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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dh_edu - 사용자 기여 [ko]</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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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갑신정변 1884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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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소금토마토: &lt;/p&gt;
&lt;hr /&gt;
&lt;div&gt;[[파일:우정총국.jpeg|500px|]]&lt;br /&gt;
&lt;br /&gt;
갑신정변이 발생했던 우정총국의 모습이다.&lt;br /&gt;
&lt;br /&gt;
==개요==&lt;br /&gt;
 갑신정변은 1884년 급진개화파가 청나라로부터의 독립과 조선의 개화를 목표로 일으킨 정변이다. 급진개화파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법, 서재필 등이 일으켰으나 청나라가 군사 개입을 하여 3일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lt;br /&gt;
&lt;br /&gt;
==일본과 갑신정변==&lt;br /&gt;
1884년 청불전쟁이 일어나며 청의 조선군이 줄어들자 개화당은 이를 기회삼아 정변을 하고자 하였다. 일본 정부는 이 때 기존의 소극적 대한 정책을 변경해 김옥균과 정변에 협력하였다. &amp;lt;/br&amp;gt; &lt;br /&gt;
정변 진행 도중 청군 200명의 입경 소식을 접한 일본 공사는 청일 양국의 충돌을 우려해 군대를 철수하고자 했다. 결국 일본군은 청군의 공격을 받아 철수하게 되었으며 갑신정변은 결국 실패로 끝나게 된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청과 갑신정변==&lt;br /&gt;
갑신정변 자체가 당시 조선의 급진개화파가 청나라로부터의 독립과 조선의 개화를 목표로 일으킨 정변이기 때문에 청나라와의 관계가 크다. [[임오군란]] 이후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내정 간섭이 다소 심해진 상태였고, 이에 대해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 등의 급진개화파는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임오군란 당시 청나라의 지원을 요청한 것은 민씨 정권이었는데, 그들에게 급진개화파는 정치적으로 위협적 존재였기 때문에 청나라의 힘을 빌려 정치적 압박을 가한 것이 그 까닭이다. 상술했듯 청불전쟁이 본격화되고 일본 정부가 소극적 대한 정책을 변경하며 정변에 협력해 갑신정변이 발발하였으나, 청국군의 개입으로 인해 3일만에 정변이 실패로 돌아간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갑신정변이 조선에 미친 영향==&lt;br /&gt;
청나라의 내정 간섭으로부터 독립을 꾀하기 위한 정변이었으나, 이것이 청나라의 개입으로 인해 실패로 돌아가면서 오히려 더욱 본격적으로 청나라가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친청파들이 정국을 좌우하게 되었다. 그러나 고종은 청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와 밀약을 추친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lt;br /&gt;
&lt;br /&gt;
일본 측은 정변으로 인해 소실된 공사관 건물에 대해 배상과 사죄를 요구하였고, 이로 인해 1884년 한성조약이 체겨뢴다.&lt;br /&gt;
&lt;br /&gt;
정변 이후 청일 양국군이 조선에 주둔하게 되고, 양국 간 교전 가능성이 높아지던 중 청일 양국군의 철수를 규정한 텐진조약이 1885년 체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인해 청일 양국은 한쪽이 조선에 파병을 할 경우 반드시 상대방 국가에 알려야 하는 의무가 생겼는데, 이것은 이후 동학농민운동 당시 청의 파병에 이어 일본의 파병이 이어지는 계기가 된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관련 자료==&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910&amp;quot; height=&amp;quot;512&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q-cAcjjmPdw&amp;quot; title=&amp;quot;3일 천하 갑신정변 한번에 다보기 l 근대 한국사 10부&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참고문헌==&lt;br /&gt;
&amp;lt;&amp;lt;청과 갑신정변, 갑신정변이 조선에 미친 영향과 관련하여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056786&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1778 두산백과]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092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amp;gt;&amp;gt;&lt;br /&gt;
==분류==&lt;br /&gt;
[[분류:개항부터 현재까지의 정치 교류]] [[분류:텀블러]] [[분류:소금토마토]]&lt;/div&gt;</summary>
		<author><name>소금토마토</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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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파일:우정총국.jpeg</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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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소금토마토: &lt;/p&gt;
&lt;hr /&gt;
&lt;div&gt;&lt;/div&gt;</summary>
		<author><name>소금토마토</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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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갑신정변 1884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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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06-23T13:25:2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소금토마토: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갑신정변은 1884년 급진개화파가 청나라로부터의 독립과 조선의 개화를 목표로 일으킨 정변이다. 급진개화파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법, 서재필 등이 일으켰으나 청나라가 군사 개입을 하여 3일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lt;br /&gt;
&lt;br /&gt;
==일본과 갑신정변==&lt;br /&gt;
1884년 청불전쟁이 일어나며 청의 조선군이 줄어들자 개화당은 이를 기회삼아 정변을 하고자 하였다. 일본 정부는 이 때 기존의 소극적 대한 정책을 변경해 김옥균과 정변에 협력하였다. &amp;lt;/br&amp;gt; &lt;br /&gt;
정변 진행 도중 청군 200명의 입경 소식을 접한 일본 공사는 청일 양국의 충돌을 우려해 군대를 철수하고자 했다. 결국 일본군은 청군의 공격을 받아 철수하게 되었으며 갑신정변은 결국 실패로 끝나게 된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청과 갑신정변==&lt;br /&gt;
갑신정변 자체가 당시 조선의 급진개화파가 청나라로부터의 독립과 조선의 개화를 목표로 일으킨 정변이기 때문에 청나라와의 관계가 크다. [[임오군란]] 이후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내정 간섭이 다소 심해진 상태였고, 이에 대해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 등의 급진개화파는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임오군란 당시 청나라의 지원을 요청한 것은 민씨 정권이었는데, 그들에게 급진개화파는 정치적으로 위협적 존재였기 때문에 청나라의 힘을 빌려 정치적 압박을 가한 것이 그 까닭이다. 상술했듯 청불전쟁이 본격화되고 일본 정부가 소극적 대한 정책을 변경하며 정변에 협력해 갑신정변이 발발하였으나, 청국군의 개입으로 인해 3일만에 정변이 실패로 돌아간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갑신정변이 조선에 미친 영향==&lt;br /&gt;
청나라의 내정 간섭으로부터 독립을 꾀하기 위한 정변이었으나, 이것이 청나라의 개입으로 인해 실패로 돌아가면서 오히려 더욱 본격적으로 청나라가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친청파들이 정국을 좌우하게 되었다. 그러나 고종은 청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와 밀약을 추친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lt;br /&gt;
&lt;br /&gt;
일본 측은 정변으로 인해 소실된 공사관 건물에 대해 배상과 사죄를 요구하였고, 이로 인해 1884년 한성조약이 체겨뢴다.&lt;br /&gt;
&lt;br /&gt;
정변 이후 청일 양국군이 조선에 주둔하게 되고, 양국 간 교전 가능성이 높아지던 중 청일 양국군의 철수를 규정한 텐진조약이 1885년 체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인해 청일 양국은 한쪽이 조선에 파병을 할 경우 반드시 상대방 국가에 알려야 하는 의무가 생겼는데, 이것은 이후 동학농민운동 당시 청의 파병에 이어 일본의 파병이 이어지는 계기가 된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관련 자료==&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910&amp;quot; height=&amp;quot;512&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q-cAcjjmPdw&amp;quot; title=&amp;quot;3일 천하 갑신정변 한번에 다보기 l 근대 한국사 10부&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참고문헌==&lt;br /&gt;
&amp;lt;&amp;lt;청과 갑신정변, 갑신정변이 조선에 미친 영향과 관련하여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056786&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1778 두산백과]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092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amp;gt;&amp;gt;&lt;br /&gt;
==분류==&lt;br /&gt;
[[분류:개항부터 현재까지의 정치 교류]] [[분류:텀블러]] [[분류:소금토마토]]&lt;/div&gt;</summary>
		<author><name>소금토마토</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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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코로나19</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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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06-23T13:13:1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소금토마토: /*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파일:코로나19.jpg|500px|코로나19]] &amp;lt;/br&amp;gt;&lt;br /&gt;
코로나19 바이러스를 표현한 이미지이다.&lt;br /&gt;
&lt;br /&gt;
==개요==&lt;br /&gt;
2020년대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였던 전염성 호흡기 감염실환이다. 2019년 12월 우한에서 처음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후 중국 전역을 거쳐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세계보건기구 WHO의 감염병 위험도 등급 최고 등급인 펜데믹 등급을 받아 일명 '코로나 펜데믹'으로 불린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현황==&lt;br /&gt;
===국내 현황===&lt;br /&gt;
감염병포털에서 제공하는 코로나19 누적확진자 자료에 따르면 2023년 8월 31일 기준 누적확진자수는 3457254명이며 그 중 사망자는 35606명이다. 사망자의 경우 2022년이 26363명으로 가장 많았다. WHO Dashboard 통계에 따르면 백신 접종률은 전체 인구의 87%이다.&lt;br /&gt;
&lt;br /&gt;
대한민국의 감염병 위기 경보 수준은 그 정도에 따라 관심, 주의, 경계, 심각 단계로 구분된다. 2020년 2월 23일 대응 수준이 경계 단계에서 심각 단계로 격상되었다. 이후 2023년 6월부터 경계 단계로 하향되었으며, 2024년 5월을 기점으로 관심 단계로 대폭 하향되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국외 현황===&lt;br /&gt;
WHO Dashboard 통계에 따르면 2024년 6월 기준 전 세계 확진자는 누적 775615736명이며, 그 중 사망자는 7051323명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발원지인 중국의 경우 누적 확진자는 99360533명, 그 중 사망자는 112248명이다. 2020년 12월 14일 처음 접종이 시작된 백신 접종의 경우 전 세계적으로 56%의 인구가 접종이 완료되었으며, 중국 내의 백신 접종률은 전체 인구의 87%이다.&lt;br /&gt;
&lt;br /&gt;
세계보건기구 WHO는 2020년 1월 30일에 국제공중보건위기상황을 선포하였으며, 3년 4개월 동안 유지되다가 지난 2023년 5월 이를 공식 종료하였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국내 영향==&lt;br /&gt;
===전반적 영향===&lt;br /&gt;
세계 동향이 코로나19 유행 이전과 이후 둘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코로나19가 가져온 영향은 엄청났으며, 국내적으로도 예외는 아니었다.&lt;br /&gt;
&lt;br /&gt;
우선 경제적 영향으로, IMF에서는 코로나19로 인해 발생한 경기침체를 대봉쇄라고 명명한 바 있는데 그만큼 국내에서도 경기가 굉장히 침체되었다. 이는 전염병 예방을 위해 인간 활동을 최소화하는 예방 정책이 불가피하게 가져온 것으로, 활동이 축소되면 경제의 마비는 필연적이다. 코로나 기간을 이기지 못하고 많은 상권이 무너졌으며, 무역 측면에서도 수출입 수준이 상당히 둔화되었다. 문화적 영향으로는 집합금지명령으로 인해 콘서트, 페스티벌 등 많은 문화 행사가 제대로 열리지 못했고 온라인 콘서트라는 문화가 새로이 생겨났다. 학교 역시 집합금지명령으로 인해 온라인 교육을 병행하였으며, 이로 인해 현재 코로나 기간을 겪은 학생들의 학력 미달 비율이 높아지고 있어 문제가 되는 상황이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정치적 영향===&lt;br /&gt;
코로나19는 정치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2020년 2월 제6공화국 이후 처음으로 국회가 폐쇄되었으며, 같은 달 26일 코로나 3법이 처리되었다. 코로나 기간에 제21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는데, 전염병 유행 상황이 심가하여 선거가 연기될 가능성이 있었으나 연기되지 않고 제때 처리되었다. 코로나 확진자 및 자가격리자의 투표 참여에 대한 문제로 참정권 논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코로나19와 같은 전염병이 유행할 경우 가장 주목받는 것이 정부의 대응이고 이에 따라 정부 지지율이 등락하는 경향이 있다. 2020년부터 2022년까지 재임하였던 문재인 전 대통령의 경우 코로나19 바이러스 유행 초기에 잠시 지지율이 하락세를 보였으나, 이후 대응에 대해 긍정적 평가가 반영되어 점차 지지율이 상향되었다. 이후 윤석열 대통열이 취임, 현재까지 재임 중이나 코로나 바이러스의 여파가 점차 완화되면서 이로 인한 지지율의 등락 문제는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중국에 대한 인식==&lt;br /&gt;
동북공정 및 문화 관련 문제들로 인해 기존에도 중국에 대한 인식이 마냥 좋다고 말하기는 어려웠으나, 코로나19를 기점으로 특히 중국에 대한 인식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모든 중국 국민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부 중국 국민과 중국 정부는 코로나19 사태에 대해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을 다소 보인 바 있으며, 코로나19로 인해 대한민국 정부와 다소 갈등을 빚은 기록도 있다. 코로나19의 발생지가 중국인 만큼 바이러스 유행으로 인해 국내에 있었던 많은 불편함과 경기침체로 인한 스트레스가 중국을 향하기 쉬운 시점인데, 이에 대한 대처가 유하지 못했고 코로나19 이외에도 외교적 갈등이나 문화적 갈등이 일어나며 모든 사건이 시너지를 발휘해 현재 한국 국민들의 중국에 대한 국민 감정은 좋지 않은 편이다. 2022년 12월 24일 진행된 여론조사에서 미국, 일본보다 중국에 대한 반중 감정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으며 이후 실시한 조사에서도 한국의 20~30대 세대의 반중 감정이 높은 것으로 확인되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관련 영상==&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910&amp;quot; height=&amp;quot;512&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EwLbowndxcU&amp;quot; title=&amp;quot;“북한·일본보다 중국이 싫다”…한국 MZ ‘반중 정서’ 확대 [뉴쉐린가이드] / KBS&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amp;lt;&amp;lt;국내 현황에 관련하여 [https://ncov.kdca.go.kr/pot/www/CVID19/CVID19_INFO/DFNTN.jsp# 감염병포털],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924441&amp;amp;cid=42107&amp;amp;categoryId=42107 한경 경제용어사전], 겨울철 유행 상황 본다, 코로나19 위기단계 '경계' 유지 https://www.fnnews.com/news/202312150852304942 참조&amp;gt;&amp;gt;&lt;br /&gt;
&amp;lt;&amp;lt;국외 현황에 관련하여 [https://data.who.int/dashboards/covid19/deaths?m49=001&amp;amp;n=o WHO Dashboard]. 3년 4개월 만에 코로나19 국제공중보건위기상황 해제...이달 중 하향 조정돼 https://www.jeonm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77871 참조&amp;gt;&amp;gt;&lt;br /&gt;
&amp;lt;&amp;lt;전반적 영향에 관련하여 늘어나는 '수포자'…고2 '기초학력 미달' 17%, 2017년 이후 최고(종합) https://www.yna.co.kr/view/AKR20240617072651530?input=1195m 참조&amp;gt;&amp;gt;&lt;br /&gt;
&amp;lt;&amp;lt;정치적 영향에 관련하여 일시 폐쇄됐던 국회, 오늘 정상화…'코로나 3법' 처리 https://www.hankyung.com/politics/article/2020022650097, 다음주에 '코로나19' 확진되면 총선 투표 못한다? https://www.moneys.co.kr/article/2020032315228026814?outlink=1, '84%' 찍었던 文 지지율 '45%'로 마무리..직선제 후 최고(종합) https://v.daum.net/v/20220506103833427?x_trkm=tx_imp=dG9yb3NfY2xvdWRfYWxwaGE=&amp;amp;x_hk=NDBhOGMyNmI3YjUzNmRkNjc3 참조&amp;gt;&amp;gt;&lt;br /&gt;
&amp;lt;&amp;lt;중국에 대한 인식에 관련하여 코로나, 중국서 나온 게 아니다?…보기 불편한 책임 회피 [여기는 논설실] https://www.hankyung.com/international/article/202101075910i, &amp;quot;한국인 81%가 중국에 부정적…56개국중 반중정서 가장 강해&amp;quot;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1/0013666727?sid=104,2030 &amp;quot;북한보다 중국이 더 싫어&amp;quot;…91%가 '비호감' https://www.youtube.com/watch?v=PDiawBnh4sw 참조&amp;gt;&amp;gt;&lt;br /&gt;
&lt;br /&gt;
==분류==&lt;br /&gt;
[[분류:개항부터_현재까지의_정치_교류]] [[분류:소금토마토]]&lt;/div&gt;</summary>
		<author><name>소금토마토</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BD%94%EB%A1%9C%EB%82%9819&amp;diff=42869</id>
		<title>코로나19</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BD%94%EB%A1%9C%EB%82%9819&amp;diff=42869"/>
		<updated>2024-06-23T13:09:3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소금토마토: &lt;/p&gt;
&lt;hr /&gt;
&lt;div&gt;[[파일:코로나19.jpg|500px|코로나19]] &amp;lt;/br&amp;gt;&lt;br /&gt;
코로나19 바이러스를 표현한 이미지이다.&lt;br /&gt;
&lt;br /&gt;
==개요==&lt;br /&gt;
2020년대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였던 전염성 호흡기 감염실환이다. 2019년 12월 우한에서 처음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후 중국 전역을 거쳐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세계보건기구 WHO의 감염병 위험도 등급 최고 등급인 펜데믹 등급을 받아 일명 '코로나 펜데믹'으로 불린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현황==&lt;br /&gt;
===국내 현황===&lt;br /&gt;
감염병포털에서 제공하는 코로나19 누적확진자 자료에 따르면 2023년 8월 31일 기준 누적확진자수는 3457254명이며 그 중 사망자는 35606명이다. 사망자의 경우 2022년이 26363명으로 가장 많았다. WHO Dashboard 통계에 따르면 백신 접종률은 전체 인구의 87%이다.&lt;br /&gt;
&lt;br /&gt;
대한민국의 감염병 위기 경보 수준은 그 정도에 따라 관심, 주의, 경계, 심각 단계로 구분된다. 2020년 2월 23일 대응 수준이 경계 단계에서 심각 단계로 격상되었다. 이후 2023년 6월부터 경계 단계로 하향되었으며, 2024년 5월을 기점으로 관심 단계로 대폭 하향되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국외 현황===&lt;br /&gt;
WHO Dashboard 통계에 따르면 2024년 6월 기준 전 세계 확진자는 누적 775615736명이며, 그 중 사망자는 7051323명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발원지인 중국의 경우 누적 확진자는 99360533명, 그 중 사망자는 112248명이다. 2020년 12월 14일 처음 접종이 시작된 백신 접종의 경우 전 세계적으로 56%의 인구가 접종이 완료되었으며, 중국 내의 백신 접종률은 전체 인구의 87%이다.&lt;br /&gt;
&lt;br /&gt;
세계보건기구 WHO는 2020년 1월 30일에 국제공중보건위기상황을 선포하였으며, 3년 4개월 동안 유지되다가 지난 2023년 5월 이를 공식 종료하였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국내 영향==&lt;br /&gt;
===전반적 영향===&lt;br /&gt;
세계 동향이 코로나19 유행 이전과 이후 둘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코로나19가 가져온 영향은 엄청났으며, 국내적으로도 예외는 아니었다.&lt;br /&gt;
&lt;br /&gt;
우선 경제적 영향으로, IMF에서는 코로나19로 인해 발생한 경기침체를 대봉쇄라고 명명한 바 있는데 그만큼 국내에서도 경기가 굉장히 침체되었다. 이는 전염병 예방을 위해 인간 활동을 최소화하는 예방 정책이 불가피하게 가져온 것으로, 활동이 축소되면 경제의 마비는 필연적이다. 코로나 기간을 이기지 못하고 많은 상권이 무너졌으며, 무역 측면에서도 수출입 수준이 상당히 둔화되었다. 문화적 영향으로는 집합금지명령으로 인해 콘서트, 페스티벌 등 많은 문화 행사가 제대로 열리지 못했고 온라인 콘서트라는 문화가 새로이 생겨났다. 학교 역시 집합금지명령으로 인해 온라인 교육을 병행하였으며, 이로 인해 현재 코로나 기간을 겪은 학생들의 학력 미달 비율이 높아지고 있어 문제가 되는 상황이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정치적 영향===&lt;br /&gt;
코로나19는 정치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2020년 2월 제6공화국 이후 처음으로 국회가 폐쇄되었으며, 같은 달 26일 코로나 3법이 처리되었다. 코로나 기간에 제21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는데, 전염병 유행 상황이 심가하여 선거가 연기될 가능성이 있었으나 연기되지 않고 제때 처리되었다. 코로나 확진자 및 자가격리자의 투표 참여에 대한 문제로 참정권 논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코로나19와 같은 전염병이 유행할 경우 가장 주목받는 것이 정부의 대응이고 이에 따라 정부 지지율이 등락하는 경향이 있다. 2020년부터 2022년까지 재임하였던 문재인 전 대통령의 경우 코로나19 바이러스 유행 초기에 잠시 지지율이 하락세를 보였으나, 이후 대응에 대해 긍정적 평가가 반영되어 점차 지지율이 상향되었다. 이후 윤석열 대통열이 취임, 현재까지 재임 중이나 코로나 바이러스의 여파가 점차 완화되면서 이로 인한 지지율의 등락 문제는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중국에 대한 인식==&lt;br /&gt;
동북공정 및 문화 관련 문제들로 인해 기존에도 중국에 대한 인식이 마냥 좋다고 말하기는 어려웠으나, 코로나19를 기점으로 특히 중국에 대한 인식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모든 중국 국민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부 중국 국민과 중국 정부는 코로나19 사태에 대해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을 다소 보인 바 있으며, 코로나19로 인해 대한민국 정부와 다소 갈등을 빚은 기록도 있다. 코로나19의 발생지가 중국인 만큼 바이러스 유행으로 인해 국내에 있었던 많은 불편함과 경기침체로 인한 스트레스가 중국을 향하기 쉬운 시점인데, 이에 대한 대처가 유하지 못했고 코로나19 이외에도 외교적 갈등이나 문화적 갈등이 일어나며 모든 사건이 시너지를 발휘해 현재 한국 국민들의 중국에 대한 국민 감정은 좋지 않은 편이다. 2022년 12월 24일 진행된 여론조사에서 미국, 일본보다 중국에 대한 반중 감정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으며 이후 실시한 조사에서도 한국의 20~30대 세대의 반중 감정이 높은 것으로 확인되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관련 영상==&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910&amp;quot; height=&amp;quot;512&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EwLbowndxcU&amp;quot; title=&amp;quot;“북한·일본보다 중국이 싫다”…한국 MZ ‘반중 정서’ 확대 [뉴쉐린가이드] / KBS&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amp;lt;&amp;lt;국내 현황에 관련하여 [https://ncov.kdca.go.kr/pot/www/CVID19/CVID19_INFO/DFNTN.jsp# 감염병포털],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924441&amp;amp;cid=42107&amp;amp;categoryId=42107 한경 경제용어사전], 겨울철 유행 상황 본다, 코로나19 위기단계 '경계' 유지 https://www.fnnews.com/news/202312150852304942 참조&amp;gt;&amp;gt;&lt;br /&gt;
&amp;lt;&amp;lt;국외 현황에 관련하여 [https://data.who.int/dashboards/covid19/deaths?m49=001&amp;amp;n=o WHO Dashboard]. 3년 4개월 만에 코로나19 국제공중보건위기상황 해제...이달 중 하향 조정돼 https://www.jeonm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77871 참조&amp;gt;&amp;gt;&lt;br /&gt;
&amp;lt;&amp;lt;전반적 영향에 관련하여 늘어나는 '수포자'…고2 '기초학력 미달' 17%, 2017년 이후 최고(종합) https://www.yna.co.kr/view/AKR20240617072651530?input=1195m 참조&amp;gt;&amp;gt;&lt;br /&gt;
&amp;lt;&amp;lt;정치적 영향에 관련하여 일시 폐쇄됐던 국회, 오늘 정상화…'코로나 3법' 처리 https://www.hankyung.com/politics/article/2020022650097, 다음주에 '코로나19' 확진되면 총선 투표 못한다? https://www.moneys.co.kr/article/2020032315228026814?outlink=1, '84%' 찍었던 文 지지율 '45%'로 마무리..직선제 후 최고(종합) https://v.daum.net/v/20220506103833427?x_trkm=tx_imp=dG9yb3NfY2xvdWRfYWxwaGE=&amp;amp;x_hk=NDBhOGMyNmI3YjUzNmRkNjc3 참조&amp;gt;&amp;gt;&lt;br /&gt;
&amp;lt;&amp;lt;중국에 대한 인식에 관련하여 &amp;quot;한국인 81%가 중국에 부정적…56개국중 반중정서 가장 강해&amp;quot;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1/0013666727?sid=104,2030 &amp;quot;북한보다 중국이 더 싫어&amp;quot;…91%가 '비호감' https://www.youtube.com/watch?v=PDiawBnh4sw 참조&amp;gt;&amp;gt;&lt;br /&gt;
==분류==&lt;br /&gt;
[[분류:개항부터_현재까지의_정치_교류]] [[분류:소금토마토]]&lt;/div&gt;</summary>
		<author><name>소금토마토</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BD%94%EB%A1%9C%EB%82%9819&amp;diff=42868</id>
		<title>코로나19</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BD%94%EB%A1%9C%EB%82%9819&amp;diff=42868"/>
		<updated>2024-06-23T12:33:1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소금토마토: /*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파일:코로나19.jpg|500px|코로나19]] &amp;lt;/br&amp;gt;&lt;br /&gt;
코로나19 바이러스를 표현한 이미지이다.&lt;br /&gt;
&lt;br /&gt;
==개요==&lt;br /&gt;
2020년대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였던 전염성 호흡기 감염실환이다. 2019년 12월 우한에서 처음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후 중국 전역을 거쳐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세계보건기구 WHO의 감염병 위험도 등급 최고 등급인 펜데믹 등급을 받아 일명 '코로나 펜데믹'으로 불린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현황==&lt;br /&gt;
===국내 현황===&lt;br /&gt;
감염병포털에서 제공하는 코로나19 누적확진자 자료에 따르면 2023년 8월 31일 기준 누적확진자수는 3457254명이며 그 중 사망자는 35606명이다. 사망자의 경우 2022년이 26363명으로 가장 많았다. WHO Dashboard 통계에 따르면 백신 접종률은 전체 인구의 87%이다.&lt;br /&gt;
&lt;br /&gt;
대한민국의 감염병 위기 경보 수준은 그 정도에 따라 관심, 주의, 경계, 심각 단계로 구분된다. 2020년 2월 23일 대응 수준이 경계 단계에서 심각 단계로 격상되었다. 이후 2023년 6월부터 경계 단계로 하향되었으며, 2024년 5월을 기점으로 관심 단계로 대폭 하향되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국외 현황===&lt;br /&gt;
WHO Dashboard 통계에 따르면 2024년 6월 기준 전 세계 확진자는 누적 775615736명이며, 그 중 사망자는 7051323명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발원지인 중국의 경우 누적 확진자는 99360533명, 그 중 사망자는 112248명이다. 2020년 12월 14일 처음 접종이 시작된 백신 접종의 경우 전 세계적으로 56%의 인구가 접종이 완료되었으며, 중국 내의 백신 접종률은 전체 인구의 87%이다.&lt;br /&gt;
&lt;br /&gt;
세계보건기구 WHO는 2020년 1월 30일에 국제공중보건위기상황을 선포하였으며, 3년 4개월 동안 유지되다가 지난 2023년 5월 이를 공식 종료하였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당시 한국 정치에 미친 영향==&lt;br /&gt;
당시 청와대는 정상회담이 하나의 합의점에도 이르지 못하고 완전히 결렬될 것이라는 결과를 전혀 예상치 못하고 여러 기대 점을 내세운 상태였는데 그만큼 회담 결과에 대한 반발도 거셌다.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은 회담 결렬 이후 정부가 설레발을 쳐 국민들의 기대감을 증폭시켰으면서 아무 결과도 내지 못했다며 비판했다. &lt;br /&gt;
회담 결렬은 문재인 정부에 큰 악재가 되어 여러 악재로 지지율 하락 폭이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의 반등을 실패하게 만들었다. 오히려 회담은 아무 성과 없이 끝났지만, 회담 직전까지 회담 결과에 대해 긍정적인 예상만을 제시고 있었다는 점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북미 관계 조율자로서 입지가 불안해졌다. 그리고 그 결과로 야당의 비판이 심해졌고 지지율 반등에도 어려움을 겪었다.&lt;br /&gt;
세 차례에 걸친 남북정상회담과 남북평화무드로 대북관계에서는 호평일색이었고 그를 기반으로 지지율 고공행진을 이어가던 문재인 정부의 지지율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고 문재인 정부의 대북관계에 대한 물음표가 생기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정권 교체의 잠재적 원인 중 하나로서, 만약 회담이 성공하여 계속 화해무드가 이어졌다면 정권교체가 안 되었을 수도 있다는 전망 또한 존재한다. 어쨌든 회담 결렬 이후로 북한과의 관계에 큰 진전이 없고 서서히 악화되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에는 긴장감이 극도로 고조되어 남북관계는 최악을 달리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관련 영상==&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900&amp;quot; height=&amp;quot;480&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4X0_jzRuG9g&amp;quot; title=&amp;quot;2차 북미 정상회담 ‘결렬’…‘비핵화 조치·제재’ 이견 / KBS뉴스(News)&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amp;lt;&amp;lt;국내 현황에 관련하여 [https://ncov.kdca.go.kr/pot/www/CVID19/CVID19_INFO/DFNTN.jsp# 감염병포털],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924441&amp;amp;cid=42107&amp;amp;categoryId=42107 한경 경제용어사전], 겨울철 유행 상황 본다, 코로나19 위기단계 '경계' 유지 https://www.fnnews.com/news/202312150852304942 참조&amp;gt;&amp;gt;&lt;br /&gt;
&amp;lt;&amp;lt;국외 현황과 관련하여 [https://data.who.int/dashboards/covid19/deaths?m49=001&amp;amp;n=o WHO Dashboard]. 3년 4개월 만에 코로나19 국제공중보건위기상황 해제...이달 중 하향 조정돼 https://www.jeonm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77871 참조&amp;gt;&amp;gt;&lt;br /&gt;
&lt;br /&gt;
==분류==&lt;br /&gt;
[[분류:개항부터_현재까지의_정치_교류]] [[분류:소금토마토]]&lt;/div&gt;</summary>
		<author><name>소금토마토</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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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코로나19</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BD%94%EB%A1%9C%EB%82%9819&amp;diff=42867"/>
		<updated>2024-06-23T12:29:0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소금토마토: /* 결렬 이유 */&lt;/p&gt;
&lt;hr /&gt;
&lt;div&gt;[[파일:코로나19.jpg|500px|코로나19]] &amp;lt;/br&amp;gt;&lt;br /&gt;
코로나19 바이러스를 표현한 이미지이다.&lt;br /&gt;
&lt;br /&gt;
==개요==&lt;br /&gt;
2020년대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였던 전염성 호흡기 감염실환이다. 2019년 12월 우한에서 처음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후 중국 전역을 거쳐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세계보건기구 WHO의 감염병 위험도 등급 최고 등급인 펜데믹 등급을 받아 일명 '코로나 펜데믹'으로 불린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현황==&lt;br /&gt;
===국내 현황===&lt;br /&gt;
감염병포털에서 제공하는 코로나19 누적확진자 자료에 따르면 2023년 8월 31일 기준 누적확진자수는 3457254명이며 그 중 사망자는 35606명이다. 사망자의 경우 2022년이 26363명으로 가장 많았다. WHO Dashboard 통계에 따르면 백신 접종률은 전체 인구의 87%이다.&lt;br /&gt;
&lt;br /&gt;
대한민국의 감염병 위기 경보 수준은 그 정도에 따라 관심, 주의, 경계, 심각 단계로 구분된다. 2020년 2월 23일 대응 수준이 경계 단계에서 심각 단계로 격상되었다. 이후 2023년 6월부터 경계 단계로 하향되었으며, 2024년 5월을 기점으로 관심 단계로 대폭 하향되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국외 현황===&lt;br /&gt;
WHO Dashboard 통계에 따르면 2024년 6월 기준 전 세계 확진자는 누적 775615736명이며, 그 중 사망자는 7051323명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발원지인 중국의 경우 누적 확진자는 99360533명, 그 중 사망자는 112248명이다. 2020년 12월 14일 처음 접종이 시작된 백신 접종의 경우 전 세계적으로 56%의 인구가 접종이 완료되었으며, 중국 내의 백신 접종률은 전체 인구의 87%이다.&lt;br /&gt;
&lt;br /&gt;
세계보건기구 WHO는 2020년 1월 30일에 국제공중보건위기상황을 선포하였으며, 3년 4개월 동안 유지되다가 지난 2023년 5월 이를 공식 종료하였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당시 한국 정치에 미친 영향==&lt;br /&gt;
당시 청와대는 정상회담이 하나의 합의점에도 이르지 못하고 완전히 결렬될 것이라는 결과를 전혀 예상치 못하고 여러 기대 점을 내세운 상태였는데 그만큼 회담 결과에 대한 반발도 거셌다.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은 회담 결렬 이후 정부가 설레발을 쳐 국민들의 기대감을 증폭시켰으면서 아무 결과도 내지 못했다며 비판했다. &lt;br /&gt;
회담 결렬은 문재인 정부에 큰 악재가 되어 여러 악재로 지지율 하락 폭이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의 반등을 실패하게 만들었다. 오히려 회담은 아무 성과 없이 끝났지만, 회담 직전까지 회담 결과에 대해 긍정적인 예상만을 제시고 있었다는 점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북미 관계 조율자로서 입지가 불안해졌다. 그리고 그 결과로 야당의 비판이 심해졌고 지지율 반등에도 어려움을 겪었다.&lt;br /&gt;
세 차례에 걸친 남북정상회담과 남북평화무드로 대북관계에서는 호평일색이었고 그를 기반으로 지지율 고공행진을 이어가던 문재인 정부의 지지율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고 문재인 정부의 대북관계에 대한 물음표가 생기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정권 교체의 잠재적 원인 중 하나로서, 만약 회담이 성공하여 계속 화해무드가 이어졌다면 정권교체가 안 되었을 수도 있다는 전망 또한 존재한다. 어쨌든 회담 결렬 이후로 북한과의 관계에 큰 진전이 없고 서서히 악화되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에는 긴장감이 극도로 고조되어 남북관계는 최악을 달리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관련 영상==&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900&amp;quot; height=&amp;quot;480&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4X0_jzRuG9g&amp;quot; title=&amp;quot;2차 북미 정상회담 ‘결렬’…‘비핵화 조치·제재’ 이견 / KBS뉴스(News)&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amp;lt;&amp;lt;개요 및 배경과 관련하여는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1/0010666063?sid=100 참조&amp;gt;&amp;gt;&lt;br /&gt;
&amp;lt;&amp;lt;결렬 이유와 관련하여는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884021.html 참조&amp;gt;&amp;gt;&lt;br /&gt;
==분류==&lt;br /&gt;
[[분류:개항부터_현재까지의_정치_교류]] [[분류:소금토마토]]&lt;/div&gt;</summary>
		<author><name>소금토마토</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BD%94%EB%A1%9C%EB%82%9819&amp;diff=42866</id>
		<title>코로나19</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BD%94%EB%A1%9C%EB%82%9819&amp;diff=42866"/>
		<updated>2024-06-23T12:28:5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소금토마토: /* 국외 현황 */&lt;/p&gt;
&lt;hr /&gt;
&lt;div&gt;[[파일:코로나19.jpg|500px|코로나19]] &amp;lt;/br&amp;gt;&lt;br /&gt;
코로나19 바이러스를 표현한 이미지이다.&lt;br /&gt;
&lt;br /&gt;
==개요==&lt;br /&gt;
2020년대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였던 전염성 호흡기 감염실환이다. 2019년 12월 우한에서 처음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후 중국 전역을 거쳐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세계보건기구 WHO의 감염병 위험도 등급 최고 등급인 펜데믹 등급을 받아 일명 '코로나 펜데믹'으로 불린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현황==&lt;br /&gt;
===국내 현황===&lt;br /&gt;
감염병포털에서 제공하는 코로나19 누적확진자 자료에 따르면 2023년 8월 31일 기준 누적확진자수는 3457254명이며 그 중 사망자는 35606명이다. 사망자의 경우 2022년이 26363명으로 가장 많았다. WHO Dashboard 통계에 따르면 백신 접종률은 전체 인구의 87%이다.&lt;br /&gt;
&lt;br /&gt;
대한민국의 감염병 위기 경보 수준은 그 정도에 따라 관심, 주의, 경계, 심각 단계로 구분된다. 2020년 2월 23일 대응 수준이 경계 단계에서 심각 단계로 격상되었다. 이후 2023년 6월부터 경계 단계로 하향되었으며, 2024년 5월을 기점으로 관심 단계로 대폭 하향되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국외 현황===&lt;br /&gt;
WHO Dashboard 통계에 따르면 2024년 6월 기준 전 세계 확진자는 누적 775615736명이며, 그 중 사망자는 7051323명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발원지인 중국의 경우 누적 확진자는 99360533명, 그 중 사망자는 112248명이다. 2020년 12월 14일 처음 접종이 시작된 백신 접종의 경우 전 세계적으로 56%의 인구가 접종이 완료되었으며, 중국 내의 백신 접종률은 전체 인구의 87%이다.&lt;br /&gt;
&lt;br /&gt;
세계보건기구 WHO는 2020년 1월 30일에 국제공중보건위기상황을 선포하였으며, 3년 4개월 동안 유지되다가 지난 2023년 5월 이를 공식 종료하였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결렬 이유===&lt;br /&gt;
그러나 회담은 완전히 결렬되었다. 가장 큰 이유는 북한의 요구가 미국 측이 들어주기에는 과도했던 것이다. 북한은 미국에 핵 시설 전반을 공개하지는 않고 있었으나, 미국은 이미 북한의 핵시설들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은 북한이 내세운 핵 시설 철거로는 만족할 수 없었고 더 많은 핵시설의 완전한 철거를 원했다. 또한, 북한은 자신들이 내세운 것에 대한 요구로 제재의 전체 해제를 들었는데, 북한의 핵시설과 잠재적 위협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는 미국 측에 과도한 요구였고 이를 받아들일 경우,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율에도 악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었다. 그에 따라 재협상의 여지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두 국가는 어느 합의점에도 이르지 못하였다. &lt;br /&gt;
&amp;lt;/br&amp;gt;&lt;br /&gt;
==당시 한국 정치에 미친 영향==&lt;br /&gt;
당시 청와대는 정상회담이 하나의 합의점에도 이르지 못하고 완전히 결렬될 것이라는 결과를 전혀 예상치 못하고 여러 기대 점을 내세운 상태였는데 그만큼 회담 결과에 대한 반발도 거셌다.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은 회담 결렬 이후 정부가 설레발을 쳐 국민들의 기대감을 증폭시켰으면서 아무 결과도 내지 못했다며 비판했다. &lt;br /&gt;
회담 결렬은 문재인 정부에 큰 악재가 되어 여러 악재로 지지율 하락 폭이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의 반등을 실패하게 만들었다. 오히려 회담은 아무 성과 없이 끝났지만, 회담 직전까지 회담 결과에 대해 긍정적인 예상만을 제시고 있었다는 점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북미 관계 조율자로서 입지가 불안해졌다. 그리고 그 결과로 야당의 비판이 심해졌고 지지율 반등에도 어려움을 겪었다.&lt;br /&gt;
세 차례에 걸친 남북정상회담과 남북평화무드로 대북관계에서는 호평일색이었고 그를 기반으로 지지율 고공행진을 이어가던 문재인 정부의 지지율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고 문재인 정부의 대북관계에 대한 물음표가 생기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정권 교체의 잠재적 원인 중 하나로서, 만약 회담이 성공하여 계속 화해무드가 이어졌다면 정권교체가 안 되었을 수도 있다는 전망 또한 존재한다. 어쨌든 회담 결렬 이후로 북한과의 관계에 큰 진전이 없고 서서히 악화되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에는 긴장감이 극도로 고조되어 남북관계는 최악을 달리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관련 영상==&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900&amp;quot; height=&amp;quot;480&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4X0_jzRuG9g&amp;quot; title=&amp;quot;2차 북미 정상회담 ‘결렬’…‘비핵화 조치·제재’ 이견 / KBS뉴스(News)&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amp;lt;&amp;lt;개요 및 배경과 관련하여는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1/0010666063?sid=100 참조&amp;gt;&amp;gt;&lt;br /&gt;
&amp;lt;&amp;lt;결렬 이유와 관련하여는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884021.html 참조&amp;gt;&amp;gt;&lt;br /&gt;
==분류==&lt;br /&gt;
[[분류:개항부터_현재까지의_정치_교류]] [[분류:소금토마토]]&lt;/div&gt;</summary>
		<author><name>소금토마토</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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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코로나19</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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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06-23T12:28:4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소금토마토: &lt;/p&gt;
&lt;hr /&gt;
&lt;div&gt;[[파일:코로나19.jpg|500px|코로나19]] &amp;lt;/br&amp;gt;&lt;br /&gt;
코로나19 바이러스를 표현한 이미지이다.&lt;br /&gt;
&lt;br /&gt;
==개요==&lt;br /&gt;
2020년대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였던 전염성 호흡기 감염실환이다. 2019년 12월 우한에서 처음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후 중국 전역을 거쳐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세계보건기구 WHO의 감염병 위험도 등급 최고 등급인 펜데믹 등급을 받아 일명 '코로나 펜데믹'으로 불린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현황==&lt;br /&gt;
===국내 현황===&lt;br /&gt;
감염병포털에서 제공하는 코로나19 누적확진자 자료에 따르면 2023년 8월 31일 기준 누적확진자수는 3457254명이며 그 중 사망자는 35606명이다. 사망자의 경우 2022년이 26363명으로 가장 많았다. WHO Dashboard 통계에 따르면 백신 접종률은 전체 인구의 87%이다.&lt;br /&gt;
&lt;br /&gt;
대한민국의 감염병 위기 경보 수준은 그 정도에 따라 관심, 주의, 경계, 심각 단계로 구분된다. 2020년 2월 23일 대응 수준이 경계 단계에서 심각 단계로 격상되었다. 이후 2023년 6월부터 경계 단계로 하향되었으며, 2024년 5월을 기점으로 관심 단계로 대폭 하향되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국외 현황===&lt;br /&gt;
WHO Dashboard 통계에 따르면 2024년 6월 기준 전 세계 확진자는 누적 775615736명이며, 그 중 사망자는 7051323명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발원지인 중국의 경우 누적 확진자는 99360533명, 그 중 사망자는 112248명이다. 2020년 12월 14일 처음 접종이 시작된 백신 접종의 경우 전 세계적으로 56%의 인구가 접종이 완료되었으며, 중국 내의 백신 접종률은 전체 인구의 87%이다.&lt;br /&gt;
&lt;br /&gt;
세계보건기구 WHO는 2020년 1월 30일에 국제공중보건위기상황을 선포하였으며, 3년 4개월 동안 유지되다가 지난 2023년 5월 이를 공식 종료하였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1차 북미회담과,여러 차례 남북 정상 회담의 여파로 남북은 화해 무드가 조성되었고 북미 관계도 큰 진전을 보였다. 종전 선언이 현실화 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삼국 모두에게 부풀어 있었으며, 특히, 북한은 제재의 완화 혹은 완전한 철폐, 한국과 미국은 북한의 비핵화와 종전 선언 등을 기대하고 있었다. &lt;br /&gt;
특히, 트럼프 대통령은 2차 북미정상회담을 가능한 한 빨리 개최하려고 했는데, 중간선거에서 2차 북미정상회담을 통해 이익을 얻고자 했기 때문이다. 미국민들의 관심거리이자 오랜 걱정인 북한 핵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느냐에 따라 대통령의 객관적인 지지율을 알 수 있는 중간 선거의 성패가 달려 있을 수 있었다. 이는 장기적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과 관련되었다. 따라서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과 다시 만나 회담하여 진전된 비핵화까지는 아니더라도 비핵화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합의문에 담는 것을 목표로 2차 북미회담을 계획했다.&lt;br /&gt;
북한 역시, 계속된 대북 제재로 경제가 악화된 상태에서 남북, 북미 화해 무드를 이용하여 제재를 완화 내지 해제하고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했다. 대한민국 역시 2차 북미회담을 통해 북한의 비핵화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이 제시되거나, 더 나아가 종전 선언 및 추가적 남북 정상회담 개최 등 남북 관계의 완전한 해빙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었다.&lt;br /&gt;
===결렬 이유===&lt;br /&gt;
그러나 회담은 완전히 결렬되었다. 가장 큰 이유는 북한의 요구가 미국 측이 들어주기에는 과도했던 것이다. 북한은 미국에 핵 시설 전반을 공개하지는 않고 있었으나, 미국은 이미 북한의 핵시설들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은 북한이 내세운 핵 시설 철거로는 만족할 수 없었고 더 많은 핵시설의 완전한 철거를 원했다. 또한, 북한은 자신들이 내세운 것에 대한 요구로 제재의 전체 해제를 들었는데, 북한의 핵시설과 잠재적 위협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는 미국 측에 과도한 요구였고 이를 받아들일 경우,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율에도 악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었다. 그에 따라 재협상의 여지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두 국가는 어느 합의점에도 이르지 못하였다. &lt;br /&gt;
&amp;lt;/br&amp;gt;&lt;br /&gt;
==당시 한국 정치에 미친 영향==&lt;br /&gt;
당시 청와대는 정상회담이 하나의 합의점에도 이르지 못하고 완전히 결렬될 것이라는 결과를 전혀 예상치 못하고 여러 기대 점을 내세운 상태였는데 그만큼 회담 결과에 대한 반발도 거셌다.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은 회담 결렬 이후 정부가 설레발을 쳐 국민들의 기대감을 증폭시켰으면서 아무 결과도 내지 못했다며 비판했다. &lt;br /&gt;
회담 결렬은 문재인 정부에 큰 악재가 되어 여러 악재로 지지율 하락 폭이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의 반등을 실패하게 만들었다. 오히려 회담은 아무 성과 없이 끝났지만, 회담 직전까지 회담 결과에 대해 긍정적인 예상만을 제시고 있었다는 점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북미 관계 조율자로서 입지가 불안해졌다. 그리고 그 결과로 야당의 비판이 심해졌고 지지율 반등에도 어려움을 겪었다.&lt;br /&gt;
세 차례에 걸친 남북정상회담과 남북평화무드로 대북관계에서는 호평일색이었고 그를 기반으로 지지율 고공행진을 이어가던 문재인 정부의 지지율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고 문재인 정부의 대북관계에 대한 물음표가 생기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정권 교체의 잠재적 원인 중 하나로서, 만약 회담이 성공하여 계속 화해무드가 이어졌다면 정권교체가 안 되었을 수도 있다는 전망 또한 존재한다. 어쨌든 회담 결렬 이후로 북한과의 관계에 큰 진전이 없고 서서히 악화되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에는 긴장감이 극도로 고조되어 남북관계는 최악을 달리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관련 영상==&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900&amp;quot; height=&amp;quot;480&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4X0_jzRuG9g&amp;quot; title=&amp;quot;2차 북미 정상회담 ‘결렬’…‘비핵화 조치·제재’ 이견 / KBS뉴스(News)&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amp;lt;&amp;lt;개요 및 배경과 관련하여는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1/0010666063?sid=100 참조&amp;gt;&amp;gt;&lt;br /&gt;
&amp;lt;&amp;lt;결렬 이유와 관련하여는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884021.html 참조&amp;gt;&amp;gt;&lt;br /&gt;
==분류==&lt;br /&gt;
[[분류:개항부터_현재까지의_정치_교류]] [[분류:소금토마토]]&lt;/div&gt;</summary>
		<author><name>소금토마토</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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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코로나19</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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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06-23T11:53:5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소금토마토: &lt;/p&gt;
&lt;hr /&gt;
&lt;div&gt;[[파일:코로나19.jpg|500px|코로나19]] &amp;lt;/br&amp;gt;&lt;br /&gt;
코로나19 바이러스를 표현한 이미지이다.&lt;br /&gt;
&lt;br /&gt;
==개요==&lt;br /&gt;
베트남 하노이에서 2019년 2월 27일부터 28일까지 진행된 김정은 국무위원회 위원장과 트럼프 미 대통령 간의 두 번째 정상회담이다. 1차 회담에서는 어느 정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지만, 2차 회담은 아무런 합의에 다다르지 못한 채로 결렬되었다.&amp;lt;/br&amp;gt;&lt;br /&gt;
&lt;br /&gt;
==배경==&lt;br /&gt;
===회담의 배경===&lt;br /&gt;
1차 북미회담과,여러 차례 남북 정상 회담의 여파로 남북은 화해 무드가 조성되었고 북미 관계도 큰 진전을 보였다. 종전 선언이 현실화 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삼국 모두에게 부풀어 있었으며, 특히, 북한은 제재의 완화 혹은 완전한 철폐, 한국과 미국은 북한의 비핵화와 종전 선언 등을 기대하고 있었다. &lt;br /&gt;
특히, 트럼프 대통령은 2차 북미정상회담을 가능한 한 빨리 개최하려고 했는데, 중간선거에서 2차 북미정상회담을 통해 이익을 얻고자 했기 때문이다. 미국민들의 관심거리이자 오랜 걱정인 북한 핵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느냐에 따라 대통령의 객관적인 지지율을 알 수 있는 중간 선거의 성패가 달려 있을 수 있었다. 이는 장기적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과 관련되었다. 따라서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과 다시 만나 회담하여 진전된 비핵화까지는 아니더라도 비핵화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합의문에 담는 것을 목표로 2차 북미회담을 계획했다.&lt;br /&gt;
북한 역시, 계속된 대북 제재로 경제가 악화된 상태에서 남북, 북미 화해 무드를 이용하여 제재를 완화 내지 해제하고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했다. 대한민국 역시 2차 북미회담을 통해 북한의 비핵화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이 제시되거나, 더 나아가 종전 선언 및 추가적 남북 정상회담 개최 등 남북 관계의 완전한 해빙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었다.&lt;br /&gt;
===결렬 이유===&lt;br /&gt;
그러나 회담은 완전히 결렬되었다. 가장 큰 이유는 북한의 요구가 미국 측이 들어주기에는 과도했던 것이다. 북한은 미국에 핵 시설 전반을 공개하지는 않고 있었으나, 미국은 이미 북한의 핵시설들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은 북한이 내세운 핵 시설 철거로는 만족할 수 없었고 더 많은 핵시설의 완전한 철거를 원했다. 또한, 북한은 자신들이 내세운 것에 대한 요구로 제재의 전체 해제를 들었는데, 북한의 핵시설과 잠재적 위협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는 미국 측에 과도한 요구였고 이를 받아들일 경우,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율에도 악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었다. 그에 따라 재협상의 여지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두 국가는 어느 합의점에도 이르지 못하였다.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당시 한국 정치에 미친 영향==&lt;br /&gt;
당시 청와대는 정상회담이 하나의 합의점에도 이르지 못하고 완전히 결렬될 것이라는 결과를 전혀 예상치 못하고 여러 기대 점을 내세운 상태였는데 그만큼 회담 결과에 대한 반발도 거셌다.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은 회담 결렬 이후 정부가 설레발을 쳐 국민들의 기대감을 증폭시켰으면서 아무 결과도 내지 못했다며 비판했다. &lt;br /&gt;
회담 결렬은 문재인 정부에 큰 악재가 되어 여러 악재로 지지율 하락 폭이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의 반등을 실패하게 만들었다. 오히려 회담은 아무 성과 없이 끝났지만, 회담 직전까지 회담 결과에 대해 긍정적인 예상만을 제시고 있었다는 점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북미 관계 조율자로서 입지가 불안해졌다. 그리고 그 결과로 야당의 비판이 심해졌고 지지율 반등에도 어려움을 겪었다.&lt;br /&gt;
세 차례에 걸친 남북정상회담과 남북평화무드로 대북관계에서는 호평일색이었고 그를 기반으로 지지율 고공행진을 이어가던 문재인 정부의 지지율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고 문재인 정부의 대북관계에 대한 물음표가 생기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정권 교체의 잠재적 원인 중 하나로서, 만약 회담이 성공하여 계속 화해무드가 이어졌다면 정권교체가 안 되었을 수도 있다는 전망 또한 존재한다. 어쨌든 회담 결렬 이후로 북한과의 관계에 큰 진전이 없고 서서히 악화되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에는 긴장감이 극도로 고조되어 남북관계는 최악을 달리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관련 영상==&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900&amp;quot; height=&amp;quot;480&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4X0_jzRuG9g&amp;quot; title=&amp;quot;2차 북미 정상회담 ‘결렬’…‘비핵화 조치·제재’ 이견 / KBS뉴스(News)&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amp;lt;&amp;lt;개요 및 배경과 관련하여는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1/0010666063?sid=100 참조&amp;gt;&amp;gt;&lt;br /&gt;
&amp;lt;&amp;lt;결렬 이유와 관련하여는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884021.html 참조&amp;gt;&amp;gt;&lt;br /&gt;
==분류==&lt;br /&gt;
[[분류:개항부터_현재까지의_정치_교류]] [[분류:낭만가]]&lt;/div&gt;</summary>
		<author><name>소금토마토</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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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파일:코로나19.jpg</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D%8C%8C%EC%9D%BC:%EC%BD%94%EB%A1%9C%EB%82%9819.jpg&amp;diff=42863"/>
		<updated>2024-06-23T11:34:1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소금토마토: &lt;/p&gt;
&lt;hr /&gt;
&lt;div&gt;&lt;/div&gt;</summary>
		<author><name>소금토마토</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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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BD%94%EB%A1%9C%EB%82%9819&amp;diff=42862</id>
		<title>코로나19</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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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06-23T11:32:5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소금토마토: &lt;/p&gt;
&lt;hr /&gt;
&lt;div&gt;[[파일:북미회담결렬.jpeg|500px|북미회담결렬]] &amp;lt;/br&amp;gt;&lt;br /&gt;
등을 돌리고 있는 것으로 표현된 김정은 국무위원장회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이다.&lt;br /&gt;
&lt;br /&gt;
==개요==&lt;br /&gt;
베트남 하노이에서 2019년 2월 27일부터 28일까지 진행된 김정은 국무위원회 위원장과 트럼프 미 대통령 간의 두 번째 정상회담이다. 1차 회담에서는 어느 정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지만, 2차 회담은 아무런 합의에 다다르지 못한 채로 결렬되었다.&amp;lt;/br&amp;gt;&lt;br /&gt;
&lt;br /&gt;
==배경==&lt;br /&gt;
===회담의 배경===&lt;br /&gt;
1차 북미회담과,여러 차례 남북 정상 회담의 여파로 남북은 화해 무드가 조성되었고 북미 관계도 큰 진전을 보였다. 종전 선언이 현실화 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삼국 모두에게 부풀어 있었으며, 특히, 북한은 제재의 완화 혹은 완전한 철폐, 한국과 미국은 북한의 비핵화와 종전 선언 등을 기대하고 있었다. &lt;br /&gt;
특히, 트럼프 대통령은 2차 북미정상회담을 가능한 한 빨리 개최하려고 했는데, 중간선거에서 2차 북미정상회담을 통해 이익을 얻고자 했기 때문이다. 미국민들의 관심거리이자 오랜 걱정인 북한 핵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느냐에 따라 대통령의 객관적인 지지율을 알 수 있는 중간 선거의 성패가 달려 있을 수 있었다. 이는 장기적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과 관련되었다. 따라서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과 다시 만나 회담하여 진전된 비핵화까지는 아니더라도 비핵화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합의문에 담는 것을 목표로 2차 북미회담을 계획했다.&lt;br /&gt;
북한 역시, 계속된 대북 제재로 경제가 악화된 상태에서 남북, 북미 화해 무드를 이용하여 제재를 완화 내지 해제하고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했다. 대한민국 역시 2차 북미회담을 통해 북한의 비핵화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이 제시되거나, 더 나아가 종전 선언 및 추가적 남북 정상회담 개최 등 남북 관계의 완전한 해빙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었다.&lt;br /&gt;
===결렬 이유===&lt;br /&gt;
그러나 회담은 완전히 결렬되었다. 가장 큰 이유는 북한의 요구가 미국 측이 들어주기에는 과도했던 것이다. 북한은 미국에 핵 시설 전반을 공개하지는 않고 있었으나, 미국은 이미 북한의 핵시설들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은 북한이 내세운 핵 시설 철거로는 만족할 수 없었고 더 많은 핵시설의 완전한 철거를 원했다. 또한, 북한은 자신들이 내세운 것에 대한 요구로 제재의 전체 해제를 들었는데, 북한의 핵시설과 잠재적 위협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는 미국 측에 과도한 요구였고 이를 받아들일 경우,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율에도 악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었다. 그에 따라 재협상의 여지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두 국가는 어느 합의점에도 이르지 못하였다.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당시 한국 정치에 미친 영향==&lt;br /&gt;
당시 청와대는 정상회담이 하나의 합의점에도 이르지 못하고 완전히 결렬될 것이라는 결과를 전혀 예상치 못하고 여러 기대 점을 내세운 상태였는데 그만큼 회담 결과에 대한 반발도 거셌다.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은 회담 결렬 이후 정부가 설레발을 쳐 국민들의 기대감을 증폭시켰으면서 아무 결과도 내지 못했다며 비판했다. &lt;br /&gt;
회담 결렬은 문재인 정부에 큰 악재가 되어 여러 악재로 지지율 하락 폭이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의 반등을 실패하게 만들었다. 오히려 회담은 아무 성과 없이 끝났지만, 회담 직전까지 회담 결과에 대해 긍정적인 예상만을 제시고 있었다는 점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북미 관계 조율자로서 입지가 불안해졌다. 그리고 그 결과로 야당의 비판이 심해졌고 지지율 반등에도 어려움을 겪었다.&lt;br /&gt;
세 차례에 걸친 남북정상회담과 남북평화무드로 대북관계에서는 호평일색이었고 그를 기반으로 지지율 고공행진을 이어가던 문재인 정부의 지지율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고 문재인 정부의 대북관계에 대한 물음표가 생기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정권 교체의 잠재적 원인 중 하나로서, 만약 회담이 성공하여 계속 화해무드가 이어졌다면 정권교체가 안 되었을 수도 있다는 전망 또한 존재한다. 어쨌든 회담 결렬 이후로 북한과의 관계에 큰 진전이 없고 서서히 악화되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에는 긴장감이 극도로 고조되어 남북관계는 최악을 달리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관련 영상==&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900&amp;quot; height=&amp;quot;480&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4X0_jzRuG9g&amp;quot; title=&amp;quot;2차 북미 정상회담 ‘결렬’…‘비핵화 조치·제재’ 이견 / KBS뉴스(News)&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amp;lt;&amp;lt;개요 및 배경과 관련하여는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1/0010666063?sid=100 참조&amp;gt;&amp;gt;&lt;br /&gt;
&amp;lt;&amp;lt;결렬 이유와 관련하여는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884021.html 참조&amp;gt;&amp;gt;&lt;br /&gt;
==분류==&lt;br /&gt;
[[분류:개항부터_현재까지의_정치_교류]] [[분류:낭만가]]&lt;/div&gt;</summary>
		<author><name>소금토마토</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E%84%EC%98%A4%EA%B5%B0%EB%9E%80&amp;diff=42861</id>
		<title>임오군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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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06-22T15:20:0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소금토마토: &lt;/p&gt;
&lt;hr /&gt;
&lt;div&gt;[[파일:임오군란.jpeg|500px|]]&lt;br /&gt;
&lt;br /&gt;
신식 군대인 별기군의 모습이다.&lt;br /&gt;
&lt;br /&gt;
=='''요약'''==&lt;br /&gt;
 1882년(고종 19) 6월 9일 신식 군대(별기군)와의 차별에 분노한 구식 군대가 일으킨 병란.&amp;lt;/br&amp;gt; &lt;br /&gt;
 &lt;br /&gt;
==배경==&lt;br /&gt;
1876년(고종 13)에 맺어진 한 · 일수호조약(일명 강화도조약)으로 인해 대원군이 취한 쇄국정책이 무너지고, 개화파(開化派)와 수구파(守舊派)의 대립이 날카롭게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왕의 친정으로 정권을 내놓은 대원군은 척족인 민씨일파를 내치고 다시 집권할 기회를 엿보고 있는 중이었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발단==&lt;br /&gt;
신식군대를 양성하는 별기군(別技軍)이 급료와 보급에서 좋은 대우를 받는 데 비해 구식군대인 무위영(武衛營) · 장어영(壯禦營) 2영의 군졸들은 13달 동안 봉급미를 받지 못해 불만이 높았다. 그러던 차에 겨우 한달치의 급료를 받게 되었으나, 그것마저 선혜청(宣惠廳) 고지기의 농간으로 말수가 턱없이 부족한데다 모래가 반 넘어 섞여 있었다. 이에 격분한 구식군졸들이 고지기를 때려 부상을 입히고 선혜청 당상(堂上) 민겸호(閔謙鎬)의 집으로 몰려가 저택을 파괴하고 폭동을 일으켰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경과==&lt;br /&gt;
사태가 이에 이르자 난병들은 대원군에게 진정하기 위해 운현궁(雲峴宮)으로 몰려와 애소했다. 대원군은 겉으로는 난병을 달랬지만, 한편으로는 심복인 허욱을 시켜 그들을 지휘케 했다. 그리하여 군민의 불평은 대원군과 연결되어 민씨 및 일본 세력의 배척운동으로 확대되었다. 군민들은 별기군 병영으로 몰려가 일본인 교련관 호리모토(掘本禮造) 공병소위를 죽이고, 민중과 합세하여 일본 공사관(서대문 밖 청수관)을 포위, 불을 지르고 일본순사 등 13명의 일인을 살해했다. 그러나 하나부사(花房義質) 공사 등 공관원들은 모두 인천으로 도망쳐서 영국 배의 도움으로 본국으로 돌아갔다.&lt;br /&gt;
&lt;br /&gt;
이튿날 더욱 강력해진 군민은 대원군의 밀명에 따라 영돈령부사 이최응(李最應) 등을 살해하고, 명성황후를 제거하기 위해 창덕궁 돈화문 안으로 난입했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궁녀의 옷으로 변장한 후 궁궐을 탈출, 충주 장호원(長湖院)의 충주목사 민응식(閔應植)의 집으로 피신했다. 사태가 위급함을 느낀 고종은 전권을 대원군에게 맡겨 반란을 수습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대원군을 불러들였다. 이리하여 왕명으로 정권을 손에 넣은 대원군은 반란을 진정시키고 군제를 개편하는 등 군란의 뒷수습에 나섰지만, 민씨일파의 청원을 받아들인 청나라가 재빨리 군대를 파견함으로써 그의 재집권은 단명에 그치고 말았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결과==&lt;br /&gt;
청나라는 이 난의 책임을 물어 대원군을 톈진(天津)으로 납치해갔으며, 일본은 조선정부에 강력한 위협을 가해 주모자 처벌과 손해 배상을 내용으로 하는 제물포조약을 맺게 했다. 군변으로 시작된 이 난은 결국 대외적으로는 청나라와 일본의 조선에 대한 권한을 확대시켜주는 결과가 되었고, 대내적으로는 개화세력과 보수세력의 갈등을 노출시켜 갑신정변의 바탕을 마련해주었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관련 자료==&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910&amp;quot; height=&amp;quot;512&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Jki0yHcShSk&amp;quot; title=&amp;quot;월급 13개월 밀린 건 선 넘었지.. &amp;amp;#39;임오군란&amp;amp;#39;으로 흥선대원군이 복귀 후 한 일! #벌거벗은한국사 EP.41 | tvN STORY 230201 방송&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19497&amp;amp;cid=62048&amp;amp;categoryId=62048 한국근현대사사전]&lt;br /&gt;
&lt;br /&gt;
==분류==&lt;br /&gt;
[[분류:개항부터_현재까지의_정치_교류]] [[분류:소금토마토]]&lt;/div&gt;</summary>
		<author><name>소금토마토</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E%84%EC%98%A4%EA%B5%B0%EB%9E%80&amp;diff=42860</id>
		<title>임오군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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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06-22T15:19:5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소금토마토: &lt;/p&gt;
&lt;hr /&gt;
&lt;div&gt;[[파일:임오군란.jpeg|500px|]]&lt;br /&gt;
신식 군대인 별기군의 모습이다.&lt;br /&gt;
&lt;br /&gt;
=='''요약'''==&lt;br /&gt;
 1882년(고종 19) 6월 9일 신식 군대(별기군)와의 차별에 분노한 구식 군대가 일으킨 병란.&amp;lt;/br&amp;gt; &lt;br /&gt;
 &lt;br /&gt;
==배경==&lt;br /&gt;
1876년(고종 13)에 맺어진 한 · 일수호조약(일명 강화도조약)으로 인해 대원군이 취한 쇄국정책이 무너지고, 개화파(開化派)와 수구파(守舊派)의 대립이 날카롭게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왕의 친정으로 정권을 내놓은 대원군은 척족인 민씨일파를 내치고 다시 집권할 기회를 엿보고 있는 중이었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발단==&lt;br /&gt;
신식군대를 양성하는 별기군(別技軍)이 급료와 보급에서 좋은 대우를 받는 데 비해 구식군대인 무위영(武衛營) · 장어영(壯禦營) 2영의 군졸들은 13달 동안 봉급미를 받지 못해 불만이 높았다. 그러던 차에 겨우 한달치의 급료를 받게 되었으나, 그것마저 선혜청(宣惠廳) 고지기의 농간으로 말수가 턱없이 부족한데다 모래가 반 넘어 섞여 있었다. 이에 격분한 구식군졸들이 고지기를 때려 부상을 입히고 선혜청 당상(堂上) 민겸호(閔謙鎬)의 집으로 몰려가 저택을 파괴하고 폭동을 일으켰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경과==&lt;br /&gt;
사태가 이에 이르자 난병들은 대원군에게 진정하기 위해 운현궁(雲峴宮)으로 몰려와 애소했다. 대원군은 겉으로는 난병을 달랬지만, 한편으로는 심복인 허욱을 시켜 그들을 지휘케 했다. 그리하여 군민의 불평은 대원군과 연결되어 민씨 및 일본 세력의 배척운동으로 확대되었다. 군민들은 별기군 병영으로 몰려가 일본인 교련관 호리모토(掘本禮造) 공병소위를 죽이고, 민중과 합세하여 일본 공사관(서대문 밖 청수관)을 포위, 불을 지르고 일본순사 등 13명의 일인을 살해했다. 그러나 하나부사(花房義質) 공사 등 공관원들은 모두 인천으로 도망쳐서 영국 배의 도움으로 본국으로 돌아갔다.&lt;br /&gt;
&lt;br /&gt;
이튿날 더욱 강력해진 군민은 대원군의 밀명에 따라 영돈령부사 이최응(李最應) 등을 살해하고, 명성황후를 제거하기 위해 창덕궁 돈화문 안으로 난입했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궁녀의 옷으로 변장한 후 궁궐을 탈출, 충주 장호원(長湖院)의 충주목사 민응식(閔應植)의 집으로 피신했다. 사태가 위급함을 느낀 고종은 전권을 대원군에게 맡겨 반란을 수습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대원군을 불러들였다. 이리하여 왕명으로 정권을 손에 넣은 대원군은 반란을 진정시키고 군제를 개편하는 등 군란의 뒷수습에 나섰지만, 민씨일파의 청원을 받아들인 청나라가 재빨리 군대를 파견함으로써 그의 재집권은 단명에 그치고 말았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결과==&lt;br /&gt;
청나라는 이 난의 책임을 물어 대원군을 톈진(天津)으로 납치해갔으며, 일본은 조선정부에 강력한 위협을 가해 주모자 처벌과 손해 배상을 내용으로 하는 제물포조약을 맺게 했다. 군변으로 시작된 이 난은 결국 대외적으로는 청나라와 일본의 조선에 대한 권한을 확대시켜주는 결과가 되었고, 대내적으로는 개화세력과 보수세력의 갈등을 노출시켜 갑신정변의 바탕을 마련해주었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관련 자료==&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910&amp;quot; height=&amp;quot;512&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Jki0yHcShSk&amp;quot; title=&amp;quot;월급 13개월 밀린 건 선 넘었지.. &amp;amp;#39;임오군란&amp;amp;#39;으로 흥선대원군이 복귀 후 한 일! #벌거벗은한국사 EP.41 | tvN STORY 230201 방송&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19497&amp;amp;cid=62048&amp;amp;categoryId=62048 한국근현대사사전]&lt;br /&gt;
&lt;br /&gt;
==분류==&lt;br /&gt;
[[분류:개항부터_현재까지의_정치_교류]] [[분류:소금토마토]]&lt;/div&gt;</summary>
		<author><name>소금토마토</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9F%AC%EC%8B%9C%EC%95%84&amp;diff=42859</id>
		<title>러시아</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9F%AC%EC%8B%9C%EC%95%84&amp;diff=42859"/>
		<updated>2024-06-22T15:09:4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소금토마토: /* 러시아와 한국의 정치 교류 */&lt;/p&gt;
&lt;hr /&gt;
&lt;div&gt;러시아는 동유럽과 북아시아에 위치한 국가이며 세계에서 가장 큰 면적을 가진 나라이다.&lt;br /&gt;
=러시아와 한국의 정치 교류=&lt;br /&gt;
===='''잠시나마 친러관계를 맺다'''====&lt;br /&gt;
----&lt;br /&gt;
&lt;br /&gt;
1884년 조선과 러시아 사이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1711 조로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며 개항 이후 조선과 러시아가 본격적인 수교를 시작한다. 러시아는 의외로 서구 열강 중 가장 조선을 자국 식민지로 삼고자 하는 국가였기 때문에, 점차 조선에 영향력을 확대해 가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영국이 러시아를 견제하는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1825 거문도 사건]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기존에 고종의 왕비인 명성황후는 이미 러시아와 우호적 관계를 맺고자 했는데, 이를 비롯한 여러 가지 요인을 말미암아 일본에서는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2948 을미사변]을 일으킨다. 이 사건을 계기로 고종은 국내 친일파 세력을 피하기 위해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1년간 피난하게 되는데, 이것이 [[아관파천]]이다. 이 기간 동안 일본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만큼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해졌다. 그러나 러시아와 일본 간 한반도의 주도권을 두고 벌인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7238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면서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하고, 이후 조선은 친일파들의 주도 하에 1910년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른 우호 또는 적대'''====&lt;br /&gt;
