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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dh_edu - 사용자 기여 [ko]</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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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2.12 사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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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이나자키로빈: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0AZ0uH4O1_g?si=dwu8QIzImfLjYmB2&amp;quot; title=&amp;quot;YouTube video player&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      &amp;lt;html&amp;gt;&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AZ7cnwn2YI?si=iM3b5DEvi9QrSHMb&amp;quot; title=&amp;quot;YouTube video player&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1979년 12월 12일, 대한민국 육군 내 불법 사조직인 하나회의 일원 전두환이 주도하여 일으킨 군사 쿠데타로 제5공화국의 실질적인 시작이 되는 사건이다.&lt;br /&gt;
&lt;br /&gt;
사건이 발생한 이래로 문민정부 시기까진 주로 12.12 사태 내지 12.12 사건으로 불렸으나 김영삼의 '''역사바로세우기 사업'''을 거치며 반정부 군사 쿠데타(내란)로 재정의되어 공식적으로 12.12 군사반란이라 불리게 되었다.&lt;br /&gt;
&lt;br /&gt;
==배경==&lt;br /&gt;
10·26 사건 이후 각 군 수뇌부들은 계엄사령관을 하게 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구심점으로 국가의 보위와 안녕을 위해 일치단결하기로 결의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합동수사본부장을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임명해서 10.26 사건을 수사했다.&lt;br /&gt;
&lt;br /&gt;
10.26 사건 당시 정승화가 궁정동과 가까이 있었고 범인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평소 친분이 두터웠기 때문에 정승화가 박정희 대통령 암살사건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있었다.&lt;br /&gt;
&lt;br /&gt;
1979년 11월 6일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은 10·26 사건 수사를 마치고 김재규의 단독 범행이라는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전두환은 &amp;quot;정승화 총장이 육군본부 벙커에 도착 후 신속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문제가 확대되지 않고 질서 정연히 사태를 수습했다&amp;quot;라고 말했다. 또한 &amp;quot;발표문을 보면 정승화 총장의 일거일동을 알 수 있다&amp;quot;면서 &amp;quot;정승화 총장이 김재규의 말을 듣고 중앙정보부로 갔으면 큰 혼란이 초래되었을 것이다. 정총장이 육군본부로 가자고 하였다&amp;quot;라고 말했다.&lt;br /&gt;
&lt;br /&gt;
11월 1일 일본 마이니치 신문에 일개 소장인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군의 최고 실권자라는 언론 발표도 나오며, 12월 9일 국방장관은 정승화 계엄사령관으로부터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동해경비사령관으로 전보시키는 건의를 받았으나 일반인들에게 수사와 관련한 의혹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며 전보 발령을 유보시킨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하나회 핵심 지휘관들의 집결===&lt;br /&gt;
&lt;br /&gt;
[[파일:하나회.png]]&lt;br /&gt;
&lt;br /&gt;
&amp;lt;small&amp;gt;맨 아랫줄 좌측 네 번째에 노태우, 다섯 번째에 전두환&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은 11월 중순부터 정승화 총장을 제거하고 군부를 장악할 계획을 세우고, 하나회를 비롯한 동조 세력 규합에 나섰다. 허화평 보안사령부 비서실장, 허삼수 보안사령부 인사처장, 이학봉 보안사령부 수사과장, 장세동 제30경비단장, 김진영 제33경비단장 등 영관급 후배의 동조를 얻어 모의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11월 말경 전두환은 황영시 제1군단장, 노태우 제9사단장, 백운택 제71방위사단장,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 1, 3, 5공수특전여단장 등 선후배 동료 장성과 쿠데타를 모의하였다. 12월 8일 전두환은 이학봉 중령으로부터 정승화 총장은 일과시간 후 총장 공관에서 연행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첨부된 세부계획서를 전달 받고, 이를 확정한 후 허삼수와 우경윤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에게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도록 지시했다.&lt;br /&gt;
&lt;br /&gt;
12월 12일 오후, 전두환은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 차규헌, 노태우, 황영시 등 규합한 동조세력을 장세동이 있던 경복궁 내 수도경비사령부 여하 제30경비단 단장실로 모이도록 한 후 시내 일원을 장악하기로 한 계획을 지시, 논의했다.&lt;br /&gt;
&lt;br /&gt;
===육군 참모총장 납치===&lt;br /&gt;
전두환의 지시를 받은 허삼수, 우경윤은 정승화 총장 연행계획을 진행했다. 19시, 이들은 정승화 총장을 체포하기 위해 수도경비사령부 33헌병대 50명을 투입했다. 그리고 계엄사령관에게 뇌물 수수 혐의를 거론하여 총리 공관으로 확인 연락을 하려던 인원을 향해 총격이 일어나고 공관 내부를 제압한다. 두 대령이 총장을 양쪽에서 잡아서 일으켜 세우니, 현관 창문을 깨고 군인이 들어와 소총의 총구로 총장을 찌르며 처가로 가려던 길을 도리어 재촉한다. 압송 도중에 건물 밖에서 공관 경비 해병대원들과 총격전을 치른다. 계속된 총격전 속에서 정 총장 신변의 위험을 느낀 경비 헌병들이 근접하는데 시간이 걸리자, 총장은 세단차에 떠밀려 들어가고 이 차는 이미 점령된 공관 정문을 매끄럽게 통과한다.  &lt;br /&gt;
&lt;br /&gt;
이후, 신군부 세력은 총장의 강제연행이 부당하다며 원상복귀를 주장하던 3군사령관 이건영 중장,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소장,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하소곤 소장,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 준장 등에 대해 하극상을 감행하고, 이들을 무력으로 제압하며 연행했다.&lt;br /&gt;
[[분류:기밀문서]][[분류:이나자키로빈]][[분류:5.18민주화운동관련]]&lt;/div&gt;</summary>
		<author><name>이나자키로빈</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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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12.12_%EC%82%AC%EA%B1%B4&amp;diff=36326</id>
		<title>12.12 사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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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2T07:04:0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나자키로빈: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0AZ0uH4O1_g?si=dwu8QIzImfLjYmB2&amp;quot; title=&amp;quot;YouTube video player&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 &amp;lt;html&amp;gt;&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AZ7cnwn2YI?si=iM3b5DEvi9QrSHMb&amp;quot; title=&amp;quot;YouTube video player&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1979년 12월 12일, 대한민국 육군 내 불법 사조직인 하나회의 일원 전두환이 주도하여 일으킨 군사 쿠데타로 제5공화국의 실질적인 시작이 되는 사건이다.&lt;br /&gt;
&lt;br /&gt;
사건이 발생한 이래로 문민정부 시기까진 주로 12.12 사태 내지 12.12 사건으로 불렸으나 김영삼의 '''역사바로세우기 사업'''을 거치며 반정부 군사 쿠데타(내란)로 재정의되어 공식적으로 12.12 군사반란이라 불리게 되었다.&lt;br /&gt;
&lt;br /&gt;
==배경==&lt;br /&gt;
10·26 사건 이후 각 군 수뇌부들은 계엄사령관을 하게 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구심점으로 국가의 보위와 안녕을 위해 일치단결하기로 결의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합동수사본부장을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임명해서 10.26 사건을 수사했다.&lt;br /&gt;
&lt;br /&gt;
10.26 사건 당시 정승화가 궁정동과 가까이 있었고 범인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평소 친분이 두터웠기 때문에 정승화가 박정희 대통령 암살사건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있었다.&lt;br /&gt;
&lt;br /&gt;
1979년 11월 6일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은 10·26 사건 수사를 마치고 김재규의 단독 범행이라는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전두환은 &amp;quot;정승화 총장이 육군본부 벙커에 도착 후 신속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문제가 확대되지 않고 질서 정연히 사태를 수습했다&amp;quot;라고 말했다. 또한 &amp;quot;발표문을 보면 정승화 총장의 일거일동을 알 수 있다&amp;quot;면서 &amp;quot;정승화 총장이 김재규의 말을 듣고 중앙정보부로 갔으면 큰 혼란이 초래되었을 것이다. 정총장이 육군본부로 가자고 하였다&amp;quot;라고 말했다.&lt;br /&gt;
&lt;br /&gt;
11월 1일 일본 마이니치 신문에 일개 소장인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군의 최고 실권자라는 언론 발표도 나오며, 12월 9일 국방장관은 정승화 계엄사령관으로부터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동해경비사령관으로 전보시키는 건의를 받았으나 일반인들에게 수사와 관련한 의혹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며 전보 발령을 유보시킨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하나회 핵심 지휘관들의 집결===&lt;br /&gt;
&lt;br /&gt;
[[파일:하나회.png]]&lt;br /&gt;
&lt;br /&gt;
&amp;lt;small&amp;gt;맨 아랫줄 좌측 네 번째에 노태우, 다섯 번째에 전두환&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은 11월 중순부터 정승화 총장을 제거하고 군부를 장악할 계획을 세우고, 하나회를 비롯한 동조 세력 규합에 나섰다. 허화평 보안사령부 비서실장, 허삼수 보안사령부 인사처장, 이학봉 보안사령부 수사과장, 장세동 제30경비단장, 김진영 제33경비단장 등 영관급 후배의 동조를 얻어 모의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11월 말경 전두환은 황영시 제1군단장, 노태우 제9사단장, 백운택 제71방위사단장,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 1, 3, 5공수특전여단장 등 선후배 동료 장성과 쿠데타를 모의하였다. 12월 8일 전두환은 이학봉 중령으로부터 정승화 총장은 일과시간 후 총장 공관에서 연행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첨부된 세부계획서를 전달 받고, 이를 확정한 후 허삼수와 우경윤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에게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도록 지시했다.&lt;br /&gt;
&lt;br /&gt;
12월 12일 오후, 전두환은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 차규헌, 노태우, 황영시 등 규합한 동조세력을 장세동이 있던 경복궁 내 수도경비사령부 여하 제30경비단 단장실로 모이도록 한 후 시내 일원을 장악하기로 한 계획을 지시, 논의했다.&lt;br /&gt;
&lt;br /&gt;
===육군 참모총장 납치===&lt;br /&gt;
전두환의 지시를 받은 허삼수, 우경윤은 정승화 총장 연행계획을 진행했다. 19시, 이들은 정승화 총장을 체포하기 위해 수도경비사령부 33헌병대 50명을 투입했다. 그리고 계엄사령관에게 뇌물 수수 혐의를 거론하여 총리 공관으로 확인 연락을 하려던 인원을 향해 총격이 일어나고 공관 내부를 제압한다. 두 대령이 총장을 양쪽에서 잡아서 일으켜 세우니, 현관 창문을 깨고 군인이 들어와 소총의 총구로 총장을 찌르며 처가로 가려던 길을 도리어 재촉한다. 압송 도중에 건물 밖에서 공관 경비 해병대원들과 총격전을 치른다. 계속된 총격전 속에서 정 총장 신변의 위험을 느낀 경비 헌병들이 근접하는데 시간이 걸리자, 총장은 세단차에 떠밀려 들어가고 이 차는 이미 점령된 공관 정문을 매끄럽게 통과한다.  &lt;br /&gt;
&lt;br /&gt;
이후, 신군부 세력은 총장의 강제연행이 부당하다며 원상복귀를 주장하던 3군사령관 이건영 중장,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소장,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하소곤 소장,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 준장 등에 대해 하극상을 감행하고, 이들을 무력으로 제압하며 연행했다.&lt;br /&gt;
[[분류:기밀문서]][[분류:이나자키로빈]][[분류:5.18민주화운동관련]]&lt;/div&gt;</summary>
		<author><name>이나자키로빈</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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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2.12 사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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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2T07:03:5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나자키로빈: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0AZ0uH4O1_g?si=dwu8QIzImfLjYmB2&amp;quot; title=&amp;quot;YouTube video player&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AZ7cnwn2YI?si=iM3b5DEvi9QrSHMb&amp;quot; title=&amp;quot;YouTube video player&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1979년 12월 12일, 대한민국 육군 내 불법 사조직인 하나회의 일원 전두환이 주도하여 일으킨 군사 쿠데타로 제5공화국의 실질적인 시작이 되는 사건이다.&lt;br /&gt;
&lt;br /&gt;
사건이 발생한 이래로 문민정부 시기까진 주로 12.12 사태 내지 12.12 사건으로 불렸으나 김영삼의 '''역사바로세우기 사업'''을 거치며 반정부 군사 쿠데타(내란)로 재정의되어 공식적으로 12.12 군사반란이라 불리게 되었다.&lt;br /&gt;
&lt;br /&gt;
==배경==&lt;br /&gt;
10·26 사건 이후 각 군 수뇌부들은 계엄사령관을 하게 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구심점으로 국가의 보위와 안녕을 위해 일치단결하기로 결의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합동수사본부장을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임명해서 10.26 사건을 수사했다.&lt;br /&gt;
&lt;br /&gt;
10.26 사건 당시 정승화가 궁정동과 가까이 있었고 범인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평소 친분이 두터웠기 때문에 정승화가 박정희 대통령 암살사건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있었다.&lt;br /&gt;
&lt;br /&gt;
1979년 11월 6일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은 10·26 사건 수사를 마치고 김재규의 단독 범행이라는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전두환은 &amp;quot;정승화 총장이 육군본부 벙커에 도착 후 신속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문제가 확대되지 않고 질서 정연히 사태를 수습했다&amp;quot;라고 말했다. 또한 &amp;quot;발표문을 보면 정승화 총장의 일거일동을 알 수 있다&amp;quot;면서 &amp;quot;정승화 총장이 김재규의 말을 듣고 중앙정보부로 갔으면 큰 혼란이 초래되었을 것이다. 정총장이 육군본부로 가자고 하였다&amp;quot;라고 말했다.&lt;br /&gt;
&lt;br /&gt;
11월 1일 일본 마이니치 신문에 일개 소장인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군의 최고 실권자라는 언론 발표도 나오며, 12월 9일 국방장관은 정승화 계엄사령관으로부터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동해경비사령관으로 전보시키는 건의를 받았으나 일반인들에게 수사와 관련한 의혹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며 전보 발령을 유보시킨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하나회 핵심 지휘관들의 집결===&lt;br /&gt;
&lt;br /&gt;
[[파일:하나회.png]]&lt;br /&gt;
&lt;br /&gt;
&amp;lt;small&amp;gt;맨 아랫줄 좌측 네 번째에 노태우, 다섯 번째에 전두환&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은 11월 중순부터 정승화 총장을 제거하고 군부를 장악할 계획을 세우고, 하나회를 비롯한 동조 세력 규합에 나섰다. 허화평 보안사령부 비서실장, 허삼수 보안사령부 인사처장, 이학봉 보안사령부 수사과장, 장세동 제30경비단장, 김진영 제33경비단장 등 영관급 후배의 동조를 얻어 모의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11월 말경 전두환은 황영시 제1군단장, 노태우 제9사단장, 백운택 제71방위사단장,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 1, 3, 5공수특전여단장 등 선후배 동료 장성과 쿠데타를 모의하였다. 12월 8일 전두환은 이학봉 중령으로부터 정승화 총장은 일과시간 후 총장 공관에서 연행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첨부된 세부계획서를 전달 받고, 이를 확정한 후 허삼수와 우경윤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에게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도록 지시했다.&lt;br /&gt;
&lt;br /&gt;
12월 12일 오후, 전두환은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 차규헌, 노태우, 황영시 등 규합한 동조세력을 장세동이 있던 경복궁 내 수도경비사령부 여하 제30경비단 단장실로 모이도록 한 후 시내 일원을 장악하기로 한 계획을 지시, 논의했다.&lt;br /&gt;
&lt;br /&gt;
===육군 참모총장 납치===&lt;br /&gt;
전두환의 지시를 받은 허삼수, 우경윤은 정승화 총장 연행계획을 진행했다. 19시, 이들은 정승화 총장을 체포하기 위해 수도경비사령부 33헌병대 50명을 투입했다. 그리고 계엄사령관에게 뇌물 수수 혐의를 거론하여 총리 공관으로 확인 연락을 하려던 인원을 향해 총격이 일어나고 공관 내부를 제압한다. 두 대령이 총장을 양쪽에서 잡아서 일으켜 세우니, 현관 창문을 깨고 군인이 들어와 소총의 총구로 총장을 찌르며 처가로 가려던 길을 도리어 재촉한다. 압송 도중에 건물 밖에서 공관 경비 해병대원들과 총격전을 치른다. 계속된 총격전 속에서 정 총장 신변의 위험을 느낀 경비 헌병들이 근접하는데 시간이 걸리자, 총장은 세단차에 떠밀려 들어가고 이 차는 이미 점령된 공관 정문을 매끄럽게 통과한다.  &lt;br /&gt;
&lt;br /&gt;
이후, 신군부 세력은 총장의 강제연행이 부당하다며 원상복귀를 주장하던 3군사령관 이건영 중장,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소장,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하소곤 소장,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 준장 등에 대해 하극상을 감행하고, 이들을 무력으로 제압하며 연행했다.&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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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name>이나자키로빈</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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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3당 합당</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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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2T03:25:5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나자키로빈: /* 개요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lt;br /&gt;
[[파일:민자당 축하연.jpeg]]&lt;br /&gt;
&lt;br /&gt;
3당 합당(三黨合黨)은 1990년 1월 22일 발표되어 그해 2월 당시 집권 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과 야당이었던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이 합당하여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이 탄생한 사건이다. 이 합당으로 만들어진 민주자유당의 후신&amp;lt;font color=&amp;quot;Gray&amp;quot;&amp;gt;(현재 국민의 힘)&amp;lt;/font&amp;gt;은 지금까지도 한국의 제1 보수정당의 명맥을 잇고 있다.&lt;br /&gt;
&lt;br /&gt;
 민주정의당과 통일민주당, 그리고 신민주공화당은 민주 발전과 국민 대화합, 민족 통합이라는 시대적 과제 앞에 오로지 역사와 국민에 봉사한다는 일념으로 아무 조건 없이 정당법의 규정에 따라 새로운 정당으로 합당한다. -노태우&lt;br /&gt;
&lt;br /&gt;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 -김영삼&lt;br /&gt;
&lt;br /&gt;
==진행==&lt;br /&gt;
제5공화국의 후신 세력인 민주정의당(민정당) 세력은 6월 민주 항쟁이라는 정치적 위기 속에서도 정권 재창출에 성공했으나, 계속되는 국민들의 민주화 및 군사정권 청산 요구는 이들에게 부담이 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 민정당이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하자, 노태우 정부는 여소야대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이른바 '보수대연합(4당 합당)'을 비밀리에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는 민정당이 1986년 신한민주당에 처음 제안했던 것으로, 당시에는 야권에서 호응이 없어 결실을 맺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김영삼 민주당 총재, 김종필 공화당 총재 등이 4당 구도로는 각자 본인들의 집권이 요원하다는 계산을 하고 있던 것이다. 3당은 1990년 내각제 개헌 등을 조건으로 통합에 합의했으며, '구국의 결단'이라는 명분 아래 3당 합당을 발표했다. 3당의 국회 의석 수를 합치면 개헌선인 200석을 훌쩍 넘긴다는 점, 각각 대구경북, 부울경, 충청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던 3당의 통합으로 사실상 호남 외의 지역들이 모두 연합하는 구도가 됐다는 점 등에서 통합 신당은 '괴물 여당'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3당합당의 여파로 노태우 대통령은 취임 2년 만에 80%에 육박하는 높은 수치의 지지율을 기록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이후==&lt;br /&gt;
신생 민주자유당은 218석을 보유한 절대다수 정당으로 정국의 주도권을 행사했으나, 2년 후 1992년 제14대 총선에서는 개헌선은커녕 299석 중 149석으로 과반 달성에도 실패하는 참패를 당한다. 이는 계파 간 공천 갈등의 여파로 낙천자 중 상당수가 무소속으로, 혹은 통일국민당 후보로 출마를 강행한 결과로 분석되었다. 이질적인 여러 계파가 한 당에 섞인 것에 대한 부작용이 이렇게 나타난 것이다.&lt;br /&gt;
&lt;br /&gt;
그러나 1992년 말 14대 대선에서 김영삼이 민주자유당 후보로 출마해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이후 야당 및 무소속 의원들을 대거 영입하여 다시 국회 과반수의 거대 여당이 되었다.&lt;br /&gt;
[[분류:기밀문서]][[분류:이나자키로빈]][[분류:5.18민주화운동관련]]&lt;/div&gt;</summary>
		<author><name>이나자키로빈</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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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3당 합당</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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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2T03:24:3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나자키로빈: /* 개요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lt;br /&gt;
[[파일:민자당 축하연.jpeg]]&lt;br /&gt;
&lt;br /&gt;
3당 합당(三黨合黨)은 1990년 1월 22일 발표되어 그해 2월 당시 집권 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과 야당이었던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이 합당하여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이 탄생한 사건이다. 이 합당으로 만들어진 민주자유당의 후신&amp;lt;font color=&amp;quot;Gray&amp;quot;&amp;gt;(현재 국민의 힘)&amp;lt;/font&amp;gt;은 지금까지도 한국의 제1 보수정당의 명맥을 잇고 있다.&lt;br /&gt;
&lt;br /&gt;
==진행==&lt;br /&gt;
제5공화국의 후신 세력인 민주정의당(민정당) 세력은 6월 민주 항쟁이라는 정치적 위기 속에서도 정권 재창출에 성공했으나, 계속되는 국민들의 민주화 및 군사정권 청산 요구는 이들에게 부담이 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 민정당이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하자, 노태우 정부는 여소야대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이른바 '보수대연합(4당 합당)'을 비밀리에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는 민정당이 1986년 신한민주당에 처음 제안했던 것으로, 당시에는 야권에서 호응이 없어 결실을 맺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김영삼 민주당 총재, 김종필 공화당 총재 등이 4당 구도로는 각자 본인들의 집권이 요원하다는 계산을 하고 있던 것이다. 3당은 1990년 내각제 개헌 등을 조건으로 통합에 합의했으며, '구국의 결단'이라는 명분 아래 3당 합당을 발표했다. 3당의 국회 의석 수를 합치면 개헌선인 200석을 훌쩍 넘긴다는 점, 각각 대구경북, 부울경, 충청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던 3당의 통합으로 사실상 호남 외의 지역들이 모두 연합하는 구도가 됐다는 점 등에서 통합 신당은 '괴물 여당'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3당합당의 여파로 노태우 대통령은 취임 2년 만에 80%에 육박하는 높은 수치의 지지율을 기록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이후==&lt;br /&gt;
신생 민주자유당은 218석을 보유한 절대다수 정당으로 정국의 주도권을 행사했으나, 2년 후 1992년 제14대 총선에서는 개헌선은커녕 299석 중 149석으로 과반 달성에도 실패하는 참패를 당한다. 이는 계파 간 공천 갈등의 여파로 낙천자 중 상당수가 무소속으로, 혹은 통일국민당 후보로 출마를 강행한 결과로 분석되었다. 이질적인 여러 계파가 한 당에 섞인 것에 대한 부작용이 이렇게 나타난 것이다.&lt;br /&gt;
&lt;br /&gt;
그러나 1992년 말 14대 대선에서 김영삼이 민주자유당 후보로 출마해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이후 야당 및 무소속 의원들을 대거 영입하여 다시 국회 과반수의 거대 여당이 되었다.&lt;br /&gt;
[[분류:기밀문서]][[분류:이나자키로빈]][[분류:5.18민주화운동관련]]&lt;/div&gt;</summary>
		<author><name>이나자키로빈</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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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이나자키로빈: &lt;/p&gt;
&lt;hr /&gt;
&lt;div&gt;&lt;/div&gt;</summary>
		<author><name>이나자키로빈</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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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0.26 사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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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2T03:22:1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나자키로빈: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400&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pVXlIbGDMIY?si=h9cjLrw7Oef_1tal&amp;quot; title=&amp;quot;YouTube video player&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40분경에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전가옥 나동건물 2층 연회장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부하 경호원들이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 등 총 6명을 권총으로 저격하여 피살한 사건이다.&lt;br /&gt;
&lt;br /&gt;
대한민국 헌정 사상 유일하게 현직 국가원수가 살해된 사건으로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는 명칭은 10.26 사태 또는 궁정동 사건이다. 당시의 시대 상황을 직접 경험했던 세대는 궁정동 사건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현재는 10.26 사태로 널리 알려지고 있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박정희의 행사 지시를 받은 차지철은 경호처장 정인형을 불러 행사를 준비하라고 한 후 오후 4시 10분 쯤 남산 중앙정보부 집무실로 전화를 걸어 김재규에게 '''&amp;quot;오늘 저녁 6시에 대행사가 있으니 궁정동 안전가옥으로 오시오. 참석 인원은 각하와 김 부장, 비서실장, 그리고 나요&amp;quot;'''라며 연락을 취했다. 그리고 김재규는 집무실 금고에 보관 중이던 발터 PPK를 꺼내어 탄환 7발을 장전하고 언제든 쉽게 꺼낼 수 있도록 책장에 숨겨 놓았다.&lt;br /&gt;
&lt;br /&gt;
김계원은 삽교천 행사에서 돌아온 후 집무실에서 군사영어학교 1기 동기인 유신정우회 총무 최영희 의원과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이날 최영희는 김계원에게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고 권했지만 김계원은 &amp;quot;언제 각하가 부르실지 모르니 (저녁) 5시까지 기다려 보자.&amp;quot; 라고 했고 예상대로 오후 4시 30분 경 차지철로부터 궁정동에 대행사가 있다는 전화 통보를 받았다. 김계원은 &amp;quot;이러니 제가 약속을 못합니다.&amp;quot; 라고 쓴웃음을 지으며 최영희에게 양해를 구한 후 궁정동으로 이동했다.&lt;br /&gt;
&lt;br /&gt;
오후 4시 30분 김재규는 궁정동 안가 나동 연회장 앞에서 김계원이 오기를 기다렸고 김계원은 오후 5시 40분경 안가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안가 정원에 쪼그려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고 김재규는 부마사태의 상황 설명을 하며 &amp;quot;이것은 단순한 시위가 아닌 민란입니다. 부산과 마산이 섬도 아니고 전국으로 퍼지지 말라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이런 심각한 상황을 차지철 그놈이 중간에서 가로막고 각하께 왜곡하여 보고하고 있단 말입니다&amp;quot; 라며 분을 삭이지 못했고, 김계원 또한 &amp;quot;차지철 그 사람 월권을 해서 야단이야, 야당 친구 몇 사람의 말만 듣고 각하에게 보고하여 각하를 강경하게 몰아가고 있단 말이지&amp;quot;라며 차지철을 비판했다.&lt;br /&gt;
&lt;br /&gt;
그러자 김재규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lt;br /&gt;
&lt;br /&gt;
 '''형님, 그 자식 해치워 버릴까요?'''&lt;br /&gt;
&lt;br /&gt;
이 말에 김계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시했다. 김재규는 김계원의 태도를 찬성하는 것으로 알고 다시 &amp;quot;형님, 뒷일을 부탁합니다.&amp;quot;라고 하니 다시 고개를 끄덕하였기 때문에 동의하는 것으로 판단했다. 이후 김계원은 사건 이후 김재규가 차지철을 진짜 살해할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고, 단순히 박정희에게 강력히 간언하여 차지철의 실각 정도를 유발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그는 &amp;quot;김재규가 단지 '비유적으로' 해치워 버린다는 표현을 쓴 줄 알았다&amp;quot;고 이야기했다.&lt;br /&gt;
&lt;br /&gt;
김재규는 차지철로부터 늘 인격 이하의 대우를 받아왔으며 박정희가 있는 앞에서 면박을 많이 받아왔기 때문에 차지철에 대한 분노가 뼈에 사무쳐 있었다. 차지철의 오만과 월권에 대한 소문은 당시 사회 전반에 널리 알려져 있었고 김재규는 물론 차지철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던 김계원 역시 그를 눈엣가시로 생각해 왔다. 당시 차지철은 박정희 말고는 모두에게 안하무인으로 행동했다. 김계원이 김재규에게 먼저 꺼낸 말은 그렇지 않아도 김재규의 가슴 속에 불타고 있는 차지철에 대한 증오심에 기름을 끼얹은 것인지도 모른다.&lt;br /&gt;
&lt;br /&gt;
비슷한 시각 중정 비서실 의전과장 박선호는 서울 중구 태평로 플라자호텔에서 당시 22세의 광고 모델이었던 신재순을, 종로구 내자동 내자호텔에서 당시 24세였던 가수 심수봉을 태우고 궁정동 안가에 도착했고 평소 무좀으로 고생하던 중앙정보부 부장 수행비서 박흥주 육군 포병 대령은 잠시 시간을 내서 광화문 에스콰이아 지점에서 새 구두를 샀다고 전해진다. 이 구두는 그날 밤 박정희와 차지철을 쏜 후 자기 구두도 팽개친 채 양말만 신고 차에 오른 김재규가 빌려 신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저녁 6시 경 박정희와 차지철 일행이 궁정동 안전가옥에 도착했고 대기 중이던 김계원과 김재규가 그들을 맞이하여 안가의 나동 연회장으로 안내하면서 연회가 시작되었다.&lt;br /&gt;
&lt;br /&gt;
술은 막걸리와 위스키 등을 준비했는데 연회장에는 위스키만 들어갔고 평소 박정희가 즐겨 마시던 능곡 소재 양조장에서 공수해 온 막걸리는 안가 식당차 운전수인 김용남과 청와대 경호관 김용섭이 나눠 마셨다. 이때 유명해진 위스키로 당시 박정희가 마셨다던 시바스 리갈이 있는데 그 유명한 현장 검증 사진에도 이 술이 재현된 상 위에 올려진 모습을 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이날 만찬에서 술은 박정희와 김계원만 주로 마셨고 간경변을 앓고 있던 김재규는 박정희의 강권에 억지로 몇 잔을 마신 반면 독실한 크리스천인 차지철은 술잔에 입만 대는 시늉만 했다.&lt;br /&gt;
&lt;br /&gt;
김재규는 식사 중인 정승화에게 &amp;quot;갑자기 각하의 부름을 받고 연회에 참석 중이오. 김(정섭)차장이 저보다 국내 정치는 훨씬 잘 알고 있으니 이 친구하고 시국 얘기 좀 나누고 계세요. 끝나는 대로 곧 오겠습니다. 김영삼이도 내가 두 손 들게 만들어 놓았는데 공화당에서 제 말을 안듣고 멋대로 하는 바람에 이 지경이 되었습니다&amp;quot; 라고 억지로 너털웃음을 지으며 해명한 후 김재규는 자신의 집무실로 가서 책장에 숨겨놓은 발터 PPK를 바지 호주머니에 숨겨 나왔다. 그리고 김재규 자신과 인연이 오래된 심복들인 수행비서 박흥주 대령과 중정 의전과장 박선호를 안가 마당으로 불러내 암살 명령을 내렸다.&lt;br /&gt;
&lt;br /&gt;
김재규의 일방적인 명령에 박선호와 박흥주는 처음에는 크게 놀랐지만 바로 마음을 다잡고 김재규의 명령에 성실히 따랐다. 박선호는 평소 자신이 아끼고 신임하던 같은 해병대 하사 출신인 안가 경비조장 이기주와 의전과장 차량 운전사 유성옥 두 명까지 암살조에 합류시켰다. 그리고 거사 이후 박선호는 안가 경비원 김태원을 차출하여 이기주와 함께 차지철과 청와대 경호원들의 확인 사살을 지시하였다.&lt;br /&gt;
&lt;br /&gt;
시간은 흘러 7시 35분이 되었다. 박선호는 안가 나동 지배인 남효주를 불러 &amp;quot;(김재규)부장님께 부속실로 전화가 왔다고 전해달라&amp;quot;며 지시했고 남효주는 연회장에 들어가 김재규에게 그대로 귀띔했다. 남효주의 전언을 들은 김재규는 부속실로 들어갔고 박선호는 모든 준비를 마친 후 대기하고 있었다. 저녁 7시 38분, 박선호에게 준비가 다 되었음을 확인한 김재규는 다시 연회장으로 들어왔다. 그는 7시 40분에 바지 주머니에 숨겨둔 권총을 꺼내 옆에 앉아 있던 차지철을 향해 &amp;quot;차지철 이 새끼! 너 건방져!&amp;quot;라고 외치며 첫 발을 쐈다.&lt;br /&gt;
&lt;br /&gt;
김재규가 쏜 첫 발은 차지철의 오른쪽 손목을 관통했고 갑자기 총에 맞아 크게 당황한 차지철은 관통당한 손목을 움켜쥐며 &amp;quot;김 부장, 왜 이래!&amp;quot;라고 외쳤다. 그리고 박정희가 &amp;quot;지금 뭐 하는 짓들이야!&amp;quot;라며 소리치자 김재규는 &amp;quot;야, 너도 죽어봐&amp;quot;라고 받아치며 마주보고 앉아있던 박정희의 오른쪽 가슴을 쐈다. 이 총격으로 박정희는 오른쪽 폐에 관통상을 입고 곧바로 쓰러져 얼굴을 식탁에 묻었다. 이때 김재규는 차지철을 쏘고 바로 박정희도 쏘았다고 증언했으나, 같은 안가에 있었던 박선호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은 첫 발 사격 후 4~5초 정도의 간격이 있었다고 주장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박정희 장례.jpg|1000픽셀]] [[파일:1026 현장.jpeg|500픽셀]]&lt;br /&gt;
&lt;br /&gt;
[[분류:기밀문서]]&lt;br /&gt;
[[분류:5.18민주화운동관련]]&lt;br /&gt;
[[분류:이나자키로빈]]&lt;/div&gt;</summary>
		<author><name>이나자키로빈</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10.26_%EC%82%AC%ED%83%9C&amp;diff=36244</id>
		<title>10.26 사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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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2T03:22:0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나자키로빈: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400&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pVXlIbGDMIY?si=h9cjLrw7Oef_1tal&amp;quot; title=&amp;quot;YouTube video player&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40분경에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전가옥 나동건물 2층 연회장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부하 경호원들이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 등 총 6명을 권총으로 저격하여 피살한 사건이다.&lt;br /&gt;
&lt;br /&gt;
대한민국 헌정 사상 유일하게 현직 국가원수가 살해된 사건으로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는 명칭은 10.26 사태 또는 궁정동 사건이다. 당시의 시대 상황을 직접 경험했던 세대는 궁정동 사건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현재는 10.26 사태로 널리 알려지고 있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박정희의 행사 지시를 받은 차지철은 경호처장 정인형을 불러 행사를 준비하라고 한 후 오후 4시 10분 쯤 남산 중앙정보부 집무실로 전화를 걸어 김재규에게 '''&amp;quot;오늘 저녁 6시에 대행사가 있으니 궁정동 안전가옥으로 오시오. 참석 인원은 각하와 김 부장, 비서실장, 그리고 나요&amp;quot;'''라며 연락을 취했다. 그리고 김재규는 집무실 금고에 보관 중이던 발터 PPK를 꺼내어 탄환 7발을 장전하고 언제든 쉽게 꺼낼 수 있도록 책장에 숨겨 놓았다.&lt;br /&gt;
&lt;br /&gt;
김계원은 삽교천 행사에서 돌아온 후 집무실에서 군사영어학교 1기 동기인 유신정우회 총무 최영희 의원과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이날 최영희는 김계원에게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고 권했지만 김계원은 &amp;quot;언제 각하가 부르실지 모르니 (저녁) 5시까지 기다려 보자.&amp;quot; 라고 했고 예상대로 오후 4시 30분 경 차지철로부터 궁정동에 대행사가 있다는 전화 통보를 받았다. 김계원은 &amp;quot;이러니 제가 약속을 못합니다.&amp;quot; 라고 쓴웃음을 지으며 최영희에게 양해를 구한 후 궁정동으로 이동했다.&lt;br /&gt;
&lt;br /&gt;
오후 4시 30분 김재규는 궁정동 안가 나동 연회장 앞에서 김계원이 오기를 기다렸고 김계원은 오후 5시 40분경 안가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안가 정원에 쪼그려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고 김재규는 부마사태의 상황 설명을 하며 &amp;quot;이것은 단순한 시위가 아닌 민란입니다. 부산과 마산이 섬도 아니고 전국으로 퍼지지 말라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이런 심각한 상황을 차지철 그놈이 중간에서 가로막고 각하께 왜곡하여 보고하고 있단 말입니다&amp;quot; 라며 분을 삭이지 못했고, 김계원 또한 &amp;quot;차지철 그 사람 월권을 해서 야단이야, 야당 친구 몇 사람의 말만 듣고 각하에게 보고하여 각하를 강경하게 몰아가고 있단 말이지&amp;quot;라며 차지철을 비판했다.&lt;br /&gt;
&lt;br /&gt;
그러자 김재규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lt;br /&gt;
&lt;br /&gt;
 '''형님, 그 자식 해치워 버릴까요?'''&lt;br /&gt;
&lt;br /&gt;
이 말에 김계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시했다. 김재규는 김계원의 태도를 찬성하는 것으로 알고 다시 &amp;quot;형님, 뒷일을 부탁합니다.&amp;quot;라고 하니 다시 고개를 끄덕하였기 때문에 동의하는 것으로 판단했다. 이후 김계원은 사건 이후 김재규가 차지철을 진짜 살해할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고, 단순히 박정희에게 강력히 간언하여 차지철의 실각 정도를 유발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그는 &amp;quot;김재규가 단지 '비유적으로' 해치워 버린다는 표현을 쓴 줄 알았다&amp;quot;고 이야기했다.&lt;br /&gt;
&lt;br /&gt;
김재규는 차지철로부터 늘 인격 이하의 대우를 받아왔으며 박정희가 있는 앞에서 면박을 많이 받아왔기 때문에 차지철에 대한 분노가 뼈에 사무쳐 있었다. 차지철의 오만과 월권에 대한 소문은 당시 사회 전반에 널리 알려져 있었고 김재규는 물론 차지철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던 김계원 역시 그를 눈엣가시로 생각해 왔다. 당시 차지철은 박정희 말고는 모두에게 안하무인으로 행동했다. 김계원이 김재규에게 먼저 꺼낸 말은 그렇지 않아도 김재규의 가슴 속에 불타고 있는 차지철에 대한 증오심에 기름을 끼얹은 것인지도 모른다.&lt;br /&gt;
&lt;br /&gt;
비슷한 시각 중정 비서실 의전과장 박선호는 서울 중구 태평로 플라자호텔에서 당시 22세의 광고 모델이었던 신재순을, 종로구 내자동 내자호텔에서 당시 24세였던 가수 심수봉을 태우고 궁정동 안가에 도착했고 평소 무좀으로 고생하던 중앙정보부 부장 수행비서 박흥주 육군 포병 대령은 잠시 시간을 내서 광화문 에스콰이아 지점에서 새 구두를 샀다고 전해진다. 이 구두는 그날 밤 박정희와 차지철을 쏜 후 자기 구두도 팽개친 채 양말만 신고 차에 오른 김재규가 빌려 신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저녁 6시 경 박정희와 차지철 일행이 궁정동 안전가옥에 도착했고 대기 중이던 김계원과 김재규가 그들을 맞이하여 안가의 나동 연회장으로 안내하면서 연회가 시작되었다.&lt;br /&gt;
&lt;br /&gt;
술은 막걸리와 위스키 등을 준비했는데 연회장에는 위스키만 들어갔고 평소 박정희가 즐겨 마시던 능곡 소재 양조장에서 공수해 온 막걸리는 안가 식당차 운전수인 김용남과 청와대 경호관 김용섭이 나눠 마셨다. 이때 유명해진 위스키로 당시 박정희가 마셨다던 시바스 리갈이 있는데 그 유명한 현장 검증 사진에도 이 술이 재현된 상 위에 올려진 모습을 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이날 만찬에서 술은 박정희와 김계원만 주로 마셨고 간경변을 앓고 있던 김재규는 박정희의 강권에 억지로 몇 잔을 마신 반면 독실한 크리스천인 차지철은 술잔에 입만 대는 시늉만 했다.&lt;br /&gt;
&lt;br /&gt;
김재규는 식사 중인 정승화에게 &amp;quot;갑자기 각하의 부름을 받고 연회에 참석 중이오. 김(정섭)차장이 저보다 국내 정치는 훨씬 잘 알고 있으니 이 친구하고 시국 얘기 좀 나누고 계세요. 끝나는 대로 곧 오겠습니다. 김영삼이도 내가 두 손 들게 만들어 놓았는데 공화당에서 제 말을 안듣고 멋대로 하는 바람에 이 지경이 되었습니다&amp;quot; 라고 억지로 너털웃음을 지으며 해명한 후 김재규는 자신의 집무실로 가서 책장에 숨겨놓은 발터 PPK를 바지 호주머니에 숨겨 나왔다. 그리고 김재규 자신과 인연이 오래된 심복들인 수행비서 박흥주 대령과 중정 의전과장 박선호를 안가 마당으로 불러내 암살 명령을 내렸다.&lt;br /&gt;
&lt;br /&gt;
김재규의 일방적인 명령에 박선호와 박흥주는 처음에는 크게 놀랐지만 바로 마음을 다잡고 김재규의 명령에 성실히 따랐다. 박선호는 평소 자신이 아끼고 신임하던 같은 해병대 하사 출신인 안가 경비조장 이기주와 의전과장 차량 운전사 유성옥 두 명까지 암살조에 합류시켰다. 그리고 거사 이후 박선호는 안가 경비원 김태원을 차출하여 이기주와 함께 차지철과 청와대 경호원들의 확인 사살을 지시하였다.&lt;br /&gt;
&lt;br /&gt;
시간은 흘러 7시 35분이 되었다. 박선호는 안가 나동 지배인 남효주를 불러 &amp;quot;(김재규)부장님께 부속실로 전화가 왔다고 전해달라&amp;quot;며 지시했고 남효주는 연회장에 들어가 김재규에게 그대로 귀띔했다. 남효주의 전언을 들은 김재규는 부속실로 들어갔고 박선호는 모든 준비를 마친 후 대기하고 있었다. 저녁 7시 38분, 박선호에게 준비가 다 되었음을 확인한 김재규는 다시 연회장으로 들어왔다. 그는 7시 40분에 바지 주머니에 숨겨둔 권총을 꺼내 옆에 앉아 있던 차지철을 향해 &amp;quot;차지철 이 새끼! 너 건방져!&amp;quot;라고 외치며 첫 발을 쐈다.&lt;br /&gt;
&lt;br /&gt;
김재규가 쏜 첫 발은 차지철의 오른쪽 손목을 관통했고 갑자기 총에 맞아 크게 당황한 차지철은 관통당한 손목을 움켜쥐며 &amp;quot;김 부장, 왜 이래!&amp;quot;라고 외쳤다. 그리고 박정희가 &amp;quot;지금 뭐 하는 짓들이야!&amp;quot;라며 소리치자 김재규는 &amp;quot;야, 너도 죽어봐&amp;quot;라고 받아치며 마주보고 앉아있던 박정희의 오른쪽 가슴을 쐈다. 이 총격으로 박정희는 오른쪽 폐에 관통상을 입고 곧바로 쓰러져 얼굴을 식탁에 묻었다. 이때 김재규는 차지철을 쏘고 바로 박정희도 쏘았다고 증언했으나, 같은 안가에 있었던 박선호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은 첫 발 사격 후 4~5초 정도의 간격이 있었다고 주장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박정희 장례.jpg|1000픽셀]] [파일:1026 현장.jpeg|500픽셀]]&lt;br /&gt;
&lt;br /&gt;
[[분류:기밀문서]]&lt;br /&gt;
[[분류:5.18민주화운동관련]]&lt;br /&gt;
[[분류:이나자키로빈]]&lt;/div&gt;</summary>
		<author><name>이나자키로빈</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10.26_%EC%82%AC%ED%83%9C&amp;diff=36243</id>
		<title>10.26 사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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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2T03:21:3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나자키로빈: /* 전개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400&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pVXlIbGDMIY?si=h9cjLrw7Oef_1tal&amp;quot; title=&amp;quot;YouTube video player&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40분경에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전가옥 나동건물 2층 연회장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부하 경호원들이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 등 총 6명을 권총으로 저격하여 피살한 사건이다.&lt;br /&gt;
&lt;br /&gt;
대한민국 헌정 사상 유일하게 현직 국가원수가 살해된 사건으로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는 명칭은 10.26 사태 또는 궁정동 사건이다. 당시의 시대 상황을 직접 경험했던 세대는 궁정동 사건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현재는 10.26 사태로 널리 알려지고 있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박정희의 행사 지시를 받은 차지철은 경호처장 정인형을 불러 행사를 준비하라고 한 후 오후 4시 10분 쯤 남산 중앙정보부 집무실로 전화를 걸어 김재규에게 '''&amp;quot;오늘 저녁 6시에 대행사가 있으니 궁정동 안전가옥으로 오시오. 참석 인원은 각하와 김 부장, 비서실장, 그리고 나요&amp;quot;'''라며 연락을 취했다. 그리고 김재규는 집무실 금고에 보관 중이던 발터 PPK를 꺼내어 탄환 7발을 장전하고 언제든 쉽게 꺼낼 수 있도록 책장에 숨겨 놓았다.&lt;br /&gt;
&lt;br /&gt;
김계원은 삽교천 행사에서 돌아온 후 집무실에서 군사영어학교 1기 동기인 유신정우회 총무 최영희 의원과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이날 최영희는 김계원에게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고 권했지만 김계원은 &amp;quot;언제 각하가 부르실지 모르니 (저녁) 5시까지 기다려 보자.&amp;quot; 라고 했고 예상대로 오후 4시 30분 경 차지철로부터 궁정동에 대행사가 있다는 전화 통보를 받았다. 김계원은 &amp;quot;이러니 제가 약속을 못합니다.&amp;quot; 라고 쓴웃음을 지으며 최영희에게 양해를 구한 후 궁정동으로 이동했다.&lt;br /&gt;
&lt;br /&gt;
오후 4시 30분 김재규는 궁정동 안가 나동 연회장 앞에서 김계원이 오기를 기다렸고 김계원은 오후 5시 40분경 안가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안가 정원에 쪼그려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고 김재규는 부마사태의 상황 설명을 하며 &amp;quot;이것은 단순한 시위가 아닌 민란입니다. 부산과 마산이 섬도 아니고 전국으로 퍼지지 말라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이런 심각한 상황을 차지철 그놈이 중간에서 가로막고 각하께 왜곡하여 보고하고 있단 말입니다&amp;quot; 라며 분을 삭이지 못했고, 김계원 또한 &amp;quot;차지철 그 사람 월권을 해서 야단이야, 야당 친구 몇 사람의 말만 듣고 각하에게 보고하여 각하를 강경하게 몰아가고 있단 말이지&amp;quot;라며 차지철을 비판했다.&lt;br /&gt;
&lt;br /&gt;
그러자 김재규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lt;br /&gt;
&lt;br /&gt;
 '''형님, 그 자식 해치워 버릴까요?'''&lt;br /&gt;
&lt;br /&gt;
이 말에 김계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시했다. 김재규는 김계원의 태도를 찬성하는 것으로 알고 다시 &amp;quot;형님, 뒷일을 부탁합니다.&amp;quot;라고 하니 다시 고개를 끄덕하였기 때문에 동의하는 것으로 판단했다. 이후 김계원은 사건 이후 김재규가 차지철을 진짜 살해할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고, 단순히 박정희에게 강력히 간언하여 차지철의 실각 정도를 유발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그는 &amp;quot;김재규가 단지 '비유적으로' 해치워 버린다는 표현을 쓴 줄 알았다&amp;quot;고 이야기했다.&lt;br /&gt;
&lt;br /&gt;
김재규는 차지철로부터 늘 인격 이하의 대우를 받아왔으며 박정희가 있는 앞에서 면박을 많이 받아왔기 때문에 차지철에 대한 분노가 뼈에 사무쳐 있었다. 차지철의 오만과 월권에 대한 소문은 당시 사회 전반에 널리 알려져 있었고 김재규는 물론 차지철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던 김계원 역시 그를 눈엣가시로 생각해 왔다. 당시 차지철은 박정희 말고는 모두에게 안하무인으로 행동했다. 김계원이 김재규에게 먼저 꺼낸 말은 그렇지 않아도 김재규의 가슴 속에 불타고 있는 차지철에 대한 증오심에 기름을 끼얹은 것인지도 모른다.&lt;br /&gt;
&lt;br /&gt;
비슷한 시각 중정 비서실 의전과장 박선호는 서울 중구 태평로 플라자호텔에서 당시 22세의 광고 모델이었던 신재순을, 종로구 내자동 내자호텔에서 당시 24세였던 가수 심수봉을 태우고 궁정동 안가에 도착했고 평소 무좀으로 고생하던 중앙정보부 부장 수행비서 박흥주 육군 포병 대령은 잠시 시간을 내서 광화문 에스콰이아 지점에서 새 구두를 샀다고 전해진다. 이 구두는 그날 밤 박정희와 차지철을 쏜 후 자기 구두도 팽개친 채 양말만 신고 차에 오른 김재규가 빌려 신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저녁 6시 경 박정희와 차지철 일행이 궁정동 안전가옥에 도착했고 대기 중이던 김계원과 김재규가 그들을 맞이하여 안가의 나동 연회장으로 안내하면서 연회가 시작되었다.&lt;br /&gt;
&lt;br /&gt;
술은 막걸리와 위스키 등을 준비했는데 연회장에는 위스키만 들어갔고 평소 박정희가 즐겨 마시던 능곡 소재 양조장에서 공수해 온 막걸리는 안가 식당차 운전수인 김용남과 청와대 경호관 김용섭이 나눠 마셨다. 이때 유명해진 위스키로 당시 박정희가 마셨다던 시바스 리갈이 있는데 그 유명한 현장 검증 사진에도 이 술이 재현된 상 위에 올려진 모습을 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이날 만찬에서 술은 박정희와 김계원만 주로 마셨고 간경변을 앓고 있던 김재규는 박정희의 강권에 억지로 몇 잔을 마신 반면 독실한 크리스천인 차지철은 술잔에 입만 대는 시늉만 했다.&lt;br /&gt;
&lt;br /&gt;
김재규는 식사 중인 정승화에게 &amp;quot;갑자기 각하의 부름을 받고 연회에 참석 중이오. 김(정섭)차장이 저보다 국내 정치는 훨씬 잘 알고 있으니 이 친구하고 시국 얘기 좀 나누고 계세요. 끝나는 대로 곧 오겠습니다. 김영삼이도 내가 두 손 들게 만들어 놓았는데 공화당에서 제 말을 안듣고 멋대로 하는 바람에 이 지경이 되었습니다&amp;quot; 라고 억지로 너털웃음을 지으며 해명한 후 김재규는 자신의 집무실로 가서 책장에 숨겨놓은 발터 PPK를 바지 호주머니에 숨겨 나왔다. 그리고 김재규 자신과 인연이 오래된 심복들인 수행비서 박흥주 대령과 중정 의전과장 박선호를 안가 마당으로 불러내 암살 명령을 내렸다.&lt;br /&gt;
&lt;br /&gt;
김재규의 일방적인 명령에 박선호와 박흥주는 처음에는 크게 놀랐지만 바로 마음을 다잡고 김재규의 명령에 성실히 따랐다. 박선호는 평소 자신이 아끼고 신임하던 같은 해병대 하사 출신인 안가 경비조장 이기주와 의전과장 차량 운전사 유성옥 두 명까지 암살조에 합류시켰다. 그리고 거사 이후 박선호는 안가 경비원 김태원을 차출하여 이기주와 함께 차지철과 청와대 경호원들의 확인 사살을 지시하였다.&lt;br /&gt;
&lt;br /&gt;
시간은 흘러 7시 35분이 되었다. 박선호는 안가 나동 지배인 남효주를 불러 &amp;quot;(김재규)부장님께 부속실로 전화가 왔다고 전해달라&amp;quot;며 지시했고 남효주는 연회장에 들어가 김재규에게 그대로 귀띔했다. 남효주의 전언을 들은 김재규는 부속실로 들어갔고 박선호는 모든 준비를 마친 후 대기하고 있었다. 저녁 7시 38분, 박선호에게 준비가 다 되었음을 확인한 김재규는 다시 연회장으로 들어왔다. 그는 7시 40분에 바지 주머니에 숨겨둔 권총을 꺼내 옆에 앉아 있던 차지철을 향해 &amp;quot;차지철 이 새끼! 너 건방져!&amp;quot;라고 외치며 첫 발을 쐈다.&lt;br /&gt;
&lt;br /&gt;
김재규가 쏜 첫 발은 차지철의 오른쪽 손목을 관통했고 갑자기 총에 맞아 크게 당황한 차지철은 관통당한 손목을 움켜쥐며 &amp;quot;김 부장, 왜 이래!&amp;quot;라고 외쳤다. 그리고 박정희가 &amp;quot;지금 뭐 하는 짓들이야!&amp;quot;라며 소리치자 김재규는 &amp;quot;야, 너도 죽어봐&amp;quot;라고 받아치며 마주보고 앉아있던 박정희의 오른쪽 가슴을 쐈다. 이 총격으로 박정희는 오른쪽 폐에 관통상을 입고 곧바로 쓰러져 얼굴을 식탁에 묻었다. 이때 김재규는 차지철을 쏘고 바로 박정희도 쏘았다고 증언했으나, 같은 안가에 있었던 박선호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은 첫 발 사격 후 4~5초 정도의 간격이 있었다고 주장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박정희 장례.jpg|1000픽셀]]&lt;br /&gt;
[[파일:1026 현장.jpeg|500픽셀|섬네일|암살 당시 현장]]&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기밀문서]]&lt;br /&gt;
[[분류:5.18민주화운동관련]]&lt;br /&gt;
[[분류:이나자키로빈]]&lt;/div&gt;</summary>
		<author><name>이나자키로빈</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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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10.26_%EC%82%AC%ED%83%9C&amp;diff=36242</id>
		<title>10.26 사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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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2T03:21:20Z</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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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개요==&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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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40분경에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전가옥 나동건물 2층 연회장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부하 경호원들이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 등 총 6명을 권총으로 저격하여 피살한 사건이다.&lt;br /&gt;
&lt;br /&gt;
대한민국 헌정 사상 유일하게 현직 국가원수가 살해된 사건으로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는 명칭은 10.26 사태 또는 궁정동 사건이다. 당시의 시대 상황을 직접 경험했던 세대는 궁정동 사건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현재는 10.26 사태로 널리 알려지고 있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박정희의 행사 지시를 받은 차지철은 경호처장 정인형을 불러 행사를 준비하라고 한 후 오후 4시 10분 쯤 남산 중앙정보부 집무실로 전화를 걸어 김재규에게 '''&amp;quot;오늘 저녁 6시에 대행사가 있으니 궁정동 안전가옥으로 오시오. 참석 인원은 각하와 김 부장, 비서실장, 그리고 나요&amp;quot;'''라며 연락을 취했다. 그리고 김재규는 집무실 금고에 보관 중이던 발터 PPK를 꺼내어 탄환 7발을 장전하고 언제든 쉽게 꺼낼 수 있도록 책장에 숨겨 놓았다.&lt;br /&gt;
&lt;br /&gt;
김계원은 삽교천 행사에서 돌아온 후 집무실에서 군사영어학교 1기 동기인 유신정우회 총무 최영희 의원과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이날 최영희는 김계원에게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고 권했지만 김계원은 &amp;quot;언제 각하가 부르실지 모르니 (저녁) 5시까지 기다려 보자.&amp;quot; 라고 했고 예상대로 오후 4시 30분 경 차지철로부터 궁정동에 대행사가 있다는 전화 통보를 받았다. 김계원은 &amp;quot;이러니 제가 약속을 못합니다.&amp;quot; 라고 쓴웃음을 지으며 최영희에게 양해를 구한 후 궁정동으로 이동했다.&lt;br /&gt;
&lt;br /&gt;
오후 4시 30분 김재규는 궁정동 안가 나동 연회장 앞에서 김계원이 오기를 기다렸고 김계원은 오후 5시 40분경 안가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안가 정원에 쪼그려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고 김재규는 부마사태의 상황 설명을 하며 &amp;quot;이것은 단순한 시위가 아닌 민란입니다. 부산과 마산이 섬도 아니고 전국으로 퍼지지 말라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이런 심각한 상황을 차지철 그놈이 중간에서 가로막고 각하께 왜곡하여 보고하고 있단 말입니다&amp;quot; 라며 분을 삭이지 못했고, 김계원 또한 &amp;quot;차지철 그 사람 월권을 해서 야단이야, 야당 친구 몇 사람의 말만 듣고 각하에게 보고하여 각하를 강경하게 몰아가고 있단 말이지&amp;quot;라며 차지철을 비판했다.&lt;br /&gt;
&lt;br /&gt;
그러자 김재규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lt;br /&gt;
&lt;br /&gt;
 '''형님, 그 자식 해치워 버릴까요?'''&lt;br /&gt;
&lt;br /&gt;
이 말에 김계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시했다. 김재규는 김계원의 태도를 찬성하는 것으로 알고 다시 &amp;quot;형님, 뒷일을 부탁합니다.&amp;quot;라고 하니 다시 고개를 끄덕하였기 때문에 동의하는 것으로 판단했다. 이후 김계원은 사건 이후 김재규가 차지철을 진짜 살해할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고, 단순히 박정희에게 강력히 간언하여 차지철의 실각 정도를 유발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그는 &amp;quot;김재규가 단지 '비유적으로' 해치워 버린다는 표현을 쓴 줄 알았다&amp;quot;고 이야기했다.&lt;br /&gt;
&lt;br /&gt;
김재규는 차지철로부터 늘 인격 이하의 대우를 받아왔으며 박정희가 있는 앞에서 면박을 많이 받아왔기 때문에 차지철에 대한 분노가 뼈에 사무쳐 있었다. 차지철의 오만과 월권에 대한 소문은 당시 사회 전반에 널리 알려져 있었고 김재규는 물론 차지철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던 김계원 역시 그를 눈엣가시로 생각해 왔다. 당시 차지철은 박정희 말고는 모두에게 안하무인으로 행동했다. 김계원이 김재규에게 먼저 꺼낸 말은 그렇지 않아도 김재규의 가슴 속에 불타고 있는 차지철에 대한 증오심에 기름을 끼얹은 것인지도 모른다.&lt;br /&gt;
&lt;br /&gt;
비슷한 시각 중정 비서실 의전과장 박선호는 서울 중구 태평로 플라자호텔에서 당시 22세의 광고 모델이었던 신재순을, 종로구 내자동 내자호텔에서 당시 24세였던 가수 심수봉을 태우고 궁정동 안가에 도착했고 평소 무좀으로 고생하던 중앙정보부 부장 수행비서 박흥주 육군 포병 대령은 잠시 시간을 내서 광화문 에스콰이아 지점에서 새 구두를 샀다고 전해진다. 이 구두는 그날 밤 박정희와 차지철을 쏜 후 자기 구두도 팽개친 채 양말만 신고 차에 오른 김재규가 빌려 신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저녁 6시 경 박정희와 차지철 일행이 궁정동 안전가옥에 도착했고 대기 중이던 김계원과 김재규가 그들을 맞이하여 안가의 나동 연회장으로 안내하면서 연회가 시작되었다.&lt;br /&gt;
&lt;br /&gt;
술은 막걸리와 위스키 등을 준비했는데 연회장에는 위스키만 들어갔고 평소 박정희가 즐겨 마시던 능곡 소재 양조장에서 공수해 온 막걸리는 안가 식당차 운전수인 김용남과 청와대 경호관 김용섭이 나눠 마셨다. 이때 유명해진 위스키로 당시 박정희가 마셨다던 시바스 리갈이 있는데 그 유명한 현장 검증 사진에도 이 술이 재현된 상 위에 올려진 모습을 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이날 만찬에서 술은 박정희와 김계원만 주로 마셨고 간경변을 앓고 있던 김재규는 박정희의 강권에 억지로 몇 잔을 마신 반면 독실한 크리스천인 차지철은 술잔에 입만 대는 시늉만 했다.&lt;br /&gt;
&lt;br /&gt;
김재규는 식사 중인 정승화에게 &amp;quot;갑자기 각하의 부름을 받고 연회에 참석 중이오. 김(정섭)차장이 저보다 국내 정치는 훨씬 잘 알고 있으니 이 친구하고 시국 얘기 좀 나누고 계세요. 끝나는 대로 곧 오겠습니다. 김영삼이도 내가 두 손 들게 만들어 놓았는데 공화당에서 제 말을 안듣고 멋대로 하는 바람에 이 지경이 되었습니다&amp;quot; 라고 억지로 너털웃음을 지으며 해명한 후 김재규는 자신의 집무실로 가서 책장에 숨겨놓은 발터 PPK를 바지 호주머니에 숨겨 나왔다. 그리고 김재규 자신과 인연이 오래된 심복들인 수행비서 박흥주 대령과 중정 의전과장 박선호를 안가 마당으로 불러내 암살 명령을 내렸다.&lt;br /&gt;
&lt;br /&gt;
김재규의 일방적인 명령에 박선호와 박흥주는 처음에는 크게 놀랐지만 바로 마음을 다잡고 김재규의 명령에 성실히 따랐다. 박선호는 평소 자신이 아끼고 신임하던 같은 해병대 하사 출신인 안가 경비조장 이기주와 의전과장 차량 운전사 유성옥 두 명까지 암살조에 합류시켰다. 그리고 거사 이후 박선호는 안가 경비원 김태원을 차출하여 이기주와 함께 차지철과 청와대 경호원들의 확인 사살을 지시하였다.&lt;br /&gt;
&lt;br /&gt;
시간은 흘러 7시 35분이 되었다. 박선호는 안가 나동 지배인 남효주를 불러 &amp;quot;(김재규)부장님께 부속실로 전화가 왔다고 전해달라&amp;quot;며 지시했고 남효주는 연회장에 들어가 김재규에게 그대로 귀띔했다. 남효주의 전언을 들은 김재규는 부속실로 들어갔고 박선호는 모든 준비를 마친 후 대기하고 있었다. 저녁 7시 38분, 박선호에게 준비가 다 되었음을 확인한 김재규는 다시 연회장으로 들어왔다. 그는 7시 40분에 바지 주머니에 숨겨둔 권총을 꺼내 옆에 앉아 있던 차지철을 향해 &amp;quot;차지철 이 새끼! 너 건방져!&amp;quot;라고 외치며 첫 발을 쐈다.&lt;br /&gt;
&lt;br /&gt;
김재규가 쏜 첫 발은 차지철의 오른쪽 손목을 관통했고 갑자기 총에 맞아 크게 당황한 차지철은 관통당한 손목을 움켜쥐며 &amp;quot;김 부장, 왜 이래!&amp;quot;라고 외쳤다. 그리고 박정희가 &amp;quot;지금 뭐 하는 짓들이야!&amp;quot;라며 소리치자 김재규는 &amp;quot;야, 너도 죽어봐&amp;quot;라고 받아치며 마주보고 앉아있던 박정희의 오른쪽 가슴을 쐈다. 이 총격으로 박정희는 오른쪽 폐에 관통상을 입고 곧바로 쓰러져 얼굴을 식탁에 묻었다. 이때 김재규는 차지철을 쏘고 바로 박정희도 쏘았다고 증언했으나, 같은 안가에 있었던 박선호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은 첫 발 사격 후 4~5초 정도의 간격이 있었다고 주장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박정희 장례.jpg|1000픽셀]] [[파일:1026 현장.jpeg|500픽셀|섬네일|암살 당시 현장]]&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기밀문서]]&lt;br /&gt;
[[분류:5.18민주화운동관련]]&lt;br /&gt;
[[분류:이나자키로빈]]&lt;/div&gt;</summary>
		<author><name>이나자키로빈</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10.26_%EC%82%AC%ED%83%9C&amp;diff=36241</id>
		<title>10.26 사태</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10.26_%EC%82%AC%ED%83%9C&amp;diff=36241"/>
		<updated>2023-12-12T03:20:2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나자키로빈: /* 전개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400&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pVXlIbGDMIY?si=h9cjLrw7Oef_1tal&amp;quot; title=&amp;quot;YouTube video player&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40분경에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전가옥 나동건물 2층 연회장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부하 경호원들이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 등 총 6명을 권총으로 저격하여 피살한 사건이다.&lt;br /&gt;
&lt;br /&gt;
대한민국 헌정 사상 유일하게 현직 국가원수가 살해된 사건으로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는 명칭은 10.26 사태 또는 궁정동 사건이다. 당시의 시대 상황을 직접 경험했던 세대는 궁정동 사건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현재는 10.26 사태로 널리 알려지고 있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박정희의 행사 지시를 받은 차지철은 경호처장 정인형을 불러 행사를 준비하라고 한 후 오후 4시 10분 쯤 남산 중앙정보부 집무실로 전화를 걸어 김재규에게 '''&amp;quot;오늘 저녁 6시에 대행사가 있으니 궁정동 안전가옥으로 오시오. 참석 인원은 각하와 김 부장, 비서실장, 그리고 나요&amp;quot;'''라며 연락을 취했다. 그리고 김재규는 집무실 금고에 보관 중이던 발터 PPK를 꺼내어 탄환 7발을 장전하고 언제든 쉽게 꺼낼 수 있도록 책장에 숨겨 놓았다.&lt;br /&gt;
&lt;br /&gt;
김계원은 삽교천 행사에서 돌아온 후 집무실에서 군사영어학교 1기 동기인 유신정우회 총무 최영희 의원과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이날 최영희는 김계원에게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고 권했지만 김계원은 &amp;quot;언제 각하가 부르실지 모르니 (저녁) 5시까지 기다려 보자.&amp;quot; 라고 했고 예상대로 오후 4시 30분 경 차지철로부터 궁정동에 대행사가 있다는 전화 통보를 받았다. 김계원은 &amp;quot;이러니 제가 약속을 못합니다.&amp;quot; 라고 쓴웃음을 지으며 최영희에게 양해를 구한 후 궁정동으로 이동했다.&lt;br /&gt;
&lt;br /&gt;
오후 4시 30분 김재규는 궁정동 안가 나동 연회장 앞에서 김계원이 오기를 기다렸고 김계원은 오후 5시 40분경 안가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안가 정원에 쪼그려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고 김재규는 부마사태의 상황 설명을 하며 &amp;quot;이것은 단순한 시위가 아닌 민란입니다. 부산과 마산이 섬도 아니고 전국으로 퍼지지 말라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이런 심각한 상황을 차지철 그놈이 중간에서 가로막고 각하께 왜곡하여 보고하고 있단 말입니다&amp;quot; 라며 분을 삭이지 못했고, 김계원 또한 &amp;quot;차지철 그 사람 월권을 해서 야단이야, 야당 친구 몇 사람의 말만 듣고 각하에게 보고하여 각하를 강경하게 몰아가고 있단 말이지&amp;quot;라며 차지철을 비판했다.&lt;br /&gt;
&lt;br /&gt;
그러자 김재규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lt;br /&gt;
&lt;br /&gt;
 '''형님, 그 자식 해치워 버릴까요?'''&lt;br /&gt;
