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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dh_edu - 사용자 기여 [ko]</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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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올데이프: /* 특징 */&lt;/p&gt;
&lt;hr /&gt;
&lt;div&gt;==사찰 정보==&lt;br /&gt;
[[파일:거조사.jpg|400픽셀|섬네일|가운데]]&lt;br /&gt;
===창건시기 및 위치===&lt;br /&gt;
경북 영천시 청통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738년 효성왕 시기에 승려 원참이 창건하였다.&lt;br /&gt;
&lt;br /&gt;
1375년(우왕 13년) 혜림법사와 법화화상이 영산전을 건립하고, 오백나한을 모셨다.&lt;br /&gt;
&lt;br /&gt;
693년(효소왕 2) 창건설, 738년(효성왕 2) 창건설이 존재한다.&lt;br /&gt;
&lt;br /&gt;
 693년 창건설과 738년 창건설은 모두 원효대사와 관련이 있다. 전국을 돌아다니던 원효대사가 이곳에 들러 형세의 뛰어남을 보고, 사찰을 창건했다 한다. 하지만 원효대사는 686년(신문왕 6) 이미 입적했기에 역사적으로는 맞지 않는 면이 있다. 따라서 경덕왕대 창건설은 은해사 사적비에 적혀 전해지는 사실로, 비교적 신빙성이 있다.&lt;br /&gt;
&lt;br /&gt;
===영산전===&lt;br /&gt;
==특징==&lt;br /&gt;
고려 왕실의 '원당'&amp;lt;ref&amp;gt;죽은 사람의 위패를 모시고 추모하는 곳으로 현대 개념으로는 묘소를 떠올리면 될 것이다.&amp;lt;/ref&amp;gt;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목조건축물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고려시대 고려시대 목조 건축물로는 영천 거조사에 위치한 영산전과 봉정사의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 수덕사 대웅전으로 총 4군데만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영천 거조사 영산전은 그 문화적 가치가 뛰어나다.&lt;br /&gt;
&lt;br /&gt;
===석탑 및 건축물===&lt;br /&gt;
[[526 석조 나한상]]&lt;br /&gt;
&lt;br /&gt;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1743 석가여래삼존입상]&lt;br /&gt;
&lt;br /&gt;
==여담==&lt;br /&gt;
거조암으로 불렸었으나 2021년 3월 23일 문화재청이 거조사로 명칭을 변경하였다.&lt;br /&gt;
거조암(사)의 의미는 아비타불이 항상 머문다는 뜻이다. &lt;br /&gt;
==출처 및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김윤주]][[분류:건축문화재]]&lt;/div&gt;</summary>
		<author><name>올데이프</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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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올데이프: /* 특징 */&lt;/p&gt;
&lt;hr /&gt;
&lt;div&gt;==사찰 정보==&lt;br /&gt;
[[파일:거조사.jpg|400픽셀|섬네일|가운데]]&lt;br /&gt;
===창건시기 및 위치===&lt;br /&gt;
경북 영천시 청통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738년 효성왕 시기에 승려 원참이 창건하였다.&lt;br /&gt;
&lt;br /&gt;
1375년(우왕 13년) 혜림법사와 법화화상이 영산전을 건립하고, 오백나한을 모셨다.&lt;br /&gt;
&lt;br /&gt;
693년(효소왕 2) 창건설, 738년(효성왕 2) 창건설이 존재한다.&lt;br /&gt;
&lt;br /&gt;
 693년 창건설과 738년 창건설은 모두 원효대사와 관련이 있다. 전국을 돌아다니던 원효대사가 이곳에 들러 형세의 뛰어남을 보고, 사찰을 창건했다 한다. 하지만 원효대사는 686년(신문왕 6) 이미 입적했기에 역사적으로는 맞지 않는 면이 있다. 따라서 경덕왕대 창건설은 은해사 사적비에 적혀 전해지는 사실로, 비교적 신빙성이 있다.&lt;br /&gt;
&lt;br /&gt;
===특징===&lt;br /&gt;
고려 왕실의 '원당'&amp;lt;ref&amp;gt;죽은 사람의 위패를 모시고 추모하는 곳으로 현대 개념으로는 묘소를 떠올리면 될 것이다.&amp;lt;/ref&amp;gt;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목조건축물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고려시대 고려시대 목조 건축물로는 영천 거조사에 위치한 영산전과 봉정사의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 수덕사 대웅전으로 총 4군데만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영천 거조사 영산전은 그 문화적 가치가 뛰어나다.&lt;br /&gt;
&lt;br /&gt;
===석탑 및 건축물===&lt;br /&gt;
[[526 석조 나한상]]&lt;br /&gt;
&lt;br /&gt;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1743 석가여래삼존입상]&lt;br /&gt;
&lt;br /&gt;
==여담==&lt;br /&gt;
거조암으로 불렸었으나 2021년 3월 23일 문화재청이 거조사로 명칭을 변경하였다.&lt;br /&gt;
거조암(사)의 의미는 아비타불이 항상 머문다는 뜻이다. &lt;br /&gt;
==출처 및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김윤주]][[분류:건축문화재]]&lt;/div&gt;</summary>
		<author><name>올데이프</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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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올데이프: &lt;/p&gt;
&lt;hr /&gt;
&lt;div&gt;==사찰 정보==&lt;br /&gt;
[[파일:거조사.jpg|400픽셀|섬네일|가운데]]&lt;br /&gt;
===창건시기 및 위치===&lt;br /&gt;
경북 영천시 청통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738년 효성왕 시기에 승려 원참이 창건하였다.&lt;br /&gt;
&lt;br /&gt;
1375년(우왕 13년) 혜림법사와 법화화상이 영산전을 건립하고, 오백나한을 모셨다.&lt;br /&gt;
&lt;br /&gt;
693년(효소왕 2) 창건설, 738년(효성왕 2) 창건설이 존재한다.&lt;br /&gt;
&lt;br /&gt;
 693년 창건설과 738년 창건설은 모두 원효대사와 관련이 있다. 전국을 돌아다니던 원효대사가 이곳에 들러 형세의 뛰어남을 보고, 사찰을 창건했다 한다. 하지만 원효대사는 686년(신문왕 6) 이미 입적했기에 역사적으로는 맞지 않는 면이 있다. 따라서 경덕왕대 창건설은 은해사 사적비에 적혀 전해지는 사실로, 비교적 신빙성이 있다.&lt;br /&gt;
&lt;br /&gt;
===특징===&lt;br /&gt;
국보로 지정된 '경천사지 10층 석탑'가 있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고려 왕실의 '원당'&amp;lt;ref&amp;gt;죽은 사람의 위패를 모시고 추모하는 곳으로 현대 개념으로는 묘소를 떠올리면 될 것이다.&amp;lt;/ref&amp;gt;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목조건축물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고려시대 고려시대 목조 건축물로는 영천 거조사에 위치한 영산전과 봉정사의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 수덕사 대웅전으로 총 4군데만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영천 거조사 영산전은 그 문화적 가치가 뛰어나다. &lt;br /&gt;
&lt;br /&gt;
===석탑 및 건축물===&lt;br /&gt;
[[526 석조 나한상]]&lt;br /&gt;
&lt;br /&gt;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1743 석가여래삼존입상]&lt;br /&gt;
&lt;br /&gt;
==여담==&lt;br /&gt;
거조암으로 불렸었으나 2021년 3월 23일 문화재청이 거조사로 명칭을 변경하였다.&lt;br /&gt;
거조암(사)의 의미는 아비타불이 항상 머문다는 뜻이다. &lt;br /&gt;
==출처 및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김윤주]][[분류:건축문화재]]&lt;/div&gt;</summary>
		<author><name>올데이프</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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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경천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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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올데이프: /* 릴레이션 */&lt;/p&gt;
&lt;hr /&gt;
&lt;div&gt;[[파일:경천사.jpg|400픽셀|섬네일|오른쪽]]&lt;br /&gt;
&lt;br /&gt;
==사찰 정보==&lt;br /&gt;
&lt;br /&gt;
===창건시기 및 위치===&lt;br /&gt;
북한 황해북도 개풍군 광덕면 부소산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려 전기 예종 때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amp;lt;ref&amp;gt; 창건에 대한 기록이 불충분하여 대략 고려 전기로 추정되고 있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특징===&lt;br /&gt;
국보로 지정된 '경천사지 10층 석탑'가 있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고려 왕실의 '원당'&amp;lt;ref&amp;gt;죽은 사람의 위패를 모시고 추모하는 곳으로 현대 개념으로는 묘소를 떠올리면 될 것이다.&amp;lt;/ref&amp;gt;으로 추정되고 있다. &lt;br /&gt;
&lt;br /&gt;
==관련된 왕==&lt;br /&gt;
===네트워크 그래프===&lt;br /&gt;
{{NetworkGraph | title=경천사.lst}}&lt;br /&gt;
&lt;br /&gt;
===클래스===&lt;br /&gt;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color:white&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amp;quot; | 클래스 !! style=&amp;quot;width:30%&amp;quot; | 설명 !! style=&amp;quot;45%&amp;quot; | 노드&lt;br /&gt;
|-&lt;br /&gt;
|석탑 || 관련있는 석탑 || 원각사지10층석탑, 경천사10층석탑&lt;br /&gt;
|-&lt;br /&gt;
|국가|| 관련 국가|| 고려, 원나라&lt;br /&gt;
|-&lt;br /&gt;
|왕|| 절과 관련된 왕|| 충민왕, 예종, 인종, 의종, 공민왕&lt;br /&gt;
|-&lt;br /&gt;
|장소|| 관련된 장소 || 경천사  &lt;br /&gt;
|}&lt;br /&gt;
&lt;br /&gt;
===릴레이션===&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brown&amp;quot;&amp;gt;'''~의 건축물이다'''&amp;lt;/span&amp;gt;&lt;br /&gt;
***설명: 어떤 세부적 건축물이 어디 절에 속한 건축물인지 나타낸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경천사지10층석탑 → 경천사&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brown&amp;quot;&amp;gt;'''~와 관련이 있다'''&amp;lt;/span&amp;gt;&lt;br /&gt;
***설명: 관련있는 인물을 나타낸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인종 → 경천사&lt;br /&gt;
***#예종 → 경천사&lt;br /&gt;
***#공민왕 → 경천사&lt;br /&gt;
***#충민왕 → 경천사&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brown&amp;quot;&amp;gt;'''~에 영향을 주다'''&amp;lt;/span&amp;gt;&lt;br /&gt;
***설명: 영향을 준 석탑/나라를 나타낸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경천사10층석탑 → 원각사지10층석탑&lt;br /&gt;
***#원나라 → 경천사10층석탑&lt;br /&gt;
&lt;br /&gt;
===예종===&lt;br /&gt;
1118년 [[예종睿宗]]이 숙종의 기신도량(忌辰道場)&amp;lt;ref&amp;gt;왕실에서 국왕이나 선왕후의 기일에 불교식으로 제사를 지내는 종교의례&amp;lt;/ref&amp;gt;을 이곳에서 베풀었다고 전해진다.&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2964&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인종===&lt;br /&gt;
1134년 인종이 문경태후(文敬太后)의 추모제를 이곳에서 열었다고 한다.&lt;br /&gt;
===이 외===&lt;br /&gt;
인종, 의종, 공민왕이 자주 행차했던 곳이라고 한다.&lt;br /&gt;
&lt;br /&gt;
==출처 및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분류:김윤주]]&lt;br /&gt;
[[분류:건축문화재]]&lt;/div&gt;</summary>
		<author><name>올데이프</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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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경천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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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1T08:36:2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올데이프: /* 클래스 */&lt;/p&gt;
&lt;hr /&gt;
&lt;div&gt;[[파일:경천사.jpg|400픽셀|섬네일|오른쪽]]&lt;br /&gt;
&lt;br /&gt;
==사찰 정보==&lt;br /&gt;
&lt;br /&gt;
===창건시기 및 위치===&lt;br /&gt;
북한 황해북도 개풍군 광덕면 부소산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려 전기 예종 때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amp;lt;ref&amp;gt; 창건에 대한 기록이 불충분하여 대략 고려 전기로 추정되고 있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특징===&lt;br /&gt;
국보로 지정된 '경천사지 10층 석탑'가 있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고려 왕실의 '원당'&amp;lt;ref&amp;gt;죽은 사람의 위패를 모시고 추모하는 곳으로 현대 개념으로는 묘소를 떠올리면 될 것이다.&amp;lt;/ref&amp;gt;으로 추정되고 있다. &lt;br /&gt;
&lt;br /&gt;
==관련된 왕==&lt;br /&gt;
===네트워크 그래프===&lt;br /&gt;
{{NetworkGraph | title=경천사.lst}}&lt;br /&gt;
&lt;br /&gt;
===클래스===&lt;br /&gt;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color:white&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amp;quot; | 클래스 !! style=&amp;quot;width:30%&amp;quot; | 설명 !! style=&amp;quot;45%&amp;quot; | 노드&lt;br /&gt;
|-&lt;br /&gt;
|석탑 || 관련있는 석탑 || 원각사지10층석탑, 경천사10층석탑&lt;br /&gt;
|-&lt;br /&gt;
|국가|| 관련 국가|| 고려, 원나라&lt;br /&gt;
|-&lt;br /&gt;
|왕|| 절과 관련된 왕|| 충민왕, 예종, 인종, 의종, 공민왕&lt;br /&gt;
|-&lt;br /&gt;
|장소|| 관련된 장소 || 경천사  &lt;br /&gt;
|}&lt;br /&gt;
&lt;br /&gt;
===릴레이션===&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brown&amp;quot;&amp;gt;'''~시대에 만들어졌다'''&amp;lt;/span&amp;gt;&lt;br /&gt;
***설명: 어떤 사찰, 건축물이 어느 시대에 제작되었는지를 알려준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경천사 → 고려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brown&amp;quot;&amp;gt;'''~의 건축물이다'''&amp;lt;/span&amp;gt;&lt;br /&gt;
***설명: 어떤 세부적 건축물이 어디 절에 속한 건축물인지 나타낸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경천사지10층석탑 → 경천사&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brown&amp;quot;&amp;gt;'''~에 위치한다 '''&amp;lt;/span&amp;gt;&lt;br /&gt;
***설명: 어떤 건축물이나 사찰이 어느 도(道)에 위치하는지 나타낸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경천사 → 경기도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brown&amp;quot;&amp;gt;'''~와 관련이 있다'''&amp;lt;/span&amp;gt;&lt;br /&gt;
***설명: 관련있는 인물을 나타낸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인종 → 경천사&lt;br /&gt;
***#예종 → 경천사&lt;br /&gt;
***#공민왕 → 경천사&lt;br /&gt;
***#충민왕 → 경천사&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brown&amp;quot;&amp;gt;'''~에 영향을 주다'''&amp;lt;/span&amp;gt;&lt;br /&gt;
***설명: 영향을 준 석탑/나라를 나타낸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경천사10층석탑 → 원각사지10층석탑&lt;br /&gt;
***#원나라 → 경천사10층석탑&lt;br /&gt;
&lt;br /&gt;
===예종===&lt;br /&gt;
1118년 [[예종睿宗]]이 숙종의 기신도량(忌辰道場)&amp;lt;ref&amp;gt;왕실에서 국왕이나 선왕후의 기일에 불교식으로 제사를 지내는 종교의례&amp;lt;/ref&amp;gt;을 이곳에서 베풀었다고 전해진다.&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2964&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인종===&lt;br /&gt;
1134년 인종이 문경태후(文敬太后)의 추모제를 이곳에서 열었다고 한다.&lt;br /&gt;
===이 외===&lt;br /&gt;
인종, 의종, 공민왕이 자주 행차했던 곳이라고 한다.&lt;br /&gt;
&lt;br /&gt;
==출처 및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분류:김윤주]]&lt;br /&gt;
[[분류:건축문화재]]&lt;/div&gt;</summary>
		<author><name>올데이프</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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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경천사.lst</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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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1T08:35:0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올데이프: &lt;/p&gt;
&lt;hr /&gt;
&lt;div&gt;&amp;lt;pre&amp;gt;&lt;br /&gt;
#Project&lt;br /&gt;
h1 경천사 relation&lt;br /&gt;
&lt;br /&gt;
#Class&lt;br /&gt;
장소 blue box&lt;br /&gt;
석탑 gold   box&lt;br /&gt;
국가 red   box&lt;br /&gt;
왕 green        box &lt;br /&gt;
&lt;br /&gt;
#Relation    &lt;br /&gt;
~와관련이있다&lt;br /&gt;
~에영향을주다&lt;br /&gt;
~에위치한다&lt;br /&gt;
&lt;br /&gt;
#Nodes&lt;br /&gt;
경천사 장소 경천사&lt;br /&gt;
원각사지10층석탑 석탑 원각사지10층석탑         &lt;br /&gt;
경천사10층석탑 석탑 경천사10층석탑                    &lt;br /&gt;
원나라 국가 원나라                  &lt;br /&gt;
충민왕 왕 충민왕   &lt;br /&gt;
예종 왕 예종   &lt;br /&gt;
의종 왕   의종&lt;br /&gt;
공민왕 왕 공민왕            &lt;br /&gt;
&lt;br /&gt;
#Links&lt;br /&gt;
경천사10층석탑 경천사 ~에위치한다&lt;br /&gt;
공민왕 경천사 ~와관련이있다&lt;br /&gt;
의종 경천사 ~와관련이있다&lt;br /&gt;
충민왕 경천사 ~와관련이있다&lt;br /&gt;
예종 경천사 ~와관련이있다&lt;br /&gt;
경천사10층석탑 원각사지10층석탑 ~에영향을주다&lt;br /&gt;
원나라 경천사10층석탑 ~에영향을주다&lt;br /&gt;
&lt;br /&gt;
#End&lt;br /&gt;
&amp;lt;/pre&amp;gt;&lt;br /&gt;
{{NetworkGraph | title=경천사.lst}}&lt;br /&gt;
[[분류:김윤주]][[분류:건축문화재]]&lt;/div&gt;</summary>
		<author><name>올데이프</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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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1T08:34:38Z</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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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div&gt;&amp;lt;pre&amp;gt;&lt;br /&gt;
#Project&lt;br /&gt;
h1 경천사 relation&lt;br /&gt;
&lt;br /&gt;
#Class&lt;br /&gt;
장소 blue box&lt;br /&gt;
석탑 gold   box&lt;br /&gt;
국가 red   box&lt;br /&gt;
왕 green        box &lt;br /&gt;
&lt;br /&gt;
#Relation    &lt;br /&gt;
~와관련이있다&lt;br /&gt;
~에영향을주다&lt;br /&gt;
~에위치한다&lt;br /&gt;
&lt;br /&gt;
#Nodes&lt;br /&gt;
경천사 장소 경천사&lt;br /&gt;
원각사지10층석탑 석탑 원각사지10층석탑         &lt;br /&gt;
경천사10층석탑 석탑 경천사10층석탑                    &lt;br /&gt;
원나라 국가 원나라                  &lt;br /&gt;
충민왕 왕 충민왕   &lt;br /&gt;
예종 왕 예종   &lt;br /&gt;
의종 왕   의종&lt;br /&gt;
공민왕 왕 공민왕            &lt;br /&gt;
&lt;br /&gt;
#Links&lt;br /&gt;
경천사10층석탑 경천사 ~에위치한다&lt;br /&gt;
공민왕 경천사 ~와관련이있다&lt;br /&gt;
의종 경천사 ~와관련이있다&lt;br /&gt;
충민왕 경천사 ~와관련이있다&lt;br /&gt;
예종 경천사 ~와관련이있다&lt;br /&gt;
경천사10층석탑 원각사지10층석탑 ~에영향을주다&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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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nd&lt;br /&gt;
&amp;lt;/pre&amp;gt;&lt;br /&gt;
{{NetworkGraph | title=경천사.lst}}&lt;br /&gt;
[[분류:김윤주]]&lt;/div&gt;</summary>
		<author><name>올데이프</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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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ject&lt;br /&gt;
h1 경천사 relation&lt;br /&gt;
&lt;br /&gt;
#Class&lt;br /&gt;
석탑 gold   box&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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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Relation    &lt;br /&gt;
~와관련이있다&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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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Nodes&lt;br /&gt;
원각사지10층석탑 석탑 원각사지10층석탑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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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민왕 왕 충민왕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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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 왕 공민왕            &lt;br /&gt;
&lt;br /&gt;
#Links&lt;br /&gt;
공민왕 경천사10층석탑 ~와관련이있다&lt;br /&gt;
의종 경천사10층석탑 ~와관련이있다&lt;br /&gt;
