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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dh_edu - 사용자 기여 [ko]</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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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기밀문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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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2T05:45:5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딩잉잉: /* 마인드맵 */&lt;/p&gt;
&lt;hr /&gt;
&lt;div&gt;=='''컨텐츠 주제'''==&lt;br /&gt;
&lt;br /&gt;
[[파일:시위대.png|400픽셀|center]][[파일:이한열사진.jpeg|400픽셀|center]][[파일:진압.png|400픽셀|center]]&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amp;lt;big&amp;gt;'''&amp;lt;span style=&amp;quot;color:#CD0000&amp;quot;&amp;gt;&amp;lt;big&amp;gt;&amp;lt;big&amp;gt;투쟁의 불꽃, 자유의 환호&amp;lt;/big&amp;gt;&amp;lt;/big&amp;gt;&amp;lt;/span&amp;gt;'''&amp;lt;br/&amp;gt;&amp;lt;br/&amp;gt;&lt;br /&gt;
''대한민국은 시민들의 투쟁과 희생을 거쳐, 피와 땀으로 민주화를 이룩하였습니다.''&amp;lt;br/&amp;gt;&lt;br /&gt;
''그들은 어둠을 밝히기 위해 항거의 불꽃을 태웠고, 그 불꽃은 자유를 외쳤으며, 그 외침은 세상을 움직였습니다.''&amp;lt;br/&amp;gt;&lt;br /&gt;
''이 «기밀문서»에는 당신이 미처 몰랐던 그 때의 열기와 의지가 실려있습니다.''&amp;lt;br/&amp;gt;&lt;br /&gt;
''함께, 그 뜨거운 페이지를 열어보시겠습니까?''&amp;lt;/span&amp;gt;&amp;lt;/big&amp;gt;&amp;lt;/div&amp;gt;&lt;br /&gt;
&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이나자키로빈]]&lt;br /&gt;
[[딩잉잉]]&lt;br /&gt;
&lt;br /&gt;
=='''팀원'''==&lt;br /&gt;
*오현지(2022131143) [[뎐]]&amp;lt;br/&amp;gt;&lt;br /&gt;
*김여원(2023130209) [[이나자키로빈]]&amp;lt;br/&amp;gt;&lt;br /&gt;
*김하은(2022131345) [[호빵이👻]]&amp;lt;br/&amp;gt;&lt;br /&gt;
*박정원(2023130350) [[•ᴗ•]]&amp;lt;br/&amp;gt;&lt;br /&gt;
*최필중(2023130216) [[딩잉잉]]&amp;lt;br/&amp;gt;&lt;br /&gt;
&lt;br /&gt;
=='''기획의도'''==&lt;br /&gt;
===기획배경===&lt;br /&gt;
1945년 광복 이후 대한민국 국민들은 자유민주국가로서의 미래를 기대했으나 실상은 그러지 못했다.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보여주듯 현재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는 그것을 누리지 못한 앞선 세대들의 목숨을 바친 항쟁의 대가이다. 민주항쟁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의 핵심 동력이었다. 오늘날 우리나라 민주의식의 중요한 기둥이 되는 네 가지 항쟁을 선별하고 각 항쟁의 배경, 전개과정, 의의를 비롯해 세부적이고 자세한 내용에 대한 기사를 작성한다.&lt;br /&gt;
===기획목적===&lt;br /&gt;
작금의 현실까지 오기에는 수없이 많은 투쟁이 있었지만 4.19혁명, 부마항쟁, 5.18민주항쟁, 6월민주항쟁이라는 네 가지 사건을 살펴보기로 한 것은 가장 많이 다뤄지고, 가장 많이 알려진 사건이기 때문이다. 관련된 사건과 역사 인물들에 대해 자세히 적어 내어 민주항쟁의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지 않으면 알기 힘든 각 민주항쟁의 자세한 내막을 밝혀낸다.&lt;br /&gt;
===기대하는 바===&lt;br /&gt;
타임라인과 온톨로지를 활용해 내용의 전반적인 이해를 돕고 자세한 설명을 통해 사건의 자세한 내막을 들어낸다. 네 가지 항쟁을 각각 큰 목차로 설정하고 세부 기사를 그 내부에 작성해 독자의 관심과 수요에 부합하는 정보를 전달하는 데 효과적일 것으로 기대된다. 민주항쟁에 참여한 사람들의 희생과 투쟁에 대한 존경심을 부르고 역사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다.&lt;br /&gt;
===기여===&lt;br /&gt;
[[뎐]], [[이나자키로빈]], [[호빵이👻]]: 기획의도 페이지 작성&lt;br /&gt;
&lt;br /&gt;
=='''온톨로지'''==&lt;br /&gt;
노드를 클릭하면 해당 페이지 혹은 목록으로 연결됩니다&lt;br /&gt;
{{NetworkGraph | title=민주항쟁.lst}}&lt;br /&gt;
[[민주항쟁.lst]]&lt;br /&gt;
===기여===&lt;br /&gt;
*[[뎐]]: 온톨로지 제작&lt;br /&gt;
&lt;br /&gt;
=='''컨텐츠 구조'''==&lt;br /&gt;
===클래스(Class)===&lt;br /&gt;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color:white&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0%&amp;quot; | 클래스 !! style=&amp;quot;width:40%&amp;quot; | 설명 !! style=&amp;quot;45%&amp;quot; | 노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제||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대표 키워드인 민주항쟁을 주제로서 나타내었다 || 만주항쟁&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항쟁||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민주화운동 시기 발생했던 주요 운동들을 ‘항쟁’이라는 키워드로 분류하였다. || 4.19혁명, 부마항쟁, 5.18 민주화운동, 6월민주항쟁&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사건||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항쟁의 원인, 결과가 되는 사건을 정리하였다|| 3.15부정선거, 고려대 4.18학생시위, 3.15의거, YH사건, 10.26사태, 12.12 군사반란, 비상계엄령,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고문추방민족대행진, 4.13호헌조치, 6.29선언, 대통령직선제, 민주선언문, 경제안정화정책, 오일쇼크, 6.10국민대회&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지역||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요 항쟁들이 일어났던 지역을 정리하였다|| 마산, 부산, 광주&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인물||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요사건들을 발생시킨 인물, 참여했던 인물을 묶어서 정리하였다|| 이승만, 이기붕, 김주열, 박정희, 김재규, 전두환, 신군부, 시민군, 박종철, 이한열, 노태우&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관계성(Relation)===&lt;br /&gt;
*&amp;lt;font color=#228B22&amp;gt;'''~은 ~에 속한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주요 항쟁들이 민주항쟁에 속함을 나타내거나 인물의 소속을 나타낸다.&lt;br /&gt;
***해당노드:&lt;br /&gt;
***#4.19혁명 -&amp;gt; 민주항쟁&lt;br /&gt;
***#부마항쟁 -&amp;gt; 민주항쟁&lt;br /&gt;
***#5.18민주화운동 -&amp;gt; 민주항쟁&lt;br /&gt;
***#6월 민주항쟁 -&amp;gt; 민주항쟁&lt;br /&gt;
***#전두환 -&amp;gt; 신군부&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의 원인이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어떠한 사건과 인과관계를 이루는 또다른 사건 혹은 인물을 설명한다.&lt;br /&gt;
***해당노드:&lt;br /&gt;
***#이기붕 -&amp;gt; 3.15부정선거&lt;br /&gt;
***#김주열 -&amp;gt; 고려대 4.18학생시위&lt;br /&gt;
***#고려대 4.18학생시위 -&amp;gt; 4.19혁명&lt;br /&gt;
***#3.15의거 -&amp;gt; 4.19혁명&lt;br /&gt;
***#김주열 -&amp;gt; 4.19혁명&lt;br /&gt;
***#3.15부정선거 -&amp;gt; 3.15의거&lt;br /&gt;
***#YH사건 -&amp;gt; 부마항쟁&lt;br /&gt;
***#YH사건 -&amp;gt; 민주선언문&lt;br /&gt;
***#오일쇼크 -&amp;gt; 경제안정화정책&lt;br /&gt;
***#부마항쟁 -&amp;gt; 10.26사태&lt;br /&gt;
***#박정희 -&amp;gt; 10.26사태&lt;br /&gt;
***#비상계엄령 -&amp;gt; 5.18민주화운동&lt;br /&gt;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 -&amp;gt; 고문추방민족대행진&lt;br /&gt;
***#고문추방민족대행진 -&amp;gt; 4.13호헌조치&lt;br /&gt;
***#4.13호헌조치 -&amp;gt; 6.10국민대회&lt;br /&gt;
***#4.13호헌조치 -&amp;gt; 6월민주항쟁&lt;br /&gt;
***#6월민주항쟁 -&amp;gt; 6.29선언&lt;br /&gt;
***#6월민주항쟁 -&amp;gt; 대통령직선제&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을 발생시켰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사건과 그 사건을 직접적으로 발생시킨 인물을 연결한다.&lt;br /&gt;
***#이승만 -&amp;gt; 3.15부정선거&lt;br /&gt;
***#김재규 -&amp;gt; 10.26사태&lt;br /&gt;
***#신군부 -&amp;gt; 1212군사반란&lt;br /&gt;
***#전두환 -&amp;gt; 비상계엄령&lt;br /&gt;
***#노태우 -&amp;gt; 6.29선언&lt;br /&gt;
***#시민군 -&amp;gt; 5.18민주화운동&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에 희생되었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민주항쟁의 진압과정 등 에서 희생된 인물을 설명한다&lt;br /&gt;
***#김주열 -&amp;gt; 3.15의거&lt;br /&gt;
***#이한열 -&amp;gt; 6월 민주항쟁&lt;br /&gt;
***#박종철&amp;gt;박종철 고문치사 사건&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에서 발생했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설명한다.&lt;br /&gt;
***#3.15의거 -&amp;gt; 마산&lt;br /&gt;
***#부마항쟁 -&amp;gt; 부산&lt;br /&gt;
***#부마항쟁 -&amp;gt; 마산&lt;br /&gt;
***#5.18민주화운동 -&amp;gt; 광주&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뎐]]: 컨텐츠 구조 페이지 작성&lt;br /&gt;
=='''마인드맵'''==&lt;br /&gt;
===주제 마인드맵===&lt;br /&gt;
[[파일:KakaoTalk_20231212_025359957_01.jpg|600px]]&lt;br /&gt;
&lt;br /&gt;
===노드 마인드맵===&lt;br /&gt;
[[파일:KakaoTalk_20231212_025359957.jpg|600px]]&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lt;br /&gt;
[[이나자키로빈]]: 주제 마인드맵 작성&amp;lt;/br&amp;gt;&lt;br /&gt;
[[딩잉잉]]: 노드 마인드맵 작성&lt;br /&gt;
&lt;br /&gt;
=='''4.19혁명'''==&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VPp4BmfDSv8VA2-oC-VATHzUYgadaiaQ9AlWXYiaiVk&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원인===&lt;br /&gt;
====[[3.15 부정선거]]====&lt;br /&gt;
[[파일:3.15부정선거_개표_모습.png|300픽셀|섬네일|오른쪽|3.15부정선거 당시 개표하는 사진&amp;lt;ref&amp;gt;사진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amp;lt;/ref&amp;gt;]]&lt;br /&gt;
1959년 대한민국은 제 4대 대통령 선거와 제 5대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당시 자유당에서는 12년째 대통령으로서 연임 중이던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이기붕]]'''을 부통령 후보로 선임하였다. 그러나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병세의 악화로 사망하게 되고,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은 확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선거의 초점은 자유당의 조병옥과 민주당의 장면 간의 선거전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본격적인 선거유세의 시작과 함께 정부와 여당의 잇따른 야당선거운동 방해사건으로 부정선거가 시작되었다. 1960년 3월 15일 선거가 시작된 이후에도 다양한 방법의 부정행위가 일어났고, 개표 결과 이승만과 이기붕의 득표가 100%에 육박하는 결과로 나오자 자유당은 득표수를 하향 조정해 최종 집계에 반영할 것을 지시했다. 결국 이승만 88.7%, 이기붕 79%의 득표율을 가지며 정, 부통령에 당선되었다.&amp;lt;ref&amp;gt;자세한 내용은 3.15부정선거 페이지 참조&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부정선거 반대시위, [[3.15 의거]]의 발생====&lt;br /&gt;
3.15 부정선거를 반대하는 시위는 초기에는 중, 고등학생들의 산발적인 시위로 전개되었다. 3월 15일 선거일 밤 경남 마산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으며,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여 1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amp;lt;br/&amp;gt;&lt;br /&gt;
3월 15일 실종되었던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4월 11일 마산부두에서 발견되자 마산 시민들은 시청, 파출소 등을 파괴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2차 시위가 일어난 것이다.&lt;br /&gt;
&lt;br /&gt;
====[[고려대학교 4.18 학생시위]]의 발생====&lt;br /&gt;
1, 2차 마산시위를 계기로 부정선거 무효와 이승만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났다. 이들은 '4.18 선언문'을 낭독하고 시내로 진출하였다. 이는 4월 19일 학생들과 일반 시민들이 가세한 대규모 시위로 이어지게 되었다.&lt;br /&gt;
====전국적인 4.19 혁명의 발생====&lt;br /&gt;
분노한 전국의 시민과 학생들이 다음 날인 4월 19일에 '이승만 하야와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며 대규모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경찰은 또다시 무차별 발포에 나섰고,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지만 이러한 압박에도 시민들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lt;br /&gt;
====이승만 대통령의 혼란 수습 시도====&lt;br /&gt;
이승만 대통령은 4.19 시위로 인한 정국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4월 20일 국무위원 전원과 자유당 당무위원 전원의 사표를 제출하도록 지시하였으며, 4월 23일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외무장관에 허정, 내무장관에 이호, 법무장관에 권승렬을 임명하는 등 개각을 단행하였다.&amp;lt;br/&amp;gt;&lt;br /&gt;
그러나 미국은 4.19직후 국무부 성명을 통해 한국에서 발생한 사태는 부정선거에 대한 '군중의 불만'을 반영한 것 이라고 했고, 양유찬 주미대사를 불러 '부정선거에 대한 철저한 조사', '경향신문 복간', '국가보안법 개정' 등을 촉구하는 각서를 전달하였다.&amp;lt;br/&amp;gt;&lt;br /&gt;
그리고 4월 25일, 이승만 정권에 분노한 전국 27개 대학 258명의 교수가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 모여 14개항의 시국 선언문을 발표하며 학생, 시민들과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들은 3.15 부정선거 및 4.19 사태의 책임을 지고 대통령이 물러날 것을 주장하였으며, &amp;quot;학생들의 피에 보답하자&amp;quot;는 플랜 카드를 앞세워 국회의사당까지 행진하였다. &lt;br /&gt;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lt;br /&gt;
무력 진압에도 대규모 시위가 이어지며 시민들은 완강하게 투쟁하였다. 4월 26일 시위대가 경무대로 다시 집결하는 등 사태가 심각하게 진행되자, 오전 10시 30분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 성명을 발표하였다. 4월 27일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하며 대통령직을 하야하고 하와이로 망명하였으며 자유당 정권도 끝나게 된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우리 국민들, 특히 학생과 청년들의 주도로 이루어진 4.19 혁명은 학생과 일반 대중이 단결하여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아시아 최초의 시건이다. 4.19혁명은 부마항쟁, 5.18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그리고 2017년 촛불시위에 이르기 까지 정권에 대항하는 국민들이 단합을 이루는 초석이 되었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도 시민 저항권에 대한 근거로써 4.19혁명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문구가 있다.&lt;br /&gt;
===기여===&lt;br /&gt;
[[뎐]]: 4.19혁명 페이지 원인, 의의 작성 &lt;br /&gt;
&lt;br /&gt;
[[•ᴗ•]]: 4.19혁명 페이지 전개 작성&lt;br /&gt;
&lt;br /&gt;
=='''부마항쟁'''==&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bK7zjpPvBsC7rFRPmsiHCUYhyWt2VXOv8SYyaBTND4Y&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원인===&lt;br /&gt;
====[[유신 헌법]]과 [[긴급조치]]====&lt;br /&gt;
1971년 선거에서 김대중을 누르고 대통령에 3선된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해 국회 해산,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등 법의 일부 기능을 정지시키고 전국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했다.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된 이른바 유신헌법에 의해 제정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법」 에 의거해 박정희가 제8대 대통령으로 재차 당선되었고, 이 유신 헌법이 발효된 기간을 유신 체제라고 부른다. 유신 체제는 행정, 입법, 사법의 3권을 모두 쥔 대통령이 종신 집권할 수 있도록 설계된 1인 대통령제였다. 박정희는 유신 헌법에 의거해 대통령의 권한으로 취할 수 있었던 특별조치인 긴급조치를 선포함으로써 헌법에 반대하는 시위 및 운동과 방송, 언론 활동을 하는 반정부 인사들을 연행, 체포, 고문하는 등 억압을 가했다.&lt;br /&gt;
&lt;br /&gt;
====한국경제의 위기====&lt;br /&gt;
1970년대 말 한국경제는''' [[오일쇼크]]'''라는 세계경제의 위기와 결합해 가라앉고 말았다. 경제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정부는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과 함께 '''[[경제안정화정책]]'''을 수용했고, 중소자본가, 봉급생활자, 도시 노동자와 농민 등에 안정화 비용을 부과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이와 같은 안정화 정책은 경제위기로 어려운 처지에 있던 중소기업들의 도산을 가속하여 기업 부도율이 치솟고 하층민들을 더 깊은 고통에 몰아넣었다. 특히 '''부가가치세'''를 도입한 이후 물가가 상승하면서 일상에 타격을 주었으며, 노동집약적 제조업이 집중되었던 부산과 마산에서는 상황이 더욱 심각하여 1979년 부산 지역 부도율은 서울의 3배에 달했다.&lt;br /&gt;
&lt;br /&gt;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lt;br /&gt;
한 시대의 대격변을 예고하는 단초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시작됐다. 1979년 8월 9일 오전, 신민당의 당사 4층 강당에서는 봉제업체인 YH무역주식회사의 여성노동자 200여명이 기업주의 폐업에 반발하여 폐업조치 철회 농성을 벌였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인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신민당이 당사 건물을 내준 것이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폭력을 동원하여 농성을 해산시켰다. 결국 이 사건은 노동 탄압 사건을 넘어선 야당에 대한 정치 탄압 사건으로 발전하였다.&lt;br /&gt;
&lt;br /&gt;
이날 경찰은 1000여명의 진압대원을 신민당사로 난입시켜 농성을 하고 있던 174명의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로 밖으로 끌어냈다. 또한 경찰은 총재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김영삼 총재와 당 간부들을 끌어내면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박정희 정권은 이 노동자 농성 사건을 빌미로 신민당 분열공작을 시도하였다. 유신정권과 비밀리에 결탁한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 3명이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 부총재 전원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접수시켰다. 그리고 법원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신민당 총재단의 직무 집행을 정지시키고 박정희 정권의 꼭두각시를 총재직무대행으로 선임하였다.&lt;br /&gt;
&lt;br /&gt;
아울러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의 동교동 자택을 전면 봉쇄하였고,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에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끊으라고 요구한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즈』 회견내용을 “반헌정적, 반민족적 작태”로 몰아서 국회에 징계 동의안을 제출했다. 10월 4일 오후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의원 159명은 여당 총회장에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제명 결의안을 '''기습적으로''' 처리해 버렸다. 노사분규 사태로 시작된 사건이 제1야당 당수의 의원직 제명으로 확대된 정치적 사태를 지켜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유신체제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이 고조되었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유신 철폐, 독재 타도!'''''   &amp;lt;small&amp;gt;-10.16 부마항쟁 당시 시위대의 구호&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부산대학교 민주선언문, 학생 시위에서 시민항쟁으로====&lt;br /&gt;
[[파일:부산시위대.jpg|250px|섬네일|오른쪽|광복동을 지나는 시위 행렬]]&lt;br /&gt;
1979년 10월 16일 아침 10시 부산대학교 구내 도서관 앞에서 약 500명의 학생들이 모여 “유신정권 물러가라”, “정치탄압 중지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반정부 시위를 벌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민주선언문」]]'''을 통해 민주화, 언론 자유, 인권 보장의 신념을 확인하고, “제도화된 폭력성과 조직적 악의 근원인 유신헌법과 독재집권층의 퇴진만이 5천 만 겨레의 통일의 첫걸음이라고 주장하면서 형제의 피를 요구하는 자유와 민주의 깃발을 우리가 잡고 반민주의 무리, 불의의 무리들을 향해 외치며 나아가자”라고 선언하였다. 이후 학생들은 교문을 나가 거리에서 시위했다. 이때 학생 수는 약 5,000명으로 불어나 있었고, 광복동과 남포동 등 부산시내 중심가까지 진출해 애국가 등의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며, 이를 제지하려는 경찰과 이곳저곳에서 충돌하였다. 비슷한 시간, 부산 동아대학교에서도 1,000여 명의 학생이 부산대학교 학생과 합류하여 가두시위를 벌였다. 부산대학교 데모로 학생 수백 명이 연행되고 100여 명이 다쳤지만 이튿날인 10월 17일에는 시위가 더욱 격화되어 학생들뿐만 아니라 다수의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학생 시위는 점차 시민항쟁의 양상을 띠어갔다.''' 밤늦게까지 계속된 시위에서 시민들은 충무파출소, 한국방송공사, 서구청, 부산세무서 등을 파괴하였고, 경찰차량을 불태우거나 파손시켰다.&lt;br /&gt;
&lt;br /&gt;
====마산의 시민항쟁====&lt;br /&gt;
&lt;br /&gt;
민주항쟁은 18일에 마산으로 확산되었다. 늦은 오후에는 1,000여 명의 경남대학교 학생들이 마산 시내 번화가에 산발적으로 집결했으며, 일부시민들도 가담해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어두워진 다음 학생과 시민들의 데모는 격화되어 파출소, 공화당사, 방송국, 신문사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파괴하였다. 이튿날인 19일에는 시위가 더욱 치열해져 마산 시내는 한때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저녁 8시경, 시위대는 경남대학과 마산대학&amp;lt;ref&amp;gt;1985년 창원대학으로 교명이 변경되었으며, 현재의 마산대학교와 다르다.&amp;lt;/ref&amp;gt;, 그리고 고등학생까지 합세하여 약 8,000명에 이르렀으며, 시내 곳곳에서 몽둥이를 들고 동사무소와 파출소로 몰려가 시설을 파괴하였고, 경찰차량에 불을 질렀다.&lt;br /&gt;
&lt;br /&gt;
====부산 계엄령, 마산 위수령====&lt;br /&gt;
[[파일:계엄포고문.jpg|270px|섬네일|왼쪽|부산지역에 내려진 계엄포고문을 읽고 있는 시민들]]&lt;br /&gt;
부산대학교 시위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박정희 정부는 학생 시위로 시작된 시위가 대규모 시민항쟁으로 사태가 심상치 않게 확대되어가자 강경책으로 대응했다. 정부는 18일 자정을 기해 '''부산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동원한 과격한 진압'''을 통해 시위 참여자들과 이를 방조한 일반 시민들까지 1,058명을 연행하고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으며, 부산지구 계엄사령부는 각 대학 휴교조처와 야간통행금지시간을 2시간 연장하는 등의 항이 담긴 포고문을 발표했다.&lt;br /&gt;
&lt;br /&gt;
부산에 계엄령이 선포된 이튿날인 19일에 마산 시위가 확대됨에 따라 그 다음날인 10월 20일 정오, 정부가 '''마산 및 창원 지역에 위수령을 발령'''해 통행금지 시간이 연장되고, 경남대학 등에는 휴교조처가 취해졌으며, 24일에는 깡패를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132명을 검거, 23명을 구속했다. 이렇게 '''표면적으로는 부마민주항쟁이 단시간에 진압되는 듯 보였지만, 항쟁은 이미 유신체제의 균열을 불러오고 있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항쟁의 전개 과정에서 볼 수 있듯, 부마민주항쟁에서 특징적인 것은 먼저 시위대의 가장 큰 분노의 대상이 공화당사와 경찰·파출소였다는 점, 다음으로는 “부가가치세를 철폐하라”, “잘 먹고 잘 살아라”등의 구호에서 드러나듯이 세무서에 대한 공격, 그리고 신문사와 방송국에 대한 공격을 들 수 있다.&lt;br /&gt;
&lt;br /&gt;
부마민주항쟁은 1970년대 유신체제 밑에서 쌓였던 침묵하는 언론, 조세, 시민을 억압하는 경찰에 대한 불만 등 정치·사회·경제·문화·종교 등 각 부문에 걸친 여러 모순의 폭발이었고, 헌법 개정과 긴급조치로 겨우 유지되던 유신체제와 박정희 정권의 붕괴를 촉진시킨 결정적인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10.26사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또한 이 사건은 1980년 5월 18일의 광주 민주화운동과 1987년 6월 민주항쟁에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된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억눌린 우리 역사&amp;lt;/br&amp;gt;터져나온 분노&amp;lt;/br&amp;gt;매운 연기 칼바람에도&amp;lt;/br&amp;gt;함성소리 드높았던&amp;lt;/br&amp;gt;동트는 새벽벌&amp;lt;/br&amp;gt;시월이 오면&amp;lt;/br&amp;gt;핏발 선 가슴마다&amp;lt;/br&amp;gt;살아오는 십 일육&amp;lt;/br&amp;gt;동지여 전진하자&amp;lt;/br&amp;gt;깨치고 나가자&amp;lt;/br&amp;gt;뜨거운 가슴으로&amp;lt;/br&amp;gt;빛나는 내일로'''''&amp;lt;/br&amp;gt;&amp;lt;small&amp;gt;-'''부산대학교''' 새벽벌도서관 10.16 기념비&amp;lt;/small&amp;gt;&amp;lt;/div&amp;gt;&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호빵이👻]]: 부마항쟁 페이지 전체 작성&amp;lt;/br&amp;gt;&lt;br /&gt;
[[이나자키로빈]]: 부마항쟁 원인 중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 작성&lt;br /&gt;
&lt;br /&gt;
=='''5.18민주화운동'''==&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AMetwTuXYHTCXINqr7ZJpzO5CHFEMQO5-Uqau51RkXA&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원인===&lt;br /&gt;
====유신체제의 붕괴====&lt;br /&gt;
&lt;br /&gt;
[[파일:김재규.jpg|섬네일|오른쪽|암살 당시 상황을 재현하는 김재규]]&lt;br /&gt;
&lt;br /&gt;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amp;lt;small&amp;gt; - 김재규&amp;lt;/small&amp;gt;&lt;br /&gt;
1979년 10월 4일 신민당 총재 김영삼이 국회에서 의원직을 제명당하자 10월 15부터 10월 20까지 부산 · 마산 등지에서는 부마항쟁이 일어났고, 이의 해결을 둘러싼 노선대립으로 갈등 중 10월 26일 &amp;lt;ins&amp;gt;[[김재규]]&amp;lt;/ins&amp;gt;가 박정희를 살해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ins&amp;gt;[[10.26 사태]]&amp;lt;/ins&amp;gt;의 사후 수습과정에서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을 중심으로 신군부 세력이 부상하였으며, 이들은 &amp;lt;ins&amp;gt;[[12.12 사건]]&amp;lt;/ins&amp;gt;의 하극상을 통하여 군부를 장악하였다. 1980년 2월 29일 김대중 등이 복권되었으나 그 해 봄, 신군부는 최규하 과도 정부를 유명무실하게 하고 국민들이 요구하는 민주주의와 이를 위한 명확한 정치일정 제시를 거부하면서 권력기반을 구축하였다.&lt;br /&gt;
&lt;br /&gt;
====청춘을 바쳐, 학생 운동====&lt;br /&gt;
&lt;br /&gt;
[[파일:서울의_봄.JPG|섬네일|오른쪽|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앞에 모인 시위대]]&lt;br /&gt;
&lt;br /&gt;
군부의 재집권 야욕에 대한 국민적 저항은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표출되었다. 1980년 3월, 서울대 총학생회 출범을 시작으로 4월 초순에는 전국의 주요 대학들이 총학생회를 결성하기 시작하였다. 대학별로 독재 정권에 아부했던 어용교수와 족벌사학 퇴진 운동을 벌였고, 특히 병영집체훈련(당시 대학 신입생들은 의무적으로 군부대에 10일 간 입대하여 각종 군사훈련을 이수해야 했다.) 거부가 주요 이슈로 전면 등장했다. 각 대학의 병영집체훈련 거부운동이 본격화되고 전국적인 쟁점으로 떠오르자 신군부는 신문, 방송을 통해 ‘학생들의 안보의식 결여’를 비난하고 교내 시위·농성을 집중적으로 보도하게 했다.  5월 1일에 서울대가 입영훈련 거부투쟁 철회를 결정하고 ‘계엄령 해제’와 ‘유신잔당 퇴진’, ‘정부개헌중단’과 ‘노동 3권 보장’ 등을 요구하기 시작하면서 대학가는 이제까지의 학내 문제 중심의 운동에서 정치개혁을 위한 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그간 정부와 대학 간에 팽팽하게 유지되던 긴장 관계는 폭발 직전으로 내닫게 된 것이다.&lt;br /&gt;
&lt;br /&gt;
약 열흘 간의 대정부 투쟁을 준비한 대학가는 5월 10일 고려대 총학생회장실에서 열린 ‘총학생회장단 회의’에 참석한 전국 23개 대학 대표들은 ‘비상계엄의 즉각 해제’와 ‘전두환, 신현확 등 유신잔당 퇴진’ 등을 결의하고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정세에 대한 공동대처 방안을 마련했다. 이후 5월 13일부터 5월 14일에 걸쳐 서울 · 부산 · 대구 · 광주 등 37개 대학에서 계엄철폐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5월 15일에는 서울역에서 시위가 발생하는 등 학생시위는 서울시가지를 거의 마비시키는 등 야간까지 지속되어 사태가 절정에 달하면서 신군부 세력을 위협하였다. 5월 16일 24개 대학 학생대표들은 당분간 시국의 추이를 관망하기로 결정하고 가두시위를 중단하면서 소강상태에 돌입하는 듯하였다.&lt;br /&gt;
&lt;br /&gt;
====1980년 봄의 광주====&lt;br /&gt;
5월 17일 신군부 세력이 이전까지는 제주도를 제외한 지역에 한정되었던 비상계엄을 전국에 확대하는 조치인 계엄포고 10호(17일 24시에 발효: 각 대학 휴교령 포함)를 밤 9시 40분에 의결하고 밤 11시 40분에 발표하면서 밤 11시를 전후한 시점부터 김대중 · 김종필이 연행되는 등 권력형 부정축재자 및 소요조종 혐의자, 학생 시위 주동자가 체포되었다. 이날 밤 광주지역의 사회운동·학생운동의 지도자도 상당수가 검거되었다. 광주의 검거대상자는 전남대 12명, 조선대 10명 등 총 22명이었다. 전남에서 계엄합동수사단은 광주505보안대가 중심이고, 중앙정보부, 경찰 등이 보조역할을 했다. 전남 계엄합동수사단은 22대 차량과 86명의 인원이 출동해 정동년 등 복적생들과 대학의 총학생회 간부들을 집중 검거했다.&lt;br /&gt;
&lt;br /&gt;
한편 육군본부는 14일 오전 7시55분에 국가 중요 보안목표와 주요대학에 군 병력 배치 명령을 하달했다. 이 명령에 따라 전남북계엄분소장인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광주 시내 주요 시설물에 이날 오후부터 계엄병력을 배치했다. 31사단 96연대 병력이 광주시내 KBS건물에 42명, MBC 21명, CBS 11명, VOC(전일방송) 11명 등 주요 방송사 건물에 배치돼 경비에 들어간 것이다.&lt;br /&gt;
&lt;br /&gt;
이날 오후 전교사령관은 7공수여단의 광주배치에 따른 수송수단 지원도 미리 협의했다. 그리고 5월 8일부터 16일 사이에 공수부대 수뇌부들도 헬기를 타고 서울에서 내려와 광주 상무대의 전투병과교육사령부를 방문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광주에서 시위가 격화되면 즉각적으로 최정예 군부대를 동원해서 진압할 준비를 철저하게 갖추고 있었다. 5월 18일에 시작된 광주의 비극은 그 이전에 이미 시한폭탄처럼 준비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lt;br /&gt;
{{구글지도 | 위도=35.175961433346885 | 경도=126.90865311973532 | 줌=13 }}  [[파일:금남로.JPG|섬네일|오른쪽|금남로 앞에 집결한 버스와 시민군]]&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18일&amp;lt;/span&amp;gt;&lt;br /&gt;
휴교령이 내려질 경우 교문 앞에서 집결한다는 결의에 따라 학생들은 5월 18일 오전 전남대학교 앞에 모였다. 공수부대원들이 전남대 앞 시위를 저지하자 대학생들은 광주역에 재집결해서 시위를 이어갔다. 시위대가 점차 늘어나면서 공수부대원이 시내에서 시위진압에 나섰으며 18일 오후 1시부터 무차별 진압작전이 이루어져 부상자가 속출하였다.&lt;br /&gt;
&lt;br /&gt;
군인들이 금남로 등 시내 중심가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이나 여자를 마구 구타하고 짓밟으며 찌르는 등의 잔혹 행동을 하자 시민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이에 시위대는 오후 4시 이후 파출소 파괴 등 적극공세에 나섰다. '''계엄군의 과잉 무력진압은 시위를 해산시키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오히려 시민들을 단결시켰으며, 결국 19일 시민 · 학생 연대가 발생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lt;br /&gt;
&lt;br /&gt;
 '''''광주 애국 시민 여러분! 이것이 웬 말입니까? 웬 벼락이란 말입니까? 죄 없는 학생들을 총칼로 찔러 죽이고 몽둥이로 두들겨 트럭으로 실어가며 부녀자를 발가벗겨 총칼로 찌르는 놈들이 이 누구란 말입니까? 이제 우리가 살길은 전시민이 하나로 뭉쳐 청년 학생들을 보호하고 유신잔당과 극악무도한 살인마 전두환 일파와 공수 특전단 놈들을 한놈도 남김없이 쳐부수는 길 뿐입니다. 우리는 이제 다 보았습니다. 다 알게 되었읍니다. 왜 학생들이 그토록 소리 높이 외쳤는가를, 우리의 적은 경찰도 군대도 아닙니다. 우리의 적은 전국민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바로 유신잔당과 전두환 일파 그놈들입니다.''''' &amp;lt;small&amp;gt; - 1980년 5월 19일에 '광주시민민주투쟁회'명의의 호소문&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19일&amp;lt;/span&amp;gt;&lt;br /&gt;
19일 오전에는 일시적 소강상태였으나 오후 들어서 분노한 학생 · 시민들이 군 · 경찰과 공방전을 벌이면서 시위는 점차 격화되었다. '''시민들은 공포감에서 벗어나 자신의 생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단순한 학생시위에서 시민봉기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계엄군은 시위대를 포위하여 구타하였으며 일부 고등학생까지 포함된 시위대는 돌과 화염병으로 저항하였고 파출소와 방송국 등에 침입하였다. 뒤처진 공수부대를 공격하거나 고립된 차량을 포위하기도 하였으며 총과 방패를 빼앗기도 하였고, 오후 4시 50분 시민들에게 포위된 계엄군의 장갑차에서 최초의 발포가 있었다. 19일 밤비가 내리는 가운데 시위가 산발적으로 계속되었으며, 20일 오전 비가 그치고 대규모 시위는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오후부터 다시 시작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20일&amp;lt;/span&amp;gt;&lt;br /&gt;
'''20일 오후 6시부터 택시와 버스 운전 기사들이 광주역과 무등경기장에 모여 대형 버스와 트럭을 앞세우고 일시에 금남로에 집결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들을 앞세운 시위는 계엄군을 몰아내는 데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였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5.18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에 &amp;lt;ins&amp;gt;[[지대한 영향]]&amp;lt;/ins&amp;gt;을 끼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학생 운동에 뛰어든 많은 대학생들은 대학교에 들어와서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의 실상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아 학생 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군부정권은 5.18 이후로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다. 전두환은 김대중 등에게 '광주 사태'의 책임을 물어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했고,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 선언을 한 직후, 8월 27일 소위 체육관 선거를 통해 전두환은 대통령 자리를 탈취했다.&lt;br /&gt;
&lt;br /&gt;
지역적인 면에서는 '''광주광역시를 비롯한 전라도 지역의 트라우마'''로 작용해 이후의 민주정의당 및 &amp;lt;ins&amp;gt;[[3당 합당]]&amp;lt;/ins&amp;gt;으로 이어지는 보수 세력에 대해 적대심을 가지고, 민주당계 정당의 표밭이 되는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미 박정희 정부 시절부터 유무형의 정치적인 차별을 받고 있었지만 5.18의 참상은 전라도가 다시는 보수 세력을 지지하지 않게 만들 정도로 심각한 사건이며 호남소외론의 가장 결정적인 명분이 되었다.&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이나자키로빈]]: 5.18 민주화운동 페이지 전체 작성&lt;br /&gt;
&lt;br /&gt;
=='''6월민주항쟁'''==&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NnXWs5RMTIf-6DOEu9_rX2k4mgzUk1AQHYneCuwXN1Q&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원인===&lt;br /&gt;
====[[박종철고문치사사건]]====&lt;br /&gt;
&lt;br /&gt;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박종철은 1987년 1월 13일 자정 경 하숙집에서 치안본부(現 경찰청)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게 연행되었다.‘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이자 ‘민주화추진위원회’ 지도위원으로 수배 받고 있었던 박종운을 잡기위해 연행한 것이었다. 취조실로 연행해간 공안 당국은 박종철에게 박종운의 소재를 물었으나, 박종철은 순순히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경찰은 잔혹한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가하였고, 박종철은 끝내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했다. 당시 경찰은 초기 발표에서 고문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라고 사망원인을 발표하였으나, 시체부검 결과 전기고문과 물고문에 의한 살인인 것으로 밝혀졌다.&lt;br /&gt;
&lt;br /&gt;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저 죽음을 응시해주길 바란다. 저 죽음을 끝내 지켜주길 바란다. 저 죽음을 다시 죽이지 말아주길 바란다.''''' &amp;lt;small&amp;gt; - 동아일보 1987년 1월 17일자 김중배 칼럼 중&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사건 진상의 일부가 공개되자 2월 7일 전국 주요 도시에서 &amp;quot;박종철군 범국민추도식&amp;quot; 및 도심 시위가 열렸고 이어 3월 3일에는 &amp;quot;박종철군 49재와 고문추방 국민대행진&amp;quot;과 함께 또 다른 시위가 열렸다. 이후 4월 2일 서울대학교 학부모 130여 명이 ‘건국대학교 사태‘ 등 시국관련 구속학생의 징계철회를 요구하며 철야 농성을 벌였다.&lt;br /&gt;
&lt;br /&gt;
====정부의 개헌논의 유보====&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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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그러나 전두환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1987년 4월 13일 [[4.13호헌조치]]라 불리는 ‘대통령 특별담화‘를 발표, 개헌(改憲) 논의를 유보하겠다고 밝혔다. [[4.13호헌조치]]에서 전두환은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와 대통령 선거는 자유 경선의 분위기가 보장되는 가운데 1987년 내에 공정한 선거관리를 통해 차질 없이 실시할 수 있게 모든 노력을 다할것‘이라고 다짐했으며, 또 ‘민정당의 후임 대통령 후보는 조속한 시일 안에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인물 가운데서 당헌 절차와 민주 방식에 따라 전당대회에서 선출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호헌조치‘라는 그 이름대로 현행 헌법에 따라 권력을 이양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국민들의 큰 기대를 얻을 것이라 믿었으나, 기대는 커녕 오히려 반발을 가져오는 요인이 되고 말았다. 곧바로 이튿날인 4월 14일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 등 각계 인사들이, 호헌 조치를 비판하는 시국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정부 최루탄에 의한 [[이한열]] 사망====&lt;br /&gt;
[[파일:이한열.jpg|200px|섬네일|오른쪽|최루탄에 피격당한 후 이종창에게 부축받는 이한열]]&lt;br /&gt;
먼저 1987년 5월 27일 야당과 재야, 종교계 등이 힘을 모아 ‘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여당인 민주정의당에서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6월 10일에 맞춰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6 · 10국민대회]])’를 치르기로 결정하였다. 대학생들은 국본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를 중심으로 6 · 10국민대회에 호응하여 6월 초부터 각 대학별로 연일 집회와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6 · 10국민대회]] 하루 전날인 6월 9일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교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는 곧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학생들은 물론 시민들의 분노가 들끓었다. 이러한 분노 속에서 6 · 10국민대회가 열렸다. 경찰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6 · 10국민대회가 열리는 성공회대성당을 원천 봉쇄하였다. 그 결과 6 · 10국민대회는 대회장에 미리 들어가 있던 소수의 인원만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대회 예정 시간인 오후 6시 이전부터 서울 시내 곳곳에서 대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시민들도 다양한 방식으로 6 · 10국민대회와 학생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날 밤 늦게까지 시위를 벌이던 학생들은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이후 5일 동안 농성을 계속하였다. 애초 계획된 것은 아니었지만 대학생들의 명동성당 농성은 6 · 10국민대회가 단발성 행사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인 저항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lt;br /&gt;
&lt;br /&gt;
====민주항쟁 확산====&lt;br /&gt;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로 개헌하라!'''''   &amp;lt;small&amp;gt;-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제시한 슬로건&amp;lt;/small&amp;gt;&lt;br /&gt;
[[파일:도망.png|200px|섬네일|왼쪽|쫓아오는 경찰들을 피해 달리고 있는 호헌철폐시위 참가자들]]&lt;br /&gt;
명동성당 농성을 거치며 항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유월항쟁의 전국화 과정에는 일정한 패턴이 존재하였다. 6월 10일 서울 외에도 전국 주요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위가 벌어졌지만, 15일까지 항쟁의 중심은 6 · 10국민대회와 명동성당 농성이 전개된 서울이었다. 하지만 6월 15일 경부터는 부산, 대전, 진주 등에서 격렬한 시위가 전개되었다. 그러다가 6월 20일부터 대규모 시위가 광주, 전주, 순천, 익산 등 호남 지방으로 옮겨졌다. 6 · 10국민대회 이후 약 20일 동안 전국 곳곳에서 매일 평균 100회 이상의 시위가 동시다발로 벌어졌다. 특히 6월 18일 ‘최루탄추방대회’와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은 전국 곳곳에서 한꺼번에 1백만 명 이상이 참여하였다. 갈수록 참가 지역이 전국 곳곳으로 확산되어 대도시, 중소도시뿐만 아니라 농촌 지역의 군 단위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6월 26일 하루에만 37~38개 시 · 군에서 시위가 동시에 벌어졌다. 유월항쟁에 참가한 연 인원은 400~500만 명으로 추산된다.&lt;br /&gt;
&lt;br /&gt;
반면 유월항쟁의 전국적 동시다발 시위는 경찰 병력을 분산시켰다. 분산된 경찰 병력으로는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거센 시위의 물결을 막아 낼 수 없었다. 경찰이 시위 진압에 최루탄을 남발하면서 최루탄도 점차 고갈되기 시작하였다. 유월항쟁 기간 동안 경찰이 사용한 최루탄만 총 67만 발이 넘었다. 더불어, 전두환 정권이 집권 내내 강조했던 88서울올림픽이 얼마 남지 않아 미국 등 국제사회의 이목이 집중된 상황에서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운동 때처럼 유혈 사태와 대량 학살을 반복하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무엇보다 군대를 동원하더라도 이러한 대규모 시민 항쟁을 진압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결국 경찰력으로 항쟁을 막기 힘들고, 군대 투입도 어렵다고 판단한 전두환 정권은 1987년 6월 29일 ‘ 6 · 29민주화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하였다. 그리고 그동안 의식불명 상태에 있었던 이한열이 7월 5일 끝내 사망하였다. 5일장 후 7월 9일 치러진 이한열의 노제에 100만 명의 인파가 모인 것을 끝으로 약 한 달 동안 지속된 유월항쟁은 마무리되었다.&lt;br /&gt;
&lt;br /&gt;
[[파일:태극기.png|300px|섬네일|오른쪽|서울역 앞에서 태극기와 '자주없이 민주없다'는 플래카드를 들고 구호를 외치는 시위대]]&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1987년 6월항쟁이 '''대통령[[직선제]] 개헌'''이라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이 항쟁에 동참한 학생과 시민들의 요구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제시한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 개헌’이라는 슬로건으로 모아졌기 때문이었다. 유월항쟁은 이러한 민주화 세력의 통합성, 즉 각기 다른 성격과 지향을 가진 여러 주체들이 모두 동의할 수 있는 ‘최소 강령’하에 ‘최대 연합’으로 결집하였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딩잉잉]]:6월민주항쟁 페이지 전체 작성&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기밀문서]]&lt;br /&gt;
[[분류:4.19혁명관련]]&lt;br /&gt;
[[분류:부마항쟁관련]]&lt;br /&gt;
[[분류:5.18민주화운동관련]]&lt;br /&gt;
[[분류:6월민주항쟁관련]]&lt;br /&gt;
[[분류:뎐]]&lt;br /&gt;
[[분류:이나자키로빈]]&lt;br /&gt;
[[분류:호빵이👻]]&lt;br /&gt;
[[분류:•ᴗ•]]&lt;br /&gt;
[[분류:딩잉잉]]&lt;/div&gt;</summary>
		<author><name>딩잉잉</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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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분류:딩잉잉</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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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딩잉잉: &lt;/p&gt;
&lt;hr /&gt;
&lt;div&gt;2023130216 한국사학과 최필중&lt;br /&gt;
===기여내용===&lt;br /&gt;
&lt;br /&gt;
* 컨텐츠 주제를 설명하는 페이지를 작성함&lt;br /&gt;
&lt;br /&gt;
* 6월 민주항쟁 페이지를 작성하였으며, 여러 사진과 영상을 삽입하여 가독성을 높임.&lt;br /&gt;
&lt;br /&gt;
* 노드 마인드맵을 작성하여 온톨로지의 토대를 구성함.&lt;br /&gt;
&lt;br /&gt;
* 6월 민주항쟁 타임라인 제작에 필요한 자료조사를 맡음&lt;/div&gt;</summary>
		<author><name>딩잉잉</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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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분류:딩잉잉</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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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2T05:41:2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딩잉잉: &lt;/p&gt;
&lt;hr /&gt;
&lt;div&gt;2023130216 한국사학과 최필중&lt;br /&gt;
===기여내용===&lt;br /&gt;
&lt;br /&gt;
*온톨로지 제작하고 노드에 해당하는 페이지 및 목록을 하이퍼링크로 연결함&lt;br /&gt;
&lt;br /&gt;
* 6월 민주항쟁 페이지를 작성함 &lt;br /&gt;
&lt;br /&gt;
*4.19혁명 페이지의 원인 부분을 담당해 작성하며 3.15부정선거, 이승만, 이기붕 페이지를 만들고 본문에 하이퍼링크를 삽입함&lt;br /&gt;
3.15부정선거 사건은 사건의 경위와 전개과정, 결과를 이해하기 쉽게 작성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인물의 경우 사진과 정보를 한눈에 보기 쉽게 표를 작성함과 함께 자세한 내용을 추가로 작성해 설명함.&lt;br /&gt;
&lt;br /&gt;
*4.19혁명 타임라인 제작에 필요한 자료조사를 맡음&lt;/div&gt;</summary>
		<author><name>딩잉잉</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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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기밀문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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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1T16:24:0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딩잉잉: /* 민주항쟁 확산 */&lt;/p&gt;
&lt;hr /&gt;
&lt;div&gt;=='''컨텐츠 주제'''==&lt;br /&gt;
&lt;br /&gt;
[[파일:시위대.png|400픽셀|center]][[파일:이한열사진.jpeg|400픽셀|center]][[파일:진압.png|400픽셀|center]]&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amp;lt;big&amp;gt;'''&amp;lt;span style=&amp;quot;color:#CD0000&amp;quot;&amp;gt;&amp;lt;big&amp;gt;&amp;lt;big&amp;gt;투쟁의 불꽃, 자유의 환호&amp;lt;/big&amp;gt;&amp;lt;/big&amp;gt;&amp;lt;/span&amp;gt;'''&amp;lt;br/&amp;gt;&amp;lt;br/&amp;gt;&lt;br /&gt;
''대한민국은 시민들의 투쟁과 희생을 거쳐, 피와 땀으로 민주화를 이룩하였습니다.''&amp;lt;br/&amp;gt;&lt;br /&gt;
''그들은 어둠을 밝히기 위해 항거의 불꽃을 태웠고, 그 불꽃은 자유를 외쳤으며, 그 외침은 세상을 움직였습니다.''&amp;lt;br/&amp;gt;&lt;br /&gt;
''이 «기밀문서»에는 당신이 미처 몰랐던 그 때의 열기와 의지가 실려있습니다.''&amp;lt;br/&amp;gt;&lt;br /&gt;
''함께, 그 뜨거운 페이지를 열어보시겠습니까?''&amp;lt;/span&amp;gt;&amp;lt;/big&amp;gt;&amp;lt;/div&amp;gt;&lt;br /&gt;
&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이나자키로빈]]&lt;br /&gt;
[[딩잉잉]]&lt;br /&gt;
&lt;br /&gt;
=='''팀원'''==&lt;br /&gt;
*오현지(2022131143) [[뎐]]&amp;lt;br/&amp;gt;&lt;br /&gt;
*김여원(2023130209) [[이나자키로빈]]&amp;lt;br/&amp;gt;&lt;br /&gt;
*김하은(2022131345) [[호빵이👻]]&amp;lt;br/&amp;gt;&lt;br /&gt;
*박정원(2023130350) [[•ᴗ•]]&amp;lt;br/&amp;gt;&lt;br /&gt;
*최필중(2023130216) [[딩잉잉]]&amp;lt;br/&amp;gt;&lt;br /&gt;
&lt;br /&gt;
=='''기획의도'''==&lt;br /&gt;
===기획배경===&lt;br /&gt;
1945년 광복 이후 대한민국 국민들은 자유민주국가로서의 미래를 기대했으나 실상은 그러지 못했다.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보여주듯 현재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는 그것을 누리지 못한 앞선 세대들의 목숨을 바친 항쟁의 대가이다. 민주항쟁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의 핵심 동력이었다. 오늘날 우리나라 민주의식의 중요한 기둥이 되는 네 가지 항쟁을 선별하고 각 항쟁의 배경, 전개과정, 의의를 비롯해 세부적이고 자세한 내용에 대한 기사를 작성한다.&lt;br /&gt;
===기획목적===&lt;br /&gt;
작금의 현실까지 오기에는 수없이 많은 투쟁이 있었지만 4.19혁명, 부마항쟁, 5.18민주항쟁, 6월민주항쟁이라는 네 가지 사건을 살펴보기로 한 것은 가장 많이 다뤄지고, 가장 많이 알려진 사건이기 때문이다. 관련된 사건과 역사 인물들에 대해 자세히 적어 내어 민주항쟁의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지 않으면 알기 힘든 각 민주항쟁의 자세한 내막을 밝혀낸다.&lt;br /&gt;
===기대하는 바===&lt;br /&gt;
타임라인과 온톨로지를 활용해 내용의 전반적인 이해를 돕고 자세한 설명을 통해 사건의 자세한 내막을 들어낸다. 네 가지 항쟁을 각각 큰 목차로 설정하고 세부 기사를 그 내부에 작성해 독자의 관심과 수요에 부합하는 정보를 전달하는 데 효과적일 것으로 기대된다. 민주항쟁에 참여한 사람들의 희생과 투쟁에 대한 존경심을 부르고 역사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다.&lt;br /&gt;
===기여===&lt;br /&gt;
[[뎐]], [[이나자키로빈]], [[호빵이👻]]: 기획의도 페이지 작성&lt;br /&gt;
&lt;br /&gt;
=='''온톨로지'''==&lt;br /&gt;
{{NetworkGraph | title=민주항쟁.lst}}&lt;br /&gt;
[[민주항쟁.lst]]&lt;br /&gt;
===기여===&lt;br /&gt;
*[[뎐]]: 온톨로지 제작&lt;br /&gt;
=='''컨텐츠 구조'''==&lt;br /&gt;
===클래스(Class)===&lt;br /&gt;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color:white&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0%&amp;quot; | 클래스 !! style=&amp;quot;width:40%&amp;quot; | 설명 !! style=&amp;quot;45%&amp;quot; | 노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제||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대표 키워드인 민주항쟁을 주제로서 나타내었다 || 만주항쟁&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항쟁||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민주화운동 시기 발생했던 주요 운동들을 ‘항쟁’이라는 키워드로 분류하였다. || 4.19혁명, 부마항쟁, 5.18 민주화운동, 6월민주항쟁&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사건||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항쟁의 원인, 결과가 되는 사건을 정리하였다|| 3.15부정선거, 고려대 4.18학생시위, 3.15의거, YH사건, 10.26사태, 12.12 군사반란, 비상계엄령,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고문추방민족대행진, 4.13호헌조치, 6.29선언, 대통령직선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지역||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요 항쟁들이 일어났던 지역을 정리하였다|| 마산, 부산, 광주&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인물||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요사건들을 발생시킨 인물, 참여했던 인물을 묶어서 정리하였다|| 이승만, 이기붕, 김주열, 박정희, 김재규, 전두환, 신군부, 시민군, 박종철, 이한열, 노태우&lt;br /&gt;
|-&lt;br /&gt;
|}&lt;br /&gt;
===관계성(Relation)===&lt;br /&gt;
*&amp;lt;font color=#228B22&amp;gt;'''~은 ~에 속한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주요 항쟁들이 민주항쟁에 속함을 나타내거나 인물의 소속을 나타낸다.&lt;br /&gt;
***해당노드:&lt;br /&gt;
***#4.19혁명 -&amp;gt; 민주항쟁&lt;br /&gt;
***#부마항쟁 -&amp;gt; 민주항쟁&lt;br /&gt;
***#5.18민주화운동 -&amp;gt; 민주항쟁&lt;br /&gt;
***#6월 민주항쟁 -&amp;gt; 민주항쟁&lt;br /&gt;
***#전두환 -&amp;gt; 신군부&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의 원인이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어떠한 사건과 인과관계를 이루는 또다른 사건 혹은 인물을 설명한다.&lt;br /&gt;
***#이기붕 -&amp;gt; 3.15부정선거&lt;br /&gt;
***#김주열 -&amp;gt; 고려대 4.18학생시위&lt;br /&gt;
***#고려대 4.18학생시위 -&amp;gt; 4.19혁명&lt;br /&gt;
***#3.15의거 -&amp;gt; 4.19혁명&lt;br /&gt;
***#김주열 -&amp;gt; 4.19혁명&lt;br /&gt;
***#3.15부정선거 -&amp;gt; 3.15의거&lt;br /&gt;
***#YH사건 -&amp;gt; 부마항쟁&lt;br /&gt;
***#부마항쟁 -&amp;gt; 10.26사태&lt;br /&gt;
***#박정희 -&amp;gt; 10.26사태&lt;br /&gt;
***#비상계엄령 -&amp;gt; 5.18민주화운동&lt;br /&gt;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 -&amp;gt; 고문추방민족대행진&lt;br /&gt;
***#고문추방민족대행진 -&amp;gt; 4.13호헌조치&lt;br /&gt;
***#4.13호헌조치 -&amp;gt; 6월민주항쟁&lt;br /&gt;
***#6월민주항쟁 -&amp;gt; 6.29선언&lt;br /&gt;
***#6월민주항쟁 -&amp;gt; 대통령직선제&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을 발생시켰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사건과 그 사건을 직접적으로 발생시킨 인물을 연결한다.&lt;br /&gt;
***#이승만 -&amp;gt; 3.15부정선거&lt;br /&gt;
***#김재규 -&amp;gt; 10.26사태&lt;br /&gt;
***#신군부 -&amp;gt; 1212군사반란&lt;br /&gt;
***#전두환 -&amp;gt; 비상계엄령&lt;br /&gt;
***#노태우 -&amp;gt; 6.29선언&lt;br /&gt;
***#시민군 -&amp;gt; 5.18민주화운동&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에 희생되었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민주항쟁의 진압과정 등 에서 희생된 인물을 설명한다&lt;br /&gt;
***#김주열 -&amp;gt; 3.15의거&lt;br /&gt;
***#이한열 -&amp;gt; 6월 민주항쟁&lt;br /&gt;
***#박종철&amp;gt;박종철 고문치사 사건&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에서 발생했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설명한다.&lt;br /&gt;
***#3.15의거 -&amp;gt; 마산&lt;br /&gt;
***#부마항쟁 -&amp;gt; 부산&lt;br /&gt;
***#부마항쟁 -&amp;gt; 마산&lt;br /&gt;
***#5.18민주화운동 -&amp;gt; 광주&lt;br /&gt;
===기여===&lt;br /&gt;
*[[뎐]]: 컨텐츠 구조 페이지 작성&lt;br /&gt;
=='''4.19혁명'''==&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VPp4BmfDSv8VA2-oC-VATHzUYgadaiaQ9AlWXYiaiVk&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원인===&lt;br /&gt;
====[[3.15 부정선거]]====&lt;br /&gt;
[[파일:3.15부정선거_개표_모습.png|300픽셀|섬네일|오른쪽|3.15부정선거 당시 개표하는 사진&amp;lt;ref&amp;gt;사진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amp;lt;/ref&amp;gt;]]&lt;br /&gt;
1959년 대한민국은 제 4대 대통령 선거와 제 5대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당시 자유당에서는 12년째 대통령으로서 연임 중이던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이기붕]]'''을 부통령 후보로 선임하였다. 그러나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병세의 악화로 사망하게 되고,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은 확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선거의 초점은 자유당의 조병옥과 민주당의 장면 간의 선거전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본격적인 선거유세의 시작과 함께 정부와 여당의 잇따른 야당선거운동 방해사건으로 부정선거가 시작되었다. 1960년 3월 15일 선거가 시작된 이후에도 다양한 방법의 부정행위가 일어났고, 개표 결과 이승만과 이기붕의 득표가 100%에 육박하는 결과로 나오자 자유당은 득표수를 하향 조정해 최종 집계에 반영할 것을 지시했다. 결국 이승만 88.7%, 이기붕 79%의 득표율을 가지며 정, 부통령에 당선되었다.&amp;lt;ref&amp;gt;자세한 내용은 3.15부정선거 페이지 참조&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부정선거 반대시위, [[3.15 의거]]의 발생====&lt;br /&gt;
3.15 부정선거를 반대하는 시위는 초기에는 중, 고등학생들의 산발적인 시위로 전개되었다. 3월 15일 선거일 밤 경남 마산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으며,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여 1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amp;lt;br/&amp;gt;&lt;br /&gt;
3월 15일 실종되었던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4월 11일 마산부두에서 발견되자 마산 시민들은 시청, 파출소 등을 파괴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2차 시위가 일어난 것이다.&lt;br /&gt;
&lt;br /&gt;
====[[고려대학교 4.18 학생시위]]의 발생====&lt;br /&gt;
1, 2차 마산시위를 계기로 부정선거 무효와 이승만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났다. 이들은 '4.18 선언문'을 낭독하고 시내로 진출하였다. 이는 4월 19일 학생들과 일반 시민들이 가세한 대규모 시위로 이어지게 되었다.&lt;br /&gt;
====전국적인 4.19 혁명의 발생====&lt;br /&gt;
분노한 전국의 시민과 학생들이 다음 날인 4월 19일에 '이승만 하야와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며 대규모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경찰은 또다시 무차별 발포에 나섰고,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지만 이러한 압박에도 시민들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lt;br /&gt;
====이승만 대통령의 혼란 수습 시도====&lt;br /&gt;
이승만 대통령은 4.19 시위로 인한 정국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4월 20일 국무위원 전원과 자유당 당무위원 전원의 사표를 제출하도록 지시하였으며, 4월 23일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외무장관에 허정, 내무장관에 이호, 법무장관에 권승렬을 임명하는 등 개각을 단행하였다.&amp;lt;br/&amp;gt;&lt;br /&gt;
그러나 미국은 4.19직후 국무부 성명을 통해 한국에서 발생한 사태는 부정선거에 대한 '군중의 불만'을 반영한 것 이라고 했고, 양유찬 주미대사를 불러 '부정선거에 대한 철저한 조사', '경향신문 복간', '국가보안법 개정' 등을 촉구하는 각서를 전달하였다.&amp;lt;br/&amp;gt;&lt;br /&gt;
그리고 4월 25일, 이승만 정권에 분노한 전국 27개 대학 258명의 교수가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 모여 14개항의 시국 선언문을 발표하며 학생, 시민들과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들은 3.15 부정선거 및 4.19 사태의 책임을 지고 대통령이 물러날 것을 주장하였으며, &amp;quot;학생들의 피에 보답하자&amp;quot;는 플랜 카드를 앞세워 국회의사당까지 행진하였다. &lt;br /&gt;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lt;br /&gt;
무력 진압에도 대규모 시위가 이어지며 시민들은 완강하게 투쟁하였다. 4월 26일 시위대가 경무대로 다시 집결하는 등 사태가 심각하게 진행되자, 오전 10시 30분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 성명을 발표하였다. 4월 27일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하며 대통령직을 하야하고 하와이로 망명하였으며 자유당 정권도 끝나게 된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우리 국민들, 특히 학생과 청년들의 주도로 이루어진 4.19 혁명은 학생과 일반 대중이 단결하여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아시아 최초의 시건이다. 4.19혁명은 부마항쟁, 5.18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그리고 2017년 촛불시위에 이르기 까지 정권에 대항하는 국민들이 단합을 이루는 초석이 되었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도 시민 저항권에 대한 근거로써 4.19혁명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문구가 있다.&lt;br /&gt;
===기여===&lt;br /&gt;
[[뎐]]: 4.19혁명 페이지 원인, 의의 작성 &lt;br /&gt;
&lt;br /&gt;
[[•ᴗ•]]: 4.19혁명 페이지 전개 작성&lt;br /&gt;
&lt;br /&gt;
=='''부마항쟁'''==&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bK7zjpPvBsC7rFRPmsiHCUYhyWt2VXOv8SYyaBTND4Y&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원인===&lt;br /&gt;
====[[유신 헌법]]과 [[긴급조치]]====&lt;br /&gt;
1971년 선거에서 김대중을 누르고 대통령에 3선된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해 국회 해산,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등 법의 일부 기능을 정지시키고 전국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했다.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된 이른바 유신헌법에 의해 제정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법」 에 의거해 박정희가 제8대 대통령으로 재차 당선되었고, 이 유신 헌법이 발효된 기간을 유신 체제라고 부른다. 유신 체제는 행정, 입법, 사법의 3권을 모두 쥔 대통령이 종신 집권할 수 있도록 설계된 1인 대통령제였다. 박정희는 유신 헌법에 의거해 대통령의 권한으로 취할 수 있었던 특별조치인 긴급조치를 선포함으로써 헌법에 반대하는 시위 및 운동과 방송, 언론 활동을 하는 반정부 인사들을 연행, 체포, 고문하는 등 억압을 가했다.&lt;br /&gt;
&lt;br /&gt;
====한국경제의 위기====&lt;br /&gt;
1970년대 말 한국경제는''' [[오일쇼크]]'''라는 세계경제의 위기와 결합해 가라앉고 말았다. 경제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정부는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과 함께 '''[[경제안정화정책]]'''을 수용했고, 중소자본가, 봉급생활자, 도시 노동자와 농민 등에 안정화 비용을 부과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이와 같은 안정화 정책은 경제위기로 어려운 처지에 있던 중소기업들의 도산을 가속하여 기업 부도율이 치솟고 하층민들을 더 깊은 고통에 몰아넣었다. 특히 '''부가가치세'''를 도입한 이후 물가가 상승하면서 일상에 타격을 주었으며, 노동집약적 제조업이 집중되었던 부산과 마산에서는 상황이 더욱 심각하여 1979년 부산 지역 부도율은 서울의 3배에 달했다.&lt;br /&gt;
&lt;br /&gt;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lt;br /&gt;
한 시대의 대격변을 예고하는 단초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시작됐다. 1979년 8월 9일 오전, 신민당의 당사 4층 강당에서는 봉제업체인 YH무역주식회사의 여성노동자 200여명이 기업주의 폐업에 반발하여 폐업조치 철회 농성을 벌였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인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신민당이 당사 건물을 내준 것이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폭력을 동원하여 농성을 해산시켰다. 결국 이 사건은 노동 탄압 사건을 넘어선 야당에 대한 정치 탄압 사건으로 발전하였다.&lt;br /&gt;
&lt;br /&gt;
이날 경찰은 1000여명의 진압대원을 신민당사로 난입시켜 농성을 하고 있던 174명의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로 밖으로 끌어냈다. 또한 경찰은 총재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김영삼 총재와 당 간부들을 끌어내면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박정희 정권은 이 노동자 농성 사건을 빌미로 신민당 분열공작을 시도하였다. 유신정권과 비밀리에 결탁한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 3명이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 부총재 전원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접수시켰다. 그리고 법원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신민당 총재단의 직무 집행을 정지시키고 박정희 정권의 꼭두각시를 총재직무대행으로 선임하였다.&lt;br /&gt;
&lt;br /&gt;
아울러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의 동교동 자택을 전면 봉쇄하였고,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에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끊으라고 요구한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즈』 회견내용을 “반헌정적, 반민족적 작태”로 몰아서 국회에 징계 동의안을 제출했다. 10월 4일 오후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의원 159명은 여당 총회장에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제명 결의안을 '''기습적으로''' 처리해 버렸다. 노사분규 사태로 시작된 사건이 제1야당 당수의 의원직 제명으로 확대된 정치적 사태를 지켜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유신체제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이 고조되었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유신 철폐, 독재 타도!'''''   &amp;lt;small&amp;gt;-10.16 부마항쟁 당시 시위대의 구호&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부산대학교 민주선언문, 학생 시위에서 시민항쟁으로====&lt;br /&gt;
[[파일:부산시위대.jpg|250px|섬네일|오른쪽|광복동을 지나는 시위 행렬]]&lt;br /&gt;
1979년 10월 16일 아침 10시 부산대학교 구내 도서관 앞에서 약 500명의 학생들이 모여 “유신정권 물러가라”, “정치탄압 중지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반정부 시위를 벌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민주선언문」]]'''을 통해 민주화, 언론 자유, 인권 보장의 신념을 확인하고, “제도화된 폭력성과 조직적 악의 근원인 유신헌법과 독재집권층의 퇴진만이 5천 만 겨레의 통일의 첫걸음이라고 주장하면서 형제의 피를 요구하는 자유와 민주의 깃발을 우리가 잡고 반민주의 무리, 불의의 무리들을 향해 외치며 나아가자”라고 선언하였다. 이후 학생들은 교문을 나가 거리에서 시위했다. 이때 학생 수는 약 5,000명으로 불어나 있었고, 광복동과 남포동 등 부산시내 중심가까지 진출해 애국가 등의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며, 이를 제지하려는 경찰과 이곳저곳에서 충돌하였다. 비슷한 시간, 부산 동아대학교에서도 1,000여 명의 학생이 부산대학교 학생과 합류하여 가두시위를 벌였다. 부산대학교 데모로 학생 수백 명이 연행되고 100여 명이 다쳤지만 이튿날인 10월 17일에는 시위가 더욱 격화되어 학생들뿐만 아니라 다수의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학생 시위는 점차 시민항쟁의 양상을 띠어갔다.''' 밤늦게까지 계속된 시위에서 시민들은 충무파출소, 한국방송공사, 서구청, 부산세무서 등을 파괴하였고, 경찰차량을 불태우거나 파손시켰다.&lt;br /&gt;
&lt;br /&gt;
====마산의 시민항쟁====&lt;br /&gt;
&lt;br /&gt;
민주항쟁은 18일에 마산으로 확산되었다. 늦은 오후에는 1,000여 명의 경남대학교 학생들이 마산 시내 번화가에 산발적으로 집결했으며, 일부시민들도 가담해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어두워진 다음 학생과 시민들의 데모는 격화되어 파출소, 공화당사, 방송국, 신문사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파괴하였다. 이튿날인 19일에는 시위가 더욱 치열해져 마산 시내는 한때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저녁 8시경, 시위대는 경남대학과 마산대학&amp;lt;ref&amp;gt;1985년 창원대학으로 교명이 변경되었으며, 현재의 마산대학교와 다르다.&amp;lt;/ref&amp;gt;, 그리고 고등학생까지 합세하여 약 8,000명에 이르렀으며, 시내 곳곳에서 몽둥이를 들고 동사무소와 파출소로 몰려가 시설을 파괴하였고, 경찰차량에 불을 질렀다.&lt;br /&gt;
&lt;br /&gt;
====부산 계엄령, 마산 위수령====&lt;br /&gt;
[[파일:계엄포고문.jpg|270px|섬네일|왼쪽|부산지역에 내려진 계엄포고문을 읽고 있는 시민들]]&lt;br /&gt;
부산대학교 시위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박정희 정부는 학생 시위로 시작된 시위가 대규모 시민항쟁으로 사태가 심상치 않게 확대되어가자 강경책으로 대응했다. 정부는 18일 자정을 기해 '''부산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동원한 과격한 진압'''을 통해 시위 참여자들과 이를 방조한 일반 시민들까지 1,058명을 연행하고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으며, 부산지구 계엄사령부는 각 대학 휴교조처와 야간통행금지시간을 2시간 연장하는 등의 항이 담긴 포고문을 발표했다.&lt;br /&gt;
&lt;br /&gt;
부산에 계엄령이 선포된 이튿날인 19일에 마산 시위가 확대됨에 따라 그 다음날인 10월 20일 정오, 정부가 '''마산 및 창원 지역에 위수령을 발령'''해 통행금지 시간이 연장되고, 경남대학 등에는 휴교조처가 취해졌으며, 24일에는 깡패를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132명을 검거, 23명을 구속했다. 이렇게 '''표면적으로는 부마민주항쟁이 단시간에 진압되는 듯 보였지만, 항쟁은 이미 유신체제의 균열을 불러오고 있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항쟁의 전개 과정에서 볼 수 있듯, 부마민주항쟁에서 특징적인 것은 먼저 시위대의 가장 큰 분노의 대상이 공화당사와 경찰·파출소였다는 점, 다음으로는 “부가가치세를 철폐하라”, “잘 먹고 잘 살아라”등의 구호에서 드러나듯이 세무서에 대한 공격, 그리고 신문사와 방송국에 대한 공격을 들 수 있다.&lt;br /&gt;
&lt;br /&gt;
부마민주항쟁은 1970년대 유신체제 밑에서 쌓였던 침묵하는 언론, 조세, 시민을 억압하는 경찰에 대한 불만 등 정치·사회·경제·문화·종교 등 각 부문에 걸친 여러 모순의 폭발이었고, 헌법 개정과 긴급조치로 겨우 유지되던 유신체제와 박정희 정권의 붕괴를 촉진시킨 결정적인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10.26사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또한 이 사건은 1980년 5월 18일의 광주 민주화운동과 1987년 6월 민주항쟁에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된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억눌린 우리 역사&amp;lt;/br&amp;gt;터져나온 분노&amp;lt;/br&amp;gt;매운 연기 칼바람에도&amp;lt;/br&amp;gt;함성소리 드높았던&amp;lt;/br&amp;gt;동트는 새벽벌&amp;lt;/br&amp;gt;시월이 오면&amp;lt;/br&amp;gt;핏발 선 가슴마다&amp;lt;/br&amp;gt;살아오는 십 일육&amp;lt;/br&amp;gt;동지여 전진하자&amp;lt;/br&amp;gt;깨치고 나가자&amp;lt;/br&amp;gt;뜨거운 가슴으로&amp;lt;/br&amp;gt;빛나는 내일로'''''&amp;lt;/br&amp;gt;&amp;lt;small&amp;gt;-'''부산대학교''' 새벽벌도서관 10.16 기념비&amp;lt;/small&amp;gt;&amp;lt;/div&amp;gt;&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호빵이👻]]: 부마항쟁 페이지 전체 작성&amp;lt;/br&amp;gt;&lt;br /&gt;
[[이나자키로빈]]: 부마항쟁 원인 중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 작성&lt;br /&gt;
&lt;br /&gt;
=='''5.18민주화운동'''==&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AMetwTuXYHTCXINqr7ZJpzO5CHFEMQO5-Uqau51RkXA&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원인===&lt;br /&gt;
====유신체제의 붕괴====&lt;br /&gt;
&lt;br /&gt;
[[파일:김재규.jpg|섬네일|오른쪽|암살 당시 상황을 재현하는 김재규]]&lt;br /&gt;
&lt;br /&gt;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amp;lt;small&amp;gt; - 김재규&amp;lt;/small&amp;gt;&lt;br /&gt;
1979년 10월 4일 신민당 총재 김영삼이 국회에서 의원직을 제명당하자 10월 15부터 10월 20까지 부산 · 마산 등지에서는 부마항쟁이 일어났고, 이의 해결을 둘러싼 노선대립으로 갈등 중 10월 26일 &amp;lt;ins&amp;gt;[[김재규]]&amp;lt;/ins&amp;gt;가 박정희를 살해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ins&amp;gt;[[10.26 사태]]&amp;lt;/ins&amp;gt;의 사후 수습과정에서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을 중심으로 신군부 세력이 부상하였으며, 이들은 &amp;lt;ins&amp;gt;[[12.12 사건]]&amp;lt;/ins&amp;gt;의 하극상을 통하여 군부를 장악하였다. 1980년 2월 29일 김대중 등이 복권되었으나 그 해 봄, 신군부는 최규하 과도 정부를 유명무실하게 하고 국민들이 요구하는 민주주의와 이를 위한 명확한 정치일정 제시를 거부하면서 권력기반을 구축하였다.&lt;br /&gt;
&lt;br /&gt;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lt;br /&gt;
한 시대의 대격변을 예고하는 단초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시작됐다. 1979년 8월 9일 오전, 신민당의 당사 4층 강당에서는 봉제업체인 YH무역주식회사의 여성노동자 200여명이 기업주의 폐업에 반발하여 폐업조치 철회 농성을 벌였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인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신민당이 당사 건물을 내준 것이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폭력을 동원하여 농성을 해산시켰다. 결국 이 사건은 노동 탄압 사건을 넘어선 야당에 대한 정치 탄압 사건으로 발전하였다.&lt;br /&gt;
&lt;br /&gt;
이날 경찰은 1000여명의 진압대원을 신민당사로 난입시켜 농성을 하고 있던 174명의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로 밖으로 끌어냈다. 또한 경찰은 총재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김영삼 총재와 당 간부들을 끌어내면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박정희 정권은 이 노동자 농성 사건을 빌미로 신민당 분열공작을 시도하였다. 유신정권과 비밀리에 결탁한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 3명이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 부총재 전원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접수시켰다. 그리고 법원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신민당 총재단의 직무 집행을 정지시키고 박정희 정권의 꼭두각시를 총재직무대행으로 선임하였다.&lt;br /&gt;
&lt;br /&gt;
아울러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의 동교동 자택을 전면 봉쇄하였고,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에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끊으라고 요구한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즈』 회견내용을 “반헌정적, 반민족적 작태”로 몰아서 국회에 징계 동의안을 제출했다. 10월 4일 오후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의원 159명은 여당 총회장에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제명 결의안을 '''기습적으로''' 처리해 버렸다.&lt;br /&gt;
&lt;br /&gt;
노사분규 사태로 시작된 사건이 제1야당 당수의 의원직 제명으로 확대된 정치적 사태를 지켜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유신체제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이 고조되었다. 또한 이 사건은 그동안 다소 주춤하던 대학가에 반유신 반독재 운동의 열기가 다시 확산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청춘을 바쳐, 학생 운동====&lt;br /&gt;
&lt;br /&gt;
[[파일:서울의_봄.JPG|섬네일|오른쪽|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앞에 모인 시위대]]&lt;br /&gt;
&lt;br /&gt;
군부의 재집권 야욕에 대한 국민적 저항은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표출되었다. 1980년 3월, 서울대 총학생회 출범을 시작으로 4월 초순에는 전국의 주요 대학들이 총학생회를 결성하기 시작하였다. 대학별로 독재 정권에 아부했던 어용교수와 족벌사학 퇴진 운동을 벌였고, 특히 병영집체훈련(당시 대학 신입생들은 의무적으로 군부대에 10일 간 입대하여 각종 군사훈련을 이수해야 했다.) 거부가 주요 이슈로 전면 등장했다. 각 대학의 병영집체훈련 거부운동이 본격화되고 전국적인 쟁점으로 떠오르자 신군부는 신문, 방송을 통해 ‘학생들의 안보의식 결여’를 비난하고 교내 시위·농성을 집중적으로 보도하게 했다.  5월 1일에 서울대가 입영훈련 거부투쟁 철회를 결정하고 ‘계엄령 해제’와 ‘유신잔당 퇴진’, ‘정부개헌중단’과 ‘노동 3권 보장’ 등을 요구하기 시작하면서 대학가는 이제까지의 학내 문제 중심의 운동에서 정치개혁을 위한 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그간 정부와 대학 간에 팽팽하게 유지되던 긴장 관계는 폭발 직전으로 내닫게 된 것이다.&lt;br /&gt;
&lt;br /&gt;
약 열흘 간의 대정부 투쟁을 준비한 대학가는 5월 10일 고려대 총학생회장실에서 열린 ‘총학생회장단 회의’에 참석한 전국 23개 대학 대표들은 ‘비상계엄의 즉각 해제’와 ‘전두환, 신현확 등 유신잔당 퇴진’ 등을 결의하고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정세에 대한 공동대처 방안을 마련했다. 이후 5월 13일부터 5월 14일에 걸쳐 서울 · 부산 · 대구 · 광주 등 37개 대학에서 계엄철폐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5월 15일에는 서울역에서 시위가 발생하는 등 학생시위는 서울시가지를 거의 마비시키는 등 야간까지 지속되어 사태가 절정에 달하면서 신군부 세력을 위협하였다. 5월 16일 24개 대학 학생대표들은 당분간 시국의 추이를 관망하기로 결정하고 가두시위를 중단하면서 소강상태에 돌입하는 듯하였다.&lt;br /&gt;
&lt;br /&gt;
====1980년 봄의 광주====&lt;br /&gt;
5월 17일 신군부 세력이 이전까지는 제주도를 제외한 지역에 한정되었던 비상계엄을 전국에 확대하는 조치인 계엄포고 10호(17일 24시에 발효: 각 대학 휴교령 포함)를 밤 9시 40분에 의결하고 밤 11시 40분에 발표하면서 밤 11시를 전후한 시점부터 김대중 · 김종필이 연행되는 등 권력형 부정축재자 및 소요조종 혐의자, 학생 시위 주동자가 체포되었다. 이날 밤 광주지역의 사회운동·학생운동의 지도자도 상당수가 검거되었다. 광주의 검거대상자는 전남대 12명, 조선대 10명 등 총 22명이었다. 전남에서 계엄합동수사단은 광주505보안대가 중심이고, 중앙정보부, 경찰 등이 보조역할을 했다. 전남 계엄합동수사단은 22대 차량과 86명의 인원이 출동해 정동년 등 복적생들과 대학의 총학생회 간부들을 집중 검거했다.&lt;br /&gt;
&lt;br /&gt;
한편 육군본부는 14일 오전 7시55분에 국가 중요 보안목표와 주요대학에 군 병력 배치 명령을 하달했다. 이 명령에 따라 전남북계엄분소장인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광주 시내 주요 시설물에 이날 오후부터 계엄병력을 배치했다. 31사단 96연대 병력이 광주시내 KBS건물에 42명, MBC 21명, CBS 11명, VOC(전일방송) 11명 등 주요 방송사 건물에 배치돼 경비에 들어간 것이다.&lt;br /&gt;
&lt;br /&gt;
이날 오후 전교사령관은 7공수여단의 광주배치에 따른 수송수단 지원도 미리 협의했다. 그리고 5월 8일부터 16일 사이에 공수부대 수뇌부들도 헬기를 타고 서울에서 내려와 광주 상무대의 전투병과교육사령부를 방문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광주에서 시위가 격화되면 즉각적으로 최정예 군부대를 동원해서 진압할 준비를 철저하게 갖추고 있었다. 5월 18일에 시작된 광주의 비극은 그 이전에 이미 시한폭탄처럼 준비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lt;br /&gt;
{{구글지도 | 위도=35.175961433346885 | 경도=126.90865311973532 | 줌=13 }}  [[파일:금남로.JPG|섬네일|오른쪽|금남로 앞에 집결한 버스와 시민군]]&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18일&amp;lt;/span&amp;gt;&lt;br /&gt;
휴교령이 내려질 경우 교문 앞에서 집결한다는 결의에 따라 학생들은 5월 18일 오전 전남대학교 앞에 모였다. 공수부대원들이 전남대 앞 시위를 저지하자 대학생들은 광주역에 재집결해서 시위를 이어갔다. 시위대가 점차 늘어나면서 공수부대원이 시내에서 시위진압에 나섰으며 18일 오후 1시부터 무차별 진압작전이 이루어져 부상자가 속출하였다.&lt;br /&gt;
&lt;br /&gt;
군인들이 금남로 등 시내 중심가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이나 여자를 마구 구타하고 짓밟으며 찌르는 등의 잔혹 행동을 하자 시민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이에 시위대는 오후 4시 이후 파출소 파괴 등 적극공세에 나섰다. '''계엄군의 과잉 무력진압은 시위를 해산시키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오히려 시민들을 단결시켰으며, 결국 19일 시민 · 학생 연대가 발생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lt;br /&gt;
&lt;br /&gt;
 '''''광주 애국 시민 여러분! 이것이 웬 말입니까? 웬 벼락이란 말입니까? 죄 없는 학생들을 총칼로 찔러 죽이고 몽둥이로 두들겨 트럭으로 실어가며 부녀자를 발가벗겨 총칼로 찌르는 놈들이 이 누구란 말입니까? 이제 우리가 살길은 전시민이 하나로 뭉쳐 청년 학생들을 보호하고 유신잔당과 극악무도한 살인마 전두환 일파와 공수 특전단 놈들을 한놈도 남김없이 쳐부수는 길 뿐입니다. 우리는 이제 다 보았습니다. 다 알게 되었읍니다. 왜 학생들이 그토록 소리 높이 외쳤는가를, 우리의 적은 경찰도 군대도 아닙니다. 우리의 적은 전국민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바로 유신잔당과 전두환 일파 그놈들입니다.''''' &amp;lt;small&amp;gt; - 1980년 5월 19일에 '광주시민민주투쟁회'명의의 호소문&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19일&amp;lt;/span&amp;gt;&lt;br /&gt;
19일 오전에는 일시적 소강상태였으나 오후 들어서 분노한 학생 · 시민들이 군 · 경찰과 공방전을 벌이면서 시위는 점차 격화되었다. '''시민들은 공포감에서 벗어나 자신의 생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단순한 학생시위에서 시민봉기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계엄군은 시위대를 포위하여 구타하였으며 일부 고등학생까지 포함된 시위대는 돌과 화염병으로 저항하였고 파출소와 방송국 등에 침입하였다. 뒤처진 공수부대를 공격하거나 고립된 차량을 포위하기도 하였으며 총과 방패를 빼앗기도 하였고, 오후 4시 50분 시민들에게 포위된 계엄군의 장갑차에서 최초의 발포가 있었다. 19일 밤비가 내리는 가운데 시위가 산발적으로 계속되었으며, 20일 오전 비가 그치고 대규모 시위는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오후부터 다시 시작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20일&amp;lt;/span&amp;gt;&lt;br /&gt;
'''20일 오후 6시부터 택시와 버스 운전 기사들이 광주역과 무등경기장에 모여 대형 버스와 트럭을 앞세우고 일시에 금남로에 집결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들을 앞세운 시위는 계엄군을 몰아내는 데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였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5.18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에 &amp;lt;ins&amp;gt;[[지대한 영향]]&amp;lt;/ins&amp;gt;을 끼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학생 운동에 뛰어든 많은 대학생들은 대학교에 들어와서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의 실상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아 학생 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군부정권은 5.18 이후로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다. 전두환은 김대중 등에게 '광주 사태'의 책임을 물어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했고,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 선언을 한 직후, 8월 27일 소위 체육관 선거를 통해 전두환은 대통령 자리를 탈취했다.&lt;br /&gt;
&lt;br /&gt;
지역적인 면에서는 '''광주광역시를 비롯한 전라도 지역의 트라우마'''로 작용해 이후의 민주정의당 및 &amp;lt;ins&amp;gt;[[3당 합당]]&amp;lt;/ins&amp;gt;으로 이어지는 보수 세력에 대해 적대심을 가지고, 민주당계 정당의 표밭이 되는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미 박정희 정부 시절부터 유무형의 정치적인 차별을 받고 있었지만 5.18의 참상은 전라도가 다시는 보수 세력을 지지하지 않게 만들 정도로 심각한 사건이며 호남소외론의 가장 결정적인 명분이 되었다.&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이나자키로빈]]: 5.18 민주화운동 페이지 전체 작성&lt;br /&gt;
&lt;br /&gt;
=='''6월민주항쟁'''==&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NnXWs5RMTIf-6DOEu9_rX2k4mgzUk1AQHYneCuwXN1Q&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원인===&lt;br /&gt;
====[[박종철고문치사사건]]====&lt;br /&gt;
&lt;br /&gt;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박종철은 1987년 1월 13일 자정 경 하숙집에서 치안본부(現 경찰청)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게 연행되었다.‘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이자 ‘민주화추진위원회’ 지도위원으로 수배 받고 있었던 박종운을 잡기위해 연행한 것이었다. 취조실로 연행해간 공안 당국은 박종철에게 박종운의 소재를 물었으나, 박종철은 순순히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경찰은 잔혹한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가하였고, 박종철은 끝내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했다. 당시 경찰은 초기 발표에서 고문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라고 사망원인을 발표하였으나, 시체부검 결과 전기고문과 물고문에 의한 살인인 것으로 밝혀졌다.&lt;br /&gt;
&lt;br /&gt;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저 죽음을 응시해주길 바란다. 저 죽음을 끝내 지켜주길 바란다. 저 죽음을 다시 죽이지 말아주길 바란다.''''' &amp;lt;small&amp;gt; - 동아일보 1987년 1월 17일자 김중배 칼럼 중&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사건 진상의 일부가 공개되자 2월 7일 전국 주요 도시에서 &amp;quot;박종철군 범국민추도식&amp;quot; 및 도심 시위가 열렸고 이어 3월 3일에는 &amp;quot;박종철군 49재와 고문추방 국민대행진&amp;quot;과 함께 또 다른 시위가 열렸다. 이후 4월 2일 서울대학교 학부모 130여 명이 ‘건국대학교 사태‘ 등 시국관련 구속학생의 징계철회를 요구하며 철야 농성을 벌였다.&lt;br /&gt;
&lt;br /&gt;
====정부의 개헌논의 유보====&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lt;br /&g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JazJFsgu4oc?si=sOE7w1tz-jKVztC9&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lt;br /&g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그러나 전두환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1987년 4월 13일 [[4.13호헌조치]]라 불리는 ‘대통령 특별담화‘를 발표, 개헌(改憲) 논의를 유보하겠다고 밝혔다. [[4.13호헌조치]]에서 전두환은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와 대통령 선거는 자유 경선의 분위기가 보장되는 가운데 1987년 내에 공정한 선거관리를 통해 차질 없이 실시할 수 있게 모든 노력을 다할것‘이라고 다짐했으며, 또 ‘민정당의 후임 대통령 후보는 조속한 시일 안에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인물 가운데서 당헌 절차와 민주 방식에 따라 전당대회에서 선출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호헌조치‘라는 그 이름대로 현행 헌법에 따라 권력을 이양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국민들의 큰 기대를 얻을 것이라 믿었으나, 기대는 커녕 오히려 반발을 가져오는 요인이 되고 말았다. 곧바로 이튿날인 4월 14일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 등 각계 인사들이, 호헌 조치를 비판하는 시국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정부 최루탄에 의한 [[이한열]] 사망====&lt;br /&gt;
[[파일:이한열.jpg|200px|섬네일|오른쪽|최루탄에 피격당한 후 이종창에게 부축받는 이한열]]&lt;br /&gt;
먼저 1987년 5월 27일 야당과 재야, 종교계 등이 힘을 모아 ‘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여당인 민주정의당에서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6월 10일에 맞춰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6 · 10국민대회]])’를 치르기로 결정하였다. 대학생들은 국본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를 중심으로 6 · 10국민대회에 호응하여 6월 초부터 각 대학별로 연일 집회와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6 · 10국민대회]] 하루 전날인 6월 9일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교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는 곧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학생들은 물론 시민들의 분노가 들끓었다. 이러한 분노 속에서 6 · 10국민대회가 열렸다. 경찰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6 · 10국민대회가 열리는 성공회대성당을 원천 봉쇄하였다. 그 결과 6 · 10국민대회는 대회장에 미리 들어가 있던 소수의 인원만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대회 예정 시간인 오후 6시 이전부터 서울 시내 곳곳에서 대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시민들도 다양한 방식으로 6 · 10국민대회와 학생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날 밤 늦게까지 시위를 벌이던 학생들은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이후 5일 동안 농성을 계속하였다. 애초 계획된 것은 아니었지만 대학생들의 명동성당 농성은 6 · 10국민대회가 단발성 행사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인 저항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lt;br /&gt;
&lt;br /&gt;
====민주항쟁 확산====&lt;br /&gt;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로 개헌하라!'''''   &amp;lt;small&amp;gt;-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제시한 슬로건&amp;lt;/small&amp;gt;&lt;br /&gt;
[[파일:도망.png|200px|섬네일|왼쪽|쫓아오는 경찰들을 피해 달리고 있는 호헌철폐시위 참가자들]]&lt;br /&gt;
명동성당 농성을 거치며 항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유월항쟁의 전국화 과정에는 일정한 패턴이 존재하였다. 6월 10일 서울 외에도 전국 주요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위가 벌어졌지만, 15일까지 항쟁의 중심은 6 · 10국민대회와 명동성당 농성이 전개된 서울이었다. 하지만 6월 15일 경부터는 부산, 대전, 진주 등에서 격렬한 시위가 전개되었다. 그러다가 6월 20일부터 대규모 시위가 광주, 전주, 순천, 익산 등 호남 지방으로 옮겨졌다. 6 · 10국민대회 이후 약 20일 동안 전국 곳곳에서 매일 평균 100회 이상의 시위가 동시다발로 벌어졌다. 특히 6월 18일 ‘최루탄추방대회’와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은 전국 곳곳에서 한꺼번에 1백만 명 이상이 참여하였다. 갈수록 참가 지역이 전국 곳곳으로 확산되어 대도시, 중소도시뿐만 아니라 농촌 지역의 군 단위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6월 26일 하루에만 37~38개 시 · 군에서 시위가 동시에 벌어졌다. 유월항쟁에 참가한 연 인원은 400~500만 명으로 추산된다.&lt;br /&gt;
&lt;br /&gt;
반면 유월항쟁의 전국적 동시다발 시위는 경찰 병력을 분산시켰다. 분산된 경찰 병력으로는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거센 시위의 물결을 막아 낼 수 없었다. 경찰이 시위 진압에 최루탄을 남발하면서 최루탄도 점차 고갈되기 시작하였다. 유월항쟁 기간 동안 경찰이 사용한 최루탄만 총 67만 발이 넘었다. 더불어, 전두환 정권이 집권 내내 강조했던 88서울올림픽이 얼마 남지 않아 미국 등 국제사회의 이목이 집중된 상황에서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운동 때처럼 유혈 사태와 대량 학살을 반복하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무엇보다 군대를 동원하더라도 이러한 대규모 시민 항쟁을 진압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결국 경찰력으로 항쟁을 막기 힘들고, 군대 투입도 어렵다고 판단한 전두환 정권은 1987년 6월 29일 ‘ 6 · 29민주화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하였다. 그리고 그동안 의식불명 상태에 있었던 이한열이 7월 5일 끝내 사망하였다. 5일장 후 7월 9일 치러진 이한열의 노제에 100만 명의 인파가 모인 것을 끝으로 약 한 달 동안 지속된 유월항쟁은 마무리되었다.&lt;br /&gt;
&lt;br /&gt;
[[파일:태극기.png|300px|섬네일|오른쪽|서울역 앞에서 태극기와 '자주없이 민주없다'는 플래카드를 들고 구호를 외치는 시위대]]&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1987년 6월항쟁이 '''대통령[[직선제]] 개헌'''이라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이 항쟁에 동참한 학생과 시민들의 요구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제시한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 개헌’이라는 슬로건으로 모아졌기 때문이었다. 유월항쟁은 이러한 민주화 세력의 통합성, 즉 각기 다른 성격과 지향을 가진 여러 주체들이 모두 동의할 수 있는 ‘최소 강령’하에 ‘최대 연합’으로 결집하였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딩잉잉]]:6월민주항쟁 페이지 전체 작성&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기밀문서]]&lt;br /&gt;
[[분류:4.19혁명관련]]&lt;br /&gt;
[[분류:부마항쟁관련]]&lt;br /&gt;
[[분류:5.18민주화운동관련]]&lt;br /&gt;
[[분류:6월민주항쟁관련]]&lt;br /&gt;
[[분류:뎐]]&lt;br /&gt;
[[분류:이나자키로빈]]&lt;br /&gt;
[[분류:호빵이👻]]&lt;br /&gt;
[[분류:•ᴗ•]]&lt;br /&gt;
[[분류:딩잉잉]]&lt;/div&gt;</summary>
		<author><name>딩잉잉</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8%B0%EB%B0%80%EB%AC%B8%EC%84%9C&amp;diff=35994</id>
		<title>기밀문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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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1T16:23:5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딩잉잉: /* 민주항쟁 확산 */&lt;/p&gt;
&lt;hr /&gt;
&lt;div&gt;=='''컨텐츠 주제'''==&lt;br /&gt;
&lt;br /&gt;
[[파일:시위대.png|400픽셀|center]][[파일:이한열사진.jpeg|400픽셀|center]][[파일:진압.png|400픽셀|center]]&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amp;lt;big&amp;gt;'''&amp;lt;span style=&amp;quot;color:#CD0000&amp;quot;&amp;gt;&amp;lt;big&amp;gt;&amp;lt;big&amp;gt;투쟁의 불꽃, 자유의 환호&amp;lt;/big&amp;gt;&amp;lt;/big&amp;gt;&amp;lt;/span&amp;gt;'''&amp;lt;br/&amp;gt;&amp;lt;br/&amp;gt;&lt;br /&gt;
''대한민국은 시민들의 투쟁과 희생을 거쳐, 피와 땀으로 민주화를 이룩하였습니다.''&amp;lt;br/&amp;gt;&lt;br /&gt;
''그들은 어둠을 밝히기 위해 항거의 불꽃을 태웠고, 그 불꽃은 자유를 외쳤으며, 그 외침은 세상을 움직였습니다.''&amp;lt;br/&amp;gt;&lt;br /&gt;
''이 «기밀문서»에는 당신이 미처 몰랐던 그 때의 열기와 의지가 실려있습니다.''&amp;lt;br/&amp;gt;&lt;br /&gt;
''함께, 그 뜨거운 페이지를 열어보시겠습니까?''&amp;lt;/span&amp;gt;&amp;lt;/big&amp;gt;&amp;lt;/div&amp;gt;&lt;br /&gt;
&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이나자키로빈]]&lt;br /&gt;
[[딩잉잉]]&lt;br /&gt;
&lt;br /&gt;
=='''팀원'''==&lt;br /&gt;
*오현지(2022131143) [[뎐]]&amp;lt;br/&amp;gt;&lt;br /&gt;
*김여원(2023130209) [[이나자키로빈]]&amp;lt;br/&amp;gt;&lt;br /&gt;
*김하은(2022131345) [[호빵이👻]]&amp;lt;br/&amp;gt;&lt;br /&gt;
*박정원(2023130350) [[•ᴗ•]]&amp;lt;br/&amp;gt;&lt;br /&gt;
*최필중(2023130216) [[딩잉잉]]&amp;lt;br/&amp;gt;&lt;br /&gt;
&lt;br /&gt;
=='''기획의도'''==&lt;br /&gt;
===기획배경===&lt;br /&gt;
1945년 광복 이후 대한민국 국민들은 자유민주국가로서의 미래를 기대했으나 실상은 그러지 못했다.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보여주듯 현재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는 그것을 누리지 못한 앞선 세대들의 목숨을 바친 항쟁의 대가이다. 민주항쟁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의 핵심 동력이었다. 오늘날 우리나라 민주의식의 중요한 기둥이 되는 네 가지 항쟁을 선별하고 각 항쟁의 배경, 전개과정, 의의를 비롯해 세부적이고 자세한 내용에 대한 기사를 작성한다.&lt;br /&gt;
===기획목적===&lt;br /&gt;
작금의 현실까지 오기에는 수없이 많은 투쟁이 있었지만 4.19혁명, 부마항쟁, 5.18민주항쟁, 6월민주항쟁이라는 네 가지 사건을 살펴보기로 한 것은 가장 많이 다뤄지고, 가장 많이 알려진 사건이기 때문이다. 관련된 사건과 역사 인물들에 대해 자세히 적어 내어 민주항쟁의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지 않으면 알기 힘든 각 민주항쟁의 자세한 내막을 밝혀낸다.&lt;br /&gt;
===기대하는 바===&lt;br /&gt;
타임라인과 온톨로지를 활용해 내용의 전반적인 이해를 돕고 자세한 설명을 통해 사건의 자세한 내막을 들어낸다. 네 가지 항쟁을 각각 큰 목차로 설정하고 세부 기사를 그 내부에 작성해 독자의 관심과 수요에 부합하는 정보를 전달하는 데 효과적일 것으로 기대된다. 민주항쟁에 참여한 사람들의 희생과 투쟁에 대한 존경심을 부르고 역사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다.&lt;br /&gt;
===기여===&lt;br /&gt;
[[뎐]], [[이나자키로빈]], [[호빵이👻]]: 기획의도 페이지 작성&lt;br /&gt;
&lt;br /&gt;
=='''온톨로지'''==&lt;br /&gt;
{{NetworkGraph | title=민주항쟁.lst}}&lt;br /&gt;
[[민주항쟁.lst]]&lt;br /&gt;
===기여===&lt;br /&gt;
*[[뎐]]: 온톨로지 제작&lt;br /&gt;
=='''컨텐츠 구조'''==&lt;br /&gt;
===클래스(Class)===&lt;br /&gt;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color:white&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0%&amp;quot; | 클래스 !! style=&amp;quot;width:40%&amp;quot; | 설명 !! style=&amp;quot;45%&amp;quot; | 노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제||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대표 키워드인 민주항쟁을 주제로서 나타내었다 || 만주항쟁&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항쟁||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민주화운동 시기 발생했던 주요 운동들을 ‘항쟁’이라는 키워드로 분류하였다. || 4.19혁명, 부마항쟁, 5.18 민주화운동, 6월민주항쟁&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사건||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항쟁의 원인, 결과가 되는 사건을 정리하였다|| 3.15부정선거, 고려대 4.18학생시위, 3.15의거, YH사건, 10.26사태, 12.12 군사반란, 비상계엄령,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고문추방민족대행진, 4.13호헌조치, 6.29선언, 대통령직선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지역||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요 항쟁들이 일어났던 지역을 정리하였다|| 마산, 부산, 광주&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인물||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요사건들을 발생시킨 인물, 참여했던 인물을 묶어서 정리하였다|| 이승만, 이기붕, 김주열, 박정희, 김재규, 전두환, 신군부, 시민군, 박종철, 이한열, 노태우&lt;br /&gt;
|-&lt;br /&gt;
|}&lt;br /&gt;
===관계성(Relation)===&lt;br /&gt;
*&amp;lt;font color=#228B22&amp;gt;'''~은 ~에 속한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주요 항쟁들이 민주항쟁에 속함을 나타내거나 인물의 소속을 나타낸다.&lt;br /&gt;
***해당노드:&lt;br /&gt;
***#4.19혁명 -&amp;gt; 민주항쟁&lt;br /&gt;
***#부마항쟁 -&amp;gt; 민주항쟁&lt;br /&gt;
***#5.18민주화운동 -&amp;gt; 민주항쟁&lt;br /&gt;
***#6월 민주항쟁 -&amp;gt; 민주항쟁&lt;br /&gt;
***#전두환 -&amp;gt; 신군부&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의 원인이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어떠한 사건과 인과관계를 이루는 또다른 사건 혹은 인물을 설명한다.&lt;br /&gt;
***#이기붕 -&amp;gt; 3.15부정선거&lt;br /&gt;
***#김주열 -&amp;gt; 고려대 4.18학생시위&lt;br /&gt;
***#고려대 4.18학생시위 -&amp;gt; 4.19혁명&lt;br /&gt;
***#3.15의거 -&amp;gt; 4.19혁명&lt;br /&gt;
***#김주열 -&amp;gt; 4.19혁명&lt;br /&gt;
***#3.15부정선거 -&amp;gt; 3.15의거&lt;br /&gt;
***#YH사건 -&amp;gt; 부마항쟁&lt;br /&gt;
***#부마항쟁 -&amp;gt; 10.26사태&lt;br /&gt;
***#박정희 -&amp;gt; 10.26사태&lt;br /&gt;
***#비상계엄령 -&amp;gt; 5.18민주화운동&lt;br /&gt;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 -&amp;gt; 고문추방민족대행진&lt;br /&gt;
***#고문추방민족대행진 -&amp;gt; 4.13호헌조치&lt;br /&gt;
***#4.13호헌조치 -&amp;gt; 6월민주항쟁&lt;br /&gt;
***#6월민주항쟁 -&amp;gt; 6.29선언&lt;br /&gt;
***#6월민주항쟁 -&amp;gt; 대통령직선제&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을 발생시켰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사건과 그 사건을 직접적으로 발생시킨 인물을 연결한다.&lt;br /&gt;
***#이승만 -&amp;gt; 3.15부정선거&lt;br /&gt;
***#김재규 -&amp;gt; 10.26사태&lt;br /&gt;
***#신군부 -&amp;gt; 1212군사반란&lt;br /&gt;
***#전두환 -&amp;gt; 비상계엄령&lt;br /&gt;
***#노태우 -&amp;gt; 6.29선언&lt;br /&gt;
***#시민군 -&amp;gt; 5.18민주화운동&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에 희생되었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민주항쟁의 진압과정 등 에서 희생된 인물을 설명한다&lt;br /&gt;
***#김주열 -&amp;gt; 3.15의거&lt;br /&gt;
***#이한열 -&amp;gt; 6월 민주항쟁&lt;br /&gt;
***#박종철&amp;gt;박종철 고문치사 사건&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에서 발생했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설명한다.&lt;br /&gt;
***#3.15의거 -&amp;gt; 마산&lt;br /&gt;
***#부마항쟁 -&amp;gt; 부산&lt;br /&gt;
***#부마항쟁 -&amp;gt; 마산&lt;br /&gt;
***#5.18민주화운동 -&amp;gt; 광주&lt;br /&gt;
===기여===&lt;br /&gt;
*[[뎐]]: 컨텐츠 구조 페이지 작성&lt;br /&gt;
=='''4.19혁명'''==&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VPp4BmfDSv8VA2-oC-VATHzUYgadaiaQ9AlWXYiaiVk&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원인===&lt;br /&gt;
====[[3.15 부정선거]]====&lt;br /&gt;
[[파일:3.15부정선거_개표_모습.png|300픽셀|섬네일|오른쪽|3.15부정선거 당시 개표하는 사진&amp;lt;ref&amp;gt;사진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amp;lt;/ref&amp;gt;]]&lt;br /&gt;
1959년 대한민국은 제 4대 대통령 선거와 제 5대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당시 자유당에서는 12년째 대통령으로서 연임 중이던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이기붕]]'''을 부통령 후보로 선임하였다. 그러나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병세의 악화로 사망하게 되고,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은 확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선거의 초점은 자유당의 조병옥과 민주당의 장면 간의 선거전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본격적인 선거유세의 시작과 함께 정부와 여당의 잇따른 야당선거운동 방해사건으로 부정선거가 시작되었다. 1960년 3월 15일 선거가 시작된 이후에도 다양한 방법의 부정행위가 일어났고, 개표 결과 이승만과 이기붕의 득표가 100%에 육박하는 결과로 나오자 자유당은 득표수를 하향 조정해 최종 집계에 반영할 것을 지시했다. 결국 이승만 88.7%, 이기붕 79%의 득표율을 가지며 정, 부통령에 당선되었다.&amp;lt;ref&amp;gt;자세한 내용은 3.15부정선거 페이지 참조&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부정선거 반대시위, [[3.15 의거]]의 발생====&lt;br /&gt;
3.15 부정선거를 반대하는 시위는 초기에는 중, 고등학생들의 산발적인 시위로 전개되었다. 3월 15일 선거일 밤 경남 마산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으며,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여 1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amp;lt;br/&amp;gt;&lt;br /&gt;
3월 15일 실종되었던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4월 11일 마산부두에서 발견되자 마산 시민들은 시청, 파출소 등을 파괴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2차 시위가 일어난 것이다.&lt;br /&gt;
&lt;br /&gt;
====[[고려대학교 4.18 학생시위]]의 발생====&lt;br /&gt;
1, 2차 마산시위를 계기로 부정선거 무효와 이승만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났다. 이들은 '4.18 선언문'을 낭독하고 시내로 진출하였다. 이는 4월 19일 학생들과 일반 시민들이 가세한 대규모 시위로 이어지게 되었다.&lt;br /&gt;
====전국적인 4.19 혁명의 발생====&lt;br /&gt;
분노한 전국의 시민과 학생들이 다음 날인 4월 19일에 '이승만 하야와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며 대규모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경찰은 또다시 무차별 발포에 나섰고,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지만 이러한 압박에도 시민들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lt;br /&gt;
====이승만 대통령의 혼란 수습 시도====&lt;br /&gt;
이승만 대통령은 4.19 시위로 인한 정국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4월 20일 국무위원 전원과 자유당 당무위원 전원의 사표를 제출하도록 지시하였으며, 4월 23일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외무장관에 허정, 내무장관에 이호, 법무장관에 권승렬을 임명하는 등 개각을 단행하였다.&amp;lt;br/&amp;gt;&lt;br /&gt;
그러나 미국은 4.19직후 국무부 성명을 통해 한국에서 발생한 사태는 부정선거에 대한 '군중의 불만'을 반영한 것 이라고 했고, 양유찬 주미대사를 불러 '부정선거에 대한 철저한 조사', '경향신문 복간', '국가보안법 개정' 등을 촉구하는 각서를 전달하였다.&amp;lt;br/&amp;gt;&lt;br /&gt;