&lt;br /&gt;
이 말에 김계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시했다. 김재규는 김계원의 태도를 찬성하는 것으로 알고 다시 &amp;quot;형님, 뒷일을 부탁합니다.&amp;quot;라고 하니 다시 고개를 끄덕하였기 때문에 동의하는 것으로 판단했다. 이후 김계원은 사건 이후 김재규가 차지철을 진짜 살해할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고, 단순히 박정희에게 강력히 간언하여 차지철의 실각 정도를 유발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그는 &amp;quot;김재규가 단지 '비유적으로' 해치워 버린다는 표현을 쓴 줄 알았다&amp;quot;고 이야기했다.&lt;br /&gt;
&lt;br /&gt;
김재규는 차지철로부터 늘 인격 이하의 대우를 받아왔으며 박정희가 있는 앞에서 면박을 많이 받아왔기 때문에 차지철에 대한 분노가 뼈에 사무쳐 있었다. 차지철의 오만과 월권에 대한 소문은 당시 사회 전반에 널리 알려져 있었고 김재규는 물론 차지철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던 김계원 역시 그를 눈엣가시로 생각해 왔다. 당시 차지철은 박정희 말고는 모두에게 안하무인으로 행동했다. 김계원이 김재규에게 먼저 꺼낸 말은 그렇지 않아도 김재규의 가슴 속에 불타고 있는 차지철에 대한 증오심에 기름을 끼얹은 것인지도 모른다.&lt;br /&gt;
&lt;br /&gt;
비슷한 시각 중정 비서실 의전과장 박선호는 서울 중구 태평로 플라자호텔에서 당시 22세의 광고 모델이었던 신재순을, 종로구 내자동 내자호텔에서 당시 24세였던 가수 심수봉을 태우고 궁정동 안가에 도착했고 평소 무좀으로 고생하던 중앙정보부 부장 수행비서 박흥주 육군 포병 대령은 잠시 시간을 내서 광화문 에스콰이아 지점에서 새 구두를 샀다고 전해진다. 이 구두는 그날 밤 박정희와 차지철을 쏜 후 자기 구두도 팽개친 채 양말만 신고 차에 오른 김재규가 빌려 신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저녁 6시 경 박정희와 차지철 일행이 궁정동 안전가옥에 도착했고 대기 중이던 김계원과 김재규가 그들을 맞이하여 안가의 나동 연회장으로 안내하면서 연회가 시작되었다.&lt;br /&gt;
&lt;br /&gt;
술은 막걸리와 위스키 등을 준비했는데 연회장에는 위스키만 들어갔고 평소 박정희가 즐겨 마시던 능곡 소재 양조장에서 공수해 온 막걸리는 안가 식당차 운전수인 김용남과 청와대 경호관 김용섭이 나눠 마셨다. 이때 유명해진 위스키로 당시 박정희가 마셨다던 시바스 리갈이 있는데 그 유명한 현장 검증 사진에도 이 술이 재현된 상 위에 올려진 모습을 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이날 만찬에서 술은 박정희와 김계원만 주로 마셨고 간경변을 앓고 있던 김재규는 박정희의 강권에 억지로 몇 잔을 마신 반면 독실한 크리스천인 차지철은 술잔에 입만 대는 시늉만 했다.&lt;br /&gt;
&lt;br /&gt;
김재규는 식사 중인 정승화에게 &amp;quot;갑자기 각하의 부름을 받고 연회에 참석 중이오. 김(정섭)차장이 저보다 국내 정치는 훨씬 잘 알고 있으니 이 친구하고 시국 얘기 좀 나누고 계세요. 끝나는 대로 곧 오겠습니다. 김영삼이도 내가 두 손 들게 만들어 놓았는데 공화당에서 제 말을 안듣고 멋대로 하는 바람에 이 지경이 되었습니다&amp;quot; 라고 억지로 너털웃음을 지으며 해명한 후 김재규는 자신의 집무실로 가서 책장에 숨겨놓은 발터 PPK를 바지 호주머니에 숨겨 나왔다. 그리고 김재규 자신과 인연이 오래된 심복들인 수행비서 박흥주 대령과 중정 의전과장 박선호를 안가 마당으로 불러내 암살 명령을 내렸다.&lt;br /&gt;
&lt;br /&gt;
김재규의 일방적인 명령에 박선호와 박흥주는 처음에는 크게 놀랐지만 바로 마음을 다잡고 김재규의 명령에 성실히 따랐다. 박선호는 평소 자신이 아끼고 신임하던 같은 해병대 하사 출신인 안가 경비조장 이기주와 의전과장 차량 운전사 유성옥 두 명까지 암살조에 합류시켰다. 그리고 거사 이후 박선호는 안가 경비원 김태원을 차출하여 이기주와 함께 차지철과 청와대 경호원들의 확인 사살을 지시하였다.&lt;br /&gt;
&lt;br /&gt;
시간은 흘러 7시 35분이 되었다. 박선호는 안가 나동 지배인 남효주를 불러 &amp;quot;(김재규)부장님께 부속실로 전화가 왔다고 전해달라&amp;quot;며 지시했고 남효주는 연회장에 들어가 김재규에게 그대로 귀띔했다. 남효주의 전언을 들은 김재규는 부속실로 들어갔고 박선호는 모든 준비를 마친 후 대기하고 있었다. 저녁 7시 38분, 박선호에게 준비가 다 되었음을 확인한 김재규는 다시 연회장으로 들어왔다. 그는 7시 40분에 바지 주머니에 숨겨둔 권총을 꺼내 옆에 앉아 있던 차지철을 향해 &amp;quot;차지철 이 새끼! 너 건방져!&amp;quot;라고 외치며 첫 발을 쐈다.&lt;br /&gt;
&lt;br /&gt;
김재규가 쏜 첫 발은 차지철의 오른쪽 손목을 관통했고 갑자기 총에 맞아 크게 당황한 차지철은 관통당한 손목을 움켜쥐며 &amp;quot;김 부장, 왜 이래!&amp;quot;라고 외쳤다. 그리고 박정희가 &amp;quot;지금 뭐 하는 짓들이야!&amp;quot;라며 소리치자 김재규는 &amp;quot;야, 너도 죽어봐&amp;quot;라고 받아치며 마주보고 앉아있던 박정희의 오른쪽 가슴을 쐈다. 이 총격으로 박정희는 오른쪽 폐에 관통상을 입고 곧바로 쓰러져 얼굴을 식탁에 묻었다. 이때 김재규는 차지철을 쏘고 바로 박정희도 쏘았다고 증언했으나, 같은 안가에 있었던 박선호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은 첫 발 사격 후 4~5초 정도의 간격이 있었다고 주장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박정희 장례.jpg|1000픽셀]] [[파일:1026 현장.jpeg|500픽셀]]&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기밀문서]]&lt;br /&gt;
[[분류:5.18민주화운동관련]]&lt;br /&gt;
[[분류:이나자키로빈]]&lt;/div&gt;</summary>
		<author><name>이나자키로빈</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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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10.26_%EC%82%AC%ED%83%9C&amp;diff=36240</id>
		<title>10.26 사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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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2T03:19:5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나자키로빈: /* 전개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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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40분경에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전가옥 나동건물 2층 연회장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부하 경호원들이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 등 총 6명을 권총으로 저격하여 피살한 사건이다.&lt;br /&gt;
&lt;br /&gt;
대한민국 헌정 사상 유일하게 현직 국가원수가 살해된 사건으로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는 명칭은 10.26 사태 또는 궁정동 사건이다. 당시의 시대 상황을 직접 경험했던 세대는 궁정동 사건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현재는 10.26 사태로 널리 알려지고 있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박정희의 행사 지시를 받은 차지철은 경호처장 정인형을 불러 행사를 준비하라고 한 후 오후 4시 10분 쯤 남산 중앙정보부 집무실로 전화를 걸어 김재규에게 '''&amp;quot;오늘 저녁 6시에 대행사가 있으니 궁정동 안전가옥으로 오시오. 참석 인원은 각하와 김 부장, 비서실장, 그리고 나요&amp;quot;'''라며 연락을 취했다. 그리고 김재규는 집무실 금고에 보관 중이던 발터 PPK를 꺼내어 탄환 7발을 장전하고 언제든 쉽게 꺼낼 수 있도록 책장에 숨겨 놓았다.&lt;br /&gt;
&lt;br /&gt;
김계원은 삽교천 행사에서 돌아온 후 집무실에서 군사영어학교 1기 동기인 유신정우회 총무 최영희 의원과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이날 최영희는 김계원에게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고 권했지만 김계원은 &amp;quot;언제 각하가 부르실지 모르니 (저녁) 5시까지 기다려 보자.&amp;quot; 라고 했고 예상대로 오후 4시 30분 경 차지철로부터 궁정동에 대행사가 있다는 전화 통보를 받았다. 김계원은 &amp;quot;이러니 제가 약속을 못합니다.&amp;quot; 라고 쓴웃음을 지으며 최영희에게 양해를 구한 후 궁정동으로 이동했다.&lt;br /&gt;
&lt;br /&gt;
오후 4시 30분 김재규는 궁정동 안가 나동 연회장 앞에서 김계원이 오기를 기다렸고 김계원은 오후 5시 40분경 안가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안가 정원에 쪼그려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고 김재규는 부마사태의 상황 설명을 하며 &amp;quot;이것은 단순한 시위가 아닌 민란입니다. 부산과 마산이 섬도 아니고 전국으로 퍼지지 말라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이런 심각한 상황을 차지철 그놈이 중간에서 가로막고 각하께 왜곡하여 보고하고 있단 말입니다&amp;quot; 라며 분을 삭이지 못했고, 김계원 또한 &amp;quot;차지철 그 사람 월권을 해서 야단이야, 야당 친구 몇 사람의 말만 듣고 각하에게 보고하여 각하를 강경하게 몰아가고 있단 말이지&amp;quot;라며 차지철을 비판했다.&lt;br /&gt;
&lt;br /&gt;
그러자 김재규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lt;br /&gt;
&lt;br /&gt;
 '''형님, 그 자식 해치워 버릴까요?'''&lt;br /&gt;
&lt;br /&gt;
이 말에 김계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시했다. 김재규는 김계원의 태도를 찬성하는 것으로 알고 다시 &amp;quot;형님, 뒷일을 부탁합니다.&amp;quot;라고 하니 다시 고개를 끄덕하였기 때문에 동의하는 것으로 판단했다. 이후 김계원은 사건 이후 김재규가 차지철을 진짜 살해할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고, 단순히 박정희에게 강력히 간언하여 차지철의 실각 정도를 유발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그는 &amp;quot;김재규가 단지 '비유적으로' 해치워 버린다는 표현을 쓴 줄 알았다&amp;quot;고 이야기했다.&lt;br /&gt;
&lt;br /&gt;
김재규는 차지철로부터 늘 인격 이하의 대우를 받아왔으며 박정희가 있는 앞에서 면박을 많이 받아왔기 때문에 차지철에 대한 분노가 뼈에 사무쳐 있었다. 차지철의 오만과 월권에 대한 소문은 당시 사회 전반에 널리 알려져 있었고 김재규는 물론 차지철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던 김계원 역시 그를 눈엣가시로 생각해 왔다. 당시 차지철은 박정희 말고는 모두에게 안하무인으로 행동했다. 김계원이 김재규에게 먼저 꺼낸 말은 그렇지 않아도 김재규의 가슴 속에 불타고 있는 차지철에 대한 증오심에 기름을 끼얹은 것인지도 모른다.&lt;br /&gt;
&lt;br /&gt;
비슷한 시각 중정 비서실 의전과장 박선호는 서울 중구 태평로 플라자호텔에서 당시 22세의 광고 모델이었던 신재순을, 종로구 내자동 내자호텔에서 당시 24세였던 가수 심수봉을 태우고 궁정동 안가에 도착했고 평소 무좀으로 고생하던 중앙정보부 부장 수행비서 박흥주 육군 포병 대령은 잠시 시간을 내서 광화문 에스콰이아 지점에서 새 구두를 샀다고 전해진다. 이 구두는 그날 밤 박정희와 차지철을 쏜 후 자기 구두도 팽개친 채 양말만 신고 차에 오른 김재규가 빌려 신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저녁 6시 경 박정희와 차지철 일행이 궁정동 안전가옥에 도착했고 대기 중이던 김계원과 김재규가 그들을 맞이하여 안가의 나동 연회장으로 안내하면서 연회가 시작되었다.&lt;br /&gt;
&lt;br /&gt;
술은 막걸리와 위스키 등을 준비했는데 연회장에는 위스키만 들어갔고 평소 박정희가 즐겨 마시던 능곡 소재 양조장에서 공수해 온 막걸리는 안가 식당차 운전수인 김용남과 청와대 경호관 김용섭이 나눠 마셨다. 이때 유명해진 위스키로 당시 박정희가 마셨다던 시바스 리갈이 있는데 그 유명한 현장 검증 사진에도 이 술이 재현된 상 위에 올려진 모습을 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이날 만찬에서 술은 박정희와 김계원만 주로 마셨고 간경변을 앓고 있던 김재규는 박정희의 강권에 억지로 몇 잔을 마신 반면 독실한 크리스천인 차지철은 술잔에 입만 대는 시늉만 했다.&lt;br /&gt;
&lt;br /&gt;
김재규는 식사 중인 정승화에게 &amp;quot;갑자기 각하의 부름을 받고 연회에 참석 중이오. 김(정섭)차장이 저보다 국내 정치는 훨씬 잘 알고 있으니 이 친구하고 시국 얘기 좀 나누고 계세요. 끝나는 대로 곧 오겠습니다. 김영삼이도 내가 두 손 들게 만들어 놓았는데 공화당에서 제 말을 안듣고 멋대로 하는 바람에 이 지경이 되었습니다&amp;quot; 라고 억지로 너털웃음을 지으며 해명한 후 김재규는 자신의 집무실로 가서 책장에 숨겨놓은 발터 PPK를 바지 호주머니에 숨겨 나왔다. 그리고 김재규 자신과 인연이 오래된 심복들인 수행비서 박흥주 대령과 중정 의전과장 박선호를 안가 마당으로 불러내 암살 명령을 내렸다.&lt;br /&gt;
&lt;br /&gt;
김재규의 일방적인 명령에 박선호와 박흥주는 처음에는 크게 놀랐지만 바로 마음을 다잡고 김재규의 명령에 성실히 따랐다. 박선호는 평소 자신이 아끼고 신임하던 같은 해병대 하사 출신인 안가 경비조장 이기주와 의전과장 차량 운전사 유성옥 두 명까지 암살조에 합류시켰다. 그리고 거사 이후 박선호는 안가 경비원 김태원을 차출하여 이기주와 함께 차지철과 청와대 경호원들의 확인 사살을 지시하였다.&lt;br /&gt;
&lt;br /&gt;
시간은 흘러 7시 35분이 되었다. 박선호는 안가 나동 지배인 남효주를 불러 &amp;quot;(김재규)부장님께 부속실로 전화가 왔다고 전해달라&amp;quot;며 지시했고 남효주는 연회장에 들어가 김재규에게 그대로 귀띔했다. 남효주의 전언을 들은 김재규는 부속실로 들어갔고 박선호는 모든 준비를 마친 후 대기하고 있었다. 저녁 7시 38분, 박선호에게 준비가 다 되었음을 확인한 김재규는 다시 연회장으로 들어왔다. 그는 7시 40분에 바지 주머니에 숨겨둔 권총을 꺼내 옆에 앉아 있던 차지철을 향해 &amp;quot;차지철 이 새끼! 너 건방져!&amp;quot;라고 외치며 첫 발을 쐈다.&lt;br /&gt;
&lt;br /&gt;
김재규가 쏜 첫 발은 차지철의 오른쪽 손목을 관통했고 갑자기 총에 맞아 크게 당황한 차지철은 관통당한 손목을 움켜쥐며 &amp;quot;김 부장, 왜 이래!&amp;quot;라고 외쳤다. 그리고 박정희가 &amp;quot;지금 뭐 하는 짓들이야!&amp;quot;라며 소리치자 김재규는 &amp;quot;야, 너도 죽어봐&amp;quot;라고 받아치며 마주보고 앉아있던 박정희의 오른쪽 가슴을 쐈다. 이 총격으로 박정희는 오른쪽 폐에 관통상을 입고 곧바로 쓰러져 얼굴을 식탁에 묻었다. 이때 김재규는 차지철을 쏘고 바로 박정희도 쏘았다고 증언했으나, 같은 안가에 있었던 박선호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은 첫 발 사격 후 4~5초 정도의 간격이 있었다고 주장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박정희 장례.jpg|1000픽셀]] [[파일:1026 현장.jpeg|1000픽셀]]&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기밀문서]]&lt;br /&gt;
[[분류:5.18민주화운동관련]]&lt;br /&gt;
[[분류:이나자키로빈]]&lt;/div&gt;</summary>
		<author><name>이나자키로빈</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D%8C%8C%EC%9D%BC:1026_%ED%98%84%EC%9E%A5.jpeg&amp;diff=36239</id>
		<title>파일:1026 현장.jpeg</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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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2T03:19:3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나자키로빈: &lt;/p&gt;
&lt;hr /&gt;
&lt;div&gt;&lt;/div&gt;</summary>
		<author><name>이나자키로빈</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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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10.26_%EC%82%AC%ED%83%9C&amp;diff=36238</id>
		<title>10.26 사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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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2T03:19:0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나자키로빈: /* 전개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400&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pVXlIbGDMIY?si=h9cjLrw7Oef_1tal&amp;quot; title=&amp;quot;YouTube video player&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40분경에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전가옥 나동건물 2층 연회장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부하 경호원들이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 등 총 6명을 권총으로 저격하여 피살한 사건이다.&lt;br /&gt;
&lt;br /&gt;
대한민국 헌정 사상 유일하게 현직 국가원수가 살해된 사건으로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는 명칭은 10.26 사태 또는 궁정동 사건이다. 당시의 시대 상황을 직접 경험했던 세대는 궁정동 사건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현재는 10.26 사태로 널리 알려지고 있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박정희의 행사 지시를 받은 차지철은 경호처장 정인형을 불러 행사를 준비하라고 한 후 오후 4시 10분 쯤 남산 중앙정보부 집무실로 전화를 걸어 김재규에게 '''&amp;quot;오늘 저녁 6시에 대행사가 있으니 궁정동 안전가옥으로 오시오. 참석 인원은 각하와 김 부장, 비서실장, 그리고 나요&amp;quot;'''라며 연락을 취했다. 그리고 김재규는 집무실 금고에 보관 중이던 발터 PPK를 꺼내어 탄환 7발을 장전하고 언제든 쉽게 꺼낼 수 있도록 책장에 숨겨 놓았다.&lt;br /&gt;
&lt;br /&gt;
김계원은 삽교천 행사에서 돌아온 후 집무실에서 군사영어학교 1기 동기인 유신정우회 총무 최영희 의원과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이날 최영희는 김계원에게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고 권했지만 김계원은 &amp;quot;언제 각하가 부르실지 모르니 (저녁) 5시까지 기다려 보자.&amp;quot; 라고 했고 예상대로 오후 4시 30분 경 차지철로부터 궁정동에 대행사가 있다는 전화 통보를 받았다. 김계원은 &amp;quot;이러니 제가 약속을 못합니다.&amp;quot; 라고 쓴웃음을 지으며 최영희에게 양해를 구한 후 궁정동으로 이동했다.&lt;br /&gt;
&lt;br /&gt;
오후 4시 30분 김재규는 궁정동 안가 나동 연회장 앞에서 김계원이 오기를 기다렸고 김계원은 오후 5시 40분경 안가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안가 정원에 쪼그려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고 김재규는 부마사태의 상황 설명을 하며 &amp;quot;이것은 단순한 시위가 아닌 민란입니다. 부산과 마산이 섬도 아니고 전국으로 퍼지지 말라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이런 심각한 상황을 차지철 그놈이 중간에서 가로막고 각하께 왜곡하여 보고하고 있단 말입니다&amp;quot; 라며 분을 삭이지 못했고, 김계원 또한 &amp;quot;차지철 그 사람 월권을 해서 야단이야, 야당 친구 몇 사람의 말만 듣고 각하에게 보고하여 각하를 강경하게 몰아가고 있단 말이지&amp;quot;라며 차지철을 비판했다.&lt;br /&gt;
&lt;br /&gt;
그러자 김재규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lt;br /&gt;
&lt;br /&gt;
 '''형님, 그 자식 해치워 버릴까요?'''&lt;br /&gt;
&lt;br /&gt;
이 말에 김계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시했다. 김재규는 김계원의 태도를 찬성하는 것으로 알고 다시 &amp;quot;형님, 뒷일을 부탁합니다.&amp;quot;라고 하니 다시 고개를 끄덕하였기 때문에 동의하는 것으로 판단했다. 이후 김계원은 사건 이후 김재규가 차지철을 진짜 살해할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고, 단순히 박정희에게 강력히 간언하여 차지철의 실각 정도를 유발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그는 &amp;quot;김재규가 단지 '비유적으로' 해치워 버린다는 표현을 쓴 줄 알았다&amp;quot;고 이야기했다.&lt;br /&gt;
&lt;br /&gt;
김재규는 차지철로부터 늘 인격 이하의 대우를 받아왔으며 박정희가 있는 앞에서 면박을 많이 받아왔기 때문에 차지철에 대한 분노가 뼈에 사무쳐 있었다. 차지철의 오만과 월권에 대한 소문은 당시 사회 전반에 널리 알려져 있었고 김재규는 물론 차지철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던 김계원 역시 그를 눈엣가시로 생각해 왔다. 당시 차지철은 박정희 말고는 모두에게 안하무인으로 행동했다. 김계원이 김재규에게 먼저 꺼낸 말은 그렇지 않아도 김재규의 가슴 속에 불타고 있는 차지철에 대한 증오심에 기름을 끼얹은 것인지도 모른다.&lt;br /&gt;
&lt;br /&gt;
비슷한 시각 중정 비서실 의전과장 박선호는 서울 중구 태평로 플라자호텔에서 당시 22세의 광고 모델이었던 신재순을, 종로구 내자동 내자호텔에서 당시 24세였던 가수 심수봉을 태우고 궁정동 안가에 도착했고 평소 무좀으로 고생하던 중앙정보부 부장 수행비서 박흥주 육군 포병 대령은 잠시 시간을 내서 광화문 에스콰이아 지점에서 새 구두를 샀다고 전해진다. 이 구두는 그날 밤 박정희와 차지철을 쏜 후 자기 구두도 팽개친 채 양말만 신고 차에 오른 김재규가 빌려 신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저녁 6시 경 박정희와 차지철 일행이 궁정동 안전가옥에 도착했고 대기 중이던 김계원과 김재규가 그들을 맞이하여 안가의 나동 연회장으로 안내하면서 연회가 시작되었다.&lt;br /&gt;
&lt;br /&gt;
술은 막걸리와 위스키 등을 준비했는데 연회장에는 위스키만 들어갔고 평소 박정희가 즐겨 마시던 능곡 소재 양조장에서 공수해 온 막걸리는 안가 식당차 운전수인 김용남과 청와대 경호관 김용섭이 나눠 마셨다. 이때 유명해진 위스키로 당시 박정희가 마셨다던 시바스 리갈이 있는데 그 유명한 현장 검증 사진에도 이 술이 재현된 상 위에 올려진 모습을 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이날 만찬에서 술은 박정희와 김계원만 주로 마셨고 간경변을 앓고 있던 김재규는 박정희의 강권에 억지로 몇 잔을 마신 반면 독실한 크리스천인 차지철은 술잔에 입만 대는 시늉만 했다.&lt;br /&gt;
&lt;br /&gt;
김재규는 식사 중인 정승화에게 &amp;quot;갑자기 각하의 부름을 받고 연회에 참석 중이오. 김(정섭)차장이 저보다 국내 정치는 훨씬 잘 알고 있으니 이 친구하고 시국 얘기 좀 나누고 계세요. 끝나는 대로 곧 오겠습니다. 김영삼이도 내가 두 손 들게 만들어 놓았는데 공화당에서 제 말을 안듣고 멋대로 하는 바람에 이 지경이 되었습니다&amp;quot; 라고 억지로 너털웃음을 지으며 해명한 후 김재규는 자신의 집무실로 가서 책장에 숨겨놓은 발터 PPK를 바지 호주머니에 숨겨 나왔다. 그리고 김재규 자신과 인연이 오래된 심복들인 수행비서 박흥주 대령과 중정 의전과장 박선호를 안가 마당으로 불러내 암살 명령을 내렸다.&lt;br /&gt;
&lt;br /&gt;
김재규의 일방적인 명령에 박선호와 박흥주는 처음에는 크게 놀랐지만 바로 마음을 다잡고 김재규의 명령에 성실히 따랐다. 박선호는 평소 자신이 아끼고 신임하던 같은 해병대 하사 출신인 안가 경비조장 이기주와 의전과장 차량 운전사 유성옥 두 명까지 암살조에 합류시켰다. 그리고 거사 이후 박선호는 안가 경비원 김태원을 차출하여 이기주와 함께 차지철과 청와대 경호원들의 확인 사살을 지시하였다.&lt;br /&gt;
&lt;br /&gt;
시간은 흘러 7시 35분이 되었다. 박선호는 안가 나동 지배인 남효주를 불러 &amp;quot;(김재규)부장님께 부속실로 전화가 왔다고 전해달라&amp;quot;며 지시했고 남효주는 연회장에 들어가 김재규에게 그대로 귀띔했다. 남효주의 전언을 들은 김재규는 부속실로 들어갔고 박선호는 모든 준비를 마친 후 대기하고 있었다. 저녁 7시 38분, 박선호에게 준비가 다 되었음을 확인한 김재규는 다시 연회장으로 들어왔다. 그는 7시 40분에 바지 주머니에 숨겨둔 권총을 꺼내 옆에 앉아 있던 차지철을 향해 &amp;quot;차지철 이 새끼! 너 건방져!&amp;quot;라고 외치며 첫 발을 쐈다.&lt;br /&gt;
&lt;br /&gt;
김재규가 쏜 첫 발은 차지철의 오른쪽 손목을 관통했고 갑자기 총에 맞아 크게 당황한 차지철은 관통당한 손목을 움켜쥐며 &amp;quot;김 부장, 왜 이래!&amp;quot;라고 외쳤다. 그리고 박정희가 &amp;quot;지금 뭐 하는 짓들이야!&amp;quot;라며 소리치자 김재규는 &amp;quot;야, 너도 죽어봐&amp;quot;라고 받아치며 마주보고 앉아있던 박정희의 오른쪽 가슴을 쐈다. 이 총격으로 박정희는 오른쪽 폐에 관통상을 입고 곧바로 쓰러져 얼굴을 식탁에 묻었다. 이때 김재규는 차지철을 쏘고 바로 박정희도 쏘았다고 증언했으나, 같은 안가에 있었던 박선호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은 첫 발 사격 후 4~5초 정도의 간격이 있었다고 주장했다.&lt;br /&gt;
&lt;br /&gt;
[[파일:박정희 장례.jpg|1000픽셀]]&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기밀문서]]&lt;br /&gt;
[[분류:5.18민주화운동관련]]&lt;br /&gt;
[[분류:이나자키로빈]]&lt;/div&gt;</summary>
		<author><name>이나자키로빈</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10.26_%EC%82%AC%ED%83%9C&amp;diff=36236</id>
		<title>10.26 사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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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2T03:18:42Z</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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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개요==&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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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40분경에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전가옥 나동건물 2층 연회장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부하 경호원들이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 등 총 6명을 권총으로 저격하여 피살한 사건이다.&lt;br /&gt;
&lt;br /&gt;
대한민국 헌정 사상 유일하게 현직 국가원수가 살해된 사건으로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는 명칭은 10.26 사태 또는 궁정동 사건이다. 당시의 시대 상황을 직접 경험했던 세대는 궁정동 사건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현재는 10.26 사태로 널리 알려지고 있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박정희의 행사 지시를 받은 차지철은 경호처장 정인형을 불러 행사를 준비하라고 한 후 오후 4시 10분 쯤 남산 중앙정보부 집무실로 전화를 걸어 김재규에게 '''&amp;quot;오늘 저녁 6시에 대행사가 있으니 궁정동 안전가옥으로 오시오. 참석 인원은 각하와 김 부장, 비서실장, 그리고 나요&amp;quot;'''라며 연락을 취했다. 그리고 김재규는 집무실 금고에 보관 중이던 발터 PPK를 꺼내어 탄환 7발을 장전하고 언제든 쉽게 꺼낼 수 있도록 책장에 숨겨 놓았다.&lt;br /&gt;
&lt;br /&gt;
김계원은 삽교천 행사에서 돌아온 후 집무실에서 군사영어학교 1기 동기인 유신정우회 총무 최영희 의원과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이날 최영희는 김계원에게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고 권했지만 김계원은 &amp;quot;언제 각하가 부르실지 모르니 (저녁) 5시까지 기다려 보자.&amp;quot; 라고 했고 예상대로 오후 4시 30분 경 차지철로부터 궁정동에 대행사가 있다는 전화 통보를 받았다. 김계원은 &amp;quot;이러니 제가 약속을 못합니다.&amp;quot; 라고 쓴웃음을 지으며 최영희에게 양해를 구한 후 궁정동으로 이동했다.&lt;br /&gt;
&lt;br /&gt;
오후 4시 30분 김재규는 궁정동 안가 나동 연회장 앞에서 김계원이 오기를 기다렸고 김계원은 오후 5시 40분경 안가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안가 정원에 쪼그려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고 김재규는 부마사태의 상황 설명을 하며 &amp;quot;이것은 단순한 시위가 아닌 민란입니다. 부산과 마산이 섬도 아니고 전국으로 퍼지지 말라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이런 심각한 상황을 차지철 그놈이 중간에서 가로막고 각하께 왜곡하여 보고하고 있단 말입니다&amp;quot; 라며 분을 삭이지 못했고, 김계원 또한 &amp;quot;차지철 그 사람 월권을 해서 야단이야, 야당 친구 몇 사람의 말만 듣고 각하에게 보고하여 각하를 강경하게 몰아가고 있단 말이지&amp;quot;라며 차지철을 비판했다.&lt;br /&gt;
&lt;br /&gt;
그러자 김재규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lt;br /&gt;
&lt;br /&gt;
 '''형님, 그 자식 해치워 버릴까요?'''&lt;br /&gt;
&lt;br /&gt;
이 말에 김계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시했다. 김재규는 김계원의 태도를 찬성하는 것으로 알고 다시 &amp;quot;형님, 뒷일을 부탁합니다.&amp;quot;라고 하니 다시 고개를 끄덕하였기 때문에 동의하는 것으로 판단했다. 이후 김계원은 사건 이후 김재규가 차지철을 진짜 살해할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고, 단순히 박정희에게 강력히 간언하여 차지철의 실각 정도를 유발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그는 &amp;quot;김재규가 단지 '비유적으로' 해치워 버린다는 표현을 쓴 줄 알았다&amp;quot;고 이야기했다.&lt;br /&gt;
&lt;br /&gt;
김재규는 차지철로부터 늘 인격 이하의 대우를 받아왔으며 박정희가 있는 앞에서 면박을 많이 받아왔기 때문에 차지철에 대한 분노가 뼈에 사무쳐 있었다. 차지철의 오만과 월권에 대한 소문은 당시 사회 전반에 널리 알려져 있었고 김재규는 물론 차지철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던 김계원 역시 그를 눈엣가시로 생각해 왔다. 당시 차지철은 박정희 말고는 모두에게 안하무인으로 행동했다. 김계원이 김재규에게 먼저 꺼낸 말은 그렇지 않아도 김재규의 가슴 속에 불타고 있는 차지철에 대한 증오심에 기름을 끼얹은 것인지도 모른다.&lt;br /&gt;
&lt;br /&gt;
비슷한 시각 중정 비서실 의전과장 박선호는 서울 중구 태평로 플라자호텔에서 당시 22세의 광고 모델이었던 신재순을, 종로구 내자동 내자호텔에서 당시 24세였던 가수 심수봉을 태우고 궁정동 안가에 도착했고 평소 무좀으로 고생하던 중앙정보부 부장 수행비서 박흥주 육군 포병 대령은 잠시 시간을 내서 광화문 에스콰이아 지점에서 새 구두를 샀다고 전해진다. 이 구두는 그날 밤 박정희와 차지철을 쏜 후 자기 구두도 팽개친 채 양말만 신고 차에 오른 김재규가 빌려 신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저녁 6시 경 박정희와 차지철 일행이 궁정동 안전가옥에 도착했고 대기 중이던 김계원과 김재규가 그들을 맞이하여 안가의 나동 연회장으로 안내하면서 연회가 시작되었다.&lt;br /&gt;
&lt;br /&gt;
술은 막걸리와 위스키 등을 준비했는데 연회장에는 위스키만 들어갔고 평소 박정희가 즐겨 마시던 능곡 소재 양조장에서 공수해 온 막걸리는 안가 식당차 운전수인 김용남과 청와대 경호관 김용섭이 나눠 마셨다. 이때 유명해진 위스키로 당시 박정희가 마셨다던 시바스 리갈이 있는데 그 유명한 현장 검증 사진에도 이 술이 재현된 상 위에 올려진 모습을 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이날 만찬에서 술은 박정희와 김계원만 주로 마셨고 간경변을 앓고 있던 김재규는 박정희의 강권에 억지로 몇 잔을 마신 반면 독실한 크리스천인 차지철은 술잔에 입만 대는 시늉만 했다.&lt;br /&gt;
&lt;br /&gt;
김재규는 식사 중인 정승화에게 &amp;quot;갑자기 각하의 부름을 받고 연회에 참석 중이오. 김(정섭)차장이 저보다 국내 정치는 훨씬 잘 알고 있으니 이 친구하고 시국 얘기 좀 나누고 계세요. 끝나는 대로 곧 오겠습니다. 김영삼이도 내가 두 손 들게 만들어 놓았는데 공화당에서 제 말을 안듣고 멋대로 하는 바람에 이 지경이 되었습니다&amp;quot; 라고 억지로 너털웃음을 지으며 해명한 후 김재규는 자신의 집무실로 가서 책장에 숨겨놓은 발터 PPK를 바지 호주머니에 숨겨 나왔다. 그리고 김재규 자신과 인연이 오래된 심복들인 수행비서 박흥주 대령과 중정 의전과장 박선호를 안가 마당으로 불러내 암살 명령을 내렸다.&lt;br /&gt;
&lt;br /&gt;
김재규의 일방적인 명령에 박선호와 박흥주는 처음에는 크게 놀랐지만 바로 마음을 다잡고 김재규의 명령에 성실히 따랐다. 박선호는 평소 자신이 아끼고 신임하던 같은 해병대 하사 출신인 안가 경비조장 이기주와 의전과장 차량 운전사 유성옥 두 명까지 암살조에 합류시켰다. 그리고 거사 이후 박선호는 안가 경비원 김태원을 차출하여 이기주와 함께 차지철과 청와대 경호원들의 확인 사살을 지시하였다.&lt;br /&gt;
&lt;br /&gt;
시간은 흘러 7시 35분이 되었다. 박선호는 안가 나동 지배인 남효주를 불러 &amp;quot;(김재규)부장님께 부속실로 전화가 왔다고 전해달라&amp;quot;며 지시했고 남효주는 연회장에 들어가 김재규에게 그대로 귀띔했다. 남효주의 전언을 들은 김재규는 부속실로 들어갔고 박선호는 모든 준비를 마친 후 대기하고 있었다. 저녁 7시 38분, 박선호에게 준비가 다 되었음을 확인한 김재규는 다시 연회장으로 들어왔다. 그는 7시 40분에 바지 주머니에 숨겨둔 권총을 꺼내 옆에 앉아 있던 차지철을 향해 &amp;quot;차지철 이 새끼! 너 건방져!&amp;quot;라고 외치며 첫 발을 쐈다.&lt;br /&gt;
&lt;br /&gt;
김재규가 쏜 첫 발은 차지철의 오른쪽 손목을 관통했고 갑자기 총에 맞아 크게 당황한 차지철은 관통당한 손목을 움켜쥐며 &amp;quot;김 부장, 왜 이래!&amp;quot;라고 외쳤다. 그리고 박정희가 &amp;quot;지금 뭐 하는 짓들이야!&amp;quot;라며 소리치자 김재규는 &amp;quot;야, 너도 죽어봐&amp;quot;라고 받아치며 마주보고 앉아있던 박정희의 오른쪽 가슴을 쐈다. 이 총격으로 박정희는 오른쪽 폐에 관통상을 입고 곧바로 쓰러져 얼굴을 식탁에 묻었다. 이때 김재규는 차지철을 쏘고 바로 박정희도 쏘았다고 증언했으나, 같은 안가에 있었던 박선호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은 첫 발 사격 후 4~5초 정도의 간격이 있었다고 주장했다.&lt;br /&gt;
&lt;br /&gt;
[[파일:박정희 장례.jpg|200픽셀]]&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기밀문서]]&lt;br /&gt;
[[분류:5.18민주화운동관련]]&lt;br /&gt;
[[분류:이나자키로빈]]&lt;/div&gt;</summary>
		<author><name>이나자키로빈</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10.26_%EC%82%AC%ED%83%9C&amp;diff=36235</id>
		<title>10.26 사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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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2T03:18:0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나자키로빈: /* 전개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400&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pVXlIbGDMIY?si=h9cjLrw7Oef_1tal&amp;quot; title=&amp;quot;YouTube video player&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40분경에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전가옥 나동건물 2층 연회장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부하 경호원들이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 등 총 6명을 권총으로 저격하여 피살한 사건이다.&lt;br /&gt;
&lt;br /&gt;
대한민국 헌정 사상 유일하게 현직 국가원수가 살해된 사건으로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는 명칭은 10.26 사태 또는 궁정동 사건이다. 당시의 시대 상황을 직접 경험했던 세대는 궁정동 사건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현재는 10.26 사태로 널리 알려지고 있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박정희의 행사 지시를 받은 차지철은 경호처장 정인형을 불러 행사를 준비하라고 한 후 오후 4시 10분 쯤 남산 중앙정보부 집무실로 전화를 걸어 김재규에게 '''&amp;quot;오늘 저녁 6시에 대행사가 있으니 궁정동 안전가옥으로 오시오. 참석 인원은 각하와 김 부장, 비서실장, 그리고 나요&amp;quot;'''라며 연락을 취했다. 그리고 김재규는 집무실 금고에 보관 중이던 발터 PPK를 꺼내어 탄환 7발을 장전하고 언제든 쉽게 꺼낼 수 있도록 책장에 숨겨 놓았다.&lt;br /&gt;
&lt;br /&gt;
김계원은 삽교천 행사에서 돌아온 후 집무실에서 군사영어학교 1기 동기인 유신정우회 총무 최영희 의원과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이날 최영희는 김계원에게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고 권했지만 김계원은 &amp;quot;언제 각하가 부르실지 모르니 (저녁) 5시까지 기다려 보자.&amp;quot; 라고 했고 예상대로 오후 4시 30분 경 차지철로부터 궁정동에 대행사가 있다는 전화 통보를 받았다. 김계원은 &amp;quot;이러니 제가 약속을 못합니다.&amp;quot; 라고 쓴웃음을 지으며 최영희에게 양해를 구한 후 궁정동으로 이동했다.&lt;br /&gt;
&lt;br /&gt;
오후 4시 30분 김재규는 궁정동 안가 나동 연회장 앞에서 김계원이 오기를 기다렸고 김계원은 오후 5시 40분경 안가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안가 정원에 쪼그려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고 김재규는 부마사태의 상황 설명을 하며 &amp;quot;이것은 단순한 시위가 아닌 민란입니다. 부산과 마산이 섬도 아니고 전국으로 퍼지지 말라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이런 심각한 상황을 차지철 그놈이 중간에서 가로막고 각하께 왜곡하여 보고하고 있단 말입니다&amp;quot; 라며 분을 삭이지 못했고, 김계원 또한 &amp;quot;차지철 그 사람 월권을 해서 야단이야, 야당 친구 몇 사람의 말만 듣고 각하에게 보고하여 각하를 강경하게 몰아가고 있단 말이지&amp;quot;라며 차지철을 비판했다.&lt;br /&gt;
&lt;br /&gt;
그러자 김재규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lt;br /&gt;
&lt;br /&gt;
 '''형님, 그 자식 해치워 버릴까요?'''&lt;br /&gt;
&lt;br /&gt;
이 말에 김계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시했다. 김재규는 김계원의 태도를 찬성하는 것으로 알고 다시 &amp;quot;형님, 뒷일을 부탁합니다.&amp;quot;라고 하니 다시 고개를 끄덕하였기 때문에 동의하는 것으로 판단했다. 이후 김계원은 사건 이후 김재규가 차지철을 진짜 살해할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고, 단순히 박정희에게 강력히 간언하여 차지철의 실각 정도를 유발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그는 &amp;quot;김재규가 단지 '비유적으로' 해치워 버린다는 표현을 쓴 줄 알았다&amp;quot;고 이야기했다.&lt;br /&gt;
&lt;br /&gt;
김재규는 차지철로부터 늘 인격 이하의 대우를 받아왔으며 박정희가 있는 앞에서 면박을 많이 받아왔기 때문에 차지철에 대한 분노가 뼈에 사무쳐 있었다. 차지철의 오만과 월권에 대한 소문은 당시 사회 전반에 널리 알려져 있었고 김재규는 물론 차지철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던 김계원 역시 그를 눈엣가시로 생각해 왔다. 당시 차지철은 박정희 말고는 모두에게 안하무인으로 행동했다. 김계원이 김재규에게 먼저 꺼낸 말은 그렇지 않아도 김재규의 가슴 속에 불타고 있는 차지철에 대한 증오심에 기름을 끼얹은 것인지도 모른다.&lt;br /&gt;
&lt;br /&gt;
비슷한 시각 중정 비서실 의전과장 박선호는 서울 중구 태평로 플라자호텔에서 당시 22세의 광고 모델이었던 신재순을, 종로구 내자동 내자호텔에서 당시 24세였던 가수 심수봉을 태우고 궁정동 안가에 도착했고 평소 무좀으로 고생하던 중앙정보부 부장 수행비서 박흥주 육군 포병 대령은 잠시 시간을 내서 광화문 에스콰이아 지점에서 새 구두를 샀다고 전해진다. 이 구두는 그날 밤 박정희와 차지철을 쏜 후 자기 구두도 팽개친 채 양말만 신고 차에 오른 김재규가 빌려 신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저녁 6시 경 박정희와 차지철 일행이 궁정동 안전가옥에 도착했고 대기 중이던 김계원과 김재규가 그들을 맞이하여 안가의 나동 연회장으로 안내하면서 연회가 시작되었다.&lt;br /&gt;
&lt;br /&gt;
술은 막걸리와 위스키 등을 준비했는데 연회장에는 위스키만 들어갔고 평소 박정희가 즐겨 마시던 능곡 소재 양조장에서 공수해 온 막걸리는 안가 식당차 운전수인 김용남과 청와대 경호관 김용섭이 나눠 마셨다. 이때 유명해진 위스키로 당시 박정희가 마셨다던 시바스 리갈이 있는데 그 유명한 현장 검증 사진에도 이 술이 재현된 상 위에 올려진 모습을 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이날 만찬에서 술은 박정희와 김계원만 주로 마셨고 간경변을 앓고 있던 김재규는 박정희의 강권에 억지로 몇 잔을 마신 반면 독실한 크리스천인 차지철은 술잔에 입만 대는 시늉만 했다.&lt;br /&gt;
&lt;br /&gt;
김재규는 식사 중인 정승화에게 &amp;quot;갑자기 각하의 부름을 받고 연회에 참석 중이오. 김(정섭)차장이 저보다 국내 정치는 훨씬 잘 알고 있으니 이 친구하고 시국 얘기 좀 나누고 계세요. 끝나는 대로 곧 오겠습니다. 김영삼이도 내가 두 손 들게 만들어 놓았는데 공화당에서 제 말을 안듣고 멋대로 하는 바람에 이 지경이 되었습니다&amp;quot; 라고 억지로 너털웃음을 지으며 해명한 후 김재규는 자신의 집무실로 가서 책장에 숨겨놓은 발터 PPK를 바지 호주머니에 숨겨 나왔다. 그리고 김재규 자신과 인연이 오래된 심복들인 수행비서 박흥주 대령과 중정 의전과장 박선호를 안가 마당으로 불러내 암살 명령을 내렸다.&lt;br /&gt;
&lt;br /&gt;
김재규의 일방적인 명령에 박선호와 박흥주는 처음에는 크게 놀랐지만 바로 마음을 다잡고 김재규의 명령에 성실히 따랐다. 박선호는 평소 자신이 아끼고 신임하던 같은 해병대 하사 출신인 안가 경비조장 이기주와 의전과장 차량 운전사 유성옥 두 명까지 암살조에 합류시켰다. 그리고 거사 이후 박선호는 안가 경비원 김태원을 차출하여 이기주와 함께 차지철과 청와대 경호원들의 확인 사살을 지시하였다.&lt;br /&gt;
&lt;br /&gt;
시간은 흘러 7시 35분이 되었다. 박선호는 안가 나동 지배인 남효주를 불러 &amp;quot;(김재규)부장님께 부속실로 전화가 왔다고 전해달라&amp;quot;며 지시했고 남효주는 연회장에 들어가 김재규에게 그대로 귀띔했다. 남효주의 전언을 들은 김재규는 부속실로 들어갔고 박선호는 모든 준비를 마친 후 대기하고 있었다. 저녁 7시 38분, 박선호에게 준비가 다 되었음을 확인한 김재규는 다시 연회장으로 들어왔다. 그는 7시 40분에 바지 주머니에 숨겨둔 권총을 꺼내 옆에 앉아 있던 차지철을 향해 &amp;quot;차지철 이 새끼! 너 건방져!&amp;quot;라고 외치며 첫 발을 쐈다.&lt;br /&gt;
&lt;br /&gt;
김재규가 쏜 첫 발은 차지철의 오른쪽 손목을 관통했고 갑자기 총에 맞아 크게 당황한 차지철은 관통당한 손목을 움켜쥐며 &amp;quot;김 부장, 왜 이래!&amp;quot;라고 외쳤다. 그리고 박정희가 &amp;quot;지금 뭐 하는 짓들이야!&amp;quot;라며 소리치자 김재규는 &amp;quot;야, 너도 죽어봐&amp;quot;라고 받아치며 마주보고 앉아있던 박정희의 오른쪽 가슴을 쐈다. 이 총격으로 박정희는 오른쪽 폐에 관통상을 입고 곧바로 쓰러져 얼굴을 식탁에 묻었다. 이때 김재규는 차지철을 쏘고 바로 박정희도 쏘았다고 증언했으나, 같은 안가에 있었던 박선호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은 첫 발 사격 후 4~5초 정도의 간격이 있었다고 주장했다.&lt;br /&gt;
&lt;br /&gt;
[[파일:박정희 장례.jpg]]&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기밀문서]]&lt;br /&gt;
[[분류:5.18민주화운동관련]]&lt;br /&gt;
[[분류:이나자키로빈]]&lt;/div&gt;</summary>
		<author><name>이나자키로빈</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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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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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파일:박정희 장례.jpg</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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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이나자키로빈: &lt;/p&gt;
&lt;hr /&gt;
&lt;div&gt;&lt;/div&gt;</summary>
		<author><name>이나자키로빈</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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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2.12 사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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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2T03:13:2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나자키로빈: /* 하나회 핵심 지휘관들의 집결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0AZ0uH4O1_g?si=dwu8QIzImfLjYmB2&amp;quot; title=&amp;quot;YouTube video player&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1979년 12월 12일, 대한민국 육군 내 불법 사조직인 하나회의 일원 전두환이 주도하여 일으킨 군사 쿠데타로 제5공화국의 실질적인 시작이 되는 사건이다.&lt;br /&gt;
&lt;br /&gt;
사건이 발생한 이래로 문민정부 시기까진 주로 12.12 사태 내지 12.12 사건으로 불렸으나 김영삼의 '''역사바로세우기 사업'''을 거치며 반정부 군사 쿠데타(내란)로 재정의되어 공식적으로 12.12 군사반란이라 불리게 되었다.&lt;br /&gt;
&lt;br /&gt;
==배경==&lt;br /&gt;
10·26 사건 이후 각 군 수뇌부들은 계엄사령관을 하게 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구심점으로 국가의 보위와 안녕을 위해 일치단결하기로 결의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합동수사본부장을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임명해서 10.26 사건을 수사했다.&lt;br /&gt;
&lt;br /&gt;
10.26 사건 당시 정승화가 궁정동과 가까이 있었고 범인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평소 친분이 두터웠기 때문에 정승화가 박정희 대통령 암살사건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있었다.&lt;br /&gt;
&lt;br /&gt;
1979년 11월 6일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은 10·26 사건 수사를 마치고 김재규의 단독 범행이라는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전두환은 &amp;quot;정승화 총장이 육군본부 벙커에 도착 후 신속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문제가 확대되지 않고 질서 정연히 사태를 수습했다&amp;quot;라고 말했다. 또한 &amp;quot;발표문을 보면 정승화 총장의 일거일동을 알 수 있다&amp;quot;면서 &amp;quot;정승화 총장이 김재규의 말을 듣고 중앙정보부로 갔으면 큰 혼란이 초래되었을 것이다. 정총장이 육군본부로 가자고 하였다&amp;quot;라고 말했다.&lt;br /&gt;
&lt;br /&gt;
11월 1일 일본 마이니치 신문에 일개 소장인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군의 최고 실권자라는 언론 발표도 나오며, 12월 9일 국방장관은 정승화 계엄사령관으로부터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동해경비사령관으로 전보시키는 건의를 받았으나 일반인들에게 수사와 관련한 의혹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며 전보 발령을 유보시킨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하나회 핵심 지휘관들의 집결===&lt;br /&gt;
&lt;br /&gt;
[[파일:하나회.png]]&lt;br /&gt;
&lt;br /&gt;
&amp;lt;small&amp;gt;맨 아랫줄 좌측 네 번째에 노태우, 다섯 번째에 전두환&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은 11월 중순부터 정승화 총장을 제거하고 군부를 장악할 계획을 세우고, 하나회를 비롯한 동조 세력 규합에 나섰다. 허화평 보안사령부 비서실장, 허삼수 보안사령부 인사처장, 이학봉 보안사령부 수사과장, 장세동 제30경비단장, 김진영 제33경비단장 등 영관급 후배의 동조를 얻어 모의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11월 말경 전두환은 황영시 제1군단장, 노태우 제9사단장, 백운택 제71방위사단장,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 1, 3, 5공수특전여단장 등 선후배 동료 장성과 쿠데타를 모의하였다. 12월 8일 전두환은 이학봉 중령으로부터 정승화 총장은 일과시간 후 총장 공관에서 연행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첨부된 세부계획서를 전달 받고, 이를 확정한 후 허삼수와 우경윤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에게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도록 지시했다.&lt;br /&gt;
&lt;br /&gt;
12월 12일 오후, 전두환은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 차규헌, 노태우, 황영시 등 규합한 동조세력을 장세동이 있던 경복궁 내 수도경비사령부 여하 제30경비단 단장실로 모이도록 한 후 시내 일원을 장악하기로 한 계획을 지시, 논의했다.&lt;br /&gt;
&lt;br /&gt;
===육군 참모총장 납치===&lt;br /&gt;
전두환의 지시를 받은 허삼수, 우경윤은 정승화 총장 연행계획을 진행했다. 19시, 이들은 정승화 총장을 체포하기 위해 수도경비사령부 33헌병대 50명을 투입했다. 그리고 계엄사령관에게 뇌물 수수 혐의를 거론하여 총리 공관으로 확인 연락을 하려던 인원을 향해 총격이 일어나고 공관 내부를 제압한다. 두 대령이 총장을 양쪽에서 잡아서 일으켜 세우니, 현관 창문을 깨고 군인이 들어와 소총의 총구로 총장을 찌르며 처가로 가려던 길을 도리어 재촉한다. 압송 도중에 건물 밖에서 공관 경비 해병대원들과 총격전을 치른다. 계속된 총격전 속에서 정 총장 신변의 위험을 느낀 경비 헌병들이 근접하는데 시간이 걸리자, 총장은 세단차에 떠밀려 들어가고 이 차는 이미 점령된 공관 정문을 매끄럽게 통과한다.  &lt;br /&gt;
&lt;br /&gt;
이후, 신군부 세력은 총장의 강제연행이 부당하다며 원상복귀를 주장하던 3군사령관 이건영 중장,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소장,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하소곤 소장,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 준장 등에 대해 하극상을 감행하고, 이들을 무력으로 제압하며 연행했다.&lt;br /&gt;
[[분류:기밀문서]][[분류:이나자키로빈]][[분류:5.18민주화운동관련]]&lt;/div&gt;</summary>
		<author><name>이나자키로빈</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12.12_%EC%82%AC%EA%B1%B4&amp;diff=36230</id>
		<title>12.12 사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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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2T03:13:1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나자키로빈: /* 하나회 핵심 지휘관들의 집결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0AZ0uH4O1_g?si=dwu8QIzImfLjYmB2&amp;quot; title=&amp;quot;YouTube video player&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1979년 12월 12일, 대한민국 육군 내 불법 사조직인 하나회의 일원 전두환이 주도하여 일으킨 군사 쿠데타로 제5공화국의 실질적인 시작이 되는 사건이다.&lt;br /&gt;
&lt;br /&gt;
사건이 발생한 이래로 문민정부 시기까진 주로 12.12 사태 내지 12.12 사건으로 불렸으나 김영삼의 '''역사바로세우기 사업'''을 거치며 반정부 군사 쿠데타(내란)로 재정의되어 공식적으로 12.12 군사반란이라 불리게 되었다.&lt;br /&gt;
&lt;br /&gt;
==배경==&lt;br /&gt;
10·26 사건 이후 각 군 수뇌부들은 계엄사령관을 하게 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구심점으로 국가의 보위와 안녕을 위해 일치단결하기로 결의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합동수사본부장을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임명해서 10.26 사건을 수사했다.&lt;br /&gt;
&lt;br /&gt;
10.26 사건 당시 정승화가 궁정동과 가까이 있었고 범인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평소 친분이 두터웠기 때문에 정승화가 박정희 대통령 암살사건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있었다.&lt;br /&gt;
&lt;br /&gt;
1979년 11월 6일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은 10·26 사건 수사를 마치고 김재규의 단독 범행이라는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전두환은 &amp;quot;정승화 총장이 육군본부 벙커에 도착 후 신속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문제가 확대되지 않고 질서 정연히 사태를 수습했다&amp;quot;라고 말했다. 또한 &amp;quot;발표문을 보면 정승화 총장의 일거일동을 알 수 있다&amp;quot;면서 &amp;quot;정승화 총장이 김재규의 말을 듣고 중앙정보부로 갔으면 큰 혼란이 초래되었을 것이다. 정총장이 육군본부로 가자고 하였다&amp;quot;라고 말했다.&lt;br /&gt;
&lt;br /&gt;
11월 1일 일본 마이니치 신문에 일개 소장인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군의 최고 실권자라는 언론 발표도 나오며, 12월 9일 국방장관은 정승화 계엄사령관으로부터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동해경비사령관으로 전보시키는 건의를 받았으나 일반인들에게 수사와 관련한 의혹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며 전보 발령을 유보시킨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하나회 핵심 지휘관들의 집결===&lt;br /&gt;
&lt;br /&gt;
[[파일:하나회.png]]&lt;br /&gt;
&amp;lt;small&amp;gt;맨 아랫줄 좌측 네 번째에 노태우, 다섯 번째에 전두환&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은 11월 중순부터 정승화 총장을 제거하고 군부를 장악할 계획을 세우고, 하나회를 비롯한 동조 세력 규합에 나섰다. 허화평 보안사령부 비서실장, 허삼수 보안사령부 인사처장, 이학봉 보안사령부 수사과장, 장세동 제30경비단장, 김진영 제33경비단장 등 영관급 후배의 동조를 얻어 모의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11월 말경 전두환은 황영시 제1군단장, 노태우 제9사단장, 백운택 제71방위사단장,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 1, 3, 5공수특전여단장 등 선후배 동료 장성과 쿠데타를 모의하였다. 12월 8일 전두환은 이학봉 중령으로부터 정승화 총장은 일과시간 후 총장 공관에서 연행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첨부된 세부계획서를 전달 받고, 이를 확정한 후 허삼수와 우경윤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에게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도록 지시했다.&lt;br /&gt;
&lt;br /&gt;
12월 12일 오후, 전두환은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 차규헌, 노태우, 황영시 등 규합한 동조세력을 장세동이 있던 경복궁 내 수도경비사령부 여하 제30경비단 단장실로 모이도록 한 후 시내 일원을 장악하기로 한 계획을 지시, 논의했다.&lt;br /&gt;
&lt;br /&gt;
===육군 참모총장 납치===&lt;br /&gt;
전두환의 지시를 받은 허삼수, 우경윤은 정승화 총장 연행계획을 진행했다. 19시, 이들은 정승화 총장을 체포하기 위해 수도경비사령부 33헌병대 50명을 투입했다. 그리고 계엄사령관에게 뇌물 수수 혐의를 거론하여 총리 공관으로 확인 연락을 하려던 인원을 향해 총격이 일어나고 공관 내부를 제압한다. 두 대령이 총장을 양쪽에서 잡아서 일으켜 세우니, 현관 창문을 깨고 군인이 들어와 소총의 총구로 총장을 찌르며 처가로 가려던 길을 도리어 재촉한다. 압송 도중에 건물 밖에서 공관 경비 해병대원들과 총격전을 치른다. 계속된 총격전 속에서 정 총장 신변의 위험을 느낀 경비 헌병들이 근접하는데 시간이 걸리자, 총장은 세단차에 떠밀려 들어가고 이 차는 이미 점령된 공관 정문을 매끄럽게 통과한다.  &lt;br /&gt;
&lt;br /&gt;
이후, 신군부 세력은 총장의 강제연행이 부당하다며 원상복귀를 주장하던 3군사령관 이건영 중장,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소장,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하소곤 소장,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 준장 등에 대해 하극상을 감행하고, 이들을 무력으로 제압하며 연행했다.&lt;br /&gt;
[[분류:기밀문서]][[분류:이나자키로빈]][[분류:5.18민주화운동관련]]&lt;/div&gt;</summary>
		<author><name>이나자키로빈</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12.12_%EC%82%AC%EA%B1%B4&amp;diff=36228</id>
		<title>12.12 사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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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2T03:12:3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나자키로빈: /* 하나회 핵심 지휘관들의 집결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0AZ0uH4O1_g?si=dwu8QIzImfLjYmB2&amp;quot; title=&amp;quot;YouTube video player&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1979년 12월 12일, 대한민국 육군 내 불법 사조직인 하나회의 일원 전두환이 주도하여 일으킨 군사 쿠데타로 제5공화국의 실질적인 시작이 되는 사건이다.&lt;br /&gt;
&lt;br /&gt;
사건이 발생한 이래로 문민정부 시기까진 주로 12.12 사태 내지 12.12 사건으로 불렸으나 김영삼의 '''역사바로세우기 사업'''을 거치며 반정부 군사 쿠데타(내란)로 재정의되어 공식적으로 12.12 군사반란이라 불리게 되었다.&lt;br /&gt;
&lt;br /&gt;
==배경==&lt;br /&gt;
10·26 사건 이후 각 군 수뇌부들은 계엄사령관을 하게 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구심점으로 국가의 보위와 안녕을 위해 일치단결하기로 결의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합동수사본부장을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임명해서 10.26 사건을 수사했다.&lt;br /&gt;
&lt;br /&gt;
10.26 사건 당시 정승화가 궁정동과 가까이 있었고 범인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평소 친분이 두터웠기 때문에 정승화가 박정희 대통령 암살사건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있었다.&lt;br /&gt;
&lt;br /&gt;
1979년 11월 6일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은 10·26 사건 수사를 마치고 김재규의 단독 범행이라는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전두환은 &amp;quot;정승화 총장이 육군본부 벙커에 도착 후 신속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문제가 확대되지 않고 질서 정연히 사태를 수습했다&amp;quot;라고 말했다. 또한 &amp;quot;발표문을 보면 정승화 총장의 일거일동을 알 수 있다&amp;quot;면서 &amp;quot;정승화 총장이 김재규의 말을 듣고 중앙정보부로 갔으면 큰 혼란이 초래되었을 것이다. 정총장이 육군본부로 가자고 하였다&amp;quot;라고 말했다.&lt;br /&gt;
&lt;br /&gt;
11월 1일 일본 마이니치 신문에 일개 소장인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군의 최고 실권자라는 언론 발표도 나오며, 12월 9일 국방장관은 정승화 계엄사령관으로부터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동해경비사령관으로 전보시키는 건의를 받았으나 일반인들에게 수사와 관련한 의혹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며 전보 발령을 유보시킨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하나회 핵심 지휘관들의 집결===&lt;br /&gt;
&lt;br /&gt;
[[파일:하나회.png]]&lt;br /&gt;
&lt;br /&gt;
[[파일:하나회.png|섬네일|가운데|맨 아랫줄 좌측 네 번째에 노태우, 다섯 번째에 전두환]]&lt;br /&gt;
&lt;br /&gt;
&lt;br /&gt;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은 11월 중순부터 정승화 총장을 제거하고 군부를 장악할 계획을 세우고, 하나회를 비롯한 동조 세력 규합에 나섰다. 허화평 보안사령부 비서실장, 허삼수 보안사령부 인사처장, 이학봉 보안사령부 수사과장, 장세동 제30경비단장, 김진영 제33경비단장 등 영관급 후배의 동조를 얻어 모의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11월 말경 전두환은 황영시 제1군단장, 노태우 제9사단장, 백운택 제71방위사단장,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 1, 3, 5공수특전여단장 등 선후배 동료 장성과 쿠데타를 모의하였다. 12월 8일 전두환은 이학봉 중령으로부터 정승화 총장은 일과시간 후 총장 공관에서 연행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첨부된 세부계획서를 전달 받고, 이를 확정한 후 허삼수와 우경윤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에게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도록 지시했다.&lt;br /&gt;
&lt;br /&gt;
12월 12일 오후, 전두환은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 차규헌, 노태우, 황영시 등 규합한 동조세력을 장세동이 있던 경복궁 내 수도경비사령부 여하 제30경비단 단장실로 모이도록 한 후 시내 일원을 장악하기로 한 계획을 지시, 논의했다.&lt;br /&gt;
&lt;br /&gt;
===육군 참모총장 납치===&lt;br /&gt;
전두환의 지시를 받은 허삼수, 우경윤은 정승화 총장 연행계획을 진행했다. 19시, 이들은 정승화 총장을 체포하기 위해 수도경비사령부 33헌병대 50명을 투입했다. 그리고 계엄사령관에게 뇌물 수수 혐의를 거론하여 총리 공관으로 확인 연락을 하려던 인원을 향해 총격이 일어나고 공관 내부를 제압한다. 두 대령이 총장을 양쪽에서 잡아서 일으켜 세우니, 현관 창문을 깨고 군인이 들어와 소총의 총구로 총장을 찌르며 처가로 가려던 길을 도리어 재촉한다. 압송 도중에 건물 밖에서 공관 경비 해병대원들과 총격전을 치른다. 계속된 총격전 속에서 정 총장 신변의 위험을 느낀 경비 헌병들이 근접하는데 시간이 걸리자, 총장은 세단차에 떠밀려 들어가고 이 차는 이미 점령된 공관 정문을 매끄럽게 통과한다.  &lt;br /&gt;
&lt;br /&gt;
이후, 신군부 세력은 총장의 강제연행이 부당하다며 원상복귀를 주장하던 3군사령관 이건영 중장,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소장,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하소곤 소장,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 준장 등에 대해 하극상을 감행하고, 이들을 무력으로 제압하며 연행했다.&lt;br /&gt;
[[분류:기밀문서]][[분류:이나자키로빈]][[분류:5.18민주화운동관련]]&lt;/div&gt;</summary>
		<author><name>이나자키로빈</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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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2.12 사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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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2T03:11:4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나자키로빈: /* 하나회 핵심 지휘관들의 집결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0AZ0uH4O1_g?si=dwu8QIzImfLjYmB2&amp;quot; title=&amp;quot;YouTube video player&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1979년 12월 12일, 대한민국 육군 내 불법 사조직인 하나회의 일원 전두환이 주도하여 일으킨 군사 쿠데타로 제5공화국의 실질적인 시작이 되는 사건이다.&lt;br /&gt;
&lt;br /&gt;
사건이 발생한 이래로 문민정부 시기까진 주로 12.12 사태 내지 12.12 사건으로 불렸으나 김영삼의 '''역사바로세우기 사업'''을 거치며 반정부 군사 쿠데타(내란)로 재정의되어 공식적으로 12.12 군사반란이라 불리게 되었다.&lt;br /&gt;
&lt;br /&gt;
==배경==&lt;br /&gt;
10·26 사건 이후 각 군 수뇌부들은 계엄사령관을 하게 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구심점으로 국가의 보위와 안녕을 위해 일치단결하기로 결의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합동수사본부장을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임명해서 10.26 사건을 수사했다.&lt;br /&gt;
&lt;br /&gt;
10.26 사건 당시 정승화가 궁정동과 가까이 있었고 범인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평소 친분이 두터웠기 때문에 정승화가 박정희 대통령 암살사건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있었다.&lt;br /&gt;
&lt;br /&gt;
1979년 11월 6일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은 10·26 사건 수사를 마치고 김재규의 단독 범행이라는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전두환은 &amp;quot;정승화 총장이 육군본부 벙커에 도착 후 신속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문제가 확대되지 않고 질서 정연히 사태를 수습했다&amp;quot;라고 말했다. 또한 &amp;quot;발표문을 보면 정승화 총장의 일거일동을 알 수 있다&amp;quot;면서 &amp;quot;정승화 총장이 김재규의 말을 듣고 중앙정보부로 갔으면 큰 혼란이 초래되었을 것이다. 정총장이 육군본부로 가자고 하였다&amp;quot;라고 말했다.&lt;br /&gt;
&lt;br /&gt;
11월 1일 일본 마이니치 신문에 일개 소장인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군의 최고 실권자라는 언론 발표도 나오며, 12월 9일 국방장관은 정승화 계엄사령관으로부터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동해경비사령관으로 전보시키는 건의를 받았으나 일반인들에게 수사와 관련한 의혹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며 전보 발령을 유보시킨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하나회 핵심 지휘관들의 집결===&lt;br /&gt;
&lt;br /&gt;
[[파일:하나회.png]]&lt;br /&gt;
&lt;br /&gt;
[[파일:하나회.png|가운데|맨 아랫줄 좌측 네 번째에 노태우, 다섯 번째에 전두환]]&lt;br /&gt;
&lt;br /&gt;
&lt;br /&gt;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은 11월 중순부터 정승화 총장을 제거하고 군부를 장악할 계획을 세우고, 하나회를 비롯한 동조 세력 규합에 나섰다. 허화평 보안사령부 비서실장, 허삼수 보안사령부 인사처장, 이학봉 보안사령부 수사과장, 장세동 제30경비단장, 김진영 제33경비단장 등 영관급 후배의 동조를 얻어 모의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11월 말경 전두환은 황영시 제1군단장, 노태우 제9사단장, 백운택 제71방위사단장,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 1, 3, 5공수특전여단장 등 선후배 동료 장성과 쿠데타를 모의하였다. 12월 8일 전두환은 이학봉 중령으로부터 정승화 총장은 일과시간 후 총장 공관에서 연행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첨부된 세부계획서를 전달 받고, 이를 확정한 후 허삼수와 우경윤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에게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도록 지시했다.&lt;br /&gt;
&lt;br /&gt;
12월 12일 오후, 전두환은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 차규헌, 노태우, 황영시 등 규합한 동조세력을 장세동이 있던 경복궁 내 수도경비사령부 여하 제30경비단 단장실로 모이도록 한 후 시내 일원을 장악하기로 한 계획을 지시, 논의했다.&lt;br /&gt;
&lt;br /&gt;
===육군 참모총장 납치===&lt;br /&gt;
전두환의 지시를 받은 허삼수, 우경윤은 정승화 총장 연행계획을 진행했다. 19시, 이들은 정승화 총장을 체포하기 위해 수도경비사령부 33헌병대 50명을 투입했다. 그리고 계엄사령관에게 뇌물 수수 혐의를 거론하여 총리 공관으로 확인 연락을 하려던 인원을 향해 총격이 일어나고 공관 내부를 제압한다. 두 대령이 총장을 양쪽에서 잡아서 일으켜 세우니, 현관 창문을 깨고 군인이 들어와 소총의 총구로 총장을 찌르며 처가로 가려던 길을 도리어 재촉한다. 압송 도중에 건물 밖에서 공관 경비 해병대원들과 총격전을 치른다. 계속된 총격전 속에서 정 총장 신변의 위험을 느낀 경비 헌병들이 근접하는데 시간이 걸리자, 총장은 세단차에 떠밀려 들어가고 이 차는 이미 점령된 공관 정문을 매끄럽게 통과한다.  &lt;br /&gt;
&lt;br /&gt;
이후, 신군부 세력은 총장의 강제연행이 부당하다며 원상복귀를 주장하던 3군사령관 이건영 중장,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소장,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하소곤 소장,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 준장 등에 대해 하극상을 감행하고, 이들을 무력으로 제압하며 연행했다.&lt;br /&gt;
[[분류:기밀문서]][[분류:이나자키로빈]][[분류:5.18민주화운동관련]]&lt;/div&gt;</summary>
		<author><name>이나자키로빈</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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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2T03:11:2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나자키로빈: /* 하나회 핵심 지휘관들의 집결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0AZ0uH4O1_g?si=dwu8QIzImfLjYmB2&amp;quot; title=&amp;quot;YouTube video player&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1979년 12월 12일, 대한민국 육군 내 불법 사조직인 하나회의 일원 전두환이 주도하여 일으킨 군사 쿠데타로 제5공화국의 실질적인 시작이 되는 사건이다.&lt;br /&gt;
