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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dh_edu - 사용자 기여 [ko]</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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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벽수산장</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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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8T12:33:0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코리아참외: /* 공간 형성과정 */&lt;/p&gt;
&lt;hr /&gt;
&lt;div&gt;=='''벽수산장 양관'''==&lt;br /&gt;
[[파일:벽수산장.jpg]]&amp;lt;ref&amp;gt;친일파 윤덕영이 옥새 내주고 지은 '벽수산장' 자리에 들어선 것은?&amp;quot; 머니랜드, 2019. 12. 24. 11:00 수정, https://v.daum.net/v/5e001d3823b9d7597983d069. 2023년12월08일 접속.&amp;lt;/ref&amp;gt;&amp;lt;br/&amp;gt;&lt;br /&gt;
윤덕영은 벽수산장 양관을 연회나 접객 용도로 사용하였다.&amp;lt;br/&amp;gt;&lt;br /&gt;
&lt;br /&gt;
=='''공간 형성과정'''==&lt;br /&gt;
* 윤덕영  매입&amp;lt;br/&amp;gt;&lt;br /&gt;
** 1910년 옥인동 47번지 매입을 하였다. 매입 배경에는 한일강제병합의 공로자로 총독부에서 받은 공채증권 46만원&amp;lt;ref&amp;gt; 1910년 1원은 100전이면 1원의 금가치는 순금 2푼(750㎎)으로 되어 있었다.1910년의   1910년에 약 1원 = 5만원, 1냥 = 5천원, 1전 = 500원, 1닢 =50원이 된다.이 기준을 적용한다면 1원은 현재 5만원인 셈이다.&amp;lt;/ref&amp;gt;의 역할이 컸다. 한일강제병합의 큰 공으로 다른 공로자보다 은사금을 더 받았다. 은사금은 보편적으로 3만원이었는데 그는 15배가 넘는 금액을 받은 것이다. 이 은사금은 옥인동 47번지로 일대를 매입하는 자금이었다. 윤덕영은 1910년이후 지속적인 부지 면적 증가를 하였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 1917년 순종의 도쿄방문 추진 성공으로 하세가와 총독에게 사례금을 받았고 1919년에는 윤덕영과 민병석이 덕수궁과 영성문 안쪽을 팔아서 이득을 챙겼다. 사례금으로 옥인동 47번지를 추가 매입하였고 1917년 16,628평으로 그해 옥인동 전체 토지면적인 총 33,583평의 49.5%이였다. 1921년에는 부태묘 문참봉 사건과 1924년에는 왕가에게 주는 친용금 횡령을 통해 돈을 모았다. 이처럼 옥인동 일대의 실질적인 부지 확장이 된 시기는 윤덕영이 불미스러운 사건에 거론되는 동안 계속 진행되었다. 1925년에는 중추원 고문으로 복직하여 정치적 재기를 노렸고 1927년에는 더욱 증가된 19,467.8평으로 옥인동 전체 총 36,361.83평인 53.54%를 소유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건축과정'''==&lt;br /&gt;
&lt;br /&gt;
* 벽수산장은 민영찬이 구득한 설계도면을 바탕으로 1913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공사 3년 만인 1917년 완공했다고 전해지지만 동아일보를 보면 1917년에도 외장은 구축되었으나 상세 부분과 내부 공사는 완료되지 않았다. 1910년에 매입했으나 1913년에 착공한 원인은 지반공사의 난관이 있었다. 이로 인해 중국인 청부업자가 공사를 두 번이나 포기해서 부분별로 공종을 분리하여 공사기간이 연장되었다고 했다.&lt;br /&gt;
&lt;br /&gt;
=='''특징'''==&lt;br /&gt;
&lt;br /&gt;
* 벽수산장 양관의 건축양식은 석재혼입의 벽돌 2층으로 프랑스 계통의 르네상스 스타일이다. 석재는 각 독립주, 건물각부의 귓돌, 창호 주변에 사용되어 이외의 부재에 사용된 붉은 벽돌과의 조화를 이루는 형태이다. 벽수산장은 내외부의 화려함으로 한양의 아방궁이라 불렸다. 철재와 장식품, 타일 등을 독일에서 구입하는 등 외국 건축 자재만을 썼고 보일러 시설을 갖추었다. 응접실 천장에는 두꺼운 대형유리로 수족관을 만들어 금붕어를 기르기도 하여 ‘금붕어 집’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윤덕영의 친일 행각으로 벽수산장에 대한 당시 미디어의 기사는 사치스러운 건물이라는 부정적 표현을 사용되었다.&lt;br /&gt;
 &lt;br /&gt;
 『조선일보』 1926년 5월 31일자 “매도설이 훤전(喧傳)되는 송석원 양관 내력담” : 집 한채를 14, 5년이나 두고 건축하고도 오히려 필역(畢役)치 못하였다 하면 누구나 경이의 눈을 뜰 것이다. 그러나 그 건물은 삼십여만의 경성시민이 날마다 치어다 보는 한양의 서편 인왕산 아래에 있는 다갈색 연화제의 삼층양관이 그것이니 이 양관은 일국 부원군의 형님인 윤덕영 자작의 송석원이 그것이다. 세상에서는 이 건물이 송석원이라는 이름을 가졌으되 통칭 ‘한양 아방궁’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부르게 되었는데 이것만으로는 능히 이 건물이 얼마나 윤환미를 다 하였는 것을 엿볼 수 있었다. &amp;lt;ref&amp;gt; 『조선일보』 1926년 5월 31일 기사&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벽수산장은 능선에 위치하여 시각적인 우세성이 강한 건물이다. 실제 윤덕영이 생활하는 건물은 벽수산장의 후면에 입지한다. 이처럼 전면의 가시적 건물과 실제 거주 건물이 다른 것은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이 투영된 것이다. 건물 전면에 양식 건물을 세우고 후면에 한옥을 건립한 사례이다.&amp;lt;ref&amp;gt;김해경. “벽수산장으로 본 근대정원의 조영기법 해석” (PDF). 《서울학연구》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amp;lt;/ref&amp;gt;&lt;br /&gt;
&lt;br /&gt;
=='''벽수산장과 연계된 부속건물'''==&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steelblue; margin: 0; border: 3px solid MidnightNlue;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lt;font color=&amp;quot;White&amp;quot;&amp;gt;벽수산장  온톨로지&amp;lt;/font&amp;gt;===&lt;br /&gt;
*벽수산장 부속 건물&lt;br /&gt;
**{{NetworkGraph| title=벽수산장.lst}}&lt;br /&gt;
&lt;br /&gt;
&lt;br /&gt;
본채의 중심 건물인 일양정 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일양정&amp;lt;br/&amp;gt;&lt;br /&gt;
소실댁(옥인동 서용택가)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옥인동서용택가&amp;lt;br/&amp;gt;&lt;br /&gt;
김덕현 가옥(현 박노수 미술관)&amp;lt;br/&amp;gt;&lt;br /&gt;
=='''참고문헌'''==&lt;br /&gt;
김해경 . “벽수산장으로 본 근대정원의 조영기법 해석” (PDF). 《서울학연구》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lt;br /&gt;
=='''각주'''==&lt;br /&gt;
&lt;br /&gt;
[[분류:박노수가옥, 걸어서 근현대사 속으로]]&lt;/div&gt;</summary>
		<author><name>코리아참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B2%BD%EC%88%98%EC%82%B0%EC%9E%A5&amp;diff=32029</id>
		<title>벽수산장</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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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8T12:32:1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코리아참외: /* 벽수산장 양관 */&lt;/p&gt;
&lt;hr /&gt;
&lt;div&gt;=='''벽수산장 양관'''==&lt;br /&gt;
[[파일:벽수산장.jpg]]&amp;lt;ref&amp;gt;친일파 윤덕영이 옥새 내주고 지은 '벽수산장' 자리에 들어선 것은?&amp;quot; 머니랜드, 2019. 12. 24. 11:00 수정, https://v.daum.net/v/5e001d3823b9d7597983d069. 2023년12월08일 접속.&amp;lt;/ref&amp;gt;&amp;lt;br/&amp;gt;&lt;br /&gt;
윤덕영은 벽수산장 양관을 연회나 접객 용도로 사용하였다.&amp;lt;br/&amp;gt;&lt;br /&gt;
&lt;br /&gt;
=='''공간 형성과정'''==&lt;br /&gt;
* 윤덕영  매입&amp;lt;br/&amp;gt;&lt;br /&gt;
** 1910년 옥인동 47번지 매입을 하였다. 매입 배경에는 한일강제병합의 공로자로 총독부에서 받은 공채증권 46만원&amp;lt;ref&amp;gt; 1910년 1원은 100전이면 1원의 금가치는 순금 2푼(750㎎)으로 되어 있었다.1910년의 1원은 현재 5만원인 셈이다. 이 기준을 적용한다면 1910년에 약 1원 = 5만원, 1냥 = 5천원, 1전 = 500원, 1닢 =50원이 된다. 철저하게 현재 가치로만 환산하면 '''2300억원'''일걸이라고 추산된다.&amp;lt;/ref&amp;gt;의 역할이 컸다. 한일강제병합의 큰 공으로 다른 공로자보다 은사금을 더 받았다. 은사금은 보편적으로 3만원이었는데 그는 15배가 넘는 금액을 받은 것이다. 이 은사금은 옥인동 47번지로 일대를 매입하는 자금이었다. 윤덕영은 1910년이후 지속적인 부지 면적 증가를 하였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 1917년 순종의 도쿄방문 추진 성공으로 하세가와 총독에게 사례금을 받았고 1919년에는 윤덕영과 민병석이 덕수궁과 영성문 안쪽을 팔아서 이득을 챙겼다. 사례금으로 옥인동 47번지를 추가 매입하였고 1917년 16,628평으로 그해 옥인동 전체 토지면적인 총 33,583평의 49.5%이였다. 1921년에는 부태묘 문참봉 사건과 1924년에는 왕가에게 주는 친용금 횡령을 통해 돈을 모았다. 이처럼 옥인동 일대의 실질적인 부지 확장이 된 시기는 윤덕영이 불미스러운 사건에 거론되는 동안 계속 진행되었다. 1925년에는 중추원 고문으로 복직하여 정치적 재기를 노렸고 1927년에는 더욱 증가된 19,467.8평으로 옥인동 전체 총 36,361.83평인 53.54%를 소유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건축과정'''==&lt;br /&gt;
&lt;br /&gt;
* 벽수산장은 민영찬이 구득한 설계도면을 바탕으로 1913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공사 3년 만인 1917년 완공했다고 전해지지만 동아일보를 보면 1917년에도 외장은 구축되었으나 상세 부분과 내부 공사는 완료되지 않았다. 1910년에 매입했으나 1913년에 착공한 원인은 지반공사의 난관이 있었다. 이로 인해 중국인 청부업자가 공사를 두 번이나 포기해서 부분별로 공종을 분리하여 공사기간이 연장되었다고 했다.&lt;br /&gt;
&lt;br /&gt;
=='''특징'''==&lt;br /&gt;
&lt;br /&gt;
* 벽수산장 양관의 건축양식은 석재혼입의 벽돌 2층으로 프랑스 계통의 르네상스 스타일이다. 석재는 각 독립주, 건물각부의 귓돌, 창호 주변에 사용되어 이외의 부재에 사용된 붉은 벽돌과의 조화를 이루는 형태이다. 벽수산장은 내외부의 화려함으로 한양의 아방궁이라 불렸다. 철재와 장식품, 타일 등을 독일에서 구입하는 등 외국 건축 자재만을 썼고 보일러 시설을 갖추었다. 응접실 천장에는 두꺼운 대형유리로 수족관을 만들어 금붕어를 기르기도 하여 ‘금붕어 집’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윤덕영의 친일 행각으로 벽수산장에 대한 당시 미디어의 기사는 사치스러운 건물이라는 부정적 표현을 사용되었다.&lt;br /&gt;
 &lt;br /&gt;
 『조선일보』 1926년 5월 31일자 “매도설이 훤전(喧傳)되는 송석원 양관 내력담” : 집 한채를 14, 5년이나 두고 건축하고도 오히려 필역(畢役)치 못하였다 하면 누구나 경이의 눈을 뜰 것이다. 그러나 그 건물은 삼십여만의 경성시민이 날마다 치어다 보는 한양의 서편 인왕산 아래에 있는 다갈색 연화제의 삼층양관이 그것이니 이 양관은 일국 부원군의 형님인 윤덕영 자작의 송석원이 그것이다. 세상에서는 이 건물이 송석원이라는 이름을 가졌으되 통칭 ‘한양 아방궁’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부르게 되었는데 이것만으로는 능히 이 건물이 얼마나 윤환미를 다 하였는 것을 엿볼 수 있었다. &amp;lt;ref&amp;gt; 『조선일보』 1926년 5월 31일 기사&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벽수산장은 능선에 위치하여 시각적인 우세성이 강한 건물이다. 실제 윤덕영이 생활하는 건물은 벽수산장의 후면에 입지한다. 이처럼 전면의 가시적 건물과 실제 거주 건물이 다른 것은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이 투영된 것이다. 건물 전면에 양식 건물을 세우고 후면에 한옥을 건립한 사례이다.&amp;lt;ref&amp;gt;김해경. “벽수산장으로 본 근대정원의 조영기법 해석” (PDF). 《서울학연구》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amp;lt;/ref&amp;gt;&lt;br /&gt;
&lt;br /&gt;
=='''벽수산장과 연계된 부속건물'''==&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steelblue; margin: 0; border: 3px solid MidnightNlue;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lt;font color=&amp;quot;White&amp;quot;&amp;gt;벽수산장  온톨로지&amp;lt;/font&amp;gt;===&lt;br /&gt;
*벽수산장 부속 건물&lt;br /&gt;
**{{NetworkGraph| title=벽수산장.lst}}&lt;br /&gt;
&lt;br /&gt;
&lt;br /&gt;
본채의 중심 건물인 일양정 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일양정&amp;lt;br/&amp;gt;&lt;br /&gt;
소실댁(옥인동 서용택가)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옥인동서용택가&amp;lt;br/&amp;gt;&lt;br /&gt;
김덕현 가옥(현 박노수 미술관)&amp;lt;br/&amp;gt;&lt;br /&gt;
=='''참고문헌'''==&lt;br /&gt;
김해경 . “벽수산장으로 본 근대정원의 조영기법 해석” (PDF). 《서울학연구》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lt;br /&gt;
=='''각주'''==&lt;br /&gt;
&lt;br /&gt;
[[분류:박노수가옥, 걸어서 근현대사 속으로]]&lt;/div&gt;</summary>
		<author><name>코리아참외</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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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8T12:32:0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코리아참외: /* 특징 */&lt;/p&gt;
&lt;hr /&gt;
&lt;div&gt;=='''벽수산장 양관'''==&lt;br /&gt;
[[파일:벽수산장.jpg]]&amp;lt;ref&amp;gt;친일파 윤덕영이 옥새 내주고 지은 '벽수산장' 자리에 들어선 것은?&amp;quot; 머니랜드, 2019. 12. 24. 11:00 수정, https://v.daum.net/v/5e001d3823b9d7597983d069. 2023년12월08일 접속.&amp;lt;/ref&amp;gt;&amp;lt;br/&amp;gt;&lt;br /&gt;
윤덕영은 벽수산장을 연회나 접객 용도로 사용하였다.&amp;lt;br/&amp;gt;&lt;br /&gt;
&lt;br /&gt;
=='''공간 형성과정'''==&lt;br /&gt;
* 윤덕영  매입&amp;lt;br/&amp;gt;&lt;br /&gt;
** 1910년 옥인동 47번지 매입을 하였다. 매입 배경에는 한일강제병합의 공로자로 총독부에서 받은 공채증권 46만원&amp;lt;ref&amp;gt; 1910년 1원은 100전이면 1원의 금가치는 순금 2푼(750㎎)으로 되어 있었다.1910년의 1원은 현재 5만원인 셈이다. 이 기준을 적용한다면 1910년에 약 1원 = 5만원, 1냥 = 5천원, 1전 = 500원, 1닢 =50원이 된다. 철저하게 현재 가치로만 환산하면 '''2300억원'''일걸이라고 추산된다.&amp;lt;/ref&amp;gt;의 역할이 컸다. 한일강제병합의 큰 공으로 다른 공로자보다 은사금을 더 받았다. 은사금은 보편적으로 3만원이었는데 그는 15배가 넘는 금액을 받은 것이다. 이 은사금은 옥인동 47번지로 일대를 매입하는 자금이었다. 윤덕영은 1910년이후 지속적인 부지 면적 증가를 하였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 1917년 순종의 도쿄방문 추진 성공으로 하세가와 총독에게 사례금을 받았고 1919년에는 윤덕영과 민병석이 덕수궁과 영성문 안쪽을 팔아서 이득을 챙겼다. 사례금으로 옥인동 47번지를 추가 매입하였고 1917년 16,628평으로 그해 옥인동 전체 토지면적인 총 33,583평의 49.5%이였다. 1921년에는 부태묘 문참봉 사건과 1924년에는 왕가에게 주는 친용금 횡령을 통해 돈을 모았다. 이처럼 옥인동 일대의 실질적인 부지 확장이 된 시기는 윤덕영이 불미스러운 사건에 거론되는 동안 계속 진행되었다. 1925년에는 중추원 고문으로 복직하여 정치적 재기를 노렸고 1927년에는 더욱 증가된 19,467.8평으로 옥인동 전체 총 36,361.83평인 53.54%를 소유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건축과정'''==&lt;br /&gt;
&lt;br /&gt;
* 벽수산장은 민영찬이 구득한 설계도면을 바탕으로 1913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공사 3년 만인 1917년 완공했다고 전해지지만 동아일보를 보면 1917년에도 외장은 구축되었으나 상세 부분과 내부 공사는 완료되지 않았다. 1910년에 매입했으나 1913년에 착공한 원인은 지반공사의 난관이 있었다. 이로 인해 중국인 청부업자가 공사를 두 번이나 포기해서 부분별로 공종을 분리하여 공사기간이 연장되었다고 했다.&lt;br /&gt;
&lt;br /&gt;
=='''특징'''==&lt;br /&gt;
&lt;br /&gt;
* 벽수산장 양관의 건축양식은 석재혼입의 벽돌 2층으로 프랑스 계통의 르네상스 스타일이다. 석재는 각 독립주, 건물각부의 귓돌, 창호 주변에 사용되어 이외의 부재에 사용된 붉은 벽돌과의 조화를 이루는 형태이다. 벽수산장은 내외부의 화려함으로 한양의 아방궁이라 불렸다. 철재와 장식품, 타일 등을 독일에서 구입하는 등 외국 건축 자재만을 썼고 보일러 시설을 갖추었다. 응접실 천장에는 두꺼운 대형유리로 수족관을 만들어 금붕어를 기르기도 하여 ‘금붕어 집’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윤덕영의 친일 행각으로 벽수산장에 대한 당시 미디어의 기사는 사치스러운 건물이라는 부정적 표현을 사용되었다.&lt;br /&gt;
 &lt;br /&gt;
 『조선일보』 1926년 5월 31일자 “매도설이 훤전(喧傳)되는 송석원 양관 내력담” : 집 한채를 14, 5년이나 두고 건축하고도 오히려 필역(畢役)치 못하였다 하면 누구나 경이의 눈을 뜰 것이다. 그러나 그 건물은 삼십여만의 경성시민이 날마다 치어다 보는 한양의 서편 인왕산 아래에 있는 다갈색 연화제의 삼층양관이 그것이니 이 양관은 일국 부원군의 형님인 윤덕영 자작의 송석원이 그것이다. 세상에서는 이 건물이 송석원이라는 이름을 가졌으되 통칭 ‘한양 아방궁’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부르게 되었는데 이것만으로는 능히 이 건물이 얼마나 윤환미를 다 하였는 것을 엿볼 수 있었다. &amp;lt;ref&amp;gt; 『조선일보』 1926년 5월 31일 기사&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벽수산장은 능선에 위치하여 시각적인 우세성이 강한 건물이다. 실제 윤덕영이 생활하는 건물은 벽수산장의 후면에 입지한다. 이처럼 전면의 가시적 건물과 실제 거주 건물이 다른 것은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이 투영된 것이다. 건물 전면에 양식 건물을 세우고 후면에 한옥을 건립한 사례이다.&amp;lt;ref&amp;gt;김해경. “벽수산장으로 본 근대정원의 조영기법 해석” (PDF). 《서울학연구》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amp;lt;/ref&amp;gt;&lt;br /&gt;
&lt;br /&gt;
=='''벽수산장과 연계된 부속건물'''==&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steelblue; margin: 0; border: 3px solid MidnightNlue;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lt;font color=&amp;quot;White&amp;quot;&amp;gt;벽수산장  온톨로지&amp;lt;/font&amp;gt;===&lt;br /&gt;
*벽수산장 부속 건물&lt;br /&gt;
**{{NetworkGraph| title=벽수산장.lst}}&lt;br /&gt;
&lt;br /&gt;
&lt;br /&gt;
본채의 중심 건물인 일양정 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일양정&amp;lt;br/&amp;gt;&lt;br /&gt;
소실댁(옥인동 서용택가)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옥인동서용택가&amp;lt;br/&amp;gt;&lt;br /&gt;
김덕현 가옥(현 박노수 미술관)&amp;lt;br/&amp;gt;&lt;br /&gt;
=='''참고문헌'''==&lt;br /&gt;
김해경 . “벽수산장으로 본 근대정원의 조영기법 해석” (PDF). 《서울학연구》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lt;br /&gt;
=='''각주'''==&lt;br /&gt;
&lt;br /&gt;
[[분류:박노수가옥, 걸어서 근현대사 속으로]]&lt;/div&gt;</summary>
		<author><name>코리아참외</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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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김성연.lst</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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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lt;/div&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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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ㅁㄹㅇㅁㄹㄴㅇㄻ.lst</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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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lt;/div&gt;</summary>
		<author><name>코리아참외</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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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조선총독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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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코리아참외: /* 개요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1910∼1945년까지 우리나라를 지배한 일본 제국주의 식민통치기구.&amp;lt;ref&amp;gt;조선총독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2242&amp;lt;/ref&amp;gt;&lt;br /&gt;
[[파일:조선총독부_청사.jpg|섬네일|오른쪽]]&lt;br /&gt;
조선총독부 청사&amp;lt;ref&amp;gt;위키페이지,조선총독부,https://ko.wikipedia.org/wiki/%EC%A1%B0%EC%84%A0%EC%B4%9D%EB%8F%85%EB%B6%80&amp;lt;/ref&amp;gt;&lt;br /&gt;
* 1916년 7월 10일 가공&lt;br /&gt;
* 1926년 10월 2일 완공 및 개장&lt;br /&gt;
* 1996년 11월 13일 철거완료&amp;lt;br/&amp;gt;&lt;br /&gt;
&lt;br /&gt;
==설립==&lt;br /&gt;
 1904년 러일전쟁에서의 승리 이후, 일본은 한일의정서를 통해 한국에 군사적 통제를 시작했고, 1905년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시켜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다. 이어져 1907년 고종 양위와 한일신협약을 통해 한국의 정치와 군사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었다. 1909년 7월 6일에는 한국의 주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병합을 결정하는 &amp;quot;한국병합실행에 관한 건&amp;quot;이 의결되었다.&lt;br /&gt;
&lt;br /&gt;
 1910년 8월 29일, 일본은 한일합병조약을 공포하고 대한제국을 조선으로 개칭하며 조선총독부를 설치했다. 총독은 일체의 정무를 통할하며, 통감부와 소속 관서는 총독의 지휘 아래 유지되었다. 이로써 조선총독부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통치 기구로서 존재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일제의 통치는 한국인을 차별하고 일본인으로 대체하여 통치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또한, 일본은 한국인 관리들을 일본의 정책에 동조시키려는 시도를 했으며, 한국인을 열등시키는 이념적 기조를 채택했다. 이러한 통치 기조는 일본의 패망까지 지속되었다.&lt;br /&gt;
&lt;br /&gt;
=='''년도별'''==&lt;br /&gt;
===제1기(1910∼1919)===&lt;br /&gt;
====설립과 초기 조직====&lt;br /&gt;
* 1910년 8월 29일에 「조선총독부 설치에 관한 건」(칙령 318호)이 공포되어 조선총독부가 설립되었다. 초기에는 통감부와 소속관서를 존속시키고, 통감에게 조선총독의 일부 직무를 맡기는 형태였다.&lt;br /&gt;
====조직구조====&lt;br /&gt;
* 조선총독부는 총독을 중심으로 정무총감을 두고 1관방 5부로 구성되었다. 내무부, 탁지부, 농상공부 등은 대한제국의 기관을 일부 축소하고 총독부의 소속으로 편입시켰다.&lt;br /&gt;
====중추원====&lt;br /&gt;
* 중추원은 조선총독의 자문기관으로 설치되었고, 주로 식민지 통치에 필요한 자문을 제공했다. 대한제국의 고등관 출신의 인사들도 중추원에서 자문에 참여했다.&lt;br /&gt;
====경찰 체제====&lt;br /&gt;
* 헌병경찰제가 도입되어 군사적 지배가 강조되었으며, 경찰기구는 헌병대사령부-각도 헌병대-헌병분대 구조로 조직되었다.&lt;br /&gt;
====사법기관====&lt;br /&gt;
* 사법부는 통감부사법청과 통감부재판소를 설치하고, 3심4급제의 재판소를 구성하여 조선의 사법권을 통제했다&lt;br /&gt;
===제2기(1920∼1936)===&lt;br /&gt;
==='''3·1운동 이후의 변화'''===&lt;br /&gt;
* 3·1운동을 계기로 1919년 8월 19일에 조선총독부관제 개정(칙령 제386호)이 이루어졌다. 총독의 권한 확장과 헌병경찰제의 폐지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lt;br /&gt;
====경찰체제 변화====&lt;br /&gt;
* 헌병경찰제가 폐지되고, 일반경찰체제로 전환되었다. 도지사가 경찰 권한을 행사하게 되었으며, 지역에 경찰서와 주재소가 설치되었다.&lt;br /&gt;
====중앙조직변경====&lt;br /&gt;
* 내무부, 탁지부, 농상공부, 사법부 등을 내무국, 재무국, 식산국, 법무국 등으로 변경하고, 경무총감부를 폐지하고 경무국을 신설하여 중앙 조직을 조정하였다.&lt;br /&gt;
====기타변화====&lt;br /&gt;
* 부국과를 서무부, 토목부, 철도부로 변경하고, 조선총독부의 6국3부제로 조직을 재편했다.&lt;br /&gt;
===제3기(1937~1945)전시체제===&lt;br /&gt;
====자원 동원 및 기획부 설립====&lt;br /&gt;
* 전시체제의 핵심은 조선의 인적과 물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전쟁 수행에 동원하기 위한 기획부 설립이다. 조선총독부는 1937년 9월에 자원조사와 총동원계획을 담당하는 자원과를 설립하였고, 1939년에는 물자 동원 및 생산력 확충 계획을 수립하는 기획부를 신설하였다.&lt;br /&gt;
====신설된 기구 및 역할 확대====&lt;br /&gt;
* 침안계통의 업무가 확대되면서 새로운 기구가 등장했다. 1939년에는 방호과가 설치되어 방공, 소방, 수방에 관한 사무를 담당했다. 1940년에는 식민지 주민을 총동원하고 통제하기 위한 국민총력조선연맹이 신설되었고, 학무국에서 관장하던 국민총동원 업무가 관방으로 이속되었다.&lt;br /&gt;
====임전체제의 강화====&lt;br /&gt;
* 중일전쟁이 장기화되자 조선총독부는 국민정신의 발휘와 국민의 총훈련, 그리고 생산력 확충을 목표로 하는 '임전체제'를 강화하였다. 1941년과 1942년에는 기획부, 후생국 신설 및 내무국의 사정국으로 개편 · 강화 등이 이뤄졌다.&lt;br /&gt;
====관제개정 및 총무국 신설====&lt;br /&gt;
* 1942년 11월에는 일본이 대동아성을 설치하면서 '행정합리화'를 실시하였고, 후생국과 기획부를 폐지하고 총무국을 신설하는 등의 기구개편을 진행하였다.&lt;br /&gt;
====결전행정체제====&lt;br /&gt;
* 1943년에는 조선총독부 전체적으로 행정기구를 개편하여 '결전행정' 체제를 수립하였다. 이는 식량의 증산, 군수물자의 개발 증산, 육해수송력 증강, 징병 등을 목적으로 하는 일원적 통합체제로 대폭 축소 개편되었다.&lt;br /&gt;
====지방행정강화====&lt;br /&gt;
* 행정기구의 변화에 따라 지방행정기구의 권한과 기능을 확대, 강화하였다. 지방기구들을 통합시켜 지방관청의 종합행정력을 강화시키는 등 지방행정을 강화하는 노력이 이뤄졌다.&lt;br /&gt;
&lt;br /&gt;
===건축 특징===&lt;br /&gt;
[[파일:청사.jpg]]&amp;lt;ref&amp;gt;조선총독부 나무위키 https://namu.wiki/w/%EC%A1%B0%EC%84%A0%EC%B4%9D%EB%8F%85%EB%B6%80&amp;lt;/ref&amp;gt;&amp;lt;br/&amp;gt;&lt;br /&gt;
* 조선총독부 중앙청사는 일제시대 식민지 통치 행정기관으로 사용되었던 건물로, 1916년에 완공되었다.  건물은 당시 최신 기술인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건축되었고, 유럽에서 수입해온 화강석과 대리석으로 마감되었다. 르네상스 양식과 바로크 양식을 절충한 네오 르네상스 양식을 기반으로 설계되었다.&lt;br /&gt;
&lt;br /&gt;
==참고==&lt;br /&gt;
&amp;quot;조선총독부.&amp;quo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n.d.,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2242. 2023년12월08일 접속.&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분류:박노수가옥, 걸어서 근현대사 속으로]]&lt;/div&gt;</summary>
		<author><name>코리아참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A1%B0%EC%84%A0%EC%B4%9D%EB%8F%85%EB%B6%80&amp;diff=31705</id>
		<title>조선총독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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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8T04:53:1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코리아참외: /* 개요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1910∼1945년까지 우리나라를 지배한 일본 제국주의 최고의 식민통치기구.&amp;lt;ref&amp;gt;조선총독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2242&amp;lt;/ref&amp;gt;&lt;br /&gt;
[[파일:조선총독부_청사.jpg|섬네일|오른쪽]]&lt;br /&gt;
조선총독부 청사&amp;lt;ref&amp;gt;위키페이지,조선총독부,https://ko.wikipedia.org/wiki/%EC%A1%B0%EC%84%A0%EC%B4%9D%EB%8F%85%EB%B6%80&amp;lt;/ref&amp;gt;&lt;br /&gt;
* 1916년 7월 10일 가공&lt;br /&gt;
* 1926년 10월 2일 완공 및 개장&lt;br /&gt;
* 1996년 11월 13일 철거완료&amp;lt;br/&amp;gt;&lt;br /&gt;
&lt;br /&gt;
==설립==&lt;br /&gt;
 1904년 러일전쟁에서의 승리 이후, 일본은 한일의정서를 통해 한국에 군사적 통제를 시작했고, 1905년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시켜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다. 이어져 1907년 고종 양위와 한일신협약을 통해 한국의 정치와 군사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었다. 1909년 7월 6일에는 한국의 주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병합을 결정하는 &amp;quot;한국병합실행에 관한 건&amp;quot;이 의결되었다.&lt;br /&gt;
&lt;br /&gt;
 1910년 8월 29일, 일본은 한일합병조약을 공포하고 대한제국을 조선으로 개칭하며 조선총독부를 설치했다. 총독은 일체의 정무를 통할하며, 통감부와 소속 관서는 총독의 지휘 아래 유지되었다. 이로써 조선총독부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통치 기구로서 존재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일제의 통치는 한국인을 차별하고 일본인으로 대체하여 통치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또한, 일본은 한국인 관리들을 일본의 정책에 동조시키려는 시도를 했으며, 한국인을 열등시키는 이념적 기조를 채택했다. 이러한 통치 기조는 일본의 패망까지 지속되었다.&lt;br /&gt;
&lt;br /&gt;
=='''년도별'''==&lt;br /&gt;
===제1기(1910∼1919)===&lt;br /&gt;
====설립과 초기 조직====&lt;br /&gt;
* 1910년 8월 29일에 「조선총독부 설치에 관한 건」(칙령 318호)이 공포되어 조선총독부가 설립되었다. 초기에는 통감부와 소속관서를 존속시키고, 통감에게 조선총독의 일부 직무를 맡기는 형태였다.&lt;br /&gt;
====조직구조====&lt;br /&gt;
* 조선총독부는 총독을 중심으로 정무총감을 두고 1관방 5부로 구성되었다. 내무부, 탁지부, 농상공부 등은 대한제국의 기관을 일부 축소하고 총독부의 소속으로 편입시켰다.&lt;br /&gt;
====중추원====&lt;br /&gt;
* 중추원은 조선총독의 자문기관으로 설치되었고, 주로 식민지 통치에 필요한 자문을 제공했다. 대한제국의 고등관 출신의 인사들도 중추원에서 자문에 참여했다.&lt;br /&gt;
====경찰 체제====&lt;br /&gt;
* 헌병경찰제가 도입되어 군사적 지배가 강조되었으며, 경찰기구는 헌병대사령부-각도 헌병대-헌병분대 구조로 조직되었다.&lt;br /&gt;
====사법기관====&lt;br /&gt;
* 사법부는 통감부사법청과 통감부재판소를 설치하고, 3심4급제의 재판소를 구성하여 조선의 사법권을 통제했다&lt;br /&gt;
===제2기(1920∼1936)===&lt;br /&gt;
==='''3·1운동 이후의 변화'''===&lt;br /&gt;
* 3·1운동을 계기로 1919년 8월 19일에 조선총독부관제 개정(칙령 제386호)이 이루어졌다. 총독의 권한 확장과 헌병경찰제의 폐지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lt;br /&gt;
====경찰체제 변화====&lt;br /&gt;
* 헌병경찰제가 폐지되고, 일반경찰체제로 전환되었다. 도지사가 경찰 권한을 행사하게 되었으며, 지역에 경찰서와 주재소가 설치되었다.&lt;br /&gt;
====중앙조직변경====&lt;br /&gt;
* 내무부, 탁지부, 농상공부, 사법부 등을 내무국, 재무국, 식산국, 법무국 등으로 변경하고, 경무총감부를 폐지하고 경무국을 신설하여 중앙 조직을 조정하였다.&lt;br /&gt;
====기타변화====&lt;br /&gt;
* 부국과를 서무부, 토목부, 철도부로 변경하고, 조선총독부의 6국3부제로 조직을 재편했다.&lt;br /&gt;
===제3기(1937~1945)전시체제===&lt;br /&gt;
====자원 동원 및 기획부 설립====&lt;br /&gt;
* 전시체제의 핵심은 조선의 인적과 물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전쟁 수행에 동원하기 위한 기획부 설립이다. 조선총독부는 1937년 9월에 자원조사와 총동원계획을 담당하는 자원과를 설립하였고, 1939년에는 물자 동원 및 생산력 확충 계획을 수립하는 기획부를 신설하였다.&lt;br /&gt;
====신설된 기구 및 역할 확대====&lt;br /&gt;
* 침안계통의 업무가 확대되면서 새로운 기구가 등장했다. 1939년에는 방호과가 설치되어 방공, 소방, 수방에 관한 사무를 담당했다. 1940년에는 식민지 주민을 총동원하고 통제하기 위한 국민총력조선연맹이 신설되었고, 학무국에서 관장하던 국민총동원 업무가 관방으로 이속되었다.&lt;br /&gt;
====임전체제의 강화====&lt;br /&gt;
* 중일전쟁이 장기화되자 조선총독부는 국민정신의 발휘와 국민의 총훈련, 그리고 생산력 확충을 목표로 하는 '임전체제'를 강화하였다. 1941년과 1942년에는 기획부, 후생국 신설 및 내무국의 사정국으로 개편 · 강화 등이 이뤄졌다.&lt;br /&gt;
====관제개정 및 총무국 신설====&lt;br /&gt;
* 1942년 11월에는 일본이 대동아성을 설치하면서 '행정합리화'를 실시하였고, 후생국과 기획부를 폐지하고 총무국을 신설하는 등의 기구개편을 진행하였다.&lt;br /&gt;
====결전행정체제====&lt;br /&gt;
* 1943년에는 조선총독부 전체적으로 행정기구를 개편하여 '결전행정' 체제를 수립하였다. 이는 식량의 증산, 군수물자의 개발 증산, 육해수송력 증강, 징병 등을 목적으로 하는 일원적 통합체제로 대폭 축소 개편되었다.&lt;br /&gt;
====지방행정강화====&lt;br /&gt;
* 행정기구의 변화에 따라 지방행정기구의 권한과 기능을 확대, 강화하였다. 지방기구들을 통합시켜 지방관청의 종합행정력을 강화시키는 등 지방행정을 강화하는 노력이 이뤄졌다.&lt;br /&gt;
&lt;br /&gt;
===건축 특징===&lt;br /&gt;
[[파일:청사.jpg]]&amp;lt;ref&amp;gt;조선총독부 나무위키 https://namu.wiki/w/%EC%A1%B0%EC%84%A0%EC%B4%9D%EB%8F%85%EB%B6%80&amp;lt;/ref&amp;gt;&amp;lt;br/&amp;gt;&lt;br /&gt;
* 조선총독부 중앙청사는 일제시대 식민지 통치 행정기관으로 사용되었던 건물로, 1916년에 완공되었다.  건물은 당시 최신 기술인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건축되었고, 유럽에서 수입해온 화강석과 대리석으로 마감되었다. 르네상스 양식과 바로크 양식을 절충한 네오 르네상스 양식을 기반으로 설계되었다.&lt;br /&gt;
&lt;br /&gt;
==참고==&lt;br /&gt;
&amp;quot;조선총독부.&amp;quo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n.d.,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2242. 2023년12월08일 접속.&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분류:박노수가옥, 걸어서 근현대사 속으로]]&lt;/div&gt;</summary>
		<author><name>코리아참외</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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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조선총독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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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8T04:51:3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코리아참외: /* 개요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파일:조선총독부_청사.jpg|섬네일|오른쪽]]&lt;br /&gt;
조선총독부 청사&amp;lt;ref&amp;gt;위키페이지,조선총독부,https://ko.wikipedia.org/wiki/%EC%A1%B0%EC%84%A0%EC%B4%9D%EB%8F%85%EB%B6%80&amp;lt;/ref&amp;gt;&lt;br /&gt;
* 1916년 7월 10일 가공&lt;br /&gt;
* 1926년 10월 2일 완공 및 개장&lt;br /&gt;
* 1996년 11월 13일 철거완료&amp;lt;br/&amp;gt;&lt;br /&gt;
&lt;br /&gt;
==설립==&lt;br /&gt;
 1904년 러일전쟁에서의 승리 이후, 일본은 한일의정서를 통해 한국에 군사적 통제를 시작했고, 1905년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시켜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다. 이어져 1907년 고종 양위와 한일신협약을 통해 한국의 정치와 군사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었다. 1909년 7월 6일에는 한국의 주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병합을 결정하는 &amp;quot;한국병합실행에 관한 건&amp;quot;이 의결되었다.&lt;br /&gt;
&lt;br /&gt;
 1910년 8월 29일, 일본은 한일합병조약을 공포하고 대한제국을 조선으로 개칭하며 조선총독부를 설치했다. 총독은 일체의 정무를 통할하며, 통감부와 소속 관서는 총독의 지휘 아래 유지되었다. 이로써 조선총독부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통치 기구로서 존재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일제의 통치는 한국인을 차별하고 일본인으로 대체하여 통치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또한, 일본은 한국인 관리들을 일본의 정책에 동조시키려는 시도를 했으며, 한국인을 열등시키는 이념적 기조를 채택했다. 이러한 통치 기조는 일본의 패망까지 지속되었다.&lt;br /&gt;
&lt;br /&gt;
=='''년도별'''==&lt;br /&gt;
===제1기(1910∼1919)===&lt;br /&gt;
====설립과 초기 조직====&lt;br /&gt;
* 1910년 8월 29일에 「조선총독부 설치에 관한 건」(칙령 318호)이 공포되어 조선총독부가 설립되었다. 초기에는 통감부와 소속관서를 존속시키고, 통감에게 조선총독의 일부 직무를 맡기는 형태였다.&lt;br /&gt;
====조직구조====&lt;br /&gt;
* 조선총독부는 총독을 중심으로 정무총감을 두고 1관방 5부로 구성되었다. 내무부, 탁지부, 농상공부 등은 대한제국의 기관을 일부 축소하고 총독부의 소속으로 편입시켰다.&lt;br /&gt;
====중추원====&lt;br /&gt;
* 중추원은 조선총독의 자문기관으로 설치되었고, 주로 식민지 통치에 필요한 자문을 제공했다. 대한제국의 고등관 출신의 인사들도 중추원에서 자문에 참여했다.&lt;br /&gt;
====경찰 체제====&lt;br /&gt;
* 헌병경찰제가 도입되어 군사적 지배가 강조되었으며, 경찰기구는 헌병대사령부-각도 헌병대-헌병분대 구조로 조직되었다.&lt;br /&gt;
====사법기관====&lt;br /&gt;
* 사법부는 통감부사법청과 통감부재판소를 설치하고, 3심4급제의 재판소를 구성하여 조선의 사법권을 통제했다&lt;br /&gt;
===제2기(1920∼1936)===&lt;br /&gt;
==='''3·1운동 이후의 변화'''===&lt;br /&gt;
* 3·1운동을 계기로 1919년 8월 19일에 조선총독부관제 개정(칙령 제386호)이 이루어졌다. 총독의 권한 확장과 헌병경찰제의 폐지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lt;br /&gt;
====경찰체제 변화====&lt;br /&gt;
* 헌병경찰제가 폐지되고, 일반경찰체제로 전환되었다. 도지사가 경찰 권한을 행사하게 되었으며, 지역에 경찰서와 주재소가 설치되었다.&lt;br /&gt;
====중앙조직변경====&lt;br /&gt;
* 내무부, 탁지부, 농상공부, 사법부 등을 내무국, 재무국, 식산국, 법무국 등으로 변경하고, 경무총감부를 폐지하고 경무국을 신설하여 중앙 조직을 조정하였다.&lt;br /&gt;
====기타변화====&lt;br /&gt;
* 부국과를 서무부, 토목부, 철도부로 변경하고, 조선총독부의 6국3부제로 조직을 재편했다.&lt;br /&gt;
===제3기(1937~1945)전시체제===&lt;br /&gt;
====자원 동원 및 기획부 설립====&lt;br /&gt;
* 전시체제의 핵심은 조선의 인적과 물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전쟁 수행에 동원하기 위한 기획부 설립이다. 조선총독부는 1937년 9월에 자원조사와 총동원계획을 담당하는 자원과를 설립하였고, 1939년에는 물자 동원 및 생산력 확충 계획을 수립하는 기획부를 신설하였다.&lt;br /&gt;
====신설된 기구 및 역할 확대====&lt;br /&gt;