그리고 4월 25일, 이승만 정권에 분노한 전국 27개 대학 258명의 교수가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 모여 14개항의 시국 선언문을 발표하며 학생, 시민들과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들은 3.15 부정선거 및 4.19 사태의 책임을 지고 대통령이 물러날 것을 주장하였으며, &amp;quot;학생들의 피에 보답하자&amp;quot;는 플랜 카드를 앞세워 국회의사당까지 행진하였다. &lt;br /&gt;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lt;br /&gt;
무력 진압에도 대규모 시위가 이어지며 시민들은 완강하게 투쟁하였다. 4월 26일 시위대가 경무대로 다시 집결하는 등 사태가 심각하게 진행되자, 오전 10시 30분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 성명을 발표하였다. 4월 27일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하며 대통령직을 하야하고 하와이로 망명하였으며 자유당 정권도 끝나게 된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우리 국민들, 특히 학생과 청년들의 주도로 이루어진 4.19 혁명은 학생과 일반 대중이 단결하여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아시아 최초의 시건이다. 4.19혁명은 부마항쟁, 5.18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그리고 2017년 촛불시위에 이르기 까지 정권에 대항하는 국민들이 단합을 이루는 초석이 되었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도 시민 저항권에 대한 근거로써 4.19혁명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문구가 있다.&lt;br /&gt;
===기여===&lt;br /&gt;
[[뎐]]: 4.19혁명 페이지 원인, 의의 작성 &lt;br /&gt;
&lt;br /&gt;
[[•ᴗ•]]: 4.19혁명 페이지 전개 작성&lt;br /&gt;
&lt;br /&gt;
=='''부마항쟁'''==&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bK7zjpPvBsC7rFRPmsiHCUYhyWt2VXOv8SYyaBTND4Y&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원인===&lt;br /&gt;
====[[유신 헌법]]과 [[긴급조치]]====&lt;br /&gt;
1971년 선거에서 김대중을 누르고 대통령에 3선된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해 국회 해산,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등 법의 일부 기능을 정지시키고 전국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했다.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된 이른바 유신헌법에 의해 제정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법」 에 의거해 박정희가 제8대 대통령으로 재차 당선되었고, 이 유신 헌법이 발효된 기간을 유신 체제라고 부른다. 유신 체제는 행정, 입법, 사법의 3권을 모두 쥔 대통령이 종신 집권할 수 있도록 설계된 1인 대통령제였다. 박정희는 유신 헌법에 의거해 대통령의 권한으로 취할 수 있었던 특별조치인 긴급조치를 선포함으로써 헌법에 반대하는 시위 및 운동과 방송, 언론 활동을 하는 반정부 인사들을 연행, 체포, 고문하는 등 억압을 가했다.&lt;br /&gt;
&lt;br /&gt;
====한국경제의 위기====&lt;br /&gt;
1970년대 말 한국경제는''' [[오일쇼크]]'''라는 세계경제의 위기와 결합해 가라앉고 말았다. 경제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정부는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과 함께 '''[[경제안정화정책]]'''을 수용했고, 중소자본가, 봉급생활자, 도시 노동자와 농민 등에 안정화 비용을 부과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이와 같은 안정화 정책은 경제위기로 어려운 처지에 있던 중소기업들의 도산을 가속하여 기업 부도율이 치솟고 하층민들을 더 깊은 고통에 몰아넣었다. 특히 '''부가가치세'''를 도입한 이후 물가가 상승하면서 일상에 타격을 주었으며, 노동집약적 제조업이 집중되었던 부산과 마산에서는 상황이 더욱 심각하여 1979년 부산 지역 부도율은 서울의 3배에 달했다.&lt;br /&gt;
&lt;br /&gt;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lt;br /&gt;
한 시대의 대격변을 예고하는 단초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시작됐다. 1979년 8월 9일 오전, 신민당의 당사 4층 강당에서는 봉제업체인 YH무역주식회사의 여성노동자 200여명이 기업주의 폐업에 반발하여 폐업조치 철회 농성을 벌였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인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신민당이 당사 건물을 내준 것이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폭력을 동원하여 농성을 해산시켰다. 결국 이 사건은 노동 탄압 사건을 넘어선 야당에 대한 정치 탄압 사건으로 발전하였다.&lt;br /&gt;
&lt;br /&gt;
이날 경찰은 1000여명의 진압대원을 신민당사로 난입시켜 농성을 하고 있던 174명의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로 밖으로 끌어냈다. 또한 경찰은 총재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김영삼 총재와 당 간부들을 끌어내면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박정희 정권은 이 노동자 농성 사건을 빌미로 신민당 분열공작을 시도하였다. 유신정권과 비밀리에 결탁한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 3명이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 부총재 전원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접수시켰다. 그리고 법원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신민당 총재단의 직무 집행을 정지시키고 박정희 정권의 꼭두각시를 총재직무대행으로 선임하였다.&lt;br /&gt;
&lt;br /&gt;
아울러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의 동교동 자택을 전면 봉쇄하였고,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에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끊으라고 요구한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즈』 회견내용을 “반헌정적, 반민족적 작태”로 몰아서 국회에 징계 동의안을 제출했다. 10월 4일 오후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의원 159명은 여당 총회장에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제명 결의안을 '''기습적으로''' 처리해 버렸다. 노사분규 사태로 시작된 사건이 제1야당 당수의 의원직 제명으로 확대된 정치적 사태를 지켜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유신체제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이 고조되었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유신 철폐, 독재 타도!'''''   &amp;lt;small&amp;gt;-10.16 부마항쟁 당시 시위대의 구호&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부산대학교 민주선언문, 학생 시위에서 시민항쟁으로====&lt;br /&gt;
[[파일:부산시위대.jpg|250px|섬네일|오른쪽|광복동을 지나는 시위 행렬]]&lt;br /&gt;
1979년 10월 16일 아침 10시 부산대학교 구내 도서관 앞에서 약 500명의 학생들이 모여 “유신정권 물러가라”, “정치탄압 중지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반정부 시위를 벌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민주선언문」]]'''을 통해 민주화, 언론 자유, 인권 보장의 신념을 확인하고, “제도화된 폭력성과 조직적 악의 근원인 유신헌법과 독재집권층의 퇴진만이 5천 만 겨레의 통일의 첫걸음이라고 주장하면서 형제의 피를 요구하는 자유와 민주의 깃발을 우리가 잡고 반민주의 무리, 불의의 무리들을 향해 외치며 나아가자”라고 선언하였다. 이후 학생들은 교문을 나가 거리에서 시위했다. 이때 학생 수는 약 5,000명으로 불어나 있었고, 광복동과 남포동 등 부산시내 중심가까지 진출해 애국가 등의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며, 이를 제지하려는 경찰과 이곳저곳에서 충돌하였다. 비슷한 시간, 부산 동아대학교에서도 1,000여 명의 학생이 부산대학교 학생과 합류하여 가두시위를 벌였다. 부산대학교 데모로 학생 수백 명이 연행되고 100여 명이 다쳤지만 이튿날인 10월 17일에는 시위가 더욱 격화되어 학생들뿐만 아니라 다수의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학생 시위는 점차 시민항쟁의 양상을 띠어갔다.''' 밤늦게까지 계속된 시위에서 시민들은 충무파출소, 한국방송공사, 서구청, 부산세무서 등을 파괴하였고, 경찰차량을 불태우거나 파손시켰다.&lt;br /&gt;
&lt;br /&gt;
====마산의 시민항쟁====&lt;br /&gt;
&lt;br /&gt;
민주항쟁은 18일에 마산으로 확산되었다. 늦은 오후에는 1,000여 명의 경남대학교 학생들이 마산 시내 번화가에 산발적으로 집결했으며, 일부시민들도 가담해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어두워진 다음 학생과 시민들의 데모는 격화되어 파출소, 공화당사, 방송국, 신문사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파괴하였다. 이튿날인 19일에는 시위가 더욱 치열해져 마산 시내는 한때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저녁 8시경, 시위대는 경남대학과 마산대학&amp;lt;ref&amp;gt;1985년 창원대학으로 교명이 변경되었으며, 현재의 마산대학교와 다르다.&amp;lt;/ref&amp;gt;, 그리고 고등학생까지 합세하여 약 8,000명에 이르렀으며, 시내 곳곳에서 몽둥이를 들고 동사무소와 파출소로 몰려가 시설을 파괴하였고, 경찰차량에 불을 질렀다.&lt;br /&gt;
&lt;br /&gt;
====부산 계엄령, 마산 위수령====&lt;br /&gt;
[[파일:계엄포고문.jpg|270px|섬네일|왼쪽|부산지역에 내려진 계엄포고문을 읽고 있는 시민들]]&lt;br /&gt;
부산대학교 시위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박정희 정부는 학생 시위로 시작된 시위가 대규모 시민항쟁으로 사태가 심상치 않게 확대되어가자 강경책으로 대응했다. 정부는 18일 자정을 기해 '''부산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동원한 과격한 진압'''을 통해 시위 참여자들과 이를 방조한 일반 시민들까지 1,058명을 연행하고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으며, 부산지구 계엄사령부는 각 대학 휴교조처와 야간통행금지시간을 2시간 연장하는 등의 항이 담긴 포고문을 발표했다.&lt;br /&gt;
&lt;br /&gt;
부산에 계엄령이 선포된 이튿날인 19일에 마산 시위가 확대됨에 따라 그 다음날인 10월 20일 정오, 정부가 '''마산 및 창원 지역에 위수령을 발령'''해 통행금지 시간이 연장되고, 경남대학 등에는 휴교조처가 취해졌으며, 24일에는 깡패를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132명을 검거, 23명을 구속했다. 이렇게 '''표면적으로는 부마민주항쟁이 단시간에 진압되는 듯 보였지만, 항쟁은 이미 유신체제의 균열을 불러오고 있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항쟁의 전개 과정에서 볼 수 있듯, 부마민주항쟁에서 특징적인 것은 먼저 시위대의 가장 큰 분노의 대상이 공화당사와 경찰·파출소였다는 점, 다음으로는 “부가가치세를 철폐하라”, “잘 먹고 잘 살아라”등의 구호에서 드러나듯이 세무서에 대한 공격, 그리고 신문사와 방송국에 대한 공격을 들 수 있다.&lt;br /&gt;
&lt;br /&gt;
부마민주항쟁은 1970년대 유신체제 밑에서 쌓였던 침묵하는 언론, 조세, 시민을 억압하는 경찰에 대한 불만 등 정치·사회·경제·문화·종교 등 각 부문에 걸친 여러 모순의 폭발이었고, 헌법 개정과 긴급조치로 겨우 유지되던 유신체제와 박정희 정권의 붕괴를 촉진시킨 결정적인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10.26사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또한 이 사건은 1980년 5월 18일의 광주 민주화운동과 1987년 6월 민주항쟁에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된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억눌린 우리 역사&amp;lt;/br&amp;gt;터져나온 분노&amp;lt;/br&amp;gt;매운 연기 칼바람에도&amp;lt;/br&amp;gt;함성소리 드높았던&amp;lt;/br&amp;gt;동트는 새벽벌&amp;lt;/br&amp;gt;시월이 오면&amp;lt;/br&amp;gt;핏발 선 가슴마다&amp;lt;/br&amp;gt;살아오는 십 일육&amp;lt;/br&amp;gt;동지여 전진하자&amp;lt;/br&amp;gt;깨치고 나가자&amp;lt;/br&amp;gt;뜨거운 가슴으로&amp;lt;/br&amp;gt;빛나는 내일로'''''&amp;lt;/br&amp;gt;&amp;lt;small&amp;gt;-'''부산대학교''' 새벽벌도서관 10.16 기념비&amp;lt;/small&amp;gt;&amp;lt;/div&amp;gt;&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호빵이👻]]: 부마항쟁 페이지 전체 작성&amp;lt;/br&amp;gt;&lt;br /&gt;
[[이나자키로빈]]: 부마항쟁 원인 중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 작성&lt;br /&gt;
&lt;br /&gt;
=='''5.18민주화운동'''==&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AMetwTuXYHTCXINqr7ZJpzO5CHFEMQO5-Uqau51RkXA&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원인===&lt;br /&gt;
====유신체제의 붕괴====&lt;br /&gt;
&lt;br /&gt;
[[파일:김재규.jpg|섬네일|오른쪽|암살 당시 상황을 재현하는 김재규]]&lt;br /&gt;
&lt;br /&gt;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amp;lt;small&amp;gt; - 김재규&amp;lt;/small&amp;gt;&lt;br /&gt;
1979년 10월 4일 신민당 총재 김영삼이 국회에서 의원직을 제명당하자 10월 15부터 10월 20까지 부산 · 마산 등지에서는 부마항쟁이 일어났고, 이의 해결을 둘러싼 노선대립으로 갈등 중 10월 26일 &amp;lt;ins&amp;gt;[[김재규]]&amp;lt;/ins&amp;gt;가 박정희를 살해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ins&amp;gt;[[10.26 사태]]&amp;lt;/ins&amp;gt;의 사후 수습과정에서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을 중심으로 신군부 세력이 부상하였으며, 이들은 &amp;lt;ins&amp;gt;[[12.12 사건]]&amp;lt;/ins&amp;gt;의 하극상을 통하여 군부를 장악하였다. 1980년 2월 29일 김대중 등이 복권되었으나 그 해 봄, 신군부는 최규하 과도 정부를 유명무실하게 하고 국민들이 요구하는 민주주의와 이를 위한 명확한 정치일정 제시를 거부하면서 권력기반을 구축하였다.&lt;br /&gt;
&lt;br /&gt;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lt;br /&gt;
한 시대의 대격변을 예고하는 단초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시작됐다. 1979년 8월 9일 오전, 신민당의 당사 4층 강당에서는 봉제업체인 YH무역주식회사의 여성노동자 200여명이 기업주의 폐업에 반발하여 폐업조치 철회 농성을 벌였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인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신민당이 당사 건물을 내준 것이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폭력을 동원하여 농성을 해산시켰다. 결국 이 사건은 노동 탄압 사건을 넘어선 야당에 대한 정치 탄압 사건으로 발전하였다.&lt;br /&gt;
&lt;br /&gt;
이날 경찰은 1000여명의 진압대원을 신민당사로 난입시켜 농성을 하고 있던 174명의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로 밖으로 끌어냈다. 또한 경찰은 총재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김영삼 총재와 당 간부들을 끌어내면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박정희 정권은 이 노동자 농성 사건을 빌미로 신민당 분열공작을 시도하였다. 유신정권과 비밀리에 결탁한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 3명이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 부총재 전원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접수시켰다. 그리고 법원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신민당 총재단의 직무 집행을 정지시키고 박정희 정권의 꼭두각시를 총재직무대행으로 선임하였다.&lt;br /&gt;
&lt;br /&gt;
아울러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의 동교동 자택을 전면 봉쇄하였고,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에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끊으라고 요구한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즈』 회견내용을 “반헌정적, 반민족적 작태”로 몰아서 국회에 징계 동의안을 제출했다. 10월 4일 오후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의원 159명은 여당 총회장에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제명 결의안을 '''기습적으로''' 처리해 버렸다.&lt;br /&gt;
&lt;br /&gt;
노사분규 사태로 시작된 사건이 제1야당 당수의 의원직 제명으로 확대된 정치적 사태를 지켜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유신체제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이 고조되었다. 또한 이 사건은 그동안 다소 주춤하던 대학가에 반유신 반독재 운동의 열기가 다시 확산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청춘을 바쳐, 학생 운동====&lt;br /&gt;
&lt;br /&gt;
[[파일:서울의_봄.JPG|섬네일|오른쪽|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앞에 모인 시위대]]&lt;br /&gt;
&lt;br /&gt;
군부의 재집권 야욕에 대한 국민적 저항은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표출되었다. 1980년 3월, 서울대 총학생회 출범을 시작으로 4월 초순에는 전국의 주요 대학들이 총학생회를 결성하기 시작하였다. 대학별로 독재 정권에 아부했던 어용교수와 족벌사학 퇴진 운동을 벌였고, 특히 병영집체훈련(당시 대학 신입생들은 의무적으로 군부대에 10일 간 입대하여 각종 군사훈련을 이수해야 했다.) 거부가 주요 이슈로 전면 등장했다. 각 대학의 병영집체훈련 거부운동이 본격화되고 전국적인 쟁점으로 떠오르자 신군부는 신문, 방송을 통해 ‘학생들의 안보의식 결여’를 비난하고 교내 시위·농성을 집중적으로 보도하게 했다.  5월 1일에 서울대가 입영훈련 거부투쟁 철회를 결정하고 ‘계엄령 해제’와 ‘유신잔당 퇴진’, ‘정부개헌중단’과 ‘노동 3권 보장’ 등을 요구하기 시작하면서 대학가는 이제까지의 학내 문제 중심의 운동에서 정치개혁을 위한 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그간 정부와 대학 간에 팽팽하게 유지되던 긴장 관계는 폭발 직전으로 내닫게 된 것이다.&lt;br /&gt;
&lt;br /&gt;
약 열흘 간의 대정부 투쟁을 준비한 대학가는 5월 10일 고려대 총학생회장실에서 열린 ‘총학생회장단 회의’에 참석한 전국 23개 대학 대표들은 ‘비상계엄의 즉각 해제’와 ‘전두환, 신현확 등 유신잔당 퇴진’ 등을 결의하고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정세에 대한 공동대처 방안을 마련했다. 이후 5월 13일부터 5월 14일에 걸쳐 서울 · 부산 · 대구 · 광주 등 37개 대학에서 계엄철폐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5월 15일에는 서울역에서 시위가 발생하는 등 학생시위는 서울시가지를 거의 마비시키는 등 야간까지 지속되어 사태가 절정에 달하면서 신군부 세력을 위협하였다. 5월 16일 24개 대학 학생대표들은 당분간 시국의 추이를 관망하기로 결정하고 가두시위를 중단하면서 소강상태에 돌입하는 듯하였다.&lt;br /&gt;
&lt;br /&gt;
====1980년 봄의 광주====&lt;br /&gt;
5월 17일 신군부 세력이 이전까지는 제주도를 제외한 지역에 한정되었던 비상계엄을 전국에 확대하는 조치인 계엄포고 10호(17일 24시에 발효: 각 대학 휴교령 포함)를 밤 9시 40분에 의결하고 밤 11시 40분에 발표하면서 밤 11시를 전후한 시점부터 김대중 · 김종필이 연행되는 등 권력형 부정축재자 및 소요조종 혐의자, 학생 시위 주동자가 체포되었다. 이날 밤 광주지역의 사회운동·학생운동의 지도자도 상당수가 검거되었다. 광주의 검거대상자는 전남대 12명, 조선대 10명 등 총 22명이었다. 전남에서 계엄합동수사단은 광주505보안대가 중심이고, 중앙정보부, 경찰 등이 보조역할을 했다. 전남 계엄합동수사단은 22대 차량과 86명의 인원이 출동해 정동년 등 복적생들과 대학의 총학생회 간부들을 집중 검거했다.&lt;br /&gt;
&lt;br /&gt;
한편 육군본부는 14일 오전 7시55분에 국가 중요 보안목표와 주요대학에 군 병력 배치 명령을 하달했다. 이 명령에 따라 전남북계엄분소장인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광주 시내 주요 시설물에 이날 오후부터 계엄병력을 배치했다. 31사단 96연대 병력이 광주시내 KBS건물에 42명, MBC 21명, CBS 11명, VOC(전일방송) 11명 등 주요 방송사 건물에 배치돼 경비에 들어간 것이다.&lt;br /&gt;
&lt;br /&gt;
이날 오후 전교사령관은 7공수여단의 광주배치에 따른 수송수단 지원도 미리 협의했다. 그리고 5월 8일부터 16일 사이에 공수부대 수뇌부들도 헬기를 타고 서울에서 내려와 광주 상무대의 전투병과교육사령부를 방문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광주에서 시위가 격화되면 즉각적으로 최정예 군부대를 동원해서 진압할 준비를 철저하게 갖추고 있었다. 5월 18일에 시작된 광주의 비극은 그 이전에 이미 시한폭탄처럼 준비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lt;br /&gt;
{{구글지도 | 위도=35.175961433346885 | 경도=126.90865311973532 | 줌=13 }}  [[파일:금남로.JPG|섬네일|오른쪽|금남로 앞에 집결한 버스와 시민군]]&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18일&amp;lt;/span&amp;gt;&lt;br /&gt;
휴교령이 내려질 경우 교문 앞에서 집결한다는 결의에 따라 학생들은 5월 18일 오전 전남대학교 앞에 모였다. 공수부대원들이 전남대 앞 시위를 저지하자 대학생들은 광주역에 재집결해서 시위를 이어갔다. 시위대가 점차 늘어나면서 공수부대원이 시내에서 시위진압에 나섰으며 18일 오후 1시부터 무차별 진압작전이 이루어져 부상자가 속출하였다.&lt;br /&gt;
&lt;br /&gt;
군인들이 금남로 등 시내 중심가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이나 여자를 마구 구타하고 짓밟으며 찌르는 등의 잔혹 행동을 하자 시민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이에 시위대는 오후 4시 이후 파출소 파괴 등 적극공세에 나섰다. '''계엄군의 과잉 무력진압은 시위를 해산시키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오히려 시민들을 단결시켰으며, 결국 19일 시민 · 학생 연대가 발생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lt;br /&gt;
&lt;br /&gt;
 '''''광주 애국 시민 여러분! 이것이 웬 말입니까? 웬 벼락이란 말입니까? 죄 없는 학생들을 총칼로 찔러 죽이고 몽둥이로 두들겨 트럭으로 실어가며 부녀자를 발가벗겨 총칼로 찌르는 놈들이 이 누구란 말입니까? 이제 우리가 살길은 전시민이 하나로 뭉쳐 청년 학생들을 보호하고 유신잔당과 극악무도한 살인마 전두환 일파와 공수 특전단 놈들을 한놈도 남김없이 쳐부수는 길 뿐입니다. 우리는 이제 다 보았습니다. 다 알게 되었읍니다. 왜 학생들이 그토록 소리 높이 외쳤는가를, 우리의 적은 경찰도 군대도 아닙니다. 우리의 적은 전국민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바로 유신잔당과 전두환 일파 그놈들입니다.''''' &amp;lt;small&amp;gt; - 1980년 5월 19일에 '광주시민민주투쟁회'명의의 호소문&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19일&amp;lt;/span&amp;gt;&lt;br /&gt;
19일 오전에는 일시적 소강상태였으나 오후 들어서 분노한 학생 · 시민들이 군 · 경찰과 공방전을 벌이면서 시위는 점차 격화되었다. '''시민들은 공포감에서 벗어나 자신의 생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단순한 학생시위에서 시민봉기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계엄군은 시위대를 포위하여 구타하였으며 일부 고등학생까지 포함된 시위대는 돌과 화염병으로 저항하였고 파출소와 방송국 등에 침입하였다. 뒤처진 공수부대를 공격하거나 고립된 차량을 포위하기도 하였으며 총과 방패를 빼앗기도 하였고, 오후 4시 50분 시민들에게 포위된 계엄군의 장갑차에서 최초의 발포가 있었다. 19일 밤비가 내리는 가운데 시위가 산발적으로 계속되었으며, 20일 오전 비가 그치고 대규모 시위는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오후부터 다시 시작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20일&amp;lt;/span&amp;gt;&lt;br /&gt;
'''20일 오후 6시부터 택시와 버스 운전 기사들이 광주역과 무등경기장에 모여 대형 버스와 트럭을 앞세우고 일시에 금남로에 집결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들을 앞세운 시위는 계엄군을 몰아내는 데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였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5.18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에 &amp;lt;ins&amp;gt;[[지대한 영향]]&amp;lt;/ins&amp;gt;을 끼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학생 운동에 뛰어든 많은 대학생들은 대학교에 들어와서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의 실상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아 학생 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군부정권은 5.18 이후로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다. 전두환은 김대중 등에게 '광주 사태'의 책임을 물어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했고,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 선언을 한 직후, 8월 27일 소위 체육관 선거를 통해 전두환은 대통령 자리를 탈취했다.&lt;br /&gt;
&lt;br /&gt;
지역적인 면에서는 '''광주광역시를 비롯한 전라도 지역의 트라우마'''로 작용해 이후의 민주정의당 및 &amp;lt;ins&amp;gt;[[3당 합당]]&amp;lt;/ins&amp;gt;으로 이어지는 보수 세력에 대해 적대심을 가지고, 민주당계 정당의 표밭이 되는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미 박정희 정부 시절부터 유무형의 정치적인 차별을 받고 있었지만 5.18의 참상은 전라도가 다시는 보수 세력을 지지하지 않게 만들 정도로 심각한 사건이며 호남소외론의 가장 결정적인 명분이 되었다.&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이나자키로빈]]: 5.18 민주화운동 페이지 전체 작성&lt;br /&gt;
&lt;br /&gt;
=='''6월민주항쟁'''==&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NnXWs5RMTIf-6DOEu9_rX2k4mgzUk1AQHYneCuwXN1Q&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원인===&lt;br /&gt;
====[[박종철고문치사사건]]====&lt;br /&gt;
&lt;br /&gt;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박종철은 1987년 1월 13일 자정 경 하숙집에서 치안본부(現 경찰청)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게 연행되었다.‘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이자 ‘민주화추진위원회’ 지도위원으로 수배 받고 있었던 박종운을 잡기위해 연행한 것이었다. 취조실로 연행해간 공안 당국은 박종철에게 박종운의 소재를 물었으나, 박종철은 순순히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경찰은 잔혹한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가하였고, 박종철은 끝내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했다. 당시 경찰은 초기 발표에서 고문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라고 사망원인을 발표하였으나, 시체부검 결과 전기고문과 물고문에 의한 살인인 것으로 밝혀졌다.&lt;br /&gt;
&lt;br /&gt;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저 죽음을 응시해주길 바란다. 저 죽음을 끝내 지켜주길 바란다. 저 죽음을 다시 죽이지 말아주길 바란다.''''' &amp;lt;small&amp;gt; - 동아일보 1987년 1월 17일자 김중배 칼럼 중&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사건 진상의 일부가 공개되자 2월 7일 전국 주요 도시에서 &amp;quot;박종철군 범국민추도식&amp;quot; 및 도심 시위가 열렸고 이어 3월 3일에는 &amp;quot;박종철군 49재와 고문추방 국민대행진&amp;quot;과 함께 또 다른 시위가 열렸다. 이후 4월 2일 서울대학교 학부모 130여 명이 ‘건국대학교 사태‘ 등 시국관련 구속학생의 징계철회를 요구하며 철야 농성을 벌였다.&lt;br /&gt;
&lt;br /&gt;
====정부의 개헌논의 유보====&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lt;br /&g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JazJFsgu4oc?si=sOE7w1tz-jKVztC9&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lt;br /&g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그러나 전두환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1987년 4월 13일 [[4.13호헌조치]]라 불리는 ‘대통령 특별담화‘를 발표, 개헌(改憲) 논의를 유보하겠다고 밝혔다. [[4.13호헌조치]]에서 전두환은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와 대통령 선거는 자유 경선의 분위기가 보장되는 가운데 1987년 내에 공정한 선거관리를 통해 차질 없이 실시할 수 있게 모든 노력을 다할것‘이라고 다짐했으며, 또 ‘민정당의 후임 대통령 후보는 조속한 시일 안에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인물 가운데서 당헌 절차와 민주 방식에 따라 전당대회에서 선출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호헌조치‘라는 그 이름대로 현행 헌법에 따라 권력을 이양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국민들의 큰 기대를 얻을 것이라 믿었으나, 기대는 커녕 오히려 반발을 가져오는 요인이 되고 말았다. 곧바로 이튿날인 4월 14일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 등 각계 인사들이, 호헌 조치를 비판하는 시국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정부 최루탄에 의한 [[이한열]] 사망====&lt;br /&gt;
[[파일:이한열.jpg|200px|섬네일|오른쪽|최루탄에 피격당한 후 이종창에게 부축받는 이한열]]&lt;br /&gt;
먼저 1987년 5월 27일 야당과 재야, 종교계 등이 힘을 모아 ‘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여당인 민주정의당에서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6월 10일에 맞춰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6 · 10국민대회]])’를 치르기로 결정하였다. 대학생들은 국본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를 중심으로 6 · 10국민대회에 호응하여 6월 초부터 각 대학별로 연일 집회와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6 · 10국민대회]] 하루 전날인 6월 9일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교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는 곧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학생들은 물론 시민들의 분노가 들끓었다. 이러한 분노 속에서 6 · 10국민대회가 열렸다. 경찰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6 · 10국민대회가 열리는 성공회대성당을 원천 봉쇄하였다. 그 결과 6 · 10국민대회는 대회장에 미리 들어가 있던 소수의 인원만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대회 예정 시간인 오후 6시 이전부터 서울 시내 곳곳에서 대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시민들도 다양한 방식으로 6 · 10국민대회와 학생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날 밤 늦게까지 시위를 벌이던 학생들은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이후 5일 동안 농성을 계속하였다. 애초 계획된 것은 아니었지만 대학생들의 명동성당 농성은 6 · 10국민대회가 단발성 행사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인 저항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lt;br /&gt;
&lt;br /&gt;
====민주항쟁 확산====&lt;br /&gt;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로 개헌하라!'''''   &amp;lt;small&amp;gt;-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제시한 슬로건&amp;lt;/small&amp;gt;&lt;br /&gt;
[[파일:도망.png|230px|섬네일|왼쪽|쫓아오는 경찰들을 피해 달리고 있는 호헌철폐시위 참가자들]]&lt;br /&gt;
명동성당 농성을 거치며 항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유월항쟁의 전국화 과정에는 일정한 패턴이 존재하였다. 6월 10일 서울 외에도 전국 주요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위가 벌어졌지만, 15일까지 항쟁의 중심은 6 · 10국민대회와 명동성당 농성이 전개된 서울이었다. 하지만 6월 15일 경부터는 부산, 대전, 진주 등에서 격렬한 시위가 전개되었다. 그러다가 6월 20일부터 대규모 시위가 광주, 전주, 순천, 익산 등 호남 지방으로 옮겨졌다. 6 · 10국민대회 이후 약 20일 동안 전국 곳곳에서 매일 평균 100회 이상의 시위가 동시다발로 벌어졌다. 특히 6월 18일 ‘최루탄추방대회’와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은 전국 곳곳에서 한꺼번에 1백만 명 이상이 참여하였다. 갈수록 참가 지역이 전국 곳곳으로 확산되어 대도시, 중소도시뿐만 아니라 농촌 지역의 군 단위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6월 26일 하루에만 37~38개 시 · 군에서 시위가 동시에 벌어졌다. 유월항쟁에 참가한 연 인원은 400~500만 명으로 추산된다.&lt;br /&gt;
&lt;br /&gt;
반면 유월항쟁의 전국적 동시다발 시위는 경찰 병력을 분산시켰다. 분산된 경찰 병력으로는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거센 시위의 물결을 막아 낼 수 없었다. 경찰이 시위 진압에 최루탄을 남발하면서 최루탄도 점차 고갈되기 시작하였다. 유월항쟁 기간 동안 경찰이 사용한 최루탄만 총 67만 발이 넘었다. 더불어, 전두환 정권이 집권 내내 강조했던 88서울올림픽이 얼마 남지 않아 미국 등 국제사회의 이목이 집중된 상황에서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운동 때처럼 유혈 사태와 대량 학살을 반복하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무엇보다 군대를 동원하더라도 이러한 대규모 시민 항쟁을 진압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결국 경찰력으로 항쟁을 막기 힘들고, 군대 투입도 어렵다고 판단한 전두환 정권은 1987년 6월 29일 ‘ 6 · 29민주화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하였다. 그리고 그동안 의식불명 상태에 있었던 이한열이 7월 5일 끝내 사망하였다. 5일장 후 7월 9일 치러진 이한열의 노제에 100만 명의 인파가 모인 것을 끝으로 약 한 달 동안 지속된 유월항쟁은 마무리되었다.&lt;br /&gt;
&lt;br /&gt;
[[파일:태극기.png|300px|섬네일|오른쪽|서울역 앞에서 태극기와 '자주없이 민주없다'는 플래카드를 들고 구호를 외치는 시위대]]&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1987년 6월항쟁이 '''대통령[[직선제]] 개헌'''이라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이 항쟁에 동참한 학생과 시민들의 요구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제시한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 개헌’이라는 슬로건으로 모아졌기 때문이었다. 유월항쟁은 이러한 민주화 세력의 통합성, 즉 각기 다른 성격과 지향을 가진 여러 주체들이 모두 동의할 수 있는 ‘최소 강령’하에 ‘최대 연합’으로 결집하였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딩잉잉]]:6월민주항쟁 페이지 전체 작성&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기밀문서]]&lt;br /&gt;
[[분류:4.19혁명관련]]&lt;br /&gt;
[[분류:부마항쟁관련]]&lt;br /&gt;
[[분류:5.18민주화운동관련]]&lt;br /&gt;
[[분류:6월민주항쟁관련]]&lt;br /&gt;
[[분류:뎐]]&lt;br /&gt;
[[분류:이나자키로빈]]&lt;br /&gt;
[[분류:호빵이👻]]&lt;br /&gt;
[[분류:•ᴗ•]]&lt;br /&gt;
[[분류:딩잉잉]]&lt;/div&gt;</summary>
		<author><name>딩잉잉</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8%B0%EB%B0%80%EB%AC%B8%EC%84%9C&amp;diff=35993</id>
		<title>기밀문서</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8%B0%EB%B0%80%EB%AC%B8%EC%84%9C&amp;diff=35993"/>
		<updated>2023-12-11T16:23:3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딩잉잉: /* 전개 */&lt;/p&gt;
&lt;hr /&gt;
&lt;div&gt;=='''컨텐츠 주제'''==&lt;br /&gt;
&lt;br /&gt;
[[파일:시위대.png|400픽셀|center]][[파일:이한열사진.jpeg|400픽셀|center]][[파일:진압.png|400픽셀|center]]&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amp;lt;big&amp;gt;'''&amp;lt;span style=&amp;quot;color:#CD0000&amp;quot;&amp;gt;&amp;lt;big&amp;gt;&amp;lt;big&amp;gt;투쟁의 불꽃, 자유의 환호&amp;lt;/big&amp;gt;&amp;lt;/big&amp;gt;&amp;lt;/span&amp;gt;'''&amp;lt;br/&amp;gt;&amp;lt;br/&amp;gt;&lt;br /&gt;
''대한민국은 시민들의 투쟁과 희생을 거쳐, 피와 땀으로 민주화를 이룩하였습니다.''&amp;lt;br/&amp;gt;&lt;br /&gt;
''그들은 어둠을 밝히기 위해 항거의 불꽃을 태웠고, 그 불꽃은 자유를 외쳤으며, 그 외침은 세상을 움직였습니다.''&amp;lt;br/&amp;gt;&lt;br /&gt;
''이 «기밀문서»에는 당신이 미처 몰랐던 그 때의 열기와 의지가 실려있습니다.''&amp;lt;br/&amp;gt;&lt;br /&gt;
''함께, 그 뜨거운 페이지를 열어보시겠습니까?''&amp;lt;/span&amp;gt;&amp;lt;/big&amp;gt;&amp;lt;/div&amp;gt;&lt;br /&gt;
&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이나자키로빈]]&lt;br /&gt;
[[딩잉잉]]&lt;br /&gt;
&lt;br /&gt;
=='''팀원'''==&lt;br /&gt;
*오현지(2022131143) [[뎐]]&amp;lt;br/&amp;gt;&lt;br /&gt;
*김여원(2023130209) [[이나자키로빈]]&amp;lt;br/&amp;gt;&lt;br /&gt;
*김하은(2022131345) [[호빵이👻]]&amp;lt;br/&amp;gt;&lt;br /&gt;
*박정원(2023130350) [[•ᴗ•]]&amp;lt;br/&amp;gt;&lt;br /&gt;
*최필중(2023130216) [[딩잉잉]]&amp;lt;br/&amp;gt;&lt;br /&gt;
&lt;br /&gt;
=='''기획의도'''==&lt;br /&gt;
===기획배경===&lt;br /&gt;
1945년 광복 이후 대한민국 국민들은 자유민주국가로서의 미래를 기대했으나 실상은 그러지 못했다.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보여주듯 현재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는 그것을 누리지 못한 앞선 세대들의 목숨을 바친 항쟁의 대가이다. 민주항쟁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의 핵심 동력이었다. 오늘날 우리나라 민주의식의 중요한 기둥이 되는 네 가지 항쟁을 선별하고 각 항쟁의 배경, 전개과정, 의의를 비롯해 세부적이고 자세한 내용에 대한 기사를 작성한다.&lt;br /&gt;
===기획목적===&lt;br /&gt;
작금의 현실까지 오기에는 수없이 많은 투쟁이 있었지만 4.19혁명, 부마항쟁, 5.18민주항쟁, 6월민주항쟁이라는 네 가지 사건을 살펴보기로 한 것은 가장 많이 다뤄지고, 가장 많이 알려진 사건이기 때문이다. 관련된 사건과 역사 인물들에 대해 자세히 적어 내어 민주항쟁의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지 않으면 알기 힘든 각 민주항쟁의 자세한 내막을 밝혀낸다.&lt;br /&gt;
===기대하는 바===&lt;br /&gt;
타임라인과 온톨로지를 활용해 내용의 전반적인 이해를 돕고 자세한 설명을 통해 사건의 자세한 내막을 들어낸다. 네 가지 항쟁을 각각 큰 목차로 설정하고 세부 기사를 그 내부에 작성해 독자의 관심과 수요에 부합하는 정보를 전달하는 데 효과적일 것으로 기대된다. 민주항쟁에 참여한 사람들의 희생과 투쟁에 대한 존경심을 부르고 역사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다.&lt;br /&gt;
===기여===&lt;br /&gt;
[[뎐]], [[이나자키로빈]], [[호빵이👻]]: 기획의도 페이지 작성&lt;br /&gt;
&lt;br /&gt;
=='''온톨로지'''==&lt;br /&gt;
{{NetworkGraph | title=민주항쟁.lst}}&lt;br /&gt;
[[민주항쟁.lst]]&lt;br /&gt;
===기여===&lt;br /&gt;
*[[뎐]]: 온톨로지 제작&lt;br /&gt;
=='''컨텐츠 구조'''==&lt;br /&gt;
===클래스(Class)===&lt;br /&gt;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color:white&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0%&amp;quot; | 클래스 !! style=&amp;quot;width:40%&amp;quot; | 설명 !! style=&amp;quot;45%&amp;quot; | 노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제||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대표 키워드인 민주항쟁을 주제로서 나타내었다 || 만주항쟁&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항쟁||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민주화운동 시기 발생했던 주요 운동들을 ‘항쟁’이라는 키워드로 분류하였다. || 4.19혁명, 부마항쟁, 5.18 민주화운동, 6월민주항쟁&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사건||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항쟁의 원인, 결과가 되는 사건을 정리하였다|| 3.15부정선거, 고려대 4.18학생시위, 3.15의거, YH사건, 10.26사태, 12.12 군사반란, 비상계엄령,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고문추방민족대행진, 4.13호헌조치, 6.29선언, 대통령직선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지역||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요 항쟁들이 일어났던 지역을 정리하였다|| 마산, 부산, 광주&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인물||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요사건들을 발생시킨 인물, 참여했던 인물을 묶어서 정리하였다|| 이승만, 이기붕, 김주열, 박정희, 김재규, 전두환, 신군부, 시민군, 박종철, 이한열, 노태우&lt;br /&gt;
|-&lt;br /&gt;
|}&lt;br /&gt;
===관계성(Relation)===&lt;br /&gt;
*&amp;lt;font color=#228B22&amp;gt;'''~은 ~에 속한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주요 항쟁들이 민주항쟁에 속함을 나타내거나 인물의 소속을 나타낸다.&lt;br /&gt;
***해당노드:&lt;br /&gt;
***#4.19혁명 -&amp;gt; 민주항쟁&lt;br /&gt;
***#부마항쟁 -&amp;gt; 민주항쟁&lt;br /&gt;
***#5.18민주화운동 -&amp;gt; 민주항쟁&lt;br /&gt;
***#6월 민주항쟁 -&amp;gt; 민주항쟁&lt;br /&gt;
***#전두환 -&amp;gt; 신군부&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의 원인이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어떠한 사건과 인과관계를 이루는 또다른 사건 혹은 인물을 설명한다.&lt;br /&gt;
***#이기붕 -&amp;gt; 3.15부정선거&lt;br /&gt;
***#김주열 -&amp;gt; 고려대 4.18학생시위&lt;br /&gt;
***#고려대 4.18학생시위 -&amp;gt; 4.19혁명&lt;br /&gt;
***#3.15의거 -&amp;gt; 4.19혁명&lt;br /&gt;
***#김주열 -&amp;gt; 4.19혁명&lt;br /&gt;
***#3.15부정선거 -&amp;gt; 3.15의거&lt;br /&gt;
***#YH사건 -&amp;gt; 부마항쟁&lt;br /&gt;
***#부마항쟁 -&amp;gt; 10.26사태&lt;br /&gt;
***#박정희 -&amp;gt; 10.26사태&lt;br /&gt;
***#비상계엄령 -&amp;gt; 5.18민주화운동&lt;br /&gt;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 -&amp;gt; 고문추방민족대행진&lt;br /&gt;
***#고문추방민족대행진 -&amp;gt; 4.13호헌조치&lt;br /&gt;
***#4.13호헌조치 -&amp;gt; 6월민주항쟁&lt;br /&gt;
***#6월민주항쟁 -&amp;gt; 6.29선언&lt;br /&gt;
***#6월민주항쟁 -&amp;gt; 대통령직선제&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을 발생시켰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사건과 그 사건을 직접적으로 발생시킨 인물을 연결한다.&lt;br /&gt;
***#이승만 -&amp;gt; 3.15부정선거&lt;br /&gt;
***#김재규 -&amp;gt; 10.26사태&lt;br /&gt;
***#신군부 -&amp;gt; 1212군사반란&lt;br /&gt;
***#전두환 -&amp;gt; 비상계엄령&lt;br /&gt;
***#노태우 -&amp;gt; 6.29선언&lt;br /&gt;
***#시민군 -&amp;gt; 5.18민주화운동&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에 희생되었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민주항쟁의 진압과정 등 에서 희생된 인물을 설명한다&lt;br /&gt;
***#김주열 -&amp;gt; 3.15의거&lt;br /&gt;
***#이한열 -&amp;gt; 6월 민주항쟁&lt;br /&gt;
***#박종철&amp;gt;박종철 고문치사 사건&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에서 발생했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설명한다.&lt;br /&gt;
***#3.15의거 -&amp;gt; 마산&lt;br /&gt;
***#부마항쟁 -&amp;gt; 부산&lt;br /&gt;
***#부마항쟁 -&amp;gt; 마산&lt;br /&gt;
***#5.18민주화운동 -&amp;gt; 광주&lt;br /&gt;
===기여===&lt;br /&gt;
*[[뎐]]: 컨텐츠 구조 페이지 작성&lt;br /&gt;
=='''4.19혁명'''==&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VPp4BmfDSv8VA2-oC-VATHzUYgadaiaQ9AlWXYiaiVk&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원인===&lt;br /&gt;
====[[3.15 부정선거]]====&lt;br /&gt;
[[파일:3.15부정선거_개표_모습.png|300픽셀|섬네일|오른쪽|3.15부정선거 당시 개표하는 사진&amp;lt;ref&amp;gt;사진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amp;lt;/ref&amp;gt;]]&lt;br /&gt;
1959년 대한민국은 제 4대 대통령 선거와 제 5대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당시 자유당에서는 12년째 대통령으로서 연임 중이던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이기붕]]'''을 부통령 후보로 선임하였다. 그러나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병세의 악화로 사망하게 되고,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은 확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선거의 초점은 자유당의 조병옥과 민주당의 장면 간의 선거전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본격적인 선거유세의 시작과 함께 정부와 여당의 잇따른 야당선거운동 방해사건으로 부정선거가 시작되었다. 1960년 3월 15일 선거가 시작된 이후에도 다양한 방법의 부정행위가 일어났고, 개표 결과 이승만과 이기붕의 득표가 100%에 육박하는 결과로 나오자 자유당은 득표수를 하향 조정해 최종 집계에 반영할 것을 지시했다. 결국 이승만 88.7%, 이기붕 79%의 득표율을 가지며 정, 부통령에 당선되었다.&amp;lt;ref&amp;gt;자세한 내용은 3.15부정선거 페이지 참조&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부정선거 반대시위, [[3.15 의거]]의 발생====&lt;br /&gt;
3.15 부정선거를 반대하는 시위는 초기에는 중, 고등학생들의 산발적인 시위로 전개되었다. 3월 15일 선거일 밤 경남 마산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으며,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여 1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amp;lt;br/&amp;gt;&lt;br /&gt;
3월 15일 실종되었던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4월 11일 마산부두에서 발견되자 마산 시민들은 시청, 파출소 등을 파괴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2차 시위가 일어난 것이다.&lt;br /&gt;
&lt;br /&gt;
====[[고려대학교 4.18 학생시위]]의 발생====&lt;br /&gt;
1, 2차 마산시위를 계기로 부정선거 무효와 이승만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났다. 이들은 '4.18 선언문'을 낭독하고 시내로 진출하였다. 이는 4월 19일 학생들과 일반 시민들이 가세한 대규모 시위로 이어지게 되었다.&lt;br /&gt;
====전국적인 4.19 혁명의 발생====&lt;br /&gt;
분노한 전국의 시민과 학생들이 다음 날인 4월 19일에 '이승만 하야와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며 대규모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경찰은 또다시 무차별 발포에 나섰고,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지만 이러한 압박에도 시민들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lt;br /&gt;
====이승만 대통령의 혼란 수습 시도====&lt;br /&gt;
이승만 대통령은 4.19 시위로 인한 정국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4월 20일 국무위원 전원과 자유당 당무위원 전원의 사표를 제출하도록 지시하였으며, 4월 23일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외무장관에 허정, 내무장관에 이호, 법무장관에 권승렬을 임명하는 등 개각을 단행하였다.&amp;lt;br/&amp;gt;&lt;br /&gt;
그러나 미국은 4.19직후 국무부 성명을 통해 한국에서 발생한 사태는 부정선거에 대한 '군중의 불만'을 반영한 것 이라고 했고, 양유찬 주미대사를 불러 '부정선거에 대한 철저한 조사', '경향신문 복간', '국가보안법 개정' 등을 촉구하는 각서를 전달하였다.&amp;lt;br/&amp;gt;&lt;br /&gt;
그리고 4월 25일, 이승만 정권에 분노한 전국 27개 대학 258명의 교수가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 모여 14개항의 시국 선언문을 발표하며 학생, 시민들과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들은 3.15 부정선거 및 4.19 사태의 책임을 지고 대통령이 물러날 것을 주장하였으며, &amp;quot;학생들의 피에 보답하자&amp;quot;는 플랜 카드를 앞세워 국회의사당까지 행진하였다. &lt;br /&gt;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lt;br /&gt;
무력 진압에도 대규모 시위가 이어지며 시민들은 완강하게 투쟁하였다. 4월 26일 시위대가 경무대로 다시 집결하는 등 사태가 심각하게 진행되자, 오전 10시 30분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 성명을 발표하였다. 4월 27일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하며 대통령직을 하야하고 하와이로 망명하였으며 자유당 정권도 끝나게 된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우리 국민들, 특히 학생과 청년들의 주도로 이루어진 4.19 혁명은 학생과 일반 대중이 단결하여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아시아 최초의 시건이다. 4.19혁명은 부마항쟁, 5.18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그리고 2017년 촛불시위에 이르기 까지 정권에 대항하는 국민들이 단합을 이루는 초석이 되었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도 시민 저항권에 대한 근거로써 4.19혁명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문구가 있다.&lt;br /&gt;
===기여===&lt;br /&gt;
[[뎐]]: 4.19혁명 페이지 원인, 의의 작성 &lt;br /&gt;
&lt;br /&gt;
[[•ᴗ•]]: 4.19혁명 페이지 전개 작성&lt;br /&gt;
&lt;br /&gt;
=='''부마항쟁'''==&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bK7zjpPvBsC7rFRPmsiHCUYhyWt2VXOv8SYyaBTND4Y&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원인===&lt;br /&gt;
====[[유신 헌법]]과 [[긴급조치]]====&lt;br /&gt;
1971년 선거에서 김대중을 누르고 대통령에 3선된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해 국회 해산,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등 법의 일부 기능을 정지시키고 전국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했다.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된 이른바 유신헌법에 의해 제정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법」 에 의거해 박정희가 제8대 대통령으로 재차 당선되었고, 이 유신 헌법이 발효된 기간을 유신 체제라고 부른다. 유신 체제는 행정, 입법, 사법의 3권을 모두 쥔 대통령이 종신 집권할 수 있도록 설계된 1인 대통령제였다. 박정희는 유신 헌법에 의거해 대통령의 권한으로 취할 수 있었던 특별조치인 긴급조치를 선포함으로써 헌법에 반대하는 시위 및 운동과 방송, 언론 활동을 하는 반정부 인사들을 연행, 체포, 고문하는 등 억압을 가했다.&lt;br /&gt;
&lt;br /&gt;
====한국경제의 위기====&lt;br /&gt;
1970년대 말 한국경제는''' [[오일쇼크]]'''라는 세계경제의 위기와 결합해 가라앉고 말았다. 경제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정부는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과 함께 '''[[경제안정화정책]]'''을 수용했고, 중소자본가, 봉급생활자, 도시 노동자와 농민 등에 안정화 비용을 부과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이와 같은 안정화 정책은 경제위기로 어려운 처지에 있던 중소기업들의 도산을 가속하여 기업 부도율이 치솟고 하층민들을 더 깊은 고통에 몰아넣었다. 특히 '''부가가치세'''를 도입한 이후 물가가 상승하면서 일상에 타격을 주었으며, 노동집약적 제조업이 집중되었던 부산과 마산에서는 상황이 더욱 심각하여 1979년 부산 지역 부도율은 서울의 3배에 달했다.&lt;br /&gt;
&lt;br /&gt;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lt;br /&gt;
한 시대의 대격변을 예고하는 단초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시작됐다. 1979년 8월 9일 오전, 신민당의 당사 4층 강당에서는 봉제업체인 YH무역주식회사의 여성노동자 200여명이 기업주의 폐업에 반발하여 폐업조치 철회 농성을 벌였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인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신민당이 당사 건물을 내준 것이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폭력을 동원하여 농성을 해산시켰다. 결국 이 사건은 노동 탄압 사건을 넘어선 야당에 대한 정치 탄압 사건으로 발전하였다.&lt;br /&gt;
&lt;br /&gt;
이날 경찰은 1000여명의 진압대원을 신민당사로 난입시켜 농성을 하고 있던 174명의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로 밖으로 끌어냈다. 또한 경찰은 총재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김영삼 총재와 당 간부들을 끌어내면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박정희 정권은 이 노동자 농성 사건을 빌미로 신민당 분열공작을 시도하였다. 유신정권과 비밀리에 결탁한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 3명이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 부총재 전원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접수시켰다. 그리고 법원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신민당 총재단의 직무 집행을 정지시키고 박정희 정권의 꼭두각시를 총재직무대행으로 선임하였다.&lt;br /&gt;
&lt;br /&gt;
아울러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의 동교동 자택을 전면 봉쇄하였고,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에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끊으라고 요구한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즈』 회견내용을 “반헌정적, 반민족적 작태”로 몰아서 국회에 징계 동의안을 제출했다. 10월 4일 오후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의원 159명은 여당 총회장에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제명 결의안을 '''기습적으로''' 처리해 버렸다. 노사분규 사태로 시작된 사건이 제1야당 당수의 의원직 제명으로 확대된 정치적 사태를 지켜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유신체제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이 고조되었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유신 철폐, 독재 타도!'''''   &amp;lt;small&amp;gt;-10.16 부마항쟁 당시 시위대의 구호&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부산대학교 민주선언문, 학생 시위에서 시민항쟁으로====&lt;br /&gt;
[[파일:부산시위대.jpg|250px|섬네일|오른쪽|광복동을 지나는 시위 행렬]]&lt;br /&gt;
1979년 10월 16일 아침 10시 부산대학교 구내 도서관 앞에서 약 500명의 학생들이 모여 “유신정권 물러가라”, “정치탄압 중지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반정부 시위를 벌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민주선언문」]]'''을 통해 민주화, 언론 자유, 인권 보장의 신념을 확인하고, “제도화된 폭력성과 조직적 악의 근원인 유신헌법과 독재집권층의 퇴진만이 5천 만 겨레의 통일의 첫걸음이라고 주장하면서 형제의 피를 요구하는 자유와 민주의 깃발을 우리가 잡고 반민주의 무리, 불의의 무리들을 향해 외치며 나아가자”라고 선언하였다. 이후 학생들은 교문을 나가 거리에서 시위했다. 이때 학생 수는 약 5,000명으로 불어나 있었고, 광복동과 남포동 등 부산시내 중심가까지 진출해 애국가 등의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며, 이를 제지하려는 경찰과 이곳저곳에서 충돌하였다. 비슷한 시간, 부산 동아대학교에서도 1,000여 명의 학생이 부산대학교 학생과 합류하여 가두시위를 벌였다. 부산대학교 데모로 학생 수백 명이 연행되고 100여 명이 다쳤지만 이튿날인 10월 17일에는 시위가 더욱 격화되어 학생들뿐만 아니라 다수의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학생 시위는 점차 시민항쟁의 양상을 띠어갔다.''' 밤늦게까지 계속된 시위에서 시민들은 충무파출소, 한국방송공사, 서구청, 부산세무서 등을 파괴하였고, 경찰차량을 불태우거나 파손시켰다.&lt;br /&gt;
&lt;br /&gt;
====마산의 시민항쟁====&lt;br /&gt;
&lt;br /&gt;
민주항쟁은 18일에 마산으로 확산되었다. 늦은 오후에는 1,000여 명의 경남대학교 학생들이 마산 시내 번화가에 산발적으로 집결했으며, 일부시민들도 가담해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어두워진 다음 학생과 시민들의 데모는 격화되어 파출소, 공화당사, 방송국, 신문사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파괴하였다. 이튿날인 19일에는 시위가 더욱 치열해져 마산 시내는 한때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저녁 8시경, 시위대는 경남대학과 마산대학&amp;lt;ref&amp;gt;1985년 창원대학으로 교명이 변경되었으며, 현재의 마산대학교와 다르다.&amp;lt;/ref&amp;gt;, 그리고 고등학생까지 합세하여 약 8,000명에 이르렀으며, 시내 곳곳에서 몽둥이를 들고 동사무소와 파출소로 몰려가 시설을 파괴하였고, 경찰차량에 불을 질렀다.&lt;br /&gt;
&lt;br /&gt;
====부산 계엄령, 마산 위수령====&lt;br /&gt;
[[파일:계엄포고문.jpg|270px|섬네일|왼쪽|부산지역에 내려진 계엄포고문을 읽고 있는 시민들]]&lt;br /&gt;
부산대학교 시위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박정희 정부는 학생 시위로 시작된 시위가 대규모 시민항쟁으로 사태가 심상치 않게 확대되어가자 강경책으로 대응했다. 정부는 18일 자정을 기해 '''부산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동원한 과격한 진압'''을 통해 시위 참여자들과 이를 방조한 일반 시민들까지 1,058명을 연행하고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으며, 부산지구 계엄사령부는 각 대학 휴교조처와 야간통행금지시간을 2시간 연장하는 등의 항이 담긴 포고문을 발표했다.&lt;br /&gt;
&lt;br /&gt;
부산에 계엄령이 선포된 이튿날인 19일에 마산 시위가 확대됨에 따라 그 다음날인 10월 20일 정오, 정부가 '''마산 및 창원 지역에 위수령을 발령'''해 통행금지 시간이 연장되고, 경남대학 등에는 휴교조처가 취해졌으며, 24일에는 깡패를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132명을 검거, 23명을 구속했다. 이렇게 '''표면적으로는 부마민주항쟁이 단시간에 진압되는 듯 보였지만, 항쟁은 이미 유신체제의 균열을 불러오고 있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항쟁의 전개 과정에서 볼 수 있듯, 부마민주항쟁에서 특징적인 것은 먼저 시위대의 가장 큰 분노의 대상이 공화당사와 경찰·파출소였다는 점, 다음으로는 “부가가치세를 철폐하라”, “잘 먹고 잘 살아라”등의 구호에서 드러나듯이 세무서에 대한 공격, 그리고 신문사와 방송국에 대한 공격을 들 수 있다.&lt;br /&gt;
&lt;br /&gt;
부마민주항쟁은 1970년대 유신체제 밑에서 쌓였던 침묵하는 언론, 조세, 시민을 억압하는 경찰에 대한 불만 등 정치·사회·경제·문화·종교 등 각 부문에 걸친 여러 모순의 폭발이었고, 헌법 개정과 긴급조치로 겨우 유지되던 유신체제와 박정희 정권의 붕괴를 촉진시킨 결정적인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10.26사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또한 이 사건은 1980년 5월 18일의 광주 민주화운동과 1987년 6월 민주항쟁에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된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억눌린 우리 역사&amp;lt;/br&amp;gt;터져나온 분노&amp;lt;/br&amp;gt;매운 연기 칼바람에도&amp;lt;/br&amp;gt;함성소리 드높았던&amp;lt;/br&amp;gt;동트는 새벽벌&amp;lt;/br&amp;gt;시월이 오면&amp;lt;/br&amp;gt;핏발 선 가슴마다&amp;lt;/br&amp;gt;살아오는 십 일육&amp;lt;/br&amp;gt;동지여 전진하자&amp;lt;/br&amp;gt;깨치고 나가자&amp;lt;/br&amp;gt;뜨거운 가슴으로&amp;lt;/br&amp;gt;빛나는 내일로'''''&amp;lt;/br&amp;gt;&amp;lt;small&amp;gt;-'''부산대학교''' 새벽벌도서관 10.16 기념비&amp;lt;/small&amp;gt;&amp;lt;/div&amp;gt;&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호빵이👻]]: 부마항쟁 페이지 전체 작성&amp;lt;/br&amp;gt;&lt;br /&gt;
[[이나자키로빈]]: 부마항쟁 원인 중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 작성&lt;br /&gt;
&lt;br /&gt;
=='''5.18민주화운동'''==&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AMetwTuXYHTCXINqr7ZJpzO5CHFEMQO5-Uqau51RkXA&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원인===&lt;br /&gt;
====유신체제의 붕괴====&lt;br /&gt;
&lt;br /&gt;
[[파일:김재규.jpg|섬네일|오른쪽|암살 당시 상황을 재현하는 김재규]]&lt;br /&gt;
&lt;br /&gt;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amp;lt;small&amp;gt; - 김재규&amp;lt;/small&amp;gt;&lt;br /&gt;
1979년 10월 4일 신민당 총재 김영삼이 국회에서 의원직을 제명당하자 10월 15부터 10월 20까지 부산 · 마산 등지에서는 부마항쟁이 일어났고, 이의 해결을 둘러싼 노선대립으로 갈등 중 10월 26일 &amp;lt;ins&amp;gt;[[김재규]]&amp;lt;/ins&amp;gt;가 박정희를 살해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ins&amp;gt;[[10.26 사태]]&amp;lt;/ins&amp;gt;의 사후 수습과정에서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을 중심으로 신군부 세력이 부상하였으며, 이들은 &amp;lt;ins&amp;gt;[[12.12 사건]]&amp;lt;/ins&amp;gt;의 하극상을 통하여 군부를 장악하였다. 1980년 2월 29일 김대중 등이 복권되었으나 그 해 봄, 신군부는 최규하 과도 정부를 유명무실하게 하고 국민들이 요구하는 민주주의와 이를 위한 명확한 정치일정 제시를 거부하면서 권력기반을 구축하였다.&lt;br /&gt;
&lt;br /&gt;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lt;br /&gt;
한 시대의 대격변을 예고하는 단초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시작됐다. 1979년 8월 9일 오전, 신민당의 당사 4층 강당에서는 봉제업체인 YH무역주식회사의 여성노동자 200여명이 기업주의 폐업에 반발하여 폐업조치 철회 농성을 벌였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인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신민당이 당사 건물을 내준 것이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폭력을 동원하여 농성을 해산시켰다. 결국 이 사건은 노동 탄압 사건을 넘어선 야당에 대한 정치 탄압 사건으로 발전하였다.&lt;br /&gt;
&lt;br /&gt;
이날 경찰은 1000여명의 진압대원을 신민당사로 난입시켜 농성을 하고 있던 174명의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로 밖으로 끌어냈다. 또한 경찰은 총재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김영삼 총재와 당 간부들을 끌어내면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박정희 정권은 이 노동자 농성 사건을 빌미로 신민당 분열공작을 시도하였다. 유신정권과 비밀리에 결탁한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 3명이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 부총재 전원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접수시켰다. 그리고 법원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신민당 총재단의 직무 집행을 정지시키고 박정희 정권의 꼭두각시를 총재직무대행으로 선임하였다.&lt;br /&gt;
&lt;br /&gt;
아울러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의 동교동 자택을 전면 봉쇄하였고,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에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끊으라고 요구한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즈』 회견내용을 “반헌정적, 반민족적 작태”로 몰아서 국회에 징계 동의안을 제출했다. 10월 4일 오후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의원 159명은 여당 총회장에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제명 결의안을 '''기습적으로''' 처리해 버렸다.&lt;br /&gt;
&lt;br /&gt;
노사분규 사태로 시작된 사건이 제1야당 당수의 의원직 제명으로 확대된 정치적 사태를 지켜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유신체제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이 고조되었다. 또한 이 사건은 그동안 다소 주춤하던 대학가에 반유신 반독재 운동의 열기가 다시 확산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청춘을 바쳐, 학생 운동====&lt;br /&gt;
&lt;br /&gt;
[[파일:서울의_봄.JPG|섬네일|오른쪽|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앞에 모인 시위대]]&lt;br /&gt;
&lt;br /&gt;
군부의 재집권 야욕에 대한 국민적 저항은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표출되었다. 1980년 3월, 서울대 총학생회 출범을 시작으로 4월 초순에는 전국의 주요 대학들이 총학생회를 결성하기 시작하였다. 대학별로 독재 정권에 아부했던 어용교수와 족벌사학 퇴진 운동을 벌였고, 특히 병영집체훈련(당시 대학 신입생들은 의무적으로 군부대에 10일 간 입대하여 각종 군사훈련을 이수해야 했다.) 거부가 주요 이슈로 전면 등장했다. 각 대학의 병영집체훈련 거부운동이 본격화되고 전국적인 쟁점으로 떠오르자 신군부는 신문, 방송을 통해 ‘학생들의 안보의식 결여’를 비난하고 교내 시위·농성을 집중적으로 보도하게 했다.  5월 1일에 서울대가 입영훈련 거부투쟁 철회를 결정하고 ‘계엄령 해제’와 ‘유신잔당 퇴진’, ‘정부개헌중단’과 ‘노동 3권 보장’ 등을 요구하기 시작하면서 대학가는 이제까지의 학내 문제 중심의 운동에서 정치개혁을 위한 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그간 정부와 대학 간에 팽팽하게 유지되던 긴장 관계는 폭발 직전으로 내닫게 된 것이다.&lt;br /&gt;
&lt;br /&gt;
약 열흘 간의 대정부 투쟁을 준비한 대학가는 5월 10일 고려대 총학생회장실에서 열린 ‘총학생회장단 회의’에 참석한 전국 23개 대학 대표들은 ‘비상계엄의 즉각 해제’와 ‘전두환, 신현확 등 유신잔당 퇴진’ 등을 결의하고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정세에 대한 공동대처 방안을 마련했다. 이후 5월 13일부터 5월 14일에 걸쳐 서울 · 부산 · 대구 · 광주 등 37개 대학에서 계엄철폐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5월 15일에는 서울역에서 시위가 발생하는 등 학생시위는 서울시가지를 거의 마비시키는 등 야간까지 지속되어 사태가 절정에 달하면서 신군부 세력을 위협하였다. 5월 16일 24개 대학 학생대표들은 당분간 시국의 추이를 관망하기로 결정하고 가두시위를 중단하면서 소강상태에 돌입하는 듯하였다.&lt;br /&gt;
&lt;br /&gt;
====1980년 봄의 광주====&lt;br /&gt;
5월 17일 신군부 세력이 이전까지는 제주도를 제외한 지역에 한정되었던 비상계엄을 전국에 확대하는 조치인 계엄포고 10호(17일 24시에 발효: 각 대학 휴교령 포함)를 밤 9시 40분에 의결하고 밤 11시 40분에 발표하면서 밤 11시를 전후한 시점부터 김대중 · 김종필이 연행되는 등 권력형 부정축재자 및 소요조종 혐의자, 학생 시위 주동자가 체포되었다. 이날 밤 광주지역의 사회운동·학생운동의 지도자도 상당수가 검거되었다. 광주의 검거대상자는 전남대 12명, 조선대 10명 등 총 22명이었다. 전남에서 계엄합동수사단은 광주505보안대가 중심이고, 중앙정보부, 경찰 등이 보조역할을 했다. 전남 계엄합동수사단은 22대 차량과 86명의 인원이 출동해 정동년 등 복적생들과 대학의 총학생회 간부들을 집중 검거했다.&lt;br /&gt;
&lt;br /&gt;
한편 육군본부는 14일 오전 7시55분에 국가 중요 보안목표와 주요대학에 군 병력 배치 명령을 하달했다. 이 명령에 따라 전남북계엄분소장인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광주 시내 주요 시설물에 이날 오후부터 계엄병력을 배치했다. 31사단 96연대 병력이 광주시내 KBS건물에 42명, MBC 21명, CBS 11명, VOC(전일방송) 11명 등 주요 방송사 건물에 배치돼 경비에 들어간 것이다.&lt;br /&gt;
&lt;br /&gt;
이날 오후 전교사령관은 7공수여단의 광주배치에 따른 수송수단 지원도 미리 협의했다. 그리고 5월 8일부터 16일 사이에 공수부대 수뇌부들도 헬기를 타고 서울에서 내려와 광주 상무대의 전투병과교육사령부를 방문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광주에서 시위가 격화되면 즉각적으로 최정예 군부대를 동원해서 진압할 준비를 철저하게 갖추고 있었다. 5월 18일에 시작된 광주의 비극은 그 이전에 이미 시한폭탄처럼 준비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lt;br /&gt;
{{구글지도 | 위도=35.175961433346885 | 경도=126.90865311973532 | 줌=13 }}  [[파일:금남로.JPG|섬네일|오른쪽|금남로 앞에 집결한 버스와 시민군]]&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18일&amp;lt;/span&amp;gt;&lt;br /&gt;
휴교령이 내려질 경우 교문 앞에서 집결한다는 결의에 따라 학생들은 5월 18일 오전 전남대학교 앞에 모였다. 공수부대원들이 전남대 앞 시위를 저지하자 대학생들은 광주역에 재집결해서 시위를 이어갔다. 시위대가 점차 늘어나면서 공수부대원이 시내에서 시위진압에 나섰으며 18일 오후 1시부터 무차별 진압작전이 이루어져 부상자가 속출하였다.&lt;br /&gt;
&lt;br /&gt;
군인들이 금남로 등 시내 중심가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이나 여자를 마구 구타하고 짓밟으며 찌르는 등의 잔혹 행동을 하자 시민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이에 시위대는 오후 4시 이후 파출소 파괴 등 적극공세에 나섰다. '''계엄군의 과잉 무력진압은 시위를 해산시키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오히려 시민들을 단결시켰으며, 결국 19일 시민 · 학생 연대가 발생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lt;br /&gt;
&lt;br /&gt;
 '''''광주 애국 시민 여러분! 이것이 웬 말입니까? 웬 벼락이란 말입니까? 죄 없는 학생들을 총칼로 찔러 죽이고 몽둥이로 두들겨 트럭으로 실어가며 부녀자를 발가벗겨 총칼로 찌르는 놈들이 이 누구란 말입니까? 이제 우리가 살길은 전시민이 하나로 뭉쳐 청년 학생들을 보호하고 유신잔당과 극악무도한 살인마 전두환 일파와 공수 특전단 놈들을 한놈도 남김없이 쳐부수는 길 뿐입니다. 우리는 이제 다 보았습니다. 다 알게 되었읍니다. 왜 학생들이 그토록 소리 높이 외쳤는가를, 우리의 적은 경찰도 군대도 아닙니다. 우리의 적은 전국민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바로 유신잔당과 전두환 일파 그놈들입니다.''''' &amp;lt;small&amp;gt; - 1980년 5월 19일에 '광주시민민주투쟁회'명의의 호소문&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19일&amp;lt;/span&amp;gt;&lt;br /&gt;
19일 오전에는 일시적 소강상태였으나 오후 들어서 분노한 학생 · 시민들이 군 · 경찰과 공방전을 벌이면서 시위는 점차 격화되었다. '''시민들은 공포감에서 벗어나 자신의 생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단순한 학생시위에서 시민봉기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계엄군은 시위대를 포위하여 구타하였으며 일부 고등학생까지 포함된 시위대는 돌과 화염병으로 저항하였고 파출소와 방송국 등에 침입하였다. 뒤처진 공수부대를 공격하거나 고립된 차량을 포위하기도 하였으며 총과 방패를 빼앗기도 하였고, 오후 4시 50분 시민들에게 포위된 계엄군의 장갑차에서 최초의 발포가 있었다. 19일 밤비가 내리는 가운데 시위가 산발적으로 계속되었으며, 20일 오전 비가 그치고 대규모 시위는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오후부터 다시 시작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20일&amp;lt;/span&amp;gt;&lt;br /&gt;
'''20일 오후 6시부터 택시와 버스 운전 기사들이 광주역과 무등경기장에 모여 대형 버스와 트럭을 앞세우고 일시에 금남로에 집결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들을 앞세운 시위는 계엄군을 몰아내는 데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였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5.18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에 &amp;lt;ins&amp;gt;[[지대한 영향]]&amp;lt;/ins&amp;gt;을 끼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학생 운동에 뛰어든 많은 대학생들은 대학교에 들어와서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의 실상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아 학생 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군부정권은 5.18 이후로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다. 전두환은 김대중 등에게 '광주 사태'의 책임을 물어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했고,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 선언을 한 직후, 8월 27일 소위 체육관 선거를 통해 전두환은 대통령 자리를 탈취했다.&lt;br /&gt;
&lt;br /&gt;
지역적인 면에서는 '''광주광역시를 비롯한 전라도 지역의 트라우마'''로 작용해 이후의 민주정의당 및 &amp;lt;ins&amp;gt;[[3당 합당]]&amp;lt;/ins&amp;gt;으로 이어지는 보수 세력에 대해 적대심을 가지고, 민주당계 정당의 표밭이 되는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미 박정희 정부 시절부터 유무형의 정치적인 차별을 받고 있었지만 5.18의 참상은 전라도가 다시는 보수 세력을 지지하지 않게 만들 정도로 심각한 사건이며 호남소외론의 가장 결정적인 명분이 되었다.&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이나자키로빈]]: 5.18 민주화운동 페이지 전체 작성&lt;br /&gt;
&lt;br /&gt;
=='''6월민주항쟁'''==&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NnXWs5RMTIf-6DOEu9_rX2k4mgzUk1AQHYneCuwXN1Q&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원인===&lt;br /&gt;
====[[박종철고문치사사건]]====&lt;br /&gt;
&lt;br /&gt;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박종철은 1987년 1월 13일 자정 경 하숙집에서 치안본부(現 경찰청)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게 연행되었다.‘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이자 ‘민주화추진위원회’ 지도위원으로 수배 받고 있었던 박종운을 잡기위해 연행한 것이었다. 취조실로 연행해간 공안 당국은 박종철에게 박종운의 소재를 물었으나, 박종철은 순순히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경찰은 잔혹한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가하였고, 박종철은 끝내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했다. 당시 경찰은 초기 발표에서 고문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라고 사망원인을 발표하였으나, 시체부검 결과 전기고문과 물고문에 의한 살인인 것으로 밝혀졌다.&lt;br /&gt;
&lt;br /&gt;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저 죽음을 응시해주길 바란다. 저 죽음을 끝내 지켜주길 바란다. 저 죽음을 다시 죽이지 말아주길 바란다.''''' &amp;lt;small&amp;gt; - 동아일보 1987년 1월 17일자 김중배 칼럼 중&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사건 진상의 일부가 공개되자 2월 7일 전국 주요 도시에서 &amp;quot;박종철군 범국민추도식&amp;quot; 및 도심 시위가 열렸고 이어 3월 3일에는 &amp;quot;박종철군 49재와 고문추방 국민대행진&amp;quot;과 함께 또 다른 시위가 열렸다. 이후 4월 2일 서울대학교 학부모 130여 명이 ‘건국대학교 사태‘ 등 시국관련 구속학생의 징계철회를 요구하며 철야 농성을 벌였다.&lt;br /&gt;
&lt;br /&gt;
====정부의 개헌논의 유보====&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lt;br /&g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JazJFsgu4oc?si=sOE7w1tz-jKVztC9&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lt;br /&g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그러나 전두환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1987년 4월 13일 [[4.13호헌조치]]라 불리는 ‘대통령 특별담화‘를 발표, 개헌(改憲) 논의를 유보하겠다고 밝혔다. [[4.13호헌조치]]에서 전두환은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와 대통령 선거는 자유 경선의 분위기가 보장되는 가운데 1987년 내에 공정한 선거관리를 통해 차질 없이 실시할 수 있게 모든 노력을 다할것‘이라고 다짐했으며, 또 ‘민정당의 후임 대통령 후보는 조속한 시일 안에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인물 가운데서 당헌 절차와 민주 방식에 따라 전당대회에서 선출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호헌조치‘라는 그 이름대로 현행 헌법에 따라 권력을 이양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국민들의 큰 기대를 얻을 것이라 믿었으나, 기대는 커녕 오히려 반발을 가져오는 요인이 되고 말았다. 곧바로 이튿날인 4월 14일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 등 각계 인사들이, 호헌 조치를 비판하는 시국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정부 최루탄에 의한 [[이한열]] 사망====&lt;br /&gt;
[[파일:이한열.jpg|200px|섬네일|오른쪽|최루탄에 피격당한 후 이종창에게 부축받는 이한열]]&lt;br /&gt;
먼저 1987년 5월 27일 야당과 재야, 종교계 등이 힘을 모아 ‘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여당인 민주정의당에서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6월 10일에 맞춰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6 · 10국민대회]])’를 치르기로 결정하였다. 대학생들은 국본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를 중심으로 6 · 10국민대회에 호응하여 6월 초부터 각 대학별로 연일 집회와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6 · 10국민대회]] 하루 전날인 6월 9일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교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는 곧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학생들은 물론 시민들의 분노가 들끓었다. 이러한 분노 속에서 6 · 10국민대회가 열렸다. 경찰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6 · 10국민대회가 열리는 성공회대성당을 원천 봉쇄하였다. 그 결과 6 · 10국민대회는 대회장에 미리 들어가 있던 소수의 인원만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대회 예정 시간인 오후 6시 이전부터 서울 시내 곳곳에서 대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시민들도 다양한 방식으로 6 · 10국민대회와 학생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날 밤 늦게까지 시위를 벌이던 학생들은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이후 5일 동안 농성을 계속하였다. 애초 계획된 것은 아니었지만 대학생들의 명동성당 농성은 6 · 10국민대회가 단발성 행사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인 저항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lt;br /&gt;
&lt;br /&gt;
====민주항쟁 확산====&lt;br /&gt;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로 개헌하라!'''''   &amp;lt;small&amp;gt;-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제시한 슬로건&amp;lt;/small&amp;gt;&lt;br /&gt;
[[파일:도망.png|260px|섬네일|왼쪽|쫓아오는 경찰들을 피해 달리고 있는 호헌철폐시위 참가자들]]&lt;br /&gt;
명동성당 농성을 거치며 항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유월항쟁의 전국화 과정에는 일정한 패턴이 존재하였다. 6월 10일 서울 외에도 전국 주요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위가 벌어졌지만, 15일까지 항쟁의 중심은 6 · 10국민대회와 명동성당 농성이 전개된 서울이었다. 하지만 6월 15일 경부터는 부산, 대전, 진주 등에서 격렬한 시위가 전개되었다. 그러다가 6월 20일부터 대규모 시위가 광주, 전주, 순천, 익산 등 호남 지방으로 옮겨졌다. 6 · 10국민대회 이후 약 20일 동안 전국 곳곳에서 매일 평균 100회 이상의 시위가 동시다발로 벌어졌다. 특히 6월 18일 ‘최루탄추방대회’와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은 전국 곳곳에서 한꺼번에 1백만 명 이상이 참여하였다. 갈수록 참가 지역이 전국 곳곳으로 확산되어 대도시, 중소도시뿐만 아니라 농촌 지역의 군 단위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6월 26일 하루에만 37~38개 시 · 군에서 시위가 동시에 벌어졌다. 유월항쟁에 참가한 연 인원은 400~500만 명으로 추산된다.&lt;br /&gt;
&lt;br /&gt;
반면 유월항쟁의 전국적 동시다발 시위는 경찰 병력을 분산시켰다. 분산된 경찰 병력으로는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거센 시위의 물결을 막아 낼 수 없었다. 경찰이 시위 진압에 최루탄을 남발하면서 최루탄도 점차 고갈되기 시작하였다. 유월항쟁 기간 동안 경찰이 사용한 최루탄만 총 67만 발이 넘었다. 더불어, 전두환 정권이 집권 내내 강조했던 88서울올림픽이 얼마 남지 않아 미국 등 국제사회의 이목이 집중된 상황에서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운동 때처럼 유혈 사태와 대량 학살을 반복하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무엇보다 군대를 동원하더라도 이러한 대규모 시민 항쟁을 진압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결국 경찰력으로 항쟁을 막기 힘들고, 군대 투입도 어렵다고 판단한 전두환 정권은 1987년 6월 29일 ‘ 6 · 29민주화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하였다. 그리고 그동안 의식불명 상태에 있었던 이한열이 7월 5일 끝내 사망하였다. 5일장 후 7월 9일 치러진 이한열의 노제에 100만 명의 인파가 모인 것을 끝으로 약 한 달 동안 지속된 유월항쟁은 마무리되었다.&lt;br /&gt;
&lt;br /&gt;
[[파일:태극기.png|300px|섬네일|오른쪽|서울역 앞에서 태극기와 '자주없이 민주없다'는 플래카드를 들고 구호를 외치는 시위대]]&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1987년 6월항쟁이 '''대통령[[직선제]] 개헌'''이라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이 항쟁에 동참한 학생과 시민들의 요구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제시한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 개헌’이라는 슬로건으로 모아졌기 때문이었다. 유월항쟁은 이러한 민주화 세력의 통합성, 즉 각기 다른 성격과 지향을 가진 여러 주체들이 모두 동의할 수 있는 ‘최소 강령’하에 ‘최대 연합’으로 결집하였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딩잉잉]]:6월민주항쟁 페이지 전체 작성&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기밀문서]]&lt;br /&gt;
[[분류:4.19혁명관련]]&lt;br /&gt;
[[분류:부마항쟁관련]]&lt;br /&gt;
[[분류:5.18민주화운동관련]]&lt;br /&gt;
[[분류:6월민주항쟁관련]]&lt;br /&gt;
[[분류:뎐]]&lt;br /&gt;
[[분류:이나자키로빈]]&lt;br /&gt;
[[분류:호빵이👻]]&lt;br /&gt;
[[분류:•ᴗ•]]&lt;br /&gt;
[[분류:딩잉잉]]&lt;/div&gt;</summary>
		<author><name>딩잉잉</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8%B0%EB%B0%80%EB%AC%B8%EC%84%9C&amp;diff=35992</id>
		<title>기밀문서</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8%B0%EB%B0%80%EB%AC%B8%EC%84%9C&amp;diff=35992"/>
		<updated>2023-12-11T16:22:5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딩잉잉: /* 민주항쟁 확산 */&lt;/p&gt;
&lt;hr /&gt;
&lt;div&gt;=='''컨텐츠 주제'''==&lt;br /&gt;
&lt;br /&gt;
[[파일:시위대.png|400픽셀|center]][[파일:이한열사진.jpeg|400픽셀|center]][[파일:진압.png|400픽셀|center]]&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amp;lt;big&amp;gt;'''&amp;lt;span style=&amp;quot;color:#CD0000&amp;quot;&amp;gt;&amp;lt;big&amp;gt;&amp;lt;big&amp;gt;투쟁의 불꽃, 자유의 환호&amp;lt;/big&amp;gt;&amp;lt;/big&amp;gt;&amp;lt;/span&amp;gt;'''&amp;lt;br/&amp;gt;&amp;lt;br/&amp;gt;&lt;br /&gt;
''대한민국은 시민들의 투쟁과 희생을 거쳐, 피와 땀으로 민주화를 이룩하였습니다.''&amp;lt;br/&amp;gt;&lt;br /&gt;
''그들은 어둠을 밝히기 위해 항거의 불꽃을 태웠고, 그 불꽃은 자유를 외쳤으며, 그 외침은 세상을 움직였습니다.''&amp;lt;br/&amp;gt;&lt;br /&gt;
''이 «기밀문서»에는 당신이 미처 몰랐던 그 때의 열기와 의지가 실려있습니다.''&amp;lt;br/&amp;gt;&lt;br /&gt;
''함께, 그 뜨거운 페이지를 열어보시겠습니까?''&amp;lt;/span&amp;gt;&amp;lt;/big&amp;gt;&amp;lt;/div&amp;gt;&lt;br /&gt;
&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이나자키로빈]]&lt;br /&gt;
[[딩잉잉]]&lt;br /&gt;
&lt;br /&gt;
=='''팀원'''==&lt;br /&gt;
*오현지(2022131143) [[뎐]]&amp;lt;br/&amp;gt;&lt;br /&gt;
*김여원(2023130209) [[이나자키로빈]]&amp;lt;br/&amp;gt;&lt;br /&gt;
*김하은(2022131345) [[호빵이👻]]&amp;lt;br/&amp;gt;&lt;br /&gt;
*박정원(2023130350) [[•ᴗ•]]&amp;lt;br/&amp;gt;&lt;br /&gt;
*최필중(2023130216) [[딩잉잉]]&amp;lt;br/&amp;gt;&lt;br /&gt;
&lt;br /&gt;
=='''기획의도'''==&lt;br /&gt;
===기획배경===&lt;br /&gt;
1945년 광복 이후 대한민국 국민들은 자유민주국가로서의 미래를 기대했으나 실상은 그러지 못했다.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보여주듯 현재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는 그것을 누리지 못한 앞선 세대들의 목숨을 바친 항쟁의 대가이다. 민주항쟁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의 핵심 동력이었다. 오늘날 우리나라 민주의식의 중요한 기둥이 되는 네 가지 항쟁을 선별하고 각 항쟁의 배경, 전개과정, 의의를 비롯해 세부적이고 자세한 내용에 대한 기사를 작성한다.&lt;br /&gt;
===기획목적===&lt;br /&gt;
작금의 현실까지 오기에는 수없이 많은 투쟁이 있었지만 4.19혁명, 부마항쟁, 5.18민주항쟁, 6월민주항쟁이라는 네 가지 사건을 살펴보기로 한 것은 가장 많이 다뤄지고, 가장 많이 알려진 사건이기 때문이다. 관련된 사건과 역사 인물들에 대해 자세히 적어 내어 민주항쟁의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지 않으면 알기 힘든 각 민주항쟁의 자세한 내막을 밝혀낸다.&lt;br /&gt;
===기대하는 바===&lt;br /&gt;
타임라인과 온톨로지를 활용해 내용의 전반적인 이해를 돕고 자세한 설명을 통해 사건의 자세한 내막을 들어낸다. 네 가지 항쟁을 각각 큰 목차로 설정하고 세부 기사를 그 내부에 작성해 독자의 관심과 수요에 부합하는 정보를 전달하는 데 효과적일 것으로 기대된다. 민주항쟁에 참여한 사람들의 희생과 투쟁에 대한 존경심을 부르고 역사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다.&lt;br /&gt;
===기여===&lt;br /&gt;
[[뎐]], [[이나자키로빈]], [[호빵이👻]]: 기획의도 페이지 작성&lt;br /&gt;
&lt;br /&gt;
=='''온톨로지'''==&lt;br /&gt;
{{NetworkGraph | title=민주항쟁.lst}}&lt;br /&gt;
[[민주항쟁.lst]]&lt;br /&gt;
===기여===&lt;br /&gt;
*[[뎐]]: 온톨로지 제작&lt;br /&gt;
=='''컨텐츠 구조'''==&lt;br /&gt;
===클래스(Class)===&lt;br /&gt;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color:white&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0%&amp;quot; | 클래스 !! style=&amp;quot;width:40%&amp;quot; | 설명 !! style=&amp;quot;45%&amp;quot; | 노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제||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대표 키워드인 민주항쟁을 주제로서 나타내었다 || 만주항쟁&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항쟁||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민주화운동 시기 발생했던 주요 운동들을 ‘항쟁’이라는 키워드로 분류하였다. || 4.19혁명, 부마항쟁, 5.18 민주화운동, 6월민주항쟁&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사건||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항쟁의 원인, 결과가 되는 사건을 정리하였다|| 3.15부정선거, 고려대 4.18학생시위, 3.15의거, YH사건, 10.26사태, 12.12 군사반란, 비상계엄령,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고문추방민족대행진, 4.13호헌조치, 6.29선언, 대통령직선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지역||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요 항쟁들이 일어났던 지역을 정리하였다|| 마산, 부산, 광주&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인물||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요사건들을 발생시킨 인물, 참여했던 인물을 묶어서 정리하였다|| 이승만, 이기붕, 김주열, 박정희, 김재규, 전두환, 신군부, 시민군, 박종철, 이한열, 노태우&lt;br /&gt;
|-&lt;br /&gt;
|}&lt;br /&gt;
===관계성(Relation)===&lt;br /&gt;
*&amp;lt;font color=#228B22&amp;gt;'''~은 ~에 속한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주요 항쟁들이 민주항쟁에 속함을 나타내거나 인물의 소속을 나타낸다.&lt;br /&gt;
***해당노드:&lt;br /&gt;
***#4.19혁명 -&amp;gt; 민주항쟁&lt;br /&gt;
***#부마항쟁 -&amp;gt; 민주항쟁&lt;br /&gt;
***#5.18민주화운동 -&amp;gt; 민주항쟁&lt;br /&gt;
***#6월 민주항쟁 -&amp;gt; 민주항쟁&lt;br /&gt;
***#전두환 -&amp;gt; 신군부&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의 원인이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어떠한 사건과 인과관계를 이루는 또다른 사건 혹은 인물을 설명한다.&lt;br /&gt;
***#이기붕 -&amp;gt; 3.15부정선거&lt;br /&gt;
***#김주열 -&amp;gt; 고려대 4.18학생시위&lt;br /&gt;
***#고려대 4.18학생시위 -&amp;gt; 4.19혁명&lt;br /&gt;
***#3.15의거 -&amp;gt; 4.19혁명&lt;br /&gt;
***#김주열 -&amp;gt; 4.19혁명&lt;br /&gt;
***#3.15부정선거 -&amp;gt; 3.15의거&lt;br /&gt;
***#YH사건 -&amp;gt; 부마항쟁&lt;br /&gt;
***#부마항쟁 -&amp;gt; 10.26사태&lt;br /&gt;
***#박정희 -&amp;gt; 10.26사태&lt;br /&gt;
***#비상계엄령 -&amp;gt; 5.18민주화운동&lt;br /&gt;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 -&amp;gt; 고문추방민족대행진&lt;br /&gt;
***#고문추방민족대행진 -&amp;gt; 4.13호헌조치&lt;br /&gt;
***#4.13호헌조치 -&amp;gt; 6월민주항쟁&lt;br /&gt;
***#6월민주항쟁 -&amp;gt; 6.29선언&lt;br /&gt;
***#6월민주항쟁 -&amp;gt; 대통령직선제&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을 발생시켰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사건과 그 사건을 직접적으로 발생시킨 인물을 연결한다.&lt;br /&gt;
***#이승만 -&amp;gt; 3.15부정선거&lt;br /&gt;
***#김재규 -&amp;gt; 10.26사태&lt;br /&gt;
***#신군부 -&amp;gt; 1212군사반란&lt;br /&gt;
***#전두환 -&amp;gt; 비상계엄령&lt;br /&gt;
***#노태우 -&amp;gt; 6.29선언&lt;br /&gt;
***#시민군 -&amp;gt; 5.18민주화운동&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에 희생되었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민주항쟁의 진압과정 등 에서 희생된 인물을 설명한다&lt;br /&gt;
***#김주열 -&amp;gt; 3.15의거&lt;br /&gt;
***#이한열 -&amp;gt; 6월 민주항쟁&lt;br /&gt;
***#박종철&amp;gt;박종철 고문치사 사건&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에서 발생했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설명한다.&lt;br /&gt;
***#3.15의거 -&amp;gt; 마산&lt;br /&gt;
***#부마항쟁 -&amp;gt; 부산&lt;br /&gt;
***#부마항쟁 -&amp;gt; 마산&lt;br /&gt;
***#5.18민주화운동 -&amp;gt; 광주&lt;br /&gt;
===기여===&lt;br /&gt;
*[[뎐]]: 컨텐츠 구조 페이지 작성&lt;br /&gt;
=='''4.19혁명'''==&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VPp4BmfDSv8VA2-oC-VATHzUYgadaiaQ9AlWXYiaiVk&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원인===&lt;br /&gt;
====[[3.15 부정선거]]====&lt;br /&gt;
[[파일:3.15부정선거_개표_모습.png|300픽셀|섬네일|오른쪽|3.15부정선거 당시 개표하는 사진&amp;lt;ref&amp;gt;사진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amp;lt;/ref&amp;gt;]]&lt;br /&gt;
1959년 대한민국은 제 4대 대통령 선거와 제 5대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당시 자유당에서는 12년째 대통령으로서 연임 중이던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이기붕]]'''을 부통령 후보로 선임하였다. 그러나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병세의 악화로 사망하게 되고,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은 확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선거의 초점은 자유당의 조병옥과 민주당의 장면 간의 선거전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본격적인 선거유세의 시작과 함께 정부와 여당의 잇따른 야당선거운동 방해사건으로 부정선거가 시작되었다. 1960년 3월 15일 선거가 시작된 이후에도 다양한 방법의 부정행위가 일어났고, 개표 결과 이승만과 이기붕의 득표가 100%에 육박하는 결과로 나오자 자유당은 득표수를 하향 조정해 최종 집계에 반영할 것을 지시했다. 결국 이승만 88.7%, 이기붕 79%의 득표율을 가지며 정, 부통령에 당선되었다.&amp;lt;ref&amp;gt;자세한 내용은 3.15부정선거 페이지 참조&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부정선거 반대시위, [[3.15 의거]]의 발생====&lt;br /&gt;
3.15 부정선거를 반대하는 시위는 초기에는 중, 고등학생들의 산발적인 시위로 전개되었다. 3월 15일 선거일 밤 경남 마산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으며,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여 1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amp;lt;br/&amp;gt;&lt;br /&gt;
3월 15일 실종되었던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4월 11일 마산부두에서 발견되자 마산 시민들은 시청, 파출소 등을 파괴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2차 시위가 일어난 것이다.&lt;br /&gt;
&lt;br /&gt;
====[[고려대학교 4.18 학생시위]]의 발생====&lt;br /&gt;
1, 2차 마산시위를 계기로 부정선거 무효와 이승만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났다. 이들은 '4.18 선언문'을 낭독하고 시내로 진출하였다. 이는 4월 19일 학생들과 일반 시민들이 가세한 대규모 시위로 이어지게 되었다.&lt;br /&gt;
====전국적인 4.19 혁명의 발생====&lt;br /&gt;
분노한 전국의 시민과 학생들이 다음 날인 4월 19일에 '이승만 하야와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며 대규모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경찰은 또다시 무차별 발포에 나섰고,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지만 이러한 압박에도 시민들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lt;br /&gt;
====이승만 대통령의 혼란 수습 시도====&lt;br /&gt;
이승만 대통령은 4.19 시위로 인한 정국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4월 20일 국무위원 전원과 자유당 당무위원 전원의 사표를 제출하도록 지시하였으며, 4월 23일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외무장관에 허정, 내무장관에 이호, 법무장관에 권승렬을 임명하는 등 개각을 단행하였다.&amp;lt;br/&amp;gt;&lt;br /&gt;
그러나 미국은 4.19직후 국무부 성명을 통해 한국에서 발생한 사태는 부정선거에 대한 '군중의 불만'을 반영한 것 이라고 했고, 양유찬 주미대사를 불러 '부정선거에 대한 철저한 조사', '경향신문 복간', '국가보안법 개정' 등을 촉구하는 각서를 전달하였다.&amp;lt;br/&amp;gt;&lt;br /&gt;
그리고 4월 25일, 이승만 정권에 분노한 전국 27개 대학 258명의 교수가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 모여 14개항의 시국 선언문을 발표하며 학생, 시민들과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들은 3.15 부정선거 및 4.19 사태의 책임을 지고 대통령이 물러날 것을 주장하였으며, &amp;quot;학생들의 피에 보답하자&amp;quot;는 플랜 카드를 앞세워 국회의사당까지 행진하였다. &lt;br /&gt;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lt;br /&gt;
무력 진압에도 대규모 시위가 이어지며 시민들은 완강하게 투쟁하였다. 4월 26일 시위대가 경무대로 다시 집결하는 등 사태가 심각하게 진행되자, 오전 10시 30분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 성명을 발표하였다. 4월 27일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하며 대통령직을 하야하고 하와이로 망명하였으며 자유당 정권도 끝나게 된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우리 국민들, 특히 학생과 청년들의 주도로 이루어진 4.19 혁명은 학생과 일반 대중이 단결하여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아시아 최초의 시건이다. 4.19혁명은 부마항쟁, 5.18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그리고 2017년 촛불시위에 이르기 까지 정권에 대항하는 국민들이 단합을 이루는 초석이 되었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도 시민 저항권에 대한 근거로써 4.19혁명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문구가 있다.&lt;br /&gt;
===기여===&lt;br /&gt;
[[뎐]]: 4.19혁명 페이지 원인, 의의 작성 &lt;br /&gt;
&lt;br /&gt;
[[•ᴗ•]]: 4.19혁명 페이지 전개 작성&lt;br /&gt;
&lt;br /&gt;
=='''부마항쟁'''==&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bK7zjpPvBsC7rFRPmsiHCUYhyWt2VXOv8SYyaBTND4Y&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원인===&lt;br /&gt;
====[[유신 헌법]]과 [[긴급조치]]====&lt;br /&gt;
1971년 선거에서 김대중을 누르고 대통령에 3선된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해 국회 해산,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등 법의 일부 기능을 정지시키고 전국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했다.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된 이른바 유신헌법에 의해 제정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법」 에 의거해 박정희가 제8대 대통령으로 재차 당선되었고, 이 유신 헌법이 발효된 기간을 유신 체제라고 부른다. 유신 체제는 행정, 입법, 사법의 3권을 모두 쥔 대통령이 종신 집권할 수 있도록 설계된 1인 대통령제였다. 박정희는 유신 헌법에 의거해 대통령의 권한으로 취할 수 있었던 특별조치인 긴급조치를 선포함으로써 헌법에 반대하는 시위 및 운동과 방송, 언론 활동을 하는 반정부 인사들을 연행, 체포, 고문하는 등 억압을 가했다.&lt;br /&gt;
&lt;br /&gt;
====한국경제의 위기====&lt;br /&gt;
1970년대 말 한국경제는''' [[오일쇼크]]'''라는 세계경제의 위기와 결합해 가라앉고 말았다. 경제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정부는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과 함께 '''[[경제안정화정책]]'''을 수용했고, 중소자본가, 봉급생활자, 도시 노동자와 농민 등에 안정화 비용을 부과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이와 같은 안정화 정책은 경제위기로 어려운 처지에 있던 중소기업들의 도산을 가속하여 기업 부도율이 치솟고 하층민들을 더 깊은 고통에 몰아넣었다. 특히 '''부가가치세'''를 도입한 이후 물가가 상승하면서 일상에 타격을 주었으며, 노동집약적 제조업이 집중되었던 부산과 마산에서는 상황이 더욱 심각하여 1979년 부산 지역 부도율은 서울의 3배에 달했다.&lt;br /&gt;
&lt;br /&gt;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lt;br /&gt;
한 시대의 대격변을 예고하는 단초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시작됐다. 1979년 8월 9일 오전, 신민당의 당사 4층 강당에서는 봉제업체인 YH무역주식회사의 여성노동자 200여명이 기업주의 폐업에 반발하여 폐업조치 철회 농성을 벌였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인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신민당이 당사 건물을 내준 것이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폭력을 동원하여 농성을 해산시켰다. 결국 이 사건은 노동 탄압 사건을 넘어선 야당에 대한 정치 탄압 사건으로 발전하였다.&lt;br /&gt;
&lt;br /&gt;
이날 경찰은 1000여명의 진압대원을 신민당사로 난입시켜 농성을 하고 있던 174명의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로 밖으로 끌어냈다. 또한 경찰은 총재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김영삼 총재와 당 간부들을 끌어내면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박정희 정권은 이 노동자 농성 사건을 빌미로 신민당 분열공작을 시도하였다. 유신정권과 비밀리에 결탁한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 3명이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 부총재 전원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접수시켰다. 그리고 법원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신민당 총재단의 직무 집행을 정지시키고 박정희 정권의 꼭두각시를 총재직무대행으로 선임하였다.&lt;br /&gt;
&lt;br /&gt;
아울러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의 동교동 자택을 전면 봉쇄하였고,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에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끊으라고 요구한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즈』 회견내용을 “반헌정적, 반민족적 작태”로 몰아서 국회에 징계 동의안을 제출했다. 10월 4일 오후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의원 159명은 여당 총회장에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제명 결의안을 '''기습적으로''' 처리해 버렸다. 노사분규 사태로 시작된 사건이 제1야당 당수의 의원직 제명으로 확대된 정치적 사태를 지켜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유신체제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이 고조되었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유신 철폐, 독재 타도!'''''   &amp;lt;small&amp;gt;-10.16 부마항쟁 당시 시위대의 구호&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부산대학교 민주선언문, 학생 시위에서 시민항쟁으로====&lt;br /&gt;
[[파일:부산시위대.jpg|250px|섬네일|오른쪽|광복동을 지나는 시위 행렬]]&lt;br /&gt;
1979년 10월 16일 아침 10시 부산대학교 구내 도서관 앞에서 약 500명의 학생들이 모여 “유신정권 물러가라”, “정치탄압 중지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반정부 시위를 벌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민주선언문」]]'''을 통해 민주화, 언론 자유, 인권 보장의 신념을 확인하고, “제도화된 폭력성과 조직적 악의 근원인 유신헌법과 독재집권층의 퇴진만이 5천 만 겨레의 통일의 첫걸음이라고 주장하면서 형제의 피를 요구하는 자유와 민주의 깃발을 우리가 잡고 반민주의 무리, 불의의 무리들을 향해 외치며 나아가자”라고 선언하였다. 이후 학생들은 교문을 나가 거리에서 시위했다. 이때 학생 수는 약 5,000명으로 불어나 있었고, 광복동과 남포동 등 부산시내 중심가까지 진출해 애국가 등의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며, 이를 제지하려는 경찰과 이곳저곳에서 충돌하였다. 비슷한 시간, 부산 동아대학교에서도 1,000여 명의 학생이 부산대학교 학생과 합류하여 가두시위를 벌였다. 부산대학교 데모로 학생 수백 명이 연행되고 100여 명이 다쳤지만 이튿날인 10월 17일에는 시위가 더욱 격화되어 학생들뿐만 아니라 다수의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학생 시위는 점차 시민항쟁의 양상을 띠어갔다.''' 밤늦게까지 계속된 시위에서 시민들은 충무파출소, 한국방송공사, 서구청, 부산세무서 등을 파괴하였고, 경찰차량을 불태우거나 파손시켰다.&lt;br /&gt;
&lt;br /&gt;
====마산의 시민항쟁====&lt;br /&gt;
&lt;br /&gt;
민주항쟁은 18일에 마산으로 확산되었다. 늦은 오후에는 1,000여 명의 경남대학교 학생들이 마산 시내 번화가에 산발적으로 집결했으며, 일부시민들도 가담해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어두워진 다음 학생과 시민들의 데모는 격화되어 파출소, 공화당사, 방송국, 신문사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파괴하였다. 이튿날인 19일에는 시위가 더욱 치열해져 마산 시내는 한때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저녁 8시경, 시위대는 경남대학과 마산대학&amp;lt;ref&amp;gt;1985년 창원대학으로 교명이 변경되었으며, 현재의 마산대학교와 다르다.&amp;lt;/ref&amp;gt;, 그리고 고등학생까지 합세하여 약 8,000명에 이르렀으며, 시내 곳곳에서 몽둥이를 들고 동사무소와 파출소로 몰려가 시설을 파괴하였고, 경찰차량에 불을 질렀다.&lt;br /&gt;
&lt;br /&gt;
====부산 계엄령, 마산 위수령====&lt;br /&gt;
[[파일:계엄포고문.jpg|270px|섬네일|왼쪽|부산지역에 내려진 계엄포고문을 읽고 있는 시민들]]&lt;br /&gt;
부산대학교 시위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박정희 정부는 학생 시위로 시작된 시위가 대규모 시민항쟁으로 사태가 심상치 않게 확대되어가자 강경책으로 대응했다. 정부는 18일 자정을 기해 '''부산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동원한 과격한 진압'''을 통해 시위 참여자들과 이를 방조한 일반 시민들까지 1,058명을 연행하고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으며, 부산지구 계엄사령부는 각 대학 휴교조처와 야간통행금지시간을 2시간 연장하는 등의 항이 담긴 포고문을 발표했다.&lt;br /&gt;
&lt;br /&gt;
부산에 계엄령이 선포된 이튿날인 19일에 마산 시위가 확대됨에 따라 그 다음날인 10월 20일 정오, 정부가 '''마산 및 창원 지역에 위수령을 발령'''해 통행금지 시간이 연장되고, 경남대학 등에는 휴교조처가 취해졌으며, 24일에는 깡패를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132명을 검거, 23명을 구속했다. 이렇게 '''표면적으로는 부마민주항쟁이 단시간에 진압되는 듯 보였지만, 항쟁은 이미 유신체제의 균열을 불러오고 있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항쟁의 전개 과정에서 볼 수 있듯, 부마민주항쟁에서 특징적인 것은 먼저 시위대의 가장 큰 분노의 대상이 공화당사와 경찰·파출소였다는 점, 다음으로는 “부가가치세를 철폐하라”, “잘 먹고 잘 살아라”등의 구호에서 드러나듯이 세무서에 대한 공격, 그리고 신문사와 방송국에 대한 공격을 들 수 있다.&lt;br /&gt;
&lt;br /&gt;
부마민주항쟁은 1970년대 유신체제 밑에서 쌓였던 침묵하는 언론, 조세, 시민을 억압하는 경찰에 대한 불만 등 정치·사회·경제·문화·종교 등 각 부문에 걸친 여러 모순의 폭발이었고, 헌법 개정과 긴급조치로 겨우 유지되던 유신체제와 박정희 정권의 붕괴를 촉진시킨 결정적인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10.26사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또한 이 사건은 1980년 5월 18일의 광주 민주화운동과 1987년 6월 민주항쟁에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된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억눌린 우리 역사&amp;lt;/br&amp;gt;터져나온 분노&amp;lt;/br&amp;gt;매운 연기 칼바람에도&amp;lt;/br&amp;gt;함성소리 드높았던&amp;lt;/br&amp;gt;동트는 새벽벌&amp;lt;/br&amp;gt;시월이 오면&amp;lt;/br&amp;gt;핏발 선 가슴마다&amp;lt;/br&amp;gt;살아오는 십 일육&amp;lt;/br&amp;gt;동지여 전진하자&amp;lt;/br&amp;gt;깨치고 나가자&amp;lt;/br&amp;gt;뜨거운 가슴으로&amp;lt;/br&amp;gt;빛나는 내일로'''''&amp;lt;/br&amp;gt;&amp;lt;small&amp;gt;-'''부산대학교''' 새벽벌도서관 10.16 기념비&amp;lt;/small&amp;gt;&amp;lt;/div&amp;gt;&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호빵이👻]]: 부마항쟁 페이지 전체 작성&amp;lt;/br&amp;gt;&lt;br /&gt;
[[이나자키로빈]]: 부마항쟁 원인 중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 작성&lt;br /&gt;
&lt;br /&gt;
=='''5.18민주화운동'''==&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AMetwTuXYHTCXINqr7ZJpzO5CHFEMQO5-Uqau51RkXA&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원인===&lt;br /&gt;
====유신체제의 붕괴====&lt;br /&gt;
&lt;br /&gt;
[[파일:김재규.jpg|섬네일|오른쪽|암살 당시 상황을 재현하는 김재규]]&lt;br /&gt;
&lt;br /&gt;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amp;lt;small&amp;gt; - 김재규&amp;lt;/small&amp;gt;&lt;br /&gt;
1979년 10월 4일 신민당 총재 김영삼이 국회에서 의원직을 제명당하자 10월 15부터 10월 20까지 부산 · 마산 등지에서는 부마항쟁이 일어났고, 이의 해결을 둘러싼 노선대립으로 갈등 중 10월 26일 &amp;lt;ins&amp;gt;[[김재규]]&amp;lt;/ins&amp;gt;가 박정희를 살해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ins&amp;gt;[[10.26 사태]]&amp;lt;/ins&amp;gt;의 사후 수습과정에서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을 중심으로 신군부 세력이 부상하였으며, 이들은 &amp;lt;ins&amp;gt;[[12.12 사건]]&amp;lt;/ins&amp;gt;의 하극상을 통하여 군부를 장악하였다. 1980년 2월 29일 김대중 등이 복권되었으나 그 해 봄, 신군부는 최규하 과도 정부를 유명무실하게 하고 국민들이 요구하는 민주주의와 이를 위한 명확한 정치일정 제시를 거부하면서 권력기반을 구축하였다.&lt;br /&gt;
&lt;br /&gt;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lt;br /&gt;
한 시대의 대격변을 예고하는 단초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시작됐다. 1979년 8월 9일 오전, 신민당의 당사 4층 강당에서는 봉제업체인 YH무역주식회사의 여성노동자 200여명이 기업주의 폐업에 반발하여 폐업조치 철회 농성을 벌였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인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신민당이 당사 건물을 내준 것이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폭력을 동원하여 농성을 해산시켰다. 결국 이 사건은 노동 탄압 사건을 넘어선 야당에 대한 정치 탄압 사건으로 발전하였다.&lt;br /&gt;
&lt;br /&gt;