&lt;br /&gt;
사건이 발생한 이래로 문민정부 시기까진 주로 12.12 사태 내지 12.12 사건으로 불렸으나 김영삼의 '''역사바로세우기 사업'''을 거치며 반정부 군사 쿠데타(내란)로 재정의되어 공식적으로 12.12 군사반란이라 불리게 되었다.&lt;br /&gt;
&lt;br /&gt;
==배경==&lt;br /&gt;
10·26 사건 이후 각 군 수뇌부들은 계엄사령관을 하게 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구심점으로 국가의 보위와 안녕을 위해 일치단결하기로 결의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합동수사본부장을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임명해서 10.26 사건을 수사했다.&lt;br /&gt;
&lt;br /&gt;
10.26 사건 당시 정승화가 궁정동과 가까이 있었고 범인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평소 친분이 두터웠기 때문에 정승화가 박정희 대통령 암살사건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있었다.&lt;br /&gt;
&lt;br /&gt;
1979년 11월 6일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은 10·26 사건 수사를 마치고 김재규의 단독 범행이라는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전두환은 &amp;quot;정승화 총장이 육군본부 벙커에 도착 후 신속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문제가 확대되지 않고 질서 정연히 사태를 수습했다&amp;quot;라고 말했다. 또한 &amp;quot;발표문을 보면 정승화 총장의 일거일동을 알 수 있다&amp;quot;면서 &amp;quot;정승화 총장이 김재규의 말을 듣고 중앙정보부로 갔으면 큰 혼란이 초래되었을 것이다. 정총장이 육군본부로 가자고 하였다&amp;quot;라고 말했다.&lt;br /&gt;
&lt;br /&gt;
11월 1일 일본 마이니치 신문에 일개 소장인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군의 최고 실권자라는 언론 발표도 나오며, 12월 9일 국방장관은 정승화 계엄사령관으로부터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동해경비사령관으로 전보시키는 건의를 받았으나 일반인들에게 수사와 관련한 의혹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며 전보 발령을 유보시킨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하나회 핵심 지휘관들의 집결===&lt;br /&gt;
&lt;br /&gt;
[[파일:하나회.png]]&lt;br /&gt;
&lt;br /&gt;
[[파일:하나회.png|맨 아랫줄 좌측 네 번째에 노태우, 다섯 번째에 전두환]]&lt;br /&gt;
&lt;br /&gt;
&lt;br /&gt;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은 11월 중순부터 정승화 총장을 제거하고 군부를 장악할 계획을 세우고, 하나회를 비롯한 동조 세력 규합에 나섰다. 허화평 보안사령부 비서실장, 허삼수 보안사령부 인사처장, 이학봉 보안사령부 수사과장, 장세동 제30경비단장, 김진영 제33경비단장 등 영관급 후배의 동조를 얻어 모의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11월 말경 전두환은 황영시 제1군단장, 노태우 제9사단장, 백운택 제71방위사단장,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 1, 3, 5공수특전여단장 등 선후배 동료 장성과 쿠데타를 모의하였다. 12월 8일 전두환은 이학봉 중령으로부터 정승화 총장은 일과시간 후 총장 공관에서 연행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첨부된 세부계획서를 전달 받고, 이를 확정한 후 허삼수와 우경윤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에게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도록 지시했다.&lt;br /&gt;
&lt;br /&gt;
12월 12일 오후, 전두환은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 차규헌, 노태우, 황영시 등 규합한 동조세력을 장세동이 있던 경복궁 내 수도경비사령부 여하 제30경비단 단장실로 모이도록 한 후 시내 일원을 장악하기로 한 계획을 지시, 논의했다.&lt;br /&gt;
&lt;br /&gt;
===육군 참모총장 납치===&lt;br /&gt;
전두환의 지시를 받은 허삼수, 우경윤은 정승화 총장 연행계획을 진행했다. 19시, 이들은 정승화 총장을 체포하기 위해 수도경비사령부 33헌병대 50명을 투입했다. 그리고 계엄사령관에게 뇌물 수수 혐의를 거론하여 총리 공관으로 확인 연락을 하려던 인원을 향해 총격이 일어나고 공관 내부를 제압한다. 두 대령이 총장을 양쪽에서 잡아서 일으켜 세우니, 현관 창문을 깨고 군인이 들어와 소총의 총구로 총장을 찌르며 처가로 가려던 길을 도리어 재촉한다. 압송 도중에 건물 밖에서 공관 경비 해병대원들과 총격전을 치른다. 계속된 총격전 속에서 정 총장 신변의 위험을 느낀 경비 헌병들이 근접하는데 시간이 걸리자, 총장은 세단차에 떠밀려 들어가고 이 차는 이미 점령된 공관 정문을 매끄럽게 통과한다.  &lt;br /&gt;
&lt;br /&gt;
이후, 신군부 세력은 총장의 강제연행이 부당하다며 원상복귀를 주장하던 3군사령관 이건영 중장,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소장,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하소곤 소장,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 준장 등에 대해 하극상을 감행하고, 이들을 무력으로 제압하며 연행했다.&lt;br /&gt;
[[분류:기밀문서]][[분류:이나자키로빈]][[분류:5.18민주화운동관련]]&lt;/div&gt;</summary>
		<author><name>이나자키로빈</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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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12.12_%EC%82%AC%EA%B1%B4&amp;diff=36223</id>
		<title>12.12 사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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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2T03:09:2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나자키로빈: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0AZ0uH4O1_g?si=dwu8QIzImfLjYmB2&amp;quot; title=&amp;quot;YouTube video player&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1979년 12월 12일, 대한민국 육군 내 불법 사조직인 하나회의 일원 전두환이 주도하여 일으킨 군사 쿠데타로 제5공화국의 실질적인 시작이 되는 사건이다.&lt;br /&gt;
&lt;br /&gt;
사건이 발생한 이래로 문민정부 시기까진 주로 12.12 사태 내지 12.12 사건으로 불렸으나 김영삼의 '''역사바로세우기 사업'''을 거치며 반정부 군사 쿠데타(내란)로 재정의되어 공식적으로 12.12 군사반란이라 불리게 되었다.&lt;br /&gt;
&lt;br /&gt;
==배경==&lt;br /&gt;
10·26 사건 이후 각 군 수뇌부들은 계엄사령관을 하게 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구심점으로 국가의 보위와 안녕을 위해 일치단결하기로 결의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합동수사본부장을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임명해서 10.26 사건을 수사했다.&lt;br /&gt;
&lt;br /&gt;
10.26 사건 당시 정승화가 궁정동과 가까이 있었고 범인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평소 친분이 두터웠기 때문에 정승화가 박정희 대통령 암살사건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있었다.&lt;br /&gt;
&lt;br /&gt;
1979년 11월 6일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은 10·26 사건 수사를 마치고 김재규의 단독 범행이라는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전두환은 &amp;quot;정승화 총장이 육군본부 벙커에 도착 후 신속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문제가 확대되지 않고 질서 정연히 사태를 수습했다&amp;quot;라고 말했다. 또한 &amp;quot;발표문을 보면 정승화 총장의 일거일동을 알 수 있다&amp;quot;면서 &amp;quot;정승화 총장이 김재규의 말을 듣고 중앙정보부로 갔으면 큰 혼란이 초래되었을 것이다. 정총장이 육군본부로 가자고 하였다&amp;quot;라고 말했다.&lt;br /&gt;
&lt;br /&gt;
11월 1일 일본 마이니치 신문에 일개 소장인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군의 최고 실권자라는 언론 발표도 나오며, 12월 9일 국방장관은 정승화 계엄사령관으로부터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동해경비사령관으로 전보시키는 건의를 받았으나 일반인들에게 수사와 관련한 의혹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며 전보 발령을 유보시킨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하나회 핵심 지휘관들의 집결===&lt;br /&gt;
&lt;br /&gt;
[[파일:하나회.png]]&lt;br /&gt;
&lt;br /&gt;
&lt;br /&gt;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은 11월 중순부터 정승화 총장을 제거하고 군부를 장악할 계획을 세우고, 하나회를 비롯한 동조 세력 규합에 나섰다. 허화평 보안사령부 비서실장, 허삼수 보안사령부 인사처장, 이학봉 보안사령부 수사과장, 장세동 제30경비단장, 김진영 제33경비단장 등 영관급 후배의 동조를 얻어 모의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11월 말경 전두환은 황영시 제1군단장, 노태우 제9사단장, 백운택 제71방위사단장,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 1, 3, 5공수특전여단장 등 선후배 동료 장성과 쿠데타를 모의하였다. 12월 8일 전두환은 이학봉 중령으로부터 정승화 총장은 일과시간 후 총장 공관에서 연행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첨부된 세부계획서를 전달 받고, 이를 확정한 후 허삼수와 우경윤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에게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도록 지시했다.&lt;br /&gt;
&lt;br /&gt;
12월 12일 오후, 전두환은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 차규헌, 노태우, 황영시 등 규합한 동조세력을 장세동이 있던 경복궁 내 수도경비사령부 여하 제30경비단 단장실로 모이도록 한 후 시내 일원을 장악하기로 한 계획을 지시, 논의했다.&lt;br /&gt;
&lt;br /&gt;
===육군 참모총장 납치===&lt;br /&gt;
전두환의 지시를 받은 허삼수, 우경윤은 정승화 총장 연행계획을 진행했다. 19시, 이들은 정승화 총장을 체포하기 위해 수도경비사령부 33헌병대 50명을 투입했다. 그리고 계엄사령관에게 뇌물 수수 혐의를 거론하여 총리 공관으로 확인 연락을 하려던 인원을 향해 총격이 일어나고 공관 내부를 제압한다. 두 대령이 총장을 양쪽에서 잡아서 일으켜 세우니, 현관 창문을 깨고 군인이 들어와 소총의 총구로 총장을 찌르며 처가로 가려던 길을 도리어 재촉한다. 압송 도중에 건물 밖에서 공관 경비 해병대원들과 총격전을 치른다. 계속된 총격전 속에서 정 총장 신변의 위험을 느낀 경비 헌병들이 근접하는데 시간이 걸리자, 총장은 세단차에 떠밀려 들어가고 이 차는 이미 점령된 공관 정문을 매끄럽게 통과한다.  &lt;br /&gt;
&lt;br /&gt;
이후, 신군부 세력은 총장의 강제연행이 부당하다며 원상복귀를 주장하던 3군사령관 이건영 중장,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소장,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하소곤 소장,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 준장 등에 대해 하극상을 감행하고, 이들을 무력으로 제압하며 연행했다.&lt;br /&gt;
[[분류:기밀문서]][[분류:이나자키로빈]][[분류:5.18민주화운동관련]]&lt;/div&gt;</summary>
		<author><name>이나자키로빈</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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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2T03:08:5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나자키로빈: &lt;/p&gt;
&lt;hr /&gt;
&lt;div&gt;&lt;/div&gt;</summary>
		<author><name>이나자키로빈</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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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지대한 영향</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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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2T00:34:3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나자키로빈: &lt;/p&gt;
&lt;hr /&gt;
&lt;div&gt;광주민주화운동을 계기로 한국의 사회운동은 1970년대 지식인 중심의 반독재민주화운동에서 1980년대 민중운동으로 변화했다. 광주민주화운동은 뚜렷한 지도부와 이념적 프로그램이 결여된 상태에서 일어난 비조직적 군중의 자연발생적인 자구행위였으며, 방어적이고 대중적인 저항이었다는 점에서 1970년대식 반독재시민운동과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또한 광주민주화운동 기간 중 항쟁의 주체들은 당시 작전지휘권을 가지고 있었던 미국이 진압을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않았다고 판단해 이전의 친미적인 민주화운동과는 다른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lt;br /&gt;
&lt;br /&gt;
2011년 5월 25일,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록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으로 등재되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기록물은 기록 유산 중 현대사 관련 자료 중 최초의 등재 자료이자, 유례 없는 대규모 자료로 총 9개의 주제로 분류되어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물에는 광주 민주화 운동의 발발과 진압, 그리고 이후의 진상 규명과 보상 등의 과정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를 포함하고 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은 한국의 민주화를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으며, 국제적으로는 필리핀, 태국, 베트남 등 아시아 각국의 민주화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현대사 자료 중에서 최초로 유네스코 기록 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기록물들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발생과 억압부터 진상 조사 활동과 보상에 이르기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기록물들이기 때문이었다. 이를 통해 민주주의 발전과 인권 향상의 과정, 그리고 인권 침해의 사례와 그에 대한 보상에 관한 절차를 가장 잘 보여주는 기록물이라는 점에서 높게 평가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분류:기밀문서]][[분류:이나자키로빈]][[분류:5.18민주화운동관련]]&lt;/div&gt;</summary>
		<author><name>이나자키로빈</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10.26_%EC%82%AC%ED%83%9C&amp;diff=36145</id>
		<title>10.26 사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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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2T00:29:0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나자키로빈: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400&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pVXlIbGDMIY?si=h9cjLrw7Oef_1tal&amp;quot; title=&amp;quot;YouTube video player&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40분경에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전가옥 나동건물 2층 연회장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부하 경호원들이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 등 총 6명을 권총으로 저격하여 피살한 사건이다.&lt;br /&gt;
&lt;br /&gt;
대한민국 헌정 사상 유일하게 현직 국가원수가 살해된 사건으로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는 명칭은 10.26 사태 또는 궁정동 사건이다. 당시의 시대 상황을 직접 경험했던 세대는 궁정동 사건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현재는 10.26 사태로 널리 알려지고 있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박정희의 행사 지시를 받은 차지철은 경호처장 정인형을 불러 행사를 준비하라고 한 후 오후 4시 10분 쯤 남산 중앙정보부 집무실로 전화를 걸어 김재규에게 '''&amp;quot;오늘 저녁 6시에 대행사가 있으니 궁정동 안전가옥으로 오시오. 참석 인원은 각하와 김 부장, 비서실장, 그리고 나요&amp;quot;'''라며 연락을 취했다. 그리고 김재규는 집무실 금고에 보관 중이던 발터 PPK를 꺼내어 탄환 7발을 장전하고 언제든 쉽게 꺼낼 수 있도록 책장에 숨겨 놓았다.&lt;br /&gt;
&lt;br /&gt;
김계원은 삽교천 행사에서 돌아온 후 집무실에서 군사영어학교 1기 동기인 유신정우회 총무 최영희 의원과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이날 최영희는 김계원에게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고 권했지만 김계원은 &amp;quot;언제 각하가 부르실지 모르니 (저녁) 5시까지 기다려 보자.&amp;quot; 라고 했고 예상대로 오후 4시 30분 경 차지철로부터 궁정동에 대행사가 있다는 전화 통보를 받았다. 김계원은 &amp;quot;이러니 제가 약속을 못합니다.&amp;quot; 라고 쓴웃음을 지으며 최영희에게 양해를 구한 후 궁정동으로 이동했다.&lt;br /&gt;
&lt;br /&gt;
오후 4시 30분 김재규는 궁정동 안가 나동 연회장 앞에서 김계원이 오기를 기다렸고 김계원은 오후 5시 40분경 안가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안가 정원에 쪼그려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고 김재규는 부마사태의 상황 설명을 하며 &amp;quot;이것은 단순한 시위가 아닌 민란입니다. 부산과 마산이 섬도 아니고 전국으로 퍼지지 말라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이런 심각한 상황을 차지철 그놈이 중간에서 가로막고 각하께 왜곡하여 보고하고 있단 말입니다&amp;quot; 라며 분을 삭이지 못했고, 김계원 또한 &amp;quot;차지철 그 사람 월권을 해서 야단이야, 야당 친구 몇 사람의 말만 듣고 각하에게 보고하여 각하를 강경하게 몰아가고 있단 말이지&amp;quot;라며 차지철을 비판했다.&lt;br /&gt;
&lt;br /&gt;
그러자 김재규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lt;br /&gt;
&lt;br /&gt;
 '''형님, 그 자식 해치워 버릴까요?'''&lt;br /&gt;
&lt;br /&gt;
이 말에 김계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시했다. 김재규는 김계원의 태도를 찬성하는 것으로 알고 다시 &amp;quot;형님, 뒷일을 부탁합니다.&amp;quot;라고 하니 다시 고개를 끄덕하였기 때문에 동의하는 것으로 판단했다. 이후 김계원은 사건 이후 김재규가 차지철을 진짜 살해할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고, 단순히 박정희에게 강력히 간언하여 차지철의 실각 정도를 유발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그는 &amp;quot;김재규가 단지 '비유적으로' 해치워 버린다는 표현을 쓴 줄 알았다&amp;quot;고 이야기했다.&lt;br /&gt;
&lt;br /&gt;
김재규는 차지철로부터 늘 인격 이하의 대우를 받아왔으며 박정희가 있는 앞에서 면박을 많이 받아왔기 때문에 차지철에 대한 분노가 뼈에 사무쳐 있었다. 차지철의 오만과 월권에 대한 소문은 당시 사회 전반에 널리 알려져 있었고 김재규는 물론 차지철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던 김계원 역시 그를 눈엣가시로 생각해 왔다. 당시 차지철은 박정희 말고는 모두에게 안하무인으로 행동했다. 김계원이 김재규에게 먼저 꺼낸 말은 그렇지 않아도 김재규의 가슴 속에 불타고 있는 차지철에 대한 증오심에 기름을 끼얹은 것인지도 모른다.&lt;br /&gt;
&lt;br /&gt;
비슷한 시각 중정 비서실 의전과장 박선호는 서울 중구 태평로 플라자호텔에서 당시 22세의 광고 모델이었던 신재순을, 종로구 내자동 내자호텔에서 당시 24세였던 가수 심수봉을 태우고 궁정동 안가에 도착했고 평소 무좀으로 고생하던 중앙정보부 부장 수행비서 박흥주 육군 포병 대령은 잠시 시간을 내서 광화문 에스콰이아 지점에서 새 구두를 샀다고 전해진다. 이 구두는 그날 밤 박정희와 차지철을 쏜 후 자기 구두도 팽개친 채 양말만 신고 차에 오른 김재규가 빌려 신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저녁 6시 경 박정희와 차지철 일행이 궁정동 안전가옥에 도착했고 대기 중이던 김계원과 김재규가 그들을 맞이하여 안가의 나동 연회장으로 안내하면서 연회가 시작되었다.&lt;br /&gt;
&lt;br /&gt;
술은 막걸리와 위스키 등을 준비했는데 연회장에는 위스키만 들어갔고 평소 박정희가 즐겨 마시던 능곡 소재 양조장에서 공수해 온 막걸리는 안가 식당차 운전수인 김용남과 청와대 경호관 김용섭이 나눠 마셨다. 이때 유명해진 위스키로 당시 박정희가 마셨다던 시바스 리갈이 있는데 그 유명한 현장 검증 사진에도 이 술이 재현된 상 위에 올려진 모습을 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이날 만찬에서 술은 박정희와 김계원만 주로 마셨고 간경변을 앓고 있던 김재규는 박정희의 강권에 억지로 몇 잔을 마신 반면 독실한 크리스천인 차지철은 술잔에 입만 대는 시늉만 했다.&lt;br /&gt;
&lt;br /&gt;
김재규는 식사 중인 정승화에게 &amp;quot;갑자기 각하의 부름을 받고 연회에 참석 중이오. 김(정섭)차장이 저보다 국내 정치는 훨씬 잘 알고 있으니 이 친구하고 시국 얘기 좀 나누고 계세요. 끝나는 대로 곧 오겠습니다. 김영삼이도 내가 두 손 들게 만들어 놓았는데 공화당에서 제 말을 안듣고 멋대로 하는 바람에 이 지경이 되었습니다&amp;quot; 라고 억지로 너털웃음을 지으며 해명한 후 김재규는 자신의 집무실로 가서 책장에 숨겨놓은 발터 PPK를 바지 호주머니에 숨겨 나왔다. 그리고 김재규 자신과 인연이 오래된 심복들인 수행비서 박흥주 대령과 중정 의전과장 박선호를 안가 마당으로 불러내 암살 명령을 내렸다.&lt;br /&gt;
&lt;br /&gt;
김재규의 일방적인 명령에 박선호와 박흥주는 처음에는 크게 놀랐지만 바로 마음을 다잡고 김재규의 명령에 성실히 따랐다. 박선호는 평소 자신이 아끼고 신임하던 같은 해병대 하사 출신인 안가 경비조장 이기주와 의전과장 차량 운전사 유성옥 두 명까지 암살조에 합류시켰다. 그리고 거사 이후 박선호는 안가 경비원 김태원을 차출하여 이기주와 함께 차지철과 청와대 경호원들의 확인 사살을 지시하였다.&lt;br /&gt;
&lt;br /&gt;
시간은 흘러 7시 35분이 되었다. 박선호는 안가 나동 지배인 남효주를 불러 &amp;quot;(김재규)부장님께 부속실로 전화가 왔다고 전해달라&amp;quot;며 지시했고 남효주는 연회장에 들어가 김재규에게 그대로 귀띔했다. 남효주의 전언을 들은 김재규는 부속실로 들어갔고 박선호는 모든 준비를 마친 후 대기하고 있었다. 저녁 7시 38분, 박선호에게 준비가 다 되었음을 확인한 김재규는 다시 연회장으로 들어왔다. 그는 7시 40분에 바지 주머니에 숨겨둔 권총을 꺼내 옆에 앉아 있던 차지철을 향해 &amp;quot;차지철 이 새끼! 너 건방져!&amp;quot;라고 외치며 첫 발을 쐈다.&lt;br /&gt;
&lt;br /&gt;
김재규가 쏜 첫 발은 차지철의 오른쪽 손목을 관통했고 갑자기 총에 맞아 크게 당황한 차지철은 관통당한 손목을 움켜쥐며 &amp;quot;김 부장, 왜 이래!&amp;quot;라고 외쳤다. 그리고 박정희가 &amp;quot;지금 뭐 하는 짓들이야!&amp;quot;라며 소리치자 김재규는 &amp;quot;야, 너도 죽어봐&amp;quot;라고 받아치며 마주보고 앉아있던 박정희의 오른쪽 가슴을 쐈다. 이 총격으로 박정희는 오른쪽 폐에 관통상을 입고 곧바로 쓰러져 얼굴을 식탁에 묻었다. 이때 김재규는 차지철을 쏘고 바로 박정희도 쏘았다고 증언했으나, 같은 안가에 있었던 박선호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은 첫 발 사격 후 4~5초 정도의 간격이 있었다고 주장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기밀문서]]&lt;br /&gt;
[[분류:5.18민주화운동관련]]&lt;br /&gt;
[[분류:이나자키로빈]]&lt;/div&gt;</summary>
		<author><name>이나자키로빈</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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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김재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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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2T00:28:1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나자키로빈: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개요==&lt;br /&gt;
&lt;br /&gt;
[[파일:김재규2.JPG]]&lt;br /&gt;
&lt;br /&gt;
대한민국 제 8대 중앙정보부장. 재임 중이던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대통령경호실장을 권총으로 저격해 살해한 10.26 사건을 일으킨 인물이다. 이튿날인 10월 27일 체포되어 1980년 5월 24일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교수형이 집행되어 생을 마감했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1924년 4월 9일 경상북도 선산군 선산면(現 구미시 선산읍) 이문리 서당마을 80-6번지&amp;lt;ref&amp;gt;이문리 80-6번지에는 김재규의 생가가 여전히 남아 있다. 김재규의 딸이 잠시 귀국해서 몇 년 전에 담을 복원하기도 했고, 2019년에는 보수공사를 진행했다.&amp;lt;/ref&amp;gt;에서 3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재규의 아버지 김형철은 고향에서 정미소를 운영했다. 당시 정미소를 운영한다는 건 지역 사회에서 상당한 부와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고, 김재규도 꽤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전해진다.&lt;br /&gt;
&lt;br /&gt;
해방 후 김천중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하다가 1946년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한다. 이때 박정희와 동기가 되며 인연이 시작된다. 고향이 같고 교사를 지낸 경력이 같아 가까이 지냈다고 한다. 이들은 1954년 9월 김재규가 5사단 36연대장으로 근무할 때 박정희가 사단장으로 부임하여 상관이 되면서 재회한다. &lt;br /&gt;
&lt;br /&gt;
5.16 군사정변 당시에는 국방부 총무과장(준장)으로 있었는데 신분 때문인지 박정희와의 인연 때문인지 혁명군사령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조사에도 불구하고 부정 사실이 발견되지 않아 석방되었고, 석방 후 현역 장군으로서 호남비료 사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6사단장과 6관구사령관을 거쳐 방첩부대장에 취임하여, 방첩부대를 보안사령부로 개편하고 초대 보안사령관이 되었다.&lt;br /&gt;
&lt;br /&gt;
1974년 9월 개각 때 건설부 장관이 되었다. 건설부 장관 부임 당시 8,000만 달러 밖에 안되던 해외건설 계약고를 30억 달러까지 끌어올리는 공을 세워 근정훈장을 받았다. 1976년 12월 신직수의 뒤를 이어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하였다. &lt;br /&gt;
&lt;br /&gt;
김재규는 중앙정보부를 통해 최태민의 조사를 지시했고, 10.26 사태가 발생하기 3일 전 최태민&amp;lt;ref&amp;gt;최순실의 친아버지.&amp;lt;/ref&amp;gt;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보고했었다. 이 보고서엔 최태민과 박근혜&amp;lt;ref&amp;gt;둘이 함께 부정한 방법으로 여기저기서 돈을 뜯어내었다. 최순실-박근혜 게이트의 시초라고 보아도 된다.&amp;lt;/ref&amp;gt; 간의 부적절한 관계와 최태민의 문란하고 부적절한 사생활이 기록되어 있었다. 김재규가 최태민이 저지른 온갖 부정의 입증을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는 오히려 최태민을 신뢰하는 꼴을 보였다. 이는 김재규 입장에서 자신이 모신 박정희가 중앙정보부 부장인 자신보다 영애를 홀린 종교인을 더 신뢰하는 시츄에이션인지라, 박정희에 대한 충성심이 바닥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이 사건이 10.26사태의 원인이라고 증언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ftjlJ-kt_Dw?si=t-H6JzWuisRTrU32&amp;quot; title=&amp;quot;YouTube video player&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 &lt;br /&gt;
&amp;lt;references/&amp;gt; &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분류:기밀문서]]&lt;br /&gt;
[[분류:5.18민주화운동관련]]&lt;br /&gt;
[[분류:이나자키로빈]]&lt;/div&gt;</summary>
		<author><name>이나자키로빈</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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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9%80%EC%9E%AC%EA%B7%9C&amp;diff=36143</id>
		<title>김재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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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2T00:27:2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나자키로빈: &lt;/p&gt;
&lt;hr /&gt;
&lt;div&gt;[[분류:기밀문서]]&lt;br /&gt;
[[분류:5.18민주화운동관련]]&lt;br /&gt;
[[분류:이나자키로빈]]&lt;br /&gt;
&lt;br /&gt;
==개요==&lt;br /&gt;
&lt;br /&gt;
[[파일:김재규2.JPG]]&lt;br /&gt;
&lt;br /&gt;
대한민국 제 8대 중앙정보부장. 재임 중이던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대통령경호실장을 권총으로 저격해 살해한 10.26 사건을 일으킨 인물이다. 이튿날인 10월 27일 체포되어 1980년 5월 24일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교수형이 집행되어 생을 마감했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1924년 4월 9일 경상북도 선산군 선산면(現 구미시 선산읍) 이문리 서당마을 80-6번지&amp;lt;ref&amp;gt;이문리 80-6번지에는 김재규의 생가가 여전히 남아 있다. 김재규의 딸이 잠시 귀국해서 몇 년 전에 담을 복원하기도 했고, 2019년에는 보수공사를 진행했다.&amp;lt;/ref&amp;gt;에서 3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재규의 아버지 김형철은 고향에서 정미소를 운영했다. 당시 정미소를 운영한다는 건 지역 사회에서 상당한 부와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고, 김재규도 꽤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전해진다.&lt;br /&gt;
&lt;br /&gt;
해방 후 김천중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하다가 1946년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한다. 이때 박정희와 동기가 되며 인연이 시작된다. 고향이 같고 교사를 지낸 경력이 같아 가까이 지냈다고 한다. 이들은 1954년 9월 김재규가 5사단 36연대장으로 근무할 때 박정희가 사단장으로 부임하여 상관이 되면서 재회한다. &lt;br /&gt;
&lt;br /&gt;
5.16 군사정변 당시에는 국방부 총무과장(준장)으로 있었는데 신분 때문인지 박정희와의 인연 때문인지 혁명군사령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조사에도 불구하고 부정 사실이 발견되지 않아 석방되었고, 석방 후 현역 장군으로서 호남비료 사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6사단장과 6관구사령관을 거쳐 방첩부대장에 취임하여, 방첩부대를 보안사령부로 개편하고 초대 보안사령관이 되었다.&lt;br /&gt;
&lt;br /&gt;
1974년 9월 개각 때 건설부 장관이 되었다. 건설부 장관 부임 당시 8,000만 달러 밖에 안되던 해외건설 계약고를 30억 달러까지 끌어올리는 공을 세워 근정훈장을 받았다. 1976년 12월 신직수의 뒤를 이어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하였다. &lt;br /&gt;
&lt;br /&gt;
김재규는 중앙정보부를 통해 최태민의 조사를 지시했고, 10.26 사태가 발생하기 3일 전 최태민&amp;lt;ref&amp;gt;최순실의 친아버지.&amp;lt;/ref&amp;gt;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보고했었다. 이 보고서엔 최태민과 박근혜&amp;lt;ref&amp;gt;둘이 함께 부정한 방법으로 여기저기서 돈을 뜯어내었다. 최순실-박근혜 게이트의 시초라고 보아도 된다.&amp;lt;/ref&amp;gt; 간의 부적절한 관계와 최태민의 문란하고 부적절한 사생활이 기록되어 있었다. 김재규가 최태민이 저지른 온갖 부정의 입증을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는 오히려 최태민을 신뢰하는 꼴을 보였다. 이는 김재규 입장에서 자신이 모신 박정희가 중앙정보부 부장인 자신보다 영애를 홀린 종교인을 더 신뢰하는 시츄에이션인지라, 박정희에 대한 충성심이 바닥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이 사건이 10.26사태의 원인이라고 증언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ftjlJ-kt_Dw?si=t-H6JzWuisRTrU32&amp;quot; title=&amp;quot;YouTube video player&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 &lt;br /&gt;
&amp;lt;references/&amp;gt; &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이나자키로빈</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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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8%B0%EB%B0%80%EB%AC%B8%EC%84%9C&amp;diff=36138</id>
		<title>기밀문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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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2T00:00:3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나자키로빈: /* 원인 */&lt;/p&gt;
&lt;hr /&gt;
&lt;div&gt;=='''컨텐츠 주제'''==&lt;br /&gt;
&lt;br /&gt;
[[파일:시위대.png|400픽셀|center]][[파일:이한열사진.jpeg|400픽셀|center]][[파일:진압.png|400픽셀|center]]&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amp;lt;big&amp;gt;'''&amp;lt;span style=&amp;quot;color:#CD0000&amp;quot;&amp;gt;&amp;lt;big&amp;gt;&amp;lt;big&amp;gt;투쟁의 불꽃, 자유의 환호&amp;lt;/big&amp;gt;&amp;lt;/big&amp;gt;&amp;lt;/span&amp;gt;'''&amp;lt;br/&amp;gt;&amp;lt;br/&amp;gt;&lt;br /&gt;
''대한민국은 시민들의 투쟁과 희생을 거쳐, 피와 땀으로 민주화를 이룩하였습니다.''&amp;lt;br/&amp;gt;&lt;br /&gt;
''그들은 어둠을 밝히기 위해 항거의 불꽃을 태웠고, 그 불꽃은 자유를 외쳤으며, 그 외침은 세상을 움직였습니다.''&amp;lt;br/&amp;gt;&lt;br /&gt;
''이 «기밀문서»에는 당신이 미처 몰랐던 그 때의 열기와 의지가 실려있습니다.''&amp;lt;br/&amp;gt;&lt;br /&gt;
''함께, 그 뜨거운 페이지를 열어보시겠습니까?''&amp;lt;/span&amp;gt;&amp;lt;/big&amp;gt;&amp;lt;/div&amp;gt;&lt;br /&gt;
&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이나자키로빈]]&lt;br /&gt;
[[딩잉잉]]&lt;br /&gt;
&lt;br /&gt;
=='''팀원'''==&lt;br /&gt;
*오현지(2022131143) [[뎐]]&amp;lt;br/&amp;gt;&lt;br /&gt;
*김여원(2023130209) [[이나자키로빈]]&amp;lt;br/&amp;gt;&lt;br /&gt;
*김하은(2022131345) [[호빵이👻]]&amp;lt;br/&amp;gt;&lt;br /&gt;
*박정원(2023130350) [[•ᴗ•]]&amp;lt;br/&amp;gt;&lt;br /&gt;
*최필중(2023130216) [[딩잉잉]]&amp;lt;br/&amp;gt;&lt;br /&gt;
&lt;br /&gt;
=='''기획의도'''==&lt;br /&gt;
===기획배경===&lt;br /&gt;
1945년 광복 이후 대한민국 국민들은 자유민주국가로서의 미래를 기대했으나 실상은 그러지 못했다.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보여주듯 현재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는 그것을 누리지 못한 앞선 세대들의 목숨을 바친 항쟁의 대가이다. 민주항쟁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의 핵심 동력이었다. 오늘날 우리나라 민주의식의 중요한 기둥이 되는 네 가지 항쟁을 선별하고 각 항쟁의 배경, 전개과정, 의의를 비롯해 세부적이고 자세한 내용에 대한 기사를 작성한다.&lt;br /&gt;
===기획목적===&lt;br /&gt;
작금의 현실까지 오기에는 수없이 많은 투쟁이 있었지만 4.19혁명, 부마항쟁, 5.18민주항쟁, 6월민주항쟁이라는 네 가지 사건을 살펴보기로 한 것은 가장 많이 다뤄지고, 가장 많이 알려진 사건이기 때문이다. 관련된 사건과 역사 인물들에 대해 자세히 적어 내어 민주항쟁의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지 않으면 알기 힘든 각 민주항쟁의 자세한 내막을 밝혀낸다.&lt;br /&gt;
===기대하는 바===&lt;br /&gt;
타임라인과 온톨로지를 활용해 내용의 전반적인 이해를 돕고 자세한 설명을 통해 사건의 자세한 내막을 들어낸다. 네 가지 항쟁을 각각 큰 목차로 설정하고 세부 기사를 그 내부에 작성해 독자의 관심과 수요에 부합하는 정보를 전달하는 데 효과적일 것으로 기대된다. 민주항쟁에 참여한 사람들의 희생과 투쟁에 대한 존경심을 부르고 역사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다.&lt;br /&gt;
===기여===&lt;br /&gt;
[[뎐]], [[이나자키로빈]], [[호빵이👻]]: 기획의도 페이지 작성&lt;br /&gt;
&lt;br /&gt;
=='''온톨로지'''==&lt;br /&gt;
{{NetworkGraph | title=민주항쟁.lst}}&lt;br /&gt;
[[민주항쟁.lst]]&lt;br /&gt;
===기여===&lt;br /&gt;
*[[뎐]]: 온톨로지 제작&lt;br /&gt;
=='''컨텐츠 구조'''==&lt;br /&gt;
===클래스(Class)===&lt;br /&gt;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color:white&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0%&amp;quot; | 클래스 !! style=&amp;quot;width:40%&amp;quot; | 설명 !! style=&amp;quot;45%&amp;quot; | 노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제||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대표 키워드인 민주항쟁을 주제로서 나타내었다 || 만주항쟁&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항쟁||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민주화운동 시기 발생했던 주요 운동들을 ‘항쟁’이라는 키워드로 분류하였다. || 4.19혁명, 부마항쟁, 5.18 민주화운동, 6월민주항쟁&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사건||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항쟁의 원인, 결과가 되는 사건을 정리하였다|| 3.15부정선거, 고려대 4.18학생시위, 3.15의거, YH사건, 10.26사태, 12.12 군사반란, 비상계엄령,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고문추방민족대행진, 4.13호헌조치, 6.29선언, 대통령직선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지역||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요 항쟁들이 일어났던 지역을 정리하였다|| 마산, 부산, 광주&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인물||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요사건들을 발생시킨 인물, 참여했던 인물을 묶어서 정리하였다|| 이승만, 이기붕, 김주열, 박정희, 김재규, 전두환, 신군부, 시민군, 박종철, 이한열, 노태우&lt;br /&gt;
|-&lt;br /&gt;
|}&lt;br /&gt;
===관계성(Relation)===&lt;br /&gt;
*&amp;lt;font color=#228B22&amp;gt;'''~은 ~에 속한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주요 항쟁들이 민주항쟁에 속함을 나타내거나 인물의 소속을 나타낸다.&lt;br /&gt;
***해당노드:&lt;br /&gt;
***#4.19혁명 -&amp;gt; 민주항쟁&lt;br /&gt;
***#부마항쟁 -&amp;gt; 민주항쟁&lt;br /&gt;
***#5.18민주화운동 -&amp;gt; 민주항쟁&lt;br /&gt;
***#6월 민주항쟁 -&amp;gt; 민주항쟁&lt;br /&gt;
***#전두환 -&amp;gt; 신군부&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의 원인이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어떠한 사건과 인과관계를 이루는 또다른 사건 혹은 인물을 설명한다.&lt;br /&gt;
***#이기붕 -&amp;gt; 3.15부정선거&lt;br /&gt;
***#김주열 -&amp;gt; 고려대 4.18학생시위&lt;br /&gt;
***#고려대 4.18학생시위 -&amp;gt; 4.19혁명&lt;br /&gt;
***#3.15의거 -&amp;gt; 4.19혁명&lt;br /&gt;
***#김주열 -&amp;gt; 4.19혁명&lt;br /&gt;
***#3.15부정선거 -&amp;gt; 3.15의거&lt;br /&gt;
***#YH사건 -&amp;gt; 부마항쟁&lt;br /&gt;
***#부마항쟁 -&amp;gt; 10.26사태&lt;br /&gt;
***#박정희 -&amp;gt; 10.26사태&lt;br /&gt;
***#비상계엄령 -&amp;gt; 5.18민주화운동&lt;br /&gt;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 -&amp;gt; 고문추방민족대행진&lt;br /&gt;
***#고문추방민족대행진 -&amp;gt; 4.13호헌조치&lt;br /&gt;
***#4.13호헌조치 -&amp;gt; 6월민주항쟁&lt;br /&gt;
***#6월민주항쟁 -&amp;gt; 6.29선언&lt;br /&gt;
***#6월민주항쟁 -&amp;gt; 대통령직선제&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을 발생시켰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사건과 그 사건을 직접적으로 발생시킨 인물을 연결한다.&lt;br /&gt;
***#이승만 -&amp;gt; 3.15부정선거&lt;br /&gt;
***#김재규 -&amp;gt; 10.26사태&lt;br /&gt;
***#신군부 -&amp;gt; 1212군사반란&lt;br /&gt;
***#전두환 -&amp;gt; 비상계엄령&lt;br /&gt;
***#노태우 -&amp;gt; 6.29선언&lt;br /&gt;
***#시민군 -&amp;gt; 5.18민주화운동&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에 희생되었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민주항쟁의 진압과정 등 에서 희생된 인물을 설명한다&lt;br /&gt;
***#김주열 -&amp;gt; 3.15의거&lt;br /&gt;
***#이한열 -&amp;gt; 6월 민주항쟁&lt;br /&gt;
***#박종철&amp;gt;박종철 고문치사 사건&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에서 발생했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설명한다.&lt;br /&gt;
***#3.15의거 -&amp;gt; 마산&lt;br /&gt;
***#부마항쟁 -&amp;gt; 부산&lt;br /&gt;
***#부마항쟁 -&amp;gt; 마산&lt;br /&gt;
***#5.18민주화운동 -&amp;gt; 광주&lt;br /&gt;
===기여===&lt;br /&gt;
*[[뎐]]: 컨텐츠 구조 페이지 작성&lt;br /&gt;
=='''마인드맵'''==&lt;br /&gt;
===주제 마인드맵===&lt;br /&gt;
[[파일:KakaoTalk_20231212_025359957_01.jpg|600px]]&lt;br /&gt;
&lt;br /&gt;
===노드 마인드맵===&lt;br /&gt;
[[파일:KakaoTalk_20231212_025359957.jpg|600px]]&lt;br /&gt;
&lt;br /&gt;
=='''4.19혁명'''==&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VPp4BmfDSv8VA2-oC-VATHzUYgadaiaQ9AlWXYiaiVk&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원인===&lt;br /&gt;
====[[3.15 부정선거]]====&lt;br /&gt;
[[파일:3.15부정선거_개표_모습.png|300픽셀|섬네일|오른쪽|3.15부정선거 당시 개표하는 사진&amp;lt;ref&amp;gt;사진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amp;lt;/ref&amp;gt;]]&lt;br /&gt;
1959년 대한민국은 제 4대 대통령 선거와 제 5대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당시 자유당에서는 12년째 대통령으로서 연임 중이던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이기붕]]'''을 부통령 후보로 선임하였다. 그러나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병세의 악화로 사망하게 되고,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은 확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선거의 초점은 자유당의 조병옥과 민주당의 장면 간의 선거전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본격적인 선거유세의 시작과 함께 정부와 여당의 잇따른 야당선거운동 방해사건으로 부정선거가 시작되었다. 1960년 3월 15일 선거가 시작된 이후에도 다양한 방법의 부정행위가 일어났고, 개표 결과 이승만과 이기붕의 득표가 100%에 육박하는 결과로 나오자 자유당은 득표수를 하향 조정해 최종 집계에 반영할 것을 지시했다. 결국 이승만 88.7%, 이기붕 79%의 득표율을 가지며 정, 부통령에 당선되었다.&amp;lt;ref&amp;gt;자세한 내용은 3.15부정선거 페이지 참조&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부정선거 반대시위, [[3.15 의거]]의 발생====&lt;br /&gt;
3.15 부정선거를 반대하는 시위는 초기에는 중, 고등학생들의 산발적인 시위로 전개되었다. 3월 15일 선거일 밤 경남 마산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으며,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여 1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amp;lt;br/&amp;gt;&lt;br /&gt;
3월 15일 실종되었던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4월 11일 마산부두에서 발견되자 마산 시민들은 시청, 파출소 등을 파괴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2차 시위가 일어난 것이다.&lt;br /&gt;
&lt;br /&gt;
====[[고려대학교 4.18 학생시위]]의 발생====&lt;br /&gt;
1, 2차 마산시위를 계기로 부정선거 무효와 이승만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났다. 이들은 '4.18 선언문'을 낭독하고 시내로 진출하였다. 이는 4월 19일 학생들과 일반 시민들이 가세한 대규모 시위로 이어지게 되었다.&lt;br /&gt;
====전국적인 4.19 혁명의 발생====&lt;br /&gt;
분노한 전국의 시민과 학생들이 다음 날인 4월 19일에 '이승만 하야와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며 대규모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경찰은 또다시 무차별 발포에 나섰고,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지만 이러한 압박에도 시민들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lt;br /&gt;
====이승만 대통령의 혼란 수습 시도====&lt;br /&gt;
이승만 대통령은 4.19 시위로 인한 정국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4월 20일 국무위원 전원과 자유당 당무위원 전원의 사표를 제출하도록 지시하였으며, 4월 23일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외무장관에 허정, 내무장관에 이호, 법무장관에 권승렬을 임명하는 등 개각을 단행하였다.&amp;lt;br/&amp;gt;&lt;br /&gt;
그러나 미국은 4.19직후 국무부 성명을 통해 한국에서 발생한 사태는 부정선거에 대한 '군중의 불만'을 반영한 것 이라고 했고, 양유찬 주미대사를 불러 '부정선거에 대한 철저한 조사', '경향신문 복간', '국가보안법 개정' 등을 촉구하는 각서를 전달하였다.&amp;lt;br/&amp;gt;&lt;br /&gt;
그리고 4월 25일, 이승만 정권에 분노한 전국 27개 대학 258명의 교수가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 모여 14개항의 시국 선언문을 발표하며 학생, 시민들과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들은 3.15 부정선거 및 4.19 사태의 책임을 지고 대통령이 물러날 것을 주장하였으며, &amp;quot;학생들의 피에 보답하자&amp;quot;는 플랜 카드를 앞세워 국회의사당까지 행진하였다. &lt;br /&gt;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lt;br /&gt;
무력 진압에도 대규모 시위가 이어지며 시민들은 완강하게 투쟁하였다. 4월 26일 시위대가 경무대로 다시 집결하는 등 사태가 심각하게 진행되자, 오전 10시 30분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 성명을 발표하였다. 4월 27일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하며 대통령직을 하야하고 하와이로 망명하였으며 자유당 정권도 끝나게 된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우리 국민들, 특히 학생과 청년들의 주도로 이루어진 4.19 혁명은 학생과 일반 대중이 단결하여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아시아 최초의 시건이다. 4.19혁명은 부마항쟁, 5.18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그리고 2017년 촛불시위에 이르기 까지 정권에 대항하는 국민들이 단합을 이루는 초석이 되었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도 시민 저항권에 대한 근거로써 4.19혁명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문구가 있다.&lt;br /&gt;
===기여===&lt;br /&gt;
[[뎐]]: 4.19혁명 페이지 원인, 의의 작성 &lt;br /&gt;
&lt;br /&gt;
[[•ᴗ•]]: 4.19혁명 페이지 전개 작성&lt;br /&gt;
&lt;br /&gt;
=='''부마항쟁'''==&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bK7zjpPvBsC7rFRPmsiHCUYhyWt2VXOv8SYyaBTND4Y&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원인===&lt;br /&gt;
====[[유신 헌법]]과 [[긴급조치]]====&lt;br /&gt;
1971년 선거에서 김대중을 누르고 대통령에 3선된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해 국회 해산,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등 법의 일부 기능을 정지시키고 전국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했다.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된 이른바 유신헌법에 의해 제정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법」 에 의거해 박정희가 제8대 대통령으로 재차 당선되었고, 이 유신 헌법이 발효된 기간을 유신 체제라고 부른다. 유신 체제는 행정, 입법, 사법의 3권을 모두 쥔 대통령이 종신 집권할 수 있도록 설계된 1인 대통령제였다. 박정희는 유신 헌법에 의거해 대통령의 권한으로 취할 수 있었던 특별조치인 긴급조치를 선포함으로써 헌법에 반대하는 시위 및 운동과 방송, 언론 활동을 하는 반정부 인사들을 연행, 체포, 고문하는 등 억압을 가했다.&lt;br /&gt;
&lt;br /&gt;
====한국경제의 위기====&lt;br /&gt;
1970년대 말 한국경제는''' [[오일쇼크]]'''라는 세계경제의 위기와 결합해 가라앉고 말았다. 경제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정부는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과 함께 '''[[경제안정화정책]]'''을 수용했고, 중소자본가, 봉급생활자, 도시 노동자와 농민 등에 안정화 비용을 부과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이와 같은 안정화 정책은 경제위기로 어려운 처지에 있던 중소기업들의 도산을 가속하여 기업 부도율이 치솟고 하층민들을 더 깊은 고통에 몰아넣었다. 특히 '''부가가치세'''를 도입한 이후 물가가 상승하면서 일상에 타격을 주었으며, 노동집약적 제조업이 집중되었던 부산과 마산에서는 상황이 더욱 심각하여 1979년 부산 지역 부도율은 서울의 3배에 달했다.&lt;br /&gt;
&lt;br /&gt;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lt;br /&gt;
한 시대의 대격변을 예고하는 단초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시작됐다. 1979년 8월 9일 오전, 신민당의 당사 4층 강당에서는 봉제업체인 YH무역주식회사의 여성노동자 200여명이 기업주의 폐업에 반발하여 폐업조치 철회 농성을 벌였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인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신민당이 당사 건물을 내준 것이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폭력을 동원하여 농성을 해산시켰다. 결국 이 사건은 노동 탄압 사건을 넘어선 야당에 대한 정치 탄압 사건으로 발전하였다.&lt;br /&gt;
&lt;br /&gt;
이날 경찰은 1000여명의 진압대원을 신민당사로 난입시켜 농성을 하고 있던 174명의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로 밖으로 끌어냈다. 또한 경찰은 총재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김영삼 총재와 당 간부들을 끌어내면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박정희 정권은 이 노동자 농성 사건을 빌미로 신민당 분열공작을 시도하였다. 유신정권과 비밀리에 결탁한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 3명이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 부총재 전원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접수시켰다. 그리고 법원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신민당 총재단의 직무 집행을 정지시키고 박정희 정권의 꼭두각시를 총재직무대행으로 선임하였다.&lt;br /&gt;
&lt;br /&gt;
아울러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의 동교동 자택을 전면 봉쇄하였고,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에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끊으라고 요구한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즈』 회견내용을 “반헌정적, 반민족적 작태”로 몰아서 국회에 징계 동의안을 제출했다. 10월 4일 오후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의원 159명은 여당 총회장에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제명 결의안을 '''기습적으로''' 처리해 버렸다. 노사분규 사태로 시작된 사건이 제1야당 당수의 의원직 제명으로 확대된 정치적 사태를 지켜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유신체제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이 고조되었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유신 철폐, 독재 타도!'''''   &amp;lt;small&amp;gt;-10.16 부마항쟁 당시 시위대의 구호&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부산대학교 민주선언문, 학생 시위에서 시민항쟁으로====&lt;br /&gt;
[[파일:부산시위대.jpg|250px|섬네일|오른쪽|광복동을 지나는 시위 행렬]]&lt;br /&gt;
1979년 10월 16일 아침 10시 부산대학교 구내 도서관 앞에서 약 500명의 학생들이 모여 “유신정권 물러가라”, “정치탄압 중지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반정부 시위를 벌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민주선언문」]]'''을 통해 민주화, 언론 자유, 인권 보장의 신념을 확인하고, “제도화된 폭력성과 조직적 악의 근원인 유신헌법과 독재집권층의 퇴진만이 5천 만 겨레의 통일의 첫걸음이라고 주장하면서 형제의 피를 요구하는 자유와 민주의 깃발을 우리가 잡고 반민주의 무리, 불의의 무리들을 향해 외치며 나아가자”라고 선언하였다. 이후 학생들은 교문을 나가 거리에서 시위했다. 이때 학생 수는 약 5,000명으로 불어나 있었고, 광복동과 남포동 등 부산시내 중심가까지 진출해 애국가 등의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며, 이를 제지하려는 경찰과 이곳저곳에서 충돌하였다. 비슷한 시간, 부산 동아대학교에서도 1,000여 명의 학생이 부산대학교 학생과 합류하여 가두시위를 벌였다. 부산대학교 데모로 학생 수백 명이 연행되고 100여 명이 다쳤지만 이튿날인 10월 17일에는 시위가 더욱 격화되어 학생들뿐만 아니라 다수의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학생 시위는 점차 시민항쟁의 양상을 띠어갔다.''' 밤늦게까지 계속된 시위에서 시민들은 충무파출소, 한국방송공사, 서구청, 부산세무서 등을 파괴하였고, 경찰차량을 불태우거나 파손시켰다.&lt;br /&gt;
&lt;br /&gt;
====마산의 시민항쟁====&lt;br /&gt;
&lt;br /&gt;
민주항쟁은 18일에 마산으로 확산되었다. 늦은 오후에는 1,000여 명의 경남대학교 학생들이 마산 시내 번화가에 산발적으로 집결했으며, 일부시민들도 가담해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어두워진 다음 학생과 시민들의 데모는 격화되어 파출소, 공화당사, 방송국, 신문사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파괴하였다. 이튿날인 19일에는 시위가 더욱 치열해져 마산 시내는 한때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저녁 8시경, 시위대는 경남대학과 마산대학&amp;lt;ref&amp;gt;1985년 창원대학으로 교명이 변경되었으며, 현재의 마산대학교와 다르다.&amp;lt;/ref&amp;gt;, 그리고 고등학생까지 합세하여 약 8,000명에 이르렀으며, 시내 곳곳에서 몽둥이를 들고 동사무소와 파출소로 몰려가 시설을 파괴하였고, 경찰차량에 불을 질렀다.&lt;br /&gt;
&lt;br /&gt;
====부산 계엄령, 마산 위수령====&lt;br /&gt;
[[파일:계엄포고문.jpg|270px|섬네일|왼쪽|부산지역에 내려진 계엄포고문을 읽고 있는 시민들]]&lt;br /&gt;
부산대학교 시위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박정희 정부는 학생 시위로 시작된 시위가 대규모 시민항쟁으로 사태가 심상치 않게 확대되어가자 강경책으로 대응했다. 정부는 18일 자정을 기해 '''부산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동원한 과격한 진압'''을 통해 시위 참여자들과 이를 방조한 일반 시민들까지 1,058명을 연행하고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으며, 부산지구 계엄사령부는 각 대학 휴교조처와 야간통행금지시간을 2시간 연장하는 등의 항이 담긴 포고문을 발표했다.&lt;br /&gt;
&lt;br /&gt;
부산에 계엄령이 선포된 이튿날인 19일에 마산 시위가 확대됨에 따라 그 다음날인 10월 20일 정오, 정부가 '''마산 및 창원 지역에 위수령을 발령'''해 통행금지 시간이 연장되고, 경남대학 등에는 휴교조처가 취해졌으며, 24일에는 깡패를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132명을 검거, 23명을 구속했다. 이렇게 '''표면적으로는 부마민주항쟁이 단시간에 진압되는 듯 보였지만, 항쟁은 이미 유신체제의 균열을 불러오고 있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항쟁의 전개 과정에서 볼 수 있듯, 부마민주항쟁에서 특징적인 것은 먼저 시위대의 가장 큰 분노의 대상이 공화당사와 경찰·파출소였다는 점, 다음으로는 “부가가치세를 철폐하라”, “잘 먹고 잘 살아라”등의 구호에서 드러나듯이 세무서에 대한 공격, 그리고 신문사와 방송국에 대한 공격을 들 수 있다.&lt;br /&gt;
&lt;br /&gt;
부마민주항쟁은 1970년대 유신체제 밑에서 쌓였던 침묵하는 언론, 조세, 시민을 억압하는 경찰에 대한 불만 등 정치·사회·경제·문화·종교 등 각 부문에 걸친 여러 모순의 폭발이었고, 헌법 개정과 긴급조치로 겨우 유지되던 유신체제와 박정희 정권의 붕괴를 촉진시킨 결정적인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10.26사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또한 이 사건은 1980년 5월 18일의 광주 민주화운동과 1987년 6월 민주항쟁에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된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억눌린 우리 역사&amp;lt;/br&amp;gt;터져나온 분노&amp;lt;/br&amp;gt;매운 연기 칼바람에도&amp;lt;/br&amp;gt;함성소리 드높았던&amp;lt;/br&amp;gt;동트는 새벽벌&amp;lt;/br&amp;gt;시월이 오면&amp;lt;/br&amp;gt;핏발 선 가슴마다&amp;lt;/br&amp;gt;살아오는 십 일육&amp;lt;/br&amp;gt;동지여 전진하자&amp;lt;/br&amp;gt;깨치고 나가자&amp;lt;/br&amp;gt;뜨거운 가슴으로&amp;lt;/br&amp;gt;빛나는 내일로'''''&amp;lt;/br&amp;gt;&amp;lt;small&amp;gt;-'''부산대학교''' 새벽벌도서관 10.16 기념비&amp;lt;/small&amp;gt;&amp;lt;/div&amp;gt;&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호빵이👻]]: 부마항쟁 페이지 전체 작성&amp;lt;/br&amp;gt;&lt;br /&gt;
[[이나자키로빈]]: 부마항쟁 원인 중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 작성&lt;br /&gt;
&lt;br /&gt;
=='''5.18민주화운동'''==&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AMetwTuXYHTCXINqr7ZJpzO5CHFEMQO5-Uqau51RkXA&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원인===&lt;br /&gt;
====유신체제의 붕괴====&lt;br /&gt;
&lt;br /&gt;
[[파일:김재규.jpg|섬네일|오른쪽|암살 당시 상황을 재현하는 김재규]]&lt;br /&gt;
&lt;br /&gt;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amp;lt;small&amp;gt; - 김재규&amp;lt;/small&amp;gt;&lt;br /&gt;
1979년 10월 4일 신민당 총재 김영삼이 국회에서 의원직을 제명당하자 10월 15부터 10월 20까지 부산 · 마산 등지에서는 부마항쟁이 일어났고, 이의 해결을 둘러싼 노선대립으로 갈등 중 10월 26일 &amp;lt;ins&amp;gt;[[김재규]]&amp;lt;/ins&amp;gt;가 박정희를 살해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ins&amp;gt;[[10.26 사태]]&amp;lt;/ins&amp;gt;의 사후 수습과정에서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을 중심으로 신군부 세력이 부상하였으며, 이들은 &amp;lt;ins&amp;gt;[[12.12 사건]]&amp;lt;/ins&amp;gt;의 하극상을 통하여 군부를 장악하였다. 1980년 2월 29일 김대중 등이 복권되었으나 그 해 봄, 신군부는 최규하 과도 정부를 유명무실하게 하고 국민들이 요구하는 민주주의와 이를 위한 명확한 정치일정 제시를 거부하면서 권력기반을 구축하였다.&lt;br /&gt;
&lt;br /&gt;
====청춘을 바쳐, 학생 운동====&lt;br /&gt;
&lt;br /&gt;
[[파일:서울의_봄.JPG|섬네일|오른쪽|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앞에 모인 시위대]]&lt;br /&gt;
&lt;br /&gt;
군부의 재집권 야욕에 대한 국민적 저항은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표출되었다. 1980년 3월, 서울대 총학생회 출범을 시작으로 4월 초순에는 전국의 주요 대학들이 총학생회를 결성하기 시작하였다. 대학별로 독재 정권에 아부했던 어용교수와 족벌사학 퇴진 운동을 벌였고, 특히 병영집체훈련(당시 대학 신입생들은 의무적으로 군부대에 10일 간 입대하여 각종 군사훈련을 이수해야 했다.) 거부가 주요 이슈로 전면 등장했다. 각 대학의 병영집체훈련 거부운동이 본격화되고 전국적인 쟁점으로 떠오르자 신군부는 신문, 방송을 통해 ‘학생들의 안보의식 결여’를 비난하고 교내 시위·농성을 집중적으로 보도하게 했다.  5월 1일에 서울대가 입영훈련 거부투쟁 철회를 결정하고 ‘계엄령 해제’와 ‘유신잔당 퇴진’, ‘정부개헌중단’과 ‘노동 3권 보장’ 등을 요구하기 시작하면서 대학가는 이제까지의 학내 문제 중심의 운동에서 정치개혁을 위한 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그간 정부와 대학 간에 팽팽하게 유지되던 긴장 관계는 폭발 직전으로 내닫게 된 것이다.&lt;br /&gt;
&lt;br /&gt;
약 열흘 간의 대정부 투쟁을 준비한 대학가는 5월 10일 고려대 총학생회장실에서 열린 ‘총학생회장단 회의’에 참석한 전국 23개 대학 대표들은 ‘비상계엄의 즉각 해제’와 ‘전두환, 신현확 등 유신잔당 퇴진’ 등을 결의하고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정세에 대한 공동대처 방안을 마련했다. 이후 5월 13일부터 5월 14일에 걸쳐 서울 · 부산 · 대구 · 광주 등 37개 대학에서 계엄철폐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5월 15일에는 서울역에서 시위가 발생하는 등 학생시위는 서울시가지를 거의 마비시키는 등 야간까지 지속되어 사태가 절정에 달하면서 신군부 세력을 위협하였다. 5월 16일 24개 대학 학생대표들은 당분간 시국의 추이를 관망하기로 결정하고 가두시위를 중단하면서 소강상태에 돌입하는 듯하였다.&lt;br /&gt;
&lt;br /&gt;
====1980년 봄의 광주====&lt;br /&gt;
5월 17일 신군부 세력이 이전까지는 제주도를 제외한 지역에 한정되었던 비상계엄을 전국에 확대하는 조치인 계엄포고 10호(17일 24시에 발효: 각 대학 휴교령 포함)를 밤 9시 40분에 의결하고 밤 11시 40분에 발표하면서 밤 11시를 전후한 시점부터 김대중 · 김종필이 연행되는 등 권력형 부정축재자 및 소요조종 혐의자, 학생 시위 주동자가 체포되었다. 이날 밤 광주지역의 사회운동·학생운동의 지도자도 상당수가 검거되었다. 광주의 검거대상자는 전남대 12명, 조선대 10명 등 총 22명이었다. 전남에서 계엄합동수사단은 광주505보안대가 중심이고, 중앙정보부, 경찰 등이 보조역할을 했다. 전남 계엄합동수사단은 22대 차량과 86명의 인원이 출동해 정동년 등 복적생들과 대학의 총학생회 간부들을 집중 검거했다.&lt;br /&gt;
&lt;br /&gt;
한편 육군본부는 14일 오전 7시55분에 국가 중요 보안목표와 주요대학에 군 병력 배치 명령을 하달했다. 이 명령에 따라 전남북계엄분소장인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광주 시내 주요 시설물에 이날 오후부터 계엄병력을 배치했다. 31사단 96연대 병력이 광주시내 KBS건물에 42명, MBC 21명, CBS 11명, VOC(전일방송) 11명 등 주요 방송사 건물에 배치돼 경비에 들어간 것이다.&lt;br /&gt;
&lt;br /&gt;
이날 오후 전교사령관은 7공수여단의 광주배치에 따른 수송수단 지원도 미리 협의했다. 그리고 5월 8일부터 16일 사이에 공수부대 수뇌부들도 헬기를 타고 서울에서 내려와 광주 상무대의 전투병과교육사령부를 방문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광주에서 시위가 격화되면 즉각적으로 최정예 군부대를 동원해서 진압할 준비를 철저하게 갖추고 있었다. 5월 18일에 시작된 광주의 비극은 그 이전에 이미 시한폭탄처럼 준비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lt;br /&gt;
{{구글지도 | 위도=35.175961433346885 | 경도=126.90865311973532 | 줌=13 }}  [[파일:금남로.JPG|섬네일|오른쪽|금남로 앞에 집결한 버스와 시민군]]&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18일&amp;lt;/span&amp;gt;&lt;br /&gt;
휴교령이 내려질 경우 교문 앞에서 집결한다는 결의에 따라 학생들은 5월 18일 오전 전남대학교 앞에 모였다. 공수부대원들이 전남대 앞 시위를 저지하자 대학생들은 광주역에 재집결해서 시위를 이어갔다. 시위대가 점차 늘어나면서 공수부대원이 시내에서 시위진압에 나섰으며 18일 오후 1시부터 무차별 진압작전이 이루어져 부상자가 속출하였다.&lt;br /&gt;
&lt;br /&gt;
군인들이 금남로 등 시내 중심가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이나 여자를 마구 구타하고 짓밟으며 찌르는 등의 잔혹 행동을 하자 시민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이에 시위대는 오후 4시 이후 파출소 파괴 등 적극공세에 나섰다. '''계엄군의 과잉 무력진압은 시위를 해산시키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오히려 시민들을 단결시켰으며, 결국 19일 시민 · 학생 연대가 발생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lt;br /&gt;
&lt;br /&gt;
 '''''광주 애국 시민 여러분! 이것이 웬 말입니까? 웬 벼락이란 말입니까? 죄 없는 학생들을 총칼로 찔러 죽이고 몽둥이로 두들겨 트럭으로 실어가며 부녀자를 발가벗겨 총칼로 찌르는 놈들이 이 누구란 말입니까? 이제 우리가 살길은 전시민이 하나로 뭉쳐 청년 학생들을 보호하고 유신잔당과 극악무도한 살인마 전두환 일파와 공수 특전단 놈들을 한놈도 남김없이 쳐부수는 길 뿐입니다. 우리는 이제 다 보았습니다. 다 알게 되었읍니다. 왜 학생들이 그토록 소리 높이 외쳤는가를, 우리의 적은 경찰도 군대도 아닙니다. 우리의 적은 전국민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바로 유신잔당과 전두환 일파 그놈들입니다.''''' &amp;lt;small&amp;gt; - 1980년 5월 19일에 '광주시민민주투쟁회'명의의 호소문&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19일&amp;lt;/span&amp;gt;&lt;br /&gt;