* 침안계통의 업무가 확대되면서 새로운 기구가 등장했다. 1939년에는 방호과가 설치되어 방공, 소방, 수방에 관한 사무를 담당했다. 1940년에는 식민지 주민을 총동원하고 통제하기 위한 국민총력조선연맹이 신설되었고, 학무국에서 관장하던 국민총동원 업무가 관방으로 이속되었다.&lt;br /&gt;
====임전체제의 강화====&lt;br /&gt;
* 중일전쟁이 장기화되자 조선총독부는 국민정신의 발휘와 국민의 총훈련, 그리고 생산력 확충을 목표로 하는 '임전체제'를 강화하였다. 1941년과 1942년에는 기획부, 후생국 신설 및 내무국의 사정국으로 개편 · 강화 등이 이뤄졌다.&lt;br /&gt;
====관제개정 및 총무국 신설====&lt;br /&gt;
* 1942년 11월에는 일본이 대동아성을 설치하면서 '행정합리화'를 실시하였고, 후생국과 기획부를 폐지하고 총무국을 신설하는 등의 기구개편을 진행하였다.&lt;br /&gt;
====결전행정체제====&lt;br /&gt;
* 1943년에는 조선총독부 전체적으로 행정기구를 개편하여 '결전행정' 체제를 수립하였다. 이는 식량의 증산, 군수물자의 개발 증산, 육해수송력 증강, 징병 등을 목적으로 하는 일원적 통합체제로 대폭 축소 개편되었다.&lt;br /&gt;
====지방행정강화====&lt;br /&gt;
* 행정기구의 변화에 따라 지방행정기구의 권한과 기능을 확대, 강화하였다. 지방기구들을 통합시켜 지방관청의 종합행정력을 강화시키는 등 지방행정을 강화하는 노력이 이뤄졌다.&lt;br /&gt;
&lt;br /&gt;
===건축 특징===&lt;br /&gt;
[[파일:청사.jpg]]&amp;lt;ref&amp;gt;조선총독부 나무위키 https://namu.wiki/w/%EC%A1%B0%EC%84%A0%EC%B4%9D%EB%8F%85%EB%B6%80&amp;lt;/ref&amp;gt;&amp;lt;br/&amp;gt;&lt;br /&gt;
* 조선총독부 중앙청사는 일제시대 식민지 통치 행정기관으로 사용되었던 건물로, 1916년에 완공되었다.  건물은 당시 최신 기술인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건축되었고, 유럽에서 수입해온 화강석과 대리석으로 마감되었다. 르네상스 양식과 바로크 양식을 절충한 네오 르네상스 양식을 기반으로 설계되었다.&lt;br /&gt;
&lt;br /&gt;
==참고==&lt;br /&gt;
&amp;quot;조선총독부.&amp;quo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n.d.,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2242. 2023년12월08일 접속.&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분류:박노수가옥, 걸어서 근현대사 속으로]]&lt;/div&gt;</summary>
		<author><name>코리아참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A1%B0%EC%84%A0%EC%B4%9D%EB%8F%85%EB%B6%80&amp;diff=31703</id>
		<title>조선총독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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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8T04:51:1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코리아참외: /* 개요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조선총독부 청사&amp;lt;br/&amp;gt;&lt;br /&gt;
[[파일:조선총독부_청사.jpg|섬네일|오른쪽]]&lt;br /&gt;
&amp;lt;ref&amp;gt;위키페이지,조선총독부,https://ko.wikipedia.org/wiki/%EC%A1%B0%EC%84%A0%EC%B4%9D%EB%8F%85%EB%B6%80&amp;lt;/ref&amp;gt;&lt;br /&gt;
* 1916년 7월 10일 가공&lt;br /&gt;
* 1926년 10월 2일 완공 및 개장&lt;br /&gt;
* 1996년 11월 13일 철거완료&amp;lt;br/&amp;gt;&lt;br /&gt;
&lt;br /&gt;
==설립==&lt;br /&gt;
 1904년 러일전쟁에서의 승리 이후, 일본은 한일의정서를 통해 한국에 군사적 통제를 시작했고, 1905년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시켜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다. 이어져 1907년 고종 양위와 한일신협약을 통해 한국의 정치와 군사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었다. 1909년 7월 6일에는 한국의 주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병합을 결정하는 &amp;quot;한국병합실행에 관한 건&amp;quot;이 의결되었다.&lt;br /&gt;
&lt;br /&gt;
 1910년 8월 29일, 일본은 한일합병조약을 공포하고 대한제국을 조선으로 개칭하며 조선총독부를 설치했다. 총독은 일체의 정무를 통할하며, 통감부와 소속 관서는 총독의 지휘 아래 유지되었다. 이로써 조선총독부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통치 기구로서 존재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일제의 통치는 한국인을 차별하고 일본인으로 대체하여 통치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또한, 일본은 한국인 관리들을 일본의 정책에 동조시키려는 시도를 했으며, 한국인을 열등시키는 이념적 기조를 채택했다. 이러한 통치 기조는 일본의 패망까지 지속되었다.&lt;br /&gt;
&lt;br /&gt;
=='''년도별'''==&lt;br /&gt;
===제1기(1910∼1919)===&lt;br /&gt;
====설립과 초기 조직====&lt;br /&gt;
* 1910년 8월 29일에 「조선총독부 설치에 관한 건」(칙령 318호)이 공포되어 조선총독부가 설립되었다. 초기에는 통감부와 소속관서를 존속시키고, 통감에게 조선총독의 일부 직무를 맡기는 형태였다.&lt;br /&gt;
====조직구조====&lt;br /&gt;
* 조선총독부는 총독을 중심으로 정무총감을 두고 1관방 5부로 구성되었다. 내무부, 탁지부, 농상공부 등은 대한제국의 기관을 일부 축소하고 총독부의 소속으로 편입시켰다.&lt;br /&gt;
====중추원====&lt;br /&gt;
* 중추원은 조선총독의 자문기관으로 설치되었고, 주로 식민지 통치에 필요한 자문을 제공했다. 대한제국의 고등관 출신의 인사들도 중추원에서 자문에 참여했다.&lt;br /&gt;
====경찰 체제====&lt;br /&gt;
* 헌병경찰제가 도입되어 군사적 지배가 강조되었으며, 경찰기구는 헌병대사령부-각도 헌병대-헌병분대 구조로 조직되었다.&lt;br /&gt;
====사법기관====&lt;br /&gt;
* 사법부는 통감부사법청과 통감부재판소를 설치하고, 3심4급제의 재판소를 구성하여 조선의 사법권을 통제했다&lt;br /&gt;
===제2기(1920∼1936)===&lt;br /&gt;
==='''3·1운동 이후의 변화'''===&lt;br /&gt;
* 3·1운동을 계기로 1919년 8월 19일에 조선총독부관제 개정(칙령 제386호)이 이루어졌다. 총독의 권한 확장과 헌병경찰제의 폐지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lt;br /&gt;
====경찰체제 변화====&lt;br /&gt;
* 헌병경찰제가 폐지되고, 일반경찰체제로 전환되었다. 도지사가 경찰 권한을 행사하게 되었으며, 지역에 경찰서와 주재소가 설치되었다.&lt;br /&gt;
====중앙조직변경====&lt;br /&gt;
* 내무부, 탁지부, 농상공부, 사법부 등을 내무국, 재무국, 식산국, 법무국 등으로 변경하고, 경무총감부를 폐지하고 경무국을 신설하여 중앙 조직을 조정하였다.&lt;br /&gt;
====기타변화====&lt;br /&gt;
* 부국과를 서무부, 토목부, 철도부로 변경하고, 조선총독부의 6국3부제로 조직을 재편했다.&lt;br /&gt;
===제3기(1937~1945)전시체제===&lt;br /&gt;
====자원 동원 및 기획부 설립====&lt;br /&gt;
* 전시체제의 핵심은 조선의 인적과 물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전쟁 수행에 동원하기 위한 기획부 설립이다. 조선총독부는 1937년 9월에 자원조사와 총동원계획을 담당하는 자원과를 설립하였고, 1939년에는 물자 동원 및 생산력 확충 계획을 수립하는 기획부를 신설하였다.&lt;br /&gt;
====신설된 기구 및 역할 확대====&lt;br /&gt;
* 침안계통의 업무가 확대되면서 새로운 기구가 등장했다. 1939년에는 방호과가 설치되어 방공, 소방, 수방에 관한 사무를 담당했다. 1940년에는 식민지 주민을 총동원하고 통제하기 위한 국민총력조선연맹이 신설되었고, 학무국에서 관장하던 국민총동원 업무가 관방으로 이속되었다.&lt;br /&gt;
====임전체제의 강화====&lt;br /&gt;
* 중일전쟁이 장기화되자 조선총독부는 국민정신의 발휘와 국민의 총훈련, 그리고 생산력 확충을 목표로 하는 '임전체제'를 강화하였다. 1941년과 1942년에는 기획부, 후생국 신설 및 내무국의 사정국으로 개편 · 강화 등이 이뤄졌다.&lt;br /&gt;
====관제개정 및 총무국 신설====&lt;br /&gt;
* 1942년 11월에는 일본이 대동아성을 설치하면서 '행정합리화'를 실시하였고, 후생국과 기획부를 폐지하고 총무국을 신설하는 등의 기구개편을 진행하였다.&lt;br /&gt;
====결전행정체제====&lt;br /&gt;
* 1943년에는 조선총독부 전체적으로 행정기구를 개편하여 '결전행정' 체제를 수립하였다. 이는 식량의 증산, 군수물자의 개발 증산, 육해수송력 증강, 징병 등을 목적으로 하는 일원적 통합체제로 대폭 축소 개편되었다.&lt;br /&gt;
====지방행정강화====&lt;br /&gt;
* 행정기구의 변화에 따라 지방행정기구의 권한과 기능을 확대, 강화하였다. 지방기구들을 통합시켜 지방관청의 종합행정력을 강화시키는 등 지방행정을 강화하는 노력이 이뤄졌다.&lt;br /&gt;
&lt;br /&gt;
===건축 특징===&lt;br /&gt;
[[파일:청사.jpg]]&amp;lt;ref&amp;gt;조선총독부 나무위키 https://namu.wiki/w/%EC%A1%B0%EC%84%A0%EC%B4%9D%EB%8F%85%EB%B6%80&amp;lt;/ref&amp;gt;&amp;lt;br/&amp;gt;&lt;br /&gt;
* 조선총독부 중앙청사는 일제시대 식민지 통치 행정기관으로 사용되었던 건물로, 1916년에 완공되었다.  건물은 당시 최신 기술인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건축되었고, 유럽에서 수입해온 화강석과 대리석으로 마감되었다. 르네상스 양식과 바로크 양식을 절충한 네오 르네상스 양식을 기반으로 설계되었다.&lt;br /&gt;
&lt;br /&gt;
==참고==&lt;br /&gt;
&amp;quot;조선총독부.&amp;quo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n.d.,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2242. 2023년12월08일 접속.&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분류:박노수가옥, 걸어서 근현대사 속으로]]&lt;/div&gt;</summary>
		<author><name>코리아참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A1%B0%EC%84%A0%EC%B4%9D%EB%8F%85%EB%B6%80&amp;diff=31702</id>
		<title>조선총독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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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8T04:48:2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코리아참외: /* 참고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조선총독부 청사&amp;lt;br/&amp;gt;&lt;br /&gt;
[[파일:조선총독부_청사.jpg]]&amp;lt;ref&amp;gt;위키페이지,조선총독부,https://ko.wikipedia.org/wiki/%EC%A1%B0%EC%84%A0%EC%B4%9D%EB%8F%85%EB%B6%80&amp;lt;/ref&amp;gt;&lt;br /&gt;
* 1916년 7월 10일 가공&lt;br /&gt;
* 1926년 10월 2일 완공 및 개장&lt;br /&gt;
* 1996년 11월 13일 철거완료&amp;lt;br/&amp;gt;&lt;br /&gt;
==설립==&lt;br /&gt;
 1904년 러일전쟁에서의 승리 이후, 일본은 한일의정서를 통해 한국에 군사적 통제를 시작했고, 1905년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시켜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다. 이어져 1907년 고종 양위와 한일신협약을 통해 한국의 정치와 군사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었다. 1909년 7월 6일에는 한국의 주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병합을 결정하는 &amp;quot;한국병합실행에 관한 건&amp;quot;이 의결되었다.&lt;br /&gt;
&lt;br /&gt;
 1910년 8월 29일, 일본은 한일합병조약을 공포하고 대한제국을 조선으로 개칭하며 조선총독부를 설치했다. 총독은 일체의 정무를 통할하며, 통감부와 소속 관서는 총독의 지휘 아래 유지되었다. 이로써 조선총독부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통치 기구로서 존재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일제의 통치는 한국인을 차별하고 일본인으로 대체하여 통치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또한, 일본은 한국인 관리들을 일본의 정책에 동조시키려는 시도를 했으며, 한국인을 열등시키는 이념적 기조를 채택했다. 이러한 통치 기조는 일본의 패망까지 지속되었다.&lt;br /&gt;
&lt;br /&gt;
=='''년도별'''==&lt;br /&gt;
===제1기(1910∼1919)===&lt;br /&gt;
====설립과 초기 조직====&lt;br /&gt;
* 1910년 8월 29일에 「조선총독부 설치에 관한 건」(칙령 318호)이 공포되어 조선총독부가 설립되었다. 초기에는 통감부와 소속관서를 존속시키고, 통감에게 조선총독의 일부 직무를 맡기는 형태였다.&lt;br /&gt;
====조직구조====&lt;br /&gt;
* 조선총독부는 총독을 중심으로 정무총감을 두고 1관방 5부로 구성되었다. 내무부, 탁지부, 농상공부 등은 대한제국의 기관을 일부 축소하고 총독부의 소속으로 편입시켰다.&lt;br /&gt;
====중추원====&lt;br /&gt;
* 중추원은 조선총독의 자문기관으로 설치되었고, 주로 식민지 통치에 필요한 자문을 제공했다. 대한제국의 고등관 출신의 인사들도 중추원에서 자문에 참여했다.&lt;br /&gt;
====경찰 체제====&lt;br /&gt;
* 헌병경찰제가 도입되어 군사적 지배가 강조되었으며, 경찰기구는 헌병대사령부-각도 헌병대-헌병분대 구조로 조직되었다.&lt;br /&gt;
====사법기관====&lt;br /&gt;
* 사법부는 통감부사법청과 통감부재판소를 설치하고, 3심4급제의 재판소를 구성하여 조선의 사법권을 통제했다&lt;br /&gt;
===제2기(1920∼1936)===&lt;br /&gt;
==='''3·1운동 이후의 변화'''===&lt;br /&gt;
* 3·1운동을 계기로 1919년 8월 19일에 조선총독부관제 개정(칙령 제386호)이 이루어졌다. 총독의 권한 확장과 헌병경찰제의 폐지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lt;br /&gt;
====경찰체제 변화====&lt;br /&gt;
* 헌병경찰제가 폐지되고, 일반경찰체제로 전환되었다. 도지사가 경찰 권한을 행사하게 되었으며, 지역에 경찰서와 주재소가 설치되었다.&lt;br /&gt;
====중앙조직변경====&lt;br /&gt;
* 내무부, 탁지부, 농상공부, 사법부 등을 내무국, 재무국, 식산국, 법무국 등으로 변경하고, 경무총감부를 폐지하고 경무국을 신설하여 중앙 조직을 조정하였다.&lt;br /&gt;
====기타변화====&lt;br /&gt;
* 부국과를 서무부, 토목부, 철도부로 변경하고, 조선총독부의 6국3부제로 조직을 재편했다.&lt;br /&gt;
===제3기(1937~1945)전시체제===&lt;br /&gt;
====자원 동원 및 기획부 설립====&lt;br /&gt;
* 전시체제의 핵심은 조선의 인적과 물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전쟁 수행에 동원하기 위한 기획부 설립이다. 조선총독부는 1937년 9월에 자원조사와 총동원계획을 담당하는 자원과를 설립하였고, 1939년에는 물자 동원 및 생산력 확충 계획을 수립하는 기획부를 신설하였다.&lt;br /&gt;
====신설된 기구 및 역할 확대====&lt;br /&gt;
* 침안계통의 업무가 확대되면서 새로운 기구가 등장했다. 1939년에는 방호과가 설치되어 방공, 소방, 수방에 관한 사무를 담당했다. 1940년에는 식민지 주민을 총동원하고 통제하기 위한 국민총력조선연맹이 신설되었고, 학무국에서 관장하던 국민총동원 업무가 관방으로 이속되었다.&lt;br /&gt;
====임전체제의 강화====&lt;br /&gt;
* 중일전쟁이 장기화되자 조선총독부는 국민정신의 발휘와 국민의 총훈련, 그리고 생산력 확충을 목표로 하는 '임전체제'를 강화하였다. 1941년과 1942년에는 기획부, 후생국 신설 및 내무국의 사정국으로 개편 · 강화 등이 이뤄졌다.&lt;br /&gt;
====관제개정 및 총무국 신설====&lt;br /&gt;
* 1942년 11월에는 일본이 대동아성을 설치하면서 '행정합리화'를 실시하였고, 후생국과 기획부를 폐지하고 총무국을 신설하는 등의 기구개편을 진행하였다.&lt;br /&gt;
====결전행정체제====&lt;br /&gt;
* 1943년에는 조선총독부 전체적으로 행정기구를 개편하여 '결전행정' 체제를 수립하였다. 이는 식량의 증산, 군수물자의 개발 증산, 육해수송력 증강, 징병 등을 목적으로 하는 일원적 통합체제로 대폭 축소 개편되었다.&lt;br /&gt;
====지방행정강화====&lt;br /&gt;
* 행정기구의 변화에 따라 지방행정기구의 권한과 기능을 확대, 강화하였다. 지방기구들을 통합시켜 지방관청의 종합행정력을 강화시키는 등 지방행정을 강화하는 노력이 이뤄졌다.&lt;br /&gt;
&lt;br /&gt;
===건축 특징===&lt;br /&gt;
[[파일:청사.jpg]]&amp;lt;ref&amp;gt;조선총독부 나무위키 https://namu.wiki/w/%EC%A1%B0%EC%84%A0%EC%B4%9D%EB%8F%85%EB%B6%80&amp;lt;/ref&amp;gt;&amp;lt;br/&amp;gt;&lt;br /&gt;
* 조선총독부 중앙청사는 일제시대 식민지 통치 행정기관으로 사용되었던 건물로, 1916년에 완공되었다.  건물은 당시 최신 기술인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건축되었고, 유럽에서 수입해온 화강석과 대리석으로 마감되었다. 르네상스 양식과 바로크 양식을 절충한 네오 르네상스 양식을 기반으로 설계되었다.&lt;br /&gt;
&lt;br /&gt;
==참고==&lt;br /&gt;
&amp;quot;조선총독부.&amp;quo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n.d.,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2242. 2023년12월08일 접속.&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분류:박노수가옥, 걸어서 근현대사 속으로]]&lt;/div&gt;</summary>
		<author><name>코리아참외</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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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A1%B0%EC%84%A0%EC%B4%9D%EB%8F%85%EB%B6%80&amp;diff=31701</id>
		<title>조선총독부</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A1%B0%EC%84%A0%EC%B4%9D%EB%8F%85%EB%B6%80&amp;diff=31701"/>
		<updated>2023-12-08T04:46:4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코리아참외: /* 설립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조선총독부 청사&amp;lt;br/&amp;gt;&lt;br /&gt;
[[파일:조선총독부_청사.jpg]]&amp;lt;ref&amp;gt;위키페이지,조선총독부,https://ko.wikipedia.org/wiki/%EC%A1%B0%EC%84%A0%EC%B4%9D%EB%8F%85%EB%B6%80&amp;lt;/ref&amp;gt;&lt;br /&gt;
* 1916년 7월 10일 가공&lt;br /&gt;
* 1926년 10월 2일 완공 및 개장&lt;br /&gt;
* 1996년 11월 13일 철거완료&amp;lt;br/&amp;gt;&lt;br /&gt;
==설립==&lt;br /&gt;
 1904년 러일전쟁에서의 승리 이후, 일본은 한일의정서를 통해 한국에 군사적 통제를 시작했고, 1905년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시켜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다. 이어져 1907년 고종 양위와 한일신협약을 통해 한국의 정치와 군사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었다. 1909년 7월 6일에는 한국의 주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병합을 결정하는 &amp;quot;한국병합실행에 관한 건&amp;quot;이 의결되었다.&lt;br /&gt;
&lt;br /&gt;
 1910년 8월 29일, 일본은 한일합병조약을 공포하고 대한제국을 조선으로 개칭하며 조선총독부를 설치했다. 총독은 일체의 정무를 통할하며, 통감부와 소속 관서는 총독의 지휘 아래 유지되었다. 이로써 조선총독부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통치 기구로서 존재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일제의 통치는 한국인을 차별하고 일본인으로 대체하여 통치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또한, 일본은 한국인 관리들을 일본의 정책에 동조시키려는 시도를 했으며, 한국인을 열등시키는 이념적 기조를 채택했다. 이러한 통치 기조는 일본의 패망까지 지속되었다.&lt;br /&gt;
&lt;br /&gt;
=='''년도별'''==&lt;br /&gt;
===제1기(1910∼1919)===&lt;br /&gt;
====설립과 초기 조직====&lt;br /&gt;
* 1910년 8월 29일에 「조선총독부 설치에 관한 건」(칙령 318호)이 공포되어 조선총독부가 설립되었다. 초기에는 통감부와 소속관서를 존속시키고, 통감에게 조선총독의 일부 직무를 맡기는 형태였다.&lt;br /&gt;
====조직구조====&lt;br /&gt;
* 조선총독부는 총독을 중심으로 정무총감을 두고 1관방 5부로 구성되었다. 내무부, 탁지부, 농상공부 등은 대한제국의 기관을 일부 축소하고 총독부의 소속으로 편입시켰다.&lt;br /&gt;
====중추원====&lt;br /&gt;
* 중추원은 조선총독의 자문기관으로 설치되었고, 주로 식민지 통치에 필요한 자문을 제공했다. 대한제국의 고등관 출신의 인사들도 중추원에서 자문에 참여했다.&lt;br /&gt;
====경찰 체제====&lt;br /&gt;
* 헌병경찰제가 도입되어 군사적 지배가 강조되었으며, 경찰기구는 헌병대사령부-각도 헌병대-헌병분대 구조로 조직되었다.&lt;br /&gt;
====사법기관====&lt;br /&gt;
* 사법부는 통감부사법청과 통감부재판소를 설치하고, 3심4급제의 재판소를 구성하여 조선의 사법권을 통제했다&lt;br /&gt;
===제2기(1920∼1936)===&lt;br /&gt;
==='''3·1운동 이후의 변화'''===&lt;br /&gt;
* 3·1운동을 계기로 1919년 8월 19일에 조선총독부관제 개정(칙령 제386호)이 이루어졌다. 총독의 권한 확장과 헌병경찰제의 폐지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lt;br /&gt;
====경찰체제 변화====&lt;br /&gt;
* 헌병경찰제가 폐지되고, 일반경찰체제로 전환되었다. 도지사가 경찰 권한을 행사하게 되었으며, 지역에 경찰서와 주재소가 설치되었다.&lt;br /&gt;
====중앙조직변경====&lt;br /&gt;
* 내무부, 탁지부, 농상공부, 사법부 등을 내무국, 재무국, 식산국, 법무국 등으로 변경하고, 경무총감부를 폐지하고 경무국을 신설하여 중앙 조직을 조정하였다.&lt;br /&gt;
====기타변화====&lt;br /&gt;
* 부국과를 서무부, 토목부, 철도부로 변경하고, 조선총독부의 6국3부제로 조직을 재편했다.&lt;br /&gt;
===제3기(1937~1945)전시체제===&lt;br /&gt;
====자원 동원 및 기획부 설립====&lt;br /&gt;
* 전시체제의 핵심은 조선의 인적과 물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전쟁 수행에 동원하기 위한 기획부 설립이다. 조선총독부는 1937년 9월에 자원조사와 총동원계획을 담당하는 자원과를 설립하였고, 1939년에는 물자 동원 및 생산력 확충 계획을 수립하는 기획부를 신설하였다.&lt;br /&gt;
====신설된 기구 및 역할 확대====&lt;br /&gt;
* 침안계통의 업무가 확대되면서 새로운 기구가 등장했다. 1939년에는 방호과가 설치되어 방공, 소방, 수방에 관한 사무를 담당했다. 1940년에는 식민지 주민을 총동원하고 통제하기 위한 국민총력조선연맹이 신설되었고, 학무국에서 관장하던 국민총동원 업무가 관방으로 이속되었다.&lt;br /&gt;
====임전체제의 강화====&lt;br /&gt;
* 중일전쟁이 장기화되자 조선총독부는 국민정신의 발휘와 국민의 총훈련, 그리고 생산력 확충을 목표로 하는 '임전체제'를 강화하였다. 1941년과 1942년에는 기획부, 후생국 신설 및 내무국의 사정국으로 개편 · 강화 등이 이뤄졌다.&lt;br /&gt;
====관제개정 및 총무국 신설====&lt;br /&gt;
* 1942년 11월에는 일본이 대동아성을 설치하면서 '행정합리화'를 실시하였고, 후생국과 기획부를 폐지하고 총무국을 신설하는 등의 기구개편을 진행하였다.&lt;br /&gt;
====결전행정체제====&lt;br /&gt;
* 1943년에는 조선총독부 전체적으로 행정기구를 개편하여 '결전행정' 체제를 수립하였다. 이는 식량의 증산, 군수물자의 개발 증산, 육해수송력 증강, 징병 등을 목적으로 하는 일원적 통합체제로 대폭 축소 개편되었다.&lt;br /&gt;
====지방행정강화====&lt;br /&gt;
* 행정기구의 변화에 따라 지방행정기구의 권한과 기능을 확대, 강화하였다. 지방기구들을 통합시켜 지방관청의 종합행정력을 강화시키는 등 지방행정을 강화하는 노력이 이뤄졌다.&lt;br /&gt;
&lt;br /&gt;
===건축 특징===&lt;br /&gt;
[[파일:청사.jpg]]&amp;lt;ref&amp;gt;조선총독부 나무위키 https://namu.wiki/w/%EC%A1%B0%EC%84%A0%EC%B4%9D%EB%8F%85%EB%B6%80&amp;lt;/ref&amp;gt;&amp;lt;br/&amp;gt;&lt;br /&gt;
* 조선총독부 중앙청사는 일제시대 식민지 통치 행정기관으로 사용되었던 건물로, 1916년에 완공되었다.  건물은 당시 최신 기술인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건축되었고, 유럽에서 수입해온 화강석과 대리석으로 마감되었다. 르네상스 양식과 바로크 양식을 절충한 네오 르네상스 양식을 기반으로 설계되었다.&lt;br /&gt;
&lt;br /&gt;
==참고==&lt;br /&gt;
조선총독부 한국민족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2242&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분류:박노수가옥, 걸어서 근현대사 속으로]]&lt;/div&gt;</summary>
		<author><name>코리아참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A1%B0%EC%84%A0%EC%B4%9D%EB%8F%85%EB%B6%80&amp;diff=31700</id>
		<title>조선총독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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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8T04:46:3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코리아참외: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조선총독부 청사&amp;lt;br/&amp;gt;&lt;br /&gt;
[[파일:조선총독부_청사.jpg]]&amp;lt;ref&amp;gt;위키페이지,조선총독부,https://ko.wikipedia.org/wiki/%EC%A1%B0%EC%84%A0%EC%B4%9D%EB%8F%85%EB%B6%80&amp;lt;/ref&amp;gt;&lt;br /&gt;
* 1916년 7월 10일 가공&lt;br /&gt;
* 1926년 10월 2일 완공 및 개장&lt;br /&gt;
* 1996년 11월 13일 철거완료&amp;lt;br/&amp;gt;&lt;br /&gt;
==설립==&lt;br /&gt;
1904년 러일전쟁에서의 승리 이후, 일본은 한일의정서를 통해 한국에 군사적 통제를 시작했고, 1905년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시켜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다. 이어져 1907년 고종 양위와 한일신협약을 통해 한국의 정치와 군사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었다. 1909년 7월 6일에는 한국의 주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병합을 결정하는 &amp;quot;한국병합실행에 관한 건&amp;quot;이 의결되었다.&lt;br /&gt;
&lt;br /&gt;
1910년 8월 29일, 일본은 한일합병조약을 공포하고 대한제국을 조선으로 개칭하며 조선총독부를 설치했다. 총독은 일체의 정무를 통할하며, 통감부와 소속 관서는 총독의 지휘 아래 유지되었다. 이로써 조선총독부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통치 기구로서 존재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일제의 통치는 한국인을 차별하고 일본인으로 대체하여 통치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또한, 일본은 한국인 관리들을 일본의 정책에 동조시키려는 시도를 했으며, 한국인을 열등시키는 이념적 기조를 채택했다. 이러한 통치 기조는 일본의 패망까지 지속되었다.&lt;br /&gt;
=='''년도별'''==&lt;br /&gt;
===제1기(1910∼1919)===&lt;br /&gt;
====설립과 초기 조직====&lt;br /&gt;
* 1910년 8월 29일에 「조선총독부 설치에 관한 건」(칙령 318호)이 공포되어 조선총독부가 설립되었다. 초기에는 통감부와 소속관서를 존속시키고, 통감에게 조선총독의 일부 직무를 맡기는 형태였다.&lt;br /&gt;
====조직구조====&lt;br /&gt;
* 조선총독부는 총독을 중심으로 정무총감을 두고 1관방 5부로 구성되었다. 내무부, 탁지부, 농상공부 등은 대한제국의 기관을 일부 축소하고 총독부의 소속으로 편입시켰다.&lt;br /&gt;
====중추원====&lt;br /&gt;
* 중추원은 조선총독의 자문기관으로 설치되었고, 주로 식민지 통치에 필요한 자문을 제공했다. 대한제국의 고등관 출신의 인사들도 중추원에서 자문에 참여했다.&lt;br /&gt;
====경찰 체제====&lt;br /&gt;
* 헌병경찰제가 도입되어 군사적 지배가 강조되었으며, 경찰기구는 헌병대사령부-각도 헌병대-헌병분대 구조로 조직되었다.&lt;br /&gt;
====사법기관====&lt;br /&gt;
* 사법부는 통감부사법청과 통감부재판소를 설치하고, 3심4급제의 재판소를 구성하여 조선의 사법권을 통제했다&lt;br /&gt;
===제2기(1920∼1936)===&lt;br /&gt;
==='''3·1운동 이후의 변화'''===&lt;br /&gt;
* 3·1운동을 계기로 1919년 8월 19일에 조선총독부관제 개정(칙령 제386호)이 이루어졌다. 총독의 권한 확장과 헌병경찰제의 폐지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lt;br /&gt;
====경찰체제 변화====&lt;br /&gt;
* 헌병경찰제가 폐지되고, 일반경찰체제로 전환되었다. 도지사가 경찰 권한을 행사하게 되었으며, 지역에 경찰서와 주재소가 설치되었다.&lt;br /&gt;
====중앙조직변경====&lt;br /&gt;
* 내무부, 탁지부, 농상공부, 사법부 등을 내무국, 재무국, 식산국, 법무국 등으로 변경하고, 경무총감부를 폐지하고 경무국을 신설하여 중앙 조직을 조정하였다.&lt;br /&gt;
====기타변화====&lt;br /&gt;
* 부국과를 서무부, 토목부, 철도부로 변경하고, 조선총독부의 6국3부제로 조직을 재편했다.&lt;br /&gt;
===제3기(1937~1945)전시체제===&lt;br /&gt;
====자원 동원 및 기획부 설립====&lt;br /&gt;
* 전시체제의 핵심은 조선의 인적과 물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전쟁 수행에 동원하기 위한 기획부 설립이다. 조선총독부는 1937년 9월에 자원조사와 총동원계획을 담당하는 자원과를 설립하였고, 1939년에는 물자 동원 및 생산력 확충 계획을 수립하는 기획부를 신설하였다.&lt;br /&gt;
====신설된 기구 및 역할 확대====&lt;br /&gt;
* 침안계통의 업무가 확대되면서 새로운 기구가 등장했다. 1939년에는 방호과가 설치되어 방공, 소방, 수방에 관한 사무를 담당했다. 1940년에는 식민지 주민을 총동원하고 통제하기 위한 국민총력조선연맹이 신설되었고, 학무국에서 관장하던 국민총동원 업무가 관방으로 이속되었다.&lt;br /&gt;
====임전체제의 강화====&lt;br /&gt;
* 중일전쟁이 장기화되자 조선총독부는 국민정신의 발휘와 국민의 총훈련, 그리고 생산력 확충을 목표로 하는 '임전체제'를 강화하였다. 1941년과 1942년에는 기획부, 후생국 신설 및 내무국의 사정국으로 개편 · 강화 등이 이뤄졌다.&lt;br /&gt;
====관제개정 및 총무국 신설====&lt;br /&gt;
* 1942년 11월에는 일본이 대동아성을 설치하면서 '행정합리화'를 실시하였고, 후생국과 기획부를 폐지하고 총무국을 신설하는 등의 기구개편을 진행하였다.&lt;br /&gt;
====결전행정체제====&lt;br /&gt;
* 1943년에는 조선총독부 전체적으로 행정기구를 개편하여 '결전행정' 체제를 수립하였다. 이는 식량의 증산, 군수물자의 개발 증산, 육해수송력 증강, 징병 등을 목적으로 하는 일원적 통합체제로 대폭 축소 개편되었다.&lt;br /&gt;
====지방행정강화====&lt;br /&gt;
* 행정기구의 변화에 따라 지방행정기구의 권한과 기능을 확대, 강화하였다. 지방기구들을 통합시켜 지방관청의 종합행정력을 강화시키는 등 지방행정을 강화하는 노력이 이뤄졌다.&lt;br /&gt;
&lt;br /&gt;
===건축 특징===&lt;br /&gt;
[[파일:청사.jpg]]&amp;lt;ref&amp;gt;조선총독부 나무위키 https://namu.wiki/w/%EC%A1%B0%EC%84%A0%EC%B4%9D%EB%8F%85%EB%B6%80&amp;lt;/ref&amp;gt;&amp;lt;br/&amp;gt;&lt;br /&gt;
* 조선총독부 중앙청사는 일제시대 식민지 통치 행정기관으로 사용되었던 건물로, 1916년에 완공되었다.  건물은 당시 최신 기술인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건축되었고, 유럽에서 수입해온 화강석과 대리석으로 마감되었다. 르네상스 양식과 바로크 양식을 절충한 네오 르네상스 양식을 기반으로 설계되었다.&lt;br /&gt;
&lt;br /&gt;
==참고==&lt;br /&gt;
조선총독부 한국민족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2242&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분류:박노수가옥, 걸어서 근현대사 속으로]]&lt;/div&gt;</summary>
		<author><name>코리아참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D%BC%EC%96%91%EC%A0%95&amp;diff=31699</id>
		<title>일양정</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D%BC%EC%96%91%EC%A0%95&amp;diff=31699"/>
		<updated>2023-12-08T04:41:2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코리아참외: &lt;/p&gt;
&lt;hr /&gt;
&lt;div&gt;=일양정=&lt;br /&gt;
[[파일:일양정.png|500픽셀]]&amp;lt;ref&amp;gt;김해경 . “벽수산장으로 본 근대정원의 조영기법 해석” (PDF). 《서울학연구》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일양정==&lt;br /&gt;
&lt;br /&gt;
* 벽수산장 본채의 중심건물인 일양정은 윤덕영이 청휘각을 계승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새로 지은 건물로 양관 뒤쪽에 위치하여 본채 역할을 하는 한옥이였다. 본채 중에서 사랑채에 해당하는 ‘일양정’은 윤덕영이 손님 접대 등 공적인 장소로 활용한 중요 공간이다. 벽수산장의 주인인 윤덕영이 쓴 4편은 모두 일양정에 관한 글이다. 「일양정십팔영」은 일양정에서 즐길 수 있는 아름다운 풍광 18가지를 시로 읊은 것이다.&lt;br /&gt;
 &lt;br /&gt;
===년도별===&lt;br /&gt;
&lt;br /&gt;
* 1875년에 지어졌다는 주장도 있고 벽수산장과 함께 1910년에 지어졌다는 주장도 있다. 1915년 지형도를 토대로 옥인동 47-269·161번지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였다.일양정은 1969년에 철거되었다.&lt;br /&gt;
&lt;br /&gt;
===특징===&lt;br /&gt;
* 일양정은 정면 5칸의 장대석과 벽돌 조적으로 혼합 구성된 1.5m정도 높이의 단 위에 축조된 건물이다. 지붕의 처마끝의 빗물받이와 기단 형태로 보아 전통적인 한옥의 형태가 아니라 과도기적 양식을 보인다. 그러나 건물의 격은 각 기둥에 주련이 걸려있을 정도로 높다.&lt;br /&gt;
&lt;br /&gt;
=='''일양정십팔영'''==&lt;br /&gt;
===개요===&lt;br /&gt;
&lt;br /&gt;
 「일양정십팔영」은 일양정이 입지한 공간에서 향유할 수 있는 경관을 서술하고 있다. 일양정의 위치는 역사적 유래를 지닌 장소 였으면 윤덕영은 이 장소에서 즐길수있는 요소 자연물, 정원건축물, 정원구조물, 기상현상등을 향유대상으로서 구분하여 일양정십팔영을 작성하였다.정원 구조물로는 우물, 연못, 홍교, 뜰이 해당되며 각 구조물은 부연적 설명을 포함하였대. 항유대상에서 자연물의 비중이 높으면 주변의 기암절벽, 노송과 바위, 이끼, 단풍나무 계곡, 폭포, 시냇물, 숲이다. 또한 일양정에서의 향유 요소는 단지 경관뿐만 아니라 일시적 기상상황, 상쾌한 기운, 그늘, 눈, 달맞이가 포함된 공감각적인 요소까지 향유할려고 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steelblue; margin: 0; border: 3px solid MidnightNlue;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lt;font color=&amp;quot;White&amp;quot;&amp;gt;일양정 향유대상 온톨로지&amp;lt;/font&amp;gt;===&lt;br /&gt;
*일양정에서 향유할 수 있는 대상을 구분하였다.&lt;br /&gt;
**{{NetworkGraph| title=일양정.ls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클래스(Class)===&lt;br /&gt;
*자신이 설계한 클래스(Class)를 나열하고, 각각의 클래스의 의미를 설명하고, 클래스에 해당되는 노드를 작성합니다.&lt;br /&gt;
*표, 목록(*, #) 등 자유로운 텍스트 형식으로 작성해주세요.&lt;br /&gt;
*예:&lt;br /&gt;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color:white&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amp;quot; | 클래스 !! style=&amp;quot;width:30%&amp;quot; | 설명 !! style=&amp;quot;45%&amp;quot; | 노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제||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대표 키워드인 일양정을 주제로서 나타내었다 || 일양정&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내용||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일양정십팔영따르면 윤덕영은  면  일양정의 장소에서 항유 할수 있는 것들을 자연물이나 기상현상등으로 구분하여 작성하였다. 이 내용을 작성하였다.|| 백악한운 옥류창벽 가재감천 일양정좌 백미원도 고송청뢰 수석노태 화원소작 풍계만음 층암비폭 첩장제설 북각관등 동루요월 구지유어 홍교장수 고류음정 장림호경&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공간구분||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항유 대상의 위치를 구분하였다. || 외원 내원&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향유대상 ||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일양정십팔영 '내용'에 따른 향유대상 || 자연물 기상현상&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공감각적요소 ||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오감을 이용해서 향유대상을 느끼려고 하였음 || 촉각 청각&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관계성(Relation)===&lt;br /&gt;
*자신이 설계한 관계성(Relation)을 나열하고, 각각의 관계의 의미를 설명하고, 관계성에 해당되는 두 노드(source, target)를 작성합니다.&lt;br /&gt;
*표, 목록(*, #) 등 자유로운 텍스트 형식으로 작성해주세요.&lt;br /&gt;
*예:&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green&amp;quot;&amp;gt;'''에_해당하다'''&amp;lt;/span&amp;gt;&lt;br /&gt;
***설명: 내용에 실려있는 것을 의미하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인왕상기 → 일양정십팔영&lt;br /&gt;
***#백악한운 → 일양정십팔영&lt;br /&gt;
***#옥류창벽 → 일양정십팔영&lt;br /&gt;
***#가재감천 → 일양정십팔영&lt;br /&gt;
***#일양정좌 → 일양정십팔영&lt;br /&gt;
***#백미원도 → 일양정십팔영&lt;br /&gt;
***#고송청뢰 → 일양정십팔영&lt;br /&gt;
***#수석노태 → 일양정십팔영&lt;br /&gt;
***#화원소작 → 일양정십팔영&lt;br /&gt;
***#풍계만음 → 일양정십팔영&lt;br /&gt;
***#층암비폭 → 일양정십팔영&lt;br /&gt;
***#첩장제설 → 일양정십팔영&lt;br /&gt;
***#북각관등 → 일양정십팔영&lt;br /&gt;
***#동루요월 → 일양정십팔영&lt;br /&gt;
***#구지유어 → 일양정십팔영&lt;br /&gt;
***#홍교장수 → 일양정십팔영&lt;br /&gt;
***#고류음정 → 일양정십팔영&lt;br /&gt;
***#장림호경 → 일양정십팔영&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green&amp;quot;&amp;gt;'''에_위치이다'''&amp;lt;/span&amp;gt;&lt;br /&gt;
***설명: 향유할 수 있는 대상의 위치 관계를 나타내었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인왕상기 → 외원&lt;br /&gt;
***#백악한운 → 외원 &lt;br /&gt;
***#백미원도 → 외원&lt;br /&gt;
***#옥류창벽 → 내원&lt;br /&gt;
***#일양정좌 → 내원&lt;br /&gt;
***#고송청뢰 → 내원&lt;br /&gt;
***#수석노태 → 내원&lt;br /&gt;
***#화원소작 → 내원&lt;br /&gt;
***#풍계만음 → 내원&lt;br /&gt;
***#층암비폭 → 내원&lt;br /&gt;
***#첩장제설 → 내원&lt;br /&gt;
***#북각관등 → 내원&lt;br /&gt;
***#동루요월 → 내원&lt;br /&gt;
***#구지유어 → 내원&lt;br /&gt;
***#홍교장수 → 내원&lt;br /&gt;
***#고류음정 → 내원&lt;br /&gt;
***#장림호경 → 내원&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 인왕상기(仁王爽氣) 인왕산의 상쾌한 기운 &lt;br /&gt;
# 백악한운(白嶽閒雲) 백악산의 한가로운 구름&lt;br /&gt;
# 옥류창벽(玉流蒼壁) 옥류동의 푸르른 절벽&lt;br /&gt;
# 가재감천(稼齋藥泉) 가재우물의 효능 좋은 우물&lt;br /&gt;
# 일양정좌(一陽靜坐) 일양정의 고요한 자리&lt;br /&gt;
# 백미원도(百美遠桃) 만발한 저 멀리 복숭아꽃&lt;br /&gt;
# 고송청뢰(古松淸籟) 늙은 소나무와 청아한 울림소리&lt;br /&gt;
# 수석노태(壽石老苔) 아름다운 바위와 오래된 이끼&lt;br /&gt;
# 화원소작(花園小酌) 꽃밭의 간단한 술자리&lt;br /&gt;
# 풍계만음(楓溪晩吟) 단풍나무 계곡의 느린 노래&lt;br /&gt;
# 층암비폭(層巖飛瀑) 켜켜히 바위와 날아갈듯한 폭포&lt;br /&gt;
# 첩장제설(疊嶂霽雪) 켜켜히 싸인 산에 개인 눈&lt;br /&gt;
# 북각관등(北閣觀燈) 북쪽 건물에서 바라본 등&lt;br /&gt;
# 동루요월(東樓邀月) 동쪽 루정에서의 달맞이&lt;br /&gt;
# 구지유어(龜池遊漁) 거북바위 연못에서 노니는 물고기&lt;br /&gt;
# 홍교장수(虹橋漲水) 무지개 다리의 넘치는 물&lt;br /&gt;
# 고류음정(高柳陰庭) 키큰 버드나무가 있는 그늘진 뜰&lt;br /&gt;
# 장림호경(長林護境) 긴 숲의 그윽한 경치&lt;br /&gt;
==참고문헌==&lt;br /&gt;
김해경 . “벽수산장으로 본 근대정원의 조영기법 해석” (PDF). 《서울학연구》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lt;br /&gt;
==각주==&lt;br /&gt;
[[분류:박노수가옥, 걸어서 근현대사 속으로]]&lt;/div&gt;</summary>
		<author><name>코리아참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D%BC%EC%96%91%EC%A0%95&amp;diff=31698</id>
		<title>일양정</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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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8T04:39:1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코리아참외: /* 일양정 */&lt;/p&gt;