충민왕 경천사10층석탑 ~와관련이있다&lt;br /&gt;
예종 경천사10층석탑 ~와관련이있다&lt;br /&gt;
경천사10층석탑 원각사지10층석탑 ~에영향을주다&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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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ject&lt;br /&gt;
h1 경천사 relation&lt;br /&gt;
&lt;br /&gt;
#Class&lt;br /&gt;
석탑 gold   box&lt;br /&gt;
국가 red   box&lt;br /&gt;
왕 green        box &lt;br /&gt;
지역 blue   box&lt;br /&gt;
#Relation    &lt;br /&gt;
~에위치한다&lt;br /&gt;
~와관련이있다&lt;br /&gt;
~에영향을주다&lt;br /&gt;
&lt;br /&gt;
#Nodes&lt;br /&gt;
원각사지10층석탑 석탑 원각사지10층석탑         &lt;br /&gt;
경천사10층석탑 석탑 경천사10층석탑                    &lt;br /&gt;
원나라 국가 원나라                  &lt;br /&gt;
충민왕 왕 충민왕   &lt;br /&gt;
예종 왕 예종   &lt;br /&gt;
의종 왕   의종&lt;br /&gt;
공민왕 왕 공민왕            &lt;br /&gt;
경기도개풍군 지역 경기도개풍군&lt;br /&gt;
&lt;br /&gt;
#Links&lt;br /&gt;
경천사 경기도개풍군 ~에위치한다&lt;br /&gt;
공민왕 경천사 ~와관련이있다&lt;br /&gt;
의종 경천사 ~와관련이있다&lt;br /&gt;
충민왕 경천사 ~와관련이있다&lt;br /&gt;
예종 경천사 ~와관련이있다&lt;br /&gt;
경천사10층석탑 원각사지10층석탑 ~에영향을주다&lt;br /&gt;
원나라 경천사10층석탑 ~에영향을주다&lt;br /&gt;
경천사10층석탑 경천사  ~에위치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End&lt;br /&gt;
&amp;lt;/pre&amp;gt;&lt;br /&gt;
{{NetworkGraph | title=경천사.lst}}&lt;br /&gt;
[[분류:김윤주]]&lt;/div&gt;</summary>
		<author><name>올데이프</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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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경천사.lst</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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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1T04:42:1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올데이프: &lt;/p&gt;
&lt;hr /&gt;
&lt;div&gt;&amp;lt;pre&amp;gt;&lt;br /&gt;
#Project&lt;br /&gt;
h1 경천사 relation&lt;br /&gt;
&lt;br /&gt;
#Class&lt;br /&gt;
석탑 gold   box&lt;br /&gt;
국가 red   box&lt;br /&gt;
왕 green        box &lt;br /&gt;
지역 blue   box&lt;br /&gt;
#Relation    &lt;br /&gt;
~에위치한다&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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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영향을주다&lt;br /&gt;
&lt;br /&gt;
#Nodes&lt;br /&gt;
원각사지10층석탑 석탑 원각사지10층석탑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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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국가 고려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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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민왕 왕 충민왕   &lt;br /&gt;
예종 왕 예종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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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 왕 공민왕            &lt;br /&gt;
경기도개풍군 지역 경기도개풍군&lt;br /&gt;
&lt;br /&gt;
#Links&lt;br /&gt;
경천사 경기도개풍군 ~에위치한다&lt;br /&gt;
공민왕 경천사 ~와관련이있다&lt;br /&gt;
의종 경천사 ~와관련이있다&lt;br /&gt;
충민왕 경천사 ~와관련이있다&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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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 경천사10층석탑 ~에영향을주다&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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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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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lt;br /&gt;
&amp;lt;/pre&amp;gt;&lt;br /&gt;
{{NetworkGraph | title=경천사.lst}}&lt;br /&gt;
[[분류:김윤주]]&lt;/div&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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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1T03:00:3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올데이프: 문서를 비움&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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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div&gt;&lt;/div&gt;</summary>
		<author><name>올데이프</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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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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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0T15:45:3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올데이프: &lt;/p&gt;
&lt;hr /&gt;
&lt;div&gt;'''1936년 보물로 지정'''&lt;br /&gt;
&lt;br /&gt;
&lt;br /&gt;
==특징==&lt;br /&gt;
===건축시기 및 위치===&lt;br /&gt;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고달사터에 위치한 고려전기 탑비의 받침돌으로 높이는 2m이다. 현재는 귀부&amp;lt;ref&amp;gt;비석의 받침돌&amp;lt;/ref&amp;gt;와 이수&amp;lt;ref&amp;gt; 비신의 꼭대기에 표현된 용&amp;lt;/ref&amp;gt; 만이 남아 있고, 비신(碑身)&amp;lt;ref&amp;gt; 비문을 새긴 돌&amp;lt;/ref&amp;gt;은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진열되어 있다.&lt;br /&gt;
&lt;br /&gt;
[[파일: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jpg|350픽셀|섬네일|오른쪽]]&lt;br /&gt;
===형태 &amp;lt;ref&amp;gt;https://gjicp.ggcf.kr/mediaObjects/438&amp;lt;/ref&amp;gt;===&lt;br /&gt;
*용의 눈과 코&lt;br /&gt;
&lt;br /&gt;
용은 눈을 부릅떠 정면을 직시하고 있는데, 눈꼬리가 길게 치켜올라가 매우 험상궂은 모습이다. 코는 들려서 콧구멍이 깊게 표현되고 중첩된 주름이 정수리까지 이어져 있다.&lt;br /&gt;
&lt;br /&gt;
*얼굴 형태&lt;br /&gt;
&lt;br /&gt;
일반적으로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모습과는 달리 입을 꽉 다물어 여의주를 물지 않은 형태이며, 길게 찢어진 입 가장자리에는 공룡의 깃과 같은 물갈퀴 형상이 조각되었고, 그 뒤로 갈기 같은 털이 머리 뒤까지 길게 뻗쳐 있다.&lt;br /&gt;
&lt;br /&gt;
*몸의 형태&lt;br /&gt;
&lt;br /&gt;
앞발은 귀갑 전면 양단에 가지런히 두었으나 마치 땅을 밀치고 나가려는 듯 격동적이고, 사실적으로 표현된 발톱은 땅을 꼭 누르고 있는 듯하다. 발은 크고 두툼하며, 5개의 발가락과 발톱이 상세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큰 발로 지대석을 누르고 버티어 앉은 모습으로 한껏 사실감이 돋보인다. &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김윤주]][[분류:건축문화재]]&lt;/div&gt;</summary>
		<author><name>올데이프</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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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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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0T15:45:2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올데이프: &lt;/p&gt;
&lt;hr /&gt;
&lt;div&gt;'''1936년 보물로 지정'''&lt;br /&gt;
&lt;br /&gt;
&lt;br /&gt;
==특징==&lt;br /&gt;
===건축시기 및 위치===&lt;br /&gt;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고달사터에 위치한 고려전기 탑비의 받침돌으로 높이는 2m이다. 현재는 귀부&amp;lt;ref&amp;gt;비석의 받침돌&amp;lt;/ref&amp;gt;와 이수&amp;lt;ref&amp;gt; 비신의 꼭대기에 표현된 용&amp;lt;/ref&amp;gt; 만이 남아 있고, 비신(碑身)&amp;lt;ref&amp;gt; 비문을 새긴 돌&amp;lt;/ref&amp;gt;은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진열되어 있다.&lt;br /&gt;
&lt;br /&gt;
[[파일: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jpg|350픽셀|섬네일|오른쪽]]&lt;br /&gt;
===형태 &amp;lt;ref&amp;gt;https://gjicp.ggcf.kr/mediaObjects/438&amp;lt;/ref&amp;gt;===&lt;br /&gt;
*용의 눈과 코&lt;br /&gt;
&lt;br /&gt;
용은 눈을 부릅떠 정면을 직시하고 있는데, 눈꼬리가 길게 치켜올라가 매우 험상궂은 모습이다. 코는 들려서 콧구멍이 깊게 표현되고 중첩된 주름이 정수리까지 이어져 있다.&lt;br /&gt;
&lt;br /&gt;
*얼굴 형태&lt;br /&gt;
&lt;br /&gt;
일반적으로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모습과는 달리 입을 꽉 다물어 여의주를 물지 않은 형태이며, 길게 찢어진 입 가장자리에는 공룡의 깃과 같은 물갈퀴 형상이 조각되었고, 그 뒤로 갈기 같은 털이 머리 뒤까지 길게 뻗쳐 있다.&lt;br /&gt;
&lt;br /&gt;
*몸의 형태&lt;br /&gt;
&lt;br /&gt;
앞발은 귀갑 전면 양단에 가지런히 두었으나 마치 땅을 밀치고 나가려는 듯 격동적이고, 사실적으로 표현된 발톱은 땅을 꼭 누르고 있는 듯하다. 발은 크고 두툼하며, 5개의 발가락과 발톱이 상세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큰 발로 지대석을 누르고 버티어 앉은 모습으로 한껏 사실감이 돋보인다. &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김윤주]][[분류:건축문화재]]&lt;/div&gt;</summary>
		<author><name>올데이프</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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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3%A0%EB%8B%AC%EC%82%AC&amp;diff=34318</id>
		<title>고달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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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0T15:44:5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올데이프: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20년 전이 한바탕 꿈이었구나, 젊은 시절 벗들은 반이나 황천객(黃泉客)이 되었는데 지금 &amp;lt;font color=&amp;quot;#8b0000&amp;quot;&amp;gt;'''고달(高達)'''&amp;lt;/font&amp;gt; 옛 절에 온 것은 원통(圓通) 큰 복전이 있기 때문이라네. 사면의 산은 병풍처럼 절을 둘렀는데, 한 개 비석은 푸른 하늘에 기대었네. 웃음꽃 피운 이야기에 밤새도록 되돌아갈 길 잊었으니, 그때는 관음보살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라네.”-&amp;lt;신증동국여지승람&amp;gt; 문신 한수(韓脩,1333-1384)의 시'''&lt;br /&gt;
==건축물 정보==&lt;br /&gt;
===건축시기 및 위치===&lt;br /&gt;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764),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에 세워졌다. 하지만 통일신라 당시에는 큰 기능을 하지 못했었다. '''[[고려시대 광종]]'''이후, 고려 초 3대 사찰 중 하나가 되었으며 대찰(大刹)로서 기능했다.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고달사 소속 많은 석탑과 석등 등의 유물은 대부분 고려시대에 만들어졌다. 고달원(高達院)이라고도 한다. &amp;lt;ref&amp;gt;신라시대에 세워졌음에도 고려시대 건축물로 넣은 이유는 고려 광종 이후 큰 절로 성장하였기 때문이며, 고려의 3대 사찰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또한 석탑들은 대부분 고려시대 때 만들어졌다.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파일:고달사 터.jpg|350픽셀|섬네일|가운데]]&lt;br /&gt;
&lt;br /&gt;
==보유 석탑==&lt;br /&gt;
*여주 고달사지 승탑&lt;br /&gt;
각 부분의 조각들에서 고려 특유의 기법을 풍기고 있어 고려시대 전기 10세기 즈음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lt;br /&gt;
거북이를 사이에 두고 네 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으며, 나머지 공간에는 구름무늬로 가득 채워져 있다. 가운데 돌을 중심으로 그 아래와 윗돌에는 연꽃무늬를 두어 우아함을 살리고 있다. 지붕돌 꼭대기에는 둥그런 돌 위로 지붕을 축소한 듯한 보개(寶蓋)가 얹혀져 있다.&lt;br /&gt;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1123100080000&amp;amp;pageNo__=1_2_1_0&amp;amp;pageNo=1_1_2_0 여주 고달사지 석조대좌]&lt;br /&gt;
&lt;br /&gt;
&amp;lt;gallery mode=&amp;quot;packed&amp;quot; caption=&amp;quot;고달사&amp;quot; heights=&amp;quot;300px&amp;quot; style=&amp;quot;float:center&amp;quot;&amp;gt;&lt;br /&gt;
파일:고달사지 승탑.jpg|고달사지 승탑&lt;br /&gt;
파일:고달사지 석조대좌.jpg|고달사지 석조대좌&lt;br /&gt;
파일:고달사지 쌍사자 석등.jpg|고달사지 쌍사자 석등&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lt;br /&gt;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lt;br /&gt;
*여주 고달사지 쌍사자 석등&lt;br /&gt;
&lt;br /&gt;
&lt;br /&gt;
===설화===&lt;br /&gt;
*신라시대에 고달(高達)&amp;lt;ref&amp;gt;고달은 가족들이 굶어 죽는 줄도 모르고 불사에 혼을 바쳤다고 한다. 이라는 승건이 창건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amp;lt;/ref&amp;gt;&lt;br /&gt;
 사냥꾼이던 고달은 사슴 한 마리를 사냥하게 되었는데, 화살을 맞고 사슴이 달아나게 되었다. 사슴의 핏자국을 따라가다 보니 불상을 모신 굴이 있었고, 그 불상에 화살이 꽂혀 있었다고 한다. 고달은 그 불상을 보며 부처님이 자신이 살생을 많이 하는 것을 훈계하기 위해 부처님이 사슴으로 변신해서 자기를 인도한 것임을 깨닫고, 그 자리에서 활과 살을 꺾어버린 뒤 수행하여 스님이 되었다고 한다. &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3371&amp;lt;/ref&amp;gt; &lt;br /&gt;
*고달원 입구‘신털이봉'이 생긴 사연&lt;br /&gt;
 원종대사 찬유는 중국에 수기설법을 유학하고 돌아와 선풍을 진작시켰다. 그는 고려 태조, 혜종, 정종, 광종으로부터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특히 고려 광종의 개혁에 큰 힘을 보태어 953년(광종 4) 국사로 책봉되었다고 한다. 만년에 고달사로 내려와 머물면서 대찰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수기설법(隨機說法)은 마치 깊은 골짜기에서 부는 회오리바람 소리와 같고, 인연 따라 감응하는 것은 맑은 못에 비치는 달그림자와 같았다,“누더기를 입은 납자(衲子)가 바람처럼 찾아오고, 대중공양을 올리기 위해 오는 이가 구름과 같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수많은 스님이 이곳을 찾아올 때 고달원 입구 500m 전에서 짚신을 턴 흙이 쌓여 신털이봉이 생겨났다고 한다.&amp;lt;ref&amp;gt;https://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220365&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김윤주]][[분류:건축문화재]]&lt;/div&gt;</summary>
		<author><name>올데이프</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2%BD%EC%B2%9C%EC%82%AC_10%EC%B8%B5_%EC%84%9D%ED%83%91&amp;diff=34317</id>
		<title>경천사 10층 석탑</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2%BD%EC%B2%9C%EC%82%AC_10%EC%B8%B5_%EC%84%9D%ED%83%91&amp;diff=34317"/>
		<updated>2023-12-10T15:44:4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올데이프: &lt;/p&gt;
&lt;hr /&gt;
&lt;div&gt;'''대한민국 국보 제 86호'''&lt;br /&gt;
&lt;br /&gt;
[[파일:경천사 10층 석탑.jpg|200픽셀|섬네일|오른쪽]]&lt;br /&gt;
&lt;br /&gt;
==건축물 정보==&lt;br /&gt;
&lt;br /&gt;
===건축시기 및 위치===&lt;br /&gt;
고려 충목왕 4년 (1348년)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부소산에 위치한 경천사에 세워진 석탑이다. 고려 말기 친원파인 권문세족들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907년 일본에게 약탈당했다가 1918년 11월 15일에 반환받게 되었다. &amp;lt;ref&amp;gt;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r200080&amp;lt;/ref&amp;gt; 그 후 국립박물관의 주도로 1960년에 복원되었으며 2005년 이후 국립중앙박물관 로비 중앙에 계속 전시되어있다. &amp;lt;ref&amp;gt;국립중앙박물관을 방문한 사람이면 한번쯤은 봤을 만한 석탑이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특징===&lt;br /&gt;
우리나라의 석탑은 대부분 '''화강암'''으로 만들어진다. 하지만 경천사 10층 석탑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높이는 13.5 미터이다.&lt;br /&gt;
석탑의 기단부와 탑신석 1층에서 3층까지의 평면은 '''한자 아(亞)자'''의 형태를 띄고 있는데 이는 당시 원나라에서 유행했던 석탑 형식이다.&amp;lt;ref&amp;gt;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recommend/view?relicRecommendId=16858&amp;lt;/ref&amp;gt; 이러한 원나라의 특징이 드러나는 이유는 경천사 10층 석탑이 고려 말기 원나라 황제의 건강과 원나라의 기원을 빌며 지어진 석탑이기 때문이다. 원나라에서 넘어온 석공들이 만들었기에 석탑의 모양과 형태가 기존 고려의 석탑과는 다른 점이 많다. 기단부부터 3층까지는 원나라의 양식을, 4층부터 10층까지는 고려시대 석탑의 양식을 따라 만들어졌다. &amp;lt;ref&amp;gt;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jsessionid=T35KoUR6Mlbc23z3N9BBlaadK5nFfis3aRPd1AjacNC1kRsynB4zgMqyseonQcGC.cpawas_servlet_engine1?pageNo=1_1_2_0&amp;amp;ccbaCpno=1111100860000&amp;lt;/ref&amp;gt;&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lt;br /&gt;
|+ '''&amp;lt;경천사 10층 석탑&amp;gt;'''&lt;br /&gt;
|+ style=&amp;quot;caption-side:bottom; text-align:left;&amp;quot;|&lt;br /&gt;
! 석탑의 특징 || 영향받은 나라 || 이유&lt;br /&gt;
|-&lt;br /&gt;
| 대리석 사용 || 원나라 || 당시 고려시대에는 화강암을 주로 사용하였으나 원나라와 티베트 불교는 주로 대리석을 사용했었다.&lt;br /&gt;
|-&lt;br /&gt;
| 화려한 보살, 연꽃 문양과 구슬무늬 || 원나라 || 화려한 문양은 고려시대 석탑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었다. &lt;br /&gt;
|-&lt;br /&gt;
| 보, 정면에서 보았을 때 점점 안으로 줄어드는 亞자형의 형태 || 원나라 || 티베트 불교에서 당시 유행했던 형식이다.&lt;br /&gt;
|-&lt;br /&gt;
| 4면으로 둘러싸인 탑신부 4~10층 || 고려 || 전형적인 고려시대 석탑의 모양이다.&lt;br /&gt;
|-&lt;br /&gt;
| 팔작지붕 형태의 기와골 || 고려 || 고려의 기와 형태를 본따서 만들어졌다.&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경천사 10층 석탑 분석사진.jpg|200픽셀|가운데]]&lt;br /&gt;
&lt;br /&gt;
==관련 석탑==&lt;br /&gt;
===익산 미륵사지 석탑===&lt;br /&gt;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과도 좋은 대조를 이룬다. 특히, 부드러우면서도 힘차게 표현된 인왕상 조각은 당시 신라 조각양식을 살피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인왕상은 모두 8구로서, 전체적으로 인왕의 역강한 힘을 느끼게 하는 조각으로서 7세기 조각양식을 잘 보여 주고 있다.&lt;br /&gt;
&lt;br /&gt;
===원각사지 10층 석탑===&lt;br /&gt;
조선 세조 때 건축된 원각사지 10층 석탑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김윤주]][[분류:건축문화재]]&lt;/div&gt;</summary>
		<author><name>올데이프</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2%BD%EC%B2%9C%EC%82%AC&amp;diff=34315</id>
		<title>경천사</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2%BD%EC%B2%9C%EC%82%AC&amp;diff=34315"/>
		<updated>2023-12-10T15:44:2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올데이프: &lt;/p&gt;
&lt;hr /&gt;
&lt;div&gt;[[파일:경천사.jpg|400픽셀|섬네일|오른쪽]]&lt;br /&gt;
&lt;br /&gt;
==사찰 정보==&lt;br /&gt;
&lt;br /&gt;
===창건시기 및 위치===&lt;br /&gt;
북한 황해북도 개풍군 광덕면 부소산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려 전기 예종 때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amp;lt;ref&amp;gt; 창건에 대한 기록이 불충분하여 대략 고려 전기로 추정되고 있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특징===&lt;br /&gt;
국보로 지정된 '경천사지 10층 석탑'가 있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고려 왕실의 '원당'&amp;lt;ref&amp;gt;죽은 사람의 위패를 모시고 추모하는 곳으로 현대 개념으로는 묘소를 떠올리면 될 것이다.&amp;lt;/ref&amp;gt;으로 추정되고 있다. &lt;br /&gt;
&lt;br /&gt;
==관련된 왕==&lt;br /&gt;
===네트워크 그래프===&lt;br /&gt;
{{NetworkGraph | title=경천사.lst}}&lt;br /&gt;
&lt;br /&gt;
===클래스===&lt;br /&gt;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color:white&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amp;quot; | 클래스 !! style=&amp;quot;width:30%&amp;quot; | 설명 !! style=&amp;quot;45%&amp;quot; | 노드&lt;br /&gt;
