아니고 약렁시(약령시(藥令市))란령(영(令))자에대하야우리는직각적으로 이시장의긔원은엇던권력(권력(權力))의 지배(지배(支配))맛해일게된것을 알수가잇다그러면 이약렁시가 처음시직된것은 언제부터인가 그야말로중학교교과서에까지『고래(고래(古來))로유명』이라고만씨여잇고 적확한년대를 쓰지안엇슴으로 대담하게 그년대를 내어노을수는업스나 비교적정확한수자를 조사한대로쓰면 서력일천륙백오십팔년(이조개국이백육십팔년효종조(李朝開國二百六十八年孝宗朝))거금이백칠십 사년전부터개시하게 되엿다고한다 그때야말로 조선을팔도(팔도(八道))에 닌후아노코 다시칠십일주로 난호아노흔 경상도의 정치적수부(수부(首府))도대구려니와 경상도(경상도(慶尚道))를둘너 남부조선각지는 산수명랑하고긔후온화하야각색약초(약초(藥草))의배양에지질이알맛기도하고 교통도편의하야(그때로보아서는)물산의집산에최적의지대도 대구엿스며 그때야말로임진병란(임진병란(壬辰兵亂) 이끗을막고모든볼회와 시설이 차자정돈뇌고발전을 보이며따라황실중심(성실중심(星室中心))으로끄으려는당시의위정사(위정자(爲政者))들은□□□□조금이라도 관계잇는 물품이면무엇이나물론하고 먼저진상(진상(進上))이란일흠아래최상의생산품을골너 서울도보내고 일반백성이먹고 입고쓰게되는 것이다그리고엇던 계□을물는하고병업시일생을 살수도업는것은 생리상자연의 리치엄으로 일국의지존(지존(至尊))인왕(왕(王))도병마의무서움은면치못 하는것이다 그래서황실에서일년동안쓸 약품을이곳에서 구하고저 국가의명령으로개시케한것이 오날날 우리가보고듯고 하는약령시의 처음이다그때는 약령이서면 감사(감사(監使))(현도지사(現道知事))가약재를골다봉하야중앙 정부 사약원(중앙정부사약원(中央政府司藥院))에 보낸후에 팔도에서모혀든 약재를일반 약국(약국(藥局))이사서완조선안의병든사락들이 그해그해의 치료를하게다엿다고한다(속(續))&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와경기(景氣)(이(二))&lt;br /&gt;
&lt;br /&gt;
대구지국육(大邱支局肉) 사(瀉) 생(生)&lt;br /&gt;
&lt;br /&gt;
【대구(大邱)】대구의약령시(약령시(藥令市))는다른상품시장에서는볼수업는특수한 유래를가지고 발달하여온만큼 지방의정청에서도일년춘추두차레에정긔적으로모여드는 지방생산자들을 위하야지방경제발달을 조장하고저 계획을세우고 제도의개선과 개시(개시(開市))긔간의 연장등 모든방면으로힘을써 보앗스나 모다뜻과갓지못하고 서구(서구(西歐))렬국의동양(동양(東洋))침입으로의학(의학(醫學))약학(약학(藥學))등학문이발달됨에침(침(針))은주사(주사(注射))로변하고바쇠는『메—쓰』로화하는바람에한약(한약(漢藥))의 가치는 전연그권위를일케되면서 대구의 약령시도차차워마하야 매매되는 약재료도주러지기만 하든중『후—버』겅긔가세계의주식시장(주식시장(株式市場))을혼란케하듯이 대구의 약령시장도 대타격의한때가 지나가게되엿스니 그는무엇일가?지금부터이십이년전(신해년(辛亥年))에중산손문 중산손우(中山孫又))씨혁명으로대청황실)대청황실(大清皇室))을넘어지면서부터는 청황실이 조선정부(조선정부(朝鮮政府))에의뢰하야사가든약품은실로막대한것이엿스나전부그매도의길이 막히게된 여러가지조건밋헤매매가 축소하여 전성시대의반도못되게 되얏다 그나마최근에는전주(전주(全州))대전(대전(大田))진주(진주(晋州))원산(원산(元山))등지에군소시장이개설되여이를약령시로밀미암아대구에떠러지는돈은매우감소되엿스나아직도령시가개설되면동성정입구(동성정입구(東城町入口))로부터남성정입구(남성정입구(南城町入口))까지 십여정(십여정(十餘町))에 처당재(당재(唐材))초재(초재(草材))등삼백여종의 약품도만흐려니와 그근처에림시려인숙(임시여인숙(臨時旅人宿))이무수히설치되고 포백기타 일용생활에필요한물품이면 평상시의 멧배나더잘팔리는 호경긔를 연설한다 그리하야 촌양빈들의낫서른돈을 먹어보겟다는 술집색시들까지 헐직한인조견으로 봄을싸고 도스리고안저서 열분애교를 술잔에담어보내는것도『넌센스』한징면인지는모르겟다마는 흡객술(흡객술(吸客術))이 졸열한다기보니 시대에뒤처진 기생들은본바닥에 거주하는손님들은『카페—』붉은녀급(여급(女給))들의자주(자(紫))빗유혹에다 뛰우고 음력과세를압서초조하는중 때맛침사재(시재(時哉))시재를불러 시내 각요리집 극장할것업시 대만원의성황을 이루는것은 그럴듯도한일이지마는 여긔에는 순진한산간에서 새노래물소리에 거치른세상일은 □도꾸지못한 산아이와도갓치 힘드려작만한 약재를도시구경겹 하여와와서판돈은『메리·픽포—드』안일망정어엽분녀자를맛나 잇는대로 다쓴후에명년의약령시 개설되기를 손을꼬바기다려서 와서보면 그녀자는어느하늘밋헤서 잇든남자와 단꿈을꾸는지 알길조차 바이업고작년구든맹서가 찬□(회(灰))처럼살어잘때화낌에 한잔무어라 먹자부어라 먹자하는연긔가튼 경긔는 견양경긔(견양경기(犬養景氣))이상으로 흥성거린나 그러기에여긔에최근오개년간의매매고외출동인원수와□적어본다&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와경기(景氣)&lt;br /&gt;
&lt;br /&gt;
(삼(三))&lt;br /&gt;
&lt;br /&gt;
대구지국(大邱支局) 육(肉) 사(瀉) 생(生)&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의현재(現在)&lt;br /&gt;
&lt;br /&gt;
약령시의 밋치는바 경제관계는실로 다방면으로 황금왕시대를연줄하며 발달하여오는만큼 녯날에는 조선안에서 생산하는재료가 매매되는이외에 당재(당재(唐材))라고하야 증국으로부터금석지재(금석지재(金石之材))가만히수입되는외에는 벌로볼만한것이 업섯스나 교통의발날노 국제무역이빈번하야지게된 오날에는일본,중국,몽고등시는말할것도 업거니와동부『아푸리카』의찌는둣한열대지방에서 생산되는 소철(소철(蘇鐵))을비롯하야 황막한시베리아의천지를 내집가티 도라다니는웅담(웅담(熊膽))까지모혀들게되는것은이약정□를통해본□류문와사의 한로막이라고도 할수잇는것이다 이러케 약령시에모혀드는약재료가 교통의 혜택을임어거의 파멸에 갑가운약령시가새로히왕성하게되자 지금이야말로 시장의 량입구에 마천두(마천루(摩天樓))가튼『리—딍』(유도탑(誘導塔))을세우고『일미네—숀』(대전식(大電飾))사이에 흥긔청긔가나붓기며 지방으로부터 모혀드는 생산자들을끄려드리는것은 확실히 일반상업전술의발달을의미한다 그러나 원래이시장는 약을재료그대로가지고와서 매매케 되는것이 특질의엿스나 지금은천일령신환,조고약과어을빈만병수까지 시장목판에서 인긔를집중하고잇는것은 아모리보아도 조뵈 화지관는 사실이다 이가튼변천가운데도 특긔하야들것은 령시의개설의래 장구한년월을 지남에따라 그본래의 성질에배반하야 부업적상인게놉을 령시의주요구성 요소로하게되고 부터는 경상도내지방에밋치는 양령시의영향은 일반 소비경제상에크다란 파문을그리게되여 약텽시본래목적인 약새생산에 효과가적게되고 시장내의 불당중개인으로말미암아 일사 평판이조치못하엿슴으로 이러한 페풍을 일소하기위하야 지금부터이십여년선에 생긴 한약상조합한약상조합(漢藥商組合))과칠년전전주(전주(全州))에양령시가처음뇌려고할때에 대함키위하야생긴약령&lt;br /&gt;
&lt;br /&gt;
흉회(약령시진흥회(藥令市振興會))가지금은약령시번영회(약령시번영회(藥令市繁榮會))로변경되여 최선의로력을 다하야오며 감독한결과 지금은어느정도까지 통제가되여간다고한다 그리하야 지금이야말로동력(동력(動力)의위력밋해거대한공장뉼이날로늘어남조선의『메드로포리쓰』를만드려는 대구현네과학(현대과학(現代科學))의태반(태반(胎盤))가튼대구의한복판에서 조선의 자랑이라고도할수잇는원시시장(원시시장(原始市塲))의한개가 벌서오늘날의 □제권내에발을듸듸고장차을래일의세계를향하야나가는것은홍미김흔일이다(속(續))&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의유래(由來)&lt;br /&gt;
&lt;br /&gt;
(사(四))&lt;br /&gt;
&lt;br /&gt;
대구지국육사생(大邱支局肉瀉生)&lt;br /&gt;
&lt;br /&gt;
삼백년동안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복잡다단한 필연적 과정을경과하여오며 자본주의 경제의현계단에서의연히그존재가필요하게된대구약령시의발달사는완연히금일경제의발달사(발달사(發達史))라고보지안을수업다 그럼으로여긔특긔할것은 그성실상 순박함이짝이업는 죽말하면 매매하는시람들의아관박대(아관박대(雅冠博帶))라든지 생산품 포장가튼것까지도(물론변천된것도만흐나)삼백년전의 녯날을 그려볼만한순박한이서장에도현대금융자본의붉은혀(설(舌))는내밀기시작하엿다지금부터 시년전엇던 외래지본벌이자긔소유의따에시장의위치를옴기려고 현위치는 도시교통상불편하다는구실로써다방면으로술책을써보앗스나현장소에서긔십년간상권을 잡고잇는 대가들의명렬한반대로그만뜻을일우지못한일도잇다그러면내구약령시를 지배하고 따라전조선의한약상계에우이를삽고잇는 이는누구일가여긔는 누구보다도 김홍조(김홍조(金弘祖))씨를아침수가업다씨는 전선적으로보아 제이위가기를설허할만하다고하며그다음순서업시치면 신태문(신태문(申泰文))김종수(김종수(金宗洙))지이원(심의원(沈義元))리치욱(이치욱(李致旭))두병은(두병은(杜炳殷))김내명(김내명(金乃明))방규진(방규진(方圭鎭))제씨를칠수잇고 그중에도 두병은(두병은(杜炳殷))씨가튼이는여러대를나려오며 사업에 종사하야 그문패는 실로일백오십년 이란력사를가저 대구의 동인당(동인당(同人堂))이란 일홈이잇다&lt;br /&gt;
&lt;br /&gt;
북평(北平)의동인당(同仁堂)은팔백년(八百年)의역사(歷史)가잇슴)그래서 대구의약텽시인긔는 이들의손에 좌우된다하여도과언이아니며 금년의약가는 금재금(김재금(金再禁))에따르는 제불가의폭등과 일중사변(일중사변(日中事變))의영향과중국은가(중국은가(中國銀價))의변동으로인하야소위당재(당재(唐材))는 폭동하엿고 조재(초재(草材))에잇서서 도변조로올은것이 불소하다는바 금후에드 더욱시세는오를무양이라고한다 여긔에당초재를물론하고 시세를 적어보앗스면좃켓스나 약명이한업시만코 날로변동이만흠으로 약렁시세표가 잇다는것만말한후에 특수한고저를보이는 몃가지를 적어보면 당재의원상산약(원상산약(元常山藥))은작년에는 매근에일원륙십전하든것이 금년은 단오십전에폭락되여 이십년레에 처음보는헐가라하며 산수유(산수유(山茱萸))는작년에 매근사십전하든것이 금년은십전에폭락되고 토사자(토사자(兎絲子))가튼것도 작년사오십전에매매되든것이 금년은십전에 폭락되여 자방생산자의 저울(형(衡))에 예긔치못한 광란(광란(狂亂))을보이고잇다고한다&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의장래(將來)&lt;br /&gt;
&lt;br /&gt;
그러면 다음날의약텅시는 엇더케될것인가?이문제는 결코예언자의 심심푸리와가튼 헛된소리는아니다적어도현세계의경제관계 와그에따라 일어나는모든사정이 쇄신된다면 모르지마는현계단의 경제제도가 그량존속되는한에는 세계적으로 한약에대한연구가왕성하여지고한약의권위가나날이놉하가는만큼약텅시의장래는압흐도세계에그일홈이놉하진다고일부인사들이말하고잇는것이그다지허언이아닐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지금은시장의형세가 산만하게생산자가 중개인울거처 도매상에게 팔게되여중간에책취를 당하게된다 하여도 장래는 현시장의대자벌들이주식(주식(株式))이나 혹은학자(합자(合資))의형식으로시장을상설하고도매와 개인생산자사이에 직접취인하게되여 지방경제의 윤택과약초생산의 장려의 약텅시본래의목적을 소개하려는것이 당업자간의 의도(의도(意圖))인 동시에매우현명한 의견인듯하다 그래서참된 대구자랑을 만들고조선의자랑을만들자——(완(完))&lt;br /&gt;
&lt;br /&gt;
==주요 내용 요약==&lt;br /&gt;
유래: 대구의 자랑으로 능금(사과) 대신 약령시를 들며 그 유래를 설명한다. 약령시는 1년에 한두 번 열리는 정기 시장이며, 조선시대 효종(1658년) 때 국가 명령(令)으로 개시된 것이다. 당시 경상도의 정치적 수부였던 대구는 약초 재배에 적합한 기후와 편리한 교통으로 물산 집산의 최적지였다. 궁중에서 쓸 약품을 이곳에서 구하기 위해 감사가 약재를 골라 사약원(司藥院)에 진상한 후, 팔도 약재를 일반 약국에서 구매하여 조선 전역의 환자 치료에 사용하게 한 것이 시초이다.&lt;br /&gt;
&lt;br /&gt;
쇠퇴와 현황: 서구 열강의 동양 침입과 함께 의학 및 약학이 발달하며 한약의 권위가 약해졌고, 약령시는 점차 쇠퇴하였다. 특히 22년 전(1915년경) 신해혁명으로 청황실이 무너지면서 조선 정부에 의뢰하던 막대한 약품 매도 길이 막힌 것이 큰 타격이었다. 최근 전주, 대전 등지에 군소 시장이 개설되어 대구 약령시의 경제적 이익이 감소했지만, 여전히 시장 개설 시에는 많은 약재가 모이고(당재, 초재 등 300여 종), 인근 상권에 호경기를 가져오는 것이다. 당시 약령시의 주요 구성 요소가 부업적 상인 계층으로 변질되고 불량 중개인 문제가 발생하자, 한약상조합과 약령시진흥회(현재 약령시번영회)가 결성되어 통제를 시도하고 있었다.&lt;br /&gt;
&lt;br /&gt;
약재 가격 변동: 당시(1937년) 일중사변(日中事變)의 영향과 중국 은가 변동으로 당재(唐材) 가격이 폭등했지만, 일부 국내 초재(草材)인 산약(山藥), 산수유(山茱萸), 토사자(兎絲子) 등은 폭락하여 생산자들에게 광란(狂亂)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lt;br /&gt;
&lt;br /&gt;
==분석 및 특징==&lt;br /&gt;
역사성 강조: 대구 약령시를 단순한 시장이 아닌 '국가 명령(令)'으로 시작된 역사적 시장으로 규정하며, 정치적, 지리적 배경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시대적 배경 반영: 서양 의학의 도입, 중국 혁명(청 황실 붕퇴), 당시 국제 정세(일중사변, 중국 은가) 등이 시장의 흥망성쇠에 미친 영향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여 식민지 시대의 경제 상황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시장 변화: 전통적인 약재 거래 방식에서 완제품 거래가 늘어나는 등 근대화에 따른 시장의 변화 양상도 포착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원시 시장'의 현대적 생존: 대구 약령시를 '조선의 자랑'이자 '원시 시장' 중 하나로 보면서도, 현대 자본주의 경제권에 발을 디디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평가하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대구(大邱)장연구회(硏究會) 창립(創立)을보고서=&lt;br /&gt;
구지국(大邱支局)&lt;br /&gt;
&lt;br /&gt;
이활(李活)&lt;br /&gt;
&lt;br /&gt;
민중(民衆)의보건운동(保建運動)은 요사이각계인사(各界人士)들의 크다른관심(關心)거리로어듸서 엇더케 무슨방법(方法)으로『억세인조선(朝鮮)』을건설(建設) 할수잇슬가 함에연구(硏究)를거듭하게되엿다회상(回想)하면 조선(朝鮮)에새로운운동경기(運動競技)가 수입(輸入)된지도 일반문화(一般文化)와갓치 벌서 반세기(半世紀)란역사(歷史)를가지고잇다 그중(中)에는 야구(野球)·정구(庭球)·축구(蹴球)·농구등(籠球等)을비롯하야 유도(柔道)·격검(擊劒)·권투등(拳鬪等)모든경기(競技)가들어와서 장족(長足)의진보(進步)도하엿스러니와 세계적무대(世界的舞臺)를향(向)하야 진출(進出)한선수(選手)도업지안타 그러나 그것은극소수(極小數)인동시(同時)에 지금(至今)까지의 조선(朝鮮)의운동경기(運動競技)는 한갓도회(都會)를중심(中心)으로잘어왓다 물론(勿論)다그럿타는것은아니지만은 현하운경기(現下運競技)그것은 조선(朝鮮)이나 혹(或)은다른나라에서라도 학교(學校)를중심(中心)으로발전(發展)되여오는만큼 교내(校內)의『스포—스맨』들은 완연(宛然)『떼파—트』진열장(陳列場)속에서 고객(顧客)을호리는『마네킹』처럼 상품화(商品化)한교육제도하(敎育制度下)에서 달큼하게 그상품(商品)의가격(價格)을놉혀주엇스며 그학교(學校)를버저나와 실사회(實社會)에취직(就職)을하면 역시(亦是)그와갓튼『마네킹』노릇을하여왓다 이러는동안 조선(朝鮮)의운동경기(運動競技)는 그발생(發生)으맹아(萌芽)가 힘것생장(生長)하기도전(前)에현제도(現制度)의 독아(毒牙)에여지(餘地)업는약관(躍關)을당(當)한절대(絕對)의원인(原因)과 그밧게사회(社會) 경제(經濟) 정치적제정세(政治的諸情勢)의착잡(錯雜)한모순(矛盾)이 너무나철업시이운동경기(運動競技)의발달(發達)까지 조해(阻害)하여왓다그러나 노력(勞力)과인내(忍耐)는갑이잇서이때까지외래품(外來品)이라면 아무비판(批判)도업시 실행(實行)하야오든우리도야구(野球)의전원(全員)이일시(一時)에활약(活躍)할수업는폐(廢)와정구(庭球)의시후(時候)에대(對)한불편(不便)과『꼴프』의귀족적(貴族的)인것등(等) 모든운동(運動)의단점(短點)만을빼고 장점(長點)만을취(取)하야 조선적운동(朝鮮的運動)을창출(創出)하려는이이 경성(京城)서는중앙체육연구소(中央體育研究所)가생(生)기고 금반대구(今般大邱)에서『장』연구회(硏究會)가생(生)기게된것이다&lt;br /&gt;
&lt;br /&gt;
장이란북조선(北朝鮮)의궁벽(窮僻)한지대(地帶)의인사(人士)들은 잘알지못할는지모르나이장만은 오래동안 우리조선(朝鮮)으로부터 그들의자손(子孫)인우리들에게부(傅)하아은 국기(國技)의하나이다물론(勿論) 국기(國技)란단순(單純)한의미(意味)로서만필자(筆者)가그것을추장(推獎)하는것은인니다 딸아서 운동(運動)의영향(影響)이문화창조(文化創造)에잇더한역할(役割)을한다는것을새로히논(論)하려는것도안니다&lt;br /&gt;
&lt;br /&gt;
대구지국(大邱支局) 이(李) 활(活)&lt;br /&gt;
&lt;br /&gt;
그러나일반문화(一般文化)가 그지리(地理)와풍토(風土)에영향(影響)되는바만흔것과가티운동경기(運動競技)도 또한그러히다 그것은『필랜드』사람들이『스켓틩』을잘하는것과『낙위(諾威)』사람의『스키-』를잘하는것이라든지『정말(丁抹)』사람의체조(體操)기튼것이 이점(點)을잘실증(實證)하고잇다 그러면조선(朝鮮)에는 조선적(朝鮮的)인자연세력(自然勢力)도 그러하러니와 더욱이 금일(今日)의사회적경제적(社會的經濟的)모든조건(條件)이 조선인(朝鮮人)에적합(適合)한것이안니면 안될것으다 그래서 최소(最少)의노력(努力)으로최대(最大)의 효과(効果)를발현(發現)치안으면안될것이다&lt;br /&gt;
&lt;br /&gt;
아에우리는생각한다 오날날까지조선(朝鮮)에수입(輸入)된운동경기(運動竸技)의종목(種目)은그대(臺)를매거(枚擧)키난(難)하나 그중(中)한가지도 우리에게 적합(適合)한것이업고 더욱이농민(農民)들에게 추장(推獎)할만힌운동(運動)은업섯다 그러나이장만은 오날날까지 그들농민(農民)의손에서전(傳)해왓다 그러면서도그진정가치(眞正價値)를돌낫든것이 오날이야 사계(斯界)의권위제씨(權威諸氏)가 적년연구(積年硏究)를거듭하야 발표(發表)한결과(結果)를보면 운동(運動)으로시 제일망각(第一忘却)치못할생리학상(生理學上)으로보아 전체(全體)가균형적(均衡的)으로활동(活動)되고 경제적(經濟的)으로도 기구(器具)를작만히는데 돈이들지안코 어느곳에서든지『장채』를직만하고『장방울』을다드무면논바닥에서나 밧기운데서라도 할수잇는농민본위(農民本位)의운동(運動)이라고한다 그리고다른운동경기(運動競技)가티『씨—슨』이잇는것도안니고 춘하추동(春夏秋冬)어느때라도 되는경기(競技)인즉 농번기(農繁期)는 못히드라도 농한기(農閑期)갓트면 그들의육체(肉體)를 하련(鍜鍊)하는데 매우적당(適當)한것이다 수(數)만흔경기중(竸技中)에능(能)히경제조건(經濟條件)이 어느정도(程度)까지용인(容認)한다하여도 그들의게생전(生前)듯자못하든말로『핸드뽈』이니『꼴』이니『라인』이니하여보아도 결(决)크그들에게취미(趣味)가잇슬이(理)가만무(萬無)하고취미(趣味)가업스면 그들에게발전(發展)될이(理)도만무(萬無)한것이다 그러나『장』연구회동인(硏究會同人)들의말을들으면경기(竸技)에계산(計算)하는용어(用語)까지도순조선(純朝鮮)말로한다는것의경하(慶賀)할일이다 이『장치기』를국기(國技)로서추장(推獎)하야세계(世界)에널니선전(宣傳)하는것도좃치만은먼저안으로그들이이국기(國技)를직혀왓는만큼 그들에게조직적(組織的)으로보급(普及)하라 그리서조선농민(朝鮮農民)의경기(競技)를만들고 따라 세계(世界)의농민대중(農民大衆)에게 보급(普及)식하라!그래서『장』연구회(硏究會)의본래(本來)의사명(使命)을다하기를바란다(종(終))&lt;br /&gt;
&lt;br /&gt;
==주요 내용 요약==&lt;br /&gt;
배경: 조선에 수입된 야구, 축구, 유도 등 서양식 운동 경기는 학교 중심, 도시 중심으로 발전하며 '상품화'되었고, 농민 등 대중에게 적합하지 않은 것이다.&lt;br /&gt;
&lt;br /&gt;
'장치기'의 가치: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 **'조선적 운동'**을 창출하려는 노력으로 경성에서는 중앙체육연구소가, 대구에서는 '장' 연구회가 생긴 것이다. '장'은 조선의 국기(國技) 중 하나로, 농민의 손에서 전해 내려온 것이다. 생리학적으로 전신 균형 활동이 가능하고, 경제적으로 기구가 필요 없어 비용이 들지 않으며, 논바닥이나 밭에서도 가능하여 농민 본위의 운동이라고 한다. 계절을 타지 않고 농한기에 육체 단련에 매우 적합하며, 경기 용어까지 순 조선말을 사용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연구회의 사명: 연구회 동인들에게 '장치기'를 국기로 추장(추천)하여 세계에 선전하는 것도 좋지만, 먼저 이 국기를 지켜온 농민들에게 조직적으로 보급하여 '조선 농민의 경기'를 만들고 나아가 세계 농민 대중에게 보급해야 한다는 사명을 부여하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분석 및 특징==&lt;br /&gt;
민족주의적 시각: 서구 문물인 스포츠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한국의 전통 운동인 '장치기'의 토착적, 민족적 가치를 재조명하려는 의도가 뚜렷한 것이다.&lt;br /&gt;
&lt;br /&gt;
대중성/실용성 강조: '장치기'의 장점을 경제적 부담 없음, 장소 제약 없음, 계절 제약 없음, 쉬운 용어 등 농민 대중에게 적합한 실용성에 초점을 맞춰 설명하고 있다.&lt;br /&gt;
&lt;br /&gt;
'마네킹' 비유: 현대 교육 제도가 배출하는 스포츠맨을 '떼파-트 진열장의 마네킹'에 비유하며, 당시 상업화된 교육 및 스포츠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드러내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노신추도문(魯迅追悼文)=&lt;br /&gt;
(일(一))&lt;br /&gt;
&lt;br /&gt;
이(李) 육(陸) 사(史)&lt;br /&gt;
&lt;br /&gt;
『아(阿)Q정전(正傳)』의 작자(作者)로서 세계적작가(世界的作家)이며 중국신문학(中國新文學)의 최고봉(最高峰)인 노신(魯迅)이지난십구일(十九日) 오전오시(午前五時)에상해(上海)에서 숙아(宿疴)로 영면(永眠)하엿다는 실음(實音)이전(傳)한지 삼일(三日)되는날에 우리는 간단(簡單)한일문(一文)을 비러 삼가추도(追悼)의뜻을 표(表)하거니와 만년(晩年)에그의 정치적불우(政治的不遇)로인(因)하야 문학자(文學者)로서의 성명(聲名)조차가 우리에게 널니퍼지지못한것을 더유감(遺憾)으로생각한다.　　　　 (일(一) 기(記) 자(者))&lt;br /&gt;
&lt;br /&gt;
일구삼이연육월초(一九三二年六月初) 어느토요일(土曜日)아츰이엿다 식관(食舘)에서나온 나와M은 네거리의 담배가가에서조간신문(朝刊新聞)을 사서들고 근육신경(筋肉神經)이떨니도록 굴근활자(活字)를 함숨에나려읽은것은 당시중국과학원부주석(當時中國科學院副主席)이요 민국혁명(民國革命)의 원로(元老)이든양행불(楊杏佛)이 남의사원(藍衣社員)에게 암살(暗殺)을당(當)하엿다는 기사(記事)이엿다.&lt;br /&gt;
&lt;br /&gt;
우리들은 거리마다 삼엄(森嚴)하게늘어선 불란서공무국(佛蘭西工務局) 순경(巡警)들의예리(銳利)한눈초리를 등으로하나 갓득늣기면서 여반로(侶伴路)의 서국(書局)까지을동안은 침묵(沈默)이 계속(繼續)되엿다&lt;br /&gt;
&lt;br /&gt;
문(門)안에 들어서자마자 편집원(編輯員)R씨(氏)는 우리들에게 다음과가튼말을 들여주엇다.&lt;br /&gt;
&lt;br /&gt;
중국좌익작가연맹(中國左翼作家聯盟)의 발안(發案)에의(依)하야 전세계(全世界)의 진보적(進步的)인 학자(學者)와 작가(作家)들이 상해(上海)에모혀서중국(中國)의 문화(文化)를 옹호(擁護)할대회(大會)를그해팔월(八月)에 갓게 된다는것과이에 불안(不安)을 늣기는 국민당통치자(國民黨統治者)들이 먼저 진보적작가진영(進步的作家陣營)의 중요분자(重要分子)인 반재년(潘梓年)(현재남경유폐(現在南京幽廢))과 인제는 고인(故人)이된 여류작가(女流作家) 정영(丁玲)을 체포(逮捕)하여행방(行方)을 불명(不明)케한것이며 여기동정(同情)을 가지는 송경령여사(宋慶齡女史)를 중심(中心)으로한 일련(一聯)의 자유주의자(自由主義者)들과 작가연맹(作家聯盟)이 맹렬(猛烈)한 구명운동(救命運動)을한사실(事實)이며 그것이 국민당통치자(國民黨統治者)들의 눈쌀에 거슬려서 양행불(楊杏彿)이 희생(犧牲) 된것과 그외(外)에도 송경령(宋慶齡) 채원(蔡元) 배(培) 노신등등(魯迅等等) 상해(上海)안에서만삼(三) 십명(十名)에갓가운 지명지사(知名之士)들이 남(藍) 의사(衣社)의『뿔랙·리스트』에 올라잇 다는것이엿다.&lt;br /&gt;
&lt;br /&gt;
그리고 그뒤삼일(三日)이 지난후(後)R씨(氏)와 내가탄자동차(自動車)는 만국빈의사(萬國殯儀社)아페다엇다,간단(簡單)한 소향(燒香)의예(禮)가 끗나고도라설때 젊은두여자(女子)의수원(隨員)과함게드러오는송경령여사(宋慶齡女史)의일행(一行)과가티 연회색(軟灰色)두루막에 검은『마괘아(馬掛兒)』을 입은중년(中年)늙은이생화(生化)에 싸인관(棺)을 붓들고 통곡(痛哭)을하든그를 나는문득 노신(魯迅)인것을알엇스며 엽헤섯든 R씨(氏)도 그가노신(魯迅)이란것을 말하고난 십분(十分)쯤뒤에 R씨(氏)는나를 노신(魯迅)에게소개(紹介)하여주엇다&lt;br /&gt;
&lt;br /&gt;
그때노신(魯迅)은 R씨(氏)로부터 내가조선청년(朝鮮靑年)이란것과 늘한번대면(對面)의기회(機會)를가지려고 햇드란말을듯고외국(外國)의선배(先輩)압히며 처소(處所)가 처소(處所)인만치 다만 근신(謹愼)과공손(恭遜)할뿐인나의손을 다시한번 잡아줄때는그는매우 익숙하고 친절(親切)한친구이엿다&lt;br /&gt;
&lt;br /&gt;
아!그가벌서 오십육세(五十六歲)를일기(一期)로 상해시고탑구호(上海施高塔九號)에서 영서(永逝)하엿다는 부보(訃報)를바들때에 암연(暗然)한줄기 눈물을지우느니 엇지조선(朝鮮)의 한사람후배(後輩)로써 이붓을잡는나뿐이랴&lt;br /&gt;
&lt;br /&gt;
(이(二))&lt;br /&gt;
&lt;br /&gt;
이육사(李陸史)&lt;br /&gt;
&lt;br /&gt;
중국문학사상(中國文學史上)에남긴 그의 위치(位置)『아(阿)Q의 정전(正傳)을 다읽고낫슬때나는 아즉까지 아(阿)Q의 운명(運命)이걱정되여 못견듸겟다』고한『로망·로—랑』의 말과가티 현대중국문학(現代中國文學)의 아버지인 노신(魯迅)을&lt;br /&gt;
&lt;br /&gt;
이해(理解)하기 위(爲)해서는 우리는 먼저 아(阿)Q의 정전(正傳)을 이해(理解)하지안흐면 안된다 그러나 지금의 중국(中國)의 아(阿)Q들은 벌서『로망·로—라』으로하야금 그운명(運命)을 걱정할 필요(必要)는 업시되엿다실(實)로 수만흔 아(阿)Q들은 벌서 자신(自身)들의 운명(運命)을 열어갈길을노신(魯迅)에게서배웟다 그래서중국(中國)의 모든근로층(勤勞層)들은 남경로(南京路)의『아스필트』가자신(自身)들의 발미테 흔들리는것을늣기며 시고탑로신촌(施高塔路新邨)의구호(九號)로그들이가젓든 위대(偉大)한문호(文豪)의최후(最後)를애도(哀悼)하는마음들은 황포탄(黃浦灘)의붉은파도(波濤)와가티 밀려가고잇는것이다&lt;br /&gt;
&lt;br /&gt;
그럼으로 아(阿)Q시대(時代)를 고찰(考察)하여보는데따라서 노신정신(魯迅精神)의 삼단적변천(三段的變遷)과아울러 현대중국문학(現代中國文學)의 발전과정(發展過程)을 알어보는것도그를추억(追憶)하는의미(意味)에서 그다지 허무(虛無)한 일은아닐것이다,&lt;br /&gt;
&lt;br /&gt;
중국(中國)에는 고래(古來)로 소설(小說)이라는오늘날우리가 보는것과가튼 완전(完全)한예술적형태(藝術的形態)는 존재(存在)하지못햇다 삼국연의(三國演義)나 수호지(水滸誌)가아니면홍루몽(紅樓夢)쯤이잇섯고 다소(多少)의전기(傳記)가잇섯을뿐으로서 일반교양(一般敎養)잇는집자제(子弟)들은 과거제도(科擧制度)에 화(禍)를바더문어체(文語體)의&lt;br /&gt;
&lt;br /&gt;
고(古)&lt;br /&gt;
&lt;br /&gt;
문(文)만숭상(崇尙)하고백화소설(白話小說)가튼것은속인(俗人)의할일이라햐야나치아는하편소위문단(所謂文壇)은당송팔가(唐宋八家)와팔반(八般)의혼합체(混合體)인상성파(相城派)와사기당(思綺堂)과 원수원(袁隨園)의유파(流派)를따라가는 사륙변체문(四六騈體文)과황산곡(黃山谷)을본존(本尊)으로하는 강서파등등(江西派等等)이 당시정통파(當時正統派)의문학(文學)으로서 과장(誇張)과 허위(虛偽)와 아유(阿諛)로서 고전문학(古典文學)을 모방(模倣)한데지나지못하엿스며 새로운사회(社會)를 창생(創生)할하등(何等)의 힘도가지지못한것은 미루어알기도 어렵지안흔 분위기(雰圍氣)속에 중국문학사상(中國文學史上)에 찬연(燦然)한봉화(烽火)가 일어난것은일구일오년(一九一五年) 잡지(雜誌)『신청년(新靑年)』의 창간(創刊)이그것이다&lt;br /&gt;
&lt;br /&gt;
이것이처음발간(發刊)되자 당시(當時)『아메리카』에잇든호적지박토(胡適之博土)는『문학개량추의(文學改良蒭議)』라는『문학혁명론(文學革命論)』을일구일칠년신연호(一九一七年新年號)에 게재(揭載)하야진독수(陳獨秀)가 이에찬의(賛意)를표(表)하고 북경대학(北京大學)을 중심(中心)으로한 진보적(進步的)인교수(敎授)들이 합류(合流)하게되자 종래(從來)의고문가(古文家)들은 이운동(運動)을방해(防害)코저 가진야비(野卑)한 정치적수단(政治的手段)을 써도보앗스나 일구팔년사월호(一九八年四月號)에 노신(魯迅)의『광인일기(狂人日記)』란 백화소설(白話小說)이&lt;br /&gt;
&lt;br /&gt;
발(發)&lt;br /&gt;
&lt;br /&gt;
표(表)되엿슬때는 문학혁명운동(文學革命運動)은 실천(實踐)의거대보무(巨大步武)를옴기게되고 벌서고문가(古文家)들은 그추악(醜惡)한꼬라를 감주지안흐면안되엿다는것은 그후(後)얼마뒤에 노신(魯迅)이광동(廣東)에갓슬때에어&lt;br /&gt;
&lt;br /&gt;
떤흥분(興奮)한청년(靑年)은 그를마지하는문장(文章)속에『광인일기(狂人日記)』를 처음읽엇슬때 문학(文學)이란것이 무엇인지몰랏든나는 차차읽어나려가면서이상(異常)한흥분(興奮)을 늣겻다 그래서 동무를만나기만하면 곳붓들고말하기를——중국(中國)의문학(文學)은 이제바야흐로 한시대(時代)를 짓고잇다 그대는『광인일기(狂人日記)』를 읽어보앗는가 또거리를거러가면 길가는사람이라도붓들고 내의견(意見)을발표(發表)하리라고생각한적도잇섯다……』(노신재광동(魯迅在廣東))&lt;br /&gt;
&lt;br /&gt;
이문제(問題)의소설(小說)『광인일기(狂人日記)』의내용(內容)은 한개망상광(妄想狂)의 일기체(日記體)의소설(小說)로서 이주인공(主人公)은 실(實)로대담(大膽)하게또명확(明確)하게 봉건적(封建的)인 중국구사회(中國舊社會)의 악폐(惡弊)를통매(痛罵)한다 자기(自己)의 이웃사람은 물론(勿論)말할것도업고 특(特)히자기가정(自己家庭)을 격렬(激烈)히 공격(攻擊)하는것이다 가정(家庭)—가족제도(家族制度)라는것이중국봉건사회(中國封建社會)의 사회적단위(社會的單位)로서일반(一般)에열마나한 해독(害毒)을끼처왓는가.봉건적가족제도(封建的家族制度)는 고형화(固型化)한유교류(儒敎流)의&lt;br /&gt;
&lt;br /&gt;
종(宗)&lt;br /&gt;
&lt;br /&gt;
법사회관념하(法社會觀念下)에 당연(當然)히붕괴(崩壞)돠여야할것이면서 붕괴(崩壞)되지못하고 근대적사회(近代的社會)의성장(成長)에 가장근본적(根本的)인 장애(障碍)로되여잇는 날근도덕(道德)과 인습(因襲)을 여지(餘地)업시 통매(痛罵)햇다,이에『광인일기(狂人日記)』중(中)에 한절(節)을 초(抄)하면『나 는 역사(歷史)를 뒤적거려 보앗다 역사(歷史)란건 어느시대(時代)에나 인의(仁義) 도덕(道德)이란몃줄로 치더치덕씨여 저잇섯다 나는 밤잠도안자고 딍굴딍굴러가며 생각하여보 앗스나 겨우글자와 글자사이 에서『사람을먹는다』는 몃자 가쓰여잇섯슬뿐이엿다』&lt;br /&gt;
&lt;br /&gt;
이가티추악(醜惡)한 사회면(社會面)을폭로(暴露)한다음 오는시대(時代)의건설(建設)은 젊은사람들의손에 맛걱저야한다는것을암시(暗示)하면서 이소설(小說)의일편(一篇)은『어린이를구(救)하자』는 말로서끗을막엇다.실(實)로이한말은 당시(當時)의『어린이』인 중국청년(中國靑年)들에게는 사상적(思想的)으로는『폭탄선언(暴彈宣言)』이상(以上)으로 충격(衝擊)을주엇스며이러한작품(作品)이 백화(白話)로쓰여지는데 따라 문학혁명(文學革命)이완전(完全)히승리(勝利)의 개가(凱歌)를 부르게된공적(功績)도 태반(太半)은노신(魯迅)에 돌려야하는것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삼(三))&lt;br /&gt;
&lt;br /&gt;
이육사(李陸史)&lt;br /&gt;
&lt;br /&gt;
『광인일기(狂人日氣)』의다음 연속(連續)해나온작품(作品)으로『공을사(孔乙巳)』『약(藥)』『명일(明日)』『일개소사건(一個小事件)』『두발적고사(頭髮的故事)』『풍파(風波)』『고향(故鄕)』등(等)은모다 신청년(新靑年)을통(通)해서세상(世上)에물의(物議)를 이르켯스나 그후일구이일년(後一九二一年) 북경신보문학부간(北京新報文學副刊)에그유명(有名)한『아(阿)Q정전(正傳)』이 연재(連載)되면서부터는 노신(魯迅)은자타(自他)가공인(共認)하는 문단제일인적작가(文壇第一人的作家)엿다.&lt;br /&gt;
&lt;br /&gt;
그리고 이러한대작(大作)은 모다신해혁명전후(辛亥革命前後)의&lt;br /&gt;
&lt;br /&gt;
봉(封)&lt;br /&gt;
&lt;br /&gt;
건사회(建社會)의생활(生活)을 그린것으로 어떠케필연적(必然的)으로 붕괴(崩壞)하지안흐면안될 특징(特徵)을가젓는가를묘사(描寫)하고 어떠케새로운사회(社會)를 살어갈가를 암시(暗示)하고잇다.뿐만아니라 당시(當時)의혁명(革命)과 혁명적(革命的)인사조(思潮)가 민중(民衆)의심리(心理)에 생활(生活)의『데테일슨』에 어떠케표현(表現)되는가를 가장『레알』하게묘사(描寫)한것이다.더구나 그는 농민작가(農民作家)라고할만치 농민생활(農民生活)을그리는데 교묘(巧妙)하다는것도 한가지조건(條件)이되겟지만은 그의소설(小說)에는주장(主張)이개념(槪念)에 흐른다거나 조금도무리(無理)가업는것은 그의작가적수완(作家的手腕)이 탁월(卓越)하다는것을 말하지안홀수업다.&lt;br /&gt;
&lt;br /&gt;
그리고 그의작품(作品)은 늘 농민(農民)을주인공(主人公)으로하는것과 때로는『인테리』일지라도 예(例)를들면『공을사(孔乙巳)』의 공을사(孔乙巳)나『아(阿)Q정전(正傳)』의아(阿)Q가모다 일맥(一脈)이상통(相通)하는 성격(性格)을가지는것이니 공을사(孔乙巳)는 구시대(舊時代)의지식인(知識人)으로 시대(時代)에떠러저서 무슨일에도 쓰여지지못하고기품(氣品)만은노펏스나 생활력(生活力)은업고걸인(乞人)이되야 선술집술상대(臺)에 일금십구조(一金十九吊)의주채(酒債)가 어느때까지쓰여저잇는대로 언제인지&lt;br /&gt;
&lt;br /&gt;
행(行)&lt;br /&gt;
&lt;br /&gt;
방(方)이 불명(不明)된채로 나중에죽어젓든것이라든지『룸펜』농민(農民)인 일용노동자아(日傭勞働者阿)Q가 또한 쑥스러운년석으로혁명혁명(革命革命)떠들어놋코는 그것이몹시유쾌해서 반취(半醉)한기분(氣分)이 폭동대(暴動隊)의일군(一群)에 참가(參加)는하려고하엿스나 결국(結局)헛풍만치고 아무것도못하다다가 때마츰 일어난 폭도(暴徒)의약탈사건(掠奪事件)에 도당(徒黨)으로오해(誤解)되여(피(彼)의평소(平素)삼가지못한 언동(言動)에의(依)하야)피살(被殺)되는 아(阿)Q의성격(性格)은 그때중국(中國)의 누구라도가 전부혹(全部或)은일부분식(一部分式)은 소유(所有)하고잇섯든것이다다시말하면 아(阿)Q나공을사(孔乙巳)가모다사고(思考)와행동(行動)이 루—즈하고 확호(確乎)한한개의 정신(精神)도업스며 우약(愚弱)하면서도 몹시건방지고 남에게한개쥐여질리면 아무런반항(反抗)도못하면서 남이자신(自身)을 연민(憐憫)하면 제도량(度量)이커서 남이못덤비는것이라고제대로도취(陶醉)하야 남을 되는대로해(害)치는 무지(無知)하고우수면서도 가엽고 괴팩스러운것을 노신(魯迅)은그『레알리스틕』한문장(文章)으로폭로(暴露)한것이 특징(特徵)이엿스니 당시(當時)『아(阿)Q정전(正傳)』이발표(發表)될때&lt;br /&gt;
&lt;br /&gt;
평(平)&lt;br /&gt;
&lt;br /&gt;
소노신(素魯迅)과 교분(交分)이좃치못한사람들은 모다자기(自己)를모—델로 고의(故意)로쓴것이라고들 떠드는자(者)가잇은것을 보아도알수가잇는것이다&lt;br /&gt;
&lt;br /&gt;
그래서당시중국(當時中國)은 시대적(時代的)으로『아(阿)Q시대(時代)』이엿스며 노신(魯迅)의『아(阿)Q정전(正傳)』이 발표(發表)될때는 비평계(批評界)를비롯하야 일반지식군(一般知識群)들은『아(阿)Q상(相)』이라거나『아(阿)Q시대(時代)』라는말을평상대화(平常對話)에사용(使用)하기를 항다반(恒茶飯)으로하게된것은 중국문학사상(中國文學史上)에남겨노흔노신(魯迅)의 위치(位置)를 짐작하기에 조흔 한개의재료(材料)이거니와그의작가(作家)로서의 태도(態度)를통(通)하야 일관(一貫)하여잇는 노신정신(魯迅精神)을 다시한번음미(吟味)해보는데 적지안흔흥미(興味)를갓게된다는것은 오늘날우리의조선문단(朝鮮文壇)에는 누구나할것업시 예술(藝術)과정치(政治)의 혼동(混同)이니 분립(分立)이니하야 문제(問題)가엇지보면 결말(决末)이난듯도하고 어찌보면 미해결(未解决)그대로 잇는듯도한 현상(現狀)인데 노신(魯迅)가티 자기신념(自己信念)이 구든사람은이예술(藝術)과정치(政治)란것을 어떠케해결(解决)하엿는가?이문제(問題)는 그의작가(作家)로서의 출발점(出發點)부터 구명(究明)해야한다.&lt;br /&gt;
&lt;br /&gt;
노신(魯迅)은&lt;br /&gt;
&lt;br /&gt;
본(本)&lt;br /&gt;
&lt;br /&gt;
내의사(來醫師)가 되려고하엿다 그것은자기(自己)의『할일』이 무엇이라는것을 알엇기때문이엇다 물론(勿論)그때의 자기(自己)의『할일』이란것은 민족개량(民族改良)이라는 신념(信念)이엿든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후년(後年)『납함(吶喊)』서문(序文)에 다음가티써다.&lt;br /&gt;
&lt;br /&gt;
『나의학적(學籍)은 일본(日本)어느 지방(地方)의 의학전문학교(醫學專門學校)에 두엇다 나의 꿈은 이것으로 매우 아름답 고 만족(滿足)햇다 졸업(卒業)만하고 고(故) 국(國)에 도라오면 아버지와가티 치료(治療)못하는 병인(病人)을살리고 전(戰) 쟁(爭)이나면 출정(出征)도하려니와 국(國) 인(人)의 유신(維新)에대(對)한 신앙(信仰)에까지 나어갈것……』이라고&lt;br /&gt;
&lt;br /&gt;
이것은물론(勿論) 소년(少年)다운노신(魯迅)의로맨틕한 인도주의적흥분(人道主義的興奮)이엿겟지만은 이꿈도결국(結局)은 깨여지고말엇다.&lt;br /&gt;
&lt;br /&gt;
——의학(醫學)은결(决)코 긴요(緊要)하지안타 우약(愚弱)한 국민(國民)은 체격(體格)이 아모 리 조타고해도 또 아모리강(强) 장(壯)해도 무의미(無意味)한 구경거리나 또는 구경군이 되는박게는아 무것도아니다—중략(中略)—그럼으로 긴요(緊要)한것은 그들을 정신적(精神的)으 로 잘개조(改造)할것은 무엇일가나 는그때당연(當然) 문예(文藝)라고생각햇다 그리고 문예운동(文藝運動)을 제창(提唱)하기 로햇다(납함서문(吶喊序文))&lt;br /&gt;
&lt;br /&gt;
이리하야 그가 당시동경(當時東京)에망명(亡命)해잇는 중국(中國)사람들의 기관지(機關紙)인『절강조(浙江潮)』『하남(河南)』등(等)에 쓰든과학사(科學史)나 진화론(進化論)의 해설(解說)을 집어치우고 문학서적(文學書籍)을 번역(飜譯)한것은희랍(希臘)의 독립운동(獨立運動)을 원조(援助)한『빠이론』과 파란(波蘭)의복수시인(復讐詩人)『아담·미케뷧치』『향가리』의 애국시인(愛國詩人)『베트피·산더—』『필립핀』의문인(文人)으로 서반아정부(西班牙政府)에 사형(死刑)바는『리샬』등(等)의 작품(作品)이엿다.&lt;br /&gt;
&lt;br /&gt;
(사(四))&lt;br /&gt;
&lt;br /&gt;
이육사(李陸史)&lt;br /&gt;
&lt;br /&gt;
그리고이것은 노신(魯迅)의 문학행정(文學行程)에잇서서 가장초기(初期)에 속(屬)하는것이지만은 이러한번역(飜譯)까지라도그의 일정(一定)한목적(目的) 즉정치적목적(即政治的目的)미테 수행(遂行)된것을 엿볼수잇는것이며 우에말한『광인일기(狂人日記)』의『어린이를구(救)하자』는말도 순결(純潔)한 청년(靑年)들에의(依)하야 새로운중국(中國)을 건설(建設)하자는 그의이상(理想)을&lt;br /&gt;
&lt;br /&gt;
단적(端的)으로 고백(告白)한것으로써 이말은당시일반청년(當時一般靑年)들에게 무거운 책임감(責任感)을깨닷게한것은물론(勿論) 이래기천년(爾來幾千年)동안의 봉건사회(封建社會)로부터 청년(靑年)을해방(解放)하랴는 슬로—간으로 널리쓰여젓고 사실(事實)그뒤의 중국청년학생(中國靑年學生)들은 모든대중적사회운동(大衆的社會運動)의최전선(最戰線)에서 활발과감(活潑果敢)한 지도(指導)와조직(組織)을하엿스며 그유명(有名)한 오사운동(五四運動)이나 오주운동(五州運動)이나 국민혁명(國民革命)까지도 늘최전선(最前線)에서서 대중(大衆)을지도(指導)한것은 이들청년학생(靑年學生)이엿다&lt;br /&gt;
&lt;br /&gt;
그럼으로 노신(魯迅)에잇서서는 예술(藝術)은정치(政治)의 노예(奴隸)가 아닐뿐아니라 적어도예술(藝術)이 정치(政治)의 선구자(先驅者)인 동시(同時)에혼동(混同)도 분립(分立)도아닌즉(即) 우수(優秀)한작품(作品) 진보적(進步的)인 작품(作品)을 산출(產出)하는데만 문호(文豪) 노신(魯迅)의지위(地位)는노퍼갓고 아(阿)Q도 여기서비로소탄생(誕生)하엿스며 일세(一世)의 비평가(批評家)를도 감(敢)히 그에게는 함부로 머리를 들지못하엿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여기에 한가지 조흔예(例)가잇다 일구이팔년경(一九二八年頃) 무한(武漢)을쪼겨와서 상해(上海)에서 태양사(太陽社)를조직(組織)한 청년비평가(青年批評家) 전행촌(錢杏村)이 때마춤 푸로문학론(文學論)이 드셀때인만큼 노신(魯迅)을 대담(大膽)하게&lt;br /&gt;
&lt;br /&gt;
공격(攻擊)을 시작(始作)해보앗다그소론(所論)에 의(依)하면노신(魯迅)의 작품(作品)은 비계급적(非階級的)이다 아(阿)Q에게어데 계급성(階級性)이잇느냐는것이다.&lt;br /&gt;
&lt;br /&gt;
물론(勿論)그것은 정당(正當)한말이다,노신(魯迅)의작품(作品)에서 우리는눈딱고보아도 푸로레타리아적특성(的特性)은 조금도 볼수가 업는것은 사실(事實)이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우리가 한사람의작품(作品)을 비평(批評)할때는 그시대적배경(時代的背景)을고려(考慮)하지안흘수는업는것이니 노신(魯迅)이작가(作家)로활동(活動)을 하고잇슬때는중국(中國)에는 오늘날우리가 정의(定義)를나릴수잇는 푸로레타리아는 업슬뿐아니라 그때쯤은 뿌르조아민주주의적(民主主義的)인 정치사조(政治思潮)조차도아즉계선(界線)이분명(分明)하지못하엿다는것은뿌르조아혁명(革命)이라는 소위국민혁명(所謂國民革命)도 정직(正直)하게말하자면 사오운동(四五運動)을 전초전(前哨戰)으로한것만큼 여기서 역시중국(亦是中國)의 비상가(批詳家)인병신(丙申)은자미잇는말을하고잇다&lt;br /&gt;
&lt;br /&gt;
『그가현재(現在) 중국좌익작가연맹(中國左翼作家聯盟)을지지(支持)하고잇다해서 그의『사오(四五)』전후(前後)의&lt;br /&gt;
&lt;br /&gt;
작품(作品)을 푸로문학(文學)이라고 지목(指目)할것은아니&lt;br /&gt;
&lt;br /&gt;
다 그러나 그를우수(優秀)한 농민작가(農民作家)라고 하는것이 타당(妥當)타고—』그러타 이말은 어느정도(程度)까지&lt;br /&gt;
&lt;br /&gt;
정당(正當)에 가까운말로서 그를푸로작가(作家)가아니고 농민작가(農民作家)라고해서작가노신(作家魯迅)의 명예(名譽)를 더럽힐조건(條件)은 되지못하는것이다 다만문제(問題)는 그가얼마나 창작(創作)에 잇서서진실(眞實)하게 명확(明確)하게 묘사(描寫)하는태도(態度)를 가지는가 그의한말을 써보기로하자&lt;br /&gt;
&lt;br /&gt;
『——현재(現在) 좌익작가(左翼作家)는 훌륭한자신(自身)들의 문학(文學)을 쓸수잇슬가?생각컨대 이것은 매우곤란(困難)하다.현재(現在)의 이런 부류(部類)의 작가(作家)들은 모다『인테리』다 그들은 현실(現實)의 진실(眞實)한 정형(情形)은쓸려고해도 용이(容易)치안타 어떤사람이 일즉 이런 문제(問題)를제출(提出)한것이잇섯다『작가(作家)가 묘사(描寫)하는것은 반드시 자기(自己)가 경험(經驗)한것이라야만될것인가?그러나 그는 스스로 답(答)하기를반드시 안그래도조타웨러러냐하면 그들은 잘 추찰(推察)할수가잇스므로 절도(窃盜)하는장면(塲面)을 묘사(描寫)하랴면 작가(作家)는 반드시 자신(自身)이 절도(窃盜)질할 필요(必要)도업고 간통(姦通)하는&lt;br /&gt;
&lt;br /&gt;
장면(塲面)을 묘사(描寫)할 필요(必要)를늣길때 작가(作家) 자신(自身)이간통(姦通)할 필요(必要)도 업다고』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작가(作家)가 구사회(舊社會)속에서 생장(生長)해서그 사회(社會)의 모든 일을 잘알고 그사회(社會)의 인간(人間)들에게 익숙해저서 잇는때문에 추찰(推察)이되는것이다 그러나 종래(從來)아무런 관계(關係)도업는새사회(社會)의 정형(情形)과인물(人物)에 대(對)해서는 작가(作家)가무능(無能)하다면 아마그릇된 묘사(描寫)를할것이다 그럼으로 푸로문학가(文學家)는 반드시 참된현실(現實)과 생명(生命)을 가티하고 혹(或)은 보다기피현실(現實)의맥박(脈搏)을 감수(感受)하지안흐면 안된다고하면서 또다시말을 계속(繼續)하는것이다.&lt;br /&gt;
&lt;br /&gt;
그러나구사회(舊社會)를 조그만치공격(攻擊)하는작품(作品)일지라도 만약(萬若)그결점(缺點)을 분명(分明)히모르고 그병근(病根)을투철(透澈)히파악(把握)치못하면 그것은유해(有害)할뿐이다 애석한일이나마현재(現在)의푸로작가(作家)들은 비평가(批評家)까지도 왕왕(往往) 그것을못한다 혹사회(或社會)를 정시(正視)해서 그진상(眞相)을 알려고도안코 그중(中)에는 상대자(相對者)라고 생각하는편의 실정(實情)도알려고하지안는다.&lt;br /&gt;
&lt;br /&gt;
(오(五))&lt;br /&gt;
&lt;br /&gt;
이육사(李陸史)&lt;br /&gt;
&lt;br /&gt;
차근(車近)한 예(例)로는 얼마전 모지상(某紙上)에 중국문학계(中國文學界)를 비평(批評)한문장(文章)을 한편(篇)보앗는데 중국문학계(中國文學界)를 삼파(三派)에 난워서 먼저창조파(創造派)를 들어 푸로파(派)라하야매우상세(詳細)하게 논급(論及)하고 다음어사사(語絲社)를 소(小)뿌르파(派)라고 조그만치 말한후(後)&lt;br /&gt;
&lt;br /&gt;
신월사(新月社)를 뿌르문학파(文學派)라 해서 겨우 붓 을 대다가만 젊은비평가(批評家)가잇 섯다 이것은 젊은기질(氣質)의 상(相) 대자(對者)라고 생각는파(派)에 대(對)해서 는 무어세(細)□□□고구(考究)할필요(必要)가 업다는뜻을 표명(表明)한것이다 물(勿) 논(論)우리는 서적(書籍)을볼때 상대자(相對者) 의것을 보는것은 동파(同派)의것을 보는안심(安心)과 유쾌(愉快)와 유익(有益)한데 밋치지 못하는것은 사실(事實)이다 그러나 만약(萬若) 일개전투자(一個戰鬪者)라면 나는 생각컨대 현실(現實)과 상대(相對) 자(者)를 이해(理解)하는 편의상(便宜上) 보담 만은 당면(當面)의 상대자(相對者)에 대(對)한 해부(解剖)를 필요(必要)로 하지안으면안 될것이다.옛것을 분명(分明)히 알 고 새로운것에 간도(看到)하고 과(過) 거(去)를 요해(了解)하야 장래(將來)를 추단(推斷) 하는데서만 우리들의 문학적(文學的) 발전(發展)은 희망(希望)이잇다 생각건대 이것만은 현재(現在)와 가튼 환경(環境) 에잇는 작가(作家)들은 부단(不斷)히 노(努) 역(力)할것이고 그래야만 참된작(作) 품(品)이 나오는것이다』라 고&lt;br /&gt;
&lt;br /&gt;
이간단(簡單)한 몃마듸만히 문호노신(文豪魯迅)의 창작(創作)에 대(對)한『모랄』인것이다 이얼마나 우리의 뼈에 사무치고도 남을만한시사(示唆)인고!이리해서&lt;br /&gt;
&lt;br /&gt;
현대중국문단(現代中國文壇)의부(父)이며비평가(批評家)의비평(批評)으로서자타(自他)가 그지위(地位)를 함께긍정(肯定)하든그의작가(作家)로서의 생애(生涯)는 너무나쩔으것이엿스니 일구이육연삼월(一九二六年三月)『이혼(離婚)』이란작품(作品)을 최후(最後)로남긴그는 교수(敎授)로서 작가(作家)로서의 화려(華麗)한 생애(生涯)는 종언(終焉)을고(告)하지 안흐면안될때가왓다 그는 지금부터『손으로쓰기보다는 발로 다라나기가 더밧벗다』&lt;br /&gt;
&lt;br /&gt;
일구이육년(一九二六年) 북양군벌(北洋軍閥)을 배경(背景)오로한 안복파(安福派)의수령(首領) 단기서(段祺瑞)의정부(政府)는 급진적(急進的)인좌파(左派)의 교수(敎授)와우수(優秀)한 지식분자오십여명(知識分子五十餘名) 체포령(逮捕令)을 나렷다 우리노신(魯迅)은 이오십명중(五十名中)의 한사람이엿다 그것은일구이사년(一九二四年) 국민당(國民黨)의 연아용공책(聯俄容共策)이 결정(决定)되야그익년(翌年)가을『뽀로된』등(等)이고문(顧問)으로광동(廣東)에오고『전국민적공동전선(全國民的共同戰線)』이엿든 국민혁명(國民革命)의제일계단(第一階段)인 광동시기(廣東時期)에는 푸로레타라아의 동맹자(同盟者)는 농민도시빈민(農民都市貧民) 소(小)뿌로지식계급(知識階級) 국민적(國民的)뿌르조아지—엿다』&lt;br /&gt;
&lt;br /&gt;
그래서 급진교수(急進敎授)들은 교육부총장(敎育部總長) 군벌정부(軍閥政府)를 육박(肉迫)하엿스며이러한&lt;br /&gt;
&lt;br /&gt;
신흥세력(新興勢力)에 낭패(狼狽)와공포(恐布)를 늣긴군벌정부(軍閥政府)는 이러한교수(敎授)들과 학생(學生)들에게체포령(逮捕令)을나리고 학생(學生)들의행렬(行列)은정부위병(政府衛兵)들의 발포(發砲)로인(因)하야 남여수백여명(男女數百餘名)의 사상자(死傷者)가낫다 그때노신(魯迅)은 북경동교민항(北京東交民巷)의 공사관구역(公使舘區域)의 외국인병원(外國人病院)이나 공장(工塲)안으로 도라단이며 찬물로기아(飢餓)를 참아가면서도 신문(新聞)과 잡지(雜誌)에 기고(寄稿)를하야 군벌정부(軍閥政府)를 맹렬(猛烈)히 공격(攻擊)하얏다 그중(中)에도『국민이래(國民以來) 최암흑일(最暗黑日)에지(誌)』하엿다는 명문(名文)은 단기서(段祺瑞)로하여금 의자(椅子)에나려안게되엿다&lt;br /&gt;
&lt;br /&gt;
——붓으로쓰헛소리는 피로쓴 사실(事實)을 만착(瞞着)하지못한다——중(中) 약(略)——붓으로쓴것이 무슨힘이 잇스랴 실탄(實彈)을쏘는것은 오즉 청년(靑年)의피다(속화개집(續華盖集))&lt;br /&gt;
&lt;br /&gt;
오늘날까지 중국문단(中國文壇)의『막심콜키—』이든그는 지금부터는문화(文化)의전사(戰士)로서『앙리·발뷰스』보다비장(悲壯)한생애(生涯)가 시작(始作)되는것이엿다&lt;br /&gt;
&lt;br /&gt;
그의말과가티&lt;br /&gt;
&lt;br /&gt;
최청흑(最晴黑)한오십일(五十日)이지나고 그는북경(北京)을탈출(脫出)햇다 하문대학(夏門大學)에 초청(招請)을바□갓으나 대학기업가(大學企業家)의 음흉수(陰凶手)것인것을 안그는광동중산대학(廣東中山大學)으로갓다 그러나 일구이육년사월십오일(一九二六年四月十五日) 장개석(蔣介石)의쿠—데타—는 광동일성(廣東一省)만 노동자농민급진지식분자삼천여명(勞働者農民急進知識分子三千餘名)을—하엿 으며 한때는『혁명(革命)의전사(戰士)』라고 간판(看板)을지인노신(魯迅)도상해(上海)로 다라나야만 되엿다여기서우리가 다시한번그에게흥미(興味)보다는 최대(最大)의 경의(敬意)를갓게되는것은 다음의일문(一文)이다&lt;br /&gt;
&lt;br /&gt;
——나의 일종망상(一種妄想)은 깨여젓 다 나는지금까지 때때로낙관(樂觀) 을가젓섯다 청년(靑年)을 압박(壓迫)하고 ——하는것은 대개노인(大槪老人)이다이 들노물(老物)들이 다죽어지면 중국(中國) 은보담더 생기(生氣)잇는것이되리라 고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 르치안은것을 알엇다 청년(靑年)을 ——하는것은 대개(大槪)는 청년(靑年)인 듯하다 또달이 재조(再造)할수업는 생명(生命)과 청춘(靑春)에 대(對)해서 한층(層) 더애낌이업시…(이기집(而己集))&lt;br /&gt;
&lt;br /&gt;
이글은그가 침묵(沈默)하고잇는것을『공포(恐怖)』때문이라고 조소(嘲笑)한 사람에게답(答)한 통신문(通信文)의 일절(一節)로서 이때까지&lt;br /&gt;
&lt;br /&gt;
진화론자(進化論者)이든 그자신(自身)의 사상적립장(思想的立塲)을양기(揚棄)하고 새로운 성장(成長)의 일단계(一段階)로보인것이라고 해석(解釋)해도 틀러지안흘것이다.&lt;br /&gt;
&lt;br /&gt;
그가상해(上海)에 왓슬때는 국민당(國民黨)의 쿠—데타—로 혁명군(革命軍)에서쪼겨온 젊은푸로문학자(文學者)가 만엇다『혁명문학론(革命文學論)』이 효효(囂囂)히 불러지고 실제정치행동(實際政治行動)의 전선(前線)을 떠난그들은 총칼대신에 펜을잡엇다,원기왕성(元氣旺盛)하게 실제공작(實際工作)의경험(經驗)에서 매우견실(堅實)한것도 잇섯스나 때로는 자부적(自負的)인 영웅주의(英雄主義)가 화(禍)를끼치고——에실패(失敗)한 분만(憤瞞)과 극좌적(極左的)인 기회주의자(機會主義者)들은노신(魯迅)을 공격(攻擊)햇다 그러나 그는푸로문학(文學)이란 어떤것인가 또는어찌해야 될것인가를 알리기위(爲)하야 아버지가튼 애무(愛撫)로서『푸레하노프』,『루나챨스키—』들의 문학론(文學論)과『싸벳트』의 문예정책(文藝政策)을번역소개(飜譯紹介)하야 중국(中國)푸로문학(文學)을건설(建設)하고잇는동안에『노신(魯迅)을타도(打倒)치안흐면 중국(中國)에푸로문학(文學)은생기지못한다』는 문학소아병자(文學小兒病者)들은 그자신(自身)들이 먼저너머지고 이제그가마자가고말엇다 이위대(偉大)한중국문학가(中國文學家)의영(靈)아페 고요히머리를숙이면서 나의개인적(個人的)으로 곤란(困難)한정형(情形)에의(依)하야 문호노신(文豪魯迅)의윤곽(輪廓)을뚜렷이그리지못함을 참괴(慚愧)히알며붓을놋키로한다 —요(了)—&lt;br /&gt;
&lt;br /&gt;
==주요 내용 요약==&lt;br /&gt;
추도 배경: 중국 신문학의 최고봉인 루쉰(魯迅)의 서거(1936년 10월 19일)를 추도하며, 작가와의 개인적 인연(1932년 양행불 암살 사건 직후 만국빈의사에서의 만남)을 회상하는 글이다.&lt;br /&gt;
&lt;br /&gt;
문학적 위치 - 아Q 정전: 루쉰 이해의 핵심으로 그의 대표작《아Q정전(阿Q正傳)을 제시하고 있다. '아Q'는 사고와 행동이 나약하고 우매하면서도 건방진, 당시 중국인의 집단적 성격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루쉰은 이 '아Q 상(相)'을 폭로하여 중국 지식 군중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루쉰은 '아Q 시대'를 종식시키고 새로운 중국을 열어갈 길을 제시한 인물로 평가된다.&lt;br /&gt;
&lt;br /&gt;
문학 혁명과 루쉰의 역할: 중국의 고루한 고문학을 비판하고 백화소설(白話小說)을 통해 문학 혁명의 선두에 선 것이다.《광인일기(狂人日記)를 통해 봉건적 가족 제도와 유교의 종법 사회 관념을 통렬히 비판하며 &amp;quot;어린이를 구하자&amp;quot;는 메시지를 던져 청년들에게 혁명적 충격을 주었다.&lt;br /&gt;
&lt;br /&gt;
예술과 정치: 루쉰은 본래 의사(醫師)가 되려 했으나, '우매한 국민은 체격이 강해도 무의미한 구경꾼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으로 정신 개조를 위한 문예 운동으로 전향하였다. 그에게 예술은 정치의 노예가 아니라, 적어도 정치의 선구자였으며, 정치적 목적 아래 수행된 것이다.&lt;br /&gt;
&lt;br /&gt;
후기 생애와 투쟁: 군벌 정부(단기서)와 국민당(장개석)의 탄압을 피해 쫓겨 다니는 비장한 '문화의 전사'로서의 삶을 살았다. 젊은 프로문학 비평가들에게 '비계급적 작가'로 공격받기도 했으나, 그는 현실과의 동떨어짐을 비판하며 진실된 현실을 기반으로 한 창작의 '모랄(도덕성)'을 강조한 것이다.&lt;br /&gt;
&lt;br /&gt;
==분석 및 특징==&lt;br /&gt;
이육사의 지식인 면모: 이육사(본명 이활, 기고명 '이육사(李陸史)')가 당대 중국의 최고 지성 및 정치 상황에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글이다. 루쉰의 문학적, 사상적 변천 과정(의학 → 문예 → 현실 참여)을 심도 있게 분석하고 있다. 루쉰 문학의 핵심 통찰: 루쉰의 작품을 단순히 서사로 보는 것이 아니라, 봉건 사회에 대한 투쟁, 계급성, 지식인의 역할 등 당대 사회 변혁의 맥락에서 분석하는 것이다. 한국 문단에 대한 시사: 글 말미에 '예술과 정치'의 관계에 대해 루쉰의 태도를 재조명하며, 당시 조선 문단에서 첨예하게 논의되던 이 문제에 대한 이육사의 입장을 간접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수필문외한(隨筆門外漢)의수첩(手帖)=&lt;br /&gt;
문(門) 외(外) 한(漢) 의 수(手) 첩(帖)&lt;br /&gt;
&lt;br /&gt;
(칠(七))&lt;br /&gt;
&lt;br /&gt;
이(李) 육(陸) 사(史)&lt;br /&gt;
&lt;br /&gt;
R이란 사람은 나와는 매우친(親)한 동무엿다 그럼으로 우리두사람 사이에는 결(决)코 무슨비밀(秘密)이란것은 잇을터수가 아니엿다 그러나 지금은 나의교우록(交友錄)속에 씨여저잇는 그의『호패(號牌)』에 붉은줄을 그은지도 벌써한달이 다되엿다.&lt;br /&gt;
&lt;br /&gt;
이러한 간단한사실(事實)이 모르는사람으로본다면 가렵지도 아프지도안흘지모르겟으나 남달리상처(相處)해오든 벗을한사람 일허버린나의흐젓한 마음은 어데도 비길수업시 서러운것이다.&lt;br /&gt;
&lt;br /&gt;
그뿐만아니라 이글을 쓰려는오늘아침에 이제는 고인(故人)인 R의동생으로부터 나에게 간단한편지한장과『문외한(門外漢)의수첩(手帖)』이란유고(遺稿)한권(卷)이 보내여왓다.&lt;br /&gt;
&lt;br /&gt;
그유고(遺稿)는 이래십년(爾來十年)에 쓴 고인(故人)의 일기(日記)인 모양인데 그도축일(逐日)해서 쓰것도 아니고 때때로마음이 내킬때마다 써둔것이며그맨끗페—지에『〇〇형(兄)에게』라는 이세상(世上)사람으로서의 절필(絶筆)인듯한 글시가 묵흔(墨痕)이임리(淋漓)한것은소리업는 내눈물을더욱짜내는것이엿다 그리고이글내용(內容)은 일기(日記)는 일기(日記)면서도 대부분(大部分)은 나에게 보내는 편지이엿다.그편지가운데서 지금이라도 흥미(興味)잇게생각나는 부분(部分)만을 써서보기로한다면 그도처음에는 문학청년(文學青年)이엿든 사실(事實)이잇섯다.그러나그는자기가 하고저한 문학(文學)을 끗끗내 완성(完成)할수잇는 행복(幸福)된사람은 아니엿다.그러나 그사람은죽든날까지도문학(文學)을 단념(斷念)하지는안헛다는것은 어느해겨울 그와나는 우연(偶然)히도 어느 온천(溫泉)에서만낫다 그때는 바로동경(東京)에서들풍자문학론(諷刺文學論)이 한참대두(擡頭)할때 이엿슴으로 그도또한 예(例)에삐지지안코 이것의 조선(朝鮮)에잇서서 가능(可能)하다는 설교(說敎)를 하는것이엿다그때좀더 생각해볼 여지(餘地)가잇다고한 나의말에 그는말하기를조선(朝鮮)사람은 생활(生活)그자체(自體)가 풍랄적(諷剌的)으로 되여잇다고 떠둘어대기에나는그에게 더진지(眞摯)한태도(態度)로 사물(事物)을 대(對)할필요(必要)가 잇다는것을말하엿고 그다음날 우리는 서로갈린체 영원(永遠)히 보지못할 사람이되엿다.&lt;br /&gt;
&lt;br /&gt;
이글은 그때나와 갈려서 몃칠동안에 쓴것이라고 생각난다 일구삼(一九三)×연(年)×월(月)×일(日)—〇형(兄)!S역(驛)에서 형(兄)과갈려서나는〇동(洞)까지 오십리(五十里)나되는 산(山)길을 걸어왓소.동리(洞里)거리에 피곤(疲困)한 다리를 쉬이면서 생각하기를 아무데나 큼직한집 초당(草堂)방을 차저드러가면 이밤을 뜻뜻한 아랫목에서 지낼수도 잇겟거니와 그들과함께 살을맛대이고지나며 그들의 생활(生活)을체득(體得)할수가 잇다면……얼마나 유쾌(愉快)한일이겟습니까?&lt;br /&gt;
&lt;br /&gt;
나는 여기서 형(兄)이일직이 하든말을 생각해보앗소 상해(上海)어데선가?목욕(沐浴)을 갓슬때 불란서(佛蘭西)사람과 서반아(西班牙)사람과 가트욕조(浴漕)에 들어갓슬때의 감정(感情)을 얘기한것을 기억(記憶)이나 하시는지요.그때는 적나라(赤裸裸)한 몸둥이들이모두꼭가튼 온도(溫度)를 느낄수잇더라고.세계(世界)는 모름직이 목간통가티 되어야 한다고.&lt;br /&gt;
&lt;br /&gt;
그러나 오늘의 나의심경(心境)은그와는 정반대(正反對)로 어데까지나 육친애(肉親愛)를 느껴볼 결심(决心)이엿소 그래서 세계(世界)는 차라리 초당(草堂)방가티되라고까지 생각해도 보앗소이러한 생각을 하노라면 또다른 한생각이 꼬리를 물고나오는동안에 나는가젓든 담배를모조리 다피워 바렷소.담배라도피우지 안흐면 첫겨우의눈우바람이몹시도 옷깃을 새여들고 발끄티저리기도해서 담빠도살겸 주막(酒幕)집잇는대로 가까이 차저갓소.그곳에는 마침담배 가개가잇고젊은농부(農夫)인듯한 사람이잇기에오전(五錢)짜리 한푼을던지고『마코』한갑을 달라고 하엿더니만 나는여기서 뜻하지못한 실패(失敗)를 하엿소 그것은 나행동(行動)이 몸차림과 어울리지안는데가 잇섯든지또는언어(言語)에 무의식적(無意識的)인 불손(不遜)이잇섯든지 그젊은 농부(農夫)는 내얼굴을 자세히 보더니만……『문(門)안에 들어와서 담배를 가저가오』……하며 코우슴을 피하며『마코』한갑을 내아프로 툭던지는것이엿소.&lt;br /&gt;
&lt;br /&gt;
나는처음 이농부(農夫)의 말을듯고한참동안 어름어름하엿소 그것은 담배가개라고하는것이 우리가 도회(都會)에서 보는담배가개와가티 백색(白色)『타일』타로 대(臺)를싸올리고『네온』등(燈)을 달고 유리창(窓)을단것이 아니고 첨하끄테다 석유(石油)궤로 목판을짜서 장수연(長壽煙),희연(囍煙),『마코』단풍(丹楓) 이런것들을몃갑식(式) 너허둔것이엿소,그래 내가들어갈 문(門)이란 어데잇겟소,&lt;br /&gt;
&lt;br /&gt;
&lt;br /&gt;
(칠(七))&lt;br /&gt;
&lt;br /&gt;
이(李) 육(陸) 사(史)&lt;br /&gt;
&lt;br /&gt;
R이란 사람은 나와는 매우친(親)한 동무엿다 그럼으로 우리두사람 사이에는 결(决)코 무슨비밀(秘密)이란것은 잇을터수가 아니엿다 그러나 지금은 나의교우록(交友錄)속에 씨여저잇는 그의『호패(號牌)』에 붉은줄을 그은지도 벌써한달이 다되엿다.&lt;br /&gt;
&lt;br /&gt;
이러한 간단한사실(事實)이 모르는사람으로본다면 가렵지도 아프지도안흘지모르겟으나 남달리상처(相處)해오든 벗을한사람 일허버린나의흐젓한 마음은 어데도 비길수업시 서러운것이다.&lt;br /&gt;
&lt;br /&gt;
그뿐만아니라 이글을 쓰려는오늘아침에 이제는 고인(故人)인 R의동생으로부터 나에게 간단한편지한장과『문외한(門外漢)의수첩(手帖)』이란유고(遺稿)한권(卷)이 보내여왓다.&lt;br /&gt;
&lt;br /&gt;
그유고(遺稿)는 이래십년(爾來十年)에 쓴 고인(故人)의 일기(日記)인 모양인데 그도축일(逐日)해서 쓰것도 아니고 때때로마음이 내킬때마다 써둔것이며그맨끗페—지에『〇〇형(兄)에게』라는 이세상(世上)사람으로서의 절필(絶筆)인듯한 글시가 묵흔(墨痕)이임리(淋漓)한것은소리업는 내눈물을더욱짜내는것이엿다 그리고이글내용(內容)은 일기(日記)는 일기(日記)면서도 대부분(大部分)은 나에게 보내는 편지이엿다.그편지가운데서 지금이라도 흥미(興味)잇게생각나는 부분(部分)만을 써서보기로한다면 그도처음에는 문학청년(文學青年)이엿든 사실(事實)이잇섯다.그러나그는자기가 하고저한 문학(文學)을 끗끗내 완성(完成)할수잇는 행복(幸福)된사람은 아니엿다.그러나 그사람은죽든날까지도문학(文學)을 단념(斷念)하지는안헛다는것은 어느해겨울 그와나는 우연(偶然)히도 어느 온천(溫泉)에서만낫다 그때는 바로동경(東京)에서들풍자문학론(諷刺文學論)이 한참대두(擡頭)할때 이엿슴으로 그도또한 예(例)에삐지지안코 이것의 조선(朝鮮)에잇서서 가능(可能)하다는 설교(說敎)를 하는것이엿다그때좀더 생각해볼 여지(餘地)가잇다고한 나의말에 그는말하기를조선(朝鮮)사람은 생활(生活)그자체(自體)가 풍랄적(諷剌的)으로 되여잇다고 떠둘어대기에나는그에게 더진지(眞摯)한태도(態度)로 사물(事物)을 대(對)할필요(必要)가 잇다는것을말하엿고 그다음날 우리는 서로갈린체 영원(永遠)히 보지못할 사람이되엿다.&lt;br /&gt;
&lt;br /&gt;
이글은 그때나와 갈려서 몃칠동안에 쓴것이라고 생각난다 일구삼(一九三)×연(年)×월(月)×일(日)—〇형(兄)!S역(驛)에서 형(兄)과갈려서나는〇동(洞)까지 오십리(五十里)나되는 산(山)길을 걸어왓소.동리(洞里)거리에 피곤(疲困)한 다리를 쉬이면서 생각하기를 아무데나 큼직한집 초당(草堂)방을 차저드러가면 이밤을 뜻뜻한 아랫목에서 지낼수도 잇겟거니와 그들과함께 살을맛대이고지나며 그들의 생활(生活)을체득(體得)할수가 잇다면……얼마나 유쾌(愉快)한일이겟습니까?&lt;br /&gt;
&lt;br /&gt;
나는 여기서 형(兄)이일직이 하든말을 생각해보앗소 상해(上海)어데선가?목욕(沐浴)을 갓슬때 불란서(佛蘭西)사람과 서반아(西班牙)사람과 가트욕조(浴漕)에 들어갓슬때의 감정(感情)을 얘기한것을 기억(記憶)이나 하시는지요.그때는 적나라(赤裸裸)한 몸둥이들이모두꼭가튼 온도(溫度)를 느낄수잇더라고.세계(世界)는 모름직이 목간통가티 되어야 한다고.&lt;br /&gt;
&lt;br /&gt;
그러나 오늘의 나의심경(心境)은그와는 정반대(正反對)로 어데까지나 육친애(肉親愛)를 느껴볼 결심(决心)이엿소 그래서 세계(世界)는 차라리 초당(草堂)방가티되라고까지 생각해도 보앗소이러한 생각을 하노라면 또다른 한생각이 꼬리를 물고나오는동안에 나는가젓든 담배를모조리 다피워 바렷소.담배라도피우지 안흐면 첫겨우의눈우바람이몹시도 옷깃을 새여들고 발끄티저리기도해서 담빠도살겸 주막(酒幕)집잇는대로 가까이 차저갓소.그곳에는 마침담배 가개가잇고젊은농부(農夫)인듯한 사람이잇기에오전(五錢)짜리 한푼을던지고『마코』한갑을 달라고 하엿더니만 나는여기서 뜻하지못한 실패(失敗)를 하엿소 그것은 나행동(行動)이 몸차림과 어울리지안는데가 잇섯든지또는언어(言語)에 무의식적(無意識的)인 불손(不遜)이잇섯든지 그젊은 농부(農夫)는 내얼굴을 자세히 보더니만……『문(門)안에 들어와서 담배를 가저가오』……하며 코우슴을 피하며『마코』한갑을 내아프로 툭던지는것이엿소.&lt;br /&gt;
&lt;br /&gt;
나는처음 이농부(農夫)의 말을듯고한참동안 어름어름하엿소 그것은 담배가개라고하는것이 우리가 도회(都會)에서 보는담배가개와가티 백색(白色)『타일』타로 대(臺)를싸올리고『네온』등(燈)을 달고 유리창(窓)을단것이 아니고 첨하끄테다 석유(石油)궤로 목판을짜서 장수연(長壽煙),희연(囍煙),『마코』단풍(丹楓) 이런것들을몃갑식(式) 너허둔것이엿소,그래 내가들어갈 문(門)이란 어데잇겟소,&lt;br /&gt;
&lt;br /&gt;
(중(中))&lt;br /&gt;
&lt;br /&gt;
이육사(李陸史)&lt;br /&gt;
&lt;br /&gt;
그날은 그곳에서 멀지안흔곳에 장날이엿나부오,장꾼들이들신들신하고 그집으로 들어오기에 나는그만 그곳을떠나 도라나오랴니까 바로내머리 뒤에서『건방진여석 눈에유리창(窓)을 부치고』……하면서 별러대는것이엿소.그때나는 모든것을 다알엇소,&lt;br /&gt;
&lt;br /&gt;
시골산촌(山村)에선 유리라는것은들창(窓)에나 부치는것인데 네눈에부친 들창을열고 다시말하면 문(門)안에 들어와서(안경(眼鏡)을벗고)담배를 가저가란 말엿소.&lt;br /&gt;
&lt;br /&gt;
내가 안경(眼鏡)을 쓰게된것은 시력(視力)이 부족(不足)한 탓이엿고 그젊은농부(農夫)가 내안경(眼鏡)쓴것을 못맛당히역이는것은 고루(固陋)한 인습(因習)의 소치(所致)라고 하드래도 그표현방법(表現方法)이얼마나 내뼈를 저리도록 쑤시는풍랄(諷剌)이엿겟소 과연(果然)여기에 남과나라는 투명(透明)한 장벽(墻壁)이 서서잇다는것을 나는안듯하엿소.&lt;br /&gt;
&lt;br /&gt;
그리고 내발길은 무겁게옴겨젓소.아주몃해를두고 어느사막(沙漠)이라도 걸어온듯한 피로(疲勞)를 깨다랏소.하늘은 점점어두어오고눈조차 함박으로 퍼붓는듯 하엿스나 나는다시 옷것을 단속지는 안헛소 될수엇스면 차디천 눈보라가 내보드러운 목덜미살을 염이듯이 얼어부트라고하여본것은 일종(一種)의 자기잔학(自己殘虐)일른지도 모르겟소.&lt;br /&gt;
&lt;br /&gt;
두시간(時間)이나 지낫을가 나는과연(果然) 어느집초당(草堂)방에 손이되엿소방안에는 초말(醋抹)냄새가 코를찌를망정 모이는사람은 대략육칠명(六七名)이나 되엿고 연령(年齡)은최저십팔(最低十八)로최고삼십이(最高三十二),인품(人品)은 모두순후(純厚)하고황소가티 질박(質朴)한놈도 잇스며암사슴가티 외로운 면석도잇섯소.그날밤은 내라는존재(存在)가 그들로보면 낫서른손이여서 일동일정(一動一靜)을 주의(注意)는 하면서도 조금도 악의(惡意)는 갓지안헛든 모양이엿소 그러기에 나더러 세상(世上)의자미잇는 얘기를 들려달라는것이오&lt;br /&gt;
&lt;br /&gt;
이때 나는 어떠한 얘기를들려줄까 하고 망서리는판에 그들중에도 연령(年齡)과 지식(知識)의 정도(程度)가잇서서 삼십(三十)에 가까운 사람들은『화용도(華容道)』를 들려달라하고그중한사람은『춘향전(春香傳)』을 얘기하라하엿소만은 여기도 또한의견(意見)은 일치(一致)되지안헛소 그중에도제일(第一)얼굴이 말숙하고 나이가이십오세(二十五歲)쯤 되여보이는 농부(農夫)한사람 말을드르면 보통학교(普通學校)를 중도퇴학(中途退學)은 하엿서도 그들가운데서는 식자연(識者然)하고 내로라는드시뽑내면서『서양(西洋)』얘기를 무에나들리라는것이오 그해서 결국(結局)은『춘향전(春香傳)』파(派)와『서양(西洋)』파(派)가 절충(折衷)한결과(結果) 나는이진귀(珍貴)한『서양춘향전(西洋春香傳)』을 친절(親切)하게도 강좌(講座)를담임(擔任)하게되엿스며 그는 득의만면(得意滿面)하야 내담배갑에서『마코』한개들 빼여물고 인조견(人造絹) 옥색(玉色)관사홋족기에서 석낭을꺼내여 담배를 피우는것이엿소 이방에서는모두들이사람을『하이카라상』이라고 부르는데 그『상』짜가나에게는 조금귀익지못하나 아마이것을 도시(都市)말로번역(飜譯)하면『모—던뽀이』란 말도갓소.&lt;br /&gt;
&lt;br /&gt;
그러나 이『서양춘향전(西洋春香傳)』이란진본서(珍本書)는 가난한 나의문헌학지식(文獻學知識)으로는 도저(到底)히 알어낼 자신(自信)도업고 그러타고 그들에게『린드뻑』이 대서양(大西洋)을 어떠케 횡단(橫斷)하엿다든지『크레오파트라』의국적(國籍)이 어느나라냐고 설왕설래(說往說來)를 하여보앗자『하이카라상』이라는 이방의『쏘크라테쓰』도그까지는 흥미(興味)를느끼지못할것갓터소.&lt;br /&gt;
&lt;br /&gt;
그래서나는 생각다못해『쉑스피어』의『로미오와쭈리엣트』를얘기하기로하고 위선그주인공(主人公)의이름을 그들이 알어듯기 쉽게『노미』이와『준』이가 이러케얘기를하니 그래도 모두그것이자미가 잇섯든지『준』이가추방당(追放當)튼날새벽에『노미』를 차저가이별(離別)을하는판인데 이곳에야『나이팅껠』이울수가 잇슬리도 업겟고 생각다못해 속담(俗談)에 꿩갑에 닭이라니 닭을울리고『준』이를 떠나보냇구려!그래도 이때는 모두들감탄(感歎)해서 흥흥코소리를치며 신삼고 가만이치든손을쉬이는구려!&lt;br /&gt;
&lt;br /&gt;
(하(下))&lt;br /&gt;
&lt;br /&gt;
이육사(李陸史)&lt;br /&gt;
&lt;br /&gt;
밤은벌써 오전(午前)두시(時)나 되엿는데 박가테서는 눈보래가 조금도 쉬지안코 나렷소,사람들은차차 긴하픔을 하다가는 제대로 팔을배고 자는이도잇고 또그자는이의 다리를베고 자는사람도잇스며 나중에는『하이카라상』과 나만이남어서 나는 이동리(洞里)의 서러운전설(傳說)을 듯는것이오『옛날에 이동리(洞里)와 건너마을이편을갈러서 정초(正初)이면『줄댕기』가 시작(始作)되엿고 그때는 사람들이 수—백명식(百名式) 모혀서 그중에도 젊은 사람들은 처녀(處女)나 총각이 제각기 마음잇는 사람들과 사랑을 속삭이면서 영원(永遠)히그자손(子孫)들은 변(變)함업시 이동리(洞里)를직혀왓건만은 지금(至今)은 어쩐일인지 그사람들은 누가 오란말도업고 가란말도 업건만은 다들어데인지 한집식 두집식 동리(洞里)를떠나고 그럴때마다 젊은이들의 싹트기시작(始作)한 사랑은 그봄이 다가기도전에 덧업시 흘러가고 만다는말을 다마치지도못하야 이사람은 창졸간에 미친듯이 쓸어저 흑흑 느껴가며우는것이엿소.나는 이것을 웨우느냐 물어볼힘도업고 울지말라고 위안(慰安)을 줄수도 업섯스며다만나 혼자 생각기를 너도 또한불상한 미완성초연(未完成初戀)의 순정자(殉情者)로 구나하고 동정(動靜)을 살피노라니 이사람도 그냥잠이 들고먼데닭이 자즌홰치는 소리가들리며 눈은끗첫는지 박가튼 바람이 몹시부럿소.&lt;br /&gt;
&lt;br /&gt;
나는몃시간(時間) 남지안흔 이밤을도저(到底)히 잘수는업섯소,내머리는해저(海底)와가티 아득하고 내가슴은운모(雲母)와가티 무거웟소.도라누을내야 도라누을수도 업스려니와여페사람들의 코고는소리는 검은시체(屍體)를 실흔마군(馬軍)의 수레박휘를 갈고가는듯하오,그럴수록방안의 정적(靜寂)은 무거워저서 자꾸만 지구(地球)의 중심(中心)으로 침전(沈澱)되는듯하엿소,나는 참다못하야 눈을감고 두손으로 얼굴을 가리웟소.바로 그때엿소,누구인지내머리마테서 말하는 사람이잇섯소,그사람이 누구인지는 기억(記憶)할수 업스나 혹(或)은 저녁전에담배가개에서본 농부(農夫)일른지도모르겟소 그가 나에게 한말은분명(分明)코『문(門)안에 드러와서……』엿소.나는 여기서 눈을번쩍뜨고가만히 생각해 보앗소.&lt;br /&gt;
&lt;br /&gt;
『오!그러타,나는 문외한(門外漢) 여다』아무리하여도 인생(人生)의 문(門)안에들어서지못할 나이라면 차라리영원(永遠)한 문외한(門外漢)으로 이세상(世上)을수박것할트시 지나갈일이지 그좁은문(門)을 들어가려고 애를쓸필요(必要)가 어데잇겟소 문(門)박게서 살어가면 책임(責任)과 부담(負擔)도 가벼우려니와 문(門)안에 우리가 직혀야할 보물(寶物)이잇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모두 문(門)안에서 직힐때에나혼자만 문(門)박게서 그모든것을파수본다면 그것도 나의한가지임무(任務)가아니겟소 그러타면 나는달게&lt;br /&gt;
&lt;br /&gt;
인생(人生)외 문외한(門外漢)이 되겟소.&lt;br /&gt;
&lt;br /&gt;
그래서 남들이모두 문(門)안에서보는세상(世上)을 나는문(門)박게서 보겟소 남들은 기피보는 세상(世上)을나는널리보면 또그만한 자긍(自矜)이잇을것갓소.오늘은 고기압(高氣壓)이어데잇는지 풍속(風速)은 육십사(六十四)미리오이동리(洞里)를 떠나아무도 발을대지안흔 대설원(大雪原)을 걸어가겟소,전인미도(前人未到)의 원시경(原始境)을 가는느낌이오,누가나를 따라이길을 올사람이 잇슬른지?업서도 나는이길을 영원(永遠)히가겟소.』&lt;br /&gt;
&lt;br /&gt;
나는이까지보고 위선이유고(遺稿)를더펏다,그리고 생각해보앗다 이것은 한사람이 인생(人生)의문(門)안에 들어오지못하고 영원(永遠)히 걸어간기록(記錄)이다 오!그러면 나도역시문외한(亦是門外漢)인가?정축(丁丑) 칠(七),이구(二九)&lt;br /&gt;
&lt;br /&gt;
==주요 내용 요약==&lt;br /&gt;
구성: 죽은 친구 'R'의 유고(遺稿)인 '문외한의 수첩' 속에 담긴, 'R'이 '〇형(兄)'(필자)에게 쓴 편지 형식의 수필이다. '문안'과 '문밖': 화자는 'S역'에서 '형'과 헤어져 산길을 걸으며 초당방에서 서민의 삶을 체득하고 싶다는 '육친애'적 소망을 가진다. 이때 담배를 사려다 한 젊은 농부에게 &amp;quot;문 안에 들어와서 담배를 가져가오&amp;quot;라는 말을 듣는다. '문안'은 농부가 '안경(유리창)'을 쓴 자신을 '도시의 문명인'으로 여기고 '안경을 벗고(유리창을 떼고) 들어와'라는 풍자적 표현이었음을 깨닫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자아 성찰: 이 경험을 통해 도시 지식인인 자신과 농민 사이에 투명한 '장벽'이 서 있다는 것을 인지하며, 자신이 '인생의 문외한(門外漢)'임을 깨닫는다. '문외한'의 결심: '문안'에 들어서지 못할 바엔 영원한 문외한이 되어 문밖에서 살아가겠다고 결심한다. 문밖에서 사는 것은 책임과 부담이 가볍고, 남들이 모두 문안에서 보는 세상을 자신은 문밖에서 '널리' 보며 '자긍(自矜)'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절필: &amp;quot;전인미도(前人未到)의 원시경(原始境)을 가는 느낌&amp;quot;으로 '대설원'을 걸어 나가는 것으로 글을 맺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분석 및 특징==&lt;br /&gt;
풍자 문학론의 실천: 농부의 '안경 쓴 눈(유리창)'에 대한 풍자는 지식인과 대중 사이의 괴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지식인의 고뇌와 성찰: 도시화된 지식인(안경 쓴 자)이 농민의 삶에 진입하려 했으나 거부당하고, 결국 자신을 '문외한'으로 규정하며 고립을 선택하는 지식인의 고뇌를 드러내는 자의식의 표현이다.&lt;br /&gt;
&lt;br /&gt;
낭만적 비장미: '대설원', '전인미도의 원시경' 등 비장하고 낭만적인 이미지로 결말을 맺으며, 이육사 특유의 고독한 결단의 미학을 보여주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소품(小品) 황엽전(黃葉箋)=&lt;br /&gt;
소품(小品)①&lt;br /&gt;
&lt;br /&gt;
황엽전(黃葉箋)&lt;br /&gt;
&lt;br /&gt;
이(李) 육(陸) 사(史)&lt;br /&gt;
&lt;br /&gt;
사람들은 어름알보다 더냉담(冷淡)하고 주사침(注射針)가티 촉발라도 그래도 제대로는 인정(人情)도잇고 눈담(曇)노잇서 친(親)한사람을 사이에는못보 보고저하고 보면빨아먹을듯이도 형형색색(形形色色)의 표정(表情)을비저내며 계절(季節)에 따라서는 눈물겨울만큼 간절한모양이나 『내』라는 위인(爲人)은 자질(資質)도 소박(素朴)하고교양(敎養)도 고매(高邁)하지못데 요즘은엇전지 신경(神經)이 차를보다 단단해저서 압흐고 슯흔것도 못견듸게늣겨지지도 안커니와 보지못해 못견딀사람도업고 소식(消息)이라도 못알려 탈이될,더친(親)하고덜친(親)한이가업다.그러나 행(幸)혀이세상(世上)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잇다고하면 나는 의무(義務)로라도그대에게 나의소식을 알려야하지만은 지금의 나에게는 그러한미덕(美德)을 수행(遂行)할 야망(野望)조차업다.다만 야망(野望)을용서(容恕)한 사람이잇거든 가을바락에 무한(無限)히 흘러가는 황엽(黃葉)의 쪼각쪼각이 모두나의 편지라고 생각을 해라그리고 그어느한쪼각이라도 주어다가 그대들의책상(冊床)우에 꼬처두고 그황엽(黃葉)이 바람에 나붓기며울며부르짓는 서러운전기(傳記)를 들어보아라……&lt;br /&gt;
&lt;br /&gt;
‥‥그놈의 거리를 말할것도업고 저는하여(何如)든 가로수(街路樹)에서떨어저 왓습니다.그래서 거리에 서잇는동안 형형색색(形形色色)의 인간(人間)들을 다보앗습니다.그러나대개(大槪)는 모다비슷비슷한 인간(人間)들이엿고 별다른 놈은 못보앗습니다 그것은 십년전(十年前)일이라고생각됩니다.어느날오후(午後) 내발밋흘지나가는 소년(少年)이 잇섯습니다,미친놈가티 중얼대는 말을가만히듯자니『루나—ㄹ』의 일기(日記)를외이는겐지『불상한놈! 불상한놈!』 고거즛말하엿습니다,그뒤로는 매일(每日)가티 아침에도 내발밋홀지나고 저녁에도 내발미틀지나는동안에 나는어느사이에그만그녀석하고 친(親)해젓습니다,그래서 그녀석의 정체(正體)를 알수가잇섯습니다&lt;br /&gt;
&lt;br /&gt;
그녀석은 어느시골에서 출가(出家)를해서 서울을왓다는데 그출가(出家)한 이유(理由)가 어린녀석하고는 맹랑햇습니다 그녀석의 집은어느해안(海岸)이든가봐요 아침으로 조수(潮水)가 밀려나가면 끗업시 널려잇는 백(白)모래바티 너무도 허무(虛無)서 오기는왓스나 섬들을 건너간 갈메기가 몹시그립다고 하는것을보면 그래도 어린향수(鄉愁)가머리를 글거가는모양이겟지요&lt;br /&gt;
&lt;br /&gt;
그후(後)나는 우리들이 늘만나는시간(時間)이되면 그녀석이 하마나오나하고 기달리기도햇습니다 그럴때 멀리에 발자욱 소리가나고 그녀석이 『하이네』 니 『꾀—테』 니의 시(詩)를외이고 올때도잇섯습니다 그리고 몃해가 지난어느해봄날 내가긴 동면(冬眠)으로부터 영롱(玲瓏)한 첫눈을텃슬때 또그녀석을만낫습니다 그때는벌서그녀석은 십부게볼 소년(少年)이아니라 의례(依例)히 그상대자(相對者)를 다리고어둑어둑한 황혼(黃昏)에 내엽헤와서간즈려울만큼 종알대며 행복(幸福)의『메뉴—』를 전람회(展覽會)의『프로그람』보다 화려(華麗)하게꾸미는것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이것어 한여름을 지나며 비가오나 바람이부나 계속(繼續)이 되엿습니다 그러나 인간(人間)들에게잇서서는 행복(幸福)의 절정(絕頂)은 최대(最大)의비극(悲劇)과 서로통(通)해 잇나봐요 그해의 첫가을 어느으스름달밤에나는이비극(悲劇)을 바로 내눈헤서보는것입니다&lt;br /&gt;
&lt;br /&gt;
『여보우리두사람이 서로사랑하면 그만이지 사랑을 부모(父母)에대(對)한 효행(孝行)으로 하는데가 어데잇소.』&lt;br /&gt;
&lt;br /&gt;
이러케 그녀석은 폐(嬖)하는것이 엿습니다.&lt;br /&gt;
&lt;br /&gt;
그것도 고이치안흔게 그때쯤은 그녀석의 기분(氣分)이란 불꼿치타오를둣도 하얏거니와 제애비말을 안듯기로 유명(有名)하야 집을나선놈이니까.&lt;br /&gt;
&lt;br /&gt;
『그러치만은 엇절수가 잇서야 지요』&lt;br /&gt;
&lt;br /&gt;
이것이 그더석의 말에갑허진보수이엿습니다.그뒤나는 십년(十年)이란 긴동안 이사람들의 속삭임을 들을수는 업섯습니다.&lt;br /&gt;
&lt;br /&gt;
아마그것이 그들의 비극(悲劇)의시초(始初)FP동시(同時)에 나의『로—맨틔시슴』도 종언(終焉)이엿든 것입니다 나는그날부터 새로운 생활(生活)을 경험(經驗)하지안으면 안되엿읍니다 이때까지는 그들가운데에 엇던한두사람의 주활(主活)을 말로서 들엇으나 인제는 어느특정(特定)한 사람의사랑이라든지 그런달착지근 한것이아니라 그저그놈도 그놈갓고 그놈도 그놈갓흔 뭇사람의생활전체(生活全體)가 내풋입새의 거울보다 반드라운 쪼각쪼각에 빗치는 것이엿읍니다 이전갓흐면멀리서 삽분삽분 발자욱 소리가들려오고 그발자욱 소리가갓가워 지는데따라 쟁반에 구슬을굴리는듯한 목소리도 들엇건만은 또그럴때면 나도 입사귀를흔들어서 업김가티 보드러운바람을 부러도 주엇건만은 이때는 내가 바람을 불기는커녕그들의지나가는 위풍(威風)에 나는전율(戰慄)하지 안을수 업섯읍니다.구슬을 굴리는듯한 목소린들 어데가듯겟읍니가?뭇사람의 포효(咆哮)하는소리란 아주바다에서 이러나는노도(怒濤)의 교향악(交響樂)가탯습니다.&lt;br /&gt;
&lt;br /&gt;
그래서 나는알기를 인간(人間)이란위대(偉大)한 작란(作亂)군이라고 하엿습니다.어떠케 그들의 얼골이 크게보이고 힘차게 늣겨것든것인가 지금은 생각만하여도 왼몸이 으슬으슬합니다.그러는중(中)에그들의 행렬(行列)은 대강(大江)가티 홀러가고 나는 또다시 노랏케 단풍이들어 한닙두닙 떨어지는것입니다.얼마나 소조(蕭條)하고 적막한거리겟습니가? 내엽헤는 괴수(怪獸)가티 늘어선 삘딍들의 거믄그림자가『팔아스트 에 얼어부튼거지들의 싸늘한꿈을 죽엄가티덥허논때업니다.밤도삼경(三更)은 지난때이지요 더벅더벅 거러오는무거운 발자욱 소리와함께 나는고요한『그림자』하나를 발견(發見)햇습니다.안개에 촉촉히 저진차림자러와 힘업시 옴겨지는발자욱이 아주무슨 패잔병(敗殘兵)의 유령(幽靈)이엿슬지도 모릅니다.나는지금 그유령(幽靈)을 따라 굴러 갑니다.그러나 그유령(幽靈)은 내가미행(尾行)을 한다는것은 모르고 또는알엇다해도 아무저항(抵抗)도 할필요(必要)가업다는듯이 방향(方向)도업시것는것이엿습니다.때로는 시내도건너고들판도 지나 힘이지치고 밤이깁프면 산(山)기슭 나무등얼 밋헤누어서 하늘에 수(數)업시만흔 별들을 헤아려도 보는것이겟지요그러나 그어느별도그에게 행운(幸運)을 점제한별은 업섯나봐요 그리다간 그는그만 흑흑늣기고 울며울다가는 자는것이엿습니다.아마도 기적(奇蹟)을 이즌순간(瞬間)이 그에게는 자장행복(幸福)된순간(瞬間)이든가봐요,산(山)속은 찬기운만 가득하고벌레소리는 정적(靜寂)을 삼림(森林)가티무성(茂盛)하게하는것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그다음날도 아츰햇발이 속새입홀 흔들면 그는일어나 것는것이엿습니나.이러는 동안에 나는이유령(幽靈)에게서 무엇을 보앗스리라고 생각하심니가?어느큰강(江)가이엿습니다.여을어 목노아울고가는 강(江)가이엿습니다.그는이강(江)가에 안저서 무엇을 생각하엿는지 눈을깜은채로 하늘을치여다보는 것이엇고 초생달은교만(嬌慢)한 게집의눈자위처름 그를흘겨보는것은 한층(層)더창백(蒼白)한 비우슴갓햇습니다 그러치만은 그는그광망(光芒)을 피(避)하려고도 안엇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내생각에 따른다면 그래도 못잇처지는 날ㄹ기억(記憶)을 모조리 물소리에 씨처흘려보내려는 노력(勞力)이엿슬지도모릅니나&lt;br /&gt;
&lt;br /&gt;
그때 먼데마을에는 개짓는소리가 어즈러히 들여오고 새바람도 유달리 옷깃을 새여드는데 그는 일어셔 한발한발 물가으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때나는 그의운명(運命)을거의들여다보는것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자살(自殺)이란 광경(光景)이 내머리속에번개가티 일어낫습니다.그리고그는물가의 널직한 반석(盤石)우에올러안저서 물속에비친 자기(自己)의얼골을 자세히 들어다보는 것이엿습니다,그러나 그물속에는자기(自己)의 얼골은 차저볼수가 업섯든것이겟지요,증오(憎惡)를 참지못하는 그는그만 뼈만남은 두손으로 물결을 훗치고는 돌우에업더저 우는것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그는 또다시 일어나 모둔것을 이저버린듯이 걸어가는 것이엿습니다.일기(日氣)는점점 흐려지고 회색(灰色)으로 물드린 천공(天空)은 그의최후(最後)의 희망(希望)까지라도 빼서바릴듯이 싸늘한 압박(壓迫)을더하는것이엿습니다.그러타고해서 그에게는 아무런 격정(激情)도 반발(反撥)도잇는것갓지는 안엇습니다 만은 주먹을 쥐여서는 주머니속에 너은체로 간간히 머리를 흔드는것은 과거(過去)에대(對)한 회한(悔恨)이라든지그런것들이 머리속을 할터가는것이겟지요?&lt;br /&gt;
&lt;br /&gt;
그것은 어느동리(洞里)압이엿습니다만흔사람들이 모엿다가는 다들도라가고 큰버드나무에『사지오리』를 부친색기를 걸처맨밋헤는 기름종지에 빤—한심지불이타고잇스섯며 아해들 몃사람이그것을 직히고 잇섯습니다.그는아해들에게 무엇을하는것이냐고 물엇습니다.&lt;br /&gt;
&lt;br /&gt;
아해들의 대답이란 너무나 묘(妙)한것이 안이겟습니가?그동리(洞里)에는 십년(十年)만에 한번식은 유령(幽靈)이 난다는 전설(傳說)이 잇섯습니다그래서 그날은 동리(洞里)사람들이정성을 다하야 한데모혀서 기도(祈禱)를 올리고 고사(告祀)를 지내는것이엿는데 그날이마츰 십년(十年)에 해당(該當)한날이며 방금 의식(儀式)을 맛친때라고 말을마천 아해들은 그를 한참동안 자세히 보다가는그만 인가(人家)를 향(向)하야 다어나는것이엿습다.아마도 그것은참으로 이동리(洞里)에 유령(幽靈)이 나타낫다는것을 알리기 때문일런지도모름니다.&lt;br /&gt;
&lt;br /&gt;
그는 한번 크제우섯습니다나는 그가 웃는것을 보는것은처음이엿습니다,그러나 그웃슴이란 곳변해저서 므슨쓰듸쓴 약물을 먹은뒤의 입모습가리 변해지며 얼골전체가 크다란 환상(幻想)에 사로잡히는것 갓햇습니다그리다가 그는 그언덕 미테서잠이들어 자면서 꿈을 꾸는것여엿습니다,그꿈이란 이러햇습니다,몹시더운 여름날 몃칠을두고 비가따루엇습니다,그래서큰물이나고 하루밤사이에 왼동리(洞里)가 물에쓸려 갓읍니다 왼여름 피담을홀려 지은농사(農事)도 한포거업시 사람마다 두주먹과한개의 목슴박게는 남지안엇음니다 주림과 치위가 매운챗죽갓치 그들을 휘갈겻읍니다 그래서 동리(洞里)사람들은 제각기 이고향(故鄕)을 떠나지안호면 안되엿읍니다 물론(勿論)녯날에야 부모(父母)의 품속갓치 포근하고 사랑스런 땅이엿지만은 지금은 참담(慘憺)과 고통(苦痛)의 회억이외(回憶以外)에 아부것도 그들의 애착(愛着)을 붓잡어 두□는 못하엿읍니다.그들은지금 한개촌락(個村落)에서 다른촌락(村落)으로 한성시(城市)에서 또다른성시(城市)에 표박(標泊)□ 길을가는것이엿지만은 그어느□곳도그들이발을 부칠곳은 어□읍니다 모든집들어 그들압헤는 문(門)들을 잠것읍니다.그리고 오즉그들에게는 한오리 끗어는 길이엿음니다 어느때나 □□갈수잇는 길이엿읍니다 하□□또하루 한달에또한달 꼭가티 그들은 하늘을 치여다보고 □을갓읍니다.벌서초본(草本)도 다□□이들고 낙엽(落葉)이 나리나 그들의발길은 머므를수는 업섯습니다 어느마을이나 성시(城市)에서 그들에게 일주일(一週日)이나 유(留)할수가□고한오리의 희망(希望)을 주엇다면 다시그순간(瞬間)이 지나면 그들에게는서름이외(以外)에 아무것도 □는것은업섯습니다.그러나 이□름과주림과 치위는 그들늙은이와 어린이와 남자여자(男子女子)를 모다한마음에 얼거맬수가 잇섯습니다 바탐과비에 바래인 그들이마음에한개의희망(希望)이란 오즉 일거리와생활(生活)이엿습니다 이것이 그들을고무(皷舞)하고 추진(推進)하는 힘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마치한떼의 표유(瓢游)하는『집시』와가티 마을을지내나 산(山)을너무나 마른풀을뜨더 그것을 덥고깔고 혹(或)은낙엽(落葉)을 쓰러다가 욕(褥)와 이불을삼어 한랭(寒冷)을 지나는하루밤 더욱이 비오는밤……밤은영원(永遠)히 차운것이며 뜨신것은다만그들의『마음』뿐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날과밤은 그넷줄처럼 밧구엿습니다.해도점점 쩔러지고 물들이 어러부트며 첫눈이 나린것도 발서 열흘전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그들은 아즉까지도 발무칠땅과한가지의 일거리도 찻지는못하엿스며 끗간데를모를 길만을보고 걸어가는것입니다.&lt;br /&gt;
&lt;br /&gt;
『여기라도 좀쉬여갓스면』모다들이러케 마음으로 부르지젓습니다.그러나 또몃사람운 말하는것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가자 압흐로 더가보자』이것도모든사람의 말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그들은 여전히 경사(傾斜)진 산(山)빗탈을걸어가며 길다란 곡선(曲線)의행렬(行列)이 계속(繼續)되는것입니다.그때는바람도 조골 잔잔해지고 햇발도구름밧글나와 열분광선(光線)이 뭇사람의 얼골을 다소명낭(多少明朗)하게하엿스나 일행(一行)이바로 산(山)미루턱에올너다엇슬때는 정세(情勢)는 디무도급(急)히변(變)하야 눈이퍼붓기 시작(始作)햇습니다.&lt;br /&gt;
&lt;br /&gt;
『눈이또나린다』이러케 부르짓고는모다들 놀나는 것이엿습니다.눈송이는 목화(木花)를 뜨더뿌리는듯이왼공중(空中)에 미만(瀰漫)하야지척을가릴수가 업섯습니다.바람에몰려오는 눈송이가 얼골에 부다치면 낫살을 어이는듯하고 손이빠질듯이 스린것입니다.시력(視力)조차 모호(糢糊)하야 발아래길도 알어보기는 어려웟습니다 재를오를때에 비(比)하면 산(山)을나려오는것은조금용이(容易)하엿스나 길이질대로 질어서 업더지락 잡버지락하는 사람들도잇스며 등에업힌 어린애들은 배가몹시 곱흐다고 우는것이며 그럴때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다들 산(山)밋헤 동리(洞里)집에 나려가서 드신밥을 준다고달래는것이엿습니다 그러나 산(山)미테 동리(洞里)집은 모다제각기 제마음에 그려보는 집들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가자 조금이라두 빨리가자불빗을 볼때까지』그들중(中)에서 한사람이 굴근목소리로 외치는것입니다&lt;br /&gt;
&lt;br /&gt;
『암그래야지』또 몃사람의 대답이 끗나면 모다들 침묵(沈默)은하면서 마음속으로는역시(亦是)『가자』고 대답하는것입니다&lt;br /&gt;
&lt;br /&gt;
사람들은 이빨을물고 잇는힘을다하야 전진(前進)합니다 지나온길이얼마이며가야할길이 얼마인것도모르면서 죽으나사나 가야한다는 것박게는 그들은 한사람도자기(自己)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업섯습니다.그들의 동반자(同伴者)의 발소리와 호흡(呼吸)이 그들의가튼 운명(運命)을결정(决定)한다는것은 이잔혹(殘酷)한 자연(自然)과 싸워가는 무리들의 금과옥조(金科玉條)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눈보래는 끗첫습니다.그러나아즉도 그들에게는 조그마한희망(希望)도 보이지는 안헛습니다.압도캄캄하고 뒤도그랫습니다.아득한 삼림(森林)속을 허우덕이는 암담(暗膽)은 영원(永遠)한흑야(黑夜)가 새이지도안코 영원(永遠)한 미로(迷路)도 끗막지도못할것 갓햇습니다.&lt;br /&gt;
&lt;br /&gt;
피로(疲勞)는 그들의몸을 풀솜가티만들엇습니다.참다가 못참는몃사람이 땅이라도 꺼지란듯이한숨을 쉬는것이엿습니다.그리고는 부르짓는 사람도업고 중얼대는 사람도업스며 눈물도마르고 공포(恐怖)도 사라진 그들은 발목에 잇는 힘을 다해서 눈과진흙우를 쉬임업시 이동(移動)하는것입니다.』&lt;br /&gt;
&lt;br /&gt;
유령(幽靈)은 그들가운데서 제일나이만흔 노인(老人)을 발견(發見)햇습니다그리고 그것은십년전(十年前) 그가고향(故鄕)을떠나올때 아즉도 그다지늙지안흔 그의아버지인것도 알엇습니다 그리고 모든사람은 그의어린시절(時節)의 동무엿습니다 그는참다못해『아버지』하고 소리를첫&lt;br /&gt;
&lt;br /&gt;
습니다 그러나그들은 어느한사람도 그를상대(相對)로 반겨마저주는사람은 업섯습니다.&lt;br /&gt;
&lt;br /&gt;
모다제각기 제갈길을 가고만잇섯습니다.&lt;br /&gt;
&lt;br /&gt;
유령(幽靈)도 그때야 잠이깨엿습니다 그리고 몸써리를 치는것입니다 얼마나 지리(支離)한꿈이며 괴로운 꿈이겟습니까?유령(幽靈)은다시일어나 것는것입니다 캄캄암흑(暗黑)속을 영원(永遠)히차고 영원(永遠)히 새지못할듯한밤을 제혼자가는것입니다 십년전(十年前) 내발밋흘 지나단이며 사랑을 속삭이든 소년(少年)은지금도 밤길을 제혼자 가고잇겟지요 황엽(黃葉)은 그래서 서러운일생(一生)을 울고만잇습니다&lt;br /&gt;
&lt;br /&gt;
정축십일(丁丑十一),일(一)&lt;br /&gt;
&lt;br /&gt;
==주요 내용 요약==&lt;br /&gt;
주제: 작가(필자)의 소식을 세상에 전하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이다.&lt;br /&gt;
&lt;br /&gt;
소식 전달: '내'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가을 바람에 흘러가는 '황엽(黃葉, 누런 잎)' 조각을 자신의 편지라고 생각하고 그 서러운 전기를 들어보라고 한다.&lt;br /&gt;
&lt;br /&gt;
'황엽'의 관찰: 황엽(필자)은 자신이 거리에서 겪은 두 가지 경험을 이야기한다.&lt;br /&gt;
&lt;br /&gt;
소년의 성장과 비극: 어린 소년이 성장하여 연인과 행복을 속삭였으나, 부모에 대한 효행 문제로 헤어지는 비극을 목격하는 것이다. 황엽은 이를 '행복의 절정은 최대의 비극과 통한다'고 표현하며 자신의 '로-맨틔시슴'의 종언이라고 말한다.&lt;br /&gt;
&lt;br /&gt;
군중의 포효와 유령: 이후 황엽은 개별적인 사랑 이야기가 아닌, '뭇사람의 생활 전체'와 **'노도(怒濤)의 교향악'**을 목도한다. 황엽은 이 거대하고 위대한 '작란군(作亂群)'의 행렬에 전율을 느낀다. 행렬이 사라진 후, 황엽은 '패잔병의 유령' 같은 힘없는 한 사람의 고독하고 고통스러운 표류와 꿈을 따라가며, 꿈속에서 홍수로 고향을 떠난 농민들이 희망 없이 떠돌지만 '가자 압흐로 더가보자'는 그들의 단합된 의지를 발견하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마무리: 유령이 깬 후 다시 홀로 밤길을 걷는 모습을 보며, 황엽은 '서러운 일생을 울고만' 있다고 글을 마무리하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분석 및 특징==&lt;br /&gt;
메타포(은유)적 글쓰기: '황엽(낙엽)'이라는 매개를 통해 자신의 소식과 감정을 전달하는 고도의 은유적인 글이다. '황엽'은 작가 자신의 고독하고 소외된 자의식, 혹은 시대를 표류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시대의식의 투영: 개인적 낭만(소년의 사랑)의 종언과 함께,'뭇사람의 생활 전체'와 '노도의 교향악'을 목도하며 당대의 격변하는 사회상과 민중의 힘을 인식하는 작가 의식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이육사의 서정성: 후반부 꿈속에서 펼쳐지는 농민들의 표류와 그들의 굳건한 생존 의지는 당시 농촌의 피폐함과 함께 암울한 현실 속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을 비장하게 포착해내는 이육사 특유의 서정성을 보여주는 것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전과기=&lt;br /&gt;