----&lt;br /&gt;
&lt;br /&gt;
일제 강점기 당시 러시아는 만주와 더불어 독립운동의 근거지 중 하나였다. 러시아는 러시아 혁명과 러시아 내전을 차례로 겪는 과정에서 백군 진영에 지원군을 보낸 연합군을 상대해야 했는데, 연합군에는 일본이 포함되어 있었고 그 과정에서 한국의 독립운동 단체들과 이해관계가 맞아 잠시나마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해 준 바 있다. 자세한 사항은 [[러시아의 독립운동 지원]] 참조.&lt;br /&gt;
&lt;br /&gt;
그러나 러시아 내전이 정리된 이후로 소련은 독립군에게서 점점 지원을 거둬들였고, 끝내[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2193 자유시 참변]이 일어난다. 이후 소련은 자신들의 러시아 지역 내 지배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당시 러시아에 이주해 살고 있던 조선의 농민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키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냉전 시대 북한과 함께 적대 관계를 형성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해방 이후 한반도 남쪽에는 [[미군정]]이, 북쪽에는 소련이 들어온다. 신탁 통치 기간이 지나고 여러 정치적 변혁을 겪으며 좌익과 우익 계열은 완전히 분리되었고 남한과 북한 정부가 각각 수립되며 완전한 분단이 이루어진다. 소련은 남한을 국가로 승인하지 않고, 북한만을 한반도 유일의 합법한 정부로 여겼다. 그 과정에서 대한민국 정부는 북한을 지원하는 소련과 점점 대립하기 시작했으며, 1950년 [[한국전쟁]]이 소련의 부추김에 의해 발발하면서 대한민국과 소련은 완전한 적대관계로 돌아서게 된다. 1955년 남한의 UN 가입 시도 역시 소련에 의해 좌절된 바 있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냉전 종식과 함께 관계가 정상화되다'''====&lt;br /&gt;
----&lt;br /&gt;
&lt;br /&gt;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소련이 서방 국가들의 우호 분위기를 이어 참가를 결정하며 한국 내 소련에 대한 인식이 완화되기 시작했다. 1989년부터 시작된 [[냉전 종식]]의 영향과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이 합쳐져 시너지를 발휘해 1990년 한소정상회담을 바탕으로 다시 수교가 시작되었다. 또한 한소수교에 따라 소련이 더 이상 한국의 UN 가입에 반대할 이유가 사라지며 한국은 1991년 UN에 북한과 함께 가입한다. 이후 소련이 해체하면서 한소관계는 한러관계로 승계되어 이어졌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현대에 들어 점차 여론이 악화되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후로 러시아와 한국의 관계는 큰 변화 없이 원만했다. 스포츠에 있어서는 러시아와 종종 국민 감정이 악화되는 일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https://news.mt.co.kr/mtview.php?no=2024022215180317499 2014년 소치올림픽 편파판정] 당시 한국의 러시아에 대한 적대적 인식이 형성된 적 있다. 또한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220218500098&amp;amp;wlog_tag3=naver 2022년 발리예바 도핑 사건]에 대한 김연아 선수의 비판으로 인해 러시아 국민들과 한국 국민들 사이에 다시금 국민 감정이 악화된 바 있다. 러시아에서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1/0003256522?sid=104 한국을 비우호 국가로 지정]하고, 이에 따라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로 러시아에 대한 적대 의견이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분류:개항부터_현재까지의_정치_교류]] [[분류:소금토마토]]&lt;/div&gt;</summary>
		<author><name>소금토마토</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9F%AC%EC%8B%9C%EC%95%84&amp;diff=42858</id>
		<title>러시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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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06-22T15:09:2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소금토마토: &lt;/p&gt;
&lt;hr /&gt;
&lt;div&gt;러시아는 동유럽과 북아시아에 위치한 국가이며 세계에서 가장 큰 면적을 가진 나라이다.&lt;br /&gt;
=러시아와 한국의 정치 교류=&lt;br /&gt;
&amp;lt;br/&amp;gt;&lt;br /&gt;
===='''잠시나마 친러관계를 맺다'''====&lt;br /&gt;
----&lt;br /&gt;
&lt;br /&gt;
1884년 조선과 러시아 사이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1711 조로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며 개항 이후 조선과 러시아가 본격적인 수교를 시작한다. 러시아는 의외로 서구 열강 중 가장 조선을 자국 식민지로 삼고자 하는 국가였기 때문에, 점차 조선에 영향력을 확대해 가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영국이 러시아를 견제하는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1825 거문도 사건]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기존에 고종의 왕비인 명성황후는 이미 러시아와 우호적 관계를 맺고자 했는데, 이를 비롯한 여러 가지 요인을 말미암아 일본에서는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2948 을미사변]을 일으킨다. 이 사건을 계기로 고종은 국내 친일파 세력을 피하기 위해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1년간 피난하게 되는데, 이것이 [[아관파천]]이다. 이 기간 동안 일본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만큼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해졌다. 그러나 러시아와 일본 간 한반도의 주도권을 두고 벌인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7238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면서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하고, 이후 조선은 친일파들의 주도 하에 1910년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른 우호 또는 적대'''====&lt;br /&gt;
----&lt;br /&gt;
&lt;br /&gt;
일제 강점기 당시 러시아는 만주와 더불어 독립운동의 근거지 중 하나였다. 러시아는 러시아 혁명과 러시아 내전을 차례로 겪는 과정에서 백군 진영에 지원군을 보낸 연합군을 상대해야 했는데, 연합군에는 일본이 포함되어 있었고 그 과정에서 한국의 독립운동 단체들과 이해관계가 맞아 잠시나마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해 준 바 있다. 자세한 사항은 [[러시아의 독립운동 지원]] 참조.&lt;br /&gt;
&lt;br /&gt;
그러나 러시아 내전이 정리된 이후로 소련은 독립군에게서 점점 지원을 거둬들였고, 끝내[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2193 자유시 참변]이 일어난다. 이후 소련은 자신들의 러시아 지역 내 지배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당시 러시아에 이주해 살고 있던 조선의 농민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키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냉전 시대 북한과 함께 적대 관계를 형성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해방 이후 한반도 남쪽에는 [[미군정]]이, 북쪽에는 소련이 들어온다. 신탁 통치 기간이 지나고 여러 정치적 변혁을 겪으며 좌익과 우익 계열은 완전히 분리되었고 남한과 북한 정부가 각각 수립되며 완전한 분단이 이루어진다. 소련은 남한을 국가로 승인하지 않고, 북한만을 한반도 유일의 합법한 정부로 여겼다. 그 과정에서 대한민국 정부는 북한을 지원하는 소련과 점점 대립하기 시작했으며, 1950년 [[한국전쟁]]이 소련의 부추김에 의해 발발하면서 대한민국과 소련은 완전한 적대관계로 돌아서게 된다. 1955년 남한의 UN 가입 시도 역시 소련에 의해 좌절된 바 있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냉전 종식과 함께 관계가 정상화되다'''====&lt;br /&gt;
----&lt;br /&gt;
&lt;br /&gt;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소련이 서방 국가들의 우호 분위기를 이어 참가를 결정하며 한국 내 소련에 대한 인식이 완화되기 시작했다. 1989년부터 시작된 [[냉전 종식]]의 영향과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이 합쳐져 시너지를 발휘해 1990년 한소정상회담을 바탕으로 다시 수교가 시작되었다. 또한 한소수교에 따라 소련이 더 이상 한국의 UN 가입에 반대할 이유가 사라지며 한국은 1991년 UN에 북한과 함께 가입한다. 이후 소련이 해체하면서 한소관계는 한러관계로 승계되어 이어졌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현대에 들어 점차 여론이 악화되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후로 러시아와 한국의 관계는 큰 변화 없이 원만했다. 스포츠에 있어서는 러시아와 종종 국민 감정이 악화되는 일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https://news.mt.co.kr/mtview.php?no=2024022215180317499 2014년 소치올림픽 편파판정] 당시 한국의 러시아에 대한 적대적 인식이 형성된 적 있다. 또한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220218500098&amp;amp;wlog_tag3=naver 2022년 발리예바 도핑 사건]에 대한 김연아 선수의 비판으로 인해 러시아 국민들과 한국 국민들 사이에 다시금 국민 감정이 악화된 바 있다. 러시아에서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1/0003256522?sid=104 한국을 비우호 국가로 지정]하고, 이에 따라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로 러시아에 대한 적대 의견이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분류:개항부터_현재까지의_정치_교류]] [[분류:소금토마토]]&lt;/div&gt;</summary>
		<author><name>소금토마토</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A4%91%EA%B5%AD&amp;diff=42857</id>
		<title>중국</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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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06-22T15:08:0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소금토마토: &lt;/p&gt;
&lt;hr /&gt;
&lt;div&gt;=중국과 한국의 정치 교류=&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조선 후기 청나라와의 관계'''====&lt;br /&gt;
----&lt;br /&gt;
&lt;br /&gt;
병자호란을 기점으로 청나라와 사대 관계를 맺은 조선은 이후로도 청과의 사대관계를 유지했다. 당시 한국이 일본에 의한 침탈의 과정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전근대 시기처럼 청과 밀접한 관계를 맺지는 않았다. 그러나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은 일본과 함께 조선의 정치에 다시 관여하기 시작했다. 이후 [[갑신정변_1884년]]을 계기로 잠시나마 청이 일본보다 조선에 대한 우위를 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가 1895년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46721&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1658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패하면서 자연스럽게 일본에게 조선에 대한 우위를 넘겨주게 된다. 이후 1910년 대한제국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일제 공동의 적을 둔 두 국가의 우호 관계'''====&lt;br /&gt;
----&lt;br /&gt;
&lt;br /&gt;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둘 모두 일본 제국주의라는 공동의 적을 둔 입장이 되면서 다시금 밀접한 관계가 형성된다. 많은 한국의 독립 단체와 독립 투사들이 만주와 상해 등 중국을 기반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한국 독립단체들의 자금 및 세력이 미약하여 자력으로는 독립 운동을 진행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었으나, [[중국의 독립운동 지원]]을 바탕으로 해방 이전까지 꾸준하게 독립 운동을 진행할 수 있었다. 한국 역시 중국의 항일 세력에 직접적으로 군대를 지원하는 등 상호 간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때까지는 양국 모두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이 공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진영별로 또는 다같이 합세하여 협력하는 양상을 보인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해방 직후 적대관계로 돌아서다'''====&lt;br /&gt;
----&lt;br /&gt;
&lt;br /&gt;
해방 이후 한반도 남쪽에는 [[미군정]]이, 북쪽에는 소련이 들어온다. 신탁 통치 기간이 지나고 여러 정치적 변혁을 겪으며 좌익과 우익 계열은 완전히 분리되었고 남한과 북한 정부가 각각 수립되며 완전한 분단이 이루어진다. 이때 중국에서는 마오쩌둥을 필두로 하는 공산당이 정권을 장악하며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다. 당연하게도 공산권이 중국에서는 같은 공산권인 북한의 정부 수립을 승인하게 되면서 남한과는 강력한 적대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진 [[한국전쟁]]에서 중국이 북한을 지원하고, UN군의 진격에 밀려 올라가는 북한에 중공군을 직접 투입해 줌으로써 남한의 북진을 저지하였다. 이때를 기점으로 중국과는 철저한 적대관계를 이루게 되고, 대한민국 정부의 강력한 반공주의에 따라 중국과는 거의 수교가 단절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냉전 종식과 함께 다시 수교를 시작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중국이 참가하게 되면서 양국의 관계가 강력한 적대 관계에서 점차 완화되었다. 이후 1989년부터 시작된 [[냉전 종식]]의 영향과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이 합쳐져 시너지를 발휘해 1992년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은 오랜 적대 관계를 깨고 다시 수교를 시작한다. 물론 수교를 하였다고 해도 완전히 사이가 좋다고 보기는 어려운데, 중국이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긴 하였으나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공산당 일당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공주의 시대의 적대 관계보다 현재의 관계가 훨씬 우호적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크고 작은 갈등이 지속되다'''====&lt;br /&gt;
----&lt;br /&gt;
&lt;br /&gt;
중국과의 수교 이후 현재까지 경제적으로는 큰 변화 없이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77896&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1864 무역]에 있어서 2020년 기준 중국은 세계 최대 교역국가이자 수출대국이고, 수입은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이다. 특히 2001년 세계무역기구 가입 이후로 중국과의 교역 비중이 크게 증가하여 2020년 전세계 수출 중 중국의 비중이 역대 최대를 기록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경제 이외의 부문에서는 크고 작은 갈등이 지속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중국은 지속적인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6377 동북공정]을 진행하며 역사적으로 한국과 갈등을 빚고 있으며, 2020년대 들어서는 문화에 있어서도 [https://www.chosun.com/national/national_general/2022/02/06/DTARKZFQBFASDAKOLWX37IKDUY/ 문화공정]을 진행하며 김치, 한복 등 한국의 문화를 중국의 문화라 주장하며 지속적 갈등을 만들고 있는 상황이다. 더하여 여전히 그 영향이 남아 있는 중국발 [[코로나19]]로 인한 중국의 외교적 압박 및 정치적 발언으로 인해 국내에서 중국에 대한 민간 여론이 극도로 나빠진 상태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분류:개항부터_현재까지의_정치_교류]] [[분류:소금토마토]]&lt;/div&gt;</summary>
		<author><name>소금토마토</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0%9C%ED%95%AD%EB%B6%80%ED%84%B0_%ED%98%84%EC%9E%AC%EA%B9%8C%EC%A7%80%EC%9D%98_%EC%A0%95%EC%B9%98_%EA%B5%90%EB%A5%98&amp;diff=42856</id>
		<title>개항부터 현재까지의 정치 교류</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0%9C%ED%95%AD%EB%B6%80%ED%84%B0_%ED%98%84%EC%9E%AC%EA%B9%8C%EC%A7%80%EC%9D%98_%EC%A0%95%EC%B9%98_%EA%B5%90%EB%A5%98&amp;diff=42856"/>
		<updated>2024-06-22T15:01:0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소금토마토: /* 기여 */&lt;/p&gt;
&lt;hr /&gt;
&lt;div&gt;==&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콘텐츠 주제==&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amp;lt;font size='5'&amp;gt;'''개항부터 현재까지 한국과 타국의 정치 교류'''&amp;lt;/font&amp;gt;&amp;lt;/div&amp;gt;&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기획의도==&lt;br /&gt;
===기획배경===&lt;br /&gt;
&amp;lt;br/&amp;gt;&lt;br /&gt;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조원과 다른 나라와의 경제 교류에 관심이 많았던 조원 두 명이 합쳐져 조를 형성하였다. '교류’와 ‘정치’라는 주제를 어떻게 연결하여 절충안을 찾을지 고민하다가 우리나라의 정치가 역사적으로 타국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아왔다는 사실이 떠올라 위 주제를 선정하게 되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기획 목적===&lt;br /&gt;
&amp;lt;br/&amp;gt;&lt;br /&gt;
 정치 교류사를 되돌아보며 타국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나라 정치의 변화 흐름을 바라보고자 했다. 이를 통해 타국이 우리나라 정치 상황에 미친 영향을 통시적으로 알아보고 주요 사건의 결과도 보고자 했다. 특히, 우리나라가 손해를 보거나 불이익을 당한 경우라면 문제점을 파악하고 이것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마련해 보고자 이러한 주제를 선정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기대하는 바===&lt;br /&gt;
&amp;lt;br/&amp;gt;&lt;br /&gt;
 타국이 우리나라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파악하고 일련의 탐구로부터 결론을 도출하기를 기대한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나라가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기대하는 바이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국가별 통시적 설명==&lt;br /&gt;
&amp;lt;br/&amp;gt;&lt;br /&gt;
===일본===&lt;br /&gt;
----&lt;br /&gt;
일본은 한국과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워 역사 속에서 많은 영향을 주고 받았다. 현재까지도 많은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또 많은 갈등이 존재하기도 한다. 특히 역사 관련 갈등이 많이 발생한다는 점이 한일관계에서 주목할 만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현대 한일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으로 한국과 일본 사이에 어떤 교류가 일어났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lt;br /&gt;
이 문서에서는 현재 한일관계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개항 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일본 사이의 주요 사건을 일본이 우리나라에 미친 정치적 영향을 중심으로 서술한다. 이 문서와 같은 내용이 '일본' 문서에도 실려 있다. &lt;br /&gt;
&amp;lt;br/&amp;gt;&lt;br /&gt;
====개항부터 국권피탈 전까지, 일본 침략의 전조====&lt;br /&gt;
----&lt;br /&gt;
[[운요호 사건]]을 시작으로 한국은 개항을 하게 된다. 일본은 쿠로후네 사건을 통해 개항하게 되었고 조선이 쇄국정책을 시행하는 사이 메이지 유신을 통해 급격하게 발전한다. 일본은 제국주의적 팽창으로 조선을 위협하기 시작하는데,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일본은 조선에 개항을 요구한다. 조선은 운요호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으며 무력시위를 하는 일본을 무시할 수 없었고 강압적인 수교 통상 요구를 받아들인다. 이 결과로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여 개항을 하게 된다. 하지만 강화도 조약은 조선에게 불평등한 면이 많았다. 또,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기 쉽게 하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다.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은 개항을 하면서 세계에 진출하게 되었으나 이는 불평등했고, 이어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의 다른 서구 열강들과 근대적인 불평등한 개항 수교 통상조약을 맺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amp;lt;/br&amp;gt;&lt;br /&gt;
이후 일본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 하는데, [[갑신정변_1884년]]을 통해 청이 조선에 대해 우위를 점하게 된다. 하지만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러일전쟁에서도 승리하면서 조선에 대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했으며, 이는 국권피탈로 이어졌다. &lt;br /&gt;
&lt;br /&gt;
====일제강점기, 암흑의 시대====&lt;br /&gt;
----&lt;br /&gt;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게 된다. 1910년부터 해방된 1945년까지를 일제강점기라고 부른다. &amp;lt;/br&amp;gt;&lt;br /&gt;
1910년대: 무단통치시기이다. 정치 단체를 만들거나 의견을 내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민족 신문이 폐간되었다. 헌병이 직접 벌을 내리는 즉결심판권이 있었으며 학교에서 교사는 군복에 칼을 찼다. 일본어가 '국어'로 교육되었으며 중등학교에서는 실업 교육을, 고등 교육 기관은 없앴다. 또, 토지 조사 사업이 시작되어 우리나라의 토지를 뺴앗아갔다. 전체 토지의 40%가 일본에 넘어갔으며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통해 일본인에게 팔렸다. &amp;lt;/br&amp;gt;&lt;br /&gt;
1920년대: 문화통치시기이다. 3.1운동이 일어나고 무단통치의 한계를 느낀 일본은 문화통치로 전환한다. 표면적으로는 유화정책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탄압, 감시, 문화 말살, 수탈을 위한 정책이었다. 헌병경찰제도가 보통경찰제도로 변경되었으나 실질적으로 경찰 인력과 시설은 늘어났다. 민족신문의 발행을 허용하였으나 검열은 계속되었다. 교육 기회 확대를 주장했지만 일본과 관련된 내용을 가르치는데 불과했으며 조선인의 취학률은 낮았고, 고등교육은 여전히 실시되지 않았다. 태형령이 없어졌지만 치안 유지법을 제정해 강력하게 탄압했다.&amp;lt;/br&amp;gt; &lt;br /&gt;
1930년대:민족말살통치시기이다. 민족말살통치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 협력을 얻기 위해 취한 정책이다. 내선일체, 황민화 정책, 창씨개명, 일선동조론이 민족말살통치의 일부이다. 민족말살통치는 일본이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고 한국인의 정체성을 없애려고  한 통치이며, 이 시기 많은 강제동원과 수탈이 이루어졌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1945년 일본이 세계 2차대전에서 패하게 되고,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한다. &lt;br /&gt;
&lt;br /&gt;
====해방 후부터 5공화국까지, 일본의 영향 축소====&lt;br /&gt;
----&lt;br /&gt;
해방 후부터 일본과 한국은 교류하지 않았다. 한국전쟁을 겪고 난 후 한국은 일본보다는 다른 나라와 더 많은 교류를 했고 영향을 주고받았다. 그러다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하며 국교를 정상화하고 교류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lt;br /&gt;
&lt;br /&gt;
====6공화국 이후, 한국과 일본의 현 좌표====&lt;br /&gt;
----&lt;br /&gt;
한국과 일본은 많은 교류를 주고받고 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식민지배를 겪었고, 식민 지배 당시 많은 문제가 발생했기에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역사적인 갈등의 골이 깊다. [[현대 한국과 일본의 역사 문제]] 문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강제동원 문제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대표적이다. 인정과 배상, 개인의 청구권 문제로 갈등이 있다. 또,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도 존재한다. 일본이 전범국으로서 책임을 지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하는데, 일본이 저지를 일을 축소하여 교과서를 편찬하면서 문제가 생기고 있다. 또, 독도 문제에 관한 일본 교과서 서술도 문제이다. 마지막으로 독도 문제가 있다. 한국의 땅임이 명백한 독도에 대해 일본이 자기 땅이라고 주장하면서 갈등이 있다.&lt;br /&gt;
&lt;br /&gt;
[[분류:텀블러]]&lt;br /&gt;
&lt;br /&gt;
===미국===&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미국은 현재 한국의 최우방국이다. 북한이라는 명확한 대립 국가가 있는 지금, 미국은 우리 안보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며, 경제에 있어서도 우리나라는 미국에 많은 의존을 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과 이렇게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시작한 것은, 해방 이후로, 고작 80년도 되지 않았다. 80년은 물론 긴 시간이지만, 우리나라의 전체 역사 속에서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 문서에서는 한국과 미국이 처음 조우한 이래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미국 사이의 주요 사건을  미국이 우리나라에 미친 정치적 영향을 중심으로 서술한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한국과 미국의 첫 조우와 무시'''====&lt;br /&gt;
----&lt;br /&gt;
&lt;br /&gt;
미국의 한국에 대한 첫 관심은 1834년 로비츠 아시아 특파원의 보고이다. 이때 로비츠는 &amp;quot;동부 아시아 대륙에 조선이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반도 국가가 있는데 청나라와 일본이라는 대륙 국가와 섬나라 사이에 위치해 있고 본국 정부가 조선과 경제 교역을 가지게 되었으면 싶다&amp;quot;라고 밝히고 있다. 이후 대원군의 통상수교거부정책이 시행되던 중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48057&amp;amp;cid=46623&amp;amp;categoryId=46623 제네럴 셔먼호 사건]이 발생하였고 조선의 개항을 요구하는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2961 신미양요]가 발생한다. 미국의 승리에도 조선은 개항하지 않았고 조선은 [[운요호 사건]]으로 인한 강화도 조약 때야 개항하게 된다. 개항 이후,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기점으로 조선과 미국은 본격적인 교류를 실시한다. &lt;br /&gt;
그러나 일본제국과 미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성사되고 조선과 미국은 단교한다. 이후 미국은 조선을 철저히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며,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 과정을 묵인하거나 일본을 두둔하게 되고 조선은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2961 1910년 나라를 빼앗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강점기에서 희망을 주다'''====&lt;br /&gt;
----&lt;br /&gt;
&lt;br /&gt;
그런 와중,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이 발표되고 식민지 조선은 이 선언에 희망을 가지고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6772 3.1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고 비록 독립을 쟁취하지는 못하였으나,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진다.&lt;br /&gt;
이후, 제2차세계대전에서 일본과 미국은 적으로 만나게 되고 전후 일본의 상황을 논의하는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다. 그러나 얄타 회담에서 한국의 신탁통치를 논의한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해방 직후 밀접한 관계가 되다'''====&lt;br /&gt;
----&lt;br /&gt;
&lt;br /&gt;
일본의 항복 후, 한반도 남쪽에는 [[미군정]]이 북쪽에는 소련이 들어온다. 미군정 시절, 여러 정치적 변혁을 겪으며 좌익과 우익 계열은 완전히 분열되었고 결국 이승만의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20143&amp;amp;cid=62048&amp;amp;categoryId=62048 정읍 발언]을 기점으로 남북은 3.8도선을 기준으로 분단된다. 이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2143 한국전쟁]이 발생하고 미국은 UN연합군과 함께 남한을 위해 참전, 통일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적화통일을 막았다. 이를 계기로 한국과 미국은 안보적으로 가까운 사이가 되었으며, 전후 복구 과정에서 미국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은 한국은 미국과 경제적으로도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해방 후 혼란기 한국에 많은 영향을 미치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승만이 4.19 혁명으로 하야하는 과정에 미국이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는 등 지속적으로 정치적, 경제적 영향을 미치던 미국은 케네디 시대를 맞이한다. 민주주의 가치를 중시했던 케네디는 박정희 정권을 마음에 들지 않아 했고 베트남전 파병에 대해 미온적 태도를 보였으나, 미국 정권이 바뀐 후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한국은 [[베트남 전쟁]] 파병을 결정한다. 베트남 파병으로 많은 국내 정치적, 경제적 변화를 겪은 한국은 경제 성장을 공고히 하는 한편, 박정희 독재 체제도 강화되었다. 박정희의 독재 강화 과정에서 한국과 미국의 관계가 악화되기도 했다. 이후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20431&amp;amp;cid=62048&amp;amp;categoryId=62048 10.26 사건]이 일어나고 여러 사건을 지나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8343 6월 항쟁]이 일어났을 때, 미국은 전두환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고 노태우의 6.29 선언 발표에 기여한다.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민주화 이후에도 계속되는 영향'''====&lt;br /&gt;
----&lt;br /&gt;
&lt;br /&gt;
이후 지속적으로 좋은 관계를 맺다 노무현 정부 시절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73146&amp;amp;cid=43667&amp;amp;categoryId=43667 한미 FTA]를 체결하였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북한과의 해빙 무드 속에서 북미 정상회담을 개최하기도 했으나, 결국 주목할 만한 성과 없이 [[북미정상회담 결렬]]을 맞이한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이후, 정부가 한미일 공조에 공을 들이며, 더욱 긴밀해진 모습이나, 북한과의 관계는 매우 악화된 상황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한국과 미국은 밀접한 동맹국이니만큼 한미관계는 다른 여느 외교 관계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뽑히며, 한미관계의 조율 여부가 그 정부의 외교적 성패를 가르기도 한다. 그러나 미국이 이권에 따라 때로는 우리를 무시하고 저버린 적도 있기 때문에 결국 미국 또한, 자국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국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미관계를 원활하게 유지함으로써 안보와 경제적 이익을 취하는 동시에 너무 미국에게만 종속되지 않도록 자주적 힘을 길러나가는 것이 바람직한 한미관계의 길일 것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분류:개항부터_현재까지의_정치_교류]] [[분류:낭만가]] &lt;br /&gt;
&lt;br /&gt;
===러시아===&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잠시나마 친러관계를 맺다'''====&lt;br /&gt;
----&lt;br /&gt;
&lt;br /&gt;
1884년 조선과 러시아 사이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1711 조로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며 개항 이후 조선과 러시아가 본격적인 수교를 시작한다. 러시아는 의외로 서구 열강 중 가장 조선을 자국 식민지로 삼고자 하는 국가였기 때문에, 점차 조선에 영향력을 확대해 가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영국이 러시아를 견제하는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1825 거문도 사건]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기존에 고종의 왕비인 명성황후는 이미 러시아와 우호적 관계를 맺고자 했는데, 이를 비롯한 여러 가지 요인을 말미암아 일본에서는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2948 을미사변]을 일으킨다. 이 사건을 계기로 고종은 국내 친일파 세력을 피하기 위해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1년간 피난하게 되는데, 이것이 [[아관파천]]이다. 이 기간 동안 일본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만큼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해졌다. 그러나 러시아와 일본 간 한반도의 주도권을 두고 벌인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7238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면서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하고, 이후 조선은 친일파들의 주도 하에 1910년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른 우호 또는 적대'''====&lt;br /&gt;
----&lt;br /&gt;
&lt;br /&gt;
일제 강점기 당시 러시아는 만주와 더불어 독립운동의 근거지 중 하나였다. 러시아는 러시아 혁명과 러시아 내전을 차례로 겪는 과정에서 백군 진영에 지원군을 보낸 연합군을 상대해야 했는데, 연합군에는 일본이 포함되어 있었고 그 과정에서 한국의 독립운동 단체들과 이해관계가 맞아 잠시나마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해 준 바 있다. 자세한 사항은 [[러시아의 독립운동 지원]] 참조.&lt;br /&gt;
&lt;br /&gt;
그러나 러시아 내전이 정리된 이후로 소련은 독립군에게서 점점 지원을 거둬들였고, 끝내[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2193 자유시 참변]이 일어난다. 이후 소련은 자신들의 러시아 지역 내 지배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당시 러시아에 이주해 살고 있던 조선의 농민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키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냉전 시대 북한과 함께 적대 관계를 형성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해방 이후 한반도 남쪽에는 [[미군정]]이, 북쪽에는 소련이 들어온다. 신탁 통치 기간이 지나고 여러 정치적 변혁을 겪으며 좌익과 우익 계열은 완전히 분리되었고 남한과 북한 정부가 각각 수립되며 완전한 분단이 이루어진다. 소련은 남한을 국가로 승인하지 않고, 북한만을 한반도 유일의 합법한 정부로 여겼다. 그 과정에서 대한민국 정부는 북한을 지원하는 소련과 점점 대립하기 시작했으며, 1950년 [[한국전쟁]]이 소련의 부추김에 의해 발발하면서 대한민국과 소련은 완전한 적대관계로 돌아서게 된다. 1955년 남한의 UN 가입 시도 역시 소련에 의해 좌절된 바 있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냉전 종식과 함께 관계가 정상화되다'''====&lt;br /&gt;
----&lt;br /&gt;
&lt;br /&gt;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소련이 서방 국가들의 우호 분위기를 이어 참가를 결정하며 한국 내 소련에 대한 인식이 완화되기 시작했다. 1989년부터 시작된 [[냉전 종식]]의 영향과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이 합쳐져 시너지를 발휘해 1990년 한소정상회담을 바탕으로 다시 수교가 시작되었다. 또한 한소수교에 따라 소련이 더 이상 한국의 UN 가입에 반대할 이유가 사라지며 한국은 1991년 UN에 북한과 함께 가입한다. 이후 소련이 해체하면서 한소관계는 한러관계로 승계되어 이어졌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현대에 들어 점차 여론이 악화되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후로 러시아와 한국의 관계는 큰 변화 없이 원만했다. 스포츠에 있어서는 러시아와 종종 국민 감정이 악화되는 일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https://news.mt.co.kr/mtview.php?no=2024022215180317499 2014년 소치올림픽 편파판정] 당시 한국의 러시아에 대한 적대적 인식이 형성된 적 있다. 또한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220218500098&amp;amp;wlog_tag3=naver 2022년 발리예바 도핑 사건]에 대한 김연아 선수의 비판으로 인해 러시아 국민들과 한국 국민들 사이에 다시금 국민 감정이 악화된 바 있다. 러시아에서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1/0003256522?sid=104 한국을 비우호 국가로 지정]하고, 이에 따라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로 러시아에 대한 적대 의견이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분류:개항부터_현재까지의_정치_교류]] [[분류:소금토마토]]&lt;br /&gt;
&lt;br /&gt;
===중국===&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조선 후기 청나라와의 관계'''====&lt;br /&gt;
----&lt;br /&gt;
&lt;br /&gt;
병자호란을 기점으로 청나라와 사대 관계를 맺은 조선은 이후로도 청과의 사대관계를 유지했다. 당시 한국이 일본에 의한 침탈의 과정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전근대 시기처럼 청과 밀접한 관계를 맺지는 않았다. 그러나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은 일본과 함께 조선의 정치에 다시 관여하기 시작했다. 이후 [[갑신정변_1884년]]을 계기로 잠시나마 청이 일본보다 조선에 대한 우위를 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가 1895년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46721&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1658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패하면서 자연스럽게 일본에게 조선에 대한 우위를 넘겨주게 된다. 이후 1910년 대한제국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일제 공동의 적을 둔 두 국가의 우호 관계'''====&lt;br /&gt;
----&lt;br /&gt;
&lt;br /&gt;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둘 모두 일본 제국주의라는 공동의 적을 둔 입장이 되면서 다시금 밀접한 관계가 형성된다. 많은 한국의 독립 단체와 독립 투사들이 만주와 상해 등 중국을 기반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한국 독립단체들의 자금 및 세력이 미약하여 자력으로는 독립 운동을 진행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었으나, [[중국의 독립운동 지원]]을 바탕으로 해방 이전까지 꾸준하게 독립 운동을 진행할 수 있었다. 한국 역시 중국의 항일 세력에 직접적으로 군대를 지원하는 등 상호 간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때까지는 양국 모두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이 공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진영별로 또는 다같이 합세하여 협력하는 양상을 보인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해방 직후 적대관계로 돌아서다'''====&lt;br /&gt;
----&lt;br /&gt;
&lt;br /&gt;
해방 이후 한반도 남쪽에는 [[미군정]]이, 북쪽에는 소련이 들어온다. 신탁 통치 기간이 지나고 여러 정치적 변혁을 겪으며 좌익과 우익 계열은 완전히 분리되었고 남한과 북한 정부가 각각 수립되며 완전한 분단이 이루어진다. 이때 중국에서는 마오쩌둥을 필두로 하는 공산당이 정권을 장악하며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다. 당연하게도 공산권이 중국에서는 같은 공산권인 북한의 정부 수립을 승인하게 되면서 남한과는 강력한 적대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진 [[한국전쟁]]에서 중국이 북한을 지원하고, UN군의 진격에 밀려 올라가는 북한에 중공군을 직접 투입해 줌으로써 남한의 북진을 저지하였다. 이때를 기점으로 중국과는 철저한 적대관계를 이루게 되고, 대한민국 정부의 강력한 반공주의에 따라 중국과는 거의 수교가 단절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냉전 종식과 함께 다시 수교를 시작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중국이 참가하게 되면서 양국의 관계가 강력한 적대 관계에서 점차 완화되었다. 이후 1989년부터 시작된 [[냉전 종식]]의 영향과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이 합쳐져 시너지를 발휘해 1992년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은 오랜 적대 관계를 깨고 다시 수교를 시작한다. 물론 수교를 하였다고 해도 완전히 사이가 좋다고 보기는 어려운데, 중국이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긴 하였으나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공산당 일당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공주의 시대의 적대 관계보다 현재의 관계가 훨씬 우호적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크고 작은 갈등이 지속되다'''====&lt;br /&gt;
----&lt;br /&gt;
&lt;br /&gt;
중국과의 수교 이후 현재까지 경제적으로는 큰 변화 없이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77896&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1864 무역]에 있어서 2020년 기준 중국은 세계 최대 교역국가이자 수출대국이고, 수입은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이다. 특히 2001년 세계무역기구 가입 이후로 중국과의 교역 비중이 크게 증가하여 2020년 전세계 수출 중 중국의 비중이 역대 최대를 기록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경제 이외의 부문에서는 크고 작은 갈등이 지속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중국은 지속적인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6377 동북공정]을 진행하며 역사적으로 한국과 갈등을 빚고 있으며, 2020년대 들어서는 문화에 있어서도 [https://www.chosun.com/national/national_general/2022/02/06/DTARKZFQBFASDAKOLWX37IKDUY/ 문화공정]을 진행하며 김치, 한복 등 한국의 문화를 중국의 문화라 주장하며 지속적 갈등을 만들고 있는 상황이다. 더하여 여전히 그 영향이 남아 있는 중국발 [[코로나19]]로 인한 중국의 외교적 압박 및 정치적 발언으로 인해 국내에서 중국에 대한 민간 여론이 극도로 나빠진 상태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분류:개항부터_현재까지의_정치_교류]] [[분류:소금토마토]]&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온톨로지==&lt;br /&gt;
{{NetworkGraph | title=정치교류.ls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NetworkGraph | title=정치교류.lst}}&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콘텐츠 구조==&lt;br /&gt;
&lt;br /&gt;
===클래스(Class)===&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color:white&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amp;quot; | 클래스 !! style=&amp;quot;width:30%&amp;quot; | 설명 !! style=&amp;quot;45%&amp;quot; | 노드&lt;br /&gt;
|-&lt;br /&gt;
|나라 ||우리나라의 정치사에 영향을 가장 많이 미친 나라들이다. 각 문서에 각 나라가 한국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통시적으로 서술하였다. || [[일본]] [[중국]] [[러시아]] [[미국]]&lt;br /&gt;
&lt;br /&gt;
|-&lt;br /&gt;
|사건 || 주요 사건들을 노드로 만들었다. 각 사건에 대해 자세히 서술했고, 각 사건이 미친 영향을 서술했다.|| [[운요호 사건]] [[강화도 조약]] [[갑신정변_1884년]] [[을사조약]] [[한일기본조약]]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현대 한국과 일본의 역사 문제]] [[임오군란]] [[중국의 독립운동 지원]] [[한국전쟁]] [[코로나19]] [[아관파천]] [[러시아의 독립운동 지원]] [[냉전 종식]] [[가쓰라-태프트 밀약]] [[민족자결주의 선언]] [[미군정]] [[베트남 전쟁]] [[북미정상회담 결렬]] &lt;br /&gt;
|-&lt;br /&gt;
|시기|| 시기를 크게 4가지로 나누어 노드를 만들었다.  || [[개항부터 국권피탈]]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 [[6공화국 이후]]&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green&amp;quot;&amp;gt;'''leads'''&amp;lt;/span&amp;gt;&lt;br /&gt;
***설명: 나라와 해당 나라가 관련된 사건을 연결한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일본 → 운요호사건&lt;br /&gt;
***#일본 → 강화도 조약&lt;br /&gt;
***#일본 → 갑신정변_1885년&lt;br /&gt;
***#일본 → 을사조약&lt;br /&gt;
***#일본 → 한일기본조약&lt;br /&gt;
***#일본 →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lt;br /&gt;
***#일본 → 현대 한국과 일본의 역사 문제&lt;br /&gt;
***#일본 → 임오군란&lt;br /&gt;
***#일본 → 톈진 조약&lt;br /&gt;
***#일본 → 가쓰라-태프트 밀약&lt;br /&gt;
***#중국 → 갑신정변&lt;br /&gt;
***#중국 →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lt;br /&gt;
***#중국 → 임오군란&lt;br /&gt;
***#중국 → 톈진 조약&lt;br /&gt;
***#중국 → 중국의 독립운동 지원&lt;br /&gt;
***#중국 →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lt;br /&gt;
***#중국 → 카이로 회담&lt;br /&gt;
***#중국 → 한국 전쟁&lt;br /&gt;
***#중국 → 코로나19&lt;br /&gt;
***#중국 → 냉전 종식&lt;br /&gt;
***#러시아 → 한국 전쟁&lt;br /&gt;
***#러시아 → 아관파천&lt;br /&gt;
***#러시아 → 러시아의 독립운동 지원&lt;br /&gt;
***#러시아 → 냉전 종식&lt;br /&gt;
***#미국 → 가쓰라-태프트 밀약&lt;br /&gt;
***#미국 → 민족자결주의 선언&lt;br /&gt;
***#미국 → 카이로 회담&lt;br /&gt;
***#미국 → 한국 전쟁&lt;br /&gt;
***#미국 → 냉전 종식&lt;br /&gt;
***#미국 → 미군정&lt;br /&gt;
***#미국 → 베트남 전쟁&lt;br /&gt;
***#미국 → 북미정상회담 결렬&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green&amp;quot;&amp;gt;'''isRelatedTo'''&amp;lt;/span&amp;gt;&lt;br /&gt;
***설명: 나라와 특정 시기를 연결한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일본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일본 → 일제강점기&lt;br /&gt;
***#일본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일본 → 6공화국 이후&lt;br /&gt;
***#중국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중국 → 일제강점기&lt;br /&gt;
***#중국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중국 → 6공화국 이후&lt;br /&gt;
***#러시아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러시아 → 일제강점기&lt;br /&gt;
***#러시아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러시아 → 6공화국 이후&lt;br /&gt;
***#미국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미국 → 일제강점기&lt;br /&gt;
***#미국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미국 → 6공화국 이후&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green&amp;quot;&amp;gt;'''happenedAt'''&amp;lt;/span&amp;gt;&lt;br /&gt;
***설명: 해당 사건과 특정 시기를 연결한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운요호 사건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강화도 조약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갑신정변_1884년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가쓰라-태프트 밀약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아관파천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임오군란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톈진조약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을사조약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중국의 독립운동 지원 → 일제강점기&lt;br /&gt;
***#민족자결주의 선언 → 일제강점기&lt;br /&gt;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 일제강점기&lt;br /&gt;
***#러시아의 독립운동 지원 → 일제강점기&lt;br /&gt;
***#카이로 회담 → 일제강점기&lt;br /&gt;
***#한일기본조약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미군정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베트남 전쟁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한국 전쟁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현대 한국과 일본의 역사 문제 → 6공화국 이후&lt;br /&gt;
***#코로나19 → 6공화국 이후&lt;br /&gt;
***#냉전 종식 → 6공화국 이후&lt;br /&gt;
***#북미정상회담 결렬 → 6공화국 이후&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마인드맵==&lt;br /&gt;
 노드 마인드맵&lt;br /&gt;
[[파일:마인드맵_1.png|500px|마인드맵 1]] &amp;lt;/br&amp;gt;&lt;br /&gt;
[[파일:마인드맵_2.png|500px|마인드맵 2]] &amp;lt;/br&amp;gt;&lt;br /&gt;
[[파일:마인드맵_3.png|500px|마인드맵 3]] &amp;lt;/br&amp;gt;&lt;br /&gt;
[[파일:마인드맵_4.png|500px|마인드맵 4]] &amp;lt;/br&amp;gt;&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기여==&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white;&amp;quot;&lt;br /&gt;
|+ 6분반 정치교류조&lt;br /&gt;
|+ style=&amp;quot;caption-side:bottom; 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팀원 || 기여내용&lt;br /&gt;
|-&lt;br /&gt;
| [[낭만가]] || 주제 선정, 전체적인 내용 설정, 미국 문서 작성, 관계 설정 및 작성, 동기 및 결론 작성, 발표&lt;br /&gt;
|-&lt;br /&gt;
| [[텀블러]] || 전체적인 내용 구상 기여, 전체적인 위키 문서 틀 작성, 온톨로지 작성, 일본 관련 문서 작성, 역할분담 작성, 발표용 ppt 제작&lt;br /&gt;
|-&lt;br /&gt;
| [[소금토마토]] || 전체적인 내용 구상 기여, 마인드맵 제작, 타임라인 제작, 중국 관련 문서 작성, 러시아 관련 문서 작성&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시간의 흐름으로 보는 정치교류사'''==&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NfjKF8MdQEGWKD4zQXAOvIxaqYsUcQGp7kQ_QSU4sq4&amp;amp;font=Default&amp;amp;lang=ko&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도출한 결론==&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국내 정세 안정화 선행 필요성'''===&lt;br /&gt;
----&lt;br /&gt;
개항기, 일제강점기, 해방 후 안정되기 전까지는 타국이 우리나라 정치 상황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안정기에 들어서고 나서는 타국의 정치적 영향도, 타국이 영향을 준 경우도 줄었다. 그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해보았는데, 타국이 영향을 줘서 흔들릴 만큼의 정치적인 불안정성이 없어졌고 따라서 타국에 기댈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할 수 있었다. 따라서 타국의 안 좋은 영향력을 최소화하고 자주권을 확립하여 국가와 국민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우선, 국내 정치 상황이 안정되어야 하며, 그것은 필수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영원한 우방국은 없다'''===&lt;br /&gt;
----&lt;br /&gt;
그다음으로 내린 결론은 영원한 우방국은 없다, 즉, 국제 사회는 철저한 계산에 따라 냉혹하면서도 현실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저희가 다룬 네 국가와 우리나라의 관계는 때론 우호적이기도 때론 적대적이기도 했는데, 그 관계의 이면에는 늘 치밀한 각국의 손익 계산이 반영되어 있었다. 즉, 타국은 우리나라가 본국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 싶으면 우호적인 제스쳐를 취하며 이용했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버리고 혹은 이해관계에 따라 적대적으로 설정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가 국권을 피탈 당할 때도 이러한 국제사회의 이해관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미국, 러시아 등의 국가를 너무 믿었다가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따라서, 국제사회에서 국가는 오직 국익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에 따른 적절한 외교전략을 수립해나가야 한다.&lt;br /&gt;
&lt;br /&gt;
결론적으로, 우리가 피해를 입은 경우도 있었는데 이런 피해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정치적 혼란을 막으면서 우리 문제에는 우리가 주도권을 뺏기지 않는 상황을 만들고 동시에 실리적인 외교 방안을 모색하여 평화와 국익을 위한 외교를 해야 할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아쉬운 점과 개선점'''===&lt;br /&gt;
----&lt;br /&gt;
주제 자체를 양이 너무 많고 내용도 어려운 주제로 정한 데다 잘하고 싶은 의욕으로 많은 문서를 만들고자 한 탓에 자료 조사와 내용 작성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이런 이유로 위키만의 장점을 드러낼 수 있는, 위키로만 할 수 있는 여러 툴이나 장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웠다. 그래서 다음에 또 위키 관련 활동을 한다면, 시간과 수준에 알맞은 적절한 주제, 적절한 개수의 노드를 미리 설정해서 자료 조사와 내용 작성에만 할애했던 시간을 위키만의 장점을 드러낼 수 있는 여러 툴을 활용하는 데에 사용하도록 개선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lt;/div&gt;</summary>
		<author><name>소금토마토</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D%8C%8C%EC%9D%BC:%EB%A7%88%EC%9D%B8%EB%93%9C%EB%A7%B5_4.png&amp;diff=42855</id>
		<title>파일:마인드맵 4.png</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D%8C%8C%EC%9D%BC:%EB%A7%88%EC%9D%B8%EB%93%9C%EB%A7%B5_4.png&amp;diff=42855"/>
		<updated>2024-06-22T15:00:1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소금토마토: &lt;/p&gt;
&lt;hr /&gt;
&lt;div&gt;&lt;/div&gt;</summary>
		<author><name>소금토마토</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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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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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파일:마인드맵 3.png</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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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06-22T14:59:1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소금토마토: &lt;/p&gt;
&lt;h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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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name>소금토마토</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D%8C%8C%EC%9D%BC:%EB%A7%88%EC%9D%B8%EB%93%9C%EB%A7%B5_2.png&amp;diff=42851</id>
		<title>파일:마인드맵 2.png</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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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06-22T14:58:1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소금토마토: &lt;/p&gt;
&lt;hr /&gt;
&lt;div&gt;&lt;/div&gt;</summary>
		<author><name>소금토마토</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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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0%9C%ED%95%AD%EB%B6%80%ED%84%B0_%ED%98%84%EC%9E%AC%EA%B9%8C%EC%A7%80%EC%9D%98_%EC%A0%95%EC%B9%98_%EA%B5%90%EB%A5%98&amp;diff=42850</id>
		<title>개항부터 현재까지의 정치 교류</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0%9C%ED%95%AD%EB%B6%80%ED%84%B0_%ED%98%84%EC%9E%AC%EA%B9%8C%EC%A7%80%EC%9D%98_%EC%A0%95%EC%B9%98_%EA%B5%90%EB%A5%98&amp;diff=42850"/>
		<updated>2024-06-22T14:58:0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소금토마토: /* 마인드맵 */&lt;/p&gt;
&lt;hr /&gt;
&lt;div&gt;==&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콘텐츠 주제==&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amp;lt;font size='5'&amp;gt;'''개항부터 현재까지 한국과 타국의 정치 교류'''&amp;lt;/font&amp;gt;&amp;lt;/div&amp;gt;&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기획의도==&lt;br /&gt;
===기획배경===&lt;br /&gt;
&amp;lt;br/&amp;gt;&lt;br /&gt;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조원과 다른 나라와의 경제 교류에 관심이 많았던 조원 두 명이 합쳐져 조를 형성하였다. '교류’와 ‘정치’라는 주제를 어떻게 연결하여 절충안을 찾을지 고민하다가 우리나라의 정치가 역사적으로 타국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아왔다는 사실이 떠올라 위 주제를 선정하게 되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기획 목적===&lt;br /&gt;
&amp;lt;br/&amp;gt;&lt;br /&gt;
 정치 교류사를 되돌아보며 타국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나라 정치의 변화 흐름을 바라보고자 했다. 이를 통해 타국이 우리나라 정치 상황에 미친 영향을 통시적으로 알아보고 주요 사건의 결과도 보고자 했다. 특히, 우리나라가 손해를 보거나 불이익을 당한 경우라면 문제점을 파악하고 이것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마련해 보고자 이러한 주제를 선정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기대하는 바===&lt;br /&gt;
&amp;lt;br/&amp;gt;&lt;br /&gt;
 타국이 우리나라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파악하고 일련의 탐구로부터 결론을 도출하기를 기대한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나라가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기대하는 바이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국가별 통시적 설명==&lt;br /&gt;
&amp;lt;br/&amp;gt;&lt;br /&gt;
===일본===&lt;br /&gt;
----&lt;br /&gt;
일본은 한국과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워 역사 속에서 많은 영향을 주고 받았다. 현재까지도 많은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또 많은 갈등이 존재하기도 한다. 특히 역사 관련 갈등이 많이 발생한다는 점이 한일관계에서 주목할 만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현대 한일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으로 한국과 일본 사이에 어떤 교류가 일어났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lt;br /&gt;
이 문서에서는 현재 한일관계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개항 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일본 사이의 주요 사건을 일본이 우리나라에 미친 정치적 영향을 중심으로 서술한다. 이 문서와 같은 내용이 '일본' 문서에도 실려 있다. &lt;br /&gt;
&amp;lt;br/&amp;gt;&lt;br /&gt;
====개항부터 국권피탈 전까지, 일본 침략의 전조====&lt;br /&gt;
----&lt;br /&gt;
[[운요호 사건]]을 시작으로 한국은 개항을 하게 된다. 일본은 쿠로후네 사건을 통해 개항하게 되었고 조선이 쇄국정책을 시행하는 사이 메이지 유신을 통해 급격하게 발전한다. 일본은 제국주의적 팽창으로 조선을 위협하기 시작하는데,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일본은 조선에 개항을 요구한다. 조선은 운요호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으며 무력시위를 하는 일본을 무시할 수 없었고 강압적인 수교 통상 요구를 받아들인다. 이 결과로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여 개항을 하게 된다. 하지만 강화도 조약은 조선에게 불평등한 면이 많았다. 또,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기 쉽게 하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다.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은 개항을 하면서 세계에 진출하게 되었으나 이는 불평등했고, 이어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의 다른 서구 열강들과 근대적인 불평등한 개항 수교 통상조약을 맺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amp;lt;/br&amp;gt;&lt;br /&gt;
이후 일본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 하는데, [[갑신정변_1884년]]을 통해 청이 조선에 대해 우위를 점하게 된다. 하지만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러일전쟁에서도 승리하면서 조선에 대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했으며, 이는 국권피탈로 이어졌다. &lt;br /&gt;
&lt;br /&gt;
====일제강점기, 암흑의 시대====&lt;br /&gt;
----&lt;br /&gt;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게 된다. 1910년부터 해방된 1945년까지를 일제강점기라고 부른다. &amp;lt;/br&amp;gt;&lt;br /&gt;
1910년대: 무단통치시기이다. 정치 단체를 만들거나 의견을 내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민족 신문이 폐간되었다. 헌병이 직접 벌을 내리는 즉결심판권이 있었으며 학교에서 교사는 군복에 칼을 찼다. 일본어가 '국어'로 교육되었으며 중등학교에서는 실업 교육을, 고등 교육 기관은 없앴다. 또, 토지 조사 사업이 시작되어 우리나라의 토지를 뺴앗아갔다. 전체 토지의 40%가 일본에 넘어갔으며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통해 일본인에게 팔렸다. &amp;lt;/br&amp;gt;&lt;br /&gt;
1920년대: 문화통치시기이다. 3.1운동이 일어나고 무단통치의 한계를 느낀 일본은 문화통치로 전환한다. 표면적으로는 유화정책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탄압, 감시, 문화 말살, 수탈을 위한 정책이었다. 헌병경찰제도가 보통경찰제도로 변경되었으나 실질적으로 경찰 인력과 시설은 늘어났다. 민족신문의 발행을 허용하였으나 검열은 계속되었다. 교육 기회 확대를 주장했지만 일본과 관련된 내용을 가르치는데 불과했으며 조선인의 취학률은 낮았고, 고등교육은 여전히 실시되지 않았다. 태형령이 없어졌지만 치안 유지법을 제정해 강력하게 탄압했다.&amp;lt;/br&amp;gt; &lt;br /&gt;
1930년대:민족말살통치시기이다. 민족말살통치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 협력을 얻기 위해 취한 정책이다. 내선일체, 황민화 정책, 창씨개명, 일선동조론이 민족말살통치의 일부이다. 민족말살통치는 일본이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고 한국인의 정체성을 없애려고  한 통치이며, 이 시기 많은 강제동원과 수탈이 이루어졌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1945년 일본이 세계 2차대전에서 패하게 되고,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한다. &lt;br /&gt;
&lt;br /&gt;
====해방 후부터 5공화국까지, 일본의 영향 축소====&lt;br /&gt;
----&lt;br /&gt;
해방 후부터 일본과 한국은 교류하지 않았다. 한국전쟁을 겪고 난 후 한국은 일본보다는 다른 나라와 더 많은 교류를 했고 영향을 주고받았다. 그러다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하며 국교를 정상화하고 교류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lt;br /&gt;
&lt;br /&gt;
====6공화국 이후, 한국과 일본의 현 좌표====&lt;br /&gt;
----&lt;br /&gt;
한국과 일본은 많은 교류를 주고받고 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식민지배를 겪었고, 식민 지배 당시 많은 문제가 발생했기에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역사적인 갈등의 골이 깊다. [[현대 한국과 일본의 역사 문제]] 문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강제동원 문제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대표적이다. 인정과 배상, 개인의 청구권 문제로 갈등이 있다. 또,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도 존재한다. 일본이 전범국으로서 책임을 지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하는데, 일본이 저지를 일을 축소하여 교과서를 편찬하면서 문제가 생기고 있다. 또, 독도 문제에 관한 일본 교과서 서술도 문제이다. 마지막으로 독도 문제가 있다. 한국의 땅임이 명백한 독도에 대해 일본이 자기 땅이라고 주장하면서 갈등이 있다.&lt;br /&gt;
&lt;br /&gt;
[[분류:텀블러]]&lt;br /&gt;
&lt;br /&gt;
===미국===&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미국은 현재 한국의 최우방국이다. 북한이라는 명확한 대립 국가가 있는 지금, 미국은 우리 안보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며, 경제에 있어서도 우리나라는 미국에 많은 의존을 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과 이렇게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시작한 것은, 해방 이후로, 고작 80년도 되지 않았다. 80년은 물론 긴 시간이지만, 우리나라의 전체 역사 속에서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 문서에서는 한국과 미국이 처음 조우한 이래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미국 사이의 주요 사건을  미국이 우리나라에 미친 정치적 영향을 중심으로 서술한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한국과 미국의 첫 조우와 무시'''====&lt;br /&gt;
----&lt;br /&gt;
&lt;br /&gt;
미국의 한국에 대한 첫 관심은 1834년 로비츠 아시아 특파원의 보고이다. 이때 로비츠는 &amp;quot;동부 아시아 대륙에 조선이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반도 국가가 있는데 청나라와 일본이라는 대륙 국가와 섬나라 사이에 위치해 있고 본국 정부가 조선과 경제 교역을 가지게 되었으면 싶다&amp;quot;라고 밝히고 있다. 이후 대원군의 통상수교거부정책이 시행되던 중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48057&amp;amp;cid=46623&amp;amp;categoryId=46623 제네럴 셔먼호 사건]이 발생하였고 조선의 개항을 요구하는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2961 신미양요]가 발생한다. 미국의 승리에도 조선은 개항하지 않았고 조선은 [[운요호 사건]]으로 인한 강화도 조약 때야 개항하게 된다. 개항 이후,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기점으로 조선과 미국은 본격적인 교류를 실시한다. &lt;br /&gt;
그러나 일본제국과 미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성사되고 조선과 미국은 단교한다. 이후 미국은 조선을 철저히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며,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 과정을 묵인하거나 일본을 두둔하게 되고 조선은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2961 1910년 나라를 빼앗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강점기에서 희망을 주다'''====&lt;br /&gt;
----&lt;br /&gt;
&lt;br /&gt;
그런 와중,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이 발표되고 식민지 조선은 이 선언에 희망을 가지고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6772 3.1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고 비록 독립을 쟁취하지는 못하였으나,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진다.&lt;br /&gt;
이후, 제2차세계대전에서 일본과 미국은 적으로 만나게 되고 전후 일본의 상황을 논의하는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다. 그러나 얄타 회담에서 한국의 신탁통치를 논의한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해방 직후 밀접한 관계가 되다'''====&lt;br /&gt;
----&lt;br /&gt;
&lt;br /&gt;
일본의 항복 후, 한반도 남쪽에는 [[미군정]]이 북쪽에는 소련이 들어온다. 미군정 시절, 여러 정치적 변혁을 겪으며 좌익과 우익 계열은 완전히 분열되었고 결국 이승만의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20143&amp;amp;cid=62048&amp;amp;categoryId=62048 정읍 발언]을 기점으로 남북은 3.8도선을 기준으로 분단된다. 이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2143 한국전쟁]이 발생하고 미국은 UN연합군과 함께 남한을 위해 참전, 통일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적화통일을 막았다. 이를 계기로 한국과 미국은 안보적으로 가까운 사이가 되었으며, 전후 복구 과정에서 미국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은 한국은 미국과 경제적으로도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해방 후 혼란기 한국에 많은 영향을 미치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승만이 4.19 혁명으로 하야하는 과정에 미국이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는 등 지속적으로 정치적, 경제적 영향을 미치던 미국은 케네디 시대를 맞이한다. 민주주의 가치를 중시했던 케네디는 박정희 정권을 마음에 들지 않아 했고 베트남전 파병에 대해 미온적 태도를 보였으나, 미국 정권이 바뀐 후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한국은 [[베트남 전쟁]] 파병을 결정한다. 베트남 파병으로 많은 국내 정치적, 경제적 변화를 겪은 한국은 경제 성장을 공고히 하는 한편, 박정희 독재 체제도 강화되었다. 박정희의 독재 강화 과정에서 한국과 미국의 관계가 악화되기도 했다. 이후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20431&amp;amp;cid=62048&amp;amp;categoryId=62048 10.26 사건]이 일어나고 여러 사건을 지나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8343 6월 항쟁]이 일어났을 때, 미국은 전두환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고 노태우의 6.29 선언 발표에 기여한다.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민주화 이후에도 계속되는 영향'''====&lt;br /&gt;
----&lt;br /&gt;
&lt;br /&gt;
이후 지속적으로 좋은 관계를 맺다 노무현 정부 시절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73146&amp;amp;cid=43667&amp;amp;categoryId=43667 한미 FTA]를 체결하였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북한과의 해빙 무드 속에서 북미 정상회담을 개최하기도 했으나, 결국 주목할 만한 성과 없이 [[북미정상회담 결렬]]을 맞이한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이후, 정부가 한미일 공조에 공을 들이며, 더욱 긴밀해진 모습이나, 북한과의 관계는 매우 악화된 상황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한국과 미국은 밀접한 동맹국이니만큼 한미관계는 다른 여느 외교 관계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뽑히며, 한미관계의 조율 여부가 그 정부의 외교적 성패를 가르기도 한다. 그러나 미국이 이권에 따라 때로는 우리를 무시하고 저버린 적도 있기 때문에 결국 미국 또한, 자국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국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미관계를 원활하게 유지함으로써 안보와 경제적 이익을 취하는 동시에 너무 미국에게만 종속되지 않도록 자주적 힘을 길러나가는 것이 바람직한 한미관계의 길일 것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분류:개항부터_현재까지의_정치_교류]] [[분류:낭만가]] &lt;br /&gt;
&lt;br /&gt;
===러시아===&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잠시나마 친러관계를 맺다'''====&lt;br /&gt;
----&lt;br /&gt;
&lt;br /&gt;
1884년 조선과 러시아 사이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1711 조로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며 개항 이후 조선과 러시아가 본격적인 수교를 시작한다. 러시아는 의외로 서구 열강 중 가장 조선을 자국 식민지로 삼고자 하는 국가였기 때문에, 점차 조선에 영향력을 확대해 가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영국이 러시아를 견제하는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1825 거문도 사건]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기존에 고종의 왕비인 명성황후는 이미 러시아와 우호적 관계를 맺고자 했는데, 이를 비롯한 여러 가지 요인을 말미암아 일본에서는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2948 을미사변]을 일으킨다. 이 사건을 계기로 고종은 국내 친일파 세력을 피하기 위해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1년간 피난하게 되는데, 이것이 [[아관파천]]이다. 이 기간 동안 일본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만큼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해졌다. 그러나 러시아와 일본 간 한반도의 주도권을 두고 벌인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7238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면서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하고, 이후 조선은 친일파들의 주도 하에 1910년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른 우호 또는 적대'''====&lt;br /&gt;
----&lt;br /&gt;