|-&lt;br /&gt;
|석탑 || 관련있는 석탑 || 원각사지10층석탑, 경천사10층석탑&lt;br /&gt;
|-&lt;br /&gt;
|국가|| 관련 국가|| 고려, 원나라&lt;br /&gt;
|-&lt;br /&gt;
|왕|| 절과 관련된 왕|| 충민왕, 예종, 인종, 의종, 공민왕&lt;br /&gt;
|-&lt;br /&gt;
|지역|| 관련된 장소 || 경기도개풍군  &lt;br /&gt;
|}&lt;br /&gt;
&lt;br /&gt;
===릴레이션===&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brown&amp;quot;&amp;gt;'''~시대에 만들어졌다'''&amp;lt;/span&amp;gt;&lt;br /&gt;
***설명: 어떤 사찰, 건축물이 어느 시대에 제작되었는지를 알려준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경천사 → 고려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brown&amp;quot;&amp;gt;'''~의 건축물이다'''&amp;lt;/span&amp;gt;&lt;br /&gt;
***설명: 어떤 세부적 건축물이 어디 절에 속한 건축물인지 나타낸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경천사지10층석탑 → 경천사&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brown&amp;quot;&amp;gt;'''~에 위치한다 '''&amp;lt;/span&amp;gt;&lt;br /&gt;
***설명: 어떤 건축물이나 사찰이 어느 도(道)에 위치하는지 나타낸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경천사 → 경기도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brown&amp;quot;&amp;gt;'''~와 관련이 있다'''&amp;lt;/span&amp;gt;&lt;br /&gt;
***설명: 관련있는 인물을 나타낸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인종 → 경천사&lt;br /&gt;
***#예종 → 경천사&lt;br /&gt;
***#공민왕 → 경천사&lt;br /&gt;
***#충민왕 → 경천사&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brown&amp;quot;&amp;gt;'''~에 영향을 주다'''&amp;lt;/span&amp;gt;&lt;br /&gt;
***설명: 영향을 준 석탑/나라를 나타낸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경천사10층석탑 → 원각사지10층석탑&lt;br /&gt;
***#원나라 → 경천사10층석탑&lt;br /&gt;
&lt;br /&gt;
===예종===&lt;br /&gt;
1118년 [[예종睿宗]]이 숙종의 기신도량(忌辰道場)&amp;lt;ref&amp;gt;왕실에서 국왕이나 선왕후의 기일에 불교식으로 제사를 지내는 종교의례&amp;lt;/ref&amp;gt;을 이곳에서 베풀었다고 전해진다.&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2964&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인종===&lt;br /&gt;
1134년 인종이 문경태후(文敬太后)의 추모제를 이곳에서 열었다고 한다.&lt;br /&gt;
===이 외===&lt;br /&gt;
인종, 의종, 공민왕이 자주 행차했던 곳이라고 한다.&lt;br /&gt;
&lt;br /&gt;
==출처 및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분류:김윤주]]&lt;br /&gt;
[[분류:건축문화재]]&lt;/div&gt;</summary>
		<author><name>올데이프</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1%B0%EC%A1%B0%EC%82%AC&amp;diff=34314</id>
		<title>거조사</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1%B0%EC%A1%B0%EC%82%AC&amp;diff=34314"/>
		<updated>2023-12-10T15:43:5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올데이프: &lt;/p&gt;
&lt;hr /&gt;
&lt;div&gt;==사찰 정보==&lt;br /&gt;
[[파일:거조사.jpg|400픽셀|섬네일|가운데]]&lt;br /&gt;
===창건시기 및 위치===&lt;br /&gt;
경북 영천시 청통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738년 효성왕 시기에 승려 원참이 창건하였다.&lt;br /&gt;
&lt;br /&gt;
693년(효소왕 2) 창건설, 738년(효성왕 2) 창건설이 존재한다.&lt;br /&gt;
&lt;br /&gt;
 693년 창건설과 738년 창건설은 모두 원효대사와 관련이 있다. 전국을 돌아다니던 원효대사가 이곳에 들러 형세의 뛰어남을 보고, 사찰을 창건했다 한다. 하지만 원효대사는 686년(신문왕 6) 이미 입적했기에 역사적으로는 맞지 않는 면이 있다. 따라서 경덕왕대 창건설은 은해사 사적비에 적혀 전해지는 사실로, 비교적 신빙성이 있다.&lt;br /&gt;
&lt;br /&gt;
===특징===&lt;br /&gt;
국보로 지정된 '경천사지 10층 석탑'가 있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고려 왕실의 '원당'&amp;lt;ref&amp;gt;죽은 사람의 위패를 모시고 추모하는 곳으로 현대 개념으로는 묘소를 떠올리면 될 것이다.&amp;lt;/ref&amp;gt;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목조건축물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고려시대 고려시대 목조 건축물로는 영천 거조사에 위치한 영산전과 봉정사의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 수덕사 대웅전으로 총 4군데만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영천 거조사 영산전은 그 문화적 가치가 뛰어나다. &lt;br /&gt;
&lt;br /&gt;
===석탑 및 건축물===&lt;br /&gt;
[[526 석조 나한상]]&lt;br /&gt;
&lt;br /&gt;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1743 석가여래삼존입상]&lt;br /&gt;
&lt;br /&gt;
==여담==&lt;br /&gt;
거조암으로 불렸었으나 2021년 3월 23일 문화재청이 거조사로 명칭을 변경하였다.&lt;br /&gt;
거조암(사)의 의미는 아비타불이 항상 머문다는 뜻이다. &lt;br /&gt;
==출처 및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김윤주]][[분류:건축문화재]]&lt;/div&gt;</summary>
		<author><name>올데이프</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526_%EC%84%9D%EC%A1%B0_%EB%82%98%ED%95%9C%EC%83%81&amp;diff=34313</id>
		<title>526 석조 나한상</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526_%EC%84%9D%EC%A1%B0_%EB%82%98%ED%95%9C%EC%83%81&amp;diff=34313"/>
		<updated>2023-12-10T15:43:3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올데이프: &lt;/p&gt;
&lt;hr /&gt;
&lt;div&gt;'''대한민국 국보 제 14호'''&lt;br /&gt;
&lt;br /&gt;
==의미==&lt;br /&gt;
526분의 다 다른 얼굴과 표정을 하고 있는 석조 나한상이 영산전에 모셔져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인 16명의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66826&amp;amp;cid=43667&amp;amp;categoryId=43667 나한]과 500명의[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629853&amp;amp;cid=50766&amp;amp;categoryId=50794 성중]들이다.&lt;br /&gt;
&lt;br /&gt;
[[파일:석조나한상.jpg|400픽셀|섬네일|가운데]]&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이렇게 많은 나한상들이 한곳에 모여있는 문화재이다. &lt;br /&gt;
==여담==&lt;br /&gt;
===설화===&lt;br /&gt;
*천천히 526분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유독 눈에 들어오는 나한상이 있을 것이다.&lt;br /&gt;
&lt;br /&gt;
그 나한상이 자신의 전생이었을거라는 설이 있다.&lt;br /&gt;
*어리석은 중생이라도 3일동안 거조암 영산전에서 정성껏 기도를 하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고 한다.&amp;lt;ref&amp;gt;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13093&amp;lt;/ref&amp;gt;&lt;br /&gt;
===복원===&lt;br /&gt;
[[파일:돈명스님.jpg|200픽셀|섬네일|오른쪽]]&lt;br /&gt;
나한상은 복원을 목적으로 재채색을 진행했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원래 모습이 사라져 사람들의 안타까움을 샀다. 나한상의 원형을 복원하기 위해서 거조암 주지스님인 돈명스님께서 [https://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23088 '나한님 원형 찾아주기']프로젝트를 시작하셨다. 페인트를 제거하고 만들어졌을 당시의 색과 형태를 복원하기 위한 노력을 거쳐 원형을 되찾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조성 당시 모습을 찾게 해 주는 것이 도리라 생각해 원형복원 불사를 시작했다&amp;quot;'''''&lt;br /&gt;
&lt;br /&gt;
고 밝히셨다.&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김윤주]][[분류:건축문화재]]&lt;/div&gt;</summary>
		<author><name>올데이프</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0%9C%ED%83%9C%EC%82%AC&amp;diff=34311</id>
		<title>개태사</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0%9C%ED%83%9C%EC%82%AC&amp;diff=34311"/>
		<updated>2023-12-10T15:43:1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올데이프: &lt;/p&gt;
&lt;hr /&gt;
&lt;div&gt;==사찰 정보==&lt;br /&gt;
[[파일:개태사.jpg|300픽셀|섬네일|오른쪽]]&lt;br /&gt;
&lt;br /&gt;
===창건시기 및 위치===&lt;br /&gt;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려 초 태조 왕건이 설립하였다.&lt;br /&gt;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항복을 받아낸 장소에 세운 절로, 통일왕조를 기념하여 세워졌다고 알려져 있다.&lt;br /&gt;
===의의===&lt;br /&gt;
후백제의 항복을 받아낸 장소에서 세운 절로써,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비로소 새로운 삼국을 통일한 통일왕조 고려의 시작을 알렸다는 의의를 지니고 있다.&lt;br /&gt;
===건축물===&lt;br /&gt;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1123402190000&amp;amp;pageNo=1_1_2_0 개태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lt;br /&gt;
==관련된 역사적 사실==&lt;br /&gt;
&lt;br /&gt;
*'''고려의 후삼국 통일 과정'''&lt;br /&gt;
&lt;br /&gt;
고려 건국 초, 고려와 백제는 서로 평화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백제의 견훤은 태조 즉위 두 달 후 즉위를 축하하는 선물을 보내기도 하였다. 하지만 백제와 신라의 전쟁 중 고려가 신라를 지원하게 되며 백제와 고구려가 등을 돌리게 된다. 이후 고려는 고창전투에서 후백제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를 계기로 신검에 의해 쫓겨난 후백제의 견훤이 항복하였다. 신검 또한 936년 고려의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항복하며 고려는 후삼국을 통일하게 되었다. &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5744&amp;lt;/ref&amp;gt;&lt;br /&gt;
&lt;br /&gt;
*'''고려 말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lt;br /&gt;
&lt;br /&gt;
 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의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되자 공민왕은 안동으로 피난하였다. 이후 피난에서 돌아오던 길에 공민왕은 수도를 강화도로 천도할 계획을 세우게 되는데, 이를 확신하기 위해 태조영전이 있는 개태사에 신하를 보내어 천도에 관한 점을 치게 하였다. 결국 불길한 점괘가 나와 천도 계획은 중지되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여담==&lt;br /&gt;
보통 신검의 항복을 받아낸 장소라 이곳에 개태사를 지었다는 설이 많으나, '''[[견훤]]이 머무르다 죽은 곳'''이기에 왕건이 이 곳에 개태사를 지었다는 설도 있다. 백제인들에게 있어서 견훤이 신검보다 그들의 정신적인 실제 왕이었다. 후백제의 백성들이 후백제 왕이 죽은 곳이라 하여 참배하게 되면 '''잔존 세력'''이 모이게 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으며 이는 반역의 위험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는 통일 초기인 고려에게 있어서 큰 위험요소 였으며, 따라서 왕건은 고려식 사찰을 이 곳에 설립하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출처 및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김윤주]][[분류:건축문화재]]&lt;/div&gt;</summary>
		<author><name>올데이프</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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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올데이프: 새 문서: '''1936년 보물로 지정'''   ==특징== ===건축시기 및 위치===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고달사터에 위치한 고려전기 탑비의 받침돌으로 높이는 2m...&lt;/p&gt;
&lt;hr /&gt;
&lt;div&gt;'''1936년 보물로 지정'''&lt;br /&gt;
&lt;br /&gt;
&lt;br /&gt;
==특징==&lt;br /&gt;
===건축시기 및 위치===&lt;br /&gt;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고달사터에 위치한 고려전기 탑비의 받침돌으로 높이는 2m이다. 현재는 귀부&amp;lt;ref&amp;gt;비석의 받침돌&amp;lt;/ref&amp;gt;와 이수&amp;lt;ref&amp;gt; 비신의 꼭대기에 표현된 용&amp;lt;/ref&amp;gt; 만이 남아 있고, 비신(碑身)&amp;lt;ref&amp;gt; 비문을 새긴 돌&amp;lt;/ref&amp;gt;은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진열되어 있다.&lt;br /&gt;
&lt;br /&gt;
[[파일: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jpg|350픽셀|섬네일|오른쪽]]&lt;br /&gt;
===형태 &amp;lt;ref&amp;gt;https://gjicp.ggcf.kr/mediaObjects/438&amp;lt;/ref&amp;gt;===&lt;br /&gt;
*용의 눈과 코&lt;br /&gt;
&lt;br /&gt;
용은 눈을 부릅떠 정면을 직시하고 있는데, 눈꼬리가 길게 치켜올라가 매우 험상궂은 모습이다. 코는 들려서 콧구멍이 깊게 표현되고 중첩된 주름이 정수리까지 이어져 있다.&lt;br /&gt;
&lt;br /&gt;
*얼굴 형태&lt;br /&gt;
&lt;br /&gt;
일반적으로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모습과는 달리 입을 꽉 다물어 여의주를 물지 않은 형태이며, 길게 찢어진 입 가장자리에는 공룡의 깃과 같은 물갈퀴 형상이 조각되었고, 그 뒤로 갈기 같은 털이 머리 뒤까지 길게 뻗쳐 있다.&lt;br /&gt;
&lt;br /&gt;
*몸의 형태&lt;br /&gt;
&lt;br /&gt;
앞발은 귀갑 전면 양단에 가지런히 두었으나 마치 땅을 밀치고 나가려는 듯 격동적이고, 사실적으로 표현된 발톱은 땅을 꼭 누르고 있는 듯하다. 발은 크고 두툼하며, 5개의 발가락과 발톱이 상세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큰 발로 지대석을 누르고 버티어 앉은 모습으로 한껏 사실감이 돋보인다. &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김윤주]]&lt;/div&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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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1936년 보물로 지정'''&lt;br /&gt;
&lt;br /&gt;
&lt;br /&gt;
==특징==&lt;br /&gt;
===건축시기 및 위치===&lt;br /&gt;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고달사터에 위치한 고려전기 탑비의 받침돌으로 높이는 2m이다. 현재는 귀부&amp;lt;ref&amp;gt;비석의 받침돌&amp;lt;/ref&amp;gt;와 이수&amp;lt;ref&amp;gt; 비신의 꼭대기에 표현된 용&amp;lt;/ref&amp;gt; 만이 남아 있고, 비신(碑身)&amp;lt;ref&amp;gt; 비문을 새긴 돌&amp;lt;/ref&amp;gt;은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진열되어 있다.&lt;br /&gt;
&lt;br /&gt;
[[파일: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jpg|350픽셀|섬네일|오른쪽]]&lt;br /&gt;
===형태 &amp;lt;ref&amp;gt;https://gjicp.ggcf.kr/mediaObjects/438&amp;lt;/ref&amp;gt;===&lt;br /&gt;
*용의 눈과 코&lt;br /&gt;
&lt;br /&gt;
용은 눈을 부릅떠 정면을 직시하고 있는데, 눈꼬리가 길게 치켜올라가 매우 험상궂은 모습이다. 코는 들려서 콧구멍이 깊게 표현되고 중첩된 주름이 정수리까지 이어져 있다.&lt;br /&gt;
&lt;br /&gt;
*얼굴 형태&lt;br /&gt;
&lt;br /&gt;
일반적으로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모습과는 달리 입을 꽉 다물어 여의주를 물지 않은 형태이며, 길게 찢어진 입 가장자리에는 공룡의 깃과 같은 물갈퀴 형상이 조각되었고, 그 뒤로 갈기 같은 털이 머리 뒤까지 길게 뻗쳐 있다.&lt;br /&gt;
&lt;br /&gt;
*몸의 형태&lt;br /&gt;
&lt;br /&gt;
앞발은 귀갑 전면 양단에 가지런히 두었으나 마치 땅을 밀치고 나가려는 듯 격동적이고, 사실적으로 표현된 발톱은 땅을 꼭 누르고 있는 듯하다. 발은 크고 두툼하며, 5개의 발가락과 발톱이 상세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큰 발로 지대석을 누르고 버티어 앉은 모습으로 한껏 사실감이 돋보인다. &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김윤주]]&lt;/div&gt;</summary>
		<author><name>올데이프</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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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1936년 보물로 지정'''&lt;br /&gt;
==특징==&lt;br /&gt;
===건축시기 및 위치===&lt;br /&gt;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고달사터에 위치한 고려전기 탑비의 받침돌으로 높이는 2m이다. 현재는 귀부&amp;lt;ref&amp;gt;비석의 받침돌&amp;lt;/ref&amp;gt;와 이수&amp;lt;ref&amp;gt; 비신의 꼭대기에 표현된 용&amp;lt;/ref&amp;gt; 만이 남아 있고, 비신(碑身)&amp;lt;ref&amp;gt; 비문을 새긴 돌&amp;lt;/ref&amp;gt;은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진열되어 있다.&lt;br /&gt;
&lt;br /&gt;
[[파일: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jpg|350픽셀|섬네일|오른쪽]]&lt;br /&gt;
===형태===&lt;br /&gt;
*용의 눈과 코&lt;br /&gt;
&lt;br /&gt;
용은 눈을 부릅떠 정면을 직시하고 있는데, 눈꼬리가 길게 치켜올라가 매우 험상궂은 모습이다. 코는 들려서 콧구멍이 깊게 표현되고 중첩된 주름이 정수리까지 이어져 있다.&lt;br /&gt;
&lt;br /&gt;
*얼굴 형태&lt;br /&gt;
&lt;br /&gt;
일반적으로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모습과는 달리 입을 꽉 다물어 여의주를 물지 않은 형태이며, 길게 찢어진 입 가장자리에는 공룡의 깃과 같은 물갈퀴 형상이 조각되었고, 그 뒤로 갈기 같은 털이 머리 뒤까지 길게 뻗쳐 있다.&lt;br /&gt;
&lt;br /&gt;
*몸의 형태&lt;br /&gt;
&lt;br /&gt;
앞발은 귀갑 전면 양단에 가지런히 두었으나 마치 땅을 밀치고 나가려는 듯 격동적이고, 사실적으로 표현된 발톱은 땅을 꼭 누르고 있는 듯하다. 발은 크고 두툼하며, 5개의 발가락과 발톱이 상세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큰 발로 지대석을 누르고 버티어 앉은 모습으로 한껏 사실감이 돋보인다. &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김윤주]]&lt;/div&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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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1936년 보물로 지정'''&lt;br /&gt;
==특징==&lt;br /&gt;
===건축시기 및 위치===&lt;br /&gt;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고달사터에 위치한 고려전기 탑비의 받침돌으로 높이는 2m이다. 현재는 귀부&amp;lt;ref&amp;gt;비석의 받침돌&amp;lt;/ref&amp;gt;와 이수&amp;lt;ref&amp;gt; 비신의 꼭대기에 표현된 용&amp;lt;/ref&amp;gt; 만이 남아 있고, 비신(碑身)&amp;lt;ref&amp;gt; 비문을 새긴 돌&amp;lt;/ref&amp;gt;은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진열되어 있다.&lt;br /&gt;
===형태===&lt;br /&gt;
*용의 눈과 코&lt;br /&gt;
&lt;br /&gt;
용은 눈을 부릅떠 정면을 직시하고 있는데, 눈꼬리가 길게 치켜올라가 매우 험상궂은 모습이다. 코는 들려서 콧구멍이 깊게 표현되고 중첩된 주름이 정수리까지 이어져 있다.&lt;br /&gt;
&lt;br /&gt;
*얼굴 형태&lt;br /&gt;
&lt;br /&gt;
일반적으로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모습과는 달리 입을 꽉 다물어 여의주를 물지 않은 형태이며, 길게 찢어진 입 가장자리에는 공룡의 깃과 같은 물갈퀴 형상이 조각되었고, 그 뒤로 갈기 같은 털이 머리 뒤까지 길게 뻗쳐 있다.&lt;br /&gt;
&lt;br /&gt;
*몸의 형태&lt;br /&gt;
&lt;br /&gt;
앞발은 귀갑 전면 양단에 가지런히 두었으나 마치 땅을 밀치고 나가려는 듯 격동적이고, 사실적으로 표현된 발톱은 땅을 꼭 누르고 있는 듯하다. 발은 크고 두툼하며, 5개의 발가락과 발톱이 상세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큰 발로 지대석을 누르고 버티어 앉은 모습으로 한껏 사실감이 돋보인다. &lt;br /&gt;
&lt;br /&gt;
[[파일:고달사 터.jpg|350픽셀|섬네일|가운데]]&lt;br /&gt;
&lt;br /&gt;
==보유 석탑==&lt;br /&gt;
*여주 고달사지 승탑&lt;br /&gt;
각 부분의 조각들에서 고려 특유의 기법을 풍기고 있어 고려시대 전기 10세기 즈음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lt;br /&gt;
거북이를 사이에 두고 네 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으며, 나머지 공간에는 구름무늬로 가득 채워져 있다. 가운데 돌을 중심으로 그 아래와 윗돌에는 연꽃무늬를 두어 우아함을 살리고 있다. 지붕돌 꼭대기에는 둥그런 돌 위로 지붕을 축소한 듯한 보개(寶蓋)가 얹혀져 있다.&lt;br /&gt;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1123100080000&amp;amp;pageNo__=1_2_1_0&amp;amp;pageNo=1_1_2_0 여주 고달사지 석조대좌]&lt;br /&gt;
&lt;br /&gt;
&amp;lt;gallery mode=&amp;quot;packed&amp;quot; caption=&amp;quot;고달사&amp;quot; heights=&amp;quot;300px&amp;quot; style=&amp;quot;float:center&amp;quot;&amp;gt;&lt;br /&gt;
파일:고달사지 승탑.jpg|고달사지 승탑&lt;br /&gt;
파일:고달사지 석조대좌.jpg|고달사지 석조대좌&lt;br /&gt;
파일:고달사지 쌍사자 석등.jpg|고달사지 쌍사자 석등&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lt;br /&gt;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lt;br /&gt;
*여주 고달사지 쌍사자 석등&lt;br /&gt;
&lt;br /&gt;
&lt;br /&gt;
===설화===&lt;br /&gt;
*신라시대에 고달(高達)&amp;lt;ref&amp;gt;고달은 가족들이 굶어 죽는 줄도 모르고 불사에 혼을 바쳤다고 한다. 이라는 승건이 창건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amp;lt;/ref&amp;gt;&lt;br /&gt;
 사냥꾼이던 고달은 사슴 한 마리를 사냥하게 되었는데, 화살을 맞고 사슴이 달아나게 되었다. 사슴의 핏자국을 따라가다 보니 불상을 모신 굴이 있었고, 그 불상에 화살이 꽂혀 있었다고 한다. 고달은 그 불상을 보며 부처님이 자신이 살생을 많이 하는 것을 훈계하기 위해 부처님이 사슴으로 변신해서 자기를 인도한 것임을 깨닫고, 그 자리에서 활과 살을 꺾어버린 뒤 수행하여 스님이 되었다고 한다. &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3371&amp;lt;/ref&amp;gt; &lt;br /&gt;