이날 경찰은 1000여명의 진압대원을 신민당사로 난입시켜 농성을 하고 있던 174명의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로 밖으로 끌어냈다. 또한 경찰은 총재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김영삼 총재와 당 간부들을 끌어내면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박정희 정권은 이 노동자 농성 사건을 빌미로 신민당 분열공작을 시도하였다. 유신정권과 비밀리에 결탁한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 3명이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 부총재 전원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접수시켰다. 그리고 법원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신민당 총재단의 직무 집행을 정지시키고 박정희 정권의 꼭두각시를 총재직무대행으로 선임하였다.&lt;br /&gt;
&lt;br /&gt;
아울러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의 동교동 자택을 전면 봉쇄하였고,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에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끊으라고 요구한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즈』 회견내용을 “반헌정적, 반민족적 작태”로 몰아서 국회에 징계 동의안을 제출했다. 10월 4일 오후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의원 159명은 여당 총회장에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제명 결의안을 '''기습적으로''' 처리해 버렸다.&lt;br /&gt;
&lt;br /&gt;
노사분규 사태로 시작된 사건이 제1야당 당수의 의원직 제명으로 확대된 정치적 사태를 지켜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유신체제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이 고조되었다. 또한 이 사건은 그동안 다소 주춤하던 대학가에 반유신 반독재 운동의 열기가 다시 확산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청춘을 바쳐, 학생 운동====&lt;br /&gt;
&lt;br /&gt;
[[파일:서울의_봄.JPG|섬네일|오른쪽|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앞에 모인 시위대]]&lt;br /&gt;
&lt;br /&gt;
군부의 재집권 야욕에 대한 국민적 저항은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표출되었다. 1980년 3월, 서울대 총학생회 출범을 시작으로 4월 초순에는 전국의 주요 대학들이 총학생회를 결성하기 시작하였다. 대학별로 독재 정권에 아부했던 어용교수와 족벌사학 퇴진 운동을 벌였고, 특히 병영집체훈련(당시 대학 신입생들은 의무적으로 군부대에 10일 간 입대하여 각종 군사훈련을 이수해야 했다.) 거부가 주요 이슈로 전면 등장했다. 각 대학의 병영집체훈련 거부운동이 본격화되고 전국적인 쟁점으로 떠오르자 신군부는 신문, 방송을 통해 ‘학생들의 안보의식 결여’를 비난하고 교내 시위·농성을 집중적으로 보도하게 했다.  5월 1일에 서울대가 입영훈련 거부투쟁 철회를 결정하고 ‘계엄령 해제’와 ‘유신잔당 퇴진’, ‘정부개헌중단’과 ‘노동 3권 보장’ 등을 요구하기 시작하면서 대학가는 이제까지의 학내 문제 중심의 운동에서 정치개혁을 위한 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그간 정부와 대학 간에 팽팽하게 유지되던 긴장 관계는 폭발 직전으로 내닫게 된 것이다.&lt;br /&gt;
&lt;br /&gt;
약 열흘 간의 대정부 투쟁을 준비한 대학가는 5월 10일 고려대 총학생회장실에서 열린 ‘총학생회장단 회의’에 참석한 전국 23개 대학 대표들은 ‘비상계엄의 즉각 해제’와 ‘전두환, 신현확 등 유신잔당 퇴진’ 등을 결의하고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정세에 대한 공동대처 방안을 마련했다. 이후 5월 13일부터 5월 14일에 걸쳐 서울 · 부산 · 대구 · 광주 등 37개 대학에서 계엄철폐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5월 15일에는 서울역에서 시위가 발생하는 등 학생시위는 서울시가지를 거의 마비시키는 등 야간까지 지속되어 사태가 절정에 달하면서 신군부 세력을 위협하였다. 5월 16일 24개 대학 학생대표들은 당분간 시국의 추이를 관망하기로 결정하고 가두시위를 중단하면서 소강상태에 돌입하는 듯하였다.&lt;br /&gt;
&lt;br /&gt;
====1980년 봄의 광주====&lt;br /&gt;
5월 17일 신군부 세력이 이전까지는 제주도를 제외한 지역에 한정되었던 비상계엄을 전국에 확대하는 조치인 계엄포고 10호(17일 24시에 발효: 각 대학 휴교령 포함)를 밤 9시 40분에 의결하고 밤 11시 40분에 발표하면서 밤 11시를 전후한 시점부터 김대중 · 김종필이 연행되는 등 권력형 부정축재자 및 소요조종 혐의자, 학생 시위 주동자가 체포되었다. 이날 밤 광주지역의 사회운동·학생운동의 지도자도 상당수가 검거되었다. 광주의 검거대상자는 전남대 12명, 조선대 10명 등 총 22명이었다. 전남에서 계엄합동수사단은 광주505보안대가 중심이고, 중앙정보부, 경찰 등이 보조역할을 했다. 전남 계엄합동수사단은 22대 차량과 86명의 인원이 출동해 정동년 등 복적생들과 대학의 총학생회 간부들을 집중 검거했다.&lt;br /&gt;
&lt;br /&gt;
한편 육군본부는 14일 오전 7시55분에 국가 중요 보안목표와 주요대학에 군 병력 배치 명령을 하달했다. 이 명령에 따라 전남북계엄분소장인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광주 시내 주요 시설물에 이날 오후부터 계엄병력을 배치했다. 31사단 96연대 병력이 광주시내 KBS건물에 42명, MBC 21명, CBS 11명, VOC(전일방송) 11명 등 주요 방송사 건물에 배치돼 경비에 들어간 것이다.&lt;br /&gt;
&lt;br /&gt;
이날 오후 전교사령관은 7공수여단의 광주배치에 따른 수송수단 지원도 미리 협의했다. 그리고 5월 8일부터 16일 사이에 공수부대 수뇌부들도 헬기를 타고 서울에서 내려와 광주 상무대의 전투병과교육사령부를 방문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광주에서 시위가 격화되면 즉각적으로 최정예 군부대를 동원해서 진압할 준비를 철저하게 갖추고 있었다. 5월 18일에 시작된 광주의 비극은 그 이전에 이미 시한폭탄처럼 준비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lt;br /&gt;
{{구글지도 | 위도=35.175961433346885 | 경도=126.90865311973532 | 줌=13 }}  [[파일:금남로.JPG|섬네일|오른쪽|금남로 앞에 집결한 버스와 시민군]]&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18일&amp;lt;/span&amp;gt;&lt;br /&gt;
휴교령이 내려질 경우 교문 앞에서 집결한다는 결의에 따라 학생들은 5월 18일 오전 전남대학교 앞에 모였다. 공수부대원들이 전남대 앞 시위를 저지하자 대학생들은 광주역에 재집결해서 시위를 이어갔다. 시위대가 점차 늘어나면서 공수부대원이 시내에서 시위진압에 나섰으며 18일 오후 1시부터 무차별 진압작전이 이루어져 부상자가 속출하였다.&lt;br /&gt;
&lt;br /&gt;
군인들이 금남로 등 시내 중심가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이나 여자를 마구 구타하고 짓밟으며 찌르는 등의 잔혹 행동을 하자 시민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이에 시위대는 오후 4시 이후 파출소 파괴 등 적극공세에 나섰다. '''계엄군의 과잉 무력진압은 시위를 해산시키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오히려 시민들을 단결시켰으며, 결국 19일 시민 · 학생 연대가 발생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lt;br /&gt;
&lt;br /&gt;
 '''''광주 애국 시민 여러분! 이것이 웬 말입니까? 웬 벼락이란 말입니까? 죄 없는 학생들을 총칼로 찔러 죽이고 몽둥이로 두들겨 트럭으로 실어가며 부녀자를 발가벗겨 총칼로 찌르는 놈들이 이 누구란 말입니까? 이제 우리가 살길은 전시민이 하나로 뭉쳐 청년 학생들을 보호하고 유신잔당과 극악무도한 살인마 전두환 일파와 공수 특전단 놈들을 한놈도 남김없이 쳐부수는 길 뿐입니다. 우리는 이제 다 보았습니다. 다 알게 되었읍니다. 왜 학생들이 그토록 소리 높이 외쳤는가를, 우리의 적은 경찰도 군대도 아닙니다. 우리의 적은 전국민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바로 유신잔당과 전두환 일파 그놈들입니다.''''' &amp;lt;small&amp;gt; - 1980년 5월 19일에 '광주시민민주투쟁회'명의의 호소문&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19일&amp;lt;/span&amp;gt;&lt;br /&gt;
19일 오전에는 일시적 소강상태였으나 오후 들어서 분노한 학생 · 시민들이 군 · 경찰과 공방전을 벌이면서 시위는 점차 격화되었다. '''시민들은 공포감에서 벗어나 자신의 생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단순한 학생시위에서 시민봉기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계엄군은 시위대를 포위하여 구타하였으며 일부 고등학생까지 포함된 시위대는 돌과 화염병으로 저항하였고 파출소와 방송국 등에 침입하였다. 뒤처진 공수부대를 공격하거나 고립된 차량을 포위하기도 하였으며 총과 방패를 빼앗기도 하였고, 오후 4시 50분 시민들에게 포위된 계엄군의 장갑차에서 최초의 발포가 있었다. 19일 밤비가 내리는 가운데 시위가 산발적으로 계속되었으며, 20일 오전 비가 그치고 대규모 시위는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오후부터 다시 시작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20일&amp;lt;/span&amp;gt;&lt;br /&gt;
'''20일 오후 6시부터 택시와 버스 운전 기사들이 광주역과 무등경기장에 모여 대형 버스와 트럭을 앞세우고 일시에 금남로에 집결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들을 앞세운 시위는 계엄군을 몰아내는 데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였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5.18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에 &amp;lt;ins&amp;gt;[[지대한 영향]]&amp;lt;/ins&amp;gt;을 끼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학생 운동에 뛰어든 많은 대학생들은 대학교에 들어와서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의 실상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아 학생 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군부정권은 5.18 이후로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다. 전두환은 김대중 등에게 '광주 사태'의 책임을 물어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했고,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 선언을 한 직후, 8월 27일 소위 체육관 선거를 통해 전두환은 대통령 자리를 탈취했다.&lt;br /&gt;
&lt;br /&gt;
지역적인 면에서는 '''광주광역시를 비롯한 전라도 지역의 트라우마'''로 작용해 이후의 민주정의당 및 &amp;lt;ins&amp;gt;[[3당 합당]]&amp;lt;/ins&amp;gt;으로 이어지는 보수 세력에 대해 적대심을 가지고, 민주당계 정당의 표밭이 되는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미 박정희 정부 시절부터 유무형의 정치적인 차별을 받고 있었지만 5.18의 참상은 전라도가 다시는 보수 세력을 지지하지 않게 만들 정도로 심각한 사건이며 호남소외론의 가장 결정적인 명분이 되었다.&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이나자키로빈]]: 5.18 민주화운동 페이지 전체 작성&lt;br /&gt;
&lt;br /&gt;
=='''6월민주항쟁'''==&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NnXWs5RMTIf-6DOEu9_rX2k4mgzUk1AQHYneCuwXN1Q&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원인===&lt;br /&gt;
====[[박종철고문치사사건]]====&lt;br /&gt;
&lt;br /&gt;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박종철은 1987년 1월 13일 자정 경 하숙집에서 치안본부(現 경찰청)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게 연행되었다.‘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이자 ‘민주화추진위원회’ 지도위원으로 수배 받고 있었던 박종운을 잡기위해 연행한 것이었다. 취조실로 연행해간 공안 당국은 박종철에게 박종운의 소재를 물었으나, 박종철은 순순히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경찰은 잔혹한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가하였고, 박종철은 끝내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했다. 당시 경찰은 초기 발표에서 고문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라고 사망원인을 발표하였으나, 시체부검 결과 전기고문과 물고문에 의한 살인인 것으로 밝혀졌다.&lt;br /&gt;
&lt;br /&gt;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저 죽음을 응시해주길 바란다. 저 죽음을 끝내 지켜주길 바란다. 저 죽음을 다시 죽이지 말아주길 바란다.''''' &amp;lt;small&amp;gt; - 동아일보 1987년 1월 17일자 김중배 칼럼 중&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사건 진상의 일부가 공개되자 2월 7일 전국 주요 도시에서 &amp;quot;박종철군 범국민추도식&amp;quot; 및 도심 시위가 열렸고 이어 3월 3일에는 &amp;quot;박종철군 49재와 고문추방 국민대행진&amp;quot;과 함께 또 다른 시위가 열렸다. 이후 4월 2일 서울대학교 학부모 130여 명이 ‘건국대학교 사태‘ 등 시국관련 구속학생의 징계철회를 요구하며 철야 농성을 벌였다.&lt;br /&gt;
&lt;br /&gt;
====정부의 개헌논의 유보====&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lt;br /&g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JazJFsgu4oc?si=sOE7w1tz-jKVztC9&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lt;br /&g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그러나 전두환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1987년 4월 13일 [[4.13호헌조치]]라 불리는 ‘대통령 특별담화‘를 발표, 개헌(改憲) 논의를 유보하겠다고 밝혔다. [[4.13호헌조치]]에서 전두환은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와 대통령 선거는 자유 경선의 분위기가 보장되는 가운데 1987년 내에 공정한 선거관리를 통해 차질 없이 실시할 수 있게 모든 노력을 다할것‘이라고 다짐했으며, 또 ‘민정당의 후임 대통령 후보는 조속한 시일 안에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인물 가운데서 당헌 절차와 민주 방식에 따라 전당대회에서 선출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호헌조치‘라는 그 이름대로 현행 헌법에 따라 권력을 이양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국민들의 큰 기대를 얻을 것이라 믿었으나, 기대는 커녕 오히려 반발을 가져오는 요인이 되고 말았다. 곧바로 이튿날인 4월 14일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 등 각계 인사들이, 호헌 조치를 비판하는 시국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정부 최루탄에 의한 [[이한열]] 사망====&lt;br /&gt;
[[파일:이한열.jpg|200px|섬네일|오른쪽|최루탄에 피격당한 후 이종창에게 부축받는 이한열]]&lt;br /&gt;
먼저 1987년 5월 27일 야당과 재야, 종교계 등이 힘을 모아 ‘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여당인 민주정의당에서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6월 10일에 맞춰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6 · 10국민대회]])’를 치르기로 결정하였다. 대학생들은 국본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를 중심으로 6 · 10국민대회에 호응하여 6월 초부터 각 대학별로 연일 집회와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6 · 10국민대회]] 하루 전날인 6월 9일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교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는 곧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학생들은 물론 시민들의 분노가 들끓었다. 이러한 분노 속에서 6 · 10국민대회가 열렸다. 경찰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6 · 10국민대회가 열리는 성공회대성당을 원천 봉쇄하였다. 그 결과 6 · 10국민대회는 대회장에 미리 들어가 있던 소수의 인원만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대회 예정 시간인 오후 6시 이전부터 서울 시내 곳곳에서 대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시민들도 다양한 방식으로 6 · 10국민대회와 학생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날 밤 늦게까지 시위를 벌이던 학생들은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이후 5일 동안 농성을 계속하였다. 애초 계획된 것은 아니었지만 대학생들의 명동성당 농성은 6 · 10국민대회가 단발성 행사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인 저항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lt;br /&gt;
&lt;br /&gt;
====민주항쟁 확산====&lt;br /&gt;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로 개헌하라!'''''   &amp;lt;small&amp;gt;-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제시한 슬로건&amp;lt;/small&amp;gt;&lt;br /&gt;
[[파일:도망.png|300px|섬네일|왼쪽|쫓아오는 경찰들을 피해 달리고 있는 호헌철폐시위 참가자들]]&lt;br /&gt;
명동성당 농성을 거치며 항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유월항쟁의 전국화 과정에는 일정한 패턴이 존재하였다. 6월 10일 서울 외에도 전국 주요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위가 벌어졌지만, 15일까지 항쟁의 중심은 6 · 10국민대회와 명동성당 농성이 전개된 서울이었다. 하지만 6월 15일 경부터는 부산, 대전, 진주 등에서 격렬한 시위가 전개되었다. 그러다가 6월 20일부터 대규모 시위가 광주, 전주, 순천, 익산 등 호남 지방으로 옮겨졌다. 6 · 10국민대회 이후 약 20일 동안 전국 곳곳에서 매일 평균 100회 이상의 시위가 동시다발로 벌어졌다. 특히 6월 18일 ‘최루탄추방대회’와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은 전국 곳곳에서 한꺼번에 1백만 명 이상이 참여하였다. 갈수록 참가 지역이 전국 곳곳으로 확산되어 대도시, 중소도시뿐만 아니라 농촌 지역의 군 단위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6월 26일 하루에만 37~38개 시 · 군에서 시위가 동시에 벌어졌다. 유월항쟁에 참가한 연 인원은 400~500만 명으로 추산된다.&lt;br /&gt;
&lt;br /&gt;
반면 유월항쟁의 전국적 동시다발 시위는 경찰 병력을 분산시켰다. 분산된 경찰 병력으로는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거센 시위의 물결을 막아 낼 수 없었다. 경찰이 시위 진압에 최루탄을 남발하면서 최루탄도 점차 고갈되기 시작하였다. 유월항쟁 기간 동안 경찰이 사용한 최루탄만 총 67만 발이 넘었다. 더불어, 전두환 정권이 집권 내내 강조했던 88서울올림픽이 얼마 남지 않아 미국 등 국제사회의 이목이 집중된 상황에서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운동 때처럼 유혈 사태와 대량 학살을 반복하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무엇보다 군대를 동원하더라도 이러한 대규모 시민 항쟁을 진압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결국 경찰력으로 항쟁을 막기 힘들고, 군대 투입도 어렵다고 판단한 전두환 정권은 1987년 6월 29일 ‘ 6 · 29민주화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하였다. 그리고 그동안 의식불명 상태에 있었던 이한열이 7월 5일 끝내 사망하였다. 5일장 후 7월 9일 치러진 이한열의 노제에 100만 명의 인파가 모인 것을 끝으로 약 한 달 동안 지속된 유월항쟁은 마무리되었다.&lt;br /&gt;
&lt;br /&gt;
[[파일:태극기.png|300px|섬네일|오른쪽|서울역 앞에서 태극기와 '자주없이 민주없다'는 플래카드를 들고 구호를 외치는 시위대]]&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1987년 6월항쟁이 '''대통령[[직선제]] 개헌'''이라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이 항쟁에 동참한 학생과 시민들의 요구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제시한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 개헌’이라는 슬로건으로 모아졌기 때문이었다. 유월항쟁은 이러한 민주화 세력의 통합성, 즉 각기 다른 성격과 지향을 가진 여러 주체들이 모두 동의할 수 있는 ‘최소 강령’하에 ‘최대 연합’으로 결집하였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딩잉잉]]:6월민주항쟁 페이지 전체 작성&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기밀문서]]&lt;br /&gt;
[[분류:4.19혁명관련]]&lt;br /&gt;
[[분류:부마항쟁관련]]&lt;br /&gt;
[[분류:5.18민주화운동관련]]&lt;br /&gt;
[[분류:6월민주항쟁관련]]&lt;br /&gt;
[[분류:뎐]]&lt;br /&gt;
[[분류:이나자키로빈]]&lt;br /&gt;
[[분류:호빵이👻]]&lt;br /&gt;
[[분류:•ᴗ•]]&lt;br /&gt;
[[분류:딩잉잉]]&lt;/div&gt;</summary>
		<author><name>딩잉잉</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8%B0%EB%B0%80%EB%AC%B8%EC%84%9C&amp;diff=35989</id>
		<title>기밀문서</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8%B0%EB%B0%80%EB%AC%B8%EC%84%9C&amp;diff=35989"/>
		<updated>2023-12-11T16:22:1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딩잉잉: /* 민주항쟁 확산 */&lt;/p&gt;
&lt;hr /&gt;
&lt;div&gt;=='''컨텐츠 주제'''==&lt;br /&gt;
&lt;br /&gt;
[[파일:시위대.png|400픽셀|center]][[파일:이한열사진.jpeg|400픽셀|center]][[파일:진압.png|400픽셀|center]]&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amp;lt;big&amp;gt;'''&amp;lt;span style=&amp;quot;color:#CD0000&amp;quot;&amp;gt;&amp;lt;big&amp;gt;&amp;lt;big&amp;gt;투쟁의 불꽃, 자유의 환호&amp;lt;/big&amp;gt;&amp;lt;/big&amp;gt;&amp;lt;/span&amp;gt;'''&amp;lt;br/&amp;gt;&amp;lt;br/&amp;gt;&lt;br /&gt;
''대한민국은 시민들의 투쟁과 희생을 거쳐, 피와 땀으로 민주화를 이룩하였습니다.''&amp;lt;br/&amp;gt;&lt;br /&gt;
''그들은 어둠을 밝히기 위해 항거의 불꽃을 태웠고, 그 불꽃은 자유를 외쳤으며, 그 외침은 세상을 움직였습니다.''&amp;lt;br/&amp;gt;&lt;br /&gt;
''이 «기밀문서»에는 당신이 미처 몰랐던 그 때의 열기와 의지가 실려있습니다.''&amp;lt;br/&amp;gt;&lt;br /&gt;
''함께, 그 뜨거운 페이지를 열어보시겠습니까?''&amp;lt;/span&amp;gt;&amp;lt;/big&amp;gt;&amp;lt;/div&amp;gt;&lt;br /&gt;
&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이나자키로빈]]&lt;br /&gt;
[[딩잉잉]]&lt;br /&gt;
&lt;br /&gt;
=='''팀원'''==&lt;br /&gt;
*오현지(2022131143) [[뎐]]&amp;lt;br/&amp;gt;&lt;br /&gt;
*김여원(2023130209) [[이나자키로빈]]&amp;lt;br/&amp;gt;&lt;br /&gt;
*김하은(2022131345) [[호빵이👻]]&amp;lt;br/&amp;gt;&lt;br /&gt;
*박정원(2023130350) [[•ᴗ•]]&amp;lt;br/&amp;gt;&lt;br /&gt;
*최필중(2023130216) [[딩잉잉]]&amp;lt;br/&amp;gt;&lt;br /&gt;
&lt;br /&gt;
=='''기획의도'''==&lt;br /&gt;
===기획배경===&lt;br /&gt;
1945년 광복 이후 대한민국 국민들은 자유민주국가로서의 미래를 기대했으나 실상은 그러지 못했다.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보여주듯 현재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는 그것을 누리지 못한 앞선 세대들의 목숨을 바친 항쟁의 대가이다. 민주항쟁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의 핵심 동력이었다. 오늘날 우리나라 민주의식의 중요한 기둥이 되는 네 가지 항쟁을 선별하고 각 항쟁의 배경, 전개과정, 의의를 비롯해 세부적이고 자세한 내용에 대한 기사를 작성한다.&lt;br /&gt;
===기획목적===&lt;br /&gt;
작금의 현실까지 오기에는 수없이 많은 투쟁이 있었지만 4.19혁명, 부마항쟁, 5.18민주항쟁, 6월민주항쟁이라는 네 가지 사건을 살펴보기로 한 것은 가장 많이 다뤄지고, 가장 많이 알려진 사건이기 때문이다. 관련된 사건과 역사 인물들에 대해 자세히 적어 내어 민주항쟁의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지 않으면 알기 힘든 각 민주항쟁의 자세한 내막을 밝혀낸다.&lt;br /&gt;
===기대하는 바===&lt;br /&gt;
타임라인과 온톨로지를 활용해 내용의 전반적인 이해를 돕고 자세한 설명을 통해 사건의 자세한 내막을 들어낸다. 네 가지 항쟁을 각각 큰 목차로 설정하고 세부 기사를 그 내부에 작성해 독자의 관심과 수요에 부합하는 정보를 전달하는 데 효과적일 것으로 기대된다. 민주항쟁에 참여한 사람들의 희생과 투쟁에 대한 존경심을 부르고 역사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다.&lt;br /&gt;
===기여===&lt;br /&gt;
[[뎐]], [[이나자키로빈]], [[호빵이👻]]: 기획의도 페이지 작성&lt;br /&gt;
&lt;br /&gt;
=='''온톨로지'''==&lt;br /&gt;
{{NetworkGraph | title=민주항쟁.lst}}&lt;br /&gt;
[[민주항쟁.lst]]&lt;br /&gt;
===기여===&lt;br /&gt;
*[[뎐]]: 온톨로지 제작&lt;br /&gt;
=='''컨텐츠 구조'''==&lt;br /&gt;
===클래스(Class)===&lt;br /&gt;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color:white&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0%&amp;quot; | 클래스 !! style=&amp;quot;width:40%&amp;quot; | 설명 !! style=&amp;quot;45%&amp;quot; | 노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제||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대표 키워드인 민주항쟁을 주제로서 나타내었다 || 만주항쟁&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항쟁||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민주화운동 시기 발생했던 주요 운동들을 ‘항쟁’이라는 키워드로 분류하였다. || 4.19혁명, 부마항쟁, 5.18 민주화운동, 6월민주항쟁&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사건||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항쟁의 원인, 결과가 되는 사건을 정리하였다|| 3.15부정선거, 고려대 4.18학생시위, 3.15의거, YH사건, 10.26사태, 12.12 군사반란, 비상계엄령,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고문추방민족대행진, 4.13호헌조치, 6.29선언, 대통령직선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지역||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요 항쟁들이 일어났던 지역을 정리하였다|| 마산, 부산, 광주&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인물||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요사건들을 발생시킨 인물, 참여했던 인물을 묶어서 정리하였다|| 이승만, 이기붕, 김주열, 박정희, 김재규, 전두환, 신군부, 시민군, 박종철, 이한열, 노태우&lt;br /&gt;
|-&lt;br /&gt;
|}&lt;br /&gt;
===관계성(Relation)===&lt;br /&gt;
*&amp;lt;font color=#228B22&amp;gt;'''~은 ~에 속한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주요 항쟁들이 민주항쟁에 속함을 나타내거나 인물의 소속을 나타낸다.&lt;br /&gt;
***해당노드:&lt;br /&gt;
***#4.19혁명 -&amp;gt; 민주항쟁&lt;br /&gt;
***#부마항쟁 -&amp;gt; 민주항쟁&lt;br /&gt;
***#5.18민주화운동 -&amp;gt; 민주항쟁&lt;br /&gt;
***#6월 민주항쟁 -&amp;gt; 민주항쟁&lt;br /&gt;
***#전두환 -&amp;gt; 신군부&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의 원인이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어떠한 사건과 인과관계를 이루는 또다른 사건 혹은 인물을 설명한다.&lt;br /&gt;
***#이기붕 -&amp;gt; 3.15부정선거&lt;br /&gt;
***#김주열 -&amp;gt; 고려대 4.18학생시위&lt;br /&gt;
***#고려대 4.18학생시위 -&amp;gt; 4.19혁명&lt;br /&gt;
***#3.15의거 -&amp;gt; 4.19혁명&lt;br /&gt;
***#김주열 -&amp;gt; 4.19혁명&lt;br /&gt;
***#3.15부정선거 -&amp;gt; 3.15의거&lt;br /&gt;
***#YH사건 -&amp;gt; 부마항쟁&lt;br /&gt;
***#부마항쟁 -&amp;gt; 10.26사태&lt;br /&gt;
***#박정희 -&amp;gt; 10.26사태&lt;br /&gt;
***#비상계엄령 -&amp;gt; 5.18민주화운동&lt;br /&gt;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 -&amp;gt; 고문추방민족대행진&lt;br /&gt;
***#고문추방민족대행진 -&amp;gt; 4.13호헌조치&lt;br /&gt;
***#4.13호헌조치 -&amp;gt; 6월민주항쟁&lt;br /&gt;
***#6월민주항쟁 -&amp;gt; 6.29선언&lt;br /&gt;
***#6월민주항쟁 -&amp;gt; 대통령직선제&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을 발생시켰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사건과 그 사건을 직접적으로 발생시킨 인물을 연결한다.&lt;br /&gt;
***#이승만 -&amp;gt; 3.15부정선거&lt;br /&gt;
***#김재규 -&amp;gt; 10.26사태&lt;br /&gt;
***#신군부 -&amp;gt; 1212군사반란&lt;br /&gt;
***#전두환 -&amp;gt; 비상계엄령&lt;br /&gt;
***#노태우 -&amp;gt; 6.29선언&lt;br /&gt;
***#시민군 -&amp;gt; 5.18민주화운동&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에 희생되었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민주항쟁의 진압과정 등 에서 희생된 인물을 설명한다&lt;br /&gt;
***#김주열 -&amp;gt; 3.15의거&lt;br /&gt;
***#이한열 -&amp;gt; 6월 민주항쟁&lt;br /&gt;
***#박종철&amp;gt;박종철 고문치사 사건&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에서 발생했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설명한다.&lt;br /&gt;
***#3.15의거 -&amp;gt; 마산&lt;br /&gt;
***#부마항쟁 -&amp;gt; 부산&lt;br /&gt;
***#부마항쟁 -&amp;gt; 마산&lt;br /&gt;
***#5.18민주화운동 -&amp;gt; 광주&lt;br /&gt;
===기여===&lt;br /&gt;
*[[뎐]]: 컨텐츠 구조 페이지 작성&lt;br /&gt;
=='''4.19혁명'''==&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VPp4BmfDSv8VA2-oC-VATHzUYgadaiaQ9AlWXYiaiVk&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원인===&lt;br /&gt;
====[[3.15 부정선거]]====&lt;br /&gt;
[[파일:3.15부정선거_개표_모습.png|300픽셀|섬네일|오른쪽|3.15부정선거 당시 개표하는 사진&amp;lt;ref&amp;gt;사진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amp;lt;/ref&amp;gt;]]&lt;br /&gt;
1959년 대한민국은 제 4대 대통령 선거와 제 5대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당시 자유당에서는 12년째 대통령으로서 연임 중이던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이기붕]]'''을 부통령 후보로 선임하였다. 그러나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병세의 악화로 사망하게 되고,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은 확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선거의 초점은 자유당의 조병옥과 민주당의 장면 간의 선거전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본격적인 선거유세의 시작과 함께 정부와 여당의 잇따른 야당선거운동 방해사건으로 부정선거가 시작되었다. 1960년 3월 15일 선거가 시작된 이후에도 다양한 방법의 부정행위가 일어났고, 개표 결과 이승만과 이기붕의 득표가 100%에 육박하는 결과로 나오자 자유당은 득표수를 하향 조정해 최종 집계에 반영할 것을 지시했다. 결국 이승만 88.7%, 이기붕 79%의 득표율을 가지며 정, 부통령에 당선되었다.&amp;lt;ref&amp;gt;자세한 내용은 3.15부정선거 페이지 참조&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부정선거 반대시위, [[3.15 의거]]의 발생====&lt;br /&gt;
3.15 부정선거를 반대하는 시위는 초기에는 중, 고등학생들의 산발적인 시위로 전개되었다. 3월 15일 선거일 밤 경남 마산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으며,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여 1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amp;lt;br/&amp;gt;&lt;br /&gt;
3월 15일 실종되었던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4월 11일 마산부두에서 발견되자 마산 시민들은 시청, 파출소 등을 파괴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2차 시위가 일어난 것이다.&lt;br /&gt;
&lt;br /&gt;
====[[고려대학교 4.18 학생시위]]의 발생====&lt;br /&gt;
1, 2차 마산시위를 계기로 부정선거 무효와 이승만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났다. 이들은 '4.18 선언문'을 낭독하고 시내로 진출하였다. 이는 4월 19일 학생들과 일반 시민들이 가세한 대규모 시위로 이어지게 되었다.&lt;br /&gt;
====전국적인 4.19 혁명의 발생====&lt;br /&gt;
분노한 전국의 시민과 학생들이 다음 날인 4월 19일에 '이승만 하야와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며 대규모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경찰은 또다시 무차별 발포에 나섰고,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지만 이러한 압박에도 시민들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lt;br /&gt;
====이승만 대통령의 혼란 수습 시도====&lt;br /&gt;
이승만 대통령은 4.19 시위로 인한 정국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4월 20일 국무위원 전원과 자유당 당무위원 전원의 사표를 제출하도록 지시하였으며, 4월 23일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외무장관에 허정, 내무장관에 이호, 법무장관에 권승렬을 임명하는 등 개각을 단행하였다.&amp;lt;br/&amp;gt;&lt;br /&gt;
그러나 미국은 4.19직후 국무부 성명을 통해 한국에서 발생한 사태는 부정선거에 대한 '군중의 불만'을 반영한 것 이라고 했고, 양유찬 주미대사를 불러 '부정선거에 대한 철저한 조사', '경향신문 복간', '국가보안법 개정' 등을 촉구하는 각서를 전달하였다.&amp;lt;br/&amp;gt;&lt;br /&gt;
그리고 4월 25일, 이승만 정권에 분노한 전국 27개 대학 258명의 교수가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 모여 14개항의 시국 선언문을 발표하며 학생, 시민들과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들은 3.15 부정선거 및 4.19 사태의 책임을 지고 대통령이 물러날 것을 주장하였으며, &amp;quot;학생들의 피에 보답하자&amp;quot;는 플랜 카드를 앞세워 국회의사당까지 행진하였다. &lt;br /&gt;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lt;br /&gt;
무력 진압에도 대규모 시위가 이어지며 시민들은 완강하게 투쟁하였다. 4월 26일 시위대가 경무대로 다시 집결하는 등 사태가 심각하게 진행되자, 오전 10시 30분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 성명을 발표하였다. 4월 27일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하며 대통령직을 하야하고 하와이로 망명하였으며 자유당 정권도 끝나게 된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우리 국민들, 특히 학생과 청년들의 주도로 이루어진 4.19 혁명은 학생과 일반 대중이 단결하여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아시아 최초의 시건이다. 4.19혁명은 부마항쟁, 5.18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그리고 2017년 촛불시위에 이르기 까지 정권에 대항하는 국민들이 단합을 이루는 초석이 되었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도 시민 저항권에 대한 근거로써 4.19혁명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문구가 있다.&lt;br /&gt;
===기여===&lt;br /&gt;
[[뎐]]: 4.19혁명 페이지 원인, 의의 작성 &lt;br /&gt;
&lt;br /&gt;
[[•ᴗ•]]: 4.19혁명 페이지 전개 작성&lt;br /&gt;
&lt;br /&gt;
=='''부마항쟁'''==&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bK7zjpPvBsC7rFRPmsiHCUYhyWt2VXOv8SYyaBTND4Y&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원인===&lt;br /&gt;
====[[유신 헌법]]과 [[긴급조치]]====&lt;br /&gt;
1971년 선거에서 김대중을 누르고 대통령에 3선된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해 국회 해산,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등 법의 일부 기능을 정지시키고 전국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했다.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된 이른바 유신헌법에 의해 제정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법」 에 의거해 박정희가 제8대 대통령으로 재차 당선되었고, 이 유신 헌법이 발효된 기간을 유신 체제라고 부른다. 유신 체제는 행정, 입법, 사법의 3권을 모두 쥔 대통령이 종신 집권할 수 있도록 설계된 1인 대통령제였다. 박정희는 유신 헌법에 의거해 대통령의 권한으로 취할 수 있었던 특별조치인 긴급조치를 선포함으로써 헌법에 반대하는 시위 및 운동과 방송, 언론 활동을 하는 반정부 인사들을 연행, 체포, 고문하는 등 억압을 가했다.&lt;br /&gt;
&lt;br /&gt;
====한국경제의 위기====&lt;br /&gt;
1970년대 말 한국경제는''' [[오일쇼크]]'''라는 세계경제의 위기와 결합해 가라앉고 말았다. 경제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정부는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과 함께 '''[[경제안정화정책]]'''을 수용했고, 중소자본가, 봉급생활자, 도시 노동자와 농민 등에 안정화 비용을 부과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이와 같은 안정화 정책은 경제위기로 어려운 처지에 있던 중소기업들의 도산을 가속하여 기업 부도율이 치솟고 하층민들을 더 깊은 고통에 몰아넣었다. 특히 '''부가가치세'''를 도입한 이후 물가가 상승하면서 일상에 타격을 주었으며, 노동집약적 제조업이 집중되었던 부산과 마산에서는 상황이 더욱 심각하여 1979년 부산 지역 부도율은 서울의 3배에 달했다.&lt;br /&gt;
&lt;br /&gt;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lt;br /&gt;
한 시대의 대격변을 예고하는 단초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시작됐다. 1979년 8월 9일 오전, 신민당의 당사 4층 강당에서는 봉제업체인 YH무역주식회사의 여성노동자 200여명이 기업주의 폐업에 반발하여 폐업조치 철회 농성을 벌였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인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신민당이 당사 건물을 내준 것이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폭력을 동원하여 농성을 해산시켰다. 결국 이 사건은 노동 탄압 사건을 넘어선 야당에 대한 정치 탄압 사건으로 발전하였다.&lt;br /&gt;
&lt;br /&gt;
이날 경찰은 1000여명의 진압대원을 신민당사로 난입시켜 농성을 하고 있던 174명의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로 밖으로 끌어냈다. 또한 경찰은 총재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김영삼 총재와 당 간부들을 끌어내면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박정희 정권은 이 노동자 농성 사건을 빌미로 신민당 분열공작을 시도하였다. 유신정권과 비밀리에 결탁한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 3명이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 부총재 전원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접수시켰다. 그리고 법원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신민당 총재단의 직무 집행을 정지시키고 박정희 정권의 꼭두각시를 총재직무대행으로 선임하였다.&lt;br /&gt;
&lt;br /&gt;
아울러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의 동교동 자택을 전면 봉쇄하였고,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에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끊으라고 요구한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즈』 회견내용을 “반헌정적, 반민족적 작태”로 몰아서 국회에 징계 동의안을 제출했다. 10월 4일 오후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의원 159명은 여당 총회장에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제명 결의안을 '''기습적으로''' 처리해 버렸다. 노사분규 사태로 시작된 사건이 제1야당 당수의 의원직 제명으로 확대된 정치적 사태를 지켜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유신체제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이 고조되었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유신 철폐, 독재 타도!'''''   &amp;lt;small&amp;gt;-10.16 부마항쟁 당시 시위대의 구호&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부산대학교 민주선언문, 학생 시위에서 시민항쟁으로====&lt;br /&gt;
[[파일:부산시위대.jpg|250px|섬네일|오른쪽|광복동을 지나는 시위 행렬]]&lt;br /&gt;
1979년 10월 16일 아침 10시 부산대학교 구내 도서관 앞에서 약 500명의 학생들이 모여 “유신정권 물러가라”, “정치탄압 중지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반정부 시위를 벌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민주선언문」]]'''을 통해 민주화, 언론 자유, 인권 보장의 신념을 확인하고, “제도화된 폭력성과 조직적 악의 근원인 유신헌법과 독재집권층의 퇴진만이 5천 만 겨레의 통일의 첫걸음이라고 주장하면서 형제의 피를 요구하는 자유와 민주의 깃발을 우리가 잡고 반민주의 무리, 불의의 무리들을 향해 외치며 나아가자”라고 선언하였다. 이후 학생들은 교문을 나가 거리에서 시위했다. 이때 학생 수는 약 5,000명으로 불어나 있었고, 광복동과 남포동 등 부산시내 중심가까지 진출해 애국가 등의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며, 이를 제지하려는 경찰과 이곳저곳에서 충돌하였다. 비슷한 시간, 부산 동아대학교에서도 1,000여 명의 학생이 부산대학교 학생과 합류하여 가두시위를 벌였다. 부산대학교 데모로 학생 수백 명이 연행되고 100여 명이 다쳤지만 이튿날인 10월 17일에는 시위가 더욱 격화되어 학생들뿐만 아니라 다수의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학생 시위는 점차 시민항쟁의 양상을 띠어갔다.''' 밤늦게까지 계속된 시위에서 시민들은 충무파출소, 한국방송공사, 서구청, 부산세무서 등을 파괴하였고, 경찰차량을 불태우거나 파손시켰다.&lt;br /&gt;
&lt;br /&gt;
====마산의 시민항쟁====&lt;br /&gt;
&lt;br /&gt;
민주항쟁은 18일에 마산으로 확산되었다. 늦은 오후에는 1,000여 명의 경남대학교 학생들이 마산 시내 번화가에 산발적으로 집결했으며, 일부시민들도 가담해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어두워진 다음 학생과 시민들의 데모는 격화되어 파출소, 공화당사, 방송국, 신문사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파괴하였다. 이튿날인 19일에는 시위가 더욱 치열해져 마산 시내는 한때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저녁 8시경, 시위대는 경남대학과 마산대학&amp;lt;ref&amp;gt;1985년 창원대학으로 교명이 변경되었으며, 현재의 마산대학교와 다르다.&amp;lt;/ref&amp;gt;, 그리고 고등학생까지 합세하여 약 8,000명에 이르렀으며, 시내 곳곳에서 몽둥이를 들고 동사무소와 파출소로 몰려가 시설을 파괴하였고, 경찰차량에 불을 질렀다.&lt;br /&gt;
&lt;br /&gt;
====부산 계엄령, 마산 위수령====&lt;br /&gt;
[[파일:계엄포고문.jpg|270px|섬네일|왼쪽|부산지역에 내려진 계엄포고문을 읽고 있는 시민들]]&lt;br /&gt;
부산대학교 시위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박정희 정부는 학생 시위로 시작된 시위가 대규모 시민항쟁으로 사태가 심상치 않게 확대되어가자 강경책으로 대응했다. 정부는 18일 자정을 기해 '''부산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동원한 과격한 진압'''을 통해 시위 참여자들과 이를 방조한 일반 시민들까지 1,058명을 연행하고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으며, 부산지구 계엄사령부는 각 대학 휴교조처와 야간통행금지시간을 2시간 연장하는 등의 항이 담긴 포고문을 발표했다.&lt;br /&gt;
&lt;br /&gt;
부산에 계엄령이 선포된 이튿날인 19일에 마산 시위가 확대됨에 따라 그 다음날인 10월 20일 정오, 정부가 '''마산 및 창원 지역에 위수령을 발령'''해 통행금지 시간이 연장되고, 경남대학 등에는 휴교조처가 취해졌으며, 24일에는 깡패를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132명을 검거, 23명을 구속했다. 이렇게 '''표면적으로는 부마민주항쟁이 단시간에 진압되는 듯 보였지만, 항쟁은 이미 유신체제의 균열을 불러오고 있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항쟁의 전개 과정에서 볼 수 있듯, 부마민주항쟁에서 특징적인 것은 먼저 시위대의 가장 큰 분노의 대상이 공화당사와 경찰·파출소였다는 점, 다음으로는 “부가가치세를 철폐하라”, “잘 먹고 잘 살아라”등의 구호에서 드러나듯이 세무서에 대한 공격, 그리고 신문사와 방송국에 대한 공격을 들 수 있다.&lt;br /&gt;
&lt;br /&gt;
부마민주항쟁은 1970년대 유신체제 밑에서 쌓였던 침묵하는 언론, 조세, 시민을 억압하는 경찰에 대한 불만 등 정치·사회·경제·문화·종교 등 각 부문에 걸친 여러 모순의 폭발이었고, 헌법 개정과 긴급조치로 겨우 유지되던 유신체제와 박정희 정권의 붕괴를 촉진시킨 결정적인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10.26사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또한 이 사건은 1980년 5월 18일의 광주 민주화운동과 1987년 6월 민주항쟁에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된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억눌린 우리 역사&amp;lt;/br&amp;gt;터져나온 분노&amp;lt;/br&amp;gt;매운 연기 칼바람에도&amp;lt;/br&amp;gt;함성소리 드높았던&amp;lt;/br&amp;gt;동트는 새벽벌&amp;lt;/br&amp;gt;시월이 오면&amp;lt;/br&amp;gt;핏발 선 가슴마다&amp;lt;/br&amp;gt;살아오는 십 일육&amp;lt;/br&amp;gt;동지여 전진하자&amp;lt;/br&amp;gt;깨치고 나가자&amp;lt;/br&amp;gt;뜨거운 가슴으로&amp;lt;/br&amp;gt;빛나는 내일로'''''&amp;lt;/br&amp;gt;&amp;lt;small&amp;gt;-'''부산대학교''' 새벽벌도서관 10.16 기념비&amp;lt;/small&amp;gt;&amp;lt;/div&amp;gt;&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호빵이👻]]: 부마항쟁 페이지 전체 작성&amp;lt;/br&amp;gt;&lt;br /&gt;
[[이나자키로빈]]: 부마항쟁 원인 중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 작성&lt;br /&gt;
&lt;br /&gt;
=='''5.18민주화운동'''==&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AMetwTuXYHTCXINqr7ZJpzO5CHFEMQO5-Uqau51RkXA&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원인===&lt;br /&gt;
====유신체제의 붕괴====&lt;br /&gt;
&lt;br /&gt;
[[파일:김재규.jpg|섬네일|오른쪽|암살 당시 상황을 재현하는 김재규]]&lt;br /&gt;
&lt;br /&gt;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amp;lt;small&amp;gt; - 김재규&amp;lt;/small&amp;gt;&lt;br /&gt;
1979년 10월 4일 신민당 총재 김영삼이 국회에서 의원직을 제명당하자 10월 15부터 10월 20까지 부산 · 마산 등지에서는 부마항쟁이 일어났고, 이의 해결을 둘러싼 노선대립으로 갈등 중 10월 26일 &amp;lt;ins&amp;gt;[[김재규]]&amp;lt;/ins&amp;gt;가 박정희를 살해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ins&amp;gt;[[10.26 사태]]&amp;lt;/ins&amp;gt;의 사후 수습과정에서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을 중심으로 신군부 세력이 부상하였으며, 이들은 &amp;lt;ins&amp;gt;[[12.12 사건]]&amp;lt;/ins&amp;gt;의 하극상을 통하여 군부를 장악하였다. 1980년 2월 29일 김대중 등이 복권되었으나 그 해 봄, 신군부는 최규하 과도 정부를 유명무실하게 하고 국민들이 요구하는 민주주의와 이를 위한 명확한 정치일정 제시를 거부하면서 권력기반을 구축하였다.&lt;br /&gt;
&lt;br /&gt;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lt;br /&gt;
한 시대의 대격변을 예고하는 단초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시작됐다. 1979년 8월 9일 오전, 신민당의 당사 4층 강당에서는 봉제업체인 YH무역주식회사의 여성노동자 200여명이 기업주의 폐업에 반발하여 폐업조치 철회 농성을 벌였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인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신민당이 당사 건물을 내준 것이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폭력을 동원하여 농성을 해산시켰다. 결국 이 사건은 노동 탄압 사건을 넘어선 야당에 대한 정치 탄압 사건으로 발전하였다.&lt;br /&gt;
&lt;br /&gt;
이날 경찰은 1000여명의 진압대원을 신민당사로 난입시켜 농성을 하고 있던 174명의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로 밖으로 끌어냈다. 또한 경찰은 총재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김영삼 총재와 당 간부들을 끌어내면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박정희 정권은 이 노동자 농성 사건을 빌미로 신민당 분열공작을 시도하였다. 유신정권과 비밀리에 결탁한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 3명이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 부총재 전원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접수시켰다. 그리고 법원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신민당 총재단의 직무 집행을 정지시키고 박정희 정권의 꼭두각시를 총재직무대행으로 선임하였다.&lt;br /&gt;
&lt;br /&gt;
아울러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의 동교동 자택을 전면 봉쇄하였고,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에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끊으라고 요구한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즈』 회견내용을 “반헌정적, 반민족적 작태”로 몰아서 국회에 징계 동의안을 제출했다. 10월 4일 오후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의원 159명은 여당 총회장에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제명 결의안을 '''기습적으로''' 처리해 버렸다.&lt;br /&gt;
&lt;br /&gt;
노사분규 사태로 시작된 사건이 제1야당 당수의 의원직 제명으로 확대된 정치적 사태를 지켜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유신체제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이 고조되었다. 또한 이 사건은 그동안 다소 주춤하던 대학가에 반유신 반독재 운동의 열기가 다시 확산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청춘을 바쳐, 학생 운동====&lt;br /&gt;
&lt;br /&gt;
[[파일:서울의_봄.JPG|섬네일|오른쪽|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앞에 모인 시위대]]&lt;br /&gt;
&lt;br /&gt;
군부의 재집권 야욕에 대한 국민적 저항은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표출되었다. 1980년 3월, 서울대 총학생회 출범을 시작으로 4월 초순에는 전국의 주요 대학들이 총학생회를 결성하기 시작하였다. 대학별로 독재 정권에 아부했던 어용교수와 족벌사학 퇴진 운동을 벌였고, 특히 병영집체훈련(당시 대학 신입생들은 의무적으로 군부대에 10일 간 입대하여 각종 군사훈련을 이수해야 했다.) 거부가 주요 이슈로 전면 등장했다. 각 대학의 병영집체훈련 거부운동이 본격화되고 전국적인 쟁점으로 떠오르자 신군부는 신문, 방송을 통해 ‘학생들의 안보의식 결여’를 비난하고 교내 시위·농성을 집중적으로 보도하게 했다.  5월 1일에 서울대가 입영훈련 거부투쟁 철회를 결정하고 ‘계엄령 해제’와 ‘유신잔당 퇴진’, ‘정부개헌중단’과 ‘노동 3권 보장’ 등을 요구하기 시작하면서 대학가는 이제까지의 학내 문제 중심의 운동에서 정치개혁을 위한 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그간 정부와 대학 간에 팽팽하게 유지되던 긴장 관계는 폭발 직전으로 내닫게 된 것이다.&lt;br /&gt;
&lt;br /&gt;
약 열흘 간의 대정부 투쟁을 준비한 대학가는 5월 10일 고려대 총학생회장실에서 열린 ‘총학생회장단 회의’에 참석한 전국 23개 대학 대표들은 ‘비상계엄의 즉각 해제’와 ‘전두환, 신현확 등 유신잔당 퇴진’ 등을 결의하고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정세에 대한 공동대처 방안을 마련했다. 이후 5월 13일부터 5월 14일에 걸쳐 서울 · 부산 · 대구 · 광주 등 37개 대학에서 계엄철폐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5월 15일에는 서울역에서 시위가 발생하는 등 학생시위는 서울시가지를 거의 마비시키는 등 야간까지 지속되어 사태가 절정에 달하면서 신군부 세력을 위협하였다. 5월 16일 24개 대학 학생대표들은 당분간 시국의 추이를 관망하기로 결정하고 가두시위를 중단하면서 소강상태에 돌입하는 듯하였다.&lt;br /&gt;
&lt;br /&gt;
====1980년 봄의 광주====&lt;br /&gt;
5월 17일 신군부 세력이 이전까지는 제주도를 제외한 지역에 한정되었던 비상계엄을 전국에 확대하는 조치인 계엄포고 10호(17일 24시에 발효: 각 대학 휴교령 포함)를 밤 9시 40분에 의결하고 밤 11시 40분에 발표하면서 밤 11시를 전후한 시점부터 김대중 · 김종필이 연행되는 등 권력형 부정축재자 및 소요조종 혐의자, 학생 시위 주동자가 체포되었다. 이날 밤 광주지역의 사회운동·학생운동의 지도자도 상당수가 검거되었다. 광주의 검거대상자는 전남대 12명, 조선대 10명 등 총 22명이었다. 전남에서 계엄합동수사단은 광주505보안대가 중심이고, 중앙정보부, 경찰 등이 보조역할을 했다. 전남 계엄합동수사단은 22대 차량과 86명의 인원이 출동해 정동년 등 복적생들과 대학의 총학생회 간부들을 집중 검거했다.&lt;br /&gt;
&lt;br /&gt;
한편 육군본부는 14일 오전 7시55분에 국가 중요 보안목표와 주요대학에 군 병력 배치 명령을 하달했다. 이 명령에 따라 전남북계엄분소장인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광주 시내 주요 시설물에 이날 오후부터 계엄병력을 배치했다. 31사단 96연대 병력이 광주시내 KBS건물에 42명, MBC 21명, CBS 11명, VOC(전일방송) 11명 등 주요 방송사 건물에 배치돼 경비에 들어간 것이다.&lt;br /&gt;
&lt;br /&gt;
이날 오후 전교사령관은 7공수여단의 광주배치에 따른 수송수단 지원도 미리 협의했다. 그리고 5월 8일부터 16일 사이에 공수부대 수뇌부들도 헬기를 타고 서울에서 내려와 광주 상무대의 전투병과교육사령부를 방문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광주에서 시위가 격화되면 즉각적으로 최정예 군부대를 동원해서 진압할 준비를 철저하게 갖추고 있었다. 5월 18일에 시작된 광주의 비극은 그 이전에 이미 시한폭탄처럼 준비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lt;br /&gt;
{{구글지도 | 위도=35.175961433346885 | 경도=126.90865311973532 | 줌=13 }}  [[파일:금남로.JPG|섬네일|오른쪽|금남로 앞에 집결한 버스와 시민군]]&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18일&amp;lt;/span&amp;gt;&lt;br /&gt;
휴교령이 내려질 경우 교문 앞에서 집결한다는 결의에 따라 학생들은 5월 18일 오전 전남대학교 앞에 모였다. 공수부대원들이 전남대 앞 시위를 저지하자 대학생들은 광주역에 재집결해서 시위를 이어갔다. 시위대가 점차 늘어나면서 공수부대원이 시내에서 시위진압에 나섰으며 18일 오후 1시부터 무차별 진압작전이 이루어져 부상자가 속출하였다.&lt;br /&gt;
&lt;br /&gt;
군인들이 금남로 등 시내 중심가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이나 여자를 마구 구타하고 짓밟으며 찌르는 등의 잔혹 행동을 하자 시민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이에 시위대는 오후 4시 이후 파출소 파괴 등 적극공세에 나섰다. '''계엄군의 과잉 무력진압은 시위를 해산시키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오히려 시민들을 단결시켰으며, 결국 19일 시민 · 학생 연대가 발생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lt;br /&gt;
&lt;br /&gt;
 '''''광주 애국 시민 여러분! 이것이 웬 말입니까? 웬 벼락이란 말입니까? 죄 없는 학생들을 총칼로 찔러 죽이고 몽둥이로 두들겨 트럭으로 실어가며 부녀자를 발가벗겨 총칼로 찌르는 놈들이 이 누구란 말입니까? 이제 우리가 살길은 전시민이 하나로 뭉쳐 청년 학생들을 보호하고 유신잔당과 극악무도한 살인마 전두환 일파와 공수 특전단 놈들을 한놈도 남김없이 쳐부수는 길 뿐입니다. 우리는 이제 다 보았습니다. 다 알게 되었읍니다. 왜 학생들이 그토록 소리 높이 외쳤는가를, 우리의 적은 경찰도 군대도 아닙니다. 우리의 적은 전국민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바로 유신잔당과 전두환 일파 그놈들입니다.''''' &amp;lt;small&amp;gt; - 1980년 5월 19일에 '광주시민민주투쟁회'명의의 호소문&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19일&amp;lt;/span&amp;gt;&lt;br /&gt;
19일 오전에는 일시적 소강상태였으나 오후 들어서 분노한 학생 · 시민들이 군 · 경찰과 공방전을 벌이면서 시위는 점차 격화되었다. '''시민들은 공포감에서 벗어나 자신의 생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단순한 학생시위에서 시민봉기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계엄군은 시위대를 포위하여 구타하였으며 일부 고등학생까지 포함된 시위대는 돌과 화염병으로 저항하였고 파출소와 방송국 등에 침입하였다. 뒤처진 공수부대를 공격하거나 고립된 차량을 포위하기도 하였으며 총과 방패를 빼앗기도 하였고, 오후 4시 50분 시민들에게 포위된 계엄군의 장갑차에서 최초의 발포가 있었다. 19일 밤비가 내리는 가운데 시위가 산발적으로 계속되었으며, 20일 오전 비가 그치고 대규모 시위는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오후부터 다시 시작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20일&amp;lt;/span&amp;gt;&lt;br /&gt;
'''20일 오후 6시부터 택시와 버스 운전 기사들이 광주역과 무등경기장에 모여 대형 버스와 트럭을 앞세우고 일시에 금남로에 집결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들을 앞세운 시위는 계엄군을 몰아내는 데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였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5.18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에 &amp;lt;ins&amp;gt;[[지대한 영향]]&amp;lt;/ins&amp;gt;을 끼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학생 운동에 뛰어든 많은 대학생들은 대학교에 들어와서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의 실상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아 학생 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군부정권은 5.18 이후로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다. 전두환은 김대중 등에게 '광주 사태'의 책임을 물어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했고,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 선언을 한 직후, 8월 27일 소위 체육관 선거를 통해 전두환은 대통령 자리를 탈취했다.&lt;br /&gt;
&lt;br /&gt;
지역적인 면에서는 '''광주광역시를 비롯한 전라도 지역의 트라우마'''로 작용해 이후의 민주정의당 및 &amp;lt;ins&amp;gt;[[3당 합당]]&amp;lt;/ins&amp;gt;으로 이어지는 보수 세력에 대해 적대심을 가지고, 민주당계 정당의 표밭이 되는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미 박정희 정부 시절부터 유무형의 정치적인 차별을 받고 있었지만 5.18의 참상은 전라도가 다시는 보수 세력을 지지하지 않게 만들 정도로 심각한 사건이며 호남소외론의 가장 결정적인 명분이 되었다.&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이나자키로빈]]: 5.18 민주화운동 페이지 전체 작성&lt;br /&gt;
&lt;br /&gt;
=='''6월민주항쟁'''==&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NnXWs5RMTIf-6DOEu9_rX2k4mgzUk1AQHYneCuwXN1Q&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원인===&lt;br /&gt;
====[[박종철고문치사사건]]====&lt;br /&gt;
&lt;br /&gt;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박종철은 1987년 1월 13일 자정 경 하숙집에서 치안본부(現 경찰청)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게 연행되었다.‘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이자 ‘민주화추진위원회’ 지도위원으로 수배 받고 있었던 박종운을 잡기위해 연행한 것이었다. 취조실로 연행해간 공안 당국은 박종철에게 박종운의 소재를 물었으나, 박종철은 순순히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경찰은 잔혹한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가하였고, 박종철은 끝내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했다. 당시 경찰은 초기 발표에서 고문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라고 사망원인을 발표하였으나, 시체부검 결과 전기고문과 물고문에 의한 살인인 것으로 밝혀졌다.&lt;br /&gt;
&lt;br /&gt;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저 죽음을 응시해주길 바란다. 저 죽음을 끝내 지켜주길 바란다. 저 죽음을 다시 죽이지 말아주길 바란다.''''' &amp;lt;small&amp;gt; - 동아일보 1987년 1월 17일자 김중배 칼럼 중&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사건 진상의 일부가 공개되자 2월 7일 전국 주요 도시에서 &amp;quot;박종철군 범국민추도식&amp;quot; 및 도심 시위가 열렸고 이어 3월 3일에는 &amp;quot;박종철군 49재와 고문추방 국민대행진&amp;quot;과 함께 또 다른 시위가 열렸다. 이후 4월 2일 서울대학교 학부모 130여 명이 ‘건국대학교 사태‘ 등 시국관련 구속학생의 징계철회를 요구하며 철야 농성을 벌였다.&lt;br /&gt;
&lt;br /&gt;
====정부의 개헌논의 유보====&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lt;br /&g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JazJFsgu4oc?si=sOE7w1tz-jKVztC9&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lt;br /&g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그러나 전두환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1987년 4월 13일 [[4.13호헌조치]]라 불리는 ‘대통령 특별담화‘를 발표, 개헌(改憲) 논의를 유보하겠다고 밝혔다. [[4.13호헌조치]]에서 전두환은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와 대통령 선거는 자유 경선의 분위기가 보장되는 가운데 1987년 내에 공정한 선거관리를 통해 차질 없이 실시할 수 있게 모든 노력을 다할것‘이라고 다짐했으며, 또 ‘민정당의 후임 대통령 후보는 조속한 시일 안에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인물 가운데서 당헌 절차와 민주 방식에 따라 전당대회에서 선출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호헌조치‘라는 그 이름대로 현행 헌법에 따라 권력을 이양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국민들의 큰 기대를 얻을 것이라 믿었으나, 기대는 커녕 오히려 반발을 가져오는 요인이 되고 말았다. 곧바로 이튿날인 4월 14일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 등 각계 인사들이, 호헌 조치를 비판하는 시국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정부 최루탄에 의한 [[이한열]] 사망====&lt;br /&gt;
[[파일:이한열.jpg|200px|섬네일|오른쪽|최루탄에 피격당한 후 이종창에게 부축받는 이한열]]&lt;br /&gt;
먼저 1987년 5월 27일 야당과 재야, 종교계 등이 힘을 모아 ‘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여당인 민주정의당에서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6월 10일에 맞춰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6 · 10국민대회]])’를 치르기로 결정하였다. 대학생들은 국본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를 중심으로 6 · 10국민대회에 호응하여 6월 초부터 각 대학별로 연일 집회와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6 · 10국민대회]] 하루 전날인 6월 9일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교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는 곧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학생들은 물론 시민들의 분노가 들끓었다. 이러한 분노 속에서 6 · 10국민대회가 열렸다. 경찰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6 · 10국민대회가 열리는 성공회대성당을 원천 봉쇄하였다. 그 결과 6 · 10국민대회는 대회장에 미리 들어가 있던 소수의 인원만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대회 예정 시간인 오후 6시 이전부터 서울 시내 곳곳에서 대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시민들도 다양한 방식으로 6 · 10국민대회와 학생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날 밤 늦게까지 시위를 벌이던 학생들은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이후 5일 동안 농성을 계속하였다. 애초 계획된 것은 아니었지만 대학생들의 명동성당 농성은 6 · 10국민대회가 단발성 행사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인 저항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lt;br /&gt;
&lt;br /&gt;
====민주항쟁 확산====&lt;br /&gt;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로 개헌하라!'''''   &amp;lt;small&amp;gt;-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제시한 슬로건&amp;lt;/small&amp;gt;&lt;br /&gt;
명동성당 농성을 거치며 항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유월항쟁의 전국화 과정에는 일정한 패턴이 존재하였다. 6월 10일 서울 외에도 전국 주요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위가 벌어졌지만, 15일까지 항쟁의 중심은 6 · 10국민대회와 명동성당 농성이 전개된 서울이었다. 하지만 6월 15일 경부터는 부산, 대전, 진주 등에서 격렬한 시위가 전개되었다. 그러다가 6월 20일부터 대규모 시위가 광주, 전주, 순천, 익산 등 호남 지방으로 옮겨졌다. 6 · 10국민대회 이후 약 20일 동안 전국 곳곳에서 매일 평균 100회 이상의 시위가 동시다발로 벌어졌다. 특히 6월 18일 ‘최루탄추방대회’와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은 전국 곳곳에서 한꺼번에 1백만 명 이상이 참여하였다. 갈수록 참가 지역이 전국 곳곳으로 확산되어 대도시, 중소도시뿐만 아니라 농촌 지역의 군 단위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6월 26일 하루에만 37~38개 시 · 군에서 시위가 동시에 벌어졌다. 유월항쟁에 참가한 연 인원은 400~500만 명으로 추산된다.&lt;br /&gt;
&lt;br /&gt;
반면 유월항쟁의 전국적 동시다발 시위는 경찰 병력을 분산시켰다. 분산된 경찰 병력으로는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거센 시위의 물결을 막아 낼 수 없었다. 경찰이 시위 진압에 최루탄을 남발하면서 최루탄도 점차 고갈되기 시작하였다. 유월항쟁 기간 동안 경찰이 사용한 최루탄만 총 67만 발이 넘었다. 더불어, 전두환 정권이 집권 내내 강조했던 88서울올림픽이 얼마 남지 않아 미국 등 국제사회의 이목이 집중된 상황에서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운동 때처럼 유혈 사태와 대량 학살을 반복하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무엇보다 군대를 동원하더라도 이러한 대규모 시민 항쟁을 진압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결국 경찰력으로 항쟁을 막기 힘들고, 군대 투입도 어렵다고 판단한 전두환 정권은 1987년 6월 29일 ‘ 6 · 29민주화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하였다. 그리고 그동안 의식불명 상태에 있었던 이한열이 7월 5일 끝내 사망하였다. 5일장 후 7월 9일 치러진 이한열의 노제에 100만 명의 인파가 모인 것을 끝으로 약 한 달 동안 지속된 유월항쟁은 마무리되었다.&lt;br /&gt;
&lt;br /&gt;
[[파일:도망.png|200px|섬네일|왼쪽|쫓아오는 경찰들을 피해 달리고 있는 호헌철폐시위 참가자들]]&lt;br /&gt;
[[파일:태극기.png|200px|섬네일|왼쪽|서울역 앞에서 태극기와 '자주없이 민주없다'는 플래카드를 들고 구호를 외치는 시위대]]&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1987년 6월항쟁이 '''대통령[[직선제]] 개헌'''이라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이 항쟁에 동참한 학생과 시민들의 요구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제시한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 개헌’이라는 슬로건으로 모아졌기 때문이었다. 유월항쟁은 이러한 민주화 세력의 통합성, 즉 각기 다른 성격과 지향을 가진 여러 주체들이 모두 동의할 수 있는 ‘최소 강령’하에 ‘최대 연합’으로 결집하였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딩잉잉]]:6월민주항쟁 페이지 전체 작성&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기밀문서]]&lt;br /&gt;
[[분류:4.19혁명관련]]&lt;br /&gt;
[[분류:부마항쟁관련]]&lt;br /&gt;
[[분류:5.18민주화운동관련]]&lt;br /&gt;
[[분류:6월민주항쟁관련]]&lt;br /&gt;
[[분류:뎐]]&lt;br /&gt;
[[분류:이나자키로빈]]&lt;br /&gt;
[[분류:호빵이👻]]&lt;br /&gt;
[[분류:•ᴗ•]]&lt;br /&gt;
[[분류:딩잉잉]]&lt;/div&gt;</summary>
		<author><name>딩잉잉</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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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기밀문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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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딩잉잉: /* 컨텐츠 주제 */&lt;/p&gt;
&lt;hr /&gt;
&lt;div&gt;=='''컨텐츠 주제'''==&lt;br /&gt;
&lt;br /&gt;
[[파일:시위대.png|400픽셀|center]][[파일:이한열사진.jpeg|400픽셀|center]][[파일:진압.png|400픽셀|center]]&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amp;lt;big&amp;gt;'''&amp;lt;span style=&amp;quot;color:#CD0000&amp;quot;&amp;gt;&amp;lt;big&amp;gt;&amp;lt;big&amp;gt;투쟁의 불꽃, 자유의 환호&amp;lt;/big&amp;gt;&amp;lt;/big&amp;gt;&amp;lt;/span&amp;gt;'''&amp;lt;br/&amp;gt;&amp;lt;br/&amp;gt;&lt;br /&gt;
''대한민국은 시민들의 투쟁과 희생을 거쳐, 피와 땀으로 민주화를 이룩하였습니다.''&amp;lt;br/&amp;gt;&lt;br /&gt;
''그들은 어둠을 밝히기 위해 항거의 불꽃을 태웠고, 그 불꽃은 자유를 외쳤으며, 그 외침은 세상을 움직였습니다.''&amp;lt;br/&amp;gt;&lt;br /&gt;
''이 «기밀문서»에는 당신이 미처 몰랐던 그 때의 열기와 의지가 실려있습니다.''&amp;lt;br/&amp;gt;&lt;br /&gt;
''함께, 그 뜨거운 페이지를 열어보시겠습니까?''&amp;lt;/span&amp;gt;&amp;lt;/big&amp;gt;&amp;lt;/div&amp;gt;&lt;br /&gt;
&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이나자키로빈]]&lt;br /&gt;
[[딩잉잉]]&lt;br /&gt;
&lt;br /&gt;
=='''팀원'''==&lt;br /&gt;
*오현지(2022131143) [[뎐]]&amp;lt;br/&amp;gt;&lt;br /&gt;
*김여원(2023130209) [[이나자키로빈]]&amp;lt;br/&amp;gt;&lt;br /&gt;
*김하은(2022131345) [[호빵이👻]]&amp;lt;br/&amp;gt;&lt;br /&gt;
*박정원(2023130350) [[•ᴗ•]]&amp;lt;br/&amp;gt;&lt;br /&gt;
*최필중(2023130216) [[딩잉잉]]&amp;lt;br/&amp;gt;&lt;br /&gt;
&lt;br /&gt;
=='''기획의도'''==&lt;br /&gt;
===기획배경===&lt;br /&gt;
1945년 광복 이후 대한민국 국민들은 자유민주국가로서의 미래를 기대했으나 실상은 그러지 못했다.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보여주듯 현재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는 그것을 누리지 못한 앞선 세대들의 목숨을 바친 항쟁의 대가이다. 민주항쟁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의 핵심 동력이었다. 오늘날 우리나라 민주의식의 중요한 기둥이 되는 네 가지 항쟁을 선별하고 각 항쟁의 배경, 전개과정, 의의를 비롯해 세부적이고 자세한 내용에 대한 기사를 작성한다.&lt;br /&gt;
===기획목적===&lt;br /&gt;
작금의 현실까지 오기에는 수없이 많은 투쟁이 있었지만 4.19혁명, 부마항쟁, 5.18민주항쟁, 6월민주항쟁이라는 네 가지 사건을 살펴보기로 한 것은 가장 많이 다뤄지고, 가장 많이 알려진 사건이기 때문이다. 관련된 사건과 역사 인물들에 대해 자세히 적어 내어 민주항쟁의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지 않으면 알기 힘든 각 민주항쟁의 자세한 내막을 밝혀낸다.&lt;br /&gt;
===기대하는 바===&lt;br /&gt;
타임라인과 온톨로지를 활용해 내용의 전반적인 이해를 돕고 자세한 설명을 통해 사건의 자세한 내막을 들어낸다. 네 가지 항쟁을 각각 큰 목차로 설정하고 세부 기사를 그 내부에 작성해 독자의 관심과 수요에 부합하는 정보를 전달하는 데 효과적일 것으로 기대된다. 민주항쟁에 참여한 사람들의 희생과 투쟁에 대한 존경심을 부르고 역사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다.&lt;br /&gt;
===기여===&lt;br /&gt;
[[뎐]], [[이나자키로빈]], [[호빵이👻]]: 기획의도 페이지 작성&lt;br /&gt;
&lt;br /&gt;
=='''온톨로지'''==&lt;br /&gt;
{{NetworkGraph | title=민주항쟁.lst}}&lt;br /&gt;
[[민주항쟁.lst]]&lt;br /&gt;
===기여===&lt;br /&gt;
*[[뎐]]: 온톨로지 제작&lt;br /&gt;
=='''컨텐츠 구조'''==&lt;br /&gt;
===클래스(Class)===&lt;br /&gt;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color:white&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0%&amp;quot; | 클래스 !! style=&amp;quot;width:40%&amp;quot; | 설명 !! style=&amp;quot;45%&amp;quot; | 노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제||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대표 키워드인 민주항쟁을 주제로서 나타내었다 || 만주항쟁&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항쟁||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민주화운동 시기 발생했던 주요 운동들을 ‘항쟁’이라는 키워드로 분류하였다. || 4.19혁명, 부마항쟁, 5.18 민주화운동, 6월민주항쟁&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사건||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항쟁의 원인, 결과가 되는 사건을 정리하였다|| 3.15부정선거, 고려대 4.18학생시위, 3.15의거, YH사건, 10.26사태, 12.12 군사반란, 비상계엄령,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고문추방민족대행진, 4.13호헌조치, 6.29선언, 대통령직선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지역||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요 항쟁들이 일어났던 지역을 정리하였다|| 마산, 부산, 광주&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인물||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요사건들을 발생시킨 인물, 참여했던 인물을 묶어서 정리하였다|| 이승만, 이기붕, 김주열, 박정희, 김재규, 전두환, 신군부, 시민군, 박종철, 이한열, 노태우&lt;br /&gt;
|-&lt;br /&gt;
|}&lt;br /&gt;
===관계성(Relation)===&lt;br /&gt;
*&amp;lt;font color=#228B22&amp;gt;'''~은 ~에 속한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주요 항쟁들이 민주항쟁에 속함을 나타내거나 인물의 소속을 나타낸다.&lt;br /&gt;
***해당노드:&lt;br /&gt;
***#4.19혁명 -&amp;gt; 민주항쟁&lt;br /&gt;
***#부마항쟁 -&amp;gt; 민주항쟁&lt;br /&gt;
***#5.18민주화운동 -&amp;gt; 민주항쟁&lt;br /&gt;
***#6월 민주항쟁 -&amp;gt; 민주항쟁&lt;br /&gt;
***#전두환 -&amp;gt; 신군부&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의 원인이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어떠한 사건과 인과관계를 이루는 또다른 사건 혹은 인물을 설명한다.&lt;br /&gt;
***#이기붕 -&amp;gt; 3.15부정선거&lt;br /&gt;
***#김주열 -&amp;gt; 고려대 4.18학생시위&lt;br /&gt;
***#고려대 4.18학생시위 -&amp;gt; 4.19혁명&lt;br /&gt;
***#3.15의거 -&amp;gt; 4.19혁명&lt;br /&gt;
***#김주열 -&amp;gt; 4.19혁명&lt;br /&gt;
***#3.15부정선거 -&amp;gt; 3.15의거&lt;br /&gt;
***#YH사건 -&amp;gt; 부마항쟁&lt;br /&gt;
***#부마항쟁 -&amp;gt; 10.26사태&lt;br /&gt;
***#박정희 -&amp;gt; 10.26사태&lt;br /&gt;
***#비상계엄령 -&amp;gt; 5.18민주화운동&lt;br /&gt;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 -&amp;gt; 고문추방민족대행진&lt;br /&gt;
***#고문추방민족대행진 -&amp;gt; 4.13호헌조치&lt;br /&gt;
***#4.13호헌조치 -&amp;gt; 6월민주항쟁&lt;br /&gt;
***#6월민주항쟁 -&amp;gt; 6.29선언&lt;br /&gt;
***#6월민주항쟁 -&amp;gt; 대통령직선제&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을 발생시켰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사건과 그 사건을 직접적으로 발생시킨 인물을 연결한다.&lt;br /&gt;
***#이승만 -&amp;gt; 3.15부정선거&lt;br /&gt;
***#김재규 -&amp;gt; 10.26사태&lt;br /&gt;
***#신군부 -&amp;gt; 1212군사반란&lt;br /&gt;
***#전두환 -&amp;gt; 비상계엄령&lt;br /&gt;
***#노태우 -&amp;gt; 6.29선언&lt;br /&gt;
***#시민군 -&amp;gt; 5.18민주화운동&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에 희생되었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민주항쟁의 진압과정 등 에서 희생된 인물을 설명한다&lt;br /&gt;
***#김주열 -&amp;gt; 3.15의거&lt;br /&gt;
***#이한열 -&amp;gt; 6월 민주항쟁&lt;br /&gt;
***#박종철&amp;gt;박종철 고문치사 사건&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에서 발생했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설명한다.&lt;br /&gt;
***#3.15의거 -&amp;gt; 마산&lt;br /&gt;
***#부마항쟁 -&amp;gt; 부산&lt;br /&gt;
***#부마항쟁 -&amp;gt; 마산&lt;br /&gt;
***#5.18민주화운동 -&amp;gt; 광주&lt;br /&gt;
===기여===&lt;br /&gt;
*[[뎐]]: 컨텐츠 구조 페이지 작성&lt;br /&gt;
=='''4.19혁명'''==&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VPp4BmfDSv8VA2-oC-VATHzUYgadaiaQ9AlWXYiaiVk&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원인===&lt;br /&gt;
====[[3.15 부정선거]]====&lt;br /&gt;
[[파일:3.15부정선거_개표_모습.png|300픽셀|섬네일|오른쪽|3.15부정선거 당시 개표하는 사진&amp;lt;ref&amp;gt;사진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amp;lt;/ref&amp;gt;]]&lt;br /&gt;
1959년 대한민국은 제 4대 대통령 선거와 제 5대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당시 자유당에서는 12년째 대통령으로서 연임 중이던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이기붕]]'''을 부통령 후보로 선임하였다. 그러나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병세의 악화로 사망하게 되고,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은 확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선거의 초점은 자유당의 조병옥과 민주당의 장면 간의 선거전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본격적인 선거유세의 시작과 함께 정부와 여당의 잇따른 야당선거운동 방해사건으로 부정선거가 시작되었다. 1960년 3월 15일 선거가 시작된 이후에도 다양한 방법의 부정행위가 일어났고, 개표 결과 이승만과 이기붕의 득표가 100%에 육박하는 결과로 나오자 자유당은 득표수를 하향 조정해 최종 집계에 반영할 것을 지시했다. 결국 이승만 88.7%, 이기붕 79%의 득표율을 가지며 정, 부통령에 당선되었다.&amp;lt;ref&amp;gt;자세한 내용은 3.15부정선거 페이지 참조&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부정선거 반대시위, [[3.15 의거]]의 발생====&lt;br /&gt;
3.15 부정선거를 반대하는 시위는 초기에는 중, 고등학생들의 산발적인 시위로 전개되었다. 3월 15일 선거일 밤 경남 마산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으며,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여 1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amp;lt;br/&amp;gt;&lt;br /&gt;
3월 15일 실종되었던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4월 11일 마산부두에서 발견되자 마산 시민들은 시청, 파출소 등을 파괴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2차 시위가 일어난 것이다.&lt;br /&gt;
&lt;br /&gt;
====[[고려대학교 4.18 학생시위]]의 발생====&lt;br /&gt;
1, 2차 마산시위를 계기로 부정선거 무효와 이승만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났다. 이들은 '4.18 선언문'을 낭독하고 시내로 진출하였다. 이는 4월 19일 학생들과 일반 시민들이 가세한 대규모 시위로 이어지게 되었다.&lt;br /&gt;
====전국적인 4.19 혁명의 발생====&lt;br /&gt;
분노한 전국의 시민과 학생들이 다음 날인 4월 19일에 '이승만 하야와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며 대규모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경찰은 또다시 무차별 발포에 나섰고,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지만 이러한 압박에도 시민들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lt;br /&gt;
====이승만 대통령의 혼란 수습 시도====&lt;br /&gt;
이승만 대통령은 4.19 시위로 인한 정국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4월 20일 국무위원 전원과 자유당 당무위원 전원의 사표를 제출하도록 지시하였으며, 4월 23일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외무장관에 허정, 내무장관에 이호, 법무장관에 권승렬을 임명하는 등 개각을 단행하였다.&amp;lt;br/&amp;gt;&lt;br /&gt;
그러나 미국은 4.19직후 국무부 성명을 통해 한국에서 발생한 사태는 부정선거에 대한 '군중의 불만'을 반영한 것 이라고 했고, 양유찬 주미대사를 불러 '부정선거에 대한 철저한 조사', '경향신문 복간', '국가보안법 개정' 등을 촉구하는 각서를 전달하였다.&amp;lt;br/&amp;gt;&lt;br /&gt;
그리고 4월 25일, 이승만 정권에 분노한 전국 27개 대학 258명의 교수가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 모여 14개항의 시국 선언문을 발표하며 학생, 시민들과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들은 3.15 부정선거 및 4.19 사태의 책임을 지고 대통령이 물러날 것을 주장하였으며, &amp;quot;학생들의 피에 보답하자&amp;quot;는 플랜 카드를 앞세워 국회의사당까지 행진하였다. &lt;br /&gt;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lt;br /&gt;
무력 진압에도 대규모 시위가 이어지며 시민들은 완강하게 투쟁하였다. 4월 26일 시위대가 경무대로 다시 집결하는 등 사태가 심각하게 진행되자, 오전 10시 30분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 성명을 발표하였다. 4월 27일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하며 대통령직을 하야하고 하와이로 망명하였으며 자유당 정권도 끝나게 된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우리 국민들, 특히 학생과 청년들의 주도로 이루어진 4.19 혁명은 학생과 일반 대중이 단결하여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아시아 최초의 시건이다. 4.19혁명은 부마항쟁, 5.18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그리고 2017년 촛불시위에 이르기 까지 정권에 대항하는 국민들이 단합을 이루는 초석이 되었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도 시민 저항권에 대한 근거로써 4.19혁명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문구가 있다.&lt;br /&gt;
===기여===&lt;br /&gt;
[[뎐]]: 4.19혁명 페이지 원인, 의의 작성 &lt;br /&gt;
&lt;br /&gt;
[[•ᴗ•]]: 4.19혁명 페이지 전개 작성&lt;br /&gt;
&lt;br /&gt;
=='''부마항쟁'''==&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bK7zjpPvBsC7rFRPmsiHCUYhyWt2VXOv8SYyaBTND4Y&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원인===&lt;br /&gt;
====[[유신 헌법]]과 [[긴급조치]]====&lt;br /&gt;
1971년 선거에서 김대중을 누르고 대통령에 3선된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해 국회 해산,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등 법의 일부 기능을 정지시키고 전국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했다.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된 이른바 유신헌법에 의해 제정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법」 에 의거해 박정희가 제8대 대통령으로 재차 당선되었고, 이 유신 헌법이 발효된 기간을 유신 체제라고 부른다. 유신 체제는 행정, 입법, 사법의 3권을 모두 쥔 대통령이 종신 집권할 수 있도록 설계된 1인 대통령제였다. 박정희는 유신 헌법에 의거해 대통령의 권한으로 취할 수 있었던 특별조치인 긴급조치를 선포함으로써 헌법에 반대하는 시위 및 운동과 방송, 언론 활동을 하는 반정부 인사들을 연행, 체포, 고문하는 등 억압을 가했다.&lt;br /&gt;
&lt;br /&gt;
====한국경제의 위기====&lt;br /&gt;
1970년대 말 한국경제는''' [[오일쇼크]]'''라는 세계경제의 위기와 결합해 가라앉고 말았다. 경제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정부는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과 함께 '''[[경제안정화정책]]'''을 수용했고, 중소자본가, 봉급생활자, 도시 노동자와 농민 등에 안정화 비용을 부과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이와 같은 안정화 정책은 경제위기로 어려운 처지에 있던 중소기업들의 도산을 가속하여 기업 부도율이 치솟고 하층민들을 더 깊은 고통에 몰아넣었다. 특히 '''부가가치세'''를 도입한 이후 물가가 상승하면서 일상에 타격을 주었으며, 노동집약적 제조업이 집중되었던 부산과 마산에서는 상황이 더욱 심각하여 1979년 부산 지역 부도율은 서울의 3배에 달했다.&lt;br /&gt;
&lt;br /&gt;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lt;br /&gt;
한 시대의 대격변을 예고하는 단초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시작됐다. 1979년 8월 9일 오전, 신민당의 당사 4층 강당에서는 봉제업체인 YH무역주식회사의 여성노동자 200여명이 기업주의 폐업에 반발하여 폐업조치 철회 농성을 벌였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인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신민당이 당사 건물을 내준 것이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폭력을 동원하여 농성을 해산시켰다. 결국 이 사건은 노동 탄압 사건을 넘어선 야당에 대한 정치 탄압 사건으로 발전하였다.&lt;br /&gt;
&lt;br /&gt;
이날 경찰은 1000여명의 진압대원을 신민당사로 난입시켜 농성을 하고 있던 174명의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로 밖으로 끌어냈다. 또한 경찰은 총재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김영삼 총재와 당 간부들을 끌어내면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박정희 정권은 이 노동자 농성 사건을 빌미로 신민당 분열공작을 시도하였다. 유신정권과 비밀리에 결탁한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 3명이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 부총재 전원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접수시켰다. 그리고 법원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신민당 총재단의 직무 집행을 정지시키고 박정희 정권의 꼭두각시를 총재직무대행으로 선임하였다.&lt;br /&gt;
&lt;br /&gt;
아울러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의 동교동 자택을 전면 봉쇄하였고,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에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끊으라고 요구한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즈』 회견내용을 “반헌정적, 반민족적 작태”로 몰아서 국회에 징계 동의안을 제출했다. 10월 4일 오후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의원 159명은 여당 총회장에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제명 결의안을 '''기습적으로''' 처리해 버렸다. 노사분규 사태로 시작된 사건이 제1야당 당수의 의원직 제명으로 확대된 정치적 사태를 지켜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유신체제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이 고조되었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유신 철폐, 독재 타도!'''''   &amp;lt;small&amp;gt;-10.16 부마항쟁 당시 시위대의 구호&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부산대학교 민주선언문, 학생 시위에서 시민항쟁으로====&lt;br /&gt;
[[파일:부산시위대.jpg|250px|섬네일|오른쪽|광복동을 지나는 시위 행렬]]&lt;br /&gt;
1979년 10월 16일 아침 10시 부산대학교 구내 도서관 앞에서 약 500명의 학생들이 모여 “유신정권 물러가라”, “정치탄압 중지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반정부 시위를 벌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민주선언문」]]'''을 통해 민주화, 언론 자유, 인권 보장의 신념을 확인하고, “제도화된 폭력성과 조직적 악의 근원인 유신헌법과 독재집권층의 퇴진만이 5천 만 겨레의 통일의 첫걸음이라고 주장하면서 형제의 피를 요구하는 자유와 민주의 깃발을 우리가 잡고 반민주의 무리, 불의의 무리들을 향해 외치며 나아가자”라고 선언하였다. 이후 학생들은 교문을 나가 거리에서 시위했다. 이때 학생 수는 약 5,000명으로 불어나 있었고, 광복동과 남포동 등 부산시내 중심가까지 진출해 애국가 등의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며, 이를 제지하려는 경찰과 이곳저곳에서 충돌하였다. 비슷한 시간, 부산 동아대학교에서도 1,000여 명의 학생이 부산대학교 학생과 합류하여 가두시위를 벌였다. 부산대학교 데모로 학생 수백 명이 연행되고 100여 명이 다쳤지만 이튿날인 10월 17일에는 시위가 더욱 격화되어 학생들뿐만 아니라 다수의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학생 시위는 점차 시민항쟁의 양상을 띠어갔다.''' 밤늦게까지 계속된 시위에서 시민들은 충무파출소, 한국방송공사, 서구청, 부산세무서 등을 파괴하였고, 경찰차량을 불태우거나 파손시켰다.&lt;br /&gt;
&lt;br /&gt;
====마산의 시민항쟁====&lt;br /&gt;
&lt;br /&gt;
민주항쟁은 18일에 마산으로 확산되었다. 늦은 오후에는 1,000여 명의 경남대학교 학생들이 마산 시내 번화가에 산발적으로 집결했으며, 일부시민들도 가담해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어두워진 다음 학생과 시민들의 데모는 격화되어 파출소, 공화당사, 방송국, 신문사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파괴하였다. 이튿날인 19일에는 시위가 더욱 치열해져 마산 시내는 한때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저녁 8시경, 시위대는 경남대학과 마산대학&amp;lt;ref&amp;gt;1985년 창원대학으로 교명이 변경되었으며, 현재의 마산대학교와 다르다.&amp;lt;/ref&amp;gt;, 그리고 고등학생까지 합세하여 약 8,000명에 이르렀으며, 시내 곳곳에서 몽둥이를 들고 동사무소와 파출소로 몰려가 시설을 파괴하였고, 경찰차량에 불을 질렀다.&lt;br /&gt;
&lt;br /&gt;
====부산 계엄령, 마산 위수령====&lt;br /&gt;
[[파일:계엄포고문.jpg|270px|섬네일|왼쪽|부산지역에 내려진 계엄포고문을 읽고 있는 시민들]]&lt;br /&gt;
부산대학교 시위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박정희 정부는 학생 시위로 시작된 시위가 대규모 시민항쟁으로 사태가 심상치 않게 확대되어가자 강경책으로 대응했다. 정부는 18일 자정을 기해 '''부산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동원한 과격한 진압'''을 통해 시위 참여자들과 이를 방조한 일반 시민들까지 1,058명을 연행하고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으며, 부산지구 계엄사령부는 각 대학 휴교조처와 야간통행금지시간을 2시간 연장하는 등의 항이 담긴 포고문을 발표했다.&lt;br /&gt;
&lt;br /&gt;
부산에 계엄령이 선포된 이튿날인 19일에 마산 시위가 확대됨에 따라 그 다음날인 10월 20일 정오, 정부가 '''마산 및 창원 지역에 위수령을 발령'''해 통행금지 시간이 연장되고, 경남대학 등에는 휴교조처가 취해졌으며, 24일에는 깡패를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132명을 검거, 23명을 구속했다. 이렇게 '''표면적으로는 부마민주항쟁이 단시간에 진압되는 듯 보였지만, 항쟁은 이미 유신체제의 균열을 불러오고 있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항쟁의 전개 과정에서 볼 수 있듯, 부마민주항쟁에서 특징적인 것은 먼저 시위대의 가장 큰 분노의 대상이 공화당사와 경찰·파출소였다는 점, 다음으로는 “부가가치세를 철폐하라”, “잘 먹고 잘 살아라”등의 구호에서 드러나듯이 세무서에 대한 공격, 그리고 신문사와 방송국에 대한 공격을 들 수 있다.&lt;br /&gt;
&lt;br /&gt;
부마민주항쟁은 1970년대 유신체제 밑에서 쌓였던 침묵하는 언론, 조세, 시민을 억압하는 경찰에 대한 불만 등 정치·사회·경제·문화·종교 등 각 부문에 걸친 여러 모순의 폭발이었고, 헌법 개정과 긴급조치로 겨우 유지되던 유신체제와 박정희 정권의 붕괴를 촉진시킨 결정적인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10.26사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또한 이 사건은 1980년 5월 18일의 광주 민주화운동과 1987년 6월 민주항쟁에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된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억눌린 우리 역사&amp;lt;/br&amp;gt;터져나온 분노&amp;lt;/br&amp;gt;매운 연기 칼바람에도&amp;lt;/br&amp;gt;함성소리 드높았던&amp;lt;/br&amp;gt;동트는 새벽벌&amp;lt;/br&amp;gt;시월이 오면&amp;lt;/br&amp;gt;핏발 선 가슴마다&amp;lt;/br&amp;gt;살아오는 십 일육&amp;lt;/br&amp;gt;동지여 전진하자&amp;lt;/br&amp;gt;깨치고 나가자&amp;lt;/br&amp;gt;뜨거운 가슴으로&amp;lt;/br&amp;gt;빛나는 내일로'''''&amp;lt;/br&amp;gt;&amp;lt;small&amp;gt;-'''부산대학교''' 새벽벌도서관 10.16 기념비&amp;lt;/small&amp;gt;&amp;lt;/div&amp;gt;&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호빵이👻]]: 부마항쟁 페이지 전체 작성&amp;lt;/br&amp;gt;&lt;br /&gt;
[[이나자키로빈]]: 부마항쟁 원인 중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 작성&lt;br /&gt;
&lt;br /&gt;
=='''5.18민주화운동'''==&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AMetwTuXYHTCXINqr7ZJpzO5CHFEMQO5-Uqau51RkXA&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원인===&lt;br /&gt;
====유신체제의 붕괴====&lt;br /&gt;
&lt;br /&gt;
[[파일:김재규.jpg|섬네일|오른쪽|암살 당시 상황을 재현하는 김재규]]&lt;br /&gt;
&lt;br /&gt;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amp;lt;small&amp;gt; - 김재규&amp;lt;/small&amp;gt;&lt;br /&gt;
1979년 10월 4일 신민당 총재 김영삼이 국회에서 의원직을 제명당하자 10월 15부터 10월 20까지 부산 · 마산 등지에서는 부마항쟁이 일어났고, 이의 해결을 둘러싼 노선대립으로 갈등 중 10월 26일 &amp;lt;ins&amp;gt;[[김재규]]&amp;lt;/ins&amp;gt;가 박정희를 살해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ins&amp;gt;[[10.26 사태]]&amp;lt;/ins&amp;gt;의 사후 수습과정에서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을 중심으로 신군부 세력이 부상하였으며, 이들은 &amp;lt;ins&amp;gt;[[12.12 사건]]&amp;lt;/ins&amp;gt;의 하극상을 통하여 군부를 장악하였다. 1980년 2월 29일 김대중 등이 복권되었으나 그 해 봄, 신군부는 최규하 과도 정부를 유명무실하게 하고 국민들이 요구하는 민주주의와 이를 위한 명확한 정치일정 제시를 거부하면서 권력기반을 구축하였다.&lt;br /&gt;
&lt;br /&gt;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lt;br /&gt;
한 시대의 대격변을 예고하는 단초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시작됐다. 1979년 8월 9일 오전, 신민당의 당사 4층 강당에서는 봉제업체인 YH무역주식회사의 여성노동자 200여명이 기업주의 폐업에 반발하여 폐업조치 철회 농성을 벌였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인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신민당이 당사 건물을 내준 것이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폭력을 동원하여 농성을 해산시켰다. 결국 이 사건은 노동 탄압 사건을 넘어선 야당에 대한 정치 탄압 사건으로 발전하였다.&lt;br /&gt;
&lt;br /&gt;
이날 경찰은 1000여명의 진압대원을 신민당사로 난입시켜 농성을 하고 있던 174명의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로 밖으로 끌어냈다. 또한 경찰은 총재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김영삼 총재와 당 간부들을 끌어내면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박정희 정권은 이 노동자 농성 사건을 빌미로 신민당 분열공작을 시도하였다. 유신정권과 비밀리에 결탁한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 3명이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 부총재 전원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접수시켰다. 그리고 법원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신민당 총재단의 직무 집행을 정지시키고 박정희 정권의 꼭두각시를 총재직무대행으로 선임하였다.&lt;br /&gt;
&lt;br /&gt;
아울러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의 동교동 자택을 전면 봉쇄하였고,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에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끊으라고 요구한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즈』 회견내용을 “반헌정적, 반민족적 작태”로 몰아서 국회에 징계 동의안을 제출했다. 10월 4일 오후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의원 159명은 여당 총회장에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제명 결의안을 '''기습적으로''' 처리해 버렸다.&lt;br /&gt;
&lt;br /&gt;
노사분규 사태로 시작된 사건이 제1야당 당수의 의원직 제명으로 확대된 정치적 사태를 지켜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유신체제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이 고조되었다. 또한 이 사건은 그동안 다소 주춤하던 대학가에 반유신 반독재 운동의 열기가 다시 확산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청춘을 바쳐, 학생 운동====&lt;br /&gt;
&lt;br /&gt;
[[파일:서울의_봄.JPG|섬네일|오른쪽|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앞에 모인 시위대]]&lt;br /&gt;
&lt;br /&gt;
군부의 재집권 야욕에 대한 국민적 저항은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표출되었다. 1980년 3월, 서울대 총학생회 출범을 시작으로 4월 초순에는 전국의 주요 대학들이 총학생회를 결성하기 시작하였다. 대학별로 독재 정권에 아부했던 어용교수와 족벌사학 퇴진 운동을 벌였고, 특히 병영집체훈련(당시 대학 신입생들은 의무적으로 군부대에 10일 간 입대하여 각종 군사훈련을 이수해야 했다.) 거부가 주요 이슈로 전면 등장했다. 각 대학의 병영집체훈련 거부운동이 본격화되고 전국적인 쟁점으로 떠오르자 신군부는 신문, 방송을 통해 ‘학생들의 안보의식 결여’를 비난하고 교내 시위·농성을 집중적으로 보도하게 했다.  5월 1일에 서울대가 입영훈련 거부투쟁 철회를 결정하고 ‘계엄령 해제’와 ‘유신잔당 퇴진’, ‘정부개헌중단’과 ‘노동 3권 보장’ 등을 요구하기 시작하면서 대학가는 이제까지의 학내 문제 중심의 운동에서 정치개혁을 위한 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그간 정부와 대학 간에 팽팽하게 유지되던 긴장 관계는 폭발 직전으로 내닫게 된 것이다.&lt;br /&gt;
&lt;br /&gt;
약 열흘 간의 대정부 투쟁을 준비한 대학가는 5월 10일 고려대 총학생회장실에서 열린 ‘총학생회장단 회의’에 참석한 전국 23개 대학 대표들은 ‘비상계엄의 즉각 해제’와 ‘전두환, 신현확 등 유신잔당 퇴진’ 등을 결의하고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정세에 대한 공동대처 방안을 마련했다. 이후 5월 13일부터 5월 14일에 걸쳐 서울 · 부산 · 대구 · 광주 등 37개 대학에서 계엄철폐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5월 15일에는 서울역에서 시위가 발생하는 등 학생시위는 서울시가지를 거의 마비시키는 등 야간까지 지속되어 사태가 절정에 달하면서 신군부 세력을 위협하였다. 5월 16일 24개 대학 학생대표들은 당분간 시국의 추이를 관망하기로 결정하고 가두시위를 중단하면서 소강상태에 돌입하는 듯하였다.&lt;br /&gt;
&lt;br /&gt;
====1980년 봄의 광주====&lt;br /&gt;
5월 17일 신군부 세력이 이전까지는 제주도를 제외한 지역에 한정되었던 비상계엄을 전국에 확대하는 조치인 계엄포고 10호(17일 24시에 발효: 각 대학 휴교령 포함)를 밤 9시 40분에 의결하고 밤 11시 40분에 발표하면서 밤 11시를 전후한 시점부터 김대중 · 김종필이 연행되는 등 권력형 부정축재자 및 소요조종 혐의자, 학생 시위 주동자가 체포되었다. 이날 밤 광주지역의 사회운동·학생운동의 지도자도 상당수가 검거되었다. 광주의 검거대상자는 전남대 12명, 조선대 10명 등 총 22명이었다. 전남에서 계엄합동수사단은 광주505보안대가 중심이고, 중앙정보부, 경찰 등이 보조역할을 했다. 전남 계엄합동수사단은 22대 차량과 86명의 인원이 출동해 정동년 등 복적생들과 대학의 총학생회 간부들을 집중 검거했다.&lt;br /&gt;
&lt;br /&gt;
한편 육군본부는 14일 오전 7시55분에 국가 중요 보안목표와 주요대학에 군 병력 배치 명령을 하달했다. 이 명령에 따라 전남북계엄분소장인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광주 시내 주요 시설물에 이날 오후부터 계엄병력을 배치했다. 31사단 96연대 병력이 광주시내 KBS건물에 42명, MBC 21명, CBS 11명, VOC(전일방송) 11명 등 주요 방송사 건물에 배치돼 경비에 들어간 것이다.&lt;br /&gt;
&lt;br /&gt;
이날 오후 전교사령관은 7공수여단의 광주배치에 따른 수송수단 지원도 미리 협의했다. 그리고 5월 8일부터 16일 사이에 공수부대 수뇌부들도 헬기를 타고 서울에서 내려와 광주 상무대의 전투병과교육사령부를 방문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광주에서 시위가 격화되면 즉각적으로 최정예 군부대를 동원해서 진압할 준비를 철저하게 갖추고 있었다. 5월 18일에 시작된 광주의 비극은 그 이전에 이미 시한폭탄처럼 준비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lt;br /&gt;
{{구글지도 | 위도=35.175961433346885 | 경도=126.90865311973532 | 줌=13 }}  [[파일:금남로.JPG|섬네일|오른쪽|금남로 앞에 집결한 버스와 시민군]]&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18일&amp;lt;/span&amp;gt;&lt;br /&gt;
휴교령이 내려질 경우 교문 앞에서 집결한다는 결의에 따라 학생들은 5월 18일 오전 전남대학교 앞에 모였다. 공수부대원들이 전남대 앞 시위를 저지하자 대학생들은 광주역에 재집결해서 시위를 이어갔다. 시위대가 점차 늘어나면서 공수부대원이 시내에서 시위진압에 나섰으며 18일 오후 1시부터 무차별 진압작전이 이루어져 부상자가 속출하였다.&lt;br /&gt;
&lt;br /&gt;
군인들이 금남로 등 시내 중심가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이나 여자를 마구 구타하고 짓밟으며 찌르는 등의 잔혹 행동을 하자 시민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이에 시위대는 오후 4시 이후 파출소 파괴 등 적극공세에 나섰다. '''계엄군의 과잉 무력진압은 시위를 해산시키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오히려 시민들을 단결시켰으며, 결국 19일 시민 · 학생 연대가 발생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lt;br /&gt;
&lt;br /&gt;
 '''''광주 애국 시민 여러분! 이것이 웬 말입니까? 웬 벼락이란 말입니까? 죄 없는 학생들을 총칼로 찔러 죽이고 몽둥이로 두들겨 트럭으로 실어가며 부녀자를 발가벗겨 총칼로 찌르는 놈들이 이 누구란 말입니까? 이제 우리가 살길은 전시민이 하나로 뭉쳐 청년 학생들을 보호하고 유신잔당과 극악무도한 살인마 전두환 일파와 공수 특전단 놈들을 한놈도 남김없이 쳐부수는 길 뿐입니다. 우리는 이제 다 보았습니다. 다 알게 되었읍니다. 왜 학생들이 그토록 소리 높이 외쳤는가를, 우리의 적은 경찰도 군대도 아닙니다. 우리의 적은 전국민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바로 유신잔당과 전두환 일파 그놈들입니다.''''' &amp;lt;small&amp;gt; - 1980년 5월 19일에 '광주시민민주투쟁회'명의의 호소문&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19일&amp;lt;/span&amp;gt;&lt;br /&gt;
19일 오전에는 일시적 소강상태였으나 오후 들어서 분노한 학생 · 시민들이 군 · 경찰과 공방전을 벌이면서 시위는 점차 격화되었다. '''시민들은 공포감에서 벗어나 자신의 생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단순한 학생시위에서 시민봉기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계엄군은 시위대를 포위하여 구타하였으며 일부 고등학생까지 포함된 시위대는 돌과 화염병으로 저항하였고 파출소와 방송국 등에 침입하였다. 뒤처진 공수부대를 공격하거나 고립된 차량을 포위하기도 하였으며 총과 방패를 빼앗기도 하였고, 오후 4시 50분 시민들에게 포위된 계엄군의 장갑차에서 최초의 발포가 있었다. 19일 밤비가 내리는 가운데 시위가 산발적으로 계속되었으며, 20일 오전 비가 그치고 대규모 시위는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오후부터 다시 시작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20일&amp;lt;/span&amp;gt;&lt;br /&gt;
'''20일 오후 6시부터 택시와 버스 운전 기사들이 광주역과 무등경기장에 모여 대형 버스와 트럭을 앞세우고 일시에 금남로에 집결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들을 앞세운 시위는 계엄군을 몰아내는 데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였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5.18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에 &amp;lt;ins&amp;gt;[[지대한 영향]]&amp;lt;/ins&amp;gt;을 끼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학생 운동에 뛰어든 많은 대학생들은 대학교에 들어와서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의 실상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아 학생 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군부정권은 5.18 이후로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다. 전두환은 김대중 등에게 '광주 사태'의 책임을 물어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했고,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 선언을 한 직후, 8월 27일 소위 체육관 선거를 통해 전두환은 대통령 자리를 탈취했다.&lt;br /&gt;
&lt;br /&gt;
지역적인 면에서는 '''광주광역시를 비롯한 전라도 지역의 트라우마'''로 작용해 이후의 민주정의당 및 &amp;lt;ins&amp;gt;[[3당 합당]]&amp;lt;/ins&amp;gt;으로 이어지는 보수 세력에 대해 적대심을 가지고, 민주당계 정당의 표밭이 되는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미 박정희 정부 시절부터 유무형의 정치적인 차별을 받고 있었지만 5.18의 참상은 전라도가 다시는 보수 세력을 지지하지 않게 만들 정도로 심각한 사건이며 호남소외론의 가장 결정적인 명분이 되었다.&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이나자키로빈]]: 5.18 민주화운동 페이지 전체 작성&lt;br /&gt;
&lt;br /&gt;
=='''6월민주항쟁'''==&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NnXWs5RMTIf-6DOEu9_rX2k4mgzUk1AQHYneCuwXN1Q&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원인===&lt;br /&gt;
====[[박종철고문치사사건]]====&lt;br /&gt;
&lt;br /&gt;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박종철은 1987년 1월 13일 자정 경 하숙집에서 치안본부(現 경찰청)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게 연행되었다.‘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이자 ‘민주화추진위원회’ 지도위원으로 수배 받고 있었던 박종운을 잡기위해 연행한 것이었다. 취조실로 연행해간 공안 당국은 박종철에게 박종운의 소재를 물었으나, 박종철은 순순히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경찰은 잔혹한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가하였고, 박종철은 끝내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했다. 당시 경찰은 초기 발표에서 고문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라고 사망원인을 발표하였으나, 시체부검 결과 전기고문과 물고문에 의한 살인인 것으로 밝혀졌다.&lt;br /&gt;
&lt;br /&gt;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저 죽음을 응시해주길 바란다. 저 죽음을 끝내 지켜주길 바란다. 저 죽음을 다시 죽이지 말아주길 바란다.''''' &amp;lt;small&amp;gt; - 동아일보 1987년 1월 17일자 김중배 칼럼 중&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사건 진상의 일부가 공개되자 2월 7일 전국 주요 도시에서 &amp;quot;박종철군 범국민추도식&amp;quot; 및 도심 시위가 열렸고 이어 3월 3일에는 &amp;quot;박종철군 49재와 고문추방 국민대행진&amp;quot;과 함께 또 다른 시위가 열렸다. 이후 4월 2일 서울대학교 학부모 130여 명이 ‘건국대학교 사태‘ 등 시국관련 구속학생의 징계철회를 요구하며 철야 농성을 벌였다.&lt;br /&gt;
&lt;br /&gt;
====정부의 개헌논의 유보====&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lt;br /&g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JazJFsgu4oc?si=sOE7w1tz-jKVztC9&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lt;br /&g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그러나 전두환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1987년 4월 13일 [[4.13호헌조치]]라 불리는 ‘대통령 특별담화‘를 발표, 개헌(改憲) 논의를 유보하겠다고 밝혔다. [[4.13호헌조치]]에서 전두환은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와 대통령 선거는 자유 경선의 분위기가 보장되는 가운데 1987년 내에 공정한 선거관리를 통해 차질 없이 실시할 수 있게 모든 노력을 다할것‘이라고 다짐했으며, 또 ‘민정당의 후임 대통령 후보는 조속한 시일 안에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인물 가운데서 당헌 절차와 민주 방식에 따라 전당대회에서 선출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호헌조치‘라는 그 이름대로 현행 헌법에 따라 권력을 이양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국민들의 큰 기대를 얻을 것이라 믿었으나, 기대는 커녕 오히려 반발을 가져오는 요인이 되고 말았다. 곧바로 이튿날인 4월 14일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 등 각계 인사들이, 호헌 조치를 비판하는 시국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정부 최루탄에 의한 [[이한열]] 사망====&lt;br /&gt;
[[파일:이한열.jpg|200px|섬네일|오른쪽|최루탄에 피격당한 후 이종창에게 부축받는 이한열]]&lt;br /&gt;