누구나 버릇이란 쉽사리 곳처지는것은아니다 그러므로 세살쩍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말도 잇지 안는가?.그런데도흔히 다른사람의 한가지 버릇을 새로히 발현햇슬때는 아—저사람은 저런버릇이 잇구나하고 속으로 비우서보거나 그버릇이 조치못한종류의것이면 대개는 업수히역이는 수도잇는가봐!.그럿컨만 나에게는 아무리 곤처보려도 곤처지지안는버릇이란 손톱을 깍고 줄로 으르고 수건으로 닥고하는것이다그것도 때와곳을 가릴것도업시조욕(漕浴)나 다방(茶房)이나는 말할것업고기차(汽車)나 배를타고 멀리여행(旅行)이라도하면 심심푸리도되고 봄날도서관(圖書舘)가튼데서 서너시간(時間) 안저백이면 제아무리 게른뱅이는 아닐지라도 웃눈섭이 기중기(起重機)처름아래눈섭을 끄러다닐때도 잇는것이고 그럴때에 손톱을 잘르고줄로 살살으르면 자릿자릿한 자미에 왼몸에게틈이 다풀리는것이다.그야내나이 어릴때는아침일직이손톱을 잘르면어룬들은질색을하시며 말리기도하엿다,그리고 말릴때에 누구인지지금에기억되지는 안어도 우리집에자주오는 손이 말하기를 아침에손톱깍고 밤에 머리빗는것은몸에해롭다고 하는것이엿고 내생각에도 그런방문은『동의보감(東醫寳鑑)』에라도 싸여 잇는줄 아럿기에그뒤로는 힘써시간(時間)을 한나절지난뒤에 손톱을 닥곤하엿지만나도내대로 세상맛을 보게된뒤로는 쓴맛단맛을 다보고 시고떨븐 구석과 휘추고초가튼 광경에 부닥길때가 시작이되고는손톱치레를 할만한 여가도 업섯고 어느사이에 손톱은 제대로자라 긴놈 쩌른놈 삐뚜러진놈꼬부러진놈 벌덕잡버진놈 앙당마스러진놈 이러케되야 내손이란 그꼴이 맛치 오증어를 뒤집어 삶어논것이 되엿다.&lt;br /&gt;
&lt;br /&gt;
그럴때에 나는 또 다시 손톱을 잘를것은 잘르고 으를놈은 으르곤하엿스며 이른아츰이라도 가리지는 안엇다.그것은밤으로 머리를 깍거보아도 몸에 해로운것도 업스니까 아츰에 손톱을 깍는것조차 위생(衞生)과는 관게업는것을 안까닭이다.&lt;br /&gt;
&lt;br /&gt;
그런대 내가이손톱을 잘르는버릇은 언제부터 시작되엿는가를 생각해보면 그도벌서 삼십년(三十年)이 더지낫다,내가난지 백일(百日)이나 되엿겟지 이란저고리박게빨간내손이 나와서 내얼골을 햅여뜻고는 나는자스려질듯이 울엇다.어머니가 놀라서가위로 내손톱을 잘러주신것이 처음이고그것이 늘거듭하야 지는동안에봄철이오면 어머니는 우리형제(兄弟)를 차례로불러 퇴ㅅ마루 양지쪽에 안치고 손톱을 잘러주시고 머리도빗기고 귀도휩여 주섯스며 이것도 내나이 여섯살때 소학(小學)을 배우고는 이런일의한반(半)은 할아버님께 이관(移管)이 되엿다 예날 내고장 우리집에는그다지 크지는못해두 허무히 적지안은 화단(花壇)이 잇섯다 그리고그화단(花壇)은 이때쯤되면 일이밧벗다 깍지로긁고호미로 매고 씨갑씨를 뿌리고총생이를 옴겨심고 적당한 거름도 주엇다 요즘가티『시크라맨이나『카—비손』이나『추리프』가튼것은 업서도 옥매화(玉梅花) 분홍매화(粉紅梅花) 홍도(紅桃) 벽도(碧桃) 해당화(海棠花) 장미화(薔薇花) 촉규화(蜀葵花) 백일홍등등(百日紅等等) 빗도보고 향(香)내도맛고꼿도보고 입도볼 말하면 일년(一年)을 다즐길수가잇는것이엿는데 내할아버지 생각은 이제 헤아려보면 우리들에게 글읽고 글시씨인사이로노력(勞力)을 몸소맛보이는것도 되려니와 그것이 정서교육(情緒敎育)도될겸(兼) 당신의 노래(老來)를 화려(華麗)하게 꾸밀수도 잇섯든 모양이엿다 그럴때마다 우리들은 이다지 가볍고고흔 노동(勞働)이 끗나면 할아버지는 우리들게 손을씨슬것과 손톱에끼인흙을 끌어내도록 손톱을닥그라 하섯다.&lt;br /&gt;
&lt;br /&gt;
이러든 내손톱이기에 나는손톱을 소중히하고 잘르고 으르고 닥고하는 동안에 한가지방편을 어덧다 그것은 나에게거북한일을말하는 사람아페서 손톱을 닥는것이다.빤히 얼굴을맛대이고 배알에 거슬이거나듯기실흔 말을듯고 억지로 참을수도업고 그러타고 언잔흔표정(表情)을 할수도업서 손톱을 닥노라면 시굴게신 어머니도 그려보고 도라가신 할아버지의 모습을 우러러 뵈일수도잇다.내고장의 푸른하늘아래 봄이 왓슬것도 가트니&lt;br /&gt;
&lt;br /&gt;
——(완(完))——&lt;br /&gt;
&lt;br /&gt;
==주요 내용 요약==&lt;br /&gt;
손톱 깎는 버릇: 화자(나)에게는 아무리 고치려 해도 고쳐지지 않는 버릇, 즉 손톱을 깎고 줄로 다듬고 닦는 행위가 있다. 이 행위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으며, 특히 심심하거나 피로할 때 긴장을 풀어주는 '자릿자릿한 재미'를 준다.&lt;br /&gt;
&lt;br /&gt;
버릇의 변화와 세상 경험: 어릴 때는 '아침에 손톱 깎는 것은 몸에 해롭다'는 옛말 때문에 어른들이 말렸고, 화자도 이를 믿었다. 그러나 세상을 경험하며 **'쓴맛 단맛'**을 다 본 후, 손톱 관리에 신경 쓸 여유가 없어 손이 엉망이 되기도 했다. 이후 미신이나 위생보다는 개인의 필요에 따라 언제든 손톱을 다듬게 되었다.&lt;br /&gt;
&lt;br /&gt;
버릇의 기원과 따뜻한 기억: 이 버릇은 태어난 지 백일 무렵 어머니가 처음 손톱을 깎아준 것에서 시작되었다.&lt;br /&gt;
&lt;br /&gt;
봄철이 되면 어머니는 형제들의 손톱을 깎고 머리를 빗겨주셨다.&lt;br /&gt;
&lt;br /&gt;
여섯 살 때부터는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화단(花壇)을 가꾸는 노동을 했다. 할아버지는 이 노동을 노력(勞働)을 몸소 맛보게 하고 정서 교육을 시키는 수단으로 여겼다. 노동이 끝난 후에는 손톱에 낀 흙을 닦도록 하셨는데, 이는 정돈과 청결의 습관으로 이어졌다.&lt;br /&gt;
&lt;br /&gt;
손톱 관리의 '방편': 손톱을 닦는 행위는 시간이 흐른 뒤 화자에게 **'방편(方便)'**의 의미를 얻게 되었다.&lt;br /&gt;
&lt;br /&gt;
듣기 싫거나 거북한 말을 하는 사람 앞에서 이 행위를 하면, 억지로 표정을 관리할 필요 없이 그 행위에 몰두하며 고향의 어머니와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분석 및 특징==&lt;br /&gt;
일상적 소재의 상징성: **'손톱 깎는 행위'**라는 극히 일상적인 소재를 통해 삶의 태도, 유년 시절의 기억, 그리고 현재의 심리적 방어 기제까지 끌어내는 수필이다.&lt;br /&gt;
&lt;br /&gt;
세대 간의 경험 대비: 수필은 크게 세 시기를 대비시킨다.&lt;br /&gt;
&lt;br /&gt;
유년기 (어머니/할아버지): 손톱 관리가 사랑과 보호, 그리고 정서 교육의 매개였다. (전통적이고 순수한 가치)&lt;br /&gt;
&lt;br /&gt;
성인기 (세상 맛을 봄): 손톱 관리가 소홀해지고 삶의 고난과 시련 속에서 잊혔다.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운 현실)&lt;br /&gt;
&lt;br /&gt;
현재 (손톱을 닦는 '방편'): 손톱 관리가 현실의 고통을 회피하고 내면의 안정을 찾는 심리적 '방편'이 되었다. (현실과의 거리 두기)&lt;br /&gt;
&lt;br /&gt;
정서적 위안: 화자가 불편한 상황에서 손톱을 닦는 행위는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힘들었던 현실 속에서 유년기의 평화로웠던 기억(어머니, 할아버지, 화단)**을 소환하여 현재의 감정을 통제하고 마음을 지키는 자기 치유의 과정인 것이다.&lt;br /&gt;
&lt;br /&gt;
향토적 정서: 화단에 핀 옥매화, 장미화, 백일홍 등과 퇴마루 양지쪽 같은 토착적인 이미지를 통해 과거의 아름다웠던 고향과 가족의 정을 회상하며, 전통적 가치에 대한 향수를 드러낸다.&lt;/div&gt;</summary>
		<author><name>Imgpdnjs</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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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이육사의 기자 생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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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10T08:49:4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Imgpdnjs: &lt;/p&gt;
&lt;hr /&gt;
&lt;div&gt;[[분류:imgpdnjs]]&lt;br /&gt;
==이육사의 기자생활==&lt;br /&gt;
출소한 뒤에는 중외일보와 조선일보 대구지국에서 기자로 일했고, 1930년에는 ‘이활’이라는 이름으로 첫 시 &amp;lt;말&amp;gt;을 조선일보에 발표했다. 이 시기는 훗날 교보생명을 세우는 신용호에게도 영향을 주어 독립운동 자금 지원과 교육 사업 구상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알려져 있다.&lt;br /&gt;
&lt;br /&gt;
1930년, 이육사는 조선일보 지면을 통해 생애 첫 시 「말」을 발표하며 문단에 모습을 드러냈다. 1월 3일자 조선일보 7면 하단에 실린 이 짧은 작품에서 그는 매질에 지쳐 쓰러질 것 같은 말이지만 새해에는 다시 우렁차게 질주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이 작품이 바로 그와 조선일보의 첫 연결고리였다.&lt;br /&gt;
&lt;br /&gt;
==중외일보 대구지국==&lt;br /&gt;
1929년 6월 장진홍 의거 관련 혐의로 복역 후 1930년에 출소한 이육사는 곧바로 언론계에 투신했다. 그는 시 발표 직후 중외일보(中外日報) 대구지국에서 기자로 일하기 시작했다. 중외일보는 1926년 조선중앙일보가 제호를 변경하여 창간된 신문으로, 1931년까지 발행되었다. 이육사가 활동하던 시기는 일제강점기 언론 탄압 속에서도 민족의식을 고취하려던 분위기가 남아있던 때였다. 지방지국 기자로서 지역 사회의 현안을 취재하고 보도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기간의 활동은 그가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사회 현실에 대한 인식을 심화하는 데 기여했다.&lt;br /&gt;
&lt;br /&gt;
==조선일보 대구지국==&lt;br /&gt;
중외일보에서 근무한 뒤, 이육사는 1931년 8월 조선일보 대구지국으로 자리를 옮겼다. 일제강점기 지방의 신문 지국은 단순한 연락소가 아닌, 지방 취재와 기사 송고의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이육사는 이곳에서 현장 기자로서의 전문적인 경험을 쌓았다. 조선일보에서 자신의 이름(필명)을 걸고 처음으로 쓴 기사는 1932년 초에 연재되었다. 첫 기사인「대구의 자랑 약령시의 유래」는 1932년 1월 14일부터 네 차례에 걸쳐 연재되었다. 이 기사를 쓸 때 그는 본명 대신‘육사생(肉瀉生)’이라는 독특한 필명을 사용했다. '육사'라는 필명이 여기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으며, 이는 그의 상징적인 수인(囚人) 번호(264)와 연결되는 '이육사'라는 이름의 유래 중 하나로 간주되기도 한다. 이 기사는 대구의 대표적인 전통 시장인 약령시의 역사와 유래를 소개하는 향토색 짙은 글이었으며 이육사가 기자로서 대구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lt;br /&gt;
&lt;br /&gt;
[[파일:이육사기사.jpg|500픽셀|섬네일|center| 이육사가 조선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근무하면서 쓴 1932년 1월 14일 자 ‘대구의 자랑 약령시의 유래’ 기사. ‘육사생’이란 필명 사용. ⓒ 조선일보]]&lt;br /&gt;
&lt;br /&gt;
그는 스포츠 기사에서도 민족적 정서를 드러냈다. 1932년 3월 6일과 9일자 스포츠란에서 「대구 ‘장’ 연구회 창립을 보고서」라는 글을 연속으로 기고하며 이번에는 ‘이활(李活)’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여기서 그는 조상 대대로 이어오던 우리 겨레의 전통 놀이 ‘장치기’를 소개하며 경기 방식뿐 아니라 점수 계산 용어까지 온전히 우리말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더 나아가 이 놀이를 세계 농민 사회에까지 널리 보급하자고 주장했다.&lt;br /&gt;
&lt;br /&gt;
그는 1934년 무렵 조선일보로 다시 합류했고, 이후에도 꾸준히 조선일보 지면에 글을 남겼다. 1930년대 후반에서 신문이 폐간되기 직전인 1940년까지 발표된 글들은 다양했다. 5회 연재된 「노신 추도문」(1936년 10월 23~29일자), 「문외한의 수첩」(1937년 8월 3~6일자, 3회), 「황엽전」(1937년 10월 31일~11월 5일자, 4회), 「전조기」(1938년 3월 2일자), 그리고 1940년 발표된 「계절의 오행」 등이 대표적이다.&lt;br /&gt;
&lt;br /&gt;
==타임라인으로 보는 이육사의 기자 발자취==&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v2%3A2PACX-1vScyeelknnBUflE4gCcqr0d_p4jIpl00AVBmBzhC5cgKY8GPsH4h-JZmzezN5VoQTKsJGw76vWgsA7O&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width=100%25&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대구(大邱)의 자랑 약령시(藥令市)의 유래(由來)=&lt;br /&gt;
대구(大邱)의자랑&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의유래(由來)&lt;br /&gt;
&lt;br /&gt;
대구지국(大邱支局) 육(肉) 사(瀉) 생(生)&lt;br /&gt;
&lt;br /&gt;
대구의자랑이 무엇이냐?고 뭇는사람이 잇스면 지금사람들은아이어룬할것업시 대구능금(평과(苹果))을말할것이다 그러나 대구능금은 최근의 한명산물로서완전한 자랑의자위를 점령할수는업는것이다 여긔서우리는중학교지리교과서(중학교지리교과서(中學校地理敎科書))에도잇는대구의유명한약령시(연령시(燕令市))를자랑으로들어놋코그에대한력사적유래를먼저아라보자&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의사적유래(史的由來)&lt;br /&gt;
&lt;br /&gt;
대구의 약령시는 일년얼차의정긔시장으로서 그시장에 집산되는 산물은 맛치『도루고』(토이기(土耳其))나『코—카쓰』(고가삭(高加索))나중앙아세아(중앙아세아(中央亞細亞))내외몽고(내외몽고(內外蒙古))등지에서 일년 일차혹이차식 열니는 모피물(모피물(毛皮物))의시장과가티대성황을일우나 이상에말한 각지의시장은인류사회의생활형태가차차목집함을따라필요한물품을서로서로밧구고저일정한장소와시일에모히는말하자면물물교환(물물교환(物物交換))시대로부터교통의관계라는지긔후의관계라든지또는일반사희생활의형태가오히려아직까지녯날의그것을면치못하고현대자본주의국제간의무역관계(무역관계(貿易關係))가극도로발달된 오날까지에 원시경제(원시경제(原始經濟))를 연구하는학자들의 연구재료가 되는것은휴미잇는 사실이지만은 대구의약렁시는 물품의집산과 교환의량식이 그와방불하여도 일홉부터 약시(약시(藥市))가아니고 약렁시(약령시(藥令市))란령(영(令))자에대하야우리는직각적으로 이시장의긔원은엇던권력(권력(權力))의 지배(지배(支配))맛해일게된것을 알수가잇다그러면 이약렁시가 처음시직된것은 언제부터인가 그야말로중학교교과서에까지『고래(고래(古來))로유명』이라고만씨여잇고 적확한년대를 쓰지안엇슴으로 대담하게 그년대를 내어노을수는업스나 비교적정확한수자를 조사한대로쓰면 서력일천륙백오십팔년(이조개국이백육십팔년효종조(李朝開國二百六十八年孝宗朝))거금이백칠십 사년전부터개시하게 되엿다고한다 그때야말로 조선을팔도(팔도(八道))에 닌후아노코 다시칠십일주로 난호아노흔 경상도의 정치적수부(수부(首府))도대구려니와 경상도(경상도(慶尚道))를둘너 남부조선각지는 산수명랑하고긔후온화하야각색약초(약초(藥草))의배양에지질이알맛기도하고 교통도편의하야(그때로보아서는)물산의집산에최적의지대도 대구엿스며 그때야말로임진병란(임진병란(壬辰兵亂) 이끗을막고모든볼회와 시설이 차자정돈뇌고발전을 보이며따라황실중심(성실중심(星室中心))으로끄으려는당시의위정사(위정자(爲政者))들은□□□□조금이라도 관계잇는 물품이면무엇이나물론하고 먼저진상(진상(進上))이란일흠아래최상의생산품을골너 서울도보내고 일반백성이먹고 입고쓰게되는 것이다그리고엇던 계□을물는하고병업시일생을 살수도업는것은 생리상자연의 리치엄으로 일국의지존(지존(至尊))인왕(왕(王))도병마의무서움은면치못 하는것이다 그래서황실에서일년동안쓸 약품을이곳에서 구하고저 국가의명령으로개시케한것이 오날날 우리가보고듯고 하는약령시의 처음이다그때는 약령이서면 감사(감사(監使))(현도지사(現道知事))가약재를골다봉하야중앙 정부 사약원(중앙정부사약원(中央政府司藥院))에 보낸후에 팔도에서모혀든 약재를일반 약국(약국(藥局))이사서완조선안의병든사락들이 그해그해의 치료를하게다엿다고한다(속(續))&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와경기(景氣)(이(二))&lt;br /&gt;
&lt;br /&gt;
대구지국육(大邱支局肉) 사(瀉) 생(生)&lt;br /&gt;
&lt;br /&gt;
【대구(大邱)】대구의약령시(약령시(藥令市))는다른상품시장에서는볼수업는특수한 유래를가지고 발달하여온만큼 지방의정청에서도일년춘추두차레에정긔적으로모여드는 지방생산자들을 위하야지방경제발달을 조장하고저 계획을세우고 제도의개선과 개시(개시(開市))긔간의 연장등 모든방면으로힘을써 보앗스나 모다뜻과갓지못하고 서구(서구(西歐))렬국의동양(동양(東洋))침입으로의학(의학(醫學))약학(약학(藥學))등학문이발달됨에침(침(針))은주사(주사(注射))로변하고바쇠는『메—쓰』로화하는바람에한약(한약(漢藥))의 가치는 전연그권위를일케되면서 대구의 약령시도차차워마하야 매매되는 약재료도주러지기만 하든중『후—버』겅긔가세계의주식시장(주식시장(株式市場))을혼란케하듯이 대구의 약령시장도 대타격의한때가 지나가게되엿스니 그는무엇일가?지금부터이십이년전(신해년(辛亥年))에중산손문 중산손우(中山孫又))씨혁명으로대청황실)대청황실(大清皇室))을넘어지면서부터는 청황실이 조선정부(조선정부(朝鮮政府))에의뢰하야사가든약품은실로막대한것이엿스나전부그매도의길이 막히게된 여러가지조건밋헤매매가 축소하여 전성시대의반도못되게 되얏다 그나마최근에는전주(전주(全州))대전(대전(大田))진주(진주(晋州))원산(원산(元山))등지에군소시장이개설되여이를약령시로밀미암아대구에떠러지는돈은매우감소되엿스나아직도령시가개설되면동성정입구(동성정입구(東城町入口))로부터남성정입구(남성정입구(南城町入口))까지 십여정(십여정(十餘町))에 처당재(당재(唐材))초재(초재(草材))등삼백여종의 약품도만흐려니와 그근처에림시려인숙(임시여인숙(臨時旅人宿))이무수히설치되고 포백기타 일용생활에필요한물품이면 평상시의 멧배나더잘팔리는 호경긔를 연설한다 그리하야 촌양빈들의낫서른돈을 먹어보겟다는 술집색시들까지 헐직한인조견으로 봄을싸고 도스리고안저서 열분애교를 술잔에담어보내는것도『넌센스』한징면인지는모르겟다마는 흡객술(흡객술(吸客術))이 졸열한다기보니 시대에뒤처진 기생들은본바닥에 거주하는손님들은『카페—』붉은녀급(여급(女給))들의자주(자(紫))빗유혹에다 뛰우고 음력과세를압서초조하는중 때맛침사재(시재(時哉))시재를불러 시내 각요리집 극장할것업시 대만원의성황을 이루는것은 그럴듯도한일이지마는 여긔에는 순진한산간에서 새노래물소리에 거치른세상일은 □도꾸지못한 산아이와도갓치 힘드려작만한 약재를도시구경겹 하여와와서판돈은『메리·픽포—드』안일망정어엽분녀자를맛나 잇는대로 다쓴후에명년의약령시 개설되기를 손을꼬바기다려서 와서보면 그녀자는어느하늘밋헤서 잇든남자와 단꿈을꾸는지 알길조차 바이업고작년구든맹서가 찬□(회(灰))처럼살어잘때화낌에 한잔무어라 먹자부어라 먹자하는연긔가튼 경긔는 견양경긔(견양경기(犬養景氣))이상으로 흥성거린나 그러기에여긔에최근오개년간의매매고외출동인원수와□적어본다&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와경기(景氣)&lt;br /&gt;
&lt;br /&gt;
(삼(三))&lt;br /&gt;
&lt;br /&gt;
대구지국(大邱支局) 육(肉) 사(瀉) 생(生)&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의현재(現在)&lt;br /&gt;
&lt;br /&gt;
약령시의 밋치는바 경제관계는실로 다방면으로 황금왕시대를연줄하며 발달하여오는만큼 녯날에는 조선안에서 생산하는재료가 매매되는이외에 당재(당재(唐材))라고하야 증국으로부터금석지재(금석지재(金石之材))가만히수입되는외에는 벌로볼만한것이 업섯스나 교통의발날노 국제무역이빈번하야지게된 오날에는일본,중국,몽고등시는말할것도 업거니와동부『아푸리카』의찌는둣한열대지방에서 생산되는 소철(소철(蘇鐵))을비롯하야 황막한시베리아의천지를 내집가티 도라다니는웅담(웅담(熊膽))까지모혀들게되는것은이약정□를통해본□류문와사의 한로막이라고도 할수잇는것이다 이러케 약령시에모혀드는약재료가 교통의 혜택을임어거의 파멸에 갑가운약령시가새로히왕성하게되자 지금이야말로 시장의 량입구에 마천두(마천루(摩天樓))가튼『리—딍』(유도탑(誘導塔))을세우고『일미네—숀』(대전식(大電飾))사이에 흥긔청긔가나붓기며 지방으로부터 모혀드는 생산자들을끄려드리는것은 확실히 일반상업전술의발달을의미한다 그러나 원래이시장는 약을재료그대로가지고와서 매매케 되는것이 특질의엿스나 지금은천일령신환,조고약과어을빈만병수까지 시장목판에서 인긔를집중하고잇는것은 아모리보아도 조뵈 화지관는 사실이다 이가튼변천가운데도 특긔하야들것은 령시의개설의래 장구한년월을 지남에따라 그본래의 성질에배반하야 부업적상인게놉을 령시의주요구성 요소로하게되고 부터는 경상도내지방에밋치는 양령시의영향은 일반 소비경제상에크다란 파문을그리게되여 약텽시본래목적인 약새생산에 효과가적게되고 시장내의 불당중개인으로말미암아 일사 평판이조치못하엿슴으로 이러한 페풍을 일소하기위하야 지금부터이십여년선에 생긴 한약상조합한약상조합(漢藥商組合))과칠년전전주(전주(全州))에양령시가처음뇌려고할때에 대함키위하야생긴약령&lt;br /&gt;
&lt;br /&gt;
흉회(약령시진흥회(藥令市振興會))가지금은약령시번영회(약령시번영회(藥令市繁榮會))로변경되여 최선의로력을 다하야오며 감독한결과 지금은어느정도까지 통제가되여간다고한다 그리하야 지금이야말로동력(동력(動力)의위력밋해거대한공장뉼이날로늘어남조선의『메드로포리쓰』를만드려는 대구현네과학(현대과학(現代科學))의태반(태반(胎盤))가튼대구의한복판에서 조선의 자랑이라고도할수잇는원시시장(원시시장(原始市塲))의한개가 벌서오늘날의 □제권내에발을듸듸고장차을래일의세계를향하야나가는것은홍미김흔일이다(속(續))&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의유래(由來)&lt;br /&gt;
&lt;br /&gt;
(사(四))&lt;br /&gt;
&lt;br /&gt;
대구지국육사생(大邱支局肉瀉生)&lt;br /&gt;
&lt;br /&gt;
삼백년동안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복잡다단한 필연적 과정을경과하여오며 자본주의 경제의현계단에서의연히그존재가필요하게된대구약령시의발달사는완연히금일경제의발달사(발달사(發達史))라고보지안을수업다 그럼으로여긔특긔할것은 그성실상 순박함이짝이업는 죽말하면 매매하는시람들의아관박대(아관박대(雅冠博帶))라든지 생산품 포장가튼것까지도(물론변천된것도만흐나)삼백년전의 녯날을 그려볼만한순박한이서장에도현대금융자본의붉은혀(설(舌))는내밀기시작하엿다지금부터 시년전엇던 외래지본벌이자긔소유의따에시장의위치를옴기려고 현위치는 도시교통상불편하다는구실로써다방면으로술책을써보앗스나현장소에서긔십년간상권을 잡고잇는 대가들의명렬한반대로그만뜻을일우지못한일도잇다그러면내구약령시를 지배하고 따라전조선의한약상계에우이를삽고잇는 이는누구일가여긔는 누구보다도 김홍조(김홍조(金弘祖))씨를아침수가업다씨는 전선적으로보아 제이위가기를설허할만하다고하며그다음순서업시치면 신태문(신태문(申泰文))김종수(김종수(金宗洙))지이원(심의원(沈義元))리치욱(이치욱(李致旭))두병은(두병은(杜炳殷))김내명(김내명(金乃明))방규진(방규진(方圭鎭))제씨를칠수잇고 그중에도 두병은(두병은(杜炳殷))씨가튼이는여러대를나려오며 사업에 종사하야 그문패는 실로일백오십년 이란력사를가저 대구의 동인당(동인당(同人堂))이란 일홈이잇다&lt;br /&gt;
&lt;br /&gt;
북평(北平)의동인당(同仁堂)은팔백년(八百年)의역사(歷史)가잇슴)그래서 대구의약텽시인긔는 이들의손에 좌우된다하여도과언이아니며 금년의약가는 금재금(김재금(金再禁))에따르는 제불가의폭등과 일중사변(일중사변(日中事變))의영향과중국은가(중국은가(中國銀價))의변동으로인하야소위당재(당재(唐材))는 폭동하엿고 조재(초재(草材))에잇서서 도변조로올은것이 불소하다는바 금후에드 더욱시세는오를무양이라고한다 여긔에당초재를물론하고 시세를 적어보앗스면좃켓스나 약명이한업시만코 날로변동이만흠으로 약렁시세표가 잇다는것만말한후에 특수한고저를보이는 몃가지를 적어보면 당재의원상산약(원상산약(元常山藥))은작년에는 매근에일원륙십전하든것이 금년은 단오십전에폭락되여 이십년레에 처음보는헐가라하며 산수유(산수유(山茱萸))는작년에 매근사십전하든것이 금년은십전에폭락되고 토사자(토사자(兎絲子))가튼것도 작년사오십전에매매되든것이 금년은십전에 폭락되여 자방생산자의 저울(형(衡))에 예긔치못한 광란(광란(狂亂))을보이고잇다고한다&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의장래(將來)&lt;br /&gt;
&lt;br /&gt;
그러면 다음날의약텅시는 엇더케될것인가?이문제는 결코예언자의 심심푸리와가튼 헛된소리는아니다적어도현세계의경제관계 와그에따라 일어나는모든사정이 쇄신된다면 모르지마는현계단의 경제제도가 그량존속되는한에는 세계적으로 한약에대한연구가왕성하여지고한약의권위가나날이놉하가는만큼약텅시의장래는압흐도세계에그일홈이놉하진다고일부인사들이말하고잇는것이그다지허언이아닐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지금은시장의형세가 산만하게생산자가 중개인울거처 도매상에게 팔게되여중간에책취를 당하게된다 하여도 장래는 현시장의대자벌들이주식(주식(株式))이나 혹은학자(합자(合資))의형식으로시장을상설하고도매와 개인생산자사이에 직접취인하게되여 지방경제의 윤택과약초생산의 장려의 약텅시본래의목적을 소개하려는것이 당업자간의 의도(의도(意圖))인 동시에매우현명한 의견인듯하다 그래서참된 대구자랑을 만들고조선의자랑을만들자——(완(完))&lt;br /&gt;
&lt;br /&gt;
==주요 내용 요약==&lt;br /&gt;
유래: 대구의 자랑으로 능금(사과) 대신 약령시를 들며 그 유래를 설명한다. 약령시는 1년에 한두 번 열리는 정기 시장이며, 조선시대 효종(1658년) 때 국가 명령(令)으로 개시된 것이다. 당시 경상도의 정치적 수부였던 대구는 약초 재배에 적합한 기후와 편리한 교통으로 물산 집산의 최적지였다. 궁중에서 쓸 약품을 이곳에서 구하기 위해 감사가 약재를 골라 사약원(司藥院)에 진상한 후, 팔도 약재를 일반 약국에서 구매하여 조선 전역의 환자 치료에 사용하게 한 것이 시초이다.&lt;br /&gt;
&lt;br /&gt;
쇠퇴와 현황: 서구 열강의 동양 침입과 함께 의학 및 약학이 발달하며 한약의 권위가 약해졌고, 약령시는 점차 쇠퇴하였다. 특히 22년 전(1915년경) 신해혁명으로 청황실이 무너지면서 조선 정부에 의뢰하던 막대한 약품 매도 길이 막힌 것이 큰 타격이었다. 최근 전주, 대전 등지에 군소 시장이 개설되어 대구 약령시의 경제적 이익이 감소했지만, 여전히 시장 개설 시에는 많은 약재가 모이고(당재, 초재 등 300여 종), 인근 상권에 호경기를 가져오는 것이다. 당시 약령시의 주요 구성 요소가 부업적 상인 계층으로 변질되고 불량 중개인 문제가 발생하자, 한약상조합과 약령시진흥회(현재 약령시번영회)가 결성되어 통제를 시도하고 있었다.&lt;br /&gt;
&lt;br /&gt;
약재 가격 변동: 당시(1937년) 일중사변(日中事變)의 영향과 중국 은가 변동으로 당재(唐材) 가격이 폭등했지만, 일부 국내 초재(草材)인 산약(山藥), 산수유(山茱萸), 토사자(兎絲子) 등은 폭락하여 생산자들에게 광란(狂亂)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lt;br /&gt;
&lt;br /&gt;
==분석 및 특징==&lt;br /&gt;
역사성 강조: 대구 약령시를 단순한 시장이 아닌 '국가 명령(令)'으로 시작된 역사적 시장으로 규정하며, 정치적, 지리적 배경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시대적 배경 반영: 서양 의학의 도입, 중국 혁명(청 황실 붕퇴), 당시 국제 정세(일중사변, 중국 은가) 등이 시장의 흥망성쇠에 미친 영향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여 식민지 시대의 경제 상황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시장 변화: 전통적인 약재 거래 방식에서 완제품 거래가 늘어나는 등 근대화에 따른 시장의 변화 양상도 포착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원시 시장'의 현대적 생존: 대구 약령시를 '조선의 자랑'이자 '원시 시장' 중 하나로 보면서도, 현대 자본주의 경제권에 발을 디디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평가하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대구(大邱)장연구회(硏究會) 창립(創立)을보고서=&lt;br /&gt;
구지국(大邱支局)&lt;br /&gt;
&lt;br /&gt;
이활(李活)&lt;br /&gt;
&lt;br /&gt;
민중(民衆)의보건운동(保建運動)은 요사이각계인사(各界人士)들의 크다른관심(關心)거리로어듸서 엇더케 무슨방법(方法)으로『억세인조선(朝鮮)』을건설(建設) 할수잇슬가 함에연구(硏究)를거듭하게되엿다회상(回想)하면 조선(朝鮮)에새로운운동경기(運動競技)가 수입(輸入)된지도 일반문화(一般文化)와갓치 벌서 반세기(半世紀)란역사(歷史)를가지고잇다 그중(中)에는 야구(野球)·정구(庭球)·축구(蹴球)·농구등(籠球等)을비롯하야 유도(柔道)·격검(擊劒)·권투등(拳鬪等)모든경기(競技)가들어와서 장족(長足)의진보(進步)도하엿스러니와 세계적무대(世界的舞臺)를향(向)하야 진출(進出)한선수(選手)도업지안타 그러나 그것은극소수(極小數)인동시(同時)에 지금(至今)까지의 조선(朝鮮)의운동경기(運動競技)는 한갓도회(都會)를중심(中心)으로잘어왓다 물론(勿論)다그럿타는것은아니지만은 현하운경기(現下運競技)그것은 조선(朝鮮)이나 혹(或)은다른나라에서라도 학교(學校)를중심(中心)으로발전(發展)되여오는만큼 교내(校內)의『스포—스맨』들은 완연(宛然)『떼파—트』진열장(陳列場)속에서 고객(顧客)을호리는『마네킹』처럼 상품화(商品化)한교육제도하(敎育制度下)에서 달큼하게 그상품(商品)의가격(價格)을놉혀주엇스며 그학교(學校)를버저나와 실사회(實社會)에취직(就職)을하면 역시(亦是)그와갓튼『마네킹』노릇을하여왓다 이러는동안 조선(朝鮮)의운동경기(運動競技)는 그발생(發生)으맹아(萌芽)가 힘것생장(生長)하기도전(前)에현제도(現制度)의 독아(毒牙)에여지(餘地)업는약관(躍關)을당(當)한절대(絕對)의원인(原因)과 그밧게사회(社會) 경제(經濟) 정치적제정세(政治的諸情勢)의착잡(錯雜)한모순(矛盾)이 너무나철업시이운동경기(運動競技)의발달(發達)까지 조해(阻害)하여왓다그러나 노력(勞力)과인내(忍耐)는갑이잇서이때까지외래품(外來品)이라면 아무비판(批判)도업시 실행(實行)하야오든우리도야구(野球)의전원(全員)이일시(一時)에활약(活躍)할수업는폐(廢)와정구(庭球)의시후(時候)에대(對)한불편(不便)과『꼴프』의귀족적(貴族的)인것등(等) 모든운동(運動)의단점(短點)만을빼고 장점(長點)만을취(取)하야 조선적운동(朝鮮的運動)을창출(創出)하려는이이 경성(京城)서는중앙체육연구소(中央體育研究所)가생(生)기고 금반대구(今般大邱)에서『장』연구회(硏究會)가생(生)기게된것이다&lt;br /&gt;
&lt;br /&gt;
장이란북조선(北朝鮮)의궁벽(窮僻)한지대(地帶)의인사(人士)들은 잘알지못할는지모르나이장만은 오래동안 우리조선(朝鮮)으로부터 그들의자손(子孫)인우리들에게부(傅)하아은 국기(國技)의하나이다물론(勿論) 국기(國技)란단순(單純)한의미(意味)로서만필자(筆者)가그것을추장(推獎)하는것은인니다 딸아서 운동(運動)의영향(影響)이문화창조(文化創造)에잇더한역할(役割)을한다는것을새로히논(論)하려는것도안니다&lt;br /&gt;
&lt;br /&gt;
대구지국(大邱支局) 이(李) 활(活)&lt;br /&gt;
&lt;br /&gt;
그러나일반문화(一般文化)가 그지리(地理)와풍토(風土)에영향(影響)되는바만흔것과가티운동경기(運動競技)도 또한그러히다 그것은『필랜드』사람들이『스켓틩』을잘하는것과『낙위(諾威)』사람의『스키-』를잘하는것이라든지『정말(丁抹)』사람의체조(體操)기튼것이 이점(點)을잘실증(實證)하고잇다 그러면조선(朝鮮)에는 조선적(朝鮮的)인자연세력(自然勢力)도 그러하러니와 더욱이 금일(今日)의사회적경제적(社會的經濟的)모든조건(條件)이 조선인(朝鮮人)에적합(適合)한것이안니면 안될것으다 그래서 최소(最少)의노력(努力)으로최대(最大)의 효과(効果)를발현(發現)치안으면안될것이다&lt;br /&gt;
&lt;br /&gt;
아에우리는생각한다 오날날까지조선(朝鮮)에수입(輸入)된운동경기(運動竸技)의종목(種目)은그대(臺)를매거(枚擧)키난(難)하나 그중(中)한가지도 우리에게 적합(適合)한것이업고 더욱이농민(農民)들에게 추장(推獎)할만힌운동(運動)은업섯다 그러나이장만은 오날날까지 그들농민(農民)의손에서전(傳)해왓다 그러면서도그진정가치(眞正價値)를돌낫든것이 오날이야 사계(斯界)의권위제씨(權威諸氏)가 적년연구(積年硏究)를거듭하야 발표(發表)한결과(結果)를보면 운동(運動)으로시 제일망각(第一忘却)치못할생리학상(生理學上)으로보아 전체(全體)가균형적(均衡的)으로활동(活動)되고 경제적(經濟的)으로도 기구(器具)를작만히는데 돈이들지안코 어느곳에서든지『장채』를직만하고『장방울』을다드무면논바닥에서나 밧기운데서라도 할수잇는농민본위(農民本位)의운동(運動)이라고한다 그리고다른운동경기(運動競技)가티『씨—슨』이잇는것도안니고 춘하추동(春夏秋冬)어느때라도 되는경기(競技)인즉 농번기(農繁期)는 못히드라도 농한기(農閑期)갓트면 그들의육체(肉體)를 하련(鍜鍊)하는데 매우적당(適當)한것이다 수(數)만흔경기중(竸技中)에능(能)히경제조건(經濟條件)이 어느정도(程度)까지용인(容認)한다하여도 그들의게생전(生前)듯자못하든말로『핸드뽈』이니『꼴』이니『라인』이니하여보아도 결(决)크그들에게취미(趣味)가잇슬이(理)가만무(萬無)하고취미(趣味)가업스면 그들에게발전(發展)될이(理)도만무(萬無)한것이다 그러나『장』연구회동인(硏究會同人)들의말을들으면경기(竸技)에계산(計算)하는용어(用語)까지도순조선(純朝鮮)말로한다는것의경하(慶賀)할일이다 이『장치기』를국기(國技)로서추장(推獎)하야세계(世界)에널니선전(宣傳)하는것도좃치만은먼저안으로그들이이국기(國技)를직혀왓는만큼 그들에게조직적(組織的)으로보급(普及)하라 그리서조선농민(朝鮮農民)의경기(競技)를만들고 따라 세계(世界)의농민대중(農民大衆)에게 보급(普及)식하라!그래서『장』연구회(硏究會)의본래(本來)의사명(使命)을다하기를바란다(종(終))&lt;br /&gt;
&lt;br /&gt;
==주요 내용 요약==&lt;br /&gt;
배경: 조선에 수입된 야구, 축구, 유도 등 서양식 운동 경기는 학교 중심, 도시 중심으로 발전하며 '상품화'되었고, 농민 등 대중에게 적합하지 않은 것이다.&lt;br /&gt;
&lt;br /&gt;
'장치기'의 가치: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 **'조선적 운동'**을 창출하려는 노력으로 경성에서는 중앙체육연구소가, 대구에서는 '장' 연구회가 생긴 것이다. '장'은 조선의 국기(國技) 중 하나로, 농민의 손에서 전해 내려온 것이다. 생리학적으로 전신 균형 활동이 가능하고, 경제적으로 기구가 필요 없어 비용이 들지 않으며, 논바닥이나 밭에서도 가능하여 농민 본위의 운동이라고 한다. 계절을 타지 않고 농한기에 육체 단련에 매우 적합하며, 경기 용어까지 순 조선말을 사용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연구회의 사명: 연구회 동인들에게 '장치기'를 국기로 추장(추천)하여 세계에 선전하는 것도 좋지만, 먼저 이 국기를 지켜온 농민들에게 조직적으로 보급하여 '조선 농민의 경기'를 만들고 나아가 세계 농민 대중에게 보급해야 한다는 사명을 부여하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분석 및 특징==&lt;br /&gt;
민족주의적 시각: 서구 문물인 스포츠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한국의 전통 운동인 '장치기'의 토착적, 민족적 가치를 재조명하려는 의도가 뚜렷한 것이다.&lt;br /&gt;
&lt;br /&gt;
대중성/실용성 강조: '장치기'의 장점을 경제적 부담 없음, 장소 제약 없음, 계절 제약 없음, 쉬운 용어 등 농민 대중에게 적합한 실용성에 초점을 맞춰 설명하고 있다.&lt;br /&gt;
&lt;br /&gt;
'마네킹' 비유: 현대 교육 제도가 배출하는 스포츠맨을 '떼파-트 진열장의 마네킹'에 비유하며, 당시 상업화된 교육 및 스포츠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드러내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노신추도문(魯迅追悼文)=&lt;br /&gt;
(일(一))&lt;br /&gt;
&lt;br /&gt;
이(李) 육(陸) 사(史)&lt;br /&gt;
&lt;br /&gt;
『아(阿)Q정전(正傳)』의 작자(作者)로서 세계적작가(世界的作家)이며 중국신문학(中國新文學)의 최고봉(最高峰)인 노신(魯迅)이지난십구일(十九日) 오전오시(午前五時)에상해(上海)에서 숙아(宿疴)로 영면(永眠)하엿다는 실음(實音)이전(傳)한지 삼일(三日)되는날에 우리는 간단(簡單)한일문(一文)을 비러 삼가추도(追悼)의뜻을 표(表)하거니와 만년(晩年)에그의 정치적불우(政治的不遇)로인(因)하야 문학자(文學者)로서의 성명(聲名)조차가 우리에게 널니퍼지지못한것을 더유감(遺憾)으로생각한다.　　　　 (일(一) 기(記) 자(者))&lt;br /&gt;
&lt;br /&gt;
일구삼이연육월초(一九三二年六月初) 어느토요일(土曜日)아츰이엿다 식관(食舘)에서나온 나와M은 네거리의 담배가가에서조간신문(朝刊新聞)을 사서들고 근육신경(筋肉神經)이떨니도록 굴근활자(活字)를 함숨에나려읽은것은 당시중국과학원부주석(當時中國科學院副主席)이요 민국혁명(民國革命)의 원로(元老)이든양행불(楊杏佛)이 남의사원(藍衣社員)에게 암살(暗殺)을당(當)하엿다는 기사(記事)이엿다.&lt;br /&gt;
&lt;br /&gt;
우리들은 거리마다 삼엄(森嚴)하게늘어선 불란서공무국(佛蘭西工務局) 순경(巡警)들의예리(銳利)한눈초리를 등으로하나 갓득늣기면서 여반로(侶伴路)의 서국(書局)까지을동안은 침묵(沈默)이 계속(繼續)되엿다&lt;br /&gt;
&lt;br /&gt;
문(門)안에 들어서자마자 편집원(編輯員)R씨(氏)는 우리들에게 다음과가튼말을 들여주엇다.&lt;br /&gt;
&lt;br /&gt;
중국좌익작가연맹(中國左翼作家聯盟)의 발안(發案)에의(依)하야 전세계(全世界)의 진보적(進步的)인 학자(學者)와 작가(作家)들이 상해(上海)에모혀서중국(中國)의 문화(文化)를 옹호(擁護)할대회(大會)를그해팔월(八月)에 갓게 된다는것과이에 불안(不安)을 늣기는 국민당통치자(國民黨統治者)들이 먼저 진보적작가진영(進步的作家陣營)의 중요분자(重要分子)인 반재년(潘梓年)(현재남경유폐(現在南京幽廢))과 인제는 고인(故人)이된 여류작가(女流作家) 정영(丁玲)을 체포(逮捕)하여행방(行方)을 불명(不明)케한것이며 여기동정(同情)을 가지는 송경령여사(宋慶齡女史)를 중심(中心)으로한 일련(一聯)의 자유주의자(自由主義者)들과 작가연맹(作家聯盟)이 맹렬(猛烈)한 구명운동(救命運動)을한사실(事實)이며 그것이 국민당통치자(國民黨統治者)들의 눈쌀에 거슬려서 양행불(楊杏彿)이 희생(犧牲) 된것과 그외(外)에도 송경령(宋慶齡) 채원(蔡元) 배(培) 노신등등(魯迅等等) 상해(上海)안에서만삼(三) 십명(十名)에갓가운 지명지사(知名之士)들이 남(藍) 의사(衣社)의『뿔랙·리스트』에 올라잇 다는것이엿다.&lt;br /&gt;
&lt;br /&gt;
그리고 그뒤삼일(三日)이 지난후(後)R씨(氏)와 내가탄자동차(自動車)는 만국빈의사(萬國殯儀社)아페다엇다,간단(簡單)한 소향(燒香)의예(禮)가 끗나고도라설때 젊은두여자(女子)의수원(隨員)과함게드러오는송경령여사(宋慶齡女史)의일행(一行)과가티 연회색(軟灰色)두루막에 검은『마괘아(馬掛兒)』을 입은중년(中年)늙은이생화(生化)에 싸인관(棺)을 붓들고 통곡(痛哭)을하든그를 나는문득 노신(魯迅)인것을알엇스며 엽헤섯든 R씨(氏)도 그가노신(魯迅)이란것을 말하고난 십분(十分)쯤뒤에 R씨(氏)는나를 노신(魯迅)에게소개(紹介)하여주엇다&lt;br /&gt;
&lt;br /&gt;
그때노신(魯迅)은 R씨(氏)로부터 내가조선청년(朝鮮靑年)이란것과 늘한번대면(對面)의기회(機會)를가지려고 햇드란말을듯고외국(外國)의선배(先輩)압히며 처소(處所)가 처소(處所)인만치 다만 근신(謹愼)과공손(恭遜)할뿐인나의손을 다시한번 잡아줄때는그는매우 익숙하고 친절(親切)한친구이엿다&lt;br /&gt;
&lt;br /&gt;
아!그가벌서 오십육세(五十六歲)를일기(一期)로 상해시고탑구호(上海施高塔九號)에서 영서(永逝)하엿다는 부보(訃報)를바들때에 암연(暗然)한줄기 눈물을지우느니 엇지조선(朝鮮)의 한사람후배(後輩)로써 이붓을잡는나뿐이랴&lt;br /&gt;
&lt;br /&gt;
(이(二))&lt;br /&gt;
&lt;br /&gt;
이육사(李陸史)&lt;br /&gt;
&lt;br /&gt;
중국문학사상(中國文學史上)에남긴 그의 위치(位置)『아(阿)Q의 정전(正傳)을 다읽고낫슬때나는 아즉까지 아(阿)Q의 운명(運命)이걱정되여 못견듸겟다』고한『로망·로—랑』의 말과가티 현대중국문학(現代中國文學)의 아버지인 노신(魯迅)을&lt;br /&gt;
&lt;br /&gt;
이해(理解)하기 위(爲)해서는 우리는 먼저 아(阿)Q의 정전(正傳)을 이해(理解)하지안흐면 안된다 그러나 지금의 중국(中國)의 아(阿)Q들은 벌서『로망·로—라』으로하야금 그운명(運命)을 걱정할 필요(必要)는 업시되엿다실(實)로 수만흔 아(阿)Q들은 벌서 자신(自身)들의 운명(運命)을 열어갈길을노신(魯迅)에게서배웟다 그래서중국(中國)의 모든근로층(勤勞層)들은 남경로(南京路)의『아스필트』가자신(自身)들의 발미테 흔들리는것을늣기며 시고탑로신촌(施高塔路新邨)의구호(九號)로그들이가젓든 위대(偉大)한문호(文豪)의최후(最後)를애도(哀悼)하는마음들은 황포탄(黃浦灘)의붉은파도(波濤)와가티 밀려가고잇는것이다&lt;br /&gt;
&lt;br /&gt;
그럼으로 아(阿)Q시대(時代)를 고찰(考察)하여보는데따라서 노신정신(魯迅精神)의 삼단적변천(三段的變遷)과아울러 현대중국문학(現代中國文學)의 발전과정(發展過程)을 알어보는것도그를추억(追憶)하는의미(意味)에서 그다지 허무(虛無)한 일은아닐것이다,&lt;br /&gt;
&lt;br /&gt;
중국(中國)에는 고래(古來)로 소설(小說)이라는오늘날우리가 보는것과가튼 완전(完全)한예술적형태(藝術的形態)는 존재(存在)하지못햇다 삼국연의(三國演義)나 수호지(水滸誌)가아니면홍루몽(紅樓夢)쯤이잇섯고 다소(多少)의전기(傳記)가잇섯을뿐으로서 일반교양(一般敎養)잇는집자제(子弟)들은 과거제도(科擧制度)에 화(禍)를바더문어체(文語體)의&lt;br /&gt;
&lt;br /&gt;
고(古)&lt;br /&gt;
&lt;br /&gt;
문(文)만숭상(崇尙)하고백화소설(白話小說)가튼것은속인(俗人)의할일이라햐야나치아는하편소위문단(所謂文壇)은당송팔가(唐宋八家)와팔반(八般)의혼합체(混合體)인상성파(相城派)와사기당(思綺堂)과 원수원(袁隨園)의유파(流派)를따라가는 사륙변체문(四六騈體文)과황산곡(黃山谷)을본존(本尊)으로하는 강서파등등(江西派等等)이 당시정통파(當時正統派)의문학(文學)으로서 과장(誇張)과 허위(虛偽)와 아유(阿諛)로서 고전문학(古典文學)을 모방(模倣)한데지나지못하엿스며 새로운사회(社會)를 창생(創生)할하등(何等)의 힘도가지지못한것은 미루어알기도 어렵지안흔 분위기(雰圍氣)속에 중국문학사상(中國文學史上)에 찬연(燦然)한봉화(烽火)가 일어난것은일구일오년(一九一五年) 잡지(雜誌)『신청년(新靑年)』의 창간(創刊)이그것이다&lt;br /&gt;
&lt;br /&gt;
이것이처음발간(發刊)되자 당시(當時)『아메리카』에잇든호적지박토(胡適之博土)는『문학개량추의(文學改良蒭議)』라는『문학혁명론(文學革命論)』을일구일칠년신연호(一九一七年新年號)에 게재(揭載)하야진독수(陳獨秀)가 이에찬의(賛意)를표(表)하고 북경대학(北京大學)을 중심(中心)으로한 진보적(進步的)인교수(敎授)들이 합류(合流)하게되자 종래(從來)의고문가(古文家)들은 이운동(運動)을방해(防害)코저 가진야비(野卑)한 정치적수단(政治的手段)을 써도보앗스나 일구팔년사월호(一九八年四月號)에 노신(魯迅)의『광인일기(狂人日記)』란 백화소설(白話小說)이&lt;br /&gt;
&lt;br /&gt;
발(發)&lt;br /&gt;
&lt;br /&gt;
표(表)되엿슬때는 문학혁명운동(文學革命運動)은 실천(實踐)의거대보무(巨大步武)를옴기게되고 벌서고문가(古文家)들은 그추악(醜惡)한꼬라를 감주지안흐면안되엿다는것은 그후(後)얼마뒤에 노신(魯迅)이광동(廣東)에갓슬때에어&lt;br /&gt;
&lt;br /&gt;
떤흥분(興奮)한청년(靑年)은 그를마지하는문장(文章)속에『광인일기(狂人日記)』를 처음읽엇슬때 문학(文學)이란것이 무엇인지몰랏든나는 차차읽어나려가면서이상(異常)한흥분(興奮)을 늣겻다 그래서 동무를만나기만하면 곳붓들고말하기를——중국(中國)의문학(文學)은 이제바야흐로 한시대(時代)를 짓고잇다 그대는『광인일기(狂人日記)』를 읽어보앗는가 또거리를거러가면 길가는사람이라도붓들고 내의견(意見)을발표(發表)하리라고생각한적도잇섯다……』(노신재광동(魯迅在廣東))&lt;br /&gt;
&lt;br /&gt;
이문제(問題)의소설(小說)『광인일기(狂人日記)』의내용(內容)은 한개망상광(妄想狂)의 일기체(日記體)의소설(小說)로서 이주인공(主人公)은 실(實)로대담(大膽)하게또명확(明確)하게 봉건적(封建的)인 중국구사회(中國舊社會)의 악폐(惡弊)를통매(痛罵)한다 자기(自己)의 이웃사람은 물론(勿論)말할것도업고 특(特)히자기가정(自己家庭)을 격렬(激烈)히 공격(攻擊)하는것이다 가정(家庭)—가족제도(家族制度)라는것이중국봉건사회(中國封建社會)의 사회적단위(社會的單位)로서일반(一般)에열마나한 해독(害毒)을끼처왓는가.봉건적가족제도(封建的家族制度)는 고형화(固型化)한유교류(儒敎流)의&lt;br /&gt;
&lt;br /&gt;
종(宗)&lt;br /&gt;
&lt;br /&gt;
법사회관념하(法社會觀念下)에 당연(當然)히붕괴(崩壞)돠여야할것이면서 붕괴(崩壞)되지못하고 근대적사회(近代的社會)의성장(成長)에 가장근본적(根本的)인 장애(障碍)로되여잇는 날근도덕(道德)과 인습(因襲)을 여지(餘地)업시 통매(痛罵)햇다,이에『광인일기(狂人日記)』중(中)에 한절(節)을 초(抄)하면『나 는 역사(歷史)를 뒤적거려 보앗다 역사(歷史)란건 어느시대(時代)에나 인의(仁義) 도덕(道德)이란몃줄로 치더치덕씨여 저잇섯다 나는 밤잠도안자고 딍굴딍굴러가며 생각하여보 앗스나 겨우글자와 글자사이 에서『사람을먹는다』는 몃자 가쓰여잇섯슬뿐이엿다』&lt;br /&gt;
&lt;br /&gt;
이가티추악(醜惡)한 사회면(社會面)을폭로(暴露)한다음 오는시대(時代)의건설(建設)은 젊은사람들의손에 맛걱저야한다는것을암시(暗示)하면서 이소설(小說)의일편(一篇)은『어린이를구(救)하자』는 말로서끗을막엇다.실(實)로이한말은 당시(當時)의『어린이』인 중국청년(中國靑年)들에게는 사상적(思想的)으로는『폭탄선언(暴彈宣言)』이상(以上)으로 충격(衝擊)을주엇스며이러한작품(作品)이 백화(白話)로쓰여지는데 따라 문학혁명(文學革命)이완전(完全)히승리(勝利)의 개가(凱歌)를 부르게된공적(功績)도 태반(太半)은노신(魯迅)에 돌려야하는것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삼(三))&lt;br /&gt;
&lt;br /&gt;
이육사(李陸史)&lt;br /&gt;
&lt;br /&gt;
『광인일기(狂人日氣)』의다음 연속(連續)해나온작품(作品)으로『공을사(孔乙巳)』『약(藥)』『명일(明日)』『일개소사건(一個小事件)』『두발적고사(頭髮的故事)』『풍파(風波)』『고향(故鄕)』등(等)은모다 신청년(新靑年)을통(通)해서세상(世上)에물의(物議)를 이르켯스나 그후일구이일년(後一九二一年) 북경신보문학부간(北京新報文學副刊)에그유명(有名)한『아(阿)Q정전(正傳)』이 연재(連載)되면서부터는 노신(魯迅)은자타(自他)가공인(共認)하는 문단제일인적작가(文壇第一人的作家)엿다.&lt;br /&gt;
&lt;br /&gt;
그리고 이러한대작(大作)은 모다신해혁명전후(辛亥革命前後)의&lt;br /&gt;
&lt;br /&gt;
봉(封)&lt;br /&gt;
&lt;br /&gt;
건사회(建社會)의생활(生活)을 그린것으로 어떠케필연적(必然的)으로 붕괴(崩壞)하지안흐면안될 특징(特徵)을가젓는가를묘사(描寫)하고 어떠케새로운사회(社會)를 살어갈가를 암시(暗示)하고잇다.뿐만아니라 당시(當時)의혁명(革命)과 혁명적(革命的)인사조(思潮)가 민중(民衆)의심리(心理)에 생활(生活)의『데테일슨』에 어떠케표현(表現)되는가를 가장『레알』하게묘사(描寫)한것이다.더구나 그는 농민작가(農民作家)라고할만치 농민생활(農民生活)을그리는데 교묘(巧妙)하다는것도 한가지조건(條件)이되겟지만은 그의소설(小說)에는주장(主張)이개념(槪念)에 흐른다거나 조금도무리(無理)가업는것은 그의작가적수완(作家的手腕)이 탁월(卓越)하다는것을 말하지안홀수업다.&lt;br /&gt;
&lt;br /&gt;
그리고 그의작품(作品)은 늘 농민(農民)을주인공(主人公)으로하는것과 때로는『인테리』일지라도 예(例)를들면『공을사(孔乙巳)』의 공을사(孔乙巳)나『아(阿)Q정전(正傳)』의아(阿)Q가모다 일맥(一脈)이상통(相通)하는 성격(性格)을가지는것이니 공을사(孔乙巳)는 구시대(舊時代)의지식인(知識人)으로 시대(時代)에떠러저서 무슨일에도 쓰여지지못하고기품(氣品)만은노펏스나 생활력(生活力)은업고걸인(乞人)이되야 선술집술상대(臺)에 일금십구조(一金十九吊)의주채(酒債)가 어느때까지쓰여저잇는대로 언제인지&lt;br /&gt;
&lt;br /&gt;
행(行)&lt;br /&gt;
&lt;br /&gt;
방(方)이 불명(不明)된채로 나중에죽어젓든것이라든지『룸펜』농민(農民)인 일용노동자아(日傭勞働者阿)Q가 또한 쑥스러운년석으로혁명혁명(革命革命)떠들어놋코는 그것이몹시유쾌해서 반취(半醉)한기분(氣分)이 폭동대(暴動隊)의일군(一群)에 참가(參加)는하려고하엿스나 결국(結局)헛풍만치고 아무것도못하다다가 때마츰 일어난 폭도(暴徒)의약탈사건(掠奪事件)에 도당(徒黨)으로오해(誤解)되여(피(彼)의평소(平素)삼가지못한 언동(言動)에의(依)하야)피살(被殺)되는 아(阿)Q의성격(性格)은 그때중국(中國)의 누구라도가 전부혹(全部或)은일부분식(一部分式)은 소유(所有)하고잇섯든것이다다시말하면 아(阿)Q나공을사(孔乙巳)가모다사고(思考)와행동(行動)이 루—즈하고 확호(確乎)한한개의 정신(精神)도업스며 우약(愚弱)하면서도 몹시건방지고 남에게한개쥐여질리면 아무런반항(反抗)도못하면서 남이자신(自身)을 연민(憐憫)하면 제도량(度量)이커서 남이못덤비는것이라고제대로도취(陶醉)하야 남을 되는대로해(害)치는 무지(無知)하고우수면서도 가엽고 괴팩스러운것을 노신(魯迅)은그『레알리스틕』한문장(文章)으로폭로(暴露)한것이 특징(特徵)이엿스니 당시(當時)『아(阿)Q정전(正傳)』이발표(發表)될때&lt;br /&gt;
&lt;br /&gt;
평(平)&lt;br /&gt;
&lt;br /&gt;
소노신(素魯迅)과 교분(交分)이좃치못한사람들은 모다자기(自己)를모—델로 고의(故意)로쓴것이라고들 떠드는자(者)가잇은것을 보아도알수가잇는것이다&lt;br /&gt;
&lt;br /&gt;
그래서당시중국(當時中國)은 시대적(時代的)으로『아(阿)Q시대(時代)』이엿스며 노신(魯迅)의『아(阿)Q정전(正傳)』이 발표(發表)될때는 비평계(批評界)를비롯하야 일반지식군(一般知識群)들은『아(阿)Q상(相)』이라거나『아(阿)Q시대(時代)』라는말을평상대화(平常對話)에사용(使用)하기를 항다반(恒茶飯)으로하게된것은 중국문학사상(中國文學史上)에남겨노흔노신(魯迅)의 위치(位置)를 짐작하기에 조흔 한개의재료(材料)이거니와그의작가(作家)로서의 태도(態度)를통(通)하야 일관(一貫)하여잇는 노신정신(魯迅精神)을 다시한번음미(吟味)해보는데 적지안흔흥미(興味)를갓게된다는것은 오늘날우리의조선문단(朝鮮文壇)에는 누구나할것업시 예술(藝術)과정치(政治)의 혼동(混同)이니 분립(分立)이니하야 문제(問題)가엇지보면 결말(决末)이난듯도하고 어찌보면 미해결(未解决)그대로 잇는듯도한 현상(現狀)인데 노신(魯迅)가티 자기신념(自己信念)이 구든사람은이예술(藝術)과정치(政治)란것을 어떠케해결(解决)하엿는가?이문제(問題)는 그의작가(作家)로서의 출발점(出發點)부터 구명(究明)해야한다.&lt;br /&gt;
&lt;br /&gt;
노신(魯迅)은&lt;br /&gt;
&lt;br /&gt;
본(本)&lt;br /&gt;
&lt;br /&gt;
내의사(來醫師)가 되려고하엿다 그것은자기(自己)의『할일』이 무엇이라는것을 알엇기때문이엇다 물론(勿論)그때의 자기(自己)의『할일』이란것은 민족개량(民族改良)이라는 신념(信念)이엿든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후년(後年)『납함(吶喊)』서문(序文)에 다음가티써다.&lt;br /&gt;
&lt;br /&gt;
『나의학적(學籍)은 일본(日本)어느 지방(地方)의 의학전문학교(醫學專門學校)에 두엇다 나의 꿈은 이것으로 매우 아름답 고 만족(滿足)햇다 졸업(卒業)만하고 고(故) 국(國)에 도라오면 아버지와가티 치료(治療)못하는 병인(病人)을살리고 전(戰) 쟁(爭)이나면 출정(出征)도하려니와 국(國) 인(人)의 유신(維新)에대(對)한 신앙(信仰)에까지 나어갈것……』이라고&lt;br /&gt;
&lt;br /&gt;
이것은물론(勿論) 소년(少年)다운노신(魯迅)의로맨틕한 인도주의적흥분(人道主義的興奮)이엿겟지만은 이꿈도결국(結局)은 깨여지고말엇다.&lt;br /&gt;
&lt;br /&gt;
——의학(醫學)은결(决)코 긴요(緊要)하지안타 우약(愚弱)한 국민(國民)은 체격(體格)이 아모 리 조타고해도 또 아모리강(强) 장(壯)해도 무의미(無意味)한 구경거리나 또는 구경군이 되는박게는아 무것도아니다—중략(中略)—그럼으로 긴요(緊要)한것은 그들을 정신적(精神的)으 로 잘개조(改造)할것은 무엇일가나 는그때당연(當然) 문예(文藝)라고생각햇다 그리고 문예운동(文藝運動)을 제창(提唱)하기 로햇다(납함서문(吶喊序文))&lt;br /&gt;
&lt;br /&gt;
이리하야 그가 당시동경(當時東京)에망명(亡命)해잇는 중국(中國)사람들의 기관지(機關紙)인『절강조(浙江潮)』『하남(河南)』등(等)에 쓰든과학사(科學史)나 진화론(進化論)의 해설(解說)을 집어치우고 문학서적(文學書籍)을 번역(飜譯)한것은희랍(希臘)의 독립운동(獨立運動)을 원조(援助)한『빠이론』과 파란(波蘭)의복수시인(復讐詩人)『아담·미케뷧치』『향가리』의 애국시인(愛國詩人)『베트피·산더—』『필립핀』의문인(文人)으로 서반아정부(西班牙政府)에 사형(死刑)바는『리샬』등(等)의 작품(作品)이엿다.&lt;br /&gt;
&lt;br /&gt;
(사(四))&lt;br /&gt;
&lt;br /&gt;
이육사(李陸史)&lt;br /&gt;
&lt;br /&gt;
그리고이것은 노신(魯迅)의 문학행정(文學行程)에잇서서 가장초기(初期)에 속(屬)하는것이지만은 이러한번역(飜譯)까지라도그의 일정(一定)한목적(目的) 즉정치적목적(即政治的目的)미테 수행(遂行)된것을 엿볼수잇는것이며 우에말한『광인일기(狂人日記)』의『어린이를구(救)하자』는말도 순결(純潔)한 청년(靑年)들에의(依)하야 새로운중국(中國)을 건설(建設)하자는 그의이상(理想)을&lt;br /&gt;
&lt;br /&gt;
단적(端的)으로 고백(告白)한것으로써 이말은당시일반청년(當時一般靑年)들에게 무거운 책임감(責任感)을깨닷게한것은물론(勿論) 이래기천년(爾來幾千年)동안의 봉건사회(封建社會)로부터 청년(靑年)을해방(解放)하랴는 슬로—간으로 널리쓰여젓고 사실(事實)그뒤의 중국청년학생(中國靑年學生)들은 모든대중적사회운동(大衆的社會運動)의최전선(最戰線)에서 활발과감(活潑果敢)한 지도(指導)와조직(組織)을하엿스며 그유명(有名)한 오사운동(五四運動)이나 오주운동(五州運動)이나 국민혁명(國民革命)까지도 늘최전선(最前線)에서서 대중(大衆)을지도(指導)한것은 이들청년학생(靑年學生)이엿다&lt;br /&gt;
&lt;br /&gt;
그럼으로 노신(魯迅)에잇서서는 예술(藝術)은정치(政治)의 노예(奴隸)가 아닐뿐아니라 적어도예술(藝術)이 정치(政治)의 선구자(先驅者)인 동시(同時)에혼동(混同)도 분립(分立)도아닌즉(即) 우수(優秀)한작품(作品) 진보적(進步的)인 작품(作品)을 산출(產出)하는데만 문호(文豪) 노신(魯迅)의지위(地位)는노퍼갓고 아(阿)Q도 여기서비로소탄생(誕生)하엿스며 일세(一世)의 비평가(批評家)를도 감(敢)히 그에게는 함부로 머리를 들지못하엿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여기에 한가지 조흔예(例)가잇다 일구이팔년경(一九二八年頃) 무한(武漢)을쪼겨와서 상해(上海)에서 태양사(太陽社)를조직(組織)한 청년비평가(青年批評家) 전행촌(錢杏村)이 때마춤 푸로문학론(文學論)이 드셀때인만큼 노신(魯迅)을 대담(大膽)하게&lt;br /&gt;
&lt;br /&gt;
공격(攻擊)을 시작(始作)해보앗다그소론(所論)에 의(依)하면노신(魯迅)의 작품(作品)은 비계급적(非階級的)이다 아(阿)Q에게어데 계급성(階級性)이잇느냐는것이다.&lt;br /&gt;
&lt;br /&gt;
물론(勿論)그것은 정당(正當)한말이다,노신(魯迅)의작품(作品)에서 우리는눈딱고보아도 푸로레타리아적특성(的特性)은 조금도 볼수가 업는것은 사실(事實)이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우리가 한사람의작품(作品)을 비평(批評)할때는 그시대적배경(時代的背景)을고려(考慮)하지안흘수는업는것이니 노신(魯迅)이작가(作家)로활동(活動)을 하고잇슬때는중국(中國)에는 오늘날우리가 정의(定義)를나릴수잇는 푸로레타리아는 업슬뿐아니라 그때쯤은 뿌르조아민주주의적(民主主義的)인 정치사조(政治思潮)조차도아즉계선(界線)이분명(分明)하지못하엿다는것은뿌르조아혁명(革命)이라는 소위국민혁명(所謂國民革命)도 정직(正直)하게말하자면 사오운동(四五運動)을 전초전(前哨戰)으로한것만큼 여기서 역시중국(亦是中國)의 비상가(批詳家)인병신(丙申)은자미잇는말을하고잇다&lt;br /&gt;
&lt;br /&gt;
『그가현재(現在) 중국좌익작가연맹(中國左翼作家聯盟)을지지(支持)하고잇다해서 그의『사오(四五)』전후(前後)의&lt;br /&gt;
&lt;br /&gt;
작품(作品)을 푸로문학(文學)이라고 지목(指目)할것은아니&lt;br /&gt;
&lt;br /&gt;
다 그러나 그를우수(優秀)한 농민작가(農民作家)라고 하는것이 타당(妥當)타고—』그러타 이말은 어느정도(程度)까지&lt;br /&gt;
&lt;br /&gt;
정당(正當)에 가까운말로서 그를푸로작가(作家)가아니고 농민작가(農民作家)라고해서작가노신(作家魯迅)의 명예(名譽)를 더럽힐조건(條件)은 되지못하는것이다 다만문제(問題)는 그가얼마나 창작(創作)에 잇서서진실(眞實)하게 명확(明確)하게 묘사(描寫)하는태도(態度)를 가지는가 그의한말을 써보기로하자&lt;br /&gt;
&lt;br /&gt;
『——현재(現在) 좌익작가(左翼作家)는 훌륭한자신(自身)들의 문학(文學)을 쓸수잇슬가?생각컨대 이것은 매우곤란(困難)하다.현재(現在)의 이런 부류(部類)의 작가(作家)들은 모다『인테리』다 그들은 현실(現實)의 진실(眞實)한 정형(情形)은쓸려고해도 용이(容易)치안타 어떤사람이 일즉 이런 문제(問題)를제출(提出)한것이잇섯다『작가(作家)가 묘사(描寫)하는것은 반드시 자기(自己)가 경험(經驗)한것이라야만될것인가?그러나 그는 스스로 답(答)하기를반드시 안그래도조타웨러러냐하면 그들은 잘 추찰(推察)할수가잇스므로 절도(窃盜)하는장면(塲面)을 묘사(描寫)하랴면 작가(作家)는 반드시 자신(自身)이 절도(窃盜)질할 필요(必要)도업고 간통(姦通)하는&lt;br /&gt;
&lt;br /&gt;
장면(塲面)을 묘사(描寫)할 필요(必要)를늣길때 작가(作家) 자신(自身)이간통(姦通)할 필요(必要)도 업다고』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작가(作家)가 구사회(舊社會)속에서 생장(生長)해서그 사회(社會)의 모든 일을 잘알고 그사회(社會)의 인간(人間)들에게 익숙해저서 잇는때문에 추찰(推察)이되는것이다 그러나 종래(從來)아무런 관계(關係)도업는새사회(社會)의 정형(情形)과인물(人物)에 대(對)해서는 작가(作家)가무능(無能)하다면 아마그릇된 묘사(描寫)를할것이다 그럼으로 푸로문학가(文學家)는 반드시 참된현실(現實)과 생명(生命)을 가티하고 혹(或)은 보다기피현실(現實)의맥박(脈搏)을 감수(感受)하지안흐면 안된다고하면서 또다시말을 계속(繼續)하는것이다.&lt;br /&gt;
&lt;br /&gt;
그러나구사회(舊社會)를 조그만치공격(攻擊)하는작품(作品)일지라도 만약(萬若)그결점(缺點)을 분명(分明)히모르고 그병근(病根)을투철(透澈)히파악(把握)치못하면 그것은유해(有害)할뿐이다 애석한일이나마현재(現在)의푸로작가(作家)들은 비평가(批評家)까지도 왕왕(往往) 그것을못한다 혹사회(或社會)를 정시(正視)해서 그진상(眞相)을 알려고도안코 그중(中)에는 상대자(相對者)라고 생각하는편의 실정(實情)도알려고하지안는다.&lt;br /&gt;
&lt;br /&gt;
(오(五))&lt;br /&gt;
&lt;br /&gt;
이육사(李陸史)&lt;br /&gt;
&lt;br /&gt;
차근(車近)한 예(例)로는 얼마전 모지상(某紙上)에 중국문학계(中國文學界)를 비평(批評)한문장(文章)을 한편(篇)보앗는데 중국문학계(中國文學界)를 삼파(三派)에 난워서 먼저창조파(創造派)를 들어 푸로파(派)라하야매우상세(詳細)하게 논급(論及)하고 다음어사사(語絲社)를 소(小)뿌르파(派)라고 조그만치 말한후(後)&lt;br /&gt;
&lt;br /&gt;
신월사(新月社)를 뿌르문학파(文學派)라 해서 겨우 붓 을 대다가만 젊은비평가(批評家)가잇 섯다 이것은 젊은기질(氣質)의 상(相) 대자(對者)라고 생각는파(派)에 대(對)해서 는 무어세(細)□□□고구(考究)할필요(必要)가 업다는뜻을 표명(表明)한것이다 물(勿) 논(論)우리는 서적(書籍)을볼때 상대자(相對者) 의것을 보는것은 동파(同派)의것을 보는안심(安心)과 유쾌(愉快)와 유익(有益)한데 밋치지 못하는것은 사실(事實)이다 그러나 만약(萬若) 일개전투자(一個戰鬪者)라면 나는 생각컨대 현실(現實)과 상대(相對) 자(者)를 이해(理解)하는 편의상(便宜上) 보담 만은 당면(當面)의 상대자(相對者)에 대(對)한 해부(解剖)를 필요(必要)로 하지안으면안 될것이다.옛것을 분명(分明)히 알 고 새로운것에 간도(看到)하고 과(過) 거(去)를 요해(了解)하야 장래(將來)를 추단(推斷) 하는데서만 우리들의 문학적(文學的) 발전(發展)은 희망(希望)이잇다 생각건대 이것만은 현재(現在)와 가튼 환경(環境) 에잇는 작가(作家)들은 부단(不斷)히 노(努) 역(力)할것이고 그래야만 참된작(作) 품(品)이 나오는것이다』라 고&lt;br /&gt;
&lt;br /&gt;
이간단(簡單)한 몃마듸만히 문호노신(文豪魯迅)의 창작(創作)에 대(對)한『모랄』인것이다 이얼마나 우리의 뼈에 사무치고도 남을만한시사(示唆)인고!이리해서&lt;br /&gt;
&lt;br /&gt;
현대중국문단(現代中國文壇)의부(父)이며비평가(批評家)의비평(批評)으로서자타(自他)가 그지위(地位)를 함께긍정(肯定)하든그의작가(作家)로서의 생애(生涯)는 너무나쩔으것이엿스니 일구이육연삼월(一九二六年三月)『이혼(離婚)』이란작품(作品)을 최후(最後)로남긴그는 교수(敎授)로서 작가(作家)로서의 화려(華麗)한 생애(生涯)는 종언(終焉)을고(告)하지 안흐면안될때가왓다 그는 지금부터『손으로쓰기보다는 발로 다라나기가 더밧벗다』&lt;br /&gt;
&lt;br /&gt;
일구이육년(一九二六年) 북양군벌(北洋軍閥)을 배경(背景)오로한 안복파(安福派)의수령(首領) 단기서(段祺瑞)의정부(政府)는 급진적(急進的)인좌파(左派)의 교수(敎授)와우수(優秀)한 지식분자오십여명(知識分子五十餘名) 체포령(逮捕令)을 나렷다 우리노신(魯迅)은 이오십명중(五十名中)의 한사람이엿다 그것은일구이사년(一九二四年) 국민당(國民黨)의 연아용공책(聯俄容共策)이 결정(决定)되야그익년(翌年)가을『뽀로된』등(等)이고문(顧問)으로광동(廣東)에오고『전국민적공동전선(全國民的共同戰線)』이엿든 국민혁명(國民革命)의제일계단(第一階段)인 광동시기(廣東時期)에는 푸로레타라아의 동맹자(同盟者)는 농민도시빈민(農民都市貧民) 소(小)뿌로지식계급(知識階級) 국민적(國民的)뿌르조아지—엿다』&lt;br /&gt;
&lt;br /&gt;
그래서 급진교수(急進敎授)들은 교육부총장(敎育部總長) 군벌정부(軍閥政府)를 육박(肉迫)하엿스며이러한&lt;br /&gt;
&lt;br /&gt;
신흥세력(新興勢力)에 낭패(狼狽)와공포(恐布)를 늣긴군벌정부(軍閥政府)는 이러한교수(敎授)들과 학생(學生)들에게체포령(逮捕令)을나리고 학생(學生)들의행렬(行列)은정부위병(政府衛兵)들의 발포(發砲)로인(因)하야 남여수백여명(男女數百餘名)의 사상자(死傷者)가낫다 그때노신(魯迅)은 북경동교민항(北京東交民巷)의 공사관구역(公使舘區域)의 외국인병원(外國人病院)이나 공장(工塲)안으로 도라단이며 찬물로기아(飢餓)를 참아가면서도 신문(新聞)과 잡지(雜誌)에 기고(寄稿)를하야 군벌정부(軍閥政府)를 맹렬(猛烈)히 공격(攻擊)하얏다 그중(中)에도『국민이래(國民以來) 최암흑일(最暗黑日)에지(誌)』하엿다는 명문(名文)은 단기서(段祺瑞)로하여금 의자(椅子)에나려안게되엿다&lt;br /&gt;
&lt;br /&gt;
——붓으로쓰헛소리는 피로쓴 사실(事實)을 만착(瞞着)하지못한다——중(中) 약(略)——붓으로쓴것이 무슨힘이 잇스랴 실탄(實彈)을쏘는것은 오즉 청년(靑年)의피다(속화개집(續華盖集))&lt;br /&gt;
&lt;br /&gt;
오늘날까지 중국문단(中國文壇)의『막심콜키—』이든그는 지금부터는문화(文化)의전사(戰士)로서『앙리·발뷰스』보다비장(悲壯)한생애(生涯)가 시작(始作)되는것이엿다&lt;br /&gt;
&lt;br /&gt;
그의말과가티&lt;br /&gt;
&lt;br /&gt;
최청흑(最晴黑)한오십일(五十日)이지나고 그는북경(北京)을탈출(脫出)햇다 하문대학(夏門大學)에 초청(招請)을바□갓으나 대학기업가(大學企業家)의 음흉수(陰凶手)것인것을 안그는광동중산대학(廣東中山大學)으로갓다 그러나 일구이육년사월십오일(一九二六年四月十五日) 장개석(蔣介石)의쿠—데타—는 광동일성(廣東一省)만 노동자농민급진지식분자삼천여명(勞働者農民急進知識分子三千餘名)을—하엿 으며 한때는『혁명(革命)의전사(戰士)』라고 간판(看板)을지인노신(魯迅)도상해(上海)로 다라나야만 되엿다여기서우리가 다시한번그에게흥미(興味)보다는 최대(最大)의 경의(敬意)를갓게되는것은 다음의일문(一文)이다&lt;br /&gt;
&lt;br /&gt;
——나의 일종망상(一種妄想)은 깨여젓 다 나는지금까지 때때로낙관(樂觀) 을가젓섯다 청년(靑年)을 압박(壓迫)하고 ——하는것은 대개노인(大槪老人)이다이 들노물(老物)들이 다죽어지면 중국(中國) 은보담더 생기(生氣)잇는것이되리라 고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 르치안은것을 알엇다 청년(靑年)을 ——하는것은 대개(大槪)는 청년(靑年)인 듯하다 또달이 재조(再造)할수업는 생명(生命)과 청춘(靑春)에 대(對)해서 한층(層) 더애낌이업시…(이기집(而己集))&lt;br /&gt;
&lt;br /&gt;
이글은그가 침묵(沈默)하고잇는것을『공포(恐怖)』때문이라고 조소(嘲笑)한 사람에게답(答)한 통신문(通信文)의 일절(一節)로서 이때까지&lt;br /&gt;
&lt;br /&gt;
진화론자(進化論者)이든 그자신(自身)의 사상적립장(思想的立塲)을양기(揚棄)하고 새로운 성장(成長)의 일단계(一段階)로보인것이라고 해석(解釋)해도 틀러지안흘것이다.&lt;br /&gt;
&lt;br /&gt;
그가상해(上海)에 왓슬때는 국민당(國民黨)의 쿠—데타—로 혁명군(革命軍)에서쪼겨온 젊은푸로문학자(文學者)가 만엇다『혁명문학론(革命文學論)』이 효효(囂囂)히 불러지고 실제정치행동(實際政治行動)의 전선(前線)을 떠난그들은 총칼대신에 펜을잡엇다,원기왕성(元氣旺盛)하게 실제공작(實際工作)의경험(經驗)에서 매우견실(堅實)한것도 잇섯스나 때로는 자부적(自負的)인 영웅주의(英雄主義)가 화(禍)를끼치고——에실패(失敗)한 분만(憤瞞)과 극좌적(極左的)인 기회주의자(機會主義者)들은노신(魯迅)을 공격(攻擊)햇다 그러나 그는푸로문학(文學)이란 어떤것인가 또는어찌해야 될것인가를 알리기위(爲)하야 아버지가튼 애무(愛撫)로서『푸레하노프』,『루나챨스키—』들의 문학론(文學論)과『싸벳트』의 문예정책(文藝政策)을번역소개(飜譯紹介)하야 중국(中國)푸로문학(文學)을건설(建設)하고잇는동안에『노신(魯迅)을타도(打倒)치안흐면 중국(中國)에푸로문학(文學)은생기지못한다』는 문학소아병자(文學小兒病者)들은 그자신(自身)들이 먼저너머지고 이제그가마자가고말엇다 이위대(偉大)한중국문학가(中國文學家)의영(靈)아페 고요히머리를숙이면서 나의개인적(個人的)으로 곤란(困難)한정형(情形)에의(依)하야 문호노신(文豪魯迅)의윤곽(輪廓)을뚜렷이그리지못함을 참괴(慚愧)히알며붓을놋키로한다 —요(了)—&lt;br /&gt;
&lt;br /&gt;
==주요 내용 요약==&lt;br /&gt;
추도 배경: 중국 신문학의 최고봉인 루쉰(魯迅)의 서거(1936년 10월 19일)를 추도하며, 작가와의 개인적 인연(1932년 양행불 암살 사건 직후 만국빈의사에서의 만남)을 회상하는 글이다.&lt;br /&gt;
&lt;br /&gt;
문학적 위치 - 아Q 정전: 루쉰 이해의 핵심으로 그의 대표작《아Q정전(阿Q正傳)을 제시하고 있다. '아Q'는 사고와 행동이 나약하고 우매하면서도 건방진, 당시 중국인의 집단적 성격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루쉰은 이 '아Q 상(相)'을 폭로하여 중국 지식 군중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루쉰은 '아Q 시대'를 종식시키고 새로운 중국을 열어갈 길을 제시한 인물로 평가된다.&lt;br /&gt;
&lt;br /&gt;
문학 혁명과 루쉰의 역할: 중국의 고루한 고문학을 비판하고 백화소설(白話小說)을 통해 문학 혁명의 선두에 선 것이다.《광인일기(狂人日記)를 통해 봉건적 가족 제도와 유교의 종법 사회 관념을 통렬히 비판하며 &amp;quot;어린이를 구하자&amp;quot;는 메시지를 던져 청년들에게 혁명적 충격을 주었다.&lt;br /&gt;
&lt;br /&gt;
예술과 정치: 루쉰은 본래 의사(醫師)가 되려 했으나, '우매한 국민은 체격이 강해도 무의미한 구경꾼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으로 정신 개조를 위한 문예 운동으로 전향하였다. 그에게 예술은 정치의 노예가 아니라, 적어도 정치의 선구자였으며, 정치적 목적 아래 수행된 것이다.&lt;br /&gt;
&lt;br /&gt;
후기 생애와 투쟁: 군벌 정부(단기서)와 국민당(장개석)의 탄압을 피해 쫓겨 다니는 비장한 '문화의 전사'로서의 삶을 살았다. 젊은 프로문학 비평가들에게 '비계급적 작가'로 공격받기도 했으나, 그는 현실과의 동떨어짐을 비판하며 진실된 현실을 기반으로 한 창작의 '모랄(도덕성)'을 강조한 것이다.&lt;br /&gt;
&lt;br /&gt;
==분석 및 특징==&lt;br /&gt;
이육사의 지식인 면모: 이육사(본명 이활, 기고명 '이육사(李陸史)')가 당대 중국의 최고 지성 및 정치 상황에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글이다. 루쉰의 문학적, 사상적 변천 과정(의학 → 문예 → 현실 참여)을 심도 있게 분석하고 있다. 루쉰 문학의 핵심 통찰: 루쉰의 작품을 단순히 서사로 보는 것이 아니라, 봉건 사회에 대한 투쟁, 계급성, 지식인의 역할 등 당대 사회 변혁의 맥락에서 분석하는 것이다. 한국 문단에 대한 시사: 글 말미에 '예술과 정치'의 관계에 대해 루쉰의 태도를 재조명하며, 당시 조선 문단에서 첨예하게 논의되던 이 문제에 대한 이육사의 입장을 간접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수필문외한(隨筆門外漢)의수첩(手帖)=&lt;br /&gt;
문(門) 외(外) 한(漢) 의 수(手) 첩(帖)&lt;br /&gt;
&lt;br /&gt;
(칠(七))&lt;br /&gt;
&lt;br /&gt;
이(李) 육(陸) 사(史)&lt;br /&gt;
&lt;br /&gt;
R이란 사람은 나와는 매우친(親)한 동무엿다 그럼으로 우리두사람 사이에는 결(决)코 무슨비밀(秘密)이란것은 잇을터수가 아니엿다 그러나 지금은 나의교우록(交友錄)속에 씨여저잇는 그의『호패(號牌)』에 붉은줄을 그은지도 벌써한달이 다되엿다.&lt;br /&gt;
&lt;br /&gt;
이러한 간단한사실(事實)이 모르는사람으로본다면 가렵지도 아프지도안흘지모르겟으나 남달리상처(相處)해오든 벗을한사람 일허버린나의흐젓한 마음은 어데도 비길수업시 서러운것이다.&lt;br /&gt;
&lt;br /&gt;
그뿐만아니라 이글을 쓰려는오늘아침에 이제는 고인(故人)인 R의동생으로부터 나에게 간단한편지한장과『문외한(門外漢)의수첩(手帖)』이란유고(遺稿)한권(卷)이 보내여왓다.&lt;br /&gt;
&lt;br /&gt;
그유고(遺稿)는 이래십년(爾來十年)에 쓴 고인(故人)의 일기(日記)인 모양인데 그도축일(逐日)해서 쓰것도 아니고 때때로마음이 내킬때마다 써둔것이며그맨끗페—지에『〇〇형(兄)에게』라는 이세상(世上)사람으로서의 절필(絶筆)인듯한 글시가 묵흔(墨痕)이임리(淋漓)한것은소리업는 내눈물을더욱짜내는것이엿다 그리고이글내용(內容)은 일기(日記)는 일기(日記)면서도 대부분(大部分)은 나에게 보내는 편지이엿다.그편지가운데서 지금이라도 흥미(興味)잇게생각나는 부분(部分)만을 써서보기로한다면 그도처음에는 문학청년(文學青年)이엿든 사실(事實)이잇섯다.그러나그는자기가 하고저한 문학(文學)을 끗끗내 완성(完成)할수잇는 행복(幸福)된사람은 아니엿다.그러나 그사람은죽든날까지도문학(文學)을 단념(斷念)하지는안헛다는것은 어느해겨울 그와나는 우연(偶然)히도 어느 온천(溫泉)에서만낫다 그때는 바로동경(東京)에서들풍자문학론(諷刺文學論)이 한참대두(擡頭)할때 이엿슴으로 그도또한 예(例)에삐지지안코 이것의 조선(朝鮮)에잇서서 가능(可能)하다는 설교(說敎)를 하는것이엿다그때좀더 생각해볼 여지(餘地)가잇다고한 나의말에 그는말하기를조선(朝鮮)사람은 생활(生活)그자체(自體)가 풍랄적(諷剌的)으로 되여잇다고 떠둘어대기에나는그에게 더진지(眞摯)한태도(態度)로 사물(事物)을 대(對)할필요(必要)가 잇다는것을말하엿고 그다음날 우리는 서로갈린체 영원(永遠)히 보지못할 사람이되엿다.&lt;br /&gt;
&lt;br /&gt;
이글은 그때나와 갈려서 몃칠동안에 쓴것이라고 생각난다 일구삼(一九三)×연(年)×월(月)×일(日)—〇형(兄)!S역(驛)에서 형(兄)과갈려서나는〇동(洞)까지 오십리(五十里)나되는 산(山)길을 걸어왓소.동리(洞里)거리에 피곤(疲困)한 다리를 쉬이면서 생각하기를 아무데나 큼직한집 초당(草堂)방을 차저드러가면 이밤을 뜻뜻한 아랫목에서 지낼수도 잇겟거니와 그들과함께 살을맛대이고지나며 그들의 생활(生活)을체득(體得)할수가 잇다면……얼마나 유쾌(愉快)한일이겟습니까?&lt;br /&gt;
&lt;br /&gt;
나는 여기서 형(兄)이일직이 하든말을 생각해보앗소 상해(上海)어데선가?목욕(沐浴)을 갓슬때 불란서(佛蘭西)사람과 서반아(西班牙)사람과 가트욕조(浴漕)에 들어갓슬때의 감정(感情)을 얘기한것을 기억(記憶)이나 하시는지요.그때는 적나라(赤裸裸)한 몸둥이들이모두꼭가튼 온도(溫度)를 느낄수잇더라고.세계(世界)는 모름직이 목간통가티 되어야 한다고.&lt;br /&gt;
&lt;br /&gt;
그러나 오늘의 나의심경(心境)은그와는 정반대(正反對)로 어데까지나 육친애(肉親愛)를 느껴볼 결심(决心)이엿소 그래서 세계(世界)는 차라리 초당(草堂)방가티되라고까지 생각해도 보앗소이러한 생각을 하노라면 또다른 한생각이 꼬리를 물고나오는동안에 나는가젓든 담배를모조리 다피워 바렷소.담배라도피우지 안흐면 첫겨우의눈우바람이몹시도 옷깃을 새여들고 발끄티저리기도해서 담빠도살겸 주막(酒幕)집잇는대로 가까이 차저갓소.그곳에는 마침담배 가개가잇고젊은농부(農夫)인듯한 사람이잇기에오전(五錢)짜리 한푼을던지고『마코』한갑을 달라고 하엿더니만 나는여기서 뜻하지못한 실패(失敗)를 하엿소 그것은 나행동(行動)이 몸차림과 어울리지안는데가 잇섯든지또는언어(言語)에 무의식적(無意識的)인 불손(不遜)이잇섯든지 그젊은 농부(農夫)는 내얼굴을 자세히 보더니만……『문(門)안에 들어와서 담배를 가저가오』……하며 코우슴을 피하며『마코』한갑을 내아프로 툭던지는것이엿소.&lt;br /&gt;
&lt;br /&gt;
나는처음 이농부(農夫)의 말을듯고한참동안 어름어름하엿소 그것은 담배가개라고하는것이 우리가 도회(都會)에서 보는담배가개와가티 백색(白色)『타일』타로 대(臺)를싸올리고『네온』등(燈)을 달고 유리창(窓)을단것이 아니고 첨하끄테다 석유(石油)궤로 목판을짜서 장수연(長壽煙),희연(囍煙),『마코』단풍(丹楓) 이런것들을몃갑식(式) 너허둔것이엿소,그래 내가들어갈 문(門)이란 어데잇겟소,&lt;br /&gt;
&lt;br /&gt;
&lt;br /&gt;
(칠(七))&lt;br /&gt;
&lt;br /&gt;
이(李) 육(陸) 사(史)&lt;br /&gt;
&lt;br /&gt;
R이란 사람은 나와는 매우친(親)한 동무엿다 그럼으로 우리두사람 사이에는 결(决)코 무슨비밀(秘密)이란것은 잇을터수가 아니엿다 그러나 지금은 나의교우록(交友錄)속에 씨여저잇는 그의『호패(號牌)』에 붉은줄을 그은지도 벌써한달이 다되엿다.&lt;br /&gt;
&lt;br /&gt;
이러한 간단한사실(事實)이 모르는사람으로본다면 가렵지도 아프지도안흘지모르겟으나 남달리상처(相處)해오든 벗을한사람 일허버린나의흐젓한 마음은 어데도 비길수업시 서러운것이다.&lt;br /&gt;
&lt;br /&gt;
그뿐만아니라 이글을 쓰려는오늘아침에 이제는 고인(故人)인 R의동생으로부터 나에게 간단한편지한장과『문외한(門外漢)의수첩(手帖)』이란유고(遺稿)한권(卷)이 보내여왓다.&lt;br /&gt;
&lt;br /&gt;
그유고(遺稿)는 이래십년(爾來十年)에 쓴 고인(故人)의 일기(日記)인 모양인데 그도축일(逐日)해서 쓰것도 아니고 때때로마음이 내킬때마다 써둔것이며그맨끗페—지에『〇〇형(兄)에게』라는 이세상(世上)사람으로서의 절필(絶筆)인듯한 글시가 묵흔(墨痕)이임리(淋漓)한것은소리업는 내눈물을더욱짜내는것이엿다 그리고이글내용(內容)은 일기(日記)는 일기(日記)면서도 대부분(大部分)은 나에게 보내는 편지이엿다.그편지가운데서 지금이라도 흥미(興味)잇게생각나는 부분(部分)만을 써서보기로한다면 그도처음에는 문학청년(文學青年)이엿든 사실(事實)이잇섯다.그러나그는자기가 하고저한 문학(文學)을 끗끗내 완성(完成)할수잇는 행복(幸福)된사람은 아니엿다.그러나 그사람은죽든날까지도문학(文學)을 단념(斷念)하지는안헛다는것은 어느해겨울 그와나는 우연(偶然)히도 어느 온천(溫泉)에서만낫다 그때는 바로동경(東京)에서들풍자문학론(諷刺文學論)이 한참대두(擡頭)할때 이엿슴으로 그도또한 예(例)에삐지지안코 이것의 조선(朝鮮)에잇서서 가능(可能)하다는 설교(說敎)를 하는것이엿다그때좀더 생각해볼 여지(餘地)가잇다고한 나의말에 그는말하기를조선(朝鮮)사람은 생활(生活)그자체(自體)가 풍랄적(諷剌的)으로 되여잇다고 떠둘어대기에나는그에게 더진지(眞摯)한태도(態度)로 사물(事物)을 대(對)할필요(必要)가 잇다는것을말하엿고 그다음날 우리는 서로갈린체 영원(永遠)히 보지못할 사람이되엿다.&lt;br /&gt;
&lt;br /&gt;
이글은 그때나와 갈려서 몃칠동안에 쓴것이라고 생각난다 일구삼(一九三)×연(年)×월(月)×일(日)—〇형(兄)!S역(驛)에서 형(兄)과갈려서나는〇동(洞)까지 오십리(五十里)나되는 산(山)길을 걸어왓소.동리(洞里)거리에 피곤(疲困)한 다리를 쉬이면서 생각하기를 아무데나 큼직한집 초당(草堂)방을 차저드러가면 이밤을 뜻뜻한 아랫목에서 지낼수도 잇겟거니와 그들과함께 살을맛대이고지나며 그들의 생활(生活)을체득(體得)할수가 잇다면……얼마나 유쾌(愉快)한일이겟습니까?&lt;br /&gt;
&lt;br /&gt;
나는 여기서 형(兄)이일직이 하든말을 생각해보앗소 상해(上海)어데선가?목욕(沐浴)을 갓슬때 불란서(佛蘭西)사람과 서반아(西班牙)사람과 가트욕조(浴漕)에 들어갓슬때의 감정(感情)을 얘기한것을 기억(記憶)이나 하시는지요.그때는 적나라(赤裸裸)한 몸둥이들이모두꼭가튼 온도(溫度)를 느낄수잇더라고.세계(世界)는 모름직이 목간통가티 되어야 한다고.&lt;br /&gt;
&lt;br /&gt;
그러나 오늘의 나의심경(心境)은그와는 정반대(正反對)로 어데까지나 육친애(肉親愛)를 느껴볼 결심(决心)이엿소 그래서 세계(世界)는 차라리 초당(草堂)방가티되라고까지 생각해도 보앗소이러한 생각을 하노라면 또다른 한생각이 꼬리를 물고나오는동안에 나는가젓든 담배를모조리 다피워 바렷소.담배라도피우지 안흐면 첫겨우의눈우바람이몹시도 옷깃을 새여들고 발끄티저리기도해서 담빠도살겸 주막(酒幕)집잇는대로 가까이 차저갓소.그곳에는 마침담배 가개가잇고젊은농부(農夫)인듯한 사람이잇기에오전(五錢)짜리 한푼을던지고『마코』한갑을 달라고 하엿더니만 나는여기서 뜻하지못한 실패(失敗)를 하엿소 그것은 나행동(行動)이 몸차림과 어울리지안는데가 잇섯든지또는언어(言語)에 무의식적(無意識的)인 불손(不遜)이잇섯든지 그젊은 농부(農夫)는 내얼굴을 자세히 보더니만……『문(門)안에 들어와서 담배를 가저가오』……하며 코우슴을 피하며『마코』한갑을 내아프로 툭던지는것이엿소.&lt;br /&gt;
&lt;br /&gt;
나는처음 이농부(農夫)의 말을듯고한참동안 어름어름하엿소 그것은 담배가개라고하는것이 우리가 도회(都會)에서 보는담배가개와가티 백색(白色)『타일』타로 대(臺)를싸올리고『네온』등(燈)을 달고 유리창(窓)을단것이 아니고 첨하끄테다 석유(石油)궤로 목판을짜서 장수연(長壽煙),희연(囍煙),『마코』단풍(丹楓) 이런것들을몃갑식(式) 너허둔것이엿소,그래 내가들어갈 문(門)이란 어데잇겟소,&lt;br /&gt;
&lt;br /&gt;
(중(中))&lt;br /&gt;
&lt;br /&gt;
이육사(李陸史)&lt;br /&gt;
&lt;br /&gt;
그날은 그곳에서 멀지안흔곳에 장날이엿나부오,장꾼들이들신들신하고 그집으로 들어오기에 나는그만 그곳을떠나 도라나오랴니까 바로내머리 뒤에서『건방진여석 눈에유리창(窓)을 부치고』……하면서 별러대는것이엿소.그때나는 모든것을 다알엇소,&lt;br /&gt;
&lt;br /&gt;
시골산촌(山村)에선 유리라는것은들창(窓)에나 부치는것인데 네눈에부친 들창을열고 다시말하면 문(門)안에 들어와서(안경(眼鏡)을벗고)담배를 가저가란 말엿소.&lt;br /&gt;
&lt;br /&gt;
내가 안경(眼鏡)을 쓰게된것은 시력(視力)이 부족(不足)한 탓이엿고 그젊은농부(農夫)가 내안경(眼鏡)쓴것을 못맛당히역이는것은 고루(固陋)한 인습(因習)의 소치(所致)라고 하드래도 그표현방법(表現方法)이얼마나 내뼈를 저리도록 쑤시는풍랄(諷剌)이엿겟소 과연(果然)여기에 남과나라는 투명(透明)한 장벽(墻壁)이 서서잇다는것을 나는안듯하엿소.&lt;br /&gt;
&lt;br /&gt;
그리고 내발길은 무겁게옴겨젓소.아주몃해를두고 어느사막(沙漠)이라도 걸어온듯한 피로(疲勞)를 깨다랏소.하늘은 점점어두어오고눈조차 함박으로 퍼붓는듯 하엿스나 나는다시 옷것을 단속지는 안헛소 될수엇스면 차디천 눈보라가 내보드러운 목덜미살을 염이듯이 얼어부트라고하여본것은 일종(一種)의 자기잔학(自己殘虐)일른지도 모르겟소.&lt;br /&gt;
&lt;br /&gt;
두시간(時間)이나 지낫을가 나는과연(果然) 어느집초당(草堂)방에 손이되엿소방안에는 초말(醋抹)냄새가 코를찌를망정 모이는사람은 대략육칠명(六七名)이나 되엿고 연령(年齡)은최저십팔(最低十八)로최고삼십이(最高三十二),인품(人品)은 모두순후(純厚)하고황소가티 질박(質朴)한놈도 잇스며암사슴가티 외로운 면석도잇섯소.그날밤은 내라는존재(存在)가 그들로보면 낫서른손이여서 일동일정(一動一靜)을 주의(注意)는 하면서도 조금도 악의(惡意)는 갓지안헛든 모양이엿소 그러기에 나더러 세상(世上)의자미잇는 얘기를 들려달라는것이오&lt;br /&gt;
&lt;br /&gt;
이때 나는 어떠한 얘기를들려줄까 하고 망서리는판에 그들중에도 연령(年齡)과 지식(知識)의 정도(程度)가잇서서 삼십(三十)에 가까운 사람들은『화용도(華容道)』를 들려달라하고그중한사람은『춘향전(春香傳)』을 얘기하라하엿소만은 여기도 또한의견(意見)은 일치(一致)되지안헛소 그중에도제일(第一)얼굴이 말숙하고 나이가이십오세(二十五歲)쯤 되여보이는 농부(農夫)한사람 말을드르면 보통학교(普通學校)를 중도퇴학(中途退學)은 하엿서도 그들가운데서는 식자연(識者然)하고 내로라는드시뽑내면서『서양(西洋)』얘기를 무에나들리라는것이오 그해서 결국(結局)은『춘향전(春香傳)』파(派)와『서양(西洋)』파(派)가 절충(折衷)한결과(結果) 나는이진귀(珍貴)한『서양춘향전(西洋春香傳)』을 친절(親切)하게도 강좌(講座)를담임(擔任)하게되엿스며 그는 득의만면(得意滿面)하야 내담배갑에서『마코』한개들 빼여물고 인조견(人造絹) 옥색(玉色)관사홋족기에서 석낭을꺼내여 담배를 피우는것이엿소 이방에서는모두들이사람을『하이카라상』이라고 부르는데 그『상』짜가나에게는 조금귀익지못하나 아마이것을 도시(都市)말로번역(飜譯)하면『모—던뽀이』란 말도갓소.&lt;br /&gt;
&lt;br /&gt;
그러나 이『서양춘향전(西洋春香傳)』이란진본서(珍本書)는 가난한 나의문헌학지식(文獻學知識)으로는 도저(到底)히 알어낼 자신(自信)도업고 그러타고 그들에게『린드뻑』이 대서양(大西洋)을 어떠케 횡단(橫斷)하엿다든지『크레오파트라』의국적(國籍)이 어느나라냐고 설왕설래(說往說來)를 하여보앗자『하이카라상』이라는 이방의『쏘크라테쓰』도그까지는 흥미(興味)를느끼지못할것갓터소.&lt;br /&gt;
&lt;br /&gt;
그래서나는 생각다못해『쉑스피어』의『로미오와쭈리엣트』를얘기하기로하고 위선그주인공(主人公)의이름을 그들이 알어듯기 쉽게『노미』이와『준』이가 이러케얘기를하니 그래도 모두그것이자미가 잇섯든지『준』이가추방당(追放當)튼날새벽에『노미』를 차저가이별(離別)을하는판인데 이곳에야『나이팅껠』이울수가 잇슬리도 업겟고 생각다못해 속담(俗談)에 꿩갑에 닭이라니 닭을울리고『준』이를 떠나보냇구려!그래도 이때는 모두들감탄(感歎)해서 흥흥코소리를치며 신삼고 가만이치든손을쉬이는구려!&lt;br /&gt;
&lt;br /&gt;
(하(下))&lt;br /&gt;
&lt;br /&gt;
이육사(李陸史)&lt;br /&gt;
&lt;br /&gt;
밤은벌써 오전(午前)두시(時)나 되엿는데 박가테서는 눈보래가 조금도 쉬지안코 나렷소,사람들은차차 긴하픔을 하다가는 제대로 팔을배고 자는이도잇고 또그자는이의 다리를베고 자는사람도잇스며 나중에는『하이카라상』과 나만이남어서 나는 이동리(洞里)의 서러운전설(傳說)을 듯는것이오『옛날에 이동리(洞里)와 건너마을이편을갈러서 정초(正初)이면『줄댕기』가 시작(始作)되엿고 그때는 사람들이 수—백명식(百名式) 모혀서 그중에도 젊은 사람들은 처녀(處女)나 총각이 제각기 마음잇는 사람들과 사랑을 속삭이면서 영원(永遠)히그자손(子孫)들은 변(變)함업시 이동리(洞里)를직혀왓건만은 지금(至今)은 어쩐일인지 그사람들은 누가 오란말도업고 가란말도 업건만은 다들어데인지 한집식 두집식 동리(洞里)를떠나고 그럴때마다 젊은이들의 싹트기시작(始作)한 사랑은 그봄이 다가기도전에 덧업시 흘러가고 만다는말을 다마치지도못하야 이사람은 창졸간에 미친듯이 쓸어저 흑흑 느껴가며우는것이엿소.나는 이것을 웨우느냐 물어볼힘도업고 울지말라고 위안(慰安)을 줄수도 업섯스며다만나 혼자 생각기를 너도 또한불상한 미완성초연(未完成初戀)의 순정자(殉情者)로 구나하고 동정(動靜)을 살피노라니 이사람도 그냥잠이 들고먼데닭이 자즌홰치는 소리가들리며 눈은끗첫는지 박가튼 바람이 몹시부럿소.&lt;br /&gt;
&lt;br /&gt;
나는몃시간(時間) 남지안흔 이밤을도저(到底)히 잘수는업섯소,내머리는해저(海底)와가티 아득하고 내가슴은운모(雲母)와가티 무거웟소.도라누을내야 도라누을수도 업스려니와여페사람들의 코고는소리는 검은시체(屍體)를 실흔마군(馬軍)의 수레박휘를 갈고가는듯하오,그럴수록방안의 정적(靜寂)은 무거워저서 자꾸만 지구(地球)의 중심(中心)으로 침전(沈澱)되는듯하엿소,나는 참다못하야 눈을감고 두손으로 얼굴을 가리웟소.바로 그때엿소,누구인지내머리마테서 말하는 사람이잇섯소,그사람이 누구인지는 기억(記憶)할수 업스나 혹(或)은 저녁전에담배가개에서본 농부(農夫)일른지도모르겟소 그가 나에게 한말은분명(分明)코『문(門)안에 드러와서……』엿소.나는 여기서 눈을번쩍뜨고가만히 생각해 보앗소.&lt;br /&gt;
&lt;br /&gt;
『오!그러타,나는 문외한(門外漢) 여다』아무리하여도 인생(人生)의 문(門)안에들어서지못할 나이라면 차라리영원(永遠)한 문외한(門外漢)으로 이세상(世上)을수박것할트시 지나갈일이지 그좁은문(門)을 들어가려고 애를쓸필요(必要)가 어데잇겟소 문(門)박게서 살어가면 책임(責任)과 부담(負擔)도 가벼우려니와 문(門)안에 우리가 직혀야할 보물(寶物)이잇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모두 문(門)안에서 직힐때에나혼자만 문(門)박게서 그모든것을파수본다면 그것도 나의한가지임무(任務)가아니겟소 그러타면 나는달게&lt;br /&gt;
&lt;br /&gt;
인생(人生)외 문외한(門外漢)이 되겟소.&lt;br /&gt;
&lt;br /&gt;
그래서 남들이모두 문(門)안에서보는세상(世上)을 나는문(門)박게서 보겟소 남들은 기피보는 세상(世上)을나는널리보면 또그만한 자긍(自矜)이잇을것갓소.오늘은 고기압(高氣壓)이어데잇는지 풍속(風速)은 육십사(六十四)미리오이동리(洞里)를 떠나아무도 발을대지안흔 대설원(大雪原)을 걸어가겟소,전인미도(前人未到)의 원시경(原始境)을 가는느낌이오,누가나를 따라이길을 올사람이 잇슬른지?업서도 나는이길을 영원(永遠)히가겟소.』&lt;br /&gt;
&lt;br /&gt;
나는이까지보고 위선이유고(遺稿)를더펏다,그리고 생각해보앗다 이것은 한사람이 인생(人生)의문(門)안에 들어오지못하고 영원(永遠)히 걸어간기록(記錄)이다 오!그러면 나도역시문외한(亦是門外漢)인가?정축(丁丑) 칠(七),이구(二九)&lt;br /&gt;
&lt;br /&gt;
==주요 내용 요약==&lt;br /&gt;
구성: 죽은 친구 'R'의 유고(遺稿)인 '문외한의 수첩' 속에 담긴, 'R'이 '〇형(兄)'(필자)에게 쓴 편지 형식의 수필이다. '문안'과 '문밖': 화자는 'S역'에서 '형'과 헤어져 산길을 걸으며 초당방에서 서민의 삶을 체득하고 싶다는 '육친애'적 소망을 가진다. 이때 담배를 사려다 한 젊은 농부에게 &amp;quot;문 안에 들어와서 담배를 가져가오&amp;quot;라는 말을 듣는다. '문안'은 농부가 '안경(유리창)'을 쓴 자신을 '도시의 문명인'으로 여기고 '안경을 벗고(유리창을 떼고) 들어와'라는 풍자적 표현이었음을 깨닫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자아 성찰: 이 경험을 통해 도시 지식인인 자신과 농민 사이에 투명한 '장벽'이 서 있다는 것을 인지하며, 자신이 '인생의 문외한(門外漢)'임을 깨닫는다. '문외한'의 결심: '문안'에 들어서지 못할 바엔 영원한 문외한이 되어 문밖에서 살아가겠다고 결심한다. 문밖에서 사는 것은 책임과 부담이 가볍고, 남들이 모두 문안에서 보는 세상을 자신은 문밖에서 '널리' 보며 '자긍(自矜)'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절필: &amp;quot;전인미도(前人未到)의 원시경(原始境)을 가는 느낌&amp;quot;으로 '대설원'을 걸어 나가는 것으로 글을 맺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분석 및 특징==&lt;br /&gt;
풍자 문학론의 실천: 농부의 '안경 쓴 눈(유리창)'에 대한 풍자는 지식인과 대중 사이의 괴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지식인의 고뇌와 성찰: 도시화된 지식인(안경 쓴 자)이 농민의 삶에 진입하려 했으나 거부당하고, 결국 자신을 '문외한'으로 규정하며 고립을 선택하는 지식인의 고뇌를 드러내는 자의식의 표현이다.&lt;br /&gt;
&lt;br /&gt;
낭만적 비장미: '대설원', '전인미도의 원시경' 등 비장하고 낭만적인 이미지로 결말을 맺으며, 이육사 특유의 고독한 결단의 미학을 보여주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소품(小品) 황엽전(黃葉箋)=&lt;br /&gt;
소품(小品)①&lt;br /&gt;
&lt;br /&gt;
황엽전(黃葉箋)&lt;br /&gt;
&lt;br /&gt;
이(李) 육(陸) 사(史)&lt;br /&gt;
&lt;br /&gt;
사람들은 어름알보다 더냉담(冷淡)하고 주사침(注射針)가티 촉발라도 그래도 제대로는 인정(人情)도잇고 눈담(曇)노잇서 친(親)한사람을 사이에는못보 보고저하고 보면빨아먹을듯이도 형형색색(形形色色)의 표정(表情)을비저내며 계절(季節)에 따라서는 눈물겨울만큼 간절한모양이나 『내』라는 위인(爲人)은 자질(資質)도 소박(素朴)하고교양(敎養)도 고매(高邁)하지못데 요즘은엇전지 신경(神經)이 차를보다 단단해저서 압흐고 슯흔것도 못견듸게늣겨지지도 안커니와 보지못해 못견딀사람도업고 소식(消息)이라도 못알려 탈이될,더친(親)하고덜친(親)한이가업다.그러나 행(幸)혀이세상(世上)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잇다고하면 나는 의무(義務)로라도그대에게 나의소식을 알려야하지만은 지금의 나에게는 그러한미덕(美德)을 수행(遂行)할 야망(野望)조차업다.다만 야망(野望)을용서(容恕)한 사람이잇거든 가을바락에 무한(無限)히 흘러가는 황엽(黃葉)의 쪼각쪼각이 모두나의 편지라고 생각을 해라그리고 그어느한쪼각이라도 주어다가 그대들의책상(冊床)우에 꼬처두고 그황엽(黃葉)이 바람에 나붓기며울며부르짓는 서러운전기(傳記)를 들어보아라……&lt;br /&gt;
&lt;br /&gt;
‥‥그놈의 거리를 말할것도업고 저는하여(何如)든 가로수(街路樹)에서떨어저 왓습니다.그래서 거리에 서잇는동안 형형색색(形形色色)의 인간(人間)들을 다보앗습니다.그러나대개(大槪)는 모다비슷비슷한 인간(人間)들이엿고 별다른 놈은 못보앗습니다 그것은 십년전(十年前)일이라고생각됩니다.어느날오후(午後) 내발밋흘지나가는 소년(少年)이 잇섯습니다,미친놈가티 중얼대는 말을가만히듯자니『루나—ㄹ』의 일기(日記)를외이는겐지『불상한놈! 불상한놈!』 고거즛말하엿습니다,그뒤로는 매일(每日)가티 아침에도 내발밋홀지나고 저녁에도 내발미틀지나는동안에 나는어느사이에그만그녀석하고 친(親)해젓습니다,그래서 그녀석의 정체(正體)를 알수가잇섯습니다&lt;br /&gt;
&lt;br /&gt;
그녀석은 어느시골에서 출가(出家)를해서 서울을왓다는데 그출가(出家)한 이유(理由)가 어린녀석하고는 맹랑햇습니다 그녀석의 집은어느해안(海岸)이든가봐요 아침으로 조수(潮水)가 밀려나가면 끗업시 널려잇는 백(白)모래바티 너무도 허무(虛無)서 오기는왓스나 섬들을 건너간 갈메기가 몹시그립다고 하는것을보면 그래도 어린향수(鄉愁)가머리를 글거가는모양이겟지요&lt;br /&gt;
&lt;br /&gt;
그후(後)나는 우리들이 늘만나는시간(時間)이되면 그녀석이 하마나오나하고 기달리기도햇습니다 그럴때 멀리에 발자욱 소리가나고 그녀석이 『하이네』 니 『꾀—테』 니의 시(詩)를외이고 올때도잇섯습니다 그리고 몃해가 지난어느해봄날 내가긴 동면(冬眠)으로부터 영롱(玲瓏)한 첫눈을텃슬때 또그녀석을만낫습니다 그때는벌서그녀석은 십부게볼 소년(少年)이아니라 의례(依例)히 그상대자(相對者)를 다리고어둑어둑한 황혼(黃昏)에 내엽헤와서간즈려울만큼 종알대며 행복(幸福)의『메뉴—』를 전람회(展覽會)의『프로그람』보다 화려(華麗)하게꾸미는것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이것어 한여름을 지나며 비가오나 바람이부나 계속(繼續)이 되엿습니다 그러나 인간(人間)들에게잇서서는 행복(幸福)의 절정(絕頂)은 최대(最大)의비극(悲劇)과 서로통(通)해 잇나봐요 그해의 첫가을 어느으스름달밤에나는이비극(悲劇)을 바로 내눈헤서보는것입니다&lt;br /&gt;
