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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dh_edu - 사용자 기여 [ko]</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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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4-22T09:38:09Z</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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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분류:페퍼민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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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1T06:57:5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페퍼민트: &lt;/p&gt;
&lt;hr /&gt;
&lt;div&gt;[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ED%8E%98%ED%8D%BC%EB%AF%BC%ED%8A%B8%F0%9F%8C%BF 페퍼민트🌿]&lt;br /&gt;
&lt;br /&gt;
&lt;br /&gt;
저는 보성전문학교, 이용익, 손병희, 3·1운동 등 '애국계몽운동' 중 '보성전문학교'와 연관성을 가지는 노드들의 위키문서를 담당하여 작성하였습니다. 조선교육령과 근대학교 설립운동 및 한성의 경우에는 관련 내용 및 자료의 양이 방대한 관계로 이미 작성되어 있는 외부 문서의 링크를 삽입한 추가적인 문서를 작성하는 방식으로 연속적인 정보 전달 및 스토리텔링에 제약이 없도록 하였습니다. &lt;br /&gt;
&lt;br /&gt;
우선, 보성전문학교에 대한 개별 문서에서는, 정의, 설립 배경과 목적 및 의의, 건물의 역사, 연원 및 변천, 현재, 각주, 참고문헌 등으로 부분을 나누어 작성하였습니다. &lt;br /&gt;
둘째로 이용익에 관한 개별 문서에서는 한 줄 소개, 생애, 러일전쟁 이전 - 고종의 신임, 러일전쟁 이전 - 고종의 신임으로 인한 시련, 러일전쟁 당시 - 일본의 경계, 러일전쟁 이후 - 보전문학교 설립, 평가, 각주, 참고문헌 등으로 부분을 나누어 작성하였습니다. &lt;br /&gt;
셋째로 손병희에 관한 개별 문서에서는 한 줄 소개, 천도교 창건 및 정비, 보성전문학교 인수, 3·1운동, 평가, 각주, 참고문헌 등으로 부분을 나누어 작성하였습니다. &lt;br /&gt;
마지막으로 3·1운동에 관한 개별 문서에서는 정의, 원인 및 배경, 전개, 의의 및 한계, 각주, 참고문헌 등으로 부분을 나누어 작성하였습니다.&lt;br /&gt;
&lt;br /&gt;
그리고 각 문서 마다 관련된 사진 자료 및 영상 자료, 도표 등을 삽입하여 전체적인 이야기를 막힘없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lt;br /&gt;
&lt;br /&gt;
애국계몽운동의 경우 모든 사건과 인물 및 단체 등이 서로 연결되어 영향을 주고 받았던 역사이기 때문에, 관련된 항목이 있음에도 미처 직접 서술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꼭 하이퍼링크(조선교육령, 근대학교 설립운동, 한성 등)를 삽입하여 전체적인 애국계몽운동의 큰 흐름  및 그 속 보성전문학교 관련 노드들의 역할을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였습니다.&lt;/div&gt;</summary>
		<author><name>페퍼민트</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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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B9%BC%EB%B3%B4%EB%8B%A4_%EA%B0%95%ED%95%9C_%ED%8E%9C%EC%9D%98_%ED%9E%98_%EC%95%A0%EA%B5%AD%EA%B3%84%EB%AA%BD%EC%9A%B4%EB%8F%99&amp;diff=34789</id>
		<title>칼보다 강한 펜의 힘 애국계몽운동</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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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1T06:06:4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페퍼민트: /* 기여 */&lt;/p&gt;
&lt;hr /&gt;
&lt;div&gt;==&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blue; margin: 0; border: 3px solid ForestGreen;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콘텐츠 주제==&lt;br /&gt;
{{글색&lt;br /&gt;
|color=#F5F5F5&lt;br /&gt;
|text='''독립운동 계열 중 애국계몽운동을 5개의 관련 단체를 기준으로 살펴보았다.'''&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p align=&amp;quot;middle&amp;quot;&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483&amp;quot; height=&amp;quot;300&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IZNU9qms3ck&amp;quot; title=&amp;quot;대한민국독립운동사 ep2. 애국계몽운동&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lt;br /&gt;
▣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LightBlue&amp;quot;&amp;gt;'''애국계몽운동'''&amp;lt;/span&amp;gt;에 해당하는 '''단체나 학교, 신문''' 등을 시작으로 그들과 관련된 '''사건, 활동, 인물, 단체, 장소''' 등을 &amp;lt;font color=SteelBlue&amp;gt;'''역사적 흐름'''&amp;lt;/font&amp;gt;에 따라 설명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blue; margin: 0; border: 3px solid ForestGreen;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기획의도==&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 애국계몽운동.jpg|400px|center|우리 조의 주제를 한 눈에 나타내는 사진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기획의도 및 목적'''&lt;br /&gt;
&lt;br /&gt;
&lt;br /&gt;
35년의 식민 통치 기간동안 한국의 주권 회복을 위해 투쟁한 독립 운동은 끊이지 않았다. 독립운동은 시대에 따라 분류할 수도 있지만 공통된 특성을 가진 독립운동을 함께 분석해 그 배경과 특징 의의를 분석하고 각각의 운동, 단체, 인물간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애국계몽운동'이라는 주제로 독립운동을 탐구하고자 한다. 애국계몽운동은 한국인의 학습권을 보장하고 국민 모두의 지적 발전을 위한 근본적인 노력으로 식민 통치 시기에 꼭 필요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계몽단체의 활동은 애국계몽운동이 전국적 규모의 운동으로 전개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신민회와 같은 전국 규모의 단체가 지회운영을 통하여 계몽운동을 광범한 운동으로 전개시켜 나갔고 학회와 같은 지역 단위의 단체가 설립, 운영되면서 운동이 전국 곳곳으로 퍼져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애국계몽운동은 교육운동과 대중계몽운동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어 이후의 민족해방운동의 밑거름이 되게 하였다. 단순한 합법적 테두리 안에서의 실력양성운동에서 애국계몽운동을 벗어날 수 있게 했던 강력한 단체의 출현에 대해서도 알아보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기대효과'''&lt;br /&gt;
&lt;br /&gt;
애국계몽운동의 흐름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으며, 활동했던 여러 단체들에 대해 알아볼 수 있다. 또한, 복잡할 수 있는 역사의 흐름을 온톨로지와 타임라인 등을 통해서, 그리고 분류된 노드를 통해 단체와 사건 등을 명확히 구분해 더욱 효과적으로 학습 가능할 것이다. 인과관계가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을 흐름을 통해 파악하고, 어떠한 사건이 어떤 사건의 영향을 받아서 발생했는 지에 대한 논리적 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 또한, 릴레이션을 통해 관련이 있는 사건 및 단체들에 대해 학습하고, 지금의 한국의 기반을 갖추어준 애국계몽운동에 대해 알아보자.&lt;br /&gt;
&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blue; margin: 0; border: 3px solid ForestGreen;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온톨로지==&lt;br /&gt;
&lt;br /&gt;
&lt;br /&gt;
{{NetworkGraph | title=애국계몽운동.ls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blue; margin: 0; border: 3px solid ForestGreen;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콘텐츠 구조==&lt;br /&gt;
&lt;br /&gt;
===클래스(Class)===&lt;br /&gt;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color:white&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5%&amp;quot; | 클래스 !! style=&amp;quot;width:23%&amp;quot; | 설명 !! style=&amp;quot;45%&amp;quot; | 노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Actor||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애국계몽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거나 큰 영향을 끼친 단체를 정리했다. || [[신민회]], [[대한매일신보]], [[청년학우회]], [[대성학교]], [[오산학교]], [[신흥무관학교]], [[신간회]], [[근우회]], [[보성전문학교]], [[통감부]], [[보안회]]&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Agen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했거나 영향을 받은 인물을 정리했다. || [[안창호]], [[양기탁]], [[신채호]], [[이용익(李容翊)]], [[안재홍]], [[손병희(孫秉熙)]], [[베델]], [[원세성]], [[송수만]]&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Even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애국계몽운동 단체의 활동 및 중요한 사건을 정리했다. || [[105인 사건]], [[청년운동]], [[교육구국운동]], [[민족산업진흥운동]], [[원산총파업]], [[광주학생항일운동]], [[3.1 운동]], [[조선교육령]], [[근대학교 설립운동]], [[국채보상운동]], [[러일전쟁]], [[황무지 개간 반대 운동]], [[시민 대회]]&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Place||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단체가 설립되거나 사건이 발생한 장소를 정리하였다. || [[평양]], [[만주]], [[원산]], [[광주]], [[한성]], [[요동반도]]&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관계성(Relation)===&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ForestGreen&amp;quot;&amp;gt;'''isMemberOf(~의 일원이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애국계몽운동에서 대표적인 사건의 일원임을 나타낸다.&lt;br /&gt;
**해당노드:&lt;br /&gt;
***안재홍 → 신간회&lt;br /&gt;
***신채호 → 신간회&lt;br /&gt;
***신채호 → 신민회&lt;br /&gt;
***양기탁 → 신민회&lt;br /&gt;
***안창호 → 신민회&lt;br /&gt;
***손병희 → 보성전문학교&lt;br /&gt;
&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ForestGreen&amp;quot;&amp;gt;'''leads(사건~을 주도하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역사적인 사건 주도를 나타낸다.&lt;br /&gt;
**해당노드:&lt;br /&gt;
***안재홍 → 3.1운동&lt;br /&gt;
***신채호 → 대한매일신보&lt;br /&gt;
***베델 → 대한매일신보&lt;br /&gt;
***양기탁 → 대한매일신보&lt;br /&gt;
***신민회 → 청년운동&lt;br /&gt;
***신민회 → 교육구국운동&lt;br /&gt;
***신민회 → 민족산업진흥운동&lt;br /&gt;
***이용익 → 교육구국운동&lt;br /&gt;
***손병희 → 3.1운동&lt;br /&gt;
***보안회 → 시민대회&lt;br /&gt;
***보안회 → 황무지개간운동&lt;br /&gt;
&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ForestGreen&amp;quot;&amp;gt;'''happenedAt(장소 ~에서 일어나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애국계몽 운동 속 사건들이 일어난 장소에 대해 설명한다.&lt;br /&gt;
**해당노드:&lt;br /&gt;
***원산총파업 → 원산&lt;br /&gt;
***러일전쟁 → 요동 반도&lt;br /&gt;
***광주학생항일운동 → 광주&lt;br /&gt;
&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ForestGreen&amp;quot;&amp;gt;'''isInfluencedBy(~에 의해 영향을 받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 어떠한 사건 혹은 단체가 영향을 받은 원인을 나타낸다.&lt;br /&gt;
**해당노드:&lt;br /&gt;
***보안회 → 러일전쟁&lt;br /&gt;
***대한매일신보 → 러일전쟁&lt;br /&gt;
***보성전문학교 → 조선교육령&lt;br /&gt;
***보성전문학교 → 근대학교 설립운동&lt;br /&gt;
***대성학교 → 교육구국운동&lt;br /&gt;
***오산학교 → 교육구국운동&lt;br /&gt;
***청년운동 → 청년 학우회&lt;br /&gt;
***신민회 → 105인 사건&lt;br /&gt;
***대한매일신보 → 신민회&lt;br /&gt;
***국채보상운동 → 대한매일신보&lt;br /&gt;
***통감부 → 대한매일신보&lt;br /&gt;
***근우회 → 신간회&lt;br /&gt;
&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ForestGreen&amp;quot;&amp;gt;'''isSupportedBy (~에게 지원을 받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어떤 활동 및 사건 등이 특정 단체 등의 지원을 받았음을 나타낸다.&lt;br /&gt;
**해당노드:&lt;br /&gt;
***광주학생항일운동 → 근우회&lt;br /&gt;
***광주학생항일운동 → 신간회&lt;br /&gt;
***원산 총파업 → 신간회&lt;br /&gt;
&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ForestGreen&amp;quot;&amp;gt;'''isFounderOf (~은 ~의 설립 주체이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각 단체 및 기관을 설립한 주체에 대해 설명한다.&lt;br /&gt;
**해당노드:&lt;br /&gt;
***송수만 → 보안회&lt;br /&gt;
***원세성 → 보안회&lt;br /&gt;
***이용익 → 보성전문학교&lt;br /&gt;
***신민회 → 신흥무관학교&lt;br /&gt;
&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ForestGreen&amp;quot;&amp;gt;'''isPartOf (~의 일부이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해당 노드의 하위 분류에 속하는 노드들에 대해 설명한다.&lt;br /&gt;
**해당노드:&lt;br /&gt;
***보안회 → 애국계몽운동&lt;br /&gt;
***신간회 → 애국계몽운동&lt;br /&gt;
***대한매일신보 → 애국계몽운동&lt;br /&gt;
***신민회 → 애국계몽운동&lt;br /&gt;
***보성전문학교 → 애국계몽운동&lt;br /&gt;
&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ForestGreen&amp;quot;&amp;gt;'''isLocatedIn (~은 ~에 위치해 있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각 단체 및 기관이 위치해 있는 장소에 대해 설명한다.&lt;br /&gt;
**해당노드:&lt;br /&gt;
***보성전문학교 → 한성&lt;br /&gt;
***신흥무관학교 → 만주&lt;br /&gt;
***대성학교 → 평양&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color:white&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5%&amp;quot; | 팀원 !! style=&amp;quot;width:23%&amp;quot; | 기여 내용&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김효원]]||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대한매일신보 관련 자료 조사 및 관련 개별 wiki문서 작성, 타임라인 구상 및 연표 생성, lst 문서 작성 참여, 마인드맵 구상 및 작성 참여, 클래스와 릴레이션 구상 참여&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페퍼민트🌿]]||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보성전문학교 관련 자료 조사 및 관련 개별 문서 작성, 연표 구상 참여 및 연표 생성, lst 문서 작성 참여, 마인드맵 구상 및 작성 참여, 클래스와 릴레이션 구상 참여&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까마귀]]||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신간회 관련 자료 조사 및 관련 개별 기사 작성, 팀페이지 주제 부분 작성, 타임라인 시작 부분 구상 및 연표 생성, lst 문서 작성 참여, 릴레이션 구상 참여, 마인드맵 참여, 지도 &amp;amp; 타임라인 작성(개별문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오연수]]||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보안회 관련 자료 조사 및 개별 문서 작성, 연표 구상 참여 및 연표 생성, Ist 문서 작성, 기획 의도 및 기대 효과 작성, 발표 영상 수합 및 제출, 클래스와 릴레이션, 마인드맵 구상 참여&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바밤🌰]]||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신민회 관련 자료 조사, 개별 문서 작성, 연표 작성, 디지털 지도 생성(개별문서), lst 파일 작성, 기획 의도 구상 (+릴레이션, 연표, 마인드맵 구상에 참여)&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blue; margin: 0; border: 3px solid ForestGreen;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마인드맵==&lt;br /&gt;
 주제 마인드맵&lt;br /&gt;
[[파일:독립운동가.jpeg|300px|center|백범 김구 중심]]&lt;br /&gt;
 노드 마인드맵&lt;br /&gt;
[[파일:애국_마인드맵.png|600px|center|애국계몽운동 기준 마인드맵]]&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blue; margin: 0; border: 3px solid ForestGreen;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33koILa2WQu31NLYfQ5YRr6wZvbqPHVhw9UHWxU5hSk&amp;amp;font=Default&amp;amp;lang=ko&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1900년대의 애국계몽운동연구』(조항래 외, 아세아문화사, 1993)&lt;br /&gt;
*『만주한인 민족운동사연구』(박환, 일조각, 1991)&lt;br /&gt;
*『105인사건과 신민회연구』(윤경로, 일지사, 1990)&lt;br /&gt;
*『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서중석, 역사비평사, 2001)&lt;br /&gt;
*『독립운동사자료집』10(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6)&lt;br /&gt;
*『한국독립운동사』(국사편찬위원회, 1965)&lt;br /&gt;
*『청년학우회의 활동과 참여 인물』(권두연, 한국문학연구학회, 2012)&lt;br /&gt;
&lt;br /&gt;
[[분류:애국계몽운동]]&lt;br /&gt;
[[분류:오연수]]&lt;br /&gt;
[[분류:페퍼민트🌿]]&lt;br /&gt;
[[분류:바밤🌰]]&lt;br /&gt;
[[분류:까마귀]]&lt;br /&gt;
[[분류:김효원]]&lt;/div&gt;</summary>
		<author><name>페퍼민트</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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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애국계몽운동.lst</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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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1T05:51:1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페퍼민트: &lt;/p&gt;
&lt;hr /&gt;
&lt;div&gt;&amp;lt;pre&amp;gt;&lt;br /&gt;
#Project&lt;br /&gt;
h1 애국계몽운동&lt;br /&gt;
&lt;br /&gt;
#Class&lt;br /&gt;
주제 Red Circle&lt;br /&gt;
단체 Green box&lt;br /&gt;
인물 Yellow pentagon&lt;br /&gt;
활동/사건 Orange&lt;br /&gt;
장소 Pink box&lt;br /&gt;
&lt;br /&gt;
#Relation&lt;br /&gt;
isMemberOf	&lt;br /&gt;
leads&lt;br /&gt;
happenedAt&lt;br /&gt;
isInfluencedBy&lt;br /&gt;
isSupportedBy&lt;br /&gt;
isFounderOf &lt;br /&gt;
isPartOf&lt;br /&gt;
isLocatedIn&lt;br /&gt;
&lt;br /&gt;
#Nodes&lt;br /&gt;
애국계몽운동 주제 애국계몽운동 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EC%B9%BC%EB%B3%B4%EB%8B%A4_%EA%B0%95%ED%95%9C_%ED%8E%9C%EC%9D%98_%ED%9E%98_%EC%95%A0%EA%B5%AD%EA%B3%84%EB%AA%BD%EC%9A%B4%EB%8F%99#.ED.81.B4.EB.9E.98.EC.8A.A4.28Class.29&lt;br /&gt;
신민회 단체 신민회 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EC%8B%A0%EB%AF%BC%ED%9A%8C&lt;br /&gt;
안창호 인물 안창호 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EC%95%88%EC%B0%BD%ED%98%B8 https://i.namu.wiki/i/8ojIt44ibsfwG2FEsWKiYcaQ3eM3hLeqzy3qLUh1qfiQgk-58LX6lZ66TqlpObnSOkHjbtA8O6PZaLQx4SRqwA.webp&lt;br /&gt;
양기탁 인물 양기탁 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EC%96%91%EA%B8%B0%ED%83%81 https://i.namu.wiki/i/mt7gVSFxYfarOytTCxBplZ9ibyYgBSFUwYyNyAVHokUEFu7oVsWiz7R_aUbP4hm2VYtuU6flvEa_wN3E5dzb9g.webp&lt;br /&gt;
신채호 인물 신채호 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EC%8B%A0%EC%B1%84%ED%98%B8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2/28/%EB%8B%A8%EC%9E%AC%EC%8B%A0%EC%B1%84%ED%98%B8.jpg&lt;br /&gt;
대한매일신보 단체 대한매일신보 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EB%8C%80%ED%95%9C%EB%A7%A4%EC%9D%BC%EC%8B%A0%EB%B3%B4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ko/c/c9/%EB%8C%80%ED%95%9C%EB%A7%A4%EC%9D%BC%EC%8B%A0%EB%B3%B4.jpg&lt;br /&gt;
105인_사건 활동/사건 105인_사건 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105%EC%9D%B8_%EC%82%AC%EA%B1%B4&lt;br /&gt;
청년운동 활동/사건 청년운동 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EC%B2%AD%EB%85%84%EC%9A%B4%EB%8F%99 https://cdn-icons-png.flaticon.com/512/2388/2388939.png&lt;br /&gt;
청년_학우회 단체 청년_학우회 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EC%B2%AD%EB%85%84%ED%95%99%EC%9A%B0%ED%9A%8C&lt;br /&gt;
교육구국운동 활동/사건 교육구국운동 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EA%B5%90%EC%9C%A1%EA%B5%AC%EA%B5%AD%EC%9A%B4%EB%8F%99 https://cdn-icons-png.flaticon.com/512/2388/2388939.png&lt;br /&gt;
이용익 인물 이용익 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EC%9D%B4%EC%9A%A9%EC%9D%B5(%E6%9D%8E%E5%AE%B9%E7%BF%8A)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0/0a/Lee_Yong-ik_Portrait.jpg&lt;br /&gt;
대성학교 단체 대성학교 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EB%8C%80%EC%84%B1%ED%95%99%EA%B5%90 https://cdn-icons-png.flaticon.com/512/1080/1080985.png&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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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장소 평양 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ED%8F%89%EC%96%91&lt;br /&gt;
만주 장소 만주 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EB%A7%8C%EC%A3%BC&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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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무관학교 단체 신흥무관학교 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EC%8B%A0%ED%9D%A5%EB%AC%B4%EA%B4%80%ED%95%99%EA%B5%90 https://cdn-icons-png.flaticon.com/512/1080/1080985.png&lt;br /&gt;
신간회 단체 신간회 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EC%8B%A0%EA%B0%84%ED%9A%8C&lt;br /&gt;
근우회 단체 근우회 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EA%B7%BC%EC%9A%B0%ED%9A%8C&lt;br /&gt;
안재홍 인물 안재홍 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EC%95%88%EC%9E%AC%ED%99%8D https://scsgozneamae10236445.cdn.ntruss.com/data2/content/image/2019/05/02/.cache/512/201905020886923.jpg&lt;br /&gt;
원산_총파업 활동/사건 원산_총파업 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EC%9B%90%EC%82%B0%EC%B4%9D%ED%8C%8C%EC%97%85 https://cdn-icons-png.flaticon.com/512/2388/2388939.png&lt;br /&gt;
광주학생항일운동 활동/사건 광주학생항일운동 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EA%B4%91%EC%A3%BC%ED%95%99%EC%83%9D%ED%95%AD%EC%9D%BC%EC%9A%B4%EB%8F%99 https://cdn-icons-png.flaticon.com/512/2388/2388939.png&lt;br /&gt;
원산 장소 원산 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EC%9B%90%EC%82%B0&lt;br /&gt;
광주 장소 광주 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EA%B4%91%EC%A3%BC&lt;br /&gt;
3.1_운동 활동/사건 3.1_운동 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3.1_%EC%9A%B4%EB%8F%99 https://cdn-icons-png.flaticon.com/512/2388/2388939.png&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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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 장소 한성 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ED%95%9C%EC%84%B1&lt;br /&gt;
손병희 인물 손병희 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EC%86%90%EB%B3%91%ED%9D%AC(%E5%AD%AB%E7%A7%89%E7%86%99) https://cdn.labortoday.co.kr/news/photo/201902/156851_71011_1715.jpg&lt;br /&gt;
조선교육령 활동/사건 조선교육령 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EC%A1%B0%EC%84%A0%EA%B5%90%EC%9C%A1%EB%A0%B9&lt;br /&gt;
근대학교_설립운동 활동/사건 근대학교_설립운동 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EA%B7%BC%EB%8C%80%ED%95%99%EA%B5%90_%EC%84%A4%EB%A6%BD%EC%9A%B4%EB%8F%99 https://cdn-icons-png.flaticon.com/512/2388/2388939.png&lt;br /&gt;
베델 인물 베델 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EB%B2%A0%EB%8D%B8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8/88/Ernest_Bethell.png&lt;br /&gt;
통감부 단체 통감부 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ED%86%B5%EA%B0%90%EB%B6%80&lt;br /&gt;
국채보상운동 활동/사건 국채보상운동 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EA%B5%AD%EC%B1%84%EB%B3%B4%EC%83%81%EC%9A%B4%EB%8F%99 https://cdn-icons-png.flaticon.com/512/2388/2388939.png&lt;br /&gt;
보안회 단체 보안회 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EB%B3%B4%EC%95%88%ED%9A%8C&lt;br /&gt;
러일전쟁 활동/사건 러일전쟁 null https://cdn-icons-png.flaticon.com/512/3522/3522092.png&lt;br /&gt;
황무지_개간_반대운동 활동/사건 황무지_개간_반대운동 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ED%99%A9%EB%AC%B4%EC%A7%80_%EA%B0%9C%EA%B0%84_%EB%B0%98%EB%8C%80_%EC%9A%B4%EB%8F%99 https://cdn-icons-png.flaticon.com/512/2388/2388939.png&lt;br /&gt;
시민_대회 활동/사건 시민_대회 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EC%8B%9C%EB%AF%BC_%EB%8C%80%ED%9A%8C&lt;br /&gt;
원세성 인물 원세성 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EC%9B%90%EC%84%B8%EC%84%B1 http://dh.aks.ac.kr/~dh_edu/wiki/images/9/9a/Man.png&lt;br /&gt;
송수만 인물 송수만 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86%A1%EC%88%98%EB%A7%8C&amp;amp;action=edit&amp;amp;redlink=1 http://dh.aks.ac.kr/~dh_edu/wiki/images/f/f5/%EC%86%A1%EC%88%98%EB%A7%8C.jpg&lt;br /&gt;
요동_반도 장소 요동_반도 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A%94%EB%8F%99%EB%B0%98%EB%8F%84&amp;amp;action=edit&amp;amp;redlink=1&lt;br /&gt;
&lt;br /&gt;
#Links&lt;br /&gt;
신민회 애국계몽운동 isPartOf&lt;br /&gt;
대한매일신보 애국계몽운동 isPartOf&lt;br /&gt;
보안회 애국계몽운동 isPartOf&lt;br /&gt;
안창호 신민회 isFounderOf &lt;br /&gt;
양기탁 신민회 isFounderOf &lt;br /&gt;
신채호 신민회 isFounderOf &lt;br /&gt;
대한매일신보 신민회 isInfluencedBy&lt;br /&gt;
신민회 105인_사건 isInfluencedBy&lt;br /&gt;
신민회 청년운동 leads &lt;br /&gt;
청년운동 청년_학우회 isInfluencedBy&lt;br /&gt;
신민회 교육구국운동 leads&lt;br /&gt;
이용익 교육구국운동 leads&lt;br /&gt;
대성학교 교육구국운동 isInfluencedBy&lt;br /&gt;
오산학교 교육구국운동 isInfluencedBy&lt;br /&gt;
대성학교 평양 isLocatedIn&lt;br /&gt;
신민회 민족산업진흥운동 leads&lt;br /&gt;
신민회 신흥무관학교 isFounderOf &lt;br /&gt;
신흥무관학교 만주 isLocatedIn&lt;br /&gt;
신간회 애국계몽운동 isPartOf&lt;br /&gt;
신채호 신간회 isMemberOf&lt;br /&gt;
안재홍 신간회 isMemberOf&lt;br /&gt;
근우회 신간회 isInfluencedBy&lt;br /&gt;
광주학생항일운동 신간회 isSupportedBy&lt;br /&gt;
광주학생항일운동 근우회 isSupportedBy&lt;br /&gt;
원산_총파업 신간회 isSupportedBy&lt;br /&gt;
원산_총파업 원산 happenedAt&lt;br /&gt;
광주학생항일운동 광주 happenedAt&lt;br /&gt;
안재홍 3.1_운동 leads&lt;br /&gt;
보성전문학교 애국계몽운동 isPartOf&lt;br /&gt;
보성전문학교 한성 isLocatedIn&lt;br /&gt;
손병희 보성전문학교 isMemberOf&lt;br /&gt;
이용익 보성전문학교 isFounderOf&lt;br /&gt;
손병희 3.1_운동 leads&lt;br /&gt;
보성전문학교 조선교육령 isInfluencedBy&lt;br /&gt;
보성전문학교 근대학교_설립운동 isInfluencedBy&lt;br /&gt;
국채보상운동 대한매일신보 isInfluencedBy&lt;br /&gt;
통감부 대한매일신보 isInfluencedBy&lt;br /&gt;
양기탁 대한매일신보 leads&lt;br /&gt;
베델 대한매일신보 leads&lt;br /&gt;
신채호 대한매일신보 leads&lt;br /&gt;
보안회 시민_대회 leads&lt;br /&gt;
보안회 황무지_개간_반대운동 leads&lt;br /&gt;
송수만 보안회 isMemberOf &lt;br /&gt;
원세성 보안회 isMemberOf &lt;br /&gt;
보안회 러일전쟁 isInfluencedBy&lt;br /&gt;
시민_대회 한성 happenedAt&lt;br /&gt;
러일전쟁 요동_반도 happenedAt&lt;br /&gt;
대한매일신보 러일전쟁 isInfluencedBy&lt;br /&gt;
&lt;br /&gt;
#End&lt;br /&gt;