&lt;hr /&gt;
&lt;div&gt;=일양정=&lt;br /&gt;
[[파일:일양정.png|500픽셀]]&amp;lt;ref&amp;gt;김해경 . “벽수산장으로 본 근대정원의 조영기법 해석” (PDF). 《서울학연구》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일양정==&lt;br /&gt;
&lt;br /&gt;
* 벽수산장 본채의 중심건물인 일양정은 윤덕영이 청휘각을 계승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새로 지은 건물로 양관 뒤쪽에 위치하여 본채 역할을 하는 한옥이였다. 본채 중에서 사랑채에 해당하는 ‘일양정’은 윤덕영이 손님 접대 등 공적인 장소로 활용한 중요 공간이다. 벽수산장의 주인인 윤덕영이 쓴 4편은 모두 일양정에 관한 글이다. 「일양정십팔영」은 일양정에서 즐길 수 있는 아름다운 풍광 18가지를 시로 읊은 것이다.&lt;br /&gt;
 &lt;br /&gt;
===년도별===&lt;br /&gt;
&lt;br /&gt;
* 1875년에 지어졌다는 주장도 있고 벽수산장과 함께 1910년에 지어졌다는 주장도 있다. 1915년 지형도를 토대로 옥인동 47-269·161번지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였다.일양정은 1969년에 철거되었다.&lt;br /&gt;
&lt;br /&gt;
===특징===&lt;br /&gt;
* 일양정은 정면 5칸의 장대석과 벽돌 조적으로 혼합 구성된 1.5m정도 높이의 단 위에 축조된 건물이다. 지붕의 처마끝의 빗물받이와 기단 형태로 보아 전통적인 한옥의 형태가 아니라 과도기적 양식을 보인다. 그러나 건물의 격은 각 기둥에 주련이 걸려있을 정도로 높다.&lt;br /&gt;
&lt;br /&gt;
=='''일양정십팔영'''==&lt;br /&gt;
===개요===&lt;br /&gt;
&lt;br /&gt;
 「일양정십팔영」은 일양정이 입지한 공간에서 향유할 수 있는 경관을 서술하고 있다. 일양정의 위치는 역사적 유래를 지닌 장소 였으면 윤덕영은 이 장소에서 즐길수있는 요소 자연물, 정원건축물, 정원구조물, 기상현상등을 향유대상으로서 구분하여 일양정십팔영을 작성하였다.정원 구조물로는 우물, 연못, 홍교, 뜰이 해당되며 각 구조물은 부연적 설명을 포함하였대. 항유대상에서 자연물의 비중이 높으면 주변의 기암절벽, 노송과 바위, 이끼, 단풍나무 계곡, 폭포, 시냇물, 숲이다. 또한 일양정에서의 향유 요소는 단지 경관뿐만 아니라 일시적 기상상황, 상쾌한 기운, 그늘, 눈, 달맞이가 포함된 공감각적인 요소까지 향유할려고 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steelblue; margin: 0; border: 3px solid MidnightNlue;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lt;font color=&amp;quot;White&amp;quot;&amp;gt;일양정 향유대상 온톨로지&amp;lt;/font&amp;gt;===&lt;br /&gt;
*일양정에서 향유할 수 있는 대상을 구분하였다.&lt;br /&gt;
**{{NetworkGraph| title=일양정.ls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클래스(Class)===&lt;br /&gt;
*자신이 설계한 클래스(Class)를 나열하고, 각각의 클래스의 의미를 설명하고, 클래스에 해당되는 노드를 작성합니다.&lt;br /&gt;
*표, 목록(*, #) 등 자유로운 텍스트 형식으로 작성해주세요.&lt;br /&gt;
*예:&lt;br /&gt;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color:white&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amp;quot; | 클래스 !! style=&amp;quot;width:30%&amp;quot; | 설명 !! style=&amp;quot;45%&amp;quot; | 노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제||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대표 키워드인 일양정을 주제로서 나타내었다 || 일양정&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내용||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일양정십팔영따르면 윤덕영은  면  일양정의 장소에서 항유 할수 있는 것들을 자연물이나 기상현상등으로 구분하여 작성하였다. 이 내용을 작성하였다.|| 백악한운 옥류창벽 가재감천 일양정좌 백미원도 고송청뢰 수석노태 화원소작 풍계만음 층암비폭 첩장제설 북각관등 동루요월 구지유어 홍교장수 고류음정 장림호경&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공간구분||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항유 대상의 위치를 구분하였다. || 외원 내원&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향유대상 ||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일양정십팔영 '내용'에 따른 향유대상 || 자연물 기상현상&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공감각적요소 ||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오감을 이용해서 향유대상을 느끼려고 하였음 || 촉각 청각&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관계성(Relation)===&lt;br /&gt;
*자신이 설계한 관계성(Relation)을 나열하고, 각각의 관계의 의미를 설명하고, 관계성에 해당되는 두 노드(source, target)를 작성합니다.&lt;br /&gt;
*표, 목록(*, #) 등 자유로운 텍스트 형식으로 작성해주세요.&lt;br /&gt;
*예:&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green&amp;quot;&amp;gt;'''에_해당하다'''&amp;lt;/span&amp;gt;&lt;br /&gt;
***설명: 내용에 실려있는 것을 의미하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인왕상기 → 일양정십팔영&lt;br /&gt;
***#백악한운 → 일양정십팔영&lt;br /&gt;
***#옥류창벽 → 일양정십팔영&lt;br /&gt;
***#가재감천 → 일양정십팔영&lt;br /&gt;
***#일양정좌 → 일양정십팔영&lt;br /&gt;
***#백미원도 → 일양정십팔영&lt;br /&gt;
***#고송청뢰 → 일양정십팔영&lt;br /&gt;
***#수석노태 → 일양정십팔영&lt;br /&gt;
***#화원소작 → 일양정십팔영&lt;br /&gt;
***#풍계만음 → 일양정십팔영&lt;br /&gt;
***#층암비폭 → 일양정십팔영&lt;br /&gt;
***#첩장제설 → 일양정십팔영&lt;br /&gt;
***#북각관등 → 일양정십팔영&lt;br /&gt;
***#동루요월 → 일양정십팔영&lt;br /&gt;
***#구지유어 → 일양정십팔영&lt;br /&gt;
***#홍교장수 → 일양정십팔영&lt;br /&gt;
***#고류음정 → 일양정십팔영&lt;br /&gt;
***#장림호경 → 일양정십팔영&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green&amp;quot;&amp;gt;'''에_위치이다'''&amp;lt;/span&amp;gt;&lt;br /&gt;
***설명: 향유할 수 있는 대상의 위치 관계를 나타내었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인왕상기 → 외원&lt;br /&gt;
***#백악한운 → 외원 &lt;br /&gt;
***#백미원도 → 외원&lt;br /&gt;
***#옥류창벽 → 내원&lt;br /&gt;
***#일양정좌 → 내원&lt;br /&gt;
***#고송청뢰 → 내원&lt;br /&gt;
***#수석노태 → 내원&lt;br /&gt;
***#화원소작 → 내원&lt;br /&gt;
***#풍계만음 → 내원&lt;br /&gt;
***#층암비폭 → 내원&lt;br /&gt;
***#첩장제설 → 내원&lt;br /&gt;
***#북각관등 → 내원&lt;br /&gt;
***#동루요월 → 내원&lt;br /&gt;
***#구지유어 → 내원&lt;br /&gt;
***#홍교장수 → 내원&lt;br /&gt;
***#고류음정 → 내원&lt;br /&gt;
***#장림호경 → 내원&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 인왕상기(仁王爽氣) 인왕산의 상쾌한 기운 &lt;br /&gt;
# 백악한운(白嶽閒雲) 백악산의 한가로운 구름&lt;br /&gt;
# 옥류창벽(玉流蒼壁) 옥류동의 푸르른 절벽&lt;br /&gt;
# 가재감천(稼齋藥泉) 가재우물의 효능 좋은 우물&lt;br /&gt;
# 일양정좌(一陽靜坐) 일양정의 고요한 자리&lt;br /&gt;
# 백미원도(百美遠桃) 만발한 저 멀리 복숭아꽃&lt;br /&gt;
# 고송청뢰(古松淸籟) 늙은 소나무와 청아한 울림소리&lt;br /&gt;
# 수석노태(壽石老苔) 아름다운 바위와 오래된 이끼&lt;br /&gt;
# 화원소작(花園小酌) 꽃밭의 간단한 술자리&lt;br /&gt;
# 풍계만음(楓溪晩吟) 단풍나무 계곡의 느린 노래&lt;br /&gt;
# 층암비폭(層巖飛瀑) 켜켜히 바위와 날아갈듯한 폭포&lt;br /&gt;
# 첩장제설(疊嶂霽雪) 켜켜히 싸인 산에 개인 눈&lt;br /&gt;
# 북각관등(北閣觀燈) 북쪽 건물에서 바라본 등&lt;br /&gt;
# 동루요월(東樓邀月) 동쪽 루정에서의 달맞이&lt;br /&gt;
# 구지유어(龜池遊漁) 거북바위 연못에서 노니는 물고기&lt;br /&gt;
# 홍교장수(虹橋漲水) 무지개 다리의 넘치는 물&lt;br /&gt;
# 고류음정(高柳陰庭) 키큰 버드나무가 있는 그늘진 뜰&lt;br /&gt;
# 장림호경(長林護境) 긴 숲의 그윽한 경치&lt;br /&gt;
==참고문헌==&lt;br /&gt;
김해경 . “벽수산장으로 본 근대정원의 조영기법 해석” (PDF). 《서울학연구》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lt;br /&gt;
==각주==&lt;br /&gt;
[[분류:박노수가옥, 걸어서 근현대사 속으로]]&lt;/div&gt;</summary>
		<author><name>코리아참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A1%B0%EC%84%A0%EC%B4%9D%EB%8F%85%EB%B6%80&amp;diff=31697</id>
		<title>조선총독부</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A1%B0%EC%84%A0%EC%B4%9D%EB%8F%85%EB%B6%80&amp;diff=31697"/>
		<updated>2023-12-08T04:37:2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코리아참외: /*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조선총독부 청사&amp;lt;br/&amp;gt;&lt;br /&gt;
[[파일:조선총독부_청사.jpg]]&amp;lt;ref&amp;gt;위키페이지,조선총독부,https://ko.wikipedia.org/wiki/%EC%A1%B0%EC%84%A0%EC%B4%9D%EB%8F%85%EB%B6%80&amp;lt;/ref&amp;gt;&lt;br /&gt;
* 1916년 7월 10일 가공&lt;br /&gt;
* 1926년 10월 2일 완공 및 개장&lt;br /&gt;
* 1996년 11월 13일 철거완료&amp;lt;br/&amp;gt;&lt;br /&gt;
&lt;br /&gt;
=='''년도별'''==&lt;br /&gt;
===제1기(1910∼1919)===&lt;br /&gt;
====설립과 초기 조직====&lt;br /&gt;
* 1910년 8월 29일에 「조선총독부 설치에 관한 건」(칙령 318호)이 공포되어 조선총독부가 설립되었다. 초기에는 통감부와 소속관서를 존속시키고, 통감에게 조선총독의 일부 직무를 맡기는 형태였다.&lt;br /&gt;
====조직구조====&lt;br /&gt;
* 조선총독부는 총독을 중심으로 정무총감을 두고 1관방 5부로 구성되었다. 내무부, 탁지부, 농상공부 등은 대한제국의 기관을 일부 축소하고 총독부의 소속으로 편입시켰다.&lt;br /&gt;
====중추원====&lt;br /&gt;
* 중추원은 조선총독의 자문기관으로 설치되었고, 주로 식민지 통치에 필요한 자문을 제공했다. 대한제국의 고등관 출신의 인사들도 중추원에서 자문에 참여했다.&lt;br /&gt;
====경찰 체제====&lt;br /&gt;
* 헌병경찰제가 도입되어 군사적 지배가 강조되었으며, 경찰기구는 헌병대사령부-각도 헌병대-헌병분대 구조로 조직되었다.&lt;br /&gt;
====사법기관====&lt;br /&gt;
* 사법부는 통감부사법청과 통감부재판소를 설치하고, 3심4급제의 재판소를 구성하여 조선의 사법권을 통제했다&lt;br /&gt;
===제2기(1920∼1936)===&lt;br /&gt;
==='''3·1운동 이후의 변화'''===&lt;br /&gt;
* 3·1운동을 계기로 1919년 8월 19일에 조선총독부관제 개정(칙령 제386호)이 이루어졌다. 총독의 권한 확장과 헌병경찰제의 폐지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lt;br /&gt;
====경찰체제 변화====&lt;br /&gt;
* 헌병경찰제가 폐지되고, 일반경찰체제로 전환되었다. 도지사가 경찰 권한을 행사하게 되었으며, 지역에 경찰서와 주재소가 설치되었다.&lt;br /&gt;
====중앙조직변경====&lt;br /&gt;
* 내무부, 탁지부, 농상공부, 사법부 등을 내무국, 재무국, 식산국, 법무국 등으로 변경하고, 경무총감부를 폐지하고 경무국을 신설하여 중앙 조직을 조정하였다.&lt;br /&gt;
====기타변화====&lt;br /&gt;
* 부국과를 서무부, 토목부, 철도부로 변경하고, 조선총독부의 6국3부제로 조직을 재편했다.&lt;br /&gt;
===제3기(1937~1945)전시체제===&lt;br /&gt;
====자원 동원 및 기획부 설립====&lt;br /&gt;
* 전시체제의 핵심은 조선의 인적과 물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전쟁 수행에 동원하기 위한 기획부 설립이다. 조선총독부는 1937년 9월에 자원조사와 총동원계획을 담당하는 자원과를 설립하였고, 1939년에는 물자 동원 및 생산력 확충 계획을 수립하는 기획부를 신설하였다.&lt;br /&gt;
====신설된 기구 및 역할 확대====&lt;br /&gt;
* 침안계통의 업무가 확대되면서 새로운 기구가 등장했다. 1939년에는 방호과가 설치되어 방공, 소방, 수방에 관한 사무를 담당했다. 1940년에는 식민지 주민을 총동원하고 통제하기 위한 국민총력조선연맹이 신설되었고, 학무국에서 관장하던 국민총동원 업무가 관방으로 이속되었다.&lt;br /&gt;
====임전체제의 강화====&lt;br /&gt;
* 중일전쟁이 장기화되자 조선총독부는 국민정신의 발휘와 국민의 총훈련, 그리고 생산력 확충을 목표로 하는 '임전체제'를 강화하였다. 1941년과 1942년에는 기획부, 후생국 신설 및 내무국의 사정국으로 개편 · 강화 등이 이뤄졌다.&lt;br /&gt;
====관제개정 및 총무국 신설====&lt;br /&gt;
* 1942년 11월에는 일본이 대동아성을 설치하면서 '행정합리화'를 실시하였고, 후생국과 기획부를 폐지하고 총무국을 신설하는 등의 기구개편을 진행하였다.&lt;br /&gt;
====결전행정체제====&lt;br /&gt;
* 1943년에는 조선총독부 전체적으로 행정기구를 개편하여 '결전행정' 체제를 수립하였다. 이는 식량의 증산, 군수물자의 개발 증산, 육해수송력 증강, 징병 등을 목적으로 하는 일원적 통합체제로 대폭 축소 개편되었다.&lt;br /&gt;
====지방행정강화====&lt;br /&gt;
* 행정기구의 변화에 따라 지방행정기구의 권한과 기능을 확대, 강화하였다. 지방기구들을 통합시켜 지방관청의 종합행정력을 강화시키는 등 지방행정을 강화하는 노력이 이뤄졌다.&lt;br /&gt;
&lt;br /&gt;
===건축 특징===&lt;br /&gt;
[[파일:청사.jpg]]&amp;lt;ref&amp;gt;조선총독부 나무위키 https://namu.wiki/w/%EC%A1%B0%EC%84%A0%EC%B4%9D%EB%8F%85%EB%B6%80&amp;lt;/ref&amp;gt;&amp;lt;br/&amp;gt;&lt;br /&gt;
* 조선총독부 중앙청사는 일제시대 식민지 통치 행정기관으로 사용되었던 건물로, 1916년에 완공되었다.  건물은 당시 최신 기술인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건축되었고, 유럽에서 수입해온 화강석과 대리석으로 마감되었다. 르네상스 양식과 바로크 양식을 절충한 네오 르네상스 양식을 기반으로 설계되었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조선총독부 한국민족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2242&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분류:박노수가옥, 걸어서 근현대사 속으로]]&lt;/div&gt;</summary>
		<author><name>코리아참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A1%B0%EC%84%A0%EC%B4%9D%EB%8F%85%EB%B6%80&amp;diff=31696</id>
		<title>조선총독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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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8T04:36:2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코리아참외: /* 각주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조선총독부 청사&amp;lt;br/&amp;gt;&lt;br /&gt;
[[파일:조선총독부_청사.jpg]]&amp;lt;ref&amp;gt;위키페이지,조선총독부,https://ko.wikipedia.org/wiki/%EC%A1%B0%EC%84%A0%EC%B4%9D%EB%8F%85%EB%B6%80&amp;lt;/ref&amp;gt;&lt;br /&gt;
* 1916년 7월 10일 가공&lt;br /&gt;
* 1926년 10월 2일 완공 및 개장&lt;br /&gt;
* 1996년 11월 13일 철거완료&amp;lt;br/&amp;gt;&lt;br /&gt;
&lt;br /&gt;
=='''년도별'''==&lt;br /&gt;
===제1기(1910∼1919)===&lt;br /&gt;
====설립과 초기 조직====&lt;br /&gt;
* 1910년 8월 29일에 「조선총독부 설치에 관한 건」(칙령 318호)이 공포되어 조선총독부가 설립되었다. 초기에는 통감부와 소속관서를 존속시키고, 통감에게 조선총독의 일부 직무를 맡기는 형태였다.&lt;br /&gt;
====조직구조====&lt;br /&gt;
* 조선총독부는 총독을 중심으로 정무총감을 두고 1관방 5부로 구성되었다. 내무부, 탁지부, 농상공부 등은 대한제국의 기관을 일부 축소하고 총독부의 소속으로 편입시켰다.&lt;br /&gt;
====중추원====&lt;br /&gt;
* 중추원은 조선총독의 자문기관으로 설치되었고, 주로 식민지 통치에 필요한 자문을 제공했다. 대한제국의 고등관 출신의 인사들도 중추원에서 자문에 참여했다.&lt;br /&gt;
====경찰 체제====&lt;br /&gt;
* 헌병경찰제가 도입되어 군사적 지배가 강조되었으며, 경찰기구는 헌병대사령부-각도 헌병대-헌병분대 구조로 조직되었다.&lt;br /&gt;
====사법기관====&lt;br /&gt;
* 사법부는 통감부사법청과 통감부재판소를 설치하고, 3심4급제의 재판소를 구성하여 조선의 사법권을 통제했다&lt;br /&gt;
===제2기(1920∼1936)===&lt;br /&gt;
==='''3·1운동 이후의 변화'''===&lt;br /&gt;
* 3·1운동을 계기로 1919년 8월 19일에 조선총독부관제 개정(칙령 제386호)이 이루어졌다. 총독의 권한 확장과 헌병경찰제의 폐지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lt;br /&gt;
====경찰체제 변화====&lt;br /&gt;
* 헌병경찰제가 폐지되고, 일반경찰체제로 전환되었다. 도지사가 경찰 권한을 행사하게 되었으며, 지역에 경찰서와 주재소가 설치되었다.&lt;br /&gt;
====중앙조직변경====&lt;br /&gt;
* 내무부, 탁지부, 농상공부, 사법부 등을 내무국, 재무국, 식산국, 법무국 등으로 변경하고, 경무총감부를 폐지하고 경무국을 신설하여 중앙 조직을 조정하였다.&lt;br /&gt;
====기타변화====&lt;br /&gt;
* 부국과를 서무부, 토목부, 철도부로 변경하고, 조선총독부의 6국3부제로 조직을 재편했다.&lt;br /&gt;
===제3기(1937~1945)전시체제===&lt;br /&gt;
====자원 동원 및 기획부 설립====&lt;br /&gt;
* 전시체제의 핵심은 조선의 인적과 물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전쟁 수행에 동원하기 위한 기획부 설립이다. 조선총독부는 1937년 9월에 자원조사와 총동원계획을 담당하는 자원과를 설립하였고, 1939년에는 물자 동원 및 생산력 확충 계획을 수립하는 기획부를 신설하였다.&lt;br /&gt;
====신설된 기구 및 역할 확대====&lt;br /&gt;
* 침안계통의 업무가 확대되면서 새로운 기구가 등장했다. 1939년에는 방호과가 설치되어 방공, 소방, 수방에 관한 사무를 담당했다. 1940년에는 식민지 주민을 총동원하고 통제하기 위한 국민총력조선연맹이 신설되었고, 학무국에서 관장하던 국민총동원 업무가 관방으로 이속되었다.&lt;br /&gt;
====임전체제의 강화====&lt;br /&gt;
* 중일전쟁이 장기화되자 조선총독부는 국민정신의 발휘와 국민의 총훈련, 그리고 생산력 확충을 목표로 하는 '임전체제'를 강화하였다. 1941년과 1942년에는 기획부, 후생국 신설 및 내무국의 사정국으로 개편 · 강화 등이 이뤄졌다.&lt;br /&gt;
====관제개정 및 총무국 신설====&lt;br /&gt;
* 1942년 11월에는 일본이 대동아성을 설치하면서 '행정합리화'를 실시하였고, 후생국과 기획부를 폐지하고 총무국을 신설하는 등의 기구개편을 진행하였다.&lt;br /&gt;
====결전행정체제====&lt;br /&gt;
* 1943년에는 조선총독부 전체적으로 행정기구를 개편하여 '결전행정' 체제를 수립하였다. 이는 식량의 증산, 군수물자의 개발 증산, 육해수송력 증강, 징병 등을 목적으로 하는 일원적 통합체제로 대폭 축소 개편되었다.&lt;br /&gt;
====지방행정강화====&lt;br /&gt;
* 행정기구의 변화에 따라 지방행정기구의 권한과 기능을 확대, 강화하였다. 지방기구들을 통합시켜 지방관청의 종합행정력을 강화시키는 등 지방행정을 강화하는 노력이 이뤄졌다.&lt;br /&gt;
&lt;br /&gt;
===건축 특징===&lt;br /&gt;
[[파일:청사.jpg]]&amp;lt;ref&amp;gt;조선총독부 나무위키 https://namu.wiki/w/%EC%A1%B0%EC%84%A0%EC%B4%9D%EB%8F%85%EB%B6%80&amp;lt;/ref&amp;gt;&amp;lt;br/&amp;gt;&lt;br /&gt;
* 조선총독부 중앙청사는 일제시대 식민지 통치 행정기관으로 사용되었던 건물로, 1916년에 완공되었다.  건물은 당시 최신 기술인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건축되었고, 유럽에서 수입해온 화강석과 대리석으로 마감되었다. 르네상스 양식과 바로크 양식을 절충한 네오 르네상스 양식을 기반으로 설계되었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분류:박노수가옥, 걸어서 근현대사 속으로]]&lt;/div&gt;</summary>
		<author><name>코리아참외</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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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조선총독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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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8T04:36:1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코리아참외: /*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조선총독부 청사&amp;lt;br/&amp;gt;&lt;br /&gt;
[[파일:조선총독부_청사.jpg]]&amp;lt;ref&amp;gt;위키페이지,조선총독부,https://ko.wikipedia.org/wiki/%EC%A1%B0%EC%84%A0%EC%B4%9D%EB%8F%85%EB%B6%80&amp;lt;/ref&amp;gt;&lt;br /&gt;
* 1916년 7월 10일 가공&lt;br /&gt;
* 1926년 10월 2일 완공 및 개장&lt;br /&gt;
* 1996년 11월 13일 철거완료&amp;lt;br/&amp;gt;&lt;br /&gt;
&lt;br /&gt;
=='''년도별'''==&lt;br /&gt;
===제1기(1910∼1919)===&lt;br /&gt;
====설립과 초기 조직====&lt;br /&gt;
* 1910년 8월 29일에 「조선총독부 설치에 관한 건」(칙령 318호)이 공포되어 조선총독부가 설립되었다. 초기에는 통감부와 소속관서를 존속시키고, 통감에게 조선총독의 일부 직무를 맡기는 형태였다.&lt;br /&gt;
====조직구조====&lt;br /&gt;
* 조선총독부는 총독을 중심으로 정무총감을 두고 1관방 5부로 구성되었다. 내무부, 탁지부, 농상공부 등은 대한제국의 기관을 일부 축소하고 총독부의 소속으로 편입시켰다.&lt;br /&gt;
====중추원====&lt;br /&gt;
* 중추원은 조선총독의 자문기관으로 설치되었고, 주로 식민지 통치에 필요한 자문을 제공했다. 대한제국의 고등관 출신의 인사들도 중추원에서 자문에 참여했다.&lt;br /&gt;
====경찰 체제====&lt;br /&gt;
* 헌병경찰제가 도입되어 군사적 지배가 강조되었으며, 경찰기구는 헌병대사령부-각도 헌병대-헌병분대 구조로 조직되었다.&lt;br /&gt;
====사법기관====&lt;br /&gt;
* 사법부는 통감부사법청과 통감부재판소를 설치하고, 3심4급제의 재판소를 구성하여 조선의 사법권을 통제했다&lt;br /&gt;
===제2기(1920∼1936)===&lt;br /&gt;
==='''3·1운동 이후의 변화'''===&lt;br /&gt;
* 3·1운동을 계기로 1919년 8월 19일에 조선총독부관제 개정(칙령 제386호)이 이루어졌다. 총독의 권한 확장과 헌병경찰제의 폐지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lt;br /&gt;
====경찰체제 변화====&lt;br /&gt;
* 헌병경찰제가 폐지되고, 일반경찰체제로 전환되었다. 도지사가 경찰 권한을 행사하게 되었으며, 지역에 경찰서와 주재소가 설치되었다.&lt;br /&gt;
====중앙조직변경====&lt;br /&gt;
* 내무부, 탁지부, 농상공부, 사법부 등을 내무국, 재무국, 식산국, 법무국 등으로 변경하고, 경무총감부를 폐지하고 경무국을 신설하여 중앙 조직을 조정하였다.&lt;br /&gt;
====기타변화====&lt;br /&gt;
* 부국과를 서무부, 토목부, 철도부로 변경하고, 조선총독부의 6국3부제로 조직을 재편했다.&lt;br /&gt;
===제3기(1937~1945)전시체제===&lt;br /&gt;
====자원 동원 및 기획부 설립====&lt;br /&gt;
* 전시체제의 핵심은 조선의 인적과 물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전쟁 수행에 동원하기 위한 기획부 설립이다. 조선총독부는 1937년 9월에 자원조사와 총동원계획을 담당하는 자원과를 설립하였고, 1939년에는 물자 동원 및 생산력 확충 계획을 수립하는 기획부를 신설하였다.&lt;br /&gt;
====신설된 기구 및 역할 확대====&lt;br /&gt;
* 침안계통의 업무가 확대되면서 새로운 기구가 등장했다. 1939년에는 방호과가 설치되어 방공, 소방, 수방에 관한 사무를 담당했다. 1940년에는 식민지 주민을 총동원하고 통제하기 위한 국민총력조선연맹이 신설되었고, 학무국에서 관장하던 국민총동원 업무가 관방으로 이속되었다.&lt;br /&gt;
====임전체제의 강화====&lt;br /&gt;
* 중일전쟁이 장기화되자 조선총독부는 국민정신의 발휘와 국민의 총훈련, 그리고 생산력 확충을 목표로 하는 '임전체제'를 강화하였다. 1941년과 1942년에는 기획부, 후생국 신설 및 내무국의 사정국으로 개편 · 강화 등이 이뤄졌다.&lt;br /&gt;
====관제개정 및 총무국 신설====&lt;br /&gt;
* 1942년 11월에는 일본이 대동아성을 설치하면서 '행정합리화'를 실시하였고, 후생국과 기획부를 폐지하고 총무국을 신설하는 등의 기구개편을 진행하였다.&lt;br /&gt;
====결전행정체제====&lt;br /&gt;
* 1943년에는 조선총독부 전체적으로 행정기구를 개편하여 '결전행정' 체제를 수립하였다. 이는 식량의 증산, 군수물자의 개발 증산, 육해수송력 증강, 징병 등을 목적으로 하는 일원적 통합체제로 대폭 축소 개편되었다.&lt;br /&gt;
====지방행정강화====&lt;br /&gt;
* 행정기구의 변화에 따라 지방행정기구의 권한과 기능을 확대, 강화하였다. 지방기구들을 통합시켜 지방관청의 종합행정력을 강화시키는 등 지방행정을 강화하는 노력이 이뤄졌다.&lt;br /&gt;
&lt;br /&gt;
===건축 특징===&lt;br /&gt;
[[파일:청사.jpg]]&amp;lt;ref&amp;gt;조선총독부 나무위키 https://namu.wiki/w/%EC%A1%B0%EC%84%A0%EC%B4%9D%EB%8F%85%EB%B6%80&amp;lt;/ref&amp;gt;&amp;lt;br/&amp;gt;&lt;br /&gt;
* 조선총독부 중앙청사는 일제시대 식민지 통치 행정기관으로 사용되었던 건물로, 1916년에 완공되었다.  건물은 당시 최신 기술인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건축되었고, 유럽에서 수입해온 화강석과 대리석으로 마감되었다. 르네상스 양식과 바로크 양식을 절충한 네오 르네상스 양식을 기반으로 설계되었다.&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각주==&lt;br /&gt;
[[분류:박노수가옥, 걸어서 근현대사 속으로]]&lt;/div&gt;</summary>
		<author><name>코리아참외</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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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조선총독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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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8T04:35:1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코리아참외: /* 개요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조선총독부 청사&amp;lt;br/&amp;gt;&lt;br /&gt;
[[파일:조선총독부_청사.jpg]]&amp;lt;ref&amp;gt;위키페이지,조선총독부,https://ko.wikipedia.org/wiki/%EC%A1%B0%EC%84%A0%EC%B4%9D%EB%8F%85%EB%B6%80&amp;lt;/ref&amp;gt;&lt;br /&gt;
* 1916년 7월 10일 가공&lt;br /&gt;
* 1926년 10월 2일 완공 및 개장&lt;br /&gt;
* 1996년 11월 13일 철거완료&amp;lt;br/&amp;gt;&lt;br /&gt;
&lt;br /&gt;
=='''년도별'''==&lt;br /&gt;
===제1기(1910∼1919)===&lt;br /&gt;
====설립과 초기 조직====&lt;br /&gt;
* 1910년 8월 29일에 「조선총독부 설치에 관한 건」(칙령 318호)이 공포되어 조선총독부가 설립되었다. 초기에는 통감부와 소속관서를 존속시키고, 통감에게 조선총독의 일부 직무를 맡기는 형태였다.&lt;br /&gt;
====조직구조====&lt;br /&gt;
* 조선총독부는 총독을 중심으로 정무총감을 두고 1관방 5부로 구성되었다. 내무부, 탁지부, 농상공부 등은 대한제국의 기관을 일부 축소하고 총독부의 소속으로 편입시켰다.&lt;br /&gt;
====중추원====&lt;br /&gt;
* 중추원은 조선총독의 자문기관으로 설치되었고, 주로 식민지 통치에 필요한 자문을 제공했다. 대한제국의 고등관 출신의 인사들도 중추원에서 자문에 참여했다.&lt;br /&gt;
====경찰 체제====&lt;br /&gt;
* 헌병경찰제가 도입되어 군사적 지배가 강조되었으며, 경찰기구는 헌병대사령부-각도 헌병대-헌병분대 구조로 조직되었다.&lt;br /&gt;
====사법기관====&lt;br /&gt;
* 사법부는 통감부사법청과 통감부재판소를 설치하고, 3심4급제의 재판소를 구성하여 조선의 사법권을 통제했다&lt;br /&gt;
===제2기(1920∼1936)===&lt;br /&gt;
==='''3·1운동 이후의 변화'''===&lt;br /&gt;
* 3·1운동을 계기로 1919년 8월 19일에 조선총독부관제 개정(칙령 제386호)이 이루어졌다. 총독의 권한 확장과 헌병경찰제의 폐지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lt;br /&gt;
====경찰체제 변화====&lt;br /&gt;
* 헌병경찰제가 폐지되고, 일반경찰체제로 전환되었다. 도지사가 경찰 권한을 행사하게 되었으며, 지역에 경찰서와 주재소가 설치되었다.&lt;br /&gt;
====중앙조직변경====&lt;br /&gt;
* 내무부, 탁지부, 농상공부, 사법부 등을 내무국, 재무국, 식산국, 법무국 등으로 변경하고, 경무총감부를 폐지하고 경무국을 신설하여 중앙 조직을 조정하였다.&lt;br /&gt;
====기타변화====&lt;br /&gt;
* 부국과를 서무부, 토목부, 철도부로 변경하고, 조선총독부의 6국3부제로 조직을 재편했다.&lt;br /&gt;
===제3기(1937~1945)전시체제===&lt;br /&gt;
====자원 동원 및 기획부 설립====&lt;br /&gt;
* 전시체제의 핵심은 조선의 인적과 물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전쟁 수행에 동원하기 위한 기획부 설립이다. 조선총독부는 1937년 9월에 자원조사와 총동원계획을 담당하는 자원과를 설립하였고, 1939년에는 물자 동원 및 생산력 확충 계획을 수립하는 기획부를 신설하였다.&lt;br /&gt;
====신설된 기구 및 역할 확대====&lt;br /&gt;
* 침안계통의 업무가 확대되면서 새로운 기구가 등장했다. 1939년에는 방호과가 설치되어 방공, 소방, 수방에 관한 사무를 담당했다. 1940년에는 식민지 주민을 총동원하고 통제하기 위한 국민총력조선연맹이 신설되었고, 학무국에서 관장하던 국민총동원 업무가 관방으로 이속되었다.&lt;br /&gt;
====임전체제의 강화====&lt;br /&gt;
* 중일전쟁이 장기화되자 조선총독부는 국민정신의 발휘와 국민의 총훈련, 그리고 생산력 확충을 목표로 하는 '임전체제'를 강화하였다. 1941년과 1942년에는 기획부, 후생국 신설 및 내무국의 사정국으로 개편 · 강화 등이 이뤄졌다.&lt;br /&gt;
====관제개정 및 총무국 신설====&lt;br /&gt;
* 1942년 11월에는 일본이 대동아성을 설치하면서 '행정합리화'를 실시하였고, 후생국과 기획부를 폐지하고 총무국을 신설하는 등의 기구개편을 진행하였다.&lt;br /&gt;
====결전행정체제====&lt;br /&gt;
* 1943년에는 조선총독부 전체적으로 행정기구를 개편하여 '결전행정' 체제를 수립하였다. 이는 식량의 증산, 군수물자의 개발 증산, 육해수송력 증강, 징병 등을 목적으로 하는 일원적 통합체제로 대폭 축소 개편되었다.&lt;br /&gt;
====지방행정강화====&lt;br /&gt;
* 행정기구의 변화에 따라 지방행정기구의 권한과 기능을 확대, 강화하였다. 지방기구들을 통합시켜 지방관청의 종합행정력을 강화시키는 등 지방행정을 강화하는 노력이 이뤄졌다.&lt;br /&gt;
&lt;br /&gt;
===건축 특징===&lt;br /&gt;
[[파일:청사.jpg]]&amp;lt;ref&amp;gt;조선총독부 나무위키 https://namu.wiki/w/%EC%A1%B0%EC%84%A0%EC%B4%9D%EB%8F%85%EB%B6%80&amp;lt;/ref&amp;gt;&amp;lt;br/&amp;gt;&lt;br /&gt;
* 조선총독부 중앙청사는 일제시대 식민지 통치 행정기관으로 사용되었던 건물로, 1916년에 완공되었다.  건물은 당시 최신 기술인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건축되었고, 유럽에서 수입해온 화강석과 대리석으로 마감되었다. 르네상스 양식과 바로크 양식을 절충한 네오 르네상스 양식을 기반으로 설계되었다.&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참고문헌==&lt;br /&gt;
[[분류:박노수가옥, 걸어서 근현대사 속으로]]&lt;/div&gt;</summary>
		<author><name>코리아참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A1%B0%EC%84%A0%EC%B4%9D%EB%8F%85%EB%B6%80&amp;diff=31693</id>
		<title>조선총독부</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A1%B0%EC%84%A0%EC%B4%9D%EB%8F%85%EB%B6%80&amp;diff=31693"/>
		<updated>2023-12-08T04:31:4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코리아참외: /* 건축 특징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조선총독부 청사&amp;lt;br/&amp;gt;&lt;br /&gt;
[[파일:조선총독부_청사.jpg]]&amp;lt;ref&amp;gt;위키페이지,조선총독부,https://ko.wikipedia.org/wiki/%EC%A1%B0%EC%84%A0%EC%B4%9D%EB%8F%85%EB%B6%80&amp;lt;/ref&amp;gt;&lt;br /&gt;
=='''년도별'''==&lt;br /&gt;
===제1기(1910∼1919)===&lt;br /&gt;
====설립과 초기 조직====&lt;br /&gt;
* 1910년 8월 29일에 「조선총독부 설치에 관한 건」(칙령 318호)이 공포되어 조선총독부가 설립되었다. 초기에는 통감부와 소속관서를 존속시키고, 통감에게 조선총독의 일부 직무를 맡기는 형태였다.&lt;br /&gt;
====조직구조====&lt;br /&gt;
* 조선총독부는 총독을 중심으로 정무총감을 두고 1관방 5부로 구성되었다. 내무부, 탁지부, 농상공부 등은 대한제국의 기관을 일부 축소하고 총독부의 소속으로 편입시켰다.&lt;br /&gt;
====중추원====&lt;br /&gt;
* 중추원은 조선총독의 자문기관으로 설치되었고, 주로 식민지 통치에 필요한 자문을 제공했다. 대한제국의 고등관 출신의 인사들도 중추원에서 자문에 참여했다.&lt;br /&gt;
====경찰 체제====&lt;br /&gt;
* 헌병경찰제가 도입되어 군사적 지배가 강조되었으며, 경찰기구는 헌병대사령부-각도 헌병대-헌병분대 구조로 조직되었다.&lt;br /&gt;
====사법기관====&lt;br /&gt;
* 사법부는 통감부사법청과 통감부재판소를 설치하고, 3심4급제의 재판소를 구성하여 조선의 사법권을 통제했다&lt;br /&gt;
===제2기(1920∼1936)===&lt;br /&gt;
==='''3·1운동 이후의 변화'''===&lt;br /&gt;
* 3·1운동을 계기로 1919년 8월 19일에 조선총독부관제 개정(칙령 제386호)이 이루어졌다. 총독의 권한 확장과 헌병경찰제의 폐지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lt;br /&gt;
====경찰체제 변화====&lt;br /&gt;
* 헌병경찰제가 폐지되고, 일반경찰체제로 전환되었다. 도지사가 경찰 권한을 행사하게 되었으며, 지역에 경찰서와 주재소가 설치되었다.&lt;br /&gt;
====중앙조직변경====&lt;br /&gt;
* 내무부, 탁지부, 농상공부, 사법부 등을 내무국, 재무국, 식산국, 법무국 등으로 변경하고, 경무총감부를 폐지하고 경무국을 신설하여 중앙 조직을 조정하였다.&lt;br /&gt;
====기타변화====&lt;br /&gt;
* 부국과를 서무부, 토목부, 철도부로 변경하고, 조선총독부의 6국3부제로 조직을 재편했다.&lt;br /&gt;
===제3기(1937~1945)전시체제===&lt;br /&gt;
====자원 동원 및 기획부 설립====&lt;br /&gt;
* 전시체제의 핵심은 조선의 인적과 물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전쟁 수행에 동원하기 위한 기획부 설립이다. 조선총독부는 1937년 9월에 자원조사와 총동원계획을 담당하는 자원과를 설립하였고, 1939년에는 물자 동원 및 생산력 확충 계획을 수립하는 기획부를 신설하였다.&lt;br /&gt;
====신설된 기구 및 역할 확대====&lt;br /&gt;
* 침안계통의 업무가 확대되면서 새로운 기구가 등장했다. 1939년에는 방호과가 설치되어 방공, 소방, 수방에 관한 사무를 담당했다. 1940년에는 식민지 주민을 총동원하고 통제하기 위한 국민총력조선연맹이 신설되었고, 학무국에서 관장하던 국민총동원 업무가 관방으로 이속되었다.&lt;br /&gt;
====임전체제의 강화====&lt;br /&gt;
* 중일전쟁이 장기화되자 조선총독부는 국민정신의 발휘와 국민의 총훈련, 그리고 생산력 확충을 목표로 하는 '임전체제'를 강화하였다. 1941년과 1942년에는 기획부, 후생국 신설 및 내무국의 사정국으로 개편 · 강화 등이 이뤄졌다.&lt;br /&gt;
====관제개정 및 총무국 신설====&lt;br /&gt;
* 1942년 11월에는 일본이 대동아성을 설치하면서 '행정합리화'를 실시하였고, 후생국과 기획부를 폐지하고 총무국을 신설하는 등의 기구개편을 진행하였다.&lt;br /&gt;
====결전행정체제====&lt;br /&gt;
* 1943년에는 조선총독부 전체적으로 행정기구를 개편하여 '결전행정' 체제를 수립하였다. 이는 식량의 증산, 군수물자의 개발 증산, 육해수송력 증강, 징병 등을 목적으로 하는 일원적 통합체제로 대폭 축소 개편되었다.&lt;br /&gt;
====지방행정강화====&lt;br /&gt;
* 행정기구의 변화에 따라 지방행정기구의 권한과 기능을 확대, 강화하였다. 지방기구들을 통합시켜 지방관청의 종합행정력을 강화시키는 등 지방행정을 강화하는 노력이 이뤄졌다.&lt;br /&gt;
&lt;br /&gt;
===건축 특징===&lt;br /&gt;
[[파일:청사.jpg]]&amp;lt;ref&amp;gt;조선총독부 나무위키 https://namu.wiki/w/%EC%A1%B0%EC%84%A0%EC%B4%9D%EB%8F%85%EB%B6%80&amp;lt;/ref&amp;gt;&amp;lt;br/&amp;gt;&lt;br /&gt;
* 조선총독부 중앙청사는 일제시대 식민지 통치 행정기관으로 사용되었던 건물로, 1916년에 완공되었다.  건물은 당시 최신 기술인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건축되었고, 유럽에서 수입해온 화강석과 대리석으로 마감되었다. 르네상스 양식과 바로크 양식을 절충한 네오 르네상스 양식을 기반으로 설계되었다.&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참고문헌==&lt;br /&gt;
[[분류:박노수가옥, 걸어서 근현대사 속으로]]&lt;/div&gt;</summary>
		<author><name>코리아참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A1%B0%EC%84%A0%EC%B4%9D%EB%8F%85%EB%B6%80&amp;diff=31692</id>
		<title>조선총독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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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8T04:27:2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코리아참외: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조선총독부 청사&amp;lt;br/&amp;gt;&lt;br /&gt;
[[파일:조선총독부_청사.jpg]]&amp;lt;ref&amp;gt;위키페이지,조선총독부,https://ko.wikipedia.org/wiki/%EC%A1%B0%EC%84%A0%EC%B4%9D%EB%8F%85%EB%B6%80&amp;lt;/ref&amp;gt;&lt;br /&gt;
=='''년도별'''==&lt;br /&gt;
===제1기(1910∼1919)===&lt;br /&gt;
====설립과 초기 조직====&lt;br /&gt;
* 1910년 8월 29일에 「조선총독부 설치에 관한 건」(칙령 318호)이 공포되어 조선총독부가 설립되었다. 초기에는 통감부와 소속관서를 존속시키고, 통감에게 조선총독의 일부 직무를 맡기는 형태였다.&lt;br /&gt;
====조직구조====&lt;br /&gt;
* 조선총독부는 총독을 중심으로 정무총감을 두고 1관방 5부로 구성되었다. 내무부, 탁지부, 농상공부 등은 대한제국의 기관을 일부 축소하고 총독부의 소속으로 편입시켰다.&lt;br /&gt;
====중추원====&lt;br /&gt;
* 중추원은 조선총독의 자문기관으로 설치되었고, 주로 식민지 통치에 필요한 자문을 제공했다. 대한제국의 고등관 출신의 인사들도 중추원에서 자문에 참여했다.&lt;br /&gt;
====경찰 체제====&lt;br /&gt;
* 헌병경찰제가 도입되어 군사적 지배가 강조되었으며, 경찰기구는 헌병대사령부-각도 헌병대-헌병분대 구조로 조직되었다.&lt;br /&gt;
====사법기관====&lt;br /&gt;
* 사법부는 통감부사법청과 통감부재판소를 설치하고, 3심4급제의 재판소를 구성하여 조선의 사법권을 통제했다&lt;br /&gt;
===제2기(1920∼1936)===&lt;br /&gt;
==='''3·1운동 이후의 변화'''===&lt;br /&gt;
* 3·1운동을 계기로 1919년 8월 19일에 조선총독부관제 개정(칙령 제386호)이 이루어졌다. 총독의 권한 확장과 헌병경찰제의 폐지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lt;br /&gt;
====경찰체제 변화====&lt;br /&gt;
* 헌병경찰제가 폐지되고, 일반경찰체제로 전환되었다. 도지사가 경찰 권한을 행사하게 되었으며, 지역에 경찰서와 주재소가 설치되었다.&lt;br /&gt;
====중앙조직변경====&lt;br /&gt;
* 내무부, 탁지부, 농상공부, 사법부 등을 내무국, 재무국, 식산국, 법무국 등으로 변경하고, 경무총감부를 폐지하고 경무국을 신설하여 중앙 조직을 조정하였다.&lt;br /&gt;
====기타변화====&lt;br /&gt;
* 부국과를 서무부, 토목부, 철도부로 변경하고, 조선총독부의 6국3부제로 조직을 재편했다.&lt;br /&gt;
===제3기(1937~1945)전시체제===&lt;br /&gt;
====자원 동원 및 기획부 설립====&lt;br /&gt;
* 전시체제의 핵심은 조선의 인적과 물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전쟁 수행에 동원하기 위한 기획부 설립이다. 조선총독부는 1937년 9월에 자원조사와 총동원계획을 담당하는 자원과를 설립하였고, 1939년에는 물자 동원 및 생산력 확충 계획을 수립하는 기획부를 신설하였다.&lt;br /&gt;
====신설된 기구 및 역할 확대====&lt;br /&gt;
* 침안계통의 업무가 확대되면서 새로운 기구가 등장했다. 1939년에는 방호과가 설치되어 방공, 소방, 수방에 관한 사무를 담당했다. 1940년에는 식민지 주민을 총동원하고 통제하기 위한 국민총력조선연맹이 신설되었고, 학무국에서 관장하던 국민총동원 업무가 관방으로 이속되었다.&lt;br /&gt;
====임전체제의 강화====&lt;br /&gt;
* 중일전쟁이 장기화되자 조선총독부는 국민정신의 발휘와 국민의 총훈련, 그리고 생산력 확충을 목표로 하는 '임전체제'를 강화하였다. 1941년과 1942년에는 기획부, 후생국 신설 및 내무국의 사정국으로 개편 · 강화 등이 이뤄졌다.&lt;br /&gt;