&lt;br /&gt;
일제 강점기 당시 러시아는 만주와 더불어 독립운동의 근거지 중 하나였다. 러시아는 러시아 혁명과 러시아 내전을 차례로 겪는 과정에서 백군 진영에 지원군을 보낸 연합군을 상대해야 했는데, 연합군에는 일본이 포함되어 있었고 그 과정에서 한국의 독립운동 단체들과 이해관계가 맞아 잠시나마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해 준 바 있다. 자세한 사항은 [[러시아의 독립운동 지원]] 참조.&lt;br /&gt;
&lt;br /&gt;
그러나 러시아 내전이 정리된 이후로 소련은 독립군에게서 점점 지원을 거둬들였고, 끝내[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2193 자유시 참변]이 일어난다. 이후 소련은 자신들의 러시아 지역 내 지배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당시 러시아에 이주해 살고 있던 조선의 농민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키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냉전 시대 북한과 함께 적대 관계를 형성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해방 이후 한반도 남쪽에는 [[미군정]]이, 북쪽에는 소련이 들어온다. 신탁 통치 기간이 지나고 여러 정치적 변혁을 겪으며 좌익과 우익 계열은 완전히 분리되었고 남한과 북한 정부가 각각 수립되며 완전한 분단이 이루어진다. 소련은 남한을 국가로 승인하지 않고, 북한만을 한반도 유일의 합법한 정부로 여겼다. 그 과정에서 대한민국 정부는 북한을 지원하는 소련과 점점 대립하기 시작했으며, 1950년 [[한국전쟁]]이 소련의 부추김에 의해 발발하면서 대한민국과 소련은 완전한 적대관계로 돌아서게 된다. 1955년 남한의 UN 가입 시도 역시 소련에 의해 좌절된 바 있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냉전 종식과 함께 관계가 정상화되다'''====&lt;br /&gt;
----&lt;br /&gt;
&lt;br /&gt;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소련이 서방 국가들의 우호 분위기를 이어 참가를 결정하며 한국 내 소련에 대한 인식이 완화되기 시작했다. 1989년부터 시작된 [[냉전 종식]]의 영향과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이 합쳐져 시너지를 발휘해 1990년 한소정상회담을 바탕으로 다시 수교가 시작되었다. 또한 한소수교에 따라 소련이 더 이상 한국의 UN 가입에 반대할 이유가 사라지며 한국은 1991년 UN에 북한과 함께 가입한다. 이후 소련이 해체하면서 한소관계는 한러관계로 승계되어 이어졌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현대에 들어 점차 여론이 악화되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후로 러시아와 한국의 관계는 큰 변화 없이 원만했다. 스포츠에 있어서는 러시아와 종종 국민 감정이 악화되는 일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https://news.mt.co.kr/mtview.php?no=2024022215180317499 2014년 소치올림픽 편파판정] 당시 한국의 러시아에 대한 적대적 인식이 형성된 적 있다. 또한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220218500098&amp;amp;wlog_tag3=naver 2022년 발리예바 도핑 사건]에 대한 김연아 선수의 비판으로 인해 러시아 국민들과 한국 국민들 사이에 다시금 국민 감정이 악화된 바 있다. 러시아에서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1/0003256522?sid=104 한국을 비우호 국가로 지정]하고, 이에 따라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로 러시아에 대한 적대 의견이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분류:개항부터_현재까지의_정치_교류]] [[분류:소금토마토]]&lt;br /&gt;
&lt;br /&gt;
===중국===&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조선 후기 청나라와의 관계'''====&lt;br /&gt;
----&lt;br /&gt;
&lt;br /&gt;
병자호란을 기점으로 청나라와 사대 관계를 맺은 조선은 이후로도 청과의 사대관계를 유지했다. 당시 한국이 일본에 의한 침탈의 과정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전근대 시기처럼 청과 밀접한 관계를 맺지는 않았다. 그러나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은 일본과 함께 조선의 정치에 다시 관여하기 시작했다. 이후 [[갑신정변_1884년]]을 계기로 잠시나마 청이 일본보다 조선에 대한 우위를 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가 1895년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46721&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1658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패하면서 자연스럽게 일본에게 조선에 대한 우위를 넘겨주게 된다. 이후 1910년 대한제국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일제 공동의 적을 둔 두 국가의 우호 관계'''====&lt;br /&gt;
----&lt;br /&gt;
&lt;br /&gt;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둘 모두 일본 제국주의라는 공동의 적을 둔 입장이 되면서 다시금 밀접한 관계가 형성된다. 많은 한국의 독립 단체와 독립 투사들이 만주와 상해 등 중국을 기반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한국 독립단체들의 자금 및 세력이 미약하여 자력으로는 독립 운동을 진행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었으나, [[중국의 독립운동 지원]]을 바탕으로 해방 이전까지 꾸준하게 독립 운동을 진행할 수 있었다. 한국 역시 중국의 항일 세력에 직접적으로 군대를 지원하는 등 상호 간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때까지는 양국 모두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이 공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진영별로 또는 다같이 합세하여 협력하는 양상을 보인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해방 직후 적대관계로 돌아서다'''====&lt;br /&gt;
----&lt;br /&gt;
&lt;br /&gt;
해방 이후 한반도 남쪽에는 [[미군정]]이, 북쪽에는 소련이 들어온다. 신탁 통치 기간이 지나고 여러 정치적 변혁을 겪으며 좌익과 우익 계열은 완전히 분리되었고 남한과 북한 정부가 각각 수립되며 완전한 분단이 이루어진다. 이때 중국에서는 마오쩌둥을 필두로 하는 공산당이 정권을 장악하며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다. 당연하게도 공산권이 중국에서는 같은 공산권인 북한의 정부 수립을 승인하게 되면서 남한과는 강력한 적대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진 [[한국전쟁]]에서 중국이 북한을 지원하고, UN군의 진격에 밀려 올라가는 북한에 중공군을 직접 투입해 줌으로써 남한의 북진을 저지하였다. 이때를 기점으로 중국과는 철저한 적대관계를 이루게 되고, 대한민국 정부의 강력한 반공주의에 따라 중국과는 거의 수교가 단절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냉전 종식과 함께 다시 수교를 시작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중국이 참가하게 되면서 양국의 관계가 강력한 적대 관계에서 점차 완화되었다. 이후 1989년부터 시작된 [[냉전 종식]]의 영향과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이 합쳐져 시너지를 발휘해 1992년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은 오랜 적대 관계를 깨고 다시 수교를 시작한다. 물론 수교를 하였다고 해도 완전히 사이가 좋다고 보기는 어려운데, 중국이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긴 하였으나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공산당 일당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공주의 시대의 적대 관계보다 현재의 관계가 훨씬 우호적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크고 작은 갈등이 지속되다'''====&lt;br /&gt;
----&lt;br /&gt;
&lt;br /&gt;
중국과의 수교 이후 현재까지 경제적으로는 큰 변화 없이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77896&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1864 무역]에 있어서 2020년 기준 중국은 세계 최대 교역국가이자 수출대국이고, 수입은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이다. 특히 2001년 세계무역기구 가입 이후로 중국과의 교역 비중이 크게 증가하여 2020년 전세계 수출 중 중국의 비중이 역대 최대를 기록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경제 이외의 부문에서는 크고 작은 갈등이 지속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중국은 지속적인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6377 동북공정]을 진행하며 역사적으로 한국과 갈등을 빚고 있으며, 2020년대 들어서는 문화에 있어서도 [https://www.chosun.com/national/national_general/2022/02/06/DTARKZFQBFASDAKOLWX37IKDUY/ 문화공정]을 진행하며 김치, 한복 등 한국의 문화를 중국의 문화라 주장하며 지속적 갈등을 만들고 있는 상황이다. 더하여 여전히 그 영향이 남아 있는 중국발 [[코로나19]]로 인한 중국의 외교적 압박 및 정치적 발언으로 인해 국내에서 중국에 대한 민간 여론이 극도로 나빠진 상태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분류:개항부터_현재까지의_정치_교류]] [[분류:소금토마토]]&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온톨로지==&lt;br /&gt;
{{NetworkGraph | title=정치교류.ls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NetworkGraph | title=정치교류.lst}}&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콘텐츠 구조==&lt;br /&gt;
&lt;br /&gt;
===클래스(Class)===&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color:white&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amp;quot; | 클래스 !! style=&amp;quot;width:30%&amp;quot; | 설명 !! style=&amp;quot;45%&amp;quot; | 노드&lt;br /&gt;
|-&lt;br /&gt;
|나라 ||우리나라의 정치사에 영향을 가장 많이 미친 나라들이다. 각 문서에 각 나라가 한국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통시적으로 서술하였다. || [[일본]] [[중국]] [[러시아]] [[미국]]&lt;br /&gt;
&lt;br /&gt;
|-&lt;br /&gt;
|사건 || 주요 사건들을 노드로 만들었다. 각 사건에 대해 자세히 서술했고, 각 사건이 미친 영향을 서술했다.|| [[운요호 사건]] [[강화도 조약]] [[갑신정변_1884년]] [[을사조약]] [[한일기본조약]]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현대 한국과 일본의 역사 문제]] [[임오군란]] [[중국의 독립운동 지원]] [[한국전쟁]] [[코로나19]] [[아관파천]] [[러시아의 독립운동 지원]] [[냉전 종식]] [[가쓰라-태프트 밀약]] [[민족자결주의 선언]] [[미군정]] [[베트남 전쟁]] [[북미정상회담 결렬]] &lt;br /&gt;
|-&lt;br /&gt;
|시기|| 시기를 크게 4가지로 나누어 노드를 만들었다.  || [[개항부터 국권피탈]]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 [[6공화국 이후]]&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green&amp;quot;&amp;gt;'''leads'''&amp;lt;/span&amp;gt;&lt;br /&gt;
***설명: 나라와 해당 나라가 관련된 사건을 연결한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일본 → 운요호사건&lt;br /&gt;
***#일본 → 강화도 조약&lt;br /&gt;
***#일본 → 갑신정변_1885년&lt;br /&gt;
***#일본 → 을사조약&lt;br /&gt;
***#일본 → 한일기본조약&lt;br /&gt;
***#일본 →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lt;br /&gt;
***#일본 → 현대 한국과 일본의 역사 문제&lt;br /&gt;
***#일본 → 임오군란&lt;br /&gt;
***#일본 → 톈진 조약&lt;br /&gt;
***#일본 → 가쓰라-태프트 밀약&lt;br /&gt;
***#중국 → 갑신정변&lt;br /&gt;
***#중국 →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lt;br /&gt;
***#중국 → 임오군란&lt;br /&gt;
***#중국 → 톈진 조약&lt;br /&gt;
***#중국 → 중국의 독립운동 지원&lt;br /&gt;
***#중국 →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lt;br /&gt;
***#중국 → 카이로 회담&lt;br /&gt;
***#중국 → 한국 전쟁&lt;br /&gt;
***#중국 → 코로나19&lt;br /&gt;
***#중국 → 냉전 종식&lt;br /&gt;
***#러시아 → 한국 전쟁&lt;br /&gt;
***#러시아 → 아관파천&lt;br /&gt;
***#러시아 → 러시아의 독립운동 지원&lt;br /&gt;
***#러시아 → 냉전 종식&lt;br /&gt;
***#미국 → 가쓰라-태프트 밀약&lt;br /&gt;
***#미국 → 민족자결주의 선언&lt;br /&gt;
***#미국 → 카이로 회담&lt;br /&gt;
***#미국 → 한국 전쟁&lt;br /&gt;
***#미국 → 냉전 종식&lt;br /&gt;
***#미국 → 미군정&lt;br /&gt;
***#미국 → 베트남 전쟁&lt;br /&gt;
***#미국 → 북미정상회담 결렬&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green&amp;quot;&amp;gt;'''isRelatedTo'''&amp;lt;/span&amp;gt;&lt;br /&gt;
***설명: 나라와 특정 시기를 연결한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일본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일본 → 일제강점기&lt;br /&gt;
***#일본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일본 → 6공화국 이후&lt;br /&gt;
***#중국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중국 → 일제강점기&lt;br /&gt;
***#중국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중국 → 6공화국 이후&lt;br /&gt;
***#러시아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러시아 → 일제강점기&lt;br /&gt;
***#러시아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러시아 → 6공화국 이후&lt;br /&gt;
***#미국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미국 → 일제강점기&lt;br /&gt;
***#미국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미국 → 6공화국 이후&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green&amp;quot;&amp;gt;'''happenedAt'''&amp;lt;/span&amp;gt;&lt;br /&gt;
***설명: 해당 사건과 특정 시기를 연결한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운요호 사건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강화도 조약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갑신정변_1884년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가쓰라-태프트 밀약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아관파천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임오군란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톈진조약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을사조약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중국의 독립운동 지원 → 일제강점기&lt;br /&gt;
***#민족자결주의 선언 → 일제강점기&lt;br /&gt;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 일제강점기&lt;br /&gt;
***#러시아의 독립운동 지원 → 일제강점기&lt;br /&gt;
***#카이로 회담 → 일제강점기&lt;br /&gt;
***#한일기본조약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미군정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베트남 전쟁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한국 전쟁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현대 한국과 일본의 역사 문제 → 6공화국 이후&lt;br /&gt;
***#코로나19 → 6공화국 이후&lt;br /&gt;
***#냉전 종식 → 6공화국 이후&lt;br /&gt;
***#북미정상회담 결렬 → 6공화국 이후&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마인드맵==&lt;br /&gt;
 노드 마인드맵&lt;br /&gt;
[[파일:마인드맵_1.png|500px|마인드맵 1]] &amp;lt;/br&amp;gt;&lt;br /&gt;
[[파일:마인드맵_2.png|500px|마인드맵 2]] &amp;lt;/br&amp;gt;&lt;br /&gt;
[[파일:마인드맵_3.png|500px|마인드맵 3]] &amp;lt;/br&amp;gt;&lt;br /&gt;
[[파일:마인드맵_4.png|500px|마인드맵 4]] &amp;lt;/br&amp;gt;&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기여==&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white;&amp;quot;&lt;br /&gt;
|+ 6분반 정치교류조&lt;br /&gt;
|+ style=&amp;quot;caption-side:bottom; 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팀원 || 기여내용&lt;br /&gt;
|-&lt;br /&gt;
| [[낭만가]] || 주제 선정, 전체적인 내용 설정, 미국 문서 작성, 관계 설정 및 작성, 동기 및 결론 작성, 발표&lt;br /&gt;
|-&lt;br /&gt;
| [[텀블러]] || 전체적인 내용 구상 기여, 전체적인 위키 문서 틀 작성, 온톨로지 작성, 일본 관련 문서 작성, 역할분담 작성, 발표용 ppt 제작&lt;br /&gt;
|-&lt;br /&gt;
| [[소금토마토]] || 추가예정&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시간의 흐름으로 보는 정치교류사'''==&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NfjKF8MdQEGWKD4zQXAOvIxaqYsUcQGp7kQ_QSU4sq4&amp;amp;font=Default&amp;amp;lang=ko&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도출한 결론==&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국내 정세 안정화 선행 필요성'''===&lt;br /&gt;
----&lt;br /&gt;
개항기, 일제강점기, 해방 후 안정되기 전까지는 타국이 우리나라 정치 상황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안정기에 들어서고 나서는 타국의 정치적 영향도, 타국이 영향을 준 경우도 줄었다. 그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해보았는데, 타국이 영향을 줘서 흔들릴 만큼의 정치적인 불안정성이 없어졌고 따라서 타국에 기댈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할 수 있었다. 따라서 타국의 안 좋은 영향력을 최소화하고 자주권을 확립하여 국가와 국민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우선, 국내 정치 상황이 안정되어야 하며, 그것은 필수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영원한 우방국은 없다'''===&lt;br /&gt;
----&lt;br /&gt;
그다음으로 내린 결론은 영원한 우방국은 없다, 즉, 국제 사회는 철저한 계산에 따라 냉혹하면서도 현실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저희가 다룬 네 국가와 우리나라의 관계는 때론 우호적이기도 때론 적대적이기도 했는데, 그 관계의 이면에는 늘 치밀한 각국의 손익 계산이 반영되어 있었다. 즉, 타국은 우리나라가 본국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 싶으면 우호적인 제스쳐를 취하며 이용했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버리고 혹은 이해관계에 따라 적대적으로 설정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가 국권을 피탈 당할 때도 이러한 국제사회의 이해관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미국, 러시아 등의 국가를 너무 믿었다가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따라서, 국제사회에서 국가는 오직 국익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에 따른 적절한 외교전략을 수립해나가야 한다.&lt;br /&gt;
&lt;br /&gt;
결론적으로, 우리가 피해를 입은 경우도 있었는데 이런 피해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정치적 혼란을 막으면서 우리 문제에는 우리가 주도권을 뺏기지 않는 상황을 만들고 동시에 실리적인 외교 방안을 모색하여 평화와 국익을 위한 외교를 해야 할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아쉬운 점과 개선점'''===&lt;br /&gt;
----&lt;br /&gt;
주제 자체를 양이 너무 많고 내용도 어려운 주제로 정한 데다 잘하고 싶은 의욕으로 많은 문서를 만들고자 한 탓에 자료 조사와 내용 작성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이런 이유로 위키만의 장점을 드러낼 수 있는, 위키로만 할 수 있는 여러 툴이나 장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웠다. 그래서 다음에 또 위키 관련 활동을 한다면, 시간과 수준에 알맞은 적절한 주제, 적절한 개수의 노드를 미리 설정해서 자료 조사와 내용 작성에만 할애했던 시간을 위키만의 장점을 드러낼 수 있는 여러 툴을 활용하는 데에 사용하도록 개선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lt;/div&gt;</summary>
		<author><name>소금토마토</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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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파일:마인드맵 1.png</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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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06-22T14:57:4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소금토마토: &lt;/p&gt;
&lt;hr /&gt;
&lt;div&gt;&lt;/div&gt;</summary>
		<author><name>소금토마토</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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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개항부터 현재까지의 정치 교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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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06-22T14:57:2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소금토마토: /* 마인드맵 */&lt;/p&gt;
&lt;hr /&gt;
&lt;div&gt;==&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콘텐츠 주제==&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amp;lt;font size='5'&amp;gt;'''개항부터 현재까지 한국과 타국의 정치 교류'''&amp;lt;/font&amp;gt;&amp;lt;/div&amp;gt;&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기획의도==&lt;br /&gt;
===기획배경===&lt;br /&gt;
&amp;lt;br/&amp;gt;&lt;br /&gt;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조원과 다른 나라와의 경제 교류에 관심이 많았던 조원 두 명이 합쳐져 조를 형성하였다. '교류’와 ‘정치’라는 주제를 어떻게 연결하여 절충안을 찾을지 고민하다가 우리나라의 정치가 역사적으로 타국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아왔다는 사실이 떠올라 위 주제를 선정하게 되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기획 목적===&lt;br /&gt;
&amp;lt;br/&amp;gt;&lt;br /&gt;
 정치 교류사를 되돌아보며 타국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나라 정치의 변화 흐름을 바라보고자 했다. 이를 통해 타국이 우리나라 정치 상황에 미친 영향을 통시적으로 알아보고 주요 사건의 결과도 보고자 했다. 특히, 우리나라가 손해를 보거나 불이익을 당한 경우라면 문제점을 파악하고 이것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마련해 보고자 이러한 주제를 선정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기대하는 바===&lt;br /&gt;
&amp;lt;br/&amp;gt;&lt;br /&gt;
 타국이 우리나라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파악하고 일련의 탐구로부터 결론을 도출하기를 기대한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나라가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기대하는 바이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국가별 통시적 설명==&lt;br /&gt;
&amp;lt;br/&amp;gt;&lt;br /&gt;
===일본===&lt;br /&gt;
----&lt;br /&gt;
일본은 한국과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워 역사 속에서 많은 영향을 주고 받았다. 현재까지도 많은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또 많은 갈등이 존재하기도 한다. 특히 역사 관련 갈등이 많이 발생한다는 점이 한일관계에서 주목할 만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현대 한일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으로 한국과 일본 사이에 어떤 교류가 일어났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lt;br /&gt;
이 문서에서는 현재 한일관계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개항 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일본 사이의 주요 사건을 일본이 우리나라에 미친 정치적 영향을 중심으로 서술한다. 이 문서와 같은 내용이 '일본' 문서에도 실려 있다. &lt;br /&gt;
&amp;lt;br/&amp;gt;&lt;br /&gt;
====개항부터 국권피탈 전까지, 일본 침략의 전조====&lt;br /&gt;
----&lt;br /&gt;
[[운요호 사건]]을 시작으로 한국은 개항을 하게 된다. 일본은 쿠로후네 사건을 통해 개항하게 되었고 조선이 쇄국정책을 시행하는 사이 메이지 유신을 통해 급격하게 발전한다. 일본은 제국주의적 팽창으로 조선을 위협하기 시작하는데,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일본은 조선에 개항을 요구한다. 조선은 운요호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으며 무력시위를 하는 일본을 무시할 수 없었고 강압적인 수교 통상 요구를 받아들인다. 이 결과로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여 개항을 하게 된다. 하지만 강화도 조약은 조선에게 불평등한 면이 많았다. 또,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기 쉽게 하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다.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은 개항을 하면서 세계에 진출하게 되었으나 이는 불평등했고, 이어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의 다른 서구 열강들과 근대적인 불평등한 개항 수교 통상조약을 맺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amp;lt;/br&amp;gt;&lt;br /&gt;
이후 일본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 하는데, [[갑신정변_1884년]]을 통해 청이 조선에 대해 우위를 점하게 된다. 하지만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러일전쟁에서도 승리하면서 조선에 대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했으며, 이는 국권피탈로 이어졌다. &lt;br /&gt;
&lt;br /&gt;
====일제강점기, 암흑의 시대====&lt;br /&gt;
----&lt;br /&gt;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게 된다. 1910년부터 해방된 1945년까지를 일제강점기라고 부른다. &amp;lt;/br&amp;gt;&lt;br /&gt;
1910년대: 무단통치시기이다. 정치 단체를 만들거나 의견을 내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민족 신문이 폐간되었다. 헌병이 직접 벌을 내리는 즉결심판권이 있었으며 학교에서 교사는 군복에 칼을 찼다. 일본어가 '국어'로 교육되었으며 중등학교에서는 실업 교육을, 고등 교육 기관은 없앴다. 또, 토지 조사 사업이 시작되어 우리나라의 토지를 뺴앗아갔다. 전체 토지의 40%가 일본에 넘어갔으며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통해 일본인에게 팔렸다. &amp;lt;/br&amp;gt;&lt;br /&gt;
1920년대: 문화통치시기이다. 3.1운동이 일어나고 무단통치의 한계를 느낀 일본은 문화통치로 전환한다. 표면적으로는 유화정책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탄압, 감시, 문화 말살, 수탈을 위한 정책이었다. 헌병경찰제도가 보통경찰제도로 변경되었으나 실질적으로 경찰 인력과 시설은 늘어났다. 민족신문의 발행을 허용하였으나 검열은 계속되었다. 교육 기회 확대를 주장했지만 일본과 관련된 내용을 가르치는데 불과했으며 조선인의 취학률은 낮았고, 고등교육은 여전히 실시되지 않았다. 태형령이 없어졌지만 치안 유지법을 제정해 강력하게 탄압했다.&amp;lt;/br&amp;gt; &lt;br /&gt;
1930년대:민족말살통치시기이다. 민족말살통치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 협력을 얻기 위해 취한 정책이다. 내선일체, 황민화 정책, 창씨개명, 일선동조론이 민족말살통치의 일부이다. 민족말살통치는 일본이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고 한국인의 정체성을 없애려고  한 통치이며, 이 시기 많은 강제동원과 수탈이 이루어졌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1945년 일본이 세계 2차대전에서 패하게 되고,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한다. &lt;br /&gt;
&lt;br /&gt;
====해방 후부터 5공화국까지, 일본의 영향 축소====&lt;br /&gt;
----&lt;br /&gt;
해방 후부터 일본과 한국은 교류하지 않았다. 한국전쟁을 겪고 난 후 한국은 일본보다는 다른 나라와 더 많은 교류를 했고 영향을 주고받았다. 그러다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하며 국교를 정상화하고 교류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lt;br /&gt;
&lt;br /&gt;
====6공화국 이후, 한국과 일본의 현 좌표====&lt;br /&gt;
----&lt;br /&gt;
한국과 일본은 많은 교류를 주고받고 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식민지배를 겪었고, 식민 지배 당시 많은 문제가 발생했기에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역사적인 갈등의 골이 깊다. [[현대 한국과 일본의 역사 문제]] 문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강제동원 문제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대표적이다. 인정과 배상, 개인의 청구권 문제로 갈등이 있다. 또,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도 존재한다. 일본이 전범국으로서 책임을 지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하는데, 일본이 저지를 일을 축소하여 교과서를 편찬하면서 문제가 생기고 있다. 또, 독도 문제에 관한 일본 교과서 서술도 문제이다. 마지막으로 독도 문제가 있다. 한국의 땅임이 명백한 독도에 대해 일본이 자기 땅이라고 주장하면서 갈등이 있다.&lt;br /&gt;
&lt;br /&gt;
[[분류:텀블러]]&lt;br /&gt;
&lt;br /&gt;
===미국===&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미국은 현재 한국의 최우방국이다. 북한이라는 명확한 대립 국가가 있는 지금, 미국은 우리 안보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며, 경제에 있어서도 우리나라는 미국에 많은 의존을 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과 이렇게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시작한 것은, 해방 이후로, 고작 80년도 되지 않았다. 80년은 물론 긴 시간이지만, 우리나라의 전체 역사 속에서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 문서에서는 한국과 미국이 처음 조우한 이래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미국 사이의 주요 사건을  미국이 우리나라에 미친 정치적 영향을 중심으로 서술한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한국과 미국의 첫 조우와 무시'''====&lt;br /&gt;
----&lt;br /&gt;
&lt;br /&gt;
미국의 한국에 대한 첫 관심은 1834년 로비츠 아시아 특파원의 보고이다. 이때 로비츠는 &amp;quot;동부 아시아 대륙에 조선이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반도 국가가 있는데 청나라와 일본이라는 대륙 국가와 섬나라 사이에 위치해 있고 본국 정부가 조선과 경제 교역을 가지게 되었으면 싶다&amp;quot;라고 밝히고 있다. 이후 대원군의 통상수교거부정책이 시행되던 중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48057&amp;amp;cid=46623&amp;amp;categoryId=46623 제네럴 셔먼호 사건]이 발생하였고 조선의 개항을 요구하는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2961 신미양요]가 발생한다. 미국의 승리에도 조선은 개항하지 않았고 조선은 [[운요호 사건]]으로 인한 강화도 조약 때야 개항하게 된다. 개항 이후,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기점으로 조선과 미국은 본격적인 교류를 실시한다. &lt;br /&gt;
그러나 일본제국과 미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성사되고 조선과 미국은 단교한다. 이후 미국은 조선을 철저히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며,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 과정을 묵인하거나 일본을 두둔하게 되고 조선은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2961 1910년 나라를 빼앗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강점기에서 희망을 주다'''====&lt;br /&gt;
----&lt;br /&gt;
&lt;br /&gt;
그런 와중,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이 발표되고 식민지 조선은 이 선언에 희망을 가지고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6772 3.1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고 비록 독립을 쟁취하지는 못하였으나,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진다.&lt;br /&gt;
이후, 제2차세계대전에서 일본과 미국은 적으로 만나게 되고 전후 일본의 상황을 논의하는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다. 그러나 얄타 회담에서 한국의 신탁통치를 논의한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해방 직후 밀접한 관계가 되다'''====&lt;br /&gt;
----&lt;br /&gt;
&lt;br /&gt;
일본의 항복 후, 한반도 남쪽에는 [[미군정]]이 북쪽에는 소련이 들어온다. 미군정 시절, 여러 정치적 변혁을 겪으며 좌익과 우익 계열은 완전히 분열되었고 결국 이승만의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20143&amp;amp;cid=62048&amp;amp;categoryId=62048 정읍 발언]을 기점으로 남북은 3.8도선을 기준으로 분단된다. 이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2143 한국전쟁]이 발생하고 미국은 UN연합군과 함께 남한을 위해 참전, 통일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적화통일을 막았다. 이를 계기로 한국과 미국은 안보적으로 가까운 사이가 되었으며, 전후 복구 과정에서 미국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은 한국은 미국과 경제적으로도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해방 후 혼란기 한국에 많은 영향을 미치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승만이 4.19 혁명으로 하야하는 과정에 미국이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는 등 지속적으로 정치적, 경제적 영향을 미치던 미국은 케네디 시대를 맞이한다. 민주주의 가치를 중시했던 케네디는 박정희 정권을 마음에 들지 않아 했고 베트남전 파병에 대해 미온적 태도를 보였으나, 미국 정권이 바뀐 후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한국은 [[베트남 전쟁]] 파병을 결정한다. 베트남 파병으로 많은 국내 정치적, 경제적 변화를 겪은 한국은 경제 성장을 공고히 하는 한편, 박정희 독재 체제도 강화되었다. 박정희의 독재 강화 과정에서 한국과 미국의 관계가 악화되기도 했다. 이후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20431&amp;amp;cid=62048&amp;amp;categoryId=62048 10.26 사건]이 일어나고 여러 사건을 지나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8343 6월 항쟁]이 일어났을 때, 미국은 전두환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고 노태우의 6.29 선언 발표에 기여한다.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민주화 이후에도 계속되는 영향'''====&lt;br /&gt;
----&lt;br /&gt;
&lt;br /&gt;
이후 지속적으로 좋은 관계를 맺다 노무현 정부 시절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73146&amp;amp;cid=43667&amp;amp;categoryId=43667 한미 FTA]를 체결하였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북한과의 해빙 무드 속에서 북미 정상회담을 개최하기도 했으나, 결국 주목할 만한 성과 없이 [[북미정상회담 결렬]]을 맞이한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이후, 정부가 한미일 공조에 공을 들이며, 더욱 긴밀해진 모습이나, 북한과의 관계는 매우 악화된 상황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한국과 미국은 밀접한 동맹국이니만큼 한미관계는 다른 여느 외교 관계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뽑히며, 한미관계의 조율 여부가 그 정부의 외교적 성패를 가르기도 한다. 그러나 미국이 이권에 따라 때로는 우리를 무시하고 저버린 적도 있기 때문에 결국 미국 또한, 자국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국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미관계를 원활하게 유지함으로써 안보와 경제적 이익을 취하는 동시에 너무 미국에게만 종속되지 않도록 자주적 힘을 길러나가는 것이 바람직한 한미관계의 길일 것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분류:개항부터_현재까지의_정치_교류]] [[분류:낭만가]] &lt;br /&gt;
&lt;br /&gt;
===러시아===&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잠시나마 친러관계를 맺다'''====&lt;br /&gt;
----&lt;br /&gt;
&lt;br /&gt;
1884년 조선과 러시아 사이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1711 조로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며 개항 이후 조선과 러시아가 본격적인 수교를 시작한다. 러시아는 의외로 서구 열강 중 가장 조선을 자국 식민지로 삼고자 하는 국가였기 때문에, 점차 조선에 영향력을 확대해 가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영국이 러시아를 견제하는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1825 거문도 사건]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기존에 고종의 왕비인 명성황후는 이미 러시아와 우호적 관계를 맺고자 했는데, 이를 비롯한 여러 가지 요인을 말미암아 일본에서는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2948 을미사변]을 일으킨다. 이 사건을 계기로 고종은 국내 친일파 세력을 피하기 위해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1년간 피난하게 되는데, 이것이 [[아관파천]]이다. 이 기간 동안 일본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만큼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해졌다. 그러나 러시아와 일본 간 한반도의 주도권을 두고 벌인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7238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면서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하고, 이후 조선은 친일파들의 주도 하에 1910년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른 우호 또는 적대'''====&lt;br /&gt;
----&lt;br /&gt;
&lt;br /&gt;
일제 강점기 당시 러시아는 만주와 더불어 독립운동의 근거지 중 하나였다. 러시아는 러시아 혁명과 러시아 내전을 차례로 겪는 과정에서 백군 진영에 지원군을 보낸 연합군을 상대해야 했는데, 연합군에는 일본이 포함되어 있었고 그 과정에서 한국의 독립운동 단체들과 이해관계가 맞아 잠시나마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해 준 바 있다. 자세한 사항은 [[러시아의 독립운동 지원]] 참조.&lt;br /&gt;
&lt;br /&gt;
그러나 러시아 내전이 정리된 이후로 소련은 독립군에게서 점점 지원을 거둬들였고, 끝내[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2193 자유시 참변]이 일어난다. 이후 소련은 자신들의 러시아 지역 내 지배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당시 러시아에 이주해 살고 있던 조선의 농민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키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냉전 시대 북한과 함께 적대 관계를 형성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해방 이후 한반도 남쪽에는 [[미군정]]이, 북쪽에는 소련이 들어온다. 신탁 통치 기간이 지나고 여러 정치적 변혁을 겪으며 좌익과 우익 계열은 완전히 분리되었고 남한과 북한 정부가 각각 수립되며 완전한 분단이 이루어진다. 소련은 남한을 국가로 승인하지 않고, 북한만을 한반도 유일의 합법한 정부로 여겼다. 그 과정에서 대한민국 정부는 북한을 지원하는 소련과 점점 대립하기 시작했으며, 1950년 [[한국전쟁]]이 소련의 부추김에 의해 발발하면서 대한민국과 소련은 완전한 적대관계로 돌아서게 된다. 1955년 남한의 UN 가입 시도 역시 소련에 의해 좌절된 바 있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냉전 종식과 함께 관계가 정상화되다'''====&lt;br /&gt;
----&lt;br /&gt;
&lt;br /&gt;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소련이 서방 국가들의 우호 분위기를 이어 참가를 결정하며 한국 내 소련에 대한 인식이 완화되기 시작했다. 1989년부터 시작된 [[냉전 종식]]의 영향과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이 합쳐져 시너지를 발휘해 1990년 한소정상회담을 바탕으로 다시 수교가 시작되었다. 또한 한소수교에 따라 소련이 더 이상 한국의 UN 가입에 반대할 이유가 사라지며 한국은 1991년 UN에 북한과 함께 가입한다. 이후 소련이 해체하면서 한소관계는 한러관계로 승계되어 이어졌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현대에 들어 점차 여론이 악화되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후로 러시아와 한국의 관계는 큰 변화 없이 원만했다. 스포츠에 있어서는 러시아와 종종 국민 감정이 악화되는 일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https://news.mt.co.kr/mtview.php?no=2024022215180317499 2014년 소치올림픽 편파판정] 당시 한국의 러시아에 대한 적대적 인식이 형성된 적 있다. 또한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220218500098&amp;amp;wlog_tag3=naver 2022년 발리예바 도핑 사건]에 대한 김연아 선수의 비판으로 인해 러시아 국민들과 한국 국민들 사이에 다시금 국민 감정이 악화된 바 있다. 러시아에서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1/0003256522?sid=104 한국을 비우호 국가로 지정]하고, 이에 따라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로 러시아에 대한 적대 의견이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분류:개항부터_현재까지의_정치_교류]] [[분류:소금토마토]]&lt;br /&gt;
&lt;br /&gt;
===중국===&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조선 후기 청나라와의 관계'''====&lt;br /&gt;
----&lt;br /&gt;
&lt;br /&gt;
병자호란을 기점으로 청나라와 사대 관계를 맺은 조선은 이후로도 청과의 사대관계를 유지했다. 당시 한국이 일본에 의한 침탈의 과정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전근대 시기처럼 청과 밀접한 관계를 맺지는 않았다. 그러나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은 일본과 함께 조선의 정치에 다시 관여하기 시작했다. 이후 [[갑신정변_1884년]]을 계기로 잠시나마 청이 일본보다 조선에 대한 우위를 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가 1895년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46721&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1658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패하면서 자연스럽게 일본에게 조선에 대한 우위를 넘겨주게 된다. 이후 1910년 대한제국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일제 공동의 적을 둔 두 국가의 우호 관계'''====&lt;br /&gt;
----&lt;br /&gt;
&lt;br /&gt;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둘 모두 일본 제국주의라는 공동의 적을 둔 입장이 되면서 다시금 밀접한 관계가 형성된다. 많은 한국의 독립 단체와 독립 투사들이 만주와 상해 등 중국을 기반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한국 독립단체들의 자금 및 세력이 미약하여 자력으로는 독립 운동을 진행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었으나, [[중국의 독립운동 지원]]을 바탕으로 해방 이전까지 꾸준하게 독립 운동을 진행할 수 있었다. 한국 역시 중국의 항일 세력에 직접적으로 군대를 지원하는 등 상호 간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때까지는 양국 모두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이 공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진영별로 또는 다같이 합세하여 협력하는 양상을 보인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해방 직후 적대관계로 돌아서다'''====&lt;br /&gt;
----&lt;br /&gt;
&lt;br /&gt;
해방 이후 한반도 남쪽에는 [[미군정]]이, 북쪽에는 소련이 들어온다. 신탁 통치 기간이 지나고 여러 정치적 변혁을 겪으며 좌익과 우익 계열은 완전히 분리되었고 남한과 북한 정부가 각각 수립되며 완전한 분단이 이루어진다. 이때 중국에서는 마오쩌둥을 필두로 하는 공산당이 정권을 장악하며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다. 당연하게도 공산권이 중국에서는 같은 공산권인 북한의 정부 수립을 승인하게 되면서 남한과는 강력한 적대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진 [[한국전쟁]]에서 중국이 북한을 지원하고, UN군의 진격에 밀려 올라가는 북한에 중공군을 직접 투입해 줌으로써 남한의 북진을 저지하였다. 이때를 기점으로 중국과는 철저한 적대관계를 이루게 되고, 대한민국 정부의 강력한 반공주의에 따라 중국과는 거의 수교가 단절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냉전 종식과 함께 다시 수교를 시작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중국이 참가하게 되면서 양국의 관계가 강력한 적대 관계에서 점차 완화되었다. 이후 1989년부터 시작된 [[냉전 종식]]의 영향과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이 합쳐져 시너지를 발휘해 1992년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은 오랜 적대 관계를 깨고 다시 수교를 시작한다. 물론 수교를 하였다고 해도 완전히 사이가 좋다고 보기는 어려운데, 중국이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긴 하였으나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공산당 일당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공주의 시대의 적대 관계보다 현재의 관계가 훨씬 우호적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크고 작은 갈등이 지속되다'''====&lt;br /&gt;
----&lt;br /&gt;
&lt;br /&gt;
중국과의 수교 이후 현재까지 경제적으로는 큰 변화 없이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77896&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1864 무역]에 있어서 2020년 기준 중국은 세계 최대 교역국가이자 수출대국이고, 수입은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이다. 특히 2001년 세계무역기구 가입 이후로 중국과의 교역 비중이 크게 증가하여 2020년 전세계 수출 중 중국의 비중이 역대 최대를 기록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경제 이외의 부문에서는 크고 작은 갈등이 지속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중국은 지속적인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6377 동북공정]을 진행하며 역사적으로 한국과 갈등을 빚고 있으며, 2020년대 들어서는 문화에 있어서도 [https://www.chosun.com/national/national_general/2022/02/06/DTARKZFQBFASDAKOLWX37IKDUY/ 문화공정]을 진행하며 김치, 한복 등 한국의 문화를 중국의 문화라 주장하며 지속적 갈등을 만들고 있는 상황이다. 더하여 여전히 그 영향이 남아 있는 중국발 [[코로나19]]로 인한 중국의 외교적 압박 및 정치적 발언으로 인해 국내에서 중국에 대한 민간 여론이 극도로 나빠진 상태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분류:개항부터_현재까지의_정치_교류]] [[분류:소금토마토]]&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온톨로지==&lt;br /&gt;
{{NetworkGraph | title=정치교류.ls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NetworkGraph | title=정치교류.ls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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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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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콘텐츠 구조==&lt;br /&gt;
&lt;br /&gt;
===클래스(Class)===&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color:white&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amp;quot; | 클래스 !! style=&amp;quot;width:30%&amp;quot; | 설명 !! style=&amp;quot;45%&amp;quot; | 노드&lt;br /&gt;
|-&lt;br /&gt;
|나라 ||우리나라의 정치사에 영향을 가장 많이 미친 나라들이다. 각 문서에 각 나라가 한국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통시적으로 서술하였다. || [[일본]] [[중국]] [[러시아]] [[미국]]&lt;br /&gt;
&lt;br /&gt;
|-&lt;br /&gt;
|사건 || 주요 사건들을 노드로 만들었다. 각 사건에 대해 자세히 서술했고, 각 사건이 미친 영향을 서술했다.|| [[운요호 사건]] [[강화도 조약]] [[갑신정변_1884년]] [[을사조약]] [[한일기본조약]]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현대 한국과 일본의 역사 문제]] [[임오군란]] [[중국의 독립운동 지원]] [[한국전쟁]] [[코로나19]] [[아관파천]] [[러시아의 독립운동 지원]] [[냉전 종식]] [[가쓰라-태프트 밀약]] [[민족자결주의 선언]] [[미군정]] [[베트남 전쟁]] [[북미정상회담 결렬]] &lt;br /&gt;
|-&lt;br /&gt;
|시기|| 시기를 크게 4가지로 나누어 노드를 만들었다.  || [[개항부터 국권피탈]]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 [[6공화국 이후]]&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green&amp;quot;&amp;gt;'''leads'''&amp;lt;/span&amp;gt;&lt;br /&gt;
***설명: 나라와 해당 나라가 관련된 사건을 연결한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일본 → 운요호사건&lt;br /&gt;
***#일본 → 강화도 조약&lt;br /&gt;
***#일본 → 갑신정변_1885년&lt;br /&gt;
***#일본 → 을사조약&lt;br /&gt;
***#일본 → 한일기본조약&lt;br /&gt;
***#일본 →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lt;br /&gt;
***#일본 → 현대 한국과 일본의 역사 문제&lt;br /&gt;
***#일본 → 임오군란&lt;br /&gt;
***#일본 → 톈진 조약&lt;br /&gt;
***#일본 → 가쓰라-태프트 밀약&lt;br /&gt;
***#중국 → 갑신정변&lt;br /&gt;
***#중국 →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lt;br /&gt;
***#중국 → 임오군란&lt;br /&gt;
***#중국 → 톈진 조약&lt;br /&gt;
***#중국 → 중국의 독립운동 지원&lt;br /&gt;
***#중국 →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lt;br /&gt;
***#중국 → 카이로 회담&lt;br /&gt;
***#중국 → 한국 전쟁&lt;br /&gt;
***#중국 → 코로나19&lt;br /&gt;
***#중국 → 냉전 종식&lt;br /&gt;
***#러시아 → 한국 전쟁&lt;br /&gt;
***#러시아 → 아관파천&lt;br /&gt;
***#러시아 → 러시아의 독립운동 지원&lt;br /&gt;
***#러시아 → 냉전 종식&lt;br /&gt;
***#미국 → 가쓰라-태프트 밀약&lt;br /&gt;
***#미국 → 민족자결주의 선언&lt;br /&gt;
***#미국 → 카이로 회담&lt;br /&gt;
***#미국 → 한국 전쟁&lt;br /&gt;
***#미국 → 냉전 종식&lt;br /&gt;
***#미국 → 미군정&lt;br /&gt;
***#미국 → 베트남 전쟁&lt;br /&gt;
***#미국 → 북미정상회담 결렬&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green&amp;quot;&amp;gt;'''isRelatedTo'''&amp;lt;/span&amp;gt;&lt;br /&gt;
***설명: 나라와 특정 시기를 연결한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일본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일본 → 일제강점기&lt;br /&gt;
***#일본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일본 → 6공화국 이후&lt;br /&gt;
***#중국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중국 → 일제강점기&lt;br /&gt;
***#중국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중국 → 6공화국 이후&lt;br /&gt;
***#러시아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러시아 → 일제강점기&lt;br /&gt;
***#러시아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러시아 → 6공화국 이후&lt;br /&gt;
***#미국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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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 6공화국 이후&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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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span style=&amp;quot;color:green&amp;quot;&amp;gt;'''happenedAt'''&amp;lt;/span&amp;gt;&lt;br /&gt;
***설명: 해당 사건과 특정 시기를 연결한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운요호 사건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강화도 조약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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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독립운동 지원 → 일제강점기&lt;br /&gt;
***#카이로 회담 → 일제강점기&lt;br /&gt;
***#한일기본조약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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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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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 6공화국 이후&lt;br /&gt;
***#냉전 종식 → 6공화국 이후&lt;br /&gt;
***#북미정상회담 결렬 → 6공화국 이후&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마인드맵==&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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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마인드맵 1.png|500px|마인드맵 1]] &amp;lt;/br&amp;g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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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기여==&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white;&amp;quot;&lt;br /&gt;
|+ 6분반 정치교류조&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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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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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NfjKF8MdQEGWKD4zQXAOvIxaqYsUcQGp7kQ_QSU4sq4&amp;amp;font=Default&amp;amp;lang=ko&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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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도출한 결론==&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국내 정세 안정화 선행 필요성'''===&lt;br /&gt;
----&lt;br /&gt;
개항기, 일제강점기, 해방 후 안정되기 전까지는 타국이 우리나라 정치 상황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안정기에 들어서고 나서는 타국의 정치적 영향도, 타국이 영향을 준 경우도 줄었다. 그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해보았는데, 타국이 영향을 줘서 흔들릴 만큼의 정치적인 불안정성이 없어졌고 따라서 타국에 기댈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할 수 있었다. 따라서 타국의 안 좋은 영향력을 최소화하고 자주권을 확립하여 국가와 국민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우선, 국내 정치 상황이 안정되어야 하며, 그것은 필수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영원한 우방국은 없다'''===&lt;br /&gt;
----&lt;br /&gt;
그다음으로 내린 결론은 영원한 우방국은 없다, 즉, 국제 사회는 철저한 계산에 따라 냉혹하면서도 현실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저희가 다룬 네 국가와 우리나라의 관계는 때론 우호적이기도 때론 적대적이기도 했는데, 그 관계의 이면에는 늘 치밀한 각국의 손익 계산이 반영되어 있었다. 즉, 타국은 우리나라가 본국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 싶으면 우호적인 제스쳐를 취하며 이용했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버리고 혹은 이해관계에 따라 적대적으로 설정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가 국권을 피탈 당할 때도 이러한 국제사회의 이해관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미국, 러시아 등의 국가를 너무 믿었다가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따라서, 국제사회에서 국가는 오직 국익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에 따른 적절한 외교전략을 수립해나가야 한다.&lt;br /&gt;
&lt;br /&gt;
결론적으로, 우리가 피해를 입은 경우도 있었는데 이런 피해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정치적 혼란을 막으면서 우리 문제에는 우리가 주도권을 뺏기지 않는 상황을 만들고 동시에 실리적인 외교 방안을 모색하여 평화와 국익을 위한 외교를 해야 할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아쉬운 점과 개선점'''===&lt;br /&gt;
----&lt;br /&gt;
주제 자체를 양이 너무 많고 내용도 어려운 주제로 정한 데다 잘하고 싶은 의욕으로 많은 문서를 만들고자 한 탓에 자료 조사와 내용 작성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이런 이유로 위키만의 장점을 드러낼 수 있는, 위키로만 할 수 있는 여러 툴이나 장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웠다. 그래서 다음에 또 위키 관련 활동을 한다면, 시간과 수준에 알맞은 적절한 주제, 적절한 개수의 노드를 미리 설정해서 자료 조사와 내용 작성에만 할애했던 시간을 위키만의 장점을 드러낼 수 있는 여러 툴을 활용하는 데에 사용하도록 개선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lt;/div&gt;</summary>
		<author><name>소금토마토</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0%9C%ED%95%AD%EB%B6%80%ED%84%B0_%ED%98%84%EC%9E%AC%EA%B9%8C%EC%A7%80%EC%9D%98_%EC%A0%95%EC%B9%98_%EA%B5%90%EB%A5%98&amp;diff=42845</id>
		<title>개항부터 현재까지의 정치 교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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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06-22T14:56:5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소금토마토: /* 마인드맵 */&lt;/p&gt;
&lt;hr /&gt;
&lt;div&gt;==&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콘텐츠 주제==&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amp;lt;font size='5'&amp;gt;'''개항부터 현재까지 한국과 타국의 정치 교류'''&amp;lt;/font&amp;gt;&amp;lt;/div&amp;gt;&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기획의도==&lt;br /&gt;
===기획배경===&lt;br /&gt;
&amp;lt;br/&amp;gt;&lt;br /&gt;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조원과 다른 나라와의 경제 교류에 관심이 많았던 조원 두 명이 합쳐져 조를 형성하였다. '교류’와 ‘정치’라는 주제를 어떻게 연결하여 절충안을 찾을지 고민하다가 우리나라의 정치가 역사적으로 타국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아왔다는 사실이 떠올라 위 주제를 선정하게 되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기획 목적===&lt;br /&gt;
&amp;lt;br/&amp;gt;&lt;br /&gt;
 정치 교류사를 되돌아보며 타국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나라 정치의 변화 흐름을 바라보고자 했다. 이를 통해 타국이 우리나라 정치 상황에 미친 영향을 통시적으로 알아보고 주요 사건의 결과도 보고자 했다. 특히, 우리나라가 손해를 보거나 불이익을 당한 경우라면 문제점을 파악하고 이것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마련해 보고자 이러한 주제를 선정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기대하는 바===&lt;br /&gt;
&amp;lt;br/&amp;gt;&lt;br /&gt;
 타국이 우리나라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파악하고 일련의 탐구로부터 결론을 도출하기를 기대한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나라가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기대하는 바이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국가별 통시적 설명==&lt;br /&gt;
&amp;lt;br/&amp;gt;&lt;br /&gt;
===일본===&lt;br /&gt;
----&lt;br /&gt;
일본은 한국과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워 역사 속에서 많은 영향을 주고 받았다. 현재까지도 많은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또 많은 갈등이 존재하기도 한다. 특히 역사 관련 갈등이 많이 발생한다는 점이 한일관계에서 주목할 만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현대 한일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으로 한국과 일본 사이에 어떤 교류가 일어났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lt;br /&gt;
이 문서에서는 현재 한일관계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개항 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일본 사이의 주요 사건을 일본이 우리나라에 미친 정치적 영향을 중심으로 서술한다. 이 문서와 같은 내용이 '일본' 문서에도 실려 있다. &lt;br /&gt;
&amp;lt;br/&amp;gt;&lt;br /&gt;
====개항부터 국권피탈 전까지, 일본 침략의 전조====&lt;br /&gt;
----&lt;br /&gt;
[[운요호 사건]]을 시작으로 한국은 개항을 하게 된다. 일본은 쿠로후네 사건을 통해 개항하게 되었고 조선이 쇄국정책을 시행하는 사이 메이지 유신을 통해 급격하게 발전한다. 일본은 제국주의적 팽창으로 조선을 위협하기 시작하는데,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일본은 조선에 개항을 요구한다. 조선은 운요호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으며 무력시위를 하는 일본을 무시할 수 없었고 강압적인 수교 통상 요구를 받아들인다. 이 결과로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여 개항을 하게 된다. 하지만 강화도 조약은 조선에게 불평등한 면이 많았다. 또,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기 쉽게 하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다.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은 개항을 하면서 세계에 진출하게 되었으나 이는 불평등했고, 이어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의 다른 서구 열강들과 근대적인 불평등한 개항 수교 통상조약을 맺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amp;lt;/br&amp;gt;&lt;br /&gt;
이후 일본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 하는데, [[갑신정변_1884년]]을 통해 청이 조선에 대해 우위를 점하게 된다. 하지만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러일전쟁에서도 승리하면서 조선에 대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했으며, 이는 국권피탈로 이어졌다. &lt;br /&gt;
&lt;br /&gt;
====일제강점기, 암흑의 시대====&lt;br /&gt;
----&lt;br /&gt;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게 된다. 1910년부터 해방된 1945년까지를 일제강점기라고 부른다. &amp;lt;/br&amp;gt;&lt;br /&gt;
1910년대: 무단통치시기이다. 정치 단체를 만들거나 의견을 내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민족 신문이 폐간되었다. 헌병이 직접 벌을 내리는 즉결심판권이 있었으며 학교에서 교사는 군복에 칼을 찼다. 일본어가 '국어'로 교육되었으며 중등학교에서는 실업 교육을, 고등 교육 기관은 없앴다. 또, 토지 조사 사업이 시작되어 우리나라의 토지를 뺴앗아갔다. 전체 토지의 40%가 일본에 넘어갔으며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통해 일본인에게 팔렸다. &amp;lt;/br&amp;gt;&lt;br /&gt;
1920년대: 문화통치시기이다. 3.1운동이 일어나고 무단통치의 한계를 느낀 일본은 문화통치로 전환한다. 표면적으로는 유화정책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탄압, 감시, 문화 말살, 수탈을 위한 정책이었다. 헌병경찰제도가 보통경찰제도로 변경되었으나 실질적으로 경찰 인력과 시설은 늘어났다. 민족신문의 발행을 허용하였으나 검열은 계속되었다. 교육 기회 확대를 주장했지만 일본과 관련된 내용을 가르치는데 불과했으며 조선인의 취학률은 낮았고, 고등교육은 여전히 실시되지 않았다. 태형령이 없어졌지만 치안 유지법을 제정해 강력하게 탄압했다.&amp;lt;/br&amp;gt; &lt;br /&gt;
1930년대:민족말살통치시기이다. 민족말살통치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 협력을 얻기 위해 취한 정책이다. 내선일체, 황민화 정책, 창씨개명, 일선동조론이 민족말살통치의 일부이다. 민족말살통치는 일본이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고 한국인의 정체성을 없애려고  한 통치이며, 이 시기 많은 강제동원과 수탈이 이루어졌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1945년 일본이 세계 2차대전에서 패하게 되고,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한다. &lt;br /&gt;
&lt;br /&gt;
====해방 후부터 5공화국까지, 일본의 영향 축소====&lt;br /&gt;
----&lt;br /&gt;
해방 후부터 일본과 한국은 교류하지 않았다. 한국전쟁을 겪고 난 후 한국은 일본보다는 다른 나라와 더 많은 교류를 했고 영향을 주고받았다. 그러다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하며 국교를 정상화하고 교류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lt;br /&gt;
&lt;br /&gt;
====6공화국 이후, 한국과 일본의 현 좌표====&lt;br /&gt;
----&lt;br /&gt;
한국과 일본은 많은 교류를 주고받고 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식민지배를 겪었고, 식민 지배 당시 많은 문제가 발생했기에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역사적인 갈등의 골이 깊다. [[현대 한국과 일본의 역사 문제]] 문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강제동원 문제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대표적이다. 인정과 배상, 개인의 청구권 문제로 갈등이 있다. 또,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도 존재한다. 일본이 전범국으로서 책임을 지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하는데, 일본이 저지를 일을 축소하여 교과서를 편찬하면서 문제가 생기고 있다. 또, 독도 문제에 관한 일본 교과서 서술도 문제이다. 마지막으로 독도 문제가 있다. 한국의 땅임이 명백한 독도에 대해 일본이 자기 땅이라고 주장하면서 갈등이 있다.&lt;br /&gt;
&lt;br /&gt;
[[분류:텀블러]]&lt;br /&gt;
&lt;br /&gt;
===미국===&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미국은 현재 한국의 최우방국이다. 북한이라는 명확한 대립 국가가 있는 지금, 미국은 우리 안보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며, 경제에 있어서도 우리나라는 미국에 많은 의존을 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과 이렇게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시작한 것은, 해방 이후로, 고작 80년도 되지 않았다. 80년은 물론 긴 시간이지만, 우리나라의 전체 역사 속에서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 문서에서는 한국과 미국이 처음 조우한 이래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미국 사이의 주요 사건을  미국이 우리나라에 미친 정치적 영향을 중심으로 서술한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한국과 미국의 첫 조우와 무시'''====&lt;br /&gt;
----&lt;br /&gt;
&lt;br /&gt;
미국의 한국에 대한 첫 관심은 1834년 로비츠 아시아 특파원의 보고이다. 이때 로비츠는 &amp;quot;동부 아시아 대륙에 조선이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반도 국가가 있는데 청나라와 일본이라는 대륙 국가와 섬나라 사이에 위치해 있고 본국 정부가 조선과 경제 교역을 가지게 되었으면 싶다&amp;quot;라고 밝히고 있다. 이후 대원군의 통상수교거부정책이 시행되던 중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48057&amp;amp;cid=46623&amp;amp;categoryId=46623 제네럴 셔먼호 사건]이 발생하였고 조선의 개항을 요구하는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2961 신미양요]가 발생한다. 미국의 승리에도 조선은 개항하지 않았고 조선은 [[운요호 사건]]으로 인한 강화도 조약 때야 개항하게 된다. 개항 이후,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기점으로 조선과 미국은 본격적인 교류를 실시한다. &lt;br /&gt;
그러나 일본제국과 미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성사되고 조선과 미국은 단교한다. 이후 미국은 조선을 철저히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며,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 과정을 묵인하거나 일본을 두둔하게 되고 조선은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2961 1910년 나라를 빼앗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강점기에서 희망을 주다'''====&lt;br /&gt;
----&lt;br /&gt;
&lt;br /&gt;
그런 와중,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이 발표되고 식민지 조선은 이 선언에 희망을 가지고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6772 3.1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고 비록 독립을 쟁취하지는 못하였으나,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진다.&lt;br /&gt;
이후, 제2차세계대전에서 일본과 미국은 적으로 만나게 되고 전후 일본의 상황을 논의하는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다. 그러나 얄타 회담에서 한국의 신탁통치를 논의한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해방 직후 밀접한 관계가 되다'''====&lt;br /&gt;
----&lt;br /&gt;
&lt;br /&gt;
일본의 항복 후, 한반도 남쪽에는 [[미군정]]이 북쪽에는 소련이 들어온다. 미군정 시절, 여러 정치적 변혁을 겪으며 좌익과 우익 계열은 완전히 분열되었고 결국 이승만의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20143&amp;amp;cid=62048&amp;amp;categoryId=62048 정읍 발언]을 기점으로 남북은 3.8도선을 기준으로 분단된다. 이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2143 한국전쟁]이 발생하고 미국은 UN연합군과 함께 남한을 위해 참전, 통일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적화통일을 막았다. 이를 계기로 한국과 미국은 안보적으로 가까운 사이가 되었으며, 전후 복구 과정에서 미국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은 한국은 미국과 경제적으로도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해방 후 혼란기 한국에 많은 영향을 미치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승만이 4.19 혁명으로 하야하는 과정에 미국이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는 등 지속적으로 정치적, 경제적 영향을 미치던 미국은 케네디 시대를 맞이한다. 민주주의 가치를 중시했던 케네디는 박정희 정권을 마음에 들지 않아 했고 베트남전 파병에 대해 미온적 태도를 보였으나, 미국 정권이 바뀐 후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한국은 [[베트남 전쟁]] 파병을 결정한다. 베트남 파병으로 많은 국내 정치적, 경제적 변화를 겪은 한국은 경제 성장을 공고히 하는 한편, 박정희 독재 체제도 강화되었다. 박정희의 독재 강화 과정에서 한국과 미국의 관계가 악화되기도 했다. 이후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20431&amp;amp;cid=62048&amp;amp;categoryId=62048 10.26 사건]이 일어나고 여러 사건을 지나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8343 6월 항쟁]이 일어났을 때, 미국은 전두환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고 노태우의 6.29 선언 발표에 기여한다.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민주화 이후에도 계속되는 영향'''====&lt;br /&gt;
----&lt;br /&gt;
&lt;br /&gt;
이후 지속적으로 좋은 관계를 맺다 노무현 정부 시절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73146&amp;amp;cid=43667&amp;amp;categoryId=43667 한미 FTA]를 체결하였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북한과의 해빙 무드 속에서 북미 정상회담을 개최하기도 했으나, 결국 주목할 만한 성과 없이 [[북미정상회담 결렬]]을 맞이한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이후, 정부가 한미일 공조에 공을 들이며, 더욱 긴밀해진 모습이나, 북한과의 관계는 매우 악화된 상황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한국과 미국은 밀접한 동맹국이니만큼 한미관계는 다른 여느 외교 관계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뽑히며, 한미관계의 조율 여부가 그 정부의 외교적 성패를 가르기도 한다. 그러나 미국이 이권에 따라 때로는 우리를 무시하고 저버린 적도 있기 때문에 결국 미국 또한, 자국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국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미관계를 원활하게 유지함으로써 안보와 경제적 이익을 취하는 동시에 너무 미국에게만 종속되지 않도록 자주적 힘을 길러나가는 것이 바람직한 한미관계의 길일 것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분류:개항부터_현재까지의_정치_교류]] [[분류:낭만가]] &lt;br /&gt;