&amp;lt;/pre&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페퍼민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D%95%9C%EC%84%B1&amp;diff=34762</id>
		<title>한성</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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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1T05:50:0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페퍼민트: 새 문서: [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C%84%B1%EB%B6%80 한성]  분류:애국계몽운동 분류:페퍼민트🌿   *한성은 보성전문학교가 자리잡은 지역이...&lt;/p&gt;
&lt;hr /&gt;
&lt;div&gt;[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C%84%B1%EB%B6%80 한성]&lt;br /&gt;
&lt;br /&gt;
[[분류:애국계몽운동]]&lt;br /&gt;
[[분류:페퍼민트🌿]]&lt;br /&gt;
&lt;br /&gt;
&lt;br /&gt;
*한성은 보성전문학교가 자리잡은 지역이다. &lt;br /&gt;
*추가적인 문서인 관계로 이미 작성된 외부문서의 링크를 첨부하였다.&lt;/div&gt;</summary>
		<author><name>페퍼민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5%A0%EA%B5%AD%EA%B3%84%EB%AA%BD%EC%9A%B4%EB%8F%99.lst&amp;diff=33344</id>
		<title>애국계몽운동.lst</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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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0T03:03:2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페퍼민트: &lt;/p&gt;
&lt;hr /&gt;
&lt;div&gt;&amp;lt;pre&amp;gt;&lt;br /&gt;
#Project&lt;br /&gt;
h1 애국계몽운동&lt;br /&gt;
&lt;br /&gt;
#Class&lt;br /&gt;
주제 Red Circle&lt;br /&gt;
단체 Green box&lt;br /&gt;
인물 Yellow pentagon&lt;br /&gt;
활동/사건 Orange&lt;br /&gt;
장소 Pink box&lt;br /&gt;
&lt;br /&gt;
#Relation&lt;br /&gt;
isMemberOf	&lt;br /&gt;
leads&lt;br /&gt;
happenedAt&lt;br /&gt;
isInfluencedBy&lt;br /&gt;
isSupportedBy&lt;br /&gt;
isFounderOf &lt;br /&gt;
isPartOf&lt;br /&gt;
isLocatedIn&lt;br /&gt;
&lt;br /&gt;
#Nodes&lt;br /&gt;
애국계몽운동 주제 애국계몽운동 &lt;br /&gt;
신민회 단체 신민회 &lt;br /&gt;
안창호 인물 안창호 null https://i.namu.wiki/i/8ojIt44ibsfwG2FEsWKiYcaQ3eM3hLeqzy3qLUh1qfiQgk-58LX6lZ66TqlpObnSOkHjbtA8O6PZaLQx4SRqwA.webp&lt;br /&gt;
양기탁 인물 양기탁 null https://i.namu.wiki/i/mt7gVSFxYfarOytTCxBplZ9ibyYgBSFUwYyNyAVHokUEFu7oVsWiz7R_aUbP4hm2VYtuU6flvEa_wN3E5dzb9g.webp&lt;br /&gt;
신채호 인물 신채호 null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2/28/%EB%8B%A8%EC%9E%AC%EC%8B%A0%EC%B1%84%ED%98%B8.jpg&lt;br /&gt;
대한매일신보 단체 대한매일신보 null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ko/c/c9/%EB%8C%80%ED%95%9C%EB%A7%A4%EC%9D%BC%EC%8B%A0%EB%B3%B4.jpg&lt;br /&gt;
105인_사건 활동/사건 105인_사건&lt;br /&gt;
청년운동 활동/사건 청년운동 null https://cdn-icons-png.flaticon.com/512/2388/2388939.png&lt;br /&gt;
청년_학우회 단체 청년_학우회&lt;br /&gt;
교육구국운동 활동/사건 교육구국운동 null https://cdn-icons-png.flaticon.com/512/2388/2388939.png&lt;br /&gt;
이용익 인물 이용익 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EC%9D%B4%EC%9A%A9%EC%9D%B5(%E6%9D%8E%E5%AE%B9%E7%BF%8A)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0/0a/Lee_Yong-ik_Portrait.jpg&lt;br /&gt;
대성학교 단체 대성학교 null https://cdn-icons-png.flaticon.com/512/1080/1080985.png&lt;br /&gt;
오산학교 단체 오산학교 null https://cdn-icons-png.flaticon.com/512/1080/1080985.png&lt;br /&gt;
평양 장소 평양&lt;br /&gt;
만주 장소 만주&lt;br /&gt;
민족산업진흥운동 활동/사건 민족산업진흥운동 null https://cdn-icons-png.flaticon.com/512/2388/2388939.png&lt;br /&gt;
신흥무관학교 단체 신흥무관학교 null https://cdn-icons-png.flaticon.com/512/1080/1080985.png&lt;br /&gt;
신간회 단체 신간회&lt;br /&gt;
근우회 단체 근우회&lt;br /&gt;
안재홍 인물 안재홍 null https://scsgozneamae10236445.cdn.ntruss.com/data2/content/image/2019/05/02/.cache/512/201905020886923.jpg&lt;br /&gt;
원산_총파업 활동/사건 원산_총파업 null https://cdn-icons-png.flaticon.com/512/2388/2388939.png&lt;br /&gt;
광주학생항일운동 활동/사건 광주학생항일운동 null https://cdn-icons-png.flaticon.com/512/2388/2388939.png&lt;br /&gt;
원산 장소 원산&lt;br /&gt;
광주 장소 광주&lt;br /&gt;
3.1_운동 활동/사건 3.1_운동 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3.1_%EC%9A%B4%EB%8F%99 https://cdn-icons-png.flaticon.com/512/2388/2388939.png&lt;br /&gt;
보성전문학교 단체 보성전문학교 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EB%B3%B4%EC%84%B1%EC%A0%84%EB%AC%B8%ED%95%99%EA%B5%90 https://cdn-icons-png.flaticon.com/512/1080/1080985.png&lt;br /&gt;
한성 장소 한성&lt;br /&gt;
손병희 인물 손병희 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EC%86%90%EB%B3%91%ED%9D%AC(%E5%AD%AB%E7%A7%89%E7%86%99) https://cdn.labortoday.co.kr/news/photo/201902/156851_71011_1715.jpg&lt;br /&gt;
조선교육령 활동/사건 조선교육령 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EC%A1%B0%EC%84%A0%EA%B5%90%EC%9C%A1%EB%A0%B9&lt;br /&gt;
근대학교_설립운동 활동/사건 근대학교_설립운동 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EA%B7%BC%EB%8C%80%ED%95%99%EA%B5%90_%EC%84%A4%EB%A6%BD%EC%9A%B4%EB%8F%99 https://cdn-icons-png.flaticon.com/512/2388/2388939.png&lt;br /&gt;
베델 인물 베델 null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8/88/Ernest_Bethell.png&lt;br /&gt;
통감부 단체 통감부&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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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_반도 장소 요동_반도&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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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nd&lt;br /&gt;
&amp;lt;/pre&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페퍼민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86%90%EB%B3%91%ED%9D%AC(%E5%AD%AB%E7%A7%89%E7%86%99)&amp;diff=33343</id>
		<title>손병희(孫秉熙)</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86%90%EB%B3%91%ED%9D%AC(%E5%AD%AB%E7%A7%89%E7%86%99)&amp;diff=33343"/>
		<updated>2023-12-10T02:53:0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페퍼민트: &lt;/p&gt;
&lt;hr /&gt;
&lt;div&gt;==손병희(孫秉熙)==&lt;br /&gt;
&lt;br /&gt;
===한 줄 소개===&lt;br /&gt;
&lt;br /&gt;
손병희는 일제강점기 3·1운동의 주역이었던 천도교인이자, 천도교 지도자이며, 독립운동가이고, 교육사업가이다.&lt;br /&gt;
&lt;br /&gt;
[[파일:2821.jpg|height:&amp;quot;100&amp;quot;|center|손병희]]&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width=&amp;quot;655&amp;quot; height=&amp;quot;491&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_kfoG_UlJHA&amp;quot; title=&amp;quot;손병희&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천도교 창건 및 정비===&lt;br /&gt;
&lt;br /&gt;
'''*천도교 창건 배경'''&lt;br /&gt;
&lt;br /&gt;
손병희는 22세였던 1882년 동학에 입도하였다. 그는 입도 3년만에 제2세 교주 최시형을 만나 착실한 신도가 되었다. 그리고 그 사이 동학의 교세는 날로 확산되었다.&lt;br /&gt;
&lt;br /&gt;
그렇게 전국적으로 정부의 부정부패에 대항하여 동학교도들과 함께 대대적인 항쟁을 전개하며 오랜 시간 최시형과 함께 해왔던 손병희였지만, 그들은 항쟁 중 충주 부근에서 개별적으로 행동하기로 하고 해산하였다. &lt;br /&gt;
&lt;br /&gt;
그 후 최시형과 손병희 등 주요 간부들은 당연히 관군의 추격을 받게 되었지만, 다행히 생존한 북접 간부들의 노력으로 교세는 명맥을 유지하였다. 특히 그들은 탄압의 손길이 적게 미쳤던 함경도와 평안도 지방으로 피신해 그곳에서의 교세 확장, 포교에 힘썼다.&lt;br /&gt;
&lt;br /&gt;
그렇게 손병희는 최시형에게 성실한 생활태도와 지략의 역량을 인정받아 '의암'이라는 도호를 받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1897년 12월 24일에는 실질적인 제3세 교주로서의 일을 맡게 되었으며, 동학농민운동이 외세에 의해 진압되고, 1898년 4월 5일 제2대 교주였던 최시형이 체포되어 6월 2일 서울 감옥에서 처형된 뒤 마침내 교주가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천도교 창건 및 조직 정비'''&lt;br /&gt;
&lt;br /&gt;
&amp;lt;big&amp;gt;'''손병희는 동학의 교주가 된 초기에는 정치와 종교 간의 불가분적 관계를 강조하면서&amp;lt;ref&amp;gt;교정일치론.&amp;lt;/ref&amp;gt; 동학에서의 여러 가지 개혁적인 시도를 감행했으나 실패했고, 도리어 일제에 의해 역이용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되면서, 정교분리의 원칙을 내걸고 1905년 교명을 '천도교'로 개칭하면서 새로운 교리와 체제를 확립하기 시작하였다.'''&amp;lt;/big&amp;gt;&lt;br /&gt;
&lt;br /&gt;
최시형의 순교가 있고 난 뒤, 손병희는 사태를 수습하고 조직을 재정비하는 데 힘썼다. 그러나 관헌의 추적이 심하자 1901년 3월 일본으로 피신했고, 그 해 9월 일시 귀국했다가 ‘세계의 대세’를 깨닫기 위해 1902년 3월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가려 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일본에 머물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그곳에서 망명중이던 개화파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새로운 인식을 갖추게 된 한편, 국내와도 꾸준히 연락하면서 교인들을 규합하고 동학을 재정비하려 노력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그런데 손병희의 일본 체류는 그의 사상적 폭이 넓어지고 새로운 시대에 적응할 수 있는 탄력성을 증대시킨 반면, 일본의 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동학교도들의 민족적 저항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amp;lt;/font&amp;gt;'''&lt;br /&gt;
&lt;br /&gt;
1904년 8월 말부터 전국에 걸쳐 조직되기 시작한 '진보회'는 원래 동학교도들이 기존 정치체제의 개혁 세력으로서 참여하기 위한 기구였으나, 이용구의 주도하에 송병준의 일진회와 합하고 친일단체화하였다.&lt;br /&gt;
&lt;br /&gt;
이에 손병희는 교정일치론을 철회하고 정치적 관심은 아예 포기하였으며, 종교로서의 동학을 고수하는 것으로 방침을 바꾸었다. 따라서 1905년 12월 1일 '동학'을 '천도교'로 바꾸어 세상에 널리 알렸고, 이듬해 1월에는 귀국하여 교회를 재조직하는 데 착수했으며, ＜천도교대헌＞을 반포하고 새로운 교단조직을 만들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천도교리의 체계화'''&lt;br /&gt;
&lt;br /&gt;
이후 손병희는 천도교단의 중앙과 지방조직을 정비하는 한편, 천도교리의 체계화에도 노력하였다. &lt;br /&gt;
&lt;br /&gt;
각종 교리서들이 천도교중앙총부 명의로 편찬되었다. 특히 1907년 출간된 『대종정의』에서는 '인내천'&amp;lt;ref&amp;gt;천도교의 기본 사상으로,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말.&amp;lt;/ref&amp;gt;을 천도교의 교의로 공식화하였다. &lt;br /&gt;
&lt;br /&gt;
이후 손병희와 천도교단에서는 서양의 근대사상을 수용하여 인내천 교리에 대한 체계화 작업을 계속했다.&lt;br /&gt;
&lt;br /&gt;
이에 따라 인내천은 한편에서 천도교 종교의식의 원천이 되어 온갖 도법과 교화의 출발점이 되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천도교 정치사상의 근저가 되어 온갖 이론과 행동을 규정짓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즉 천도교에서는 '보국안민'&amp;lt;ref&amp;gt;나랏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함&amp;lt;/ref&amp;gt;, '포덕천하'&amp;lt;ref&amp;gt;덕을 천하에 편다는 뜻으로, 세상에 천도교를 널리 보급함을 이르는 말.&amp;lt;/ref&amp;gt;, '광제창생'&amp;lt;ref&amp;gt;널리 백성을 구제함&amp;lt;/ref&amp;gt;을 통한 지상천국 건설을 최고의 이상으로 삼기 시작한 것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보성전문학교 인수===&lt;br /&gt;
&lt;br /&gt;
보성전문학교의 설립자인 이용익의 서거 이후, 그의 손자 이종호가 잠시 학교의 경영을 맡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하지만 보성전문학교는 고종의 퇴위 이후 급속도로 경영난에 봉착하게 되었다. 학교의 설립자는 이용익이었으나, 학교의 보호자는 그를 아끼던 고종이었기 때문이다. 일제가 1906년 이상설ㆍ이준ㆍ이위종 등 헤이그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퇴위시키면서 보성학원에 대한 지원 역시 끊긴 것이다. &lt;br /&gt;
&lt;br /&gt;
주인이 없는 보성전문학교를 이끌고 있던 윤익선&amp;lt;ref&amp;gt;보성전문학교 5대 교장.&amp;lt;/ref&amp;gt;은 손병희를 찾아가 지원을 간청했다. 손병희는 어떤 일이 있어도 명문 보성전문학교의 문을 닫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였고, 1907년 12월 21일 보성전문학교를 천도교에서 인수하였다. &lt;br /&gt;
&lt;br /&gt;
막대한 부채를 안고 인수한 것이었지만 보성전문학생 중에는 특정 종교재단에서 학교를 인수하는 것을 반대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이를 알게 된 손병희는 학교에서 일체의 종교적 색채를 강요하지 말 것을 담당자들에게 각별히 당부하였다. &lt;br /&gt;
&lt;br /&gt;
이 때 손병희가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지 않았다면 오늘의 고려대학교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해방 후 고려대학교는 교정 한 구석에 손병희의 동상을 세웠다.&lt;br /&gt;
&lt;br /&gt;
[[파일:손병희_선생_흉상.jpg|height:&amp;quot;100&amp;quot;|center|손병희]]&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3.1운동===&lt;br /&gt;
&lt;br /&gt;
&lt;br /&gt;
손병희와 천도교단은 3·1운동을 준비하고 전국적인 조직을 이용해 시위를 조직하거나 운동자금을 제공하는 등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lt;br /&gt;
&lt;br /&gt;
각 기관이나 연원을 대표한 핵심지도자였던 손병희, 권병덕, 최린, 이종일, 권동진, 오세창, 양한묵, 임예환, 홍기조, 나용환, 나인협, 김완규, 박준승, 이종훈, 홍병기로 구성된 15명이 ‘민족대표 33인’의 일원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을 하기도 하였다. 1919년 2월 27일 밤 천도교 직영의 보성사에서 독립선언문 2만 1000매를 인쇄, 이튿날 가회동 자신의 집에 민족대표 23명이 모여 다음날 거사를 재확인하였다. 그리고 파고다공원&amp;lt;ref&amp;gt;현 탑골공원.&amp;lt;/ref&amp;gt;에서 독립선언식을 할 경우의 불상사를 염려해 파고다공원 부근 '태화관'에서 기념식을 거행하기로 하였다.&lt;br /&gt;
&lt;br /&gt;
이처럼 손병희와 천도교단이 3․1운동의 준비와 확산에 조직적으로 관여한 것은 ‘교정일치’라는 천도교리와도 무관치 않은 것이었다. &lt;br /&gt;
&lt;br /&gt;
손병희는 3·1운동 관련 재판과정에서 “종교가 만족스럽게 행해지지 못하는 동안은 아무래도 종교가가 정치에 관계하게 된다. 국가가 종교를 도와주면 정치에 관계하지 않고 자립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는 한에는 종교는 정치에 붙어 가서 그 목적을 달성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며, 정치와 종교의 유기적인 관계를 분명하게 밝혔다. 그리고 강제병합 후 한국인을 항상 압박만 하고 관리로 채용하지 않는 등, 정치적 차별이 심각함을 문제 삼았다. &lt;br /&gt;
&lt;br /&gt;
한편 3월 1일 기념식 거행 후 일본경찰에 자진 검거되어 1920년 10월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이던 손병희는, 1년 8개월만에 병보석으로 출옥 후 상춘원에서 요양하였다. 하지만 그는 결국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1922년 5월 19일 향년 62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평가===&lt;br /&gt;
&lt;br /&gt;
&lt;br /&gt;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건국훈장은 대한민국 국가 수립에 뚜렷한 공을 세운 자나 국가의 기초를 다지는 데 뚜렷한 공적이 있다고 평가되는 자에게 수여하는 훈장이다.&lt;br /&gt;
&lt;br /&gt;
*일제강점기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들의 손병희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민족의 영웅', '조선 독립의 거인' 등으로 굉장히 높았다. 해방을 맞아 귀국한 김구를 비롯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간부들은 손병희 선생을 '독립운동의 근원지'라고 평가하였다.&lt;br /&gt;
&lt;br /&gt;
*1992년 3월 및 2019년 3월에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amp;lt;ref&amp;gt;국가보훈처가 선정한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amp;quot;손병희.&amp;quot; 유튜브 비디오, &amp;quot;국가보훈,&amp;quot; 2016. 12. 04. https://www.youtube.com/watch?v=_kfoG_UlJHA&lt;br /&gt;
* &amp;quot;독립유공자 공적조서&amp;quot;, &amp;lt;공훈전자사료관&amp;gt;, &amp;lt;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Popup.do?goTocode=0&amp;amp;mngNo=2821&amp;amp;kwd=%EC%86%90%EB%B3%91%ED%9D%AC&amp;gt;&lt;br /&gt;
* &amp;quot;손병희 (孫秉熙)&amp;quot;, &amp;lt;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amp;gt;, &amp;lt;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0507&amp;gt;&lt;br /&gt;
* &amp;quot;손병희[孫秉熙]&amp;quot;, &amp;lt;우리역사넷&amp;gt;, &amp;lt;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n401600&amp;amp;code=kc_age_40&amp;gt;&lt;br /&gt;
* &amp;quot;천도교 (天道敎)&amp;quot;, &amp;lt;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amp;gt;, &amp;lt;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5819&amp;gt;&lt;br /&gt;
* 성강현, 「3·1운동에서 의암 손병희의 역할에 대한 재조명」, 『동학학보』제62호, 동학학회, 2022, 113-158쪽.&lt;br /&gt;
* &amp;quot;건국훈장 (建國勳章)&amp;quot;, &amp;lt;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amp;gt;, &amp;lt;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1973&amp;gt;&lt;br /&gt;
* 김삼웅, &amp;quot;보성전문학교에서 법률공부&amp;quot;, &amp;lt;오마이뉴스&amp;gt;, 2021. 12. 25., &amp;lt;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796593&amp;gt;&lt;br /&gt;
* &amp;quot;보성전문학교 (普成專門學校)&amp;quot;, &amp;lt;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amp;gt;, &amp;lt;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3433&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애국계몽운동]]&lt;br /&gt;
[[분류:페퍼민트🌿]]&lt;/div&gt;</summary>
		<author><name>페퍼민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D%B4%EC%9A%A9%EC%9D%B5(%E6%9D%8E%E5%AE%B9%E7%BF%8A)&amp;diff=33342</id>
		<title>이용익(李容翊)</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D%B4%EC%9A%A9%EC%9D%B5(%E6%9D%8E%E5%AE%B9%E7%BF%8A)&amp;diff=33342"/>
		<updated>2023-12-10T02:37:4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페퍼민트: &lt;/p&gt;
&lt;hr /&gt;
&lt;div&gt;==이용익(李容翊)==&lt;br /&gt;
&lt;br /&gt;
===한 줄 소개===&lt;br /&gt;
&lt;br /&gt;
대한제국 때, 내장원경, 탁지부대신, 중앙은행 총재 등을 역임하여 근대 개혁에 기여한 관료.&lt;br /&gt;
&lt;br /&gt;
[[파일:20215553-6569-4f5d-8d60-9f047f5415b9.jpg|height:&amp;quot;100&amp;quot;|center|이용익]]&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width=&amp;quot;700&amp;quot; height=&amp;quot;400&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hO3AqWdRbiY&amp;quot; title=&amp;quot;[신비한TV 서프라이즈]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전국 팔도를 누비며 보부상으로 성공한 이용익! 그의 비결은?!, MBC 221127 방송&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amp;lt;br/&amp;gt;&lt;br /&gt;
&lt;br /&gt;
*1854년&amp;lt;ref&amp;gt;철종 5년&amp;lt;/ref&amp;gt; 함경북도 명천에서 태어났다.&lt;br /&gt;
&lt;br /&gt;
*서민의 아들로 태어나 소년 시절에 서당에서 수학을 했다.&lt;br /&gt;
&lt;br /&gt;
*그 뒤 고향을 떠나 한때 보부상으로 행상하여 자금을 모았고, 함경남도 단천에 와서 금광에 투자하여 거부가 되었다.&lt;br /&gt;
&lt;br /&gt;
*고종의 신임을 받아 단천&amp;lt;ref&amp;gt;금광이 있던 곳. 그는 이곳의 금광을 관리했다.&amp;lt;/ref&amp;gt; 감역, 탁지부대신, 서북철도국총재, 중앙은행총재 등을 역임하면서 근대 개혁에 기여하였다.&lt;br /&gt;
&lt;br /&gt;
*1904년 러일전쟁 이후 일본으로 압송되었다가 다시 돌아왔다.&lt;br /&gt;
&lt;br /&gt;
*돌아와서는 민족의 역량을 키우기 위해 자비로 보성소학과 중학 그리고 보성전문학교&amp;lt;ref&amp;gt;현 고려대학교의 전신&amp;lt;/ref&amp;gt;를 설립하여 인재 키워내기에 힘썼다. 그 외에도 편집소 보성관, 인쇄소 보성사 등을 설치하여 민족계몽에 힘쓰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어 국권이 박탈되고 보호정치가 시작되자, 육군부장이라는 직명으로 고종의 밀서를 들고 프랑스로 원조 요청을 하러 향하던 중 중국 산둥성옌타이항에서 6월에 일본 관헌에게 발각되었다. 이 때 밀령의 책임을 추궁 받을까 염려한 조선 정부에 의해, 일체의 모든 공직에서 파면되었다.&lt;br /&gt;
&lt;br /&gt;
*그 후 해외를 망명하며 구국운동을 이어갔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07년&amp;lt;ref&amp;gt;고종 44년&amp;lt;/ref&amp;gt;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객사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러일전쟁 이전 - 고종의 신임===&lt;br /&gt;
&lt;br /&gt;
이용익은 고종 황제의 총애와 신임을 독차지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러한 절대적인 신임으로 인해 대한제국의 돈줄을 맡긴 것도 맞지만, 그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였기 때문에 총애를 받은 것이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그가 처음으로 최고 권력에 다가서게 된 것은 임오군란 때 충주로 피신한 명성황후와 민영익 사이의 연락을 맡았기 때문이었다. &lt;br /&gt;
&lt;br /&gt;
그가 단천 감역으로서 광산에서 채굴한 금덩어리를 고종에게 상납하여 신임을 얻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오고 있다.&lt;br /&gt;
&lt;br /&gt;
그가 출세하게 된 가장 큰 계기는 아관파천 이후였다. 당시 함경도 출신자들이 상당수 등용되면서 정국의 한 축을 구성하게 되었는데 이 가운데 이용익도 끼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896년 8월에는 평안북도 관찰사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3월에는 중추원 의관에 등용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러일전쟁 이전 - 고종의 신임으로 인한 시련===&lt;br /&gt;
&lt;br /&gt;
&amp;lt;big&amp;gt;'''&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하지만 그는 이렇게 벼락출세를 하게 되면서 만만치 않은 반발 역시 감당해야 했다.&amp;lt;/font&amp;gt;'''&amp;lt;/big&amp;gt; &lt;br /&gt;
&lt;br /&gt;
1897년, 이윤용과 한규설 등의 대신들을 모함했다는 이유로 그는 유배를 가야만 하였다. 이는 그가 반발에 부딪힌 첫 번째 사례라고 할 수 있다.&amp;lt;ref&amp;gt;당시 일본공사관에서는 대신과 총신 사이의 알력 때문에 이 사건이 일어났다고 본국에 보고한 바 있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00년 이용익은 중추원의장 정낙용의 탄핵을 받았으며, 이듬해 1월 21일에는 의정부 참정 조병식의 공격을 받았다. &lt;br /&gt;
&lt;br /&gt;
가장 심한 공격은 1902년 11월에 있었다. 당시 의정 윤용선 등 여러 대신들이 경운궁 대한문 밖에 연좌하면서 이용익에게 죄 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당시에는 고종 황제조차도 그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그를 피신시킬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결국 이것으로도 사태는 진정되지 않았고, 이용익은 안남미 구입이라는 명목으로 러시아 군함을 타고 당시 러시아가 장악하고 있던 여순으로 건너가야만 했다.&lt;br /&gt;
&lt;br /&gt;
&amp;lt;big&amp;gt;'''&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이용익은 왜 이렇게 심한 공격을 받아야만 하였을까?&amp;lt;/font&amp;gt;'''&amp;lt;/big&amp;gt;&lt;br /&gt;
&lt;br /&gt;
정낙용은 그가 북쪽 변방의 천한 출신임에도 언사와 거동이 대단히 오만하다고 공격하였다. 그의 벼락출세를 질투한 것이다. &lt;br /&gt;
&lt;br /&gt;
이용익이 공격당한 이유로는 한 가지가 더 있다. 이용익이 맡은 여러 역할 가운데 하나가 감찰이었다. 그는 당시 세금 상납을 일부러 하지 않고 있거나 세금 상납이 밀린 지방관이나 관찰사에게는 얄짤이 없었다고 한다. 이밖에도 관리들의 비리를 적발하여 처벌을 요구하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다. 그는 이렇게 대신들의 미움을 살 수밖에 없는 일들을 도맡아 왔고, &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1903년에는 그가 입원한 병원에서 폭탄이 터지는 사태까지 발생했다고 한다.&amp;lt;/font&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러일전쟁 당시 - 일본의 경계===&lt;br /&gt;
&lt;br /&gt;
이용익이 대신들의 미움만 받은 것은 아니었다. &lt;br /&gt;
&amp;lt;big&amp;gt;'''&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이용익은 러일전쟁이 일어난 지 2주 만인 1904년 2월 22일, 일본으로 강제 압송되었다.&amp;lt;/font&amp;gt;'''&amp;lt;/big&amp;gt;&lt;br /&gt;
&lt;br /&gt;
일본의 입장에서는 그가 가장 위험한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실제 그는 일본의 전쟁 수행에 방해가 되는 행동만 했다고 한다. &lt;br /&gt;
&lt;br /&gt;
대한제국은 러일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국외중립'을 선언한 바 있다. 당시 외부 번역관 이건춘을 중국 지부로 밀파하여 그곳에서 각국에 국외중립을 선언하는 전문을 발송토록 하였는데, 이를 총 지휘한 인물이 바로 이용익이었다.&lt;br /&gt;
&lt;br /&gt;
고종 황제는 1904년 1월에 들어서면서 이용익을 군부대신, 원수부검사국총장 등 군직에 연이어 임명하였으며, 그는 야포용 탄약을 포함한 다량의 군수품을 수입하는 등 전쟁 발발에 항상 대비하고 있었다. &lt;br /&gt;
&lt;br /&gt;
그가 이러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은 전쟁이 터지자마자 그를 납치해 간 것이다. &lt;br /&gt;
&lt;br /&gt;
그가 일본으로 끌려간 다음날인 2월 23일, 대한제국과 일본 간의 공수동맹을 주요한 내용으로 하는 '한일의정서'가 체결된 것도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그는 일본으로 압송됐을 당시 온갖 회유정책의 대상이 되었으나 모두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일본에서 다시 돌아온 후 그가 관직에 복귀하기 위해 노력하던 때까지도 일본은 그를 최선을 다해 방해했다. 그를 총애하던 고종 황제도 그를 관직에 복귀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일제는 그에 대한 의심을 늦추지 않고 끊임없이 방해하였다. 그가 1905년 2월 경북관찰사에 임명되자 일진회를 동원하여 그의 부임을 물리적으로 막기까지 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계속 정치를 하는 것은 무리라는 판단 하에 결국 그는 스스로 1905년 9월 국외로 망명의 길을 떠나게 된 것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러일전쟁 이후 - 보성전문학교 설립===&lt;br /&gt;
&lt;br /&gt;
이용익은 일본으로 끌려간 지 10개월이 지나서야 비로소 귀국할 수 있었다.&amp;lt;ref&amp;gt;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유리해지자 국제 여론을 고려해 이용익을 귀국시킨 것이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그는 귀국 후 '교육구국'을 다짐하며 보성학교와 보성사를 설립하는 등 문화계몽사업에 주력하며, 소학교부터 전문학교에 이르기까지의 체계적인 교육기관을 설립하려는 시도를 하기 시작했다. &lt;br /&gt;
&lt;br /&gt;
보성전문학교를 세운 것은 그가 일본에 납치되었다가 귀국한 이듬해이다. 그는 체류 중에는 일본의 근대 교육기관을 두루 살펴보았고, 귀국할 때에는 다수의 도서와 인쇄기를 사비로 구입해 왔다. 이것은 우리나라에 신교육기관을 창설하려는 의도였다.&lt;br /&gt;
&lt;br /&gt;
모든 준비를 마친 이용익은 고종에게 학교의 설립 계획을 알렸고, 고종은 크게 기뻐하며 ‘보성(普成)’이라는 교명을 하사했다.&amp;lt;ref&amp;gt;원래 이용익이 생각한 교명은 '중앙학교'였는데, 고종이 하사한 교명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05년 4월 3일, 보성전문학교는 종로에 있던 러시아어 학교인 관립한성아어학교의 건물을 빌려 개교했다. 당시에는 정부 조직과 상통하도록 법률, 이재, 농학, 상학, 공학과로 구성된 2년제 전문학교로 시작되었다. &lt;br /&gt;
&lt;br /&gt;
보성전문학교는 형식상 사립학교였음에도 황실의 막대한 지원금으로 운영돼 거의 황립학교에 가까웠다.&amp;lt;ref&amp;gt;고종의 신임을 받은 이용익 덕분이다.&amp;lt;/ref&amp;gt; 이것이 감사했던 이용익은 고종의 배려에 대한 감사와 보성전문학교의 특별한 위상을 표현하고자 황실의 문장인 오얏꽃을 학교의 상징으로 채택하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현재 고려대학교에 있는 이용익의 흉상&amp;gt;'''&lt;br /&gt;
[[파일:고려대 51 roaltlf.jpg|height:&amp;quot;100&amp;quot;|center|이용익 흉상]]&lt;br /&gt;
&lt;br /&gt;
&lt;br /&gt;
===평가===&lt;br /&gt;
&lt;br /&gt;
&amp;lt;big&amp;gt;'''&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고려대학교의 전신 보성전문대학 설립자 이용익은 아직까지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amp;lt;/font&amp;gt;'''&amp;lt;/big&amp;gt;&lt;br /&gt;
&lt;br /&gt;
그의 후손이 국가보훈처에 이용익 선생에 대한 기록이 적힌 러시아와 프랑스의 문건을 모두 제출했는데도 독립운동의 성격이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계속 서훈 신청을 거절당하고 있다. 그의 후손은 &amp;quot;사실 독립유공자에 대한 자료는 보훈처 공훈발굴과에서 해야 할 역할인데 자료를 줘도 제대로 검토하지 않는 실정&amp;quot;이라며 국가보훈처를 비판했다.&lt;br /&gt;
&lt;br /&gt;
&amp;lt;big&amp;gt;'''&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그리고 일각에서는 이용익이 천민이고 무식한 사람이라며 그를 폄하하기도 한다.&amp;lt;/font&amp;gt;'''&amp;lt;/big&amp;gt; &lt;br /&gt;