&lt;br /&gt;
『여보우리두사람이 서로사랑하면 그만이지 사랑을 부모(父母)에대(對)한 효행(孝行)으로 하는데가 어데잇소.』&lt;br /&gt;
&lt;br /&gt;
이러케 그녀석은 폐(嬖)하는것이 엿습니다.&lt;br /&gt;
&lt;br /&gt;
그것도 고이치안흔게 그때쯤은 그녀석의 기분(氣分)이란 불꼿치타오를둣도 하얏거니와 제애비말을 안듯기로 유명(有名)하야 집을나선놈이니까.&lt;br /&gt;
&lt;br /&gt;
『그러치만은 엇절수가 잇서야 지요』&lt;br /&gt;
&lt;br /&gt;
이것이 그더석의 말에갑허진보수이엿습니다.그뒤나는 십년(十年)이란 긴동안 이사람들의 속삭임을 들을수는 업섯습니다.&lt;br /&gt;
&lt;br /&gt;
아마그것이 그들의 비극(悲劇)의시초(始初)FP동시(同時)에 나의『로—맨틔시슴』도 종언(終焉)이엿든 것입니다 나는그날부터 새로운 생활(生活)을 경험(經驗)하지안으면 안되엿읍니다 이때까지는 그들가운데에 엇던한두사람의 주활(主活)을 말로서 들엇으나 인제는 어느특정(特定)한 사람의사랑이라든지 그런달착지근 한것이아니라 그저그놈도 그놈갓고 그놈도 그놈갓흔 뭇사람의생활전체(生活全體)가 내풋입새의 거울보다 반드라운 쪼각쪼각에 빗치는 것이엿읍니다 이전갓흐면멀리서 삽분삽분 발자욱 소리가들려오고 그발자욱 소리가갓가워 지는데따라 쟁반에 구슬을굴리는듯한 목소리도 들엇건만은 또그럴때면 나도 입사귀를흔들어서 업김가티 보드러운바람을 부러도 주엇건만은 이때는 내가 바람을 불기는커녕그들의지나가는 위풍(威風)에 나는전율(戰慄)하지 안을수 업섯읍니다.구슬을 굴리는듯한 목소린들 어데가듯겟읍니가?뭇사람의 포효(咆哮)하는소리란 아주바다에서 이러나는노도(怒濤)의 교향악(交響樂)가탯습니다.&lt;br /&gt;
&lt;br /&gt;
그래서 나는알기를 인간(人間)이란위대(偉大)한 작란(作亂)군이라고 하엿습니다.어떠케 그들의 얼골이 크게보이고 힘차게 늣겨것든것인가 지금은 생각만하여도 왼몸이 으슬으슬합니다.그러는중(中)에그들의 행렬(行列)은 대강(大江)가티 홀러가고 나는 또다시 노랏케 단풍이들어 한닙두닙 떨어지는것입니다.얼마나 소조(蕭條)하고 적막한거리겟습니가? 내엽헤는 괴수(怪獸)가티 늘어선 삘딍들의 거믄그림자가『팔아스트 에 얼어부튼거지들의 싸늘한꿈을 죽엄가티덥허논때업니다.밤도삼경(三更)은 지난때이지요 더벅더벅 거러오는무거운 발자욱 소리와함께 나는고요한『그림자』하나를 발견(發見)햇습니다.안개에 촉촉히 저진차림자러와 힘업시 옴겨지는발자욱이 아주무슨 패잔병(敗殘兵)의 유령(幽靈)이엿슬지도 모릅니다.나는지금 그유령(幽靈)을 따라 굴러 갑니다.그러나 그유령(幽靈)은 내가미행(尾行)을 한다는것은 모르고 또는알엇다해도 아무저항(抵抗)도 할필요(必要)가업다는듯이 방향(方向)도업시것는것이엿습니다.때로는 시내도건너고들판도 지나 힘이지치고 밤이깁프면 산(山)기슭 나무등얼 밋헤누어서 하늘에 수(數)업시만흔 별들을 헤아려도 보는것이겟지요그러나 그어느별도그에게 행운(幸運)을 점제한별은 업섯나봐요 그리다간 그는그만 흑흑늣기고 울며울다가는 자는것이엿습니다.아마도 기적(奇蹟)을 이즌순간(瞬間)이 그에게는 자장행복(幸福)된순간(瞬間)이든가봐요,산(山)속은 찬기운만 가득하고벌레소리는 정적(靜寂)을 삼림(森林)가티무성(茂盛)하게하는것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그다음날도 아츰햇발이 속새입홀 흔들면 그는일어나 것는것이엿습니나.이러는 동안에 나는이유령(幽靈)에게서 무엇을 보앗스리라고 생각하심니가?어느큰강(江)가이엿습니다.여을어 목노아울고가는 강(江)가이엿습니다.그는이강(江)가에 안저서 무엇을 생각하엿는지 눈을깜은채로 하늘을치여다보는 것이엇고 초생달은교만(嬌慢)한 게집의눈자위처름 그를흘겨보는것은 한층(層)더창백(蒼白)한 비우슴갓햇습니다 그러치만은 그는그광망(光芒)을 피(避)하려고도 안엇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내생각에 따른다면 그래도 못잇처지는 날ㄹ기억(記憶)을 모조리 물소리에 씨처흘려보내려는 노력(勞力)이엿슬지도모릅니나&lt;br /&gt;
&lt;br /&gt;
그때 먼데마을에는 개짓는소리가 어즈러히 들여오고 새바람도 유달리 옷깃을 새여드는데 그는 일어셔 한발한발 물가으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때나는 그의운명(運命)을거의들여다보는것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자살(自殺)이란 광경(光景)이 내머리속에번개가티 일어낫습니다.그리고그는물가의 널직한 반석(盤石)우에올러안저서 물속에비친 자기(自己)의얼골을 자세히 들어다보는 것이엿습니다,그러나 그물속에는자기(自己)의 얼골은 차저볼수가 업섯든것이겟지요,증오(憎惡)를 참지못하는 그는그만 뼈만남은 두손으로 물결을 훗치고는 돌우에업더저 우는것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그는 또다시 일어나 모둔것을 이저버린듯이 걸어가는 것이엿습니다.일기(日氣)는점점 흐려지고 회색(灰色)으로 물드린 천공(天空)은 그의최후(最後)의 희망(希望)까지라도 빼서바릴듯이 싸늘한 압박(壓迫)을더하는것이엿습니다.그러타고해서 그에게는 아무런 격정(激情)도 반발(反撥)도잇는것갓지는 안엇습니다 만은 주먹을 쥐여서는 주머니속에 너은체로 간간히 머리를 흔드는것은 과거(過去)에대(對)한 회한(悔恨)이라든지그런것들이 머리속을 할터가는것이겟지요?&lt;br /&gt;
&lt;br /&gt;
그것은 어느동리(洞里)압이엿습니다만흔사람들이 모엿다가는 다들도라가고 큰버드나무에『사지오리』를 부친색기를 걸처맨밋헤는 기름종지에 빤—한심지불이타고잇스섯며 아해들 몃사람이그것을 직히고 잇섯습니다.그는아해들에게 무엇을하는것이냐고 물엇습니다.&lt;br /&gt;
&lt;br /&gt;
아해들의 대답이란 너무나 묘(妙)한것이 안이겟습니가?그동리(洞里)에는 십년(十年)만에 한번식은 유령(幽靈)이 난다는 전설(傳說)이 잇섯습니다그래서 그날은 동리(洞里)사람들이정성을 다하야 한데모혀서 기도(祈禱)를 올리고 고사(告祀)를 지내는것이엿는데 그날이마츰 십년(十年)에 해당(該當)한날이며 방금 의식(儀式)을 맛친때라고 말을마천 아해들은 그를 한참동안 자세히 보다가는그만 인가(人家)를 향(向)하야 다어나는것이엿습다.아마도 그것은참으로 이동리(洞里)에 유령(幽靈)이 나타낫다는것을 알리기 때문일런지도모름니다.&lt;br /&gt;
&lt;br /&gt;
그는 한번 크제우섯습니다나는 그가 웃는것을 보는것은처음이엿습니다,그러나 그웃슴이란 곳변해저서 므슨쓰듸쓴 약물을 먹은뒤의 입모습가리 변해지며 얼골전체가 크다란 환상(幻想)에 사로잡히는것 갓햇습니다그리다가 그는 그언덕 미테서잠이들어 자면서 꿈을 꾸는것여엿습니다,그꿈이란 이러햇습니다,몹시더운 여름날 몃칠을두고 비가따루엇습니다,그래서큰물이나고 하루밤사이에 왼동리(洞里)가 물에쓸려 갓읍니다 왼여름 피담을홀려 지은농사(農事)도 한포거업시 사람마다 두주먹과한개의 목슴박게는 남지안엇음니다 주림과 치위가 매운챗죽갓치 그들을 휘갈겻읍니다 그래서 동리(洞里)사람들은 제각기 이고향(故鄕)을 떠나지안호면 안되엿읍니다 물론(勿論)녯날에야 부모(父母)의 품속갓치 포근하고 사랑스런 땅이엿지만은 지금은 참담(慘憺)과 고통(苦痛)의 회억이외(回憶以外)에 아부것도 그들의 애착(愛着)을 붓잡어 두□는 못하엿읍니다.그들은지금 한개촌락(個村落)에서 다른촌락(村落)으로 한성시(城市)에서 또다른성시(城市)에 표박(標泊)□ 길을가는것이엿지만은 그어느□곳도그들이발을 부칠곳은 어□읍니다 모든집들어 그들압헤는 문(門)들을 잠것읍니다.그리고 오즉그들에게는 한오리 끗어는 길이엿음니다 어느때나 □□갈수잇는 길이엿읍니다 하□□또하루 한달에또한달 꼭가티 그들은 하늘을 치여다보고 □을갓읍니다.벌서초본(草本)도 다□□이들고 낙엽(落葉)이 나리나 그들의발길은 머므를수는 업섯습니다 어느마을이나 성시(城市)에서 그들에게 일주일(一週日)이나 유(留)할수가□고한오리의 희망(希望)을 주엇다면 다시그순간(瞬間)이 지나면 그들에게는서름이외(以外)에 아무것도 □는것은업섯습니다.그러나 이□름과주림과 치위는 그들늙은이와 어린이와 남자여자(男子女子)를 모다한마음에 얼거맬수가 잇섯습니다 바탐과비에 바래인 그들이마음에한개의희망(希望)이란 오즉 일거리와생활(生活)이엿습니다 이것이 그들을고무(皷舞)하고 추진(推進)하는 힘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마치한떼의 표유(瓢游)하는『집시』와가티 마을을지내나 산(山)을너무나 마른풀을뜨더 그것을 덥고깔고 혹(或)은낙엽(落葉)을 쓰러다가 욕(褥)와 이불을삼어 한랭(寒冷)을 지나는하루밤 더욱이 비오는밤……밤은영원(永遠)히 차운것이며 뜨신것은다만그들의『마음』뿐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날과밤은 그넷줄처럼 밧구엿습니다.해도점점 쩔러지고 물들이 어러부트며 첫눈이 나린것도 발서 열흘전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그들은 아즉까지도 발무칠땅과한가지의 일거리도 찻지는못하엿스며 끗간데를모를 길만을보고 걸어가는것입니다.&lt;br /&gt;
&lt;br /&gt;
『여기라도 좀쉬여갓스면』모다들이러케 마음으로 부르지젓습니다.그러나 또몃사람운 말하는것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가자 압흐로 더가보자』이것도모든사람의 말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그들은 여전히 경사(傾斜)진 산(山)빗탈을걸어가며 길다란 곡선(曲線)의행렬(行列)이 계속(繼續)되는것입니다.그때는바람도 조골 잔잔해지고 햇발도구름밧글나와 열분광선(光線)이 뭇사람의 얼골을 다소명낭(多少明朗)하게하엿스나 일행(一行)이바로 산(山)미루턱에올너다엇슬때는 정세(情勢)는 디무도급(急)히변(變)하야 눈이퍼붓기 시작(始作)햇습니다.&lt;br /&gt;
&lt;br /&gt;
『눈이또나린다』이러케 부르짓고는모다들 놀나는 것이엿습니다.눈송이는 목화(木花)를 뜨더뿌리는듯이왼공중(空中)에 미만(瀰漫)하야지척을가릴수가 업섯습니다.바람에몰려오는 눈송이가 얼골에 부다치면 낫살을 어이는듯하고 손이빠질듯이 스린것입니다.시력(視力)조차 모호(糢糊)하야 발아래길도 알어보기는 어려웟습니다 재를오를때에 비(比)하면 산(山)을나려오는것은조금용이(容易)하엿스나 길이질대로 질어서 업더지락 잡버지락하는 사람들도잇스며 등에업힌 어린애들은 배가몹시 곱흐다고 우는것이며 그럴때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다들 산(山)밋헤 동리(洞里)집에 나려가서 드신밥을 준다고달래는것이엿습니다 그러나 산(山)미테 동리(洞里)집은 모다제각기 제마음에 그려보는 집들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가자 조금이라두 빨리가자불빗을 볼때까지』그들중(中)에서 한사람이 굴근목소리로 외치는것입니다&lt;br /&gt;
&lt;br /&gt;
『암그래야지』또 몃사람의 대답이 끗나면 모다들 침묵(沈默)은하면서 마음속으로는역시(亦是)『가자』고 대답하는것입니다&lt;br /&gt;
&lt;br /&gt;
사람들은 이빨을물고 잇는힘을다하야 전진(前進)합니다 지나온길이얼마이며가야할길이 얼마인것도모르면서 죽으나사나 가야한다는 것박게는 그들은 한사람도자기(自己)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업섯습니다.그들의 동반자(同伴者)의 발소리와 호흡(呼吸)이 그들의가튼 운명(運命)을결정(决定)한다는것은 이잔혹(殘酷)한 자연(自然)과 싸워가는 무리들의 금과옥조(金科玉條)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눈보래는 끗첫습니다.그러나아즉도 그들에게는 조그마한희망(希望)도 보이지는 안헛습니다.압도캄캄하고 뒤도그랫습니다.아득한 삼림(森林)속을 허우덕이는 암담(暗膽)은 영원(永遠)한흑야(黑夜)가 새이지도안코 영원(永遠)한 미로(迷路)도 끗막지도못할것 갓햇습니다.&lt;br /&gt;
&lt;br /&gt;
피로(疲勞)는 그들의몸을 풀솜가티만들엇습니다.참다가 못참는몃사람이 땅이라도 꺼지란듯이한숨을 쉬는것이엿습니다.그리고는 부르짓는 사람도업고 중얼대는 사람도업스며 눈물도마르고 공포(恐怖)도 사라진 그들은 발목에 잇는 힘을 다해서 눈과진흙우를 쉬임업시 이동(移動)하는것입니다.』&lt;br /&gt;
&lt;br /&gt;
유령(幽靈)은 그들가운데서 제일나이만흔 노인(老人)을 발견(發見)햇습니다그리고 그것은십년전(十年前) 그가고향(故鄕)을떠나올때 아즉도 그다지늙지안흔 그의아버지인것도 알엇습니다 그리고 모든사람은 그의어린시절(時節)의 동무엿습니다 그는참다못해『아버지』하고 소리를첫&lt;br /&gt;
&lt;br /&gt;
습니다 그러나그들은 어느한사람도 그를상대(相對)로 반겨마저주는사람은 업섯습니다.&lt;br /&gt;
&lt;br /&gt;
모다제각기 제갈길을 가고만잇섯습니다.&lt;br /&gt;
&lt;br /&gt;
유령(幽靈)도 그때야 잠이깨엿습니다 그리고 몸써리를 치는것입니다 얼마나 지리(支離)한꿈이며 괴로운 꿈이겟습니까?유령(幽靈)은다시일어나 것는것입니다 캄캄암흑(暗黑)속을 영원(永遠)히차고 영원(永遠)히 새지못할듯한밤을 제혼자가는것입니다 십년전(十年前) 내발밋흘 지나단이며 사랑을 속삭이든 소년(少年)은지금도 밤길을 제혼자 가고잇겟지요 황엽(黃葉)은 그래서 서러운일생(一生)을 울고만잇습니다&lt;br /&gt;
&lt;br /&gt;
정축십일(丁丑十一),일(一)&lt;br /&gt;
&lt;br /&gt;
==주요 내용 요약==&lt;br /&gt;
주제: 작가(필자)의 소식을 세상에 전하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이다.&lt;br /&gt;
&lt;br /&gt;
소식 전달: '내'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가을 바람에 흘러가는 '황엽(黃葉, 누런 잎)' 조각을 자신의 편지라고 생각하고 그 서러운 전기를 들어보라고 한다.&lt;br /&gt;
&lt;br /&gt;
'황엽'의 관찰: 황엽(필자)은 자신이 거리에서 겪은 두 가지 경험을 이야기한다.&lt;br /&gt;
&lt;br /&gt;
소년의 성장과 비극: 어린 소년이 성장하여 연인과 행복을 속삭였으나, 부모에 대한 효행 문제로 헤어지는 비극을 목격하는 것이다. 황엽은 이를 '행복의 절정은 최대의 비극과 통한다'고 표현하며 자신의 '로-맨틔시슴'의 종언이라고 말한다.&lt;br /&gt;
&lt;br /&gt;
군중의 포효와 유령: 이후 황엽은 개별적인 사랑 이야기가 아닌, '뭇사람의 생활 전체'와 **'노도(怒濤)의 교향악'**을 목도한다. 황엽은 이 거대하고 위대한 '작란군(作亂群)'의 행렬에 전율을 느낀다. 행렬이 사라진 후, 황엽은 '패잔병의 유령' 같은 힘없는 한 사람의 고독하고 고통스러운 표류와 꿈을 따라가며, 꿈속에서 홍수로 고향을 떠난 농민들이 희망 없이 떠돌지만 '가자 압흐로 더가보자'는 그들의 단합된 의지를 발견하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마무리: 유령이 깬 후 다시 홀로 밤길을 걷는 모습을 보며, 황엽은 '서러운 일생을 울고만' 있다고 글을 마무리하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분석 및 특징==&lt;br /&gt;
메타포(은유)적 글쓰기: '황엽(낙엽)'이라는 매개를 통해 자신의 소식과 감정을 전달하는 고도의 은유적인 글이다. '황엽'은 작가 자신의 고독하고 소외된 자의식, 혹은 시대를 표류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시대의식의 투영: 개인적 낭만(소년의 사랑)의 종언과 함께,'뭇사람의 생활 전체'와 '노도의 교향악'을 목도하며 당대의 격변하는 사회상과 민중의 힘을 인식하는 작가 의식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이육사의 서정성: 후반부 꿈속에서 펼쳐지는 농민들의 표류와 그들의 굳건한 생존 의지는 당시 농촌의 피폐함과 함께 암울한 현실 속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을 비장하게 포착해내는 이육사 특유의 서정성을 보여주는 것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전과기=&lt;br /&gt;
누구나 버릇이란 쉽사리 곳처지는것은아니다 그러므로 세살쩍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말도 잇지 안는가?.그런데도흔히 다른사람의 한가지 버릇을 새로히 발현햇슬때는 아—저사람은 저런버릇이 잇구나하고 속으로 비우서보거나 그버릇이 조치못한종류의것이면 대개는 업수히역이는 수도잇는가봐!.그럿컨만 나에게는 아무리 곤처보려도 곤처지지안는버릇이란 손톱을 깍고 줄로 으르고 수건으로 닥고하는것이다그것도 때와곳을 가릴것도업시조욕(漕浴)나 다방(茶房)이나는 말할것업고기차(汽車)나 배를타고 멀리여행(旅行)이라도하면 심심푸리도되고 봄날도서관(圖書舘)가튼데서 서너시간(時間) 안저백이면 제아무리 게른뱅이는 아닐지라도 웃눈섭이 기중기(起重機)처름아래눈섭을 끄러다닐때도 잇는것이고 그럴때에 손톱을 잘르고줄로 살살으르면 자릿자릿한 자미에 왼몸에게틈이 다풀리는것이다.그야내나이 어릴때는아침일직이손톱을 잘르면어룬들은질색을하시며 말리기도하엿다,그리고 말릴때에 누구인지지금에기억되지는 안어도 우리집에자주오는 손이 말하기를 아침에손톱깍고 밤에 머리빗는것은몸에해롭다고 하는것이엿고 내생각에도 그런방문은『동의보감(東醫寳鑑)』에라도 싸여 잇는줄 아럿기에그뒤로는 힘써시간(時間)을 한나절지난뒤에 손톱을 닥곤하엿지만나도내대로 세상맛을 보게된뒤로는 쓴맛단맛을 다보고 시고떨븐 구석과 휘추고초가튼 광경에 부닥길때가 시작이되고는손톱치레를 할만한 여가도 업섯고 어느사이에 손톱은 제대로자라 긴놈 쩌른놈 삐뚜러진놈꼬부러진놈 벌덕잡버진놈 앙당마스러진놈 이러케되야 내손이란 그꼴이 맛치 오증어를 뒤집어 삶어논것이 되엿다.&lt;br /&gt;
&lt;br /&gt;
그럴때에 나는 또 다시 손톱을 잘를것은 잘르고 으를놈은 으르곤하엿스며 이른아츰이라도 가리지는 안엇다.그것은밤으로 머리를 깍거보아도 몸에 해로운것도 업스니까 아츰에 손톱을 깍는것조차 위생(衞生)과는 관게업는것을 안까닭이다.&lt;br /&gt;
&lt;br /&gt;
그런대 내가이손톱을 잘르는버릇은 언제부터 시작되엿는가를 생각해보면 그도벌서 삼십년(三十年)이 더지낫다,내가난지 백일(百日)이나 되엿겟지 이란저고리박게빨간내손이 나와서 내얼골을 햅여뜻고는 나는자스려질듯이 울엇다.어머니가 놀라서가위로 내손톱을 잘러주신것이 처음이고그것이 늘거듭하야 지는동안에봄철이오면 어머니는 우리형제(兄弟)를 차례로불러 퇴ㅅ마루 양지쪽에 안치고 손톱을 잘러주시고 머리도빗기고 귀도휩여 주섯스며 이것도 내나이 여섯살때 소학(小學)을 배우고는 이런일의한반(半)은 할아버님께 이관(移管)이 되엿다 예날 내고장 우리집에는그다지 크지는못해두 허무히 적지안은 화단(花壇)이 잇섯다 그리고그화단(花壇)은 이때쯤되면 일이밧벗다 깍지로긁고호미로 매고 씨갑씨를 뿌리고총생이를 옴겨심고 적당한 거름도 주엇다 요즘가티『시크라맨이나『카—비손』이나『추리프』가튼것은 업서도 옥매화(玉梅花) 분홍매화(粉紅梅花) 홍도(紅桃) 벽도(碧桃) 해당화(海棠花) 장미화(薔薇花) 촉규화(蜀葵花) 백일홍등등(百日紅等等) 빗도보고 향(香)내도맛고꼿도보고 입도볼 말하면 일년(一年)을 다즐길수가잇는것이엿는데 내할아버지 생각은 이제 헤아려보면 우리들에게 글읽고 글시씨인사이로노력(勞力)을 몸소맛보이는것도 되려니와 그것이 정서교육(情緒敎育)도될겸(兼) 당신의 노래(老來)를 화려(華麗)하게 꾸밀수도 잇섯든 모양이엿다 그럴때마다 우리들은 이다지 가볍고고흔 노동(勞働)이 끗나면 할아버지는 우리들게 손을씨슬것과 손톱에끼인흙을 끌어내도록 손톱을닥그라 하섯다.&lt;br /&gt;
&lt;br /&gt;
이러든 내손톱이기에 나는손톱을 소중히하고 잘르고 으르고 닥고하는 동안에 한가지방편을 어덧다 그것은 나에게거북한일을말하는 사람아페서 손톱을 닥는것이다.빤히 얼굴을맛대이고 배알에 거슬이거나듯기실흔 말을듯고 억지로 참을수도업고 그러타고 언잔흔표정(表情)을 할수도업서 손톱을 닥노라면 시굴게신 어머니도 그려보고 도라가신 할아버지의 모습을 우러러 뵈일수도잇다.내고장의 푸른하늘아래 봄이 왓슬것도 가트니&lt;br /&gt;
&lt;br /&gt;
——(완(完))——&lt;/div&gt;</summary>
		<author><name>Imgpdnjs</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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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이육사의 기자 생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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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10T08:48:3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Imgpdnjs: &lt;/p&gt;
&lt;hr /&gt;
&lt;div&gt;[[분류:imgpdnjs]]&lt;br /&gt;
==이육사의 기자생활==&lt;br /&gt;
출소한 뒤에는 중외일보와 조선일보 대구지국에서 기자로 일했고, 1930년에는 ‘이활’이라는 이름으로 첫 시 &amp;lt;말&amp;gt;을 조선일보에 발표했다. 이 시기는 훗날 교보생명을 세우는 신용호에게도 영향을 주어 독립운동 자금 지원과 교육 사업 구상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알려져 있다.&lt;br /&gt;
&lt;br /&gt;
1930년, 이육사는 조선일보 지면을 통해 생애 첫 시 「말」을 발표하며 문단에 모습을 드러냈다. 1월 3일자 조선일보 7면 하단에 실린 이 짧은 작품에서 그는 매질에 지쳐 쓰러질 것 같은 말이지만 새해에는 다시 우렁차게 질주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이 작품이 바로 그와 조선일보의 첫 연결고리였다.&lt;br /&gt;
&lt;br /&gt;
==중외일보 대구지국==&lt;br /&gt;
1929년 6월 장진홍 의거 관련 혐의로 복역 후 1930년에 출소한 이육사는 곧바로 언론계에 투신했다. 그는 시 발표 직후 중외일보(中外日報) 대구지국에서 기자로 일하기 시작했다. 중외일보는 1926년 조선중앙일보가 제호를 변경하여 창간된 신문으로, 1931년까지 발행되었다. 이육사가 활동하던 시기는 일제강점기 언론 탄압 속에서도 민족의식을 고취하려던 분위기가 남아있던 때였다. 지방지국 기자로서 지역 사회의 현안을 취재하고 보도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기간의 활동은 그가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사회 현실에 대한 인식을 심화하는 데 기여했다.&lt;br /&gt;
&lt;br /&gt;
==조선일보 대구지국==&lt;br /&gt;
중외일보에서 근무한 뒤, 이육사는 1931년 8월 조선일보 대구지국으로 자리를 옮겼다. 일제강점기 지방의 신문 지국은 단순한 연락소가 아닌, 지방 취재와 기사 송고의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이육사는 이곳에서 현장 기자로서의 전문적인 경험을 쌓았다. 조선일보에서 자신의 이름(필명)을 걸고 처음으로 쓴 기사는 1932년 초에 연재되었다. 첫 기사인「대구의 자랑 약령시의 유래」는 1932년 1월 14일부터 네 차례에 걸쳐 연재되었다. 이 기사를 쓸 때 그는 본명 대신‘육사생(肉瀉生)’이라는 독특한 필명을 사용했다. '육사'라는 필명이 여기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으며, 이는 그의 상징적인 수인(囚人) 번호(264)와 연결되는 '이육사'라는 이름의 유래 중 하나로 간주되기도 한다. 이 기사는 대구의 대표적인 전통 시장인 약령시의 역사와 유래를 소개하는 향토색 짙은 글이었으며 이육사가 기자로서 대구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lt;br /&gt;
&lt;br /&gt;
[[파일:이육사기사.jpg|500픽셀|섬네일|center| 이육사가 조선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근무하면서 쓴 1932년 1월 14일 자 ‘대구의 자랑 약령시의 유래’ 기사. ‘육사생’이란 필명 사용. ⓒ 조선일보]]&lt;br /&gt;
&lt;br /&gt;
그는 스포츠 기사에서도 민족적 정서를 드러냈다. 1932년 3월 6일과 9일자 스포츠란에서 「대구 ‘장’ 연구회 창립을 보고서」라는 글을 연속으로 기고하며 이번에는 ‘이활(李活)’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여기서 그는 조상 대대로 이어오던 우리 겨레의 전통 놀이 ‘장치기’를 소개하며 경기 방식뿐 아니라 점수 계산 용어까지 온전히 우리말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더 나아가 이 놀이를 세계 농민 사회에까지 널리 보급하자고 주장했다.&lt;br /&gt;
&lt;br /&gt;
그는 1934년 무렵 조선일보로 다시 합류했고, 이후에도 꾸준히 조선일보 지면에 글을 남겼다. 1930년대 후반에서 신문이 폐간되기 직전인 1940년까지 발표된 글들은 다양했다. 5회 연재된 「노신 추도문」(1936년 10월 23~29일자), 「문외한의 수첩」(1937년 8월 3~6일자, 3회), 「황엽전」(1937년 10월 31일~11월 5일자, 4회), 「전조기」(1938년 3월 2일자), 그리고 1940년 발표된 「계절의 오행」 등이 대표적이다.&lt;br /&gt;
&lt;br /&gt;
==타임라인으로 보는 이육사의 기자 발자취==&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v2%3A2PACX-1vScyeelknnBUflE4gCcqr0d_p4jIpl00AVBmBzhC5cgKY8GPsH4h-JZmzezN5VoQTKsJGw76vWgsA7O&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width=100%25&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대구(大邱)의 자랑 약령시(藥令市)의 유래(由來)=&lt;br /&gt;
대구(大邱)의자랑&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의유래(由來)&lt;br /&gt;
&lt;br /&gt;
대구지국(大邱支局) 육(肉) 사(瀉) 생(生)&lt;br /&gt;
&lt;br /&gt;
대구의자랑이 무엇이냐?고 뭇는사람이 잇스면 지금사람들은아이어룬할것업시 대구능금(평과(苹果))을말할것이다 그러나 대구능금은 최근의 한명산물로서완전한 자랑의자위를 점령할수는업는것이다 여긔서우리는중학교지리교과서(중학교지리교과서(中學校地理敎科書))에도잇는대구의유명한약령시(연령시(燕令市))를자랑으로들어놋코그에대한력사적유래를먼저아라보자&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의사적유래(史的由來)&lt;br /&gt;
&lt;br /&gt;
대구의 약령시는 일년얼차의정긔시장으로서 그시장에 집산되는 산물은 맛치『도루고』(토이기(土耳其))나『코—카쓰』(고가삭(高加索))나중앙아세아(중앙아세아(中央亞細亞))내외몽고(내외몽고(內外蒙古))등지에서 일년 일차혹이차식 열니는 모피물(모피물(毛皮物))의시장과가티대성황을일우나 이상에말한 각지의시장은인류사회의생활형태가차차목집함을따라필요한물품을서로서로밧구고저일정한장소와시일에모히는말하자면물물교환(물물교환(物物交換))시대로부터교통의관계라는지긔후의관계라든지또는일반사희생활의형태가오히려아직까지녯날의그것을면치못하고현대자본주의국제간의무역관계(무역관계(貿易關係))가극도로발달된 오날까지에 원시경제(원시경제(原始經濟))를 연구하는학자들의 연구재료가 되는것은휴미잇는 사실이지만은 대구의약렁시는 물품의집산과 교환의량식이 그와방불하여도 일홉부터 약시(약시(藥市))가아니고 약렁시(약령시(藥令市))란령(영(令))자에대하야우리는직각적으로 이시장의긔원은엇던권력(권력(權力))의 지배(지배(支配))맛해일게된것을 알수가잇다그러면 이약렁시가 처음시직된것은 언제부터인가 그야말로중학교교과서에까지『고래(고래(古來))로유명』이라고만씨여잇고 적확한년대를 쓰지안엇슴으로 대담하게 그년대를 내어노을수는업스나 비교적정확한수자를 조사한대로쓰면 서력일천륙백오십팔년(이조개국이백육십팔년효종조(李朝開國二百六十八年孝宗朝))거금이백칠십 사년전부터개시하게 되엿다고한다 그때야말로 조선을팔도(팔도(八道))에 닌후아노코 다시칠십일주로 난호아노흔 경상도의 정치적수부(수부(首府))도대구려니와 경상도(경상도(慶尚道))를둘너 남부조선각지는 산수명랑하고긔후온화하야각색약초(약초(藥草))의배양에지질이알맛기도하고 교통도편의하야(그때로보아서는)물산의집산에최적의지대도 대구엿스며 그때야말로임진병란(임진병란(壬辰兵亂) 이끗을막고모든볼회와 시설이 차자정돈뇌고발전을 보이며따라황실중심(성실중심(星室中心))으로끄으려는당시의위정사(위정자(爲政者))들은□□□□조금이라도 관계잇는 물품이면무엇이나물론하고 먼저진상(진상(進上))이란일흠아래최상의생산품을골너 서울도보내고 일반백성이먹고 입고쓰게되는 것이다그리고엇던 계□을물는하고병업시일생을 살수도업는것은 생리상자연의 리치엄으로 일국의지존(지존(至尊))인왕(왕(王))도병마의무서움은면치못 하는것이다 그래서황실에서일년동안쓸 약품을이곳에서 구하고저 국가의명령으로개시케한것이 오날날 우리가보고듯고 하는약령시의 처음이다그때는 약령이서면 감사(감사(監使))(현도지사(現道知事))가약재를골다봉하야중앙 정부 사약원(중앙정부사약원(中央政府司藥院))에 보낸후에 팔도에서모혀든 약재를일반 약국(약국(藥局))이사서완조선안의병든사락들이 그해그해의 치료를하게다엿다고한다(속(續))&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와경기(景氣)(이(二))&lt;br /&gt;
&lt;br /&gt;
대구지국육(大邱支局肉) 사(瀉) 생(生)&lt;br /&gt;
&lt;br /&gt;
【대구(大邱)】대구의약령시(약령시(藥令市))는다른상품시장에서는볼수업는특수한 유래를가지고 발달하여온만큼 지방의정청에서도일년춘추두차레에정긔적으로모여드는 지방생산자들을 위하야지방경제발달을 조장하고저 계획을세우고 제도의개선과 개시(개시(開市))긔간의 연장등 모든방면으로힘을써 보앗스나 모다뜻과갓지못하고 서구(서구(西歐))렬국의동양(동양(東洋))침입으로의학(의학(醫學))약학(약학(藥學))등학문이발달됨에침(침(針))은주사(주사(注射))로변하고바쇠는『메—쓰』로화하는바람에한약(한약(漢藥))의 가치는 전연그권위를일케되면서 대구의 약령시도차차워마하야 매매되는 약재료도주러지기만 하든중『후—버』겅긔가세계의주식시장(주식시장(株式市場))을혼란케하듯이 대구의 약령시장도 대타격의한때가 지나가게되엿스니 그는무엇일가?지금부터이십이년전(신해년(辛亥年))에중산손문 중산손우(中山孫又))씨혁명으로대청황실)대청황실(大清皇室))을넘어지면서부터는 청황실이 조선정부(조선정부(朝鮮政府))에의뢰하야사가든약품은실로막대한것이엿스나전부그매도의길이 막히게된 여러가지조건밋헤매매가 축소하여 전성시대의반도못되게 되얏다 그나마최근에는전주(전주(全州))대전(대전(大田))진주(진주(晋州))원산(원산(元山))등지에군소시장이개설되여이를약령시로밀미암아대구에떠러지는돈은매우감소되엿스나아직도령시가개설되면동성정입구(동성정입구(東城町入口))로부터남성정입구(남성정입구(南城町入口))까지 십여정(십여정(十餘町))에 처당재(당재(唐材))초재(초재(草材))등삼백여종의 약품도만흐려니와 그근처에림시려인숙(임시여인숙(臨時旅人宿))이무수히설치되고 포백기타 일용생활에필요한물품이면 평상시의 멧배나더잘팔리는 호경긔를 연설한다 그리하야 촌양빈들의낫서른돈을 먹어보겟다는 술집색시들까지 헐직한인조견으로 봄을싸고 도스리고안저서 열분애교를 술잔에담어보내는것도『넌센스』한징면인지는모르겟다마는 흡객술(흡객술(吸客術))이 졸열한다기보니 시대에뒤처진 기생들은본바닥에 거주하는손님들은『카페—』붉은녀급(여급(女給))들의자주(자(紫))빗유혹에다 뛰우고 음력과세를압서초조하는중 때맛침사재(시재(時哉))시재를불러 시내 각요리집 극장할것업시 대만원의성황을 이루는것은 그럴듯도한일이지마는 여긔에는 순진한산간에서 새노래물소리에 거치른세상일은 □도꾸지못한 산아이와도갓치 힘드려작만한 약재를도시구경겹 하여와와서판돈은『메리·픽포—드』안일망정어엽분녀자를맛나 잇는대로 다쓴후에명년의약령시 개설되기를 손을꼬바기다려서 와서보면 그녀자는어느하늘밋헤서 잇든남자와 단꿈을꾸는지 알길조차 바이업고작년구든맹서가 찬□(회(灰))처럼살어잘때화낌에 한잔무어라 먹자부어라 먹자하는연긔가튼 경긔는 견양경긔(견양경기(犬養景氣))이상으로 흥성거린나 그러기에여긔에최근오개년간의매매고외출동인원수와□적어본다&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와경기(景氣)&lt;br /&gt;
&lt;br /&gt;
(삼(三))&lt;br /&gt;
&lt;br /&gt;
대구지국(大邱支局) 육(肉) 사(瀉) 생(生)&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의현재(現在)&lt;br /&gt;
&lt;br /&gt;
약령시의 밋치는바 경제관계는실로 다방면으로 황금왕시대를연줄하며 발달하여오는만큼 녯날에는 조선안에서 생산하는재료가 매매되는이외에 당재(당재(唐材))라고하야 증국으로부터금석지재(금석지재(金石之材))가만히수입되는외에는 벌로볼만한것이 업섯스나 교통의발날노 국제무역이빈번하야지게된 오날에는일본,중국,몽고등시는말할것도 업거니와동부『아푸리카』의찌는둣한열대지방에서 생산되는 소철(소철(蘇鐵))을비롯하야 황막한시베리아의천지를 내집가티 도라다니는웅담(웅담(熊膽))까지모혀들게되는것은이약정□를통해본□류문와사의 한로막이라고도 할수잇는것이다 이러케 약령시에모혀드는약재료가 교통의 혜택을임어거의 파멸에 갑가운약령시가새로히왕성하게되자 지금이야말로 시장의 량입구에 마천두(마천루(摩天樓))가튼『리—딍』(유도탑(誘導塔))을세우고『일미네—숀』(대전식(大電飾))사이에 흥긔청긔가나붓기며 지방으로부터 모혀드는 생산자들을끄려드리는것은 확실히 일반상업전술의발달을의미한다 그러나 원래이시장는 약을재료그대로가지고와서 매매케 되는것이 특질의엿스나 지금은천일령신환,조고약과어을빈만병수까지 시장목판에서 인긔를집중하고잇는것은 아모리보아도 조뵈 화지관는 사실이다 이가튼변천가운데도 특긔하야들것은 령시의개설의래 장구한년월을 지남에따라 그본래의 성질에배반하야 부업적상인게놉을 령시의주요구성 요소로하게되고 부터는 경상도내지방에밋치는 양령시의영향은 일반 소비경제상에크다란 파문을그리게되여 약텽시본래목적인 약새생산에 효과가적게되고 시장내의 불당중개인으로말미암아 일사 평판이조치못하엿슴으로 이러한 페풍을 일소하기위하야 지금부터이십여년선에 생긴 한약상조합한약상조합(漢藥商組合))과칠년전전주(전주(全州))에양령시가처음뇌려고할때에 대함키위하야생긴약령&lt;br /&gt;
&lt;br /&gt;
흉회(약령시진흥회(藥令市振興會))가지금은약령시번영회(약령시번영회(藥令市繁榮會))로변경되여 최선의로력을 다하야오며 감독한결과 지금은어느정도까지 통제가되여간다고한다 그리하야 지금이야말로동력(동력(動力)의위력밋해거대한공장뉼이날로늘어남조선의『메드로포리쓰』를만드려는 대구현네과학(현대과학(現代科學))의태반(태반(胎盤))가튼대구의한복판에서 조선의 자랑이라고도할수잇는원시시장(원시시장(原始市塲))의한개가 벌서오늘날의 □제권내에발을듸듸고장차을래일의세계를향하야나가는것은홍미김흔일이다(속(續))&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의유래(由來)&lt;br /&gt;
&lt;br /&gt;
(사(四))&lt;br /&gt;
&lt;br /&gt;
대구지국육사생(大邱支局肉瀉生)&lt;br /&gt;
&lt;br /&gt;
삼백년동안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복잡다단한 필연적 과정을경과하여오며 자본주의 경제의현계단에서의연히그존재가필요하게된대구약령시의발달사는완연히금일경제의발달사(발달사(發達史))라고보지안을수업다 그럼으로여긔특긔할것은 그성실상 순박함이짝이업는 죽말하면 매매하는시람들의아관박대(아관박대(雅冠博帶))라든지 생산품 포장가튼것까지도(물론변천된것도만흐나)삼백년전의 녯날을 그려볼만한순박한이서장에도현대금융자본의붉은혀(설(舌))는내밀기시작하엿다지금부터 시년전엇던 외래지본벌이자긔소유의따에시장의위치를옴기려고 현위치는 도시교통상불편하다는구실로써다방면으로술책을써보앗스나현장소에서긔십년간상권을 잡고잇는 대가들의명렬한반대로그만뜻을일우지못한일도잇다그러면내구약령시를 지배하고 따라전조선의한약상계에우이를삽고잇는 이는누구일가여긔는 누구보다도 김홍조(김홍조(金弘祖))씨를아침수가업다씨는 전선적으로보아 제이위가기를설허할만하다고하며그다음순서업시치면 신태문(신태문(申泰文))김종수(김종수(金宗洙))지이원(심의원(沈義元))리치욱(이치욱(李致旭))두병은(두병은(杜炳殷))김내명(김내명(金乃明))방규진(방규진(方圭鎭))제씨를칠수잇고 그중에도 두병은(두병은(杜炳殷))씨가튼이는여러대를나려오며 사업에 종사하야 그문패는 실로일백오십년 이란력사를가저 대구의 동인당(동인당(同人堂))이란 일홈이잇다&lt;br /&gt;
&lt;br /&gt;
북평(北平)의동인당(同仁堂)은팔백년(八百年)의역사(歷史)가잇슴)그래서 대구의약텽시인긔는 이들의손에 좌우된다하여도과언이아니며 금년의약가는 금재금(김재금(金再禁))에따르는 제불가의폭등과 일중사변(일중사변(日中事變))의영향과중국은가(중국은가(中國銀價))의변동으로인하야소위당재(당재(唐材))는 폭동하엿고 조재(초재(草材))에잇서서 도변조로올은것이 불소하다는바 금후에드 더욱시세는오를무양이라고한다 여긔에당초재를물론하고 시세를 적어보앗스면좃켓스나 약명이한업시만코 날로변동이만흠으로 약렁시세표가 잇다는것만말한후에 특수한고저를보이는 몃가지를 적어보면 당재의원상산약(원상산약(元常山藥))은작년에는 매근에일원륙십전하든것이 금년은 단오십전에폭락되여 이십년레에 처음보는헐가라하며 산수유(산수유(山茱萸))는작년에 매근사십전하든것이 금년은십전에폭락되고 토사자(토사자(兎絲子))가튼것도 작년사오십전에매매되든것이 금년은십전에 폭락되여 자방생산자의 저울(형(衡))에 예긔치못한 광란(광란(狂亂))을보이고잇다고한다&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의장래(將來)&lt;br /&gt;
&lt;br /&gt;
그러면 다음날의약텅시는 엇더케될것인가?이문제는 결코예언자의 심심푸리와가튼 헛된소리는아니다적어도현세계의경제관계 와그에따라 일어나는모든사정이 쇄신된다면 모르지마는현계단의 경제제도가 그량존속되는한에는 세계적으로 한약에대한연구가왕성하여지고한약의권위가나날이놉하가는만큼약텅시의장래는압흐도세계에그일홈이놉하진다고일부인사들이말하고잇는것이그다지허언이아닐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지금은시장의형세가 산만하게생산자가 중개인울거처 도매상에게 팔게되여중간에책취를 당하게된다 하여도 장래는 현시장의대자벌들이주식(주식(株式))이나 혹은학자(합자(合資))의형식으로시장을상설하고도매와 개인생산자사이에 직접취인하게되여 지방경제의 윤택과약초생산의 장려의 약텅시본래의목적을 소개하려는것이 당업자간의 의도(의도(意圖))인 동시에매우현명한 의견인듯하다 그래서참된 대구자랑을 만들고조선의자랑을만들자——(완(完))&lt;br /&gt;
&lt;br /&gt;
==주요 내용 요약==&lt;br /&gt;
유래: 대구의 자랑으로 능금(사과) 대신 약령시를 들며 그 유래를 설명한다. 약령시는 1년에 한두 번 열리는 정기 시장이며, 조선시대 효종(1658년) 때 국가 명령(令)으로 개시된 것이다. 당시 경상도의 정치적 수부였던 대구는 약초 재배에 적합한 기후와 편리한 교통으로 물산 집산의 최적지였다. 궁중에서 쓸 약품을 이곳에서 구하기 위해 감사가 약재를 골라 사약원(司藥院)에 진상한 후, 팔도 약재를 일반 약국에서 구매하여 조선 전역의 환자 치료에 사용하게 한 것이 시초이다.&lt;br /&gt;
&lt;br /&gt;
쇠퇴와 현황: 서구 열강의 동양 침입과 함께 의학 및 약학이 발달하며 한약의 권위가 약해졌고, 약령시는 점차 쇠퇴하였다. 특히 22년 전(1915년경) 신해혁명으로 청황실이 무너지면서 조선 정부에 의뢰하던 막대한 약품 매도 길이 막힌 것이 큰 타격이었다. 최근 전주, 대전 등지에 군소 시장이 개설되어 대구 약령시의 경제적 이익이 감소했지만, 여전히 시장 개설 시에는 많은 약재가 모이고(당재, 초재 등 300여 종), 인근 상권에 호경기를 가져오는 것이다. 당시 약령시의 주요 구성 요소가 부업적 상인 계층으로 변질되고 불량 중개인 문제가 발생하자, 한약상조합과 약령시진흥회(현재 약령시번영회)가 결성되어 통제를 시도하고 있었다.&lt;br /&gt;
&lt;br /&gt;
약재 가격 변동: 당시(1937년) 일중사변(日中事變)의 영향과 중국 은가 변동으로 당재(唐材) 가격이 폭등했지만, 일부 국내 초재(草材)인 산약(山藥), 산수유(山茱萸), 토사자(兎絲子) 등은 폭락하여 생산자들에게 광란(狂亂)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lt;br /&gt;
&lt;br /&gt;
==분석 및 특징==&lt;br /&gt;
역사성 강조: 대구 약령시를 단순한 시장이 아닌 '국가 명령(令)'으로 시작된 역사적 시장으로 규정하며, 정치적, 지리적 배경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시대적 배경 반영: 서양 의학의 도입, 중국 혁명(청 황실 붕퇴), 당시 국제 정세(일중사변, 중국 은가) 등이 시장의 흥망성쇠에 미친 영향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여 식민지 시대의 경제 상황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시장 변화: 전통적인 약재 거래 방식에서 완제품 거래가 늘어나는 등 근대화에 따른 시장의 변화 양상도 포착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원시 시장'의 현대적 생존: 대구 약령시를 '조선의 자랑'이자 '원시 시장' 중 하나로 보면서도, 현대 자본주의 경제권에 발을 디디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평가하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대구(大邱)장연구회(硏究會) 창립(創立)을보고서=&lt;br /&gt;
구지국(大邱支局)&lt;br /&gt;
&lt;br /&gt;
이활(李活)&lt;br /&gt;
&lt;br /&gt;
민중(民衆)의보건운동(保建運動)은 요사이각계인사(各界人士)들의 크다른관심(關心)거리로어듸서 엇더케 무슨방법(方法)으로『억세인조선(朝鮮)』을건설(建設) 할수잇슬가 함에연구(硏究)를거듭하게되엿다회상(回想)하면 조선(朝鮮)에새로운운동경기(運動競技)가 수입(輸入)된지도 일반문화(一般文化)와갓치 벌서 반세기(半世紀)란역사(歷史)를가지고잇다 그중(中)에는 야구(野球)·정구(庭球)·축구(蹴球)·농구등(籠球等)을비롯하야 유도(柔道)·격검(擊劒)·권투등(拳鬪等)모든경기(競技)가들어와서 장족(長足)의진보(進步)도하엿스러니와 세계적무대(世界的舞臺)를향(向)하야 진출(進出)한선수(選手)도업지안타 그러나 그것은극소수(極小數)인동시(同時)에 지금(至今)까지의 조선(朝鮮)의운동경기(運動競技)는 한갓도회(都會)를중심(中心)으로잘어왓다 물론(勿論)다그럿타는것은아니지만은 현하운경기(現下運競技)그것은 조선(朝鮮)이나 혹(或)은다른나라에서라도 학교(學校)를중심(中心)으로발전(發展)되여오는만큼 교내(校內)의『스포—스맨』들은 완연(宛然)『떼파—트』진열장(陳列場)속에서 고객(顧客)을호리는『마네킹』처럼 상품화(商品化)한교육제도하(敎育制度下)에서 달큼하게 그상품(商品)의가격(價格)을놉혀주엇스며 그학교(學校)를버저나와 실사회(實社會)에취직(就職)을하면 역시(亦是)그와갓튼『마네킹』노릇을하여왓다 이러는동안 조선(朝鮮)의운동경기(運動競技)는 그발생(發生)으맹아(萌芽)가 힘것생장(生長)하기도전(前)에현제도(現制度)의 독아(毒牙)에여지(餘地)업는약관(躍關)을당(當)한절대(絕對)의원인(原因)과 그밧게사회(社會) 경제(經濟) 정치적제정세(政治的諸情勢)의착잡(錯雜)한모순(矛盾)이 너무나철업시이운동경기(運動競技)의발달(發達)까지 조해(阻害)하여왓다그러나 노력(勞力)과인내(忍耐)는갑이잇서이때까지외래품(外來品)이라면 아무비판(批判)도업시 실행(實行)하야오든우리도야구(野球)의전원(全員)이일시(一時)에활약(活躍)할수업는폐(廢)와정구(庭球)의시후(時候)에대(對)한불편(不便)과『꼴프』의귀족적(貴族的)인것등(等) 모든운동(運動)의단점(短點)만을빼고 장점(長點)만을취(取)하야 조선적운동(朝鮮的運動)을창출(創出)하려는이이 경성(京城)서는중앙체육연구소(中央體育研究所)가생(生)기고 금반대구(今般大邱)에서『장』연구회(硏究會)가생(生)기게된것이다&lt;br /&gt;
&lt;br /&gt;
장이란북조선(北朝鮮)의궁벽(窮僻)한지대(地帶)의인사(人士)들은 잘알지못할는지모르나이장만은 오래동안 우리조선(朝鮮)으로부터 그들의자손(子孫)인우리들에게부(傅)하아은 국기(國技)의하나이다물론(勿論) 국기(國技)란단순(單純)한의미(意味)로서만필자(筆者)가그것을추장(推獎)하는것은인니다 딸아서 운동(運動)의영향(影響)이문화창조(文化創造)에잇더한역할(役割)을한다는것을새로히논(論)하려는것도안니다&lt;br /&gt;
&lt;br /&gt;
대구지국(大邱支局) 이(李) 활(活)&lt;br /&gt;
&lt;br /&gt;
그러나일반문화(一般文化)가 그지리(地理)와풍토(風土)에영향(影響)되는바만흔것과가티운동경기(運動競技)도 또한그러히다 그것은『필랜드』사람들이『스켓틩』을잘하는것과『낙위(諾威)』사람의『스키-』를잘하는것이라든지『정말(丁抹)』사람의체조(體操)기튼것이 이점(點)을잘실증(實證)하고잇다 그러면조선(朝鮮)에는 조선적(朝鮮的)인자연세력(自然勢力)도 그러하러니와 더욱이 금일(今日)의사회적경제적(社會的經濟的)모든조건(條件)이 조선인(朝鮮人)에적합(適合)한것이안니면 안될것으다 그래서 최소(最少)의노력(努力)으로최대(最大)의 효과(効果)를발현(發現)치안으면안될것이다&lt;br /&gt;
&lt;br /&gt;
아에우리는생각한다 오날날까지조선(朝鮮)에수입(輸入)된운동경기(運動竸技)의종목(種目)은그대(臺)를매거(枚擧)키난(難)하나 그중(中)한가지도 우리에게 적합(適合)한것이업고 더욱이농민(農民)들에게 추장(推獎)할만힌운동(運動)은업섯다 그러나이장만은 오날날까지 그들농민(農民)의손에서전(傳)해왓다 그러면서도그진정가치(眞正價値)를돌낫든것이 오날이야 사계(斯界)의권위제씨(權威諸氏)가 적년연구(積年硏究)를거듭하야 발표(發表)한결과(結果)를보면 운동(運動)으로시 제일망각(第一忘却)치못할생리학상(生理學上)으로보아 전체(全體)가균형적(均衡的)으로활동(活動)되고 경제적(經濟的)으로도 기구(器具)를작만히는데 돈이들지안코 어느곳에서든지『장채』를직만하고『장방울』을다드무면논바닥에서나 밧기운데서라도 할수잇는농민본위(農民本位)의운동(運動)이라고한다 그리고다른운동경기(運動競技)가티『씨—슨』이잇는것도안니고 춘하추동(春夏秋冬)어느때라도 되는경기(競技)인즉 농번기(農繁期)는 못히드라도 농한기(農閑期)갓트면 그들의육체(肉體)를 하련(鍜鍊)하는데 매우적당(適當)한것이다 수(數)만흔경기중(竸技中)에능(能)히경제조건(經濟條件)이 어느정도(程度)까지용인(容認)한다하여도 그들의게생전(生前)듯자못하든말로『핸드뽈』이니『꼴』이니『라인』이니하여보아도 결(决)크그들에게취미(趣味)가잇슬이(理)가만무(萬無)하고취미(趣味)가업스면 그들에게발전(發展)될이(理)도만무(萬無)한것이다 그러나『장』연구회동인(硏究會同人)들의말을들으면경기(竸技)에계산(計算)하는용어(用語)까지도순조선(純朝鮮)말로한다는것의경하(慶賀)할일이다 이『장치기』를국기(國技)로서추장(推獎)하야세계(世界)에널니선전(宣傳)하는것도좃치만은먼저안으로그들이이국기(國技)를직혀왓는만큼 그들에게조직적(組織的)으로보급(普及)하라 그리서조선농민(朝鮮農民)의경기(競技)를만들고 따라 세계(世界)의농민대중(農民大衆)에게 보급(普及)식하라!그래서『장』연구회(硏究會)의본래(本來)의사명(使命)을다하기를바란다(종(終))&lt;br /&gt;
&lt;br /&gt;
==주요 내용 요약==&lt;br /&gt;
배경: 조선에 수입된 야구, 축구, 유도 등 서양식 운동 경기는 학교 중심, 도시 중심으로 발전하며 '상품화'되었고, 농민 등 대중에게 적합하지 않은 것이다.&lt;br /&gt;
&lt;br /&gt;
'장치기'의 가치: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 **'조선적 운동'**을 창출하려는 노력으로 경성에서는 중앙체육연구소가, 대구에서는 '장' 연구회가 생긴 것이다. '장'은 조선의 국기(國技) 중 하나로, 농민의 손에서 전해 내려온 것이다. 생리학적으로 전신 균형 활동이 가능하고, 경제적으로 기구가 필요 없어 비용이 들지 않으며, 논바닥이나 밭에서도 가능하여 농민 본위의 운동이라고 한다. 계절을 타지 않고 농한기에 육체 단련에 매우 적합하며, 경기 용어까지 순 조선말을 사용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연구회의 사명: 연구회 동인들에게 '장치기'를 국기로 추장(추천)하여 세계에 선전하는 것도 좋지만, 먼저 이 국기를 지켜온 농민들에게 조직적으로 보급하여 '조선 농민의 경기'를 만들고 나아가 세계 농민 대중에게 보급해야 한다는 사명을 부여하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분석 및 특징==&lt;br /&gt;
민족주의적 시각: 서구 문물인 스포츠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한국의 전통 운동인 '장치기'의 토착적, 민족적 가치를 재조명하려는 의도가 뚜렷한 것이다.&lt;br /&gt;
&lt;br /&gt;
대중성/실용성 강조: '장치기'의 장점을 경제적 부담 없음, 장소 제약 없음, 계절 제약 없음, 쉬운 용어 등 농민 대중에게 적합한 실용성에 초점을 맞춰 설명하고 있다.&lt;br /&gt;
&lt;br /&gt;
'마네킹' 비유: 현대 교육 제도가 배출하는 스포츠맨을 '떼파-트 진열장의 마네킹'에 비유하며, 당시 상업화된 교육 및 스포츠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드러내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노신추도문(魯迅追悼文)=&lt;br /&gt;
(일(一))&lt;br /&gt;
&lt;br /&gt;
이(李) 육(陸) 사(史)&lt;br /&gt;
&lt;br /&gt;
『아(阿)Q정전(正傳)』의 작자(作者)로서 세계적작가(世界的作家)이며 중국신문학(中國新文學)의 최고봉(最高峰)인 노신(魯迅)이지난십구일(十九日) 오전오시(午前五時)에상해(上海)에서 숙아(宿疴)로 영면(永眠)하엿다는 실음(實音)이전(傳)한지 삼일(三日)되는날에 우리는 간단(簡單)한일문(一文)을 비러 삼가추도(追悼)의뜻을 표(表)하거니와 만년(晩年)에그의 정치적불우(政治的不遇)로인(因)하야 문학자(文學者)로서의 성명(聲名)조차가 우리에게 널니퍼지지못한것을 더유감(遺憾)으로생각한다.　　　　 (일(一) 기(記) 자(者))&lt;br /&gt;
&lt;br /&gt;
일구삼이연육월초(一九三二年六月初) 어느토요일(土曜日)아츰이엿다 식관(食舘)에서나온 나와M은 네거리의 담배가가에서조간신문(朝刊新聞)을 사서들고 근육신경(筋肉神經)이떨니도록 굴근활자(活字)를 함숨에나려읽은것은 당시중국과학원부주석(當時中國科學院副主席)이요 민국혁명(民國革命)의 원로(元老)이든양행불(楊杏佛)이 남의사원(藍衣社員)에게 암살(暗殺)을당(當)하엿다는 기사(記事)이엿다.&lt;br /&gt;
&lt;br /&gt;
우리들은 거리마다 삼엄(森嚴)하게늘어선 불란서공무국(佛蘭西工務局) 순경(巡警)들의예리(銳利)한눈초리를 등으로하나 갓득늣기면서 여반로(侶伴路)의 서국(書局)까지을동안은 침묵(沈默)이 계속(繼續)되엿다&lt;br /&gt;
&lt;br /&gt;
문(門)안에 들어서자마자 편집원(編輯員)R씨(氏)는 우리들에게 다음과가튼말을 들여주엇다.&lt;br /&gt;
&lt;br /&gt;
중국좌익작가연맹(中國左翼作家聯盟)의 발안(發案)에의(依)하야 전세계(全世界)의 진보적(進步的)인 학자(學者)와 작가(作家)들이 상해(上海)에모혀서중국(中國)의 문화(文化)를 옹호(擁護)할대회(大會)를그해팔월(八月)에 갓게 된다는것과이에 불안(不安)을 늣기는 국민당통치자(國民黨統治者)들이 먼저 진보적작가진영(進步的作家陣營)의 중요분자(重要分子)인 반재년(潘梓年)(현재남경유폐(現在南京幽廢))과 인제는 고인(故人)이된 여류작가(女流作家) 정영(丁玲)을 체포(逮捕)하여행방(行方)을 불명(不明)케한것이며 여기동정(同情)을 가지는 송경령여사(宋慶齡女史)를 중심(中心)으로한 일련(一聯)의 자유주의자(自由主義者)들과 작가연맹(作家聯盟)이 맹렬(猛烈)한 구명운동(救命運動)을한사실(事實)이며 그것이 국민당통치자(國民黨統治者)들의 눈쌀에 거슬려서 양행불(楊杏彿)이 희생(犧牲) 된것과 그외(外)에도 송경령(宋慶齡) 채원(蔡元) 배(培) 노신등등(魯迅等等) 상해(上海)안에서만삼(三) 십명(十名)에갓가운 지명지사(知名之士)들이 남(藍) 의사(衣社)의『뿔랙·리스트』에 올라잇 다는것이엿다.&lt;br /&gt;
&lt;br /&gt;
그리고 그뒤삼일(三日)이 지난후(後)R씨(氏)와 내가탄자동차(自動車)는 만국빈의사(萬國殯儀社)아페다엇다,간단(簡單)한 소향(燒香)의예(禮)가 끗나고도라설때 젊은두여자(女子)의수원(隨員)과함게드러오는송경령여사(宋慶齡女史)의일행(一行)과가티 연회색(軟灰色)두루막에 검은『마괘아(馬掛兒)』을 입은중년(中年)늙은이생화(生化)에 싸인관(棺)을 붓들고 통곡(痛哭)을하든그를 나는문득 노신(魯迅)인것을알엇스며 엽헤섯든 R씨(氏)도 그가노신(魯迅)이란것을 말하고난 십분(十分)쯤뒤에 R씨(氏)는나를 노신(魯迅)에게소개(紹介)하여주엇다&lt;br /&gt;
&lt;br /&gt;
그때노신(魯迅)은 R씨(氏)로부터 내가조선청년(朝鮮靑年)이란것과 늘한번대면(對面)의기회(機會)를가지려고 햇드란말을듯고외국(外國)의선배(先輩)압히며 처소(處所)가 처소(處所)인만치 다만 근신(謹愼)과공손(恭遜)할뿐인나의손을 다시한번 잡아줄때는그는매우 익숙하고 친절(親切)한친구이엿다&lt;br /&gt;
&lt;br /&gt;
아!그가벌서 오십육세(五十六歲)를일기(一期)로 상해시고탑구호(上海施高塔九號)에서 영서(永逝)하엿다는 부보(訃報)를바들때에 암연(暗然)한줄기 눈물을지우느니 엇지조선(朝鮮)의 한사람후배(後輩)로써 이붓을잡는나뿐이랴&lt;br /&gt;
&lt;br /&gt;
(이(二))&lt;br /&gt;
&lt;br /&gt;
이육사(李陸史)&lt;br /&gt;
&lt;br /&gt;
중국문학사상(中國文學史上)에남긴 그의 위치(位置)『아(阿)Q의 정전(正傳)을 다읽고낫슬때나는 아즉까지 아(阿)Q의 운명(運命)이걱정되여 못견듸겟다』고한『로망·로—랑』의 말과가티 현대중국문학(現代中國文學)의 아버지인 노신(魯迅)을&lt;br /&gt;
&lt;br /&gt;
이해(理解)하기 위(爲)해서는 우리는 먼저 아(阿)Q의 정전(正傳)을 이해(理解)하지안흐면 안된다 그러나 지금의 중국(中國)의 아(阿)Q들은 벌서『로망·로—라』으로하야금 그운명(運命)을 걱정할 필요(必要)는 업시되엿다실(實)로 수만흔 아(阿)Q들은 벌서 자신(自身)들의 운명(運命)을 열어갈길을노신(魯迅)에게서배웟다 그래서중국(中國)의 모든근로층(勤勞層)들은 남경로(南京路)의『아스필트』가자신(自身)들의 발미테 흔들리는것을늣기며 시고탑로신촌(施高塔路新邨)의구호(九號)로그들이가젓든 위대(偉大)한문호(文豪)의최후(最後)를애도(哀悼)하는마음들은 황포탄(黃浦灘)의붉은파도(波濤)와가티 밀려가고잇는것이다&lt;br /&gt;
&lt;br /&gt;
그럼으로 아(阿)Q시대(時代)를 고찰(考察)하여보는데따라서 노신정신(魯迅精神)의 삼단적변천(三段的變遷)과아울러 현대중국문학(現代中國文學)의 발전과정(發展過程)을 알어보는것도그를추억(追憶)하는의미(意味)에서 그다지 허무(虛無)한 일은아닐것이다,&lt;br /&gt;
&lt;br /&gt;
중국(中國)에는 고래(古來)로 소설(小說)이라는오늘날우리가 보는것과가튼 완전(完全)한예술적형태(藝術的形態)는 존재(存在)하지못햇다 삼국연의(三國演義)나 수호지(水滸誌)가아니면홍루몽(紅樓夢)쯤이잇섯고 다소(多少)의전기(傳記)가잇섯을뿐으로서 일반교양(一般敎養)잇는집자제(子弟)들은 과거제도(科擧制度)에 화(禍)를바더문어체(文語體)의&lt;br /&gt;
&lt;br /&gt;
고(古)&lt;br /&gt;
&lt;br /&gt;
문(文)만숭상(崇尙)하고백화소설(白話小說)가튼것은속인(俗人)의할일이라햐야나치아는하편소위문단(所謂文壇)은당송팔가(唐宋八家)와팔반(八般)의혼합체(混合體)인상성파(相城派)와사기당(思綺堂)과 원수원(袁隨園)의유파(流派)를따라가는 사륙변체문(四六騈體文)과황산곡(黃山谷)을본존(本尊)으로하는 강서파등등(江西派等等)이 당시정통파(當時正統派)의문학(文學)으로서 과장(誇張)과 허위(虛偽)와 아유(阿諛)로서 고전문학(古典文學)을 모방(模倣)한데지나지못하엿스며 새로운사회(社會)를 창생(創生)할하등(何等)의 힘도가지지못한것은 미루어알기도 어렵지안흔 분위기(雰圍氣)속에 중국문학사상(中國文學史上)에 찬연(燦然)한봉화(烽火)가 일어난것은일구일오년(一九一五年) 잡지(雜誌)『신청년(新靑年)』의 창간(創刊)이그것이다&lt;br /&gt;
&lt;br /&gt;
이것이처음발간(發刊)되자 당시(當時)『아메리카』에잇든호적지박토(胡適之博土)는『문학개량추의(文學改良蒭議)』라는『문학혁명론(文學革命論)』을일구일칠년신연호(一九一七年新年號)에 게재(揭載)하야진독수(陳獨秀)가 이에찬의(賛意)를표(表)하고 북경대학(北京大學)을 중심(中心)으로한 진보적(進步的)인교수(敎授)들이 합류(合流)하게되자 종래(從來)의고문가(古文家)들은 이운동(運動)을방해(防害)코저 가진야비(野卑)한 정치적수단(政治的手段)을 써도보앗스나 일구팔년사월호(一九八年四月號)에 노신(魯迅)의『광인일기(狂人日記)』란 백화소설(白話小說)이&lt;br /&gt;
&lt;br /&gt;
발(發)&lt;br /&gt;
&lt;br /&gt;
표(表)되엿슬때는 문학혁명운동(文學革命運動)은 실천(實踐)의거대보무(巨大步武)를옴기게되고 벌서고문가(古文家)들은 그추악(醜惡)한꼬라를 감주지안흐면안되엿다는것은 그후(後)얼마뒤에 노신(魯迅)이광동(廣東)에갓슬때에어&lt;br /&gt;
&lt;br /&gt;
떤흥분(興奮)한청년(靑年)은 그를마지하는문장(文章)속에『광인일기(狂人日記)』를 처음읽엇슬때 문학(文學)이란것이 무엇인지몰랏든나는 차차읽어나려가면서이상(異常)한흥분(興奮)을 늣겻다 그래서 동무를만나기만하면 곳붓들고말하기를——중국(中國)의문학(文學)은 이제바야흐로 한시대(時代)를 짓고잇다 그대는『광인일기(狂人日記)』를 읽어보앗는가 또거리를거러가면 길가는사람이라도붓들고 내의견(意見)을발표(發表)하리라고생각한적도잇섯다……』(노신재광동(魯迅在廣東))&lt;br /&gt;
&lt;br /&gt;
이문제(問題)의소설(小說)『광인일기(狂人日記)』의내용(內容)은 한개망상광(妄想狂)의 일기체(日記體)의소설(小說)로서 이주인공(主人公)은 실(實)로대담(大膽)하게또명확(明確)하게 봉건적(封建的)인 중국구사회(中國舊社會)의 악폐(惡弊)를통매(痛罵)한다 자기(自己)의 이웃사람은 물론(勿論)말할것도업고 특(特)히자기가정(自己家庭)을 격렬(激烈)히 공격(攻擊)하는것이다 가정(家庭)—가족제도(家族制度)라는것이중국봉건사회(中國封建社會)의 사회적단위(社會的單位)로서일반(一般)에열마나한 해독(害毒)을끼처왓는가.봉건적가족제도(封建的家族制度)는 고형화(固型化)한유교류(儒敎流)의&lt;br /&gt;
&lt;br /&gt;
종(宗)&lt;br /&gt;
&lt;br /&gt;
법사회관념하(法社會觀念下)에 당연(當然)히붕괴(崩壞)돠여야할것이면서 붕괴(崩壞)되지못하고 근대적사회(近代的社會)의성장(成長)에 가장근본적(根本的)인 장애(障碍)로되여잇는 날근도덕(道德)과 인습(因襲)을 여지(餘地)업시 통매(痛罵)햇다,이에『광인일기(狂人日記)』중(中)에 한절(節)을 초(抄)하면『나 는 역사(歷史)를 뒤적거려 보앗다 역사(歷史)란건 어느시대(時代)에나 인의(仁義) 도덕(道德)이란몃줄로 치더치덕씨여 저잇섯다 나는 밤잠도안자고 딍굴딍굴러가며 생각하여보 앗스나 겨우글자와 글자사이 에서『사람을먹는다』는 몃자 가쓰여잇섯슬뿐이엿다』&lt;br /&gt;
&lt;br /&gt;
이가티추악(醜惡)한 사회면(社會面)을폭로(暴露)한다음 오는시대(時代)의건설(建設)은 젊은사람들의손에 맛걱저야한다는것을암시(暗示)하면서 이소설(小說)의일편(一篇)은『어린이를구(救)하자』는 말로서끗을막엇다.실(實)로이한말은 당시(當時)의『어린이』인 중국청년(中國靑年)들에게는 사상적(思想的)으로는『폭탄선언(暴彈宣言)』이상(以上)으로 충격(衝擊)을주엇스며이러한작품(作品)이 백화(白話)로쓰여지는데 따라 문학혁명(文學革命)이완전(完全)히승리(勝利)의 개가(凱歌)를 부르게된공적(功績)도 태반(太半)은노신(魯迅)에 돌려야하는것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삼(三))&lt;br /&gt;
&lt;br /&gt;
이육사(李陸史)&lt;br /&gt;
&lt;br /&gt;
『광인일기(狂人日氣)』의다음 연속(連續)해나온작품(作品)으로『공을사(孔乙巳)』『약(藥)』『명일(明日)』『일개소사건(一個小事件)』『두발적고사(頭髮的故事)』『풍파(風波)』『고향(故鄕)』등(等)은모다 신청년(新靑年)을통(通)해서세상(世上)에물의(物議)를 이르켯스나 그후일구이일년(後一九二一年) 북경신보문학부간(北京新報文學副刊)에그유명(有名)한『아(阿)Q정전(正傳)』이 연재(連載)되면서부터는 노신(魯迅)은자타(自他)가공인(共認)하는 문단제일인적작가(文壇第一人的作家)엿다.&lt;br /&gt;
&lt;br /&gt;
그리고 이러한대작(大作)은 모다신해혁명전후(辛亥革命前後)의&lt;br /&gt;
&lt;br /&gt;
봉(封)&lt;br /&gt;
&lt;br /&gt;
건사회(建社會)의생활(生活)을 그린것으로 어떠케필연적(必然的)으로 붕괴(崩壞)하지안흐면안될 특징(特徵)을가젓는가를묘사(描寫)하고 어떠케새로운사회(社會)를 살어갈가를 암시(暗示)하고잇다.뿐만아니라 당시(當時)의혁명(革命)과 혁명적(革命的)인사조(思潮)가 민중(民衆)의심리(心理)에 생활(生活)의『데테일슨』에 어떠케표현(表現)되는가를 가장『레알』하게묘사(描寫)한것이다.더구나 그는 농민작가(農民作家)라고할만치 농민생활(農民生活)을그리는데 교묘(巧妙)하다는것도 한가지조건(條件)이되겟지만은 그의소설(小說)에는주장(主張)이개념(槪念)에 흐른다거나 조금도무리(無理)가업는것은 그의작가적수완(作家的手腕)이 탁월(卓越)하다는것을 말하지안홀수업다.&lt;br /&gt;
&lt;br /&gt;
그리고 그의작품(作品)은 늘 농민(農民)을주인공(主人公)으로하는것과 때로는『인테리』일지라도 예(例)를들면『공을사(孔乙巳)』의 공을사(孔乙巳)나『아(阿)Q정전(正傳)』의아(阿)Q가모다 일맥(一脈)이상통(相通)하는 성격(性格)을가지는것이니 공을사(孔乙巳)는 구시대(舊時代)의지식인(知識人)으로 시대(時代)에떠러저서 무슨일에도 쓰여지지못하고기품(氣品)만은노펏스나 생활력(生活力)은업고걸인(乞人)이되야 선술집술상대(臺)에 일금십구조(一金十九吊)의주채(酒債)가 어느때까지쓰여저잇는대로 언제인지&lt;br /&gt;
&lt;br /&gt;
행(行)&lt;br /&gt;
&lt;br /&gt;
방(方)이 불명(不明)된채로 나중에죽어젓든것이라든지『룸펜』농민(農民)인 일용노동자아(日傭勞働者阿)Q가 또한 쑥스러운년석으로혁명혁명(革命革命)떠들어놋코는 그것이몹시유쾌해서 반취(半醉)한기분(氣分)이 폭동대(暴動隊)의일군(一群)에 참가(參加)는하려고하엿스나 결국(結局)헛풍만치고 아무것도못하다다가 때마츰 일어난 폭도(暴徒)의약탈사건(掠奪事件)에 도당(徒黨)으로오해(誤解)되여(피(彼)의평소(平素)삼가지못한 언동(言動)에의(依)하야)피살(被殺)되는 아(阿)Q의성격(性格)은 그때중국(中國)의 누구라도가 전부혹(全部或)은일부분식(一部分式)은 소유(所有)하고잇섯든것이다다시말하면 아(阿)Q나공을사(孔乙巳)가모다사고(思考)와행동(行動)이 루—즈하고 확호(確乎)한한개의 정신(精神)도업스며 우약(愚弱)하면서도 몹시건방지고 남에게한개쥐여질리면 아무런반항(反抗)도못하면서 남이자신(自身)을 연민(憐憫)하면 제도량(度量)이커서 남이못덤비는것이라고제대로도취(陶醉)하야 남을 되는대로해(害)치는 무지(無知)하고우수면서도 가엽고 괴팩스러운것을 노신(魯迅)은그『레알리스틕』한문장(文章)으로폭로(暴露)한것이 특징(特徵)이엿스니 당시(當時)『아(阿)Q정전(正傳)』이발표(發表)될때&lt;br /&gt;
&lt;br /&gt;
평(平)&lt;br /&gt;
&lt;br /&gt;
소노신(素魯迅)과 교분(交分)이좃치못한사람들은 모다자기(自己)를모—델로 고의(故意)로쓴것이라고들 떠드는자(者)가잇은것을 보아도알수가잇는것이다&lt;br /&gt;
&lt;br /&gt;
그래서당시중국(當時中國)은 시대적(時代的)으로『아(阿)Q시대(時代)』이엿스며 노신(魯迅)의『아(阿)Q정전(正傳)』이 발표(發表)될때는 비평계(批評界)를비롯하야 일반지식군(一般知識群)들은『아(阿)Q상(相)』이라거나『아(阿)Q시대(時代)』라는말을평상대화(平常對話)에사용(使用)하기를 항다반(恒茶飯)으로하게된것은 중국문학사상(中國文學史上)에남겨노흔노신(魯迅)의 위치(位置)를 짐작하기에 조흔 한개의재료(材料)이거니와그의작가(作家)로서의 태도(態度)를통(通)하야 일관(一貫)하여잇는 노신정신(魯迅精神)을 다시한번음미(吟味)해보는데 적지안흔흥미(興味)를갓게된다는것은 오늘날우리의조선문단(朝鮮文壇)에는 누구나할것업시 예술(藝術)과정치(政治)의 혼동(混同)이니 분립(分立)이니하야 문제(問題)가엇지보면 결말(决末)이난듯도하고 어찌보면 미해결(未解决)그대로 잇는듯도한 현상(現狀)인데 노신(魯迅)가티 자기신념(自己信念)이 구든사람은이예술(藝術)과정치(政治)란것을 어떠케해결(解决)하엿는가?이문제(問題)는 그의작가(作家)로서의 출발점(出發點)부터 구명(究明)해야한다.&lt;br /&gt;
&lt;br /&gt;
노신(魯迅)은&lt;br /&gt;
&lt;br /&gt;
본(本)&lt;br /&gt;
&lt;br /&gt;
내의사(來醫師)가 되려고하엿다 그것은자기(自己)의『할일』이 무엇이라는것을 알엇기때문이엇다 물론(勿論)그때의 자기(自己)의『할일』이란것은 민족개량(民族改良)이라는 신념(信念)이엿든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후년(後年)『납함(吶喊)』서문(序文)에 다음가티써다.&lt;br /&gt;
&lt;br /&gt;
『나의학적(學籍)은 일본(日本)어느 지방(地方)의 의학전문학교(醫學專門學校)에 두엇다 나의 꿈은 이것으로 매우 아름답 고 만족(滿足)햇다 졸업(卒業)만하고 고(故) 국(國)에 도라오면 아버지와가티 치료(治療)못하는 병인(病人)을살리고 전(戰) 쟁(爭)이나면 출정(出征)도하려니와 국(國) 인(人)의 유신(維新)에대(對)한 신앙(信仰)에까지 나어갈것……』이라고&lt;br /&gt;
&lt;br /&gt;
이것은물론(勿論) 소년(少年)다운노신(魯迅)의로맨틕한 인도주의적흥분(人道主義的興奮)이엿겟지만은 이꿈도결국(結局)은 깨여지고말엇다.&lt;br /&gt;
&lt;br /&gt;
——의학(醫學)은결(决)코 긴요(緊要)하지안타 우약(愚弱)한 국민(國民)은 체격(體格)이 아모 리 조타고해도 또 아모리강(强) 장(壯)해도 무의미(無意味)한 구경거리나 또는 구경군이 되는박게는아 무것도아니다—중략(中略)—그럼으로 긴요(緊要)한것은 그들을 정신적(精神的)으 로 잘개조(改造)할것은 무엇일가나 는그때당연(當然) 문예(文藝)라고생각햇다 그리고 문예운동(文藝運動)을 제창(提唱)하기 로햇다(납함서문(吶喊序文))&lt;br /&gt;
&lt;br /&gt;
이리하야 그가 당시동경(當時東京)에망명(亡命)해잇는 중국(中國)사람들의 기관지(機關紙)인『절강조(浙江潮)』『하남(河南)』등(等)에 쓰든과학사(科學史)나 진화론(進化論)의 해설(解說)을 집어치우고 문학서적(文學書籍)을 번역(飜譯)한것은희랍(希臘)의 독립운동(獨立運動)을 원조(援助)한『빠이론』과 파란(波蘭)의복수시인(復讐詩人)『아담·미케뷧치』『향가리』의 애국시인(愛國詩人)『베트피·산더—』『필립핀』의문인(文人)으로 서반아정부(西班牙政府)에 사형(死刑)바는『리샬』등(等)의 작품(作品)이엿다.&lt;br /&gt;
&lt;br /&gt;
(사(四))&lt;br /&gt;
&lt;br /&gt;
이육사(李陸史)&lt;br /&gt;
&lt;br /&gt;
그리고이것은 노신(魯迅)의 문학행정(文學行程)에잇서서 가장초기(初期)에 속(屬)하는것이지만은 이러한번역(飜譯)까지라도그의 일정(一定)한목적(目的) 즉정치적목적(即政治的目的)미테 수행(遂行)된것을 엿볼수잇는것이며 우에말한『광인일기(狂人日記)』의『어린이를구(救)하자』는말도 순결(純潔)한 청년(靑年)들에의(依)하야 새로운중국(中國)을 건설(建設)하자는 그의이상(理想)을&lt;br /&gt;
&lt;br /&gt;
단적(端的)으로 고백(告白)한것으로써 이말은당시일반청년(當時一般靑年)들에게 무거운 책임감(責任感)을깨닷게한것은물론(勿論) 이래기천년(爾來幾千年)동안의 봉건사회(封建社會)로부터 청년(靑年)을해방(解放)하랴는 슬로—간으로 널리쓰여젓고 사실(事實)그뒤의 중국청년학생(中國靑年學生)들은 모든대중적사회운동(大衆的社會運動)의최전선(最戰線)에서 활발과감(活潑果敢)한 지도(指導)와조직(組織)을하엿스며 그유명(有名)한 오사운동(五四運動)이나 오주운동(五州運動)이나 국민혁명(國民革命)까지도 늘최전선(最前線)에서서 대중(大衆)을지도(指導)한것은 이들청년학생(靑年學生)이엿다&lt;br /&gt;
&lt;br /&gt;
그럼으로 노신(魯迅)에잇서서는 예술(藝術)은정치(政治)의 노예(奴隸)가 아닐뿐아니라 적어도예술(藝術)이 정치(政治)의 선구자(先驅者)인 동시(同時)에혼동(混同)도 분립(分立)도아닌즉(即) 우수(優秀)한작품(作品) 진보적(進步的)인 작품(作品)을 산출(產出)하는데만 문호(文豪) 노신(魯迅)의지위(地位)는노퍼갓고 아(阿)Q도 여기서비로소탄생(誕生)하엿스며 일세(一世)의 비평가(批評家)를도 감(敢)히 그에게는 함부로 머리를 들지못하엿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여기에 한가지 조흔예(例)가잇다 일구이팔년경(一九二八年頃) 무한(武漢)을쪼겨와서 상해(上海)에서 태양사(太陽社)를조직(組織)한 청년비평가(青年批評家) 전행촌(錢杏村)이 때마춤 푸로문학론(文學論)이 드셀때인만큼 노신(魯迅)을 대담(大膽)하게&lt;br /&gt;
&lt;br /&gt;
공격(攻擊)을 시작(始作)해보앗다그소론(所論)에 의(依)하면노신(魯迅)의 작품(作品)은 비계급적(非階級的)이다 아(阿)Q에게어데 계급성(階級性)이잇느냐는것이다.&lt;br /&gt;
&lt;br /&gt;
물론(勿論)그것은 정당(正當)한말이다,노신(魯迅)의작품(作品)에서 우리는눈딱고보아도 푸로레타리아적특성(的特性)은 조금도 볼수가 업는것은 사실(事實)이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우리가 한사람의작품(作品)을 비평(批評)할때는 그시대적배경(時代的背景)을고려(考慮)하지안흘수는업는것이니 노신(魯迅)이작가(作家)로활동(活動)을 하고잇슬때는중국(中國)에는 오늘날우리가 정의(定義)를나릴수잇는 푸로레타리아는 업슬뿐아니라 그때쯤은 뿌르조아민주주의적(民主主義的)인 정치사조(政治思潮)조차도아즉계선(界線)이분명(分明)하지못하엿다는것은뿌르조아혁명(革命)이라는 소위국민혁명(所謂國民革命)도 정직(正直)하게말하자면 사오운동(四五運動)을 전초전(前哨戰)으로한것만큼 여기서 역시중국(亦是中國)의 비상가(批詳家)인병신(丙申)은자미잇는말을하고잇다&lt;br /&gt;
&lt;br /&gt;
『그가현재(現在) 중국좌익작가연맹(中國左翼作家聯盟)을지지(支持)하고잇다해서 그의『사오(四五)』전후(前後)의&lt;br /&gt;
&lt;br /&gt;
작품(作品)을 푸로문학(文學)이라고 지목(指目)할것은아니&lt;br /&gt;
&lt;br /&gt;
다 그러나 그를우수(優秀)한 농민작가(農民作家)라고 하는것이 타당(妥當)타고—』그러타 이말은 어느정도(程度)까지&lt;br /&gt;
&lt;br /&gt;
정당(正當)에 가까운말로서 그를푸로작가(作家)가아니고 농민작가(農民作家)라고해서작가노신(作家魯迅)의 명예(名譽)를 더럽힐조건(條件)은 되지못하는것이다 다만문제(問題)는 그가얼마나 창작(創作)에 잇서서진실(眞實)하게 명확(明確)하게 묘사(描寫)하는태도(態度)를 가지는가 그의한말을 써보기로하자&lt;br /&gt;
&lt;br /&gt;
『——현재(現在) 좌익작가(左翼作家)는 훌륭한자신(自身)들의 문학(文學)을 쓸수잇슬가?생각컨대 이것은 매우곤란(困難)하다.현재(現在)의 이런 부류(部類)의 작가(作家)들은 모다『인테리』다 그들은 현실(現實)의 진실(眞實)한 정형(情形)은쓸려고해도 용이(容易)치안타 어떤사람이 일즉 이런 문제(問題)를제출(提出)한것이잇섯다『작가(作家)가 묘사(描寫)하는것은 반드시 자기(自己)가 경험(經驗)한것이라야만될것인가?그러나 그는 스스로 답(答)하기를반드시 안그래도조타웨러러냐하면 그들은 잘 추찰(推察)할수가잇스므로 절도(窃盜)하는장면(塲面)을 묘사(描寫)하랴면 작가(作家)는 반드시 자신(自身)이 절도(窃盜)질할 필요(必要)도업고 간통(姦通)하는&lt;br /&gt;
&lt;br /&gt;
장면(塲面)을 묘사(描寫)할 필요(必要)를늣길때 작가(作家) 자신(自身)이간통(姦通)할 필요(必要)도 업다고』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작가(作家)가 구사회(舊社會)속에서 생장(生長)해서그 사회(社會)의 모든 일을 잘알고 그사회(社會)의 인간(人間)들에게 익숙해저서 잇는때문에 추찰(推察)이되는것이다 그러나 종래(從來)아무런 관계(關係)도업는새사회(社會)의 정형(情形)과인물(人物)에 대(對)해서는 작가(作家)가무능(無能)하다면 아마그릇된 묘사(描寫)를할것이다 그럼으로 푸로문학가(文學家)는 반드시 참된현실(現實)과 생명(生命)을 가티하고 혹(或)은 보다기피현실(現實)의맥박(脈搏)을 감수(感受)하지안흐면 안된다고하면서 또다시말을 계속(繼續)하는것이다.&lt;br /&gt;
&lt;br /&gt;
그러나구사회(舊社會)를 조그만치공격(攻擊)하는작품(作品)일지라도 만약(萬若)그결점(缺點)을 분명(分明)히모르고 그병근(病根)을투철(透澈)히파악(把握)치못하면 그것은유해(有害)할뿐이다 애석한일이나마현재(現在)의푸로작가(作家)들은 비평가(批評家)까지도 왕왕(往往) 그것을못한다 혹사회(或社會)를 정시(正視)해서 그진상(眞相)을 알려고도안코 그중(中)에는 상대자(相對者)라고 생각하는편의 실정(實情)도알려고하지안는다.&lt;br /&gt;
&lt;br /&gt;
(오(五))&lt;br /&gt;
&lt;br /&gt;
이육사(李陸史)&lt;br /&gt;
&lt;br /&gt;
차근(車近)한 예(例)로는 얼마전 모지상(某紙上)에 중국문학계(中國文學界)를 비평(批評)한문장(文章)을 한편(篇)보앗는데 중국문학계(中國文學界)를 삼파(三派)에 난워서 먼저창조파(創造派)를 들어 푸로파(派)라하야매우상세(詳細)하게 논급(論及)하고 다음어사사(語絲社)를 소(小)뿌르파(派)라고 조그만치 말한후(後)&lt;br /&gt;
&lt;br /&gt;
신월사(新月社)를 뿌르문학파(文學派)라 해서 겨우 붓 을 대다가만 젊은비평가(批評家)가잇 섯다 이것은 젊은기질(氣質)의 상(相) 대자(對者)라고 생각는파(派)에 대(對)해서 는 무어세(細)□□□고구(考究)할필요(必要)가 업다는뜻을 표명(表明)한것이다 물(勿) 논(論)우리는 서적(書籍)을볼때 상대자(相對者) 의것을 보는것은 동파(同派)의것을 보는안심(安心)과 유쾌(愉快)와 유익(有益)한데 밋치지 못하는것은 사실(事實)이다 그러나 만약(萬若) 일개전투자(一個戰鬪者)라면 나는 생각컨대 현실(現實)과 상대(相對) 자(者)를 이해(理解)하는 편의상(便宜上) 보담 만은 당면(當面)의 상대자(相對者)에 대(對)한 해부(解剖)를 필요(必要)로 하지안으면안 될것이다.옛것을 분명(分明)히 알 고 새로운것에 간도(看到)하고 과(過) 거(去)를 요해(了解)하야 장래(將來)를 추단(推斷) 하는데서만 우리들의 문학적(文學的) 발전(發展)은 희망(希望)이잇다 생각건대 이것만은 현재(現在)와 가튼 환경(環境) 에잇는 작가(作家)들은 부단(不斷)히 노(努) 역(力)할것이고 그래야만 참된작(作) 품(品)이 나오는것이다』라 고&lt;br /&gt;
&lt;br /&gt;
이간단(簡單)한 몃마듸만히 문호노신(文豪魯迅)의 창작(創作)에 대(對)한『모랄』인것이다 이얼마나 우리의 뼈에 사무치고도 남을만한시사(示唆)인고!이리해서&lt;br /&gt;
&lt;br /&gt;
현대중국문단(現代中國文壇)의부(父)이며비평가(批評家)의비평(批評)으로서자타(自他)가 그지위(地位)를 함께긍정(肯定)하든그의작가(作家)로서의 생애(生涯)는 너무나쩔으것이엿스니 일구이육연삼월(一九二六年三月)『이혼(離婚)』이란작품(作品)을 최후(最後)로남긴그는 교수(敎授)로서 작가(作家)로서의 화려(華麗)한 생애(生涯)는 종언(終焉)을고(告)하지 안흐면안될때가왓다 그는 지금부터『손으로쓰기보다는 발로 다라나기가 더밧벗다』&lt;br /&gt;
&lt;br /&gt;
일구이육년(一九二六年) 북양군벌(北洋軍閥)을 배경(背景)오로한 안복파(安福派)의수령(首領) 단기서(段祺瑞)의정부(政府)는 급진적(急進的)인좌파(左派)의 교수(敎授)와우수(優秀)한 지식분자오십여명(知識分子五十餘名) 체포령(逮捕令)을 나렷다 우리노신(魯迅)은 이오십명중(五十名中)의 한사람이엿다 그것은일구이사년(一九二四年) 국민당(國民黨)의 연아용공책(聯俄容共策)이 결정(决定)되야그익년(翌年)가을『뽀로된』등(等)이고문(顧問)으로광동(廣東)에오고『전국민적공동전선(全國民的共同戰線)』이엿든 국민혁명(國民革命)의제일계단(第一階段)인 광동시기(廣東時期)에는 푸로레타라아의 동맹자(同盟者)는 농민도시빈민(農民都市貧民) 소(小)뿌로지식계급(知識階級) 국민적(國民的)뿌르조아지—엿다』&lt;br /&gt;
&lt;br /&gt;
그래서 급진교수(急進敎授)들은 교육부총장(敎育部總長) 군벌정부(軍閥政府)를 육박(肉迫)하엿스며이러한&lt;br /&gt;
&lt;br /&gt;
신흥세력(新興勢力)에 낭패(狼狽)와공포(恐布)를 늣긴군벌정부(軍閥政府)는 이러한교수(敎授)들과 학생(學生)들에게체포령(逮捕令)을나리고 학생(學生)들의행렬(行列)은정부위병(政府衛兵)들의 발포(發砲)로인(因)하야 남여수백여명(男女數百餘名)의 사상자(死傷者)가낫다 그때노신(魯迅)은 북경동교민항(北京東交民巷)의 공사관구역(公使舘區域)의 외국인병원(外國人病院)이나 공장(工塲)안으로 도라단이며 찬물로기아(飢餓)를 참아가면서도 신문(新聞)과 잡지(雜誌)에 기고(寄稿)를하야 군벌정부(軍閥政府)를 맹렬(猛烈)히 공격(攻擊)하얏다 그중(中)에도『국민이래(國民以來) 최암흑일(最暗黑日)에지(誌)』하엿다는 명문(名文)은 단기서(段祺瑞)로하여금 의자(椅子)에나려안게되엿다&lt;br /&gt;
&lt;br /&gt;
——붓으로쓰헛소리는 피로쓴 사실(事實)을 만착(瞞着)하지못한다——중(中) 약(略)——붓으로쓴것이 무슨힘이 잇스랴 실탄(實彈)을쏘는것은 오즉 청년(靑年)의피다(속화개집(續華盖集))&lt;br /&gt;
&lt;br /&gt;
오늘날까지 중국문단(中國文壇)의『막심콜키—』이든그는 지금부터는문화(文化)의전사(戰士)로서『앙리·발뷰스』보다비장(悲壯)한생애(生涯)가 시작(始作)되는것이엿다&lt;br /&gt;
&lt;br /&gt;
그의말과가티&lt;br /&gt;
&lt;br /&gt;
최청흑(最晴黑)한오십일(五十日)이지나고 그는북경(北京)을탈출(脫出)햇다 하문대학(夏門大學)에 초청(招請)을바□갓으나 대학기업가(大學企業家)의 음흉수(陰凶手)것인것을 안그는광동중산대학(廣東中山大學)으로갓다 그러나 일구이육년사월십오일(一九二六年四月十五日) 장개석(蔣介石)의쿠—데타—는 광동일성(廣東一省)만 노동자농민급진지식분자삼천여명(勞働者農民急進知識分子三千餘名)을—하엿 으며 한때는『혁명(革命)의전사(戰士)』라고 간판(看板)을지인노신(魯迅)도상해(上海)로 다라나야만 되엿다여기서우리가 다시한번그에게흥미(興味)보다는 최대(最大)의 경의(敬意)를갓게되는것은 다음의일문(一文)이다&lt;br /&gt;
&lt;br /&gt;
——나의 일종망상(一種妄想)은 깨여젓 다 나는지금까지 때때로낙관(樂觀) 을가젓섯다 청년(靑年)을 압박(壓迫)하고 ——하는것은 대개노인(大槪老人)이다이 들노물(老物)들이 다죽어지면 중국(中國) 은보담더 생기(生氣)잇는것이되리라 고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 르치안은것을 알엇다 청년(靑年)을 ——하는것은 대개(大槪)는 청년(靑年)인 듯하다 또달이 재조(再造)할수업는 생명(生命)과 청춘(靑春)에 대(對)해서 한층(層) 더애낌이업시…(이기집(而己集))&lt;br /&gt;
&lt;br /&gt;
이글은그가 침묵(沈默)하고잇는것을『공포(恐怖)』때문이라고 조소(嘲笑)한 사람에게답(答)한 통신문(通信文)의 일절(一節)로서 이때까지&lt;br /&gt;
&lt;br /&gt;
진화론자(進化論者)이든 그자신(自身)의 사상적립장(思想的立塲)을양기(揚棄)하고 새로운 성장(成長)의 일단계(一段階)로보인것이라고 해석(解釋)해도 틀러지안흘것이다.&lt;br /&gt;
&lt;br /&gt;
그가상해(上海)에 왓슬때는 국민당(國民黨)의 쿠—데타—로 혁명군(革命軍)에서쪼겨온 젊은푸로문학자(文學者)가 만엇다『혁명문학론(革命文學論)』이 효효(囂囂)히 불러지고 실제정치행동(實際政治行動)의 전선(前線)을 떠난그들은 총칼대신에 펜을잡엇다,원기왕성(元氣旺盛)하게 실제공작(實際工作)의경험(經驗)에서 매우견실(堅實)한것도 잇섯스나 때로는 자부적(自負的)인 영웅주의(英雄主義)가 화(禍)를끼치고——에실패(失敗)한 분만(憤瞞)과 극좌적(極左的)인 기회주의자(機會主義者)들은노신(魯迅)을 공격(攻擊)햇다 그러나 그는푸로문학(文學)이란 어떤것인가 또는어찌해야 될것인가를 알리기위(爲)하야 아버지가튼 애무(愛撫)로서『푸레하노프』,『루나챨스키—』들의 문학론(文學論)과『싸벳트』의 문예정책(文藝政策)을번역소개(飜譯紹介)하야 중국(中國)푸로문학(文學)을건설(建設)하고잇는동안에『노신(魯迅)을타도(打倒)치안흐면 중국(中國)에푸로문학(文學)은생기지못한다』는 문학소아병자(文學小兒病者)들은 그자신(自身)들이 먼저너머지고 이제그가마자가고말엇다 이위대(偉大)한중국문학가(中國文學家)의영(靈)아페 고요히머리를숙이면서 나의개인적(個人的)으로 곤란(困難)한정형(情形)에의(依)하야 문호노신(文豪魯迅)의윤곽(輪廓)을뚜렷이그리지못함을 참괴(慚愧)히알며붓을놋키로한다 —요(了)—&lt;br /&gt;
&lt;br /&gt;
==주요 내용 요약==&lt;br /&gt;
추도 배경: 중국 신문학의 최고봉인 루쉰(魯迅)의 서거(1936년 10월 19일)를 추도하며, 작가와의 개인적 인연(1932년 양행불 암살 사건 직후 만국빈의사에서의 만남)을 회상하는 글이다.&lt;br /&gt;
&lt;br /&gt;
문학적 위치 - 아Q 정전: 루쉰 이해의 핵심으로 그의 대표작《아Q정전(阿Q正傳)을 제시하고 있다. '아Q'는 사고와 행동이 나약하고 우매하면서도 건방진, 당시 중국인의 집단적 성격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루쉰은 이 '아Q 상(相)'을 폭로하여 중국 지식 군중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루쉰은 '아Q 시대'를 종식시키고 새로운 중국을 열어갈 길을 제시한 인물로 평가된다.&lt;br /&gt;
&lt;br /&gt;
문학 혁명과 루쉰의 역할: 중국의 고루한 고문학을 비판하고 백화소설(白話小說)을 통해 문학 혁명의 선두에 선 것이다.《광인일기(狂人日記)를 통해 봉건적 가족 제도와 유교의 종법 사회 관념을 통렬히 비판하며 &amp;quot;어린이를 구하자&amp;quot;는 메시지를 던져 청년들에게 혁명적 충격을 주었다.&lt;br /&gt;
&lt;br /&gt;
예술과 정치: 루쉰은 본래 의사(醫師)가 되려 했으나, '우매한 국민은 체격이 강해도 무의미한 구경꾼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으로 정신 개조를 위한 문예 운동으로 전향하였다. 그에게 예술은 정치의 노예가 아니라, 적어도 정치의 선구자였으며, 정치적 목적 아래 수행된 것이다.&lt;br /&gt;
&lt;br /&gt;
후기 생애와 투쟁: 군벌 정부(단기서)와 국민당(장개석)의 탄압을 피해 쫓겨 다니는 비장한 '문화의 전사'로서의 삶을 살았다. 젊은 프로문학 비평가들에게 '비계급적 작가'로 공격받기도 했으나, 그는 현실과의 동떨어짐을 비판하며 진실된 현실을 기반으로 한 창작의 '모랄(도덕성)'을 강조한 것이다.&lt;br /&gt;
&lt;br /&gt;
==분석 및 특징==&lt;br /&gt;
이육사의 지식인 면모: 이육사(본명 이활, 기고명 '이육사(李陸史)')가 당대 중국의 최고 지성 및 정치 상황에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글이다. 루쉰의 문학적, 사상적 변천 과정(의학 → 문예 → 현실 참여)을 심도 있게 분석하고 있다. 루쉰 문학의 핵심 통찰: 루쉰의 작품을 단순히 서사로 보는 것이 아니라, 봉건 사회에 대한 투쟁, 계급성, 지식인의 역할 등 당대 사회 변혁의 맥락에서 분석하는 것이다. 한국 문단에 대한 시사: 글 말미에 '예술과 정치'의 관계에 대해 루쉰의 태도를 재조명하며, 당시 조선 문단에서 첨예하게 논의되던 이 문제에 대한 이육사의 입장을 간접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수필문외한(隨筆門外漢)의수첩(手帖)=&lt;br /&gt;
문(門) 외(外) 한(漢) 의 수(手) 첩(帖)&lt;br /&gt;
&lt;br /&gt;
(칠(七))&lt;br /&gt;
&lt;br /&gt;
이(李) 육(陸) 사(史)&lt;br /&gt;
&lt;br /&gt;
R이란 사람은 나와는 매우친(親)한 동무엿다 그럼으로 우리두사람 사이에는 결(决)코 무슨비밀(秘密)이란것은 잇을터수가 아니엿다 그러나 지금은 나의교우록(交友錄)속에 씨여저잇는 그의『호패(號牌)』에 붉은줄을 그은지도 벌써한달이 다되엿다.&lt;br /&gt;
&lt;br /&gt;
이러한 간단한사실(事實)이 모르는사람으로본다면 가렵지도 아프지도안흘지모르겟으나 남달리상처(相處)해오든 벗을한사람 일허버린나의흐젓한 마음은 어데도 비길수업시 서러운것이다.&lt;br /&gt;
&lt;br /&gt;
그뿐만아니라 이글을 쓰려는오늘아침에 이제는 고인(故人)인 R의동생으로부터 나에게 간단한편지한장과『문외한(門外漢)의수첩(手帖)』이란유고(遺稿)한권(卷)이 보내여왓다.&lt;br /&gt;
&lt;br /&gt;
그유고(遺稿)는 이래십년(爾來十年)에 쓴 고인(故人)의 일기(日記)인 모양인데 그도축일(逐日)해서 쓰것도 아니고 때때로마음이 내킬때마다 써둔것이며그맨끗페—지에『〇〇형(兄)에게』라는 이세상(世上)사람으로서의 절필(絶筆)인듯한 글시가 묵흔(墨痕)이임리(淋漓)한것은소리업는 내눈물을더욱짜내는것이엿다 그리고이글내용(內容)은 일기(日記)는 일기(日記)면서도 대부분(大部分)은 나에게 보내는 편지이엿다.그편지가운데서 지금이라도 흥미(興味)잇게생각나는 부분(部分)만을 써서보기로한다면 그도처음에는 문학청년(文學青年)이엿든 사실(事實)이잇섯다.그러나그는자기가 하고저한 문학(文學)을 끗끗내 완성(完成)할수잇는 행복(幸福)된사람은 아니엿다.그러나 그사람은죽든날까지도문학(文學)을 단념(斷念)하지는안헛다는것은 어느해겨울 그와나는 우연(偶然)히도 어느 온천(溫泉)에서만낫다 그때는 바로동경(東京)에서들풍자문학론(諷刺文學論)이 한참대두(擡頭)할때 이엿슴으로 그도또한 예(例)에삐지지안코 이것의 조선(朝鮮)에잇서서 가능(可能)하다는 설교(說敎)를 하는것이엿다그때좀더 생각해볼 여지(餘地)가잇다고한 나의말에 그는말하기를조선(朝鮮)사람은 생활(生活)그자체(自體)가 풍랄적(諷剌的)으로 되여잇다고 떠둘어대기에나는그에게 더진지(眞摯)한태도(態度)로 사물(事物)을 대(對)할필요(必要)가 잇다는것을말하엿고 그다음날 우리는 서로갈린체 영원(永遠)히 보지못할 사람이되엿다.&lt;br /&gt;
&lt;br /&gt;
이글은 그때나와 갈려서 몃칠동안에 쓴것이라고 생각난다 일구삼(一九三)×연(年)×월(月)×일(日)—〇형(兄)!S역(驛)에서 형(兄)과갈려서나는〇동(洞)까지 오십리(五十里)나되는 산(山)길을 걸어왓소.동리(洞里)거리에 피곤(疲困)한 다리를 쉬이면서 생각하기를 아무데나 큼직한집 초당(草堂)방을 차저드러가면 이밤을 뜻뜻한 아랫목에서 지낼수도 잇겟거니와 그들과함께 살을맛대이고지나며 그들의 생활(生活)을체득(體得)할수가 잇다면……얼마나 유쾌(愉快)한일이겟습니까?&lt;br /&gt;
&lt;br /&gt;
나는 여기서 형(兄)이일직이 하든말을 생각해보앗소 상해(上海)어데선가?목욕(沐浴)을 갓슬때 불란서(佛蘭西)사람과 서반아(西班牙)사람과 가트욕조(浴漕)에 들어갓슬때의 감정(感情)을 얘기한것을 기억(記憶)이나 하시는지요.그때는 적나라(赤裸裸)한 몸둥이들이모두꼭가튼 온도(溫度)를 느낄수잇더라고.세계(世界)는 모름직이 목간통가티 되어야 한다고.&lt;br /&gt;
&lt;br /&gt;
그러나 오늘의 나의심경(心境)은그와는 정반대(正反對)로 어데까지나 육친애(肉親愛)를 느껴볼 결심(决心)이엿소 그래서 세계(世界)는 차라리 초당(草堂)방가티되라고까지 생각해도 보앗소이러한 생각을 하노라면 또다른 한생각이 꼬리를 물고나오는동안에 나는가젓든 담배를모조리 다피워 바렷소.담배라도피우지 안흐면 첫겨우의눈우바람이몹시도 옷깃을 새여들고 발끄티저리기도해서 담빠도살겸 주막(酒幕)집잇는대로 가까이 차저갓소.그곳에는 마침담배 가개가잇고젊은농부(農夫)인듯한 사람이잇기에오전(五錢)짜리 한푼을던지고『마코』한갑을 달라고 하엿더니만 나는여기서 뜻하지못한 실패(失敗)를 하엿소 그것은 나행동(行動)이 몸차림과 어울리지안는데가 잇섯든지또는언어(言語)에 무의식적(無意識的)인 불손(不遜)이잇섯든지 그젊은 농부(農夫)는 내얼굴을 자세히 보더니만……『문(門)안에 들어와서 담배를 가저가오』……하며 코우슴을 피하며『마코』한갑을 내아프로 툭던지는것이엿소.&lt;br /&gt;
&lt;br /&gt;
나는처음 이농부(農夫)의 말을듯고한참동안 어름어름하엿소 그것은 담배가개라고하는것이 우리가 도회(都會)에서 보는담배가개와가티 백색(白色)『타일』타로 대(臺)를싸올리고『네온』등(燈)을 달고 유리창(窓)을단것이 아니고 첨하끄테다 석유(石油)궤로 목판을짜서 장수연(長壽煙),희연(囍煙),『마코』단풍(丹楓) 이런것들을몃갑식(式) 너허둔것이엿소,그래 내가들어갈 문(門)이란 어데잇겟소,&lt;br /&gt;
&lt;br /&gt;
&lt;br /&gt;
(칠(七))&lt;br /&gt;
&lt;br /&gt;
이(李) 육(陸) 사(史)&lt;br /&gt;
&lt;br /&gt;
R이란 사람은 나와는 매우친(親)한 동무엿다 그럼으로 우리두사람 사이에는 결(决)코 무슨비밀(秘密)이란것은 잇을터수가 아니엿다 그러나 지금은 나의교우록(交友錄)속에 씨여저잇는 그의『호패(號牌)』에 붉은줄을 그은지도 벌써한달이 다되엿다.&lt;br /&gt;
&lt;br /&gt;
이러한 간단한사실(事實)이 모르는사람으로본다면 가렵지도 아프지도안흘지모르겟으나 남달리상처(相處)해오든 벗을한사람 일허버린나의흐젓한 마음은 어데도 비길수업시 서러운것이다.&lt;br /&gt;
&lt;br /&gt;
그뿐만아니라 이글을 쓰려는오늘아침에 이제는 고인(故人)인 R의동생으로부터 나에게 간단한편지한장과『문외한(門外漢)의수첩(手帖)』이란유고(遺稿)한권(卷)이 보내여왓다.&lt;br /&gt;
&lt;br /&gt;
그유고(遺稿)는 이래십년(爾來十年)에 쓴 고인(故人)의 일기(日記)인 모양인데 그도축일(逐日)해서 쓰것도 아니고 때때로마음이 내킬때마다 써둔것이며그맨끗페—지에『〇〇형(兄)에게』라는 이세상(世上)사람으로서의 절필(絶筆)인듯한 글시가 묵흔(墨痕)이임리(淋漓)한것은소리업는 내눈물을더욱짜내는것이엿다 그리고이글내용(內容)은 일기(日記)는 일기(日記)면서도 대부분(大部分)은 나에게 보내는 편지이엿다.그편지가운데서 지금이라도 흥미(興味)잇게생각나는 부분(部分)만을 써서보기로한다면 그도처음에는 문학청년(文學青年)이엿든 사실(事實)이잇섯다.그러나그는자기가 하고저한 문학(文學)을 끗끗내 완성(完成)할수잇는 행복(幸福)된사람은 아니엿다.그러나 그사람은죽든날까지도문학(文學)을 단념(斷念)하지는안헛다는것은 어느해겨울 그와나는 우연(偶然)히도 어느 온천(溫泉)에서만낫다 그때는 바로동경(東京)에서들풍자문학론(諷刺文學論)이 한참대두(擡頭)할때 이엿슴으로 그도또한 예(例)에삐지지안코 이것의 조선(朝鮮)에잇서서 가능(可能)하다는 설교(說敎)를 하는것이엿다그때좀더 생각해볼 여지(餘地)가잇다고한 나의말에 그는말하기를조선(朝鮮)사람은 생활(生活)그자체(自體)가 풍랄적(諷剌的)으로 되여잇다고 떠둘어대기에나는그에게 더진지(眞摯)한태도(態度)로 사물(事物)을 대(對)할필요(必要)가 잇다는것을말하엿고 그다음날 우리는 서로갈린체 영원(永遠)히 보지못할 사람이되엿다.&lt;br /&gt;
&lt;br /&gt;
이글은 그때나와 갈려서 몃칠동안에 쓴것이라고 생각난다 일구삼(一九三)×연(年)×월(月)×일(日)—〇형(兄)!S역(驛)에서 형(兄)과갈려서나는〇동(洞)까지 오십리(五十里)나되는 산(山)길을 걸어왓소.동리(洞里)거리에 피곤(疲困)한 다리를 쉬이면서 생각하기를 아무데나 큼직한집 초당(草堂)방을 차저드러가면 이밤을 뜻뜻한 아랫목에서 지낼수도 잇겟거니와 그들과함께 살을맛대이고지나며 그들의 생활(生活)을체득(體得)할수가 잇다면……얼마나 유쾌(愉快)한일이겟습니까?&lt;br /&gt;
&lt;br /&gt;
나는 여기서 형(兄)이일직이 하든말을 생각해보앗소 상해(上海)어데선가?목욕(沐浴)을 갓슬때 불란서(佛蘭西)사람과 서반아(西班牙)사람과 가트욕조(浴漕)에 들어갓슬때의 감정(感情)을 얘기한것을 기억(記憶)이나 하시는지요.그때는 적나라(赤裸裸)한 몸둥이들이모두꼭가튼 온도(溫度)를 느낄수잇더라고.세계(世界)는 모름직이 목간통가티 되어야 한다고.&lt;br /&gt;
&lt;br /&gt;
그러나 오늘의 나의심경(心境)은그와는 정반대(正反對)로 어데까지나 육친애(肉親愛)를 느껴볼 결심(决心)이엿소 그래서 세계(世界)는 차라리 초당(草堂)방가티되라고까지 생각해도 보앗소이러한 생각을 하노라면 또다른 한생각이 꼬리를 물고나오는동안에 나는가젓든 담배를모조리 다피워 바렷소.담배라도피우지 안흐면 첫겨우의눈우바람이몹시도 옷깃을 새여들고 발끄티저리기도해서 담빠도살겸 주막(酒幕)집잇는대로 가까이 차저갓소.그곳에는 마침담배 가개가잇고젊은농부(農夫)인듯한 사람이잇기에오전(五錢)짜리 한푼을던지고『마코』한갑을 달라고 하엿더니만 나는여기서 뜻하지못한 실패(失敗)를 하엿소 그것은 나행동(行動)이 몸차림과 어울리지안는데가 잇섯든지또는언어(言語)에 무의식적(無意識的)인 불손(不遜)이잇섯든지 그젊은 농부(農夫)는 내얼굴을 자세히 보더니만……『문(門)안에 들어와서 담배를 가저가오』……하며 코우슴을 피하며『마코』한갑을 내아프로 툭던지는것이엿소.&lt;br /&gt;
&lt;br /&gt;
나는처음 이농부(農夫)의 말을듯고한참동안 어름어름하엿소 그것은 담배가개라고하는것이 우리가 도회(都會)에서 보는담배가개와가티 백색(白色)『타일』타로 대(臺)를싸올리고『네온』등(燈)을 달고 유리창(窓)을단것이 아니고 첨하끄테다 석유(石油)궤로 목판을짜서 장수연(長壽煙),희연(囍煙),『마코』단풍(丹楓) 이런것들을몃갑식(式) 너허둔것이엿소,그래 내가들어갈 문(門)이란 어데잇겟소,&lt;br /&gt;
&lt;br /&gt;
(중(中))&lt;br /&gt;
&lt;br /&gt;
이육사(李陸史)&lt;br /&gt;
&lt;br /&gt;
그날은 그곳에서 멀지안흔곳에 장날이엿나부오,장꾼들이들신들신하고 그집으로 들어오기에 나는그만 그곳을떠나 도라나오랴니까 바로내머리 뒤에서『건방진여석 눈에유리창(窓)을 부치고』……하면서 별러대는것이엿소.그때나는 모든것을 다알엇소,&lt;br /&gt;
&lt;br /&gt;
시골산촌(山村)에선 유리라는것은들창(窓)에나 부치는것인데 네눈에부친 들창을열고 다시말하면 문(門)안에 들어와서(안경(眼鏡)을벗고)담배를 가저가란 말엿소.&lt;br /&gt;
&lt;br /&gt;
내가 안경(眼鏡)을 쓰게된것은 시력(視力)이 부족(不足)한 탓이엿고 그젊은농부(農夫)가 내안경(眼鏡)쓴것을 못맛당히역이는것은 고루(固陋)한 인습(因習)의 소치(所致)라고 하드래도 그표현방법(表現方法)이얼마나 내뼈를 저리도록 쑤시는풍랄(諷剌)이엿겟소 과연(果然)여기에 남과나라는 투명(透明)한 장벽(墻壁)이 서서잇다는것을 나는안듯하엿소.&lt;br /&gt;
&lt;br /&gt;
그리고 내발길은 무겁게옴겨젓소.아주몃해를두고 어느사막(沙漠)이라도 걸어온듯한 피로(疲勞)를 깨다랏소.하늘은 점점어두어오고눈조차 함박으로 퍼붓는듯 하엿스나 나는다시 옷것을 단속지는 안헛소 될수엇스면 차디천 눈보라가 내보드러운 목덜미살을 염이듯이 얼어부트라고하여본것은 일종(一種)의 자기잔학(自己殘虐)일른지도 모르겟소.&lt;br /&gt;