&lt;br /&gt;
===러시아===&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잠시나마 친러관계를 맺다'''====&lt;br /&gt;
----&lt;br /&gt;
&lt;br /&gt;
1884년 조선과 러시아 사이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1711 조로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며 개항 이후 조선과 러시아가 본격적인 수교를 시작한다. 러시아는 의외로 서구 열강 중 가장 조선을 자국 식민지로 삼고자 하는 국가였기 때문에, 점차 조선에 영향력을 확대해 가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영국이 러시아를 견제하는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1825 거문도 사건]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기존에 고종의 왕비인 명성황후는 이미 러시아와 우호적 관계를 맺고자 했는데, 이를 비롯한 여러 가지 요인을 말미암아 일본에서는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2948 을미사변]을 일으킨다. 이 사건을 계기로 고종은 국내 친일파 세력을 피하기 위해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1년간 피난하게 되는데, 이것이 [[아관파천]]이다. 이 기간 동안 일본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만큼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해졌다. 그러나 러시아와 일본 간 한반도의 주도권을 두고 벌인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7238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면서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하고, 이후 조선은 친일파들의 주도 하에 1910년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른 우호 또는 적대'''====&lt;br /&gt;
----&lt;br /&gt;
&lt;br /&gt;
일제 강점기 당시 러시아는 만주와 더불어 독립운동의 근거지 중 하나였다. 러시아는 러시아 혁명과 러시아 내전을 차례로 겪는 과정에서 백군 진영에 지원군을 보낸 연합군을 상대해야 했는데, 연합군에는 일본이 포함되어 있었고 그 과정에서 한국의 독립운동 단체들과 이해관계가 맞아 잠시나마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해 준 바 있다. 자세한 사항은 [[러시아의 독립운동 지원]] 참조.&lt;br /&gt;
&lt;br /&gt;
그러나 러시아 내전이 정리된 이후로 소련은 독립군에게서 점점 지원을 거둬들였고, 끝내[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2193 자유시 참변]이 일어난다. 이후 소련은 자신들의 러시아 지역 내 지배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당시 러시아에 이주해 살고 있던 조선의 농민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키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냉전 시대 북한과 함께 적대 관계를 형성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해방 이후 한반도 남쪽에는 [[미군정]]이, 북쪽에는 소련이 들어온다. 신탁 통치 기간이 지나고 여러 정치적 변혁을 겪으며 좌익과 우익 계열은 완전히 분리되었고 남한과 북한 정부가 각각 수립되며 완전한 분단이 이루어진다. 소련은 남한을 국가로 승인하지 않고, 북한만을 한반도 유일의 합법한 정부로 여겼다. 그 과정에서 대한민국 정부는 북한을 지원하는 소련과 점점 대립하기 시작했으며, 1950년 [[한국전쟁]]이 소련의 부추김에 의해 발발하면서 대한민국과 소련은 완전한 적대관계로 돌아서게 된다. 1955년 남한의 UN 가입 시도 역시 소련에 의해 좌절된 바 있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냉전 종식과 함께 관계가 정상화되다'''====&lt;br /&gt;
----&lt;br /&gt;
&lt;br /&gt;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소련이 서방 국가들의 우호 분위기를 이어 참가를 결정하며 한국 내 소련에 대한 인식이 완화되기 시작했다. 1989년부터 시작된 [[냉전 종식]]의 영향과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이 합쳐져 시너지를 발휘해 1990년 한소정상회담을 바탕으로 다시 수교가 시작되었다. 또한 한소수교에 따라 소련이 더 이상 한국의 UN 가입에 반대할 이유가 사라지며 한국은 1991년 UN에 북한과 함께 가입한다. 이후 소련이 해체하면서 한소관계는 한러관계로 승계되어 이어졌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현대에 들어 점차 여론이 악화되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후로 러시아와 한국의 관계는 큰 변화 없이 원만했다. 스포츠에 있어서는 러시아와 종종 국민 감정이 악화되는 일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https://news.mt.co.kr/mtview.php?no=2024022215180317499 2014년 소치올림픽 편파판정] 당시 한국의 러시아에 대한 적대적 인식이 형성된 적 있다. 또한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220218500098&amp;amp;wlog_tag3=naver 2022년 발리예바 도핑 사건]에 대한 김연아 선수의 비판으로 인해 러시아 국민들과 한국 국민들 사이에 다시금 국민 감정이 악화된 바 있다. 러시아에서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1/0003256522?sid=104 한국을 비우호 국가로 지정]하고, 이에 따라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로 러시아에 대한 적대 의견이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분류:개항부터_현재까지의_정치_교류]] [[분류:소금토마토]]&lt;br /&gt;
&lt;br /&gt;
===중국===&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조선 후기 청나라와의 관계'''====&lt;br /&gt;
----&lt;br /&gt;
&lt;br /&gt;
병자호란을 기점으로 청나라와 사대 관계를 맺은 조선은 이후로도 청과의 사대관계를 유지했다. 당시 한국이 일본에 의한 침탈의 과정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전근대 시기처럼 청과 밀접한 관계를 맺지는 않았다. 그러나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은 일본과 함께 조선의 정치에 다시 관여하기 시작했다. 이후 [[갑신정변_1884년]]을 계기로 잠시나마 청이 일본보다 조선에 대한 우위를 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가 1895년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46721&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1658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패하면서 자연스럽게 일본에게 조선에 대한 우위를 넘겨주게 된다. 이후 1910년 대한제국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일제 공동의 적을 둔 두 국가의 우호 관계'''====&lt;br /&gt;
----&lt;br /&gt;
&lt;br /&gt;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둘 모두 일본 제국주의라는 공동의 적을 둔 입장이 되면서 다시금 밀접한 관계가 형성된다. 많은 한국의 독립 단체와 독립 투사들이 만주와 상해 등 중국을 기반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한국 독립단체들의 자금 및 세력이 미약하여 자력으로는 독립 운동을 진행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었으나, [[중국의 독립운동 지원]]을 바탕으로 해방 이전까지 꾸준하게 독립 운동을 진행할 수 있었다. 한국 역시 중국의 항일 세력에 직접적으로 군대를 지원하는 등 상호 간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때까지는 양국 모두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이 공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진영별로 또는 다같이 합세하여 협력하는 양상을 보인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해방 직후 적대관계로 돌아서다'''====&lt;br /&gt;
----&lt;br /&gt;
&lt;br /&gt;
해방 이후 한반도 남쪽에는 [[미군정]]이, 북쪽에는 소련이 들어온다. 신탁 통치 기간이 지나고 여러 정치적 변혁을 겪으며 좌익과 우익 계열은 완전히 분리되었고 남한과 북한 정부가 각각 수립되며 완전한 분단이 이루어진다. 이때 중국에서는 마오쩌둥을 필두로 하는 공산당이 정권을 장악하며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다. 당연하게도 공산권이 중국에서는 같은 공산권인 북한의 정부 수립을 승인하게 되면서 남한과는 강력한 적대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진 [[한국전쟁]]에서 중국이 북한을 지원하고, UN군의 진격에 밀려 올라가는 북한에 중공군을 직접 투입해 줌으로써 남한의 북진을 저지하였다. 이때를 기점으로 중국과는 철저한 적대관계를 이루게 되고, 대한민국 정부의 강력한 반공주의에 따라 중국과는 거의 수교가 단절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냉전 종식과 함께 다시 수교를 시작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중국이 참가하게 되면서 양국의 관계가 강력한 적대 관계에서 점차 완화되었다. 이후 1989년부터 시작된 [[냉전 종식]]의 영향과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이 합쳐져 시너지를 발휘해 1992년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은 오랜 적대 관계를 깨고 다시 수교를 시작한다. 물론 수교를 하였다고 해도 완전히 사이가 좋다고 보기는 어려운데, 중국이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긴 하였으나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공산당 일당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공주의 시대의 적대 관계보다 현재의 관계가 훨씬 우호적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크고 작은 갈등이 지속되다'''====&lt;br /&gt;
----&lt;br /&gt;
&lt;br /&gt;
중국과의 수교 이후 현재까지 경제적으로는 큰 변화 없이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77896&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1864 무역]에 있어서 2020년 기준 중국은 세계 최대 교역국가이자 수출대국이고, 수입은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이다. 특히 2001년 세계무역기구 가입 이후로 중국과의 교역 비중이 크게 증가하여 2020년 전세계 수출 중 중국의 비중이 역대 최대를 기록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경제 이외의 부문에서는 크고 작은 갈등이 지속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중국은 지속적인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6377 동북공정]을 진행하며 역사적으로 한국과 갈등을 빚고 있으며, 2020년대 들어서는 문화에 있어서도 [https://www.chosun.com/national/national_general/2022/02/06/DTARKZFQBFASDAKOLWX37IKDUY/ 문화공정]을 진행하며 김치, 한복 등 한국의 문화를 중국의 문화라 주장하며 지속적 갈등을 만들고 있는 상황이다. 더하여 여전히 그 영향이 남아 있는 중국발 [[코로나19]]로 인한 중국의 외교적 압박 및 정치적 발언으로 인해 국내에서 중국에 대한 민간 여론이 극도로 나빠진 상태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분류:개항부터_현재까지의_정치_교류]] [[분류:소금토마토]]&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온톨로지==&lt;br /&gt;
{{NetworkGraph | title=정치교류.ls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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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tworkGraph | title=정치교류.ls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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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콘텐츠 구조==&lt;br /&gt;
&lt;br /&gt;
===클래스(Class)===&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color:white&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amp;quot; | 클래스 !! style=&amp;quot;width:30%&amp;quot; | 설명 !! style=&amp;quot;45%&amp;quot; | 노드&lt;br /&gt;
|-&lt;br /&gt;
|나라 ||우리나라의 정치사에 영향을 가장 많이 미친 나라들이다. 각 문서에 각 나라가 한국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통시적으로 서술하였다. || [[일본]] [[중국]] [[러시아]] [[미국]]&lt;br /&gt;
&lt;br /&gt;
|-&lt;br /&gt;
|사건 || 주요 사건들을 노드로 만들었다. 각 사건에 대해 자세히 서술했고, 각 사건이 미친 영향을 서술했다.|| [[운요호 사건]] [[강화도 조약]] [[갑신정변_1884년]] [[을사조약]] [[한일기본조약]]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현대 한국과 일본의 역사 문제]] [[임오군란]] [[중국의 독립운동 지원]] [[한국전쟁]] [[코로나19]] [[아관파천]] [[러시아의 독립운동 지원]] [[냉전 종식]] [[가쓰라-태프트 밀약]] [[민족자결주의 선언]] [[미군정]] [[베트남 전쟁]] [[북미정상회담 결렬]] &lt;br /&gt;
|-&lt;br /&gt;
|시기|| 시기를 크게 4가지로 나누어 노드를 만들었다.  || [[개항부터 국권피탈]]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 [[6공화국 이후]]&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green&amp;quot;&amp;gt;'''leads'''&amp;lt;/span&amp;gt;&lt;br /&gt;
***설명: 나라와 해당 나라가 관련된 사건을 연결한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일본 → 운요호사건&lt;br /&gt;
***#일본 → 강화도 조약&lt;br /&gt;
***#일본 → 갑신정변_1885년&lt;br /&gt;
***#일본 → 을사조약&lt;br /&gt;
***#일본 → 한일기본조약&lt;br /&gt;
***#일본 →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lt;br /&gt;
***#일본 → 현대 한국과 일본의 역사 문제&lt;br /&gt;
***#일본 → 임오군란&lt;br /&gt;
***#일본 → 톈진 조약&lt;br /&gt;
***#일본 → 가쓰라-태프트 밀약&lt;br /&gt;
***#중국 → 갑신정변&lt;br /&gt;
***#중국 →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lt;br /&gt;
***#중국 → 임오군란&lt;br /&gt;
***#중국 → 톈진 조약&lt;br /&gt;
***#중국 → 중국의 독립운동 지원&lt;br /&gt;
***#중국 →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lt;br /&gt;
***#중국 → 카이로 회담&lt;br /&gt;
***#중국 → 한국 전쟁&lt;br /&gt;
***#중국 → 코로나19&lt;br /&gt;
***#중국 → 냉전 종식&lt;br /&gt;
***#러시아 → 한국 전쟁&lt;br /&gt;
***#러시아 → 아관파천&lt;br /&gt;
***#러시아 → 러시아의 독립운동 지원&lt;br /&gt;
***#러시아 → 냉전 종식&lt;br /&gt;
***#미국 → 가쓰라-태프트 밀약&lt;br /&gt;
***#미국 → 민족자결주의 선언&lt;br /&gt;
***#미국 → 카이로 회담&lt;br /&gt;
***#미국 → 한국 전쟁&lt;br /&gt;
***#미국 → 냉전 종식&lt;br /&gt;
***#미국 → 미군정&lt;br /&gt;
***#미국 → 베트남 전쟁&lt;br /&gt;
***#미국 → 북미정상회담 결렬&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green&amp;quot;&amp;gt;'''isRelatedTo'''&amp;lt;/span&amp;gt;&lt;br /&gt;
***설명: 나라와 특정 시기를 연결한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일본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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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 6공화국 이후&lt;br /&gt;
***#중국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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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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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span style=&amp;quot;color:green&amp;quot;&amp;gt;'''happenedAt'''&amp;lt;/span&amp;gt;&lt;br /&gt;
***설명: 해당 사건과 특정 시기를 연결한다.&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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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요호 사건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강화도 조약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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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톈진조약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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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독립운동 지원 → 일제강점기&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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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 일제강점기&lt;br /&gt;
***#러시아의 독립운동 지원 → 일제강점기&lt;br /&gt;
***#카이로 회담 → 일제강점기&lt;br /&gt;
***#한일기본조약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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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한국 전쟁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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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 6공화국 이후&lt;br /&gt;
***#냉전 종식 → 6공화국 이후&lt;br /&gt;
***#북미정상회담 결렬 → 6공화국 이후&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마인드맵==&lt;br /&gt;
 노드 마인드맵&lt;br /&gt;
[[파일:마인드맵 1.png|500px|운요호]] &amp;lt;/br&amp;gt;&lt;br /&gt;
[[파일:마인드맵 2.png|500px|운요호]] &amp;lt;/br&amp;gt;&lt;br /&gt;
[[파일:마인드맵 3.png|500px|운요호]] &amp;lt;/br&amp;gt;&lt;br /&gt;
[[파일:마인드맵 4.png|500px|운요호]] &amp;lt;/br&amp;gt;&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기여==&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white;&amp;quot;&lt;br /&gt;
|+ 6분반 정치교류조&lt;br /&gt;
|+ style=&amp;quot;caption-side:bottom; 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팀원 || 기여내용&lt;br /&gt;
|-&lt;br /&gt;
| [[낭만가]] || 주제 선정, 전체적인 내용 설정, 미국 문서 작성, 관계 설정 및 작성, 동기 및 결론 작성, 발표&lt;br /&gt;
|-&lt;br /&gt;
| [[텀블러]] || 전체적인 내용 구상 기여, 전체적인 위키 문서 틀 작성, 온톨로지 작성, 일본 관련 문서 작성, 역할분담 작성, 발표용 ppt 제작&lt;br /&gt;
|-&lt;br /&gt;
| [[소금토마토]] || 추가예정&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시간의 흐름으로 보는 정치교류사'''==&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NfjKF8MdQEGWKD4zQXAOvIxaqYsUcQGp7kQ_QSU4sq4&amp;amp;font=Default&amp;amp;lang=ko&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도출한 결론==&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국내 정세 안정화 선행 필요성'''===&lt;br /&gt;
----&lt;br /&gt;
개항기, 일제강점기, 해방 후 안정되기 전까지는 타국이 우리나라 정치 상황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안정기에 들어서고 나서는 타국의 정치적 영향도, 타국이 영향을 준 경우도 줄었다. 그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해보았는데, 타국이 영향을 줘서 흔들릴 만큼의 정치적인 불안정성이 없어졌고 따라서 타국에 기댈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할 수 있었다. 따라서 타국의 안 좋은 영향력을 최소화하고 자주권을 확립하여 국가와 국민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우선, 국내 정치 상황이 안정되어야 하며, 그것은 필수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영원한 우방국은 없다'''===&lt;br /&gt;
----&lt;br /&gt;
그다음으로 내린 결론은 영원한 우방국은 없다, 즉, 국제 사회는 철저한 계산에 따라 냉혹하면서도 현실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저희가 다룬 네 국가와 우리나라의 관계는 때론 우호적이기도 때론 적대적이기도 했는데, 그 관계의 이면에는 늘 치밀한 각국의 손익 계산이 반영되어 있었다. 즉, 타국은 우리나라가 본국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 싶으면 우호적인 제스쳐를 취하며 이용했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버리고 혹은 이해관계에 따라 적대적으로 설정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가 국권을 피탈 당할 때도 이러한 국제사회의 이해관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미국, 러시아 등의 국가를 너무 믿었다가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따라서, 국제사회에서 국가는 오직 국익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에 따른 적절한 외교전략을 수립해나가야 한다.&lt;br /&gt;
&lt;br /&gt;
결론적으로, 우리가 피해를 입은 경우도 있었는데 이런 피해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정치적 혼란을 막으면서 우리 문제에는 우리가 주도권을 뺏기지 않는 상황을 만들고 동시에 실리적인 외교 방안을 모색하여 평화와 국익을 위한 외교를 해야 할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아쉬운 점과 개선점'''===&lt;br /&gt;
----&lt;br /&gt;
주제 자체를 양이 너무 많고 내용도 어려운 주제로 정한 데다 잘하고 싶은 의욕으로 많은 문서를 만들고자 한 탓에 자료 조사와 내용 작성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이런 이유로 위키만의 장점을 드러낼 수 있는, 위키로만 할 수 있는 여러 툴이나 장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웠다. 그래서 다음에 또 위키 관련 활동을 한다면, 시간과 수준에 알맞은 적절한 주제, 적절한 개수의 노드를 미리 설정해서 자료 조사와 내용 작성에만 할애했던 시간을 위키만의 장점을 드러낼 수 있는 여러 툴을 활용하는 데에 사용하도록 개선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lt;/div&gt;</summary>
		<author><name>소금토마토</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D%8C%8C%EC%9D%BC:%EB%A7%88%EC%9D%B8%EB%93%9C%EB%A7%B5_4.PNG&amp;diff=42843</id>
		<title>파일:마인드맵 4.PNG</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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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06-22T14:54:4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소금토마토: &lt;/p&gt;
&lt;hr /&gt;
&lt;div&gt;&lt;/div&gt;</summary>
		<author><name>소금토마토</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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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D%8C%8C%EC%9D%BC:%EB%A7%88%EC%9D%B8%EB%93%9C%EB%A7%B5_3.PNG&amp;diff=42842</id>
		<title>파일:마인드맵 3.PNG</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D%8C%8C%EC%9D%BC:%EB%A7%88%EC%9D%B8%EB%93%9C%EB%A7%B5_3.PNG&amp;diff=42842"/>
		<updated>2024-06-22T14:54:3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소금토마토: &lt;/p&gt;
&lt;hr /&gt;
&lt;div&gt;&lt;/div&gt;</summary>
		<author><name>소금토마토</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D%8C%8C%EC%9D%BC:%EB%A7%88%EC%9D%B8%EB%93%9C%EB%A7%B5_2.PNG&amp;diff=42841</id>
		<title>파일:마인드맵 2.PNG</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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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06-22T14:54:2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소금토마토: &lt;/p&gt;
&lt;hr /&gt;
&lt;div&gt;&lt;/div&gt;</summary>
		<author><name>소금토마토</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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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파일:마인드맵 1.PNG</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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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06-22T14:54:0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소금토마토: &lt;/p&gt;
&lt;hr /&gt;
&lt;div&gt;&lt;/div&gt;</summary>
		<author><name>소금토마토</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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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개항부터 현재까지의 정치 교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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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06-22T14:52:1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소금토마토: /* 러시아 */&lt;/p&gt;
&lt;hr /&gt;
&lt;div&gt;==&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콘텐츠 주제==&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amp;lt;font size='5'&amp;gt;'''개항부터 현재까지 한국과 타국의 정치 교류'''&amp;lt;/font&amp;gt;&amp;lt;/div&amp;gt;&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기획의도==&lt;br /&gt;
===기획배경===&lt;br /&gt;
&amp;lt;br/&amp;gt;&lt;br /&gt;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조원과 다른 나라와의 경제 교류에 관심이 많았던 조원 두 명이 합쳐져 조를 형성하였다. '교류’와 ‘정치’라는 주제를 어떻게 연결하여 절충안을 찾을지 고민하다가 우리나라의 정치가 역사적으로 타국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아왔다는 사실이 떠올라 위 주제를 선정하게 되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기획 목적===&lt;br /&gt;
&amp;lt;br/&amp;gt;&lt;br /&gt;
 정치 교류사를 되돌아보며 타국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나라 정치의 변화 흐름을 바라보고자 했다. 이를 통해 타국이 우리나라 정치 상황에 미친 영향을 통시적으로 알아보고 주요 사건의 결과도 보고자 했다. 특히, 우리나라가 손해를 보거나 불이익을 당한 경우라면 문제점을 파악하고 이것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마련해 보고자 이러한 주제를 선정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기대하는 바===&lt;br /&gt;
&amp;lt;br/&amp;gt;&lt;br /&gt;
 타국이 우리나라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파악하고 일련의 탐구로부터 결론을 도출하기를 기대한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나라가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기대하는 바이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국가별 통시적 설명==&lt;br /&gt;
&amp;lt;br/&amp;gt;&lt;br /&gt;
===일본===&lt;br /&gt;
----&lt;br /&gt;
일본은 한국과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워 역사 속에서 많은 영향을 주고 받았다. 현재까지도 많은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또 많은 갈등이 존재하기도 한다. 특히 역사 관련 갈등이 많이 발생한다는 점이 한일관계에서 주목할 만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현대 한일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으로 한국과 일본 사이에 어떤 교류가 일어났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lt;br /&gt;
이 문서에서는 현재 한일관계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개항 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일본 사이의 주요 사건을 일본이 우리나라에 미친 정치적 영향을 중심으로 서술한다. 이 문서와 같은 내용이 '일본' 문서에도 실려 있다. &lt;br /&gt;
&amp;lt;br/&amp;gt;&lt;br /&gt;
====개항부터 국권피탈 전까지, 일본 침략의 전조====&lt;br /&gt;
----&lt;br /&gt;
[[운요호 사건]]을 시작으로 한국은 개항을 하게 된다. 일본은 쿠로후네 사건을 통해 개항하게 되었고 조선이 쇄국정책을 시행하는 사이 메이지 유신을 통해 급격하게 발전한다. 일본은 제국주의적 팽창으로 조선을 위협하기 시작하는데,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일본은 조선에 개항을 요구한다. 조선은 운요호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으며 무력시위를 하는 일본을 무시할 수 없었고 강압적인 수교 통상 요구를 받아들인다. 이 결과로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여 개항을 하게 된다. 하지만 강화도 조약은 조선에게 불평등한 면이 많았다. 또,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기 쉽게 하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다.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은 개항을 하면서 세계에 진출하게 되었으나 이는 불평등했고, 이어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의 다른 서구 열강들과 근대적인 불평등한 개항 수교 통상조약을 맺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amp;lt;/br&amp;gt;&lt;br /&gt;
이후 일본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 하는데, [[갑신정변_1884년]]을 통해 청이 조선에 대해 우위를 점하게 된다. 하지만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러일전쟁에서도 승리하면서 조선에 대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했으며, 이는 국권피탈로 이어졌다. &lt;br /&gt;
&lt;br /&gt;
====일제강점기, 암흑의 시대====&lt;br /&gt;
----&lt;br /&gt;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게 된다. 1910년부터 해방된 1945년까지를 일제강점기라고 부른다. &amp;lt;/br&amp;gt;&lt;br /&gt;
1910년대: 무단통치시기이다. 정치 단체를 만들거나 의견을 내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민족 신문이 폐간되었다. 헌병이 직접 벌을 내리는 즉결심판권이 있었으며 학교에서 교사는 군복에 칼을 찼다. 일본어가 '국어'로 교육되었으며 중등학교에서는 실업 교육을, 고등 교육 기관은 없앴다. 또, 토지 조사 사업이 시작되어 우리나라의 토지를 뺴앗아갔다. 전체 토지의 40%가 일본에 넘어갔으며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통해 일본인에게 팔렸다. &amp;lt;/br&amp;gt;&lt;br /&gt;
1920년대: 문화통치시기이다. 3.1운동이 일어나고 무단통치의 한계를 느낀 일본은 문화통치로 전환한다. 표면적으로는 유화정책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탄압, 감시, 문화 말살, 수탈을 위한 정책이었다. 헌병경찰제도가 보통경찰제도로 변경되었으나 실질적으로 경찰 인력과 시설은 늘어났다. 민족신문의 발행을 허용하였으나 검열은 계속되었다. 교육 기회 확대를 주장했지만 일본과 관련된 내용을 가르치는데 불과했으며 조선인의 취학률은 낮았고, 고등교육은 여전히 실시되지 않았다. 태형령이 없어졌지만 치안 유지법을 제정해 강력하게 탄압했다.&amp;lt;/br&amp;gt; &lt;br /&gt;
1930년대:민족말살통치시기이다. 민족말살통치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 협력을 얻기 위해 취한 정책이다. 내선일체, 황민화 정책, 창씨개명, 일선동조론이 민족말살통치의 일부이다. 민족말살통치는 일본이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고 한국인의 정체성을 없애려고  한 통치이며, 이 시기 많은 강제동원과 수탈이 이루어졌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1945년 일본이 세계 2차대전에서 패하게 되고,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한다. &lt;br /&gt;
&lt;br /&gt;
====해방 후부터 5공화국까지, 일본의 영향 축소====&lt;br /&gt;
----&lt;br /&gt;
해방 후부터 일본과 한국은 교류하지 않았다. 한국전쟁을 겪고 난 후 한국은 일본보다는 다른 나라와 더 많은 교류를 했고 영향을 주고받았다. 그러다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하며 국교를 정상화하고 교류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lt;br /&gt;
&lt;br /&gt;
====6공화국 이후, 한국과 일본의 현 좌표====&lt;br /&gt;
----&lt;br /&gt;
한국과 일본은 많은 교류를 주고받고 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식민지배를 겪었고, 식민 지배 당시 많은 문제가 발생했기에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역사적인 갈등의 골이 깊다. [[현대 한국과 일본의 역사 문제]] 문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강제동원 문제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대표적이다. 인정과 배상, 개인의 청구권 문제로 갈등이 있다. 또,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도 존재한다. 일본이 전범국으로서 책임을 지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하는데, 일본이 저지를 일을 축소하여 교과서를 편찬하면서 문제가 생기고 있다. 또, 독도 문제에 관한 일본 교과서 서술도 문제이다. 마지막으로 독도 문제가 있다. 한국의 땅임이 명백한 독도에 대해 일본이 자기 땅이라고 주장하면서 갈등이 있다.&lt;br /&gt;
&lt;br /&gt;
[[분류:텀블러]]&lt;br /&gt;
&lt;br /&gt;
===미국===&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미국은 현재 한국의 최우방국이다. 북한이라는 명확한 대립 국가가 있는 지금, 미국은 우리 안보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며, 경제에 있어서도 우리나라는 미국에 많은 의존을 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과 이렇게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시작한 것은, 해방 이후로, 고작 80년도 되지 않았다. 80년은 물론 긴 시간이지만, 우리나라의 전체 역사 속에서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 문서에서는 한국과 미국이 처음 조우한 이래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미국 사이의 주요 사건을  미국이 우리나라에 미친 정치적 영향을 중심으로 서술한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한국과 미국의 첫 조우와 무시'''====&lt;br /&gt;
----&lt;br /&gt;
&lt;br /&gt;
미국의 한국에 대한 첫 관심은 1834년 로비츠 아시아 특파원의 보고이다. 이때 로비츠는 &amp;quot;동부 아시아 대륙에 조선이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반도 국가가 있는데 청나라와 일본이라는 대륙 국가와 섬나라 사이에 위치해 있고 본국 정부가 조선과 경제 교역을 가지게 되었으면 싶다&amp;quot;라고 밝히고 있다. 이후 대원군의 통상수교거부정책이 시행되던 중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48057&amp;amp;cid=46623&amp;amp;categoryId=46623 제네럴 셔먼호 사건]이 발생하였고 조선의 개항을 요구하는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2961 신미양요]가 발생한다. 미국의 승리에도 조선은 개항하지 않았고 조선은 [[운요호 사건]]으로 인한 강화도 조약 때야 개항하게 된다. 개항 이후,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기점으로 조선과 미국은 본격적인 교류를 실시한다. &lt;br /&gt;
그러나 일본제국과 미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성사되고 조선과 미국은 단교한다. 이후 미국은 조선을 철저히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며,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 과정을 묵인하거나 일본을 두둔하게 되고 조선은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2961 1910년 나라를 빼앗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강점기에서 희망을 주다'''====&lt;br /&gt;
----&lt;br /&gt;
&lt;br /&gt;
그런 와중,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이 발표되고 식민지 조선은 이 선언에 희망을 가지고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6772 3.1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고 비록 독립을 쟁취하지는 못하였으나,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진다.&lt;br /&gt;
이후, 제2차세계대전에서 일본과 미국은 적으로 만나게 되고 전후 일본의 상황을 논의하는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다. 그러나 얄타 회담에서 한국의 신탁통치를 논의한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해방 직후 밀접한 관계가 되다'''====&lt;br /&gt;
----&lt;br /&gt;
&lt;br /&gt;
일본의 항복 후, 한반도 남쪽에는 [[미군정]]이 북쪽에는 소련이 들어온다. 미군정 시절, 여러 정치적 변혁을 겪으며 좌익과 우익 계열은 완전히 분열되었고 결국 이승만의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20143&amp;amp;cid=62048&amp;amp;categoryId=62048 정읍 발언]을 기점으로 남북은 3.8도선을 기준으로 분단된다. 이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2143 한국전쟁]이 발생하고 미국은 UN연합군과 함께 남한을 위해 참전, 통일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적화통일을 막았다. 이를 계기로 한국과 미국은 안보적으로 가까운 사이가 되었으며, 전후 복구 과정에서 미국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은 한국은 미국과 경제적으로도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해방 후 혼란기 한국에 많은 영향을 미치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승만이 4.19 혁명으로 하야하는 과정에 미국이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는 등 지속적으로 정치적, 경제적 영향을 미치던 미국은 케네디 시대를 맞이한다. 민주주의 가치를 중시했던 케네디는 박정희 정권을 마음에 들지 않아 했고 베트남전 파병에 대해 미온적 태도를 보였으나, 미국 정권이 바뀐 후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한국은 [[베트남 전쟁]] 파병을 결정한다. 베트남 파병으로 많은 국내 정치적, 경제적 변화를 겪은 한국은 경제 성장을 공고히 하는 한편, 박정희 독재 체제도 강화되었다. 박정희의 독재 강화 과정에서 한국과 미국의 관계가 악화되기도 했다. 이후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20431&amp;amp;cid=62048&amp;amp;categoryId=62048 10.26 사건]이 일어나고 여러 사건을 지나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8343 6월 항쟁]이 일어났을 때, 미국은 전두환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고 노태우의 6.29 선언 발표에 기여한다.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민주화 이후에도 계속되는 영향'''====&lt;br /&gt;
----&lt;br /&gt;
&lt;br /&gt;
이후 지속적으로 좋은 관계를 맺다 노무현 정부 시절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73146&amp;amp;cid=43667&amp;amp;categoryId=43667 한미 FTA]를 체결하였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북한과의 해빙 무드 속에서 북미 정상회담을 개최하기도 했으나, 결국 주목할 만한 성과 없이 [[북미정상회담 결렬]]을 맞이한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이후, 정부가 한미일 공조에 공을 들이며, 더욱 긴밀해진 모습이나, 북한과의 관계는 매우 악화된 상황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한국과 미국은 밀접한 동맹국이니만큼 한미관계는 다른 여느 외교 관계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뽑히며, 한미관계의 조율 여부가 그 정부의 외교적 성패를 가르기도 한다. 그러나 미국이 이권에 따라 때로는 우리를 무시하고 저버린 적도 있기 때문에 결국 미국 또한, 자국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국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미관계를 원활하게 유지함으로써 안보와 경제적 이익을 취하는 동시에 너무 미국에게만 종속되지 않도록 자주적 힘을 길러나가는 것이 바람직한 한미관계의 길일 것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분류:개항부터_현재까지의_정치_교류]] [[분류:낭만가]] &lt;br /&gt;
&lt;br /&gt;
===러시아===&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잠시나마 친러관계를 맺다'''====&lt;br /&gt;
----&lt;br /&gt;
&lt;br /&gt;
1884년 조선과 러시아 사이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1711 조로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며 개항 이후 조선과 러시아가 본격적인 수교를 시작한다. 러시아는 의외로 서구 열강 중 가장 조선을 자국 식민지로 삼고자 하는 국가였기 때문에, 점차 조선에 영향력을 확대해 가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영국이 러시아를 견제하는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1825 거문도 사건]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기존에 고종의 왕비인 명성황후는 이미 러시아와 우호적 관계를 맺고자 했는데, 이를 비롯한 여러 가지 요인을 말미암아 일본에서는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2948 을미사변]을 일으킨다. 이 사건을 계기로 고종은 국내 친일파 세력을 피하기 위해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1년간 피난하게 되는데, 이것이 [[아관파천]]이다. 이 기간 동안 일본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만큼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해졌다. 그러나 러시아와 일본 간 한반도의 주도권을 두고 벌인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7238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면서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하고, 이후 조선은 친일파들의 주도 하에 1910년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른 우호 또는 적대'''====&lt;br /&gt;
----&lt;br /&gt;
&lt;br /&gt;
일제 강점기 당시 러시아는 만주와 더불어 독립운동의 근거지 중 하나였다. 러시아는 러시아 혁명과 러시아 내전을 차례로 겪는 과정에서 백군 진영에 지원군을 보낸 연합군을 상대해야 했는데, 연합군에는 일본이 포함되어 있었고 그 과정에서 한국의 독립운동 단체들과 이해관계가 맞아 잠시나마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해 준 바 있다. 자세한 사항은 [[러시아의 독립운동 지원]] 참조.&lt;br /&gt;
&lt;br /&gt;
그러나 러시아 내전이 정리된 이후로 소련은 독립군에게서 점점 지원을 거둬들였고, 끝내[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2193 자유시 참변]이 일어난다. 이후 소련은 자신들의 러시아 지역 내 지배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당시 러시아에 이주해 살고 있던 조선의 농민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키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냉전 시대 북한과 함께 적대 관계를 형성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해방 이후 한반도 남쪽에는 [[미군정]]이, 북쪽에는 소련이 들어온다. 신탁 통치 기간이 지나고 여러 정치적 변혁을 겪으며 좌익과 우익 계열은 완전히 분리되었고 남한과 북한 정부가 각각 수립되며 완전한 분단이 이루어진다. 소련은 남한을 국가로 승인하지 않고, 북한만을 한반도 유일의 합법한 정부로 여겼다. 그 과정에서 대한민국 정부는 북한을 지원하는 소련과 점점 대립하기 시작했으며, 1950년 [[한국전쟁]]이 소련의 부추김에 의해 발발하면서 대한민국과 소련은 완전한 적대관계로 돌아서게 된다. 1955년 남한의 UN 가입 시도 역시 소련에 의해 좌절된 바 있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냉전 종식과 함께 관계가 정상화되다'''====&lt;br /&gt;
----&lt;br /&gt;
&lt;br /&gt;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소련이 서방 국가들의 우호 분위기를 이어 참가를 결정하며 한국 내 소련에 대한 인식이 완화되기 시작했다. 1989년부터 시작된 [[냉전 종식]]의 영향과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이 합쳐져 시너지를 발휘해 1990년 한소정상회담을 바탕으로 다시 수교가 시작되었다. 또한 한소수교에 따라 소련이 더 이상 한국의 UN 가입에 반대할 이유가 사라지며 한국은 1991년 UN에 북한과 함께 가입한다. 이후 소련이 해체하면서 한소관계는 한러관계로 승계되어 이어졌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현대에 들어 점차 여론이 악화되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후로 러시아와 한국의 관계는 큰 변화 없이 원만했다. 스포츠에 있어서는 러시아와 종종 국민 감정이 악화되는 일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https://news.mt.co.kr/mtview.php?no=2024022215180317499 2014년 소치올림픽 편파판정] 당시 한국의 러시아에 대한 적대적 인식이 형성된 적 있다. 또한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220218500098&amp;amp;wlog_tag3=naver 2022년 발리예바 도핑 사건]에 대한 김연아 선수의 비판으로 인해 러시아 국민들과 한국 국민들 사이에 다시금 국민 감정이 악화된 바 있다. 러시아에서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1/0003256522?sid=104 한국을 비우호 국가로 지정]하고, 이에 따라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로 러시아에 대한 적대 의견이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분류:개항부터_현재까지의_정치_교류]] [[분류:소금토마토]]&lt;br /&gt;
&lt;br /&gt;
===중국===&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조선 후기 청나라와의 관계'''====&lt;br /&gt;
----&lt;br /&gt;
&lt;br /&gt;
병자호란을 기점으로 청나라와 사대 관계를 맺은 조선은 이후로도 청과의 사대관계를 유지했다. 당시 한국이 일본에 의한 침탈의 과정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전근대 시기처럼 청과 밀접한 관계를 맺지는 않았다. 그러나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은 일본과 함께 조선의 정치에 다시 관여하기 시작했다. 이후 [[갑신정변_1884년]]을 계기로 잠시나마 청이 일본보다 조선에 대한 우위를 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가 1895년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46721&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1658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패하면서 자연스럽게 일본에게 조선에 대한 우위를 넘겨주게 된다. 이후 1910년 대한제국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일제 공동의 적을 둔 두 국가의 우호 관계'''====&lt;br /&gt;
----&lt;br /&gt;
&lt;br /&gt;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둘 모두 일본 제국주의라는 공동의 적을 둔 입장이 되면서 다시금 밀접한 관계가 형성된다. 많은 한국의 독립 단체와 독립 투사들이 만주와 상해 등 중국을 기반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한국 독립단체들의 자금 및 세력이 미약하여 자력으로는 독립 운동을 진행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었으나, [[중국의 독립운동 지원]]을 바탕으로 해방 이전까지 꾸준하게 독립 운동을 진행할 수 있었다. 한국 역시 중국의 항일 세력에 직접적으로 군대를 지원하는 등 상호 간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때까지는 양국 모두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이 공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진영별로 또는 다같이 합세하여 협력하는 양상을 보인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해방 직후 적대관계로 돌아서다'''====&lt;br /&gt;
----&lt;br /&gt;
&lt;br /&gt;
해방 이후 한반도 남쪽에는 [[미군정]]이, 북쪽에는 소련이 들어온다. 신탁 통치 기간이 지나고 여러 정치적 변혁을 겪으며 좌익과 우익 계열은 완전히 분리되었고 남한과 북한 정부가 각각 수립되며 완전한 분단이 이루어진다. 이때 중국에서는 마오쩌둥을 필두로 하는 공산당이 정권을 장악하며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다. 당연하게도 공산권이 중국에서는 같은 공산권인 북한의 정부 수립을 승인하게 되면서 남한과는 강력한 적대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진 [[한국전쟁]]에서 중국이 북한을 지원하고, UN군의 진격에 밀려 올라가는 북한에 중공군을 직접 투입해 줌으로써 남한의 북진을 저지하였다. 이때를 기점으로 중국과는 철저한 적대관계를 이루게 되고, 대한민국 정부의 강력한 반공주의에 따라 중국과는 거의 수교가 단절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냉전 종식과 함께 다시 수교를 시작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중국이 참가하게 되면서 양국의 관계가 강력한 적대 관계에서 점차 완화되었다. 이후 1989년부터 시작된 [[냉전 종식]]의 영향과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이 합쳐져 시너지를 발휘해 1992년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은 오랜 적대 관계를 깨고 다시 수교를 시작한다. 물론 수교를 하였다고 해도 완전히 사이가 좋다고 보기는 어려운데, 중국이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긴 하였으나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공산당 일당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공주의 시대의 적대 관계보다 현재의 관계가 훨씬 우호적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크고 작은 갈등이 지속되다'''====&lt;br /&gt;
----&lt;br /&gt;
&lt;br /&gt;
중국과의 수교 이후 현재까지 경제적으로는 큰 변화 없이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77896&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1864 무역]에 있어서 2020년 기준 중국은 세계 최대 교역국가이자 수출대국이고, 수입은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이다. 특히 2001년 세계무역기구 가입 이후로 중국과의 교역 비중이 크게 증가하여 2020년 전세계 수출 중 중국의 비중이 역대 최대를 기록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경제 이외의 부문에서는 크고 작은 갈등이 지속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중국은 지속적인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6377 동북공정]을 진행하며 역사적으로 한국과 갈등을 빚고 있으며, 2020년대 들어서는 문화에 있어서도 [https://www.chosun.com/national/national_general/2022/02/06/DTARKZFQBFASDAKOLWX37IKDUY/ 문화공정]을 진행하며 김치, 한복 등 한국의 문화를 중국의 문화라 주장하며 지속적 갈등을 만들고 있는 상황이다. 더하여 여전히 그 영향이 남아 있는 중국발 [[코로나19]]로 인한 중국의 외교적 압박 및 정치적 발언으로 인해 국내에서 중국에 대한 민간 여론이 극도로 나빠진 상태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분류:개항부터_현재까지의_정치_교류]] [[분류:소금토마토]]&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온톨로지==&lt;br /&gt;
{{NetworkGraph | title=정치교류.ls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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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콘텐츠 구조==&lt;br /&gt;
&lt;br /&gt;
===클래스(Class)===&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color:white&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amp;quot; | 클래스 !! style=&amp;quot;width:30%&amp;quot; | 설명 !! style=&amp;quot;45%&amp;quot; | 노드&lt;br /&gt;
|-&lt;br /&gt;
|나라 ||우리나라의 정치사에 영향을 가장 많이 미친 나라들이다. 각 문서에 각 나라가 한국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통시적으로 서술하였다. || [[일본]] [[중국]] [[러시아]] [[미국]]&lt;br /&gt;
&lt;br /&gt;
|-&lt;br /&gt;
|사건 || 주요 사건들을 노드로 만들었다. 각 사건에 대해 자세히 서술했고, 각 사건이 미친 영향을 서술했다.|| [[운요호 사건]] [[강화도 조약]] [[갑신정변_1884년]] [[을사조약]] [[한일기본조약]]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현대 한국과 일본의 역사 문제]] [[임오군란]] [[중국의 독립운동 지원]] [[한국전쟁]] [[코로나19]] [[아관파천]] [[러시아의 독립운동 지원]] [[냉전 종식]] [[가쓰라-태프트 밀약]] [[민족자결주의 선언]] [[미군정]] [[베트남 전쟁]] [[북미정상회담 결렬]] &lt;br /&gt;
|-&lt;br /&gt;
|시기|| 시기를 크게 4가지로 나누어 노드를 만들었다.  || [[개항부터 국권피탈]]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 [[6공화국 이후]]&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green&amp;quot;&amp;gt;'''leads'''&amp;lt;/span&amp;gt;&lt;br /&gt;
***설명: 나라와 해당 나라가 관련된 사건을 연결한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일본 → 운요호사건&lt;br /&gt;
***#일본 → 강화도 조약&lt;br /&gt;
***#일본 → 갑신정변_1885년&lt;br /&gt;
***#일본 → 을사조약&lt;br /&gt;
***#일본 → 한일기본조약&lt;br /&gt;
***#일본 →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lt;br /&gt;
***#일본 → 현대 한국과 일본의 역사 문제&lt;br /&gt;
***#일본 → 임오군란&lt;br /&gt;
***#일본 → 톈진 조약&lt;br /&gt;
***#일본 → 가쓰라-태프트 밀약&lt;br /&gt;
***#중국 → 갑신정변&lt;br /&gt;
***#중국 →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lt;br /&gt;
***#중국 → 임오군란&lt;br /&gt;
***#중국 → 톈진 조약&lt;br /&gt;
***#중국 → 중국의 독립운동 지원&lt;br /&gt;
***#중국 →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lt;br /&gt;
***#중국 → 카이로 회담&lt;br /&gt;
***#중국 → 한국 전쟁&lt;br /&gt;
***#중국 → 코로나19&lt;br /&gt;
***#중국 → 냉전 종식&lt;br /&gt;
***#러시아 → 한국 전쟁&lt;br /&gt;
***#러시아 → 아관파천&lt;br /&gt;
***#러시아 → 러시아의 독립운동 지원&lt;br /&gt;
***#러시아 → 냉전 종식&lt;br /&gt;
***#미국 → 가쓰라-태프트 밀약&lt;br /&gt;
***#미국 → 민족자결주의 선언&lt;br /&gt;
***#미국 → 카이로 회담&lt;br /&gt;
***#미국 → 한국 전쟁&lt;br /&gt;
***#미국 → 냉전 종식&lt;br /&gt;
***#미국 → 미군정&lt;br /&gt;
***#미국 → 베트남 전쟁&lt;br /&gt;
***#미국 → 북미정상회담 결렬&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green&amp;quot;&amp;gt;'''isRelatedTo'''&amp;lt;/span&amp;gt;&lt;br /&gt;
***설명: 나라와 특정 시기를 연결한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일본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일본 → 일제강점기&lt;br /&gt;
***#일본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일본 → 6공화국 이후&lt;br /&gt;
***#중국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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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중국 → 6공화국 이후&lt;br /&gt;
***#러시아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러시아 → 일제강점기&lt;br /&gt;
***#러시아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러시아 → 6공화국 이후&lt;br /&gt;
***#미국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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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미국 → 6공화국 이후&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green&amp;quot;&amp;gt;'''happenedAt'''&amp;lt;/span&amp;gt;&lt;br /&gt;
***설명: 해당 사건과 특정 시기를 연결한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운요호 사건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강화도 조약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갑신정변_1884년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가쓰라-태프트 밀약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아관파천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임오군란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톈진조약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을사조약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중국의 독립운동 지원 → 일제강점기&lt;br /&gt;
***#민족자결주의 선언 → 일제강점기&lt;br /&gt;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 일제강점기&lt;br /&gt;
***#러시아의 독립운동 지원 → 일제강점기&lt;br /&gt;
***#카이로 회담 → 일제강점기&lt;br /&gt;
***#한일기본조약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미군정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베트남 전쟁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한국 전쟁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현대 한국과 일본의 역사 문제 → 6공화국 이후&lt;br /&gt;
***#코로나19 → 6공화국 이후&lt;br /&gt;
***#냉전 종식 → 6공화국 이후&lt;br /&gt;
***#북미정상회담 결렬 → 6공화국 이후&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마인드맵==&lt;br /&gt;
 주제 마인드맵&lt;br /&gt;
사진 첨부   ※ 수업에 했던 포스트잇 사진 가능&lt;br /&gt;
&lt;br /&gt;
 노드 마인드맵&lt;br /&gt;
사진 첨부&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기여==&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white;&amp;quot;&lt;br /&gt;
|+ 6분반 정치교류조&lt;br /&gt;
|+ style=&amp;quot;caption-side:bottom; 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팀원 || 기여내용&lt;br /&gt;
|-&lt;br /&gt;
| [[낭만가]] || 주제 선정, 전체적인 내용 설정, 미국 문서 작성, 관계 설정 및 작성, 동기 및 결론 작성, 발표&lt;br /&gt;
|-&lt;br /&gt;
| [[텀블러]] || 전체적인 내용 구상 기여, 전체적인 위키 문서 틀 작성, 온톨로지 작성, 일본 관련 문서 작성, 역할분담 작성, 발표용 ppt 제작&lt;br /&gt;
|-&lt;br /&gt;
| [[소금토마토]] || 추가예정&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시간의 흐름으로 보는 정치교류사'''==&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NfjKF8MdQEGWKD4zQXAOvIxaqYsUcQGp7kQ_QSU4sq4&amp;amp;font=Default&amp;amp;lang=ko&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도출한 결론==&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국내 정세 안정화 선행 필요성'''===&lt;br /&gt;
----&lt;br /&gt;
개항기, 일제강점기, 해방 후 안정되기 전까지는 타국이 우리나라 정치 상황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안정기에 들어서고 나서는 타국의 정치적 영향도, 타국이 영향을 준 경우도 줄었다. 그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해보았는데, 타국이 영향을 줘서 흔들릴 만큼의 정치적인 불안정성이 없어졌고 따라서 타국에 기댈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할 수 있었다. 따라서 타국의 안 좋은 영향력을 최소화하고 자주권을 확립하여 국가와 국민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우선, 국내 정치 상황이 안정되어야 하며, 그것은 필수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영원한 우방국은 없다'''===&lt;br /&gt;
----&lt;br /&gt;
그다음으로 내린 결론은 영원한 우방국은 없다, 즉, 국제 사회는 철저한 계산에 따라 냉혹하면서도 현실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저희가 다룬 네 국가와 우리나라의 관계는 때론 우호적이기도 때론 적대적이기도 했는데, 그 관계의 이면에는 늘 치밀한 각국의 손익 계산이 반영되어 있었다. 즉, 타국은 우리나라가 본국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 싶으면 우호적인 제스쳐를 취하며 이용했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버리고 혹은 이해관계에 따라 적대적으로 설정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가 국권을 피탈 당할 때도 이러한 국제사회의 이해관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미국, 러시아 등의 국가를 너무 믿었다가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따라서, 국제사회에서 국가는 오직 국익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에 따른 적절한 외교전략을 수립해나가야 한다.&lt;br /&gt;
&lt;br /&gt;
결론적으로, 우리가 피해를 입은 경우도 있었는데 이런 피해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정치적 혼란을 막으면서 우리 문제에는 우리가 주도권을 뺏기지 않는 상황을 만들고 동시에 실리적인 외교 방안을 모색하여 평화와 국익을 위한 외교를 해야 할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아쉬운 점과 개선점'''===&lt;br /&gt;
----&lt;br /&gt;
주제 자체를 양이 너무 많고 내용도 어려운 주제로 정한 데다 잘하고 싶은 의욕으로 많은 문서를 만들고자 한 탓에 자료 조사와 내용 작성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이런 이유로 위키만의 장점을 드러낼 수 있는, 위키로만 할 수 있는 여러 툴이나 장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웠다. 그래서 다음에 또 위키 관련 활동을 한다면, 시간과 수준에 알맞은 적절한 주제, 적절한 개수의 노드를 미리 설정해서 자료 조사와 내용 작성에만 할애했던 시간을 위키만의 장점을 드러낼 수 있는 여러 툴을 활용하는 데에 사용하도록 개선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lt;/div&gt;</summary>
		<author><name>소금토마토</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0%9C%ED%95%AD%EB%B6%80%ED%84%B0_%ED%98%84%EC%9E%AC%EA%B9%8C%EC%A7%80%EC%9D%98_%EC%A0%95%EC%B9%98_%EA%B5%90%EB%A5%98&amp;diff=42833</id>
		<title>개항부터 현재까지의 정치 교류</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0%9C%ED%95%AD%EB%B6%80%ED%84%B0_%ED%98%84%EC%9E%AC%EA%B9%8C%EC%A7%80%EC%9D%98_%EC%A0%95%EC%B9%98_%EA%B5%90%EB%A5%98&amp;diff=42833"/>
		<updated>2024-06-22T14:42:5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소금토마토: /* 냉전 종식과 함께 다시 수교를 시작하다 */&lt;/p&gt;
&lt;hr /&gt;
&lt;div&gt;==&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콘텐츠 주제==&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amp;lt;font size='5'&amp;gt;'''개항부터 현재까지 한국과 타국의 정치 교류'''&amp;lt;/font&amp;gt;&amp;lt;/div&amp;gt;&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기획의도==&lt;br /&gt;
===기획배경===&lt;br /&gt;
&amp;lt;br/&amp;gt;&lt;br /&gt;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조원과 다른 나라와의 경제 교류에 관심이 많았던 조원 두 명이 합쳐져 조를 형성하였다. '교류’와 ‘정치’라는 주제를 어떻게 연결하여 절충안을 찾을지 고민하다가 우리나라의 정치가 역사적으로 타국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아왔다는 사실이 떠올라 위 주제를 선정하게 되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기획 목적===&lt;br /&gt;
&amp;lt;br/&amp;gt;&lt;br /&gt;
 정치 교류사를 되돌아보며 타국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나라 정치의 변화 흐름을 바라보고자 했다. 이를 통해 타국이 우리나라 정치 상황에 미친 영향을 통시적으로 알아보고 주요 사건의 결과도 보고자 했다. 특히, 우리나라가 손해를 보거나 불이익을 당한 경우라면 문제점을 파악하고 이것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마련해 보고자 이러한 주제를 선정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기대하는 바===&lt;br /&gt;
&amp;lt;br/&amp;gt;&lt;br /&gt;
 타국이 우리나라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파악하고 일련의 탐구로부터 결론을 도출하기를 기대한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나라가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기대하는 바이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국가별 통시적 설명==&lt;br /&gt;
&amp;lt;br/&amp;gt;&lt;br /&gt;
===일본===&lt;br /&gt;
----&lt;br /&gt;
일본은 한국과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워 역사 속에서 많은 영향을 주고 받았다. 현재까지도 많은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또 많은 갈등이 존재하기도 한다. 특히 역사 관련 갈등이 많이 발생한다는 점이 한일관계에서 주목할 만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현대 한일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으로 한국과 일본 사이에 어떤 교류가 일어났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lt;br /&gt;
이 문서에서는 현재 한일관계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개항 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일본 사이의 주요 사건을 일본이 우리나라에 미친 정치적 영향을 중심으로 서술한다. 이 문서와 같은 내용이 '일본' 문서에도 실려 있다. &lt;br /&gt;
&amp;lt;br/&amp;gt;&lt;br /&gt;
====개항부터 국권피탈 전까지, 일본 침략의 전조====&lt;br /&gt;
----&lt;br /&gt;
[[운요호 사건]]을 시작으로 한국은 개항을 하게 된다. 일본은 쿠로후네 사건을 통해 개항하게 되었고 조선이 쇄국정책을 시행하는 사이 메이지 유신을 통해 급격하게 발전한다. 일본은 제국주의적 팽창으로 조선을 위협하기 시작하는데,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일본은 조선에 개항을 요구한다. 조선은 운요호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으며 무력시위를 하는 일본을 무시할 수 없었고 강압적인 수교 통상 요구를 받아들인다. 이 결과로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여 개항을 하게 된다. 하지만 강화도 조약은 조선에게 불평등한 면이 많았다. 또,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기 쉽게 하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다.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은 개항을 하면서 세계에 진출하게 되었으나 이는 불평등했고, 이어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의 다른 서구 열강들과 근대적인 불평등한 개항 수교 통상조약을 맺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amp;lt;/br&amp;gt;&lt;br /&gt;
이후 일본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 하는데, [[갑신정변_1884년]]을 통해 청이 조선에 대해 우위를 점하게 된다. 하지만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러일전쟁에서도 승리하면서 조선에 대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했으며, 이는 국권피탈로 이어졌다. &lt;br /&gt;
&lt;br /&gt;
====일제강점기, 암흑의 시대====&lt;br /&gt;
----&lt;br /&gt;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게 된다. 1910년부터 해방된 1945년까지를 일제강점기라고 부른다. &amp;lt;/br&amp;gt;&lt;br /&gt;
1910년대: 무단통치시기이다. 정치 단체를 만들거나 의견을 내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민족 신문이 폐간되었다. 헌병이 직접 벌을 내리는 즉결심판권이 있었으며 학교에서 교사는 군복에 칼을 찼다. 일본어가 '국어'로 교육되었으며 중등학교에서는 실업 교육을, 고등 교육 기관은 없앴다. 또, 토지 조사 사업이 시작되어 우리나라의 토지를 뺴앗아갔다. 전체 토지의 40%가 일본에 넘어갔으며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통해 일본인에게 팔렸다. &amp;lt;/br&amp;gt;&lt;br /&gt;
1920년대: 문화통치시기이다. 3.1운동이 일어나고 무단통치의 한계를 느낀 일본은 문화통치로 전환한다. 표면적으로는 유화정책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탄압, 감시, 문화 말살, 수탈을 위한 정책이었다. 헌병경찰제도가 보통경찰제도로 변경되었으나 실질적으로 경찰 인력과 시설은 늘어났다. 민족신문의 발행을 허용하였으나 검열은 계속되었다. 교육 기회 확대를 주장했지만 일본과 관련된 내용을 가르치는데 불과했으며 조선인의 취학률은 낮았고, 고등교육은 여전히 실시되지 않았다. 태형령이 없어졌지만 치안 유지법을 제정해 강력하게 탄압했다.&amp;lt;/br&amp;gt; &lt;br /&gt;
1930년대:민족말살통치시기이다. 민족말살통치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 협력을 얻기 위해 취한 정책이다. 내선일체, 황민화 정책, 창씨개명, 일선동조론이 민족말살통치의 일부이다. 민족말살통치는 일본이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고 한국인의 정체성을 없애려고  한 통치이며, 이 시기 많은 강제동원과 수탈이 이루어졌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1945년 일본이 세계 2차대전에서 패하게 되고,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한다. &lt;br /&gt;
&lt;br /&gt;
====해방 후부터 5공화국까지, 일본의 영향 축소====&lt;br /&gt;
----&lt;br /&gt;
해방 후부터 일본과 한국은 교류하지 않았다. 한국전쟁을 겪고 난 후 한국은 일본보다는 다른 나라와 더 많은 교류를 했고 영향을 주고받았다. 그러다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하며 국교를 정상화하고 교류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lt;br /&gt;
&lt;br /&gt;
====6공화국 이후, 한국과 일본의 현 좌표====&lt;br /&gt;
----&lt;br /&gt;
한국과 일본은 많은 교류를 주고받고 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식민지배를 겪었고, 식민 지배 당시 많은 문제가 발생했기에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역사적인 갈등의 골이 깊다. [[현대 한국과 일본의 역사 문제]] 문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강제동원 문제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대표적이다. 인정과 배상, 개인의 청구권 문제로 갈등이 있다. 또,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도 존재한다. 일본이 전범국으로서 책임을 지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하는데, 일본이 저지를 일을 축소하여 교과서를 편찬하면서 문제가 생기고 있다. 또, 독도 문제에 관한 일본 교과서 서술도 문제이다. 마지막으로 독도 문제가 있다. 한국의 땅임이 명백한 독도에 대해 일본이 자기 땅이라고 주장하면서 갈등이 있다.&lt;br /&gt;
&lt;br /&gt;
[[분류:텀블러]]&lt;br /&gt;
&lt;br /&gt;
===미국===&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미국은 현재 한국의 최우방국이다. 북한이라는 명확한 대립 국가가 있는 지금, 미국은 우리 안보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며, 경제에 있어서도 우리나라는 미국에 많은 의존을 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과 이렇게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시작한 것은, 해방 이후로, 고작 80년도 되지 않았다. 80년은 물론 긴 시간이지만, 우리나라의 전체 역사 속에서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 문서에서는 한국과 미국이 처음 조우한 이래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미국 사이의 주요 사건을  미국이 우리나라에 미친 정치적 영향을 중심으로 서술한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한국과 미국의 첫 조우와 무시'''====&lt;br /&gt;
----&lt;br /&gt;
&lt;br /&gt;
미국의 한국에 대한 첫 관심은 1834년 로비츠 아시아 특파원의 보고이다. 이때 로비츠는 &amp;quot;동부 아시아 대륙에 조선이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반도 국가가 있는데 청나라와 일본이라는 대륙 국가와 섬나라 사이에 위치해 있고 본국 정부가 조선과 경제 교역을 가지게 되었으면 싶다&amp;quot;라고 밝히고 있다. 이후 대원군의 통상수교거부정책이 시행되던 중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48057&amp;amp;cid=46623&amp;amp;categoryId=46623 제네럴 셔먼호 사건]이 발생하였고 조선의 개항을 요구하는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2961 신미양요]가 발생한다. 미국의 승리에도 조선은 개항하지 않았고 조선은 [[운요호 사건]]으로 인한 강화도 조약 때야 개항하게 된다. 개항 이후,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기점으로 조선과 미국은 본격적인 교류를 실시한다. &lt;br /&gt;