*고달원 입구‘신털이봉'이 생긴 사연&lt;br /&gt;
 원종대사 찬유는 중국에 수기설법을 유학하고 돌아와 선풍을 진작시켰다. 그는 고려 태조, 혜종, 정종, 광종으로부터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특히 고려 광종의 개혁에 큰 힘을 보태어 953년(광종 4) 국사로 책봉되었다고 한다. 만년에 고달사로 내려와 머물면서 대찰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수기설법(隨機說法)은 마치 깊은 골짜기에서 부는 회오리바람 소리와 같고, 인연 따라 감응하는 것은 맑은 못에 비치는 달그림자와 같았다,“누더기를 입은 납자(衲子)가 바람처럼 찾아오고, 대중공양을 올리기 위해 오는 이가 구름과 같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수많은 스님이 이곳을 찾아올 때 고달원 입구 500m 전에서 짚신을 턴 흙이 쌓여 신털이봉이 생겨났다고 한다.&amp;lt;ref&amp;gt;https://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220365&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김윤주]]&lt;/div&gt;</summary>
		<author><name>올데이프</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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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고달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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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0T08:43:2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올데이프: /* 보유 석탑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20년 전이 한바탕 꿈이었구나, 젊은 시절 벗들은 반이나 황천객(黃泉客)이 되었는데 지금 &amp;lt;font color=&amp;quot;#8b0000&amp;quot;&amp;gt;'''고달(高達)'''&amp;lt;/font&amp;gt; 옛 절에 온 것은 원통(圓通) 큰 복전이 있기 때문이라네. 사면의 산은 병풍처럼 절을 둘렀는데, 한 개 비석은 푸른 하늘에 기대었네. 웃음꽃 피운 이야기에 밤새도록 되돌아갈 길 잊었으니, 그때는 관음보살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라네.”-&amp;lt;신증동국여지승람&amp;gt; 문신 한수(韓脩,1333-1384)의 시'''&lt;br /&gt;
==건축물 정보==&lt;br /&gt;
===건축시기 및 위치===&lt;br /&gt;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764),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에 세워졌다. 하지만 통일신라 당시에는 큰 기능을 하지 못했었다. '''[[고려시대 광종]]'''이후, 고려 초 3대 사찰 중 하나가 되었으며 대찰(大刹)로서 기능했다.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고달사 소속 많은 석탑과 석등 등의 유물은 대부분 고려시대에 만들어졌다. 고달원(高達院)이라고도 한다. &amp;lt;ref&amp;gt;신라시대에 세워졌음에도 고려시대 건축물로 넣은 이유는 고려 광종 이후 큰 절로 성장하였기 때문이며, 고려의 3대 사찰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또한 석탑들은 대부분 고려시대 때 만들어졌다.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파일:고달사 터.jpg|350픽셀|섬네일|가운데]]&lt;br /&gt;
&lt;br /&gt;
==보유 석탑==&lt;br /&gt;
*여주 고달사지 승탑&lt;br /&gt;
각 부분의 조각들에서 고려 특유의 기법을 풍기고 있어 고려시대 전기 10세기 즈음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lt;br /&gt;
거북이를 사이에 두고 네 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으며, 나머지 공간에는 구름무늬로 가득 채워져 있다. 가운데 돌을 중심으로 그 아래와 윗돌에는 연꽃무늬를 두어 우아함을 살리고 있다. 지붕돌 꼭대기에는 둥그런 돌 위로 지붕을 축소한 듯한 보개(寶蓋)가 얹혀져 있다.&lt;br /&gt;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1123100080000&amp;amp;pageNo__=1_2_1_0&amp;amp;pageNo=1_1_2_0 여주 고달사지 석조대좌]&lt;br /&gt;
&lt;br /&gt;
&amp;lt;gallery mode=&amp;quot;packed&amp;quot; caption=&amp;quot;고달사&amp;quot; heights=&amp;quot;300px&amp;quot; style=&amp;quot;float:center&amp;quot;&amp;gt;&lt;br /&gt;
파일:고달사지 승탑.jpg|고달사지 승탑&lt;br /&gt;
파일:고달사지 석조대좌.jpg|고달사지 석조대좌&lt;br /&gt;
파일:고달사지 쌍사자 석등.jpg|고달사지 쌍사자 석등&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lt;br /&gt;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lt;br /&gt;
*여주 고달사지 쌍사자 석등&lt;br /&gt;
&lt;br /&gt;
&lt;br /&gt;
===설화===&lt;br /&gt;
*신라시대에 고달(高達)&amp;lt;ref&amp;gt;고달은 가족들이 굶어 죽는 줄도 모르고 불사에 혼을 바쳤다고 한다. 이라는 승건이 창건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amp;lt;/ref&amp;gt;&lt;br /&gt;
 사냥꾼이던 고달은 사슴 한 마리를 사냥하게 되었는데, 화살을 맞고 사슴이 달아나게 되었다. 사슴의 핏자국을 따라가다 보니 불상을 모신 굴이 있었고, 그 불상에 화살이 꽂혀 있었다고 한다. 고달은 그 불상을 보며 부처님이 자신이 살생을 많이 하는 것을 훈계하기 위해 부처님이 사슴으로 변신해서 자기를 인도한 것임을 깨닫고, 그 자리에서 활과 살을 꺾어버린 뒤 수행하여 스님이 되었다고 한다. &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3371&amp;lt;/ref&amp;gt; &lt;br /&gt;
*고달원 입구‘신털이봉'이 생긴 사연&lt;br /&gt;
 원종대사 찬유는 중국에 수기설법을 유학하고 돌아와 선풍을 진작시켰다. 그는 고려 태조, 혜종, 정종, 광종으로부터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특히 고려 광종의 개혁에 큰 힘을 보태어 953년(광종 4) 국사로 책봉되었다고 한다. 만년에 고달사로 내려와 머물면서 대찰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수기설법(隨機說法)은 마치 깊은 골짜기에서 부는 회오리바람 소리와 같고, 인연 따라 감응하는 것은 맑은 못에 비치는 달그림자와 같았다,“누더기를 입은 납자(衲子)가 바람처럼 찾아오고, 대중공양을 올리기 위해 오는 이가 구름과 같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수많은 스님이 이곳을 찾아올 때 고달원 입구 500m 전에서 짚신을 턴 흙이 쌓여 신털이봉이 생겨났다고 한다.&amp;lt;ref&amp;gt;https://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220365&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김윤주]]&lt;/div&gt;</summary>
		<author><name>올데이프</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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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고달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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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올데이프: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20년 전이 한바탕 꿈이었구나, 젊은 시절 벗들은 반이나 황천객(黃泉客)이 되었는데 지금 &amp;lt;font color=&amp;quot;#8b0000&amp;quot;&amp;gt;'''고달(高達)'''&amp;lt;/font&amp;gt; 옛 절에 온 것은 원통(圓通) 큰 복전이 있기 때문이라네. 사면의 산은 병풍처럼 절을 둘렀는데, 한 개 비석은 푸른 하늘에 기대었네. 웃음꽃 피운 이야기에 밤새도록 되돌아갈 길 잊었으니, 그때는 관음보살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라네.”-&amp;lt;신증동국여지승람&amp;gt; 문신 한수(韓脩,1333-1384)의 시'''&lt;br /&gt;
==건축물 정보==&lt;br /&gt;
===건축시기 및 위치===&lt;br /&gt;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764),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에 세워졌다. 하지만 통일신라 당시에는 큰 기능을 하지 못했었다. '''[[고려시대 광종]]'''이후, 고려 초 3대 사찰 중 하나가 되었으며 대찰(大刹)로서 기능했다.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고달사 소속 많은 석탑과 석등 등의 유물은 대부분 고려시대에 만들어졌다. 고달원(高達院)이라고도 한다. &amp;lt;ref&amp;gt;신라시대에 세워졌음에도 고려시대 건축물로 넣은 이유는 고려 광종 이후 큰 절로 성장하였기 때문이며, 고려의 3대 사찰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또한 석탑들은 대부분 고려시대 때 만들어졌다.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파일:고달사 터.jpg|350픽셀|섬네일|가운데]]&lt;br /&gt;
&lt;br /&gt;
==보유 석탑==&lt;br /&gt;
*여주 고달사지 승탑&lt;br /&gt;
각 부분의 조각들에서 고려 특유의 기법을 풍기고 있어 고려시대 전기 10세기 즈음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lt;br /&gt;
거북이를 사이에 두고 네 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으며, 나머지 공간에는 구름무늬로 가득 채워져 있다. 가운데 돌을 중심으로 그 아래와 윗돌에는 연꽃무늬를 두어 우아함을 살리고 있다. 지붕돌 꼭대기에는 둥그런 돌 위로 지붕을 축소한 듯한 보개(寶蓋)가 얹혀져 있다.&lt;br /&gt;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1123100080000&amp;amp;pageNo__=1_2_1_0&amp;amp;pageNo=1_1_2_0 여주 고달사지 석조대좌]&lt;br /&gt;
&lt;br /&gt;
&amp;lt;gallery mode=&amp;quot;packed&amp;quot; caption=&amp;quot;고달사&amp;quot; heights=&amp;quot;300px&amp;quot; style=&amp;quot;float:center&amp;quot;&amp;gt;&lt;br /&gt;
파일:고달사지 승탑.jpg|고달사지 승탑&lt;br /&gt;
파일:고달사지 석조대좌.jpg|고달사지 석조대좌&lt;br /&gt;
파일:고달사지 쌍사자 석등.jpg|고달사지 쌍사자 석등&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lt;br /&gt;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lt;br /&gt;
*여주 고달사지 쌍사자 석등&lt;br /&gt;
&lt;br /&gt;
&lt;br /&gt;
===설화===&lt;br /&gt;
*신라시대에 고달(高達)&amp;lt;ref&amp;gt;고달은 가족들이 굶어 죽는 줄도 모르고 불사에 혼을 바쳤다고 한다. 이라는 승건이 창건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amp;lt;/ref&amp;gt;&lt;br /&gt;
 사냥꾼이던 고달은 사슴 한 마리를 사냥하게 되었는데, 화살을 맞고 사슴이 달아나게 되었다. 사슴의 핏자국을 따라가다 보니 불상을 모신 굴이 있었고, 그 불상에 화살이 꽂혀 있었다고 한다. 고달은 그 불상을 보며 부처님이 자신이 살생을 많이 하는 것을 훈계하기 위해 부처님이 사슴으로 변신해서 자기를 인도한 것임을 깨닫고, 그 자리에서 활과 살을 꺾어버린 뒤 수행하여 스님이 되었다고 한다. &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3371&amp;lt;/ref&amp;gt; &lt;br /&gt;
*고달원 입구‘신털이봉'이 생긴 사연&lt;br /&gt;
 원종대사 찬유는 중국에 수기설법을 유학하고 돌아와 선풍을 진작시켰다. 그는 고려 태조, 혜종, 정종, 광종으로부터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특히 고려 광종의 개혁에 큰 힘을 보태어 953년(광종 4) 국사로 책봉되었다고 한다. 만년에 고달사로 내려와 머물면서 대찰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수기설법(隨機說法)은 마치 깊은 골짜기에서 부는 회오리바람 소리와 같고, 인연 따라 감응하는 것은 맑은 못에 비치는 달그림자와 같았다,“누더기를 입은 납자(衲子)가 바람처럼 찾아오고, 대중공양을 올리기 위해 오는 이가 구름과 같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수많은 스님이 이곳을 찾아올 때 고달원 입구 500m 전에서 짚신을 턴 흙이 쌓여 신털이봉이 생겨났다고 한다.&amp;lt;ref&amp;gt;https://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220365&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김윤주]]&lt;/div&gt;</summary>
		<author><name>올데이프</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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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고달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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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0T08:41:3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올데이프: /* 보유 석탑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20년 전이 한바탕 꿈이었구나, 젊은 시절 벗들은 반이나 황천객(黃泉客)이 되었는데 지금 &amp;lt;font color=&amp;quot;#8b0000&amp;quot;&amp;gt;'''고달(高達)'''&amp;lt;/font&amp;gt; 옛 절에 온 것은 원통(圓通) 큰 복전이 있기 때문이라네. 사면의 산은 병풍처럼 절을 둘렀는데, 한 개 비석은 푸른 하늘에 기대었네. 웃음꽃 피운 이야기에 밤새도록 되돌아갈 길 잊었으니, 그때는 관음보살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라네.”-&amp;lt;신증동국여지승람&amp;gt; 문신 한수(韓脩,1333-1384)의 시&lt;br /&gt;
==건축물 정보==&lt;br /&gt;
===건축시기 및 위치===&lt;br /&gt;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764),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에 세워졌다. 하지만 통일신라 당시에는 큰 기능을 하지 못했었다. '''[[고려시대 광종]]'''이후, 고려 초 3대 사찰 중 하나가 되었으며 대찰(大刹)로서 기능했다.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고달사 소속 많은 석탑과 석등 등의 유물은 대부분 고려시대에 만들어졌다. 고달원(高達院)이라고도 한다. &amp;lt;ref&amp;gt;신라시대에 세워졌음에도 고려시대 건축물로 넣은 이유는 고려 광종 이후 큰 절로 성장하였기 때문이며, 고려의 3대 사찰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또한 석탑들은 대부분 고려시대 때 만들어졌다.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파일:고달사 터.jpg|350픽셀|섬네일|가운데]]&lt;br /&gt;
&lt;br /&gt;
==보유 석탑==&lt;br /&gt;
*여주 고달사지 승탑&lt;br /&gt;
각 부분의 조각들에서 고려 특유의 기법을 풍기고 있어 고려시대 전기 10세기 즈음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lt;br /&gt;
거북이를 사이에 두고 네 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으며, 나머지 공간에는 구름무늬로 가득 채워져 있다. 가운데 돌을 중심으로 그 아래와 윗돌에는 연꽃무늬를 두어 우아함을 살리고 있다. 지붕돌 꼭대기에는 둥그런 돌 위로 지붕을 축소한 듯한 보개(寶蓋)가 얹혀져 있다.&lt;br /&gt;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1123100080000&amp;amp;pageNo__=1_2_1_0&amp;amp;pageNo=1_1_2_0 여주 고달사지 석조대좌]&lt;br /&gt;
&lt;br /&gt;
&amp;lt;gallery mode=&amp;quot;packed&amp;quot; caption=&amp;quot;고달사&amp;quot; heights=&amp;quot;300px&amp;quot; style=&amp;quot;float:center&amp;quot;&amp;gt;&lt;br /&gt;
파일:고달사지 승탑.jpg|고달사지 승탑&lt;br /&gt;
파일:고달사지 석조대좌.jpg|고달사지 석조대좌&lt;br /&gt;
파일:고달사지 쌍사자 석등.jpg|고달사지 쌍사자 석등&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lt;br /&gt;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lt;br /&gt;
*여주 고달사지 쌍사자 석등&lt;br /&gt;
&lt;br /&gt;
&lt;br /&gt;
===설화===&lt;br /&gt;
*신라시대에 고달(高達)&amp;lt;ref&amp;gt;고달은 가족들이 굶어 죽는 줄도 모르고 불사에 혼을 바쳤다고 한다. 이라는 승건이 창건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amp;lt;/ref&amp;gt;&lt;br /&gt;
 사냥꾼이던 고달은 사슴 한 마리를 사냥하게 되었는데, 화살을 맞고 사슴이 달아나게 되었다. 사슴의 핏자국을 따라가다 보니 불상을 모신 굴이 있었고, 그 불상에 화살이 꽂혀 있었다고 한다. 고달은 그 불상을 보며 부처님이 자신이 살생을 많이 하는 것을 훈계하기 위해 부처님이 사슴으로 변신해서 자기를 인도한 것임을 깨닫고, 그 자리에서 활과 살을 꺾어버린 뒤 수행하여 스님이 되었다고 한다. &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3371&amp;lt;/ref&amp;gt; &lt;br /&gt;
*고달원 입구‘신털이봉'이 생긴 사연&lt;br /&gt;
 원종대사 찬유는 중국에 수기설법을 유학하고 돌아와 선풍을 진작시켰다. 그는 고려 태조, 혜종, 정종, 광종으로부터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특히 고려 광종의 개혁에 큰 힘을 보태어 953년(광종 4) 국사로 책봉되었다고 한다. 만년에 고달사로 내려와 머물면서 대찰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수기설법(隨機說法)은 마치 깊은 골짜기에서 부는 회오리바람 소리와 같고, 인연 따라 감응하는 것은 맑은 못에 비치는 달그림자와 같았다,“누더기를 입은 납자(衲子)가 바람처럼 찾아오고, 대중공양을 올리기 위해 오는 이가 구름과 같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수많은 스님이 이곳을 찾아올 때 고달원 입구 500m 전에서 짚신을 턴 흙이 쌓여 신털이봉이 생겨났다고 한다.&amp;lt;ref&amp;gt;https://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220365&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김윤주]]&lt;/div&gt;</summary>
		<author><name>올데이프</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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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0T08:41:2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올데이프: &lt;/p&gt;
&lt;h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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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년 전이 한바탕 꿈이었구나, 젊은 시절 벗들은 반이나 황천객(黃泉客)이 되었는데 지금 &amp;lt;font color=&amp;quot;#8b0000&amp;quot;&amp;gt;'''고달(高達)'''&amp;lt;/font&amp;gt; 옛 절에 온 것은 원통(圓通) 큰 복전이 있기 때문이라네. 사면의 산은 병풍처럼 절을 둘렀는데, 한 개 비석은 푸른 하늘에 기대었네. 웃음꽃 피운 이야기에 밤새도록 되돌아갈 길 잊었으니, 그때는 관음보살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라네.”-&amp;lt;신증동국여지승람&amp;gt; 문신 한수(韓脩,1333-1384)의 시&lt;br /&gt;
==건축물 정보==&lt;br /&gt;
===건축시기 및 위치===&lt;br /&gt;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764),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에 세워졌다. 하지만 통일신라 당시에는 큰 기능을 하지 못했었다. '''[[고려시대 광종]]'''이후, 고려 초 3대 사찰 중 하나가 되었으며 대찰(大刹)로서 기능했다.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고달사 소속 많은 석탑과 석등 등의 유물은 대부분 고려시대에 만들어졌다. 고달원(高達院)이라고도 한다. &amp;lt;ref&amp;gt;신라시대에 세워졌음에도 고려시대 건축물로 넣은 이유는 고려 광종 이후 큰 절로 성장하였기 때문이며, 고려의 3대 사찰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또한 석탑들은 대부분 고려시대 때 만들어졌다.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파일:고달사 터.jpg|350픽셀|섬네일|가운데]]&lt;br /&gt;
&lt;br /&gt;
==보유 석탑==&lt;br /&gt;
*여주 고달사지 승탑&lt;br /&gt;
각 부분의 조각들에서 고려 특유의 기법을 풍기고 있어 고려시대 전기 10세기 즈음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lt;br /&gt;
거북이를 사이에 두고 네 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으며, 나머지 공간에는 구름무늬로 가득 채워져 있다. 가운데 돌을 중심으로 그 아래와 윗돌에는 연꽃무늬를 두어 우아함을 살리고 있다. 지붕돌 꼭대기에는 둥그런 돌 위로 지붕을 축소한 듯한 보개(寶蓋)가 얹혀져 있다.&lt;br /&gt;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1123100080000&amp;amp;pageNo__=1_2_1_0&amp;amp;pageNo=1_1_2_0 여주 고달사지 석조대좌]&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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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고달사지 승탑.jpg|고달사지 승탑&lt;br /&gt;
파일:고달사지 석조대좌.jpg|고달사지 석조대좌&lt;br /&gt;
파일:고달사지 쌍사자 석등.jpg|고달사지 쌍사자 석등&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lt;br /&gt;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lt;br /&gt;
*여주 고달사지 쌍사자 석등&lt;br /&gt;
&lt;br /&gt;
&lt;br /&gt;
===설화===&lt;br /&gt;
*신라시대에 고달(高達)&amp;lt;ref&amp;gt;고달은 가족들이 굶어 죽는 줄도 모르고 불사에 혼을 바쳤다고 한다. 이라는 승건이 창건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amp;lt;/ref&amp;gt;&lt;br /&gt;
 사냥꾼이던 고달은 사슴 한 마리를 사냥하게 되었는데, 화살을 맞고 사슴이 달아나게 되었다. 사슴의 핏자국을 따라가다 보니 불상을 모신 굴이 있었고, 그 불상에 화살이 꽂혀 있었다고 한다. 고달은 그 불상을 보며 부처님이 자신이 살생을 많이 하는 것을 훈계하기 위해 부처님이 사슴으로 변신해서 자기를 인도한 것임을 깨닫고, 그 자리에서 활과 살을 꺾어버린 뒤 수행하여 스님이 되었다고 한다. &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3371&amp;lt;/ref&amp;gt; &lt;br /&gt;
*고달원 입구‘신털이봉'이 생긴 사연&lt;br /&gt;
 원종대사 찬유는 중국에 수기설법을 유학하고 돌아와 선풍을 진작시켰다. 그는 고려 태조, 혜종, 정종, 광종으로부터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특히 고려 광종의 개혁에 큰 힘을 보태어 953년(광종 4) 국사로 책봉되었다고 한다. 만년에 고달사로 내려와 머물면서 대찰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수기설법(隨機說法)은 마치 깊은 골짜기에서 부는 회오리바람 소리와 같고, 인연 따라 감응하는 것은 맑은 못에 비치는 달그림자와 같았다,“누더기를 입은 납자(衲子)가 바람처럼 찾아오고, 대중공양을 올리기 위해 오는 이가 구름과 같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수많은 스님이 이곳을 찾아올 때 고달원 입구 500m 전에서 짚신을 턴 흙이 쌓여 신털이봉이 생겨났다고 한다.&amp;lt;ref&amp;gt;https://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220365&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김윤주]]&lt;/div&gt;</summary>