====관제개정 및 총무국 신설====&lt;br /&gt;
* 1942년 11월에는 일본이 대동아성을 설치하면서 '행정합리화'를 실시하였고, 후생국과 기획부를 폐지하고 총무국을 신설하는 등의 기구개편을 진행하였다.&lt;br /&gt;
====결전행정체제====&lt;br /&gt;
* 1943년에는 조선총독부 전체적으로 행정기구를 개편하여 '결전행정' 체제를 수립하였다. 이는 식량의 증산, 군수물자의 개발 증산, 육해수송력 증강, 징병 등을 목적으로 하는 일원적 통합체제로 대폭 축소 개편되었다.&lt;br /&gt;
====지방행정강화====&lt;br /&gt;
* 행정기구의 변화에 따라 지방행정기구의 권한과 기능을 확대, 강화하였다. 지방기구들을 통합시켜 지방관청의 종합행정력을 강화시키는 등 지방행정을 강화하는 노력이 이뤄졌다.&lt;br /&gt;
&lt;br /&gt;
===건축 특징===&lt;br /&gt;
[[파일:청사.jpg]]&lt;br /&gt;
* 조선총독부 중앙청사는 일제시대 식민지 통치 행정기관으로 사용되었던 건물로, 1916년에 완공되었다.  건물은 당시 최신 기술인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건축되었고, 유럽에서 수입해온 화강석과 대리석으로 마감되었다. 르네상스 양식과 바로크 양식을 절충한 네오 르네상스 양식을 기반으로 설계되었다.&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참고문헌==&lt;br /&gt;
[[분류:박노수가옥, 걸어서 근현대사 속으로]]&lt;/div&gt;</summary>
		<author><name>코리아참외</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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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코리아참외: &lt;/p&gt;
&lt;hr /&gt;
&lt;div&gt;&lt;/div&gt;</summary>
		<author><name>코리아참외</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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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조선총독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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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개요==&lt;br /&gt;
조선총독부 청사&amp;lt;br/&amp;gt;&lt;br /&gt;
[[파일:조선총독부_청사.jpg]]&amp;lt;ref&amp;gt;위키페이지,조선총독부,https://ko.wikipedia.org/wiki/%EC%A1%B0%EC%84%A0%EC%B4%9D%EB%8F%85%EB%B6%80&amp;lt;/ref&amp;gt;&lt;br /&gt;
=='''년도별'''==&lt;br /&gt;
===제1기(1910∼1919)===&lt;br /&gt;
====설립과 초기 조직====&lt;br /&gt;
* 1910년 8월 29일에 「조선총독부 설치에 관한 건」(칙령 318호)이 공포되어 조선총독부가 설립되었다. 초기에는 통감부와 소속관서를 존속시키고, 통감에게 조선총독의 일부 직무를 맡기는 형태였다.&lt;br /&gt;
====조직구조====&lt;br /&gt;
* 조선총독부는 총독을 중심으로 정무총감을 두고 1관방 5부로 구성되었다. 내무부, 탁지부, 농상공부 등은 대한제국의 기관을 일부 축소하고 총독부의 소속으로 편입시켰다.&lt;br /&gt;
====중추원====&lt;br /&gt;
* 중추원은 조선총독의 자문기관으로 설치되었고, 주로 식민지 통치에 필요한 자문을 제공했다. 대한제국의 고등관 출신의 인사들도 중추원에서 자문에 참여했다.&lt;br /&gt;
====경찰 체제====&lt;br /&gt;
* 헌병경찰제가 도입되어 군사적 지배가 강조되었으며, 경찰기구는 헌병대사령부-각도 헌병대-헌병분대 구조로 조직되었다.&lt;br /&gt;
====사법기관====&lt;br /&gt;
* 사법부는 통감부사법청과 통감부재판소를 설치하고, 3심4급제의 재판소를 구성하여 조선의 사법권을 통제했다&lt;br /&gt;
===제2기(1920∼1936)===&lt;br /&gt;
==='''3·1운동 이후의 변화'''===&lt;br /&gt;
* 3·1운동을 계기로 1919년 8월 19일에 조선총독부관제 개정(칙령 제386호)이 이루어졌다. 총독의 권한 확장과 헌병경찰제의 폐지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lt;br /&gt;
====경찰체제 변화====&lt;br /&gt;
* 헌병경찰제가 폐지되고, 일반경찰체제로 전환되었다. 도지사가 경찰 권한을 행사하게 되었으며, 지역에 경찰서와 주재소가 설치되었다.&lt;br /&gt;
====중앙조직변경====&lt;br /&gt;
* 내무부, 탁지부, 농상공부, 사법부 등을 내무국, 재무국, 식산국, 법무국 등으로 변경하고, 경무총감부를 폐지하고 경무국을 신설하여 중앙 조직을 조정하였다.&lt;br /&gt;
====기타변화====&lt;br /&gt;
* 부국과를 서무부, 토목부, 철도부로 변경하고, 조선총독부의 6국3부제로 조직을 재편했다.&lt;br /&gt;
===제3기(1937~1945)전시체제===&lt;br /&gt;
====자원 동원 및 기획부 설립====&lt;br /&gt;
* 전시체제의 핵심은 조선의 인적과 물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전쟁 수행에 동원하기 위한 기획부 설립이다. 조선총독부는 1937년 9월에 자원조사와 총동원계획을 담당하는 자원과를 설립하였고, 1939년에는 물자 동원 및 생산력 확충 계획을 수립하는 기획부를 신설하였다.&lt;br /&gt;
====신설된 기구 및 역할 확대====&lt;br /&gt;
* 침안계통의 업무가 확대되면서 새로운 기구가 등장했다. 1939년에는 방호과가 설치되어 방공, 소방, 수방에 관한 사무를 담당했다. 1940년에는 식민지 주민을 총동원하고 통제하기 위한 국민총력조선연맹이 신설되었고, 학무국에서 관장하던 국민총동원 업무가 관방으로 이속되었다.&lt;br /&gt;
====임전체제의 강화====&lt;br /&gt;
* 중일전쟁이 장기화되자 조선총독부는 국민정신의 발휘와 국민의 총훈련, 그리고 생산력 확충을 목표로 하는 '임전체제'를 강화하였다. 1941년과 1942년에는 기획부, 후생국 신설 및 내무국의 사정국으로 개편 · 강화 등이 이뤄졌다.&lt;br /&gt;
====관제개정 및 총무국 신설====&lt;br /&gt;
* 1942년 11월에는 일본이 대동아성을 설치하면서 '행정합리화'를 실시하였고, 후생국과 기획부를 폐지하고 총무국을 신설하는 등의 기구개편을 진행하였다.&lt;br /&gt;
====결전행정체제====&lt;br /&gt;
* 1943년에는 조선총독부 전체적으로 행정기구를 개편하여 '결전행정' 체제를 수립하였다. 이는 식량의 증산, 군수물자의 개발 증산, 육해수송력 증강, 징병 등을 목적으로 하는 일원적 통합체제로 대폭 축소 개편되었다.&lt;br /&gt;
====지방행정강화====&lt;br /&gt;
* 행정기구의 변화에 따라 지방행정기구의 권한과 기능을 확대, 강화하였다. 지방기구들을 통합시켜 지방관청의 종합행정력을 강화시키는 등 지방행정을 강화하는 노력이 이뤄졌다.&lt;br /&gt;
&lt;br /&gt;
===건축 특징===&lt;br /&gt;
* 조선총독부 중앙청사는 일제시대 식민지 통치 행정기관으로 사용되었던 건물로, 1916년에 완공되었다.  건물은 당시 최신 기술인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건축되었고, 유럽에서 수입해온 화강석과 대리석으로 마감되었다. 르네상스 양식과 바로크 양식을 절충한 네오 르네상스 양식을 기반으로 설계되었다.&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참고문헌==&lt;br /&gt;
[[분류:박노수가옥, 걸어서 근현대사 속으로]]&lt;/div&gt;</summary>
		<author><name>코리아참외</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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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조선총독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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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8T04:21:1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코리아참외: /* 내용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조선총독부 청사&amp;lt;br/&amp;gt;&lt;br /&gt;
[[파일:조선총독부_청사.jpg]]&amp;lt;ref&amp;gt;위키페이지,조선총독부,https://ko.wikipedia.org/wiki/%EC%A1%B0%EC%84%A0%EC%B4%9D%EB%8F%85%EB%B6%80&amp;lt;/ref&amp;gt;&lt;br /&gt;
==년도별==&lt;br /&gt;
===제1기(1910∼1919)===&lt;br /&gt;
====설립과 초기 조직====&lt;br /&gt;
* 1910년 8월 29일에 「조선총독부 설치에 관한 건」(칙령 318호)이 공포되어 조선총독부가 설립되었다. 초기에는 통감부와 소속관서를 존속시키고, 통감에게 조선총독의 일부 직무를 맡기는 형태였다.&lt;br /&gt;
====조직구조====&lt;br /&gt;
* 조선총독부는 총독을 중심으로 정무총감을 두고 1관방 5부로 구성되었다. 내무부, 탁지부, 농상공부 등은 대한제국의 기관을 일부 축소하고 총독부의 소속으로 편입시켰다.&lt;br /&gt;
====중추원====&lt;br /&gt;
* 중추원은 조선총독의 자문기관으로 설치되었고, 주로 식민지 통치에 필요한 자문을 제공했다. 대한제국의 고등관 출신의 인사들도 중추원에서 자문에 참여했다.&lt;br /&gt;
====경찰 체제====&lt;br /&gt;
* 헌병경찰제가 도입되어 군사적 지배가 강조되었으며, 경찰기구는 헌병대사령부-각도 헌병대-헌병분대 구조로 조직되었다.&lt;br /&gt;
====사법기관====&lt;br /&gt;
* 사법부는 통감부사법청과 통감부재판소를 설치하고, 3심4급제의 재판소를 구성하여 조선의 사법권을 통제했다&lt;br /&gt;
===제2기(1920∼1936)===&lt;br /&gt;
==='''3·1운동 이후의 변화'''===&lt;br /&gt;
* 3·1운동을 계기로 1919년 8월 19일에 조선총독부관제 개정(칙령 제386호)이 이루어졌다. 총독의 권한 확장과 헌병경찰제의 폐지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lt;br /&gt;
====경찰체제 변화====&lt;br /&gt;
* 헌병경찰제가 폐지되고, 일반경찰체제로 전환되었다. 도지사가 경찰 권한을 행사하게 되었으며, 지역에 경찰서와 주재소가 설치되었다.&lt;br /&gt;
====중앙조직변경====&lt;br /&gt;
* 내무부, 탁지부, 농상공부, 사법부 등을 내무국, 재무국, 식산국, 법무국 등으로 변경하고, 경무총감부를 폐지하고 경무국을 신설하여 중앙 조직을 조정하였다.&lt;br /&gt;
====기타변화====&lt;br /&gt;
* 부국과를 서무부, 토목부, 철도부로 변경하고, 조선총독부의 6국3부제로 조직을 재편했다.&lt;br /&gt;
===제3기(1937~1945)전시체제===&lt;br /&gt;
====자원 동원 및 기획부 설립====&lt;br /&gt;
* 전시체제의 핵심은 조선의 인적과 물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전쟁 수행에 동원하기 위한 기획부 설립이다. 조선총독부는 1937년 9월에 자원조사와 총동원계획을 담당하는 자원과를 설립하였고, 1939년에는 물자 동원 및 생산력 확충 계획을 수립하는 기획부를 신설하였다.&lt;br /&gt;
====신설된 기구 및 역할 확대====&lt;br /&gt;
* 침안계통의 업무가 확대되면서 새로운 기구가 등장했다. 1939년에는 방호과가 설치되어 방공, 소방, 수방에 관한 사무를 담당했다. 1940년에는 식민지 주민을 총동원하고 통제하기 위한 국민총력조선연맹이 신설되었고, 학무국에서 관장하던 국민총동원 업무가 관방으로 이속되었다.&lt;br /&gt;
====임전체제의 강화====&lt;br /&gt;
* 중일전쟁이 장기화되자 조선총독부는 국민정신의 발휘와 국민의 총훈련, 그리고 생산력 확충을 목표로 하는 '임전체제'를 강화하였다. 1941년과 1942년에는 기획부, 후생국 신설 및 내무국의 사정국으로 개편 · 강화 등이 이뤄졌다.&lt;br /&gt;
====관제개정 및 총무국 신설====&lt;br /&gt;
* 1942년 11월에는 일본이 대동아성을 설치하면서 '행정합리화'를 실시하였고, 후생국과 기획부를 폐지하고 총무국을 신설하는 등의 기구개편을 진행하였다.&lt;br /&gt;
====결전행정체제====&lt;br /&gt;
* 1943년에는 조선총독부 전체적으로 행정기구를 개편하여 '결전행정' 체제를 수립하였다. 이는 식량의 증산, 군수물자의 개발 증산, 육해수송력 증강, 징병 등을 목적으로 하는 일원적 통합체제로 대폭 축소 개편되었다.&lt;br /&gt;
====지방행정강화====&lt;br /&gt;
* 행정기구의 변화에 따라 지방행정기구의 권한과 기능을 확대, 강화하였다. 지방기구들을 통합시켜 지방관청의 종합행정력을 강화시키는 등 지방행정을 강화하는 노력이 이뤄졌다.&lt;br /&gt;
&lt;br /&gt;
===건축 특징===&lt;br /&gt;
* 조선총독부 중앙청사는 일제시대 식민지 통치 행정기관으로 사용되었던 건물로, 1916년에 완공되었다.  건물은 당시 최신 기술인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건축되었고, 유럽에서 수입해온 화강석과 대리석으로 마감되었다. 르네상스 양식과 바로크 양식을 절충한 네오 르네상스 양식을 기반으로 설계되었다.&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참고문헌==&lt;br /&gt;
[[분류:박노수가옥, 걸어서 근현대사 속으로]]&lt;/div&gt;</summary>
		<author><name>코리아참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A1%B0%EC%84%A0%EC%B4%9D%EB%8F%85%EB%B6%80&amp;diff=31688</id>
		<title>조선총독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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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8T04:20:5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코리아참외: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조선총독부 청사&amp;lt;br/&amp;gt;&lt;br /&gt;
[[파일:조선총독부_청사.jpg]]&amp;lt;ref&amp;gt;위키페이지,조선총독부,https://ko.wikipedia.org/wiki/%EC%A1%B0%EC%84%A0%EC%B4%9D%EB%8F%85%EB%B6%80&amp;lt;/ref&amp;gt;&lt;br /&gt;
==내용==&lt;br /&gt;
===제1기(1910∼1919)===&lt;br /&gt;
====설립과 초기 조직====&lt;br /&gt;
* 1910년 8월 29일에 「조선총독부 설치에 관한 건」(칙령 318호)이 공포되어 조선총독부가 설립되었다. 초기에는 통감부와 소속관서를 존속시키고, 통감에게 조선총독의 일부 직무를 맡기는 형태였다.&lt;br /&gt;
====조직구조====&lt;br /&gt;
* 조선총독부는 총독을 중심으로 정무총감을 두고 1관방 5부로 구성되었다. 내무부, 탁지부, 농상공부 등은 대한제국의 기관을 일부 축소하고 총독부의 소속으로 편입시켰다.&lt;br /&gt;
====중추원====&lt;br /&gt;
* 중추원은 조선총독의 자문기관으로 설치되었고, 주로 식민지 통치에 필요한 자문을 제공했다. 대한제국의 고등관 출신의 인사들도 중추원에서 자문에 참여했다.&lt;br /&gt;
====경찰 체제====&lt;br /&gt;
* 헌병경찰제가 도입되어 군사적 지배가 강조되었으며, 경찰기구는 헌병대사령부-각도 헌병대-헌병분대 구조로 조직되었다.&lt;br /&gt;
====사법기관====&lt;br /&gt;
* 사법부는 통감부사법청과 통감부재판소를 설치하고, 3심4급제의 재판소를 구성하여 조선의 사법권을 통제했다&lt;br /&gt;
===제2기(1920∼1936)===&lt;br /&gt;
==='''3·1운동 이후의 변화'''===&lt;br /&gt;
* 3·1운동을 계기로 1919년 8월 19일에 조선총독부관제 개정(칙령 제386호)이 이루어졌다. 총독의 권한 확장과 헌병경찰제의 폐지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lt;br /&gt;
====경찰체제 변화====&lt;br /&gt;
* 헌병경찰제가 폐지되고, 일반경찰체제로 전환되었다. 도지사가 경찰 권한을 행사하게 되었으며, 지역에 경찰서와 주재소가 설치되었다.&lt;br /&gt;
====중앙조직변경====&lt;br /&gt;
* 내무부, 탁지부, 농상공부, 사법부 등을 내무국, 재무국, 식산국, 법무국 등으로 변경하고, 경무총감부를 폐지하고 경무국을 신설하여 중앙 조직을 조정하였다.&lt;br /&gt;
====기타변화====&lt;br /&gt;
* 부국과를 서무부, 토목부, 철도부로 변경하고, 조선총독부의 6국3부제로 조직을 재편했다.&lt;br /&gt;
===제3기(1937~1945)전시체제===&lt;br /&gt;
====자원 동원 및 기획부 설립====&lt;br /&gt;
* 전시체제의 핵심은 조선의 인적과 물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전쟁 수행에 동원하기 위한 기획부 설립이다. 조선총독부는 1937년 9월에 자원조사와 총동원계획을 담당하는 자원과를 설립하였고, 1939년에는 물자 동원 및 생산력 확충 계획을 수립하는 기획부를 신설하였다.&lt;br /&gt;
====신설된 기구 및 역할 확대====&lt;br /&gt;
* 침안계통의 업무가 확대되면서 새로운 기구가 등장했다. 1939년에는 방호과가 설치되어 방공, 소방, 수방에 관한 사무를 담당했다. 1940년에는 식민지 주민을 총동원하고 통제하기 위한 국민총력조선연맹이 신설되었고, 학무국에서 관장하던 국민총동원 업무가 관방으로 이속되었다.&lt;br /&gt;
====임전체제의 강화====&lt;br /&gt;
* 중일전쟁이 장기화되자 조선총독부는 국민정신의 발휘와 국민의 총훈련, 그리고 생산력 확충을 목표로 하는 '임전체제'를 강화하였다. 1941년과 1942년에는 기획부, 후생국 신설 및 내무국의 사정국으로 개편 · 강화 등이 이뤄졌다.&lt;br /&gt;
====관제개정 및 총무국 신설====&lt;br /&gt;
* 1942년 11월에는 일본이 대동아성을 설치하면서 '행정합리화'를 실시하였고, 후생국과 기획부를 폐지하고 총무국을 신설하는 등의 기구개편을 진행하였다.&lt;br /&gt;
====결전행정체제====&lt;br /&gt;
* 1943년에는 조선총독부 전체적으로 행정기구를 개편하여 '결전행정' 체제를 수립하였다. 이는 식량의 증산, 군수물자의 개발 증산, 육해수송력 증강, 징병 등을 목적으로 하는 일원적 통합체제로 대폭 축소 개편되었다.&lt;br /&gt;
====지방행정강화====&lt;br /&gt;
* 행정기구의 변화에 따라 지방행정기구의 권한과 기능을 확대, 강화하였다. 지방기구들을 통합시켜 지방관청의 종합행정력을 강화시키는 등 지방행정을 강화하는 노력이 이뤄졌다.&lt;br /&gt;
&lt;br /&gt;
===건축 특징===&lt;br /&gt;
* 조선총독부 중앙청사는 일제시대 식민지 통치 행정기관으로 사용되었던 건물로, 1916년에 완공되었다.  건물은 당시 최신 기술인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건축되었고, 유럽에서 수입해온 화강석과 대리석으로 마감되었다. 르네상스 양식과 바로크 양식을 절충한 네오 르네상스 양식을 기반으로 설계되었다.&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참고문헌==&lt;br /&gt;
[[분류:박노수가옥, 걸어서 근현대사 속으로]]&lt;/div&gt;</summary>
		<author><name>코리아참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A1%B0%EC%84%A0%EC%B4%9D%EB%8F%85%EB%B6%80&amp;diff=31687</id>
		<title>조선총독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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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8T04:19:5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코리아참외: /* 개요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조선총독부 청사&amp;lt;br/&amp;gt;&lt;br /&gt;
[[파일:조선총독부_청사.jpg]]&amp;lt;ref&amp;gt;위키페이지,조선총독부,https://ko.wikipedia.org/wiki/%EC%A1%B0%EC%84%A0%EC%B4%9D%EB%8F%85%EB%B6%80&amp;lt;/ref&amp;gt;&lt;br /&gt;
===제1기(1910∼1919)===&lt;br /&gt;
====설립과 초기 조직====&lt;br /&gt;
* 1910년 8월 29일에 「조선총독부 설치에 관한 건」(칙령 318호)이 공포되어 조선총독부가 설립되었다. 초기에는 통감부와 소속관서를 존속시키고, 통감에게 조선총독의 일부 직무를 맡기는 형태였다.&lt;br /&gt;
====조직구조====&lt;br /&gt;
* 조선총독부는 총독을 중심으로 정무총감을 두고 1관방 5부로 구성되었다. 내무부, 탁지부, 농상공부 등은 대한제국의 기관을 일부 축소하고 총독부의 소속으로 편입시켰다.&lt;br /&gt;
====중추원====&lt;br /&gt;
* 중추원은 조선총독의 자문기관으로 설치되었고, 주로 식민지 통치에 필요한 자문을 제공했다. 대한제국의 고등관 출신의 인사들도 중추원에서 자문에 참여했다.&lt;br /&gt;
====경찰 체제====&lt;br /&gt;
* 헌병경찰제가 도입되어 군사적 지배가 강조되었으며, 경찰기구는 헌병대사령부-각도 헌병대-헌병분대 구조로 조직되었다.&lt;br /&gt;
====사법기관====&lt;br /&gt;
* 사법부는 통감부사법청과 통감부재판소를 설치하고, 3심4급제의 재판소를 구성하여 조선의 사법권을 통제했다&lt;br /&gt;
===제2기(1920∼1936)===&lt;br /&gt;
==='''3·1운동 이후의 변화'''===&lt;br /&gt;
* 3·1운동을 계기로 1919년 8월 19일에 조선총독부관제 개정(칙령 제386호)이 이루어졌다. 총독의 권한 확장과 헌병경찰제의 폐지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lt;br /&gt;
====경찰체제 변화====&lt;br /&gt;
* 헌병경찰제가 폐지되고, 일반경찰체제로 전환되었다. 도지사가 경찰 권한을 행사하게 되었으며, 지역에 경찰서와 주재소가 설치되었다.&lt;br /&gt;
====중앙조직변경====&lt;br /&gt;
* 내무부, 탁지부, 농상공부, 사법부 등을 내무국, 재무국, 식산국, 법무국 등으로 변경하고, 경무총감부를 폐지하고 경무국을 신설하여 중앙 조직을 조정하였다.&lt;br /&gt;
====기타변화====&lt;br /&gt;
* 부국과를 서무부, 토목부, 철도부로 변경하고, 조선총독부의 6국3부제로 조직을 재편했다.&lt;br /&gt;
===제3기(1937~1945)전시체제===&lt;br /&gt;
====자원 동원 및 기획부 설립====&lt;br /&gt;
* 전시체제의 핵심은 조선의 인적과 물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전쟁 수행에 동원하기 위한 기획부 설립이다. 조선총독부는 1937년 9월에 자원조사와 총동원계획을 담당하는 자원과를 설립하였고, 1939년에는 물자 동원 및 생산력 확충 계획을 수립하는 기획부를 신설하였다.&lt;br /&gt;
====신설된 기구 및 역할 확대====&lt;br /&gt;
* 침안계통의 업무가 확대되면서 새로운 기구가 등장했다. 1939년에는 방호과가 설치되어 방공, 소방, 수방에 관한 사무를 담당했다. 1940년에는 식민지 주민을 총동원하고 통제하기 위한 국민총력조선연맹이 신설되었고, 학무국에서 관장하던 국민총동원 업무가 관방으로 이속되었다.&lt;br /&gt;
====임전체제의 강화====&lt;br /&gt;
* 중일전쟁이 장기화되자 조선총독부는 국민정신의 발휘와 국민의 총훈련, 그리고 생산력 확충을 목표로 하는 '임전체제'를 강화하였다. 1941년과 1942년에는 기획부, 후생국 신설 및 내무국의 사정국으로 개편 · 강화 등이 이뤄졌다.&lt;br /&gt;
====관제개정 및 총무국 신설====&lt;br /&gt;
* 1942년 11월에는 일본이 대동아성을 설치하면서 '행정합리화'를 실시하였고, 후생국과 기획부를 폐지하고 총무국을 신설하는 등의 기구개편을 진행하였다.&lt;br /&gt;
====결전행정체제====&lt;br /&gt;
* 1943년에는 조선총독부 전체적으로 행정기구를 개편하여 '결전행정' 체제를 수립하였다. 이는 식량의 증산, 군수물자의 개발 증산, 육해수송력 증강, 징병 등을 목적으로 하는 일원적 통합체제로 대폭 축소 개편되었다.&lt;br /&gt;
====지방행정강화====&lt;br /&gt;
* 행정기구의 변화에 따라 지방행정기구의 권한과 기능을 확대, 강화하였다. 지방기구들을 통합시켜 지방관청의 종합행정력을 강화시키는 등 지방행정을 강화하는 노력이 이뤄졌다.&lt;br /&gt;
&lt;br /&gt;
===건축 특징===&lt;br /&gt;
* 조선총독부 중앙청사는 일제시대 식민지 통치 행정기관으로 사용되었던 건물로, 1916년에 완공되었다.  건물은 당시 최신 기술인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건축되었고, 유럽에서 수입해온 화강석과 대리석으로 마감되었다. 르네상스 양식과 바로크 양식을 절충한 네오 르네상스 양식을 기반으로 설계되었다.&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참고문헌==&lt;br /&gt;
[[분류:박노수가옥, 걸어서 근현대사 속으로]]&lt;/div&gt;</summary>
		<author><name>코리아참외</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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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조선총독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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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8T04:13:0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코리아참외: /* 개요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조선총독부 청사&amp;lt;br/&amp;gt;&lt;br /&gt;
[[파일:조선총독부_청사.jpg]]&amp;lt;ref&amp;gt;위키페이지,조선총독부,https://ko.wikipedia.org/wiki/%EC%A1%B0%EC%84%A0%EC%B4%9D%EB%8F%85%EB%B6%80&amp;lt;/ref&amp;gt;&lt;br /&gt;
===제1기(1910∼1919)===&lt;br /&gt;
====설립과 초기 조직====&lt;br /&gt;
* 1910년 8월 29일에 「조선총독부 설치에 관한 건」(칙령 318호)이 공포되어 조선총독부가 설립되었다. 초기에는 통감부와 소속관서를 존속시키고, 통감에게 조선총독의 일부 직무를 맡기는 형태였다.&lt;br /&gt;
====조직구조====&lt;br /&gt;
* 조선총독부는 총독을 중심으로 정무총감을 두고 1관방 5부로 구성되었다. 내무부, 탁지부, 농상공부 등은 대한제국의 기관을 일부 축소하고 총독부의 소속으로 편입시켰다.&lt;br /&gt;
====중추원====&lt;br /&gt;
* 중추원은 조선총독의 자문기관으로 설치되었고, 주로 식민지 통치에 필요한 자문을 제공했다. 대한제국의 고등관 출신의 인사들도 중추원에서 자문에 참여했다.&lt;br /&gt;
====경찰 체제====&lt;br /&gt;
* 헌병경찰제가 도입되어 군사적 지배가 강조되었으며, 경찰기구는 헌병대사령부-각도 헌병대-헌병분대 구조로 조직되었다.&lt;br /&gt;
====사법기관====&lt;br /&gt;
* 사법부는 통감부사법청과 통감부재판소를 설치하고, 3심4급제의 재판소를 구성하여 조선의 사법권을 통제했다&lt;br /&gt;
===제2기(1920∼1936)===&lt;br /&gt;
==='''3·1운동 이후의 변화'''===&lt;br /&gt;
* 3·1운동을 계기로 1919년 8월 19일에 조선총독부관제 개정(칙령 제386호)이 이루어졌다. 총독의 권한 확장과 헌병경찰제의 폐지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lt;br /&gt;
====경찰체제 변화====&lt;br /&gt;
* 헌병경찰제가 폐지되고, 일반경찰체제로 전환되었다. 도지사가 경찰 권한을 행사하게 되었으며, 지역에 경찰서와 주재소가 설치되었다.&lt;br /&gt;
====중앙조직변경====&lt;br /&gt;
* 내무부, 탁지부, 농상공부, 사법부 등을 내무국, 재무국, 식산국, 법무국 등으로 변경하고, 경무총감부를 폐지하고 경무국을 신설하여 중앙 조직을 조정하였다.&lt;br /&gt;
====기타변화====&lt;br /&gt;
* 부국과를 서무부, 토목부, 철도부로 변경하고, 조선총독부의 6국3부제로 조직을 재편했다.&lt;br /&gt;
===제3기(1937~1945)전시체제===&lt;br /&gt;
====자원 동원 및 기획부 설립====&lt;br /&gt;
* 전시체제의 핵심은 조선의 인적과 물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전쟁 수행에 동원하기 위한 기획부 설립이다. 조선총독부는 1937년 9월에 자원조사와 총동원계획을 담당하는 자원과를 설립하였고, 1939년에는 물자 동원 및 생산력 확충 계획을 수립하는 기획부를 신설하였다.&lt;br /&gt;
====신설된 기구 및 역할 확대====&lt;br /&gt;
* 침안계통의 업무가 확대되면서 새로운 기구가 등장했다. 1939년에는 방호과가 설치되어 방공, 소방, 수방에 관한 사무를 담당했다. 1940년에는 식민지 주민을 총동원하고 통제하기 위한 국민총력조선연맹이 신설되었고, 학무국에서 관장하던 국민총동원 업무가 관방으로 이속되었다.&lt;br /&gt;
====임전체제의 강화====&lt;br /&gt;
* 중일전쟁이 장기화되자 조선총독부는 국민정신의 발휘와 국민의 총훈련, 그리고 생산력 확충을 목표로 하는 '임전체제'를 강화하였다. 1941년과 1942년에는 기획부, 후생국 신설 및 내무국의 사정국으로 개편 · 강화 등이 이뤄졌다.&lt;br /&gt;
====관제개정 및 총무국 신설====&lt;br /&gt;
* 1942년 11월에는 일본이 대동아성을 설치하면서 '행정합리화'를 실시하였고, 후생국과 기획부를 폐지하고 총무국을 신설하는 등의 기구개편을 진행하였다.&lt;br /&gt;
====결전행정체제====&lt;br /&gt;
* 1943년에는 조선총독부 전체적으로 행정기구를 개편하여 '결전행정' 체제를 수립하였다. 이는 식량의 증산, 군수물자의 개발 증산, 육해수송력 증강, 징병 등을 목적으로 하는 일원적 통합체제로 대폭 축소 개편되었다.&lt;br /&gt;
====지방행정강화====&lt;br /&gt;
* 행정기구의 변화에 따라 지방행정기구의 권한과 기능을 확대, 강화하였다. 지방기구들을 통합시켜 지방관청의 종합행정력을 강화시키는 등 지방행정을 강화하는 노력이 이뤄졌다.&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참고문헌==&lt;br /&gt;
[[분류:박노수가옥, 걸어서 근현대사 속으로]]&lt;/div&gt;</summary>
		<author><name>코리아참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A1%B0%EC%84%A0%EC%B4%9D%EB%8F%85%EB%B6%80&amp;diff=31680</id>
		<title>조선총독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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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8T04:12:5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코리아참외: /* 개요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조선총독부 청사&lt;br /&gt;
[[파일:조선총독부_청사.jpg]]&amp;lt;ref&amp;gt;위키페이지,조선총독부,https://ko.wikipedia.org/wiki/%EC%A1%B0%EC%84%A0%EC%B4%9D%EB%8F%85%EB%B6%80&amp;lt;/ref&amp;gt;&lt;br /&gt;
===제1기(1910∼1919)===&lt;br /&gt;
====설립과 초기 조직====&lt;br /&gt;
* 1910년 8월 29일에 「조선총독부 설치에 관한 건」(칙령 318호)이 공포되어 조선총독부가 설립되었다. 초기에는 통감부와 소속관서를 존속시키고, 통감에게 조선총독의 일부 직무를 맡기는 형태였다.&lt;br /&gt;
====조직구조====&lt;br /&gt;
* 조선총독부는 총독을 중심으로 정무총감을 두고 1관방 5부로 구성되었다. 내무부, 탁지부, 농상공부 등은 대한제국의 기관을 일부 축소하고 총독부의 소속으로 편입시켰다.&lt;br /&gt;
====중추원====&lt;br /&gt;
* 중추원은 조선총독의 자문기관으로 설치되었고, 주로 식민지 통치에 필요한 자문을 제공했다. 대한제국의 고등관 출신의 인사들도 중추원에서 자문에 참여했다.&lt;br /&gt;
====경찰 체제====&lt;br /&gt;
* 헌병경찰제가 도입되어 군사적 지배가 강조되었으며, 경찰기구는 헌병대사령부-각도 헌병대-헌병분대 구조로 조직되었다.&lt;br /&gt;
====사법기관====&lt;br /&gt;
* 사법부는 통감부사법청과 통감부재판소를 설치하고, 3심4급제의 재판소를 구성하여 조선의 사법권을 통제했다&lt;br /&gt;
===제2기(1920∼1936)===&lt;br /&gt;
==='''3·1운동 이후의 변화'''===&lt;br /&gt;
* 3·1운동을 계기로 1919년 8월 19일에 조선총독부관제 개정(칙령 제386호)이 이루어졌다. 총독의 권한 확장과 헌병경찰제의 폐지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lt;br /&gt;
====경찰체제 변화====&lt;br /&gt;
* 헌병경찰제가 폐지되고, 일반경찰체제로 전환되었다. 도지사가 경찰 권한을 행사하게 되었으며, 지역에 경찰서와 주재소가 설치되었다.&lt;br /&gt;
====중앙조직변경====&lt;br /&gt;
* 내무부, 탁지부, 농상공부, 사법부 등을 내무국, 재무국, 식산국, 법무국 등으로 변경하고, 경무총감부를 폐지하고 경무국을 신설하여 중앙 조직을 조정하였다.&lt;br /&gt;
====기타변화====&lt;br /&gt;
* 부국과를 서무부, 토목부, 철도부로 변경하고, 조선총독부의 6국3부제로 조직을 재편했다.&lt;br /&gt;
===제3기(1937~1945)전시체제===&lt;br /&gt;
====자원 동원 및 기획부 설립====&lt;br /&gt;
* 전시체제의 핵심은 조선의 인적과 물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전쟁 수행에 동원하기 위한 기획부 설립이다. 조선총독부는 1937년 9월에 자원조사와 총동원계획을 담당하는 자원과를 설립하였고, 1939년에는 물자 동원 및 생산력 확충 계획을 수립하는 기획부를 신설하였다.&lt;br /&gt;
====신설된 기구 및 역할 확대====&lt;br /&gt;
* 침안계통의 업무가 확대되면서 새로운 기구가 등장했다. 1939년에는 방호과가 설치되어 방공, 소방, 수방에 관한 사무를 담당했다. 1940년에는 식민지 주민을 총동원하고 통제하기 위한 국민총력조선연맹이 신설되었고, 학무국에서 관장하던 국민총동원 업무가 관방으로 이속되었다.&lt;br /&gt;
====임전체제의 강화====&lt;br /&gt;
* 중일전쟁이 장기화되자 조선총독부는 국민정신의 발휘와 국민의 총훈련, 그리고 생산력 확충을 목표로 하는 '임전체제'를 강화하였다. 1941년과 1942년에는 기획부, 후생국 신설 및 내무국의 사정국으로 개편 · 강화 등이 이뤄졌다.&lt;br /&gt;
====관제개정 및 총무국 신설====&lt;br /&gt;
* 1942년 11월에는 일본이 대동아성을 설치하면서 '행정합리화'를 실시하였고, 후생국과 기획부를 폐지하고 총무국을 신설하는 등의 기구개편을 진행하였다.&lt;br /&gt;
====결전행정체제====&lt;br /&gt;
* 1943년에는 조선총독부 전체적으로 행정기구를 개편하여 '결전행정' 체제를 수립하였다. 이는 식량의 증산, 군수물자의 개발 증산, 육해수송력 증강, 징병 등을 목적으로 하는 일원적 통합체제로 대폭 축소 개편되었다.&lt;br /&gt;
====지방행정강화====&lt;br /&gt;
* 행정기구의 변화에 따라 지방행정기구의 권한과 기능을 확대, 강화하였다. 지방기구들을 통합시켜 지방관청의 종합행정력을 강화시키는 등 지방행정을 강화하는 노력이 이뤄졌다.&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참고문헌==&lt;br /&gt;
[[분류:박노수가옥, 걸어서 근현대사 속으로]]&lt;/div&gt;</summary>
		<author><name>코리아참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A1%B0%EC%84%A0%EC%B4%9D%EB%8F%85%EB%B6%80&amp;diff=31675</id>
		<title>조선총독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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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8T04:11:2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코리아참외: /* 개요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파일:조선총독부_청사.jpg]]&amp;lt;ref&amp;gt;위키페이지,조선총독부,https://ko.wikipedia.org/wiki/%EC%A1%B0%EC%84%A0%EC%B4%9D%EB%8F%85%EB%B6%80&amp;lt;/ref&amp;gt;&lt;br /&gt;
===제1기(1910∼1919)===&lt;br /&gt;
====설립과 초기 조직====&lt;br /&gt;
* 1910년 8월 29일에 「조선총독부 설치에 관한 건」(칙령 318호)이 공포되어 조선총독부가 설립되었다. 초기에는 통감부와 소속관서를 존속시키고, 통감에게 조선총독의 일부 직무를 맡기는 형태였다.&lt;br /&gt;
====조직구조====&lt;br /&gt;
* 조선총독부는 총독을 중심으로 정무총감을 두고 1관방 5부로 구성되었다. 내무부, 탁지부, 농상공부 등은 대한제국의 기관을 일부 축소하고 총독부의 소속으로 편입시켰다.&lt;br /&gt;
====중추원====&lt;br /&gt;
* 중추원은 조선총독의 자문기관으로 설치되었고, 주로 식민지 통치에 필요한 자문을 제공했다. 대한제국의 고등관 출신의 인사들도 중추원에서 자문에 참여했다.&lt;br /&gt;
====경찰 체제====&lt;br /&gt;
* 헌병경찰제가 도입되어 군사적 지배가 강조되었으며, 경찰기구는 헌병대사령부-각도 헌병대-헌병분대 구조로 조직되었다.&lt;br /&gt;
====사법기관====&lt;br /&gt;
* 사법부는 통감부사법청과 통감부재판소를 설치하고, 3심4급제의 재판소를 구성하여 조선의 사법권을 통제했다&lt;br /&gt;
===제2기(1920∼1936)===&lt;br /&gt;
==='''3·1운동 이후의 변화'''===&lt;br /&gt;
* 3·1운동을 계기로 1919년 8월 19일에 조선총독부관제 개정(칙령 제386호)이 이루어졌다. 총독의 권한 확장과 헌병경찰제의 폐지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lt;br /&gt;
====경찰체제 변화====&lt;br /&gt;
* 헌병경찰제가 폐지되고, 일반경찰체제로 전환되었다. 도지사가 경찰 권한을 행사하게 되었으며, 지역에 경찰서와 주재소가 설치되었다.&lt;br /&gt;
====중앙조직변경====&lt;br /&gt;
* 내무부, 탁지부, 농상공부, 사법부 등을 내무국, 재무국, 식산국, 법무국 등으로 변경하고, 경무총감부를 폐지하고 경무국을 신설하여 중앙 조직을 조정하였다.&lt;br /&gt;
====기타변화====&lt;br /&gt;
* 부국과를 서무부, 토목부, 철도부로 변경하고, 조선총독부의 6국3부제로 조직을 재편했다.&lt;br /&gt;
===제3기(1937~1945)전시체제===&lt;br /&gt;
====자원 동원 및 기획부 설립====&lt;br /&gt;
* 전시체제의 핵심은 조선의 인적과 물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전쟁 수행에 동원하기 위한 기획부 설립이다. 조선총독부는 1937년 9월에 자원조사와 총동원계획을 담당하는 자원과를 설립하였고, 1939년에는 물자 동원 및 생산력 확충 계획을 수립하는 기획부를 신설하였다.&lt;br /&gt;
====신설된 기구 및 역할 확대====&lt;br /&gt;
* 침안계통의 업무가 확대되면서 새로운 기구가 등장했다. 1939년에는 방호과가 설치되어 방공, 소방, 수방에 관한 사무를 담당했다. 1940년에는 식민지 주민을 총동원하고 통제하기 위한 국민총력조선연맹이 신설되었고, 학무국에서 관장하던 국민총동원 업무가 관방으로 이속되었다.&lt;br /&gt;
====임전체제의 강화====&lt;br /&gt;
* 중일전쟁이 장기화되자 조선총독부는 국민정신의 발휘와 국민의 총훈련, 그리고 생산력 확충을 목표로 하는 '임전체제'를 강화하였다. 1941년과 1942년에는 기획부, 후생국 신설 및 내무국의 사정국으로 개편 · 강화 등이 이뤄졌다.&lt;br /&gt;
====관제개정 및 총무국 신설====&lt;br /&gt;
* 1942년 11월에는 일본이 대동아성을 설치하면서 '행정합리화'를 실시하였고, 후생국과 기획부를 폐지하고 총무국을 신설하는 등의 기구개편을 진행하였다.&lt;br /&gt;
====결전행정체제====&lt;br /&gt;
* 1943년에는 조선총독부 전체적으로 행정기구를 개편하여 '결전행정' 체제를 수립하였다. 이는 식량의 증산, 군수물자의 개발 증산, 육해수송력 증강, 징병 등을 목적으로 하는 일원적 통합체제로 대폭 축소 개편되었다.&lt;br /&gt;
====지방행정강화====&lt;br /&gt;
* 행정기구의 변화에 따라 지방행정기구의 권한과 기능을 확대, 강화하였다. 지방기구들을 통합시켜 지방관청의 종합행정력을 강화시키는 등 지방행정을 강화하는 노력이 이뤄졌다.&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참고문헌==&lt;br /&gt;
[[분류:박노수가옥, 걸어서 근현대사 속으로]]&lt;/div&gt;</summary>
		<author><name>코리아참외</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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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조선총독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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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8T04:10:3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코리아참외: /* 개요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파일:조선총독부_청사.jpg]]&lt;br /&gt;
===제1기(1910∼1919)===&lt;br /&gt;
====설립과 초기 조직====&lt;br /&gt;
* 1910년 8월 29일에 「조선총독부 설치에 관한 건」(칙령 318호)이 공포되어 조선총독부가 설립되었다. 초기에는 통감부와 소속관서를 존속시키고, 통감에게 조선총독의 일부 직무를 맡기는 형태였다.&lt;br /&gt;
====조직구조====&lt;br /&gt;
* 조선총독부는 총독을 중심으로 정무총감을 두고 1관방 5부로 구성되었다. 내무부, 탁지부, 농상공부 등은 대한제국의 기관을 일부 축소하고 총독부의 소속으로 편입시켰다.&lt;br /&gt;
====중추원====&lt;br /&gt;
* 중추원은 조선총독의 자문기관으로 설치되었고, 주로 식민지 통치에 필요한 자문을 제공했다. 대한제국의 고등관 출신의 인사들도 중추원에서 자문에 참여했다.&lt;br /&gt;
====경찰 체제====&lt;br /&gt;
* 헌병경찰제가 도입되어 군사적 지배가 강조되었으며, 경찰기구는 헌병대사령부-각도 헌병대-헌병분대 구조로 조직되었다.&lt;br /&gt;
====사법기관====&lt;br /&gt;
* 사법부는 통감부사법청과 통감부재판소를 설치하고, 3심4급제의 재판소를 구성하여 조선의 사법권을 통제했다&lt;br /&gt;
===제2기(1920∼1936)===&lt;br /&gt;
==='''3·1운동 이후의 변화'''===&lt;br /&gt;
* 3·1운동을 계기로 1919년 8월 19일에 조선총독부관제 개정(칙령 제386호)이 이루어졌다. 총독의 권한 확장과 헌병경찰제의 폐지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lt;br /&gt;
====경찰체제 변화====&lt;br /&gt;
* 헌병경찰제가 폐지되고, 일반경찰체제로 전환되었다. 도지사가 경찰 권한을 행사하게 되었으며, 지역에 경찰서와 주재소가 설치되었다.&lt;br /&gt;
====중앙조직변경====&lt;br /&gt;
* 내무부, 탁지부, 농상공부, 사법부 등을 내무국, 재무국, 식산국, 법무국 등으로 변경하고, 경무총감부를 폐지하고 경무국을 신설하여 중앙 조직을 조정하였다.&lt;br /&gt;
====기타변화====&lt;br /&gt;
* 부국과를 서무부, 토목부, 철도부로 변경하고, 조선총독부의 6국3부제로 조직을 재편했다.&lt;br /&gt;
===제3기(1937~1945)전시체제===&lt;br /&gt;
====자원 동원 및 기획부 설립====&lt;br /&gt;
* 전시체제의 핵심은 조선의 인적과 물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전쟁 수행에 동원하기 위한 기획부 설립이다. 조선총독부는 1937년 9월에 자원조사와 총동원계획을 담당하는 자원과를 설립하였고, 1939년에는 물자 동원 및 생산력 확충 계획을 수립하는 기획부를 신설하였다.&lt;br /&gt;
====신설된 기구 및 역할 확대====&lt;br /&gt;
* 침안계통의 업무가 확대되면서 새로운 기구가 등장했다. 1939년에는 방호과가 설치되어 방공, 소방, 수방에 관한 사무를 담당했다. 1940년에는 식민지 주민을 총동원하고 통제하기 위한 국민총력조선연맹이 신설되었고, 학무국에서 관장하던 국민총동원 업무가 관방으로 이속되었다.&lt;br /&gt;
====임전체제의 강화====&lt;br /&gt;
* 중일전쟁이 장기화되자 조선총독부는 국민정신의 발휘와 국민의 총훈련, 그리고 생산력 확충을 목표로 하는 '임전체제'를 강화하였다. 1941년과 1942년에는 기획부, 후생국 신설 및 내무국의 사정국으로 개편 · 강화 등이 이뤄졌다.&lt;br /&gt;
====관제개정 및 총무국 신설====&lt;br /&gt;
* 1942년 11월에는 일본이 대동아성을 설치하면서 '행정합리화'를 실시하였고, 후생국과 기획부를 폐지하고 총무국을 신설하는 등의 기구개편을 진행하였다.&lt;br /&gt;
====결전행정체제====&lt;br /&gt;
* 1943년에는 조선총독부 전체적으로 행정기구를 개편하여 '결전행정' 체제를 수립하였다. 이는 식량의 증산, 군수물자의 개발 증산, 육해수송력 증강, 징병 등을 목적으로 하는 일원적 통합체제로 대폭 축소 개편되었다.&lt;br /&gt;
====지방행정강화====&lt;br /&gt;
* 행정기구의 변화에 따라 지방행정기구의 권한과 기능을 확대, 강화하였다. 지방기구들을 통합시켜 지방관청의 종합행정력을 강화시키는 등 지방행정을 강화하는 노력이 이뤄졌다.&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참고문헌==&lt;br /&gt;