먼저 1987년 5월 27일 야당과 재야, 종교계 등이 힘을 모아 ‘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여당인 민주정의당에서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6월 10일에 맞춰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6 · 10국민대회]])’를 치르기로 결정하였다. 대학생들은 국본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를 중심으로 6 · 10국민대회에 호응하여 6월 초부터 각 대학별로 연일 집회와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6 · 10국민대회]] 하루 전날인 6월 9일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교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는 곧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학생들은 물론 시민들의 분노가 들끓었다. 이러한 분노 속에서 6 · 10국민대회가 열렸다. 경찰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6 · 10국민대회가 열리는 성공회대성당을 원천 봉쇄하였다. 그 결과 6 · 10국민대회는 대회장에 미리 들어가 있던 소수의 인원만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대회 예정 시간인 오후 6시 이전부터 서울 시내 곳곳에서 대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시민들도 다양한 방식으로 6 · 10국민대회와 학생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날 밤 늦게까지 시위를 벌이던 학생들은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이후 5일 동안 농성을 계속하였다. 애초 계획된 것은 아니었지만 대학생들의 명동성당 농성은 6 · 10국민대회가 단발성 행사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인 저항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lt;br /&gt;
&lt;br /&gt;
====민주항쟁 확산====&lt;br /&gt;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로 개헌하라!'''''   &amp;lt;small&amp;gt;-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제시한 슬로건&amp;lt;/small&amp;gt;&lt;br /&gt;
명동성당 농성을 거치며 항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유월항쟁의 전국화 과정에는 일정한 패턴이 존재하였다. 6월 10일 서울 외에도 전국 주요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위가 벌어졌지만, 15일까지 항쟁의 중심은 6 · 10국민대회와 명동성당 농성이 전개된 서울이었다. 하지만 6월 15일 경부터는 부산, 대전, 진주 등에서 격렬한 시위가 전개되었다. 그러다가 6월 20일부터 대규모 시위가 광주, 전주, 순천, 익산 등 호남 지방으로 옮겨졌다. 6 · 10국민대회 이후 약 20일 동안 전국 곳곳에서 매일 평균 100회 이상의 시위가 동시다발로 벌어졌다. 특히 6월 18일 ‘최루탄추방대회’와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은 전국 곳곳에서 한꺼번에 1백만 명 이상이 참여하였다. 갈수록 참가 지역이 전국 곳곳으로 확산되어 대도시, 중소도시뿐만 아니라 농촌 지역의 군 단위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6월 26일 하루에만 37~38개 시 · 군에서 시위가 동시에 벌어졌다. 유월항쟁에 참가한 연 인원은 400~500만 명으로 추산된다.&lt;br /&gt;
&lt;br /&gt;
반면 유월항쟁의 전국적 동시다발 시위는 경찰 병력을 분산시켰다. 분산된 경찰 병력으로는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거센 시위의 물결을 막아 낼 수 없었다. 경찰이 시위 진압에 최루탄을 남발하면서 최루탄도 점차 고갈되기 시작하였다. 유월항쟁 기간 동안 경찰이 사용한 최루탄만 총 67만 발이 넘었다. 더불어, 전두환 정권이 집권 내내 강조했던 88서울올림픽이 얼마 남지 않아 미국 등 국제사회의 이목이 집중된 상황에서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운동 때처럼 유혈 사태와 대량 학살을 반복하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무엇보다 군대를 동원하더라도 이러한 대규모 시민 항쟁을 진압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결국 경찰력으로 항쟁을 막기 힘들고, 군대 투입도 어렵다고 판단한 전두환 정권은 1987년 6월 29일 ‘ 6 · 29민주화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하였다. 그리고 그동안 의식불명 상태에 있었던 이한열이 7월 5일 끝내 사망하였다. 5일장 후 7월 9일 치러진 이한열의 노제에 100만 명의 인파가 모인 것을 끝으로 약 한 달 동안 지속된 유월항쟁은 마무리되었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1987년 6월항쟁이 '''대통령[[직선제]] 개헌'''이라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이 항쟁에 동참한 학생과 시민들의 요구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제시한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 개헌’이라는 슬로건으로 모아졌기 때문이었다. 유월항쟁은 이러한 민주화 세력의 통합성, 즉 각기 다른 성격과 지향을 가진 여러 주체들이 모두 동의할 수 있는 ‘최소 강령’하에 ‘최대 연합’으로 결집하였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딩잉잉]]:6월민주항쟁 페이지 전체 작성&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기밀문서]]&lt;br /&gt;
[[분류:4.19혁명관련]]&lt;br /&gt;
[[분류:부마항쟁관련]]&lt;br /&gt;
[[분류:5.18민주화운동관련]]&lt;br /&gt;
[[분류:6월민주항쟁관련]]&lt;br /&gt;
[[분류:뎐]]&lt;br /&gt;
[[분류:이나자키로빈]]&lt;br /&gt;
[[분류:호빵이👻]]&lt;br /&gt;
[[분류:•ᴗ•]]&lt;br /&gt;
[[분류:딩잉잉]]&lt;/div&gt;</summary>
		<author><name>딩잉잉</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8%B0%EB%B0%80%EB%AC%B8%EC%84%9C&amp;diff=35966</id>
		<title>기밀문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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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1T16:17:1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딩잉잉: /* 컨텐츠 주제 */&lt;/p&gt;
&lt;hr /&gt;
&lt;div&gt;=='''컨텐츠 주제'''==&lt;br /&gt;
&lt;br /&gt;
[[파일:시위대.png|400픽셀|center]][[파일:이한열사진.jpeg|400픽셀|center]][[파일:진압.png|400픽셀|center]]&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amp;lt;big&amp;gt;'''&amp;lt;span style=&amp;quot;color:#CD0000&amp;quot;&amp;gt;&amp;lt;big&amp;gt;투쟁의 불꽃, 자유의 환호&amp;lt;/big&amp;gt;&amp;lt;big&amp;gt;큰 글자&amp;lt;/big&amp;gt;&amp;lt;/span&amp;gt;'''&amp;lt;br/&amp;gt;&amp;lt;br/&amp;gt;&lt;br /&gt;
''대한민국은 시민들의 투쟁과 희생을 거쳐, 피와 땀으로 민주화를 이룩하였습니다.''&amp;lt;br/&amp;gt;&lt;br /&gt;
''그들은 어둠을 밝히기 위해 항거의 불꽃을 태웠고, 그 불꽃은 자유를 외쳤으며, 그 외침은 세상을 움직였습니다.''&amp;lt;br/&amp;gt;&lt;br /&gt;
''이 «기밀문서»에는 당신이 미처 몰랐던 그 때의 열기와 의지가 실려있습니다.''&amp;lt;br/&amp;gt;&lt;br /&gt;
''함께, 그 뜨거운 페이지를 열어보시겠습니까?''&amp;lt;/span&amp;gt;&amp;lt;/big&amp;gt;&amp;lt;/div&amp;gt;&lt;br /&gt;
&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이나자키로빈]]&lt;br /&gt;
[[딩잉잉]]&lt;br /&gt;
&lt;br /&gt;
=='''팀원'''==&lt;br /&gt;
*오현지(2022131143) [[뎐]]&amp;lt;br/&amp;gt;&lt;br /&gt;
*김여원(2023130209) [[이나자키로빈]]&amp;lt;br/&amp;gt;&lt;br /&gt;
*김하은(2022131345) [[호빵이👻]]&amp;lt;br/&amp;gt;&lt;br /&gt;
*박정원(2023130350) [[•ᴗ•]]&amp;lt;br/&amp;gt;&lt;br /&gt;
*최필중(2023130216) [[딩잉잉]]&amp;lt;br/&amp;gt;&lt;br /&gt;
&lt;br /&gt;
=='''기획의도'''==&lt;br /&gt;
===기획배경===&lt;br /&gt;
1945년 광복 이후 대한민국 국민들은 자유민주국가로서의 미래를 기대했으나 실상은 그러지 못했다.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보여주듯 현재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는 그것을 누리지 못한 앞선 세대들의 목숨을 바친 항쟁의 대가이다. 민주항쟁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의 핵심 동력이었다. 오늘날 우리나라 민주의식의 중요한 기둥이 되는 네 가지 항쟁을 선별하고 각 항쟁의 배경, 전개과정, 의의를 비롯해 세부적이고 자세한 내용에 대한 기사를 작성한다.&lt;br /&gt;
===기획목적===&lt;br /&gt;
작금의 현실까지 오기에는 수없이 많은 투쟁이 있었지만 4.19혁명, 부마항쟁, 5.18민주항쟁, 6월민주항쟁이라는 네 가지 사건을 살펴보기로 한 것은 가장 많이 다뤄지고, 가장 많이 알려진 사건이기 때문이다. 관련된 사건과 역사 인물들에 대해 자세히 적어 내어 민주항쟁의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지 않으면 알기 힘든 각 민주항쟁의 자세한 내막을 밝혀낸다.&lt;br /&gt;
===기대하는 바===&lt;br /&gt;
타임라인과 온톨로지를 활용해 내용의 전반적인 이해를 돕고 자세한 설명을 통해 사건의 자세한 내막을 들어낸다. 네 가지 항쟁을 각각 큰 목차로 설정하고 세부 기사를 그 내부에 작성해 독자의 관심과 수요에 부합하는 정보를 전달하는 데 효과적일 것으로 기대된다. 민주항쟁에 참여한 사람들의 희생과 투쟁에 대한 존경심을 부르고 역사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다.&lt;br /&gt;
===기여===&lt;br /&gt;
[[뎐]], [[이나자키로빈]], [[호빵이👻]]: 기획의도 페이지 작성&lt;br /&gt;
&lt;br /&gt;
=='''온톨로지'''==&lt;br /&gt;
{{NetworkGraph | title=민주항쟁.lst}}&lt;br /&gt;
[[민주항쟁.lst]]&lt;br /&gt;
===기여===&lt;br /&gt;
*[[뎐]]: 온톨로지 제작&lt;br /&gt;
=='''컨텐츠 구조'''==&lt;br /&gt;
===클래스(Class)===&lt;br /&gt;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color:white&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0%&amp;quot; | 클래스 !! style=&amp;quot;width:40%&amp;quot; | 설명 !! style=&amp;quot;45%&amp;quot; | 노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제||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대표 키워드인 민주항쟁을 주제로서 나타내었다 || 만주항쟁&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항쟁||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민주화운동 시기 발생했던 주요 운동들을 ‘항쟁’이라는 키워드로 분류하였다. || 4.19혁명, 부마항쟁, 5.18 민주화운동, 6월민주항쟁&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사건||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항쟁의 원인, 결과가 되는 사건을 정리하였다|| 3.15부정선거, 고려대 4.18학생시위, 3.15의거, YH사건, 10.26사태, 12.12 군사반란, 비상계엄령,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고문추방민족대행진, 4.13호헌조치, 6.29선언, 대통령직선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지역||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요 항쟁들이 일어났던 지역을 정리하였다|| 마산, 부산, 광주&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인물||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요사건들을 발생시킨 인물, 참여했던 인물을 묶어서 정리하였다|| 이승만, 이기붕, 김주열, 박정희, 김재규, 전두환, 신군부, 시민군, 박종철, 이한열, 노태우&lt;br /&gt;
|-&lt;br /&gt;
|}&lt;br /&gt;
===관계성(Relation)===&lt;br /&gt;
*&amp;lt;font color=#228B22&amp;gt;'''~은 ~에 속한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주요 항쟁들이 민주항쟁에 속함을 나타내거나 인물의 소속을 나타낸다.&lt;br /&gt;
***해당노드:&lt;br /&gt;
***#4.19혁명 -&amp;gt; 민주항쟁&lt;br /&gt;
***#부마항쟁 -&amp;gt; 민주항쟁&lt;br /&gt;
***#5.18민주화운동 -&amp;gt; 민주항쟁&lt;br /&gt;
***#6월 민주항쟁 -&amp;gt; 민주항쟁&lt;br /&gt;
***#전두환 -&amp;gt; 신군부&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의 원인이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어떠한 사건과 인과관계를 이루는 또다른 사건 혹은 인물을 설명한다.&lt;br /&gt;
***#이기붕 -&amp;gt; 3.15부정선거&lt;br /&gt;
***#김주열 -&amp;gt; 고려대 4.18학생시위&lt;br /&gt;
***#고려대 4.18학생시위 -&amp;gt; 4.19혁명&lt;br /&gt;
***#3.15의거 -&amp;gt; 4.19혁명&lt;br /&gt;
***#김주열 -&amp;gt; 4.19혁명&lt;br /&gt;
***#3.15부정선거 -&amp;gt; 3.15의거&lt;br /&gt;
***#YH사건 -&amp;gt; 부마항쟁&lt;br /&gt;
***#부마항쟁 -&amp;gt; 10.26사태&lt;br /&gt;
***#박정희 -&amp;gt; 10.26사태&lt;br /&gt;
***#비상계엄령 -&amp;gt; 5.18민주화운동&lt;br /&gt;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 -&amp;gt; 고문추방민족대행진&lt;br /&gt;
***#고문추방민족대행진 -&amp;gt; 4.13호헌조치&lt;br /&gt;
***#4.13호헌조치 -&amp;gt; 6월민주항쟁&lt;br /&gt;
***#6월민주항쟁 -&amp;gt; 6.29선언&lt;br /&gt;
***#6월민주항쟁 -&amp;gt; 대통령직선제&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을 발생시켰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사건과 그 사건을 직접적으로 발생시킨 인물을 연결한다.&lt;br /&gt;
***#이승만 -&amp;gt; 3.15부정선거&lt;br /&gt;
***#김재규 -&amp;gt; 10.26사태&lt;br /&gt;
***#신군부 -&amp;gt; 1212군사반란&lt;br /&gt;
***#전두환 -&amp;gt; 비상계엄령&lt;br /&gt;
***#노태우 -&amp;gt; 6.29선언&lt;br /&gt;
***#시민군 -&amp;gt; 5.18민주화운동&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에 희생되었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민주항쟁의 진압과정 등 에서 희생된 인물을 설명한다&lt;br /&gt;
***#김주열 -&amp;gt; 3.15의거&lt;br /&gt;
***#이한열 -&amp;gt; 6월 민주항쟁&lt;br /&gt;
***#박종철&amp;gt;박종철 고문치사 사건&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에서 발생했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설명한다.&lt;br /&gt;
***#3.15의거 -&amp;gt; 마산&lt;br /&gt;
***#부마항쟁 -&amp;gt; 부산&lt;br /&gt;
***#부마항쟁 -&amp;gt; 마산&lt;br /&gt;
***#5.18민주화운동 -&amp;gt; 광주&lt;br /&gt;
===기여===&lt;br /&gt;
*[[뎐]]: 컨텐츠 구조 페이지 작성&lt;br /&gt;
=='''4.19혁명'''==&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VPp4BmfDSv8VA2-oC-VATHzUYgadaiaQ9AlWXYiaiVk&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원인===&lt;br /&gt;
====[[3.15 부정선거]]====&lt;br /&gt;
[[파일:3.15부정선거_개표_모습.png|300픽셀|섬네일|오른쪽|3.15부정선거 당시 개표하는 사진&amp;lt;ref&amp;gt;사진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amp;lt;/ref&amp;gt;]]&lt;br /&gt;
1959년 대한민국은 제 4대 대통령 선거와 제 5대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당시 자유당에서는 12년째 대통령으로서 연임 중이던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이기붕]]'''을 부통령 후보로 선임하였다. 그러나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병세의 악화로 사망하게 되고,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은 확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선거의 초점은 자유당의 조병옥과 민주당의 장면 간의 선거전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본격적인 선거유세의 시작과 함께 정부와 여당의 잇따른 야당선거운동 방해사건으로 부정선거가 시작되었다. 1960년 3월 15일 선거가 시작된 이후에도 다양한 방법의 부정행위가 일어났고, 개표 결과 이승만과 이기붕의 득표가 100%에 육박하는 결과로 나오자 자유당은 득표수를 하향 조정해 최종 집계에 반영할 것을 지시했다. 결국 이승만 88.7%, 이기붕 79%의 득표율을 가지며 정, 부통령에 당선되었다.&amp;lt;ref&amp;gt;자세한 내용은 3.15부정선거 페이지 참조&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부정선거 반대시위, [[3.15 의거]]의 발생====&lt;br /&gt;
3.15 부정선거를 반대하는 시위는 초기에는 중, 고등학생들의 산발적인 시위로 전개되었다. 3월 15일 선거일 밤 경남 마산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으며,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여 1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amp;lt;br/&amp;gt;&lt;br /&gt;
3월 15일 실종되었던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4월 11일 마산부두에서 발견되자 마산 시민들은 시청, 파출소 등을 파괴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2차 시위가 일어난 것이다.&lt;br /&gt;
&lt;br /&gt;
====[[고려대학교 4.18 학생시위]]의 발생====&lt;br /&gt;
1, 2차 마산시위를 계기로 부정선거 무효와 이승만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났다. 이들은 '4.18 선언문'을 낭독하고 시내로 진출하였다. 이는 4월 19일 학생들과 일반 시민들이 가세한 대규모 시위로 이어지게 되었다.&lt;br /&gt;
====전국적인 4.19 혁명의 발생====&lt;br /&gt;
분노한 전국의 시민과 학생들이 다음 날인 4월 19일에 '이승만 하야와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며 대규모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경찰은 또다시 무차별 발포에 나섰고,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지만 이러한 압박에도 시민들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lt;br /&gt;
====이승만 대통령의 혼란 수습 시도====&lt;br /&gt;
이승만 대통령은 4.19 시위로 인한 정국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4월 20일 국무위원 전원과 자유당 당무위원 전원의 사표를 제출하도록 지시하였으며, 4월 23일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외무장관에 허정, 내무장관에 이호, 법무장관에 권승렬을 임명하는 등 개각을 단행하였다.&amp;lt;br/&amp;gt;&lt;br /&gt;
그러나 미국은 4.19직후 국무부 성명을 통해 한국에서 발생한 사태는 부정선거에 대한 '군중의 불만'을 반영한 것 이라고 했고, 양유찬 주미대사를 불러 '부정선거에 대한 철저한 조사', '경향신문 복간', '국가보안법 개정' 등을 촉구하는 각서를 전달하였다.&amp;lt;br/&amp;gt;&lt;br /&gt;
그리고 4월 25일, 이승만 정권에 분노한 전국 27개 대학 258명의 교수가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 모여 14개항의 시국 선언문을 발표하며 학생, 시민들과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들은 3.15 부정선거 및 4.19 사태의 책임을 지고 대통령이 물러날 것을 주장하였으며, &amp;quot;학생들의 피에 보답하자&amp;quot;는 플랜 카드를 앞세워 국회의사당까지 행진하였다. &lt;br /&gt;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lt;br /&gt;
무력 진압에도 대규모 시위가 이어지며 시민들은 완강하게 투쟁하였다. 4월 26일 시위대가 경무대로 다시 집결하는 등 사태가 심각하게 진행되자, 오전 10시 30분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 성명을 발표하였다. 4월 27일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하며 대통령직을 하야하고 하와이로 망명하였으며 자유당 정권도 끝나게 된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우리 국민들, 특히 학생과 청년들의 주도로 이루어진 4.19 혁명은 학생과 일반 대중이 단결하여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아시아 최초의 시건이다. 4.19혁명은 부마항쟁, 5.18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그리고 2017년 촛불시위에 이르기 까지 정권에 대항하는 국민들이 단합을 이루는 초석이 되었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도 시민 저항권에 대한 근거로써 4.19혁명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문구가 있다.&lt;br /&gt;
===기여===&lt;br /&gt;
[[뎐]]: 4.19혁명 페이지 원인, 의의 작성 &lt;br /&gt;
&lt;br /&gt;
[[•ᴗ•]]: 4.19혁명 페이지 전개 작성&lt;br /&gt;
&lt;br /&gt;
=='''부마항쟁'''==&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bK7zjpPvBsC7rFRPmsiHCUYhyWt2VXOv8SYyaBTND4Y&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원인===&lt;br /&gt;
====[[유신 헌법]]과 [[긴급조치]]====&lt;br /&gt;
1971년 선거에서 김대중을 누르고 대통령에 3선된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해 국회 해산,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등 법의 일부 기능을 정지시키고 전국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했다.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된 이른바 유신헌법에 의해 제정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법」 에 의거해 박정희가 제8대 대통령으로 재차 당선되었고, 이 유신 헌법이 발효된 기간을 유신 체제라고 부른다. 유신 체제는 행정, 입법, 사법의 3권을 모두 쥔 대통령이 종신 집권할 수 있도록 설계된 1인 대통령제였다. 박정희는 유신 헌법에 의거해 대통령의 권한으로 취할 수 있었던 특별조치인 긴급조치를 선포함으로써 헌법에 반대하는 시위 및 운동과 방송, 언론 활동을 하는 반정부 인사들을 연행, 체포, 고문하는 등 억압을 가했다.&lt;br /&gt;
&lt;br /&gt;
====한국경제의 위기====&lt;br /&gt;
1970년대 말 한국경제는''' [[오일쇼크]]'''라는 세계경제의 위기와 결합해 가라앉고 말았다. 경제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정부는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과 함께 '''[[경제안정화정책]]'''을 수용했고, 중소자본가, 봉급생활자, 도시 노동자와 농민 등에 안정화 비용을 부과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이와 같은 안정화 정책은 경제위기로 어려운 처지에 있던 중소기업들의 도산을 가속하여 기업 부도율이 치솟고 하층민들을 더 깊은 고통에 몰아넣었다. 특히 '''부가가치세'''를 도입한 이후 물가가 상승하면서 일상에 타격을 주었으며, 노동집약적 제조업이 집중되었던 부산과 마산에서는 상황이 더욱 심각하여 1979년 부산 지역 부도율은 서울의 3배에 달했다.&lt;br /&gt;
&lt;br /&gt;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lt;br /&gt;
한 시대의 대격변을 예고하는 단초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시작됐다. 1979년 8월 9일 오전, 신민당의 당사 4층 강당에서는 봉제업체인 YH무역주식회사의 여성노동자 200여명이 기업주의 폐업에 반발하여 폐업조치 철회 농성을 벌였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인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신민당이 당사 건물을 내준 것이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폭력을 동원하여 농성을 해산시켰다. 결국 이 사건은 노동 탄압 사건을 넘어선 야당에 대한 정치 탄압 사건으로 발전하였다.&lt;br /&gt;
&lt;br /&gt;
이날 경찰은 1000여명의 진압대원을 신민당사로 난입시켜 농성을 하고 있던 174명의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로 밖으로 끌어냈다. 또한 경찰은 총재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김영삼 총재와 당 간부들을 끌어내면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박정희 정권은 이 노동자 농성 사건을 빌미로 신민당 분열공작을 시도하였다. 유신정권과 비밀리에 결탁한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 3명이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 부총재 전원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접수시켰다. 그리고 법원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신민당 총재단의 직무 집행을 정지시키고 박정희 정권의 꼭두각시를 총재직무대행으로 선임하였다.&lt;br /&gt;
&lt;br /&gt;
아울러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의 동교동 자택을 전면 봉쇄하였고,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에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끊으라고 요구한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즈』 회견내용을 “반헌정적, 반민족적 작태”로 몰아서 국회에 징계 동의안을 제출했다. 10월 4일 오후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의원 159명은 여당 총회장에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제명 결의안을 '''기습적으로''' 처리해 버렸다. 노사분규 사태로 시작된 사건이 제1야당 당수의 의원직 제명으로 확대된 정치적 사태를 지켜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유신체제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이 고조되었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유신 철폐, 독재 타도!'''''   &amp;lt;small&amp;gt;-10.16 부마항쟁 당시 시위대의 구호&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부산대학교 민주선언문, 학생 시위에서 시민항쟁으로====&lt;br /&gt;
[[파일:부산시위대.jpg|250px|섬네일|오른쪽|광복동을 지나는 시위 행렬]]&lt;br /&gt;
1979년 10월 16일 아침 10시 부산대학교 구내 도서관 앞에서 약 500명의 학생들이 모여 “유신정권 물러가라”, “정치탄압 중지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반정부 시위를 벌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민주선언문」]]'''을 통해 민주화, 언론 자유, 인권 보장의 신념을 확인하고, “제도화된 폭력성과 조직적 악의 근원인 유신헌법과 독재집권층의 퇴진만이 5천 만 겨레의 통일의 첫걸음이라고 주장하면서 형제의 피를 요구하는 자유와 민주의 깃발을 우리가 잡고 반민주의 무리, 불의의 무리들을 향해 외치며 나아가자”라고 선언하였다. 이후 학생들은 교문을 나가 거리에서 시위했다. 이때 학생 수는 약 5,000명으로 불어나 있었고, 광복동과 남포동 등 부산시내 중심가까지 진출해 애국가 등의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며, 이를 제지하려는 경찰과 이곳저곳에서 충돌하였다. 비슷한 시간, 부산 동아대학교에서도 1,000여 명의 학생이 부산대학교 학생과 합류하여 가두시위를 벌였다. 부산대학교 데모로 학생 수백 명이 연행되고 100여 명이 다쳤지만 이튿날인 10월 17일에는 시위가 더욱 격화되어 학생들뿐만 아니라 다수의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학생 시위는 점차 시민항쟁의 양상을 띠어갔다.''' 밤늦게까지 계속된 시위에서 시민들은 충무파출소, 한국방송공사, 서구청, 부산세무서 등을 파괴하였고, 경찰차량을 불태우거나 파손시켰다.&lt;br /&gt;
&lt;br /&gt;
====마산의 시민항쟁====&lt;br /&gt;
&lt;br /&gt;
민주항쟁은 18일에 마산으로 확산되었다. 늦은 오후에는 1,000여 명의 경남대학교 학생들이 마산 시내 번화가에 산발적으로 집결했으며, 일부시민들도 가담해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어두워진 다음 학생과 시민들의 데모는 격화되어 파출소, 공화당사, 방송국, 신문사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파괴하였다. 이튿날인 19일에는 시위가 더욱 치열해져 마산 시내는 한때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저녁 8시경, 시위대는 경남대학과 마산대학&amp;lt;ref&amp;gt;1985년 창원대학으로 교명이 변경되었으며, 현재의 마산대학교와 다르다.&amp;lt;/ref&amp;gt;, 그리고 고등학생까지 합세하여 약 8,000명에 이르렀으며, 시내 곳곳에서 몽둥이를 들고 동사무소와 파출소로 몰려가 시설을 파괴하였고, 경찰차량에 불을 질렀다.&lt;br /&gt;
&lt;br /&gt;
====부산 계엄령, 마산 위수령====&lt;br /&gt;
[[파일:계엄포고문.jpg|270px|섬네일|왼쪽|부산지역에 내려진 계엄포고문을 읽고 있는 시민들]]&lt;br /&gt;
부산대학교 시위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박정희 정부는 학생 시위로 시작된 시위가 대규모 시민항쟁으로 사태가 심상치 않게 확대되어가자 강경책으로 대응했다. 정부는 18일 자정을 기해 '''부산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동원한 과격한 진압'''을 통해 시위 참여자들과 이를 방조한 일반 시민들까지 1,058명을 연행하고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으며, 부산지구 계엄사령부는 각 대학 휴교조처와 야간통행금지시간을 2시간 연장하는 등의 항이 담긴 포고문을 발표했다.&lt;br /&gt;
&lt;br /&gt;
부산에 계엄령이 선포된 이튿날인 19일에 마산 시위가 확대됨에 따라 그 다음날인 10월 20일 정오, 정부가 '''마산 및 창원 지역에 위수령을 발령'''해 통행금지 시간이 연장되고, 경남대학 등에는 휴교조처가 취해졌으며, 24일에는 깡패를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132명을 검거, 23명을 구속했다. 이렇게 '''표면적으로는 부마민주항쟁이 단시간에 진압되는 듯 보였지만, 항쟁은 이미 유신체제의 균열을 불러오고 있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항쟁의 전개 과정에서 볼 수 있듯, 부마민주항쟁에서 특징적인 것은 먼저 시위대의 가장 큰 분노의 대상이 공화당사와 경찰·파출소였다는 점, 다음으로는 “부가가치세를 철폐하라”, “잘 먹고 잘 살아라”등의 구호에서 드러나듯이 세무서에 대한 공격, 그리고 신문사와 방송국에 대한 공격을 들 수 있다.&lt;br /&gt;
&lt;br /&gt;
부마민주항쟁은 1970년대 유신체제 밑에서 쌓였던 침묵하는 언론, 조세, 시민을 억압하는 경찰에 대한 불만 등 정치·사회·경제·문화·종교 등 각 부문에 걸친 여러 모순의 폭발이었고, 헌법 개정과 긴급조치로 겨우 유지되던 유신체제와 박정희 정권의 붕괴를 촉진시킨 결정적인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10.26사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또한 이 사건은 1980년 5월 18일의 광주 민주화운동과 1987년 6월 민주항쟁에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된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억눌린 우리 역사&amp;lt;/br&amp;gt;터져나온 분노&amp;lt;/br&amp;gt;매운 연기 칼바람에도&amp;lt;/br&amp;gt;함성소리 드높았던&amp;lt;/br&amp;gt;동트는 새벽벌&amp;lt;/br&amp;gt;시월이 오면&amp;lt;/br&amp;gt;핏발 선 가슴마다&amp;lt;/br&amp;gt;살아오는 십 일육&amp;lt;/br&amp;gt;동지여 전진하자&amp;lt;/br&amp;gt;깨치고 나가자&amp;lt;/br&amp;gt;뜨거운 가슴으로&amp;lt;/br&amp;gt;빛나는 내일로'''''&amp;lt;/br&amp;gt;&amp;lt;small&amp;gt;-'''부산대학교''' 새벽벌도서관 10.16 기념비&amp;lt;/small&amp;gt;&amp;lt;/div&amp;gt;&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호빵이👻]]: 부마항쟁 페이지 전체 작성&amp;lt;/br&amp;gt;&lt;br /&gt;
[[이나자키로빈]]: 부마항쟁 원인 중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 작성&lt;br /&gt;
&lt;br /&gt;
=='''5.18민주화운동'''==&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AMetwTuXYHTCXINqr7ZJpzO5CHFEMQO5-Uqau51RkXA&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원인===&lt;br /&gt;
====유신체제의 붕괴====&lt;br /&gt;
&lt;br /&gt;
[[파일:김재규.jpg|섬네일|오른쪽|암살 당시 상황을 재현하는 김재규]]&lt;br /&gt;
&lt;br /&gt;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amp;lt;small&amp;gt; - 김재규&amp;lt;/small&amp;gt;&lt;br /&gt;
1979년 10월 4일 신민당 총재 김영삼이 국회에서 의원직을 제명당하자 10월 15부터 10월 20까지 부산 · 마산 등지에서는 부마항쟁이 일어났고, 이의 해결을 둘러싼 노선대립으로 갈등 중 10월 26일 &amp;lt;ins&amp;gt;[[김재규]]&amp;lt;/ins&amp;gt;가 박정희를 살해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ins&amp;gt;[[10.26 사태]]&amp;lt;/ins&amp;gt;의 사후 수습과정에서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을 중심으로 신군부 세력이 부상하였으며, 이들은 &amp;lt;ins&amp;gt;[[12.12 사건]]&amp;lt;/ins&amp;gt;의 하극상을 통하여 군부를 장악하였다. 1980년 2월 29일 김대중 등이 복권되었으나 그 해 봄, 신군부는 최규하 과도 정부를 유명무실하게 하고 국민들이 요구하는 민주주의와 이를 위한 명확한 정치일정 제시를 거부하면서 권력기반을 구축하였다.&lt;br /&gt;
&lt;br /&gt;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lt;br /&gt;
한 시대의 대격변을 예고하는 단초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시작됐다. 1979년 8월 9일 오전, 신민당의 당사 4층 강당에서는 봉제업체인 YH무역주식회사의 여성노동자 200여명이 기업주의 폐업에 반발하여 폐업조치 철회 농성을 벌였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인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신민당이 당사 건물을 내준 것이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폭력을 동원하여 농성을 해산시켰다. 결국 이 사건은 노동 탄압 사건을 넘어선 야당에 대한 정치 탄압 사건으로 발전하였다.&lt;br /&gt;
&lt;br /&gt;
이날 경찰은 1000여명의 진압대원을 신민당사로 난입시켜 농성을 하고 있던 174명의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로 밖으로 끌어냈다. 또한 경찰은 총재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김영삼 총재와 당 간부들을 끌어내면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박정희 정권은 이 노동자 농성 사건을 빌미로 신민당 분열공작을 시도하였다. 유신정권과 비밀리에 결탁한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 3명이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 부총재 전원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접수시켰다. 그리고 법원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신민당 총재단의 직무 집행을 정지시키고 박정희 정권의 꼭두각시를 총재직무대행으로 선임하였다.&lt;br /&gt;
&lt;br /&gt;
아울러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의 동교동 자택을 전면 봉쇄하였고,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에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끊으라고 요구한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즈』 회견내용을 “반헌정적, 반민족적 작태”로 몰아서 국회에 징계 동의안을 제출했다. 10월 4일 오후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의원 159명은 여당 총회장에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제명 결의안을 '''기습적으로''' 처리해 버렸다.&lt;br /&gt;
&lt;br /&gt;
노사분규 사태로 시작된 사건이 제1야당 당수의 의원직 제명으로 확대된 정치적 사태를 지켜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유신체제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이 고조되었다. 또한 이 사건은 그동안 다소 주춤하던 대학가에 반유신 반독재 운동의 열기가 다시 확산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청춘을 바쳐, 학생 운동====&lt;br /&gt;
&lt;br /&gt;
[[파일:서울의_봄.JPG|섬네일|오른쪽|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앞에 모인 시위대]]&lt;br /&gt;
&lt;br /&gt;
군부의 재집권 야욕에 대한 국민적 저항은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표출되었다. 1980년 3월, 서울대 총학생회 출범을 시작으로 4월 초순에는 전국의 주요 대학들이 총학생회를 결성하기 시작하였다. 대학별로 독재 정권에 아부했던 어용교수와 족벌사학 퇴진 운동을 벌였고, 특히 병영집체훈련(당시 대학 신입생들은 의무적으로 군부대에 10일 간 입대하여 각종 군사훈련을 이수해야 했다.) 거부가 주요 이슈로 전면 등장했다. 각 대학의 병영집체훈련 거부운동이 본격화되고 전국적인 쟁점으로 떠오르자 신군부는 신문, 방송을 통해 ‘학생들의 안보의식 결여’를 비난하고 교내 시위·농성을 집중적으로 보도하게 했다.  5월 1일에 서울대가 입영훈련 거부투쟁 철회를 결정하고 ‘계엄령 해제’와 ‘유신잔당 퇴진’, ‘정부개헌중단’과 ‘노동 3권 보장’ 등을 요구하기 시작하면서 대학가는 이제까지의 학내 문제 중심의 운동에서 정치개혁을 위한 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그간 정부와 대학 간에 팽팽하게 유지되던 긴장 관계는 폭발 직전으로 내닫게 된 것이다.&lt;br /&gt;
&lt;br /&gt;
약 열흘 간의 대정부 투쟁을 준비한 대학가는 5월 10일 고려대 총학생회장실에서 열린 ‘총학생회장단 회의’에 참석한 전국 23개 대학 대표들은 ‘비상계엄의 즉각 해제’와 ‘전두환, 신현확 등 유신잔당 퇴진’ 등을 결의하고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정세에 대한 공동대처 방안을 마련했다. 이후 5월 13일부터 5월 14일에 걸쳐 서울 · 부산 · 대구 · 광주 등 37개 대학에서 계엄철폐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5월 15일에는 서울역에서 시위가 발생하는 등 학생시위는 서울시가지를 거의 마비시키는 등 야간까지 지속되어 사태가 절정에 달하면서 신군부 세력을 위협하였다. 5월 16일 24개 대학 학생대표들은 당분간 시국의 추이를 관망하기로 결정하고 가두시위를 중단하면서 소강상태에 돌입하는 듯하였다.&lt;br /&gt;
&lt;br /&gt;
====1980년 봄의 광주====&lt;br /&gt;
5월 17일 신군부 세력이 이전까지는 제주도를 제외한 지역에 한정되었던 비상계엄을 전국에 확대하는 조치인 계엄포고 10호(17일 24시에 발효: 각 대학 휴교령 포함)를 밤 9시 40분에 의결하고 밤 11시 40분에 발표하면서 밤 11시를 전후한 시점부터 김대중 · 김종필이 연행되는 등 권력형 부정축재자 및 소요조종 혐의자, 학생 시위 주동자가 체포되었다. 이날 밤 광주지역의 사회운동·학생운동의 지도자도 상당수가 검거되었다. 광주의 검거대상자는 전남대 12명, 조선대 10명 등 총 22명이었다. 전남에서 계엄합동수사단은 광주505보안대가 중심이고, 중앙정보부, 경찰 등이 보조역할을 했다. 전남 계엄합동수사단은 22대 차량과 86명의 인원이 출동해 정동년 등 복적생들과 대학의 총학생회 간부들을 집중 검거했다.&lt;br /&gt;
&lt;br /&gt;
한편 육군본부는 14일 오전 7시55분에 국가 중요 보안목표와 주요대학에 군 병력 배치 명령을 하달했다. 이 명령에 따라 전남북계엄분소장인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광주 시내 주요 시설물에 이날 오후부터 계엄병력을 배치했다. 31사단 96연대 병력이 광주시내 KBS건물에 42명, MBC 21명, CBS 11명, VOC(전일방송) 11명 등 주요 방송사 건물에 배치돼 경비에 들어간 것이다.&lt;br /&gt;
&lt;br /&gt;
이날 오후 전교사령관은 7공수여단의 광주배치에 따른 수송수단 지원도 미리 협의했다. 그리고 5월 8일부터 16일 사이에 공수부대 수뇌부들도 헬기를 타고 서울에서 내려와 광주 상무대의 전투병과교육사령부를 방문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광주에서 시위가 격화되면 즉각적으로 최정예 군부대를 동원해서 진압할 준비를 철저하게 갖추고 있었다. 5월 18일에 시작된 광주의 비극은 그 이전에 이미 시한폭탄처럼 준비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lt;br /&gt;
{{구글지도 | 위도=35.175961433346885 | 경도=126.90865311973532 | 줌=13 }}  [[파일:금남로.JPG|섬네일|오른쪽|금남로 앞에 집결한 버스와 시민군]]&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18일&amp;lt;/span&amp;gt;&lt;br /&gt;
휴교령이 내려질 경우 교문 앞에서 집결한다는 결의에 따라 학생들은 5월 18일 오전 전남대학교 앞에 모였다. 공수부대원들이 전남대 앞 시위를 저지하자 대학생들은 광주역에 재집결해서 시위를 이어갔다. 시위대가 점차 늘어나면서 공수부대원이 시내에서 시위진압에 나섰으며 18일 오후 1시부터 무차별 진압작전이 이루어져 부상자가 속출하였다.&lt;br /&gt;
&lt;br /&gt;
군인들이 금남로 등 시내 중심가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이나 여자를 마구 구타하고 짓밟으며 찌르는 등의 잔혹 행동을 하자 시민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이에 시위대는 오후 4시 이후 파출소 파괴 등 적극공세에 나섰다. '''계엄군의 과잉 무력진압은 시위를 해산시키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오히려 시민들을 단결시켰으며, 결국 19일 시민 · 학생 연대가 발생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lt;br /&gt;
&lt;br /&gt;
 '''''광주 애국 시민 여러분! 이것이 웬 말입니까? 웬 벼락이란 말입니까? 죄 없는 학생들을 총칼로 찔러 죽이고 몽둥이로 두들겨 트럭으로 실어가며 부녀자를 발가벗겨 총칼로 찌르는 놈들이 이 누구란 말입니까? 이제 우리가 살길은 전시민이 하나로 뭉쳐 청년 학생들을 보호하고 유신잔당과 극악무도한 살인마 전두환 일파와 공수 특전단 놈들을 한놈도 남김없이 쳐부수는 길 뿐입니다. 우리는 이제 다 보았습니다. 다 알게 되었읍니다. 왜 학생들이 그토록 소리 높이 외쳤는가를, 우리의 적은 경찰도 군대도 아닙니다. 우리의 적은 전국민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바로 유신잔당과 전두환 일파 그놈들입니다.''''' &amp;lt;small&amp;gt; - 1980년 5월 19일에 '광주시민민주투쟁회'명의의 호소문&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19일&amp;lt;/span&amp;gt;&lt;br /&gt;
19일 오전에는 일시적 소강상태였으나 오후 들어서 분노한 학생 · 시민들이 군 · 경찰과 공방전을 벌이면서 시위는 점차 격화되었다. '''시민들은 공포감에서 벗어나 자신의 생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단순한 학생시위에서 시민봉기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계엄군은 시위대를 포위하여 구타하였으며 일부 고등학생까지 포함된 시위대는 돌과 화염병으로 저항하였고 파출소와 방송국 등에 침입하였다. 뒤처진 공수부대를 공격하거나 고립된 차량을 포위하기도 하였으며 총과 방패를 빼앗기도 하였고, 오후 4시 50분 시민들에게 포위된 계엄군의 장갑차에서 최초의 발포가 있었다. 19일 밤비가 내리는 가운데 시위가 산발적으로 계속되었으며, 20일 오전 비가 그치고 대규모 시위는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오후부터 다시 시작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20일&amp;lt;/span&amp;gt;&lt;br /&gt;
'''20일 오후 6시부터 택시와 버스 운전 기사들이 광주역과 무등경기장에 모여 대형 버스와 트럭을 앞세우고 일시에 금남로에 집결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들을 앞세운 시위는 계엄군을 몰아내는 데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였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5.18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에 &amp;lt;ins&amp;gt;[[지대한 영향]]&amp;lt;/ins&amp;gt;을 끼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학생 운동에 뛰어든 많은 대학생들은 대학교에 들어와서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의 실상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아 학생 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군부정권은 5.18 이후로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다. 전두환은 김대중 등에게 '광주 사태'의 책임을 물어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했고,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 선언을 한 직후, 8월 27일 소위 체육관 선거를 통해 전두환은 대통령 자리를 탈취했다.&lt;br /&gt;
&lt;br /&gt;
지역적인 면에서는 '''광주광역시를 비롯한 전라도 지역의 트라우마'''로 작용해 이후의 민주정의당 및 &amp;lt;ins&amp;gt;[[3당 합당]]&amp;lt;/ins&amp;gt;으로 이어지는 보수 세력에 대해 적대심을 가지고, 민주당계 정당의 표밭이 되는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미 박정희 정부 시절부터 유무형의 정치적인 차별을 받고 있었지만 5.18의 참상은 전라도가 다시는 보수 세력을 지지하지 않게 만들 정도로 심각한 사건이며 호남소외론의 가장 결정적인 명분이 되었다.&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이나자키로빈]]: 5.18 민주화운동 페이지 전체 작성&lt;br /&gt;
&lt;br /&gt;
=='''6월민주항쟁'''==&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NnXWs5RMTIf-6DOEu9_rX2k4mgzUk1AQHYneCuwXN1Q&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원인===&lt;br /&gt;
====[[박종철고문치사사건]]====&lt;br /&gt;
&lt;br /&gt;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박종철은 1987년 1월 13일 자정 경 하숙집에서 치안본부(現 경찰청)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게 연행되었다.‘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이자 ‘민주화추진위원회’ 지도위원으로 수배 받고 있었던 박종운을 잡기위해 연행한 것이었다. 취조실로 연행해간 공안 당국은 박종철에게 박종운의 소재를 물었으나, 박종철은 순순히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경찰은 잔혹한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가하였고, 박종철은 끝내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했다. 당시 경찰은 초기 발표에서 고문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라고 사망원인을 발표하였으나, 시체부검 결과 전기고문과 물고문에 의한 살인인 것으로 밝혀졌다.&lt;br /&gt;
&lt;br /&gt;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저 죽음을 응시해주길 바란다. 저 죽음을 끝내 지켜주길 바란다. 저 죽음을 다시 죽이지 말아주길 바란다.''''' &amp;lt;small&amp;gt; - 동아일보 1987년 1월 17일자 김중배 칼럼 중&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사건 진상의 일부가 공개되자 2월 7일 전국 주요 도시에서 &amp;quot;박종철군 범국민추도식&amp;quot; 및 도심 시위가 열렸고 이어 3월 3일에는 &amp;quot;박종철군 49재와 고문추방 국민대행진&amp;quot;과 함께 또 다른 시위가 열렸다. 이후 4월 2일 서울대학교 학부모 130여 명이 ‘건국대학교 사태‘ 등 시국관련 구속학생의 징계철회를 요구하며 철야 농성을 벌였다.&lt;br /&gt;
&lt;br /&gt;
====정부의 개헌논의 유보====&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lt;br /&g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JazJFsgu4oc?si=sOE7w1tz-jKVztC9&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lt;br /&g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그러나 전두환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1987년 4월 13일 [[4.13호헌조치]]라 불리는 ‘대통령 특별담화‘를 발표, 개헌(改憲) 논의를 유보하겠다고 밝혔다. [[4.13호헌조치]]에서 전두환은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와 대통령 선거는 자유 경선의 분위기가 보장되는 가운데 1987년 내에 공정한 선거관리를 통해 차질 없이 실시할 수 있게 모든 노력을 다할것‘이라고 다짐했으며, 또 ‘민정당의 후임 대통령 후보는 조속한 시일 안에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인물 가운데서 당헌 절차와 민주 방식에 따라 전당대회에서 선출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호헌조치‘라는 그 이름대로 현행 헌법에 따라 권력을 이양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국민들의 큰 기대를 얻을 것이라 믿었으나, 기대는 커녕 오히려 반발을 가져오는 요인이 되고 말았다. 곧바로 이튿날인 4월 14일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 등 각계 인사들이, 호헌 조치를 비판하는 시국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정부 최루탄에 의한 [[이한열]] 사망====&lt;br /&gt;
[[파일:이한열.jpg|200px|섬네일|오른쪽|최루탄에 피격당한 후 이종창에게 부축받는 이한열]]&lt;br /&gt;
먼저 1987년 5월 27일 야당과 재야, 종교계 등이 힘을 모아 ‘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여당인 민주정의당에서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6월 10일에 맞춰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6 · 10국민대회]])’를 치르기로 결정하였다. 대학생들은 국본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를 중심으로 6 · 10국민대회에 호응하여 6월 초부터 각 대학별로 연일 집회와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6 · 10국민대회]] 하루 전날인 6월 9일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교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는 곧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학생들은 물론 시민들의 분노가 들끓었다. 이러한 분노 속에서 6 · 10국민대회가 열렸다. 경찰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6 · 10국민대회가 열리는 성공회대성당을 원천 봉쇄하였다. 그 결과 6 · 10국민대회는 대회장에 미리 들어가 있던 소수의 인원만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대회 예정 시간인 오후 6시 이전부터 서울 시내 곳곳에서 대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시민들도 다양한 방식으로 6 · 10국민대회와 학생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날 밤 늦게까지 시위를 벌이던 학생들은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이후 5일 동안 농성을 계속하였다. 애초 계획된 것은 아니었지만 대학생들의 명동성당 농성은 6 · 10국민대회가 단발성 행사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인 저항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lt;br /&gt;
&lt;br /&gt;
====민주항쟁 확산====&lt;br /&gt;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로 개헌하라!'''''   &amp;lt;small&amp;gt;-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제시한 슬로건&amp;lt;/small&amp;gt;&lt;br /&gt;
명동성당 농성을 거치며 항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유월항쟁의 전국화 과정에는 일정한 패턴이 존재하였다. 6월 10일 서울 외에도 전국 주요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위가 벌어졌지만, 15일까지 항쟁의 중심은 6 · 10국민대회와 명동성당 농성이 전개된 서울이었다. 하지만 6월 15일 경부터는 부산, 대전, 진주 등에서 격렬한 시위가 전개되었다. 그러다가 6월 20일부터 대규모 시위가 광주, 전주, 순천, 익산 등 호남 지방으로 옮겨졌다. 6 · 10국민대회 이후 약 20일 동안 전국 곳곳에서 매일 평균 100회 이상의 시위가 동시다발로 벌어졌다. 특히 6월 18일 ‘최루탄추방대회’와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은 전국 곳곳에서 한꺼번에 1백만 명 이상이 참여하였다. 갈수록 참가 지역이 전국 곳곳으로 확산되어 대도시, 중소도시뿐만 아니라 농촌 지역의 군 단위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6월 26일 하루에만 37~38개 시 · 군에서 시위가 동시에 벌어졌다. 유월항쟁에 참가한 연 인원은 400~500만 명으로 추산된다.&lt;br /&gt;
&lt;br /&gt;
반면 유월항쟁의 전국적 동시다발 시위는 경찰 병력을 분산시켰다. 분산된 경찰 병력으로는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거센 시위의 물결을 막아 낼 수 없었다. 경찰이 시위 진압에 최루탄을 남발하면서 최루탄도 점차 고갈되기 시작하였다. 유월항쟁 기간 동안 경찰이 사용한 최루탄만 총 67만 발이 넘었다. 더불어, 전두환 정권이 집권 내내 강조했던 88서울올림픽이 얼마 남지 않아 미국 등 국제사회의 이목이 집중된 상황에서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운동 때처럼 유혈 사태와 대량 학살을 반복하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무엇보다 군대를 동원하더라도 이러한 대규모 시민 항쟁을 진압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결국 경찰력으로 항쟁을 막기 힘들고, 군대 투입도 어렵다고 판단한 전두환 정권은 1987년 6월 29일 ‘ 6 · 29민주화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하였다. 그리고 그동안 의식불명 상태에 있었던 이한열이 7월 5일 끝내 사망하였다. 5일장 후 7월 9일 치러진 이한열의 노제에 100만 명의 인파가 모인 것을 끝으로 약 한 달 동안 지속된 유월항쟁은 마무리되었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1987년 6월항쟁이 '''대통령[[직선제]] 개헌'''이라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이 항쟁에 동참한 학생과 시민들의 요구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제시한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 개헌’이라는 슬로건으로 모아졌기 때문이었다. 유월항쟁은 이러한 민주화 세력의 통합성, 즉 각기 다른 성격과 지향을 가진 여러 주체들이 모두 동의할 수 있는 ‘최소 강령’하에 ‘최대 연합’으로 결집하였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딩잉잉]]:6월민주항쟁 페이지 전체 작성&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기밀문서]]&lt;br /&gt;
[[분류:4.19혁명관련]]&lt;br /&gt;
[[분류:부마항쟁관련]]&lt;br /&gt;
[[분류:5.18민주화운동관련]]&lt;br /&gt;
[[분류:6월민주항쟁관련]]&lt;br /&gt;
[[분류:뎐]]&lt;br /&gt;
[[분류:이나자키로빈]]&lt;br /&gt;
[[분류:호빵이👻]]&lt;br /&gt;
[[분류:•ᴗ•]]&lt;br /&gt;
[[분류:딩잉잉]]&lt;/div&gt;</summary>
		<author><name>딩잉잉</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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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기밀문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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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1T16:16:5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딩잉잉: /* 컨텐츠 주제 */&lt;/p&gt;
&lt;hr /&gt;
&lt;div&gt;=='''컨텐츠 주제'''==&lt;br /&gt;
&lt;br /&gt;
[[파일:시위대.png|400픽셀|center]][[파일:이한열사진.jpeg|400픽셀|center]][[파일:진압.png|400픽셀|center]]&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amp;lt;big&amp;gt;'''&amp;lt;span style=&amp;quot;color:#CD0000&amp;quot;&amp;gt;투쟁의 불꽃, 자유의 환호&amp;lt;/span&amp;gt;'''&amp;lt;br/&amp;gt;&amp;lt;br/&amp;gt;&lt;br /&gt;
''대한민국은 시민들의 투쟁과 희생을 거쳐, 피와 땀으로 민주화를 이룩하였습니다.''&amp;lt;br/&amp;gt;&lt;br /&gt;
''그들은 어둠을 밝히기 위해 항거의 불꽃을 태웠고, 그 불꽃은 자유를 외쳤으며, 그 외침은 세상을 움직였습니다.''&amp;lt;br/&amp;gt;&lt;br /&gt;
''이 «기밀문서»에는 당신이 미처 몰랐던 그 때의 열기와 의지가 실려있습니다.''&amp;lt;br/&amp;gt;&lt;br /&gt;
''함께, 그 뜨거운 페이지를 열어보시겠습니까?''&amp;lt;/span&amp;gt;&amp;lt;/big&amp;gt;&amp;lt;/div&amp;gt;&lt;br /&gt;
&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이나자키로빈]]&lt;br /&gt;
[[딩잉잉]]&lt;br /&gt;
&lt;br /&gt;
=='''팀원'''==&lt;br /&gt;
*오현지(2022131143) [[뎐]]&amp;lt;br/&amp;gt;&lt;br /&gt;
*김여원(2023130209) [[이나자키로빈]]&amp;lt;br/&amp;gt;&lt;br /&gt;
*김하은(2022131345) [[호빵이👻]]&amp;lt;br/&amp;gt;&lt;br /&gt;
*박정원(2023130350) [[•ᴗ•]]&amp;lt;br/&amp;gt;&lt;br /&gt;
*최필중(2023130216) [[딩잉잉]]&amp;lt;br/&amp;gt;&lt;br /&gt;
&lt;br /&gt;
=='''기획의도'''==&lt;br /&gt;
===기획배경===&lt;br /&gt;
1945년 광복 이후 대한민국 국민들은 자유민주국가로서의 미래를 기대했으나 실상은 그러지 못했다.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보여주듯 현재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는 그것을 누리지 못한 앞선 세대들의 목숨을 바친 항쟁의 대가이다. 민주항쟁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의 핵심 동력이었다. 오늘날 우리나라 민주의식의 중요한 기둥이 되는 네 가지 항쟁을 선별하고 각 항쟁의 배경, 전개과정, 의의를 비롯해 세부적이고 자세한 내용에 대한 기사를 작성한다.&lt;br /&gt;
===기획목적===&lt;br /&gt;
작금의 현실까지 오기에는 수없이 많은 투쟁이 있었지만 4.19혁명, 부마항쟁, 5.18민주항쟁, 6월민주항쟁이라는 네 가지 사건을 살펴보기로 한 것은 가장 많이 다뤄지고, 가장 많이 알려진 사건이기 때문이다. 관련된 사건과 역사 인물들에 대해 자세히 적어 내어 민주항쟁의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지 않으면 알기 힘든 각 민주항쟁의 자세한 내막을 밝혀낸다.&lt;br /&gt;
===기대하는 바===&lt;br /&gt;
타임라인과 온톨로지를 활용해 내용의 전반적인 이해를 돕고 자세한 설명을 통해 사건의 자세한 내막을 들어낸다. 네 가지 항쟁을 각각 큰 목차로 설정하고 세부 기사를 그 내부에 작성해 독자의 관심과 수요에 부합하는 정보를 전달하는 데 효과적일 것으로 기대된다. 민주항쟁에 참여한 사람들의 희생과 투쟁에 대한 존경심을 부르고 역사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다.&lt;br /&gt;
===기여===&lt;br /&gt;
[[뎐]], [[이나자키로빈]], [[호빵이👻]]: 기획의도 페이지 작성&lt;br /&gt;
&lt;br /&gt;
=='''온톨로지'''==&lt;br /&gt;
{{NetworkGraph | title=민주항쟁.lst}}&lt;br /&gt;
[[민주항쟁.lst]]&lt;br /&gt;
===기여===&lt;br /&gt;
*[[뎐]]: 온톨로지 제작&lt;br /&gt;
=='''컨텐츠 구조'''==&lt;br /&gt;
===클래스(Class)===&lt;br /&gt;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color:white&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0%&amp;quot; | 클래스 !! style=&amp;quot;width:40%&amp;quot; | 설명 !! style=&amp;quot;45%&amp;quot; | 노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제||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대표 키워드인 민주항쟁을 주제로서 나타내었다 || 만주항쟁&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항쟁||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민주화운동 시기 발생했던 주요 운동들을 ‘항쟁’이라는 키워드로 분류하였다. || 4.19혁명, 부마항쟁, 5.18 민주화운동, 6월민주항쟁&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사건||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항쟁의 원인, 결과가 되는 사건을 정리하였다|| 3.15부정선거, 고려대 4.18학생시위, 3.15의거, YH사건, 10.26사태, 12.12 군사반란, 비상계엄령,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고문추방민족대행진, 4.13호헌조치, 6.29선언, 대통령직선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지역||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요 항쟁들이 일어났던 지역을 정리하였다|| 마산, 부산, 광주&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인물||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요사건들을 발생시킨 인물, 참여했던 인물을 묶어서 정리하였다|| 이승만, 이기붕, 김주열, 박정희, 김재규, 전두환, 신군부, 시민군, 박종철, 이한열, 노태우&lt;br /&gt;
|-&lt;br /&gt;
|}&lt;br /&gt;
===관계성(Relation)===&lt;br /&gt;
*&amp;lt;font color=#228B22&amp;gt;'''~은 ~에 속한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주요 항쟁들이 민주항쟁에 속함을 나타내거나 인물의 소속을 나타낸다.&lt;br /&gt;
***해당노드:&lt;br /&gt;
***#4.19혁명 -&amp;gt; 민주항쟁&lt;br /&gt;
***#부마항쟁 -&amp;gt; 민주항쟁&lt;br /&gt;
***#5.18민주화운동 -&amp;gt; 민주항쟁&lt;br /&gt;
***#6월 민주항쟁 -&amp;gt; 민주항쟁&lt;br /&gt;
***#전두환 -&amp;gt; 신군부&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의 원인이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어떠한 사건과 인과관계를 이루는 또다른 사건 혹은 인물을 설명한다.&lt;br /&gt;
***#이기붕 -&amp;gt; 3.15부정선거&lt;br /&gt;
***#김주열 -&amp;gt; 고려대 4.18학생시위&lt;br /&gt;
***#고려대 4.18학생시위 -&amp;gt; 4.19혁명&lt;br /&gt;
***#3.15의거 -&amp;gt; 4.19혁명&lt;br /&gt;
***#김주열 -&amp;gt; 4.19혁명&lt;br /&gt;
***#3.15부정선거 -&amp;gt; 3.15의거&lt;br /&gt;
***#YH사건 -&amp;gt; 부마항쟁&lt;br /&gt;
***#부마항쟁 -&amp;gt; 10.26사태&lt;br /&gt;
***#박정희 -&amp;gt; 10.26사태&lt;br /&gt;
***#비상계엄령 -&amp;gt; 5.18민주화운동&lt;br /&gt;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 -&amp;gt; 고문추방민족대행진&lt;br /&gt;
***#고문추방민족대행진 -&amp;gt; 4.13호헌조치&lt;br /&gt;
***#4.13호헌조치 -&amp;gt; 6월민주항쟁&lt;br /&gt;
***#6월민주항쟁 -&amp;gt; 6.29선언&lt;br /&gt;
***#6월민주항쟁 -&amp;gt; 대통령직선제&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을 발생시켰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사건과 그 사건을 직접적으로 발생시킨 인물을 연결한다.&lt;br /&gt;
***#이승만 -&amp;gt; 3.15부정선거&lt;br /&gt;
***#김재규 -&amp;gt; 10.26사태&lt;br /&gt;
***#신군부 -&amp;gt; 1212군사반란&lt;br /&gt;
***#전두환 -&amp;gt; 비상계엄령&lt;br /&gt;
***#노태우 -&amp;gt; 6.29선언&lt;br /&gt;
***#시민군 -&amp;gt; 5.18민주화운동&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에 희생되었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민주항쟁의 진압과정 등 에서 희생된 인물을 설명한다&lt;br /&gt;
***#김주열 -&amp;gt; 3.15의거&lt;br /&gt;
***#이한열 -&amp;gt; 6월 민주항쟁&lt;br /&gt;
***#박종철&amp;gt;박종철 고문치사 사건&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에서 발생했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설명한다.&lt;br /&gt;
***#3.15의거 -&amp;gt; 마산&lt;br /&gt;
***#부마항쟁 -&amp;gt; 부산&lt;br /&gt;
***#부마항쟁 -&amp;gt; 마산&lt;br /&gt;
***#5.18민주화운동 -&amp;gt; 광주&lt;br /&gt;
===기여===&lt;br /&gt;
*[[뎐]]: 컨텐츠 구조 페이지 작성&lt;br /&gt;
=='''4.19혁명'''==&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VPp4BmfDSv8VA2-oC-VATHzUYgadaiaQ9AlWXYiaiVk&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원인===&lt;br /&gt;
====[[3.15 부정선거]]====&lt;br /&gt;
[[파일:3.15부정선거_개표_모습.png|300픽셀|섬네일|오른쪽|3.15부정선거 당시 개표하는 사진&amp;lt;ref&amp;gt;사진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amp;lt;/ref&amp;gt;]]&lt;br /&gt;
1959년 대한민국은 제 4대 대통령 선거와 제 5대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당시 자유당에서는 12년째 대통령으로서 연임 중이던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이기붕]]'''을 부통령 후보로 선임하였다. 그러나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병세의 악화로 사망하게 되고,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은 확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선거의 초점은 자유당의 조병옥과 민주당의 장면 간의 선거전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본격적인 선거유세의 시작과 함께 정부와 여당의 잇따른 야당선거운동 방해사건으로 부정선거가 시작되었다. 1960년 3월 15일 선거가 시작된 이후에도 다양한 방법의 부정행위가 일어났고, 개표 결과 이승만과 이기붕의 득표가 100%에 육박하는 결과로 나오자 자유당은 득표수를 하향 조정해 최종 집계에 반영할 것을 지시했다. 결국 이승만 88.7%, 이기붕 79%의 득표율을 가지며 정, 부통령에 당선되었다.&amp;lt;ref&amp;gt;자세한 내용은 3.15부정선거 페이지 참조&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부정선거 반대시위, [[3.15 의거]]의 발생====&lt;br /&gt;
3.15 부정선거를 반대하는 시위는 초기에는 중, 고등학생들의 산발적인 시위로 전개되었다. 3월 15일 선거일 밤 경남 마산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으며,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여 1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amp;lt;br/&amp;gt;&lt;br /&gt;
3월 15일 실종되었던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4월 11일 마산부두에서 발견되자 마산 시민들은 시청, 파출소 등을 파괴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2차 시위가 일어난 것이다.&lt;br /&gt;
&lt;br /&gt;
====[[고려대학교 4.18 학생시위]]의 발생====&lt;br /&gt;
1, 2차 마산시위를 계기로 부정선거 무효와 이승만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났다. 이들은 '4.18 선언문'을 낭독하고 시내로 진출하였다. 이는 4월 19일 학생들과 일반 시민들이 가세한 대규모 시위로 이어지게 되었다.&lt;br /&gt;
====전국적인 4.19 혁명의 발생====&lt;br /&gt;
분노한 전국의 시민과 학생들이 다음 날인 4월 19일에 '이승만 하야와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며 대규모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경찰은 또다시 무차별 발포에 나섰고,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지만 이러한 압박에도 시민들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lt;br /&gt;
====이승만 대통령의 혼란 수습 시도====&lt;br /&gt;
이승만 대통령은 4.19 시위로 인한 정국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4월 20일 국무위원 전원과 자유당 당무위원 전원의 사표를 제출하도록 지시하였으며, 4월 23일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외무장관에 허정, 내무장관에 이호, 법무장관에 권승렬을 임명하는 등 개각을 단행하였다.&amp;lt;br/&amp;gt;&lt;br /&gt;
그러나 미국은 4.19직후 국무부 성명을 통해 한국에서 발생한 사태는 부정선거에 대한 '군중의 불만'을 반영한 것 이라고 했고, 양유찬 주미대사를 불러 '부정선거에 대한 철저한 조사', '경향신문 복간', '국가보안법 개정' 등을 촉구하는 각서를 전달하였다.&amp;lt;br/&amp;gt;&lt;br /&gt;
그리고 4월 25일, 이승만 정권에 분노한 전국 27개 대학 258명의 교수가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 모여 14개항의 시국 선언문을 발표하며 학생, 시민들과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들은 3.15 부정선거 및 4.19 사태의 책임을 지고 대통령이 물러날 것을 주장하였으며, &amp;quot;학생들의 피에 보답하자&amp;quot;는 플랜 카드를 앞세워 국회의사당까지 행진하였다. &lt;br /&gt;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lt;br /&gt;
무력 진압에도 대규모 시위가 이어지며 시민들은 완강하게 투쟁하였다. 4월 26일 시위대가 경무대로 다시 집결하는 등 사태가 심각하게 진행되자, 오전 10시 30분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 성명을 발표하였다. 4월 27일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하며 대통령직을 하야하고 하와이로 망명하였으며 자유당 정권도 끝나게 된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우리 국민들, 특히 학생과 청년들의 주도로 이루어진 4.19 혁명은 학생과 일반 대중이 단결하여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아시아 최초의 시건이다. 4.19혁명은 부마항쟁, 5.18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그리고 2017년 촛불시위에 이르기 까지 정권에 대항하는 국민들이 단합을 이루는 초석이 되었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도 시민 저항권에 대한 근거로써 4.19혁명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문구가 있다.&lt;br /&gt;
===기여===&lt;br /&gt;
[[뎐]]: 4.19혁명 페이지 원인, 의의 작성 &lt;br /&gt;
&lt;br /&gt;
[[•ᴗ•]]: 4.19혁명 페이지 전개 작성&lt;br /&gt;
&lt;br /&gt;
=='''부마항쟁'''==&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bK7zjpPvBsC7rFRPmsiHCUYhyWt2VXOv8SYyaBTND4Y&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원인===&lt;br /&gt;
====[[유신 헌법]]과 [[긴급조치]]====&lt;br /&gt;
1971년 선거에서 김대중을 누르고 대통령에 3선된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해 국회 해산,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등 법의 일부 기능을 정지시키고 전국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했다.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된 이른바 유신헌법에 의해 제정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법」 에 의거해 박정희가 제8대 대통령으로 재차 당선되었고, 이 유신 헌법이 발효된 기간을 유신 체제라고 부른다. 유신 체제는 행정, 입법, 사법의 3권을 모두 쥔 대통령이 종신 집권할 수 있도록 설계된 1인 대통령제였다. 박정희는 유신 헌법에 의거해 대통령의 권한으로 취할 수 있었던 특별조치인 긴급조치를 선포함으로써 헌법에 반대하는 시위 및 운동과 방송, 언론 활동을 하는 반정부 인사들을 연행, 체포, 고문하는 등 억압을 가했다.&lt;br /&gt;
&lt;br /&gt;
====한국경제의 위기====&lt;br /&gt;
1970년대 말 한국경제는''' [[오일쇼크]]'''라는 세계경제의 위기와 결합해 가라앉고 말았다. 경제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정부는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과 함께 '''[[경제안정화정책]]'''을 수용했고, 중소자본가, 봉급생활자, 도시 노동자와 농민 등에 안정화 비용을 부과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이와 같은 안정화 정책은 경제위기로 어려운 처지에 있던 중소기업들의 도산을 가속하여 기업 부도율이 치솟고 하층민들을 더 깊은 고통에 몰아넣었다. 특히 '''부가가치세'''를 도입한 이후 물가가 상승하면서 일상에 타격을 주었으며, 노동집약적 제조업이 집중되었던 부산과 마산에서는 상황이 더욱 심각하여 1979년 부산 지역 부도율은 서울의 3배에 달했다.&lt;br /&gt;
&lt;br /&gt;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lt;br /&gt;
한 시대의 대격변을 예고하는 단초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시작됐다. 1979년 8월 9일 오전, 신민당의 당사 4층 강당에서는 봉제업체인 YH무역주식회사의 여성노동자 200여명이 기업주의 폐업에 반발하여 폐업조치 철회 농성을 벌였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인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신민당이 당사 건물을 내준 것이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폭력을 동원하여 농성을 해산시켰다. 결국 이 사건은 노동 탄압 사건을 넘어선 야당에 대한 정치 탄압 사건으로 발전하였다.&lt;br /&gt;
&lt;br /&gt;
이날 경찰은 1000여명의 진압대원을 신민당사로 난입시켜 농성을 하고 있던 174명의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로 밖으로 끌어냈다. 또한 경찰은 총재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김영삼 총재와 당 간부들을 끌어내면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박정희 정권은 이 노동자 농성 사건을 빌미로 신민당 분열공작을 시도하였다. 유신정권과 비밀리에 결탁한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 3명이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 부총재 전원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접수시켰다. 그리고 법원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신민당 총재단의 직무 집행을 정지시키고 박정희 정권의 꼭두각시를 총재직무대행으로 선임하였다.&lt;br /&gt;
&lt;br /&gt;
아울러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의 동교동 자택을 전면 봉쇄하였고,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에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끊으라고 요구한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즈』 회견내용을 “반헌정적, 반민족적 작태”로 몰아서 국회에 징계 동의안을 제출했다. 10월 4일 오후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의원 159명은 여당 총회장에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제명 결의안을 '''기습적으로''' 처리해 버렸다. 노사분규 사태로 시작된 사건이 제1야당 당수의 의원직 제명으로 확대된 정치적 사태를 지켜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유신체제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이 고조되었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유신 철폐, 독재 타도!'''''   &amp;lt;small&amp;gt;-10.16 부마항쟁 당시 시위대의 구호&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부산대학교 민주선언문, 학생 시위에서 시민항쟁으로====&lt;br /&gt;
[[파일:부산시위대.jpg|250px|섬네일|오른쪽|광복동을 지나는 시위 행렬]]&lt;br /&gt;
1979년 10월 16일 아침 10시 부산대학교 구내 도서관 앞에서 약 500명의 학생들이 모여 “유신정권 물러가라”, “정치탄압 중지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반정부 시위를 벌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민주선언문」]]'''을 통해 민주화, 언론 자유, 인권 보장의 신념을 확인하고, “제도화된 폭력성과 조직적 악의 근원인 유신헌법과 독재집권층의 퇴진만이 5천 만 겨레의 통일의 첫걸음이라고 주장하면서 형제의 피를 요구하는 자유와 민주의 깃발을 우리가 잡고 반민주의 무리, 불의의 무리들을 향해 외치며 나아가자”라고 선언하였다. 이후 학생들은 교문을 나가 거리에서 시위했다. 이때 학생 수는 약 5,000명으로 불어나 있었고, 광복동과 남포동 등 부산시내 중심가까지 진출해 애국가 등의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며, 이를 제지하려는 경찰과 이곳저곳에서 충돌하였다. 비슷한 시간, 부산 동아대학교에서도 1,000여 명의 학생이 부산대학교 학생과 합류하여 가두시위를 벌였다. 부산대학교 데모로 학생 수백 명이 연행되고 100여 명이 다쳤지만 이튿날인 10월 17일에는 시위가 더욱 격화되어 학생들뿐만 아니라 다수의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학생 시위는 점차 시민항쟁의 양상을 띠어갔다.''' 밤늦게까지 계속된 시위에서 시민들은 충무파출소, 한국방송공사, 서구청, 부산세무서 등을 파괴하였고, 경찰차량을 불태우거나 파손시켰다.&lt;br /&gt;
&lt;br /&gt;
====마산의 시민항쟁====&lt;br /&gt;
&lt;br /&gt;
민주항쟁은 18일에 마산으로 확산되었다. 늦은 오후에는 1,000여 명의 경남대학교 학생들이 마산 시내 번화가에 산발적으로 집결했으며, 일부시민들도 가담해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어두워진 다음 학생과 시민들의 데모는 격화되어 파출소, 공화당사, 방송국, 신문사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파괴하였다. 이튿날인 19일에는 시위가 더욱 치열해져 마산 시내는 한때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저녁 8시경, 시위대는 경남대학과 마산대학&amp;lt;ref&amp;gt;1985년 창원대학으로 교명이 변경되었으며, 현재의 마산대학교와 다르다.&amp;lt;/ref&amp;gt;, 그리고 고등학생까지 합세하여 약 8,000명에 이르렀으며, 시내 곳곳에서 몽둥이를 들고 동사무소와 파출소로 몰려가 시설을 파괴하였고, 경찰차량에 불을 질렀다.&lt;br /&gt;
&lt;br /&gt;
====부산 계엄령, 마산 위수령====&lt;br /&gt;
[[파일:계엄포고문.jpg|270px|섬네일|왼쪽|부산지역에 내려진 계엄포고문을 읽고 있는 시민들]]&lt;br /&gt;
부산대학교 시위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박정희 정부는 학생 시위로 시작된 시위가 대규모 시민항쟁으로 사태가 심상치 않게 확대되어가자 강경책으로 대응했다. 정부는 18일 자정을 기해 '''부산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동원한 과격한 진압'''을 통해 시위 참여자들과 이를 방조한 일반 시민들까지 1,058명을 연행하고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으며, 부산지구 계엄사령부는 각 대학 휴교조처와 야간통행금지시간을 2시간 연장하는 등의 항이 담긴 포고문을 발표했다.&lt;br /&gt;
&lt;br /&gt;
부산에 계엄령이 선포된 이튿날인 19일에 마산 시위가 확대됨에 따라 그 다음날인 10월 20일 정오, 정부가 '''마산 및 창원 지역에 위수령을 발령'''해 통행금지 시간이 연장되고, 경남대학 등에는 휴교조처가 취해졌으며, 24일에는 깡패를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132명을 검거, 23명을 구속했다. 이렇게 '''표면적으로는 부마민주항쟁이 단시간에 진압되는 듯 보였지만, 항쟁은 이미 유신체제의 균열을 불러오고 있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항쟁의 전개 과정에서 볼 수 있듯, 부마민주항쟁에서 특징적인 것은 먼저 시위대의 가장 큰 분노의 대상이 공화당사와 경찰·파출소였다는 점, 다음으로는 “부가가치세를 철폐하라”, “잘 먹고 잘 살아라”등의 구호에서 드러나듯이 세무서에 대한 공격, 그리고 신문사와 방송국에 대한 공격을 들 수 있다.&lt;br /&gt;
&lt;br /&gt;
부마민주항쟁은 1970년대 유신체제 밑에서 쌓였던 침묵하는 언론, 조세, 시민을 억압하는 경찰에 대한 불만 등 정치·사회·경제·문화·종교 등 각 부문에 걸친 여러 모순의 폭발이었고, 헌법 개정과 긴급조치로 겨우 유지되던 유신체제와 박정희 정권의 붕괴를 촉진시킨 결정적인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10.26사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또한 이 사건은 1980년 5월 18일의 광주 민주화운동과 1987년 6월 민주항쟁에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된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억눌린 우리 역사&amp;lt;/br&amp;gt;터져나온 분노&amp;lt;/br&amp;gt;매운 연기 칼바람에도&amp;lt;/br&amp;gt;함성소리 드높았던&amp;lt;/br&amp;gt;동트는 새벽벌&amp;lt;/br&amp;gt;시월이 오면&amp;lt;/br&amp;gt;핏발 선 가슴마다&amp;lt;/br&amp;gt;살아오는 십 일육&amp;lt;/br&amp;gt;동지여 전진하자&amp;lt;/br&amp;gt;깨치고 나가자&amp;lt;/br&amp;gt;뜨거운 가슴으로&amp;lt;/br&amp;gt;빛나는 내일로'''''&amp;lt;/br&amp;gt;&amp;lt;small&amp;gt;-'''부산대학교''' 새벽벌도서관 10.16 기념비&amp;lt;/small&amp;gt;&amp;lt;/div&amp;gt;&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호빵이👻]]: 부마항쟁 페이지 전체 작성&amp;lt;/br&amp;gt;&lt;br /&gt;
[[이나자키로빈]]: 부마항쟁 원인 중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 작성&lt;br /&gt;
&lt;br /&gt;
=='''5.18민주화운동'''==&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AMetwTuXYHTCXINqr7ZJpzO5CHFEMQO5-Uqau51RkXA&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원인===&lt;br /&gt;
====유신체제의 붕괴====&lt;br /&gt;
&lt;br /&gt;
[[파일:김재규.jpg|섬네일|오른쪽|암살 당시 상황을 재현하는 김재규]]&lt;br /&gt;
&lt;br /&gt;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amp;lt;small&amp;gt; - 김재규&amp;lt;/small&amp;gt;&lt;br /&gt;
1979년 10월 4일 신민당 총재 김영삼이 국회에서 의원직을 제명당하자 10월 15부터 10월 20까지 부산 · 마산 등지에서는 부마항쟁이 일어났고, 이의 해결을 둘러싼 노선대립으로 갈등 중 10월 26일 &amp;lt;ins&amp;gt;[[김재규]]&amp;lt;/ins&amp;gt;가 박정희를 살해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ins&amp;gt;[[10.26 사태]]&amp;lt;/ins&amp;gt;의 사후 수습과정에서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을 중심으로 신군부 세력이 부상하였으며, 이들은 &amp;lt;ins&amp;gt;[[12.12 사건]]&amp;lt;/ins&amp;gt;의 하극상을 통하여 군부를 장악하였다. 1980년 2월 29일 김대중 등이 복권되었으나 그 해 봄, 신군부는 최규하 과도 정부를 유명무실하게 하고 국민들이 요구하는 민주주의와 이를 위한 명확한 정치일정 제시를 거부하면서 권력기반을 구축하였다.&lt;br /&gt;
&lt;br /&gt;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lt;br /&gt;
한 시대의 대격변을 예고하는 단초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시작됐다. 1979년 8월 9일 오전, 신민당의 당사 4층 강당에서는 봉제업체인 YH무역주식회사의 여성노동자 200여명이 기업주의 폐업에 반발하여 폐업조치 철회 농성을 벌였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인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신민당이 당사 건물을 내준 것이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폭력을 동원하여 농성을 해산시켰다. 결국 이 사건은 노동 탄압 사건을 넘어선 야당에 대한 정치 탄압 사건으로 발전하였다.&lt;br /&gt;
&lt;br /&gt;
이날 경찰은 1000여명의 진압대원을 신민당사로 난입시켜 농성을 하고 있던 174명의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로 밖으로 끌어냈다. 또한 경찰은 총재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김영삼 총재와 당 간부들을 끌어내면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박정희 정권은 이 노동자 농성 사건을 빌미로 신민당 분열공작을 시도하였다. 유신정권과 비밀리에 결탁한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 3명이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 부총재 전원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접수시켰다. 그리고 법원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신민당 총재단의 직무 집행을 정지시키고 박정희 정권의 꼭두각시를 총재직무대행으로 선임하였다.&lt;br /&gt;
&lt;br /&gt;
아울러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의 동교동 자택을 전면 봉쇄하였고,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에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끊으라고 요구한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즈』 회견내용을 “반헌정적, 반민족적 작태”로 몰아서 국회에 징계 동의안을 제출했다. 10월 4일 오후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의원 159명은 여당 총회장에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제명 결의안을 '''기습적으로''' 처리해 버렸다.&lt;br /&gt;
&lt;br /&gt;
노사분규 사태로 시작된 사건이 제1야당 당수의 의원직 제명으로 확대된 정치적 사태를 지켜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유신체제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이 고조되었다. 또한 이 사건은 그동안 다소 주춤하던 대학가에 반유신 반독재 운동의 열기가 다시 확산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청춘을 바쳐, 학생 운동====&lt;br /&gt;
&lt;br /&gt;
[[파일:서울의_봄.JPG|섬네일|오른쪽|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앞에 모인 시위대]]&lt;br /&gt;
&lt;br /&gt;
군부의 재집권 야욕에 대한 국민적 저항은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표출되었다. 1980년 3월, 서울대 총학생회 출범을 시작으로 4월 초순에는 전국의 주요 대학들이 총학생회를 결성하기 시작하였다. 대학별로 독재 정권에 아부했던 어용교수와 족벌사학 퇴진 운동을 벌였고, 특히 병영집체훈련(당시 대학 신입생들은 의무적으로 군부대에 10일 간 입대하여 각종 군사훈련을 이수해야 했다.) 거부가 주요 이슈로 전면 등장했다. 각 대학의 병영집체훈련 거부운동이 본격화되고 전국적인 쟁점으로 떠오르자 신군부는 신문, 방송을 통해 ‘학생들의 안보의식 결여’를 비난하고 교내 시위·농성을 집중적으로 보도하게 했다.  5월 1일에 서울대가 입영훈련 거부투쟁 철회를 결정하고 ‘계엄령 해제’와 ‘유신잔당 퇴진’, ‘정부개헌중단’과 ‘노동 3권 보장’ 등을 요구하기 시작하면서 대학가는 이제까지의 학내 문제 중심의 운동에서 정치개혁을 위한 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그간 정부와 대학 간에 팽팽하게 유지되던 긴장 관계는 폭발 직전으로 내닫게 된 것이다.&lt;br /&gt;
&lt;br /&gt;
약 열흘 간의 대정부 투쟁을 준비한 대학가는 5월 10일 고려대 총학생회장실에서 열린 ‘총학생회장단 회의’에 참석한 전국 23개 대학 대표들은 ‘비상계엄의 즉각 해제’와 ‘전두환, 신현확 등 유신잔당 퇴진’ 등을 결의하고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정세에 대한 공동대처 방안을 마련했다. 이후 5월 13일부터 5월 14일에 걸쳐 서울 · 부산 · 대구 · 광주 등 37개 대학에서 계엄철폐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5월 15일에는 서울역에서 시위가 발생하는 등 학생시위는 서울시가지를 거의 마비시키는 등 야간까지 지속되어 사태가 절정에 달하면서 신군부 세력을 위협하였다. 5월 16일 24개 대학 학생대표들은 당분간 시국의 추이를 관망하기로 결정하고 가두시위를 중단하면서 소강상태에 돌입하는 듯하였다.&lt;br /&gt;
&lt;br /&gt;
====1980년 봄의 광주====&lt;br /&gt;
5월 17일 신군부 세력이 이전까지는 제주도를 제외한 지역에 한정되었던 비상계엄을 전국에 확대하는 조치인 계엄포고 10호(17일 24시에 발효: 각 대학 휴교령 포함)를 밤 9시 40분에 의결하고 밤 11시 40분에 발표하면서 밤 11시를 전후한 시점부터 김대중 · 김종필이 연행되는 등 권력형 부정축재자 및 소요조종 혐의자, 학생 시위 주동자가 체포되었다. 이날 밤 광주지역의 사회운동·학생운동의 지도자도 상당수가 검거되었다. 광주의 검거대상자는 전남대 12명, 조선대 10명 등 총 22명이었다. 전남에서 계엄합동수사단은 광주505보안대가 중심이고, 중앙정보부, 경찰 등이 보조역할을 했다. 전남 계엄합동수사단은 22대 차량과 86명의 인원이 출동해 정동년 등 복적생들과 대학의 총학생회 간부들을 집중 검거했다.&lt;br /&gt;
&lt;br /&gt;
한편 육군본부는 14일 오전 7시55분에 국가 중요 보안목표와 주요대학에 군 병력 배치 명령을 하달했다. 이 명령에 따라 전남북계엄분소장인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광주 시내 주요 시설물에 이날 오후부터 계엄병력을 배치했다. 31사단 96연대 병력이 광주시내 KBS건물에 42명, MBC 21명, CBS 11명, VOC(전일방송) 11명 등 주요 방송사 건물에 배치돼 경비에 들어간 것이다.&lt;br /&gt;
&lt;br /&gt;
이날 오후 전교사령관은 7공수여단의 광주배치에 따른 수송수단 지원도 미리 협의했다. 그리고 5월 8일부터 16일 사이에 공수부대 수뇌부들도 헬기를 타고 서울에서 내려와 광주 상무대의 전투병과교육사령부를 방문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광주에서 시위가 격화되면 즉각적으로 최정예 군부대를 동원해서 진압할 준비를 철저하게 갖추고 있었다. 5월 18일에 시작된 광주의 비극은 그 이전에 이미 시한폭탄처럼 준비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lt;br /&gt;
{{구글지도 | 위도=35.175961433346885 | 경도=126.90865311973532 | 줌=13 }}  [[파일:금남로.JPG|섬네일|오른쪽|금남로 앞에 집결한 버스와 시민군]]&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18일&amp;lt;/span&amp;gt;&lt;br /&gt;
휴교령이 내려질 경우 교문 앞에서 집결한다는 결의에 따라 학생들은 5월 18일 오전 전남대학교 앞에 모였다. 공수부대원들이 전남대 앞 시위를 저지하자 대학생들은 광주역에 재집결해서 시위를 이어갔다. 시위대가 점차 늘어나면서 공수부대원이 시내에서 시위진압에 나섰으며 18일 오후 1시부터 무차별 진압작전이 이루어져 부상자가 속출하였다.&lt;br /&gt;
&lt;br /&gt;
군인들이 금남로 등 시내 중심가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이나 여자를 마구 구타하고 짓밟으며 찌르는 등의 잔혹 행동을 하자 시민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이에 시위대는 오후 4시 이후 파출소 파괴 등 적극공세에 나섰다. '''계엄군의 과잉 무력진압은 시위를 해산시키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오히려 시민들을 단결시켰으며, 결국 19일 시민 · 학생 연대가 발생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lt;br /&gt;
&lt;br /&gt;
 '''''광주 애국 시민 여러분! 이것이 웬 말입니까? 웬 벼락이란 말입니까? 죄 없는 학생들을 총칼로 찔러 죽이고 몽둥이로 두들겨 트럭으로 실어가며 부녀자를 발가벗겨 총칼로 찌르는 놈들이 이 누구란 말입니까? 이제 우리가 살길은 전시민이 하나로 뭉쳐 청년 학생들을 보호하고 유신잔당과 극악무도한 살인마 전두환 일파와 공수 특전단 놈들을 한놈도 남김없이 쳐부수는 길 뿐입니다. 우리는 이제 다 보았습니다. 다 알게 되었읍니다. 왜 학생들이 그토록 소리 높이 외쳤는가를, 우리의 적은 경찰도 군대도 아닙니다. 우리의 적은 전국민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바로 유신잔당과 전두환 일파 그놈들입니다.''''' &amp;lt;small&amp;gt; - 1980년 5월 19일에 '광주시민민주투쟁회'명의의 호소문&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19일&amp;lt;/span&amp;gt;&lt;br /&gt;
19일 오전에는 일시적 소강상태였으나 오후 들어서 분노한 학생 · 시민들이 군 · 경찰과 공방전을 벌이면서 시위는 점차 격화되었다. '''시민들은 공포감에서 벗어나 자신의 생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단순한 학생시위에서 시민봉기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계엄군은 시위대를 포위하여 구타하였으며 일부 고등학생까지 포함된 시위대는 돌과 화염병으로 저항하였고 파출소와 방송국 등에 침입하였다. 뒤처진 공수부대를 공격하거나 고립된 차량을 포위하기도 하였으며 총과 방패를 빼앗기도 하였고, 오후 4시 50분 시민들에게 포위된 계엄군의 장갑차에서 최초의 발포가 있었다. 19일 밤비가 내리는 가운데 시위가 산발적으로 계속되었으며, 20일 오전 비가 그치고 대규모 시위는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오후부터 다시 시작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20일&amp;lt;/span&amp;gt;&lt;br /&gt;
'''20일 오후 6시부터 택시와 버스 운전 기사들이 광주역과 무등경기장에 모여 대형 버스와 트럭을 앞세우고 일시에 금남로에 집결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들을 앞세운 시위는 계엄군을 몰아내는 데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였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5.18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에 &amp;lt;ins&amp;gt;[[지대한 영향]]&amp;lt;/ins&amp;gt;을 끼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학생 운동에 뛰어든 많은 대학생들은 대학교에 들어와서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의 실상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아 학생 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군부정권은 5.18 이후로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다. 전두환은 김대중 등에게 '광주 사태'의 책임을 물어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했고,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 선언을 한 직후, 8월 27일 소위 체육관 선거를 통해 전두환은 대통령 자리를 탈취했다.&lt;br /&gt;
&lt;br /&gt;
지역적인 면에서는 '''광주광역시를 비롯한 전라도 지역의 트라우마'''로 작용해 이후의 민주정의당 및 &amp;lt;ins&amp;gt;[[3당 합당]]&amp;lt;/ins&amp;gt;으로 이어지는 보수 세력에 대해 적대심을 가지고, 민주당계 정당의 표밭이 되는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미 박정희 정부 시절부터 유무형의 정치적인 차별을 받고 있었지만 5.18의 참상은 전라도가 다시는 보수 세력을 지지하지 않게 만들 정도로 심각한 사건이며 호남소외론의 가장 결정적인 명분이 되었다.&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이나자키로빈]]: 5.18 민주화운동 페이지 전체 작성&lt;br /&gt;
&lt;br /&gt;
=='''6월민주항쟁'''==&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NnXWs5RMTIf-6DOEu9_rX2k4mgzUk1AQHYneCuwXN1Q&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원인===&lt;br /&gt;
====[[박종철고문치사사건]]====&lt;br /&gt;
&lt;br /&gt;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박종철은 1987년 1월 13일 자정 경 하숙집에서 치안본부(現 경찰청)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게 연행되었다.‘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이자 ‘민주화추진위원회’ 지도위원으로 수배 받고 있었던 박종운을 잡기위해 연행한 것이었다. 취조실로 연행해간 공안 당국은 박종철에게 박종운의 소재를 물었으나, 박종철은 순순히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경찰은 잔혹한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가하였고, 박종철은 끝내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했다. 당시 경찰은 초기 발표에서 고문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라고 사망원인을 발표하였으나, 시체부검 결과 전기고문과 물고문에 의한 살인인 것으로 밝혀졌다.&lt;br /&gt;
&lt;br /&gt;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저 죽음을 응시해주길 바란다. 저 죽음을 끝내 지켜주길 바란다. 저 죽음을 다시 죽이지 말아주길 바란다.''''' &amp;lt;small&amp;gt; - 동아일보 1987년 1월 17일자 김중배 칼럼 중&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사건 진상의 일부가 공개되자 2월 7일 전국 주요 도시에서 &amp;quot;박종철군 범국민추도식&amp;quot; 및 도심 시위가 열렸고 이어 3월 3일에는 &amp;quot;박종철군 49재와 고문추방 국민대행진&amp;quot;과 함께 또 다른 시위가 열렸다. 이후 4월 2일 서울대학교 학부모 130여 명이 ‘건국대학교 사태‘ 등 시국관련 구속학생의 징계철회를 요구하며 철야 농성을 벌였다.&lt;br /&gt;
&lt;br /&gt;
====정부의 개헌논의 유보====&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lt;br /&g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JazJFsgu4oc?si=sOE7w1tz-jKVztC9&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lt;br /&g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그러나 전두환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1987년 4월 13일 [[4.13호헌조치]]라 불리는 ‘대통령 특별담화‘를 발표, 개헌(改憲) 논의를 유보하겠다고 밝혔다. [[4.13호헌조치]]에서 전두환은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와 대통령 선거는 자유 경선의 분위기가 보장되는 가운데 1987년 내에 공정한 선거관리를 통해 차질 없이 실시할 수 있게 모든 노력을 다할것‘이라고 다짐했으며, 또 ‘민정당의 후임 대통령 후보는 조속한 시일 안에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인물 가운데서 당헌 절차와 민주 방식에 따라 전당대회에서 선출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호헌조치‘라는 그 이름대로 현행 헌법에 따라 권력을 이양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국민들의 큰 기대를 얻을 것이라 믿었으나, 기대는 커녕 오히려 반발을 가져오는 요인이 되고 말았다. 곧바로 이튿날인 4월 14일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 등 각계 인사들이, 호헌 조치를 비판하는 시국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정부 최루탄에 의한 [[이한열]] 사망====&lt;br /&gt;
[[파일:이한열.jpg|200px|섬네일|오른쪽|최루탄에 피격당한 후 이종창에게 부축받는 이한열]]&lt;br /&gt;
먼저 1987년 5월 27일 야당과 재야, 종교계 등이 힘을 모아 ‘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여당인 민주정의당에서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6월 10일에 맞춰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6 · 10국민대회]])’를 치르기로 결정하였다. 대학생들은 국본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를 중심으로 6 · 10국민대회에 호응하여 6월 초부터 각 대학별로 연일 집회와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6 · 10국민대회]] 하루 전날인 6월 9일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교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는 곧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학생들은 물론 시민들의 분노가 들끓었다. 이러한 분노 속에서 6 · 10국민대회가 열렸다. 경찰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6 · 10국민대회가 열리는 성공회대성당을 원천 봉쇄하였다. 그 결과 6 · 10국민대회는 대회장에 미리 들어가 있던 소수의 인원만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대회 예정 시간인 오후 6시 이전부터 서울 시내 곳곳에서 대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시민들도 다양한 방식으로 6 · 10국민대회와 학생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날 밤 늦게까지 시위를 벌이던 학생들은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이후 5일 동안 농성을 계속하였다. 애초 계획된 것은 아니었지만 대학생들의 명동성당 농성은 6 · 10국민대회가 단발성 행사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인 저항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lt;br /&gt;
&lt;br /&gt;
====민주항쟁 확산====&lt;br /&gt;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로 개헌하라!'''''   &amp;lt;small&amp;gt;-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제시한 슬로건&amp;lt;/small&amp;gt;&lt;br /&gt;
명동성당 농성을 거치며 항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유월항쟁의 전국화 과정에는 일정한 패턴이 존재하였다. 6월 10일 서울 외에도 전국 주요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위가 벌어졌지만, 15일까지 항쟁의 중심은 6 · 10국민대회와 명동성당 농성이 전개된 서울이었다. 하지만 6월 15일 경부터는 부산, 대전, 진주 등에서 격렬한 시위가 전개되었다. 그러다가 6월 20일부터 대규모 시위가 광주, 전주, 순천, 익산 등 호남 지방으로 옮겨졌다. 6 · 10국민대회 이후 약 20일 동안 전국 곳곳에서 매일 평균 100회 이상의 시위가 동시다발로 벌어졌다. 특히 6월 18일 ‘최루탄추방대회’와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은 전국 곳곳에서 한꺼번에 1백만 명 이상이 참여하였다. 갈수록 참가 지역이 전국 곳곳으로 확산되어 대도시, 중소도시뿐만 아니라 농촌 지역의 군 단위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6월 26일 하루에만 37~38개 시 · 군에서 시위가 동시에 벌어졌다. 유월항쟁에 참가한 연 인원은 400~500만 명으로 추산된다.&lt;br /&gt;
&lt;br /&gt;
반면 유월항쟁의 전국적 동시다발 시위는 경찰 병력을 분산시켰다. 분산된 경찰 병력으로는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거센 시위의 물결을 막아 낼 수 없었다. 경찰이 시위 진압에 최루탄을 남발하면서 최루탄도 점차 고갈되기 시작하였다. 유월항쟁 기간 동안 경찰이 사용한 최루탄만 총 67만 발이 넘었다. 더불어, 전두환 정권이 집권 내내 강조했던 88서울올림픽이 얼마 남지 않아 미국 등 국제사회의 이목이 집중된 상황에서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운동 때처럼 유혈 사태와 대량 학살을 반복하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무엇보다 군대를 동원하더라도 이러한 대규모 시민 항쟁을 진압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결국 경찰력으로 항쟁을 막기 힘들고, 군대 투입도 어렵다고 판단한 전두환 정권은 1987년 6월 29일 ‘ 6 · 29민주화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하였다. 그리고 그동안 의식불명 상태에 있었던 이한열이 7월 5일 끝내 사망하였다. 5일장 후 7월 9일 치러진 이한열의 노제에 100만 명의 인파가 모인 것을 끝으로 약 한 달 동안 지속된 유월항쟁은 마무리되었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1987년 6월항쟁이 '''대통령[[직선제]] 개헌'''이라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이 항쟁에 동참한 학생과 시민들의 요구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제시한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 개헌’이라는 슬로건으로 모아졌기 때문이었다. 유월항쟁은 이러한 민주화 세력의 통합성, 즉 각기 다른 성격과 지향을 가진 여러 주체들이 모두 동의할 수 있는 ‘최소 강령’하에 ‘최대 연합’으로 결집하였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딩잉잉]]:6월민주항쟁 페이지 전체 작성&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기밀문서]]&lt;br /&gt;
[[분류:4.19혁명관련]]&lt;br /&gt;
[[분류:부마항쟁관련]]&lt;br /&gt;
[[분류:5.18민주화운동관련]]&lt;br /&gt;
[[분류:6월민주항쟁관련]]&lt;br /&gt;
[[분류:뎐]]&lt;br /&gt;
[[분류:이나자키로빈]]&lt;br /&gt;
[[분류:호빵이👻]]&lt;br /&gt;
[[분류:•ᴗ•]]&lt;br /&gt;
[[분류:딩잉잉]]&lt;/div&gt;</summary>
		<author><name>딩잉잉</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8%B0%EB%B0%80%EB%AC%B8%EC%84%9C&amp;diff=35964</id>
		<title>기밀문서</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8%B0%EB%B0%80%EB%AC%B8%EC%84%9C&amp;diff=35964"/>
		<updated>2023-12-11T16:16:4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딩잉잉: /* 컨텐츠 주제 */&lt;/p&gt;
&lt;hr /&gt;
&lt;div&gt;=='''컨텐츠 주제'''==&lt;br /&gt;
&lt;br /&gt;
[[파일:시위대.png|400픽셀|left]][[파일:이한열사진.jpeg|400픽셀|center]][[파일:진압.png|400픽셀|righ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amp;lt;big&amp;gt;'''&amp;lt;span style=&amp;quot;color:#CD0000&amp;quot;&amp;gt;투쟁의 불꽃, 자유의 환호&amp;lt;/span&amp;gt;'''&amp;lt;br/&amp;gt;&amp;lt;br/&amp;gt;&lt;br /&gt;
''대한민국은 시민들의 투쟁과 희생을 거쳐, 피와 땀으로 민주화를 이룩하였습니다.''&amp;lt;br/&amp;gt;&lt;br /&gt;
''그들은 어둠을 밝히기 위해 항거의 불꽃을 태웠고, 그 불꽃은 자유를 외쳤으며, 그 외침은 세상을 움직였습니다.''&amp;lt;br/&amp;gt;&lt;br /&gt;
''이 «기밀문서»에는 당신이 미처 몰랐던 그 때의 열기와 의지가 실려있습니다.''&amp;lt;br/&amp;gt;&lt;br /&gt;
''함께, 그 뜨거운 페이지를 열어보시겠습니까?''&amp;lt;/span&amp;gt;&amp;lt;/big&amp;gt;&amp;lt;/div&amp;gt;&lt;br /&gt;
&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이나자키로빈]]&lt;br /&gt;
[[딩잉잉]]&lt;br /&gt;
&lt;br /&gt;
=='''팀원'''==&lt;br /&gt;
*오현지(2022131143) [[뎐]]&amp;lt;br/&amp;gt;&lt;br /&gt;
*김여원(2023130209) [[이나자키로빈]]&amp;lt;br/&amp;gt;&lt;br /&gt;
*김하은(2022131345) [[호빵이👻]]&amp;lt;br/&amp;gt;&lt;br /&gt;
*박정원(2023130350) [[•ᴗ•]]&amp;lt;br/&amp;gt;&lt;br /&gt;
*최필중(2023130216) [[딩잉잉]]&amp;lt;br/&amp;gt;&lt;br /&gt;
&lt;br /&gt;
=='''기획의도'''==&lt;br /&gt;
===기획배경===&lt;br /&gt;
1945년 광복 이후 대한민국 국민들은 자유민주국가로서의 미래를 기대했으나 실상은 그러지 못했다.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보여주듯 현재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는 그것을 누리지 못한 앞선 세대들의 목숨을 바친 항쟁의 대가이다. 민주항쟁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의 핵심 동력이었다. 오늘날 우리나라 민주의식의 중요한 기둥이 되는 네 가지 항쟁을 선별하고 각 항쟁의 배경, 전개과정, 의의를 비롯해 세부적이고 자세한 내용에 대한 기사를 작성한다.&lt;br /&gt;
===기획목적===&lt;br /&gt;
작금의 현실까지 오기에는 수없이 많은 투쟁이 있었지만 4.19혁명, 부마항쟁, 5.18민주항쟁, 6월민주항쟁이라는 네 가지 사건을 살펴보기로 한 것은 가장 많이 다뤄지고, 가장 많이 알려진 사건이기 때문이다. 관련된 사건과 역사 인물들에 대해 자세히 적어 내어 민주항쟁의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지 않으면 알기 힘든 각 민주항쟁의 자세한 내막을 밝혀낸다.&lt;br /&gt;
===기대하는 바===&lt;br /&gt;
타임라인과 온톨로지를 활용해 내용의 전반적인 이해를 돕고 자세한 설명을 통해 사건의 자세한 내막을 들어낸다. 네 가지 항쟁을 각각 큰 목차로 설정하고 세부 기사를 그 내부에 작성해 독자의 관심과 수요에 부합하는 정보를 전달하는 데 효과적일 것으로 기대된다. 민주항쟁에 참여한 사람들의 희생과 투쟁에 대한 존경심을 부르고 역사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다.&lt;br /&gt;
===기여===&lt;br /&gt;
[[뎐]], [[이나자키로빈]], [[호빵이👻]]: 기획의도 페이지 작성&lt;br /&gt;
&lt;br /&gt;
=='''온톨로지'''==&lt;br /&gt;
{{NetworkGraph | title=민주항쟁.lst}}&lt;br /&gt;
[[민주항쟁.lst]]&lt;br /&gt;
===기여===&lt;br /&gt;
*[[뎐]]: 온톨로지 제작&lt;br /&gt;
=='''컨텐츠 구조'''==&lt;br /&gt;
===클래스(Class)===&lt;br /&gt;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color:white&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0%&amp;quot; | 클래스 !! style=&amp;quot;width:40%&amp;quot; | 설명 !! style=&amp;quot;45%&amp;quot; | 노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제||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대표 키워드인 민주항쟁을 주제로서 나타내었다 || 만주항쟁&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항쟁||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민주화운동 시기 발생했던 주요 운동들을 ‘항쟁’이라는 키워드로 분류하였다. || 4.19혁명, 부마항쟁, 5.18 민주화운동, 6월민주항쟁&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사건||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항쟁의 원인, 결과가 되는 사건을 정리하였다|| 3.15부정선거, 고려대 4.18학생시위, 3.15의거, YH사건, 10.26사태, 12.12 군사반란, 비상계엄령,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고문추방민족대행진, 4.13호헌조치, 6.29선언, 대통령직선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지역||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요 항쟁들이 일어났던 지역을 정리하였다|| 마산, 부산, 광주&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인물||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요사건들을 발생시킨 인물, 참여했던 인물을 묶어서 정리하였다|| 이승만, 이기붕, 김주열, 박정희, 김재규, 전두환, 신군부, 시민군, 박종철, 이한열, 노태우&lt;br /&gt;
|-&lt;br /&gt;
|}&lt;br /&gt;
===관계성(Relation)===&lt;br /&gt;
*&amp;lt;font color=#228B22&amp;gt;'''~은 ~에 속한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주요 항쟁들이 민주항쟁에 속함을 나타내거나 인물의 소속을 나타낸다.&lt;br /&gt;
***해당노드:&lt;br /&gt;
***#4.19혁명 -&amp;gt; 민주항쟁&lt;br /&gt;
***#부마항쟁 -&amp;gt; 민주항쟁&lt;br /&gt;
***#5.18민주화운동 -&amp;gt; 민주항쟁&lt;br /&gt;
***#6월 민주항쟁 -&amp;gt; 민주항쟁&lt;br /&gt;
***#전두환 -&amp;gt; 신군부&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의 원인이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어떠한 사건과 인과관계를 이루는 또다른 사건 혹은 인물을 설명한다.&lt;br /&gt;
***#이기붕 -&amp;gt; 3.15부정선거&lt;br /&gt;
***#김주열 -&amp;gt; 고려대 4.18학생시위&lt;br /&gt;
***#고려대 4.18학생시위 -&amp;gt; 4.19혁명&lt;br /&gt;
***#3.15의거 -&amp;gt; 4.19혁명&lt;br /&gt;
***#김주열 -&amp;gt; 4.19혁명&lt;br /&gt;
***#3.15부정선거 -&amp;gt; 3.15의거&lt;br /&gt;
***#YH사건 -&amp;gt; 부마항쟁&lt;br /&gt;
***#부마항쟁 -&amp;gt; 10.26사태&lt;br /&gt;
***#박정희 -&amp;gt; 10.26사태&lt;br /&gt;
***#비상계엄령 -&amp;gt; 5.18민주화운동&lt;br /&gt;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 -&amp;gt; 고문추방민족대행진&lt;br /&gt;
***#고문추방민족대행진 -&amp;gt; 4.13호헌조치&lt;br /&gt;
***#4.13호헌조치 -&amp;gt; 6월민주항쟁&lt;br /&gt;
***#6월민주항쟁 -&amp;gt; 6.29선언&lt;br /&gt;
***#6월민주항쟁 -&amp;gt; 대통령직선제&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을 발생시켰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사건과 그 사건을 직접적으로 발생시킨 인물을 연결한다.&lt;br /&gt;
***#이승만 -&amp;gt; 3.15부정선거&lt;br /&gt;
***#김재규 -&amp;gt; 10.26사태&lt;br /&gt;
***#신군부 -&amp;gt; 1212군사반란&lt;br /&gt;
***#전두환 -&amp;gt; 비상계엄령&lt;br /&gt;
***#노태우 -&amp;gt; 6.29선언&lt;br /&gt;
***#시민군 -&amp;gt; 5.18민주화운동&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에 희생되었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민주항쟁의 진압과정 등 에서 희생된 인물을 설명한다&lt;br /&gt;
***#김주열 -&amp;gt; 3.15의거&lt;br /&gt;
***#이한열 -&amp;gt; 6월 민주항쟁&lt;br /&gt;
***#박종철&amp;gt;박종철 고문치사 사건&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에서 발생했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설명한다.&lt;br /&gt;
***#3.15의거 -&amp;gt; 마산&lt;br /&gt;
***#부마항쟁 -&amp;gt; 부산&lt;br /&gt;
***#부마항쟁 -&amp;gt; 마산&lt;br /&gt;
***#5.18민주화운동 -&amp;gt; 광주&lt;br /&gt;
===기여===&lt;br /&gt;
*[[뎐]]: 컨텐츠 구조 페이지 작성&lt;br /&gt;
=='''4.19혁명'''==&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VPp4BmfDSv8VA2-oC-VATHzUYgadaiaQ9AlWXYiaiVk&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원인===&lt;br /&gt;
====[[3.15 부정선거]]====&lt;br /&gt;