		<author><name>올데이프</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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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고달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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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0T08:40:4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올데이프: /* 보유 석탑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20년 전이 한바탕 꿈이었구나, 젊은 시절 벗들은 반이나 황천객(黃泉客)이 되었는데 지금 &amp;lt;font color=&amp;quot;#8b0000&amp;quot;&amp;gt;'''고달(高達)'''&amp;lt;/font&amp;gt; 옛 절에 온 것은 원통(圓通) 큰 복전이 있기 때문이라네. 사면의 산은 병풍처럼 절을 둘렀는데, 한 개 비석은 푸른 하늘에 기대었네. 웃음꽃 피운 이야기에 밤새도록 되돌아갈 길 잊었으니, 그때는 관음보살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라네.”-&amp;lt;신증동국여지승람&amp;gt; 문신 한수(韓脩,1333-1384)의 시&lt;br /&gt;
==건축물 정보==&lt;br /&gt;
===건축시기 및 위치===&lt;br /&gt;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764),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에 세워졌다. 하지만 통일신라 당시에는 큰 기능을 하지 못했었다. '''[[고려시대 광종]]'''이후, 고려 초 3대 사찰 중 하나가 되었으며 대찰(大刹)로서 기능했다.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고달사 소속 많은 석탑과 석등 등의 유물은 대부분 고려시대에 만들어졌다. 고달원(高達院)이라고도 한다. &amp;lt;ref&amp;gt;신라시대에 세워졌음에도 고려시대 건축물로 넣은 이유는 고려 광종 이후 큰 절로 성장하였기 때문이며, 고려의 3대 사찰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또한 석탑들은 대부분 고려시대 때 만들어졌다.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파일:고달사 터.jpg|350픽셀|섬네일|가운데]]&lt;br /&gt;
&lt;br /&gt;
==보유 석탑==&lt;br /&gt;
*여주 고달사지 승탑&lt;br /&gt;
각 부분의 조각들에서 고려 특유의 기법을 풍기고 있어 고려시대 전기 10세기 즈음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lt;br /&gt;
거북이를 사이에 두고 네 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으며, 나머지 공간에는 구름무늬로 가득 채워져 있다. 가운데 돌을 중심으로 그 아래와 윗돌에는 연꽃무늬를 두어 우아함을 살리고 있다. 지붕돌 꼭대기에는 둥그런 돌 위로 지붕을 축소한 듯한 보개(寶蓋)가 얹혀져 있다.&lt;br /&gt;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1123100080000&amp;amp;pageNo__=1_2_1_0&amp;amp;pageNo=1_1_2_0 여주 고달사지 석조대좌]&lt;br /&gt;
&lt;br /&gt;
&amp;lt;gallery mode=&amp;quot;packed&amp;quot; caption=&amp;quot;고달사&amp;quot; heights=&amp;quot;300px&amp;quot; style=&amp;quot;float:center&amp;quot;&amp;gt;&lt;br /&gt;
파일:고달사지 승탑.jpg|고달사지 승탑&lt;br /&gt;
파일:고달사지 석조대좌.jpg|고달사지 석조대좌&lt;br /&gt;
파일:고달사지 쌍사자 석등.jpg|고달사지 쌍사자 석등&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lt;br /&gt;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lt;br /&gt;
*여주 고달사지 쌍사자 석등&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설화===&lt;br /&gt;
*신라시대에 고달(高達)&amp;lt;ref&amp;gt;고달은 가족들이 굶어 죽는 줄도 모르고 불사에 혼을 바쳤다고 한다. 이라는 승건이 창건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amp;lt;/ref&amp;gt;&lt;br /&gt;
 사냥꾼이던 고달은 사슴 한 마리를 사냥하게 되었는데, 화살을 맞고 사슴이 달아나게 되었다. 사슴의 핏자국을 따라가다 보니 불상을 모신 굴이 있었고, 그 불상에 화살이 꽂혀 있었다고 한다. 고달은 그 불상을 보며 부처님이 자신이 살생을 많이 하는 것을 훈계하기 위해 부처님이 사슴으로 변신해서 자기를 인도한 것임을 깨닫고, 그 자리에서 활과 살을 꺾어버린 뒤 수행하여 스님이 되었다고 한다. &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3371&amp;lt;/ref&amp;gt; &lt;br /&gt;
*고달원 입구‘신털이봉'이 생긴 사연&lt;br /&gt;
 원종대사 찬유는 중국에 수기설법을 유학하고 돌아와 선풍을 진작시켰다. 그는 고려 태조, 혜종, 정종, 광종으로부터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특히 고려 광종의 개혁에 큰 힘을 보태어 953년(광종 4) 국사로 책봉되었다고 한다. 만년에 고달사로 내려와 머물면서 대찰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수기설법(隨機說法)은 마치 깊은 골짜기에서 부는 회오리바람 소리와 같고, 인연 따라 감응하는 것은 맑은 못에 비치는 달그림자와 같았다,“누더기를 입은 납자(衲子)가 바람처럼 찾아오고, 대중공양을 올리기 위해 오는 이가 구름과 같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수많은 스님이 이곳을 찾아올 때 고달원 입구 500m 전에서 짚신을 턴 흙이 쌓여 신털이봉이 생겨났다고 한다.&amp;lt;ref&amp;gt;https://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220365&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김윤주]]&lt;/div&gt;</summary>
		<author><name>올데이프</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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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고달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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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0T08:40:1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올데이프: /* 보유 석탑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20년 전이 한바탕 꿈이었구나, 젊은 시절 벗들은 반이나 황천객(黃泉客)이 되었는데 지금 &amp;lt;font color=&amp;quot;#8b0000&amp;quot;&amp;gt;'''고달(高達)'''&amp;lt;/font&amp;gt; 옛 절에 온 것은 원통(圓通) 큰 복전이 있기 때문이라네. 사면의 산은 병풍처럼 절을 둘렀는데, 한 개 비석은 푸른 하늘에 기대었네. 웃음꽃 피운 이야기에 밤새도록 되돌아갈 길 잊었으니, 그때는 관음보살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라네.”-&amp;lt;신증동국여지승람&amp;gt; 문신 한수(韓脩,1333-1384)의 시&lt;br /&gt;
==건축물 정보==&lt;br /&gt;
===건축시기 및 위치===&lt;br /&gt;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764),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에 세워졌다. 하지만 통일신라 당시에는 큰 기능을 하지 못했었다. '''[[고려시대 광종]]'''이후, 고려 초 3대 사찰 중 하나가 되었으며 대찰(大刹)로서 기능했다.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고달사 소속 많은 석탑과 석등 등의 유물은 대부분 고려시대에 만들어졌다. 고달원(高達院)이라고도 한다. &amp;lt;ref&amp;gt;신라시대에 세워졌음에도 고려시대 건축물로 넣은 이유는 고려 광종 이후 큰 절로 성장하였기 때문이며, 고려의 3대 사찰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또한 석탑들은 대부분 고려시대 때 만들어졌다.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파일:고달사 터.jpg|350픽셀|섬네일|가운데]]&lt;br /&gt;
&lt;br /&gt;
==보유 석탑==&lt;br /&gt;
*여주 고달사지 승탑&lt;br /&gt;
각 부분의 조각들에서 고려 특유의 기법을 풍기고 있어 고려시대 전기 10세기 즈음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lt;br /&gt;
거북이를 사이에 두고 네 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으며, 나머지 공간에는 구름무늬로 가득 채워져 있다. 가운데 돌을 중심으로 그 아래와 윗돌에는 연꽃무늬를 두어 우아함을 살리고 있다. 지붕돌 꼭대기에는 둥그런 돌 위로 지붕을 축소한 듯한 보개(寶蓋)가 얹혀져 있다.&lt;br /&gt;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1123100080000&amp;amp;pageNo__=1_2_1_0&amp;amp;pageNo=1_1_2_0 여주 고달사지 석조대좌]&lt;br /&gt;
&lt;br /&gt;
&amp;lt;gallery mode=&amp;quot;packed&amp;quot; caption=&amp;quot;고달사&amp;quot; heights=&amp;quot;250px&amp;quot; style=&amp;quot;float:left&amp;quot;&amp;gt;&lt;br /&gt;
파일:고달사지 승탑.jpg|고달사지 승탑&lt;br /&gt;
파일:고달사지 석조대좌.jpg|고달사지 석조대좌&lt;br /&gt;
파일:고달사지 쌍사자 석등.jpg|고달사지 쌍사자 석등&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lt;br /&gt;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lt;br /&gt;
*여주 고달사지 쌍사자 석등&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설화===&lt;br /&gt;
*신라시대에 고달(高達)&amp;lt;ref&amp;gt;고달은 가족들이 굶어 죽는 줄도 모르고 불사에 혼을 바쳤다고 한다. 이라는 승건이 창건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amp;lt;/ref&amp;gt;&lt;br /&gt;
 사냥꾼이던 고달은 사슴 한 마리를 사냥하게 되었는데, 화살을 맞고 사슴이 달아나게 되었다. 사슴의 핏자국을 따라가다 보니 불상을 모신 굴이 있었고, 그 불상에 화살이 꽂혀 있었다고 한다. 고달은 그 불상을 보며 부처님이 자신이 살생을 많이 하는 것을 훈계하기 위해 부처님이 사슴으로 변신해서 자기를 인도한 것임을 깨닫고, 그 자리에서 활과 살을 꺾어버린 뒤 수행하여 스님이 되었다고 한다. &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3371&amp;lt;/ref&amp;gt; &lt;br /&gt;
*고달원 입구‘신털이봉'이 생긴 사연&lt;br /&gt;
 원종대사 찬유는 중국에 수기설법을 유학하고 돌아와 선풍을 진작시켰다. 그는 고려 태조, 혜종, 정종, 광종으로부터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특히 고려 광종의 개혁에 큰 힘을 보태어 953년(광종 4) 국사로 책봉되었다고 한다. 만년에 고달사로 내려와 머물면서 대찰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수기설법(隨機說法)은 마치 깊은 골짜기에서 부는 회오리바람 소리와 같고, 인연 따라 감응하는 것은 맑은 못에 비치는 달그림자와 같았다,“누더기를 입은 납자(衲子)가 바람처럼 찾아오고, 대중공양을 올리기 위해 오는 이가 구름과 같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수많은 스님이 이곳을 찾아올 때 고달원 입구 500m 전에서 짚신을 턴 흙이 쌓여 신털이봉이 생겨났다고 한다.&amp;lt;ref&amp;gt;https://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220365&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김윤주]]&lt;/div&gt;</summary>
		<author><name>올데이프</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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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고달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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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0T08:40:0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올데이프: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20년 전이 한바탕 꿈이었구나, 젊은 시절 벗들은 반이나 황천객(黃泉客)이 되었는데 지금 &amp;lt;font color=&amp;quot;#8b0000&amp;quot;&amp;gt;'''고달(高達)'''&amp;lt;/font&amp;gt; 옛 절에 온 것은 원통(圓通) 큰 복전이 있기 때문이라네. 사면의 산은 병풍처럼 절을 둘렀는데, 한 개 비석은 푸른 하늘에 기대었네. 웃음꽃 피운 이야기에 밤새도록 되돌아갈 길 잊었으니, 그때는 관음보살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라네.”-&amp;lt;신증동국여지승람&amp;gt; 문신 한수(韓脩,1333-1384)의 시&lt;br /&gt;
==건축물 정보==&lt;br /&gt;
===건축시기 및 위치===&lt;br /&gt;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764),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에 세워졌다. 하지만 통일신라 당시에는 큰 기능을 하지 못했었다. '''[[고려시대 광종]]'''이후, 고려 초 3대 사찰 중 하나가 되었으며 대찰(大刹)로서 기능했다.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고달사 소속 많은 석탑과 석등 등의 유물은 대부분 고려시대에 만들어졌다. 고달원(高達院)이라고도 한다. &amp;lt;ref&amp;gt;신라시대에 세워졌음에도 고려시대 건축물로 넣은 이유는 고려 광종 이후 큰 절로 성장하였기 때문이며, 고려의 3대 사찰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또한 석탑들은 대부분 고려시대 때 만들어졌다.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파일:고달사 터.jpg|350픽셀|섬네일|가운데]]&lt;br /&gt;
&lt;br /&gt;
==보유 석탑==&lt;br /&gt;
*여주 고달사지 승탑&lt;br /&gt;
각 부분의 조각들에서 고려 특유의 기법을 풍기고 있어 고려시대 전기 10세기 즈음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lt;br /&gt;
거북이를 사이에 두고 네 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으며, 나머지 공간에는 구름무늬로 가득 채워져 있다. 가운데 돌을 중심으로 그 아래와 윗돌에는 연꽃무늬를 두어 우아함을 살리고 있다. 지붕돌 꼭대기에는 둥그런 돌 위로 지붕을 축소한 듯한 보개(寶蓋)가 얹혀져 있다.&lt;br /&gt;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1123100080000&amp;amp;pageNo__=1_2_1_0&amp;amp;pageNo=1_1_2_0 여주 고달사지 석조대좌]&lt;br /&gt;
&lt;br /&gt;
&amp;lt;gallery mode=&amp;quot;packed&amp;quot; caption=&amp;quot;고달사&amp;quot; heights=&amp;quot;250px&amp;quot; style=&amp;quot;float:left&amp;quot;&amp;gt;&lt;br /&gt;
파일:고달사지 승탑.jpg|고달사지 승탑&lt;br /&gt;
파일:고달사지 석조대좌.jpg|고달사지 석조대좌&lt;br /&gt;
파일:고달사지 쌍사자 석등.jpg|고달사지 쌍사자 석등&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lt;br /&gt;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lt;br /&gt;
*여주 고달사지 쌍사자 석등&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설화===&lt;br /&gt;
*신라시대에 고달(高達)&amp;lt;ref&amp;gt;고달은 가족들이 굶어 죽는 줄도 모르고 불사에 혼을 바쳤다고 한다. 이라는 승건이 창건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amp;lt;/ref&amp;gt;&lt;br /&gt;
 사냥꾼이던 고달은 사슴 한 마리를 사냥하게 되었는데, 화살을 맞고 사슴이 달아나게 되었다. 사슴의 핏자국을 따라가다 보니 불상을 모신 굴이 있었고, 그 불상에 화살이 꽂혀 있었다고 한다. 고달은 그 불상을 보며 부처님이 자신이 살생을 많이 하는 것을 훈계하기 위해 부처님이 사슴으로 변신해서 자기를 인도한 것임을 깨닫고, 그 자리에서 활과 살을 꺾어버린 뒤 수행하여 스님이 되었다고 한다. &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3371&amp;lt;/ref&amp;gt; &lt;br /&gt;
*고달원 입구‘신털이봉'이 생긴 사연&lt;br /&gt;
 원종대사 찬유는 중국에 수기설법을 유학하고 돌아와 선풍을 진작시켰다. 그는 고려 태조, 혜종, 정종, 광종으로부터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특히 고려 광종의 개혁에 큰 힘을 보태어 953년(광종 4) 국사로 책봉되었다고 한다. 만년에 고달사로 내려와 머물면서 대찰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수기설법(隨機說法)은 마치 깊은 골짜기에서 부는 회오리바람 소리와 같고, 인연 따라 감응하는 것은 맑은 못에 비치는 달그림자와 같았다,“누더기를 입은 납자(衲子)가 바람처럼 찾아오고, 대중공양을 올리기 위해 오는 이가 구름과 같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수많은 스님이 이곳을 찾아올 때 고달원 입구 500m 전에서 짚신을 턴 흙이 쌓여 신털이봉이 생겨났다고 한다.&amp;lt;ref&amp;gt;https://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220365&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김윤주]]&lt;/div&gt;</summary>
		<author><name>올데이프</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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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고달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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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0T08:39:4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올데이프: /* 보유 석탑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20년 전이 한바탕 꿈이었구나, 젊은 시절 벗들은 반이나 황천객(黃泉客)이 되었는데 지금 &amp;lt;font color=&amp;quot;#8b0000&amp;quot;&amp;gt;'''고달(高達)'''&amp;lt;/font&amp;gt; 옛 절에 온 것은 원통(圓通) 큰 복전이 있기 때문이라네. 사면의 산은 병풍처럼 절을 둘렀는데, 한 개 비석은 푸른 하늘에 기대었네. 웃음꽃 피운 이야기에 밤새도록 되돌아갈 길 잊었으니, 그때는 관음보살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라네.”-&amp;lt;신증동국여지승람&amp;gt; 문신 한수(韓脩,1333-1384)의 시&lt;br /&gt;
==건축물 정보==&lt;br /&gt;
===건축시기 및 위치===&lt;br /&gt;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764),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에 세워졌다. 하지만 통일신라 당시에는 큰 기능을 하지 못했었다. '''[[고려시대 광종]]'''이후, 고려 초 3대 사찰 중 하나가 되었으며 대찰(大刹)로서 기능했다.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고달사 소속 많은 석탑과 석등 등의 유물은 대부분 고려시대에 만들어졌다. 고달원(高達院)이라고도 한다. &amp;lt;ref&amp;gt;신라시대에 세워졌음에도 고려시대 건축물로 넣은 이유는 고려 광종 이후 큰 절로 성장하였기 때문이며, 고려의 3대 사찰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또한 석탑들은 대부분 고려시대 때 만들어졌다.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파일:고달사 터.jpg|350픽셀|섬네일|가운데]]&lt;br /&gt;
&lt;br /&gt;
==보유 석탑==&lt;br /&gt;
*여주 고달사지 승탑&lt;br /&gt;
각 부분의 조각들에서 고려 특유의 기법을 풍기고 있어 고려시대 전기 10세기 즈음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lt;br /&gt;
거북이를 사이에 두고 네 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으며, 나머지 공간에는 구름무늬로 가득 채워져 있다. 가운데 돌을 중심으로 그 아래와 윗돌에는 연꽃무늬를 두어 우아함을 살리고 있다. 지붕돌 꼭대기에는 둥그런 돌 위로 지붕을 축소한 듯한 보개(寶蓋)가 얹혀져 있다.&lt;br /&gt;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1123100080000&amp;amp;pageNo__=1_2_1_0&amp;amp;pageNo=1_1_2_0 여주 고달사지 석조대좌]&lt;br /&gt;
&lt;br /&gt;
&amp;lt;gallery mode=&amp;quot;packed&amp;quot; caption=&amp;quot;고달사&amp;quot; heights=&amp;quot;250px&amp;quot; style=&amp;quot;float:left&amp;quot;&amp;gt;&lt;br /&gt;
파일:고달사지 승탑.jpg|고달사지 승탑&lt;br /&gt;
파일:고달사지 석조대좌.jpg|고달사지 석조대좌&lt;br /&gt;
파일:고달사지 쌍사자 석등.jpg|고달사지 쌍사자 석등&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lt;br /&gt;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lt;br /&gt;
*여주 고달사지 쌍사자 석등&lt;br /&gt;
&lt;br /&gt;
===설화===&lt;br /&gt;
*신라시대에 고달(高達)&amp;lt;ref&amp;gt;고달은 가족들이 굶어 죽는 줄도 모르고 불사에 혼을 바쳤다고 한다. 이라는 승건이 창건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amp;lt;/ref&amp;gt;&lt;br /&gt;
 사냥꾼이던 고달은 사슴 한 마리를 사냥하게 되었는데, 화살을 맞고 사슴이 달아나게 되었다. 사슴의 핏자국을 따라가다 보니 불상을 모신 굴이 있었고, 그 불상에 화살이 꽂혀 있었다고 한다. 고달은 그 불상을 보며 부처님이 자신이 살생을 많이 하는 것을 훈계하기 위해 부처님이 사슴으로 변신해서 자기를 인도한 것임을 깨닫고, 그 자리에서 활과 살을 꺾어버린 뒤 수행하여 스님이 되었다고 한다. &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3371&amp;lt;/ref&amp;gt; &lt;br /&gt;
*고달원 입구‘신털이봉'이 생긴 사연&lt;br /&gt;
 원종대사 찬유는 중국에 수기설법을 유학하고 돌아와 선풍을 진작시켰다. 그는 고려 태조, 혜종, 정종, 광종으로부터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특히 고려 광종의 개혁에 큰 힘을 보태어 953년(광종 4) 국사로 책봉되었다고 한다. 만년에 고달사로 내려와 머물면서 대찰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수기설법(隨機說法)은 마치 깊은 골짜기에서 부는 회오리바람 소리와 같고, 인연 따라 감응하는 것은 맑은 못에 비치는 달그림자와 같았다,“누더기를 입은 납자(衲子)가 바람처럼 찾아오고, 대중공양을 올리기 위해 오는 이가 구름과 같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수많은 스님이 이곳을 찾아올 때 고달원 입구 500m 전에서 짚신을 턴 흙이 쌓여 신털이봉이 생겨났다고 한다.&amp;lt;ref&amp;gt;https://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220365&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김윤주]]&lt;/div&gt;</summary>
		<author><name>올데이프</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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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고달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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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0T08:39:2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올데이프: /* 보유 석탑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20년 전이 한바탕 꿈이었구나, 젊은 시절 벗들은 반이나 황천객(黃泉客)이 되었는데 지금 &amp;lt;font color=&amp;quot;#8b0000&amp;quot;&amp;gt;'''고달(高達)'''&amp;lt;/font&amp;gt; 옛 절에 온 것은 원통(圓通) 큰 복전이 있기 때문이라네. 사면의 산은 병풍처럼 절을 둘렀는데, 한 개 비석은 푸른 하늘에 기대었네. 웃음꽃 피운 이야기에 밤새도록 되돌아갈 길 잊었으니, 그때는 관음보살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라네.”-&amp;lt;신증동국여지승람&amp;gt; 문신 한수(韓脩,1333-1384)의 시&lt;br /&gt;
==건축물 정보==&lt;br /&gt;
===건축시기 및 위치===&lt;br /&gt;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764),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에 세워졌다. 하지만 통일신라 당시에는 큰 기능을 하지 못했었다. '''[[고려시대 광종]]'''이후, 고려 초 3대 사찰 중 하나가 되었으며 대찰(大刹)로서 기능했다.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고달사 소속 많은 석탑과 석등 등의 유물은 대부분 고려시대에 만들어졌다. 고달원(高達院)이라고도 한다. &amp;lt;ref&amp;gt;신라시대에 세워졌음에도 고려시대 건축물로 넣은 이유는 고려 광종 이후 큰 절로 성장하였기 때문이며, 고려의 3대 사찰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또한 석탑들은 대부분 고려시대 때 만들어졌다.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파일:고달사 터.jpg|350픽셀|섬네일|가운데]]&lt;br /&gt;