&lt;br /&gt;
하지만 그가 정말 무식했다면 결코 그 많은 관직을 수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무식한 사람이라는 오해를 받게 됐을까? '고종황제의 충신, 이용익의 재평가'라는 책에서는, 이용익의 출신과 성장을 놓고 악의적인 소문이 퍼진 이유로, '1876년 전후에 팽배했던 평안도와 함경도 사람들에 대한 차별의식을 밑바탕으로 한 이용익의 승승장구에 대한 질투심과 일본 제국주의 앞잡이 일진회와 실체가 왜곡돼 이완용, 윤치호 등 친일세력이 활동한 독립협회 모략이 함께 작용했을 가능성'을 들고 있다.&lt;br /&gt;
&lt;br /&gt;
그에 대한 재평가가 시급한 상황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amp;quot;[신비한TV 서프라이즈]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전국 팔도를 누비며 보부상으로 성공한 이용익! 그의 비결은?!, MBC 221127 방송.&amp;quot; 유튜브 비디오, &amp;quot;MBC 미스터리 : 심야괴담회 X 서프라이즈,&amp;quot; 2022. 11. 27. https://www.youtube.com/watch?v=hO3AqWdRbiY&amp;amp;t=1s&lt;br /&gt;
* &amp;quot;이용익[李容翊]&amp;quot;, &amp;lt;우리역사넷&amp;gt;, &amp;lt;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n403900&amp;amp;code=kc_age_40&amp;gt;&lt;br /&gt;
* &amp;quot;이용익 (李容翊)&amp;quot;, &amp;lt;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amp;gt;, &amp;lt;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5266&amp;gt;&lt;br /&gt;
* 윤미경, &amp;quot;&amp;quot;나의 외증조 이용익은&amp;quot;...어느 독립운동가 후손의 피끓는 외침&amp;quot;, &amp;lt;뉴스;트리&amp;gt;, 2021. 05. 01., &amp;lt;https://www.newstree.kr/newsView/ntr202103170012&amp;gt;&lt;br /&gt;
* 정한솔, &amp;quot;‘보성에서 고려까지’ 114년 역사의 초석을 다지다&amp;quot;, &amp;lt;고대신문&amp;gt;, 2019. 05. 08., &amp;lt;https://www.kunews.ac.kr/news/articleView.html?idxno=30350&amp;gt;&lt;br /&gt;
* &amp;quot;보성전문학교&amp;quot;, &amp;lt;성북마을아카이브&amp;gt;, &amp;lt;https://archive.sb.go.kr/isbcc/home/u/story/view/626.do;jsessionid=186F266BB5C77B77C2F3A954EEE39964&amp;gt;&lt;br /&gt;
* &amp;quot;보성전문학교 (普成專門學校)&amp;quot;, &amp;lt;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amp;gt;, &amp;lt;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3433&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애국계몽운동]]&lt;br /&gt;
[[분류:페퍼민트🌿]]&lt;/div&gt;</summary>
		<author><name>페퍼민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B3%B4%EC%84%B1%EC%A0%84%EB%AC%B8%ED%95%99%EA%B5%90&amp;diff=33341</id>
		<title>보성전문학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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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0T02:28:0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페퍼민트: &lt;/p&gt;
&lt;hr /&gt;
&lt;div&gt;==보성전문학교 (普成專門學校)==&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lt;br /&gt;
1905년 지금의 서울인 한성에 설립되어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직후까지 존속했던 근대적 고등교육기관이자 전문학교로, '''고려대학교의 전신'''이다.&amp;lt;/br&amp;gt;&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 15585522-57c8-42f8-99e6-865b5916d9d7.jpg|400px|lright|보성전문학교 초창기 교정 사진이다.]]&amp;lt;/br&amp;gt;&lt;br /&gt;
&lt;br /&gt;
===설립 배경과 목적 및 의의===&lt;br /&gt;
&lt;br /&gt;
내우외환으로 국운이 기울어지며 열강의 이해가 각축하는 소용돌이 속에서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amp;quot;민족과 국가를 구하는 길은 오직 청년 학도를 가르치는 교육의 힘을 기르는 데 있다&amp;quot;&amp;lt;/font&amp;gt;'''는 '교육구국'의 신념을 가지고 대한제국의 이용익 선생이 보성전문학교를 설립했다.&lt;br /&gt;
&lt;br /&gt;
광무황제의 가장 측근이며, 배일 친러파였던 이용익은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확실시되는 가운데 납치되어 갔던 일본으로부터 귀국했고, 당시 근대국가를 경영할 정치·경제·법률 등에 밝은 전문적 인재가 없어 대한제국이 위기에 놓인 것임을 절감하여, 그러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보성전문학교를 세운 것이다. &lt;br /&gt;
&lt;br /&gt;
이렇게 세워진 보성전문학교는 한국최초의 민간인에 의한 근대적 고등교육기관으로, 신교육 보급을 통한 국가자강 및 민족주의의 교육적 실현과 항일 민족 투쟁의 산실이었으며, 근대적 학문의 발상지였다는 역사적 의의를 가진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ig&amp;gt;'''''&amp;lt;font color=&amp;quot;#ff2500&amp;quot;&amp;gt;명순구 법학전문대학원장 : “보성은 논어에 등장하는 말로 널리 인간성을 계발한다는 의미다.&amp;quot;&amp;lt;/font&amp;gt;'''''&amp;lt;/big&amp;gt;&amp;lt;ref&amp;gt;원래 이용익이 생각한 교명은 중앙학교였는데, 고종이 하사한 교명에 따라 학교 이름을 보성이라 지었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건물의 역사===&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white;&amp;quot;&lt;br /&gt;
|+ style=&amp;quot;caption-side:bottom; text-align:left;&amp;quot;|&lt;br /&gt;
|-&lt;br /&gt;
| 1905년 4월 3일 || 종로에 있던 러시아어 학교인 관립한성아어학교&amp;lt;ref&amp;gt;현 종로 수송공원&amp;lt;/ref&amp;gt; 건물을 빌려 개교 || [[파일:Image01.png | 200px]]&lt;br /&gt;
|-&lt;br /&gt;
| 1906년 || 이용익은 아어학교에 이웃한 박동 소재 김교헌 소유의 대저택&amp;lt;ref&amp;gt;현 조계사 터&amp;lt;/ref&amp;gt;을 매입하여 학교 시설을 정비. 부속출판사 “보성사”도 설립. || [[파일:Image02.png | 200px]]&lt;br /&gt;
|-&lt;br /&gt;
| 1918년 || 박동을 아예 떠나 낙원동의 서북학회 회관&amp;lt;ref&amp;gt;현 종로 낙원상가 터&amp;lt;/ref&amp;gt;을 임차하여 사용하기 시작. || [[파일:Image03.png | 200px]]&lt;br /&gt;
|-&lt;br /&gt;
| 1922년 || 천도교 본부의 이전&amp;lt;ref&amp;gt;송현동에서 경운동으로 이전함.&amp;lt;/ref&amp;gt;에 따라 송현동에 건물 신축 및 이전. || [[파일:Image04.png | 200px]]&lt;br /&gt;
|-&lt;br /&gt;
| 1924년 || ‘ㄷ’자 모양의 서양식 건물을 신축. 건물 앞마당에 회화나무가 보임.&amp;lt;ref&amp;gt;이 회화나무의 씨를 받아 2019년 5월 법학신관 앞에 식재.&amp;lt;/ref&amp;gt; || [[파일:Image04.png | 200px]]&lt;br /&gt;
|-&lt;br /&gt;
| 1934년 || 경영권을 인수한 인촌 김성수가 안암동에 현재의 본관을 신축하면서 종로를 완전히 떠나 안암동에 정착. || [[파일:Image05.png | 200px]]&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연원 및 변천===&lt;br /&gt;
&lt;br /&gt;
&lt;br /&gt;
*이용익이 1905년 4월 3일 창설.&lt;br /&gt;
&lt;br /&gt;
&lt;br /&gt;
*이용익이 해외 망명중 서거, 손자 이종호가 잠시 학교 경영의 책임을 맡았으나 안중근의 의거에 연루되어 구금되자 경영난에 봉착. &lt;br /&gt;
&lt;br /&gt;
&lt;br /&gt;
*1910년, 그것을 구제하기 위해 천도교의 손병희(孫秉熙)가 인수. 이렇게 해서 재정적 위기는 면할 수 있게 되었으나, 동시에 나라의 독립을 상실한 해이기도 했기 때문에&amp;lt;ref&amp;gt;한일병합조약&amp;lt;/ref&amp;gt; 일제 총독부의 본격적인 간섭이 시작됨.&lt;br /&gt;
&lt;br /&gt;
&lt;br /&gt;
*총독부는 1915년 3월 사립학교 규칙과 동시에 전문학교 규칙도 아울러 공포. 같은 해 4월 1일부터 시행된 전문학교 규칙에는 “본령에 의하여 설치하는 전문학교가 아니면 전문학교라 칭할 수 없다.”고 하였음. 이에 따라 보성전문학교의 교명은 보성법률상업학교로 격하됨.&lt;br /&gt;
&lt;br /&gt;
&lt;br /&gt;
*1920년 2월에 교장으로 취임한 고원훈이 총독부 당국에 전문학교로의 승격을 거듭 타진하는 한편, 김병로 등이 재단법인 기성회를 조직하여 널리 사회 독지가들에게 호소하기 시작.&lt;br /&gt;
&lt;br /&gt;
&lt;br /&gt;
*전국 각지의 사회 인사 58명이 도움을 주어, 1921년 12월 28일, 보성전문학교라는 교명을 되찾음.&lt;br /&gt;
&lt;br /&gt;
&lt;br /&gt;
*1922년 일제의 조선교육령에 의해 3년제 전문학교로 개편.&lt;br /&gt;
&lt;br /&gt;
&lt;br /&gt;
*그 후 1932년에 총독부의 지나친 간섭 및 물가 변동, 재단 경영의 부진 등으로 학교가 불안정해지자 김성수가 경영을 인수.&lt;br /&gt;
&lt;br /&gt;
&lt;br /&gt;
*김성수는 민립대학 설립의 꿈을 펴기 위해 1934년 현재의 안암동 교사로 보성전문학교를 신축 이전. &lt;br /&gt;
&lt;br /&gt;
&lt;br /&gt;
*그 후 보성전문학교는 외적으로도, 내적으로도 거듭 발전함. 건물을 신축하고 최신 규모의 시설을 확충하는 동시에, 도서·민속고고품을 모집했고, 교과목 및 교수내용에 충실을 가했음. 뿐만 아니라 재학생 및 졸업생들이 사회 곳곳에서 활약하는 등 해를 따라 눈에 띄는 발전을 이루어나감.&lt;br /&gt;
&lt;br /&gt;
&lt;br /&gt;
*그러나 이러한 발전에 따라 총독부의 탄압도 강해짐. 그들은 보성의 농과 신설계획을 거부하였고, 1944년에는 교명을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로 고치지 않고는 존속할 수 없도록 함.&lt;br /&gt;
&lt;br /&gt;
&lt;br /&gt;
*1945년 해방 후 9월에 재단이사회가 개최됨. 모든 학사규정을 다시 보성전문학교의 그것으로 환원시켰다가, 1946년 8월 고려대학교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됨.&lt;br /&gt;
&lt;br /&gt;
&lt;br /&gt;
===현재===&lt;br /&gt;
&lt;br /&gt;
&lt;br /&gt;
1945년 해방 후 1946년 8월 15일, 미군정청 문교부장이 설립 신청을 승인함에 따라 보성전문학교는 전문학교를 넘어 종합대학의 지위에 올랐다. 이름은 고려대학교로 정해졌다. &lt;br /&gt;
&lt;br /&gt;
보성전문학교 이후의 고려대학교는 1955년을 기점으로 현대화되면서 현재까지 이어져, 명문사립학교로서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초대 총장으로 현상윤 선생이 취임한 이래 유진오 선생(2,3,4대), 이종우 선생(5대), 김상협 선생(6,8대), 차락훈 선생(7대), 김준엽 선생(9대), 이준범 선생(10,11대), 김희집 선생(12대), 홍일식 선생(13대), 김정배 선생(14대), 어윤대 선생(15대), 이필상 선생(16대), 이기수 선생(17대), 김병철 선생(18대), 염재호 선생(19대)에 이어 제 20대 총장으로 정진택 선생이 총장직을 이어오고 있다. &lt;br /&gt;
&lt;br /&gt;
정진택 총장의 지도 아래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amp;quot;새로운 가치를 만들어가는 사람 중심의 고려대학교 - 창의적 미래인재 양성, 세계를 변환시키는 대학&amp;quot;&amp;lt;/font&amp;gt;'''이라는 비전을 추진하고 있는 고려대학교는 세계 유수대학들과 어깨를 나란히하며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고 시대를 이끌어나가는 학문적 가치와 인류를 위한 사회적 가치를 세우며 미래사회를 준비할 창의적 인재를 양성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또한 교육, 연구, 행정 등 전 분야에서 상호 존중하고 배려하는 고대만의 문화인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고대다움'&amp;lt;/font&amp;gt;'''을 바탕으로 '같이'의 가치가 활짝 피어나는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사람고대'&amp;lt;/font&amp;gt;''' 실현을 이뤄나가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2023 고려대학교 홍보영상&amp;gt;'''&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873&amp;quot; height=&amp;quot;491&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we0B2oBxKUM&amp;quot; title=&amp;quot;[고려대학교 Korea University] 2023 고려대학교 홍보영상 &amp;amp;#39;Welcome to KU&amp;amp;#39;&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amp;quot;[고려대학교 Korea University] 2023 고려대학교 홍보영상 'Welcome to KU'.&amp;quot; 유튜브 비디오, &amp;quot;고려대학교 Korea University,&amp;quot; 2023. 03. 01. https://www.youtube.com/watch?v=we0B2oBxKUM&lt;br /&gt;
* &amp;quot;고려대학교&amp;quot;, &amp;lt;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amp;gt;, &amp;lt;https://koreachoongang.org/edu/sub2/p_menu_group/200/p_menu_id_sel/edusub2&amp;gt;&lt;br /&gt;
* &amp;quot;3) 구국교육정책과 의무교육운동&amp;quot;, &amp;lt;우리역사넷&amp;gt;, &amp;lt;http://contents.history.go.kr/mobile/nh/view.do?levelId=nh_042_0030_0040_0030&amp;gt;&lt;br /&gt;
* 정한솔, &amp;quot;‘보성에서 고려까지’ 114년 역사의 초석을 다지다&amp;quot;, &amp;lt;고대신문&amp;gt;, 2019. 05. 08., &amp;lt;https://www.kunews.ac.kr/news/articleView.html?idxno=30350&amp;gt;&lt;br /&gt;
* &amp;quot;보성전문학교&amp;quot;, &amp;lt;성북마을아카이브&amp;gt;, &amp;lt;https://archive.sb.go.kr/isbcc/home/u/story/view/626.do;jsessionid=186F266BB5C77B77C2F3A954EEE39964&amp;gt;&lt;br /&gt;
* &amp;quot;보성전문학교 (普成專門學校)&amp;quot;, &amp;lt;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amp;gt;, &amp;lt;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3433&amp;gt;&lt;br /&gt;
* &amp;quot;학교 건물의 역사&amp;quot;, &amp;lt;고려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amp;gt;, &amp;lt;https://lawschool.korea.ac.kr/law/archive01.do?mode=view&amp;amp;articleNo=129696&amp;amp;article.offset=0&amp;amp;articleLimit=10&amp;amp;srSearchVal=%EC%97%AD%EC%82%AC&amp;amp;srSearchKey=article_title&amp;amp;totalNoticeYn=N&amp;amp;totalBoardNo=&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애국계몽운동]]&lt;br /&gt;
[[분류:페퍼민트🌿]]&lt;/div&gt;</summary>
		<author><name>페퍼민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3.1_%EC%9A%B4%EB%8F%99&amp;diff=33339</id>
		<title>3.1 운동</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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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0T02:14:2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페퍼민트: &lt;/p&gt;
&lt;hr /&gt;
&lt;div&gt;==3.1 운동==&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lt;br /&gt;
&lt;br /&gt;
'''1919년 3월 1일을 기해 일어난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width=&amp;quot;873&amp;quot; height=&amp;quot;491&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qAshxJh4jHA&amp;quot; title=&amp;quot;3·1 만세 시위, 100년 만에 데이터로 복원 / YTN&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원인 및 배경===&lt;br /&gt;
&lt;br /&gt;
&lt;br /&gt;
'''3·1운동은 일제의 폭압적인 식민지 지배에 대한 민족의 저항으로 일어났다.''' &lt;br /&gt;
&lt;br /&gt;
일본은 조선을 강점한 뒤 군사력을 배경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의 각 분야에서 폭력적인 억압과 수탈을 자행하는 무단통치를 실시했다.&lt;br /&gt;
&lt;br /&gt;
무단통치 하의 조선총독부는 민족 고유문화 말살, 경제적 지배의 철저화 등을 통해 한민족의 정당한 민족적 저항의 기반을 없애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이에 따라 한국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어쩔 수 없이 중국, 만주, 노령, 미주 등의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거나, 아예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지하로 숨어 기회를 엿보고만 있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그러던 중,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발표되었다.'''&lt;br /&gt;
&lt;br /&gt;
한국의 민족지도자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발표가 있자, 이에 의거해 한국 민족의 독립을 호소하고자 노력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이들의 움직임에 힘을 더 실어주었던 사건은 일본 도쿄에서 거행된 '2·8독립선언'이었다.'''&lt;br /&gt;
&lt;br /&gt;
젊은 동경 유학생들이 모여 발표한 「2·8독립선언서」는 일제의 침략행위를 역사적으로 설명하고, 병합이 민족의 의사를 무시한 일제의 군국주의적 야심의 사기와 폭력에 의해 이뤄졌음을 규탄하였다. 또한 식민지 정책의 야만적 성격을 폭로하였고, 일제와 열강은 마땅히 동양평화와 세계평화를 위해 한국을 독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민족자결주의 발표 이래 국내에서도 독립운동의 분위기가 고조되어가던 중, 고종황제가 갑자기 붕어&amp;lt;ref&amp;gt;임금이 세상을 떠나는 것.&amp;lt;/ref&amp;gt;하였다.&amp;lt;ref&amp;gt;덕수궁에서 기거하던 고종황제는 당시 68세로 건강한 편이었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건강하던 고종이 갑작스럽게 중병으로 붕어하자, 국민들은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이때 일제에 의해 독살 당한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 온 국민들은 망국의 설움과 일제에 대한 적개심으로 크게 동요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1910년 국권 상실 이래 잠자코 기회만을 노리고 있던 민족지도자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 발표', '재일 유학생의 2·8독립선언', '고종황제의 붕어' 등이 연속적으로 일어나 민족적 항일 의식이 고조되자, 이때가 독립을 꾀할 가장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여, 거족적인 3·1 운동의 계획에 본격적으로 돌입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lt;br /&gt;
'''*시작'''&lt;br /&gt;
&lt;br /&gt;
1919년 3월 1일, 미리 계획했던 대로 서울과 평양, 의주, 선천, 안주, 원산, 진남포 등 6개 도시에서 동시에 만세 운동이 시작되었다.&lt;br /&gt;
&lt;br /&gt;
원래 독립선언식의 예정 장소는 탑골공원이었으나 학생들의 희생을 고려하여 민족대표들은 그 장소를 인사동의 태화관&amp;lt;ref&amp;gt;일제강점기 경성부에 있던 음식점 겸 술집. 유명한 요리집이던 명월관의 부속 건물이기도 했다.&amp;lt;/ref&amp;gt;으로 갑자기 변경하였다.&lt;br /&gt;
&lt;br /&gt;
민족대표 33명 가운데 29명&amp;lt;ref&amp;gt;길선주, 김병조, 유여대, 정춘수 등 4인은 지방에 있었으므로 불참.&amp;lt;/ref&amp;gt;은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 모여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인 서영환을 통해 독립통고서를 조선총독부에 전달했다. &lt;br /&gt;
&lt;br /&gt;
한편 최린은 태화관 주인 안순환에게 조선총독부에 전화를 걸어 민족대표 일동이 여기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나서 축배를 들고 있다고 통고하게 하였다.&lt;br /&gt;
&lt;br /&gt;
이 통고를 받은 즉시 일본경찰 80여 명이 달려왔고, 태화관은 포위되었다.&lt;br /&gt;
&lt;br /&gt;
그러던 중 계획했던 대로 오후 3시가 되자 한용운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그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제창한 뒤, 민족대표들은 의연히 일본 경찰에 스스로 체포되었다. &lt;br /&gt;
&lt;br /&gt;
탑골공원에 모여 있던 학생들은 등장하지 않는 민족대표들에 당황하여 강기덕 등을 그들에게 보내 항의하기도 했으나, 2시 30분&amp;lt;ref&amp;gt;혹은 2시.&amp;lt;/ref&amp;gt; 무렵에 따로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한 청년이 단상으로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두 갈래로 나뉘어 종로, 서울역, 정동, 이화학당, 서대문 등을 행진하며 시위를 벌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확산'''&lt;br /&gt;
&lt;br /&gt;
3·1운동은 수 개월 동안 지속되었으며, 교통이 발달한 여러 도시 등을 중심으로 시작되어 농촌 등지로 전파되며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되었다. &lt;br /&gt;
&lt;br /&gt;
갈수록 참여하는 인원과 계층이 늘어나면서 운동의 양상은 비폭력 시위에서 폭력투쟁으로 발전하였다. &lt;br /&gt;
&lt;br /&gt;
국외로도 확산되어 만주, 연해주, 도쿄, 오사카, 필라델피아 등에서도 독립 시위가 벌어졌다.&lt;br /&gt;
&lt;br /&gt;
&lt;br /&gt;
운동이 발전될수록 투쟁 목표가 구체화되고 조직화되었으며, 비폭력적인 만세운동에서 계획적이고 공세적인 폭력투쟁으로 진전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lt;br /&gt;
&lt;br /&gt;
폭력투쟁은 일제의 탄압에 대한 방어적인 대응으로 나타난 것도 있었지만, 일제의 권력기관에 대해 계획적이고 공세적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었다. &lt;br /&gt;
&lt;br /&gt;
일본 헌병의 총격 등으로 시위가 강제로 해산되면 군중들은 몽둥이와 죽창 등으로 무장하여 헌병 주재소와 면사무소, 우편소, 금융조합, 일본인과 친일 인사의 집 등을 파괴하고 각종 수탈용 장부와 무기를 빼앗아 소각하는 등 무력을 행사했다. &lt;br /&gt;
&lt;br /&gt;
그러나 처음부터 일제의 권력기관을 접수하려 나서는 경우도 있었는데, 강원도 통천에서는 총검으로 무장하고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특히 국외독립운동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평안도와 함경도 등 북부지방에서 이러한 경향이 강했는데, 간도 및 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 세력은 3·1운동 당시 국내진공계획을 세우기도 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일제의 진압'''&lt;br /&gt;
&lt;br /&gt;
일제는 3·1운동을 무력으로 무자비하게 진압했다.&lt;br /&gt;
&lt;br /&gt;
화성 제암리, 천안 아우내, 정주 곽산, 남원 광한루, 익산 이리를 포함한 전국 각지에서 시위대에 총격을 가하는 등 학살이 벌어졌다. &lt;br /&gt;
&lt;br /&gt;
그리고 시위자들을 체포하여 가혹한 고문을 서슴지 않았다. &lt;br /&gt;
&lt;br /&gt;
당시 일제의 통계에 따르면 3·1운동 이후 3개월 동안 시위 진압 과정에서 7509명이 사망했으며, 15961명이 부상을 입었다.&lt;br /&gt;
&lt;br /&gt;
그리고 46948명이 구금되었고, 교회 47개소, 학교 2개교, 민가 715채가 소각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의의 및 한계===&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전국적인 범위에서 각계각층을 망라하여 전개된 3·1운동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켜 나라 안팎에 민족의 독립 의지와 저력을 보여주었다.&lt;br /&gt;
&lt;br /&gt;
*중국 상하이에서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다. &lt;br /&gt;
&lt;br /&gt;
*일제의 통치 방법이 무단통치&amp;lt;ref&amp;gt;헌병의 무력을 보여주는 등 조선인에게 압박을 가해 조선민족의 민족의식을 억누르던 방식.&amp;lt;/ref&amp;gt;에서 문화통치&amp;lt;ref&amp;gt;무단 통치의 한계를 느끼고 조선인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고자 실시한 식민 통치 정책&amp;lt;/ref&amp;gt;로 바뀌게 하였다.&lt;br /&gt;
&lt;br /&gt;
*민족의식과 민족정신에 새로운 자각과 힘을 주어 교육을 진흥시켰고, 신문예운동·산업운동이 활성화되게 했으며, 민족 자립의 기초를 다지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lt;br /&gt;
&lt;br /&gt;
*독립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넓혀 독립운동을 체계화·조직화·활성화하는 계기가 되었다.&lt;br /&gt;
&lt;br /&gt;
*민중들은 3·1운동에 참여하면서 민족의식과 정치의식을 높일 수 있었으며, 이민족에 대한 끈질기고 강렬한 독립투쟁정신을 고취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1920년대에 다양한 사회운동과 조직이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lt;br /&gt;
&lt;br /&gt;
*왕조의 회복을 목표로 한 복벽주의가 청산되고 민주공화제가 독립국가의 목표로 자리를 잡았다.&lt;br /&gt;
&lt;br /&gt;
&lt;br /&gt;
'''*한계'''&lt;br /&gt;
&lt;br /&gt;
*일제의 문화통치로 전환은 가혹한 식민통치를 은폐하고 친일파를 육성하여 민족운동을 분열시키기 위한 기만책에 지나지 않았다.&lt;br /&gt;
&lt;br /&gt;
*운동의 과정을 통일적으로 지도하는 조직체가 없었기에 지역과 계층에 따라 투쟁의 형태와 강도가 다른 식으로 운동이 분산적으로 전개되었다.&lt;br /&gt;
&lt;br /&gt;
*민족대표는 독립청원의 방식에 주력하여 타협적인 태도를 벗어나지 못했고 광범위하게 일어난 민중들의 항일투쟁을 이끌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지니지 못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amp;quot;3·1 만세 시위, 100년 만에 데이터로 복원 / YTN.&amp;quot; 유튜브 비디오, &amp;quot;YTN,&amp;quot; 2019. 02. 21. https://www.youtube.com/watch?v=qAshxJh4jHA&lt;br /&gt;
* &amp;quot;3·1운동 (三一運動)&amp;quot;, &amp;lt;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amp;gt;, &amp;lt;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6772&amp;gt;&lt;br /&gt;
* &amp;quot;문화유산&amp;quot;, &amp;lt;3.1운동유엔유네스코등재기념재단&amp;gt;, &amp;lt;http://31ununesco.net/&amp;gt;&lt;br /&gt;
* &amp;quot;2·8독립선언 (二八獨立宣言)&amp;quot;, &amp;lt;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amp;gt;, &amp;lt;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6354&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애국계몽운동]]&lt;br /&gt;
[[분류:페퍼민트🌿]]&lt;/div&gt;</summary>
		<author><name>페퍼민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B6%84%EB%A5%98:%ED%8E%98%ED%8D%BC%EB%AF%BC%ED%8A%B8%F0%9F%8C%BF&amp;diff=33338</id>
		<title>분류:페퍼민트🌿</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B6%84%EB%A5%98:%ED%8E%98%ED%8D%BC%EB%AF%BC%ED%8A%B8%F0%9F%8C%BF&amp;diff=33338"/>
		<updated>2023-12-10T02:00:1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페퍼민트: &lt;/p&gt;
&lt;hr /&gt;
&lt;div&gt;[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ED%8E%98%ED%8D%BC%EB%AF%BC%ED%8A%B8%F0%9F%8C%BF 페퍼민트🌿]&lt;br /&gt;
&lt;br /&gt;
&lt;br /&gt;
저는 보성전문학교, 이용익, 손병희, 3·1운동 등 '애국계몽운동' 중 '보성전문학교'와 연관성을 가지는 노드들의 위키문서를 담당하여 작성하였습니다. 조선교육령과 근대학교 설립운동의 경우에는 관련 내용 및 자료의 양이 방대한 관계로 이미 작성되어 있는 외부 문서의 링크를 삽입한 추가적인 문서를 작성하는 방식으로 연속적인 정보 전달 및 스토리텔링에 제약이 없도록 하였습니다. &lt;br /&gt;
&lt;br /&gt;
우선, 보성전문학교에 대한 개별 문서에서는, 정의, 설립 배경과 목적 및 의의, 건물의 역사, 연원 및 변천, 현재, 각주, 참고문헌 등으로 부분을 나누어 작성하였습니다. &lt;br /&gt;
둘째로 이용익에 관한 개별 문서에서는 한 줄 소개, 생애, 러일전쟁 이전 - 고종의 신임, 러일전쟁 이전 - 고종의 신임으로 인한 시련, 러일전쟁 당시 - 일본의 경계, 러일전쟁 이후 - 보전문학교 설립, 평가, 각주, 참고문헌 등으로 부분을 나누어 작성하였습니다. &lt;br /&gt;
셋째로 손병희에 관한 개별 문서에서는 한 줄 소개, 천도교 창건 및 정비, 보성전문학교 인수, 3·1운동, 평가, 각주, 참고문헌 등으로 부분을 나누어 작성하였습니다. &lt;br /&gt;
마지막으로 3·1운동에 관한 개별 문서에서는 정의, 원인 및 배경, 전개, 의의 및 한계, 각주, 참고문헌 등으로 부분을 나누어 작성하였습니다.&lt;br /&gt;
&lt;br /&gt;
그리고 각 문서 마다 관련된 사진 자료 및 영상 자료, 도표 등을 삽입하여 전체적인 이야기를 막힘없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lt;br /&gt;
&lt;br /&gt;
애국계몽운동의 경우 모든 사건과 인물 및 단체 등이 서로 연결되어 영향을 주고 받았던 역사이기 때문에, 관련된 항목이 있음에도 미처 직접 서술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꼭 하이퍼링크(조선교육령, 근대학교 설립운동 등)를 삽입하여 전체적인 애국계몽운동의 큰 흐름  및 그 속 보성전문학교 관련 노드들의 역할을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였습니다.&lt;/div&gt;</summary>
		<author><name>페퍼민트</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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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B6%84%EB%A5%98:%ED%8E%98%ED%8D%BC%EB%AF%BC%ED%8A%B8%F0%9F%8C%BF&amp;diff=33337</id>
		<title>분류:페퍼민트🌿</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B6%84%EB%A5%98:%ED%8E%98%ED%8D%BC%EB%AF%BC%ED%8A%B8%F0%9F%8C%BF&amp;diff=33337"/>
		<updated>2023-12-10T01:59:4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페퍼민트: &lt;/p&gt;
&lt;hr /&gt;
&lt;div&gt;[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ED%8E%98%ED%8D%BC%EB%AF%BC%ED%8A%B8%F0%9F%8C%BF 페퍼민트🌿]&lt;br /&gt;
&lt;br /&gt;
&lt;br /&gt;
저는 보성전문학교, 이용익, 손병희, 3·1운동 등 '애국계몽운동' 중 '보성전문학교'와 연관성을 가지는 노드들의 위키문서를 담당하여 작성하였습니다. 조선교육령과 근대학교 설립운동의 경우에는 관련 내용 및 자료의 양이 방대한 관계로 이미 작성되어 있는 외부 문서의 링크를 삽입한 추가적인 문서를 작성하는 방식으로 연속적인 정보 전달 및 스토리텔링에 제약이 없도록 하였습니다. &lt;br /&gt;
&lt;br /&gt;
우선, 보성전문학교에 대한 개별 문서에서는, 정의, 설립 배경과 목적 및 의의, 건물의 역사, 연원 및 변천, 현재, 각주, 참고문헌 등으로 부분을 나누어 작성하였습니다. &lt;br /&gt;
둘째로 이용익에 관한 개별 문서에서는 한 줄 소개, 생애, 러일전쟁 이전 - 고종의 신임, 러일전쟁 이전 - 고종의 신임으로 인한 시련, 러일전쟁 당시 - 일본의 경계, 러일전쟁 이후 - 보전문학교 설립, 평가, 각주, 참고문헌 등으로 부분을 나누어 작성하였습니다. &lt;br /&gt;
셋째로 손병희에 관한 개별 문서에서는 한 줄 소개, 천도교 창건 및 정비, 보성전문학교 인수, 3·1운동, 평가, 각주, 참고문헌 등으로 부분을 나누어 작성하였습니다. &lt;br /&gt;
마지막으로 3·1운동에 관한 개별 문서에서는 정의, 원인 및 배경, 전개, 의의 및 한계, 각주, 참고문헌 등으로 부분을 나누어 작성하였습니다.&lt;br /&gt;
&lt;br /&gt;
그리고 각 문서 마다 관련된 사진 자료 및 영상 자료, 도표 등을 삽입하여 전체적인 이야기를 막힘없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lt;br /&gt;
&lt;br /&gt;
애국계몽운동의 경우 모든 사건과 인물 및 단체 등이 유기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영향을 주고 받았던 역사이기 때문에, 관련된 항목이 있음에도 미처 직접 서술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꼭 하이퍼링크(조선교육령, 근대학교 설립운동 등)를 삽입하여 전체적인 애국계몽운동의 큰 흐름  및 그 속 보성전문학교 관련 노드들의 역할을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였습니다.&lt;/div&gt;</summary>