19일 오전에는 일시적 소강상태였으나 오후 들어서 분노한 학생 · 시민들이 군 · 경찰과 공방전을 벌이면서 시위는 점차 격화되었다. '''시민들은 공포감에서 벗어나 자신의 생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단순한 학생시위에서 시민봉기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계엄군은 시위대를 포위하여 구타하였으며 일부 고등학생까지 포함된 시위대는 돌과 화염병으로 저항하였고 파출소와 방송국 등에 침입하였다. 뒤처진 공수부대를 공격하거나 고립된 차량을 포위하기도 하였으며 총과 방패를 빼앗기도 하였고, 오후 4시 50분 시민들에게 포위된 계엄군의 장갑차에서 최초의 발포가 있었다. 19일 밤비가 내리는 가운데 시위가 산발적으로 계속되었으며, 20일 오전 비가 그치고 대규모 시위는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오후부터 다시 시작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20일&amp;lt;/span&amp;gt;&lt;br /&gt;
'''20일 오후 6시부터 택시와 버스 운전 기사들이 광주역과 무등경기장에 모여 대형 버스와 트럭을 앞세우고 일시에 금남로에 집결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들을 앞세운 시위는 계엄군을 몰아내는 데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였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5.18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에 &amp;lt;ins&amp;gt;[[지대한 영향]]&amp;lt;/ins&amp;gt;을 끼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학생 운동에 뛰어든 많은 대학생들은 대학교에 들어와서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의 실상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아 학생 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군부정권은 5.18 이후로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다. 전두환은 김대중 등에게 '광주 사태'의 책임을 물어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했고,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 선언을 한 직후, 8월 27일 소위 체육관 선거를 통해 전두환은 대통령 자리를 탈취했다.&lt;br /&gt;
&lt;br /&gt;
지역적인 면에서는 '''광주광역시를 비롯한 전라도 지역의 트라우마'''로 작용해 이후의 민주정의당 및 &amp;lt;ins&amp;gt;[[3당 합당]]&amp;lt;/ins&amp;gt;으로 이어지는 보수 세력에 대해 적대심을 가지고, 민주당계 정당의 표밭이 되는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미 박정희 정부 시절부터 유무형의 정치적인 차별을 받고 있었지만 5.18의 참상은 전라도가 다시는 보수 세력을 지지하지 않게 만들 정도로 심각한 사건이며 호남소외론의 가장 결정적인 명분이 되었다.&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이나자키로빈]]: 5.18 민주화운동 페이지 전체 작성&lt;br /&gt;
&lt;br /&gt;
=='''6월민주항쟁'''==&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NnXWs5RMTIf-6DOEu9_rX2k4mgzUk1AQHYneCuwXN1Q&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원인===&lt;br /&gt;
====[[박종철고문치사사건]]====&lt;br /&gt;
&lt;br /&gt;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박종철은 1987년 1월 13일 자정 경 하숙집에서 치안본부(現 경찰청)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게 연행되었다.‘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이자 ‘민주화추진위원회’ 지도위원으로 수배 받고 있었던 박종운을 잡기위해 연행한 것이었다. 취조실로 연행해간 공안 당국은 박종철에게 박종운의 소재를 물었으나, 박종철은 순순히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경찰은 잔혹한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가하였고, 박종철은 끝내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했다. 당시 경찰은 초기 발표에서 고문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라고 사망원인을 발표하였으나, 시체부검 결과 전기고문과 물고문에 의한 살인인 것으로 밝혀졌다.&lt;br /&gt;
&lt;br /&gt;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저 죽음을 응시해주길 바란다. 저 죽음을 끝내 지켜주길 바란다. 저 죽음을 다시 죽이지 말아주길 바란다.''''' &amp;lt;small&amp;gt; - 동아일보 1987년 1월 17일자 김중배 칼럼 중&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사건 진상의 일부가 공개되자 2월 7일 전국 주요 도시에서 &amp;quot;박종철군 범국민추도식&amp;quot; 및 도심 시위가 열렸고 이어 3월 3일에는 &amp;quot;박종철군 49재와 고문추방 국민대행진&amp;quot;과 함께 또 다른 시위가 열렸다. 이후 4월 2일 서울대학교 학부모 130여 명이 ‘건국대학교 사태‘ 등 시국관련 구속학생의 징계철회를 요구하며 철야 농성을 벌였다.&lt;br /&gt;
&lt;br /&gt;
====정부의 개헌논의 유보====&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lt;br /&g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JazJFsgu4oc?si=sOE7w1tz-jKVztC9&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lt;br /&g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그러나 전두환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1987년 4월 13일 [[4.13호헌조치]]라 불리는 ‘대통령 특별담화‘를 발표, 개헌(改憲) 논의를 유보하겠다고 밝혔다. [[4.13호헌조치]]에서 전두환은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와 대통령 선거는 자유 경선의 분위기가 보장되는 가운데 1987년 내에 공정한 선거관리를 통해 차질 없이 실시할 수 있게 모든 노력을 다할것‘이라고 다짐했으며, 또 ‘민정당의 후임 대통령 후보는 조속한 시일 안에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인물 가운데서 당헌 절차와 민주 방식에 따라 전당대회에서 선출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호헌조치‘라는 그 이름대로 현행 헌법에 따라 권력을 이양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국민들의 큰 기대를 얻을 것이라 믿었으나, 기대는 커녕 오히려 반발을 가져오는 요인이 되고 말았다. 곧바로 이튿날인 4월 14일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 등 각계 인사들이, 호헌 조치를 비판하는 시국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정부 최루탄에 의한 [[이한열]] 사망====&lt;br /&gt;
[[파일:이한열.jpg|200px|섬네일|오른쪽|최루탄에 피격당한 후 이종창에게 부축받는 이한열]]&lt;br /&gt;
먼저 1987년 5월 27일 야당과 재야, 종교계 등이 힘을 모아 ‘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여당인 민주정의당에서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6월 10일에 맞춰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6 · 10국민대회]])’를 치르기로 결정하였다. 대학생들은 국본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를 중심으로 6 · 10국민대회에 호응하여 6월 초부터 각 대학별로 연일 집회와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6 · 10국민대회]] 하루 전날인 6월 9일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교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는 곧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학생들은 물론 시민들의 분노가 들끓었다. 이러한 분노 속에서 6 · 10국민대회가 열렸다. 경찰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6 · 10국민대회가 열리는 성공회대성당을 원천 봉쇄하였다. 그 결과 6 · 10국민대회는 대회장에 미리 들어가 있던 소수의 인원만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대회 예정 시간인 오후 6시 이전부터 서울 시내 곳곳에서 대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시민들도 다양한 방식으로 6 · 10국민대회와 학생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날 밤 늦게까지 시위를 벌이던 학생들은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이후 5일 동안 농성을 계속하였다. 애초 계획된 것은 아니었지만 대학생들의 명동성당 농성은 6 · 10국민대회가 단발성 행사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인 저항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lt;br /&gt;
&lt;br /&gt;
====민주항쟁 확산====&lt;br /&gt;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로 개헌하라!'''''   &amp;lt;small&amp;gt;-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제시한 슬로건&amp;lt;/small&amp;gt;&lt;br /&gt;
[[파일:도망.png|200px|섬네일|왼쪽|쫓아오는 경찰들을 피해 달리고 있는 호헌철폐시위 참가자들]]&lt;br /&gt;
명동성당 농성을 거치며 항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유월항쟁의 전국화 과정에는 일정한 패턴이 존재하였다. 6월 10일 서울 외에도 전국 주요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위가 벌어졌지만, 15일까지 항쟁의 중심은 6 · 10국민대회와 명동성당 농성이 전개된 서울이었다. 하지만 6월 15일 경부터는 부산, 대전, 진주 등에서 격렬한 시위가 전개되었다. 그러다가 6월 20일부터 대규모 시위가 광주, 전주, 순천, 익산 등 호남 지방으로 옮겨졌다. 6 · 10국민대회 이후 약 20일 동안 전국 곳곳에서 매일 평균 100회 이상의 시위가 동시다발로 벌어졌다. 특히 6월 18일 ‘최루탄추방대회’와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은 전국 곳곳에서 한꺼번에 1백만 명 이상이 참여하였다. 갈수록 참가 지역이 전국 곳곳으로 확산되어 대도시, 중소도시뿐만 아니라 농촌 지역의 군 단위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6월 26일 하루에만 37~38개 시 · 군에서 시위가 동시에 벌어졌다. 유월항쟁에 참가한 연 인원은 400~500만 명으로 추산된다.&lt;br /&gt;
&lt;br /&gt;
반면 유월항쟁의 전국적 동시다발 시위는 경찰 병력을 분산시켰다. 분산된 경찰 병력으로는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거센 시위의 물결을 막아 낼 수 없었다. 경찰이 시위 진압에 최루탄을 남발하면서 최루탄도 점차 고갈되기 시작하였다. 유월항쟁 기간 동안 경찰이 사용한 최루탄만 총 67만 발이 넘었다. 더불어, 전두환 정권이 집권 내내 강조했던 88서울올림픽이 얼마 남지 않아 미국 등 국제사회의 이목이 집중된 상황에서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운동 때처럼 유혈 사태와 대량 학살을 반복하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무엇보다 군대를 동원하더라도 이러한 대규모 시민 항쟁을 진압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결국 경찰력으로 항쟁을 막기 힘들고, 군대 투입도 어렵다고 판단한 전두환 정권은 1987년 6월 29일 ‘ 6 · 29민주화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하였다. 그리고 그동안 의식불명 상태에 있었던 이한열이 7월 5일 끝내 사망하였다. 5일장 후 7월 9일 치러진 이한열의 노제에 100만 명의 인파가 모인 것을 끝으로 약 한 달 동안 지속된 유월항쟁은 마무리되었다.&lt;br /&gt;
&lt;br /&gt;
[[파일:태극기.png|300px|섬네일|오른쪽|서울역 앞에서 태극기와 '자주없이 민주없다'는 플래카드를 들고 구호를 외치는 시위대]]&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1987년 6월항쟁이 '''대통령[[직선제]] 개헌'''이라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이 항쟁에 동참한 학생과 시민들의 요구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제시한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 개헌’이라는 슬로건으로 모아졌기 때문이었다. 유월항쟁은 이러한 민주화 세력의 통합성, 즉 각기 다른 성격과 지향을 가진 여러 주체들이 모두 동의할 수 있는 ‘최소 강령’하에 ‘최대 연합’으로 결집하였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딩잉잉]]:6월민주항쟁 페이지 전체 작성&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기밀문서]]&lt;br /&gt;
[[분류:4.19혁명관련]]&lt;br /&gt;
[[분류:부마항쟁관련]]&lt;br /&gt;
[[분류:5.18민주화운동관련]]&lt;br /&gt;
[[분류:6월민주항쟁관련]]&lt;br /&gt;
[[분류:뎐]]&lt;br /&gt;
[[분류:이나자키로빈]]&lt;br /&gt;
[[분류:호빵이👻]]&lt;br /&gt;
[[분류:•ᴗ•]]&lt;br /&gt;
[[분류:딩잉잉]]&lt;/div&gt;</summary>
		<author><name>이나자키로빈</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8%B0%EB%B0%80%EB%AC%B8%EC%84%9C&amp;diff=31953</id>
		<title>기밀문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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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8T08:48:3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나자키로빈: &lt;/p&gt;
&lt;hr /&gt;
&lt;div&gt;=='''컨텐츠 주제'''==&lt;br /&gt;
[[파일:이한열.JPG]]&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CD0000&amp;quot;&amp;gt;투쟁의 불꽃, 자유의 환호&amp;lt;/span&amp;gt;'''&amp;lt;br/&amp;gt;&lt;br /&gt;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으로 일궈낸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역사에 대해 함께 살펴보자.&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이나자키로빈]]&lt;br /&gt;
&lt;br /&gt;
=='''팀원'''==&lt;br /&gt;
*오현지(2022131143) [[뎐]]&amp;lt;br/&amp;gt;&lt;br /&gt;
*김여원(2023130209) [[이나자키로빈]]&amp;lt;br/&amp;gt;&lt;br /&gt;
*김하은(2022131345) [[호빵이👻]]&amp;lt;br/&amp;gt;&lt;br /&gt;
*박정원(2023130350) [[•ᴗ•]]&amp;lt;br/&amp;gt;&lt;br /&gt;
*최필중(2023130216) [[딩잉잉]]&amp;lt;br/&amp;gt;&lt;br /&gt;
&lt;br /&gt;
=='''기획의도'''==&lt;br /&gt;
===기획배경===&lt;br /&gt;
1945년 광복 이후 대한민국 국민들은 자유민주국가로서의 미래를 기대했으나 실상은 그러지 못했다.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보여주듯 현재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는 그것을 누리지 못한 앞선 세대들의 목숨을 바친 항쟁의 대가이다. 민주항쟁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의 핵심 동력이었다. 오늘날 우리나라 민주의식의 중요한 기둥이 되는 네 가지 항쟁을 선별하고 각 항쟁의 배경, 전개과정, 의의를 비롯해 세부적이고 자세한 내용에 대한 기사를 작성한다.&lt;br /&gt;
===기획목적===&lt;br /&gt;
작금의 현실까지 오기에는 수없이 많은 투쟁이 있었지만 4.19혁명, 부마항쟁, 5.18민주항쟁, 6월민주항쟁이라는 네 가지 사건을 살펴보기로 한 것은 가장 많이 다뤄지고, 가장 많이 알려진 사건이기 때문이다. 관련된 사건과 역사 인물들에 대해 자세히 적어 내어 민주항쟁의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지 않으면 알기 힘든 각 민주항쟁의 자세한 내막을 밝혀낸다.&lt;br /&gt;
===기대하는 바===&lt;br /&gt;
타임라인과 온톨로지를 활용해 내용의 전반적인 이해를 돕고 자세한 설명을 통해 사건의 자세한 내막을 들어낸다. 네 가지 항쟁을 각각 큰 목차로 설정하고 세부 기사를 그 내부에 작성해 독자의 관심과 수요에 부합하는 정보를 전달하는 데 효과적일 것으로 기대된다. 민주항쟁에 참여한 사람들의 희생과 투쟁에 대한 존경심을 부르고 역사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다.&lt;br /&gt;
===기여===&lt;br /&gt;
[[뎐]], [[이나자키로빈]], [[호빵이👻]]: 기획의도 페이지 작성&lt;br /&gt;
&lt;br /&gt;
=='''온톨로지'''==&lt;br /&gt;
{{NetworkGraph | title=민주항쟁.lst}}&lt;br /&gt;
[[민주항쟁.lst]]&lt;br /&gt;
===기여===&lt;br /&gt;
*[[뎐]]: 온톨로지 제작&lt;br /&gt;
=='''컨텐츠 구조'''==&lt;br /&gt;
===클래스(Class)===&lt;br /&gt;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color:white&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0%&amp;quot; | 클래스 !! style=&amp;quot;width:40%&amp;quot; | 설명 !! style=&amp;quot;45%&amp;quot; | 노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제||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대표 키워드인 민주항쟁을 주제로서 나타내었다 || 만주항쟁&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항쟁||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민주화운동 시기 발생했던 주요 운동들을 ‘항쟁’이라는 키워드로 분류하였다. || 4.19혁명, 부마항쟁, 5.18 민주화운동, 6월민주항쟁&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사건||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항쟁의 원인, 결과가 되는 사건을 정리하였다|| 3.15부정선거, 고려대 4.18학생시위, 3.15의거, YH사건, 10.26사태, 12.12 군사반란, 비상계엄령,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고문추방민족대행진, 4.13호헌조치, 6.29선언, 대통령직선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지역||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요 항쟁들이 일어났던 지역을 정리하였다|| 마산, 부산, 광주&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인물||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요사건들을 발생시킨 인물, 참여했던 인물을 묶어서 정리하였다|| 이승만, 이기붕, 김주열, 박정희, 김재규, 전두환, 신군부, 시민군, 박종철, 이한열, 노태우&lt;br /&gt;
|-&lt;br /&gt;
|}&lt;br /&gt;
===관계성(Relation)===&lt;br /&gt;
*&amp;lt;font color=#228B22&amp;gt;'''~은 ~에 속한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주요 항쟁들이 민주항쟁에 속함을 나타내거나 인물의 소속을 나타낸다.&lt;br /&gt;
***해당노드:&lt;br /&gt;
***#4.19혁명 -&amp;gt; 민주항쟁&lt;br /&gt;
***#부마항쟁 -&amp;gt; 민주항쟁&lt;br /&gt;
***#5.18민주화운동 -&amp;gt; 민주항쟁&lt;br /&gt;
***#6월 민주항쟁 -&amp;gt; 민주항쟁&lt;br /&gt;
***#전두환 -&amp;gt; 신군부&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의 원인이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어떠한 사건과 인과관계를 이루는 또다른 사건 혹은 인물을 설명한다.&lt;br /&gt;
***#이기붕 -&amp;gt; 3.15부정선거&lt;br /&gt;
***#김주열 -&amp;gt; 고려대 4.18학생시위&lt;br /&gt;
***#고려대 4.18학생시위 -&amp;gt; 4.19혁명&lt;br /&gt;
***#3.15의거 -&amp;gt; 4.19혁명&lt;br /&gt;
***#김주열 -&amp;gt; 4.19혁명&lt;br /&gt;
***#3.15부정선거 -&amp;gt; 3.15의거&lt;br /&gt;
***#YH사건 -&amp;gt; 부마항쟁&lt;br /&gt;
***#부마항쟁 -&amp;gt; 10.26사태&lt;br /&gt;
***#박정희 -&amp;gt; 10.26사태&lt;br /&gt;
***#비상계엄령 -&amp;gt; 5.18민주화운동&lt;br /&gt;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 -&amp;gt; 고문추방민족대행진&lt;br /&gt;
***#고문추방민족대행진 -&amp;gt; 4.13호헌조치&lt;br /&gt;
***#4.13호헌조치 -&amp;gt; 6월민주항쟁&lt;br /&gt;
***#6월민주항쟁 -&amp;gt; 6.29선언&lt;br /&gt;
***#6월민주항쟁 -&amp;gt; 대통령직선제&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을 발생시켰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사건과 그 사건을 직접적으로 발생시킨 인물을 연결한다.&lt;br /&gt;
***#이승만 -&amp;gt; 3.15부정선거&lt;br /&gt;
***#김재규 -&amp;gt; 10.26사태&lt;br /&gt;
***#신군부 -&amp;gt; 1212군사반란&lt;br /&gt;
***#전두환 -&amp;gt; 비상계엄령&lt;br /&gt;
***#노태우 -&amp;gt; 6.29선언&lt;br /&gt;
***#시민군 -&amp;gt; 5.18민주화운동&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에 희생되었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민주항쟁의 진압과정 등 에서 희생된 인물을 설명한다&lt;br /&gt;
***#김주열 -&amp;gt; 3.15의거&lt;br /&gt;
***#이한열 -&amp;gt; 6월 민주항쟁&lt;br /&gt;
***#박종철&amp;gt;박종철 고문치사 사건&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에서 발생했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설명한다.&lt;br /&gt;
***#3.15의거 -&amp;gt; 마산&lt;br /&gt;
***#부마항쟁 -&amp;gt; 부산&lt;br /&gt;
***#부마항쟁 -&amp;gt; 마산&lt;br /&gt;
***#5.18민주화운동 -&amp;gt; 광주&lt;br /&gt;
===기여===&lt;br /&gt;
*[[뎐]]: 컨텐츠 구조 페이지 작성&lt;br /&gt;
=='''4.19혁명'''==&lt;br /&gt;
===타임라인===&lt;br /&gt;
===원인===&lt;br /&gt;
====[[3.15 부정선거]]====&lt;br /&gt;
1959년 대한민국은 제 4대 대통령 선거와 제 5대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당시 자유당에서는 12년째 대통령으로서 연임 중이던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이기붕]]'''을 부통령 후보로 선임하였다. 그러나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병세의 악화로 사망하게 되고,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은 확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선거의 초점은 자유당의 조병옥과 민주당의 장면 간의 선거전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본격적인 선거유세의 시작과 함께 정부와 여당의 잇따른 야당선거운동 방해사건으로 부정선거가 시작되었다. 1960년 3월 15일 선거가 시작된 이후에도 다양한 방법의 부정행위가 일어났고, 개표 결과 이승만과 이기붕의 득표가 100%에 육박하는 결과로 나오자 자유당은 득표수를 하향 조정해 최종 집계에 반영할 것을 지시했다. 결국 이승만 88.7%, 이기붕 79%의 득표율을 가지며 정, 부통령에 당선되었다.&amp;lt;ref&amp;gt;자세한 내용은 3.15부정선거 페이지 참조&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부정선거 반대시위, [[3.15 의거]]의 발생====&lt;br /&gt;
3.15 부정선거를 반대하는 시위는 초기에는 중, 고등학생들의 산발적인 시위로 전개되었다. 3월 15일 선거일 밤 경남 마산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으며,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여 1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amp;lt;br/&amp;gt;&lt;br /&gt;
3월 15일 실종되었던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4월 11일 마산부두에서 발견되자 마산 시민들은 시청, 파출소 등을 파괴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2차 시위가 일어난 것이다.&lt;br /&gt;
&lt;br /&gt;
====[[고려대학교 4.18 학생시위]]의 발생====&lt;br /&gt;
1, 2차 마산시위를 계기로 부정선거 무효와 이승만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났다. '4.18 선언문'을 낭독하고 시내로 진출하였다. 이는 4월 19일 학생들과 일반 시민들이 가세한 대규모 시위로 이어지게 되었다.&lt;br /&gt;
====전국적인 4.19 혁명의 발생====&lt;br /&gt;
분노한 전국의 시민과 학생들이 다음 날인 4월 19일 총궐기하여 '이승만 하야와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며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경찰은 또다시 무차별 발포에 나섰고,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여기에 이승만 정부는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지만 이러한 압박에도 시민들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lt;br /&gt;
====이승만 대통령의 혼란 수습 시도====&lt;br /&gt;
이승만 대통령은 4.19 시위로 인한 정국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4월 20일 국무위원 전원과 자유당 당무위원 전원의 사표를 제출하도록 지시하였으며, 4월 23일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외무장관에 허정, 내무장관에 이호, 법무장관에 권승렬을 임명하는 등 개각을 단행하였다.&amp;lt;br/&amp;gt;&lt;br /&gt;
그러나 미국은 4.19직후 국무부 성명을 통해 한국에서 발생한 사태는 부정선거에 대한 '군중의 불만'을 반영한 것 이라고 했고, 양유찬 주미대사를 불러 '부정선거에 대한 철저한 조사', '경향신문 복간', '국가보안법 개정' 등을 촉구하는 각서를 전달하였다.&amp;lt;br/&amp;gt;&lt;br /&gt;
그리고 4월 25일, 이승만 정권에 분노한 전국 27개 대학 258명의 교수가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 모여 14개항의 시국 선언문을 발표하며 학생, 시민들과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들은 3.15 부정선거 및 4.19 사태의 책임을 지고 대통령이 물러날 것을 주장하였으며, &amp;quot;학생들의 피에 보답하자&amp;quot;는 플랜 카드를 앞세워 국회의사당까지 행진하였다. &lt;br /&gt;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lt;br /&gt;
무력진압에도 대규모 시위가 이어지며 시민들은 완강하게 투쟁하였다. 4월 26일 시위대가 경무대로 다시 집결하는 등 사태가 심각하게 진행되자, 오전 10시 30분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 성명을 발표하였다. 4월 27일 이승만은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하며 대통령직을 하야하고 하와이로 망명하였으며 자유당 정권도 끝나게 된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우리 국민들, 특히 학생과 청년들의 주도로 이루어진 4.19 혁명은 학생과 일반 대중이 단결하여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아시아 최초의 시건이다. 4.19혁명은 부마항쟁, 5.18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그리고 2017년 촛불시위에 이르기 까지 정권에 대항하는 국민들이 단합을 이루는 초석이 되었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도 시민 저항권에 대한 근거로써 4.19혁명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문구가 있다.&lt;br /&gt;
===기여===&lt;br /&gt;
[[뎐]]: 4.19혁명 페이지 원인, 의의 작성 &lt;br /&gt;
&lt;br /&gt;
[[•ᴗ•]]: 4.19혁명 페이지 전개 작성&lt;br /&gt;
&lt;br /&gt;
=='''부마항쟁'''==&lt;br /&gt;
===타임라인===&lt;br /&gt;
===원인===&lt;br /&gt;
====[[유신 헌법]]과 [[긴급조치]]====&lt;br /&gt;
1971년 선거에서 김대중을 누르고 대통령에 3선된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해 국회 해산,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등 법의 일부 기능을 정지시키고 전국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했다.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된 이른바 유신헌법에 의해 제정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법」 에 의거해 박정희가 제8대 대통령으로 재차 당선되었고, 이 유신 헌법이 발효된 기간을 유신 체제라고 부른다. 유신 체제는 행정, 입법, 사법의 3권을 모두 쥔 대통령이 종신 집권할 수 있도록 설계된 1인 대통령제였다. 박정희는 유신 헌법에 의거해 대통령의 권한으로 취할 수 있었던 특별조치인 긴급조치를 선포함으로써 헌법에 반대하는 시위 및 운동과 방송, 언론 활동을 하는 반정부 인사들을 연행, 체포, 고문하는 등 억압을 가했다.&lt;br /&gt;
&lt;br /&gt;
====한국경제의 위기====&lt;br /&gt;
1970년대 말 한국경제는''' [[제2차 오일쇼크]]'''라는 세계경제의 위기와 결합해 가라앉고 말았다. 경제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정부는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과 함께 '''[[경제안정화정책]]'''을 수용했고, 중소자본가, 봉급생활자, 도시 노동자와 농민 등에 안정화 비용을 부과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이와 같은 안정화 정책은 경제위기로 어려운 처지에 있던 중소기업들의 도산을 가속하여 기업 부도율이 치솟고 하층민들을 더 깊은 고통에 몰아넣었다. 특히 '''부가가치세'''를 도입한 이후 물가가 상승하면서 일상에 타격을 주었으며, 노동집약적 제조업이 집중되었던 부산과 마산에서는 상황이 더욱 심각하여 1979년 부산지역 부도율은 서울의 3배에 달했다.&lt;br /&gt;
&lt;br /&gt;
====YH 사건====&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부산대학교 민주선언문, 학생 시위에서 시민항쟁으로====&lt;br /&gt;
&lt;br /&gt;
1979년 10월 16일 아침 10시 부산대학교 구내 도서관 앞에서 약 500명의 학생들이 모여 “유신정권 물러가라”, “정치탄압 중지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반정부 시위를 벌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민주선언문」]]'''을 통해 민주화, 언론 자유, 인권 보장의 신념을 확인하고, “제도화된 폭력성과 조직적 악의 근원인 유신헌법과 독재집권층의 퇴진만이 5천 만 겨레의 통일의 첫걸음이라고 주장하면서 형제의 피를 요구하는 자유와 민주의 깃발을 우리가 잡고 반민주의 무리, 불의의 무리들을 향해 외치며 나아가자”라고 선언하였다. 이후 학생들은 교문을 나가 거리에서 시위했다. 이때 학생 수는 약 5,000명으로 불어나 있었고, 광복동과 남포동 등 부산시내 중심가까지 진출해 애국가 등의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며, 이를 제지하려는 경찰과 이곳저곳에서 충돌하였다. 비슷한 시간, 부산 동아대학교에서도 1,000여 명의 학생이 부산대학교 학생과 합류하여 가두시위를 벌였다. 부산대학교 데모로 학생 수백 명이 연행되고 100여 명이 다쳤지만 이튿날인 10월 17일에는 시위가 더욱 격화되어 학생들뿐만 아니라 다수의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학생 시위는 점차 시민항쟁의 양상을 띠어갔다.''' 밤늦게까지 계속된 시위에서 시민들은 충무파출소, 한국방송공사, 서구청, 부산세무서 등을 파괴하였고, 경찰차량을 불태우거나 파손시켰다.&lt;br /&gt;
&lt;br /&gt;
====마산의 시민항쟁====&lt;br /&gt;
&lt;br /&gt;
민주항쟁은 18일에 마산으로 확산되었다. 늦은 오후에는 1,000여 명의 경남대학교 학생들이 마산 시내 번화가에 산발적으로 집결했으며, 일부시민들도 가담해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어두워진 다음 학생과 시민들의 데모는 격화되어 파출소, 공화당사, 방송국, 신문사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파괴하였다. 이튿날인 19일에는 시위가 더욱 치열해져 마산 시내는 한때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저녁 8시경, 시위대는 경남대학과 마산대학&amp;lt;ref&amp;gt;1985년 창원대학으로 교명이 변경되었으며, 현재의 마산대학교와 다르다.&amp;lt;/ref&amp;gt;, 그리고 고등학생까지 합세하여 약 8,000명에 이르렀으며, 시내 곳곳에서 몽둥이를 들고 동사무소와 파출소로 몰려가 시설을 파괴하였고, 경찰차량에 불을 질렀다.&lt;br /&gt;
&lt;br /&gt;
====부산 계엄령, 마산 지역 위수령====&lt;br /&gt;
&lt;br /&gt;
부산대학교 시위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박정희 정부는 학생 시위로 시작된 시위가 대규모 시민항쟁으로 사태가 심상치 않게 확대되어가자 강경책으로 대응했다. 정부는 18일 자정을 기해 '''부산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동원한 과격한 진압'''을 통해 [[파일:계엄포고문.jpg|200px|섬네일|부산지역에 내려진 계엄포고문을 일고 있는 시민들]] 시위 참여자들과 이를 방조한 일반 시민들까지 1,058명을 연행하고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으며, 부산지구 계엄사령부는 각 대학 휴교조처와 야간통행금지시간을 2시간 연장하는 등의 항이 담긴 포고문을 발표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부산에 계엄령이 선포된 이튿날인 19일에 마산 시위가 확대됨에 따라 그 다음날인 10월 20일 정오, 정부가 '''마산 및 창원 지역에 위수령을 발령'''해 통행금지 시간이 연장되고, 경남대학 등에는 휴교조처가 취해졌고, 24일에는 깡패를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132명을 검거, 23명을 구속했다. 이렇게 '''표면적으로는 부마민주항쟁이 단시간에 진압되는 듯 보였지만, 항쟁은 이미 유신체제의 균열을 불러오고 있었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항쟁의 전개 과정에서 볼 수 있듯, 부마민주항쟁에서 특징적인 사실은 먼저 시위대의 가장 큰 분노의 대상은 공화당사와 경찰·파출소였다는 점, 다음으로 ‘부유층’에 대한 시위대의 공공연한 공격, 세 번째로 “부가가치세를 철폐하라”, “잘 먹고 잘 살아라”라는 외침에서 드러나듯이 세무서에 대한 공격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문사·방송국에 대한 공격을 들 수 있다.&lt;br /&gt;
&lt;br /&gt;
부마민주항쟁은 1970년대 유신체제 밑에서 쌓였던 침묵하는 언론, 조세, 시민을 억압하는 경찰에 대한 불만 등 정치·사회·경제·문화·종교 등 각 부문에 걸친 여러 모순의 폭발이었고, 헌법 개정과 긴급조치로 겨우 유지되던 유신체제와 박정희 정권의 붕괴를 촉진시킨 결정적인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10.26사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항쟁은 1980년 5월 18일의 광주 민주화운동과 1987년 6월 민주항쟁에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된다.&lt;br /&gt;
===기여===&lt;br /&gt;
[[호빵이👻]]: 부마항쟁 페이지 전체 작성&lt;br /&gt;
&lt;br /&gt;
=='''5.18민주화운동'''==&lt;br /&gt;
===타임라인===&lt;br /&gt;
===원인===&lt;br /&gt;
====유신체제의 붕괴====&lt;br /&gt;
&lt;br /&gt;
[[파일:김재규.jpg|섬네일|오른쪽|암살 당시 상황을 재현하는 김재규]]&lt;br /&gt;
&lt;br /&gt;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amp;lt;small&amp;gt; - 김재규&amp;lt;/small&amp;gt;&lt;br /&gt;
1979년 10월 4일 신민당 총재 김영삼이 국회에서 의원직을 제명당하자 10월 15부터 10월 20까지 부산 · 마산 등지에서는 부마항쟁이 일어났고, 이의 해결을 둘러싼 노선대립으로 갈등 중 10월 26일 &amp;lt;ins&amp;gt;[[김재규]]&amp;lt;/ins&amp;gt;가 박정희를 살해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ins&amp;gt;[[10.26 사태]]&amp;lt;/ins&amp;gt;의 사후 수습과정에서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을 중심으로 신군부 세력이 부상하였으며, 이들은 &amp;lt;ins&amp;gt;[[12.12 사건]]&amp;lt;/ins&amp;gt;의 하극상을 통하여 군부를 장악하였다. 1980년 2월 29일 김대중 등이 복권되었으나 그 해 봄, 신군부는 최규하 과도 정부를 유명무실하게 하고 국민들이 요구하는 민주주의와 이를 위한 명확한 정치일정 제시를 거부하면서 권력기반을 구축하였다.&lt;br /&gt;
&lt;br /&gt;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lt;br /&gt;
한 시대의 대격변을 예고하는 단초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시작됐다. 1979년 8월 9일 오전, 신민당의 당사 4층 강당에서는 봉제업체인 YH무역주식회사의 여성노동자 200여명이 기업주의 폐업에 반발하여 폐업조치 철회 농성을 벌였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인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신민당이 당사 건물을 내준 것이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폭력을 동원하여 농성을 해산시켰다. 결국 이 사건은 노동 탄압 사건을 넘어선 야당에 대한 정치 탄압 사건으로 발전하였다.&lt;br /&gt;
&lt;br /&gt;
이날 경찰은 1000여명의 진압대원을 신민당사로 난입시켜 농성을 하고 있던 174명의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로 밖으로 끌어냈다. 또한 경찰은 총재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김영삼 총재와 당 간부들을 끌어내면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박정희 정권은 이 노동자 농성 사건을 빌미로 신민당 분열공작을 시도하였다. 유신정권과 비밀리에 결탁한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 3명이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 부총재 전원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접수시켰다. 그리고 법원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신민당 총재단의 직무 집행을 정지시키고 박정희 정권의 꼭두각시를 총재직무대행으로 선임하였다.&lt;br /&gt;
&lt;br /&gt;
아울러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의 동교동 자택을 전면 봉쇄하였고,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에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끊으라고 요구한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즈』 회견내용을 “반헌정적, 반민족적 작태”로 몰아서 국회에 징계 동의안을 제출했다. 10월 4일 오후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의원 159명은 여당 총회장에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제명 결의안을 '''기습적으로''' 처리해 버렸다.&lt;br /&gt;
&lt;br /&gt;
노사분규 사태로 시작된 사건이 제1야당 당수의 의원직 제명으로 확대된 정치적 사태를 지켜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유신체제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이 고조되었다. 또한 이 사건은 그동안 다소 주춤하던 대학가에 반유신 반독재 운동의 열기가 다시 확산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청춘을 바쳐, 학생 운동====&lt;br /&gt;
&lt;br /&gt;
[[파일:서울의_봄.JPG|섬네일|오른쪽|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앞에 모인 시위대]]&lt;br /&gt;
&lt;br /&gt;
군부의 재집권 야욕에 대한 국민적 저항은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표출되었다. 1980년 3월, 서울대 총학생회 출범을 시작으로 4월 초순에는 전국의 주요 대학들이 총학생회를 결성하기 시작하였다. 대학별로 독재 정권에 아부했던 어용교수와 족벌사학 퇴진 운동을 벌였고, 특히 병영집체훈련(당시 대학 신입생들은 의무적으로 군부대에 10일 간 입대하여 각종 군사훈련을 이수해야 했다.) 거부가 주요 이슈로 전면 등장했다. 각 대학의 병영집체훈련 거부운동이 본격화되고 전국적인 쟁점으로 떠오르자 신군부는 신문, 방송을 통해 ‘학생들의 안보의식 결여’를 비난하고 교내 시위·농성을 집중적으로 보도하게 했다.  5월 1일에 서울대가 입영훈련 거부투쟁 철회를 결정하고 ‘계엄령 해제’와 ‘유신잔당 퇴진’, ‘정부개헌중단’과 ‘노동 3권 보장’ 등을 요구하기 시작하면서 대학가는 이제까지의 학내 문제 중심의 운동에서 정치개혁을 위한 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그간 정부와 대학 간에 팽팽하게 유지되던 긴장 관계는 폭발 직전으로 내닫게 된 것이다.&lt;br /&gt;
&lt;br /&gt;
약 열흘 간의 대정부 투쟁을 준비한 대학가는 5월 10일 고려대 총학생회장실에서 열린 ‘총학생회장단 회의’에 참석한 전국 23개 대학 대표들은 ‘비상계엄의 즉각 해제’와 ‘전두환, 신현확 등 유신잔당 퇴진’ 등을 결의하고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정세에 대한 공동대처 방안을 마련했다. 이후 5월 13일부터 5월 14일에 걸쳐 서울 · 부산 · 대구 · 광주 등 37개 대학에서 계엄철폐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5월 15일에는 서울역에서 시위가 발생하는 등 학생시위는 서울시가지를 거의 마비시키는 등 야간까지 지속되어 사태가 절정에 달하면서 신군부 세력을 위협하였다. 5월 16일 24개 대학 학생대표들은 당분간 시국의 추이를 관망하기로 결정하고 가두시위를 중단하면서 소강상태에 돌입하는 듯하였다.&lt;br /&gt;
&lt;br /&gt;
====1980년 봄의 광주====&lt;br /&gt;
5월 17일 신군부 세력이 이전까지는 제주도를 제외한 지역에 한정되었던 비상계엄을 전국에 확대하는 조치인 계엄포고 10호(17일 24시에 발효: 각 대학 휴교령 포함)를 밤 9시 40분에 의결하고 밤 11시 40분에 발표하면서 밤 11시를 전후한 시점부터 김대중 · 김종필이 연행되는 등 권력형 부정축재자 및 소요조종 혐의자, 학생 시위 주동자가 체포되었다. 이날 밤 광주지역의 사회운동·학생운동의 지도자도 상당수가 검거되었다. 광주의 검거대상자는 전남대 12명, 조선대 10명 등 총 22명이었다. 전남에서 계엄합동수사단은 광주505보안대가 중심이고, 중앙정보부, 경찰 등이 보조역할을 했다. 전남 계엄합동수사단은 22대 차량과 86명의 인원이 출동해 정동년 등 복적생들과 대학의 총학생회 간부들을 집중 검거했다.&lt;br /&gt;
&lt;br /&gt;
한편 육군본부는 14일 오전 7시55분에 국가 중요 보안목표와 주요대학에 군 병력 배치 명령을 하달했다. 이 명령에 따라 전남북계엄분소장인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광주 시내 주요 시설물에 이날 오후부터 계엄병력을 배치했다. 31사단 96연대 병력이 광주시내 KBS건물에 42명, MBC 21명, CBS 11명, VOC(전일방송) 11명 등 주요 방송사 건물에 배치돼 경비에 들어간 것이다.&lt;br /&gt;
&lt;br /&gt;
이날 오후 전교사령관은 7공수여단의 광주배치에 따른 수송수단 지원도 미리 협의했다. 그리고 5월 8일부터 16일 사이에 공수부대 수뇌부들도 헬기를 타고 서울에서 내려와 광주 상무대의 전투병과교육사령부를 방문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광주에서 시위가 격화되면 즉각적으로 최정예 군부대를 동원해서 진압할 준비를 철저하게 갖추고 있었다. 5월 18일에 시작된 광주의 비극은 그 이전에 이미 시한폭탄처럼 준비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lt;br /&gt;
{{구글지도 | 위도=35.175961433346885 | 경도=126.90865311973532 | 줌=13 }}  [[파일:금남로.JPG|섬네일|오른쪽|금남로 앞에 집결한 버스와 시민군]]&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18일&amp;lt;/span&amp;gt;&lt;br /&gt;
휴교령이 내려질 경우 교문 앞에서 집결한다는 결의에 따라 학생들은 5월 18일 오전 전남대학교 앞에 모였다. 공수부대원들이 전남대 앞 시위를 저지하자 대학생들은 광주역에 재집결해서 시위를 이어갔다. 시위대가 점차 늘어나면서 공수부대원이 시내에서 시위진압에 나섰으며 18일 오후 1시부터 무차별 진압작전이 이루어져 부상자가 속출하였다.&lt;br /&gt;
&lt;br /&gt;
군인들이 금남로 등 시내 중심가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이나 여자를 마구 구타하고 짓밟으며 찌르는 등의 잔혹 행동을 하자 시민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이에 시위대는 오후 4시 이후 파출소 파괴 등 적극공세에 나섰다. '''계엄군의 과잉 무력진압은 시위를 해산시키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오히려 시민들을 단결시켰으며, 결국 19일 시민 · 학생 연대가 발생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lt;br /&gt;
&lt;br /&gt;
 '''''광주 애국 시민 여러분! 이것이 웬 말입니까? 웬 벼락이란 말입니까? 죄 없는 학생들을 총칼로 찔러 죽이고 몽둥이로 두들겨 트럭으로 실어가며 부녀자를 발가벗겨 총칼로 찌르는 놈들이 이 누구란 말입니까? 이제 우리가 살길은 전시민이 하나로 뭉쳐 청년 학생들을 보호하고 유신잔당과 극악무도한 살인마 전두환 일파와 공수 특전단 놈들을 한놈도 남김없이 쳐부수는 길 뿐입니다. 우리는 이제 다 보았습니다. 다 알게 되었읍니다. 왜 학생들이 그토록 소리 높이 외쳤는가를, 우리의 적은 경찰도 군대도 아닙니다. 우리의 적은 전국민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바로 유신잔당과 전두환 일파 그놈들입니다.''''' &amp;lt;small&amp;gt; - 1980년 5월 19일에 '광주시민민주투쟁회'명의의 호소문&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19일&amp;lt;/span&amp;gt;&lt;br /&gt;
19일 오전에는 일시적 소강상태였으나 오후 들어서 분노한 학생 · 시민들이 군 · 경찰과 공방전을 벌이면서 시위는 점차 격화되었다. '''시민들은 공포감에서 벗어나 자신의 생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단순한 학생시위에서 시민봉기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계엄군은 시위대를 포위하여 구타하였으며 일부 고등학생까지 포함된 시위대는 돌과 화염병으로 저항하였고 파출소와 방송국 등에 침입하였다. 뒤처진 공수부대를 공격하거나 고립된 차량을 포위하기도 하였으며 총과 방패를 빼앗기도 하였고, 오후 4시 50분 시민들에게 포위된 계엄군의 장갑차에서 최초의 발포가 있었다. 19일 밤비가 내리는 가운데 시위가 산발적으로 계속되었으며, 20일 오전 비가 그치고 대규모 시위는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오후부터 다시 시작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20일&amp;lt;/span&amp;gt;&lt;br /&gt;
'''20일 오후 6시부터 택시와 버스 운전 기사들이 광주역과 무등경기장에 모여 대형 버스와 트럭을 앞세우고 일시에 금남로에 집결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들을 앞세운 시위는 계엄군을 몰아내는 데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였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5.18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에 &amp;lt;ins&amp;gt;[[지대한 영향]]&amp;lt;/ins&amp;gt;을 끼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학생 운동에 뛰어든 많은 대학생들은 대학교에 들어와서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의 실상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아 학생 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군부정권은 5.18 이후로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다. 전두환은 김대중 등에게 '광주 사태'의 책임을 물어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했고,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 선언을 한 직후, 8월 27일 소위 체육관 선거를 통해 전두환은 대통령 자리를 탈취했다.&lt;br /&gt;
&lt;br /&gt;
지역적인 면에서는 '''광주광역시를 비롯한 전라도 지역의 트라우마'''로 작용해 이후의 민주정의당 및 &amp;lt;ins&amp;gt;[[3당 합당]]&amp;lt;/ins&amp;gt;으로 이어지는 보수 세력에 대해 적대심을 가지고, 민주당계 정당의 표밭이 되는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미 박정희 정부 시절부터 유무형의 정치적인 차별을 받고 있었지만 5.18의 참상은 전라도가 다시는 보수 세력을 지지하지 않게 만들 정도로 심각한 사건이며 호남소외론의 가장 결정적인 명분이 되었다.&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이나자키로빈]]: 5.18 민주화운동 페이지 전체 작성&lt;br /&gt;
&lt;br /&gt;
=='''6월민주항쟁'''==&lt;br /&gt;
===타임라인===&lt;br /&gt;
===원인===&lt;br /&gt;
1985년 2 · 12총선에서 신한민주당이 승리한 것을 기점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가 날로 커졌다. 1986년 개헌서명운동의 성과로 국회 내 개헌특위가 만들어졌지만, 여야 간 개헌 협상은 난항을 거듭하였다. 이를 빌미로 1987년 4월 13일 전두환은 대통령 임기 내 개헌을 거부하고, 기존 제5공화국 헌법으로 차기 대통령 선거를 치르겠다는 이른바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였다. 전두환 정부가 이렇게 개헌 거부를 공식화한 상황에서 5월 18일 정의구현사제단이 지난 1987년 1월 발생한 [[박종철고문치사사건]]이 정권 차원에서 은폐 ·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폭로하였다. 많은 시민들이 크게 분노하였고, 야당과 민주화운동 진영은 전두환 정부에 정면으로 맞서기 위한 투쟁에 본격적으로 돌입하였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먼저 1987년 5월 27일 야당과 재야, 종교계 등이 힘을 모아 ‘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여당인 민주정의당에서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6월 10일에 맞춰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6 · 10국민대회)’를 치르기로 결정하였다. 대학생들은 국본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를 중심으로 6 · 10국민대회에 호응하여 6월 초부터 각 대학별로 연일 집회와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6 · 10국민대회 하루 전날인 6월 9일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교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는 곧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학생들은 물론 시민들의 분노가 들끓었다. 이러한 분노 속에서 6 · 10국민대회가 열렸다. 경찰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6 · 10국민대회가 열리는 성공회대성당을 원천 봉쇄하였다. 그 결과 6 · 10국민대회는 대회장에 미리 들어가 있던 소수의 인원만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대회 예정 시간인 오후 6시 이전부터 서울 시내 곳곳에서 대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시민들도 다양한 방식으로 6 · 10국민대회와 학생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날 밤 늦게까지 시위를 벌이던 학생들은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이후 5일 동안 농성을 계속하였다. 애초 계획된 것은 아니었지만 대학생들의 명동성당 농성은 6 · 10국민대회가 단발성 행사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인 저항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lt;br /&gt;
&lt;br /&gt;
명동성당 농성을 거치며 항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유월항쟁의 전국화 과정에는 일정한 패턴이 존재하였다. 6월 10일 서울 외에도 전국 주요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위가 벌어졌지만, 15일까지 항쟁의 중심은 6 · 10국민대회와 명동성당 농성이 전개된 서울이었다. 하지만 6월 15일 경부터는 부산, 대전, 진주 등에서 격렬한 시위가 전개되었다. 그러다가 6월 20일부터 대규모 시위가 광주, 전주, 순천, 익산 등 호남 지방으로 옮겨졌다. 6 · 10국민대회 이후 약 20일 동안 전국 곳곳에서 매일 평균 100회 이상의 시위가 동시다발로 벌어졌다. 특히 6월 18일 ‘최루탄추방대회’와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은 전국 곳곳에서 한꺼번에 1백만 명 이상이 참여하였다. 갈수록 참가 지역이 전국 곳곳으로 확산되어 대도시, 중소도시뿐만 아니라 농촌 지역의 군 단위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6월 26일 하루에만 37~38개 시 · 군에서 시위가 동시에 벌어졌다. 유월항쟁에 참가한 연 인원은 400~500만 명으로 추산된다.&lt;br /&gt;
&lt;br /&gt;
반면 유월항쟁의 전국적 동시다발 시위는 경찰 병력을 분산시켰다. 분산된 경찰 병력으로는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거센 시위의 물결을 막아 낼 수 없었다. 경찰이 시위 진압에 최루탄을 남발하면서 최루탄도 점차 고갈되기 시작하였다. 유월항쟁 기간 동안 경찰이 사용한 최루탄만 총 67만 발이 넘었다. 더불어, 전두환 정권이 집권 내내 강조했던 88서울올림픽이 얼마 남지 않아 미국 등 국제사회의 이목이 집중된 상황에서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운동 때처럼 유혈 사태와 대량 학살을 반복하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무엇보다 군대를 동원하더라도 이러한 대규모 시민 항쟁을 진압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결국 경찰력으로 항쟁을 막기 힘들고, 군대 투입도 어렵다고 판단한 전두환 정권은 1987년 6월 29일 ‘ 6 · 29민주화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하였다. 그리고 그동안 의식불명 상태에 있었던 이한열이 7월 5일 끝내 사망하였다. 5일장 후 7월 9일 치러진 이한열의 노제에 100만 명의 인파가 모인 것을 끝으로 약 한 달 동안 지속된 유월항쟁은 마무리되었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1987년 유월항쟁이 대통령직선제 개헌이라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이 항쟁에 동참한 학생과 시민들의 요구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제시한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 개헌’이라는 슬로건으로 모아졌기 때문이었다. 유월항쟁은 이러한 민주화 세력의 통합성, 즉 각기 다른 성격과 지향을 가진 여러 주체들이 모두 동의할 수 있는 ‘최소 강령’하에 ‘최대 연합’으로 결집하였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lt;br /&gt;
===기여===&lt;br /&gt;
[[딩잉잉]]:6월민주항쟁 페이지 전체 작성&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기밀문서]]&lt;br /&gt;
[[분류:4.19혁명관련]]&lt;br /&gt;
[[분류:부마항쟁관련]]&lt;br /&gt;
[[분류:5.18민주화운동관련]]&lt;br /&gt;
[[분류:6월민주항쟁관련]]&lt;br /&gt;
[[분류:뎐]]&lt;br /&gt;
[[분류:이나자키로빈]]&lt;br /&gt;
[[분류:호빵이👻]]&lt;br /&gt;
[[분류:•ᴗ•]]&lt;br /&gt;
[[분류:딩잉잉]]&lt;/div&gt;</summary>
		<author><name>이나자키로빈</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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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8%B0%EB%B0%80%EB%AC%B8%EC%84%9C&amp;diff=31952</id>
		<title>기밀문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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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8T08:47:1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나자키로빈: /* 컨텐츠 주제 */&lt;/p&gt;
&lt;hr /&gt;
&lt;div&gt;=='''컨텐츠 주제'''==&lt;br /&gt;
[[파일:이한열.JPG]]&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CD0000&amp;quot;&amp;gt;투쟁의 불꽃, 자유의 환호&amp;lt;/span&amp;gt;'''&amp;lt;br/&amp;gt;&lt;br /&gt;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으로 일궈낸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역사에 대해 함께 살펴보자.&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lt;br /&gt;
=='''팀원'''==&lt;br /&gt;
*오현지(2022131143) [[뎐]]&amp;lt;br/&amp;gt;&lt;br /&gt;
*김여원(2023130209) [[이나자키로빈]]&amp;lt;br/&amp;gt;&lt;br /&gt;
*김하은(2022131345) [[호빵이👻]]&amp;lt;br/&amp;gt;&lt;br /&gt;
*박정원(2023130350) [[•ᴗ•]]&amp;lt;br/&amp;gt;&lt;br /&gt;
*최필중(2023130216) [[딩잉잉]]&amp;lt;br/&amp;gt;&lt;br /&gt;
&lt;br /&gt;
=='''기획의도'''==&lt;br /&gt;
===기획배경===&lt;br /&gt;
1945년 광복 이후 대한민국 국민들은 자유민주국가로서의 미래를 기대했으나 실상은 그러지 못했다.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보여주듯 현재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는 그것을 누리지 못한 앞선 세대들의 목숨을 바친 항쟁의 대가이다. 민주항쟁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의 핵심 동력이었다. 오늘날 우리나라 민주의식의 중요한 기둥이 되는 네 가지 항쟁을 선별하고 각 항쟁의 배경, 전개과정, 의의를 비롯해 세부적이고 자세한 내용에 대한 기사를 작성한다.&lt;br /&gt;
===기획목적===&lt;br /&gt;
작금의 현실까지 오기에는 수없이 많은 투쟁이 있었지만 4.19혁명, 부마항쟁, 5.18민주항쟁, 6월민주항쟁이라는 네 가지 사건을 살펴보기로 한 것은 가장 많이 다뤄지고, 가장 많이 알려진 사건이기 때문이다. 관련된 사건과 역사 인물들에 대해 자세히 적어 내어 민주항쟁의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지 않으면 알기 힘든 각 민주항쟁의 자세한 내막을 밝혀낸다.&lt;br /&gt;
===기대하는 바===&lt;br /&gt;
타임라인과 온톨로지를 활용해 내용의 전반적인 이해를 돕고 자세한 설명을 통해 사건의 자세한 내막을 들어낸다. 네 가지 항쟁을 각각 큰 목차로 설정하고 세부 기사를 그 내부에 작성해 독자의 관심과 수요에 부합하는 정보를 전달하는 데 효과적일 것으로 기대된다. 민주항쟁에 참여한 사람들의 희생과 투쟁에 대한 존경심을 부르고 역사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다.&lt;br /&gt;
===기여===&lt;br /&gt;
[[뎐]], [[이나자키로빈]], [[호빵이👻]]: 기획의도 페이지 작성&lt;br /&gt;
&lt;br /&gt;
=='''온톨로지'''==&lt;br /&gt;
{{NetworkGraph | title=민주항쟁.lst}}&lt;br /&gt;
[[민주항쟁.lst]]&lt;br /&gt;
===기여===&lt;br /&gt;
*[[뎐]]: 온톨로지 제작&lt;br /&gt;
=='''컨텐츠 구조'''==&lt;br /&gt;
===클래스(Class)===&lt;br /&gt;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color:white&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0%&amp;quot; | 클래스 !! style=&amp;quot;width:40%&amp;quot; | 설명 !! style=&amp;quot;45%&amp;quot; | 노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제||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대표 키워드인 민주항쟁을 주제로서 나타내었다 || 만주항쟁&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항쟁||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민주화운동 시기 발생했던 주요 운동들을 ‘항쟁’이라는 키워드로 분류하였다. || 4.19혁명, 부마항쟁, 5.18 민주화운동, 6월민주항쟁&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사건||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항쟁의 원인, 결과가 되는 사건을 정리하였다|| 3.15부정선거, 고려대 4.18학생시위, 3.15의거, YH사건, 10.26사태, 12.12 군사반란, 비상계엄령,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고문추방민족대행진, 4.13호헌조치, 6.29선언, 대통령직선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지역||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요 항쟁들이 일어났던 지역을 정리하였다|| 마산, 부산, 광주&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인물||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요사건들을 발생시킨 인물, 참여했던 인물을 묶어서 정리하였다|| 이승만, 이기붕, 김주열, 박정희, 김재규, 전두환, 신군부, 시민군, 박종철, 이한열, 노태우&lt;br /&gt;
|-&lt;br /&gt;
|}&lt;br /&gt;
===관계성(Relation)===&lt;br /&gt;
*&amp;lt;font color=#228B22&amp;gt;'''~은 ~에 속한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주요 항쟁들이 민주항쟁에 속함을 나타내거나 인물의 소속을 나타낸다.&lt;br /&gt;
***해당노드:&lt;br /&gt;
***#4.19혁명 -&amp;gt; 민주항쟁&lt;br /&gt;
***#부마항쟁 -&amp;gt; 민주항쟁&lt;br /&gt;
***#5.18민주화운동 -&amp;gt; 민주항쟁&lt;br /&gt;
***#6월 민주항쟁 -&amp;gt; 민주항쟁&lt;br /&gt;
***#전두환 -&amp;gt; 신군부&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의 원인이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어떠한 사건과 인과관계를 이루는 또다른 사건 혹은 인물을 설명한다.&lt;br /&gt;
***#이기붕 -&amp;gt; 3.15부정선거&lt;br /&gt;
***#김주열 -&amp;gt; 고려대 4.18학생시위&lt;br /&gt;
***#고려대 4.18학생시위 -&amp;gt; 4.19혁명&lt;br /&gt;
***#3.15의거 -&amp;gt; 4.19혁명&lt;br /&gt;
***#김주열 -&amp;gt; 4.19혁명&lt;br /&gt;
***#3.15부정선거 -&amp;gt; 3.15의거&lt;br /&gt;
***#YH사건 -&amp;gt; 부마항쟁&lt;br /&gt;
***#부마항쟁 -&amp;gt; 10.26사태&lt;br /&gt;
***#박정희 -&amp;gt; 10.26사태&lt;br /&gt;
***#비상계엄령 -&amp;gt; 5.18민주화운동&lt;br /&gt;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 -&amp;gt; 고문추방민족대행진&lt;br /&gt;
***#고문추방민족대행진 -&amp;gt; 4.13호헌조치&lt;br /&gt;
***#4.13호헌조치 -&amp;gt; 6월민주항쟁&lt;br /&gt;
***#6월민주항쟁 -&amp;gt; 6.29선언&lt;br /&gt;
***#6월민주항쟁 -&amp;gt; 대통령직선제&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을 발생시켰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사건과 그 사건을 직접적으로 발생시킨 인물을 연결한다.&lt;br /&gt;
***#이승만 -&amp;gt; 3.15부정선거&lt;br /&gt;
***#김재규 -&amp;gt; 10.26사태&lt;br /&gt;
***#신군부 -&amp;gt; 1212군사반란&lt;br /&gt;
***#전두환 -&amp;gt; 비상계엄령&lt;br /&gt;
***#노태우 -&amp;gt; 6.29선언&lt;br /&gt;
***#시민군 -&amp;gt; 5.18민주화운동&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에 희생되었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민주항쟁의 진압과정 등 에서 희생된 인물을 설명한다&lt;br /&gt;
***#김주열 -&amp;gt; 3.15의거&lt;br /&gt;
***#이한열 -&amp;gt; 6월 민주항쟁&lt;br /&gt;
***#박종철&amp;gt;박종철 고문치사 사건&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에서 발생했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설명한다.&lt;br /&gt;
***#3.15의거 -&amp;gt; 마산&lt;br /&gt;
***#부마항쟁 -&amp;gt; 부산&lt;br /&gt;
***#부마항쟁 -&amp;gt; 마산&lt;br /&gt;
***#5.18민주화운동 -&amp;gt; 광주&lt;br /&gt;
===기여===&lt;br /&gt;
*[[뎐]]: 컨텐츠 구조 페이지 작성&lt;br /&gt;
=='''4.19혁명'''==&lt;br /&gt;
===타임라인===&lt;br /&gt;
===원인===&lt;br /&gt;
====[[3.15 부정선거]]====&lt;br /&gt;
1959년 대한민국은 제 4대 대통령 선거와 제 5대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당시 자유당에서는 12년째 대통령으로서 연임 중이던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이기붕]]'''을 부통령 후보로 선임하였다. 그러나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병세의 악화로 사망하게 되고,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은 확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선거의 초점은 자유당의 조병옥과 민주당의 장면 간의 선거전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본격적인 선거유세의 시작과 함께 정부와 여당의 잇따른 야당선거운동 방해사건으로 부정선거가 시작되었다. 1960년 3월 15일 선거가 시작된 이후에도 다양한 방법의 부정행위가 일어났고, 개표 결과 이승만과 이기붕의 득표가 100%에 육박하는 결과로 나오자 자유당은 득표수를 하향 조정해 최종 집계에 반영할 것을 지시했다. 결국 이승만 88.7%, 이기붕 79%의 득표율을 가지며 정, 부통령에 당선되었다.&amp;lt;ref&amp;gt;자세한 내용은 3.15부정선거 페이지 참조&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부정선거 반대시위, [[3.15 의거]]의 발생====&lt;br /&gt;
3.15 부정선거를 반대하는 시위는 초기에는 중, 고등학생들의 산발적인 시위로 전개되었다. 3월 15일 선거일 밤 경남 마산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으며,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여 1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amp;lt;br/&amp;gt;&lt;br /&gt;
3월 15일 실종되었던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4월 11일 마산부두에서 발견되자 마산 시민들은 시청, 파출소 등을 파괴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2차 시위가 일어난 것이다.&lt;br /&gt;
&lt;br /&gt;
====[[고려대학교 4.18 학생시위]]의 발생====&lt;br /&gt;
1, 2차 마산시위를 계기로 부정선거 무효와 이승만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났다. '4.18 선언문'을 낭독하고 시내로 진출하였다. 이는 4월 19일 학생들과 일반 시민들이 가세한 대규모 시위로 이어지게 되었다.&lt;br /&gt;
====전국적인 4.19 혁명의 발생====&lt;br /&gt;
분노한 전국의 시민과 학생들이 다음 날인 4월 19일 총궐기하여 '이승만 하야와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며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경찰은 또다시 무차별 발포에 나섰고,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여기에 이승만 정부는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지만 이러한 압박에도 시민들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lt;br /&gt;
====이승만 대통령의 혼란 수습 시도====&lt;br /&gt;
이승만 대통령은 4.19 시위로 인한 정국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4월 20일 국무위원 전원과 자유당 당무위원 전원의 사표를 제출하도록 지시하였으며, 4월 23일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외무장관에 허정, 내무장관에 이호, 법무장관에 권승렬을 임명하는 등 개각을 단행하였다.&amp;lt;br/&amp;gt;&lt;br /&gt;
그러나 미국은 4.19직후 국무부 성명을 통해 한국에서 발생한 사태는 부정선거에 대한 '군중의 불만'을 반영한 것 이라고 했고, 양유찬 주미대사를 불러 '부정선거에 대한 철저한 조사', '경향신문 복간', '국가보안법 개정' 등을 촉구하는 각서를 전달하였다.&amp;lt;br/&amp;gt;&lt;br /&gt;