&lt;br /&gt;
두시간(時間)이나 지낫을가 나는과연(果然) 어느집초당(草堂)방에 손이되엿소방안에는 초말(醋抹)냄새가 코를찌를망정 모이는사람은 대략육칠명(六七名)이나 되엿고 연령(年齡)은최저십팔(最低十八)로최고삼십이(最高三十二),인품(人品)은 모두순후(純厚)하고황소가티 질박(質朴)한놈도 잇스며암사슴가티 외로운 면석도잇섯소.그날밤은 내라는존재(存在)가 그들로보면 낫서른손이여서 일동일정(一動一靜)을 주의(注意)는 하면서도 조금도 악의(惡意)는 갓지안헛든 모양이엿소 그러기에 나더러 세상(世上)의자미잇는 얘기를 들려달라는것이오&lt;br /&gt;
&lt;br /&gt;
이때 나는 어떠한 얘기를들려줄까 하고 망서리는판에 그들중에도 연령(年齡)과 지식(知識)의 정도(程度)가잇서서 삼십(三十)에 가까운 사람들은『화용도(華容道)』를 들려달라하고그중한사람은『춘향전(春香傳)』을 얘기하라하엿소만은 여기도 또한의견(意見)은 일치(一致)되지안헛소 그중에도제일(第一)얼굴이 말숙하고 나이가이십오세(二十五歲)쯤 되여보이는 농부(農夫)한사람 말을드르면 보통학교(普通學校)를 중도퇴학(中途退學)은 하엿서도 그들가운데서는 식자연(識者然)하고 내로라는드시뽑내면서『서양(西洋)』얘기를 무에나들리라는것이오 그해서 결국(結局)은『춘향전(春香傳)』파(派)와『서양(西洋)』파(派)가 절충(折衷)한결과(結果) 나는이진귀(珍貴)한『서양춘향전(西洋春香傳)』을 친절(親切)하게도 강좌(講座)를담임(擔任)하게되엿스며 그는 득의만면(得意滿面)하야 내담배갑에서『마코』한개들 빼여물고 인조견(人造絹) 옥색(玉色)관사홋족기에서 석낭을꺼내여 담배를 피우는것이엿소 이방에서는모두들이사람을『하이카라상』이라고 부르는데 그『상』짜가나에게는 조금귀익지못하나 아마이것을 도시(都市)말로번역(飜譯)하면『모—던뽀이』란 말도갓소.&lt;br /&gt;
&lt;br /&gt;
그러나 이『서양춘향전(西洋春香傳)』이란진본서(珍本書)는 가난한 나의문헌학지식(文獻學知識)으로는 도저(到底)히 알어낼 자신(自信)도업고 그러타고 그들에게『린드뻑』이 대서양(大西洋)을 어떠케 횡단(橫斷)하엿다든지『크레오파트라』의국적(國籍)이 어느나라냐고 설왕설래(說往說來)를 하여보앗자『하이카라상』이라는 이방의『쏘크라테쓰』도그까지는 흥미(興味)를느끼지못할것갓터소.&lt;br /&gt;
&lt;br /&gt;
그래서나는 생각다못해『쉑스피어』의『로미오와쭈리엣트』를얘기하기로하고 위선그주인공(主人公)의이름을 그들이 알어듯기 쉽게『노미』이와『준』이가 이러케얘기를하니 그래도 모두그것이자미가 잇섯든지『준』이가추방당(追放當)튼날새벽에『노미』를 차저가이별(離別)을하는판인데 이곳에야『나이팅껠』이울수가 잇슬리도 업겟고 생각다못해 속담(俗談)에 꿩갑에 닭이라니 닭을울리고『준』이를 떠나보냇구려!그래도 이때는 모두들감탄(感歎)해서 흥흥코소리를치며 신삼고 가만이치든손을쉬이는구려!&lt;br /&gt;
&lt;br /&gt;
(하(下))&lt;br /&gt;
&lt;br /&gt;
이육사(李陸史)&lt;br /&gt;
&lt;br /&gt;
밤은벌써 오전(午前)두시(時)나 되엿는데 박가테서는 눈보래가 조금도 쉬지안코 나렷소,사람들은차차 긴하픔을 하다가는 제대로 팔을배고 자는이도잇고 또그자는이의 다리를베고 자는사람도잇스며 나중에는『하이카라상』과 나만이남어서 나는 이동리(洞里)의 서러운전설(傳說)을 듯는것이오『옛날에 이동리(洞里)와 건너마을이편을갈러서 정초(正初)이면『줄댕기』가 시작(始作)되엿고 그때는 사람들이 수—백명식(百名式) 모혀서 그중에도 젊은 사람들은 처녀(處女)나 총각이 제각기 마음잇는 사람들과 사랑을 속삭이면서 영원(永遠)히그자손(子孫)들은 변(變)함업시 이동리(洞里)를직혀왓건만은 지금(至今)은 어쩐일인지 그사람들은 누가 오란말도업고 가란말도 업건만은 다들어데인지 한집식 두집식 동리(洞里)를떠나고 그럴때마다 젊은이들의 싹트기시작(始作)한 사랑은 그봄이 다가기도전에 덧업시 흘러가고 만다는말을 다마치지도못하야 이사람은 창졸간에 미친듯이 쓸어저 흑흑 느껴가며우는것이엿소.나는 이것을 웨우느냐 물어볼힘도업고 울지말라고 위안(慰安)을 줄수도 업섯스며다만나 혼자 생각기를 너도 또한불상한 미완성초연(未完成初戀)의 순정자(殉情者)로 구나하고 동정(動靜)을 살피노라니 이사람도 그냥잠이 들고먼데닭이 자즌홰치는 소리가들리며 눈은끗첫는지 박가튼 바람이 몹시부럿소.&lt;br /&gt;
&lt;br /&gt;
나는몃시간(時間) 남지안흔 이밤을도저(到底)히 잘수는업섯소,내머리는해저(海底)와가티 아득하고 내가슴은운모(雲母)와가티 무거웟소.도라누을내야 도라누을수도 업스려니와여페사람들의 코고는소리는 검은시체(屍體)를 실흔마군(馬軍)의 수레박휘를 갈고가는듯하오,그럴수록방안의 정적(靜寂)은 무거워저서 자꾸만 지구(地球)의 중심(中心)으로 침전(沈澱)되는듯하엿소,나는 참다못하야 눈을감고 두손으로 얼굴을 가리웟소.바로 그때엿소,누구인지내머리마테서 말하는 사람이잇섯소,그사람이 누구인지는 기억(記憶)할수 업스나 혹(或)은 저녁전에담배가개에서본 농부(農夫)일른지도모르겟소 그가 나에게 한말은분명(分明)코『문(門)안에 드러와서……』엿소.나는 여기서 눈을번쩍뜨고가만히 생각해 보앗소.&lt;br /&gt;
&lt;br /&gt;
『오!그러타,나는 문외한(門外漢) 여다』아무리하여도 인생(人生)의 문(門)안에들어서지못할 나이라면 차라리영원(永遠)한 문외한(門外漢)으로 이세상(世上)을수박것할트시 지나갈일이지 그좁은문(門)을 들어가려고 애를쓸필요(必要)가 어데잇겟소 문(門)박게서 살어가면 책임(責任)과 부담(負擔)도 가벼우려니와 문(門)안에 우리가 직혀야할 보물(寶物)이잇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모두 문(門)안에서 직힐때에나혼자만 문(門)박게서 그모든것을파수본다면 그것도 나의한가지임무(任務)가아니겟소 그러타면 나는달게&lt;br /&gt;
&lt;br /&gt;
인생(人生)외 문외한(門外漢)이 되겟소.&lt;br /&gt;
&lt;br /&gt;
그래서 남들이모두 문(門)안에서보는세상(世上)을 나는문(門)박게서 보겟소 남들은 기피보는 세상(世上)을나는널리보면 또그만한 자긍(自矜)이잇을것갓소.오늘은 고기압(高氣壓)이어데잇는지 풍속(風速)은 육십사(六十四)미리오이동리(洞里)를 떠나아무도 발을대지안흔 대설원(大雪原)을 걸어가겟소,전인미도(前人未到)의 원시경(原始境)을 가는느낌이오,누가나를 따라이길을 올사람이 잇슬른지?업서도 나는이길을 영원(永遠)히가겟소.』&lt;br /&gt;
&lt;br /&gt;
나는이까지보고 위선이유고(遺稿)를더펏다,그리고 생각해보앗다 이것은 한사람이 인생(人生)의문(門)안에 들어오지못하고 영원(永遠)히 걸어간기록(記錄)이다 오!그러면 나도역시문외한(亦是門外漢)인가?정축(丁丑) 칠(七),이구(二九)&lt;br /&gt;
&lt;br /&gt;
==주요 내용 요약==&lt;br /&gt;
구성: 죽은 친구 'R'의 유고(遺稿)인 '문외한의 수첩' 속에 담긴, 'R'이 '〇형(兄)'(필자)에게 쓴 편지 형식의 수필이다. '문안'과 '문밖': 화자는 'S역'에서 '형'과 헤어져 산길을 걸으며 초당방에서 서민의 삶을 체득하고 싶다는 '육친애'적 소망을 가진다. 이때 담배를 사려다 한 젊은 농부에게 &amp;quot;문 안에 들어와서 담배를 가져가오&amp;quot;라는 말을 듣는다. '문안'은 농부가 '안경(유리창)'을 쓴 자신을 '도시의 문명인'으로 여기고 '안경을 벗고(유리창을 떼고) 들어와'라는 풍자적 표현이었음을 깨닫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자아 성찰: 이 경험을 통해 도시 지식인인 자신과 농민 사이에 투명한 '장벽'이 서 있다는 것을 인지하며, 자신이 '인생의 문외한(門外漢)'임을 깨닫는다. '문외한'의 결심: '문안'에 들어서지 못할 바엔 영원한 문외한이 되어 문밖에서 살아가겠다고 결심한다. 문밖에서 사는 것은 책임과 부담이 가볍고, 남들이 모두 문안에서 보는 세상을 자신은 문밖에서 '널리' 보며 '자긍(自矜)'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절필: &amp;quot;전인미도(前人未到)의 원시경(原始境)을 가는 느낌&amp;quot;으로 '대설원'을 걸어 나가는 것으로 글을 맺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분석 및 특징==&lt;br /&gt;
풍자 문학론의 실천: 농부의 '안경 쓴 눈(유리창)'에 대한 풍자는 지식인과 대중 사이의 괴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지식인의 고뇌와 성찰: 도시화된 지식인(안경 쓴 자)이 농민의 삶에 진입하려 했으나 거부당하고, 결국 자신을 '문외한'으로 규정하며 고립을 선택하는 지식인의 고뇌를 드러내는 자의식의 표현이다.&lt;br /&gt;
&lt;br /&gt;
낭만적 비장미: '대설원', '전인미도의 원시경' 등 비장하고 낭만적인 이미지로 결말을 맺으며, 이육사 특유의 고독한 결단의 미학을 보여주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소품(小品) 황엽전(黃葉箋)=&lt;br /&gt;
소품(小品)①&lt;br /&gt;
&lt;br /&gt;
황엽전(黃葉箋)&lt;br /&gt;
&lt;br /&gt;
이(李) 육(陸) 사(史)&lt;br /&gt;
&lt;br /&gt;
사람들은 어름알보다 더냉담(冷淡)하고 주사침(注射針)가티 촉발라도 그래도 제대로는 인정(人情)도잇고 눈담(曇)노잇서 친(親)한사람을 사이에는못보 보고저하고 보면빨아먹을듯이도 형형색색(形形色色)의 표정(表情)을비저내며 계절(季節)에 따라서는 눈물겨울만큼 간절한모양이나 『내』라는 위인(爲人)은 자질(資質)도 소박(素朴)하고교양(敎養)도 고매(高邁)하지못데 요즘은엇전지 신경(神經)이 차를보다 단단해저서 압흐고 슯흔것도 못견듸게늣겨지지도 안커니와 보지못해 못견딀사람도업고 소식(消息)이라도 못알려 탈이될,더친(親)하고덜친(親)한이가업다.그러나 행(幸)혀이세상(世上)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잇다고하면 나는 의무(義務)로라도그대에게 나의소식을 알려야하지만은 지금의 나에게는 그러한미덕(美德)을 수행(遂行)할 야망(野望)조차업다.다만 야망(野望)을용서(容恕)한 사람이잇거든 가을바락에 무한(無限)히 흘러가는 황엽(黃葉)의 쪼각쪼각이 모두나의 편지라고 생각을 해라그리고 그어느한쪼각이라도 주어다가 그대들의책상(冊床)우에 꼬처두고 그황엽(黃葉)이 바람에 나붓기며울며부르짓는 서러운전기(傳記)를 들어보아라……&lt;br /&gt;
&lt;br /&gt;
‥‥그놈의 거리를 말할것도업고 저는하여(何如)든 가로수(街路樹)에서떨어저 왓습니다.그래서 거리에 서잇는동안 형형색색(形形色色)의 인간(人間)들을 다보앗습니다.그러나대개(大槪)는 모다비슷비슷한 인간(人間)들이엿고 별다른 놈은 못보앗습니다 그것은 십년전(十年前)일이라고생각됩니다.어느날오후(午後) 내발밋흘지나가는 소년(少年)이 잇섯습니다,미친놈가티 중얼대는 말을가만히듯자니『루나—ㄹ』의 일기(日記)를외이는겐지『불상한놈! 불상한놈!』 고거즛말하엿습니다,그뒤로는 매일(每日)가티 아침에도 내발밋홀지나고 저녁에도 내발미틀지나는동안에 나는어느사이에그만그녀석하고 친(親)해젓습니다,그래서 그녀석의 정체(正體)를 알수가잇섯습니다&lt;br /&gt;
&lt;br /&gt;
그녀석은 어느시골에서 출가(出家)를해서 서울을왓다는데 그출가(出家)한 이유(理由)가 어린녀석하고는 맹랑햇습니다 그녀석의 집은어느해안(海岸)이든가봐요 아침으로 조수(潮水)가 밀려나가면 끗업시 널려잇는 백(白)모래바티 너무도 허무(虛無)서 오기는왓스나 섬들을 건너간 갈메기가 몹시그립다고 하는것을보면 그래도 어린향수(鄉愁)가머리를 글거가는모양이겟지요&lt;br /&gt;
&lt;br /&gt;
그후(後)나는 우리들이 늘만나는시간(時間)이되면 그녀석이 하마나오나하고 기달리기도햇습니다 그럴때 멀리에 발자욱 소리가나고 그녀석이 『하이네』 니 『꾀—테』 니의 시(詩)를외이고 올때도잇섯습니다 그리고 몃해가 지난어느해봄날 내가긴 동면(冬眠)으로부터 영롱(玲瓏)한 첫눈을텃슬때 또그녀석을만낫습니다 그때는벌서그녀석은 십부게볼 소년(少年)이아니라 의례(依例)히 그상대자(相對者)를 다리고어둑어둑한 황혼(黃昏)에 내엽헤와서간즈려울만큼 종알대며 행복(幸福)의『메뉴—』를 전람회(展覽會)의『프로그람』보다 화려(華麗)하게꾸미는것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이것어 한여름을 지나며 비가오나 바람이부나 계속(繼續)이 되엿습니다 그러나 인간(人間)들에게잇서서는 행복(幸福)의 절정(絕頂)은 최대(最大)의비극(悲劇)과 서로통(通)해 잇나봐요 그해의 첫가을 어느으스름달밤에나는이비극(悲劇)을 바로 내눈헤서보는것입니다&lt;br /&gt;
&lt;br /&gt;
『여보우리두사람이 서로사랑하면 그만이지 사랑을 부모(父母)에대(對)한 효행(孝行)으로 하는데가 어데잇소.』&lt;br /&gt;
&lt;br /&gt;
이러케 그녀석은 폐(嬖)하는것이 엿습니다.&lt;br /&gt;
&lt;br /&gt;
그것도 고이치안흔게 그때쯤은 그녀석의 기분(氣分)이란 불꼿치타오를둣도 하얏거니와 제애비말을 안듯기로 유명(有名)하야 집을나선놈이니까.&lt;br /&gt;
&lt;br /&gt;
『그러치만은 엇절수가 잇서야 지요』&lt;br /&gt;
&lt;br /&gt;
이것이 그더석의 말에갑허진보수이엿습니다.그뒤나는 십년(十年)이란 긴동안 이사람들의 속삭임을 들을수는 업섯습니다.&lt;br /&gt;
&lt;br /&gt;
아마그것이 그들의 비극(悲劇)의시초(始初)FP동시(同時)에 나의『로—맨틔시슴』도 종언(終焉)이엿든 것입니다 나는그날부터 새로운 생활(生活)을 경험(經驗)하지안으면 안되엿읍니다 이때까지는 그들가운데에 엇던한두사람의 주활(主活)을 말로서 들엇으나 인제는 어느특정(特定)한 사람의사랑이라든지 그런달착지근 한것이아니라 그저그놈도 그놈갓고 그놈도 그놈갓흔 뭇사람의생활전체(生活全體)가 내풋입새의 거울보다 반드라운 쪼각쪼각에 빗치는 것이엿읍니다 이전갓흐면멀리서 삽분삽분 발자욱 소리가들려오고 그발자욱 소리가갓가워 지는데따라 쟁반에 구슬을굴리는듯한 목소리도 들엇건만은 또그럴때면 나도 입사귀를흔들어서 업김가티 보드러운바람을 부러도 주엇건만은 이때는 내가 바람을 불기는커녕그들의지나가는 위풍(威風)에 나는전율(戰慄)하지 안을수 업섯읍니다.구슬을 굴리는듯한 목소린들 어데가듯겟읍니가?뭇사람의 포효(咆哮)하는소리란 아주바다에서 이러나는노도(怒濤)의 교향악(交響樂)가탯습니다.&lt;br /&gt;
&lt;br /&gt;
그래서 나는알기를 인간(人間)이란위대(偉大)한 작란(作亂)군이라고 하엿습니다.어떠케 그들의 얼골이 크게보이고 힘차게 늣겨것든것인가 지금은 생각만하여도 왼몸이 으슬으슬합니다.그러는중(中)에그들의 행렬(行列)은 대강(大江)가티 홀러가고 나는 또다시 노랏케 단풍이들어 한닙두닙 떨어지는것입니다.얼마나 소조(蕭條)하고 적막한거리겟습니가? 내엽헤는 괴수(怪獸)가티 늘어선 삘딍들의 거믄그림자가『팔아스트 에 얼어부튼거지들의 싸늘한꿈을 죽엄가티덥허논때업니다.밤도삼경(三更)은 지난때이지요 더벅더벅 거러오는무거운 발자욱 소리와함께 나는고요한『그림자』하나를 발견(發見)햇습니다.안개에 촉촉히 저진차림자러와 힘업시 옴겨지는발자욱이 아주무슨 패잔병(敗殘兵)의 유령(幽靈)이엿슬지도 모릅니다.나는지금 그유령(幽靈)을 따라 굴러 갑니다.그러나 그유령(幽靈)은 내가미행(尾行)을 한다는것은 모르고 또는알엇다해도 아무저항(抵抗)도 할필요(必要)가업다는듯이 방향(方向)도업시것는것이엿습니다.때로는 시내도건너고들판도 지나 힘이지치고 밤이깁프면 산(山)기슭 나무등얼 밋헤누어서 하늘에 수(數)업시만흔 별들을 헤아려도 보는것이겟지요그러나 그어느별도그에게 행운(幸運)을 점제한별은 업섯나봐요 그리다간 그는그만 흑흑늣기고 울며울다가는 자는것이엿습니다.아마도 기적(奇蹟)을 이즌순간(瞬間)이 그에게는 자장행복(幸福)된순간(瞬間)이든가봐요,산(山)속은 찬기운만 가득하고벌레소리는 정적(靜寂)을 삼림(森林)가티무성(茂盛)하게하는것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그다음날도 아츰햇발이 속새입홀 흔들면 그는일어나 것는것이엿습니나.이러는 동안에 나는이유령(幽靈)에게서 무엇을 보앗스리라고 생각하심니가?어느큰강(江)가이엿습니다.여을어 목노아울고가는 강(江)가이엿습니다.그는이강(江)가에 안저서 무엇을 생각하엿는지 눈을깜은채로 하늘을치여다보는 것이엇고 초생달은교만(嬌慢)한 게집의눈자위처름 그를흘겨보는것은 한층(層)더창백(蒼白)한 비우슴갓햇습니다 그러치만은 그는그광망(光芒)을 피(避)하려고도 안엇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내생각에 따른다면 그래도 못잇처지는 날ㄹ기억(記憶)을 모조리 물소리에 씨처흘려보내려는 노력(勞力)이엿슬지도모릅니나&lt;br /&gt;
&lt;br /&gt;
그때 먼데마을에는 개짓는소리가 어즈러히 들여오고 새바람도 유달리 옷깃을 새여드는데 그는 일어셔 한발한발 물가으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때나는 그의운명(運命)을거의들여다보는것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자살(自殺)이란 광경(光景)이 내머리속에번개가티 일어낫습니다.그리고그는물가의 널직한 반석(盤石)우에올러안저서 물속에비친 자기(自己)의얼골을 자세히 들어다보는 것이엿습니다,그러나 그물속에는자기(自己)의 얼골은 차저볼수가 업섯든것이겟지요,증오(憎惡)를 참지못하는 그는그만 뼈만남은 두손으로 물결을 훗치고는 돌우에업더저 우는것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그는 또다시 일어나 모둔것을 이저버린듯이 걸어가는 것이엿습니다.일기(日氣)는점점 흐려지고 회색(灰色)으로 물드린 천공(天空)은 그의최후(最後)의 희망(希望)까지라도 빼서바릴듯이 싸늘한 압박(壓迫)을더하는것이엿습니다.그러타고해서 그에게는 아무런 격정(激情)도 반발(反撥)도잇는것갓지는 안엇습니다 만은 주먹을 쥐여서는 주머니속에 너은체로 간간히 머리를 흔드는것은 과거(過去)에대(對)한 회한(悔恨)이라든지그런것들이 머리속을 할터가는것이겟지요?&lt;br /&gt;
&lt;br /&gt;
그것은 어느동리(洞里)압이엿습니다만흔사람들이 모엿다가는 다들도라가고 큰버드나무에『사지오리』를 부친색기를 걸처맨밋헤는 기름종지에 빤—한심지불이타고잇스섯며 아해들 몃사람이그것을 직히고 잇섯습니다.그는아해들에게 무엇을하는것이냐고 물엇습니다.&lt;br /&gt;
&lt;br /&gt;
아해들의 대답이란 너무나 묘(妙)한것이 안이겟습니가?그동리(洞里)에는 십년(十年)만에 한번식은 유령(幽靈)이 난다는 전설(傳說)이 잇섯습니다그래서 그날은 동리(洞里)사람들이정성을 다하야 한데모혀서 기도(祈禱)를 올리고 고사(告祀)를 지내는것이엿는데 그날이마츰 십년(十年)에 해당(該當)한날이며 방금 의식(儀式)을 맛친때라고 말을마천 아해들은 그를 한참동안 자세히 보다가는그만 인가(人家)를 향(向)하야 다어나는것이엿습다.아마도 그것은참으로 이동리(洞里)에 유령(幽靈)이 나타낫다는것을 알리기 때문일런지도모름니다.&lt;br /&gt;
&lt;br /&gt;
그는 한번 크제우섯습니다나는 그가 웃는것을 보는것은처음이엿습니다,그러나 그웃슴이란 곳변해저서 므슨쓰듸쓴 약물을 먹은뒤의 입모습가리 변해지며 얼골전체가 크다란 환상(幻想)에 사로잡히는것 갓햇습니다그리다가 그는 그언덕 미테서잠이들어 자면서 꿈을 꾸는것여엿습니다,그꿈이란 이러햇습니다,몹시더운 여름날 몃칠을두고 비가따루엇습니다,그래서큰물이나고 하루밤사이에 왼동리(洞里)가 물에쓸려 갓읍니다 왼여름 피담을홀려 지은농사(農事)도 한포거업시 사람마다 두주먹과한개의 목슴박게는 남지안엇음니다 주림과 치위가 매운챗죽갓치 그들을 휘갈겻읍니다 그래서 동리(洞里)사람들은 제각기 이고향(故鄕)을 떠나지안호면 안되엿읍니다 물론(勿論)녯날에야 부모(父母)의 품속갓치 포근하고 사랑스런 땅이엿지만은 지금은 참담(慘憺)과 고통(苦痛)의 회억이외(回憶以外)에 아부것도 그들의 애착(愛着)을 붓잡어 두□는 못하엿읍니다.그들은지금 한개촌락(個村落)에서 다른촌락(村落)으로 한성시(城市)에서 또다른성시(城市)에 표박(標泊)□ 길을가는것이엿지만은 그어느□곳도그들이발을 부칠곳은 어□읍니다 모든집들어 그들압헤는 문(門)들을 잠것읍니다.그리고 오즉그들에게는 한오리 끗어는 길이엿음니다 어느때나 □□갈수잇는 길이엿읍니다 하□□또하루 한달에또한달 꼭가티 그들은 하늘을 치여다보고 □을갓읍니다.벌서초본(草本)도 다□□이들고 낙엽(落葉)이 나리나 그들의발길은 머므를수는 업섯습니다 어느마을이나 성시(城市)에서 그들에게 일주일(一週日)이나 유(留)할수가□고한오리의 희망(希望)을 주엇다면 다시그순간(瞬間)이 지나면 그들에게는서름이외(以外)에 아무것도 □는것은업섯습니다.그러나 이□름과주림과 치위는 그들늙은이와 어린이와 남자여자(男子女子)를 모다한마음에 얼거맬수가 잇섯습니다 바탐과비에 바래인 그들이마음에한개의희망(希望)이란 오즉 일거리와생활(生活)이엿습니다 이것이 그들을고무(皷舞)하고 추진(推進)하는 힘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마치한떼의 표유(瓢游)하는『집시』와가티 마을을지내나 산(山)을너무나 마른풀을뜨더 그것을 덥고깔고 혹(或)은낙엽(落葉)을 쓰러다가 욕(褥)와 이불을삼어 한랭(寒冷)을 지나는하루밤 더욱이 비오는밤……밤은영원(永遠)히 차운것이며 뜨신것은다만그들의『마음』뿐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날과밤은 그넷줄처럼 밧구엿습니다.해도점점 쩔러지고 물들이 어러부트며 첫눈이 나린것도 발서 열흘전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그들은 아즉까지도 발무칠땅과한가지의 일거리도 찻지는못하엿스며 끗간데를모를 길만을보고 걸어가는것입니다.&lt;br /&gt;
&lt;br /&gt;
『여기라도 좀쉬여갓스면』모다들이러케 마음으로 부르지젓습니다.그러나 또몃사람운 말하는것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가자 압흐로 더가보자』이것도모든사람의 말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그들은 여전히 경사(傾斜)진 산(山)빗탈을걸어가며 길다란 곡선(曲線)의행렬(行列)이 계속(繼續)되는것입니다.그때는바람도 조골 잔잔해지고 햇발도구름밧글나와 열분광선(光線)이 뭇사람의 얼골을 다소명낭(多少明朗)하게하엿스나 일행(一行)이바로 산(山)미루턱에올너다엇슬때는 정세(情勢)는 디무도급(急)히변(變)하야 눈이퍼붓기 시작(始作)햇습니다.&lt;br /&gt;
&lt;br /&gt;
『눈이또나린다』이러케 부르짓고는모다들 놀나는 것이엿습니다.눈송이는 목화(木花)를 뜨더뿌리는듯이왼공중(空中)에 미만(瀰漫)하야지척을가릴수가 업섯습니다.바람에몰려오는 눈송이가 얼골에 부다치면 낫살을 어이는듯하고 손이빠질듯이 스린것입니다.시력(視力)조차 모호(糢糊)하야 발아래길도 알어보기는 어려웟습니다 재를오를때에 비(比)하면 산(山)을나려오는것은조금용이(容易)하엿스나 길이질대로 질어서 업더지락 잡버지락하는 사람들도잇스며 등에업힌 어린애들은 배가몹시 곱흐다고 우는것이며 그럴때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다들 산(山)밋헤 동리(洞里)집에 나려가서 드신밥을 준다고달래는것이엿습니다 그러나 산(山)미테 동리(洞里)집은 모다제각기 제마음에 그려보는 집들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가자 조금이라두 빨리가자불빗을 볼때까지』그들중(中)에서 한사람이 굴근목소리로 외치는것입니다&lt;br /&gt;
&lt;br /&gt;
『암그래야지』또 몃사람의 대답이 끗나면 모다들 침묵(沈默)은하면서 마음속으로는역시(亦是)『가자』고 대답하는것입니다&lt;br /&gt;
&lt;br /&gt;
사람들은 이빨을물고 잇는힘을다하야 전진(前進)합니다 지나온길이얼마이며가야할길이 얼마인것도모르면서 죽으나사나 가야한다는 것박게는 그들은 한사람도자기(自己)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업섯습니다.그들의 동반자(同伴者)의 발소리와 호흡(呼吸)이 그들의가튼 운명(運命)을결정(决定)한다는것은 이잔혹(殘酷)한 자연(自然)과 싸워가는 무리들의 금과옥조(金科玉條)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눈보래는 끗첫습니다.그러나아즉도 그들에게는 조그마한희망(希望)도 보이지는 안헛습니다.압도캄캄하고 뒤도그랫습니다.아득한 삼림(森林)속을 허우덕이는 암담(暗膽)은 영원(永遠)한흑야(黑夜)가 새이지도안코 영원(永遠)한 미로(迷路)도 끗막지도못할것 갓햇습니다.&lt;br /&gt;
&lt;br /&gt;
피로(疲勞)는 그들의몸을 풀솜가티만들엇습니다.참다가 못참는몃사람이 땅이라도 꺼지란듯이한숨을 쉬는것이엿습니다.그리고는 부르짓는 사람도업고 중얼대는 사람도업스며 눈물도마르고 공포(恐怖)도 사라진 그들은 발목에 잇는 힘을 다해서 눈과진흙우를 쉬임업시 이동(移動)하는것입니다.』&lt;br /&gt;
&lt;br /&gt;
유령(幽靈)은 그들가운데서 제일나이만흔 노인(老人)을 발견(發見)햇습니다그리고 그것은십년전(十年前) 그가고향(故鄕)을떠나올때 아즉도 그다지늙지안흔 그의아버지인것도 알엇습니다 그리고 모든사람은 그의어린시절(時節)의 동무엿습니다 그는참다못해『아버지』하고 소리를첫&lt;br /&gt;
&lt;br /&gt;
습니다 그러나그들은 어느한사람도 그를상대(相對)로 반겨마저주는사람은 업섯습니다.&lt;br /&gt;
&lt;br /&gt;
모다제각기 제갈길을 가고만잇섯습니다.&lt;br /&gt;
&lt;br /&gt;
유령(幽靈)도 그때야 잠이깨엿습니다 그리고 몸써리를 치는것입니다 얼마나 지리(支離)한꿈이며 괴로운 꿈이겟습니까?유령(幽靈)은다시일어나 것는것입니다 캄캄암흑(暗黑)속을 영원(永遠)히차고 영원(永遠)히 새지못할듯한밤을 제혼자가는것입니다 십년전(十年前) 내발밋흘 지나단이며 사랑을 속삭이든 소년(少年)은지금도 밤길을 제혼자 가고잇겟지요 황엽(黃葉)은 그래서 서러운일생(一生)을 울고만잇습니다&lt;br /&gt;
&lt;br /&gt;
정축십일(丁丑十一),일(一)&lt;br /&gt;
&lt;br /&gt;
=전과기=&lt;br /&gt;
누구나 버릇이란 쉽사리 곳처지는것은아니다 그러므로 세살쩍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말도 잇지 안는가?.그런데도흔히 다른사람의 한가지 버릇을 새로히 발현햇슬때는 아—저사람은 저런버릇이 잇구나하고 속으로 비우서보거나 그버릇이 조치못한종류의것이면 대개는 업수히역이는 수도잇는가봐!.그럿컨만 나에게는 아무리 곤처보려도 곤처지지안는버릇이란 손톱을 깍고 줄로 으르고 수건으로 닥고하는것이다그것도 때와곳을 가릴것도업시조욕(漕浴)나 다방(茶房)이나는 말할것업고기차(汽車)나 배를타고 멀리여행(旅行)이라도하면 심심푸리도되고 봄날도서관(圖書舘)가튼데서 서너시간(時間) 안저백이면 제아무리 게른뱅이는 아닐지라도 웃눈섭이 기중기(起重機)처름아래눈섭을 끄러다닐때도 잇는것이고 그럴때에 손톱을 잘르고줄로 살살으르면 자릿자릿한 자미에 왼몸에게틈이 다풀리는것이다.그야내나이 어릴때는아침일직이손톱을 잘르면어룬들은질색을하시며 말리기도하엿다,그리고 말릴때에 누구인지지금에기억되지는 안어도 우리집에자주오는 손이 말하기를 아침에손톱깍고 밤에 머리빗는것은몸에해롭다고 하는것이엿고 내생각에도 그런방문은『동의보감(東醫寳鑑)』에라도 싸여 잇는줄 아럿기에그뒤로는 힘써시간(時間)을 한나절지난뒤에 손톱을 닥곤하엿지만나도내대로 세상맛을 보게된뒤로는 쓴맛단맛을 다보고 시고떨븐 구석과 휘추고초가튼 광경에 부닥길때가 시작이되고는손톱치레를 할만한 여가도 업섯고 어느사이에 손톱은 제대로자라 긴놈 쩌른놈 삐뚜러진놈꼬부러진놈 벌덕잡버진놈 앙당마스러진놈 이러케되야 내손이란 그꼴이 맛치 오증어를 뒤집어 삶어논것이 되엿다.&lt;br /&gt;
&lt;br /&gt;
그럴때에 나는 또 다시 손톱을 잘를것은 잘르고 으를놈은 으르곤하엿스며 이른아츰이라도 가리지는 안엇다.그것은밤으로 머리를 깍거보아도 몸에 해로운것도 업스니까 아츰에 손톱을 깍는것조차 위생(衞生)과는 관게업는것을 안까닭이다.&lt;br /&gt;
&lt;br /&gt;
그런대 내가이손톱을 잘르는버릇은 언제부터 시작되엿는가를 생각해보면 그도벌서 삼십년(三十年)이 더지낫다,내가난지 백일(百日)이나 되엿겟지 이란저고리박게빨간내손이 나와서 내얼골을 햅여뜻고는 나는자스려질듯이 울엇다.어머니가 놀라서가위로 내손톱을 잘러주신것이 처음이고그것이 늘거듭하야 지는동안에봄철이오면 어머니는 우리형제(兄弟)를 차례로불러 퇴ㅅ마루 양지쪽에 안치고 손톱을 잘러주시고 머리도빗기고 귀도휩여 주섯스며 이것도 내나이 여섯살때 소학(小學)을 배우고는 이런일의한반(半)은 할아버님께 이관(移管)이 되엿다 예날 내고장 우리집에는그다지 크지는못해두 허무히 적지안은 화단(花壇)이 잇섯다 그리고그화단(花壇)은 이때쯤되면 일이밧벗다 깍지로긁고호미로 매고 씨갑씨를 뿌리고총생이를 옴겨심고 적당한 거름도 주엇다 요즘가티『시크라맨이나『카—비손』이나『추리프』가튼것은 업서도 옥매화(玉梅花) 분홍매화(粉紅梅花) 홍도(紅桃) 벽도(碧桃) 해당화(海棠花) 장미화(薔薇花) 촉규화(蜀葵花) 백일홍등등(百日紅等等) 빗도보고 향(香)내도맛고꼿도보고 입도볼 말하면 일년(一年)을 다즐길수가잇는것이엿는데 내할아버지 생각은 이제 헤아려보면 우리들에게 글읽고 글시씨인사이로노력(勞力)을 몸소맛보이는것도 되려니와 그것이 정서교육(情緒敎育)도될겸(兼) 당신의 노래(老來)를 화려(華麗)하게 꾸밀수도 잇섯든 모양이엿다 그럴때마다 우리들은 이다지 가볍고고흔 노동(勞働)이 끗나면 할아버지는 우리들게 손을씨슬것과 손톱에끼인흙을 끌어내도록 손톱을닥그라 하섯다.&lt;br /&gt;
&lt;br /&gt;
이러든 내손톱이기에 나는손톱을 소중히하고 잘르고 으르고 닥고하는 동안에 한가지방편을 어덧다 그것은 나에게거북한일을말하는 사람아페서 손톱을 닥는것이다.빤히 얼굴을맛대이고 배알에 거슬이거나듯기실흔 말을듯고 억지로 참을수도업고 그러타고 언잔흔표정(表情)을 할수도업서 손톱을 닥노라면 시굴게신 어머니도 그려보고 도라가신 할아버지의 모습을 우러러 뵈일수도잇다.내고장의 푸른하늘아래 봄이 왓슬것도 가트니&lt;br /&gt;
&lt;br /&gt;
——(완(完))——&lt;br /&gt;
&lt;br /&gt;
==주요 내용 요약==&lt;br /&gt;
주제: 작가(필자)의 소식을 세상에 전하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이다.&lt;br /&gt;
&lt;br /&gt;
소식 전달: '내'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가을 바람에 흘러가는 '황엽(黃葉, 누런 잎)' 조각을 자신의 편지라고 생각하고 그 서러운 전기를 들어보라고 한다.&lt;br /&gt;
&lt;br /&gt;
'황엽'의 관찰: 황엽(필자)은 자신이 거리에서 겪은 두 가지 경험을 이야기한다.&lt;br /&gt;
&lt;br /&gt;
소년의 성장과 비극: 어린 소년이 성장하여 연인과 행복을 속삭였으나, 부모에 대한 효행 문제로 헤어지는 비극을 목격하는 것이다. 황엽은 이를 '행복의 절정은 최대의 비극과 통한다'고 표현하며 자신의 '로-맨틔시슴'의 종언이라고 말한다.&lt;br /&gt;
&lt;br /&gt;
군중의 포효와 유령: 이후 황엽은 개별적인 사랑 이야기가 아닌, '뭇사람의 생활 전체'와 **'노도(怒濤)의 교향악'**을 목도한다. 황엽은 이 거대하고 위대한 '작란군(作亂群)'의 행렬에 전율을 느낀다. 행렬이 사라진 후, 황엽은 '패잔병의 유령' 같은 힘없는 한 사람의 고독하고 고통스러운 표류와 꿈을 따라가며, 꿈속에서 홍수로 고향을 떠난 농민들이 희망 없이 떠돌지만 '가자 압흐로 더가보자'는 그들의 단합된 의지를 발견하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마무리: 유령이 깬 후 다시 홀로 밤길을 걷는 모습을 보며, 황엽은 '서러운 일생을 울고만' 있다고 글을 마무리하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분석 및 특징==&lt;br /&gt;
메타포(은유)적 글쓰기: '황엽(낙엽)'이라는 매개를 통해 자신의 소식과 감정을 전달하는 고도의 은유적인 글이다. '황엽'은 작가 자신의 고독하고 소외된 자의식, 혹은 시대를 표류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시대의식의 투영: 개인적 낭만(소년의 사랑)의 종언과 함께,'뭇사람의 생활 전체'와 '노도의 교향악'을 목도하며 당대의 격변하는 사회상과 민중의 힘을 인식하는 작가 의식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이육사의 서정성: 후반부 꿈속에서 펼쳐지는 농민들의 표류와 그들의 굳건한 생존 의지는 당시 농촌의 피폐함과 함께 암울한 현실 속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을 비장하게 포착해내는 이육사 특유의 서정성을 보여주는 것이다.&lt;/div&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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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이육사의 기자 생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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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10T08:42:0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Imgpdnjs: /* 대구(大邱)의 자랑 약령시(藥令市)의 유래(由來) */&lt;/p&gt;
&lt;hr /&gt;
&lt;div&gt;[[분류:imgpdnjs]]&lt;br /&gt;
==이육사의 기자생활==&lt;br /&gt;
출소한 뒤에는 중외일보와 조선일보 대구지국에서 기자로 일했고, 1930년에는 ‘이활’이라는 이름으로 첫 시 &amp;lt;말&amp;gt;을 조선일보에 발표했다. 이 시기는 훗날 교보생명을 세우는 신용호에게도 영향을 주어 독립운동 자금 지원과 교육 사업 구상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알려져 있다.&lt;br /&gt;
&lt;br /&gt;
1930년, 이육사는 조선일보 지면을 통해 생애 첫 시 「말」을 발표하며 문단에 모습을 드러냈다. 1월 3일자 조선일보 7면 하단에 실린 이 짧은 작품에서 그는 매질에 지쳐 쓰러질 것 같은 말이지만 새해에는 다시 우렁차게 질주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이 작품이 바로 그와 조선일보의 첫 연결고리였다.&lt;br /&gt;
&lt;br /&gt;
==중외일보 대구지국==&lt;br /&gt;
1929년 6월 장진홍 의거 관련 혐의로 복역 후 1930년에 출소한 이육사는 곧바로 언론계에 투신했다. 그는 시 발표 직후 중외일보(中外日報) 대구지국에서 기자로 일하기 시작했다. 중외일보는 1926년 조선중앙일보가 제호를 변경하여 창간된 신문으로, 1931년까지 발행되었다. 이육사가 활동하던 시기는 일제강점기 언론 탄압 속에서도 민족의식을 고취하려던 분위기가 남아있던 때였다. 지방지국 기자로서 지역 사회의 현안을 취재하고 보도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기간의 활동은 그가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사회 현실에 대한 인식을 심화하는 데 기여했다.&lt;br /&gt;
&lt;br /&gt;
==조선일보 대구지국==&lt;br /&gt;
중외일보에서 근무한 뒤, 이육사는 1931년 8월 조선일보 대구지국으로 자리를 옮겼다. 일제강점기 지방의 신문 지국은 단순한 연락소가 아닌, 지방 취재와 기사 송고의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이육사는 이곳에서 현장 기자로서의 전문적인 경험을 쌓았다. 조선일보에서 자신의 이름(필명)을 걸고 처음으로 쓴 기사는 1932년 초에 연재되었다. 첫 기사인「대구의 자랑 약령시의 유래」는 1932년 1월 14일부터 네 차례에 걸쳐 연재되었다. 이 기사를 쓸 때 그는 본명 대신‘육사생(肉瀉生)’이라는 독특한 필명을 사용했다. '육사'라는 필명이 여기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으며, 이는 그의 상징적인 수인(囚人) 번호(264)와 연결되는 '이육사'라는 이름의 유래 중 하나로 간주되기도 한다. 이 기사는 대구의 대표적인 전통 시장인 약령시의 역사와 유래를 소개하는 향토색 짙은 글이었으며 이육사가 기자로서 대구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lt;br /&gt;
&lt;br /&gt;
[[파일:이육사기사.jpg|500픽셀|섬네일|center| 이육사가 조선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근무하면서 쓴 1932년 1월 14일 자 ‘대구의 자랑 약령시의 유래’ 기사. ‘육사생’이란 필명 사용. ⓒ 조선일보]]&lt;br /&gt;
&lt;br /&gt;
그는 스포츠 기사에서도 민족적 정서를 드러냈다. 1932년 3월 6일과 9일자 스포츠란에서 「대구 ‘장’ 연구회 창립을 보고서」라는 글을 연속으로 기고하며 이번에는 ‘이활(李活)’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여기서 그는 조상 대대로 이어오던 우리 겨레의 전통 놀이 ‘장치기’를 소개하며 경기 방식뿐 아니라 점수 계산 용어까지 온전히 우리말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더 나아가 이 놀이를 세계 농민 사회에까지 널리 보급하자고 주장했다.&lt;br /&gt;
&lt;br /&gt;
그는 1934년 무렵 조선일보로 다시 합류했고, 이후에도 꾸준히 조선일보 지면에 글을 남겼다. 1930년대 후반에서 신문이 폐간되기 직전인 1940년까지 발표된 글들은 다양했다. 5회 연재된 「노신 추도문」(1936년 10월 23~29일자), 「문외한의 수첩」(1937년 8월 3~6일자, 3회), 「황엽전」(1937년 10월 31일~11월 5일자, 4회), 「전조기」(1938년 3월 2일자), 그리고 1940년 발표된 「계절의 오행」 등이 대표적이다.&lt;br /&gt;
&lt;br /&gt;
==타임라인으로 보는 이육사의 기자 발자취==&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v2%3A2PACX-1vScyeelknnBUflE4gCcqr0d_p4jIpl00AVBmBzhC5cgKY8GPsH4h-JZmzezN5VoQTKsJGw76vWgsA7O&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width=100%25&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대구(大邱)의 자랑 약령시(藥令市)의 유래(由來)=&lt;br /&gt;
대구(大邱)의자랑&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의유래(由來)&lt;br /&gt;
&lt;br /&gt;
대구지국(大邱支局) 육(肉) 사(瀉) 생(生)&lt;br /&gt;
&lt;br /&gt;
대구의자랑이 무엇이냐?고 뭇는사람이 잇스면 지금사람들은아이어룬할것업시 대구능금(평과(苹果))을말할것이다 그러나 대구능금은 최근의 한명산물로서완전한 자랑의자위를 점령할수는업는것이다 여긔서우리는중학교지리교과서(중학교지리교과서(中學校地理敎科書))에도잇는대구의유명한약령시(연령시(燕令市))를자랑으로들어놋코그에대한력사적유래를먼저아라보자&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의사적유래(史的由來)&lt;br /&gt;
&lt;br /&gt;
대구의 약령시는 일년얼차의정긔시장으로서 그시장에 집산되는 산물은 맛치『도루고』(토이기(土耳其))나『코—카쓰』(고가삭(高加索))나중앙아세아(중앙아세아(中央亞細亞))내외몽고(내외몽고(內外蒙古))등지에서 일년 일차혹이차식 열니는 모피물(모피물(毛皮物))의시장과가티대성황을일우나 이상에말한 각지의시장은인류사회의생활형태가차차목집함을따라필요한물품을서로서로밧구고저일정한장소와시일에모히는말하자면물물교환(물물교환(物物交換))시대로부터교통의관계라는지긔후의관계라든지또는일반사희생활의형태가오히려아직까지녯날의그것을면치못하고현대자본주의국제간의무역관계(무역관계(貿易關係))가극도로발달된 오날까지에 원시경제(원시경제(原始經濟))를 연구하는학자들의 연구재료가 되는것은휴미잇는 사실이지만은 대구의약렁시는 물품의집산과 교환의량식이 그와방불하여도 일홉부터 약시(약시(藥市))가아니고 약렁시(약령시(藥令市))란령(영(令))자에대하야우리는직각적으로 이시장의긔원은엇던권력(권력(權力))의 지배(지배(支配))맛해일게된것을 알수가잇다그러면 이약렁시가 처음시직된것은 언제부터인가 그야말로중학교교과서에까지『고래(고래(古來))로유명』이라고만씨여잇고 적확한년대를 쓰지안엇슴으로 대담하게 그년대를 내어노을수는업스나 비교적정확한수자를 조사한대로쓰면 서력일천륙백오십팔년(이조개국이백육십팔년효종조(李朝開國二百六十八年孝宗朝))거금이백칠십 사년전부터개시하게 되엿다고한다 그때야말로 조선을팔도(팔도(八道))에 닌후아노코 다시칠십일주로 난호아노흔 경상도의 정치적수부(수부(首府))도대구려니와 경상도(경상도(慶尚道))를둘너 남부조선각지는 산수명랑하고긔후온화하야각색약초(약초(藥草))의배양에지질이알맛기도하고 교통도편의하야(그때로보아서는)물산의집산에최적의지대도 대구엿스며 그때야말로임진병란(임진병란(壬辰兵亂) 이끗을막고모든볼회와 시설이 차자정돈뇌고발전을 보이며따라황실중심(성실중심(星室中心))으로끄으려는당시의위정사(위정자(爲政者))들은□□□□조금이라도 관계잇는 물품이면무엇이나물론하고 먼저진상(진상(進上))이란일흠아래최상의생산품을골너 서울도보내고 일반백성이먹고 입고쓰게되는 것이다그리고엇던 계□을물는하고병업시일생을 살수도업는것은 생리상자연의 리치엄으로 일국의지존(지존(至尊))인왕(왕(王))도병마의무서움은면치못 하는것이다 그래서황실에서일년동안쓸 약품을이곳에서 구하고저 국가의명령으로개시케한것이 오날날 우리가보고듯고 하는약령시의 처음이다그때는 약령이서면 감사(감사(監使))(현도지사(現道知事))가약재를골다봉하야중앙 정부 사약원(중앙정부사약원(中央政府司藥院))에 보낸후에 팔도에서모혀든 약재를일반 약국(약국(藥局))이사서완조선안의병든사락들이 그해그해의 치료를하게다엿다고한다(속(續))&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와경기(景氣)(이(二))&lt;br /&gt;
&lt;br /&gt;
대구지국육(大邱支局肉) 사(瀉) 생(生)&lt;br /&gt;
&lt;br /&gt;
【대구(大邱)】대구의약령시(약령시(藥令市))는다른상품시장에서는볼수업는특수한 유래를가지고 발달하여온만큼 지방의정청에서도일년춘추두차레에정긔적으로모여드는 지방생산자들을 위하야지방경제발달을 조장하고저 계획을세우고 제도의개선과 개시(개시(開市))긔간의 연장등 모든방면으로힘을써 보앗스나 모다뜻과갓지못하고 서구(서구(西歐))렬국의동양(동양(東洋))침입으로의학(의학(醫學))약학(약학(藥學))등학문이발달됨에침(침(針))은주사(주사(注射))로변하고바쇠는『메—쓰』로화하는바람에한약(한약(漢藥))의 가치는 전연그권위를일케되면서 대구의 약령시도차차워마하야 매매되는 약재료도주러지기만 하든중『후—버』겅긔가세계의주식시장(주식시장(株式市場))을혼란케하듯이 대구의 약령시장도 대타격의한때가 지나가게되엿스니 그는무엇일가?지금부터이십이년전(신해년(辛亥年))에중산손문 중산손우(中山孫又))씨혁명으로대청황실)대청황실(大清皇室))을넘어지면서부터는 청황실이 조선정부(조선정부(朝鮮政府))에의뢰하야사가든약품은실로막대한것이엿스나전부그매도의길이 막히게된 여러가지조건밋헤매매가 축소하여 전성시대의반도못되게 되얏다 그나마최근에는전주(전주(全州))대전(대전(大田))진주(진주(晋州))원산(원산(元山))등지에군소시장이개설되여이를약령시로밀미암아대구에떠러지는돈은매우감소되엿스나아직도령시가개설되면동성정입구(동성정입구(東城町入口))로부터남성정입구(남성정입구(南城町入口))까지 십여정(십여정(十餘町))에 처당재(당재(唐材))초재(초재(草材))등삼백여종의 약품도만흐려니와 그근처에림시려인숙(임시여인숙(臨時旅人宿))이무수히설치되고 포백기타 일용생활에필요한물품이면 평상시의 멧배나더잘팔리는 호경긔를 연설한다 그리하야 촌양빈들의낫서른돈을 먹어보겟다는 술집색시들까지 헐직한인조견으로 봄을싸고 도스리고안저서 열분애교를 술잔에담어보내는것도『넌센스』한징면인지는모르겟다마는 흡객술(흡객술(吸客術))이 졸열한다기보니 시대에뒤처진 기생들은본바닥에 거주하는손님들은『카페—』붉은녀급(여급(女給))들의자주(자(紫))빗유혹에다 뛰우고 음력과세를압서초조하는중 때맛침사재(시재(時哉))시재를불러 시내 각요리집 극장할것업시 대만원의성황을 이루는것은 그럴듯도한일이지마는 여긔에는 순진한산간에서 새노래물소리에 거치른세상일은 □도꾸지못한 산아이와도갓치 힘드려작만한 약재를도시구경겹 하여와와서판돈은『메리·픽포—드』안일망정어엽분녀자를맛나 잇는대로 다쓴후에명년의약령시 개설되기를 손을꼬바기다려서 와서보면 그녀자는어느하늘밋헤서 잇든남자와 단꿈을꾸는지 알길조차 바이업고작년구든맹서가 찬□(회(灰))처럼살어잘때화낌에 한잔무어라 먹자부어라 먹자하는연긔가튼 경긔는 견양경긔(견양경기(犬養景氣))이상으로 흥성거린나 그러기에여긔에최근오개년간의매매고외출동인원수와□적어본다&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와경기(景氣)&lt;br /&gt;
&lt;br /&gt;
(삼(三))&lt;br /&gt;
&lt;br /&gt;
대구지국(大邱支局) 육(肉) 사(瀉) 생(生)&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의현재(現在)&lt;br /&gt;
&lt;br /&gt;
약령시의 밋치는바 경제관계는실로 다방면으로 황금왕시대를연줄하며 발달하여오는만큼 녯날에는 조선안에서 생산하는재료가 매매되는이외에 당재(당재(唐材))라고하야 증국으로부터금석지재(금석지재(金石之材))가만히수입되는외에는 벌로볼만한것이 업섯스나 교통의발날노 국제무역이빈번하야지게된 오날에는일본,중국,몽고등시는말할것도 업거니와동부『아푸리카』의찌는둣한열대지방에서 생산되는 소철(소철(蘇鐵))을비롯하야 황막한시베리아의천지를 내집가티 도라다니는웅담(웅담(熊膽))까지모혀들게되는것은이약정□를통해본□류문와사의 한로막이라고도 할수잇는것이다 이러케 약령시에모혀드는약재료가 교통의 혜택을임어거의 파멸에 갑가운약령시가새로히왕성하게되자 지금이야말로 시장의 량입구에 마천두(마천루(摩天樓))가튼『리—딍』(유도탑(誘導塔))을세우고『일미네—숀』(대전식(大電飾))사이에 흥긔청긔가나붓기며 지방으로부터 모혀드는 생산자들을끄려드리는것은 확실히 일반상업전술의발달을의미한다 그러나 원래이시장는 약을재료그대로가지고와서 매매케 되는것이 특질의엿스나 지금은천일령신환,조고약과어을빈만병수까지 시장목판에서 인긔를집중하고잇는것은 아모리보아도 조뵈 화지관는 사실이다 이가튼변천가운데도 특긔하야들것은 령시의개설의래 장구한년월을 지남에따라 그본래의 성질에배반하야 부업적상인게놉을 령시의주요구성 요소로하게되고 부터는 경상도내지방에밋치는 양령시의영향은 일반 소비경제상에크다란 파문을그리게되여 약텽시본래목적인 약새생산에 효과가적게되고 시장내의 불당중개인으로말미암아 일사 평판이조치못하엿슴으로 이러한 페풍을 일소하기위하야 지금부터이십여년선에 생긴 한약상조합한약상조합(漢藥商組合))과칠년전전주(전주(全州))에양령시가처음뇌려고할때에 대함키위하야생긴약령&lt;br /&gt;
&lt;br /&gt;
흉회(약령시진흥회(藥令市振興會))가지금은약령시번영회(약령시번영회(藥令市繁榮會))로변경되여 최선의로력을 다하야오며 감독한결과 지금은어느정도까지 통제가되여간다고한다 그리하야 지금이야말로동력(동력(動力)의위력밋해거대한공장뉼이날로늘어남조선의『메드로포리쓰』를만드려는 대구현네과학(현대과학(現代科學))의태반(태반(胎盤))가튼대구의한복판에서 조선의 자랑이라고도할수잇는원시시장(원시시장(原始市塲))의한개가 벌서오늘날의 □제권내에발을듸듸고장차을래일의세계를향하야나가는것은홍미김흔일이다(속(續))&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의유래(由來)&lt;br /&gt;
&lt;br /&gt;
(사(四))&lt;br /&gt;
&lt;br /&gt;
대구지국육사생(大邱支局肉瀉生)&lt;br /&gt;
&lt;br /&gt;
삼백년동안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복잡다단한 필연적 과정을경과하여오며 자본주의 경제의현계단에서의연히그존재가필요하게된대구약령시의발달사는완연히금일경제의발달사(발달사(發達史))라고보지안을수업다 그럼으로여긔특긔할것은 그성실상 순박함이짝이업는 죽말하면 매매하는시람들의아관박대(아관박대(雅冠博帶))라든지 생산품 포장가튼것까지도(물론변천된것도만흐나)삼백년전의 녯날을 그려볼만한순박한이서장에도현대금융자본의붉은혀(설(舌))는내밀기시작하엿다지금부터 시년전엇던 외래지본벌이자긔소유의따에시장의위치를옴기려고 현위치는 도시교통상불편하다는구실로써다방면으로술책을써보앗스나현장소에서긔십년간상권을 잡고잇는 대가들의명렬한반대로그만뜻을일우지못한일도잇다그러면내구약령시를 지배하고 따라전조선의한약상계에우이를삽고잇는 이는누구일가여긔는 누구보다도 김홍조(김홍조(金弘祖))씨를아침수가업다씨는 전선적으로보아 제이위가기를설허할만하다고하며그다음순서업시치면 신태문(신태문(申泰文))김종수(김종수(金宗洙))지이원(심의원(沈義元))리치욱(이치욱(李致旭))두병은(두병은(杜炳殷))김내명(김내명(金乃明))방규진(방규진(方圭鎭))제씨를칠수잇고 그중에도 두병은(두병은(杜炳殷))씨가튼이는여러대를나려오며 사업에 종사하야 그문패는 실로일백오십년 이란력사를가저 대구의 동인당(동인당(同人堂))이란 일홈이잇다&lt;br /&gt;
&lt;br /&gt;
북평(北平)의동인당(同仁堂)은팔백년(八百年)의역사(歷史)가잇슴)그래서 대구의약텽시인긔는 이들의손에 좌우된다하여도과언이아니며 금년의약가는 금재금(김재금(金再禁))에따르는 제불가의폭등과 일중사변(일중사변(日中事變))의영향과중국은가(중국은가(中國銀價))의변동으로인하야소위당재(당재(唐材))는 폭동하엿고 조재(초재(草材))에잇서서 도변조로올은것이 불소하다는바 금후에드 더욱시세는오를무양이라고한다 여긔에당초재를물론하고 시세를 적어보앗스면좃켓스나 약명이한업시만코 날로변동이만흠으로 약렁시세표가 잇다는것만말한후에 특수한고저를보이는 몃가지를 적어보면 당재의원상산약(원상산약(元常山藥))은작년에는 매근에일원륙십전하든것이 금년은 단오십전에폭락되여 이십년레에 처음보는헐가라하며 산수유(산수유(山茱萸))는작년에 매근사십전하든것이 금년은십전에폭락되고 토사자(토사자(兎絲子))가튼것도 작년사오십전에매매되든것이 금년은십전에 폭락되여 자방생산자의 저울(형(衡))에 예긔치못한 광란(광란(狂亂))을보이고잇다고한다&lt;br /&gt;
&lt;br /&gt;
약령시(藥令市)의장래(將來)&lt;br /&gt;
&lt;br /&gt;
그러면 다음날의약텅시는 엇더케될것인가?이문제는 결코예언자의 심심푸리와가튼 헛된소리는아니다적어도현세계의경제관계 와그에따라 일어나는모든사정이 쇄신된다면 모르지마는현계단의 경제제도가 그량존속되는한에는 세계적으로 한약에대한연구가왕성하여지고한약의권위가나날이놉하가는만큼약텅시의장래는압흐도세계에그일홈이놉하진다고일부인사들이말하고잇는것이그다지허언이아닐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지금은시장의형세가 산만하게생산자가 중개인울거처 도매상에게 팔게되여중간에책취를 당하게된다 하여도 장래는 현시장의대자벌들이주식(주식(株式))이나 혹은학자(합자(合資))의형식으로시장을상설하고도매와 개인생산자사이에 직접취인하게되여 지방경제의 윤택과약초생산의 장려의 약텅시본래의목적을 소개하려는것이 당업자간의 의도(의도(意圖))인 동시에매우현명한 의견인듯하다 그래서참된 대구자랑을 만들고조선의자랑을만들자——(완(完))&lt;br /&gt;
&lt;br /&gt;
==주요 내용 요약==&lt;br /&gt;
유래: 대구의 자랑으로 능금(사과) 대신 약령시를 들며 그 유래를 설명한다. 약령시는 1년에 한두 번 열리는 정기 시장이며, 조선시대 효종(1658년) 때 **국가 명령(令)**으로 개시된 것이다.&lt;br /&gt;
&lt;br /&gt;
당시 경상도의 정치적 수부였던 대구는 약초 재배에 적합한 기후와 편리한 교통으로 물산 집산의 최적지였다.&lt;br /&gt;
&lt;br /&gt;
궁중에서 쓸 약품을 이곳에서 구하기 위해 감사가 약재를 골라 사약원(司藥院)에 진상한 후, 팔도 약재를 일반 약국에서 구매하여 조선 전역의 환자 치료에 사용하게 한 것이 시초이다.&lt;br /&gt;
&lt;br /&gt;
쇠퇴와 현황: 서구 열강의 동양 침입과 함께 의학 및 약학이 발달하며 한약의 권위가 약해졌고, 약령시는 점차 쇠퇴하였다.&lt;br /&gt;
&lt;br /&gt;
특히 22년 전(1915년경) 신해혁명으로 청황실이 무너지면서 조선 정부에 의뢰하던 막대한 약품 매도 길이 막힌 것이 큰 타격이었다.&lt;br /&gt;
&lt;br /&gt;
최근 전주, 대전 등지에 군소 시장이 개설되어 대구 약령시의 경제적 이익이 감소했지만, 여전히 시장 개설 시에는 많은 약재가 모이고(당재, 초재 등 300여 종), 인근 상권에 호경기를 가져오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당시 약령시의 주요 구성 요소가 부업적 상인 계층으로 변질되고 불량 중개인 문제가 발생하자, 한약상조합과 약령시진흥회(현재 약령시번영회)가 결성되어 통제를 시도하고 있었다.&lt;br /&gt;
&lt;br /&gt;
약재 가격 변동: 당시(1937년) 일중사변(日中事變)의 영향과 중국 은가 변동으로 당재(唐材) 가격이 폭등했지만, 일부 국내 초재(草材)인 산약(山藥), 산수유(山茱萸), 토사자(兎絲子) 등은 폭락하여 생산자들에게 광란(狂亂)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lt;br /&gt;
&lt;br /&gt;
==분석 및 특징==&lt;br /&gt;
역사성 강조: 대구 약령시를 단순한 시장이 아닌 '국가 명령(令)'으로 시작된 역사적 시장으로 규정하며, 정치적, 지리적 배경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시대적 배경 반영: 서양 의학의 도입, 중국 혁명(청 황실 붕퇴), 당시 국제 정세(일중사변, 중국 은가) 등이 시장의 흥망성쇠에 미친 영향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여 식민지 시대의 경제 상황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시장 변화: 전통적인 약재 거래 방식에서 완제품 거래가 늘어나는 등 근대화에 따른 시장의 변화 양상도 포착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원시 시장'의 현대적 생존: 대구 약령시를 '조선의 자랑'이자 '원시 시장' 중 하나로 보면서도, 현대 자본주의 경제권에 발을 디디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평가하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대구(大邱)장연구회(硏究會) 창립(創立)을보고서=&lt;br /&gt;
구지국(大邱支局)&lt;br /&gt;
&lt;br /&gt;
이활(李活)&lt;br /&gt;
&lt;br /&gt;
민중(民衆)의보건운동(保建運動)은 요사이각계인사(各界人士)들의 크다른관심(關心)거리로어듸서 엇더케 무슨방법(方法)으로『억세인조선(朝鮮)』을건설(建設) 할수잇슬가 함에연구(硏究)를거듭하게되엿다회상(回想)하면 조선(朝鮮)에새로운운동경기(運動競技)가 수입(輸入)된지도 일반문화(一般文化)와갓치 벌서 반세기(半世紀)란역사(歷史)를가지고잇다 그중(中)에는 야구(野球)·정구(庭球)·축구(蹴球)·농구등(籠球等)을비롯하야 유도(柔道)·격검(擊劒)·권투등(拳鬪等)모든경기(競技)가들어와서 장족(長足)의진보(進步)도하엿스러니와 세계적무대(世界的舞臺)를향(向)하야 진출(進出)한선수(選手)도업지안타 그러나 그것은극소수(極小數)인동시(同時)에 지금(至今)까지의 조선(朝鮮)의운동경기(運動競技)는 한갓도회(都會)를중심(中心)으로잘어왓다 물론(勿論)다그럿타는것은아니지만은 현하운경기(現下運競技)그것은 조선(朝鮮)이나 혹(或)은다른나라에서라도 학교(學校)를중심(中心)으로발전(發展)되여오는만큼 교내(校內)의『스포—스맨』들은 완연(宛然)『떼파—트』진열장(陳列場)속에서 고객(顧客)을호리는『마네킹』처럼 상품화(商品化)한교육제도하(敎育制度下)에서 달큼하게 그상품(商品)의가격(價格)을놉혀주엇스며 그학교(學校)를버저나와 실사회(實社會)에취직(就職)을하면 역시(亦是)그와갓튼『마네킹』노릇을하여왓다 이러는동안 조선(朝鮮)의운동경기(運動競技)는 그발생(發生)으맹아(萌芽)가 힘것생장(生長)하기도전(前)에현제도(現制度)의 독아(毒牙)에여지(餘地)업는약관(躍關)을당(當)한절대(絕對)의원인(原因)과 그밧게사회(社會) 경제(經濟) 정치적제정세(政治的諸情勢)의착잡(錯雜)한모순(矛盾)이 너무나철업시이운동경기(運動競技)의발달(發達)까지 조해(阻害)하여왓다그러나 노력(勞力)과인내(忍耐)는갑이잇서이때까지외래품(外來品)이라면 아무비판(批判)도업시 실행(實行)하야오든우리도야구(野球)의전원(全員)이일시(一時)에활약(活躍)할수업는폐(廢)와정구(庭球)의시후(時候)에대(對)한불편(不便)과『꼴프』의귀족적(貴族的)인것등(等) 모든운동(運動)의단점(短點)만을빼고 장점(長點)만을취(取)하야 조선적운동(朝鮮的運動)을창출(創出)하려는이이 경성(京城)서는중앙체육연구소(中央體育研究所)가생(生)기고 금반대구(今般大邱)에서『장』연구회(硏究會)가생(生)기게된것이다&lt;br /&gt;
&lt;br /&gt;
장이란북조선(北朝鮮)의궁벽(窮僻)한지대(地帶)의인사(人士)들은 잘알지못할는지모르나이장만은 오래동안 우리조선(朝鮮)으로부터 그들의자손(子孫)인우리들에게부(傅)하아은 국기(國技)의하나이다물론(勿論) 국기(國技)란단순(單純)한의미(意味)로서만필자(筆者)가그것을추장(推獎)하는것은인니다 딸아서 운동(運動)의영향(影響)이문화창조(文化創造)에잇더한역할(役割)을한다는것을새로히논(論)하려는것도안니다&lt;br /&gt;
&lt;br /&gt;
대구지국(大邱支局) 이(李) 활(活)&lt;br /&gt;
&lt;br /&gt;
그러나일반문화(一般文化)가 그지리(地理)와풍토(風土)에영향(影響)되는바만흔것과가티운동경기(運動競技)도 또한그러히다 그것은『필랜드』사람들이『스켓틩』을잘하는것과『낙위(諾威)』사람의『스키-』를잘하는것이라든지『정말(丁抹)』사람의체조(體操)기튼것이 이점(點)을잘실증(實證)하고잇다 그러면조선(朝鮮)에는 조선적(朝鮮的)인자연세력(自然勢力)도 그러하러니와 더욱이 금일(今日)의사회적경제적(社會的經濟的)모든조건(條件)이 조선인(朝鮮人)에적합(適合)한것이안니면 안될것으다 그래서 최소(最少)의노력(努力)으로최대(最大)의 효과(効果)를발현(發現)치안으면안될것이다&lt;br /&gt;
&lt;br /&gt;
아에우리는생각한다 오날날까지조선(朝鮮)에수입(輸入)된운동경기(運動竸技)의종목(種目)은그대(臺)를매거(枚擧)키난(難)하나 그중(中)한가지도 우리에게 적합(適合)한것이업고 더욱이농민(農民)들에게 추장(推獎)할만힌운동(運動)은업섯다 그러나이장만은 오날날까지 그들농민(農民)의손에서전(傳)해왓다 그러면서도그진정가치(眞正價値)를돌낫든것이 오날이야 사계(斯界)의권위제씨(權威諸氏)가 적년연구(積年硏究)를거듭하야 발표(發表)한결과(結果)를보면 운동(運動)으로시 제일망각(第一忘却)치못할생리학상(生理學上)으로보아 전체(全體)가균형적(均衡的)으로활동(活動)되고 경제적(經濟的)으로도 기구(器具)를작만히는데 돈이들지안코 어느곳에서든지『장채』를직만하고『장방울』을다드무면논바닥에서나 밧기운데서라도 할수잇는농민본위(農民本位)의운동(運動)이라고한다 그리고다른운동경기(運動競技)가티『씨—슨』이잇는것도안니고 춘하추동(春夏秋冬)어느때라도 되는경기(競技)인즉 농번기(農繁期)는 못히드라도 농한기(農閑期)갓트면 그들의육체(肉體)를 하련(鍜鍊)하는데 매우적당(適當)한것이다 수(數)만흔경기중(竸技中)에능(能)히경제조건(經濟條件)이 어느정도(程度)까지용인(容認)한다하여도 그들의게생전(生前)듯자못하든말로『핸드뽈』이니『꼴』이니『라인』이니하여보아도 결(决)크그들에게취미(趣味)가잇슬이(理)가만무(萬無)하고취미(趣味)가업스면 그들에게발전(發展)될이(理)도만무(萬無)한것이다 그러나『장』연구회동인(硏究會同人)들의말을들으면경기(竸技)에계산(計算)하는용어(用語)까지도순조선(純朝鮮)말로한다는것의경하(慶賀)할일이다 이『장치기』를국기(國技)로서추장(推獎)하야세계(世界)에널니선전(宣傳)하는것도좃치만은먼저안으로그들이이국기(國技)를직혀왓는만큼 그들에게조직적(組織的)으로보급(普及)하라 그리서조선농민(朝鮮農民)의경기(競技)를만들고 따라 세계(世界)의농민대중(農民大衆)에게 보급(普及)식하라!그래서『장』연구회(硏究會)의본래(本來)의사명(使命)을다하기를바란다(종(終))&lt;br /&gt;
&lt;br /&gt;
=노신추도문(魯迅追悼文)=&lt;br /&gt;
(일(一))&lt;br /&gt;
&lt;br /&gt;
이(李) 육(陸) 사(史)&lt;br /&gt;
&lt;br /&gt;
『아(阿)Q정전(正傳)』의 작자(作者)로서 세계적작가(世界的作家)이며 중국신문학(中國新文學)의 최고봉(最高峰)인 노신(魯迅)이지난십구일(十九日) 오전오시(午前五時)에상해(上海)에서 숙아(宿疴)로 영면(永眠)하엿다는 실음(實音)이전(傳)한지 삼일(三日)되는날에 우리는 간단(簡單)한일문(一文)을 비러 삼가추도(追悼)의뜻을 표(表)하거니와 만년(晩年)에그의 정치적불우(政治的不遇)로인(因)하야 문학자(文學者)로서의 성명(聲名)조차가 우리에게 널니퍼지지못한것을 더유감(遺憾)으로생각한다.　　　　 (일(一) 기(記) 자(者))&lt;br /&gt;
&lt;br /&gt;
일구삼이연육월초(一九三二年六月初) 어느토요일(土曜日)아츰이엿다 식관(食舘)에서나온 나와M은 네거리의 담배가가에서조간신문(朝刊新聞)을 사서들고 근육신경(筋肉神經)이떨니도록 굴근활자(活字)를 함숨에나려읽은것은 당시중국과학원부주석(當時中國科學院副主席)이요 민국혁명(民國革命)의 원로(元老)이든양행불(楊杏佛)이 남의사원(藍衣社員)에게 암살(暗殺)을당(當)하엿다는 기사(記事)이엿다.&lt;br /&gt;
&lt;br /&gt;
우리들은 거리마다 삼엄(森嚴)하게늘어선 불란서공무국(佛蘭西工務局) 순경(巡警)들의예리(銳利)한눈초리를 등으로하나 갓득늣기면서 여반로(侶伴路)의 서국(書局)까지을동안은 침묵(沈默)이 계속(繼續)되엿다&lt;br /&gt;
&lt;br /&gt;
문(門)안에 들어서자마자 편집원(編輯員)R씨(氏)는 우리들에게 다음과가튼말을 들여주엇다.&lt;br /&gt;
&lt;br /&gt;
중국좌익작가연맹(中國左翼作家聯盟)의 발안(發案)에의(依)하야 전세계(全世界)의 진보적(進步的)인 학자(學者)와 작가(作家)들이 상해(上海)에모혀서중국(中國)의 문화(文化)를 옹호(擁護)할대회(大會)를그해팔월(八月)에 갓게 된다는것과이에 불안(不安)을 늣기는 국민당통치자(國民黨統治者)들이 먼저 진보적작가진영(進步的作家陣營)의 중요분자(重要分子)인 반재년(潘梓年)(현재남경유폐(現在南京幽廢))과 인제는 고인(故人)이된 여류작가(女流作家) 정영(丁玲)을 체포(逮捕)하여행방(行方)을 불명(不明)케한것이며 여기동정(同情)을 가지는 송경령여사(宋慶齡女史)를 중심(中心)으로한 일련(一聯)의 자유주의자(自由主義者)들과 작가연맹(作家聯盟)이 맹렬(猛烈)한 구명운동(救命運動)을한사실(事實)이며 그것이 국민당통치자(國民黨統治者)들의 눈쌀에 거슬려서 양행불(楊杏彿)이 희생(犧牲) 된것과 그외(外)에도 송경령(宋慶齡) 채원(蔡元) 배(培) 노신등등(魯迅等等) 상해(上海)안에서만삼(三) 십명(十名)에갓가운 지명지사(知名之士)들이 남(藍) 의사(衣社)의『뿔랙·리스트』에 올라잇 다는것이엿다.&lt;br /&gt;
&lt;br /&gt;
그리고 그뒤삼일(三日)이 지난후(後)R씨(氏)와 내가탄자동차(自動車)는 만국빈의사(萬國殯儀社)아페다엇다,간단(簡單)한 소향(燒香)의예(禮)가 끗나고도라설때 젊은두여자(女子)의수원(隨員)과함게드러오는송경령여사(宋慶齡女史)의일행(一行)과가티 연회색(軟灰色)두루막에 검은『마괘아(馬掛兒)』을 입은중년(中年)늙은이생화(生化)에 싸인관(棺)을 붓들고 통곡(痛哭)을하든그를 나는문득 노신(魯迅)인것을알엇스며 엽헤섯든 R씨(氏)도 그가노신(魯迅)이란것을 말하고난 십분(十分)쯤뒤에 R씨(氏)는나를 노신(魯迅)에게소개(紹介)하여주엇다&lt;br /&gt;
&lt;br /&gt;
그때노신(魯迅)은 R씨(氏)로부터 내가조선청년(朝鮮靑年)이란것과 늘한번대면(對面)의기회(機會)를가지려고 햇드란말을듯고외국(外國)의선배(先輩)압히며 처소(處所)가 처소(處所)인만치 다만 근신(謹愼)과공손(恭遜)할뿐인나의손을 다시한번 잡아줄때는그는매우 익숙하고 친절(親切)한친구이엿다&lt;br /&gt;
&lt;br /&gt;
아!그가벌서 오십육세(五十六歲)를일기(一期)로 상해시고탑구호(上海施高塔九號)에서 영서(永逝)하엿다는 부보(訃報)를바들때에 암연(暗然)한줄기 눈물을지우느니 엇지조선(朝鮮)의 한사람후배(後輩)로써 이붓을잡는나뿐이랴&lt;br /&gt;
&lt;br /&gt;
(이(二))&lt;br /&gt;
&lt;br /&gt;
이육사(李陸史)&lt;br /&gt;
&lt;br /&gt;
중국문학사상(中國文學史上)에남긴 그의 위치(位置)『아(阿)Q의 정전(正傳)을 다읽고낫슬때나는 아즉까지 아(阿)Q의 운명(運命)이걱정되여 못견듸겟다』고한『로망·로—랑』의 말과가티 현대중국문학(現代中國文學)의 아버지인 노신(魯迅)을&lt;br /&gt;
&lt;br /&gt;
이해(理解)하기 위(爲)해서는 우리는 먼저 아(阿)Q의 정전(正傳)을 이해(理解)하지안흐면 안된다 그러나 지금의 중국(中國)의 아(阿)Q들은 벌서『로망·로—라』으로하야금 그운명(運命)을 걱정할 필요(必要)는 업시되엿다실(實)로 수만흔 아(阿)Q들은 벌서 자신(自身)들의 운명(運命)을 열어갈길을노신(魯迅)에게서배웟다 그래서중국(中國)의 모든근로층(勤勞層)들은 남경로(南京路)의『아스필트』가자신(自身)들의 발미테 흔들리는것을늣기며 시고탑로신촌(施高塔路新邨)의구호(九號)로그들이가젓든 위대(偉大)한문호(文豪)의최후(最後)를애도(哀悼)하는마음들은 황포탄(黃浦灘)의붉은파도(波濤)와가티 밀려가고잇는것이다&lt;br /&gt;
&lt;br /&gt;
그럼으로 아(阿)Q시대(時代)를 고찰(考察)하여보는데따라서 노신정신(魯迅精神)의 삼단적변천(三段的變遷)과아울러 현대중국문학(現代中國文學)의 발전과정(發展過程)을 알어보는것도그를추억(追憶)하는의미(意味)에서 그다지 허무(虛無)한 일은아닐것이다,&lt;br /&gt;
&lt;br /&gt;
중국(中國)에는 고래(古來)로 소설(小說)이라는오늘날우리가 보는것과가튼 완전(完全)한예술적형태(藝術的形態)는 존재(存在)하지못햇다 삼국연의(三國演義)나 수호지(水滸誌)가아니면홍루몽(紅樓夢)쯤이잇섯고 다소(多少)의전기(傳記)가잇섯을뿐으로서 일반교양(一般敎養)잇는집자제(子弟)들은 과거제도(科擧制度)에 화(禍)를바더문어체(文語體)의&lt;br /&gt;
&lt;br /&gt;
고(古)&lt;br /&gt;
&lt;br /&gt;
문(文)만숭상(崇尙)하고백화소설(白話小說)가튼것은속인(俗人)의할일이라햐야나치아는하편소위문단(所謂文壇)은당송팔가(唐宋八家)와팔반(八般)의혼합체(混合體)인상성파(相城派)와사기당(思綺堂)과 원수원(袁隨園)의유파(流派)를따라가는 사륙변체문(四六騈體文)과황산곡(黃山谷)을본존(本尊)으로하는 강서파등등(江西派等等)이 당시정통파(當時正統派)의문학(文學)으로서 과장(誇張)과 허위(虛偽)와 아유(阿諛)로서 고전문학(古典文學)을 모방(模倣)한데지나지못하엿스며 새로운사회(社會)를 창생(創生)할하등(何等)의 힘도가지지못한것은 미루어알기도 어렵지안흔 분위기(雰圍氣)속에 중국문학사상(中國文學史上)에 찬연(燦然)한봉화(烽火)가 일어난것은일구일오년(一九一五年) 잡지(雜誌)『신청년(新靑年)』의 창간(創刊)이그것이다&lt;br /&gt;
&lt;br /&gt;
이것이처음발간(發刊)되자 당시(當時)『아메리카』에잇든호적지박토(胡適之博土)는『문학개량추의(文學改良蒭議)』라는『문학혁명론(文學革命論)』을일구일칠년신연호(一九一七年新年號)에 게재(揭載)하야진독수(陳獨秀)가 이에찬의(賛意)를표(表)하고 북경대학(北京大學)을 중심(中心)으로한 진보적(進步的)인교수(敎授)들이 합류(合流)하게되자 종래(從來)의고문가(古文家)들은 이운동(運動)을방해(防害)코저 가진야비(野卑)한 정치적수단(政治的手段)을 써도보앗스나 일구팔년사월호(一九八年四月號)에 노신(魯迅)의『광인일기(狂人日記)』란 백화소설(白話小說)이&lt;br /&gt;
&lt;br /&gt;
발(發)&lt;br /&gt;
&lt;br /&gt;
표(表)되엿슬때는 문학혁명운동(文學革命運動)은 실천(實踐)의거대보무(巨大步武)를옴기게되고 벌서고문가(古文家)들은 그추악(醜惡)한꼬라를 감주지안흐면안되엿다는것은 그후(後)얼마뒤에 노신(魯迅)이광동(廣東)에갓슬때에어&lt;br /&gt;
&lt;br /&gt;
떤흥분(興奮)한청년(靑年)은 그를마지하는문장(文章)속에『광인일기(狂人日記)』를 처음읽엇슬때 문학(文學)이란것이 무엇인지몰랏든나는 차차읽어나려가면서이상(異常)한흥분(興奮)을 늣겻다 그래서 동무를만나기만하면 곳붓들고말하기를——중국(中國)의문학(文學)은 이제바야흐로 한시대(時代)를 짓고잇다 그대는『광인일기(狂人日記)』를 읽어보앗는가 또거리를거러가면 길가는사람이라도붓들고 내의견(意見)을발표(發表)하리라고생각한적도잇섯다……』(노신재광동(魯迅在廣東))&lt;br /&gt;
&lt;br /&gt;
이문제(問題)의소설(小說)『광인일기(狂人日記)』의내용(內容)은 한개망상광(妄想狂)의 일기체(日記體)의소설(小說)로서 이주인공(主人公)은 실(實)로대담(大膽)하게또명확(明確)하게 봉건적(封建的)인 중국구사회(中國舊社會)의 악폐(惡弊)를통매(痛罵)한다 자기(自己)의 이웃사람은 물론(勿論)말할것도업고 특(特)히자기가정(自己家庭)을 격렬(激烈)히 공격(攻擊)하는것이다 가정(家庭)—가족제도(家族制度)라는것이중국봉건사회(中國封建社會)의 사회적단위(社會的單位)로서일반(一般)에열마나한 해독(害毒)을끼처왓는가.봉건적가족제도(封建的家族制度)는 고형화(固型化)한유교류(儒敎流)의&lt;br /&gt;
&lt;br /&gt;
종(宗)&lt;br /&gt;
&lt;br /&gt;
법사회관념하(法社會觀念下)에 당연(當然)히붕괴(崩壞)돠여야할것이면서 붕괴(崩壞)되지못하고 근대적사회(近代的社會)의성장(成長)에 가장근본적(根本的)인 장애(障碍)로되여잇는 날근도덕(道德)과 인습(因襲)을 여지(餘地)업시 통매(痛罵)햇다,이에『광인일기(狂人日記)』중(中)에 한절(節)을 초(抄)하면『나 는 역사(歷史)를 뒤적거려 보앗다 역사(歷史)란건 어느시대(時代)에나 인의(仁義) 도덕(道德)이란몃줄로 치더치덕씨여 저잇섯다 나는 밤잠도안자고 딍굴딍굴러가며 생각하여보 앗스나 겨우글자와 글자사이 에서『사람을먹는다』는 몃자 가쓰여잇섯슬뿐이엿다』&lt;br /&gt;
&lt;br /&gt;
이가티추악(醜惡)한 사회면(社會面)을폭로(暴露)한다음 오는시대(時代)의건설(建設)은 젊은사람들의손에 맛걱저야한다는것을암시(暗示)하면서 이소설(小說)의일편(一篇)은『어린이를구(救)하자』는 말로서끗을막엇다.실(實)로이한말은 당시(當時)의『어린이』인 중국청년(中國靑年)들에게는 사상적(思想的)으로는『폭탄선언(暴彈宣言)』이상(以上)으로 충격(衝擊)을주엇스며이러한작품(作品)이 백화(白話)로쓰여지는데 따라 문학혁명(文學革命)이완전(完全)히승리(勝利)의 개가(凱歌)를 부르게된공적(功績)도 태반(太半)은노신(魯迅)에 돌려야하는것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삼(三))&lt;br /&gt;
&lt;br /&gt;
이육사(李陸史)&lt;br /&gt;
&lt;br /&gt;
『광인일기(狂人日氣)』의다음 연속(連續)해나온작품(作品)으로『공을사(孔乙巳)』『약(藥)』『명일(明日)』『일개소사건(一個小事件)』『두발적고사(頭髮的故事)』『풍파(風波)』『고향(故鄕)』등(等)은모다 신청년(新靑年)을통(通)해서세상(世上)에물의(物議)를 이르켯스나 그후일구이일년(後一九二一年) 북경신보문학부간(北京新報文學副刊)에그유명(有名)한『아(阿)Q정전(正傳)』이 연재(連載)되면서부터는 노신(魯迅)은자타(自他)가공인(共認)하는 문단제일인적작가(文壇第一人的作家)엿다.&lt;br /&gt;
&lt;br /&gt;
그리고 이러한대작(大作)은 모다신해혁명전후(辛亥革命前後)의&lt;br /&gt;
&lt;br /&gt;
봉(封)&lt;br /&gt;
&lt;br /&gt;
건사회(建社會)의생활(生活)을 그린것으로 어떠케필연적(必然的)으로 붕괴(崩壞)하지안흐면안될 특징(特徵)을가젓는가를묘사(描寫)하고 어떠케새로운사회(社會)를 살어갈가를 암시(暗示)하고잇다.뿐만아니라 당시(當時)의혁명(革命)과 혁명적(革命的)인사조(思潮)가 민중(民衆)의심리(心理)에 생활(生活)의『데테일슨』에 어떠케표현(表現)되는가를 가장『레알』하게묘사(描寫)한것이다.더구나 그는 농민작가(農民作家)라고할만치 농민생활(農民生活)을그리는데 교묘(巧妙)하다는것도 한가지조건(條件)이되겟지만은 그의소설(小說)에는주장(主張)이개념(槪念)에 흐른다거나 조금도무리(無理)가업는것은 그의작가적수완(作家的手腕)이 탁월(卓越)하다는것을 말하지안홀수업다.&lt;br /&gt;
&lt;br /&gt;
그리고 그의작품(作品)은 늘 농민(農民)을주인공(主人公)으로하는것과 때로는『인테리』일지라도 예(例)를들면『공을사(孔乙巳)』의 공을사(孔乙巳)나『아(阿)Q정전(正傳)』의아(阿)Q가모다 일맥(一脈)이상통(相通)하는 성격(性格)을가지는것이니 공을사(孔乙巳)는 구시대(舊時代)의지식인(知識人)으로 시대(時代)에떠러저서 무슨일에도 쓰여지지못하고기품(氣品)만은노펏스나 생활력(生活力)은업고걸인(乞人)이되야 선술집술상대(臺)에 일금십구조(一金十九吊)의주채(酒債)가 어느때까지쓰여저잇는대로 언제인지&lt;br /&gt;
&lt;br /&gt;
행(行)&lt;br /&gt;
&lt;br /&gt;
방(方)이 불명(不明)된채로 나중에죽어젓든것이라든지『룸펜』농민(農民)인 일용노동자아(日傭勞働者阿)Q가 또한 쑥스러운년석으로혁명혁명(革命革命)떠들어놋코는 그것이몹시유쾌해서 반취(半醉)한기분(氣分)이 폭동대(暴動隊)의일군(一群)에 참가(參加)는하려고하엿스나 결국(結局)헛풍만치고 아무것도못하다다가 때마츰 일어난 폭도(暴徒)의약탈사건(掠奪事件)에 도당(徒黨)으로오해(誤解)되여(피(彼)의평소(平素)삼가지못한 언동(言動)에의(依)하야)피살(被殺)되는 아(阿)Q의성격(性格)은 그때중국(中國)의 누구라도가 전부혹(全部或)은일부분식(一部分式)은 소유(所有)하고잇섯든것이다다시말하면 아(阿)Q나공을사(孔乙巳)가모다사고(思考)와행동(行動)이 루—즈하고 확호(確乎)한한개의 정신(精神)도업스며 우약(愚弱)하면서도 몹시건방지고 남에게한개쥐여질리면 아무런반항(反抗)도못하면서 남이자신(自身)을 연민(憐憫)하면 제도량(度量)이커서 남이못덤비는것이라고제대로도취(陶醉)하야 남을 되는대로해(害)치는 무지(無知)하고우수면서도 가엽고 괴팩스러운것을 노신(魯迅)은그『레알리스틕』한문장(文章)으로폭로(暴露)한것이 특징(特徵)이엿스니 당시(當時)『아(阿)Q정전(正傳)』이발표(發表)될때&lt;br /&gt;
&lt;br /&gt;
평(平)&lt;br /&gt;
&lt;br /&gt;
소노신(素魯迅)과 교분(交分)이좃치못한사람들은 모다자기(自己)를모—델로 고의(故意)로쓴것이라고들 떠드는자(者)가잇은것을 보아도알수가잇는것이다&lt;br /&gt;
&lt;br /&gt;
그래서당시중국(當時中國)은 시대적(時代的)으로『아(阿)Q시대(時代)』이엿스며 노신(魯迅)의『아(阿)Q정전(正傳)』이 발표(發表)될때는 비평계(批評界)를비롯하야 일반지식군(一般知識群)들은『아(阿)Q상(相)』이라거나『아(阿)Q시대(時代)』라는말을평상대화(平常對話)에사용(使用)하기를 항다반(恒茶飯)으로하게된것은 중국문학사상(中國文學史上)에남겨노흔노신(魯迅)의 위치(位置)를 짐작하기에 조흔 한개의재료(材料)이거니와그의작가(作家)로서의 태도(態度)를통(通)하야 일관(一貫)하여잇는 노신정신(魯迅精神)을 다시한번음미(吟味)해보는데 적지안흔흥미(興味)를갓게된다는것은 오늘날우리의조선문단(朝鮮文壇)에는 누구나할것업시 예술(藝術)과정치(政治)의 혼동(混同)이니 분립(分立)이니하야 문제(問題)가엇지보면 결말(决末)이난듯도하고 어찌보면 미해결(未解决)그대로 잇는듯도한 현상(現狀)인데 노신(魯迅)가티 자기신념(自己信念)이 구든사람은이예술(藝術)과정치(政治)란것을 어떠케해결(解决)하엿는가?이문제(問題)는 그의작가(作家)로서의 출발점(出發點)부터 구명(究明)해야한다.&lt;br /&gt;
&lt;br /&gt;
노신(魯迅)은&lt;br /&gt;
&lt;br /&gt;
본(本)&lt;br /&gt;
&lt;br /&gt;
내의사(來醫師)가 되려고하엿다 그것은자기(自己)의『할일』이 무엇이라는것을 알엇기때문이엇다 물론(勿論)그때의 자기(自己)의『할일』이란것은 민족개량(民族改良)이라는 신념(信念)이엿든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후년(後年)『납함(吶喊)』서문(序文)에 다음가티써다.&lt;br /&gt;
&lt;br /&gt;
『나의학적(學籍)은 일본(日本)어느 지방(地方)의 의학전문학교(醫學專門學校)에 두엇다 나의 꿈은 이것으로 매우 아름답 고 만족(滿足)햇다 졸업(卒業)만하고 고(故) 국(國)에 도라오면 아버지와가티 치료(治療)못하는 병인(病人)을살리고 전(戰) 쟁(爭)이나면 출정(出征)도하려니와 국(國) 인(人)의 유신(維新)에대(對)한 신앙(信仰)에까지 나어갈것……』이라고&lt;br /&gt;
&lt;br /&gt;
이것은물론(勿論) 소년(少年)다운노신(魯迅)의로맨틕한 인도주의적흥분(人道主義的興奮)이엿겟지만은 이꿈도결국(結局)은 깨여지고말엇다.&lt;br /&gt;
&lt;br /&gt;
——의학(醫學)은결(决)코 긴요(緊要)하지안타 우약(愚弱)한 국민(國民)은 체격(體格)이 아모 리 조타고해도 또 아모리강(强) 장(壯)해도 무의미(無意味)한 구경거리나 또는 구경군이 되는박게는아 무것도아니다—중략(中略)—그럼으로 긴요(緊要)한것은 그들을 정신적(精神的)으 로 잘개조(改造)할것은 무엇일가나 는그때당연(當然) 문예(文藝)라고생각햇다 그리고 문예운동(文藝運動)을 제창(提唱)하기 로햇다(납함서문(吶喊序文))&lt;br /&gt;
&lt;br /&gt;
이리하야 그가 당시동경(當時東京)에망명(亡命)해잇는 중국(中國)사람들의 기관지(機關紙)인『절강조(浙江潮)』『하남(河南)』등(等)에 쓰든과학사(科學史)나 진화론(進化論)의 해설(解說)을 집어치우고 문학서적(文學書籍)을 번역(飜譯)한것은희랍(希臘)의 독립운동(獨立運動)을 원조(援助)한『빠이론』과 파란(波蘭)의복수시인(復讐詩人)『아담·미케뷧치』『향가리』의 애국시인(愛國詩人)『베트피·산더—』『필립핀』의문인(文人)으로 서반아정부(西班牙政府)에 사형(死刑)바는『리샬』등(等)의 작품(作品)이엿다.&lt;br /&gt;
&lt;br /&gt;
(사(四))&lt;br /&gt;
&lt;br /&gt;
이육사(李陸史)&lt;br /&gt;
&lt;br /&gt;
그리고이것은 노신(魯迅)의 문학행정(文學行程)에잇서서 가장초기(初期)에 속(屬)하는것이지만은 이러한번역(飜譯)까지라도그의 일정(一定)한목적(目的) 즉정치적목적(即政治的目的)미테 수행(遂行)된것을 엿볼수잇는것이며 우에말한『광인일기(狂人日記)』의『어린이를구(救)하자』는말도 순결(純潔)한 청년(靑年)들에의(依)하야 새로운중국(中國)을 건설(建設)하자는 그의이상(理想)을&lt;br /&gt;
&lt;br /&gt;
단적(端的)으로 고백(告白)한것으로써 이말은당시일반청년(當時一般靑年)들에게 무거운 책임감(責任感)을깨닷게한것은물론(勿論) 이래기천년(爾來幾千年)동안의 봉건사회(封建社會)로부터 청년(靑年)을해방(解放)하랴는 슬로—간으로 널리쓰여젓고 사실(事實)그뒤의 중국청년학생(中國靑年學生)들은 모든대중적사회운동(大衆的社會運動)의최전선(最戰線)에서 활발과감(活潑果敢)한 지도(指導)와조직(組織)을하엿스며 그유명(有名)한 오사운동(五四運動)이나 오주운동(五州運動)이나 국민혁명(國民革命)까지도 늘최전선(最前線)에서서 대중(大衆)을지도(指導)한것은 이들청년학생(靑年學生)이엿다&lt;br /&gt;
&lt;br /&gt;
그럼으로 노신(魯迅)에잇서서는 예술(藝術)은정치(政治)의 노예(奴隸)가 아닐뿐아니라 적어도예술(藝術)이 정치(政治)의 선구자(先驅者)인 동시(同時)에혼동(混同)도 분립(分立)도아닌즉(即) 우수(優秀)한작품(作品) 진보적(進步的)인 작품(作品)을 산출(產出)하는데만 문호(文豪) 노신(魯迅)의지위(地位)는노퍼갓고 아(阿)Q도 여기서비로소탄생(誕生)하엿스며 일세(一世)의 비평가(批評家)를도 감(敢)히 그에게는 함부로 머리를 들지못하엿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여기에 한가지 조흔예(例)가잇다 일구이팔년경(一九二八年頃) 무한(武漢)을쪼겨와서 상해(上海)에서 태양사(太陽社)를조직(組織)한 청년비평가(青年批評家) 전행촌(錢杏村)이 때마춤 푸로문학론(文學論)이 드셀때인만큼 노신(魯迅)을 대담(大膽)하게&lt;br /&gt;
&lt;br /&gt;
공격(攻擊)을 시작(始作)해보앗다그소론(所論)에 의(依)하면노신(魯迅)의 작품(作品)은 비계급적(非階級的)이다 아(阿)Q에게어데 계급성(階級性)이잇느냐는것이다.&lt;br /&gt;
&lt;br /&gt;
물론(勿論)그것은 정당(正當)한말이다,노신(魯迅)의작품(作品)에서 우리는눈딱고보아도 푸로레타리아적특성(的特性)은 조금도 볼수가 업는것은 사실(事實)이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우리가 한사람의작품(作品)을 비평(批評)할때는 그시대적배경(時代的背景)을고려(考慮)하지안흘수는업는것이니 노신(魯迅)이작가(作家)로활동(活動)을 하고잇슬때는중국(中國)에는 오늘날우리가 정의(定義)를나릴수잇는 푸로레타리아는 업슬뿐아니라 그때쯤은 뿌르조아민주주의적(民主主義的)인 정치사조(政治思潮)조차도아즉계선(界線)이분명(分明)하지못하엿다는것은뿌르조아혁명(革命)이라는 소위국민혁명(所謂國民革命)도 정직(正直)하게말하자면 사오운동(四五運動)을 전초전(前哨戰)으로한것만큼 여기서 역시중국(亦是中國)의 비상가(批詳家)인병신(丙申)은자미잇는말을하고잇다&lt;br /&gt;
&lt;br /&gt;
『그가현재(現在) 중국좌익작가연맹(中國左翼作家聯盟)을지지(支持)하고잇다해서 그의『사오(四五)』전후(前後)의&lt;br /&gt;
&lt;br /&gt;
작품(作品)을 푸로문학(文學)이라고 지목(指目)할것은아니&lt;br /&gt;
&lt;br /&gt;
다 그러나 그를우수(優秀)한 농민작가(農民作家)라고 하는것이 타당(妥當)타고—』그러타 이말은 어느정도(程度)까지&lt;br /&gt;
&lt;br /&gt;
정당(正當)에 가까운말로서 그를푸로작가(作家)가아니고 농민작가(農民作家)라고해서작가노신(作家魯迅)의 명예(名譽)를 더럽힐조건(條件)은 되지못하는것이다 다만문제(問題)는 그가얼마나 창작(創作)에 잇서서진실(眞實)하게 명확(明確)하게 묘사(描寫)하는태도(態度)를 가지는가 그의한말을 써보기로하자&lt;br /&gt;
&lt;br /&gt;
『——현재(現在) 좌익작가(左翼作家)는 훌륭한자신(自身)들의 문학(文學)을 쓸수잇슬가?생각컨대 이것은 매우곤란(困難)하다.현재(現在)의 이런 부류(部類)의 작가(作家)들은 모다『인테리』다 그들은 현실(現實)의 진실(眞實)한 정형(情形)은쓸려고해도 용이(容易)치안타 어떤사람이 일즉 이런 문제(問題)를제출(提出)한것이잇섯다『작가(作家)가 묘사(描寫)하는것은 반드시 자기(自己)가 경험(經驗)한것이라야만될것인가?그러나 그는 스스로 답(答)하기를반드시 안그래도조타웨러러냐하면 그들은 잘 추찰(推察)할수가잇스므로 절도(窃盜)하는장면(塲面)을 묘사(描寫)하랴면 작가(作家)는 반드시 자신(自身)이 절도(窃盜)질할 필요(必要)도업고 간통(姦通)하는&lt;br /&gt;
&lt;br /&gt;
장면(塲面)을 묘사(描寫)할 필요(必要)를늣길때 작가(作家) 자신(自身)이간통(姦通)할 필요(必要)도 업다고』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작가(作家)가 구사회(舊社會)속에서 생장(生長)해서그 사회(社會)의 모든 일을 잘알고 그사회(社會)의 인간(人間)들에게 익숙해저서 잇는때문에 추찰(推察)이되는것이다 그러나 종래(從來)아무런 관계(關係)도업는새사회(社會)의 정형(情形)과인물(人物)에 대(對)해서는 작가(作家)가무능(無能)하다면 아마그릇된 묘사(描寫)를할것이다 그럼으로 푸로문학가(文學家)는 반드시 참된현실(現實)과 생명(生命)을 가티하고 혹(或)은 보다기피현실(現實)의맥박(脈搏)을 감수(感受)하지안흐면 안된다고하면서 또다시말을 계속(繼續)하는것이다.&lt;br /&gt;
&lt;br /&gt;
그러나구사회(舊社會)를 조그만치공격(攻擊)하는작품(作品)일지라도 만약(萬若)그결점(缺點)을 분명(分明)히모르고 그병근(病根)을투철(透澈)히파악(把握)치못하면 그것은유해(有害)할뿐이다 애석한일이나마현재(現在)의푸로작가(作家)들은 비평가(批評家)까지도 왕왕(往往) 그것을못한다 혹사회(或社會)를 정시(正視)해서 그진상(眞相)을 알려고도안코 그중(中)에는 상대자(相對者)라고 생각하는편의 실정(實情)도알려고하지안는다.&lt;br /&gt;
&lt;br /&gt;
(오(五))&lt;br /&gt;
&lt;br /&gt;
이육사(李陸史)&lt;br /&gt;
&lt;br /&gt;
차근(車近)한 예(例)로는 얼마전 모지상(某紙上)에 중국문학계(中國文學界)를 비평(批評)한문장(文章)을 한편(篇)보앗는데 중국문학계(中國文學界)를 삼파(三派)에 난워서 먼저창조파(創造派)를 들어 푸로파(派)라하야매우상세(詳細)하게 논급(論及)하고 다음어사사(語絲社)를 소(小)뿌르파(派)라고 조그만치 말한후(後)&lt;br /&gt;
&lt;br /&gt;
신월사(新月社)를 뿌르문학파(文學派)라 해서 겨우 붓 을 대다가만 젊은비평가(批評家)가잇 섯다 이것은 젊은기질(氣質)의 상(相) 대자(對者)라고 생각는파(派)에 대(對)해서 는 무어세(細)□□□고구(考究)할필요(必要)가 업다는뜻을 표명(表明)한것이다 물(勿) 논(論)우리는 서적(書籍)을볼때 상대자(相對者) 의것을 보는것은 동파(同派)의것을 보는안심(安心)과 유쾌(愉快)와 유익(有益)한데 밋치지 못하는것은 사실(事實)이다 그러나 만약(萬若) 일개전투자(一個戰鬪者)라면 나는 생각컨대 현실(現實)과 상대(相對) 자(者)를 이해(理解)하는 편의상(便宜上) 보담 만은 당면(當面)의 상대자(相對者)에 대(對)한 해부(解剖)를 필요(必要)로 하지안으면안 될것이다.옛것을 분명(分明)히 알 고 새로운것에 간도(看到)하고 과(過) 거(去)를 요해(了解)하야 장래(將來)를 추단(推斷) 하는데서만 우리들의 문학적(文學的) 발전(發展)은 희망(希望)이잇다 생각건대 이것만은 현재(現在)와 가튼 환경(環境) 에잇는 작가(作家)들은 부단(不斷)히 노(努) 역(力)할것이고 그래야만 참된작(作) 품(品)이 나오는것이다』라 고&lt;br /&gt;
&lt;br /&gt;
이간단(簡單)한 몃마듸만히 문호노신(文豪魯迅)의 창작(創作)에 대(對)한『모랄』인것이다 이얼마나 우리의 뼈에 사무치고도 남을만한시사(示唆)인고!이리해서&lt;br /&gt;
&lt;br /&gt;
현대중국문단(現代中國文壇)의부(父)이며비평가(批評家)의비평(批評)으로서자타(自他)가 그지위(地位)를 함께긍정(肯定)하든그의작가(作家)로서의 생애(生涯)는 너무나쩔으것이엿스니 일구이육연삼월(一九二六年三月)『이혼(離婚)』이란작품(作品)을 최후(最後)로남긴그는 교수(敎授)로서 작가(作家)로서의 화려(華麗)한 생애(生涯)는 종언(終焉)을고(告)하지 안흐면안될때가왓다 그는 지금부터『손으로쓰기보다는 발로 다라나기가 더밧벗다』&lt;br /&gt;
&lt;br /&gt;
일구이육년(一九二六年) 북양군벌(北洋軍閥)을 배경(背景)오로한 안복파(安福派)의수령(首領) 단기서(段祺瑞)의정부(政府)는 급진적(急進的)인좌파(左派)의 교수(敎授)와우수(優秀)한 지식분자오십여명(知識分子五十餘名) 체포령(逮捕令)을 나렷다 우리노신(魯迅)은 이오십명중(五十名中)의 한사람이엿다 그것은일구이사년(一九二四年) 국민당(國民黨)의 연아용공책(聯俄容共策)이 결정(决定)되야그익년(翌年)가을『뽀로된』등(等)이고문(顧問)으로광동(廣東)에오고『전국민적공동전선(全國民的共同戰線)』이엿든 국민혁명(國民革命)의제일계단(第一階段)인 광동시기(廣東時期)에는 푸로레타라아의 동맹자(同盟者)는 농민도시빈민(農民都市貧民) 소(小)뿌로지식계급(知識階級) 국민적(國民的)뿌르조아지—엿다』&lt;br /&gt;
&lt;br /&gt;
그래서 급진교수(急進敎授)들은 교육부총장(敎育部總長) 군벌정부(軍閥政府)를 육박(肉迫)하엿스며이러한&lt;br /&gt;
&lt;br /&gt;
신흥세력(新興勢力)에 낭패(狼狽)와공포(恐布)를 늣긴군벌정부(軍閥政府)는 이러한교수(敎授)들과 학생(學生)들에게체포령(逮捕令)을나리고 학생(學生)들의행렬(行列)은정부위병(政府衛兵)들의 발포(發砲)로인(因)하야 남여수백여명(男女數百餘名)의 사상자(死傷者)가낫다 그때노신(魯迅)은 북경동교민항(北京東交民巷)의 공사관구역(公使舘區域)의 외국인병원(外國人病院)이나 공장(工塲)안으로 도라단이며 찬물로기아(飢餓)를 참아가면서도 신문(新聞)과 잡지(雜誌)에 기고(寄稿)를하야 군벌정부(軍閥政府)를 맹렬(猛烈)히 공격(攻擊)하얏다 그중(中)에도『국민이래(國民以來) 최암흑일(最暗黑日)에지(誌)』하엿다는 명문(名文)은 단기서(段祺瑞)로하여금 의자(椅子)에나려안게되엿다&lt;br /&gt;
&lt;br /&gt;
——붓으로쓰헛소리는 피로쓴 사실(事實)을 만착(瞞着)하지못한다——중(中) 약(略)——붓으로쓴것이 무슨힘이 잇스랴 실탄(實彈)을쏘는것은 오즉 청년(靑年)의피다(속화개집(續華盖集))&lt;br /&gt;
&lt;br /&gt;
오늘날까지 중국문단(中國文壇)의『막심콜키—』이든그는 지금부터는문화(文化)의전사(戰士)로서『앙리·발뷰스』보다비장(悲壯)한생애(生涯)가 시작(始作)되는것이엿다&lt;br /&gt;
&lt;br /&gt;
그의말과가티&lt;br /&gt;
&lt;br /&gt;
최청흑(最晴黑)한오십일(五十日)이지나고 그는북경(北京)을탈출(脫出)햇다 하문대학(夏門大學)에 초청(招請)을바□갓으나 대학기업가(大學企業家)의 음흉수(陰凶手)것인것을 안그는광동중산대학(廣東中山大學)으로갓다 그러나 일구이육년사월십오일(一九二六年四月十五日) 장개석(蔣介石)의쿠—데타—는 광동일성(廣東一省)만 노동자농민급진지식분자삼천여명(勞働者農民急進知識分子三千餘名)을—하엿 으며 한때는『혁명(革命)의전사(戰士)』라고 간판(看板)을지인노신(魯迅)도상해(上海)로 다라나야만 되엿다여기서우리가 다시한번그에게흥미(興味)보다는 최대(最大)의 경의(敬意)를갓게되는것은 다음의일문(一文)이다&lt;br /&gt;
&lt;br /&gt;
——나의 일종망상(一種妄想)은 깨여젓 다 나는지금까지 때때로낙관(樂觀) 을가젓섯다 청년(靑年)을 압박(壓迫)하고 ——하는것은 대개노인(大槪老人)이다이 들노물(老物)들이 다죽어지면 중국(中國) 은보담더 생기(生氣)잇는것이되리라 고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 르치안은것을 알엇다 청년(靑年)을 ——하는것은 대개(大槪)는 청년(靑年)인 듯하다 또달이 재조(再造)할수업는 생명(生命)과 청춘(靑春)에 대(對)해서 한층(層) 더애낌이업시…(이기집(而己集))&lt;br /&gt;
&lt;br /&gt;
이글은그가 침묵(沈默)하고잇는것을『공포(恐怖)』때문이라고 조소(嘲笑)한 사람에게답(答)한 통신문(通信文)의 일절(一節)로서 이때까지&lt;br /&gt;
&lt;br /&gt;
진화론자(進化論者)이든 그자신(自身)의 사상적립장(思想的立塲)을양기(揚棄)하고 새로운 성장(成長)의 일단계(一段階)로보인것이라고 해석(解釋)해도 틀러지안흘것이다.&lt;br /&gt;
&lt;br /&gt;
그가상해(上海)에 왓슬때는 국민당(國民黨)의 쿠—데타—로 혁명군(革命軍)에서쪼겨온 젊은푸로문학자(文學者)가 만엇다『혁명문학론(革命文學論)』이 효효(囂囂)히 불러지고 실제정치행동(實際政治行動)의 전선(前線)을 떠난그들은 총칼대신에 펜을잡엇다,원기왕성(元氣旺盛)하게 실제공작(實際工作)의경험(經驗)에서 매우견실(堅實)한것도 잇섯스나 때로는 자부적(自負的)인 영웅주의(英雄主義)가 화(禍)를끼치고——에실패(失敗)한 분만(憤瞞)과 극좌적(極左的)인 기회주의자(機會主義者)들은노신(魯迅)을 공격(攻擊)햇다 그러나 그는푸로문학(文學)이란 어떤것인가 또는어찌해야 될것인가를 알리기위(爲)하야 아버지가튼 애무(愛撫)로서『푸레하노프』,『루나챨스키—』들의 문학론(文學論)과『싸벳트』의 문예정책(文藝政策)을번역소개(飜譯紹介)하야 중국(中國)푸로문학(文學)을건설(建設)하고잇는동안에『노신(魯迅)을타도(打倒)치안흐면 중국(中國)에푸로문학(文學)은생기지못한다』는 문학소아병자(文學小兒病者)들은 그자신(自身)들이 먼저너머지고 이제그가마자가고말엇다 이위대(偉大)한중국문학가(中國文學家)의영(靈)아페 고요히머리를숙이면서 나의개인적(個人的)으로 곤란(困難)한정형(情形)에의(依)하야 문호노신(文豪魯迅)의윤곽(輪廓)을뚜렷이그리지못함을 참괴(慚愧)히알며붓을놋키로한다 —요(了)—&lt;br /&gt;
&lt;br /&gt;
=수필문외한(隨筆門外漢)의수첩(手帖)=&lt;br /&gt;
문(門) 외(外) 한(漢) 의 수(手) 첩(帖)&lt;br /&gt;
&lt;br /&gt;
(칠(七))&lt;br /&gt;
&lt;br /&gt;
이(李) 육(陸) 사(史)&lt;br /&gt;
&lt;br /&gt;
R이란 사람은 나와는 매우친(親)한 동무엿다 그럼으로 우리두사람 사이에는 결(决)코 무슨비밀(秘密)이란것은 잇을터수가 아니엿다 그러나 지금은 나의교우록(交友錄)속에 씨여저잇는 그의『호패(號牌)』에 붉은줄을 그은지도 벌써한달이 다되엿다.&lt;br /&gt;
&lt;br /&gt;
이러한 간단한사실(事實)이 모르는사람으로본다면 가렵지도 아프지도안흘지모르겟으나 남달리상처(相處)해오든 벗을한사람 일허버린나의흐젓한 마음은 어데도 비길수업시 서러운것이다.&lt;br /&gt;
&lt;br /&gt;
그뿐만아니라 이글을 쓰려는오늘아침에 이제는 고인(故人)인 R의동생으로부터 나에게 간단한편지한장과『문외한(門外漢)의수첩(手帖)』이란유고(遺稿)한권(卷)이 보내여왓다.&lt;br /&gt;
&lt;br /&gt;
그유고(遺稿)는 이래십년(爾來十年)에 쓴 고인(故人)의 일기(日記)인 모양인데 그도축일(逐日)해서 쓰것도 아니고 때때로마음이 내킬때마다 써둔것이며그맨끗페—지에『〇〇형(兄)에게』라는 이세상(世上)사람으로서의 절필(絶筆)인듯한 글시가 묵흔(墨痕)이임리(淋漓)한것은소리업는 내눈물을더욱짜내는것이엿다 그리고이글내용(內容)은 일기(日記)는 일기(日記)면서도 대부분(大部分)은 나에게 보내는 편지이엿다.그편지가운데서 지금이라도 흥미(興味)잇게생각나는 부분(部分)만을 써서보기로한다면 그도처음에는 문학청년(文學青年)이엿든 사실(事實)이잇섯다.그러나그는자기가 하고저한 문학(文學)을 끗끗내 완성(完成)할수잇는 행복(幸福)된사람은 아니엿다.그러나 그사람은죽든날까지도문학(文學)을 단념(斷念)하지는안헛다는것은 어느해겨울 그와나는 우연(偶然)히도 어느 온천(溫泉)에서만낫다 그때는 바로동경(東京)에서들풍자문학론(諷刺文學論)이 한참대두(擡頭)할때 이엿슴으로 그도또한 예(例)에삐지지안코 이것의 조선(朝鮮)에잇서서 가능(可能)하다는 설교(說敎)를 하는것이엿다그때좀더 생각해볼 여지(餘地)가잇다고한 나의말에 그는말하기를조선(朝鮮)사람은 생활(生活)그자체(自體)가 풍랄적(諷剌的)으로 되여잇다고 떠둘어대기에나는그에게 더진지(眞摯)한태도(態度)로 사물(事物)을 대(對)할필요(必要)가 잇다는것을말하엿고 그다음날 우리는 서로갈린체 영원(永遠)히 보지못할 사람이되엿다.&lt;br /&gt;
&lt;br /&gt;
이글은 그때나와 갈려서 몃칠동안에 쓴것이라고 생각난다 일구삼(一九三)×연(年)×월(月)×일(日)—〇형(兄)!S역(驛)에서 형(兄)과갈려서나는〇동(洞)까지 오십리(五十里)나되는 산(山)길을 걸어왓소.동리(洞里)거리에 피곤(疲困)한 다리를 쉬이면서 생각하기를 아무데나 큼직한집 초당(草堂)방을 차저드러가면 이밤을 뜻뜻한 아랫목에서 지낼수도 잇겟거니와 그들과함께 살을맛대이고지나며 그들의 생활(生活)을체득(體得)할수가 잇다면……얼마나 유쾌(愉快)한일이겟습니까?&lt;br /&gt;
&lt;br /&gt;
나는 여기서 형(兄)이일직이 하든말을 생각해보앗소 상해(上海)어데선가?목욕(沐浴)을 갓슬때 불란서(佛蘭西)사람과 서반아(西班牙)사람과 가트욕조(浴漕)에 들어갓슬때의 감정(感情)을 얘기한것을 기억(記憶)이나 하시는지요.그때는 적나라(赤裸裸)한 몸둥이들이모두꼭가튼 온도(溫度)를 느낄수잇더라고.세계(世界)는 모름직이 목간통가티 되어야 한다고.&lt;br /&gt;
&lt;br /&gt;