		<author><name>페퍼민트</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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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근대학교 설립운동</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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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0T01:30:0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페퍼민트: 새 문서: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nh/view.do?levelId=nh_043_0040_0030_0020_0010 근대학교 설립운동]  분류:애국계몽운동 분류:페퍼민트🌿   *근대학...&lt;/p&gt;
&lt;hr /&gt;
&lt;div&gt;[http://contents.history.go.kr/mobile/nh/view.do?levelId=nh_043_0040_0030_0020_0010 근대학교 설립운동]&lt;br /&gt;
&lt;br /&gt;
[[분류:애국계몽운동]]&lt;br /&gt;
[[분류:페퍼민트🌿]]&lt;br /&gt;
&lt;br /&gt;
&lt;br /&gt;
*근대학교 설립운동은 보성전문학교의 설립에 영향을 끼친 운동이다. &lt;br /&gt;
*관련 내용이 너무 방대한 관계로 이미 작성된 외부문서의 링크를 첨부하였다.&lt;/div&gt;</summary>
		<author><name>페퍼민트</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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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A1%B0%EC%84%A0%EA%B5%90%EC%9C%A1%EB%A0%B9&amp;diff=33325</id>
		<title>조선교육령</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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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0T01:25:5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페퍼민트: 새 문서: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1933 조선교육령]  분류:애국계몽운동 분류:페퍼민트🌿   *조선교육령은 보성전문학교에 직접적인 영...&lt;/p&gt;
&lt;hr /&gt;
&lt;div&gt;[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1933 조선교육령]&lt;br /&gt;
&lt;br /&gt;
[[분류:애국계몽운동]]&lt;br /&gt;
[[분류:페퍼민트🌿]]&lt;br /&gt;
&lt;br /&gt;
&lt;br /&gt;
*조선교육령은 보성전문학교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일제의 교육방침이었다. &lt;br /&gt;
*교육령의 내용이 너무 방대한 관계로 관련된 외부문서의 링크를 첨부하였다.&lt;/div&gt;</summary>
		<author><name>페퍼민트</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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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B9%BC%EB%B3%B4%EB%8B%A4_%EA%B0%95%ED%95%9C_%ED%8E%9C%EC%9D%98_%ED%9E%98_%EC%95%A0%EA%B5%AD%EA%B3%84%EB%AA%BD%EC%9A%B4%EB%8F%99&amp;diff=33324</id>
		<title>칼보다 강한 펜의 힘 애국계몽운동</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B9%BC%EB%B3%B4%EB%8B%A4_%EA%B0%95%ED%95%9C_%ED%8E%9C%EC%9D%98_%ED%9E%98_%EC%95%A0%EA%B5%AD%EA%B3%84%EB%AA%BD%EC%9A%B4%EB%8F%99&amp;diff=33324"/>
		<updated>2023-12-10T01:22:1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페퍼민트: /* 기여 */&lt;/p&gt;
&lt;hr /&gt;
&lt;div&gt;==&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blue; margin: 0; border: 3px solid ForestGreen;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콘텐츠 주제==&lt;br /&gt;
독립운동 계열 중 '''애국계몽운동'''을 5개의 관련 단체를 기준으로 살펴보았다.&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blue; margin: 0; border: 3px solid ForestGreen;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기획의도==&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 애국계몽운동.jpg|400px|center|우리 조의 주제를 한 눈에 나타내는 사진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기획의도 및 목적'''&lt;br /&gt;
&lt;br /&gt;
&lt;br /&gt;
35년의 식민 통치 기간동안 한국의 주권 회복을 위해 투쟁한 독립 운동은 끊이지 않았다. 독립운동은 시대에 따라 분류할 수도 있지만 공통된 특성을 가진 독립운동을 함께 분석해 그 배경과 특징 의의를 분석하고 각각의 운동, 단체, 인물간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애국계몽운동'이라는 주제로 독립운동을 탐구하고자 한다. 애국계몽운동은 한국인의 학습권을 보장하고 국민 모두의 지적 발전을 위한 근본적인 노력으로 식민 통치 시기에 꼭 필요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계몽단체의 활동은 애국계몽운동이 전국적 규모의 운동으로 전개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신민회와 같은 전국 규모의 단체가 지회운영을 통하여 계몽운동을 광범한 운동으로 전개시켜 나갔고 학회와 같은 지역 단위의 단체가 설립, 운영되면서 운동이 전국 곳곳으로 퍼져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애국계몽운동은 교육운동과 대중계몽운동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어 이후의 민족해방운동의 밑거름이 되게 하였다. 단순한 합법적 테두리 안에서의 실력양성운동에서 애국계몽운동을 벗어날 수 있게 했던 강력한 단체의 출현에 대해서도 알아보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기대효과'''&lt;br /&gt;
&lt;br /&gt;
애국계몽운동의 흐름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으며, 활동했던 여러 단체들에 대해 알아볼 수 있다. 또한, 복잡할 수 있는 역사의 흐름을 온톨로지와 타임라인 등을 통해서, 그리고 분류된 노드를 통해 단체와 사건 등을 명확히 구분해 더욱 효과적으로 학습 가능할 것이다. 인과관계가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을 흐름을 통해 파악하고, 어떠한 사건이 어떤 사건의 영향을 받아서 발생했는 지에 대한 논리적 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 또한, 릴레이션을 통해 관련이 있는 사건 및 단체들에 대해 학습하고, 지금의 한국의 기반을 갖추어준 애국계몽운동에 대해 알아보자.&lt;br /&gt;
&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blue; margin: 0; border: 3px solid ForestGreen;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온톨로지==&lt;br /&gt;
&lt;br /&gt;
&lt;br /&gt;
{{NetworkGraph | title=애국계몽운동.ls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blue; margin: 0; border: 3px solid ForestGreen;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콘텐츠 구조==&lt;br /&gt;
&lt;br /&gt;
===클래스(Class)===&lt;br /&gt;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color:white&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5%&amp;quot; | 클래스 !! style=&amp;quot;width:23%&amp;quot; | 설명 !! style=&amp;quot;45%&amp;quot; | 노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Actor||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애국계몽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거나 큰 영향을 끼친 단체를 정리했다. || [[신민회]], [[대한매일신보]], [[청년학우회]], [[대성학교]], [[오산학교]], [[신흥무관학교]], [[신간회]], [[근우회]], [[보성전문학교]], [[통감부]], [[보안회]]&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Agen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했거나 영향을 받은 인물을 정리했다. || [[안창호]], [[양기탁]], [[신채호]], [[이용익(李容翊)]], [[안재홍]], [[손병희(孫秉熙)]], [[베델]], [[원세성]], [[송수만]]&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Even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애국계몽운동 단체의 활동 및 중요한 사건을 정리했다. || [[105인 사건]], [[청년운동]], [[교육구국운동]], [[민족산업진흥운동]], [[원산총파업]], [[광주학생항일운동]], [[3.1 운동]], [[조선교육령]], [[근대학교 설립운동]], [[국채보상운동]], [[러일전쟁]], [[황무지 개간 반대 운동]], [[시민 대회]]&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Place||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단체가 설립되거나 사건이 발생한 장소를 정리하였다. || [[평양]], [[만주]], [[원산]], [[광주]], [[한성]], [[요동반도]]&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관계성(Relation)===&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ForestGreen&amp;quot;&amp;gt;'''isMemberOf(~의 일원이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애국계몽운동에서 대표적인 사건의 일원임을 나타낸다.&lt;br /&gt;
**해당노드:&lt;br /&gt;
***안재홍 → 신간회&lt;br /&gt;
***신채호 → 신간회&lt;br /&gt;
***신채호 → 신민회&lt;br /&gt;
***양기탁 → 신민회&lt;br /&gt;
***안창호 → 신민회&lt;br /&gt;
***손병희 → 보성전문학교&lt;br /&gt;
&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ForestGreen&amp;quot;&amp;gt;'''leads(사건~을 주도하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역사적인 사건 주도를 나타낸다.&lt;br /&gt;
**해당노드:&lt;br /&gt;
***안재홍 → 3.1운동&lt;br /&gt;
***신채호 → 대한매일신보&lt;br /&gt;
***베델 → 대한매일신보&lt;br /&gt;
***양기탁 → 대한매일신보&lt;br /&gt;
***신민회 → 청년운동&lt;br /&gt;
***신민회 → 교육구국운동&lt;br /&gt;
***신민회 → 민족산업진흥운동&lt;br /&gt;
***이용익 → 교육구국운동&lt;br /&gt;
***손병희 → 3.1운동&lt;br /&gt;
***보안회 → 시민대회&lt;br /&gt;
***보안회 → 황무지개간운동&lt;br /&gt;
&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ForestGreen&amp;quot;&amp;gt;'''happenedAt(장소 ~에서 일어나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애국계몽 운동 속 사건들이 일어난 장소에 대해 설명한다.&lt;br /&gt;
**해당노드:&lt;br /&gt;
***원산총파업 → 원산&lt;br /&gt;
***러일전쟁 → 요동 반도&lt;br /&gt;
***광주학생항일운동 → 광주&lt;br /&gt;
&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ForestGreen&amp;quot;&amp;gt;'''isInfluencedBy(~에 의해 영향을 받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 어떠한 사건 혹은 단체가 영향을 받은 원인과 함께 나타낸다.&lt;br /&gt;
**해당노드:&lt;br /&gt;
***보안회 → 러일전쟁&lt;br /&gt;
***대한매일신보 → 러일전쟁&lt;br /&gt;
***보성전문학교 → 조선교육령&lt;br /&gt;
***보성전문학교 → 근대학교 설립운동&lt;br /&gt;
***대성학교 → 교육구국운동&lt;br /&gt;
***오산학교 → 교육구국운동&lt;br /&gt;
***청년운동 → 청년 학우회&lt;br /&gt;
***신민회 → 105인 사건&lt;br /&gt;
***대한매일신보 → 신민회&lt;br /&gt;
***국채보상운동 → 대한매일신보&lt;br /&gt;
***통감부 → 대한매일신보&lt;br /&gt;
***근우회 → 신간회&lt;br /&gt;
&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ForestGreen&amp;quot;&amp;gt;'''isSupportedBy (~에게 지원을 받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어떤 활동 및 사건 등이 특정 단체 등의 지원을 받았음을 나타낸다.&lt;br /&gt;
**해당노드:&lt;br /&gt;
***광주학생항일운동 → 근우회&lt;br /&gt;
***광주학생항일운동 → 신간회&lt;br /&gt;
***원산 총파업 → 신간회&lt;br /&gt;
&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ForestGreen&amp;quot;&amp;gt;'''isFounderOf (~은 ~의 설립 주체이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각 단체 및 기관을 설립한 주체에 대해 설명한다.&lt;br /&gt;
**해당노드:&lt;br /&gt;
***송수만 → 보안회&lt;br /&gt;
***원세성 → 보안회&lt;br /&gt;
***이용익 → 보성전문학교&lt;br /&gt;
***신민회 → 신흥무관학교&lt;br /&gt;
&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ForestGreen&amp;quot;&amp;gt;'''isPartOf (~의 일부이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해당 노드의 하위 분류에 속하는 노드들에 대해 설명한다.&lt;br /&gt;
**해당노드:&lt;br /&gt;
***보안회 → 애국계몽운동&lt;br /&gt;
***신간회 → 애국계몽운동&lt;br /&gt;
***대한매일신보 → 애국계몽운동&lt;br /&gt;
***신민회 → 애국계몽운동&lt;br /&gt;
***보성전문학교 → 애국계몽운동&lt;br /&gt;
&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ForestGreen&amp;quot;&amp;gt;'''isLocatedIn (~은 ~에 위치해 있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각 단체 및 기관이 위치해 있는 장소에 대해 설명한다.&lt;br /&gt;
**해당노드:&lt;br /&gt;
***보성전문학교 → 한성&lt;br /&gt;
***신흥무관학교 → 만주&lt;br /&gt;
***대성학교 → 평양&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color:white&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5%&amp;quot; | 팀원 !! style=&amp;quot;width:23%&amp;quot; | 기여 내용&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김효원]]||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페퍼민트🌿]]||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보성전문학교 관련 자료 조사 및 관련 개별 문서 작성, 연표 구상 참여 및 연표 생성, lst 문서 작성 참여, 마인드맵 구상 및 작성 참여, 릴레이션 구상 참여&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까마귀]]||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오연수]]||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바밤🌰]]||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신민회 관련 자료 조사, 개별 문서 작성, 연표 작성, 디지털 지도 생성(개별문서), lst 파일 작성, 기획 의도 구상 (+릴레이션, 연표, 마인드맵 구상에 참여)&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blue; margin: 0; border: 3px solid ForestGreen;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마인드맵==&lt;br /&gt;
 주제 마인드맵&lt;br /&gt;
[[파일:독립운동가.jpeg|300px|center|백범 김구 중심]]&lt;br /&gt;
 노드 마인드맵&lt;br /&gt;
[[파일:애국_마인드맵.png|600px|center|애국계몽운동 기준 마인드맵]]&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blue; margin: 0; border: 3px solid ForestGreen;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33koILa2WQu31NLYfQ5YRr6wZvbqPHVhw9UHWxU5hSk&amp;amp;font=Default&amp;amp;lang=ko&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1900년대의 애국계몽운동연구』(조항래 외, 아세아문화사, 1993)&lt;br /&gt;
*『만주한인 민족운동사연구』(박환, 일조각, 1991)&lt;br /&gt;
*『105인사건과 신민회연구』(윤경로, 일지사, 1990)&lt;br /&gt;
*『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서중석, 역사비평사, 2001)&lt;br /&gt;
*『독립운동사자료집』10(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6)&lt;br /&gt;
*『한국독립운동사』(국사편찬위원회, 1965)&lt;br /&gt;
*『청년학우회의 활동과 참여 인물』(권두연, 한국문학연구학회, 2012)&lt;br /&gt;
&lt;br /&gt;
[[분류:애국계몽운동]]&lt;/div&gt;</summary>
		<author><name>페퍼민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3.1_%EC%9A%B4%EB%8F%99&amp;diff=33323</id>
		<title>3.1 운동</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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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0T01:05:4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페퍼민트: &lt;/p&gt;
&lt;hr /&gt;
&lt;div&gt;==3.1 운동==&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lt;br /&gt;
&lt;br /&gt;
'''1919년 3월 1일을 기해 일어난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width=&amp;quot;873&amp;quot; height=&amp;quot;491&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qAshxJh4jHA&amp;quot; title=&amp;quot;3·1 만세 시위, 100년 만에 데이터로 복원 / YTN&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원인 및 배경===&lt;br /&gt;
&lt;br /&gt;
&lt;br /&gt;
'''3·1운동은 일제의 폭압적인 식민지 지배에 대한 민족의 저항으로 일어났다.''' &lt;br /&gt;
&lt;br /&gt;
일본은 조선을 강점한 뒤 군사력을 배경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의 각 분야에서 폭력적인 억압과 수탈을 자행하는 무단통치를 실시했다.&lt;br /&gt;
&lt;br /&gt;
무단통치 하의 조선총독부는 민족 고유문화 말살, 경제적 지배의 철저화 등을 통해 한민족의 정당한 민족적 저항의 기반을 없애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이에 따라 한국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어쩔 수 없이 중국, 만주, 노령, 미주 등의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거나, 아예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지하로 숨어 기회를 엿보고만 있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그러던 중,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발표되었다.'''&lt;br /&gt;
&lt;br /&gt;
한국의 민족지도자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발표가 있자, 이에 의거해 한국 민족의 독립을 호소하고자 노력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이들의 움직임에 힘을 더 실어주었던 사건은 일본 도쿄에서 거행된 '2·8독립선언'이었다.'''&lt;br /&gt;
&lt;br /&gt;
젊은 동경 유학생들이 모여 발표한 「2·8독립선언서」는 일제의 침략행위를 역사적으로 설명하고, 병합이 민족의 의사를 무시한 일제의 군국주의적 야심의 사기와 폭력에 의해 이뤄졌음을 규탄하였다. 또한 식민지 정책의 야만적 성격을 폭로하였고, 일제와 열강은 마땅히 동양평화와 세계평화를 위해 한국을 독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민족자결주의 발표 이래 국내에서도 독립운동의 분위기가 고조되어가던 중, 고종황제가 갑자기 붕어&amp;lt;ref&amp;gt;임금이 세상을 떠나는 것.&amp;lt;/ref&amp;gt;하였다.&amp;lt;ref&amp;gt;덕수궁에서 기거하던 고종황제는 당시 68세로 건강한 편이었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건강하던 고종이 갑작스럽게 중병으로 붕어하자, 국민들은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이때 일제에 의해 독살 당한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 온 국민들은 망국의 설움과 일제에 대한 적개심으로 크게 동요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1910년 국권 상실 이래 잠자코 기회만을 노리고 있던 민족지도자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 발표', '재일 유학생의 2·8독립선언', '고종황제의 붕어' 등이 연속적으로 일어나 민족적 항일 의식이 고조되자, 이때가 독립을 꾀할 가장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여, 거족적인 3·1 운동의 계획에 본격적으로 돌입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lt;br /&gt;
'''*시작'''&lt;br /&gt;
&lt;br /&gt;
1919년 3월 1일, 미리 계획했던 대로 서울과 평양, 의주, 선천, 안주, 원산, 진남포 등 6개 도시에서 동시에 만세 운동이 시작되었다.&lt;br /&gt;
&lt;br /&gt;
원래 독립선언식의 예정 장소는 탑골공원이었으나 학생들의 희생을 고려하여 민족대표들은 그 장소를 인사동의 태화관&amp;lt;ref&amp;gt;일제강점기 경성부에 있던 음식점 겸 술집. 유명한 요리집이던 명월관의 부속 건물이기도 했다.&amp;lt;/ref&amp;gt;으로 갑자기 변경하였다.&lt;br /&gt;
&lt;br /&gt;
민족대표 33명 가운데 29명&amp;lt;ref&amp;gt;길선주, 김병조, 유여대, 정춘수 등 4인은 지방에 있었으므로 불참.&amp;lt;/ref&amp;gt;은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 모여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인 서영환을 통해 독립통고서를 조선총독부에 전달했다. &lt;br /&gt;
&lt;br /&gt;
한편 최린은 태화관 주인 안순환에게 조선총독부에 전화를 걸어 민족대표 일동이 여기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나서 축배를 들고 있다고 통고하게 하였다.&lt;br /&gt;
&lt;br /&gt;
이 통고를 받은 즉시 일본경찰 80여 명이 달려왔고, 태화관은 포위되었다.&lt;br /&gt;
&lt;br /&gt;
그러던 중 계획했던 대로 오후 3시가 되자 한용운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그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제창한 뒤, 민족대표들은 의연히 일본 경찰에 스스로 체포되었다. &lt;br /&gt;
&lt;br /&gt;
탑골공원에 모여 있던 학생들은 등장하지 않는 민족대표들에 당황하여 강기덕 등을 그들에게 보내 항의하기도 했으나, 2시 30분&amp;lt;ref&amp;gt;혹은 2시.&amp;lt;/ref&amp;gt; 무렵에 따로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한 청년이 단상으로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두 갈래로 나뉘어 종로, 서울역, 정동, 이화학당, 서대문 등을 행진하며 시위를 벌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확산'''&lt;br /&gt;
&lt;br /&gt;
3·1운동은 수 개월 동안 지속되었으며, 교통이 발달한 여러 도시 등을 중심으로 시작되어 농촌 등지로 전파되며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되었다. &lt;br /&gt;
&lt;br /&gt;
갈수록 참여하는 인원과 계층이 늘어나면서 운동의 양상은 비폭력 시위에서 폭력투쟁으로 발전하였다. &lt;br /&gt;
&lt;br /&gt;
국외로도 확산되어 만주, 연해주, 도쿄, 오사카, 필라델피아 등에서도 독립 시위가 벌어졌다.&lt;br /&gt;
&lt;br /&gt;
&lt;br /&gt;
운동이 발전될수록 투쟁 목표가 구체화되고 조직화되었으며, 비폭력적인 만세운동에서 계획적이고 공세적인 폭력투쟁으로 진전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lt;br /&gt;
&lt;br /&gt;
폭력투쟁은 일제의 탄압에 대한 방어적인 대응으로 나타난 것도 있었지만, 일제의 권력기관에 대해 계획적이고 공세적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었다. &lt;br /&gt;
&lt;br /&gt;
일본 헌병의 총격 등으로 시위가 강제로 해산되면 군중들은 몽둥이와 죽창 등으로 무장하여 헌병 주재소와 면사무소, 우편소, 금융조합, 일본인과 친일 인사의 집 등을 파괴하고 각종 수탈용 장부와 무기를 빼앗아 소각하는 등 무력을 행사했다. &lt;br /&gt;
&lt;br /&gt;
그러나 처음부터 일제의 권력기관을 접수하려 나서는 경우도 있었는데, 강원도 통천에서는 총검으로 무장하고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특히 국외독립운동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평안도와 함경도 등 북부지방에서 이러한 경향이 강했는데, 간도 및 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 세력은 3·1운동 당시 국내진공계획을 세우기도 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일제의 진압'''&lt;br /&gt;
&lt;br /&gt;
일제는 3·1운동을 무력으로 무자비하게 진압했다.&lt;br /&gt;
&lt;br /&gt;
화성 제암리, 천안 아우내, 정주 곽산, 남원 광한루, 익산 이리를 포함한 전국 각지에서 시위대에 총격을 가하는 등 학살이 벌어졌다. &lt;br /&gt;
&lt;br /&gt;
그리고 시위자들을 체포하여 가혹한 고문을 서슴지 않았다. &lt;br /&gt;
&lt;br /&gt;
당시 일제의 통계에 따르면 3·1운동 이후 3개월 동안 시위 진압 과정에서 7509명이 사망했으며, 15961명이 부상을 입었다.&lt;br /&gt;
&lt;br /&gt;
그리고 46948명이 구금되었고, 교회 47개소, 학교 2개교, 민가 715채가 소각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의의 및 한계===&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전국적인 범위에서 각계각층을 망라하여 전개된 3·1운동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켜 나라 안팎에 민족의 독립 의지와 저력을 보여주었다.&lt;br /&gt;
&lt;br /&gt;
*중국 상하이에서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다. &lt;br /&gt;
&lt;br /&gt;
*일제의 통치 방법이 무단통치&amp;lt;ref&amp;gt;헌병의 무력을 보여주는 등 조선인에게 압박을 가해 조선민족의 민족의식을 억누르던 방식.&amp;lt;/ref&amp;gt;에서 문화통치&amp;lt;ref&amp;gt;무단 통치의 한계를 느끼고 조선인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고자 실시한 식민 통치 정책&amp;lt;/ref&amp;gt;로 바뀌게 하였다.&lt;br /&gt;
&lt;br /&gt;
*민족의식과 민족정신에 새로운 자각과 힘을 주어 교육을 진흥시켰고, 신문예운동·산업운동이 활성화되게 했으며, 민족 자립의 기초를 다지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lt;br /&gt;
&lt;br /&gt;
*독립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넓혀 독립운동을 체계화·조직화·활성화하는 계기가 되었다.&lt;br /&gt;
&lt;br /&gt;
*민중들은 3·1운동에 참여하면서 민족의식과 정치의식을 높일 수 있었으며, 이민족에 대한 끈질기고 강렬한 독립투쟁정신을 고취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1920년대에 다양한 사회운동과 조직이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lt;br /&gt;
&lt;br /&gt;
*왕조의 회복을 목표로 한 복벽주의가 청산되고 민주공화제가 독립국가의 목표로 자리를 잡았다.&lt;br /&gt;
&lt;br /&gt;
&lt;br /&gt;
'''*한계'''&lt;br /&gt;
&lt;br /&gt;
*일제의 문화통치로 전환은 가혹한 식민통치를 은폐하고 친일파를 육성하여 민족운동을 분열시키기 위한 기만책에 지나지 않았다.&lt;br /&gt;
&lt;br /&gt;
*운동의 과정을 통일적으로 지도하는 조직체가 없었기에 지역과 계층에 따라 투쟁의 형태와 강도가 다른 식으로 운동이 분산적으로 전개되었다.&lt;br /&gt;
&lt;br /&gt;
*민족대표는 독립청원의 방식에 주력하여 타협적인 태도를 벗어나지 못했고 광범위하게 일어난 민중들의 항일투쟁을 이끌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지니지 못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분류:애국계몽운동]]&lt;br /&gt;
[[분류:페퍼민트🌿]]&lt;/div&gt;</summary>
		<author><name>페퍼민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3.1_%EC%9A%B4%EB%8F%99&amp;diff=33229</id>
		<title>3.1 운동</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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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9T18:26:0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페퍼민트: &lt;/p&gt;
&lt;hr /&gt;
&lt;div&gt;==3.1 운동==&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lt;br /&gt;
'''1919년 3월 1일을 기해 일어난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width=&amp;quot;873&amp;quot; height=&amp;quot;491&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qAshxJh4jHA&amp;quot; title=&amp;quot;3·1 만세 시위, 100년 만에 데이터로 복원 / YTN&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원인 및 배경===&lt;br /&gt;
&lt;br /&gt;
'''3·1운동은 일제의 폭압적인 식민지 지배에 대한 민족의 저항으로 일어났다.''' &lt;br /&gt;
&lt;br /&gt;
일본은 조선을 강점한 뒤 군사력을 배경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의 각 분야에서 폭력적인 억압과 수탈을 자행하는 무단통치를 실시했다.&lt;br /&gt;
&lt;br /&gt;
무단통치 하의 조선총독부는 민족 고유문화 말살, 경제적 지배의 철저화 등을 통해 한민족의 정당한 민족적 저항의 기반을 없애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이에 따라 한국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어쩔 수 없이 중국, 만주, 노령, 미주 등의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거나, 아예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지하로 숨어 기회를 엿보고만 있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그러던 중,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발표되었다.'''&lt;br /&gt;
&lt;br /&gt;
한국의 민족지도자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발표가 있자, 이에 의거해 한국 민족의 독립을 호소하고자 노력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이들의 움직임에 힘을 더 실어주었던 사건은 일본 도쿄에서 거행된 '2·8독립선언'이었다.'''&lt;br /&gt;
&lt;br /&gt;
젊은 동경 유학생들이 모여 발표한 「2·8독립선언서」는 일제의 침략행위를 역사적으로 설명하고, 병합이 민족의 의사를 무시한 일제의 군국주의적 야심의 사기와 폭력에 의해 이뤄졌음을 규탄하였다. 또한 식민지 정책의 야만적 성격을 폭로하였고, 일제와 열강은 마땅히 동양평화와 세계평화를 위해 한국을 독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민족자결주의 발표 이래 국내에서도 독립운동의 분위기가 고조되어가던 중, 고종황제가 갑자기 붕어&amp;lt;ref&amp;gt;임금이 세상을 떠나는 것.&amp;lt;/ref&amp;gt;하였다.&amp;lt;ref&amp;gt;덕수궁에서 기거하던 고종황제는 당시 68세로 건강한 편이었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건강하던 고종이 갑작스럽게 중병으로 붕어하자, 국민들은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이때 일제에 의해 독살 당한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 온 국민들은 망국의 설움과 일제에 대한 적개심으로 크게 동요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1910년 국권 상실 이래 잠자코 기회만을 노리고 있던 민족지도자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 발표', '재일 유학생의 2·8독립선언', '고종황제의 붕어' 등이 연속적으로 일어나 민족적 항일 의식이 고조되자, 이때가 독립을 꾀할 가장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여, 거족적인 3·1 운동의 계획에 본격적으로 돌입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lt;br /&gt;
&lt;br /&gt;
3·1운동은 수 개월 동안 지속되었으며, 교통이 발달한 여러 도시 등을 중심으로 시작되어 농촌 등지로 전파되며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되었다. &lt;br /&gt;
&lt;br /&gt;
갈수록 참여하는 인원과 계층이 늘어나면서 운동의 양상은 비폭력 시위에서 폭력투쟁으로 발전하였다. &lt;br /&gt;
&lt;br /&gt;