그러나 일본제국과 미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성사되고 조선과 미국은 단교한다. 이후 미국은 조선을 철저히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며,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 과정을 묵인하거나 일본을 두둔하게 되고 조선은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2961 1910년 나라를 빼앗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강점기에서 희망을 주다'''====&lt;br /&gt;
----&lt;br /&gt;
&lt;br /&gt;
그런 와중,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이 발표되고 식민지 조선은 이 선언에 희망을 가지고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6772 3.1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고 비록 독립을 쟁취하지는 못하였으나,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진다.&lt;br /&gt;
이후, 제2차세계대전에서 일본과 미국은 적으로 만나게 되고 전후 일본의 상황을 논의하는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다. 그러나 얄타 회담에서 한국의 신탁통치를 논의한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해방 직후 밀접한 관계가 되다'''====&lt;br /&gt;
----&lt;br /&gt;
&lt;br /&gt;
일본의 항복 후, 한반도 남쪽에는 [[미군정]]이 북쪽에는 소련이 들어온다. 미군정 시절, 여러 정치적 변혁을 겪으며 좌익과 우익 계열은 완전히 분열되었고 결국 이승만의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20143&amp;amp;cid=62048&amp;amp;categoryId=62048 정읍 발언]을 기점으로 남북은 3.8도선을 기준으로 분단된다. 이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2143 한국전쟁]이 발생하고 미국은 UN연합군과 함께 남한을 위해 참전, 통일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적화통일을 막았다. 이를 계기로 한국과 미국은 안보적으로 가까운 사이가 되었으며, 전후 복구 과정에서 미국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은 한국은 미국과 경제적으로도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해방 후 혼란기 한국에 많은 영향을 미치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승만이 4.19 혁명으로 하야하는 과정에 미국이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는 등 지속적으로 정치적, 경제적 영향을 미치던 미국은 케네디 시대를 맞이한다. 민주주의 가치를 중시했던 케네디는 박정희 정권을 마음에 들지 않아 했고 베트남전 파병에 대해 미온적 태도를 보였으나, 미국 정권이 바뀐 후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한국은 [[베트남 전쟁]] 파병을 결정한다. 베트남 파병으로 많은 국내 정치적, 경제적 변화를 겪은 한국은 경제 성장을 공고히 하는 한편, 박정희 독재 체제도 강화되었다. 박정희의 독재 강화 과정에서 한국과 미국의 관계가 악화되기도 했다. 이후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20431&amp;amp;cid=62048&amp;amp;categoryId=62048 10.26 사건]이 일어나고 여러 사건을 지나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8343 6월 항쟁]이 일어났을 때, 미국은 전두환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고 노태우의 6.29 선언 발표에 기여한다.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민주화 이후에도 계속되는 영향'''====&lt;br /&gt;
----&lt;br /&gt;
&lt;br /&gt;
이후 지속적으로 좋은 관계를 맺다 노무현 정부 시절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73146&amp;amp;cid=43667&amp;amp;categoryId=43667 한미 FTA]를 체결하였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북한과의 해빙 무드 속에서 북미 정상회담을 개최하기도 했으나, 결국 주목할 만한 성과 없이 [[북미정상회담 결렬]]을 맞이한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이후, 정부가 한미일 공조에 공을 들이며, 더욱 긴밀해진 모습이나, 북한과의 관계는 매우 악화된 상황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한국과 미국은 밀접한 동맹국이니만큼 한미관계는 다른 여느 외교 관계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뽑히며, 한미관계의 조율 여부가 그 정부의 외교적 성패를 가르기도 한다. 그러나 미국이 이권에 따라 때로는 우리를 무시하고 저버린 적도 있기 때문에 결국 미국 또한, 자국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국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미관계를 원활하게 유지함으로써 안보와 경제적 이익을 취하는 동시에 너무 미국에게만 종속되지 않도록 자주적 힘을 길러나가는 것이 바람직한 한미관계의 길일 것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분류:개항부터_현재까지의_정치_교류]] [[분류:낭만가]] &lt;br /&gt;
&lt;br /&gt;
===러시아===&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잠시나마 친러관계를 맺다'''====&lt;br /&gt;
----&lt;br /&gt;
&lt;br /&gt;
1884년 조선과 러시아 사이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1711 조로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며 개항 이후 조선과 러시아가 본격적인 수교를 시작한다. 러시아는 의외로 서구 열강 중 가장 조선을 자국 식민지로 삼고자 하는 국가였기 때문에, 점차 조선에 영향력을 확대해 가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영국이 러시아를 견제하는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1825 거문도 사건]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기존에 고종의 왕비인 명성황후는 이미 러시아와 우호적 관계를 맺고자 했는데, 이를 비롯한 여러 가지 요인을 말미암아 일본에서는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2948 을미사변]을 일으킨다. 이 사건을 계기로 고종은 국내 친일파 세력을 피하기 위해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1년간 피난하게 되는데, 이것이 [[아관파천]]이다. 이 기간 동안 일본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만큼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해졌다. 그러나 러시아와 일본 간 한반도의 주도권을 두고 벌인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7238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면서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하고, 이후 조선은 친일파들의 주도 하에 1910년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른 우호 또는 적대'''====&lt;br /&gt;
----&lt;br /&gt;
&lt;br /&gt;
일제 강점기 당시 러시아는 만주와 더불어 독립운동의 근거지 중 하나였다. 러시아는 러시아 혁명과 러시아 내전을 차례로 겪는 과정에서 백군 진영에 지원군을 보낸 연합군을 상대해야 했는데, 연합군에는 일본이 포함되어 있었고 그 과정에서 한국의 독립운동 단체들과 이해관계가 맞아 잠시나마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해 준 바 있다. 자세한 사항은 [[러시아의 독립운동 지원]] 참조.&lt;br /&gt;
&lt;br /&gt;
그러나 러시아 내전이 정리된 이후로 소련은 독립군에게서 점점 지원을 거둬들였고, 끝내[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2193 자유시 참변]이 일어난다. 이후 소련은 자신들의 러시아 지역 내 지배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당시 러시아에 이주해 살고 있던 조선의 농민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키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냉전 시대 북한과 함께 적대 관계를 형성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해방 이후 한반도 남쪽에는 [[미군정]]이, 북쪽에는 소련이 들어온다. 신탁 통치 기간이 지나고 여러 정치적 변혁을 겪으며 좌익과 우익 계열은 완전히 분리되었고 남한과 북한 정부가 각각 수립되며 완전한 분단이 이루어진다. 소련은 남한을 국가로 승인하지 않고, 북한만을 한반도 유일의 합법한 정부로 여겼다. 그 과정에서 대한민국 정부는 북한을 지원하는 소련과 점점 대립하기 시작했으며, 1950년 [[한국전쟁]]이 소련의 부추김에 의해 발발하면서 대한민국과 소련은 완전한 적대관계로 돌아서게 된다. 1955년 남한의 UN 가입 시도 역시 소련에 의해 좌절된 바 있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냉전 종식과 함께 관계가 정상화되다'''====&lt;br /&gt;
----&lt;br /&gt;
&lt;br /&gt;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소련이 서방 국가들의 우호 분위기를 이어 참가를 결정하며 한국 내 소련에 대한 인식이 완화되기 시작했다. 1989년부터 시작된 [[냉전 종식]]의 영향과 노태우 정부의 물론 수교를 하였다고 해도 완전히 사이가 좋다고 보기는 어려운데, 중국이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긴 하였으나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공산당 일당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공주의 시대의 적대 관계보다 현재의 관계가 훨씬 우호적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크고 작은 갈등이 지속되다'''====&lt;br /&gt;
----&lt;br /&gt;
&lt;br /&gt;
중국과의 수교 이후 현재까지 경제적으로는 큰 변화 없이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77896&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1864 무역]에 있어서 2020년 기준 중국은 세계 최대 교역국가이자 수출대국이고, 수입은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이다. 특히 2001년 세계무역기구 가입 이후로 중국과의 교역 비중이 크게 증가하여 2020년 전세계 수출 중 중국의 비중이 역대 최대를 기록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경제 이외의 부문에서는 크고 작은 갈등이 지속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중국은 지속적인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6377 동북공정]을 진행하며 역사적으로 한국과 갈등을 빚고 있으며, 2020년대 들어서는 문화에 있어서도 [https://www.chosun.com/national/national_general/2022/02/06/DTARKZFQBFASDAKOLWX37IKDUY/ 문화공정]을 진행하며 김치, 한복 등 한국의 문화를 중국의 문화라 주장하며 지속적 갈등을 만들고 있는 상황이다. 더하여 여전히 그 영향이 남아 있는 중국발 [[코로나19]]로 인한 중국의 외교적 압박 및 정치적 발언으로 인해 국내에서 중국에 대한 민간 여론이 극도로 나빠진 상태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분류:개항부터_현재까지의_정치_교류]] [[분류:소금토마토]]&lt;br /&gt;
&lt;br /&gt;
===중국===&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조선 후기 청나라와의 관계'''====&lt;br /&gt;
----&lt;br /&gt;
&lt;br /&gt;
병자호란을 기점으로 청나라와 사대 관계를 맺은 조선은 이후로도 청과의 사대관계를 유지했다. 당시 한국이 일본에 의한 침탈의 과정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전근대 시기처럼 청과 밀접한 관계를 맺지는 않았다. 그러나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은 일본과 함께 조선의 정치에 다시 관여하기 시작했다. 이후 [[갑신정변_1884년]]을 계기로 잠시나마 청이 일본보다 조선에 대한 우위를 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가 1895년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46721&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1658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패하면서 자연스럽게 일본에게 조선에 대한 우위를 넘겨주게 된다. 이후 1910년 대한제국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일제 공동의 적을 둔 두 국가의 우호 관계'''====&lt;br /&gt;
----&lt;br /&gt;
&lt;br /&gt;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둘 모두 일본 제국주의라는 공동의 적을 둔 입장이 되면서 다시금 밀접한 관계가 형성된다. 많은 한국의 독립 단체와 독립 투사들이 만주와 상해 등 중국을 기반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한국 독립단체들의 자금 및 세력이 미약하여 자력으로는 독립 운동을 진행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었으나, [[중국의 독립운동 지원]]을 바탕으로 해방 이전까지 꾸준하게 독립 운동을 진행할 수 있었다. 한국 역시 중국의 항일 세력에 직접적으로 군대를 지원하는 등 상호 간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때까지는 양국 모두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이 공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진영별로 또는 다같이 합세하여 협력하는 양상을 보인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해방 직후 적대관계로 돌아서다'''====&lt;br /&gt;
----&lt;br /&gt;
&lt;br /&gt;
해방 이후 한반도 남쪽에는 [[미군정]]이, 북쪽에는 소련이 들어온다. 신탁 통치 기간이 지나고 여러 정치적 변혁을 겪으며 좌익과 우익 계열은 완전히 분리되었고 남한과 북한 정부가 각각 수립되며 완전한 분단이 이루어진다. 이때 중국에서는 마오쩌둥을 필두로 하는 공산당이 정권을 장악하며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다. 당연하게도 공산권이 중국에서는 같은 공산권인 북한의 정부 수립을 승인하게 되면서 남한과는 강력한 적대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진 [[한국전쟁]]에서 중국이 북한을 지원하고, UN군의 진격에 밀려 올라가는 북한에 중공군을 직접 투입해 줌으로써 남한의 북진을 저지하였다. 이때를 기점으로 중국과는 철저한 적대관계를 이루게 되고, 대한민국 정부의 강력한 반공주의에 따라 중국과는 거의 수교가 단절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냉전 종식과 함께 다시 수교를 시작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중국이 참가하게 되면서 양국의 관계가 강력한 적대 관계에서 점차 완화되었다. 이후 1989년부터 시작된 [[냉전 종식]]의 영향과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이 합쳐져 시너지를 발휘해 1992년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은 오랜 적대 관계를 깨고 다시 수교를 시작한다. 물론 수교를 하였다고 해도 완전히 사이가 좋다고 보기는 어려운데, 중국이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긴 하였으나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공산당 일당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공주의 시대의 적대 관계보다 현재의 관계가 훨씬 우호적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크고 작은 갈등이 지속되다'''====&lt;br /&gt;
----&lt;br /&gt;
&lt;br /&gt;
중국과의 수교 이후 현재까지 경제적으로는 큰 변화 없이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77896&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1864 무역]에 있어서 2020년 기준 중국은 세계 최대 교역국가이자 수출대국이고, 수입은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이다. 특히 2001년 세계무역기구 가입 이후로 중국과의 교역 비중이 크게 증가하여 2020년 전세계 수출 중 중국의 비중이 역대 최대를 기록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경제 이외의 부문에서는 크고 작은 갈등이 지속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중국은 지속적인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6377 동북공정]을 진행하며 역사적으로 한국과 갈등을 빚고 있으며, 2020년대 들어서는 문화에 있어서도 [https://www.chosun.com/national/national_general/2022/02/06/DTARKZFQBFASDAKOLWX37IKDUY/ 문화공정]을 진행하며 김치, 한복 등 한국의 문화를 중국의 문화라 주장하며 지속적 갈등을 만들고 있는 상황이다. 더하여 여전히 그 영향이 남아 있는 중국발 [[코로나19]]로 인한 중국의 외교적 압박 및 정치적 발언으로 인해 국내에서 중국에 대한 민간 여론이 극도로 나빠진 상태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분류:개항부터_현재까지의_정치_교류]] [[분류:소금토마토]]&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온톨로지==&lt;br /&gt;
{{NetworkGraph | title=정치교류.ls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NetworkGraph | title=정치교류.ls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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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콘텐츠 구조==&lt;br /&gt;
&lt;br /&gt;
===클래스(Class)===&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color:white&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amp;quot; | 클래스 !! style=&amp;quot;width:30%&amp;quot; | 설명 !! style=&amp;quot;45%&amp;quot; | 노드&lt;br /&gt;
|-&lt;br /&gt;
|나라 ||우리나라의 정치사에 영향을 가장 많이 미친 나라들이다. 각 문서에 각 나라가 한국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통시적으로 서술하였다. || [[일본]] [[중국]] [[러시아]] [[미국]]&lt;br /&gt;
&lt;br /&gt;
|-&lt;br /&gt;
|사건 || 주요 사건들을 노드로 만들었다. 각 사건에 대해 자세히 서술했고, 각 사건이 미친 영향을 서술했다.|| [[운요호 사건]] [[강화도 조약]] [[갑신정변_1884년]] [[을사조약]] [[한일기본조약]]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현대 한국과 일본의 역사 문제]] [[임오군란]] [[중국의 독립운동 지원]] [[한국전쟁]] [[코로나19]] [[아관파천]] [[러시아의 독립운동 지원]] [[냉전 종식]] [[가쓰라-태프트 밀약]] [[민족자결주의 선언]] [[미군정]] [[베트남 전쟁]] [[북미정상회담 결렬]] &lt;br /&gt;
|-&lt;br /&gt;
|시기|| 시기를 크게 4가지로 나누어 노드를 만들었다.  || [[개항부터 국권피탈]]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 [[6공화국 이후]]&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green&amp;quot;&amp;gt;'''leads'''&amp;lt;/span&amp;gt;&lt;br /&gt;
***설명: 나라와 해당 나라가 관련된 사건을 연결한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일본 → 운요호사건&lt;br /&gt;
***#일본 → 강화도 조약&lt;br /&gt;
***#일본 → 갑신정변_1885년&lt;br /&gt;
***#일본 → 을사조약&lt;br /&gt;
***#일본 → 한일기본조약&lt;br /&gt;
***#일본 →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lt;br /&gt;
***#일본 → 현대 한국과 일본의 역사 문제&lt;br /&gt;
***#일본 → 임오군란&lt;br /&gt;
***#일본 → 톈진 조약&lt;br /&gt;
***#일본 → 가쓰라-태프트 밀약&lt;br /&gt;
***#중국 → 갑신정변&lt;br /&gt;
***#중국 →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lt;br /&gt;
***#중국 → 임오군란&lt;br /&gt;
***#중국 → 톈진 조약&lt;br /&gt;
***#중국 → 중국의 독립운동 지원&lt;br /&gt;
***#중국 →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lt;br /&gt;
***#중국 → 카이로 회담&lt;br /&gt;
***#중국 → 한국 전쟁&lt;br /&gt;
***#중국 → 코로나19&lt;br /&gt;
***#중국 → 냉전 종식&lt;br /&gt;
***#러시아 → 한국 전쟁&lt;br /&gt;
***#러시아 → 아관파천&lt;br /&gt;
***#러시아 → 러시아의 독립운동 지원&lt;br /&gt;
***#러시아 → 냉전 종식&lt;br /&gt;
***#미국 → 가쓰라-태프트 밀약&lt;br /&gt;
***#미국 → 민족자결주의 선언&lt;br /&gt;
***#미국 → 카이로 회담&lt;br /&gt;
***#미국 → 한국 전쟁&lt;br /&gt;
***#미국 → 냉전 종식&lt;br /&gt;
***#미국 → 미군정&lt;br /&gt;
***#미국 → 베트남 전쟁&lt;br /&gt;
***#미국 → 북미정상회담 결렬&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green&amp;quot;&amp;gt;'''isRelatedTo'''&amp;lt;/span&amp;gt;&lt;br /&gt;
***설명: 나라와 특정 시기를 연결한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일본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일본 → 일제강점기&lt;br /&gt;
***#일본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일본 → 6공화국 이후&lt;br /&gt;
***#중국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중국 → 일제강점기&lt;br /&gt;
***#중국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중국 → 6공화국 이후&lt;br /&gt;
***#러시아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러시아 → 일제강점기&lt;br /&gt;
***#러시아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러시아 → 6공화국 이후&lt;br /&gt;
***#미국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미국 → 일제강점기&lt;br /&gt;
***#미국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미국 → 6공화국 이후&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green&amp;quot;&amp;gt;'''happenedAt'''&amp;lt;/span&amp;gt;&lt;br /&gt;
***설명: 해당 사건과 특정 시기를 연결한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운요호 사건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강화도 조약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갑신정변_1884년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가쓰라-태프트 밀약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아관파천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임오군란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톈진조약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을사조약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중국의 독립운동 지원 → 일제강점기&lt;br /&gt;
***#민족자결주의 선언 → 일제강점기&lt;br /&gt;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 일제강점기&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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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 회담 → 일제강점기&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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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한국과 일본의 역사 문제 → 6공화국 이후&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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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종식 → 6공화국 이후&lt;br /&gt;
***#북미정상회담 결렬 → 6공화국 이후&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마인드맵==&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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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기여==&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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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원 || 기여내용&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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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시간의 흐름으로 보는 정치교류사'''==&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NfjKF8MdQEGWKD4zQXAOvIxaqYsUcQGp7kQ_QSU4sq4&amp;amp;font=Default&amp;amp;lang=ko&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도출한 결론==&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국내 정세 안정화 선행 필요성'''===&lt;br /&gt;
----&lt;br /&gt;
개항기, 일제강점기, 해방 후 안정되기 전까지는 타국이 우리나라 정치 상황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안정기에 들어서고 나서는 타국의 정치적 영향도, 타국이 영향을 준 경우도 줄었다. 그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해보았는데, 타국이 영향을 줘서 흔들릴 만큼의 정치적인 불안정성이 없어졌고 따라서 타국에 기댈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할 수 있었다. 따라서 타국의 안 좋은 영향력을 최소화하고 자주권을 확립하여 국가와 국민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우선, 국내 정치 상황이 안정되어야 하며, 그것은 필수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영원한 우방국은 없다'''===&lt;br /&gt;
----&lt;br /&gt;
그다음으로 내린 결론은 영원한 우방국은 없다, 즉, 국제 사회는 철저한 계산에 따라 냉혹하면서도 현실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저희가 다룬 네 국가와 우리나라의 관계는 때론 우호적이기도 때론 적대적이기도 했는데, 그 관계의 이면에는 늘 치밀한 각국의 손익 계산이 반영되어 있었다. 즉, 타국은 우리나라가 본국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 싶으면 우호적인 제스쳐를 취하며 이용했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버리고 혹은 이해관계에 따라 적대적으로 설정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가 국권을 피탈 당할 때도 이러한 국제사회의 이해관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미국, 러시아 등의 국가를 너무 믿었다가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따라서, 국제사회에서 국가는 오직 국익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에 따른 적절한 외교전략을 수립해나가야 한다.&lt;br /&gt;
&lt;br /&gt;
결론적으로, 우리가 피해를 입은 경우도 있었는데 이런 피해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정치적 혼란을 막으면서 우리 문제에는 우리가 주도권을 뺏기지 않는 상황을 만들고 동시에 실리적인 외교 방안을 모색하여 평화와 국익을 위한 외교를 해야 할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아쉬운 점과 개선점'''===&lt;br /&gt;
----&lt;br /&gt;
주제 자체를 양이 너무 많고 내용도 어려운 주제로 정한 데다 잘하고 싶은 의욕으로 많은 문서를 만들고자 한 탓에 자료 조사와 내용 작성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이런 이유로 위키만의 장점을 드러낼 수 있는, 위키로만 할 수 있는 여러 툴이나 장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웠다. 그래서 다음에 또 위키 관련 활동을 한다면, 시간과 수준에 알맞은 적절한 주제, 적절한 개수의 노드를 미리 설정해서 자료 조사와 내용 작성에만 할애했던 시간을 위키만의 장점을 드러낼 수 있는 여러 툴을 활용하는 데에 사용하도록 개선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lt;/div&gt;</summary>
		<author><name>소금토마토</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0%9C%ED%95%AD%EB%B6%80%ED%84%B0_%ED%98%84%EC%9E%AC%EA%B9%8C%EC%A7%80%EC%9D%98_%EC%A0%95%EC%B9%98_%EA%B5%90%EB%A5%98&amp;diff=42832</id>
		<title>개항부터 현재까지의 정치 교류</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0%9C%ED%95%AD%EB%B6%80%ED%84%B0_%ED%98%84%EC%9E%AC%EA%B9%8C%EC%A7%80%EC%9D%98_%EC%A0%95%EC%B9%98_%EA%B5%90%EB%A5%98&amp;diff=42832"/>
		<updated>2024-06-22T14:42:4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소금토마토: /* 러시아 */&lt;/p&gt;
&lt;hr /&gt;
&lt;div&gt;==&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콘텐츠 주제==&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amp;lt;font size='5'&amp;gt;'''개항부터 현재까지 한국과 타국의 정치 교류'''&amp;lt;/font&amp;gt;&amp;lt;/div&amp;gt;&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기획의도==&lt;br /&gt;
===기획배경===&lt;br /&gt;
&amp;lt;br/&amp;gt;&lt;br /&gt;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조원과 다른 나라와의 경제 교류에 관심이 많았던 조원 두 명이 합쳐져 조를 형성하였다. '교류’와 ‘정치’라는 주제를 어떻게 연결하여 절충안을 찾을지 고민하다가 우리나라의 정치가 역사적으로 타국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아왔다는 사실이 떠올라 위 주제를 선정하게 되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기획 목적===&lt;br /&gt;
&amp;lt;br/&amp;gt;&lt;br /&gt;
 정치 교류사를 되돌아보며 타국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나라 정치의 변화 흐름을 바라보고자 했다. 이를 통해 타국이 우리나라 정치 상황에 미친 영향을 통시적으로 알아보고 주요 사건의 결과도 보고자 했다. 특히, 우리나라가 손해를 보거나 불이익을 당한 경우라면 문제점을 파악하고 이것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마련해 보고자 이러한 주제를 선정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기대하는 바===&lt;br /&gt;
&amp;lt;br/&amp;gt;&lt;br /&gt;
 타국이 우리나라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파악하고 일련의 탐구로부터 결론을 도출하기를 기대한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나라가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기대하는 바이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국가별 통시적 설명==&lt;br /&gt;
&amp;lt;br/&amp;gt;&lt;br /&gt;
===일본===&lt;br /&gt;
----&lt;br /&gt;
일본은 한국과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워 역사 속에서 많은 영향을 주고 받았다. 현재까지도 많은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또 많은 갈등이 존재하기도 한다. 특히 역사 관련 갈등이 많이 발생한다는 점이 한일관계에서 주목할 만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현대 한일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으로 한국과 일본 사이에 어떤 교류가 일어났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lt;br /&gt;
이 문서에서는 현재 한일관계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개항 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일본 사이의 주요 사건을 일본이 우리나라에 미친 정치적 영향을 중심으로 서술한다. 이 문서와 같은 내용이 '일본' 문서에도 실려 있다. &lt;br /&gt;
&amp;lt;br/&amp;gt;&lt;br /&gt;
====개항부터 국권피탈 전까지, 일본 침략의 전조====&lt;br /&gt;
----&lt;br /&gt;
[[운요호 사건]]을 시작으로 한국은 개항을 하게 된다. 일본은 쿠로후네 사건을 통해 개항하게 되었고 조선이 쇄국정책을 시행하는 사이 메이지 유신을 통해 급격하게 발전한다. 일본은 제국주의적 팽창으로 조선을 위협하기 시작하는데,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일본은 조선에 개항을 요구한다. 조선은 운요호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으며 무력시위를 하는 일본을 무시할 수 없었고 강압적인 수교 통상 요구를 받아들인다. 이 결과로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여 개항을 하게 된다. 하지만 강화도 조약은 조선에게 불평등한 면이 많았다. 또,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기 쉽게 하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다.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은 개항을 하면서 세계에 진출하게 되었으나 이는 불평등했고, 이어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의 다른 서구 열강들과 근대적인 불평등한 개항 수교 통상조약을 맺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amp;lt;/br&amp;gt;&lt;br /&gt;
이후 일본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 하는데, [[갑신정변_1884년]]을 통해 청이 조선에 대해 우위를 점하게 된다. 하지만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러일전쟁에서도 승리하면서 조선에 대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했으며, 이는 국권피탈로 이어졌다. &lt;br /&gt;
&lt;br /&gt;
====일제강점기, 암흑의 시대====&lt;br /&gt;
----&lt;br /&gt;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게 된다. 1910년부터 해방된 1945년까지를 일제강점기라고 부른다. &amp;lt;/br&amp;gt;&lt;br /&gt;
1910년대: 무단통치시기이다. 정치 단체를 만들거나 의견을 내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민족 신문이 폐간되었다. 헌병이 직접 벌을 내리는 즉결심판권이 있었으며 학교에서 교사는 군복에 칼을 찼다. 일본어가 '국어'로 교육되었으며 중등학교에서는 실업 교육을, 고등 교육 기관은 없앴다. 또, 토지 조사 사업이 시작되어 우리나라의 토지를 뺴앗아갔다. 전체 토지의 40%가 일본에 넘어갔으며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통해 일본인에게 팔렸다. &amp;lt;/br&amp;gt;&lt;br /&gt;
1920년대: 문화통치시기이다. 3.1운동이 일어나고 무단통치의 한계를 느낀 일본은 문화통치로 전환한다. 표면적으로는 유화정책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탄압, 감시, 문화 말살, 수탈을 위한 정책이었다. 헌병경찰제도가 보통경찰제도로 변경되었으나 실질적으로 경찰 인력과 시설은 늘어났다. 민족신문의 발행을 허용하였으나 검열은 계속되었다. 교육 기회 확대를 주장했지만 일본과 관련된 내용을 가르치는데 불과했으며 조선인의 취학률은 낮았고, 고등교육은 여전히 실시되지 않았다. 태형령이 없어졌지만 치안 유지법을 제정해 강력하게 탄압했다.&amp;lt;/br&amp;gt; &lt;br /&gt;
1930년대:민족말살통치시기이다. 민족말살통치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 협력을 얻기 위해 취한 정책이다. 내선일체, 황민화 정책, 창씨개명, 일선동조론이 민족말살통치의 일부이다. 민족말살통치는 일본이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고 한국인의 정체성을 없애려고  한 통치이며, 이 시기 많은 강제동원과 수탈이 이루어졌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1945년 일본이 세계 2차대전에서 패하게 되고,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한다. &lt;br /&gt;
&lt;br /&gt;
====해방 후부터 5공화국까지, 일본의 영향 축소====&lt;br /&gt;
----&lt;br /&gt;
해방 후부터 일본과 한국은 교류하지 않았다. 한국전쟁을 겪고 난 후 한국은 일본보다는 다른 나라와 더 많은 교류를 했고 영향을 주고받았다. 그러다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하며 국교를 정상화하고 교류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lt;br /&gt;
&lt;br /&gt;
====6공화국 이후, 한국과 일본의 현 좌표====&lt;br /&gt;
----&lt;br /&gt;
한국과 일본은 많은 교류를 주고받고 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식민지배를 겪었고, 식민 지배 당시 많은 문제가 발생했기에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역사적인 갈등의 골이 깊다. [[현대 한국과 일본의 역사 문제]] 문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강제동원 문제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대표적이다. 인정과 배상, 개인의 청구권 문제로 갈등이 있다. 또,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도 존재한다. 일본이 전범국으로서 책임을 지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하는데, 일본이 저지를 일을 축소하여 교과서를 편찬하면서 문제가 생기고 있다. 또, 독도 문제에 관한 일본 교과서 서술도 문제이다. 마지막으로 독도 문제가 있다. 한국의 땅임이 명백한 독도에 대해 일본이 자기 땅이라고 주장하면서 갈등이 있다.&lt;br /&gt;
&lt;br /&gt;
[[분류:텀블러]]&lt;br /&gt;
&lt;br /&gt;
===미국===&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미국은 현재 한국의 최우방국이다. 북한이라는 명확한 대립 국가가 있는 지금, 미국은 우리 안보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며, 경제에 있어서도 우리나라는 미국에 많은 의존을 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과 이렇게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시작한 것은, 해방 이후로, 고작 80년도 되지 않았다. 80년은 물론 긴 시간이지만, 우리나라의 전체 역사 속에서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 문서에서는 한국과 미국이 처음 조우한 이래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미국 사이의 주요 사건을  미국이 우리나라에 미친 정치적 영향을 중심으로 서술한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한국과 미국의 첫 조우와 무시'''====&lt;br /&gt;
----&lt;br /&gt;
&lt;br /&gt;
미국의 한국에 대한 첫 관심은 1834년 로비츠 아시아 특파원의 보고이다. 이때 로비츠는 &amp;quot;동부 아시아 대륙에 조선이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반도 국가가 있는데 청나라와 일본이라는 대륙 국가와 섬나라 사이에 위치해 있고 본국 정부가 조선과 경제 교역을 가지게 되었으면 싶다&amp;quot;라고 밝히고 있다. 이후 대원군의 통상수교거부정책이 시행되던 중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48057&amp;amp;cid=46623&amp;amp;categoryId=46623 제네럴 셔먼호 사건]이 발생하였고 조선의 개항을 요구하는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2961 신미양요]가 발생한다. 미국의 승리에도 조선은 개항하지 않았고 조선은 [[운요호 사건]]으로 인한 강화도 조약 때야 개항하게 된다. 개항 이후,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기점으로 조선과 미국은 본격적인 교류를 실시한다. &lt;br /&gt;
그러나 일본제국과 미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성사되고 조선과 미국은 단교한다. 이후 미국은 조선을 철저히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며,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 과정을 묵인하거나 일본을 두둔하게 되고 조선은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2961 1910년 나라를 빼앗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강점기에서 희망을 주다'''====&lt;br /&gt;
----&lt;br /&gt;
&lt;br /&gt;
그런 와중,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이 발표되고 식민지 조선은 이 선언에 희망을 가지고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6772 3.1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고 비록 독립을 쟁취하지는 못하였으나,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진다.&lt;br /&gt;
이후, 제2차세계대전에서 일본과 미국은 적으로 만나게 되고 전후 일본의 상황을 논의하는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다. 그러나 얄타 회담에서 한국의 신탁통치를 논의한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해방 직후 밀접한 관계가 되다'''====&lt;br /&gt;
----&lt;br /&gt;
&lt;br /&gt;
일본의 항복 후, 한반도 남쪽에는 [[미군정]]이 북쪽에는 소련이 들어온다. 미군정 시절, 여러 정치적 변혁을 겪으며 좌익과 우익 계열은 완전히 분열되었고 결국 이승만의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20143&amp;amp;cid=62048&amp;amp;categoryId=62048 정읍 발언]을 기점으로 남북은 3.8도선을 기준으로 분단된다. 이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2143 한국전쟁]이 발생하고 미국은 UN연합군과 함께 남한을 위해 참전, 통일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적화통일을 막았다. 이를 계기로 한국과 미국은 안보적으로 가까운 사이가 되었으며, 전후 복구 과정에서 미국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은 한국은 미국과 경제적으로도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해방 후 혼란기 한국에 많은 영향을 미치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승만이 4.19 혁명으로 하야하는 과정에 미국이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는 등 지속적으로 정치적, 경제적 영향을 미치던 미국은 케네디 시대를 맞이한다. 민주주의 가치를 중시했던 케네디는 박정희 정권을 마음에 들지 않아 했고 베트남전 파병에 대해 미온적 태도를 보였으나, 미국 정권이 바뀐 후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한국은 [[베트남 전쟁]] 파병을 결정한다. 베트남 파병으로 많은 국내 정치적, 경제적 변화를 겪은 한국은 경제 성장을 공고히 하는 한편, 박정희 독재 체제도 강화되었다. 박정희의 독재 강화 과정에서 한국과 미국의 관계가 악화되기도 했다. 이후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20431&amp;amp;cid=62048&amp;amp;categoryId=62048 10.26 사건]이 일어나고 여러 사건을 지나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8343 6월 항쟁]이 일어났을 때, 미국은 전두환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고 노태우의 6.29 선언 발표에 기여한다.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민주화 이후에도 계속되는 영향'''====&lt;br /&gt;
----&lt;br /&gt;
&lt;br /&gt;
이후 지속적으로 좋은 관계를 맺다 노무현 정부 시절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73146&amp;amp;cid=43667&amp;amp;categoryId=43667 한미 FTA]를 체결하였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북한과의 해빙 무드 속에서 북미 정상회담을 개최하기도 했으나, 결국 주목할 만한 성과 없이 [[북미정상회담 결렬]]을 맞이한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이후, 정부가 한미일 공조에 공을 들이며, 더욱 긴밀해진 모습이나, 북한과의 관계는 매우 악화된 상황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한국과 미국은 밀접한 동맹국이니만큼 한미관계는 다른 여느 외교 관계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뽑히며, 한미관계의 조율 여부가 그 정부의 외교적 성패를 가르기도 한다. 그러나 미국이 이권에 따라 때로는 우리를 무시하고 저버린 적도 있기 때문에 결국 미국 또한, 자국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국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미관계를 원활하게 유지함으로써 안보와 경제적 이익을 취하는 동시에 너무 미국에게만 종속되지 않도록 자주적 힘을 길러나가는 것이 바람직한 한미관계의 길일 것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분류:개항부터_현재까지의_정치_교류]] [[분류:낭만가]] &lt;br /&gt;
&lt;br /&gt;
===러시아===&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잠시나마 친러관계를 맺다'''====&lt;br /&gt;
----&lt;br /&gt;
&lt;br /&gt;
1884년 조선과 러시아 사이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1711 조로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며 개항 이후 조선과 러시아가 본격적인 수교를 시작한다. 러시아는 의외로 서구 열강 중 가장 조선을 자국 식민지로 삼고자 하는 국가였기 때문에, 점차 조선에 영향력을 확대해 가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영국이 러시아를 견제하는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1825 거문도 사건]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기존에 고종의 왕비인 명성황후는 이미 러시아와 우호적 관계를 맺고자 했는데, 이를 비롯한 여러 가지 요인을 말미암아 일본에서는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2948 을미사변]을 일으킨다. 이 사건을 계기로 고종은 국내 친일파 세력을 피하기 위해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1년간 피난하게 되는데, 이것이 [[아관파천]]이다. 이 기간 동안 일본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만큼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해졌다. 그러나 러시아와 일본 간 한반도의 주도권을 두고 벌인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7238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면서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하고, 이후 조선은 친일파들의 주도 하에 1910년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른 우호 또는 적대'''====&lt;br /&gt;
----&lt;br /&gt;
&lt;br /&gt;
일제 강점기 당시 러시아는 만주와 더불어 독립운동의 근거지 중 하나였다. 러시아는 러시아 혁명과 러시아 내전을 차례로 겪는 과정에서 백군 진영에 지원군을 보낸 연합군을 상대해야 했는데, 연합군에는 일본이 포함되어 있었고 그 과정에서 한국의 독립운동 단체들과 이해관계가 맞아 잠시나마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해 준 바 있다. 자세한 사항은 [[러시아의 독립운동 지원]] 참조.&lt;br /&gt;
&lt;br /&gt;
그러나 러시아 내전이 정리된 이후로 소련은 독립군에게서 점점 지원을 거둬들였고, 끝내[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2193 자유시 참변]이 일어난다. 이후 소련은 자신들의 러시아 지역 내 지배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당시 러시아에 이주해 살고 있던 조선의 농민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키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냉전 시대 북한과 함께 적대 관계를 형성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해방 이후 한반도 남쪽에는 [[미군정]]이, 북쪽에는 소련이 들어온다. 신탁 통치 기간이 지나고 여러 정치적 변혁을 겪으며 좌익과 우익 계열은 완전히 분리되었고 남한과 북한 정부가 각각 수립되며 완전한 분단이 이루어진다. 소련은 남한을 국가로 승인하지 않고, 북한만을 한반도 유일의 합법한 정부로 여겼다. 그 과정에서 대한민국 정부는 북한을 지원하는 소련과 점점 대립하기 시작했으며, 1950년 [[한국전쟁]]이 소련의 부추김에 의해 발발하면서 대한민국과 소련은 완전한 적대관계로 돌아서게 된다. 1955년 남한의 UN 가입 시도 역시 소련에 의해 좌절된 바 있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냉전 종식과 함께 관계가 정상화되다'''====&lt;br /&gt;
----&lt;br /&gt;
&lt;br /&gt;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소련이 서방 국가들의 우호 분위기를 이어 참가를 결정하며 한국 내 소련에 대한 인식이 완화되기 시작했다. 1989년부터 시작된 [[냉전 종식]]의 영향과 노태우 정부의 물론 수교를 하였다고 해도 완전히 사이가 좋다고 보기는 어려운데, 중국이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긴 하였으나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공산당 일당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공주의 시대의 적대 관계보다 현재의 관계가 훨씬 우호적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크고 작은 갈등이 지속되다'''====&lt;br /&gt;
----&lt;br /&gt;
&lt;br /&gt;
중국과의 수교 이후 현재까지 경제적으로는 큰 변화 없이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77896&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1864 무역]에 있어서 2020년 기준 중국은 세계 최대 교역국가이자 수출대국이고, 수입은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이다. 특히 2001년 세계무역기구 가입 이후로 중국과의 교역 비중이 크게 증가하여 2020년 전세계 수출 중 중국의 비중이 역대 최대를 기록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경제 이외의 부문에서는 크고 작은 갈등이 지속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중국은 지속적인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6377 동북공정]을 진행하며 역사적으로 한국과 갈등을 빚고 있으며, 2020년대 들어서는 문화에 있어서도 [https://www.chosun.com/national/national_general/2022/02/06/DTARKZFQBFASDAKOLWX37IKDUY/ 문화공정]을 진행하며 김치, 한복 등 한국의 문화를 중국의 문화라 주장하며 지속적 갈등을 만들고 있는 상황이다. 더하여 여전히 그 영향이 남아 있는 중국발 [[코로나19]]로 인한 중국의 외교적 압박 및 정치적 발언으로 인해 국내에서 중국에 대한 민간 여론이 극도로 나빠진 상태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분류:개항부터_현재까지의_정치_교류]] [[분류:소금토마토]]&lt;br /&gt;
&lt;br /&gt;
===중국===&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조선 후기 청나라와의 관계'''====&lt;br /&gt;
----&lt;br /&gt;
&lt;br /&gt;
병자호란을 기점으로 청나라와 사대 관계를 맺은 조선은 이후로도 청과의 사대관계를 유지했다. 당시 한국이 일본에 의한 침탈의 과정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전근대 시기처럼 청과 밀접한 관계를 맺지는 않았다. 그러나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은 일본과 함께 조선의 정치에 다시 관여하기 시작했다. 이후 [[갑신정변_1884년]]을 계기로 잠시나마 청이 일본보다 조선에 대한 우위를 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가 1895년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46721&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1658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패하면서 자연스럽게 일본에게 조선에 대한 우위를 넘겨주게 된다. 이후 1910년 대한제국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일제 공동의 적을 둔 두 국가의 우호 관계'''====&lt;br /&gt;
----&lt;br /&gt;
&lt;br /&gt;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둘 모두 일본 제국주의라는 공동의 적을 둔 입장이 되면서 다시금 밀접한 관계가 형성된다. 많은 한국의 독립 단체와 독립 투사들이 만주와 상해 등 중국을 기반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한국 독립단체들의 자금 및 세력이 미약하여 자력으로는 독립 운동을 진행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었으나, [[중국의 독립운동 지원]]을 바탕으로 해방 이전까지 꾸준하게 독립 운동을 진행할 수 있었다. 한국 역시 중국의 항일 세력에 직접적으로 군대를 지원하는 등 상호 간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때까지는 양국 모두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이 공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진영별로 또는 다같이 합세하여 협력하는 양상을 보인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해방 직후 적대관계로 돌아서다'''====&lt;br /&gt;
----&lt;br /&gt;
&lt;br /&gt;
해방 이후 한반도 남쪽에는 [[미군정]]이, 북쪽에는 소련이 들어온다. 신탁 통치 기간이 지나고 여러 정치적 변혁을 겪으며 좌익과 우익 계열은 완전히 분리되었고 남한과 북한 정부가 각각 수립되며 완전한 분단이 이루어진다. 이때 중국에서는 마오쩌둥을 필두로 하는 공산당이 정권을 장악하며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다. 당연하게도 공산권이 중국에서는 같은 공산권인 북한의 정부 수립을 승인하게 되면서 남한과는 강력한 적대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진 [[한국전쟁]]에서 중국이 북한을 지원하고, UN군의 진격에 밀려 올라가는 북한에 중공군을 직접 투입해 줌으로써 남한의 북진을 저지하였다. 이때를 기점으로 중국과는 철저한 적대관계를 이루게 되고, 대한민국 정부의 강력한 반공주의에 따라 중국과는 거의 수교가 단절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냉전 종식과 함께 다시 수교를 시작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중국이 참가하게 되면서 양국의 관계가 강력한 적대 관계에서 점차 완화되었다. 이후 1989년부터 시작된 [[냉전 종식]]의 영향과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이 합쳐져 시너지를 발휘에 1992년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은 오랜 적대 관계를 깨고 다시 수교를 시작한다. 물론 수교를 하였다고 해도 완전히 사이가 좋다고 보기는 어려운데, 중국이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긴 하였으나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공산당 일당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공주의 시대의 적대 관계보다 현재의 관계가 훨씬 우호적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크고 작은 갈등이 지속되다'''====&lt;br /&gt;
----&lt;br /&gt;
&lt;br /&gt;
중국과의 수교 이후 현재까지 경제적으로는 큰 변화 없이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77896&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1864 무역]에 있어서 2020년 기준 중국은 세계 최대 교역국가이자 수출대국이고, 수입은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이다. 특히 2001년 세계무역기구 가입 이후로 중국과의 교역 비중이 크게 증가하여 2020년 전세계 수출 중 중국의 비중이 역대 최대를 기록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경제 이외의 부문에서는 크고 작은 갈등이 지속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중국은 지속적인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6377 동북공정]을 진행하며 역사적으로 한국과 갈등을 빚고 있으며, 2020년대 들어서는 문화에 있어서도 [https://www.chosun.com/national/national_general/2022/02/06/DTARKZFQBFASDAKOLWX37IKDUY/ 문화공정]을 진행하며 김치, 한복 등 한국의 문화를 중국의 문화라 주장하며 지속적 갈등을 만들고 있는 상황이다. 더하여 여전히 그 영향이 남아 있는 중국발 [[코로나19]]로 인한 중국의 외교적 압박 및 정치적 발언으로 인해 국내에서 중국에 대한 민간 여론이 극도로 나빠진 상태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분류:개항부터_현재까지의_정치_교류]] [[분류:소금토마토]]&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온톨로지==&lt;br /&gt;
{{NetworkGraph | title=정치교류.ls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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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pre&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콘텐츠 구조==&lt;br /&gt;
&lt;br /&gt;
===클래스(Class)===&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color:white&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amp;quot; | 클래스 !! style=&amp;quot;width:30%&amp;quot; | 설명 !! style=&amp;quot;45%&amp;quot; | 노드&lt;br /&gt;
|-&lt;br /&gt;
|나라 ||우리나라의 정치사에 영향을 가장 많이 미친 나라들이다. 각 문서에 각 나라가 한국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통시적으로 서술하였다. || [[일본]] [[중국]] [[러시아]] [[미국]]&lt;br /&gt;
&lt;br /&gt;
|-&lt;br /&gt;
|사건 || 주요 사건들을 노드로 만들었다. 각 사건에 대해 자세히 서술했고, 각 사건이 미친 영향을 서술했다.|| [[운요호 사건]] [[강화도 조약]] [[갑신정변_1884년]] [[을사조약]] [[한일기본조약]]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현대 한국과 일본의 역사 문제]] [[임오군란]] [[중국의 독립운동 지원]] [[한국전쟁]] [[코로나19]] [[아관파천]] [[러시아의 독립운동 지원]] [[냉전 종식]] [[가쓰라-태프트 밀약]] [[민족자결주의 선언]] [[미군정]] [[베트남 전쟁]] [[북미정상회담 결렬]] &lt;br /&gt;
|-&lt;br /&gt;
|시기|| 시기를 크게 4가지로 나누어 노드를 만들었다.  || [[개항부터 국권피탈]]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 [[6공화국 이후]]&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green&amp;quot;&amp;gt;'''leads'''&amp;lt;/span&amp;gt;&lt;br /&gt;
***설명: 나라와 해당 나라가 관련된 사건을 연결한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일본 → 운요호사건&lt;br /&gt;
***#일본 → 강화도 조약&lt;br /&gt;
***#일본 → 갑신정변_1885년&lt;br /&gt;
***#일본 → 을사조약&lt;br /&gt;
***#일본 → 한일기본조약&lt;br /&gt;
***#일본 →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lt;br /&gt;
***#일본 → 현대 한국과 일본의 역사 문제&lt;br /&gt;
***#일본 → 임오군란&lt;br /&gt;
***#일본 → 톈진 조약&lt;br /&gt;
***#일본 → 가쓰라-태프트 밀약&lt;br /&gt;
***#중국 → 갑신정변&lt;br /&gt;
***#중국 →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lt;br /&gt;
***#중국 → 임오군란&lt;br /&gt;
***#중국 → 톈진 조약&lt;br /&gt;
***#중국 → 중국의 독립운동 지원&lt;br /&gt;
***#중국 →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lt;br /&gt;
***#중국 → 카이로 회담&lt;br /&gt;
***#중국 → 한국 전쟁&lt;br /&gt;
***#중국 → 코로나19&lt;br /&gt;
***#중국 → 냉전 종식&lt;br /&gt;
***#러시아 → 한국 전쟁&lt;br /&gt;
***#러시아 → 아관파천&lt;br /&gt;
***#러시아 → 러시아의 독립운동 지원&lt;br /&gt;
***#러시아 → 냉전 종식&lt;br /&gt;
***#미국 → 가쓰라-태프트 밀약&lt;br /&gt;
***#미국 → 민족자결주의 선언&lt;br /&gt;
***#미국 → 카이로 회담&lt;br /&gt;
***#미국 → 한국 전쟁&lt;br /&gt;
***#미국 → 냉전 종식&lt;br /&gt;
***#미국 → 미군정&lt;br /&gt;
***#미국 → 베트남 전쟁&lt;br /&gt;
***#미국 → 북미정상회담 결렬&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green&amp;quot;&amp;gt;'''isRelatedTo'''&amp;lt;/span&amp;gt;&lt;br /&gt;
***설명: 나라와 특정 시기를 연결한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일본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일본 → 일제강점기&lt;br /&gt;
***#일본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일본 → 6공화국 이후&lt;br /&gt;
***#중국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중국 → 일제강점기&lt;br /&gt;
***#중국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중국 → 6공화국 이후&lt;br /&gt;
***#러시아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러시아 → 일제강점기&lt;br /&gt;
***#러시아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러시아 → 6공화국 이후&lt;br /&gt;
***#미국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미국 → 일제강점기&lt;br /&gt;
***#미국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미국 → 6공화국 이후&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green&amp;quot;&amp;gt;'''happenedAt'''&amp;lt;/span&amp;gt;&lt;br /&gt;
***설명: 해당 사건과 특정 시기를 연결한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운요호 사건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강화도 조약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갑신정변_1884년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가쓰라-태프트 밀약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아관파천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임오군란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톈진조약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을사조약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중국의 독립운동 지원 → 일제강점기&lt;br /&gt;
***#민족자결주의 선언 → 일제강점기&lt;br /&gt;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 일제강점기&lt;br /&gt;
***#러시아의 독립운동 지원 → 일제강점기&lt;br /&gt;
***#카이로 회담 → 일제강점기&lt;br /&gt;
***#한일기본조약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미군정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베트남 전쟁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한국 전쟁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현대 한국과 일본의 역사 문제 → 6공화국 이후&lt;br /&gt;
***#코로나19 → 6공화국 이후&lt;br /&gt;
***#냉전 종식 → 6공화국 이후&lt;br /&gt;
***#북미정상회담 결렬 → 6공화국 이후&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마인드맵==&lt;br /&gt;
 주제 마인드맵&lt;br /&gt;
사진 첨부   ※ 수업에 했던 포스트잇 사진 가능&lt;br /&gt;
&lt;br /&gt;
 노드 마인드맵&lt;br /&gt;
사진 첨부&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기여==&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white;&amp;quot;&lt;br /&gt;
|+ 6분반 정치교류조&lt;br /&gt;
|+ style=&amp;quot;caption-side:bottom; 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팀원 || 기여내용&lt;br /&gt;
|-&lt;br /&gt;
| [[낭만가]] || 주제 선정, 전체적인 내용 설정, 미국 문서 작성, 관계 설정 및 작성, 동기 및 결론 작성, 발표&lt;br /&gt;
|-&lt;br /&gt;
| [[텀블러]] || 전체적인 내용 구상 기여, 전체적인 위키 문서 틀 작성, 온톨로지 작성, 일본 관련 문서 작성, 역할분담 작성, 발표용 ppt 제작&lt;br /&gt;
|-&lt;br /&gt;
| [[소금토마토]] || 추가예정&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시간의 흐름으로 보는 정치교류사'''==&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NfjKF8MdQEGWKD4zQXAOvIxaqYsUcQGp7kQ_QSU4sq4&amp;amp;font=Default&amp;amp;lang=ko&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도출한 결론==&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국내 정세 안정화 선행 필요성'''===&lt;br /&gt;
----&lt;br /&gt;
개항기, 일제강점기, 해방 후 안정되기 전까지는 타국이 우리나라 정치 상황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안정기에 들어서고 나서는 타국의 정치적 영향도, 타국이 영향을 준 경우도 줄었다. 그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해보았는데, 타국이 영향을 줘서 흔들릴 만큼의 정치적인 불안정성이 없어졌고 따라서 타국에 기댈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할 수 있었다. 따라서 타국의 안 좋은 영향력을 최소화하고 자주권을 확립하여 국가와 국민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우선, 국내 정치 상황이 안정되어야 하며, 그것은 필수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영원한 우방국은 없다'''===&lt;br /&gt;
----&lt;br /&gt;
그다음으로 내린 결론은 영원한 우방국은 없다, 즉, 국제 사회는 철저한 계산에 따라 냉혹하면서도 현실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저희가 다룬 네 국가와 우리나라의 관계는 때론 우호적이기도 때론 적대적이기도 했는데, 그 관계의 이면에는 늘 치밀한 각국의 손익 계산이 반영되어 있었다. 즉, 타국은 우리나라가 본국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 싶으면 우호적인 제스쳐를 취하며 이용했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버리고 혹은 이해관계에 따라 적대적으로 설정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가 국권을 피탈 당할 때도 이러한 국제사회의 이해관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미국, 러시아 등의 국가를 너무 믿었다가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따라서, 국제사회에서 국가는 오직 국익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에 따른 적절한 외교전략을 수립해나가야 한다.&lt;br /&gt;
&lt;br /&gt;
결론적으로, 우리가 피해를 입은 경우도 있었는데 이런 피해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정치적 혼란을 막으면서 우리 문제에는 우리가 주도권을 뺏기지 않는 상황을 만들고 동시에 실리적인 외교 방안을 모색하여 평화와 국익을 위한 외교를 해야 할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아쉬운 점과 개선점'''===&lt;br /&gt;
----&lt;br /&gt;
주제 자체를 양이 너무 많고 내용도 어려운 주제로 정한 데다 잘하고 싶은 의욕으로 많은 문서를 만들고자 한 탓에 자료 조사와 내용 작성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이런 이유로 위키만의 장점을 드러낼 수 있는, 위키로만 할 수 있는 여러 툴이나 장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웠다. 그래서 다음에 또 위키 관련 활동을 한다면, 시간과 수준에 알맞은 적절한 주제, 적절한 개수의 노드를 미리 설정해서 자료 조사와 내용 작성에만 할애했던 시간을 위키만의 장점을 드러낼 수 있는 여러 툴을 활용하는 데에 사용하도록 개선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lt;/div&gt;</summary>
		<author><name>소금토마토</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0%9C%ED%95%AD%EB%B6%80%ED%84%B0_%ED%98%84%EC%9E%AC%EA%B9%8C%EC%A7%80%EC%9D%98_%EC%A0%95%EC%B9%98_%EA%B5%90%EB%A5%98&amp;diff=42820</id>
		<title>개항부터 현재까지의 정치 교류</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0%9C%ED%95%AD%EB%B6%80%ED%84%B0_%ED%98%84%EC%9E%AC%EA%B9%8C%EC%A7%80%EC%9D%98_%EC%A0%95%EC%B9%98_%EA%B5%90%EB%A5%98&amp;diff=42820"/>
		<updated>2024-06-22T14:20:5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소금토마토: /* 중국 */&lt;/p&gt;
&lt;hr /&gt;
&lt;div&gt;==&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콘텐츠 주제==&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amp;lt;font size='5'&amp;gt;'''개항부터 현재까지 한국과 타국의 정치 교류'''&amp;lt;/font&amp;gt;&amp;lt;/div&amp;gt;&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기획의도==&lt;br /&gt;
===기획배경===&lt;br /&gt;
&amp;lt;br/&amp;gt;&lt;br /&gt;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조원과 다른 나라와의 경제 교류에 관심이 많았던 조원 두 명이 합쳐져 조를 형성하였다. '교류’와 ‘정치’라는 주제를 어떻게 연결하여 절충안을 찾을지 고민하다가 우리나라의 정치가 역사적으로 타국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아왔다는 사실이 떠올라 위 주제를 선정하게 되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기획 목적===&lt;br /&gt;
&amp;lt;br/&amp;gt;&lt;br /&gt;
 정치 교류사를 되돌아보며 타국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나라 정치의 변화 흐름을 바라보고자 했다. 이를 통해 타국이 우리나라 정치 상황에 미친 영향을 통시적으로 알아보고 주요 사건의 결과도 보고자 했다. 특히, 우리나라가 손해를 보거나 불이익을 당한 경우라면 문제점을 파악하고 이것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마련해 보고자 이러한 주제를 선정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기대하는 바===&lt;br /&gt;
&amp;lt;br/&amp;gt;&lt;br /&gt;
 타국이 우리나라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파악하고 일련의 탐구로부터 결론을 도출하기를 기대한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나라가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기대하는 바이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국가별 통시적 설명==&lt;br /&gt;
&amp;lt;br/&amp;gt;&lt;br /&gt;
===일본===&lt;br /&gt;
----&lt;br /&gt;
일본은 한국과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워 역사 속에서 많은 영향을 주고 받았다. 현재까지도 많은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또 많은 갈등이 존재하기도 한다. 특히 역사 관련 갈등이 많이 발생한다는 점이 한일관계에서 주목할 만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현대 한일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으로 한국과 일본 사이에 어떤 교류가 일어났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lt;br /&gt;
이 문서에서는 현재 한일관계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개항 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일본 사이의 주요 사건을 일본이 우리나라에 미친 정치적 영향을 중심으로 서술한다. 이 문서와 같은 내용이 '일본' 문서에도 실려 있다. &lt;br /&gt;
&amp;lt;br/&amp;gt;&lt;br /&gt;
====개항부터 국권피탈 전까지, 일본 침략의 전조====&lt;br /&gt;
----&lt;br /&gt;
[[운요호 사건]]을 시작으로 한국은 개항을 하게 된다. 일본은 쿠로후네 사건을 통해 개항하게 되었고 조선이 쇄국정책을 시행하는 사이 메이지 유신을 통해 급격하게 발전한다. 일본은 제국주의적 팽창으로 조선을 위협하기 시작하는데,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일본은 조선에 개항을 요구한다. 조선은 운요호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으며 무력시위를 하는 일본을 무시할 수 없었고 강압적인 수교 통상 요구를 받아들인다. 이 결과로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여 개항을 하게 된다. 하지만 강화도 조약은 조선에게 불평등한 면이 많았다. 또,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기 쉽게 하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다.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은 개항을 하면서 세계에 진출하게 되었으나 이는 불평등했고, 이어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의 다른 서구 열강들과 근대적인 불평등한 개항 수교 통상조약을 맺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amp;lt;/br&amp;gt;&lt;br /&gt;
이후 일본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 하는데, [[갑신정변_1884년]]을 통해 청이 조선에 대해 우위를 점하게 된다. 하지만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러일전쟁에서도 승리하면서 조선에 대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했으며, 이는 국권피탈로 이어졌다. &lt;br /&gt;
&lt;br /&gt;
====일제강점기, 암흑의 시대====&lt;br /&gt;
----&lt;br /&gt;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게 된다. 1910년부터 해방된 1945년까지를 일제강점기라고 부른다. &amp;lt;/br&amp;gt;&lt;br /&gt;
1910년대: 무단통치시기이다. 정치 단체를 만들거나 의견을 내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민족 신문이 폐간되었다. 헌병이 직접 벌을 내리는 즉결심판권이 있었으며 학교에서 교사는 군복에 칼을 찼다. 일본어가 '국어'로 교육되었으며 중등학교에서는 실업 교육을, 고등 교육 기관은 없앴다. 또, 토지 조사 사업이 시작되어 우리나라의 토지를 뺴앗아갔다. 전체 토지의 40%가 일본에 넘어갔으며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통해 일본인에게 팔렸다. &amp;lt;/br&amp;gt;&lt;br /&gt;
1920년대: 문화통치시기이다. 3.1운동이 일어나고 무단통치의 한계를 느낀 일본은 문화통치로 전환한다. 표면적으로는 유화정책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탄압, 감시, 문화 말살, 수탈을 위한 정책이었다. 헌병경찰제도가 보통경찰제도로 변경되었으나 실질적으로 경찰 인력과 시설은 늘어났다. 민족신문의 발행을 허용하였으나 검열은 계속되었다. 교육 기회 확대를 주장했지만 일본과 관련된 내용을 가르치는데 불과했으며 조선인의 취학률은 낮았고, 고등교육은 여전히 실시되지 않았다. 태형령이 없어졌지만 치안 유지법을 제정해 강력하게 탄압했다.&amp;lt;/br&amp;gt; &lt;br /&gt;
1930년대:민족말살통치시기이다. 민족말살통치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 협력을 얻기 위해 취한 정책이다. 내선일체, 황민화 정책, 창씨개명, 일선동조론이 민족말살통치의 일부이다. 민족말살통치는 일본이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고 한국인의 정체성을 없애려고  한 통치이며, 이 시기 많은 강제동원과 수탈이 이루어졌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1945년 일본이 세계 2차대전에서 패하게 되고,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한다. &lt;br /&gt;
&lt;br /&gt;
====해방 후부터 5공화국까지, 일본의 영향 축소====&lt;br /&gt;
----&lt;br /&gt;
해방 후부터 일본과 한국은 교류하지 않았다. 한국전쟁을 겪고 난 후 한국은 일본보다는 다른 나라와 더 많은 교류를 했고 영향을 주고받았다. 그러다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하며 국교를 정상화하고 교류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lt;br /&gt;
&lt;br /&gt;
====6공화국 이후, 한국과 일본의 현 좌표====&lt;br /&gt;
----&lt;br /&gt;
한국과 일본은 많은 교류를 주고받고 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식민지배를 겪었고, 식민 지배 당시 많은 문제가 발생했기에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역사적인 갈등의 골이 깊다. [[현대 한국과 일본의 역사 문제]] 문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강제동원 문제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대표적이다. 인정과 배상, 개인의 청구권 문제로 갈등이 있다. 또,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도 존재한다. 일본이 전범국으로서 책임을 지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하는데, 일본이 저지를 일을 축소하여 교과서를 편찬하면서 문제가 생기고 있다. 또, 독도 문제에 관한 일본 교과서 서술도 문제이다. 마지막으로 독도 문제가 있다. 한국의 땅임이 명백한 독도에 대해 일본이 자기 땅이라고 주장하면서 갈등이 있다.&lt;br /&gt;