[[파일:3.15부정선거_개표_모습.png|300픽셀|섬네일|오른쪽|3.15부정선거 당시 개표하는 사진&amp;lt;ref&amp;gt;사진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amp;lt;/ref&amp;gt;]]&lt;br /&gt;
1959년 대한민국은 제 4대 대통령 선거와 제 5대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당시 자유당에서는 12년째 대통령으로서 연임 중이던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이기붕]]'''을 부통령 후보로 선임하였다. 그러나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병세의 악화로 사망하게 되고,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은 확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선거의 초점은 자유당의 조병옥과 민주당의 장면 간의 선거전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본격적인 선거유세의 시작과 함께 정부와 여당의 잇따른 야당선거운동 방해사건으로 부정선거가 시작되었다. 1960년 3월 15일 선거가 시작된 이후에도 다양한 방법의 부정행위가 일어났고, 개표 결과 이승만과 이기붕의 득표가 100%에 육박하는 결과로 나오자 자유당은 득표수를 하향 조정해 최종 집계에 반영할 것을 지시했다. 결국 이승만 88.7%, 이기붕 79%의 득표율을 가지며 정, 부통령에 당선되었다.&amp;lt;ref&amp;gt;자세한 내용은 3.15부정선거 페이지 참조&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부정선거 반대시위, [[3.15 의거]]의 발생====&lt;br /&gt;
3.15 부정선거를 반대하는 시위는 초기에는 중, 고등학생들의 산발적인 시위로 전개되었다. 3월 15일 선거일 밤 경남 마산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으며,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여 1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amp;lt;br/&amp;gt;&lt;br /&gt;
3월 15일 실종되었던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4월 11일 마산부두에서 발견되자 마산 시민들은 시청, 파출소 등을 파괴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2차 시위가 일어난 것이다.&lt;br /&gt;
&lt;br /&gt;
====[[고려대학교 4.18 학생시위]]의 발생====&lt;br /&gt;
1, 2차 마산시위를 계기로 부정선거 무효와 이승만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났다. 이들은 '4.18 선언문'을 낭독하고 시내로 진출하였다. 이는 4월 19일 학생들과 일반 시민들이 가세한 대규모 시위로 이어지게 되었다.&lt;br /&gt;
====전국적인 4.19 혁명의 발생====&lt;br /&gt;
분노한 전국의 시민과 학생들이 다음 날인 4월 19일에 '이승만 하야와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며 대규모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경찰은 또다시 무차별 발포에 나섰고,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지만 이러한 압박에도 시민들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lt;br /&gt;
====이승만 대통령의 혼란 수습 시도====&lt;br /&gt;
이승만 대통령은 4.19 시위로 인한 정국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4월 20일 국무위원 전원과 자유당 당무위원 전원의 사표를 제출하도록 지시하였으며, 4월 23일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외무장관에 허정, 내무장관에 이호, 법무장관에 권승렬을 임명하는 등 개각을 단행하였다.&amp;lt;br/&amp;gt;&lt;br /&gt;
그러나 미국은 4.19직후 국무부 성명을 통해 한국에서 발생한 사태는 부정선거에 대한 '군중의 불만'을 반영한 것 이라고 했고, 양유찬 주미대사를 불러 '부정선거에 대한 철저한 조사', '경향신문 복간', '국가보안법 개정' 등을 촉구하는 각서를 전달하였다.&amp;lt;br/&amp;gt;&lt;br /&gt;
그리고 4월 25일, 이승만 정권에 분노한 전국 27개 대학 258명의 교수가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 모여 14개항의 시국 선언문을 발표하며 학생, 시민들과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들은 3.15 부정선거 및 4.19 사태의 책임을 지고 대통령이 물러날 것을 주장하였으며, &amp;quot;학생들의 피에 보답하자&amp;quot;는 플랜 카드를 앞세워 국회의사당까지 행진하였다. &lt;br /&gt;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lt;br /&gt;
무력 진압에도 대규모 시위가 이어지며 시민들은 완강하게 투쟁하였다. 4월 26일 시위대가 경무대로 다시 집결하는 등 사태가 심각하게 진행되자, 오전 10시 30분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 성명을 발표하였다. 4월 27일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하며 대통령직을 하야하고 하와이로 망명하였으며 자유당 정권도 끝나게 된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우리 국민들, 특히 학생과 청년들의 주도로 이루어진 4.19 혁명은 학생과 일반 대중이 단결하여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아시아 최초의 시건이다. 4.19혁명은 부마항쟁, 5.18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그리고 2017년 촛불시위에 이르기 까지 정권에 대항하는 국민들이 단합을 이루는 초석이 되었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도 시민 저항권에 대한 근거로써 4.19혁명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문구가 있다.&lt;br /&gt;
===기여===&lt;br /&gt;
[[뎐]]: 4.19혁명 페이지 원인, 의의 작성 &lt;br /&gt;
&lt;br /&gt;
[[•ᴗ•]]: 4.19혁명 페이지 전개 작성&lt;br /&gt;
&lt;br /&gt;
=='''부마항쟁'''==&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bK7zjpPvBsC7rFRPmsiHCUYhyWt2VXOv8SYyaBTND4Y&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원인===&lt;br /&gt;
====[[유신 헌법]]과 [[긴급조치]]====&lt;br /&gt;
1971년 선거에서 김대중을 누르고 대통령에 3선된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해 국회 해산,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등 법의 일부 기능을 정지시키고 전국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했다.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된 이른바 유신헌법에 의해 제정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법」 에 의거해 박정희가 제8대 대통령으로 재차 당선되었고, 이 유신 헌법이 발효된 기간을 유신 체제라고 부른다. 유신 체제는 행정, 입법, 사법의 3권을 모두 쥔 대통령이 종신 집권할 수 있도록 설계된 1인 대통령제였다. 박정희는 유신 헌법에 의거해 대통령의 권한으로 취할 수 있었던 특별조치인 긴급조치를 선포함으로써 헌법에 반대하는 시위 및 운동과 방송, 언론 활동을 하는 반정부 인사들을 연행, 체포, 고문하는 등 억압을 가했다.&lt;br /&gt;
&lt;br /&gt;
====한국경제의 위기====&lt;br /&gt;
1970년대 말 한국경제는''' [[오일쇼크]]'''라는 세계경제의 위기와 결합해 가라앉고 말았다. 경제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정부는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과 함께 '''[[경제안정화정책]]'''을 수용했고, 중소자본가, 봉급생활자, 도시 노동자와 농민 등에 안정화 비용을 부과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이와 같은 안정화 정책은 경제위기로 어려운 처지에 있던 중소기업들의 도산을 가속하여 기업 부도율이 치솟고 하층민들을 더 깊은 고통에 몰아넣었다. 특히 '''부가가치세'''를 도입한 이후 물가가 상승하면서 일상에 타격을 주었으며, 노동집약적 제조업이 집중되었던 부산과 마산에서는 상황이 더욱 심각하여 1979년 부산 지역 부도율은 서울의 3배에 달했다.&lt;br /&gt;
&lt;br /&gt;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lt;br /&gt;
한 시대의 대격변을 예고하는 단초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시작됐다. 1979년 8월 9일 오전, 신민당의 당사 4층 강당에서는 봉제업체인 YH무역주식회사의 여성노동자 200여명이 기업주의 폐업에 반발하여 폐업조치 철회 농성을 벌였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인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신민당이 당사 건물을 내준 것이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폭력을 동원하여 농성을 해산시켰다. 결국 이 사건은 노동 탄압 사건을 넘어선 야당에 대한 정치 탄압 사건으로 발전하였다.&lt;br /&gt;
&lt;br /&gt;
이날 경찰은 1000여명의 진압대원을 신민당사로 난입시켜 농성을 하고 있던 174명의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로 밖으로 끌어냈다. 또한 경찰은 총재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김영삼 총재와 당 간부들을 끌어내면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박정희 정권은 이 노동자 농성 사건을 빌미로 신민당 분열공작을 시도하였다. 유신정권과 비밀리에 결탁한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 3명이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 부총재 전원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접수시켰다. 그리고 법원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신민당 총재단의 직무 집행을 정지시키고 박정희 정권의 꼭두각시를 총재직무대행으로 선임하였다.&lt;br /&gt;
&lt;br /&gt;
아울러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의 동교동 자택을 전면 봉쇄하였고,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에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끊으라고 요구한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즈』 회견내용을 “반헌정적, 반민족적 작태”로 몰아서 국회에 징계 동의안을 제출했다. 10월 4일 오후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의원 159명은 여당 총회장에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제명 결의안을 '''기습적으로''' 처리해 버렸다. 노사분규 사태로 시작된 사건이 제1야당 당수의 의원직 제명으로 확대된 정치적 사태를 지켜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유신체제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이 고조되었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유신 철폐, 독재 타도!'''''   &amp;lt;small&amp;gt;-10.16 부마항쟁 당시 시위대의 구호&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부산대학교 민주선언문, 학생 시위에서 시민항쟁으로====&lt;br /&gt;
[[파일:부산시위대.jpg|250px|섬네일|오른쪽|광복동을 지나는 시위 행렬]]&lt;br /&gt;
1979년 10월 16일 아침 10시 부산대학교 구내 도서관 앞에서 약 500명의 학생들이 모여 “유신정권 물러가라”, “정치탄압 중지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반정부 시위를 벌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민주선언문」]]'''을 통해 민주화, 언론 자유, 인권 보장의 신념을 확인하고, “제도화된 폭력성과 조직적 악의 근원인 유신헌법과 독재집권층의 퇴진만이 5천 만 겨레의 통일의 첫걸음이라고 주장하면서 형제의 피를 요구하는 자유와 민주의 깃발을 우리가 잡고 반민주의 무리, 불의의 무리들을 향해 외치며 나아가자”라고 선언하였다. 이후 학생들은 교문을 나가 거리에서 시위했다. 이때 학생 수는 약 5,000명으로 불어나 있었고, 광복동과 남포동 등 부산시내 중심가까지 진출해 애국가 등의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며, 이를 제지하려는 경찰과 이곳저곳에서 충돌하였다. 비슷한 시간, 부산 동아대학교에서도 1,000여 명의 학생이 부산대학교 학생과 합류하여 가두시위를 벌였다. 부산대학교 데모로 학생 수백 명이 연행되고 100여 명이 다쳤지만 이튿날인 10월 17일에는 시위가 더욱 격화되어 학생들뿐만 아니라 다수의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학생 시위는 점차 시민항쟁의 양상을 띠어갔다.''' 밤늦게까지 계속된 시위에서 시민들은 충무파출소, 한국방송공사, 서구청, 부산세무서 등을 파괴하였고, 경찰차량을 불태우거나 파손시켰다.&lt;br /&gt;
&lt;br /&gt;
====마산의 시민항쟁====&lt;br /&gt;
&lt;br /&gt;
민주항쟁은 18일에 마산으로 확산되었다. 늦은 오후에는 1,000여 명의 경남대학교 학생들이 마산 시내 번화가에 산발적으로 집결했으며, 일부시민들도 가담해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어두워진 다음 학생과 시민들의 데모는 격화되어 파출소, 공화당사, 방송국, 신문사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파괴하였다. 이튿날인 19일에는 시위가 더욱 치열해져 마산 시내는 한때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저녁 8시경, 시위대는 경남대학과 마산대학&amp;lt;ref&amp;gt;1985년 창원대학으로 교명이 변경되었으며, 현재의 마산대학교와 다르다.&amp;lt;/ref&amp;gt;, 그리고 고등학생까지 합세하여 약 8,000명에 이르렀으며, 시내 곳곳에서 몽둥이를 들고 동사무소와 파출소로 몰려가 시설을 파괴하였고, 경찰차량에 불을 질렀다.&lt;br /&gt;
&lt;br /&gt;
====부산 계엄령, 마산 위수령====&lt;br /&gt;
[[파일:계엄포고문.jpg|270px|섬네일|왼쪽|부산지역에 내려진 계엄포고문을 읽고 있는 시민들]]&lt;br /&gt;
부산대학교 시위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박정희 정부는 학생 시위로 시작된 시위가 대규모 시민항쟁으로 사태가 심상치 않게 확대되어가자 강경책으로 대응했다. 정부는 18일 자정을 기해 '''부산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동원한 과격한 진압'''을 통해 시위 참여자들과 이를 방조한 일반 시민들까지 1,058명을 연행하고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으며, 부산지구 계엄사령부는 각 대학 휴교조처와 야간통행금지시간을 2시간 연장하는 등의 항이 담긴 포고문을 발표했다.&lt;br /&gt;
&lt;br /&gt;
부산에 계엄령이 선포된 이튿날인 19일에 마산 시위가 확대됨에 따라 그 다음날인 10월 20일 정오, 정부가 '''마산 및 창원 지역에 위수령을 발령'''해 통행금지 시간이 연장되고, 경남대학 등에는 휴교조처가 취해졌으며, 24일에는 깡패를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132명을 검거, 23명을 구속했다. 이렇게 '''표면적으로는 부마민주항쟁이 단시간에 진압되는 듯 보였지만, 항쟁은 이미 유신체제의 균열을 불러오고 있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항쟁의 전개 과정에서 볼 수 있듯, 부마민주항쟁에서 특징적인 것은 먼저 시위대의 가장 큰 분노의 대상이 공화당사와 경찰·파출소였다는 점, 다음으로는 “부가가치세를 철폐하라”, “잘 먹고 잘 살아라”등의 구호에서 드러나듯이 세무서에 대한 공격, 그리고 신문사와 방송국에 대한 공격을 들 수 있다.&lt;br /&gt;
&lt;br /&gt;
부마민주항쟁은 1970년대 유신체제 밑에서 쌓였던 침묵하는 언론, 조세, 시민을 억압하는 경찰에 대한 불만 등 정치·사회·경제·문화·종교 등 각 부문에 걸친 여러 모순의 폭발이었고, 헌법 개정과 긴급조치로 겨우 유지되던 유신체제와 박정희 정권의 붕괴를 촉진시킨 결정적인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10.26사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또한 이 사건은 1980년 5월 18일의 광주 민주화운동과 1987년 6월 민주항쟁에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된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억눌린 우리 역사&amp;lt;/br&amp;gt;터져나온 분노&amp;lt;/br&amp;gt;매운 연기 칼바람에도&amp;lt;/br&amp;gt;함성소리 드높았던&amp;lt;/br&amp;gt;동트는 새벽벌&amp;lt;/br&amp;gt;시월이 오면&amp;lt;/br&amp;gt;핏발 선 가슴마다&amp;lt;/br&amp;gt;살아오는 십 일육&amp;lt;/br&amp;gt;동지여 전진하자&amp;lt;/br&amp;gt;깨치고 나가자&amp;lt;/br&amp;gt;뜨거운 가슴으로&amp;lt;/br&amp;gt;빛나는 내일로'''''&amp;lt;/br&amp;gt;&amp;lt;small&amp;gt;-'''부산대학교''' 새벽벌도서관 10.16 기념비&amp;lt;/small&amp;gt;&amp;lt;/div&amp;gt;&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호빵이👻]]: 부마항쟁 페이지 전체 작성&amp;lt;/br&amp;gt;&lt;br /&gt;
[[이나자키로빈]]: 부마항쟁 원인 중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 작성&lt;br /&gt;
&lt;br /&gt;
=='''5.18민주화운동'''==&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AMetwTuXYHTCXINqr7ZJpzO5CHFEMQO5-Uqau51RkXA&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원인===&lt;br /&gt;
====유신체제의 붕괴====&lt;br /&gt;
&lt;br /&gt;
[[파일:김재규.jpg|섬네일|오른쪽|암살 당시 상황을 재현하는 김재규]]&lt;br /&gt;
&lt;br /&gt;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amp;lt;small&amp;gt; - 김재규&amp;lt;/small&amp;gt;&lt;br /&gt;
1979년 10월 4일 신민당 총재 김영삼이 국회에서 의원직을 제명당하자 10월 15부터 10월 20까지 부산 · 마산 등지에서는 부마항쟁이 일어났고, 이의 해결을 둘러싼 노선대립으로 갈등 중 10월 26일 &amp;lt;ins&amp;gt;[[김재규]]&amp;lt;/ins&amp;gt;가 박정희를 살해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ins&amp;gt;[[10.26 사태]]&amp;lt;/ins&amp;gt;의 사후 수습과정에서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을 중심으로 신군부 세력이 부상하였으며, 이들은 &amp;lt;ins&amp;gt;[[12.12 사건]]&amp;lt;/ins&amp;gt;의 하극상을 통하여 군부를 장악하였다. 1980년 2월 29일 김대중 등이 복권되었으나 그 해 봄, 신군부는 최규하 과도 정부를 유명무실하게 하고 국민들이 요구하는 민주주의와 이를 위한 명확한 정치일정 제시를 거부하면서 권력기반을 구축하였다.&lt;br /&gt;
&lt;br /&gt;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lt;br /&gt;
한 시대의 대격변을 예고하는 단초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시작됐다. 1979년 8월 9일 오전, 신민당의 당사 4층 강당에서는 봉제업체인 YH무역주식회사의 여성노동자 200여명이 기업주의 폐업에 반발하여 폐업조치 철회 농성을 벌였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인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신민당이 당사 건물을 내준 것이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폭력을 동원하여 농성을 해산시켰다. 결국 이 사건은 노동 탄압 사건을 넘어선 야당에 대한 정치 탄압 사건으로 발전하였다.&lt;br /&gt;
&lt;br /&gt;
이날 경찰은 1000여명의 진압대원을 신민당사로 난입시켜 농성을 하고 있던 174명의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로 밖으로 끌어냈다. 또한 경찰은 총재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김영삼 총재와 당 간부들을 끌어내면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박정희 정권은 이 노동자 농성 사건을 빌미로 신민당 분열공작을 시도하였다. 유신정권과 비밀리에 결탁한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 3명이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 부총재 전원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접수시켰다. 그리고 법원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신민당 총재단의 직무 집행을 정지시키고 박정희 정권의 꼭두각시를 총재직무대행으로 선임하였다.&lt;br /&gt;
&lt;br /&gt;
아울러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의 동교동 자택을 전면 봉쇄하였고,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에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끊으라고 요구한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즈』 회견내용을 “반헌정적, 반민족적 작태”로 몰아서 국회에 징계 동의안을 제출했다. 10월 4일 오후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의원 159명은 여당 총회장에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제명 결의안을 '''기습적으로''' 처리해 버렸다.&lt;br /&gt;
&lt;br /&gt;
노사분규 사태로 시작된 사건이 제1야당 당수의 의원직 제명으로 확대된 정치적 사태를 지켜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유신체제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이 고조되었다. 또한 이 사건은 그동안 다소 주춤하던 대학가에 반유신 반독재 운동의 열기가 다시 확산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청춘을 바쳐, 학생 운동====&lt;br /&gt;
&lt;br /&gt;
[[파일:서울의_봄.JPG|섬네일|오른쪽|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앞에 모인 시위대]]&lt;br /&gt;
&lt;br /&gt;
군부의 재집권 야욕에 대한 국민적 저항은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표출되었다. 1980년 3월, 서울대 총학생회 출범을 시작으로 4월 초순에는 전국의 주요 대학들이 총학생회를 결성하기 시작하였다. 대학별로 독재 정권에 아부했던 어용교수와 족벌사학 퇴진 운동을 벌였고, 특히 병영집체훈련(당시 대학 신입생들은 의무적으로 군부대에 10일 간 입대하여 각종 군사훈련을 이수해야 했다.) 거부가 주요 이슈로 전면 등장했다. 각 대학의 병영집체훈련 거부운동이 본격화되고 전국적인 쟁점으로 떠오르자 신군부는 신문, 방송을 통해 ‘학생들의 안보의식 결여’를 비난하고 교내 시위·농성을 집중적으로 보도하게 했다.  5월 1일에 서울대가 입영훈련 거부투쟁 철회를 결정하고 ‘계엄령 해제’와 ‘유신잔당 퇴진’, ‘정부개헌중단’과 ‘노동 3권 보장’ 등을 요구하기 시작하면서 대학가는 이제까지의 학내 문제 중심의 운동에서 정치개혁을 위한 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그간 정부와 대학 간에 팽팽하게 유지되던 긴장 관계는 폭발 직전으로 내닫게 된 것이다.&lt;br /&gt;
&lt;br /&gt;
약 열흘 간의 대정부 투쟁을 준비한 대학가는 5월 10일 고려대 총학생회장실에서 열린 ‘총학생회장단 회의’에 참석한 전국 23개 대학 대표들은 ‘비상계엄의 즉각 해제’와 ‘전두환, 신현확 등 유신잔당 퇴진’ 등을 결의하고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정세에 대한 공동대처 방안을 마련했다. 이후 5월 13일부터 5월 14일에 걸쳐 서울 · 부산 · 대구 · 광주 등 37개 대학에서 계엄철폐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5월 15일에는 서울역에서 시위가 발생하는 등 학생시위는 서울시가지를 거의 마비시키는 등 야간까지 지속되어 사태가 절정에 달하면서 신군부 세력을 위협하였다. 5월 16일 24개 대학 학생대표들은 당분간 시국의 추이를 관망하기로 결정하고 가두시위를 중단하면서 소강상태에 돌입하는 듯하였다.&lt;br /&gt;
&lt;br /&gt;
====1980년 봄의 광주====&lt;br /&gt;
5월 17일 신군부 세력이 이전까지는 제주도를 제외한 지역에 한정되었던 비상계엄을 전국에 확대하는 조치인 계엄포고 10호(17일 24시에 발효: 각 대학 휴교령 포함)를 밤 9시 40분에 의결하고 밤 11시 40분에 발표하면서 밤 11시를 전후한 시점부터 김대중 · 김종필이 연행되는 등 권력형 부정축재자 및 소요조종 혐의자, 학생 시위 주동자가 체포되었다. 이날 밤 광주지역의 사회운동·학생운동의 지도자도 상당수가 검거되었다. 광주의 검거대상자는 전남대 12명, 조선대 10명 등 총 22명이었다. 전남에서 계엄합동수사단은 광주505보안대가 중심이고, 중앙정보부, 경찰 등이 보조역할을 했다. 전남 계엄합동수사단은 22대 차량과 86명의 인원이 출동해 정동년 등 복적생들과 대학의 총학생회 간부들을 집중 검거했다.&lt;br /&gt;
&lt;br /&gt;
한편 육군본부는 14일 오전 7시55분에 국가 중요 보안목표와 주요대학에 군 병력 배치 명령을 하달했다. 이 명령에 따라 전남북계엄분소장인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광주 시내 주요 시설물에 이날 오후부터 계엄병력을 배치했다. 31사단 96연대 병력이 광주시내 KBS건물에 42명, MBC 21명, CBS 11명, VOC(전일방송) 11명 등 주요 방송사 건물에 배치돼 경비에 들어간 것이다.&lt;br /&gt;
&lt;br /&gt;
이날 오후 전교사령관은 7공수여단의 광주배치에 따른 수송수단 지원도 미리 협의했다. 그리고 5월 8일부터 16일 사이에 공수부대 수뇌부들도 헬기를 타고 서울에서 내려와 광주 상무대의 전투병과교육사령부를 방문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광주에서 시위가 격화되면 즉각적으로 최정예 군부대를 동원해서 진압할 준비를 철저하게 갖추고 있었다. 5월 18일에 시작된 광주의 비극은 그 이전에 이미 시한폭탄처럼 준비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lt;br /&gt;
{{구글지도 | 위도=35.175961433346885 | 경도=126.90865311973532 | 줌=13 }}  [[파일:금남로.JPG|섬네일|오른쪽|금남로 앞에 집결한 버스와 시민군]]&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18일&amp;lt;/span&amp;gt;&lt;br /&gt;
휴교령이 내려질 경우 교문 앞에서 집결한다는 결의에 따라 학생들은 5월 18일 오전 전남대학교 앞에 모였다. 공수부대원들이 전남대 앞 시위를 저지하자 대학생들은 광주역에 재집결해서 시위를 이어갔다. 시위대가 점차 늘어나면서 공수부대원이 시내에서 시위진압에 나섰으며 18일 오후 1시부터 무차별 진압작전이 이루어져 부상자가 속출하였다.&lt;br /&gt;
&lt;br /&gt;
군인들이 금남로 등 시내 중심가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이나 여자를 마구 구타하고 짓밟으며 찌르는 등의 잔혹 행동을 하자 시민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이에 시위대는 오후 4시 이후 파출소 파괴 등 적극공세에 나섰다. '''계엄군의 과잉 무력진압은 시위를 해산시키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오히려 시민들을 단결시켰으며, 결국 19일 시민 · 학생 연대가 발생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lt;br /&gt;
&lt;br /&gt;
 '''''광주 애국 시민 여러분! 이것이 웬 말입니까? 웬 벼락이란 말입니까? 죄 없는 학생들을 총칼로 찔러 죽이고 몽둥이로 두들겨 트럭으로 실어가며 부녀자를 발가벗겨 총칼로 찌르는 놈들이 이 누구란 말입니까? 이제 우리가 살길은 전시민이 하나로 뭉쳐 청년 학생들을 보호하고 유신잔당과 극악무도한 살인마 전두환 일파와 공수 특전단 놈들을 한놈도 남김없이 쳐부수는 길 뿐입니다. 우리는 이제 다 보았습니다. 다 알게 되었읍니다. 왜 학생들이 그토록 소리 높이 외쳤는가를, 우리의 적은 경찰도 군대도 아닙니다. 우리의 적은 전국민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바로 유신잔당과 전두환 일파 그놈들입니다.''''' &amp;lt;small&amp;gt; - 1980년 5월 19일에 '광주시민민주투쟁회'명의의 호소문&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19일&amp;lt;/span&amp;gt;&lt;br /&gt;
19일 오전에는 일시적 소강상태였으나 오후 들어서 분노한 학생 · 시민들이 군 · 경찰과 공방전을 벌이면서 시위는 점차 격화되었다. '''시민들은 공포감에서 벗어나 자신의 생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단순한 학생시위에서 시민봉기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계엄군은 시위대를 포위하여 구타하였으며 일부 고등학생까지 포함된 시위대는 돌과 화염병으로 저항하였고 파출소와 방송국 등에 침입하였다. 뒤처진 공수부대를 공격하거나 고립된 차량을 포위하기도 하였으며 총과 방패를 빼앗기도 하였고, 오후 4시 50분 시민들에게 포위된 계엄군의 장갑차에서 최초의 발포가 있었다. 19일 밤비가 내리는 가운데 시위가 산발적으로 계속되었으며, 20일 오전 비가 그치고 대규모 시위는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오후부터 다시 시작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20일&amp;lt;/span&amp;gt;&lt;br /&gt;
'''20일 오후 6시부터 택시와 버스 운전 기사들이 광주역과 무등경기장에 모여 대형 버스와 트럭을 앞세우고 일시에 금남로에 집결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들을 앞세운 시위는 계엄군을 몰아내는 데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였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5.18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에 &amp;lt;ins&amp;gt;[[지대한 영향]]&amp;lt;/ins&amp;gt;을 끼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학생 운동에 뛰어든 많은 대학생들은 대학교에 들어와서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의 실상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아 학생 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군부정권은 5.18 이후로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다. 전두환은 김대중 등에게 '광주 사태'의 책임을 물어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했고,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 선언을 한 직후, 8월 27일 소위 체육관 선거를 통해 전두환은 대통령 자리를 탈취했다.&lt;br /&gt;
&lt;br /&gt;
지역적인 면에서는 '''광주광역시를 비롯한 전라도 지역의 트라우마'''로 작용해 이후의 민주정의당 및 &amp;lt;ins&amp;gt;[[3당 합당]]&amp;lt;/ins&amp;gt;으로 이어지는 보수 세력에 대해 적대심을 가지고, 민주당계 정당의 표밭이 되는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미 박정희 정부 시절부터 유무형의 정치적인 차별을 받고 있었지만 5.18의 참상은 전라도가 다시는 보수 세력을 지지하지 않게 만들 정도로 심각한 사건이며 호남소외론의 가장 결정적인 명분이 되었다.&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이나자키로빈]]: 5.18 민주화운동 페이지 전체 작성&lt;br /&gt;
&lt;br /&gt;
=='''6월민주항쟁'''==&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NnXWs5RMTIf-6DOEu9_rX2k4mgzUk1AQHYneCuwXN1Q&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원인===&lt;br /&gt;
====[[박종철고문치사사건]]====&lt;br /&gt;
&lt;br /&gt;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박종철은 1987년 1월 13일 자정 경 하숙집에서 치안본부(現 경찰청)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게 연행되었다.‘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이자 ‘민주화추진위원회’ 지도위원으로 수배 받고 있었던 박종운을 잡기위해 연행한 것이었다. 취조실로 연행해간 공안 당국은 박종철에게 박종운의 소재를 물었으나, 박종철은 순순히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경찰은 잔혹한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가하였고, 박종철은 끝내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했다. 당시 경찰은 초기 발표에서 고문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라고 사망원인을 발표하였으나, 시체부검 결과 전기고문과 물고문에 의한 살인인 것으로 밝혀졌다.&lt;br /&gt;
&lt;br /&gt;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저 죽음을 응시해주길 바란다. 저 죽음을 끝내 지켜주길 바란다. 저 죽음을 다시 죽이지 말아주길 바란다.''''' &amp;lt;small&amp;gt; - 동아일보 1987년 1월 17일자 김중배 칼럼 중&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사건 진상의 일부가 공개되자 2월 7일 전국 주요 도시에서 &amp;quot;박종철군 범국민추도식&amp;quot; 및 도심 시위가 열렸고 이어 3월 3일에는 &amp;quot;박종철군 49재와 고문추방 국민대행진&amp;quot;과 함께 또 다른 시위가 열렸다. 이후 4월 2일 서울대학교 학부모 130여 명이 ‘건국대학교 사태‘ 등 시국관련 구속학생의 징계철회를 요구하며 철야 농성을 벌였다.&lt;br /&gt;
&lt;br /&gt;
====정부의 개헌논의 유보====&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lt;br /&g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JazJFsgu4oc?si=sOE7w1tz-jKVztC9&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lt;br /&g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그러나 전두환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1987년 4월 13일 [[4.13호헌조치]]라 불리는 ‘대통령 특별담화‘를 발표, 개헌(改憲) 논의를 유보하겠다고 밝혔다. [[4.13호헌조치]]에서 전두환은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와 대통령 선거는 자유 경선의 분위기가 보장되는 가운데 1987년 내에 공정한 선거관리를 통해 차질 없이 실시할 수 있게 모든 노력을 다할것‘이라고 다짐했으며, 또 ‘민정당의 후임 대통령 후보는 조속한 시일 안에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인물 가운데서 당헌 절차와 민주 방식에 따라 전당대회에서 선출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호헌조치‘라는 그 이름대로 현행 헌법에 따라 권력을 이양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국민들의 큰 기대를 얻을 것이라 믿었으나, 기대는 커녕 오히려 반발을 가져오는 요인이 되고 말았다. 곧바로 이튿날인 4월 14일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 등 각계 인사들이, 호헌 조치를 비판하는 시국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정부 최루탄에 의한 [[이한열]] 사망====&lt;br /&gt;
[[파일:이한열.jpg|200px|섬네일|오른쪽|최루탄에 피격당한 후 이종창에게 부축받는 이한열]]&lt;br /&gt;
먼저 1987년 5월 27일 야당과 재야, 종교계 등이 힘을 모아 ‘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여당인 민주정의당에서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6월 10일에 맞춰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6 · 10국민대회]])’를 치르기로 결정하였다. 대학생들은 국본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를 중심으로 6 · 10국민대회에 호응하여 6월 초부터 각 대학별로 연일 집회와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6 · 10국민대회]] 하루 전날인 6월 9일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교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는 곧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학생들은 물론 시민들의 분노가 들끓었다. 이러한 분노 속에서 6 · 10국민대회가 열렸다. 경찰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6 · 10국민대회가 열리는 성공회대성당을 원천 봉쇄하였다. 그 결과 6 · 10국민대회는 대회장에 미리 들어가 있던 소수의 인원만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대회 예정 시간인 오후 6시 이전부터 서울 시내 곳곳에서 대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시민들도 다양한 방식으로 6 · 10국민대회와 학생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날 밤 늦게까지 시위를 벌이던 학생들은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이후 5일 동안 농성을 계속하였다. 애초 계획된 것은 아니었지만 대학생들의 명동성당 농성은 6 · 10국민대회가 단발성 행사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인 저항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lt;br /&gt;
&lt;br /&gt;
====민주항쟁 확산====&lt;br /&gt;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로 개헌하라!'''''   &amp;lt;small&amp;gt;-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제시한 슬로건&amp;lt;/small&amp;gt;&lt;br /&gt;
명동성당 농성을 거치며 항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유월항쟁의 전국화 과정에는 일정한 패턴이 존재하였다. 6월 10일 서울 외에도 전국 주요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위가 벌어졌지만, 15일까지 항쟁의 중심은 6 · 10국민대회와 명동성당 농성이 전개된 서울이었다. 하지만 6월 15일 경부터는 부산, 대전, 진주 등에서 격렬한 시위가 전개되었다. 그러다가 6월 20일부터 대규모 시위가 광주, 전주, 순천, 익산 등 호남 지방으로 옮겨졌다. 6 · 10국민대회 이후 약 20일 동안 전국 곳곳에서 매일 평균 100회 이상의 시위가 동시다발로 벌어졌다. 특히 6월 18일 ‘최루탄추방대회’와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은 전국 곳곳에서 한꺼번에 1백만 명 이상이 참여하였다. 갈수록 참가 지역이 전국 곳곳으로 확산되어 대도시, 중소도시뿐만 아니라 농촌 지역의 군 단위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6월 26일 하루에만 37~38개 시 · 군에서 시위가 동시에 벌어졌다. 유월항쟁에 참가한 연 인원은 400~500만 명으로 추산된다.&lt;br /&gt;
&lt;br /&gt;
반면 유월항쟁의 전국적 동시다발 시위는 경찰 병력을 분산시켰다. 분산된 경찰 병력으로는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거센 시위의 물결을 막아 낼 수 없었다. 경찰이 시위 진압에 최루탄을 남발하면서 최루탄도 점차 고갈되기 시작하였다. 유월항쟁 기간 동안 경찰이 사용한 최루탄만 총 67만 발이 넘었다. 더불어, 전두환 정권이 집권 내내 강조했던 88서울올림픽이 얼마 남지 않아 미국 등 국제사회의 이목이 집중된 상황에서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운동 때처럼 유혈 사태와 대량 학살을 반복하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무엇보다 군대를 동원하더라도 이러한 대규모 시민 항쟁을 진압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결국 경찰력으로 항쟁을 막기 힘들고, 군대 투입도 어렵다고 판단한 전두환 정권은 1987년 6월 29일 ‘ 6 · 29민주화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하였다. 그리고 그동안 의식불명 상태에 있었던 이한열이 7월 5일 끝내 사망하였다. 5일장 후 7월 9일 치러진 이한열의 노제에 100만 명의 인파가 모인 것을 끝으로 약 한 달 동안 지속된 유월항쟁은 마무리되었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1987년 6월항쟁이 '''대통령[[직선제]] 개헌'''이라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이 항쟁에 동참한 학생과 시민들의 요구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제시한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 개헌’이라는 슬로건으로 모아졌기 때문이었다. 유월항쟁은 이러한 민주화 세력의 통합성, 즉 각기 다른 성격과 지향을 가진 여러 주체들이 모두 동의할 수 있는 ‘최소 강령’하에 ‘최대 연합’으로 결집하였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딩잉잉]]:6월민주항쟁 페이지 전체 작성&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기밀문서]]&lt;br /&gt;
[[분류:4.19혁명관련]]&lt;br /&gt;
[[분류:부마항쟁관련]]&lt;br /&gt;
[[분류:5.18민주화운동관련]]&lt;br /&gt;
[[분류:6월민주항쟁관련]]&lt;br /&gt;
[[분류:뎐]]&lt;br /&gt;
[[분류:이나자키로빈]]&lt;br /&gt;
[[분류:호빵이👻]]&lt;br /&gt;
[[분류:•ᴗ•]]&lt;br /&gt;
[[분류:딩잉잉]]&lt;/div&gt;</summary>
		<author><name>딩잉잉</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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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기밀문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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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1T16:16:3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딩잉잉: /* 컨텐츠 주제 */&lt;/p&gt;
&lt;hr /&gt;
&lt;div&gt;=='''컨텐츠 주제'''==&lt;br /&gt;
&lt;br /&gt;
[[파일:시위대.png|400픽셀|left]]&lt;br /&gt;
[[파일:이한열사진.jpeg|400픽셀|center]]&lt;br /&gt;
[[파일:진압.png|400픽셀|righ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amp;lt;big&amp;gt;'''&amp;lt;span style=&amp;quot;color:#CD0000&amp;quot;&amp;gt;투쟁의 불꽃, 자유의 환호&amp;lt;/span&amp;gt;'''&amp;lt;br/&amp;gt;&amp;lt;br/&amp;gt;&lt;br /&gt;
''대한민국은 시민들의 투쟁과 희생을 거쳐, 피와 땀으로 민주화를 이룩하였습니다.''&amp;lt;br/&amp;gt;&lt;br /&gt;
''그들은 어둠을 밝히기 위해 항거의 불꽃을 태웠고, 그 불꽃은 자유를 외쳤으며, 그 외침은 세상을 움직였습니다.''&amp;lt;br/&amp;gt;&lt;br /&gt;
''이 «기밀문서»에는 당신이 미처 몰랐던 그 때의 열기와 의지가 실려있습니다.''&amp;lt;br/&amp;gt;&lt;br /&gt;
''함께, 그 뜨거운 페이지를 열어보시겠습니까?''&amp;lt;/span&amp;gt;&amp;lt;/big&amp;gt;&amp;lt;/div&amp;gt;&lt;br /&gt;
&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이나자키로빈]]&lt;br /&gt;
[[딩잉잉]]&lt;br /&gt;
&lt;br /&gt;
=='''팀원'''==&lt;br /&gt;
*오현지(2022131143) [[뎐]]&amp;lt;br/&amp;gt;&lt;br /&gt;
*김여원(2023130209) [[이나자키로빈]]&amp;lt;br/&amp;gt;&lt;br /&gt;
*김하은(2022131345) [[호빵이👻]]&amp;lt;br/&amp;gt;&lt;br /&gt;
*박정원(2023130350) [[•ᴗ•]]&amp;lt;br/&amp;gt;&lt;br /&gt;
*최필중(2023130216) [[딩잉잉]]&amp;lt;br/&amp;gt;&lt;br /&gt;
&lt;br /&gt;
=='''기획의도'''==&lt;br /&gt;
===기획배경===&lt;br /&gt;
1945년 광복 이후 대한민국 국민들은 자유민주국가로서의 미래를 기대했으나 실상은 그러지 못했다.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보여주듯 현재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는 그것을 누리지 못한 앞선 세대들의 목숨을 바친 항쟁의 대가이다. 민주항쟁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의 핵심 동력이었다. 오늘날 우리나라 민주의식의 중요한 기둥이 되는 네 가지 항쟁을 선별하고 각 항쟁의 배경, 전개과정, 의의를 비롯해 세부적이고 자세한 내용에 대한 기사를 작성한다.&lt;br /&gt;
===기획목적===&lt;br /&gt;
작금의 현실까지 오기에는 수없이 많은 투쟁이 있었지만 4.19혁명, 부마항쟁, 5.18민주항쟁, 6월민주항쟁이라는 네 가지 사건을 살펴보기로 한 것은 가장 많이 다뤄지고, 가장 많이 알려진 사건이기 때문이다. 관련된 사건과 역사 인물들에 대해 자세히 적어 내어 민주항쟁의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지 않으면 알기 힘든 각 민주항쟁의 자세한 내막을 밝혀낸다.&lt;br /&gt;
===기대하는 바===&lt;br /&gt;
타임라인과 온톨로지를 활용해 내용의 전반적인 이해를 돕고 자세한 설명을 통해 사건의 자세한 내막을 들어낸다. 네 가지 항쟁을 각각 큰 목차로 설정하고 세부 기사를 그 내부에 작성해 독자의 관심과 수요에 부합하는 정보를 전달하는 데 효과적일 것으로 기대된다. 민주항쟁에 참여한 사람들의 희생과 투쟁에 대한 존경심을 부르고 역사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다.&lt;br /&gt;
===기여===&lt;br /&gt;
[[뎐]], [[이나자키로빈]], [[호빵이👻]]: 기획의도 페이지 작성&lt;br /&gt;
&lt;br /&gt;
=='''온톨로지'''==&lt;br /&gt;
{{NetworkGraph | title=민주항쟁.lst}}&lt;br /&gt;
[[민주항쟁.lst]]&lt;br /&gt;
===기여===&lt;br /&gt;
*[[뎐]]: 온톨로지 제작&lt;br /&gt;
=='''컨텐츠 구조'''==&lt;br /&gt;
===클래스(Class)===&lt;br /&gt;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color:white&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0%&amp;quot; | 클래스 !! style=&amp;quot;width:40%&amp;quot; | 설명 !! style=&amp;quot;45%&amp;quot; | 노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제||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대표 키워드인 민주항쟁을 주제로서 나타내었다 || 만주항쟁&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항쟁||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민주화운동 시기 발생했던 주요 운동들을 ‘항쟁’이라는 키워드로 분류하였다. || 4.19혁명, 부마항쟁, 5.18 민주화운동, 6월민주항쟁&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사건||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항쟁의 원인, 결과가 되는 사건을 정리하였다|| 3.15부정선거, 고려대 4.18학생시위, 3.15의거, YH사건, 10.26사태, 12.12 군사반란, 비상계엄령,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고문추방민족대행진, 4.13호헌조치, 6.29선언, 대통령직선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지역||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요 항쟁들이 일어났던 지역을 정리하였다|| 마산, 부산, 광주&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인물||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요사건들을 발생시킨 인물, 참여했던 인물을 묶어서 정리하였다|| 이승만, 이기붕, 김주열, 박정희, 김재규, 전두환, 신군부, 시민군, 박종철, 이한열, 노태우&lt;br /&gt;
|-&lt;br /&gt;
|}&lt;br /&gt;
===관계성(Relation)===&lt;br /&gt;
*&amp;lt;font color=#228B22&amp;gt;'''~은 ~에 속한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주요 항쟁들이 민주항쟁에 속함을 나타내거나 인물의 소속을 나타낸다.&lt;br /&gt;
***해당노드:&lt;br /&gt;
***#4.19혁명 -&amp;gt; 민주항쟁&lt;br /&gt;
***#부마항쟁 -&amp;gt; 민주항쟁&lt;br /&gt;
***#5.18민주화운동 -&amp;gt; 민주항쟁&lt;br /&gt;
***#6월 민주항쟁 -&amp;gt; 민주항쟁&lt;br /&gt;
***#전두환 -&amp;gt; 신군부&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의 원인이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어떠한 사건과 인과관계를 이루는 또다른 사건 혹은 인물을 설명한다.&lt;br /&gt;
***#이기붕 -&amp;gt; 3.15부정선거&lt;br /&gt;
***#김주열 -&amp;gt; 고려대 4.18학생시위&lt;br /&gt;
***#고려대 4.18학생시위 -&amp;gt; 4.19혁명&lt;br /&gt;
***#3.15의거 -&amp;gt; 4.19혁명&lt;br /&gt;
***#김주열 -&amp;gt; 4.19혁명&lt;br /&gt;
***#3.15부정선거 -&amp;gt; 3.15의거&lt;br /&gt;
***#YH사건 -&amp;gt; 부마항쟁&lt;br /&gt;
***#부마항쟁 -&amp;gt; 10.26사태&lt;br /&gt;
***#박정희 -&amp;gt; 10.26사태&lt;br /&gt;
***#비상계엄령 -&amp;gt; 5.18민주화운동&lt;br /&gt;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 -&amp;gt; 고문추방민족대행진&lt;br /&gt;
***#고문추방민족대행진 -&amp;gt; 4.13호헌조치&lt;br /&gt;
***#4.13호헌조치 -&amp;gt; 6월민주항쟁&lt;br /&gt;
***#6월민주항쟁 -&amp;gt; 6.29선언&lt;br /&gt;
***#6월민주항쟁 -&amp;gt; 대통령직선제&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을 발생시켰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사건과 그 사건을 직접적으로 발생시킨 인물을 연결한다.&lt;br /&gt;
***#이승만 -&amp;gt; 3.15부정선거&lt;br /&gt;
***#김재규 -&amp;gt; 10.26사태&lt;br /&gt;
***#신군부 -&amp;gt; 1212군사반란&lt;br /&gt;
***#전두환 -&amp;gt; 비상계엄령&lt;br /&gt;
***#노태우 -&amp;gt; 6.29선언&lt;br /&gt;
***#시민군 -&amp;gt; 5.18민주화운동&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에 희생되었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민주항쟁의 진압과정 등 에서 희생된 인물을 설명한다&lt;br /&gt;
***#김주열 -&amp;gt; 3.15의거&lt;br /&gt;
***#이한열 -&amp;gt; 6월 민주항쟁&lt;br /&gt;
***#박종철&amp;gt;박종철 고문치사 사건&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에서 발생했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설명한다.&lt;br /&gt;
***#3.15의거 -&amp;gt; 마산&lt;br /&gt;
***#부마항쟁 -&amp;gt; 부산&lt;br /&gt;
***#부마항쟁 -&amp;gt; 마산&lt;br /&gt;
***#5.18민주화운동 -&amp;gt; 광주&lt;br /&gt;
===기여===&lt;br /&gt;
*[[뎐]]: 컨텐츠 구조 페이지 작성&lt;br /&gt;
=='''4.19혁명'''==&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VPp4BmfDSv8VA2-oC-VATHzUYgadaiaQ9AlWXYiaiVk&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원인===&lt;br /&gt;
====[[3.15 부정선거]]====&lt;br /&gt;
[[파일:3.15부정선거_개표_모습.png|300픽셀|섬네일|오른쪽|3.15부정선거 당시 개표하는 사진&amp;lt;ref&amp;gt;사진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amp;lt;/ref&amp;gt;]]&lt;br /&gt;
1959년 대한민국은 제 4대 대통령 선거와 제 5대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당시 자유당에서는 12년째 대통령으로서 연임 중이던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이기붕]]'''을 부통령 후보로 선임하였다. 그러나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병세의 악화로 사망하게 되고,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은 확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선거의 초점은 자유당의 조병옥과 민주당의 장면 간의 선거전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본격적인 선거유세의 시작과 함께 정부와 여당의 잇따른 야당선거운동 방해사건으로 부정선거가 시작되었다. 1960년 3월 15일 선거가 시작된 이후에도 다양한 방법의 부정행위가 일어났고, 개표 결과 이승만과 이기붕의 득표가 100%에 육박하는 결과로 나오자 자유당은 득표수를 하향 조정해 최종 집계에 반영할 것을 지시했다. 결국 이승만 88.7%, 이기붕 79%의 득표율을 가지며 정, 부통령에 당선되었다.&amp;lt;ref&amp;gt;자세한 내용은 3.15부정선거 페이지 참조&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부정선거 반대시위, [[3.15 의거]]의 발생====&lt;br /&gt;
3.15 부정선거를 반대하는 시위는 초기에는 중, 고등학생들의 산발적인 시위로 전개되었다. 3월 15일 선거일 밤 경남 마산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으며,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여 1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amp;lt;br/&amp;gt;&lt;br /&gt;
3월 15일 실종되었던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4월 11일 마산부두에서 발견되자 마산 시민들은 시청, 파출소 등을 파괴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2차 시위가 일어난 것이다.&lt;br /&gt;
&lt;br /&gt;
====[[고려대학교 4.18 학생시위]]의 발생====&lt;br /&gt;
1, 2차 마산시위를 계기로 부정선거 무효와 이승만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났다. 이들은 '4.18 선언문'을 낭독하고 시내로 진출하였다. 이는 4월 19일 학생들과 일반 시민들이 가세한 대규모 시위로 이어지게 되었다.&lt;br /&gt;
====전국적인 4.19 혁명의 발생====&lt;br /&gt;
분노한 전국의 시민과 학생들이 다음 날인 4월 19일에 '이승만 하야와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며 대규모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경찰은 또다시 무차별 발포에 나섰고,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지만 이러한 압박에도 시민들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lt;br /&gt;
====이승만 대통령의 혼란 수습 시도====&lt;br /&gt;
이승만 대통령은 4.19 시위로 인한 정국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4월 20일 국무위원 전원과 자유당 당무위원 전원의 사표를 제출하도록 지시하였으며, 4월 23일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외무장관에 허정, 내무장관에 이호, 법무장관에 권승렬을 임명하는 등 개각을 단행하였다.&amp;lt;br/&amp;gt;&lt;br /&gt;
그러나 미국은 4.19직후 국무부 성명을 통해 한국에서 발생한 사태는 부정선거에 대한 '군중의 불만'을 반영한 것 이라고 했고, 양유찬 주미대사를 불러 '부정선거에 대한 철저한 조사', '경향신문 복간', '국가보안법 개정' 등을 촉구하는 각서를 전달하였다.&amp;lt;br/&amp;gt;&lt;br /&gt;
그리고 4월 25일, 이승만 정권에 분노한 전국 27개 대학 258명의 교수가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 모여 14개항의 시국 선언문을 발표하며 학생, 시민들과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들은 3.15 부정선거 및 4.19 사태의 책임을 지고 대통령이 물러날 것을 주장하였으며, &amp;quot;학생들의 피에 보답하자&amp;quot;는 플랜 카드를 앞세워 국회의사당까지 행진하였다. &lt;br /&gt;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lt;br /&gt;
무력 진압에도 대규모 시위가 이어지며 시민들은 완강하게 투쟁하였다. 4월 26일 시위대가 경무대로 다시 집결하는 등 사태가 심각하게 진행되자, 오전 10시 30분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 성명을 발표하였다. 4월 27일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하며 대통령직을 하야하고 하와이로 망명하였으며 자유당 정권도 끝나게 된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우리 국민들, 특히 학생과 청년들의 주도로 이루어진 4.19 혁명은 학생과 일반 대중이 단결하여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아시아 최초의 시건이다. 4.19혁명은 부마항쟁, 5.18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그리고 2017년 촛불시위에 이르기 까지 정권에 대항하는 국민들이 단합을 이루는 초석이 되었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도 시민 저항권에 대한 근거로써 4.19혁명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문구가 있다.&lt;br /&gt;
===기여===&lt;br /&gt;
[[뎐]]: 4.19혁명 페이지 원인, 의의 작성 &lt;br /&gt;
&lt;br /&gt;
[[•ᴗ•]]: 4.19혁명 페이지 전개 작성&lt;br /&gt;
&lt;br /&gt;
=='''부마항쟁'''==&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bK7zjpPvBsC7rFRPmsiHCUYhyWt2VXOv8SYyaBTND4Y&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원인===&lt;br /&gt;
====[[유신 헌법]]과 [[긴급조치]]====&lt;br /&gt;
1971년 선거에서 김대중을 누르고 대통령에 3선된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해 국회 해산,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등 법의 일부 기능을 정지시키고 전국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했다.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된 이른바 유신헌법에 의해 제정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법」 에 의거해 박정희가 제8대 대통령으로 재차 당선되었고, 이 유신 헌법이 발효된 기간을 유신 체제라고 부른다. 유신 체제는 행정, 입법, 사법의 3권을 모두 쥔 대통령이 종신 집권할 수 있도록 설계된 1인 대통령제였다. 박정희는 유신 헌법에 의거해 대통령의 권한으로 취할 수 있었던 특별조치인 긴급조치를 선포함으로써 헌법에 반대하는 시위 및 운동과 방송, 언론 활동을 하는 반정부 인사들을 연행, 체포, 고문하는 등 억압을 가했다.&lt;br /&gt;
&lt;br /&gt;
====한국경제의 위기====&lt;br /&gt;
1970년대 말 한국경제는''' [[오일쇼크]]'''라는 세계경제의 위기와 결합해 가라앉고 말았다. 경제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정부는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과 함께 '''[[경제안정화정책]]'''을 수용했고, 중소자본가, 봉급생활자, 도시 노동자와 농민 등에 안정화 비용을 부과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이와 같은 안정화 정책은 경제위기로 어려운 처지에 있던 중소기업들의 도산을 가속하여 기업 부도율이 치솟고 하층민들을 더 깊은 고통에 몰아넣었다. 특히 '''부가가치세'''를 도입한 이후 물가가 상승하면서 일상에 타격을 주었으며, 노동집약적 제조업이 집중되었던 부산과 마산에서는 상황이 더욱 심각하여 1979년 부산 지역 부도율은 서울의 3배에 달했다.&lt;br /&gt;
&lt;br /&gt;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lt;br /&gt;
한 시대의 대격변을 예고하는 단초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시작됐다. 1979년 8월 9일 오전, 신민당의 당사 4층 강당에서는 봉제업체인 YH무역주식회사의 여성노동자 200여명이 기업주의 폐업에 반발하여 폐업조치 철회 농성을 벌였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인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신민당이 당사 건물을 내준 것이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폭력을 동원하여 농성을 해산시켰다. 결국 이 사건은 노동 탄압 사건을 넘어선 야당에 대한 정치 탄압 사건으로 발전하였다.&lt;br /&gt;
&lt;br /&gt;
이날 경찰은 1000여명의 진압대원을 신민당사로 난입시켜 농성을 하고 있던 174명의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로 밖으로 끌어냈다. 또한 경찰은 총재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김영삼 총재와 당 간부들을 끌어내면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박정희 정권은 이 노동자 농성 사건을 빌미로 신민당 분열공작을 시도하였다. 유신정권과 비밀리에 결탁한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 3명이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 부총재 전원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접수시켰다. 그리고 법원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신민당 총재단의 직무 집행을 정지시키고 박정희 정권의 꼭두각시를 총재직무대행으로 선임하였다.&lt;br /&gt;
&lt;br /&gt;
아울러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의 동교동 자택을 전면 봉쇄하였고,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에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끊으라고 요구한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즈』 회견내용을 “반헌정적, 반민족적 작태”로 몰아서 국회에 징계 동의안을 제출했다. 10월 4일 오후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의원 159명은 여당 총회장에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제명 결의안을 '''기습적으로''' 처리해 버렸다. 노사분규 사태로 시작된 사건이 제1야당 당수의 의원직 제명으로 확대된 정치적 사태를 지켜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유신체제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이 고조되었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유신 철폐, 독재 타도!'''''   &amp;lt;small&amp;gt;-10.16 부마항쟁 당시 시위대의 구호&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부산대학교 민주선언문, 학생 시위에서 시민항쟁으로====&lt;br /&gt;
[[파일:부산시위대.jpg|250px|섬네일|오른쪽|광복동을 지나는 시위 행렬]]&lt;br /&gt;
1979년 10월 16일 아침 10시 부산대학교 구내 도서관 앞에서 약 500명의 학생들이 모여 “유신정권 물러가라”, “정치탄압 중지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반정부 시위를 벌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민주선언문」]]'''을 통해 민주화, 언론 자유, 인권 보장의 신념을 확인하고, “제도화된 폭력성과 조직적 악의 근원인 유신헌법과 독재집권층의 퇴진만이 5천 만 겨레의 통일의 첫걸음이라고 주장하면서 형제의 피를 요구하는 자유와 민주의 깃발을 우리가 잡고 반민주의 무리, 불의의 무리들을 향해 외치며 나아가자”라고 선언하였다. 이후 학생들은 교문을 나가 거리에서 시위했다. 이때 학생 수는 약 5,000명으로 불어나 있었고, 광복동과 남포동 등 부산시내 중심가까지 진출해 애국가 등의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며, 이를 제지하려는 경찰과 이곳저곳에서 충돌하였다. 비슷한 시간, 부산 동아대학교에서도 1,000여 명의 학생이 부산대학교 학생과 합류하여 가두시위를 벌였다. 부산대학교 데모로 학생 수백 명이 연행되고 100여 명이 다쳤지만 이튿날인 10월 17일에는 시위가 더욱 격화되어 학생들뿐만 아니라 다수의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학생 시위는 점차 시민항쟁의 양상을 띠어갔다.''' 밤늦게까지 계속된 시위에서 시민들은 충무파출소, 한국방송공사, 서구청, 부산세무서 등을 파괴하였고, 경찰차량을 불태우거나 파손시켰다.&lt;br /&gt;
&lt;br /&gt;
====마산의 시민항쟁====&lt;br /&gt;
&lt;br /&gt;
민주항쟁은 18일에 마산으로 확산되었다. 늦은 오후에는 1,000여 명의 경남대학교 학생들이 마산 시내 번화가에 산발적으로 집결했으며, 일부시민들도 가담해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어두워진 다음 학생과 시민들의 데모는 격화되어 파출소, 공화당사, 방송국, 신문사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파괴하였다. 이튿날인 19일에는 시위가 더욱 치열해져 마산 시내는 한때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저녁 8시경, 시위대는 경남대학과 마산대학&amp;lt;ref&amp;gt;1985년 창원대학으로 교명이 변경되었으며, 현재의 마산대학교와 다르다.&amp;lt;/ref&amp;gt;, 그리고 고등학생까지 합세하여 약 8,000명에 이르렀으며, 시내 곳곳에서 몽둥이를 들고 동사무소와 파출소로 몰려가 시설을 파괴하였고, 경찰차량에 불을 질렀다.&lt;br /&gt;
&lt;br /&gt;
====부산 계엄령, 마산 위수령====&lt;br /&gt;
[[파일:계엄포고문.jpg|270px|섬네일|왼쪽|부산지역에 내려진 계엄포고문을 읽고 있는 시민들]]&lt;br /&gt;
부산대학교 시위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박정희 정부는 학생 시위로 시작된 시위가 대규모 시민항쟁으로 사태가 심상치 않게 확대되어가자 강경책으로 대응했다. 정부는 18일 자정을 기해 '''부산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동원한 과격한 진압'''을 통해 시위 참여자들과 이를 방조한 일반 시민들까지 1,058명을 연행하고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으며, 부산지구 계엄사령부는 각 대학 휴교조처와 야간통행금지시간을 2시간 연장하는 등의 항이 담긴 포고문을 발표했다.&lt;br /&gt;
&lt;br /&gt;
부산에 계엄령이 선포된 이튿날인 19일에 마산 시위가 확대됨에 따라 그 다음날인 10월 20일 정오, 정부가 '''마산 및 창원 지역에 위수령을 발령'''해 통행금지 시간이 연장되고, 경남대학 등에는 휴교조처가 취해졌으며, 24일에는 깡패를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132명을 검거, 23명을 구속했다. 이렇게 '''표면적으로는 부마민주항쟁이 단시간에 진압되는 듯 보였지만, 항쟁은 이미 유신체제의 균열을 불러오고 있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항쟁의 전개 과정에서 볼 수 있듯, 부마민주항쟁에서 특징적인 것은 먼저 시위대의 가장 큰 분노의 대상이 공화당사와 경찰·파출소였다는 점, 다음으로는 “부가가치세를 철폐하라”, “잘 먹고 잘 살아라”등의 구호에서 드러나듯이 세무서에 대한 공격, 그리고 신문사와 방송국에 대한 공격을 들 수 있다.&lt;br /&gt;
&lt;br /&gt;
부마민주항쟁은 1970년대 유신체제 밑에서 쌓였던 침묵하는 언론, 조세, 시민을 억압하는 경찰에 대한 불만 등 정치·사회·경제·문화·종교 등 각 부문에 걸친 여러 모순의 폭발이었고, 헌법 개정과 긴급조치로 겨우 유지되던 유신체제와 박정희 정권의 붕괴를 촉진시킨 결정적인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10.26사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또한 이 사건은 1980년 5월 18일의 광주 민주화운동과 1987년 6월 민주항쟁에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된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억눌린 우리 역사&amp;lt;/br&amp;gt;터져나온 분노&amp;lt;/br&amp;gt;매운 연기 칼바람에도&amp;lt;/br&amp;gt;함성소리 드높았던&amp;lt;/br&amp;gt;동트는 새벽벌&amp;lt;/br&amp;gt;시월이 오면&amp;lt;/br&amp;gt;핏발 선 가슴마다&amp;lt;/br&amp;gt;살아오는 십 일육&amp;lt;/br&amp;gt;동지여 전진하자&amp;lt;/br&amp;gt;깨치고 나가자&amp;lt;/br&amp;gt;뜨거운 가슴으로&amp;lt;/br&amp;gt;빛나는 내일로'''''&amp;lt;/br&amp;gt;&amp;lt;small&amp;gt;-'''부산대학교''' 새벽벌도서관 10.16 기념비&amp;lt;/small&amp;gt;&amp;lt;/div&amp;gt;&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호빵이👻]]: 부마항쟁 페이지 전체 작성&amp;lt;/br&amp;gt;&lt;br /&gt;
[[이나자키로빈]]: 부마항쟁 원인 중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 작성&lt;br /&gt;
&lt;br /&gt;
=='''5.18민주화운동'''==&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AMetwTuXYHTCXINqr7ZJpzO5CHFEMQO5-Uqau51RkXA&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원인===&lt;br /&gt;
====유신체제의 붕괴====&lt;br /&gt;
&lt;br /&gt;
[[파일:김재규.jpg|섬네일|오른쪽|암살 당시 상황을 재현하는 김재규]]&lt;br /&gt;
&lt;br /&gt;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amp;lt;small&amp;gt; - 김재규&amp;lt;/small&amp;gt;&lt;br /&gt;
1979년 10월 4일 신민당 총재 김영삼이 국회에서 의원직을 제명당하자 10월 15부터 10월 20까지 부산 · 마산 등지에서는 부마항쟁이 일어났고, 이의 해결을 둘러싼 노선대립으로 갈등 중 10월 26일 &amp;lt;ins&amp;gt;[[김재규]]&amp;lt;/ins&amp;gt;가 박정희를 살해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ins&amp;gt;[[10.26 사태]]&amp;lt;/ins&amp;gt;의 사후 수습과정에서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을 중심으로 신군부 세력이 부상하였으며, 이들은 &amp;lt;ins&amp;gt;[[12.12 사건]]&amp;lt;/ins&amp;gt;의 하극상을 통하여 군부를 장악하였다. 1980년 2월 29일 김대중 등이 복권되었으나 그 해 봄, 신군부는 최규하 과도 정부를 유명무실하게 하고 국민들이 요구하는 민주주의와 이를 위한 명확한 정치일정 제시를 거부하면서 권력기반을 구축하였다.&lt;br /&gt;
&lt;br /&gt;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lt;br /&gt;
한 시대의 대격변을 예고하는 단초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시작됐다. 1979년 8월 9일 오전, 신민당의 당사 4층 강당에서는 봉제업체인 YH무역주식회사의 여성노동자 200여명이 기업주의 폐업에 반발하여 폐업조치 철회 농성을 벌였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인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신민당이 당사 건물을 내준 것이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폭력을 동원하여 농성을 해산시켰다. 결국 이 사건은 노동 탄압 사건을 넘어선 야당에 대한 정치 탄압 사건으로 발전하였다.&lt;br /&gt;
&lt;br /&gt;
이날 경찰은 1000여명의 진압대원을 신민당사로 난입시켜 농성을 하고 있던 174명의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로 밖으로 끌어냈다. 또한 경찰은 총재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김영삼 총재와 당 간부들을 끌어내면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박정희 정권은 이 노동자 농성 사건을 빌미로 신민당 분열공작을 시도하였다. 유신정권과 비밀리에 결탁한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 3명이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 부총재 전원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접수시켰다. 그리고 법원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신민당 총재단의 직무 집행을 정지시키고 박정희 정권의 꼭두각시를 총재직무대행으로 선임하였다.&lt;br /&gt;
&lt;br /&gt;
아울러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의 동교동 자택을 전면 봉쇄하였고,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에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끊으라고 요구한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즈』 회견내용을 “반헌정적, 반민족적 작태”로 몰아서 국회에 징계 동의안을 제출했다. 10월 4일 오후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의원 159명은 여당 총회장에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제명 결의안을 '''기습적으로''' 처리해 버렸다.&lt;br /&gt;
&lt;br /&gt;
노사분규 사태로 시작된 사건이 제1야당 당수의 의원직 제명으로 확대된 정치적 사태를 지켜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유신체제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이 고조되었다. 또한 이 사건은 그동안 다소 주춤하던 대학가에 반유신 반독재 운동의 열기가 다시 확산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청춘을 바쳐, 학생 운동====&lt;br /&gt;
&lt;br /&gt;
[[파일:서울의_봄.JPG|섬네일|오른쪽|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앞에 모인 시위대]]&lt;br /&gt;
&lt;br /&gt;
군부의 재집권 야욕에 대한 국민적 저항은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표출되었다. 1980년 3월, 서울대 총학생회 출범을 시작으로 4월 초순에는 전국의 주요 대학들이 총학생회를 결성하기 시작하였다. 대학별로 독재 정권에 아부했던 어용교수와 족벌사학 퇴진 운동을 벌였고, 특히 병영집체훈련(당시 대학 신입생들은 의무적으로 군부대에 10일 간 입대하여 각종 군사훈련을 이수해야 했다.) 거부가 주요 이슈로 전면 등장했다. 각 대학의 병영집체훈련 거부운동이 본격화되고 전국적인 쟁점으로 떠오르자 신군부는 신문, 방송을 통해 ‘학생들의 안보의식 결여’를 비난하고 교내 시위·농성을 집중적으로 보도하게 했다.  5월 1일에 서울대가 입영훈련 거부투쟁 철회를 결정하고 ‘계엄령 해제’와 ‘유신잔당 퇴진’, ‘정부개헌중단’과 ‘노동 3권 보장’ 등을 요구하기 시작하면서 대학가는 이제까지의 학내 문제 중심의 운동에서 정치개혁을 위한 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그간 정부와 대학 간에 팽팽하게 유지되던 긴장 관계는 폭발 직전으로 내닫게 된 것이다.&lt;br /&gt;
&lt;br /&gt;
약 열흘 간의 대정부 투쟁을 준비한 대학가는 5월 10일 고려대 총학생회장실에서 열린 ‘총학생회장단 회의’에 참석한 전국 23개 대학 대표들은 ‘비상계엄의 즉각 해제’와 ‘전두환, 신현확 등 유신잔당 퇴진’ 등을 결의하고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정세에 대한 공동대처 방안을 마련했다. 이후 5월 13일부터 5월 14일에 걸쳐 서울 · 부산 · 대구 · 광주 등 37개 대학에서 계엄철폐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5월 15일에는 서울역에서 시위가 발생하는 등 학생시위는 서울시가지를 거의 마비시키는 등 야간까지 지속되어 사태가 절정에 달하면서 신군부 세력을 위협하였다. 5월 16일 24개 대학 학생대표들은 당분간 시국의 추이를 관망하기로 결정하고 가두시위를 중단하면서 소강상태에 돌입하는 듯하였다.&lt;br /&gt;
&lt;br /&gt;
====1980년 봄의 광주====&lt;br /&gt;
5월 17일 신군부 세력이 이전까지는 제주도를 제외한 지역에 한정되었던 비상계엄을 전국에 확대하는 조치인 계엄포고 10호(17일 24시에 발효: 각 대학 휴교령 포함)를 밤 9시 40분에 의결하고 밤 11시 40분에 발표하면서 밤 11시를 전후한 시점부터 김대중 · 김종필이 연행되는 등 권력형 부정축재자 및 소요조종 혐의자, 학생 시위 주동자가 체포되었다. 이날 밤 광주지역의 사회운동·학생운동의 지도자도 상당수가 검거되었다. 광주의 검거대상자는 전남대 12명, 조선대 10명 등 총 22명이었다. 전남에서 계엄합동수사단은 광주505보안대가 중심이고, 중앙정보부, 경찰 등이 보조역할을 했다. 전남 계엄합동수사단은 22대 차량과 86명의 인원이 출동해 정동년 등 복적생들과 대학의 총학생회 간부들을 집중 검거했다.&lt;br /&gt;
&lt;br /&gt;
한편 육군본부는 14일 오전 7시55분에 국가 중요 보안목표와 주요대학에 군 병력 배치 명령을 하달했다. 이 명령에 따라 전남북계엄분소장인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광주 시내 주요 시설물에 이날 오후부터 계엄병력을 배치했다. 31사단 96연대 병력이 광주시내 KBS건물에 42명, MBC 21명, CBS 11명, VOC(전일방송) 11명 등 주요 방송사 건물에 배치돼 경비에 들어간 것이다.&lt;br /&gt;
&lt;br /&gt;
이날 오후 전교사령관은 7공수여단의 광주배치에 따른 수송수단 지원도 미리 협의했다. 그리고 5월 8일부터 16일 사이에 공수부대 수뇌부들도 헬기를 타고 서울에서 내려와 광주 상무대의 전투병과교육사령부를 방문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광주에서 시위가 격화되면 즉각적으로 최정예 군부대를 동원해서 진압할 준비를 철저하게 갖추고 있었다. 5월 18일에 시작된 광주의 비극은 그 이전에 이미 시한폭탄처럼 준비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lt;br /&gt;
{{구글지도 | 위도=35.175961433346885 | 경도=126.90865311973532 | 줌=13 }}  [[파일:금남로.JPG|섬네일|오른쪽|금남로 앞에 집결한 버스와 시민군]]&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18일&amp;lt;/span&amp;gt;&lt;br /&gt;
휴교령이 내려질 경우 교문 앞에서 집결한다는 결의에 따라 학생들은 5월 18일 오전 전남대학교 앞에 모였다. 공수부대원들이 전남대 앞 시위를 저지하자 대학생들은 광주역에 재집결해서 시위를 이어갔다. 시위대가 점차 늘어나면서 공수부대원이 시내에서 시위진압에 나섰으며 18일 오후 1시부터 무차별 진압작전이 이루어져 부상자가 속출하였다.&lt;br /&gt;
&lt;br /&gt;
군인들이 금남로 등 시내 중심가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이나 여자를 마구 구타하고 짓밟으며 찌르는 등의 잔혹 행동을 하자 시민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이에 시위대는 오후 4시 이후 파출소 파괴 등 적극공세에 나섰다. '''계엄군의 과잉 무력진압은 시위를 해산시키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오히려 시민들을 단결시켰으며, 결국 19일 시민 · 학생 연대가 발생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lt;br /&gt;
&lt;br /&gt;
 '''''광주 애국 시민 여러분! 이것이 웬 말입니까? 웬 벼락이란 말입니까? 죄 없는 학생들을 총칼로 찔러 죽이고 몽둥이로 두들겨 트럭으로 실어가며 부녀자를 발가벗겨 총칼로 찌르는 놈들이 이 누구란 말입니까? 이제 우리가 살길은 전시민이 하나로 뭉쳐 청년 학생들을 보호하고 유신잔당과 극악무도한 살인마 전두환 일파와 공수 특전단 놈들을 한놈도 남김없이 쳐부수는 길 뿐입니다. 우리는 이제 다 보았습니다. 다 알게 되었읍니다. 왜 학생들이 그토록 소리 높이 외쳤는가를, 우리의 적은 경찰도 군대도 아닙니다. 우리의 적은 전국민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바로 유신잔당과 전두환 일파 그놈들입니다.''''' &amp;lt;small&amp;gt; - 1980년 5월 19일에 '광주시민민주투쟁회'명의의 호소문&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19일&amp;lt;/span&amp;gt;&lt;br /&gt;
19일 오전에는 일시적 소강상태였으나 오후 들어서 분노한 학생 · 시민들이 군 · 경찰과 공방전을 벌이면서 시위는 점차 격화되었다. '''시민들은 공포감에서 벗어나 자신의 생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단순한 학생시위에서 시민봉기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계엄군은 시위대를 포위하여 구타하였으며 일부 고등학생까지 포함된 시위대는 돌과 화염병으로 저항하였고 파출소와 방송국 등에 침입하였다. 뒤처진 공수부대를 공격하거나 고립된 차량을 포위하기도 하였으며 총과 방패를 빼앗기도 하였고, 오후 4시 50분 시민들에게 포위된 계엄군의 장갑차에서 최초의 발포가 있었다. 19일 밤비가 내리는 가운데 시위가 산발적으로 계속되었으며, 20일 오전 비가 그치고 대규모 시위는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오후부터 다시 시작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20일&amp;lt;/span&amp;gt;&lt;br /&gt;
'''20일 오후 6시부터 택시와 버스 운전 기사들이 광주역과 무등경기장에 모여 대형 버스와 트럭을 앞세우고 일시에 금남로에 집결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들을 앞세운 시위는 계엄군을 몰아내는 데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였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5.18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에 &amp;lt;ins&amp;gt;[[지대한 영향]]&amp;lt;/ins&amp;gt;을 끼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학생 운동에 뛰어든 많은 대학생들은 대학교에 들어와서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의 실상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아 학생 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군부정권은 5.18 이후로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다. 전두환은 김대중 등에게 '광주 사태'의 책임을 물어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했고,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 선언을 한 직후, 8월 27일 소위 체육관 선거를 통해 전두환은 대통령 자리를 탈취했다.&lt;br /&gt;
&lt;br /&gt;
지역적인 면에서는 '''광주광역시를 비롯한 전라도 지역의 트라우마'''로 작용해 이후의 민주정의당 및 &amp;lt;ins&amp;gt;[[3당 합당]]&amp;lt;/ins&amp;gt;으로 이어지는 보수 세력에 대해 적대심을 가지고, 민주당계 정당의 표밭이 되는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미 박정희 정부 시절부터 유무형의 정치적인 차별을 받고 있었지만 5.18의 참상은 전라도가 다시는 보수 세력을 지지하지 않게 만들 정도로 심각한 사건이며 호남소외론의 가장 결정적인 명분이 되었다.&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이나자키로빈]]: 5.18 민주화운동 페이지 전체 작성&lt;br /&gt;
&lt;br /&gt;
=='''6월민주항쟁'''==&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NnXWs5RMTIf-6DOEu9_rX2k4mgzUk1AQHYneCuwXN1Q&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원인===&lt;br /&gt;
====[[박종철고문치사사건]]====&lt;br /&gt;
&lt;br /&gt;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박종철은 1987년 1월 13일 자정 경 하숙집에서 치안본부(現 경찰청)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게 연행되었다.‘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이자 ‘민주화추진위원회’ 지도위원으로 수배 받고 있었던 박종운을 잡기위해 연행한 것이었다. 취조실로 연행해간 공안 당국은 박종철에게 박종운의 소재를 물었으나, 박종철은 순순히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경찰은 잔혹한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가하였고, 박종철은 끝내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했다. 당시 경찰은 초기 발표에서 고문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라고 사망원인을 발표하였으나, 시체부검 결과 전기고문과 물고문에 의한 살인인 것으로 밝혀졌다.&lt;br /&gt;
&lt;br /&gt;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저 죽음을 응시해주길 바란다. 저 죽음을 끝내 지켜주길 바란다. 저 죽음을 다시 죽이지 말아주길 바란다.''''' &amp;lt;small&amp;gt; - 동아일보 1987년 1월 17일자 김중배 칼럼 중&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사건 진상의 일부가 공개되자 2월 7일 전국 주요 도시에서 &amp;quot;박종철군 범국민추도식&amp;quot; 및 도심 시위가 열렸고 이어 3월 3일에는 &amp;quot;박종철군 49재와 고문추방 국민대행진&amp;quot;과 함께 또 다른 시위가 열렸다. 이후 4월 2일 서울대학교 학부모 130여 명이 ‘건국대학교 사태‘ 등 시국관련 구속학생의 징계철회를 요구하며 철야 농성을 벌였다.&lt;br /&gt;
&lt;br /&gt;
====정부의 개헌논의 유보====&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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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JazJFsgu4oc?si=sOE7w1tz-jKVztC9&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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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그러나 전두환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1987년 4월 13일 [[4.13호헌조치]]라 불리는 ‘대통령 특별담화‘를 발표, 개헌(改憲) 논의를 유보하겠다고 밝혔다. [[4.13호헌조치]]에서 전두환은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와 대통령 선거는 자유 경선의 분위기가 보장되는 가운데 1987년 내에 공정한 선거관리를 통해 차질 없이 실시할 수 있게 모든 노력을 다할것‘이라고 다짐했으며, 또 ‘민정당의 후임 대통령 후보는 조속한 시일 안에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인물 가운데서 당헌 절차와 민주 방식에 따라 전당대회에서 선출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호헌조치‘라는 그 이름대로 현행 헌법에 따라 권력을 이양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국민들의 큰 기대를 얻을 것이라 믿었으나, 기대는 커녕 오히려 반발을 가져오는 요인이 되고 말았다. 곧바로 이튿날인 4월 14일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 등 각계 인사들이, 호헌 조치를 비판하는 시국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정부 최루탄에 의한 [[이한열]] 사망====&lt;br /&gt;
[[파일:이한열.jpg|200px|섬네일|오른쪽|최루탄에 피격당한 후 이종창에게 부축받는 이한열]]&lt;br /&gt;
먼저 1987년 5월 27일 야당과 재야, 종교계 등이 힘을 모아 ‘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여당인 민주정의당에서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6월 10일에 맞춰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6 · 10국민대회]])’를 치르기로 결정하였다. 대학생들은 국본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를 중심으로 6 · 10국민대회에 호응하여 6월 초부터 각 대학별로 연일 집회와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6 · 10국민대회]] 하루 전날인 6월 9일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교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는 곧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학생들은 물론 시민들의 분노가 들끓었다. 이러한 분노 속에서 6 · 10국민대회가 열렸다. 경찰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6 · 10국민대회가 열리는 성공회대성당을 원천 봉쇄하였다. 그 결과 6 · 10국민대회는 대회장에 미리 들어가 있던 소수의 인원만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대회 예정 시간인 오후 6시 이전부터 서울 시내 곳곳에서 대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시민들도 다양한 방식으로 6 · 10국민대회와 학생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날 밤 늦게까지 시위를 벌이던 학생들은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이후 5일 동안 농성을 계속하였다. 애초 계획된 것은 아니었지만 대학생들의 명동성당 농성은 6 · 10국민대회가 단발성 행사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인 저항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lt;br /&gt;
&lt;br /&gt;
====민주항쟁 확산====&lt;br /&gt;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로 개헌하라!'''''   &amp;lt;small&amp;gt;-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제시한 슬로건&amp;lt;/small&amp;gt;&lt;br /&gt;
명동성당 농성을 거치며 항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유월항쟁의 전국화 과정에는 일정한 패턴이 존재하였다. 6월 10일 서울 외에도 전국 주요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위가 벌어졌지만, 15일까지 항쟁의 중심은 6 · 10국민대회와 명동성당 농성이 전개된 서울이었다. 하지만 6월 15일 경부터는 부산, 대전, 진주 등에서 격렬한 시위가 전개되었다. 그러다가 6월 20일부터 대규모 시위가 광주, 전주, 순천, 익산 등 호남 지방으로 옮겨졌다. 6 · 10국민대회 이후 약 20일 동안 전국 곳곳에서 매일 평균 100회 이상의 시위가 동시다발로 벌어졌다. 특히 6월 18일 ‘최루탄추방대회’와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은 전국 곳곳에서 한꺼번에 1백만 명 이상이 참여하였다. 갈수록 참가 지역이 전국 곳곳으로 확산되어 대도시, 중소도시뿐만 아니라 농촌 지역의 군 단위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6월 26일 하루에만 37~38개 시 · 군에서 시위가 동시에 벌어졌다. 유월항쟁에 참가한 연 인원은 400~500만 명으로 추산된다.&lt;br /&gt;
&lt;br /&gt;
반면 유월항쟁의 전국적 동시다발 시위는 경찰 병력을 분산시켰다. 분산된 경찰 병력으로는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거센 시위의 물결을 막아 낼 수 없었다. 경찰이 시위 진압에 최루탄을 남발하면서 최루탄도 점차 고갈되기 시작하였다. 유월항쟁 기간 동안 경찰이 사용한 최루탄만 총 67만 발이 넘었다. 더불어, 전두환 정권이 집권 내내 강조했던 88서울올림픽이 얼마 남지 않아 미국 등 국제사회의 이목이 집중된 상황에서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운동 때처럼 유혈 사태와 대량 학살을 반복하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무엇보다 군대를 동원하더라도 이러한 대규모 시민 항쟁을 진압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결국 경찰력으로 항쟁을 막기 힘들고, 군대 투입도 어렵다고 판단한 전두환 정권은 1987년 6월 29일 ‘ 6 · 29민주화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하였다. 그리고 그동안 의식불명 상태에 있었던 이한열이 7월 5일 끝내 사망하였다. 5일장 후 7월 9일 치러진 이한열의 노제에 100만 명의 인파가 모인 것을 끝으로 약 한 달 동안 지속된 유월항쟁은 마무리되었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1987년 6월항쟁이 '''대통령[[직선제]] 개헌'''이라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이 항쟁에 동참한 학생과 시민들의 요구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제시한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 개헌’이라는 슬로건으로 모아졌기 때문이었다. 유월항쟁은 이러한 민주화 세력의 통합성, 즉 각기 다른 성격과 지향을 가진 여러 주체들이 모두 동의할 수 있는 ‘최소 강령’하에 ‘최대 연합’으로 결집하였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딩잉잉]]:6월민주항쟁 페이지 전체 작성&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기밀문서]]&lt;br /&gt;
[[분류:4.19혁명관련]]&lt;br /&gt;
[[분류:부마항쟁관련]]&lt;br /&gt;
[[분류:5.18민주화운동관련]]&lt;br /&gt;
[[분류:6월민주항쟁관련]]&lt;br /&gt;
[[분류:뎐]]&lt;br /&gt;
[[분류:이나자키로빈]]&lt;br /&gt;
[[분류:호빵이👻]]&lt;br /&gt;
[[분류:•ᴗ•]]&lt;br /&gt;
[[분류:딩잉잉]]&lt;/div&gt;</summary>
		<author><name>딩잉잉</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8%B0%EB%B0%80%EB%AC%B8%EC%84%9C&amp;diff=35960</id>
		<title>기밀문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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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1T16:16:0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딩잉잉: /* 컨텐츠 주제 */&lt;/p&gt;
&lt;hr /&gt;
&lt;div&gt;=='''컨텐츠 주제'''==&lt;br /&gt;
&lt;br /&gt;
[[파일:시위대.png|400픽셀|right]]&lt;br /&gt;
[[파일:이한열사진.jpeg|400픽셀|center]]&lt;br /&gt;
[[파일:진압.png|400픽셀|lef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amp;lt;big&amp;gt;'''&amp;lt;span style=&amp;quot;color:#CD0000&amp;quot;&amp;gt;투쟁의 불꽃, 자유의 환호&amp;lt;/span&amp;gt;'''&amp;lt;br/&amp;gt;&amp;lt;br/&amp;gt;&lt;br /&gt;
''대한민국은 시민들의 투쟁과 희생을 거쳐, 피와 땀으로 민주화를 이룩하였습니다.''&amp;lt;br/&amp;gt;&lt;br /&gt;
''그들은 어둠을 밝히기 위해 항거의 불꽃을 태웠고, 그 불꽃은 자유를 외쳤으며, 그 외침은 세상을 움직였습니다.''&amp;lt;br/&amp;gt;&lt;br /&gt;
''이 «기밀문서»에는 당신이 미처 몰랐던 그 때의 열기와 의지가 실려있습니다.''&amp;lt;br/&amp;gt;&lt;br /&gt;
''함께, 그 뜨거운 페이지를 열어보시겠습니까?''&amp;lt;/span&amp;gt;&amp;lt;/big&amp;gt;&amp;lt;/div&amp;gt;&lt;br /&gt;
&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이나자키로빈]]&lt;br /&gt;
[[딩잉잉]]&lt;br /&gt;
&lt;br /&gt;
=='''팀원'''==&lt;br /&gt;
*오현지(2022131143) [[뎐]]&amp;lt;br/&amp;gt;&lt;br /&gt;
*김여원(2023130209) [[이나자키로빈]]&amp;lt;br/&amp;gt;&lt;br /&gt;
*김하은(2022131345) [[호빵이👻]]&amp;lt;br/&amp;gt;&lt;br /&gt;
*박정원(2023130350) [[•ᴗ•]]&amp;lt;br/&amp;gt;&lt;br /&gt;
*최필중(2023130216) [[딩잉잉]]&amp;lt;br/&amp;gt;&lt;br /&gt;
&lt;br /&gt;
=='''기획의도'''==&lt;br /&gt;
===기획배경===&lt;br /&gt;
1945년 광복 이후 대한민국 국민들은 자유민주국가로서의 미래를 기대했으나 실상은 그러지 못했다.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보여주듯 현재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는 그것을 누리지 못한 앞선 세대들의 목숨을 바친 항쟁의 대가이다. 민주항쟁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의 핵심 동력이었다. 오늘날 우리나라 민주의식의 중요한 기둥이 되는 네 가지 항쟁을 선별하고 각 항쟁의 배경, 전개과정, 의의를 비롯해 세부적이고 자세한 내용에 대한 기사를 작성한다.&lt;br /&gt;
===기획목적===&lt;br /&gt;
작금의 현실까지 오기에는 수없이 많은 투쟁이 있었지만 4.19혁명, 부마항쟁, 5.18민주항쟁, 6월민주항쟁이라는 네 가지 사건을 살펴보기로 한 것은 가장 많이 다뤄지고, 가장 많이 알려진 사건이기 때문이다. 관련된 사건과 역사 인물들에 대해 자세히 적어 내어 민주항쟁의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지 않으면 알기 힘든 각 민주항쟁의 자세한 내막을 밝혀낸다.&lt;br /&gt;
===기대하는 바===&lt;br /&gt;
타임라인과 온톨로지를 활용해 내용의 전반적인 이해를 돕고 자세한 설명을 통해 사건의 자세한 내막을 들어낸다. 네 가지 항쟁을 각각 큰 목차로 설정하고 세부 기사를 그 내부에 작성해 독자의 관심과 수요에 부합하는 정보를 전달하는 데 효과적일 것으로 기대된다. 민주항쟁에 참여한 사람들의 희생과 투쟁에 대한 존경심을 부르고 역사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다.&lt;br /&gt;
===기여===&lt;br /&gt;
[[뎐]], [[이나자키로빈]], [[호빵이👻]]: 기획의도 페이지 작성&lt;br /&gt;
&lt;br /&gt;
=='''온톨로지'''==&lt;br /&gt;
{{NetworkGraph | title=민주항쟁.lst}}&lt;br /&gt;
[[민주항쟁.lst]]&lt;br /&gt;
===기여===&lt;br /&gt;
*[[뎐]]: 온톨로지 제작&lt;br /&gt;
=='''컨텐츠 구조'''==&lt;br /&gt;
===클래스(Class)===&lt;br /&gt;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color:white&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0%&amp;quot; | 클래스 !! style=&amp;quot;width:40%&amp;quot; | 설명 !! style=&amp;quot;45%&amp;quot; | 노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제||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대표 키워드인 민주항쟁을 주제로서 나타내었다 || 만주항쟁&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항쟁||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민주화운동 시기 발생했던 주요 운동들을 ‘항쟁’이라는 키워드로 분류하였다. || 4.19혁명, 부마항쟁, 5.18 민주화운동, 6월민주항쟁&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사건||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항쟁의 원인, 결과가 되는 사건을 정리하였다|| 3.15부정선거, 고려대 4.18학생시위, 3.15의거, YH사건, 10.26사태, 12.12 군사반란, 비상계엄령,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고문추방민족대행진, 4.13호헌조치, 6.29선언, 대통령직선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지역||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요 항쟁들이 일어났던 지역을 정리하였다|| 마산, 부산, 광주&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인물||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요사건들을 발생시킨 인물, 참여했던 인물을 묶어서 정리하였다|| 이승만, 이기붕, 김주열, 박정희, 김재규, 전두환, 신군부, 시민군, 박종철, 이한열, 노태우&lt;br /&gt;
|-&lt;br /&gt;
|}&lt;br /&gt;
===관계성(Relation)===&lt;br /&gt;
*&amp;lt;font color=#228B22&amp;gt;'''~은 ~에 속한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주요 항쟁들이 민주항쟁에 속함을 나타내거나 인물의 소속을 나타낸다.&lt;br /&gt;
***해당노드:&lt;br /&gt;
***#4.19혁명 -&amp;gt; 민주항쟁&lt;br /&gt;
***#부마항쟁 -&amp;gt; 민주항쟁&lt;br /&gt;
***#5.18민주화운동 -&amp;gt; 민주항쟁&lt;br /&gt;
***#6월 민주항쟁 -&amp;gt; 민주항쟁&lt;br /&gt;
***#전두환 -&amp;gt; 신군부&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의 원인이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어떠한 사건과 인과관계를 이루는 또다른 사건 혹은 인물을 설명한다.&lt;br /&gt;
***#이기붕 -&amp;gt; 3.15부정선거&lt;br /&gt;
***#김주열 -&amp;gt; 고려대 4.18학생시위&lt;br /&gt;
***#고려대 4.18학생시위 -&amp;gt; 4.19혁명&lt;br /&gt;
***#3.15의거 -&amp;gt; 4.19혁명&lt;br /&gt;
***#김주열 -&amp;gt; 4.19혁명&lt;br /&gt;
***#3.15부정선거 -&amp;gt; 3.15의거&lt;br /&gt;
***#YH사건 -&amp;gt; 부마항쟁&lt;br /&gt;
***#부마항쟁 -&amp;gt; 10.26사태&lt;br /&gt;
***#박정희 -&amp;gt; 10.26사태&lt;br /&gt;
***#비상계엄령 -&amp;gt; 5.18민주화운동&lt;br /&gt;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 -&amp;gt; 고문추방민족대행진&lt;br /&gt;
***#고문추방민족대행진 -&amp;gt; 4.13호헌조치&lt;br /&gt;
***#4.13호헌조치 -&amp;gt; 6월민주항쟁&lt;br /&gt;
***#6월민주항쟁 -&amp;gt; 6.29선언&lt;br /&gt;
***#6월민주항쟁 -&amp;gt; 대통령직선제&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을 발생시켰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사건과 그 사건을 직접적으로 발생시킨 인물을 연결한다.&lt;br /&gt;
***#이승만 -&amp;gt; 3.15부정선거&lt;br /&gt;
***#김재규 -&amp;gt; 10.26사태&lt;br /&gt;
***#신군부 -&amp;gt; 1212군사반란&lt;br /&gt;
***#전두환 -&amp;gt; 비상계엄령&lt;br /&gt;
***#노태우 -&amp;gt; 6.29선언&lt;br /&gt;
***#시민군 -&amp;gt; 5.18민주화운동&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에 희생되었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민주항쟁의 진압과정 등 에서 희생된 인물을 설명한다&lt;br /&gt;
***#김주열 -&amp;gt; 3.15의거&lt;br /&gt;
***#이한열 -&amp;gt; 6월 민주항쟁&lt;br /&gt;
***#박종철&amp;gt;박종철 고문치사 사건&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에서 발생했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설명한다.&lt;br /&gt;
***#3.15의거 -&amp;gt; 마산&lt;br /&gt;
***#부마항쟁 -&amp;gt; 부산&lt;br /&gt;
***#부마항쟁 -&amp;gt; 마산&lt;br /&gt;
***#5.18민주화운동 -&amp;gt; 광주&lt;br /&gt;
===기여===&lt;br /&gt;
*[[뎐]]: 컨텐츠 구조 페이지 작성&lt;br /&gt;
=='''4.19혁명'''==&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VPp4BmfDSv8VA2-oC-VATHzUYgadaiaQ9AlWXYiaiVk&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원인===&lt;br /&gt;
====[[3.15 부정선거]]====&lt;br /&gt;
[[파일:3.15부정선거_개표_모습.png|300픽셀|섬네일|오른쪽|3.15부정선거 당시 개표하는 사진&amp;lt;ref&amp;gt;사진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amp;lt;/ref&amp;gt;]]&lt;br /&gt;
1959년 대한민국은 제 4대 대통령 선거와 제 5대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당시 자유당에서는 12년째 대통령으로서 연임 중이던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이기붕]]'''을 부통령 후보로 선임하였다. 그러나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병세의 악화로 사망하게 되고,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은 확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선거의 초점은 자유당의 조병옥과 민주당의 장면 간의 선거전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본격적인 선거유세의 시작과 함께 정부와 여당의 잇따른 야당선거운동 방해사건으로 부정선거가 시작되었다. 1960년 3월 15일 선거가 시작된 이후에도 다양한 방법의 부정행위가 일어났고, 개표 결과 이승만과 이기붕의 득표가 100%에 육박하는 결과로 나오자 자유당은 득표수를 하향 조정해 최종 집계에 반영할 것을 지시했다. 결국 이승만 88.7%, 이기붕 79%의 득표율을 가지며 정, 부통령에 당선되었다.&amp;lt;ref&amp;gt;자세한 내용은 3.15부정선거 페이지 참조&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부정선거 반대시위, [[3.15 의거]]의 발생====&lt;br /&gt;
3.15 부정선거를 반대하는 시위는 초기에는 중, 고등학생들의 산발적인 시위로 전개되었다. 3월 15일 선거일 밤 경남 마산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으며,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여 1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amp;lt;br/&amp;gt;&lt;br /&gt;
3월 15일 실종되었던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4월 11일 마산부두에서 발견되자 마산 시민들은 시청, 파출소 등을 파괴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2차 시위가 일어난 것이다.&lt;br /&gt;
&lt;br /&gt;
====[[고려대학교 4.18 학생시위]]의 발생====&lt;br /&gt;
1, 2차 마산시위를 계기로 부정선거 무효와 이승만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났다. 이들은 '4.18 선언문'을 낭독하고 시내로 진출하였다. 이는 4월 19일 학생들과 일반 시민들이 가세한 대규모 시위로 이어지게 되었다.&lt;br /&gt;
====전국적인 4.19 혁명의 발생====&lt;br /&gt;
분노한 전국의 시민과 학생들이 다음 날인 4월 19일에 '이승만 하야와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며 대규모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경찰은 또다시 무차별 발포에 나섰고,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지만 이러한 압박에도 시민들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lt;br /&gt;
====이승만 대통령의 혼란 수습 시도====&lt;br /&gt;
이승만 대통령은 4.19 시위로 인한 정국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4월 20일 국무위원 전원과 자유당 당무위원 전원의 사표를 제출하도록 지시하였으며, 4월 23일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외무장관에 허정, 내무장관에 이호, 법무장관에 권승렬을 임명하는 등 개각을 단행하였다.&amp;lt;br/&amp;gt;&lt;br /&gt;
그러나 미국은 4.19직후 국무부 성명을 통해 한국에서 발생한 사태는 부정선거에 대한 '군중의 불만'을 반영한 것 이라고 했고, 양유찬 주미대사를 불러 '부정선거에 대한 철저한 조사', '경향신문 복간', '국가보안법 개정' 등을 촉구하는 각서를 전달하였다.&amp;lt;br/&amp;gt;&lt;br /&gt;
그리고 4월 25일, 이승만 정권에 분노한 전국 27개 대학 258명의 교수가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 모여 14개항의 시국 선언문을 발표하며 학생, 시민들과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들은 3.15 부정선거 및 4.19 사태의 책임을 지고 대통령이 물러날 것을 주장하였으며, &amp;quot;학생들의 피에 보답하자&amp;quot;는 플랜 카드를 앞세워 국회의사당까지 행진하였다. &lt;br /&gt;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lt;br /&gt;
무력 진압에도 대규모 시위가 이어지며 시민들은 완강하게 투쟁하였다. 4월 26일 시위대가 경무대로 다시 집결하는 등 사태가 심각하게 진행되자, 오전 10시 30분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 성명을 발표하였다. 4월 27일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하며 대통령직을 하야하고 하와이로 망명하였으며 자유당 정권도 끝나게 된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우리 국민들, 특히 학생과 청년들의 주도로 이루어진 4.19 혁명은 학생과 일반 대중이 단결하여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아시아 최초의 시건이다. 4.19혁명은 부마항쟁, 5.18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그리고 2017년 촛불시위에 이르기 까지 정권에 대항하는 국민들이 단합을 이루는 초석이 되었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도 시민 저항권에 대한 근거로써 4.19혁명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문구가 있다.&lt;br /&gt;
===기여===&lt;br /&gt;
[[뎐]]: 4.19혁명 페이지 원인, 의의 작성 &lt;br /&gt;
&lt;br /&gt;
[[•ᴗ•]]: 4.19혁명 페이지 전개 작성&lt;br /&gt;
&lt;br /&gt;
=='''부마항쟁'''==&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bK7zjpPvBsC7rFRPmsiHCUYhyWt2VXOv8SYyaBTND4Y&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원인===&lt;br /&gt;
====[[유신 헌법]]과 [[긴급조치]]====&lt;br /&gt;
1971년 선거에서 김대중을 누르고 대통령에 3선된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해 국회 해산,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등 법의 일부 기능을 정지시키고 전국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했다.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된 이른바 유신헌법에 의해 제정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법」 에 의거해 박정희가 제8대 대통령으로 재차 당선되었고, 이 유신 헌법이 발효된 기간을 유신 체제라고 부른다. 유신 체제는 행정, 입법, 사법의 3권을 모두 쥔 대통령이 종신 집권할 수 있도록 설계된 1인 대통령제였다. 박정희는 유신 헌법에 의거해 대통령의 권한으로 취할 수 있었던 특별조치인 긴급조치를 선포함으로써 헌법에 반대하는 시위 및 운동과 방송, 언론 활동을 하는 반정부 인사들을 연행, 체포, 고문하는 등 억압을 가했다.&lt;br /&gt;
&lt;br /&gt;
====한국경제의 위기====&lt;br /&gt;
1970년대 말 한국경제는''' [[오일쇼크]]'''라는 세계경제의 위기와 결합해 가라앉고 말았다. 경제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정부는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과 함께 '''[[경제안정화정책]]'''을 수용했고, 중소자본가, 봉급생활자, 도시 노동자와 농민 등에 안정화 비용을 부과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이와 같은 안정화 정책은 경제위기로 어려운 처지에 있던 중소기업들의 도산을 가속하여 기업 부도율이 치솟고 하층민들을 더 깊은 고통에 몰아넣었다. 특히 '''부가가치세'''를 도입한 이후 물가가 상승하면서 일상에 타격을 주었으며, 노동집약적 제조업이 집중되었던 부산과 마산에서는 상황이 더욱 심각하여 1979년 부산 지역 부도율은 서울의 3배에 달했다.&lt;br /&gt;
&lt;br /&gt;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lt;br /&gt;
한 시대의 대격변을 예고하는 단초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시작됐다. 1979년 8월 9일 오전, 신민당의 당사 4층 강당에서는 봉제업체인 YH무역주식회사의 여성노동자 200여명이 기업주의 폐업에 반발하여 폐업조치 철회 농성을 벌였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인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신민당이 당사 건물을 내준 것이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폭력을 동원하여 농성을 해산시켰다. 결국 이 사건은 노동 탄압 사건을 넘어선 야당에 대한 정치 탄압 사건으로 발전하였다.&lt;br /&gt;
&lt;br /&gt;
이날 경찰은 1000여명의 진압대원을 신민당사로 난입시켜 농성을 하고 있던 174명의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로 밖으로 끌어냈다. 또한 경찰은 총재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김영삼 총재와 당 간부들을 끌어내면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박정희 정권은 이 노동자 농성 사건을 빌미로 신민당 분열공작을 시도하였다. 유신정권과 비밀리에 결탁한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 3명이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 부총재 전원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접수시켰다. 그리고 법원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신민당 총재단의 직무 집행을 정지시키고 박정희 정권의 꼭두각시를 총재직무대행으로 선임하였다.&lt;br /&gt;
&lt;br /&gt;
아울러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의 동교동 자택을 전면 봉쇄하였고,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에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끊으라고 요구한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즈』 회견내용을 “반헌정적, 반민족적 작태”로 몰아서 국회에 징계 동의안을 제출했다. 10월 4일 오후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의원 159명은 여당 총회장에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제명 결의안을 '''기습적으로''' 처리해 버렸다. 노사분규 사태로 시작된 사건이 제1야당 당수의 의원직 제명으로 확대된 정치적 사태를 지켜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유신체제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이 고조되었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유신 철폐, 독재 타도!'''''   &amp;lt;small&amp;gt;-10.16 부마항쟁 당시 시위대의 구호&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부산대학교 민주선언문, 학생 시위에서 시민항쟁으로====&lt;br /&gt;
[[파일:부산시위대.jpg|250px|섬네일|오른쪽|광복동을 지나는 시위 행렬]]&lt;br /&gt;
1979년 10월 16일 아침 10시 부산대학교 구내 도서관 앞에서 약 500명의 학생들이 모여 “유신정권 물러가라”, “정치탄압 중지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반정부 시위를 벌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민주선언문」]]'''을 통해 민주화, 언론 자유, 인권 보장의 신념을 확인하고, “제도화된 폭력성과 조직적 악의 근원인 유신헌법과 독재집권층의 퇴진만이 5천 만 겨레의 통일의 첫걸음이라고 주장하면서 형제의 피를 요구하는 자유와 민주의 깃발을 우리가 잡고 반민주의 무리, 불의의 무리들을 향해 외치며 나아가자”라고 선언하였다. 이후 학생들은 교문을 나가 거리에서 시위했다. 이때 학생 수는 약 5,000명으로 불어나 있었고, 광복동과 남포동 등 부산시내 중심가까지 진출해 애국가 등의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며, 이를 제지하려는 경찰과 이곳저곳에서 충돌하였다. 비슷한 시간, 부산 동아대학교에서도 1,000여 명의 학생이 부산대학교 학생과 합류하여 가두시위를 벌였다. 부산대학교 데모로 학생 수백 명이 연행되고 100여 명이 다쳤지만 이튿날인 10월 17일에는 시위가 더욱 격화되어 학생들뿐만 아니라 다수의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학생 시위는 점차 시민항쟁의 양상을 띠어갔다.''' 밤늦게까지 계속된 시위에서 시민들은 충무파출소, 한국방송공사, 서구청, 부산세무서 등을 파괴하였고, 경찰차량을 불태우거나 파손시켰다.&lt;br /&gt;
&lt;br /&gt;
====마산의 시민항쟁====&lt;br /&gt;
&lt;br /&gt;
민주항쟁은 18일에 마산으로 확산되었다. 늦은 오후에는 1,000여 명의 경남대학교 학생들이 마산 시내 번화가에 산발적으로 집결했으며, 일부시민들도 가담해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어두워진 다음 학생과 시민들의 데모는 격화되어 파출소, 공화당사, 방송국, 신문사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파괴하였다. 이튿날인 19일에는 시위가 더욱 치열해져 마산 시내는 한때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저녁 8시경, 시위대는 경남대학과 마산대학&amp;lt;ref&amp;gt;1985년 창원대학으로 교명이 변경되었으며, 현재의 마산대학교와 다르다.&amp;lt;/ref&amp;gt;, 그리고 고등학생까지 합세하여 약 8,000명에 이르렀으며, 시내 곳곳에서 몽둥이를 들고 동사무소와 파출소로 몰려가 시설을 파괴하였고, 경찰차량에 불을 질렀다.&lt;br /&gt;
&lt;br /&gt;
====부산 계엄령, 마산 위수령====&lt;br /&gt;
[[파일:계엄포고문.jpg|270px|섬네일|왼쪽|부산지역에 내려진 계엄포고문을 읽고 있는 시민들]]&lt;br /&gt;
부산대학교 시위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박정희 정부는 학생 시위로 시작된 시위가 대규모 시민항쟁으로 사태가 심상치 않게 확대되어가자 강경책으로 대응했다. 정부는 18일 자정을 기해 '''부산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동원한 과격한 진압'''을 통해 시위 참여자들과 이를 방조한 일반 시민들까지 1,058명을 연행하고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으며, 부산지구 계엄사령부는 각 대학 휴교조처와 야간통행금지시간을 2시간 연장하는 등의 항이 담긴 포고문을 발표했다.&lt;br /&gt;
&lt;br /&gt;
부산에 계엄령이 선포된 이튿날인 19일에 마산 시위가 확대됨에 따라 그 다음날인 10월 20일 정오, 정부가 '''마산 및 창원 지역에 위수령을 발령'''해 통행금지 시간이 연장되고, 경남대학 등에는 휴교조처가 취해졌으며, 24일에는 깡패를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132명을 검거, 23명을 구속했다. 이렇게 '''표면적으로는 부마민주항쟁이 단시간에 진압되는 듯 보였지만, 항쟁은 이미 유신체제의 균열을 불러오고 있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항쟁의 전개 과정에서 볼 수 있듯, 부마민주항쟁에서 특징적인 것은 먼저 시위대의 가장 큰 분노의 대상이 공화당사와 경찰·파출소였다는 점, 다음으로는 “부가가치세를 철폐하라”, “잘 먹고 잘 살아라”등의 구호에서 드러나듯이 세무서에 대한 공격, 그리고 신문사와 방송국에 대한 공격을 들 수 있다.&lt;br /&gt;
&lt;br /&gt;