&lt;br /&gt;
==보유 석탑==&lt;br /&gt;
*여주 고달사지 승탑&lt;br /&gt;
각 부분의 조각들에서 고려 특유의 기법을 풍기고 있어 고려시대 전기 10세기 즈음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lt;br /&gt;
거북이를 사이에 두고 네 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으며, 나머지 공간에는 구름무늬로 가득 채워져 있다. 가운데 돌을 중심으로 그 아래와 윗돌에는 연꽃무늬를 두어 우아함을 살리고 있다. 지붕돌 꼭대기에는 둥그런 돌 위로 지붕을 축소한 듯한 보개(寶蓋)가 얹혀져 있다.&lt;br /&gt;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1123100080000&amp;amp;pageNo__=1_2_1_0&amp;amp;pageNo=1_1_2_0 여주 고달사지 석조대좌]&lt;br /&gt;
&amp;lt;gallery mode=&amp;quot;packed&amp;quot; caption=&amp;quot;고달사&amp;quot; heights=&amp;quot;250px&amp;quot; style=&amp;quot;float:left&amp;quot;&amp;gt;&lt;br /&gt;
파일:고달사지 승탑.jpg|고달사지 승탑&lt;br /&gt;
파일:고달사지 석조대좌.jpg|고달사지 석조대좌&lt;br /&gt;
파일:고달사지 쌍사자 석등.jpg|고달사지 쌍사자 석등&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lt;br /&gt;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lt;br /&gt;
*여주 고달사지 쌍사자 석등&lt;br /&gt;
&lt;br /&gt;
===설화===&lt;br /&gt;
*신라시대에 고달(高達)&amp;lt;ref&amp;gt;고달은 가족들이 굶어 죽는 줄도 모르고 불사에 혼을 바쳤다고 한다. 이라는 승건이 창건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amp;lt;/ref&amp;gt;&lt;br /&gt;
 사냥꾼이던 고달은 사슴 한 마리를 사냥하게 되었는데, 화살을 맞고 사슴이 달아나게 되었다. 사슴의 핏자국을 따라가다 보니 불상을 모신 굴이 있었고, 그 불상에 화살이 꽂혀 있었다고 한다. 고달은 그 불상을 보며 부처님이 자신이 살생을 많이 하는 것을 훈계하기 위해 부처님이 사슴으로 변신해서 자기를 인도한 것임을 깨닫고, 그 자리에서 활과 살을 꺾어버린 뒤 수행하여 스님이 되었다고 한다. &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3371&amp;lt;/ref&amp;gt; &lt;br /&gt;
*고달원 입구‘신털이봉'이 생긴 사연&lt;br /&gt;
 원종대사 찬유는 중국에 수기설법을 유학하고 돌아와 선풍을 진작시켰다. 그는 고려 태조, 혜종, 정종, 광종으로부터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특히 고려 광종의 개혁에 큰 힘을 보태어 953년(광종 4) 국사로 책봉되었다고 한다. 만년에 고달사로 내려와 머물면서 대찰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수기설법(隨機說法)은 마치 깊은 골짜기에서 부는 회오리바람 소리와 같고, 인연 따라 감응하는 것은 맑은 못에 비치는 달그림자와 같았다,“누더기를 입은 납자(衲子)가 바람처럼 찾아오고, 대중공양을 올리기 위해 오는 이가 구름과 같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수많은 스님이 이곳을 찾아올 때 고달원 입구 500m 전에서 짚신을 턴 흙이 쌓여 신털이봉이 생겨났다고 한다.&amp;lt;ref&amp;gt;https://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220365&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김윤주]]&lt;/div&gt;</summary>
		<author><name>올데이프</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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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올데이프: /* 보유 석탑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20년 전이 한바탕 꿈이었구나, 젊은 시절 벗들은 반이나 황천객(黃泉客)이 되었는데 지금 &amp;lt;font color=&amp;quot;#8b0000&amp;quot;&amp;gt;'''고달(高達)'''&amp;lt;/font&amp;gt; 옛 절에 온 것은 원통(圓通) 큰 복전이 있기 때문이라네. 사면의 산은 병풍처럼 절을 둘렀는데, 한 개 비석은 푸른 하늘에 기대었네. 웃음꽃 피운 이야기에 밤새도록 되돌아갈 길 잊었으니, 그때는 관음보살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라네.”-&amp;lt;신증동국여지승람&amp;gt; 문신 한수(韓脩,1333-1384)의 시&lt;br /&gt;
==건축물 정보==&lt;br /&gt;
===건축시기 및 위치===&lt;br /&gt;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764),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에 세워졌다. 하지만 통일신라 당시에는 큰 기능을 하지 못했었다. '''[[고려시대 광종]]'''이후, 고려 초 3대 사찰 중 하나가 되었으며 대찰(大刹)로서 기능했다.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고달사 소속 많은 석탑과 석등 등의 유물은 대부분 고려시대에 만들어졌다. 고달원(高達院)이라고도 한다. &amp;lt;ref&amp;gt;신라시대에 세워졌음에도 고려시대 건축물로 넣은 이유는 고려 광종 이후 큰 절로 성장하였기 때문이며, 고려의 3대 사찰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또한 석탑들은 대부분 고려시대 때 만들어졌다.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파일:고달사 터.jpg|350픽셀|섬네일|가운데]]&lt;br /&gt;
&lt;br /&gt;
==보유 석탑==&lt;br /&gt;
*여주 고달사지 승탑&lt;br /&gt;
각 부분의 조각들에서 고려 특유의 기법을 풍기고 있어 고려시대 전기 10세기 즈음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lt;br /&gt;
거북이를 사이에 두고 네 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으며, 나머지 공간에는 구름무늬로 가득 채워져 있다. 가운데 돌을 중심으로 그 아래와 윗돌에는 연꽃무늬를 두어 우아함을 살리고 있다. 지붕돌 꼭대기에는 둥그런 돌 위로 지붕을 축소한 듯한 보개(寶蓋)가 얹혀져 있다.&lt;br /&gt;
[[파일:고달사지 승탑.jpg|250픽셀|오른쪽]]&lt;br /&gt;
[[파일:고달사지 석조대좌.jpg|250픽셀|오른쪽]]&lt;br /&gt;
[[파일:고달사지 쌍사자 석등.jpg|250픽셀|오른쪽]]&lt;br /&gt;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1123100080000&amp;amp;pageNo__=1_2_1_0&amp;amp;pageNo=1_1_2_0 여주 고달사지 석조대좌]&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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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고달사지 승탑.jpg|고달사지 승탑&lt;br /&gt;
파일:고달사지 석조대좌.jpg|고달사지 석조대좌&lt;br /&gt;
파일:고달사지 쌍사자 석등.jpg|고달사지 쌍사자 석등&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lt;br /&gt;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lt;br /&gt;
*여주 고달사지 쌍사자 석등&lt;br /&gt;
&lt;br /&gt;
===설화===&lt;br /&gt;
*신라시대에 고달(高達)&amp;lt;ref&amp;gt;고달은 가족들이 굶어 죽는 줄도 모르고 불사에 혼을 바쳤다고 한다. 이라는 승건이 창건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amp;lt;/ref&amp;gt;&lt;br /&gt;
 사냥꾼이던 고달은 사슴 한 마리를 사냥하게 되었는데, 화살을 맞고 사슴이 달아나게 되었다. 사슴의 핏자국을 따라가다 보니 불상을 모신 굴이 있었고, 그 불상에 화살이 꽂혀 있었다고 한다. 고달은 그 불상을 보며 부처님이 자신이 살생을 많이 하는 것을 훈계하기 위해 부처님이 사슴으로 변신해서 자기를 인도한 것임을 깨닫고, 그 자리에서 활과 살을 꺾어버린 뒤 수행하여 스님이 되었다고 한다. &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3371&amp;lt;/ref&amp;gt; &lt;br /&gt;
*고달원 입구‘신털이봉'이 생긴 사연&lt;br /&gt;
 원종대사 찬유는 중국에 수기설법을 유학하고 돌아와 선풍을 진작시켰다. 그는 고려 태조, 혜종, 정종, 광종으로부터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특히 고려 광종의 개혁에 큰 힘을 보태어 953년(광종 4) 국사로 책봉되었다고 한다. 만년에 고달사로 내려와 머물면서 대찰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수기설법(隨機說法)은 마치 깊은 골짜기에서 부는 회오리바람 소리와 같고, 인연 따라 감응하는 것은 맑은 못에 비치는 달그림자와 같았다,“누더기를 입은 납자(衲子)가 바람처럼 찾아오고, 대중공양을 올리기 위해 오는 이가 구름과 같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수많은 스님이 이곳을 찾아올 때 고달원 입구 500m 전에서 짚신을 턴 흙이 쌓여 신털이봉이 생겨났다고 한다.&amp;lt;ref&amp;gt;https://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220365&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김윤주]]&lt;/div&gt;</summary>
		<author><name>올데이프</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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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고달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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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0T08:36:2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올데이프: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20년 전이 한바탕 꿈이었구나, 젊은 시절 벗들은 반이나 황천객(黃泉客)이 되었는데 지금 &amp;lt;font color=&amp;quot;#8b0000&amp;quot;&amp;gt;'''고달(高達)'''&amp;lt;/font&amp;gt; 옛 절에 온 것은 원통(圓通) 큰 복전이 있기 때문이라네. 사면의 산은 병풍처럼 절을 둘렀는데, 한 개 비석은 푸른 하늘에 기대었네. 웃음꽃 피운 이야기에 밤새도록 되돌아갈 길 잊었으니, 그때는 관음보살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라네.”-&amp;lt;신증동국여지승람&amp;gt; 문신 한수(韓脩,1333-1384)의 시&lt;br /&gt;
==건축물 정보==&lt;br /&gt;
===건축시기 및 위치===&lt;br /&gt;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764),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에 세워졌다. 하지만 통일신라 당시에는 큰 기능을 하지 못했었다. '''[[고려시대 광종]]'''이후, 고려 초 3대 사찰 중 하나가 되었으며 대찰(大刹)로서 기능했다.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고달사 소속 많은 석탑과 석등 등의 유물은 대부분 고려시대에 만들어졌다. 고달원(高達院)이라고도 한다. &amp;lt;ref&amp;gt;신라시대에 세워졌음에도 고려시대 건축물로 넣은 이유는 고려 광종 이후 큰 절로 성장하였기 때문이며, 고려의 3대 사찰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또한 석탑들은 대부분 고려시대 때 만들어졌다.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파일:고달사 터.jpg|350픽셀|섬네일|가운데]]&lt;br /&gt;
&lt;br /&gt;
==보유 석탑==&lt;br /&gt;
*여주 고달사지 승탑&lt;br /&gt;
각 부분의 조각들에서 고려 특유의 기법을 풍기고 있어 고려시대 전기 10세기 즈음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lt;br /&gt;
거북이를 사이에 두고 네 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으며, 나머지 공간에는 구름무늬로 가득 채워져 있다. 가운데 돌을 중심으로 그 아래와 윗돌에는 연꽃무늬를 두어 우아함을 살리고 있다. 지붕돌 꼭대기에는 둥그런 돌 위로 지붕을 축소한 듯한 보개(寶蓋)가 얹혀져 있다.&lt;br /&gt;
[[파일:고달사지 승탑.jpg|250픽셀|오른쪽]]&lt;br /&gt;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1123100080000&amp;amp;pageNo__=1_2_1_0&amp;amp;pageNo=1_1_2_0 여주 고달사지 석조대좌]&lt;br /&gt;
&amp;lt;gallery mode=&amp;quot;packed&amp;quot; caption=&amp;quot;고달사&amp;quot; heights=&amp;quot;250px&amp;quot; style=&amp;quot;float:left&amp;quot;&amp;gt;&lt;br /&gt;
파일:고달사지 승탑.jpg|고달사지 승탑&lt;br /&gt;
파일:고달사지 석조대좌.jpg|고달사지 석조대좌&lt;br /&gt;
파일:고달사지 쌍사자 석등.jpg|고달사지 쌍사자 석등&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lt;br /&gt;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lt;br /&gt;
*여주 고달사지 쌍사자 석등&lt;br /&gt;
&lt;br /&gt;
===설화===&lt;br /&gt;
*신라시대에 고달(高達)&amp;lt;ref&amp;gt;고달은 가족들이 굶어 죽는 줄도 모르고 불사에 혼을 바쳤다고 한다. 이라는 승건이 창건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amp;lt;/ref&amp;gt;&lt;br /&gt;
 사냥꾼이던 고달은 사슴 한 마리를 사냥하게 되었는데, 화살을 맞고 사슴이 달아나게 되었다. 사슴의 핏자국을 따라가다 보니 불상을 모신 굴이 있었고, 그 불상에 화살이 꽂혀 있었다고 한다. 고달은 그 불상을 보며 부처님이 자신이 살생을 많이 하는 것을 훈계하기 위해 부처님이 사슴으로 변신해서 자기를 인도한 것임을 깨닫고, 그 자리에서 활과 살을 꺾어버린 뒤 수행하여 스님이 되었다고 한다. &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3371&amp;lt;/ref&amp;gt; &lt;br /&gt;
*고달원 입구‘신털이봉'이 생긴 사연&lt;br /&gt;
 원종대사 찬유는 중국에 수기설법을 유학하고 돌아와 선풍을 진작시켰다. 그는 고려 태조, 혜종, 정종, 광종으로부터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특히 고려 광종의 개혁에 큰 힘을 보태어 953년(광종 4) 국사로 책봉되었다고 한다. 만년에 고달사로 내려와 머물면서 대찰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수기설법(隨機說法)은 마치 깊은 골짜기에서 부는 회오리바람 소리와 같고, 인연 따라 감응하는 것은 맑은 못에 비치는 달그림자와 같았다,“누더기를 입은 납자(衲子)가 바람처럼 찾아오고, 대중공양을 올리기 위해 오는 이가 구름과 같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수많은 스님이 이곳을 찾아올 때 고달원 입구 500m 전에서 짚신을 턴 흙이 쌓여 신털이봉이 생겨났다고 한다.&amp;lt;ref&amp;gt;https://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220365&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김윤주]]&lt;/div&gt;</summary>
		<author><name>올데이프</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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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고달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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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0T08:33:1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올데이프: /* 보유 석탑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20년 전이 한바탕 꿈이었구나, 젊은 시절 벗들은 반이나 황천객(黃泉客)이 되었는데 지금 &amp;lt;font color=&amp;quot;#8b0000&amp;quot;&amp;gt;'''고달(高達)'''&amp;lt;/font&amp;gt; 옛 절에 온 것은 원통(圓通) 큰 복전이 있기 때문이라네. 사면의 산은 병풍처럼 절을 둘렀는데, 한 개 비석은 푸른 하늘에 기대었네. 웃음꽃 피운 이야기에 밤새도록 되돌아갈 길 잊었으니, 그때는 관음보살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라네.”-&amp;lt;신증동국여지승람&amp;gt; 문신 한수(韓脩,1333-1384)의 시&lt;br /&gt;
==건축물 정보==&lt;br /&gt;
===건축시기 및 위치===&lt;br /&gt;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764),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에 세워졌다. 하지만 통일신라 당시에는 큰 기능을 하지 못했었다. '''[[고려시대 광종]]'''이후, 고려 초 3대 사찰 중 하나가 되었으며 대찰(大刹)로서 기능했다.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고달사 소속 많은 석탑과 석등 등의 유물은 대부분 고려시대에 만들어졌다. 고달원(高達院)이라고도 한다. &amp;lt;ref&amp;gt;신라시대에 세워졌음에도 고려시대 건축물로 넣은 이유는 고려 광종 이후 큰 절로 성장하였기 때문이며, 고려의 3대 사찰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또한 석탑들은 대부분 고려시대 때 만들어졌다.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파일:고달사 터.jpg|350픽셀|섬네일|가운데]]&lt;br /&gt;
&lt;br /&gt;
==보유 석탑==&lt;br /&gt;
*여주 고달사지 승탑&lt;br /&gt;
각 부분의 조각들에서 고려 특유의 기법을 풍기고 있어 고려시대 전기 10세기 즈음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lt;br /&gt;
거북이를 사이에 두고 네 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으며, 나머지 공간에는 구름무늬로 가득 채워져 있다. 가운데 돌을 중심으로 그 아래와 윗돌에는 연꽃무늬를 두어 우아함을 살리고 있다. 지붕돌 꼭대기에는 둥그런 돌 위로 지붕을 축소한 듯한 보개(寶蓋)가 얹혀져 있다.&lt;br /&gt;
[[파일:고달사지 승탑.jpg|250픽셀|오른쪽]]&lt;br /&gt;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1123100080000&amp;amp;pageNo__=1_2_1_0&amp;amp;pageNo=1_1_2_0 여주 고달사지 석조대좌]]&lt;br /&gt;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lt;br /&gt;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lt;br /&gt;
*여주 고달사지 쌍사자 석등&lt;br /&gt;
&lt;br /&gt;
===설화===&lt;br /&gt;
*신라시대에 고달(高達)&amp;lt;ref&amp;gt;고달은 가족들이 굶어 죽는 줄도 모르고 불사에 혼을 바쳤다고 한다. 이라는 승건이 창건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amp;lt;/ref&amp;gt;&lt;br /&gt;
 사냥꾼이던 고달은 사슴 한 마리를 사냥하게 되었는데, 화살을 맞고 사슴이 달아나게 되었다. 사슴의 핏자국을 따라가다 보니 불상을 모신 굴이 있었고, 그 불상에 화살이 꽂혀 있었다고 한다. 고달은 그 불상을 보며 부처님이 자신이 살생을 많이 하는 것을 훈계하기 위해 부처님이 사슴으로 변신해서 자기를 인도한 것임을 깨닫고, 그 자리에서 활과 살을 꺾어버린 뒤 수행하여 스님이 되었다고 한다. &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3371&amp;lt;/ref&amp;gt; &lt;br /&gt;
*고달원 입구‘신털이봉'이 생긴 사연&lt;br /&gt;
 원종대사 찬유는 중국에 수기설법을 유학하고 돌아와 선풍을 진작시켰다. 그는 고려 태조, 혜종, 정종, 광종으로부터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특히 고려 광종의 개혁에 큰 힘을 보태어 953년(광종 4) 국사로 책봉되었다고 한다. 만년에 고달사로 내려와 머물면서 대찰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수기설법(隨機說法)은 마치 깊은 골짜기에서 부는 회오리바람 소리와 같고, 인연 따라 감응하는 것은 맑은 못에 비치는 달그림자와 같았다,“누더기를 입은 납자(衲子)가 바람처럼 찾아오고, 대중공양을 올리기 위해 오는 이가 구름과 같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수많은 스님이 이곳을 찾아올 때 고달원 입구 500m 전에서 짚신을 턴 흙이 쌓여 신털이봉이 생겨났다고 한다.&amp;lt;ref&amp;gt;https://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220365&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김윤주]]&lt;/div&gt;</summary>
		<author><name>올데이프</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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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올데이프: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20년 전이 한바탕 꿈이었구나, 젊은 시절 벗들은 반이나 황천객(黃泉客)이 되었는데 지금 &amp;lt;font color=&amp;quot;#8b0000&amp;quot;&amp;gt;'''고달(高達)'''&amp;lt;/font&amp;gt; 옛 절에 온 것은 원통(圓通) 큰 복전이 있기 때문이라네. 사면의 산은 병풍처럼 절을 둘렀는데, 한 개 비석은 푸른 하늘에 기대었네. 웃음꽃 피운 이야기에 밤새도록 되돌아갈 길 잊었으니, 그때는 관음보살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라네.”-&amp;lt;신증동국여지승람&amp;gt; 문신 한수(韓脩,1333-1384)의 시&lt;br /&gt;
==건축물 정보==&lt;br /&gt;
===건축시기 및 위치===&lt;br /&gt;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764),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에 세워졌다. 하지만 통일신라 당시에는 큰 기능을 하지 못했었다. '''[[고려시대 광종]]'''이후, 고려 초 3대 사찰 중 하나가 되었으며 대찰(大刹)로서 기능했다.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고달사 소속 많은 석탑과 석등 등의 유물은 대부분 고려시대에 만들어졌다. 고달원(高達院)이라고도 한다. &amp;lt;ref&amp;gt;신라시대에 세워졌음에도 고려시대 건축물로 넣은 이유는 고려 광종 이후 큰 절로 성장하였기 때문이며, 고려의 3대 사찰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또한 석탑들은 대부분 고려시대 때 만들어졌다.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파일:고달사 터.jpg|350픽셀|섬네일|가운데]]&lt;br /&gt;
&lt;br /&gt;
==보유 석탑==&lt;br /&gt;
*여주 고달사지 승탑&lt;br /&gt;
각 부분의 조각들에서 고려 특유의 기법을 풍기고 있어 고려시대 전기 10세기 즈음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lt;br /&gt;
거북이를 사이에 두고 네 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으며, 나머지 공간에는 구름무늬로 가득 채워져 있다. 가운데 돌을 중심으로 그 아래와 윗돌에는 연꽃무늬를 두어 우아함을 살리고 있다. 지붕돌 꼭대기에는 둥그런 돌 위로 지붕을 축소한 듯한 보개(寶蓋)가 얹혀져 있다.&lt;br /&gt;
[[파일:고달사지 승탑.jpg|250픽셀|오른쪽]]&lt;br /&gt;
*여주 고달사지 석조대좌&lt;br /&gt;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lt;br /&gt;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lt;br /&gt;
*여주 고달사지 쌍사자 석등&lt;br /&gt;
&lt;br /&gt;
===설화===&lt;br /&gt;
*신라시대에 고달(高達)&amp;lt;ref&amp;gt;고달은 가족들이 굶어 죽는 줄도 모르고 불사에 혼을 바쳤다고 한다. 이라는 승건이 창건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amp;lt;/ref&amp;gt;&lt;br /&gt;
 사냥꾼이던 고달은 사슴 한 마리를 사냥하게 되었는데, 화살을 맞고 사슴이 달아나게 되었다. 사슴의 핏자국을 따라가다 보니 불상을 모신 굴이 있었고, 그 불상에 화살이 꽂혀 있었다고 한다. 고달은 그 불상을 보며 부처님이 자신이 살생을 많이 하는 것을 훈계하기 위해 부처님이 사슴으로 변신해서 자기를 인도한 것임을 깨닫고, 그 자리에서 활과 살을 꺾어버린 뒤 수행하여 스님이 되었다고 한다. &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3371&amp;lt;/ref&amp;gt; &lt;br /&gt;
*고달원 입구‘신털이봉'이 생긴 사연&lt;br /&gt;