국외로도 확산되어 만주, 연해주, 도쿄, 오사카, 필라델피아 등에서도 독립 시위가 벌어졌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운동이 발전될수록 투쟁 목표가 구체화되고 조직화되었으며, 비폭력적인 만세시위운동에서 계획적이고 공세적인 폭력투쟁으로 진전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폭력투쟁은 일제의 탄압에 대한 방어적인 대응으로 나타난 것도 있었지만, 일제의 권력기관에 대해 계획적이고 공세적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었다. 일본 헌병의 총격 등으로 시위가 강제로 해산되면 군중들은 몽둥이와 죽창 등으로 무장하여 헌병 주재소와 면사무소, 우편소, 금융조합, 일본인과 친일인사의 집 등을 파괴하고 각종 수탈용 장부와 무기를 빼앗아 소각하는 등 무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일제의 권력기관을 접수하려 나서는 경우도 있었는데, 강원도 통천에서는 총검으로 무장하고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특히 국외독립운동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평안도와 함경도 등 북부지방에서 이러한 경향이 강했는데, 간도·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세력은 3·1운동 당시 국내진공계획을 세우기도 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의의 및 한계===&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전국적인 범위에서 각계각층을 망라하여 전개된 3·1운동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켜 나라 안팎에 민족의 독립 의지와 저력을 보여주었다.&lt;br /&gt;
&lt;br /&gt;
*중국 상하이에서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다. &lt;br /&gt;
&lt;br /&gt;
*일제의 통치 방법이 무단통치&amp;lt;ref&amp;gt;헌병의 무력을 보여주는 등 조선인에게 압박을 가해 조선민족의 민족의식을 억누르던 방식.&amp;lt;/ref&amp;gt;에서 문화통치&amp;lt;ref&amp;gt;무단 통치의 한계를 느끼고 조선인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고자 실시한 식민 통치 정책&amp;lt;/ref&amp;gt;로 바뀌게 하였다.&lt;br /&gt;
&lt;br /&gt;
*민족의식과 민족정신에 새로운 자각과 힘을 주어 교육을 진흥시켰고, 신문예운동·산업운동이 활성화되게 했으며, 민족 자립의 기초를 다지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lt;br /&gt;
&lt;br /&gt;
*독립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넓혀 독립운동을 체계화·조직화·활성화하는 계기가 되었다.&lt;br /&gt;
&lt;br /&gt;
*민중들은 3·1운동에 참여하면서 민족의식과 정치의식을 높일 수 있었으며, 이민족에 대한 끈질기고 강렬한 독립투쟁정신을 고취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1920년대에 다양한 사회운동과 조직이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lt;br /&gt;
&lt;br /&gt;
*왕조의 회복을 목표로 한 복벽주의가 청산되고 민주공화제가 독립국가의 목표로 자리를 잡았다.&lt;br /&gt;
&lt;br /&gt;
&lt;br /&gt;
'''*한계'''&lt;br /&gt;
&lt;br /&gt;
*일제의 문화통치로 전환은 가혹한 식민통치를 은폐하고 친일파를 육성하여 민족운동을 분열시키기 위한 기만책에 지나지 않았다.&lt;br /&gt;
&lt;br /&gt;
*운동의 과정을 통일적으로 지도하는 조직체가 없었기에 지역과 계층에 따라 투쟁의 형태와 강도가 다른 식으로 운동이 분산적으로 전개되었다.&lt;br /&gt;
&lt;br /&gt;
*민족대표는 독립청원의 방식에 주력하여 타협적인 태도를 벗어나지 못했고 광범위하게 일어난 민중들의 항일투쟁을 이끌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지니지 못했다.&lt;/div&gt;</summary>
		<author><name>페퍼민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3.1_%EC%9A%B4%EB%8F%99&amp;diff=33217</id>
		<title>3.1 운동</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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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9T18:17:0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페퍼민트: &lt;/p&gt;
&lt;hr /&gt;
&lt;div&gt;==3.1 운동==&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lt;br /&gt;
'''1919년 3월 1일을 기해 일어난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width=&amp;quot;873&amp;quot; height=&amp;quot;491&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qAshxJh4jHA&amp;quot; title=&amp;quot;3·1 만세 시위, 100년 만에 데이터로 복원 / YTN&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원인 및 배경===&lt;br /&gt;
&lt;br /&gt;
'''3·1운동은 일제의 폭압적인 식민지 지배에 대한 민족의 저항으로 일어났다.''' &lt;br /&gt;
&lt;br /&gt;
일본은 조선을 강점한 뒤 군사력을 배경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의 각 분야에서 폭력적인 억압과 수탈을 자행하는 무단통치를 실시했다.&lt;br /&gt;
&lt;br /&gt;
무단통치 하의 조선총독부는 민족 고유문화 말살, 경제적 지배의 철저화 등을 통해 한민족의 정당한 민족적 저항의 기반을 없애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이에 따라 한국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어쩔 수 없이 중국, 만주, 노령, 미주 등의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거나, 아예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지하로 숨어 기회를 엿보고만 있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그러던 중,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발표되었다.'''&lt;br /&gt;
&lt;br /&gt;
한국의 민족지도자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발표가 있자, 이에 의거해 한국 민족의 독립을 호소하고자 노력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이들의 움직임에 힘을 더 실어주었던 사건은 일본 도쿄에서 거행된 '2·8독립선언'이었다.'''&lt;br /&gt;
&lt;br /&gt;
젊은 동경 유학생들이 모여 발표한 「2·8독립선언서」는 일제의 침략행위를 역사적으로 설명하고, 병합이 민족의 의사를 무시한 일제의 군국주의적 야심의 사기와 폭력에 의해 이뤄졌음을 규탄하였다. 또한 식민지 정책의 야만적 성격을 폭로하였고, 일제와 열강은 마땅히 동양평화와 세계평화를 위해 한국을 독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민족자결주의 발표 이래 국내에서도 독립운동의 분위기가 고조되어가던 중, 고종황제가 갑자기 붕어&amp;lt;ref&amp;gt;임금이 세상을 떠나는 것.&amp;lt;/ref&amp;gt;하였다.&amp;lt;ref&amp;gt;덕수궁에서 기거하던 고종황제는 당시 68세로 건강한 편이었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건강하던 고종이 갑작스럽게 중병으로 붕어하자, 국민들은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이때 일제에 의해 독살 당한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 온 국민들은 망국의 설움과 일제에 대한 적개심으로 크게 동요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1910년 국권 상실 이래 잠자코 기회만을 노리고 있던 민족지도자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 발표', '재일 유학생의 2·8독립선언', '고종황제의 붕어' 등이 연속적으로 일어나 민족적 항일 의식이 고조되자, 이때가 독립을 꾀할 가장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여, 거족적인 3·1 운동의 계획에 본격적으로 돌입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lt;br /&gt;
&lt;br /&gt;
===의의 및 한계===&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전국적인 범위에서 각계각층을 망라하여 전개된 3·1운동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켜 나라 안팎에 민족의 독립 의지와 저력을 보여주었다.&lt;br /&gt;
&lt;br /&gt;
*중국 상하이에서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다. &lt;br /&gt;
&lt;br /&gt;
*일제의 통치 방법이 무단통치&amp;lt;ref&amp;gt;헌병의 무력을 보여주는 등 조선인에게 압박을 가해 조선민족의 민족의식을 억누르던 방식.&amp;lt;/ref&amp;gt;에서 문화통치&amp;lt;ref&amp;gt;무단 통치의 한계를 느끼고 조선인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고자 실시한 식민 통치 정책&amp;lt;/ref&amp;gt;로 바뀌게 하였다.&lt;br /&gt;
&lt;br /&gt;
*민족의식과 민족정신에 새로운 자각과 힘을 주어 교육을 진흥시켰고, 신문예운동·산업운동이 활성화되게 했으며, 민족 자립의 기초를 다지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lt;br /&gt;
&lt;br /&gt;
*독립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넓혀 독립운동을 체계화·조직화·활성화하는 계기가 되었다.&lt;br /&gt;
&lt;br /&gt;
*민중들은 3·1운동에 참여하면서 민족의식과 정치의식을 높일 수 있었으며, 이민족에 대한 끈질기고 강렬한 독립투쟁정신을 고취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1920년대에 다양한 사회운동과 조직이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lt;br /&gt;
&lt;br /&gt;
*왕조의 회복을 목표로 한 복벽주의가 청산되고 민주공화제가 독립국가의 목표로 자리를 잡았다.&lt;br /&gt;
&lt;br /&gt;
&lt;br /&gt;
'''*한계'''&lt;br /&gt;
&lt;br /&gt;
*일제의 문화통치로 전환은 가혹한 식민통치를 은폐하고 친일파를 육성하여 민족운동을 분열시키기 위한 기만책에 지나지 않았다.&lt;br /&gt;
&lt;br /&gt;
*운동의 과정을 통일적으로 지도하는 조직체가 없었기에 지역과 계층에 따라 투쟁의 형태와 강도가 다른 식으로 운동이 분산적으로 전개되었다.&lt;br /&gt;
&lt;br /&gt;
*민족대표는 독립청원의 방식에 주력하여 타협적인 태도를 벗어나지 못했고 광범위하게 일어난 민중들의 항일투쟁을 이끌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지니지 못했다.&lt;/div&gt;</summary>
		<author><name>페퍼민트</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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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3.1_%EC%9A%B4%EB%8F%99&amp;diff=33207</id>
		<title>3.1 운동</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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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9T18:11:4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페퍼민트: &lt;/p&gt;
&lt;hr /&gt;
&lt;div&gt;==3.1 운동==&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lt;br /&gt;
'''1919년 3월 1일을 기해 일어난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width=&amp;quot;873&amp;quot; height=&amp;quot;491&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qAshxJh4jHA&amp;quot; title=&amp;quot;3·1 만세 시위, 100년 만에 데이터로 복원 / YTN&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원인 및 배경===&lt;br /&gt;
&lt;br /&gt;
'''3·1운동은 일제의 폭압적인 식민지 지배에 대한 민족의 저항으로 일어났다.''' &lt;br /&gt;
&lt;br /&gt;
일본은 조선을 강점한 뒤 군사력을 배경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의 각 분야에서 폭력적인 억압과 수탈을 자행하는 무단통치를 실시했다.&lt;br /&gt;
&lt;br /&gt;
무단통치 하의 조선총독부는 민족 고유문화 말살, 경제적 지배의 철저화 등을 통해 한민족의 정당한 민족적 저항의 기반을 없애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이에 따라 한국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어쩔 수 없이 중국, 만주, 노령, 미주 등의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거나, 아예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지하로 숨어 기회를 엿보고만 있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그러던 중,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발표되었다.'''&lt;br /&gt;
&lt;br /&gt;
한국의 민족지도자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발표가 있자, 이에 의거해 한국 민족의 독립을 호소하고자 노력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이들의 움직임에 힘을 더 실어주었던 사건은 일본 도쿄에서 거행된 '2·8독립선언'이었다.'''&lt;br /&gt;
&lt;br /&gt;
젊은 동경 유학생들이 모여 발표한 「2·8독립선언서」는 일제의 침략행위를 역사적으로 설명하고, 병합이 민족의 의사를 무시한 일제의 군국주의적 야심의 사기와 폭력에 의해 이뤄졌음을 규탄하였다. 또한 식민지 정책의 야만적 성격을 폭로하였고, 일제와 열강은 마땅히 동양평화와 세계평화를 위해 한국을 독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민족자결주의 발표 이래 국내에서도 독립운동의 분위기가 고조되어가던 중, 고종황제가 갑자기 붕어&amp;lt;ref&amp;gt;임금이 세상을 떠나는 것.&amp;lt;/ref&amp;gt;하였다.&amp;lt;ref&amp;gt;덕수궁에서 기거하던 고종황제는 당시 68세로 건강한 편이었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lt;br /&gt;
&lt;br /&gt;
===의의 및 한계===&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전국적인 범위에서 각계각층을 망라하여 전개된 3·1운동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켜 나라 안팎에 민족의 독립 의지와 저력을 보여주었다.&lt;br /&gt;
&lt;br /&gt;
*중국 상하이에서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다. &lt;br /&gt;
&lt;br /&gt;
*일제의 통치 방법이 무단통치&amp;lt;ref&amp;gt;헌병의 무력을 보여주는 등 조선인에게 압박을 가해 조선민족의 민족의식을 억누르던 방식.&amp;lt;/ref&amp;gt;에서 문화통치&amp;lt;ref&amp;gt;무단 통치의 한계를 느끼고 조선인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고자 실시한 식민 통치 정책&amp;lt;/ref&amp;gt;로 바뀌게 하였다.&lt;br /&gt;
&lt;br /&gt;
*민족의식과 민족정신에 새로운 자각과 힘을 주어 교육을 진흥시켰고, 신문예운동·산업운동이 활성화되게 했으며, 민족 자립의 기초를 다지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lt;br /&gt;
&lt;br /&gt;
*독립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넓혀 독립운동을 체계화·조직화·활성화하는 계기가 되었다.&lt;br /&gt;
&lt;br /&gt;
*민중들은 3·1운동에 참여하면서 민족의식과 정치의식을 높일 수 있었으며, 이민족에 대한 끈질기고 강렬한 독립투쟁정신을 고취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1920년대에 다양한 사회운동과 조직이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lt;br /&gt;
&lt;br /&gt;
*왕조의 회복을 목표로 한 복벽주의가 청산되고 민주공화제가 독립국가의 목표로 자리를 잡았다.&lt;br /&gt;
&lt;br /&gt;
&lt;br /&gt;
'''*한계'''&lt;br /&gt;
&lt;br /&gt;
*일제의 문화통치로 전환은 가혹한 식민통치를 은폐하고 친일파를 육성하여 민족운동을 분열시키기 위한 기만책에 지나지 않았다.&lt;br /&gt;
&lt;br /&gt;
*운동의 과정을 통일적으로 지도하는 조직체가 없었기에 지역과 계층에 따라 투쟁의 형태와 강도가 다른 식으로 운동이 분산적으로 전개되었다.&lt;br /&gt;
&lt;br /&gt;
*민족대표는 독립청원의 방식에 주력하여 타협적인 태도를 벗어나지 못했고 광범위하게 일어난 민중들의 항일투쟁을 이끌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지니지 못했다.&lt;/div&gt;</summary>
		<author><name>페퍼민트</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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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3.1 운동</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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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9T17:53:5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페퍼민트: 새 문서: ==3.1 운동==   ===정의===  '''1919년 3월 1일을 기해 일어난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  &amp;lt;html&amp;gt;&amp;lt;iframe width=&amp;quot;873&amp;quot; height=&amp;quot;491&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q...&lt;/p&gt;
&lt;hr /&gt;
&lt;div&gt;==3.1 운동==&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lt;br /&gt;
'''1919년 3월 1일을 기해 일어난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width=&amp;quot;873&amp;quot; height=&amp;quot;491&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qAshxJh4jHA&amp;quot; title=&amp;quot;3·1 만세 시위, 100년 만에 데이터로 복원 / YTN&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원인 및 배경===&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lt;br /&gt;
&lt;br /&gt;
===의의 및 한계===&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전국적인 범위에서 각계각층을 망라하여 전개된 3·1운동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켜 나라 안팎에 민족의 독립 의지와 저력을 보여주었다.&lt;br /&gt;
&lt;br /&gt;
*중국 상하이에서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다. &lt;br /&gt;
&lt;br /&gt;
*일제의 통치 방법이 무단통치&amp;lt;ref&amp;gt;헌병의 무력을 보여주는 등 조선인에게 압박을 가해 조선민족의 민족의식을 억누르던 방식.&amp;lt;/ref&amp;gt;에서 문화통치&amp;lt;ref&amp;gt;무단 통치의 한계를 느끼고 조선인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고자 실시한 식민 통치 정책&amp;lt;/ref&amp;gt;로 바뀌게 하였다.&lt;br /&gt;
&lt;br /&gt;
*민족의식과 민족정신에 새로운 자각과 힘을 주어 교육을 진흥시켰고, 신문예운동·산업운동이 활성화되게 했으며, 민족 자립의 기초를 다지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lt;br /&gt;
&lt;br /&gt;
*독립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넓혀 독립운동을 체계화·조직화·활성화하는 계기가 되었다.&lt;br /&gt;
&lt;br /&gt;
*민중들은 3·1운동에 참여하면서 민족의식과 정치의식을 높일 수 있었으며, 이민족에 대한 끈질기고 강렬한 독립투쟁정신을 고취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1920년대에 다양한 사회운동과 조직이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lt;br /&gt;
&lt;br /&gt;
*왕조의 회복을 목표로 한 복벽주의가 청산되고 민주공화제가 독립국가의 목표로 자리를 잡았다.&lt;br /&gt;
&lt;br /&gt;
&lt;br /&gt;
'''*한계'''&lt;br /&gt;
&lt;br /&gt;
*일제의 문화통치로 전환은 가혹한 식민통치를 은폐하고 친일파를 육성하여 민족운동을 분열시키기 위한 기만책에 지나지 않았다.&lt;br /&gt;
&lt;br /&gt;
*운동의 과정을 통일적으로 지도하는 조직체가 없었기에 지역과 계층에 따라 투쟁의 형태와 강도가 다른 식으로 운동이 분산적으로 전개되었다.&lt;br /&gt;
&lt;br /&gt;
*민족대표는 독립청원의 방식에 주력하여 타협적인 태도를 벗어나지 못했고 광범위하게 일어난 민중들의 항일투쟁을 이끌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지니지 못했다.&lt;/div&gt;</summary>
		<author><name>페퍼민트</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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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86%90%EB%B3%91%ED%9D%AC(%E5%AD%AB%E7%A7%89%E7%86%99)&amp;diff=33134</id>
		<title>손병희(孫秉熙)</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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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9T17:15:4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페퍼민트: &lt;/p&gt;
&lt;hr /&gt;
&lt;div&gt;==손병희(孫秉熙)==&lt;br /&gt;
&lt;br /&gt;
===한 줄 소개===&lt;br /&gt;
&lt;br /&gt;
손병희는 일제강점기 3·1운동의 주역이었던 천도교인이자, 천도교 지도자이며, 독립운동가이고, 교육사업가이다.&lt;br /&gt;
&lt;br /&gt;
[[파일:2821.jpg|height:&amp;quot;100&amp;quot;|center|손병희]]&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width=&amp;quot;655&amp;quot; height=&amp;quot;491&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_kfoG_UlJHA&amp;quot; title=&amp;quot;손병희&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천도교 창건 및 정비===&lt;br /&gt;
&lt;br /&gt;
'''*천도교 창건 배경'''&lt;br /&gt;
&lt;br /&gt;
손병희는 22세였던 1882년 동학에 입도하였다. 그는 입도 3년만에 제2세 교주 최시형을 만나 착실한 신도가 되었다. 그리고 그 사이 동학의 교세는 날로 확산되었다.&lt;br /&gt;
&lt;br /&gt;
그렇게 전국적으로 정부의 부정부패에 대항하여 동학교도들과 함께 대대적인 항쟁을 전개하며 오랜 시간 최시형과 함께 해왔던 손병희였지만, 그들은 항쟁 중 충주 부근에서 개별적으로 행동하기로 하고 해산하였다. &lt;br /&gt;
&lt;br /&gt;
그 후 최시형과 손병희 등 주요 간부들은 당연히 관군의 추격을 받게 되었지만, 다행히 생존한 북접 간부들의 노력으로 교세는 명맥을 유지하였다. 특히 그들은 탄압의 손길이 적게 미쳤던 함경도와 평안도 지방으로 피신해 그곳에서의 교세 확장, 포교에 힘썼다.&lt;br /&gt;
&lt;br /&gt;
그렇게 손병희는 최시형에게 성실한 생활태도와 지략의 역량을 인정받아 '의암'이라는 도호를 받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1897년 12월 24일에는 실질적인 제3세 교주로서의 일을 맡게 되었으며, 동학농민운동이 외세에 의해 진압되고, 1898년 4월 5일 제2대 교주였던 최시형이 체포되어 6월 2일 서울 감옥에서 처형된 뒤 마침내 교주가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천도교 창건 및 조직 정비'''&lt;br /&gt;
&lt;br /&gt;
&amp;lt;big&amp;gt;'''손병희는 동학의 교주가 된 초기에는 정치와 종교 간의 불가분적 관계를 강조하면서&amp;lt;ref&amp;gt;교정일치론.&amp;lt;/ref&amp;gt; 동학에서의 여러 가지 개혁적인 시도를 감행했으나 실패했고, 도리어 일제에 의해 역이용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되면서, 정교분리의 원칙을 내걸고 1905년 교명을 '천도교'로 개칭하면서 새로운 교리와 체제를 확립하기 시작하였다.'''&amp;lt;/big&amp;gt;&lt;br /&gt;
&lt;br /&gt;
최시형의 순교가 있고 난 뒤, 손병희는 사태를 수습하고 조직을 재정비하는 데 힘썼다. 그러나 관헌의 추적이 심하자 1901년 3월 일본으로 피신했고, 그 해 9월 일시 귀국했다가 ‘세계의 대세’를 깨닫기 위해 1902년 3월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가려 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일본에 머물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그곳에서 망명중이던 개화파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새로운 인식을 갖추게 된 한편, 국내와도 꾸준히 연락하면서 교인들을 규합하고 동학을 재정비하려 노력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그런데 손병희의 일본 체류는 그의 사상적 폭이 넓어지고 새로운 시대에 적응할 수 있는 탄력성을 증대시킨 반면, 일본의 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동학교도들의 민족적 저항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amp;lt;/font&amp;gt;'''&lt;br /&gt;
&lt;br /&gt;
1904년 8월 말부터 전국에 걸쳐 조직되기 시작한 '진보회'는 원래 동학교도들이 기존 정치체제의 개혁 세력으로서 참여하기 위한 기구였으나, 이용구의 주도하에 송병준의 일진회와 합하고 친일단체화하였다.&lt;br /&gt;
&lt;br /&gt;
이에 손병희는 교정일치론을 철회하고 정치적 관심은 아예 포기하였으며, 종교로서의 동학을 고수하는 것으로 방침을 바꾸었다. 따라서 1905년 12월 1일 '동학'을 '천도교'로 바꾸어 세상에 널리 알렸고, 이듬해 1월에는 귀국하여 교회를 재조직하는 데 착수했으며, ＜천도교대헌＞을 반포하고 새로운 교단조직을 만들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천도교리의 체계화'''&lt;br /&gt;
&lt;br /&gt;
이후 손병희는 천도교단의 중앙과 지방조직을 정비하는 한편, 천도교리의 체계화에도 노력하였다. &lt;br /&gt;
&lt;br /&gt;
각종 교리서들이 천도교중앙총부 명의로 편찬되었다. 특히 1907년 출간된 『대종정의』에서는 '인내천'&amp;lt;ref&amp;gt;천도교의 기본 사상으로,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말.&amp;lt;/ref&amp;gt;을 천도교의 교의로 공식화하였다. &lt;br /&gt;
&lt;br /&gt;
이후 손병희와 천도교단에서는 서양의 근대사상을 수용하여 인내천 교리에 대한 체계화 작업을 계속했다.&lt;br /&gt;
&lt;br /&gt;
이에 따라 인내천은 한편에서 천도교 종교의식의 원천이 되어 온갖 도법과 교화의 출발점이 되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천도교 정치사상의 근저가 되어 온갖 이론과 행동을 규정짓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즉 천도교에서는 '보국안민'&amp;lt;ref&amp;gt;나랏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함&amp;lt;/ref&amp;gt;, '포덕천하'&amp;lt;ref&amp;gt;덕을 천하에 편다는 뜻으로, 세상에 천도교를 널리 보급함을 이르는 말.&amp;lt;/ref&amp;gt;, '광제창생'&amp;lt;ref&amp;gt;널리 백성을 구제함&amp;lt;/ref&amp;gt;을 통한 지상천국 건설을 최고의 이상으로 삼기 시작한 것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보성전문학교 인수===&lt;br /&gt;
&lt;br /&gt;
보성전문학교의 설립자인 이용익의 서거 이후, 그의 손자 이종호가 잠시 학교의 경영을 맡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하지만 보성전문학교는 고종의 퇴위 이후 급속도로 경영난에 봉착하게 되었다. 학교의 설립자는 이용익이었으나, 학교의 보호자는 그를 아끼던 고종이었기 때문이다. 일제가 1906년 이상설ㆍ이준ㆍ이위종 등 헤이그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퇴위시키면서 보성학원에 대한 지원 역시 끊긴 것이다. &lt;br /&gt;
&lt;br /&gt;
주인이 없는 보성전문학교를 이끌고 있던 윤익선&amp;lt;ref&amp;gt;보성전문학교 5대 교장.&amp;lt;/ref&amp;gt;은 손병희를 찾아가 지원을 간청했다. 손병희는 어떤 일이 있어도 명문 보성전문학교의 문을 닫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였고, 1907년 12월 21일 보성전문학교를 천도교에서 인수하였다. &lt;br /&gt;
&lt;br /&gt;
막대한 부채를 안고 인수한 것이었지만 보성전문학생 중에는 특정 종교재단에서 학교를 인수하는 것을 반대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이를 알게 된 손병희는 학교에서 일체의 종교적 색채를 강요하지 말 것을 담당자들에게 각별히 당부하였다. &lt;br /&gt;
&lt;br /&gt;
이 때 손병희가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지 않았다면 오늘의 고려대학교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해방 후 고려대학교는 교정 한 구석에 손병희의 동상을 세웠다.&lt;br /&gt;
&lt;br /&gt;
[[파일:손병희_선생_흉상.jpg|height:&amp;quot;100&amp;quot;|center|손병희]]&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3.1운동===&lt;br /&gt;
&lt;br /&gt;
&lt;br /&gt;
손병희와 천도교단은 3·1운동을 준비하고 전국적인 조직을 이용해 시위를 조직하거나 운동자금을 제공하는 등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lt;br /&gt;
&lt;br /&gt;
각 기관이나 연원을 대표한 핵심지도자였던 손병희, 권병덕, 최린, 이종일, 권동진, 오세창, 양한묵, 임예환, 홍기조, 나용환, 나인협, 김완규, 박준승, 이종훈, 홍병기로 구성된 15명이 ‘민족대표 33인’의 일원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을 하기도 하였다. 1919년 2월 27일 밤 천도교 직영의 보성사에서 독립선언문 2만 1000매를 인쇄, 이튿날 가회동 자신의 집에 민족대표 23명이 모여 다음날 거사를 재확인하였다. 그리고 파고다공원&amp;lt;ref&amp;gt;현 탑골공원.&amp;lt;/ref&amp;gt;에서 독립선언식을 할 경우의 불상사를 염려해 파고다공원 부근 '태화관'에서 기념식을 거행하기로 하였다.&lt;br /&gt;
&lt;br /&gt;
이처럼 손병희와 천도교단이 3․1운동의 준비와 확산에 조직적으로 관여한 것은 ‘교정일치’라는 천도교리와도 무관치 않은 것이었다. &lt;br /&gt;
&lt;br /&gt;
손병희는 3·1운동 관련 재판과정에서 “종교가 만족스럽게 행해지지 못하는 동안은 아무래도 종교가가 정치에 관계하게 된다. 국가가 종교를 도와주면 정치에 관계하지 않고 자립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는 한에는 종교는 정치에 붙어 가서 그 목적을 달성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며, 정치와 종교의 유기적인 관계를 분명하게 밝혔다. 그리고 강제병합 후 한국인을 항상 압박만 하고 관리로 채용하지 않는 등, 정치적 차별이 심각함을 문제 삼았다. &lt;br /&gt;
&lt;br /&gt;
한편 3월 1일 기념식 거행 후 일본경찰에 자진 검거되어 1920년 10월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이던 손병희는, 1년 8개월만에 병보석으로 출옥 후 상춘원에서 요양하였다. 하지만 그는 결국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1922년 5월 19일 향년 62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평가===&lt;br /&gt;
&lt;br /&gt;
&lt;br /&gt;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건국훈장은 대한민국 국가 수립에 뚜렷한 공을 세운 자나 국가의 기초를 다지는 데 뚜렷한 공적이 있다고 평가되는 자에게 수여하는 훈장이다.&lt;br /&gt;
&lt;br /&gt;
*일제강점기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들의 손병희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민족의 영웅', '조선 독립의 거인' 등으로 굉장히 높았다. 해방을 맞아 귀국한 김구를 비롯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간부들은 손병희 선생을 '독립운동의 근원지'라고 평가하였다.&lt;br /&gt;
&lt;br /&gt;
*1992년 3월 및 2019년 3월에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amp;lt;ref&amp;gt;국가보훈처가 선정한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분류:애국계몽운동]]&lt;br /&gt;
[[분류:페퍼민트🌿]]&lt;/div&gt;</summary>
		<author><name>페퍼민트</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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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파일:손병희 선생 흉상.jpg</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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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9T17:13:0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페퍼민트: &lt;/p&gt;
&lt;hr /&gt;
&lt;div&gt;&lt;/div&gt;</summary>
		<author><name>페퍼민트</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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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손병희(孫秉熙)</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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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9T16:11:3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페퍼민트: 새 문서: ==손병희(孫秉熙)==  ===한 줄 소개===  손병희는 일제강점기 3·1운동의 주역이었던 천도교인이자, 천도교 지도자이며, 독립운동가이고, 교육...&lt;/p&gt;
&lt;hr /&gt;
&lt;div&gt;==손병희(孫秉熙)==&lt;br /&gt;
&lt;br /&gt;
===한 줄 소개===&lt;br /&gt;
&lt;br /&gt;
손병희는 일제강점기 3·1운동의 주역이었던 천도교인이자, 천도교 지도자이며, 독립운동가이고, 교육사업가이다.&lt;br /&gt;
&lt;br /&gt;
[[파일:2821.jpg|height:&amp;quot;100&amp;quot;|center|손병희]]&lt;br /&gt;
&lt;br /&gt;
&lt;br /&gt;
===천도교 창건 및 정비===&lt;br /&gt;
&lt;br /&gt;
'''*천도교 창건 배경'''&lt;br /&gt;
&lt;br /&gt;
손병희는 22세였던 1882년 동학에 입도하였다. 그는 입도 3년만에 제2세 교주 최시형을 만나 착실한 신도가 되었다. 그리고 그 사이 동학의 교세는 날로 확산되었다.&lt;br /&gt;
&lt;br /&gt;
그렇게 전국적으로 정부의 부정부패에 대항하여 동학교도들과 함께 대대적인 항쟁을 전개하며 오랜 시간 최시형과 함께 해왔던 손병희였지만, 그들은 항쟁 중 충주 부근에서 개별적으로 행동하기로 하고 해산하였다. &lt;br /&gt;