&lt;br /&gt;
[[분류:텀블러]]&lt;br /&gt;
&lt;br /&gt;
===미국===&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미국은 현재 한국의 최우방국이다. 북한이라는 명확한 대립 국가가 있는 지금, 미국은 우리 안보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며, 경제에 있어서도 우리나라는 미국에 많은 의존을 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과 이렇게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시작한 것은, 해방 이후로, 고작 80년도 되지 않았다. 80년은 물론 긴 시간이지만, 우리나라의 전체 역사 속에서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 문서에서는 한국과 미국이 처음 조우한 이래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미국 사이의 주요 사건을  미국이 우리나라에 미친 정치적 영향을 중심으로 서술한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한국과 미국의 첫 조우와 무시'''====&lt;br /&gt;
----&lt;br /&gt;
&lt;br /&gt;
미국의 한국에 대한 첫 관심은 1834년 로비츠 아시아 특파원의 보고이다. 이때 로비츠는 &amp;quot;동부 아시아 대륙에 조선이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반도 국가가 있는데 청나라와 일본이라는 대륙 국가와 섬나라 사이에 위치해 있고 본국 정부가 조선과 경제 교역을 가지게 되었으면 싶다&amp;quot;라고 밝히고 있다. 이후 대원군의 통상수교거부정책이 시행되던 중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48057&amp;amp;cid=46623&amp;amp;categoryId=46623 제네럴 셔먼호 사건]이 발생하였고 조선의 개항을 요구하는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2961 신미양요]가 발생한다. 미국의 승리에도 조선은 개항하지 않았고 조선은 [[운요호 사건]]으로 인한 강화도 조약 때야 개항하게 된다. 개항 이후,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기점으로 조선과 미국은 본격적인 교류를 실시한다. &lt;br /&gt;
그러나 일본제국과 미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성사되고 조선과 미국은 단교한다. 이후 미국은 조선을 철저히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며,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 과정을 묵인하거나 일본을 두둔하게 되고 조선은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2961 1910년 나라를 빼앗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강점기에서 희망을 주다'''====&lt;br /&gt;
----&lt;br /&gt;
&lt;br /&gt;
그런 와중,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이 발표되고 식민지 조선은 이 선언에 희망을 가지고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6772 3.1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고 비록 독립을 쟁취하지는 못하였으나,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진다.&lt;br /&gt;
이후, 제2차세계대전에서 일본과 미국은 적으로 만나게 되고 전후 일본의 상황을 논의하는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다. 그러나 얄타 회담에서 한국의 신탁통치를 논의한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해방 직후 밀접한 관계가 되다'''====&lt;br /&gt;
----&lt;br /&gt;
&lt;br /&gt;
일본의 항복 후, 한반도 남쪽에는 [[미군정]]이 북쪽에는 소련이 들어온다. 미군정 시절, 여러 정치적 변혁을 겪으며 좌익과 우익 계열은 완전히 분열되었고 결국 이승만의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20143&amp;amp;cid=62048&amp;amp;categoryId=62048 정읍 발언]을 기점으로 남북은 3.8도선을 기준으로 분단된다. 이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2143 한국전쟁]이 발생하고 미국은 UN연합군과 함께 남한을 위해 참전, 통일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적화통일을 막았다. 이를 계기로 한국과 미국은 안보적으로 가까운 사이가 되었으며, 전후 복구 과정에서 미국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은 한국은 미국과 경제적으로도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해방 후 혼란기 한국에 많은 영향을 미치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승만이 4.19 혁명으로 하야하는 과정에 미국이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는 등 지속적으로 정치적, 경제적 영향을 미치던 미국은 케네디 시대를 맞이한다. 민주주의 가치를 중시했던 케네디는 박정희 정권을 마음에 들지 않아 했고 베트남전 파병에 대해 미온적 태도를 보였으나, 미국 정권이 바뀐 후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한국은 [[베트남 전쟁]] 파병을 결정한다. 베트남 파병으로 많은 국내 정치적, 경제적 변화를 겪은 한국은 경제 성장을 공고히 하는 한편, 박정희 독재 체제도 강화되었다. 박정희의 독재 강화 과정에서 한국과 미국의 관계가 악화되기도 했다. 이후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20431&amp;amp;cid=62048&amp;amp;categoryId=62048 10.26 사건]이 일어나고 여러 사건을 지나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8343 6월 항쟁]이 일어났을 때, 미국은 전두환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고 노태우의 6.29 선언 발표에 기여한다.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민주화 이후에도 계속되는 영향'''====&lt;br /&gt;
----&lt;br /&gt;
&lt;br /&gt;
이후 지속적으로 좋은 관계를 맺다 노무현 정부 시절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73146&amp;amp;cid=43667&amp;amp;categoryId=43667 한미 FTA]를 체결하였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북한과의 해빙 무드 속에서 북미 정상회담을 개최하기도 했으나, 결국 주목할 만한 성과 없이 [[북미정상회담 결렬]]을 맞이한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이후, 정부가 한미일 공조에 공을 들이며, 더욱 긴밀해진 모습이나, 북한과의 관계는 매우 악화된 상황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한국과 미국은 밀접한 동맹국이니만큼 한미관계는 다른 여느 외교 관계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뽑히며, 한미관계의 조율 여부가 그 정부의 외교적 성패를 가르기도 한다. 그러나 미국이 이권에 따라 때로는 우리를 무시하고 저버린 적도 있기 때문에 결국 미국 또한, 자국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국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미관계를 원활하게 유지함으로써 안보와 경제적 이익을 취하는 동시에 너무 미국에게만 종속되지 않도록 자주적 힘을 길러나가는 것이 바람직한 한미관계의 길일 것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분류:개항부터_현재까지의_정치_교류]] [[분류:낭만가]] &lt;br /&gt;
&lt;br /&gt;
===러시아===&lt;br /&gt;
&amp;lt;br/&amp;gt;&lt;br /&gt;
===중국===&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조선 후기 청나라와의 관계'''====&lt;br /&gt;
----&lt;br /&gt;
&lt;br /&gt;
병자호란을 기점으로 청나라와 사대 관계를 맺은 조선은 이후로도 청과의 사대관계를 유지했다. 당시 한국이 일본에 의한 침탈의 과정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전근대 시기처럼 청과 밀접한 관계를 맺지는 않았다. 그러나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은 일본과 함께 조선의 정치에 다시 관여하기 시작했다. 이후 [[갑신정변_1884년]]을 계기로 잠시나마 청이 일본보다 조선에 대한 우위를 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가 1895년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46721&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1658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패하면서 자연스럽게 일본에게 조선에 대한 우위를 넘겨주게 된다. 이후 1910년 대한제국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일제 공동의 적을 둔 두 국가의 우호 관계'''====&lt;br /&gt;
----&lt;br /&gt;
&lt;br /&gt;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둘 모두 일본 제국주의라는 공동의 적을 둔 입장이 되면서 다시금 밀접한 관계가 형성된다. 많은 한국의 독립 단체와 독립 투사들이 만주와 상해 등 중국을 기반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한국 독립단체들의 자금 및 세력이 미약하여 자력으로는 독립 운동을 진행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었으나, [[중국의 독립운동 지원]]을 바탕으로 해방 이전까지 꾸준하게 독립 운동을 진행할 수 있었다. 한국 역시 중국의 항일 세력에 직접적으로 군대를 지원하는 등 상호 간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때까지는 양국 모두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이 공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진영별로 또는 다같이 합세하여 협력하는 양상을 보인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해방 직후 적대관계로 돌아서다'''====&lt;br /&gt;
----&lt;br /&gt;
&lt;br /&gt;
해방 이후 한반도 남쪽에는 [[미군정]]이, 북쪽에는 소련이 들어온다. 신탁 통치 기간이 지나고 여러 정치적 변혁을 겪으며 좌익과 우익 계열은 완전히 분리되었고 남한과 북한 정부가 각각 수립되며 완전한 분단이 이루어진다. 이때 중국에서는 마오쩌둥을 필두로 하는 공산당이 정권을 장악하며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다. 당연하게도 공산권이 중국에서는 같은 공산권인 북한의 정부 수립을 승인하게 되면서 남한과는 강력한 적대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진 [[한국전쟁]]에서 중국이 북한을 지원하고, UN군의 진격에 밀려 올라가는 북한에 중공군을 직접 투입해 줌으로써 남한의 북진을 저지하였다. 이때를 기점으로 중국과는 철저한 적대관계를 이루게 되고, 대한민국 정부의 강력한 반공주의에 따라 중국과는 거의 수교가 단절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냉전 종식과 함께 다시 수교를 시작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중국이 참가하게 되면서 양국의 관계가 강력한 적대 관계에서 점차 완화되었다. 이후 1989년부터 시작된 [[냉전 종식]]의 영향과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이 합쳐져 시너지를 발휘에 1992년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은 오랜 적대 관계를 깨고 다시 수교를 시작한다. 물론 수교를 하였다고 해도 완전히 사이가 좋다고 보기는 어려운데, 중국이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긴 하였으나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공산당 일당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공주의 시대의 적대 관계보다 현재의 관계가 훨씬 우호적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크고 작은 갈등이 지속되다'''====&lt;br /&gt;
----&lt;br /&gt;
&lt;br /&gt;
중국과의 수교 이후 현재까지 경제적으로는 큰 변화 없이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77896&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1864 무역]에 있어서 2020년 기준 중국은 세계 최대 교역국가이자 수출대국이고, 수입은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이다. 특히 2001년 세계무역기구 가입 이후로 중국과의 교역 비중이 크게 증가하여 2020년 전세계 수출 중 중국의 비중이 역대 최대를 기록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경제 이외의 부문에서는 크고 작은 갈등이 지속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중국은 지속적인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6377 동북공정]을 진행하며 역사적으로 한국과 갈등을 빚고 있으며, 2020년대 들어서는 문화에 있어서도 [https://www.chosun.com/national/national_general/2022/02/06/DTARKZFQBFASDAKOLWX37IKDUY/ 문화공정]을 진행하며 김치, 한복 등 한국의 문화를 중국의 문화라 주장하며 지속적 갈등을 만들고 있는 상황이다. 더하여 여전히 그 영향이 남아 있는 중국발 [[코로나19]]로 인한 중국의 외교적 압박 및 정치적 발언으로 인해 국내에서 중국에 대한 민간 여론이 극도로 나빠진 상태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분류:개항부터_현재까지의_정치_교류]] [[분류:소금토마토]]&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온톨로지==&lt;br /&gt;
{{NetworkGraph | title=정치교류.ls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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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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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tworkGraph | title=정치교류.ls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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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콘텐츠 구조==&lt;br /&gt;
&lt;br /&gt;
===클래스(Class)===&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color:white&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amp;quot; | 클래스 !! style=&amp;quot;width:30%&amp;quot; | 설명 !! style=&amp;quot;45%&amp;quot; | 노드&lt;br /&gt;
|-&lt;br /&gt;
|나라 ||우리나라의 정치사에 영향을 가장 많이 미친 나라들이다. 각 문서에 각 나라가 한국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통시적으로 서술하였다. || [[일본]] [[중국]] [[러시아]] [[미국]]&lt;br /&gt;
&lt;br /&gt;
|-&lt;br /&gt;
|사건 || 주요 사건들을 노드로 만들었다. 각 사건에 대해 자세히 서술했고, 각 사건이 미친 영향을 서술했다.|| [[운요호 사건]] [[강화도 조약]] [[갑신정변_1884년]] [[을사조약]] [[한일기본조약]]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현대 한국과 일본의 역사 문제]] [[임오군란]] [[중국의 독립운동 지원]] [[한국전쟁]] [[코로나19]] [[아관파천]] [[러시아의 독립운동 지원]] [[냉전 종식]] [[가쓰라-태프트 밀약]] [[민족자결주의 선언]] [[미군정]] [[베트남 전쟁]] [[북미정상회담 결렬]] &lt;br /&gt;
|-&lt;br /&gt;
|시기|| 시기를 크게 4가지로 나누어 노드를 만들었다.  || [[개항부터 국권피탈]]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 [[6공화국 이후]]&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green&amp;quot;&amp;gt;'''leads'''&amp;lt;/span&amp;gt;&lt;br /&gt;
***설명: 나라와 해당 나라가 관련된 사건을 연결한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일본 → 운요호사건&lt;br /&gt;
***#일본 → 강화도 조약&lt;br /&gt;
***#일본 → 갑신정변_1885년&lt;br /&gt;
***#일본 → 을사조약&lt;br /&gt;
***#일본 → 한일기본조약&lt;br /&gt;
***#일본 →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lt;br /&gt;
***#일본 → 현대 한국과 일본의 역사 문제&lt;br /&gt;
***#일본 → 임오군란&lt;br /&gt;
***#일본 → 톈진 조약&lt;br /&gt;
***#일본 → 가쓰라-태프트 밀약&lt;br /&gt;
***#중국 → 갑신정변&lt;br /&gt;
***#중국 →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lt;br /&gt;
***#중국 → 임오군란&lt;br /&gt;
***#중국 → 톈진 조약&lt;br /&gt;
***#중국 → 중국의 독립운동 지원&lt;br /&gt;
***#중국 →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lt;br /&gt;
***#중국 → 카이로 회담&lt;br /&gt;
***#중국 → 한국 전쟁&lt;br /&gt;
***#중국 → 코로나19&lt;br /&gt;
***#중국 → 냉전 종식&lt;br /&gt;
***#러시아 → 한국 전쟁&lt;br /&gt;
***#러시아 → 아관파천&lt;br /&gt;
***#러시아 → 러시아의 독립운동 지원&lt;br /&gt;
***#러시아 → 냉전 종식&lt;br /&gt;
***#미국 → 가쓰라-태프트 밀약&lt;br /&gt;
***#미국 → 민족자결주의 선언&lt;br /&gt;
***#미국 → 카이로 회담&lt;br /&gt;
***#미국 → 한국 전쟁&lt;br /&gt;
***#미국 → 냉전 종식&lt;br /&gt;
***#미국 → 미군정&lt;br /&gt;
***#미국 → 베트남 전쟁&lt;br /&gt;
***#미국 → 북미정상회담 결렬&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green&amp;quot;&amp;gt;'''isRelatedTo'''&amp;lt;/span&amp;gt;&lt;br /&gt;
***설명: 나라와 특정 시기를 연결한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일본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일본 → 일제강점기&lt;br /&gt;
***#일본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일본 → 6공화국 이후&lt;br /&gt;
***#중국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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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중국 → 6공화국 이후&lt;br /&gt;
***#러시아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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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 6공화국 이후&lt;br /&gt;
***#미국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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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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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green&amp;quot;&amp;gt;'''happenedAt'''&amp;lt;/span&amp;gt;&lt;br /&gt;
***설명: 해당 사건과 특정 시기를 연결한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운요호 사건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강화도 조약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갑신정변_1884년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가쓰라-태프트 밀약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아관파천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임오군란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톈진조약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을사조약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중국의 독립운동 지원 → 일제강점기&lt;br /&gt;
***#민족자결주의 선언 → 일제강점기&lt;br /&gt;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 일제강점기&lt;br /&gt;
***#러시아의 독립운동 지원 → 일제강점기&lt;br /&gt;
***#카이로 회담 → 일제강점기&lt;br /&gt;
***#한일기본조약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미군정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베트남 전쟁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한국 전쟁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현대 한국과 일본의 역사 문제 → 6공화국 이후&lt;br /&gt;
***#코로나19 → 6공화국 이후&lt;br /&gt;
***#냉전 종식 → 6공화국 이후&lt;br /&gt;
***#북미정상회담 결렬 → 6공화국 이후&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마인드맵==&lt;br /&gt;
 주제 마인드맵&lt;br /&gt;
사진 첨부   ※ 수업에 했던 포스트잇 사진 가능&lt;br /&gt;
&lt;br /&gt;
 노드 마인드맵&lt;br /&gt;
사진 첨부&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기여==&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white;&amp;quot;&lt;br /&gt;
|+ 6분반 정치교류조&lt;br /&gt;
|+ style=&amp;quot;caption-side:bottom; 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팀원 || 기여내용&lt;br /&gt;
|-&lt;br /&gt;
| [[낭만가]] || 주제 선정, 전체적인 내용 설정, 미국 문서 작성, 관계 설정 및 작성, 동기 및 결론 작성, 발표&lt;br /&gt;
|-&lt;br /&gt;
| [[텀블러]] || 전체적인 내용 구상 기여, 전체적인 위키 문서 틀 작성, 온톨로지 작성, 일본 관련 문서 작성, 역할분담 작성, 발표용 ppt 제작&lt;br /&gt;
|-&lt;br /&gt;
| [[소금토마토]] || 추가예정&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시간의 흐름으로 보는 정치교류사'''==&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NfjKF8MdQEGWKD4zQXAOvIxaqYsUcQGp7kQ_QSU4sq4&amp;amp;font=Default&amp;amp;lang=ko&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도출한 결론==&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국내 정세 안정화 선행 필요성'''===&lt;br /&gt;
----&lt;br /&gt;
개항기, 일제강점기, 해방 후 안정되기 전까지는 타국이 우리나라 정치 상황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안정기에 들어서고 나서는 타국의 정치적 영향도, 타국이 영향을 준 경우도 줄었다. 그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해보았는데, 타국이 영향을 줘서 흔들릴 만큼의 정치적인 불안정성이 없어졌고 따라서 타국에 기댈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할 수 있었다. 따라서 타국의 안 좋은 영향력을 최소화하고 자주권을 확립하여 국가와 국민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우선, 국내 정치 상황이 안정되어야 하며, 그것은 필수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영원한 우방국은 없다'''===&lt;br /&gt;
----&lt;br /&gt;
그다음으로 내린 결론은 영원한 우방국은 없다, 즉, 국제 사회는 철저한 계산에 따라 냉혹하면서도 현실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저희가 다룬 네 국가와 우리나라의 관계는 때론 우호적이기도 때론 적대적이기도 했는데, 그 관계의 이면에는 늘 치밀한 각국의 손익 계산이 반영되어 있었다. 즉, 타국은 우리나라가 본국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 싶으면 우호적인 제스쳐를 취하며 이용했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버리고 혹은 이해관계에 따라 적대적으로 설정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가 국권을 피탈 당할 때도 이러한 국제사회의 이해관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미국, 러시아 등의 국가를 너무 믿었다가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따라서, 국제사회에서 국가는 오직 국익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에 따른 적절한 외교전략을 수립해나가야 한다.&lt;br /&gt;
&lt;br /&gt;
결론적으로, 우리가 피해를 입은 경우도 있었는데 이런 피해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정치적 혼란을 막으면서 우리 문제에는 우리가 주도권을 뺏기지 않는 상황을 만들고 동시에 실리적인 외교 방안을 모색하여 평화와 국익을 위한 외교를 해야 할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아쉬운 점과 개선점'''===&lt;br /&gt;
----&lt;br /&gt;
주제 자체를 양이 너무 많고 내용도 어려운 주제로 정한 데다 잘하고 싶은 의욕으로 많은 문서를 만들고자 한 탓에 자료 조사와 내용 작성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이런 이유로 위키만의 장점을 드러낼 수 있는, 위키로만 할 수 있는 여러 툴이나 장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웠다. 그래서 다음에 또 위키 관련 활동을 한다면, 시간과 수준에 알맞은 적절한 주제, 적절한 개수의 노드를 미리 설정해서 자료 조사와 내용 작성에만 할애했던 시간을 위키만의 장점을 드러낼 수 있는 여러 툴을 활용하는 데에 사용하도록 개선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lt;/div&gt;</summary>
		<author><name>소금토마토</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0%9C%ED%95%AD%EB%B6%80%ED%84%B0_%ED%98%84%EC%9E%AC%EA%B9%8C%EC%A7%80%EC%9D%98_%EC%A0%95%EC%B9%98_%EA%B5%90%EB%A5%98&amp;diff=42818</id>
		<title>개항부터 현재까지의 정치 교류</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0%9C%ED%95%AD%EB%B6%80%ED%84%B0_%ED%98%84%EC%9E%AC%EA%B9%8C%EC%A7%80%EC%9D%98_%EC%A0%95%EC%B9%98_%EA%B5%90%EB%A5%98&amp;diff=42818"/>
		<updated>2024-06-22T14:20:2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소금토마토: /* 크고 작은 갈등이 지속되다 */&lt;/p&gt;
&lt;hr /&gt;
&lt;div&gt;==&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콘텐츠 주제==&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amp;lt;font size='5'&amp;gt;'''개항부터 현재까지 한국과 타국의 정치 교류'''&amp;lt;/font&amp;gt;&amp;lt;/div&amp;gt;&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기획의도==&lt;br /&gt;
===기획배경===&lt;br /&gt;
&amp;lt;br/&amp;gt;&lt;br /&gt;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조원과 다른 나라와의 경제 교류에 관심이 많았던 조원 두 명이 합쳐져 조를 형성하였다. '교류’와 ‘정치’라는 주제를 어떻게 연결하여 절충안을 찾을지 고민하다가 우리나라의 정치가 역사적으로 타국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아왔다는 사실이 떠올라 위 주제를 선정하게 되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기획 목적===&lt;br /&gt;
&amp;lt;br/&amp;gt;&lt;br /&gt;
 정치 교류사를 되돌아보며 타국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나라 정치의 변화 흐름을 바라보고자 했다. 이를 통해 타국이 우리나라 정치 상황에 미친 영향을 통시적으로 알아보고 주요 사건의 결과도 보고자 했다. 특히, 우리나라가 손해를 보거나 불이익을 당한 경우라면 문제점을 파악하고 이것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마련해 보고자 이러한 주제를 선정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기대하는 바===&lt;br /&gt;
&amp;lt;br/&amp;gt;&lt;br /&gt;
 타국이 우리나라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파악하고 일련의 탐구로부터 결론을 도출하기를 기대한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나라가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기대하는 바이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국가별 통시적 설명==&lt;br /&gt;
&amp;lt;br/&amp;gt;&lt;br /&gt;
===일본===&lt;br /&gt;
----&lt;br /&gt;
일본은 한국과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워 역사 속에서 많은 영향을 주고 받았다. 현재까지도 많은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또 많은 갈등이 존재하기도 한다. 특히 역사 관련 갈등이 많이 발생한다는 점이 한일관계에서 주목할 만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현대 한일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으로 한국과 일본 사이에 어떤 교류가 일어났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lt;br /&gt;
이 문서에서는 현재 한일관계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개항 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일본 사이의 주요 사건을 일본이 우리나라에 미친 정치적 영향을 중심으로 서술한다. 이 문서와 같은 내용이 '일본' 문서에도 실려 있다. &lt;br /&gt;
&amp;lt;br/&amp;gt;&lt;br /&gt;
====개항부터 국권피탈 전까지, 일본 침략의 전조====&lt;br /&gt;
----&lt;br /&gt;
[[운요호 사건]]을 시작으로 한국은 개항을 하게 된다. 일본은 쿠로후네 사건을 통해 개항하게 되었고 조선이 쇄국정책을 시행하는 사이 메이지 유신을 통해 급격하게 발전한다. 일본은 제국주의적 팽창으로 조선을 위협하기 시작하는데,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일본은 조선에 개항을 요구한다. 조선은 운요호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으며 무력시위를 하는 일본을 무시할 수 없었고 강압적인 수교 통상 요구를 받아들인다. 이 결과로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여 개항을 하게 된다. 하지만 강화도 조약은 조선에게 불평등한 면이 많았다. 또,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기 쉽게 하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다.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은 개항을 하면서 세계에 진출하게 되었으나 이는 불평등했고, 이어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의 다른 서구 열강들과 근대적인 불평등한 개항 수교 통상조약을 맺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amp;lt;/br&amp;gt;&lt;br /&gt;
이후 일본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 하는데, [[갑신정변_1884년]]을 통해 청이 조선에 대해 우위를 점하게 된다. 하지만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러일전쟁에서도 승리하면서 조선에 대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했으며, 이는 국권피탈로 이어졌다. &lt;br /&gt;
&lt;br /&gt;
====일제강점기, 암흑의 시대====&lt;br /&gt;
----&lt;br /&gt;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게 된다. 1910년부터 해방된 1945년까지를 일제강점기라고 부른다. &amp;lt;/br&amp;gt;&lt;br /&gt;
1910년대: 무단통치시기이다. 정치 단체를 만들거나 의견을 내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민족 신문이 폐간되었다. 헌병이 직접 벌을 내리는 즉결심판권이 있었으며 학교에서 교사는 군복에 칼을 찼다. 일본어가 '국어'로 교육되었으며 중등학교에서는 실업 교육을, 고등 교육 기관은 없앴다. 또, 토지 조사 사업이 시작되어 우리나라의 토지를 뺴앗아갔다. 전체 토지의 40%가 일본에 넘어갔으며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통해 일본인에게 팔렸다. &amp;lt;/br&amp;gt;&lt;br /&gt;
1920년대: 문화통치시기이다. 3.1운동이 일어나고 무단통치의 한계를 느낀 일본은 문화통치로 전환한다. 표면적으로는 유화정책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탄압, 감시, 문화 말살, 수탈을 위한 정책이었다. 헌병경찰제도가 보통경찰제도로 변경되었으나 실질적으로 경찰 인력과 시설은 늘어났다. 민족신문의 발행을 허용하였으나 검열은 계속되었다. 교육 기회 확대를 주장했지만 일본과 관련된 내용을 가르치는데 불과했으며 조선인의 취학률은 낮았고, 고등교육은 여전히 실시되지 않았다. 태형령이 없어졌지만 치안 유지법을 제정해 강력하게 탄압했다.&amp;lt;/br&amp;gt; &lt;br /&gt;
1930년대:민족말살통치시기이다. 민족말살통치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 협력을 얻기 위해 취한 정책이다. 내선일체, 황민화 정책, 창씨개명, 일선동조론이 민족말살통치의 일부이다. 민족말살통치는 일본이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고 한국인의 정체성을 없애려고  한 통치이며, 이 시기 많은 강제동원과 수탈이 이루어졌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1945년 일본이 세계 2차대전에서 패하게 되고,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한다. &lt;br /&gt;
&lt;br /&gt;
====해방 후부터 5공화국까지, 일본의 영향 축소====&lt;br /&gt;
----&lt;br /&gt;
해방 후부터 일본과 한국은 교류하지 않았다. 한국전쟁을 겪고 난 후 한국은 일본보다는 다른 나라와 더 많은 교류를 했고 영향을 주고받았다. 그러다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하며 국교를 정상화하고 교류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lt;br /&gt;
&lt;br /&gt;
====6공화국 이후, 한국과 일본의 현 좌표====&lt;br /&gt;
----&lt;br /&gt;
한국과 일본은 많은 교류를 주고받고 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식민지배를 겪었고, 식민 지배 당시 많은 문제가 발생했기에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역사적인 갈등의 골이 깊다. [[현대 한국과 일본의 역사 문제]] 문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강제동원 문제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대표적이다. 인정과 배상, 개인의 청구권 문제로 갈등이 있다. 또,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도 존재한다. 일본이 전범국으로서 책임을 지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하는데, 일본이 저지를 일을 축소하여 교과서를 편찬하면서 문제가 생기고 있다. 또, 독도 문제에 관한 일본 교과서 서술도 문제이다. 마지막으로 독도 문제가 있다. 한국의 땅임이 명백한 독도에 대해 일본이 자기 땅이라고 주장하면서 갈등이 있다.&lt;br /&gt;
&lt;br /&gt;
[[분류:텀블러]]&lt;br /&gt;
&lt;br /&gt;
===미국===&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미국은 현재 한국의 최우방국이다. 북한이라는 명확한 대립 국가가 있는 지금, 미국은 우리 안보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며, 경제에 있어서도 우리나라는 미국에 많은 의존을 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과 이렇게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시작한 것은, 해방 이후로, 고작 80년도 되지 않았다. 80년은 물론 긴 시간이지만, 우리나라의 전체 역사 속에서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 문서에서는 한국과 미국이 처음 조우한 이래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미국 사이의 주요 사건을  미국이 우리나라에 미친 정치적 영향을 중심으로 서술한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한국과 미국의 첫 조우와 무시'''====&lt;br /&gt;
----&lt;br /&gt;
&lt;br /&gt;
미국의 한국에 대한 첫 관심은 1834년 로비츠 아시아 특파원의 보고이다. 이때 로비츠는 &amp;quot;동부 아시아 대륙에 조선이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반도 국가가 있는데 청나라와 일본이라는 대륙 국가와 섬나라 사이에 위치해 있고 본국 정부가 조선과 경제 교역을 가지게 되었으면 싶다&amp;quot;라고 밝히고 있다. 이후 대원군의 통상수교거부정책이 시행되던 중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48057&amp;amp;cid=46623&amp;amp;categoryId=46623 제네럴 셔먼호 사건]이 발생하였고 조선의 개항을 요구하는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2961 신미양요]가 발생한다. 미국의 승리에도 조선은 개항하지 않았고 조선은 [[운요호 사건]]으로 인한 강화도 조약 때야 개항하게 된다. 개항 이후,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기점으로 조선과 미국은 본격적인 교류를 실시한다. &lt;br /&gt;
그러나 일본제국과 미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성사되고 조선과 미국은 단교한다. 이후 미국은 조선을 철저히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며,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 과정을 묵인하거나 일본을 두둔하게 되고 조선은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2961 1910년 나라를 빼앗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강점기에서 희망을 주다'''====&lt;br /&gt;
----&lt;br /&gt;
&lt;br /&gt;
그런 와중,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이 발표되고 식민지 조선은 이 선언에 희망을 가지고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6772 3.1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고 비록 독립을 쟁취하지는 못하였으나,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진다.&lt;br /&gt;
이후, 제2차세계대전에서 일본과 미국은 적으로 만나게 되고 전후 일본의 상황을 논의하는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다. 그러나 얄타 회담에서 한국의 신탁통치를 논의한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해방 직후 밀접한 관계가 되다'''====&lt;br /&gt;
----&lt;br /&gt;
&lt;br /&gt;
일본의 항복 후, 한반도 남쪽에는 [[미군정]]이 북쪽에는 소련이 들어온다. 미군정 시절, 여러 정치적 변혁을 겪으며 좌익과 우익 계열은 완전히 분열되었고 결국 이승만의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20143&amp;amp;cid=62048&amp;amp;categoryId=62048 정읍 발언]을 기점으로 남북은 3.8도선을 기준으로 분단된다. 이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2143 한국전쟁]이 발생하고 미국은 UN연합군과 함께 남한을 위해 참전, 통일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적화통일을 막았다. 이를 계기로 한국과 미국은 안보적으로 가까운 사이가 되었으며, 전후 복구 과정에서 미국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은 한국은 미국과 경제적으로도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해방 후 혼란기 한국에 많은 영향을 미치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승만이 4.19 혁명으로 하야하는 과정에 미국이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는 등 지속적으로 정치적, 경제적 영향을 미치던 미국은 케네디 시대를 맞이한다. 민주주의 가치를 중시했던 케네디는 박정희 정권을 마음에 들지 않아 했고 베트남전 파병에 대해 미온적 태도를 보였으나, 미국 정권이 바뀐 후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한국은 [[베트남 전쟁]] 파병을 결정한다. 베트남 파병으로 많은 국내 정치적, 경제적 변화를 겪은 한국은 경제 성장을 공고히 하는 한편, 박정희 독재 체제도 강화되었다. 박정희의 독재 강화 과정에서 한국과 미국의 관계가 악화되기도 했다. 이후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20431&amp;amp;cid=62048&amp;amp;categoryId=62048 10.26 사건]이 일어나고 여러 사건을 지나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8343 6월 항쟁]이 일어났을 때, 미국은 전두환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고 노태우의 6.29 선언 발표에 기여한다.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민주화 이후에도 계속되는 영향'''====&lt;br /&gt;
----&lt;br /&gt;
&lt;br /&gt;
이후 지속적으로 좋은 관계를 맺다 노무현 정부 시절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73146&amp;amp;cid=43667&amp;amp;categoryId=43667 한미 FTA]를 체결하였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북한과의 해빙 무드 속에서 북미 정상회담을 개최하기도 했으나, 결국 주목할 만한 성과 없이 [[북미정상회담 결렬]]을 맞이한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이후, 정부가 한미일 공조에 공을 들이며, 더욱 긴밀해진 모습이나, 북한과의 관계는 매우 악화된 상황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한국과 미국은 밀접한 동맹국이니만큼 한미관계는 다른 여느 외교 관계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뽑히며, 한미관계의 조율 여부가 그 정부의 외교적 성패를 가르기도 한다. 그러나 미국이 이권에 따라 때로는 우리를 무시하고 저버린 적도 있기 때문에 결국 미국 또한, 자국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국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미관계를 원활하게 유지함으로써 안보와 경제적 이익을 취하는 동시에 너무 미국에게만 종속되지 않도록 자주적 힘을 길러나가는 것이 바람직한 한미관계의 길일 것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분류:개항부터_현재까지의_정치_교류]] [[분류:낭만가]] &lt;br /&gt;
&lt;br /&gt;
===러시아===&lt;br /&gt;
&amp;lt;br/&amp;gt;&lt;br /&gt;
===중국===&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미국은 현재 한국의 최우방국이다. 북한이라는 명확한 대립 국가가 있는 지금, 미국은 우리 안보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며, 경제에 있어서도 우리나라는 미국에 많은 의존을 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과 이렇게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시작한 것은, 해방 이후로, 고작 80년도 되지 않았다. 80년은 물론 긴 시간이지만, 우리나라의 전체 역사 속에서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 문서에서는 한국과 미국이 처음 조우한 이래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미국 사이의 주요 사건을  미국이 우리나라에 미친 정치적 영향을 중심으로 서술한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조선 후기 청나라와의 관계'''====&lt;br /&gt;
----&lt;br /&gt;
&lt;br /&gt;
병자호란을 기점으로 청나라와 사대 관계를 맺은 조선은 이후로도 청과의 사대관계를 유지했다. 당시 한국이 일본에 의한 침탈의 과정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전근대 시기처럼 청과 밀접한 관계를 맺지는 않았다. 그러나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은 일본과 함께 조선의 정치에 다시 관여하기 시작했다. 이후 [[갑신정변_1884년]]을 계기로 잠시나마 청이 일본보다 조선에 대한 우위를 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가 1895년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46721&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1658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패하면서 자연스럽게 일본에게 조선에 대한 우위를 넘겨주게 된다. 이후 1910년 대한제국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일제 공동의 적을 둔 두 국가의 우호 관계'''====&lt;br /&gt;
----&lt;br /&gt;
&lt;br /&gt;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둘 모두 일본 제국주의라는 공동의 적을 둔 입장이 되면서 다시금 밀접한 관계가 형성된다. 많은 한국의 독립 단체와 독립 투사들이 만주와 상해 등 중국을 기반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한국 독립단체들의 자금 및 세력이 미약하여 자력으로는 독립 운동을 진행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었으나, [[중국의 독립운동 지원]]을 바탕으로 해방 이전까지 꾸준하게 독립 운동을 진행할 수 있었다. 한국 역시 중국의 항일 세력에 직접적으로 군대를 지원하는 등 상호 간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때까지는 양국 모두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이 공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진영별로 또는 다같이 합세하여 협력하는 양상을 보인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해방 직후 적대관계로 돌아서다'''====&lt;br /&gt;
----&lt;br /&gt;
&lt;br /&gt;
해방 이후 한반도 남쪽에는 [[미군정]]이, 북쪽에는 소련이 들어온다. 신탁 통치 기간이 지나고 여러 정치적 변혁을 겪으며 좌익과 우익 계열은 완전히 분리되었고 남한과 북한 정부가 각각 수립되며 완전한 분단이 이루어진다. 이때 중국에서는 마오쩌둥을 필두로 하는 공산당이 정권을 장악하며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다. 당연하게도 공산권이 중국에서는 같은 공산권인 북한의 정부 수립을 승인하게 되면서 남한과는 강력한 적대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진 [[한국전쟁]]에서 중국이 북한을 지원하고, UN군의 진격에 밀려 올라가는 북한에 중공군을 직접 투입해 줌으로써 남한의 북진을 저지하였다. 이때를 기점으로 중국과는 철저한 적대관계를 이루게 되고, 대한민국 정부의 강력한 반공주의에 따라 중국과는 거의 수교가 단절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냉전 종식과 함께 다시 수교를 시작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중국이 참가하게 되면서 양국의 관계가 강력한 적대 관계에서 점차 완화되었다. 이후 1989년부터 시작된 [[냉전 종식]]의 영향과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이 합쳐져 시너지를 발휘에 1992년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은 오랜 적대 관계를 깨고 다시 수교를 시작한다. 물론 수교를 하였다고 해도 완전히 사이가 좋다고 보기는 어려운데, 중국이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긴 하였으나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공산당 일당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공주의 시대의 적대 관계보다 현재의 관계가 훨씬 우호적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크고 작은 갈등이 지속되다'''====&lt;br /&gt;
----&lt;br /&gt;
&lt;br /&gt;
중국과의 수교 이후 현재까지 경제적으로는 큰 변화 없이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77896&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1864 무역]에 있어서 2020년 기준 중국은 세계 최대 교역국가이자 수출대국이고, 수입은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이다. 특히 2001년 세계무역기구 가입 이후로 중국과의 교역 비중이 크게 증가하여 2020년 전세계 수출 중 중국의 비중이 역대 최대를 기록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경제 이외의 부문에서는 크고 작은 갈등이 지속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중국은 지속적인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6377 동북공정]을 진행하며 역사적으로 한국과 갈등을 빚고 있으며, 2020년대 들어서는 문화에 있어서도 [https://www.chosun.com/national/national_general/2022/02/06/DTARKZFQBFASDAKOLWX37IKDUY/ 문화공정]을 진행하며 김치, 한복 등 한국의 문화를 중국의 문화라 주장하며 지속적 갈등을 만들고 있는 상황이다. 더하여 여전히 그 영향이 남아 있는 중국발 [[코로나19]]로 인한 중국의 외교적 압박 및 정치적 발언으로 인해 국내에서 중국에 대한 민간 여론이 극도로 나빠진 상태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온톨로지==&lt;br /&gt;
{{NetworkGraph | title=정치교류.ls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NetworkGraph | title=정치교류.lst}}&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콘텐츠 구조==&lt;br /&gt;
&lt;br /&gt;
===클래스(Class)===&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color:white&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amp;quot; | 클래스 !! style=&amp;quot;width:30%&amp;quot; | 설명 !! style=&amp;quot;45%&amp;quot; | 노드&lt;br /&gt;
|-&lt;br /&gt;
|나라 ||우리나라의 정치사에 영향을 가장 많이 미친 나라들이다. 각 문서에 각 나라가 한국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통시적으로 서술하였다. || [[일본]] [[중국]] [[러시아]] [[미국]]&lt;br /&gt;
&lt;br /&gt;
|-&lt;br /&gt;
|사건 || 주요 사건들을 노드로 만들었다. 각 사건에 대해 자세히 서술했고, 각 사건이 미친 영향을 서술했다.|| [[운요호 사건]] [[강화도 조약]] [[갑신정변_1884년]] [[을사조약]] [[한일기본조약]]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현대 한국과 일본의 역사 문제]] [[임오군란]] [[중국의 독립운동 지원]] [[한국전쟁]] [[코로나19]] [[아관파천]] [[러시아의 독립운동 지원]] [[냉전 종식]] [[가쓰라-태프트 밀약]] [[민족자결주의 선언]] [[미군정]] [[베트남 전쟁]] [[북미정상회담 결렬]] &lt;br /&gt;
|-&lt;br /&gt;
|시기|| 시기를 크게 4가지로 나누어 노드를 만들었다.  || [[개항부터 국권피탈]]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 [[6공화국 이후]]&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green&amp;quot;&amp;gt;'''leads'''&amp;lt;/span&amp;gt;&lt;br /&gt;
***설명: 나라와 해당 나라가 관련된 사건을 연결한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일본 → 운요호사건&lt;br /&gt;
***#일본 → 강화도 조약&lt;br /&gt;
***#일본 → 갑신정변_1885년&lt;br /&gt;
***#일본 → 을사조약&lt;br /&gt;
***#일본 → 한일기본조약&lt;br /&gt;
***#일본 →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lt;br /&gt;
***#일본 → 현대 한국과 일본의 역사 문제&lt;br /&gt;
***#일본 → 임오군란&lt;br /&gt;
***#일본 → 톈진 조약&lt;br /&gt;
***#일본 → 가쓰라-태프트 밀약&lt;br /&gt;
***#중국 → 갑신정변&lt;br /&gt;
***#중국 →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lt;br /&gt;
***#중국 → 임오군란&lt;br /&gt;
***#중국 → 톈진 조약&lt;br /&gt;
***#중국 → 중국의 독립운동 지원&lt;br /&gt;
***#중국 →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lt;br /&gt;
***#중국 → 카이로 회담&lt;br /&gt;
***#중국 → 한국 전쟁&lt;br /&gt;
***#중국 → 코로나19&lt;br /&gt;
***#중국 → 냉전 종식&lt;br /&gt;
***#러시아 → 한국 전쟁&lt;br /&gt;
***#러시아 → 아관파천&lt;br /&gt;
***#러시아 → 러시아의 독립운동 지원&lt;br /&gt;
***#러시아 → 냉전 종식&lt;br /&gt;
***#미국 → 가쓰라-태프트 밀약&lt;br /&gt;
***#미국 → 민족자결주의 선언&lt;br /&gt;
***#미국 → 카이로 회담&lt;br /&gt;
***#미국 → 한국 전쟁&lt;br /&gt;
***#미국 → 냉전 종식&lt;br /&gt;
***#미국 → 미군정&lt;br /&gt;
***#미국 → 베트남 전쟁&lt;br /&gt;
***#미국 → 북미정상회담 결렬&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green&amp;quot;&amp;gt;'''isRelatedTo'''&amp;lt;/span&amp;gt;&lt;br /&gt;
***설명: 나라와 특정 시기를 연결한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일본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일본 → 일제강점기&lt;br /&gt;
***#일본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일본 → 6공화국 이후&lt;br /&gt;
***#중국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중국 → 일제강점기&lt;br /&gt;
***#중국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중국 → 6공화국 이후&lt;br /&gt;
***#러시아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러시아 → 일제강점기&lt;br /&gt;
***#러시아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러시아 → 6공화국 이후&lt;br /&gt;
***#미국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미국 → 일제강점기&lt;br /&gt;
***#미국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미국 → 6공화국 이후&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green&amp;quot;&amp;gt;'''happenedAt'''&amp;lt;/span&amp;gt;&lt;br /&gt;
***설명: 해당 사건과 특정 시기를 연결한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운요호 사건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강화도 조약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갑신정변_1884년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가쓰라-태프트 밀약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아관파천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임오군란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톈진조약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을사조약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중국의 독립운동 지원 → 일제강점기&lt;br /&gt;
***#민족자결주의 선언 → 일제강점기&lt;br /&gt;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 일제강점기&lt;br /&gt;
***#러시아의 독립운동 지원 → 일제강점기&lt;br /&gt;
***#카이로 회담 → 일제강점기&lt;br /&gt;
***#한일기본조약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미군정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베트남 전쟁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한국 전쟁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현대 한국과 일본의 역사 문제 → 6공화국 이후&lt;br /&gt;
***#코로나19 → 6공화국 이후&lt;br /&gt;
***#냉전 종식 → 6공화국 이후&lt;br /&gt;
***#북미정상회담 결렬 → 6공화국 이후&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마인드맵==&lt;br /&gt;
 주제 마인드맵&lt;br /&gt;
사진 첨부   ※ 수업에 했던 포스트잇 사진 가능&lt;br /&gt;
&lt;br /&gt;
 노드 마인드맵&lt;br /&gt;
사진 첨부&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기여==&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white;&amp;quot;&lt;br /&gt;
|+ 6분반 정치교류조&lt;br /&gt;
|+ style=&amp;quot;caption-side:bottom; 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팀원 || 기여내용&lt;br /&gt;
|-&lt;br /&gt;
| [[낭만가]] || 주제 선정, 전체적인 내용 설정, 미국 문서 작성, 관계 설정 및 작성, 동기 및 결론 작성, 발표&lt;br /&gt;
|-&lt;br /&gt;
| [[텀블러]] || 전체적인 내용 구상 기여, 전체적인 위키 문서 틀 작성, 온톨로지 작성, 일본 관련 문서 작성, 역할분담 작성, 발표용 ppt 제작&lt;br /&gt;
|-&lt;br /&gt;
| [[소금토마토]] || 추가예정&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시간의 흐름으로 보는 정치교류사'''==&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NfjKF8MdQEGWKD4zQXAOvIxaqYsUcQGp7kQ_QSU4sq4&amp;amp;font=Default&amp;amp;lang=ko&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도출한 결론==&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국내 정세 안정화 선행 필요성'''===&lt;br /&gt;
----&lt;br /&gt;
개항기, 일제강점기, 해방 후 안정되기 전까지는 타국이 우리나라 정치 상황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안정기에 들어서고 나서는 타국의 정치적 영향도, 타국이 영향을 준 경우도 줄었다. 그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해보았는데, 타국이 영향을 줘서 흔들릴 만큼의 정치적인 불안정성이 없어졌고 따라서 타국에 기댈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할 수 있었다. 따라서 타국의 안 좋은 영향력을 최소화하고 자주권을 확립하여 국가와 국민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우선, 국내 정치 상황이 안정되어야 하며, 그것은 필수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영원한 우방국은 없다'''===&lt;br /&gt;
----&lt;br /&gt;
그다음으로 내린 결론은 영원한 우방국은 없다, 즉, 국제 사회는 철저한 계산에 따라 냉혹하면서도 현실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저희가 다룬 네 국가와 우리나라의 관계는 때론 우호적이기도 때론 적대적이기도 했는데, 그 관계의 이면에는 늘 치밀한 각국의 손익 계산이 반영되어 있었다. 즉, 타국은 우리나라가 본국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 싶으면 우호적인 제스쳐를 취하며 이용했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버리고 혹은 이해관계에 따라 적대적으로 설정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가 국권을 피탈 당할 때도 이러한 국제사회의 이해관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미국, 러시아 등의 국가를 너무 믿었다가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따라서, 국제사회에서 국가는 오직 국익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에 따른 적절한 외교전략을 수립해나가야 한다.&lt;br /&gt;
&lt;br /&gt;
결론적으로, 우리가 피해를 입은 경우도 있었는데 이런 피해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정치적 혼란을 막으면서 우리 문제에는 우리가 주도권을 뺏기지 않는 상황을 만들고 동시에 실리적인 외교 방안을 모색하여 평화와 국익을 위한 외교를 해야 할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아쉬운 점과 개선점'''===&lt;br /&gt;
----&lt;br /&gt;
주제 자체를 양이 너무 많고 내용도 어려운 주제로 정한 데다 잘하고 싶은 의욕으로 많은 문서를 만들고자 한 탓에 자료 조사와 내용 작성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이런 이유로 위키만의 장점을 드러낼 수 있는, 위키로만 할 수 있는 여러 툴이나 장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웠다. 그래서 다음에 또 위키 관련 활동을 한다면, 시간과 수준에 알맞은 적절한 주제, 적절한 개수의 노드를 미리 설정해서 자료 조사와 내용 작성에만 할애했던 시간을 위키만의 장점을 드러낼 수 있는 여러 툴을 활용하는 데에 사용하도록 개선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lt;/div&gt;</summary>
		<author><name>소금토마토</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0%9C%ED%95%AD%EB%B6%80%ED%84%B0_%ED%98%84%EC%9E%AC%EA%B9%8C%EC%A7%80%EC%9D%98_%EC%A0%95%EC%B9%98_%EA%B5%90%EB%A5%98&amp;diff=42810</id>
		<title>개항부터 현재까지의 정치 교류</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0%9C%ED%95%AD%EB%B6%80%ED%84%B0_%ED%98%84%EC%9E%AC%EA%B9%8C%EC%A7%80%EC%9D%98_%EC%A0%95%EC%B9%98_%EA%B5%90%EB%A5%98&amp;diff=42810"/>
		<updated>2024-06-22T14:11:5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소금토마토: /* 중국 */&lt;/p&gt;
&lt;hr /&gt;
&lt;div&gt;==&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콘텐츠 주제==&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amp;lt;font size='5'&amp;gt;'''개항부터 현재까지 한국과 타국의 정치 교류'''&amp;lt;/font&amp;gt;&amp;lt;/div&amp;gt;&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기획의도==&lt;br /&gt;
===기획배경===&lt;br /&gt;
&amp;lt;br/&amp;gt;&lt;br /&gt;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조원과 다른 나라와의 경제 교류에 관심이 많았던 조원 두 명이 합쳐져 조를 형성하였다. '교류’와 ‘정치’라는 주제를 어떻게 연결하여 절충안을 찾을지 고민하다가 우리나라의 정치가 역사적으로 타국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아왔다는 사실이 떠올라 위 주제를 선정하게 되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기획 목적===&lt;br /&gt;
&amp;lt;br/&amp;gt;&lt;br /&gt;
 정치 교류사를 되돌아보며 타국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나라 정치의 변화 흐름을 바라보고자 했다. 이를 통해 타국이 우리나라 정치 상황에 미친 영향을 통시적으로 알아보고 주요 사건의 결과도 보고자 했다. 특히, 우리나라가 손해를 보거나 불이익을 당한 경우라면 문제점을 파악하고 이것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마련해 보고자 이러한 주제를 선정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기대하는 바===&lt;br /&gt;
&amp;lt;br/&amp;gt;&lt;br /&gt;
 타국이 우리나라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파악하고 일련의 탐구로부터 결론을 도출하기를 기대한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나라가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기대하는 바이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국가별 통시적 설명==&lt;br /&gt;
&amp;lt;br/&amp;gt;&lt;br /&gt;
===일본===&lt;br /&gt;
----&lt;br /&gt;
일본은 한국과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워 역사 속에서 많은 영향을 주고 받았다. 현재까지도 많은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또 많은 갈등이 존재하기도 한다. 특히 역사 관련 갈등이 많이 발생한다는 점이 한일관계에서 주목할 만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현대 한일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으로 한국과 일본 사이에 어떤 교류가 일어났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lt;br /&gt;
이 문서에서는 현재 한일관계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개항 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일본 사이의 주요 사건을 일본이 우리나라에 미친 정치적 영향을 중심으로 서술한다. 이 문서와 같은 내용이 '일본' 문서에도 실려 있다. &lt;br /&gt;
&amp;lt;br/&amp;gt;&lt;br /&gt;
====개항부터 국권피탈 전까지, 일본 침략의 전조====&lt;br /&gt;
----&lt;br /&gt;
[[운요호 사건]]을 시작으로 한국은 개항을 하게 된다. 일본은 쿠로후네 사건을 통해 개항하게 되었고 조선이 쇄국정책을 시행하는 사이 메이지 유신을 통해 급격하게 발전한다. 일본은 제국주의적 팽창으로 조선을 위협하기 시작하는데,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일본은 조선에 개항을 요구한다. 조선은 운요호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으며 무력시위를 하는 일본을 무시할 수 없었고 강압적인 수교 통상 요구를 받아들인다. 이 결과로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여 개항을 하게 된다. 하지만 강화도 조약은 조선에게 불평등한 면이 많았다. 또,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기 쉽게 하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다.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은 개항을 하면서 세계에 진출하게 되었으나 이는 불평등했고, 이어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의 다른 서구 열강들과 근대적인 불평등한 개항 수교 통상조약을 맺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amp;lt;/br&amp;gt;&lt;br /&gt;
이후 일본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 하는데, [[갑신정변_1884년]]을 통해 청이 조선에 대해 우위를 점하게 된다. 하지만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러일전쟁에서도 승리하면서 조선에 대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했으며, 이는 국권피탈로 이어졌다. &lt;br /&gt;
&lt;br /&gt;
====일제강점기, 암흑의 시대====&lt;br /&gt;
----&lt;br /&gt;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게 된다. 1910년부터 해방된 1945년까지를 일제강점기라고 부른다. &amp;lt;/br&amp;gt;&lt;br /&gt;
1910년대: 무단통치시기이다. 정치 단체를 만들거나 의견을 내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민족 신문이 폐간되었다. 헌병이 직접 벌을 내리는 즉결심판권이 있었으며 학교에서 교사는 군복에 칼을 찼다. 일본어가 '국어'로 교육되었으며 중등학교에서는 실업 교육을, 고등 교육 기관은 없앴다. 또, 토지 조사 사업이 시작되어 우리나라의 토지를 뺴앗아갔다. 전체 토지의 40%가 일본에 넘어갔으며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통해 일본인에게 팔렸다. &amp;lt;/br&amp;gt;&lt;br /&gt;
1920년대: 문화통치시기이다. 3.1운동이 일어나고 무단통치의 한계를 느낀 일본은 문화통치로 전환한다. 표면적으로는 유화정책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탄압, 감시, 문화 말살, 수탈을 위한 정책이었다. 헌병경찰제도가 보통경찰제도로 변경되었으나 실질적으로 경찰 인력과 시설은 늘어났다. 민족신문의 발행을 허용하였으나 검열은 계속되었다. 교육 기회 확대를 주장했지만 일본과 관련된 내용을 가르치는데 불과했으며 조선인의 취학률은 낮았고, 고등교육은 여전히 실시되지 않았다. 태형령이 없어졌지만 치안 유지법을 제정해 강력하게 탄압했다.&amp;lt;/br&amp;gt; &lt;br /&gt;
1930년대:민족말살통치시기이다. 민족말살통치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 협력을 얻기 위해 취한 정책이다. 내선일체, 황민화 정책, 창씨개명, 일선동조론이 민족말살통치의 일부이다. 민족말살통치는 일본이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고 한국인의 정체성을 없애려고  한 통치이며, 이 시기 많은 강제동원과 수탈이 이루어졌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1945년 일본이 세계 2차대전에서 패하게 되고,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한다. &lt;br /&gt;
&lt;br /&gt;
====해방 후부터 5공화국까지, 일본의 영향 축소====&lt;br /&gt;
----&lt;br /&gt;
해방 후부터 일본과 한국은 교류하지 않았다. 한국전쟁을 겪고 난 후 한국은 일본보다는 다른 나라와 더 많은 교류를 했고 영향을 주고받았다. 그러다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하며 국교를 정상화하고 교류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lt;br /&gt;
&lt;br /&gt;
====6공화국 이후, 한국과 일본의 현 좌표====&lt;br /&gt;
----&lt;br /&gt;
한국과 일본은 많은 교류를 주고받고 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식민지배를 겪었고, 식민 지배 당시 많은 문제가 발생했기에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역사적인 갈등의 골이 깊다. [[현대 한국과 일본의 역사 문제]] 문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강제동원 문제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대표적이다. 인정과 배상, 개인의 청구권 문제로 갈등이 있다. 또,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도 존재한다. 일본이 전범국으로서 책임을 지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하는데, 일본이 저지를 일을 축소하여 교과서를 편찬하면서 문제가 생기고 있다. 또, 독도 문제에 관한 일본 교과서 서술도 문제이다. 마지막으로 독도 문제가 있다. 한국의 땅임이 명백한 독도에 대해 일본이 자기 땅이라고 주장하면서 갈등이 있다.&lt;br /&gt;
&lt;br /&gt;
[[분류:텀블러]]&lt;br /&gt;
&lt;br /&gt;
===미국===&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미국은 현재 한국의 최우방국이다. 북한이라는 명확한 대립 국가가 있는 지금, 미국은 우리 안보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며, 경제에 있어서도 우리나라는 미국에 많은 의존을 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과 이렇게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시작한 것은, 해방 이후로, 고작 80년도 되지 않았다. 80년은 물론 긴 시간이지만, 우리나라의 전체 역사 속에서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 문서에서는 한국과 미국이 처음 조우한 이래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미국 사이의 주요 사건을  미국이 우리나라에 미친 정치적 영향을 중심으로 서술한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한국과 미국의 첫 조우와 무시'''====&lt;br /&gt;
----&lt;br /&gt;
&lt;br /&gt;
미국의 한국에 대한 첫 관심은 1834년 로비츠 아시아 특파원의 보고이다. 이때 로비츠는 &amp;quot;동부 아시아 대륙에 조선이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반도 국가가 있는데 청나라와 일본이라는 대륙 국가와 섬나라 사이에 위치해 있고 본국 정부가 조선과 경제 교역을 가지게 되었으면 싶다&amp;quot;라고 밝히고 있다. 이후 대원군의 통상수교거부정책이 시행되던 중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48057&amp;amp;cid=46623&amp;amp;categoryId=46623 제네럴 셔먼호 사건]이 발생하였고 조선의 개항을 요구하는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2961 신미양요]가 발생한다. 미국의 승리에도 조선은 개항하지 않았고 조선은 [[운요호 사건]]으로 인한 강화도 조약 때야 개항하게 된다. 개항 이후,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기점으로 조선과 미국은 본격적인 교류를 실시한다. &lt;br /&gt;
그러나 일본제국과 미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성사되고 조선과 미국은 단교한다. 이후 미국은 조선을 철저히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며,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 과정을 묵인하거나 일본을 두둔하게 되고 조선은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2961 1910년 나라를 빼앗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강점기에서 희망을 주다'''====&lt;br /&gt;
----&lt;br /&gt;
&lt;br /&gt;
그런 와중,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이 발표되고 식민지 조선은 이 선언에 희망을 가지고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6772 3.1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고 비록 독립을 쟁취하지는 못하였으나,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진다.&lt;br /&gt;
이후, 제2차세계대전에서 일본과 미국은 적으로 만나게 되고 전후 일본의 상황을 논의하는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다. 그러나 얄타 회담에서 한국의 신탁통치를 논의한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해방 직후 밀접한 관계가 되다'''====&lt;br /&gt;
----&lt;br /&gt;
&lt;br /&gt;
일본의 항복 후, 한반도 남쪽에는 [[미군정]]이 북쪽에는 소련이 들어온다. 미군정 시절, 여러 정치적 변혁을 겪으며 좌익과 우익 계열은 완전히 분열되었고 결국 이승만의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20143&amp;amp;cid=62048&amp;amp;categoryId=62048 정읍 발언]을 기점으로 남북은 3.8도선을 기준으로 분단된다. 이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2143 한국전쟁]이 발생하고 미국은 UN연합군과 함께 남한을 위해 참전, 통일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적화통일을 막았다. 이를 계기로 한국과 미국은 안보적으로 가까운 사이가 되었으며, 전후 복구 과정에서 미국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은 한국은 미국과 경제적으로도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해방 후 혼란기 한국에 많은 영향을 미치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승만이 4.19 혁명으로 하야하는 과정에 미국이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는 등 지속적으로 정치적, 경제적 영향을 미치던 미국은 케네디 시대를 맞이한다. 민주주의 가치를 중시했던 케네디는 박정희 정권을 마음에 들지 않아 했고 베트남전 파병에 대해 미온적 태도를 보였으나, 미국 정권이 바뀐 후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한국은 [[베트남 전쟁]] 파병을 결정한다. 베트남 파병으로 많은 국내 정치적, 경제적 변화를 겪은 한국은 경제 성장을 공고히 하는 한편, 박정희 독재 체제도 강화되었다. 박정희의 독재 강화 과정에서 한국과 미국의 관계가 악화되기도 했다. 이후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20431&amp;amp;cid=62048&amp;amp;categoryId=62048 10.26 사건]이 일어나고 여러 사건을 지나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8343 6월 항쟁]이 일어났을 때, 미국은 전두환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고 노태우의 6.29 선언 발표에 기여한다.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민주화 이후에도 계속되는 영향'''====&lt;br /&gt;
----&lt;br /&gt;
&lt;br /&gt;
이후 지속적으로 좋은 관계를 맺다 노무현 정부 시절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73146&amp;amp;cid=43667&amp;amp;categoryId=43667 한미 FTA]를 체결하였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북한과의 해빙 무드 속에서 북미 정상회담을 개최하기도 했으나, 결국 주목할 만한 성과 없이 [[북미정상회담 결렬]]을 맞이한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이후, 정부가 한미일 공조에 공을 들이며, 더욱 긴밀해진 모습이나, 북한과의 관계는 매우 악화된 상황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한국과 미국은 밀접한 동맹국이니만큼 한미관계는 다른 여느 외교 관계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뽑히며, 한미관계의 조율 여부가 그 정부의 외교적 성패를 가르기도 한다. 그러나 미국이 이권에 따라 때로는 우리를 무시하고 저버린 적도 있기 때문에 결국 미국 또한, 자국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국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미관계를 원활하게 유지함으로써 안보와 경제적 이익을 취하는 동시에 너무 미국에게만 종속되지 않도록 자주적 힘을 길러나가는 것이 바람직한 한미관계의 길일 것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분류:개항부터_현재까지의_정치_교류]] [[분류:낭만가]] &lt;br /&gt;
&lt;br /&gt;
===러시아===&lt;br /&gt;
&amp;lt;br/&amp;gt;&lt;br /&gt;