그리고 4월 25일, 이승만 정권에 분노한 전국 27개 대학 258명의 교수가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 모여 14개항의 시국 선언문을 발표하며 학생, 시민들과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들은 3.15 부정선거 및 4.19 사태의 책임을 지고 대통령이 물러날 것을 주장하였으며, &amp;quot;학생들의 피에 보답하자&amp;quot;는 플랜 카드를 앞세워 국회의사당까지 행진하였다. &lt;br /&gt;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lt;br /&gt;
무력진압에도 대규모 시위가 이어지며 시민들은 완강하게 투쟁하였다. 4월 26일 시위대가 경무대로 다시 집결하는 등 사태가 심각하게 진행되자, 오전 10시 30분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 성명을 발표하였다. 4월 27일 이승만은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하며 대통령직을 하야하고 하와이로 망명하였으며 자유당 정권도 끝나게 된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우리 국민들, 특히 학생과 청년들의 주도로 이루어진 4.19 혁명은 학생과 일반 대중이 단결하여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아시아 최초의 시건이다. 4.19혁명은 부마항쟁, 5.18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그리고 2017년 촛불시위에 이르기 까지 정권에 대항하는 국민들이 단합을 이루는 초석이 되었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도 시민 저항권에 대한 근거로써 4.19혁명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문구가 있다.&lt;br /&gt;
===기여===&lt;br /&gt;
[[뎐]]: 4.19혁명 페이지 원인, 의의 작성 &lt;br /&gt;
&lt;br /&gt;
[[•ᴗ•]]: 4.19혁명 페이지 전개 작성&lt;br /&gt;
&lt;br /&gt;
=='''부마항쟁'''==&lt;br /&gt;
===타임라인===&lt;br /&gt;
===원인===&lt;br /&gt;
====[[유신 헌법]]과 [[긴급조치]]====&lt;br /&gt;
1971년 선거에서 김대중을 누르고 대통령에 3선된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해 국회 해산,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등 법의 일부 기능을 정지시키고 전국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했다.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된 이른바 유신헌법에 의해 제정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법」 에 의거해 박정희가 제8대 대통령으로 재차 당선되었고, 이 유신 헌법이 발효된 기간을 유신 체제라고 부른다. 유신 체제는 행정, 입법, 사법의 3권을 모두 쥔 대통령이 종신 집권할 수 있도록 설계된 1인 대통령제였다. 박정희는 유신 헌법에 의거해 대통령의 권한으로 취할 수 있었던 특별조치인 긴급조치를 선포함으로써 헌법에 반대하는 시위 및 운동과 방송, 언론 활동을 하는 반정부 인사들을 연행, 체포, 고문하는 등 억압을 가했다.&lt;br /&gt;
&lt;br /&gt;
====한국경제의 위기====&lt;br /&gt;
1970년대 말 한국경제는''' [[제2차 오일쇼크]]'''라는 세계경제의 위기와 결합해 가라앉고 말았다. 경제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정부는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과 함께 '''[[경제안정화정책]]'''을 수용했고, 중소자본가, 봉급생활자, 도시 노동자와 농민 등에 안정화 비용을 부과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이와 같은 안정화 정책은 경제위기로 어려운 처지에 있던 중소기업들의 도산을 가속하여 기업 부도율이 치솟고 하층민들을 더 깊은 고통에 몰아넣었다. 특히 '''부가가치세'''를 도입한 이후 물가가 상승하면서 일상에 타격을 주었으며, 노동집약적 제조업이 집중되었던 부산과 마산에서는 상황이 더욱 심각하여 1979년 부산지역 부도율은 서울의 3배에 달했다.&lt;br /&gt;
&lt;br /&gt;
====YH 사건====&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부산대학교 민주선언문, 학생 시위에서 시민항쟁으로====&lt;br /&gt;
&lt;br /&gt;
1979년 10월 16일 아침 10시 부산대학교 구내 도서관 앞에서 약 500명의 학생들이 모여 “유신정권 물러가라”, “정치탄압 중지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반정부 시위를 벌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민주선언문」]]'''을 통해 민주화, 언론 자유, 인권 보장의 신념을 확인하고, “제도화된 폭력성과 조직적 악의 근원인 유신헌법과 독재집권층의 퇴진만이 5천 만 겨레의 통일의 첫걸음이라고 주장하면서 형제의 피를 요구하는 자유와 민주의 깃발을 우리가 잡고 반민주의 무리, 불의의 무리들을 향해 외치며 나아가자”라고 선언하였다. 이후 학생들은 교문을 나가 거리에서 시위했다. 이때 학생 수는 약 5,000명으로 불어나 있었고, 광복동과 남포동 등 부산시내 중심가까지 진출해 애국가 등의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며, 이를 제지하려는 경찰과 이곳저곳에서 충돌하였다. 비슷한 시간, 부산 동아대학교에서도 1,000여 명의 학생이 부산대학교 학생과 합류하여 가두시위를 벌였다. 부산대학교 데모로 학생 수백 명이 연행되고 100여 명이 다쳤지만 이튿날인 10월 17일에는 시위가 더욱 격화되어 학생들뿐만 아니라 다수의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학생 시위는 점차 시민항쟁의 양상을 띠어갔다.''' 밤늦게까지 계속된 시위에서 시민들은 충무파출소, 한국방송공사, 서구청, 부산세무서 등을 파괴하였고, 경찰차량을 불태우거나 파손시켰다.&lt;br /&gt;
&lt;br /&gt;
====마산의 시민항쟁====&lt;br /&gt;
&lt;br /&gt;
민주항쟁은 18일에 마산으로 확산되었다. 늦은 오후에는 1,000여 명의 경남대학교 학생들이 마산 시내 번화가에 산발적으로 집결했으며, 일부시민들도 가담해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어두워진 다음 학생과 시민들의 데모는 격화되어 파출소, 공화당사, 방송국, 신문사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파괴하였다. 이튿날인 19일에는 시위가 더욱 치열해져 마산 시내는 한때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저녁 8시경, 시위대는 경남대학과 마산대학&amp;lt;ref&amp;gt;1985년 창원대학으로 교명이 변경되었으며, 현재의 마산대학교와 다르다.&amp;lt;/ref&amp;gt;, 그리고 고등학생까지 합세하여 약 8,000명에 이르렀으며, 시내 곳곳에서 몽둥이를 들고 동사무소와 파출소로 몰려가 시설을 파괴하였고, 경찰차량에 불을 질렀다.&lt;br /&gt;
&lt;br /&gt;
====부산 계엄령, 마산 지역 위수령====&lt;br /&gt;
&lt;br /&gt;
부산대학교 시위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박정희 정부는 학생 시위로 시작된 시위가 대규모 시민항쟁으로 사태가 심상치 않게 확대되어가자 강경책으로 대응했다. 정부는 18일 자정을 기해 '''부산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동원한 과격한 진압'''을 통해 [[파일:계엄포고문.jpg|200px|섬네일|부산지역에 내려진 계엄포고문을 일고 있는 시민들]] 시위 참여자들과 이를 방조한 일반 시민들까지 1,058명을 연행하고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으며, 부산지구 계엄사령부는 각 대학 휴교조처와 야간통행금지시간을 2시간 연장하는 등의 항이 담긴 포고문을 발표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부산에 계엄령이 선포된 이튿날인 19일에 마산 시위가 확대됨에 따라 그 다음날인 10월 20일 정오, 정부가 '''마산 및 창원 지역에 위수령을 발령'''해 통행금지 시간이 연장되고, 경남대학 등에는 휴교조처가 취해졌고, 24일에는 깡패를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132명을 검거, 23명을 구속했다. 이렇게 '''표면적으로는 부마민주항쟁이 단시간에 진압되는 듯 보였지만, 항쟁은 이미 유신체제의 균열을 불러오고 있었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항쟁의 전개 과정에서 볼 수 있듯, 부마민주항쟁에서 특징적인 사실은 먼저 시위대의 가장 큰 분노의 대상은 공화당사와 경찰·파출소였다는 점, 다음으로 ‘부유층’에 대한 시위대의 공공연한 공격, 세 번째로 “부가가치세를 철폐하라”, “잘 먹고 잘 살아라”라는 외침에서 드러나듯이 세무서에 대한 공격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문사·방송국에 대한 공격을 들 수 있다.&lt;br /&gt;
&lt;br /&gt;
부마민주항쟁은 1970년대 유신체제 밑에서 쌓였던 침묵하는 언론, 조세, 시민을 억압하는 경찰에 대한 불만 등 정치·사회·경제·문화·종교 등 각 부문에 걸친 여러 모순의 폭발이었고, 헌법 개정과 긴급조치로 겨우 유지되던 유신체제와 박정희 정권의 붕괴를 촉진시킨 결정적인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10.26사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항쟁은 1980년 5월 18일의 광주 민주화운동과 1987년 6월 민주항쟁에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된다.&lt;br /&gt;
===기여===&lt;br /&gt;
[[호빵이👻]]: 부마항쟁 페이지 전체 작성&lt;br /&gt;
&lt;br /&gt;
=='''5.18민주화운동'''==&lt;br /&gt;
===타임라인===&lt;br /&gt;
===원인===&lt;br /&gt;
====유신체제의 붕괴====&lt;br /&gt;
&lt;br /&gt;
[[파일:김재규.jpg|섬네일|오른쪽|암살 당시 상황을 재현하는 김재규]]&lt;br /&gt;
&lt;br /&gt;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amp;lt;small&amp;gt; - 김재규&amp;lt;/small&amp;gt;&lt;br /&gt;
1979년 10월 4일 신민당 총재 김영삼이 국회에서 의원직을 제명당하자 10월 15부터 10월 20까지 부산 · 마산 등지에서는 부마항쟁이 일어났고, 이의 해결을 둘러싼 노선대립으로 갈등 중 10월 26일 &amp;lt;ins&amp;gt;[[김재규]]&amp;lt;/ins&amp;gt;가 박정희를 살해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ins&amp;gt;[[10.26 사태]]&amp;lt;/ins&amp;gt;의 사후 수습과정에서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을 중심으로 신군부 세력이 부상하였으며, 이들은 &amp;lt;ins&amp;gt;[[12.12 사건]]&amp;lt;/ins&amp;gt;의 하극상을 통하여 군부를 장악하였다. 1980년 2월 29일 김대중 등이 복권되었으나 그 해 봄, 신군부는 최규하 과도 정부를 유명무실하게 하고 국민들이 요구하는 민주주의와 이를 위한 명확한 정치일정 제시를 거부하면서 권력기반을 구축하였다.&lt;br /&gt;
&lt;br /&gt;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lt;br /&gt;
한 시대의 대격변을 예고하는 단초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시작됐다. 1979년 8월 9일 오전, 신민당의 당사 4층 강당에서는 봉제업체인 YH무역주식회사의 여성노동자 200여명이 기업주의 폐업에 반발하여 폐업조치 철회 농성을 벌였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인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신민당이 당사 건물을 내준 것이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폭력을 동원하여 농성을 해산시켰다. 결국 이 사건은 노동 탄압 사건을 넘어선 야당에 대한 정치 탄압 사건으로 발전하였다.&lt;br /&gt;
&lt;br /&gt;
이날 경찰은 1000여명의 진압대원을 신민당사로 난입시켜 농성을 하고 있던 174명의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로 밖으로 끌어냈다. 또한 경찰은 총재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김영삼 총재와 당 간부들을 끌어내면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박정희 정권은 이 노동자 농성 사건을 빌미로 신민당 분열공작을 시도하였다. 유신정권과 비밀리에 결탁한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 3명이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 부총재 전원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접수시켰다. 그리고 법원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신민당 총재단의 직무 집행을 정지시키고 박정희 정권의 꼭두각시를 총재직무대행으로 선임하였다.&lt;br /&gt;
&lt;br /&gt;
아울러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의 동교동 자택을 전면 봉쇄하였고,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에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끊으라고 요구한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즈』 회견내용을 “반헌정적, 반민족적 작태”로 몰아서 국회에 징계 동의안을 제출했다. 10월 4일 오후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의원 159명은 여당 총회장에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제명 결의안을 '''기습적으로''' 처리해 버렸다.&lt;br /&gt;
&lt;br /&gt;
노사분규 사태로 시작된 사건이 제1야당 당수의 의원직 제명으로 확대된 정치적 사태를 지켜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유신체제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이 고조되었다. 또한 이 사건은 그동안 다소 주춤하던 대학가에 반유신 반독재 운동의 열기가 다시 확산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청춘을 바쳐, 학생 운동====&lt;br /&gt;
&lt;br /&gt;
[[파일:서울의_봄.JPG|섬네일|오른쪽|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앞에 모인 시위대]]&lt;br /&gt;
&lt;br /&gt;
군부의 재집권 야욕에 대한 국민적 저항은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표출되었다. 1980년 3월, 서울대 총학생회 출범을 시작으로 4월 초순에는 전국의 주요 대학들이 총학생회를 결성하기 시작하였다. 대학별로 독재 정권에 아부했던 어용교수와 족벌사학 퇴진 운동을 벌였고, 특히 병영집체훈련(당시 대학 신입생들은 의무적으로 군부대에 10일 간 입대하여 각종 군사훈련을 이수해야 했다.) 거부가 주요 이슈로 전면 등장했다. 각 대학의 병영집체훈련 거부운동이 본격화되고 전국적인 쟁점으로 떠오르자 신군부는 신문, 방송을 통해 ‘학생들의 안보의식 결여’를 비난하고 교내 시위·농성을 집중적으로 보도하게 했다.  5월 1일에 서울대가 입영훈련 거부투쟁 철회를 결정하고 ‘계엄령 해제’와 ‘유신잔당 퇴진’, ‘정부개헌중단’과 ‘노동 3권 보장’ 등을 요구하기 시작하면서 대학가는 이제까지의 학내 문제 중심의 운동에서 정치개혁을 위한 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그간 정부와 대학 간에 팽팽하게 유지되던 긴장 관계는 폭발 직전으로 내닫게 된 것이다.&lt;br /&gt;
&lt;br /&gt;
약 열흘 간의 대정부 투쟁을 준비한 대학가는 5월 10일 고려대 총학생회장실에서 열린 ‘총학생회장단 회의’에 참석한 전국 23개 대학 대표들은 ‘비상계엄의 즉각 해제’와 ‘전두환, 신현확 등 유신잔당 퇴진’ 등을 결의하고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정세에 대한 공동대처 방안을 마련했다. 이후 5월 13일부터 5월 14일에 걸쳐 서울 · 부산 · 대구 · 광주 등 37개 대학에서 계엄철폐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5월 15일에는 서울역에서 시위가 발생하는 등 학생시위는 서울시가지를 거의 마비시키는 등 야간까지 지속되어 사태가 절정에 달하면서 신군부 세력을 위협하였다. 5월 16일 24개 대학 학생대표들은 당분간 시국의 추이를 관망하기로 결정하고 가두시위를 중단하면서 소강상태에 돌입하는 듯하였다.&lt;br /&gt;
&lt;br /&gt;
====1980년 봄의 광주====&lt;br /&gt;
5월 17일 신군부 세력이 이전까지는 제주도를 제외한 지역에 한정되었던 비상계엄을 전국에 확대하는 조치인 계엄포고 10호(17일 24시에 발효: 각 대학 휴교령 포함)를 밤 9시 40분에 의결하고 밤 11시 40분에 발표하면서 밤 11시를 전후한 시점부터 김대중 · 김종필이 연행되는 등 권력형 부정축재자 및 소요조종 혐의자, 학생 시위 주동자가 체포되었다. 이날 밤 광주지역의 사회운동·학생운동의 지도자도 상당수가 검거되었다. 광주의 검거대상자는 전남대 12명, 조선대 10명 등 총 22명이었다. 전남에서 계엄합동수사단은 광주505보안대가 중심이고, 중앙정보부, 경찰 등이 보조역할을 했다. 전남 계엄합동수사단은 22대 차량과 86명의 인원이 출동해 정동년 등 복적생들과 대학의 총학생회 간부들을 집중 검거했다.&lt;br /&gt;
&lt;br /&gt;
한편 육군본부는 14일 오전 7시55분에 국가 중요 보안목표와 주요대학에 군 병력 배치 명령을 하달했다. 이 명령에 따라 전남북계엄분소장인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광주 시내 주요 시설물에 이날 오후부터 계엄병력을 배치했다. 31사단 96연대 병력이 광주시내 KBS건물에 42명, MBC 21명, CBS 11명, VOC(전일방송) 11명 등 주요 방송사 건물에 배치돼 경비에 들어간 것이다.&lt;br /&gt;
&lt;br /&gt;
이날 오후 전교사령관은 7공수여단의 광주배치에 따른 수송수단 지원도 미리 협의했다. 그리고 5월 8일부터 16일 사이에 공수부대 수뇌부들도 헬기를 타고 서울에서 내려와 광주 상무대의 전투병과교육사령부를 방문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광주에서 시위가 격화되면 즉각적으로 최정예 군부대를 동원해서 진압할 준비를 철저하게 갖추고 있었다. 5월 18일에 시작된 광주의 비극은 그 이전에 이미 시한폭탄처럼 준비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lt;br /&gt;
{{구글지도 | 위도=35.175961433346885 | 경도=126.90865311973532 | 줌=13 }}  [[파일:금남로.JPG|섬네일|오른쪽|금남로 앞에 집결한 버스와 시민군]]&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18일&amp;lt;/span&amp;gt;&lt;br /&gt;
휴교령이 내려질 경우 교문 앞에서 집결한다는 결의에 따라 학생들은 5월 18일 오전 전남대학교 앞에 모였다. 공수부대원들이 전남대 앞 시위를 저지하자 대학생들은 광주역에 재집결해서 시위를 이어갔다. 시위대가 점차 늘어나면서 공수부대원이 시내에서 시위진압에 나섰으며 18일 오후 1시부터 무차별 진압작전이 이루어져 부상자가 속출하였다.&lt;br /&gt;
&lt;br /&gt;
군인들이 금남로 등 시내 중심가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이나 여자를 마구 구타하고 짓밟으며 찌르는 등의 잔혹 행동을 하자 시민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이에 시위대는 오후 4시 이후 파출소 파괴 등 적극공세에 나섰다. '''계엄군의 과잉 무력진압은 시위를 해산시키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오히려 시민들을 단결시켰으며, 결국 19일 시민 · 학생 연대가 발생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lt;br /&gt;
&lt;br /&gt;
 '''''광주 애국 시민 여러분! 이것이 웬 말입니까? 웬 벼락이란 말입니까? 죄 없는 학생들을 총칼로 찔러 죽이고 몽둥이로 두들겨 트럭으로 실어가며 부녀자를 발가벗겨 총칼로 찌르는 놈들이 이 누구란 말입니까? 이제 우리가 살길은 전시민이 하나로 뭉쳐 청년 학생들을 보호하고 유신잔당과 극악무도한 살인마 전두환 일파와 공수 특전단 놈들을 한놈도 남김없이 쳐부수는 길 뿐입니다. 우리는 이제 다 보았습니다. 다 알게 되었읍니다. 왜 학생들이 그토록 소리 높이 외쳤는가를, 우리의 적은 경찰도 군대도 아닙니다. 우리의 적은 전국민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바로 유신잔당과 전두환 일파 그놈들입니다.''''' &amp;lt;small&amp;gt; - 1980년 5월 19일에 '광주시민민주투쟁회'명의의 호소문&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19일&amp;lt;/span&amp;gt;&lt;br /&gt;
19일 오전에는 일시적 소강상태였으나 오후 들어서 분노한 학생 · 시민들이 군 · 경찰과 공방전을 벌이면서 시위는 점차 격화되었다. '''시민들은 공포감에서 벗어나 자신의 생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단순한 학생시위에서 시민봉기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계엄군은 시위대를 포위하여 구타하였으며 일부 고등학생까지 포함된 시위대는 돌과 화염병으로 저항하였고 파출소와 방송국 등에 침입하였다. 뒤처진 공수부대를 공격하거나 고립된 차량을 포위하기도 하였으며 총과 방패를 빼앗기도 하였고, 오후 4시 50분 시민들에게 포위된 계엄군의 장갑차에서 최초의 발포가 있었다. 19일 밤비가 내리는 가운데 시위가 산발적으로 계속되었으며, 20일 오전 비가 그치고 대규모 시위는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오후부터 다시 시작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20일&amp;lt;/span&amp;gt;&lt;br /&gt;
'''20일 오후 6시부터 택시와 버스 운전 기사들이 광주역과 무등경기장에 모여 대형 버스와 트럭을 앞세우고 일시에 금남로에 집결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들을 앞세운 시위는 계엄군을 몰아내는 데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였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5.18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에 &amp;lt;ins&amp;gt;[[지대한 영향]]&amp;lt;/ins&amp;gt;을 끼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학생 운동에 뛰어든 많은 대학생들은 대학교에 들어와서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의 실상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아 학생 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군부정권은 5.18 이후로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다. 전두환은 김대중 등에게 '광주 사태'의 책임을 물어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했고,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 선언을 한 직후, 8월 27일 소위 체육관 선거를 통해 전두환은 대통령 자리를 탈취했다.&lt;br /&gt;
&lt;br /&gt;
지역적인 면에서는 '''광주광역시를 비롯한 전라도 지역의 트라우마'''로 작용해 이후의 민주정의당 및 &amp;lt;ins&amp;gt;[[3당 합당]]&amp;lt;/ins&amp;gt;으로 이어지는 보수 세력에 대해 적대심을 가지고, 민주당계 정당의 표밭이 되는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미 박정희 정부 시절부터 유무형의 정치적인 차별을 받고 있었지만 5.18의 참상은 전라도가 다시는 보수 세력을 지지하지 않게 만들 정도로 심각한 사건이며 호남소외론의 가장 결정적인 명분이 되었다.&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이나자키로빈]]: 5.18 민주화운동 페이지 전체 작성&lt;br /&gt;
&lt;br /&gt;
=='''6월민주항쟁'''==&lt;br /&gt;
===타임라인===&lt;br /&gt;
===원인===&lt;br /&gt;
1985년 2 · 12총선에서 신한민주당이 승리한 것을 기점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가 날로 커졌다. 1986년 개헌서명운동의 성과로 국회 내 개헌특위가 만들어졌지만, 여야 간 개헌 협상은 난항을 거듭하였다. 이를 빌미로 1987년 4월 13일 전두환은 대통령 임기 내 개헌을 거부하고, 기존 제5공화국 헌법으로 차기 대통령 선거를 치르겠다는 이른바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였다. 전두환 정부가 이렇게 개헌 거부를 공식화한 상황에서 5월 18일 정의구현사제단이 지난 1987년 1월 발생한 [[박종철고문치사사건]]이 정권 차원에서 은폐 ·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폭로하였다. 많은 시민들이 크게 분노하였고, 야당과 민주화운동 진영은 전두환 정부에 정면으로 맞서기 위한 투쟁에 본격적으로 돌입하였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먼저 1987년 5월 27일 야당과 재야, 종교계 등이 힘을 모아 ‘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여당인 민주정의당에서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6월 10일에 맞춰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6 · 10국민대회)’를 치르기로 결정하였다. 대학생들은 국본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를 중심으로 6 · 10국민대회에 호응하여 6월 초부터 각 대학별로 연일 집회와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6 · 10국민대회 하루 전날인 6월 9일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교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는 곧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학생들은 물론 시민들의 분노가 들끓었다. 이러한 분노 속에서 6 · 10국민대회가 열렸다. 경찰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6 · 10국민대회가 열리는 성공회대성당을 원천 봉쇄하였다. 그 결과 6 · 10국민대회는 대회장에 미리 들어가 있던 소수의 인원만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대회 예정 시간인 오후 6시 이전부터 서울 시내 곳곳에서 대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시민들도 다양한 방식으로 6 · 10국민대회와 학생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날 밤 늦게까지 시위를 벌이던 학생들은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이후 5일 동안 농성을 계속하였다. 애초 계획된 것은 아니었지만 대학생들의 명동성당 농성은 6 · 10국민대회가 단발성 행사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인 저항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lt;br /&gt;
&lt;br /&gt;
명동성당 농성을 거치며 항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유월항쟁의 전국화 과정에는 일정한 패턴이 존재하였다. 6월 10일 서울 외에도 전국 주요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위가 벌어졌지만, 15일까지 항쟁의 중심은 6 · 10국민대회와 명동성당 농성이 전개된 서울이었다. 하지만 6월 15일 경부터는 부산, 대전, 진주 등에서 격렬한 시위가 전개되었다. 그러다가 6월 20일부터 대규모 시위가 광주, 전주, 순천, 익산 등 호남 지방으로 옮겨졌다. 6 · 10국민대회 이후 약 20일 동안 전국 곳곳에서 매일 평균 100회 이상의 시위가 동시다발로 벌어졌다. 특히 6월 18일 ‘최루탄추방대회’와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은 전국 곳곳에서 한꺼번에 1백만 명 이상이 참여하였다. 갈수록 참가 지역이 전국 곳곳으로 확산되어 대도시, 중소도시뿐만 아니라 농촌 지역의 군 단위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6월 26일 하루에만 37~38개 시 · 군에서 시위가 동시에 벌어졌다. 유월항쟁에 참가한 연 인원은 400~500만 명으로 추산된다.&lt;br /&gt;
&lt;br /&gt;
반면 유월항쟁의 전국적 동시다발 시위는 경찰 병력을 분산시켰다. 분산된 경찰 병력으로는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거센 시위의 물결을 막아 낼 수 없었다. 경찰이 시위 진압에 최루탄을 남발하면서 최루탄도 점차 고갈되기 시작하였다. 유월항쟁 기간 동안 경찰이 사용한 최루탄만 총 67만 발이 넘었다. 더불어, 전두환 정권이 집권 내내 강조했던 88서울올림픽이 얼마 남지 않아 미국 등 국제사회의 이목이 집중된 상황에서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운동 때처럼 유혈 사태와 대량 학살을 반복하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무엇보다 군대를 동원하더라도 이러한 대규모 시민 항쟁을 진압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결국 경찰력으로 항쟁을 막기 힘들고, 군대 투입도 어렵다고 판단한 전두환 정권은 1987년 6월 29일 ‘ 6 · 29민주화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하였다. 그리고 그동안 의식불명 상태에 있었던 이한열이 7월 5일 끝내 사망하였다. 5일장 후 7월 9일 치러진 이한열의 노제에 100만 명의 인파가 모인 것을 끝으로 약 한 달 동안 지속된 유월항쟁은 마무리되었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1987년 유월항쟁이 대통령직선제 개헌이라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이 항쟁에 동참한 학생과 시민들의 요구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제시한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 개헌’이라는 슬로건으로 모아졌기 때문이었다. 유월항쟁은 이러한 민주화 세력의 통합성, 즉 각기 다른 성격과 지향을 가진 여러 주체들이 모두 동의할 수 있는 ‘최소 강령’하에 ‘최대 연합’으로 결집하였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lt;br /&gt;
===기여===&lt;br /&gt;
[[딩잉잉]]:6월민주항쟁 페이지 전체 작성&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기밀문서]]&lt;br /&gt;
[[분류:4.19혁명관련]]&lt;br /&gt;
[[분류:부마항쟁관련]]&lt;br /&gt;
[[분류:5.18민주화운동관련]]&lt;br /&gt;
[[분류:6월민주항쟁관련]]&lt;br /&gt;
[[분류:뎐]]&lt;br /&gt;
[[분류:이나자키로빈]]&lt;br /&gt;
[[분류:호빵이👻]]&lt;br /&gt;
[[분류:•ᴗ•]]&lt;br /&gt;
[[분류:딩잉잉]]&lt;/div&gt;</summary>
		<author><name>이나자키로빈</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8%B0%EB%B0%80%EB%AC%B8%EC%84%9C&amp;diff=31949</id>
		<title>기밀문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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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8T08:46:5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나자키로빈: /* 컨텐츠 주제 */&lt;/p&gt;
&lt;hr /&gt;
&lt;div&gt;=='''컨텐츠 주제'''==&lt;br /&gt;
[[파일:이한열.JPG]]&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CD0000&amp;quot;&amp;gt;투쟁의 불꽃, 자유의 환호&amp;lt;/span&amp;gt;'''&lt;br /&gt;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으로 일궈낸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역사에 대해 함께 살펴보자.&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lt;br /&gt;
=='''팀원'''==&lt;br /&gt;
*오현지(2022131143) [[뎐]]&amp;lt;br/&amp;gt;&lt;br /&gt;
*김여원(2023130209) [[이나자키로빈]]&amp;lt;br/&amp;gt;&lt;br /&gt;
*김하은(2022131345) [[호빵이👻]]&amp;lt;br/&amp;gt;&lt;br /&gt;
*박정원(2023130350) [[•ᴗ•]]&amp;lt;br/&amp;gt;&lt;br /&gt;
*최필중(2023130216) [[딩잉잉]]&amp;lt;br/&amp;gt;&lt;br /&gt;
&lt;br /&gt;
=='''기획의도'''==&lt;br /&gt;
===기획배경===&lt;br /&gt;
1945년 광복 이후 대한민국 국민들은 자유민주국가로서의 미래를 기대했으나 실상은 그러지 못했다.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보여주듯 현재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는 그것을 누리지 못한 앞선 세대들의 목숨을 바친 항쟁의 대가이다. 민주항쟁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의 핵심 동력이었다. 오늘날 우리나라 민주의식의 중요한 기둥이 되는 네 가지 항쟁을 선별하고 각 항쟁의 배경, 전개과정, 의의를 비롯해 세부적이고 자세한 내용에 대한 기사를 작성한다.&lt;br /&gt;
===기획목적===&lt;br /&gt;
작금의 현실까지 오기에는 수없이 많은 투쟁이 있었지만 4.19혁명, 부마항쟁, 5.18민주항쟁, 6월민주항쟁이라는 네 가지 사건을 살펴보기로 한 것은 가장 많이 다뤄지고, 가장 많이 알려진 사건이기 때문이다. 관련된 사건과 역사 인물들에 대해 자세히 적어 내어 민주항쟁의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지 않으면 알기 힘든 각 민주항쟁의 자세한 내막을 밝혀낸다.&lt;br /&gt;
===기대하는 바===&lt;br /&gt;
타임라인과 온톨로지를 활용해 내용의 전반적인 이해를 돕고 자세한 설명을 통해 사건의 자세한 내막을 들어낸다. 네 가지 항쟁을 각각 큰 목차로 설정하고 세부 기사를 그 내부에 작성해 독자의 관심과 수요에 부합하는 정보를 전달하는 데 효과적일 것으로 기대된다. 민주항쟁에 참여한 사람들의 희생과 투쟁에 대한 존경심을 부르고 역사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다.&lt;br /&gt;
===기여===&lt;br /&gt;
[[뎐]], [[이나자키로빈]], [[호빵이👻]]: 기획의도 페이지 작성&lt;br /&gt;
&lt;br /&gt;
=='''온톨로지'''==&lt;br /&gt;
{{NetworkGraph | title=민주항쟁.lst}}&lt;br /&gt;
[[민주항쟁.lst]]&lt;br /&gt;
===기여===&lt;br /&gt;
*[[뎐]]: 온톨로지 제작&lt;br /&gt;
=='''컨텐츠 구조'''==&lt;br /&gt;
===클래스(Class)===&lt;br /&gt;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color:white&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0%&amp;quot; | 클래스 !! style=&amp;quot;width:40%&amp;quot; | 설명 !! style=&amp;quot;45%&amp;quot; | 노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제||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대표 키워드인 민주항쟁을 주제로서 나타내었다 || 만주항쟁&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항쟁||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민주화운동 시기 발생했던 주요 운동들을 ‘항쟁’이라는 키워드로 분류하였다. || 4.19혁명, 부마항쟁, 5.18 민주화운동, 6월민주항쟁&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사건||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항쟁의 원인, 결과가 되는 사건을 정리하였다|| 3.15부정선거, 고려대 4.18학생시위, 3.15의거, YH사건, 10.26사태, 12.12 군사반란, 비상계엄령,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고문추방민족대행진, 4.13호헌조치, 6.29선언, 대통령직선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지역||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요 항쟁들이 일어났던 지역을 정리하였다|| 마산, 부산, 광주&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인물||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요사건들을 발생시킨 인물, 참여했던 인물을 묶어서 정리하였다|| 이승만, 이기붕, 김주열, 박정희, 김재규, 전두환, 신군부, 시민군, 박종철, 이한열, 노태우&lt;br /&gt;
|-&lt;br /&gt;
|}&lt;br /&gt;
===관계성(Relation)===&lt;br /&gt;
*&amp;lt;font color=#228B22&amp;gt;'''~은 ~에 속한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주요 항쟁들이 민주항쟁에 속함을 나타내거나 인물의 소속을 나타낸다.&lt;br /&gt;
***해당노드:&lt;br /&gt;
***#4.19혁명 -&amp;gt; 민주항쟁&lt;br /&gt;
***#부마항쟁 -&amp;gt; 민주항쟁&lt;br /&gt;
***#5.18민주화운동 -&amp;gt; 민주항쟁&lt;br /&gt;
***#6월 민주항쟁 -&amp;gt; 민주항쟁&lt;br /&gt;
***#전두환 -&amp;gt; 신군부&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의 원인이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어떠한 사건과 인과관계를 이루는 또다른 사건 혹은 인물을 설명한다.&lt;br /&gt;
***#이기붕 -&amp;gt; 3.15부정선거&lt;br /&gt;
***#김주열 -&amp;gt; 고려대 4.18학생시위&lt;br /&gt;
***#고려대 4.18학생시위 -&amp;gt; 4.19혁명&lt;br /&gt;
***#3.15의거 -&amp;gt; 4.19혁명&lt;br /&gt;
***#김주열 -&amp;gt; 4.19혁명&lt;br /&gt;
***#3.15부정선거 -&amp;gt; 3.15의거&lt;br /&gt;
***#YH사건 -&amp;gt; 부마항쟁&lt;br /&gt;
***#부마항쟁 -&amp;gt; 10.26사태&lt;br /&gt;
***#박정희 -&amp;gt; 10.26사태&lt;br /&gt;
***#비상계엄령 -&amp;gt; 5.18민주화운동&lt;br /&gt;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 -&amp;gt; 고문추방민족대행진&lt;br /&gt;
***#고문추방민족대행진 -&amp;gt; 4.13호헌조치&lt;br /&gt;
***#4.13호헌조치 -&amp;gt; 6월민주항쟁&lt;br /&gt;
***#6월민주항쟁 -&amp;gt; 6.29선언&lt;br /&gt;
***#6월민주항쟁 -&amp;gt; 대통령직선제&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을 발생시켰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사건과 그 사건을 직접적으로 발생시킨 인물을 연결한다.&lt;br /&gt;
***#이승만 -&amp;gt; 3.15부정선거&lt;br /&gt;
***#김재규 -&amp;gt; 10.26사태&lt;br /&gt;
***#신군부 -&amp;gt; 1212군사반란&lt;br /&gt;
***#전두환 -&amp;gt; 비상계엄령&lt;br /&gt;
***#노태우 -&amp;gt; 6.29선언&lt;br /&gt;
***#시민군 -&amp;gt; 5.18민주화운동&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에 희생되었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민주항쟁의 진압과정 등 에서 희생된 인물을 설명한다&lt;br /&gt;
***#김주열 -&amp;gt; 3.15의거&lt;br /&gt;
***#이한열 -&amp;gt; 6월 민주항쟁&lt;br /&gt;
***#박종철&amp;gt;박종철 고문치사 사건&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에서 발생했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설명한다.&lt;br /&gt;
***#3.15의거 -&amp;gt; 마산&lt;br /&gt;
***#부마항쟁 -&amp;gt; 부산&lt;br /&gt;
***#부마항쟁 -&amp;gt; 마산&lt;br /&gt;
***#5.18민주화운동 -&amp;gt; 광주&lt;br /&gt;
===기여===&lt;br /&gt;
*[[뎐]]: 컨텐츠 구조 페이지 작성&lt;br /&gt;
=='''4.19혁명'''==&lt;br /&gt;
===타임라인===&lt;br /&gt;
===원인===&lt;br /&gt;
====[[3.15 부정선거]]====&lt;br /&gt;
1959년 대한민국은 제 4대 대통령 선거와 제 5대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당시 자유당에서는 12년째 대통령으로서 연임 중이던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이기붕]]'''을 부통령 후보로 선임하였다. 그러나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병세의 악화로 사망하게 되고,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은 확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선거의 초점은 자유당의 조병옥과 민주당의 장면 간의 선거전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본격적인 선거유세의 시작과 함께 정부와 여당의 잇따른 야당선거운동 방해사건으로 부정선거가 시작되었다. 1960년 3월 15일 선거가 시작된 이후에도 다양한 방법의 부정행위가 일어났고, 개표 결과 이승만과 이기붕의 득표가 100%에 육박하는 결과로 나오자 자유당은 득표수를 하향 조정해 최종 집계에 반영할 것을 지시했다. 결국 이승만 88.7%, 이기붕 79%의 득표율을 가지며 정, 부통령에 당선되었다.&amp;lt;ref&amp;gt;자세한 내용은 3.15부정선거 페이지 참조&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부정선거 반대시위, [[3.15 의거]]의 발생====&lt;br /&gt;
3.15 부정선거를 반대하는 시위는 초기에는 중, 고등학생들의 산발적인 시위로 전개되었다. 3월 15일 선거일 밤 경남 마산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으며,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여 1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amp;lt;br/&amp;gt;&lt;br /&gt;
3월 15일 실종되었던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4월 11일 마산부두에서 발견되자 마산 시민들은 시청, 파출소 등을 파괴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2차 시위가 일어난 것이다.&lt;br /&gt;
&lt;br /&gt;
====[[고려대학교 4.18 학생시위]]의 발생====&lt;br /&gt;
1, 2차 마산시위를 계기로 부정선거 무효와 이승만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났다. '4.18 선언문'을 낭독하고 시내로 진출하였다. 이는 4월 19일 학생들과 일반 시민들이 가세한 대규모 시위로 이어지게 되었다.&lt;br /&gt;
====전국적인 4.19 혁명의 발생====&lt;br /&gt;
분노한 전국의 시민과 학생들이 다음 날인 4월 19일 총궐기하여 '이승만 하야와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며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경찰은 또다시 무차별 발포에 나섰고,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여기에 이승만 정부는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지만 이러한 압박에도 시민들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lt;br /&gt;
====이승만 대통령의 혼란 수습 시도====&lt;br /&gt;
이승만 대통령은 4.19 시위로 인한 정국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4월 20일 국무위원 전원과 자유당 당무위원 전원의 사표를 제출하도록 지시하였으며, 4월 23일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외무장관에 허정, 내무장관에 이호, 법무장관에 권승렬을 임명하는 등 개각을 단행하였다.&amp;lt;br/&amp;gt;&lt;br /&gt;
그러나 미국은 4.19직후 국무부 성명을 통해 한국에서 발생한 사태는 부정선거에 대한 '군중의 불만'을 반영한 것 이라고 했고, 양유찬 주미대사를 불러 '부정선거에 대한 철저한 조사', '경향신문 복간', '국가보안법 개정' 등을 촉구하는 각서를 전달하였다.&amp;lt;br/&amp;gt;&lt;br /&gt;
그리고 4월 25일, 이승만 정권에 분노한 전국 27개 대학 258명의 교수가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 모여 14개항의 시국 선언문을 발표하며 학생, 시민들과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들은 3.15 부정선거 및 4.19 사태의 책임을 지고 대통령이 물러날 것을 주장하였으며, &amp;quot;학생들의 피에 보답하자&amp;quot;는 플랜 카드를 앞세워 국회의사당까지 행진하였다. &lt;br /&gt;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lt;br /&gt;
무력진압에도 대규모 시위가 이어지며 시민들은 완강하게 투쟁하였다. 4월 26일 시위대가 경무대로 다시 집결하는 등 사태가 심각하게 진행되자, 오전 10시 30분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 성명을 발표하였다. 4월 27일 이승만은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하며 대통령직을 하야하고 하와이로 망명하였으며 자유당 정권도 끝나게 된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우리 국민들, 특히 학생과 청년들의 주도로 이루어진 4.19 혁명은 학생과 일반 대중이 단결하여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아시아 최초의 시건이다. 4.19혁명은 부마항쟁, 5.18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그리고 2017년 촛불시위에 이르기 까지 정권에 대항하는 국민들이 단합을 이루는 초석이 되었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도 시민 저항권에 대한 근거로써 4.19혁명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문구가 있다.&lt;br /&gt;
===기여===&lt;br /&gt;
[[뎐]]: 4.19혁명 페이지 원인, 의의 작성 &lt;br /&gt;
&lt;br /&gt;
[[•ᴗ•]]: 4.19혁명 페이지 전개 작성&lt;br /&gt;
&lt;br /&gt;
=='''부마항쟁'''==&lt;br /&gt;
===타임라인===&lt;br /&gt;
===원인===&lt;br /&gt;
====[[유신 헌법]]과 [[긴급조치]]====&lt;br /&gt;
1971년 선거에서 김대중을 누르고 대통령에 3선된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해 국회 해산,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등 법의 일부 기능을 정지시키고 전국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했다.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된 이른바 유신헌법에 의해 제정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법」 에 의거해 박정희가 제8대 대통령으로 재차 당선되었고, 이 유신 헌법이 발효된 기간을 유신 체제라고 부른다. 유신 체제는 행정, 입법, 사법의 3권을 모두 쥔 대통령이 종신 집권할 수 있도록 설계된 1인 대통령제였다. 박정희는 유신 헌법에 의거해 대통령의 권한으로 취할 수 있었던 특별조치인 긴급조치를 선포함으로써 헌법에 반대하는 시위 및 운동과 방송, 언론 활동을 하는 반정부 인사들을 연행, 체포, 고문하는 등 억압을 가했다.&lt;br /&gt;
&lt;br /&gt;
====한국경제의 위기====&lt;br /&gt;
1970년대 말 한국경제는''' [[제2차 오일쇼크]]'''라는 세계경제의 위기와 결합해 가라앉고 말았다. 경제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정부는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과 함께 '''[[경제안정화정책]]'''을 수용했고, 중소자본가, 봉급생활자, 도시 노동자와 농민 등에 안정화 비용을 부과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이와 같은 안정화 정책은 경제위기로 어려운 처지에 있던 중소기업들의 도산을 가속하여 기업 부도율이 치솟고 하층민들을 더 깊은 고통에 몰아넣었다. 특히 '''부가가치세'''를 도입한 이후 물가가 상승하면서 일상에 타격을 주었으며, 노동집약적 제조업이 집중되었던 부산과 마산에서는 상황이 더욱 심각하여 1979년 부산지역 부도율은 서울의 3배에 달했다.&lt;br /&gt;
&lt;br /&gt;
====YH 사건====&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부산대학교 민주선언문, 학생 시위에서 시민항쟁으로====&lt;br /&gt;
&lt;br /&gt;
1979년 10월 16일 아침 10시 부산대학교 구내 도서관 앞에서 약 500명의 학생들이 모여 “유신정권 물러가라”, “정치탄압 중지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반정부 시위를 벌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민주선언문」]]'''을 통해 민주화, 언론 자유, 인권 보장의 신념을 확인하고, “제도화된 폭력성과 조직적 악의 근원인 유신헌법과 독재집권층의 퇴진만이 5천 만 겨레의 통일의 첫걸음이라고 주장하면서 형제의 피를 요구하는 자유와 민주의 깃발을 우리가 잡고 반민주의 무리, 불의의 무리들을 향해 외치며 나아가자”라고 선언하였다. 이후 학생들은 교문을 나가 거리에서 시위했다. 이때 학생 수는 약 5,000명으로 불어나 있었고, 광복동과 남포동 등 부산시내 중심가까지 진출해 애국가 등의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며, 이를 제지하려는 경찰과 이곳저곳에서 충돌하였다. 비슷한 시간, 부산 동아대학교에서도 1,000여 명의 학생이 부산대학교 학생과 합류하여 가두시위를 벌였다. 부산대학교 데모로 학생 수백 명이 연행되고 100여 명이 다쳤지만 이튿날인 10월 17일에는 시위가 더욱 격화되어 학생들뿐만 아니라 다수의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학생 시위는 점차 시민항쟁의 양상을 띠어갔다.''' 밤늦게까지 계속된 시위에서 시민들은 충무파출소, 한국방송공사, 서구청, 부산세무서 등을 파괴하였고, 경찰차량을 불태우거나 파손시켰다.&lt;br /&gt;
&lt;br /&gt;
====마산의 시민항쟁====&lt;br /&gt;
&lt;br /&gt;
민주항쟁은 18일에 마산으로 확산되었다. 늦은 오후에는 1,000여 명의 경남대학교 학생들이 마산 시내 번화가에 산발적으로 집결했으며, 일부시민들도 가담해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어두워진 다음 학생과 시민들의 데모는 격화되어 파출소, 공화당사, 방송국, 신문사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파괴하였다. 이튿날인 19일에는 시위가 더욱 치열해져 마산 시내는 한때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저녁 8시경, 시위대는 경남대학과 마산대학&amp;lt;ref&amp;gt;1985년 창원대학으로 교명이 변경되었으며, 현재의 마산대학교와 다르다.&amp;lt;/ref&amp;gt;, 그리고 고등학생까지 합세하여 약 8,000명에 이르렀으며, 시내 곳곳에서 몽둥이를 들고 동사무소와 파출소로 몰려가 시설을 파괴하였고, 경찰차량에 불을 질렀다.&lt;br /&gt;
&lt;br /&gt;
====부산 계엄령, 마산 지역 위수령====&lt;br /&gt;
&lt;br /&gt;
부산대학교 시위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박정희 정부는 학생 시위로 시작된 시위가 대규모 시민항쟁으로 사태가 심상치 않게 확대되어가자 강경책으로 대응했다. 정부는 18일 자정을 기해 '''부산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동원한 과격한 진압'''을 통해 [[파일:계엄포고문.jpg|200px|섬네일|부산지역에 내려진 계엄포고문을 일고 있는 시민들]] 시위 참여자들과 이를 방조한 일반 시민들까지 1,058명을 연행하고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으며, 부산지구 계엄사령부는 각 대학 휴교조처와 야간통행금지시간을 2시간 연장하는 등의 항이 담긴 포고문을 발표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부산에 계엄령이 선포된 이튿날인 19일에 마산 시위가 확대됨에 따라 그 다음날인 10월 20일 정오, 정부가 '''마산 및 창원 지역에 위수령을 발령'''해 통행금지 시간이 연장되고, 경남대학 등에는 휴교조처가 취해졌고, 24일에는 깡패를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132명을 검거, 23명을 구속했다. 이렇게 '''표면적으로는 부마민주항쟁이 단시간에 진압되는 듯 보였지만, 항쟁은 이미 유신체제의 균열을 불러오고 있었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항쟁의 전개 과정에서 볼 수 있듯, 부마민주항쟁에서 특징적인 사실은 먼저 시위대의 가장 큰 분노의 대상은 공화당사와 경찰·파출소였다는 점, 다음으로 ‘부유층’에 대한 시위대의 공공연한 공격, 세 번째로 “부가가치세를 철폐하라”, “잘 먹고 잘 살아라”라는 외침에서 드러나듯이 세무서에 대한 공격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문사·방송국에 대한 공격을 들 수 있다.&lt;br /&gt;
&lt;br /&gt;
부마민주항쟁은 1970년대 유신체제 밑에서 쌓였던 침묵하는 언론, 조세, 시민을 억압하는 경찰에 대한 불만 등 정치·사회·경제·문화·종교 등 각 부문에 걸친 여러 모순의 폭발이었고, 헌법 개정과 긴급조치로 겨우 유지되던 유신체제와 박정희 정권의 붕괴를 촉진시킨 결정적인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10.26사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항쟁은 1980년 5월 18일의 광주 민주화운동과 1987년 6월 민주항쟁에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된다.&lt;br /&gt;
===기여===&lt;br /&gt;
[[호빵이👻]]: 부마항쟁 페이지 전체 작성&lt;br /&gt;
&lt;br /&gt;
=='''5.18민주화운동'''==&lt;br /&gt;
===타임라인===&lt;br /&gt;
===원인===&lt;br /&gt;
====유신체제의 붕괴====&lt;br /&gt;
&lt;br /&gt;
[[파일:김재규.jpg|섬네일|오른쪽|암살 당시 상황을 재현하는 김재규]]&lt;br /&gt;
&lt;br /&gt;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amp;lt;small&amp;gt; - 김재규&amp;lt;/small&amp;gt;&lt;br /&gt;
1979년 10월 4일 신민당 총재 김영삼이 국회에서 의원직을 제명당하자 10월 15부터 10월 20까지 부산 · 마산 등지에서는 부마항쟁이 일어났고, 이의 해결을 둘러싼 노선대립으로 갈등 중 10월 26일 &amp;lt;ins&amp;gt;[[김재규]]&amp;lt;/ins&amp;gt;가 박정희를 살해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ins&amp;gt;[[10.26 사태]]&amp;lt;/ins&amp;gt;의 사후 수습과정에서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을 중심으로 신군부 세력이 부상하였으며, 이들은 &amp;lt;ins&amp;gt;[[12.12 사건]]&amp;lt;/ins&amp;gt;의 하극상을 통하여 군부를 장악하였다. 1980년 2월 29일 김대중 등이 복권되었으나 그 해 봄, 신군부는 최규하 과도 정부를 유명무실하게 하고 국민들이 요구하는 민주주의와 이를 위한 명확한 정치일정 제시를 거부하면서 권력기반을 구축하였다.&lt;br /&gt;
&lt;br /&gt;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lt;br /&gt;
한 시대의 대격변을 예고하는 단초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시작됐다. 1979년 8월 9일 오전, 신민당의 당사 4층 강당에서는 봉제업체인 YH무역주식회사의 여성노동자 200여명이 기업주의 폐업에 반발하여 폐업조치 철회 농성을 벌였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인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신민당이 당사 건물을 내준 것이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폭력을 동원하여 농성을 해산시켰다. 결국 이 사건은 노동 탄압 사건을 넘어선 야당에 대한 정치 탄압 사건으로 발전하였다.&lt;br /&gt;
&lt;br /&gt;
이날 경찰은 1000여명의 진압대원을 신민당사로 난입시켜 농성을 하고 있던 174명의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로 밖으로 끌어냈다. 또한 경찰은 총재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김영삼 총재와 당 간부들을 끌어내면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박정희 정권은 이 노동자 농성 사건을 빌미로 신민당 분열공작을 시도하였다. 유신정권과 비밀리에 결탁한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 3명이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 부총재 전원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접수시켰다. 그리고 법원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신민당 총재단의 직무 집행을 정지시키고 박정희 정권의 꼭두각시를 총재직무대행으로 선임하였다.&lt;br /&gt;
&lt;br /&gt;
아울러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의 동교동 자택을 전면 봉쇄하였고,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에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끊으라고 요구한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즈』 회견내용을 “반헌정적, 반민족적 작태”로 몰아서 국회에 징계 동의안을 제출했다. 10월 4일 오후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의원 159명은 여당 총회장에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제명 결의안을 '''기습적으로''' 처리해 버렸다.&lt;br /&gt;
&lt;br /&gt;
노사분규 사태로 시작된 사건이 제1야당 당수의 의원직 제명으로 확대된 정치적 사태를 지켜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유신체제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이 고조되었다. 또한 이 사건은 그동안 다소 주춤하던 대학가에 반유신 반독재 운동의 열기가 다시 확산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청춘을 바쳐, 학생 운동====&lt;br /&gt;
&lt;br /&gt;
[[파일:서울의_봄.JPG|섬네일|오른쪽|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앞에 모인 시위대]]&lt;br /&gt;
&lt;br /&gt;
군부의 재집권 야욕에 대한 국민적 저항은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표출되었다. 1980년 3월, 서울대 총학생회 출범을 시작으로 4월 초순에는 전국의 주요 대학들이 총학생회를 결성하기 시작하였다. 대학별로 독재 정권에 아부했던 어용교수와 족벌사학 퇴진 운동을 벌였고, 특히 병영집체훈련(당시 대학 신입생들은 의무적으로 군부대에 10일 간 입대하여 각종 군사훈련을 이수해야 했다.) 거부가 주요 이슈로 전면 등장했다. 각 대학의 병영집체훈련 거부운동이 본격화되고 전국적인 쟁점으로 떠오르자 신군부는 신문, 방송을 통해 ‘학생들의 안보의식 결여’를 비난하고 교내 시위·농성을 집중적으로 보도하게 했다.  5월 1일에 서울대가 입영훈련 거부투쟁 철회를 결정하고 ‘계엄령 해제’와 ‘유신잔당 퇴진’, ‘정부개헌중단’과 ‘노동 3권 보장’ 등을 요구하기 시작하면서 대학가는 이제까지의 학내 문제 중심의 운동에서 정치개혁을 위한 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그간 정부와 대학 간에 팽팽하게 유지되던 긴장 관계는 폭발 직전으로 내닫게 된 것이다.&lt;br /&gt;
&lt;br /&gt;
약 열흘 간의 대정부 투쟁을 준비한 대학가는 5월 10일 고려대 총학생회장실에서 열린 ‘총학생회장단 회의’에 참석한 전국 23개 대학 대표들은 ‘비상계엄의 즉각 해제’와 ‘전두환, 신현확 등 유신잔당 퇴진’ 등을 결의하고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정세에 대한 공동대처 방안을 마련했다. 이후 5월 13일부터 5월 14일에 걸쳐 서울 · 부산 · 대구 · 광주 등 37개 대학에서 계엄철폐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5월 15일에는 서울역에서 시위가 발생하는 등 학생시위는 서울시가지를 거의 마비시키는 등 야간까지 지속되어 사태가 절정에 달하면서 신군부 세력을 위협하였다. 5월 16일 24개 대학 학생대표들은 당분간 시국의 추이를 관망하기로 결정하고 가두시위를 중단하면서 소강상태에 돌입하는 듯하였다.&lt;br /&gt;
&lt;br /&gt;
====1980년 봄의 광주====&lt;br /&gt;
5월 17일 신군부 세력이 이전까지는 제주도를 제외한 지역에 한정되었던 비상계엄을 전국에 확대하는 조치인 계엄포고 10호(17일 24시에 발효: 각 대학 휴교령 포함)를 밤 9시 40분에 의결하고 밤 11시 40분에 발표하면서 밤 11시를 전후한 시점부터 김대중 · 김종필이 연행되는 등 권력형 부정축재자 및 소요조종 혐의자, 학생 시위 주동자가 체포되었다. 이날 밤 광주지역의 사회운동·학생운동의 지도자도 상당수가 검거되었다. 광주의 검거대상자는 전남대 12명, 조선대 10명 등 총 22명이었다. 전남에서 계엄합동수사단은 광주505보안대가 중심이고, 중앙정보부, 경찰 등이 보조역할을 했다. 전남 계엄합동수사단은 22대 차량과 86명의 인원이 출동해 정동년 등 복적생들과 대학의 총학생회 간부들을 집중 검거했다.&lt;br /&gt;
&lt;br /&gt;
한편 육군본부는 14일 오전 7시55분에 국가 중요 보안목표와 주요대학에 군 병력 배치 명령을 하달했다. 이 명령에 따라 전남북계엄분소장인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광주 시내 주요 시설물에 이날 오후부터 계엄병력을 배치했다. 31사단 96연대 병력이 광주시내 KBS건물에 42명, MBC 21명, CBS 11명, VOC(전일방송) 11명 등 주요 방송사 건물에 배치돼 경비에 들어간 것이다.&lt;br /&gt;
&lt;br /&gt;
이날 오후 전교사령관은 7공수여단의 광주배치에 따른 수송수단 지원도 미리 협의했다. 그리고 5월 8일부터 16일 사이에 공수부대 수뇌부들도 헬기를 타고 서울에서 내려와 광주 상무대의 전투병과교육사령부를 방문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광주에서 시위가 격화되면 즉각적으로 최정예 군부대를 동원해서 진압할 준비를 철저하게 갖추고 있었다. 5월 18일에 시작된 광주의 비극은 그 이전에 이미 시한폭탄처럼 준비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lt;br /&gt;
{{구글지도 | 위도=35.175961433346885 | 경도=126.90865311973532 | 줌=13 }}  [[파일:금남로.JPG|섬네일|오른쪽|금남로 앞에 집결한 버스와 시민군]]&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18일&amp;lt;/span&amp;gt;&lt;br /&gt;
휴교령이 내려질 경우 교문 앞에서 집결한다는 결의에 따라 학생들은 5월 18일 오전 전남대학교 앞에 모였다. 공수부대원들이 전남대 앞 시위를 저지하자 대학생들은 광주역에 재집결해서 시위를 이어갔다. 시위대가 점차 늘어나면서 공수부대원이 시내에서 시위진압에 나섰으며 18일 오후 1시부터 무차별 진압작전이 이루어져 부상자가 속출하였다.&lt;br /&gt;
&lt;br /&gt;
군인들이 금남로 등 시내 중심가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이나 여자를 마구 구타하고 짓밟으며 찌르는 등의 잔혹 행동을 하자 시민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이에 시위대는 오후 4시 이후 파출소 파괴 등 적극공세에 나섰다. '''계엄군의 과잉 무력진압은 시위를 해산시키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오히려 시민들을 단결시켰으며, 결국 19일 시민 · 학생 연대가 발생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lt;br /&gt;
&lt;br /&gt;
 '''''광주 애국 시민 여러분! 이것이 웬 말입니까? 웬 벼락이란 말입니까? 죄 없는 학생들을 총칼로 찔러 죽이고 몽둥이로 두들겨 트럭으로 실어가며 부녀자를 발가벗겨 총칼로 찌르는 놈들이 이 누구란 말입니까? 이제 우리가 살길은 전시민이 하나로 뭉쳐 청년 학생들을 보호하고 유신잔당과 극악무도한 살인마 전두환 일파와 공수 특전단 놈들을 한놈도 남김없이 쳐부수는 길 뿐입니다. 우리는 이제 다 보았습니다. 다 알게 되었읍니다. 왜 학생들이 그토록 소리 높이 외쳤는가를, 우리의 적은 경찰도 군대도 아닙니다. 우리의 적은 전국민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바로 유신잔당과 전두환 일파 그놈들입니다.''''' &amp;lt;small&amp;gt; - 1980년 5월 19일에 '광주시민민주투쟁회'명의의 호소문&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19일&amp;lt;/span&amp;gt;&lt;br /&gt;
19일 오전에는 일시적 소강상태였으나 오후 들어서 분노한 학생 · 시민들이 군 · 경찰과 공방전을 벌이면서 시위는 점차 격화되었다. '''시민들은 공포감에서 벗어나 자신의 생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단순한 학생시위에서 시민봉기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계엄군은 시위대를 포위하여 구타하였으며 일부 고등학생까지 포함된 시위대는 돌과 화염병으로 저항하였고 파출소와 방송국 등에 침입하였다. 뒤처진 공수부대를 공격하거나 고립된 차량을 포위하기도 하였으며 총과 방패를 빼앗기도 하였고, 오후 4시 50분 시민들에게 포위된 계엄군의 장갑차에서 최초의 발포가 있었다. 19일 밤비가 내리는 가운데 시위가 산발적으로 계속되었으며, 20일 오전 비가 그치고 대규모 시위는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오후부터 다시 시작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20일&amp;lt;/span&amp;gt;&lt;br /&gt;
'''20일 오후 6시부터 택시와 버스 운전 기사들이 광주역과 무등경기장에 모여 대형 버스와 트럭을 앞세우고 일시에 금남로에 집결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들을 앞세운 시위는 계엄군을 몰아내는 데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였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5.18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에 &amp;lt;ins&amp;gt;[[지대한 영향]]&amp;lt;/ins&amp;gt;을 끼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학생 운동에 뛰어든 많은 대학생들은 대학교에 들어와서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의 실상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아 학생 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군부정권은 5.18 이후로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다. 전두환은 김대중 등에게 '광주 사태'의 책임을 물어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했고,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 선언을 한 직후, 8월 27일 소위 체육관 선거를 통해 전두환은 대통령 자리를 탈취했다.&lt;br /&gt;
&lt;br /&gt;
지역적인 면에서는 '''광주광역시를 비롯한 전라도 지역의 트라우마'''로 작용해 이후의 민주정의당 및 &amp;lt;ins&amp;gt;[[3당 합당]]&amp;lt;/ins&amp;gt;으로 이어지는 보수 세력에 대해 적대심을 가지고, 민주당계 정당의 표밭이 되는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미 박정희 정부 시절부터 유무형의 정치적인 차별을 받고 있었지만 5.18의 참상은 전라도가 다시는 보수 세력을 지지하지 않게 만들 정도로 심각한 사건이며 호남소외론의 가장 결정적인 명분이 되었다.&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이나자키로빈]]: 5.18 민주화운동 페이지 전체 작성&lt;br /&gt;
&lt;br /&gt;
=='''6월민주항쟁'''==&lt;br /&gt;
===타임라인===&lt;br /&gt;
===원인===&lt;br /&gt;
1985년 2 · 12총선에서 신한민주당이 승리한 것을 기점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가 날로 커졌다. 1986년 개헌서명운동의 성과로 국회 내 개헌특위가 만들어졌지만, 여야 간 개헌 협상은 난항을 거듭하였다. 이를 빌미로 1987년 4월 13일 전두환은 대통령 임기 내 개헌을 거부하고, 기존 제5공화국 헌법으로 차기 대통령 선거를 치르겠다는 이른바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였다. 전두환 정부가 이렇게 개헌 거부를 공식화한 상황에서 5월 18일 정의구현사제단이 지난 1987년 1월 발생한 [[박종철고문치사사건]]이 정권 차원에서 은폐 ·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폭로하였다. 많은 시민들이 크게 분노하였고, 야당과 민주화운동 진영은 전두환 정부에 정면으로 맞서기 위한 투쟁에 본격적으로 돌입하였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먼저 1987년 5월 27일 야당과 재야, 종교계 등이 힘을 모아 ‘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여당인 민주정의당에서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6월 10일에 맞춰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6 · 10국민대회)’를 치르기로 결정하였다. 대학생들은 국본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를 중심으로 6 · 10국민대회에 호응하여 6월 초부터 각 대학별로 연일 집회와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6 · 10국민대회 하루 전날인 6월 9일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교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는 곧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학생들은 물론 시민들의 분노가 들끓었다. 이러한 분노 속에서 6 · 10국민대회가 열렸다. 경찰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6 · 10국민대회가 열리는 성공회대성당을 원천 봉쇄하였다. 그 결과 6 · 10국민대회는 대회장에 미리 들어가 있던 소수의 인원만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대회 예정 시간인 오후 6시 이전부터 서울 시내 곳곳에서 대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시민들도 다양한 방식으로 6 · 10국민대회와 학생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날 밤 늦게까지 시위를 벌이던 학생들은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이후 5일 동안 농성을 계속하였다. 애초 계획된 것은 아니었지만 대학생들의 명동성당 농성은 6 · 10국민대회가 단발성 행사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인 저항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lt;br /&gt;
&lt;br /&gt;
명동성당 농성을 거치며 항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유월항쟁의 전국화 과정에는 일정한 패턴이 존재하였다. 6월 10일 서울 외에도 전국 주요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위가 벌어졌지만, 15일까지 항쟁의 중심은 6 · 10국민대회와 명동성당 농성이 전개된 서울이었다. 하지만 6월 15일 경부터는 부산, 대전, 진주 등에서 격렬한 시위가 전개되었다. 그러다가 6월 20일부터 대규모 시위가 광주, 전주, 순천, 익산 등 호남 지방으로 옮겨졌다. 6 · 10국민대회 이후 약 20일 동안 전국 곳곳에서 매일 평균 100회 이상의 시위가 동시다발로 벌어졌다. 특히 6월 18일 ‘최루탄추방대회’와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은 전국 곳곳에서 한꺼번에 1백만 명 이상이 참여하였다. 갈수록 참가 지역이 전국 곳곳으로 확산되어 대도시, 중소도시뿐만 아니라 농촌 지역의 군 단위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6월 26일 하루에만 37~38개 시 · 군에서 시위가 동시에 벌어졌다. 유월항쟁에 참가한 연 인원은 400~500만 명으로 추산된다.&lt;br /&gt;
&lt;br /&gt;