부마민주항쟁은 1970년대 유신체제 밑에서 쌓였던 침묵하는 언론, 조세, 시민을 억압하는 경찰에 대한 불만 등 정치·사회·경제·문화·종교 등 각 부문에 걸친 여러 모순의 폭발이었고, 헌법 개정과 긴급조치로 겨우 유지되던 유신체제와 박정희 정권의 붕괴를 촉진시킨 결정적인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10.26사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또한 이 사건은 1980년 5월 18일의 광주 민주화운동과 1987년 6월 민주항쟁에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된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억눌린 우리 역사&amp;lt;/br&amp;gt;터져나온 분노&amp;lt;/br&amp;gt;매운 연기 칼바람에도&amp;lt;/br&amp;gt;함성소리 드높았던&amp;lt;/br&amp;gt;동트는 새벽벌&amp;lt;/br&amp;gt;시월이 오면&amp;lt;/br&amp;gt;핏발 선 가슴마다&amp;lt;/br&amp;gt;살아오는 십 일육&amp;lt;/br&amp;gt;동지여 전진하자&amp;lt;/br&amp;gt;깨치고 나가자&amp;lt;/br&amp;gt;뜨거운 가슴으로&amp;lt;/br&amp;gt;빛나는 내일로'''''&amp;lt;/br&amp;gt;&amp;lt;small&amp;gt;-'''부산대학교''' 새벽벌도서관 10.16 기념비&amp;lt;/small&amp;gt;&amp;lt;/div&amp;gt;&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호빵이👻]]: 부마항쟁 페이지 전체 작성&amp;lt;/br&amp;gt;&lt;br /&gt;
[[이나자키로빈]]: 부마항쟁 원인 중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 작성&lt;br /&gt;
&lt;br /&gt;
=='''5.18민주화운동'''==&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AMetwTuXYHTCXINqr7ZJpzO5CHFEMQO5-Uqau51RkXA&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원인===&lt;br /&gt;
====유신체제의 붕괴====&lt;br /&gt;
&lt;br /&gt;
[[파일:김재규.jpg|섬네일|오른쪽|암살 당시 상황을 재현하는 김재규]]&lt;br /&gt;
&lt;br /&gt;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amp;lt;small&amp;gt; - 김재규&amp;lt;/small&amp;gt;&lt;br /&gt;
1979년 10월 4일 신민당 총재 김영삼이 국회에서 의원직을 제명당하자 10월 15부터 10월 20까지 부산 · 마산 등지에서는 부마항쟁이 일어났고, 이의 해결을 둘러싼 노선대립으로 갈등 중 10월 26일 &amp;lt;ins&amp;gt;[[김재규]]&amp;lt;/ins&amp;gt;가 박정희를 살해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ins&amp;gt;[[10.26 사태]]&amp;lt;/ins&amp;gt;의 사후 수습과정에서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을 중심으로 신군부 세력이 부상하였으며, 이들은 &amp;lt;ins&amp;gt;[[12.12 사건]]&amp;lt;/ins&amp;gt;의 하극상을 통하여 군부를 장악하였다. 1980년 2월 29일 김대중 등이 복권되었으나 그 해 봄, 신군부는 최규하 과도 정부를 유명무실하게 하고 국민들이 요구하는 민주주의와 이를 위한 명확한 정치일정 제시를 거부하면서 권력기반을 구축하였다.&lt;br /&gt;
&lt;br /&gt;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lt;br /&gt;
한 시대의 대격변을 예고하는 단초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시작됐다. 1979년 8월 9일 오전, 신민당의 당사 4층 강당에서는 봉제업체인 YH무역주식회사의 여성노동자 200여명이 기업주의 폐업에 반발하여 폐업조치 철회 농성을 벌였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인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신민당이 당사 건물을 내준 것이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폭력을 동원하여 농성을 해산시켰다. 결국 이 사건은 노동 탄압 사건을 넘어선 야당에 대한 정치 탄압 사건으로 발전하였다.&lt;br /&gt;
&lt;br /&gt;
이날 경찰은 1000여명의 진압대원을 신민당사로 난입시켜 농성을 하고 있던 174명의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로 밖으로 끌어냈다. 또한 경찰은 총재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김영삼 총재와 당 간부들을 끌어내면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박정희 정권은 이 노동자 농성 사건을 빌미로 신민당 분열공작을 시도하였다. 유신정권과 비밀리에 결탁한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 3명이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 부총재 전원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접수시켰다. 그리고 법원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신민당 총재단의 직무 집행을 정지시키고 박정희 정권의 꼭두각시를 총재직무대행으로 선임하였다.&lt;br /&gt;
&lt;br /&gt;
아울러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의 동교동 자택을 전면 봉쇄하였고,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에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끊으라고 요구한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즈』 회견내용을 “반헌정적, 반민족적 작태”로 몰아서 국회에 징계 동의안을 제출했다. 10월 4일 오후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의원 159명은 여당 총회장에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제명 결의안을 '''기습적으로''' 처리해 버렸다.&lt;br /&gt;
&lt;br /&gt;
노사분규 사태로 시작된 사건이 제1야당 당수의 의원직 제명으로 확대된 정치적 사태를 지켜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유신체제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이 고조되었다. 또한 이 사건은 그동안 다소 주춤하던 대학가에 반유신 반독재 운동의 열기가 다시 확산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청춘을 바쳐, 학생 운동====&lt;br /&gt;
&lt;br /&gt;
[[파일:서울의_봄.JPG|섬네일|오른쪽|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앞에 모인 시위대]]&lt;br /&gt;
&lt;br /&gt;
군부의 재집권 야욕에 대한 국민적 저항은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표출되었다. 1980년 3월, 서울대 총학생회 출범을 시작으로 4월 초순에는 전국의 주요 대학들이 총학생회를 결성하기 시작하였다. 대학별로 독재 정권에 아부했던 어용교수와 족벌사학 퇴진 운동을 벌였고, 특히 병영집체훈련(당시 대학 신입생들은 의무적으로 군부대에 10일 간 입대하여 각종 군사훈련을 이수해야 했다.) 거부가 주요 이슈로 전면 등장했다. 각 대학의 병영집체훈련 거부운동이 본격화되고 전국적인 쟁점으로 떠오르자 신군부는 신문, 방송을 통해 ‘학생들의 안보의식 결여’를 비난하고 교내 시위·농성을 집중적으로 보도하게 했다.  5월 1일에 서울대가 입영훈련 거부투쟁 철회를 결정하고 ‘계엄령 해제’와 ‘유신잔당 퇴진’, ‘정부개헌중단’과 ‘노동 3권 보장’ 등을 요구하기 시작하면서 대학가는 이제까지의 학내 문제 중심의 운동에서 정치개혁을 위한 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그간 정부와 대학 간에 팽팽하게 유지되던 긴장 관계는 폭발 직전으로 내닫게 된 것이다.&lt;br /&gt;
&lt;br /&gt;
약 열흘 간의 대정부 투쟁을 준비한 대학가는 5월 10일 고려대 총학생회장실에서 열린 ‘총학생회장단 회의’에 참석한 전국 23개 대학 대표들은 ‘비상계엄의 즉각 해제’와 ‘전두환, 신현확 등 유신잔당 퇴진’ 등을 결의하고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정세에 대한 공동대처 방안을 마련했다. 이후 5월 13일부터 5월 14일에 걸쳐 서울 · 부산 · 대구 · 광주 등 37개 대학에서 계엄철폐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5월 15일에는 서울역에서 시위가 발생하는 등 학생시위는 서울시가지를 거의 마비시키는 등 야간까지 지속되어 사태가 절정에 달하면서 신군부 세력을 위협하였다. 5월 16일 24개 대학 학생대표들은 당분간 시국의 추이를 관망하기로 결정하고 가두시위를 중단하면서 소강상태에 돌입하는 듯하였다.&lt;br /&gt;
&lt;br /&gt;
====1980년 봄의 광주====&lt;br /&gt;
5월 17일 신군부 세력이 이전까지는 제주도를 제외한 지역에 한정되었던 비상계엄을 전국에 확대하는 조치인 계엄포고 10호(17일 24시에 발효: 각 대학 휴교령 포함)를 밤 9시 40분에 의결하고 밤 11시 40분에 발표하면서 밤 11시를 전후한 시점부터 김대중 · 김종필이 연행되는 등 권력형 부정축재자 및 소요조종 혐의자, 학생 시위 주동자가 체포되었다. 이날 밤 광주지역의 사회운동·학생운동의 지도자도 상당수가 검거되었다. 광주의 검거대상자는 전남대 12명, 조선대 10명 등 총 22명이었다. 전남에서 계엄합동수사단은 광주505보안대가 중심이고, 중앙정보부, 경찰 등이 보조역할을 했다. 전남 계엄합동수사단은 22대 차량과 86명의 인원이 출동해 정동년 등 복적생들과 대학의 총학생회 간부들을 집중 검거했다.&lt;br /&gt;
&lt;br /&gt;
한편 육군본부는 14일 오전 7시55분에 국가 중요 보안목표와 주요대학에 군 병력 배치 명령을 하달했다. 이 명령에 따라 전남북계엄분소장인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광주 시내 주요 시설물에 이날 오후부터 계엄병력을 배치했다. 31사단 96연대 병력이 광주시내 KBS건물에 42명, MBC 21명, CBS 11명, VOC(전일방송) 11명 등 주요 방송사 건물에 배치돼 경비에 들어간 것이다.&lt;br /&gt;
&lt;br /&gt;
이날 오후 전교사령관은 7공수여단의 광주배치에 따른 수송수단 지원도 미리 협의했다. 그리고 5월 8일부터 16일 사이에 공수부대 수뇌부들도 헬기를 타고 서울에서 내려와 광주 상무대의 전투병과교육사령부를 방문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광주에서 시위가 격화되면 즉각적으로 최정예 군부대를 동원해서 진압할 준비를 철저하게 갖추고 있었다. 5월 18일에 시작된 광주의 비극은 그 이전에 이미 시한폭탄처럼 준비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lt;br /&gt;
{{구글지도 | 위도=35.175961433346885 | 경도=126.90865311973532 | 줌=13 }}  [[파일:금남로.JPG|섬네일|오른쪽|금남로 앞에 집결한 버스와 시민군]]&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18일&amp;lt;/span&amp;gt;&lt;br /&gt;
휴교령이 내려질 경우 교문 앞에서 집결한다는 결의에 따라 학생들은 5월 18일 오전 전남대학교 앞에 모였다. 공수부대원들이 전남대 앞 시위를 저지하자 대학생들은 광주역에 재집결해서 시위를 이어갔다. 시위대가 점차 늘어나면서 공수부대원이 시내에서 시위진압에 나섰으며 18일 오후 1시부터 무차별 진압작전이 이루어져 부상자가 속출하였다.&lt;br /&gt;
&lt;br /&gt;
군인들이 금남로 등 시내 중심가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이나 여자를 마구 구타하고 짓밟으며 찌르는 등의 잔혹 행동을 하자 시민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이에 시위대는 오후 4시 이후 파출소 파괴 등 적극공세에 나섰다. '''계엄군의 과잉 무력진압은 시위를 해산시키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오히려 시민들을 단결시켰으며, 결국 19일 시민 · 학생 연대가 발생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lt;br /&gt;
&lt;br /&gt;
 '''''광주 애국 시민 여러분! 이것이 웬 말입니까? 웬 벼락이란 말입니까? 죄 없는 학생들을 총칼로 찔러 죽이고 몽둥이로 두들겨 트럭으로 실어가며 부녀자를 발가벗겨 총칼로 찌르는 놈들이 이 누구란 말입니까? 이제 우리가 살길은 전시민이 하나로 뭉쳐 청년 학생들을 보호하고 유신잔당과 극악무도한 살인마 전두환 일파와 공수 특전단 놈들을 한놈도 남김없이 쳐부수는 길 뿐입니다. 우리는 이제 다 보았습니다. 다 알게 되었읍니다. 왜 학생들이 그토록 소리 높이 외쳤는가를, 우리의 적은 경찰도 군대도 아닙니다. 우리의 적은 전국민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바로 유신잔당과 전두환 일파 그놈들입니다.''''' &amp;lt;small&amp;gt; - 1980년 5월 19일에 '광주시민민주투쟁회'명의의 호소문&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19일&amp;lt;/span&amp;gt;&lt;br /&gt;
19일 오전에는 일시적 소강상태였으나 오후 들어서 분노한 학생 · 시민들이 군 · 경찰과 공방전을 벌이면서 시위는 점차 격화되었다. '''시민들은 공포감에서 벗어나 자신의 생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단순한 학생시위에서 시민봉기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계엄군은 시위대를 포위하여 구타하였으며 일부 고등학생까지 포함된 시위대는 돌과 화염병으로 저항하였고 파출소와 방송국 등에 침입하였다. 뒤처진 공수부대를 공격하거나 고립된 차량을 포위하기도 하였으며 총과 방패를 빼앗기도 하였고, 오후 4시 50분 시민들에게 포위된 계엄군의 장갑차에서 최초의 발포가 있었다. 19일 밤비가 내리는 가운데 시위가 산발적으로 계속되었으며, 20일 오전 비가 그치고 대규모 시위는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오후부터 다시 시작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20일&amp;lt;/span&amp;gt;&lt;br /&gt;
'''20일 오후 6시부터 택시와 버스 운전 기사들이 광주역과 무등경기장에 모여 대형 버스와 트럭을 앞세우고 일시에 금남로에 집결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들을 앞세운 시위는 계엄군을 몰아내는 데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였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5.18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에 &amp;lt;ins&amp;gt;[[지대한 영향]]&amp;lt;/ins&amp;gt;을 끼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학생 운동에 뛰어든 많은 대학생들은 대학교에 들어와서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의 실상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아 학생 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군부정권은 5.18 이후로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다. 전두환은 김대중 등에게 '광주 사태'의 책임을 물어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했고,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 선언을 한 직후, 8월 27일 소위 체육관 선거를 통해 전두환은 대통령 자리를 탈취했다.&lt;br /&gt;
&lt;br /&gt;
지역적인 면에서는 '''광주광역시를 비롯한 전라도 지역의 트라우마'''로 작용해 이후의 민주정의당 및 &amp;lt;ins&amp;gt;[[3당 합당]]&amp;lt;/ins&amp;gt;으로 이어지는 보수 세력에 대해 적대심을 가지고, 민주당계 정당의 표밭이 되는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미 박정희 정부 시절부터 유무형의 정치적인 차별을 받고 있었지만 5.18의 참상은 전라도가 다시는 보수 세력을 지지하지 않게 만들 정도로 심각한 사건이며 호남소외론의 가장 결정적인 명분이 되었다.&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이나자키로빈]]: 5.18 민주화운동 페이지 전체 작성&lt;br /&gt;
&lt;br /&gt;
=='''6월민주항쟁'''==&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NnXWs5RMTIf-6DOEu9_rX2k4mgzUk1AQHYneCuwXN1Q&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원인===&lt;br /&gt;
====[[박종철고문치사사건]]====&lt;br /&gt;
&lt;br /&gt;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박종철은 1987년 1월 13일 자정 경 하숙집에서 치안본부(現 경찰청)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게 연행되었다.‘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이자 ‘민주화추진위원회’ 지도위원으로 수배 받고 있었던 박종운을 잡기위해 연행한 것이었다. 취조실로 연행해간 공안 당국은 박종철에게 박종운의 소재를 물었으나, 박종철은 순순히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경찰은 잔혹한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가하였고, 박종철은 끝내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했다. 당시 경찰은 초기 발표에서 고문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라고 사망원인을 발표하였으나, 시체부검 결과 전기고문과 물고문에 의한 살인인 것으로 밝혀졌다.&lt;br /&gt;
&lt;br /&gt;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저 죽음을 응시해주길 바란다. 저 죽음을 끝내 지켜주길 바란다. 저 죽음을 다시 죽이지 말아주길 바란다.''''' &amp;lt;small&amp;gt; - 동아일보 1987년 1월 17일자 김중배 칼럼 중&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사건 진상의 일부가 공개되자 2월 7일 전국 주요 도시에서 &amp;quot;박종철군 범국민추도식&amp;quot; 및 도심 시위가 열렸고 이어 3월 3일에는 &amp;quot;박종철군 49재와 고문추방 국민대행진&amp;quot;과 함께 또 다른 시위가 열렸다. 이후 4월 2일 서울대학교 학부모 130여 명이 ‘건국대학교 사태‘ 등 시국관련 구속학생의 징계철회를 요구하며 철야 농성을 벌였다.&lt;br /&gt;
&lt;br /&gt;
====정부의 개헌논의 유보====&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lt;br /&g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JazJFsgu4oc?si=sOE7w1tz-jKVztC9&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lt;br /&g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그러나 전두환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1987년 4월 13일 [[4.13호헌조치]]라 불리는 ‘대통령 특별담화‘를 발표, 개헌(改憲) 논의를 유보하겠다고 밝혔다. [[4.13호헌조치]]에서 전두환은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와 대통령 선거는 자유 경선의 분위기가 보장되는 가운데 1987년 내에 공정한 선거관리를 통해 차질 없이 실시할 수 있게 모든 노력을 다할것‘이라고 다짐했으며, 또 ‘민정당의 후임 대통령 후보는 조속한 시일 안에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인물 가운데서 당헌 절차와 민주 방식에 따라 전당대회에서 선출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호헌조치‘라는 그 이름대로 현행 헌법에 따라 권력을 이양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국민들의 큰 기대를 얻을 것이라 믿었으나, 기대는 커녕 오히려 반발을 가져오는 요인이 되고 말았다. 곧바로 이튿날인 4월 14일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 등 각계 인사들이, 호헌 조치를 비판하는 시국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정부 최루탄에 의한 [[이한열]] 사망====&lt;br /&gt;
[[파일:이한열.jpg|200px|섬네일|오른쪽|최루탄에 피격당한 후 이종창에게 부축받는 이한열]]&lt;br /&gt;
먼저 1987년 5월 27일 야당과 재야, 종교계 등이 힘을 모아 ‘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여당인 민주정의당에서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6월 10일에 맞춰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6 · 10국민대회]])’를 치르기로 결정하였다. 대학생들은 국본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를 중심으로 6 · 10국민대회에 호응하여 6월 초부터 각 대학별로 연일 집회와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6 · 10국민대회]] 하루 전날인 6월 9일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교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는 곧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학생들은 물론 시민들의 분노가 들끓었다. 이러한 분노 속에서 6 · 10국민대회가 열렸다. 경찰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6 · 10국민대회가 열리는 성공회대성당을 원천 봉쇄하였다. 그 결과 6 · 10국민대회는 대회장에 미리 들어가 있던 소수의 인원만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대회 예정 시간인 오후 6시 이전부터 서울 시내 곳곳에서 대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시민들도 다양한 방식으로 6 · 10국민대회와 학생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날 밤 늦게까지 시위를 벌이던 학생들은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이후 5일 동안 농성을 계속하였다. 애초 계획된 것은 아니었지만 대학생들의 명동성당 농성은 6 · 10국민대회가 단발성 행사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인 저항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lt;br /&gt;
&lt;br /&gt;
====민주항쟁 확산====&lt;br /&gt;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로 개헌하라!'''''   &amp;lt;small&amp;gt;-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제시한 슬로건&amp;lt;/small&amp;gt;&lt;br /&gt;
명동성당 농성을 거치며 항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유월항쟁의 전국화 과정에는 일정한 패턴이 존재하였다. 6월 10일 서울 외에도 전국 주요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위가 벌어졌지만, 15일까지 항쟁의 중심은 6 · 10국민대회와 명동성당 농성이 전개된 서울이었다. 하지만 6월 15일 경부터는 부산, 대전, 진주 등에서 격렬한 시위가 전개되었다. 그러다가 6월 20일부터 대규모 시위가 광주, 전주, 순천, 익산 등 호남 지방으로 옮겨졌다. 6 · 10국민대회 이후 약 20일 동안 전국 곳곳에서 매일 평균 100회 이상의 시위가 동시다발로 벌어졌다. 특히 6월 18일 ‘최루탄추방대회’와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은 전국 곳곳에서 한꺼번에 1백만 명 이상이 참여하였다. 갈수록 참가 지역이 전국 곳곳으로 확산되어 대도시, 중소도시뿐만 아니라 농촌 지역의 군 단위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6월 26일 하루에만 37~38개 시 · 군에서 시위가 동시에 벌어졌다. 유월항쟁에 참가한 연 인원은 400~500만 명으로 추산된다.&lt;br /&gt;
&lt;br /&gt;
반면 유월항쟁의 전국적 동시다발 시위는 경찰 병력을 분산시켰다. 분산된 경찰 병력으로는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거센 시위의 물결을 막아 낼 수 없었다. 경찰이 시위 진압에 최루탄을 남발하면서 최루탄도 점차 고갈되기 시작하였다. 유월항쟁 기간 동안 경찰이 사용한 최루탄만 총 67만 발이 넘었다. 더불어, 전두환 정권이 집권 내내 강조했던 88서울올림픽이 얼마 남지 않아 미국 등 국제사회의 이목이 집중된 상황에서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운동 때처럼 유혈 사태와 대량 학살을 반복하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무엇보다 군대를 동원하더라도 이러한 대규모 시민 항쟁을 진압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결국 경찰력으로 항쟁을 막기 힘들고, 군대 투입도 어렵다고 판단한 전두환 정권은 1987년 6월 29일 ‘ 6 · 29민주화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하였다. 그리고 그동안 의식불명 상태에 있었던 이한열이 7월 5일 끝내 사망하였다. 5일장 후 7월 9일 치러진 이한열의 노제에 100만 명의 인파가 모인 것을 끝으로 약 한 달 동안 지속된 유월항쟁은 마무리되었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1987년 6월항쟁이 '''대통령[[직선제]] 개헌'''이라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이 항쟁에 동참한 학생과 시민들의 요구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제시한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 개헌’이라는 슬로건으로 모아졌기 때문이었다. 유월항쟁은 이러한 민주화 세력의 통합성, 즉 각기 다른 성격과 지향을 가진 여러 주체들이 모두 동의할 수 있는 ‘최소 강령’하에 ‘최대 연합’으로 결집하였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딩잉잉]]:6월민주항쟁 페이지 전체 작성&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기밀문서]]&lt;br /&gt;
[[분류:4.19혁명관련]]&lt;br /&gt;
[[분류:부마항쟁관련]]&lt;br /&gt;
[[분류:5.18민주화운동관련]]&lt;br /&gt;
[[분류:6월민주항쟁관련]]&lt;br /&gt;
[[분류:뎐]]&lt;br /&gt;
[[분류:이나자키로빈]]&lt;br /&gt;
[[분류:호빵이👻]]&lt;br /&gt;
[[분류:•ᴗ•]]&lt;br /&gt;
[[분류:딩잉잉]]&lt;/div&gt;</summary>
		<author><name>딩잉잉</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8%B0%EB%B0%80%EB%AC%B8%EC%84%9C&amp;diff=35957</id>
		<title>기밀문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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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1T16:15:4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딩잉잉: /* 컨텐츠 주제 */&lt;/p&gt;
&lt;hr /&gt;
&lt;div&gt;=='''컨텐츠 주제'''==&lt;br /&gt;
[[파일:이한열사진.jpeg|400픽셀|center]]&lt;br /&gt;
[[파일:시위대.png|400픽셀|right]]&lt;br /&gt;
[[파일:진압.png|400픽셀|lef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amp;lt;big&amp;gt;'''&amp;lt;span style=&amp;quot;color:#CD0000&amp;quot;&amp;gt;투쟁의 불꽃, 자유의 환호&amp;lt;/span&amp;gt;'''&amp;lt;br/&amp;gt;&amp;lt;br/&amp;gt;&lt;br /&gt;
''대한민국은 시민들의 투쟁과 희생을 거쳐, 피와 땀으로 민주화를 이룩하였습니다.''&amp;lt;br/&amp;gt;&lt;br /&gt;
''그들은 어둠을 밝히기 위해 항거의 불꽃을 태웠고, 그 불꽃은 자유를 외쳤으며, 그 외침은 세상을 움직였습니다.''&amp;lt;br/&amp;gt;&lt;br /&gt;
''이 «기밀문서»에는 당신이 미처 몰랐던 그 때의 열기와 의지가 실려있습니다.''&amp;lt;br/&amp;gt;&lt;br /&gt;
''함께, 그 뜨거운 페이지를 열어보시겠습니까?''&amp;lt;/span&amp;gt;&amp;lt;/big&amp;gt;&amp;lt;/div&amp;gt;&lt;br /&gt;
&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이나자키로빈]]&lt;br /&gt;
[[딩잉잉]]&lt;br /&gt;
&lt;br /&gt;
=='''팀원'''==&lt;br /&gt;
*오현지(2022131143) [[뎐]]&amp;lt;br/&amp;gt;&lt;br /&gt;
*김여원(2023130209) [[이나자키로빈]]&amp;lt;br/&amp;gt;&lt;br /&gt;
*김하은(2022131345) [[호빵이👻]]&amp;lt;br/&amp;gt;&lt;br /&gt;
*박정원(2023130350) [[•ᴗ•]]&amp;lt;br/&amp;gt;&lt;br /&gt;
*최필중(2023130216) [[딩잉잉]]&amp;lt;br/&amp;gt;&lt;br /&gt;
&lt;br /&gt;
=='''기획의도'''==&lt;br /&gt;
===기획배경===&lt;br /&gt;
1945년 광복 이후 대한민국 국민들은 자유민주국가로서의 미래를 기대했으나 실상은 그러지 못했다.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보여주듯 현재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는 그것을 누리지 못한 앞선 세대들의 목숨을 바친 항쟁의 대가이다. 민주항쟁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의 핵심 동력이었다. 오늘날 우리나라 민주의식의 중요한 기둥이 되는 네 가지 항쟁을 선별하고 각 항쟁의 배경, 전개과정, 의의를 비롯해 세부적이고 자세한 내용에 대한 기사를 작성한다.&lt;br /&gt;
===기획목적===&lt;br /&gt;
작금의 현실까지 오기에는 수없이 많은 투쟁이 있었지만 4.19혁명, 부마항쟁, 5.18민주항쟁, 6월민주항쟁이라는 네 가지 사건을 살펴보기로 한 것은 가장 많이 다뤄지고, 가장 많이 알려진 사건이기 때문이다. 관련된 사건과 역사 인물들에 대해 자세히 적어 내어 민주항쟁의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지 않으면 알기 힘든 각 민주항쟁의 자세한 내막을 밝혀낸다.&lt;br /&gt;
===기대하는 바===&lt;br /&gt;
타임라인과 온톨로지를 활용해 내용의 전반적인 이해를 돕고 자세한 설명을 통해 사건의 자세한 내막을 들어낸다. 네 가지 항쟁을 각각 큰 목차로 설정하고 세부 기사를 그 내부에 작성해 독자의 관심과 수요에 부합하는 정보를 전달하는 데 효과적일 것으로 기대된다. 민주항쟁에 참여한 사람들의 희생과 투쟁에 대한 존경심을 부르고 역사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다.&lt;br /&gt;
===기여===&lt;br /&gt;
[[뎐]], [[이나자키로빈]], [[호빵이👻]]: 기획의도 페이지 작성&lt;br /&gt;
&lt;br /&gt;
=='''온톨로지'''==&lt;br /&gt;
{{NetworkGraph | title=민주항쟁.lst}}&lt;br /&gt;
[[민주항쟁.lst]]&lt;br /&gt;
===기여===&lt;br /&gt;
*[[뎐]]: 온톨로지 제작&lt;br /&gt;
=='''컨텐츠 구조'''==&lt;br /&gt;
===클래스(Class)===&lt;br /&gt;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color:white&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0%&amp;quot; | 클래스 !! style=&amp;quot;width:40%&amp;quot; | 설명 !! style=&amp;quot;45%&amp;quot; | 노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제||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대표 키워드인 민주항쟁을 주제로서 나타내었다 || 만주항쟁&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항쟁||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민주화운동 시기 발생했던 주요 운동들을 ‘항쟁’이라는 키워드로 분류하였다. || 4.19혁명, 부마항쟁, 5.18 민주화운동, 6월민주항쟁&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사건||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항쟁의 원인, 결과가 되는 사건을 정리하였다|| 3.15부정선거, 고려대 4.18학생시위, 3.15의거, YH사건, 10.26사태, 12.12 군사반란, 비상계엄령,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고문추방민족대행진, 4.13호헌조치, 6.29선언, 대통령직선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지역||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요 항쟁들이 일어났던 지역을 정리하였다|| 마산, 부산, 광주&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인물||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요사건들을 발생시킨 인물, 참여했던 인물을 묶어서 정리하였다|| 이승만, 이기붕, 김주열, 박정희, 김재규, 전두환, 신군부, 시민군, 박종철, 이한열, 노태우&lt;br /&gt;
|-&lt;br /&gt;
|}&lt;br /&gt;
===관계성(Relation)===&lt;br /&gt;
*&amp;lt;font color=#228B22&amp;gt;'''~은 ~에 속한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주요 항쟁들이 민주항쟁에 속함을 나타내거나 인물의 소속을 나타낸다.&lt;br /&gt;
***해당노드:&lt;br /&gt;
***#4.19혁명 -&amp;gt; 민주항쟁&lt;br /&gt;
***#부마항쟁 -&amp;gt; 민주항쟁&lt;br /&gt;
***#5.18민주화운동 -&amp;gt; 민주항쟁&lt;br /&gt;
***#6월 민주항쟁 -&amp;gt; 민주항쟁&lt;br /&gt;
***#전두환 -&amp;gt; 신군부&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의 원인이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어떠한 사건과 인과관계를 이루는 또다른 사건 혹은 인물을 설명한다.&lt;br /&gt;
***#이기붕 -&amp;gt; 3.15부정선거&lt;br /&gt;
***#김주열 -&amp;gt; 고려대 4.18학생시위&lt;br /&gt;
***#고려대 4.18학생시위 -&amp;gt; 4.19혁명&lt;br /&gt;
***#3.15의거 -&amp;gt; 4.19혁명&lt;br /&gt;
***#김주열 -&amp;gt; 4.19혁명&lt;br /&gt;
***#3.15부정선거 -&amp;gt; 3.15의거&lt;br /&gt;
***#YH사건 -&amp;gt; 부마항쟁&lt;br /&gt;
***#부마항쟁 -&amp;gt; 10.26사태&lt;br /&gt;
***#박정희 -&amp;gt; 10.26사태&lt;br /&gt;
***#비상계엄령 -&amp;gt; 5.18민주화운동&lt;br /&gt;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 -&amp;gt; 고문추방민족대행진&lt;br /&gt;
***#고문추방민족대행진 -&amp;gt; 4.13호헌조치&lt;br /&gt;
***#4.13호헌조치 -&amp;gt; 6월민주항쟁&lt;br /&gt;
***#6월민주항쟁 -&amp;gt; 6.29선언&lt;br /&gt;
***#6월민주항쟁 -&amp;gt; 대통령직선제&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을 발생시켰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사건과 그 사건을 직접적으로 발생시킨 인물을 연결한다.&lt;br /&gt;
***#이승만 -&amp;gt; 3.15부정선거&lt;br /&gt;
***#김재규 -&amp;gt; 10.26사태&lt;br /&gt;
***#신군부 -&amp;gt; 1212군사반란&lt;br /&gt;
***#전두환 -&amp;gt; 비상계엄령&lt;br /&gt;
***#노태우 -&amp;gt; 6.29선언&lt;br /&gt;
***#시민군 -&amp;gt; 5.18민주화운동&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에 희생되었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민주항쟁의 진압과정 등 에서 희생된 인물을 설명한다&lt;br /&gt;
***#김주열 -&amp;gt; 3.15의거&lt;br /&gt;
***#이한열 -&amp;gt; 6월 민주항쟁&lt;br /&gt;
***#박종철&amp;gt;박종철 고문치사 사건&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에서 발생했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설명한다.&lt;br /&gt;
***#3.15의거 -&amp;gt; 마산&lt;br /&gt;
***#부마항쟁 -&amp;gt; 부산&lt;br /&gt;
***#부마항쟁 -&amp;gt; 마산&lt;br /&gt;
***#5.18민주화운동 -&amp;gt; 광주&lt;br /&gt;
===기여===&lt;br /&gt;
*[[뎐]]: 컨텐츠 구조 페이지 작성&lt;br /&gt;
=='''4.19혁명'''==&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VPp4BmfDSv8VA2-oC-VATHzUYgadaiaQ9AlWXYiaiVk&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원인===&lt;br /&gt;
====[[3.15 부정선거]]====&lt;br /&gt;
[[파일:3.15부정선거_개표_모습.png|300픽셀|섬네일|오른쪽|3.15부정선거 당시 개표하는 사진&amp;lt;ref&amp;gt;사진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amp;lt;/ref&amp;gt;]]&lt;br /&gt;
1959년 대한민국은 제 4대 대통령 선거와 제 5대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당시 자유당에서는 12년째 대통령으로서 연임 중이던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이기붕]]'''을 부통령 후보로 선임하였다. 그러나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병세의 악화로 사망하게 되고,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은 확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선거의 초점은 자유당의 조병옥과 민주당의 장면 간의 선거전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본격적인 선거유세의 시작과 함께 정부와 여당의 잇따른 야당선거운동 방해사건으로 부정선거가 시작되었다. 1960년 3월 15일 선거가 시작된 이후에도 다양한 방법의 부정행위가 일어났고, 개표 결과 이승만과 이기붕의 득표가 100%에 육박하는 결과로 나오자 자유당은 득표수를 하향 조정해 최종 집계에 반영할 것을 지시했다. 결국 이승만 88.7%, 이기붕 79%의 득표율을 가지며 정, 부통령에 당선되었다.&amp;lt;ref&amp;gt;자세한 내용은 3.15부정선거 페이지 참조&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부정선거 반대시위, [[3.15 의거]]의 발생====&lt;br /&gt;
3.15 부정선거를 반대하는 시위는 초기에는 중, 고등학생들의 산발적인 시위로 전개되었다. 3월 15일 선거일 밤 경남 마산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으며,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여 1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amp;lt;br/&amp;gt;&lt;br /&gt;
3월 15일 실종되었던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4월 11일 마산부두에서 발견되자 마산 시민들은 시청, 파출소 등을 파괴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2차 시위가 일어난 것이다.&lt;br /&gt;
&lt;br /&gt;
====[[고려대학교 4.18 학생시위]]의 발생====&lt;br /&gt;
1, 2차 마산시위를 계기로 부정선거 무효와 이승만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났다. 이들은 '4.18 선언문'을 낭독하고 시내로 진출하였다. 이는 4월 19일 학생들과 일반 시민들이 가세한 대규모 시위로 이어지게 되었다.&lt;br /&gt;
====전국적인 4.19 혁명의 발생====&lt;br /&gt;
분노한 전국의 시민과 학생들이 다음 날인 4월 19일에 '이승만 하야와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며 대규모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경찰은 또다시 무차별 발포에 나섰고,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지만 이러한 압박에도 시민들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lt;br /&gt;
====이승만 대통령의 혼란 수습 시도====&lt;br /&gt;
이승만 대통령은 4.19 시위로 인한 정국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4월 20일 국무위원 전원과 자유당 당무위원 전원의 사표를 제출하도록 지시하였으며, 4월 23일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외무장관에 허정, 내무장관에 이호, 법무장관에 권승렬을 임명하는 등 개각을 단행하였다.&amp;lt;br/&amp;gt;&lt;br /&gt;
그러나 미국은 4.19직후 국무부 성명을 통해 한국에서 발생한 사태는 부정선거에 대한 '군중의 불만'을 반영한 것 이라고 했고, 양유찬 주미대사를 불러 '부정선거에 대한 철저한 조사', '경향신문 복간', '국가보안법 개정' 등을 촉구하는 각서를 전달하였다.&amp;lt;br/&amp;gt;&lt;br /&gt;
그리고 4월 25일, 이승만 정권에 분노한 전국 27개 대학 258명의 교수가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 모여 14개항의 시국 선언문을 발표하며 학생, 시민들과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들은 3.15 부정선거 및 4.19 사태의 책임을 지고 대통령이 물러날 것을 주장하였으며, &amp;quot;학생들의 피에 보답하자&amp;quot;는 플랜 카드를 앞세워 국회의사당까지 행진하였다. &lt;br /&gt;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lt;br /&gt;
무력 진압에도 대규모 시위가 이어지며 시민들은 완강하게 투쟁하였다. 4월 26일 시위대가 경무대로 다시 집결하는 등 사태가 심각하게 진행되자, 오전 10시 30분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 성명을 발표하였다. 4월 27일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하며 대통령직을 하야하고 하와이로 망명하였으며 자유당 정권도 끝나게 된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우리 국민들, 특히 학생과 청년들의 주도로 이루어진 4.19 혁명은 학생과 일반 대중이 단결하여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아시아 최초의 시건이다. 4.19혁명은 부마항쟁, 5.18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그리고 2017년 촛불시위에 이르기 까지 정권에 대항하는 국민들이 단합을 이루는 초석이 되었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도 시민 저항권에 대한 근거로써 4.19혁명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문구가 있다.&lt;br /&gt;
===기여===&lt;br /&gt;
[[뎐]]: 4.19혁명 페이지 원인, 의의 작성 &lt;br /&gt;
&lt;br /&gt;
[[•ᴗ•]]: 4.19혁명 페이지 전개 작성&lt;br /&gt;
&lt;br /&gt;
=='''부마항쟁'''==&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bK7zjpPvBsC7rFRPmsiHCUYhyWt2VXOv8SYyaBTND4Y&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원인===&lt;br /&gt;
====[[유신 헌법]]과 [[긴급조치]]====&lt;br /&gt;
1971년 선거에서 김대중을 누르고 대통령에 3선된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해 국회 해산,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등 법의 일부 기능을 정지시키고 전국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했다.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된 이른바 유신헌법에 의해 제정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법」 에 의거해 박정희가 제8대 대통령으로 재차 당선되었고, 이 유신 헌법이 발효된 기간을 유신 체제라고 부른다. 유신 체제는 행정, 입법, 사법의 3권을 모두 쥔 대통령이 종신 집권할 수 있도록 설계된 1인 대통령제였다. 박정희는 유신 헌법에 의거해 대통령의 권한으로 취할 수 있었던 특별조치인 긴급조치를 선포함으로써 헌법에 반대하는 시위 및 운동과 방송, 언론 활동을 하는 반정부 인사들을 연행, 체포, 고문하는 등 억압을 가했다.&lt;br /&gt;
&lt;br /&gt;
====한국경제의 위기====&lt;br /&gt;
1970년대 말 한국경제는''' [[오일쇼크]]'''라는 세계경제의 위기와 결합해 가라앉고 말았다. 경제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정부는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과 함께 '''[[경제안정화정책]]'''을 수용했고, 중소자본가, 봉급생활자, 도시 노동자와 농민 등에 안정화 비용을 부과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이와 같은 안정화 정책은 경제위기로 어려운 처지에 있던 중소기업들의 도산을 가속하여 기업 부도율이 치솟고 하층민들을 더 깊은 고통에 몰아넣었다. 특히 '''부가가치세'''를 도입한 이후 물가가 상승하면서 일상에 타격을 주었으며, 노동집약적 제조업이 집중되었던 부산과 마산에서는 상황이 더욱 심각하여 1979년 부산 지역 부도율은 서울의 3배에 달했다.&lt;br /&gt;
&lt;br /&gt;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lt;br /&gt;
한 시대의 대격변을 예고하는 단초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시작됐다. 1979년 8월 9일 오전, 신민당의 당사 4층 강당에서는 봉제업체인 YH무역주식회사의 여성노동자 200여명이 기업주의 폐업에 반발하여 폐업조치 철회 농성을 벌였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인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신민당이 당사 건물을 내준 것이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폭력을 동원하여 농성을 해산시켰다. 결국 이 사건은 노동 탄압 사건을 넘어선 야당에 대한 정치 탄압 사건으로 발전하였다.&lt;br /&gt;
&lt;br /&gt;
이날 경찰은 1000여명의 진압대원을 신민당사로 난입시켜 농성을 하고 있던 174명의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로 밖으로 끌어냈다. 또한 경찰은 총재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김영삼 총재와 당 간부들을 끌어내면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박정희 정권은 이 노동자 농성 사건을 빌미로 신민당 분열공작을 시도하였다. 유신정권과 비밀리에 결탁한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 3명이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 부총재 전원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접수시켰다. 그리고 법원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신민당 총재단의 직무 집행을 정지시키고 박정희 정권의 꼭두각시를 총재직무대행으로 선임하였다.&lt;br /&gt;
&lt;br /&gt;
아울러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의 동교동 자택을 전면 봉쇄하였고,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에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끊으라고 요구한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즈』 회견내용을 “반헌정적, 반민족적 작태”로 몰아서 국회에 징계 동의안을 제출했다. 10월 4일 오후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의원 159명은 여당 총회장에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제명 결의안을 '''기습적으로''' 처리해 버렸다. 노사분규 사태로 시작된 사건이 제1야당 당수의 의원직 제명으로 확대된 정치적 사태를 지켜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유신체제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이 고조되었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유신 철폐, 독재 타도!'''''   &amp;lt;small&amp;gt;-10.16 부마항쟁 당시 시위대의 구호&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부산대학교 민주선언문, 학생 시위에서 시민항쟁으로====&lt;br /&gt;
[[파일:부산시위대.jpg|250px|섬네일|오른쪽|광복동을 지나는 시위 행렬]]&lt;br /&gt;
1979년 10월 16일 아침 10시 부산대학교 구내 도서관 앞에서 약 500명의 학생들이 모여 “유신정권 물러가라”, “정치탄압 중지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반정부 시위를 벌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민주선언문」]]'''을 통해 민주화, 언론 자유, 인권 보장의 신념을 확인하고, “제도화된 폭력성과 조직적 악의 근원인 유신헌법과 독재집권층의 퇴진만이 5천 만 겨레의 통일의 첫걸음이라고 주장하면서 형제의 피를 요구하는 자유와 민주의 깃발을 우리가 잡고 반민주의 무리, 불의의 무리들을 향해 외치며 나아가자”라고 선언하였다. 이후 학생들은 교문을 나가 거리에서 시위했다. 이때 학생 수는 약 5,000명으로 불어나 있었고, 광복동과 남포동 등 부산시내 중심가까지 진출해 애국가 등의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며, 이를 제지하려는 경찰과 이곳저곳에서 충돌하였다. 비슷한 시간, 부산 동아대학교에서도 1,000여 명의 학생이 부산대학교 학생과 합류하여 가두시위를 벌였다. 부산대학교 데모로 학생 수백 명이 연행되고 100여 명이 다쳤지만 이튿날인 10월 17일에는 시위가 더욱 격화되어 학생들뿐만 아니라 다수의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학생 시위는 점차 시민항쟁의 양상을 띠어갔다.''' 밤늦게까지 계속된 시위에서 시민들은 충무파출소, 한국방송공사, 서구청, 부산세무서 등을 파괴하였고, 경찰차량을 불태우거나 파손시켰다.&lt;br /&gt;
&lt;br /&gt;
====마산의 시민항쟁====&lt;br /&gt;
&lt;br /&gt;
민주항쟁은 18일에 마산으로 확산되었다. 늦은 오후에는 1,000여 명의 경남대학교 학생들이 마산 시내 번화가에 산발적으로 집결했으며, 일부시민들도 가담해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어두워진 다음 학생과 시민들의 데모는 격화되어 파출소, 공화당사, 방송국, 신문사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파괴하였다. 이튿날인 19일에는 시위가 더욱 치열해져 마산 시내는 한때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저녁 8시경, 시위대는 경남대학과 마산대학&amp;lt;ref&amp;gt;1985년 창원대학으로 교명이 변경되었으며, 현재의 마산대학교와 다르다.&amp;lt;/ref&amp;gt;, 그리고 고등학생까지 합세하여 약 8,000명에 이르렀으며, 시내 곳곳에서 몽둥이를 들고 동사무소와 파출소로 몰려가 시설을 파괴하였고, 경찰차량에 불을 질렀다.&lt;br /&gt;
&lt;br /&gt;
====부산 계엄령, 마산 위수령====&lt;br /&gt;
[[파일:계엄포고문.jpg|270px|섬네일|왼쪽|부산지역에 내려진 계엄포고문을 읽고 있는 시민들]]&lt;br /&gt;
부산대학교 시위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박정희 정부는 학생 시위로 시작된 시위가 대규모 시민항쟁으로 사태가 심상치 않게 확대되어가자 강경책으로 대응했다. 정부는 18일 자정을 기해 '''부산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동원한 과격한 진압'''을 통해 시위 참여자들과 이를 방조한 일반 시민들까지 1,058명을 연행하고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으며, 부산지구 계엄사령부는 각 대학 휴교조처와 야간통행금지시간을 2시간 연장하는 등의 항이 담긴 포고문을 발표했다.&lt;br /&gt;
&lt;br /&gt;
부산에 계엄령이 선포된 이튿날인 19일에 마산 시위가 확대됨에 따라 그 다음날인 10월 20일 정오, 정부가 '''마산 및 창원 지역에 위수령을 발령'''해 통행금지 시간이 연장되고, 경남대학 등에는 휴교조처가 취해졌으며, 24일에는 깡패를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132명을 검거, 23명을 구속했다. 이렇게 '''표면적으로는 부마민주항쟁이 단시간에 진압되는 듯 보였지만, 항쟁은 이미 유신체제의 균열을 불러오고 있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항쟁의 전개 과정에서 볼 수 있듯, 부마민주항쟁에서 특징적인 것은 먼저 시위대의 가장 큰 분노의 대상이 공화당사와 경찰·파출소였다는 점, 다음으로는 “부가가치세를 철폐하라”, “잘 먹고 잘 살아라”등의 구호에서 드러나듯이 세무서에 대한 공격, 그리고 신문사와 방송국에 대한 공격을 들 수 있다.&lt;br /&gt;
&lt;br /&gt;
부마민주항쟁은 1970년대 유신체제 밑에서 쌓였던 침묵하는 언론, 조세, 시민을 억압하는 경찰에 대한 불만 등 정치·사회·경제·문화·종교 등 각 부문에 걸친 여러 모순의 폭발이었고, 헌법 개정과 긴급조치로 겨우 유지되던 유신체제와 박정희 정권의 붕괴를 촉진시킨 결정적인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10.26사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또한 이 사건은 1980년 5월 18일의 광주 민주화운동과 1987년 6월 민주항쟁에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된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억눌린 우리 역사&amp;lt;/br&amp;gt;터져나온 분노&amp;lt;/br&amp;gt;매운 연기 칼바람에도&amp;lt;/br&amp;gt;함성소리 드높았던&amp;lt;/br&amp;gt;동트는 새벽벌&amp;lt;/br&amp;gt;시월이 오면&amp;lt;/br&amp;gt;핏발 선 가슴마다&amp;lt;/br&amp;gt;살아오는 십 일육&amp;lt;/br&amp;gt;동지여 전진하자&amp;lt;/br&amp;gt;깨치고 나가자&amp;lt;/br&amp;gt;뜨거운 가슴으로&amp;lt;/br&amp;gt;빛나는 내일로'''''&amp;lt;/br&amp;gt;&amp;lt;small&amp;gt;-'''부산대학교''' 새벽벌도서관 10.16 기념비&amp;lt;/small&amp;gt;&amp;lt;/div&amp;gt;&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호빵이👻]]: 부마항쟁 페이지 전체 작성&amp;lt;/br&amp;gt;&lt;br /&gt;
[[이나자키로빈]]: 부마항쟁 원인 중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 작성&lt;br /&gt;
&lt;br /&gt;
=='''5.18민주화운동'''==&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AMetwTuXYHTCXINqr7ZJpzO5CHFEMQO5-Uqau51RkXA&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원인===&lt;br /&gt;
====유신체제의 붕괴====&lt;br /&gt;
&lt;br /&gt;
[[파일:김재규.jpg|섬네일|오른쪽|암살 당시 상황을 재현하는 김재규]]&lt;br /&gt;
&lt;br /&gt;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amp;lt;small&amp;gt; - 김재규&amp;lt;/small&amp;gt;&lt;br /&gt;
1979년 10월 4일 신민당 총재 김영삼이 국회에서 의원직을 제명당하자 10월 15부터 10월 20까지 부산 · 마산 등지에서는 부마항쟁이 일어났고, 이의 해결을 둘러싼 노선대립으로 갈등 중 10월 26일 &amp;lt;ins&amp;gt;[[김재규]]&amp;lt;/ins&amp;gt;가 박정희를 살해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ins&amp;gt;[[10.26 사태]]&amp;lt;/ins&amp;gt;의 사후 수습과정에서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을 중심으로 신군부 세력이 부상하였으며, 이들은 &amp;lt;ins&amp;gt;[[12.12 사건]]&amp;lt;/ins&amp;gt;의 하극상을 통하여 군부를 장악하였다. 1980년 2월 29일 김대중 등이 복권되었으나 그 해 봄, 신군부는 최규하 과도 정부를 유명무실하게 하고 국민들이 요구하는 민주주의와 이를 위한 명확한 정치일정 제시를 거부하면서 권력기반을 구축하였다.&lt;br /&gt;
&lt;br /&gt;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lt;br /&gt;
한 시대의 대격변을 예고하는 단초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시작됐다. 1979년 8월 9일 오전, 신민당의 당사 4층 강당에서는 봉제업체인 YH무역주식회사의 여성노동자 200여명이 기업주의 폐업에 반발하여 폐업조치 철회 농성을 벌였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인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신민당이 당사 건물을 내준 것이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폭력을 동원하여 농성을 해산시켰다. 결국 이 사건은 노동 탄압 사건을 넘어선 야당에 대한 정치 탄압 사건으로 발전하였다.&lt;br /&gt;
&lt;br /&gt;
이날 경찰은 1000여명의 진압대원을 신민당사로 난입시켜 농성을 하고 있던 174명의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로 밖으로 끌어냈다. 또한 경찰은 총재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김영삼 총재와 당 간부들을 끌어내면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박정희 정권은 이 노동자 농성 사건을 빌미로 신민당 분열공작을 시도하였다. 유신정권과 비밀리에 결탁한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 3명이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 부총재 전원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접수시켰다. 그리고 법원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신민당 총재단의 직무 집행을 정지시키고 박정희 정권의 꼭두각시를 총재직무대행으로 선임하였다.&lt;br /&gt;
&lt;br /&gt;
아울러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의 동교동 자택을 전면 봉쇄하였고,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에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끊으라고 요구한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즈』 회견내용을 “반헌정적, 반민족적 작태”로 몰아서 국회에 징계 동의안을 제출했다. 10월 4일 오후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의원 159명은 여당 총회장에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제명 결의안을 '''기습적으로''' 처리해 버렸다.&lt;br /&gt;
&lt;br /&gt;
노사분규 사태로 시작된 사건이 제1야당 당수의 의원직 제명으로 확대된 정치적 사태를 지켜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유신체제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이 고조되었다. 또한 이 사건은 그동안 다소 주춤하던 대학가에 반유신 반독재 운동의 열기가 다시 확산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청춘을 바쳐, 학생 운동====&lt;br /&gt;
&lt;br /&gt;
[[파일:서울의_봄.JPG|섬네일|오른쪽|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앞에 모인 시위대]]&lt;br /&gt;
&lt;br /&gt;
군부의 재집권 야욕에 대한 국민적 저항은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표출되었다. 1980년 3월, 서울대 총학생회 출범을 시작으로 4월 초순에는 전국의 주요 대학들이 총학생회를 결성하기 시작하였다. 대학별로 독재 정권에 아부했던 어용교수와 족벌사학 퇴진 운동을 벌였고, 특히 병영집체훈련(당시 대학 신입생들은 의무적으로 군부대에 10일 간 입대하여 각종 군사훈련을 이수해야 했다.) 거부가 주요 이슈로 전면 등장했다. 각 대학의 병영집체훈련 거부운동이 본격화되고 전국적인 쟁점으로 떠오르자 신군부는 신문, 방송을 통해 ‘학생들의 안보의식 결여’를 비난하고 교내 시위·농성을 집중적으로 보도하게 했다.  5월 1일에 서울대가 입영훈련 거부투쟁 철회를 결정하고 ‘계엄령 해제’와 ‘유신잔당 퇴진’, ‘정부개헌중단’과 ‘노동 3권 보장’ 등을 요구하기 시작하면서 대학가는 이제까지의 학내 문제 중심의 운동에서 정치개혁을 위한 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그간 정부와 대학 간에 팽팽하게 유지되던 긴장 관계는 폭발 직전으로 내닫게 된 것이다.&lt;br /&gt;
&lt;br /&gt;
약 열흘 간의 대정부 투쟁을 준비한 대학가는 5월 10일 고려대 총학생회장실에서 열린 ‘총학생회장단 회의’에 참석한 전국 23개 대학 대표들은 ‘비상계엄의 즉각 해제’와 ‘전두환, 신현확 등 유신잔당 퇴진’ 등을 결의하고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정세에 대한 공동대처 방안을 마련했다. 이후 5월 13일부터 5월 14일에 걸쳐 서울 · 부산 · 대구 · 광주 등 37개 대학에서 계엄철폐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5월 15일에는 서울역에서 시위가 발생하는 등 학생시위는 서울시가지를 거의 마비시키는 등 야간까지 지속되어 사태가 절정에 달하면서 신군부 세력을 위협하였다. 5월 16일 24개 대학 학생대표들은 당분간 시국의 추이를 관망하기로 결정하고 가두시위를 중단하면서 소강상태에 돌입하는 듯하였다.&lt;br /&gt;
&lt;br /&gt;
====1980년 봄의 광주====&lt;br /&gt;
5월 17일 신군부 세력이 이전까지는 제주도를 제외한 지역에 한정되었던 비상계엄을 전국에 확대하는 조치인 계엄포고 10호(17일 24시에 발효: 각 대학 휴교령 포함)를 밤 9시 40분에 의결하고 밤 11시 40분에 발표하면서 밤 11시를 전후한 시점부터 김대중 · 김종필이 연행되는 등 권력형 부정축재자 및 소요조종 혐의자, 학생 시위 주동자가 체포되었다. 이날 밤 광주지역의 사회운동·학생운동의 지도자도 상당수가 검거되었다. 광주의 검거대상자는 전남대 12명, 조선대 10명 등 총 22명이었다. 전남에서 계엄합동수사단은 광주505보안대가 중심이고, 중앙정보부, 경찰 등이 보조역할을 했다. 전남 계엄합동수사단은 22대 차량과 86명의 인원이 출동해 정동년 등 복적생들과 대학의 총학생회 간부들을 집중 검거했다.&lt;br /&gt;
&lt;br /&gt;
한편 육군본부는 14일 오전 7시55분에 국가 중요 보안목표와 주요대학에 군 병력 배치 명령을 하달했다. 이 명령에 따라 전남북계엄분소장인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광주 시내 주요 시설물에 이날 오후부터 계엄병력을 배치했다. 31사단 96연대 병력이 광주시내 KBS건물에 42명, MBC 21명, CBS 11명, VOC(전일방송) 11명 등 주요 방송사 건물에 배치돼 경비에 들어간 것이다.&lt;br /&gt;
&lt;br /&gt;
이날 오후 전교사령관은 7공수여단의 광주배치에 따른 수송수단 지원도 미리 협의했다. 그리고 5월 8일부터 16일 사이에 공수부대 수뇌부들도 헬기를 타고 서울에서 내려와 광주 상무대의 전투병과교육사령부를 방문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광주에서 시위가 격화되면 즉각적으로 최정예 군부대를 동원해서 진압할 준비를 철저하게 갖추고 있었다. 5월 18일에 시작된 광주의 비극은 그 이전에 이미 시한폭탄처럼 준비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lt;br /&gt;
{{구글지도 | 위도=35.175961433346885 | 경도=126.90865311973532 | 줌=13 }}  [[파일:금남로.JPG|섬네일|오른쪽|금남로 앞에 집결한 버스와 시민군]]&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18일&amp;lt;/span&amp;gt;&lt;br /&gt;
휴교령이 내려질 경우 교문 앞에서 집결한다는 결의에 따라 학생들은 5월 18일 오전 전남대학교 앞에 모였다. 공수부대원들이 전남대 앞 시위를 저지하자 대학생들은 광주역에 재집결해서 시위를 이어갔다. 시위대가 점차 늘어나면서 공수부대원이 시내에서 시위진압에 나섰으며 18일 오후 1시부터 무차별 진압작전이 이루어져 부상자가 속출하였다.&lt;br /&gt;
&lt;br /&gt;
군인들이 금남로 등 시내 중심가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이나 여자를 마구 구타하고 짓밟으며 찌르는 등의 잔혹 행동을 하자 시민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이에 시위대는 오후 4시 이후 파출소 파괴 등 적극공세에 나섰다. '''계엄군의 과잉 무력진압은 시위를 해산시키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오히려 시민들을 단결시켰으며, 결국 19일 시민 · 학생 연대가 발생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lt;br /&gt;
&lt;br /&gt;
 '''''광주 애국 시민 여러분! 이것이 웬 말입니까? 웬 벼락이란 말입니까? 죄 없는 학생들을 총칼로 찔러 죽이고 몽둥이로 두들겨 트럭으로 실어가며 부녀자를 발가벗겨 총칼로 찌르는 놈들이 이 누구란 말입니까? 이제 우리가 살길은 전시민이 하나로 뭉쳐 청년 학생들을 보호하고 유신잔당과 극악무도한 살인마 전두환 일파와 공수 특전단 놈들을 한놈도 남김없이 쳐부수는 길 뿐입니다. 우리는 이제 다 보았습니다. 다 알게 되었읍니다. 왜 학생들이 그토록 소리 높이 외쳤는가를, 우리의 적은 경찰도 군대도 아닙니다. 우리의 적은 전국민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바로 유신잔당과 전두환 일파 그놈들입니다.''''' &amp;lt;small&amp;gt; - 1980년 5월 19일에 '광주시민민주투쟁회'명의의 호소문&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19일&amp;lt;/span&amp;gt;&lt;br /&gt;
19일 오전에는 일시적 소강상태였으나 오후 들어서 분노한 학생 · 시민들이 군 · 경찰과 공방전을 벌이면서 시위는 점차 격화되었다. '''시민들은 공포감에서 벗어나 자신의 생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단순한 학생시위에서 시민봉기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계엄군은 시위대를 포위하여 구타하였으며 일부 고등학생까지 포함된 시위대는 돌과 화염병으로 저항하였고 파출소와 방송국 등에 침입하였다. 뒤처진 공수부대를 공격하거나 고립된 차량을 포위하기도 하였으며 총과 방패를 빼앗기도 하였고, 오후 4시 50분 시민들에게 포위된 계엄군의 장갑차에서 최초의 발포가 있었다. 19일 밤비가 내리는 가운데 시위가 산발적으로 계속되었으며, 20일 오전 비가 그치고 대규모 시위는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오후부터 다시 시작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20일&amp;lt;/span&amp;gt;&lt;br /&gt;
'''20일 오후 6시부터 택시와 버스 운전 기사들이 광주역과 무등경기장에 모여 대형 버스와 트럭을 앞세우고 일시에 금남로에 집결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들을 앞세운 시위는 계엄군을 몰아내는 데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였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5.18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에 &amp;lt;ins&amp;gt;[[지대한 영향]]&amp;lt;/ins&amp;gt;을 끼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학생 운동에 뛰어든 많은 대학생들은 대학교에 들어와서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의 실상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아 학생 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군부정권은 5.18 이후로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다. 전두환은 김대중 등에게 '광주 사태'의 책임을 물어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했고,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 선언을 한 직후, 8월 27일 소위 체육관 선거를 통해 전두환은 대통령 자리를 탈취했다.&lt;br /&gt;
&lt;br /&gt;
지역적인 면에서는 '''광주광역시를 비롯한 전라도 지역의 트라우마'''로 작용해 이후의 민주정의당 및 &amp;lt;ins&amp;gt;[[3당 합당]]&amp;lt;/ins&amp;gt;으로 이어지는 보수 세력에 대해 적대심을 가지고, 민주당계 정당의 표밭이 되는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미 박정희 정부 시절부터 유무형의 정치적인 차별을 받고 있었지만 5.18의 참상은 전라도가 다시는 보수 세력을 지지하지 않게 만들 정도로 심각한 사건이며 호남소외론의 가장 결정적인 명분이 되었다.&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이나자키로빈]]: 5.18 민주화운동 페이지 전체 작성&lt;br /&gt;
&lt;br /&gt;
=='''6월민주항쟁'''==&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NnXWs5RMTIf-6DOEu9_rX2k4mgzUk1AQHYneCuwXN1Q&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원인===&lt;br /&gt;
====[[박종철고문치사사건]]====&lt;br /&gt;
&lt;br /&gt;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박종철은 1987년 1월 13일 자정 경 하숙집에서 치안본부(現 경찰청)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게 연행되었다.‘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이자 ‘민주화추진위원회’ 지도위원으로 수배 받고 있었던 박종운을 잡기위해 연행한 것이었다. 취조실로 연행해간 공안 당국은 박종철에게 박종운의 소재를 물었으나, 박종철은 순순히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경찰은 잔혹한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가하였고, 박종철은 끝내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했다. 당시 경찰은 초기 발표에서 고문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라고 사망원인을 발표하였으나, 시체부검 결과 전기고문과 물고문에 의한 살인인 것으로 밝혀졌다.&lt;br /&gt;
&lt;br /&gt;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저 죽음을 응시해주길 바란다. 저 죽음을 끝내 지켜주길 바란다. 저 죽음을 다시 죽이지 말아주길 바란다.''''' &amp;lt;small&amp;gt; - 동아일보 1987년 1월 17일자 김중배 칼럼 중&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사건 진상의 일부가 공개되자 2월 7일 전국 주요 도시에서 &amp;quot;박종철군 범국민추도식&amp;quot; 및 도심 시위가 열렸고 이어 3월 3일에는 &amp;quot;박종철군 49재와 고문추방 국민대행진&amp;quot;과 함께 또 다른 시위가 열렸다. 이후 4월 2일 서울대학교 학부모 130여 명이 ‘건국대학교 사태‘ 등 시국관련 구속학생의 징계철회를 요구하며 철야 농성을 벌였다.&lt;br /&gt;
&lt;br /&gt;
====정부의 개헌논의 유보====&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lt;br /&g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JazJFsgu4oc?si=sOE7w1tz-jKVztC9&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lt;br /&g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그러나 전두환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1987년 4월 13일 [[4.13호헌조치]]라 불리는 ‘대통령 특별담화‘를 발표, 개헌(改憲) 논의를 유보하겠다고 밝혔다. [[4.13호헌조치]]에서 전두환은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와 대통령 선거는 자유 경선의 분위기가 보장되는 가운데 1987년 내에 공정한 선거관리를 통해 차질 없이 실시할 수 있게 모든 노력을 다할것‘이라고 다짐했으며, 또 ‘민정당의 후임 대통령 후보는 조속한 시일 안에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인물 가운데서 당헌 절차와 민주 방식에 따라 전당대회에서 선출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호헌조치‘라는 그 이름대로 현행 헌법에 따라 권력을 이양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국민들의 큰 기대를 얻을 것이라 믿었으나, 기대는 커녕 오히려 반발을 가져오는 요인이 되고 말았다. 곧바로 이튿날인 4월 14일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 등 각계 인사들이, 호헌 조치를 비판하는 시국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정부 최루탄에 의한 [[이한열]] 사망====&lt;br /&gt;
[[파일:이한열.jpg|200px|섬네일|오른쪽|최루탄에 피격당한 후 이종창에게 부축받는 이한열]]&lt;br /&gt;
먼저 1987년 5월 27일 야당과 재야, 종교계 등이 힘을 모아 ‘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여당인 민주정의당에서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6월 10일에 맞춰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6 · 10국민대회]])’를 치르기로 결정하였다. 대학생들은 국본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를 중심으로 6 · 10국민대회에 호응하여 6월 초부터 각 대학별로 연일 집회와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6 · 10국민대회]] 하루 전날인 6월 9일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교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는 곧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학생들은 물론 시민들의 분노가 들끓었다. 이러한 분노 속에서 6 · 10국민대회가 열렸다. 경찰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6 · 10국민대회가 열리는 성공회대성당을 원천 봉쇄하였다. 그 결과 6 · 10국민대회는 대회장에 미리 들어가 있던 소수의 인원만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대회 예정 시간인 오후 6시 이전부터 서울 시내 곳곳에서 대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시민들도 다양한 방식으로 6 · 10국민대회와 학생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날 밤 늦게까지 시위를 벌이던 학생들은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이후 5일 동안 농성을 계속하였다. 애초 계획된 것은 아니었지만 대학생들의 명동성당 농성은 6 · 10국민대회가 단발성 행사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인 저항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lt;br /&gt;
&lt;br /&gt;
====민주항쟁 확산====&lt;br /&gt;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로 개헌하라!'''''   &amp;lt;small&amp;gt;-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제시한 슬로건&amp;lt;/small&amp;gt;&lt;br /&gt;
명동성당 농성을 거치며 항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유월항쟁의 전국화 과정에는 일정한 패턴이 존재하였다. 6월 10일 서울 외에도 전국 주요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위가 벌어졌지만, 15일까지 항쟁의 중심은 6 · 10국민대회와 명동성당 농성이 전개된 서울이었다. 하지만 6월 15일 경부터는 부산, 대전, 진주 등에서 격렬한 시위가 전개되었다. 그러다가 6월 20일부터 대규모 시위가 광주, 전주, 순천, 익산 등 호남 지방으로 옮겨졌다. 6 · 10국민대회 이후 약 20일 동안 전국 곳곳에서 매일 평균 100회 이상의 시위가 동시다발로 벌어졌다. 특히 6월 18일 ‘최루탄추방대회’와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은 전국 곳곳에서 한꺼번에 1백만 명 이상이 참여하였다. 갈수록 참가 지역이 전국 곳곳으로 확산되어 대도시, 중소도시뿐만 아니라 농촌 지역의 군 단위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6월 26일 하루에만 37~38개 시 · 군에서 시위가 동시에 벌어졌다. 유월항쟁에 참가한 연 인원은 400~500만 명으로 추산된다.&lt;br /&gt;
&lt;br /&gt;
반면 유월항쟁의 전국적 동시다발 시위는 경찰 병력을 분산시켰다. 분산된 경찰 병력으로는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거센 시위의 물결을 막아 낼 수 없었다. 경찰이 시위 진압에 최루탄을 남발하면서 최루탄도 점차 고갈되기 시작하였다. 유월항쟁 기간 동안 경찰이 사용한 최루탄만 총 67만 발이 넘었다. 더불어, 전두환 정권이 집권 내내 강조했던 88서울올림픽이 얼마 남지 않아 미국 등 국제사회의 이목이 집중된 상황에서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운동 때처럼 유혈 사태와 대량 학살을 반복하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무엇보다 군대를 동원하더라도 이러한 대규모 시민 항쟁을 진압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결국 경찰력으로 항쟁을 막기 힘들고, 군대 투입도 어렵다고 판단한 전두환 정권은 1987년 6월 29일 ‘ 6 · 29민주화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하였다. 그리고 그동안 의식불명 상태에 있었던 이한열이 7월 5일 끝내 사망하였다. 5일장 후 7월 9일 치러진 이한열의 노제에 100만 명의 인파가 모인 것을 끝으로 약 한 달 동안 지속된 유월항쟁은 마무리되었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1987년 6월항쟁이 '''대통령[[직선제]] 개헌'''이라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이 항쟁에 동참한 학생과 시민들의 요구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제시한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 개헌’이라는 슬로건으로 모아졌기 때문이었다. 유월항쟁은 이러한 민주화 세력의 통합성, 즉 각기 다른 성격과 지향을 가진 여러 주체들이 모두 동의할 수 있는 ‘최소 강령’하에 ‘최대 연합’으로 결집하였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딩잉잉]]:6월민주항쟁 페이지 전체 작성&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기밀문서]]&lt;br /&gt;
[[분류:4.19혁명관련]]&lt;br /&gt;
[[분류:부마항쟁관련]]&lt;br /&gt;
[[분류:5.18민주화운동관련]]&lt;br /&gt;
[[분류:6월민주항쟁관련]]&lt;br /&gt;
[[분류:뎐]]&lt;br /&gt;
[[분류:이나자키로빈]]&lt;br /&gt;
[[분류:호빵이👻]]&lt;br /&gt;
[[분류:•ᴗ•]]&lt;br /&gt;
[[분류:딩잉잉]]&lt;/div&gt;</summary>
		<author><name>딩잉잉</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8%B0%EB%B0%80%EB%AC%B8%EC%84%9C&amp;diff=35954</id>
		<title>기밀문서</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8%B0%EB%B0%80%EB%AC%B8%EC%84%9C&amp;diff=35954"/>
		<updated>2023-12-11T16:15:1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딩잉잉: /* 컨텐츠 주제 */&lt;/p&gt;
&lt;hr /&gt;
&lt;div&gt;=='''컨텐츠 주제'''==&lt;br /&gt;
[[파일:이한열사진.jpeg|600픽셀|center]]&lt;br /&gt;
[[파일:시위대.png|600픽셀|center]]&lt;br /&gt;
[[파일:진압.png|600픽셀|center]]&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amp;lt;big&amp;gt;'''&amp;lt;span style=&amp;quot;color:#CD0000&amp;quot;&amp;gt;투쟁의 불꽃, 자유의 환호&amp;lt;/span&amp;gt;'''&amp;lt;br/&amp;gt;&amp;lt;br/&amp;gt;&lt;br /&gt;
''대한민국은 시민들의 투쟁과 희생을 거쳐, 피와 땀으로 민주화를 이룩하였습니다.''&amp;lt;br/&amp;gt;&lt;br /&gt;
''그들은 어둠을 밝히기 위해 항거의 불꽃을 태웠고, 그 불꽃은 자유를 외쳤으며, 그 외침은 세상을 움직였습니다.''&amp;lt;br/&amp;gt;&lt;br /&gt;
''이 «기밀문서»에는 당신이 미처 몰랐던 그 때의 열기와 의지가 실려있습니다.''&amp;lt;br/&amp;gt;&lt;br /&gt;
''함께, 그 뜨거운 페이지를 열어보시겠습니까?''&amp;lt;/span&amp;gt;&amp;lt;/big&amp;gt;&amp;lt;/div&amp;gt;&lt;br /&gt;
&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이나자키로빈]]&lt;br /&gt;
[[딩잉잉]]&lt;br /&gt;
&lt;br /&gt;
=='''팀원'''==&lt;br /&gt;
*오현지(2022131143) [[뎐]]&amp;lt;br/&amp;gt;&lt;br /&gt;
*김여원(2023130209) [[이나자키로빈]]&amp;lt;br/&amp;gt;&lt;br /&gt;
*김하은(2022131345) [[호빵이👻]]&amp;lt;br/&amp;gt;&lt;br /&gt;
*박정원(2023130350) [[•ᴗ•]]&amp;lt;br/&amp;gt;&lt;br /&gt;
*최필중(2023130216) [[딩잉잉]]&amp;lt;br/&amp;gt;&lt;br /&gt;
&lt;br /&gt;
=='''기획의도'''==&lt;br /&gt;
===기획배경===&lt;br /&gt;
1945년 광복 이후 대한민국 국민들은 자유민주국가로서의 미래를 기대했으나 실상은 그러지 못했다.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보여주듯 현재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는 그것을 누리지 못한 앞선 세대들의 목숨을 바친 항쟁의 대가이다. 민주항쟁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의 핵심 동력이었다. 오늘날 우리나라 민주의식의 중요한 기둥이 되는 네 가지 항쟁을 선별하고 각 항쟁의 배경, 전개과정, 의의를 비롯해 세부적이고 자세한 내용에 대한 기사를 작성한다.&lt;br /&gt;
===기획목적===&lt;br /&gt;
작금의 현실까지 오기에는 수없이 많은 투쟁이 있었지만 4.19혁명, 부마항쟁, 5.18민주항쟁, 6월민주항쟁이라는 네 가지 사건을 살펴보기로 한 것은 가장 많이 다뤄지고, 가장 많이 알려진 사건이기 때문이다. 관련된 사건과 역사 인물들에 대해 자세히 적어 내어 민주항쟁의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지 않으면 알기 힘든 각 민주항쟁의 자세한 내막을 밝혀낸다.&lt;br /&gt;
===기대하는 바===&lt;br /&gt;
타임라인과 온톨로지를 활용해 내용의 전반적인 이해를 돕고 자세한 설명을 통해 사건의 자세한 내막을 들어낸다. 네 가지 항쟁을 각각 큰 목차로 설정하고 세부 기사를 그 내부에 작성해 독자의 관심과 수요에 부합하는 정보를 전달하는 데 효과적일 것으로 기대된다. 민주항쟁에 참여한 사람들의 희생과 투쟁에 대한 존경심을 부르고 역사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다.&lt;br /&gt;
===기여===&lt;br /&gt;
[[뎐]], [[이나자키로빈]], [[호빵이👻]]: 기획의도 페이지 작성&lt;br /&gt;
&lt;br /&gt;
=='''온톨로지'''==&lt;br /&gt;
{{NetworkGraph | title=민주항쟁.lst}}&lt;br /&gt;
[[민주항쟁.lst]]&lt;br /&gt;
===기여===&lt;br /&gt;
*[[뎐]]: 온톨로지 제작&lt;br /&gt;
=='''컨텐츠 구조'''==&lt;br /&gt;
===클래스(Class)===&lt;br /&gt;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color:white&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0%&amp;quot; | 클래스 !! style=&amp;quot;width:40%&amp;quot; | 설명 !! style=&amp;quot;45%&amp;quot; | 노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제||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대표 키워드인 민주항쟁을 주제로서 나타내었다 || 만주항쟁&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항쟁||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민주화운동 시기 발생했던 주요 운동들을 ‘항쟁’이라는 키워드로 분류하였다. || 4.19혁명, 부마항쟁, 5.18 민주화운동, 6월민주항쟁&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사건||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항쟁의 원인, 결과가 되는 사건을 정리하였다|| 3.15부정선거, 고려대 4.18학생시위, 3.15의거, YH사건, 10.26사태, 12.12 군사반란, 비상계엄령,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고문추방민족대행진, 4.13호헌조치, 6.29선언, 대통령직선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지역||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요 항쟁들이 일어났던 지역을 정리하였다|| 마산, 부산, 광주&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인물||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요사건들을 발생시킨 인물, 참여했던 인물을 묶어서 정리하였다|| 이승만, 이기붕, 김주열, 박정희, 김재규, 전두환, 신군부, 시민군, 박종철, 이한열, 노태우&lt;br /&gt;
|-&lt;br /&gt;
|}&lt;br /&gt;
===관계성(Relation)===&lt;br /&gt;
*&amp;lt;font color=#228B22&amp;gt;'''~은 ~에 속한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주요 항쟁들이 민주항쟁에 속함을 나타내거나 인물의 소속을 나타낸다.&lt;br /&gt;
***해당노드:&lt;br /&gt;
***#4.19혁명 -&amp;gt; 민주항쟁&lt;br /&gt;
***#부마항쟁 -&amp;gt; 민주항쟁&lt;br /&gt;
***#5.18민주화운동 -&amp;gt; 민주항쟁&lt;br /&gt;
***#6월 민주항쟁 -&amp;gt; 민주항쟁&lt;br /&gt;
***#전두환 -&amp;gt; 신군부&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의 원인이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어떠한 사건과 인과관계를 이루는 또다른 사건 혹은 인물을 설명한다.&lt;br /&gt;
***#이기붕 -&amp;gt; 3.15부정선거&lt;br /&gt;
***#김주열 -&amp;gt; 고려대 4.18학생시위&lt;br /&gt;
***#고려대 4.18학생시위 -&amp;gt; 4.19혁명&lt;br /&gt;
***#3.15의거 -&amp;gt; 4.19혁명&lt;br /&gt;
***#김주열 -&amp;gt; 4.19혁명&lt;br /&gt;
***#3.15부정선거 -&amp;gt; 3.15의거&lt;br /&gt;
***#YH사건 -&amp;gt; 부마항쟁&lt;br /&gt;
***#부마항쟁 -&amp;gt; 10.26사태&lt;br /&gt;
***#박정희 -&amp;gt; 10.26사태&lt;br /&gt;
***#비상계엄령 -&amp;gt; 5.18민주화운동&lt;br /&gt;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 -&amp;gt; 고문추방민족대행진&lt;br /&gt;
***#고문추방민족대행진 -&amp;gt; 4.13호헌조치&lt;br /&gt;
***#4.13호헌조치 -&amp;gt; 6월민주항쟁&lt;br /&gt;
***#6월민주항쟁 -&amp;gt; 6.29선언&lt;br /&gt;
***#6월민주항쟁 -&amp;gt; 대통령직선제&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을 발생시켰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사건과 그 사건을 직접적으로 발생시킨 인물을 연결한다.&lt;br /&gt;
***#이승만 -&amp;gt; 3.15부정선거&lt;br /&gt;
***#김재규 -&amp;gt; 10.26사태&lt;br /&gt;
***#신군부 -&amp;gt; 1212군사반란&lt;br /&gt;
***#전두환 -&amp;gt; 비상계엄령&lt;br /&gt;
***#노태우 -&amp;gt; 6.29선언&lt;br /&gt;
***#시민군 -&amp;gt; 5.18민주화운동&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에 희생되었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민주항쟁의 진압과정 등 에서 희생된 인물을 설명한다&lt;br /&gt;
***#김주열 -&amp;gt; 3.15의거&lt;br /&gt;
***#이한열 -&amp;gt; 6월 민주항쟁&lt;br /&gt;
***#박종철&amp;gt;박종철 고문치사 사건&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에서 발생했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설명한다.&lt;br /&gt;
***#3.15의거 -&amp;gt; 마산&lt;br /&gt;
***#부마항쟁 -&amp;gt; 부산&lt;br /&gt;
***#부마항쟁 -&amp;gt; 마산&lt;br /&gt;
***#5.18민주화운동 -&amp;gt; 광주&lt;br /&gt;
===기여===&lt;br /&gt;
*[[뎐]]: 컨텐츠 구조 페이지 작성&lt;br /&gt;
=='''4.19혁명'''==&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VPp4BmfDSv8VA2-oC-VATHzUYgadaiaQ9AlWXYiaiVk&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원인===&lt;br /&gt;
====[[3.15 부정선거]]====&lt;br /&gt;
[[파일:3.15부정선거_개표_모습.png|300픽셀|섬네일|오른쪽|3.15부정선거 당시 개표하는 사진&amp;lt;ref&amp;gt;사진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amp;lt;/ref&amp;gt;]]&lt;br /&gt;
1959년 대한민국은 제 4대 대통령 선거와 제 5대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당시 자유당에서는 12년째 대통령으로서 연임 중이던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이기붕]]'''을 부통령 후보로 선임하였다. 그러나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병세의 악화로 사망하게 되고,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은 확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선거의 초점은 자유당의 조병옥과 민주당의 장면 간의 선거전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본격적인 선거유세의 시작과 함께 정부와 여당의 잇따른 야당선거운동 방해사건으로 부정선거가 시작되었다. 1960년 3월 15일 선거가 시작된 이후에도 다양한 방법의 부정행위가 일어났고, 개표 결과 이승만과 이기붕의 득표가 100%에 육박하는 결과로 나오자 자유당은 득표수를 하향 조정해 최종 집계에 반영할 것을 지시했다. 결국 이승만 88.7%, 이기붕 79%의 득표율을 가지며 정, 부통령에 당선되었다.&amp;lt;ref&amp;gt;자세한 내용은 3.15부정선거 페이지 참조&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부정선거 반대시위, [[3.15 의거]]의 발생====&lt;br /&gt;
3.15 부정선거를 반대하는 시위는 초기에는 중, 고등학생들의 산발적인 시위로 전개되었다. 3월 15일 선거일 밤 경남 마산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으며,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여 1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amp;lt;br/&amp;gt;&lt;br /&gt;
3월 15일 실종되었던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4월 11일 마산부두에서 발견되자 마산 시민들은 시청, 파출소 등을 파괴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2차 시위가 일어난 것이다.&lt;br /&gt;
&lt;br /&gt;
====[[고려대학교 4.18 학생시위]]의 발생====&lt;br /&gt;
1, 2차 마산시위를 계기로 부정선거 무효와 이승만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났다. 이들은 '4.18 선언문'을 낭독하고 시내로 진출하였다. 이는 4월 19일 학생들과 일반 시민들이 가세한 대규모 시위로 이어지게 되었다.&lt;br /&gt;
====전국적인 4.19 혁명의 발생====&lt;br /&gt;
분노한 전국의 시민과 학생들이 다음 날인 4월 19일에 '이승만 하야와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며 대규모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경찰은 또다시 무차별 발포에 나섰고,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지만 이러한 압박에도 시민들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lt;br /&gt;
====이승만 대통령의 혼란 수습 시도====&lt;br /&gt;
이승만 대통령은 4.19 시위로 인한 정국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4월 20일 국무위원 전원과 자유당 당무위원 전원의 사표를 제출하도록 지시하였으며, 4월 23일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외무장관에 허정, 내무장관에 이호, 법무장관에 권승렬을 임명하는 등 개각을 단행하였다.&amp;lt;br/&amp;gt;&lt;br /&gt;
그러나 미국은 4.19직후 국무부 성명을 통해 한국에서 발생한 사태는 부정선거에 대한 '군중의 불만'을 반영한 것 이라고 했고, 양유찬 주미대사를 불러 '부정선거에 대한 철저한 조사', '경향신문 복간', '국가보안법 개정' 등을 촉구하는 각서를 전달하였다.&amp;lt;br/&amp;gt;&lt;br /&gt;
그리고 4월 25일, 이승만 정권에 분노한 전국 27개 대학 258명의 교수가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 모여 14개항의 시국 선언문을 발표하며 학생, 시민들과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들은 3.15 부정선거 및 4.19 사태의 책임을 지고 대통령이 물러날 것을 주장하였으며, &amp;quot;학생들의 피에 보답하자&amp;quot;는 플랜 카드를 앞세워 국회의사당까지 행진하였다. &lt;br /&gt;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lt;br /&gt;
무력 진압에도 대규모 시위가 이어지며 시민들은 완강하게 투쟁하였다. 4월 26일 시위대가 경무대로 다시 집결하는 등 사태가 심각하게 진행되자, 오전 10시 30분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 성명을 발표하였다. 4월 27일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하며 대통령직을 하야하고 하와이로 망명하였으며 자유당 정권도 끝나게 된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우리 국민들, 특히 학생과 청년들의 주도로 이루어진 4.19 혁명은 학생과 일반 대중이 단결하여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아시아 최초의 시건이다. 4.19혁명은 부마항쟁, 5.18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그리고 2017년 촛불시위에 이르기 까지 정권에 대항하는 국민들이 단합을 이루는 초석이 되었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도 시민 저항권에 대한 근거로써 4.19혁명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문구가 있다.&lt;br /&gt;
===기여===&lt;br /&gt;
[[뎐]]: 4.19혁명 페이지 원인, 의의 작성 &lt;br /&gt;
&lt;br /&gt;
[[•ᴗ•]]: 4.19혁명 페이지 전개 작성&lt;br /&gt;
&lt;br /&gt;
=='''부마항쟁'''==&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bK7zjpPvBsC7rFRPmsiHCUYhyWt2VXOv8SYyaBTND4Y&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원인===&lt;br /&gt;
====[[유신 헌법]]과 [[긴급조치]]====&lt;br /&gt;
1971년 선거에서 김대중을 누르고 대통령에 3선된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해 국회 해산,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등 법의 일부 기능을 정지시키고 전국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했다.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된 이른바 유신헌법에 의해 제정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법」 에 의거해 박정희가 제8대 대통령으로 재차 당선되었고, 이 유신 헌법이 발효된 기간을 유신 체제라고 부른다. 유신 체제는 행정, 입법, 사법의 3권을 모두 쥔 대통령이 종신 집권할 수 있도록 설계된 1인 대통령제였다. 박정희는 유신 헌법에 의거해 대통령의 권한으로 취할 수 있었던 특별조치인 긴급조치를 선포함으로써 헌법에 반대하는 시위 및 운동과 방송, 언론 활동을 하는 반정부 인사들을 연행, 체포, 고문하는 등 억압을 가했다.&lt;br /&gt;
&lt;br /&gt;
====한국경제의 위기====&lt;br /&gt;
1970년대 말 한국경제는''' [[오일쇼크]]'''라는 세계경제의 위기와 결합해 가라앉고 말았다. 경제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정부는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과 함께 '''[[경제안정화정책]]'''을 수용했고, 중소자본가, 봉급생활자, 도시 노동자와 농민 등에 안정화 비용을 부과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이와 같은 안정화 정책은 경제위기로 어려운 처지에 있던 중소기업들의 도산을 가속하여 기업 부도율이 치솟고 하층민들을 더 깊은 고통에 몰아넣었다. 특히 '''부가가치세'''를 도입한 이후 물가가 상승하면서 일상에 타격을 주었으며, 노동집약적 제조업이 집중되었던 부산과 마산에서는 상황이 더욱 심각하여 1979년 부산 지역 부도율은 서울의 3배에 달했다.&lt;br /&gt;
&lt;br /&gt;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lt;br /&gt;
한 시대의 대격변을 예고하는 단초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시작됐다. 1979년 8월 9일 오전, 신민당의 당사 4층 강당에서는 봉제업체인 YH무역주식회사의 여성노동자 200여명이 기업주의 폐업에 반발하여 폐업조치 철회 농성을 벌였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인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신민당이 당사 건물을 내준 것이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폭력을 동원하여 농성을 해산시켰다. 결국 이 사건은 노동 탄압 사건을 넘어선 야당에 대한 정치 탄압 사건으로 발전하였다.&lt;br /&gt;
&lt;br /&gt;
이날 경찰은 1000여명의 진압대원을 신민당사로 난입시켜 농성을 하고 있던 174명의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로 밖으로 끌어냈다. 또한 경찰은 총재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김영삼 총재와 당 간부들을 끌어내면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박정희 정권은 이 노동자 농성 사건을 빌미로 신민당 분열공작을 시도하였다. 유신정권과 비밀리에 결탁한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 3명이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 부총재 전원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접수시켰다. 그리고 법원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신민당 총재단의 직무 집행을 정지시키고 박정희 정권의 꼭두각시를 총재직무대행으로 선임하였다.&lt;br /&gt;
&lt;br /&gt;
아울러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의 동교동 자택을 전면 봉쇄하였고,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에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끊으라고 요구한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즈』 회견내용을 “반헌정적, 반민족적 작태”로 몰아서 국회에 징계 동의안을 제출했다. 10월 4일 오후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의원 159명은 여당 총회장에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제명 결의안을 '''기습적으로''' 처리해 버렸다. 노사분규 사태로 시작된 사건이 제1야당 당수의 의원직 제명으로 확대된 정치적 사태를 지켜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유신체제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이 고조되었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유신 철폐, 독재 타도!'''''   &amp;lt;small&amp;gt;-10.16 부마항쟁 당시 시위대의 구호&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부산대학교 민주선언문, 학생 시위에서 시민항쟁으로====&lt;br /&gt;
[[파일:부산시위대.jpg|250px|섬네일|오른쪽|광복동을 지나는 시위 행렬]]&lt;br /&gt;
1979년 10월 16일 아침 10시 부산대학교 구내 도서관 앞에서 약 500명의 학생들이 모여 “유신정권 물러가라”, “정치탄압 중지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반정부 시위를 벌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민주선언문」]]'''을 통해 민주화, 언론 자유, 인권 보장의 신념을 확인하고, “제도화된 폭력성과 조직적 악의 근원인 유신헌법과 독재집권층의 퇴진만이 5천 만 겨레의 통일의 첫걸음이라고 주장하면서 형제의 피를 요구하는 자유와 민주의 깃발을 우리가 잡고 반민주의 무리, 불의의 무리들을 향해 외치며 나아가자”라고 선언하였다. 이후 학생들은 교문을 나가 거리에서 시위했다. 이때 학생 수는 약 5,000명으로 불어나 있었고, 광복동과 남포동 등 부산시내 중심가까지 진출해 애국가 등의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며, 이를 제지하려는 경찰과 이곳저곳에서 충돌하였다. 비슷한 시간, 부산 동아대학교에서도 1,000여 명의 학생이 부산대학교 학생과 합류하여 가두시위를 벌였다. 부산대학교 데모로 학생 수백 명이 연행되고 100여 명이 다쳤지만 이튿날인 10월 17일에는 시위가 더욱 격화되어 학생들뿐만 아니라 다수의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학생 시위는 점차 시민항쟁의 양상을 띠어갔다.''' 밤늦게까지 계속된 시위에서 시민들은 충무파출소, 한국방송공사, 서구청, 부산세무서 등을 파괴하였고, 경찰차량을 불태우거나 파손시켰다.&lt;br /&gt;
&lt;br /&gt;
====마산의 시민항쟁====&lt;br /&gt;
&lt;br /&gt;
민주항쟁은 18일에 마산으로 확산되었다. 늦은 오후에는 1,000여 명의 경남대학교 학생들이 마산 시내 번화가에 산발적으로 집결했으며, 일부시민들도 가담해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어두워진 다음 학생과 시민들의 데모는 격화되어 파출소, 공화당사, 방송국, 신문사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파괴하였다. 이튿날인 19일에는 시위가 더욱 치열해져 마산 시내는 한때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저녁 8시경, 시위대는 경남대학과 마산대학&amp;lt;ref&amp;gt;1985년 창원대학으로 교명이 변경되었으며, 현재의 마산대학교와 다르다.&amp;lt;/ref&amp;gt;, 그리고 고등학생까지 합세하여 약 8,000명에 이르렀으며, 시내 곳곳에서 몽둥이를 들고 동사무소와 파출소로 몰려가 시설을 파괴하였고, 경찰차량에 불을 질렀다.&lt;br /&gt;
&lt;br /&gt;
====부산 계엄령, 마산 위수령====&lt;br /&gt;
[[파일:계엄포고문.jpg|270px|섬네일|왼쪽|부산지역에 내려진 계엄포고문을 읽고 있는 시민들]]&lt;br /&gt;
부산대학교 시위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박정희 정부는 학생 시위로 시작된 시위가 대규모 시민항쟁으로 사태가 심상치 않게 확대되어가자 강경책으로 대응했다. 정부는 18일 자정을 기해 '''부산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동원한 과격한 진압'''을 통해 시위 참여자들과 이를 방조한 일반 시민들까지 1,058명을 연행하고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으며, 부산지구 계엄사령부는 각 대학 휴교조처와 야간통행금지시간을 2시간 연장하는 등의 항이 담긴 포고문을 발표했다.&lt;br /&gt;
&lt;br /&gt;
부산에 계엄령이 선포된 이튿날인 19일에 마산 시위가 확대됨에 따라 그 다음날인 10월 20일 정오, 정부가 '''마산 및 창원 지역에 위수령을 발령'''해 통행금지 시간이 연장되고, 경남대학 등에는 휴교조처가 취해졌으며, 24일에는 깡패를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132명을 검거, 23명을 구속했다. 이렇게 '''표면적으로는 부마민주항쟁이 단시간에 진압되는 듯 보였지만, 항쟁은 이미 유신체제의 균열을 불러오고 있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항쟁의 전개 과정에서 볼 수 있듯, 부마민주항쟁에서 특징적인 것은 먼저 시위대의 가장 큰 분노의 대상이 공화당사와 경찰·파출소였다는 점, 다음으로는 “부가가치세를 철폐하라”, “잘 먹고 잘 살아라”등의 구호에서 드러나듯이 세무서에 대한 공격, 그리고 신문사와 방송국에 대한 공격을 들 수 있다.&lt;br /&gt;
&lt;br /&gt;
부마민주항쟁은 1970년대 유신체제 밑에서 쌓였던 침묵하는 언론, 조세, 시민을 억압하는 경찰에 대한 불만 등 정치·사회·경제·문화·종교 등 각 부문에 걸친 여러 모순의 폭발이었고, 헌법 개정과 긴급조치로 겨우 유지되던 유신체제와 박정희 정권의 붕괴를 촉진시킨 결정적인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10.26사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또한 이 사건은 1980년 5월 18일의 광주 민주화운동과 1987년 6월 민주항쟁에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된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억눌린 우리 역사&amp;lt;/br&amp;gt;터져나온 분노&amp;lt;/br&amp;gt;매운 연기 칼바람에도&amp;lt;/br&amp;gt;함성소리 드높았던&amp;lt;/br&amp;gt;동트는 새벽벌&amp;lt;/br&amp;gt;시월이 오면&amp;lt;/br&amp;gt;핏발 선 가슴마다&amp;lt;/br&amp;gt;살아오는 십 일육&amp;lt;/br&amp;gt;동지여 전진하자&amp;lt;/br&amp;gt;깨치고 나가자&amp;lt;/br&amp;gt;뜨거운 가슴으로&amp;lt;/br&amp;gt;빛나는 내일로'''''&amp;lt;/br&amp;gt;&amp;lt;small&amp;gt;-'''부산대학교''' 새벽벌도서관 10.16 기념비&amp;lt;/small&amp;gt;&amp;lt;/div&amp;gt;&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호빵이👻]]: 부마항쟁 페이지 전체 작성&amp;lt;/br&amp;gt;&lt;br /&gt;
[[이나자키로빈]]: 부마항쟁 원인 중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 작성&lt;br /&gt;
&lt;br /&gt;
=='''5.18민주화운동'''==&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AMetwTuXYHTCXINqr7ZJpzO5CHFEMQO5-Uqau51RkXA&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원인===&lt;br /&gt;
====유신체제의 붕괴====&lt;br /&gt;
&lt;br /&gt;
[[파일:김재규.jpg|섬네일|오른쪽|암살 당시 상황을 재현하는 김재규]]&lt;br /&gt;
&lt;br /&gt;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amp;lt;small&amp;gt; - 김재규&amp;lt;/small&amp;gt;&lt;br /&gt;
1979년 10월 4일 신민당 총재 김영삼이 국회에서 의원직을 제명당하자 10월 15부터 10월 20까지 부산 · 마산 등지에서는 부마항쟁이 일어났고, 이의 해결을 둘러싼 노선대립으로 갈등 중 10월 26일 &amp;lt;ins&amp;gt;[[김재규]]&amp;lt;/ins&amp;gt;가 박정희를 살해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ins&amp;gt;[[10.26 사태]]&amp;lt;/ins&amp;gt;의 사후 수습과정에서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을 중심으로 신군부 세력이 부상하였으며, 이들은 &amp;lt;ins&amp;gt;[[12.12 사건]]&amp;lt;/ins&amp;gt;의 하극상을 통하여 군부를 장악하였다. 1980년 2월 29일 김대중 등이 복권되었으나 그 해 봄, 신군부는 최규하 과도 정부를 유명무실하게 하고 국민들이 요구하는 민주주의와 이를 위한 명확한 정치일정 제시를 거부하면서 권력기반을 구축하였다.&lt;br /&gt;
&lt;br /&gt;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lt;br /&gt;
한 시대의 대격변을 예고하는 단초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시작됐다. 1979년 8월 9일 오전, 신민당의 당사 4층 강당에서는 봉제업체인 YH무역주식회사의 여성노동자 200여명이 기업주의 폐업에 반발하여 폐업조치 철회 농성을 벌였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인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신민당이 당사 건물을 내준 것이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폭력을 동원하여 농성을 해산시켰다. 결국 이 사건은 노동 탄압 사건을 넘어선 야당에 대한 정치 탄압 사건으로 발전하였다.&lt;br /&gt;
&lt;br /&gt;
이날 경찰은 1000여명의 진압대원을 신민당사로 난입시켜 농성을 하고 있던 174명의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로 밖으로 끌어냈다. 또한 경찰은 총재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김영삼 총재와 당 간부들을 끌어내면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박정희 정권은 이 노동자 농성 사건을 빌미로 신민당 분열공작을 시도하였다. 유신정권과 비밀리에 결탁한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 3명이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 부총재 전원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접수시켰다. 그리고 법원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신민당 총재단의 직무 집행을 정지시키고 박정희 정권의 꼭두각시를 총재직무대행으로 선임하였다.&lt;br /&gt;
&lt;br /&gt;
아울러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의 동교동 자택을 전면 봉쇄하였고,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에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끊으라고 요구한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즈』 회견내용을 “반헌정적, 반민족적 작태”로 몰아서 국회에 징계 동의안을 제출했다. 10월 4일 오후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의원 159명은 여당 총회장에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제명 결의안을 '''기습적으로''' 처리해 버렸다.&lt;br /&gt;
&lt;br /&gt;
노사분규 사태로 시작된 사건이 제1야당 당수의 의원직 제명으로 확대된 정치적 사태를 지켜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유신체제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이 고조되었다. 또한 이 사건은 그동안 다소 주춤하던 대학가에 반유신 반독재 운동의 열기가 다시 확산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청춘을 바쳐, 학생 운동====&lt;br /&gt;
&lt;br /&gt;
[[파일:서울의_봄.JPG|섬네일|오른쪽|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앞에 모인 시위대]]&lt;br /&gt;
&lt;br /&gt;
군부의 재집권 야욕에 대한 국민적 저항은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표출되었다. 1980년 3월, 서울대 총학생회 출범을 시작으로 4월 초순에는 전국의 주요 대학들이 총학생회를 결성하기 시작하였다. 대학별로 독재 정권에 아부했던 어용교수와 족벌사학 퇴진 운동을 벌였고, 특히 병영집체훈련(당시 대학 신입생들은 의무적으로 군부대에 10일 간 입대하여 각종 군사훈련을 이수해야 했다.) 거부가 주요 이슈로 전면 등장했다. 각 대학의 병영집체훈련 거부운동이 본격화되고 전국적인 쟁점으로 떠오르자 신군부는 신문, 방송을 통해 ‘학생들의 안보의식 결여’를 비난하고 교내 시위·농성을 집중적으로 보도하게 했다.  5월 1일에 서울대가 입영훈련 거부투쟁 철회를 결정하고 ‘계엄령 해제’와 ‘유신잔당 퇴진’, ‘정부개헌중단’과 ‘노동 3권 보장’ 등을 요구하기 시작하면서 대학가는 이제까지의 학내 문제 중심의 운동에서 정치개혁을 위한 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그간 정부와 대학 간에 팽팽하게 유지되던 긴장 관계는 폭발 직전으로 내닫게 된 것이다.&lt;br /&gt;
&lt;br /&gt;
약 열흘 간의 대정부 투쟁을 준비한 대학가는 5월 10일 고려대 총학생회장실에서 열린 ‘총학생회장단 회의’에 참석한 전국 23개 대학 대표들은 ‘비상계엄의 즉각 해제’와 ‘전두환, 신현확 등 유신잔당 퇴진’ 등을 결의하고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정세에 대한 공동대처 방안을 마련했다. 이후 5월 13일부터 5월 14일에 걸쳐 서울 · 부산 · 대구 · 광주 등 37개 대학에서 계엄철폐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5월 15일에는 서울역에서 시위가 발생하는 등 학생시위는 서울시가지를 거의 마비시키는 등 야간까지 지속되어 사태가 절정에 달하면서 신군부 세력을 위협하였다. 5월 16일 24개 대학 학생대표들은 당분간 시국의 추이를 관망하기로 결정하고 가두시위를 중단하면서 소강상태에 돌입하는 듯하였다.&lt;br /&gt;
&lt;br /&gt;
====1980년 봄의 광주====&lt;br /&gt;
5월 17일 신군부 세력이 이전까지는 제주도를 제외한 지역에 한정되었던 비상계엄을 전국에 확대하는 조치인 계엄포고 10호(17일 24시에 발효: 각 대학 휴교령 포함)를 밤 9시 40분에 의결하고 밤 11시 40분에 발표하면서 밤 11시를 전후한 시점부터 김대중 · 김종필이 연행되는 등 권력형 부정축재자 및 소요조종 혐의자, 학생 시위 주동자가 체포되었다. 이날 밤 광주지역의 사회운동·학생운동의 지도자도 상당수가 검거되었다. 광주의 검거대상자는 전남대 12명, 조선대 10명 등 총 22명이었다. 전남에서 계엄합동수사단은 광주505보안대가 중심이고, 중앙정보부, 경찰 등이 보조역할을 했다. 전남 계엄합동수사단은 22대 차량과 86명의 인원이 출동해 정동년 등 복적생들과 대학의 총학생회 간부들을 집중 검거했다.&lt;br /&gt;
&lt;br /&gt;
한편 육군본부는 14일 오전 7시55분에 국가 중요 보안목표와 주요대학에 군 병력 배치 명령을 하달했다. 이 명령에 따라 전남북계엄분소장인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광주 시내 주요 시설물에 이날 오후부터 계엄병력을 배치했다. 31사단 96연대 병력이 광주시내 KBS건물에 42명, MBC 21명, CBS 11명, VOC(전일방송) 11명 등 주요 방송사 건물에 배치돼 경비에 들어간 것이다.&lt;br /&gt;
&lt;br /&gt;
이날 오후 전교사령관은 7공수여단의 광주배치에 따른 수송수단 지원도 미리 협의했다. 그리고 5월 8일부터 16일 사이에 공수부대 수뇌부들도 헬기를 타고 서울에서 내려와 광주 상무대의 전투병과교육사령부를 방문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광주에서 시위가 격화되면 즉각적으로 최정예 군부대를 동원해서 진압할 준비를 철저하게 갖추고 있었다. 5월 18일에 시작된 광주의 비극은 그 이전에 이미 시한폭탄처럼 준비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lt;br /&gt;
{{구글지도 | 위도=35.175961433346885 | 경도=126.90865311973532 | 줌=13 }}  [[파일:금남로.JPG|섬네일|오른쪽|금남로 앞에 집결한 버스와 시민군]]&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18일&amp;lt;/span&amp;gt;&lt;br /&gt;
휴교령이 내려질 경우 교문 앞에서 집결한다는 결의에 따라 학생들은 5월 18일 오전 전남대학교 앞에 모였다. 공수부대원들이 전남대 앞 시위를 저지하자 대학생들은 광주역에 재집결해서 시위를 이어갔다. 시위대가 점차 늘어나면서 공수부대원이 시내에서 시위진압에 나섰으며 18일 오후 1시부터 무차별 진압작전이 이루어져 부상자가 속출하였다.&lt;br /&gt;
&lt;br /&gt;
군인들이 금남로 등 시내 중심가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이나 여자를 마구 구타하고 짓밟으며 찌르는 등의 잔혹 행동을 하자 시민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이에 시위대는 오후 4시 이후 파출소 파괴 등 적극공세에 나섰다. '''계엄군의 과잉 무력진압은 시위를 해산시키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오히려 시민들을 단결시켰으며, 결국 19일 시민 · 학생 연대가 발생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lt;br /&gt;
&lt;br /&gt;
 '''''광주 애국 시민 여러분! 이것이 웬 말입니까? 웬 벼락이란 말입니까? 죄 없는 학생들을 총칼로 찔러 죽이고 몽둥이로 두들겨 트럭으로 실어가며 부녀자를 발가벗겨 총칼로 찌르는 놈들이 이 누구란 말입니까? 이제 우리가 살길은 전시민이 하나로 뭉쳐 청년 학생들을 보호하고 유신잔당과 극악무도한 살인마 전두환 일파와 공수 특전단 놈들을 한놈도 남김없이 쳐부수는 길 뿐입니다. 우리는 이제 다 보았습니다. 다 알게 되었읍니다. 왜 학생들이 그토록 소리 높이 외쳤는가를, 우리의 적은 경찰도 군대도 아닙니다. 우리의 적은 전국민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바로 유신잔당과 전두환 일파 그놈들입니다.''''' &amp;lt;small&amp;gt; - 1980년 5월 19일에 '광주시민민주투쟁회'명의의 호소문&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19일&amp;lt;/span&amp;gt;&lt;br /&gt;
19일 오전에는 일시적 소강상태였으나 오후 들어서 분노한 학생 · 시민들이 군 · 경찰과 공방전을 벌이면서 시위는 점차 격화되었다. '''시민들은 공포감에서 벗어나 자신의 생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단순한 학생시위에서 시민봉기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계엄군은 시위대를 포위하여 구타하였으며 일부 고등학생까지 포함된 시위대는 돌과 화염병으로 저항하였고 파출소와 방송국 등에 침입하였다. 뒤처진 공수부대를 공격하거나 고립된 차량을 포위하기도 하였으며 총과 방패를 빼앗기도 하였고, 오후 4시 50분 시민들에게 포위된 계엄군의 장갑차에서 최초의 발포가 있었다. 19일 밤비가 내리는 가운데 시위가 산발적으로 계속되었으며, 20일 오전 비가 그치고 대규모 시위는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오후부터 다시 시작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20일&amp;lt;/span&amp;gt;&lt;br /&gt;
'''20일 오후 6시부터 택시와 버스 운전 기사들이 광주역과 무등경기장에 모여 대형 버스와 트럭을 앞세우고 일시에 금남로에 집결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들을 앞세운 시위는 계엄군을 몰아내는 데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였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5.18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에 &amp;lt;ins&amp;gt;[[지대한 영향]]&amp;lt;/ins&amp;gt;을 끼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학생 운동에 뛰어든 많은 대학생들은 대학교에 들어와서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의 실상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아 학생 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군부정권은 5.18 이후로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다. 전두환은 김대중 등에게 '광주 사태'의 책임을 물어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했고,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 선언을 한 직후, 8월 27일 소위 체육관 선거를 통해 전두환은 대통령 자리를 탈취했다.&lt;br /&gt;
&lt;br /&gt;
지역적인 면에서는 '''광주광역시를 비롯한 전라도 지역의 트라우마'''로 작용해 이후의 민주정의당 및 &amp;lt;ins&amp;gt;[[3당 합당]]&amp;lt;/ins&amp;gt;으로 이어지는 보수 세력에 대해 적대심을 가지고, 민주당계 정당의 표밭이 되는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미 박정희 정부 시절부터 유무형의 정치적인 차별을 받고 있었지만 5.18의 참상은 전라도가 다시는 보수 세력을 지지하지 않게 만들 정도로 심각한 사건이며 호남소외론의 가장 결정적인 명분이 되었다.&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이나자키로빈]]: 5.18 민주화운동 페이지 전체 작성&lt;br /&gt;
&lt;br /&gt;
=='''6월민주항쟁'''==&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NnXWs5RMTIf-6DOEu9_rX2k4mgzUk1AQHYneCuwXN1Q&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원인===&lt;br /&gt;
====[[박종철고문치사사건]]====&lt;br /&gt;
&lt;br /&gt;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박종철은 1987년 1월 13일 자정 경 하숙집에서 치안본부(現 경찰청)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게 연행되었다.‘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이자 ‘민주화추진위원회’ 지도위원으로 수배 받고 있었던 박종운을 잡기위해 연행한 것이었다. 취조실로 연행해간 공안 당국은 박종철에게 박종운의 소재를 물었으나, 박종철은 순순히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경찰은 잔혹한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가하였고, 박종철은 끝내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했다. 당시 경찰은 초기 발표에서 고문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라고 사망원인을 발표하였으나, 시체부검 결과 전기고문과 물고문에 의한 살인인 것으로 밝혀졌다.&lt;br /&gt;