===중국===&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미국은 현재 한국의 최우방국이다. 북한이라는 명확한 대립 국가가 있는 지금, 미국은 우리 안보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며, 경제에 있어서도 우리나라는 미국에 많은 의존을 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과 이렇게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시작한 것은, 해방 이후로, 고작 80년도 되지 않았다. 80년은 물론 긴 시간이지만, 우리나라의 전체 역사 속에서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 문서에서는 한국과 미국이 처음 조우한 이래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미국 사이의 주요 사건을  미국이 우리나라에 미친 정치적 영향을 중심으로 서술한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조선 후기 청나라와의 관계'''====&lt;br /&gt;
----&lt;br /&gt;
&lt;br /&gt;
병자호란을 기점으로 청나라와 사대 관계를 맺은 조선은 이후로도 청과의 사대관계를 유지했다. 당시 한국이 일본에 의한 침탈의 과정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전근대 시기처럼 청과 밀접한 관계를 맺지는 않았다. 그러나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은 일본과 함께 조선의 정치에 다시 관여하기 시작했다. 이후 [[갑신정변_1884년]]을 계기로 잠시나마 청이 일본보다 조선에 대한 우위를 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가 1895년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46721&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1658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패하면서 자연스럽게 일본에게 조선에 대한 우위를 넘겨주게 된다. 이후 1910년 대한제국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일제 공동의 적을 둔 두 국가의 우호 관계'''====&lt;br /&gt;
----&lt;br /&gt;
&lt;br /&gt;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둘 모두 일본 제국주의라는 공동의 적을 둔 입장이 되면서 다시금 밀접한 관계가 형성된다. 많은 한국의 독립 단체와 독립 투사들이 만주와 상해 등 중국을 기반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한국 독립단체들의 자금 및 세력이 미약하여 자력으로는 독립 운동을 진행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었으나, [[중국의 독립운동 지원]]을 바탕으로 해방 이전까지 꾸준하게 독립 운동을 진행할 수 있었다. 한국 역시 중국의 항일 세력에 직접적으로 군대를 지원하는 등 상호 간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때까지는 양국 모두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이 공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진영별로 또는 다같이 합세하여 협력하는 양상을 보인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해방 직후 적대관계로 돌아서다'''====&lt;br /&gt;
----&lt;br /&gt;
&lt;br /&gt;
해방 이후 한반도 남쪽에는 [[미군정]]이, 북쪽에는 소련이 들어온다. 신탁 통치 기간이 지나고 여러 정치적 변혁을 겪으며 좌익과 우익 계열은 완전히 분리되었고 남한과 북한 정부가 각각 수립되며 완전한 분단이 이루어진다. 이때 중국에서는 마오쩌둥을 필두로 하는 공산당이 정권을 장악하며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다. 당연하게도 공산권이 중국에서는 같은 공산권인 북한의 정부 수립을 승인하게 되면서 남한과는 강력한 적대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진 [[한국전쟁]]에서 중국이 북한을 지원하고, UN군의 진격에 밀려 올라가는 북한에 중공군을 직접 투입해 줌으로써 남한의 북진을 저지하였다. 이때를 기점으로 중국과는 철저한 적대관계를 이루게 되고, 대한민국 정부의 강력한 반공주의에 따라 중국과는 거의 수교가 단절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냉전 종식과 함께 다시 수교를 시작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중국이 참가하게 되면서 양국의 관계가 강력한 적대 관계에서 점차 완화되었다. 이후 1989년부터 시작된 [[냉전 종식]]의 영향과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이 합쳐져 시너지를 발휘에 1992년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은 오랜 적대 관계를 깨고 다시 수교를 시작한다. 물론 수교를 하였다고 해도 완전히 사이가 좋다고 보기는 어려운데, 중국이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긴 하였으나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공산당 일당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공주의 시대의 적대 관계보다 현재의 관계가 훨씬 우호적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크고 작은 갈등이 지속되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이후 지속적으로 좋은 관계를 맺다 노무현 정부 시절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73146&amp;amp;cid=43667&amp;amp;categoryId=43667 한미 FTA]를 체결하였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북한과의 해빙 무드 속에서 북미 정상회담을 개최하기도 했으나, 결국 주목할 만한 성과 없이 [[북미정상회담 결렬]]을 맞이한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이후, 정부가 한미일 공조에 공을 들이며, 더욱 긴밀해진 모습이나, 북한과의 관계는 매우 악화된 상황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한국과 미국은 밀접한 동맹국이니만큼 한미관계는 다른 여느 외교 관계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뽑히며, 한미관계의 조율 여부가 그 정부의 외교적 성패를 가르기도 한다. 그러나 미국이 이권에 따라 때로는 우리를 무시하고 저버린 적도 있기 때문에 결국 미국 또한, 자국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국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미관계를 원활하게 유지함으로써 안보와 경제적 이익을 취하는 동시에 너무 미국에게만 종속되지 않도록 자주적 힘을 길러나가는 것이 바람직한 한미관계의 길일 것이다.&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온톨로지==&lt;br /&gt;
{{NetworkGraph | title=정치교류.ls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NetworkGraph | title=정치교류.lst}}&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콘텐츠 구조==&lt;br /&gt;
&lt;br /&gt;
===클래스(Class)===&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color:white&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amp;quot; | 클래스 !! style=&amp;quot;width:30%&amp;quot; | 설명 !! style=&amp;quot;45%&amp;quot; | 노드&lt;br /&gt;
|-&lt;br /&gt;
|나라 ||우리나라의 정치사에 영향을 가장 많이 미친 나라들이다. 각 문서에 각 나라가 한국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통시적으로 서술하였다. || [[일본]] [[중국]] [[러시아]] [[미국]]&lt;br /&gt;
&lt;br /&gt;
|-&lt;br /&gt;
|사건 || 주요 사건들을 노드로 만들었다. 각 사건에 대해 자세히 서술했고, 각 사건이 미친 영향을 서술했다.|| [[운요호 사건]] [[강화도 조약]] [[갑신정변_1884년]] [[을사조약]] [[한일기본조약]]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현대 한국과 일본의 역사 문제]] [[임오군란]] [[중국의 독립운동 지원]] [[한국전쟁]] [[코로나19]] [[아관파천]] [[러시아의 독립운동 지원]] [[냉전 종식]] [[가쓰라-태프트 밀약]] [[민족자결주의 선언]] [[미군정]] [[베트남 전쟁]] [[북미정상회담 결렬]] &lt;br /&gt;
|-&lt;br /&gt;
|시기|| 시기를 크게 4가지로 나누어 노드를 만들었다.  || [[개항부터 국권피탈]]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 [[6공화국 이후]]&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green&amp;quot;&amp;gt;'''leads'''&amp;lt;/span&amp;gt;&lt;br /&gt;
***설명: 나라와 해당 나라가 관련된 사건을 연결한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일본 → 운요호사건&lt;br /&gt;
***#일본 → 강화도 조약&lt;br /&gt;
***#일본 → 갑신정변_1885년&lt;br /&gt;
***#일본 → 을사조약&lt;br /&gt;
***#일본 → 한일기본조약&lt;br /&gt;
***#일본 →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lt;br /&gt;
***#일본 → 현대 한국과 일본의 역사 문제&lt;br /&gt;
***#일본 → 임오군란&lt;br /&gt;
***#일본 → 톈진 조약&lt;br /&gt;
***#일본 → 가쓰라-태프트 밀약&lt;br /&gt;
***#중국 → 갑신정변&lt;br /&gt;
***#중국 →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lt;br /&gt;
***#중국 → 임오군란&lt;br /&gt;
***#중국 → 톈진 조약&lt;br /&gt;
***#중국 → 중국의 독립운동 지원&lt;br /&gt;
***#중국 →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lt;br /&gt;
***#중국 → 카이로 회담&lt;br /&gt;
***#중국 → 한국 전쟁&lt;br /&gt;
***#중국 → 코로나19&lt;br /&gt;
***#중국 → 냉전 종식&lt;br /&gt;
***#러시아 → 한국 전쟁&lt;br /&gt;
***#러시아 → 아관파천&lt;br /&gt;
***#러시아 → 러시아의 독립운동 지원&lt;br /&gt;
***#러시아 → 냉전 종식&lt;br /&gt;
***#미국 → 가쓰라-태프트 밀약&lt;br /&gt;
***#미국 → 민족자결주의 선언&lt;br /&gt;
***#미국 → 카이로 회담&lt;br /&gt;
***#미국 → 한국 전쟁&lt;br /&gt;
***#미국 → 냉전 종식&lt;br /&gt;
***#미국 → 미군정&lt;br /&gt;
***#미국 → 베트남 전쟁&lt;br /&gt;
***#미국 → 북미정상회담 결렬&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green&amp;quot;&amp;gt;'''isRelatedTo'''&amp;lt;/span&amp;gt;&lt;br /&gt;
***설명: 나라와 특정 시기를 연결한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일본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일본 → 일제강점기&lt;br /&gt;
***#일본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일본 → 6공화국 이후&lt;br /&gt;
***#중국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중국 → 일제강점기&lt;br /&gt;
***#중국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중국 → 6공화국 이후&lt;br /&gt;
***#러시아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러시아 → 일제강점기&lt;br /&gt;
***#러시아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러시아 → 6공화국 이후&lt;br /&gt;
***#미국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미국 → 일제강점기&lt;br /&gt;
***#미국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미국 → 6공화국 이후&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green&amp;quot;&amp;gt;'''happenedAt'''&amp;lt;/span&amp;gt;&lt;br /&gt;
***설명: 해당 사건과 특정 시기를 연결한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운요호 사건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강화도 조약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갑신정변_1884년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가쓰라-태프트 밀약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아관파천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임오군란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톈진조약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을사조약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중국의 독립운동 지원 → 일제강점기&lt;br /&gt;
***#민족자결주의 선언 → 일제강점기&lt;br /&gt;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 일제강점기&lt;br /&gt;
***#러시아의 독립운동 지원 → 일제강점기&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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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기본조약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미군정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베트남 전쟁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한국 전쟁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현대 한국과 일본의 역사 문제 → 6공화국 이후&lt;br /&gt;
***#코로나19 → 6공화국 이후&lt;br /&gt;
***#냉전 종식 → 6공화국 이후&lt;br /&gt;
***#북미정상회담 결렬 → 6공화국 이후&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마인드맵==&lt;br /&gt;
 주제 마인드맵&lt;br /&gt;
사진 첨부   ※ 수업에 했던 포스트잇 사진 가능&lt;br /&gt;
&lt;br /&gt;
 노드 마인드맵&lt;br /&gt;
사진 첨부&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기여==&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white;&amp;quot;&lt;br /&gt;
|+ 6분반 정치교류조&lt;br /&gt;
|+ style=&amp;quot;caption-side:bottom; text-align:center;&amp;quot;|&lt;br /&gt;
!팀원 || 기여내용&lt;br /&gt;
|-&lt;br /&gt;
| [[낭만가]] || 주제 선정, 전체적인 내용 설정, 미국 문서 작성, 관계 설정 및 작성, 동기 및 결론 작성, 발표&lt;br /&gt;
|-&lt;br /&gt;
| [[텀블러]] || 전체적인 내용 구상 기여, 전체적인 위키 문서 틀 작성, 온톨로지 작성, 일본 관련 문서 작성, 역할분담 작성, 발표용 ppt 제작&lt;br /&gt;
|-&lt;br /&gt;
| [[소금토마토]] || 추가예정&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시간의 흐름으로 보는 정치교류사'''==&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NfjKF8MdQEGWKD4zQXAOvIxaqYsUcQGp7kQ_QSU4sq4&amp;amp;font=Default&amp;amp;lang=ko&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도출한 결론==&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국내 정세 안정화 선행 필요성'''===&lt;br /&gt;
----&lt;br /&gt;
개항기, 일제강점기, 해방 후 안정되기 전까지는 타국이 우리나라 정치 상황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안정기에 들어서고 나서는 타국의 정치적 영향도, 타국이 영향을 준 경우도 줄었다. 그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해보았는데, 타국이 영향을 줘서 흔들릴 만큼의 정치적인 불안정성이 없어졌고 따라서 타국에 기댈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할 수 있었다. 따라서 타국의 안 좋은 영향력을 최소화하고 자주권을 확립하여 국가와 국민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우선, 국내 정치 상황이 안정되어야 하며, 그것은 필수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영원한 우방국은 없다'''===&lt;br /&gt;
----&lt;br /&gt;
그다음으로 내린 결론은 영원한 우방국은 없다, 즉, 국제 사회는 철저한 계산에 따라 냉혹하면서도 현실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저희가 다룬 네 국가와 우리나라의 관계는 때론 우호적이기도 때론 적대적이기도 했는데, 그 관계의 이면에는 늘 치밀한 각국의 손익 계산이 반영되어 있었다. 즉, 타국은 우리나라가 본국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 싶으면 우호적인 제스쳐를 취하며 이용했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버리고 혹은 이해관계에 따라 적대적으로 설정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가 국권을 피탈 당할 때도 이러한 국제사회의 이해관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미국, 러시아 등의 국가를 너무 믿었다가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따라서, 국제사회에서 국가는 오직 국익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에 따른 적절한 외교전략을 수립해나가야 한다.&lt;br /&gt;
&lt;br /&gt;
결론적으로, 우리가 피해를 입은 경우도 있었는데 이런 피해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정치적 혼란을 막으면서 우리 문제에는 우리가 주도권을 뺏기지 않는 상황을 만들고 동시에 실리적인 외교 방안을 모색하여 평화와 국익을 위한 외교를 해야 할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아쉬운 점과 개선점'''===&lt;br /&gt;
----&lt;br /&gt;
주제 자체를 양이 너무 많고 내용도 어려운 주제로 정한 데다 잘하고 싶은 의욕으로 많은 문서를 만들고자 한 탓에 자료 조사와 내용 작성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이런 이유로 위키만의 장점을 드러낼 수 있는, 위키로만 할 수 있는 여러 툴이나 장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웠다. 그래서 다음에 또 위키 관련 활동을 한다면, 시간과 수준에 알맞은 적절한 주제, 적절한 개수의 노드를 미리 설정해서 자료 조사와 내용 작성에만 할애했던 시간을 위키만의 장점을 드러낼 수 있는 여러 툴을 활용하는 데에 사용하도록 개선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lt;/div&gt;</summary>
		<author><name>소금토마토</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0%9C%ED%95%AD%EB%B6%80%ED%84%B0_%ED%98%84%EC%9E%AC%EA%B9%8C%EC%A7%80%EC%9D%98_%EC%A0%95%EC%B9%98_%EA%B5%90%EB%A5%98&amp;diff=42809</id>
		<title>개항부터 현재까지의 정치 교류</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0%9C%ED%95%AD%EB%B6%80%ED%84%B0_%ED%98%84%EC%9E%AC%EA%B9%8C%EC%A7%80%EC%9D%98_%EC%A0%95%EC%B9%98_%EA%B5%90%EB%A5%98&amp;diff=42809"/>
		<updated>2024-06-22T14:11:1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소금토마토: /* 중국 */&lt;/p&gt;
&lt;hr /&gt;
&lt;div&gt;==&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콘텐츠 주제==&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amp;lt;font size='5'&amp;gt;'''개항부터 현재까지 한국과 타국의 정치 교류'''&amp;lt;/font&amp;gt;&amp;lt;/div&amp;gt;&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기획의도==&lt;br /&gt;
===기획배경===&lt;br /&gt;
&amp;lt;br/&amp;gt;&lt;br /&gt;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조원과 다른 나라와의 경제 교류에 관심이 많았던 조원 두 명이 합쳐져 조를 형성하였다. '교류’와 ‘정치’라는 주제를 어떻게 연결하여 절충안을 찾을지 고민하다가 우리나라의 정치가 역사적으로 타국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아왔다는 사실이 떠올라 위 주제를 선정하게 되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기획 목적===&lt;br /&gt;
&amp;lt;br/&amp;gt;&lt;br /&gt;
 정치 교류사를 되돌아보며 타국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나라 정치의 변화 흐름을 바라보고자 했다. 이를 통해 타국이 우리나라 정치 상황에 미친 영향을 통시적으로 알아보고 주요 사건의 결과도 보고자 했다. 특히, 우리나라가 손해를 보거나 불이익을 당한 경우라면 문제점을 파악하고 이것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마련해 보고자 이러한 주제를 선정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기대하는 바===&lt;br /&gt;
&amp;lt;br/&amp;gt;&lt;br /&gt;
 타국이 우리나라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파악하고 일련의 탐구로부터 결론을 도출하기를 기대한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나라가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기대하는 바이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국가별 통시적 설명==&lt;br /&gt;
&amp;lt;br/&amp;gt;&lt;br /&gt;
===일본===&lt;br /&gt;
----&lt;br /&gt;
일본은 한국과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워 역사 속에서 많은 영향을 주고 받았다. 현재까지도 많은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또 많은 갈등이 존재하기도 한다. 특히 역사 관련 갈등이 많이 발생한다는 점이 한일관계에서 주목할 만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현대 한일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으로 한국과 일본 사이에 어떤 교류가 일어났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lt;br /&gt;
이 문서에서는 현재 한일관계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개항 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일본 사이의 주요 사건을 일본이 우리나라에 미친 정치적 영향을 중심으로 서술한다. 이 문서와 같은 내용이 '일본' 문서에도 실려 있다. &lt;br /&gt;
&amp;lt;br/&amp;gt;&lt;br /&gt;
====개항부터 국권피탈 전까지, 일본 침략의 전조====&lt;br /&gt;
----&lt;br /&gt;
[[운요호 사건]]을 시작으로 한국은 개항을 하게 된다. 일본은 쿠로후네 사건을 통해 개항하게 되었고 조선이 쇄국정책을 시행하는 사이 메이지 유신을 통해 급격하게 발전한다. 일본은 제국주의적 팽창으로 조선을 위협하기 시작하는데,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일본은 조선에 개항을 요구한다. 조선은 운요호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으며 무력시위를 하는 일본을 무시할 수 없었고 강압적인 수교 통상 요구를 받아들인다. 이 결과로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여 개항을 하게 된다. 하지만 강화도 조약은 조선에게 불평등한 면이 많았다. 또,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기 쉽게 하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다.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은 개항을 하면서 세계에 진출하게 되었으나 이는 불평등했고, 이어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의 다른 서구 열강들과 근대적인 불평등한 개항 수교 통상조약을 맺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amp;lt;/br&amp;gt;&lt;br /&gt;
이후 일본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 하는데, [[갑신정변_1884년]]을 통해 청이 조선에 대해 우위를 점하게 된다. 하지만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러일전쟁에서도 승리하면서 조선에 대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했으며, 이는 국권피탈로 이어졌다. &lt;br /&gt;
&lt;br /&gt;
====일제강점기, 암흑의 시대====&lt;br /&gt;
----&lt;br /&gt;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게 된다. 1910년부터 해방된 1945년까지를 일제강점기라고 부른다. &amp;lt;/br&amp;gt;&lt;br /&gt;
1910년대: 무단통치시기이다. 정치 단체를 만들거나 의견을 내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민족 신문이 폐간되었다. 헌병이 직접 벌을 내리는 즉결심판권이 있었으며 학교에서 교사는 군복에 칼을 찼다. 일본어가 '국어'로 교육되었으며 중등학교에서는 실업 교육을, 고등 교육 기관은 없앴다. 또, 토지 조사 사업이 시작되어 우리나라의 토지를 뺴앗아갔다. 전체 토지의 40%가 일본에 넘어갔으며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통해 일본인에게 팔렸다. &amp;lt;/br&amp;gt;&lt;br /&gt;
1920년대: 문화통치시기이다. 3.1운동이 일어나고 무단통치의 한계를 느낀 일본은 문화통치로 전환한다. 표면적으로는 유화정책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탄압, 감시, 문화 말살, 수탈을 위한 정책이었다. 헌병경찰제도가 보통경찰제도로 변경되었으나 실질적으로 경찰 인력과 시설은 늘어났다. 민족신문의 발행을 허용하였으나 검열은 계속되었다. 교육 기회 확대를 주장했지만 일본과 관련된 내용을 가르치는데 불과했으며 조선인의 취학률은 낮았고, 고등교육은 여전히 실시되지 않았다. 태형령이 없어졌지만 치안 유지법을 제정해 강력하게 탄압했다.&amp;lt;/br&amp;gt; &lt;br /&gt;
1930년대:민족말살통치시기이다. 민족말살통치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 협력을 얻기 위해 취한 정책이다. 내선일체, 황민화 정책, 창씨개명, 일선동조론이 민족말살통치의 일부이다. 민족말살통치는 일본이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고 한국인의 정체성을 없애려고  한 통치이며, 이 시기 많은 강제동원과 수탈이 이루어졌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1945년 일본이 세계 2차대전에서 패하게 되고,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한다. &lt;br /&gt;
&lt;br /&gt;
====해방 후부터 5공화국까지, 일본의 영향 축소====&lt;br /&gt;
----&lt;br /&gt;
해방 후부터 일본과 한국은 교류하지 않았다. 한국전쟁을 겪고 난 후 한국은 일본보다는 다른 나라와 더 많은 교류를 했고 영향을 주고받았다. 그러다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하며 국교를 정상화하고 교류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lt;br /&gt;
&lt;br /&gt;
====6공화국 이후, 한국과 일본의 현 좌표====&lt;br /&gt;
----&lt;br /&gt;
한국과 일본은 많은 교류를 주고받고 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식민지배를 겪었고, 식민 지배 당시 많은 문제가 발생했기에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역사적인 갈등의 골이 깊다. [[현대 한국과 일본의 역사 문제]] 문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강제동원 문제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대표적이다. 인정과 배상, 개인의 청구권 문제로 갈등이 있다. 또,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도 존재한다. 일본이 전범국으로서 책임을 지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하는데, 일본이 저지를 일을 축소하여 교과서를 편찬하면서 문제가 생기고 있다. 또, 독도 문제에 관한 일본 교과서 서술도 문제이다. 마지막으로 독도 문제가 있다. 한국의 땅임이 명백한 독도에 대해 일본이 자기 땅이라고 주장하면서 갈등이 있다.&lt;br /&gt;
&lt;br /&gt;
[[분류:텀블러]]&lt;br /&gt;
&lt;br /&gt;
===미국===&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미국은 현재 한국의 최우방국이다. 북한이라는 명확한 대립 국가가 있는 지금, 미국은 우리 안보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며, 경제에 있어서도 우리나라는 미국에 많은 의존을 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과 이렇게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시작한 것은, 해방 이후로, 고작 80년도 되지 않았다. 80년은 물론 긴 시간이지만, 우리나라의 전체 역사 속에서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 문서에서는 한국과 미국이 처음 조우한 이래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미국 사이의 주요 사건을  미국이 우리나라에 미친 정치적 영향을 중심으로 서술한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한국과 미국의 첫 조우와 무시'''====&lt;br /&gt;
----&lt;br /&gt;
&lt;br /&gt;
미국의 한국에 대한 첫 관심은 1834년 로비츠 아시아 특파원의 보고이다. 이때 로비츠는 &amp;quot;동부 아시아 대륙에 조선이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반도 국가가 있는데 청나라와 일본이라는 대륙 국가와 섬나라 사이에 위치해 있고 본국 정부가 조선과 경제 교역을 가지게 되었으면 싶다&amp;quot;라고 밝히고 있다. 이후 대원군의 통상수교거부정책이 시행되던 중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48057&amp;amp;cid=46623&amp;amp;categoryId=46623 제네럴 셔먼호 사건]이 발생하였고 조선의 개항을 요구하는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2961 신미양요]가 발생한다. 미국의 승리에도 조선은 개항하지 않았고 조선은 [[운요호 사건]]으로 인한 강화도 조약 때야 개항하게 된다. 개항 이후,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기점으로 조선과 미국은 본격적인 교류를 실시한다. &lt;br /&gt;
그러나 일본제국과 미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성사되고 조선과 미국은 단교한다. 이후 미국은 조선을 철저히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며,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 과정을 묵인하거나 일본을 두둔하게 되고 조선은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2961 1910년 나라를 빼앗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강점기에서 희망을 주다'''====&lt;br /&gt;
----&lt;br /&gt;
&lt;br /&gt;
그런 와중,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이 발표되고 식민지 조선은 이 선언에 희망을 가지고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6772 3.1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고 비록 독립을 쟁취하지는 못하였으나,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진다.&lt;br /&gt;
이후, 제2차세계대전에서 일본과 미국은 적으로 만나게 되고 전후 일본의 상황을 논의하는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다. 그러나 얄타 회담에서 한국의 신탁통치를 논의한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해방 직후 밀접한 관계가 되다'''====&lt;br /&gt;
----&lt;br /&gt;
&lt;br /&gt;
일본의 항복 후, 한반도 남쪽에는 [[미군정]]이 북쪽에는 소련이 들어온다. 미군정 시절, 여러 정치적 변혁을 겪으며 좌익과 우익 계열은 완전히 분열되었고 결국 이승만의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20143&amp;amp;cid=62048&amp;amp;categoryId=62048 정읍 발언]을 기점으로 남북은 3.8도선을 기준으로 분단된다. 이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2143 한국전쟁]이 발생하고 미국은 UN연합군과 함께 남한을 위해 참전, 통일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적화통일을 막았다. 이를 계기로 한국과 미국은 안보적으로 가까운 사이가 되었으며, 전후 복구 과정에서 미국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은 한국은 미국과 경제적으로도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해방 후 혼란기 한국에 많은 영향을 미치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승만이 4.19 혁명으로 하야하는 과정에 미국이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는 등 지속적으로 정치적, 경제적 영향을 미치던 미국은 케네디 시대를 맞이한다. 민주주의 가치를 중시했던 케네디는 박정희 정권을 마음에 들지 않아 했고 베트남전 파병에 대해 미온적 태도를 보였으나, 미국 정권이 바뀐 후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한국은 [[베트남 전쟁]] 파병을 결정한다. 베트남 파병으로 많은 국내 정치적, 경제적 변화를 겪은 한국은 경제 성장을 공고히 하는 한편, 박정희 독재 체제도 강화되었다. 박정희의 독재 강화 과정에서 한국과 미국의 관계가 악화되기도 했다. 이후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20431&amp;amp;cid=62048&amp;amp;categoryId=62048 10.26 사건]이 일어나고 여러 사건을 지나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8343 6월 항쟁]이 일어났을 때, 미국은 전두환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고 노태우의 6.29 선언 발표에 기여한다.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민주화 이후에도 계속되는 영향'''====&lt;br /&gt;
----&lt;br /&gt;
&lt;br /&gt;
이후 지속적으로 좋은 관계를 맺다 노무현 정부 시절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73146&amp;amp;cid=43667&amp;amp;categoryId=43667 한미 FTA]를 체결하였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북한과의 해빙 무드 속에서 북미 정상회담을 개최하기도 했으나, 결국 주목할 만한 성과 없이 [[북미정상회담 결렬]]을 맞이한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이후, 정부가 한미일 공조에 공을 들이며, 더욱 긴밀해진 모습이나, 북한과의 관계는 매우 악화된 상황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한국과 미국은 밀접한 동맹국이니만큼 한미관계는 다른 여느 외교 관계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뽑히며, 한미관계의 조율 여부가 그 정부의 외교적 성패를 가르기도 한다. 그러나 미국이 이권에 따라 때로는 우리를 무시하고 저버린 적도 있기 때문에 결국 미국 또한, 자국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국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미관계를 원활하게 유지함으로써 안보와 경제적 이익을 취하는 동시에 너무 미국에게만 종속되지 않도록 자주적 힘을 길러나가는 것이 바람직한 한미관계의 길일 것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분류:개항부터_현재까지의_정치_교류]] [[분류:낭만가]] &lt;br /&gt;
&lt;br /&gt;
===러시아===&lt;br /&gt;
&amp;lt;br/&amp;gt;&lt;br /&gt;
===중국===&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미국은 현재 한국의 최우방국이다. 북한이라는 명확한 대립 국가가 있는 지금, 미국은 우리 안보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며, 경제에 있어서도 우리나라는 미국에 많은 의존을 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과 이렇게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시작한 것은, 해방 이후로, 고작 80년도 되지 않았다. 80년은 물론 긴 시간이지만, 우리나라의 전체 역사 속에서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 문서에서는 한국과 미국이 처음 조우한 이래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미국 사이의 주요 사건을  미국이 우리나라에 미친 정치적 영향을 중심으로 서술한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조선 후기 청나라와의 관계'''====&lt;br /&gt;
----&lt;br /&gt;
&lt;br /&gt;
병자호란을 기점으로 청나라와 사대 관계를 맺은 조선은 이후로도 청과의 사대관계를 유지했다. 당시 한국이 일본에 의한 침탈의 과정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전근대 시기처럼 청과 밀접한 관계를 맺지는 않았다. 그러나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은 일본과 함께 조선의 정치에 다시 관여하기 시작했다. 이후 [[갑신정변_1884년]]을 계기로 잠시나마 청이 일본보다 조선에 대한 우위를 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가 1895년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46721&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1658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패하면서 자연스럽게 일본에게 조선에 대한 우위를 넘겨주게 된다. 이후 1910년 대한제국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일제 공동의 적을 둔 두 국가의 우호 관계'''====&lt;br /&gt;
----&lt;br /&gt;
&lt;br /&gt;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둘 모두 일본 제국주의라는 공동의 적을 둔 입장이 되면서 다시금 밀접한 관계가 형성된다. 많은 한국의 독립 단체와 독립 투사들이 만주와 상해 등 중국을 기반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한국 독립단체들의 자금 및 세력이 미약하여 자력으로는 독립 운동을 진행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었으나, [[중국의 독립운동 지원]]을 바탕으로 해방 이전까지 꾸준하게 독립 운동을 진행할 수 있었다. 한국 역시 중국의 항일 세력에 직접적으로 군대를 지원하는 등 상호 간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때까지는 양국 모두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이 공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진영별로 또는 다같이 합세하여 협력하는 양상을 보인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해방 직후 적대관계로 돌아서다'''====&lt;br /&gt;
----&lt;br /&gt;
&lt;br /&gt;
해방 이후 한반도 남쪽에는 [[미군정]]이, 북쪽에는 소련이 들어온다. 신탁 통치 기간이 지나고 여러 정치적 변혁을 겪으며 좌익과 우익 계열은 완전히 분리되었고 남한과 북한 정부가 각각 수립되며 완전한 분단이 이루어진다. 이때 중국에서는 마오쩌둥을 필두로 하는 공산당이 정권을 장악하며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다. 당연하게도 공산권이 중국에서는 같은 공산권인 북한의 정부 수립을 승인하게 되면서 남한과는 강력한 적대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진 [[한국전쟁]]에서 중국이 북한을 지원하고, UN군의 진격에 밀려 올라가는 북한에 중공군을 직접 투입해 줌으로써 남한의 북진을 저지하였다. 이때를 기점으로 중국과는 철저한 적대관계를 이루게 되고, 대한민국 정부의 강력한 반공주의에 따라 중국과는 거의 수교가 단절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냉전 종식과 함께 다시 수교를 시작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중국이 참가하게 되면서 양국의 관계가 강력한 적대 관계에서 점차 완화되었다. 이후 1989년부터 시작된 [[냉전 종식]]의 영향과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이 합쳐져 시너지를 발휘에 1992년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은 오랜 적대 관계를 깨고 다시 수교를 시작한다. 물론 수교를 하였다고 해도 완전히 사이가 좋다고 보기는 어려운데, 중국이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긴 하였으나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공산당 일당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공주의 시대의 적대 관계보다 현재의 관계가 훨씬 우호적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계속되는 갈등, '''====&lt;br /&gt;
----&lt;br /&gt;
&lt;br /&gt;
이후 지속적으로 좋은 관계를 맺다 노무현 정부 시절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73146&amp;amp;cid=43667&amp;amp;categoryId=43667 한미 FTA]를 체결하였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북한과의 해빙 무드 속에서 북미 정상회담을 개최하기도 했으나, 결국 주목할 만한 성과 없이 [[북미정상회담 결렬]]을 맞이한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이후, 정부가 한미일 공조에 공을 들이며, 더욱 긴밀해진 모습이나, 북한과의 관계는 매우 악화된 상황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한국과 미국은 밀접한 동맹국이니만큼 한미관계는 다른 여느 외교 관계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뽑히며, 한미관계의 조율 여부가 그 정부의 외교적 성패를 가르기도 한다. 그러나 미국이 이권에 따라 때로는 우리를 무시하고 저버린 적도 있기 때문에 결국 미국 또한, 자국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국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미관계를 원활하게 유지함으로써 안보와 경제적 이익을 취하는 동시에 너무 미국에게만 종속되지 않도록 자주적 힘을 길러나가는 것이 바람직한 한미관계의 길일 것이다.&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온톨로지==&lt;br /&gt;
{{NetworkGraph | title=정치교류.lst}}&lt;br /&gt;
&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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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tworkGraph | title=정치교류.lst}}&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콘텐츠 구조==&lt;br /&gt;
&lt;br /&gt;
===클래스(Class)===&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color:white&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amp;quot; | 클래스 !! style=&amp;quot;width:30%&amp;quot; | 설명 !! style=&amp;quot;45%&amp;quot; | 노드&lt;br /&gt;
|-&lt;br /&gt;
|나라 ||우리나라의 정치사에 영향을 가장 많이 미친 나라들이다. 각 문서에 각 나라가 한국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통시적으로 서술하였다. || [[일본]] [[중국]] [[러시아]] [[미국]]&lt;br /&gt;
&lt;br /&gt;
|-&lt;br /&gt;
|사건 || 주요 사건들을 노드로 만들었다. 각 사건에 대해 자세히 서술했고, 각 사건이 미친 영향을 서술했다.|| [[운요호 사건]] [[강화도 조약]] [[갑신정변_1884년]] [[을사조약]] [[한일기본조약]]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현대 한국과 일본의 역사 문제]] [[임오군란]] [[중국의 독립운동 지원]] [[한국전쟁]] [[코로나19]] [[아관파천]] [[러시아의 독립운동 지원]] [[냉전 종식]] [[가쓰라-태프트 밀약]] [[민족자결주의 선언]] [[미군정]] [[베트남 전쟁]] [[북미정상회담 결렬]] &lt;br /&gt;
|-&lt;br /&gt;
|시기|| 시기를 크게 4가지로 나누어 노드를 만들었다.  || [[개항부터 국권피탈]]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 [[6공화국 이후]]&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green&amp;quot;&amp;gt;'''leads'''&amp;lt;/span&amp;gt;&lt;br /&gt;
***설명: 나라와 해당 나라가 관련된 사건을 연결한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일본 → 운요호사건&lt;br /&gt;
***#일본 → 강화도 조약&lt;br /&gt;
***#일본 → 갑신정변_1885년&lt;br /&gt;
***#일본 → 을사조약&lt;br /&gt;
***#일본 → 한일기본조약&lt;br /&gt;
***#일본 →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lt;br /&gt;
***#일본 → 현대 한국과 일본의 역사 문제&lt;br /&gt;
***#일본 → 임오군란&lt;br /&gt;
***#일본 → 톈진 조약&lt;br /&gt;
***#일본 → 가쓰라-태프트 밀약&lt;br /&gt;
***#중국 → 갑신정변&lt;br /&gt;
***#중국 →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lt;br /&gt;
***#중국 → 임오군란&lt;br /&gt;
***#중국 → 톈진 조약&lt;br /&gt;
***#중국 → 중국의 독립운동 지원&lt;br /&gt;
***#중국 →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lt;br /&gt;
***#중국 → 카이로 회담&lt;br /&gt;
***#중국 → 한국 전쟁&lt;br /&gt;
***#중국 → 코로나19&lt;br /&gt;
***#중국 → 냉전 종식&lt;br /&gt;
***#러시아 → 한국 전쟁&lt;br /&gt;
***#러시아 → 아관파천&lt;br /&gt;
***#러시아 → 러시아의 독립운동 지원&lt;br /&gt;
***#러시아 → 냉전 종식&lt;br /&gt;
***#미국 → 가쓰라-태프트 밀약&lt;br /&gt;
***#미국 → 민족자결주의 선언&lt;br /&gt;
***#미국 → 카이로 회담&lt;br /&gt;
***#미국 → 한국 전쟁&lt;br /&gt;
***#미국 → 냉전 종식&lt;br /&gt;
***#미국 → 미군정&lt;br /&gt;
***#미국 → 베트남 전쟁&lt;br /&gt;
***#미국 → 북미정상회담 결렬&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green&amp;quot;&amp;gt;'''isRelatedTo'''&amp;lt;/span&amp;gt;&lt;br /&gt;
***설명: 나라와 특정 시기를 연결한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일본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일본 → 일제강점기&lt;br /&gt;
***#일본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일본 → 6공화국 이후&lt;br /&gt;
***#중국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중국 → 일제강점기&lt;br /&gt;
***#중국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중국 → 6공화국 이후&lt;br /&gt;
***#러시아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러시아 → 일제강점기&lt;br /&gt;
***#러시아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러시아 → 6공화국 이후&lt;br /&gt;
***#미국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미국 → 일제강점기&lt;br /&gt;
***#미국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미국 → 6공화국 이후&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green&amp;quot;&amp;gt;'''happenedAt'''&amp;lt;/span&amp;gt;&lt;br /&gt;
***설명: 해당 사건과 특정 시기를 연결한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운요호 사건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강화도 조약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갑신정변_1884년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가쓰라-태프트 밀약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아관파천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임오군란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톈진조약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을사조약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중국의 독립운동 지원 → 일제강점기&lt;br /&gt;
***#민족자결주의 선언 → 일제강점기&lt;br /&gt;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 일제강점기&lt;br /&gt;
***#러시아의 독립운동 지원 → 일제강점기&lt;br /&gt;
***#카이로 회담 → 일제강점기&lt;br /&gt;
***#한일기본조약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미군정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베트남 전쟁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한국 전쟁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현대 한국과 일본의 역사 문제 → 6공화국 이후&lt;br /&gt;
***#코로나19 → 6공화국 이후&lt;br /&gt;
***#냉전 종식 → 6공화국 이후&lt;br /&gt;
***#북미정상회담 결렬 → 6공화국 이후&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마인드맵==&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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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기여==&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white;&amp;quot;&lt;br /&gt;
|+ 6분반 정치교류조&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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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원 || 기여내용&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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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소금토마토]] || 추가예정&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시간의 흐름으로 보는 정치교류사'''==&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NfjKF8MdQEGWKD4zQXAOvIxaqYsUcQGp7kQ_QSU4sq4&amp;amp;font=Default&amp;amp;lang=ko&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도출한 결론==&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국내 정세 안정화 선행 필요성'''===&lt;br /&gt;
----&lt;br /&gt;
개항기, 일제강점기, 해방 후 안정되기 전까지는 타국이 우리나라 정치 상황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안정기에 들어서고 나서는 타국의 정치적 영향도, 타국이 영향을 준 경우도 줄었다. 그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해보았는데, 타국이 영향을 줘서 흔들릴 만큼의 정치적인 불안정성이 없어졌고 따라서 타국에 기댈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할 수 있었다. 따라서 타국의 안 좋은 영향력을 최소화하고 자주권을 확립하여 국가와 국민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우선, 국내 정치 상황이 안정되어야 하며, 그것은 필수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영원한 우방국은 없다'''===&lt;br /&gt;
----&lt;br /&gt;
그다음으로 내린 결론은 영원한 우방국은 없다, 즉, 국제 사회는 철저한 계산에 따라 냉혹하면서도 현실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저희가 다룬 네 국가와 우리나라의 관계는 때론 우호적이기도 때론 적대적이기도 했는데, 그 관계의 이면에는 늘 치밀한 각국의 손익 계산이 반영되어 있었다. 즉, 타국은 우리나라가 본국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 싶으면 우호적인 제스쳐를 취하며 이용했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버리고 혹은 이해관계에 따라 적대적으로 설정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가 국권을 피탈 당할 때도 이러한 국제사회의 이해관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미국, 러시아 등의 국가를 너무 믿었다가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따라서, 국제사회에서 국가는 오직 국익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에 따른 적절한 외교전략을 수립해나가야 한다.&lt;br /&gt;
&lt;br /&gt;
결론적으로, 우리가 피해를 입은 경우도 있었는데 이런 피해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정치적 혼란을 막으면서 우리 문제에는 우리가 주도권을 뺏기지 않는 상황을 만들고 동시에 실리적인 외교 방안을 모색하여 평화와 국익을 위한 외교를 해야 할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아쉬운 점과 개선점'''===&lt;br /&gt;
----&lt;br /&gt;
주제 자체를 양이 너무 많고 내용도 어려운 주제로 정한 데다 잘하고 싶은 의욕으로 많은 문서를 만들고자 한 탓에 자료 조사와 내용 작성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이런 이유로 위키만의 장점을 드러낼 수 있는, 위키로만 할 수 있는 여러 툴이나 장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웠다. 그래서 다음에 또 위키 관련 활동을 한다면, 시간과 수준에 알맞은 적절한 주제, 적절한 개수의 노드를 미리 설정해서 자료 조사와 내용 작성에만 할애했던 시간을 위키만의 장점을 드러낼 수 있는 여러 툴을 활용하는 데에 사용하도록 개선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lt;/div&gt;</summary>
		<author><name>소금토마토</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0%9C%ED%95%AD%EB%B6%80%ED%84%B0_%ED%98%84%EC%9E%AC%EA%B9%8C%EC%A7%80%EC%9D%98_%EC%A0%95%EC%B9%98_%EA%B5%90%EB%A5%98&amp;diff=42806</id>
		<title>개항부터 현재까지의 정치 교류</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0%9C%ED%95%AD%EB%B6%80%ED%84%B0_%ED%98%84%EC%9E%AC%EA%B9%8C%EC%A7%80%EC%9D%98_%EC%A0%95%EC%B9%98_%EA%B5%90%EB%A5%98&amp;diff=42806"/>
		<updated>2024-06-22T13:53:3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소금토마토: /* 중국 */&lt;/p&gt;
&lt;hr /&gt;
&lt;div&gt;==&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콘텐츠 주제==&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amp;lt;font size='5'&amp;gt;'''개항부터 현재까지 한국과 타국의 정치 교류'''&amp;lt;/font&amp;gt;&amp;lt;/div&amp;gt;&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기획의도==&lt;br /&gt;
===기획배경===&lt;br /&gt;
&amp;lt;br/&amp;gt;&lt;br /&gt;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조원과 다른 나라와의 경제 교류에 관심이 많았던 조원 두 명이 합쳐져 조를 형성하였다. '교류’와 ‘정치’라는 주제를 어떻게 연결하여 절충안을 찾을지 고민하다가 우리나라의 정치가 역사적으로 타국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아왔다는 사실이 떠올라 위 주제를 선정하게 되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기획 목적===&lt;br /&gt;
&amp;lt;br/&amp;gt;&lt;br /&gt;
 정치 교류사를 되돌아보며 타국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나라 정치의 변화 흐름을 바라보고자 했다. 이를 통해 타국이 우리나라 정치 상황에 미친 영향을 통시적으로 알아보고 주요 사건의 결과도 보고자 했다. 특히, 우리나라가 손해를 보거나 불이익을 당한 경우라면 문제점을 파악하고 이것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마련해 보고자 이러한 주제를 선정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기대하는 바===&lt;br /&gt;
&amp;lt;br/&amp;gt;&lt;br /&gt;
 타국이 우리나라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파악하고 일련의 탐구로부터 결론을 도출하기를 기대한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나라가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기대하는 바이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국가별 통시적 설명==&lt;br /&gt;
&amp;lt;br/&amp;gt;&lt;br /&gt;
===일본===&lt;br /&gt;
----&lt;br /&gt;
일본은 한국과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워 역사 속에서 많은 영향을 주고 받았다. 현재까지도 많은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또 많은 갈등이 존재하기도 한다. 특히 역사 관련 갈등이 많이 발생한다는 점이 한일관계에서 주목할 만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현대 한일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으로 한국과 일본 사이에 어떤 교류가 일어났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lt;br /&gt;
이 문서에서는 현재 한일관계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개항 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일본 사이의 주요 사건을 일본이 우리나라에 미친 정치적 영향을 중심으로 서술한다. 이 문서와 같은 내용이 '일본' 문서에도 실려 있다. &lt;br /&gt;
&amp;lt;br/&amp;gt;&lt;br /&gt;
====개항부터 국권피탈 전까지, 일본 침략의 전조====&lt;br /&gt;
----&lt;br /&gt;
[[운요호 사건]]을 시작으로 한국은 개항을 하게 된다. 일본은 쿠로후네 사건을 통해 개항하게 되었고 조선이 쇄국정책을 시행하는 사이 메이지 유신을 통해 급격하게 발전한다. 일본은 제국주의적 팽창으로 조선을 위협하기 시작하는데,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일본은 조선에 개항을 요구한다. 조선은 운요호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으며 무력시위를 하는 일본을 무시할 수 없었고 강압적인 수교 통상 요구를 받아들인다. 이 결과로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여 개항을 하게 된다. 하지만 강화도 조약은 조선에게 불평등한 면이 많았다. 또,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기 쉽게 하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다.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은 개항을 하면서 세계에 진출하게 되었으나 이는 불평등했고, 이어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의 다른 서구 열강들과 근대적인 불평등한 개항 수교 통상조약을 맺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amp;lt;/br&amp;gt;&lt;br /&gt;
이후 일본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 하는데, [[갑신정변_1884년]]을 통해 청이 조선에 대해 우위를 점하게 된다. 하지만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러일전쟁에서도 승리하면서 조선에 대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했으며, 이는 국권피탈로 이어졌다. &lt;br /&gt;
&lt;br /&gt;
====일제강점기, 암흑의 시대====&lt;br /&gt;
----&lt;br /&gt;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게 된다. 1910년부터 해방된 1945년까지를 일제강점기라고 부른다. &amp;lt;/br&amp;gt;&lt;br /&gt;
1910년대: 무단통치시기이다. 정치 단체를 만들거나 의견을 내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민족 신문이 폐간되었다. 헌병이 직접 벌을 내리는 즉결심판권이 있었으며 학교에서 교사는 군복에 칼을 찼다. 일본어가 '국어'로 교육되었으며 중등학교에서는 실업 교육을, 고등 교육 기관은 없앴다. 또, 토지 조사 사업이 시작되어 우리나라의 토지를 뺴앗아갔다. 전체 토지의 40%가 일본에 넘어갔으며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통해 일본인에게 팔렸다. &amp;lt;/br&amp;gt;&lt;br /&gt;
1920년대: 문화통치시기이다. 3.1운동이 일어나고 무단통치의 한계를 느낀 일본은 문화통치로 전환한다. 표면적으로는 유화정책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탄압, 감시, 문화 말살, 수탈을 위한 정책이었다. 헌병경찰제도가 보통경찰제도로 변경되었으나 실질적으로 경찰 인력과 시설은 늘어났다. 민족신문의 발행을 허용하였으나 검열은 계속되었다. 교육 기회 확대를 주장했지만 일본과 관련된 내용을 가르치는데 불과했으며 조선인의 취학률은 낮았고, 고등교육은 여전히 실시되지 않았다. 태형령이 없어졌지만 치안 유지법을 제정해 강력하게 탄압했다.&amp;lt;/br&amp;gt; &lt;br /&gt;
1930년대:민족말살통치시기이다. 민족말살통치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 협력을 얻기 위해 취한 정책이다. 내선일체, 황민화 정책, 창씨개명, 일선동조론이 민족말살통치의 일부이다. 민족말살통치는 일본이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고 한국인의 정체성을 없애려고  한 통치이며, 이 시기 많은 강제동원과 수탈이 이루어졌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1945년 일본이 세계 2차대전에서 패하게 되고,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한다. &lt;br /&gt;
&lt;br /&gt;
====해방 후부터 5공화국까지, 일본의 영향 축소====&lt;br /&gt;
----&lt;br /&gt;
해방 후부터 일본과 한국은 교류하지 않았다. 한국전쟁을 겪고 난 후 한국은 일본보다는 다른 나라와 더 많은 교류를 했고 영향을 주고받았다. 그러다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하며 국교를 정상화하고 교류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lt;br /&gt;
&lt;br /&gt;
====6공화국 이후, 한국과 일본의 현 좌표====&lt;br /&gt;
----&lt;br /&gt;
한국과 일본은 많은 교류를 주고받고 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식민지배를 겪었고, 식민 지배 당시 많은 문제가 발생했기에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역사적인 갈등의 골이 깊다. [[현대 한국과 일본의 역사 문제]] 문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강제동원 문제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대표적이다. 인정과 배상, 개인의 청구권 문제로 갈등이 있다. 또,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도 존재한다. 일본이 전범국으로서 책임을 지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하는데, 일본이 저지를 일을 축소하여 교과서를 편찬하면서 문제가 생기고 있다. 또, 독도 문제에 관한 일본 교과서 서술도 문제이다. 마지막으로 독도 문제가 있다. 한국의 땅임이 명백한 독도에 대해 일본이 자기 땅이라고 주장하면서 갈등이 있다.&lt;br /&gt;
&lt;br /&gt;
[[분류:텀블러]]&lt;br /&gt;
&lt;br /&gt;
===미국===&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미국은 현재 한국의 최우방국이다. 북한이라는 명확한 대립 국가가 있는 지금, 미국은 우리 안보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며, 경제에 있어서도 우리나라는 미국에 많은 의존을 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과 이렇게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시작한 것은, 해방 이후로, 고작 80년도 되지 않았다. 80년은 물론 긴 시간이지만, 우리나라의 전체 역사 속에서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 문서에서는 한국과 미국이 처음 조우한 이래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미국 사이의 주요 사건을  미국이 우리나라에 미친 정치적 영향을 중심으로 서술한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한국과 미국의 첫 조우와 무시'''====&lt;br /&gt;
----&lt;br /&gt;
&lt;br /&gt;
미국의 한국에 대한 첫 관심은 1834년 로비츠 아시아 특파원의 보고이다. 이때 로비츠는 &amp;quot;동부 아시아 대륙에 조선이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반도 국가가 있는데 청나라와 일본이라는 대륙 국가와 섬나라 사이에 위치해 있고 본국 정부가 조선과 경제 교역을 가지게 되었으면 싶다&amp;quot;라고 밝히고 있다. 이후 대원군의 통상수교거부정책이 시행되던 중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48057&amp;amp;cid=46623&amp;amp;categoryId=46623 제네럴 셔먼호 사건]이 발생하였고 조선의 개항을 요구하는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2961 신미양요]가 발생한다. 미국의 승리에도 조선은 개항하지 않았고 조선은 [[운요호 사건]]으로 인한 강화도 조약 때야 개항하게 된다. 개항 이후,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기점으로 조선과 미국은 본격적인 교류를 실시한다. &lt;br /&gt;
그러나 일본제국과 미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성사되고 조선과 미국은 단교한다. 이후 미국은 조선을 철저히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며,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 과정을 묵인하거나 일본을 두둔하게 되고 조선은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2961 1910년 나라를 빼앗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강점기에서 희망을 주다'''====&lt;br /&gt;
----&lt;br /&gt;
&lt;br /&gt;
그런 와중,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이 발표되고 식민지 조선은 이 선언에 희망을 가지고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6772 3.1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고 비록 독립을 쟁취하지는 못하였으나,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진다.&lt;br /&gt;
이후, 제2차세계대전에서 일본과 미국은 적으로 만나게 되고 전후 일본의 상황을 논의하는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다. 그러나 얄타 회담에서 한국의 신탁통치를 논의한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해방 직후 밀접한 관계가 되다'''====&lt;br /&gt;
----&lt;br /&gt;
&lt;br /&gt;
일본의 항복 후, 한반도 남쪽에는 [[미군정]]이 북쪽에는 소련이 들어온다. 미군정 시절, 여러 정치적 변혁을 겪으며 좌익과 우익 계열은 완전히 분열되었고 결국 이승만의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20143&amp;amp;cid=62048&amp;amp;categoryId=62048 정읍 발언]을 기점으로 남북은 3.8도선을 기준으로 분단된다. 이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2143 한국전쟁]이 발생하고 미국은 UN연합군과 함께 남한을 위해 참전, 통일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적화통일을 막았다. 이를 계기로 한국과 미국은 안보적으로 가까운 사이가 되었으며, 전후 복구 과정에서 미국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은 한국은 미국과 경제적으로도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해방 후 혼란기 한국에 많은 영향을 미치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승만이 4.19 혁명으로 하야하는 과정에 미국이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는 등 지속적으로 정치적, 경제적 영향을 미치던 미국은 케네디 시대를 맞이한다. 민주주의 가치를 중시했던 케네디는 박정희 정권을 마음에 들지 않아 했고 베트남전 파병에 대해 미온적 태도를 보였으나, 미국 정권이 바뀐 후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한국은 [[베트남 전쟁]] 파병을 결정한다. 베트남 파병으로 많은 국내 정치적, 경제적 변화를 겪은 한국은 경제 성장을 공고히 하는 한편, 박정희 독재 체제도 강화되었다. 박정희의 독재 강화 과정에서 한국과 미국의 관계가 악화되기도 했다. 이후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20431&amp;amp;cid=62048&amp;amp;categoryId=62048 10.26 사건]이 일어나고 여러 사건을 지나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8343 6월 항쟁]이 일어났을 때, 미국은 전두환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고 노태우의 6.29 선언 발표에 기여한다.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민주화 이후에도 계속되는 영향'''====&lt;br /&gt;
----&lt;br /&gt;
&lt;br /&gt;
이후 지속적으로 좋은 관계를 맺다 노무현 정부 시절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73146&amp;amp;cid=43667&amp;amp;categoryId=43667 한미 FTA]를 체결하였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북한과의 해빙 무드 속에서 북미 정상회담을 개최하기도 했으나, 결국 주목할 만한 성과 없이 [[북미정상회담 결렬]]을 맞이한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이후, 정부가 한미일 공조에 공을 들이며, 더욱 긴밀해진 모습이나, 북한과의 관계는 매우 악화된 상황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한국과 미국은 밀접한 동맹국이니만큼 한미관계는 다른 여느 외교 관계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뽑히며, 한미관계의 조율 여부가 그 정부의 외교적 성패를 가르기도 한다. 그러나 미국이 이권에 따라 때로는 우리를 무시하고 저버린 적도 있기 때문에 결국 미국 또한, 자국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국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미관계를 원활하게 유지함으로써 안보와 경제적 이익을 취하는 동시에 너무 미국에게만 종속되지 않도록 자주적 힘을 길러나가는 것이 바람직한 한미관계의 길일 것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분류:개항부터_현재까지의_정치_교류]] [[분류:낭만가]] &lt;br /&gt;
&lt;br /&gt;
===러시아===&lt;br /&gt;
&amp;lt;br/&amp;gt;&lt;br /&gt;
===중국===&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미국은 현재 한국의 최우방국이다. 북한이라는 명확한 대립 국가가 있는 지금, 미국은 우리 안보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며, 경제에 있어서도 우리나라는 미국에 많은 의존을 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과 이렇게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시작한 것은, 해방 이후로, 고작 80년도 되지 않았다. 80년은 물론 긴 시간이지만, 우리나라의 전체 역사 속에서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 문서에서는 한국과 미국이 처음 조우한 이래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미국 사이의 주요 사건을  미국이 우리나라에 미친 정치적 영향을 중심으로 서술한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조선 후기 청나라와의 관계'''====&lt;br /&gt;
----&lt;br /&gt;
&lt;br /&gt;
병자호란을 기점으로 청나라와 사대 관계를 맺은 조선은 이후로도 청과의 사대관계를 유지했다. 당시 한국이 일본에 의한 침탈의 과정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전근대 시기처럼 청과 밀접한 관계를 맺지는 않았다. 그러나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은 일본과 함께 조선의 정치에 다시 관여하기 시작했다. &lt;br /&gt;
&lt;br /&gt;
미국의 한국에 대한 첫 관심은 1834년 로비츠 아시아 특파원의 보고이다. 이때 로비츠는 &amp;quot;동부 아시아 대륙에 조선이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반도 국가가 있는데 청나라와 일본이라는 대륙 국가와 섬나라 사이에 위치해 있고 본국 정부가 조선과 경제 교역을 가지게 되었으면 싶다&amp;quot;라고 밝히고 있다. 이후 대원군의 통상수교거부정책이 시행되던 중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48057&amp;amp;cid=46623&amp;amp;categoryId=46623 제네럴 셔먼호 사건]이 발생하였고 조선의 개항을 요구하는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2961 신미양요]가 발생한다. 미국의 승리에도 조선은 개항하지 않았고 조선은 [[운요호 사건]]으로 인한 강화도 조약 때야 개항하게 된다. 개항 이후,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기점으로 조선과 미국은 본격적인 교류를 실시한다. &lt;br /&gt;
그러나 일본제국과 미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성사되고 조선과 미국은 단교한다. 이후 미국은 조선을 철저히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며,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 과정을 묵인하거나 일본을 두둔하게 되고 조선은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2961 1910년 나라를 빼앗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강점기에서 희망을 주다'''====&lt;br /&gt;
----&lt;br /&gt;
&lt;br /&gt;
그런 와중,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이 발표되고 식민지 조선은 이 선언에 희망을 가지고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6772 3.1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고 비록 독립을 쟁취하지는 못하였으나,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진다.&lt;br /&gt;
이후, 제2차세계대전에서 일본과 미국은 적으로 만나게 되고 전후 일본의 상황을 논의하는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다. 그러나 얄타 회담에서 한국의 신탁통치를 논의한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해방 직후 밀접한 관계가 되다'''====&lt;br /&gt;
----&lt;br /&gt;
&lt;br /&gt;
일본의 항복 후, 한반도 남쪽에는 [[미군정]]이 북쪽에는 소련이 들어온다. 미군정 시절, 여러 정치적 변혁을 겪으며 좌익과 우익 계열은 완전히 분열되었고 결국 이승만의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20143&amp;amp;cid=62048&amp;amp;categoryId=62048 정읍 발언]을 기점으로 남북은 3.8도선을 기준으로 분단된다. 이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2143 한국전쟁]이 발생하고 미국은 UN연합군과 함께 남한을 위해 참전, 통일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적화통일을 막았다. 이를 계기로 한국과 미국은 안보적으로 가까운 사이가 되었으며, 전후 복구 과정에서 미국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은 한국은 미국과 경제적으로도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해방 후 혼란기 한국에 많은 영향을 미치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승만이 4.19 혁명으로 하야하는 과정에 미국이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는 등 지속적으로 정치적, 경제적 영향을 미치던 미국은 케네디 시대를 맞이한다. 민주주의 가치를 중시했던 케네디는 박정희 정권을 마음에 들지 않아 했고 베트남전 파병에 대해 미온적 태도를 보였으나, 미국 정권이 바뀐 후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한국은 [[베트남 전쟁]] 파병을 결정한다. 베트남 파병으로 많은 국내 정치적, 경제적 변화를 겪은 한국은 경제 성장을 공고히 하는 한편, 박정희 독재 체제도 강화되었다. 박정희의 독재 강화 과정에서 한국과 미국의 관계가 악화되기도 했다. 이후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20431&amp;amp;cid=62048&amp;amp;categoryId=62048 10.26 사건]이 일어나고 여러 사건을 지나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8343 6월 항쟁]이 일어났을 때, 미국은 전두환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고 노태우의 6.29 선언 발표에 기여한다. &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민주화 이후에도 계속되는 영향'''====&lt;br /&gt;
----&lt;br /&gt;
&lt;br /&gt;
이후 지속적으로 좋은 관계를 맺다 노무현 정부 시절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73146&amp;amp;cid=43667&amp;amp;categoryId=43667 한미 FTA]를 체결하였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북한과의 해빙 무드 속에서 북미 정상회담을 개최하기도 했으나, 결국 주목할 만한 성과 없이 [[북미정상회담 결렬]]을 맞이한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이후, 정부가 한미일 공조에 공을 들이며, 더욱 긴밀해진 모습이나, 북한과의 관계는 매우 악화된 상황이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한국과 미국은 밀접한 동맹국이니만큼 한미관계는 다른 여느 외교 관계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뽑히며, 한미관계의 조율 여부가 그 정부의 외교적 성패를 가르기도 한다. 그러나 미국이 이권에 따라 때로는 우리를 무시하고 저버린 적도 있기 때문에 결국 미국 또한, 자국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국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미관계를 원활하게 유지함으로써 안보와 경제적 이익을 취하는 동시에 너무 미국에게만 종속되지 않도록 자주적 힘을 길러나가는 것이 바람직한 한미관계의 길일 것이다.&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온톨로지==&lt;br /&gt;
{{NetworkGraph | title=정치교류.ls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NetworkGraph | title=정치교류.lst}}&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background-color:lightyellow; margin: 0; border: 3px solid yellow; padding: 3px ; border-radius:100px&amp;quot;&amp;gt;콘텐츠 구조==&lt;br /&gt;