반면 유월항쟁의 전국적 동시다발 시위는 경찰 병력을 분산시켰다. 분산된 경찰 병력으로는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거센 시위의 물결을 막아 낼 수 없었다. 경찰이 시위 진압에 최루탄을 남발하면서 최루탄도 점차 고갈되기 시작하였다. 유월항쟁 기간 동안 경찰이 사용한 최루탄만 총 67만 발이 넘었다. 더불어, 전두환 정권이 집권 내내 강조했던 88서울올림픽이 얼마 남지 않아 미국 등 국제사회의 이목이 집중된 상황에서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운동 때처럼 유혈 사태와 대량 학살을 반복하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무엇보다 군대를 동원하더라도 이러한 대규모 시민 항쟁을 진압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결국 경찰력으로 항쟁을 막기 힘들고, 군대 투입도 어렵다고 판단한 전두환 정권은 1987년 6월 29일 ‘ 6 · 29민주화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하였다. 그리고 그동안 의식불명 상태에 있었던 이한열이 7월 5일 끝내 사망하였다. 5일장 후 7월 9일 치러진 이한열의 노제에 100만 명의 인파가 모인 것을 끝으로 약 한 달 동안 지속된 유월항쟁은 마무리되었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1987년 유월항쟁이 대통령직선제 개헌이라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이 항쟁에 동참한 학생과 시민들의 요구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제시한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 개헌’이라는 슬로건으로 모아졌기 때문이었다. 유월항쟁은 이러한 민주화 세력의 통합성, 즉 각기 다른 성격과 지향을 가진 여러 주체들이 모두 동의할 수 있는 ‘최소 강령’하에 ‘최대 연합’으로 결집하였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lt;br /&gt;
===기여===&lt;br /&gt;
[[딩잉잉]]:6월민주항쟁 페이지 전체 작성&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기밀문서]]&lt;br /&gt;
[[분류:4.19혁명관련]]&lt;br /&gt;
[[분류:부마항쟁관련]]&lt;br /&gt;
[[분류:5.18민주화운동관련]]&lt;br /&gt;
[[분류:6월민주항쟁관련]]&lt;br /&gt;
[[분류:뎐]]&lt;br /&gt;
[[분류:이나자키로빈]]&lt;br /&gt;
[[분류:호빵이👻]]&lt;br /&gt;
[[분류:•ᴗ•]]&lt;br /&gt;
[[분류:딩잉잉]]&lt;/div&gt;</summary>
		<author><name>이나자키로빈</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8%B0%EB%B0%80%EB%AC%B8%EC%84%9C&amp;diff=31946</id>
		<title>기밀문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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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8T08:46:2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나자키로빈: /* 컨텐츠 주제 */&lt;/p&gt;
&lt;hr /&gt;
&lt;div&gt;=='''컨텐츠 주제'''==&lt;br /&gt;
[[파일:이한열.JPG]]&lt;br /&gt;
&lt;br /&gt;
&amp;lt;font size=&amp;quot;6&amp;quot;&amp;gt;'''&amp;lt;span style=&amp;quot;color:#CD0000&amp;quot;&amp;gt;투쟁의 불꽃, 자유의 환호: 민주항쟁의 기적&amp;lt;/span&amp;gt;'''&amp;lt;/font&amp;gt;&lt;br /&gt;
&lt;br /&gt;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으로 일궈낸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역사에 대해 함께 살펴보자.&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lt;br /&gt;
=='''팀원'''==&lt;br /&gt;
*오현지(2022131143) [[뎐]]&amp;lt;br/&amp;gt;&lt;br /&gt;
*김여원(2023130209) [[이나자키로빈]]&amp;lt;br/&amp;gt;&lt;br /&gt;
*김하은(2022131345) [[호빵이👻]]&amp;lt;br/&amp;gt;&lt;br /&gt;
*박정원(2023130350) [[•ᴗ•]]&amp;lt;br/&amp;gt;&lt;br /&gt;
*최필중(2023130216) [[딩잉잉]]&amp;lt;br/&amp;gt;&lt;br /&gt;
&lt;br /&gt;
=='''기획의도'''==&lt;br /&gt;
===기획배경===&lt;br /&gt;
1945년 광복 이후 대한민국 국민들은 자유민주국가로서의 미래를 기대했으나 실상은 그러지 못했다.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보여주듯 현재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는 그것을 누리지 못한 앞선 세대들의 목숨을 바친 항쟁의 대가이다. 민주항쟁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의 핵심 동력이었다. 오늘날 우리나라 민주의식의 중요한 기둥이 되는 네 가지 항쟁을 선별하고 각 항쟁의 배경, 전개과정, 의의를 비롯해 세부적이고 자세한 내용에 대한 기사를 작성한다.&lt;br /&gt;
===기획목적===&lt;br /&gt;
작금의 현실까지 오기에는 수없이 많은 투쟁이 있었지만 4.19혁명, 부마항쟁, 5.18민주항쟁, 6월민주항쟁이라는 네 가지 사건을 살펴보기로 한 것은 가장 많이 다뤄지고, 가장 많이 알려진 사건이기 때문이다. 관련된 사건과 역사 인물들에 대해 자세히 적어 내어 민주항쟁의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지 않으면 알기 힘든 각 민주항쟁의 자세한 내막을 밝혀낸다.&lt;br /&gt;
===기대하는 바===&lt;br /&gt;
타임라인과 온톨로지를 활용해 내용의 전반적인 이해를 돕고 자세한 설명을 통해 사건의 자세한 내막을 들어낸다. 네 가지 항쟁을 각각 큰 목차로 설정하고 세부 기사를 그 내부에 작성해 독자의 관심과 수요에 부합하는 정보를 전달하는 데 효과적일 것으로 기대된다. 민주항쟁에 참여한 사람들의 희생과 투쟁에 대한 존경심을 부르고 역사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다.&lt;br /&gt;
===기여===&lt;br /&gt;
[[뎐]], [[이나자키로빈]], [[호빵이👻]]: 기획의도 페이지 작성&lt;br /&gt;
&lt;br /&gt;
=='''온톨로지'''==&lt;br /&gt;
{{NetworkGraph | title=민주항쟁.lst}}&lt;br /&gt;
[[민주항쟁.lst]]&lt;br /&gt;
===기여===&lt;br /&gt;
*[[뎐]]: 온톨로지 제작&lt;br /&gt;
=='''컨텐츠 구조'''==&lt;br /&gt;
===클래스(Class)===&lt;br /&gt;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color:white&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0%&amp;quot; | 클래스 !! style=&amp;quot;width:40%&amp;quot; | 설명 !! style=&amp;quot;45%&amp;quot; | 노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제||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대표 키워드인 민주항쟁을 주제로서 나타내었다 || 만주항쟁&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항쟁||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민주화운동 시기 발생했던 주요 운동들을 ‘항쟁’이라는 키워드로 분류하였다. || 4.19혁명, 부마항쟁, 5.18 민주화운동, 6월민주항쟁&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사건||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항쟁의 원인, 결과가 되는 사건을 정리하였다|| 3.15부정선거, 고려대 4.18학생시위, 3.15의거, YH사건, 10.26사태, 12.12 군사반란, 비상계엄령,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고문추방민족대행진, 4.13호헌조치, 6.29선언, 대통령직선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지역||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요 항쟁들이 일어났던 지역을 정리하였다|| 마산, 부산, 광주&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인물||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요사건들을 발생시킨 인물, 참여했던 인물을 묶어서 정리하였다|| 이승만, 이기붕, 김주열, 박정희, 김재규, 전두환, 신군부, 시민군, 박종철, 이한열, 노태우&lt;br /&gt;
|-&lt;br /&gt;
|}&lt;br /&gt;
===관계성(Relation)===&lt;br /&gt;
*&amp;lt;font color=#228B22&amp;gt;'''~은 ~에 속한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주요 항쟁들이 민주항쟁에 속함을 나타내거나 인물의 소속을 나타낸다.&lt;br /&gt;
***해당노드:&lt;br /&gt;
***#4.19혁명 -&amp;gt; 민주항쟁&lt;br /&gt;
***#부마항쟁 -&amp;gt; 민주항쟁&lt;br /&gt;
***#5.18민주화운동 -&amp;gt; 민주항쟁&lt;br /&gt;
***#6월 민주항쟁 -&amp;gt; 민주항쟁&lt;br /&gt;
***#전두환 -&amp;gt; 신군부&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의 원인이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어떠한 사건과 인과관계를 이루는 또다른 사건 혹은 인물을 설명한다.&lt;br /&gt;
***#이기붕 -&amp;gt; 3.15부정선거&lt;br /&gt;
***#김주열 -&amp;gt; 고려대 4.18학생시위&lt;br /&gt;
***#고려대 4.18학생시위 -&amp;gt; 4.19혁명&lt;br /&gt;
***#3.15의거 -&amp;gt; 4.19혁명&lt;br /&gt;
***#김주열 -&amp;gt; 4.19혁명&lt;br /&gt;
***#3.15부정선거 -&amp;gt; 3.15의거&lt;br /&gt;
***#YH사건 -&amp;gt; 부마항쟁&lt;br /&gt;
***#부마항쟁 -&amp;gt; 10.26사태&lt;br /&gt;
***#박정희 -&amp;gt; 10.26사태&lt;br /&gt;
***#비상계엄령 -&amp;gt; 5.18민주화운동&lt;br /&gt;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 -&amp;gt; 고문추방민족대행진&lt;br /&gt;
***#고문추방민족대행진 -&amp;gt; 4.13호헌조치&lt;br /&gt;
***#4.13호헌조치 -&amp;gt; 6월민주항쟁&lt;br /&gt;
***#6월민주항쟁 -&amp;gt; 6.29선언&lt;br /&gt;
***#6월민주항쟁 -&amp;gt; 대통령직선제&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을 발생시켰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사건과 그 사건을 직접적으로 발생시킨 인물을 연결한다.&lt;br /&gt;
***#이승만 -&amp;gt; 3.15부정선거&lt;br /&gt;
***#김재규 -&amp;gt; 10.26사태&lt;br /&gt;
***#신군부 -&amp;gt; 1212군사반란&lt;br /&gt;
***#전두환 -&amp;gt; 비상계엄령&lt;br /&gt;
***#노태우 -&amp;gt; 6.29선언&lt;br /&gt;
***#시민군 -&amp;gt; 5.18민주화운동&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에 희생되었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민주항쟁의 진압과정 등 에서 희생된 인물을 설명한다&lt;br /&gt;
***#김주열 -&amp;gt; 3.15의거&lt;br /&gt;
***#이한열 -&amp;gt; 6월 민주항쟁&lt;br /&gt;
***#박종철&amp;gt;박종철 고문치사 사건&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에서 발생했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설명한다.&lt;br /&gt;
***#3.15의거 -&amp;gt; 마산&lt;br /&gt;
***#부마항쟁 -&amp;gt; 부산&lt;br /&gt;
***#부마항쟁 -&amp;gt; 마산&lt;br /&gt;
***#5.18민주화운동 -&amp;gt; 광주&lt;br /&gt;
===기여===&lt;br /&gt;
*[[뎐]]: 컨텐츠 구조 페이지 작성&lt;br /&gt;
=='''4.19혁명'''==&lt;br /&gt;
===타임라인===&lt;br /&gt;
===원인===&lt;br /&gt;
====[[3.15 부정선거]]====&lt;br /&gt;
1959년 대한민국은 제 4대 대통령 선거와 제 5대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당시 자유당에서는 12년째 대통령으로서 연임 중이던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이기붕]]'''을 부통령 후보로 선임하였다. 그러나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병세의 악화로 사망하게 되고,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은 확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선거의 초점은 자유당의 조병옥과 민주당의 장면 간의 선거전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본격적인 선거유세의 시작과 함께 정부와 여당의 잇따른 야당선거운동 방해사건으로 부정선거가 시작되었다. 1960년 3월 15일 선거가 시작된 이후에도 다양한 방법의 부정행위가 일어났고, 개표 결과 이승만과 이기붕의 득표가 100%에 육박하는 결과로 나오자 자유당은 득표수를 하향 조정해 최종 집계에 반영할 것을 지시했다. 결국 이승만 88.7%, 이기붕 79%의 득표율을 가지며 정, 부통령에 당선되었다.&amp;lt;ref&amp;gt;자세한 내용은 3.15부정선거 페이지 참조&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부정선거 반대시위, [[3.15 의거]]의 발생====&lt;br /&gt;
3.15 부정선거를 반대하는 시위는 초기에는 중, 고등학생들의 산발적인 시위로 전개되었다. 3월 15일 선거일 밤 경남 마산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으며,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여 1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amp;lt;br/&amp;gt;&lt;br /&gt;
3월 15일 실종되었던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4월 11일 마산부두에서 발견되자 마산 시민들은 시청, 파출소 등을 파괴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2차 시위가 일어난 것이다.&lt;br /&gt;
&lt;br /&gt;
====[[고려대학교 4.18 학생시위]]의 발생====&lt;br /&gt;
1, 2차 마산시위를 계기로 부정선거 무효와 이승만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났다. '4.18 선언문'을 낭독하고 시내로 진출하였다. 이는 4월 19일 학생들과 일반 시민들이 가세한 대규모 시위로 이어지게 되었다.&lt;br /&gt;
====전국적인 4.19 혁명의 발생====&lt;br /&gt;
분노한 전국의 시민과 학생들이 다음 날인 4월 19일 총궐기하여 '이승만 하야와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며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경찰은 또다시 무차별 발포에 나섰고,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여기에 이승만 정부는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지만 이러한 압박에도 시민들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lt;br /&gt;
====이승만 대통령의 혼란 수습 시도====&lt;br /&gt;
이승만 대통령은 4.19 시위로 인한 정국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4월 20일 국무위원 전원과 자유당 당무위원 전원의 사표를 제출하도록 지시하였으며, 4월 23일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외무장관에 허정, 내무장관에 이호, 법무장관에 권승렬을 임명하는 등 개각을 단행하였다.&amp;lt;br/&amp;gt;&lt;br /&gt;
그러나 미국은 4.19직후 국무부 성명을 통해 한국에서 발생한 사태는 부정선거에 대한 '군중의 불만'을 반영한 것 이라고 했고, 양유찬 주미대사를 불러 '부정선거에 대한 철저한 조사', '경향신문 복간', '국가보안법 개정' 등을 촉구하는 각서를 전달하였다.&amp;lt;br/&amp;gt;&lt;br /&gt;
그리고 4월 25일, 이승만 정권에 분노한 전국 27개 대학 258명의 교수가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 모여 14개항의 시국 선언문을 발표하며 학생, 시민들과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들은 3.15 부정선거 및 4.19 사태의 책임을 지고 대통령이 물러날 것을 주장하였으며, &amp;quot;학생들의 피에 보답하자&amp;quot;는 플랜 카드를 앞세워 국회의사당까지 행진하였다. &lt;br /&gt;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lt;br /&gt;
무력진압에도 대규모 시위가 이어지며 시민들은 완강하게 투쟁하였다. 4월 26일 시위대가 경무대로 다시 집결하는 등 사태가 심각하게 진행되자, 오전 10시 30분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 성명을 발표하였다. 4월 27일 이승만은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하며 대통령직을 하야하고 하와이로 망명하였으며 자유당 정권도 끝나게 된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우리 국민들, 특히 학생과 청년들의 주도로 이루어진 4.19 혁명은 학생과 일반 대중이 단결하여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아시아 최초의 시건이다. 4.19혁명은 부마항쟁, 5.18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그리고 2017년 촛불시위에 이르기 까지 정권에 대항하는 국민들이 단합을 이루는 초석이 되었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도 시민 저항권에 대한 근거로써 4.19혁명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문구가 있다.&lt;br /&gt;
===기여===&lt;br /&gt;
[[뎐]]: 4.19혁명 페이지 원인, 의의 작성 &lt;br /&gt;
&lt;br /&gt;
[[•ᴗ•]]: 4.19혁명 페이지 전개 작성&lt;br /&gt;
&lt;br /&gt;
=='''부마항쟁'''==&lt;br /&gt;
===타임라인===&lt;br /&gt;
===원인===&lt;br /&gt;
====[[유신 헌법]]과 [[긴급조치]]====&lt;br /&gt;
1971년 선거에서 김대중을 누르고 대통령에 3선된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해 국회 해산,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등 법의 일부 기능을 정지시키고 전국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했다.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된 이른바 유신헌법에 의해 제정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법」 에 의거해 박정희가 제8대 대통령으로 재차 당선되었고, 이 유신 헌법이 발효된 기간을 유신 체제라고 부른다. 유신 체제는 행정, 입법, 사법의 3권을 모두 쥔 대통령이 종신 집권할 수 있도록 설계된 1인 대통령제였다. 박정희는 유신 헌법에 의거해 대통령의 권한으로 취할 수 있었던 특별조치인 긴급조치를 선포함으로써 헌법에 반대하는 시위 및 운동과 방송, 언론 활동을 하는 반정부 인사들을 연행, 체포, 고문하는 등 억압을 가했다.&lt;br /&gt;
&lt;br /&gt;
====한국경제의 위기====&lt;br /&gt;
1970년대 말 한국경제는''' [[제2차 오일쇼크]]'''라는 세계경제의 위기와 결합해 가라앉고 말았다. 경제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정부는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과 함께 '''[[경제안정화정책]]'''을 수용했고, 중소자본가, 봉급생활자, 도시 노동자와 농민 등에 안정화 비용을 부과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이와 같은 안정화 정책은 경제위기로 어려운 처지에 있던 중소기업들의 도산을 가속하여 기업 부도율이 치솟고 하층민들을 더 깊은 고통에 몰아넣었다. 특히 '''부가가치세'''를 도입한 이후 물가가 상승하면서 일상에 타격을 주었으며, 노동집약적 제조업이 집중되었던 부산과 마산에서는 상황이 더욱 심각하여 1979년 부산지역 부도율은 서울의 3배에 달했다.&lt;br /&gt;
&lt;br /&gt;
====YH 사건====&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부산대학교 민주선언문, 학생 시위에서 시민항쟁으로====&lt;br /&gt;
&lt;br /&gt;
1979년 10월 16일 아침 10시 부산대학교 구내 도서관 앞에서 약 500명의 학생들이 모여 “유신정권 물러가라”, “정치탄압 중지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반정부 시위를 벌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민주선언문」]]'''을 통해 민주화, 언론 자유, 인권 보장의 신념을 확인하고, “제도화된 폭력성과 조직적 악의 근원인 유신헌법과 독재집권층의 퇴진만이 5천 만 겨레의 통일의 첫걸음이라고 주장하면서 형제의 피를 요구하는 자유와 민주의 깃발을 우리가 잡고 반민주의 무리, 불의의 무리들을 향해 외치며 나아가자”라고 선언하였다. 이후 학생들은 교문을 나가 거리에서 시위했다. 이때 학생 수는 약 5,000명으로 불어나 있었고, 광복동과 남포동 등 부산시내 중심가까지 진출해 애국가 등의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며, 이를 제지하려는 경찰과 이곳저곳에서 충돌하였다. 비슷한 시간, 부산 동아대학교에서도 1,000여 명의 학생이 부산대학교 학생과 합류하여 가두시위를 벌였다. 부산대학교 데모로 학생 수백 명이 연행되고 100여 명이 다쳤지만 이튿날인 10월 17일에는 시위가 더욱 격화되어 학생들뿐만 아니라 다수의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학생 시위는 점차 시민항쟁의 양상을 띠어갔다.''' 밤늦게까지 계속된 시위에서 시민들은 충무파출소, 한국방송공사, 서구청, 부산세무서 등을 파괴하였고, 경찰차량을 불태우거나 파손시켰다.&lt;br /&gt;
&lt;br /&gt;
====마산의 시민항쟁====&lt;br /&gt;
&lt;br /&gt;
민주항쟁은 18일에 마산으로 확산되었다. 늦은 오후에는 1,000여 명의 경남대학교 학생들이 마산 시내 번화가에 산발적으로 집결했으며, 일부시민들도 가담해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어두워진 다음 학생과 시민들의 데모는 격화되어 파출소, 공화당사, 방송국, 신문사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파괴하였다. 이튿날인 19일에는 시위가 더욱 치열해져 마산 시내는 한때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저녁 8시경, 시위대는 경남대학과 마산대학&amp;lt;ref&amp;gt;1985년 창원대학으로 교명이 변경되었으며, 현재의 마산대학교와 다르다.&amp;lt;/ref&amp;gt;, 그리고 고등학생까지 합세하여 약 8,000명에 이르렀으며, 시내 곳곳에서 몽둥이를 들고 동사무소와 파출소로 몰려가 시설을 파괴하였고, 경찰차량에 불을 질렀다.&lt;br /&gt;
&lt;br /&gt;
====부산 계엄령, 마산 지역 위수령====&lt;br /&gt;
&lt;br /&gt;
부산대학교 시위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박정희 정부는 학생 시위로 시작된 시위가 대규모 시민항쟁으로 사태가 심상치 않게 확대되어가자 강경책으로 대응했다. 정부는 18일 자정을 기해 '''부산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동원한 과격한 진압'''을 통해 [[파일:계엄포고문.jpg|200px|섬네일|부산지역에 내려진 계엄포고문을 일고 있는 시민들]] 시위 참여자들과 이를 방조한 일반 시민들까지 1,058명을 연행하고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으며, 부산지구 계엄사령부는 각 대학 휴교조처와 야간통행금지시간을 2시간 연장하는 등의 항이 담긴 포고문을 발표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부산에 계엄령이 선포된 이튿날인 19일에 마산 시위가 확대됨에 따라 그 다음날인 10월 20일 정오, 정부가 '''마산 및 창원 지역에 위수령을 발령'''해 통행금지 시간이 연장되고, 경남대학 등에는 휴교조처가 취해졌고, 24일에는 깡패를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132명을 검거, 23명을 구속했다. 이렇게 '''표면적으로는 부마민주항쟁이 단시간에 진압되는 듯 보였지만, 항쟁은 이미 유신체제의 균열을 불러오고 있었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항쟁의 전개 과정에서 볼 수 있듯, 부마민주항쟁에서 특징적인 사실은 먼저 시위대의 가장 큰 분노의 대상은 공화당사와 경찰·파출소였다는 점, 다음으로 ‘부유층’에 대한 시위대의 공공연한 공격, 세 번째로 “부가가치세를 철폐하라”, “잘 먹고 잘 살아라”라는 외침에서 드러나듯이 세무서에 대한 공격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문사·방송국에 대한 공격을 들 수 있다.&lt;br /&gt;
&lt;br /&gt;
부마민주항쟁은 1970년대 유신체제 밑에서 쌓였던 침묵하는 언론, 조세, 시민을 억압하는 경찰에 대한 불만 등 정치·사회·경제·문화·종교 등 각 부문에 걸친 여러 모순의 폭발이었고, 헌법 개정과 긴급조치로 겨우 유지되던 유신체제와 박정희 정권의 붕괴를 촉진시킨 결정적인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10.26사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항쟁은 1980년 5월 18일의 광주 민주화운동과 1987년 6월 민주항쟁에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된다.&lt;br /&gt;
===기여===&lt;br /&gt;
[[호빵이👻]]: 부마항쟁 페이지 전체 작성&lt;br /&gt;
&lt;br /&gt;
=='''5.18민주화운동'''==&lt;br /&gt;
===타임라인===&lt;br /&gt;
===원인===&lt;br /&gt;
====유신체제의 붕괴====&lt;br /&gt;
&lt;br /&gt;
[[파일:김재규.jpg|섬네일|오른쪽|암살 당시 상황을 재현하는 김재규]]&lt;br /&gt;
&lt;br /&gt;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amp;lt;small&amp;gt; - 김재규&amp;lt;/small&amp;gt;&lt;br /&gt;
1979년 10월 4일 신민당 총재 김영삼이 국회에서 의원직을 제명당하자 10월 15부터 10월 20까지 부산 · 마산 등지에서는 부마항쟁이 일어났고, 이의 해결을 둘러싼 노선대립으로 갈등 중 10월 26일 &amp;lt;ins&amp;gt;[[김재규]]&amp;lt;/ins&amp;gt;가 박정희를 살해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ins&amp;gt;[[10.26 사태]]&amp;lt;/ins&amp;gt;의 사후 수습과정에서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을 중심으로 신군부 세력이 부상하였으며, 이들은 &amp;lt;ins&amp;gt;[[12.12 사건]]&amp;lt;/ins&amp;gt;의 하극상을 통하여 군부를 장악하였다. 1980년 2월 29일 김대중 등이 복권되었으나 그 해 봄, 신군부는 최규하 과도 정부를 유명무실하게 하고 국민들이 요구하는 민주주의와 이를 위한 명확한 정치일정 제시를 거부하면서 권력기반을 구축하였다.&lt;br /&gt;
&lt;br /&gt;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lt;br /&gt;
한 시대의 대격변을 예고하는 단초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시작됐다. 1979년 8월 9일 오전, 신민당의 당사 4층 강당에서는 봉제업체인 YH무역주식회사의 여성노동자 200여명이 기업주의 폐업에 반발하여 폐업조치 철회 농성을 벌였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인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신민당이 당사 건물을 내준 것이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폭력을 동원하여 농성을 해산시켰다. 결국 이 사건은 노동 탄압 사건을 넘어선 야당에 대한 정치 탄압 사건으로 발전하였다.&lt;br /&gt;
&lt;br /&gt;
이날 경찰은 1000여명의 진압대원을 신민당사로 난입시켜 농성을 하고 있던 174명의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로 밖으로 끌어냈다. 또한 경찰은 총재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김영삼 총재와 당 간부들을 끌어내면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박정희 정권은 이 노동자 농성 사건을 빌미로 신민당 분열공작을 시도하였다. 유신정권과 비밀리에 결탁한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 3명이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 부총재 전원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접수시켰다. 그리고 법원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신민당 총재단의 직무 집행을 정지시키고 박정희 정권의 꼭두각시를 총재직무대행으로 선임하였다.&lt;br /&gt;
&lt;br /&gt;
아울러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의 동교동 자택을 전면 봉쇄하였고,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에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끊으라고 요구한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즈』 회견내용을 “반헌정적, 반민족적 작태”로 몰아서 국회에 징계 동의안을 제출했다. 10월 4일 오후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의원 159명은 여당 총회장에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제명 결의안을 '''기습적으로''' 처리해 버렸다.&lt;br /&gt;
&lt;br /&gt;
노사분규 사태로 시작된 사건이 제1야당 당수의 의원직 제명으로 확대된 정치적 사태를 지켜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유신체제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이 고조되었다. 또한 이 사건은 그동안 다소 주춤하던 대학가에 반유신 반독재 운동의 열기가 다시 확산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청춘을 바쳐, 학생 운동====&lt;br /&gt;
&lt;br /&gt;
[[파일:서울의_봄.JPG|섬네일|오른쪽|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앞에 모인 시위대]]&lt;br /&gt;
&lt;br /&gt;
군부의 재집권 야욕에 대한 국민적 저항은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표출되었다. 1980년 3월, 서울대 총학생회 출범을 시작으로 4월 초순에는 전국의 주요 대학들이 총학생회를 결성하기 시작하였다. 대학별로 독재 정권에 아부했던 어용교수와 족벌사학 퇴진 운동을 벌였고, 특히 병영집체훈련(당시 대학 신입생들은 의무적으로 군부대에 10일 간 입대하여 각종 군사훈련을 이수해야 했다.) 거부가 주요 이슈로 전면 등장했다. 각 대학의 병영집체훈련 거부운동이 본격화되고 전국적인 쟁점으로 떠오르자 신군부는 신문, 방송을 통해 ‘학생들의 안보의식 결여’를 비난하고 교내 시위·농성을 집중적으로 보도하게 했다.  5월 1일에 서울대가 입영훈련 거부투쟁 철회를 결정하고 ‘계엄령 해제’와 ‘유신잔당 퇴진’, ‘정부개헌중단’과 ‘노동 3권 보장’ 등을 요구하기 시작하면서 대학가는 이제까지의 학내 문제 중심의 운동에서 정치개혁을 위한 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그간 정부와 대학 간에 팽팽하게 유지되던 긴장 관계는 폭발 직전으로 내닫게 된 것이다.&lt;br /&gt;
&lt;br /&gt;
약 열흘 간의 대정부 투쟁을 준비한 대학가는 5월 10일 고려대 총학생회장실에서 열린 ‘총학생회장단 회의’에 참석한 전국 23개 대학 대표들은 ‘비상계엄의 즉각 해제’와 ‘전두환, 신현확 등 유신잔당 퇴진’ 등을 결의하고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정세에 대한 공동대처 방안을 마련했다. 이후 5월 13일부터 5월 14일에 걸쳐 서울 · 부산 · 대구 · 광주 등 37개 대학에서 계엄철폐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5월 15일에는 서울역에서 시위가 발생하는 등 학생시위는 서울시가지를 거의 마비시키는 등 야간까지 지속되어 사태가 절정에 달하면서 신군부 세력을 위협하였다. 5월 16일 24개 대학 학생대표들은 당분간 시국의 추이를 관망하기로 결정하고 가두시위를 중단하면서 소강상태에 돌입하는 듯하였다.&lt;br /&gt;
&lt;br /&gt;
====1980년 봄의 광주====&lt;br /&gt;
5월 17일 신군부 세력이 이전까지는 제주도를 제외한 지역에 한정되었던 비상계엄을 전국에 확대하는 조치인 계엄포고 10호(17일 24시에 발효: 각 대학 휴교령 포함)를 밤 9시 40분에 의결하고 밤 11시 40분에 발표하면서 밤 11시를 전후한 시점부터 김대중 · 김종필이 연행되는 등 권력형 부정축재자 및 소요조종 혐의자, 학생 시위 주동자가 체포되었다. 이날 밤 광주지역의 사회운동·학생운동의 지도자도 상당수가 검거되었다. 광주의 검거대상자는 전남대 12명, 조선대 10명 등 총 22명이었다. 전남에서 계엄합동수사단은 광주505보안대가 중심이고, 중앙정보부, 경찰 등이 보조역할을 했다. 전남 계엄합동수사단은 22대 차량과 86명의 인원이 출동해 정동년 등 복적생들과 대학의 총학생회 간부들을 집중 검거했다.&lt;br /&gt;
&lt;br /&gt;
한편 육군본부는 14일 오전 7시55분에 국가 중요 보안목표와 주요대학에 군 병력 배치 명령을 하달했다. 이 명령에 따라 전남북계엄분소장인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광주 시내 주요 시설물에 이날 오후부터 계엄병력을 배치했다. 31사단 96연대 병력이 광주시내 KBS건물에 42명, MBC 21명, CBS 11명, VOC(전일방송) 11명 등 주요 방송사 건물에 배치돼 경비에 들어간 것이다.&lt;br /&gt;
&lt;br /&gt;
이날 오후 전교사령관은 7공수여단의 광주배치에 따른 수송수단 지원도 미리 협의했다. 그리고 5월 8일부터 16일 사이에 공수부대 수뇌부들도 헬기를 타고 서울에서 내려와 광주 상무대의 전투병과교육사령부를 방문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광주에서 시위가 격화되면 즉각적으로 최정예 군부대를 동원해서 진압할 준비를 철저하게 갖추고 있었다. 5월 18일에 시작된 광주의 비극은 그 이전에 이미 시한폭탄처럼 준비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lt;br /&gt;
{{구글지도 | 위도=35.175961433346885 | 경도=126.90865311973532 | 줌=13 }}  [[파일:금남로.JPG|섬네일|오른쪽|금남로 앞에 집결한 버스와 시민군]]&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18일&amp;lt;/span&amp;gt;&lt;br /&gt;
휴교령이 내려질 경우 교문 앞에서 집결한다는 결의에 따라 학생들은 5월 18일 오전 전남대학교 앞에 모였다. 공수부대원들이 전남대 앞 시위를 저지하자 대학생들은 광주역에 재집결해서 시위를 이어갔다. 시위대가 점차 늘어나면서 공수부대원이 시내에서 시위진압에 나섰으며 18일 오후 1시부터 무차별 진압작전이 이루어져 부상자가 속출하였다.&lt;br /&gt;
&lt;br /&gt;
군인들이 금남로 등 시내 중심가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이나 여자를 마구 구타하고 짓밟으며 찌르는 등의 잔혹 행동을 하자 시민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이에 시위대는 오후 4시 이후 파출소 파괴 등 적극공세에 나섰다. '''계엄군의 과잉 무력진압은 시위를 해산시키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오히려 시민들을 단결시켰으며, 결국 19일 시민 · 학생 연대가 발생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lt;br /&gt;
&lt;br /&gt;
 '''''광주 애국 시민 여러분! 이것이 웬 말입니까? 웬 벼락이란 말입니까? 죄 없는 학생들을 총칼로 찔러 죽이고 몽둥이로 두들겨 트럭으로 실어가며 부녀자를 발가벗겨 총칼로 찌르는 놈들이 이 누구란 말입니까? 이제 우리가 살길은 전시민이 하나로 뭉쳐 청년 학생들을 보호하고 유신잔당과 극악무도한 살인마 전두환 일파와 공수 특전단 놈들을 한놈도 남김없이 쳐부수는 길 뿐입니다. 우리는 이제 다 보았습니다. 다 알게 되었읍니다. 왜 학생들이 그토록 소리 높이 외쳤는가를, 우리의 적은 경찰도 군대도 아닙니다. 우리의 적은 전국민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바로 유신잔당과 전두환 일파 그놈들입니다.''''' &amp;lt;small&amp;gt; - 1980년 5월 19일에 '광주시민민주투쟁회'명의의 호소문&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19일&amp;lt;/span&amp;gt;&lt;br /&gt;
19일 오전에는 일시적 소강상태였으나 오후 들어서 분노한 학생 · 시민들이 군 · 경찰과 공방전을 벌이면서 시위는 점차 격화되었다. '''시민들은 공포감에서 벗어나 자신의 생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단순한 학생시위에서 시민봉기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계엄군은 시위대를 포위하여 구타하였으며 일부 고등학생까지 포함된 시위대는 돌과 화염병으로 저항하였고 파출소와 방송국 등에 침입하였다. 뒤처진 공수부대를 공격하거나 고립된 차량을 포위하기도 하였으며 총과 방패를 빼앗기도 하였고, 오후 4시 50분 시민들에게 포위된 계엄군의 장갑차에서 최초의 발포가 있었다. 19일 밤비가 내리는 가운데 시위가 산발적으로 계속되었으며, 20일 오전 비가 그치고 대규모 시위는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오후부터 다시 시작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20일&amp;lt;/span&amp;gt;&lt;br /&gt;
'''20일 오후 6시부터 택시와 버스 운전 기사들이 광주역과 무등경기장에 모여 대형 버스와 트럭을 앞세우고 일시에 금남로에 집결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들을 앞세운 시위는 계엄군을 몰아내는 데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였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5.18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에 &amp;lt;ins&amp;gt;[[지대한 영향]]&amp;lt;/ins&amp;gt;을 끼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학생 운동에 뛰어든 많은 대학생들은 대학교에 들어와서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의 실상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아 학생 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군부정권은 5.18 이후로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다. 전두환은 김대중 등에게 '광주 사태'의 책임을 물어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했고,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 선언을 한 직후, 8월 27일 소위 체육관 선거를 통해 전두환은 대통령 자리를 탈취했다.&lt;br /&gt;
&lt;br /&gt;
지역적인 면에서는 '''광주광역시를 비롯한 전라도 지역의 트라우마'''로 작용해 이후의 민주정의당 및 &amp;lt;ins&amp;gt;[[3당 합당]]&amp;lt;/ins&amp;gt;으로 이어지는 보수 세력에 대해 적대심을 가지고, 민주당계 정당의 표밭이 되는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미 박정희 정부 시절부터 유무형의 정치적인 차별을 받고 있었지만 5.18의 참상은 전라도가 다시는 보수 세력을 지지하지 않게 만들 정도로 심각한 사건이며 호남소외론의 가장 결정적인 명분이 되었다.&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이나자키로빈]]: 5.18 민주화운동 페이지 전체 작성&lt;br /&gt;
&lt;br /&gt;
=='''6월민주항쟁'''==&lt;br /&gt;
===타임라인===&lt;br /&gt;
===원인===&lt;br /&gt;
1985년 2 · 12총선에서 신한민주당이 승리한 것을 기점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가 날로 커졌다. 1986년 개헌서명운동의 성과로 국회 내 개헌특위가 만들어졌지만, 여야 간 개헌 협상은 난항을 거듭하였다. 이를 빌미로 1987년 4월 13일 전두환은 대통령 임기 내 개헌을 거부하고, 기존 제5공화국 헌법으로 차기 대통령 선거를 치르겠다는 이른바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였다. 전두환 정부가 이렇게 개헌 거부를 공식화한 상황에서 5월 18일 정의구현사제단이 지난 1987년 1월 발생한 [[박종철고문치사사건]]이 정권 차원에서 은폐 ·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폭로하였다. 많은 시민들이 크게 분노하였고, 야당과 민주화운동 진영은 전두환 정부에 정면으로 맞서기 위한 투쟁에 본격적으로 돌입하였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먼저 1987년 5월 27일 야당과 재야, 종교계 등이 힘을 모아 ‘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여당인 민주정의당에서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6월 10일에 맞춰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6 · 10국민대회)’를 치르기로 결정하였다. 대학생들은 국본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를 중심으로 6 · 10국민대회에 호응하여 6월 초부터 각 대학별로 연일 집회와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6 · 10국민대회 하루 전날인 6월 9일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교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는 곧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학생들은 물론 시민들의 분노가 들끓었다. 이러한 분노 속에서 6 · 10국민대회가 열렸다. 경찰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6 · 10국민대회가 열리는 성공회대성당을 원천 봉쇄하였다. 그 결과 6 · 10국민대회는 대회장에 미리 들어가 있던 소수의 인원만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대회 예정 시간인 오후 6시 이전부터 서울 시내 곳곳에서 대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시민들도 다양한 방식으로 6 · 10국민대회와 학생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날 밤 늦게까지 시위를 벌이던 학생들은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이후 5일 동안 농성을 계속하였다. 애초 계획된 것은 아니었지만 대학생들의 명동성당 농성은 6 · 10국민대회가 단발성 행사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인 저항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lt;br /&gt;
&lt;br /&gt;
명동성당 농성을 거치며 항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유월항쟁의 전국화 과정에는 일정한 패턴이 존재하였다. 6월 10일 서울 외에도 전국 주요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위가 벌어졌지만, 15일까지 항쟁의 중심은 6 · 10국민대회와 명동성당 농성이 전개된 서울이었다. 하지만 6월 15일 경부터는 부산, 대전, 진주 등에서 격렬한 시위가 전개되었다. 그러다가 6월 20일부터 대규모 시위가 광주, 전주, 순천, 익산 등 호남 지방으로 옮겨졌다. 6 · 10국민대회 이후 약 20일 동안 전국 곳곳에서 매일 평균 100회 이상의 시위가 동시다발로 벌어졌다. 특히 6월 18일 ‘최루탄추방대회’와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은 전국 곳곳에서 한꺼번에 1백만 명 이상이 참여하였다. 갈수록 참가 지역이 전국 곳곳으로 확산되어 대도시, 중소도시뿐만 아니라 농촌 지역의 군 단위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6월 26일 하루에만 37~38개 시 · 군에서 시위가 동시에 벌어졌다. 유월항쟁에 참가한 연 인원은 400~500만 명으로 추산된다.&lt;br /&gt;
&lt;br /&gt;
반면 유월항쟁의 전국적 동시다발 시위는 경찰 병력을 분산시켰다. 분산된 경찰 병력으로는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거센 시위의 물결을 막아 낼 수 없었다. 경찰이 시위 진압에 최루탄을 남발하면서 최루탄도 점차 고갈되기 시작하였다. 유월항쟁 기간 동안 경찰이 사용한 최루탄만 총 67만 발이 넘었다. 더불어, 전두환 정권이 집권 내내 강조했던 88서울올림픽이 얼마 남지 않아 미국 등 국제사회의 이목이 집중된 상황에서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운동 때처럼 유혈 사태와 대량 학살을 반복하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무엇보다 군대를 동원하더라도 이러한 대규모 시민 항쟁을 진압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결국 경찰력으로 항쟁을 막기 힘들고, 군대 투입도 어렵다고 판단한 전두환 정권은 1987년 6월 29일 ‘ 6 · 29민주화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하였다. 그리고 그동안 의식불명 상태에 있었던 이한열이 7월 5일 끝내 사망하였다. 5일장 후 7월 9일 치러진 이한열의 노제에 100만 명의 인파가 모인 것을 끝으로 약 한 달 동안 지속된 유월항쟁은 마무리되었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1987년 유월항쟁이 대통령직선제 개헌이라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이 항쟁에 동참한 학생과 시민들의 요구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제시한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 개헌’이라는 슬로건으로 모아졌기 때문이었다. 유월항쟁은 이러한 민주화 세력의 통합성, 즉 각기 다른 성격과 지향을 가진 여러 주체들이 모두 동의할 수 있는 ‘최소 강령’하에 ‘최대 연합’으로 결집하였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lt;br /&gt;
===기여===&lt;br /&gt;
[[딩잉잉]]:6월민주항쟁 페이지 전체 작성&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기밀문서]]&lt;br /&gt;
[[분류:4.19혁명관련]]&lt;br /&gt;
[[분류:부마항쟁관련]]&lt;br /&gt;
[[분류:5.18민주화운동관련]]&lt;br /&gt;
[[분류:6월민주항쟁관련]]&lt;br /&gt;
[[분류:뎐]]&lt;br /&gt;
[[분류:이나자키로빈]]&lt;br /&gt;
[[분류:호빵이👻]]&lt;br /&gt;
[[분류:•ᴗ•]]&lt;br /&gt;
[[분류:딩잉잉]]&lt;/div&gt;</summary>
		<author><name>이나자키로빈</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8%B0%EB%B0%80%EB%AC%B8%EC%84%9C&amp;diff=31944</id>
		<title>기밀문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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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8T08:45:4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나자키로빈: &lt;/p&gt;
&lt;hr /&gt;
&lt;div&gt;=='''컨텐츠 주제'''==&lt;br /&gt;
[[파일:이한열.JPG]]&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CD0000&amp;quot;&amp;gt;투쟁의 불꽃, 자유의 환호: 민주항쟁의 기적&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으로 일궈낸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역사에 대해 함께 살펴보자.&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팀원'''==&lt;br /&gt;
*오현지(2022131143) [[뎐]]&amp;lt;br/&amp;gt;&lt;br /&gt;
*김여원(2023130209) [[이나자키로빈]]&amp;lt;br/&amp;gt;&lt;br /&gt;
*김하은(2022131345) [[호빵이👻]]&amp;lt;br/&amp;gt;&lt;br /&gt;
*박정원(2023130350) [[•ᴗ•]]&amp;lt;br/&amp;gt;&lt;br /&gt;
*최필중(2023130216) [[딩잉잉]]&amp;lt;br/&amp;gt;&lt;br /&gt;
&lt;br /&gt;
=='''기획의도'''==&lt;br /&gt;
===기획배경===&lt;br /&gt;
1945년 광복 이후 대한민국 국민들은 자유민주국가로서의 미래를 기대했으나 실상은 그러지 못했다.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보여주듯 현재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는 그것을 누리지 못한 앞선 세대들의 목숨을 바친 항쟁의 대가이다. 민주항쟁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의 핵심 동력이었다. 오늘날 우리나라 민주의식의 중요한 기둥이 되는 네 가지 항쟁을 선별하고 각 항쟁의 배경, 전개과정, 의의를 비롯해 세부적이고 자세한 내용에 대한 기사를 작성한다.&lt;br /&gt;
===기획목적===&lt;br /&gt;
작금의 현실까지 오기에는 수없이 많은 투쟁이 있었지만 4.19혁명, 부마항쟁, 5.18민주항쟁, 6월민주항쟁이라는 네 가지 사건을 살펴보기로 한 것은 가장 많이 다뤄지고, 가장 많이 알려진 사건이기 때문이다. 관련된 사건과 역사 인물들에 대해 자세히 적어 내어 민주항쟁의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지 않으면 알기 힘든 각 민주항쟁의 자세한 내막을 밝혀낸다.&lt;br /&gt;
===기대하는 바===&lt;br /&gt;
타임라인과 온톨로지를 활용해 내용의 전반적인 이해를 돕고 자세한 설명을 통해 사건의 자세한 내막을 들어낸다. 네 가지 항쟁을 각각 큰 목차로 설정하고 세부 기사를 그 내부에 작성해 독자의 관심과 수요에 부합하는 정보를 전달하는 데 효과적일 것으로 기대된다. 민주항쟁에 참여한 사람들의 희생과 투쟁에 대한 존경심을 부르고 역사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다.&lt;br /&gt;
===기여===&lt;br /&gt;
[[뎐]], [[이나자키로빈]], [[호빵이👻]]: 기획의도 페이지 작성&lt;br /&gt;
&lt;br /&gt;
=='''온톨로지'''==&lt;br /&gt;
{{NetworkGraph | title=민주항쟁.lst}}&lt;br /&gt;
[[민주항쟁.lst]]&lt;br /&gt;
===기여===&lt;br /&gt;
*[[뎐]]: 온톨로지 제작&lt;br /&gt;
=='''컨텐츠 구조'''==&lt;br /&gt;
===클래스(Class)===&lt;br /&gt;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color:white&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0%&amp;quot; | 클래스 !! style=&amp;quot;width:40%&amp;quot; | 설명 !! style=&amp;quot;45%&amp;quot; | 노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제||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대표 키워드인 민주항쟁을 주제로서 나타내었다 || 만주항쟁&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항쟁||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민주화운동 시기 발생했던 주요 운동들을 ‘항쟁’이라는 키워드로 분류하였다. || 4.19혁명, 부마항쟁, 5.18 민주화운동, 6월민주항쟁&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사건||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항쟁의 원인, 결과가 되는 사건을 정리하였다|| 3.15부정선거, 고려대 4.18학생시위, 3.15의거, YH사건, 10.26사태, 12.12 군사반란, 비상계엄령,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고문추방민족대행진, 4.13호헌조치, 6.29선언, 대통령직선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지역||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요 항쟁들이 일어났던 지역을 정리하였다|| 마산, 부산, 광주&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인물||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요사건들을 발생시킨 인물, 참여했던 인물을 묶어서 정리하였다|| 이승만, 이기붕, 김주열, 박정희, 김재규, 전두환, 신군부, 시민군, 박종철, 이한열, 노태우&lt;br /&gt;
|-&lt;br /&gt;
|}&lt;br /&gt;
===관계성(Relation)===&lt;br /&gt;
*&amp;lt;font color=#228B22&amp;gt;'''~은 ~에 속한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주요 항쟁들이 민주항쟁에 속함을 나타내거나 인물의 소속을 나타낸다.&lt;br /&gt;
***해당노드:&lt;br /&gt;
***#4.19혁명 -&amp;gt; 민주항쟁&lt;br /&gt;
***#부마항쟁 -&amp;gt; 민주항쟁&lt;br /&gt;
***#5.18민주화운동 -&amp;gt; 민주항쟁&lt;br /&gt;
***#6월 민주항쟁 -&amp;gt; 민주항쟁&lt;br /&gt;
***#전두환 -&amp;gt; 신군부&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의 원인이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어떠한 사건과 인과관계를 이루는 또다른 사건 혹은 인물을 설명한다.&lt;br /&gt;
***#이기붕 -&amp;gt; 3.15부정선거&lt;br /&gt;
***#김주열 -&amp;gt; 고려대 4.18학생시위&lt;br /&gt;
***#고려대 4.18학생시위 -&amp;gt; 4.19혁명&lt;br /&gt;
***#3.15의거 -&amp;gt; 4.19혁명&lt;br /&gt;
***#김주열 -&amp;gt; 4.19혁명&lt;br /&gt;
***#3.15부정선거 -&amp;gt; 3.15의거&lt;br /&gt;
***#YH사건 -&amp;gt; 부마항쟁&lt;br /&gt;
***#부마항쟁 -&amp;gt; 10.26사태&lt;br /&gt;
***#박정희 -&amp;gt; 10.26사태&lt;br /&gt;
***#비상계엄령 -&amp;gt; 5.18민주화운동&lt;br /&gt;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 -&amp;gt; 고문추방민족대행진&lt;br /&gt;
***#고문추방민족대행진 -&amp;gt; 4.13호헌조치&lt;br /&gt;
***#4.13호헌조치 -&amp;gt; 6월민주항쟁&lt;br /&gt;
***#6월민주항쟁 -&amp;gt; 6.29선언&lt;br /&gt;
***#6월민주항쟁 -&amp;gt; 대통령직선제&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을 발생시켰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사건과 그 사건을 직접적으로 발생시킨 인물을 연결한다.&lt;br /&gt;
***#이승만 -&amp;gt; 3.15부정선거&lt;br /&gt;
***#김재규 -&amp;gt; 10.26사태&lt;br /&gt;
***#신군부 -&amp;gt; 1212군사반란&lt;br /&gt;
***#전두환 -&amp;gt; 비상계엄령&lt;br /&gt;
***#노태우 -&amp;gt; 6.29선언&lt;br /&gt;
***#시민군 -&amp;gt; 5.18민주화운동&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에 희생되었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민주항쟁의 진압과정 등 에서 희생된 인물을 설명한다&lt;br /&gt;
***#김주열 -&amp;gt; 3.15의거&lt;br /&gt;
***#이한열 -&amp;gt; 6월 민주항쟁&lt;br /&gt;
***#박종철&amp;gt;박종철 고문치사 사건&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에서 발생했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설명한다.&lt;br /&gt;
***#3.15의거 -&amp;gt; 마산&lt;br /&gt;
***#부마항쟁 -&amp;gt; 부산&lt;br /&gt;
***#부마항쟁 -&amp;gt; 마산&lt;br /&gt;
***#5.18민주화운동 -&amp;gt; 광주&lt;br /&gt;
===기여===&lt;br /&gt;
*[[뎐]]: 컨텐츠 구조 페이지 작성&lt;br /&gt;
=='''4.19혁명'''==&lt;br /&gt;
===타임라인===&lt;br /&gt;
===원인===&lt;br /&gt;
====[[3.15 부정선거]]====&lt;br /&gt;
1959년 대한민국은 제 4대 대통령 선거와 제 5대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당시 자유당에서는 12년째 대통령으로서 연임 중이던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이기붕]]'''을 부통령 후보로 선임하였다. 그러나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병세의 악화로 사망하게 되고,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은 확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선거의 초점은 자유당의 조병옥과 민주당의 장면 간의 선거전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본격적인 선거유세의 시작과 함께 정부와 여당의 잇따른 야당선거운동 방해사건으로 부정선거가 시작되었다. 1960년 3월 15일 선거가 시작된 이후에도 다양한 방법의 부정행위가 일어났고, 개표 결과 이승만과 이기붕의 득표가 100%에 육박하는 결과로 나오자 자유당은 득표수를 하향 조정해 최종 집계에 반영할 것을 지시했다. 결국 이승만 88.7%, 이기붕 79%의 득표율을 가지며 정, 부통령에 당선되었다.&amp;lt;ref&amp;gt;자세한 내용은 3.15부정선거 페이지 참조&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부정선거 반대시위, [[3.15 의거]]의 발생====&lt;br /&gt;
3.15 부정선거를 반대하는 시위는 초기에는 중, 고등학생들의 산발적인 시위로 전개되었다. 3월 15일 선거일 밤 경남 마산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으며,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여 1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amp;lt;br/&amp;gt;&lt;br /&gt;
3월 15일 실종되었던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4월 11일 마산부두에서 발견되자 마산 시민들은 시청, 파출소 등을 파괴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2차 시위가 일어난 것이다.&lt;br /&gt;
&lt;br /&gt;
====[[고려대학교 4.18 학생시위]]의 발생====&lt;br /&gt;
1, 2차 마산시위를 계기로 부정선거 무효와 이승만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났다. '4.18 선언문'을 낭독하고 시내로 진출하였다. 이는 4월 19일 학생들과 일반 시민들이 가세한 대규모 시위로 이어지게 되었다.&lt;br /&gt;
====전국적인 4.19 혁명의 발생====&lt;br /&gt;
분노한 전국의 시민과 학생들이 다음 날인 4월 19일 총궐기하여 '이승만 하야와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며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경찰은 또다시 무차별 발포에 나섰고,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여기에 이승만 정부는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지만 이러한 압박에도 시민들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lt;br /&gt;
====이승만 대통령의 혼란 수습 시도====&lt;br /&gt;
이승만 대통령은 4.19 시위로 인한 정국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4월 20일 국무위원 전원과 자유당 당무위원 전원의 사표를 제출하도록 지시하였으며, 4월 23일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외무장관에 허정, 내무장관에 이호, 법무장관에 권승렬을 임명하는 등 개각을 단행하였다.&amp;lt;br/&amp;gt;&lt;br /&gt;
그러나 미국은 4.19직후 국무부 성명을 통해 한국에서 발생한 사태는 부정선거에 대한 '군중의 불만'을 반영한 것 이라고 했고, 양유찬 주미대사를 불러 '부정선거에 대한 철저한 조사', '경향신문 복간', '국가보안법 개정' 등을 촉구하는 각서를 전달하였다.&amp;lt;br/&amp;gt;&lt;br /&gt;
그리고 4월 25일, 이승만 정권에 분노한 전국 27개 대학 258명의 교수가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 모여 14개항의 시국 선언문을 발표하며 학생, 시민들과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들은 3.15 부정선거 및 4.19 사태의 책임을 지고 대통령이 물러날 것을 주장하였으며, &amp;quot;학생들의 피에 보답하자&amp;quot;는 플랜 카드를 앞세워 국회의사당까지 행진하였다. &lt;br /&gt;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lt;br /&gt;
무력진압에도 대규모 시위가 이어지며 시민들은 완강하게 투쟁하였다. 4월 26일 시위대가 경무대로 다시 집결하는 등 사태가 심각하게 진행되자, 오전 10시 30분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 성명을 발표하였다. 4월 27일 이승만은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하며 대통령직을 하야하고 하와이로 망명하였으며 자유당 정권도 끝나게 된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우리 국민들, 특히 학생과 청년들의 주도로 이루어진 4.19 혁명은 학생과 일반 대중이 단결하여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아시아 최초의 시건이다. 4.19혁명은 부마항쟁, 5.18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그리고 2017년 촛불시위에 이르기 까지 정권에 대항하는 국민들이 단합을 이루는 초석이 되었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도 시민 저항권에 대한 근거로써 4.19혁명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문구가 있다.&lt;br /&gt;
===기여===&lt;br /&gt;
[[뎐]]: 4.19혁명 페이지 원인, 의의 작성 &lt;br /&gt;
&lt;br /&gt;
[[•ᴗ•]]: 4.19혁명 페이지 전개 작성&lt;br /&gt;
&lt;br /&gt;
=='''부마항쟁'''==&lt;br /&gt;
===타임라인===&lt;br /&gt;
===원인===&lt;br /&gt;
====[[유신 헌법]]과 [[긴급조치]]====&lt;br /&gt;
1971년 선거에서 김대중을 누르고 대통령에 3선된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해 국회 해산,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등 법의 일부 기능을 정지시키고 전국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했다.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된 이른바 유신헌법에 의해 제정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법」 에 의거해 박정희가 제8대 대통령으로 재차 당선되었고, 이 유신 헌법이 발효된 기간을 유신 체제라고 부른다. 유신 체제는 행정, 입법, 사법의 3권을 모두 쥔 대통령이 종신 집권할 수 있도록 설계된 1인 대통령제였다. 박정희는 유신 헌법에 의거해 대통령의 권한으로 취할 수 있었던 특별조치인 긴급조치를 선포함으로써 헌법에 반대하는 시위 및 운동과 방송, 언론 활동을 하는 반정부 인사들을 연행, 체포, 고문하는 등 억압을 가했다.&lt;br /&gt;
&lt;br /&gt;
====한국경제의 위기====&lt;br /&gt;
1970년대 말 한국경제는''' [[제2차 오일쇼크]]'''라는 세계경제의 위기와 결합해 가라앉고 말았다. 경제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정부는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과 함께 '''[[경제안정화정책]]'''을 수용했고, 중소자본가, 봉급생활자, 도시 노동자와 농민 등에 안정화 비용을 부과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이와 같은 안정화 정책은 경제위기로 어려운 처지에 있던 중소기업들의 도산을 가속하여 기업 부도율이 치솟고 하층민들을 더 깊은 고통에 몰아넣었다. 특히 '''부가가치세'''를 도입한 이후 물가가 상승하면서 일상에 타격을 주었으며, 노동집약적 제조업이 집중되었던 부산과 마산에서는 상황이 더욱 심각하여 1979년 부산지역 부도율은 서울의 3배에 달했다.&lt;br /&gt;
&lt;br /&gt;
====YH 사건====&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부산대학교 민주선언문, 학생 시위에서 시민항쟁으로====&lt;br /&gt;
&lt;br /&gt;
1979년 10월 16일 아침 10시 부산대학교 구내 도서관 앞에서 약 500명의 학생들이 모여 “유신정권 물러가라”, “정치탄압 중지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반정부 시위를 벌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민주선언문」]]'''을 통해 민주화, 언론 자유, 인권 보장의 신념을 확인하고, “제도화된 폭력성과 조직적 악의 근원인 유신헌법과 독재집권층의 퇴진만이 5천 만 겨레의 통일의 첫걸음이라고 주장하면서 형제의 피를 요구하는 자유와 민주의 깃발을 우리가 잡고 반민주의 무리, 불의의 무리들을 향해 외치며 나아가자”라고 선언하였다. 이후 학생들은 교문을 나가 거리에서 시위했다. 이때 학생 수는 약 5,000명으로 불어나 있었고, 광복동과 남포동 등 부산시내 중심가까지 진출해 애국가 등의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며, 이를 제지하려는 경찰과 이곳저곳에서 충돌하였다. 비슷한 시간, 부산 동아대학교에서도 1,000여 명의 학생이 부산대학교 학생과 합류하여 가두시위를 벌였다. 부산대학교 데모로 학생 수백 명이 연행되고 100여 명이 다쳤지만 이튿날인 10월 17일에는 시위가 더욱 격화되어 학생들뿐만 아니라 다수의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학생 시위는 점차 시민항쟁의 양상을 띠어갔다.''' 밤늦게까지 계속된 시위에서 시민들은 충무파출소, 한국방송공사, 서구청, 부산세무서 등을 파괴하였고, 경찰차량을 불태우거나 파손시켰다.&lt;br /&gt;
&lt;br /&gt;
====마산의 시민항쟁====&lt;br /&gt;
&lt;br /&gt;
민주항쟁은 18일에 마산으로 확산되었다. 늦은 오후에는 1,000여 명의 경남대학교 학생들이 마산 시내 번화가에 산발적으로 집결했으며, 일부시민들도 가담해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어두워진 다음 학생과 시민들의 데모는 격화되어 파출소, 공화당사, 방송국, 신문사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파괴하였다. 이튿날인 19일에는 시위가 더욱 치열해져 마산 시내는 한때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저녁 8시경, 시위대는 경남대학과 마산대학&amp;lt;ref&amp;gt;1985년 창원대학으로 교명이 변경되었으며, 현재의 마산대학교와 다르다.&amp;lt;/ref&amp;gt;, 그리고 고등학생까지 합세하여 약 8,000명에 이르렀으며, 시내 곳곳에서 몽둥이를 들고 동사무소와 파출소로 몰려가 시설을 파괴하였고, 경찰차량에 불을 질렀다.&lt;br /&gt;
&lt;br /&gt;
====부산 계엄령, 마산 지역 위수령====&lt;br /&gt;
&lt;br /&gt;
부산대학교 시위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박정희 정부는 학생 시위로 시작된 시위가 대규모 시민항쟁으로 사태가 심상치 않게 확대되어가자 강경책으로 대응했다. 정부는 18일 자정을 기해 '''부산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동원한 과격한 진압'''을 통해 [[파일:계엄포고문.jpg|200px|섬네일|부산지역에 내려진 계엄포고문을 일고 있는 시민들]] 시위 참여자들과 이를 방조한 일반 시민들까지 1,058명을 연행하고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으며, 부산지구 계엄사령부는 각 대학 휴교조처와 야간통행금지시간을 2시간 연장하는 등의 항이 담긴 포고문을 발표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부산에 계엄령이 선포된 이튿날인 19일에 마산 시위가 확대됨에 따라 그 다음날인 10월 20일 정오, 정부가 '''마산 및 창원 지역에 위수령을 발령'''해 통행금지 시간이 연장되고, 경남대학 등에는 휴교조처가 취해졌고, 24일에는 깡패를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132명을 검거, 23명을 구속했다. 이렇게 '''표면적으로는 부마민주항쟁이 단시간에 진압되는 듯 보였지만, 항쟁은 이미 유신체제의 균열을 불러오고 있었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항쟁의 전개 과정에서 볼 수 있듯, 부마민주항쟁에서 특징적인 사실은 먼저 시위대의 가장 큰 분노의 대상은 공화당사와 경찰·파출소였다는 점, 다음으로 ‘부유층’에 대한 시위대의 공공연한 공격, 세 번째로 “부가가치세를 철폐하라”, “잘 먹고 잘 살아라”라는 외침에서 드러나듯이 세무서에 대한 공격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문사·방송국에 대한 공격을 들 수 있다.&lt;br /&gt;
&lt;br /&gt;
부마민주항쟁은 1970년대 유신체제 밑에서 쌓였던 침묵하는 언론, 조세, 시민을 억압하는 경찰에 대한 불만 등 정치·사회·경제·문화·종교 등 각 부문에 걸친 여러 모순의 폭발이었고, 헌법 개정과 긴급조치로 겨우 유지되던 유신체제와 박정희 정권의 붕괴를 촉진시킨 결정적인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10.26사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항쟁은 1980년 5월 18일의 광주 민주화운동과 1987년 6월 민주항쟁에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된다.&lt;br /&gt;
===기여===&lt;br /&gt;
[[호빵이👻]]: 부마항쟁 페이지 전체 작성&lt;br /&gt;
&lt;br /&gt;
=='''5.18민주화운동'''==&lt;br /&gt;
===타임라인===&lt;br /&gt;
===원인===&lt;br /&gt;
====유신체제의 붕괴====&lt;br /&gt;
&lt;br /&gt;
[[파일:김재규.jpg|섬네일|오른쪽|암살 당시 상황을 재현하는 김재규]]&lt;br /&gt;
&lt;br /&gt;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amp;lt;small&amp;gt; - 김재규&amp;lt;/small&amp;gt;&lt;br /&gt;
1979년 10월 4일 신민당 총재 김영삼이 국회에서 의원직을 제명당하자 10월 15부터 10월 20까지 부산 · 마산 등지에서는 부마항쟁이 일어났고, 이의 해결을 둘러싼 노선대립으로 갈등 중 10월 26일 &amp;lt;ins&amp;gt;[[김재규]]&amp;lt;/ins&amp;gt;가 박정희를 살해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ins&amp;gt;[[10.26 사태]]&amp;lt;/ins&amp;gt;의 사후 수습과정에서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을 중심으로 신군부 세력이 부상하였으며, 이들은 &amp;lt;ins&amp;gt;[[12.12 사건]]&amp;lt;/ins&amp;gt;의 하극상을 통하여 군부를 장악하였다. 1980년 2월 29일 김대중 등이 복권되었으나 그 해 봄, 신군부는 최규하 과도 정부를 유명무실하게 하고 국민들이 요구하는 민주주의와 이를 위한 명확한 정치일정 제시를 거부하면서 권력기반을 구축하였다.&lt;br /&gt;
&lt;br /&gt;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lt;br /&gt;
한 시대의 대격변을 예고하는 단초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시작됐다. 1979년 8월 9일 오전, 신민당의 당사 4층 강당에서는 봉제업체인 YH무역주식회사의 여성노동자 200여명이 기업주의 폐업에 반발하여 폐업조치 철회 농성을 벌였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인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신민당이 당사 건물을 내준 것이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폭력을 동원하여 농성을 해산시켰다. 결국 이 사건은 노동 탄압 사건을 넘어선 야당에 대한 정치 탄압 사건으로 발전하였다.&lt;br /&gt;
&lt;br /&gt;
이날 경찰은 1000여명의 진압대원을 신민당사로 난입시켜 농성을 하고 있던 174명의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로 밖으로 끌어냈다. 또한 경찰은 총재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김영삼 총재와 당 간부들을 끌어내면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박정희 정권은 이 노동자 농성 사건을 빌미로 신민당 분열공작을 시도하였다. 유신정권과 비밀리에 결탁한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 3명이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 부총재 전원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접수시켰다. 그리고 법원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신민당 총재단의 직무 집행을 정지시키고 박정희 정권의 꼭두각시를 총재직무대행으로 선임하였다.&lt;br /&gt;