[[분류:박노수가옥, 걸어서 근현대사 속으로]]&lt;/div&gt;</summary>
		<author><name>코리아참외</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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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div&gt;&lt;/div&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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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개요==&lt;br /&gt;
===제1기(1910∼1919)===&lt;br /&gt;
====설립과 초기 조직====&lt;br /&gt;
* 1910년 8월 29일에 「조선총독부 설치에 관한 건」(칙령 318호)이 공포되어 조선총독부가 설립되었다. 초기에는 통감부와 소속관서를 존속시키고, 통감에게 조선총독의 일부 직무를 맡기는 형태였다.&lt;br /&gt;
====조직구조====&lt;br /&gt;
* 조선총독부는 총독을 중심으로 정무총감을 두고 1관방 5부로 구성되었다. 내무부, 탁지부, 농상공부 등은 대한제국의 기관을 일부 축소하고 총독부의 소속으로 편입시켰다.&lt;br /&gt;
====중추원====&lt;br /&gt;
* 중추원은 조선총독의 자문기관으로 설치되었고, 주로 식민지 통치에 필요한 자문을 제공했다. 대한제국의 고등관 출신의 인사들도 중추원에서 자문에 참여했다.&lt;br /&gt;
====경찰 체제====&lt;br /&gt;
* 헌병경찰제가 도입되어 군사적 지배가 강조되었으며, 경찰기구는 헌병대사령부-각도 헌병대-헌병분대 구조로 조직되었다.&lt;br /&gt;
====사법기관====&lt;br /&gt;
* 사법부는 통감부사법청과 통감부재판소를 설치하고, 3심4급제의 재판소를 구성하여 조선의 사법권을 통제했다&lt;br /&gt;
===제2기(1920∼1936)===&lt;br /&gt;
==='''3·1운동 이후의 변화'''===&lt;br /&gt;
* 3·1운동을 계기로 1919년 8월 19일에 조선총독부관제 개정(칙령 제386호)이 이루어졌다. 총독의 권한 확장과 헌병경찰제의 폐지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lt;br /&gt;
====경찰체제 변화====&lt;br /&gt;
* 헌병경찰제가 폐지되고, 일반경찰체제로 전환되었다. 도지사가 경찰 권한을 행사하게 되었으며, 지역에 경찰서와 주재소가 설치되었다.&lt;br /&gt;
====중앙조직변경====&lt;br /&gt;
* 내무부, 탁지부, 농상공부, 사법부 등을 내무국, 재무국, 식산국, 법무국 등으로 변경하고, 경무총감부를 폐지하고 경무국을 신설하여 중앙 조직을 조정하였다.&lt;br /&gt;
====기타변화====&lt;br /&gt;
* 부국과를 서무부, 토목부, 철도부로 변경하고, 조선총독부의 6국3부제로 조직을 재편했다.&lt;br /&gt;
===제3기(1937~1945)전시체제===&lt;br /&gt;
====자원 동원 및 기획부 설립====&lt;br /&gt;
* 전시체제의 핵심은 조선의 인적과 물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전쟁 수행에 동원하기 위한 기획부 설립이다. 조선총독부는 1937년 9월에 자원조사와 총동원계획을 담당하는 자원과를 설립하였고, 1939년에는 물자 동원 및 생산력 확충 계획을 수립하는 기획부를 신설하였다.&lt;br /&gt;
====신설된 기구 및 역할 확대====&lt;br /&gt;
* 침안계통의 업무가 확대되면서 새로운 기구가 등장했다. 1939년에는 방호과가 설치되어 방공, 소방, 수방에 관한 사무를 담당했다. 1940년에는 식민지 주민을 총동원하고 통제하기 위한 국민총력조선연맹이 신설되었고, 학무국에서 관장하던 국민총동원 업무가 관방으로 이속되었다.&lt;br /&gt;
====임전체제의 강화====&lt;br /&gt;
* 중일전쟁이 장기화되자 조선총독부는 국민정신의 발휘와 국민의 총훈련, 그리고 생산력 확충을 목표로 하는 '임전체제'를 강화하였다. 1941년과 1942년에는 기획부, 후생국 신설 및 내무국의 사정국으로 개편 · 강화 등이 이뤄졌다.&lt;br /&gt;
====관제개정 및 총무국 신설====&lt;br /&gt;
* 1942년 11월에는 일본이 대동아성을 설치하면서 '행정합리화'를 실시하였고, 후생국과 기획부를 폐지하고 총무국을 신설하는 등의 기구개편을 진행하였다.&lt;br /&gt;
====결전행정체제====&lt;br /&gt;
* 1943년에는 조선총독부 전체적으로 행정기구를 개편하여 '결전행정' 체제를 수립하였다. 이는 식량의 증산, 군수물자의 개발 증산, 육해수송력 증강, 징병 등을 목적으로 하는 일원적 통합체제로 대폭 축소 개편되었다.&lt;br /&gt;
====지방행정강화====&lt;br /&gt;
* 행정기구의 변화에 따라 지방행정기구의 권한과 기능을 확대, 강화하였다. 지방기구들을 통합시켜 지방관청의 종합행정력을 강화시키는 등 지방행정을 강화하는 노력이 이뤄졌다.&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참고문헌==&lt;br /&gt;
[[분류:박노수가옥, 걸어서 근현대사 속으로]]&lt;/div&gt;</summary>
		<author><name>코리아참외</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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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A1%B0%EC%84%A0%EC%B4%9D%EB%8F%85%EB%B6%80&amp;diff=31670</id>
		<title>조선총독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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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8T04:05:2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코리아참외: /* =3·1운동 이후의 변화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제1기(1910∼1919)===&lt;br /&gt;
====설립과 초기 조직====&lt;br /&gt;
* 1910년 8월 29일에 「조선총독부 설치에 관한 건」(칙령 318호)이 공포되어 조선총독부가 설립되었다. 초기에는 통감부와 소속관서를 존속시키고, 통감에게 조선총독의 일부 직무를 맡기는 형태였다.&lt;br /&gt;
====조직구조====&lt;br /&gt;
* 조선총독부는 총독을 중심으로 정무총감을 두고 1관방 5부로 구성되었다. 내무부, 탁지부, 농상공부 등은 대한제국의 기관을 일부 축소하고 총독부의 소속으로 편입시켰다.&lt;br /&gt;
====중추원====&lt;br /&gt;
* 중추원은 조선총독의 자문기관으로 설치되었고, 주로 식민지 통치에 필요한 자문을 제공했다. 대한제국의 고등관 출신의 인사들도 중추원에서 자문에 참여했다.&lt;br /&gt;
====경찰 체제====&lt;br /&gt;
* 헌병경찰제가 도입되어 군사적 지배가 강조되었으며, 경찰기구는 헌병대사령부-각도 헌병대-헌병분대 구조로 조직되었다.&lt;br /&gt;
====사법기관====&lt;br /&gt;
* 사법부는 통감부사법청과 통감부재판소를 설치하고, 3심4급제의 재판소를 구성하여 조선의 사법권을 통제했다&lt;br /&gt;
===제2기(1920∼1936)===&lt;br /&gt;
==='''3·1운동 이후의 변화'''===&lt;br /&gt;
* 3·1운동을 계기로 1919년 8월 19일에 조선총독부관제 개정(칙령 제386호)이 이루어졌다. 총독의 권한 확장과 헌병경찰제의 폐지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lt;br /&gt;
====경찰체제 변화====&lt;br /&gt;
* 헌병경찰제가 폐지되고, 일반경찰체제로 전환되었다. 도지사가 경찰 권한을 행사하게 되었으며, 지역에 경찰서와 주재소가 설치되었다.&lt;br /&gt;
====중앙조직변경====&lt;br /&gt;
* 내무부, 탁지부, 농상공부, 사법부 등을 내무국, 재무국, 식산국, 법무국 등으로 변경하고, 경무총감부를 폐지하고 경무국을 신설하여 중앙 조직을 조정하였다.&lt;br /&gt;
====기타변화====&lt;br /&gt;
* 부국과를 서무부, 토목부, 철도부로 변경하고, 조선총독부의 6국3부제로 조직을 재편했다.&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참고문헌==&lt;br /&gt;
[[분류:박노수가옥, 걸어서 근현대사 속으로]]&lt;/div&gt;</summary>
		<author><name>코리아참외</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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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조선총독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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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8T04:05:1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코리아참외: /* 개요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제1기(1910∼1919)===&lt;br /&gt;
====설립과 초기 조직====&lt;br /&gt;
* 1910년 8월 29일에 「조선총독부 설치에 관한 건」(칙령 318호)이 공포되어 조선총독부가 설립되었다. 초기에는 통감부와 소속관서를 존속시키고, 통감에게 조선총독의 일부 직무를 맡기는 형태였다.&lt;br /&gt;
====조직구조====&lt;br /&gt;
* 조선총독부는 총독을 중심으로 정무총감을 두고 1관방 5부로 구성되었다. 내무부, 탁지부, 농상공부 등은 대한제국의 기관을 일부 축소하고 총독부의 소속으로 편입시켰다.&lt;br /&gt;
====중추원====&lt;br /&gt;
* 중추원은 조선총독의 자문기관으로 설치되었고, 주로 식민지 통치에 필요한 자문을 제공했다. 대한제국의 고등관 출신의 인사들도 중추원에서 자문에 참여했다.&lt;br /&gt;
====경찰 체제====&lt;br /&gt;
* 헌병경찰제가 도입되어 군사적 지배가 강조되었으며, 경찰기구는 헌병대사령부-각도 헌병대-헌병분대 구조로 조직되었다.&lt;br /&gt;
====사법기관====&lt;br /&gt;
* 사법부는 통감부사법청과 통감부재판소를 설치하고, 3심4급제의 재판소를 구성하여 조선의 사법권을 통제했다&lt;br /&gt;
===제2기(1920∼1936)===&lt;br /&gt;
===='''3·1운동 이후의 변화'''===&lt;br /&gt;
* 3·1운동을 계기로 1919년 8월 19일에 조선총독부관제 개정(칙령 제386호)이 이루어졌다. 총독의 권한 확장과 헌병경찰제의 폐지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lt;br /&gt;
====경찰체제 변화====&lt;br /&gt;
* 헌병경찰제가 폐지되고, 일반경찰체제로 전환되었다. 도지사가 경찰 권한을 행사하게 되었으며, 지역에 경찰서와 주재소가 설치되었다.&lt;br /&gt;
====중앙조직변경====&lt;br /&gt;
* 내무부, 탁지부, 농상공부, 사법부 등을 내무국, 재무국, 식산국, 법무국 등으로 변경하고, 경무총감부를 폐지하고 경무국을 신설하여 중앙 조직을 조정하였다.&lt;br /&gt;
====기타변화====&lt;br /&gt;
* 부국과를 서무부, 토목부, 철도부로 변경하고, 조선총독부의 6국3부제로 조직을 재편했다.&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참고문헌==&lt;br /&gt;
[[분류:박노수가옥, 걸어서 근현대사 속으로]]&lt;/div&gt;</summary>
		<author><name>코리아참외</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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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조선총독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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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8T04:03:0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코리아참외: /* 설립과 초기 조직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제1기===&lt;br /&gt;
====설립과 초기 조직====&lt;br /&gt;
* 1910년 8월 29일에 「조선총독부 설치에 관한 건」(칙령 318호)이 공포되어 조선총독부가 설립되었다. 초기에는 통감부와 소속관서를 존속시키고, 통감에게 조선총독의 일부 직무를 맡기는 형태였다.&lt;br /&gt;
====조직구조====&lt;br /&gt;
* 조선총독부는 총독을 중심으로 정무총감을 두고 1관방 5부로 구성되었다. 내무부, 탁지부, 농상공부 등은 대한제국의 기관을 일부 축소하고 총독부의 소속으로 편입시켰다.&lt;br /&gt;
====중추원====&lt;br /&gt;
* 중추원은 조선총독의 자문기관으로 설치되었고, 주로 식민지 통치에 필요한 자문을 제공했다. 대한제국의 고등관 출신의 인사들도 중추원에서 자문에 참여했다.&lt;br /&gt;
====경찰 체제====&lt;br /&gt;
* 헌병경찰제가 도입되어 군사적 지배가 강조되었으며, 경찰기구는 헌병대사령부-각도 헌병대-헌병분대 구조로 조직되었다.&lt;br /&gt;
====사법기관====&lt;br /&gt;
* 사법부는 통감부사법청과 통감부재판소를 설치하고, 3심4급제의 재판소를 구성하여 조선의 사법권을 통제했다&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참고문헌==&lt;br /&gt;
[[분류:박노수가옥, 걸어서 근현대사 속으로]]&lt;/div&gt;</summary>
		<author><name>코리아참외</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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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조선총독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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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8T04:01:3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코리아참외: /* 설립과 초기 조직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제1기===&lt;br /&gt;
====설립과 초기 조직====&lt;br /&gt;
* 1910년 8월 29일에 「조선총독부 설치에 관한 건」(칙령 318호)이 공포되어 조선총독부가 설립되었다. 초기에는 통감부와 소속관서를 존속시키고, 통감에게 조선총독의 일부 직무를 맡기는 형태였다.&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참고문헌==&lt;br /&gt;
[[분류:박노수가옥, 걸어서 근현대사 속으로]]&lt;/div&gt;</summary>
		<author><name>코리아참외</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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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조선총독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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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8T04:01:1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코리아참외: 새 문서: ==개요== ===제1기=== ====설립과 초기 조직==== ==각주== ==참고문헌== 분류:박노수가옥, 걸어서 근현대사 속으로&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제1기===&lt;br /&gt;
====설립과 초기 조직====&lt;br /&gt;
==각주==&lt;br /&gt;
==참고문헌==&lt;br /&gt;
[[분류:박노수가옥, 걸어서 근현대사 속으로]]&lt;/div&gt;</summary>
		<author><name>코리아참외</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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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일양정</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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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8T02:34:4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코리아참외: &lt;/p&gt;
&lt;hr /&gt;
&lt;div&gt;=일양정=&lt;br /&gt;
[[파일:일양정.png|500픽셀]]&amp;lt;ref&amp;gt;김해경 . “벽수산장으로 본 근대정원의 조영기법 해석” (PDF). 《서울학연구》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일양정==&lt;br /&gt;
&lt;br /&gt;
 벽수산장 본채의 중심건물인 일양정은 윤덕영이 청휘각을 계승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새로 지은 건물로 양관 뒤쪽에 위치하여 본채 역할을 하는 한옥이였다. 본채 중에서 사랑채에 해당하는 ‘일양정’은 윤덕영이 손님 접대 등 공적인 장소로 활용한 중요 공간이다. 벽수산장의 주인인 윤덕영이 쓴 4편은 모두 일양정에 관한 글이다. 「일양정십팔영」은 일양정에서 즐길 수 있는 아름다운 풍광 18가지를 시로 읊은 것이다.&lt;br /&gt;
 &lt;br /&gt;
===년도별===&lt;br /&gt;
&lt;br /&gt;
 1875년에 지어졌다는 주장도 있고 벽수산장과 함께 1910년에 지어졌다는 주장도 있다. 1915년 지형도를 토대로 옥인동 47-269·161번지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였다.일양정은 1969년에 철거되었다.&lt;br /&gt;
&lt;br /&gt;
===특징===&lt;br /&gt;
 일양정은 정면 5칸의 장대석과 벽돌 조적으로 혼합 구성된 1.5m정도 높이의 단 위에 축조된 건물이다. 지붕의 처마끝의 빗물받이와 기단 형태로 보아 전통적인 한옥의 형태가 아니라 과도기적 양식을 보인다. 그러나 건물의 격은 각 기둥에 주련이 걸려있을 정도로 높다.&lt;br /&gt;
&lt;br /&gt;
=='''일양정십팔영'''==&lt;br /&gt;
===개요===&lt;br /&gt;
&lt;br /&gt;
 「일양정십팔영」은 일양정이 입지한 공간에서 향유할 수 있는 경관을 서술하고 있다. 일양정의 위치는 역사적 유래를 지닌 장소 였으면 윤덕영은 이 장소에서 즐길수있는 요소 자연물, 정원건축물, 정원구조물, 기상현상등을 향유대상으로서 구분하여 일양정십팔영을 작성하였다.정원 구조물로는 우물, 연못, 홍교, 뜰이 해당되며 각 구조물은 부연적 설명을 포함하였대. 항유대상에서 자연물의 비중이 높으면 주변의 기암절벽, 노송과 바위, 이끼, 단풍나무 계곡, 폭포, 시냇물, 숲이다. 또한 일양정에서의 향유 요소는 단지 경관뿐만 아니라 일시적 기상상황, 상쾌한 기운, 그늘, 눈, 달맞이가 포함된 공감각적인 요소까지 향유할려고 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steelblue; margin: 0; border: 3px solid MidnightNlue;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lt;font color=&amp;quot;White&amp;quot;&amp;gt;일양정 향유대상 온톨로지&amp;lt;/font&amp;gt;===&lt;br /&gt;
*일양정에서 향유할 수 있는 대상을 구분하였다.&lt;br /&gt;
**{{NetworkGraph| title=일양정.ls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클래스(Class)===&lt;br /&gt;
*자신이 설계한 클래스(Class)를 나열하고, 각각의 클래스의 의미를 설명하고, 클래스에 해당되는 노드를 작성합니다.&lt;br /&gt;
*표, 목록(*, #) 등 자유로운 텍스트 형식으로 작성해주세요.&lt;br /&gt;
*예:&lt;br /&gt;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color:white&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amp;quot; | 클래스 !! style=&amp;quot;width:30%&amp;quot; | 설명 !! style=&amp;quot;45%&amp;quot; | 노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제||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대표 키워드인 일양정을 주제로서 나타내었다 || 일양정&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내용||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일양정십팔영따르면 윤덕영은  면  일양정의 장소에서 항유 할수 있는 것들을 자연물이나 기상현상등으로 구분하여 작성하였다. 이 내용을 작성하였다.|| 백악한운 옥류창벽 가재감천 일양정좌 백미원도 고송청뢰 수석노태 화원소작 풍계만음 층암비폭 첩장제설 북각관등 동루요월 구지유어 홍교장수 고류음정 장림호경&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공간구분||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항유 대상의 위치를 구분하였다. || 외원 내원&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향유대상 ||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일양정십팔영 '내용'에 따른 향유대상 || 자연물 기상현상&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공감각적요소 ||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오감을 이용해서 향유대상을 느끼려고 하였음 || 촉각 청각&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관계성(Relation)===&lt;br /&gt;
*자신이 설계한 관계성(Relation)을 나열하고, 각각의 관계의 의미를 설명하고, 관계성에 해당되는 두 노드(source, target)를 작성합니다.&lt;br /&gt;
*표, 목록(*, #) 등 자유로운 텍스트 형식으로 작성해주세요.&lt;br /&gt;
*예:&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green&amp;quot;&amp;gt;'''에_해당하다'''&amp;lt;/span&amp;gt;&lt;br /&gt;
***설명: 내용에 실려있는 것을 의미하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인왕상기 → 일양정십팔영&lt;br /&gt;
***#백악한운 → 일양정십팔영&lt;br /&gt;
***#옥류창벽 → 일양정십팔영&lt;br /&gt;
***#가재감천 → 일양정십팔영&lt;br /&gt;
***#일양정좌 → 일양정십팔영&lt;br /&gt;
***#백미원도 → 일양정십팔영&lt;br /&gt;
***#고송청뢰 → 일양정십팔영&lt;br /&gt;
***#수석노태 → 일양정십팔영&lt;br /&gt;
***#화원소작 → 일양정십팔영&lt;br /&gt;
***#풍계만음 → 일양정십팔영&lt;br /&gt;
***#층암비폭 → 일양정십팔영&lt;br /&gt;
***#첩장제설 → 일양정십팔영&lt;br /&gt;
***#북각관등 → 일양정십팔영&lt;br /&gt;
***#동루요월 → 일양정십팔영&lt;br /&gt;
***#구지유어 → 일양정십팔영&lt;br /&gt;
***#홍교장수 → 일양정십팔영&lt;br /&gt;
***#고류음정 → 일양정십팔영&lt;br /&gt;
***#장림호경 → 일양정십팔영&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green&amp;quot;&amp;gt;'''에_위치이다'''&amp;lt;/span&amp;gt;&lt;br /&gt;
***설명: 향유할 수 있는 대상의 위치 관계를 나타내었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인왕상기 → 외원&lt;br /&gt;
***#백악한운 → 외원 &lt;br /&gt;
***#백미원도 → 외원&lt;br /&gt;
***#옥류창벽 → 내원&lt;br /&gt;
***#일양정좌 → 내원&lt;br /&gt;
***#고송청뢰 → 내원&lt;br /&gt;
***#수석노태 → 내원&lt;br /&gt;
***#화원소작 → 내원&lt;br /&gt;
***#풍계만음 → 내원&lt;br /&gt;
***#층암비폭 → 내원&lt;br /&gt;
***#첩장제설 → 내원&lt;br /&gt;
***#북각관등 → 내원&lt;br /&gt;
***#동루요월 → 내원&lt;br /&gt;
***#구지유어 → 내원&lt;br /&gt;
***#홍교장수 → 내원&lt;br /&gt;
***#고류음정 → 내원&lt;br /&gt;
***#장림호경 → 내원&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 인왕상기(仁王爽氣) 인왕산의 상쾌한 기운 &lt;br /&gt;
# 백악한운(白嶽閒雲) 백악산의 한가로운 구름&lt;br /&gt;
# 옥류창벽(玉流蒼壁) 옥류동의 푸르른 절벽&lt;br /&gt;
# 가재감천(稼齋藥泉) 가재우물의 효능 좋은 우물&lt;br /&gt;
# 일양정좌(一陽靜坐) 일양정의 고요한 자리&lt;br /&gt;
# 백미원도(百美遠桃) 만발한 저 멀리 복숭아꽃&lt;br /&gt;
# 고송청뢰(古松淸籟) 늙은 소나무와 청아한 울림소리&lt;br /&gt;
# 수석노태(壽石老苔) 아름다운 바위와 오래된 이끼&lt;br /&gt;
# 화원소작(花園小酌) 꽃밭의 간단한 술자리&lt;br /&gt;
# 풍계만음(楓溪晩吟) 단풍나무 계곡의 느린 노래&lt;br /&gt;
# 층암비폭(層巖飛瀑) 켜켜히 바위와 날아갈듯한 폭포&lt;br /&gt;
# 첩장제설(疊嶂霽雪) 켜켜히 싸인 산에 개인 눈&lt;br /&gt;
# 북각관등(北閣觀燈) 북쪽 건물에서 바라본 등&lt;br /&gt;
# 동루요월(東樓邀月) 동쪽 루정에서의 달맞이&lt;br /&gt;
# 구지유어(龜池遊漁) 거북바위 연못에서 노니는 물고기&lt;br /&gt;
# 홍교장수(虹橋漲水) 무지개 다리의 넘치는 물&lt;br /&gt;
# 고류음정(高柳陰庭) 키큰 버드나무가 있는 그늘진 뜰&lt;br /&gt;
# 장림호경(長林護境) 긴 숲의 그윽한 경치&lt;br /&gt;
==참고문헌==&lt;br /&gt;
김해경 . “벽수산장으로 본 근대정원의 조영기법 해석” (PDF). 《서울학연구》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lt;br /&gt;
==각주==&lt;br /&gt;
[[분류:박노수가옥, 걸어서 근현대사 속으로]]&lt;/div&gt;</summary>
		<author><name>코리아참외</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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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일양정</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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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8T02:33:5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코리아참외: /* 일양정 */&lt;/p&gt;
&lt;hr /&gt;
&lt;div&gt;=일양정=&lt;br /&gt;
[[파일:일양정.png|500픽셀]]&amp;lt;ref&amp;gt;김해경 . “벽수산장으로 본 근대정원의 조영기법 해석” (PDF). 《서울학연구》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일양정==&lt;br /&gt;
&lt;br /&gt;
 벽수산장 본채의 중심건물인 일양정은 윤덕영이 청휘각을 계승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새로 지은 건물로 양관 뒤쪽에 위치하여 본채 역할을 하는 한옥이였다. 본채 중에서 사랑채에 해당하는 ‘일양정’은 윤덕영이 손님 접대 등 공적인 장소로 활용한 중요 공간이다. 벽수산장의 주인인 윤덕영이 쓴 4편은 모두 일양정에 관한 글이다. 「일양정십팔영」은 일양정에서 즐길 수 있는 아름다운 풍광 18가지를 시로 읊은 것이다.&lt;br /&gt;
 &lt;br /&gt;
===년도별===&lt;br /&gt;
&lt;br /&gt;
 1875년에 지어졌다는 주장도 있고 벽수산장과 함께 1910년에 지어졌다는 주장도 있다. 1915년 지형도를 토대로 옥인동 47-269·161번지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였다.일양정은 1969년에 철거되었다.&lt;br /&gt;
&lt;br /&gt;
===특징===&lt;br /&gt;
 일양정은 정면 5칸의 장대석과 벽돌 조적으로 혼합 구성된 1.5m정도 높이의 단 위에 축조된 건물이다. 지붕의 처마끝의 빗물받이와 기단 형태로 보아 전통적인 한옥의 형태가 아니라 과도기적 양식을 보인다. 그러나 건물의 격은 각 기둥에 주련이 걸려있을 정도로 높다.&lt;br /&gt;
&lt;br /&gt;
=='''일양정십팔영'''==&lt;br /&gt;
===개요===&lt;br /&gt;
&lt;br /&gt;
 「일양정십팔영」은 일양정이 입지한 공간에서 향유할 수 있는 경관을 서술하고 있다. 일양정의 위치는 역사적 유래를 지닌 장소 였으면 윤덕영은 이 장소에서 즐길수있는 요소 자연물, 정원건축물, 정원구조물, 기상현상등을 향유대상으로서 구분하여 일양정십팔영을 작성하였다.정원 구조물로는 우물, 연못, 홍교, 뜰이 해당되며 각 구조물은 부연적 설명을 포함하였대. 항유대상에서 자연물의 비중이 높으면 주변의 기암절벽, 노송과 바위, 이끼, 단풍나무 계곡, 폭포, 시냇물, 숲이다. 또한 일양정에서의 향유 요소는 단지 경관뿐만 아니라 일시적 기상상황, 상쾌한 기운, 그늘, 눈, 달맞이가 포함된 공감각적인 요소까지 향유할려고 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steelblue; margin: 0; border: 3px solid MidnightNlue;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lt;font color=&amp;quot;White&amp;quot;&amp;gt;일양정 향유대상 온톨로지&amp;lt;/font&amp;gt;===&lt;br /&gt;
*일양정에서 향유할 수 있는 대상을 구분하였다.&lt;br /&gt;
**{{NetworkGraph| title=일양정.ls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클래스(Class)===&lt;br /&gt;
*자신이 설계한 클래스(Class)를 나열하고, 각각의 클래스의 의미를 설명하고, 클래스에 해당되는 노드를 작성합니다.&lt;br /&gt;
*표, 목록(*, #) 등 자유로운 텍스트 형식으로 작성해주세요.&lt;br /&gt;
*예:&lt;br /&gt;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color:white&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amp;quot; | 클래스 !! style=&amp;quot;width:30%&amp;quot; | 설명 !! style=&amp;quot;45%&amp;quot; | 노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제||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대표 키워드인 일양정을 주제로서 나타내었다 || 일양정&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내용||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일양정십팔영따르면 윤덕영은  면  일양정의 장소에서 항유 할수 있는 것들을 자연물이나 기상현상등으로 구분하여 작성하였다. 이 내용을 작성하였다.|| 백악한운 옥류창벽 가재감천 일양정좌 백미원도 고송청뢰 수석노태 화원소작 풍계만음 층암비폭 첩장제설 북각관등 동루요월 구지유어 홍교장수 고류음정 장림호경&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공간구분||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항유 대상의 위치를 구분하였다. || 외원 내원&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향유대상 ||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일양정십팔영 '내용'에 따른 향유대상 || 자연물 기상현상&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공감각적요소 ||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오감을 이용해서 향유대상을 느끼려고 하였음 || 촉각 청각&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관계성(Relation)===&lt;br /&gt;
*자신이 설계한 관계성(Relation)을 나열하고, 각각의 관계의 의미를 설명하고, 관계성에 해당되는 두 노드(source, target)를 작성합니다.&lt;br /&gt;
*표, 목록(*, #) 등 자유로운 텍스트 형식으로 작성해주세요.&lt;br /&gt;
*예:&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green&amp;quot;&amp;gt;'''에_해당하다'''&amp;lt;/span&amp;gt;&lt;br /&gt;
***설명: 내용에 실려있는 것을 의미하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인왕상기 → 일양정십팔영&lt;br /&gt;
***#백악한운 → 일양정십팔영&lt;br /&gt;
***#옥류창벽 → 일양정십팔영&lt;br /&gt;
***#가재감천 → 일양정십팔영&lt;br /&gt;
***#일양정좌 → 일양정십팔영&lt;br /&gt;
***#백미원도 → 일양정십팔영&lt;br /&gt;
***#고송청뢰 → 일양정십팔영&lt;br /&gt;
***#수석노태 → 일양정십팔영&lt;br /&gt;
***#화원소작 → 일양정십팔영&lt;br /&gt;
***#풍계만음 → 일양정십팔영&lt;br /&gt;
***#층암비폭 → 일양정십팔영&lt;br /&gt;
***#첩장제설 → 일양정십팔영&lt;br /&gt;
***#북각관등 → 일양정십팔영&lt;br /&gt;
***#동루요월 → 일양정십팔영&lt;br /&gt;
***#구지유어 → 일양정십팔영&lt;br /&gt;
***#홍교장수 → 일양정십팔영&lt;br /&gt;
***#고류음정 → 일양정십팔영&lt;br /&gt;
***#장림호경 → 일양정십팔영&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green&amp;quot;&amp;gt;'''에_위치이다'''&amp;lt;/span&amp;gt;&lt;br /&gt;
***설명: 향유할 수 있는 대상의 위치 관계를 나타내었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인왕상기 → 외원&lt;br /&gt;
***#백악한운 → 외원 &lt;br /&gt;
***#백미원도 → 외원&lt;br /&gt;
***#옥류창벽 → 내원&lt;br /&gt;
***#일양정좌 → 내원&lt;br /&gt;
***#고송청뢰 → 내원&lt;br /&gt;
***#수석노태 → 내원&lt;br /&gt;
***#화원소작 → 내원&lt;br /&gt;
***#풍계만음 → 내원&lt;br /&gt;
***#층암비폭 → 내원&lt;br /&gt;
***#첩장제설 → 내원&lt;br /&gt;
***#북각관등 → 내원&lt;br /&gt;
***#동루요월 → 내원&lt;br /&gt;
***#구지유어 → 내원&lt;br /&gt;
***#홍교장수 → 내원&lt;br /&gt;
***#고류음정 → 내원&lt;br /&gt;
***#장림호경 → 내원&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 인왕상기(仁王爽氣) 인왕산의 상쾌한 기운 &lt;br /&gt;
# 백악한운(白嶽閒雲) 백악산의 한가로운 구름&lt;br /&gt;
# 옥류창벽(玉流蒼壁) 옥류동의 푸르른 절벽&lt;br /&gt;
# 가재감천(稼齋藥泉) 가재우물의 효능 좋은 우물&lt;br /&gt;
# 일양정좌(一陽靜坐) 일양정의 고요한 자리&lt;br /&gt;
# 백미원도(百美遠桃) 만발한 저 멀리 복숭아꽃&lt;br /&gt;
# 고송청뢰(古松淸籟) 늙은 소나무와 청아한 울림소리&lt;br /&gt;
# 수석노태(壽石老苔) 아름다운 바위와 오래된 이끼&lt;br /&gt;
# 화원소작(花園小酌) 꽃밭의 간단한 술자리&lt;br /&gt;
# 풍계만음(楓溪晩吟) 단풍나무 계곡의 느린 노래&lt;br /&gt;
# 층암비폭(層巖飛瀑) 켜켜히 바위와 날아갈듯한 폭포&lt;br /&gt;
# 첩장제설(疊嶂霽雪) 켜켜히 싸인 산에 개인 눈&lt;br /&gt;
# 북각관등(北閣觀燈) 북쪽 건물에서 바라본 등&lt;br /&gt;
# 동루요월(東樓邀月) 동쪽 루정에서의 달맞이&lt;br /&gt;
# 구지유어(龜池遊漁) 거북바위 연못에서 노니는 물고기&lt;br /&gt;
# 홍교장수(虹橋漲水) 무지개 다리의 넘치는 물&lt;br /&gt;
# 고류음정(高柳陰庭) 키큰 버드나무가 있는 그늘진 뜰&lt;br /&gt;
# 장림호경(長林護境) 긴 숲의 그윽한 경치&lt;br /&gt;
==참고문헌==&lt;br /&gt;
김해경 . “벽수산장으로 본 근대정원의 조영기법 해석” (PDF). 《서울학연구》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lt;br /&gt;
[[분류:박노수가옥, 걸어서 근현대사 속으로]]&lt;/div&gt;</summary>
		<author><name>코리아참외</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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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D%BC%EC%96%91%EC%A0%95&amp;diff=31642</id>
		<title>일양정</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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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8T02:32:3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코리아참외: /* 클래스(Class) */&lt;/p&gt;
&lt;hr /&gt;
&lt;div&gt;=일양정=&lt;br /&gt;
[[파일:일양정.png|500픽셀]]&lt;br /&gt;
&lt;br /&gt;
==일양정==&lt;br /&gt;
&lt;br /&gt;
 벽수산장 본채의 중심건물인 일양정은 윤덕영이 청휘각을 계승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새로 지은 건물로 양관 뒤쪽에 위치하여 본채 역할을 하는 한옥이였다. 본채 중에서 사랑채에 해당하는 ‘일양정’은 윤덕영이 손님 접대 등 공적인 장소로 활용한 중요 공간이다. 벽수산장의 주인인 윤덕영이 쓴 4편은 모두 일양정에 관한 글이다. 「일양정십팔영」은 일양정에서 즐길 수 있는 아름다운 풍광 18가지를 시로 읊은 것이다.&lt;br /&gt;
 &lt;br /&gt;
===년도별===&lt;br /&gt;
&lt;br /&gt;
 1875년에 지어졌다는 주장도 있고 벽수산장과 함께 1910년에 지어졌다는 주장도 있다. 1915년 지형도를 토대로 옥인동 47-269·161번지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였다.일양정은 1969년에 철거되었다.&lt;br /&gt;
&lt;br /&gt;
===특징===&lt;br /&gt;
 일양정은 정면 5칸의 장대석과 벽돌 조적으로 혼합 구성된 1.5m정도 높이의 단 위에 축조된 건물이다. 지붕의 처마끝의 빗물받이와 기단 형태로 보아 전통적인 한옥의 형태가 아니라 과도기적 양식을 보인다. 그러나 건물의 격은 각 기둥에 주련이 걸려있을 정도로 높다.&lt;br /&gt;
&lt;br /&gt;
=='''일양정십팔영'''==&lt;br /&gt;
===개요===&lt;br /&gt;
&lt;br /&gt;
 「일양정십팔영」은 일양정이 입지한 공간에서 향유할 수 있는 경관을 서술하고 있다. 일양정의 위치는 역사적 유래를 지닌 장소 였으면 윤덕영은 이 장소에서 즐길수있는 요소 자연물, 정원건축물, 정원구조물, 기상현상등을 향유대상으로서 구분하여 일양정십팔영을 작성하였다.정원 구조물로는 우물, 연못, 홍교, 뜰이 해당되며 각 구조물은 부연적 설명을 포함하였대. 항유대상에서 자연물의 비중이 높으면 주변의 기암절벽, 노송과 바위, 이끼, 단풍나무 계곡, 폭포, 시냇물, 숲이다. 또한 일양정에서의 향유 요소는 단지 경관뿐만 아니라 일시적 기상상황, 상쾌한 기운, 그늘, 눈, 달맞이가 포함된 공감각적인 요소까지 향유할려고 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steelblue; margin: 0; border: 3px solid MidnightNlue;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lt;font color=&amp;quot;White&amp;quot;&amp;gt;일양정 향유대상 온톨로지&amp;lt;/font&amp;gt;===&lt;br /&gt;
*일양정에서 향유할 수 있는 대상을 구분하였다.&lt;br /&gt;
**{{NetworkGraph| title=일양정.ls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클래스(Class)===&lt;br /&gt;
*자신이 설계한 클래스(Class)를 나열하고, 각각의 클래스의 의미를 설명하고, 클래스에 해당되는 노드를 작성합니다.&lt;br /&gt;
*표, 목록(*, #) 등 자유로운 텍스트 형식으로 작성해주세요.&lt;br /&gt;
*예:&lt;br /&gt;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color:white&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amp;quot; | 클래스 !! style=&amp;quot;width:30%&amp;quot; | 설명 !! style=&amp;quot;45%&amp;quot; | 노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제||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대표 키워드인 일양정을 주제로서 나타내었다 || 일양정&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내용||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일양정십팔영따르면 윤덕영은  면  일양정의 장소에서 항유 할수 있는 것들을 자연물이나 기상현상등으로 구분하여 작성하였다. 이 내용을 작성하였다.|| 백악한운 옥류창벽 가재감천 일양정좌 백미원도 고송청뢰 수석노태 화원소작 풍계만음 층암비폭 첩장제설 북각관등 동루요월 구지유어 홍교장수 고류음정 장림호경&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공간구분||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항유 대상의 위치를 구분하였다. || 외원 내원&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향유대상 ||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일양정십팔영 '내용'에 따른 향유대상 || 자연물 기상현상&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공감각적요소 ||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오감을 이용해서 향유대상을 느끼려고 하였음 || 촉각 청각&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관계성(Relation)===&lt;br /&gt;
*자신이 설계한 관계성(Relation)을 나열하고, 각각의 관계의 의미를 설명하고, 관계성에 해당되는 두 노드(source, target)를 작성합니다.&lt;br /&gt;
*표, 목록(*, #) 등 자유로운 텍스트 형식으로 작성해주세요.&lt;br /&gt;
*예:&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green&amp;quot;&amp;gt;'''에_해당하다'''&amp;lt;/span&amp;gt;&lt;br /&gt;
***설명: 내용에 실려있는 것을 의미하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인왕상기 → 일양정십팔영&lt;br /&gt;
***#백악한운 → 일양정십팔영&lt;br /&gt;
***#옥류창벽 → 일양정십팔영&lt;br /&gt;
***#가재감천 → 일양정십팔영&lt;br /&gt;
***#일양정좌 → 일양정십팔영&lt;br /&gt;
***#백미원도 → 일양정십팔영&lt;br /&gt;
***#고송청뢰 → 일양정십팔영&lt;br /&gt;
***#수석노태 → 일양정십팔영&lt;br /&gt;
***#화원소작 → 일양정십팔영&lt;br /&gt;
***#풍계만음 → 일양정십팔영&lt;br /&gt;
***#층암비폭 → 일양정십팔영&lt;br /&gt;
***#첩장제설 → 일양정십팔영&lt;br /&gt;
***#북각관등 → 일양정십팔영&lt;br /&gt;
***#동루요월 → 일양정십팔영&lt;br /&gt;
***#구지유어 → 일양정십팔영&lt;br /&gt;
***#홍교장수 → 일양정십팔영&lt;br /&gt;
***#고류음정 → 일양정십팔영&lt;br /&gt;
***#장림호경 → 일양정십팔영&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green&amp;quot;&amp;gt;'''에_위치이다'''&amp;lt;/span&amp;gt;&lt;br /&gt;
***설명: 향유할 수 있는 대상의 위치 관계를 나타내었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인왕상기 → 외원&lt;br /&gt;
***#백악한운 → 외원 &lt;br /&gt;
***#백미원도 → 외원&lt;br /&gt;
***#옥류창벽 → 내원&lt;br /&gt;
***#일양정좌 → 내원&lt;br /&gt;
***#고송청뢰 → 내원&lt;br /&gt;
***#수석노태 → 내원&lt;br /&gt;
***#화원소작 → 내원&lt;br /&gt;
***#풍계만음 → 내원&lt;br /&gt;
***#층암비폭 → 내원&lt;br /&gt;
***#첩장제설 → 내원&lt;br /&gt;
***#북각관등 → 내원&lt;br /&gt;
***#동루요월 → 내원&lt;br /&gt;
***#구지유어 → 내원&lt;br /&gt;
***#홍교장수 → 내원&lt;br /&gt;
***#고류음정 → 내원&lt;br /&gt;
***#장림호경 → 내원&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 인왕상기(仁王爽氣) 인왕산의 상쾌한 기운 &lt;br /&gt;
# 백악한운(白嶽閒雲) 백악산의 한가로운 구름&lt;br /&gt;
# 옥류창벽(玉流蒼壁) 옥류동의 푸르른 절벽&lt;br /&gt;
# 가재감천(稼齋藥泉) 가재우물의 효능 좋은 우물&lt;br /&gt;
# 일양정좌(一陽靜坐) 일양정의 고요한 자리&lt;br /&gt;
# 백미원도(百美遠桃) 만발한 저 멀리 복숭아꽃&lt;br /&gt;
# 고송청뢰(古松淸籟) 늙은 소나무와 청아한 울림소리&lt;br /&gt;
# 수석노태(壽石老苔) 아름다운 바위와 오래된 이끼&lt;br /&gt;
# 화원소작(花園小酌) 꽃밭의 간단한 술자리&lt;br /&gt;
# 풍계만음(楓溪晩吟) 단풍나무 계곡의 느린 노래&lt;br /&gt;
# 층암비폭(層巖飛瀑) 켜켜히 바위와 날아갈듯한 폭포&lt;br /&gt;
# 첩장제설(疊嶂霽雪) 켜켜히 싸인 산에 개인 눈&lt;br /&gt;
# 북각관등(北閣觀燈) 북쪽 건물에서 바라본 등&lt;br /&gt;
# 동루요월(東樓邀月) 동쪽 루정에서의 달맞이&lt;br /&gt;
# 구지유어(龜池遊漁) 거북바위 연못에서 노니는 물고기&lt;br /&gt;
# 홍교장수(虹橋漲水) 무지개 다리의 넘치는 물&lt;br /&gt;
# 고류음정(高柳陰庭) 키큰 버드나무가 있는 그늘진 뜰&lt;br /&gt;
# 장림호경(長林護境) 긴 숲의 그윽한 경치&lt;br /&gt;
==참고문헌==&lt;br /&gt;