그러나 오늘의 나의심경(心境)은그와는 정반대(正反對)로 어데까지나 육친애(肉親愛)를 느껴볼 결심(决心)이엿소 그래서 세계(世界)는 차라리 초당(草堂)방가티되라고까지 생각해도 보앗소이러한 생각을 하노라면 또다른 한생각이 꼬리를 물고나오는동안에 나는가젓든 담배를모조리 다피워 바렷소.담배라도피우지 안흐면 첫겨우의눈우바람이몹시도 옷깃을 새여들고 발끄티저리기도해서 담빠도살겸 주막(酒幕)집잇는대로 가까이 차저갓소.그곳에는 마침담배 가개가잇고젊은농부(農夫)인듯한 사람이잇기에오전(五錢)짜리 한푼을던지고『마코』한갑을 달라고 하엿더니만 나는여기서 뜻하지못한 실패(失敗)를 하엿소 그것은 나행동(行動)이 몸차림과 어울리지안는데가 잇섯든지또는언어(言語)에 무의식적(無意識的)인 불손(不遜)이잇섯든지 그젊은 농부(農夫)는 내얼굴을 자세히 보더니만……『문(門)안에 들어와서 담배를 가저가오』……하며 코우슴을 피하며『마코』한갑을 내아프로 툭던지는것이엿소.&lt;br /&gt;
&lt;br /&gt;
나는처음 이농부(農夫)의 말을듯고한참동안 어름어름하엿소 그것은 담배가개라고하는것이 우리가 도회(都會)에서 보는담배가개와가티 백색(白色)『타일』타로 대(臺)를싸올리고『네온』등(燈)을 달고 유리창(窓)을단것이 아니고 첨하끄테다 석유(石油)궤로 목판을짜서 장수연(長壽煙),희연(囍煙),『마코』단풍(丹楓) 이런것들을몃갑식(式) 너허둔것이엿소,그래 내가들어갈 문(門)이란 어데잇겟소,&lt;br /&gt;
&lt;br /&gt;
[출처 : 조선일보 뉴스 라이브러리]&lt;br /&gt;
https://newslibrary.chosun.com/view/article_view.html?id=582619370803e1052&amp;amp;set_date=19370803&amp;amp;page_no=5문(門) 외(外) 한(漢) 의 수(手) 첩(帖)&lt;br /&gt;
&lt;br /&gt;
(칠(七))&lt;br /&gt;
&lt;br /&gt;
이(李) 육(陸) 사(史)&lt;br /&gt;
&lt;br /&gt;
R이란 사람은 나와는 매우친(親)한 동무엿다 그럼으로 우리두사람 사이에는 결(决)코 무슨비밀(秘密)이란것은 잇을터수가 아니엿다 그러나 지금은 나의교우록(交友錄)속에 씨여저잇는 그의『호패(號牌)』에 붉은줄을 그은지도 벌써한달이 다되엿다.&lt;br /&gt;
&lt;br /&gt;
이러한 간단한사실(事實)이 모르는사람으로본다면 가렵지도 아프지도안흘지모르겟으나 남달리상처(相處)해오든 벗을한사람 일허버린나의흐젓한 마음은 어데도 비길수업시 서러운것이다.&lt;br /&gt;
&lt;br /&gt;
그뿐만아니라 이글을 쓰려는오늘아침에 이제는 고인(故人)인 R의동생으로부터 나에게 간단한편지한장과『문외한(門外漢)의수첩(手帖)』이란유고(遺稿)한권(卷)이 보내여왓다.&lt;br /&gt;
&lt;br /&gt;
그유고(遺稿)는 이래십년(爾來十年)에 쓴 고인(故人)의 일기(日記)인 모양인데 그도축일(逐日)해서 쓰것도 아니고 때때로마음이 내킬때마다 써둔것이며그맨끗페—지에『〇〇형(兄)에게』라는 이세상(世上)사람으로서의 절필(絶筆)인듯한 글시가 묵흔(墨痕)이임리(淋漓)한것은소리업는 내눈물을더욱짜내는것이엿다 그리고이글내용(內容)은 일기(日記)는 일기(日記)면서도 대부분(大部分)은 나에게 보내는 편지이엿다.그편지가운데서 지금이라도 흥미(興味)잇게생각나는 부분(部分)만을 써서보기로한다면 그도처음에는 문학청년(文學青年)이엿든 사실(事實)이잇섯다.그러나그는자기가 하고저한 문학(文學)을 끗끗내 완성(完成)할수잇는 행복(幸福)된사람은 아니엿다.그러나 그사람은죽든날까지도문학(文學)을 단념(斷念)하지는안헛다는것은 어느해겨울 그와나는 우연(偶然)히도 어느 온천(溫泉)에서만낫다 그때는 바로동경(東京)에서들풍자문학론(諷刺文學論)이 한참대두(擡頭)할때 이엿슴으로 그도또한 예(例)에삐지지안코 이것의 조선(朝鮮)에잇서서 가능(可能)하다는 설교(說敎)를 하는것이엿다그때좀더 생각해볼 여지(餘地)가잇다고한 나의말에 그는말하기를조선(朝鮮)사람은 생활(生活)그자체(自體)가 풍랄적(諷剌的)으로 되여잇다고 떠둘어대기에나는그에게 더진지(眞摯)한태도(態度)로 사물(事物)을 대(對)할필요(必要)가 잇다는것을말하엿고 그다음날 우리는 서로갈린체 영원(永遠)히 보지못할 사람이되엿다.&lt;br /&gt;
&lt;br /&gt;
이글은 그때나와 갈려서 몃칠동안에 쓴것이라고 생각난다 일구삼(一九三)×연(年)×월(月)×일(日)—〇형(兄)!S역(驛)에서 형(兄)과갈려서나는〇동(洞)까지 오십리(五十里)나되는 산(山)길을 걸어왓소.동리(洞里)거리에 피곤(疲困)한 다리를 쉬이면서 생각하기를 아무데나 큼직한집 초당(草堂)방을 차저드러가면 이밤을 뜻뜻한 아랫목에서 지낼수도 잇겟거니와 그들과함께 살을맛대이고지나며 그들의 생활(生活)을체득(體得)할수가 잇다면……얼마나 유쾌(愉快)한일이겟습니까?&lt;br /&gt;
&lt;br /&gt;
나는 여기서 형(兄)이일직이 하든말을 생각해보앗소 상해(上海)어데선가?목욕(沐浴)을 갓슬때 불란서(佛蘭西)사람과 서반아(西班牙)사람과 가트욕조(浴漕)에 들어갓슬때의 감정(感情)을 얘기한것을 기억(記憶)이나 하시는지요.그때는 적나라(赤裸裸)한 몸둥이들이모두꼭가튼 온도(溫度)를 느낄수잇더라고.세계(世界)는 모름직이 목간통가티 되어야 한다고.&lt;br /&gt;
&lt;br /&gt;
그러나 오늘의 나의심경(心境)은그와는 정반대(正反對)로 어데까지나 육친애(肉親愛)를 느껴볼 결심(决心)이엿소 그래서 세계(世界)는 차라리 초당(草堂)방가티되라고까지 생각해도 보앗소이러한 생각을 하노라면 또다른 한생각이 꼬리를 물고나오는동안에 나는가젓든 담배를모조리 다피워 바렷소.담배라도피우지 안흐면 첫겨우의눈우바람이몹시도 옷깃을 새여들고 발끄티저리기도해서 담빠도살겸 주막(酒幕)집잇는대로 가까이 차저갓소.그곳에는 마침담배 가개가잇고젊은농부(農夫)인듯한 사람이잇기에오전(五錢)짜리 한푼을던지고『마코』한갑을 달라고 하엿더니만 나는여기서 뜻하지못한 실패(失敗)를 하엿소 그것은 나행동(行動)이 몸차림과 어울리지안는데가 잇섯든지또는언어(言語)에 무의식적(無意識的)인 불손(不遜)이잇섯든지 그젊은 농부(農夫)는 내얼굴을 자세히 보더니만……『문(門)안에 들어와서 담배를 가저가오』……하며 코우슴을 피하며『마코』한갑을 내아프로 툭던지는것이엿소.&lt;br /&gt;
&lt;br /&gt;
나는처음 이농부(農夫)의 말을듯고한참동안 어름어름하엿소 그것은 담배가개라고하는것이 우리가 도회(都會)에서 보는담배가개와가티 백색(白色)『타일』타로 대(臺)를싸올리고『네온』등(燈)을 달고 유리창(窓)을단것이 아니고 첨하끄테다 석유(石油)궤로 목판을짜서 장수연(長壽煙),희연(囍煙),『마코』단풍(丹楓) 이런것들을몃갑식(式) 너허둔것이엿소,그래 내가들어갈 문(門)이란 어데잇겟소,&lt;br /&gt;
&lt;br /&gt;
(중(中))&lt;br /&gt;
&lt;br /&gt;
이육사(李陸史)&lt;br /&gt;
&lt;br /&gt;
그날은 그곳에서 멀지안흔곳에 장날이엿나부오,장꾼들이들신들신하고 그집으로 들어오기에 나는그만 그곳을떠나 도라나오랴니까 바로내머리 뒤에서『건방진여석 눈에유리창(窓)을 부치고』……하면서 별러대는것이엿소.그때나는 모든것을 다알엇소,&lt;br /&gt;
&lt;br /&gt;
시골산촌(山村)에선 유리라는것은들창(窓)에나 부치는것인데 네눈에부친 들창을열고 다시말하면 문(門)안에 들어와서(안경(眼鏡)을벗고)담배를 가저가란 말엿소.&lt;br /&gt;
&lt;br /&gt;
내가 안경(眼鏡)을 쓰게된것은 시력(視力)이 부족(不足)한 탓이엿고 그젊은농부(農夫)가 내안경(眼鏡)쓴것을 못맛당히역이는것은 고루(固陋)한 인습(因習)의 소치(所致)라고 하드래도 그표현방법(表現方法)이얼마나 내뼈를 저리도록 쑤시는풍랄(諷剌)이엿겟소 과연(果然)여기에 남과나라는 투명(透明)한 장벽(墻壁)이 서서잇다는것을 나는안듯하엿소.&lt;br /&gt;
&lt;br /&gt;
그리고 내발길은 무겁게옴겨젓소.아주몃해를두고 어느사막(沙漠)이라도 걸어온듯한 피로(疲勞)를 깨다랏소.하늘은 점점어두어오고눈조차 함박으로 퍼붓는듯 하엿스나 나는다시 옷것을 단속지는 안헛소 될수엇스면 차디천 눈보라가 내보드러운 목덜미살을 염이듯이 얼어부트라고하여본것은 일종(一種)의 자기잔학(自己殘虐)일른지도 모르겟소.&lt;br /&gt;
&lt;br /&gt;
두시간(時間)이나 지낫을가 나는과연(果然) 어느집초당(草堂)방에 손이되엿소방안에는 초말(醋抹)냄새가 코를찌를망정 모이는사람은 대략육칠명(六七名)이나 되엿고 연령(年齡)은최저십팔(最低十八)로최고삼십이(最高三十二),인품(人品)은 모두순후(純厚)하고황소가티 질박(質朴)한놈도 잇스며암사슴가티 외로운 면석도잇섯소.그날밤은 내라는존재(存在)가 그들로보면 낫서른손이여서 일동일정(一動一靜)을 주의(注意)는 하면서도 조금도 악의(惡意)는 갓지안헛든 모양이엿소 그러기에 나더러 세상(世上)의자미잇는 얘기를 들려달라는것이오&lt;br /&gt;
&lt;br /&gt;
이때 나는 어떠한 얘기를들려줄까 하고 망서리는판에 그들중에도 연령(年齡)과 지식(知識)의 정도(程度)가잇서서 삼십(三十)에 가까운 사람들은『화용도(華容道)』를 들려달라하고그중한사람은『춘향전(春香傳)』을 얘기하라하엿소만은 여기도 또한의견(意見)은 일치(一致)되지안헛소 그중에도제일(第一)얼굴이 말숙하고 나이가이십오세(二十五歲)쯤 되여보이는 농부(農夫)한사람 말을드르면 보통학교(普通學校)를 중도퇴학(中途退學)은 하엿서도 그들가운데서는 식자연(識者然)하고 내로라는드시뽑내면서『서양(西洋)』얘기를 무에나들리라는것이오 그해서 결국(結局)은『춘향전(春香傳)』파(派)와『서양(西洋)』파(派)가 절충(折衷)한결과(結果) 나는이진귀(珍貴)한『서양춘향전(西洋春香傳)』을 친절(親切)하게도 강좌(講座)를담임(擔任)하게되엿스며 그는 득의만면(得意滿面)하야 내담배갑에서『마코』한개들 빼여물고 인조견(人造絹) 옥색(玉色)관사홋족기에서 석낭을꺼내여 담배를 피우는것이엿소 이방에서는모두들이사람을『하이카라상』이라고 부르는데 그『상』짜가나에게는 조금귀익지못하나 아마이것을 도시(都市)말로번역(飜譯)하면『모—던뽀이』란 말도갓소.&lt;br /&gt;
&lt;br /&gt;
그러나 이『서양춘향전(西洋春香傳)』이란진본서(珍本書)는 가난한 나의문헌학지식(文獻學知識)으로는 도저(到底)히 알어낼 자신(自信)도업고 그러타고 그들에게『린드뻑』이 대서양(大西洋)을 어떠케 횡단(橫斷)하엿다든지『크레오파트라』의국적(國籍)이 어느나라냐고 설왕설래(說往說來)를 하여보앗자『하이카라상』이라는 이방의『쏘크라테쓰』도그까지는 흥미(興味)를느끼지못할것갓터소.&lt;br /&gt;
&lt;br /&gt;
그래서나는 생각다못해『쉑스피어』의『로미오와쭈리엣트』를얘기하기로하고 위선그주인공(主人公)의이름을 그들이 알어듯기 쉽게『노미』이와『준』이가 이러케얘기를하니 그래도 모두그것이자미가 잇섯든지『준』이가추방당(追放當)튼날새벽에『노미』를 차저가이별(離別)을하는판인데 이곳에야『나이팅껠』이울수가 잇슬리도 업겟고 생각다못해 속담(俗談)에 꿩갑에 닭이라니 닭을울리고『준』이를 떠나보냇구려!그래도 이때는 모두들감탄(感歎)해서 흥흥코소리를치며 신삼고 가만이치든손을쉬이는구려!&lt;br /&gt;
&lt;br /&gt;
(하(下))&lt;br /&gt;
&lt;br /&gt;
이육사(李陸史)&lt;br /&gt;
&lt;br /&gt;
밤은벌써 오전(午前)두시(時)나 되엿는데 박가테서는 눈보래가 조금도 쉬지안코 나렷소,사람들은차차 긴하픔을 하다가는 제대로 팔을배고 자는이도잇고 또그자는이의 다리를베고 자는사람도잇스며 나중에는『하이카라상』과 나만이남어서 나는 이동리(洞里)의 서러운전설(傳說)을 듯는것이오『옛날에 이동리(洞里)와 건너마을이편을갈러서 정초(正初)이면『줄댕기』가 시작(始作)되엿고 그때는 사람들이 수—백명식(百名式) 모혀서 그중에도 젊은 사람들은 처녀(處女)나 총각이 제각기 마음잇는 사람들과 사랑을 속삭이면서 영원(永遠)히그자손(子孫)들은 변(變)함업시 이동리(洞里)를직혀왓건만은 지금(至今)은 어쩐일인지 그사람들은 누가 오란말도업고 가란말도 업건만은 다들어데인지 한집식 두집식 동리(洞里)를떠나고 그럴때마다 젊은이들의 싹트기시작(始作)한 사랑은 그봄이 다가기도전에 덧업시 흘러가고 만다는말을 다마치지도못하야 이사람은 창졸간에 미친듯이 쓸어저 흑흑 느껴가며우는것이엿소.나는 이것을 웨우느냐 물어볼힘도업고 울지말라고 위안(慰安)을 줄수도 업섯스며다만나 혼자 생각기를 너도 또한불상한 미완성초연(未完成初戀)의 순정자(殉情者)로 구나하고 동정(動靜)을 살피노라니 이사람도 그냥잠이 들고먼데닭이 자즌홰치는 소리가들리며 눈은끗첫는지 박가튼 바람이 몹시부럿소.&lt;br /&gt;
&lt;br /&gt;
나는몃시간(時間) 남지안흔 이밤을도저(到底)히 잘수는업섯소,내머리는해저(海底)와가티 아득하고 내가슴은운모(雲母)와가티 무거웟소.도라누을내야 도라누을수도 업스려니와여페사람들의 코고는소리는 검은시체(屍體)를 실흔마군(馬軍)의 수레박휘를 갈고가는듯하오,그럴수록방안의 정적(靜寂)은 무거워저서 자꾸만 지구(地球)의 중심(中心)으로 침전(沈澱)되는듯하엿소,나는 참다못하야 눈을감고 두손으로 얼굴을 가리웟소.바로 그때엿소,누구인지내머리마테서 말하는 사람이잇섯소,그사람이 누구인지는 기억(記憶)할수 업스나 혹(或)은 저녁전에담배가개에서본 농부(農夫)일른지도모르겟소 그가 나에게 한말은분명(分明)코『문(門)안에 드러와서……』엿소.나는 여기서 눈을번쩍뜨고가만히 생각해 보앗소.&lt;br /&gt;
&lt;br /&gt;
『오!그러타,나는 문외한(門外漢) 여다』아무리하여도 인생(人生)의 문(門)안에들어서지못할 나이라면 차라리영원(永遠)한 문외한(門外漢)으로 이세상(世上)을수박것할트시 지나갈일이지 그좁은문(門)을 들어가려고 애를쓸필요(必要)가 어데잇겟소 문(門)박게서 살어가면 책임(責任)과 부담(負擔)도 가벼우려니와 문(門)안에 우리가 직혀야할 보물(寶物)이잇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모두 문(門)안에서 직힐때에나혼자만 문(門)박게서 그모든것을파수본다면 그것도 나의한가지임무(任務)가아니겟소 그러타면 나는달게&lt;br /&gt;
&lt;br /&gt;
인생(人生)외 문외한(門外漢)이 되겟소.&lt;br /&gt;
&lt;br /&gt;
그래서 남들이모두 문(門)안에서보는세상(世上)을 나는문(門)박게서 보겟소 남들은 기피보는 세상(世上)을나는널리보면 또그만한 자긍(自矜)이잇을것갓소.오늘은 고기압(高氣壓)이어데잇는지 풍속(風速)은 육십사(六十四)미리오이동리(洞里)를 떠나아무도 발을대지안흔 대설원(大雪原)을 걸어가겟소,전인미도(前人未到)의 원시경(原始境)을 가는느낌이오,누가나를 따라이길을 올사람이 잇슬른지?업서도 나는이길을 영원(永遠)히가겟소.』&lt;br /&gt;
&lt;br /&gt;
나는이까지보고 위선이유고(遺稿)를더펏다,그리고 생각해보앗다 이것은 한사람이 인생(人生)의문(門)안에 들어오지못하고 영원(永遠)히 걸어간기록(記錄)이다 오!그러면 나도역시문외한(亦是門外漢)인가?정축(丁丑) 칠(七),이구(二九)&lt;br /&gt;
&lt;br /&gt;
=소품(小品) 황엽전(黃葉箋)=&lt;br /&gt;
소품(小品)①&lt;br /&gt;
&lt;br /&gt;
황엽전(黃葉箋)&lt;br /&gt;
&lt;br /&gt;
이(李) 육(陸) 사(史)&lt;br /&gt;
&lt;br /&gt;
사람들은 어름알보다 더냉담(冷淡)하고 주사침(注射針)가티 촉발라도 그래도 제대로는 인정(人情)도잇고 눈담(曇)노잇서 친(親)한사람을 사이에는못보 보고저하고 보면빨아먹을듯이도 형형색색(形形色色)의 표정(表情)을비저내며 계절(季節)에 따라서는 눈물겨울만큼 간절한모양이나 『내』라는 위인(爲人)은 자질(資質)도 소박(素朴)하고교양(敎養)도 고매(高邁)하지못데 요즘은엇전지 신경(神經)이 차를보다 단단해저서 압흐고 슯흔것도 못견듸게늣겨지지도 안커니와 보지못해 못견딀사람도업고 소식(消息)이라도 못알려 탈이될,더친(親)하고덜친(親)한이가업다.그러나 행(幸)혀이세상(世上)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잇다고하면 나는 의무(義務)로라도그대에게 나의소식을 알려야하지만은 지금의 나에게는 그러한미덕(美德)을 수행(遂行)할 야망(野望)조차업다.다만 야망(野望)을용서(容恕)한 사람이잇거든 가을바락에 무한(無限)히 흘러가는 황엽(黃葉)의 쪼각쪼각이 모두나의 편지라고 생각을 해라그리고 그어느한쪼각이라도 주어다가 그대들의책상(冊床)우에 꼬처두고 그황엽(黃葉)이 바람에 나붓기며울며부르짓는 서러운전기(傳記)를 들어보아라……&lt;br /&gt;
&lt;br /&gt;
‥‥그놈의 거리를 말할것도업고 저는하여(何如)든 가로수(街路樹)에서떨어저 왓습니다.그래서 거리에 서잇는동안 형형색색(形形色色)의 인간(人間)들을 다보앗습니다.그러나대개(大槪)는 모다비슷비슷한 인간(人間)들이엿고 별다른 놈은 못보앗습니다 그것은 십년전(十年前)일이라고생각됩니다.어느날오후(午後) 내발밋흘지나가는 소년(少年)이 잇섯습니다,미친놈가티 중얼대는 말을가만히듯자니『루나—ㄹ』의 일기(日記)를외이는겐지『불상한놈! 불상한놈!』 고거즛말하엿습니다,그뒤로는 매일(每日)가티 아침에도 내발밋홀지나고 저녁에도 내발미틀지나는동안에 나는어느사이에그만그녀석하고 친(親)해젓습니다,그래서 그녀석의 정체(正體)를 알수가잇섯습니다&lt;br /&gt;
&lt;br /&gt;
그녀석은 어느시골에서 출가(出家)를해서 서울을왓다는데 그출가(出家)한 이유(理由)가 어린녀석하고는 맹랑햇습니다 그녀석의 집은어느해안(海岸)이든가봐요 아침으로 조수(潮水)가 밀려나가면 끗업시 널려잇는 백(白)모래바티 너무도 허무(虛無)서 오기는왓스나 섬들을 건너간 갈메기가 몹시그립다고 하는것을보면 그래도 어린향수(鄉愁)가머리를 글거가는모양이겟지요&lt;br /&gt;
&lt;br /&gt;
그후(後)나는 우리들이 늘만나는시간(時間)이되면 그녀석이 하마나오나하고 기달리기도햇습니다 그럴때 멀리에 발자욱 소리가나고 그녀석이 『하이네』 니 『꾀—테』 니의 시(詩)를외이고 올때도잇섯습니다 그리고 몃해가 지난어느해봄날 내가긴 동면(冬眠)으로부터 영롱(玲瓏)한 첫눈을텃슬때 또그녀석을만낫습니다 그때는벌서그녀석은 십부게볼 소년(少年)이아니라 의례(依例)히 그상대자(相對者)를 다리고어둑어둑한 황혼(黃昏)에 내엽헤와서간즈려울만큼 종알대며 행복(幸福)의『메뉴—』를 전람회(展覽會)의『프로그람』보다 화려(華麗)하게꾸미는것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이것어 한여름을 지나며 비가오나 바람이부나 계속(繼續)이 되엿습니다 그러나 인간(人間)들에게잇서서는 행복(幸福)의 절정(絕頂)은 최대(最大)의비극(悲劇)과 서로통(通)해 잇나봐요 그해의 첫가을 어느으스름달밤에나는이비극(悲劇)을 바로 내눈헤서보는것입니다&lt;br /&gt;
&lt;br /&gt;
『여보우리두사람이 서로사랑하면 그만이지 사랑을 부모(父母)에대(對)한 효행(孝行)으로 하는데가 어데잇소.』&lt;br /&gt;
&lt;br /&gt;
이러케 그녀석은 폐(嬖)하는것이 엿습니다.&lt;br /&gt;
&lt;br /&gt;
그것도 고이치안흔게 그때쯤은 그녀석의 기분(氣分)이란 불꼿치타오를둣도 하얏거니와 제애비말을 안듯기로 유명(有名)하야 집을나선놈이니까.&lt;br /&gt;
&lt;br /&gt;
『그러치만은 엇절수가 잇서야 지요』&lt;br /&gt;
&lt;br /&gt;
이것이 그더석의 말에갑허진보수이엿습니다.그뒤나는 십년(十年)이란 긴동안 이사람들의 속삭임을 들을수는 업섯습니다.&lt;br /&gt;
&lt;br /&gt;
아마그것이 그들의 비극(悲劇)의시초(始初)FP동시(同時)에 나의『로—맨틔시슴』도 종언(終焉)이엿든 것입니다 나는그날부터 새로운 생활(生活)을 경험(經驗)하지안으면 안되엿읍니다 이때까지는 그들가운데에 엇던한두사람의 주활(主活)을 말로서 들엇으나 인제는 어느특정(特定)한 사람의사랑이라든지 그런달착지근 한것이아니라 그저그놈도 그놈갓고 그놈도 그놈갓흔 뭇사람의생활전체(生活全體)가 내풋입새의 거울보다 반드라운 쪼각쪼각에 빗치는 것이엿읍니다 이전갓흐면멀리서 삽분삽분 발자욱 소리가들려오고 그발자욱 소리가갓가워 지는데따라 쟁반에 구슬을굴리는듯한 목소리도 들엇건만은 또그럴때면 나도 입사귀를흔들어서 업김가티 보드러운바람을 부러도 주엇건만은 이때는 내가 바람을 불기는커녕그들의지나가는 위풍(威風)에 나는전율(戰慄)하지 안을수 업섯읍니다.구슬을 굴리는듯한 목소린들 어데가듯겟읍니가?뭇사람의 포효(咆哮)하는소리란 아주바다에서 이러나는노도(怒濤)의 교향악(交響樂)가탯습니다.&lt;br /&gt;
&lt;br /&gt;
그래서 나는알기를 인간(人間)이란위대(偉大)한 작란(作亂)군이라고 하엿습니다.어떠케 그들의 얼골이 크게보이고 힘차게 늣겨것든것인가 지금은 생각만하여도 왼몸이 으슬으슬합니다.그러는중(中)에그들의 행렬(行列)은 대강(大江)가티 홀러가고 나는 또다시 노랏케 단풍이들어 한닙두닙 떨어지는것입니다.얼마나 소조(蕭條)하고 적막한거리겟습니가? 내엽헤는 괴수(怪獸)가티 늘어선 삘딍들의 거믄그림자가『팔아스트 에 얼어부튼거지들의 싸늘한꿈을 죽엄가티덥허논때업니다.밤도삼경(三更)은 지난때이지요 더벅더벅 거러오는무거운 발자욱 소리와함께 나는고요한『그림자』하나를 발견(發見)햇습니다.안개에 촉촉히 저진차림자러와 힘업시 옴겨지는발자욱이 아주무슨 패잔병(敗殘兵)의 유령(幽靈)이엿슬지도 모릅니다.나는지금 그유령(幽靈)을 따라 굴러 갑니다.그러나 그유령(幽靈)은 내가미행(尾行)을 한다는것은 모르고 또는알엇다해도 아무저항(抵抗)도 할필요(必要)가업다는듯이 방향(方向)도업시것는것이엿습니다.때로는 시내도건너고들판도 지나 힘이지치고 밤이깁프면 산(山)기슭 나무등얼 밋헤누어서 하늘에 수(數)업시만흔 별들을 헤아려도 보는것이겟지요그러나 그어느별도그에게 행운(幸運)을 점제한별은 업섯나봐요 그리다간 그는그만 흑흑늣기고 울며울다가는 자는것이엿습니다.아마도 기적(奇蹟)을 이즌순간(瞬間)이 그에게는 자장행복(幸福)된순간(瞬間)이든가봐요,산(山)속은 찬기운만 가득하고벌레소리는 정적(靜寂)을 삼림(森林)가티무성(茂盛)하게하는것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그다음날도 아츰햇발이 속새입홀 흔들면 그는일어나 것는것이엿습니나.이러는 동안에 나는이유령(幽靈)에게서 무엇을 보앗스리라고 생각하심니가?어느큰강(江)가이엿습니다.여을어 목노아울고가는 강(江)가이엿습니다.그는이강(江)가에 안저서 무엇을 생각하엿는지 눈을깜은채로 하늘을치여다보는 것이엇고 초생달은교만(嬌慢)한 게집의눈자위처름 그를흘겨보는것은 한층(層)더창백(蒼白)한 비우슴갓햇습니다 그러치만은 그는그광망(光芒)을 피(避)하려고도 안엇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내생각에 따른다면 그래도 못잇처지는 날ㄹ기억(記憶)을 모조리 물소리에 씨처흘려보내려는 노력(勞力)이엿슬지도모릅니나&lt;br /&gt;
&lt;br /&gt;
그때 먼데마을에는 개짓는소리가 어즈러히 들여오고 새바람도 유달리 옷깃을 새여드는데 그는 일어셔 한발한발 물가으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때나는 그의운명(運命)을거의들여다보는것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자살(自殺)이란 광경(光景)이 내머리속에번개가티 일어낫습니다.그리고그는물가의 널직한 반석(盤石)우에올러안저서 물속에비친 자기(自己)의얼골을 자세히 들어다보는 것이엿습니다,그러나 그물속에는자기(自己)의 얼골은 차저볼수가 업섯든것이겟지요,증오(憎惡)를 참지못하는 그는그만 뼈만남은 두손으로 물결을 훗치고는 돌우에업더저 우는것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그는 또다시 일어나 모둔것을 이저버린듯이 걸어가는 것이엿습니다.일기(日氣)는점점 흐려지고 회색(灰色)으로 물드린 천공(天空)은 그의최후(最後)의 희망(希望)까지라도 빼서바릴듯이 싸늘한 압박(壓迫)을더하는것이엿습니다.그러타고해서 그에게는 아무런 격정(激情)도 반발(反撥)도잇는것갓지는 안엇습니다 만은 주먹을 쥐여서는 주머니속에 너은체로 간간히 머리를 흔드는것은 과거(過去)에대(對)한 회한(悔恨)이라든지그런것들이 머리속을 할터가는것이겟지요?&lt;br /&gt;
&lt;br /&gt;
그것은 어느동리(洞里)압이엿습니다만흔사람들이 모엿다가는 다들도라가고 큰버드나무에『사지오리』를 부친색기를 걸처맨밋헤는 기름종지에 빤—한심지불이타고잇스섯며 아해들 몃사람이그것을 직히고 잇섯습니다.그는아해들에게 무엇을하는것이냐고 물엇습니다.&lt;br /&gt;
&lt;br /&gt;
아해들의 대답이란 너무나 묘(妙)한것이 안이겟습니가?그동리(洞里)에는 십년(十年)만에 한번식은 유령(幽靈)이 난다는 전설(傳說)이 잇섯습니다그래서 그날은 동리(洞里)사람들이정성을 다하야 한데모혀서 기도(祈禱)를 올리고 고사(告祀)를 지내는것이엿는데 그날이마츰 십년(十年)에 해당(該當)한날이며 방금 의식(儀式)을 맛친때라고 말을마천 아해들은 그를 한참동안 자세히 보다가는그만 인가(人家)를 향(向)하야 다어나는것이엿습다.아마도 그것은참으로 이동리(洞里)에 유령(幽靈)이 나타낫다는것을 알리기 때문일런지도모름니다.&lt;br /&gt;
&lt;br /&gt;
그는 한번 크제우섯습니다나는 그가 웃는것을 보는것은처음이엿습니다,그러나 그웃슴이란 곳변해저서 므슨쓰듸쓴 약물을 먹은뒤의 입모습가리 변해지며 얼골전체가 크다란 환상(幻想)에 사로잡히는것 갓햇습니다그리다가 그는 그언덕 미테서잠이들어 자면서 꿈을 꾸는것여엿습니다,그꿈이란 이러햇습니다,몹시더운 여름날 몃칠을두고 비가따루엇습니다,그래서큰물이나고 하루밤사이에 왼동리(洞里)가 물에쓸려 갓읍니다 왼여름 피담을홀려 지은농사(農事)도 한포거업시 사람마다 두주먹과한개의 목슴박게는 남지안엇음니다 주림과 치위가 매운챗죽갓치 그들을 휘갈겻읍니다 그래서 동리(洞里)사람들은 제각기 이고향(故鄕)을 떠나지안호면 안되엿읍니다 물론(勿論)녯날에야 부모(父母)의 품속갓치 포근하고 사랑스런 땅이엿지만은 지금은 참담(慘憺)과 고통(苦痛)의 회억이외(回憶以外)에 아부것도 그들의 애착(愛着)을 붓잡어 두□는 못하엿읍니다.그들은지금 한개촌락(個村落)에서 다른촌락(村落)으로 한성시(城市)에서 또다른성시(城市)에 표박(標泊)□ 길을가는것이엿지만은 그어느□곳도그들이발을 부칠곳은 어□읍니다 모든집들어 그들압헤는 문(門)들을 잠것읍니다.그리고 오즉그들에게는 한오리 끗어는 길이엿음니다 어느때나 □□갈수잇는 길이엿읍니다 하□□또하루 한달에또한달 꼭가티 그들은 하늘을 치여다보고 □을갓읍니다.벌서초본(草本)도 다□□이들고 낙엽(落葉)이 나리나 그들의발길은 머므를수는 업섯습니다 어느마을이나 성시(城市)에서 그들에게 일주일(一週日)이나 유(留)할수가□고한오리의 희망(希望)을 주엇다면 다시그순간(瞬間)이 지나면 그들에게는서름이외(以外)에 아무것도 □는것은업섯습니다.그러나 이□름과주림과 치위는 그들늙은이와 어린이와 남자여자(男子女子)를 모다한마음에 얼거맬수가 잇섯습니다 바탐과비에 바래인 그들이마음에한개의희망(希望)이란 오즉 일거리와생활(生活)이엿습니다 이것이 그들을고무(皷舞)하고 추진(推進)하는 힘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마치한떼의 표유(瓢游)하는『집시』와가티 마을을지내나 산(山)을너무나 마른풀을뜨더 그것을 덥고깔고 혹(或)은낙엽(落葉)을 쓰러다가 욕(褥)와 이불을삼어 한랭(寒冷)을 지나는하루밤 더욱이 비오는밤……밤은영원(永遠)히 차운것이며 뜨신것은다만그들의『마음』뿐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날과밤은 그넷줄처럼 밧구엿습니다.해도점점 쩔러지고 물들이 어러부트며 첫눈이 나린것도 발서 열흘전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그들은 아즉까지도 발무칠땅과한가지의 일거리도 찻지는못하엿스며 끗간데를모를 길만을보고 걸어가는것입니다.&lt;br /&gt;
&lt;br /&gt;
『여기라도 좀쉬여갓스면』모다들이러케 마음으로 부르지젓습니다.그러나 또몃사람운 말하는것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가자 압흐로 더가보자』이것도모든사람의 말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그들은 여전히 경사(傾斜)진 산(山)빗탈을걸어가며 길다란 곡선(曲線)의행렬(行列)이 계속(繼續)되는것입니다.그때는바람도 조골 잔잔해지고 햇발도구름밧글나와 열분광선(光線)이 뭇사람의 얼골을 다소명낭(多少明朗)하게하엿스나 일행(一行)이바로 산(山)미루턱에올너다엇슬때는 정세(情勢)는 디무도급(急)히변(變)하야 눈이퍼붓기 시작(始作)햇습니다.&lt;br /&gt;
&lt;br /&gt;
『눈이또나린다』이러케 부르짓고는모다들 놀나는 것이엿습니다.눈송이는 목화(木花)를 뜨더뿌리는듯이왼공중(空中)에 미만(瀰漫)하야지척을가릴수가 업섯습니다.바람에몰려오는 눈송이가 얼골에 부다치면 낫살을 어이는듯하고 손이빠질듯이 스린것입니다.시력(視力)조차 모호(糢糊)하야 발아래길도 알어보기는 어려웟습니다 재를오를때에 비(比)하면 산(山)을나려오는것은조금용이(容易)하엿스나 길이질대로 질어서 업더지락 잡버지락하는 사람들도잇스며 등에업힌 어린애들은 배가몹시 곱흐다고 우는것이며 그럴때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다들 산(山)밋헤 동리(洞里)집에 나려가서 드신밥을 준다고달래는것이엿습니다 그러나 산(山)미테 동리(洞里)집은 모다제각기 제마음에 그려보는 집들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가자 조금이라두 빨리가자불빗을 볼때까지』그들중(中)에서 한사람이 굴근목소리로 외치는것입니다&lt;br /&gt;
&lt;br /&gt;
『암그래야지』또 몃사람의 대답이 끗나면 모다들 침묵(沈默)은하면서 마음속으로는역시(亦是)『가자』고 대답하는것입니다&lt;br /&gt;
&lt;br /&gt;
사람들은 이빨을물고 잇는힘을다하야 전진(前進)합니다 지나온길이얼마이며가야할길이 얼마인것도모르면서 죽으나사나 가야한다는 것박게는 그들은 한사람도자기(自己)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업섯습니다.그들의 동반자(同伴者)의 발소리와 호흡(呼吸)이 그들의가튼 운명(運命)을결정(决定)한다는것은 이잔혹(殘酷)한 자연(自然)과 싸워가는 무리들의 금과옥조(金科玉條)이엿습니다.&lt;br /&gt;
&lt;br /&gt;
눈보래는 끗첫습니다.그러나아즉도 그들에게는 조그마한희망(希望)도 보이지는 안헛습니다.압도캄캄하고 뒤도그랫습니다.아득한 삼림(森林)속을 허우덕이는 암담(暗膽)은 영원(永遠)한흑야(黑夜)가 새이지도안코 영원(永遠)한 미로(迷路)도 끗막지도못할것 갓햇습니다.&lt;br /&gt;
&lt;br /&gt;
피로(疲勞)는 그들의몸을 풀솜가티만들엇습니다.참다가 못참는몃사람이 땅이라도 꺼지란듯이한숨을 쉬는것이엿습니다.그리고는 부르짓는 사람도업고 중얼대는 사람도업스며 눈물도마르고 공포(恐怖)도 사라진 그들은 발목에 잇는 힘을 다해서 눈과진흙우를 쉬임업시 이동(移動)하는것입니다.』&lt;br /&gt;
&lt;br /&gt;
유령(幽靈)은 그들가운데서 제일나이만흔 노인(老人)을 발견(發見)햇습니다그리고 그것은십년전(十年前) 그가고향(故鄕)을떠나올때 아즉도 그다지늙지안흔 그의아버지인것도 알엇습니다 그리고 모든사람은 그의어린시절(時節)의 동무엿습니다 그는참다못해『아버지』하고 소리를첫&lt;br /&gt;
&lt;br /&gt;
습니다 그러나그들은 어느한사람도 그를상대(相對)로 반겨마저주는사람은 업섯습니다.&lt;br /&gt;
&lt;br /&gt;
모다제각기 제갈길을 가고만잇섯습니다.&lt;br /&gt;
&lt;br /&gt;
유령(幽靈)도 그때야 잠이깨엿습니다 그리고 몸써리를 치는것입니다 얼마나 지리(支離)한꿈이며 괴로운 꿈이겟습니까?유령(幽靈)은다시일어나 것는것입니다 캄캄암흑(暗黑)속을 영원(永遠)히차고 영원(永遠)히 새지못할듯한밤을 제혼자가는것입니다 십년전(十年前) 내발밋흘 지나단이며 사랑을 속삭이든 소년(少年)은지금도 밤길을 제혼자 가고잇겟지요 황엽(黃葉)은 그래서 서러운일생(一生)을 울고만잇습니다&lt;br /&gt;
&lt;br /&gt;
정축십일(丁丑十一),일(一)&lt;br /&gt;
&lt;br /&gt;
=전과기=&lt;br /&gt;
누구나 버릇이란 쉽사리 곳처지는것은아니다 그러므로 세살쩍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말도 잇지 안는가?.그런데도흔히 다른사람의 한가지 버릇을 새로히 발현햇슬때는 아—저사람은 저런버릇이 잇구나하고 속으로 비우서보거나 그버릇이 조치못한종류의것이면 대개는 업수히역이는 수도잇는가봐!.그럿컨만 나에게는 아무리 곤처보려도 곤처지지안는버릇이란 손톱을 깍고 줄로 으르고 수건으로 닥고하는것이다그것도 때와곳을 가릴것도업시조욕(漕浴)나 다방(茶房)이나는 말할것업고기차(汽車)나 배를타고 멀리여행(旅行)이라도하면 심심푸리도되고 봄날도서관(圖書舘)가튼데서 서너시간(時間) 안저백이면 제아무리 게른뱅이는 아닐지라도 웃눈섭이 기중기(起重機)처름아래눈섭을 끄러다닐때도 잇는것이고 그럴때에 손톱을 잘르고줄로 살살으르면 자릿자릿한 자미에 왼몸에게틈이 다풀리는것이다.그야내나이 어릴때는아침일직이손톱을 잘르면어룬들은질색을하시며 말리기도하엿다,그리고 말릴때에 누구인지지금에기억되지는 안어도 우리집에자주오는 손이 말하기를 아침에손톱깍고 밤에 머리빗는것은몸에해롭다고 하는것이엿고 내생각에도 그런방문은『동의보감(東醫寳鑑)』에라도 싸여 잇는줄 아럿기에그뒤로는 힘써시간(時間)을 한나절지난뒤에 손톱을 닥곤하엿지만나도내대로 세상맛을 보게된뒤로는 쓴맛단맛을 다보고 시고떨븐 구석과 휘추고초가튼 광경에 부닥길때가 시작이되고는손톱치레를 할만한 여가도 업섯고 어느사이에 손톱은 제대로자라 긴놈 쩌른놈 삐뚜러진놈꼬부러진놈 벌덕잡버진놈 앙당마스러진놈 이러케되야 내손이란 그꼴이 맛치 오증어를 뒤집어 삶어논것이 되엿다.&lt;br /&gt;
&lt;br /&gt;
그럴때에 나는 또 다시 손톱을 잘를것은 잘르고 으를놈은 으르곤하엿스며 이른아츰이라도 가리지는 안엇다.그것은밤으로 머리를 깍거보아도 몸에 해로운것도 업스니까 아츰에 손톱을 깍는것조차 위생(衞生)과는 관게업는것을 안까닭이다.&lt;br /&gt;
&lt;br /&gt;
그런대 내가이손톱을 잘르는버릇은 언제부터 시작되엿는가를 생각해보면 그도벌서 삼십년(三十年)이 더지낫다,내가난지 백일(百日)이나 되엿겟지 이란저고리박게빨간내손이 나와서 내얼골을 햅여뜻고는 나는자스려질듯이 울엇다.어머니가 놀라서가위로 내손톱을 잘러주신것이 처음이고그것이 늘거듭하야 지는동안에봄철이오면 어머니는 우리형제(兄弟)를 차례로불러 퇴ㅅ마루 양지쪽에 안치고 손톱을 잘러주시고 머리도빗기고 귀도휩여 주섯스며 이것도 내나이 여섯살때 소학(小學)을 배우고는 이런일의한반(半)은 할아버님께 이관(移管)이 되엿다 예날 내고장 우리집에는그다지 크지는못해두 허무히 적지안은 화단(花壇)이 잇섯다 그리고그화단(花壇)은 이때쯤되면 일이밧벗다 깍지로긁고호미로 매고 씨갑씨를 뿌리고총생이를 옴겨심고 적당한 거름도 주엇다 요즘가티『시크라맨이나『카—비손』이나『추리프』가튼것은 업서도 옥매화(玉梅花) 분홍매화(粉紅梅花) 홍도(紅桃) 벽도(碧桃) 해당화(海棠花) 장미화(薔薇花) 촉규화(蜀葵花) 백일홍등등(百日紅等等) 빗도보고 향(香)내도맛고꼿도보고 입도볼 말하면 일년(一年)을 다즐길수가잇는것이엿는데 내할아버지 생각은 이제 헤아려보면 우리들에게 글읽고 글시씨인사이로노력(勞力)을 몸소맛보이는것도 되려니와 그것이 정서교육(情緒敎育)도될겸(兼) 당신의 노래(老來)를 화려(華麗)하게 꾸밀수도 잇섯든 모양이엿다 그럴때마다 우리들은 이다지 가볍고고흔 노동(勞働)이 끗나면 할아버지는 우리들게 손을씨슬것과 손톱에끼인흙을 끌어내도록 손톱을닥그라 하섯다.&lt;br /&gt;
&lt;br /&gt;
이러든 내손톱이기에 나는손톱을 소중히하고 잘르고 으르고 닥고하는 동안에 한가지방편을 어덧다 그것은 나에게거북한일을말하는 사람아페서 손톱을 닥는것이다.빤히 얼굴을맛대이고 배알에 거슬이거나듯기실흔 말을듯고 억지로 참을수도업고 그러타고 언잔흔표정(表情)을 할수도업서 손톱을 닥노라면 시굴게신 어머니도 그려보고 도라가신 할아버지의 모습을 우러러 뵈일수도잇다.내고장의 푸른하늘아래 봄이 왓슬것도 가트니&lt;br /&gt;
&lt;br /&gt;
——(완(完))——&lt;/div&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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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이육사(李陸史)</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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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분류:imgpdnjs]]&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파일:이육사.jpg]]&lt;br /&gt;
&amp;lt;/div&amp;gt;&lt;br /&gt;
==기본 정보==&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margin:auto;&amp;quot;&lt;br /&gt;
|+ '''이육사'''&lt;br /&gt;
! 항목 !! 내용&lt;br /&gt;
|-&lt;br /&gt;
| 본명 || 이원록&lt;br /&gt;
|-&lt;br /&gt;
| 출생 || 1904년 5월 18일&lt;br /&gt;
|-&lt;br /&gt;
| 출생지 || 경상북도 예안군 의동면 원촌동 원촌마을&lt;br /&gt;
|-&lt;br /&gt;
| 사망 || 1944년 1월 16일&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이육사는 1904년 5월 18일, 지금의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인 옛 예안군 일대에서 태어났다. 퇴계 이황의 후손인 아버지 이가호와 어머니 허길 사이에서 여섯 형제 중 둘째였다. 훗날 그는 영천 화북면 오동리 출신인 안일양과 결혼하게 된다.&lt;br /&gt;
&lt;br /&gt;
어린 시절 그는 조부 이중직에게서 소학을 배우며 한학을 익혔다. 조부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진성이씨 문중에서 운영하던 보문의숙(훗날 도산공립보통학교)에서 공부했고, 이때 배운 한학의 영향은 그의 문학 세계에도 묻어난다. 졸업 후 가족이 대구로 이주했고, 그는 열아홉에 영천의 백학학원에서 교원으로 잠시 일했다. 1924년에는 일본 도쿄에서 예비학교 과정을 수학했으나 중도에 그만두고, 다음 해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 사회학을 공부했지만 역시 2학년 때 학업을 접었다.&lt;br /&gt;
&lt;br /&gt;
1927년 그는 [[장진홍_1895]]이 일으킨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과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대구형무소에서 약 1년 반을 지냈다. 이때의 수인번호 ‘264’를 따서 훗날 자신의 호를 ‘육사’라 짓는다.&lt;br /&gt;
&lt;br /&gt;
1932년 그는 만주 펑톈으로 건너가 [[윤세주_1901]]를 만나 의열단 입단 권유를 받았고, 난징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으로 들어가 폭탄 제조와 투척, 변장, 무기 운반, 피신 기술 등 다양한 실전 교육을 받았다. 사격 실력은 특히 뛰어났다고 전해진다.&lt;br /&gt;
&lt;br /&gt;
1933년 귀국 후에는 신문·잡지를 오가며 시와 논문, 시나리오 등 여러 글을 썼고, 루쉰의 소설 《고향》을 번역하기도 했다. 하지만 1934년 의열단 출신이라는 이유로 다시 검거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을 당했고, 몇 달 뒤 기소유예로 풀려났다.&lt;br /&gt;
&lt;br /&gt;
1943년 베이징으로 건너갔다가 어머니와 큰형의 소상을 위해 5월에 귀국했다. 그러 이 해 6월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었고, 결국 1944년 1월 16일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교도소에서 옥사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https://www.youtube.com/watch?v=gCcfvA4fGKY 광복 79주년 특별영상 : 행동하는 지성, 저항시인 이육사 이야기]&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937&amp;quot; height=&amp;quot;527&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gCcfvA4fGKY&amp;quot; title=&amp;quot;광복 79주년 특별영상 : 행동하는 지성, 저항시인 이육사 이야기&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이육사의 기자 생활]]==&lt;br /&gt;
많은 사람들이 이육사의 문학 작품만을 알고 기자 생활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위 페이지에서는 이육사의 기자 생활에 대해 더 자세히 서술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청포도'에 스민 가족에 대한 향수와 해방의 염원==&lt;br /&gt;
[[이육사의 '청포도']]&amp;lt;/div&amp;gt;는 이육사가 일제강점기에 경험한 상실과 분리를 바탕으로,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해방에 대한 염원을 동시에 그려낸 시이다. 시에서 드러난 익어가는 청포도의 모습과 돌아올 이를 기다리는 마음은 개인의 정서와 민족적인 바람이 자연스럽게 중첩되는 지점을 보여준다.&lt;br /&gt;
&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v2%3A2PACX-1vTBMVIXErpB6OYWbzC-nzv_0t_UNL2Q64IzD8TI-b1EywFJnOKdoMzdLiVC3NeAgyn4NLe-NEfPjK34&amp;amp;font=Default&amp;amp;lang=ko&amp;amp;initial_zoom=2&amp;amp;width=100%25&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이육사를 기억하는 장소==&lt;br /&gt;
이육사는 경상북도에서 태어났지만 전국적으로 이육사와 관련된 장소들이 많다. 아래 지도는 이육사와 관련된 모든 장소들을 정리한 지도이다. 대단한 시인 이육사를 기억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방문하기를 추천하한다.&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amp;quot;https://www.google.com/maps/d/embed?mid=1h1k2e9-GTfl5Bzcv0D2CRQG12cR998o&amp;amp;ehbc=2E312F&amp;quot; width=&amp;quot;640&amp;quot; height=&amp;quot;480&amp;quot;&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amp;lt;/div&amp;gt;&lt;br /&gt;
&lt;br /&gt;
:::::&amp;lt;p&amp;gt; '''1. 청포도 문학공원'''&lt;br /&gt;
&amp;lt;/p&amp;gt;&lt;br /&gt;
&amp;lt;p&amp;gt;&lt;br /&gt;
:::::이육사의 대표 시 「청포도」의 영감을 얻은 장소로 알려져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청림동 일대에 조성되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포항 청림동 일대(현재 해병사단 내 일월지 주변)에 동양 최대의 포도원이 있었는데, 이육사가 이곳에서 영일만을 바라보며 시를 구상했다는 문헌 기록을 바탕으로 한다. 공원에는 청포도 시비와 함께 문화축제가 열리며 시인의 문학 정신을 기리고 있다.&lt;br /&gt;
&amp;lt;/p&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p&amp;gt; '''2. 이육사문학관'''&lt;br /&gt;
&amp;lt;/p&amp;gt;&lt;br /&gt;
&amp;lt;p&amp;gt;&lt;br /&gt;
:::::이육사 시인의 고향인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에 2004년 탄신 100주년을 맞아 설립되었다. 그의 민족정신과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한 공간으로, 친필 원고, 시집, 독립운동 관련 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다. 문학관 주변에는 복원된 생가, 청포도 샘, 절정 시비 등이 함께 조성되어 있다.&lt;br /&gt;
&amp;lt;/p&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p&amp;gt; '''3. 이육사 생가'''&lt;br /&gt;
&amp;lt;/p&amp;gt;&lt;br /&gt;
&amp;lt;p&amp;gt;&lt;br /&gt;
:::::이육사가 태어난 집이다. 원래 안동댐 건설로 인해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1976년 안동시 태화동으로 옮겨졌다. 이후 육사 탄신 100주년(2004년)을 기념하여 이육사문학관 옆(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에 원래의 건축 양식을 살려 복원되었다. 조선 후기 전통적인 반가(班家)의 건축 양식을 띄고 있으며, 특히 사랑채와 안채의 크기와 구조가 거의 동일하게 대칭을 이루는 독특한 특징이 있다.&lt;br /&gt;
&amp;lt;/p&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p&amp;gt; '''4. 문화공간 이육사'''&lt;br /&gt;
&amp;lt;/p&amp;gt;&lt;br /&gt;
&amp;lt;p&amp;gt;&lt;br /&gt;
:::::이육사가 1939년 무렵 가족과 거주하며 「청포도」 등 주요 작품을 발표했던 서울특별시 성북구 종암동의 역사적 의의를 기념하여 2019년에 개관한 복합 문화 공간이다. 각 층의 명칭을 '청포도', '교목', '절정' 등 그의 대표 시 제목에서 따왔으며, 전시, 강좌, 문화 행사 등을 통해 시인의 삶과 문학을 시민들과 공유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lt;br /&gt;
&amp;lt;/p&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p&amp;gt; '''5. 264작은문학관'''&lt;br /&gt;
&amp;lt;/p&amp;gt;&lt;br /&gt;
&amp;lt;p&amp;gt;&lt;br /&gt;
:::::이육사의 필명이 된 수인번호 '264'를 기려 대구광역시 중구 북성로에 조성된 작은 문학관이다. 이육사는 1927년 장진홍 의거로 인해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이곳에서 '264'라는 수감번호를 받았다. 일제강점기 적산가옥을 리모델링하여 1층은 카페와 기획전시실, 2층은 상설전시실로 운영되며, 이육사의 생애와 작품을 살펴볼 수 있다.&lt;br /&gt;
&amp;lt;/p&amp;gt;&lt;/div&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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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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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이육사(李陸史)</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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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10T08:38:0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Imgpdnjs: &lt;/p&gt;
&lt;hr /&gt;
&lt;div&gt;[[분류:imgpdnjs]]&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파일:이육사.jpg]]&lt;br /&gt;
&amp;lt;/div&amp;gt;&lt;br /&gt;
==기본 정보==&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margin:auto;&amp;quot;&lt;br /&gt;
|+ '''이육사'''&lt;br /&gt;
! 항목 !! 내용&lt;br /&gt;
|-&lt;br /&gt;
| 본명 || 이원록&lt;br /&gt;
|-&lt;br /&gt;
| 출생 || 1904년 5월 18일&lt;br /&gt;
|-&lt;br /&gt;
| 출생지 || 경상북도 예안군 의동면 원촌동 원촌마을&lt;br /&gt;
|-&lt;br /&gt;
| 사망 || 1944년 1월 16일&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이육사는 1904년 5월 18일, 지금의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인 옛 예안군 일대에서 태어났다. 퇴계 이황의 후손인 아버지 이가호와 어머니 허길 사이에서 여섯 형제 중 둘째였다. 훗날 그는 영천 화북면 오동리 출신인 안일양과 결혼하게 된다.&lt;br /&gt;
&lt;br /&gt;
어린 시절 그는 조부 이중직에게서 소학을 배우며 한학을 익혔다. 조부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진성이씨 문중에서 운영하던 보문의숙(훗날 도산공립보통학교)에서 공부했고, 이때 배운 한학의 영향은 그의 문학 세계에도 묻어난다. 졸업 후 가족이 대구로 이주했고, 그는 열아홉에 영천의 백학학원에서 교원으로 잠시 일했다. 1924년에는 일본 도쿄에서 예비학교 과정을 수학했으나 중도에 그만두고, 다음 해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 사회학을 공부했지만 역시 2학년 때 학업을 접었다.&lt;br /&gt;
&lt;br /&gt;
1927년 그는 [[장진홍_1895]]이 일으킨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과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대구형무소에서 약 1년 반을 지냈다. 이때의 수인번호 ‘264’를 따서 훗날 자신의 호를 ‘육사’라 짓는다.&lt;br /&gt;
&lt;br /&gt;
1932년 그는 만주 펑톈으로 건너가 [[윤세주_1901]]를 만나 의열단 입단 권유를 받았고, 난징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으로 들어가 폭탄 제조와 투척, 변장, 무기 운반, 피신 기술 등 다양한 실전 교육을 받았다. 사격 실력은 특히 뛰어났다고 전해진다.&lt;br /&gt;
&lt;br /&gt;
1933년 귀국 후에는 신문·잡지를 오가며 시와 논문, 시나리오 등 여러 글을 썼고, 루쉰의 소설 《고향》을 번역하기도 했다. 하지만 1934년 의열단 출신이라는 이유로 다시 검거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을 당했고, 몇 달 뒤 기소유예로 풀려났다.&lt;br /&gt;
&lt;br /&gt;
1943년 베이징으로 건너갔다가 어머니와 큰형의 소상을 위해 5월에 귀국했다. 그러 이 해 6월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었고, 결국 1944년 1월 16일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교도소에서 옥사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https://www.youtube.com/watch?v=gCcfvA4fGKY 광복 79주년 특별영상 : 행동하는 지성, 저항시인 이육사 이야기]&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937&amp;quot; height=&amp;quot;527&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gCcfvA4fGKY&amp;quot; title=&amp;quot;광복 79주년 특별영상 : 행동하는 지성, 저항시인 이육사 이야기&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이육사의 기자 생활]]==&lt;br /&gt;
많은 사람들이 이육사의 문학 작품만을 알고 기자 생활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위 페이지에서는 이육사의 기자 생활에 대해 더 자세히 서술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청포도'에 스민 가족에 대한 향수와 해방의 염원==&lt;br /&gt;
[[이육사의 '청포도']]&amp;lt;/div&amp;gt;는 이육사가 일제강점기에 경험한 상실과 분리를 바탕으로,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해방에 대한 염원을 동시에 그려낸 시이다. 시에서 드러난 익어가는 청포도의 모습과 돌아올 이를 기다리는 마음은 개인의 정서와 민족적인 바람이 자연스럽게 중첩되는 지점을 보여준다.&lt;br /&gt;
&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v2%3A2PACX-1vTBMVIXErpB6OYWbzC-nzv_0t_UNL2Q64IzD8TI-b1EywFJnOKdoMzdLiVC3NeAgyn4NLe-NEfPjK34&amp;amp;font=Default&amp;amp;lang=ko&amp;amp;initial_zoom=2&amp;amp;width=100%25&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이육사를 기억하는 장소==&lt;br /&gt;
이육사는 경상북도에서 태어났지만 전국적으로 이육사와 관련된 장소들이 많다. 아래 지도는 이육사와 관련된 모든 장소들을 정리한 지도이다. 대단한 시인 이육사를 기억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방문하기를 추천하한다.&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amp;quot;https://www.google.com/maps/d/embed?mid=1h1k2e9-GTfl5Bzcv0D2CRQG12cR998o&amp;amp;ehbc=2E312F&amp;quot; width=&amp;quot;640&amp;quot; height=&amp;quot;480&amp;quot;&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amp;lt;/div&amp;gt;&lt;br /&gt;
&lt;br /&gt;
:::::&amp;lt;p&amp;gt; '''1. 청포도 문학공원'''&lt;br /&gt;
&amp;lt;/p&amp;gt;&lt;br /&gt;
&amp;lt;p&amp;gt;&lt;br /&gt;
:::::이육사의 대표 시 「청포도」의 영감을 얻은 장소로 알려져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청림동 일대에 조성되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포항 청림동 일대(현재 해병사단 내 일월지 주변)에 동양 최대의 포도원이 있었는데, 이육사가 이곳에서 영일만을 바라보며 시를 구상했다는 문헌 기록을 바탕으로 한다. 공원에는 청포도 시비와 함께 문화축제가 열리며 시인의 문학 정신을 기리고 있다.&lt;br /&gt;
&amp;lt;/p&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p&amp;gt; '''2. 이육사문학관'''&lt;br /&gt;
&amp;lt;/p&amp;gt;&lt;br /&gt;
&amp;lt;p&amp;gt;&lt;br /&gt;
:::::이육사 시인의 고향인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에 2004년 탄신 100주년을 맞아 설립되었다. 그의 민족정신과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한 공간으로, 친필 원고, 시집, 독립운동 관련 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다. 문학관 주변에는 복원된 생가, 청포도 샘, 절정 시비 등이 함께 조성되어 있다.&lt;br /&gt;
&amp;lt;/p&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p&amp;gt; '''3. 이육사 생가'''&lt;br /&gt;
&amp;lt;/p&amp;gt;&lt;br /&gt;
&amp;lt;p&amp;gt;&lt;br /&gt;
:::::이육사가 태어난 집이다. 원래 안동댐 건설로 인해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1976년 안동시 태화동으로 옮겨졌다. 이후 육사 탄신 100주년(2004년)을 기념하여 이육사문학관 옆(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에 원래의 건축 양식을 살려 복원되었다. 조선 후기 전통적인 반가(班家)의 건축 양식을 띄고 있으며, 특히 사랑채와 안채의 크기와 구조가 거의 동일하게 대칭을 이루는 독특한 특징이 있다.&lt;br /&gt;
&amp;lt;/p&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p&amp;gt; '''4. 문화공간 이육사'''&lt;br /&gt;
&amp;lt;/p&amp;gt;&lt;br /&gt;
&amp;lt;p&amp;gt;&lt;br /&gt;
:::::이육사가 1939년 무렵 가족과 거주하며 「청포도」 등 주요 작품을 발표했던 서울특별시 성북구 종암동의 역사적 의의를 기념하여 2019년에 개관한 복합 문화 공간이다. 각 층의 명칭을 '청포도', '교목', '절정' 등 그의 대표 시 제목에서 따왔으며, 전시, 강좌, 문화 행사 등을 통해 시인의 삶과 문학을 시민들과 공유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p&amp;gt; '''5. 264작은문학관'''&lt;br /&gt;
&amp;lt;/p&amp;gt;&lt;br /&gt;
&amp;lt;p&amp;gt;&lt;br /&gt;
:::::이육사의 필명이 된 수인번호 '264'를 기려 대구광역시 중구 북성로에 조성된 작은 문학관이다. 이육사는 1927년 장진홍 의거로 인해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이곳에서 '264'라는 수감번호를 받았다. 일제강점기 적산가옥을 리모델링하여 1층은 카페와 기획전시실, 2층은 상설전시실로 운영되며, 이육사의 생애와 작품을 살펴볼 수 있다.&lt;/div&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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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이육사(李陸史)</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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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10T08:37:4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Imgpdnjs: &lt;/p&gt;
&lt;hr /&gt;
&lt;div&gt;[[분류:imgpdnjs]]&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파일:이육사.jpg]]&lt;br /&gt;
&amp;lt;/div&amp;gt;&lt;br /&gt;
==기본 정보==&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margin:auto;&amp;quot;&lt;br /&gt;
|+ '''이육사'''&lt;br /&gt;
! 항목 !! 내용&lt;br /&gt;
|-&lt;br /&gt;
| 본명 || 이원록&lt;br /&gt;
|-&lt;br /&gt;
| 출생 || 1904년 5월 18일&lt;br /&gt;
|-&lt;br /&gt;
| 출생지 || 경상북도 예안군 의동면 원촌동 원촌마을&lt;br /&gt;
|-&lt;br /&gt;
| 사망 || 1944년 1월 16일&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이육사는 1904년 5월 18일, 지금의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인 옛 예안군 일대에서 태어났다. 퇴계 이황의 후손인 아버지 이가호와 어머니 허길 사이에서 여섯 형제 중 둘째였다. 훗날 그는 영천 화북면 오동리 출신인 안일양과 결혼하게 된다.&lt;br /&gt;
&lt;br /&gt;
어린 시절 그는 조부 이중직에게서 소학을 배우며 한학을 익혔다. 조부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진성이씨 문중에서 운영하던 보문의숙(훗날 도산공립보통학교)에서 공부했고, 이때 배운 한학의 영향은 그의 문학 세계에도 묻어난다. 졸업 후 가족이 대구로 이주했고, 그는 열아홉에 영천의 백학학원에서 교원으로 잠시 일했다. 1924년에는 일본 도쿄에서 예비학교 과정을 수학했으나 중도에 그만두고, 다음 해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 사회학을 공부했지만 역시 2학년 때 학업을 접었다.&lt;br /&gt;
&lt;br /&gt;
1927년 그는 [[장진홍_1895]]이 일으킨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과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대구형무소에서 약 1년 반을 지냈다. 이때의 수인번호 ‘264’를 따서 훗날 자신의 호를 ‘육사’라 짓는다.&lt;br /&gt;
&lt;br /&gt;
1932년 그는 만주 펑톈으로 건너가 [[윤세주_1901]]를 만나 의열단 입단 권유를 받았고, 난징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으로 들어가 폭탄 제조와 투척, 변장, 무기 운반, 피신 기술 등 다양한 실전 교육을 받았다. 사격 실력은 특히 뛰어났다고 전해진다.&lt;br /&gt;
&lt;br /&gt;
1933년 귀국 후에는 신문·잡지를 오가며 시와 논문, 시나리오 등 여러 글을 썼고, 루쉰의 소설 《고향》을 번역하기도 했다. 하지만 1934년 의열단 출신이라는 이유로 다시 검거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을 당했고, 몇 달 뒤 기소유예로 풀려났다.&lt;br /&gt;
&lt;br /&gt;
1943년 베이징으로 건너갔다가 어머니와 큰형의 소상을 위해 5월에 귀국했다. 그러 이 해 6월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었고, 결국 1944년 1월 16일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교도소에서 옥사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https://www.youtube.com/watch?v=gCcfvA4fGKY 광복 79주년 특별영상 : 행동하는 지성, 저항시인 이육사 이야기]&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937&amp;quot; height=&amp;quot;527&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gCcfvA4fGKY&amp;quot; title=&amp;quot;광복 79주년 특별영상 : 행동하는 지성, 저항시인 이육사 이야기&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이육사의 기자 생활]]==&lt;br /&gt;
많은 사람들이 이육사의 문학 작품만을 알고 기자 생활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위 페이지에서는 이육사의 기자 생활에 대해 더 자세히 서술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청포도'에 스민 가족에 대한 향수와 해방의 염원==&lt;br /&gt;
[[이육사의 '청포도']]&amp;lt;/div&amp;gt;는 이육사가 일제강점기에 경험한 상실과 분리를 바탕으로,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해방에 대한 염원을 동시에 그려낸 시이다. 시에서 드러난 익어가는 청포도의 모습과 돌아올 이를 기다리는 마음은 개인의 정서와 민족적인 바람이 자연스럽게 중첩되는 지점을 보여준다.&lt;br /&gt;
&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v2%3A2PACX-1vTBMVIXErpB6OYWbzC-nzv_0t_UNL2Q64IzD8TI-b1EywFJnOKdoMzdLiVC3NeAgyn4NLe-NEfPjK34&amp;amp;font=Default&amp;amp;lang=ko&amp;amp;initial_zoom=2&amp;amp;width=100%25&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이육사를 기억하는 장소==&lt;br /&gt;
이육사는 경상북도에서 태어났지만 전국적으로 이육사와 관련된 장소들이 많다. 아래 지도는 이육사와 관련된 모든 장소들을 정리한 지도이다. 대단한 시인 이육사를 기억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방문하기를 추천하한다.&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amp;quot;https://www.google.com/maps/d/embed?mid=1h1k2e9-GTfl5Bzcv0D2CRQG12cR998o&amp;amp;ehbc=2E312F&amp;quot; width=&amp;quot;640&amp;quot; height=&amp;quot;480&amp;quot;&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amp;lt;/div&amp;gt;&lt;br /&gt;
&lt;br /&gt;
:::::&amp;lt;p&amp;gt; '''1. 청포도 문학공원'''&lt;br /&gt;
&amp;lt;/p&amp;gt;&lt;br /&gt;
&amp;lt;p&amp;gt;&lt;br /&gt;
:::::이육사의 대표 시 「청포도」의 영감을 얻은 장소로 알려져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청림동 일대에 조성되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포항 청림동 일대(현재 해병사단 내 일월지 주변)에 동양 최대의 포도원이 있었는데, 이육사가 이곳에서 영일만을 바라보며 시를 구상했다는 문헌 기록을 바탕으로 한다. 공원에는 청포도 시비와 함께 문화축제가 열리며 시인의 문학 정신을 기리고 있다.&lt;br /&gt;
&amp;lt;/p&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p&amp;gt; '''2. 이육사문학관'''&lt;br /&gt;
&amp;lt;/p&amp;gt;&lt;br /&gt;
&amp;lt;p&amp;gt;&lt;br /&gt;
:::::이육사 시인의 고향인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에 2004년 탄신 100주년을 맞아 설립되었다. 그의 민족정신과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한 공간으로, 친필 원고, 시집, 독립운동 관련 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다. 문학관 주변에는 복원된 생가, 청포도 샘, 절정 시비 등이 함께 조성되어 있다.&lt;br /&gt;
&amp;lt;/p&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p&amp;gt; '''3. 이육사 생가'''&lt;br /&gt;
&amp;lt;/p&amp;gt;&lt;br /&gt;
&amp;lt;p&amp;gt;&lt;br /&gt;
:::::이육사가 태어난 집이다. 원래 안동댐 건설로 인해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1976년 안동시 태화동으로 옮겨졌다. 이후 육사 탄신 100주년(2004년)을 기념하여 이육사문학관 옆(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에 원래의 건축 양식을 살려 복원되었다. 조선 후기 전통적인 반가(班家)의 건축 양식을 띄고 있으며, 특히 사랑채와 안채의 크기와 구조가 거의 동일하게 대칭을 이루는 독특한 특징이 있다.&lt;br /&gt;
&amp;lt;/p&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p&amp;gt; '''4. 문화공간 이육사'''&lt;br /&gt;
&amp;lt;/p&amp;gt;&lt;br /&gt;
&amp;lt;p&amp;gt;&lt;br /&gt;
:::::이육사가 1939년 무렵 가족과 거주하며 「청포도」 등 주요 작품을 발표했던 서울특별시 성북구 종암동의 역사적 의의를 기념하여 2019년에 개관한 복합 문화 공간이다. 각 층의 명칭을 '청포도', '교목', '절정' 등 그의 대표 시 제목에서 따왔으며, 전시, 강좌, 문화 행사 등을 통해 시인의 삶과 문학을 시민들과 공유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p&amp;gt; '''5. 264작은문학관'''&lt;br /&gt;
&amp;lt;/p&amp;gt;&lt;br /&gt;
&amp;lt;p&amp;gt;&lt;br /&gt;
:::::이육사의 필명이 된 수인번호 '264'를 기려 대구광역시 중구 북성로에 조성된 작은 문학관이다. 이육사는 1927년 장진홍 의거로 인해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이곳에서 '264'라는 수감번호를 받았다. 일제강점기 적산가옥을 리모델링하여 1층은 카페와 기획전시실, 2층은 상설전시실로 운영되며, 이육사의 생애와 작품을 살펴볼 수 있다.&lt;/div&gt;</summary>
		<author><name>Imgpdnjs</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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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이육사(李陸史)</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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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10T08:36:5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Imgpdnjs: &lt;/p&gt;
&lt;hr /&gt;
&lt;div&gt;[[분류:imgpdnjs]]&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파일:이육사.jpg]]&lt;br /&gt;
&amp;lt;/div&amp;gt;&lt;br /&gt;
==기본 정보==&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margin:auto;&amp;quot;&lt;br /&gt;
|+ '''이육사'''&lt;br /&gt;
! 항목 !! 내용&lt;br /&gt;
|-&lt;br /&gt;
| 본명 || 이원록&lt;br /&gt;
|-&lt;br /&gt;
| 출생 || 1904년 5월 18일&lt;br /&gt;
|-&lt;br /&gt;
| 출생지 || 경상북도 예안군 의동면 원촌동 원촌마을&lt;br /&gt;
|-&lt;br /&gt;
| 사망 || 1944년 1월 16일&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이육사는 1904년 5월 18일, 지금의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인 옛 예안군 일대에서 태어났다. 퇴계 이황의 후손인 아버지 이가호와 어머니 허길 사이에서 여섯 형제 중 둘째였다. 훗날 그는 영천 화북면 오동리 출신인 안일양과 결혼하게 된다.&lt;br /&gt;
&lt;br /&gt;
어린 시절 그는 조부 이중직에게서 소학을 배우며 한학을 익혔다. 조부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진성이씨 문중에서 운영하던 보문의숙(훗날 도산공립보통학교)에서 공부했고, 이때 배운 한학의 영향은 그의 문학 세계에도 묻어난다. 졸업 후 가족이 대구로 이주했고, 그는 열아홉에 영천의 백학학원에서 교원으로 잠시 일했다. 1924년에는 일본 도쿄에서 예비학교 과정을 수학했으나 중도에 그만두고, 다음 해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 사회학을 공부했지만 역시 2학년 때 학업을 접었다.&lt;br /&gt;
&lt;br /&gt;
1927년 그는 [[장진홍_1895]]이 일으킨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과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대구형무소에서 약 1년 반을 지냈다. 이때의 수인번호 ‘264’를 따서 훗날 자신의 호를 ‘육사’라 짓는다.&lt;br /&gt;
&lt;br /&gt;
1932년 그는 만주 펑톈으로 건너가 [[윤세주_1901]]를 만나 의열단 입단 권유를 받았고, 난징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으로 들어가 폭탄 제조와 투척, 변장, 무기 운반, 피신 기술 등 다양한 실전 교육을 받았다. 사격 실력은 특히 뛰어났다고 전해진다.&lt;br /&gt;
&lt;br /&gt;
1933년 귀국 후에는 신문·잡지를 오가며 시와 논문, 시나리오 등 여러 글을 썼고, 루쉰의 소설 《고향》을 번역하기도 했다. 하지만 1934년 의열단 출신이라는 이유로 다시 검거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을 당했고, 몇 달 뒤 기소유예로 풀려났다.&lt;br /&gt;
&lt;br /&gt;
1943년 베이징으로 건너갔다가 어머니와 큰형의 소상을 위해 5월에 귀국했다. 그러 이 해 6월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었고, 결국 1944년 1월 16일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교도소에서 옥사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https://www.youtube.com/watch?v=gCcfvA4fGKY 광복 79주년 특별영상 : 행동하는 지성, 저항시인 이육사 이야기]&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937&amp;quot; height=&amp;quot;527&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gCcfvA4fGKY&amp;quot; title=&amp;quot;광복 79주년 특별영상 : 행동하는 지성, 저항시인 이육사 이야기&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이육사의 기자 생활]]==&lt;br /&gt;
많은 사람들이 이육사의 문학 작품만을 알고 기자 생활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위 페이지에서는 이육사의 기자 생활에 대해 더 자세히 서술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청포도'에 스민 가족에 대한 향수와 해방의 염원==&lt;br /&gt;
[[이육사의 '청포도']]&amp;lt;/div&amp;gt;는 이육사가 일제강점기에 경험한 상실과 분리를 바탕으로,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해방에 대한 염원을 동시에 그려낸 시이다. 시에서 드러난 익어가는 청포도의 모습과 돌아올 이를 기다리는 마음은 개인의 정서와 민족적인 바람이 자연스럽게 중첩되는 지점을 보여준다.&lt;br /&gt;
&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v2%3A2PACX-1vTBMVIXErpB6OYWbzC-nzv_0t_UNL2Q64IzD8TI-b1EywFJnOKdoMzdLiVC3NeAgyn4NLe-NEfPjK34&amp;amp;font=Default&amp;amp;lang=ko&amp;amp;initial_zoom=2&amp;amp;width=100%25&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이육사를 기억하는 장소==&lt;br /&gt;
이육사는 경상북도에서 태어났지만 전국적으로 이육사와 관련된 장소들이 많다. 아래 지도는 이육사와 관련된 모든 장소들을 정리한 지도이다. 대단한 시인 이육사를 기억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방문하기를 추천하한다.&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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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div&amp;gt;&lt;br /&gt;
&lt;br /&gt;
:::::&amp;lt;p&amp;gt; '''1. 청포도 문학공원'''&lt;br /&gt;
&amp;lt;/p&amp;gt;&lt;br /&gt;
&amp;lt;p&amp;gt;&lt;br /&gt;
:::::이육사의 대표 시 「청포도」의 영감을 얻은 장소로 알려져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청림동 일대에 조성되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포항 청림동 일대(현재 해병사단 내 일월지 주변)에 동양 최대의 포도원이 있었는데, 이육사가 이곳에서 영일만을 바라보며 시를 구상했다는 문헌 기록을 바탕으로 한다. 공원에는 청포도 시비와 함께 문화축제가 열리며 시인의 문학 정신을 기리고 있다.&lt;br /&gt;
&amp;lt;/p&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p&amp;gt; '''2. 이육사문학관'''&lt;br /&gt;
&amp;lt;/p&amp;gt;&lt;br /&gt;
&amp;lt;p&amp;gt;&lt;br /&gt;
:::::이육사 시인의 고향인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에 2004년 탄신 100주년을 맞아 설립되었다. 그의 민족정신과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한 공간으로, 친필 원고, 시집, 독립운동 관련 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다. 문학관 주변에는 복원된 생가, 청포도 샘, 절정 시비 등이 함께 조성되어 있다.&lt;br /&gt;
&amp;lt;/p&amp;gt;&lt;br /&gt;
&lt;br /&gt;
:::::&amp;lt;p&amp;gt; '''3. 이육사 생가'''&lt;br /&gt;
&amp;lt;/p&amp;gt;&lt;br /&gt;
&amp;lt;p&amp;gt;&lt;br /&gt;
:::::이육사가 태어난 집이다. 원래 안동댐 건설로 인해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1976년 안동시 태화동으로 옮겨졌다. 이후 육사 탄신 100주년(2004년)을 기념하여 이육사문학관 옆(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에 원래의 건축 양식을 살려 복원되었다. 조선 후기 전통적인 반가(班家)의 건축 양식을 띄고 있으며, 특히 사랑채와 안채의 크기와 구조가 거의 동일하게 대칭을 이루는 독특한 특징이 있다.&lt;br /&gt;
&amp;lt;/p&amp;gt;&lt;br /&gt;
&lt;br /&gt;
:::::&amp;lt;p&amp;gt; '''4. 문화공간 이육사'''&lt;br /&gt;
&amp;lt;/p&amp;gt;&lt;br /&gt;
&amp;lt;p&amp;gt;&lt;br /&gt;
 :::::이육사가 1939년 무렵 가족과 거주하며 「청포도」 등 주요 작품을 발표했던 서울특별시 성북구 종암동의 역사적 의의를 기념하여 2019년에 개관한 복합 문화 공간이다. 각 층의 명칭을 '청포도', '교목', '절정' 등 그의 대표 시 제목에서 따왔으며, 전시, 강좌, 문화 행사 등을 통해 시인의 삶과 문학을 시민들과 공유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p&amp;gt; '''264작은문학관'''&lt;br /&gt;
&amp;lt;/p&amp;gt;&lt;br /&gt;
&amp;lt;p&amp;gt;&lt;br /&gt;
 :::::이육사의 필명이 된 수인번호 '264'를 기려 대구광역시 중구 북성로에 조성된 작은 문학관이다. 이육사는 1927년 장진홍 의거로 인해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이곳에서 '264'라는 수감번호를 받았다. 일제강점기 적산가옥을 리모델링하여 1층은 카페와 기획전시실, 2층은 상설전시실로 운영되며, 이육사의 생애와 작품을 살펴볼 수 있다.&lt;/div&gt;</summary>
		<author><name>Imgpdnjs</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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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A0%80%EB%85%81%EC%97%90&amp;diff=65840</id>
		<title>저녁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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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10T08:34:2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Imgpdnjs: &lt;/p&gt;
&lt;hr /&gt;
&lt;div&gt;[[분류:pjh262]] &lt;br /&gt;
[[파일:저녁에.jpg|600픽셀|섬네일|center|설명]]&lt;br /&gt;
=='''개요'''==&lt;br /&gt;
 「저녁에」는 한국 현대 서정시를 대표하는 시인 김광섭이 1960년대 후반에 발표한 후기 작품으로, 그의 시 세계가 도달한 달관과 명상성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시로 평가받는다. 이 작품은 1965년 뇌졸중 발병 이후 이어진 투병과 요양의 시간을 거쳐 탄생한 시로, 이전 시기에 보였던 사회적 발언이나 현실 인식 중심의 태도에서 벗어나 존재 그 자체에 대한 근원적 성찰로 나아간 김광섭 후기 시풍의 전형을 보여준다. 「저녁에」는 극도로 절제된 언어, 짧은 행과 단순한 어휘를 통해 삶과 죽음, 인연과 소멸, 기억과 재회의 가능성이라는 철학적 주제를 깊이 있게 탐구한다. 특히 일상적인 사물과 자연 이미지(별, 밤, 어둠)를 통해 존재의 유한성과 인간 관계의 소중함을 사유하게 만드는 점에서 한국 현대 서정시의 정수로 평가된다.&lt;br /&gt;
&lt;br /&gt;
=='''시 전문'''==&lt;br /&gt;
&amp;lt;/br&amp;gt;&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margin:auto;&amp;quot;&lt;br /&gt;
|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저렇게 많은 별중에&amp;lt;/div&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amp;lt;/div&amp;g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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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br&amp;g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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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amp;lt;/div&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이렇게 정다운&amp;lt;/div&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너 하나 나하나는&amp;lt;/div&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어디서 무엇이되어&amp;lt;/div&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다시 만나랴&amp;lt;/div&amp;gt;&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작품 배경'''==&lt;br /&gt;
 김광섭의 「저녁에」(1969)는 시인의 후기 삶과 밀접하게 연결된 작품으로, 개인적 고통과 내면적 성찰이 집약된 시로 이해된다.시인은 1965년 뇌졸중 발병 이후 언어장애와 신체 마비를 겪으며 이전과 같은 사회 활동과 문단 활동이 어려워졌다. 이로 인해 그는 외부 세계로부터 물리적·정서적으로 멀어지는 경험을 했고, 그 과정에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고독과 침묵의 시간을 통과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투병과 단절의 시간은 단순한 상실의 시간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되묻는 성찰의 시간으로 전환되었다. 김광섭은 병상에서 삶과 죽음, 존재의 지속성, 인간 관계의 본질, 기억의 의미를 사유하게 되었고, 그 결과 후기 시에서는 감정의 과잉이나 관념적 설명을 최소화한 채 극도로 담백한 언어로 심오한 사유를 담아내는 시 세계를 확립하게 된다. 「저녁에」는 이러한 후기 시 정신의 결정체로, 고통을 직접적으로 서술하지 않으면서도 삶의 황혼기에 도달한 인간이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을 고요하게 형상화한 작품이다.&lt;br /&gt;
&lt;br /&gt;
=='''생애의 투영'''==&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4169E1; font-weight:bold; font-size:20px;&amp;quot;&amp;gt;'''1. 별'''&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이 시에서 ‘별’은 단순한 자연 풍경이 아니라, 시인이 삶의 말기에 마주한 유일한 의미의 대상을 상징한다. 병과 고독 속에서 인간 관계와 사회적 연결이 급격히 단절된 상황에서, 시인은 수많은 존재들 가운데 오직 하나의 대상만을 응시한다. 이 별은 잃어버릴 수 없는 기억이거나, 삶에서 끝까지 놓지 않으려는 인연, 혹은 인간으로서 존재를 지탱해 주는 마지막 의미일 수 있다. 또한 별은 우주적 거리감을 지닌 초월적 존재이면서도 화자를 ‘내려다보는’ 친밀한 대상으로 설정되어, 시인이 느낀 고독과 동시에 연대를 갈망하는 마음을 함께 드러낸다. 이는 투병 이후 더욱 절박해진 존재 의미에 대한 집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4169E1; font-weight:bold; font-size:20px;&amp;quot;&amp;gt;'''2. 나(화자)'''&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화자 ‘나’는 단순한 시적 자아를 넘어, 신체적·정신적 한계를 자각한 후기 김광섭 자신의 모습을 강하게 반영한다. 밤이 깊어질수록 화자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는 표현은 육체의 쇠약, 언어 능력의 상실, 그리고 점차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인식을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나 이 소멸은 공포나 절망으로 표현되지 않고, 고요하고 담담한 시선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는 시인이 자신의 삶을 부정하거나 거부하기보다, 생의 유한성을 인식한 상태에서 그것을 수용하는 태도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화자는 결국 사라질 존재이지만, 그 사라짐마저도 세계의 질서로 받아들이는 달관의 태도를 포함한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4169E1; font-weight:bold; font-size:20px;&amp;quot;&amp;gt;'''3.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이 구절은 시 전체의 정서를 집약하는 결말부로, 단순한 이별의 탄식이 아니라 소멸 이후에도 관계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인간적 소망을 담고 있다. 시인은 만남이 다시 가능한지 확신하지 않으며, 의문형으로 질문을 던질 뿐이다. 이러한 표현은 오히려 재회의 불확실성을 전제하기 때문에 더욱 진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질문 속에는 기억, 연대, 관계의 의미는 소멸 이후에도 이어질 수 있다는 믿음이 남아 있다. 이는 투병 속에서 인간 관계의 소중함을 절실히 인식한 김광섭의 세계관을 보여주며, 죽음 이후의 재회라기보다 기억 속에서, 혹은 존재의 다른 형태로 이어지는 인간적 연결에 대한 희망으로 해석된다.&lt;br /&gt;
&lt;br /&gt;