&lt;br /&gt;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저 죽음을 응시해주길 바란다. 저 죽음을 끝내 지켜주길 바란다. 저 죽음을 다시 죽이지 말아주길 바란다.''''' &amp;lt;small&amp;gt; - 동아일보 1987년 1월 17일자 김중배 칼럼 중&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사건 진상의 일부가 공개되자 2월 7일 전국 주요 도시에서 &amp;quot;박종철군 범국민추도식&amp;quot; 및 도심 시위가 열렸고 이어 3월 3일에는 &amp;quot;박종철군 49재와 고문추방 국민대행진&amp;quot;과 함께 또 다른 시위가 열렸다. 이후 4월 2일 서울대학교 학부모 130여 명이 ‘건국대학교 사태‘ 등 시국관련 구속학생의 징계철회를 요구하며 철야 농성을 벌였다.&lt;br /&gt;
&lt;br /&gt;
====정부의 개헌논의 유보====&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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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JazJFsgu4oc?si=sOE7w1tz-jKVztC9&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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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그러나 전두환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1987년 4월 13일 [[4.13호헌조치]]라 불리는 ‘대통령 특별담화‘를 발표, 개헌(改憲) 논의를 유보하겠다고 밝혔다. [[4.13호헌조치]]에서 전두환은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와 대통령 선거는 자유 경선의 분위기가 보장되는 가운데 1987년 내에 공정한 선거관리를 통해 차질 없이 실시할 수 있게 모든 노력을 다할것‘이라고 다짐했으며, 또 ‘민정당의 후임 대통령 후보는 조속한 시일 안에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인물 가운데서 당헌 절차와 민주 방식에 따라 전당대회에서 선출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호헌조치‘라는 그 이름대로 현행 헌법에 따라 권력을 이양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국민들의 큰 기대를 얻을 것이라 믿었으나, 기대는 커녕 오히려 반발을 가져오는 요인이 되고 말았다. 곧바로 이튿날인 4월 14일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 등 각계 인사들이, 호헌 조치를 비판하는 시국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정부 최루탄에 의한 [[이한열]] 사망====&lt;br /&gt;
[[파일:이한열.jpg|200px|섬네일|오른쪽|최루탄에 피격당한 후 이종창에게 부축받는 이한열]]&lt;br /&gt;
먼저 1987년 5월 27일 야당과 재야, 종교계 등이 힘을 모아 ‘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여당인 민주정의당에서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6월 10일에 맞춰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6 · 10국민대회]])’를 치르기로 결정하였다. 대학생들은 국본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를 중심으로 6 · 10국민대회에 호응하여 6월 초부터 각 대학별로 연일 집회와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6 · 10국민대회]] 하루 전날인 6월 9일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교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는 곧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학생들은 물론 시민들의 분노가 들끓었다. 이러한 분노 속에서 6 · 10국민대회가 열렸다. 경찰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6 · 10국민대회가 열리는 성공회대성당을 원천 봉쇄하였다. 그 결과 6 · 10국민대회는 대회장에 미리 들어가 있던 소수의 인원만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대회 예정 시간인 오후 6시 이전부터 서울 시내 곳곳에서 대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시민들도 다양한 방식으로 6 · 10국민대회와 학생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날 밤 늦게까지 시위를 벌이던 학생들은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이후 5일 동안 농성을 계속하였다. 애초 계획된 것은 아니었지만 대학생들의 명동성당 농성은 6 · 10국민대회가 단발성 행사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인 저항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lt;br /&gt;
&lt;br /&gt;
====민주항쟁 확산====&lt;br /&gt;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로 개헌하라!'''''   &amp;lt;small&amp;gt;-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제시한 슬로건&amp;lt;/small&amp;gt;&lt;br /&gt;
명동성당 농성을 거치며 항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유월항쟁의 전국화 과정에는 일정한 패턴이 존재하였다. 6월 10일 서울 외에도 전국 주요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위가 벌어졌지만, 15일까지 항쟁의 중심은 6 · 10국민대회와 명동성당 농성이 전개된 서울이었다. 하지만 6월 15일 경부터는 부산, 대전, 진주 등에서 격렬한 시위가 전개되었다. 그러다가 6월 20일부터 대규모 시위가 광주, 전주, 순천, 익산 등 호남 지방으로 옮겨졌다. 6 · 10국민대회 이후 약 20일 동안 전국 곳곳에서 매일 평균 100회 이상의 시위가 동시다발로 벌어졌다. 특히 6월 18일 ‘최루탄추방대회’와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은 전국 곳곳에서 한꺼번에 1백만 명 이상이 참여하였다. 갈수록 참가 지역이 전국 곳곳으로 확산되어 대도시, 중소도시뿐만 아니라 농촌 지역의 군 단위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6월 26일 하루에만 37~38개 시 · 군에서 시위가 동시에 벌어졌다. 유월항쟁에 참가한 연 인원은 400~500만 명으로 추산된다.&lt;br /&gt;
&lt;br /&gt;
반면 유월항쟁의 전국적 동시다발 시위는 경찰 병력을 분산시켰다. 분산된 경찰 병력으로는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거센 시위의 물결을 막아 낼 수 없었다. 경찰이 시위 진압에 최루탄을 남발하면서 최루탄도 점차 고갈되기 시작하였다. 유월항쟁 기간 동안 경찰이 사용한 최루탄만 총 67만 발이 넘었다. 더불어, 전두환 정권이 집권 내내 강조했던 88서울올림픽이 얼마 남지 않아 미국 등 국제사회의 이목이 집중된 상황에서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운동 때처럼 유혈 사태와 대량 학살을 반복하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무엇보다 군대를 동원하더라도 이러한 대규모 시민 항쟁을 진압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결국 경찰력으로 항쟁을 막기 힘들고, 군대 투입도 어렵다고 판단한 전두환 정권은 1987년 6월 29일 ‘ 6 · 29민주화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하였다. 그리고 그동안 의식불명 상태에 있었던 이한열이 7월 5일 끝내 사망하였다. 5일장 후 7월 9일 치러진 이한열의 노제에 100만 명의 인파가 모인 것을 끝으로 약 한 달 동안 지속된 유월항쟁은 마무리되었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1987년 6월항쟁이 '''대통령[[직선제]] 개헌'''이라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이 항쟁에 동참한 학생과 시민들의 요구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제시한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 개헌’이라는 슬로건으로 모아졌기 때문이었다. 유월항쟁은 이러한 민주화 세력의 통합성, 즉 각기 다른 성격과 지향을 가진 여러 주체들이 모두 동의할 수 있는 ‘최소 강령’하에 ‘최대 연합’으로 결집하였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딩잉잉]]:6월민주항쟁 페이지 전체 작성&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기밀문서]]&lt;br /&gt;
[[분류:4.19혁명관련]]&lt;br /&gt;
[[분류:부마항쟁관련]]&lt;br /&gt;
[[분류:5.18민주화운동관련]]&lt;br /&gt;
[[분류:6월민주항쟁관련]]&lt;br /&gt;
[[분류:뎐]]&lt;br /&gt;
[[분류:이나자키로빈]]&lt;br /&gt;
[[분류:호빵이👻]]&lt;br /&gt;
[[분류:•ᴗ•]]&lt;br /&gt;
[[분류:딩잉잉]]&lt;/div&gt;</summary>
		<author><name>딩잉잉</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8%B0%EB%B0%80%EB%AC%B8%EC%84%9C&amp;diff=35953</id>
		<title>기밀문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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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1T16:14:5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딩잉잉: /* 컨텐츠 주제 */&lt;/p&gt;
&lt;hr /&gt;
&lt;div&gt;=='''컨텐츠 주제'''==&lt;br /&gt;
[[파일:이한열사진.jpeg|600픽셀|center]]&lt;br /&gt;
[[파일:시위대.png|600픽셀|left]]&lt;br /&gt;
[[파일:진압.png|600픽셀|righ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amp;lt;big&amp;gt;'''&amp;lt;span style=&amp;quot;color:#CD0000&amp;quot;&amp;gt;투쟁의 불꽃, 자유의 환호&amp;lt;/span&amp;gt;'''&amp;lt;br/&amp;gt;&amp;lt;br/&amp;gt;&lt;br /&gt;
''대한민국은 시민들의 투쟁과 희생을 거쳐, 피와 땀으로 민주화를 이룩하였습니다.''&amp;lt;br/&amp;gt;&lt;br /&gt;
''그들은 어둠을 밝히기 위해 항거의 불꽃을 태웠고, 그 불꽃은 자유를 외쳤으며, 그 외침은 세상을 움직였습니다.''&amp;lt;br/&amp;gt;&lt;br /&gt;
''이 «기밀문서»에는 당신이 미처 몰랐던 그 때의 열기와 의지가 실려있습니다.''&amp;lt;br/&amp;gt;&lt;br /&gt;
''함께, 그 뜨거운 페이지를 열어보시겠습니까?''&amp;lt;/span&amp;gt;&amp;lt;/big&amp;gt;&amp;lt;/div&amp;gt;&lt;br /&gt;
&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이나자키로빈]]&lt;br /&gt;
[[딩잉잉]]&lt;br /&gt;
&lt;br /&gt;
=='''팀원'''==&lt;br /&gt;
*오현지(2022131143) [[뎐]]&amp;lt;br/&amp;gt;&lt;br /&gt;
*김여원(2023130209) [[이나자키로빈]]&amp;lt;br/&amp;gt;&lt;br /&gt;
*김하은(2022131345) [[호빵이👻]]&amp;lt;br/&amp;gt;&lt;br /&gt;
*박정원(2023130350) [[•ᴗ•]]&amp;lt;br/&amp;gt;&lt;br /&gt;
*최필중(2023130216) [[딩잉잉]]&amp;lt;br/&amp;gt;&lt;br /&gt;
&lt;br /&gt;
=='''기획의도'''==&lt;br /&gt;
===기획배경===&lt;br /&gt;
1945년 광복 이후 대한민국 국민들은 자유민주국가로서의 미래를 기대했으나 실상은 그러지 못했다.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보여주듯 현재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는 그것을 누리지 못한 앞선 세대들의 목숨을 바친 항쟁의 대가이다. 민주항쟁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의 핵심 동력이었다. 오늘날 우리나라 민주의식의 중요한 기둥이 되는 네 가지 항쟁을 선별하고 각 항쟁의 배경, 전개과정, 의의를 비롯해 세부적이고 자세한 내용에 대한 기사를 작성한다.&lt;br /&gt;
===기획목적===&lt;br /&gt;
작금의 현실까지 오기에는 수없이 많은 투쟁이 있었지만 4.19혁명, 부마항쟁, 5.18민주항쟁, 6월민주항쟁이라는 네 가지 사건을 살펴보기로 한 것은 가장 많이 다뤄지고, 가장 많이 알려진 사건이기 때문이다. 관련된 사건과 역사 인물들에 대해 자세히 적어 내어 민주항쟁의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지 않으면 알기 힘든 각 민주항쟁의 자세한 내막을 밝혀낸다.&lt;br /&gt;
===기대하는 바===&lt;br /&gt;
타임라인과 온톨로지를 활용해 내용의 전반적인 이해를 돕고 자세한 설명을 통해 사건의 자세한 내막을 들어낸다. 네 가지 항쟁을 각각 큰 목차로 설정하고 세부 기사를 그 내부에 작성해 독자의 관심과 수요에 부합하는 정보를 전달하는 데 효과적일 것으로 기대된다. 민주항쟁에 참여한 사람들의 희생과 투쟁에 대한 존경심을 부르고 역사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다.&lt;br /&gt;
===기여===&lt;br /&gt;
[[뎐]], [[이나자키로빈]], [[호빵이👻]]: 기획의도 페이지 작성&lt;br /&gt;
&lt;br /&gt;
=='''온톨로지'''==&lt;br /&gt;
{{NetworkGraph | title=민주항쟁.lst}}&lt;br /&gt;
[[민주항쟁.lst]]&lt;br /&gt;
===기여===&lt;br /&gt;
*[[뎐]]: 온톨로지 제작&lt;br /&gt;
=='''컨텐츠 구조'''==&lt;br /&gt;
===클래스(Class)===&lt;br /&gt;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color:white&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0%&amp;quot; | 클래스 !! style=&amp;quot;width:40%&amp;quot; | 설명 !! style=&amp;quot;45%&amp;quot; | 노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제||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대표 키워드인 민주항쟁을 주제로서 나타내었다 || 만주항쟁&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항쟁||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민주화운동 시기 발생했던 주요 운동들을 ‘항쟁’이라는 키워드로 분류하였다. || 4.19혁명, 부마항쟁, 5.18 민주화운동, 6월민주항쟁&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사건||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항쟁의 원인, 결과가 되는 사건을 정리하였다|| 3.15부정선거, 고려대 4.18학생시위, 3.15의거, YH사건, 10.26사태, 12.12 군사반란, 비상계엄령,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고문추방민족대행진, 4.13호헌조치, 6.29선언, 대통령직선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지역||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요 항쟁들이 일어났던 지역을 정리하였다|| 마산, 부산, 광주&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인물||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요사건들을 발생시킨 인물, 참여했던 인물을 묶어서 정리하였다|| 이승만, 이기붕, 김주열, 박정희, 김재규, 전두환, 신군부, 시민군, 박종철, 이한열, 노태우&lt;br /&gt;
|-&lt;br /&gt;
|}&lt;br /&gt;
===관계성(Relation)===&lt;br /&gt;
*&amp;lt;font color=#228B22&amp;gt;'''~은 ~에 속한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주요 항쟁들이 민주항쟁에 속함을 나타내거나 인물의 소속을 나타낸다.&lt;br /&gt;
***해당노드:&lt;br /&gt;
***#4.19혁명 -&amp;gt; 민주항쟁&lt;br /&gt;
***#부마항쟁 -&amp;gt; 민주항쟁&lt;br /&gt;
***#5.18민주화운동 -&amp;gt; 민주항쟁&lt;br /&gt;
***#6월 민주항쟁 -&amp;gt; 민주항쟁&lt;br /&gt;
***#전두환 -&amp;gt; 신군부&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의 원인이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어떠한 사건과 인과관계를 이루는 또다른 사건 혹은 인물을 설명한다.&lt;br /&gt;
***#이기붕 -&amp;gt; 3.15부정선거&lt;br /&gt;
***#김주열 -&amp;gt; 고려대 4.18학생시위&lt;br /&gt;
***#고려대 4.18학생시위 -&amp;gt; 4.19혁명&lt;br /&gt;
***#3.15의거 -&amp;gt; 4.19혁명&lt;br /&gt;
***#김주열 -&amp;gt; 4.19혁명&lt;br /&gt;
***#3.15부정선거 -&amp;gt; 3.15의거&lt;br /&gt;
***#YH사건 -&amp;gt; 부마항쟁&lt;br /&gt;
***#부마항쟁 -&amp;gt; 10.26사태&lt;br /&gt;
***#박정희 -&amp;gt; 10.26사태&lt;br /&gt;
***#비상계엄령 -&amp;gt; 5.18민주화운동&lt;br /&gt;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 -&amp;gt; 고문추방민족대행진&lt;br /&gt;
***#고문추방민족대행진 -&amp;gt; 4.13호헌조치&lt;br /&gt;
***#4.13호헌조치 -&amp;gt; 6월민주항쟁&lt;br /&gt;
***#6월민주항쟁 -&amp;gt; 6.29선언&lt;br /&gt;
***#6월민주항쟁 -&amp;gt; 대통령직선제&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을 발생시켰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사건과 그 사건을 직접적으로 발생시킨 인물을 연결한다.&lt;br /&gt;
***#이승만 -&amp;gt; 3.15부정선거&lt;br /&gt;
***#김재규 -&amp;gt; 10.26사태&lt;br /&gt;
***#신군부 -&amp;gt; 1212군사반란&lt;br /&gt;
***#전두환 -&amp;gt; 비상계엄령&lt;br /&gt;
***#노태우 -&amp;gt; 6.29선언&lt;br /&gt;
***#시민군 -&amp;gt; 5.18민주화운동&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에 희생되었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민주항쟁의 진압과정 등 에서 희생된 인물을 설명한다&lt;br /&gt;
***#김주열 -&amp;gt; 3.15의거&lt;br /&gt;
***#이한열 -&amp;gt; 6월 민주항쟁&lt;br /&gt;
***#박종철&amp;gt;박종철 고문치사 사건&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에서 발생했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설명한다.&lt;br /&gt;
***#3.15의거 -&amp;gt; 마산&lt;br /&gt;
***#부마항쟁 -&amp;gt; 부산&lt;br /&gt;
***#부마항쟁 -&amp;gt; 마산&lt;br /&gt;
***#5.18민주화운동 -&amp;gt; 광주&lt;br /&gt;
===기여===&lt;br /&gt;
*[[뎐]]: 컨텐츠 구조 페이지 작성&lt;br /&gt;
=='''4.19혁명'''==&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VPp4BmfDSv8VA2-oC-VATHzUYgadaiaQ9AlWXYiaiVk&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원인===&lt;br /&gt;
====[[3.15 부정선거]]====&lt;br /&gt;
[[파일:3.15부정선거_개표_모습.png|300픽셀|섬네일|오른쪽|3.15부정선거 당시 개표하는 사진&amp;lt;ref&amp;gt;사진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amp;lt;/ref&amp;gt;]]&lt;br /&gt;
1959년 대한민국은 제 4대 대통령 선거와 제 5대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당시 자유당에서는 12년째 대통령으로서 연임 중이던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이기붕]]'''을 부통령 후보로 선임하였다. 그러나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병세의 악화로 사망하게 되고,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은 확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선거의 초점은 자유당의 조병옥과 민주당의 장면 간의 선거전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본격적인 선거유세의 시작과 함께 정부와 여당의 잇따른 야당선거운동 방해사건으로 부정선거가 시작되었다. 1960년 3월 15일 선거가 시작된 이후에도 다양한 방법의 부정행위가 일어났고, 개표 결과 이승만과 이기붕의 득표가 100%에 육박하는 결과로 나오자 자유당은 득표수를 하향 조정해 최종 집계에 반영할 것을 지시했다. 결국 이승만 88.7%, 이기붕 79%의 득표율을 가지며 정, 부통령에 당선되었다.&amp;lt;ref&amp;gt;자세한 내용은 3.15부정선거 페이지 참조&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부정선거 반대시위, [[3.15 의거]]의 발생====&lt;br /&gt;
3.15 부정선거를 반대하는 시위는 초기에는 중, 고등학생들의 산발적인 시위로 전개되었다. 3월 15일 선거일 밤 경남 마산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으며,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여 1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amp;lt;br/&amp;gt;&lt;br /&gt;
3월 15일 실종되었던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4월 11일 마산부두에서 발견되자 마산 시민들은 시청, 파출소 등을 파괴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2차 시위가 일어난 것이다.&lt;br /&gt;
&lt;br /&gt;
====[[고려대학교 4.18 학생시위]]의 발생====&lt;br /&gt;
1, 2차 마산시위를 계기로 부정선거 무효와 이승만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났다. 이들은 '4.18 선언문'을 낭독하고 시내로 진출하였다. 이는 4월 19일 학생들과 일반 시민들이 가세한 대규모 시위로 이어지게 되었다.&lt;br /&gt;
====전국적인 4.19 혁명의 발생====&lt;br /&gt;
분노한 전국의 시민과 학생들이 다음 날인 4월 19일에 '이승만 하야와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며 대규모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경찰은 또다시 무차별 발포에 나섰고,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지만 이러한 압박에도 시민들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lt;br /&gt;
====이승만 대통령의 혼란 수습 시도====&lt;br /&gt;
이승만 대통령은 4.19 시위로 인한 정국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4월 20일 국무위원 전원과 자유당 당무위원 전원의 사표를 제출하도록 지시하였으며, 4월 23일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외무장관에 허정, 내무장관에 이호, 법무장관에 권승렬을 임명하는 등 개각을 단행하였다.&amp;lt;br/&amp;gt;&lt;br /&gt;
그러나 미국은 4.19직후 국무부 성명을 통해 한국에서 발생한 사태는 부정선거에 대한 '군중의 불만'을 반영한 것 이라고 했고, 양유찬 주미대사를 불러 '부정선거에 대한 철저한 조사', '경향신문 복간', '국가보안법 개정' 등을 촉구하는 각서를 전달하였다.&amp;lt;br/&amp;gt;&lt;br /&gt;
그리고 4월 25일, 이승만 정권에 분노한 전국 27개 대학 258명의 교수가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 모여 14개항의 시국 선언문을 발표하며 학생, 시민들과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들은 3.15 부정선거 및 4.19 사태의 책임을 지고 대통령이 물러날 것을 주장하였으며, &amp;quot;학생들의 피에 보답하자&amp;quot;는 플랜 카드를 앞세워 국회의사당까지 행진하였다. &lt;br /&gt;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lt;br /&gt;
무력 진압에도 대규모 시위가 이어지며 시민들은 완강하게 투쟁하였다. 4월 26일 시위대가 경무대로 다시 집결하는 등 사태가 심각하게 진행되자, 오전 10시 30분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 성명을 발표하였다. 4월 27일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하며 대통령직을 하야하고 하와이로 망명하였으며 자유당 정권도 끝나게 된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우리 국민들, 특히 학생과 청년들의 주도로 이루어진 4.19 혁명은 학생과 일반 대중이 단결하여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아시아 최초의 시건이다. 4.19혁명은 부마항쟁, 5.18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그리고 2017년 촛불시위에 이르기 까지 정권에 대항하는 국민들이 단합을 이루는 초석이 되었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도 시민 저항권에 대한 근거로써 4.19혁명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문구가 있다.&lt;br /&gt;
===기여===&lt;br /&gt;
[[뎐]]: 4.19혁명 페이지 원인, 의의 작성 &lt;br /&gt;
&lt;br /&gt;
[[•ᴗ•]]: 4.19혁명 페이지 전개 작성&lt;br /&gt;
&lt;br /&gt;
=='''부마항쟁'''==&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bK7zjpPvBsC7rFRPmsiHCUYhyWt2VXOv8SYyaBTND4Y&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원인===&lt;br /&gt;
====[[유신 헌법]]과 [[긴급조치]]====&lt;br /&gt;
1971년 선거에서 김대중을 누르고 대통령에 3선된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해 국회 해산,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등 법의 일부 기능을 정지시키고 전국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했다.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된 이른바 유신헌법에 의해 제정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법」 에 의거해 박정희가 제8대 대통령으로 재차 당선되었고, 이 유신 헌법이 발효된 기간을 유신 체제라고 부른다. 유신 체제는 행정, 입법, 사법의 3권을 모두 쥔 대통령이 종신 집권할 수 있도록 설계된 1인 대통령제였다. 박정희는 유신 헌법에 의거해 대통령의 권한으로 취할 수 있었던 특별조치인 긴급조치를 선포함으로써 헌법에 반대하는 시위 및 운동과 방송, 언론 활동을 하는 반정부 인사들을 연행, 체포, 고문하는 등 억압을 가했다.&lt;br /&gt;
&lt;br /&gt;
====한국경제의 위기====&lt;br /&gt;
1970년대 말 한국경제는''' [[오일쇼크]]'''라는 세계경제의 위기와 결합해 가라앉고 말았다. 경제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정부는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과 함께 '''[[경제안정화정책]]'''을 수용했고, 중소자본가, 봉급생활자, 도시 노동자와 농민 등에 안정화 비용을 부과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이와 같은 안정화 정책은 경제위기로 어려운 처지에 있던 중소기업들의 도산을 가속하여 기업 부도율이 치솟고 하층민들을 더 깊은 고통에 몰아넣었다. 특히 '''부가가치세'''를 도입한 이후 물가가 상승하면서 일상에 타격을 주었으며, 노동집약적 제조업이 집중되었던 부산과 마산에서는 상황이 더욱 심각하여 1979년 부산 지역 부도율은 서울의 3배에 달했다.&lt;br /&gt;
&lt;br /&gt;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lt;br /&gt;
한 시대의 대격변을 예고하는 단초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시작됐다. 1979년 8월 9일 오전, 신민당의 당사 4층 강당에서는 봉제업체인 YH무역주식회사의 여성노동자 200여명이 기업주의 폐업에 반발하여 폐업조치 철회 농성을 벌였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인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신민당이 당사 건물을 내준 것이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폭력을 동원하여 농성을 해산시켰다. 결국 이 사건은 노동 탄압 사건을 넘어선 야당에 대한 정치 탄압 사건으로 발전하였다.&lt;br /&gt;
&lt;br /&gt;
이날 경찰은 1000여명의 진압대원을 신민당사로 난입시켜 농성을 하고 있던 174명의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로 밖으로 끌어냈다. 또한 경찰은 총재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김영삼 총재와 당 간부들을 끌어내면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박정희 정권은 이 노동자 농성 사건을 빌미로 신민당 분열공작을 시도하였다. 유신정권과 비밀리에 결탁한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 3명이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 부총재 전원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접수시켰다. 그리고 법원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신민당 총재단의 직무 집행을 정지시키고 박정희 정권의 꼭두각시를 총재직무대행으로 선임하였다.&lt;br /&gt;
&lt;br /&gt;
아울러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의 동교동 자택을 전면 봉쇄하였고,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에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끊으라고 요구한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즈』 회견내용을 “반헌정적, 반민족적 작태”로 몰아서 국회에 징계 동의안을 제출했다. 10월 4일 오후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의원 159명은 여당 총회장에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제명 결의안을 '''기습적으로''' 처리해 버렸다. 노사분규 사태로 시작된 사건이 제1야당 당수의 의원직 제명으로 확대된 정치적 사태를 지켜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유신체제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이 고조되었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유신 철폐, 독재 타도!'''''   &amp;lt;small&amp;gt;-10.16 부마항쟁 당시 시위대의 구호&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부산대학교 민주선언문, 학생 시위에서 시민항쟁으로====&lt;br /&gt;
[[파일:부산시위대.jpg|250px|섬네일|오른쪽|광복동을 지나는 시위 행렬]]&lt;br /&gt;
1979년 10월 16일 아침 10시 부산대학교 구내 도서관 앞에서 약 500명의 학생들이 모여 “유신정권 물러가라”, “정치탄압 중지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반정부 시위를 벌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민주선언문」]]'''을 통해 민주화, 언론 자유, 인권 보장의 신념을 확인하고, “제도화된 폭력성과 조직적 악의 근원인 유신헌법과 독재집권층의 퇴진만이 5천 만 겨레의 통일의 첫걸음이라고 주장하면서 형제의 피를 요구하는 자유와 민주의 깃발을 우리가 잡고 반민주의 무리, 불의의 무리들을 향해 외치며 나아가자”라고 선언하였다. 이후 학생들은 교문을 나가 거리에서 시위했다. 이때 학생 수는 약 5,000명으로 불어나 있었고, 광복동과 남포동 등 부산시내 중심가까지 진출해 애국가 등의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며, 이를 제지하려는 경찰과 이곳저곳에서 충돌하였다. 비슷한 시간, 부산 동아대학교에서도 1,000여 명의 학생이 부산대학교 학생과 합류하여 가두시위를 벌였다. 부산대학교 데모로 학생 수백 명이 연행되고 100여 명이 다쳤지만 이튿날인 10월 17일에는 시위가 더욱 격화되어 학생들뿐만 아니라 다수의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학생 시위는 점차 시민항쟁의 양상을 띠어갔다.''' 밤늦게까지 계속된 시위에서 시민들은 충무파출소, 한국방송공사, 서구청, 부산세무서 등을 파괴하였고, 경찰차량을 불태우거나 파손시켰다.&lt;br /&gt;
&lt;br /&gt;
====마산의 시민항쟁====&lt;br /&gt;
&lt;br /&gt;
민주항쟁은 18일에 마산으로 확산되었다. 늦은 오후에는 1,000여 명의 경남대학교 학생들이 마산 시내 번화가에 산발적으로 집결했으며, 일부시민들도 가담해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어두워진 다음 학생과 시민들의 데모는 격화되어 파출소, 공화당사, 방송국, 신문사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파괴하였다. 이튿날인 19일에는 시위가 더욱 치열해져 마산 시내는 한때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저녁 8시경, 시위대는 경남대학과 마산대학&amp;lt;ref&amp;gt;1985년 창원대학으로 교명이 변경되었으며, 현재의 마산대학교와 다르다.&amp;lt;/ref&amp;gt;, 그리고 고등학생까지 합세하여 약 8,000명에 이르렀으며, 시내 곳곳에서 몽둥이를 들고 동사무소와 파출소로 몰려가 시설을 파괴하였고, 경찰차량에 불을 질렀다.&lt;br /&gt;
&lt;br /&gt;
====부산 계엄령, 마산 위수령====&lt;br /&gt;
[[파일:계엄포고문.jpg|270px|섬네일|왼쪽|부산지역에 내려진 계엄포고문을 읽고 있는 시민들]]&lt;br /&gt;
부산대학교 시위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박정희 정부는 학생 시위로 시작된 시위가 대규모 시민항쟁으로 사태가 심상치 않게 확대되어가자 강경책으로 대응했다. 정부는 18일 자정을 기해 '''부산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동원한 과격한 진압'''을 통해 시위 참여자들과 이를 방조한 일반 시민들까지 1,058명을 연행하고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으며, 부산지구 계엄사령부는 각 대학 휴교조처와 야간통행금지시간을 2시간 연장하는 등의 항이 담긴 포고문을 발표했다.&lt;br /&gt;
&lt;br /&gt;
부산에 계엄령이 선포된 이튿날인 19일에 마산 시위가 확대됨에 따라 그 다음날인 10월 20일 정오, 정부가 '''마산 및 창원 지역에 위수령을 발령'''해 통행금지 시간이 연장되고, 경남대학 등에는 휴교조처가 취해졌으며, 24일에는 깡패를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132명을 검거, 23명을 구속했다. 이렇게 '''표면적으로는 부마민주항쟁이 단시간에 진압되는 듯 보였지만, 항쟁은 이미 유신체제의 균열을 불러오고 있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항쟁의 전개 과정에서 볼 수 있듯, 부마민주항쟁에서 특징적인 것은 먼저 시위대의 가장 큰 분노의 대상이 공화당사와 경찰·파출소였다는 점, 다음으로는 “부가가치세를 철폐하라”, “잘 먹고 잘 살아라”등의 구호에서 드러나듯이 세무서에 대한 공격, 그리고 신문사와 방송국에 대한 공격을 들 수 있다.&lt;br /&gt;
&lt;br /&gt;
부마민주항쟁은 1970년대 유신체제 밑에서 쌓였던 침묵하는 언론, 조세, 시민을 억압하는 경찰에 대한 불만 등 정치·사회·경제·문화·종교 등 각 부문에 걸친 여러 모순의 폭발이었고, 헌법 개정과 긴급조치로 겨우 유지되던 유신체제와 박정희 정권의 붕괴를 촉진시킨 결정적인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10.26사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또한 이 사건은 1980년 5월 18일의 광주 민주화운동과 1987년 6월 민주항쟁에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된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억눌린 우리 역사&amp;lt;/br&amp;gt;터져나온 분노&amp;lt;/br&amp;gt;매운 연기 칼바람에도&amp;lt;/br&amp;gt;함성소리 드높았던&amp;lt;/br&amp;gt;동트는 새벽벌&amp;lt;/br&amp;gt;시월이 오면&amp;lt;/br&amp;gt;핏발 선 가슴마다&amp;lt;/br&amp;gt;살아오는 십 일육&amp;lt;/br&amp;gt;동지여 전진하자&amp;lt;/br&amp;gt;깨치고 나가자&amp;lt;/br&amp;gt;뜨거운 가슴으로&amp;lt;/br&amp;gt;빛나는 내일로'''''&amp;lt;/br&amp;gt;&amp;lt;small&amp;gt;-'''부산대학교''' 새벽벌도서관 10.16 기념비&amp;lt;/small&amp;gt;&amp;lt;/div&amp;gt;&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호빵이👻]]: 부마항쟁 페이지 전체 작성&amp;lt;/br&amp;gt;&lt;br /&gt;
[[이나자키로빈]]: 부마항쟁 원인 중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 작성&lt;br /&gt;
&lt;br /&gt;
=='''5.18민주화운동'''==&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AMetwTuXYHTCXINqr7ZJpzO5CHFEMQO5-Uqau51RkXA&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원인===&lt;br /&gt;
====유신체제의 붕괴====&lt;br /&gt;
&lt;br /&gt;
[[파일:김재규.jpg|섬네일|오른쪽|암살 당시 상황을 재현하는 김재규]]&lt;br /&gt;
&lt;br /&gt;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amp;lt;small&amp;gt; - 김재규&amp;lt;/small&amp;gt;&lt;br /&gt;
1979년 10월 4일 신민당 총재 김영삼이 국회에서 의원직을 제명당하자 10월 15부터 10월 20까지 부산 · 마산 등지에서는 부마항쟁이 일어났고, 이의 해결을 둘러싼 노선대립으로 갈등 중 10월 26일 &amp;lt;ins&amp;gt;[[김재규]]&amp;lt;/ins&amp;gt;가 박정희를 살해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ins&amp;gt;[[10.26 사태]]&amp;lt;/ins&amp;gt;의 사후 수습과정에서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을 중심으로 신군부 세력이 부상하였으며, 이들은 &amp;lt;ins&amp;gt;[[12.12 사건]]&amp;lt;/ins&amp;gt;의 하극상을 통하여 군부를 장악하였다. 1980년 2월 29일 김대중 등이 복권되었으나 그 해 봄, 신군부는 최규하 과도 정부를 유명무실하게 하고 국민들이 요구하는 민주주의와 이를 위한 명확한 정치일정 제시를 거부하면서 권력기반을 구축하였다.&lt;br /&gt;
&lt;br /&gt;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lt;br /&gt;
한 시대의 대격변을 예고하는 단초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시작됐다. 1979년 8월 9일 오전, 신민당의 당사 4층 강당에서는 봉제업체인 YH무역주식회사의 여성노동자 200여명이 기업주의 폐업에 반발하여 폐업조치 철회 농성을 벌였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인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신민당이 당사 건물을 내준 것이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폭력을 동원하여 농성을 해산시켰다. 결국 이 사건은 노동 탄압 사건을 넘어선 야당에 대한 정치 탄압 사건으로 발전하였다.&lt;br /&gt;
&lt;br /&gt;
이날 경찰은 1000여명의 진압대원을 신민당사로 난입시켜 농성을 하고 있던 174명의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로 밖으로 끌어냈다. 또한 경찰은 총재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김영삼 총재와 당 간부들을 끌어내면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박정희 정권은 이 노동자 농성 사건을 빌미로 신민당 분열공작을 시도하였다. 유신정권과 비밀리에 결탁한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 3명이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 부총재 전원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접수시켰다. 그리고 법원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신민당 총재단의 직무 집행을 정지시키고 박정희 정권의 꼭두각시를 총재직무대행으로 선임하였다.&lt;br /&gt;
&lt;br /&gt;
아울러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의 동교동 자택을 전면 봉쇄하였고,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에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끊으라고 요구한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즈』 회견내용을 “반헌정적, 반민족적 작태”로 몰아서 국회에 징계 동의안을 제출했다. 10월 4일 오후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의원 159명은 여당 총회장에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제명 결의안을 '''기습적으로''' 처리해 버렸다.&lt;br /&gt;
&lt;br /&gt;
노사분규 사태로 시작된 사건이 제1야당 당수의 의원직 제명으로 확대된 정치적 사태를 지켜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유신체제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이 고조되었다. 또한 이 사건은 그동안 다소 주춤하던 대학가에 반유신 반독재 운동의 열기가 다시 확산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청춘을 바쳐, 학생 운동====&lt;br /&gt;
&lt;br /&gt;
[[파일:서울의_봄.JPG|섬네일|오른쪽|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앞에 모인 시위대]]&lt;br /&gt;
&lt;br /&gt;
군부의 재집권 야욕에 대한 국민적 저항은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표출되었다. 1980년 3월, 서울대 총학생회 출범을 시작으로 4월 초순에는 전국의 주요 대학들이 총학생회를 결성하기 시작하였다. 대학별로 독재 정권에 아부했던 어용교수와 족벌사학 퇴진 운동을 벌였고, 특히 병영집체훈련(당시 대학 신입생들은 의무적으로 군부대에 10일 간 입대하여 각종 군사훈련을 이수해야 했다.) 거부가 주요 이슈로 전면 등장했다. 각 대학의 병영집체훈련 거부운동이 본격화되고 전국적인 쟁점으로 떠오르자 신군부는 신문, 방송을 통해 ‘학생들의 안보의식 결여’를 비난하고 교내 시위·농성을 집중적으로 보도하게 했다.  5월 1일에 서울대가 입영훈련 거부투쟁 철회를 결정하고 ‘계엄령 해제’와 ‘유신잔당 퇴진’, ‘정부개헌중단’과 ‘노동 3권 보장’ 등을 요구하기 시작하면서 대학가는 이제까지의 학내 문제 중심의 운동에서 정치개혁을 위한 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그간 정부와 대학 간에 팽팽하게 유지되던 긴장 관계는 폭발 직전으로 내닫게 된 것이다.&lt;br /&gt;
&lt;br /&gt;
약 열흘 간의 대정부 투쟁을 준비한 대학가는 5월 10일 고려대 총학생회장실에서 열린 ‘총학생회장단 회의’에 참석한 전국 23개 대학 대표들은 ‘비상계엄의 즉각 해제’와 ‘전두환, 신현확 등 유신잔당 퇴진’ 등을 결의하고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정세에 대한 공동대처 방안을 마련했다. 이후 5월 13일부터 5월 14일에 걸쳐 서울 · 부산 · 대구 · 광주 등 37개 대학에서 계엄철폐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5월 15일에는 서울역에서 시위가 발생하는 등 학생시위는 서울시가지를 거의 마비시키는 등 야간까지 지속되어 사태가 절정에 달하면서 신군부 세력을 위협하였다. 5월 16일 24개 대학 학생대표들은 당분간 시국의 추이를 관망하기로 결정하고 가두시위를 중단하면서 소강상태에 돌입하는 듯하였다.&lt;br /&gt;
&lt;br /&gt;
====1980년 봄의 광주====&lt;br /&gt;
5월 17일 신군부 세력이 이전까지는 제주도를 제외한 지역에 한정되었던 비상계엄을 전국에 확대하는 조치인 계엄포고 10호(17일 24시에 발효: 각 대학 휴교령 포함)를 밤 9시 40분에 의결하고 밤 11시 40분에 발표하면서 밤 11시를 전후한 시점부터 김대중 · 김종필이 연행되는 등 권력형 부정축재자 및 소요조종 혐의자, 학생 시위 주동자가 체포되었다. 이날 밤 광주지역의 사회운동·학생운동의 지도자도 상당수가 검거되었다. 광주의 검거대상자는 전남대 12명, 조선대 10명 등 총 22명이었다. 전남에서 계엄합동수사단은 광주505보안대가 중심이고, 중앙정보부, 경찰 등이 보조역할을 했다. 전남 계엄합동수사단은 22대 차량과 86명의 인원이 출동해 정동년 등 복적생들과 대학의 총학생회 간부들을 집중 검거했다.&lt;br /&gt;
&lt;br /&gt;
한편 육군본부는 14일 오전 7시55분에 국가 중요 보안목표와 주요대학에 군 병력 배치 명령을 하달했다. 이 명령에 따라 전남북계엄분소장인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광주 시내 주요 시설물에 이날 오후부터 계엄병력을 배치했다. 31사단 96연대 병력이 광주시내 KBS건물에 42명, MBC 21명, CBS 11명, VOC(전일방송) 11명 등 주요 방송사 건물에 배치돼 경비에 들어간 것이다.&lt;br /&gt;
&lt;br /&gt;
이날 오후 전교사령관은 7공수여단의 광주배치에 따른 수송수단 지원도 미리 협의했다. 그리고 5월 8일부터 16일 사이에 공수부대 수뇌부들도 헬기를 타고 서울에서 내려와 광주 상무대의 전투병과교육사령부를 방문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광주에서 시위가 격화되면 즉각적으로 최정예 군부대를 동원해서 진압할 준비를 철저하게 갖추고 있었다. 5월 18일에 시작된 광주의 비극은 그 이전에 이미 시한폭탄처럼 준비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lt;br /&gt;
{{구글지도 | 위도=35.175961433346885 | 경도=126.90865311973532 | 줌=13 }}  [[파일:금남로.JPG|섬네일|오른쪽|금남로 앞에 집결한 버스와 시민군]]&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18일&amp;lt;/span&amp;gt;&lt;br /&gt;
휴교령이 내려질 경우 교문 앞에서 집결한다는 결의에 따라 학생들은 5월 18일 오전 전남대학교 앞에 모였다. 공수부대원들이 전남대 앞 시위를 저지하자 대학생들은 광주역에 재집결해서 시위를 이어갔다. 시위대가 점차 늘어나면서 공수부대원이 시내에서 시위진압에 나섰으며 18일 오후 1시부터 무차별 진압작전이 이루어져 부상자가 속출하였다.&lt;br /&gt;
&lt;br /&gt;
군인들이 금남로 등 시내 중심가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이나 여자를 마구 구타하고 짓밟으며 찌르는 등의 잔혹 행동을 하자 시민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이에 시위대는 오후 4시 이후 파출소 파괴 등 적극공세에 나섰다. '''계엄군의 과잉 무력진압은 시위를 해산시키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오히려 시민들을 단결시켰으며, 결국 19일 시민 · 학생 연대가 발생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lt;br /&gt;
&lt;br /&gt;
 '''''광주 애국 시민 여러분! 이것이 웬 말입니까? 웬 벼락이란 말입니까? 죄 없는 학생들을 총칼로 찔러 죽이고 몽둥이로 두들겨 트럭으로 실어가며 부녀자를 발가벗겨 총칼로 찌르는 놈들이 이 누구란 말입니까? 이제 우리가 살길은 전시민이 하나로 뭉쳐 청년 학생들을 보호하고 유신잔당과 극악무도한 살인마 전두환 일파와 공수 특전단 놈들을 한놈도 남김없이 쳐부수는 길 뿐입니다. 우리는 이제 다 보았습니다. 다 알게 되었읍니다. 왜 학생들이 그토록 소리 높이 외쳤는가를, 우리의 적은 경찰도 군대도 아닙니다. 우리의 적은 전국민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바로 유신잔당과 전두환 일파 그놈들입니다.''''' &amp;lt;small&amp;gt; - 1980년 5월 19일에 '광주시민민주투쟁회'명의의 호소문&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19일&amp;lt;/span&amp;gt;&lt;br /&gt;
19일 오전에는 일시적 소강상태였으나 오후 들어서 분노한 학생 · 시민들이 군 · 경찰과 공방전을 벌이면서 시위는 점차 격화되었다. '''시민들은 공포감에서 벗어나 자신의 생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단순한 학생시위에서 시민봉기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계엄군은 시위대를 포위하여 구타하였으며 일부 고등학생까지 포함된 시위대는 돌과 화염병으로 저항하였고 파출소와 방송국 등에 침입하였다. 뒤처진 공수부대를 공격하거나 고립된 차량을 포위하기도 하였으며 총과 방패를 빼앗기도 하였고, 오후 4시 50분 시민들에게 포위된 계엄군의 장갑차에서 최초의 발포가 있었다. 19일 밤비가 내리는 가운데 시위가 산발적으로 계속되었으며, 20일 오전 비가 그치고 대규모 시위는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오후부터 다시 시작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20일&amp;lt;/span&amp;gt;&lt;br /&gt;
'''20일 오후 6시부터 택시와 버스 운전 기사들이 광주역과 무등경기장에 모여 대형 버스와 트럭을 앞세우고 일시에 금남로에 집결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들을 앞세운 시위는 계엄군을 몰아내는 데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였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5.18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에 &amp;lt;ins&amp;gt;[[지대한 영향]]&amp;lt;/ins&amp;gt;을 끼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학생 운동에 뛰어든 많은 대학생들은 대학교에 들어와서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의 실상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아 학생 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군부정권은 5.18 이후로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다. 전두환은 김대중 등에게 '광주 사태'의 책임을 물어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했고,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 선언을 한 직후, 8월 27일 소위 체육관 선거를 통해 전두환은 대통령 자리를 탈취했다.&lt;br /&gt;
&lt;br /&gt;
지역적인 면에서는 '''광주광역시를 비롯한 전라도 지역의 트라우마'''로 작용해 이후의 민주정의당 및 &amp;lt;ins&amp;gt;[[3당 합당]]&amp;lt;/ins&amp;gt;으로 이어지는 보수 세력에 대해 적대심을 가지고, 민주당계 정당의 표밭이 되는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미 박정희 정부 시절부터 유무형의 정치적인 차별을 받고 있었지만 5.18의 참상은 전라도가 다시는 보수 세력을 지지하지 않게 만들 정도로 심각한 사건이며 호남소외론의 가장 결정적인 명분이 되었다.&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이나자키로빈]]: 5.18 민주화운동 페이지 전체 작성&lt;br /&gt;
&lt;br /&gt;
=='''6월민주항쟁'''==&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NnXWs5RMTIf-6DOEu9_rX2k4mgzUk1AQHYneCuwXN1Q&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원인===&lt;br /&gt;
====[[박종철고문치사사건]]====&lt;br /&gt;
&lt;br /&gt;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박종철은 1987년 1월 13일 자정 경 하숙집에서 치안본부(現 경찰청)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게 연행되었다.‘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이자 ‘민주화추진위원회’ 지도위원으로 수배 받고 있었던 박종운을 잡기위해 연행한 것이었다. 취조실로 연행해간 공안 당국은 박종철에게 박종운의 소재를 물었으나, 박종철은 순순히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경찰은 잔혹한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가하였고, 박종철은 끝내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했다. 당시 경찰은 초기 발표에서 고문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라고 사망원인을 발표하였으나, 시체부검 결과 전기고문과 물고문에 의한 살인인 것으로 밝혀졌다.&lt;br /&gt;
&lt;br /&gt;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저 죽음을 응시해주길 바란다. 저 죽음을 끝내 지켜주길 바란다. 저 죽음을 다시 죽이지 말아주길 바란다.''''' &amp;lt;small&amp;gt; - 동아일보 1987년 1월 17일자 김중배 칼럼 중&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사건 진상의 일부가 공개되자 2월 7일 전국 주요 도시에서 &amp;quot;박종철군 범국민추도식&amp;quot; 및 도심 시위가 열렸고 이어 3월 3일에는 &amp;quot;박종철군 49재와 고문추방 국민대행진&amp;quot;과 함께 또 다른 시위가 열렸다. 이후 4월 2일 서울대학교 학부모 130여 명이 ‘건국대학교 사태‘ 등 시국관련 구속학생의 징계철회를 요구하며 철야 농성을 벌였다.&lt;br /&gt;
&lt;br /&gt;
====정부의 개헌논의 유보====&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lt;br /&g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JazJFsgu4oc?si=sOE7w1tz-jKVztC9&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lt;br /&g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그러나 전두환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1987년 4월 13일 [[4.13호헌조치]]라 불리는 ‘대통령 특별담화‘를 발표, 개헌(改憲) 논의를 유보하겠다고 밝혔다. [[4.13호헌조치]]에서 전두환은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와 대통령 선거는 자유 경선의 분위기가 보장되는 가운데 1987년 내에 공정한 선거관리를 통해 차질 없이 실시할 수 있게 모든 노력을 다할것‘이라고 다짐했으며, 또 ‘민정당의 후임 대통령 후보는 조속한 시일 안에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인물 가운데서 당헌 절차와 민주 방식에 따라 전당대회에서 선출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호헌조치‘라는 그 이름대로 현행 헌법에 따라 권력을 이양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국민들의 큰 기대를 얻을 것이라 믿었으나, 기대는 커녕 오히려 반발을 가져오는 요인이 되고 말았다. 곧바로 이튿날인 4월 14일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 등 각계 인사들이, 호헌 조치를 비판하는 시국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정부 최루탄에 의한 [[이한열]] 사망====&lt;br /&gt;
[[파일:이한열.jpg|200px|섬네일|오른쪽|최루탄에 피격당한 후 이종창에게 부축받는 이한열]]&lt;br /&gt;
먼저 1987년 5월 27일 야당과 재야, 종교계 등이 힘을 모아 ‘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여당인 민주정의당에서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6월 10일에 맞춰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6 · 10국민대회]])’를 치르기로 결정하였다. 대학생들은 국본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를 중심으로 6 · 10국민대회에 호응하여 6월 초부터 각 대학별로 연일 집회와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6 · 10국민대회]] 하루 전날인 6월 9일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교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는 곧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학생들은 물론 시민들의 분노가 들끓었다. 이러한 분노 속에서 6 · 10국민대회가 열렸다. 경찰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6 · 10국민대회가 열리는 성공회대성당을 원천 봉쇄하였다. 그 결과 6 · 10국민대회는 대회장에 미리 들어가 있던 소수의 인원만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대회 예정 시간인 오후 6시 이전부터 서울 시내 곳곳에서 대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시민들도 다양한 방식으로 6 · 10국민대회와 학생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날 밤 늦게까지 시위를 벌이던 학생들은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이후 5일 동안 농성을 계속하였다. 애초 계획된 것은 아니었지만 대학생들의 명동성당 농성은 6 · 10국민대회가 단발성 행사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인 저항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lt;br /&gt;
&lt;br /&gt;
====민주항쟁 확산====&lt;br /&gt;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로 개헌하라!'''''   &amp;lt;small&amp;gt;-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제시한 슬로건&amp;lt;/small&amp;gt;&lt;br /&gt;
명동성당 농성을 거치며 항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유월항쟁의 전국화 과정에는 일정한 패턴이 존재하였다. 6월 10일 서울 외에도 전국 주요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위가 벌어졌지만, 15일까지 항쟁의 중심은 6 · 10국민대회와 명동성당 농성이 전개된 서울이었다. 하지만 6월 15일 경부터는 부산, 대전, 진주 등에서 격렬한 시위가 전개되었다. 그러다가 6월 20일부터 대규모 시위가 광주, 전주, 순천, 익산 등 호남 지방으로 옮겨졌다. 6 · 10국민대회 이후 약 20일 동안 전국 곳곳에서 매일 평균 100회 이상의 시위가 동시다발로 벌어졌다. 특히 6월 18일 ‘최루탄추방대회’와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은 전국 곳곳에서 한꺼번에 1백만 명 이상이 참여하였다. 갈수록 참가 지역이 전국 곳곳으로 확산되어 대도시, 중소도시뿐만 아니라 농촌 지역의 군 단위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6월 26일 하루에만 37~38개 시 · 군에서 시위가 동시에 벌어졌다. 유월항쟁에 참가한 연 인원은 400~500만 명으로 추산된다.&lt;br /&gt;
&lt;br /&gt;
반면 유월항쟁의 전국적 동시다발 시위는 경찰 병력을 분산시켰다. 분산된 경찰 병력으로는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거센 시위의 물결을 막아 낼 수 없었다. 경찰이 시위 진압에 최루탄을 남발하면서 최루탄도 점차 고갈되기 시작하였다. 유월항쟁 기간 동안 경찰이 사용한 최루탄만 총 67만 발이 넘었다. 더불어, 전두환 정권이 집권 내내 강조했던 88서울올림픽이 얼마 남지 않아 미국 등 국제사회의 이목이 집중된 상황에서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운동 때처럼 유혈 사태와 대량 학살을 반복하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무엇보다 군대를 동원하더라도 이러한 대규모 시민 항쟁을 진압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결국 경찰력으로 항쟁을 막기 힘들고, 군대 투입도 어렵다고 판단한 전두환 정권은 1987년 6월 29일 ‘ 6 · 29민주화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하였다. 그리고 그동안 의식불명 상태에 있었던 이한열이 7월 5일 끝내 사망하였다. 5일장 후 7월 9일 치러진 이한열의 노제에 100만 명의 인파가 모인 것을 끝으로 약 한 달 동안 지속된 유월항쟁은 마무리되었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1987년 6월항쟁이 '''대통령[[직선제]] 개헌'''이라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이 항쟁에 동참한 학생과 시민들의 요구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제시한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 개헌’이라는 슬로건으로 모아졌기 때문이었다. 유월항쟁은 이러한 민주화 세력의 통합성, 즉 각기 다른 성격과 지향을 가진 여러 주체들이 모두 동의할 수 있는 ‘최소 강령’하에 ‘최대 연합’으로 결집하였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딩잉잉]]:6월민주항쟁 페이지 전체 작성&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기밀문서]]&lt;br /&gt;
[[분류:4.19혁명관련]]&lt;br /&gt;
[[분류:부마항쟁관련]]&lt;br /&gt;
[[분류:5.18민주화운동관련]]&lt;br /&gt;
[[분류:6월민주항쟁관련]]&lt;br /&gt;
[[분류:뎐]]&lt;br /&gt;
[[분류:이나자키로빈]]&lt;br /&gt;
[[분류:호빵이👻]]&lt;br /&gt;
[[분류:•ᴗ•]]&lt;br /&gt;
[[분류:딩잉잉]]&lt;/div&gt;</summary>
		<author><name>딩잉잉</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8%B0%EB%B0%80%EB%AC%B8%EC%84%9C&amp;diff=35950</id>
		<title>기밀문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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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1T16:14:2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딩잉잉: /* 컨텐츠 주제 */&lt;/p&gt;
&lt;hr /&gt;
&lt;div&gt;=='''컨텐츠 주제'''==&lt;br /&gt;
[[파일:이한열사진.jpeg|center]]&lt;br /&gt;
[[파일:시위대.png|left]]&lt;br /&gt;
[[파일:진압.png|right]]&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amp;lt;big&amp;gt;'''&amp;lt;span style=&amp;quot;color:#CD0000&amp;quot;&amp;gt;투쟁의 불꽃, 자유의 환호&amp;lt;/span&amp;gt;'''&amp;lt;br/&amp;gt;&amp;lt;br/&amp;gt;&lt;br /&gt;
''대한민국은 시민들의 투쟁과 희생을 거쳐, 피와 땀으로 민주화를 이룩하였습니다.''&amp;lt;br/&amp;gt;&lt;br /&gt;
''그들은 어둠을 밝히기 위해 항거의 불꽃을 태웠고, 그 불꽃은 자유를 외쳤으며, 그 외침은 세상을 움직였습니다.''&amp;lt;br/&amp;gt;&lt;br /&gt;
''이 «기밀문서»에는 당신이 미처 몰랐던 그 때의 열기와 의지가 실려있습니다.''&amp;lt;br/&amp;gt;&lt;br /&gt;
''함께, 그 뜨거운 페이지를 열어보시겠습니까?''&amp;lt;/span&amp;gt;&amp;lt;/big&amp;gt;&amp;lt;/div&amp;gt;&lt;br /&gt;
&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이나자키로빈]]&lt;br /&gt;
[[딩잉잉]]&lt;br /&gt;
&lt;br /&gt;
=='''팀원'''==&lt;br /&gt;
*오현지(2022131143) [[뎐]]&amp;lt;br/&amp;gt;&lt;br /&gt;
*김여원(2023130209) [[이나자키로빈]]&amp;lt;br/&amp;gt;&lt;br /&gt;
*김하은(2022131345) [[호빵이👻]]&amp;lt;br/&amp;gt;&lt;br /&gt;
*박정원(2023130350) [[•ᴗ•]]&amp;lt;br/&amp;gt;&lt;br /&gt;
*최필중(2023130216) [[딩잉잉]]&amp;lt;br/&amp;gt;&lt;br /&gt;
&lt;br /&gt;
=='''기획의도'''==&lt;br /&gt;
===기획배경===&lt;br /&gt;
1945년 광복 이후 대한민국 국민들은 자유민주국가로서의 미래를 기대했으나 실상은 그러지 못했다.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보여주듯 현재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는 그것을 누리지 못한 앞선 세대들의 목숨을 바친 항쟁의 대가이다. 민주항쟁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의 핵심 동력이었다. 오늘날 우리나라 민주의식의 중요한 기둥이 되는 네 가지 항쟁을 선별하고 각 항쟁의 배경, 전개과정, 의의를 비롯해 세부적이고 자세한 내용에 대한 기사를 작성한다.&lt;br /&gt;
===기획목적===&lt;br /&gt;
작금의 현실까지 오기에는 수없이 많은 투쟁이 있었지만 4.19혁명, 부마항쟁, 5.18민주항쟁, 6월민주항쟁이라는 네 가지 사건을 살펴보기로 한 것은 가장 많이 다뤄지고, 가장 많이 알려진 사건이기 때문이다. 관련된 사건과 역사 인물들에 대해 자세히 적어 내어 민주항쟁의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지 않으면 알기 힘든 각 민주항쟁의 자세한 내막을 밝혀낸다.&lt;br /&gt;
===기대하는 바===&lt;br /&gt;
타임라인과 온톨로지를 활용해 내용의 전반적인 이해를 돕고 자세한 설명을 통해 사건의 자세한 내막을 들어낸다. 네 가지 항쟁을 각각 큰 목차로 설정하고 세부 기사를 그 내부에 작성해 독자의 관심과 수요에 부합하는 정보를 전달하는 데 효과적일 것으로 기대된다. 민주항쟁에 참여한 사람들의 희생과 투쟁에 대한 존경심을 부르고 역사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다.&lt;br /&gt;
===기여===&lt;br /&gt;
[[뎐]], [[이나자키로빈]], [[호빵이👻]]: 기획의도 페이지 작성&lt;br /&gt;
&lt;br /&gt;
=='''온톨로지'''==&lt;br /&gt;
{{NetworkGraph | title=민주항쟁.lst}}&lt;br /&gt;
[[민주항쟁.lst]]&lt;br /&gt;
===기여===&lt;br /&gt;
*[[뎐]]: 온톨로지 제작&lt;br /&gt;
=='''컨텐츠 구조'''==&lt;br /&gt;
===클래스(Class)===&lt;br /&gt;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color:white&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0%&amp;quot; | 클래스 !! style=&amp;quot;width:40%&amp;quot; | 설명 !! style=&amp;quot;45%&amp;quot; | 노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제||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대표 키워드인 민주항쟁을 주제로서 나타내었다 || 만주항쟁&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항쟁||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민주화운동 시기 발생했던 주요 운동들을 ‘항쟁’이라는 키워드로 분류하였다. || 4.19혁명, 부마항쟁, 5.18 민주화운동, 6월민주항쟁&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사건||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항쟁의 원인, 결과가 되는 사건을 정리하였다|| 3.15부정선거, 고려대 4.18학생시위, 3.15의거, YH사건, 10.26사태, 12.12 군사반란, 비상계엄령,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고문추방민족대행진, 4.13호헌조치, 6.29선언, 대통령직선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지역||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요 항쟁들이 일어났던 지역을 정리하였다|| 마산, 부산, 광주&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인물||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요사건들을 발생시킨 인물, 참여했던 인물을 묶어서 정리하였다|| 이승만, 이기붕, 김주열, 박정희, 김재규, 전두환, 신군부, 시민군, 박종철, 이한열, 노태우&lt;br /&gt;
|-&lt;br /&gt;
|}&lt;br /&gt;
===관계성(Relation)===&lt;br /&gt;
*&amp;lt;font color=#228B22&amp;gt;'''~은 ~에 속한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주요 항쟁들이 민주항쟁에 속함을 나타내거나 인물의 소속을 나타낸다.&lt;br /&gt;
***해당노드:&lt;br /&gt;
***#4.19혁명 -&amp;gt; 민주항쟁&lt;br /&gt;
***#부마항쟁 -&amp;gt; 민주항쟁&lt;br /&gt;
***#5.18민주화운동 -&amp;gt; 민주항쟁&lt;br /&gt;
***#6월 민주항쟁 -&amp;gt; 민주항쟁&lt;br /&gt;
***#전두환 -&amp;gt; 신군부&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의 원인이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어떠한 사건과 인과관계를 이루는 또다른 사건 혹은 인물을 설명한다.&lt;br /&gt;
***#이기붕 -&amp;gt; 3.15부정선거&lt;br /&gt;
***#김주열 -&amp;gt; 고려대 4.18학생시위&lt;br /&gt;
***#고려대 4.18학생시위 -&amp;gt; 4.19혁명&lt;br /&gt;
***#3.15의거 -&amp;gt; 4.19혁명&lt;br /&gt;
***#김주열 -&amp;gt; 4.19혁명&lt;br /&gt;
***#3.15부정선거 -&amp;gt; 3.15의거&lt;br /&gt;
***#YH사건 -&amp;gt; 부마항쟁&lt;br /&gt;
***#부마항쟁 -&amp;gt; 10.26사태&lt;br /&gt;
***#박정희 -&amp;gt; 10.26사태&lt;br /&gt;
***#비상계엄령 -&amp;gt; 5.18민주화운동&lt;br /&gt;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 -&amp;gt; 고문추방민족대행진&lt;br /&gt;
***#고문추방민족대행진 -&amp;gt; 4.13호헌조치&lt;br /&gt;
***#4.13호헌조치 -&amp;gt; 6월민주항쟁&lt;br /&gt;
***#6월민주항쟁 -&amp;gt; 6.29선언&lt;br /&gt;
***#6월민주항쟁 -&amp;gt; 대통령직선제&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을 발생시켰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사건과 그 사건을 직접적으로 발생시킨 인물을 연결한다.&lt;br /&gt;
***#이승만 -&amp;gt; 3.15부정선거&lt;br /&gt;
***#김재규 -&amp;gt; 10.26사태&lt;br /&gt;
***#신군부 -&amp;gt; 1212군사반란&lt;br /&gt;
***#전두환 -&amp;gt; 비상계엄령&lt;br /&gt;
***#노태우 -&amp;gt; 6.29선언&lt;br /&gt;
***#시민군 -&amp;gt; 5.18민주화운동&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에 희생되었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민주항쟁의 진압과정 등 에서 희생된 인물을 설명한다&lt;br /&gt;
***#김주열 -&amp;gt; 3.15의거&lt;br /&gt;
***#이한열 -&amp;gt; 6월 민주항쟁&lt;br /&gt;
***#박종철&amp;gt;박종철 고문치사 사건&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에서 발생했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설명한다.&lt;br /&gt;
***#3.15의거 -&amp;gt; 마산&lt;br /&gt;
***#부마항쟁 -&amp;gt; 부산&lt;br /&gt;
***#부마항쟁 -&amp;gt; 마산&lt;br /&gt;
***#5.18민주화운동 -&amp;gt; 광주&lt;br /&gt;
===기여===&lt;br /&gt;
*[[뎐]]: 컨텐츠 구조 페이지 작성&lt;br /&gt;
=='''4.19혁명'''==&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VPp4BmfDSv8VA2-oC-VATHzUYgadaiaQ9AlWXYiaiVk&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원인===&lt;br /&gt;
====[[3.15 부정선거]]====&lt;br /&gt;
[[파일:3.15부정선거_개표_모습.png|300픽셀|섬네일|오른쪽|3.15부정선거 당시 개표하는 사진&amp;lt;ref&amp;gt;사진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amp;lt;/ref&amp;gt;]]&lt;br /&gt;
1959년 대한민국은 제 4대 대통령 선거와 제 5대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당시 자유당에서는 12년째 대통령으로서 연임 중이던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이기붕]]'''을 부통령 후보로 선임하였다. 그러나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병세의 악화로 사망하게 되고,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은 확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선거의 초점은 자유당의 조병옥과 민주당의 장면 간의 선거전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본격적인 선거유세의 시작과 함께 정부와 여당의 잇따른 야당선거운동 방해사건으로 부정선거가 시작되었다. 1960년 3월 15일 선거가 시작된 이후에도 다양한 방법의 부정행위가 일어났고, 개표 결과 이승만과 이기붕의 득표가 100%에 육박하는 결과로 나오자 자유당은 득표수를 하향 조정해 최종 집계에 반영할 것을 지시했다. 결국 이승만 88.7%, 이기붕 79%의 득표율을 가지며 정, 부통령에 당선되었다.&amp;lt;ref&amp;gt;자세한 내용은 3.15부정선거 페이지 참조&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부정선거 반대시위, [[3.15 의거]]의 발생====&lt;br /&gt;
3.15 부정선거를 반대하는 시위는 초기에는 중, 고등학생들의 산발적인 시위로 전개되었다. 3월 15일 선거일 밤 경남 마산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으며,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여 1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amp;lt;br/&amp;gt;&lt;br /&gt;
3월 15일 실종되었던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4월 11일 마산부두에서 발견되자 마산 시민들은 시청, 파출소 등을 파괴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2차 시위가 일어난 것이다.&lt;br /&gt;
&lt;br /&gt;
====[[고려대학교 4.18 학생시위]]의 발생====&lt;br /&gt;
1, 2차 마산시위를 계기로 부정선거 무효와 이승만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났다. 이들은 '4.18 선언문'을 낭독하고 시내로 진출하였다. 이는 4월 19일 학생들과 일반 시민들이 가세한 대규모 시위로 이어지게 되었다.&lt;br /&gt;
====전국적인 4.19 혁명의 발생====&lt;br /&gt;
분노한 전국의 시민과 학생들이 다음 날인 4월 19일에 '이승만 하야와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며 대규모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경찰은 또다시 무차별 발포에 나섰고,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지만 이러한 압박에도 시민들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lt;br /&gt;
====이승만 대통령의 혼란 수습 시도====&lt;br /&gt;
이승만 대통령은 4.19 시위로 인한 정국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4월 20일 국무위원 전원과 자유당 당무위원 전원의 사표를 제출하도록 지시하였으며, 4월 23일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외무장관에 허정, 내무장관에 이호, 법무장관에 권승렬을 임명하는 등 개각을 단행하였다.&amp;lt;br/&amp;gt;&lt;br /&gt;
그러나 미국은 4.19직후 국무부 성명을 통해 한국에서 발생한 사태는 부정선거에 대한 '군중의 불만'을 반영한 것 이라고 했고, 양유찬 주미대사를 불러 '부정선거에 대한 철저한 조사', '경향신문 복간', '국가보안법 개정' 등을 촉구하는 각서를 전달하였다.&amp;lt;br/&amp;gt;&lt;br /&gt;
그리고 4월 25일, 이승만 정권에 분노한 전국 27개 대학 258명의 교수가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 모여 14개항의 시국 선언문을 발표하며 학생, 시민들과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들은 3.15 부정선거 및 4.19 사태의 책임을 지고 대통령이 물러날 것을 주장하였으며, &amp;quot;학생들의 피에 보답하자&amp;quot;는 플랜 카드를 앞세워 국회의사당까지 행진하였다. &lt;br /&gt;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lt;br /&gt;
무력 진압에도 대규모 시위가 이어지며 시민들은 완강하게 투쟁하였다. 4월 26일 시위대가 경무대로 다시 집결하는 등 사태가 심각하게 진행되자, 오전 10시 30분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 성명을 발표하였다. 4월 27일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하며 대통령직을 하야하고 하와이로 망명하였으며 자유당 정권도 끝나게 된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우리 국민들, 특히 학생과 청년들의 주도로 이루어진 4.19 혁명은 학생과 일반 대중이 단결하여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아시아 최초의 시건이다. 4.19혁명은 부마항쟁, 5.18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그리고 2017년 촛불시위에 이르기 까지 정권에 대항하는 국민들이 단합을 이루는 초석이 되었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도 시민 저항권에 대한 근거로써 4.19혁명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문구가 있다.&lt;br /&gt;
===기여===&lt;br /&gt;
[[뎐]]: 4.19혁명 페이지 원인, 의의 작성 &lt;br /&gt;
&lt;br /&gt;
[[•ᴗ•]]: 4.19혁명 페이지 전개 작성&lt;br /&gt;
&lt;br /&gt;
=='''부마항쟁'''==&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bK7zjpPvBsC7rFRPmsiHCUYhyWt2VXOv8SYyaBTND4Y&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원인===&lt;br /&gt;
====[[유신 헌법]]과 [[긴급조치]]====&lt;br /&gt;
1971년 선거에서 김대중을 누르고 대통령에 3선된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해 국회 해산,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등 법의 일부 기능을 정지시키고 전국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했다.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된 이른바 유신헌법에 의해 제정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법」 에 의거해 박정희가 제8대 대통령으로 재차 당선되었고, 이 유신 헌법이 발효된 기간을 유신 체제라고 부른다. 유신 체제는 행정, 입법, 사법의 3권을 모두 쥔 대통령이 종신 집권할 수 있도록 설계된 1인 대통령제였다. 박정희는 유신 헌법에 의거해 대통령의 권한으로 취할 수 있었던 특별조치인 긴급조치를 선포함으로써 헌법에 반대하는 시위 및 운동과 방송, 언론 활동을 하는 반정부 인사들을 연행, 체포, 고문하는 등 억압을 가했다.&lt;br /&gt;
&lt;br /&gt;
====한국경제의 위기====&lt;br /&gt;
1970년대 말 한국경제는''' [[오일쇼크]]'''라는 세계경제의 위기와 결합해 가라앉고 말았다. 경제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정부는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과 함께 '''[[경제안정화정책]]'''을 수용했고, 중소자본가, 봉급생활자, 도시 노동자와 농민 등에 안정화 비용을 부과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이와 같은 안정화 정책은 경제위기로 어려운 처지에 있던 중소기업들의 도산을 가속하여 기업 부도율이 치솟고 하층민들을 더 깊은 고통에 몰아넣었다. 특히 '''부가가치세'''를 도입한 이후 물가가 상승하면서 일상에 타격을 주었으며, 노동집약적 제조업이 집중되었던 부산과 마산에서는 상황이 더욱 심각하여 1979년 부산 지역 부도율은 서울의 3배에 달했다.&lt;br /&gt;
&lt;br /&gt;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lt;br /&gt;
한 시대의 대격변을 예고하는 단초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시작됐다. 1979년 8월 9일 오전, 신민당의 당사 4층 강당에서는 봉제업체인 YH무역주식회사의 여성노동자 200여명이 기업주의 폐업에 반발하여 폐업조치 철회 농성을 벌였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인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신민당이 당사 건물을 내준 것이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폭력을 동원하여 농성을 해산시켰다. 결국 이 사건은 노동 탄압 사건을 넘어선 야당에 대한 정치 탄압 사건으로 발전하였다.&lt;br /&gt;
&lt;br /&gt;
이날 경찰은 1000여명의 진압대원을 신민당사로 난입시켜 농성을 하고 있던 174명의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로 밖으로 끌어냈다. 또한 경찰은 총재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김영삼 총재와 당 간부들을 끌어내면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박정희 정권은 이 노동자 농성 사건을 빌미로 신민당 분열공작을 시도하였다. 유신정권과 비밀리에 결탁한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 3명이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 부총재 전원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접수시켰다. 그리고 법원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신민당 총재단의 직무 집행을 정지시키고 박정희 정권의 꼭두각시를 총재직무대행으로 선임하였다.&lt;br /&gt;
&lt;br /&gt;
아울러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의 동교동 자택을 전면 봉쇄하였고,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에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끊으라고 요구한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즈』 회견내용을 “반헌정적, 반민족적 작태”로 몰아서 국회에 징계 동의안을 제출했다. 10월 4일 오후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의원 159명은 여당 총회장에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제명 결의안을 '''기습적으로''' 처리해 버렸다. 노사분규 사태로 시작된 사건이 제1야당 당수의 의원직 제명으로 확대된 정치적 사태를 지켜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유신체제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이 고조되었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유신 철폐, 독재 타도!'''''   &amp;lt;small&amp;gt;-10.16 부마항쟁 당시 시위대의 구호&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부산대학교 민주선언문, 학생 시위에서 시민항쟁으로====&lt;br /&gt;
[[파일:부산시위대.jpg|250px|섬네일|오른쪽|광복동을 지나는 시위 행렬]]&lt;br /&gt;
1979년 10월 16일 아침 10시 부산대학교 구내 도서관 앞에서 약 500명의 학생들이 모여 “유신정권 물러가라”, “정치탄압 중지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반정부 시위를 벌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민주선언문」]]'''을 통해 민주화, 언론 자유, 인권 보장의 신념을 확인하고, “제도화된 폭력성과 조직적 악의 근원인 유신헌법과 독재집권층의 퇴진만이 5천 만 겨레의 통일의 첫걸음이라고 주장하면서 형제의 피를 요구하는 자유와 민주의 깃발을 우리가 잡고 반민주의 무리, 불의의 무리들을 향해 외치며 나아가자”라고 선언하였다. 이후 학생들은 교문을 나가 거리에서 시위했다. 이때 학생 수는 약 5,000명으로 불어나 있었고, 광복동과 남포동 등 부산시내 중심가까지 진출해 애국가 등의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며, 이를 제지하려는 경찰과 이곳저곳에서 충돌하였다. 비슷한 시간, 부산 동아대학교에서도 1,000여 명의 학생이 부산대학교 학생과 합류하여 가두시위를 벌였다. 부산대학교 데모로 학생 수백 명이 연행되고 100여 명이 다쳤지만 이튿날인 10월 17일에는 시위가 더욱 격화되어 학생들뿐만 아니라 다수의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학생 시위는 점차 시민항쟁의 양상을 띠어갔다.''' 밤늦게까지 계속된 시위에서 시민들은 충무파출소, 한국방송공사, 서구청, 부산세무서 등을 파괴하였고, 경찰차량을 불태우거나 파손시켰다.&lt;br /&gt;
&lt;br /&gt;
====마산의 시민항쟁====&lt;br /&gt;
&lt;br /&gt;
민주항쟁은 18일에 마산으로 확산되었다. 늦은 오후에는 1,000여 명의 경남대학교 학생들이 마산 시내 번화가에 산발적으로 집결했으며, 일부시민들도 가담해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어두워진 다음 학생과 시민들의 데모는 격화되어 파출소, 공화당사, 방송국, 신문사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파괴하였다. 이튿날인 19일에는 시위가 더욱 치열해져 마산 시내는 한때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저녁 8시경, 시위대는 경남대학과 마산대학&amp;lt;ref&amp;gt;1985년 창원대학으로 교명이 변경되었으며, 현재의 마산대학교와 다르다.&amp;lt;/ref&amp;gt;, 그리고 고등학생까지 합세하여 약 8,000명에 이르렀으며, 시내 곳곳에서 몽둥이를 들고 동사무소와 파출소로 몰려가 시설을 파괴하였고, 경찰차량에 불을 질렀다.&lt;br /&gt;
&lt;br /&gt;
====부산 계엄령, 마산 위수령====&lt;br /&gt;
[[파일:계엄포고문.jpg|270px|섬네일|왼쪽|부산지역에 내려진 계엄포고문을 읽고 있는 시민들]]&lt;br /&gt;
부산대학교 시위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박정희 정부는 학생 시위로 시작된 시위가 대규모 시민항쟁으로 사태가 심상치 않게 확대되어가자 강경책으로 대응했다. 정부는 18일 자정을 기해 '''부산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동원한 과격한 진압'''을 통해 시위 참여자들과 이를 방조한 일반 시민들까지 1,058명을 연행하고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으며, 부산지구 계엄사령부는 각 대학 휴교조처와 야간통행금지시간을 2시간 연장하는 등의 항이 담긴 포고문을 발표했다.&lt;br /&gt;
&lt;br /&gt;
부산에 계엄령이 선포된 이튿날인 19일에 마산 시위가 확대됨에 따라 그 다음날인 10월 20일 정오, 정부가 '''마산 및 창원 지역에 위수령을 발령'''해 통행금지 시간이 연장되고, 경남대학 등에는 휴교조처가 취해졌으며, 24일에는 깡패를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132명을 검거, 23명을 구속했다. 이렇게 '''표면적으로는 부마민주항쟁이 단시간에 진압되는 듯 보였지만, 항쟁은 이미 유신체제의 균열을 불러오고 있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항쟁의 전개 과정에서 볼 수 있듯, 부마민주항쟁에서 특징적인 것은 먼저 시위대의 가장 큰 분노의 대상이 공화당사와 경찰·파출소였다는 점, 다음으로는 “부가가치세를 철폐하라”, “잘 먹고 잘 살아라”등의 구호에서 드러나듯이 세무서에 대한 공격, 그리고 신문사와 방송국에 대한 공격을 들 수 있다.&lt;br /&gt;
&lt;br /&gt;
부마민주항쟁은 1970년대 유신체제 밑에서 쌓였던 침묵하는 언론, 조세, 시민을 억압하는 경찰에 대한 불만 등 정치·사회·경제·문화·종교 등 각 부문에 걸친 여러 모순의 폭발이었고, 헌법 개정과 긴급조치로 겨우 유지되던 유신체제와 박정희 정권의 붕괴를 촉진시킨 결정적인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10.26사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또한 이 사건은 1980년 5월 18일의 광주 민주화운동과 1987년 6월 민주항쟁에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된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억눌린 우리 역사&amp;lt;/br&amp;gt;터져나온 분노&amp;lt;/br&amp;gt;매운 연기 칼바람에도&amp;lt;/br&amp;gt;함성소리 드높았던&amp;lt;/br&amp;gt;동트는 새벽벌&amp;lt;/br&amp;gt;시월이 오면&amp;lt;/br&amp;gt;핏발 선 가슴마다&amp;lt;/br&amp;gt;살아오는 십 일육&amp;lt;/br&amp;gt;동지여 전진하자&amp;lt;/br&amp;gt;깨치고 나가자&amp;lt;/br&amp;gt;뜨거운 가슴으로&amp;lt;/br&amp;gt;빛나는 내일로'''''&amp;lt;/br&amp;gt;&amp;lt;small&amp;gt;-'''부산대학교''' 새벽벌도서관 10.16 기념비&amp;lt;/small&amp;gt;&amp;lt;/div&amp;gt;&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호빵이👻]]: 부마항쟁 페이지 전체 작성&amp;lt;/br&amp;gt;&lt;br /&gt;
[[이나자키로빈]]: 부마항쟁 원인 중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 작성&lt;br /&gt;
&lt;br /&gt;
=='''5.18민주화운동'''==&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AMetwTuXYHTCXINqr7ZJpzO5CHFEMQO5-Uqau51RkXA&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원인===&lt;br /&gt;
====유신체제의 붕괴====&lt;br /&gt;
&lt;br /&gt;
[[파일:김재규.jpg|섬네일|오른쪽|암살 당시 상황을 재현하는 김재규]]&lt;br /&gt;
&lt;br /&gt;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amp;lt;small&amp;gt; - 김재규&amp;lt;/small&amp;gt;&lt;br /&gt;
1979년 10월 4일 신민당 총재 김영삼이 국회에서 의원직을 제명당하자 10월 15부터 10월 20까지 부산 · 마산 등지에서는 부마항쟁이 일어났고, 이의 해결을 둘러싼 노선대립으로 갈등 중 10월 26일 &amp;lt;ins&amp;gt;[[김재규]]&amp;lt;/ins&amp;gt;가 박정희를 살해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ins&amp;gt;[[10.26 사태]]&amp;lt;/ins&amp;gt;의 사후 수습과정에서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을 중심으로 신군부 세력이 부상하였으며, 이들은 &amp;lt;ins&amp;gt;[[12.12 사건]]&amp;lt;/ins&amp;gt;의 하극상을 통하여 군부를 장악하였다. 1980년 2월 29일 김대중 등이 복권되었으나 그 해 봄, 신군부는 최규하 과도 정부를 유명무실하게 하고 국민들이 요구하는 민주주의와 이를 위한 명확한 정치일정 제시를 거부하면서 권력기반을 구축하였다.&lt;br /&gt;
&lt;br /&gt;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lt;br /&gt;
한 시대의 대격변을 예고하는 단초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시작됐다. 1979년 8월 9일 오전, 신민당의 당사 4층 강당에서는 봉제업체인 YH무역주식회사의 여성노동자 200여명이 기업주의 폐업에 반발하여 폐업조치 철회 농성을 벌였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인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신민당이 당사 건물을 내준 것이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폭력을 동원하여 농성을 해산시켰다. 결국 이 사건은 노동 탄압 사건을 넘어선 야당에 대한 정치 탄압 사건으로 발전하였다.&lt;br /&gt;
&lt;br /&gt;
이날 경찰은 1000여명의 진압대원을 신민당사로 난입시켜 농성을 하고 있던 174명의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로 밖으로 끌어냈다. 또한 경찰은 총재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김영삼 총재와 당 간부들을 끌어내면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박정희 정권은 이 노동자 농성 사건을 빌미로 신민당 분열공작을 시도하였다. 유신정권과 비밀리에 결탁한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 3명이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 부총재 전원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접수시켰다. 그리고 법원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신민당 총재단의 직무 집행을 정지시키고 박정희 정권의 꼭두각시를 총재직무대행으로 선임하였다.&lt;br /&gt;
&lt;br /&gt;
아울러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의 동교동 자택을 전면 봉쇄하였고,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에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끊으라고 요구한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즈』 회견내용을 “반헌정적, 반민족적 작태”로 몰아서 국회에 징계 동의안을 제출했다. 10월 4일 오후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의원 159명은 여당 총회장에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제명 결의안을 '''기습적으로''' 처리해 버렸다.&lt;br /&gt;
&lt;br /&gt;
노사분규 사태로 시작된 사건이 제1야당 당수의 의원직 제명으로 확대된 정치적 사태를 지켜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유신체제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이 고조되었다. 또한 이 사건은 그동안 다소 주춤하던 대학가에 반유신 반독재 운동의 열기가 다시 확산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청춘을 바쳐, 학생 운동====&lt;br /&gt;
&lt;br /&gt;
[[파일:서울의_봄.JPG|섬네일|오른쪽|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앞에 모인 시위대]]&lt;br /&gt;
&lt;br /&gt;
군부의 재집권 야욕에 대한 국민적 저항은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표출되었다. 1980년 3월, 서울대 총학생회 출범을 시작으로 4월 초순에는 전국의 주요 대학들이 총학생회를 결성하기 시작하였다. 대학별로 독재 정권에 아부했던 어용교수와 족벌사학 퇴진 운동을 벌였고, 특히 병영집체훈련(당시 대학 신입생들은 의무적으로 군부대에 10일 간 입대하여 각종 군사훈련을 이수해야 했다.) 거부가 주요 이슈로 전면 등장했다. 각 대학의 병영집체훈련 거부운동이 본격화되고 전국적인 쟁점으로 떠오르자 신군부는 신문, 방송을 통해 ‘학생들의 안보의식 결여’를 비난하고 교내 시위·농성을 집중적으로 보도하게 했다.  5월 1일에 서울대가 입영훈련 거부투쟁 철회를 결정하고 ‘계엄령 해제’와 ‘유신잔당 퇴진’, ‘정부개헌중단’과 ‘노동 3권 보장’ 등을 요구하기 시작하면서 대학가는 이제까지의 학내 문제 중심의 운동에서 정치개혁을 위한 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그간 정부와 대학 간에 팽팽하게 유지되던 긴장 관계는 폭발 직전으로 내닫게 된 것이다.&lt;br /&gt;
&lt;br /&gt;
약 열흘 간의 대정부 투쟁을 준비한 대학가는 5월 10일 고려대 총학생회장실에서 열린 ‘총학생회장단 회의’에 참석한 전국 23개 대학 대표들은 ‘비상계엄의 즉각 해제’와 ‘전두환, 신현확 등 유신잔당 퇴진’ 등을 결의하고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정세에 대한 공동대처 방안을 마련했다. 이후 5월 13일부터 5월 14일에 걸쳐 서울 · 부산 · 대구 · 광주 등 37개 대학에서 계엄철폐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5월 15일에는 서울역에서 시위가 발생하는 등 학생시위는 서울시가지를 거의 마비시키는 등 야간까지 지속되어 사태가 절정에 달하면서 신군부 세력을 위협하였다. 5월 16일 24개 대학 학생대표들은 당분간 시국의 추이를 관망하기로 결정하고 가두시위를 중단하면서 소강상태에 돌입하는 듯하였다.&lt;br /&gt;
&lt;br /&gt;
====1980년 봄의 광주====&lt;br /&gt;
5월 17일 신군부 세력이 이전까지는 제주도를 제외한 지역에 한정되었던 비상계엄을 전국에 확대하는 조치인 계엄포고 10호(17일 24시에 발효: 각 대학 휴교령 포함)를 밤 9시 40분에 의결하고 밤 11시 40분에 발표하면서 밤 11시를 전후한 시점부터 김대중 · 김종필이 연행되는 등 권력형 부정축재자 및 소요조종 혐의자, 학생 시위 주동자가 체포되었다. 이날 밤 광주지역의 사회운동·학생운동의 지도자도 상당수가 검거되었다. 광주의 검거대상자는 전남대 12명, 조선대 10명 등 총 22명이었다. 전남에서 계엄합동수사단은 광주505보안대가 중심이고, 중앙정보부, 경찰 등이 보조역할을 했다. 전남 계엄합동수사단은 22대 차량과 86명의 인원이 출동해 정동년 등 복적생들과 대학의 총학생회 간부들을 집중 검거했다.&lt;br /&gt;
&lt;br /&gt;
한편 육군본부는 14일 오전 7시55분에 국가 중요 보안목표와 주요대학에 군 병력 배치 명령을 하달했다. 이 명령에 따라 전남북계엄분소장인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광주 시내 주요 시설물에 이날 오후부터 계엄병력을 배치했다. 31사단 96연대 병력이 광주시내 KBS건물에 42명, MBC 21명, CBS 11명, VOC(전일방송) 11명 등 주요 방송사 건물에 배치돼 경비에 들어간 것이다.&lt;br /&gt;
&lt;br /&gt;
이날 오후 전교사령관은 7공수여단의 광주배치에 따른 수송수단 지원도 미리 협의했다. 그리고 5월 8일부터 16일 사이에 공수부대 수뇌부들도 헬기를 타고 서울에서 내려와 광주 상무대의 전투병과교육사령부를 방문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광주에서 시위가 격화되면 즉각적으로 최정예 군부대를 동원해서 진압할 준비를 철저하게 갖추고 있었다. 5월 18일에 시작된 광주의 비극은 그 이전에 이미 시한폭탄처럼 준비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lt;br /&gt;
{{구글지도 | 위도=35.175961433346885 | 경도=126.90865311973532 | 줌=13 }}  [[파일:금남로.JPG|섬네일|오른쪽|금남로 앞에 집결한 버스와 시민군]]&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18일&amp;lt;/span&amp;gt;&lt;br /&gt;
휴교령이 내려질 경우 교문 앞에서 집결한다는 결의에 따라 학생들은 5월 18일 오전 전남대학교 앞에 모였다. 공수부대원들이 전남대 앞 시위를 저지하자 대학생들은 광주역에 재집결해서 시위를 이어갔다. 시위대가 점차 늘어나면서 공수부대원이 시내에서 시위진압에 나섰으며 18일 오후 1시부터 무차별 진압작전이 이루어져 부상자가 속출하였다.&lt;br /&gt;
&lt;br /&gt;
군인들이 금남로 등 시내 중심가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이나 여자를 마구 구타하고 짓밟으며 찌르는 등의 잔혹 행동을 하자 시민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이에 시위대는 오후 4시 이후 파출소 파괴 등 적극공세에 나섰다. '''계엄군의 과잉 무력진압은 시위를 해산시키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오히려 시민들을 단결시켰으며, 결국 19일 시민 · 학생 연대가 발생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lt;br /&gt;
&lt;br /&gt;
 '''''광주 애국 시민 여러분! 이것이 웬 말입니까? 웬 벼락이란 말입니까? 죄 없는 학생들을 총칼로 찔러 죽이고 몽둥이로 두들겨 트럭으로 실어가며 부녀자를 발가벗겨 총칼로 찌르는 놈들이 이 누구란 말입니까? 이제 우리가 살길은 전시민이 하나로 뭉쳐 청년 학생들을 보호하고 유신잔당과 극악무도한 살인마 전두환 일파와 공수 특전단 놈들을 한놈도 남김없이 쳐부수는 길 뿐입니다. 우리는 이제 다 보았습니다. 다 알게 되었읍니다. 왜 학생들이 그토록 소리 높이 외쳤는가를, 우리의 적은 경찰도 군대도 아닙니다. 우리의 적은 전국민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바로 유신잔당과 전두환 일파 그놈들입니다.''''' &amp;lt;small&amp;gt; - 1980년 5월 19일에 '광주시민민주투쟁회'명의의 호소문&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19일&amp;lt;/span&amp;gt;&lt;br /&gt;
19일 오전에는 일시적 소강상태였으나 오후 들어서 분노한 학생 · 시민들이 군 · 경찰과 공방전을 벌이면서 시위는 점차 격화되었다. '''시민들은 공포감에서 벗어나 자신의 생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단순한 학생시위에서 시민봉기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계엄군은 시위대를 포위하여 구타하였으며 일부 고등학생까지 포함된 시위대는 돌과 화염병으로 저항하였고 파출소와 방송국 등에 침입하였다. 뒤처진 공수부대를 공격하거나 고립된 차량을 포위하기도 하였으며 총과 방패를 빼앗기도 하였고, 오후 4시 50분 시민들에게 포위된 계엄군의 장갑차에서 최초의 발포가 있었다. 19일 밤비가 내리는 가운데 시위가 산발적으로 계속되었으며, 20일 오전 비가 그치고 대규모 시위는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오후부터 다시 시작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20일&amp;lt;/span&amp;gt;&lt;br /&gt;
'''20일 오후 6시부터 택시와 버스 운전 기사들이 광주역과 무등경기장에 모여 대형 버스와 트럭을 앞세우고 일시에 금남로에 집결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들을 앞세운 시위는 계엄군을 몰아내는 데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였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5.18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에 &amp;lt;ins&amp;gt;[[지대한 영향]]&amp;lt;/ins&amp;gt;을 끼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학생 운동에 뛰어든 많은 대학생들은 대학교에 들어와서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의 실상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아 학생 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군부정권은 5.18 이후로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다. 전두환은 김대중 등에게 '광주 사태'의 책임을 물어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했고,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 선언을 한 직후, 8월 27일 소위 체육관 선거를 통해 전두환은 대통령 자리를 탈취했다.&lt;br /&gt;
&lt;br /&gt;
지역적인 면에서는 '''광주광역시를 비롯한 전라도 지역의 트라우마'''로 작용해 이후의 민주정의당 및 &amp;lt;ins&amp;gt;[[3당 합당]]&amp;lt;/ins&amp;gt;으로 이어지는 보수 세력에 대해 적대심을 가지고, 민주당계 정당의 표밭이 되는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미 박정희 정부 시절부터 유무형의 정치적인 차별을 받고 있었지만 5.18의 참상은 전라도가 다시는 보수 세력을 지지하지 않게 만들 정도로 심각한 사건이며 호남소외론의 가장 결정적인 명분이 되었다.&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이나자키로빈]]: 5.18 민주화운동 페이지 전체 작성&lt;br /&gt;
&lt;br /&gt;
=='''6월민주항쟁'''==&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NnXWs5RMTIf-6DOEu9_rX2k4mgzUk1AQHYneCuwXN1Q&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원인===&lt;br /&gt;
====[[박종철고문치사사건]]====&lt;br /&gt;
&lt;br /&gt;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박종철은 1987년 1월 13일 자정 경 하숙집에서 치안본부(現 경찰청)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게 연행되었다.‘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이자 ‘민주화추진위원회’ 지도위원으로 수배 받고 있었던 박종운을 잡기위해 연행한 것이었다. 취조실로 연행해간 공안 당국은 박종철에게 박종운의 소재를 물었으나, 박종철은 순순히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경찰은 잔혹한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가하였고, 박종철은 끝내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했다. 당시 경찰은 초기 발표에서 고문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라고 사망원인을 발표하였으나, 시체부검 결과 전기고문과 물고문에 의한 살인인 것으로 밝혀졌다.&lt;br /&gt;
&lt;br /&gt;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저 죽음을 응시해주길 바란다. 저 죽음을 끝내 지켜주길 바란다. 저 죽음을 다시 죽이지 말아주길 바란다.''''' &amp;lt;small&amp;gt; - 동아일보 1987년 1월 17일자 김중배 칼럼 중&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사건 진상의 일부가 공개되자 2월 7일 전국 주요 도시에서 &amp;quot;박종철군 범국민추도식&amp;quot; 및 도심 시위가 열렸고 이어 3월 3일에는 &amp;quot;박종철군 49재와 고문추방 국민대행진&amp;quot;과 함께 또 다른 시위가 열렸다. 이후 4월 2일 서울대학교 학부모 130여 명이 ‘건국대학교 사태‘ 등 시국관련 구속학생의 징계철회를 요구하며 철야 농성을 벌였다.&lt;br /&gt;
&lt;br /&gt;
====정부의 개헌논의 유보====&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lt;br /&g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JazJFsgu4oc?si=sOE7w1tz-jKVztC9&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lt;br /&g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그러나 전두환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1987년 4월 13일 [[4.13호헌조치]]라 불리는 ‘대통령 특별담화‘를 발표, 개헌(改憲) 논의를 유보하겠다고 밝혔다. [[4.13호헌조치]]에서 전두환은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와 대통령 선거는 자유 경선의 분위기가 보장되는 가운데 1987년 내에 공정한 선거관리를 통해 차질 없이 실시할 수 있게 모든 노력을 다할것‘이라고 다짐했으며, 또 ‘민정당의 후임 대통령 후보는 조속한 시일 안에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인물 가운데서 당헌 절차와 민주 방식에 따라 전당대회에서 선출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호헌조치‘라는 그 이름대로 현행 헌법에 따라 권력을 이양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국민들의 큰 기대를 얻을 것이라 믿었으나, 기대는 커녕 오히려 반발을 가져오는 요인이 되고 말았다. 곧바로 이튿날인 4월 14일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 등 각계 인사들이, 호헌 조치를 비판하는 시국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정부 최루탄에 의한 [[이한열]] 사망====&lt;br /&gt;
[[파일:이한열.jpg|200px|섬네일|오른쪽|최루탄에 피격당한 후 이종창에게 부축받는 이한열]]&lt;br /&gt;
먼저 1987년 5월 27일 야당과 재야, 종교계 등이 힘을 모아 ‘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여당인 민주정의당에서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6월 10일에 맞춰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6 · 10국민대회]])’를 치르기로 결정하였다. 대학생들은 국본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를 중심으로 6 · 10국민대회에 호응하여 6월 초부터 각 대학별로 연일 집회와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6 · 10국민대회]] 하루 전날인 6월 9일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교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는 곧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학생들은 물론 시민들의 분노가 들끓었다. 이러한 분노 속에서 6 · 10국민대회가 열렸다. 경찰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6 · 10국민대회가 열리는 성공회대성당을 원천 봉쇄하였다. 그 결과 6 · 10국민대회는 대회장에 미리 들어가 있던 소수의 인원만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대회 예정 시간인 오후 6시 이전부터 서울 시내 곳곳에서 대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시민들도 다양한 방식으로 6 · 10국민대회와 학생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날 밤 늦게까지 시위를 벌이던 학생들은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이후 5일 동안 농성을 계속하였다. 애초 계획된 것은 아니었지만 대학생들의 명동성당 농성은 6 · 10국민대회가 단발성 행사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인 저항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lt;br /&gt;
&lt;br /&gt;
====민주항쟁 확산====&lt;br /&gt;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로 개헌하라!'''''   &amp;lt;small&amp;gt;-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제시한 슬로건&amp;lt;/small&amp;gt;&lt;br /&gt;
명동성당 농성을 거치며 항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유월항쟁의 전국화 과정에는 일정한 패턴이 존재하였다. 6월 10일 서울 외에도 전국 주요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위가 벌어졌지만, 15일까지 항쟁의 중심은 6 · 10국민대회와 명동성당 농성이 전개된 서울이었다. 하지만 6월 15일 경부터는 부산, 대전, 진주 등에서 격렬한 시위가 전개되었다. 그러다가 6월 20일부터 대규모 시위가 광주, 전주, 순천, 익산 등 호남 지방으로 옮겨졌다. 6 · 10국민대회 이후 약 20일 동안 전국 곳곳에서 매일 평균 100회 이상의 시위가 동시다발로 벌어졌다. 특히 6월 18일 ‘최루탄추방대회’와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은 전국 곳곳에서 한꺼번에 1백만 명 이상이 참여하였다. 갈수록 참가 지역이 전국 곳곳으로 확산되어 대도시, 중소도시뿐만 아니라 농촌 지역의 군 단위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6월 26일 하루에만 37~38개 시 · 군에서 시위가 동시에 벌어졌다. 유월항쟁에 참가한 연 인원은 400~500만 명으로 추산된다.&lt;br /&gt;
&lt;br /&gt;
반면 유월항쟁의 전국적 동시다발 시위는 경찰 병력을 분산시켰다. 분산된 경찰 병력으로는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거센 시위의 물결을 막아 낼 수 없었다. 경찰이 시위 진압에 최루탄을 남발하면서 최루탄도 점차 고갈되기 시작하였다. 유월항쟁 기간 동안 경찰이 사용한 최루탄만 총 67만 발이 넘었다. 더불어, 전두환 정권이 집권 내내 강조했던 88서울올림픽이 얼마 남지 않아 미국 등 국제사회의 이목이 집중된 상황에서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운동 때처럼 유혈 사태와 대량 학살을 반복하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무엇보다 군대를 동원하더라도 이러한 대규모 시민 항쟁을 진압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결국 경찰력으로 항쟁을 막기 힘들고, 군대 투입도 어렵다고 판단한 전두환 정권은 1987년 6월 29일 ‘ 6 · 29민주화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하였다. 그리고 그동안 의식불명 상태에 있었던 이한열이 7월 5일 끝내 사망하였다. 5일장 후 7월 9일 치러진 이한열의 노제에 100만 명의 인파가 모인 것을 끝으로 약 한 달 동안 지속된 유월항쟁은 마무리되었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1987년 6월항쟁이 '''대통령[[직선제]] 개헌'''이라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이 항쟁에 동참한 학생과 시민들의 요구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제시한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 개헌’이라는 슬로건으로 모아졌기 때문이었다. 유월항쟁은 이러한 민주화 세력의 통합성, 즉 각기 다른 성격과 지향을 가진 여러 주체들이 모두 동의할 수 있는 ‘최소 강령’하에 ‘최대 연합’으로 결집하였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딩잉잉]]:6월민주항쟁 페이지 전체 작성&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기밀문서]]&lt;br /&gt;
[[분류:4.19혁명관련]]&lt;br /&gt;
[[분류:부마항쟁관련]]&lt;br /&gt;
[[분류:5.18민주화운동관련]]&lt;br /&gt;
[[분류:6월민주항쟁관련]]&lt;br /&gt;
[[분류:뎐]]&lt;br /&gt;
[[분류:이나자키로빈]]&lt;br /&gt;
[[분류:호빵이👻]]&lt;br /&gt;
[[분류:•ᴗ•]]&lt;br /&gt;
[[분류:딩잉잉]]&lt;/div&gt;</summary>
		<author><name>딩잉잉</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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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파일:진압.png</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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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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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name>딩잉잉</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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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파일:시위대.png</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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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lt;/div&gt;</summary>
		<author><name>딩잉잉</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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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기밀문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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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1T16:11:0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딩잉잉: /* 컨텐츠 주제 */&lt;/p&gt;
&lt;hr /&gt;
&lt;div&gt;=='''컨텐츠 주제'''==&lt;br /&gt;
[[파일:이한열사진.jpeg|center]]&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amp;lt;big&amp;gt;'''&amp;lt;span style=&amp;quot;color:#CD0000&amp;quot;&amp;gt;투쟁의 불꽃, 자유의 환호&amp;lt;/span&amp;gt;'''&amp;lt;br/&amp;gt;&amp;lt;br/&amp;gt;&lt;br /&gt;
''대한민국은 시민들의 투쟁과 희생을 거쳐, 피와 땀으로 민주화를 이룩하였습니다.''&amp;lt;br/&amp;gt;&lt;br /&gt;
''그들은 어둠을 밝히기 위해 항거의 불꽃을 태웠고, 그 불꽃은 자유를 외쳤으며, 그 외침은 세상을 움직였습니다.''&amp;lt;br/&amp;gt;&lt;br /&gt;
''이 «기밀문서»에는 당신이 미처 몰랐던 그 때의 열기와 의지가 실려있습니다.''&amp;lt;br/&amp;gt;&lt;br /&gt;
''함께, 그 뜨거운 페이지를 열어보시겠습니까?''&amp;lt;/span&amp;gt;&amp;lt;/big&amp;gt;&amp;lt;/div&amp;gt;&lt;br /&gt;
&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이나자키로빈]]&lt;br /&gt;
[[딩잉잉]]&lt;br /&gt;
&lt;br /&gt;
=='''팀원'''==&lt;br /&gt;
*오현지(2022131143) [[뎐]]&amp;lt;br/&amp;gt;&lt;br /&gt;
*김여원(2023130209) [[이나자키로빈]]&amp;lt;br/&amp;gt;&lt;br /&gt;
*김하은(2022131345) [[호빵이👻]]&amp;lt;br/&amp;gt;&lt;br /&gt;
*박정원(2023130350) [[•ᴗ•]]&amp;lt;br/&amp;gt;&lt;br /&gt;
*최필중(2023130216) [[딩잉잉]]&amp;lt;br/&amp;gt;&lt;br /&gt;
&lt;br /&gt;
=='''기획의도'''==&lt;br /&gt;
===기획배경===&lt;br /&gt;
1945년 광복 이후 대한민국 국민들은 자유민주국가로서의 미래를 기대했으나 실상은 그러지 못했다.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보여주듯 현재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는 그것을 누리지 못한 앞선 세대들의 목숨을 바친 항쟁의 대가이다. 민주항쟁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의 핵심 동력이었다. 오늘날 우리나라 민주의식의 중요한 기둥이 되는 네 가지 항쟁을 선별하고 각 항쟁의 배경, 전개과정, 의의를 비롯해 세부적이고 자세한 내용에 대한 기사를 작성한다.&lt;br /&gt;
===기획목적===&lt;br /&gt;
작금의 현실까지 오기에는 수없이 많은 투쟁이 있었지만 4.19혁명, 부마항쟁, 5.18민주항쟁, 6월민주항쟁이라는 네 가지 사건을 살펴보기로 한 것은 가장 많이 다뤄지고, 가장 많이 알려진 사건이기 때문이다. 관련된 사건과 역사 인물들에 대해 자세히 적어 내어 민주항쟁의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지 않으면 알기 힘든 각 민주항쟁의 자세한 내막을 밝혀낸다.&lt;br /&gt;
===기대하는 바===&lt;br /&gt;
타임라인과 온톨로지를 활용해 내용의 전반적인 이해를 돕고 자세한 설명을 통해 사건의 자세한 내막을 들어낸다. 네 가지 항쟁을 각각 큰 목차로 설정하고 세부 기사를 그 내부에 작성해 독자의 관심과 수요에 부합하는 정보를 전달하는 데 효과적일 것으로 기대된다. 민주항쟁에 참여한 사람들의 희생과 투쟁에 대한 존경심을 부르고 역사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다.&lt;br /&gt;
===기여===&lt;br /&gt;
[[뎐]], [[이나자키로빈]], [[호빵이👻]]: 기획의도 페이지 작성&lt;br /&gt;
&lt;br /&gt;
=='''온톨로지'''==&lt;br /&gt;
{{NetworkGraph | title=민주항쟁.lst}}&lt;br /&gt;
[[민주항쟁.lst]]&lt;br /&gt;
===기여===&lt;br /&gt;
*[[뎐]]: 온톨로지 제작&lt;br /&gt;
=='''컨텐츠 구조'''==&lt;br /&gt;
===클래스(Class)===&lt;br /&gt;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color:white&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0%&amp;quot; | 클래스 !! style=&amp;quot;width:40%&amp;quot; | 설명 !! style=&amp;quot;45%&amp;quot; | 노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제||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대표 키워드인 민주항쟁을 주제로서 나타내었다 || 만주항쟁&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항쟁||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민주화운동 시기 발생했던 주요 운동들을 ‘항쟁’이라는 키워드로 분류하였다. || 4.19혁명, 부마항쟁, 5.18 민주화운동, 6월민주항쟁&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사건||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항쟁의 원인, 결과가 되는 사건을 정리하였다|| 3.15부정선거, 고려대 4.18학생시위, 3.15의거, YH사건, 10.26사태, 12.12 군사반란, 비상계엄령,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고문추방민족대행진, 4.13호헌조치, 6.29선언, 대통령직선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지역||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요 항쟁들이 일어났던 지역을 정리하였다|| 마산, 부산, 광주&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인물||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요사건들을 발생시킨 인물, 참여했던 인물을 묶어서 정리하였다|| 이승만, 이기붕, 김주열, 박정희, 김재규, 전두환, 신군부, 시민군, 박종철, 이한열, 노태우&lt;br /&gt;