김해경 . “벽수산장으로 본 근대정원의 조영기법 해석” (PDF). 《서울학연구》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lt;br /&gt;
[[분류:박노수가옥, 걸어서 근현대사 속으로]]&lt;/div&gt;</summary>
		<author><name>코리아참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8%A5%EC%9D%B8%EB%8F%99%EC%84%9C%EC%9A%A9%ED%83%9D%EA%B0%80&amp;diff=31640</id>
		<title>옥인동서용택가</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8%A5%EC%9D%B8%EB%8F%99%EC%84%9C%EC%9A%A9%ED%83%9D%EA%B0%80&amp;diff=31640"/>
		<updated>2023-12-08T02:30:1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코리아참외: &lt;/p&gt;
&lt;hr /&gt;
&lt;div&gt;==옥인동서용택가==&lt;br /&gt;
* 윤덕영의 소실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1910년대 지어진 한옥은 당시에는 '윤덕영의 소실댁'으로 불렸다. 1955년 일부가 서용택에게 매각되었고 해방이후 '서용택가'로 불리게 되었다.&amp;lt;br/&amp;gt;&lt;br /&gt;
* 1977년 순정효황후가 살았던 집으로 알려져 문화재에 지정되었지만 이후 순정효황후가 살았던 근거가 없고 부식된 곳과 파손된 벽등으로 인해 1997년 민속 문화재 지정이 해지되었다.&amp;lt;br/&amp;gt;&lt;br /&gt;
&lt;br /&gt;
* 이 건물은 벽수산장 경내에 있던 여러 건물 가운데, 윤덕영의 소실(小室)&amp;lt;ref&amp;gt;첩&amp;lt;/ref&amp;gt;을 위하여 건축한 한옥이다.&lt;br /&gt;
&lt;br /&gt;
* 남산골 한옥마을에는 이 건물을 본따 재현한 한옥이 있다.&amp;lt;br/&amp;gt;[[파일:남산한옥마을.png|250px]]&amp;lt;br/&amp;gt;&lt;br /&gt;
&lt;br /&gt;
==개요==&lt;br /&gt;
[[파일:옥인동서용택가.png|250px]]&amp;lt;br/&amp;gt;&lt;br /&gt;
&lt;br /&gt;
*옥인동서용택가(玉仁洞徐龍澤家)&amp;lt;br/&amp;gt;&lt;br /&gt;
*민속문화재 제 23호&amp;lt;br/&amp;gt;&lt;br /&gt;
**1977년 3월 17일 지정&amp;lt;br/&amp;gt;&lt;br /&gt;
**1997년 2월 20일 해지&amp;lt;br/&amp;gt;&lt;br /&gt;
*시대: 일제 강점기&amp;lt;br/&amp;gt;&lt;br /&gt;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47-133&amp;lt;br/&amp;gt;&lt;br /&gt;
*정보: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 포털 정보&lt;br /&gt;
&lt;br /&gt;
==건물구조==&lt;br /&gt;
[[파일:1998년_현황_측면도.png|250px]]&lt;br /&gt;
*대문: 수십단의 ㄱ자로 꺾인 돌계단&amp;lt;br/&amp;gt;&lt;br /&gt;
*안채: ㄷ자형 평면, 4칸반 크기의 대청 중앙에 위치&amp;lt;br/&amp;gt;&lt;br /&gt;
*안채 구성: 안방, 부엌, 찬방, 건넌방, 마루방, 아랫방 등&amp;lt;br/&amp;gt;&lt;br /&gt;
===사랑채===&lt;br /&gt;
*대문간 옆에 위치&amp;lt;br/&amp;gt;&lt;br /&gt;
*전면에서 중층으로 보이며, 높은 곳에 위치&amp;lt;br/&amp;gt;&lt;br /&gt;
*구성: 사랑방, 대청, 작은 마루방&amp;lt;br/&amp;gt;&lt;br /&gt;
&lt;br /&gt;
==건물특징==&lt;br /&gt;
&lt;br /&gt;
*가구는 일고주오량이다.&amp;lt;ref&amp;gt;한식 목조 건물에서, 지붕틀을 짤 때 높은 기둥 한 개를 써서 꾸민 오량지붕틀.&amp;lt;/ref&amp;gt;&amp;lt;br/&amp;gt;&lt;br /&gt;
*전후면 모두 부연을 단 겹처마이고, 후면과 측면 모두 툇마루 밖으로 #자살 창호를 달아 궁집과 같은 모습이다.&lt;br /&gt;
==참고문헌==&lt;br /&gt;
김해경 . “벽수산장으로 본 근대정원의 조영기법 해석” (PDF). 《서울학연구》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lt;br /&gt;
==각주==&lt;br /&gt;
&lt;br /&gt;
[[분류:박노수가옥, 걸어서 근현대사 속으로]]&lt;/div&gt;</summary>
		<author><name>코리아참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B2%BD%EC%88%98%EC%82%B0%EC%9E%A5&amp;diff=31639</id>
		<title>벽수산장</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B2%BD%EC%88%98%EC%82%B0%EC%9E%A5&amp;diff=31639"/>
		<updated>2023-12-08T02:29:5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코리아참외: &lt;/p&gt;
&lt;hr /&gt;
&lt;div&gt;=='''벽수산장 양관'''==&lt;br /&gt;
[[파일:벽수산장.jpg]]&amp;lt;ref&amp;gt;친일파 윤덕영이 옥새 내주고 지은 '벽수산장' 자리에 들어선 것은?&amp;quot; 머니랜드, 2019. 12. 24. 11:00 수정, https://v.daum.net/v/5e001d3823b9d7597983d069. 2023년12월08일 접속.&amp;lt;/ref&amp;gt;&amp;lt;br/&amp;gt;&lt;br /&gt;
윤덕영은 벽수산장을 연회나 접객 용도로 사용하였다.&amp;lt;br/&amp;gt;&lt;br /&gt;
&lt;br /&gt;
=='''공간 형성과정'''==&lt;br /&gt;
* 윤덕영  매입&amp;lt;br/&amp;gt;&lt;br /&gt;
** 1910년 옥인동 47번지 매입을 하였다. 매입 배경에는 한일강제병합의 공로자로 총독부에서 받은 공채증권 46만원&amp;lt;ref&amp;gt; 1910년 1원은 100전이면 1원의 금가치는 순금 2푼(750㎎)으로 되어 있었다.1910년의 1원은 현재 5만원인 셈이다. 이 기준을 적용한다면 1910년에 약 1원 = 5만원, 1냥 = 5천원, 1전 = 500원, 1닢 =50원이 된다. 철저하게 현재 가치로만 환산하면 '''2300억원'''일걸이라고 추산된다.&amp;lt;/ref&amp;gt;의 역할이 컸다. 한일강제병합의 큰 공으로 다른 공로자보다 은사금을 더 받았다. 은사금은 보편적으로 3만원이었는데 그는 15배가 넘는 금액을 받은 것이다. 이 은사금은 옥인동 47번지로 일대를 매입하는 자금이었다. 윤덕영은 1910년이후 지속적인 부지 면적 증가를 하였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 1917년 순종의 도쿄방문 추진 성공으로 하세가와 총독에게 사례금을 받았고 1919년에는 윤덕영과 민병석이 덕수궁과 영성문 안쪽을 팔아서 이득을 챙겼다. 사례금으로 옥인동 47번지를 추가 매입하였고 1917년 16,628평으로 그해 옥인동 전체 토지면적인 총 33,583평의 49.5%이였다. 1921년에는 부태묘 문참봉 사건과 1924년에는 왕가에게 주는 친용금 횡령을 통해 돈을 모았다. 이처럼 옥인동 일대의 실질적인 부지 확장이 된 시기는 윤덕영이 불미스러운 사건에 거론되는 동안 계속 진행되었다. 1925년에는 중추원 고문으로 복직하여 정치적 재기를 노렸고 1927년에는 더욱 증가된 19,467.8평으로 옥인동 전체 총 36,361.83평인 53.54%를 소유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건축과정'''==&lt;br /&gt;
&lt;br /&gt;
* 벽수산장은 민영찬이 구득한 설계도면을 바탕으로 1913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공사 3년 만인 1917년 완공했다고 전해지지만 동아일보를 보면 1917년에도 외장은 구축되었으나 상세 부분과 내부 공사는 완료되지 않았다. 1910년에 매입했으나 1913년에 착공한 원인은 지반공사의 난관이 있었다. 이로 인해 중국인 청부업자가 공사를 두 번이나 포기해서 부분별로 공종을 분리하여 공사기간이 연장되었다고 했다.&lt;br /&gt;
&lt;br /&gt;
=='''특징'''==&lt;br /&gt;
&lt;br /&gt;
* 벽수산장의 건축양식은 석재혼입의 벽돌 2층으로 프랑스 계통의 르네상스 스타일이다. 석재는 각 독립주, 건물각부의 귓돌, 창호 주변에 사용되어 이외의 부재에 사용된 붉은 벽돌과의 조화를 이루는 형태이다. 벽수산장은 내외부의 화려함으로 한양의 아방궁이라 불렸다. 철재와 장식품, 타일 등을 독일에서 구입하는 등 외국 건축 자재만을 썼고 보일러 시설을 갖추었다. 응접실 천장에는 두꺼운 대형유리로 수족관을 만들어 금붕어를 기르기도 하여 ‘금붕어 집’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윤덕영의 친일 행각으로 벽수산장에 대한 당시 미디어의 기사는 사치스러운 건물이라는 부정적 표현을 사용되었다.&lt;br /&gt;
 &lt;br /&gt;
 『조선일보』 1926년 5월 31일자 “매도설이 훤전(喧傳)되는 송석원 양관 내력담” : 집 한채를 14, 5년이나 두고 건축하고도 오히려 필역(畢役)치 못하였다 하면 누구나 경이의 눈을 뜰 것이다. 그러나 그 건물은 삼십여만의 경성시민이 날마다 치어다 보는 한양의 서편 인왕산 아래에 있는 다갈색 연화제의 삼층양관이 그것이니 이 양관은 일국 부원군의 형님인 윤덕영 자작의 송석원이 그것이다. 세상에서는 이 건물이 송석원이라는 이름을 가졌으되 통칭 ‘한양 아방궁’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부르게 되었는데 이것만으로는 능히 이 건물이 얼마나 윤환미를 다 하였는 것을 엿볼 수 있었다. &amp;lt;ref&amp;gt; 『조선일보』 1926년 5월 31일 기사&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벽수산장은 능선에 위치하여 시각적인 우세성이 강한 건물이다. 실제 윤덕영이 생활하는 건물은 벽수산장의 후면에 입지한다. 이처럼 전면의 가시적 건물과 실제 거주 건물이 다른 것은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이 투영된 것이다. 건물 전면에 양식 건물을 세우고 후면에 한옥을 건립한 사례이다.&amp;lt;ref&amp;gt;김해경. “벽수산장으로 본 근대정원의 조영기법 해석” (PDF). 《서울학연구》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amp;lt;/ref&amp;gt;&lt;br /&gt;
&lt;br /&gt;
=='''벽수산장과 연계된 부속건물'''==&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steelblue; margin: 0; border: 3px solid MidnightNlue;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lt;font color=&amp;quot;White&amp;quot;&amp;gt;벽수산장  온톨로지&amp;lt;/font&amp;gt;===&lt;br /&gt;
*벽수산장 부속 건물&lt;br /&gt;
**{{NetworkGraph| title=벽수산장.lst}}&lt;br /&gt;
&lt;br /&gt;
&lt;br /&gt;
본채의 중심 건물인 일양정 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일양정&amp;lt;br/&amp;gt;&lt;br /&gt;
소실댁(옥인동 서용택가)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옥인동서용택가&amp;lt;br/&amp;gt;&lt;br /&gt;
김덕현 가옥(현 박노수 미술관)&amp;lt;br/&amp;gt;&lt;br /&gt;
=='''참고문헌'''==&lt;br /&gt;
김해경 . “벽수산장으로 본 근대정원의 조영기법 해석” (PDF). 《서울학연구》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lt;br /&gt;
=='''각주'''==&lt;br /&gt;
&lt;br /&gt;
[[분류:박노수가옥, 걸어서 근현대사 속으로]]&lt;/div&gt;</summary>
		<author><name>코리아참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D%BC%EC%96%91%EC%A0%95&amp;diff=31638</id>
		<title>일양정</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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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8T02:29:1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코리아참외: &lt;/p&gt;
&lt;hr /&gt;
&lt;div&gt;=일양정=&lt;br /&gt;
[[파일:일양정.png|500픽셀]]&lt;br /&gt;
&lt;br /&gt;
==일양정==&lt;br /&gt;
&lt;br /&gt;
 벽수산장 본채의 중심건물인 일양정은 윤덕영이 청휘각을 계승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새로 지은 건물로 양관 뒤쪽에 위치하여 본채 역할을 하는 한옥이였다. 본채 중에서 사랑채에 해당하는 ‘일양정’은 윤덕영이 손님 접대 등 공적인 장소로 활용한 중요 공간이다. 벽수산장의 주인인 윤덕영이 쓴 4편은 모두 일양정에 관한 글이다. 「일양정십팔영」은 일양정에서 즐길 수 있는 아름다운 풍광 18가지를 시로 읊은 것이다.&lt;br /&gt;
 &lt;br /&gt;
===년도별===&lt;br /&gt;
&lt;br /&gt;
 1875년에 지어졌다는 주장도 있고 벽수산장과 함께 1910년에 지어졌다는 주장도 있다. 1915년 지형도를 토대로 옥인동 47-269·161번지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였다.일양정은 1969년에 철거되었다.&lt;br /&gt;
&lt;br /&gt;
===특징===&lt;br /&gt;
 일양정은 정면 5칸의 장대석과 벽돌 조적으로 혼합 구성된 1.5m정도 높이의 단 위에 축조된 건물이다. 지붕의 처마끝의 빗물받이와 기단 형태로 보아 전통적인 한옥의 형태가 아니라 과도기적 양식을 보인다. 그러나 건물의 격은 각 기둥에 주련이 걸려있을 정도로 높다.&lt;br /&gt;
&lt;br /&gt;
=='''일양정십팔영'''==&lt;br /&gt;
===개요===&lt;br /&gt;
&lt;br /&gt;
 「일양정십팔영」은 일양정이 입지한 공간에서 향유할 수 있는 경관을 서술하고 있다. 일양정의 위치는 역사적 유래를 지닌 장소 였으면 윤덕영은 이 장소에서 즐길수있는 요소 자연물, 정원건축물, 정원구조물, 기상현상등을 향유대상으로서 구분하여 일양정십팔영을 작성하였다.정원 구조물로는 우물, 연못, 홍교, 뜰이 해당되며 각 구조물은 부연적 설명을 포함하였대. 항유대상에서 자연물의 비중이 높으면 주변의 기암절벽, 노송과 바위, 이끼, 단풍나무 계곡, 폭포, 시냇물, 숲이다. 또한 일양정에서의 향유 요소는 단지 경관뿐만 아니라 일시적 기상상황, 상쾌한 기운, 그늘, 눈, 달맞이가 포함된 공감각적인 요소까지 향유할려고 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steelblue; margin: 0; border: 3px solid MidnightNlue;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lt;font color=&amp;quot;White&amp;quot;&amp;gt;일양정 향유대상 온톨로지&amp;lt;/font&amp;gt;===&lt;br /&gt;
*일양정에서 향유할 수 있는 대상을 구분하였다.&lt;br /&gt;
**{{NetworkGraph| title=일양정.ls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클래스(Class)===&lt;br /&gt;
*자신이 설계한 클래스(Class)를 나열하고, 각각의 클래스의 의미를 설명하고, 클래스에 해당되는 노드를 작성합니다.&lt;br /&gt;
*표, 목록(*, #) 등 자유로운 텍스트 형식으로 작성해주세요.&lt;br /&gt;
*예:&lt;br /&gt;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color:white&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amp;quot; | 클래스 !! style=&amp;quot;width:30%&amp;quot; | 설명 !! style=&amp;quot;45%&amp;quot; | 노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제||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대표 키워드인 일양정을 주제로서 나타내었다 || 일양정&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내용||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일양정십팔영따르면 윤덕영은  면  일양정의 장소에서 항유 할수 있는 것들을 자연물이나 기상현상등으로 구분하여 작성하였다. 이 내용을 작성하였다.|| 백악한운 옥류창벽 가재감천 일양정좌 백미원도 고송청뢰 수석노태 화원소작 풍계만음 층암비폭 첩장제설 북각관등 동루요월 구지유어 홍교장수 고류음정 장림호경&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공간구분||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항유 대상의 위치를 구분하였다. || 외원 내원&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관계성(Relation)===&lt;br /&gt;
*자신이 설계한 관계성(Relation)을 나열하고, 각각의 관계의 의미를 설명하고, 관계성에 해당되는 두 노드(source, target)를 작성합니다.&lt;br /&gt;
*표, 목록(*, #) 등 자유로운 텍스트 형식으로 작성해주세요.&lt;br /&gt;
*예:&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green&amp;quot;&amp;gt;'''에_해당하다'''&amp;lt;/span&amp;gt;&lt;br /&gt;
***설명: 내용에 실려있는 것을 의미하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인왕상기 → 일양정십팔영&lt;br /&gt;
***#백악한운 → 일양정십팔영&lt;br /&gt;
***#옥류창벽 → 일양정십팔영&lt;br /&gt;
***#가재감천 → 일양정십팔영&lt;br /&gt;
***#일양정좌 → 일양정십팔영&lt;br /&gt;
***#백미원도 → 일양정십팔영&lt;br /&gt;
***#고송청뢰 → 일양정십팔영&lt;br /&gt;
***#수석노태 → 일양정십팔영&lt;br /&gt;
***#화원소작 → 일양정십팔영&lt;br /&gt;
***#풍계만음 → 일양정십팔영&lt;br /&gt;
***#층암비폭 → 일양정십팔영&lt;br /&gt;
***#첩장제설 → 일양정십팔영&lt;br /&gt;
***#북각관등 → 일양정십팔영&lt;br /&gt;
***#동루요월 → 일양정십팔영&lt;br /&gt;
***#구지유어 → 일양정십팔영&lt;br /&gt;
***#홍교장수 → 일양정십팔영&lt;br /&gt;
***#고류음정 → 일양정십팔영&lt;br /&gt;
***#장림호경 → 일양정십팔영&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green&amp;quot;&amp;gt;'''에_위치이다'''&amp;lt;/span&amp;gt;&lt;br /&gt;
***설명: 향유할 수 있는 대상의 위치 관계를 나타내었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인왕상기 → 외원&lt;br /&gt;
***#백악한운 → 외원 &lt;br /&gt;
***#백미원도 → 외원&lt;br /&gt;
***#옥류창벽 → 내원&lt;br /&gt;
***#일양정좌 → 내원&lt;br /&gt;
***#고송청뢰 → 내원&lt;br /&gt;
***#수석노태 → 내원&lt;br /&gt;
***#화원소작 → 내원&lt;br /&gt;
***#풍계만음 → 내원&lt;br /&gt;
***#층암비폭 → 내원&lt;br /&gt;
***#첩장제설 → 내원&lt;br /&gt;
***#북각관등 → 내원&lt;br /&gt;
***#동루요월 → 내원&lt;br /&gt;
***#구지유어 → 내원&lt;br /&gt;
***#홍교장수 → 내원&lt;br /&gt;
***#고류음정 → 내원&lt;br /&gt;
***#장림호경 → 내원&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 인왕상기(仁王爽氣) 인왕산의 상쾌한 기운 &lt;br /&gt;
# 백악한운(白嶽閒雲) 백악산의 한가로운 구름&lt;br /&gt;
# 옥류창벽(玉流蒼壁) 옥류동의 푸르른 절벽&lt;br /&gt;
# 가재감천(稼齋藥泉) 가재우물의 효능 좋은 우물&lt;br /&gt;
# 일양정좌(一陽靜坐) 일양정의 고요한 자리&lt;br /&gt;
# 백미원도(百美遠桃) 만발한 저 멀리 복숭아꽃&lt;br /&gt;
# 고송청뢰(古松淸籟) 늙은 소나무와 청아한 울림소리&lt;br /&gt;
# 수석노태(壽石老苔) 아름다운 바위와 오래된 이끼&lt;br /&gt;
# 화원소작(花園小酌) 꽃밭의 간단한 술자리&lt;br /&gt;
# 풍계만음(楓溪晩吟) 단풍나무 계곡의 느린 노래&lt;br /&gt;
# 층암비폭(層巖飛瀑) 켜켜히 바위와 날아갈듯한 폭포&lt;br /&gt;
# 첩장제설(疊嶂霽雪) 켜켜히 싸인 산에 개인 눈&lt;br /&gt;
# 북각관등(北閣觀燈) 북쪽 건물에서 바라본 등&lt;br /&gt;
# 동루요월(東樓邀月) 동쪽 루정에서의 달맞이&lt;br /&gt;
# 구지유어(龜池遊漁) 거북바위 연못에서 노니는 물고기&lt;br /&gt;
# 홍교장수(虹橋漲水) 무지개 다리의 넘치는 물&lt;br /&gt;
# 고류음정(高柳陰庭) 키큰 버드나무가 있는 그늘진 뜰&lt;br /&gt;
# 장림호경(長林護境) 긴 숲의 그윽한 경치&lt;br /&gt;
==참고문헌==&lt;br /&gt;
김해경 . “벽수산장으로 본 근대정원의 조영기법 해석” (PDF). 《서울학연구》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lt;br /&gt;
[[분류:박노수가옥, 걸어서 근현대사 속으로]]&lt;/div&gt;</summary>
		<author><name>코리아참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D%BC%EC%96%91%EC%A0%95&amp;diff=31637</id>
		<title>일양정</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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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8T02:28:4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코리아참외: &lt;/p&gt;
&lt;hr /&gt;
&lt;div&gt;=일양정=&lt;br /&gt;
[[파일:일양정.png|500픽셀]]&lt;br /&gt;
&lt;br /&gt;
==일양정==&lt;br /&gt;
&lt;br /&gt;
 벽수산장 본채의 중심건물인 일양정은 윤덕영이 청휘각을 계승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새로 지은 건물로 양관 뒤쪽에 위치하여 본채 역할을 하는 한옥이였다. 본채 중에서 사랑채에 해당하는 ‘일양정’은 윤덕영이 손님 접대 등 공적인 장소로 활용한 중요 공간이다. 벽수산장의 주인인 윤덕영이 쓴 4편은 모두 일양정에 관한 글이다. 「일양정십팔영」은 일양정에서 즐길 수 있는 아름다운 풍광 18가지를 시로 읊은 것이다.&lt;br /&gt;
 &lt;br /&gt;
===년도별===&lt;br /&gt;
&lt;br /&gt;
 1875년에 지어졌다는 주장도 있고 벽수산장과 함께 1910년에 지어졌다는 주장도 있다. 1915년 지형도를 토대로 옥인동 47-269·161번지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였다.일양정은 1969년에 철거되었다.&lt;br /&gt;
&lt;br /&gt;
===특징===&lt;br /&gt;
 일양정은 정면 5칸의 장대석과 벽돌 조적으로 혼합 구성된 1.5m정도 높이의 단 위에 축조된 건물이다. 지붕의 처마끝의 빗물받이와 기단 형태로 보아 전통적인 한옥의 형태가 아니라 과도기적 양식을 보인다. 그러나 건물의 격은 각 기둥에 주련이 걸려있을 정도로 높다.&lt;br /&gt;
&lt;br /&gt;
=='''일양정십팔영'''==&lt;br /&gt;
===개요===&lt;br /&gt;
&lt;br /&gt;
 「일양정십팔영」은 일양정이 입지한 공간에서 향유할 수 있는 경관을 서술하고 있다. 일양정의 위치는 역사적 유래를 지닌 장소 였으면 윤덕영은 이 장소에서 즐길수있는 요소 자연물, 정원건축물, 정원구조물, 기상현상등을 향유대상으로서 구분하여 일양정십팔영을 작성하였다.정원 구조물로는 우물, 연못, 홍교, 뜰이 해당되며 각 구조물은 부연적 설명을 포함하였대. 항유대상에서 자연물의 비중이 높으면 주변의 기암절벽, 노송과 바위, 이끼, 단풍나무 계곡, 폭포, 시냇물, 숲이다. 또한 일양정에서의 향유 요소는 단지 경관뿐만 아니라 일시적 기상상황, 상쾌한 기운, 그늘, 눈, 달맞이가 포함된 공감각적인 요소까지 향유할려고 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steelblue; margin: 0; border: 3px solid MidnightNlue;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amp;lt;font color=&amp;quot;White&amp;quot;&amp;gt;일양정 향유대상 온톨로지&amp;lt;/font&amp;gt;===&lt;br /&gt;
*일양정에서 향유할 수 있는 대상을 구분하였다.&lt;br /&gt;
**{{NetworkGraph| title=일양정.ls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클래스(Class)===&lt;br /&gt;
*자신이 설계한 클래스(Class)를 나열하고, 각각의 클래스의 의미를 설명하고, 클래스에 해당되는 노드를 작성합니다.&lt;br /&gt;
*표, 목록(*, #) 등 자유로운 텍스트 형식으로 작성해주세요.&lt;br /&gt;
*예:&lt;br /&gt;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color:white&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amp;quot; | 클래스 !! style=&amp;quot;width:30%&amp;quot; | 설명 !! style=&amp;quot;45%&amp;quot; | 노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제||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대표 키워드인 일양정을 주제로서 나타내었다 || 일양정&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내용||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일양정십팔영따르면 윤덕영은  면  일양정의 장소에서 항유 할수 있는 것들을 자연물이나 기상현상등으로 구분하여 작성하였다. 이 내용을 작성하였다.|| 백악한운 옥류창벽 가재감천 일양정좌 백미원도 고송청뢰 수석노태 화원소작 풍계만음 층암비폭 첩장제설 북각관등 동루요월 구지유어 홍교장수 고류음정 장림호경&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공간구분||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항유 대상의 위치를 구분하였다. || 외원 내원&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관계성(Relation)===&lt;br /&gt;
*자신이 설계한 관계성(Relation)을 나열하고, 각각의 관계의 의미를 설명하고, 관계성에 해당되는 두 노드(source, target)를 작성합니다.&lt;br /&gt;
*표, 목록(*, #) 등 자유로운 텍스트 형식으로 작성해주세요.&lt;br /&gt;
*예:&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green&amp;quot;&amp;gt;'''에_해당하다'''&amp;lt;/span&amp;gt;&lt;br /&gt;
***설명: 내용에 실려있는 것을 의미하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인왕상기 → 일양정십팔영&lt;br /&gt;
***#백악한운 → 일양정십팔영&lt;br /&gt;
***#옥류창벽 → 일양정십팔영&lt;br /&gt;
***#가재감천 → 일양정십팔영&lt;br /&gt;
***#일양정좌 → 일양정십팔영&lt;br /&gt;
***#백미원도 → 일양정십팔영&lt;br /&gt;
***#고송청뢰 → 일양정십팔영&lt;br /&gt;
***#수석노태 → 일양정십팔영&lt;br /&gt;
***#화원소작 → 일양정십팔영&lt;br /&gt;
***#풍계만음 → 일양정십팔영&lt;br /&gt;
***#층암비폭 → 일양정십팔영&lt;br /&gt;
***#첩장제설 → 일양정십팔영&lt;br /&gt;
***#북각관등 → 일양정십팔영&lt;br /&gt;
***#동루요월 → 일양정십팔영&lt;br /&gt;
***#구지유어 → 일양정십팔영&lt;br /&gt;
***#홍교장수 → 일양정십팔영&lt;br /&gt;
***#고류음정 → 일양정십팔영&lt;br /&gt;
***#장림호경 → 일양정십팔영&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green&amp;quot;&amp;gt;'''에_위치이다'''&amp;lt;/span&amp;gt;&lt;br /&gt;
***설명: 향유할 수 있는 대상의 위치 관계를 나타내었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인왕상기 → 외원&lt;br /&gt;
***#백악한운 → 외원 &lt;br /&gt;
***#백미원도 → 외원&lt;br /&gt;
***#옥류창벽 → 내원&lt;br /&gt;
***#일양정좌 → 내원&lt;br /&gt;
***#고송청뢰 → 내원&lt;br /&gt;
***#수석노태 → 내원&lt;br /&gt;
***#화원소작 → 내원&lt;br /&gt;
***#풍계만음 → 내원&lt;br /&gt;
***#층암비폭 → 내원&lt;br /&gt;
***#첩장제설 → 내원&lt;br /&gt;
***#북각관등 → 내원&lt;br /&gt;
***#동루요월 → 내원&lt;br /&gt;
***#구지유어 → 내원&lt;br /&gt;
***#홍교장수 → 내원&lt;br /&gt;
***#고류음정 → 내원&lt;br /&gt;
***#장림호경 → 내원&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 인왕상기(仁王爽氣) 인왕산의 상쾌한 기운 &lt;br /&gt;
# 백악한운(白嶽閒雲) 백악산의 한가로운 구름&lt;br /&gt;
# 옥류창벽(玉流蒼壁) 옥류동의 푸르른 절벽&lt;br /&gt;
# 가재감천(稼齋藥泉) 가재우물의 효능 좋은 우물&lt;br /&gt;
# 일양정좌(一陽靜坐) 일양정의 고요한 자리&lt;br /&gt;
# 백미원도(百美遠桃) 만발한 저 멀리 복숭아꽃&lt;br /&gt;
# 고송청뢰(古松淸籟) 늙은 소나무와 청아한 울림소리&lt;br /&gt;
# 수석노태(壽石老苔) 아름다운 바위와 오래된 이끼&lt;br /&gt;
# 화원소작(花園小酌) 꽃밭의 간단한 술자리&lt;br /&gt;
# 풍계만음(楓溪晩吟) 단풍나무 계곡의 느린 노래&lt;br /&gt;
# 층암비폭(層巖飛瀑) 켜켜히 바위와 날아갈듯한 폭포&lt;br /&gt;
# 첩장제설(疊嶂霽雪) 켜켜히 싸인 산에 개인 눈&lt;br /&gt;
# 북각관등(北閣觀燈) 북쪽 건물에서 바라본 등&lt;br /&gt;
# 동루요월(東樓邀月) 동쪽 루정에서의 달맞이&lt;br /&gt;
# 구지유어(龜池遊漁) 거북바위 연못에서 노니는 물고기&lt;br /&gt;
# 홍교장수(虹橋漲水) 무지개 다리의 넘치는 물&lt;br /&gt;
# 고류음정(高柳陰庭) 키큰 버드나무가 있는 그늘진 뜰&lt;br /&gt;
# 장림호경(長林護境) 긴 숲의 그윽한 경치&lt;br /&gt;
&lt;br /&gt;
[[분류:박노수가옥, 걸어서 근현대사 속으로]]&lt;/div&gt;</summary>
		<author><name>코리아참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B0%95%EB%85%B8%EC%88%98%EA%B0%80%EC%98%A5,_%EA%B1%B8%EC%96%B4%EC%84%9C_%EA%B7%BC%ED%98%84%EB%8C%80%EC%82%AC_%EC%86%8D%EC%9C%BC%EB%A1%9C&amp;diff=31636</id>
		<title>박노수가옥, 걸어서 근현대사 속으로</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B0%95%EB%85%B8%EC%88%98%EA%B0%80%EC%98%A5,_%EA%B1%B8%EC%96%B4%EC%84%9C_%EA%B7%BC%ED%98%84%EB%8C%80%EC%82%AC_%EC%86%8D%EC%9C%BC%EB%A1%9C&amp;diff=31636"/>
		<updated>2023-12-08T02:27:2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코리아참외: /* 팀원 */&lt;/p&gt;
&lt;hr /&gt;
&lt;div&gt;[[분류:박노수가옥, 걸어서 근현대사 속으로]] [[분류:배고파요]] [[분류:cxk]] [[분류:코리아참외]] [[분류:하수민]] [[분류:데자와]]&lt;br /&gt;
&lt;br /&gt;
=='''콘텐츠 주제'''==&lt;br /&gt;
[[파일:걸어서.jpg|가운데|500픽셀]]&lt;br /&gt;
==='''박노수가옥, 걸어서 근현대사 속으로'''===&lt;br /&gt;
여러분은 주변의 문화재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나요?&amp;lt;/br&amp;gt;&lt;br /&gt;
혹시 문화재가 박물관 안에만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나요?&amp;lt;/br&amp;gt;&lt;br /&gt;
그런 당신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박노수 가옥에서 출발하는 걸어서 근현대사 속으로!&lt;br /&gt;
&lt;br /&gt;
=='''팀원'''==&lt;br /&gt;
*김재민(2023130333) [[코리아참외]] &amp;lt;br/&amp;gt;&lt;br /&gt;
*박준형(2023130227) [[배고파요]]&amp;lt;br/&amp;gt;&lt;br /&gt;
*비명징(2022131135) [[cxk]]&amp;lt;br/&amp;gt;&lt;br /&gt;
*조아연(2023130204) [[데자와]]&amp;lt;br/&amp;gt;&lt;br /&gt;
*하수민&amp;lt;br/&amp;gt;&lt;br /&gt;
&lt;br /&gt;
=='''기획의도'''==&lt;br /&gt;
*박노수가옥은 일제강점기부터 근대까지 주요 인물들의 행적이 담긴 곳으로 근현대사뿐만 아니라 건축사, 미술사적으로도 의미있는 공간이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다. 이를 재조명하고자 박노수가옥을 중심으로 관련 인물과 근대 건축물들의 이야기를 펼쳐나갔다. 박노수가옥이 하나의 건축물에 불과해보이더라도, 이와 연관된 이야기들을 풀어내면 훨씬 더 많은 인물이나, 장소, 사건과 이어진다는 것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우리가 박노수가옥의 이야기를 풀어낸 것처럼 유명한 문화유산이 아니더라도, 그것이 담고 있는 역사적 의미는 풍부하기에 주변의, 혹은 유명하지 않은 문화유산에도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기획하였다.&lt;br /&gt;
&lt;br /&gt;
=='''온톨로지'''==&lt;br /&gt;
*자신이 설계한 콘텐츠의 온톨로지를 설명합니다.&lt;br /&gt;
*이 단락의 제일 상위에는 수업시간에 작성했던 전체 네트워크 그래프를 삽입합니다.&lt;br /&gt;
**{{NetworkGraph | title=박노수가옥.lst}}&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blue&amp;quot;&amp;gt;'''틀을 사용할때 입력할 부분입니다.''' &amp;lt;/font&amp;gt;&lt;br /&gt;
&amp;lt;br/&amp;gt;전체네트워크그래프를 각 팀별 파일명으로 변경&lt;br /&gt;
&lt;br /&gt;
=='''콘텐츠 구조'''==&lt;br /&gt;
&lt;br /&gt;
==='''클래스(Class)'''===&lt;br /&gt;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color:white&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0%&amp;quot; | 클래스 !! style=&amp;quot;width:30%&amp;quot; | 설명 !! style=&amp;quot;45%&amp;quot; | 노드&lt;br /&gt;
|-&lt;br /&gt;
|인물|| 박노수가옥과 관련된 인물들을 이 클래스에 정리하였다. || 박노수, 윤덕영, 박길룡, 윤덕영의 딸, 전형필&lt;br /&gt;
|-&lt;br /&gt;
|장소|| 박노수가옥이나 관련 인물들과 관련있는 장소를 이 클래스에 정리하였다. || 박노수가옥, 화식백화점, 종로구, 조선총독부, 경운동 민병옥 가옥, 서울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경성공업전문학교(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벽수산장(현 박노수가옥 인근), 혜화전문학교 본관(현 동국대학교), 평양대동공전교사(현 김책공업종합대학), 간송미술관 보화각, 박노수미술관, 박길룡건축사무소, 세종특별자치시 &lt;br /&gt;
|-&lt;br /&gt;
|미술품|| 인물이 창작한 미술품을 이 클래스에 정리하였다. || 선소운, 류하, 비마, 산수도&lt;br /&gt;
|-&lt;br /&gt;
|특징|| 인물이나 장소가 가지고 있는 특징을 이 클래스에 정리하였다. || 친일파, 한국화, 절충식 가옥, 서울시 문화재자료 1호, 서울시 1종 등록미술관, 화필인생&lt;br /&gt;
|-&lt;br /&gt;
|사건|| 역사적인 사건을 이 클래스에 정리하였다. || 한일병합조약(경술국치)&lt;br /&gt;
|}&lt;br /&gt;
&lt;br /&gt;
==='''관계성(Relation)'''===&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green&amp;quot;&amp;gt;'''~을/를 건축했다'''&amp;lt;/span&amp;gt;&lt;br /&gt;
**설명: 어떤 인물이 어떤 건물을 건축했는지 나타낸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박길룡 → 박노수가옥&lt;br /&gt;
**#박길룡 → 화신백화점&lt;br /&gt;
**#박길룡 → 경운동 민병옥 가옥&lt;br /&gt;
**#박길룡 → 간송미술관 보화각&lt;br /&gt;
**#박길룡 → 혜화전문학교 본관(현 동국대학교)&lt;br /&gt;
**#박길룡 → 평양대동공전교사(현 김책공업종합대학)&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green&amp;quot;&amp;gt;''' ~을/를 창작했다'''&amp;lt;/span&amp;gt;&lt;br /&gt;
**설명: 어떤 인물이 어떤 작품을 창작했는지 나타낸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박노수 → 류하&lt;br /&gt;
**#박노수 → 선소운&lt;br /&gt;
**#박노수 → 비마&lt;br /&gt;
**#박노수 → 산수도&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green&amp;quot;&amp;gt;'''~에 거주했다'''&amp;lt;/span&amp;gt;&lt;br /&gt;
**설명: 어떤 인물이 어떤 장소에 거주했는지 나타낸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박노수 → 박노수가옥&lt;br /&gt;
**#윤덕영 → 벽수산장(현 박노수가옥 인근)&lt;br /&gt;
**#윤덕영의 딸 → 박노수가옥&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green&amp;quot;&amp;gt;'''~에 해당한다'''&amp;lt;/span&amp;gt;&lt;br /&gt;
**설명: 인물이나 장소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나타낸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박노수 → 한국화&lt;br /&gt;
**#윤덕영 → 친일파&lt;br /&gt;
**#박노수가옥 → 절충식 가옥&lt;br /&gt;
**#박노수가옥 → 서울시 문화재자료 1호&lt;br /&gt;
**#박노수가옥 → 서울시 1종 등록미술관&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green&amp;quot;&amp;gt;'''~에서 태어났다'''&amp;lt;/span&amp;gt;&lt;br /&gt;
**설명: 어떤 인물이 어떤 장소에서 태어났는지 나타낸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박노수 → 세종특별자치시&lt;br /&gt;
**#박길룡 → 종로구&lt;br /&gt;
**#윤덕영 → 종로구&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green&amp;quot;&amp;gt;'''~소속이(었)다'''&amp;lt;/span&amp;gt;&lt;br /&gt;
**설명: 어떤 인물이 과거 혹은 현재에 소속된 곳을 나타낸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박노수 → 서울대학교&lt;br /&gt;
**#박노수 → 이화여자대학교&lt;br /&gt;
**#박길룡 → 조선총독부&lt;br /&gt;
**#박길룡 → 경성공업전문학교(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lt;br /&gt;
**#윤덕영 → 조선총독부&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green&amp;quot;&amp;gt;'''~전신이다'''&amp;lt;/span&amp;gt;&lt;br /&gt;
**설명: 과거의 장소가 현재 어느 곳으로 바뀌었는지 나타낸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박노수가옥 → 박노수미술관&lt;br /&gt;
**#경성공업전문학교(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 서울대학교&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green&amp;quot;&amp;gt;'''~의 현 위치'''&amp;lt;/span&amp;gt;&lt;br /&gt;
**설명: 사라진 어떤 장소의 현재 위치를 나타낸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화신백화점 → 종로구&lt;br /&gt;
**#조선총독부 → 종로구&lt;br /&gt;
**#벽수산장(현 박노수가옥 인근) → 종로구&lt;br /&gt;
**#박길룡건축사무소 → 종로구&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green&amp;quot;&amp;gt;'''~에 소재한다'''&amp;lt;/span&amp;gt;&lt;br /&gt;
**설명: 어떤 장소가 존재하는 장소를 나타낸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박노수가옥 → 종로구&lt;br /&gt;
**#경운동 민병옥 가옥 → 종로구&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green&amp;quot;&amp;gt;'''~을/를 전시한다'''&amp;lt;/span&amp;gt;&lt;br /&gt;
**설명: 어떤 전시를 하고 있는지 나타낸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박노수미술관 → 화필인생&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green&amp;quot;&amp;gt;'''~에 기여했다'''&amp;lt;/span&amp;gt;&lt;br /&gt;
**설명: 어떤 인물이 어떤 장소에 기여했는지 나타낸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윤덕영 → 박노수가옥&lt;br /&gt;
**#윤덕영 → 한일병합조약(경술국치)&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green&amp;quot;&amp;gt;'''~의 가족이다'''&amp;lt;/span&amp;gt;&lt;br /&gt;
**설명: 인물 간의 가족관계를 나타낸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윤덕영의 딸 → 윤덕영&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green&amp;quot;&amp;gt;'''~을/를 설립했다'''&amp;lt;/span&amp;gt;&lt;br /&gt;
**설명: 어떤 인물이 어떤 장소를 설립했는지 나타낸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박길룡 → 박길룡건축사무소&lt;br /&gt;
**#전형필 → 간송미술관 보화각&lt;br /&gt;
&lt;br /&gt;
=='''마인드맵'''==&lt;br /&gt;
* 주제 마인드맵&lt;br /&gt;
[[파일:유형문화재주제논의.png|가운데|700픽셀]]&lt;br /&gt;
 주제 논의 과정에서 따로 마인드맵을 작성하기 않고 한 명이 논의 내용을 타이핑하며 진행하였다.&lt;br /&gt;
 수시로 내용을 수정해 가면서 논의를 진행하였기에 논의 초반 내용은 나타나 있지 않지만, 초반의 경우 대한민국 내의 유형문화재 전반을 다루기로 했다.&lt;br /&gt;
 한국 문화재들 중에서도 크게 고대, 중세, 근현대 문화재로 나눈 후 하위 분류로 건축물, 공예품, 회화/서예 등으로 나누는 식으로 논의가 진행되었으나, 교수님의 피드백을 바탕으로 다루는 내용이 지나치게 광범위해질 것을 우려해 특정한 하나의 문화재를 중심으로 위키페이지를 작성하기로 결정하였다.&lt;br /&gt;
 이때 종로구 옥인동 박노수 미술관의 경우 건물 자체가 문화재로 지정된 동시에 현재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 독특하다고 여겨 박노수 미술관을 주제로 선정하였다.&lt;br /&gt;