=='''핵심 상징어'''==&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87CEEB; font-weight:bold; font-size:20px;&amp;quot;&amp;gt;'''1. 별'''&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이 시에서 ‘별’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 이미지로, 수많은 존재들 가운데 화자와 마주한 유일한 의미의 대상을 상징한다. 광대한 우주 속의 별은 인간에게 근본적으로 도달할 수 없는 초월적 존재이지만, 동시에 화자를 ‘내려다보는’ 친밀한 대상으로 형상화된다. 이를 통해 별은 거리감과 친밀성을 동시에 지닌 이중적 상징이 되며, 병과 고독 속에서 시인이 마지막으로 응시하는 인연, 혹은 삶에서 끝까지 붙들고 싶은 의미를 나타낸다. 별을 바라보는 행위는 존재의 고독을 인정하면서도 타자와의 연결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시인의 내면 태도를 드러낸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87CEEB; font-weight:bold; font-size:20px;&amp;quot;&amp;gt;'''2. 화자(나)'''&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화자 ‘나’는 이 시의 사유를 이끄는 시적 주체로, 개인적 고독과 존재의 유한성을 직접적으로 체현한다. 밤이 깊어질수록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화자의 모습은 육체적 쇠약과 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인간의 운명을 상징하며, 이는 김광섭 자신의 투병 이후 삶의 상태와 긴밀하게 대응된다. 그러나 화자는 자신의 소멸을 비극적으로 호소하지 않고, 조용하고 절제된 시선으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태도는 삶의 끝자락에서 도달한 체념이 아니라, 세계의 질서를 인식한 뒤 얻은 성찰과 달관의 경지를 보여준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87CEEB; font-weight:bold; font-size:20px;&amp;quot;&amp;gt;'''3. 밤,저녁,황혼'''&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밤과 저녁은 시의 시간적 배경이자 정서적 공간으로 기능하며, 하루의 끝이라는 물리적 의미를 넘어서 삶의 황혼기를 상징한다. 저녁은 활동과 생동의 시간이 끝난 뒤 찾아오는 사색의 시간으로, 시인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존재의 의미를 조용히 성찰하는 시점이다. 이 시간대는 죽음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종결과 순환 가능성을 동시에 암시하며 시 전체에 고요하면서도 쓸쓸한 명상적 분위기를 형성한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87CEEB; font-weight:bold; font-size:20px;&amp;quot;&amp;gt;'''4. 밝음과 어둠의 대비'''&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시 속에서 ‘밝음’과 ‘어둠’은 뚜렷한 대비 구조를 이루며 존재 인식의 핵심을 드러낸다. 별이 ‘밝음 속으로’ 사라지고, 화자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는 표현은 단순한 시각적 변화가 아니라, 의미와 기억, 존재가 소멸해 가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밝음은 잠시 붙잡을 수 있었던 의미나 기억, 희망을 나타내며, 어둠은 인간 존재가 결국 귀속되는 소멸과 불확실성을 의미한다. 이 대비를 통해 시인은 인간 인연의 순간성과 존재의 가냘픔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87CEEB; font-weight:bold; font-size:20px;&amp;quot;&amp;gt;'''5. 사라짐'''&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별과 화자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사라지는 모습은 존재의 유한성과 이별의 필연성을 상징한다. 이는 단절이나 절망의 선언이라기보다는, 모든 존재가 각자의 방식으로 세계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인식에 가깝다. 시인은 ‘사라짐’을 극적인 상실로 과장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묘사함으로써 죽음과 소멸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여준다. 이러한 인식은 후기 김광섭 시 세계의 특징인 담담한 초월성과도 맞닿아 있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87CEEB; font-weight:bold; font-size:20px;&amp;quot;&amp;gt;'''6. 너 하나, 나 하나'''&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라는 구절은 이 시의 정서적 중심으로, 수많은 관계 속에서 서로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 두 존재를 상징한다. 이는 혈연이나 사회적 관계를 넘어서, 인간이 인간에게 부여하는 본질적인 정서적 유대의 표상이다. 동시에 이 표현에는 관계가 지닌 소중함과 더불어, 언젠가는 반드시 헤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도 함께 담겨 있다. 시인은 인연의 유한성을 알면서도, 그 정다움을 끝까지 긍정한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87CEEB; font-weight:bold; font-size:20px;&amp;quot;&amp;gt;'''7. 다시 만나랴'''&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결말부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희망과 회의가 공존하는 질문이다. 시인은 재회를 확신하지 않으며, 의문형으로 남김으로써 만남의 불확실성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이 질문은 곧 인간 관계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포기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억 속에서, 혹은 존재의 다른 형태로 다시 이어질 수 있기를 바라는 조용한 염원을 담고 있다. 이는 투병과 고립의 시간 속에서도 인간적 연대와 인연의 의미를 끝까지 놓지 않았던 김광섭의 세계관을 반영한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87CEEB; font-weight:bold; font-size:20px;&amp;quot;&amp;gt;'''8. 기억과 회상'''&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이 시 전반에 흐르는 기억과 회상의 정서는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시 전체를 지탱하는 암시적 동기로 작용한다. 별을 바라보고, 인연을 되새기며, 다시 만남을 묻는 행위는 모두 과거의 순간을 현재로 소환하려는 시적 태도에서 비롯된다. 기억은 소멸과 단절 속에서도 존재를 이어 주는 매개로 기능하며, 시인은 이를 통해 삶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방식에 대해 조용히 사유한다.&lt;br /&gt;
&lt;br /&gt;
=='''주제 의식'''==&lt;br /&gt;
 「저녁에」는 개별적 인연과 존재의 유한성을 인식하면서도, 그 속에서 인간적 관계의 의미를 발견하려는 시이다. 작품은 수많은 존재 속에서 마주한 ‘하나’의 가치, 이별과 소멸의 필연성, 그리고 재회에 대한 조용한 희망을 동시에 담고 있다. 이를 통해 시인은 삶이 결국 사라짐으로 귀결되더라도, 그 과정에서 형성되는 관계와 기억은 의미를 지닌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이러한 주제 의식은 개인적 체험에서 출발하지만, 독자 개개인의 삶과 관계 경험으로 확장되어 보편적 공감을 형성한다.&lt;br /&gt;
&lt;br /&gt;
=='''문학사적 의의'''==&lt;br /&gt;
 「저녁에」는 김광섭 후기 시 세계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되며, 전후 한국 시가 개인적 성찰과 존재 인식의 방향으로 이동하는 흐름을 잘 보여준다. 이 작품은 사회 현실을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지만, 개인의 내면을 깊이 탐구함으로써 인간 존재의 보편적 문제를 제기한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이는 서정시가 단순한 감정 표현을 넘어 철학적 사유의 장으로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lt;/div&gt;</summary>
		<author><name>Imgpdnjs</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A0%80%EB%85%81%EC%97%90&amp;diff=65838</id>
		<title>저녁에</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A0%80%EB%85%81%EC%97%90&amp;diff=65838"/>
		<updated>2025-12-10T08:34:1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Imgpdnjs: &lt;/p&gt;
&lt;hr /&gt;
&lt;div&gt;[[분류:pjh262]] &lt;br /&gt;
[[파일:저녁에.jpg|500픽셀|섬네일|center|설명]]&lt;br /&gt;
=='''개요'''==&lt;br /&gt;
 「저녁에」는 한국 현대 서정시를 대표하는 시인 김광섭이 1960년대 후반에 발표한 후기 작품으로, 그의 시 세계가 도달한 달관과 명상성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시로 평가받는다. 이 작품은 1965년 뇌졸중 발병 이후 이어진 투병과 요양의 시간을 거쳐 탄생한 시로, 이전 시기에 보였던 사회적 발언이나 현실 인식 중심의 태도에서 벗어나 존재 그 자체에 대한 근원적 성찰로 나아간 김광섭 후기 시풍의 전형을 보여준다. 「저녁에」는 극도로 절제된 언어, 짧은 행과 단순한 어휘를 통해 삶과 죽음, 인연과 소멸, 기억과 재회의 가능성이라는 철학적 주제를 깊이 있게 탐구한다. 특히 일상적인 사물과 자연 이미지(별, 밤, 어둠)를 통해 존재의 유한성과 인간 관계의 소중함을 사유하게 만드는 점에서 한국 현대 서정시의 정수로 평가된다.&lt;br /&gt;
&lt;br /&gt;
=='''시 전문'''==&lt;br /&gt;
&amp;lt;/br&amp;gt;&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margin:auto;&amp;quot;&lt;br /&gt;
|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저렇게 많은 별중에&amp;lt;/div&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amp;lt;/div&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amp;lt;/div&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그 별 하나를 쳐다 본다&amp;lt;/div&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밤이 깊을수록&amp;lt;/div&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별은 밝음 속으로 사라지고&amp;lt;/div&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amp;lt;/div&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이렇게 정다운&amp;lt;/div&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너 하나 나하나는&amp;lt;/div&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어디서 무엇이되어&amp;lt;/div&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다시 만나랴&amp;lt;/div&amp;gt;&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작품 배경'''==&lt;br /&gt;
 김광섭의 「저녁에」(1969)는 시인의 후기 삶과 밀접하게 연결된 작품으로, 개인적 고통과 내면적 성찰이 집약된 시로 이해된다.시인은 1965년 뇌졸중 발병 이후 언어장애와 신체 마비를 겪으며 이전과 같은 사회 활동과 문단 활동이 어려워졌다. 이로 인해 그는 외부 세계로부터 물리적·정서적으로 멀어지는 경험을 했고, 그 과정에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고독과 침묵의 시간을 통과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투병과 단절의 시간은 단순한 상실의 시간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되묻는 성찰의 시간으로 전환되었다. 김광섭은 병상에서 삶과 죽음, 존재의 지속성, 인간 관계의 본질, 기억의 의미를 사유하게 되었고, 그 결과 후기 시에서는 감정의 과잉이나 관념적 설명을 최소화한 채 극도로 담백한 언어로 심오한 사유를 담아내는 시 세계를 확립하게 된다. 「저녁에」는 이러한 후기 시 정신의 결정체로, 고통을 직접적으로 서술하지 않으면서도 삶의 황혼기에 도달한 인간이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을 고요하게 형상화한 작품이다.&lt;br /&gt;
&lt;br /&gt;
=='''생애의 투영'''==&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4169E1; font-weight:bold; font-size:20px;&amp;quot;&amp;gt;'''1. 별'''&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이 시에서 ‘별’은 단순한 자연 풍경이 아니라, 시인이 삶의 말기에 마주한 유일한 의미의 대상을 상징한다. 병과 고독 속에서 인간 관계와 사회적 연결이 급격히 단절된 상황에서, 시인은 수많은 존재들 가운데 오직 하나의 대상만을 응시한다. 이 별은 잃어버릴 수 없는 기억이거나, 삶에서 끝까지 놓지 않으려는 인연, 혹은 인간으로서 존재를 지탱해 주는 마지막 의미일 수 있다. 또한 별은 우주적 거리감을 지닌 초월적 존재이면서도 화자를 ‘내려다보는’ 친밀한 대상으로 설정되어, 시인이 느낀 고독과 동시에 연대를 갈망하는 마음을 함께 드러낸다. 이는 투병 이후 더욱 절박해진 존재 의미에 대한 집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4169E1; font-weight:bold; font-size:20px;&amp;quot;&amp;gt;'''2. 나(화자)'''&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화자 ‘나’는 단순한 시적 자아를 넘어, 신체적·정신적 한계를 자각한 후기 김광섭 자신의 모습을 강하게 반영한다. 밤이 깊어질수록 화자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는 표현은 육체의 쇠약, 언어 능력의 상실, 그리고 점차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인식을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나 이 소멸은 공포나 절망으로 표현되지 않고, 고요하고 담담한 시선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는 시인이 자신의 삶을 부정하거나 거부하기보다, 생의 유한성을 인식한 상태에서 그것을 수용하는 태도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화자는 결국 사라질 존재이지만, 그 사라짐마저도 세계의 질서로 받아들이는 달관의 태도를 포함한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4169E1; font-weight:bold; font-size:20px;&amp;quot;&amp;gt;'''3.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이 구절은 시 전체의 정서를 집약하는 결말부로, 단순한 이별의 탄식이 아니라 소멸 이후에도 관계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인간적 소망을 담고 있다. 시인은 만남이 다시 가능한지 확신하지 않으며, 의문형으로 질문을 던질 뿐이다. 이러한 표현은 오히려 재회의 불확실성을 전제하기 때문에 더욱 진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질문 속에는 기억, 연대, 관계의 의미는 소멸 이후에도 이어질 수 있다는 믿음이 남아 있다. 이는 투병 속에서 인간 관계의 소중함을 절실히 인식한 김광섭의 세계관을 보여주며, 죽음 이후의 재회라기보다 기억 속에서, 혹은 존재의 다른 형태로 이어지는 인간적 연결에 대한 희망으로 해석된다.&lt;br /&gt;
&lt;br /&gt;
=='''핵심 상징어'''==&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87CEEB; font-weight:bold; font-size:20px;&amp;quot;&amp;gt;'''1. 별'''&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이 시에서 ‘별’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 이미지로, 수많은 존재들 가운데 화자와 마주한 유일한 의미의 대상을 상징한다. 광대한 우주 속의 별은 인간에게 근본적으로 도달할 수 없는 초월적 존재이지만, 동시에 화자를 ‘내려다보는’ 친밀한 대상으로 형상화된다. 이를 통해 별은 거리감과 친밀성을 동시에 지닌 이중적 상징이 되며, 병과 고독 속에서 시인이 마지막으로 응시하는 인연, 혹은 삶에서 끝까지 붙들고 싶은 의미를 나타낸다. 별을 바라보는 행위는 존재의 고독을 인정하면서도 타자와의 연결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시인의 내면 태도를 드러낸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87CEEB; font-weight:bold; font-size:20px;&amp;quot;&amp;gt;'''2. 화자(나)'''&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화자 ‘나’는 이 시의 사유를 이끄는 시적 주체로, 개인적 고독과 존재의 유한성을 직접적으로 체현한다. 밤이 깊어질수록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화자의 모습은 육체적 쇠약과 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인간의 운명을 상징하며, 이는 김광섭 자신의 투병 이후 삶의 상태와 긴밀하게 대응된다. 그러나 화자는 자신의 소멸을 비극적으로 호소하지 않고, 조용하고 절제된 시선으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태도는 삶의 끝자락에서 도달한 체념이 아니라, 세계의 질서를 인식한 뒤 얻은 성찰과 달관의 경지를 보여준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87CEEB; font-weight:bold; font-size:20px;&amp;quot;&amp;gt;'''3. 밤,저녁,황혼'''&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밤과 저녁은 시의 시간적 배경이자 정서적 공간으로 기능하며, 하루의 끝이라는 물리적 의미를 넘어서 삶의 황혼기를 상징한다. 저녁은 활동과 생동의 시간이 끝난 뒤 찾아오는 사색의 시간으로, 시인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존재의 의미를 조용히 성찰하는 시점이다. 이 시간대는 죽음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종결과 순환 가능성을 동시에 암시하며 시 전체에 고요하면서도 쓸쓸한 명상적 분위기를 형성한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87CEEB; font-weight:bold; font-size:20px;&amp;quot;&amp;gt;'''4. 밝음과 어둠의 대비'''&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시 속에서 ‘밝음’과 ‘어둠’은 뚜렷한 대비 구조를 이루며 존재 인식의 핵심을 드러낸다. 별이 ‘밝음 속으로’ 사라지고, 화자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는 표현은 단순한 시각적 변화가 아니라, 의미와 기억, 존재가 소멸해 가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밝음은 잠시 붙잡을 수 있었던 의미나 기억, 희망을 나타내며, 어둠은 인간 존재가 결국 귀속되는 소멸과 불확실성을 의미한다. 이 대비를 통해 시인은 인간 인연의 순간성과 존재의 가냘픔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87CEEB; font-weight:bold; font-size:20px;&amp;quot;&amp;gt;'''5. 사라짐'''&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별과 화자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사라지는 모습은 존재의 유한성과 이별의 필연성을 상징한다. 이는 단절이나 절망의 선언이라기보다는, 모든 존재가 각자의 방식으로 세계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인식에 가깝다. 시인은 ‘사라짐’을 극적인 상실로 과장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묘사함으로써 죽음과 소멸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여준다. 이러한 인식은 후기 김광섭 시 세계의 특징인 담담한 초월성과도 맞닿아 있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87CEEB; font-weight:bold; font-size:20px;&amp;quot;&amp;gt;'''6. 너 하나, 나 하나'''&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라는 구절은 이 시의 정서적 중심으로, 수많은 관계 속에서 서로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 두 존재를 상징한다. 이는 혈연이나 사회적 관계를 넘어서, 인간이 인간에게 부여하는 본질적인 정서적 유대의 표상이다. 동시에 이 표현에는 관계가 지닌 소중함과 더불어, 언젠가는 반드시 헤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도 함께 담겨 있다. 시인은 인연의 유한성을 알면서도, 그 정다움을 끝까지 긍정한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87CEEB; font-weight:bold; font-size:20px;&amp;quot;&amp;gt;'''7. 다시 만나랴'''&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결말부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희망과 회의가 공존하는 질문이다. 시인은 재회를 확신하지 않으며, 의문형으로 남김으로써 만남의 불확실성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이 질문은 곧 인간 관계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포기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억 속에서, 혹은 존재의 다른 형태로 다시 이어질 수 있기를 바라는 조용한 염원을 담고 있다. 이는 투병과 고립의 시간 속에서도 인간적 연대와 인연의 의미를 끝까지 놓지 않았던 김광섭의 세계관을 반영한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87CEEB; font-weight:bold; font-size:20px;&amp;quot;&amp;gt;'''8. 기억과 회상'''&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이 시 전반에 흐르는 기억과 회상의 정서는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시 전체를 지탱하는 암시적 동기로 작용한다. 별을 바라보고, 인연을 되새기며, 다시 만남을 묻는 행위는 모두 과거의 순간을 현재로 소환하려는 시적 태도에서 비롯된다. 기억은 소멸과 단절 속에서도 존재를 이어 주는 매개로 기능하며, 시인은 이를 통해 삶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방식에 대해 조용히 사유한다.&lt;br /&gt;
&lt;br /&gt;
=='''주제 의식'''==&lt;br /&gt;
 「저녁에」는 개별적 인연과 존재의 유한성을 인식하면서도, 그 속에서 인간적 관계의 의미를 발견하려는 시이다. 작품은 수많은 존재 속에서 마주한 ‘하나’의 가치, 이별과 소멸의 필연성, 그리고 재회에 대한 조용한 희망을 동시에 담고 있다. 이를 통해 시인은 삶이 결국 사라짐으로 귀결되더라도, 그 과정에서 형성되는 관계와 기억은 의미를 지닌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이러한 주제 의식은 개인적 체험에서 출발하지만, 독자 개개인의 삶과 관계 경험으로 확장되어 보편적 공감을 형성한다.&lt;br /&gt;
&lt;br /&gt;
=='''문학사적 의의'''==&lt;br /&gt;
 「저녁에」는 김광섭 후기 시 세계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되며, 전후 한국 시가 개인적 성찰과 존재 인식의 방향으로 이동하는 흐름을 잘 보여준다. 이 작품은 사회 현실을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지만, 개인의 내면을 깊이 탐구함으로써 인간 존재의 보편적 문제를 제기한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이는 서정시가 단순한 감정 표현을 넘어 철학적 사유의 장으로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lt;/div&gt;</summary>
		<author><name>Imgpdnjs</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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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A0%80%EB%85%81%EC%97%90&amp;diff=65836</id>
		<title>저녁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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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10T08:34:0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Imgpdnjs: &lt;/p&gt;
&lt;hr /&gt;
&lt;div&gt;[[분류:pjh262]] &lt;br /&gt;
[[파일:저녁에.jpg|300픽셀|섬네일|center|설명]]&lt;br /&gt;
=='''개요'''==&lt;br /&gt;
 「저녁에」는 한국 현대 서정시를 대표하는 시인 김광섭이 1960년대 후반에 발표한 후기 작품으로, 그의 시 세계가 도달한 달관과 명상성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시로 평가받는다. 이 작품은 1965년 뇌졸중 발병 이후 이어진 투병과 요양의 시간을 거쳐 탄생한 시로, 이전 시기에 보였던 사회적 발언이나 현실 인식 중심의 태도에서 벗어나 존재 그 자체에 대한 근원적 성찰로 나아간 김광섭 후기 시풍의 전형을 보여준다. 「저녁에」는 극도로 절제된 언어, 짧은 행과 단순한 어휘를 통해 삶과 죽음, 인연과 소멸, 기억과 재회의 가능성이라는 철학적 주제를 깊이 있게 탐구한다. 특히 일상적인 사물과 자연 이미지(별, 밤, 어둠)를 통해 존재의 유한성과 인간 관계의 소중함을 사유하게 만드는 점에서 한국 현대 서정시의 정수로 평가된다.&lt;br /&gt;
&lt;br /&gt;
=='''시 전문'''==&lt;br /&gt;
&amp;lt;/br&amp;gt;&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margin:auto;&amp;quot;&lt;br /&gt;
|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저렇게 많은 별중에&amp;lt;/div&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amp;lt;/div&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amp;lt;/div&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그 별 하나를 쳐다 본다&amp;lt;/div&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밤이 깊을수록&amp;lt;/div&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별은 밝음 속으로 사라지고&amp;lt;/div&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amp;lt;/div&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이렇게 정다운&amp;lt;/div&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너 하나 나하나는&amp;lt;/div&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어디서 무엇이되어&amp;lt;/div&amp;g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다시 만나랴&amp;lt;/div&amp;gt;&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작품 배경'''==&lt;br /&gt;
 김광섭의 「저녁에」(1969)는 시인의 후기 삶과 밀접하게 연결된 작품으로, 개인적 고통과 내면적 성찰이 집약된 시로 이해된다.시인은 1965년 뇌졸중 발병 이후 언어장애와 신체 마비를 겪으며 이전과 같은 사회 활동과 문단 활동이 어려워졌다. 이로 인해 그는 외부 세계로부터 물리적·정서적으로 멀어지는 경험을 했고, 그 과정에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고독과 침묵의 시간을 통과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투병과 단절의 시간은 단순한 상실의 시간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되묻는 성찰의 시간으로 전환되었다. 김광섭은 병상에서 삶과 죽음, 존재의 지속성, 인간 관계의 본질, 기억의 의미를 사유하게 되었고, 그 결과 후기 시에서는 감정의 과잉이나 관념적 설명을 최소화한 채 극도로 담백한 언어로 심오한 사유를 담아내는 시 세계를 확립하게 된다. 「저녁에」는 이러한 후기 시 정신의 결정체로, 고통을 직접적으로 서술하지 않으면서도 삶의 황혼기에 도달한 인간이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을 고요하게 형상화한 작품이다.&lt;br /&gt;
&lt;br /&gt;
=='''생애의 투영'''==&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4169E1; font-weight:bold; font-size:20px;&amp;quot;&amp;gt;'''1. 별'''&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이 시에서 ‘별’은 단순한 자연 풍경이 아니라, 시인이 삶의 말기에 마주한 유일한 의미의 대상을 상징한다. 병과 고독 속에서 인간 관계와 사회적 연결이 급격히 단절된 상황에서, 시인은 수많은 존재들 가운데 오직 하나의 대상만을 응시한다. 이 별은 잃어버릴 수 없는 기억이거나, 삶에서 끝까지 놓지 않으려는 인연, 혹은 인간으로서 존재를 지탱해 주는 마지막 의미일 수 있다. 또한 별은 우주적 거리감을 지닌 초월적 존재이면서도 화자를 ‘내려다보는’ 친밀한 대상으로 설정되어, 시인이 느낀 고독과 동시에 연대를 갈망하는 마음을 함께 드러낸다. 이는 투병 이후 더욱 절박해진 존재 의미에 대한 집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4169E1; font-weight:bold; font-size:20px;&amp;quot;&amp;gt;'''2. 나(화자)'''&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화자 ‘나’는 단순한 시적 자아를 넘어, 신체적·정신적 한계를 자각한 후기 김광섭 자신의 모습을 강하게 반영한다. 밤이 깊어질수록 화자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는 표현은 육체의 쇠약, 언어 능력의 상실, 그리고 점차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인식을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나 이 소멸은 공포나 절망으로 표현되지 않고, 고요하고 담담한 시선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는 시인이 자신의 삶을 부정하거나 거부하기보다, 생의 유한성을 인식한 상태에서 그것을 수용하는 태도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화자는 결국 사라질 존재이지만, 그 사라짐마저도 세계의 질서로 받아들이는 달관의 태도를 포함한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4169E1; font-weight:bold; font-size:20px;&amp;quot;&amp;gt;'''3.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이 구절은 시 전체의 정서를 집약하는 결말부로, 단순한 이별의 탄식이 아니라 소멸 이후에도 관계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인간적 소망을 담고 있다. 시인은 만남이 다시 가능한지 확신하지 않으며, 의문형으로 질문을 던질 뿐이다. 이러한 표현은 오히려 재회의 불확실성을 전제하기 때문에 더욱 진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질문 속에는 기억, 연대, 관계의 의미는 소멸 이후에도 이어질 수 있다는 믿음이 남아 있다. 이는 투병 속에서 인간 관계의 소중함을 절실히 인식한 김광섭의 세계관을 보여주며, 죽음 이후의 재회라기보다 기억 속에서, 혹은 존재의 다른 형태로 이어지는 인간적 연결에 대한 희망으로 해석된다.&lt;br /&gt;
&lt;br /&gt;
=='''핵심 상징어'''==&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87CEEB; font-weight:bold; font-size:20px;&amp;quot;&amp;gt;'''1. 별'''&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이 시에서 ‘별’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 이미지로, 수많은 존재들 가운데 화자와 마주한 유일한 의미의 대상을 상징한다. 광대한 우주 속의 별은 인간에게 근본적으로 도달할 수 없는 초월적 존재이지만, 동시에 화자를 ‘내려다보는’ 친밀한 대상으로 형상화된다. 이를 통해 별은 거리감과 친밀성을 동시에 지닌 이중적 상징이 되며, 병과 고독 속에서 시인이 마지막으로 응시하는 인연, 혹은 삶에서 끝까지 붙들고 싶은 의미를 나타낸다. 별을 바라보는 행위는 존재의 고독을 인정하면서도 타자와의 연결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시인의 내면 태도를 드러낸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87CEEB; font-weight:bold; font-size:20px;&amp;quot;&amp;gt;'''2. 화자(나)'''&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화자 ‘나’는 이 시의 사유를 이끄는 시적 주체로, 개인적 고독과 존재의 유한성을 직접적으로 체현한다. 밤이 깊어질수록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화자의 모습은 육체적 쇠약과 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인간의 운명을 상징하며, 이는 김광섭 자신의 투병 이후 삶의 상태와 긴밀하게 대응된다. 그러나 화자는 자신의 소멸을 비극적으로 호소하지 않고, 조용하고 절제된 시선으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태도는 삶의 끝자락에서 도달한 체념이 아니라, 세계의 질서를 인식한 뒤 얻은 성찰과 달관의 경지를 보여준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87CEEB; font-weight:bold; font-size:20px;&amp;quot;&amp;gt;'''3. 밤,저녁,황혼'''&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밤과 저녁은 시의 시간적 배경이자 정서적 공간으로 기능하며, 하루의 끝이라는 물리적 의미를 넘어서 삶의 황혼기를 상징한다. 저녁은 활동과 생동의 시간이 끝난 뒤 찾아오는 사색의 시간으로, 시인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존재의 의미를 조용히 성찰하는 시점이다. 이 시간대는 죽음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종결과 순환 가능성을 동시에 암시하며 시 전체에 고요하면서도 쓸쓸한 명상적 분위기를 형성한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87CEEB; font-weight:bold; font-size:20px;&amp;quot;&amp;gt;'''4. 밝음과 어둠의 대비'''&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시 속에서 ‘밝음’과 ‘어둠’은 뚜렷한 대비 구조를 이루며 존재 인식의 핵심을 드러낸다. 별이 ‘밝음 속으로’ 사라지고, 화자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는 표현은 단순한 시각적 변화가 아니라, 의미와 기억, 존재가 소멸해 가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밝음은 잠시 붙잡을 수 있었던 의미나 기억, 희망을 나타내며, 어둠은 인간 존재가 결국 귀속되는 소멸과 불확실성을 의미한다. 이 대비를 통해 시인은 인간 인연의 순간성과 존재의 가냘픔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87CEEB; font-weight:bold; font-size:20px;&amp;quot;&amp;gt;'''5. 사라짐'''&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별과 화자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사라지는 모습은 존재의 유한성과 이별의 필연성을 상징한다. 이는 단절이나 절망의 선언이라기보다는, 모든 존재가 각자의 방식으로 세계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인식에 가깝다. 시인은 ‘사라짐’을 극적인 상실로 과장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묘사함으로써 죽음과 소멸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여준다. 이러한 인식은 후기 김광섭 시 세계의 특징인 담담한 초월성과도 맞닿아 있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87CEEB; font-weight:bold; font-size:20px;&amp;quot;&amp;gt;'''6. 너 하나, 나 하나'''&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라는 구절은 이 시의 정서적 중심으로, 수많은 관계 속에서 서로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 두 존재를 상징한다. 이는 혈연이나 사회적 관계를 넘어서, 인간이 인간에게 부여하는 본질적인 정서적 유대의 표상이다. 동시에 이 표현에는 관계가 지닌 소중함과 더불어, 언젠가는 반드시 헤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도 함께 담겨 있다. 시인은 인연의 유한성을 알면서도, 그 정다움을 끝까지 긍정한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87CEEB; font-weight:bold; font-size:20px;&amp;quot;&amp;gt;'''7. 다시 만나랴'''&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결말부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희망과 회의가 공존하는 질문이다. 시인은 재회를 확신하지 않으며, 의문형으로 남김으로써 만남의 불확실성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이 질문은 곧 인간 관계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포기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억 속에서, 혹은 존재의 다른 형태로 다시 이어질 수 있기를 바라는 조용한 염원을 담고 있다. 이는 투병과 고립의 시간 속에서도 인간적 연대와 인연의 의미를 끝까지 놓지 않았던 김광섭의 세계관을 반영한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87CEEB; font-weight:bold; font-size:20px;&amp;quot;&amp;gt;'''8. 기억과 회상'''&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이 시 전반에 흐르는 기억과 회상의 정서는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시 전체를 지탱하는 암시적 동기로 작용한다. 별을 바라보고, 인연을 되새기며, 다시 만남을 묻는 행위는 모두 과거의 순간을 현재로 소환하려는 시적 태도에서 비롯된다. 기억은 소멸과 단절 속에서도 존재를 이어 주는 매개로 기능하며, 시인은 이를 통해 삶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방식에 대해 조용히 사유한다.&lt;br /&gt;
&lt;br /&gt;
=='''주제 의식'''==&lt;br /&gt;
 「저녁에」는 개별적 인연과 존재의 유한성을 인식하면서도, 그 속에서 인간적 관계의 의미를 발견하려는 시이다. 작품은 수많은 존재 속에서 마주한 ‘하나’의 가치, 이별과 소멸의 필연성, 그리고 재회에 대한 조용한 희망을 동시에 담고 있다. 이를 통해 시인은 삶이 결국 사라짐으로 귀결되더라도, 그 과정에서 형성되는 관계와 기억은 의미를 지닌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이러한 주제 의식은 개인적 체험에서 출발하지만, 독자 개개인의 삶과 관계 경험으로 확장되어 보편적 공감을 형성한다.&lt;br /&gt;
&lt;br /&gt;
=='''문학사적 의의'''==&lt;br /&gt;
 「저녁에」는 김광섭 후기 시 세계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되며, 전후 한국 시가 개인적 성찰과 존재 인식의 방향으로 이동하는 흐름을 잘 보여준다. 이 작품은 사회 현실을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지만, 개인의 내면을 깊이 탐구함으로써 인간 존재의 보편적 문제를 제기한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이는 서정시가 단순한 감정 표현을 넘어 철학적 사유의 장으로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lt;/div&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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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이육사(李陸史)</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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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10T08:29:3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Imgpdnjs: /* 이육사를 기억하는 장소 */&lt;/p&gt;
&lt;hr /&gt;
&lt;div&gt;[[분류:imgpdnjs]]&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파일:이육사.jpg]]&lt;br /&gt;
&amp;lt;/div&amp;gt;&lt;br /&gt;
==기본 정보==&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margin:auto;&amp;quot;&lt;br /&gt;
|+ '''이육사'''&lt;br /&gt;
! 항목 !! 내용&lt;br /&gt;
|-&lt;br /&gt;
| 본명 || 이원록&lt;br /&gt;
|-&lt;br /&gt;
| 출생 || 1904년 5월 18일&lt;br /&gt;
|-&lt;br /&gt;
| 출생지 || 경상북도 예안군 의동면 원촌동 원촌마을&lt;br /&gt;
|-&lt;br /&gt;
| 사망 || 1944년 1월 16일&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이육사는 1904년 5월 18일, 지금의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인 옛 예안군 일대에서 태어났다. 퇴계 이황의 후손인 아버지 이가호와 어머니 허길 사이에서 여섯 형제 중 둘째였다. 훗날 그는 영천 화북면 오동리 출신인 안일양과 결혼하게 된다.&lt;br /&gt;
&lt;br /&gt;
어린 시절 그는 조부 이중직에게서 소학을 배우며 한학을 익혔다. 조부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진성이씨 문중에서 운영하던 보문의숙(훗날 도산공립보통학교)에서 공부했고, 이때 배운 한학의 영향은 그의 문학 세계에도 묻어난다. 졸업 후 가족이 대구로 이주했고, 그는 열아홉에 영천의 백학학원에서 교원으로 잠시 일했다. 1924년에는 일본 도쿄에서 예비학교 과정을 수학했으나 중도에 그만두고, 다음 해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 사회학을 공부했지만 역시 2학년 때 학업을 접었다.&lt;br /&gt;
&lt;br /&gt;
1927년 그는 [[장진홍_1895]]이 일으킨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과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대구형무소에서 약 1년 반을 지냈다. 이때의 수인번호 ‘264’를 따서 훗날 자신의 호를 ‘육사’라 짓는다.&lt;br /&gt;
&lt;br /&gt;
1932년 그는 만주 펑톈으로 건너가 [[윤세주_1901]]를 만나 의열단 입단 권유를 받았고, 난징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으로 들어가 폭탄 제조와 투척, 변장, 무기 운반, 피신 기술 등 다양한 실전 교육을 받았다. 사격 실력은 특히 뛰어났다고 전해진다.&lt;br /&gt;
&lt;br /&gt;
1933년 귀국 후에는 신문·잡지를 오가며 시와 논문, 시나리오 등 여러 글을 썼고, 루쉰의 소설 《고향》을 번역하기도 했다. 하지만 1934년 의열단 출신이라는 이유로 다시 검거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을 당했고, 몇 달 뒤 기소유예로 풀려났다.&lt;br /&gt;
&lt;br /&gt;
1943년 베이징으로 건너갔다가 어머니와 큰형의 소상을 위해 5월에 귀국했다. 그러 이 해 6월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었고, 결국 1944년 1월 16일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교도소에서 옥사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https://www.youtube.com/watch?v=gCcfvA4fGKY 광복 79주년 특별영상 : 행동하는 지성, 저항시인 이육사 이야기]&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937&amp;quot; height=&amp;quot;527&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gCcfvA4fGKY&amp;quot; title=&amp;quot;광복 79주년 특별영상 : 행동하는 지성, 저항시인 이육사 이야기&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이육사의 기자 생활]]==&lt;br /&gt;
많은 사람들이 이육사의 문학 작품만을 알고 기자 생활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위 페이지에서는 이육사의 기자 생활에 대해 더 자세히 서술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청포도'에 스민 가족에 대한 향수와 해방의 염원==&lt;br /&gt;
[[이육사의 '청포도']]&amp;lt;/div&amp;gt;는 이육사가 일제강점기에 경험한 상실과 분리를 바탕으로,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해방에 대한 염원을 동시에 그려낸 시이다. 시에서 드러난 익어가는 청포도의 모습과 돌아올 이를 기다리는 마음은 개인의 정서와 민족적인 바람이 자연스럽게 중첩되는 지점을 보여준다.&lt;br /&gt;
&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v2%3A2PACX-1vTBMVIXErpB6OYWbzC-nzv_0t_UNL2Q64IzD8TI-b1EywFJnOKdoMzdLiVC3NeAgyn4NLe-NEfPjK34&amp;amp;font=Default&amp;amp;lang=ko&amp;amp;initial_zoom=2&amp;amp;width=100%25&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이육사를 기억하는 장소==&lt;br /&gt;
이육사는 경상북도에서 태어났지만 전국적으로 이육사와 관련된 장소들이 많다. 아래 지도는 이육사와 관련된 모든 장소들을 정리한 지도이다. 대단한 시인 이육사를 기억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방문하기를 추천하한다.&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amp;quot;https://www.google.com/maps/d/embed?mid=1h1k2e9-GTfl5Bzcv0D2CRQG12cR998o&amp;amp;ehbc=2E312F&amp;quot; width=&amp;quot;640&amp;quot; height=&amp;quot;480&amp;quot;&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amp;lt;/div&amp;gt;&lt;br /&gt;
&lt;br /&gt;
&amp;lt;p&amp;gt; '''1.청포도 문학공원'''&lt;br /&gt;
이육사의 대표 시 「청포도」의 영감을 얻은 장소로 알려져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청림동 일대에 조성되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포항 청림동 일대(현재 해병사단 내 일월지 주변)에 동양 최대의 포도원이 있었는데, 이육사가 이곳에서 영일만을 바라보며 시를 구상했다는 문헌 기록을 바탕으로 한다. 공원에는 청포도 시비와 함께 문화축제가 열리며 시인의 문학 정신을 기리고 있다.&lt;br /&gt;
&amp;lt;/p&amp;gt;&lt;br /&gt;
&lt;br /&gt;
## '''이육사문학관'''&lt;br /&gt;
#: 이육사 시인의 고향인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에 2004년 탄신 100주년을 맞아 설립되었다. 그의 민족정신과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한 공간으로, 친필 원고, 시집, 독립운동 관련 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다. 문학관 주변에는 복원된 생가, 청포도 샘, 절정 시비 등이 함께 조성되어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 '''이육사 생가'''&lt;br /&gt;
#: 이육사가 태어난 집이다. 원래 안동댐 건설로 인해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1976년 안동시 태화동으로 옮겨졌다. 이후 육사 탄신 100주년(2004년)을 기념하여 이육사문학관 옆(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에 원래의 건축 양식을 살려 복원되었다. 조선 후기 전통적인 반가(班家)의 건축 양식을 띄고 있으며, 특히 사랑채와 안채의 크기와 구조가 거의 동일하게 대칭을 이루는 독특한 특징이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 '''문화공간 이육사'''&lt;br /&gt;
#: 이육사가 1939년 무렵 가족과 거주하며 「청포도」 등 주요 작품을 발표했던 서울특별시 성북구 종암동의 역사적 의의를 기념하여 2019년에 개관한 복합 문화 공간이다. 각 층의 명칭을 '청포도', '교목', '절정' 등 그의 대표 시 제목에서 따왔으며, 전시, 강좌, 문화 행사 등을 통해 시인의 삶과 문학을 시민들과 공유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 '''264작은문학관'''&lt;br /&gt;
#: 이육사의 필명이 된 수인번호 '264'를 기려 대구광역시 중구 북성로에 조성된 작은 문학관이다. 이육사는 1927년 장진홍 의거로 인해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이곳에서 '264'라는 수감번호를 받았다. 일제강점기 적산가옥을 리모델링하여 1층은 카페와 기획전시실, 2층은 상설전시실로 운영되며, 이육사의 생애와 작품을 살펴볼 수 있다.&lt;/div&gt;</summary>
		<author><name>Imgpdnjs</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D%B4%EC%9C%A1%EC%82%AC(%E6%9D%8E%E9%99%B8%E5%8F%B2)&amp;diff=65808</id>
		<title>이육사(李陸史)</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D%B4%EC%9C%A1%EC%82%AC(%E6%9D%8E%E9%99%B8%E5%8F%B2)&amp;diff=65808"/>
		<updated>2025-12-10T08:29:1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Imgpdnjs: /* 이육사를 기억하는 장소 */&lt;/p&gt;
&lt;hr /&gt;
&lt;div&gt;[[분류:imgpdnjs]]&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파일:이육사.jpg]]&lt;br /&gt;
&amp;lt;/div&amp;gt;&lt;br /&gt;
==기본 정보==&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margin:auto;&amp;quot;&lt;br /&gt;
|+ '''이육사'''&lt;br /&gt;
! 항목 !! 내용&lt;br /&gt;
|-&lt;br /&gt;
| 본명 || 이원록&lt;br /&gt;
|-&lt;br /&gt;
| 출생 || 1904년 5월 18일&lt;br /&gt;
|-&lt;br /&gt;
| 출생지 || 경상북도 예안군 의동면 원촌동 원촌마을&lt;br /&gt;
|-&lt;br /&gt;
| 사망 || 1944년 1월 16일&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이육사는 1904년 5월 18일, 지금의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인 옛 예안군 일대에서 태어났다. 퇴계 이황의 후손인 아버지 이가호와 어머니 허길 사이에서 여섯 형제 중 둘째였다. 훗날 그는 영천 화북면 오동리 출신인 안일양과 결혼하게 된다.&lt;br /&gt;
&lt;br /&gt;
어린 시절 그는 조부 이중직에게서 소학을 배우며 한학을 익혔다. 조부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진성이씨 문중에서 운영하던 보문의숙(훗날 도산공립보통학교)에서 공부했고, 이때 배운 한학의 영향은 그의 문학 세계에도 묻어난다. 졸업 후 가족이 대구로 이주했고, 그는 열아홉에 영천의 백학학원에서 교원으로 잠시 일했다. 1924년에는 일본 도쿄에서 예비학교 과정을 수학했으나 중도에 그만두고, 다음 해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 사회학을 공부했지만 역시 2학년 때 학업을 접었다.&lt;br /&gt;
&lt;br /&gt;
1927년 그는 [[장진홍_1895]]이 일으킨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과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대구형무소에서 약 1년 반을 지냈다. 이때의 수인번호 ‘264’를 따서 훗날 자신의 호를 ‘육사’라 짓는다.&lt;br /&gt;
&lt;br /&gt;
1932년 그는 만주 펑톈으로 건너가 [[윤세주_1901]]를 만나 의열단 입단 권유를 받았고, 난징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으로 들어가 폭탄 제조와 투척, 변장, 무기 운반, 피신 기술 등 다양한 실전 교육을 받았다. 사격 실력은 특히 뛰어났다고 전해진다.&lt;br /&gt;
&lt;br /&gt;
1933년 귀국 후에는 신문·잡지를 오가며 시와 논문, 시나리오 등 여러 글을 썼고, 루쉰의 소설 《고향》을 번역하기도 했다. 하지만 1934년 의열단 출신이라는 이유로 다시 검거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을 당했고, 몇 달 뒤 기소유예로 풀려났다.&lt;br /&gt;
&lt;br /&gt;
1943년 베이징으로 건너갔다가 어머니와 큰형의 소상을 위해 5월에 귀국했다. 그러 이 해 6월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었고, 결국 1944년 1월 16일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교도소에서 옥사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https://www.youtube.com/watch?v=gCcfvA4fGKY 광복 79주년 특별영상 : 행동하는 지성, 저항시인 이육사 이야기]&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937&amp;quot; height=&amp;quot;527&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gCcfvA4fGKY&amp;quot; title=&amp;quot;광복 79주년 특별영상 : 행동하는 지성, 저항시인 이육사 이야기&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이육사의 기자 생활]]==&lt;br /&gt;
많은 사람들이 이육사의 문학 작품만을 알고 기자 생활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위 페이지에서는 이육사의 기자 생활에 대해 더 자세히 서술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청포도'에 스민 가족에 대한 향수와 해방의 염원==&lt;br /&gt;
[[이육사의 '청포도']]&amp;lt;/div&amp;gt;는 이육사가 일제강점기에 경험한 상실과 분리를 바탕으로,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해방에 대한 염원을 동시에 그려낸 시이다. 시에서 드러난 익어가는 청포도의 모습과 돌아올 이를 기다리는 마음은 개인의 정서와 민족적인 바람이 자연스럽게 중첩되는 지점을 보여준다.&lt;br /&gt;
&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v2%3A2PACX-1vTBMVIXErpB6OYWbzC-nzv_0t_UNL2Q64IzD8TI-b1EywFJnOKdoMzdLiVC3NeAgyn4NLe-NEfPjK34&amp;amp;font=Default&amp;amp;lang=ko&amp;amp;initial_zoom=2&amp;amp;width=100%25&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이육사를 기억하는 장소==&lt;br /&gt;
이육사는 경상북도에서 태어났지만 전국적으로 이육사와 관련된 장소들이 많다. 아래 지도는 이육사와 관련된 모든 장소들을 정리한 지도이다. 대단한 시인 이육사를 기억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방문하기를 추천하한다.&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amp;quot;https://www.google.com/maps/d/embed?mid=1h1k2e9-GTfl5Bzcv0D2CRQG12cR998o&amp;amp;ehbc=2E312F&amp;quot; width=&amp;quot;640&amp;quot; height=&amp;quot;480&amp;quot;&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amp;lt;/div&amp;gt;&lt;br /&gt;
&lt;br /&gt;
&amp;lt;p&amp;gt; '''1.청포도 문학공원'''&lt;br /&gt;
#: 이육사의 대표 시 「청포도」의 영감을 얻은 장소로 알려져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청림동 일대에 조성되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포항 청림동 일대(현재 해병사단 내 일월지 주변)에 동양 최대의 포도원이 있었는데, 이육사가 이곳에서 영일만을 바라보며 시를 구상했다는 문헌 기록을 바탕으로 한다. 공원에는 청포도 시비와 함께 문화축제가 열리며 시인의 문학 정신을 기리고 있다.&lt;br /&gt;
&amp;lt;/p&amp;gt;&lt;br /&gt;
&lt;br /&gt;
## '''이육사문학관'''&lt;br /&gt;
#: 이육사 시인의 고향인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에 2004년 탄신 100주년을 맞아 설립되었다. 그의 민족정신과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한 공간으로, 친필 원고, 시집, 독립운동 관련 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다. 문학관 주변에는 복원된 생가, 청포도 샘, 절정 시비 등이 함께 조성되어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 '''이육사 생가'''&lt;br /&gt;
#: 이육사가 태어난 집이다. 원래 안동댐 건설로 인해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1976년 안동시 태화동으로 옮겨졌다. 이후 육사 탄신 100주년(2004년)을 기념하여 이육사문학관 옆(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에 원래의 건축 양식을 살려 복원되었다. 조선 후기 전통적인 반가(班家)의 건축 양식을 띄고 있으며, 특히 사랑채와 안채의 크기와 구조가 거의 동일하게 대칭을 이루는 독특한 특징이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 '''문화공간 이육사'''&lt;br /&gt;
#: 이육사가 1939년 무렵 가족과 거주하며 「청포도」 등 주요 작품을 발표했던 서울특별시 성북구 종암동의 역사적 의의를 기념하여 2019년에 개관한 복합 문화 공간이다. 각 층의 명칭을 '청포도', '교목', '절정' 등 그의 대표 시 제목에서 따왔으며, 전시, 강좌, 문화 행사 등을 통해 시인의 삶과 문학을 시민들과 공유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 '''264작은문학관'''&lt;br /&gt;
#: 이육사의 필명이 된 수인번호 '264'를 기려 대구광역시 중구 북성로에 조성된 작은 문학관이다. 이육사는 1927년 장진홍 의거로 인해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이곳에서 '264'라는 수감번호를 받았다. 일제강점기 적산가옥을 리모델링하여 1층은 카페와 기획전시실, 2층은 상설전시실로 운영되며, 이육사의 생애와 작품을 살펴볼 수 있다.&lt;/div&gt;</summary>
		<author><name>Imgpdnjs</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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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이육사(李陸史)</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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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10T08:28:2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Imgpdnjs: /* 이육사를 기억하는 장소 */&lt;/p&gt;
&lt;hr /&gt;
&lt;div&gt;[[분류:imgpdnjs]]&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파일:이육사.jpg]]&lt;br /&gt;
&amp;lt;/div&amp;gt;&lt;br /&gt;
==기본 정보==&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margin:auto;&amp;quot;&lt;br /&gt;
|+ '''이육사'''&lt;br /&gt;
! 항목 !! 내용&lt;br /&gt;
|-&lt;br /&gt;
| 본명 || 이원록&lt;br /&gt;
|-&lt;br /&gt;
| 출생 || 1904년 5월 18일&lt;br /&gt;
|-&lt;br /&gt;
| 출생지 || 경상북도 예안군 의동면 원촌동 원촌마을&lt;br /&gt;
|-&lt;br /&gt;
| 사망 || 1944년 1월 16일&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이육사는 1904년 5월 18일, 지금의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인 옛 예안군 일대에서 태어났다. 퇴계 이황의 후손인 아버지 이가호와 어머니 허길 사이에서 여섯 형제 중 둘째였다. 훗날 그는 영천 화북면 오동리 출신인 안일양과 결혼하게 된다.&lt;br /&gt;
&lt;br /&gt;
어린 시절 그는 조부 이중직에게서 소학을 배우며 한학을 익혔다. 조부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진성이씨 문중에서 운영하던 보문의숙(훗날 도산공립보통학교)에서 공부했고, 이때 배운 한학의 영향은 그의 문학 세계에도 묻어난다. 졸업 후 가족이 대구로 이주했고, 그는 열아홉에 영천의 백학학원에서 교원으로 잠시 일했다. 1924년에는 일본 도쿄에서 예비학교 과정을 수학했으나 중도에 그만두고, 다음 해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 사회학을 공부했지만 역시 2학년 때 학업을 접었다.&lt;br /&gt;
&lt;br /&gt;
1927년 그는 [[장진홍_1895]]이 일으킨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과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대구형무소에서 약 1년 반을 지냈다. 이때의 수인번호 ‘264’를 따서 훗날 자신의 호를 ‘육사’라 짓는다.&lt;br /&gt;
&lt;br /&gt;
1932년 그는 만주 펑톈으로 건너가 [[윤세주_1901]]를 만나 의열단 입단 권유를 받았고, 난징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으로 들어가 폭탄 제조와 투척, 변장, 무기 운반, 피신 기술 등 다양한 실전 교육을 받았다. 사격 실력은 특히 뛰어났다고 전해진다.&lt;br /&gt;
&lt;br /&gt;
1933년 귀국 후에는 신문·잡지를 오가며 시와 논문, 시나리오 등 여러 글을 썼고, 루쉰의 소설 《고향》을 번역하기도 했다. 하지만 1934년 의열단 출신이라는 이유로 다시 검거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을 당했고, 몇 달 뒤 기소유예로 풀려났다.&lt;br /&gt;
&lt;br /&gt;
1943년 베이징으로 건너갔다가 어머니와 큰형의 소상을 위해 5월에 귀국했다. 그러 이 해 6월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었고, 결국 1944년 1월 16일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교도소에서 옥사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https://www.youtube.com/watch?v=gCcfvA4fGKY 광복 79주년 특별영상 : 행동하는 지성, 저항시인 이육사 이야기]&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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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iframe width=&amp;quot;937&amp;quot; height=&amp;quot;527&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gCcfvA4fGKY&amp;quot; title=&amp;quot;광복 79주년 특별영상 : 행동하는 지성, 저항시인 이육사 이야기&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이육사의 기자 생활]]==&lt;br /&gt;
많은 사람들이 이육사의 문학 작품만을 알고 기자 생활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위 페이지에서는 이육사의 기자 생활에 대해 더 자세히 서술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청포도'에 스민 가족에 대한 향수와 해방의 염원==&lt;br /&gt;
[[이육사의 '청포도']]&amp;lt;/div&amp;gt;는 이육사가 일제강점기에 경험한 상실과 분리를 바탕으로,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해방에 대한 염원을 동시에 그려낸 시이다. 시에서 드러난 익어가는 청포도의 모습과 돌아올 이를 기다리는 마음은 개인의 정서와 민족적인 바람이 자연스럽게 중첩되는 지점을 보여준다.&lt;br /&gt;
&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v2%3A2PACX-1vTBMVIXErpB6OYWbzC-nzv_0t_UNL2Q64IzD8TI-b1EywFJnOKdoMzdLiVC3NeAgyn4NLe-NEfPjK34&amp;amp;font=Default&amp;amp;lang=ko&amp;amp;initial_zoom=2&amp;amp;width=100%25&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이육사를 기억하는 장소==&lt;br /&gt;
이육사는 경상북도에서 태어났지만 전국적으로 이육사와 관련된 장소들이 많다. 아래 지도는 이육사와 관련된 모든 장소들을 정리한 지도이다. 대단한 시인 이육사를 기억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방문하기를 추천하한다.&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amp;quot;https://www.google.com/maps/d/embed?mid=1h1k2e9-GTfl5Bzcv0D2CRQG12cR998o&amp;amp;ehbc=2E312F&amp;quot; width=&amp;quot;640&amp;quot; height=&amp;quot;480&amp;quot;&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amp;lt;/div&amp;gt;&lt;br /&gt;
&lt;br /&gt;
# '''청포도 문학공원'''&lt;br /&gt;
#: 이육사의 대표 시 「청포도」의 영감을 얻은 장소로 알려져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청림동 일대에 조성되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포항 청림동 일대(현재 해병사단 내 일월지 주변)에 동양 최대의 포도원이 있었는데, 이육사가 이곳에서 영일만을 바라보며 시를 구상했다는 문헌 기록을 바탕으로 한다. 공원에는 청포도 시비와 함께 문화축제가 열리며 시인의 문학 정신을 기리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 '''이육사문학관'''&lt;br /&gt;
#: 이육사 시인의 고향인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에 2004년 탄신 100주년을 맞아 설립되었다. 그의 민족정신과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한 공간으로, 친필 원고, 시집, 독립운동 관련 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다. 문학관 주변에는 복원된 생가, 청포도 샘, 절정 시비 등이 함께 조성되어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 '''이육사 생가'''&lt;br /&gt;
#: 이육사가 태어난 집이다. 원래 안동댐 건설로 인해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1976년 안동시 태화동으로 옮겨졌다. 이후 육사 탄신 100주년(2004년)을 기념하여 이육사문학관 옆(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에 원래의 건축 양식을 살려 복원되었다. 조선 후기 전통적인 반가(班家)의 건축 양식을 띄고 있으며, 특히 사랑채와 안채의 크기와 구조가 거의 동일하게 대칭을 이루는 독특한 특징이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 '''문화공간 이육사'''&lt;br /&gt;
#: 이육사가 1939년 무렵 가족과 거주하며 「청포도」 등 주요 작품을 발표했던 서울특별시 성북구 종암동의 역사적 의의를 기념하여 2019년에 개관한 복합 문화 공간이다. 각 층의 명칭을 '청포도', '교목', '절정' 등 그의 대표 시 제목에서 따왔으며, 전시, 강좌, 문화 행사 등을 통해 시인의 삶과 문학을 시민들과 공유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 '''264작은문학관'''&lt;br /&gt;
#: 이육사의 필명이 된 수인번호 '264'를 기려 대구광역시 중구 북성로에 조성된 작은 문학관이다. 이육사는 1927년 장진홍 의거로 인해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이곳에서 '264'라는 수감번호를 받았다. 일제강점기 적산가옥을 리모델링하여 1층은 카페와 기획전시실, 2층은 상설전시실로 운영되며, 이육사의 생애와 작품을 살펴볼 수 있다.&lt;/div&gt;</summary>
		<author><name>Imgpdnjs</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D%B4%EC%9C%A1%EC%82%AC(%E6%9D%8E%E9%99%B8%E5%8F%B2)&amp;diff=65793</id>
		<title>이육사(李陸史)</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D%B4%EC%9C%A1%EC%82%AC(%E6%9D%8E%E9%99%B8%E5%8F%B2)&amp;diff=65793"/>
		<updated>2025-12-10T08:27:1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Imgpdnjs: &lt;/p&gt;
&lt;hr /&gt;
&lt;div&gt;[[분류:imgpdnjs]]&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파일:이육사.jpg]]&lt;br /&gt;
&amp;lt;/div&amp;gt;&lt;br /&gt;
==기본 정보==&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margin:auto;&amp;quot;&lt;br /&gt;
|+ '''이육사'''&lt;br /&gt;
! 항목 !! 내용&lt;br /&gt;
|-&lt;br /&gt;
| 본명 || 이원록&lt;br /&gt;
|-&lt;br /&gt;
| 출생 || 1904년 5월 18일&lt;br /&gt;
|-&lt;br /&gt;
| 출생지 || 경상북도 예안군 의동면 원촌동 원촌마을&lt;br /&gt;
|-&lt;br /&gt;
| 사망 || 1944년 1월 16일&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이육사는 1904년 5월 18일, 지금의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인 옛 예안군 일대에서 태어났다. 퇴계 이황의 후손인 아버지 이가호와 어머니 허길 사이에서 여섯 형제 중 둘째였다. 훗날 그는 영천 화북면 오동리 출신인 안일양과 결혼하게 된다.&lt;br /&gt;
&lt;br /&gt;
어린 시절 그는 조부 이중직에게서 소학을 배우며 한학을 익혔다. 조부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진성이씨 문중에서 운영하던 보문의숙(훗날 도산공립보통학교)에서 공부했고, 이때 배운 한학의 영향은 그의 문학 세계에도 묻어난다. 졸업 후 가족이 대구로 이주했고, 그는 열아홉에 영천의 백학학원에서 교원으로 잠시 일했다. 1924년에는 일본 도쿄에서 예비학교 과정을 수학했으나 중도에 그만두고, 다음 해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 사회학을 공부했지만 역시 2학년 때 학업을 접었다.&lt;br /&gt;
&lt;br /&gt;
1927년 그는 [[장진홍_1895]]이 일으킨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과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대구형무소에서 약 1년 반을 지냈다. 이때의 수인번호 ‘264’를 따서 훗날 자신의 호를 ‘육사’라 짓는다.&lt;br /&gt;
&lt;br /&gt;
1932년 그는 만주 펑톈으로 건너가 [[윤세주_1901]]를 만나 의열단 입단 권유를 받았고, 난징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으로 들어가 폭탄 제조와 투척, 변장, 무기 운반, 피신 기술 등 다양한 실전 교육을 받았다. 사격 실력은 특히 뛰어났다고 전해진다.&lt;br /&gt;
&lt;br /&gt;
1933년 귀국 후에는 신문·잡지를 오가며 시와 논문, 시나리오 등 여러 글을 썼고, 루쉰의 소설 《고향》을 번역하기도 했다. 하지만 1934년 의열단 출신이라는 이유로 다시 검거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을 당했고, 몇 달 뒤 기소유예로 풀려났다.&lt;br /&gt;
&lt;br /&gt;
1943년 베이징으로 건너갔다가 어머니와 큰형의 소상을 위해 5월에 귀국했다. 그러 이 해 6월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었고, 결국 1944년 1월 16일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교도소에서 옥사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https://www.youtube.com/watch?v=gCcfvA4fGKY 광복 79주년 특별영상 : 행동하는 지성, 저항시인 이육사 이야기]&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937&amp;quot; height=&amp;quot;527&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gCcfvA4fGKY&amp;quot; title=&amp;quot;광복 79주년 특별영상 : 행동하는 지성, 저항시인 이육사 이야기&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이육사의 기자 생활]]==&lt;br /&gt;
많은 사람들이 이육사의 문학 작품만을 알고 기자 생활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위 페이지에서는 이육사의 기자 생활에 대해 더 자세히 서술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청포도'에 스민 가족에 대한 향수와 해방의 염원==&lt;br /&gt;
[[이육사의 '청포도']]&amp;lt;/div&amp;gt;는 이육사가 일제강점기에 경험한 상실과 분리를 바탕으로,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해방에 대한 염원을 동시에 그려낸 시이다. 시에서 드러난 익어가는 청포도의 모습과 돌아올 이를 기다리는 마음은 개인의 정서와 민족적인 바람이 자연스럽게 중첩되는 지점을 보여준다.&lt;br /&gt;
&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v2%3A2PACX-1vTBMVIXErpB6OYWbzC-nzv_0t_UNL2Q64IzD8TI-b1EywFJnOKdoMzdLiVC3NeAgyn4NLe-NEfPjK34&amp;amp;font=Default&amp;amp;lang=ko&amp;amp;initial_zoom=2&amp;amp;width=100%25&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이육사를 기억하는 장소==&lt;br /&gt;
이육사는 경상북도에서 태어났지만 전국적으로 이육사와 관련된 장소들이 많다. 아래 지도는 이육사와 관련된 모든 장소들을 정리한 지도이다. 대단한 시인 이육사를 기억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방문하기를 추천하한다.&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amp;quot;https://www.google.com/maps/d/embed?mid=1h1k2e9-GTfl5Bzcv0D2CRQG12cR998o&amp;amp;ehbc=2E312F&amp;quot; width=&amp;quot;640&amp;quot; height=&amp;quot;480&amp;quot;&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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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청포도 문학공원'''&lt;br /&gt;
#: 이육사의 대표 시 「청포도」의 영감을 얻은 장소로 알려져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청림동 일대에 조성되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포항 청림동 일대(현재 해병사단 내 일월지 주변)에 동양 최대의 포도원이 있었는데, 이육사가 이곳에서 영일만을 바라보며 시를 구상했다는 문헌 기록을 바탕으로 한다. 공원에는 청포도 시비와 함께 문화축제가 열리며 시인의 문학 정신을 기리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 '''이육사문학관'''&lt;br /&gt;
#: 이육사 시인의 고향인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에 2004년 탄신 100주년을 맞아 설립되었다. 그의 민족정신과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한 공간으로, 친필 원고, 시집, 독립운동 관련 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다. 문학관 주변에는 복원된 생가, 청포도 샘, 절정 시비 등이 함께 조성되어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 '''이육사 생가'''&lt;br /&gt;
#: 이육사가 태어난 집이다. 원래 안동댐 건설로 인해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1976년 안동시 태화동으로 옮겨졌다. 이후 육사 탄신 100주년(2004년)을 기념하여 이육사문학관 옆(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에 원래의 건축 양식을 살려 복원되었다. 조선 후기 전통적인 반가(班家)의 건축 양식을 띄고 있으며, 특히 사랑채와 안채의 크기와 구조가 거의 동일하게 대칭을 이루는 독특한 특징이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 '''문화공간 이육사'''&lt;br /&gt;
#: 이육사가 1939년 무렵 가족과 거주하며 「청포도」 등 주요 작품을 발표했던 서울특별시 성북구 종암동의 역사적 의의를 기념하여 2019년에 개관한 복합 문화 공간이다. 각 층의 명칭을 '청포도', '교목', '절정' 등 그의 대표 시 제목에서 따왔으며, 전시, 강좌, 문화 행사 등을 통해 시인의 삶과 문학을 시민들과 공유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 '''264작은문학관'''&lt;br /&gt;
#: 이육사의 필명이 된 수인번호 '264'를 기려 대구광역시 중구 북성로에 조성된 작은 문학관이다. 이육사는 1927년 장진홍 의거로 인해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이곳에서 '264'라는 수감번호를 받았다. 일제강점기 적산가옥을 리모델링하여 1층은 카페와 기획전시실, 2층은 상설전시실로 운영되며, 이육사의 생애와 작품을 살펴볼 수 있다.&lt;/div&gt;</summary>
		<author><name>Imgpdnjs</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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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이육사(李陸史)</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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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10T08:27:0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Imgpdnjs: &lt;/p&gt;
&lt;hr /&gt;
&lt;div&gt;[[분류:imgpdnjs]]&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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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일:이육사.jpg]]&lt;br /&gt;
&amp;lt;/div&amp;gt;&lt;br /&gt;
==기본 정보==&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margin:auto;&amp;quot;&lt;br /&gt;
|+ '''이육사'''&lt;br /&gt;
! 항목 !! 내용&lt;br /&gt;
|-&lt;br /&gt;
| 본명 || 이원록&lt;br /&gt;
|-&lt;br /&gt;
| 출생 || 1904년 5월 18일&lt;br /&gt;
|-&lt;br /&gt;
| 출생지 || 경상북도 예안군 의동면 원촌동 원촌마을&lt;br /&gt;
|-&lt;br /&gt;
| 사망 || 1944년 1월 16일&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이육사는 1904년 5월 18일, 지금의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인 옛 예안군 일대에서 태어났다. 퇴계 이황의 후손인 아버지 이가호와 어머니 허길 사이에서 여섯 형제 중 둘째였다. 훗날 그는 영천 화북면 오동리 출신인 안일양과 결혼하게 된다.&lt;br /&gt;
&lt;br /&gt;
어린 시절 그는 조부 이중직에게서 소학을 배우며 한학을 익혔다. 조부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진성이씨 문중에서 운영하던 보문의숙(훗날 도산공립보통학교)에서 공부했고, 이때 배운 한학의 영향은 그의 문학 세계에도 묻어난다. 졸업 후 가족이 대구로 이주했고, 그는 열아홉에 영천의 백학학원에서 교원으로 잠시 일했다. 1924년에는 일본 도쿄에서 예비학교 과정을 수학했으나 중도에 그만두고, 다음 해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 사회학을 공부했지만 역시 2학년 때 학업을 접었다.&lt;br /&gt;
&lt;br /&gt;
1927년 그는 [[장진홍_1895]]이 일으킨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과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대구형무소에서 약 1년 반을 지냈다. 이때의 수인번호 ‘264’를 따서 훗날 자신의 호를 ‘육사’라 짓는다.&lt;br /&gt;
&lt;br /&gt;
1932년 그는 만주 펑톈으로 건너가 [[윤세주_1901]]를 만나 의열단 입단 권유를 받았고, 난징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으로 들어가 폭탄 제조와 투척, 변장, 무기 운반, 피신 기술 등 다양한 실전 교육을 받았다. 사격 실력은 특히 뛰어났다고 전해진다.&lt;br /&gt;
&lt;br /&gt;
1933년 귀국 후에는 신문·잡지를 오가며 시와 논문, 시나리오 등 여러 글을 썼고, 루쉰의 소설 《고향》을 번역하기도 했다. 하지만 1934년 의열단 출신이라는 이유로 다시 검거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을 당했고, 몇 달 뒤 기소유예로 풀려났다.&lt;br /&gt;
&lt;br /&gt;
1943년 베이징으로 건너갔다가 어머니와 큰형의 소상을 위해 5월에 귀국했다. 그러 이 해 6월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었고, 결국 1944년 1월 16일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교도소에서 옥사하였다.&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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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gCcfvA4fGKY 광복 79주년 특별영상 : 행동하는 지성, 저항시인 이육사 이야기]&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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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이육사의 기자 생활]]==&lt;br /&gt;
많은 사람들이 이육사의 문학 작품만을 알고 기자 생활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위 페이지에서는 이육사의 기자 생활에 대해 더 자세히 서술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청포도'에 스민 가족에 대한 향수와 해방의 염원==&lt;br /&gt;
[[이육사의 '청포도']]&amp;lt;/div&amp;gt;는 이육사가 일제강점기에 경험한 상실과 분리를 바탕으로,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해방에 대한 염원을 동시에 그려낸 시이다. 시에서 드러난 익어가는 청포도의 모습과 돌아올 이를 기다리는 마음은 개인의 정서와 민족적인 바람이 자연스럽게 중첩되는 지점을 보여준다.&lt;br /&gt;