&lt;br /&gt;
아울러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의 동교동 자택을 전면 봉쇄하였고,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에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끊으라고 요구한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즈』 회견내용을 “반헌정적, 반민족적 작태”로 몰아서 국회에 징계 동의안을 제출했다. 10월 4일 오후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의원 159명은 여당 총회장에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제명 결의안을 '''기습적으로''' 처리해 버렸다.&lt;br /&gt;
&lt;br /&gt;
노사분규 사태로 시작된 사건이 제1야당 당수의 의원직 제명으로 확대된 정치적 사태를 지켜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유신체제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이 고조되었다. 또한 이 사건은 그동안 다소 주춤하던 대학가에 반유신 반독재 운동의 열기가 다시 확산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청춘을 바쳐, 학생 운동====&lt;br /&gt;
&lt;br /&gt;
[[파일:서울의_봄.JPG|섬네일|오른쪽|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앞에 모인 시위대]]&lt;br /&gt;
&lt;br /&gt;
군부의 재집권 야욕에 대한 국민적 저항은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표출되었다. 1980년 3월, 서울대 총학생회 출범을 시작으로 4월 초순에는 전국의 주요 대학들이 총학생회를 결성하기 시작하였다. 대학별로 독재 정권에 아부했던 어용교수와 족벌사학 퇴진 운동을 벌였고, 특히 병영집체훈련(당시 대학 신입생들은 의무적으로 군부대에 10일 간 입대하여 각종 군사훈련을 이수해야 했다.) 거부가 주요 이슈로 전면 등장했다. 각 대학의 병영집체훈련 거부운동이 본격화되고 전국적인 쟁점으로 떠오르자 신군부는 신문, 방송을 통해 ‘학생들의 안보의식 결여’를 비난하고 교내 시위·농성을 집중적으로 보도하게 했다.  5월 1일에 서울대가 입영훈련 거부투쟁 철회를 결정하고 ‘계엄령 해제’와 ‘유신잔당 퇴진’, ‘정부개헌중단’과 ‘노동 3권 보장’ 등을 요구하기 시작하면서 대학가는 이제까지의 학내 문제 중심의 운동에서 정치개혁을 위한 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그간 정부와 대학 간에 팽팽하게 유지되던 긴장 관계는 폭발 직전으로 내닫게 된 것이다.&lt;br /&gt;
&lt;br /&gt;
약 열흘 간의 대정부 투쟁을 준비한 대학가는 5월 10일 고려대 총학생회장실에서 열린 ‘총학생회장단 회의’에 참석한 전국 23개 대학 대표들은 ‘비상계엄의 즉각 해제’와 ‘전두환, 신현확 등 유신잔당 퇴진’ 등을 결의하고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정세에 대한 공동대처 방안을 마련했다. 이후 5월 13일부터 5월 14일에 걸쳐 서울 · 부산 · 대구 · 광주 등 37개 대학에서 계엄철폐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5월 15일에는 서울역에서 시위가 발생하는 등 학생시위는 서울시가지를 거의 마비시키는 등 야간까지 지속되어 사태가 절정에 달하면서 신군부 세력을 위협하였다. 5월 16일 24개 대학 학생대표들은 당분간 시국의 추이를 관망하기로 결정하고 가두시위를 중단하면서 소강상태에 돌입하는 듯하였다.&lt;br /&gt;
&lt;br /&gt;
====1980년 봄의 광주====&lt;br /&gt;
5월 17일 신군부 세력이 이전까지는 제주도를 제외한 지역에 한정되었던 비상계엄을 전국에 확대하는 조치인 계엄포고 10호(17일 24시에 발효: 각 대학 휴교령 포함)를 밤 9시 40분에 의결하고 밤 11시 40분에 발표하면서 밤 11시를 전후한 시점부터 김대중 · 김종필이 연행되는 등 권력형 부정축재자 및 소요조종 혐의자, 학생 시위 주동자가 체포되었다. 이날 밤 광주지역의 사회운동·학생운동의 지도자도 상당수가 검거되었다. 광주의 검거대상자는 전남대 12명, 조선대 10명 등 총 22명이었다. 전남에서 계엄합동수사단은 광주505보안대가 중심이고, 중앙정보부, 경찰 등이 보조역할을 했다. 전남 계엄합동수사단은 22대 차량과 86명의 인원이 출동해 정동년 등 복적생들과 대학의 총학생회 간부들을 집중 검거했다.&lt;br /&gt;
&lt;br /&gt;
한편 육군본부는 14일 오전 7시55분에 국가 중요 보안목표와 주요대학에 군 병력 배치 명령을 하달했다. 이 명령에 따라 전남북계엄분소장인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광주 시내 주요 시설물에 이날 오후부터 계엄병력을 배치했다. 31사단 96연대 병력이 광주시내 KBS건물에 42명, MBC 21명, CBS 11명, VOC(전일방송) 11명 등 주요 방송사 건물에 배치돼 경비에 들어간 것이다.&lt;br /&gt;
&lt;br /&gt;
이날 오후 전교사령관은 7공수여단의 광주배치에 따른 수송수단 지원도 미리 협의했다. 그리고 5월 8일부터 16일 사이에 공수부대 수뇌부들도 헬기를 타고 서울에서 내려와 광주 상무대의 전투병과교육사령부를 방문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광주에서 시위가 격화되면 즉각적으로 최정예 군부대를 동원해서 진압할 준비를 철저하게 갖추고 있었다. 5월 18일에 시작된 광주의 비극은 그 이전에 이미 시한폭탄처럼 준비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lt;br /&gt;
{{구글지도 | 위도=35.175961433346885 | 경도=126.90865311973532 | 줌=13 }}  [[파일:금남로.JPG|섬네일|오른쪽|금남로 앞에 집결한 버스와 시민군]]&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18일&amp;lt;/span&amp;gt;&lt;br /&gt;
휴교령이 내려질 경우 교문 앞에서 집결한다는 결의에 따라 학생들은 5월 18일 오전 전남대학교 앞에 모였다. 공수부대원들이 전남대 앞 시위를 저지하자 대학생들은 광주역에 재집결해서 시위를 이어갔다. 시위대가 점차 늘어나면서 공수부대원이 시내에서 시위진압에 나섰으며 18일 오후 1시부터 무차별 진압작전이 이루어져 부상자가 속출하였다.&lt;br /&gt;
&lt;br /&gt;
군인들이 금남로 등 시내 중심가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이나 여자를 마구 구타하고 짓밟으며 찌르는 등의 잔혹 행동을 하자 시민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이에 시위대는 오후 4시 이후 파출소 파괴 등 적극공세에 나섰다. '''계엄군의 과잉 무력진압은 시위를 해산시키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오히려 시민들을 단결시켰으며, 결국 19일 시민 · 학생 연대가 발생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lt;br /&gt;
&lt;br /&gt;
 '''''광주 애국 시민 여러분! 이것이 웬 말입니까? 웬 벼락이란 말입니까? 죄 없는 학생들을 총칼로 찔러 죽이고 몽둥이로 두들겨 트럭으로 실어가며 부녀자를 발가벗겨 총칼로 찌르는 놈들이 이 누구란 말입니까? 이제 우리가 살길은 전시민이 하나로 뭉쳐 청년 학생들을 보호하고 유신잔당과 극악무도한 살인마 전두환 일파와 공수 특전단 놈들을 한놈도 남김없이 쳐부수는 길 뿐입니다. 우리는 이제 다 보았습니다. 다 알게 되었읍니다. 왜 학생들이 그토록 소리 높이 외쳤는가를, 우리의 적은 경찰도 군대도 아닙니다. 우리의 적은 전국민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바로 유신잔당과 전두환 일파 그놈들입니다.''''' &amp;lt;small&amp;gt; - 1980년 5월 19일에 '광주시민민주투쟁회'명의의 호소문&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19일&amp;lt;/span&amp;gt;&lt;br /&gt;
19일 오전에는 일시적 소강상태였으나 오후 들어서 분노한 학생 · 시민들이 군 · 경찰과 공방전을 벌이면서 시위는 점차 격화되었다. '''시민들은 공포감에서 벗어나 자신의 생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단순한 학생시위에서 시민봉기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계엄군은 시위대를 포위하여 구타하였으며 일부 고등학생까지 포함된 시위대는 돌과 화염병으로 저항하였고 파출소와 방송국 등에 침입하였다. 뒤처진 공수부대를 공격하거나 고립된 차량을 포위하기도 하였으며 총과 방패를 빼앗기도 하였고, 오후 4시 50분 시민들에게 포위된 계엄군의 장갑차에서 최초의 발포가 있었다. 19일 밤비가 내리는 가운데 시위가 산발적으로 계속되었으며, 20일 오전 비가 그치고 대규모 시위는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오후부터 다시 시작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20일&amp;lt;/span&amp;gt;&lt;br /&gt;
'''20일 오후 6시부터 택시와 버스 운전 기사들이 광주역과 무등경기장에 모여 대형 버스와 트럭을 앞세우고 일시에 금남로에 집결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들을 앞세운 시위는 계엄군을 몰아내는 데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였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5.18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에 &amp;lt;ins&amp;gt;[[지대한 영향]]&amp;lt;/ins&amp;gt;을 끼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학생 운동에 뛰어든 많은 대학생들은 대학교에 들어와서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의 실상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아 학생 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군부정권은 5.18 이후로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다. 전두환은 김대중 등에게 '광주 사태'의 책임을 물어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했고,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 선언을 한 직후, 8월 27일 소위 체육관 선거를 통해 전두환은 대통령 자리를 탈취했다.&lt;br /&gt;
&lt;br /&gt;
지역적인 면에서는 '''광주광역시를 비롯한 전라도 지역의 트라우마'''로 작용해 이후의 민주정의당 및 &amp;lt;ins&amp;gt;[[3당 합당]]&amp;lt;/ins&amp;gt;으로 이어지는 보수 세력에 대해 적대심을 가지고, 민주당계 정당의 표밭이 되는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미 박정희 정부 시절부터 유무형의 정치적인 차별을 받고 있었지만 5.18의 참상은 전라도가 다시는 보수 세력을 지지하지 않게 만들 정도로 심각한 사건이며 호남소외론의 가장 결정적인 명분이 되었다.&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이나자키로빈]]: 5.18 민주화운동 페이지 전체 작성&lt;br /&gt;
&lt;br /&gt;
=='''6월민주항쟁'''==&lt;br /&gt;
===타임라인===&lt;br /&gt;
===원인===&lt;br /&gt;
1985년 2 · 12총선에서 신한민주당이 승리한 것을 기점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가 날로 커졌다. 1986년 개헌서명운동의 성과로 국회 내 개헌특위가 만들어졌지만, 여야 간 개헌 협상은 난항을 거듭하였다. 이를 빌미로 1987년 4월 13일 전두환은 대통령 임기 내 개헌을 거부하고, 기존 제5공화국 헌법으로 차기 대통령 선거를 치르겠다는 이른바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였다. 전두환 정부가 이렇게 개헌 거부를 공식화한 상황에서 5월 18일 정의구현사제단이 지난 1987년 1월 발생한 [[박종철고문치사사건]]이 정권 차원에서 은폐 ·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폭로하였다. 많은 시민들이 크게 분노하였고, 야당과 민주화운동 진영은 전두환 정부에 정면으로 맞서기 위한 투쟁에 본격적으로 돌입하였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먼저 1987년 5월 27일 야당과 재야, 종교계 등이 힘을 모아 ‘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여당인 민주정의당에서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6월 10일에 맞춰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6 · 10국민대회)’를 치르기로 결정하였다. 대학생들은 국본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를 중심으로 6 · 10국민대회에 호응하여 6월 초부터 각 대학별로 연일 집회와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6 · 10국민대회 하루 전날인 6월 9일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교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는 곧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학생들은 물론 시민들의 분노가 들끓었다. 이러한 분노 속에서 6 · 10국민대회가 열렸다. 경찰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6 · 10국민대회가 열리는 성공회대성당을 원천 봉쇄하였다. 그 결과 6 · 10국민대회는 대회장에 미리 들어가 있던 소수의 인원만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대회 예정 시간인 오후 6시 이전부터 서울 시내 곳곳에서 대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시민들도 다양한 방식으로 6 · 10국민대회와 학생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날 밤 늦게까지 시위를 벌이던 학생들은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이후 5일 동안 농성을 계속하였다. 애초 계획된 것은 아니었지만 대학생들의 명동성당 농성은 6 · 10국민대회가 단발성 행사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인 저항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lt;br /&gt;
&lt;br /&gt;
명동성당 농성을 거치며 항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유월항쟁의 전국화 과정에는 일정한 패턴이 존재하였다. 6월 10일 서울 외에도 전국 주요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위가 벌어졌지만, 15일까지 항쟁의 중심은 6 · 10국민대회와 명동성당 농성이 전개된 서울이었다. 하지만 6월 15일 경부터는 부산, 대전, 진주 등에서 격렬한 시위가 전개되었다. 그러다가 6월 20일부터 대규모 시위가 광주, 전주, 순천, 익산 등 호남 지방으로 옮겨졌다. 6 · 10국민대회 이후 약 20일 동안 전국 곳곳에서 매일 평균 100회 이상의 시위가 동시다발로 벌어졌다. 특히 6월 18일 ‘최루탄추방대회’와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은 전국 곳곳에서 한꺼번에 1백만 명 이상이 참여하였다. 갈수록 참가 지역이 전국 곳곳으로 확산되어 대도시, 중소도시뿐만 아니라 농촌 지역의 군 단위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6월 26일 하루에만 37~38개 시 · 군에서 시위가 동시에 벌어졌다. 유월항쟁에 참가한 연 인원은 400~500만 명으로 추산된다.&lt;br /&gt;
&lt;br /&gt;
반면 유월항쟁의 전국적 동시다발 시위는 경찰 병력을 분산시켰다. 분산된 경찰 병력으로는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거센 시위의 물결을 막아 낼 수 없었다. 경찰이 시위 진압에 최루탄을 남발하면서 최루탄도 점차 고갈되기 시작하였다. 유월항쟁 기간 동안 경찰이 사용한 최루탄만 총 67만 발이 넘었다. 더불어, 전두환 정권이 집권 내내 강조했던 88서울올림픽이 얼마 남지 않아 미국 등 국제사회의 이목이 집중된 상황에서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운동 때처럼 유혈 사태와 대량 학살을 반복하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무엇보다 군대를 동원하더라도 이러한 대규모 시민 항쟁을 진압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결국 경찰력으로 항쟁을 막기 힘들고, 군대 투입도 어렵다고 판단한 전두환 정권은 1987년 6월 29일 ‘ 6 · 29민주화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하였다. 그리고 그동안 의식불명 상태에 있었던 이한열이 7월 5일 끝내 사망하였다. 5일장 후 7월 9일 치러진 이한열의 노제에 100만 명의 인파가 모인 것을 끝으로 약 한 달 동안 지속된 유월항쟁은 마무리되었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1987년 유월항쟁이 대통령직선제 개헌이라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이 항쟁에 동참한 학생과 시민들의 요구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제시한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 개헌’이라는 슬로건으로 모아졌기 때문이었다. 유월항쟁은 이러한 민주화 세력의 통합성, 즉 각기 다른 성격과 지향을 가진 여러 주체들이 모두 동의할 수 있는 ‘최소 강령’하에 ‘최대 연합’으로 결집하였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lt;br /&gt;
===기여===&lt;br /&gt;
[[딩잉잉]]:6월민주항쟁 페이지 전체 작성&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기밀문서]]&lt;br /&gt;
[[분류:4.19혁명관련]]&lt;br /&gt;
[[분류:부마항쟁관련]]&lt;br /&gt;
[[분류:5.18민주화운동관련]]&lt;br /&gt;
[[분류:6월민주항쟁관련]]&lt;br /&gt;
[[분류:뎐]]&lt;br /&gt;
[[분류:이나자키로빈]]&lt;br /&gt;
[[분류:호빵이👻]]&lt;br /&gt;
[[분류:•ᴗ•]]&lt;br /&gt;
[[분류:딩잉잉]]&lt;/div&gt;</summary>
		<author><name>이나자키로빈</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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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name>이나자키로빈</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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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김재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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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이나자키로빈: /* 생애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개요==&lt;br /&gt;
&lt;br /&gt;
[[파일:김재규2.JPG]]&lt;br /&gt;
&lt;br /&gt;
대한민국 제 8대 중앙정보부장. 재임 중이던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대통령경호실장을 권총으로 저격해 살해한 10.26 사건을 일으킨 인물이다. 이튿날인 10월 27일 체포되어 1980년 5월 24일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교수형이 집행되어 생을 마감했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1924년 4월 9일 경상북도 선산군 선산면(現 구미시 선산읍) 이문리 서당마을 80-6번지&amp;lt;ref&amp;gt;이문리 80-6번지에는 김재규의 생가가 여전히 남아 있다. 김재규의 딸이 잠시 귀국해서 몇 년 전에 담을 복원하기도 했고, 2019년에는 보수공사를 진행했다.&amp;lt;/ref&amp;gt;에서 3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재규의 아버지 김형철은 고향에서 정미소를 운영했다. 당시 정미소를 운영한다는 건 지역 사회에서 상당한 부와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고, 김재규도 꽤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전해진다.&lt;br /&gt;
&lt;br /&gt;
해방 후 김천중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하다가 1946년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한다. 이때 박정희와 동기가 되며 인연이 시작된다. 고향이 같고 교사를 지낸 경력이 같아 가까이 지냈다고 한다. 이들은 1954년 9월 김재규가 5사단 36연대장으로 근무할 때 박정희가 사단장으로 부임하여 상관이 되면서 재회한다. &lt;br /&gt;
&lt;br /&gt;
5.16 군사정변 당시에는 국방부 총무과장(준장)으로 있었는데 신분 때문인지 박정희와의 인연 때문인지 혁명군사령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조사에도 불구하고 부정 사실이 발견되지 않아 석방되었고, 석방 후 현역 장군으로서 호남비료 사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6사단장과 6관구사령관을 거쳐 방첩부대장에 취임하여, 방첩부대를 보안사령부로 개편하고 초대 보안사령관이 되었다.&lt;br /&gt;
&lt;br /&gt;
1974년 9월 개각 때 건설부 장관이 되었다. 건설부 장관 부임 당시 8,000만 달러 밖에 안되던 해외건설 계약고를 30억 달러까지 끌어올리는 공을 세워 근정훈장을 받았다. 1976년 12월 신직수의 뒤를 이어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하였다. &lt;br /&gt;
&lt;br /&gt;
김재규는 중앙정보부를 통해 최태민의 조사를 지시했고, 10.26 사태가 발생하기 3일 전 최태민&amp;lt;ref&amp;gt;최순실의 친아버지.&amp;lt;/ref&amp;gt;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보고했었다. 이 보고서엔 최태민과 박근혜&amp;lt;ref&amp;gt;둘이 함께 부정한 방법으로 여기저기서 돈을 뜯어내었다. 최순실-박근혜 게이트의 시초라고 보아도 된다.&amp;lt;/ref&amp;gt; 간의 부적절한 관계와 최태민의 문란하고 부적절한 사생활이 기록되어 있었다. 김재규가 최태민이 저지른 온갖 부정의 입증을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는 오히려 최태민을 신뢰하는 꼴을 보였다. 이는 김재규 입장에서 자신이 모신 박정희가 중앙정보부 부장인 자신보다 영애를 홀린 종교인을 더 신뢰하는 시츄에이션인지라, 박정희에 대한 충성심이 바닥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이 사건이 10.26사태의 원인이라고 증언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ftjlJ-kt_Dw?si=t-H6JzWuisRTrU32&amp;quot; title=&amp;quot;YouTube video player&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 &lt;br /&gt;
&amp;lt;references/&amp;gt; &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이나자키로빈</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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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김재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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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8T08:31:3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나자키로빈: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개요==&lt;br /&gt;
&lt;br /&gt;
[[파일:김재규2.JPG]]&lt;br /&gt;
&lt;br /&gt;
대한민국 제 8대 중앙정보부장. 재임 중이던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대통령경호실장을 권총으로 저격해 살해한 10.26 사건을 일으킨 인물이다. 이튿날인 10월 27일 체포되어 1980년 5월 24일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교수형이 집행되어 생을 마감했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1924년 4월 9일 경상북도 선산군 선산면(現 구미시 선산읍) 이문리 서당마을 80-6번지&amp;lt;ref&amp;gt;이문리 80-6번지에는 김재규의 생가가 여전히 남아 있다. 김재규의 딸이 잠시 귀국해서 몇 년 전에 담을 복원하기도 했고, 2019년에는 보수공사를 진행했다.&amp;lt;/ref&amp;gt;에서 3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재규의 아버지 김형철은 고향에서 정미소를 운영했다. 당시 정미소를 운영한다는 건 지역 사회에서 상당한 부와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고, 김재규도 꽤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전해진다.&lt;br /&gt;
&lt;br /&gt;
해방 후 김천중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하다가 1946년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한다. 이때 박정희와 동기가 되며 인연이 시작된다. 고향이 같고 교사를 지낸 경력이 같아 가까이 지냈다고 한다. 이들은 1954년 9월 김재규가 5사단 36연대장으로 근무할 때 박정희가 사단장으로 부임하여 상관이 되면서 재회한다. &lt;br /&gt;
&lt;br /&gt;
5.16 군사정변 당시에는 국방부 총무과장(준장)으로 있었는데 신분 때문인지 박정희와의 인연 때문인지 혁명군사령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조사에도 불구하고 부정 사실이 발견되지 않아 석방되었고, 석방 후 현역 장군으로서 호남비료 사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6사단장과 6관구사령관을 거쳐 방첩부대장에 취임하여, 방첩부대를 보안사령부로 개편하고 초대 보안사령관이 되었다.&lt;br /&gt;
&lt;br /&gt;
1974년 9월 개각 때 건설부 장관이 되었다. 건설부 장관 부임 당시 8,000만 달러 밖에 안되던 해외건설 계약고를 30억 달러까지 끌어올리는 공을 세워 근정훈장을 받았다. 1976년 12월 신직수의 뒤를 이어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하였다. &lt;br /&gt;
&lt;br /&gt;
김재규는 중앙정보부를 통해 최태민의 조사를 지시했고, 10.26 사태가 발생하기 3일 전 최태민&amp;lt;ref&amp;gt;최순실의 친아버지.&amp;lt;/ref&amp;gt;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보고했었다. 이 보고서엔 최태민과 박근혜&amp;lt;ref&amp;gt;둘이 함께 부정한 방법으로 여기저기서 돈을 뜯어내었다. 최순실-박근혜 게이트의 시초라고 보아도 된다.&amp;lt;/ref&amp;gt; 간의 부적절한 관계와 최태민의 문란하고 부적절한 사생활이 기록되어 있었다. 김재규가 최태민이 저지른 온갖 부정의 입증을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는 오히려 최태민을 신뢰하는 꼴을 보였다. 이는 김재규 입장에서 자신이 모신 박정희가 중앙정보부 부장인 자신보다 영애를 홀린 종교인을 더 신뢰하는 시츄에이션인지라, 박정희에 대한 충성심이 바닥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이 사건이 10.26사태의 원인이라고 증언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ftjlJ-kt_Dw?si=t-H6JzWuisRTrU32&amp;quot; title=&amp;quot;YouTube video player&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 &lt;br /&gt;
&amp;lt;references/&amp;gt; &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이나자키로빈</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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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김재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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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8T08:30:0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나자키로빈: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개요==&lt;br /&gt;
&lt;br /&gt;
[[파일:김재규2.JPG]]&lt;br /&gt;
&lt;br /&gt;
대한민국 제 8대 중앙정보부장. 재임 중이던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대통령경호실장을 권총으로 저격해 살해한 10.26 사건을 일으킨 인물이다. 이튿날인 10월 27일 체포되어 1980년 5월 24일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교수형이 집행되어 생을 마감했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1924년 4월 9일 경상북도 선산군 선산면(現 구미시 선산읍) 이문리 서당마을 80-6번지&amp;lt;ref&amp;gt;이문리 80-6번지에는 김재규의 생가가 여전히 남아 있다. 김재규의 딸이 잠시 귀국해서 몇 년 전에 담을 복원하기도 했고, 2019년에는 보수공사를 진행했다.&amp;lt;/ref&amp;gt;에서 3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재규의 아버지 김형철은 고향에서 정미소를 운영했다. 당시 정미소를 운영한다는 건 지역 사회에서 상당한 부와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고, 김재규도 꽤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전해진다.&lt;br /&gt;
&lt;br /&gt;
해방 후 김천중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하다가 1946년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한다. 이때 박정희와 동기가 되며 인연이 시작된다. 고향이 같고 교사를 지낸 경력이 같아 가까이 지냈다고 한다. 이들은 1954년 9월 김재규가 5사단 36연대장으로 근무할 때 박정희가 사단장으로 부임하여 상관이 되면서 재회한다. &lt;br /&gt;
&lt;br /&gt;
5.16 군사정변 당시에는 국방부 총무과장(준장)으로 있었는데 신분 때문인지 박정희와의 인연 때문인지 혁명군사령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조사에도 불구하고 부정 사실이 발견되지 않아 석방되었고, 석방 후 현역 장군으로서 호남비료 사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6사단장과 6관구사령관을 거쳐 방첩부대장에 취임하여, 방첩부대를 보안사령부로 개편하고 초대 보안사령관이 되었다.&lt;br /&gt;
&lt;br /&gt;
1974년 9월 개각 때 건설부 장관이 되었다. 건설부 장관 부임 당시 8,000만 달러 밖에 안되던 해외건설 계약고를 30억 달러까지 끌어올리는 공을 세워 근정훈장을 받았다. 1976년 12월 신직수의 뒤를 이어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하였다. &lt;br /&gt;
&lt;br /&gt;
김재규는 중앙정보부를 통해 최태민의 조사를 지시했고, 10.26 사태가 발생하기 3일 전 &amp;lt;ref&amp;gt;최태민&amp;lt;/ref&amp;gt;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보고했었다. 이 보고서엔 &amp;lt;ref&amp;gt;최태민과 박근혜&amp;lt;/ref&amp;gt; 간의 부적절한 관계와 최태민의 문란하고 부적절한 사생활이 기록되어 있었다. 김재규가 최태민이 저지른 온갖 부정의 입증을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는 오히려 최태민을 신뢰하는 꼴을 보였다. 이는 김재규 입장에서 자신이 모신 박정희가 중앙정보부 부장인 자신보다 영애를 홀린 종교인을 더 신뢰하는 시츄에이션인지라, 박정희에 대한 충성심이 바닥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이 사건이 10.26사태의 원인이라고 증언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ftjlJ-kt_Dw?si=t-H6JzWuisRTrU32&amp;quot; title=&amp;quot;YouTube video player&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 이문리 80-6번지에는 김재규의 생가가 여전히 남아 있다. 김재규의 딸이 잠시 귀국해서 몇 년 전에 담을 복원하기도 했고, 2019년에는 보수공사를 진행했다.&lt;br /&gt;
&amp;lt;references/&amp;gt; 최순실의 친아버지.&lt;br /&gt;
&amp;lt;references/&amp;gt; 둘이 함께 부정한 방법으로 여기저기서 돈을 뜯어내었다. 최순실-박근혜 게이트의 시초라고 보아도 된다.&lt;/div&gt;</summary>
		<author><name>이나자키로빈</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9%80%EC%9E%AC%EA%B7%9C&amp;diff=31913</id>
		<title>김재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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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8T08:28:1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나자키로빈: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개요==&lt;br /&gt;
&lt;br /&gt;
[[파일:김재규2.JPG]]&lt;br /&gt;
&lt;br /&gt;
대한민국 제 8대 중앙정보부장. 재임 중이던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대통령경호실장을 권총으로 저격해 살해한 10.26 사건을 일으킨 인물이다. 이튿날인 10월 27일 체포되어 1980년 5월 24일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교수형이 집행되어 생을 마감했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1924년 4월 9일 &amp;lt;ref&amp;gt;경상북도 선산군 선산면(現 구미시 선산읍) 이문리 서당마을 80-6번지&amp;lt;/ref&amp;gt;에서 3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재규의 아버지 김형철은 고향에서 정미소를 운영했다. 당시 정미소를 운영한다는 건 지역 사회에서 상당한 부와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고, 김재규도 꽤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전해진다.&lt;br /&gt;
&lt;br /&gt;
해방 후 김천중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하다가 1946년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한다. 이때 박정희와 동기가 되며 인연이 시작된다. 고향이 같고 교사를 지낸 경력이 같아 가까이 지냈다고 한다. 이들은 1954년 9월 김재규가 5사단 36연대장으로 근무할 때 박정희가 사단장으로 부임하여 상관이 되면서 재회한다. &lt;br /&gt;
&lt;br /&gt;
5.16 군사정변 당시에는 국방부 총무과장(준장)으로 있었는데 신분 때문인지 박정희와의 인연 때문인지 혁명군사령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조사에도 불구하고 부정 사실이 발견되지 않아 석방되었고, 석방 후 현역 장군으로서 호남비료 사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6사단장과 6관구사령관을 거쳐 방첩부대장에 취임하여, 방첩부대를 보안사령부로 개편하고 초대 보안사령관이 되었다.&lt;br /&gt;
&lt;br /&gt;
1974년 9월 개각 때 건설부 장관이 되었다. 건설부 장관 부임 당시 8,000만 달러 밖에 안되던 해외건설 계약고를 30억 달러까지 끌어올리는 공을 세워 근정훈장을 받았다. 1976년 12월 신직수의 뒤를 이어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하였다. &lt;br /&gt;
&lt;br /&gt;
김재규는 중앙정보부를 통해 최태민의 조사를 지시했고, 10.26 사태가 발생하기 3일 전 &amp;lt;ref&amp;gt;최태민&amp;lt;/ref&amp;gt;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보고했었다. 이 보고서엔 &amp;lt;ref&amp;gt;최태민과 박근혜&amp;lt;/ref&amp;gt; 간의 부적절한 관계와 최태민의 문란하고 부적절한 사생활이 기록되어 있었다. 김재규가 최태민이 저지른 온갖 부정의 입증을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는 오히려 최태민을 신뢰하는 꼴을 보였다. 이는 김재규 입장에서 자신이 모신 박정희가 중앙정보부 부장인 자신보다 영애를 홀린 종교인을 더 신뢰하는 시츄에이션인지라, 박정희에 대한 충성심이 바닥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이 사건이 10.26사태의 원인이라고 증언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ftjlJ-kt_Dw?si=t-H6JzWuisRTrU32&amp;quot; title=&amp;quot;YouTube video player&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 이문리 80-6번지에는 김재규의 생가가 여전히 남아 있다.김재규의 딸이 잠시 귀국해서 몇 년 전에 담을 복원하기도 했고, 2019년에는 보수공사를 진행했다.&lt;br /&gt;
&amp;lt;references/&amp;gt; 최순실의 친아버지.&lt;br /&gt;
&amp;lt;references/&amp;gt; 둘이 함께 부정한 방법으로 여기저기서 돈을 뜯어내었다. 최순실-박근혜 게이트의 시초라고 보아도 된다.&lt;/div&gt;</summary>
		<author><name>이나자키로빈</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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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김재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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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이나자키로빈: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개요==&lt;br /&gt;
&lt;br /&gt;
[[파일:김재규2.JPG]]&lt;br /&gt;
&lt;br /&gt;
대한민국 제 8대 중앙정보부장. 재임 중이던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대통령경호실장을 권총으로 저격해 살해한 10.26 사건을 일으킨 인물이다. 이튿날인 10월 27일 체포되어 1980년 5월 24일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교수형이 집행되어 생을 마감했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출처==&lt;/div&gt;</summary>
		<author><name>이나자키로빈</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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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김재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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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정보&lt;br /&gt;
|사진=김재규2.JPG&lt;br /&gt;
|이름= 김재규&lt;br /&gt;
|한자명= 金載圭&lt;br /&gt;
|영문명= Kim Jae-gyu&lt;br /&gt;
|일본명= &amp;lt;ref&amp;gt;金本 元一&amp;lt;/ref&amp;gt;&lt;br /&gt;
|사망=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서울구치소 (現 서대문형무소역사관)&lt;br /&gt;
|묘소=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능평리 산16-1 (現 경기도 광주시 능평동 산16-1)&lt;br /&gt;
}}&lt;br /&gt;
&lt;br /&gt;
==개요==&lt;br /&gt;
&lt;br /&gt;
{{위키명함&lt;br /&gt;
|이미지=[[파일:김재규2.JPG|섬네일|center|대한민국 제8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lt;br /&gt;
|이름=김재규&lt;br /&gt;
|한자명=金載圭&lt;br /&gt;
|영문명=Kim Jae-gyu&lt;br /&gt;
|일본명=&amp;lt;ref&amp;gt;金本 元一&amp;lt;/ref&amp;gt;&lt;br /&gt;
|사망=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서울구치소&lt;br /&gt;
(現 서대문형무소역사관)&lt;br /&gt;
|묘소=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능평리 산16-1&lt;br /&gt;
(現 경기도 광주시 능평동 산16-1)&lt;br /&gt;
}}&lt;br /&gt;
대한민국 제 8대 중앙정보부장. 재임 중이던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대통령경호실장을 권총으로 저격해 살해한 10.26 사건을 일으킨 인물이다. 이튿날인 10월 27일 체포되어 1980년 5월 24일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교수형이 집행되어 생을 마감했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amp;lt;references/&amp;gt; 광복 이전 창씨 개명에 의한 일본 이름이다.&lt;/div&gt;</summary>
		<author><name>이나자키로빈</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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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김재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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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8T08:10:2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나자키로빈: &lt;/p&gt;
&lt;hr /&gt;
&lt;div&gt;{{위키명함|이미지=[[파일:김재규2.JPG|섬네일|center|대한민국 제8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이름=김재규|한자명=金載圭|영문명=Kim Jae-gyu|일본명=&amp;lt;ref&amp;gt;金本 元一&amp;lt;/ref&amp;gt;|사망=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서울구치소 (現 서대문형무소역사관)|묘소=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능평리 산16-1 (現 경기도 광주시 능평동 산16-1)}}&lt;br /&gt;
&lt;br /&gt;
&lt;br /&gt;
{{정보&lt;br /&gt;
|사진=김재규2.JPG&lt;br /&gt;
|이름=김재규&lt;br /&gt;
|한자명=金載圭&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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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 서대문형무소역사관)&lt;br /&gt;
|묘소=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능평리 산16-1&lt;br /&gt;
(現 경기도 광주시 능평동 산16-1)&lt;br /&gt;
}}&lt;br /&gt;
&lt;br /&gt;
==개요==&lt;br /&gt;
&lt;br /&gt;
{{위키명함&lt;br /&gt;
|이미지=[[파일:김재규2.JPG|섬네일|center|대한민국 제8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lt;br /&gt;
|이름=김재규&lt;br /&gt;
|한자명=金載圭&lt;br /&gt;
|영문명=Kim Jae-gyu&lt;br /&gt;
|일본명=&amp;lt;ref&amp;gt;金本 元一&amp;lt;/ref&amp;gt;&lt;br /&gt;
|사망=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서울구치소&lt;br /&gt;
(現 서대문형무소역사관)&lt;br /&gt;
|묘소=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능평리 산16-1&lt;br /&gt;
(現 경기도 광주시 능평동 산16-1)&lt;br /&gt;
}}&lt;br /&gt;
대한민국 제 8대 중앙정보부장. 재임 중이던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대통령경호실장을 권총으로 저격해 살해한 10.26 사건을 일으킨 인물이다. 이튿날인 10월 27일 체포되어 1980년 5월 24일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교수형이 집행되어 생을 마감했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amp;lt;references/&amp;gt; 광복 이전 창씨 개명에 의한 일본 이름이다.&lt;/div&gt;</summary>
		<author><name>이나자키로빈</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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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8T08:10:17Z</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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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위키명함|이미지=[[파일:김재규2.JPG|섬네일|center|대한민국 제8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이름=김재규|한자명=金載圭|영문명=Kim Jae-gyu|일본명=&amp;lt;ref&amp;gt;金本 元一&amp;lt;/ref&amp;gt;|사망=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서울구치소 (現 서대문형무소역사관)|묘소=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능평리 산16-1 (現 경기도 광주시 능평동 산16-1)}}&lt;br /&gt;
&lt;br /&gt;
&lt;br /&gt;
{{정보&lt;br /&gt;
|사진=김재규2.JPG&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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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 경기도 광주시 능평동 산16-1)&lt;br /&gt;
==개요==&lt;br /&gt;
&lt;br /&gt;
{{위키명함&lt;br /&gt;
|이미지=[[파일:김재규2.JPG|섬네일|center|대한민국 제8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lt;br /&gt;
|이름=김재규&lt;br /&gt;
|한자명=金載圭&lt;br /&gt;
|영문명=Kim Jae-gyu&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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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 서대문형무소역사관)&lt;br /&gt;
|묘소=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능평리 산16-1&lt;br /&gt;
(現 경기도 광주시 능평동 산16-1)&lt;br /&gt;
}}&lt;br /&gt;
대한민국 제 8대 중앙정보부장. 재임 중이던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대통령경호실장을 권총으로 저격해 살해한 10.26 사건을 일으킨 인물이다. 이튿날인 10월 27일 체포되어 1980년 5월 24일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교수형이 집행되어 생을 마감했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amp;lt;references/&amp;gt; 광복 이전 창씨 개명에 의한 일본 이름이다.&lt;/div&gt;</summary>
		<author><name>이나자키로빈</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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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김재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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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8T08:08:3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나자키로빈: &lt;/p&gt;
&lt;hr /&gt;
&lt;div&gt;{{위키명함|이미지=[[파일:김재규2.JPG|섬네일|center|대한민국 제8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이름=김재규|한자명=金載圭|영문명=Kim Jae-gyu|일본명=&amp;lt;ref&amp;gt;金本 元一&amp;lt;/ref&amp;gt;|사망=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서울구치소 (現 서대문형무소역사관)|묘소=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능평리 산16-1 (現 경기도 광주시 능평동 산16-1)}}&lt;br /&gt;
&lt;br /&gt;
==개요==&lt;br /&gt;
&lt;br /&gt;
{{위키명함&lt;br /&gt;
|이미지=[[파일:김재규2.JPG|섬네일|center|대한민국 제8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lt;br /&gt;
|이름=김재규&lt;br /&gt;
|한자명=金載圭&lt;br /&gt;
|영문명=Kim Jae-gyu&lt;br /&gt;
|일본명=&amp;lt;ref&amp;gt;金本 元一&amp;lt;/ref&amp;gt;&lt;br /&gt;
|사망=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서울구치소&lt;br /&gt;
(現 서대문형무소역사관)&lt;br /&gt;
|묘소=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능평리 산16-1&lt;br /&gt;
(現 경기도 광주시 능평동 산16-1)&lt;br /&gt;
}}&lt;br /&gt;
대한민국 제 8대 중앙정보부장. 재임 중이던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대통령경호실장을 권총으로 저격해 살해한 10.26 사건을 일으킨 인물이다. 이튿날인 10월 27일 체포되어 1980년 5월 24일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교수형이 집행되어 생을 마감했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amp;lt;references/&amp;gt; 광복 이전 창씨 개명에 의한 일본 이름이다.&lt;/div&gt;</summary>
		<author><name>이나자키로빈</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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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김재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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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8T08:05:3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나자키로빈: &lt;/p&gt;
&lt;hr /&gt;
&lt;div&gt;{{위키명함&lt;br /&gt;
|이미지=[[파일:김재규2.JPG|섬네일|center|대한민국 제8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lt;br /&gt;
|이름=김재규&lt;br /&gt;
|한자명=金載圭&lt;br /&gt;
|영문명=Kim Jae-gyu&lt;br /&gt;
|일본명=&amp;lt;ref&amp;gt;金本 元一&amp;lt;/ref&amp;gt;&lt;br /&gt;
|사망=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서울구치소&lt;br /&gt;
(現 서대문형무소역사관)&lt;br /&gt;
|묘소=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능평리 산16-1&lt;br /&gt;
(現 경기도 광주시 능평동 산16-1)&lt;br /&gt;
}}&lt;br /&gt;
&lt;br /&gt;
==개요==&lt;br /&gt;
&lt;br /&gt;
{{위키명함&lt;br /&gt;
|이미지=[[파일:김재규2.JPG|섬네일|center|대한민국 제8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lt;br /&gt;
|이름=김재규&lt;br /&gt;
|한자명=金載圭&lt;br /&gt;
|영문명=Kim Jae-gyu&lt;br /&gt;
|일본명=&amp;lt;ref&amp;gt;金本 元一&amp;lt;/ref&amp;gt;&lt;br /&gt;
|사망=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서울구치소&lt;br /&gt;
(現 서대문형무소역사관)&lt;br /&gt;
|묘소=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능평리 산16-1&lt;br /&gt;
(現 경기도 광주시 능평동 산16-1)&lt;br /&gt;
}}&lt;br /&gt;
대한민국 제 8대 중앙정보부장. 재임 중이던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대통령경호실장을 권총으로 저격해 살해한 10.26 사건을 일으킨 인물이다. 이튿날인 10월 27일 체포되어 1980년 5월 24일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교수형이 집행되어 생을 마감했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amp;lt;references/&amp;gt; 광복 이전 창씨 개명에 의한 일본 이름이다.&lt;/div&gt;</summary>
		<author><name>이나자키로빈</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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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김재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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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8T08:05:1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나자키로빈: 새 문서: {{위키명함 |이미지=대한민국 제8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이름=김재규 |한자명=金載圭 |영문명=Kim Jae-gyu |...&lt;/p&gt;
&lt;hr /&gt;
&lt;div&gt;{{위키명함&lt;br /&gt;
|이미지=[[파일:김재규2.JPG|섬네일|center|대한민국 제8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lt;br /&gt;
|이름=김재규&lt;br /&gt;
|한자명=金載圭&lt;br /&gt;
|영문명=Kim Jae-gyu&lt;br /&gt;
|일본명=&amp;lt;ref&amp;gt;金本 元一&amp;lt;/ref&amp;gt;&lt;br /&gt;
|사망=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서울구치소&lt;br /&gt;
(現 서대문형무소역사관)&lt;br /&gt;
|묘소=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능평리 산16-1&lt;br /&gt;
(現 경기도 광주시 능평동 산16-1)&lt;br /&gt;
}}&lt;br /&gt;
&lt;br /&gt;
==개요==&lt;br /&gt;
대한민국 제 8대 중앙정보부장. 재임 중이던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대통령경호실장을 권총으로 저격해 살해한 10.26 사건을 일으킨 인물이다. 이튿날인 10월 27일 체포되어 1980년 5월 24일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교수형이 집행되어 생을 마감했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amp;lt;references/&amp;gt; 광복 이전 창씨 개명에 의한 일본 이름이다.&lt;/div&gt;</summary>
		<author><name>이나자키로빈</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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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파일:김재규2.JPG</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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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8T07:57:4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나자키로빈: &lt;/p&gt;
&lt;hr /&gt;
&lt;div&gt;&lt;/div&gt;</summary>
		<author><name>이나자키로빈</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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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기밀문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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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8T07:50:2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나자키로빈: /* 유신체제의 붕괴 */&lt;/p&gt;
&lt;hr /&gt;
&lt;div&gt;=='''컨텐츠 주제'''==&lt;br /&gt;
===기여===&lt;br /&gt;
=='''팀원'''==&lt;br /&gt;
*오현지(2022131143) [[뎐]]&amp;lt;br/&amp;gt;&lt;br /&gt;
*김여원(2023130209) [[이나자키로빈]]&amp;lt;br/&amp;gt;&lt;br /&gt;
*김하은(2022131345) [[호빵이👻]]&amp;lt;br/&amp;gt;&lt;br /&gt;
*박정원(2023130350) [[•ᴗ•]]&amp;lt;br/&amp;gt;&lt;br /&gt;
*최필중(2023130216) [[딩잉잉]]&amp;lt;br/&amp;gt;&lt;br /&gt;
&lt;br /&gt;
=='''기획의도'''==&lt;br /&gt;
===기획배경===&lt;br /&gt;
1945년 광복 이후 대한민국 국민들은 자유민주국가로서의 미래를 기대했으나 실상은 그러지 못했다.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보여주듯 현재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는 그것을 누리지 못한 앞선 세대들의 목숨을 바친 항쟁의 대가이다. 민주항쟁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의 핵심 동력이었다. 오늘날 우리나라 민주의식의 중요한 기둥이 되는 네 가지 항쟁을 선별하고 각 항쟁의 배경, 전개과정, 의의를 비롯해 세부적이고 자세한 내용에 대한 기사를 작성한다.&lt;br /&gt;
===기획목적===&lt;br /&gt;
작금의 현실까지 오기에는 수없이 많은 투쟁이 있었지만 4.19혁명, 부마항쟁, 5.18민주항쟁, 6월민주항쟁이라는 네 가지 사건을 살펴보기로 한 것은 가장 많이 다뤄지고, 가장 많이 알려진 사건이기 때문이다. 관련된 사건과 역사 인물들에 대해 자세히 적어 내어 민주항쟁의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지 않으면 알기 힘든 각 민주항쟁의 자세한 내막을 밝혀낸다.&lt;br /&gt;
===기대하는 바===&lt;br /&gt;
타임라인과 온톨로지를 활용해 내용의 전반적인 이해를 돕고 자세한 설명을 통해 사건의 자세한 내막을 들어낸다. 네 가지 항쟁을 각각 큰 목차로 설정하고 세부 기사를 그 내부에 작성해 독자의 관심과 수요에 부합하는 정보를 전달하는 데 효과적일 것으로 기대된다. 민주항쟁에 참여한 사람들의 희생과 투쟁에 대한 존경심을 부르고 역사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다.&lt;br /&gt;
===기여===&lt;br /&gt;
[[뎐]], [[이나자키로빈]], [[호빵이👻]]: 기획의도 페이지 작성&lt;br /&gt;
&lt;br /&gt;
=='''온톨로지'''==&lt;br /&gt;
{{NetworkGraph | title=민주항쟁.lst}}&lt;br /&gt;
[[민주항쟁.lst]]&lt;br /&gt;
===기여===&lt;br /&gt;
*[[뎐]]: 온톨로지 제작&lt;br /&gt;
=='''컨텐츠 구조'''==&lt;br /&gt;
===클래스(Class)===&lt;br /&gt;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color:white&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0%&amp;quot; | 클래스 !! style=&amp;quot;width:40%&amp;quot; | 설명 !! style=&amp;quot;45%&amp;quot; | 노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제||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대표 키워드인 민주항쟁을 주제로서 나타내었다 || 만주항쟁&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항쟁||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민주화운동 시기 발생했던 주요 운동들을 ‘항쟁’이라는 키워드로 분류하였다. || 4.19혁명, 부마항쟁, 5.18 민주화운동, 6월민주항쟁&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사건||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항쟁의 원인, 결과가 되는 사건을 정리하였다|| 3.15부정선거, 고려대 4.18학생시위, 3.15의거, YH사건, 10.26사태, 12.12 군사반란, 비상계엄령,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고문추방민족대행진, 4.13호헌조치, 6.29선언, 대통령직선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지역||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요 항쟁들이 일어났던 지역을 정리하였다|| 마산, 부산, 광주&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인물||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요사건들을 발생시킨 인물, 참여했던 인물을 묶어서 정리하였다|| 이승만, 이기붕, 김주열, 박정희, 김재규, 전두환, 신군부, 시민군, 박종철, 이한열, 노태우&lt;br /&gt;
|-&lt;br /&gt;
|}&lt;br /&gt;
===관계성(Relation)===&lt;br /&gt;
*&amp;lt;font color=#228B22&amp;gt;'''~은 ~에 속한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주요 항쟁들이 민주항쟁에 속함을 나타내거나 인물의 소속을 나타낸다.&lt;br /&gt;
***해당노드:&lt;br /&gt;
***#4.19혁명 -&amp;gt; 민주항쟁&lt;br /&gt;
***#부마항쟁 -&amp;gt; 민주항쟁&lt;br /&gt;
***#5.18민주화운동 -&amp;gt; 민주항쟁&lt;br /&gt;
***#6월 민주항쟁 -&amp;gt; 민주항쟁&lt;br /&gt;
***#전두환 -&amp;gt; 신군부&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의 원인이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어떠한 사건과 인과관계를 이루는 또다른 사건 혹은 인물을 설명한다.&lt;br /&gt;
***#이기붕 -&amp;gt; 3.15부정선거&lt;br /&gt;
***#김주열 -&amp;gt; 고려대 4.18학생시위&lt;br /&gt;
***#고려대 4.18학생시위 -&amp;gt; 4.19혁명&lt;br /&gt;
***#3.15의거 -&amp;gt; 4.19혁명&lt;br /&gt;
***#김주열 -&amp;gt; 4.19혁명&lt;br /&gt;
***#3.15부정선거 -&amp;gt; 3.15의거&lt;br /&gt;
***#YH사건 -&amp;gt; 부마항쟁&lt;br /&gt;
***#부마항쟁 -&amp;gt; 10.26사태&lt;br /&gt;
***#박정희 -&amp;gt; 10.26사태&lt;br /&gt;
***#비상계엄령 -&amp;gt; 5.18민주화운동&lt;br /&gt;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 -&amp;gt; 고문추방민족대행진&lt;br /&gt;
***#고문추방민족대행진 -&amp;gt; 4.13호헌조치&lt;br /&gt;
***#4.13호헌조치 -&amp;gt; 6월민주항쟁&lt;br /&gt;
***#6월민주항쟁 -&amp;gt; 6.29선언&lt;br /&gt;
***#6월민주항쟁 -&amp;gt; 대통령직선제&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을 발생시켰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사건과 그 사건을 직접적으로 발생시킨 인물을 연결한다.&lt;br /&gt;
***#이승만 -&amp;gt; 3.15부정선거&lt;br /&gt;
***#김재규 -&amp;gt; 10.26사태&lt;br /&gt;
***#신군부 -&amp;gt; 1212군사반란&lt;br /&gt;
***#전두환 -&amp;gt; 비상계엄령&lt;br /&gt;
***#노태우 -&amp;gt; 6.29선언&lt;br /&gt;
***#시민군 -&amp;gt; 5.18민주화운동&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에 희생되었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민주항쟁의 진압과정 등 에서 희생된 인물을 설명한다&lt;br /&gt;
***#김주열 -&amp;gt; 3.15의거&lt;br /&gt;
***#이한열 -&amp;gt; 6월 민주항쟁&lt;br /&gt;
***#박종철&amp;gt;박종철 고문치사 사건&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에서 발생했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설명한다.&lt;br /&gt;
***#3.15의거 -&amp;gt; 마산&lt;br /&gt;
***#부마항쟁 -&amp;gt; 부산&lt;br /&gt;
***#부마항쟁 -&amp;gt; 마산&lt;br /&gt;
***#5.18민주화운동 -&amp;gt; 광주&lt;br /&gt;
===기여===&lt;br /&gt;
*[[뎐]]: 컨텐츠 구조 페이지 작성&lt;br /&gt;
=='''4.19혁명'''==&lt;br /&gt;
===타임라인===&lt;br /&gt;
===원인===&lt;br /&gt;
====[[3.15 부정선거]]====&lt;br /&gt;
1959년 대한민국은 제 4대 대통령 선거와 제 5대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당시 자유당에서는 12년째 대통령으로서 연임 중이던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이기붕]]'''을 부통령 후보로 선임하였다. 그러나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병세의 악화로 사망하게 되고,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은 확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선거의 초점은 자유당의 조병옥과 민주당의 장면 간의 선거전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본격적인 선거유세의 시작과 함께 정부와 여당의 잇따른 야당선거운동 방해사건으로 부정선거가 시작되었다. 1960년 3월 15일 선거가 시작된 이후에도 다양한 방법의 부정행위가 일어났고, 개표 결과 이승만과 이기붕의 득표가 100%에 육박하는 결과로 나오자 자유당은 득표수를 하향 조정해 최종 집계에 반영할 것을 지시했다. 결국 이승만 88.7%, 이기붕 79%의 득표율을 가지며 정, 부통령에 당선되었다.&amp;lt;ref&amp;gt;자세한 내용은 3.15부정선거 페이지 참조&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부정선거 반대시위, [[3.15 의거]]의 발생====&lt;br /&gt;
3.15 부정선거를 반대하는 시위는 초기에는 중, 고등학생들의 산발적인 시위로 전개되었다. 3월 15일 선거일 밤 경남 마산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으며,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여 1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amp;lt;br/&amp;gt;&lt;br /&gt;
3월 15일 실종되었던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4월 11일 마산부두에서 발견되자 마산 시민들은 시청, 파출소 등을 파괴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2차 시위가 일어난 것이다.&lt;br /&gt;
&lt;br /&gt;
====[[고려대학교 4.18 학생시위]]의 발생====&lt;br /&gt;
1, 2차 마산시위를 계기로 부정선거 무효와 이승만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났다. '4.18 선언문'을 낭독하고 시내로 진출하였다. 이는 4월 19일 학생들과 일반 시민들이 가세한 대규모 시위로 이어지게 되었다.&lt;br /&gt;
====전국적인 4.19 혁명의 발생====&lt;br /&gt;
분노한 전국의 시민과 학생들이 다음 날인 4월 19일 총궐기하여 '이승만 하야와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며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경찰은 또다시 무차별 발포에 나섰고,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여기에 이승만 정부는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지만 이러한 압박에도 시민들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lt;br /&gt;
====이승만 대통령의 혼란 수습 시도====&lt;br /&gt;
이승만 대통령은 4.19 시위로 인한 정국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4월 20일 국무위원 전원과 자유당 당무위원 전원의 사표를 제출하도록 지시하였으며, 4월 23일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외무장관에 허정, 내무장관에 이호, 법무장관에 권승렬을 임명하는 등 개각을 단행하였다.&amp;lt;br/&amp;gt;&lt;br /&gt;
그러나 미국은 4.19직후 국무부 성명을 통해 한국에서 발생한 사태는 부정선거에 대한 '군중의 불만'을 반영한 것 이라고 했고, 양유찬 주미대사를 불러 '부정선거에 대한 철저한 조사', '경향신문 복간', '국가보안법 개정' 등을 촉구하는 각서를 전달하였다.&amp;lt;br/&amp;gt;&lt;br /&gt;
그리고 4월 25일, 이승만 정권에 분노한 전국 27개 대학 258명의 교수가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 모여 14개항의 시국 선언문을 발표하며 학생, 시민들과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들은 3.15 부정선거 및 4.19 사태의 책임을 지고 대통령이 물러날 것을 주장하였으며, &amp;quot;학생들의 피에 보답하자&amp;quot;는 플랜 카드를 앞세워 국회의사당까지 행진하였다. &lt;br /&gt;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lt;br /&gt;
무력진압에도 대규모 시위가 이어지며 시민들은 완강하게 투쟁하였다. 4월 26일 시위대가 경무대로 다시 집결하는 등 사태가 심각하게 진행되자, 오전 10시 30분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 성명을 발표하였다. 4월 27일 이승만은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하며 대통령직을 하야하고 하와이로 망명하였으며 자유당 정권도 끝나게 된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우리 국민들, 특히 학생과 청년들의 주도로 이루어진 4.19 혁명은 학생과 일반 대중이 단결하여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아시아 최초의 시건이다. 4.19혁명은 부마항쟁, 5.18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그리고 2017년 촛불시위에 이르기 까지 정권에 대항하는 국민들이 단합을 이루는 초석이 되었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도 시민 저항권에 대한 근거로써 4.19혁명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문구가 있다.&lt;br /&gt;
===기여===&lt;br /&gt;
[[뎐]]: 4.19혁명 페이지 원인, 의의 작성 &lt;br /&gt;
&lt;br /&gt;
[[•ᴗ•]]: 4.19혁명 페이지 전개 작성&lt;br /&gt;