&lt;br /&gt;
그 후 최시형과 손병희 등 주요 간부들은 당연히 관군의 추격을 받게 되었지만, 다행히 생존한 북접 간부들의 노력으로 교세는 명맥을 유지하였다. 특히 그들은 탄압의 손길이 적게 미쳤던 함경도와 평안도 지방으로 피신해 그곳에서의 교세 확장, 포교에 힘썼다.&lt;br /&gt;
&lt;br /&gt;
그렇게 손병희는 최시형에게 성실한 생활태도와 지략의 역량을 인정받아 의암이라는 도호를 받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1897년 12월 24일에는 실질적인 제3세 교주로서의 일을 맡게 되었으며, 동학농민운동이 외세에 의해 진압되고, 1898년 4월 5일 제2대 교주였던 최시형이 체포되어 6월 2일 서울 감옥에서 처형된 뒤 마침내 교주가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천도교 창건 및 조직 정비'''&lt;br /&gt;
&lt;br /&gt;
&amp;lt;big&amp;gt;'''손병희는 동학의 교주가 된 초기에는 정치와 종교 간의 불가분적 관계를 강조하면서&amp;lt;ref&amp;gt;교정일치론.&amp;lt;/ref&amp;gt; 동학에서의 여러 가지 개혁적인 시도를 감행했으나 실패했고, 도리어 일제에 의해 역이용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되면서, 정교분리의 원칙을 내걸고 1905년 교명을 '천도교'로 개칭하면서 새로운 교리와 체제를 확립하기 시작하였다.'''&amp;lt;/big&amp;gt;&lt;br /&gt;
&lt;br /&gt;
최시형의 순교가 있고 난 뒤, 손병희는 사태를 수습하고 조직을 재정비하는 데 힘썼다. 그러나 관헌의 추적이 심하자 1901년 3월 일본으로 피신했고, 그 해 9월 일시 귀국했다가 ‘세계의 대세’를 깨닫기 위해 1902년 3월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가려 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일본에 머물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그곳에서 망명중이던 개화파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새로운 인식을 갖추게 된 한편, 국내와도 꾸준히 연락하면서 교인들을 규합하고 동학을 재정비하려 노력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그런데 손병희의 일본 체류는 그의 사상적 폭이 넓어지고 새로운 시대에 적응할 수 있는 탄력성을 증대시킨 반면, 일본의 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동학교도들의 민족적 저항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amp;lt;/font&amp;gt;'''&lt;br /&gt;
&lt;br /&gt;
1904년 8월 말부터 전국에 걸쳐 조직되기 시작한 '진보회'는 원래 동학교도들이 기존 정치체제의 개혁 세력으로서 참여하기 위한 기구였으나, 이용구의 주도하에 송병준의 일진회와 합하고 친일단체화하였다.&lt;br /&gt;
&lt;br /&gt;
이에 손병희는 교정일치론을 철회하고 정치적 관심은 아예 포기하였으며, 종교로서의 동학을 고수하는 것으로 방침을 바꾸었다. 따라서 1905년 12월 1일 '동학'을 '천도교'로 바꾸어 세상에 널리 알렸고, 이듬해 1월에는 귀국하여 교회를 재조직하는 데 착수했으며, ＜천도교대헌＞을 반포하고 새로운 교단조직을 만들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천도교리의 체계화'''&lt;br /&gt;
&lt;br /&gt;
이후 손병희는 천도교단의 중앙과 지방조직을 정비하는 한편, 천도교리의 체계화에도 노력하였다. &lt;br /&gt;
&lt;br /&gt;
각종 교리서들이 천도교중앙총부 명의로 편찬되었다. 특히 1907년 출간된 『대종정의』에서는 '인내천'&amp;lt;ref&amp;gt;천도교의 기본 사상으로,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말.&amp;lt;/ref&amp;gt;을 천도교의 교의로 공식화하였다. &lt;br /&gt;
&lt;br /&gt;
이후 손병희와 천도교단에서는 서양의 근대사상을 수용하여 인내천 교리에 대한 체계화 작업을 계속했다.&lt;br /&gt;
&lt;br /&gt;
이에 따라 인내천은 한편에서 천도교 종교의식의 원천이 되어 온갖 도법과 교화의 출발점이 되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천도교 정치사상의 근저가 되어 온갖 이론과 행동을 규정짓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즉 천도교에서는 '보국안민'&amp;lt;ref&amp;gt;나랏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함&amp;lt;/ref&amp;gt;, '포덕천하'&amp;lt;ref&amp;gt;덕을 천하에 편다는 뜻으로, 세상에 천도교를 널리 보급함을 이르는 말.&amp;lt;/ref&amp;gt;, '광제창생'&amp;lt;ref&amp;gt;널리 백성을 구제함&amp;lt;/ref&amp;gt;을 통한 지상천국 건설을 최고의 이상으로 삼기 시작한 것이다.&lt;/div&gt;</summary>
		<author><name>페퍼민트</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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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9T15:26:5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페퍼민트: &lt;/p&gt;
&lt;hr /&gt;
&lt;div&gt;&lt;/div&gt;</summary>
		<author><name>페퍼민트</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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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이용익(李容翊)</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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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9T14:42:3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페퍼민트: &lt;/p&gt;
&lt;hr /&gt;
&lt;div&gt;==이용익(李容翊)==&lt;br /&gt;
&lt;br /&gt;
===한 줄 소개===&lt;br /&gt;
&lt;br /&gt;
대한제국 때, 내장원경, 탁지부대신, 중앙은행 총재 등을 역임하여 근대 개혁에 기여한 관료.&lt;br /&gt;
&lt;br /&gt;
[[파일:20215553-6569-4f5d-8d60-9f047f5415b9.jpg|height:&amp;quot;100&amp;quot;|center|이용익]]&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width=&amp;quot;700&amp;quot; height=&amp;quot;400&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hO3AqWdRbiY&amp;quot; title=&amp;quot;[신비한TV 서프라이즈]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전국 팔도를 누비며 보부상으로 성공한 이용익! 그의 비결은?!, MBC 221127 방송&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amp;lt;br/&amp;gt;&lt;br /&gt;
&lt;br /&gt;
*1854년&amp;lt;ref&amp;gt;철종 5년&amp;lt;/ref&amp;gt; 함경북도 명천에서 태어났다.&lt;br /&gt;
&lt;br /&gt;
*서민의 아들로 태어나 소년 시절에 서당에서 수학을 했다.&lt;br /&gt;
&lt;br /&gt;
*그 뒤 고향을 떠나 한때 보부상으로 행상하여 자금을 모았고, 함경남도 단천에 와서 금광에 투자하여 거부가 되었다.&lt;br /&gt;
&lt;br /&gt;
*고종의 신임을 받아 단천&amp;lt;ref&amp;gt;금광이 있던 곳. 그는 이곳의 금광을 관리했다.&amp;lt;/ref&amp;gt; 감역, 탁지부대신, 서북철도국총재, 중앙은행총재 등을 역임하면서 근대 개혁에 기여하였다.&lt;br /&gt;
&lt;br /&gt;
*1904년 러일전쟁 이후 일본으로 압송되었다가 다시 돌아왔다.&lt;br /&gt;
&lt;br /&gt;
*돌아와서는 민족의 역량을 키우기 위해 자비로 보성소학과 중학 그리고 보성전문학교&amp;lt;ref&amp;gt;현 고려대학교의 전신&amp;lt;/ref&amp;gt;를 설립하여 인재 키워내기에 힘썼다. 그 외에도 편집소 보성관, 인쇄소 보성사 등을 설치하여 민족계몽에 힘쓰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어 국권이 박탈되고 보호정치가 시작되자, 육군부장이라는 직명으로 고종의 밀서를 들고 프랑스로 원조 요청을 하러 향하던 중 중국 산둥성옌타이항에서 6월에 일본 관헌에게 발각되었다. 이 때 밀령의 책임을 추궁 받을까 염려한 조선 정부에 의해, 일체의 모든 공직에서 파면되었다.&lt;br /&gt;
&lt;br /&gt;
*그 후 해외를 망명하며 구국운동을 이어갔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07년&amp;lt;ref&amp;gt;고종 44년&amp;lt;/ref&amp;gt;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객사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러일전쟁 이전 - 고종의 신임===&lt;br /&gt;
&lt;br /&gt;
이용익은 고종 황제의 총애와 신임을 독차지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러한 절대적인 신임으로 인해 대한제국의 돈줄을 맡긴 것도 맞지만, 그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였기 때문에 총애를 받은 것이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그가 처음으로 최고 권력에 다가서게 된 것은 임오군란 때 충주로 피신한 명성황후와 민영익 사이의 연락을 맡았기 때문이었다. &lt;br /&gt;
&lt;br /&gt;
그가 단천 감역으로서 광산에서 채굴한 금덩어리를 고종에게 상납하여 신임을 얻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오고 있다.&lt;br /&gt;
&lt;br /&gt;
그가 출세하게 된 가장 큰 계기는 아관파천 이후였다. 당시 함경도 출신자들이 상당수 등용되면서 정국의 한 축을 구성하게 되었는데 이 가운데 이용익도 끼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896년 8월에는 평안북도 관찰사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3월에는 중추원 의관에 등용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러일전쟁 이전 - 고종의 신임으로 인한 시련===&lt;br /&gt;
&lt;br /&gt;
&amp;lt;big&amp;gt;'''&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하지만 그는 이렇게 벼락출세를 하게 되면서 만만치 않은 반발 역시 감당해야 했다.&amp;lt;/font&amp;gt;'''&amp;lt;/big&amp;gt; &lt;br /&gt;
&lt;br /&gt;
1897년, 이윤용과 한규설 등의 대신들을 모함했다는 이유로 그는 유배를 가야만 하였다. 이는 그가 반발에 부딪힌 첫 번째 사례라고 할 수 있다.&amp;lt;ref&amp;gt;당시 일본공사관에서는 대신과 총신 사이의 알력 때문에 이 사건이 일어났다고 본국에 보고한 바 있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00년 이용익은 중추원의장 정낙용의 탄핵을 받았으며, 이듬해 1월 21일에는 의정부 참정 조병식의 공격을 받았다. &lt;br /&gt;
&lt;br /&gt;
가장 심한 공격은 1902년 11월에 있었다. 당시 의정 윤용선 등 여러 대신들이 경운궁 대한문 밖에 연좌하면서 이용익에게 죄 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당시에는 고종 황제조차도 그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그를 피신시킬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결국 이것으로도 사태는 진정되지 않았고, 이용익은 안남미 구입이라는 명목으로 러시아 군함을 타고 당시 러시아가 장악하고 있던 여순으로 건너가야만 했다.&lt;br /&gt;
&lt;br /&gt;
&amp;lt;big&amp;gt;'''&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이용익은 왜 이렇게 심한 공격을 받아야만 하였을까?&amp;lt;/font&amp;gt;'''&amp;lt;/big&amp;gt;&lt;br /&gt;
&lt;br /&gt;
정낙용은 그가 북쪽 변방의 천한 출신임에도 언사와 거동이 대단히 오만하다고 공격하였다. 그의 벼락출세를 질투한 것이다. &lt;br /&gt;
&lt;br /&gt;
이용익이 공격당한 이유로는 한 가지가 더 있다. 이용익이 맡은 여러 역할 가운데 하나가 감찰이었다. 그는 당시 세금 상납을 일부러 하지 않고 있거나 세금 상납이 밀린 지방관이나 관찰사에게는 얄짤이 없었다고 한다. 이밖에도 관리들의 비리를 적발하여 처벌을 요구하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다. 그는 이렇게 대신들의 미움을 살 수밖에 없는 일들을 도맡아 왔고, &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1903년에는 그가 입원한 병원에서 폭탄이 터지는 사태까지 발생했다고 한다.&amp;lt;/font&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러일전쟁 당시 - 일본의 경계===&lt;br /&gt;
&lt;br /&gt;
이용익이 대신들의 미움만 받은 것은 아니었다. &lt;br /&gt;
&amp;lt;big&amp;gt;'''&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이용익은 러일전쟁이 일어난 지 2주 만인 1904년 2월 22일, 일본으로 강제 압송되었다.&amp;lt;/font&amp;gt;'''&amp;lt;/big&amp;gt;&lt;br /&gt;
&lt;br /&gt;
일본의 입장에서는 그가 가장 위험한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실제 그는 일본의 전쟁 수행에 방해가 되는 행동만 했다고 한다. &lt;br /&gt;
&lt;br /&gt;
대한제국은 러일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국외중립'을 선언한 바 있다. 당시 외부 번역관 이건춘을 중국 지부로 밀파하여 그곳에서 각국에 국외중립을 선언하는 전문을 발송토록 하였는데, 이를 총 지휘한 인물이 바로 이용익이었다.&lt;br /&gt;
&lt;br /&gt;
고종 황제는 1904년 1월에 들어서면서 이용익을 군부대신, 원수부검사국총장 등 군직에 연이어 임명하였으며, 그는 야포용 탄약을 포함한 다량의 군수품을 수입하는 등 전쟁 발발에 항상 대비하고 있었다. &lt;br /&gt;
&lt;br /&gt;
그가 이러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은 전쟁이 터지자마자 그를 납치해 간 것이다. &lt;br /&gt;
&lt;br /&gt;
그가 일본으로 끌려간 다음날인 2월 23일, 대한제국과 일본 간의 공수동맹을 주요한 내용으로 하는 '한일의정서'가 체결된 것도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그는 일본으로 압송됐을 당시 온갖 회유정책의 대상이 되었으나 모두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일본에서 다시 돌아온 후 그가 관직에 복귀하기 위해 노력하던 때까지도 일본은 그를 최선을 다해 방해했다. 그를 총애하던 고종 황제도 그를 관직에 복귀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일제는 그에 대한 의심을 늦추지 않고 끊임없이 방해하였다. 그가 1905년 2월 경북관찰사에 임명되자 일진회를 동원하여 그의 부임을 물리적으로 막기까지 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계속 정치를 하는 것은 무리라는 판단 하에 결국 그는 스스로 1905년 9월 국외로 망명의 길을 떠나게 된 것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러일전쟁 이후 - 보성전문학교 설립===&lt;br /&gt;
&lt;br /&gt;
이용익은 일본으로 끌려간 지 10개월이 지나서야 비로소 귀국할 수 있었다.&amp;lt;ref&amp;gt;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유리해지자 국제 여론을 고려해 이용익을 귀국시킨 것이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그는 귀국 후 '교육구국'을 다짐하며 보성학교와 보성사를 설립하는 등 문화계몽사업에 주력하며, 소학교부터 전문학교에 이르기까지의 체계적인 교육기관을 설립하려는 시도를 하기 시작했다. &lt;br /&gt;
&lt;br /&gt;
보성전문학교를 세운 것은 그가 일본에 납치되었다가 귀국한 이듬해이다. 그는 체류 중에는 일본의 근대 교육기관을 두루 살펴보았고, 귀국할 때에는 다수의 도서와 인쇄기를 사비로 구입해 왔다. 이것은 우리나라에 신교육기관을 창설하려는 의도였다.&lt;br /&gt;
&lt;br /&gt;
모든 준비를 마친 이용익은 고종에게 학교의 설립 계획을 알렸고, 고종은 크게 기뻐하며 ‘보성(普成)’이라는 교명을 하사했다.&amp;lt;ref&amp;gt;원래 이용익이 생각한 교명은 '중앙학교'였는데, 고종이 하사한 교명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05년 4월 3일, 보성전문학교는 종로에 있던 러시아어 학교인 관립한성아어학교의 건물을 빌려 개교했다. 당시에는 정부 조직과 상통하도록 법률, 이재, 농학, 상학, 공학과로 구성된 2년제 전문학교로 시작되었다. &lt;br /&gt;
&lt;br /&gt;
보성전문학교는 형식상 사립학교였음에도 황실의 막대한 지원금으로 운영돼 거의 황립학교에 가까웠다.&amp;lt;ref&amp;gt;고종의 신임을 받은 이용익 덕분이다.&amp;lt;/ref&amp;gt; 이것이 감사했던 이용익은 고종의 배려에 대한 감사와 보성전문학교의 특별한 위상을 표현하고자 황실의 문장인 오얏꽃을 학교의 상징으로 채택하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현재 고려대학교에 있는 이용익의 흉상&amp;gt;'''&lt;br /&gt;
[[파일:고려대 51 roaltlf.jpg|height:&amp;quot;100&amp;quot;|center|이용익 흉상]]&lt;br /&gt;
&lt;br /&gt;
&lt;br /&gt;
===평가===&lt;br /&gt;
&lt;br /&gt;
&amp;lt;big&amp;gt;'''&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고려대학교의 전신 보성전문대학 설립자 이용익은 아직까지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amp;lt;/font&amp;gt;'''&amp;lt;/big&amp;gt;&lt;br /&gt;
&lt;br /&gt;
그의 후손이 국가보훈처에 이용익 선생에 대한 기록이 적힌 러시아와 프랑스의 문건을 모두 제출했는데도 독립운동의 성격이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계속 서훈 신청을 거절당하고 있다. 그의 후손은 &amp;quot;사실 독립유공자에 대한 자료는 보훈처 공훈발굴과에서 해야 할 역할인데 자료를 줘도 제대로 검토하지 않는 실정&amp;quot;이라며 국가보훈처를 비판했다.&lt;br /&gt;
&lt;br /&gt;
&amp;lt;big&amp;gt;'''&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그리고 일각에서는 이용익이 천민이고 무식한 사람이라며 그를 폄하하기도 한다.&amp;lt;/font&amp;gt;'''&amp;lt;/big&amp;gt; &lt;br /&gt;
&lt;br /&gt;
하지만 그가 정말 무식했다면 결코 그 많은 관직을 수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무식한 사람이라는 오해를 받게 됐을까? '고종황제의 충신, 이용익의 재평가'라는 책에서는, 이용익의 출신과 성장을 놓고 악의적인 소문이 퍼진 이유로, '1876년 전후에 팽배했던 평안도와 함경도 사람들에 대한 차별의식을 밑바탕으로 한 이용익의 승승장구에 대한 질투심과 일본 제국주의 앞잡이 일진회와 실체가 왜곡돼 이완용, 윤치호 등 친일세력이 활동한 독립협회 모략이 함께 작용했을 가능성'을 들고 있다.&lt;br /&gt;
&lt;br /&gt;
그에 대한 재평가가 시급한 상황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분류:애국계몽운동]]&lt;br /&gt;
[[분류:페퍼민트🌿]]&lt;/div&gt;</summary>
		<author><name>페퍼민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D%B4%EC%9A%A9%EC%9D%B5(%E6%9D%8E%E5%AE%B9%E7%BF%8A)&amp;diff=33018</id>
		<title>이용익(李容翊)</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D%B4%EC%9A%A9%EC%9D%B5(%E6%9D%8E%E5%AE%B9%E7%BF%8A)&amp;diff=33018"/>
		<updated>2023-12-09T14:40:3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페퍼민트: &lt;/p&gt;
&lt;hr /&gt;
&lt;div&gt;==이용익(李容翊)==&lt;br /&gt;
&lt;br /&gt;
===한 줄 소개===&lt;br /&gt;
&lt;br /&gt;
대한제국 때, 내장원경, 탁지부대신, 중앙은행 총재 등을 역임하여 근대 개혁에 기여한 관료.&lt;br /&gt;
&lt;br /&gt;
[[파일:20215553-6569-4f5d-8d60-9f047f5415b9.jpg|height:&amp;quot;100&amp;quot;|center|이용익]]&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width=&amp;quot;700&amp;quot; height=&amp;quot;400&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hO3AqWdRbiY&amp;quot; title=&amp;quot;[신비한TV 서프라이즈]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전국 팔도를 누비며 보부상으로 성공한 이용익! 그의 비결은?!, MBC 221127 방송&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amp;lt;br/&amp;gt;&lt;br /&gt;
&lt;br /&gt;
*1854년&amp;lt;ref&amp;gt;철종 5년&amp;lt;/ref&amp;gt; 함경북도 명천에서 태어났다.&lt;br /&gt;
&lt;br /&gt;
*서민의 아들로 태어나 소년 시절에 서당에서 수학을 했다.&lt;br /&gt;
&lt;br /&gt;
*그 뒤 고향을 떠나 한때 보부상으로 행상하여 자금을 모았고, 함경남도 단천에 와서 금광에 투자하여 거부가 되었다.&lt;br /&gt;
&lt;br /&gt;
*고종의 신임을 받아 단천&amp;lt;ref&amp;gt;금광이 있던 곳. 그는 이곳의 금광을 관리했다.&amp;lt;/ref&amp;gt; 감역, 탁지부대신, 서북철도국총재, 중앙은행총재 등을 역임하면서 근대 개혁에 기여하였다.&lt;br /&gt;
&lt;br /&gt;
*1904년 러일전쟁 이후 일본으로 압송되었다가 다시 돌아왔다.&lt;br /&gt;
&lt;br /&gt;
*돌아와서는 민족의 역량을 키우기 위해 자비로 보성소학과 중학 그리고 보성전문학교&amp;lt;ref&amp;gt;현 고려대학교의 전신&amp;lt;/ref&amp;gt;를 설립하여 인재 키워내기에 힘썼다. 그 외에도 편집소 보성관, 인쇄소 보성사 등을 설치하여 민족계몽에 힘쓰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어 국권이 박탈되고 보호정치가 시작되자, 육군부장이라는 직명으로 고종의 밀서를 들고 프랑스로 원조 요청을 하러 향하던 중 중국 산둥성옌타이항에서 6월에 일본 관헌에게 발각되었다. 이 때 밀령의 책임을 추궁 받을까 염려한 조선 정부에 의해, 일체의 모든 공직에서 파면되었다.&lt;br /&gt;
&lt;br /&gt;
*그 후 해외를 망명하며 구국운동을 이어갔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07년&amp;lt;ref&amp;gt;고종 44년&amp;lt;/ref&amp;gt;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객사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러일전쟁 이전 - 고종의 신임===&lt;br /&gt;
&lt;br /&gt;
이용익은 고종 황제의 총애와 신임을 독차지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러한 절대적인 신임으로 인해 대한제국의 돈줄을 맡긴 것도 맞지만, 그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였기 때문에 총애를 받은 것이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그가 처음으로 최고 권력에 다가서게 된 것은 임오군란 때 충주로 피신한 명성황후와 민영익 사이의 연락을 맡았기 때문이었다. &lt;br /&gt;
&lt;br /&gt;
그가 단천 감역으로서 광산에서 채굴한 금덩어리를 고종에게 상납하여 신임을 얻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오고 있다.&lt;br /&gt;
&lt;br /&gt;
그가 출세하게 된 가장 큰 계기는 아관파천 이후였다. 당시 함경도 출신자들이 상당수 등용되면서 정국의 한 축을 구성하게 되었는데 이 가운데 이용익도 끼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896년 8월에는 평안북도 관찰사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3월에는 중추원 의관에 등용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러일전쟁 이전 - 고종의 신임으로 인한 시련===&lt;br /&gt;
&lt;br /&gt;
&amp;lt;big&amp;gt;'''&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하지만 그는 이렇게 벼락출세를 하게 되면서 만만치 않은 반발 역시 감당해야 했다.&amp;lt;/font&amp;gt;'''&amp;lt;/big&amp;gt; &lt;br /&gt;
&lt;br /&gt;
1897년, 이윤용과 한규설 등의 대신들을 모함했다는 이유로 그는 유배를 가야만 하였다. 이는 그가 반발에 부딪힌 첫 번째 사례라고 할 수 있다.&amp;lt;ref&amp;gt;당시 일본공사관에서는 대신과 총신 사이의 알력 때문에 이 사건이 일어났다고 본국에 보고한 바 있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00년 이용익은 중추원의장 정낙용의 탄핵을 받았으며, 이듬해 1월 21일에는 의정부 참정 조병식의 공격을 받았다. &lt;br /&gt;
&lt;br /&gt;
가장 심한 공격은 1902년 11월에 있었다. 당시 의정 윤용선 등 여러 대신들이 경운궁 대한문 밖에 연좌하면서 이용익에게 죄 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당시에는 고종 황제조차도 그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그를 피신시킬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결국 이것으로도 사태는 진정되지 않았고, 이용익은 안남미 구입이라는 명목으로 러시아 군함을 타고 당시 러시아가 장악하고 있던 여순으로 건너가야만 했다.&lt;br /&gt;
&lt;br /&gt;
&amp;lt;big&amp;gt;'''&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이용익은 왜 이렇게 심한 공격을 받아야만 하였을까?&amp;lt;/font&amp;gt;'''&amp;lt;/big&amp;gt;&lt;br /&gt;
&lt;br /&gt;
정낙용은 그가 북쪽 변방의 천한 출신임에도 언사와 거동이 대단히 오만하다고 공격하였다. 그의 벼락출세를 질투한 것이다. &lt;br /&gt;
&lt;br /&gt;
이용익이 공격당한 이유로는 한 가지가 더 있다. 이용익이 맡은 여러 역할 가운데 하나가 감찰이었다. 그는 당시 세금 상납을 일부러 하지 않고 있거나 세금 상납이 밀린 지방관이나 관찰사에게는 얄짤이 없었다고 한다. 이밖에도 관리들의 비리를 적발하여 처벌을 요구하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다. 그는 이렇게 대신들의 미움을 살 수밖에 없는 일들을 도맡아 왔고,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1903년에는 그가 입원한 병원에서 폭탄이 터지는 사태까지 발생했다고 한다.&amp;lt;/font&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러일전쟁 당시 - 일본의 경계===&lt;br /&gt;
&lt;br /&gt;
이용익이 대신들의 미움만 받은 것은 아니었다. &lt;br /&gt;
&amp;lt;big&amp;gt;'''&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이용익은 러일전쟁이 일어난 지 2주 만인 1904년 2월 22일, 일본으로 강제 압송되었다.&amp;lt;/font&amp;gt;'''&amp;lt;/big&amp;gt;&lt;br /&gt;
&lt;br /&gt;
일본의 입장에서는 그가 가장 위험한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실제 그는 일본의 전쟁 수행에 방해가 되는 행동만 했다고 한다. &lt;br /&gt;
&lt;br /&gt;
대한제국은 러일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국외중립'을 선언한 바 있다. 당시 외부 번역관 이건춘을 중국 지부로 밀파하여 그곳에서 각국에 국외중립을 선언하는 전문을 발송토록 하였는데, 이를 총 지휘한 인물이 바로 이용익이었다.&lt;br /&gt;
&lt;br /&gt;
고종 황제는 1904년 1월에 들어서면서 이용익을 군부대신, 원수부검사국총장 등 군직에 연이어 임명하였으며, 그는 야포용 탄약을 포함한 다량의 군수품을 수입하는 등 전쟁 발발에 항상 대비하고 있었다. &lt;br /&gt;
&lt;br /&gt;
그가 이러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은 전쟁이 터지자마자 그를 납치해 간 것이다. &lt;br /&gt;
&lt;br /&gt;
그가 일본으로 끌려간 다음날인 2월 23일, 대한제국과 일본 간의 공수동맹을 주요한 내용으로 하는 '한일의정서'가 체결된 것도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그는 일본으로 압송됐을 당시 온갖 회유정책의 대상이 되었으나 모두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일본에서 다시 돌아온 후 그가 관직에 복귀하기 위해 노력하던 때까지도 일본은 그를 최선을 다해 방해했다. 그를 총애하던 고종 황제도 그를 관직에 복귀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일제는 그에 대한 의심을 늦추지 않고 끊임없이 방해하였다. 그가 1905년 2월 경북관찰사에 임명되자 일진회를 동원하여 그의 부임을 물리적으로 막기까지 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계속 정치를 하는 것은 무리라는 판단 하에 결국 그는 스스로 1905년 9월 국외로 망명의 길을 떠나게 된 것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러일전쟁 이후 - 보성전문학교 설립===&lt;br /&gt;
&lt;br /&gt;
이용익은 일본으로 끌려간 지 10개월이 지나서야 비로소 귀국할 수 있었다.&amp;lt;ref&amp;gt;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유리해지자 국제 여론을 고려해 이용익을 귀국시킨 것이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그는 귀국 후 '교육구국'을 다짐하며 보성학교와 보성사를 설립하는 등 문화계몽사업에 주력하며, 소학교부터 전문학교에 이르기까지의 체계적인 교육기관을 설립하려는 시도를 하기 시작했다. &lt;br /&gt;
&lt;br /&gt;
보성전문학교를 세운 것은 그가 일본에 납치되었다가 귀국한 이듬해이다. 그는 체류 중에는 일본의 근대 교육기관을 두루 살펴보았고, 귀국할 때에는 다수의 도서와 인쇄기를 사비로 구입해 왔다. 이것은 우리나라에 신교육기관을 창설하려는 의도였다.&lt;br /&gt;
&lt;br /&gt;
모든 준비를 마친 이용익은 고종에게 학교의 설립 계획을 알렸고, 고종은 크게 기뻐하며 ‘보성(普成)’이라는 교명을 하사했다.&amp;lt;ref&amp;gt;원래 이용익이 생각한 교명은 '중앙학교'였는데, 고종이 하사한 교명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05년 4월 3일, 보성전문학교는 종로에 있던 러시아어 학교인 관립한성아어학교의 건물을 빌려 개교했다. 당시에는 정부 조직과 상통하도록 법률, 이재, 농학, 상학, 공학과로 구성된 2년제 전문학교로 시작되었다. &lt;br /&gt;
&lt;br /&gt;
보성전문학교는 형식상 사립학교였음에도 황실의 막대한 지원금으로 운영돼 거의 황립학교에 가까웠다.&amp;lt;ref&amp;gt;고종의 신임을 받은 이용익 덕분이다.&amp;lt;/ref&amp;gt; 이것이 감사했던 이용익은 고종의 배려에 대한 감사와 보성전문학교의 특별한 위상을 표현하고자 황실의 문장인 오얏꽃을 학교의 상징으로 채택하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현재 고려대학교에 있는 이용익의 흉상&amp;gt;'''&lt;br /&gt;
[[파일:고려대 51 roaltlf.jpg|height:&amp;quot;100&amp;quot;|center|이용익 흉상]]&lt;br /&gt;
&lt;br /&gt;
&lt;br /&gt;
===평가===&lt;br /&gt;
&lt;br /&gt;
&amp;lt;big&amp;gt;'''&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고려대학교의 전신 보성전문대학 설립자 이용익은 아직까지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amp;lt;/font&amp;gt;'''&amp;lt;/big&amp;gt;&lt;br /&gt;
&lt;br /&gt;
그의 후손이 국가보훈처에 이용익 선생에 대한 기록이 적힌 러시아와 프랑스의 문건을 모두 제출했는데도 독립운동의 성격이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계속 서훈 신청을 거절당하고 있다. 그의 후손은 &amp;quot;사실 독립유공자에 대한 자료는 보훈처 공훈발굴과에서 해야 할 역할인데 자료를 줘도 제대로 검토하지 않는 실정&amp;quot;이라며 국가보훈처를 비판했다.&lt;br /&gt;
&lt;br /&gt;
&amp;lt;big&amp;gt;'''&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그리고 일각에서는 이용익이 천민이고 무식한 사람이라며 그를 폄하하기도 한다.&amp;lt;/font&amp;gt;'''&amp;lt;/big&amp;gt; &lt;br /&gt;
&lt;br /&gt;
하지만 그가 정말 무식했다면 결코 그 많은 관직을 수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무식한 사람이라는 오해를 받게 됐을까? '고종황제의 충신, 이용익의 재평가'라는 책에서는, 이용익의 출신과 성장을 놓고 악의적인 소문이 퍼진 이유로, '1876년 전후에 팽배했던 평안도와 함경도 사람들에 대한 차별의식을 밑바탕으로 한 이용익의 승승장구에 대한 질투심과 일본 제국주의 앞잡이 일진회와 실체가 왜곡돼 이완용, 윤치호 등 친일세력이 활동한 독립협회 모략이 함께 작용했을 가능성'을 들고 있다.&lt;br /&gt;
&lt;br /&gt;
그에 대한 재평가가 시급한 상황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분류:애국계몽운동]]&lt;br /&gt;
[[분류:페퍼민트🌿]]&lt;/div&gt;</summary>
		<author><name>페퍼민트</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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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lt;/div&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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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이용익(李容翊)</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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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페퍼민트: &lt;/p&gt;
&lt;hr /&gt;
&lt;div&gt;==이용익(李容翊)==&lt;br /&gt;
&lt;br /&gt;
===한 줄 소개===&lt;br /&gt;
&lt;br /&gt;
대한제국 때, 내장원경, 탁지부대신, 중앙은행 총재 등을 역임하여 근대 개혁에 기여한 관료.&lt;br /&gt;
&lt;br /&gt;
[[파일:20215553-6569-4f5d-8d60-9f047f5415b9.jpg|height:&amp;quot;100&amp;quot;|center|이용익]]&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width=&amp;quot;700&amp;quot; height=&amp;quot;400&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hO3AqWdRbiY&amp;quot; title=&amp;quot;[신비한TV 서프라이즈]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전국 팔도를 누비며 보부상으로 성공한 이용익! 그의 비결은?!, MBC 221127 방송&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amp;lt;br/&amp;gt;&lt;br /&gt;
&lt;br /&gt;
*1854년&amp;lt;ref&amp;gt;철종 5년&amp;lt;/ref&amp;gt; 함경북도 명천에서 태어났다.&lt;br /&gt;
&lt;br /&gt;
*서민의 아들로 태어나 소년 시절에 서당에서 수학을 했다.&lt;br /&gt;
&lt;br /&gt;
*그 뒤 고향을 떠나 한때 보부상으로 행상하여 자금을 모았고, 함경남도 단천에 와서 금광에 투자하여 거부가 되었다.&lt;br /&gt;
&lt;br /&gt;
*고종의 신임을 받아 단천&amp;lt;ref&amp;gt;금광이 있던 곳. 그는 이곳의 금광을 관리했다.&amp;lt;/ref&amp;gt; 감역, 탁지부대신, 서북철도국총재, 중앙은행총재 등을 역임하면서 근대 개혁에 기여하였다.&lt;br /&gt;
&lt;br /&gt;
*1904년 러일전쟁 이후 일본으로 압송되었다가 다시 돌아왔다.&lt;br /&gt;