&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v2%3A2PACX-1vTBMVIXErpB6OYWbzC-nzv_0t_UNL2Q64IzD8TI-b1EywFJnOKdoMzdLiVC3NeAgyn4NLe-NEfPjK34&amp;amp;font=Default&amp;amp;lang=ko&amp;amp;initial_zoom=2&amp;amp;width=100%25&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이육사를 기억하는 장소==&lt;br /&gt;
이육사는 경상북도에서 태어났지만 전국적으로 이육사와 관련된 장소들이 많다. 아래 지도는 이육사와 관련된 모든 장소들을 정리한 지도이다. 대단한 시인 이육사를 기억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방문하기를 추천하한다.&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amp;quot;https://www.google.com/maps/d/embed?mid=1h1k2e9-GTfl5Bzcv0D2CRQG12cR998o&amp;amp;ehbc=2E312F&amp;quot; width=&amp;quot;640&amp;quot; height=&amp;quot;480&amp;quot;&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amp;lt;/div&amp;gt;&lt;br /&gt;
&lt;br /&gt;
# '''청포도 문학공원'''&lt;br /&gt;
#: 이육사의 대표 시 「청포도」의 영감을 얻은 장소로 알려져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청림동 일대에 조성되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포항 청림동 일대(현재 해병사단 내 일월지 주변)에 동양 최대의 포도원이 있었는데, 이육사가 이곳에서 영일만을 바라보며 시를 구상했다는 문헌 기록을 바탕으로 한다. 공원에는 청포도 시비와 함께 문화축제가 열리며 시인의 문학 정신을 기리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 '''이육사문학관'''&lt;br /&gt;
#: 이육사 시인의 고향인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에 2004년 탄신 100주년을 맞아 설립되었다. 그의 민족정신과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한 공간으로, 친필 원고, 시집, 독립운동 관련 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다. 문학관 주변에는 복원된 생가, 청포도 샘, 절정 시비 등이 함께 조성되어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 '''이육사 생가'''&lt;br /&gt;
#: 이육사가 태어난 집이다. 원래 안동댐 건설로 인해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1976년 안동시 태화동으로 옮겨졌다. 이후 육사 탄신 100주년(2004년)을 기념하여 이육사문학관 옆(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에 원래의 건축 양식을 살려 복원되었다. 조선 후기 전통적인 반가(班家)의 건축 양식을 띄고 있으며, 특히 사랑채와 안채의 크기와 구조가 거의 동일하게 대칭을 이루는 독특한 특징이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 '''문화공간 이육사'''&lt;br /&gt;
#: 이육사가 1939년 무렵 가족과 거주하며 「청포도」 등 주요 작품을 발표했던 서울특별시 성북구 종암동의 역사적 의의를 기념하여 2019년에 개관한 복합 문화 공간이다. 각 층의 명칭을 '청포도', '교목', '절정' 등 그의 대표 시 제목에서 따왔으며, 전시, 강좌, 문화 행사 등을 통해 시인의 삶과 문학을 시민들과 공유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 '''264작은문학관'''&lt;br /&gt;
#: 이육사의 필명이 된 수인번호 '264'를 기려 대구광역시 중구 북성로에 조성된 작은 문학관이다. 이육사는 1927년 장진홍 의거로 인해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이곳에서 '264'라는 수감번호를 받았다. 일제강점기 적산가옥을 리모델링하여 1층은 카페와 기획전시실, 2층은 상설전시실로 운영되며, 이육사의 생애와 작품을 살펴볼 수 있다.&lt;/div&gt;</summary>
		<author><name>Imgpdnjs</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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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D%B4%EC%9C%A1%EC%82%AC(%E6%9D%8E%E9%99%B8%E5%8F%B2)&amp;diff=65775</id>
		<title>이육사(李陸史)</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D%B4%EC%9C%A1%EC%82%AC(%E6%9D%8E%E9%99%B8%E5%8F%B2)&amp;diff=65775"/>
		<updated>2025-12-10T08:25:0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Imgpdnjs: /* 생애 */&lt;/p&gt;
&lt;hr /&gt;
&lt;div&gt;[[분류:imgpdnjs]]&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파일:이육사.jpg]]&lt;br /&gt;
&amp;lt;/div&amp;gt;&lt;br /&gt;
==기본 정보==&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margin:auto;&amp;quot;&lt;br /&gt;
|+ '''이육사'''&lt;br /&gt;
! 항목 !! 내용&lt;br /&gt;
|-&lt;br /&gt;
| 본명 || 이원록&lt;br /&gt;
|-&lt;br /&gt;
| 출생 || 1904년 5월 18일&lt;br /&gt;
|-&lt;br /&gt;
| 출생지 || 경상북도 예안군 의동면 원촌동 원촌마을&lt;br /&gt;
|-&lt;br /&gt;
| 사망 || 1944년 1월 16일&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이육사는 1904년 5월 18일, 지금의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인 옛 예안군 일대에서 태어났다. 퇴계 이황의 후손인 아버지 이가호와 어머니 허길 사이에서 여섯 형제 중 둘째였다. 훗날 그는 영천 화북면 오동리 출신인 안일양과 결혼하게 된다.&lt;br /&gt;
&lt;br /&gt;
어린 시절 그는 조부 이중직에게서 소학을 배우며 한학을 익혔다. 조부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진성이씨 문중에서 운영하던 보문의숙(훗날 도산공립보통학교)에서 공부했고, 이때 배운 한학의 영향은 그의 문학 세계에도 묻어난다. 졸업 후 가족이 대구로 이주했고, 그는 열아홉에 영천의 백학학원에서 교원으로 잠시 일했다. 1924년에는 일본 도쿄에서 예비학교 과정을 수학했으나 중도에 그만두고, 다음 해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 사회학을 공부했지만 역시 2학년 때 학업을 접었다.&lt;br /&gt;
&lt;br /&gt;
1927년 그는 [[장진홍_1895]]이 일으킨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과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대구형무소에서 약 1년 반을 지냈다. 이때의 수인번호 ‘264’를 따서 훗날 자신의 호를 ‘육사’라 짓는다.&lt;br /&gt;
&lt;br /&gt;
1932년 그는 만주 펑톈으로 건너가 [[윤세주_1901]]를 만나 의열단 입단 권유를 받았고, 난징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으로 들어가 폭탄 제조와 투척, 변장, 무기 운반, 피신 기술 등 다양한 실전 교육을 받았다. 사격 실력은 특히 뛰어났다고 전해진다.&lt;br /&gt;
&lt;br /&gt;
1933년 귀국 후에는 신문·잡지를 오가며 시와 논문, 시나리오 등 여러 글을 썼고, 루쉰의 소설 《고향》을 번역하기도 했다. 하지만 1934년 의열단 출신이라는 이유로 다시 검거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을 당했고, 몇 달 뒤 기소유예로 풀려났다.&lt;br /&gt;
&lt;br /&gt;
1943년 베이징으로 건너갔다가 어머니와 큰형의 소상을 위해 5월에 귀국했다. 그러 이 해 6월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었고, 결국 1944년 1월 16일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교도소에서 옥사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https://www.youtube.com/watch?v=gCcfvA4fGKY 광복 79주년 특별영상 : 행동하는 지성, 저항시인 이육사 이야기]&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937&amp;quot; height=&amp;quot;527&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gCcfvA4fGKY&amp;quot; title=&amp;quot;광복 79주년 특별영상 : 행동하는 지성, 저항시인 이육사 이야기&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이육사의 기자 생활]]==&lt;br /&gt;
많은 사람들이 이육사의 문학 작품만을 알고 기자 생활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위 페이지에서는 이육사의 기자 생활에 대해 더 자세히 서술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청포도'에 스민 가족에 대한 향수와 해방의 염원==&lt;br /&gt;
[[이육사의 '청포도']]&amp;lt;/div&amp;gt;는 이육사가 일제강점기에 경험한 상실과 분리를 바탕으로,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해방에 대한 염원을 동시에 그려낸 시이다. 시에서 드러난 익어가는 청포도의 모습과 돌아올 이를 기다리는 마음은 개인의 정서와 민족적인 바람이 자연스럽게 중첩되는 지점을 보여준다.&lt;br /&gt;
&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v2%3A2PACX-1vTBMVIXErpB6OYWbzC-nzv_0t_UNL2Q64IzD8TI-b1EywFJnOKdoMzdLiVC3NeAgyn4NLe-NEfPjK34&amp;amp;font=Default&amp;amp;lang=ko&amp;amp;initial_zoom=2&amp;amp;width=100%25&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이육사를 기억하는 장소==&lt;br /&gt;
이육사는 경상북도에서 태어났지만 전국적으로 이육사와 관련된 장소들이 많다. 아래 지도는 이육사와 관련된 모든 장소들을 정리한 지도이다. 대단한 시인 이육사를 기억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방문하기를 추천하한다.&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amp;quot;https://www.google.com/maps/d/embed?mid=1h1k2e9-GTfl5Bzcv0D2CRQG12cR998o&amp;amp;ehbc=2E312F&amp;quot; width=&amp;quot;640&amp;quot; height=&amp;quot;480&amp;quot;&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amp;lt;/div&amp;gt;&lt;br /&gt;
&lt;br /&gt;
# '''청포도 문학공원'''&lt;br /&gt;
#: 이육사의 대표 시 「청포도」의 영감을 얻은 장소로 알려져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청림동 일대에 조성되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포항 청림동 일대(현재 해병사단 내 일월지 주변)에 동양 최대의 포도원이 있었는데, 이육사가 이곳에서 영일만을 바라보며 시를 구상했다는 문헌 기록을 바탕으로 한다. 공원에는 청포도 시비와 함께 문화축제가 열리며 시인의 문학 정신을 기리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 '''이육사문학관'''&lt;br /&gt;
#: 이육사 시인의 고향인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에 2004년 탄신 100주년을 맞아 설립되었다. 그의 민족정신과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한 공간으로, 친필 원고, 시집, 독립운동 관련 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다. 문학관 주변에는 복원된 생가, 청포도 샘, 절정 시비 등이 함께 조성되어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 '''이육사 생가'''&lt;br /&gt;
#: 이육사가 태어난 집이다. 원래 안동댐 건설로 인해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1976년 안동시 태화동으로 옮겨졌다. 이후 육사 탄신 100주년(2004년)을 기념하여 이육사문학관 옆(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에 원래의 건축 양식을 살려 복원되었다. 조선 후기 전통적인 반가(班家)의 건축 양식을 띄고 있으며, 특히 사랑채와 안채의 크기와 구조가 거의 동일하게 대칭을 이루는 독특한 특징이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 '''문화공간 이육사'''&lt;br /&gt;
#: 이육사가 1939년 무렵 가족과 거주하며 「청포도」 등 주요 작품을 발표했던 서울특별시 성북구 종암동의 역사적 의의를 기념하여 2019년에 개관한 복합 문화 공간이다. 각 층의 명칭을 '청포도', '교목', '절정' 등 그의 대표 시 제목에서 따왔으며, 전시, 강좌, 문화 행사 등을 통해 시인의 삶과 문학을 시민들과 공유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 '''264작은문학관'''&lt;br /&gt;
#: 이육사의 필명이 된 수인번호 '264'를 기려 대구광역시 중구 북성로에 조성된 작은 문학관이다. 이육사는 1927년 장진홍 의거로 인해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이곳에서 '264'라는 수감번호를 받았다. 일제강점기 적산가옥을 리모델링하여 1층은 카페와 기획전시실, 2층은 상설전시실로 운영되며, 이육사의 생애와 작품을 살펴볼 수 있다.&lt;/div&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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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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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10T08:18:4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Imgpdnjs: &lt;/p&gt;
&lt;hr /&gt;
&lt;div&gt;[[분류:imgpdnjs]]&lt;br /&gt;
&lt;br /&gt;
[[파일:조선은행대구지점사진.jpg|500픽셀|섬네일|center|조선은행 대구지점 전경 ⓒ 대구역사문화대전]]&lt;br /&gt;
&lt;br /&gt;
&lt;br /&gt;
=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 =&lt;br /&gt;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은 1927년 10월 18일 대구에서 발생한 무장 독립운동으로, 장진홍이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시한폭탄을 배달하여 폭발시킨 사건이다. 당시 조선은행은 조선 내 금융·화폐 정책의 핵심 기관이며, 식민경제 지배의 상징적 공간이었다. 폭발은 은행원과 일본 경찰 등 5명에게 중상을 입혔고, 창문 70여 장이 파손될 정도로 강력해 대구 도심 전체가 흔들렸다.&lt;br /&gt;
&lt;br /&gt;
&amp;quot;1927년 한낮, 조선은행 대구지점에서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이 울렸다. 이는 한 민족에게 독립의 외침이었으며, 민족혼을 일깨운 우뢰와도 같았다.&amp;quot;는 기록도 남아 있다.&lt;br /&gt;
&lt;br /&gt;
== 역사적 배경 ==&lt;br /&gt;
3·1운동 이후 1920년대 조선의 무장 독립운동은 의열단 활동을 중심으로 급진화되고 있었다. 이 시기 투쟁의 주요 대상은 경찰서·도청 같은 행정기관뿐 아니라, 식민 금융 지배의 핵심이던 조선은행과 식산은행 등 경제착취 기관이었다.&lt;br /&gt;
&lt;br /&gt;
조선은행 대구지점은 1910년대 중반 대구 중심부에 건립되었으며, 일제의 세금 관리·화폐 유통·대규모 자금 대출을 담당하는 지역 경제 지배의 핵심 기관이었다. 직원의 상당수가 일본인이었고, 군 복무 경험자도 많아 보안 체계가 강화되어 있었다. 건물은 붉은 벽돌과 석재를 혼합한 2층 구조였으며, 외부에서 수상한 물체가 반입될 경우 쉽게 눈에 띌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lt;br /&gt;
&lt;br /&gt;
1927년 4월, 무장투쟁을 준비하던 장진홍은 일본인 좌파 활동가 굴절무삼랑(堀切茂三郞)을 통해 폭탄 제조법과 뇌관, 도화선, 자금을 제공받았다. 일제는 이 사건을 ‘국제공산당 배후설’로 몰아갔으나, 실제로는 일본 내 혁명운동 잔존 세력과의 연결에 가깝다는 평가가 있다.&lt;br /&gt;
&lt;br /&gt;
== 사건 준비 ==&lt;br /&gt;
장진홍은 폭탄 제조법을 익힌 뒤 경북 칠곡·선산 경계의 봉화산에서 시한폭탄 성능 시험을 실시했다. 테스트 결과를 토대로 그는 대형 폭탄 4개와 소형 자결용 폭탄 1개를 추가로 제작했다. 장진홍의 목표는 대구의 핵심 식민통치 기관 네 곳이었다.&lt;br /&gt;
&lt;br /&gt;
* 조선은행 대구지점  &lt;br /&gt;
* 경북도청  &lt;br /&gt;
* 식산은행 대구지점  &lt;br /&gt;
* 경북경찰부  &lt;br /&gt;
&lt;br /&gt;
1927년 10월 17일, 그는 폭탄을 자전거에 싣고 대구로 이동해 덕흥여관에 투숙했다. 일제의 수사를 교란하기 위해 다리를 저는 척하고 서울말을 사용한 것은 의도된 위장이었다.&lt;br /&gt;
&lt;br /&gt;
여관 사환 박노선은 장진홍이 넘어진 부상자라고 믿었고, 다음 날 그가 부탁한 ‘벌꿀 상자’ 배달 심부름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 상자들 속에는 모두 폭탄이 들어 있었다.&lt;br /&gt;
&lt;br /&gt;
== 사건 전개 ==&lt;br /&gt;
10월 18일 오전 9시경, 박노선은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상자 한 개를 전달했다. 상자는 국고계 주임 복지흥삼에게 전달되었으나, 건물 안에 있던 일본인 은행원 길촌결(吉村潔)이 화약 냄새를 감지하여 즉시 포장을 풀어 확인했다. 그는 도화선을 잘라냈지만, 이미 점화된 폭탄은 11시 50분경 내부에서 폭발했다.&lt;br /&gt;
&lt;br /&gt;
* 창문 70여 장 파손  &lt;br /&gt;
* 은행 직원 및 일본 경찰 포함 5명 중상  &lt;br /&gt;
* 충격파가 대구역까지 도달  &lt;br /&gt;
* 은행 주변 기와지붕 파손, 유리 파편이 수십 m 반경으로 확산  &lt;br /&gt;
&lt;br /&gt;
폭발 직후 은행은 극심한 혼란에 빠졌고, 경찰과 소방 인력이 긴급 투입되었다. 인근 상점과 시장 상인들은 대규모 폭동으로 오인하여 대피했고, 대구 도심 전체가 한동안 마비되었다는 보도도 있다.&lt;br /&gt;
&lt;br /&gt;
나머지 세 건물(도청·식산은행·경북경찰부)의 폭발이 실패한 이유는 길촌결의 조기 발견으로 추가 전달이 중단되었기 때문이었다.&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amp;quot;https://www.google.com/maps/d/embed?mid=1Vbme0Wt5tZNnQRcv9tCNeZ6x62FsuF8&amp;amp;ehbc=2E312F&amp;quot; width=&amp;quot;640&amp;quot; height=&amp;quot;480&amp;quot;&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 언론 보도와 사회적 반응 ==&lt;br /&gt;
* '''매일신보'''(총독부 기관지): 사건을 &amp;quot;공산주의자의 파괴 음모&amp;quot;로 규정, 치안유지법 강화를 촉구  &lt;br /&gt;
* '''조선일보·동아일보''': 의거 자체의 배후를 명확히 알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며 보도  &lt;br /&gt;
* 대구 지역 상공인: 은행의 업무 마비와 금융 거래 지연으로 경제적 혼란 경험  &lt;br /&gt;
* 민중 여론: 표면적 침묵 속에서도 식민 금융기관을 겨냥한 공격이라는 점에서 은근한 지지 분위기 존재  &lt;br /&gt;
&lt;br /&gt;
이처럼 같은 사건을 두고 신문마다 다른 관점을 보였으며, 이후 일제가 지방 경찰권 강화의 명분으로 사건을 적극 활용하였다.&lt;br /&gt;
&lt;br /&gt;
== 초기 수사와 검거 ==&lt;br /&gt;
폭발 직후 일제 경찰은 대규모 검거 작전을 실시하고, 1928년 1월 이정기 등 8명을 체포했다. 이 과정에서 여러 조선인 독립운동가가 고문과 조작된 자백으로 억울하게 연루되었으며, 당시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인물 중에는 시인 [[이육사]]도 포함되었다.  &lt;br /&gt;
이육사는 이때 부여받은 수인번호 ‘264’를 자신의 아호 ‘육사(陸史)’의 유래로 삼게 된다.&lt;br /&gt;
&lt;br /&gt;
조선은행 사건은 이육사에게 첫 투옥 경험을 안겨준 사건이자, 그의 이후 독립운동 및 문학 활동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사건으로 평가된다.&lt;br /&gt;
&lt;br /&gt;
== 폭발 이후 대구 지역 독립운동의 변화 ==&lt;br /&gt;
조선은행 폭파 사건은 대구 지역 항일운동에 다음과 같은 영향을 미쳤다.&lt;br /&gt;
&lt;br /&gt;
* 비밀결사 조직망 와해 및 재편  &lt;br /&gt;
* 경찰·헌병의 사상 탄압 확대  &lt;br /&gt;
* 경북·대구 지역에서 폭발물 관련 규제 강화  &lt;br /&gt;
* 지역 사회의 방범 조직 확대  &lt;br /&gt;
&lt;br /&gt;
신고 체계가 강화되면서 무장독립운동은 더 은밀한 underground 조직 형태로 변화했다.&lt;br /&gt;
&lt;br /&gt;
== 조선은행 대구지점 건물의 이후 ==&lt;br /&gt;
폭발 후 조선은행 대구지점은 여러 차례 개·보수를 거쳤으며, 해방 이후 한국은행 대구지점으로 잠시 사용된 기록도 있다. 이후 원 건물은 도시 개발 과정에서 철거되거나 개축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건물의 정확한 형태는 사진 자료를 통해 일부만 확인된다.&lt;br /&gt;
&lt;br /&gt;
== 사건의 의의 ==&lt;br /&gt;
이 사건은 다음과 같은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lt;br /&gt;
&lt;br /&gt;
* 1920년대 후반 조선 내 무장 투쟁의 대표적 사례  &lt;br /&gt;
* 식민 금융 지배의 핵심 기관을 직접 타격했다는 상징성  &lt;br /&gt;
* 일본 경찰력과 행정 조직 강화의 계기  &lt;br /&gt;
* 이육사 등 여러 독립운동가들의 투옥 및 향후 활동에 영향을 미침  &lt;br /&gt;
* 국제공산당 배후설 제기 등 당시 동아시아 사상투쟁 구도의 반영  &lt;br /&gt;
&lt;br /&gt;
[[파일:장진홍판결문.jpg|300px|섬네일|center|장진홍 사건 관련 판결문 ⓒ 대구역사문화대전]]&lt;br /&gt;
&lt;br /&gt;
&lt;br /&gt;
==소설로 다시 재현해보는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lt;br /&gt;
&lt;br /&gt;
덕흥여관에 처음 들어갈 때 장진홍은 겨우 걷는 사람처럼 심하게 다리를 절뚝거렸다. 자전거를 나무 아래에 세우고 묶는 일도 간신히 해냈다. 사환 박노선이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이윽고 말을 걸었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1e90ff&amp;quot;&amp;gt;&amp;quot;와 카심니까(왜 그러십니까)? 크게 다친 거 같은데 자정건 우째 타고 오싰능교(자전거는 어떻게 타고 오셨습니까)?&amp;quot;&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ff8c00&amp;quot;&amp;gt;&amp;quot;내가 선물을 꼭 보내야 할 고마운 곳들이 몇 군데 있는데, 모두들 이 인근에 있다오. 그래서 이렇게 자전거에 선물들을 싣고 왔는데,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을 기약해야지요. 내리막길에서 자전거를 타다가 심하게 넘어지는 바람에 이리 다쳤지요.&amp;quot;&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장진홍이 서울말로 대답했다. 그렇게 다리를 전 것과 서울말을 쓴 것은 의거 후 일제 경찰의 수사에 혼선을 주려는 의도된 언행이었다. 자신을 노출하지 않으려면 다른 사람을 동원해야 하는데, 박노선에게 심부름을 시키면 적당하겠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다시 이튿날(18일), 장진홍은 박노선에게 '심부름값'을 주면서 부탁했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ff8c00&amp;quot;&amp;gt;&amp;quot;자고 나면 낫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다리가 퉁퉁 붓고 통증이 더 심해져서 아주 걷기가 힘들게 되었다오. 이것들이 모두 벌꿀상자인데 조선은행, 도청, 식산은행, 경찰서에 순서대로 급히 배달을 좀 해 주시오.&amp;quot;&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벌꿀 선물로 위장된 상자들 안에는 장진홍이 직접 제조한 시한폭탄들이 들어 있었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박노선은 짭짤한 심부름값이 흐뭇해 부랴부랴 상자들을 챙겨들고 조선은행 대구지점으로 갔다. 박노선은 장진홍이 시킨 대로 국고계 주임 복지흥삼(福地興三)을 찾았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1e90ff&amp;quot;&amp;gt;&amp;quot;선물 가꼬(가지고) 심부름 왔어에(왔어요), 주임님!&amp;quot;&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박노선은 평소 안면이 있는 복지흥삼에게 벌꿀 상자 하나를 건넸다. 그때 복지흥삼 곁에 군인 출신 일본인 은행원 길촌결(吉村潔)이 앉아 있었다. 그가 군인 출신답게 화약 냄새를 맡았다. 길촌결이 재빨리 포장 끈을 풀었다. 상자 안에는 도화선에 불이 붙은 폭탄이 이글거리고 있었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a020f0&amp;quot;&amp;gt;&amp;quot;으악! 이게 뭐야? 이게 뭐야!&amp;quot;&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복지흥삼이 비명을 질러댔다. 길촌결이 재빠르게 도화선을 잘랐다. 아직 불이 옮겨 붙지 않은 나머지 세 상자는 황급히 은행 앞뜰 자전거 주차장로 옮겨졌다. 신고를 받은 경찰이 달려왔고, 박노선은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lt;br /&gt;
&lt;br /&gt;
경찰은 주차장에 있는 폭탄 셋을 다시 한길로 내놓았다. 옮긴 지 1∼2분 만에 폭탄 셋은 요란한 굉음을 내며 잇따라 폭발했다. 은행원, 경찰 등 5명이 파편에 맞아 중상을 입었고, 은행 창문 70여 개가 박살이 나면서 파편이 대구역까지 날아갔다.&lt;br /&gt;
&lt;br /&gt;
폭파 의거는 '절반의 성공'에 멈추었지만 세상을 흔들었다. 일제 경찰은 1928년 1월 장진홍이 '범인'인 줄 파악하지 못한 채, 이정기 등 독립운동가 8명을 검거해 대구 형무소에 투옥했다. 이때 이원록(이육사)도 자신의 형·동생과 더불어 옥고를 겪었다. 일경은 악독한 고문 끝에 이들을 진범으로 조작해 재판에 회부했다.&lt;br /&gt;
&lt;br /&gt;
의거가 완전한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을 한탄한 장진홍 지사는 1927년 11월과 1928년 1월 안동 경찰서와 영천 경찰서 폭파를 계획했다. 그러나 끝내 실행에 옮기지 못한 상태에서, 검거의 포위망이 좁혀오자 몸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갔다.&lt;br /&gt;
&lt;br /&gt;
일본에서도 장진홍은 새로운 거사 준비에 골몰했다. 하지만 동생의 오사카 소재 안경점에서 마침내 검거되었다. 장 지사를 체포한 일제 경찰은 조선인이었다. 조선인 형사 최덕술은 1929년 2월 19일 의기양양하게 장 지사를 대구로 압송했다.&lt;br /&gt;
&lt;br /&gt;
혹독한 고문이 시작되었다. 더 많은 관련자들을 체포해 공적을 쌓으려는 조선인 형사들의 광분은 그야말로 '필설로 형언'하기 어려울 만큼 비인간적이었다. 하지만 장 지사는 오직 자신의 단독 의거라는 점만 되풀이해서 강조하며 오히려 그들을 꾸짖었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ff8c00&amp;quot;&amp;gt;&amp;quot;조선 민족의 피를 받은 자로서 일제 경찰의 주구가 되어 동족의 해방운동을 이다지도 방해하는 악질 조선인 경관의 죄상이야말로 나의 죽은 혼이라도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amp;quot;&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여섯 달이나 악랄한 고문을 당한 끝에 장 지사는 재판에 회부되었다. 1930년 2월 17일 대구지방법원 1심 재판은 '사형'을 언도했다. 그 뒤 대구복심법원 재판도, 고등법원 상고 결과도 마찬가지로 '사형'이었다. 장 지사는 사형 선고가 내려질 때마다 재판정에서 &amp;lt;span style=&amp;quot;color:#ff8c00&amp;quot;&amp;gt;&amp;quot;대한독립만세!!!&amp;quot;&amp;lt;/span&amp;gt;를 외쳤다.&lt;br /&gt;
&lt;br /&gt;
1930년 7월 31일, 장 지사는 &amp;lt;span style=&amp;quot;color:#ff8c00&amp;quot;&amp;gt;&amp;quot;일제에게 치욕스러운 죽음을 당하느니 차라리 내 손으로 목숨을 끊는 것이 일제에 대한 마지막 항거가 아니겠는가!&amp;quot;&amp;lt;/span&amp;gt; 하고 결심했다. 이윽고 그날 밤 11시경 장 지사가 자결·순국하였다.&lt;/div&gt;</summary>
		<author><name>Imgpdnjs</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E%A5%EC%A7%84%ED%99%8D_1895&amp;diff=65686</id>
		<title>장진홍 1895</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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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10T08:10:3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Imgpdnjs: &lt;/p&gt;
&lt;hr /&gt;
&lt;div&gt;[[분류:imgpdnjs]]&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장진홍초상화.jpg|300픽셀|섬네일|center|유족이 보관하고 있는 장진홍 의사의 초상화. ⓒ 장진홍 의사 기념사업회]]&lt;br /&gt;
==기본정보==&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margin:auto;&amp;quot;&lt;br /&gt;
|+ '''장진홍 (張鎭弘)'''&lt;br /&gt;
! 항목 !! 내용&lt;br /&gt;
|-&lt;br /&gt;
| 출생 || 1895년 6월 6일&lt;br /&gt;
|-&lt;br /&gt;
| 출생지 || 경상도 인동도호부 북면 문법동&lt;br /&gt;
|-&lt;br /&gt;
| 사망 || 1930년 7월 31일 23시경&lt;br /&gt;
|-&lt;br /&gt;
| 초명 || 장재환 (張在煥)&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그는 1895년 경상도 인동도호부 북면 문법동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고향의 인명학교에서 기초 교육을 받았으며, 이 학교를 마친 후 1914년에 조선보병대에 입대했다. 군 생활은 오래 가지 않아 1916년 제대하며 끝났다.&lt;br /&gt;
&lt;br /&gt;
1919년, 그가 귀국한 직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번져 나가자 그는 부친 소유의 논 다섯 두락을 처분해 활동 자금을 마련했다. 이후 서적 행상으로 위장해 전국을 돌아다니며 일제가 저지른 학살, 방화, 고문 등의 실태를 직접 확인하고 세세하게 기록했다. 그해 7월, 미국 군함이 인천항에 들어오자 그는 이 조사서를 경북 출신 승무원 김상철에게 건네 미국에서 영문으로 번역·배포해 달라고 부탁했다.&lt;br /&gt;
&lt;br /&gt;
[[파일:약장수장진홍.jpg|200픽셀|섬네일|right|약장수였던 장진홍의 모습]]&lt;br /&gt;
&lt;br /&gt;
그 뒤 부산에서 조선일보 지국을 운영하기도 하고 생계를 위해 약장사를 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26년 1월, 이내성을 만나 독립운동을 어떻게 펼칠지 논의했고, 1927년 봄에는 그의 소개로 경산시장에서 국제공산당원이라 자칭하는 굴절무삼랑을 만났다. 굴절은 관공서와 은행, 부호의 집에 폭탄을 던져 민심을 뒤흔들어야 혁명이 촉진된다고 주장했고, 그는 한 달쯤 뒤 굴절이 만주에서 들여온 뇌관·도화선과 50원의 자금을 받아 폭탄 제조법을 배웠다.&lt;br /&gt;
&lt;br /&gt;
그해 8월 그는 시험용 폭탄 두 개를 만들어 칠곡과 선산 경계의 봉화산에서 성능을 시험했다. 이어 10월 16일에는 실제 거사에 쓸 폭탄 네 개와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준비한 폭탄 한 개를 추가로 제조해 경북도청, 경북경찰부, 조선은행 대구지점, 식산은행 대구지점을 목표로 삼았다.&lt;br /&gt;
&lt;br /&gt;
10월 18일 오전, 그는 대구 덕흥여관에서 폭탄에 점화 준비를 한 뒤 여관 종업원 박노선에게 목표지점 네 곳에 폭탄을 배달해 달라고 전달했다. 그리고 같은 날 11시 50분경 폭발이 일어나 은행 직원과 일본 경찰 다섯 명이 중상을 입고, 은행 창문 수십 장이 산산이 부서졌다.&lt;br /&gt;
&lt;br /&gt;
경찰은 운반책이었던 박노선을 체포해 추궁했지만 그의 배후를 밝혀내지 못했다. 사건 이후 그는 선산군 해평면으로 숨어들었다가 안동과 영천에서 다시 거사를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lt;br /&gt;
&lt;br /&gt;
1928년 2월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에서 안경점을 하던 동생 장의환을 만나러 갔다가 며칠 머무는 사이, 그를 잡으려 한국에서 파견된 경북경찰부 형사들에게 1929년 2월 13일 밤 습격을 받아 붙잡혔다.&lt;br /&gt;
&lt;br /&gt;
송환된 그는 조선인 경찰들의 매국적 행태를 강하게 비난하며 “동족을 억압하는 조선인 경관의 죄악은 죽은 뒤에도 용서할 수 없다”고 외쳤다고 전해진다. 조사 과정에서도 그는 거사를 혼자 계획하고 실행했음을 분명히 했지만, 모진 고문을 피할 수는 없었다. 반년 뒤 열린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자 법정에서 바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고, 2심과 고등법원 상고까지 모두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lt;br /&gt;
&lt;br /&gt;
1930년 7월 31일, 그는 일본의 손에 의해 치욕스럽게 죽음을 맞기보다는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편이 저항의 마지막 표현이라고 판단해, 그날 밤 11시경 자결로 생을 마쳤다.&lt;br /&gt;
&lt;br /&gt;
[[파일:장진홍사형기사.jpg|500픽셀|섬네일|center|ⓒ 장진홍 의사의 사형 판결을 알리는 &amp;lt;동아일보&amp;gt; 기사(1930.2.18.) ⓒ 동아일보]]&lt;br /&gt;
&lt;br /&gt;
= 동시대 독립운동 및 의열 투쟁 속에서의 장진홍의 위치 =&lt;br /&gt;
장진홍(1895–1930)은 1920년대 후반 조선 내 무장투쟁 국면에서 '''의열단식 폭탄 투쟁'''과 '''사회주의 계열 혁명 전략'''이 교차하던 지점에 위치한 인물이다. 그는 의열단처럼 상징적 타격을 통해 식민 권력의 허를 찌르는 방식을 택했으나, 조직에 속하지 않고 '''단독 계획·단독 제조·단독 실행'''을 고수했다는 점에서 비정형적인 무장 독립운동가로 평가된다.&lt;br /&gt;
&lt;br /&gt;
또한,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영향을 보여주는 굴절무삼랑과의 접촉, 그리고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으로 연루된 이육사(李陸史)와의 관계는 장진홍이 놓여 있던 시대적·사상적 위치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요소로 평가된다.&lt;br /&gt;
&lt;br /&gt;
== 시대적 배경 ==&lt;br /&gt;
=== 의열단 투쟁의 고조 (1920~1925) ===&lt;br /&gt;
* 김원봉 중심의 의열단은 폭탄·암살 중심의 직접행동을 전개하였다.&lt;br /&gt;
*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경성경찰서 등 식민 기관을 겨냥한 공격이 이어지며 식민 권력에 충격을 주었다.&lt;br /&gt;
&lt;br /&gt;
=== 1925년 이후의 변화: 조직 재편과 노선 분화 ===&lt;br /&gt;
* 1925년 치안유지법 시행 이후, 의열단은 중국에서 재편되었고 조선 내에서는 소규모 무장 행동이 증가하였다.&lt;br /&gt;
* 사회주의 계열 운동이 확대되며 도시 중심부 파괴 전략 등 혁명 전술이 일부 활동가들에게 수용되었다.&lt;br /&gt;
&lt;br /&gt;
=== 1927년 전후의 조선 내부 분위기 ===&lt;br /&gt;
* 조선공산당 검거, 치안 강화, 경제적 불만 확산 등으로 민심이 흔들리던 시기였다.&lt;br /&gt;
* 의열단의 표적 방식이 자극이 되어 '''“소수라도 핵심을 정확히 타격하라”'''는 논리가 퍼졌다.&lt;br /&gt;
* 장진홍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개인적 결단·외부 사상·지역 경험이 결합된 독자적 노선을 형성하였다.&lt;br /&gt;
&lt;br /&gt;
== 장진홍의 사상적 위치 ==&lt;br /&gt;
=== 의열단식 투쟁의 영향 ===&lt;br /&gt;
장진홍이 노린 목표(경북도청, 경북경찰부, 조선은행, 식산은행)는 의열단의 표적 패턴과 매우 유사하다.  &lt;br /&gt;
이는 '''식민 권력의 심장을 타격해 체제를 흔든다'''는 의열단식 논리를 반영한다.&lt;br /&gt;
&lt;br /&gt;
=== 사회주의 계열 혁명 전략의 영향 ===&lt;br /&gt;
굴절무삼랑을 통해 폭탄 제조 기술과 도시 중심 파괴 전략을 배웠으며,  &lt;br /&gt;
'''민심 동요 → 혁명 촉발'''이라는 사회주의 혁명론의 전술을 일부 수용하였다.&lt;br /&gt;
&lt;br /&gt;
그러나 그는 특정 조직에 가입하거나 이념적으로 체계를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lt;br /&gt;
'''조직 없는 사회주의적 의열투쟁가'''라는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lt;br /&gt;
&lt;br /&gt;
=== 개인주의적 무장행동의 성격 ===&lt;br /&gt;
* 자금·준비·실행의 중심이 모두 본인이었다.&lt;br /&gt;
* 폭탄을 직접 제조하고, 계획도 단독으로 수행하였다.  &lt;br /&gt;
→ 의열단의 조직성도, 사회주의 운동의 집단전략도 아닌 '''독자적 단독 실행 모델'''을 형성했다.&lt;br /&gt;
&lt;br /&gt;
== 김원봉·신채호 등과의 노선 비교 ==&lt;br /&gt;
=== 김원봉(의열단 단장)과의 비교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 항목 !! 김원봉 !! 장진홍&lt;br /&gt;
|-&lt;br /&gt;
| 조직성 || 국제적 비밀조직 운영 || 조직 없음, 개인 단독 계획&lt;br /&gt;
|-&lt;br /&gt;
| 이론 기반 || 무정부주의+민족주의 || 민족주의+사회주의 전략 일부 수용&lt;br /&gt;
|-&lt;br /&gt;
| 투쟁 방식 || 표적 선정과 국제 지원 || 지역 기반, 즉흥적·직접적&lt;br /&gt;
|-&lt;br /&gt;
| 목표 || 식민 권력의 상징 타격 || 동일하나 전략적 연속성 부족&lt;br /&gt;
|}&lt;br /&gt;
&lt;br /&gt;
=== 신채호 노선(무정부주의 혁명론)과의 비교 ===&lt;br /&gt;
신채호는 '''“조선 혁명은 개인의 결단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했으며,  &lt;br /&gt;
장진홍의 행동 방식은 이 결단론과 유사하다.  &lt;br /&gt;
다만 사상적 학습의 흔적은 적고, 행동 양식만 닮아 있는 수준이다.&lt;br /&gt;
&lt;br /&gt;
=== 종합 평가 ===&lt;br /&gt;
장진홍은&lt;br /&gt;
* 의열단의 전위적 폭력 전략&lt;br /&gt;
* 사회주의 혁명 전술의 일부&lt;br /&gt;
* 신채호식 개인결단론&lt;br /&gt;
&lt;br /&gt;
이 세 요소가 교차한 '''중간지점의 실천가'''였다고 평가된다.&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 내 투쟁 전략에 끼친 영향=&lt;br /&gt;
* '''개인 단독 거사''' 모델을 보여주며 무장투쟁의 다양성을 넓혔다.&lt;br /&gt;
* 1920년대 후반 침체된 내부 분위기 속에서 무장 행동이 가능함을 입증하였다.&lt;br /&gt;
* 폭발 사건 이후 일제의 치안 강경책이 강화되면서  &lt;br /&gt;
  이육사 등 무관한 조선인들도 피해를 보는 부작용이 발생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육사(李陸史)]]와의 관계=&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margin:auto;&amp;quot;&lt;br /&gt;
|+ 장진홍과 이육사&lt;br /&gt;
|-&lt;br /&gt;
! 구분&lt;br /&gt;
! 장진홍 (張鎭弘) 의사&lt;br /&gt;
! 이육사 (李陸史) 시인&lt;br /&gt;
|-&lt;br /&gt;
| '''주요 활동 분야'''&lt;br /&gt;
| 무장 독립운동가, 의열투쟁&lt;br /&gt;
| 시인, 독립운동가 (의열단 활동)&lt;br /&gt;
|-&lt;br /&gt;
|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 역할'''&lt;br /&gt;
| '''진범''' (주도자)&lt;br /&gt;
| '''연루자''' (허위 조작으로 옥고를 치름)&lt;br /&gt;
|-&lt;br /&gt;
| '''투옥 및 최후'''&lt;br /&gt;
| 체포 후 사형 선고, 1930년 옥중 자결 순국&lt;br /&gt;
| 1년 7개월간 옥고 후 무혐의 석방, 이후에도 투옥을 반복하며 시 활동 전개&lt;br /&gt;
|-&lt;br /&gt;
| ''''육사' 호의 유래'''&lt;br /&gt;
| -&lt;br /&gt;
|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으로 수감 당시 수인번호 '''264'''에서 호를 취함&lt;br /&gt;
|-&lt;br /&gt;
| '''독립 운동 역할'''&lt;br /&gt;
|무장실천&lt;br /&gt;
|문화·정신 투쟁&lt;br /&gt;
|}&lt;br /&gt;
&amp;lt;/div&amp;gt;&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v2%3A2PACX-1vTnCkZ16HoB3Ryu_e5FhKe9MjGxm9mNIE4KerRfoVpJ3ZovBHlyNVJ7yRr1OEwG1iVERyZmu94BjZ8O&amp;amp;font=Default&amp;amp;lang=ko&amp;amp;initial_zoom=2&amp;amp;width=100%25&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div&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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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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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10T08:09:3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Imgpdnjs: &lt;/p&gt;
&lt;hr /&gt;
&lt;div&gt;[[분류:imgpdnjs]]&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장진홍초상화.jpg|300픽셀|섬네일|center|유족이 보관하고 있는 장진홍 의사의 초상화. ⓒ 장진홍 의사 기념사업회]]&lt;br /&gt;
==기본정보==&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margin:auto;&amp;quot;&lt;br /&gt;
|+ '''장진홍 (張鎭弘)'''&lt;br /&gt;
! 항목 !! 내용&lt;br /&gt;
|-&lt;br /&gt;
| 출생 || 1895년 6월 6일&lt;br /&gt;
|-&lt;br /&gt;
| 출생지 || 경상도 인동도호부 북면 문법동&lt;br /&gt;
|-&lt;br /&gt;
| 사망 || 1930년 7월 31일 23시경&lt;br /&gt;
|-&lt;br /&gt;
| 초명 || 장재환 (張在煥)&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그는 1895년 경상도 인동도호부 북면 문법동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고향의 인명학교에서 기초 교육을 받았으며, 이 학교를 마친 후 1914년에 조선보병대에 입대했다. 군 생활은 오래 가지 않아 1916년 제대하며 끝났다.&lt;br /&gt;
&lt;br /&gt;
1919년, 그가 귀국한 직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번져 나가자 그는 부친 소유의 논 다섯 두락을 처분해 활동 자금을 마련했다. 이후 서적 행상으로 위장해 전국을 돌아다니며 일제가 저지른 학살, 방화, 고문 등의 실태를 직접 확인하고 세세하게 기록했다. 그해 7월, 미국 군함이 인천항에 들어오자 그는 이 조사서를 경북 출신 승무원 김상철에게 건네 미국에서 영문으로 번역·배포해 달라고 부탁했다.&lt;br /&gt;
&lt;br /&gt;
[[파일:약장수장진홍.jpg|200픽셀|섬네일|right|약장수였던 장진홍의 모습]]&lt;br /&gt;
&lt;br /&gt;
그 뒤 부산에서 조선일보 지국을 운영하기도 하고 생계를 위해 약장사를 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26년 1월, 이내성을 만나 독립운동을 어떻게 펼칠지 논의했고, 1927년 봄에는 그의 소개로 경산시장에서 국제공산당원이라 자칭하는 굴절무삼랑을 만났다. 굴절은 관공서와 은행, 부호의 집에 폭탄을 던져 민심을 뒤흔들어야 혁명이 촉진된다고 주장했고, 그는 한 달쯤 뒤 굴절이 만주에서 들여온 뇌관·도화선과 50원의 자금을 받아 폭탄 제조법을 배웠다.&lt;br /&gt;
&lt;br /&gt;
그해 8월 그는 시험용 폭탄 두 개를 만들어 칠곡과 선산 경계의 봉화산에서 성능을 시험했다. 이어 10월 16일에는 실제 거사에 쓸 폭탄 네 개와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준비한 폭탄 한 개를 추가로 제조해 경북도청, 경북경찰부, 조선은행 대구지점, 식산은행 대구지점을 목표로 삼았다.&lt;br /&gt;
&lt;br /&gt;
10월 18일 오전, 그는 대구 덕흥여관에서 폭탄에 점화 준비를 한 뒤 여관 종업원 박노선에게 목표지점 네 곳에 폭탄을 배달해 달라고 전달했다. 그리고 같은 날 11시 50분경 폭발이 일어나 은행 직원과 일본 경찰 다섯 명이 중상을 입고, 은행 창문 수십 장이 산산이 부서졌다.&lt;br /&gt;
&lt;br /&gt;
경찰은 운반책이었던 박노선을 체포해 추궁했지만 그의 배후를 밝혀내지 못했다. 사건 이후 그는 선산군 해평면으로 숨어들었다가 안동과 영천에서 다시 거사를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lt;br /&gt;
&lt;br /&gt;
1928년 2월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에서 안경점을 하던 동생 장의환을 만나러 갔다가 며칠 머무는 사이, 그를 잡으려 한국에서 파견된 경북경찰부 형사들에게 1929년 2월 13일 밤 습격을 받아 붙잡혔다.&lt;br /&gt;
&lt;br /&gt;
송환된 그는 조선인 경찰들의 매국적 행태를 강하게 비난하며 “동족을 억압하는 조선인 경관의 죄악은 죽은 뒤에도 용서할 수 없다”고 외쳤다고 전해진다. 조사 과정에서도 그는 거사를 혼자 계획하고 실행했음을 분명히 했지만, 모진 고문을 피할 수는 없었다. 반년 뒤 열린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자 법정에서 바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고, 2심과 고등법원 상고까지 모두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lt;br /&gt;
&lt;br /&gt;
1930년 7월 31일, 그는 일본의 손에 의해 치욕스럽게 죽음을 맞기보다는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편이 저항의 마지막 표현이라고 판단해, 그날 밤 11시경 자결로 생을 마쳤다.&lt;br /&gt;
&lt;br /&gt;
[[파일:장진홍사형기사.jpg|500픽셀|섬네일|center|ⓒ 장진홍 의사의 사형 판결을 알리는 &amp;lt;동아일보&amp;gt; 기사(1930.2.18.) ⓒ 동아일보]]&lt;br /&gt;
&lt;br /&gt;
= 동시대 독립운동 및 의열 투쟁 속에서의 장진홍의 위치 =&lt;br /&gt;
장진홍(1895–1930)은 1920년대 후반 조선 내 무장투쟁 국면에서 '''의열단식 폭탄 투쟁'''과 '''사회주의 계열 혁명 전략'''이 교차하던 지점에 위치한 인물이다. 그는 의열단처럼 상징적 타격을 통해 식민 권력의 허를 찌르는 방식을 택했으나, 조직에 속하지 않고 '''단독 계획·단독 제조·단독 실행'''을 고수했다는 점에서 비정형적인 무장 독립운동가로 평가된다.&lt;br /&gt;
&lt;br /&gt;
또한,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영향을 보여주는 굴절무삼랑과의 접촉, 그리고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으로 연루된 이육사(李陸史)와의 관계는 장진홍이 놓여 있던 시대적·사상적 위치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요소로 평가된다.&lt;br /&gt;
&lt;br /&gt;
== 1. 시대적 배경 ==&lt;br /&gt;
=== 1.1 의열단 투쟁의 고조 (1920~1925) ===&lt;br /&gt;
* 김원봉 중심의 의열단은 폭탄·암살 중심의 직접행동을 전개하였다.&lt;br /&gt;
*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경성경찰서 등 식민 기관을 겨냥한 공격이 이어지며 식민 권력에 충격을 주었다.&lt;br /&gt;
&lt;br /&gt;
=== 1.2 1925년 이후의 변화: 조직 재편과 노선 분화 ===&lt;br /&gt;
* 1925년 치안유지법 시행 이후, 의열단은 중국에서 재편되었고 조선 내에서는 소규모 무장 행동이 증가하였다.&lt;br /&gt;
* 사회주의 계열 운동이 확대되며 도시 중심부 파괴 전략 등 혁명 전술이 일부 활동가들에게 수용되었다.&lt;br /&gt;
&lt;br /&gt;
=== 1.3 1927년 전후의 조선 내부 분위기 ===&lt;br /&gt;
* 조선공산당 검거, 치안 강화, 경제적 불만 확산 등으로 민심이 흔들리던 시기였다.&lt;br /&gt;
* 의열단의 표적 방식이 자극이 되어 '''“소수라도 핵심을 정확히 타격하라”'''는 논리가 퍼졌다.&lt;br /&gt;
* 장진홍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개인적 결단·외부 사상·지역 경험이 결합된 독자적 노선을 형성하였다.&lt;br /&gt;
&lt;br /&gt;
== 2. 장진홍의 사상적 위치 ==&lt;br /&gt;
=== 2.1 의열단식 투쟁의 영향 ===&lt;br /&gt;
장진홍이 노린 목표(경북도청, 경북경찰부, 조선은행, 식산은행)는 의열단의 표적 패턴과 매우 유사하다.  &lt;br /&gt;
이는 '''식민 권력의 심장을 타격해 체제를 흔든다'''는 의열단식 논리를 반영한다.&lt;br /&gt;
&lt;br /&gt;
=== 2.2 사회주의 계열 혁명 전략의 영향 ===&lt;br /&gt;
굴절무삼랑을 통해 폭탄 제조 기술과 도시 중심 파괴 전략을 배웠으며,  &lt;br /&gt;
'''민심 동요 → 혁명 촉발'''이라는 사회주의 혁명론의 전술을 일부 수용하였다.&lt;br /&gt;
&lt;br /&gt;
그러나 그는 특정 조직에 가입하거나 이념적으로 체계를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lt;br /&gt;
'''조직 없는 사회주의적 의열투쟁가'''라는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lt;br /&gt;
&lt;br /&gt;
=== 2.3 개인주의적 무장행동의 성격 ===&lt;br /&gt;
* 자금·준비·실행의 중심이 모두 본인이었다.&lt;br /&gt;
* 폭탄을 직접 제조하고, 계획도 단독으로 수행하였다.  &lt;br /&gt;
→ 의열단의 조직성도, 사회주의 운동의 집단전략도 아닌 '''독자적 단독 실행 모델'''을 형성했다.&lt;br /&gt;
&lt;br /&gt;
== 3. 김원봉·신채호 등과의 노선 비교 ==&lt;br /&gt;
=== 3.1 김원봉(의열단 단장)과의 비교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 항목 !! 김원봉 !! 장진홍&lt;br /&gt;
|-&lt;br /&gt;
| 조직성 || 국제적 비밀조직 운영 || 조직 없음, 개인 단독 계획&lt;br /&gt;
|-&lt;br /&gt;
| 이론 기반 || 무정부주의+민족주의 || 민족주의+사회주의 전략 일부 수용&lt;br /&gt;
|-&lt;br /&gt;
| 투쟁 방식 || 표적 선정과 국제 지원 || 지역 기반, 즉흥적·직접적&lt;br /&gt;
|-&lt;br /&gt;
| 목표 || 식민 권력의 상징 타격 || 동일하나 전략적 연속성 부족&lt;br /&gt;
|}&lt;br /&gt;
&lt;br /&gt;
=== 3.2 신채호 노선(무정부주의 혁명론)과의 비교 ===&lt;br /&gt;
신채호는 '''“조선 혁명은 개인의 결단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했으며,  &lt;br /&gt;
장진홍의 행동 방식은 이 결단론과 유사하다.  &lt;br /&gt;
다만 사상적 학습의 흔적은 적고, 행동 양식만 닮아 있는 수준이다.&lt;br /&gt;
&lt;br /&gt;
=== 3.3 종합 평가 ===&lt;br /&gt;
장진홍은&lt;br /&gt;
* 의열단의 전위적 폭력 전략&lt;br /&gt;
* 사회주의 혁명 전술의 일부&lt;br /&gt;
* 신채호식 개인결단론&lt;br /&gt;
&lt;br /&gt;
이 세 요소가 교차한 '''중간지점의 실천가'''였다고 평가된다.&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 내 투쟁 전략에 끼친 영향=&lt;br /&gt;
* '''개인 단독 거사''' 모델을 보여주며 무장투쟁의 다양성을 넓혔다.&lt;br /&gt;
* 1920년대 후반 침체된 내부 분위기 속에서 무장 행동이 가능함을 입증하였다.&lt;br /&gt;
* 폭발 사건 이후 일제의 치안 강경책이 강화되면서  &lt;br /&gt;
  이육사 등 무관한 조선인들도 피해를 보는 부작용이 발생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육사(李陸史)]]와의 관계=&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margin:auto;&amp;quot;&lt;br /&gt;
|+ 장진홍과 이육사&lt;br /&gt;
|-&lt;br /&gt;
! 구분&lt;br /&gt;
! 장진홍 (張鎭弘) 의사&lt;br /&gt;
! 이육사 (李陸史) 시인&lt;br /&gt;
|-&lt;br /&gt;
| '''주요 활동 분야'''&lt;br /&gt;
| 무장 독립운동가, 의열투쟁&lt;br /&gt;
| 시인, 독립운동가 (의열단 활동)&lt;br /&gt;
|-&lt;br /&gt;
|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 역할'''&lt;br /&gt;
| '''진범''' (주도자)&lt;br /&gt;
| '''연루자''' (허위 조작으로 옥고를 치름)&lt;br /&gt;
|-&lt;br /&gt;
| '''투옥 및 최후'''&lt;br /&gt;
| 체포 후 사형 선고, 1930년 옥중 자결 순국&lt;br /&gt;
| 1년 7개월간 옥고 후 무혐의 석방, 이후에도 투옥을 반복하며 시 활동 전개&lt;br /&gt;
|-&lt;br /&gt;
| ''''육사' 호의 유래'''&lt;br /&gt;
| -&lt;br /&gt;
|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으로 수감 당시 수인번호 '''264'''에서 호를 취함&lt;br /&gt;
|-&lt;br /&gt;
| '''독립 운동 역할'''&lt;br /&gt;
|무장실천&lt;br /&gt;
|문화·정신 투쟁&lt;br /&gt;
|}&lt;br /&gt;
&amp;lt;/div&amp;gt;&lt;br /&gt;
=타임라인=&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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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장진홍 1895</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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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10T08:07:5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Imgpdnjs: &lt;/p&gt;
&lt;hr /&gt;
&lt;div&gt;[[분류:imgpdnjs]]&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장진홍초상화.jpg|300픽셀|섬네일|center|유족이 보관하고 있는 장진홍 의사의 초상화. ⓒ 장진홍 의사 기념사업회]]&lt;br /&gt;
==기본정보==&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margin:auto;&amp;quot;&lt;br /&gt;
|+ '''장진홍 (張鎭弘)'''&lt;br /&gt;
! 항목 !! 내용&lt;br /&gt;
|-&lt;br /&gt;
| 출생 || 1895년 6월 6일&lt;br /&gt;
|-&lt;br /&gt;
| 출생지 || 경상도 인동도호부 북면 문법동&lt;br /&gt;
|-&lt;br /&gt;
| 사망 || 1930년 7월 31일 23시경&lt;br /&gt;
|-&lt;br /&gt;
| 초명 || 장재환 (張在煥)&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그는 1895년 경상도 인동도호부 북면 문법동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고향의 인명학교에서 기초 교육을 받았으며, 이 학교를 마친 후 1914년에 조선보병대에 입대했다. 군 생활은 오래 가지 않아 1916년 제대하며 끝났다.&lt;br /&gt;
&lt;br /&gt;
1919년, 그가 귀국한 직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번져 나가자 그는 부친 소유의 논 다섯 두락을 처분해 활동 자금을 마련했다. 이후 서적 행상으로 위장해 전국을 돌아다니며 일제가 저지른 학살, 방화, 고문 등의 실태를 직접 확인하고 세세하게 기록했다. 그해 7월, 미국 군함이 인천항에 들어오자 그는 이 조사서를 경북 출신 승무원 김상철에게 건네 미국에서 영문으로 번역·배포해 달라고 부탁했다.&lt;br /&gt;
&lt;br /&gt;
[[파일:약장수장진홍.jpg|200픽셀|섬네일|right|약장수였던 장진홍의 모습]]&lt;br /&gt;
&lt;br /&gt;
그 뒤 부산에서 조선일보 지국을 운영하기도 하고 생계를 위해 약장사를 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26년 1월, 이내성을 만나 독립운동을 어떻게 펼칠지 논의했고, 1927년 봄에는 그의 소개로 경산시장에서 국제공산당원이라 자칭하는 굴절무삼랑을 만났다. 굴절은 관공서와 은행, 부호의 집에 폭탄을 던져 민심을 뒤흔들어야 혁명이 촉진된다고 주장했고, 그는 한 달쯤 뒤 굴절이 만주에서 들여온 뇌관·도화선과 50원의 자금을 받아 폭탄 제조법을 배웠다.&lt;br /&gt;
&lt;br /&gt;
그해 8월 그는 시험용 폭탄 두 개를 만들어 칠곡과 선산 경계의 봉화산에서 성능을 시험했다. 이어 10월 16일에는 실제 거사에 쓸 폭탄 네 개와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준비한 폭탄 한 개를 추가로 제조해 경북도청, 경북경찰부, 조선은행 대구지점, 식산은행 대구지점을 목표로 삼았다.&lt;br /&gt;
&lt;br /&gt;
10월 18일 오전, 그는 대구 덕흥여관에서 폭탄에 점화 준비를 한 뒤 여관 종업원 박노선에게 목표지점 네 곳에 폭탄을 배달해 달라고 전달했다. 그리고 같은 날 11시 50분경 폭발이 일어나 은행 직원과 일본 경찰 다섯 명이 중상을 입고, 은행 창문 수십 장이 산산이 부서졌다.&lt;br /&gt;
&lt;br /&gt;
경찰은 운반책이었던 박노선을 체포해 추궁했지만 그의 배후를 밝혀내지 못했다. 사건 이후 그는 선산군 해평면으로 숨어들었다가 안동과 영천에서 다시 거사를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lt;br /&gt;
&lt;br /&gt;
1928년 2월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에서 안경점을 하던 동생 장의환을 만나러 갔다가 며칠 머무는 사이, 그를 잡으려 한국에서 파견된 경북경찰부 형사들에게 1929년 2월 13일 밤 습격을 받아 붙잡혔다.&lt;br /&gt;
&lt;br /&gt;
송환된 그는 조선인 경찰들의 매국적 행태를 강하게 비난하며 “동족을 억압하는 조선인 경관의 죄악은 죽은 뒤에도 용서할 수 없다”고 외쳤다고 전해진다. 조사 과정에서도 그는 거사를 혼자 계획하고 실행했음을 분명히 했지만, 모진 고문을 피할 수는 없었다. 반년 뒤 열린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자 법정에서 바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고, 2심과 고등법원 상고까지 모두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lt;br /&gt;
&lt;br /&gt;
1930년 7월 31일, 그는 일본의 손에 의해 치욕스럽게 죽음을 맞기보다는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편이 저항의 마지막 표현이라고 판단해, 그날 밤 11시경 자결로 생을 마쳤다.&lt;br /&gt;
&lt;br /&gt;
[[파일:장진홍사형기사.jpg|500픽셀|섬네일|center|ⓒ 장진홍 의사의 사형 판결을 알리는 &amp;lt;동아일보&amp;gt; 기사(1930.2.18.) ⓒ 동아일보]]&lt;br /&gt;
= 동시대 독립운동 및 의열 투쟁 속에서의 장진홍의 위치 =&lt;br /&gt;
장진홍(1895–1930)은 1920년대 후반 조선 내 무장투쟁 국면에서 '''의열단식 폭탄 투쟁'''과 '''사회주의 계열 혁명 전략'''이 교차하던 지점에 위치한 인물이다. 그는 의열단처럼 상징적 타격을 통해 식민 권력의 허를 찌르는 방식을 택했으나, 조직에 속하지 않고 '''단독 계획·단독 제조·단독 실행'''을 고수했다는 점에서 비정형적인 무장 독립운동가로 평가된다.&lt;br /&gt;
&lt;br /&gt;
또한,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영향을 보여주는 굴절무삼랑과의 접촉, 그리고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으로 연루된 이육사(李陸史)와의 관계는 장진홍이 놓여 있던 시대적·사상적 위치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요소로 평가된다.&lt;br /&gt;
&lt;br /&gt;
== 1. 시대적 배경 ==&lt;br /&gt;
=== 1.1 의열단 투쟁의 고조 (1920~1925) ===&lt;br /&gt;
* 김원봉 중심의 의열단은 폭탄·암살 중심의 직접행동을 전개하였다.&lt;br /&gt;
*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경성경찰서 등 식민 기관을 겨냥한 공격이 이어지며 식민 권력에 충격을 주었다.&lt;br /&gt;
&lt;br /&gt;
=== 1.2 1925년 이후의 변화: 조직 재편과 노선 분화 ===&lt;br /&gt;
* 1925년 치안유지법 시행 이후, 의열단은 중국에서 재편되었고 조선 내에서는 소규모 무장 행동이 증가하였다.&lt;br /&gt;
* 사회주의 계열 운동이 확대되며 도시 중심부 파괴 전략 등 혁명 전술이 일부 활동가들에게 수용되었다.&lt;br /&gt;
&lt;br /&gt;
=== 1.3 1927년 전후의 조선 내부 분위기 ===&lt;br /&gt;
* 조선공산당 검거, 치안 강화, 경제적 불만 확산 등으로 민심이 흔들리던 시기였다.&lt;br /&gt;
* 의열단의 표적 방식이 자극이 되어 '''“소수라도 핵심을 정확히 타격하라”'''는 논리가 퍼졌다.&lt;br /&gt;
* 장진홍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개인적 결단·외부 사상·지역 경험이 결합된 독자적 노선을 형성하였다.&lt;br /&gt;
&lt;br /&gt;
== 2. 장진홍의 사상적 위치 ==&lt;br /&gt;
=== 2.1 의열단식 투쟁의 영향 ===&lt;br /&gt;
장진홍이 노린 목표(경북도청, 경북경찰부, 조선은행, 식산은행)는 의열단의 표적 패턴과 매우 유사하다.  &lt;br /&gt;
이는 '''식민 권력의 심장을 타격해 체제를 흔든다'''는 의열단식 논리를 반영한다.&lt;br /&gt;
&lt;br /&gt;
=== 2.2 사회주의 계열 혁명 전략의 영향 ===&lt;br /&gt;
굴절무삼랑을 통해 폭탄 제조 기술과 도시 중심 파괴 전략을 배웠으며,  &lt;br /&gt;
'''민심 동요 → 혁명 촉발'''이라는 사회주의 혁명론의 전술을 일부 수용하였다.&lt;br /&gt;
&lt;br /&gt;
그러나 그는 특정 조직에 가입하거나 이념적으로 체계를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lt;br /&gt;
'''조직 없는 사회주의적 의열투쟁가'''라는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lt;br /&gt;
&lt;br /&gt;
=== 2.3 개인주의적 무장행동의 성격 ===&lt;br /&gt;
* 자금·준비·실행의 중심이 모두 본인이었다.&lt;br /&gt;
* 폭탄을 직접 제조하고, 계획도 단독으로 수행하였다.  &lt;br /&gt;
→ 의열단의 조직성도, 사회주의 운동의 집단전략도 아닌 '''독자적 단독 실행 모델'''을 형성했다.&lt;br /&gt;
&lt;br /&gt;
== 3. 김원봉·신채호 등과의 노선 비교 ==&lt;br /&gt;
=== 3.1 김원봉(의열단 단장)과의 비교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 항목 !! 김원봉 !! 장진홍&lt;br /&gt;
|-&lt;br /&gt;
| 조직성 || 국제적 비밀조직 운영 || 조직 없음, 개인 단독 계획&lt;br /&gt;
|-&lt;br /&gt;
| 이론 기반 || 무정부주의+민족주의 || 민족주의+사회주의 전략 일부 수용&lt;br /&gt;
|-&lt;br /&gt;
| 투쟁 방식 || 표적 선정과 국제 지원 || 지역 기반, 즉흥적·직접적&lt;br /&gt;
|-&lt;br /&gt;
| 목표 || 식민 권력의 상징 타격 || 동일하나 전략적 연속성 부족&lt;br /&gt;
|}&lt;br /&gt;
&lt;br /&gt;
=== 3.2 신채호 노선(무정부주의 혁명론)과의 비교 ===&lt;br /&gt;
신채호는 '''“조선 혁명은 개인의 결단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했으며,  &lt;br /&gt;
장진홍의 행동 방식은 이 결단론과 유사하다.  &lt;br /&gt;
다만 사상적 학습의 흔적은 적고, 행동 양식만 닮아 있는 수준이다.&lt;br /&gt;
&lt;br /&gt;
=== 3.3 종합 평가 ===&lt;br /&gt;
장진홍은&lt;br /&gt;
* 의열단의 전위적 폭력 전략&lt;br /&gt;
* 사회주의 혁명 전술의 일부&lt;br /&gt;
* 신채호식 개인결단론&lt;br /&gt;
&lt;br /&gt;
이 세 요소가 교차한 '''중간지점의 실천가'''였다고 평가된다.&lt;br /&gt;
&lt;br /&gt;
&lt;br /&gt;
== 4. 조선 내 투쟁 전략에 끼친 영향 ==&lt;br /&gt;
* '''개인 단독 거사''' 모델을 보여주며 무장투쟁의 다양성을 넓혔다.&lt;br /&gt;
* 1920년대 후반 침체된 내부 분위기 속에서 무장 행동이 가능함을 입증하였다.&lt;br /&gt;
* 폭발 사건 이후 일제의 치안 강경책이 강화되면서  &lt;br /&gt;
  이육사 등 무관한 조선인들도 피해를 보는 부작용이 발생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 5. [[이육사(李陸史)]]와의 관계==&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margin:auto;&amp;quot;&lt;br /&gt;
|+ 장진홍과 이육사&lt;br /&gt;
|-&lt;br /&gt;
! 구분&lt;br /&gt;
! 장진홍 (張鎭弘) 의사&lt;br /&gt;
! 이육사 (李陸史) 시인&lt;br /&gt;
|-&lt;br /&gt;
| '''주요 활동 분야'''&lt;br /&gt;
| 무장 독립운동가, 의열투쟁&lt;br /&gt;
| 시인, 독립운동가 (의열단 활동)&lt;br /&gt;
|-&lt;br /&gt;
|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 역할'''&lt;br /&gt;
| '''진범''' (주도자)&lt;br /&gt;
| '''연루자''' (허위 조작으로 옥고를 치름)&lt;br /&gt;
|-&lt;br /&gt;
| '''투옥 및 최후'''&lt;br /&gt;
| 체포 후 사형 선고, 1930년 옥중 자결 순국&lt;br /&gt;
| 1년 7개월간 옥고 후 무혐의 석방, 이후에도 투옥을 반복하며 시 활동 전개&lt;br /&gt;
|-&lt;br /&gt;
| ''''육사' 호의 유래'''&lt;br /&gt;
| -&lt;br /&gt;
|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으로 수감 당시 수인번호 '''264'''에서 호를 취함&lt;br /&gt;
|-&lt;br /&gt;
| '''독립 운동 역할'''&lt;br /&gt;
|무장실천&lt;br /&gt;
|문화·정신 투쟁&lt;br /&gt;
|}&lt;br /&gt;
&amp;lt;/div&amp;gt;&lt;br /&gt;
== 6.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v2%3A2PACX-1vTnCkZ16HoB3Ryu_e5FhKe9MjGxm9mNIE4KerRfoVpJ3ZovBHlyNVJ7yRr1OEwG1iVERyZmu94BjZ8O&amp;amp;font=Default&amp;amp;lang=ko&amp;amp;initial_zoom=2&amp;amp;width=100%25&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Imgpdnjs</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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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장진홍 1895</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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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10T08:06:5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Imgpdnjs: &lt;/p&gt;
&lt;hr /&gt;
&lt;div&gt;[[분류:imgpdnjs]]&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장진홍초상화.jpg|300픽셀|섬네일|center|유족이 보관하고 있는 장진홍 의사의 초상화. ⓒ 장진홍 의사 기념사업회]]&lt;br /&gt;
==기본정보==&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margin:auto;&amp;quot;&lt;br /&gt;
|+ '''장진홍 (張鎭弘)'''&lt;br /&gt;
! 항목 !! 내용&lt;br /&gt;
|-&lt;br /&gt;
| 출생 || 1895년 6월 6일&lt;br /&gt;
|-&lt;br /&gt;
| 출생지 || 경상도 인동도호부 북면 문법동&lt;br /&gt;
|-&lt;br /&gt;
| 사망 || 1930년 7월 31일 23시경&lt;br /&gt;
|-&lt;br /&gt;
| 초명 || 장재환 (張在煥)&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그는 1895년 경상도 인동도호부 북면 문법동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고향의 인명학교에서 기초 교육을 받았으며, 이 학교를 마친 후 1914년에 조선보병대에 입대했다. 군 생활은 오래 가지 않아 1916년 제대하며 끝났다.&lt;br /&gt;
&lt;br /&gt;
1919년, 그가 귀국한 직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번져 나가자 그는 부친 소유의 논 다섯 두락을 처분해 활동 자금을 마련했다. 이후 서적 행상으로 위장해 전국을 돌아다니며 일제가 저지른 학살, 방화, 고문 등의 실태를 직접 확인하고 세세하게 기록했다. 그해 7월, 미국 군함이 인천항에 들어오자 그는 이 조사서를 경북 출신 승무원 김상철에게 건네 미국에서 영문으로 번역·배포해 달라고 부탁했다.&lt;br /&gt;
&lt;br /&gt;
[[파일:약장수장진홍.jpg|200픽셀|섬네일|right|약장수였던 장진홍의 모습]]&lt;br /&gt;
&lt;br /&gt;
그 뒤 부산에서 조선일보 지국을 운영하기도 하고 생계를 위해 약장사를 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26년 1월, 이내성을 만나 독립운동을 어떻게 펼칠지 논의했고, 1927년 봄에는 그의 소개로 경산시장에서 국제공산당원이라 자칭하는 굴절무삼랑을 만났다. 굴절은 관공서와 은행, 부호의 집에 폭탄을 던져 민심을 뒤흔들어야 혁명이 촉진된다고 주장했고, 그는 한 달쯤 뒤 굴절이 만주에서 들여온 뇌관·도화선과 50원의 자금을 받아 폭탄 제조법을 배웠다.&lt;br /&gt;
&lt;br /&gt;
그해 8월 그는 시험용 폭탄 두 개를 만들어 칠곡과 선산 경계의 봉화산에서 성능을 시험했다. 이어 10월 16일에는 실제 거사에 쓸 폭탄 네 개와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준비한 폭탄 한 개를 추가로 제조해 경북도청, 경북경찰부, 조선은행 대구지점, 식산은행 대구지점을 목표로 삼았다.&lt;br /&gt;
&lt;br /&gt;
10월 18일 오전, 그는 대구 덕흥여관에서 폭탄에 점화 준비를 한 뒤 여관 종업원 박노선에게 목표지점 네 곳에 폭탄을 배달해 달라고 전달했다. 그리고 같은 날 11시 50분경 폭발이 일어나 은행 직원과 일본 경찰 다섯 명이 중상을 입고, 은행 창문 수십 장이 산산이 부서졌다.&lt;br /&gt;
&lt;br /&gt;
경찰은 운반책이었던 박노선을 체포해 추궁했지만 그의 배후를 밝혀내지 못했다. 사건 이후 그는 선산군 해평면으로 숨어들었다가 안동과 영천에서 다시 거사를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lt;br /&gt;
&lt;br /&gt;
1928년 2월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에서 안경점을 하던 동생 장의환을 만나러 갔다가 며칠 머무는 사이, 그를 잡으려 한국에서 파견된 경북경찰부 형사들에게 1929년 2월 13일 밤 습격을 받아 붙잡혔다.&lt;br /&gt;
&lt;br /&gt;
송환된 그는 조선인 경찰들의 매국적 행태를 강하게 비난하며 “동족을 억압하는 조선인 경관의 죄악은 죽은 뒤에도 용서할 수 없다”고 외쳤다고 전해진다. 조사 과정에서도 그는 거사를 혼자 계획하고 실행했음을 분명히 했지만, 모진 고문을 피할 수는 없었다. 반년 뒤 열린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자 법정에서 바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고, 2심과 고등법원 상고까지 모두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lt;br /&gt;
&lt;br /&gt;
1930년 7월 31일, 그는 일본의 손에 의해 치욕스럽게 죽음을 맞기보다는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편이 저항의 마지막 표현이라고 판단해, 그날 밤 11시경 자결로 생을 마쳤다.&lt;br /&gt;
&lt;br /&gt;
[[파일:장진홍사형기사.jpg|500픽셀|섬네일|center|ⓒ 장진홍 의사의 사형 판결을 알리는 &amp;lt;동아일보&amp;gt; 기사(1930.2.18.) ⓒ 동아일보]]&lt;br /&gt;
= 동시대 독립운동 및 의열 투쟁 속에서의 장진홍의 위치 =&lt;br /&gt;
장진홍(1895–1930)은 1920년대 후반 조선 내 무장투쟁 국면에서 '''의열단식 폭탄 투쟁'''과 '''사회주의 계열 혁명 전략'''이 교차하던 지점에 위치한 인물이다. 그는 의열단처럼 상징적 타격을 통해 식민 권력의 허를 찌르는 방식을 택했으나, 조직에 속하지 않고 '''단독 계획·단독 제조·단독 실행'''을 고수했다는 점에서 비정형적인 무장 독립운동가로 평가된다.&lt;br /&gt;
&lt;br /&gt;
또한,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영향을 보여주는 굴절무삼랑과의 접촉, 그리고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으로 연루된 이육사(李陸史)와의 관계는 장진홍이 놓여 있던 시대적·사상적 위치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요소로 평가된다.&lt;br /&gt;
&lt;br /&gt;
== 1. 시대적 배경 ==&lt;br /&gt;
=== 1.1 의열단 투쟁의 고조 (1920~1925) ===&lt;br /&gt;
* 김원봉 중심의 의열단은 폭탄·암살 중심의 직접행동을 전개하였다.&lt;br /&gt;
*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경성경찰서 등 식민 기관을 겨냥한 공격이 이어지며 식민 권력에 충격을 주었다.&lt;br /&gt;
&lt;br /&gt;
=== 1.2 1925년 이후의 변화: 조직 재편과 노선 분화 ===&lt;br /&gt;
* 1925년 치안유지법 시행 이후, 의열단은 중국에서 재편되었고 조선 내에서는 소규모 무장 행동이 증가하였다.&lt;br /&gt;
* 사회주의 계열 운동이 확대되며 도시 중심부 파괴 전략 등 혁명 전술이 일부 활동가들에게 수용되었다.&lt;br /&gt;
&lt;br /&gt;
=== 1.3 1927년 전후의 조선 내부 분위기 ===&lt;br /&gt;
* 조선공산당 검거, 치안 강화, 경제적 불만 확산 등으로 민심이 흔들리던 시기였다.&lt;br /&gt;
* 의열단의 표적 방식이 자극이 되어 '''“소수라도 핵심을 정확히 타격하라”'''는 논리가 퍼졌다.&lt;br /&gt;
* 장진홍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개인적 결단·외부 사상·지역 경험이 결합된 독자적 노선을 형성하였다.&lt;br /&gt;
&lt;br /&gt;
== 2. 장진홍의 사상적 위치 ==&lt;br /&gt;
=== 2.1 의열단식 투쟁의 영향 ===&lt;br /&gt;
장진홍이 노린 목표(경북도청, 경북경찰부, 조선은행, 식산은행)는 의열단의 표적 패턴과 매우 유사하다.  &lt;br /&gt;
이는 '''식민 권력의 심장을 타격해 체제를 흔든다'''는 의열단식 논리를 반영한다.&lt;br /&gt;
&lt;br /&gt;
=== 2.2 사회주의 계열 혁명 전략의 영향 ===&lt;br /&gt;
굴절무삼랑을 통해 폭탄 제조 기술과 도시 중심 파괴 전략을 배웠으며,  &lt;br /&gt;
'''민심 동요 → 혁명 촉발'''이라는 사회주의 혁명론의 전술을 일부 수용하였다.&lt;br /&gt;
&lt;br /&gt;
그러나 그는 특정 조직에 가입하거나 이념적으로 체계를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lt;br /&gt;
'''조직 없는 사회주의적 의열투쟁가'''라는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lt;br /&gt;
&lt;br /&gt;
=== 2.3 개인주의적 무장행동의 성격 ===&lt;br /&gt;
* 자금·준비·실행의 중심이 모두 본인이었다.&lt;br /&gt;
* 폭탄을 직접 제조하고, 계획도 단독으로 수행하였다.  &lt;br /&gt;
→ 의열단의 조직성도, 사회주의 운동의 집단전략도 아닌 '''독자적 단독 실행 모델'''을 형성했다.&lt;br /&gt;
&lt;br /&gt;
== 3. 김원봉·신채호 등과의 노선 비교 ==&lt;br /&gt;
=== 3.1 김원봉(의열단 단장)과의 비교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 항목 !! 김원봉 !! 장진홍&lt;br /&gt;
|-&lt;br /&gt;
| 조직성 || 국제적 비밀조직 운영 || 조직 없음, 개인 단독 계획&lt;br /&gt;
|-&lt;br /&gt;
| 이론 기반 || 무정부주의+민족주의 || 민족주의+사회주의 전략 일부 수용&lt;br /&gt;
|-&lt;br /&gt;
| 투쟁 방식 || 표적 선정과 국제 지원 || 지역 기반, 즉흥적·직접적&lt;br /&gt;
|-&lt;br /&gt;
| 목표 || 식민 권력의 상징 타격 || 동일하나 전략적 연속성 부족&lt;br /&gt;
|}&lt;br /&gt;
&lt;br /&gt;
=== 3.2 신채호 노선(무정부주의 혁명론)과의 비교 ===&lt;br /&gt;
신채호는 '''“조선 혁명은 개인의 결단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했으며,  &lt;br /&gt;
장진홍의 행동 방식은 이 결단론과 유사하다.  &lt;br /&gt;
다만 사상적 학습의 흔적은 적고, 행동 양식만 닮아 있는 수준이다.&lt;br /&gt;
&lt;br /&gt;
=== 3.3 종합 평가 ===&lt;br /&gt;
장진홍은&lt;br /&gt;
* 의열단의 전위적 폭력 전략&lt;br /&gt;
* 사회주의 혁명 전술의 일부&lt;br /&gt;
* 신채호식 개인결단론&lt;br /&gt;
&lt;br /&gt;
이 세 요소가 교차한 '''중간지점의 실천가'''였다고 평가된다.&lt;br /&gt;
&lt;br /&gt;
&lt;br /&gt;
== 4. 조선 내 투쟁 전략에 끼친 영향 ==&lt;br /&gt;
* '''개인 단독 거사''' 모델을 보여주며 무장투쟁의 다양성을 넓혔다.&lt;br /&gt;
* 1920년대 후반 침체된 내부 분위기 속에서 무장 행동이 가능함을 입증하였다.&lt;br /&gt;
* 폭발 사건 이후 일제의 치안 강경책이 강화되면서  &lt;br /&gt;
  이육사 등 무관한 조선인들도 피해를 보는 부작용이 발생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육사(李陸史)]]와의 관계==&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margin:auto;&amp;quot;&lt;br /&gt;
|+ 장진홍과 이육사&lt;br /&gt;
|-&lt;br /&gt;
! 구분&lt;br /&gt;
! 장진홍 (張鎭弘) 의사&lt;br /&gt;
! 이육사 (李陸史) 시인&lt;br /&gt;
|-&lt;br /&gt;
| '''주요 활동 분야'''&lt;br /&gt;
| 무장 독립운동가, 의열투쟁&lt;br /&gt;
| 시인, 독립운동가 (의열단 활동)&lt;br /&gt;
|-&lt;br /&gt;
|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 역할'''&lt;br /&gt;
| '''진범''' (주도자)&lt;br /&gt;
| '''연루자''' (허위 조작으로 옥고를 치름)&lt;br /&gt;
|-&lt;br /&gt;
| '''투옥 및 최후'''&lt;br /&gt;
| 체포 후 사형 선고, 1930년 옥중 자결 순국&lt;br /&gt;
| 1년 7개월간 옥고 후 무혐의 석방, 이후에도 투옥을 반복하며 시 활동 전개&lt;br /&gt;
|-&lt;br /&gt;
| ''''육사' 호의 유래'''&lt;br /&gt;
| -&lt;br /&gt;
|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으로 수감 당시 수인번호 '''264'''에서 호를 취함&lt;br /&gt;
|-&lt;br /&gt;
| '''독립 운동 역할'''&lt;br /&gt;
|무장실천&lt;br /&gt;
|문화·정신 투쟁&lt;br /&gt;
|}&lt;br /&gt;
&amp;lt;/div&amp;gt;&lt;br /&gt;
==타임라인==&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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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장진홍 1895</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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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10T08:04:2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Imgpdnjs: &lt;/p&gt;
&lt;hr /&gt;
&lt;div&gt;[[분류:imgpdnjs]]&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장진홍초상화.jpg|300픽셀|섬네일|center|유족이 보관하고 있는 장진홍 의사의 초상화. ⓒ 장진홍 의사 기념사업회]]&lt;br /&gt;
==기본정보==&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margin:auto;&amp;quot;&lt;br /&gt;
|+ '''장진홍 (張鎭弘)'''&lt;br /&gt;
! 항목 !! 내용&lt;br /&gt;
|-&lt;br /&gt;
| 출생 || 1895년 6월 6일&lt;br /&gt;
|-&lt;br /&gt;
| 출생지 || 경상도 인동도호부 북면 문법동&lt;br /&gt;
|-&lt;br /&gt;
| 사망 || 1930년 7월 31일 23시경&lt;br /&gt;
|-&lt;br /&gt;
| 초명 || 장재환 (張在煥)&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그는 1895년 경상도 인동도호부 북면 문법동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고향의 인명학교에서 기초 교육을 받았으며, 이 학교를 마친 후 1914년에 조선보병대에 입대했다. 군 생활은 오래 가지 않아 1916년 제대하며 끝났다.&lt;br /&gt;
&lt;br /&gt;
1919년, 그가 귀국한 직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번져 나가자 그는 부친 소유의 논 다섯 두락을 처분해 활동 자금을 마련했다. 이후 서적 행상으로 위장해 전국을 돌아다니며 일제가 저지른 학살, 방화, 고문 등의 실태를 직접 확인하고 세세하게 기록했다. 그해 7월, 미국 군함이 인천항에 들어오자 그는 이 조사서를 경북 출신 승무원 김상철에게 건네 미국에서 영문으로 번역·배포해 달라고 부탁했다.&lt;br /&gt;
&lt;br /&gt;
[[파일:약장수장진홍.jpg|200픽셀|섬네일|right|약장수였던 장진홍의 모습]]&lt;br /&gt;
&lt;br /&gt;