&lt;br /&gt;
=='''부마항쟁'''==&lt;br /&gt;
===타임라인===&lt;br /&gt;
===원인===&lt;br /&gt;
====[[유신 헌법]]과 [[긴급조치]]====&lt;br /&gt;
1971년 선거에서 김대중을 누르고 대통령에 3선된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해 국회 해산,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등 법의 일부 기능을 정지시키고 전국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했다.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된 이른바 유신헌법에 의해 제정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법」 에 의거해 박정희가 제8대 대통령으로 재차 당선되었고, 이 유신 헌법이 발효된 기간을 유신 체제라고 부른다. 유신 체제는 행정, 입법, 사법의 3권을 모두 쥔 대통령이 종신 집권할 수 있도록 설계된 1인 대통령제였다. 박정희는 유신 헌법에 의거해 대통령의 권한으로 취할 수 있었던 특별조치인 긴급조치를 선포함으로써 헌법에 반대하는 시위 및 운동과 방송, 언론 활동을 하는 반정부 인사들을 연행, 체포, 고문하는 등 억압을 가했다.&lt;br /&gt;
&lt;br /&gt;
====한국경제의 위기====&lt;br /&gt;
1970년대 말 한국경제는''' [[제2차 오일쇼크]]'''라는 세계경제의 위기와 결합해 가라앉고 말았다. 경제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정부는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과 함께 '''[[경제안정화정책]]'''을 수용했고, 중소자본가, 봉급생활자, 도시 노동자와 농민 등에 안정화 비용을 부과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이와 같은 안정화 정책은 경제위기로 어려운 처지에 있던 중소기업들의 도산을 가속하여 기업 부도율이 치솟고 하층민들을 더 깊은 고통에 몰아넣었다. 특히 '''부가가치세'''를 도입한 이후 물가가 상승하면서 일상에 타격을 주었으며, 노동집약적 제조업이 집중되었던 부산과 마산에서는 상황이 더욱 심각하여 1979년 부산지역 부도율은 서울의 3배에 달했다.&lt;br /&gt;
&lt;br /&gt;
====YH 사건====&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부산대학교 민주선언문, 학생 시위에서 시민항쟁으로====&lt;br /&gt;
&lt;br /&gt;
1979년 10월 16일 아침 10시 부산대학교 구내 도서관 앞에서 약 500명의 학생들이 모여 “유신정권 물러가라”, “정치탄압 중지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반정부 시위를 벌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민주선언문」]]'''을 통해 민주화, 언론 자유, 인권 보장의 신념을 확인하고, “제도화된 폭력성과 조직적 악의 근원인 유신헌법과 독재집권층의 퇴진만이 5천 만 겨레의 통일의 첫걸음이라고 주장하면서 형제의 피를 요구하는 자유와 민주의 깃발을 우리가 잡고 반민주의 무리, 불의의 무리들을 향해 외치며 나아가자”라고 선언하였다. 이후 학생들은 교문을 나가 거리에서 시위했다. 이때 학생 수는 약 5,000명으로 불어나 있었고, 광복동과 남포동 등 부산시내 중심가까지 진출해 애국가 등의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며, 이를 제지하려는 경찰과 이곳저곳에서 충돌하였다. 비슷한 시간, 부산 동아대학교에서도 1,000여 명의 학생이 부산대학교 학생과 합류하여 가두시위를 벌였다. 부산대학교 데모로 학생 수백 명이 연행되고 100여 명이 다쳤지만 이튿날인 10월 17일에는 시위가 더욱 격화되어 학생들뿐만 아니라 다수의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학생 시위는 점차 시민항쟁의 양상을 띠어갔다.''' 밤늦게까지 계속된 시위에서 시민들은 충무파출소, 한국방송공사, 서구청, 부산세무서 등을 파괴하였고, 경찰차량을 불태우거나 파손시켰다.&lt;br /&gt;
&lt;br /&gt;
====마산의 시민항쟁====&lt;br /&gt;
&lt;br /&gt;
민주항쟁은 18일에 마산으로 확산되었다. 늦은 오후에는 1,000여 명의 경남대학교 학생들이 마산 시내 번화가에 산발적으로 집결했으며, 일부시민들도 가담해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어두워진 다음 학생과 시민들의 데모는 격화되어 파출소, 공화당사, 방송국, 신문사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파괴하였다. 이튿날인 19일에는 시위가 더욱 치열해져 마산 시내는 한때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저녁 8시경, 시위대는 경남대학과 마산대학&amp;lt;ref&amp;gt;1985년 창원대학으로 교명이 변경되었으며, 현재의 마산대학교와 다르다.&amp;lt;/ref&amp;gt;, 그리고 고등학생까지 합세하여 약 8,000명에 이르렀으며, 시내 곳곳에서 몽둥이를 들고 동사무소와 파출소로 몰려가 시설을 파괴하였고, 경찰차량에 불을 질렀다.&lt;br /&gt;
&lt;br /&gt;
====부산 계엄령, 마산 지역 위수령====&lt;br /&gt;
&lt;br /&gt;
부산대학교 시위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박정희 정부는 학생 시위로 시작된 시위가 대규모 시민항쟁으로 사태가 심상치 않게 확대되어가자 강경책으로 대응했다. 정부는 18일 자정을 기해 '''부산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동원한 과격한 진압'''을 통해 [[파일:계엄포고문.jpg|200px|섬네일|부산지역에 내려진 계엄포고문을 일고 있는 시민들]] 시위 참여자들과 이를 방조한 일반 시민들까지 1,058명을 연행하고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으며, 부산지구 계엄사령부는 각 대학 휴교조처와 야간통행금지시간을 2시간 연장하는 등의 항이 담긴 포고문을 발표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부산에 계엄령이 선포된 이튿날인 19일에 마산 시위가 확대됨에 따라 그 다음날인 10월 20일 정오, 정부가 '''마산 및 창원 지역에 위수령을 발령'''해 통행금지 시간이 연장되고, 경남대학 등에는 휴교조처가 취해졌고, 24일에는 깡패를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132명을 검거, 23명을 구속했다. 이렇게 '''표면적으로는 부마민주항쟁이 단시간에 진압되는 듯 보였지만, 항쟁은 이미 유신체제의 균열을 불러오고 있었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항쟁의 전개 과정에서 볼 수 있듯, 부마민주항쟁에서 특징적인 사실은 먼저 시위대의 가장 큰 분노의 대상은 공화당사와 경찰·파출소였다는 점, 다음으로 ‘부유층’에 대한 시위대의 공공연한 공격, 세 번째로 “부가가치세를 철폐하라”, “잘 먹고 잘 살아라”라는 외침에서 드러나듯이 세무서에 대한 공격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문사·방송국에 대한 공격을 들 수 있다.&lt;br /&gt;
&lt;br /&gt;
부마민주항쟁은 1970년대 유신체제 밑에서 쌓였던 침묵하는 언론, 조세, 시민을 억압하는 경찰에 대한 불만 등 정치·사회·경제·문화·종교 등 각 부문에 걸친 여러 모순의 폭발이었고, 헌법 개정과 긴급조치로 겨우 유지되던 유신체제와 박정희 정권의 붕괴를 촉진시킨 결정적인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10.26사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항쟁은 1980년 5월 18일의 광주 민주화운동과 1987년 6월 민주항쟁에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된다.&lt;br /&gt;
===기여===&lt;br /&gt;
[[호빵이👻]]: 부마항쟁 페이지 전체 작성&lt;br /&gt;
&lt;br /&gt;
=='''5.18민주화운동'''==&lt;br /&gt;
===타임라인===&lt;br /&gt;
===원인===&lt;br /&gt;
====유신체제의 붕괴====&lt;br /&gt;
&lt;br /&gt;
[[파일:김재규.jpg|섬네일|오른쪽|암살 당시 상황을 재현하는 김재규]]&lt;br /&gt;
&lt;br /&gt;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amp;lt;small&amp;gt; - 김재규&amp;lt;/small&amp;gt;&lt;br /&gt;
1979년 10월 4일 신민당 총재 김영삼이 국회에서 의원직을 제명당하자 10월 15부터 10월 20까지 부산 · 마산 등지에서는 부마항쟁이 일어났고, 이의 해결을 둘러싼 노선대립으로 갈등 중 10월 26일 &amp;lt;ins&amp;gt;[[김재규]]&amp;lt;/ins&amp;gt;가 박정희를 살해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ins&amp;gt;[[10.26 사태]]&amp;lt;/ins&amp;gt;의 사후 수습과정에서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을 중심으로 신군부 세력이 부상하였으며, 이들은 &amp;lt;ins&amp;gt;[[12.12 사건]]&amp;lt;/ins&amp;gt;의 하극상을 통하여 군부를 장악하였다. 1980년 2월 29일 김대중 등이 복권되었으나 그 해 봄, 신군부는 최규하 과도 정부를 유명무실하게 하고 국민들이 요구하는 민주주의와 이를 위한 명확한 정치일정 제시를 거부하면서 권력기반을 구축하였다.&lt;br /&gt;
&lt;br /&gt;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lt;br /&gt;
한 시대의 대격변을 예고하는 단초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시작됐다. 1979년 8월 9일 오전, 신민당의 당사 4층 강당에서는 봉제업체인 YH무역주식회사의 여성노동자 200여명이 기업주의 폐업에 반발하여 폐업조치 철회 농성을 벌였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인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신민당이 당사 건물을 내준 것이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폭력을 동원하여 농성을 해산시켰다. 결국 이 사건은 노동 탄압 사건을 넘어선 야당에 대한 정치 탄압 사건으로 발전하였다.&lt;br /&gt;
&lt;br /&gt;
이날 경찰은 1000여명의 진압대원을 신민당사로 난입시켜 농성을 하고 있던 174명의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로 밖으로 끌어냈다. 또한 경찰은 총재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김영삼 총재와 당 간부들을 끌어내면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박정희 정권은 이 노동자 농성 사건을 빌미로 신민당 분열공작을 시도하였다. 유신정권과 비밀리에 결탁한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 3명이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 부총재 전원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접수시켰다. 그리고 법원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신민당 총재단의 직무 집행을 정지시키고 박정희 정권의 꼭두각시를 총재직무대행으로 선임하였다.&lt;br /&gt;
&lt;br /&gt;
아울러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의 동교동 자택을 전면 봉쇄하였고,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에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끊으라고 요구한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즈』 회견내용을 “반헌정적, 반민족적 작태”로 몰아서 국회에 징계 동의안을 제출했다. 10월 4일 오후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의원 159명은 여당 총회장에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제명 결의안을 '''기습적으로''' 처리해 버렸다.&lt;br /&gt;
&lt;br /&gt;
노사분규 사태로 시작된 사건이 제1야당 당수의 의원직 제명으로 확대된 정치적 사태를 지켜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유신체제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이 고조되었다. 또한 이 사건은 그동안 다소 주춤하던 대학가에 반유신 반독재 운동의 열기가 다시 확산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청춘을 바쳐, 학생 운동====&lt;br /&gt;
&lt;br /&gt;
[[파일:서울의_봄.JPG|섬네일|오른쪽|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앞에 모인 시위대]]&lt;br /&gt;
&lt;br /&gt;
군부의 재집권 야욕에 대한 국민적 저항은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표출되었다. 1980년 3월, 서울대 총학생회 출범을 시작으로 4월 초순에는 전국의 주요 대학들이 총학생회를 결성하기 시작하였다. 대학별로 독재 정권에 아부했던 어용교수와 족벌사학 퇴진 운동을 벌였고, 특히 병영집체훈련(당시 대학 신입생들은 의무적으로 군부대에 10일 간 입대하여 각종 군사훈련을 이수해야 했다.) 거부가 주요 이슈로 전면 등장했다. 각 대학의 병영집체훈련 거부운동이 본격화되고 전국적인 쟁점으로 떠오르자 신군부는 신문, 방송을 통해 ‘학생들의 안보의식 결여’를 비난하고 교내 시위·농성을 집중적으로 보도하게 했다.  5월 1일에 서울대가 입영훈련 거부투쟁 철회를 결정하고 ‘계엄령 해제’와 ‘유신잔당 퇴진’, ‘정부개헌중단’과 ‘노동 3권 보장’ 등을 요구하기 시작하면서 대학가는 이제까지의 학내 문제 중심의 운동에서 정치개혁을 위한 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그간 정부와 대학 간에 팽팽하게 유지되던 긴장 관계는 폭발 직전으로 내닫게 된 것이다.&lt;br /&gt;
&lt;br /&gt;
약 열흘 간의 대정부 투쟁을 준비한 대학가는 5월 10일 고려대 총학생회장실에서 열린 ‘총학생회장단 회의’에 참석한 전국 23개 대학 대표들은 ‘비상계엄의 즉각 해제’와 ‘전두환, 신현확 등 유신잔당 퇴진’ 등을 결의하고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정세에 대한 공동대처 방안을 마련했다. 이후 5월 13일부터 5월 14일에 걸쳐 서울 · 부산 · 대구 · 광주 등 37개 대학에서 계엄철폐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5월 15일에는 서울역에서 시위가 발생하는 등 학생시위는 서울시가지를 거의 마비시키는 등 야간까지 지속되어 사태가 절정에 달하면서 신군부 세력을 위협하였다. 5월 16일 24개 대학 학생대표들은 당분간 시국의 추이를 관망하기로 결정하고 가두시위를 중단하면서 소강상태에 돌입하는 듯하였다.&lt;br /&gt;
&lt;br /&gt;
====1980년 봄의 광주====&lt;br /&gt;
5월 17일 신군부 세력이 이전까지는 제주도를 제외한 지역에 한정되었던 비상계엄을 전국에 확대하는 조치인 계엄포고 10호(17일 24시에 발효: 각 대학 휴교령 포함)를 밤 9시 40분에 의결하고 밤 11시 40분에 발표하면서 밤 11시를 전후한 시점부터 김대중 · 김종필이 연행되는 등 권력형 부정축재자 및 소요조종 혐의자, 학생 시위 주동자가 체포되었다. 이날 밤 광주지역의 사회운동·학생운동의 지도자도 상당수가 검거되었다. 광주의 검거대상자는 전남대 12명, 조선대 10명 등 총 22명이었다. 전남에서 계엄합동수사단은 광주505보안대가 중심이고, 중앙정보부, 경찰 등이 보조역할을 했다. 전남 계엄합동수사단은 22대 차량과 86명의 인원이 출동해 정동년 등 복적생들과 대학의 총학생회 간부들을 집중 검거했다.&lt;br /&gt;
&lt;br /&gt;
한편 육군본부는 14일 오전 7시55분에 국가 중요 보안목표와 주요대학에 군 병력 배치 명령을 하달했다. 이 명령에 따라 전남북계엄분소장인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광주 시내 주요 시설물에 이날 오후부터 계엄병력을 배치했다. 31사단 96연대 병력이 광주시내 KBS건물에 42명, MBC 21명, CBS 11명, VOC(전일방송) 11명 등 주요 방송사 건물에 배치돼 경비에 들어간 것이다.&lt;br /&gt;
&lt;br /&gt;
이날 오후 전교사령관은 7공수여단의 광주배치에 따른 수송수단 지원도 미리 협의했다. 그리고 5월 8일부터 16일 사이에 공수부대 수뇌부들도 헬기를 타고 서울에서 내려와 광주 상무대의 전투병과교육사령부를 방문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광주에서 시위가 격화되면 즉각적으로 최정예 군부대를 동원해서 진압할 준비를 철저하게 갖추고 있었다. 5월 18일에 시작된 광주의 비극은 그 이전에 이미 시한폭탄처럼 준비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lt;br /&gt;
{{구글지도 | 위도=35.175961433346885 | 경도=126.90865311973532 | 줌=13 }}  [[파일:금남로.JPG|섬네일|오른쪽|금남로 앞에 집결한 버스와 시민군]]&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18일&amp;lt;/span&amp;gt;&lt;br /&gt;
휴교령이 내려질 경우 교문 앞에서 집결한다는 결의에 따라 학생들은 5월 18일 오전 전남대학교 앞에 모였다. 공수부대원들이 전남대 앞 시위를 저지하자 대학생들은 광주역에 재집결해서 시위를 이어갔다. 시위대가 점차 늘어나면서 공수부대원이 시내에서 시위진압에 나섰으며 18일 오후 1시부터 무차별 진압작전이 이루어져 부상자가 속출하였다.&lt;br /&gt;
&lt;br /&gt;
군인들이 금남로 등 시내 중심가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이나 여자를 마구 구타하고 짓밟으며 찌르는 등의 잔혹 행동을 하자 시민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이에 시위대는 오후 4시 이후 파출소 파괴 등 적극공세에 나섰다. '''계엄군의 과잉 무력진압은 시위를 해산시키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오히려 시민들을 단결시켰으며, 결국 19일 시민 · 학생 연대가 발생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lt;br /&gt;
&lt;br /&gt;
 '''''광주 애국 시민 여러분! 이것이 웬 말입니까? 웬 벼락이란 말입니까? 죄 없는 학생들을 총칼로 찔러 죽이고 몽둥이로 두들겨 트럭으로 실어가며 부녀자를 발가벗겨 총칼로 찌르는 놈들이 이 누구란 말입니까? 이제 우리가 살길은 전시민이 하나로 뭉쳐 청년 학생들을 보호하고 유신잔당과 극악무도한 살인마 전두환 일파와 공수 특전단 놈들을 한놈도 남김없이 쳐부수는 길 뿐입니다. 우리는 이제 다 보았습니다. 다 알게 되었읍니다. 왜 학생들이 그토록 소리 높이 외쳤는가를, 우리의 적은 경찰도 군대도 아닙니다. 우리의 적은 전국민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바로 유신잔당과 전두환 일파 그놈들입니다.''''' &amp;lt;small&amp;gt; - 1980년 5월 19일에 '광주시민민주투쟁회'명의의 호소문&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19일&amp;lt;/span&amp;gt;&lt;br /&gt;
19일 오전에는 일시적 소강상태였으나 오후 들어서 분노한 학생 · 시민들이 군 · 경찰과 공방전을 벌이면서 시위는 점차 격화되었다. '''시민들은 공포감에서 벗어나 자신의 생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단순한 학생시위에서 시민봉기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계엄군은 시위대를 포위하여 구타하였으며 일부 고등학생까지 포함된 시위대는 돌과 화염병으로 저항하였고 파출소와 방송국 등에 침입하였다. 뒤처진 공수부대를 공격하거나 고립된 차량을 포위하기도 하였으며 총과 방패를 빼앗기도 하였고, 오후 4시 50분 시민들에게 포위된 계엄군의 장갑차에서 최초의 발포가 있었다. 19일 밤비가 내리는 가운데 시위가 산발적으로 계속되었으며, 20일 오전 비가 그치고 대규모 시위는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오후부터 다시 시작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20일&amp;lt;/span&amp;gt;&lt;br /&gt;
'''20일 오후 6시부터 택시와 버스 운전 기사들이 광주역과 무등경기장에 모여 대형 버스와 트럭을 앞세우고 일시에 금남로에 집결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들을 앞세운 시위는 계엄군을 몰아내는 데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였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5.18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에 &amp;lt;ins&amp;gt;[[지대한 영향]]&amp;lt;/ins&amp;gt;을 끼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학생 운동에 뛰어든 많은 대학생들은 대학교에 들어와서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의 실상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아 학생 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군부정권은 5.18 이후로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다. 전두환은 김대중 등에게 '광주 사태'의 책임을 물어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했고,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 선언을 한 직후, 8월 27일 소위 체육관 선거를 통해 전두환은 대통령 자리를 탈취했다.&lt;br /&gt;
&lt;br /&gt;
지역적인 면에서는 '''광주광역시를 비롯한 전라도 지역의 트라우마'''로 작용해 이후의 민주정의당 및 &amp;lt;ins&amp;gt;[[3당 합당]]&amp;lt;/ins&amp;gt;으로 이어지는 보수 세력에 대해 적대심을 가지고, 민주당계 정당의 표밭이 되는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미 박정희 정부 시절부터 유무형의 정치적인 차별을 받고 있었지만 5.18의 참상은 전라도가 다시는 보수 세력을 지지하지 않게 만들 정도로 심각한 사건이며 호남소외론의 가장 결정적인 명분이 되었다.&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이나자키로빈]]: 5.18 민주화운동 페이지 전체 작성&lt;br /&gt;
&lt;br /&gt;
=='''6월민주항쟁'''==&lt;br /&gt;
===타임라인===&lt;br /&gt;
===원인===&lt;br /&gt;
1985년 2 · 12총선에서 신한민주당이 승리한 것을 기점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가 날로 커졌다. 1986년 개헌서명운동의 성과로 국회 내 개헌특위가 만들어졌지만, 여야 간 개헌 협상은 난항을 거듭하였다. 이를 빌미로 1987년 4월 13일 전두환은 대통령 임기 내 개헌을 거부하고, 기존 제5공화국 헌법으로 차기 대통령 선거를 치르겠다는 이른바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였다. 전두환 정부가 이렇게 개헌 거부를 공식화한 상황에서 5월 18일 정의구현사제단이 지난 1987년 1월 발생한 [[박종철고문치사사건]]이 정권 차원에서 은폐 ·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폭로하였다. 많은 시민들이 크게 분노하였고, 야당과 민주화운동 진영은 전두환 정부에 정면으로 맞서기 위한 투쟁에 본격적으로 돌입하였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먼저 1987년 5월 27일 야당과 재야, 종교계 등이 힘을 모아 ‘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여당인 민주정의당에서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6월 10일에 맞춰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6 · 10국민대회)’를 치르기로 결정하였다. 대학생들은 국본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를 중심으로 6 · 10국민대회에 호응하여 6월 초부터 각 대학별로 연일 집회와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6 · 10국민대회 하루 전날인 6월 9일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교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는 곧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학생들은 물론 시민들의 분노가 들끓었다. 이러한 분노 속에서 6 · 10국민대회가 열렸다. 경찰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6 · 10국민대회가 열리는 성공회대성당을 원천 봉쇄하였다. 그 결과 6 · 10국민대회는 대회장에 미리 들어가 있던 소수의 인원만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대회 예정 시간인 오후 6시 이전부터 서울 시내 곳곳에서 대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시민들도 다양한 방식으로 6 · 10국민대회와 학생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날 밤 늦게까지 시위를 벌이던 학생들은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이후 5일 동안 농성을 계속하였다. 애초 계획된 것은 아니었지만 대학생들의 명동성당 농성은 6 · 10국민대회가 단발성 행사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인 저항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lt;br /&gt;
&lt;br /&gt;
명동성당 농성을 거치며 항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유월항쟁의 전국화 과정에는 일정한 패턴이 존재하였다. 6월 10일 서울 외에도 전국 주요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위가 벌어졌지만, 15일까지 항쟁의 중심은 6 · 10국민대회와 명동성당 농성이 전개된 서울이었다. 하지만 6월 15일 경부터는 부산, 대전, 진주 등에서 격렬한 시위가 전개되었다. 그러다가 6월 20일부터 대규모 시위가 광주, 전주, 순천, 익산 등 호남 지방으로 옮겨졌다. 6 · 10국민대회 이후 약 20일 동안 전국 곳곳에서 매일 평균 100회 이상의 시위가 동시다발로 벌어졌다. 특히 6월 18일 ‘최루탄추방대회’와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은 전국 곳곳에서 한꺼번에 1백만 명 이상이 참여하였다. 갈수록 참가 지역이 전국 곳곳으로 확산되어 대도시, 중소도시뿐만 아니라 농촌 지역의 군 단위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6월 26일 하루에만 37~38개 시 · 군에서 시위가 동시에 벌어졌다. 유월항쟁에 참가한 연 인원은 400~500만 명으로 추산된다.&lt;br /&gt;
&lt;br /&gt;
반면 유월항쟁의 전국적 동시다발 시위는 경찰 병력을 분산시켰다. 분산된 경찰 병력으로는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거센 시위의 물결을 막아 낼 수 없었다. 경찰이 시위 진압에 최루탄을 남발하면서 최루탄도 점차 고갈되기 시작하였다. 유월항쟁 기간 동안 경찰이 사용한 최루탄만 총 67만 발이 넘었다. 더불어, 전두환 정권이 집권 내내 강조했던 88서울올림픽이 얼마 남지 않아 미국 등 국제사회의 이목이 집중된 상황에서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운동 때처럼 유혈 사태와 대량 학살을 반복하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무엇보다 군대를 동원하더라도 이러한 대규모 시민 항쟁을 진압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결국 경찰력으로 항쟁을 막기 힘들고, 군대 투입도 어렵다고 판단한 전두환 정권은 1987년 6월 29일 ‘ 6 · 29민주화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하였다. 그리고 그동안 의식불명 상태에 있었던 이한열이 7월 5일 끝내 사망하였다. 5일장 후 7월 9일 치러진 이한열의 노제에 100만 명의 인파가 모인 것을 끝으로 약 한 달 동안 지속된 유월항쟁은 마무리되었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1987년 유월항쟁이 대통령직선제 개헌이라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이 항쟁에 동참한 학생과 시민들의 요구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제시한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 개헌’이라는 슬로건으로 모아졌기 때문이었다. 유월항쟁은 이러한 민주화 세력의 통합성, 즉 각기 다른 성격과 지향을 가진 여러 주체들이 모두 동의할 수 있는 ‘최소 강령’하에 ‘최대 연합’으로 결집하였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lt;br /&gt;
===기여===&lt;br /&gt;
[[딩잉잉]]:6월민주항쟁 페이지 전체 작성&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기밀문서]]&lt;br /&gt;
[[분류:4.19혁명관련]]&lt;br /&gt;
[[분류:부마항쟁관련]]&lt;br /&gt;
[[분류:5.18민주화운동관련]]&lt;br /&gt;
[[분류:6월민주항쟁관련]]&lt;br /&gt;
[[분류:뎐]]&lt;br /&gt;
[[분류:이나자키로빈]]&lt;br /&gt;
[[분류:호빵이👻]]&lt;br /&gt;
[[분류:•ᴗ•]]&lt;br /&gt;
[[분류:딩잉잉]]&lt;/div&gt;</summary>
		<author><name>이나자키로빈</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8%B0%EB%B0%80%EB%AC%B8%EC%84%9C&amp;diff=31871</id>
		<title>기밀문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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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08T07:48:3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이나자키로빈: /* 의의 */&lt;/p&gt;
&lt;hr /&gt;
&lt;div&gt;=='''컨텐츠 주제'''==&lt;br /&gt;
===기여===&lt;br /&gt;
=='''팀원'''==&lt;br /&gt;
*오현지(2022131143) [[뎐]]&amp;lt;br/&amp;gt;&lt;br /&gt;
*김여원(2023130209) [[이나자키로빈]]&amp;lt;br/&amp;gt;&lt;br /&gt;
*김하은(2022131345) [[호빵이👻]]&amp;lt;br/&amp;gt;&lt;br /&gt;
*박정원(2023130350) [[•ᴗ•]]&amp;lt;br/&amp;gt;&lt;br /&gt;
*최필중(2023130216) [[딩잉잉]]&amp;lt;br/&amp;gt;&lt;br /&gt;
&lt;br /&gt;
=='''기획의도'''==&lt;br /&gt;
===기획배경===&lt;br /&gt;
1945년 광복 이후 대한민국 국민들은 자유민주국가로서의 미래를 기대했으나 실상은 그러지 못했다.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보여주듯 현재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는 그것을 누리지 못한 앞선 세대들의 목숨을 바친 항쟁의 대가이다. 민주항쟁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의 핵심 동력이었다. 오늘날 우리나라 민주의식의 중요한 기둥이 되는 네 가지 항쟁을 선별하고 각 항쟁의 배경, 전개과정, 의의를 비롯해 세부적이고 자세한 내용에 대한 기사를 작성한다.&lt;br /&gt;
===기획목적===&lt;br /&gt;
작금의 현실까지 오기에는 수없이 많은 투쟁이 있었지만 4.19혁명, 부마항쟁, 5.18민주항쟁, 6월민주항쟁이라는 네 가지 사건을 살펴보기로 한 것은 가장 많이 다뤄지고, 가장 많이 알려진 사건이기 때문이다. 관련된 사건과 역사 인물들에 대해 자세히 적어 내어 민주항쟁의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지 않으면 알기 힘든 각 민주항쟁의 자세한 내막을 밝혀낸다.&lt;br /&gt;
===기대하는 바===&lt;br /&gt;
타임라인과 온톨로지를 활용해 내용의 전반적인 이해를 돕고 자세한 설명을 통해 사건의 자세한 내막을 들어낸다. 네 가지 항쟁을 각각 큰 목차로 설정하고 세부 기사를 그 내부에 작성해 독자의 관심과 수요에 부합하는 정보를 전달하는 데 효과적일 것으로 기대된다. 민주항쟁에 참여한 사람들의 희생과 투쟁에 대한 존경심을 부르고 역사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다.&lt;br /&gt;
===기여===&lt;br /&gt;
[[뎐]], [[이나자키로빈]], [[호빵이👻]]: 기획의도 페이지 작성&lt;br /&gt;
&lt;br /&gt;
=='''온톨로지'''==&lt;br /&gt;
{{NetworkGraph | title=민주항쟁.lst}}&lt;br /&gt;
[[민주항쟁.lst]]&lt;br /&gt;
===기여===&lt;br /&gt;
*[[뎐]]: 온톨로지 제작&lt;br /&gt;
=='''컨텐츠 구조'''==&lt;br /&gt;
===클래스(Class)===&lt;br /&gt;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color:white&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0%&amp;quot; | 클래스 !! style=&amp;quot;width:40%&amp;quot; | 설명 !! style=&amp;quot;45%&amp;quot; | 노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제||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대표 키워드인 민주항쟁을 주제로서 나타내었다 || 만주항쟁&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항쟁||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민주화운동 시기 발생했던 주요 운동들을 ‘항쟁’이라는 키워드로 분류하였다. || 4.19혁명, 부마항쟁, 5.18 민주화운동, 6월민주항쟁&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사건||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항쟁의 원인, 결과가 되는 사건을 정리하였다|| 3.15부정선거, 고려대 4.18학생시위, 3.15의거, YH사건, 10.26사태, 12.12 군사반란, 비상계엄령,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고문추방민족대행진, 4.13호헌조치, 6.29선언, 대통령직선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지역||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요 항쟁들이 일어났던 지역을 정리하였다|| 마산, 부산, 광주&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인물||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요사건들을 발생시킨 인물, 참여했던 인물을 묶어서 정리하였다|| 이승만, 이기붕, 김주열, 박정희, 김재규, 전두환, 신군부, 시민군, 박종철, 이한열, 노태우&lt;br /&gt;
|-&lt;br /&gt;
|}&lt;br /&gt;
===관계성(Relation)===&lt;br /&gt;
*&amp;lt;font color=#228B22&amp;gt;'''~은 ~에 속한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주요 항쟁들이 민주항쟁에 속함을 나타내거나 인물의 소속을 나타낸다.&lt;br /&gt;
***해당노드:&lt;br /&gt;
***#4.19혁명 -&amp;gt; 민주항쟁&lt;br /&gt;
***#부마항쟁 -&amp;gt; 민주항쟁&lt;br /&gt;
***#5.18민주화운동 -&amp;gt; 민주항쟁&lt;br /&gt;
***#6월 민주항쟁 -&amp;gt; 민주항쟁&lt;br /&gt;
***#전두환 -&amp;gt; 신군부&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의 원인이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어떠한 사건과 인과관계를 이루는 또다른 사건 혹은 인물을 설명한다.&lt;br /&gt;
***#이기붕 -&amp;gt; 3.15부정선거&lt;br /&gt;
***#김주열 -&amp;gt; 고려대 4.18학생시위&lt;br /&gt;
***#고려대 4.18학생시위 -&amp;gt; 4.19혁명&lt;br /&gt;
***#3.15의거 -&amp;gt; 4.19혁명&lt;br /&gt;
***#김주열 -&amp;gt; 4.19혁명&lt;br /&gt;
***#3.15부정선거 -&amp;gt; 3.15의거&lt;br /&gt;
***#YH사건 -&amp;gt; 부마항쟁&lt;br /&gt;
***#부마항쟁 -&amp;gt; 10.26사태&lt;br /&gt;
***#박정희 -&amp;gt; 10.26사태&lt;br /&gt;
***#비상계엄령 -&amp;gt; 5.18민주화운동&lt;br /&gt;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 -&amp;gt; 고문추방민족대행진&lt;br /&gt;
***#고문추방민족대행진 -&amp;gt; 4.13호헌조치&lt;br /&gt;
***#4.13호헌조치 -&amp;gt; 6월민주항쟁&lt;br /&gt;
***#6월민주항쟁 -&amp;gt; 6.29선언&lt;br /&gt;
***#6월민주항쟁 -&amp;gt; 대통령직선제&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을 발생시켰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사건과 그 사건을 직접적으로 발생시킨 인물을 연결한다.&lt;br /&gt;
***#이승만 -&amp;gt; 3.15부정선거&lt;br /&gt;
***#김재규 -&amp;gt; 10.26사태&lt;br /&gt;
***#신군부 -&amp;gt; 1212군사반란&lt;br /&gt;
***#전두환 -&amp;gt; 비상계엄령&lt;br /&gt;
***#노태우 -&amp;gt; 6.29선언&lt;br /&gt;
***#시민군 -&amp;gt; 5.18민주화운동&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에 희생되었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민주항쟁의 진압과정 등 에서 희생된 인물을 설명한다&lt;br /&gt;
***#김주열 -&amp;gt; 3.15의거&lt;br /&gt;
***#이한열 -&amp;gt; 6월 민주항쟁&lt;br /&gt;
***#박종철&amp;gt;박종철 고문치사 사건&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에서 발생했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설명한다.&lt;br /&gt;
***#3.15의거 -&amp;gt; 마산&lt;br /&gt;
***#부마항쟁 -&amp;gt; 부산&lt;br /&gt;
***#부마항쟁 -&amp;gt; 마산&lt;br /&gt;
***#5.18민주화운동 -&amp;gt; 광주&lt;br /&gt;
===기여===&lt;br /&gt;
*[[뎐]]: 컨텐츠 구조 페이지 작성&lt;br /&gt;
=='''4.19혁명'''==&lt;br /&gt;
===타임라인===&lt;br /&gt;
===원인===&lt;br /&gt;
====[[3.15 부정선거]]====&lt;br /&gt;
1959년 대한민국은 제 4대 대통령 선거와 제 5대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당시 자유당에서는 12년째 대통령으로서 연임 중이던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이기붕]]'''을 부통령 후보로 선임하였다. 그러나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병세의 악화로 사망하게 되고,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은 확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선거의 초점은 자유당의 조병옥과 민주당의 장면 간의 선거전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본격적인 선거유세의 시작과 함께 정부와 여당의 잇따른 야당선거운동 방해사건으로 부정선거가 시작되었다. 1960년 3월 15일 선거가 시작된 이후에도 다양한 방법의 부정행위가 일어났고, 개표 결과 이승만과 이기붕의 득표가 100%에 육박하는 결과로 나오자 자유당은 득표수를 하향 조정해 최종 집계에 반영할 것을 지시했다. 결국 이승만 88.7%, 이기붕 79%의 득표율을 가지며 정, 부통령에 당선되었다.&amp;lt;ref&amp;gt;자세한 내용은 3.15부정선거 페이지 참조&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부정선거 반대시위, [[3.15 의거]]의 발생====&lt;br /&gt;
3.15 부정선거를 반대하는 시위는 초기에는 중, 고등학생들의 산발적인 시위로 전개되었다. 3월 15일 선거일 밤 경남 마산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으며,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여 1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amp;lt;br/&amp;gt;&lt;br /&gt;
3월 15일 실종되었던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4월 11일 마산부두에서 발견되자 마산 시민들은 시청, 파출소 등을 파괴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2차 시위가 일어난 것이다.&lt;br /&gt;
&lt;br /&gt;
====[[고려대학교 4.18 학생시위]]의 발생====&lt;br /&gt;
1, 2차 마산시위를 계기로 부정선거 무효와 이승만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났다. '4.18 선언문'을 낭독하고 시내로 진출하였다. 이는 4월 19일 학생들과 일반 시민들이 가세한 대규모 시위로 이어지게 되었다.&lt;br /&gt;
====전국적인 4.19 혁명의 발생====&lt;br /&gt;
분노한 전국의 시민과 학생들이 다음 날인 4월 19일 총궐기하여 '이승만 하야와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며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경찰은 또다시 무차별 발포에 나섰고,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여기에 이승만 정부는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지만 이러한 압박에도 시민들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lt;br /&gt;
====이승만 대통령의 혼란 수습 시도====&lt;br /&gt;
이승만 대통령은 4.19 시위로 인한 정국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4월 20일 국무위원 전원과 자유당 당무위원 전원의 사표를 제출하도록 지시하였으며, 4월 23일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외무장관에 허정, 내무장관에 이호, 법무장관에 권승렬을 임명하는 등 개각을 단행하였다.&amp;lt;br/&amp;gt;&lt;br /&gt;
그러나 미국은 4.19직후 국무부 성명을 통해 한국에서 발생한 사태는 부정선거에 대한 '군중의 불만'을 반영한 것 이라고 했고, 양유찬 주미대사를 불러 '부정선거에 대한 철저한 조사', '경향신문 복간', '국가보안법 개정' 등을 촉구하는 각서를 전달하였다.&amp;lt;br/&amp;gt;&lt;br /&gt;
그리고 4월 25일, 이승만 정권에 분노한 전국 27개 대학 258명의 교수가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 모여 14개항의 시국 선언문을 발표하며 학생, 시민들과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들은 3.15 부정선거 및 4.19 사태의 책임을 지고 대통령이 물러날 것을 주장하였으며, &amp;quot;학생들의 피에 보답하자&amp;quot;는 플랜 카드를 앞세워 국회의사당까지 행진하였다. &lt;br /&gt;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lt;br /&gt;
무력진압에도 대규모 시위가 이어지며 시민들은 완강하게 투쟁하였다. 4월 26일 시위대가 경무대로 다시 집결하는 등 사태가 심각하게 진행되자, 오전 10시 30분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 성명을 발표하였다. 4월 27일 이승만은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하며 대통령직을 하야하고 하와이로 망명하였으며 자유당 정권도 끝나게 된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우리 국민들, 특히 학생과 청년들의 주도로 이루어진 4.19 혁명은 학생과 일반 대중이 단결하여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아시아 최초의 시건이다. 4.19혁명은 부마항쟁, 5.18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그리고 2017년 촛불시위에 이르기 까지 정권에 대항하는 국민들이 단합을 이루는 초석이 되었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도 시민 저항권에 대한 근거로써 4.19혁명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문구가 있다.&lt;br /&gt;
===기여===&lt;br /&gt;
[[뎐]]: 4.19혁명 페이지 원인, 의의 작성 &lt;br /&gt;
&lt;br /&gt;
[[•ᴗ•]]: 4.19혁명 페이지 전개 작성&lt;br /&gt;
&lt;br /&gt;
=='''부마항쟁'''==&lt;br /&gt;
===타임라인===&lt;br /&gt;
===원인===&lt;br /&gt;
====[[유신 헌법]]과 [[긴급조치]]====&lt;br /&gt;
1971년 선거에서 김대중을 누르고 대통령에 3선된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해 국회 해산,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등 법의 일부 기능을 정지시키고 전국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했다.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된 이른바 유신헌법에 의해 제정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법」 에 의거해 박정희가 제8대 대통령으로 재차 당선되었고, 이 유신 헌법이 발효된 기간을 유신 체제라고 부른다. 유신 체제는 행정, 입법, 사법의 3권을 모두 쥔 대통령이 종신 집권할 수 있도록 설계된 1인 대통령제였다. 박정희는 유신 헌법에 의거해 대통령의 권한으로 취할 수 있었던 특별조치인 긴급조치를 선포함으로써 헌법에 반대하는 시위 및 운동과 방송, 언론 활동을 하는 반정부 인사들을 연행, 체포, 고문하는 등 억압을 가했다.&lt;br /&gt;
&lt;br /&gt;
====한국경제의 위기====&lt;br /&gt;
1970년대 말 한국경제는''' [[제2차 오일쇼크]]'''라는 세계경제의 위기와 결합해 가라앉고 말았다. 경제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정부는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과 함께 '''[[경제안정화정책]]'''을 수용했고, 중소자본가, 봉급생활자, 도시 노동자와 농민 등에 안정화 비용을 부과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이와 같은 안정화 정책은 경제위기로 어려운 처지에 있던 중소기업들의 도산을 가속하여 기업 부도율이 치솟고 하층민들을 더 깊은 고통에 몰아넣었다. 특히 '''부가가치세'''를 도입한 이후 물가가 상승하면서 일상에 타격을 주었으며, 노동집약적 제조업이 집중되었던 부산과 마산에서는 상황이 더욱 심각하여 1979년 부산지역 부도율은 서울의 3배에 달했다.&lt;br /&gt;
&lt;br /&gt;
====YH 사건====&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부산대학교 민주선언문, 학생 시위에서 시민항쟁으로====&lt;br /&gt;
&lt;br /&gt;
1979년 10월 16일 아침 10시 부산대학교 구내 도서관 앞에서 약 500명의 학생들이 모여 “유신정권 물러가라”, “정치탄압 중지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반정부 시위를 벌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민주선언문」]]'''을 통해 민주화, 언론 자유, 인권 보장의 신념을 확인하고, “제도화된 폭력성과 조직적 악의 근원인 유신헌법과 독재집권층의 퇴진만이 5천 만 겨레의 통일의 첫걸음이라고 주장하면서 형제의 피를 요구하는 자유와 민주의 깃발을 우리가 잡고 반민주의 무리, 불의의 무리들을 향해 외치며 나아가자”라고 선언하였다. 이후 학생들은 교문을 나가 거리에서 시위했다. 이때 학생 수는 약 5,000명으로 불어나 있었고, 광복동과 남포동 등 부산시내 중심가까지 진출해 애국가 등의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며, 이를 제지하려는 경찰과 이곳저곳에서 충돌하였다. 비슷한 시간, 부산 동아대학교에서도 1,000여 명의 학생이 부산대학교 학생과 합류하여 가두시위를 벌였다. 부산대학교 데모로 학생 수백 명이 연행되고 100여 명이 다쳤지만 이튿날인 10월 17일에는 시위가 더욱 격화되어 학생들뿐만 아니라 다수의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학생 시위는 점차 시민항쟁의 양상을 띠어갔다.''' 밤늦게까지 계속된 시위에서 시민들은 충무파출소, 한국방송공사, 서구청, 부산세무서 등을 파괴하였고, 경찰차량을 불태우거나 파손시켰다.&lt;br /&gt;
&lt;br /&gt;
====마산의 시민항쟁====&lt;br /&gt;
&lt;br /&gt;
민주항쟁은 18일에 마산으로 확산되었다. 늦은 오후에는 1,000여 명의 경남대학교 학생들이 마산 시내 번화가에 산발적으로 집결했으며, 일부시민들도 가담해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어두워진 다음 학생과 시민들의 데모는 격화되어 파출소, 공화당사, 방송국, 신문사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파괴하였다. 이튿날인 19일에는 시위가 더욱 치열해져 마산 시내는 한때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저녁 8시경, 시위대는 경남대학과 마산대학&amp;lt;ref&amp;gt;1985년 창원대학으로 교명이 변경되었으며, 현재의 마산대학교와 다르다.&amp;lt;/ref&amp;gt;, 그리고 고등학생까지 합세하여 약 8,000명에 이르렀으며, 시내 곳곳에서 몽둥이를 들고 동사무소와 파출소로 몰려가 시설을 파괴하였고, 경찰차량에 불을 질렀다.&lt;br /&gt;
&lt;br /&gt;
====부산 계엄령, 마산 지역 위수령====&lt;br /&gt;
&lt;br /&gt;
부산대학교 시위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박정희 정부는 학생 시위로 시작된 시위가 대규모 시민항쟁으로 사태가 심상치 않게 확대되어가자 강경책으로 대응했다. 정부는 18일 자정을 기해 '''부산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동원한 과격한 진압'''을 통해 [[파일:계엄포고문.jpg|200px|섬네일|부산지역에 내려진 계엄포고문을 일고 있는 시민들]] 시위 참여자들과 이를 방조한 일반 시민들까지 1,058명을 연행하고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으며, 부산지구 계엄사령부는 각 대학 휴교조처와 야간통행금지시간을 2시간 연장하는 등의 항이 담긴 포고문을 발표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부산에 계엄령이 선포된 이튿날인 19일에 마산 시위가 확대됨에 따라 그 다음날인 10월 20일 정오, 정부가 '''마산 및 창원 지역에 위수령을 발령'''해 통행금지 시간이 연장되고, 경남대학 등에는 휴교조처가 취해졌고, 24일에는 깡패를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132명을 검거, 23명을 구속했다. 이렇게 '''표면적으로는 부마민주항쟁이 단시간에 진압되는 듯 보였지만, 항쟁은 이미 유신체제의 균열을 불러오고 있었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항쟁의 전개 과정에서 볼 수 있듯, 부마민주항쟁에서 특징적인 사실은 먼저 시위대의 가장 큰 분노의 대상은 공화당사와 경찰·파출소였다는 점, 다음으로 ‘부유층’에 대한 시위대의 공공연한 공격, 세 번째로 “부가가치세를 철폐하라”, “잘 먹고 잘 살아라”라는 외침에서 드러나듯이 세무서에 대한 공격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문사·방송국에 대한 공격을 들 수 있다.&lt;br /&gt;
&lt;br /&gt;
부마민주항쟁은 1970년대 유신체제 밑에서 쌓였던 침묵하는 언론, 조세, 시민을 억압하는 경찰에 대한 불만 등 정치·사회·경제·문화·종교 등 각 부문에 걸친 여러 모순의 폭발이었고, 헌법 개정과 긴급조치로 겨우 유지되던 유신체제와 박정희 정권의 붕괴를 촉진시킨 결정적인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10.26사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항쟁은 1980년 5월 18일의 광주 민주화운동과 1987년 6월 민주항쟁에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된다.&lt;br /&gt;
===기여===&lt;br /&gt;
[[호빵이👻]]: 부마항쟁 페이지 전체 작성&lt;br /&gt;
&lt;br /&gt;
=='''5.18민주화운동'''==&lt;br /&gt;
===타임라인===&lt;br /&gt;
===원인===&lt;br /&gt;
====유신체제의 붕괴====&lt;br /&gt;
&lt;br /&gt;
[[파일:김재규.jpg|섬네일|오른쪽|암살 당시 상황을 재현하는 김재규]]&lt;br /&gt;
&lt;br /&gt;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amp;lt;small&amp;gt; - 김재규&amp;lt;/small&amp;gt;&lt;br /&gt;
1979년 10월 4일 신민당 총재 김영삼이 국회에서 의원직을 제명당하자 10월 15부터 10월 20까지 부산 · 마산 등지에서는 부마항쟁이 일어났고, 이의 해결을 둘러싼 노선대립으로 갈등 중 10월 26일 김재규가 박정희를 살해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ins&amp;gt;[[10.26 사태]]&amp;lt;/ins&amp;gt;의 사후 수습과정에서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을 중심으로 신군부 세력이 부상하였으며, 이들은 &amp;lt;ins&amp;gt;[[12.12 사건]]&amp;lt;/ins&amp;gt;의 하극상을 통하여 군부를 장악하였다. 1980년 2월 29일 김대중 등이 복권되었으나 그 해 봄, 신군부는 최규하 과도 정부를 유명무실하게 하고 국민들이 요구하는 민주주의와 이를 위한 명확한 정치일정 제시를 거부하면서 권력기반을 구축하였다.&lt;br /&gt;
&lt;br /&gt;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lt;br /&gt;
한 시대의 대격변을 예고하는 단초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시작됐다. 1979년 8월 9일 오전, 신민당의 당사 4층 강당에서는 봉제업체인 YH무역주식회사의 여성노동자 200여명이 기업주의 폐업에 반발하여 폐업조치 철회 농성을 벌였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인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신민당이 당사 건물을 내준 것이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폭력을 동원하여 농성을 해산시켰다. 결국 이 사건은 노동 탄압 사건을 넘어선 야당에 대한 정치 탄압 사건으로 발전하였다.&lt;br /&gt;
&lt;br /&gt;
이날 경찰은 1000여명의 진압대원을 신민당사로 난입시켜 농성을 하고 있던 174명의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로 밖으로 끌어냈다. 또한 경찰은 총재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김영삼 총재와 당 간부들을 끌어내면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박정희 정권은 이 노동자 농성 사건을 빌미로 신민당 분열공작을 시도하였다. 유신정권과 비밀리에 결탁한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 3명이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 부총재 전원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접수시켰다. 그리고 법원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신민당 총재단의 직무 집행을 정지시키고 박정희 정권의 꼭두각시를 총재직무대행으로 선임하였다.&lt;br /&gt;
&lt;br /&gt;
아울러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의 동교동 자택을 전면 봉쇄하였고,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에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끊으라고 요구한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즈』 회견내용을 “반헌정적, 반민족적 작태”로 몰아서 국회에 징계 동의안을 제출했다. 10월 4일 오후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의원 159명은 여당 총회장에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제명 결의안을 '''기습적으로''' 처리해 버렸다.&lt;br /&gt;
&lt;br /&gt;
노사분규 사태로 시작된 사건이 제1야당 당수의 의원직 제명으로 확대된 정치적 사태를 지켜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유신체제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이 고조되었다. 또한 이 사건은 그동안 다소 주춤하던 대학가에 반유신 반독재 운동의 열기가 다시 확산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청춘을 바쳐, 학생 운동====&lt;br /&gt;
&lt;br /&gt;
[[파일:서울의_봄.JPG|섬네일|오른쪽|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앞에 모인 시위대]]&lt;br /&gt;
&lt;br /&gt;
군부의 재집권 야욕에 대한 국민적 저항은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표출되었다. 1980년 3월, 서울대 총학생회 출범을 시작으로 4월 초순에는 전국의 주요 대학들이 총학생회를 결성하기 시작하였다. 대학별로 독재 정권에 아부했던 어용교수와 족벌사학 퇴진 운동을 벌였고, 특히 병영집체훈련(당시 대학 신입생들은 의무적으로 군부대에 10일 간 입대하여 각종 군사훈련을 이수해야 했다.) 거부가 주요 이슈로 전면 등장했다. 각 대학의 병영집체훈련 거부운동이 본격화되고 전국적인 쟁점으로 떠오르자 신군부는 신문, 방송을 통해 ‘학생들의 안보의식 결여’를 비난하고 교내 시위·농성을 집중적으로 보도하게 했다.  5월 1일에 서울대가 입영훈련 거부투쟁 철회를 결정하고 ‘계엄령 해제’와 ‘유신잔당 퇴진’, ‘정부개헌중단’과 ‘노동 3권 보장’ 등을 요구하기 시작하면서 대학가는 이제까지의 학내 문제 중심의 운동에서 정치개혁을 위한 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그간 정부와 대학 간에 팽팽하게 유지되던 긴장 관계는 폭발 직전으로 내닫게 된 것이다.&lt;br /&gt;
&lt;br /&gt;
약 열흘 간의 대정부 투쟁을 준비한 대학가는 5월 10일 고려대 총학생회장실에서 열린 ‘총학생회장단 회의’에 참석한 전국 23개 대학 대표들은 ‘비상계엄의 즉각 해제’와 ‘전두환, 신현확 등 유신잔당 퇴진’ 등을 결의하고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정세에 대한 공동대처 방안을 마련했다. 이후 5월 13일부터 5월 14일에 걸쳐 서울 · 부산 · 대구 · 광주 등 37개 대학에서 계엄철폐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5월 15일에는 서울역에서 시위가 발생하는 등 학생시위는 서울시가지를 거의 마비시키는 등 야간까지 지속되어 사태가 절정에 달하면서 신군부 세력을 위협하였다. 5월 16일 24개 대학 학생대표들은 당분간 시국의 추이를 관망하기로 결정하고 가두시위를 중단하면서 소강상태에 돌입하는 듯하였다.&lt;br /&gt;
&lt;br /&gt;
====1980년 봄의 광주====&lt;br /&gt;
5월 17일 신군부 세력이 이전까지는 제주도를 제외한 지역에 한정되었던 비상계엄을 전국에 확대하는 조치인 계엄포고 10호(17일 24시에 발효: 각 대학 휴교령 포함)를 밤 9시 40분에 의결하고 밤 11시 40분에 발표하면서 밤 11시를 전후한 시점부터 김대중 · 김종필이 연행되는 등 권력형 부정축재자 및 소요조종 혐의자, 학생 시위 주동자가 체포되었다. 이날 밤 광주지역의 사회운동·학생운동의 지도자도 상당수가 검거되었다. 광주의 검거대상자는 전남대 12명, 조선대 10명 등 총 22명이었다. 전남에서 계엄합동수사단은 광주505보안대가 중심이고, 중앙정보부, 경찰 등이 보조역할을 했다. 전남 계엄합동수사단은 22대 차량과 86명의 인원이 출동해 정동년 등 복적생들과 대학의 총학생회 간부들을 집중 검거했다.&lt;br /&gt;
&lt;br /&gt;
한편 육군본부는 14일 오전 7시55분에 국가 중요 보안목표와 주요대학에 군 병력 배치 명령을 하달했다. 이 명령에 따라 전남북계엄분소장인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광주 시내 주요 시설물에 이날 오후부터 계엄병력을 배치했다. 31사단 96연대 병력이 광주시내 KBS건물에 42명, MBC 21명, CBS 11명, VOC(전일방송) 11명 등 주요 방송사 건물에 배치돼 경비에 들어간 것이다.&lt;br /&gt;
&lt;br /&gt;
이날 오후 전교사령관은 7공수여단의 광주배치에 따른 수송수단 지원도 미리 협의했다. 그리고 5월 8일부터 16일 사이에 공수부대 수뇌부들도 헬기를 타고 서울에서 내려와 광주 상무대의 전투병과교육사령부를 방문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광주에서 시위가 격화되면 즉각적으로 최정예 군부대를 동원해서 진압할 준비를 철저하게 갖추고 있었다. 5월 18일에 시작된 광주의 비극은 그 이전에 이미 시한폭탄처럼 준비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lt;br /&gt;
{{구글지도 | 위도=35.175961433346885 | 경도=126.90865311973532 | 줌=13 }}  [[파일:금남로.JPG|섬네일|오른쪽|금남로 앞에 집결한 버스와 시민군]]&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18일&amp;lt;/span&amp;gt;&lt;br /&gt;
휴교령이 내려질 경우 교문 앞에서 집결한다는 결의에 따라 학생들은 5월 18일 오전 전남대학교 앞에 모였다. 공수부대원들이 전남대 앞 시위를 저지하자 대학생들은 광주역에 재집결해서 시위를 이어갔다. 시위대가 점차 늘어나면서 공수부대원이 시내에서 시위진압에 나섰으며 18일 오후 1시부터 무차별 진압작전이 이루어져 부상자가 속출하였다.&lt;br /&gt;
&lt;br /&gt;
군인들이 금남로 등 시내 중심가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이나 여자를 마구 구타하고 짓밟으며 찌르는 등의 잔혹 행동을 하자 시민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이에 시위대는 오후 4시 이후 파출소 파괴 등 적극공세에 나섰다. '''계엄군의 과잉 무력진압은 시위를 해산시키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오히려 시민들을 단결시켰으며, 결국 19일 시민 · 학생 연대가 발생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lt;br /&gt;
&lt;br /&gt;
 '''''광주 애국 시민 여러분! 이것이 웬 말입니까? 웬 벼락이란 말입니까? 죄 없는 학생들을 총칼로 찔러 죽이고 몽둥이로 두들겨 트럭으로 실어가며 부녀자를 발가벗겨 총칼로 찌르는 놈들이 이 누구란 말입니까? 이제 우리가 살길은 전시민이 하나로 뭉쳐 청년 학생들을 보호하고 유신잔당과 극악무도한 살인마 전두환 일파와 공수 특전단 놈들을 한놈도 남김없이 쳐부수는 길 뿐입니다. 우리는 이제 다 보았습니다. 다 알게 되었읍니다. 왜 학생들이 그토록 소리 높이 외쳤는가를, 우리의 적은 경찰도 군대도 아닙니다. 우리의 적은 전국민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바로 유신잔당과 전두환 일파 그놈들입니다.''''' &amp;lt;small&amp;gt; - 1980년 5월 19일에 '광주시민민주투쟁회'명의의 호소문&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19일&amp;lt;/span&amp;gt;&lt;br /&gt;
19일 오전에는 일시적 소강상태였으나 오후 들어서 분노한 학생 · 시민들이 군 · 경찰과 공방전을 벌이면서 시위는 점차 격화되었다. '''시민들은 공포감에서 벗어나 자신의 생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단순한 학생시위에서 시민봉기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계엄군은 시위대를 포위하여 구타하였으며 일부 고등학생까지 포함된 시위대는 돌과 화염병으로 저항하였고 파출소와 방송국 등에 침입하였다. 뒤처진 공수부대를 공격하거나 고립된 차량을 포위하기도 하였으며 총과 방패를 빼앗기도 하였고, 오후 4시 50분 시민들에게 포위된 계엄군의 장갑차에서 최초의 발포가 있었다. 19일 밤비가 내리는 가운데 시위가 산발적으로 계속되었으며, 20일 오전 비가 그치고 대규모 시위는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오후부터 다시 시작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20일&amp;lt;/span&amp;gt;&lt;br /&gt;
'''20일 오후 6시부터 택시와 버스 운전 기사들이 광주역과 무등경기장에 모여 대형 버스와 트럭을 앞세우고 일시에 금남로에 집결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들을 앞세운 시위는 계엄군을 몰아내는 데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였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5.18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에 &amp;lt;ins&amp;gt;[[지대한 영향]]&amp;lt;/ins&amp;gt;을 끼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학생 운동에 뛰어든 많은 대학생들은 대학교에 들어와서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의 실상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아 학생 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군부정권은 5.18 이후로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다. 전두환은 김대중 등에게 '광주 사태'의 책임을 물어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했고,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 선언을 한 직후, 8월 27일 소위 체육관 선거를 통해 전두환은 대통령 자리를 탈취했다.&lt;br /&gt;
&lt;br /&gt;
지역적인 면에서는 '''광주광역시를 비롯한 전라도 지역의 트라우마'''로 작용해 이후의 민주정의당 및 &amp;lt;ins&amp;gt;[[3당 합당]]&amp;lt;/ins&amp;gt;으로 이어지는 보수 세력에 대해 적대심을 가지고, 민주당계 정당의 표밭이 되는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미 박정희 정부 시절부터 유무형의 정치적인 차별을 받고 있었지만 5.18의 참상은 전라도가 다시는 보수 세력을 지지하지 않게 만들 정도로 심각한 사건이며 호남소외론의 가장 결정적인 명분이 되었다.&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이나자키로빈]]: 5.18 민주화운동 페이지 전체 작성&lt;br /&gt;
&lt;br /&gt;
=='''6월민주항쟁'''==&lt;br /&gt;
===타임라인===&lt;br /&gt;
===원인===&lt;br /&gt;
1985년 2 · 12총선에서 신한민주당이 승리한 것을 기점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가 날로 커졌다. 1986년 개헌서명운동의 성과로 국회 내 개헌특위가 만들어졌지만, 여야 간 개헌 협상은 난항을 거듭하였다. 이를 빌미로 1987년 4월 13일 전두환은 대통령 임기 내 개헌을 거부하고, 기존 제5공화국 헌법으로 차기 대통령 선거를 치르겠다는 이른바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였다. 전두환 정부가 이렇게 개헌 거부를 공식화한 상황에서 5월 18일 정의구현사제단이 지난 1987년 1월 발생한 [[박종철고문치사사건]]이 정권 차원에서 은폐 ·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폭로하였다. 많은 시민들이 크게 분노하였고, 야당과 민주화운동 진영은 전두환 정부에 정면으로 맞서기 위한 투쟁에 본격적으로 돌입하였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먼저 1987년 5월 27일 야당과 재야, 종교계 등이 힘을 모아 ‘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여당인 민주정의당에서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6월 10일에 맞춰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6 · 10국민대회)’를 치르기로 결정하였다. 대학생들은 국본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를 중심으로 6 · 10국민대회에 호응하여 6월 초부터 각 대학별로 연일 집회와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6 · 10국민대회 하루 전날인 6월 9일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교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는 곧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학생들은 물론 시민들의 분노가 들끓었다. 이러한 분노 속에서 6 · 10국민대회가 열렸다. 경찰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6 · 10국민대회가 열리는 성공회대성당을 원천 봉쇄하였다. 그 결과 6 · 10국민대회는 대회장에 미리 들어가 있던 소수의 인원만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대회 예정 시간인 오후 6시 이전부터 서울 시내 곳곳에서 대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시민들도 다양한 방식으로 6 · 10국민대회와 학생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날 밤 늦게까지 시위를 벌이던 학생들은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이후 5일 동안 농성을 계속하였다. 애초 계획된 것은 아니었지만 대학생들의 명동성당 농성은 6 · 10국민대회가 단발성 행사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인 저항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lt;br /&gt;
&lt;br /&gt;
명동성당 농성을 거치며 항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유월항쟁의 전국화 과정에는 일정한 패턴이 존재하였다. 6월 10일 서울 외에도 전국 주요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위가 벌어졌지만, 15일까지 항쟁의 중심은 6 · 10국민대회와 명동성당 농성이 전개된 서울이었다. 하지만 6월 15일 경부터는 부산, 대전, 진주 등에서 격렬한 시위가 전개되었다. 그러다가 6월 20일부터 대규모 시위가 광주, 전주, 순천, 익산 등 호남 지방으로 옮겨졌다. 6 · 10국민대회 이후 약 20일 동안 전국 곳곳에서 매일 평균 100회 이상의 시위가 동시다발로 벌어졌다. 특히 6월 18일 ‘최루탄추방대회’와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은 전국 곳곳에서 한꺼번에 1백만 명 이상이 참여하였다. 갈수록 참가 지역이 전국 곳곳으로 확산되어 대도시, 중소도시뿐만 아니라 농촌 지역의 군 단위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6월 26일 하루에만 37~38개 시 · 군에서 시위가 동시에 벌어졌다. 유월항쟁에 참가한 연 인원은 400~500만 명으로 추산된다.&lt;br /&gt;
&lt;br /&gt;
반면 유월항쟁의 전국적 동시다발 시위는 경찰 병력을 분산시켰다. 분산된 경찰 병력으로는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거센 시위의 물결을 막아 낼 수 없었다. 경찰이 시위 진압에 최루탄을 남발하면서 최루탄도 점차 고갈되기 시작하였다. 유월항쟁 기간 동안 경찰이 사용한 최루탄만 총 67만 발이 넘었다. 더불어, 전두환 정권이 집권 내내 강조했던 88서울올림픽이 얼마 남지 않아 미국 등 국제사회의 이목이 집중된 상황에서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운동 때처럼 유혈 사태와 대량 학살을 반복하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무엇보다 군대를 동원하더라도 이러한 대규모 시민 항쟁을 진압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결국 경찰력으로 항쟁을 막기 힘들고, 군대 투입도 어렵다고 판단한 전두환 정권은 1987년 6월 29일 ‘ 6 · 29민주화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하였다. 그리고 그동안 의식불명 상태에 있었던 이한열이 7월 5일 끝내 사망하였다. 5일장 후 7월 9일 치러진 이한열의 노제에 100만 명의 인파가 모인 것을 끝으로 약 한 달 동안 지속된 유월항쟁은 마무리되었다.&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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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의===&lt;br /&gt;
1987년 유월항쟁이 대통령직선제 개헌이라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이 항쟁에 동참한 학생과 시민들의 요구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제시한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 개헌’이라는 슬로건으로 모아졌기 때문이었다. 유월항쟁은 이러한 민주화 세력의 통합성, 즉 각기 다른 성격과 지향을 가진 여러 주체들이 모두 동의할 수 있는 ‘최소 강령’하에 ‘최대 연합’으로 결집하였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lt;br /&gt;
===기여===&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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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기밀문서]]&lt;br /&gt;
[[분류:4.19혁명관련]]&lt;br /&gt;
[[분류:부마항쟁관련]]&lt;br /&gt;
[[분류:5.18민주화운동관련]]&lt;br /&gt;
[[분류:6월민주항쟁관련]]&lt;br /&gt;
[[분류:뎐]]&lt;br /&gt;
[[분류:이나자키로빈]]&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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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name>이나자키로빈</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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