 원종대사 찬유는 중국에 수기설법을 유학하고 돌아와 선풍을 진작시켰다. 그는 고려 태조, 혜종, 정종, 광종으로부터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특히 고려 광종의 개혁에 큰 힘을 보태어 953년(광종 4) 국사로 책봉되었다고 한다. 만년에 고달사로 내려와 머물면서 대찰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수기설법(隨機說法)은 마치 깊은 골짜기에서 부는 회오리바람 소리와 같고, 인연 따라 감응하는 것은 맑은 못에 비치는 달그림자와 같았다,“누더기를 입은 납자(衲子)가 바람처럼 찾아오고, 대중공양을 올리기 위해 오는 이가 구름과 같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수많은 스님이 이곳을 찾아올 때 고달원 입구 500m 전에서 짚신을 턴 흙이 쌓여 신털이봉이 생겨났다고 한다.&amp;lt;ref&amp;gt;https://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220365&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김윤주]]&lt;/div&gt;</summary>
		<author><name>올데이프</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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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고달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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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0T08:28:0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올데이프: /* 보유 석탑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20년 전이 한바탕 꿈이었구나, 젊은 시절 벗들은 반이나 황천객(黃泉客)이 되었는데 지금 &amp;lt;font color=&amp;quot;#8b0000&amp;quot;&amp;gt;'''고달(高達)'''&amp;lt;/font&amp;gt; 옛 절에 온 것은 원통(圓通) 큰 복전이 있기 때문이라네. 사면의 산은 병풍처럼 절을 둘렀는데, 한 개 비석은 푸른 하늘에 기대었네. 웃음꽃 피운 이야기에 밤새도록 되돌아갈 길 잊었으니, 그때는 관음보살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라네.”-&amp;lt;신증동국여지승람&amp;gt; 문신 한수(韓脩,1333-1384)의 시&lt;br /&gt;
==건축물 정보==&lt;br /&gt;
===건축시기 및 위치===&lt;br /&gt;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764),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에 세워졌다. 하지만 통일신라 당시에는 큰 기능을 하지 못했었다. '''[[고려시대 광종]]'''이후, 고려 초 3대 사찰 중 하나가 되었으며 대찰(大刹)로서 기능했다.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고달사 소속 많은 석탑과 석등 등의 유물은 대부분 고려시대에 만들어졌다. 고달원(高達院)이라고도 한다. &amp;lt;ref&amp;gt;신라시대에 세워졌음에도 고려시대 건축물로 넣은 이유는 고려 광종 이후 큰 절로 성장하였기 때문이며, 고려의 3대 사찰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또한 석탑들은 대부분 고려시대 때 만들어졌다.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파일:고달사 터.jpg|350픽셀|섬네일|가운데]]&lt;br /&gt;
&lt;br /&gt;
==보유 석탑==&lt;br /&gt;
*여주 고달사지 승탑&lt;br /&gt;
각 부분의 조각들에서 고려 특유의 기법을 풍기고 있어 고려시대 전기 10세기 즈음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lt;br /&gt;
*여주 고달사지 석조대좌&lt;br /&gt;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lt;br /&gt;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lt;br /&gt;
*여주 고달사지 쌍사자 석등&lt;br /&gt;
&lt;br /&gt;
===설화===&lt;br /&gt;
*신라시대에 고달(高達)&amp;lt;ref&amp;gt;고달은 가족들이 굶어 죽는 줄도 모르고 불사에 혼을 바쳤다고 한다. 이라는 승건이 창건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amp;lt;/ref&amp;gt;&lt;br /&gt;
 사냥꾼이던 고달은 사슴 한 마리를 사냥하게 되었는데, 화살을 맞고 사슴이 달아나게 되었다. 사슴의 핏자국을 따라가다 보니 불상을 모신 굴이 있었고, 그 불상에 화살이 꽂혀 있었다고 한다. 고달은 그 불상을 보며 부처님이 자신이 살생을 많이 하는 것을 훈계하기 위해 부처님이 사슴으로 변신해서 자기를 인도한 것임을 깨닫고, 그 자리에서 활과 살을 꺾어버린 뒤 수행하여 스님이 되었다고 한다. &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3371&amp;lt;/ref&amp;gt; &lt;br /&gt;
*고달원 입구‘신털이봉'이 생긴 사연&lt;br /&gt;
 원종대사 찬유는 중국에 수기설법을 유학하고 돌아와 선풍을 진작시켰다. 그는 고려 태조, 혜종, 정종, 광종으로부터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특히 고려 광종의 개혁에 큰 힘을 보태어 953년(광종 4) 국사로 책봉되었다고 한다. 만년에 고달사로 내려와 머물면서 대찰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수기설법(隨機說法)은 마치 깊은 골짜기에서 부는 회오리바람 소리와 같고, 인연 따라 감응하는 것은 맑은 못에 비치는 달그림자와 같았다,“누더기를 입은 납자(衲子)가 바람처럼 찾아오고, 대중공양을 올리기 위해 오는 이가 구름과 같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수많은 스님이 이곳을 찾아올 때 고달원 입구 500m 전에서 짚신을 턴 흙이 쌓여 신털이봉이 생겨났다고 한다.&amp;lt;ref&amp;gt;https://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220365&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김윤주]]&lt;/div&gt;</summary>
		<author><name>올데이프</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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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0T08:27:1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올데이프: /* 특징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20년 전이 한바탕 꿈이었구나, 젊은 시절 벗들은 반이나 황천객(黃泉客)이 되었는데 지금 &amp;lt;font color=&amp;quot;#8b0000&amp;quot;&amp;gt;'''고달(高達)'''&amp;lt;/font&amp;gt; 옛 절에 온 것은 원통(圓通) 큰 복전이 있기 때문이라네. 사면의 산은 병풍처럼 절을 둘렀는데, 한 개 비석은 푸른 하늘에 기대었네. 웃음꽃 피운 이야기에 밤새도록 되돌아갈 길 잊었으니, 그때는 관음보살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라네.”-&amp;lt;신증동국여지승람&amp;gt; 문신 한수(韓脩,1333-1384)의 시&lt;br /&gt;
==건축물 정보==&lt;br /&gt;
===건축시기 및 위치===&lt;br /&gt;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764),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에 세워졌다. 하지만 통일신라 당시에는 큰 기능을 하지 못했었다. '''[[고려시대 광종]]'''이후, 고려 초 3대 사찰 중 하나가 되었으며 대찰(大刹)로서 기능했다.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고달사 소속 많은 석탑과 석등 등의 유물은 대부분 고려시대에 만들어졌다. 고달원(高達院)이라고도 한다. &amp;lt;ref&amp;gt;신라시대에 세워졌음에도 고려시대 건축물로 넣은 이유는 고려 광종 이후 큰 절로 성장하였기 때문이며, 고려의 3대 사찰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또한 석탑들은 대부분 고려시대 때 만들어졌다.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파일:고달사 터.jpg|350픽셀|섬네일|가운데]]&lt;br /&gt;
&lt;br /&gt;
==보유 석탑==&lt;br /&gt;
*여주 고달사지 승탑&lt;br /&gt;
*여주 고달사지 석조대좌&lt;br /&gt;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lt;br /&gt;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lt;br /&gt;
*여주 고달사지 쌍사자 석등&lt;br /&gt;
&lt;br /&gt;
===설화===&lt;br /&gt;
*신라시대에 고달(高達)&amp;lt;ref&amp;gt;고달은 가족들이 굶어 죽는 줄도 모르고 불사에 혼을 바쳤다고 한다. 이라는 승건이 창건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amp;lt;/ref&amp;gt;&lt;br /&gt;
 사냥꾼이던 고달은 사슴 한 마리를 사냥하게 되었는데, 화살을 맞고 사슴이 달아나게 되었다. 사슴의 핏자국을 따라가다 보니 불상을 모신 굴이 있었고, 그 불상에 화살이 꽂혀 있었다고 한다. 고달은 그 불상을 보며 부처님이 자신이 살생을 많이 하는 것을 훈계하기 위해 부처님이 사슴으로 변신해서 자기를 인도한 것임을 깨닫고, 그 자리에서 활과 살을 꺾어버린 뒤 수행하여 스님이 되었다고 한다. &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3371&amp;lt;/ref&amp;gt; &lt;br /&gt;
*고달원 입구‘신털이봉'이 생긴 사연&lt;br /&gt;
 원종대사 찬유는 중국에 수기설법을 유학하고 돌아와 선풍을 진작시켰다. 그는 고려 태조, 혜종, 정종, 광종으로부터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특히 고려 광종의 개혁에 큰 힘을 보태어 953년(광종 4) 국사로 책봉되었다고 한다. 만년에 고달사로 내려와 머물면서 대찰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수기설법(隨機說法)은 마치 깊은 골짜기에서 부는 회오리바람 소리와 같고, 인연 따라 감응하는 것은 맑은 못에 비치는 달그림자와 같았다,“누더기를 입은 납자(衲子)가 바람처럼 찾아오고, 대중공양을 올리기 위해 오는 이가 구름과 같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수많은 스님이 이곳을 찾아올 때 고달원 입구 500m 전에서 짚신을 턴 흙이 쌓여 신털이봉이 생겨났다고 한다.&amp;lt;ref&amp;gt;https://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220365&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김윤주]]&lt;/div&gt;</summary>
		<author><name>올데이프</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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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고달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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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0T08:25:5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올데이프: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20년 전이 한바탕 꿈이었구나, 젊은 시절 벗들은 반이나 황천객(黃泉客)이 되었는데 지금 &amp;lt;font color=&amp;quot;#8b0000&amp;quot;&amp;gt;'''고달(高達)'''&amp;lt;/font&amp;gt; 옛 절에 온 것은 원통(圓通) 큰 복전이 있기 때문이라네. 사면의 산은 병풍처럼 절을 둘렀는데, 한 개 비석은 푸른 하늘에 기대었네. 웃음꽃 피운 이야기에 밤새도록 되돌아갈 길 잊었으니, 그때는 관음보살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라네.”-&amp;lt;신증동국여지승람&amp;gt; 문신 한수(韓脩,1333-1384)의 시&lt;br /&gt;
==건축물 정보==&lt;br /&gt;
===건축시기 및 위치===&lt;br /&gt;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764),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에 세워졌다. 하지만 통일신라 당시에는 큰 기능을 하지 못했었다. '''[[고려시대 광종]]'''이후, 고려 초 3대 사찰 중 하나가 되었으며 대찰(大刹)로서 기능했다.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고달사 소속 많은 석탑과 석등 등의 유물은 대부분 고려시대에 만들어졌다. 고달원(高達院)이라고도 한다. &amp;lt;ref&amp;gt;신라시대에 세워졌음에도 고려시대 건축물로 넣은 이유는 고려 광종 이후 큰 절로 성장하였기 때문이며, 고려의 3대 사찰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또한 석탑들은 대부분 고려시대 때 만들어졌다.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파일:고달사 터.jpg|350픽셀|섬네일|가운데]]&lt;br /&gt;
&lt;br /&gt;
===특징===&lt;br /&gt;
우리나라의 석탑은 대부분 '''화강암'''으로 만들어진다. 하지만 경천사 10층 석탑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높이는 13.5 미터이다.&lt;br /&gt;
석탑의 기단부와 탑신석 1층에서 3층까지의 평면은 '''한자 아(亞)자'''의 형태를 띄고 있는데 이는 당시 원나라에서 유행했던 석탑 형식이다.&amp;lt;ref&amp;gt;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recommend/view?relicRecommendId=16858&amp;lt;/ref&amp;gt; 이러한 원나라의 특징이 드러나는 이유는 경천사 10층 석탑이 고려 말기 원나라 황제의 건강과 원나라의 기원을 빌며 지어진 석탑이기 때문이다. 원나라에서 넘어온 석공들이 만들었기에 석탑의 모양과 형태가 기존 고려의 석탑과는 다른 점이 많다. 기단부부터 3층까지는 원나라의 양식을, 4층부터 10층까지는 고려시대 석탑의 양식을 따라 만들어졌다. &amp;lt;ref&amp;gt;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jsessionid=T35KoUR6Mlbc23z3N9BBlaadK5nFfis3aRPd1AjacNC1kRsynB4zgMqyseonQcGC.cpawas_servlet_engine1?pageNo=1_1_2_0&amp;amp;ccbaCpno=1111100860000&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경천사 10층 석탑 분석사진.jpg|200픽셀|가운데]]&lt;br /&gt;
&lt;br /&gt;
==보유 석탑==&lt;br /&gt;
*여주 고달사지 승탑&lt;br /&gt;
*여주 고달사지 석조대좌&lt;br /&gt;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lt;br /&gt;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lt;br /&gt;
*여주 고달사지 쌍사자 석등&lt;br /&gt;
&lt;br /&gt;
===설화===&lt;br /&gt;
*신라시대에 고달(高達)&amp;lt;ref&amp;gt;고달은 가족들이 굶어 죽는 줄도 모르고 불사에 혼을 바쳤다고 한다. 이라는 승건이 창건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amp;lt;/ref&amp;gt;&lt;br /&gt;
 사냥꾼이던 고달은 사슴 한 마리를 사냥하게 되었는데, 화살을 맞고 사슴이 달아나게 되었다. 사슴의 핏자국을 따라가다 보니 불상을 모신 굴이 있었고, 그 불상에 화살이 꽂혀 있었다고 한다. 고달은 그 불상을 보며 부처님이 자신이 살생을 많이 하는 것을 훈계하기 위해 부처님이 사슴으로 변신해서 자기를 인도한 것임을 깨닫고, 그 자리에서 활과 살을 꺾어버린 뒤 수행하여 스님이 되었다고 한다. &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3371&amp;lt;/ref&amp;gt; &lt;br /&gt;
*고달원 입구‘신털이봉'이 생긴 사연&lt;br /&gt;
 원종대사 찬유는 중국에 수기설법을 유학하고 돌아와 선풍을 진작시켰다. 그는 고려 태조, 혜종, 정종, 광종으로부터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특히 고려 광종의 개혁에 큰 힘을 보태어 953년(광종 4) 국사로 책봉되었다고 한다. 만년에 고달사로 내려와 머물면서 대찰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수기설법(隨機說法)은 마치 깊은 골짜기에서 부는 회오리바람 소리와 같고, 인연 따라 감응하는 것은 맑은 못에 비치는 달그림자와 같았다,“누더기를 입은 납자(衲子)가 바람처럼 찾아오고, 대중공양을 올리기 위해 오는 이가 구름과 같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수많은 스님이 이곳을 찾아올 때 고달원 입구 500m 전에서 짚신을 턴 흙이 쌓여 신털이봉이 생겨났다고 한다.&amp;lt;ref&amp;gt;https://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220365&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김윤주]]&lt;/div&gt;</summary>
		<author><name>올데이프</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3%A0%EB%8B%AC%EC%82%AC&amp;diff=33844</id>
		<title>고달사</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3%A0%EB%8B%AC%EC%82%AC&amp;diff=33844"/>
		<updated>2023-12-10T08:07:3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올데이프: /* 설화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건축물 정보==&lt;br /&gt;
 “20년 전이 한바탕 꿈이었구나, 젊은 시절 벗들은 반이나 황천객(黃泉客)이 되었는데 지금 &amp;lt;font color=&amp;quot;#8b0000&amp;quot;&amp;gt;'''고달(高達)'''&amp;lt;/font&amp;gt; 옛 절에 온 것은 원통(圓通) 큰 복전이 있기 때문이라네. 사면의 산은 병풍처럼 절을 둘렀는데, 한 개 비석은 푸른 하늘에 기대었네. 웃음꽃 피운 이야기에 밤새도록 되돌아갈 길 잊었으니, 그때는 관음보살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라네.”-&amp;lt;신증동국여지승람&amp;gt; 문신 한수(韓脩,1333-1384)의 시&lt;br /&gt;
&lt;br /&gt;
===건축시기 및 위치===&lt;br /&gt;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764),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에 세워졌다. 하지만 통일신라 당시에는 큰 기능을 하지 못했었다. '''[[고려시대 광종]]'''이후, 고려 초 3대 사찰 중 하나가 되었으며 대찰(大刹)로서 기능했다.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고달사 소속 많은 석탑과 석등 등의 유물은 대부분 고려시대에 만들어졌다. &amp;lt;ref&amp;gt;신라시대에 세워졌음에도 고려시대 건축물로 넣은 이유는 고려 광종 이후 큰 절로 성장하였기 때문이며, 고려의 3대 사찰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또한 석탑들은 대부분 고려시대 때 만들어졌다.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파일:고달사 터.jpg|350픽셀|섬네일|가운데]]&lt;br /&gt;
&lt;br /&gt;
===특징===&lt;br /&gt;
우리나라의 석탑은 대부분 '''화강암'''으로 만들어진다. 하지만 경천사 10층 석탑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높이는 13.5 미터이다.&lt;br /&gt;
석탑의 기단부와 탑신석 1층에서 3층까지의 평면은 '''한자 아(亞)자'''의 형태를 띄고 있는데 이는 당시 원나라에서 유행했던 석탑 형식이다.&amp;lt;ref&amp;gt;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recommend/view?relicRecommendId=16858&amp;lt;/ref&amp;gt; 이러한 원나라의 특징이 드러나는 이유는 경천사 10층 석탑이 고려 말기 원나라 황제의 건강과 원나라의 기원을 빌며 지어진 석탑이기 때문이다. 원나라에서 넘어온 석공들이 만들었기에 석탑의 모양과 형태가 기존 고려의 석탑과는 다른 점이 많다. 기단부부터 3층까지는 원나라의 양식을, 4층부터 10층까지는 고려시대 석탑의 양식을 따라 만들어졌다. &amp;lt;ref&amp;gt;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jsessionid=T35KoUR6Mlbc23z3N9BBlaadK5nFfis3aRPd1AjacNC1kRsynB4zgMqyseonQcGC.cpawas_servlet_engine1?pageNo=1_1_2_0&amp;amp;ccbaCpno=1111100860000&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경천사 10층 석탑 분석사진.jpg|200픽셀|가운데]]&lt;br /&gt;
&lt;br /&gt;
==보유 석탑==&lt;br /&gt;
*여주 고달사지 승탑&lt;br /&gt;
*여주 고달사지 석조대좌&lt;br /&gt;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lt;br /&gt;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lt;br /&gt;
*여주 고달사지 쌍사자 석등&lt;br /&gt;
&lt;br /&gt;
===설화===&lt;br /&gt;
*신라시대에 고달(高達)이라는 승건이 창건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lt;br /&gt;
 사냥꾼이던 고달은 사슴 한 마리를 사냥하게 되었는데, 화살을 맞고 사슴이 달아나게 되었다. 사슴의 핏자국을 따라가다 보니 불상을 모신 굴이 있었고, 그 불상에 화살이 꽂혀 있었다고 한다. 고달은 그 불상을 보며 부처님이 자신이 살생을 많이 하는 것을 훈계하기 위해 부처님이 사슴으로 변신해서 자기를 인도한 것임을 깨닫고, 그 자리에서 활과 살을 꺾어버린 뒤 수행하여 스님이 되었다고 한다. &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3371&amp;lt;/ref&amp;gt;&lt;br /&gt;
*고달원 입구‘신털이봉'이 생긴 사연&lt;br /&gt;
 원종대사 찬유는 중국에 수기설법을 유학하고 돌아와 선풍을 진작시켰다. 그는 고려 태조, 혜종, 정종, 광종으로부터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특히 고려 광종의 개혁에 큰 힘을 보태어 953년(광종 4) 국사로 책봉되었다고 한다. 만년에 고달사로 내려와 머물면서 대찰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수기설법(隨機說法)은 마치 깊은 골짜기에서 부는 회오리바람 소리와 같고, 인연 따라 감응하는 것은 맑은 못에 비치는 달그림자와 같았다,“누더기를 입은 납자(衲子)가 바람처럼 찾아오고, 대중공양을 올리기 위해 오는 이가 구름과 같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수많은 스님이 이곳을 찾아올 때 고달원 입구 500m 전에서 짚신을 턴 흙이 쌓여 신털이봉이 생겨났다고 한다.&amp;lt;ref&amp;gt;https://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220365&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김윤주]]&lt;/div&gt;</summary>
		<author><name>올데이프</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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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3%A0%EB%8B%AC%EC%82%AC&amp;diff=33841</id>
		<title>고달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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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0T08:06:3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올데이프: /* 설화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건축물 정보==&lt;br /&gt;
 “20년 전이 한바탕 꿈이었구나, 젊은 시절 벗들은 반이나 황천객(黃泉客)이 되었는데 지금 &amp;lt;font color=&amp;quot;#8b0000&amp;quot;&amp;gt;'''고달(高達)'''&amp;lt;/font&amp;gt; 옛 절에 온 것은 원통(圓通) 큰 복전이 있기 때문이라네. 사면의 산은 병풍처럼 절을 둘렀는데, 한 개 비석은 푸른 하늘에 기대었네. 웃음꽃 피운 이야기에 밤새도록 되돌아갈 길 잊었으니, 그때는 관음보살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라네.”-&amp;lt;신증동국여지승람&amp;gt; 문신 한수(韓脩,1333-1384)의 시&lt;br /&gt;
&lt;br /&gt;
===건축시기 및 위치===&lt;br /&gt;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764),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에 세워졌다. 하지만 통일신라 당시에는 큰 기능을 하지 못했었다. '''[[고려시대 광종]]'''이후, 고려 초 3대 사찰 중 하나가 되었으며 대찰(大刹)로서 기능했다.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고달사 소속 많은 석탑과 석등 등의 유물은 대부분 고려시대에 만들어졌다. &amp;lt;ref&amp;gt;신라시대에 세워졌음에도 고려시대 건축물로 넣은 이유는 고려 광종 이후 큰 절로 성장하였기 때문이며, 고려의 3대 사찰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또한 석탑들은 대부분 고려시대 때 만들어졌다.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파일:고달사 터.jpg|350픽셀|섬네일|가운데]]&lt;br /&gt;
&lt;br /&gt;
===특징===&lt;br /&gt;
우리나라의 석탑은 대부분 '''화강암'''으로 만들어진다. 하지만 경천사 10층 석탑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높이는 13.5 미터이다.&lt;br /&gt;