그 뒤 부산에서 조선일보 지국을 운영하기도 하고 생계를 위해 약장사를 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26년 1월, 이내성을 만나 독립운동을 어떻게 펼칠지 논의했고, 1927년 봄에는 그의 소개로 경산시장에서 국제공산당원이라 자칭하는 굴절무삼랑을 만났다. 굴절은 관공서와 은행, 부호의 집에 폭탄을 던져 민심을 뒤흔들어야 혁명이 촉진된다고 주장했고, 그는 한 달쯤 뒤 굴절이 만주에서 들여온 뇌관·도화선과 50원의 자금을 받아 폭탄 제조법을 배웠다.&lt;br /&gt;
&lt;br /&gt;
그해 8월 그는 시험용 폭탄 두 개를 만들어 칠곡과 선산 경계의 봉화산에서 성능을 시험했다. 이어 10월 16일에는 실제 거사에 쓸 폭탄 네 개와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준비한 폭탄 한 개를 추가로 제조해 경북도청, 경북경찰부, 조선은행 대구지점, 식산은행 대구지점을 목표로 삼았다.&lt;br /&gt;
&lt;br /&gt;
10월 18일 오전, 그는 대구 덕흥여관에서 폭탄에 점화 준비를 한 뒤 여관 종업원 박노선에게 목표지점 네 곳에 폭탄을 배달해 달라고 전달했다. 그리고 같은 날 11시 50분경 폭발이 일어나 은행 직원과 일본 경찰 다섯 명이 중상을 입고, 은행 창문 수십 장이 산산이 부서졌다.&lt;br /&gt;
&lt;br /&gt;
경찰은 운반책이었던 박노선을 체포해 추궁했지만 그의 배후를 밝혀내지 못했다. 사건 이후 그는 선산군 해평면으로 숨어들었다가 안동과 영천에서 다시 거사를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lt;br /&gt;
&lt;br /&gt;
1928년 2월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에서 안경점을 하던 동생 장의환을 만나러 갔다가 며칠 머무는 사이, 그를 잡으려 한국에서 파견된 경북경찰부 형사들에게 1929년 2월 13일 밤 습격을 받아 붙잡혔다.&lt;br /&gt;
&lt;br /&gt;
송환된 그는 조선인 경찰들의 매국적 행태를 강하게 비난하며 “동족을 억압하는 조선인 경관의 죄악은 죽은 뒤에도 용서할 수 없다”고 외쳤다고 전해진다. 조사 과정에서도 그는 거사를 혼자 계획하고 실행했음을 분명히 했지만, 모진 고문을 피할 수는 없었다. 반년 뒤 열린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자 법정에서 바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고, 2심과 고등법원 상고까지 모두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lt;br /&gt;
&lt;br /&gt;
1930년 7월 31일, 그는 일본의 손에 의해 치욕스럽게 죽음을 맞기보다는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편이 저항의 마지막 표현이라고 판단해, 그날 밤 11시경 자결로 생을 마쳤다.&lt;br /&gt;
&lt;br /&gt;
[[파일:장진홍사형기사.jpg|500픽셀|섬네일|center|ⓒ 장진홍 의사의 사형 판결을 알리는 &amp;lt;동아일보&amp;gt; 기사(1930.2.18.) ⓒ 동아일보]]&lt;br /&gt;
==[[이육사(李陸史)]]와의 관계==&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margin:auto;&amp;quot;&lt;br /&gt;
|+ 장진홍과 이육사&lt;br /&gt;
|-&lt;br /&gt;
! 구분&lt;br /&gt;
! 장진홍 (張鎭弘) 의사&lt;br /&gt;
! 이육사 (李陸史) 시인&lt;br /&gt;
|-&lt;br /&gt;
| '''주요 활동 분야'''&lt;br /&gt;
| 무장 독립운동가, 의열투쟁&lt;br /&gt;
| 시인, 독립운동가 (의열단 활동)&lt;br /&gt;
|-&lt;br /&gt;
|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 역할'''&lt;br /&gt;
| '''진범''' (주도자)&lt;br /&gt;
| '''연루자''' (허위 조작으로 옥고를 치름)&lt;br /&gt;
|-&lt;br /&gt;
| '''투옥 및 최후'''&lt;br /&gt;
| 체포 후 사형 선고, 1930년 옥중 자결 순국&lt;br /&gt;
| 1년 7개월간 옥고 후 무혐의 석방, 이후에도 투옥을 반복하며 시 활동 전개&lt;br /&gt;
|-&lt;br /&gt;
| ''''육사' 호의 유래'''&lt;br /&gt;
| -&lt;br /&gt;
|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으로 수감 당시 수인번호 '''264'''에서 호를 취함&lt;br /&gt;
|-&lt;br /&gt;
| '''독립 운동 역할'''&lt;br /&gt;
|무장실천&lt;br /&gt;
|문화·정신 투쟁&lt;br /&gt;
|}&lt;br /&gt;
&amp;lt;/div&amp;gt;&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v2%3A2PACX-1vTnCkZ16HoB3Ryu_e5FhKe9MjGxm9mNIE4KerRfoVpJ3ZovBHlyNVJ7yRr1OEwG1iVERyZmu94BjZ8O&amp;amp;font=Default&amp;amp;lang=ko&amp;amp;initial_zoom=2&amp;amp;width=100%25&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div&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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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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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10T07:55:0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Imgpdnjs: &lt;/p&gt;
&lt;hr /&gt;
&lt;div&gt;[[분류:imgpdnjs]]&lt;br /&gt;
&lt;br /&gt;
[[파일:조선은행대구지점사진.jpg|500픽셀|섬네일|center|조선은행 대구지점 전경 ⓒ 대구역사문화대전]]&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lt;br /&gt;
&amp;quot;1927년 10월 18일, 한 낮에 조선은행 대구지점에서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그것은 잠자고 있던 한 민족에게는 독립의 함성이였으며 민족혼을 일깨운 한낮의 우렛소리였다.&amp;quot; &amp;lt;br/&amp;gt;이 사건은 장진홍이 일제에 저항하고자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폭탄을 배달하여 폭파시킨 사건이다.&lt;br /&gt;
&lt;br /&gt;
==역사적 배경==&lt;br /&gt;
3.1운동 이후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독립운동은 의열단을 중심으로 군사적인 항일 운동이 주를 이루었다. 이 시기 투쟁은 주로 손으로 던져서 터뜨리는 폭탄을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투쟁의 대상은 조선은행과 같은 경제 착취 기관이나 도청, 경찰서, 법원 같은 식민 통치 기구에 집중되었다. 장진홍은 1907년 인명학교 학생 때부터 항일의식을 배웠으며, 1916년 이내성(李乃成)의 권유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27년 4월, 장진홍은 이내성의 소개로 일본인 굴절무삼랑(堀切茂三郞)을 만났다. 공산주의자였던 굴절무삼랑은 혁명을 촉진하기 위해 장진홍에게 폭탄 제조법과 다이너마이트 뇌관, 도화선, 자금을 제공했다.&lt;br /&gt;
&lt;br /&gt;
==사건 설명==&lt;br /&gt;
장진홍은 폭탄 제조법을 익힌 후 봉화산에서 성능 실험을 마쳤다. 이후 그는 거사용 큰 폭탄 4개와 자살용 소형 폭탄 1개를 추가로 제조했다. 1927년 10월 17일, 장진홍은 폭탄을 싣고 대구로 이동하여 덕흥여관에 숙소를 잡았다. 장진홍이 노린 대상은 조선은행 대구지점, 경북도청, 식산은행 대구지점, 그리고 경북경찰부 네 곳이었다.&lt;br /&gt;
&lt;br /&gt;
10월 18일 오전 9시경, 장진홍은 폭탄에 점화포장을 한 뒤 여관 종업원 박노선에게 거사 목표지점 4곳에 송달을 부탁했다. 하지만 이 중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전달된 폭탄 1개만이 같은 날 오전 11시 50분쯤 폭발하여 은행원과 일제 경찰 등 5명이 중상을 입고 은행 창문 70여 장이 파손되었다.&lt;br /&gt;
&lt;br /&gt;
나머지 3곳에서 폭탄이 터지지 않았던 이유는, 조선은행에 근무하던 군인 출신 일본인 은행원 길촌결(吉村潔)이 폭탄 상자에서 화약 냄새를 맡았기 때문이다. 길촌결이 이를 인지하면서 나머지 폭탄의 배달에 문제가 생겨 3개 지점의 폭파는 일어나지 않았다.&lt;br /&gt;
&lt;br /&gt;
아래 지도에서 파란색은 폭발 예정지였지만 터지지 않은 곳이고, 빨간색은 실제로 폭발이 터진 조선은행 대구지점이다.&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amp;quot;https://www.google.com/maps/d/embed?mid=1Vbme0Wt5tZNnQRcv9tCNeZ6x62FsuF8&amp;amp;ehbc=2E312F&amp;quot; width=&amp;quot;640&amp;quot; height=&amp;quot;480&amp;quot;&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결과와 의의==&lt;br /&gt;
장진홍은 폭발 확인 후 피신했으나, 1929년 2월 일본 오사카에서 경북경찰부 형사들에게 체포되었다. 본국으로 송환된 장진홍은 자신을 취조하는 조선인 경관들의 행태를 질타하며 불굴의 독립의지를 과시했다. 그는 고문을 받은 끝에 1심과 2심에서 사형이 선고되자 &amp;quot;조선독립만세&amp;quot;를 외쳤다. 1930년 7월 31일 밤, 장진홍은 일제에 대한 마지막 항거로 자신의 손으로 목숨을 끊어 옥중 자결 순국했다. &lt;br /&gt;
이 사건의 여파로, 시인 [[이육사(李陸史)]]는 1927년 장진홍 의거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어 1년 7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그는 이때 받은 수인번호 264에서 따서 자신의 호를 '육사(陸史)'라고 지었다.&lt;br /&gt;
이육사 시인 외에도 장진홍의 어머니가 이 일로 체포된 바 있으며, 인동 장씨 일가인 장용희가 동료와 가족의 피해를 줄이고자 자결했고, 그의 친척인 장효식이 행방불명되는 등 주변 인물들이 이 사건으로 인해 큰 고초를 겪었다.&lt;br /&gt;
&lt;br /&gt;
이 사건은 1920년대 말 대구 지역의 대표적인 무장 독립운동이었으며, 거사가 국제공산당과 연계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lt;br /&gt;
&lt;br /&gt;
[[파일:장진홍판결문.jpg|300픽셀|섬네일|center|장진홍의 판결문 ⓒ 대구역사문화대전]]&lt;br /&gt;
&lt;br /&gt;
&lt;br /&gt;
==소설로 다시 재현해보는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lt;br /&gt;
&lt;br /&gt;
덕흥여관에 처음 들어갈 때 장진홍은 겨우 걷는 사람처럼 심하게 다리를 절뚝거렸다. 자전거를 나무 아래에 세우고 묶는 일도 간신히 해냈다. 사환 박노선이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이윽고 말을 걸었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1e90ff&amp;quot;&amp;gt;&amp;quot;와 카심니까(왜 그러십니까)? 크게 다친 거 같은데 자정건 우째 타고 오싰능교(자전거는 어떻게 타고 오셨습니까)?&amp;quot;&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ff8c00&amp;quot;&amp;gt;&amp;quot;내가 선물을 꼭 보내야 할 고마운 곳들이 몇 군데 있는데, 모두들 이 인근에 있다오. 그래서 이렇게 자전거에 선물들을 싣고 왔는데,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을 기약해야지요. 내리막길에서 자전거를 타다가 심하게 넘어지는 바람에 이리 다쳤지요.&amp;quot;&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장진홍이 서울말로 대답했다. 그렇게 다리를 전 것과 서울말을 쓴 것은 의거 후 일제 경찰의 수사에 혼선을 주려는 의도된 언행이었다. 자신을 노출하지 않으려면 다른 사람을 동원해야 하는데, 박노선에게 심부름을 시키면 적당하겠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다시 이튿날(18일), 장진홍은 박노선에게 '심부름값'을 주면서 부탁했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ff8c00&amp;quot;&amp;gt;&amp;quot;자고 나면 낫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다리가 퉁퉁 붓고 통증이 더 심해져서 아주 걷기가 힘들게 되었다오. 이것들이 모두 벌꿀상자인데 조선은행, 도청, 식산은행, 경찰서에 순서대로 급히 배달을 좀 해 주시오.&amp;quot;&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벌꿀 선물로 위장된 상자들 안에는 장진홍이 직접 제조한 시한폭탄들이 들어 있었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박노선은 짭짤한 심부름값이 흐뭇해 부랴부랴 상자들을 챙겨들고 조선은행 대구지점으로 갔다. 박노선은 장진홍이 시킨 대로 국고계 주임 복지흥삼(福地興三)을 찾았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1e90ff&amp;quot;&amp;gt;&amp;quot;선물 가꼬(가지고) 심부름 왔어에(왔어요), 주임님!&amp;quot;&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박노선은 평소 안면이 있는 복지흥삼에게 벌꿀 상자 하나를 건넸다. 그때 복지흥삼 곁에 군인 출신 일본인 은행원 길촌결(吉村潔)이 앉아 있었다. 그가 군인 출신답게 화약 냄새를 맡았다. 길촌결이 재빨리 포장 끈을 풀었다. 상자 안에는 도화선에 불이 붙은 폭탄이 이글거리고 있었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a020f0&amp;quot;&amp;gt;&amp;quot;으악! 이게 뭐야? 이게 뭐야!&amp;quot;&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복지흥삼이 비명을 질러댔다. 길촌결이 재빠르게 도화선을 잘랐다. 아직 불이 옮겨 붙지 않은 나머지 세 상자는 황급히 은행 앞뜰 자전거 주차장로 옮겨졌다. 신고를 받은 경찰이 달려왔고, 박노선은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lt;br /&gt;
&lt;br /&gt;
경찰은 주차장에 있는 폭탄 셋을 다시 한길로 내놓았다. 옮긴 지 1∼2분 만에 폭탄 셋은 요란한 굉음을 내며 잇따라 폭발했다. 은행원, 경찰 등 5명이 파편에 맞아 중상을 입었고, 은행 창문 70여 개가 박살이 나면서 파편이 대구역까지 날아갔다.&lt;br /&gt;
&lt;br /&gt;
폭파 의거는 '절반의 성공'에 멈추었지만 세상을 흔들었다. 일제 경찰은 1928년 1월 장진홍이 '범인'인 줄 파악하지 못한 채, 이정기 등 독립운동가 8명을 검거해 대구 형무소에 투옥했다. 이때 이원록(이육사)도 자신의 형·동생과 더불어 옥고를 겪었다. 일경은 악독한 고문 끝에 이들을 진범으로 조작해 재판에 회부했다.&lt;br /&gt;
&lt;br /&gt;
의거가 완전한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을 한탄한 장진홍 지사는 1927년 11월과 1928년 1월 안동 경찰서와 영천 경찰서 폭파를 계획했다. 그러나 끝내 실행에 옮기지 못한 상태에서, 검거의 포위망이 좁혀오자 몸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갔다.&lt;br /&gt;
&lt;br /&gt;
일본에서도 장진홍은 새로운 거사 준비에 골몰했다. 하지만 동생의 오사카 소재 안경점에서 마침내 검거되었다. 장 지사를 체포한 일제 경찰은 조선인이었다. 조선인 형사 최덕술은 1929년 2월 19일 의기양양하게 장 지사를 대구로 압송했다.&lt;br /&gt;
&lt;br /&gt;
혹독한 고문이 시작되었다. 더 많은 관련자들을 체포해 공적을 쌓으려는 조선인 형사들의 광분은 그야말로 '필설로 형언'하기 어려울 만큼 비인간적이었다. 하지만 장 지사는 오직 자신의 단독 의거라는 점만 되풀이해서 강조하며 오히려 그들을 꾸짖었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ff8c00&amp;quot;&amp;gt;&amp;quot;조선 민족의 피를 받은 자로서 일제 경찰의 주구가 되어 동족의 해방운동을 이다지도 방해하는 악질 조선인 경관의 죄상이야말로 나의 죽은 혼이라도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amp;quot;&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여섯 달이나 악랄한 고문을 당한 끝에 장 지사는 재판에 회부되었다. 1930년 2월 17일 대구지방법원 1심 재판은 '사형'을 언도했다. 그 뒤 대구복심법원 재판도, 고등법원 상고 결과도 마찬가지로 '사형'이었다. 장 지사는 사형 선고가 내려질 때마다 재판정에서 &amp;lt;span style=&amp;quot;color:#ff8c00&amp;quot;&amp;gt;&amp;quot;대한독립만세!!!&amp;quot;&amp;lt;/span&amp;gt;를 외쳤다.&lt;br /&gt;
&lt;br /&gt;
1930년 7월 31일, 장 지사는 &amp;lt;span style=&amp;quot;color:#ff8c00&amp;quot;&amp;gt;&amp;quot;일제에게 치욕스러운 죽음을 당하느니 차라리 내 손으로 목숨을 끊는 것이 일제에 대한 마지막 항거가 아니겠는가!&amp;quot;&amp;lt;/span&amp;gt; 하고 결심했다. 이윽고 그날 밤 11시경 장 지사가 자결·순국하였다.&lt;/div&gt;</summary>
		<author><name>Imgpdnjs</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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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A1%B0%EC%84%A0%EC%9D%80%ED%96%89_%EB%8C%80%EA%B5%AC%EC%A7%80%EC%A0%90_%ED%8F%AD%ED%8C%8C_%EC%82%AC%EA%B1%B4&amp;diff=65617</id>
		<title>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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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10T07:52:2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Imgpdnjs: &lt;/p&gt;
&lt;hr /&gt;
&lt;div&gt;[[분류:imgpdnjs]]&lt;br /&gt;
&lt;br /&gt;
[[파일:조선은행대구지점사진.jpg|500픽셀|섬네일|center|조선은행 대구지점 전경 ⓒ 대구역사문화대전]]&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lt;br /&gt;
&amp;quot;1927년 10월 18일, 한 낮에 조선은행 대구지점에서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그것은 잠자고 있던 한 민족에게는 독립의 함성이였으며 민족혼을 일깨운 한낮의 우렛소리였다.&amp;quot; &amp;lt;br/&amp;gt;이 사건은 장진홍이 일제에 저항하고자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폭탄을 배달하여 폭파시킨 사건이다.&lt;br /&gt;
&lt;br /&gt;
==역사적 배경==&lt;br /&gt;
3.1운동 이후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독립운동은 의열단을 중심으로 군사적인 항일 운동이 주를 이루었다. 이 시기 투쟁은 주로 손으로 던져서 터뜨리는 폭탄을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투쟁의 대상은 조선은행과 같은 경제 착취 기관이나 도청, 경찰서, 법원 같은 식민 통치 기구에 집중되었다. 장진홍은 1907년 인명학교 학생 때부터 항일의식을 배웠으며, 1916년 이내성(李乃成)의 권유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27년 4월, 장진홍은 이내성의 소개로 일본인 굴절무삼랑(堀切茂三郞)을 만났다. 공산주의자였던 굴절무삼랑은 혁명을 촉진하기 위해 장진홍에게 폭탄 제조법과 다이너마이트 뇌관, 도화선, 자금을 제공했다.&lt;br /&gt;
&lt;br /&gt;
==사건 설명==&lt;br /&gt;
장진홍은 폭탄 제조법을 익힌 후 봉화산에서 성능 실험을 마쳤다. 이후 그는 거사용 큰 폭탄 4개와 자살용 소형 폭탄 1개를 추가로 제조했다. 1927년 10월 17일, 장진홍은 폭탄을 싣고 대구로 이동하여 덕흥여관에 숙소를 잡았다. 장진홍이 노린 대상은 조선은행 대구지점, 경북도청, 식산은행 대구지점, 그리고 경북경찰부 네 곳이었다.&lt;br /&gt;
&lt;br /&gt;
10월 18일 오전 9시경, 장진홍은 폭탄에 점화포장을 한 뒤 여관 종업원 박노선에게 거사 목표지점 4곳에 송달을 부탁했다. 하지만 이 중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전달된 폭탄 1개만이 같은 날 오전 11시 50분쯤 폭발하여 은행원과 일제 경찰 등 5명이 중상을 입고 은행 창문 70여 장이 파손되었다.&lt;br /&gt;
&lt;br /&gt;
나머지 3곳에서 폭탄이 터지지 않았던 이유는, 조선은행에 근무하던 군인 출신 일본인 은행원 길촌결(吉村潔)이 폭탄 상자에서 화약 냄새를 맡았기 때문이다. 길촌결이 이를 인지하면서 나머지 폭탄의 배달에 문제가 생겨 3개 지점의 폭파는 일어나지 않았다.&lt;br /&gt;
&lt;br /&gt;
아래 지도에서 파란색은 폭발 예정지였지만 터지지 않은 곳이고, 빨간색은 실제로 폭발이 터진 조선은행 대구지점이다.&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amp;quot;https://www.google.com/maps/d/embed?mid=1Vbme0Wt5tZNnQRcv9tCNeZ6x62FsuF8&amp;amp;ehbc=2E312F&amp;quot; width=&amp;quot;640&amp;quot; height=&amp;quot;480&amp;quot;&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결과와 의의==&lt;br /&gt;
장진홍은 폭발 확인 후 피신했으나, 1929년 2월 일본 오사카에서 경북경찰부 형사들에게 체포되었다. 본국으로 송환된 장진홍은 자신을 취조하는 조선인 경관들의 행태를 질타하며 불굴의 독립의지를 과시했다. 그는 고문을 받은 끝에 1심과 2심에서 사형이 선고되자 &amp;quot;조선독립만세&amp;quot;를 외쳤다. 1930년 7월 31일 밤, 장진홍은 일제에 대한 마지막 항거로 자신의 손으로 목숨을 끊어 옥중 자결 순국했다. &lt;br /&gt;
이 사건의 여파로, 시인 [[이육사(李陸史)]]는 1927년 장진홍 의거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어 1년 7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그는 이때 받은 수인번호 264에서 따서 자신의 호를 '육사(陸史)'라고 지었다.&lt;br /&gt;
이육사 시인 외에도 장진홍의 어머니가 이 일로 체포된 바 있으며, 인동 장씨 일가인 장용희가 동료와 가족의 피해를 줄이고자 자결했고, 그의 친척인 장효식이 행방불명되는 등 주변 인물들이 이 사건으로 인해 큰 고초를 겪었다.&lt;br /&gt;
&lt;br /&gt;
이 사건은 1920년대 말 대구 지역의 대표적인 무장 독립운동이었으며, 거사가 국제공산당과 연계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lt;br /&gt;
&lt;br /&gt;
[[파일:장진홍판결문.jpg|300픽셀|섬네일|center|장진홍의 판결문 ⓒ 대구역사문화대전]]&lt;br /&gt;
&lt;br /&gt;
&lt;br /&gt;
==소설로 다시 재현해보는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lt;br /&gt;
&lt;br /&gt;
덕흥여관에 처음 들어갈 때 장진홍은 겨우 걷는 사람처럼 심하게 다리를 절뚝거렸다. 자전거를 나무 아래에 세우고 묶는 일도 간신히 해냈다. 사환 박노선이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이윽고 말을 걸었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1e90ff&amp;quot;&amp;gt;&amp;quot;와 카심니까(왜 그러십니까)? 크게 다친 거 같은데 자정건 우째 타고 오싰능교(자전거는 어떻게 타고 오셨습니까)?&amp;quot;&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amp;quot;내가 선물을 꼭 보내야 할 고마운 곳들이 몇 군데 있는데, 모두들 이 인근에 있다오. 그래서 이렇게 자전거에 선물들을 싣고 왔는데,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을 기약해야지요. 내리막길에서 자전거를 타다가 심하게 넘어지는 바람에 이리 다쳤지요.&amp;quot;&lt;br /&gt;
&lt;br /&gt;
장진홍이 서울말로 대답했다. 그렇게 다리를 전 것과 서울말을 쓴 것은 의거 후 일제 경찰의 수사에 혼선을 주려는 의도된 언행이었다. 자신을 노출하지 않으려면 다른 사람을 동원해야 하는데, 박노선에게 심부름을 시키면 적당하겠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다시 이튿날(18일), 장진홍은 박노선에게 '심부름값'을 주면서 부탁했다.&lt;br /&gt;
&lt;br /&gt;
&amp;quot;자고 나면 낫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다리가 퉁퉁 붓고 통증이 더 심해져서 아주 걷기가 힘들게 되었다오. 이것들이 모두 벌꿀상자인데 조선은행, 도청, 식산은행, 경찰서에 순서대로 급히 배달을 좀 해 주시오.&amp;quot;&lt;br /&gt;
&lt;br /&gt;
벌꿀 선물로 위장된 상자들 안에는 장진홍이 직접 제조한 시한폭탄들이 들어 있었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박노선은 짭짤한 심부름값이 흐뭇해 부랴부랴 상자들을 챙겨들고 조선은행 대구지점으로 갔다. 박노선은 장진홍이 시킨 대로 국고계 주임 복지흥삼(福地興三)을 찾았다.&lt;br /&gt;
&lt;br /&gt;
&amp;quot;선물 가꼬(가지고) 심부름 왔어에(왔어요), 주임님!&amp;quot;&lt;br /&gt;
&lt;br /&gt;
박노선은 평소 안면이 있는 복지흥삼에게 벌꿀 상자 하나를 건넸다. 그때 복지흥삼 곁에 군인 출신 일본인 은행원 길촌결(吉村潔)이 앉아 있었다. 그가 군인 출신답게 화약 냄새를 맡았다. 길촌결이 재빨리 포장 끈을 풀었다. 상자 안에는 도화선에 불이 붙은 폭탄이 이글거리고 있었다.&lt;br /&gt;
&lt;br /&gt;
&amp;quot;으악! 이게 뭐야? 이게 뭐야!&amp;quot;&lt;br /&gt;
&lt;br /&gt;
복지흥삼이 비명을 질러댔다. 길촌결이 재빠르게 도화선을 잘랐다. 아직 불이 옮겨 붙지 않은 나머지 세 상자는 황급히 은행 앞뜰 자전거 주차장로 옮겨졌다. 신고를 받은 경찰이 달려왔고, 박노선은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lt;br /&gt;
&lt;br /&gt;
경찰은 주차장에 있는 폭탄 셋을 다시 한길로 내놓았다. 옮긴 지 1∼2분 만에 폭탄 셋은 요란한 굉음을 내며 잇따라 폭발했다. 은행원, 경찰 등 5명이 파편에 맞아 중상을 입었고, 은행 창문 70여 개가 박살이 나면서 파편이 대구역까지 날아갔다.&lt;br /&gt;
&lt;br /&gt;
폭파 의거는 '절반의 성공'에 멈추었지만 세상을 흔들었다. 일제 경찰은 1928년 1월 장진홍이 '범인'인 줄 파악하지 못한 채, 이정기 등 독립운동가 8명을 검거해 대구 형무소에 투옥했다. 이때 이원록(이육사)도 자신의 형·동생과 더불어 옥고를 겪었다. 일경은 악독한 고문 끝에 이들을 진범으로 조작해 재판에 회부했다.&lt;br /&gt;
&lt;br /&gt;
의거가 완전한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을 한탄한 장진홍 지사는 1927년 11월과 1928년 1월 안동 경찰서와 영천 경찰서 폭파를 계획했다. 그러나 끝내 실행에 옮기지 못한 상태에서, 검거의 포위망이 좁혀오자 몸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갔다.&lt;br /&gt;
&lt;br /&gt;
일본에서도 장진홍은 새로운 거사 준비에 골몰했다. 하지만 동생의 오사카 소재 안경점에서 마침내 검거되었다. 장 지사를 체포한 일제 경찰은 조선인이었다. 조선인 형사 최덕술은 1929년 2월 19일 의기양양하게 장 지사를 대구로 압송했다.&lt;br /&gt;
&lt;br /&gt;
혹독한 고문이 시작되었다. 더 많은 관련자들을 체포해 공적을 쌓으려는 조선인 형사들의 광분은 그야말로 '필설로 형언'하기 어려울 만큼 비인간적이었다. 하지만 장 지사는 오직 자신의 단독 의거라는 점만 되풀이해서 강조하며 오히려 그들을 꾸짖었다.&lt;br /&gt;
&lt;br /&gt;
&amp;quot;조선 민족의 피를 받은 자로서 일제 경찰의 주구가 되어 동족의 해방운동을 이다지도 방해하는 악질 조선인 경관의 죄상이야말로 나의 죽은 혼이라도 용서할 수 않을 것이다!&amp;quot;&lt;br /&gt;
&lt;br /&gt;
여섯 달이나 악랄한 고문을 당한 끝에 장 지사는 재판에 회부되었다. 1930년 2월 17일 대구지방법원 1심 재판은 '사형'을 언도했다. 그 뒤 대구복심법원 재판도, 고등법원 상고 결과도 마찬가지로 '사형'이었다. 장 지사는 사형 선고가 내려질 때마다 재판정에서 &amp;quot;대한독립만세!!!&amp;quot;를 외쳤다.&lt;br /&gt;
&lt;br /&gt;
1930년 7월 31일, 장 지사는 &amp;quot;일제에게 치욕스러운 죽음을 당하느니 차라리 내 손으로 목숨을 끊는 것이 일제에 대한 마지막 항거가 아니겠는가!&amp;quot; 하고 결심했다. 이윽고 그날 밤 11시경 장 지사가 자결·순국하였다.&lt;/div&gt;</summary>
		<author><name>Imgpdnjs</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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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이육사(李陸史)</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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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10T07:48:2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Imgpdnjs: &lt;/p&gt;
&lt;hr /&gt;
&lt;div&gt;[[분류:imgpdnjs]]&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파일:이육사.jpg]]&lt;br /&gt;
&amp;lt;/div&amp;gt;&lt;br /&gt;
==기본 정보==&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margin:auto;&amp;quot;&lt;br /&gt;
|+ '''이육사'''&lt;br /&gt;
! 항목 !! 내용&lt;br /&gt;
|-&lt;br /&gt;
| 본명 || 이원록&lt;br /&gt;
|-&lt;br /&gt;
| 출생 || 1904년 5월 18일&lt;br /&gt;
|-&lt;br /&gt;
| 출생지 || 경상북도 예안군 의동면 원촌동 원촌마을&lt;br /&gt;
|-&lt;br /&gt;
| 사망 || 1944년 1월 16일&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이육사는 1904년 5월 18일, 지금의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인 옛 예안군 일대에서 태어났다. 퇴계 이황의 후손인 아버지 이가호와 어머니 허길 사이에서 여섯 형제 중 둘째였다. 훗날 그는 영천 화북면 오동리 출신인 안일양과 결혼하게 된다.&lt;br /&gt;
&lt;br /&gt;
어린 시절 그는 조부 이중직에게서 소학을 배우며 한학을 익혔다. 조부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진성이씨 문중에서 운영하던 보문의숙(훗날 도산공립보통학교)에서 공부했고, 이때 배운 한학의 영향은 그의 문학 세계에도 묻어난다. 졸업 후 가족이 대구로 이주했고, 그는 열아홉에 영천의 백학학원에서 교원으로 잠시 일했다. 1924년에는 일본 도쿄에서 예비학교 과정을 수학했으나 중도에 그만두고, 다음 해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 사회학을 공부했지만 역시 2학년 때 학업을 접었다.&lt;br /&gt;
&lt;br /&gt;
1927년 그는 [[장진홍_1895]]이 일으킨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과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대구형무소에서 약 1년 반을 지냈다. 이때의 수인번호 ‘264’를 따서 훗날 자신의 호를 ‘육사’라 짓는다.&lt;br /&gt;
&lt;br /&gt;
1932년 그는 만주 펑톈으로 건너가 [[윤세주_1901]]를 만나 의열단 입단 권유를 받았고, 난징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으로 들어가 폭탄 제조와 투척, 변장, 무기 운반, 피신 기술 등 다양한 실전 교육을 받았다. 사격 실력은 특히 뛰어났다고 전해진다.&lt;br /&gt;
&lt;br /&gt;
1933년 귀국 후에는 신문·잡지를 오가며 시와 논문, 시나리오 등 여러 글을 썼고, 루쉰의 소설 《고향》을 번역하기도 했다. 하지만 1934년 의열단 출신이라는 이유로 다시 검거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을 당했고, 몇 달 뒤 기소유예로 풀려났다.&lt;br /&gt;
&lt;br /&gt;
1943년 베이징으로 건너갔다가 어머니와 큰형의 소상을 위해 5월에 귀국했다. 그러 이 해 6월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었고, 결국 1944년 1월 16일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교도소에서 옥사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https://www.youtube.com/watch?v=gCcfvA4fGKY 광복 79주년 특별영상 : 행동하는 지성, 저항시인 이육사 이야기]&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width=&amp;quot;400&amp;quot; height=&amp;quot;300&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watch?v=gCcfvA4fGKY 광복 79주년 특별영상 : 행동하는 지성, 저항시인 이육사 이야기&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amp;lt;/div&amp;gt;&lt;br /&gt;
&lt;br /&gt;
==[[이육사의 기자 생활]]==&lt;br /&gt;
많은 사람들이 이육사의 문학 작품만을 알고 기자 생활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위 페이지에서는 이육사의 기자 생활에 대해 더 자세히 서술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청포도'에 스민 가족에 대한 향수와 해방의 염원==&lt;br /&gt;
[[이육사의 '청포도']]&amp;lt;/div&amp;gt;는 이육사가 일제강점기에 경험한 상실과 분리를 바탕으로,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해방에 대한 염원을 동시에 그려낸 시이다. 시에서 드러난 익어가는 청포도의 모습과 돌아올 이를 기다리는 마음은 개인의 정서와 민족적인 바람이 자연스럽게 중첩되는 지점을 보여준다.&lt;br /&gt;
&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v2%3A2PACX-1vTBMVIXErpB6OYWbzC-nzv_0t_UNL2Q64IzD8TI-b1EywFJnOKdoMzdLiVC3NeAgyn4NLe-NEfPjK34&amp;amp;font=Default&amp;amp;lang=ko&amp;amp;initial_zoom=2&amp;amp;width=100%25&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이육사를 기억하는 장소==&lt;br /&gt;
이육사는 경상북도에서 태어났지만 전국적으로 이육사와 관련된 장소들이 많다. 아래 지도는 이육사와 관련된 모든 장소들을 정리한 지도이다. 대단한 시인 이육사를 기억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방문하기를 추천하한다.&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amp;quot;https://www.google.com/maps/d/embed?mid=1h1k2e9-GTfl5Bzcv0D2CRQG12cR998o&amp;amp;ehbc=2E312F&amp;quot; width=&amp;quot;640&amp;quot; height=&amp;quot;480&amp;quot;&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amp;lt;/div&amp;gt;&lt;br /&gt;
&lt;br /&gt;
# '''청포도 문학공원'''&lt;br /&gt;
#: 이육사의 대표 시 「청포도」의 영감을 얻은 장소로 알려져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청림동 일대에 조성되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포항 청림동 일대(현재 해병사단 내 일월지 주변)에 동양 최대의 포도원이 있었는데, 이육사가 이곳에서 영일만을 바라보며 시를 구상했다는 문헌 기록을 바탕으로 한다. 공원에는 청포도 시비와 함께 문화축제가 열리며 시인의 문학 정신을 기리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 '''이육사문학관'''&lt;br /&gt;
#: 이육사 시인의 고향인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에 2004년 탄신 100주년을 맞아 설립되었다. 그의 민족정신과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한 공간으로, 친필 원고, 시집, 독립운동 관련 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다. 문학관 주변에는 복원된 생가, 청포도 샘, 절정 시비 등이 함께 조성되어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 '''이육사 생가'''&lt;br /&gt;
#: 이육사가 태어난 집이다. 원래 안동댐 건설로 인해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1976년 안동시 태화동으로 옮겨졌다. 이후 육사 탄신 100주년(2004년)을 기념하여 이육사문학관 옆(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에 원래의 건축 양식을 살려 복원되었다. 조선 후기 전통적인 반가(班家)의 건축 양식을 띄고 있으며, 특히 사랑채와 안채의 크기와 구조가 거의 동일하게 대칭을 이루는 독특한 특징이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 '''문화공간 이육사'''&lt;br /&gt;
#: 이육사가 1939년 무렵 가족과 거주하며 「청포도」 등 주요 작품을 발표했던 서울특별시 성북구 종암동의 역사적 의의를 기념하여 2019년에 개관한 복합 문화 공간이다. 각 층의 명칭을 '청포도', '교목', '절정' 등 그의 대표 시 제목에서 따왔으며, 전시, 강좌, 문화 행사 등을 통해 시인의 삶과 문학을 시민들과 공유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 '''264작은문학관'''&lt;br /&gt;
#: 이육사의 필명이 된 수인번호 '264'를 기려 대구광역시 중구 북성로에 조성된 작은 문학관이다. 이육사는 1927년 장진홍 의거로 인해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이곳에서 '264'라는 수감번호를 받았다. 일제강점기 적산가옥을 리모델링하여 1층은 카페와 기획전시실, 2층은 상설전시실로 운영되며, 이육사의 생애와 작품을 살펴볼 수 있다.&lt;/div&gt;</summary>
		<author><name>Imgpdnjs</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D%B4%EC%9C%A1%EC%82%AC(%E6%9D%8E%E9%99%B8%E5%8F%B2)&amp;diff=65604</id>
		<title>이육사(李陸史)</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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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10T07:47:5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Imgpdnjs: &lt;/p&gt;
&lt;hr /&gt;
&lt;div&gt;[[분류:imgpdnjs]]&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파일:이육사.jpg]]&lt;br /&gt;
&amp;lt;/div&amp;gt;&lt;br /&gt;
==기본 정보==&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margin:auto;&amp;quot;&lt;br /&gt;
|+ '''이육사'''&lt;br /&gt;
! 항목 !! 내용&lt;br /&gt;
|-&lt;br /&gt;
| 본명 || 이원록&lt;br /&gt;
|-&lt;br /&gt;
| 출생 || 1904년 5월 18일&lt;br /&gt;
|-&lt;br /&gt;
| 출생지 || 경상북도 예안군 의동면 원촌동 원촌마을&lt;br /&gt;
|-&lt;br /&gt;
| 사망 || 1944년 1월 16일&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이육사는 1904년 5월 18일, 지금의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인 옛 예안군 일대에서 태어났다. 퇴계 이황의 후손인 아버지 이가호와 어머니 허길 사이에서 여섯 형제 중 둘째였다. 훗날 그는 영천 화북면 오동리 출신인 안일양과 결혼하게 된다.&lt;br /&gt;
&lt;br /&gt;
어린 시절 그는 조부 이중직에게서 소학을 배우며 한학을 익혔다. 조부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진성이씨 문중에서 운영하던 보문의숙(훗날 도산공립보통학교)에서 공부했고, 이때 배운 한학의 영향은 그의 문학 세계에도 묻어난다. 졸업 후 가족이 대구로 이주했고, 그는 열아홉에 영천의 백학학원에서 교원으로 잠시 일했다. 1924년에는 일본 도쿄에서 예비학교 과정을 수학했으나 중도에 그만두고, 다음 해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 사회학을 공부했지만 역시 2학년 때 학업을 접었다.&lt;br /&gt;
&lt;br /&gt;
1927년 그는 [[장진홍_1895]]이 일으킨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과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대구형무소에서 약 1년 반을 지냈다. 이때의 수인번호 ‘264’를 따서 훗날 자신의 호를 ‘육사’라 짓는다.&lt;br /&gt;
&lt;br /&gt;
1932년 그는 만주 펑톈으로 건너가 [[윤세주_1901]]를 만나 의열단 입단 권유를 받았고, 난징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으로 들어가 폭탄 제조와 투척, 변장, 무기 운반, 피신 기술 등 다양한 실전 교육을 받았다. 사격 실력은 특히 뛰어났다고 전해진다.&lt;br /&gt;
&lt;br /&gt;
1933년 귀국 후에는 신문·잡지를 오가며 시와 논문, 시나리오 등 여러 글을 썼고, 루쉰의 소설 《고향》을 번역하기도 했다. 하지만 1934년 의열단 출신이라는 이유로 다시 검거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을 당했고, 몇 달 뒤 기소유예로 풀려났다.&lt;br /&gt;
&lt;br /&gt;
1943년 베이징으로 건너갔다가 어머니와 큰형의 소상을 위해 5월에 귀국했다. 그러 이 해 6월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었고, 결국 1944년 1월 16일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교도소에서 옥사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https://www.youtube.com/watch?v=gCcfvA4fGKY 광복 79주년 특별영상 : 행동하는 지성, 저항시인 이육사 이야기]&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width=&amp;quot;400&amp;quot; height=&amp;quot;300&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watch?v=gCcfvA4fGKY 광복 79주년 특별영상 : 행동하는 지성, 저항시인 이육사 이야기&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amp;lt;/div&amp;gt;&lt;br /&gt;
&lt;br /&gt;
==[[이육사의 기자 생활]]==&lt;br /&gt;
많은 사람들이 이육사의 문학 작품만을 알고 기자 생활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위 페이지에서는 이육사의 기자 생활에 대해 더 자세히 서술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청포도'에 스민 가족에 대한 향수와 해방의 염원==&lt;br /&gt;
[[이육사의 '청포도']]&amp;lt;/div&amp;gt;는 이육사가 일제강점기에 경험한 상실과 분리를 바탕으로,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해방에 대한 염원을 동시에 그려낸 시이다. 시에서 드러난 익어가는 청포도의 모습과 돌아올 이를 기다리는 마음은 개인의 정서와 민족적인 바람이 자연스럽게 중첩되는 지점을 보여준다.&lt;br /&gt;
&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v2%3A2PACX-1vTBMVIXErpB6OYWbzC-nzv_0t_UNL2Q64IzD8TI-b1EywFJnOKdoMzdLiVC3NeAgyn4NLe-NEfPjK34&amp;amp;font=Default&amp;amp;lang=ko&amp;amp;initial_zoom=2&amp;amp;width=100%25&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이육사를 기억하는 장소==&lt;br /&gt;
이육사는 경상북도에서 태어났지만 전국적으로 이육사와 관련된 장소들이 많다. 아래 지도는 이육사와 관련된 모든 장소들을 정리한 지도이다. 대단한 시인 이육사를 기억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방문하기를 추천하한다.&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amp;quot;https://www.google.com/maps/d/embed?mid=1h1k2e9-GTfl5Bzcv0D2CRQG12cR998o&amp;amp;ehbc=2E312F&amp;quot; width=&amp;quot;640&amp;quot; height=&amp;quot;480&amp;quot;&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amp;lt;/div&amp;gt;&lt;br /&gt;
&lt;br /&gt;
# '''청포도 문학공원'''&lt;br /&gt;
#: 이육사의 대표 시 「청포도」의 영감을 얻은 장소로 알려져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청림동 일대에 조성되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포항 청림동 일대(현재 해병사단 내 일월지 주변)에 동양 최대의 포도원이 있었는데, 이육사가 이곳에서 영일만을 바라보며 시를 구상했다는 문헌 기록을 바탕으로 한다. 공원에는 청포도 시비와 함께 문화축제가 열리며 시인의 문학 정신을 기리고 있다.&lt;br /&gt;
&lt;br /&gt;
# '''이육사문학관'''&lt;br /&gt;
#: 이육사 시인의 고향인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에 2004년 탄신 100주년을 맞아 설립되었다. 그의 민족정신과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한 공간으로, 친필 원고, 시집, 독립운동 관련 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다. 문학관 주변에는 복원된 생가, 청포도 샘, 절정 시비 등이 함께 조성되어 있다.&lt;br /&gt;
&lt;br /&gt;
# '''이육사 생가'''&lt;br /&gt;
#: 이육사가 태어난 집이다. 원래 안동댐 건설로 인해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1976년 안동시 태화동으로 옮겨졌다. 이후 육사 탄신 100주년(2004년)을 기념하여 이육사문학관 옆(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에 원래의 건축 양식을 살려 복원되었다. 조선 후기 전통적인 반가(班家)의 건축 양식을 띄고 있으며, 특히 사랑채와 안채의 크기와 구조가 거의 동일하게 대칭을 이루는 독특한 특징이 있다.&lt;br /&gt;
&lt;br /&gt;
# '''문화공간 이육사'''&lt;br /&gt;
#: 이육사가 1939년 무렵 가족과 거주하며 「청포도」 등 주요 작품을 발표했던 서울특별시 성북구 종암동의 역사적 의의를 기념하여 2019년에 개관한 복합 문화 공간이다. 각 층의 명칭을 '청포도', '교목', '절정' 등 그의 대표 시 제목에서 따왔으며, 전시, 강좌, 문화 행사 등을 통해 시인의 삶과 문학을 시민들과 공유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lt;br /&gt;
&lt;br /&gt;
# '''264작은문학관'''&lt;br /&gt;
#: 이육사의 필명이 된 수인번호 '264'를 기려 대구광역시 중구 북성로에 조성된 작은 문학관이다. 이육사는 1927년 장진홍 의거로 인해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이곳에서 '264'라는 수감번호를 받았다. 일제강점기 적산가옥을 리모델링하여 1층은 카페와 기획전시실, 2층은 상설전시실로 운영되며, 이육사의 생애와 작품을 살펴볼 수 있다.&lt;/div&gt;</summary>
		<author><name>Imgpdnjs</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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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D%B4%EC%9C%A1%EC%82%AC(%E6%9D%8E%E9%99%B8%E5%8F%B2)&amp;diff=65603</id>
		<title>이육사(李陸史)</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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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10T07:47:17Z</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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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분류:imgpdnjs]]&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파일:이육사.jpg]]&lt;br /&gt;
&amp;lt;/div&amp;gt;&lt;br /&gt;
==기본 정보==&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margin:auto;&amp;quot;&lt;br /&gt;
|+ '''이육사'''&lt;br /&gt;
! 항목 !! 내용&lt;br /&gt;
|-&lt;br /&gt;
| 본명 || 이원록&lt;br /&gt;
|-&lt;br /&gt;
| 출생 || 1904년 5월 18일&lt;br /&gt;
|-&lt;br /&gt;
| 출생지 || 경상북도 예안군 의동면 원촌동 원촌마을&lt;br /&gt;
|-&lt;br /&gt;
| 사망 || 1944년 1월 16일&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이육사는 1904년 5월 18일, 지금의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인 옛 예안군 일대에서 태어났다. 퇴계 이황의 후손인 아버지 이가호와 어머니 허길 사이에서 여섯 형제 중 둘째였다. 훗날 그는 영천 화북면 오동리 출신인 안일양과 결혼하게 된다.&lt;br /&gt;
&lt;br /&gt;
어린 시절 그는 조부 이중직에게서 소학을 배우며 한학을 익혔다. 조부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진성이씨 문중에서 운영하던 보문의숙(훗날 도산공립보통학교)에서 공부했고, 이때 배운 한학의 영향은 그의 문학 세계에도 묻어난다. 졸업 후 가족이 대구로 이주했고, 그는 열아홉에 영천의 백학학원에서 교원으로 잠시 일했다. 1924년에는 일본 도쿄에서 예비학교 과정을 수학했으나 중도에 그만두고, 다음 해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 사회학을 공부했지만 역시 2학년 때 학업을 접었다.&lt;br /&gt;
&lt;br /&gt;
1927년 그는 [[장진홍_1895]]이 일으킨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과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대구형무소에서 약 1년 반을 지냈다. 이때의 수인번호 ‘264’를 따서 훗날 자신의 호를 ‘육사’라 짓는다.&lt;br /&gt;
&lt;br /&gt;
1932년 그는 만주 펑톈으로 건너가 [[윤세주_1901]]를 만나 의열단 입단 권유를 받았고, 난징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으로 들어가 폭탄 제조와 투척, 변장, 무기 운반, 피신 기술 등 다양한 실전 교육을 받았다. 사격 실력은 특히 뛰어났다고 전해진다.&lt;br /&gt;
&lt;br /&gt;
1933년 귀국 후에는 신문·잡지를 오가며 시와 논문, 시나리오 등 여러 글을 썼고, 루쉰의 소설 《고향》을 번역하기도 했다. 하지만 1934년 의열단 출신이라는 이유로 다시 검거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을 당했고, 몇 달 뒤 기소유예로 풀려났다.&lt;br /&gt;
&lt;br /&gt;
1943년 베이징으로 건너갔다가 어머니와 큰형의 소상을 위해 5월에 귀국했다. 그러 이 해 6월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었고, 결국 1944년 1월 16일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교도소에서 옥사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https://www.youtube.com/watch?v=gCcfvA4fGKY 광복 79주년 특별영상 : 행동하는 지성, 저항시인 이육사 이야기]&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width=&amp;quot;400&amp;quot; height=&amp;quot;300&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watch?v=gCcfvA4fGKY 광복 79주년 특별영상 : 행동하는 지성, 저항시인 이육사 이야기&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amp;lt;/div&amp;gt;&lt;br /&gt;
&lt;br /&gt;
==[[이육사의 기자 생활]]==&lt;br /&gt;
많은 사람들이 이육사의 문학 작품만을 알고 기자 생활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위 페이지에서는 이육사의 기자 생활에 대해 더 자세히 서술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청포도'에 스민 가족에 대한 향수와 해방의 염원==&lt;br /&gt;
[[이육사의 '청포도']]&amp;lt;/div&amp;gt;는 이육사가 일제강점기에 경험한 상실과 분리를 바탕으로,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해방에 대한 염원을 동시에 그려낸 시이다. 시에서 드러난 익어가는 청포도의 모습과 돌아올 이를 기다리는 마음은 개인의 정서와 민족적인 바람이 자연스럽게 중첩되는 지점을 보여준다.&lt;br /&gt;
&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v2%3A2PACX-1vTBMVIXErpB6OYWbzC-nzv_0t_UNL2Q64IzD8TI-b1EywFJnOKdoMzdLiVC3NeAgyn4NLe-NEfPjK34&amp;amp;font=Default&amp;amp;lang=ko&amp;amp;initial_zoom=2&amp;amp;width=100%25&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이육사를 기억하는 장소==&lt;br /&gt;
이육사는 경상북도에서 태어났지만 전국적으로 이육사와 관련된 장소들이 많다. 아래 지도는 이육사와 관련된 모든 장소들을 정리한 지도이다. 대단한 시인 이육사를 기억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방문하기를 추천하한다.&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amp;quot;https://www.google.com/maps/d/embed?mid=1h1k2e9-GTfl5Bzcv0D2CRQG12cR998o&amp;amp;ehbc=2E312F&amp;quot; width=&amp;quot;640&amp;quot; height=&amp;quot;480&amp;quot;&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amp;lt;/div&amp;gt;&lt;br /&gt;
&lt;br /&gt;
# '''[[청포도 문학공원]]'''&lt;br /&gt;
#: 이육사의 대표 시 「청포도」의 영감을 얻은 장소로 알려져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청림동 일대에 조성되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포항 청림동 일대(현재 해병사단 내 일월지 주변)에 동양 최대의 포도원이 있었는데, 이육사가 이곳에서 영일만을 바라보며 시를 구상했다는 문헌 기록을 바탕으로 한다. 공원에는 청포도 시비와 함께 문화축제가 열리며 시인의 문학 정신을 기리고 있다.&lt;br /&gt;
&lt;br /&gt;
# '''[[이육사문학관]]'''&lt;br /&gt;
#: 이육사 시인의 고향인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에 2004년 탄신 100주년을 맞아 설립되었다. 그의 민족정신과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한 공간으로, 친필 원고, 시집, 독립운동 관련 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다. 문학관 주변에는 복원된 생가, 청포도 샘, 절정 시비 등이 함께 조성되어 있다.&lt;br /&gt;
&lt;br /&gt;
# '''이육사 생가'''&lt;br /&gt;
#: 이육사가 태어난 집이다. 원래 안동댐 건설로 인해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1976년 안동시 태화동으로 옮겨졌다. 이후 육사 탄신 100주년(2004년)을 기념하여 이육사문학관 옆(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에 원래의 건축 양식을 살려 복원되었다. 조선 후기 전통적인 반가(班家)의 건축 양식을 띄고 있으며, 특히 사랑채와 안채의 크기와 구조가 거의 동일하게 대칭을 이루는 독특한 특징이 있다.&lt;br /&gt;
&lt;br /&gt;
# '''문화공간 이육사'''&lt;br /&gt;
#: 이육사가 1939년 무렵 가족과 거주하며 「청포도」 등 주요 작품을 발표했던 서울특별시 성북구 종암동의 역사적 의의를 기념하여 2019년에 개관한 복합 문화 공간이다. 각 층의 명칭을 '청포도', '교목', '절정' 등 그의 대표 시 제목에서 따왔으며, 전시, 강좌, 문화 행사 등을 통해 시인의 삶과 문학을 시민들과 공유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lt;br /&gt;
&lt;br /&gt;
# '''264작은문학관'''&lt;br /&gt;
#: 이육사의 필명이 된 수인번호 '264'를 기려 대구광역시 중구 북성로에 조성된 작은 문학관이다. 이육사는 1927년 장진홍 의거로 인해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이곳에서 '264'라는 수감번호를 받았다. 일제강점기 적산가옥을 리모델링하여 1층은 카페와 기획전시실, 2층은 상설전시실로 운영되며, 이육사의 생애와 작품을 살펴볼 수 있다.&lt;/div&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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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이육사(李陸史)</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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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분류:imgpdnjs]]&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파일:이육사.jpg]]&lt;br /&gt;
&amp;lt;/div&amp;gt;&lt;br /&gt;
==기본 정보==&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margin:auto;&amp;quot;&lt;br /&gt;
|+ '''이육사'''&lt;br /&gt;
! 항목 !! 내용&lt;br /&gt;
|-&lt;br /&gt;
| 본명 || 이원록&lt;br /&gt;
|-&lt;br /&gt;
| 출생 || 1904년 5월 18일&lt;br /&gt;
|-&lt;br /&gt;
| 출생지 || 경상북도 예안군 의동면 원촌동 원촌마을&lt;br /&gt;
|-&lt;br /&gt;
| 사망 || 1944년 1월 16일&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이육사는 1904년 5월 18일, 지금의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인 옛 예안군 일대에서 태어났다. 퇴계 이황의 후손인 아버지 이가호와 어머니 허길 사이에서 여섯 형제 중 둘째였다. 훗날 그는 영천 화북면 오동리 출신인 안일양과 결혼하게 된다.&lt;br /&gt;
&lt;br /&gt;
어린 시절 그는 조부 이중직에게서 소학을 배우며 한학을 익혔다. 조부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진성이씨 문중에서 운영하던 보문의숙(훗날 도산공립보통학교)에서 공부했고, 이때 배운 한학의 영향은 그의 문학 세계에도 묻어난다. 졸업 후 가족이 대구로 이주했고, 그는 열아홉에 영천의 백학학원에서 교원으로 잠시 일했다. 1924년에는 일본 도쿄에서 예비학교 과정을 수학했으나 중도에 그만두고, 다음 해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 사회학을 공부했지만 역시 2학년 때 학업을 접었다.&lt;br /&gt;
&lt;br /&gt;
1927년 그는 [[장진홍_1895]]이 일으킨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과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대구형무소에서 약 1년 반을 지냈다. 이때의 수인번호 ‘264’를 따서 훗날 자신의 호를 ‘육사’라 짓는다.&lt;br /&gt;
&lt;br /&gt;
1932년 그는 만주 펑톈으로 건너가 [[윤세주_1901]]를 만나 의열단 입단 권유를 받았고, 난징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으로 들어가 폭탄 제조와 투척, 변장, 무기 운반, 피신 기술 등 다양한 실전 교육을 받았다. 사격 실력은 특히 뛰어났다고 전해진다.&lt;br /&gt;
&lt;br /&gt;
1933년 귀국 후에는 신문·잡지를 오가며 시와 논문, 시나리오 등 여러 글을 썼고, 루쉰의 소설 《고향》을 번역하기도 했다. 하지만 1934년 의열단 출신이라는 이유로 다시 검거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을 당했고, 몇 달 뒤 기소유예로 풀려났다.&lt;br /&gt;
&lt;br /&gt;
1943년 베이징으로 건너갔다가 어머니와 큰형의 소상을 위해 5월에 귀국했다. 그러 이 해 6월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었고, 결국 1944년 1월 16일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교도소에서 옥사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https://www.youtube.com/watch?v=gCcfvA4fGKY 광복 79주년 특별영상 : 행동하는 지성, 저항시인 이육사 이야기]&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width=&amp;quot;400&amp;quot; height=&amp;quot;300&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watch?v=gCcfvA4fGKY 광복 79주년 특별영상 : 행동하는 지성, 저항시인 이육사 이야기&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amp;lt;/div&amp;gt;&lt;br /&gt;
&lt;br /&gt;
==[[이육사의 기자 생활]]==&lt;br /&gt;
많은 사람들이 이육사의 문학 작품만을 알고 기자 생활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위 페이지에서는 이육사의 기자 생활에 대해 더 자세히 서술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청포도'에 스민 가족에 대한 향수와 해방의 염원==&lt;br /&gt;
[[이육사의 '청포도']]&amp;lt;/div&amp;gt;는 이육사가 일제강점기에 경험한 상실과 분리를 바탕으로,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해방에 대한 염원을 동시에 그려낸 시이다. 시에서 드러난 익어가는 청포도의 모습과 돌아올 이를 기다리는 마음은 개인의 정서와 민족적인 바람이 자연스럽게 중첩되는 지점을 보여준다.&lt;br /&gt;
&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v2%3A2PACX-1vTBMVIXErpB6OYWbzC-nzv_0t_UNL2Q64IzD8TI-b1EywFJnOKdoMzdLiVC3NeAgyn4NLe-NEfPjK34&amp;amp;font=Default&amp;amp;lang=ko&amp;amp;initial_zoom=2&amp;amp;width=100%25&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이육사를 기억하는 장소==&lt;br /&gt;
이육사는 경상북도에서 태어났지만 전국적으로 이육사와 관련된 장소들이 많다. 아래 지도는 이육사와 관련된 모든 장소들을 정리한 지도이다. 대단한 시인 이육사를 기억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방문하기를 추천하한다.&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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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1.청포도 문학공원&lt;br /&gt;
이육사의 대표 시 '청포도'의 영감을 얻은 장소로 알려져 조성되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포항 청림동 일대(현재 해병사단 내 일월지 주변)에 동양 최대의 포도원이 있었는데, 이육사가 이곳에서 영일만을 바라보며 시를 구상했다는 문헌 기록을 바탕으로 한다. 공원에는 청포도 시비와 함께 문화축제가 열리기도 하며, 시인의 문학 정신을 기리고 있다.	&lt;br /&gt;
2. 이육사문학관	&lt;br /&gt;
이육사 시인의 고향인 안동에 2004년 탄신 100주년을 맞아 설립되었다. 그의 민족정신과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한 공간으로, 친필 원고, 시집, 독립운동 관련 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문학관 주변에는 복원된 생가와 청포도 샘, 절정 시비 등이 함께 조성되어 있다.	&lt;br /&gt;
3. 이육사 생가		&lt;br /&gt;
원래 안동댐 건설로 인해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1976년 안동시 태화동으로 옮겨졌다. 이후 육사 탄신 100주년(2004년)을 기념하여 이육사문학관 옆(원천리)에 원래의 건축 양식을 살려 복원되었다. 조선 후기 전통적인 반가(班家)의 건축 양식을 띄고 있으며, 특히 사랑채와 안채의 크기와 구조가 거의 동일하게 대칭을 이루는 독특한 특징이 있다.	&lt;br /&gt;
4. 문화공간 이육사&lt;br /&gt;
이육사가 1939년 무렵 가족과 거주하며 &amp;lt;청포도&amp;gt; 등 주요 작품을 발표했던 서울 종암동의 역사적 의의를 기념하여 2019년에 개관한 복합 문화 공간이다. 각 층의 명칭을 '청포도', '교목', '절정' 등 그의 대표 시 제목에서 따왔으며, 전시, 강좌, 문화 행사 등을 통해 시인의 삶과 문학을 시민들과 공유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lt;br /&gt;
5. 264작은문학관&lt;br /&gt;
이육사의 필명이 된 수인번호 '264'를 기려 대구에 조성된 작은 문학관이다. 이육사는 1927년 장진홍 의거로 인해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이곳에서 '264'라는 수감번호를 받았다. 일제강점기 적산가옥을 리모델링하여 1층은 카페와 기획전시실, 2층은 상설전시실로 운영되며, 이육사의 생애와 작품을 살펴볼 수 있다.&lt;/div&gt;</summary>
		<author><name>Imgpdnjs</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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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D%B4%EC%9C%A1%EC%82%AC(%E6%9D%8E%E9%99%B8%E5%8F%B2)&amp;diff=65600</id>
		<title>이육사(李陸史)</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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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10T07:45:31Z</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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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분류:imgpdnjs]]&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파일:이육사.jpg]]&lt;br /&gt;
&amp;lt;/div&amp;gt;&lt;br /&gt;
==기본 정보==&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margin:auto;&amp;quot;&lt;br /&gt;
|+ '''이육사'''&lt;br /&gt;
! 항목 !! 내용&lt;br /&gt;
|-&lt;br /&gt;
| 본명 || 이원록&lt;br /&gt;
|-&lt;br /&gt;
| 출생 || 1904년 5월 18일&lt;br /&gt;
|-&lt;br /&gt;
| 출생지 || 경상북도 예안군 의동면 원촌동 원촌마을&lt;br /&gt;
|-&lt;br /&gt;
| 사망 || 1944년 1월 16일&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이육사는 1904년 5월 18일, 지금의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인 옛 예안군 일대에서 태어났다. 퇴계 이황의 후손인 아버지 이가호와 어머니 허길 사이에서 여섯 형제 중 둘째였다. 훗날 그는 영천 화북면 오동리 출신인 안일양과 결혼하게 된다.&lt;br /&gt;
&lt;br /&gt;
어린 시절 그는 조부 이중직에게서 소학을 배우며 한학을 익혔다. 조부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진성이씨 문중에서 운영하던 보문의숙(훗날 도산공립보통학교)에서 공부했고, 이때 배운 한학의 영향은 그의 문학 세계에도 묻어난다. 졸업 후 가족이 대구로 이주했고, 그는 열아홉에 영천의 백학학원에서 교원으로 잠시 일했다. 1924년에는 일본 도쿄에서 예비학교 과정을 수학했으나 중도에 그만두고, 다음 해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 사회학을 공부했지만 역시 2학년 때 학업을 접었다.&lt;br /&gt;
&lt;br /&gt;
1927년 그는 [[장진홍_1895]]이 일으킨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과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대구형무소에서 약 1년 반을 지냈다. 이때의 수인번호 ‘264’를 따서 훗날 자신의 호를 ‘육사’라 짓는다.&lt;br /&gt;
&lt;br /&gt;
1932년 그는 만주 펑톈으로 건너가 [[윤세주_1901]]를 만나 의열단 입단 권유를 받았고, 난징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으로 들어가 폭탄 제조와 투척, 변장, 무기 운반, 피신 기술 등 다양한 실전 교육을 받았다. 사격 실력은 특히 뛰어났다고 전해진다.&lt;br /&gt;
&lt;br /&gt;
1933년 귀국 후에는 신문·잡지를 오가며 시와 논문, 시나리오 등 여러 글을 썼고, 루쉰의 소설 《고향》을 번역하기도 했다. 하지만 1934년 의열단 출신이라는 이유로 다시 검거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을 당했고, 몇 달 뒤 기소유예로 풀려났다.&lt;br /&gt;
&lt;br /&gt;
1943년 베이징으로 건너갔다가 어머니와 큰형의 소상을 위해 5월에 귀국했다. 그러 이 해 6월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었고, 결국 1944년 1월 16일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교도소에서 옥사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https://www.youtube.com/watch?v=gCcfvA4fGKY 광복 79주년 특별영상 : 행동하는 지성, 저항시인 이육사 이야기]&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width=&amp;quot;400&amp;quot; height=&amp;quot;300&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watch?v=gCcfvA4fGKY 광복 79주년 특별영상 : 행동하는 지성, 저항시인 이육사 이야기&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amp;lt;/div&amp;gt;&lt;br /&gt;
&lt;br /&gt;
==[[이육사의 기자 생활]]==&lt;br /&gt;
많은 사람들이 이육사의 문학 작품만을 알고 기자 생활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위 페이지에서는 이육사의 기자 생활에 대해 더 자세히 서술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청포도'에 스민 가족에 대한 향수와 해방의 염원==&lt;br /&gt;
[[이육사의 '청포도']]&amp;lt;/div&amp;gt;는 이육사가 일제강점기에 경험한 상실과 분리를 바탕으로,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해방에 대한 염원을 동시에 그려낸 시이다. 시에서 드러난 익어가는 청포도의 모습과 돌아올 이를 기다리는 마음은 개인의 정서와 민족적인 바람이 자연스럽게 중첩되는 지점을 보여준다.&lt;br /&gt;
&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v2%3A2PACX-1vTBMVIXErpB6OYWbzC-nzv_0t_UNL2Q64IzD8TI-b1EywFJnOKdoMzdLiVC3NeAgyn4NLe-NEfPjK34&amp;amp;font=Default&amp;amp;lang=ko&amp;amp;initial_zoom=2&amp;amp;width=100%25&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이육사를 기억하는 장소==&lt;br /&gt;
이육사는 경상북도에서 태어났지만 전국적으로 이육사와 관련된 장소들이 많다. 아래 지도는 이육사와 관련된 모든 장소들을 정리한 지도이다. 대단한 시인 이육사를 기억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방문하기를 추천하한다.&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amp;quot;https://www.google.com/maps/d/embed?mid=1h1k2e9-GTfl5Bzcv0D2CRQG12cR998o&amp;amp;ehbc=2E312F&amp;quot; width=&amp;quot;640&amp;quot; height=&amp;quot;480&amp;quot;&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amp;lt;/div&amp;gt;&lt;br /&gt;
&lt;br /&gt;
#.청포도 문학공원&lt;br /&gt;
이육사의 대표 시 '청포도'의 영감을 얻은 장소로 알려져 조성되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포항 청림동 일대(현재 해병사단 내 일월지 주변)에 동양 최대의 포도원이 있었는데, 이육사가 이곳에서 영일만을 바라보며 시를 구상했다는 문헌 기록을 바탕으로 한다. 공원에는 청포도 시비와 함께 문화축제가 열리기도 하며, 시인의 문학 정신을 기리고 있다.	&lt;br /&gt;
#. 이육사문학관	&lt;br /&gt;
이육사 시인의 고향인 안동에 2004년 탄신 100주년을 맞아 설립되었다. 그의 민족정신과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한 공간으로, 친필 원고, 시집, 독립운동 관련 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문학관 주변에는 복원된 생가와 청포도 샘, 절정 시비 등이 함께 조성되어 있다.	&lt;br /&gt;
#. 이육사 생가		&lt;br /&gt;
원래 안동댐 건설로 인해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1976년 안동시 태화동으로 옮겨졌다. 이후 육사 탄신 100주년(2004년)을 기념하여 이육사문학관 옆(원천리)에 원래의 건축 양식을 살려 복원되었다. 조선 후기 전통적인 반가(班家)의 건축 양식을 띄고 있으며, 특히 사랑채와 안채의 크기와 구조가 거의 동일하게 대칭을 이루는 독특한 특징이 있다.	&lt;br /&gt;
#. 문화공간 이육사&lt;br /&gt;
이육사가 1939년 무렵 가족과 거주하며 &amp;lt;청포도&amp;gt; 등 주요 작품을 발표했던 서울 종암동의 역사적 의의를 기념하여 2019년에 개관한 복합 문화 공간이다. 각 층의 명칭을 '청포도', '교목', '절정' 등 그의 대표 시 제목에서 따왔으며, 전시, 강좌, 문화 행사 등을 통해 시인의 삶과 문학을 시민들과 공유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lt;br /&gt;
#. 264작은문학관&lt;br /&gt;
이육사의 필명이 된 수인번호 '264'를 기려 대구에 조성된 작은 문학관이다. 이육사는 1927년 장진홍 의거로 인해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이곳에서 '264'라는 수감번호를 받았다. 일제강점기 적산가옥을 리모델링하여 1층은 카페와 기획전시실, 2층은 상설전시실로 운영되며, 이육사의 생애와 작품을 살펴볼 수 있다.&lt;/div&gt;</summary>
		<author><name>Imgpdnjs</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D%B4%EC%9C%A1%EC%82%AC(%E6%9D%8E%E9%99%B8%E5%8F%B2)&amp;diff=65591</id>
		<title>이육사(李陸史)</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D%B4%EC%9C%A1%EC%82%AC(%E6%9D%8E%E9%99%B8%E5%8F%B2)&amp;diff=65591"/>
		<updated>2025-12-10T07:41:4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Imgpdnjs: &lt;/p&gt;
&lt;hr /&gt;
&lt;div&gt;[[분류:imgpdnjs]]&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파일:이육사.jpg]]&lt;br /&gt;
&amp;lt;/div&amp;gt;&lt;br /&gt;
==기본 정보==&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margin:auto;&amp;quot;&lt;br /&gt;
|+ '''이육사'''&lt;br /&gt;
! 항목 !! 내용&lt;br /&gt;
|-&lt;br /&gt;
| 본명 || 이원록&lt;br /&gt;
|-&lt;br /&gt;
| 출생 || 1904년 5월 18일&lt;br /&gt;
|-&lt;br /&gt;
| 출생지 || 경상북도 예안군 의동면 원촌동 원촌마을&lt;br /&gt;
|-&lt;br /&gt;
| 사망 || 1944년 1월 16일&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이육사는 1904년 5월 18일, 지금의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인 옛 예안군 일대에서 태어났다. 퇴계 이황의 후손인 아버지 이가호와 어머니 허길 사이에서 여섯 형제 중 둘째였다. 훗날 그는 영천 화북면 오동리 출신인 안일양과 결혼하게 된다.&lt;br /&gt;
&lt;br /&gt;
어린 시절 그는 조부 이중직에게서 소학을 배우며 한학을 익혔다. 조부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진성이씨 문중에서 운영하던 보문의숙(훗날 도산공립보통학교)에서 공부했고, 이때 배운 한학의 영향은 그의 문학 세계에도 묻어난다. 졸업 후 가족이 대구로 이주했고, 그는 열아홉에 영천의 백학학원에서 교원으로 잠시 일했다. 1924년에는 일본 도쿄에서 예비학교 과정을 수학했으나 중도에 그만두고, 다음 해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 사회학을 공부했지만 역시 2학년 때 학업을 접었다.&lt;br /&gt;
&lt;br /&gt;
1927년 그는 [[장진홍_1895]]이 일으킨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과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대구형무소에서 약 1년 반을 지냈다. 이때의 수인번호 ‘264’를 따서 훗날 자신의 호를 ‘육사’라 짓는다.&lt;br /&gt;
&lt;br /&gt;
1932년 그는 만주 펑톈으로 건너가 [[윤세주_1901]]를 만나 의열단 입단 권유를 받았고, 난징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으로 들어가 폭탄 제조와 투척, 변장, 무기 운반, 피신 기술 등 다양한 실전 교육을 받았다. 사격 실력은 특히 뛰어났다고 전해진다.&lt;br /&gt;
&lt;br /&gt;
1933년 귀국 후에는 신문·잡지를 오가며 시와 논문, 시나리오 등 여러 글을 썼고, 루쉰의 소설 《고향》을 번역하기도 했다. 하지만 1934년 의열단 출신이라는 이유로 다시 검거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을 당했고, 몇 달 뒤 기소유예로 풀려났다.&lt;br /&gt;
&lt;br /&gt;
1943년 베이징으로 건너갔다가 어머니와 큰형의 소상을 위해 5월에 귀국했다. 그러 이 해 6월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었고, 결국 1944년 1월 16일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교도소에서 옥사하였다.&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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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gCcfvA4fGKY 광복 79주년 특별영상 : 행동하는 지성, 저항시인 이육사 이야기]&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width=&amp;quot;400&amp;quot; height=&amp;quot;300&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watch?v=gCcfvA4fGKY 광복 79주년 특별영상 : 행동하는 지성, 저항시인 이육사 이야기&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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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이육사의 기자 생활]]==&lt;br /&gt;
많은 사람들이 이육사의 문학 작품만을 알고 기자 생활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위 페이지에서는 이육사의 기자 생활에 대해 더 자세히 서술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청포도'에 스민 가족에 대한 향수와 해방의 염원==&lt;br /&gt;
[[이육사의 '청포도']]&amp;lt;/div&amp;gt;는 이육사가 일제강점기에 경험한 상실과 분리를 바탕으로,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해방에 대한 염원을 동시에 그려낸 시이다. 시에서 드러난 익어가는 청포도의 모습과 돌아올 이를 기다리는 마음은 개인의 정서와 민족적인 바람이 자연스럽게 중첩되는 지점을 보여준다.&lt;br /&gt;
&lt;br /&gt;
==타임라인==&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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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이육사를 기억하는 장소==&lt;br /&gt;
이육사는 경상북도에서 태어났지만 전국적으로 이육사와 관련된 장소들이 많다. 아래 지도는 이육사와 관련된 모든 장소들을 정리한 지도이다. 대단한 시인 이육사를 기억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방문하기를 추천하한다.&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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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포도 문학공원		&lt;br /&gt;
#. 이육사문학관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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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공간 이육사			&lt;br /&gt;
#. 264작은문학관&lt;/div&gt;</summary>
		<author><name>Imgpdnjs</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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