&lt;br /&gt;
*돌아와서는 민족의 역량을 키우기 위해 자비로 보성소학과 중학 그리고 보성전문학교&amp;lt;ref&amp;gt;현 고려대학교의 전신&amp;lt;/ref&amp;gt;를 설립하여 인재 키워내기에 힘썼다. 그 외에도 편집소 보성관, 인쇄소 보성사 등을 설치하여 민족계몽에 힘쓰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어 국권이 박탈되고 보호정치가 시작되자, 육군부장이라는 직명으로 고종의 밀서를 들고 프랑스로 원조 요청을 하러 향하던 중 중국 산둥성옌타이항에서 6월에 일본 관헌에게 발각되었다. 이 때 밀령의 책임을 추궁 받을까 염려한 조선 정부에 의해, 일체의 모든 공직에서 파면되었다.&lt;br /&gt;
&lt;br /&gt;
*그 후 해외를 망명하며 구국운동을 이어갔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07년&amp;lt;ref&amp;gt;고종 44년&amp;lt;/ref&amp;gt;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객사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러일전쟁 이전 - 고종의 신임===&lt;br /&gt;
&lt;br /&gt;
이용익은 고종 황제의 총애와 신임을 독차지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러한 절대적인 신임으로 인해 대한제국의 돈줄을 맡긴 것도 맞지만, 그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였기 때문에 총애를 받은 것이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그가 처음으로 최고 권력에 다가서게 된 것은 임오군란 때 충주로 피신한 명성황후와 민영익 사이의 연락을 맡았기 때문이었다. &lt;br /&gt;
&lt;br /&gt;
그가 단천 감역으로서 광산에서 채굴한 금덩어리를 고종에게 상납하여 신임을 얻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오고 있다.&lt;br /&gt;
&lt;br /&gt;
그가 출세하게 된 가장 큰 계기는 아관파천 이후였다. 당시 함경도 출신자들이 상당수 등용되면서 정국의 한 축을 구성하게 되었는데 이 가운데 이용익도 끼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896년 8월에는 평안북도 관찰사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3월에는 중추원 의관에 등용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러일전쟁 이전 - 고종의 신임으로 인한 시련===&lt;br /&gt;
&lt;br /&gt;
&amp;lt;big&amp;gt;'''&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하지만 그는 이렇게 벼락출세를 하게 되면서 만만치 않은 반발 역시 감당해야 했다.&amp;lt;/font&amp;gt;'''&amp;lt;/big&amp;gt; &lt;br /&gt;
&lt;br /&gt;
1897년, 이윤용과 한규설 등의 대신들을 모함했다는 이유로 그는 유배를 가야만 하였다. 이는 그가 반발에 부딪힌 첫 번째 사례라고 할 수 있다.&amp;lt;ref&amp;gt;당시 일본공사관에서는 대신과 총신 사이의 알력 때문에 이 사건이 일어났다고 본국에 보고한 바 있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00년 이용익은 중추원의장 정낙용의 탄핵을 받았으며, 이듬해 1월 21일에는 의정부 참정 조병식의 공격을 받았다. &lt;br /&gt;
&lt;br /&gt;
가장 심한 공격은 1902년 11월에 있었다. 당시 의정 윤용선 등 여러 대신들이 경운궁 대한문 밖에 연좌하면서 이용익에게 죄 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당시에는 고종 황제조차도 그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그를 피신시킬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결국 이것으로도 사태는 진정되지 않았고, 이용익은 안남미 구입이라는 명목으로 러시아 군함을 타고 당시 러시아가 장악하고 있던 여순으로 건너가야만 했다.&lt;br /&gt;
&lt;br /&gt;
&amp;lt;big&amp;gt;'''&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이용익은 왜 이렇게 심한 공격을 받아야만 하였을까?&amp;lt;/font&amp;gt;'''&amp;lt;/big&amp;gt;&lt;br /&gt;
&lt;br /&gt;
정낙용은 그가 북쪽 변방의 천한 출신임에도 언사와 거동이 대단히 오만하다고 공격하였다. 그의 벼락출세를 질투한 것이다. &lt;br /&gt;
&lt;br /&gt;
이용익이 공격당한 이유로는 한 가지가 더 있다. 이용익이 맡은 여러 역할 가운데 하나가 감찰이었다. 그는 당시 세금 상납을 일부러 하지 않고 있거나 세금 상납이 밀린 지방관이나 관찰사에게는 얄짤이 없었다고 한다. 이밖에도 관리들의 비리를 적발하여 처벌을 요구하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다. 그는 이렇게 대신들의 미움을 살 수밖에 없는 일들을 도맡아 왔고,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1903년에는 그가 입원한 병원에서 폭탄이 터지는 사태까지 발생했다고 한다.&amp;lt;/font&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페퍼민트</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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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이용익(李容翊)</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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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9T14:17:2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페퍼민트: &lt;/p&gt;
&lt;hr /&gt;
&lt;div&gt;==이용익(李容翊)==&lt;br /&gt;
&lt;br /&gt;
===한 줄 소개===&lt;br /&gt;
&lt;br /&gt;
대한제국 때, 내장원경, 탁지부대신, 중앙은행 총재 등을 역임하여 근대 개혁에 기여한 관료.&lt;br /&gt;
&lt;br /&gt;
[[파일:20215553-6569-4f5d-8d60-9f047f5415b9.jpg|height:&amp;quot;100&amp;quot;|center|이용익]]&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width=&amp;quot;700&amp;quot; height=&amp;quot;400&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hO3AqWdRbiY&amp;quot; title=&amp;quot;[신비한TV 서프라이즈]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전국 팔도를 누비며 보부상으로 성공한 이용익! 그의 비결은?!, MBC 221127 방송&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amp;lt;br/&amp;gt;&lt;br /&gt;
&lt;br /&gt;
*1854년&amp;lt;ref&amp;gt;철종 5년&amp;lt;/ref&amp;gt; 함경북도 명천에서 태어났다.&lt;br /&gt;
&lt;br /&gt;
*서민의 아들로 태어나 소년 시절에 서당에서 수학을 했다.&lt;br /&gt;
&lt;br /&gt;
*그 뒤 고향을 떠나 한때 보부상으로 행상하여 자금을 모았고, 함경남도 단천에 와서 금광에 투자하여 거부가 되었다.&lt;br /&gt;
&lt;br /&gt;
*고종의 신임을 받아 단천&amp;lt;ref&amp;gt;금광이 있던 곳. 그는 이곳의 금광을 관리했다.&amp;lt;/ref&amp;gt; 감역, 탁지부대신, 서북철도국총재, 중앙은행총재 등을 역임하면서 근대 개혁에 기여하였다.&lt;br /&gt;
&lt;br /&gt;
*1904년 러일전쟁 이후 일본으로 압송되었다가 다시 돌아왔다.&lt;br /&gt;
&lt;br /&gt;
*돌아와서는 민족의 역량을 키우기 위해 자비로 보성소학과 중학 그리고 보성전문학교&amp;lt;ref&amp;gt;현 고려대학교의 전신&amp;lt;/ref&amp;gt;를 설립하여 인재 키워내기에 힘썼다. 그 외에도 편집소 보성관, 인쇄소 보성사 등을 설치하여 민족계몽에 힘쓰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어 국권이 박탈되고 보호정치가 시작되자, 육군부장이라는 직명으로 고종의 밀서를 들고 프랑스로 원조 요청을 하러 향하던 중 중국 산둥성옌타이항에서 6월에 일본 관헌에게 발각되었다. 이 때 밀령의 책임을 추궁 받을까 염려한 조선 정부에 의해, 일체의 모든 공직에서 파면되었다.&lt;br /&gt;
&lt;br /&gt;
*그 후 해외를 망명하며 구국운동을 이어갔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07년&amp;lt;ref&amp;gt;고종 44년&amp;lt;/ref&amp;gt;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객사하였다.&lt;/div&gt;</summary>
		<author><name>페퍼민트</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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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9T14:10:4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페퍼민트: &lt;/p&gt;
&lt;hr /&gt;
&lt;div&gt;&lt;/div&gt;</summary>
		<author><name>페퍼민트</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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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분류:페퍼민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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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9T11:27:0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페퍼민트: &lt;/p&gt;
&lt;hr /&gt;
&lt;div&gt;[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ED%8E%98%ED%8D%BC%EB%AF%BC%ED%8A%B8%F0%9F%8C%BF 페퍼민트🌿]&lt;/div&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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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9T11:26:2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페퍼민트: 새 문서: [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ED%8E%98%ED%8D%BC%EB%AF%BC%ED%8A%B8%F0%9F%8C%BF 박세은]&lt;/p&gt;
&lt;hr /&gt;
&lt;div&gt;[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ED%8E%98%ED%8D%BC%EB%AF%BC%ED%8A%B8%F0%9F%8C%BF 박세은]&lt;/div&gt;</summary>
		<author><name>페퍼민트</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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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B3%B4%EC%84%B1%EC%A0%84%EB%AC%B8%ED%95%99%EA%B5%90&amp;diff=32830</id>
		<title>보성전문학교</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B3%B4%EC%84%B1%EC%A0%84%EB%AC%B8%ED%95%99%EA%B5%90&amp;diff=32830"/>
		<updated>2023-12-09T11:18:5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페퍼민트: &lt;/p&gt;
&lt;hr /&gt;
&lt;div&gt;==보성전문학교 (普成專門學校)==&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lt;br /&gt;
1905년 지금의 서울인 한성에 설립되어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직후까지 존속했던 근대적 고등교육기관이자 전문학교로, '''고려대학교의 전신'''이다.&amp;lt;/br&amp;gt;&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 15585522-57c8-42f8-99e6-865b5916d9d7.jpg|400px|lright|보성전문학교 초창기 교정 사진이다.]]&amp;lt;/br&amp;gt;&lt;br /&gt;
&lt;br /&gt;
===설립 배경과 목적 및 의의===&lt;br /&gt;
&lt;br /&gt;
내우외환으로 국운이 기울어지며 열강의 이해가 각축하는 소용돌이 속에서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amp;quot;민족과 국가를 구하는 길은 오직 청년 학도를 가르치는 교육의 힘을 기르는 데 있다&amp;quot;&amp;lt;/font&amp;gt;'''는 '교육구국'의 신념을 가지고 대한제국의 이용익 선생이 보성전문학교를 설립했다.&lt;br /&gt;
&lt;br /&gt;
광무황제의 가장 측근이며, 배일 친러파였던 이용익은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확실시되는 가운데 납치되어 갔던 일본으로부터 귀국했고, 당시 근대국가를 경영할 정치·경제·법률 등에 밝은 전문적 인재가 없어 대한제국이 위기에 놓인 것임을 절감하여, 그러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보성전문학교를 세운 것이다. &lt;br /&gt;
&lt;br /&gt;
이렇게 세워진 보성전문학교는 한국최초의 민간인에 의한 근대적 고등교육기관으로, 신교육 보급을 통한 국가자강 및 민족주의의 교육적 실현과 항일 민족 투쟁의 산실이었으며, 근대적 학문의 발상지였다는 역사적 의의를 가진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ig&amp;gt;'''''&amp;lt;font color=&amp;quot;#ff2500&amp;quot;&amp;gt;명순구 법학전문대학원장 : “보성은 논어에 등장하는 말로 널리 인간성을 계발한다는 의미다.&amp;quot;&amp;lt;/font&amp;gt;'''''&amp;lt;/big&amp;gt;&amp;lt;ref&amp;gt;원래 이용익이 생각한 교명은 중앙학교였는데, 고종이 하사한 교명에 따라 학교 이름을 보성이라 지었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건물의 역사===&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white;&amp;quot;&lt;br /&gt;
|+ style=&amp;quot;caption-side:bottom; text-align:left;&amp;quot;|&lt;br /&gt;
|-&lt;br /&gt;
| 1905년 4월 3일 || 종로에 있던 러시아어 학교인 관립한성아어학교&amp;lt;ref&amp;gt;현 종로 수송공원&amp;lt;/ref&amp;gt; 건물을 빌려 개교 || [[파일:Image01.png | 200px]]&lt;br /&gt;
|-&lt;br /&gt;
| 1906년 || 이용익은 아어학교에 이웃한 박동 소재 김교헌 소유의 대저택&amp;lt;ref&amp;gt;현 조계사 터&amp;lt;/ref&amp;gt;을 매입하여 학교 시설을 정비. 부속출판사 “보성사”도 설립. || [[파일:Image02.png | 200px]]&lt;br /&gt;
|-&lt;br /&gt;
| 1918년 || 박동을 아예 떠나 낙원동의 서북학회 회관&amp;lt;ref&amp;gt;현 종로 낙원상가 터&amp;lt;/ref&amp;gt;을 임차하여 사용하기 시작. || [[파일:Image03.png | 200px]]&lt;br /&gt;
|-&lt;br /&gt;
| 1922년 || 천도교 본부의 이전&amp;lt;ref&amp;gt;송현동에서 경운동으로 이전함.&amp;lt;/ref&amp;gt;에 따라 송현동에 건물 신축 및 이전. || [[파일:Image04.png | 200px]]&lt;br /&gt;
|-&lt;br /&gt;
| 1924년 || ‘ㄷ’자 모양의 서양식 건물을 신축. 건물 앞마당에 회화나무가 보임.&amp;lt;ref&amp;gt;이 회화나무의 씨를 받아 2019년 5월 법학신관 앞에 식재.&amp;lt;/ref&amp;gt; || [[파일:Image04.png | 200px]]&lt;br /&gt;
|-&lt;br /&gt;
| 1934년 || 경영권을 인수한 인촌 김성수가 안암동에 현재의 본관을 신축하면서 종로를 완전히 떠나 안암동에 정착. || [[파일:Image05.png | 200px]]&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연원 및 변천===&lt;br /&gt;
&lt;br /&gt;
&lt;br /&gt;
*이용익이 1905년 4월 3일 창설.&lt;br /&gt;
&lt;br /&gt;
&lt;br /&gt;
*이용익이 해외 망명중 서거, 손자 이종호가 잠시 학교 경영의 책임을 맡았으나 안중근의 의거에 연루되어 구금되자 경영난에 봉착. &lt;br /&gt;
&lt;br /&gt;
&lt;br /&gt;
*1910년, 그것을 구제하기 위해 천도교의 손병희(孫秉熙)가 인수. 이렇게 해서 재정적 위기는 면할 수 있게 되었으나, 동시에 나라의 독립을 상실한 해이기도 했기 때문에&amp;lt;ref&amp;gt;한일병합조약&amp;lt;/ref&amp;gt; 일제 총독부의 본격적인 간섭이 시작됨.&lt;br /&gt;
&lt;br /&gt;
&lt;br /&gt;
*총독부는 1915년 3월 사립학교 규칙과 동시에 전문학교 규칙도 아울러 공포. 같은 해 4월 1일부터 시행된 전문학교 규칙에는 “본령에 의하여 설치하는 전문학교가 아니면 전문학교라 칭할 수 없다.”고 하였음. 이에 따라 보성전문학교의 교명은 보성법률상업학교로 격하됨.&lt;br /&gt;
&lt;br /&gt;
&lt;br /&gt;
*1920년 2월에 교장으로 취임한 고원훈이 총독부 당국에 전문학교로의 승격을 거듭 타진하는 한편, 김병로 등이 재단법인 기성회를 조직하여 널리 사회 독지가들에게 호소하기 시작.&lt;br /&gt;
&lt;br /&gt;
&lt;br /&gt;
*전국 각지의 사회 인사 58명이 도움을 주어, 1921년 12월 28일, 보성전문학교라는 교명을 되찾음.&lt;br /&gt;
&lt;br /&gt;
&lt;br /&gt;
*1922년 일제의 조선교육령에 의해 3년제 전문학교로 개편.&lt;br /&gt;
&lt;br /&gt;
&lt;br /&gt;
*그 후 1932년에 총독부의 지나친 간섭 및 물가 변동, 재단 경영의 부진 등으로 학교가 불안정해지자 김성수가 경영을 인수.&lt;br /&gt;
&lt;br /&gt;
&lt;br /&gt;
*김성수는 민립대학 설립의 꿈을 펴기 위해 1934년 현재의 안암동 교사로 보성전문학교를 신축 이전. &lt;br /&gt;
&lt;br /&gt;
&lt;br /&gt;
*그 후 보성전문학교는 외적으로도, 내적으로도 거듭 발전함. 건물을 신축하고 최신 규모의 시설을 확충하는 동시에, 도서·민속고고품을 모집했고, 교과목 및 교수내용에 충실을 가했음. 뿐만 아니라 재학생 및 졸업생들이 사회 곳곳에서 활약하는 등 해를 따라 눈에 띄는 발전을 이루어나감.&lt;br /&gt;
&lt;br /&gt;
&lt;br /&gt;
*그러나 이러한 발전에 따라 총독부의 탄압도 강해짐. 그들은 보성의 농과 신설계획을 거부하였고, 1944년에는 교명을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로 고치지 않고는 존속할 수 없도록 함.&lt;br /&gt;
&lt;br /&gt;
&lt;br /&gt;
*1945년 해방 후 9월에 재단이사회가 개최됨. 모든 학사규정을 다시 보성전문학교의 그것으로 환원시켰다가, 1946년 8월 고려대학교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됨.&lt;br /&gt;
&lt;br /&gt;
&lt;br /&gt;
===현재===&lt;br /&gt;
&lt;br /&gt;
&lt;br /&gt;
1945년 해방 후 1946년 8월 15일, 미군정청 문교부장이 설립 신청을 승인함에 따라 보성전문학교는 전문학교를 넘어 종합대학의 지위에 올랐다. 이름은 고려대학교로 정해졌다. &lt;br /&gt;
&lt;br /&gt;
보성전문학교 이후의 고려대학교는 1955년을 기점으로 현대화되면서 현재까지 이어져, 명문사립학교로서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초대 총장으로 현상윤 선생이 취임한 이래 유진오 선생(2,3,4대), 이종우 선생(5대), 김상협 선생(6,8대), 차락훈 선생(7대), 김준엽 선생(9대), 이준범 선생(10,11대), 김희집 선생(12대), 홍일식 선생(13대), 김정배 선생(14대), 어윤대 선생(15대), 이필상 선생(16대), 이기수 선생(17대), 김병철 선생(18대), 염재호 선생(19대)에 이어 제 20대 총장으로 정진택 선생이 총장직을 이어오고 있다. &lt;br /&gt;
&lt;br /&gt;
정진택 총장의 지도 아래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amp;quot;새로운 가치를 만들어가는 사람 중심의 고려대학교 - 창의적 미래인재 양성, 세계를 변환시키는 대학&amp;quot;&amp;lt;/font&amp;gt;'''이라는 비전을 추진하고 있는 고려대학교는 세계 유수대학들과 어깨를 나란히하며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고 시대를 이끌어나가는 학문적 가치와 인류를 위한 사회적 가치를 세우며 미래사회를 준비할 창의적 인재를 양성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또한 교육, 연구, 행정 등 전 분야에서 상호 존중하고 배려하는 고대만의 문화인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고대다움'&amp;lt;/font&amp;gt;'''을 바탕으로 '같이'의 가치가 활짝 피어나는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사람고대'&amp;lt;/font&amp;gt;''' 실현을 이뤄나가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2023 고려대학교 홍보영상&amp;gt;'''&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873&amp;quot; height=&amp;quot;491&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we0B2oBxKUM&amp;quot; title=&amp;quot;[고려대학교 Korea University] 2023 고려대학교 홍보영상 &amp;amp;#39;Welcome to KU&amp;amp;#39;&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분류:애국계몽운동]]&lt;br /&gt;
[[분류:페퍼민트🌿]]&lt;/div&gt;</summary>
		<author><name>페퍼민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B3%B4%EC%84%B1%EC%A0%84%EB%AC%B8%ED%95%99%EA%B5%90&amp;diff=32829</id>
		<title>보성전문학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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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9T11:17:5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페퍼민트: &lt;/p&gt;
&lt;hr /&gt;
&lt;div&gt;==보성전문학교 (普成專門學校)==&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lt;br /&gt;
1905년 지금의 서울인 한성에 설립되어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직후까지 존속했던 근대적 고등교육기관이자 전문학교로, '''고려대학교의 전신'''이다.&amp;lt;/br&amp;gt;&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 15585522-57c8-42f8-99e6-865b5916d9d7.jpg|400px|lright|보성전문학교 초창기 교정 사진이다.]]&amp;lt;/br&amp;gt;&lt;br /&gt;
&lt;br /&gt;
===설립 배경과 목적 및 의의===&lt;br /&gt;
&lt;br /&gt;
내우외환으로 국운이 기울어지며 열강의 이해가 각축하는 소용돌이 속에서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amp;quot;민족과 국가를 구하는 길은 오직 청년 학도를 가르치는 교육의 힘을 기르는 데 있다&amp;quot;&amp;lt;/font&amp;gt;'''는 '교육구국'의 신념을 가지고 대한제국의 이용익 선생이 보성전문학교를 설립했다.&lt;br /&gt;
&lt;br /&gt;
광무황제의 가장 측근이며, 배일 친러파였던 이용익은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확실시되는 가운데 납치되어 갔던 일본으로부터 귀국했고, 당시 근대국가를 경영할 정치·경제·법률 등에 밝은 전문적 인재가 없어 대한제국이 위기에 놓인 것임을 절감하여, 그러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보성전문학교를 세운 것이다. &lt;br /&gt;
&lt;br /&gt;
이렇게 세워진 보성전문학교는 한국최초의 민간인에 의한 근대적 고등교육기관으로, 신교육 보급을 통한 국가자강 및 민족주의의 교육적 실현과 항일 민족 투쟁의 산실이었으며, 근대적 학문의 발상지였다는 역사적 의의를 가진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ig&amp;gt;'''''&amp;lt;font color=&amp;quot;#ff2500&amp;quot;&amp;gt;명순구 법학전문대학원장 : “보성은 논어에 등장하는 말로 널리 인간성을 계발한다는 의미다.&amp;quot;&amp;lt;/font&amp;gt;'''''&amp;lt;/big&amp;gt;&amp;lt;ref&amp;gt;원래 이용익이 생각한 교명은 중앙학교였는데, 고종이 하사한 교명에 따라 학교 이름을 보성이라 지었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건물의 역사===&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white;&amp;quot;&lt;br /&gt;
|+ style=&amp;quot;caption-side:bottom; text-align:left;&amp;quot;|&lt;br /&gt;
|-&lt;br /&gt;
| 1905년 4월 3일 || 종로에 있던 러시아어 학교인 관립한성아어학교&amp;lt;ref&amp;gt;현 종로 수송공원&amp;lt;/ref&amp;gt; 건물을 빌려 개교 || [[파일:Image01.png | 200px]]&lt;br /&gt;
|-&lt;br /&gt;
| 1906년 || 이용익은 아어학교에 이웃한 박동 소재 김교헌 소유의 대저택&amp;lt;ref&amp;gt;현 조계사 터&amp;lt;/ref&amp;gt;을 매입하여 학교 시설을 정비. 부속출판사 “보성사”도 설립. || [[파일:Image02.png | 200px]]&lt;br /&gt;
|-&lt;br /&gt;
| 1918년 || 박동을 아예 떠나 낙원동의 서북학회 회관&amp;lt;ref&amp;gt;현 종로 낙원상가 터&amp;lt;/ref&amp;gt;을 임차하여 사용하기 시작. || [[파일:Image03.png | 200px]]&lt;br /&gt;
|-&lt;br /&gt;
| 1922년 || 천도교 본부의 이전&amp;lt;ref&amp;gt;송현동에서 경운동으로 이전함.&amp;lt;/ref&amp;gt;에 따라 송현동에 건물 신축 및 이전. || [[파일:Image04.png | 200px]]&lt;br /&gt;
|-&lt;br /&gt;
| 1924년 || ‘ㄷ’자 모양의 서양식 건물을 신축. 건물 앞마당에 회화나무가 보임.&amp;lt;ref&amp;gt;이 회화나무의 씨를 받아 2019년 5월 법학신관 앞에 식재.&amp;lt;/ref&amp;gt; || [[파일:Image04.png | 200px]]&lt;br /&gt;
|-&lt;br /&gt;
| 1934년 || 경영권을 인수한 인촌 김성수가 안암동에 현재의 본관을 신축하면서 종로를 완전히 떠나 안암동에 정착. || [[파일:Image05.png | 200px]]&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연원 및 변천===&lt;br /&gt;
&lt;br /&gt;
&lt;br /&gt;
*이용익이 1905년 4월 3일 창설.&lt;br /&gt;
&lt;br /&gt;
&lt;br /&gt;
*이용익이 해외 망명중 서거, 손자 이종호가 잠시 학교 경영의 책임을 맡았으나 안중근의 의거에 연루되어 구금되자 경영난에 봉착. &lt;br /&gt;
&lt;br /&gt;
&lt;br /&gt;
*1910년, 그것을 구제하기 위해 천도교의 손병희(孫秉熙)가 인수. 이렇게 해서 재정적 위기는 면할 수 있게 되었으나, 동시에 나라의 독립을 상실한 해이기도 했기 때문에&amp;lt;ref&amp;gt;한일병합조약&amp;lt;/ref&amp;gt; 일제 총독부의 본격적인 간섭이 시작됨.&lt;br /&gt;
&lt;br /&gt;
&lt;br /&gt;
*총독부는 1915년 3월 사립학교 규칙과 동시에 전문학교 규칙도 아울러 공포. 같은 해 4월 1일부터 시행된 전문학교 규칙에는 “본령에 의하여 설치하는 전문학교가 아니면 전문학교라 칭할 수 없다.”고 하였음. 이에 따라 보성전문학교의 교명은 보성법률상업학교로 격하됨.&lt;br /&gt;
&lt;br /&gt;
&lt;br /&gt;
*1920년 2월에 교장으로 취임한 고원훈이 총독부 당국에 전문학교로의 승격을 거듭 타진하는 한편, 김병로 등이 재단법인 기성회를 조직하여 널리 사회 독지가들에게 호소하기 시작.&lt;br /&gt;
&lt;br /&gt;
&lt;br /&gt;
*전국 각지의 사회 인사 58명이 도움을 주어, 1921년 12월 28일, 보성전문학교라는 교명을 되찾음.&lt;br /&gt;
&lt;br /&gt;
&lt;br /&gt;
*1922년 일제의 조선교육령에 의해 3년제 전문학교로 개편.&lt;br /&gt;
&lt;br /&gt;
&lt;br /&gt;
*그 후 1932년에 총독부의 지나친 간섭 및 물가 변동, 재단 경영의 부진 등으로 학교가 불안정해지자 김성수가 경영을 인수.&lt;br /&gt;
&lt;br /&gt;
&lt;br /&gt;
*김성수는 민립대학 설립의 꿈을 펴기 위해 1934년 현재의 안암동 교사로 보성전문학교를 신축 이전. &lt;br /&gt;
&lt;br /&gt;
&lt;br /&gt;
*그 후 보성전문학교는 외적으로도, 내적으로도 거듭 발전함. 건물을 신축하고 최신 규모의 시설을 확충하는 동시에, 도서·민속고고품을 모집했고, 교과목 및 교수내용에 충실을 가했음. 뿐만 아니라 재학생 및 졸업생들이 사회 곳곳에서 활약하는 등 해를 따라 눈에 띄는 발전을 이루어나감.&lt;br /&gt;
&lt;br /&gt;
&lt;br /&gt;
*그러나 이러한 발전에 따라 총독부의 탄압도 강해짐. 그들은 보성의 농과 신설계획을 거부하였고, 1944년에는 교명을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로 고치지 않고는 존속할 수 없도록 함.&lt;br /&gt;
&lt;br /&gt;
&lt;br /&gt;
*1945년 해방 후 9월에 재단이사회가 개최됨. 모든 학사규정을 다시 보성전문학교의 그것으로 환원시켰다가, 1946년 8월 고려대학교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됨.&lt;br /&gt;
&lt;br /&gt;
&lt;br /&gt;
===현재===&lt;br /&gt;
&lt;br /&gt;
&lt;br /&gt;
1945년 해방 후 1946년 8월 15일, 미군정청 문교부장이 설립 신청을 승인함에 따라 보성전문학교는 전문학교를 넘어 종합대학의 지위에 올랐다. 이름은 고려대학교로 정해졌다. &lt;br /&gt;
&lt;br /&gt;
보성전문학교 이후의 고려대학교는 1955년을 기점으로 현대화되면서 현재까지 이어져, 명문사립학교로서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초대 총장으로 현상윤 선생이 취임한 이래 유진오 선생(2,3,4대), 이종우 선생(5대), 김상협 선생(6,8대), 차락훈 선생(7대), 김준엽 선생(9대), 이준범 선생(10,11대), 김희집 선생(12대), 홍일식 선생(13대), 김정배 선생(14대), 어윤대 선생(15대), 이필상 선생(16대), 이기수 선생(17대), 김병철 선생(18대), 염재호 선생(19대)에 이어 제 20대 총장으로 정진택 선생이 총장직을 이어오고 있다. &lt;br /&gt;
&lt;br /&gt;
정진택 총장의 지도 아래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amp;quot;새로운 가치를 만들어가는 사람 중심의 고려대학교 - 창의적 미래인재 양성, 세계를 변환시키는 대학&amp;quot;&amp;lt;/font&amp;gt;'''이라는 비전을 추진하고 있는 고려대학교는 세계 유수대학들과 어깨를 나란히하며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고 시대를 이끌어나가는 학문적 가치와 인류를 위한 사회적 가치를 세우며 미래사회를 준비할 창의적 인재를 양성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또한 교육, 연구, 행정 등 전 분야에서 상호 존중하고 배려하는 고대만의 문화인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고대다움'&amp;lt;/font&amp;gt;'''을 바탕으로 '같이'의 가치가 활짝 피어나는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사람고대'&amp;lt;/font&amp;gt;''' 실현을 이뤄나가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2023 고려대학교 홍보영상&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873&amp;quot; height=&amp;quot;491&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we0B2oBxKUM&amp;quot; title=&amp;quot;[고려대학교 Korea University] 2023 고려대학교 홍보영상 &amp;amp;#39;Welcome to KU&amp;amp;#39;&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분류:애국계몽운동]]&lt;br /&gt;
[[분류:페퍼민트🌿]]&lt;/div&gt;</summary>
		<author><name>페퍼민트</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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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보성전문학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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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9T11:17:1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페퍼민트: &lt;/p&gt;
&lt;hr /&gt;
&lt;div&gt;==보성전문학교 (普成專門學校)==&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lt;br /&gt;
1905년 지금의 서울인 한성에 설립되어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직후까지 존속했던 근대적 고등교육기관이자 전문학교로, '''고려대학교의 전신'''이다.&amp;lt;/br&amp;gt;&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 15585522-57c8-42f8-99e6-865b5916d9d7.jpg|400px|lright|보성전문학교 초창기 교정 사진이다.]]&amp;lt;/br&amp;gt;&lt;br /&gt;
&lt;br /&gt;
===설립 배경과 목적 및 의의===&lt;br /&gt;
&lt;br /&gt;
내우외환으로 국운이 기울어지며 열강의 이해가 각축하는 소용돌이 속에서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amp;quot;민족과 국가를 구하는 길은 오직 청년 학도를 가르치는 교육의 힘을 기르는 데 있다&amp;quot;&amp;lt;/font&amp;gt;'''는 '교육구국'의 신념을 가지고 대한제국의 이용익 선생이 보성전문학교를 설립했다.&lt;br /&gt;
&lt;br /&gt;
광무황제의 가장 측근이며, 배일 친러파였던 이용익은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확실시되는 가운데 납치되어 갔던 일본으로부터 귀국했고, 당시 근대국가를 경영할 정치·경제·법률 등에 밝은 전문적 인재가 없어 대한제국이 위기에 놓인 것임을 절감하여, 그러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보성전문학교를 세운 것이다. &lt;br /&gt;
&lt;br /&gt;
이렇게 세워진 보성전문학교는 한국최초의 민간인에 의한 근대적 고등교육기관으로, 신교육 보급을 통한 국가자강 및 민족주의의 교육적 실현과 항일 민족 투쟁의 산실이었으며, 근대적 학문의 발상지였다는 역사적 의의를 가진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ig&amp;gt;'''''&amp;lt;font color=&amp;quot;#ff2500&amp;quot;&amp;gt;명순구 법학전문대학원장 : “보성은 논어에 등장하는 말로 널리 인간성을 계발한다는 의미다.&amp;quot;&amp;lt;/font&amp;gt;'''''&amp;lt;/big&amp;gt;&amp;lt;ref&amp;gt;원래 이용익이 생각한 교명은 중앙학교였는데, 고종이 하사한 교명에 따라 학교 이름을 보성이라 지었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건물의 역사===&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white;&amp;quot;&lt;br /&gt;
|+ style=&amp;quot;caption-side:bottom; text-align:left;&amp;quot;|&lt;br /&gt;
|-&lt;br /&gt;
| 1905년 4월 3일 || 종로에 있던 러시아어 학교인 관립한성아어학교&amp;lt;ref&amp;gt;현 종로 수송공원&amp;lt;/ref&amp;gt; 건물을 빌려 개교 || [[파일:Image01.png | 200px]]&lt;br /&gt;
|-&lt;br /&gt;
| 1906년 || 이용익은 아어학교에 이웃한 박동 소재 김교헌 소유의 대저택&amp;lt;ref&amp;gt;현 조계사 터&amp;lt;/ref&amp;gt;을 매입하여 학교 시설을 정비. 부속출판사 “보성사”도 설립. || [[파일:Image02.png | 200px]]&lt;br /&gt;