&lt;br /&gt;
===클래스(Class)===&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color:white&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amp;quot; | 클래스 !! style=&amp;quot;width:30%&amp;quot; | 설명 !! style=&amp;quot;45%&amp;quot; | 노드&lt;br /&gt;
|-&lt;br /&gt;
|나라 ||우리나라의 정치사에 영향을 가장 많이 미친 나라들이다. 각 문서에 각 나라가 한국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통시적으로 서술하였다. || [[일본]] [[중국]] [[러시아]] [[미국]]&lt;br /&gt;
&lt;br /&gt;
|-&lt;br /&gt;
|사건 || 주요 사건들을 노드로 만들었다. 각 사건에 대해 자세히 서술했고, 각 사건이 미친 영향을 서술했다.|| [[운요호 사건]] [[강화도 조약]] [[갑신정변_1884년]] [[을사조약]] [[한일기본조약]]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현대 한국과 일본의 역사 문제]] [[임오군란]] [[중국의 독립운동 지원]] [[한국전쟁]] [[코로나19]] [[아관파천]] [[러시아의 독립운동 지원]] [[냉전 종식]] [[가쓰라-태프트 밀약]] [[민족자결주의 선언]] [[미군정]] [[베트남 전쟁]] [[북미정상회담 결렬]] &lt;br /&gt;
|-&lt;br /&gt;
|시기|| 시기를 크게 4가지로 나누어 노드를 만들었다.  || [[개항부터 국권피탈]]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 [[6공화국 이후]]&lt;br /&gt;
|}&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green&amp;quot;&amp;gt;'''leads'''&amp;lt;/span&amp;gt;&lt;br /&gt;
***설명: 나라와 해당 나라가 관련된 사건을 연결한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일본 → 운요호사건&lt;br /&gt;
***#일본 → 강화도 조약&lt;br /&gt;
***#일본 → 갑신정변_1885년&lt;br /&gt;
***#일본 → 을사조약&lt;br /&gt;
***#일본 → 한일기본조약&lt;br /&gt;
***#일본 →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lt;br /&gt;
***#일본 → 현대 한국과 일본의 역사 문제&lt;br /&gt;
***#일본 → 임오군란&lt;br /&gt;
***#일본 → 톈진 조약&lt;br /&gt;
***#일본 → 가쓰라-태프트 밀약&lt;br /&gt;
***#중국 → 갑신정변&lt;br /&gt;
***#중국 →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lt;br /&gt;
***#중국 → 임오군란&lt;br /&gt;
***#중국 → 톈진 조약&lt;br /&gt;
***#중국 → 중국의 독립운동 지원&lt;br /&gt;
***#중국 →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lt;br /&gt;
***#중국 → 카이로 회담&lt;br /&gt;
***#중국 → 한국 전쟁&lt;br /&gt;
***#중국 → 코로나19&lt;br /&gt;
***#중국 → 냉전 종식&lt;br /&gt;
***#러시아 → 한국 전쟁&lt;br /&gt;
***#러시아 → 아관파천&lt;br /&gt;
***#러시아 → 러시아의 독립운동 지원&lt;br /&gt;
***#러시아 → 냉전 종식&lt;br /&gt;
***#미국 → 가쓰라-태프트 밀약&lt;br /&gt;
***#미국 → 민족자결주의 선언&lt;br /&gt;
***#미국 → 카이로 회담&lt;br /&gt;
***#미국 → 한국 전쟁&lt;br /&gt;
***#미국 → 냉전 종식&lt;br /&gt;
***#미국 → 미군정&lt;br /&gt;
***#미국 → 베트남 전쟁&lt;br /&gt;
***#미국 → 북미정상회담 결렬&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green&amp;quot;&amp;gt;'''isRelatedTo'''&amp;lt;/span&amp;gt;&lt;br /&gt;
***설명: 나라와 특정 시기를 연결한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일본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일본 → 일제강점기&lt;br /&gt;
***#일본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일본 → 6공화국 이후&lt;br /&gt;
***#중국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중국 → 일제강점기&lt;br /&gt;
***#중국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중국 → 6공화국 이후&lt;br /&gt;
***#러시아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러시아 → 일제강점기&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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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 6공화국 이후&lt;br /&gt;
***#미국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미국 → 일제강점기&lt;br /&gt;
***#미국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미국 → 6공화국 이후&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color:green&amp;quot;&amp;gt;'''happenedAt'''&amp;lt;/span&amp;gt;&lt;br /&gt;
***설명: 해당 사건과 특정 시기를 연결한다.&lt;br /&gt;
***해당노드: &lt;br /&gt;
***#운요호 사건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강화도 조약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갑신정변_1884년 → 개항부터 국권피탈&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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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기본조약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미군정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베트남 전쟁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한국 전쟁 → 해방 이후부터 5공화국&lt;br /&gt;
***#현대 한국과 일본의 역사 문제 → 6공화국 이후&lt;br /&gt;
***#코로나19 → 6공화국 이후&lt;br /&gt;
***#냉전 종식 → 6공화국 이후&lt;br /&gt;
***#북미정상회담 결렬 → 6공화국 이후&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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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분반 정치교류조&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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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NfjKF8MdQEGWKD4zQXAOvIxaqYsUcQGp7kQ_QSU4sq4&amp;amp;font=Default&amp;amp;lang=ko&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도출한 결론==&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국내 정세 안정화 선행 필요성'''===&lt;br /&gt;
----&lt;br /&gt;
개항기, 일제강점기, 해방 후 안정되기 전까지는 타국이 우리나라 정치 상황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안정기에 들어서고 나서는 타국의 정치적 영향도, 타국이 영향을 준 경우도 줄었다. 그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해보았는데, 타국이 영향을 줘서 흔들릴 만큼의 정치적인 불안정성이 없어졌고 따라서 타국에 기댈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할 수 있었다. 따라서 타국의 안 좋은 영향력을 최소화하고 자주권을 확립하여 국가와 국민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우선, 국내 정치 상황이 안정되어야 하며, 그것은 필수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영원한 우방국은 없다'''===&lt;br /&gt;
----&lt;br /&gt;
그다음으로 내린 결론은 영원한 우방국은 없다, 즉, 국제 사회는 철저한 계산에 따라 냉혹하면서도 현실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저희가 다룬 네 국가와 우리나라의 관계는 때론 우호적이기도 때론 적대적이기도 했는데, 그 관계의 이면에는 늘 치밀한 각국의 손익 계산이 반영되어 있었다. 즉, 타국은 우리나라가 본국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 싶으면 우호적인 제스쳐를 취하며 이용했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버리고 혹은 이해관계에 따라 적대적으로 설정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가 국권을 피탈 당할 때도 이러한 국제사회의 이해관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미국, 러시아 등의 국가를 너무 믿었다가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따라서, 국제사회에서 국가는 오직 국익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에 따른 적절한 외교전략을 수립해나가야 한다.&lt;br /&gt;
&lt;br /&gt;
결론적으로, 우리가 피해를 입은 경우도 있었는데 이런 피해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정치적 혼란을 막으면서 우리 문제에는 우리가 주도권을 뺏기지 않는 상황을 만들고 동시에 실리적인 외교 방안을 모색하여 평화와 국익을 위한 외교를 해야 할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아쉬운 점과 개선점'''===&lt;br /&gt;
----&lt;br /&gt;
주제 자체를 양이 너무 많고 내용도 어려운 주제로 정한 데다 잘하고 싶은 의욕으로 많은 문서를 만들고자 한 탓에 자료 조사와 내용 작성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이런 이유로 위키만의 장점을 드러낼 수 있는, 위키로만 할 수 있는 여러 툴이나 장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웠다. 그래서 다음에 또 위키 관련 활동을 한다면, 시간과 수준에 알맞은 적절한 주제, 적절한 개수의 노드를 미리 설정해서 자료 조사와 내용 작성에만 할애했던 시간을 위키만의 장점을 드러낼 수 있는 여러 툴을 활용하는 데에 사용하도록 개선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lt;/div&gt;</summary>
		<author><name>소금토마토</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E%84%EC%98%A4%EA%B5%B0%EB%9E%80&amp;diff=42804</id>
		<title>임오군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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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06-22T13:47:0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소금토마토: &lt;/p&gt;
&lt;hr /&gt;
&lt;div&gt;[[파일:임오군란.jpeg|500px|]]&lt;br /&gt;
&lt;br /&gt;
=='''요약'''==&lt;br /&gt;
 1882년(고종 19) 6월 9일 신식 군대(별기군)와의 차별에 분노한 구식 군대가 일으킨 병란.&amp;lt;/br&amp;gt; &lt;br /&gt;
이후 어쩌고저쩌고이러쿵저러쿵 된다. &lt;br /&gt;
 &lt;br /&gt;
==배경==&lt;br /&gt;
1876년(고종 13)에 맺어진 한 · 일수호조약(일명 강화도조약)으로 인해 대원군이 취한 쇄국정책이 무너지고, 개화파(開化派)와 수구파(守舊派)의 대립이 날카롭게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왕의 친정으로 정권을 내놓은 대원군은 척족인 민씨일파를 내치고 다시 집권할 기회를 엿보고 있는 중이었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발단==&lt;br /&gt;
신식군대를 양성하는 별기군(別技軍)이 급료와 보급에서 좋은 대우를 받는 데 비해 구식군대인 무위영(武衛營) · 장어영(壯禦營) 2영의 군졸들은 13달 동안 봉급미를 받지 못해 불만이 높았다. 그러던 차에 겨우 한달치의 급료를 받게 되었으나, 그것마저 선혜청(宣惠廳) 고지기의 농간으로 말수가 턱없이 부족한데다 모래가 반 넘어 섞여 있었다. 이에 격분한 구식군졸들이 고지기를 때려 부상을 입히고 선혜청 당상(堂上) 민겸호(閔謙鎬)의 집으로 몰려가 저택을 파괴하고 폭동을 일으켰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경과==&lt;br /&gt;
사태가 이에 이르자 난병들은 대원군에게 진정하기 위해 운현궁(雲峴宮)으로 몰려와 애소했다. 대원군은 겉으로는 난병을 달랬지만, 한편으로는 심복인 허욱을 시켜 그들을 지휘케 했다. 그리하여 군민의 불평은 대원군과 연결되어 민씨 및 일본 세력의 배척운동으로 확대되었다. 군민들은 별기군 병영으로 몰려가 일본인 교련관 호리모토(掘本禮造) 공병소위를 죽이고, 민중과 합세하여 일본 공사관(서대문 밖 청수관)을 포위, 불을 지르고 일본순사 등 13명의 일인을 살해했다. 그러나 하나부사(花房義質) 공사 등 공관원들은 모두 인천으로 도망쳐서 영국 배의 도움으로 본국으로 돌아갔다.&lt;br /&gt;
&lt;br /&gt;
이튿날 더욱 강력해진 군민은 대원군의 밀명에 따라 영돈령부사 이최응(李最應) 등을 살해하고, 명성황후를 제거하기 위해 창덕궁 돈화문 안으로 난입했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궁녀의 옷으로 변장한 후 궁궐을 탈출, 충주 장호원(長湖院)의 충주목사 민응식(閔應植)의 집으로 피신했다. 사태가 위급함을 느낀 고종은 전권을 대원군에게 맡겨 반란을 수습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대원군을 불러들였다. 이리하여 왕명으로 정권을 손에 넣은 대원군은 반란을 진정시키고 군제를 개편하는 등 군란의 뒷수습에 나섰지만, 민씨일파의 청원을 받아들인 청나라가 재빨리 군대를 파견함으로써 그의 재집권은 단명에 그치고 말았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결과==&lt;br /&gt;
청나라는 이 난의 책임을 물어 대원군을 톈진(天津)으로 납치해갔으며, 일본은 조선정부에 강력한 위협을 가해 주모자 처벌과 손해 배상을 내용으로 하는 제물포조약을 맺게 했다. 군변으로 시작된 이 난은 결국 대외적으로는 청나라와 일본의 조선에 대한 권한을 확대시켜주는 결과가 되었고, 대내적으로는 개화세력과 보수세력의 갈등을 노출시켜 갑신정변의 바탕을 마련해주었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관련 자료==&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910&amp;quot; height=&amp;quot;512&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Jki0yHcShSk&amp;quot; title=&amp;quot;월급 13개월 밀린 건 선 넘었지.. &amp;amp;#39;임오군란&amp;amp;#39;으로 흥선대원군이 복귀 후 한 일! #벌거벗은한국사 EP.41 | tvN STORY 230201 방송&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19497&amp;amp;cid=62048&amp;amp;categoryId=62048 한국근현대사사전]&lt;br /&gt;
&lt;br /&gt;
==분류==&lt;br /&gt;
[[분류:개항부터_현재까지의_정치_교류]] [[분류:소금토마토]]&lt;/div&gt;</summary>
		<author><name>소금토마토</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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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파일:임오군란.jpeg</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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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06-22T13:46:0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소금토마토: &lt;/p&gt;
&lt;hr /&gt;
&lt;div&gt;&lt;/div&gt;</summary>
		<author><name>소금토마토</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5%84%EA%B4%80%ED%8C%8C%EC%B2%9C&amp;diff=42802</id>
		<title>아관파천</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5%84%EA%B4%80%ED%8C%8C%EC%B2%9C&amp;diff=42802"/>
		<updated>2024-06-22T13:45:1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소금토마토: &lt;/p&gt;
&lt;hr /&gt;
&lt;div&gt;[[파일:러시아 공사관.jpeg|500px|]]&lt;br /&gt;
&lt;br /&gt;
러시아 공사관의 모습이다.&lt;br /&gt;
&lt;br /&gt;
=='''요약'''==&lt;br /&gt;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 이후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과 왕세자가 1896년 2월 11일부터 약 1년간 조선의 왕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에 옮겨 거처한 사건.&amp;lt;/br&amp;gt;&lt;br /&gt;
&lt;br /&gt;
==배경==&lt;br /&gt;
을미사변(乙未事變) 이후 일본의 영향 아래에서 조직된 제4차 김홍집(金弘集) 내각은 1세 1원 연호(一世一元年號), 태양력 사용, 서울에 친위대(親衛隊)·시위대(侍衛隊), 지방에 진위대(鎭衛隊)를 두는 군제 개혁, 단발령의 실시 등의 개혁을 단행하였으나 명성황후의 시해와 단발령의 실시는 친일 내각과 그 배후세력인 일본에 대한 국민의 감정을 극단적으로 자극하여 전국 각지에서 의병항쟁이 일어났다. 당시 고종은 을미사변으로 사실상 경복궁에 감금된 상태였는데,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길 계획을 수립하였다. 먼저 이범진(李範晉)·이완용(李完用) 등 친러파 세력에게 러시아 공사 카를 베베르(Karl Ivanovich Veber)와 접선하도록 하여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기고자 하는 뜻을 전하게 하였다. 러시아는 고종의 뜻을 받아들였고, 인천에 와 있던 러시아 수병(水兵) 100여 명과 포(砲) 1문을 러시아 공사관의 방위를 강화시킨다는 명목으로 서울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친위대가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지방으로 이동한 틈을 이용하여, 2월 11일 새벽 국왕과 왕세자를 극비리에 정동(貞洞)에 있던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겼다. 당시 러시아는 아라사(俄羅斯)로 표기되어 이를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 불렀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한 고종은 친일 내각에 참여한 내각총리대신 김홍집·내부대신 유길준(兪吉濬)·농상공부대신 정병하(鄭秉夏)·군부대신 조희연(趙羲淵)·법부대신 장박(張博) 등을 역적으로 규정하고 그들을 체포하여 처형하도록 명령하였다. 흥분한 군중은 퇴청하던 김홍집·정병하를 살해하였고, 피신한 탁지부대신 어윤중(魚允中)은 다음날 용인에서 붙잡혀 살해되었다. 유길준·조희연·권형진(權瀅鎭)·우범선(禹範善)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잠적했던 외부대신 김윤식(金允植)은 결국 체포되어 제주도로 종신 유배당하였다.&lt;br /&gt;
&lt;br /&gt;
이후 고종은 박정양(朴定陽)·이완용·조병직(趙秉稷)·이윤용(李允用)·윤용구(尹用求)·이재정(李在正) 등 친러·친미파 인사로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였다. 이들은 의병항쟁을 불문에 부치고, 죄수들을 석방하는 등 민심 수습에 힘쓰는 한편, 일본식으로 개혁하였던 ‘내각’제도를 구제(舊制)인 ‘의정부’제로 환원 등을 시행하였다.&lt;br /&gt;
&lt;br /&gt;
또한 고종은 1896년 5월 러시아 니콜라이 2세(Nikolai Ⅱ)의 대관식에 민영환(閔泳煥)을 특사로 파견하여 러시아 군대와 군사 교관의 추가 파병, 3백만 엔의 차관, 전신선 설치 등을 요청하도록 하였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지만, 일본 군대는 여전히 서울에 주둔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러시아와 일본은 1896년 5월 베베르-고무라(小村壽太郎) 각서(서울의정서), 6월에 로바노프(Lobanovr)-야마가타(山縣有明) 의정서(모스크바의정서)를 체결하여 한반도에서의 균형을 합의하였다. 이에 고종의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러시아는 약간의 군사고문단을 민영환의 귀국길에 동행시키는데 그쳤다. 고종은 이들을 중심으로 800여 명을 선발하여 호위병으로 훈련시켜 환궁에 대비하였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결과와 영향==&lt;br /&gt;
러시아는 아관파천을 계기로 조선에 압력을 가하여 압록강 연안과 울릉도의 삼림채벌권을 비롯하여 경원(慶源)·종성(鐘城)의 광산채굴권, 경원전신선(京元電信線)을 시베리아 전선에 연결하는 권리, 인천 월미도 저탄소 설치권 등 경제적 이권을 차지하였다. 그러자 최혜국대우를 통상 조약에 포함시켰던 구미열강(歐美列强)도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여 경인(京仁) 및 경의선(京義線) 철도부설권 등 중요 이권이 값싼 조건으로 외국에 넘어갔다. 아울러 정부 각부에 러시아인 고문이 초빙되었고, 중앙 군제와 무기가 러시아식으로 개편되어 러시아의 영향력이 확대되었다.&lt;br /&gt;
&lt;br /&gt;
러시아 등 외국의 이권 취득은 러시아에 대한 여론을 악화시켰다. 또한 국왕의 외국 공사관 거주에 따른 국격의 손상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독립협회(獨立協會) 등은 고종의 환궁을 호소하였다. 그리고 1897년 2월 25일, 고종은 호위를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 갖추어졌다고 판단하여 러시아 공관을 떠나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慶運宮, 지금의 덕수궁)으로 환궁하였다. 이로써 약 1년간의 아관파천이 막을 내렸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관련 자료==&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910&amp;quot; height=&amp;quot;512&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I0BlBEAg0KY&amp;quot; title=&amp;quot;&amp;amp;#39;아관파천&amp;amp;#39;, 아내를 잃고 공포에 떨던 고종의 선택! 결국 본격적인 전쟁과 대립이 시작되다.. | 러일전쟁 | #벌거벗은세계사 #사피엔스&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20271&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3383 두산백과]&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개항부터_현재까지의_정치_교류]] [[분류:소금토마토]]&lt;br /&gt;
&lt;br /&gt;
==이전 문서==&lt;br /&gt;
아관파천(俄館播遷)은 1896년 2월 11일, 고종과 측근 인사들의 요청에 러시아공사가 동의하여 고종과 왕세자가 비밀리에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사건이다. 을미사변 이후 신변의 위협을 느끼던 고종과 측근 인사들의 요청에 러시아공사 베베르가 동의하여 비밀리에 고종과 왕세자가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사건이다. 아관파천으로 인해 친일 내각이 무너졌고, 고종은 경운궁 환궁 전 1년 동안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렀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1154&amp;quot; height=&amp;quot;564&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gjuUHlv68vg&amp;quot; title=&amp;quot;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 간 고종 &amp;amp;#39;아관 파천&amp;amp;#39; (역사만화 82화) [공부왕찐천재]&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분류:근대역사인물]]&lt;br /&gt;
[[분류:고종훈]]&lt;/div&gt;</summary>
		<author><name>소금토마토</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5%84%EA%B4%80%ED%8C%8C%EC%B2%9C&amp;diff=42801</id>
		<title>아관파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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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06-22T13:45:1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소금토마토: &lt;/p&gt;
&lt;hr /&gt;
&lt;div&gt;[[파일:러시아 공사관.jpeg|500px|]]&lt;br /&gt;
러시아 공사관의 모습이다.&lt;br /&gt;
&lt;br /&gt;
=='''요약'''==&lt;br /&gt;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 이후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과 왕세자가 1896년 2월 11일부터 약 1년간 조선의 왕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에 옮겨 거처한 사건.&amp;lt;/br&amp;gt;&lt;br /&gt;
&lt;br /&gt;
==배경==&lt;br /&gt;
을미사변(乙未事變) 이후 일본의 영향 아래에서 조직된 제4차 김홍집(金弘集) 내각은 1세 1원 연호(一世一元年號), 태양력 사용, 서울에 친위대(親衛隊)·시위대(侍衛隊), 지방에 진위대(鎭衛隊)를 두는 군제 개혁, 단발령의 실시 등의 개혁을 단행하였으나 명성황후의 시해와 단발령의 실시는 친일 내각과 그 배후세력인 일본에 대한 국민의 감정을 극단적으로 자극하여 전국 각지에서 의병항쟁이 일어났다. 당시 고종은 을미사변으로 사실상 경복궁에 감금된 상태였는데,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길 계획을 수립하였다. 먼저 이범진(李範晉)·이완용(李完用) 등 친러파 세력에게 러시아 공사 카를 베베르(Karl Ivanovich Veber)와 접선하도록 하여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기고자 하는 뜻을 전하게 하였다. 러시아는 고종의 뜻을 받아들였고, 인천에 와 있던 러시아 수병(水兵) 100여 명과 포(砲) 1문을 러시아 공사관의 방위를 강화시킨다는 명목으로 서울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친위대가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지방으로 이동한 틈을 이용하여, 2월 11일 새벽 국왕과 왕세자를 극비리에 정동(貞洞)에 있던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겼다. 당시 러시아는 아라사(俄羅斯)로 표기되어 이를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 불렀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한 고종은 친일 내각에 참여한 내각총리대신 김홍집·내부대신 유길준(兪吉濬)·농상공부대신 정병하(鄭秉夏)·군부대신 조희연(趙羲淵)·법부대신 장박(張博) 등을 역적으로 규정하고 그들을 체포하여 처형하도록 명령하였다. 흥분한 군중은 퇴청하던 김홍집·정병하를 살해하였고, 피신한 탁지부대신 어윤중(魚允中)은 다음날 용인에서 붙잡혀 살해되었다. 유길준·조희연·권형진(權瀅鎭)·우범선(禹範善)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잠적했던 외부대신 김윤식(金允植)은 결국 체포되어 제주도로 종신 유배당하였다.&lt;br /&gt;
&lt;br /&gt;
이후 고종은 박정양(朴定陽)·이완용·조병직(趙秉稷)·이윤용(李允用)·윤용구(尹用求)·이재정(李在正) 등 친러·친미파 인사로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였다. 이들은 의병항쟁을 불문에 부치고, 죄수들을 석방하는 등 민심 수습에 힘쓰는 한편, 일본식으로 개혁하였던 ‘내각’제도를 구제(舊制)인 ‘의정부’제로 환원 등을 시행하였다.&lt;br /&gt;
&lt;br /&gt;
또한 고종은 1896년 5월 러시아 니콜라이 2세(Nikolai Ⅱ)의 대관식에 민영환(閔泳煥)을 특사로 파견하여 러시아 군대와 군사 교관의 추가 파병, 3백만 엔의 차관, 전신선 설치 등을 요청하도록 하였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지만, 일본 군대는 여전히 서울에 주둔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러시아와 일본은 1896년 5월 베베르-고무라(小村壽太郎) 각서(서울의정서), 6월에 로바노프(Lobanovr)-야마가타(山縣有明) 의정서(모스크바의정서)를 체결하여 한반도에서의 균형을 합의하였다. 이에 고종의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러시아는 약간의 군사고문단을 민영환의 귀국길에 동행시키는데 그쳤다. 고종은 이들을 중심으로 800여 명을 선발하여 호위병으로 훈련시켜 환궁에 대비하였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결과와 영향==&lt;br /&gt;
러시아는 아관파천을 계기로 조선에 압력을 가하여 압록강 연안과 울릉도의 삼림채벌권을 비롯하여 경원(慶源)·종성(鐘城)의 광산채굴권, 경원전신선(京元電信線)을 시베리아 전선에 연결하는 권리, 인천 월미도 저탄소 설치권 등 경제적 이권을 차지하였다. 그러자 최혜국대우를 통상 조약에 포함시켰던 구미열강(歐美列强)도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여 경인(京仁) 및 경의선(京義線) 철도부설권 등 중요 이권이 값싼 조건으로 외국에 넘어갔다. 아울러 정부 각부에 러시아인 고문이 초빙되었고, 중앙 군제와 무기가 러시아식으로 개편되어 러시아의 영향력이 확대되었다.&lt;br /&gt;
&lt;br /&gt;
러시아 등 외국의 이권 취득은 러시아에 대한 여론을 악화시켰다. 또한 국왕의 외국 공사관 거주에 따른 국격의 손상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독립협회(獨立協會) 등은 고종의 환궁을 호소하였다. 그리고 1897년 2월 25일, 고종은 호위를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 갖추어졌다고 판단하여 러시아 공관을 떠나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慶運宮, 지금의 덕수궁)으로 환궁하였다. 이로써 약 1년간의 아관파천이 막을 내렸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관련 자료==&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910&amp;quot; height=&amp;quot;512&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I0BlBEAg0KY&amp;quot; title=&amp;quot;&amp;amp;#39;아관파천&amp;amp;#39;, 아내를 잃고 공포에 떨던 고종의 선택! 결국 본격적인 전쟁과 대립이 시작되다.. | 러일전쟁 | #벌거벗은세계사 #사피엔스&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20271&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3383 두산백과]&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개항부터_현재까지의_정치_교류]] [[분류:소금토마토]]&lt;br /&gt;
&lt;br /&gt;
==이전 문서==&lt;br /&gt;
아관파천(俄館播遷)은 1896년 2월 11일, 고종과 측근 인사들의 요청에 러시아공사가 동의하여 고종과 왕세자가 비밀리에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사건이다. 을미사변 이후 신변의 위협을 느끼던 고종과 측근 인사들의 요청에 러시아공사 베베르가 동의하여 비밀리에 고종과 왕세자가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사건이다. 아관파천으로 인해 친일 내각이 무너졌고, 고종은 경운궁 환궁 전 1년 동안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렀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1154&amp;quot; height=&amp;quot;564&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gjuUHlv68vg&amp;quot; title=&amp;quot;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 간 고종 &amp;amp;#39;아관 파천&amp;amp;#39; (역사만화 82화) [공부왕찐천재]&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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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분류:근대역사인물]]&lt;br /&gt;
[[분류:고종훈]]&lt;/div&gt;</summary>
		<author><name>소금토마토</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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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lt;/div&gt;</summary>
		<author><name>소금토마토</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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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아관파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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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06-22T13:44:4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소금토마토: &lt;/p&gt;
&lt;hr /&gt;
&lt;div&gt;[[파일:러시아 공사관.jpg|500px|]]&lt;br /&gt;
러시아 공사관의 모습이다.&lt;br /&gt;
&lt;br /&gt;
=='''요약'''==&lt;br /&gt;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 이후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과 왕세자가 1896년 2월 11일부터 약 1년간 조선의 왕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에 옮겨 거처한 사건.&amp;lt;/br&amp;gt;&lt;br /&gt;
&lt;br /&gt;
==배경==&lt;br /&gt;
을미사변(乙未事變) 이후 일본의 영향 아래에서 조직된 제4차 김홍집(金弘集) 내각은 1세 1원 연호(一世一元年號), 태양력 사용, 서울에 친위대(親衛隊)·시위대(侍衛隊), 지방에 진위대(鎭衛隊)를 두는 군제 개혁, 단발령의 실시 등의 개혁을 단행하였으나 명성황후의 시해와 단발령의 실시는 친일 내각과 그 배후세력인 일본에 대한 국민의 감정을 극단적으로 자극하여 전국 각지에서 의병항쟁이 일어났다. 당시 고종은 을미사변으로 사실상 경복궁에 감금된 상태였는데,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길 계획을 수립하였다. 먼저 이범진(李範晉)·이완용(李完用) 등 친러파 세력에게 러시아 공사 카를 베베르(Karl Ivanovich Veber)와 접선하도록 하여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기고자 하는 뜻을 전하게 하였다. 러시아는 고종의 뜻을 받아들였고, 인천에 와 있던 러시아 수병(水兵) 100여 명과 포(砲) 1문을 러시아 공사관의 방위를 강화시킨다는 명목으로 서울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친위대가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지방으로 이동한 틈을 이용하여, 2월 11일 새벽 국왕과 왕세자를 극비리에 정동(貞洞)에 있던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겼다. 당시 러시아는 아라사(俄羅斯)로 표기되어 이를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 불렀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한 고종은 친일 내각에 참여한 내각총리대신 김홍집·내부대신 유길준(兪吉濬)·농상공부대신 정병하(鄭秉夏)·군부대신 조희연(趙羲淵)·법부대신 장박(張博) 등을 역적으로 규정하고 그들을 체포하여 처형하도록 명령하였다. 흥분한 군중은 퇴청하던 김홍집·정병하를 살해하였고, 피신한 탁지부대신 어윤중(魚允中)은 다음날 용인에서 붙잡혀 살해되었다. 유길준·조희연·권형진(權瀅鎭)·우범선(禹範善)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잠적했던 외부대신 김윤식(金允植)은 결국 체포되어 제주도로 종신 유배당하였다.&lt;br /&gt;
&lt;br /&gt;
이후 고종은 박정양(朴定陽)·이완용·조병직(趙秉稷)·이윤용(李允用)·윤용구(尹用求)·이재정(李在正) 등 친러·친미파 인사로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였다. 이들은 의병항쟁을 불문에 부치고, 죄수들을 석방하는 등 민심 수습에 힘쓰는 한편, 일본식으로 개혁하였던 ‘내각’제도를 구제(舊制)인 ‘의정부’제로 환원 등을 시행하였다.&lt;br /&gt;
&lt;br /&gt;
또한 고종은 1896년 5월 러시아 니콜라이 2세(Nikolai Ⅱ)의 대관식에 민영환(閔泳煥)을 특사로 파견하여 러시아 군대와 군사 교관의 추가 파병, 3백만 엔의 차관, 전신선 설치 등을 요청하도록 하였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지만, 일본 군대는 여전히 서울에 주둔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러시아와 일본은 1896년 5월 베베르-고무라(小村壽太郎) 각서(서울의정서), 6월에 로바노프(Lobanovr)-야마가타(山縣有明) 의정서(모스크바의정서)를 체결하여 한반도에서의 균형을 합의하였다. 이에 고종의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러시아는 약간의 군사고문단을 민영환의 귀국길에 동행시키는데 그쳤다. 고종은 이들을 중심으로 800여 명을 선발하여 호위병으로 훈련시켜 환궁에 대비하였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결과와 영향==&lt;br /&gt;
러시아는 아관파천을 계기로 조선에 압력을 가하여 압록강 연안과 울릉도의 삼림채벌권을 비롯하여 경원(慶源)·종성(鐘城)의 광산채굴권, 경원전신선(京元電信線)을 시베리아 전선에 연결하는 권리, 인천 월미도 저탄소 설치권 등 경제적 이권을 차지하였다. 그러자 최혜국대우를 통상 조약에 포함시켰던 구미열강(歐美列强)도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여 경인(京仁) 및 경의선(京義線) 철도부설권 등 중요 이권이 값싼 조건으로 외국에 넘어갔다. 아울러 정부 각부에 러시아인 고문이 초빙되었고, 중앙 군제와 무기가 러시아식으로 개편되어 러시아의 영향력이 확대되었다.&lt;br /&gt;
&lt;br /&gt;
러시아 등 외국의 이권 취득은 러시아에 대한 여론을 악화시켰다. 또한 국왕의 외국 공사관 거주에 따른 국격의 손상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독립협회(獨立協會) 등은 고종의 환궁을 호소하였다. 그리고 1897년 2월 25일, 고종은 호위를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 갖추어졌다고 판단하여 러시아 공관을 떠나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慶運宮, 지금의 덕수궁)으로 환궁하였다. 이로써 약 1년간의 아관파천이 막을 내렸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관련 자료==&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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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20271&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3383 두산백과]&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개항부터_현재까지의_정치_교류]] [[분류:소금토마토]]&lt;br /&gt;
&lt;br /&gt;
==이전 문서==&lt;br /&gt;
아관파천(俄館播遷)은 1896년 2월 11일, 고종과 측근 인사들의 요청에 러시아공사가 동의하여 고종과 왕세자가 비밀리에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사건이다. 을미사변 이후 신변의 위협을 느끼던 고종과 측근 인사들의 요청에 러시아공사 베베르가 동의하여 비밀리에 고종과 왕세자가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사건이다. 아관파천으로 인해 친일 내각이 무너졌고, 고종은 경운궁 환궁 전 1년 동안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렀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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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분류:근대역사인물]]&lt;br /&gt;
[[분류:고종훈]]&lt;/div&gt;</summary>
		<author><name>소금토마토</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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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파일:러시아 공사관.jpeg</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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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소금토마토: &lt;/p&gt;
&lt;hr /&gt;
&lt;div&gt;&lt;/div&gt;</summary>
		<author><name>소금토마토</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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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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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아관파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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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06-22T13:43:1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소금토마토: /* 관련 자료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lt;br /&gt;
=='''요약'''==&lt;br /&gt;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 이후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과 왕세자가 1896년 2월 11일부터 약 1년간 조선의 왕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에 옮겨 거처한 사건.&amp;lt;/br&amp;gt;&lt;br /&gt;
&lt;br /&gt;
==배경==&lt;br /&gt;
을미사변(乙未事變) 이후 일본의 영향 아래에서 조직된 제4차 김홍집(金弘集) 내각은 1세 1원 연호(一世一元年號), 태양력 사용, 서울에 친위대(親衛隊)·시위대(侍衛隊), 지방에 진위대(鎭衛隊)를 두는 군제 개혁, 단발령의 실시 등의 개혁을 단행하였으나 명성황후의 시해와 단발령의 실시는 친일 내각과 그 배후세력인 일본에 대한 국민의 감정을 극단적으로 자극하여 전국 각지에서 의병항쟁이 일어났다. 당시 고종은 을미사변으로 사실상 경복궁에 감금된 상태였는데,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길 계획을 수립하였다. 먼저 이범진(李範晉)·이완용(李完用) 등 친러파 세력에게 러시아 공사 카를 베베르(Karl Ivanovich Veber)와 접선하도록 하여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기고자 하는 뜻을 전하게 하였다. 러시아는 고종의 뜻을 받아들였고, 인천에 와 있던 러시아 수병(水兵) 100여 명과 포(砲) 1문을 러시아 공사관의 방위를 강화시킨다는 명목으로 서울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친위대가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지방으로 이동한 틈을 이용하여, 2월 11일 새벽 국왕과 왕세자를 극비리에 정동(貞洞)에 있던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겼다. 당시 러시아는 아라사(俄羅斯)로 표기되어 이를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 불렀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한 고종은 친일 내각에 참여한 내각총리대신 김홍집·내부대신 유길준(兪吉濬)·농상공부대신 정병하(鄭秉夏)·군부대신 조희연(趙羲淵)·법부대신 장박(張博) 등을 역적으로 규정하고 그들을 체포하여 처형하도록 명령하였다. 흥분한 군중은 퇴청하던 김홍집·정병하를 살해하였고, 피신한 탁지부대신 어윤중(魚允中)은 다음날 용인에서 붙잡혀 살해되었다. 유길준·조희연·권형진(權瀅鎭)·우범선(禹範善)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잠적했던 외부대신 김윤식(金允植)은 결국 체포되어 제주도로 종신 유배당하였다.&lt;br /&gt;
&lt;br /&gt;
이후 고종은 박정양(朴定陽)·이완용·조병직(趙秉稷)·이윤용(李允用)·윤용구(尹用求)·이재정(李在正) 등 친러·친미파 인사로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였다. 이들은 의병항쟁을 불문에 부치고, 죄수들을 석방하는 등 민심 수습에 힘쓰는 한편, 일본식으로 개혁하였던 ‘내각’제도를 구제(舊制)인 ‘의정부’제로 환원 등을 시행하였다.&lt;br /&gt;
&lt;br /&gt;
또한 고종은 1896년 5월 러시아 니콜라이 2세(Nikolai Ⅱ)의 대관식에 민영환(閔泳煥)을 특사로 파견하여 러시아 군대와 군사 교관의 추가 파병, 3백만 엔의 차관, 전신선 설치 등을 요청하도록 하였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지만, 일본 군대는 여전히 서울에 주둔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러시아와 일본은 1896년 5월 베베르-고무라(小村壽太郎) 각서(서울의정서), 6월에 로바노프(Lobanovr)-야마가타(山縣有明) 의정서(모스크바의정서)를 체결하여 한반도에서의 균형을 합의하였다. 이에 고종의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러시아는 약간의 군사고문단을 민영환의 귀국길에 동행시키는데 그쳤다. 고종은 이들을 중심으로 800여 명을 선발하여 호위병으로 훈련시켜 환궁에 대비하였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결과와 영향==&lt;br /&gt;
러시아는 아관파천을 계기로 조선에 압력을 가하여 압록강 연안과 울릉도의 삼림채벌권을 비롯하여 경원(慶源)·종성(鐘城)의 광산채굴권, 경원전신선(京元電信線)을 시베리아 전선에 연결하는 권리, 인천 월미도 저탄소 설치권 등 경제적 이권을 차지하였다. 그러자 최혜국대우를 통상 조약에 포함시켰던 구미열강(歐美列强)도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여 경인(京仁) 및 경의선(京義線) 철도부설권 등 중요 이권이 값싼 조건으로 외국에 넘어갔다. 아울러 정부 각부에 러시아인 고문이 초빙되었고, 중앙 군제와 무기가 러시아식으로 개편되어 러시아의 영향력이 확대되었다.&lt;br /&gt;
&lt;br /&gt;
러시아 등 외국의 이권 취득은 러시아에 대한 여론을 악화시켰다. 또한 국왕의 외국 공사관 거주에 따른 국격의 손상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독립협회(獨立協會) 등은 고종의 환궁을 호소하였다. 그리고 1897년 2월 25일, 고종은 호위를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 갖추어졌다고 판단하여 러시아 공관을 떠나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慶運宮, 지금의 덕수궁)으로 환궁하였다. 이로써 약 1년간의 아관파천이 막을 내렸다. &amp;lt;/br&amp;g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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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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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lt;br /&gt;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20271&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3383 두산백과]&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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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분류:개항부터_현재까지의_정치_교류]] [[분류:소금토마토]]&lt;br /&gt;
&lt;br /&gt;
==이전 문서==&lt;br /&gt;
아관파천(俄館播遷)은 1896년 2월 11일, 고종과 측근 인사들의 요청에 러시아공사가 동의하여 고종과 왕세자가 비밀리에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사건이다. 을미사변 이후 신변의 위협을 느끼던 고종과 측근 인사들의 요청에 러시아공사 베베르가 동의하여 비밀리에 고종과 왕세자가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사건이다. 아관파천으로 인해 친일 내각이 무너졌고, 고종은 경운궁 환궁 전 1년 동안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렀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1154&amp;quot; height=&amp;quot;564&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gjuUHlv68vg&amp;quot; title=&amp;quot;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 간 고종 &amp;amp;#39;아관 파천&amp;amp;#39; (역사만화 82화) [공부왕찐천재]&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분류:근대역사인물]]&lt;br /&gt;
[[분류:고종훈]]&lt;/div&gt;</summary>
		<author><name>소금토마토</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5%84%EA%B4%80%ED%8C%8C%EC%B2%9C&amp;diff=42796</id>
		<title>아관파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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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06-22T13:42:4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소금토마토: /* 요약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lt;br /&gt;
=='''요약'''==&lt;br /&gt;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 이후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과 왕세자가 1896년 2월 11일부터 약 1년간 조선의 왕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에 옮겨 거처한 사건.&amp;lt;/br&amp;gt;&lt;br /&gt;
&lt;br /&gt;
==배경==&lt;br /&gt;
을미사변(乙未事變) 이후 일본의 영향 아래에서 조직된 제4차 김홍집(金弘集) 내각은 1세 1원 연호(一世一元年號), 태양력 사용, 서울에 친위대(親衛隊)·시위대(侍衛隊), 지방에 진위대(鎭衛隊)를 두는 군제 개혁, 단발령의 실시 등의 개혁을 단행하였으나 명성황후의 시해와 단발령의 실시는 친일 내각과 그 배후세력인 일본에 대한 국민의 감정을 극단적으로 자극하여 전국 각지에서 의병항쟁이 일어났다. 당시 고종은 을미사변으로 사실상 경복궁에 감금된 상태였는데,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길 계획을 수립하였다. 먼저 이범진(李範晉)·이완용(李完用) 등 친러파 세력에게 러시아 공사 카를 베베르(Karl Ivanovich Veber)와 접선하도록 하여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기고자 하는 뜻을 전하게 하였다. 러시아는 고종의 뜻을 받아들였고, 인천에 와 있던 러시아 수병(水兵) 100여 명과 포(砲) 1문을 러시아 공사관의 방위를 강화시킨다는 명목으로 서울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친위대가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지방으로 이동한 틈을 이용하여, 2월 11일 새벽 국왕과 왕세자를 극비리에 정동(貞洞)에 있던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겼다. 당시 러시아는 아라사(俄羅斯)로 표기되어 이를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 불렀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한 고종은 친일 내각에 참여한 내각총리대신 김홍집·내부대신 유길준(兪吉濬)·농상공부대신 정병하(鄭秉夏)·군부대신 조희연(趙羲淵)·법부대신 장박(張博) 등을 역적으로 규정하고 그들을 체포하여 처형하도록 명령하였다. 흥분한 군중은 퇴청하던 김홍집·정병하를 살해하였고, 피신한 탁지부대신 어윤중(魚允中)은 다음날 용인에서 붙잡혀 살해되었다. 유길준·조희연·권형진(權瀅鎭)·우범선(禹範善)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잠적했던 외부대신 김윤식(金允植)은 결국 체포되어 제주도로 종신 유배당하였다.&lt;br /&gt;
&lt;br /&gt;
이후 고종은 박정양(朴定陽)·이완용·조병직(趙秉稷)·이윤용(李允用)·윤용구(尹用求)·이재정(李在正) 등 친러·친미파 인사로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였다. 이들은 의병항쟁을 불문에 부치고, 죄수들을 석방하는 등 민심 수습에 힘쓰는 한편, 일본식으로 개혁하였던 ‘내각’제도를 구제(舊制)인 ‘의정부’제로 환원 등을 시행하였다.&lt;br /&gt;
&lt;br /&gt;
또한 고종은 1896년 5월 러시아 니콜라이 2세(Nikolai Ⅱ)의 대관식에 민영환(閔泳煥)을 특사로 파견하여 러시아 군대와 군사 교관의 추가 파병, 3백만 엔의 차관, 전신선 설치 등을 요청하도록 하였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지만, 일본 군대는 여전히 서울에 주둔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러시아와 일본은 1896년 5월 베베르-고무라(小村壽太郎) 각서(서울의정서), 6월에 로바노프(Lobanovr)-야마가타(山縣有明) 의정서(모스크바의정서)를 체결하여 한반도에서의 균형을 합의하였다. 이에 고종의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러시아는 약간의 군사고문단을 민영환의 귀국길에 동행시키는데 그쳤다. 고종은 이들을 중심으로 800여 명을 선발하여 호위병으로 훈련시켜 환궁에 대비하였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결과와 영향==&lt;br /&gt;
러시아는 아관파천을 계기로 조선에 압력을 가하여 압록강 연안과 울릉도의 삼림채벌권을 비롯하여 경원(慶源)·종성(鐘城)의 광산채굴권, 경원전신선(京元電信線)을 시베리아 전선에 연결하는 권리, 인천 월미도 저탄소 설치권 등 경제적 이권을 차지하였다. 그러자 최혜국대우를 통상 조약에 포함시켰던 구미열강(歐美列强)도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여 경인(京仁) 및 경의선(京義線) 철도부설권 등 중요 이권이 값싼 조건으로 외국에 넘어갔다. 아울러 정부 각부에 러시아인 고문이 초빙되었고, 중앙 군제와 무기가 러시아식으로 개편되어 러시아의 영향력이 확대되었다.&lt;br /&gt;
&lt;br /&gt;
러시아 등 외국의 이권 취득은 러시아에 대한 여론을 악화시켰다. 또한 국왕의 외국 공사관 거주에 따른 국격의 손상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독립협회(獨立協會) 등은 고종의 환궁을 호소하였다. 그리고 1897년 2월 25일, 고종은 호위를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 갖추어졌다고 판단하여 러시아 공관을 떠나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慶運宮, 지금의 덕수궁)으로 환궁하였다. 이로써 약 1년간의 아관파천이 막을 내렸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관련 자료==&lt;br /&gt;
[[파일:운요호사진.jpeg|500px|운요호]] &amp;lt;/br&amp;gt;&lt;br /&gt;
위 사진은 운요호의 사진이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20271&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3383 두산백과]&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개항부터_현재까지의_정치_교류]] [[분류:소금토마토]]&lt;br /&gt;
&lt;br /&gt;
==이전 문서==&lt;br /&gt;
아관파천(俄館播遷)은 1896년 2월 11일, 고종과 측근 인사들의 요청에 러시아공사가 동의하여 고종과 왕세자가 비밀리에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사건이다. 을미사변 이후 신변의 위협을 느끼던 고종과 측근 인사들의 요청에 러시아공사 베베르가 동의하여 비밀리에 고종과 왕세자가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사건이다. 아관파천으로 인해 친일 내각이 무너졌고, 고종은 경운궁 환궁 전 1년 동안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렀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1154&amp;quot; height=&amp;quot;564&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gjuUHlv68vg&amp;quot; title=&amp;quot;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 간 고종 &amp;amp;#39;아관 파천&amp;amp;#39; (역사만화 82화) [공부왕찐천재]&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분류:근대역사인물]]&lt;br /&gt;
[[분류:고종훈]]&lt;/div&gt;</summary>
		<author><name>소금토마토</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83%89%EC%A0%84_%EC%A2%85%EC%8B%9D&amp;diff=42795</id>
		<title>냉전 종식</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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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06-22T13:41:5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소금토마토: &lt;/p&gt;
&lt;hr /&gt;
&lt;div&gt;[[파일:냉전 종식.jpg|500px|냉전 종식]] &amp;lt;/br&amp;gt;&lt;br /&gt;
미국의 부시 대통령(왼쪽)과 소련의 고르바초프(오른쪽) 서기장의 모습이다.&lt;br /&gt;
&lt;br /&gt;
==개요==&lt;br /&gt;
원칙적으로는 탈냉전 시기 이전 냉전이 종식되어가는 시기를 가리키나, 대한민국의 국제 관계 서술을 위하여 탈냉전 시기까지 포함하였다. 탈냉전 시기는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권의 붕괴와 함께 냉전이 종식되면서 나타난 시대를 가리킨다. 시기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나, 대체로 대한민국의 제6공화국 시작과 맞물린다고 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배경==&lt;br /&gt;
===닉슨 독트린===&lt;br /&gt;
베트남 전쟁에서 상당한 피해를 입은 후, 미국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미국이 소련을 군사적으로 압도하지 못한다는 판단 아래 세계에서 미국의 역할을 이전보다 축소시키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외교정책을 타국 분쟁에 직접 개입하는 방식에서 동맹구과의 협력을 통해 간접 개입하는 것으로 선회하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lt;br /&gt;
&lt;br /&gt;
 ① 미국은 앞으로 베트남전쟁과 같은 군사적 개입을 피한다.&lt;br /&gt;
&lt;br /&gt;
 ② 미국은 아시아 제국(諸國)과의 조약상 약속을 지키지만, 강대국의 핵에 의한 위협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내란이나 침략에 대하여 아시아 각국이 스스로 협력하여 그에 대처하여야 할 것이다.&lt;br /&gt;
&lt;br /&gt;
 ③ 미국은 ‘태평양 국가’로서 그 지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계속하지만 직접적·군사적인 또는 정치적인 과잉개입은 하지 않으며 자조(自助)의 의사를 가진 아시아 제국의 자주적 행동을 측면 지원한다.&lt;br /&gt;
&lt;br /&gt;
 ④ 아시아 제국에 대한 원조는 경제중심으로 바꾸며 다수국간 방식을 강화하여 미국의 과중한 부담을 피한다.&lt;br /&gt;
&lt;br /&gt;
 ⑤ 아시아 제국이 5∼10년의 장래에는 상호안전보장을 위한 군사기구를 만들기를 기대한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각국의 안보는 스스로 우선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후 미국은 공산주의 진영에 대해 우호적 태도를 취했고, 이후 1972년 미국과 중국의 회담이 이어지면서 본격적으로 냉전 종식이 시작되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냉전 종식==&lt;br /&gt;
===몰타 회담===&lt;br /&gt;
1989년 12월에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와 소련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 간의 미소정상회담을 가리킨다. 미국과 소련 간 적대 행위의 중단을 그 내용으로 하며, 공식적으로 냉전을 종식시킨 회담으로 평가받는다. 이 회담에서 미소 양국 간 공식적으로 조인된 조약은 없으나, 양국 모두 군비 축소 및 군사 규모 축소, 미소 간 평화와 화합, 경제협력, 남미와 중동의 지역분쟁해소 등에 대해 동의하였다. 비록 여러 현안에 대해 원칙적인 의견을 교환한 것이며 구체적 협의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으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새로운 국제질서의 방향을 제시한 회담으로 여겨진다.&lt;br /&gt;
===공산권의 붕괴===&lt;br /&gt;
미하일 고르바초프 집권 당시 소련의 경제 체계는 굉장히 약화되어 있었다. 소련 경제 개선을 위해 1987년부터 다양한 개혁을 시도하였지만 쉽지 않았다. 이 틈을 타서 1989년 동독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이에 따라 바르샤바 조약기구 국가들의 붕괴가 시작되었다. 같은 해에 우크라이나가 독립하였고, 폴란드, 루마니아, 체코, 유고슬라비아 등 동유럽 국가들은 1990년 들어 점차 자유선거르 시행하고 전후 체제에서 일탈하였으며, 알바니아에서도 1991년 자유선거가 이뤄지며 탈공산화를 이룩했다. 소련 역시 1991년 소련 건국의 주요자들이 퇴직하며 해체 수순을 밟았고, 냉전의 두 주체 중 하나였던 소련이 사라지면서 냉전이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영향==&lt;br /&gt;
===러시아===&lt;br /&gt;
당시 대한민국 또한 1990년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이 시행되고 있었고, 냉전의 종식 분위기에 따라 대한민국과 소련은 갈등 관계를 해소 후 수교하게 된다. 또한 그동안 한국의 UN 가입에 반대하던 소련이 한소수교로 인해 더 이상 가입을 반대하지 않음으로써 1991년 한국의 UN 가입 또한 이루어졌다. 이후 소련이 해체하며 한소수교는 한러수교로 승계되게 된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중국===&lt;br /&gt;
소련과의 수교에 이어 중국과의 수교 역시 이어졌다. 1991년 한국과 중국은 무역대표부를 설치해 새로운 교류의 시작을 알렸다. 중국과의 관계에 있어 걸림돌이 되던 남북관계는 1991년 남북한 UN 공동 가입 이후 남북한 기본합의서 채택에 따라 개선되었다. 이에 따라 1992년 4월에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수교 협상이 개시되었고 같은 해 8월 24일 수교를 확정지었다. 다만 한중수교의 후속 조치로 중국 측이 요구한 한국과 대만의 단교가 뒤따를 수 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관련 영상==&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910&amp;quot; height=&amp;quot;512&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U2a0Z3V_dOA&amp;quot; title=&amp;quot;&amp;amp;#39;미하일 고르바초프&amp;amp;#39; 소련의 해체와 냉전 종식의 주역 KBS 080812 방송&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amp;lt;&amp;lt;닉슨 독트린과 몰타 회담, 한소수교에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078826&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1657 두산백과][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094301&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1659 두산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67578&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3385 두산백과] 참조&amp;gt;&amp;gt;&lt;br /&gt;
&amp;lt;&amp;lt;공산권 붕괴에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726927&amp;amp;cid=42140&amp;amp;categoryId=42140 21세기 정치학대사전] 참조&amp;gt;&amp;gt;&lt;br /&gt;
&amp;lt;&amp;lt;한중 수교에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374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amp;gt;&amp;gt;&lt;br /&gt;
&lt;br /&gt;
==분류==&lt;br /&gt;
[[분류:개항부터_현재까지의_정치_교류]] [[분류:소금토마토]]&lt;/div&gt;</summary>
		<author><name>소금토마토</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D%8C%8C%EC%9D%BC:%EB%83%89%EC%A0%84_%EC%A2%85%EC%8B%9D.jpeg&amp;diff=42794</id>
		<title>파일:냉전 종식.jpeg</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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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06-22T13:41:3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소금토마토: &lt;/p&gt;
&lt;hr /&gt;
&lt;div&gt;&lt;/div&gt;</summary>
		<author><name>소금토마토</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83%89%EC%A0%84_%EC%A2%85%EC%8B%9D&amp;diff=42792</id>
		<title>냉전 종식</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83%89%EC%A0%84_%EC%A2%85%EC%8B%9D&amp;diff=42792"/>
		<updated>2024-06-22T13:40:5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소금토마토: /*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파일:냉전 종식.jpeg|500px|냉전 종식]] &amp;lt;/br&amp;gt;&lt;br /&gt;
미국의 부시 대통령(왼쪽)과 소련의 고르바초프(오른쪽) 서기장의 모습이다.&lt;br /&gt;
&lt;br /&gt;
==개요==&lt;br /&gt;
원칙적으로는 탈냉전 시기 이전 냉전이 종식되어가는 시기를 가리키나, 대한민국의 국제 관계 서술을 위하여 탈냉전 시기까지 포함하였다. 탈냉전 시기는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권의 붕괴와 함께 냉전이 종식되면서 나타난 시대를 가리킨다. 시기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나, 대체로 대한민국의 제6공화국 시작과 맞물린다고 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배경==&lt;br /&gt;
===닉슨 독트린===&lt;br /&gt;
베트남 전쟁에서 상당한 피해를 입은 후, 미국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미국이 소련을 군사적으로 압도하지 못한다는 판단 아래 세계에서 미국의 역할을 이전보다 축소시키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외교정책을 타국 분쟁에 직접 개입하는 방식에서 동맹구과의 협력을 통해 간접 개입하는 것으로 선회하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lt;br /&gt;
&lt;br /&gt;
 ① 미국은 앞으로 베트남전쟁과 같은 군사적 개입을 피한다.&lt;br /&gt;
&lt;br /&gt;
 ② 미국은 아시아 제국(諸國)과의 조약상 약속을 지키지만, 강대국의 핵에 의한 위협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내란이나 침략에 대하여 아시아 각국이 스스로 협력하여 그에 대처하여야 할 것이다.&lt;br /&gt;
&lt;br /&gt;
 ③ 미국은 ‘태평양 국가’로서 그 지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계속하지만 직접적·군사적인 또는 정치적인 과잉개입은 하지 않으며 자조(自助)의 의사를 가진 아시아 제국의 자주적 행동을 측면 지원한다.&lt;br /&gt;
&lt;br /&gt;
 ④ 아시아 제국에 대한 원조는 경제중심으로 바꾸며 다수국간 방식을 강화하여 미국의 과중한 부담을 피한다.&lt;br /&gt;
&lt;br /&gt;
 ⑤ 아시아 제국이 5∼10년의 장래에는 상호안전보장을 위한 군사기구를 만들기를 기대한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각국의 안보는 스스로 우선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후 미국은 공산주의 진영에 대해 우호적 태도를 취했고, 이후 1972년 미국과 중국의 회담이 이어지면서 본격적으로 냉전 종식이 시작되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냉전 종식==&lt;br /&gt;
===몰타 회담===&lt;br /&gt;
1989년 12월에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와 소련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 간의 미소정상회담을 가리킨다. 미국과 소련 간 적대 행위의 중단을 그 내용으로 하며, 공식적으로 냉전을 종식시킨 회담으로 평가받는다. 이 회담에서 미소 양국 간 공식적으로 조인된 조약은 없으나, 양국 모두 군비 축소 및 군사 규모 축소, 미소 간 평화와 화합, 경제협력, 남미와 중동의 지역분쟁해소 등에 대해 동의하였다. 비록 여러 현안에 대해 원칙적인 의견을 교환한 것이며 구체적 협의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으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새로운 국제질서의 방향을 제시한 회담으로 여겨진다.&lt;br /&gt;
===공산권의 붕괴===&lt;br /&gt;
미하일 고르바초프 집권 당시 소련의 경제 체계는 굉장히 약화되어 있었다. 소련 경제 개선을 위해 1987년부터 다양한 개혁을 시도하였지만 쉽지 않았다. 이 틈을 타서 1989년 동독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이에 따라 바르샤바 조약기구 국가들의 붕괴가 시작되었다. 같은 해에 우크라이나가 독립하였고, 폴란드, 루마니아, 체코, 유고슬라비아 등 동유럽 국가들은 1990년 들어 점차 자유선거르 시행하고 전후 체제에서 일탈하였으며, 알바니아에서도 1991년 자유선거가 이뤄지며 탈공산화를 이룩했다. 소련 역시 1991년 소련 건국의 주요자들이 퇴직하며 해체 수순을 밟았고, 냉전의 두 주체 중 하나였던 소련이 사라지면서 냉전이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영향==&lt;br /&gt;
===러시아===&lt;br /&gt;
당시 대한민국 또한 1990년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이 시행되고 있었고, 냉전의 종식 분위기에 따라 대한민국과 소련은 갈등 관계를 해소 후 수교하게 된다. 또한 그동안 한국의 UN 가입에 반대하던 소련이 한소수교로 인해 더 이상 가입을 반대하지 않음으로써 1991년 한국의 UN 가입 또한 이루어졌다. 이후 소련이 해체하며 한소수교는 한러수교로 승계되게 된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중국===&lt;br /&gt;
소련과의 수교에 이어 중국과의 수교 역시 이어졌다. 1991년 한국과 중국은 무역대표부를 설치해 새로운 교류의 시작을 알렸다. 중국과의 관계에 있어 걸림돌이 되던 남북관계는 1991년 남북한 UN 공동 가입 이후 남북한 기본합의서 채택에 따라 개선되었다. 이에 따라 1992년 4월에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수교 협상이 개시되었고 같은 해 8월 24일 수교를 확정지었다. 다만 한중수교의 후속 조치로 중국 측이 요구한 한국과 대만의 단교가 뒤따를 수 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관련 영상==&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910&amp;quot; height=&amp;quot;512&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U2a0Z3V_dOA&amp;quot; title=&amp;quot;&amp;amp;#39;미하일 고르바초프&amp;amp;#39; 소련의 해체와 냉전 종식의 주역 KBS 080812 방송&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amp;lt;&amp;lt;닉슨 독트린과 몰타 회담, 한소수교에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078826&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1657 두산백과][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094301&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1659 두산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67578&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3385 두산백과] 참조&amp;gt;&amp;gt;&lt;br /&gt;
&amp;lt;&amp;lt;공산권 붕괴에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726927&amp;amp;cid=42140&amp;amp;categoryId=42140 21세기 정치학대사전] 참조&amp;gt;&amp;gt;&lt;br /&gt;
&amp;lt;&amp;lt;한중 수교에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374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amp;gt;&amp;gt;&lt;br /&gt;
&lt;br /&gt;
==분류==&lt;br /&gt;
[[분류:개항부터_현재까지의_정치_교류]] [[분류:소금토마토]]&lt;/div&gt;</summary>
		<author><name>소금토마토</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83%89%EC%A0%84_%EC%A2%85%EC%8B%9D&amp;diff=42791</id>
		<title>냉전 종식</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83%89%EC%A0%84_%EC%A2%85%EC%8B%9D&amp;diff=42791"/>
		<updated>2024-06-22T13:40:4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소금토마토: /*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파일:냉전 종식.jpeg|500px|냉전 종식]] &amp;lt;/br&amp;gt;&lt;br /&gt;
미국의 부시 대통령(왼쪽)과 소련의 고르바초프(오른쪽) 서기장의 모습이다.&lt;br /&gt;
&lt;br /&gt;
==개요==&lt;br /&gt;
원칙적으로는 탈냉전 시기 이전 냉전이 종식되어가는 시기를 가리키나, 대한민국의 국제 관계 서술을 위하여 탈냉전 시기까지 포함하였다. 탈냉전 시기는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권의 붕괴와 함께 냉전이 종식되면서 나타난 시대를 가리킨다. 시기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나, 대체로 대한민국의 제6공화국 시작과 맞물린다고 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배경==&lt;br /&gt;
===닉슨 독트린===&lt;br /&gt;
베트남 전쟁에서 상당한 피해를 입은 후, 미국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미국이 소련을 군사적으로 압도하지 못한다는 판단 아래 세계에서 미국의 역할을 이전보다 축소시키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외교정책을 타국 분쟁에 직접 개입하는 방식에서 동맹구과의 협력을 통해 간접 개입하는 것으로 선회하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lt;br /&gt;
&lt;br /&gt;
 ① 미국은 앞으로 베트남전쟁과 같은 군사적 개입을 피한다.&lt;br /&gt;
&lt;br /&gt;
 ② 미국은 아시아 제국(諸國)과의 조약상 약속을 지키지만, 강대국의 핵에 의한 위협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내란이나 침략에 대하여 아시아 각국이 스스로 협력하여 그에 대처하여야 할 것이다.&lt;br /&gt;
&lt;br /&gt;
 ③ 미국은 ‘태평양 국가’로서 그 지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계속하지만 직접적·군사적인 또는 정치적인 과잉개입은 하지 않으며 자조(自助)의 의사를 가진 아시아 제국의 자주적 행동을 측면 지원한다.&lt;br /&gt;
&lt;br /&gt;
 ④ 아시아 제국에 대한 원조는 경제중심으로 바꾸며 다수국간 방식을 강화하여 미국의 과중한 부담을 피한다.&lt;br /&gt;
&lt;br /&gt;
 ⑤ 아시아 제국이 5∼10년의 장래에는 상호안전보장을 위한 군사기구를 만들기를 기대한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lt;br /&gt;
각국의 안보는 스스로 우선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후 미국은 공산주의 진영에 대해 우호적 태도를 취했고, 이후 1972년 미국과 중국의 회담이 이어지면서 본격적으로 냉전 종식이 시작되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냉전 종식==&lt;br /&gt;
===몰타 회담===&lt;br /&gt;
1989년 12월에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와 소련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 간의 미소정상회담을 가리킨다. 미국과 소련 간 적대 행위의 중단을 그 내용으로 하며, 공식적으로 냉전을 종식시킨 회담으로 평가받는다. 이 회담에서 미소 양국 간 공식적으로 조인된 조약은 없으나, 양국 모두 군비 축소 및 군사 규모 축소, 미소 간 평화와 화합, 경제협력, 남미와 중동의 지역분쟁해소 등에 대해 동의하였다. 비록 여러 현안에 대해 원칙적인 의견을 교환한 것이며 구체적 협의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으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새로운 국제질서의 방향을 제시한 회담으로 여겨진다.&lt;br /&gt;
===공산권의 붕괴===&lt;br /&gt;
미하일 고르바초프 집권 당시 소련의 경제 체계는 굉장히 약화되어 있었다. 소련 경제 개선을 위해 1987년부터 다양한 개혁을 시도하였지만 쉽지 않았다. 이 틈을 타서 1989년 동독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이에 따라 바르샤바 조약기구 국가들의 붕괴가 시작되었다. 같은 해에 우크라이나가 독립하였고, 폴란드, 루마니아, 체코, 유고슬라비아 등 동유럽 국가들은 1990년 들어 점차 자유선거르 시행하고 전후 체제에서 일탈하였으며, 알바니아에서도 1991년 자유선거가 이뤄지며 탈공산화를 이룩했다. 소련 역시 1991년 소련 건국의 주요자들이 퇴직하며 해체 수순을 밟았고, 냉전의 두 주체 중 하나였던 소련이 사라지면서 냉전이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영향==&lt;br /&gt;
===러시아===&lt;br /&gt;
당시 대한민국 또한 1990년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이 시행되고 있었고, 냉전의 종식 분위기에 따라 대한민국과 소련은 갈등 관계를 해소 후 수교하게 된다. 또한 그동안 한국의 UN 가입에 반대하던 소련이 한소수교로 인해 더 이상 가입을 반대하지 않음으로써 1991년 한국의 UN 가입 또한 이루어졌다. 이후 소련이 해체하며 한소수교는 한러수교로 승계되게 된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중국===&lt;br /&gt;
소련과의 수교에 이어 중국과의 수교 역시 이어졌다. 1991년 한국과 중국은 무역대표부를 설치해 새로운 교류의 시작을 알렸다. 중국과의 관계에 있어 걸림돌이 되던 남북관계는 1991년 남북한 UN 공동 가입 이후 남북한 기본합의서 채택에 따라 개선되었다. 이에 따라 1992년 4월에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수교 협상이 개시되었고 같은 해 8월 24일 수교를 확정지었다. 다만 한중수교의 후속 조치로 중국 측이 요구한 한국과 대만의 단교가 뒤따를 수 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관련 영상==&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910&amp;quot; height=&amp;quot;512&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U2a0Z3V_dOA&amp;quot; title=&amp;quot;&amp;amp;#39;미하일 고르바초프&amp;amp;#39; 소련의 해체와 냉전 종식의 주역 KBS 080812 방송&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amp;lt;&amp;lt;닉슨 독트린과 몰타 회담, 한소 수교에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078826&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1657 두산백과][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094301&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1659 두산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67578&amp;amp;cid=40942&amp;amp;categoryId=33385 두산백과] 참조&amp;gt;&amp;gt;&lt;br /&gt;
&amp;lt;&amp;lt;공산권 붕괴에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726927&amp;amp;cid=42140&amp;amp;categoryId=42140 21세기 정치학대사전] 참조&amp;gt;&amp;gt;&lt;br /&gt;
&amp;lt;&amp;lt;한중 수교에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374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amp;gt;&amp;gt;&lt;br /&gt;
&lt;br /&gt;
==분류==&lt;br /&gt;
[[분류:개항부터_현재까지의_정치_교류]] [[분류:소금토마토]]&lt;/div&gt;</summary>
		<author><name>소금토마토</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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