 '박노수 미술관'이라는 명칭은 단순히 건축물의 미술사적 측면만 강조하는 것 같아 문화재 등록명인 '박노수가옥'으로 명칭을 통일하였다.&lt;br /&gt;
&lt;br /&gt;
* 노드 마인드맵&lt;br /&gt;
[[파일:박노수가옥마인드맵.jpg|가운데|900픽셀]]&lt;br /&gt;
 초반의 박노수가옥 관련 클래스(Class), 릴레이션(Relation), 노드(Node)는 다음과 같다.&lt;br /&gt;
 논의가 진행됨에 따라 클래스, 릴레이션 노드가 점차 구체화되고 다양해짐으로써 위와 같은 결과물이 나오게 되었다.&lt;br /&gt;
 클래스, 릴레이션, 노드 등은 논의 진행에 따라 달라졌지만 박노수가옥과 3명의 주요인물들을 중심으로 내용을 전개하는 흐름은 달라지지 않았다.&lt;br /&gt;
&lt;br /&gt;
=='''박노수가옥 타임라인'''==&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md6HbYd_PWYBF3_m0488S_WOZUR59pcgwr2sLF-bCy0&amp;amp;font=Default&amp;amp;lang=ko&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박노수가옥 지도'''==&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amp;quot;https://www.google.com/maps/d/embed?mid=1AQURnXJiW2aLz-oSp0Y56WhVuoUhH3g&amp;amp;ehbc=2E312F&amp;quot; width=&amp;quot;640&amp;quot; height=&amp;quot;480&amp;quot;&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 박노수와 관련있는 장소들은 초록색 마커, 박길룡과 관련 있는 장소들은 갈색 마커로, 윤덕영과 관련 있는 장소는 보라색 마커로, 2명 이상의 인물과 관련 있는 장소들은 파란색 마커를 사용해 표시하였다.&lt;br /&gt;
**초록색: 이화여자대학교, 청주상업고등학교(전 청주상업고등학교)&lt;br /&gt;
**갈색: 간송미술관(보화각), 동국대학교(전 혜화전문학교), 종로타워(전 화신백화점), 경운동 민병옥 가옥&lt;br /&gt;
**보라색: -&lt;br /&gt;
**파란색: 박노수가옥(박노수미술관)[박노수, 박길룡, 윤덕영], 서울대학교[박노수, 박길룡], 경복궁(전 조선총독부 청사)[박길룡, 윤덕영]&lt;br /&gt;
&lt;br /&gt;
* 청주대성고등학교(전 청주상업고등학교)를 제외하고는 박노수 가옥 및 주요인물들 관련 장소들이 모두 서울에 밀집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lt;br /&gt;
** 윤덕영과 빅길룡 둘 다 출신지 및 주요 활동지가 서울이라는 점에서 윤덕영 및 박길룡 관련 장소들은 모두 서울에 위치해 있다.&lt;br /&gt;
** 위의 두 인물과 달리 박노수는 충청남도 출신이라는 점에서 그의 모교이자 충청도에 위치한 청주대성고등학교(전 청주상업고등학교)가 유일한 지도 상의 서울 지역 외 장소이다. 그리고 박노수의 대학 입학 이후 관련 장소들은 모두 서울에 위치해 있다.&lt;br /&gt;
&lt;br /&gt;
=='''박노수가옥 관련 위키페이지'''==&lt;br /&gt;
&lt;br /&gt;
===[[박노수가옥(박노수미술관)]]===&lt;br /&gt;
&lt;br /&gt;
====[[절충식 가옥]]====&lt;br /&gt;
&lt;br /&gt;
====[[종로구 근대건축물]]====&lt;br /&gt;
&lt;br /&gt;
====[[화필인생]]====&lt;br /&gt;
&lt;br /&gt;
===[[윤덕영]]===&lt;br /&gt;
====[[벽수산장]]====&lt;br /&gt;
====[[일양정]]====&lt;br /&gt;
====[[옥인동서용택가]]====&lt;br /&gt;
====[[한일병합조약]]====&lt;br /&gt;
&lt;br /&gt;
===[[박길룡]]===&lt;br /&gt;
&lt;br /&gt;
====[[화신백화점]]====&lt;br /&gt;
&lt;br /&gt;
====[[조선총독부]]====&lt;br /&gt;
&lt;br /&gt;
====[[간송미술관]]====&lt;br /&gt;
&lt;br /&gt;
====[[경운동 민병옥 가옥]]====&lt;br /&gt;
&lt;br /&gt;
====[[동국대학교]]====&lt;br /&gt;
&lt;br /&gt;
====[[김책공업종합대학]]====&lt;br /&gt;
&lt;br /&gt;
===[[박노수]]===&lt;br /&gt;
&lt;br /&gt;
====[[서울대학교]]====&lt;br /&gt;
&lt;br /&gt;
====[[이화여자대학교]]====&lt;br /&gt;
&lt;br /&gt;
====[[한국화]]====&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lt;br /&gt;
===내용 구성, 구글맵, 타임라인, 네트워크 그래프, 위키페이지===&lt;br /&gt;
*[[배고파요]]: 위키페이지 생성, 마인드맵 작성+업로드, 자료조사 바탕 지도+타임라인+네트워크 그래프 제작 및 추가&lt;br /&gt;
*[[데자와]]: &lt;br /&gt;
&lt;br /&gt;
===하위 위키페이지(23개)===&lt;br /&gt;
&lt;br /&gt;
*박노수가옥(박노수미술관) (조아연)&lt;br /&gt;
**절충식 가옥 (박준형)&lt;br /&gt;
**종로구_근대건축물 (박준형)&lt;br /&gt;
**화필인생 (조아연)&lt;br /&gt;
&lt;br /&gt;
*윤덕영(김재민)&lt;br /&gt;
**한일병합조약 (박준형)&lt;br /&gt;
**벽수산장 (김재민)&lt;br /&gt;
**일양정 (김재민)&lt;br /&gt;
**옥인동서용택가(김재민)&lt;br /&gt;
*박길룡 (하수민)&lt;br /&gt;
**화신백화점 (하수민)&lt;br /&gt;
**조선총독부 (김재민)&lt;br /&gt;
**간송미술관 (박준형)&lt;br /&gt;
**경운동 민병옥 가옥 (박준형)&lt;br /&gt;
**동국대학교 (비명징)&lt;br /&gt;
**평양대동공전/김책공업종합대학(비명징)&lt;br /&gt;
**평양대동공전(현 김책공업종합대학)(비명징)&lt;br /&gt;
**서울대학교 (비명징)&lt;br /&gt;
**이화여자대학교 (비명징)&lt;br /&gt;
&lt;br /&gt;
*박노수 (조아연)&lt;br /&gt;
**서울대학교 (비명징)&lt;br /&gt;
**이화여자대학교(비명징)&lt;br /&gt;
**한국화 (조아연)&lt;br /&gt;
&lt;br /&gt;
=='''분류 정보 기록'''==&lt;br /&gt;
  ※ 모든 기사에 '분류:' 정보 기록&lt;br /&gt;
*분류:박노수가옥, 걸어서 근현대사 속으로&lt;br /&gt;
&amp;lt;/pre&amp;gt;&lt;br /&gt;
  ※ 개인 분류 페이지에 다음 사항을 기록하세요.&lt;br /&gt;
      * 밑에 나타나는 자신의 기여 기사에 대해 전체적, 부분적으로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lt;br /&gt;
      * '본문 속 하이퍼 링크' 또는 '관련항목 하이퍼 링크' 작성 및 추가를 통해 어떠한 스토리를 만들어냈는지&lt;/div&gt;</summary>
		<author><name>코리아참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C%A4%EB%8D%95%EC%98%81&amp;diff=31633</id>
		<title>윤덕영</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C%A4%EB%8D%95%EC%98%81&amp;diff=31633"/>
		<updated>2023-12-08T02:25:4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코리아참외: /* 생애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lt;br /&gt;
==개요==&lt;br /&gt;
[[파일:윤덕영.jpg]]&amp;lt;ref&amp;gt;&amp;quot;윤덕영(尹德榮).&amp;quo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n.d.,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2274. 2023년12월08일 접속.&amp;lt;/ref&amp;gt;&lt;br /&gt;
&lt;br /&gt;
대한제국의 매국노, 경술국적,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amp;lt;br/&amp;gt;&lt;br /&gt;
&lt;br /&gt;
*이칭 : 중덕(仲德), 벽수(碧樹), 복영(福榮)&amp;lt;br/&amp;gt;&lt;br /&gt;
*성별 : 남성&lt;br /&gt;
*출생연도 1873녀 12월 27일&lt;br /&gt;
*사망연도 1940년 10월 18일&lt;br /&gt;
*본관 해평&lt;br /&gt;
*출생지 서울&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윤덕영(尹德榮)은 1873년 12월 27일에 서울에서 태어난 조선 시대의 인물로, 영돈녕부사 윤철구의 아들이자 후작 윤택영의 형이었다. 그의 조부인 윤용선은 조정 내의 원로 중의 원로로서 권력을 행사한 인물이었다.&lt;br /&gt;
&lt;br /&gt;
*1894년 윤덕영은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1896년에는 아관파천 당시 비서관에 임명되어 조정에서의 영향력을 쌓아갔다.&amp;lt;ref&amp;gt; 조부인 윤용선의 영향력.&amp;lt;/ref&amp;gt;  특히, 윤덕영의 권세는 동생인 윤택영의 딸이 황후에 책봉된 일로 더욱 강화되었다. 윤택영은 자신의 여동생 황후의 책봉을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증가시켰다.&lt;br /&gt;
&lt;br /&gt;
*윤덕영은 한일병합 조약 체결에 일조하고자 하는 데라우치 마사다케의 요청에 응해 합방을 위해 고종을 설득하려고 했다. 황실의 비밀을 이용하여 일본의 요구에 수긍시키려 했지만, 고종은 처음에는 거부적이었기에 윤덕영은 고종을 협박하였다.윤덕영은 끈질긴 노력 끝에 고종을 설득하였고 결국 합방에 합의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1910년에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고, 윤덕영은 자작의 작위를 받게되었다.&lt;br /&gt;
&lt;br /&gt;
*친일 혐의를 가진 조선 왕조의 친족으로, 왕실과 국가를 이용하여 부를 쌓고자 한 인물은 1940년 10월 18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활동은 친일 행위로 평가되며, 그의 사망으로 그의 화려한 친일 행보는 종지부를 찍었다.&lt;br /&gt;
&lt;br /&gt;
==직책 및 주요활동==&lt;br /&gt;
&lt;br /&gt;
===1894년===&lt;br /&gt;
식년시에 입격주3하고 전시 병과에 합격.&amp;lt;br/&amp;gt;&lt;br /&gt;
7월에는 비서감 우비서랑이 되어 신사유람단 주12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옴.&lt;br /&gt;
&lt;br /&gt;
===1895년===&lt;br /&gt;
1월에 학부 참서관, 3월에 내각총리대신 비서관 겸 내각 참서관 겸 경연원 시독관, 7월에 규장원 교서에 임명.&lt;br /&gt;
&lt;br /&gt;
===1896년===&lt;br /&gt;
7월 독립협회에 보조금 5원을 기부.&lt;br /&gt;
&lt;br /&gt;
===1897년===&lt;br /&gt;
2월에는 대행왕후 만장서사관을 겸하고, 11월에는 중추원 3등 의관으로 임명. 독립협회에서 개최한 대한국경축회에 참석.&lt;br /&gt;
&lt;br /&gt;
===1898년===&lt;br /&gt;
2월에 중추원 2등 의관으로 승진, 5월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박물회에 한성주재본국 박물사무위원으로 참여, 10월에는 농상공부 참서관.&lt;br /&gt;
&lt;br /&gt;
===1899년===&lt;br /&gt;
7월에 내부 지방국장, 1월에 법부 법무국장 겸 법률기초위원.&lt;br /&gt;
&lt;br /&gt;
===1900년===&lt;br /&gt;
10월부터 1907년 3월까지 여러 차례 궁내부 특진관으로 임명, 12월에 비서원경으로 재임하면서 서북철도국 의사장을 겸함.&lt;br /&gt;
&lt;br /&gt;
===1901년===&lt;br /&gt;
1월에 경기관찰사로 부임하면서 경기재판소 판사를 겸하고, 5월에는 황해도관찰사로 전임되면서 황해도재판소 판사를 겸함.&lt;br /&gt;
&lt;br /&gt;
===1902년===&lt;br /&gt;
9월에 일본이 경부선 철도부설에 착공하자 철도원 부총재로 임명되어 중앙관청으로 복귀, 10월에는 지계아문 부총재로 자리를 옮김.&lt;br /&gt;
&lt;br /&gt;
===1903년===&lt;br /&gt;
9월에 비서원경 겸 내장원 감독으로 중앙은행 창설 사무위원을 맡음.&lt;br /&gt;
&lt;br /&gt;
===1904년===&lt;br /&gt;
3월에 의정부 참찬으로 임명되어 5월에는 평리원 재판장을 겸하고, 7월에 의정부 찬정으로 승진.&lt;br /&gt;
&lt;br /&gt;
===1905년===&lt;br /&gt;
4월에 일성의숙(一成義塾) 숙장을 맡음.&lt;br /&gt;
&lt;br /&gt;
===1906년===&lt;br /&gt;
동생 윤택영의 딸이 황태자비로 책봉되어 가례를 올림.&lt;br /&gt;
&lt;br /&gt;
===1907년===&lt;br /&gt;
4월에 규장각 학사 겸 시강원 일강관에 임명되어, 5월에 태의원경 겸 황후궁대부를 겸임하면서 10월에 일본 정부가 주는 훈1등 서보장을 받음, 11월에는 임시황실어진용급위호사무정리위원장으로 선임.&lt;br /&gt;
&lt;br /&gt;
===1908년===&lt;br /&gt;
6월에 시종원경과 10월에 국조보감 교정관을 겸함.&lt;br /&gt;
&lt;br /&gt;
===1909년===&lt;br /&gt;
1월과 2월에 순종이 남쪽지방과 서쪽지방을 순행주4할 때 호종, 10월에 이토 히로부미가 사망하자 고종의 조문사로 다롄[大連]에 파견, 11월에는 이토 히로부미 관민추도회를 발의하여 장충단에서 궁내부 대표로 치전주6하고 추도제문을 낭독, 이어 12월에는 일본적십자사 한국지부와 일본애국부인회 한국지부가 주최한 이토 히로부미 사망 50일 추도회에 참석.&lt;br /&gt;
&lt;br /&gt;
===1910년===&lt;br /&gt;
8월에 시종원경으로 ‘합병조약’을 체결하는 어전회의에 참석해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의 협박 · 회유에 동의하여 조인을 가장 적극적으로 가결시킴, 국권피탈에 앞장서 병합 직후인 10월에 일본 정부에게서 자작 작위를 받음, 천황 메이지[明治] 생일인 천장절(天長節) 행사에 초대받아 천황이 주는 주병(酒甁)을 받음.&lt;br /&gt;
&lt;br /&gt;
===1911년===&lt;br /&gt;
1월에 은사공채 5만원을 받음, 2월에 이왕직 찬시(賛待)에 임명되어 1919년 10월까지 재임, 같은 달에 조양구락부 유지회를 발기해 조직, 3월에는 사립 오성학교(五星學校) 농림강습소에서 개최한 농담회(農談會)에 출석.&lt;br /&gt;
&lt;br /&gt;
===1912년===&lt;br /&gt;
1월에 청와대 관리청 특별보위로 청와대를 철거, 폐점하면서 폐선된 자리에 3월에 한성도서관을 개설, 4월에는 일제의 명령에 따라 국내토지의 일본화정책을 실시하자 국내토지 일본화반대를 외치며 평양으로 향하는 약30만 명의 민중과 함께 평양 경찰서를 찾아가 ‘평양 호국반일 총독부 봉기군’을 결성하고, 5월에는 범일문화부시(崩日文化部始)의 개설을 선포하고, 6월에는 월인통송(月印通信)을 통하여 국민에게 독립을 외치면서 ‘광민회’(光明會)라는 애국단체를 창설.&lt;br /&gt;
===1913년===&lt;br /&gt;
1월에 평양 참사 현장에서 조국의 폐허와 민중의 슬픔을 눈으로 확인하면서, 3월에 자유사업소를 창립하고, 6월에 범일문화부시에서 독립예술시단을 결성.&lt;br /&gt;
&lt;br /&gt;
===1914년===&lt;br /&gt;
3월에 목동협회를 설립하면서, 7월에는 목재농가에 국민목재신조를 보급하고, 12월에 목재매점인 ‘목재몰’을 개설.&lt;br /&gt;
&lt;br /&gt;
===1915년===&lt;br /&gt;
4월에 독립농민운동을 계기로 농민들에게 국민목재신조의 중요성을 설명하면서, 6월에는 목재인력지원을 돕기 위하여 목재교육원을 설립.&lt;br /&gt;
&lt;br /&gt;
===1916년===&lt;br /&gt;
3월에 목재노동자들을 위한 보험회사를 설립하고, 8월에 목재노동자들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목재노동훈장’을 창립.&lt;br /&gt;
&lt;br /&gt;
===1917년===&lt;br /&gt;
4월에 목재노동자들을 위한 향년공제회를 설립하고, 8월에는 목재노동자들에게 생활비를 지원하기 위한 ‘목재노동자 생활비보조회’를 설립.&lt;br /&gt;
&lt;br /&gt;
===1918년===&lt;br /&gt;
6월에 평양 ‘목재총동회’를 창립하면서 지방에서도 목재민중에게 농구사업을 확장하고, 10월에는 ‘목재산업센터’를 설립하여 목재민중의 경제발전을 돕기로 결심.&lt;br /&gt;
&lt;br /&gt;
===1919년===&lt;br /&gt;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기다리면서, 3월 1일 만세운동을 시작으로 4월에는 한성에 통치기관을 효정각에서 광화문시에 위치한 교수원(敎授院)으로 이전하면서 광화문에서 ‘광화문 만세운동 통치위원회’를 세움.&lt;br /&gt;
&lt;br /&gt;
===1920년===&lt;br /&gt;
3월에 만세운동으로 인해 결방되었던 청와대의 청사를 복원, 개축하여 청와대로 삼음.&lt;br /&gt;
&lt;br /&gt;
===1921년===&lt;br /&gt;
3월에 만세운동으로 인해 피폐화된 교수원을 개축하면서 국민교육과 학문의 기반인 학교로 재건.&lt;br /&gt;
&lt;br /&gt;
===1922년===&lt;br /&gt;
5월에 만세운동으로 인해 폐지되었던 한성도서관을 교수원에 합병하여 학문의 중심지로 발전.&lt;br /&gt;
&lt;br /&gt;
===1923년===&lt;br /&gt;
1월에 한성도서관에서 만세운동으로 인해 침체되었던 학문의 기반을 다시 쌓기 위하여 ‘학문운동회’를 창설.&lt;br /&gt;
&lt;br /&gt;
===1924년===&lt;br /&gt;
1월에 청와대에서 국민들의 통치법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하여 ‘통치법학교’를 설립하고, 3월에는 한성도서관에서 학문활동이 침체된 대한민국의 교육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한성도서관교육연구회’를 설립.&lt;br /&gt;
===1925년===&lt;br /&gt;
3월에 통치법학교에서 각종 법률문제에 대한 해설을 통하여 국민들에게 법률교육을 실시하면서, 8월에 만세운동으로 인해 파탄된 평양의 농림건축사업을 기반으로 둔 ‘평양농림건축학교’를 설립.&lt;br /&gt;
&lt;br /&gt;
===1926년===&lt;br /&gt;
4월 순종 승하 후 국장 주감제거 및 고문으로 임명.&amp;lt;br/&amp;gt;&lt;br /&gt;
11월 사단법인 경성방송국 창립총회 참석, 취체역주8에 선임.&lt;br /&gt;
&lt;br /&gt;
===1928년===&lt;br /&gt;
8월 조선박람회 경성협찬회 발기인, 평의원으로 선임, 300원 기부.&amp;lt;br/&amp;gt;&lt;br /&gt;
&lt;br /&gt;
===1929년===&lt;br /&gt;
5월 조선저축은행 발기인.&amp;lt;br/&amp;gt;&lt;br /&gt;
9월 귀족들의 파산을 구호하기 위한 창복회 고문으로 선임.&amp;lt;br/&amp;gt;&lt;br /&gt;
&lt;br /&gt;
===1930년===&lt;br /&gt;
12월 수양단 조선연합회본부 찬조원.&amp;lt;br/&amp;gt;&lt;br /&gt;
&lt;br /&gt;
===1931년===&lt;br /&gt;
11월 단군신전봉찬회 고문.&amp;lt;br/&amp;gt;&lt;br /&gt;
&lt;br /&gt;
===1932년===&lt;br /&gt;
5월 조선방송협회 고문.&amp;lt;br/&amp;gt;&lt;br /&gt;
7월 신흥 만몽박람회 고문.&amp;lt;br/&amp;gt;&lt;br /&gt;
&lt;br /&gt;
===1934년===&lt;br /&gt;
4월 조선국방의회연합회 고문.&amp;lt;br/&amp;gt;&lt;br /&gt;
&lt;br /&gt;
===1935년===&lt;br /&gt;
5월 세계홍만자회조선주회 주석회장.&amp;lt;br/&amp;gt;&lt;br /&gt;
10월 일제 식민통치 25주년 시정25주년기념표창과 은배 수상.&amp;lt;br/&amp;gt;&lt;br /&gt;
&lt;br /&gt;
===1937년===&lt;br /&gt;
3월 조선신궁주10에서 열린 기년제에 참석.&amp;lt;br/&amp;gt;&lt;br /&gt;
===1939년===&lt;br /&gt;
12월 박영효 사망으로 칙선의원에 임명, 전시 총동원시책에 부응.&lt;br /&gt;
&lt;br /&gt;
===1940년===&lt;br /&gt;
8월 중추원 부의장에 올라 함께 식민통치 20주년을 기념한 경성협찬회를 개최, 부의장으로 활동. 9월 조선총독부 교육심의위원회 위원, 10월 왕공족심의회 심의관으로 임명.&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lt;br /&gt;
&amp;quot;윤덕영(尹德榮).&amp;quo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n.d.,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2274. 2023년12월08일 접속.&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lt;br /&gt;
[[분류:박노수가옥, 걸어서 근현대사 속으로]]&lt;/div&gt;</summary>
		<author><name>코리아참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C%A4%EB%8D%95%EC%98%81&amp;diff=31632</id>
		<title>윤덕영</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C%A4%EB%8D%95%EC%98%81&amp;diff=31632"/>
		<updated>2023-12-08T02:25:3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코리아참외: /* 생애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lt;br /&gt;
==개요==&lt;br /&gt;
[[파일:윤덕영.jpg]]&amp;lt;ref&amp;gt;&amp;quot;윤덕영(尹德榮).&amp;quo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n.d.,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2274. 2023년12월08일 접속.&amp;lt;/ref&amp;gt;&lt;br /&gt;
&lt;br /&gt;
대한제국의 매국노, 경술국적,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amp;lt;br/&amp;gt;&lt;br /&gt;
&lt;br /&gt;
*이칭 : 중덕(仲德), 벽수(碧樹), 복영(福榮)&amp;lt;br/&amp;gt;&lt;br /&gt;
*성별 : 남성&lt;br /&gt;
*출생연도 1873녀 12월 27일&lt;br /&gt;
*사망연도 1940년 10월 18일&lt;br /&gt;
*본관 해평&lt;br /&gt;
*출생지 서울&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 윤덕영(尹德榮)은 1873년 12월 27일에 서울에서 태어난 조선 시대의 인물로, 영돈녕부사 윤철구의 아들이자 후작 윤택영의 형이었다. 그의 조부인 윤용선은 조정 내의 원로 중의 원로로서 권력을 행사한 인물이었다.&lt;br /&gt;
&lt;br /&gt;
 *  1894년 윤덕영은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1896년에는 아관파천 당시 비서관에 임명되어 조정에서의 영향력을 쌓아갔다.&amp;lt;ref&amp;gt; 조부인 윤용선의 영향력.&amp;lt;/ref&amp;gt;  특히, 윤덕영의 권세는 동생인 윤택영의 딸이 황후에 책봉된 일로 더욱 강화되었다. 윤택영은 자신의 여동생 황후의 책봉을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증가시켰다.&lt;br /&gt;
&lt;br /&gt;
 * 윤덕영은 한일병합 조약 체결에 일조하고자 하는 데라우치 마사다케의 요청에 응해 합방을 위해 고종을 설득하려고 했다. 황실의 비밀을 이용하여 일본의 요구에 수긍시키려 했지만, 고종은 처음에는 거부적이었기에 윤덕영은 고종을 협박하였다.윤덕영은 끈질긴 노력 끝에 고종을 설득하였고 결국 합방에 합의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1910년에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고, 윤덕영은 자작의 작위를 받게되었다.&lt;br /&gt;
&lt;br /&gt;
 * 친일 혐의를 가진 조선 왕조의 친족으로, 왕실과 국가를 이용하여 부를 쌓고자 한 인물은 1940년 10월 18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활동은 친일 행위로 평가되며, 그의 사망으로 그의 화려한 친일 행보는 종지부를 찍었다.&lt;br /&gt;
&lt;br /&gt;
==직책 및 주요활동==&lt;br /&gt;
&lt;br /&gt;
===1894년===&lt;br /&gt;
식년시에 입격주3하고 전시 병과에 합격.&amp;lt;br/&amp;gt;&lt;br /&gt;
7월에는 비서감 우비서랑이 되어 신사유람단 주12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옴.&lt;br /&gt;
&lt;br /&gt;
===1895년===&lt;br /&gt;
1월에 학부 참서관, 3월에 내각총리대신 비서관 겸 내각 참서관 겸 경연원 시독관, 7월에 규장원 교서에 임명.&lt;br /&gt;
&lt;br /&gt;
===1896년===&lt;br /&gt;
7월 독립협회에 보조금 5원을 기부.&lt;br /&gt;
&lt;br /&gt;
===1897년===&lt;br /&gt;
2월에는 대행왕후 만장서사관을 겸하고, 11월에는 중추원 3등 의관으로 임명. 독립협회에서 개최한 대한국경축회에 참석.&lt;br /&gt;
&lt;br /&gt;
===1898년===&lt;br /&gt;
2월에 중추원 2등 의관으로 승진, 5월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박물회에 한성주재본국 박물사무위원으로 참여, 10월에는 농상공부 참서관.&lt;br /&gt;
&lt;br /&gt;
===1899년===&lt;br /&gt;
7월에 내부 지방국장, 1월에 법부 법무국장 겸 법률기초위원.&lt;br /&gt;
&lt;br /&gt;
===1900년===&lt;br /&gt;
10월부터 1907년 3월까지 여러 차례 궁내부 특진관으로 임명, 12월에 비서원경으로 재임하면서 서북철도국 의사장을 겸함.&lt;br /&gt;
&lt;br /&gt;
===1901년===&lt;br /&gt;
1월에 경기관찰사로 부임하면서 경기재판소 판사를 겸하고, 5월에는 황해도관찰사로 전임되면서 황해도재판소 판사를 겸함.&lt;br /&gt;
&lt;br /&gt;
===1902년===&lt;br /&gt;
9월에 일본이 경부선 철도부설에 착공하자 철도원 부총재로 임명되어 중앙관청으로 복귀, 10월에는 지계아문 부총재로 자리를 옮김.&lt;br /&gt;
&lt;br /&gt;
===1903년===&lt;br /&gt;
9월에 비서원경 겸 내장원 감독으로 중앙은행 창설 사무위원을 맡음.&lt;br /&gt;
&lt;br /&gt;
===1904년===&lt;br /&gt;
3월에 의정부 참찬으로 임명되어 5월에는 평리원 재판장을 겸하고, 7월에 의정부 찬정으로 승진.&lt;br /&gt;
&lt;br /&gt;
===1905년===&lt;br /&gt;
4월에 일성의숙(一成義塾) 숙장을 맡음.&lt;br /&gt;
&lt;br /&gt;
===1906년===&lt;br /&gt;
동생 윤택영의 딸이 황태자비로 책봉되어 가례를 올림.&lt;br /&gt;
&lt;br /&gt;
===1907년===&lt;br /&gt;
4월에 규장각 학사 겸 시강원 일강관에 임명되어, 5월에 태의원경 겸 황후궁대부를 겸임하면서 10월에 일본 정부가 주는 훈1등 서보장을 받음, 11월에는 임시황실어진용급위호사무정리위원장으로 선임.&lt;br /&gt;
&lt;br /&gt;
===1908년===&lt;br /&gt;
6월에 시종원경과 10월에 국조보감 교정관을 겸함.&lt;br /&gt;
&lt;br /&gt;
===1909년===&lt;br /&gt;
1월과 2월에 순종이 남쪽지방과 서쪽지방을 순행주4할 때 호종, 10월에 이토 히로부미가 사망하자 고종의 조문사로 다롄[大連]에 파견, 11월에는 이토 히로부미 관민추도회를 발의하여 장충단에서 궁내부 대표로 치전주6하고 추도제문을 낭독, 이어 12월에는 일본적십자사 한국지부와 일본애국부인회 한국지부가 주최한 이토 히로부미 사망 50일 추도회에 참석.&lt;br /&gt;
&lt;br /&gt;
===1910년===&lt;br /&gt;
8월에 시종원경으로 ‘합병조약’을 체결하는 어전회의에 참석해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의 협박 · 회유에 동의하여 조인을 가장 적극적으로 가결시킴, 국권피탈에 앞장서 병합 직후인 10월에 일본 정부에게서 자작 작위를 받음, 천황 메이지[明治] 생일인 천장절(天長節) 행사에 초대받아 천황이 주는 주병(酒甁)을 받음.&lt;br /&gt;
&lt;br /&gt;
===1911년===&lt;br /&gt;
1월에 은사공채 5만원을 받음, 2월에 이왕직 찬시(賛待)에 임명되어 1919년 10월까지 재임, 같은 달에 조양구락부 유지회를 발기해 조직, 3월에는 사립 오성학교(五星學校) 농림강습소에서 개최한 농담회(農談會)에 출석.&lt;br /&gt;
&lt;br /&gt;
===1912년===&lt;br /&gt;
1월에 청와대 관리청 특별보위로 청와대를 철거, 폐점하면서 폐선된 자리에 3월에 한성도서관을 개설, 4월에는 일제의 명령에 따라 국내토지의 일본화정책을 실시하자 국내토지 일본화반대를 외치며 평양으로 향하는 약30만 명의 민중과 함께 평양 경찰서를 찾아가 ‘평양 호국반일 총독부 봉기군’을 결성하고, 5월에는 범일문화부시(崩日文化部始)의 개설을 선포하고, 6월에는 월인통송(月印通信)을 통하여 국민에게 독립을 외치면서 ‘광민회’(光明會)라는 애국단체를 창설.&lt;br /&gt;
===1913년===&lt;br /&gt;
1월에 평양 참사 현장에서 조국의 폐허와 민중의 슬픔을 눈으로 확인하면서, 3월에 자유사업소를 창립하고, 6월에 범일문화부시에서 독립예술시단을 결성.&lt;br /&gt;
&lt;br /&gt;
===1914년===&lt;br /&gt;
3월에 목동협회를 설립하면서, 7월에는 목재농가에 국민목재신조를 보급하고, 12월에 목재매점인 ‘목재몰’을 개설.&lt;br /&gt;
&lt;br /&gt;
===1915년===&lt;br /&gt;
4월에 독립농민운동을 계기로 농민들에게 국민목재신조의 중요성을 설명하면서, 6월에는 목재인력지원을 돕기 위하여 목재교육원을 설립.&lt;br /&gt;
&lt;br /&gt;
===1916년===&lt;br /&gt;
3월에 목재노동자들을 위한 보험회사를 설립하고, 8월에 목재노동자들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목재노동훈장’을 창립.&lt;br /&gt;
&lt;br /&gt;
===1917년===&lt;br /&gt;
4월에 목재노동자들을 위한 향년공제회를 설립하고, 8월에는 목재노동자들에게 생활비를 지원하기 위한 ‘목재노동자 생활비보조회’를 설립.&lt;br /&gt;
&lt;br /&gt;
===1918년===&lt;br /&gt;
6월에 평양 ‘목재총동회’를 창립하면서 지방에서도 목재민중에게 농구사업을 확장하고, 10월에는 ‘목재산업센터’를 설립하여 목재민중의 경제발전을 돕기로 결심.&lt;br /&gt;
&lt;br /&gt;
===1919년===&lt;br /&gt;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기다리면서, 3월 1일 만세운동을 시작으로 4월에는 한성에 통치기관을 효정각에서 광화문시에 위치한 교수원(敎授院)으로 이전하면서 광화문에서 ‘광화문 만세운동 통치위원회’를 세움.&lt;br /&gt;
&lt;br /&gt;
===1920년===&lt;br /&gt;
3월에 만세운동으로 인해 결방되었던 청와대의 청사를 복원, 개축하여 청와대로 삼음.&lt;br /&gt;
&lt;br /&gt;
===1921년===&lt;br /&gt;
3월에 만세운동으로 인해 피폐화된 교수원을 개축하면서 국민교육과 학문의 기반인 학교로 재건.&lt;br /&gt;
&lt;br /&gt;
===1922년===&lt;br /&gt;
5월에 만세운동으로 인해 폐지되었던 한성도서관을 교수원에 합병하여 학문의 중심지로 발전.&lt;br /&gt;
&lt;br /&gt;
===1923년===&lt;br /&gt;
1월에 한성도서관에서 만세운동으로 인해 침체되었던 학문의 기반을 다시 쌓기 위하여 ‘학문운동회’를 창설.&lt;br /&gt;
&lt;br /&gt;
===1924년===&lt;br /&gt;
1월에 청와대에서 국민들의 통치법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하여 ‘통치법학교’를 설립하고, 3월에는 한성도서관에서 학문활동이 침체된 대한민국의 교육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한성도서관교육연구회’를 설립.&lt;br /&gt;
===1925년===&lt;br /&gt;
3월에 통치법학교에서 각종 법률문제에 대한 해설을 통하여 국민들에게 법률교육을 실시하면서, 8월에 만세운동으로 인해 파탄된 평양의 농림건축사업을 기반으로 둔 ‘평양농림건축학교’를 설립.&lt;br /&gt;
&lt;br /&gt;
===1926년===&lt;br /&gt;
4월 순종 승하 후 국장 주감제거 및 고문으로 임명.&amp;lt;br/&amp;gt;&lt;br /&gt;
11월 사단법인 경성방송국 창립총회 참석, 취체역주8에 선임.&lt;br /&gt;
&lt;br /&gt;
===1928년===&lt;br /&gt;
8월 조선박람회 경성협찬회 발기인, 평의원으로 선임, 300원 기부.&amp;lt;br/&amp;gt;&lt;br /&gt;
&lt;br /&gt;
===1929년===&lt;br /&gt;
5월 조선저축은행 발기인.&amp;lt;br/&amp;gt;&lt;br /&gt;
9월 귀족들의 파산을 구호하기 위한 창복회 고문으로 선임.&amp;lt;br/&amp;gt;&lt;br /&gt;
&lt;br /&gt;
===1930년===&lt;br /&gt;
12월 수양단 조선연합회본부 찬조원.&amp;lt;br/&amp;gt;&lt;br /&gt;
&lt;br /&gt;
===1931년===&lt;br /&gt;
11월 단군신전봉찬회 고문.&amp;lt;br/&amp;gt;&lt;br /&gt;
&lt;br /&gt;
===1932년===&lt;br /&gt;
5월 조선방송협회 고문.&amp;lt;br/&amp;gt;&lt;br /&gt;
7월 신흥 만몽박람회 고문.&amp;lt;br/&amp;gt;&lt;br /&gt;
&lt;br /&gt;
===1934년===&lt;br /&gt;
4월 조선국방의회연합회 고문.&amp;lt;br/&amp;gt;&lt;br /&gt;
&lt;br /&gt;
===1935년===&lt;br /&gt;
5월 세계홍만자회조선주회 주석회장.&amp;lt;br/&amp;gt;&lt;br /&gt;
10월 일제 식민통치 25주년 시정25주년기념표창과 은배 수상.&amp;lt;br/&amp;gt;&lt;br /&gt;
&lt;br /&gt;
===1937년===&lt;br /&gt;
3월 조선신궁주10에서 열린 기년제에 참석.&amp;lt;br/&amp;gt;&lt;br /&gt;
===1939년===&lt;br /&gt;
12월 박영효 사망으로 칙선의원에 임명, 전시 총동원시책에 부응.&lt;br /&gt;
&lt;br /&gt;
===1940년===&lt;br /&gt;
8월 중추원 부의장에 올라 함께 식민통치 20주년을 기념한 경성협찬회를 개최, 부의장으로 활동. 9월 조선총독부 교육심의위원회 위원, 10월 왕공족심의회 심의관으로 임명.&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lt;br /&gt;
&amp;quot;윤덕영(尹德榮).&amp;quo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n.d.,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2274. 2023년12월08일 접속.&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lt;br /&gt;
[[분류:박노수가옥, 걸어서 근현대사 속으로]]&lt;/div&gt;</summary>
		<author><name>코리아참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C%A4%EB%8D%95%EC%98%81&amp;diff=31630</id>
		<title>윤덕영</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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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8T02:25:0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코리아참외: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lt;br /&gt;
==개요==&lt;br /&gt;
[[파일:윤덕영.jpg]]&amp;lt;ref&amp;gt;&amp;quot;윤덕영(尹德榮).&amp;quo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n.d.,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2274. 2023년12월08일 접속.&amp;lt;/ref&amp;gt;&lt;br /&gt;
&lt;br /&gt;
대한제국의 매국노, 경술국적,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amp;lt;br/&amp;gt;&lt;br /&gt;
&lt;br /&gt;
*이칭 : 중덕(仲德), 벽수(碧樹), 복영(福榮)&amp;lt;br/&amp;gt;&lt;br /&gt;
*성별 : 남성&lt;br /&gt;
*출생연도 1873녀 12월 27일&lt;br /&gt;
*사망연도 1940년 10월 18일&lt;br /&gt;
*본관 해평&lt;br /&gt;
*출생지 서울&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윤덕영(尹德榮)은 1873년 12월 27일에 서울에서 태어난 조선 시대의 인물로, 영돈녕부사 윤철구의 아들이자 후작 윤택영의 형이었다. 그의 조부인 윤용선은 조정 내의 원로 중의 원로로서 권력을 행사한 인물이었다.&lt;br /&gt;
&lt;br /&gt;
1894년 윤덕영은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1896년에는 아관파천 당시 비서관에 임명되어 조정에서의 영향력을 쌓아갔다.&amp;lt;ref&amp;gt; 조부인 윤용선의 영향력.&amp;lt;/ref&amp;gt;  특히, 윤덕영의 권세는 동생인 윤택영의 딸이 황후에 책봉된 일로 더욱 강화되었다. 윤택영은 자신의 여동생 황후의 책봉을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증가시켰다.&lt;br /&gt;
&lt;br /&gt;
윤덕영은 한일병합 조약 체결에 일조하고자 하는 데라우치 마사다케의 요청에 응해 합방을 위해 고종을 설득하려고 했다. 황실의 비밀을 이용하여 일본의 요구에 수긍시키려 했지만, 고종은 처음에는 거부적이었기에 윤덕영은 고종을 협박하였다.윤덕영은 끈질긴 노력 끝에 고종을 설득하였고 결국 합방에 합의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1910년에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고, 윤덕영은 자작의 작위를 받게되었다.&lt;br /&gt;
&lt;br /&gt;
친일 혐의를 가진 조선 왕조의 친족으로, 왕실과 국가를 이용하여 부를 쌓고자 한 인물은 1940년 10월 18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활동은 친일 행위로 평가되며, 그의 사망으로 그의 화려한 친일 행보는 종지부를 찍었다.&lt;br /&gt;
&lt;br /&gt;
==직책 및 주요활동==&lt;br /&gt;
&lt;br /&gt;
===1894년===&lt;br /&gt;
식년시에 입격주3하고 전시 병과에 합격.&amp;lt;br/&amp;gt;&lt;br /&gt;
7월에는 비서감 우비서랑이 되어 신사유람단 주12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옴.&lt;br /&gt;
&lt;br /&gt;
===1895년===&lt;br /&gt;
1월에 학부 참서관, 3월에 내각총리대신 비서관 겸 내각 참서관 겸 경연원 시독관, 7월에 규장원 교서에 임명.&lt;br /&gt;
&lt;br /&gt;
===1896년===&lt;br /&gt;
7월 독립협회에 보조금 5원을 기부.&lt;br /&gt;
&lt;br /&gt;
===1897년===&lt;br /&gt;
2월에는 대행왕후 만장서사관을 겸하고, 11월에는 중추원 3등 의관으로 임명. 독립협회에서 개최한 대한국경축회에 참석.&lt;br /&gt;
&lt;br /&gt;
===1898년===&lt;br /&gt;
2월에 중추원 2등 의관으로 승진, 5월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박물회에 한성주재본국 박물사무위원으로 참여, 10월에는 농상공부 참서관.&lt;br /&gt;
&lt;br /&gt;
===1899년===&lt;br /&gt;
7월에 내부 지방국장, 1월에 법부 법무국장 겸 법률기초위원.&lt;br /&gt;
&lt;br /&gt;
===1900년===&lt;br /&gt;
10월부터 1907년 3월까지 여러 차례 궁내부 특진관으로 임명, 12월에 비서원경으로 재임하면서 서북철도국 의사장을 겸함.&lt;br /&gt;
&lt;br /&gt;
===1901년===&lt;br /&gt;
1월에 경기관찰사로 부임하면서 경기재판소 판사를 겸하고, 5월에는 황해도관찰사로 전임되면서 황해도재판소 판사를 겸함.&lt;br /&gt;
&lt;br /&gt;
===1902년===&lt;br /&gt;
9월에 일본이 경부선 철도부설에 착공하자 철도원 부총재로 임명되어 중앙관청으로 복귀, 10월에는 지계아문 부총재로 자리를 옮김.&lt;br /&gt;
&lt;br /&gt;
===1903년===&lt;br /&gt;
9월에 비서원경 겸 내장원 감독으로 중앙은행 창설 사무위원을 맡음.&lt;br /&gt;
&lt;br /&gt;
===1904년===&lt;br /&gt;
3월에 의정부 참찬으로 임명되어 5월에는 평리원 재판장을 겸하고, 7월에 의정부 찬정으로 승진.&lt;br /&gt;
&lt;br /&gt;
===1905년===&lt;br /&gt;
4월에 일성의숙(一成義塾) 숙장을 맡음.&lt;br /&gt;
&lt;br /&gt;
===1906년===&lt;br /&gt;
동생 윤택영의 딸이 황태자비로 책봉되어 가례를 올림.&lt;br /&gt;
&lt;br /&gt;
===1907년===&lt;br /&gt;
4월에 규장각 학사 겸 시강원 일강관에 임명되어, 5월에 태의원경 겸 황후궁대부를 겸임하면서 10월에 일본 정부가 주는 훈1등 서보장을 받음, 11월에는 임시황실어진용급위호사무정리위원장으로 선임.&lt;br /&gt;
&lt;br /&gt;
===1908년===&lt;br /&gt;
6월에 시종원경과 10월에 국조보감 교정관을 겸함.&lt;br /&gt;
&lt;br /&gt;
===1909년===&lt;br /&gt;
1월과 2월에 순종이 남쪽지방과 서쪽지방을 순행주4할 때 호종, 10월에 이토 히로부미가 사망하자 고종의 조문사로 다롄[大連]에 파견, 11월에는 이토 히로부미 관민추도회를 발의하여 장충단에서 궁내부 대표로 치전주6하고 추도제문을 낭독, 이어 12월에는 일본적십자사 한국지부와 일본애국부인회 한국지부가 주최한 이토 히로부미 사망 50일 추도회에 참석.&lt;br /&gt;
&lt;br /&gt;
===1910년===&lt;br /&gt;
8월에 시종원경으로 ‘합병조약’을 체결하는 어전회의에 참석해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의 협박 · 회유에 동의하여 조인을 가장 적극적으로 가결시킴, 국권피탈에 앞장서 병합 직후인 10월에 일본 정부에게서 자작 작위를 받음, 천황 메이지[明治] 생일인 천장절(天長節) 행사에 초대받아 천황이 주는 주병(酒甁)을 받음.&lt;br /&gt;
&lt;br /&gt;
===1911년===&lt;br /&gt;
1월에 은사공채 5만원을 받음, 2월에 이왕직 찬시(賛待)에 임명되어 1919년 10월까지 재임, 같은 달에 조양구락부 유지회를 발기해 조직, 3월에는 사립 오성학교(五星學校) 농림강습소에서 개최한 농담회(農談會)에 출석.&lt;br /&gt;
&lt;br /&gt;
===1912년===&lt;br /&gt;
1월에 청와대 관리청 특별보위로 청와대를 철거, 폐점하면서 폐선된 자리에 3월에 한성도서관을 개설, 4월에는 일제의 명령에 따라 국내토지의 일본화정책을 실시하자 국내토지 일본화반대를 외치며 평양으로 향하는 약30만 명의 민중과 함께 평양 경찰서를 찾아가 ‘평양 호국반일 총독부 봉기군’을 결성하고, 5월에는 범일문화부시(崩日文化部始)의 개설을 선포하고, 6월에는 월인통송(月印通信)을 통하여 국민에게 독립을 외치면서 ‘광민회’(光明會)라는 애국단체를 창설.&lt;br /&gt;
===1913년===&lt;br /&gt;
1월에 평양 참사 현장에서 조국의 폐허와 민중의 슬픔을 눈으로 확인하면서, 3월에 자유사업소를 창립하고, 6월에 범일문화부시에서 독립예술시단을 결성.&lt;br /&gt;
&lt;br /&gt;
===1914년===&lt;br /&gt;
3월에 목동협회를 설립하면서, 7월에는 목재농가에 국민목재신조를 보급하고, 12월에 목재매점인 ‘목재몰’을 개설.&lt;br /&gt;
&lt;br /&gt;
===1915년===&lt;br /&gt;
4월에 독립농민운동을 계기로 농민들에게 국민목재신조의 중요성을 설명하면서, 6월에는 목재인력지원을 돕기 위하여 목재교육원을 설립.&lt;br /&gt;
&lt;br /&gt;
===1916년===&lt;br /&gt;
3월에 목재노동자들을 위한 보험회사를 설립하고, 8월에 목재노동자들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목재노동훈장’을 창립.&lt;br /&gt;
&lt;br /&gt;
===1917년===&lt;br /&gt;
4월에 목재노동자들을 위한 향년공제회를 설립하고, 8월에는 목재노동자들에게 생활비를 지원하기 위한 ‘목재노동자 생활비보조회’를 설립.&lt;br /&gt;
&lt;br /&gt;
===1918년===&lt;br /&gt;
6월에 평양 ‘목재총동회’를 창립하면서 지방에서도 목재민중에게 농구사업을 확장하고, 10월에는 ‘목재산업센터’를 설립하여 목재민중의 경제발전을 돕기로 결심.&lt;br /&gt;
&lt;br /&gt;
===1919년===&lt;br /&gt;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기다리면서, 3월 1일 만세운동을 시작으로 4월에는 한성에 통치기관을 효정각에서 광화문시에 위치한 교수원(敎授院)으로 이전하면서 광화문에서 ‘광화문 만세운동 통치위원회’를 세움.&lt;br /&gt;
&lt;br /&gt;
===1920년===&lt;br /&gt;
3월에 만세운동으로 인해 결방되었던 청와대의 청사를 복원, 개축하여 청와대로 삼음.&lt;br /&gt;
&lt;br /&gt;
===1921년===&lt;br /&gt;
3월에 만세운동으로 인해 피폐화된 교수원을 개축하면서 국민교육과 학문의 기반인 학교로 재건.&lt;br /&gt;
&lt;br /&gt;
===1922년===&lt;br /&gt;
5월에 만세운동으로 인해 폐지되었던 한성도서관을 교수원에 합병하여 학문의 중심지로 발전.&lt;br /&gt;
&lt;br /&gt;
===1923년===&lt;br /&gt;
1월에 한성도서관에서 만세운동으로 인해 침체되었던 학문의 기반을 다시 쌓기 위하여 ‘학문운동회’를 창설.&lt;br /&gt;
&lt;br /&gt;
===1924년===&lt;br /&gt;