석탑의 기단부와 탑신석 1층에서 3층까지의 평면은 '''한자 아(亞)자'''의 형태를 띄고 있는데 이는 당시 원나라에서 유행했던 석탑 형식이다.&amp;lt;ref&amp;gt;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recommend/view?relicRecommendId=16858&amp;lt;/ref&amp;gt; 이러한 원나라의 특징이 드러나는 이유는 경천사 10층 석탑이 고려 말기 원나라 황제의 건강과 원나라의 기원을 빌며 지어진 석탑이기 때문이다. 원나라에서 넘어온 석공들이 만들었기에 석탑의 모양과 형태가 기존 고려의 석탑과는 다른 점이 많다. 기단부부터 3층까지는 원나라의 양식을, 4층부터 10층까지는 고려시대 석탑의 양식을 따라 만들어졌다. &amp;lt;ref&amp;gt;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jsessionid=T35KoUR6Mlbc23z3N9BBlaadK5nFfis3aRPd1AjacNC1kRsynB4zgMqyseonQcGC.cpawas_servlet_engine1?pageNo=1_1_2_0&amp;amp;ccbaCpno=1111100860000&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경천사 10층 석탑 분석사진.jpg|200픽셀|가운데]]&lt;br /&gt;
&lt;br /&gt;
==보유 석탑==&lt;br /&gt;
*여주 고달사지 승탑&lt;br /&gt;
*여주 고달사지 석조대좌&lt;br /&gt;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lt;br /&gt;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lt;br /&gt;
*여주 고달사지 쌍사자 석등&lt;br /&gt;
&lt;br /&gt;
===설화===&lt;br /&gt;
*신라시대에 고달(高達)이라는 승건이 창건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lt;br /&gt;
 사냥꾼이던 고달은 사슴 한 마리를 사냥하게 되었는데, 화살을 맞고 사슴이 달아나게 되었다. 사슴의 핏자국을 따라가다 보니 불상을 모신 굴이 있었고, 그 불상에 화살이 꽂혀 있었다고 한다. 고달은 그 불상을 보며 부처님이 자신이 살생을 많이 하는 것을 훈계하기 위해 부처님이 사슴으로 변신해서 자기를 인도한 것임을 깨닫고, 그 자리에서 활과 살을 꺾어버린 뒤 수행하여 스님이 되었다고 한다. &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3371&amp;lt;/ref&amp;gt;&lt;br /&gt;
*고달원 입구‘신털이봉'이 생긴 사연&lt;br /&gt;
 원종대사 찬유는 중국에 수기설법을 유학하고 돌아와 선풍을 진작시켰다. 그는 고려 태조, 혜종, 정종, 광종으로부터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특히 고려 광종의 개혁에 큰 힘을 보태어 953년(광종 4) 국사로 책봉되었다고 한다. 만년에 고달사로 내려와 머물면서 대찰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수기설법(隨機說法)은 마치 깊은 골짜기에서 부는 회오리바람 소리와 같고, 인연 따라 감응하는 것은 맑은 못에 비치는 달그림자와 같았다,“누더기를 입은 납자(衲子)가 바람처럼 찾아오고, 대중공양을 올리기 위해 오는 이가 구름과 같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수많은 스님이 이곳을 찾아올 때 고달원 입구 500m 전에서 짚신을 턴 흙이 쌓여 신털이봉이 생겨났다고 한다.&amp;lt;ref&amp;gt;http://www.ibulgyo.com&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김윤주]]&lt;/div&gt;</summary>
		<author><name>올데이프</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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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고달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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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0T08:03:0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올데이프: /* 건축물 정보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건축물 정보==&lt;br /&gt;
 “20년 전이 한바탕 꿈이었구나, 젊은 시절 벗들은 반이나 황천객(黃泉客)이 되었는데 지금 &amp;lt;font color=&amp;quot;#8b0000&amp;quot;&amp;gt;'''고달(高達)'''&amp;lt;/font&amp;gt; 옛 절에 온 것은 원통(圓通) 큰 복전이 있기 때문이라네. 사면의 산은 병풍처럼 절을 둘렀는데, 한 개 비석은 푸른 하늘에 기대었네. 웃음꽃 피운 이야기에 밤새도록 되돌아갈 길 잊었으니, 그때는 관음보살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라네.”-&amp;lt;신증동국여지승람&amp;gt; 문신 한수(韓脩,1333-1384)의 시&lt;br /&gt;
&lt;br /&gt;
===건축시기 및 위치===&lt;br /&gt;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764),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에 세워졌다. 하지만 통일신라 당시에는 큰 기능을 하지 못했었다. '''[[고려시대 광종]]'''이후, 고려 초 3대 사찰 중 하나가 되었으며 대찰(大刹)로서 기능했다.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고달사 소속 많은 석탑과 석등 등의 유물은 대부분 고려시대에 만들어졌다. &amp;lt;ref&amp;gt;신라시대에 세워졌음에도 고려시대 건축물로 넣은 이유는 고려 광종 이후 큰 절로 성장하였기 때문이며, 고려의 3대 사찰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또한 석탑들은 대부분 고려시대 때 만들어졌다.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파일:고달사 터.jpg|350픽셀|섬네일|가운데]]&lt;br /&gt;
&lt;br /&gt;
===특징===&lt;br /&gt;
우리나라의 석탑은 대부분 '''화강암'''으로 만들어진다. 하지만 경천사 10층 석탑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높이는 13.5 미터이다.&lt;br /&gt;
석탑의 기단부와 탑신석 1층에서 3층까지의 평면은 '''한자 아(亞)자'''의 형태를 띄고 있는데 이는 당시 원나라에서 유행했던 석탑 형식이다.&amp;lt;ref&amp;gt;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recommend/view?relicRecommendId=16858&amp;lt;/ref&amp;gt; 이러한 원나라의 특징이 드러나는 이유는 경천사 10층 석탑이 고려 말기 원나라 황제의 건강과 원나라의 기원을 빌며 지어진 석탑이기 때문이다. 원나라에서 넘어온 석공들이 만들었기에 석탑의 모양과 형태가 기존 고려의 석탑과는 다른 점이 많다. 기단부부터 3층까지는 원나라의 양식을, 4층부터 10층까지는 고려시대 석탑의 양식을 따라 만들어졌다. &amp;lt;ref&amp;gt;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jsessionid=T35KoUR6Mlbc23z3N9BBlaadK5nFfis3aRPd1AjacNC1kRsynB4zgMqyseonQcGC.cpawas_servlet_engine1?pageNo=1_1_2_0&amp;amp;ccbaCpno=1111100860000&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경천사 10층 석탑 분석사진.jpg|200픽셀|가운데]]&lt;br /&gt;
&lt;br /&gt;
==보유 석탑==&lt;br /&gt;
*여주 고달사지 승탑&lt;br /&gt;
*여주 고달사지 석조대좌&lt;br /&gt;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lt;br /&gt;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lt;br /&gt;
*여주 고달사지 쌍사자 석등&lt;br /&gt;
&lt;br /&gt;
===설화===&lt;br /&gt;
신라시대에 고달(高達)이라는 승건이 창건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사냥꾼이던 고달은 사슴 한 마리를 사냥하게 되었는데, 화살을 맞고 사슴이 달아나게 되었다. 사슴의 핏자국을 따라가다 보니 불상을 모신 굴이 있었고, 그 불상에 화살이 꽂혀 있었다고 한다. 고달은 그 불상을 보며 부처님이 자신이 살생을 많이 하는 것을 훈계하기 위해 부처님이 사슴으로 변신해서 자기를 인도한 것임을 깨닫고, 그 자리에서 활과 살을 꺾어버린 뒤 수행하여 스님이 되었다고 한다. &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3371&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김윤주]]&lt;/div&gt;</summary>
		<author><name>올데이프</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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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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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고달사</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3%A0%EB%8B%AC%EC%82%AC&amp;diff=33831"/>
		<updated>2023-12-10T08:02:5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올데이프: /* 건축물 정보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건축물 정보==&lt;br /&gt;
 “20년 전이 한바탕 꿈이었구나, 젊은 시절 벗들은 반이나 황천객(黃泉客)이 되었는데 지금 &amp;lt;font color=&amp;quot;#8b0000&amp;quot;&amp;gt;'''고달(高達)'''&amp;lt;/font&amp;gt; 옛 절에 온 것은 원통(圓通) 큰 복전이 있기 때문이라네. 사면의 산은 병풍처럼 절을 둘렀는데, 한 개 비석은 푸른 하늘에 기대었네. 웃음꽃 피운 이야기에 밤새도록 되돌아갈 길 잊었으니, 그때는 관음보살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라네.”&lt;br /&gt;
-&amp;lt;신증동국여지승람&amp;gt; 문신 한수(韓脩,1333-1384)의 시&lt;br /&gt;
&lt;br /&gt;
===건축시기 및 위치===&lt;br /&gt;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764),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에 세워졌다. 하지만 통일신라 당시에는 큰 기능을 하지 못했었다. '''[[고려시대 광종]]'''이후, 고려 초 3대 사찰 중 하나가 되었으며 대찰(大刹)로서 기능했다.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고달사 소속 많은 석탑과 석등 등의 유물은 대부분 고려시대에 만들어졌다. &amp;lt;ref&amp;gt;신라시대에 세워졌음에도 고려시대 건축물로 넣은 이유는 고려 광종 이후 큰 절로 성장하였기 때문이며, 고려의 3대 사찰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또한 석탑들은 대부분 고려시대 때 만들어졌다.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파일:고달사 터.jpg|350픽셀|섬네일|가운데]]&lt;br /&gt;
&lt;br /&gt;
===특징===&lt;br /&gt;
우리나라의 석탑은 대부분 '''화강암'''으로 만들어진다. 하지만 경천사 10층 석탑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높이는 13.5 미터이다.&lt;br /&gt;
석탑의 기단부와 탑신석 1층에서 3층까지의 평면은 '''한자 아(亞)자'''의 형태를 띄고 있는데 이는 당시 원나라에서 유행했던 석탑 형식이다.&amp;lt;ref&amp;gt;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recommend/view?relicRecommendId=16858&amp;lt;/ref&amp;gt; 이러한 원나라의 특징이 드러나는 이유는 경천사 10층 석탑이 고려 말기 원나라 황제의 건강과 원나라의 기원을 빌며 지어진 석탑이기 때문이다. 원나라에서 넘어온 석공들이 만들었기에 석탑의 모양과 형태가 기존 고려의 석탑과는 다른 점이 많다. 기단부부터 3층까지는 원나라의 양식을, 4층부터 10층까지는 고려시대 석탑의 양식을 따라 만들어졌다. &amp;lt;ref&amp;gt;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jsessionid=T35KoUR6Mlbc23z3N9BBlaadK5nFfis3aRPd1AjacNC1kRsynB4zgMqyseonQcGC.cpawas_servlet_engine1?pageNo=1_1_2_0&amp;amp;ccbaCpno=1111100860000&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경천사 10층 석탑 분석사진.jpg|200픽셀|가운데]]&lt;br /&gt;
&lt;br /&gt;
==보유 석탑==&lt;br /&gt;
*여주 고달사지 승탑&lt;br /&gt;
*여주 고달사지 석조대좌&lt;br /&gt;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lt;br /&gt;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lt;br /&gt;
*여주 고달사지 쌍사자 석등&lt;br /&gt;
&lt;br /&gt;
===설화===&lt;br /&gt;
신라시대에 고달(高達)이라는 승건이 창건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사냥꾼이던 고달은 사슴 한 마리를 사냥하게 되었는데, 화살을 맞고 사슴이 달아나게 되었다. 사슴의 핏자국을 따라가다 보니 불상을 모신 굴이 있었고, 그 불상에 화살이 꽂혀 있었다고 한다. 고달은 그 불상을 보며 부처님이 자신이 살생을 많이 하는 것을 훈계하기 위해 부처님이 사슴으로 변신해서 자기를 인도한 것임을 깨닫고, 그 자리에서 활과 살을 꺾어버린 뒤 수행하여 스님이 되었다고 한다. &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3371&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김윤주]]&lt;/div&gt;</summary>
		<author><name>올데이프</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3%A0%EB%8B%AC%EC%82%AC&amp;diff=33830</id>
		<title>고달사</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3%A0%EB%8B%AC%EC%82%AC&amp;diff=33830"/>
		<updated>2023-12-10T08:02:4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올데이프: /* 건축물 정보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건축물 정보==&lt;br /&gt;
 “20년 전이 한바탕 꿈이었구나, 젊은 시절 벗들은 반이나 황천객(黃泉客)이 되었는데 지금 &amp;lt;font color=&amp;quot;#8b0000&amp;quot;&amp;gt;'''고달(高達)'''&amp;lt;/font&amp;gt; 옛 절에 온 것은 원통(圓通) 큰 복전이 있기 때문이라네. 사면의 산은 병풍처럼 절을 둘렀는데, 한 개 비석은 푸른 하늘에 기대었네. 웃음꽃 피운 이야기에 밤새도록 되돌아갈 길 잊었으니, 그때는 관음보살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라네.”&lt;br /&gt;
&lt;br /&gt;
 -&amp;lt;신증동국여지승람&amp;gt; 문신 한수(韓脩,1333-1384)의 시&lt;br /&gt;
&lt;br /&gt;
===건축시기 및 위치===&lt;br /&gt;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764),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에 세워졌다. 하지만 통일신라 당시에는 큰 기능을 하지 못했었다. '''[[고려시대 광종]]'''이후, 고려 초 3대 사찰 중 하나가 되었으며 대찰(大刹)로서 기능했다.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고달사 소속 많은 석탑과 석등 등의 유물은 대부분 고려시대에 만들어졌다. &amp;lt;ref&amp;gt;신라시대에 세워졌음에도 고려시대 건축물로 넣은 이유는 고려 광종 이후 큰 절로 성장하였기 때문이며, 고려의 3대 사찰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또한 석탑들은 대부분 고려시대 때 만들어졌다.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파일:고달사 터.jpg|350픽셀|섬네일|가운데]]&lt;br /&gt;
&lt;br /&gt;
===특징===&lt;br /&gt;
우리나라의 석탑은 대부분 '''화강암'''으로 만들어진다. 하지만 경천사 10층 석탑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높이는 13.5 미터이다.&lt;br /&gt;
석탑의 기단부와 탑신석 1층에서 3층까지의 평면은 '''한자 아(亞)자'''의 형태를 띄고 있는데 이는 당시 원나라에서 유행했던 석탑 형식이다.&amp;lt;ref&amp;gt;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recommend/view?relicRecommendId=16858&amp;lt;/ref&amp;gt; 이러한 원나라의 특징이 드러나는 이유는 경천사 10층 석탑이 고려 말기 원나라 황제의 건강과 원나라의 기원을 빌며 지어진 석탑이기 때문이다. 원나라에서 넘어온 석공들이 만들었기에 석탑의 모양과 형태가 기존 고려의 석탑과는 다른 점이 많다. 기단부부터 3층까지는 원나라의 양식을, 4층부터 10층까지는 고려시대 석탑의 양식을 따라 만들어졌다. &amp;lt;ref&amp;gt;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jsessionid=T35KoUR6Mlbc23z3N9BBlaadK5nFfis3aRPd1AjacNC1kRsynB4zgMqyseonQcGC.cpawas_servlet_engine1?pageNo=1_1_2_0&amp;amp;ccbaCpno=1111100860000&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경천사 10층 석탑 분석사진.jpg|200픽셀|가운데]]&lt;br /&gt;
&lt;br /&gt;
==보유 석탑==&lt;br /&gt;
*여주 고달사지 승탑&lt;br /&gt;
*여주 고달사지 석조대좌&lt;br /&gt;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lt;br /&gt;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lt;br /&gt;
*여주 고달사지 쌍사자 석등&lt;br /&gt;
&lt;br /&gt;
===설화===&lt;br /&gt;
신라시대에 고달(高達)이라는 승건이 창건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사냥꾼이던 고달은 사슴 한 마리를 사냥하게 되었는데, 화살을 맞고 사슴이 달아나게 되었다. 사슴의 핏자국을 따라가다 보니 불상을 모신 굴이 있었고, 그 불상에 화살이 꽂혀 있었다고 한다. 고달은 그 불상을 보며 부처님이 자신이 살생을 많이 하는 것을 훈계하기 위해 부처님이 사슴으로 변신해서 자기를 인도한 것임을 깨닫고, 그 자리에서 활과 살을 꺾어버린 뒤 수행하여 스님이 되었다고 한다. &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3371&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김윤주]]&lt;/div&gt;</summary>
		<author><name>올데이프</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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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3%A0%EB%8B%AC%EC%82%AC&amp;diff=33827</id>
		<title>고달사</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3%A0%EB%8B%AC%EC%82%AC&amp;diff=33827"/>
		<updated>2023-12-10T08:02:1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올데이프: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건축물 정보==&lt;br /&gt;
 “20년 전이 한바탕 꿈이었구나, 젊은 시절 벗들은 반이나 황천객(黃泉客)이 되었는데 지금 &amp;lt;font color=&amp;quot;#8b0000&amp;quot;&amp;gt;'''고달(高達)'''&amp;lt;/font&amp;gt; 옛 절에 온 것은 원통(圓通) 큰 복전이 있기 때문이라네. 사면의 산은 병풍처럼 절을 둘렀는데, 한 개 비석은 푸른 하늘에 기대었네. 웃음꽃 피운 이야기에 밤새도록 되돌아갈 길 잊었으니, 그때는 관음보살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라네.”&lt;br /&gt;
-&amp;lt;신증동국여지승람&amp;gt; 문신 한수(韓脩,1333-1384)의 시&lt;br /&gt;
&lt;br /&gt;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lt;br /&gt;
&lt;br /&gt;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lt;br /&gt;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lt;br /&gt;
===건축시기 및 위치===&lt;br /&gt;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764),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에 세워졌다. 하지만 통일신라 당시에는 큰 기능을 하지 못했었다. '''[[고려시대 광종]]'''이후, 고려 초 3대 사찰 중 하나가 되었으며 대찰(大刹)로서 기능했다.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고달사 소속 많은 석탑과 석등 등의 유물은 대부분 고려시대에 만들어졌다. &amp;lt;ref&amp;gt;신라시대에 세워졌음에도 고려시대 건축물로 넣은 이유는 고려 광종 이후 큰 절로 성장하였기 때문이며, 고려의 3대 사찰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또한 석탑들은 대부분 고려시대 때 만들어졌다.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파일:고달사 터.jpg|350픽셀|섬네일|가운데]]&lt;br /&gt;
&lt;br /&gt;
===특징===&lt;br /&gt;
우리나라의 석탑은 대부분 '''화강암'''으로 만들어진다. 하지만 경천사 10층 석탑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높이는 13.5 미터이다.&lt;br /&gt;
석탑의 기단부와 탑신석 1층에서 3층까지의 평면은 '''한자 아(亞)자'''의 형태를 띄고 있는데 이는 당시 원나라에서 유행했던 석탑 형식이다.&amp;lt;ref&amp;gt;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recommend/view?relicRecommendId=16858&amp;lt;/ref&amp;gt; 이러한 원나라의 특징이 드러나는 이유는 경천사 10층 석탑이 고려 말기 원나라 황제의 건강과 원나라의 기원을 빌며 지어진 석탑이기 때문이다. 원나라에서 넘어온 석공들이 만들었기에 석탑의 모양과 형태가 기존 고려의 석탑과는 다른 점이 많다. 기단부부터 3층까지는 원나라의 양식을, 4층부터 10층까지는 고려시대 석탑의 양식을 따라 만들어졌다. &amp;lt;ref&amp;gt;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jsessionid=T35KoUR6Mlbc23z3N9BBlaadK5nFfis3aRPd1AjacNC1kRsynB4zgMqyseonQcGC.cpawas_servlet_engine1?pageNo=1_1_2_0&amp;amp;ccbaCpno=1111100860000&amp;lt;/ref&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경천사 10층 석탑 분석사진.jpg|200픽셀|가운데]]&lt;br /&gt;
&lt;br /&gt;
==보유 석탑==&lt;br /&gt;
*여주 고달사지 승탑&lt;br /&gt;
*여주 고달사지 석조대좌&lt;br /&gt;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lt;br /&gt;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lt;br /&gt;
*여주 고달사지 쌍사자 석등&lt;br /&gt;
&lt;br /&gt;
===설화===&lt;br /&gt;
신라시대에 고달(高達)이라는 승건이 창건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사냥꾼이던 고달은 사슴 한 마리를 사냥하게 되었는데, 화살을 맞고 사슴이 달아나게 되었다. 사슴의 핏자국을 따라가다 보니 불상을 모신 굴이 있었고, 그 불상에 화살이 꽂혀 있었다고 한다. 고달은 그 불상을 보며 부처님이 자신이 살생을 많이 하는 것을 훈계하기 위해 부처님이 사슴으로 변신해서 자기를 인도한 것임을 깨닫고, 그 자리에서 활과 살을 꺾어버린 뒤 수행하여 스님이 되었다고 한다. &amp;lt;ref&amp;gt;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3371&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출처==&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김윤주]]&lt;/div&gt;</summary>
		<author><name>올데이프</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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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3%A0%EB%A0%A4%EC%8B%9C%EB%8C%80_%EA%B4%91%EC%A2%85&amp;diff=33799</id>
		<title>고려시대 광종</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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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0T07:44:2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올데이프: 새 문서: 고려의 제4대 임금이다. 고려 제 1대 임금인 태조 왕건의 넷째 아들이다. 형제들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는 점에서 피의 군주로 불리기도...&lt;/p&gt;
&lt;hr /&gt;
&lt;div&gt;고려의 제4대 임금이다. 고려 제 1대 임금인 태조 왕건의 넷째 아들이다. 형제들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는 점에서 피의 군주로 불리기도 한다. 노비안검법, 과거제와 같은 민심안정정책들을 실시하였으며 '광무'라는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였었다. &lt;br /&gt;
&lt;br /&gt;
[[분류:김윤주]]&lt;/div&gt;</summary>
		<author><name>올데이프</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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