|-&lt;br /&gt;
| 1918년 || 박동을 아예 떠나 낙원동의 서북학회 회관&amp;lt;ref&amp;gt;현 종로 낙원상가 터&amp;lt;/ref&amp;gt;을 임차하여 사용하기 시작. || [[파일:Image03.png | 200px]]&lt;br /&gt;
|-&lt;br /&gt;
| 1922년 || 천도교 본부의 이전&amp;lt;ref&amp;gt;송현동에서 경운동으로 이전함.&amp;lt;/ref&amp;gt;에 따라 송현동에 건물 신축 및 이전. || [[파일:Image04.png | 200px]]&lt;br /&gt;
|-&lt;br /&gt;
| 1924년 || ‘ㄷ’자 모양의 서양식 건물을 신축. 건물 앞마당에 회화나무가 보임.&amp;lt;ref&amp;gt;이 회화나무의 씨를 받아 2019년 5월 법학신관 앞에 식재.&amp;lt;/ref&amp;gt; || [[파일:Image04.png | 200px]]&lt;br /&gt;
|-&lt;br /&gt;
| 1934년 || 경영권을 인수한 인촌 김성수가 안암동에 현재의 본관을 신축하면서 종로를 완전히 떠나 안암동에 정착. || [[파일:Image05.png | 200px]]&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연원 및 변천===&lt;br /&gt;
&lt;br /&gt;
&lt;br /&gt;
*이용익이 1905년 4월 3일 창설.&lt;br /&gt;
&lt;br /&gt;
&lt;br /&gt;
*이용익이 해외 망명중 서거, 손자 이종호가 잠시 학교 경영의 책임을 맡았으나 안중근의 의거에 연루되어 구금되자 경영난에 봉착. &lt;br /&gt;
&lt;br /&gt;
&lt;br /&gt;
*1910년, 그것을 구제하기 위해 천도교의 손병희(孫秉熙)가 인수. 이렇게 해서 재정적 위기는 면할 수 있게 되었으나, 동시에 나라의 독립을 상실한 해이기도 했기 때문에&amp;lt;ref&amp;gt;한일병합조약&amp;lt;/ref&amp;gt; 일제 총독부의 본격적인 간섭이 시작됨.&lt;br /&gt;
&lt;br /&gt;
&lt;br /&gt;
*총독부는 1915년 3월 사립학교 규칙과 동시에 전문학교 규칙도 아울러 공포. 같은 해 4월 1일부터 시행된 전문학교 규칙에는 “본령에 의하여 설치하는 전문학교가 아니면 전문학교라 칭할 수 없다.”고 하였음. 이에 따라 보성전문학교의 교명은 보성법률상업학교로 격하됨.&lt;br /&gt;
&lt;br /&gt;
&lt;br /&gt;
*1920년 2월에 교장으로 취임한 고원훈이 총독부 당국에 전문학교로의 승격을 거듭 타진하는 한편, 김병로 등이 재단법인 기성회를 조직하여 널리 사회 독지가들에게 호소하기 시작.&lt;br /&gt;
&lt;br /&gt;
&lt;br /&gt;
*전국 각지의 사회 인사 58명이 도움을 주어, 1921년 12월 28일, 보성전문학교라는 교명을 되찾음.&lt;br /&gt;
&lt;br /&gt;
&lt;br /&gt;
*1922년 일제의 조선교육령에 의해 3년제 전문학교로 개편.&lt;br /&gt;
&lt;br /&gt;
&lt;br /&gt;
*그 후 1932년에 총독부의 지나친 간섭 및 물가 변동, 재단 경영의 부진 등으로 학교가 불안정해지자 김성수가 경영을 인수.&lt;br /&gt;
&lt;br /&gt;
&lt;br /&gt;
*김성수는 민립대학 설립의 꿈을 펴기 위해 1934년 현재의 안암동 교사로 보성전문학교를 신축 이전. &lt;br /&gt;
&lt;br /&gt;
&lt;br /&gt;
*그 후 보성전문학교는 외적으로도, 내적으로도 거듭 발전함. 건물을 신축하고 최신 규모의 시설을 확충하는 동시에, 도서·민속고고품을 모집했고, 교과목 및 교수내용에 충실을 가했음. 뿐만 아니라 재학생 및 졸업생들이 사회 곳곳에서 활약하는 등 해를 따라 눈에 띄는 발전을 이루어나감.&lt;br /&gt;
&lt;br /&gt;
&lt;br /&gt;
*그러나 이러한 발전에 따라 총독부의 탄압도 강해짐. 그들은 보성의 농과 신설계획을 거부하였고, 1944년에는 교명을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로 고치지 않고는 존속할 수 없도록 함.&lt;br /&gt;
&lt;br /&gt;
&lt;br /&gt;
*1945년 해방 후 9월에 재단이사회가 개최됨. 모든 학사규정을 다시 보성전문학교의 그것으로 환원시켰다가, 1946년 8월 고려대학교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됨.&lt;br /&gt;
&lt;br /&gt;
&lt;br /&gt;
===현재===&lt;br /&gt;
&lt;br /&gt;
&lt;br /&gt;
1945년 해방 후 1946년 8월 15일, 미군정청 문교부장이 설립 신청을 승인함에 따라 보성전문학교는 전문학교를 넘어 종합대학의 지위에 올랐다. 이름은 고려대학교로 정해졌다. &lt;br /&gt;
&lt;br /&gt;
보성전문학교 이후의 고려대학교는 1955년을 기점으로 현대화되면서 현재까지 이어져, 명문사립학교로서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초대 총장으로 현상윤 선생이 취임한 이래 유진오 선생(2,3,4대), 이종우 선생(5대), 김상협 선생(6,8대), 차락훈 선생(7대), 김준엽 선생(9대), 이준범 선생(10,11대), 김희집 선생(12대), 홍일식 선생(13대), 김정배 선생(14대), 어윤대 선생(15대), 이필상 선생(16대), 이기수 선생(17대), 김병철 선생(18대), 염재호 선생(19대)에 이어 제 20대 총장으로 정진택 선생이 총장직을 이어오고 있다. &lt;br /&gt;
&lt;br /&gt;
정진택 총장의 지도 아래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amp;quot;새로운 가치를 만들어가는 사람 중심의 고려대학교 - 창의적 미래인재 양성, 세계를 변환시키는 대학&amp;quot;&amp;lt;/font&amp;gt;'''이라는 비전을 추진하고 있는 고려대학교는 세계 유수대학들과 어깨를 나란히하며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고 시대를 이끌어나가는 학문적 가치와 인류를 위한 사회적 가치를 세우며 미래사회를 준비할 창의적 인재를 양성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또한 교육, 연구, 행정 등 전 분야에서 상호 존중하고 배려하는 고대만의 문화인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고대다움'&amp;lt;/font&amp;gt;'''을 바탕으로 '같이'의 가치가 활짝 피어나는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사람고대'&amp;lt;/font&amp;gt;''' 실현을 이뤄나가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2023 고려대학교 홍보영상&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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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html&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페퍼민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B3%B4%EC%84%B1%EC%A0%84%EB%AC%B8%ED%95%99%EA%B5%90&amp;diff=32827</id>
		<title>보성전문학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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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9T11:12:2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페퍼민트: &lt;/p&gt;
&lt;hr /&gt;
&lt;div&gt;==보성전문학교 (普成專門學校)==&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lt;br /&gt;
1905년 지금의 서울인 한성에 설립되어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직후까지 존속했던 근대적 고등교육기관이자 전문학교로, '''고려대학교의 전신'''이다.&amp;lt;/br&amp;gt;&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 15585522-57c8-42f8-99e6-865b5916d9d7.jpg|400px|lright|보성전문학교 초창기 교정 사진이다.]]&amp;lt;/br&amp;gt;&lt;br /&gt;
&lt;br /&gt;
===설립 배경과 목적 및 의의===&lt;br /&gt;
&lt;br /&gt;
내우외환으로 국운이 기울어지며 열강의 이해가 각축하는 소용돌이 속에서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amp;quot;민족과 국가를 구하는 길은 오직 청년 학도를 가르치는 교육의 힘을 기르는 데 있다&amp;quot;&amp;lt;/font&amp;gt;'''는 '교육구국'의 신념을 가지고 대한제국의 이용익 선생이 보성전문학교를 설립했다.&lt;br /&gt;
&lt;br /&gt;
광무황제의 가장 측근이며, 배일 친러파였던 이용익은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확실시되는 가운데 납치되어 갔던 일본으로부터 귀국했고, 당시 근대국가를 경영할 정치·경제·법률 등에 밝은 전문적 인재가 없어 대한제국이 위기에 놓인 것임을 절감하여, 그러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보성전문학교를 세운 것이다. &lt;br /&gt;
&lt;br /&gt;
이렇게 세워진 보성전문학교는 한국최초의 민간인에 의한 근대적 고등교육기관으로, 신교육 보급을 통한 국가자강 및 민족주의의 교육적 실현과 항일 민족 투쟁의 산실이었으며, 근대적 학문의 발상지였다는 역사적 의의를 가진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ig&amp;gt;'''''&amp;lt;font color=&amp;quot;#ff2500&amp;quot;&amp;gt;명순구 법학전문대학원장 : “보성은 논어에 등장하는 말로 널리 인간성을 계발한다는 의미다.&amp;quot;&amp;lt;/font&amp;gt;'''''&amp;lt;/big&amp;gt;&amp;lt;ref&amp;gt;원래 이용익이 생각한 교명은 중앙학교였는데, 고종이 하사한 교명에 따라 학교 이름을 보성이라 지었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건물의 역사===&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white;&amp;quot;&lt;br /&gt;
|+ style=&amp;quot;caption-side:bottom; text-align:left;&amp;quot;|&lt;br /&gt;
|-&lt;br /&gt;
| 1905년 4월 3일 || 종로에 있던 러시아어 학교인 관립한성아어학교&amp;lt;ref&amp;gt;현 종로 수송공원&amp;lt;/ref&amp;gt; 건물을 빌려 개교 || [[파일:Image01.png | 200px]]&lt;br /&gt;
|-&lt;br /&gt;
| 1906년 || 이용익은 아어학교에 이웃한 박동 소재 김교헌 소유의 대저택&amp;lt;ref&amp;gt;현 조계사 터&amp;lt;/ref&amp;gt;을 매입하여 학교 시설을 정비. 부속출판사 “보성사”도 설립. || [[파일:Image02.png | 200px]]&lt;br /&gt;
|-&lt;br /&gt;
| 1918년 || 박동을 아예 떠나 낙원동의 서북학회 회관&amp;lt;ref&amp;gt;현 종로 낙원상가 터&amp;lt;/ref&amp;gt;을 임차하여 사용하기 시작. || [[파일:Image03.png | 200px]]&lt;br /&gt;
|-&lt;br /&gt;
| 1922년 || 천도교 본부의 이전&amp;lt;ref&amp;gt;송현동에서 경운동으로 이전함.&amp;lt;/ref&amp;gt;에 따라 송현동에 건물 신축 및 이전. || [[파일:Image04.png | 200px]]&lt;br /&gt;
|-&lt;br /&gt;
| 1924년 || ‘ㄷ’자 모양의 서양식 건물을 신축. 건물 앞마당에 회화나무가 보임.&amp;lt;ref&amp;gt;이 회화나무의 씨를 받아 2019년 5월 법학신관 앞에 식재.&amp;lt;/ref&amp;gt; || [[파일:Image04.png | 200px]]&lt;br /&gt;
|-&lt;br /&gt;
| 1934년 || 경영권을 인수한 인촌 김성수가 안암동에 현재의 본관을 신축하면서 종로를 완전히 떠나 안암동에 정착. || [[파일:Image05.png | 200px]]&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연원 및 변천===&lt;br /&gt;
&lt;br /&gt;
&lt;br /&gt;
*이용익이 1905년 4월 3일 창설.&lt;br /&gt;
&lt;br /&gt;
&lt;br /&gt;
*이용익이 해외 망명중 서거, 손자 이종호가 잠시 학교 경영의 책임을 맡았으나 안중근의 의거에 연루되어 구금되자 경영난에 봉착. &lt;br /&gt;
&lt;br /&gt;
&lt;br /&gt;
*1910년, 그것을 구제하기 위해 천도교의 손병희(孫秉熙)가 인수. 이렇게 해서 재정적 위기는 면할 수 있게 되었으나, 동시에 나라의 독립을 상실한 해이기도 했기 때문에&amp;lt;ref&amp;gt;한일병합조약&amp;lt;/ref&amp;gt; 일제 총독부의 본격적인 간섭이 시작됨.&lt;br /&gt;
&lt;br /&gt;
&lt;br /&gt;
*총독부는 1915년 3월 사립학교 규칙과 동시에 전문학교 규칙도 아울러 공포. 같은 해 4월 1일부터 시행된 전문학교 규칙에는 “본령에 의하여 설치하는 전문학교가 아니면 전문학교라 칭할 수 없다.”고 하였음. 이에 따라 보성전문학교의 교명은 보성법률상업학교로 격하됨.&lt;br /&gt;
&lt;br /&gt;
&lt;br /&gt;
*1920년 2월에 교장으로 취임한 고원훈이 총독부 당국에 전문학교로의 승격을 거듭 타진하는 한편, 김병로 등이 재단법인 기성회를 조직하여 널리 사회 독지가들에게 호소하기 시작.&lt;br /&gt;
&lt;br /&gt;
&lt;br /&gt;
*전국 각지의 사회 인사 58명이 도움을 주어, 1921년 12월 28일, 보성전문학교라는 교명을 되찾음.&lt;br /&gt;
&lt;br /&gt;
&lt;br /&gt;
*1922년 일제의 조선교육령에 의해 3년제 전문학교로 개편.&lt;br /&gt;
&lt;br /&gt;
&lt;br /&gt;
*그 후 1932년에 총독부의 지나친 간섭 및 물가 변동, 재단 경영의 부진 등으로 학교가 불안정해지자 김성수가 경영을 인수.&lt;br /&gt;
&lt;br /&gt;
&lt;br /&gt;
*김성수는 민립대학 설립의 꿈을 펴기 위해 1934년 현재의 안암동 교사로 보성전문학교를 신축 이전. &lt;br /&gt;
&lt;br /&gt;
&lt;br /&gt;
*그 후 보성전문학교는 외적으로도, 내적으로도 거듭 발전함. 건물을 신축하고 최신 규모의 시설을 확충하는 동시에, 도서·민속고고품을 모집했고, 교과목 및 교수내용에 충실을 가했음. 뿐만 아니라 재학생 및 졸업생들이 사회 곳곳에서 활약하는 등 해를 따라 눈에 띄는 발전을 이루어나감.&lt;br /&gt;
&lt;br /&gt;
&lt;br /&gt;
*그러나 이러한 발전에 따라 총독부의 탄압도 강해짐. 그들은 보성의 농과 신설계획을 거부하였고, 1944년에는 교명을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로 고치지 않고는 존속할 수 없도록 함.&lt;br /&gt;
&lt;br /&gt;
&lt;br /&gt;
*1945년 해방 후 9월에 재단이사회가 개최됨. 모든 학사규정을 다시 보성전문학교의 그것으로 환원시켰다가, 1946년 8월 고려대학교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됨.&lt;br /&gt;
&lt;br /&gt;
&lt;br /&gt;
===현재===&lt;br /&gt;
&lt;br /&gt;
&lt;br /&gt;
1945년 해방 후 1946년 8월 15일, 미군정청 문교부장이 설립 신청을 승인함에 따라 보성전문학교는 전문학교를 넘어 종합대학의 지위에 올랐다. 이름은 고려대학교로 정해졌다. &lt;br /&gt;
&lt;br /&gt;
보성전문학교 이후의 고려대학교는 1955년을 기점으로 현대화되면서 현재까지 이어져, 명문사립학교로서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초대 총장으로 현상윤 선생이 취임한 이래 유진오 선생(2,3,4대), 이종우 선생(5대), 김상협 선생(6,8대), 차락훈 선생(7대), 김준엽 선생(9대), 이준범 선생(10,11대), 김희집 선생(12대), 홍일식 선생(13대), 김정배 선생(14대), 어윤대 선생(15대), 이필상 선생(16대), 이기수 선생(17대), 김병철 선생(18대), 염재호 선생(19대)에 이어 제 20대 총장으로 정진택 선생이 총장직을 이어오고 있다. &lt;br /&gt;
&lt;br /&gt;
정진택 총장의 지도 아래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amp;quot;새로운 가치를 만들어가는 사람 중심의 고려대학교 - 창의적 미래인재 양성, 세계를 변환시키는 대학&amp;quot;&amp;lt;/font&amp;gt;'''이라는 비전을 추진하고 있는 고려대학교는 세계 유수대학들과 어깨를 나란히하며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고 시대를 이끌어나가는 학문적 가치와 인류를 위한 사회적 가치를 세우며 미래사회를 준비할 창의적 인재를 양성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또한 교육, 연구, 행정 등 전 분야에서 상호 존중하고 배려하는 고대만의 문화인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고대다움'&amp;lt;/font&amp;gt;'''을 바탕으로 '같이'의 가치가 활짝 피어나는 '''&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사람고대'&amp;lt;/font&amp;gt;''' 실현을 이뤄나가고 있다.&lt;/div&gt;</summary>
		<author><name>페퍼민트</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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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보성전문학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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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9T11:06:5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페퍼민트: &lt;/p&gt;
&lt;hr /&gt;
&lt;div&gt;==보성전문학교 (普成專門學校)==&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lt;br /&gt;
1905년 지금의 서울인 한성에 설립되어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직후까지 존속했던 근대적 고등교육기관이자 전문학교로, '''고려대학교의 전신'''이다.&amp;lt;/br&amp;gt;&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 15585522-57c8-42f8-99e6-865b5916d9d7.jpg|400px|lright|보성전문학교 초창기 교정 사진이다.]]&amp;lt;/br&amp;gt;&lt;br /&gt;
&lt;br /&gt;
===설립 배경과 목적 및 의의===&lt;br /&gt;
&lt;br /&gt;
내우외환으로 국운이 기울어지며 열강의 이해가 각축하는 소용돌이 속에서 &amp;quot;''&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민족과 국가를 구하는 길은 오직 청년 학도를 가르치는 교육의 힘을 기르는 데 있다&amp;lt;/font&amp;gt;''&amp;quot;는 '교육구국'의 신념을 가지고 대한제국의 이용익 선생이 보성전문학교를 설립했다.&lt;br /&gt;
&lt;br /&gt;
광무황제의 가장 측근이며, 배일 친러파였던 이용익은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확실시되는 가운데 납치되어 갔던 일본으로부터 귀국했고, 당시 근대국가를 경영할 정치·경제·법률 등에 밝은 전문적 인재가 없어 대한제국이 위기에 놓인 것임을 절감하여, 그러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보성전문학교를 세운 것이다. &lt;br /&gt;
&lt;br /&gt;
이렇게 세워진 보성전문학교는 한국최초의 민간인에 의한 근대적 고등교육기관으로, 신교육 보급을 통한 국가자강 및 민족주의의 교육적 실현과 항일 민족 투쟁의 산실이었으며, 근대적 학문의 발상지였다는 역사적 의의를 가진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ig&amp;gt;'''''&amp;lt;font color=&amp;quot;#ff2500&amp;quot;&amp;gt;명순구 법학전문대학원장 : “보성은 논어에 등장하는 말로 널리 인간성을 계발한다는 의미다.&amp;quot;&amp;lt;/font&amp;gt;'''''&amp;lt;/big&amp;gt;&amp;lt;ref&amp;gt;원래 이용익이 생각한 교명은 중앙학교였는데, 고종이 하사한 교명에 따라 학교 이름을 보성이라 지었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건물의 역사===&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white;&amp;quot;&lt;br /&gt;
|+ style=&amp;quot;caption-side:bottom; text-align:left;&amp;quot;|&lt;br /&gt;
|-&lt;br /&gt;
| 1905년 4월 3일 || 종로에 있던 러시아어 학교인 관립한성아어학교&amp;lt;ref&amp;gt;현 종로 수송공원&amp;lt;/ref&amp;gt; 건물을 빌려 개교 || [[파일:Image01.png | 200px]]&lt;br /&gt;
|-&lt;br /&gt;
| 1906년 || 이용익은 아어학교에 이웃한 박동 소재 김교헌 소유의 대저택&amp;lt;ref&amp;gt;현 조계사 터&amp;lt;/ref&amp;gt;을 매입하여 학교 시설을 정비. 부속출판사 “보성사”도 설립. || [[파일:Image02.png | 200px]]&lt;br /&gt;
|-&lt;br /&gt;
| 1918년 || 박동을 아예 떠나 낙원동의 서북학회 회관&amp;lt;ref&amp;gt;현 종로 낙원상가 터&amp;lt;/ref&amp;gt;을 임차하여 사용하기 시작. || [[파일:Image03.png | 200px]]&lt;br /&gt;
|-&lt;br /&gt;
| 1922년 || 천도교 본부의 이전&amp;lt;ref&amp;gt;송현동에서 경운동으로 이전함.&amp;lt;/ref&amp;gt;에 따라 송현동에 건물 신축 및 이전. || [[파일:Image04.png | 200px]]&lt;br /&gt;
|-&lt;br /&gt;
| 1924년 || ‘ㄷ’자 모양의 서양식 건물을 신축. 건물 앞마당에 회화나무가 보임.&amp;lt;ref&amp;gt;이 회화나무의 씨를 받아 2019년 5월 법학신관 앞에 식재.&amp;lt;/ref&amp;gt; || [[파일:Image04.png | 200px]]&lt;br /&gt;
|-&lt;br /&gt;
| 1934년 || 경영권을 인수한 인촌 김성수가 안암동에 현재의 본관을 신축하면서 종로를 완전히 떠나 안암동에 정착. || [[파일:Image05.png | 200px]]&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연원 및 변천===&lt;br /&gt;
&lt;br /&gt;
&lt;br /&gt;
*이용익이 1905년 4월 3일 창설.'&lt;br /&gt;
&lt;br /&gt;
&lt;br /&gt;
*이용익이 해외 망명중 서거, 손자 이종호가 잠시 학교 경영의 책임을 맡았으나 안중근의 의거에 연루되어 구금되자 경영난에 봉착. &lt;br /&gt;
&lt;br /&gt;
&lt;br /&gt;
*1910년, 그것을 구제하기 위해 천도교의 손병희(孫秉熙)가 인수. 이렇게 해서 재정적 위기는 면할 수 있게 되었으나, 동시에 나라의 독립을 상실한 해이기도 했기 때문에(각주: 한일병합조약) 일제 총독부의 본격적인 간섭이 시작됨.&lt;br /&gt;
&lt;br /&gt;
&lt;br /&gt;
*총독부는 1915년 3월 사립학교 규칙과 동시에 전문학교 규칙도 아울러 공포. 같은 해 4월 1일부터 시행된 전문학교 규칙에는 “본령에 의하여 설치하는 전문학교가 아니면 전문학교라 칭할 수 없다.”고 하였음. 이에 따라 보성전문학교의 교명은 보성법률상업학교로 격하됨.&lt;br /&gt;
&lt;br /&gt;
&lt;br /&gt;
*1920년 2월에 교장으로 취임한 고원훈이 총독부 당국에 전문학교로의 승격을 거듭 타진하는 한편, 김병로 등이 재단법인 기성회를 조직하여 널리 사회 독지가들에게 호소하기 시작.&lt;br /&gt;
&lt;br /&gt;
&lt;br /&gt;
*전국 각지의 사회 인사 58명이 도움을 주어, 1921년 12월 28일, 보성전문학교라는 교명을 되찾음.&lt;br /&gt;
&lt;br /&gt;
&lt;br /&gt;
*1922년 일제의 조선교육령에 의해 3년제 전문학교로 개편.&lt;br /&gt;
&lt;br /&gt;
&lt;br /&gt;
*그 후 1932년에 총독부의 지나친 간섭 및 물가 변동, 재단 경영의 부진 등으로 학교가 불안정해지자 김성수가 경영을 인수.&lt;br /&gt;
&lt;br /&gt;
&lt;br /&gt;
*김성수는 민립대학 설립의 꿈을 펴기 위해 1934년 현재의 안암동 교사로 보성전문학교를 신축 이전. &lt;br /&gt;
&lt;br /&gt;
&lt;br /&gt;
*그 후 보성전문학교는 외적으로도, 내적으로도 거듭 발전함. 건물을 신축하고 최신 규모의 시설을 확충하는 동시에, 도서·민속고고품을 모집했고, 교과목 및 교수내용에 충실을 가했음. 뿐만 아니라 재학생 및 졸업생들이 사회 곳곳에서 활약하는 등 해를 따라 눈에 띄는 발전을 이루어나감.&lt;br /&gt;
&lt;br /&gt;
&lt;br /&gt;
*그러나 이러한 발전에 따라 총독부의 탄압도 강해짐. 그들은 보성의 농과 신설계획을 거부하였고, 1944년에는 교명을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로 고치지 않고는 존속할 수 없도록 함.&lt;br /&gt;
&lt;br /&gt;
&lt;br /&gt;
*1945년 해방 후 9월에 재단이사회가 개최됨. 모든 학사규정을 다시 보성전문학교의 그것으로 환원시켰다가, 1946년 8월 고려대학교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됨.&lt;br /&gt;
&lt;br /&gt;
&lt;br /&gt;
===현재===&lt;/div&gt;</summary>
		<author><name>페퍼민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B3%B4%EC%84%B1%EC%A0%84%EB%AC%B8%ED%95%99%EA%B5%90&amp;diff=32822</id>
		<title>보성전문학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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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9T11:03:1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페퍼민트: &lt;/p&gt;
&lt;hr /&gt;
&lt;div&gt;==보성전문학교 (普成專門學校)==&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lt;br /&gt;
1905년 지금의 서울인 한성에 설립되어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직후까지 존속했던 근대적 고등교육기관이자 전문학교로, '''고려대학교의 전신'''이다.&amp;lt;/br&amp;gt;&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 15585522-57c8-42f8-99e6-865b5916d9d7.jpg|400px|lright|보성전문학교 초창기 교정 사진이다.]]&amp;lt;/br&amp;gt;&lt;br /&gt;
&lt;br /&gt;
===설립 배경과 목적 및 의의===&lt;br /&gt;
&lt;br /&gt;
내우외환으로 국운이 기울어지며 열강의 이해가 각축하는 소용돌이 속에서 &amp;quot;''&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민족과 국가를 구하는 길은 오직 청년 학도를 가르치는 교육의 힘을 기르는 데 있다&amp;lt;/font&amp;gt;''&amp;quot;는 '교육구국'의 신념을 가지고 대한제국의 이용익 선생이 보성전문학교를 설립했다.&lt;br /&gt;
&lt;br /&gt;
광무황제의 가장 측근이며, 배일 친러파였던 이용익은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확실시되는 가운데 납치되어 갔던 일본으로부터 귀국했고, 당시 근대국가를 경영할 정치·경제·법률 등에 밝은 전문적 인재가 없어 대한제국이 위기에 놓인 것임을 절감하여, 그러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보성전문학교를 세운 것이다. &lt;br /&gt;
&lt;br /&gt;
이렇게 세워진 보성전문학교는 한국최초의 민간인에 의한 근대적 고등교육기관으로, 신교육 보급을 통한 국가자강 및 민족주의의 교육적 실현과 항일 민족 투쟁의 산실이었으며, 근대적 학문의 발상지였다는 역사적 의의를 가진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ig&amp;gt;'''''&amp;lt;font color=&amp;quot;#ff2500&amp;quot;&amp;gt;명순구 법학전문대학원장 : “보성은 논어에 등장하는 말로 널리 인간성을 계발한다는 의미다.&amp;quot;&amp;lt;/font&amp;gt;'''''&amp;lt;/big&amp;gt;&amp;lt;ref&amp;gt;원래 이용익이 생각한 교명은 중앙학교였는데, 고종이 하사한 교명에 따라 학교 이름을 보성이라 지었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건물의 역사===&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white;&amp;quot;&lt;br /&gt;
|+ style=&amp;quot;caption-side:bottom; text-align:left;&amp;quot;|&lt;br /&gt;
|-&lt;br /&gt;
| 1905년 4월 3일 || 종로에 있던 러시아어 학교인 관립한성아어학교&amp;lt;ref&amp;gt;현 종로 수송공원&amp;lt;/ref&amp;gt; 건물을 빌려 개교 || [[파일:Image01.png | 200px]]&lt;br /&gt;
|-&lt;br /&gt;
| 1906년 || 이용익은 아어학교에 이웃한 박동 소재 김교헌 소유의 대저택&amp;lt;ref&amp;gt;현 조계사 터&amp;lt;/ref&amp;gt;을 매입하여 학교 시설을 정비. 부속출판사 “보성사”도 설립. || [[파일:Image02.png | 200px]]&lt;br /&gt;
|-&lt;br /&gt;
| 1918년 || 박동을 아예 떠나 낙원동의 서북학회 회관&amp;lt;ref&amp;gt;현 종로 낙원상가 터&amp;lt;/ref&amp;gt;을 임차하여 사용하기 시작. || [[파일:Image03.png | 200px]]&lt;br /&gt;
|-&lt;br /&gt;
| 1922년 || 천도교 본부의 이전&amp;lt;ref&amp;gt;송현동에서 경운동으로 이전함.&amp;lt;/ref&amp;gt;에 따라 송현동에 건물 신축 및 이전. || [[파일:Image04.png | 200px]]&lt;br /&gt;
|-&lt;br /&gt;
| 1924년 || ‘ㄷ’자 모양의 서양식 건물을 신축. 건물 앞마당에 회화나무가 보임.&amp;lt;ref&amp;gt;이 회화나무의 씨를 받아 2019년 5월 법학신관 앞에 식재.&amp;lt;/ref&amp;gt; || [[파일:Image04.png | 200px]]&lt;br /&gt;
|-&lt;br /&gt;
| 1934년 || 경영권을 인수한 인촌 김성수가 안암동에 현재의 본관을 신축하면서 종로를 완전히 떠나 안암동에 정착. || [[파일:Image05.png | 200px]]&lt;br /&gt;
|-&lt;br /&gt;
|}&lt;/div&gt;</summary>
		<author><name>페퍼민트</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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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div&gt;==보성전문학교 (普成專門學校)==&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lt;br /&gt;
1905년 지금의 서울인 한성에 설립되어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직후까지 존속했던 근대적 고등교육기관이자 전문학교로, '''고려대학교의 전신'''이다.&amp;lt;/br&amp;g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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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15585522-57c8-42f8-99e6-865b5916d9d7.jpg|400px|lright|보성전문학교 초창기 교정 사진이다.]]&amp;lt;/br&amp;gt;&lt;br /&gt;
&lt;br /&gt;
===설립 배경과 목적 및 의의===&lt;br /&gt;
&lt;br /&gt;
내우외환으로 국운이 기울어지며 열강의 이해가 각축하는 소용돌이 속에서 &amp;quot;''&amp;lt;font color=&amp;quot;#ff0000&amp;quot;&amp;gt;민족과 국가를 구하는 길은 오직 청년 학도를 가르치는 교육의 힘을 기르는 데 있다&amp;lt;/font&amp;gt;''&amp;quot;는 '교육구국'의 신념을 가지고 대한제국의 이용익 선생이 보성전문학교를 설립했다.&lt;br /&gt;
&lt;br /&gt;
광무황제의 가장 측근이며, 배일 친러파였던 이용익은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확실시되는 가운데 납치되어 갔던 일본으로부터 귀국했고, 당시 근대국가를 경영할 정치·경제·법률 등에 밝은 전문적 인재가 없어 대한제국이 위기에 놓인 것임을 절감하여, 그러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보성전문학교를 세운 것이다. &lt;br /&gt;
&lt;br /&gt;
이렇게 세워진 보성전문학교는 한국최초의 민간인에 의한 근대적 고등교육기관으로, 신교육 보급을 통한 국가자강 및 민족주의의 교육적 실현과 항일 민족 투쟁의 산실이었으며, 근대적 학문의 발상지였다는 역사적 의의를 가진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ig&amp;gt;'''''명순구 법학전문대학원장 : “보성은 논어에 등장하는 말로 널리 인간성을 계발한다는 의미다.&amp;quot;'''''&amp;lt;/big&amp;gt;&amp;lt;ref&amp;gt;원래 이용익이 생각한 교명은 중앙학교였는데, 고종이 하사한 교명에 따라 학교 이름을 보성이라 지었다.&amp;lt;/ref&amp;gt;&lt;/div&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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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보성전문학교 (普成專門學校)==&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1905년 지금의 서울인 한성에 설립되어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직후까지 존속했던 근대적 고등교육기관이자 전문학교로, '''고려대학교의 전신'''이다.&amp;lt;/br&amp;g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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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페퍼민트: &lt;/p&gt;
&lt;hr /&gt;
&lt;div&gt;==보성전문학교 (普成專門學校)==&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1905년 지금의 서울인 한성에 설립되어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직후까지 존속했던 근대적 고등교육기관이자 전문학교로, '''고려대학교의 전신'''이다.&lt;br /&gt;
[[파일: 15585522-57c8-42f8-99e6-865b5916d9d7.jpg|500px|left|보성전문학교 초창기 교정 사진이다.]]&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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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보성전문학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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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9T10:05:4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페퍼민트: &lt;/p&gt;
&lt;hr /&gt;
&lt;div&gt;==보성전문학교 (普成專門學校)==&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1905년 지금의 서울인 한성에 설립되어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직후까지 존속했던 근대적 고등교육기관이자 전문학교로, '''고려대학교의 전신'''이다.&lt;br /&gt;
[[파일: 15585522-57c8-42f8-99e6-865b5916d9d7.jpg|500px|left|보성전문학교 초창기 교정 사진이다.]]&lt;/div&gt;</summary>
		<author><name>페퍼민트</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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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보성전문학교 (普成專門學校)==&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1905년 지금의 서울인 한성에 설립되어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직후까지 존속했던 근대적 고등교육기관이자 전문학교로, '''고려대학교의 전신'''이다.&lt;/div&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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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이용익(李容翊)</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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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name>페퍼민트</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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