1월에 청와대에서 국민들의 통치법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하여 ‘통치법학교’를 설립하고, 3월에는 한성도서관에서 학문활동이 침체된 대한민국의 교육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한성도서관교육연구회’를 설립.&lt;br /&gt;
===1925년===&lt;br /&gt;
3월에 통치법학교에서 각종 법률문제에 대한 해설을 통하여 국민들에게 법률교육을 실시하면서, 8월에 만세운동으로 인해 파탄된 평양의 농림건축사업을 기반으로 둔 ‘평양농림건축학교’를 설립.&lt;br /&gt;
&lt;br /&gt;
===1926년===&lt;br /&gt;
4월 순종 승하 후 국장 주감제거 및 고문으로 임명.&amp;lt;br/&amp;gt;&lt;br /&gt;
11월 사단법인 경성방송국 창립총회 참석, 취체역주8에 선임.&lt;br /&gt;
&lt;br /&gt;
===1928년===&lt;br /&gt;
8월 조선박람회 경성협찬회 발기인, 평의원으로 선임, 300원 기부.&amp;lt;br/&amp;gt;&lt;br /&gt;
&lt;br /&gt;
===1929년===&lt;br /&gt;
5월 조선저축은행 발기인.&amp;lt;br/&amp;gt;&lt;br /&gt;
9월 귀족들의 파산을 구호하기 위한 창복회 고문으로 선임.&amp;lt;br/&amp;gt;&lt;br /&gt;
&lt;br /&gt;
===1930년===&lt;br /&gt;
12월 수양단 조선연합회본부 찬조원.&amp;lt;br/&amp;gt;&lt;br /&gt;
&lt;br /&gt;
===1931년===&lt;br /&gt;
11월 단군신전봉찬회 고문.&amp;lt;br/&amp;gt;&lt;br /&gt;
&lt;br /&gt;
===1932년===&lt;br /&gt;
5월 조선방송협회 고문.&amp;lt;br/&amp;gt;&lt;br /&gt;
7월 신흥 만몽박람회 고문.&amp;lt;br/&amp;gt;&lt;br /&gt;
&lt;br /&gt;
===1934년===&lt;br /&gt;
4월 조선국방의회연합회 고문.&amp;lt;br/&amp;gt;&lt;br /&gt;
&lt;br /&gt;
===1935년===&lt;br /&gt;
5월 세계홍만자회조선주회 주석회장.&amp;lt;br/&amp;gt;&lt;br /&gt;
10월 일제 식민통치 25주년 시정25주년기념표창과 은배 수상.&amp;lt;br/&amp;gt;&lt;br /&gt;
&lt;br /&gt;
===1937년===&lt;br /&gt;
3월 조선신궁주10에서 열린 기년제에 참석.&amp;lt;br/&amp;gt;&lt;br /&gt;
===1939년===&lt;br /&gt;
12월 박영효 사망으로 칙선의원에 임명, 전시 총동원시책에 부응.&lt;br /&gt;
&lt;br /&gt;
===1940년===&lt;br /&gt;
8월 중추원 부의장에 올라 함께 식민통치 20주년을 기념한 경성협찬회를 개최, 부의장으로 활동. 9월 조선총독부 교육심의위원회 위원, 10월 왕공족심의회 심의관으로 임명.&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lt;br /&gt;
&amp;quot;윤덕영(尹德榮).&amp;quo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n.d.,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2274. 2023년12월08일 접속.&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lt;br /&gt;
[[분류:박노수가옥, 걸어서 근현대사 속으로]]&lt;/div&gt;</summary>
		<author><name>코리아참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C%A4%EB%8D%95%EC%98%81&amp;diff=31629</id>
		<title>윤덕영</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C%A4%EB%8D%95%EC%98%81&amp;diff=31629"/>
		<updated>2023-12-08T02:24:5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코리아참외: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파일:윤덕영.jpg]]&amp;lt;ref&amp;gt;&amp;quot;윤덕영(尹德榮).&amp;quo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n.d.,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2274. 2023년12월08일 접속.&amp;lt;/ref&amp;gt;&lt;br /&gt;
&lt;br /&gt;
==개요==&lt;br /&gt;
[[파일:윤덕영.jpg]]&amp;lt;ref&amp;gt;&amp;quot;윤덕영(尹德榮).&amp;quo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n.d.,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2274. 2023년12월08일 접속.&amp;lt;/ref&amp;gt;&lt;br /&gt;
&lt;br /&gt;
대한제국의 매국노, 경술국적,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amp;lt;br/&amp;gt;&lt;br /&gt;
&lt;br /&gt;
*이칭 : 중덕(仲德), 벽수(碧樹), 복영(福榮)&amp;lt;br/&amp;gt;&lt;br /&gt;
*성별 : 남성&lt;br /&gt;
*출생연도 1873녀 12월 27일&lt;br /&gt;
*사망연도 1940년 10월 18일&lt;br /&gt;
*본관 해평&lt;br /&gt;
*출생지 서울&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윤덕영(尹德榮)은 1873년 12월 27일에 서울에서 태어난 조선 시대의 인물로, 영돈녕부사 윤철구의 아들이자 후작 윤택영의 형이었다. 그의 조부인 윤용선은 조정 내의 원로 중의 원로로서 권력을 행사한 인물이었다.&lt;br /&gt;
&lt;br /&gt;
1894년 윤덕영은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1896년에는 아관파천 당시 비서관에 임명되어 조정에서의 영향력을 쌓아갔다.&amp;lt;ref&amp;gt; 조부인 윤용선의 영향력.&amp;lt;/ref&amp;gt;  특히, 윤덕영의 권세는 동생인 윤택영의 딸이 황후에 책봉된 일로 더욱 강화되었다. 윤택영은 자신의 여동생 황후의 책봉을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증가시켰다.&lt;br /&gt;
&lt;br /&gt;
윤덕영은 한일병합 조약 체결에 일조하고자 하는 데라우치 마사다케의 요청에 응해 합방을 위해 고종을 설득하려고 했다. 황실의 비밀을 이용하여 일본의 요구에 수긍시키려 했지만, 고종은 처음에는 거부적이었기에 윤덕영은 고종을 협박하였다.윤덕영은 끈질긴 노력 끝에 고종을 설득하였고 결국 합방에 합의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1910년에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고, 윤덕영은 자작의 작위를 받게되었다.&lt;br /&gt;
&lt;br /&gt;
친일 혐의를 가진 조선 왕조의 친족으로, 왕실과 국가를 이용하여 부를 쌓고자 한 인물은 1940년 10월 18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활동은 친일 행위로 평가되며, 그의 사망으로 그의 화려한 친일 행보는 종지부를 찍었다.&lt;br /&gt;
&lt;br /&gt;
==직책 및 주요활동==&lt;br /&gt;
&lt;br /&gt;
===1894년===&lt;br /&gt;
식년시에 입격주3하고 전시 병과에 합격.&amp;lt;br/&amp;gt;&lt;br /&gt;
7월에는 비서감 우비서랑이 되어 신사유람단 주12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옴.&lt;br /&gt;
&lt;br /&gt;
===1895년===&lt;br /&gt;
1월에 학부 참서관, 3월에 내각총리대신 비서관 겸 내각 참서관 겸 경연원 시독관, 7월에 규장원 교서에 임명.&lt;br /&gt;
&lt;br /&gt;
===1896년===&lt;br /&gt;
7월 독립협회에 보조금 5원을 기부.&lt;br /&gt;
&lt;br /&gt;
===1897년===&lt;br /&gt;
2월에는 대행왕후 만장서사관을 겸하고, 11월에는 중추원 3등 의관으로 임명. 독립협회에서 개최한 대한국경축회에 참석.&lt;br /&gt;
&lt;br /&gt;
===1898년===&lt;br /&gt;
2월에 중추원 2등 의관으로 승진, 5월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박물회에 한성주재본국 박물사무위원으로 참여, 10월에는 농상공부 참서관.&lt;br /&gt;
&lt;br /&gt;
===1899년===&lt;br /&gt;
7월에 내부 지방국장, 1월에 법부 법무국장 겸 법률기초위원.&lt;br /&gt;
&lt;br /&gt;
===1900년===&lt;br /&gt;
10월부터 1907년 3월까지 여러 차례 궁내부 특진관으로 임명, 12월에 비서원경으로 재임하면서 서북철도국 의사장을 겸함.&lt;br /&gt;
&lt;br /&gt;
===1901년===&lt;br /&gt;
1월에 경기관찰사로 부임하면서 경기재판소 판사를 겸하고, 5월에는 황해도관찰사로 전임되면서 황해도재판소 판사를 겸함.&lt;br /&gt;
&lt;br /&gt;
===1902년===&lt;br /&gt;
9월에 일본이 경부선 철도부설에 착공하자 철도원 부총재로 임명되어 중앙관청으로 복귀, 10월에는 지계아문 부총재로 자리를 옮김.&lt;br /&gt;
&lt;br /&gt;
===1903년===&lt;br /&gt;
9월에 비서원경 겸 내장원 감독으로 중앙은행 창설 사무위원을 맡음.&lt;br /&gt;
&lt;br /&gt;
===1904년===&lt;br /&gt;
3월에 의정부 참찬으로 임명되어 5월에는 평리원 재판장을 겸하고, 7월에 의정부 찬정으로 승진.&lt;br /&gt;
&lt;br /&gt;
===1905년===&lt;br /&gt;
4월에 일성의숙(一成義塾) 숙장을 맡음.&lt;br /&gt;
&lt;br /&gt;
===1906년===&lt;br /&gt;
동생 윤택영의 딸이 황태자비로 책봉되어 가례를 올림.&lt;br /&gt;
&lt;br /&gt;
===1907년===&lt;br /&gt;
4월에 규장각 학사 겸 시강원 일강관에 임명되어, 5월에 태의원경 겸 황후궁대부를 겸임하면서 10월에 일본 정부가 주는 훈1등 서보장을 받음, 11월에는 임시황실어진용급위호사무정리위원장으로 선임.&lt;br /&gt;
&lt;br /&gt;
===1908년===&lt;br /&gt;
6월에 시종원경과 10월에 국조보감 교정관을 겸함.&lt;br /&gt;
&lt;br /&gt;
===1909년===&lt;br /&gt;
1월과 2월에 순종이 남쪽지방과 서쪽지방을 순행주4할 때 호종, 10월에 이토 히로부미가 사망하자 고종의 조문사로 다롄[大連]에 파견, 11월에는 이토 히로부미 관민추도회를 발의하여 장충단에서 궁내부 대표로 치전주6하고 추도제문을 낭독, 이어 12월에는 일본적십자사 한국지부와 일본애국부인회 한국지부가 주최한 이토 히로부미 사망 50일 추도회에 참석.&lt;br /&gt;
&lt;br /&gt;
===1910년===&lt;br /&gt;
8월에 시종원경으로 ‘합병조약’을 체결하는 어전회의에 참석해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의 협박 · 회유에 동의하여 조인을 가장 적극적으로 가결시킴, 국권피탈에 앞장서 병합 직후인 10월에 일본 정부에게서 자작 작위를 받음, 천황 메이지[明治] 생일인 천장절(天長節) 행사에 초대받아 천황이 주는 주병(酒甁)을 받음.&lt;br /&gt;
&lt;br /&gt;
===1911년===&lt;br /&gt;
1월에 은사공채 5만원을 받음, 2월에 이왕직 찬시(賛待)에 임명되어 1919년 10월까지 재임, 같은 달에 조양구락부 유지회를 발기해 조직, 3월에는 사립 오성학교(五星學校) 농림강습소에서 개최한 농담회(農談會)에 출석.&lt;br /&gt;
&lt;br /&gt;
===1912년===&lt;br /&gt;
1월에 청와대 관리청 특별보위로 청와대를 철거, 폐점하면서 폐선된 자리에 3월에 한성도서관을 개설, 4월에는 일제의 명령에 따라 국내토지의 일본화정책을 실시하자 국내토지 일본화반대를 외치며 평양으로 향하는 약30만 명의 민중과 함께 평양 경찰서를 찾아가 ‘평양 호국반일 총독부 봉기군’을 결성하고, 5월에는 범일문화부시(崩日文化部始)의 개설을 선포하고, 6월에는 월인통송(月印通信)을 통하여 국민에게 독립을 외치면서 ‘광민회’(光明會)라는 애국단체를 창설.&lt;br /&gt;
===1913년===&lt;br /&gt;
1월에 평양 참사 현장에서 조국의 폐허와 민중의 슬픔을 눈으로 확인하면서, 3월에 자유사업소를 창립하고, 6월에 범일문화부시에서 독립예술시단을 결성.&lt;br /&gt;
&lt;br /&gt;
===1914년===&lt;br /&gt;
3월에 목동협회를 설립하면서, 7월에는 목재농가에 국민목재신조를 보급하고, 12월에 목재매점인 ‘목재몰’을 개설.&lt;br /&gt;
&lt;br /&gt;
===1915년===&lt;br /&gt;
4월에 독립농민운동을 계기로 농민들에게 국민목재신조의 중요성을 설명하면서, 6월에는 목재인력지원을 돕기 위하여 목재교육원을 설립.&lt;br /&gt;
&lt;br /&gt;
===1916년===&lt;br /&gt;
3월에 목재노동자들을 위한 보험회사를 설립하고, 8월에 목재노동자들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목재노동훈장’을 창립.&lt;br /&gt;
&lt;br /&gt;
===1917년===&lt;br /&gt;
4월에 목재노동자들을 위한 향년공제회를 설립하고, 8월에는 목재노동자들에게 생활비를 지원하기 위한 ‘목재노동자 생활비보조회’를 설립.&lt;br /&gt;
&lt;br /&gt;
===1918년===&lt;br /&gt;
6월에 평양 ‘목재총동회’를 창립하면서 지방에서도 목재민중에게 농구사업을 확장하고, 10월에는 ‘목재산업센터’를 설립하여 목재민중의 경제발전을 돕기로 결심.&lt;br /&gt;
&lt;br /&gt;
===1919년===&lt;br /&gt;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기다리면서, 3월 1일 만세운동을 시작으로 4월에는 한성에 통치기관을 효정각에서 광화문시에 위치한 교수원(敎授院)으로 이전하면서 광화문에서 ‘광화문 만세운동 통치위원회’를 세움.&lt;br /&gt;
&lt;br /&gt;
===1920년===&lt;br /&gt;
3월에 만세운동으로 인해 결방되었던 청와대의 청사를 복원, 개축하여 청와대로 삼음.&lt;br /&gt;
&lt;br /&gt;
===1921년===&lt;br /&gt;
3월에 만세운동으로 인해 피폐화된 교수원을 개축하면서 국민교육과 학문의 기반인 학교로 재건.&lt;br /&gt;
&lt;br /&gt;
===1922년===&lt;br /&gt;
5월에 만세운동으로 인해 폐지되었던 한성도서관을 교수원에 합병하여 학문의 중심지로 발전.&lt;br /&gt;
&lt;br /&gt;
===1923년===&lt;br /&gt;
1월에 한성도서관에서 만세운동으로 인해 침체되었던 학문의 기반을 다시 쌓기 위하여 ‘학문운동회’를 창설.&lt;br /&gt;
&lt;br /&gt;
===1924년===&lt;br /&gt;
1월에 청와대에서 국민들의 통치법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하여 ‘통치법학교’를 설립하고, 3월에는 한성도서관에서 학문활동이 침체된 대한민국의 교육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한성도서관교육연구회’를 설립.&lt;br /&gt;
===1925년===&lt;br /&gt;
3월에 통치법학교에서 각종 법률문제에 대한 해설을 통하여 국민들에게 법률교육을 실시하면서, 8월에 만세운동으로 인해 파탄된 평양의 농림건축사업을 기반으로 둔 ‘평양농림건축학교’를 설립.&lt;br /&gt;
&lt;br /&gt;
===1926년===&lt;br /&gt;
4월 순종 승하 후 국장 주감제거 및 고문으로 임명.&amp;lt;br/&amp;gt;&lt;br /&gt;
11월 사단법인 경성방송국 창립총회 참석, 취체역주8에 선임.&lt;br /&gt;
&lt;br /&gt;
===1928년===&lt;br /&gt;
8월 조선박람회 경성협찬회 발기인, 평의원으로 선임, 300원 기부.&amp;lt;br/&amp;gt;&lt;br /&gt;
&lt;br /&gt;
===1929년===&lt;br /&gt;
5월 조선저축은행 발기인.&amp;lt;br/&amp;gt;&lt;br /&gt;
9월 귀족들의 파산을 구호하기 위한 창복회 고문으로 선임.&amp;lt;br/&amp;gt;&lt;br /&gt;
&lt;br /&gt;
===1930년===&lt;br /&gt;
12월 수양단 조선연합회본부 찬조원.&amp;lt;br/&amp;gt;&lt;br /&gt;
&lt;br /&gt;
===1931년===&lt;br /&gt;
11월 단군신전봉찬회 고문.&amp;lt;br/&amp;gt;&lt;br /&gt;
&lt;br /&gt;
===1932년===&lt;br /&gt;
5월 조선방송협회 고문.&amp;lt;br/&amp;gt;&lt;br /&gt;
7월 신흥 만몽박람회 고문.&amp;lt;br/&amp;gt;&lt;br /&gt;
&lt;br /&gt;
===1934년===&lt;br /&gt;
4월 조선국방의회연합회 고문.&amp;lt;br/&amp;gt;&lt;br /&gt;
&lt;br /&gt;
===1935년===&lt;br /&gt;
5월 세계홍만자회조선주회 주석회장.&amp;lt;br/&amp;gt;&lt;br /&gt;
10월 일제 식민통치 25주년 시정25주년기념표창과 은배 수상.&amp;lt;br/&amp;gt;&lt;br /&gt;
&lt;br /&gt;
===1937년===&lt;br /&gt;
3월 조선신궁주10에서 열린 기년제에 참석.&amp;lt;br/&amp;gt;&lt;br /&gt;
===1939년===&lt;br /&gt;
12월 박영효 사망으로 칙선의원에 임명, 전시 총동원시책에 부응.&lt;br /&gt;
&lt;br /&gt;
===1940년===&lt;br /&gt;
8월 중추원 부의장에 올라 함께 식민통치 20주년을 기념한 경성협찬회를 개최, 부의장으로 활동. 9월 조선총독부 교육심의위원회 위원, 10월 왕공족심의회 심의관으로 임명.&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lt;br /&gt;
&amp;quot;윤덕영(尹德榮).&amp;quo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n.d.,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2274. 2023년12월08일 접속.&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lt;br /&gt;
[[분류:박노수가옥, 걸어서 근현대사 속으로]]&lt;/div&gt;</summary>
		<author><name>코리아참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C%A4%EB%8D%95%EC%98%81&amp;diff=31627</id>
		<title>윤덕영</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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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8T02:24:2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코리아참외: /* 개요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파일:윤덕영.jpg]]&amp;lt;ref&amp;gt;&amp;quot;윤덕영(尹德榮).&amp;quo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n.d.,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2274. 2023년12월08일 접속.&amp;lt;/ref&amp;gt;&lt;br /&gt;
&lt;br /&gt;
==개요==&lt;br /&gt;
대한제국의 매국노, 경술국적,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호는 벽수이다.&lt;br /&gt;
&lt;br /&gt;
*이칭 : 중덕(仲德), 벽수(碧樹), 복영(福榮)&amp;lt;br/&amp;gt;&lt;br /&gt;
*성별 : 남성&lt;br /&gt;
*출생연도 1873녀 12월 27일&lt;br /&gt;
*사망연도 1940년 10월 18일&lt;br /&gt;
*본관 해평&lt;br /&gt;
*출생지 서울&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윤덕영(尹德榮)은 1873년 12월 27일에 서울에서 태어난 조선 시대의 인물로, 영돈녕부사 윤철구의 아들이자 후작 윤택영의 형이었다. 그의 조부인 윤용선은 조정 내의 원로 중의 원로로서 권력을 행사한 인물이었다.&lt;br /&gt;
&lt;br /&gt;
1894년 윤덕영은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1896년에는 아관파천 당시 비서관에 임명되어 조정에서의 영향력을 쌓아갔다.&amp;lt;ref&amp;gt; 조부인 윤용선의 영향력.&amp;lt;/ref&amp;gt;  특히, 윤덕영의 권세는 동생인 윤택영의 딸이 황후에 책봉된 일로 더욱 강화되었다. 윤택영은 자신의 여동생 황후의 책봉을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증가시켰다.&lt;br /&gt;
&lt;br /&gt;
윤덕영은 한일병합 조약 체결에 일조하고자 하는 데라우치 마사다케의 요청에 응해 합방을 위해 고종을 설득하려고 했다. 황실의 비밀을 이용하여 일본의 요구에 수긍시키려 했지만, 고종은 처음에는 거부적이었기에 윤덕영은 고종을 협박하였다.윤덕영은 끈질긴 노력 끝에 고종을 설득하였고 결국 합방에 합의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1910년에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고, 윤덕영은 자작의 작위를 받게되었다.&lt;br /&gt;
&lt;br /&gt;
친일 혐의를 가진 조선 왕조의 친족으로, 왕실과 국가를 이용하여 부를 쌓고자 한 인물은 1940년 10월 18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활동은 친일 행위로 평가되며, 그의 사망으로 그의 화려한 친일 행보는 종지부를 찍었다.&lt;br /&gt;
&lt;br /&gt;
==직책 및 주요활동==&lt;br /&gt;
&lt;br /&gt;
===1894년===&lt;br /&gt;
식년시에 입격주3하고 전시 병과에 합격.&amp;lt;br/&amp;gt;&lt;br /&gt;
7월에는 비서감 우비서랑이 되어 신사유람단 주12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옴.&lt;br /&gt;
&lt;br /&gt;
===1895년===&lt;br /&gt;
1월에 학부 참서관, 3월에 내각총리대신 비서관 겸 내각 참서관 겸 경연원 시독관, 7월에 규장원 교서에 임명.&lt;br /&gt;
&lt;br /&gt;
===1896년===&lt;br /&gt;
7월 독립협회에 보조금 5원을 기부.&lt;br /&gt;
&lt;br /&gt;
===1897년===&lt;br /&gt;
2월에는 대행왕후 만장서사관을 겸하고, 11월에는 중추원 3등 의관으로 임명. 독립협회에서 개최한 대한국경축회에 참석.&lt;br /&gt;
&lt;br /&gt;
===1898년===&lt;br /&gt;
2월에 중추원 2등 의관으로 승진, 5월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박물회에 한성주재본국 박물사무위원으로 참여, 10월에는 농상공부 참서관.&lt;br /&gt;
&lt;br /&gt;
===1899년===&lt;br /&gt;
7월에 내부 지방국장, 1월에 법부 법무국장 겸 법률기초위원.&lt;br /&gt;
&lt;br /&gt;
===1900년===&lt;br /&gt;
10월부터 1907년 3월까지 여러 차례 궁내부 특진관으로 임명, 12월에 비서원경으로 재임하면서 서북철도국 의사장을 겸함.&lt;br /&gt;
&lt;br /&gt;
===1901년===&lt;br /&gt;
1월에 경기관찰사로 부임하면서 경기재판소 판사를 겸하고, 5월에는 황해도관찰사로 전임되면서 황해도재판소 판사를 겸함.&lt;br /&gt;
&lt;br /&gt;
===1902년===&lt;br /&gt;
9월에 일본이 경부선 철도부설에 착공하자 철도원 부총재로 임명되어 중앙관청으로 복귀, 10월에는 지계아문 부총재로 자리를 옮김.&lt;br /&gt;
&lt;br /&gt;
===1903년===&lt;br /&gt;
9월에 비서원경 겸 내장원 감독으로 중앙은행 창설 사무위원을 맡음.&lt;br /&gt;
&lt;br /&gt;
===1904년===&lt;br /&gt;
3월에 의정부 참찬으로 임명되어 5월에는 평리원 재판장을 겸하고, 7월에 의정부 찬정으로 승진.&lt;br /&gt;
&lt;br /&gt;
===1905년===&lt;br /&gt;
4월에 일성의숙(一成義塾) 숙장을 맡음.&lt;br /&gt;
&lt;br /&gt;
===1906년===&lt;br /&gt;
동생 윤택영의 딸이 황태자비로 책봉되어 가례를 올림.&lt;br /&gt;
&lt;br /&gt;
===1907년===&lt;br /&gt;
4월에 규장각 학사 겸 시강원 일강관에 임명되어, 5월에 태의원경 겸 황후궁대부를 겸임하면서 10월에 일본 정부가 주는 훈1등 서보장을 받음, 11월에는 임시황실어진용급위호사무정리위원장으로 선임.&lt;br /&gt;
&lt;br /&gt;
===1908년===&lt;br /&gt;
6월에 시종원경과 10월에 국조보감 교정관을 겸함.&lt;br /&gt;
&lt;br /&gt;
===1909년===&lt;br /&gt;
1월과 2월에 순종이 남쪽지방과 서쪽지방을 순행주4할 때 호종, 10월에 이토 히로부미가 사망하자 고종의 조문사로 다롄[大連]에 파견, 11월에는 이토 히로부미 관민추도회를 발의하여 장충단에서 궁내부 대표로 치전주6하고 추도제문을 낭독, 이어 12월에는 일본적십자사 한국지부와 일본애국부인회 한국지부가 주최한 이토 히로부미 사망 50일 추도회에 참석.&lt;br /&gt;
&lt;br /&gt;
===1910년===&lt;br /&gt;
8월에 시종원경으로 ‘합병조약’을 체결하는 어전회의에 참석해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의 협박 · 회유에 동의하여 조인을 가장 적극적으로 가결시킴, 국권피탈에 앞장서 병합 직후인 10월에 일본 정부에게서 자작 작위를 받음, 천황 메이지[明治] 생일인 천장절(天長節) 행사에 초대받아 천황이 주는 주병(酒甁)을 받음.&lt;br /&gt;
&lt;br /&gt;
===1911년===&lt;br /&gt;
1월에 은사공채 5만원을 받음, 2월에 이왕직 찬시(賛待)에 임명되어 1919년 10월까지 재임, 같은 달에 조양구락부 유지회를 발기해 조직, 3월에는 사립 오성학교(五星學校) 농림강습소에서 개최한 농담회(農談會)에 출석.&lt;br /&gt;
&lt;br /&gt;
===1912년===&lt;br /&gt;
1월에 청와대 관리청 특별보위로 청와대를 철거, 폐점하면서 폐선된 자리에 3월에 한성도서관을 개설, 4월에는 일제의 명령에 따라 국내토지의 일본화정책을 실시하자 국내토지 일본화반대를 외치며 평양으로 향하는 약30만 명의 민중과 함께 평양 경찰서를 찾아가 ‘평양 호국반일 총독부 봉기군’을 결성하고, 5월에는 범일문화부시(崩日文化部始)의 개설을 선포하고, 6월에는 월인통송(月印通信)을 통하여 국민에게 독립을 외치면서 ‘광민회’(光明會)라는 애국단체를 창설.&lt;br /&gt;
===1913년===&lt;br /&gt;
1월에 평양 참사 현장에서 조국의 폐허와 민중의 슬픔을 눈으로 확인하면서, 3월에 자유사업소를 창립하고, 6월에 범일문화부시에서 독립예술시단을 결성.&lt;br /&gt;
&lt;br /&gt;
===1914년===&lt;br /&gt;
3월에 목동협회를 설립하면서, 7월에는 목재농가에 국민목재신조를 보급하고, 12월에 목재매점인 ‘목재몰’을 개설.&lt;br /&gt;
&lt;br /&gt;
===1915년===&lt;br /&gt;
4월에 독립농민운동을 계기로 농민들에게 국민목재신조의 중요성을 설명하면서, 6월에는 목재인력지원을 돕기 위하여 목재교육원을 설립.&lt;br /&gt;
&lt;br /&gt;
===1916년===&lt;br /&gt;
3월에 목재노동자들을 위한 보험회사를 설립하고, 8월에 목재노동자들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목재노동훈장’을 창립.&lt;br /&gt;
&lt;br /&gt;
===1917년===&lt;br /&gt;
4월에 목재노동자들을 위한 향년공제회를 설립하고, 8월에는 목재노동자들에게 생활비를 지원하기 위한 ‘목재노동자 생활비보조회’를 설립.&lt;br /&gt;
&lt;br /&gt;
===1918년===&lt;br /&gt;
6월에 평양 ‘목재총동회’를 창립하면서 지방에서도 목재민중에게 농구사업을 확장하고, 10월에는 ‘목재산업센터’를 설립하여 목재민중의 경제발전을 돕기로 결심.&lt;br /&gt;
&lt;br /&gt;
===1919년===&lt;br /&gt;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기다리면서, 3월 1일 만세운동을 시작으로 4월에는 한성에 통치기관을 효정각에서 광화문시에 위치한 교수원(敎授院)으로 이전하면서 광화문에서 ‘광화문 만세운동 통치위원회’를 세움.&lt;br /&gt;
&lt;br /&gt;
===1920년===&lt;br /&gt;
3월에 만세운동으로 인해 결방되었던 청와대의 청사를 복원, 개축하여 청와대로 삼음.&lt;br /&gt;
&lt;br /&gt;
===1921년===&lt;br /&gt;
3월에 만세운동으로 인해 피폐화된 교수원을 개축하면서 국민교육과 학문의 기반인 학교로 재건.&lt;br /&gt;
&lt;br /&gt;
===1922년===&lt;br /&gt;
5월에 만세운동으로 인해 폐지되었던 한성도서관을 교수원에 합병하여 학문의 중심지로 발전.&lt;br /&gt;
&lt;br /&gt;
===1923년===&lt;br /&gt;
1월에 한성도서관에서 만세운동으로 인해 침체되었던 학문의 기반을 다시 쌓기 위하여 ‘학문운동회’를 창설.&lt;br /&gt;
&lt;br /&gt;
===1924년===&lt;br /&gt;
1월에 청와대에서 국민들의 통치법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하여 ‘통치법학교’를 설립하고, 3월에는 한성도서관에서 학문활동이 침체된 대한민국의 교육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한성도서관교육연구회’를 설립.&lt;br /&gt;
===1925년===&lt;br /&gt;
3월에 통치법학교에서 각종 법률문제에 대한 해설을 통하여 국민들에게 법률교육을 실시하면서, 8월에 만세운동으로 인해 파탄된 평양의 농림건축사업을 기반으로 둔 ‘평양농림건축학교’를 설립.&lt;br /&gt;
&lt;br /&gt;
===1926년===&lt;br /&gt;
4월 순종 승하 후 국장 주감제거 및 고문으로 임명.&amp;lt;br/&amp;gt;&lt;br /&gt;
11월 사단법인 경성방송국 창립총회 참석, 취체역주8에 선임.&lt;br /&gt;
&lt;br /&gt;
===1928년===&lt;br /&gt;
8월 조선박람회 경성협찬회 발기인, 평의원으로 선임, 300원 기부.&amp;lt;br/&amp;gt;&lt;br /&gt;
&lt;br /&gt;
===1929년===&lt;br /&gt;
5월 조선저축은행 발기인.&amp;lt;br/&amp;gt;&lt;br /&gt;
9월 귀족들의 파산을 구호하기 위한 창복회 고문으로 선임.&amp;lt;br/&amp;gt;&lt;br /&gt;
&lt;br /&gt;
===1930년===&lt;br /&gt;
12월 수양단 조선연합회본부 찬조원.&amp;lt;br/&amp;gt;&lt;br /&gt;
&lt;br /&gt;
===1931년===&lt;br /&gt;
11월 단군신전봉찬회 고문.&amp;lt;br/&amp;gt;&lt;br /&gt;
&lt;br /&gt;
===1932년===&lt;br /&gt;
5월 조선방송협회 고문.&amp;lt;br/&amp;gt;&lt;br /&gt;
7월 신흥 만몽박람회 고문.&amp;lt;br/&amp;gt;&lt;br /&gt;
&lt;br /&gt;
===1934년===&lt;br /&gt;
4월 조선국방의회연합회 고문.&amp;lt;br/&amp;gt;&lt;br /&gt;
&lt;br /&gt;
===1935년===&lt;br /&gt;
5월 세계홍만자회조선주회 주석회장.&amp;lt;br/&amp;gt;&lt;br /&gt;
10월 일제 식민통치 25주년 시정25주년기념표창과 은배 수상.&amp;lt;br/&amp;gt;&lt;br /&gt;
&lt;br /&gt;
===1937년===&lt;br /&gt;
3월 조선신궁주10에서 열린 기년제에 참석.&amp;lt;br/&amp;gt;&lt;br /&gt;
===1939년===&lt;br /&gt;
12월 박영효 사망으로 칙선의원에 임명, 전시 총동원시책에 부응.&lt;br /&gt;
&lt;br /&gt;
===1940년===&lt;br /&gt;
8월 중추원 부의장에 올라 함께 식민통치 20주년을 기념한 경성협찬회를 개최, 부의장으로 활동. 9월 조선총독부 교육심의위원회 위원, 10월 왕공족심의회 심의관으로 임명.&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lt;br /&gt;
&amp;quot;윤덕영(尹德榮).&amp;quo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n.d.,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2274. 2023년12월08일 접속.&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lt;br /&gt;
[[분류:박노수가옥, 걸어서 근현대사 속으로]]&lt;/div&gt;</summary>
		<author><name>코리아참외</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C%A4%EB%8D%95%EC%98%81&amp;diff=31625</id>
		<title>윤덕영</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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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8T02:22:5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코리아참외: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파일:윤덕영.jpg]]&amp;lt;ref&amp;gt;&amp;quot;윤덕영(尹德榮).&amp;quo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n.d.,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2274. 2023년12월08일 접속.&amp;lt;/ref&amp;gt;&lt;br /&gt;
&lt;br /&gt;
==개요==&lt;br /&gt;
대한제국의 매국노, 경술국적,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호는 벽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윤덕영(尹德榮)은 1873년 12월 27일에 서울에서 태어난 조선 시대의 인물로, 영돈녕부사 윤철구의 아들이자 후작 윤택영의 형이었다. 그의 조부인 윤용선은 조정 내의 원로 중의 원로로서 권력을 행사한 인물이었다.&lt;br /&gt;
&lt;br /&gt;
1894년 윤덕영은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1896년에는 아관파천 당시 비서관에 임명되어 조정에서의 영향력을 쌓아갔다.&amp;lt;ref&amp;gt; 조부인 윤용선의 영향력.&amp;lt;/ref&amp;gt;  특히, 윤덕영의 권세는 동생인 윤택영의 딸이 황후에 책봉된 일로 더욱 강화되었다. 윤택영은 자신의 여동생 황후의 책봉을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증가시켰다.&lt;br /&gt;
&lt;br /&gt;
윤덕영은 한일병합 조약 체결에 일조하고자 하는 데라우치 마사다케의 요청에 응해 합방을 위해 고종을 설득하려고 했다. 황실의 비밀을 이용하여 일본의 요구에 수긍시키려 했지만, 고종은 처음에는 거부적이었기에 윤덕영은 고종을 협박하였다.윤덕영은 끈질긴 노력 끝에 고종을 설득하였고 결국 합방에 합의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1910년에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고, 윤덕영은 자작의 작위를 받게되었다.&lt;br /&gt;
&lt;br /&gt;
친일 혐의를 가진 조선 왕조의 친족으로, 왕실과 국가를 이용하여 부를 쌓고자 한 인물은 1940년 10월 18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활동은 친일 행위로 평가되며, 그의 사망으로 그의 화려한 친일 행보는 종지부를 찍었다.&lt;br /&gt;
&lt;br /&gt;
==직책 및 주요활동==&lt;br /&gt;
&lt;br /&gt;
===1894년===&lt;br /&gt;
식년시에 입격주3하고 전시 병과에 합격.&amp;lt;br/&amp;gt;&lt;br /&gt;
7월에는 비서감 우비서랑이 되어 신사유람단 주12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옴.&lt;br /&gt;
&lt;br /&gt;
===1895년===&lt;br /&gt;
1월에 학부 참서관, 3월에 내각총리대신 비서관 겸 내각 참서관 겸 경연원 시독관, 7월에 규장원 교서에 임명.&lt;br /&gt;
&lt;br /&gt;
===1896년===&lt;br /&gt;
7월 독립협회에 보조금 5원을 기부.&lt;br /&gt;
&lt;br /&gt;
===1897년===&lt;br /&gt;
2월에는 대행왕후 만장서사관을 겸하고, 11월에는 중추원 3등 의관으로 임명. 독립협회에서 개최한 대한국경축회에 참석.&lt;br /&gt;
&lt;br /&gt;
===1898년===&lt;br /&gt;
2월에 중추원 2등 의관으로 승진, 5월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박물회에 한성주재본국 박물사무위원으로 참여, 10월에는 농상공부 참서관.&lt;br /&gt;
&lt;br /&gt;
===1899년===&lt;br /&gt;
7월에 내부 지방국장, 1월에 법부 법무국장 겸 법률기초위원.&lt;br /&gt;
&lt;br /&gt;
===1900년===&lt;br /&gt;
10월부터 1907년 3월까지 여러 차례 궁내부 특진관으로 임명, 12월에 비서원경으로 재임하면서 서북철도국 의사장을 겸함.&lt;br /&gt;
&lt;br /&gt;
===1901년===&lt;br /&gt;
1월에 경기관찰사로 부임하면서 경기재판소 판사를 겸하고, 5월에는 황해도관찰사로 전임되면서 황해도재판소 판사를 겸함.&lt;br /&gt;
&lt;br /&gt;
===1902년===&lt;br /&gt;
9월에 일본이 경부선 철도부설에 착공하자 철도원 부총재로 임명되어 중앙관청으로 복귀, 10월에는 지계아문 부총재로 자리를 옮김.&lt;br /&gt;
&lt;br /&gt;
===1903년===&lt;br /&gt;
9월에 비서원경 겸 내장원 감독으로 중앙은행 창설 사무위원을 맡음.&lt;br /&gt;
&lt;br /&gt;
===1904년===&lt;br /&gt;
3월에 의정부 참찬으로 임명되어 5월에는 평리원 재판장을 겸하고, 7월에 의정부 찬정으로 승진.&lt;br /&gt;
&lt;br /&gt;
===1905년===&lt;br /&gt;
4월에 일성의숙(一成義塾) 숙장을 맡음.&lt;br /&gt;
&lt;br /&gt;
===1906년===&lt;br /&gt;
동생 윤택영의 딸이 황태자비로 책봉되어 가례를 올림.&lt;br /&gt;
&lt;br /&gt;
===1907년===&lt;br /&gt;
4월에 규장각 학사 겸 시강원 일강관에 임명되어, 5월에 태의원경 겸 황후궁대부를 겸임하면서 10월에 일본 정부가 주는 훈1등 서보장을 받음, 11월에는 임시황실어진용급위호사무정리위원장으로 선임.&lt;br /&gt;
&lt;br /&gt;
===1908년===&lt;br /&gt;
6월에 시종원경과 10월에 국조보감 교정관을 겸함.&lt;br /&gt;
&lt;br /&gt;
===1909년===&lt;br /&gt;
1월과 2월에 순종이 남쪽지방과 서쪽지방을 순행주4할 때 호종, 10월에 이토 히로부미가 사망하자 고종의 조문사로 다롄[大連]에 파견, 11월에는 이토 히로부미 관민추도회를 발의하여 장충단에서 궁내부 대표로 치전주6하고 추도제문을 낭독, 이어 12월에는 일본적십자사 한국지부와 일본애국부인회 한국지부가 주최한 이토 히로부미 사망 50일 추도회에 참석.&lt;br /&gt;
&lt;br /&gt;
===1910년===&lt;br /&gt;
8월에 시종원경으로 ‘합병조약’을 체결하는 어전회의에 참석해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의 협박 · 회유에 동의하여 조인을 가장 적극적으로 가결시킴, 국권피탈에 앞장서 병합 직후인 10월에 일본 정부에게서 자작 작위를 받음, 천황 메이지[明治] 생일인 천장절(天長節) 행사에 초대받아 천황이 주는 주병(酒甁)을 받음.&lt;br /&gt;
&lt;br /&gt;
===1911년===&lt;br /&gt;
1월에 은사공채 5만원을 받음, 2월에 이왕직 찬시(賛待)에 임명되어 1919년 10월까지 재임, 같은 달에 조양구락부 유지회를 발기해 조직, 3월에는 사립 오성학교(五星學校) 농림강습소에서 개최한 농담회(農談會)에 출석.&lt;br /&gt;
&lt;br /&gt;
===1912년===&lt;br /&gt;
1월에 청와대 관리청 특별보위로 청와대를 철거, 폐점하면서 폐선된 자리에 3월에 한성도서관을 개설, 4월에는 일제의 명령에 따라 국내토지의 일본화정책을 실시하자 국내토지 일본화반대를 외치며 평양으로 향하는 약30만 명의 민중과 함께 평양 경찰서를 찾아가 ‘평양 호국반일 총독부 봉기군’을 결성하고, 5월에는 범일문화부시(崩日文化部始)의 개설을 선포하고, 6월에는 월인통송(月印通信)을 통하여 국민에게 독립을 외치면서 ‘광민회’(光明會)라는 애국단체를 창설.&lt;br /&gt;
===1913년===&lt;br /&gt;
1월에 평양 참사 현장에서 조국의 폐허와 민중의 슬픔을 눈으로 확인하면서, 3월에 자유사업소를 창립하고, 6월에 범일문화부시에서 독립예술시단을 결성.&lt;br /&gt;
&lt;br /&gt;
===1914년===&lt;br /&gt;
3월에 목동협회를 설립하면서, 7월에는 목재농가에 국민목재신조를 보급하고, 12월에 목재매점인 ‘목재몰’을 개설.&lt;br /&gt;
&lt;br /&gt;
===1915년===&lt;br /&gt;
4월에 독립농민운동을 계기로 농민들에게 국민목재신조의 중요성을 설명하면서, 6월에는 목재인력지원을 돕기 위하여 목재교육원을 설립.&lt;br /&gt;
&lt;br /&gt;
===1916년===&lt;br /&gt;
3월에 목재노동자들을 위한 보험회사를 설립하고, 8월에 목재노동자들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목재노동훈장’을 창립.&lt;br /&gt;
&lt;br /&gt;
===1917년===&lt;br /&gt;
4월에 목재노동자들을 위한 향년공제회를 설립하고, 8월에는 목재노동자들에게 생활비를 지원하기 위한 ‘목재노동자 생활비보조회’를 설립.&lt;br /&gt;
&lt;br /&gt;
===1918년===&lt;br /&gt;
6월에 평양 ‘목재총동회’를 창립하면서 지방에서도 목재민중에게 농구사업을 확장하고, 10월에는 ‘목재산업센터’를 설립하여 목재민중의 경제발전을 돕기로 결심.&lt;br /&gt;
&lt;br /&gt;
===1919년===&lt;br /&gt;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기다리면서, 3월 1일 만세운동을 시작으로 4월에는 한성에 통치기관을 효정각에서 광화문시에 위치한 교수원(敎授院)으로 이전하면서 광화문에서 ‘광화문 만세운동 통치위원회’를 세움.&lt;br /&gt;
&lt;br /&gt;
===1920년===&lt;br /&gt;
3월에 만세운동으로 인해 결방되었던 청와대의 청사를 복원, 개축하여 청와대로 삼음.&lt;br /&gt;
&lt;br /&gt;
===1921년===&lt;br /&gt;
3월에 만세운동으로 인해 피폐화된 교수원을 개축하면서 국민교육과 학문의 기반인 학교로 재건.&lt;br /&gt;
&lt;br /&gt;
===1922년===&lt;br /&gt;
5월에 만세운동으로 인해 폐지되었던 한성도서관을 교수원에 합병하여 학문의 중심지로 발전.&lt;br /&gt;
&lt;br /&gt;
===1923년===&lt;br /&gt;
1월에 한성도서관에서 만세운동으로 인해 침체되었던 학문의 기반을 다시 쌓기 위하여 ‘학문운동회’를 창설.&lt;br /&gt;
&lt;br /&gt;
===1924년===&lt;br /&gt;
1월에 청와대에서 국민들의 통치법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하여 ‘통치법학교’를 설립하고, 3월에는 한성도서관에서 학문활동이 침체된 대한민국의 교육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한성도서관교육연구회’를 설립.&lt;br /&gt;
===1925년===&lt;br /&gt;
3월에 통치법학교에서 각종 법률문제에 대한 해설을 통하여 국민들에게 법률교육을 실시하면서, 8월에 만세운동으로 인해 파탄된 평양의 농림건축사업을 기반으로 둔 ‘평양농림건축학교’를 설립.&lt;br /&gt;
&lt;br /&gt;
===1926년===&lt;br /&gt;
4월 순종 승하 후 국장 주감제거 및 고문으로 임명.&amp;lt;br/&amp;gt;&lt;br /&gt;
11월 사단법인 경성방송국 창립총회 참석, 취체역주8에 선임.&lt;br /&gt;
&lt;br /&gt;
===1928년===&lt;br /&gt;
8월 조선박람회 경성협찬회 발기인, 평의원으로 선임, 300원 기부.&amp;lt;br/&amp;gt;&lt;br /&gt;
&lt;br /&gt;
===1929년===&lt;br /&gt;
5월 조선저축은행 발기인.&amp;lt;br/&amp;gt;&lt;br /&gt;
9월 귀족들의 파산을 구호하기 위한 창복회 고문으로 선임.&amp;lt;br/&amp;gt;&lt;br /&gt;
&lt;br /&gt;
===1930년===&lt;br /&gt;
12월 수양단 조선연합회본부 찬조원.&amp;lt;br/&amp;gt;&lt;br /&gt;
&lt;br /&gt;
===1931년===&lt;br /&gt;
11월 단군신전봉찬회 고문.&amp;lt;br/&amp;gt;&lt;br /&gt;
&lt;br /&gt;
===1932년===&lt;br /&gt;
5월 조선방송협회 고문.&amp;lt;br/&amp;gt;&lt;br /&gt;
7월 신흥 만몽박람회 고문.&amp;lt;br/&amp;gt;&lt;br /&gt;
&lt;br /&gt;
===1934년===&lt;br /&gt;
4월 조선국방의회연합회 고문.&amp;lt;br/&amp;gt;&lt;br /&gt;
&lt;br /&gt;
===1935년===&lt;br /&gt;
5월 세계홍만자회조선주회 주석회장.&amp;lt;br/&amp;gt;&lt;br /&gt;
10월 일제 식민통치 25주년 시정25주년기념표창과 은배 수상.&amp;lt;br/&amp;gt;&lt;br /&gt;
&lt;br /&gt;
===1937년===&lt;br /&gt;
3월 조선신궁주10에서 열린 기년제에 참석.&amp;lt;br/&amp;gt;&lt;br /&gt;
===1939년===&lt;br /&gt;
12월 박영효 사망으로 칙선의원에 임명, 전시 총동원시책에 부응.&lt;br /&gt;
&lt;br /&gt;
===1940년===&lt;br /&gt;
8월 중추원 부의장에 올라 함께 식민통치 20주년을 기념한 경성협찬회를 개최, 부의장으로 활동. 9월 조선총독부 교육심의위원회 위원, 10월 왕공족심의회 심의관으로 임명.&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lt;br /&gt;
&amp;quot;윤덕영(尹德榮).&amp;quot;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n.d.,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2274. 2023년12월08일 접속.&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lt;br /&gt;
[[분류:박노수가옥, 걸어서 근현대사 속으로]]&lt;/div&gt;</summary>
		<author><name>코리아참외</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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