|-&lt;br /&gt;
|}&lt;br /&gt;
===관계성(Relation)===&lt;br /&gt;
*&amp;lt;font color=#228B22&amp;gt;'''~은 ~에 속한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주요 항쟁들이 민주항쟁에 속함을 나타내거나 인물의 소속을 나타낸다.&lt;br /&gt;
***해당노드:&lt;br /&gt;
***#4.19혁명 -&amp;gt; 민주항쟁&lt;br /&gt;
***#부마항쟁 -&amp;gt; 민주항쟁&lt;br /&gt;
***#5.18민주화운동 -&amp;gt; 민주항쟁&lt;br /&gt;
***#6월 민주항쟁 -&amp;gt; 민주항쟁&lt;br /&gt;
***#전두환 -&amp;gt; 신군부&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의 원인이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어떠한 사건과 인과관계를 이루는 또다른 사건 혹은 인물을 설명한다.&lt;br /&gt;
***#이기붕 -&amp;gt; 3.15부정선거&lt;br /&gt;
***#김주열 -&amp;gt; 고려대 4.18학생시위&lt;br /&gt;
***#고려대 4.18학생시위 -&amp;gt; 4.19혁명&lt;br /&gt;
***#3.15의거 -&amp;gt; 4.19혁명&lt;br /&gt;
***#김주열 -&amp;gt; 4.19혁명&lt;br /&gt;
***#3.15부정선거 -&amp;gt; 3.15의거&lt;br /&gt;
***#YH사건 -&amp;gt; 부마항쟁&lt;br /&gt;
***#부마항쟁 -&amp;gt; 10.26사태&lt;br /&gt;
***#박정희 -&amp;gt; 10.26사태&lt;br /&gt;
***#비상계엄령 -&amp;gt; 5.18민주화운동&lt;br /&gt;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 -&amp;gt; 고문추방민족대행진&lt;br /&gt;
***#고문추방민족대행진 -&amp;gt; 4.13호헌조치&lt;br /&gt;
***#4.13호헌조치 -&amp;gt; 6월민주항쟁&lt;br /&gt;
***#6월민주항쟁 -&amp;gt; 6.29선언&lt;br /&gt;
***#6월민주항쟁 -&amp;gt; 대통령직선제&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을 발생시켰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사건과 그 사건을 직접적으로 발생시킨 인물을 연결한다.&lt;br /&gt;
***#이승만 -&amp;gt; 3.15부정선거&lt;br /&gt;
***#김재규 -&amp;gt; 10.26사태&lt;br /&gt;
***#신군부 -&amp;gt; 1212군사반란&lt;br /&gt;
***#전두환 -&amp;gt; 비상계엄령&lt;br /&gt;
***#노태우 -&amp;gt; 6.29선언&lt;br /&gt;
***#시민군 -&amp;gt; 5.18민주화운동&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에 희생되었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민주항쟁의 진압과정 등 에서 희생된 인물을 설명한다&lt;br /&gt;
***#김주열 -&amp;gt; 3.15의거&lt;br /&gt;
***#이한열 -&amp;gt; 6월 민주항쟁&lt;br /&gt;
***#박종철&amp;gt;박종철 고문치사 사건&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에서 발생했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설명한다.&lt;br /&gt;
***#3.15의거 -&amp;gt; 마산&lt;br /&gt;
***#부마항쟁 -&amp;gt; 부산&lt;br /&gt;
***#부마항쟁 -&amp;gt; 마산&lt;br /&gt;
***#5.18민주화운동 -&amp;gt; 광주&lt;br /&gt;
===기여===&lt;br /&gt;
*[[뎐]]: 컨텐츠 구조 페이지 작성&lt;br /&gt;
=='''4.19혁명'''==&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VPp4BmfDSv8VA2-oC-VATHzUYgadaiaQ9AlWXYiaiVk&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원인===&lt;br /&gt;
====[[3.15 부정선거]]====&lt;br /&gt;
[[파일:3.15부정선거_개표_모습.png|300픽셀|섬네일|오른쪽|3.15부정선거 당시 개표하는 사진&amp;lt;ref&amp;gt;사진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amp;lt;/ref&amp;gt;]]&lt;br /&gt;
1959년 대한민국은 제 4대 대통령 선거와 제 5대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당시 자유당에서는 12년째 대통령으로서 연임 중이던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이기붕]]'''을 부통령 후보로 선임하였다. 그러나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병세의 악화로 사망하게 되고,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은 확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선거의 초점은 자유당의 조병옥과 민주당의 장면 간의 선거전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본격적인 선거유세의 시작과 함께 정부와 여당의 잇따른 야당선거운동 방해사건으로 부정선거가 시작되었다. 1960년 3월 15일 선거가 시작된 이후에도 다양한 방법의 부정행위가 일어났고, 개표 결과 이승만과 이기붕의 득표가 100%에 육박하는 결과로 나오자 자유당은 득표수를 하향 조정해 최종 집계에 반영할 것을 지시했다. 결국 이승만 88.7%, 이기붕 79%의 득표율을 가지며 정, 부통령에 당선되었다.&amp;lt;ref&amp;gt;자세한 내용은 3.15부정선거 페이지 참조&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부정선거 반대시위, [[3.15 의거]]의 발생====&lt;br /&gt;
3.15 부정선거를 반대하는 시위는 초기에는 중, 고등학생들의 산발적인 시위로 전개되었다. 3월 15일 선거일 밤 경남 마산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으며,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여 1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amp;lt;br/&amp;gt;&lt;br /&gt;
3월 15일 실종되었던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4월 11일 마산부두에서 발견되자 마산 시민들은 시청, 파출소 등을 파괴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2차 시위가 일어난 것이다.&lt;br /&gt;
&lt;br /&gt;
====[[고려대학교 4.18 학생시위]]의 발생====&lt;br /&gt;
1, 2차 마산시위를 계기로 부정선거 무효와 이승만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났다. 이들은 '4.18 선언문'을 낭독하고 시내로 진출하였다. 이는 4월 19일 학생들과 일반 시민들이 가세한 대규모 시위로 이어지게 되었다.&lt;br /&gt;
====전국적인 4.19 혁명의 발생====&lt;br /&gt;
분노한 전국의 시민과 학생들이 다음 날인 4월 19일에 '이승만 하야와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며 대규모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경찰은 또다시 무차별 발포에 나섰고,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지만 이러한 압박에도 시민들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lt;br /&gt;
====이승만 대통령의 혼란 수습 시도====&lt;br /&gt;
이승만 대통령은 4.19 시위로 인한 정국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4월 20일 국무위원 전원과 자유당 당무위원 전원의 사표를 제출하도록 지시하였으며, 4월 23일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외무장관에 허정, 내무장관에 이호, 법무장관에 권승렬을 임명하는 등 개각을 단행하였다.&amp;lt;br/&amp;gt;&lt;br /&gt;
그러나 미국은 4.19직후 국무부 성명을 통해 한국에서 발생한 사태는 부정선거에 대한 '군중의 불만'을 반영한 것 이라고 했고, 양유찬 주미대사를 불러 '부정선거에 대한 철저한 조사', '경향신문 복간', '국가보안법 개정' 등을 촉구하는 각서를 전달하였다.&amp;lt;br/&amp;gt;&lt;br /&gt;
그리고 4월 25일, 이승만 정권에 분노한 전국 27개 대학 258명의 교수가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 모여 14개항의 시국 선언문을 발표하며 학생, 시민들과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들은 3.15 부정선거 및 4.19 사태의 책임을 지고 대통령이 물러날 것을 주장하였으며, &amp;quot;학생들의 피에 보답하자&amp;quot;는 플랜 카드를 앞세워 국회의사당까지 행진하였다. &lt;br /&gt;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lt;br /&gt;
무력 진압에도 대규모 시위가 이어지며 시민들은 완강하게 투쟁하였다. 4월 26일 시위대가 경무대로 다시 집결하는 등 사태가 심각하게 진행되자, 오전 10시 30분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 성명을 발표하였다. 4월 27일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하며 대통령직을 하야하고 하와이로 망명하였으며 자유당 정권도 끝나게 된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우리 국민들, 특히 학생과 청년들의 주도로 이루어진 4.19 혁명은 학생과 일반 대중이 단결하여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아시아 최초의 시건이다. 4.19혁명은 부마항쟁, 5.18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그리고 2017년 촛불시위에 이르기 까지 정권에 대항하는 국민들이 단합을 이루는 초석이 되었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도 시민 저항권에 대한 근거로써 4.19혁명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문구가 있다.&lt;br /&gt;
===기여===&lt;br /&gt;
[[뎐]]: 4.19혁명 페이지 원인, 의의 작성 &lt;br /&gt;
&lt;br /&gt;
[[•ᴗ•]]: 4.19혁명 페이지 전개 작성&lt;br /&gt;
&lt;br /&gt;
=='''부마항쟁'''==&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bK7zjpPvBsC7rFRPmsiHCUYhyWt2VXOv8SYyaBTND4Y&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원인===&lt;br /&gt;
====[[유신 헌법]]과 [[긴급조치]]====&lt;br /&gt;
1971년 선거에서 김대중을 누르고 대통령에 3선된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해 국회 해산,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등 법의 일부 기능을 정지시키고 전국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했다.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된 이른바 유신헌법에 의해 제정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법」 에 의거해 박정희가 제8대 대통령으로 재차 당선되었고, 이 유신 헌법이 발효된 기간을 유신 체제라고 부른다. 유신 체제는 행정, 입법, 사법의 3권을 모두 쥔 대통령이 종신 집권할 수 있도록 설계된 1인 대통령제였다. 박정희는 유신 헌법에 의거해 대통령의 권한으로 취할 수 있었던 특별조치인 긴급조치를 선포함으로써 헌법에 반대하는 시위 및 운동과 방송, 언론 활동을 하는 반정부 인사들을 연행, 체포, 고문하는 등 억압을 가했다.&lt;br /&gt;
&lt;br /&gt;
====한국경제의 위기====&lt;br /&gt;
1970년대 말 한국경제는''' [[오일쇼크]]'''라는 세계경제의 위기와 결합해 가라앉고 말았다. 경제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정부는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과 함께 '''[[경제안정화정책]]'''을 수용했고, 중소자본가, 봉급생활자, 도시 노동자와 농민 등에 안정화 비용을 부과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이와 같은 안정화 정책은 경제위기로 어려운 처지에 있던 중소기업들의 도산을 가속하여 기업 부도율이 치솟고 하층민들을 더 깊은 고통에 몰아넣었다. 특히 '''부가가치세'''를 도입한 이후 물가가 상승하면서 일상에 타격을 주었으며, 노동집약적 제조업이 집중되었던 부산과 마산에서는 상황이 더욱 심각하여 1979년 부산 지역 부도율은 서울의 3배에 달했다.&lt;br /&gt;
&lt;br /&gt;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lt;br /&gt;
한 시대의 대격변을 예고하는 단초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시작됐다. 1979년 8월 9일 오전, 신민당의 당사 4층 강당에서는 봉제업체인 YH무역주식회사의 여성노동자 200여명이 기업주의 폐업에 반발하여 폐업조치 철회 농성을 벌였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인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신민당이 당사 건물을 내준 것이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폭력을 동원하여 농성을 해산시켰다. 결국 이 사건은 노동 탄압 사건을 넘어선 야당에 대한 정치 탄압 사건으로 발전하였다.&lt;br /&gt;
&lt;br /&gt;
이날 경찰은 1000여명의 진압대원을 신민당사로 난입시켜 농성을 하고 있던 174명의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로 밖으로 끌어냈다. 또한 경찰은 총재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김영삼 총재와 당 간부들을 끌어내면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박정희 정권은 이 노동자 농성 사건을 빌미로 신민당 분열공작을 시도하였다. 유신정권과 비밀리에 결탁한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 3명이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 부총재 전원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접수시켰다. 그리고 법원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신민당 총재단의 직무 집행을 정지시키고 박정희 정권의 꼭두각시를 총재직무대행으로 선임하였다.&lt;br /&gt;
&lt;br /&gt;
아울러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의 동교동 자택을 전면 봉쇄하였고,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에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끊으라고 요구한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즈』 회견내용을 “반헌정적, 반민족적 작태”로 몰아서 국회에 징계 동의안을 제출했다. 10월 4일 오후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의원 159명은 여당 총회장에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제명 결의안을 '''기습적으로''' 처리해 버렸다. 노사분규 사태로 시작된 사건이 제1야당 당수의 의원직 제명으로 확대된 정치적 사태를 지켜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유신체제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이 고조되었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유신 철폐, 독재 타도!'''''   &amp;lt;small&amp;gt;-10.16 부마항쟁 당시 시위대의 구호&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부산대학교 민주선언문, 학생 시위에서 시민항쟁으로====&lt;br /&gt;
[[파일:부산시위대.jpg|250px|섬네일|오른쪽|광복동을 지나는 시위 행렬]]&lt;br /&gt;
1979년 10월 16일 아침 10시 부산대학교 구내 도서관 앞에서 약 500명의 학생들이 모여 “유신정권 물러가라”, “정치탄압 중지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반정부 시위를 벌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민주선언문」]]'''을 통해 민주화, 언론 자유, 인권 보장의 신념을 확인하고, “제도화된 폭력성과 조직적 악의 근원인 유신헌법과 독재집권층의 퇴진만이 5천 만 겨레의 통일의 첫걸음이라고 주장하면서 형제의 피를 요구하는 자유와 민주의 깃발을 우리가 잡고 반민주의 무리, 불의의 무리들을 향해 외치며 나아가자”라고 선언하였다. 이후 학생들은 교문을 나가 거리에서 시위했다. 이때 학생 수는 약 5,000명으로 불어나 있었고, 광복동과 남포동 등 부산시내 중심가까지 진출해 애국가 등의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며, 이를 제지하려는 경찰과 이곳저곳에서 충돌하였다. 비슷한 시간, 부산 동아대학교에서도 1,000여 명의 학생이 부산대학교 학생과 합류하여 가두시위를 벌였다. 부산대학교 데모로 학생 수백 명이 연행되고 100여 명이 다쳤지만 이튿날인 10월 17일에는 시위가 더욱 격화되어 학생들뿐만 아니라 다수의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학생 시위는 점차 시민항쟁의 양상을 띠어갔다.''' 밤늦게까지 계속된 시위에서 시민들은 충무파출소, 한국방송공사, 서구청, 부산세무서 등을 파괴하였고, 경찰차량을 불태우거나 파손시켰다.&lt;br /&gt;
&lt;br /&gt;
====마산의 시민항쟁====&lt;br /&gt;
&lt;br /&gt;
민주항쟁은 18일에 마산으로 확산되었다. 늦은 오후에는 1,000여 명의 경남대학교 학생들이 마산 시내 번화가에 산발적으로 집결했으며, 일부시민들도 가담해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어두워진 다음 학생과 시민들의 데모는 격화되어 파출소, 공화당사, 방송국, 신문사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파괴하였다. 이튿날인 19일에는 시위가 더욱 치열해져 마산 시내는 한때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저녁 8시경, 시위대는 경남대학과 마산대학&amp;lt;ref&amp;gt;1985년 창원대학으로 교명이 변경되었으며, 현재의 마산대학교와 다르다.&amp;lt;/ref&amp;gt;, 그리고 고등학생까지 합세하여 약 8,000명에 이르렀으며, 시내 곳곳에서 몽둥이를 들고 동사무소와 파출소로 몰려가 시설을 파괴하였고, 경찰차량에 불을 질렀다.&lt;br /&gt;
&lt;br /&gt;
====부산 계엄령, 마산 위수령====&lt;br /&gt;
[[파일:계엄포고문.jpg|270px|섬네일|왼쪽|부산지역에 내려진 계엄포고문을 읽고 있는 시민들]]&lt;br /&gt;
부산대학교 시위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박정희 정부는 학생 시위로 시작된 시위가 대규모 시민항쟁으로 사태가 심상치 않게 확대되어가자 강경책으로 대응했다. 정부는 18일 자정을 기해 '''부산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동원한 과격한 진압'''을 통해 시위 참여자들과 이를 방조한 일반 시민들까지 1,058명을 연행하고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으며, 부산지구 계엄사령부는 각 대학 휴교조처와 야간통행금지시간을 2시간 연장하는 등의 항이 담긴 포고문을 발표했다.&lt;br /&gt;
&lt;br /&gt;
부산에 계엄령이 선포된 이튿날인 19일에 마산 시위가 확대됨에 따라 그 다음날인 10월 20일 정오, 정부가 '''마산 및 창원 지역에 위수령을 발령'''해 통행금지 시간이 연장되고, 경남대학 등에는 휴교조처가 취해졌으며, 24일에는 깡패를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132명을 검거, 23명을 구속했다. 이렇게 '''표면적으로는 부마민주항쟁이 단시간에 진압되는 듯 보였지만, 항쟁은 이미 유신체제의 균열을 불러오고 있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항쟁의 전개 과정에서 볼 수 있듯, 부마민주항쟁에서 특징적인 것은 먼저 시위대의 가장 큰 분노의 대상이 공화당사와 경찰·파출소였다는 점, 다음으로는 “부가가치세를 철폐하라”, “잘 먹고 잘 살아라”등의 구호에서 드러나듯이 세무서에 대한 공격, 그리고 신문사와 방송국에 대한 공격을 들 수 있다.&lt;br /&gt;
&lt;br /&gt;
부마민주항쟁은 1970년대 유신체제 밑에서 쌓였던 침묵하는 언론, 조세, 시민을 억압하는 경찰에 대한 불만 등 정치·사회·경제·문화·종교 등 각 부문에 걸친 여러 모순의 폭발이었고, 헌법 개정과 긴급조치로 겨우 유지되던 유신체제와 박정희 정권의 붕괴를 촉진시킨 결정적인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10.26사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또한 이 사건은 1980년 5월 18일의 광주 민주화운동과 1987년 6월 민주항쟁에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된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억눌린 우리 역사&amp;lt;/br&amp;gt;터져나온 분노&amp;lt;/br&amp;gt;매운 연기 칼바람에도&amp;lt;/br&amp;gt;함성소리 드높았던&amp;lt;/br&amp;gt;동트는 새벽벌&amp;lt;/br&amp;gt;시월이 오면&amp;lt;/br&amp;gt;핏발 선 가슴마다&amp;lt;/br&amp;gt;살아오는 십 일육&amp;lt;/br&amp;gt;동지여 전진하자&amp;lt;/br&amp;gt;깨치고 나가자&amp;lt;/br&amp;gt;뜨거운 가슴으로&amp;lt;/br&amp;gt;빛나는 내일로'''''&amp;lt;/br&amp;gt;&amp;lt;small&amp;gt;-'''부산대학교''' 새벽벌도서관 10.16 기념비&amp;lt;/small&amp;gt;&amp;lt;/div&amp;gt;&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호빵이👻]]: 부마항쟁 페이지 전체 작성&amp;lt;/br&amp;gt;&lt;br /&gt;
[[이나자키로빈]]: 부마항쟁 원인 중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 작성&lt;br /&gt;
&lt;br /&gt;
=='''5.18민주화운동'''==&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AMetwTuXYHTCXINqr7ZJpzO5CHFEMQO5-Uqau51RkXA&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원인===&lt;br /&gt;
====유신체제의 붕괴====&lt;br /&gt;
&lt;br /&gt;
[[파일:김재규.jpg|섬네일|오른쪽|암살 당시 상황을 재현하는 김재규]]&lt;br /&gt;
&lt;br /&gt;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amp;lt;small&amp;gt; - 김재규&amp;lt;/small&amp;gt;&lt;br /&gt;
1979년 10월 4일 신민당 총재 김영삼이 국회에서 의원직을 제명당하자 10월 15부터 10월 20까지 부산 · 마산 등지에서는 부마항쟁이 일어났고, 이의 해결을 둘러싼 노선대립으로 갈등 중 10월 26일 &amp;lt;ins&amp;gt;[[김재규]]&amp;lt;/ins&amp;gt;가 박정희를 살해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ins&amp;gt;[[10.26 사태]]&amp;lt;/ins&amp;gt;의 사후 수습과정에서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을 중심으로 신군부 세력이 부상하였으며, 이들은 &amp;lt;ins&amp;gt;[[12.12 사건]]&amp;lt;/ins&amp;gt;의 하극상을 통하여 군부를 장악하였다. 1980년 2월 29일 김대중 등이 복권되었으나 그 해 봄, 신군부는 최규하 과도 정부를 유명무실하게 하고 국민들이 요구하는 민주주의와 이를 위한 명확한 정치일정 제시를 거부하면서 권력기반을 구축하였다.&lt;br /&gt;
&lt;br /&gt;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lt;br /&gt;
한 시대의 대격변을 예고하는 단초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시작됐다. 1979년 8월 9일 오전, 신민당의 당사 4층 강당에서는 봉제업체인 YH무역주식회사의 여성노동자 200여명이 기업주의 폐업에 반발하여 폐업조치 철회 농성을 벌였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인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신민당이 당사 건물을 내준 것이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폭력을 동원하여 농성을 해산시켰다. 결국 이 사건은 노동 탄압 사건을 넘어선 야당에 대한 정치 탄압 사건으로 발전하였다.&lt;br /&gt;
&lt;br /&gt;
이날 경찰은 1000여명의 진압대원을 신민당사로 난입시켜 농성을 하고 있던 174명의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로 밖으로 끌어냈다. 또한 경찰은 총재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김영삼 총재와 당 간부들을 끌어내면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박정희 정권은 이 노동자 농성 사건을 빌미로 신민당 분열공작을 시도하였다. 유신정권과 비밀리에 결탁한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 3명이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 부총재 전원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접수시켰다. 그리고 법원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신민당 총재단의 직무 집행을 정지시키고 박정희 정권의 꼭두각시를 총재직무대행으로 선임하였다.&lt;br /&gt;
&lt;br /&gt;
아울러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의 동교동 자택을 전면 봉쇄하였고,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에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끊으라고 요구한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즈』 회견내용을 “반헌정적, 반민족적 작태”로 몰아서 국회에 징계 동의안을 제출했다. 10월 4일 오후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의원 159명은 여당 총회장에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제명 결의안을 '''기습적으로''' 처리해 버렸다.&lt;br /&gt;
&lt;br /&gt;
노사분규 사태로 시작된 사건이 제1야당 당수의 의원직 제명으로 확대된 정치적 사태를 지켜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유신체제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이 고조되었다. 또한 이 사건은 그동안 다소 주춤하던 대학가에 반유신 반독재 운동의 열기가 다시 확산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청춘을 바쳐, 학생 운동====&lt;br /&gt;
&lt;br /&gt;
[[파일:서울의_봄.JPG|섬네일|오른쪽|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앞에 모인 시위대]]&lt;br /&gt;
&lt;br /&gt;
군부의 재집권 야욕에 대한 국민적 저항은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표출되었다. 1980년 3월, 서울대 총학생회 출범을 시작으로 4월 초순에는 전국의 주요 대학들이 총학생회를 결성하기 시작하였다. 대학별로 독재 정권에 아부했던 어용교수와 족벌사학 퇴진 운동을 벌였고, 특히 병영집체훈련(당시 대학 신입생들은 의무적으로 군부대에 10일 간 입대하여 각종 군사훈련을 이수해야 했다.) 거부가 주요 이슈로 전면 등장했다. 각 대학의 병영집체훈련 거부운동이 본격화되고 전국적인 쟁점으로 떠오르자 신군부는 신문, 방송을 통해 ‘학생들의 안보의식 결여’를 비난하고 교내 시위·농성을 집중적으로 보도하게 했다.  5월 1일에 서울대가 입영훈련 거부투쟁 철회를 결정하고 ‘계엄령 해제’와 ‘유신잔당 퇴진’, ‘정부개헌중단’과 ‘노동 3권 보장’ 등을 요구하기 시작하면서 대학가는 이제까지의 학내 문제 중심의 운동에서 정치개혁을 위한 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그간 정부와 대학 간에 팽팽하게 유지되던 긴장 관계는 폭발 직전으로 내닫게 된 것이다.&lt;br /&gt;
&lt;br /&gt;
약 열흘 간의 대정부 투쟁을 준비한 대학가는 5월 10일 고려대 총학생회장실에서 열린 ‘총학생회장단 회의’에 참석한 전국 23개 대학 대표들은 ‘비상계엄의 즉각 해제’와 ‘전두환, 신현확 등 유신잔당 퇴진’ 등을 결의하고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정세에 대한 공동대처 방안을 마련했다. 이후 5월 13일부터 5월 14일에 걸쳐 서울 · 부산 · 대구 · 광주 등 37개 대학에서 계엄철폐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5월 15일에는 서울역에서 시위가 발생하는 등 학생시위는 서울시가지를 거의 마비시키는 등 야간까지 지속되어 사태가 절정에 달하면서 신군부 세력을 위협하였다. 5월 16일 24개 대학 학생대표들은 당분간 시국의 추이를 관망하기로 결정하고 가두시위를 중단하면서 소강상태에 돌입하는 듯하였다.&lt;br /&gt;
&lt;br /&gt;
====1980년 봄의 광주====&lt;br /&gt;
5월 17일 신군부 세력이 이전까지는 제주도를 제외한 지역에 한정되었던 비상계엄을 전국에 확대하는 조치인 계엄포고 10호(17일 24시에 발효: 각 대학 휴교령 포함)를 밤 9시 40분에 의결하고 밤 11시 40분에 발표하면서 밤 11시를 전후한 시점부터 김대중 · 김종필이 연행되는 등 권력형 부정축재자 및 소요조종 혐의자, 학생 시위 주동자가 체포되었다. 이날 밤 광주지역의 사회운동·학생운동의 지도자도 상당수가 검거되었다. 광주의 검거대상자는 전남대 12명, 조선대 10명 등 총 22명이었다. 전남에서 계엄합동수사단은 광주505보안대가 중심이고, 중앙정보부, 경찰 등이 보조역할을 했다. 전남 계엄합동수사단은 22대 차량과 86명의 인원이 출동해 정동년 등 복적생들과 대학의 총학생회 간부들을 집중 검거했다.&lt;br /&gt;
&lt;br /&gt;
한편 육군본부는 14일 오전 7시55분에 국가 중요 보안목표와 주요대학에 군 병력 배치 명령을 하달했다. 이 명령에 따라 전남북계엄분소장인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광주 시내 주요 시설물에 이날 오후부터 계엄병력을 배치했다. 31사단 96연대 병력이 광주시내 KBS건물에 42명, MBC 21명, CBS 11명, VOC(전일방송) 11명 등 주요 방송사 건물에 배치돼 경비에 들어간 것이다.&lt;br /&gt;
&lt;br /&gt;
이날 오후 전교사령관은 7공수여단의 광주배치에 따른 수송수단 지원도 미리 협의했다. 그리고 5월 8일부터 16일 사이에 공수부대 수뇌부들도 헬기를 타고 서울에서 내려와 광주 상무대의 전투병과교육사령부를 방문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광주에서 시위가 격화되면 즉각적으로 최정예 군부대를 동원해서 진압할 준비를 철저하게 갖추고 있었다. 5월 18일에 시작된 광주의 비극은 그 이전에 이미 시한폭탄처럼 준비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lt;br /&gt;
{{구글지도 | 위도=35.175961433346885 | 경도=126.90865311973532 | 줌=13 }}  [[파일:금남로.JPG|섬네일|오른쪽|금남로 앞에 집결한 버스와 시민군]]&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18일&amp;lt;/span&amp;gt;&lt;br /&gt;
휴교령이 내려질 경우 교문 앞에서 집결한다는 결의에 따라 학생들은 5월 18일 오전 전남대학교 앞에 모였다. 공수부대원들이 전남대 앞 시위를 저지하자 대학생들은 광주역에 재집결해서 시위를 이어갔다. 시위대가 점차 늘어나면서 공수부대원이 시내에서 시위진압에 나섰으며 18일 오후 1시부터 무차별 진압작전이 이루어져 부상자가 속출하였다.&lt;br /&gt;
&lt;br /&gt;
군인들이 금남로 등 시내 중심가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이나 여자를 마구 구타하고 짓밟으며 찌르는 등의 잔혹 행동을 하자 시민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이에 시위대는 오후 4시 이후 파출소 파괴 등 적극공세에 나섰다. '''계엄군의 과잉 무력진압은 시위를 해산시키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오히려 시민들을 단결시켰으며, 결국 19일 시민 · 학생 연대가 발생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lt;br /&gt;
&lt;br /&gt;
 '''''광주 애국 시민 여러분! 이것이 웬 말입니까? 웬 벼락이란 말입니까? 죄 없는 학생들을 총칼로 찔러 죽이고 몽둥이로 두들겨 트럭으로 실어가며 부녀자를 발가벗겨 총칼로 찌르는 놈들이 이 누구란 말입니까? 이제 우리가 살길은 전시민이 하나로 뭉쳐 청년 학생들을 보호하고 유신잔당과 극악무도한 살인마 전두환 일파와 공수 특전단 놈들을 한놈도 남김없이 쳐부수는 길 뿐입니다. 우리는 이제 다 보았습니다. 다 알게 되었읍니다. 왜 학생들이 그토록 소리 높이 외쳤는가를, 우리의 적은 경찰도 군대도 아닙니다. 우리의 적은 전국민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바로 유신잔당과 전두환 일파 그놈들입니다.''''' &amp;lt;small&amp;gt; - 1980년 5월 19일에 '광주시민민주투쟁회'명의의 호소문&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19일&amp;lt;/span&amp;gt;&lt;br /&gt;
19일 오전에는 일시적 소강상태였으나 오후 들어서 분노한 학생 · 시민들이 군 · 경찰과 공방전을 벌이면서 시위는 점차 격화되었다. '''시민들은 공포감에서 벗어나 자신의 생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단순한 학생시위에서 시민봉기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계엄군은 시위대를 포위하여 구타하였으며 일부 고등학생까지 포함된 시위대는 돌과 화염병으로 저항하였고 파출소와 방송국 등에 침입하였다. 뒤처진 공수부대를 공격하거나 고립된 차량을 포위하기도 하였으며 총과 방패를 빼앗기도 하였고, 오후 4시 50분 시민들에게 포위된 계엄군의 장갑차에서 최초의 발포가 있었다. 19일 밤비가 내리는 가운데 시위가 산발적으로 계속되었으며, 20일 오전 비가 그치고 대규모 시위는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오후부터 다시 시작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20일&amp;lt;/span&amp;gt;&lt;br /&gt;
'''20일 오후 6시부터 택시와 버스 운전 기사들이 광주역과 무등경기장에 모여 대형 버스와 트럭을 앞세우고 일시에 금남로에 집결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들을 앞세운 시위는 계엄군을 몰아내는 데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였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5.18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에 &amp;lt;ins&amp;gt;[[지대한 영향]]&amp;lt;/ins&amp;gt;을 끼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학생 운동에 뛰어든 많은 대학생들은 대학교에 들어와서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의 실상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아 학생 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군부정권은 5.18 이후로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다. 전두환은 김대중 등에게 '광주 사태'의 책임을 물어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했고,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 선언을 한 직후, 8월 27일 소위 체육관 선거를 통해 전두환은 대통령 자리를 탈취했다.&lt;br /&gt;
&lt;br /&gt;
지역적인 면에서는 '''광주광역시를 비롯한 전라도 지역의 트라우마'''로 작용해 이후의 민주정의당 및 &amp;lt;ins&amp;gt;[[3당 합당]]&amp;lt;/ins&amp;gt;으로 이어지는 보수 세력에 대해 적대심을 가지고, 민주당계 정당의 표밭이 되는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미 박정희 정부 시절부터 유무형의 정치적인 차별을 받고 있었지만 5.18의 참상은 전라도가 다시는 보수 세력을 지지하지 않게 만들 정도로 심각한 사건이며 호남소외론의 가장 결정적인 명분이 되었다.&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이나자키로빈]]: 5.18 민주화운동 페이지 전체 작성&lt;br /&gt;
&lt;br /&gt;
=='''6월민주항쟁'''==&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NnXWs5RMTIf-6DOEu9_rX2k4mgzUk1AQHYneCuwXN1Q&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원인===&lt;br /&gt;
====[[박종철고문치사사건]]====&lt;br /&gt;
&lt;br /&gt;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박종철은 1987년 1월 13일 자정 경 하숙집에서 치안본부(現 경찰청)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게 연행되었다.‘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이자 ‘민주화추진위원회’ 지도위원으로 수배 받고 있었던 박종운을 잡기위해 연행한 것이었다. 취조실로 연행해간 공안 당국은 박종철에게 박종운의 소재를 물었으나, 박종철은 순순히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경찰은 잔혹한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가하였고, 박종철은 끝내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했다. 당시 경찰은 초기 발표에서 고문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라고 사망원인을 발표하였으나, 시체부검 결과 전기고문과 물고문에 의한 살인인 것으로 밝혀졌다.&lt;br /&gt;
&lt;br /&gt;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저 죽음을 응시해주길 바란다. 저 죽음을 끝내 지켜주길 바란다. 저 죽음을 다시 죽이지 말아주길 바란다.''''' &amp;lt;small&amp;gt; - 동아일보 1987년 1월 17일자 김중배 칼럼 중&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사건 진상의 일부가 공개되자 2월 7일 전국 주요 도시에서 &amp;quot;박종철군 범국민추도식&amp;quot; 및 도심 시위가 열렸고 이어 3월 3일에는 &amp;quot;박종철군 49재와 고문추방 국민대행진&amp;quot;과 함께 또 다른 시위가 열렸다. 이후 4월 2일 서울대학교 학부모 130여 명이 ‘건국대학교 사태‘ 등 시국관련 구속학생의 징계철회를 요구하며 철야 농성을 벌였다.&lt;br /&gt;
&lt;br /&gt;
====정부의 개헌논의 유보====&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lt;br /&g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JazJFsgu4oc?si=sOE7w1tz-jKVztC9&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lt;br /&g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그러나 전두환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1987년 4월 13일 [[4.13호헌조치]]라 불리는 ‘대통령 특별담화‘를 발표, 개헌(改憲) 논의를 유보하겠다고 밝혔다. [[4.13호헌조치]]에서 전두환은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와 대통령 선거는 자유 경선의 분위기가 보장되는 가운데 1987년 내에 공정한 선거관리를 통해 차질 없이 실시할 수 있게 모든 노력을 다할것‘이라고 다짐했으며, 또 ‘민정당의 후임 대통령 후보는 조속한 시일 안에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인물 가운데서 당헌 절차와 민주 방식에 따라 전당대회에서 선출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호헌조치‘라는 그 이름대로 현행 헌법에 따라 권력을 이양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국민들의 큰 기대를 얻을 것이라 믿었으나, 기대는 커녕 오히려 반발을 가져오는 요인이 되고 말았다. 곧바로 이튿날인 4월 14일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 등 각계 인사들이, 호헌 조치를 비판하는 시국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정부 최루탄에 의한 [[이한열]] 사망====&lt;br /&gt;
[[파일:이한열.jpg|200px|섬네일|오른쪽|최루탄에 피격당한 후 이종창에게 부축받는 이한열]]&lt;br /&gt;
먼저 1987년 5월 27일 야당과 재야, 종교계 등이 힘을 모아 ‘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여당인 민주정의당에서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6월 10일에 맞춰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6 · 10국민대회]])’를 치르기로 결정하였다. 대학생들은 국본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를 중심으로 6 · 10국민대회에 호응하여 6월 초부터 각 대학별로 연일 집회와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6 · 10국민대회]] 하루 전날인 6월 9일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교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는 곧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학생들은 물론 시민들의 분노가 들끓었다. 이러한 분노 속에서 6 · 10국민대회가 열렸다. 경찰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6 · 10국민대회가 열리는 성공회대성당을 원천 봉쇄하였다. 그 결과 6 · 10국민대회는 대회장에 미리 들어가 있던 소수의 인원만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대회 예정 시간인 오후 6시 이전부터 서울 시내 곳곳에서 대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시민들도 다양한 방식으로 6 · 10국민대회와 학생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날 밤 늦게까지 시위를 벌이던 학생들은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이후 5일 동안 농성을 계속하였다. 애초 계획된 것은 아니었지만 대학생들의 명동성당 농성은 6 · 10국민대회가 단발성 행사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인 저항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lt;br /&gt;
&lt;br /&gt;
====민주항쟁 확산====&lt;br /&gt;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로 개헌하라!'''''   &amp;lt;small&amp;gt;-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제시한 슬로건&amp;lt;/small&amp;gt;&lt;br /&gt;
명동성당 농성을 거치며 항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유월항쟁의 전국화 과정에는 일정한 패턴이 존재하였다. 6월 10일 서울 외에도 전국 주요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위가 벌어졌지만, 15일까지 항쟁의 중심은 6 · 10국민대회와 명동성당 농성이 전개된 서울이었다. 하지만 6월 15일 경부터는 부산, 대전, 진주 등에서 격렬한 시위가 전개되었다. 그러다가 6월 20일부터 대규모 시위가 광주, 전주, 순천, 익산 등 호남 지방으로 옮겨졌다. 6 · 10국민대회 이후 약 20일 동안 전국 곳곳에서 매일 평균 100회 이상의 시위가 동시다발로 벌어졌다. 특히 6월 18일 ‘최루탄추방대회’와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은 전국 곳곳에서 한꺼번에 1백만 명 이상이 참여하였다. 갈수록 참가 지역이 전국 곳곳으로 확산되어 대도시, 중소도시뿐만 아니라 농촌 지역의 군 단위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6월 26일 하루에만 37~38개 시 · 군에서 시위가 동시에 벌어졌다. 유월항쟁에 참가한 연 인원은 400~500만 명으로 추산된다.&lt;br /&gt;
&lt;br /&gt;
반면 유월항쟁의 전국적 동시다발 시위는 경찰 병력을 분산시켰다. 분산된 경찰 병력으로는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거센 시위의 물결을 막아 낼 수 없었다. 경찰이 시위 진압에 최루탄을 남발하면서 최루탄도 점차 고갈되기 시작하였다. 유월항쟁 기간 동안 경찰이 사용한 최루탄만 총 67만 발이 넘었다. 더불어, 전두환 정권이 집권 내내 강조했던 88서울올림픽이 얼마 남지 않아 미국 등 국제사회의 이목이 집중된 상황에서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운동 때처럼 유혈 사태와 대량 학살을 반복하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무엇보다 군대를 동원하더라도 이러한 대규모 시민 항쟁을 진압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결국 경찰력으로 항쟁을 막기 힘들고, 군대 투입도 어렵다고 판단한 전두환 정권은 1987년 6월 29일 ‘ 6 · 29민주화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하였다. 그리고 그동안 의식불명 상태에 있었던 이한열이 7월 5일 끝내 사망하였다. 5일장 후 7월 9일 치러진 이한열의 노제에 100만 명의 인파가 모인 것을 끝으로 약 한 달 동안 지속된 유월항쟁은 마무리되었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1987년 6월항쟁이 '''대통령[[직선제]] 개헌'''이라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이 항쟁에 동참한 학생과 시민들의 요구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제시한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 개헌’이라는 슬로건으로 모아졌기 때문이었다. 유월항쟁은 이러한 민주화 세력의 통합성, 즉 각기 다른 성격과 지향을 가진 여러 주체들이 모두 동의할 수 있는 ‘최소 강령’하에 ‘최대 연합’으로 결집하였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딩잉잉]]:6월민주항쟁 페이지 전체 작성&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기밀문서]]&lt;br /&gt;
[[분류:4.19혁명관련]]&lt;br /&gt;
[[분류:부마항쟁관련]]&lt;br /&gt;
[[분류:5.18민주화운동관련]]&lt;br /&gt;
[[분류:6월민주항쟁관련]]&lt;br /&gt;
[[분류:뎐]]&lt;br /&gt;
[[분류:이나자키로빈]]&lt;br /&gt;
[[분류:호빵이👻]]&lt;br /&gt;
[[분류:•ᴗ•]]&lt;br /&gt;
[[분류:딩잉잉]]&lt;/div&gt;</summary>
		<author><name>딩잉잉</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8%B0%EB%B0%80%EB%AC%B8%EC%84%9C&amp;diff=35917</id>
		<title>기밀문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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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1T16:06:3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딩잉잉: /* 컨텐츠 주제 */&lt;/p&gt;
&lt;hr /&gt;
&lt;div&gt;=='''컨텐츠 주제'''==&lt;br /&gt;
[[파일:이한열사진.jpeg|center]]&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amp;lt;big&amp;gt;'''&amp;lt;span style=&amp;quot;color:#CD0000&amp;quot;&amp;gt;투쟁의 불꽃, 자유의 환호&amp;lt;/span&amp;gt;'''&amp;lt;br/&amp;gt;&lt;br /&gt;
''대한민국은 시민들의 피와 땀으로 민주화를 이룩하였습니다.''&amp;lt;br/&amp;gt;&lt;br /&gt;
''그 역동적인 역사 속에서, 시민은 어둠을 밝히기 위해 힘을 모았고, 억압과 항거의 불꽃은 자유를 외쳤습니다.''&amp;lt;br/&amp;gt;&lt;br /&gt;
''이 «기밀문서»에는 당시의 투쟁의 열기와 불굴의 의지가 실려있습니다.''&amp;lt;br/&amp;gt;&lt;br /&gt;
''함께, 그 뜨거운 페이지를 열어보시겠습니까?''&amp;lt;/span&amp;gt;&amp;lt;/big&amp;gt;&amp;lt;/div&amp;gt;&lt;br /&gt;
&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이나자키로빈]]&lt;br /&gt;
[[딩잉잉]]&lt;br /&gt;
&lt;br /&gt;
=='''팀원'''==&lt;br /&gt;
*오현지(2022131143) [[뎐]]&amp;lt;br/&amp;gt;&lt;br /&gt;
*김여원(2023130209) [[이나자키로빈]]&amp;lt;br/&amp;gt;&lt;br /&gt;
*김하은(2022131345) [[호빵이👻]]&amp;lt;br/&amp;gt;&lt;br /&gt;
*박정원(2023130350) [[•ᴗ•]]&amp;lt;br/&amp;gt;&lt;br /&gt;
*최필중(2023130216) [[딩잉잉]]&amp;lt;br/&amp;gt;&lt;br /&gt;
&lt;br /&gt;
=='''기획의도'''==&lt;br /&gt;
===기획배경===&lt;br /&gt;
1945년 광복 이후 대한민국 국민들은 자유민주국가로서의 미래를 기대했으나 실상은 그러지 못했다.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보여주듯 현재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는 그것을 누리지 못한 앞선 세대들의 목숨을 바친 항쟁의 대가이다. 민주항쟁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의 핵심 동력이었다. 오늘날 우리나라 민주의식의 중요한 기둥이 되는 네 가지 항쟁을 선별하고 각 항쟁의 배경, 전개과정, 의의를 비롯해 세부적이고 자세한 내용에 대한 기사를 작성한다.&lt;br /&gt;
===기획목적===&lt;br /&gt;
작금의 현실까지 오기에는 수없이 많은 투쟁이 있었지만 4.19혁명, 부마항쟁, 5.18민주항쟁, 6월민주항쟁이라는 네 가지 사건을 살펴보기로 한 것은 가장 많이 다뤄지고, 가장 많이 알려진 사건이기 때문이다. 관련된 사건과 역사 인물들에 대해 자세히 적어 내어 민주항쟁의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지 않으면 알기 힘든 각 민주항쟁의 자세한 내막을 밝혀낸다.&lt;br /&gt;
===기대하는 바===&lt;br /&gt;
타임라인과 온톨로지를 활용해 내용의 전반적인 이해를 돕고 자세한 설명을 통해 사건의 자세한 내막을 들어낸다. 네 가지 항쟁을 각각 큰 목차로 설정하고 세부 기사를 그 내부에 작성해 독자의 관심과 수요에 부합하는 정보를 전달하는 데 효과적일 것으로 기대된다. 민주항쟁에 참여한 사람들의 희생과 투쟁에 대한 존경심을 부르고 역사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다.&lt;br /&gt;
===기여===&lt;br /&gt;
[[뎐]], [[이나자키로빈]], [[호빵이👻]]: 기획의도 페이지 작성&lt;br /&gt;
&lt;br /&gt;
=='''온톨로지'''==&lt;br /&gt;
{{NetworkGraph | title=민주항쟁.lst}}&lt;br /&gt;
[[민주항쟁.lst]]&lt;br /&gt;
===기여===&lt;br /&gt;
*[[뎐]]: 온톨로지 제작&lt;br /&gt;
=='''컨텐츠 구조'''==&lt;br /&gt;
===클래스(Class)===&lt;br /&gt;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color:white&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0%&amp;quot; | 클래스 !! style=&amp;quot;width:40%&amp;quot; | 설명 !! style=&amp;quot;45%&amp;quot; | 노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제||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대표 키워드인 민주항쟁을 주제로서 나타내었다 || 만주항쟁&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항쟁||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민주화운동 시기 발생했던 주요 운동들을 ‘항쟁’이라는 키워드로 분류하였다. || 4.19혁명, 부마항쟁, 5.18 민주화운동, 6월민주항쟁&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사건||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항쟁의 원인, 결과가 되는 사건을 정리하였다|| 3.15부정선거, 고려대 4.18학생시위, 3.15의거, YH사건, 10.26사태, 12.12 군사반란, 비상계엄령,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고문추방민족대행진, 4.13호헌조치, 6.29선언, 대통령직선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지역||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요 항쟁들이 일어났던 지역을 정리하였다|| 마산, 부산, 광주&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인물||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요사건들을 발생시킨 인물, 참여했던 인물을 묶어서 정리하였다|| 이승만, 이기붕, 김주열, 박정희, 김재규, 전두환, 신군부, 시민군, 박종철, 이한열, 노태우&lt;br /&gt;
|-&lt;br /&gt;
|}&lt;br /&gt;
===관계성(Relation)===&lt;br /&gt;
*&amp;lt;font color=#228B22&amp;gt;'''~은 ~에 속한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주요 항쟁들이 민주항쟁에 속함을 나타내거나 인물의 소속을 나타낸다.&lt;br /&gt;
***해당노드:&lt;br /&gt;
***#4.19혁명 -&amp;gt; 민주항쟁&lt;br /&gt;
***#부마항쟁 -&amp;gt; 민주항쟁&lt;br /&gt;
***#5.18민주화운동 -&amp;gt; 민주항쟁&lt;br /&gt;
***#6월 민주항쟁 -&amp;gt; 민주항쟁&lt;br /&gt;
***#전두환 -&amp;gt; 신군부&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의 원인이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어떠한 사건과 인과관계를 이루는 또다른 사건 혹은 인물을 설명한다.&lt;br /&gt;
***#이기붕 -&amp;gt; 3.15부정선거&lt;br /&gt;
***#김주열 -&amp;gt; 고려대 4.18학생시위&lt;br /&gt;
***#고려대 4.18학생시위 -&amp;gt; 4.19혁명&lt;br /&gt;
***#3.15의거 -&amp;gt; 4.19혁명&lt;br /&gt;
***#김주열 -&amp;gt; 4.19혁명&lt;br /&gt;
***#3.15부정선거 -&amp;gt; 3.15의거&lt;br /&gt;
***#YH사건 -&amp;gt; 부마항쟁&lt;br /&gt;
***#부마항쟁 -&amp;gt; 10.26사태&lt;br /&gt;
***#박정희 -&amp;gt; 10.26사태&lt;br /&gt;
***#비상계엄령 -&amp;gt; 5.18민주화운동&lt;br /&gt;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 -&amp;gt; 고문추방민족대행진&lt;br /&gt;
***#고문추방민족대행진 -&amp;gt; 4.13호헌조치&lt;br /&gt;
***#4.13호헌조치 -&amp;gt; 6월민주항쟁&lt;br /&gt;
***#6월민주항쟁 -&amp;gt; 6.29선언&lt;br /&gt;
***#6월민주항쟁 -&amp;gt; 대통령직선제&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을 발생시켰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사건과 그 사건을 직접적으로 발생시킨 인물을 연결한다.&lt;br /&gt;
***#이승만 -&amp;gt; 3.15부정선거&lt;br /&gt;
***#김재규 -&amp;gt; 10.26사태&lt;br /&gt;
***#신군부 -&amp;gt; 1212군사반란&lt;br /&gt;
***#전두환 -&amp;gt; 비상계엄령&lt;br /&gt;
***#노태우 -&amp;gt; 6.29선언&lt;br /&gt;
***#시민군 -&amp;gt; 5.18민주화운동&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에 희생되었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민주항쟁의 진압과정 등 에서 희생된 인물을 설명한다&lt;br /&gt;
***#김주열 -&amp;gt; 3.15의거&lt;br /&gt;
***#이한열 -&amp;gt; 6월 민주항쟁&lt;br /&gt;
***#박종철&amp;gt;박종철 고문치사 사건&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에서 발생했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설명한다.&lt;br /&gt;
***#3.15의거 -&amp;gt; 마산&lt;br /&gt;
***#부마항쟁 -&amp;gt; 부산&lt;br /&gt;
***#부마항쟁 -&amp;gt; 마산&lt;br /&gt;
***#5.18민주화운동 -&amp;gt; 광주&lt;br /&gt;
===기여===&lt;br /&gt;
*[[뎐]]: 컨텐츠 구조 페이지 작성&lt;br /&gt;
=='''4.19혁명'''==&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VPp4BmfDSv8VA2-oC-VATHzUYgadaiaQ9AlWXYiaiVk&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원인===&lt;br /&gt;
====[[3.15 부정선거]]====&lt;br /&gt;
[[파일:3.15부정선거_개표_모습.png|300픽셀|섬네일|오른쪽|3.15부정선거 당시 개표하는 사진&amp;lt;ref&amp;gt;사진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amp;lt;/ref&amp;gt;]]&lt;br /&gt;
1959년 대한민국은 제 4대 대통령 선거와 제 5대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당시 자유당에서는 12년째 대통령으로서 연임 중이던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이기붕]]'''을 부통령 후보로 선임하였다. 그러나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병세의 악화로 사망하게 되고,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은 확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선거의 초점은 자유당의 조병옥과 민주당의 장면 간의 선거전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본격적인 선거유세의 시작과 함께 정부와 여당의 잇따른 야당선거운동 방해사건으로 부정선거가 시작되었다. 1960년 3월 15일 선거가 시작된 이후에도 다양한 방법의 부정행위가 일어났고, 개표 결과 이승만과 이기붕의 득표가 100%에 육박하는 결과로 나오자 자유당은 득표수를 하향 조정해 최종 집계에 반영할 것을 지시했다. 결국 이승만 88.7%, 이기붕 79%의 득표율을 가지며 정, 부통령에 당선되었다.&amp;lt;ref&amp;gt;자세한 내용은 3.15부정선거 페이지 참조&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부정선거 반대시위, [[3.15 의거]]의 발생====&lt;br /&gt;
3.15 부정선거를 반대하는 시위는 초기에는 중, 고등학생들의 산발적인 시위로 전개되었다. 3월 15일 선거일 밤 경남 마산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으며,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여 1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amp;lt;br/&amp;gt;&lt;br /&gt;
3월 15일 실종되었던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4월 11일 마산부두에서 발견되자 마산 시민들은 시청, 파출소 등을 파괴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2차 시위가 일어난 것이다.&lt;br /&gt;
&lt;br /&gt;
====[[고려대학교 4.18 학생시위]]의 발생====&lt;br /&gt;
1, 2차 마산시위를 계기로 부정선거 무효와 이승만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났다. 이들은 '4.18 선언문'을 낭독하고 시내로 진출하였다. 이는 4월 19일 학생들과 일반 시민들이 가세한 대규모 시위로 이어지게 되었다.&lt;br /&gt;
====전국적인 4.19 혁명의 발생====&lt;br /&gt;
분노한 전국의 시민과 학생들이 다음 날인 4월 19일에 '이승만 하야와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며 대규모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경찰은 또다시 무차별 발포에 나섰고,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지만 이러한 압박에도 시민들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lt;br /&gt;
====이승만 대통령의 혼란 수습 시도====&lt;br /&gt;
이승만 대통령은 4.19 시위로 인한 정국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4월 20일 국무위원 전원과 자유당 당무위원 전원의 사표를 제출하도록 지시하였으며, 4월 23일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외무장관에 허정, 내무장관에 이호, 법무장관에 권승렬을 임명하는 등 개각을 단행하였다.&amp;lt;br/&amp;gt;&lt;br /&gt;
그러나 미국은 4.19직후 국무부 성명을 통해 한국에서 발생한 사태는 부정선거에 대한 '군중의 불만'을 반영한 것 이라고 했고, 양유찬 주미대사를 불러 '부정선거에 대한 철저한 조사', '경향신문 복간', '국가보안법 개정' 등을 촉구하는 각서를 전달하였다.&amp;lt;br/&amp;gt;&lt;br /&gt;
그리고 4월 25일, 이승만 정권에 분노한 전국 27개 대학 258명의 교수가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 모여 14개항의 시국 선언문을 발표하며 학생, 시민들과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들은 3.15 부정선거 및 4.19 사태의 책임을 지고 대통령이 물러날 것을 주장하였으며, &amp;quot;학생들의 피에 보답하자&amp;quot;는 플랜 카드를 앞세워 국회의사당까지 행진하였다. &lt;br /&gt;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lt;br /&gt;
무력 진압에도 대규모 시위가 이어지며 시민들은 완강하게 투쟁하였다. 4월 26일 시위대가 경무대로 다시 집결하는 등 사태가 심각하게 진행되자, 오전 10시 30분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 성명을 발표하였다. 4월 27일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하며 대통령직을 하야하고 하와이로 망명하였으며 자유당 정권도 끝나게 된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우리 국민들, 특히 학생과 청년들의 주도로 이루어진 4.19 혁명은 학생과 일반 대중이 단결하여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아시아 최초의 시건이다. 4.19혁명은 부마항쟁, 5.18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그리고 2017년 촛불시위에 이르기 까지 정권에 대항하는 국민들이 단합을 이루는 초석이 되었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도 시민 저항권에 대한 근거로써 4.19혁명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문구가 있다.&lt;br /&gt;
===기여===&lt;br /&gt;
[[뎐]]: 4.19혁명 페이지 원인, 의의 작성 &lt;br /&gt;
&lt;br /&gt;
[[•ᴗ•]]: 4.19혁명 페이지 전개 작성&lt;br /&gt;
&lt;br /&gt;
=='''부마항쟁'''==&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bK7zjpPvBsC7rFRPmsiHCUYhyWt2VXOv8SYyaBTND4Y&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원인===&lt;br /&gt;
====[[유신 헌법]]과 [[긴급조치]]====&lt;br /&gt;
1971년 선거에서 김대중을 누르고 대통령에 3선된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해 국회 해산,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등 법의 일부 기능을 정지시키고 전국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했다.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된 이른바 유신헌법에 의해 제정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법」 에 의거해 박정희가 제8대 대통령으로 재차 당선되었고, 이 유신 헌법이 발효된 기간을 유신 체제라고 부른다. 유신 체제는 행정, 입법, 사법의 3권을 모두 쥔 대통령이 종신 집권할 수 있도록 설계된 1인 대통령제였다. 박정희는 유신 헌법에 의거해 대통령의 권한으로 취할 수 있었던 특별조치인 긴급조치를 선포함으로써 헌법에 반대하는 시위 및 운동과 방송, 언론 활동을 하는 반정부 인사들을 연행, 체포, 고문하는 등 억압을 가했다.&lt;br /&gt;
&lt;br /&gt;
====한국경제의 위기====&lt;br /&gt;
1970년대 말 한국경제는''' [[오일쇼크]]'''라는 세계경제의 위기와 결합해 가라앉고 말았다. 경제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정부는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과 함께 '''[[경제안정화정책]]'''을 수용했고, 중소자본가, 봉급생활자, 도시 노동자와 농민 등에 안정화 비용을 부과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이와 같은 안정화 정책은 경제위기로 어려운 처지에 있던 중소기업들의 도산을 가속하여 기업 부도율이 치솟고 하층민들을 더 깊은 고통에 몰아넣었다. 특히 '''부가가치세'''를 도입한 이후 물가가 상승하면서 일상에 타격을 주었으며, 노동집약적 제조업이 집중되었던 부산과 마산에서는 상황이 더욱 심각하여 1979년 부산 지역 부도율은 서울의 3배에 달했다.&lt;br /&gt;
&lt;br /&gt;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lt;br /&gt;
한 시대의 대격변을 예고하는 단초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시작됐다. 1979년 8월 9일 오전, 신민당의 당사 4층 강당에서는 봉제업체인 YH무역주식회사의 여성노동자 200여명이 기업주의 폐업에 반발하여 폐업조치 철회 농성을 벌였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인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신민당이 당사 건물을 내준 것이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폭력을 동원하여 농성을 해산시켰다. 결국 이 사건은 노동 탄압 사건을 넘어선 야당에 대한 정치 탄압 사건으로 발전하였다.&lt;br /&gt;
&lt;br /&gt;
이날 경찰은 1000여명의 진압대원을 신민당사로 난입시켜 농성을 하고 있던 174명의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로 밖으로 끌어냈다. 또한 경찰은 총재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김영삼 총재와 당 간부들을 끌어내면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박정희 정권은 이 노동자 농성 사건을 빌미로 신민당 분열공작을 시도하였다. 유신정권과 비밀리에 결탁한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 3명이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 부총재 전원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접수시켰다. 그리고 법원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신민당 총재단의 직무 집행을 정지시키고 박정희 정권의 꼭두각시를 총재직무대행으로 선임하였다.&lt;br /&gt;
&lt;br /&gt;
아울러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의 동교동 자택을 전면 봉쇄하였고,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에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끊으라고 요구한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즈』 회견내용을 “반헌정적, 반민족적 작태”로 몰아서 국회에 징계 동의안을 제출했다. 10월 4일 오후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의원 159명은 여당 총회장에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제명 결의안을 '''기습적으로''' 처리해 버렸다. 노사분규 사태로 시작된 사건이 제1야당 당수의 의원직 제명으로 확대된 정치적 사태를 지켜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유신체제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이 고조되었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유신 철폐, 독재 타도!'''''   &amp;lt;small&amp;gt;-10.16 부마항쟁 당시 시위대의 구호&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부산대학교 민주선언문, 학생 시위에서 시민항쟁으로====&lt;br /&gt;
[[파일:부산시위대.jpg|250px|섬네일|오른쪽|광복동을 지나는 시위 행렬]]&lt;br /&gt;
1979년 10월 16일 아침 10시 부산대학교 구내 도서관 앞에서 약 500명의 학생들이 모여 “유신정권 물러가라”, “정치탄압 중지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반정부 시위를 벌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민주선언문」]]'''을 통해 민주화, 언론 자유, 인권 보장의 신념을 확인하고, “제도화된 폭력성과 조직적 악의 근원인 유신헌법과 독재집권층의 퇴진만이 5천 만 겨레의 통일의 첫걸음이라고 주장하면서 형제의 피를 요구하는 자유와 민주의 깃발을 우리가 잡고 반민주의 무리, 불의의 무리들을 향해 외치며 나아가자”라고 선언하였다. 이후 학생들은 교문을 나가 거리에서 시위했다. 이때 학생 수는 약 5,000명으로 불어나 있었고, 광복동과 남포동 등 부산시내 중심가까지 진출해 애국가 등의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며, 이를 제지하려는 경찰과 이곳저곳에서 충돌하였다. 비슷한 시간, 부산 동아대학교에서도 1,000여 명의 학생이 부산대학교 학생과 합류하여 가두시위를 벌였다. 부산대학교 데모로 학생 수백 명이 연행되고 100여 명이 다쳤지만 이튿날인 10월 17일에는 시위가 더욱 격화되어 학생들뿐만 아니라 다수의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학생 시위는 점차 시민항쟁의 양상을 띠어갔다.''' 밤늦게까지 계속된 시위에서 시민들은 충무파출소, 한국방송공사, 서구청, 부산세무서 등을 파괴하였고, 경찰차량을 불태우거나 파손시켰다.&lt;br /&gt;
&lt;br /&gt;
====마산의 시민항쟁====&lt;br /&gt;
&lt;br /&gt;
민주항쟁은 18일에 마산으로 확산되었다. 늦은 오후에는 1,000여 명의 경남대학교 학생들이 마산 시내 번화가에 산발적으로 집결했으며, 일부시민들도 가담해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어두워진 다음 학생과 시민들의 데모는 격화되어 파출소, 공화당사, 방송국, 신문사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파괴하였다. 이튿날인 19일에는 시위가 더욱 치열해져 마산 시내는 한때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저녁 8시경, 시위대는 경남대학과 마산대학&amp;lt;ref&amp;gt;1985년 창원대학으로 교명이 변경되었으며, 현재의 마산대학교와 다르다.&amp;lt;/ref&amp;gt;, 그리고 고등학생까지 합세하여 약 8,000명에 이르렀으며, 시내 곳곳에서 몽둥이를 들고 동사무소와 파출소로 몰려가 시설을 파괴하였고, 경찰차량에 불을 질렀다.&lt;br /&gt;
&lt;br /&gt;
====부산 계엄령, 마산 위수령====&lt;br /&gt;
[[파일:계엄포고문.jpg|270px|섬네일|왼쪽|부산지역에 내려진 계엄포고문을 읽고 있는 시민들]]&lt;br /&gt;
부산대학교 시위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박정희 정부는 학생 시위로 시작된 시위가 대규모 시민항쟁으로 사태가 심상치 않게 확대되어가자 강경책으로 대응했다. 정부는 18일 자정을 기해 '''부산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동원한 과격한 진압'''을 통해 시위 참여자들과 이를 방조한 일반 시민들까지 1,058명을 연행하고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으며, 부산지구 계엄사령부는 각 대학 휴교조처와 야간통행금지시간을 2시간 연장하는 등의 항이 담긴 포고문을 발표했다.&lt;br /&gt;
&lt;br /&gt;
부산에 계엄령이 선포된 이튿날인 19일에 마산 시위가 확대됨에 따라 그 다음날인 10월 20일 정오, 정부가 '''마산 및 창원 지역에 위수령을 발령'''해 통행금지 시간이 연장되고, 경남대학 등에는 휴교조처가 취해졌으며, 24일에는 깡패를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132명을 검거, 23명을 구속했다. 이렇게 '''표면적으로는 부마민주항쟁이 단시간에 진압되는 듯 보였지만, 항쟁은 이미 유신체제의 균열을 불러오고 있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항쟁의 전개 과정에서 볼 수 있듯, 부마민주항쟁에서 특징적인 것은 먼저 시위대의 가장 큰 분노의 대상이 공화당사와 경찰·파출소였다는 점, 다음으로는 “부가가치세를 철폐하라”, “잘 먹고 잘 살아라”등의 구호에서 드러나듯이 세무서에 대한 공격, 그리고 신문사와 방송국에 대한 공격을 들 수 있다.&lt;br /&gt;
&lt;br /&gt;
부마민주항쟁은 1970년대 유신체제 밑에서 쌓였던 침묵하는 언론, 조세, 시민을 억압하는 경찰에 대한 불만 등 정치·사회·경제·문화·종교 등 각 부문에 걸친 여러 모순의 폭발이었고, 헌법 개정과 긴급조치로 겨우 유지되던 유신체제와 박정희 정권의 붕괴를 촉진시킨 결정적인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10.26사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또한 이 사건은 1980년 5월 18일의 광주 민주화운동과 1987년 6월 민주항쟁에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된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억눌린 우리 역사&amp;lt;/br&amp;gt;터져나온 분노&amp;lt;/br&amp;gt;매운 연기 칼바람에도&amp;lt;/br&amp;gt;함성소리 드높았던&amp;lt;/br&amp;gt;동트는 새벽벌&amp;lt;/br&amp;gt;시월이 오면&amp;lt;/br&amp;gt;핏발 선 가슴마다&amp;lt;/br&amp;gt;살아오는 십 일육&amp;lt;/br&amp;gt;동지여 전진하자&amp;lt;/br&amp;gt;깨치고 나가자&amp;lt;/br&amp;gt;뜨거운 가슴으로&amp;lt;/br&amp;gt;빛나는 내일로'''''&amp;lt;/br&amp;gt;&amp;lt;small&amp;gt;-'''부산대학교''' 새벽벌도서관 10.16 기념비&amp;lt;/small&amp;gt;&amp;lt;/div&amp;gt;&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호빵이👻]]: 부마항쟁 페이지 전체 작성&amp;lt;/br&amp;gt;&lt;br /&gt;
[[이나자키로빈]]: 부마항쟁 원인 중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 작성&lt;br /&gt;
&lt;br /&gt;
=='''5.18민주화운동'''==&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AMetwTuXYHTCXINqr7ZJpzO5CHFEMQO5-Uqau51RkXA&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원인===&lt;br /&gt;
====유신체제의 붕괴====&lt;br /&gt;
&lt;br /&gt;
[[파일:김재규.jpg|섬네일|오른쪽|암살 당시 상황을 재현하는 김재규]]&lt;br /&gt;
&lt;br /&gt;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amp;lt;small&amp;gt; - 김재규&amp;lt;/small&amp;gt;&lt;br /&gt;
1979년 10월 4일 신민당 총재 김영삼이 국회에서 의원직을 제명당하자 10월 15부터 10월 20까지 부산 · 마산 등지에서는 부마항쟁이 일어났고, 이의 해결을 둘러싼 노선대립으로 갈등 중 10월 26일 &amp;lt;ins&amp;gt;[[김재규]]&amp;lt;/ins&amp;gt;가 박정희를 살해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ins&amp;gt;[[10.26 사태]]&amp;lt;/ins&amp;gt;의 사후 수습과정에서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을 중심으로 신군부 세력이 부상하였으며, 이들은 &amp;lt;ins&amp;gt;[[12.12 사건]]&amp;lt;/ins&amp;gt;의 하극상을 통하여 군부를 장악하였다. 1980년 2월 29일 김대중 등이 복권되었으나 그 해 봄, 신군부는 최규하 과도 정부를 유명무실하게 하고 국민들이 요구하는 민주주의와 이를 위한 명확한 정치일정 제시를 거부하면서 권력기반을 구축하였다.&lt;br /&gt;
&lt;br /&gt;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lt;br /&gt;
한 시대의 대격변을 예고하는 단초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시작됐다. 1979년 8월 9일 오전, 신민당의 당사 4층 강당에서는 봉제업체인 YH무역주식회사의 여성노동자 200여명이 기업주의 폐업에 반발하여 폐업조치 철회 농성을 벌였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인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신민당이 당사 건물을 내준 것이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폭력을 동원하여 농성을 해산시켰다. 결국 이 사건은 노동 탄압 사건을 넘어선 야당에 대한 정치 탄압 사건으로 발전하였다.&lt;br /&gt;
&lt;br /&gt;
이날 경찰은 1000여명의 진압대원을 신민당사로 난입시켜 농성을 하고 있던 174명의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로 밖으로 끌어냈다. 또한 경찰은 총재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김영삼 총재와 당 간부들을 끌어내면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박정희 정권은 이 노동자 농성 사건을 빌미로 신민당 분열공작을 시도하였다. 유신정권과 비밀리에 결탁한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 3명이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 부총재 전원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접수시켰다. 그리고 법원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신민당 총재단의 직무 집행을 정지시키고 박정희 정권의 꼭두각시를 총재직무대행으로 선임하였다.&lt;br /&gt;
&lt;br /&gt;
아울러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의 동교동 자택을 전면 봉쇄하였고,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에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끊으라고 요구한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즈』 회견내용을 “반헌정적, 반민족적 작태”로 몰아서 국회에 징계 동의안을 제출했다. 10월 4일 오후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의원 159명은 여당 총회장에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제명 결의안을 '''기습적으로''' 처리해 버렸다.&lt;br /&gt;
&lt;br /&gt;
노사분규 사태로 시작된 사건이 제1야당 당수의 의원직 제명으로 확대된 정치적 사태를 지켜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유신체제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이 고조되었다. 또한 이 사건은 그동안 다소 주춤하던 대학가에 반유신 반독재 운동의 열기가 다시 확산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청춘을 바쳐, 학생 운동====&lt;br /&gt;
&lt;br /&gt;
[[파일:서울의_봄.JPG|섬네일|오른쪽|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앞에 모인 시위대]]&lt;br /&gt;
&lt;br /&gt;
군부의 재집권 야욕에 대한 국민적 저항은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표출되었다. 1980년 3월, 서울대 총학생회 출범을 시작으로 4월 초순에는 전국의 주요 대학들이 총학생회를 결성하기 시작하였다. 대학별로 독재 정권에 아부했던 어용교수와 족벌사학 퇴진 운동을 벌였고, 특히 병영집체훈련(당시 대학 신입생들은 의무적으로 군부대에 10일 간 입대하여 각종 군사훈련을 이수해야 했다.) 거부가 주요 이슈로 전면 등장했다. 각 대학의 병영집체훈련 거부운동이 본격화되고 전국적인 쟁점으로 떠오르자 신군부는 신문, 방송을 통해 ‘학생들의 안보의식 결여’를 비난하고 교내 시위·농성을 집중적으로 보도하게 했다.  5월 1일에 서울대가 입영훈련 거부투쟁 철회를 결정하고 ‘계엄령 해제’와 ‘유신잔당 퇴진’, ‘정부개헌중단’과 ‘노동 3권 보장’ 등을 요구하기 시작하면서 대학가는 이제까지의 학내 문제 중심의 운동에서 정치개혁을 위한 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그간 정부와 대학 간에 팽팽하게 유지되던 긴장 관계는 폭발 직전으로 내닫게 된 것이다.&lt;br /&gt;
&lt;br /&gt;
약 열흘 간의 대정부 투쟁을 준비한 대학가는 5월 10일 고려대 총학생회장실에서 열린 ‘총학생회장단 회의’에 참석한 전국 23개 대학 대표들은 ‘비상계엄의 즉각 해제’와 ‘전두환, 신현확 등 유신잔당 퇴진’ 등을 결의하고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정세에 대한 공동대처 방안을 마련했다. 이후 5월 13일부터 5월 14일에 걸쳐 서울 · 부산 · 대구 · 광주 등 37개 대학에서 계엄철폐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5월 15일에는 서울역에서 시위가 발생하는 등 학생시위는 서울시가지를 거의 마비시키는 등 야간까지 지속되어 사태가 절정에 달하면서 신군부 세력을 위협하였다. 5월 16일 24개 대학 학생대표들은 당분간 시국의 추이를 관망하기로 결정하고 가두시위를 중단하면서 소강상태에 돌입하는 듯하였다.&lt;br /&gt;
&lt;br /&gt;
====1980년 봄의 광주====&lt;br /&gt;
5월 17일 신군부 세력이 이전까지는 제주도를 제외한 지역에 한정되었던 비상계엄을 전국에 확대하는 조치인 계엄포고 10호(17일 24시에 발효: 각 대학 휴교령 포함)를 밤 9시 40분에 의결하고 밤 11시 40분에 발표하면서 밤 11시를 전후한 시점부터 김대중 · 김종필이 연행되는 등 권력형 부정축재자 및 소요조종 혐의자, 학생 시위 주동자가 체포되었다. 이날 밤 광주지역의 사회운동·학생운동의 지도자도 상당수가 검거되었다. 광주의 검거대상자는 전남대 12명, 조선대 10명 등 총 22명이었다. 전남에서 계엄합동수사단은 광주505보안대가 중심이고, 중앙정보부, 경찰 등이 보조역할을 했다. 전남 계엄합동수사단은 22대 차량과 86명의 인원이 출동해 정동년 등 복적생들과 대학의 총학생회 간부들을 집중 검거했다.&lt;br /&gt;
&lt;br /&gt;
한편 육군본부는 14일 오전 7시55분에 국가 중요 보안목표와 주요대학에 군 병력 배치 명령을 하달했다. 이 명령에 따라 전남북계엄분소장인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광주 시내 주요 시설물에 이날 오후부터 계엄병력을 배치했다. 31사단 96연대 병력이 광주시내 KBS건물에 42명, MBC 21명, CBS 11명, VOC(전일방송) 11명 등 주요 방송사 건물에 배치돼 경비에 들어간 것이다.&lt;br /&gt;
&lt;br /&gt;
이날 오후 전교사령관은 7공수여단의 광주배치에 따른 수송수단 지원도 미리 협의했다. 그리고 5월 8일부터 16일 사이에 공수부대 수뇌부들도 헬기를 타고 서울에서 내려와 광주 상무대의 전투병과교육사령부를 방문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광주에서 시위가 격화되면 즉각적으로 최정예 군부대를 동원해서 진압할 준비를 철저하게 갖추고 있었다. 5월 18일에 시작된 광주의 비극은 그 이전에 이미 시한폭탄처럼 준비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lt;br /&gt;
{{구글지도 | 위도=35.175961433346885 | 경도=126.90865311973532 | 줌=13 }}  [[파일:금남로.JPG|섬네일|오른쪽|금남로 앞에 집결한 버스와 시민군]]&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18일&amp;lt;/span&amp;gt;&lt;br /&gt;
휴교령이 내려질 경우 교문 앞에서 집결한다는 결의에 따라 학생들은 5월 18일 오전 전남대학교 앞에 모였다. 공수부대원들이 전남대 앞 시위를 저지하자 대학생들은 광주역에 재집결해서 시위를 이어갔다. 시위대가 점차 늘어나면서 공수부대원이 시내에서 시위진압에 나섰으며 18일 오후 1시부터 무차별 진압작전이 이루어져 부상자가 속출하였다.&lt;br /&gt;
&lt;br /&gt;
군인들이 금남로 등 시내 중심가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이나 여자를 마구 구타하고 짓밟으며 찌르는 등의 잔혹 행동을 하자 시민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이에 시위대는 오후 4시 이후 파출소 파괴 등 적극공세에 나섰다. '''계엄군의 과잉 무력진압은 시위를 해산시키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오히려 시민들을 단결시켰으며, 결국 19일 시민 · 학생 연대가 발생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lt;br /&gt;
&lt;br /&gt;
 '''''광주 애국 시민 여러분! 이것이 웬 말입니까? 웬 벼락이란 말입니까? 죄 없는 학생들을 총칼로 찔러 죽이고 몽둥이로 두들겨 트럭으로 실어가며 부녀자를 발가벗겨 총칼로 찌르는 놈들이 이 누구란 말입니까? 이제 우리가 살길은 전시민이 하나로 뭉쳐 청년 학생들을 보호하고 유신잔당과 극악무도한 살인마 전두환 일파와 공수 특전단 놈들을 한놈도 남김없이 쳐부수는 길 뿐입니다. 우리는 이제 다 보았습니다. 다 알게 되었읍니다. 왜 학생들이 그토록 소리 높이 외쳤는가를, 우리의 적은 경찰도 군대도 아닙니다. 우리의 적은 전국민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바로 유신잔당과 전두환 일파 그놈들입니다.''''' &amp;lt;small&amp;gt; - 1980년 5월 19일에 '광주시민민주투쟁회'명의의 호소문&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19일&amp;lt;/span&amp;gt;&lt;br /&gt;
19일 오전에는 일시적 소강상태였으나 오후 들어서 분노한 학생 · 시민들이 군 · 경찰과 공방전을 벌이면서 시위는 점차 격화되었다. '''시민들은 공포감에서 벗어나 자신의 생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단순한 학생시위에서 시민봉기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계엄군은 시위대를 포위하여 구타하였으며 일부 고등학생까지 포함된 시위대는 돌과 화염병으로 저항하였고 파출소와 방송국 등에 침입하였다. 뒤처진 공수부대를 공격하거나 고립된 차량을 포위하기도 하였으며 총과 방패를 빼앗기도 하였고, 오후 4시 50분 시민들에게 포위된 계엄군의 장갑차에서 최초의 발포가 있었다. 19일 밤비가 내리는 가운데 시위가 산발적으로 계속되었으며, 20일 오전 비가 그치고 대규모 시위는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오후부터 다시 시작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20일&amp;lt;/span&amp;gt;&lt;br /&gt;
'''20일 오후 6시부터 택시와 버스 운전 기사들이 광주역과 무등경기장에 모여 대형 버스와 트럭을 앞세우고 일시에 금남로에 집결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들을 앞세운 시위는 계엄군을 몰아내는 데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였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5.18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에 &amp;lt;ins&amp;gt;[[지대한 영향]]&amp;lt;/ins&amp;gt;을 끼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학생 운동에 뛰어든 많은 대학생들은 대학교에 들어와서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의 실상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아 학생 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군부정권은 5.18 이후로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다. 전두환은 김대중 등에게 '광주 사태'의 책임을 물어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했고,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 선언을 한 직후, 8월 27일 소위 체육관 선거를 통해 전두환은 대통령 자리를 탈취했다.&lt;br /&gt;
&lt;br /&gt;
지역적인 면에서는 '''광주광역시를 비롯한 전라도 지역의 트라우마'''로 작용해 이후의 민주정의당 및 &amp;lt;ins&amp;gt;[[3당 합당]]&amp;lt;/ins&amp;gt;으로 이어지는 보수 세력에 대해 적대심을 가지고, 민주당계 정당의 표밭이 되는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미 박정희 정부 시절부터 유무형의 정치적인 차별을 받고 있었지만 5.18의 참상은 전라도가 다시는 보수 세력을 지지하지 않게 만들 정도로 심각한 사건이며 호남소외론의 가장 결정적인 명분이 되었다.&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이나자키로빈]]: 5.18 민주화운동 페이지 전체 작성&lt;br /&gt;
&lt;br /&gt;
=='''6월민주항쟁'''==&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NnXWs5RMTIf-6DOEu9_rX2k4mgzUk1AQHYneCuwXN1Q&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원인===&lt;br /&gt;
====[[박종철고문치사사건]]====&lt;br /&gt;
&lt;br /&gt;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박종철은 1987년 1월 13일 자정 경 하숙집에서 치안본부(現 경찰청)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게 연행되었다.‘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이자 ‘민주화추진위원회’ 지도위원으로 수배 받고 있었던 박종운을 잡기위해 연행한 것이었다. 취조실로 연행해간 공안 당국은 박종철에게 박종운의 소재를 물었으나, 박종철은 순순히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경찰은 잔혹한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가하였고, 박종철은 끝내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했다. 당시 경찰은 초기 발표에서 고문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라고 사망원인을 발표하였으나, 시체부검 결과 전기고문과 물고문에 의한 살인인 것으로 밝혀졌다.&lt;br /&gt;
&lt;br /&gt;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저 죽음을 응시해주길 바란다. 저 죽음을 끝내 지켜주길 바란다. 저 죽음을 다시 죽이지 말아주길 바란다.''''' &amp;lt;small&amp;gt; - 동아일보 1987년 1월 17일자 김중배 칼럼 중&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사건 진상의 일부가 공개되자 2월 7일 전국 주요 도시에서 &amp;quot;박종철군 범국민추도식&amp;quot; 및 도심 시위가 열렸고 이어 3월 3일에는 &amp;quot;박종철군 49재와 고문추방 국민대행진&amp;quot;과 함께 또 다른 시위가 열렸다. 이후 4월 2일 서울대학교 학부모 130여 명이 ‘건국대학교 사태‘ 등 시국관련 구속학생의 징계철회를 요구하며 철야 농성을 벌였다.&lt;br /&gt;
&lt;br /&gt;
====정부의 개헌논의 유보====&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lt;br /&g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JazJFsgu4oc?si=sOE7w1tz-jKVztC9&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lt;br /&g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그러나 전두환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1987년 4월 13일 [[4.13호헌조치]]라 불리는 ‘대통령 특별담화‘를 발표, 개헌(改憲) 논의를 유보하겠다고 밝혔다. [[4.13호헌조치]]에서 전두환은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와 대통령 선거는 자유 경선의 분위기가 보장되는 가운데 1987년 내에 공정한 선거관리를 통해 차질 없이 실시할 수 있게 모든 노력을 다할것‘이라고 다짐했으며, 또 ‘민정당의 후임 대통령 후보는 조속한 시일 안에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인물 가운데서 당헌 절차와 민주 방식에 따라 전당대회에서 선출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호헌조치‘라는 그 이름대로 현행 헌법에 따라 권력을 이양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국민들의 큰 기대를 얻을 것이라 믿었으나, 기대는 커녕 오히려 반발을 가져오는 요인이 되고 말았다. 곧바로 이튿날인 4월 14일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 등 각계 인사들이, 호헌 조치를 비판하는 시국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정부 최루탄에 의한 [[이한열]] 사망====&lt;br /&gt;
[[파일:이한열.jpg|200px|섬네일|오른쪽|최루탄에 피격당한 후 이종창에게 부축받는 이한열]]&lt;br /&gt;
먼저 1987년 5월 27일 야당과 재야, 종교계 등이 힘을 모아 ‘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여당인 민주정의당에서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6월 10일에 맞춰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6 · 10국민대회]])’를 치르기로 결정하였다. 대학생들은 국본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를 중심으로 6 · 10국민대회에 호응하여 6월 초부터 각 대학별로 연일 집회와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6 · 10국민대회]] 하루 전날인 6월 9일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교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는 곧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학생들은 물론 시민들의 분노가 들끓었다. 이러한 분노 속에서 6 · 10국민대회가 열렸다. 경찰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6 · 10국민대회가 열리는 성공회대성당을 원천 봉쇄하였다. 그 결과 6 · 10국민대회는 대회장에 미리 들어가 있던 소수의 인원만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대회 예정 시간인 오후 6시 이전부터 서울 시내 곳곳에서 대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시민들도 다양한 방식으로 6 · 10국민대회와 학생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날 밤 늦게까지 시위를 벌이던 학생들은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이후 5일 동안 농성을 계속하였다. 애초 계획된 것은 아니었지만 대학생들의 명동성당 농성은 6 · 10국민대회가 단발성 행사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인 저항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lt;br /&gt;
&lt;br /&gt;
====민주항쟁 확산====&lt;br /&gt;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로 개헌하라!'''''   &amp;lt;small&amp;gt;-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제시한 슬로건&amp;lt;/small&amp;gt;&lt;br /&gt;
명동성당 농성을 거치며 항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유월항쟁의 전국화 과정에는 일정한 패턴이 존재하였다. 6월 10일 서울 외에도 전국 주요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위가 벌어졌지만, 15일까지 항쟁의 중심은 6 · 10국민대회와 명동성당 농성이 전개된 서울이었다. 하지만 6월 15일 경부터는 부산, 대전, 진주 등에서 격렬한 시위가 전개되었다. 그러다가 6월 20일부터 대규모 시위가 광주, 전주, 순천, 익산 등 호남 지방으로 옮겨졌다. 6 · 10국민대회 이후 약 20일 동안 전국 곳곳에서 매일 평균 100회 이상의 시위가 동시다발로 벌어졌다. 특히 6월 18일 ‘최루탄추방대회’와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은 전국 곳곳에서 한꺼번에 1백만 명 이상이 참여하였다. 갈수록 참가 지역이 전국 곳곳으로 확산되어 대도시, 중소도시뿐만 아니라 농촌 지역의 군 단위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6월 26일 하루에만 37~38개 시 · 군에서 시위가 동시에 벌어졌다. 유월항쟁에 참가한 연 인원은 400~500만 명으로 추산된다.&lt;br /&gt;
&lt;br /&gt;
반면 유월항쟁의 전국적 동시다발 시위는 경찰 병력을 분산시켰다. 분산된 경찰 병력으로는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거센 시위의 물결을 막아 낼 수 없었다. 경찰이 시위 진압에 최루탄을 남발하면서 최루탄도 점차 고갈되기 시작하였다. 유월항쟁 기간 동안 경찰이 사용한 최루탄만 총 67만 발이 넘었다. 더불어, 전두환 정권이 집권 내내 강조했던 88서울올림픽이 얼마 남지 않아 미국 등 국제사회의 이목이 집중된 상황에서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운동 때처럼 유혈 사태와 대량 학살을 반복하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무엇보다 군대를 동원하더라도 이러한 대규모 시민 항쟁을 진압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결국 경찰력으로 항쟁을 막기 힘들고, 군대 투입도 어렵다고 판단한 전두환 정권은 1987년 6월 29일 ‘ 6 · 29민주화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하였다. 그리고 그동안 의식불명 상태에 있었던 이한열이 7월 5일 끝내 사망하였다. 5일장 후 7월 9일 치러진 이한열의 노제에 100만 명의 인파가 모인 것을 끝으로 약 한 달 동안 지속된 유월항쟁은 마무리되었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1987년 6월항쟁이 '''대통령[[직선제]] 개헌'''이라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이 항쟁에 동참한 학생과 시민들의 요구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제시한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 개헌’이라는 슬로건으로 모아졌기 때문이었다. 유월항쟁은 이러한 민주화 세력의 통합성, 즉 각기 다른 성격과 지향을 가진 여러 주체들이 모두 동의할 수 있는 ‘최소 강령’하에 ‘최대 연합’으로 결집하였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딩잉잉]]:6월민주항쟁 페이지 전체 작성&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기밀문서]]&lt;br /&gt;
[[분류:4.19혁명관련]]&lt;br /&gt;
[[분류:부마항쟁관련]]&lt;br /&gt;
[[분류:5.18민주화운동관련]]&lt;br /&gt;
[[분류:6월민주항쟁관련]]&lt;br /&gt;
[[분류:뎐]]&lt;br /&gt;
[[분류:이나자키로빈]]&lt;br /&gt;
[[분류:호빵이👻]]&lt;br /&gt;
[[분류:•ᴗ•]]&lt;br /&gt;
[[분류:딩잉잉]]&lt;/div&gt;</summary>
		<author><name>딩잉잉</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8%B0%EB%B0%80%EB%AC%B8%EC%84%9C&amp;diff=35916</id>
		<title>기밀문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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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1T16:05:5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딩잉잉: /* 컨텐츠 주제 */&lt;/p&gt;
&lt;hr /&gt;
&lt;div&gt;=='''컨텐츠 주제'''==&lt;br /&gt;
[[파일:이한열사진.jpeg|center]]&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amp;lt;big&amp;gt;'''&amp;lt;span style=&amp;quot;color:#CD0000&amp;quot;&amp;gt;투쟁의 불꽃, 자유의 환호&amp;lt;/span&amp;gt;'''&amp;lt;br/&amp;gt;&lt;br /&gt;
대한민국은 시민들의 피와 땀으로 민주화를 이룩하였습니다.&amp;lt;br/&amp;gt;&lt;br /&gt;
그 역동적인 역사 속에서, 시민은 어둠을 밝히기 위해 힘을 모았고, 억압과 항거의 불꽃은 자유를 외쳤습니다.&amp;lt;br/&amp;gt;&lt;br /&gt;
이 «기밀문서»에는 당시의 투쟁의 열기와 불굴의 의지가 실려있습니다.&amp;lt;br/&amp;gt;&lt;br /&gt;
함께, 그 뜨거운 페이지를 열어보시겠습니까?&amp;lt;/span&amp;gt;&amp;lt;/big&amp;gt;&amp;lt;/div&amp;gt;&lt;br /&gt;
&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이나자키로빈]]&lt;br /&gt;
[[딩잉잉]]&lt;br /&gt;
&lt;br /&gt;
=='''팀원'''==&lt;br /&gt;
*오현지(2022131143) [[뎐]]&amp;lt;br/&amp;gt;&lt;br /&gt;
*김여원(2023130209) [[이나자키로빈]]&amp;lt;br/&amp;gt;&lt;br /&gt;
*김하은(2022131345) [[호빵이👻]]&amp;lt;br/&amp;gt;&lt;br /&gt;
*박정원(2023130350) [[•ᴗ•]]&amp;lt;br/&amp;gt;&lt;br /&gt;
*최필중(2023130216) [[딩잉잉]]&amp;lt;br/&amp;gt;&lt;br /&gt;
&lt;br /&gt;
=='''기획의도'''==&lt;br /&gt;
===기획배경===&lt;br /&gt;
1945년 광복 이후 대한민국 국민들은 자유민주국가로서의 미래를 기대했으나 실상은 그러지 못했다.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보여주듯 현재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는 그것을 누리지 못한 앞선 세대들의 목숨을 바친 항쟁의 대가이다. 민주항쟁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의 핵심 동력이었다. 오늘날 우리나라 민주의식의 중요한 기둥이 되는 네 가지 항쟁을 선별하고 각 항쟁의 배경, 전개과정, 의의를 비롯해 세부적이고 자세한 내용에 대한 기사를 작성한다.&lt;br /&gt;
===기획목적===&lt;br /&gt;
작금의 현실까지 오기에는 수없이 많은 투쟁이 있었지만 4.19혁명, 부마항쟁, 5.18민주항쟁, 6월민주항쟁이라는 네 가지 사건을 살펴보기로 한 것은 가장 많이 다뤄지고, 가장 많이 알려진 사건이기 때문이다. 관련된 사건과 역사 인물들에 대해 자세히 적어 내어 민주항쟁의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지 않으면 알기 힘든 각 민주항쟁의 자세한 내막을 밝혀낸다.&lt;br /&gt;
===기대하는 바===&lt;br /&gt;
타임라인과 온톨로지를 활용해 내용의 전반적인 이해를 돕고 자세한 설명을 통해 사건의 자세한 내막을 들어낸다. 네 가지 항쟁을 각각 큰 목차로 설정하고 세부 기사를 그 내부에 작성해 독자의 관심과 수요에 부합하는 정보를 전달하는 데 효과적일 것으로 기대된다. 민주항쟁에 참여한 사람들의 희생과 투쟁에 대한 존경심을 부르고 역사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다.&lt;br /&gt;
===기여===&lt;br /&gt;
[[뎐]], [[이나자키로빈]], [[호빵이👻]]: 기획의도 페이지 작성&lt;br /&gt;
&lt;br /&gt;
=='''온톨로지'''==&lt;br /&gt;
{{NetworkGraph | title=민주항쟁.lst}}&lt;br /&gt;
[[민주항쟁.lst]]&lt;br /&gt;
===기여===&lt;br /&gt;
*[[뎐]]: 온톨로지 제작&lt;br /&gt;
=='''컨텐츠 구조'''==&lt;br /&gt;
===클래스(Class)===&lt;br /&gt;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color:white&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0%&amp;quot; | 클래스 !! style=&amp;quot;width:40%&amp;quot; | 설명 !! style=&amp;quot;45%&amp;quot; | 노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제||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대표 키워드인 민주항쟁을 주제로서 나타내었다 || 만주항쟁&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항쟁||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민주화운동 시기 발생했던 주요 운동들을 ‘항쟁’이라는 키워드로 분류하였다. || 4.19혁명, 부마항쟁, 5.18 민주화운동, 6월민주항쟁&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사건||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항쟁의 원인, 결과가 되는 사건을 정리하였다|| 3.15부정선거, 고려대 4.18학생시위, 3.15의거, YH사건, 10.26사태, 12.12 군사반란, 비상계엄령,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고문추방민족대행진, 4.13호헌조치, 6.29선언, 대통령직선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지역||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요 항쟁들이 일어났던 지역을 정리하였다|| 마산, 부산, 광주&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인물||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요사건들을 발생시킨 인물, 참여했던 인물을 묶어서 정리하였다|| 이승만, 이기붕, 김주열, 박정희, 김재규, 전두환, 신군부, 시민군, 박종철, 이한열, 노태우&lt;br /&gt;
|-&lt;br /&gt;
|}&lt;br /&gt;
===관계성(Relation)===&lt;br /&gt;
*&amp;lt;font color=#228B22&amp;gt;'''~은 ~에 속한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주요 항쟁들이 민주항쟁에 속함을 나타내거나 인물의 소속을 나타낸다.&lt;br /&gt;
***해당노드:&lt;br /&gt;
***#4.19혁명 -&amp;gt; 민주항쟁&lt;br /&gt;
***#부마항쟁 -&amp;gt; 민주항쟁&lt;br /&gt;
***#5.18민주화운동 -&amp;gt; 민주항쟁&lt;br /&gt;
***#6월 민주항쟁 -&amp;gt; 민주항쟁&lt;br /&gt;
***#전두환 -&amp;gt; 신군부&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의 원인이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어떠한 사건과 인과관계를 이루는 또다른 사건 혹은 인물을 설명한다.&lt;br /&gt;
***#이기붕 -&amp;gt; 3.15부정선거&lt;br /&gt;
***#김주열 -&amp;gt; 고려대 4.18학생시위&lt;br /&gt;
***#고려대 4.18학생시위 -&amp;gt; 4.19혁명&lt;br /&gt;
***#3.15의거 -&amp;gt; 4.19혁명&lt;br /&gt;
***#김주열 -&amp;gt; 4.19혁명&lt;br /&gt;
***#3.15부정선거 -&amp;gt; 3.15의거&lt;br /&gt;
***#YH사건 -&amp;gt; 부마항쟁&lt;br /&gt;
***#부마항쟁 -&amp;gt; 10.26사태&lt;br /&gt;
***#박정희 -&amp;gt; 10.26사태&lt;br /&gt;
***#비상계엄령 -&amp;gt; 5.18민주화운동&lt;br /&gt;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 -&amp;gt; 고문추방민족대행진&lt;br /&gt;
***#고문추방민족대행진 -&amp;gt; 4.13호헌조치&lt;br /&gt;
***#4.13호헌조치 -&amp;gt; 6월민주항쟁&lt;br /&gt;
***#6월민주항쟁 -&amp;gt; 6.29선언&lt;br /&gt;
***#6월민주항쟁 -&amp;gt; 대통령직선제&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을 발생시켰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사건과 그 사건을 직접적으로 발생시킨 인물을 연결한다.&lt;br /&gt;
***#이승만 -&amp;gt; 3.15부정선거&lt;br /&gt;
***#김재규 -&amp;gt; 10.26사태&lt;br /&gt;
***#신군부 -&amp;gt; 1212군사반란&lt;br /&gt;
***#전두환 -&amp;gt; 비상계엄령&lt;br /&gt;
***#노태우 -&amp;gt; 6.29선언&lt;br /&gt;
***#시민군 -&amp;gt; 5.18민주화운동&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에 희생되었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민주항쟁의 진압과정 등 에서 희생된 인물을 설명한다&lt;br /&gt;
***#김주열 -&amp;gt; 3.15의거&lt;br /&gt;
***#이한열 -&amp;gt; 6월 민주항쟁&lt;br /&gt;
***#박종철&amp;gt;박종철 고문치사 사건&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에서 발생했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설명한다.&lt;br /&gt;
***#3.15의거 -&amp;gt; 마산&lt;br /&gt;
***#부마항쟁 -&amp;gt; 부산&lt;br /&gt;
***#부마항쟁 -&amp;gt; 마산&lt;br /&gt;
***#5.18민주화운동 -&amp;gt; 광주&lt;br /&gt;
===기여===&lt;br /&gt;
*[[뎐]]: 컨텐츠 구조 페이지 작성&lt;br /&gt;
=='''4.19혁명'''==&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VPp4BmfDSv8VA2-oC-VATHzUYgadaiaQ9AlWXYiaiVk&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원인===&lt;br /&gt;
====[[3.15 부정선거]]====&lt;br /&gt;
[[파일:3.15부정선거_개표_모습.png|300픽셀|섬네일|오른쪽|3.15부정선거 당시 개표하는 사진&amp;lt;ref&amp;gt;사진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amp;lt;/ref&amp;gt;]]&lt;br /&gt;
1959년 대한민국은 제 4대 대통령 선거와 제 5대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당시 자유당에서는 12년째 대통령으로서 연임 중이던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이기붕]]'''을 부통령 후보로 선임하였다. 그러나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병세의 악화로 사망하게 되고,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은 확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선거의 초점은 자유당의 조병옥과 민주당의 장면 간의 선거전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본격적인 선거유세의 시작과 함께 정부와 여당의 잇따른 야당선거운동 방해사건으로 부정선거가 시작되었다. 1960년 3월 15일 선거가 시작된 이후에도 다양한 방법의 부정행위가 일어났고, 개표 결과 이승만과 이기붕의 득표가 100%에 육박하는 결과로 나오자 자유당은 득표수를 하향 조정해 최종 집계에 반영할 것을 지시했다. 결국 이승만 88.7%, 이기붕 79%의 득표율을 가지며 정, 부통령에 당선되었다.&amp;lt;ref&amp;gt;자세한 내용은 3.15부정선거 페이지 참조&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부정선거 반대시위, [[3.15 의거]]의 발생====&lt;br /&gt;
3.15 부정선거를 반대하는 시위는 초기에는 중, 고등학생들의 산발적인 시위로 전개되었다. 3월 15일 선거일 밤 경남 마산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으며,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여 1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amp;lt;br/&amp;gt;&lt;br /&gt;
3월 15일 실종되었던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4월 11일 마산부두에서 발견되자 마산 시민들은 시청, 파출소 등을 파괴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2차 시위가 일어난 것이다.&lt;br /&gt;
&lt;br /&gt;
====[[고려대학교 4.18 학생시위]]의 발생====&lt;br /&gt;
1, 2차 마산시위를 계기로 부정선거 무효와 이승만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났다. 이들은 '4.18 선언문'을 낭독하고 시내로 진출하였다. 이는 4월 19일 학생들과 일반 시민들이 가세한 대규모 시위로 이어지게 되었다.&lt;br /&gt;
====전국적인 4.19 혁명의 발생====&lt;br /&gt;
분노한 전국의 시민과 학생들이 다음 날인 4월 19일에 '이승만 하야와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며 대규모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경찰은 또다시 무차별 발포에 나섰고,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지만 이러한 압박에도 시민들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lt;br /&gt;
====이승만 대통령의 혼란 수습 시도====&lt;br /&gt;
이승만 대통령은 4.19 시위로 인한 정국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4월 20일 국무위원 전원과 자유당 당무위원 전원의 사표를 제출하도록 지시하였으며, 4월 23일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외무장관에 허정, 내무장관에 이호, 법무장관에 권승렬을 임명하는 등 개각을 단행하였다.&amp;lt;br/&amp;gt;&lt;br /&gt;
그러나 미국은 4.19직후 국무부 성명을 통해 한국에서 발생한 사태는 부정선거에 대한 '군중의 불만'을 반영한 것 이라고 했고, 양유찬 주미대사를 불러 '부정선거에 대한 철저한 조사', '경향신문 복간', '국가보안법 개정' 등을 촉구하는 각서를 전달하였다.&amp;lt;br/&amp;gt;&lt;br /&gt;
그리고 4월 25일, 이승만 정권에 분노한 전국 27개 대학 258명의 교수가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 모여 14개항의 시국 선언문을 발표하며 학생, 시민들과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들은 3.15 부정선거 및 4.19 사태의 책임을 지고 대통령이 물러날 것을 주장하였으며, &amp;quot;학생들의 피에 보답하자&amp;quot;는 플랜 카드를 앞세워 국회의사당까지 행진하였다. &lt;br /&gt;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lt;br /&gt;
무력 진압에도 대규모 시위가 이어지며 시민들은 완강하게 투쟁하였다. 4월 26일 시위대가 경무대로 다시 집결하는 등 사태가 심각하게 진행되자, 오전 10시 30분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 성명을 발표하였다. 4월 27일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하며 대통령직을 하야하고 하와이로 망명하였으며 자유당 정권도 끝나게 된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우리 국민들, 특히 학생과 청년들의 주도로 이루어진 4.19 혁명은 학생과 일반 대중이 단결하여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아시아 최초의 시건이다. 4.19혁명은 부마항쟁, 5.18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그리고 2017년 촛불시위에 이르기 까지 정권에 대항하는 국민들이 단합을 이루는 초석이 되었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도 시민 저항권에 대한 근거로써 4.19혁명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문구가 있다.&lt;br /&gt;
===기여===&lt;br /&gt;
[[뎐]]: 4.19혁명 페이지 원인, 의의 작성 &lt;br /&gt;
&lt;br /&gt;
[[•ᴗ•]]: 4.19혁명 페이지 전개 작성&lt;br /&gt;
&lt;br /&gt;
=='''부마항쟁'''==&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bK7zjpPvBsC7rFRPmsiHCUYhyWt2VXOv8SYyaBTND4Y&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원인===&lt;br /&gt;
====[[유신 헌법]]과 [[긴급조치]]====&lt;br /&gt;
1971년 선거에서 김대중을 누르고 대통령에 3선된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해 국회 해산,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등 법의 일부 기능을 정지시키고 전국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했다.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된 이른바 유신헌법에 의해 제정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법」 에 의거해 박정희가 제8대 대통령으로 재차 당선되었고, 이 유신 헌법이 발효된 기간을 유신 체제라고 부른다. 유신 체제는 행정, 입법, 사법의 3권을 모두 쥔 대통령이 종신 집권할 수 있도록 설계된 1인 대통령제였다. 박정희는 유신 헌법에 의거해 대통령의 권한으로 취할 수 있었던 특별조치인 긴급조치를 선포함으로써 헌법에 반대하는 시위 및 운동과 방송, 언론 활동을 하는 반정부 인사들을 연행, 체포, 고문하는 등 억압을 가했다.&lt;br /&gt;
&lt;br /&gt;
====한국경제의 위기====&lt;br /&gt;
1970년대 말 한국경제는''' [[오일쇼크]]'''라는 세계경제의 위기와 결합해 가라앉고 말았다. 경제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정부는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과 함께 '''[[경제안정화정책]]'''을 수용했고, 중소자본가, 봉급생활자, 도시 노동자와 농민 등에 안정화 비용을 부과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이와 같은 안정화 정책은 경제위기로 어려운 처지에 있던 중소기업들의 도산을 가속하여 기업 부도율이 치솟고 하층민들을 더 깊은 고통에 몰아넣었다. 특히 '''부가가치세'''를 도입한 이후 물가가 상승하면서 일상에 타격을 주었으며, 노동집약적 제조업이 집중되었던 부산과 마산에서는 상황이 더욱 심각하여 1979년 부산 지역 부도율은 서울의 3배에 달했다.&lt;br /&gt;
&lt;br /&gt;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lt;br /&gt;
한 시대의 대격변을 예고하는 단초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시작됐다. 1979년 8월 9일 오전, 신민당의 당사 4층 강당에서는 봉제업체인 YH무역주식회사의 여성노동자 200여명이 기업주의 폐업에 반발하여 폐업조치 철회 농성을 벌였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인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신민당이 당사 건물을 내준 것이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폭력을 동원하여 농성을 해산시켰다. 결국 이 사건은 노동 탄압 사건을 넘어선 야당에 대한 정치 탄압 사건으로 발전하였다.&lt;br /&gt;
&lt;br /&gt;
이날 경찰은 1000여명의 진압대원을 신민당사로 난입시켜 농성을 하고 있던 174명의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로 밖으로 끌어냈다. 또한 경찰은 총재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김영삼 총재와 당 간부들을 끌어내면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박정희 정권은 이 노동자 농성 사건을 빌미로 신민당 분열공작을 시도하였다. 유신정권과 비밀리에 결탁한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 3명이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 부총재 전원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접수시켰다. 그리고 법원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신민당 총재단의 직무 집행을 정지시키고 박정희 정권의 꼭두각시를 총재직무대행으로 선임하였다.&lt;br /&gt;
&lt;br /&gt;
아울러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의 동교동 자택을 전면 봉쇄하였고,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에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끊으라고 요구한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즈』 회견내용을 “반헌정적, 반민족적 작태”로 몰아서 국회에 징계 동의안을 제출했다. 10월 4일 오후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의원 159명은 여당 총회장에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제명 결의안을 '''기습적으로''' 처리해 버렸다. 노사분규 사태로 시작된 사건이 제1야당 당수의 의원직 제명으로 확대된 정치적 사태를 지켜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유신체제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이 고조되었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유신 철폐, 독재 타도!'''''   &amp;lt;small&amp;gt;-10.16 부마항쟁 당시 시위대의 구호&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부산대학교 민주선언문, 학생 시위에서 시민항쟁으로====&lt;br /&gt;
[[파일:부산시위대.jpg|250px|섬네일|오른쪽|광복동을 지나는 시위 행렬]]&lt;br /&gt;
1979년 10월 16일 아침 10시 부산대학교 구내 도서관 앞에서 약 500명의 학생들이 모여 “유신정권 물러가라”, “정치탄압 중지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반정부 시위를 벌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민주선언문」]]'''을 통해 민주화, 언론 자유, 인권 보장의 신념을 확인하고, “제도화된 폭력성과 조직적 악의 근원인 유신헌법과 독재집권층의 퇴진만이 5천 만 겨레의 통일의 첫걸음이라고 주장하면서 형제의 피를 요구하는 자유와 민주의 깃발을 우리가 잡고 반민주의 무리, 불의의 무리들을 향해 외치며 나아가자”라고 선언하였다. 이후 학생들은 교문을 나가 거리에서 시위했다. 이때 학생 수는 약 5,000명으로 불어나 있었고, 광복동과 남포동 등 부산시내 중심가까지 진출해 애국가 등의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며, 이를 제지하려는 경찰과 이곳저곳에서 충돌하였다. 비슷한 시간, 부산 동아대학교에서도 1,000여 명의 학생이 부산대학교 학생과 합류하여 가두시위를 벌였다. 부산대학교 데모로 학생 수백 명이 연행되고 100여 명이 다쳤지만 이튿날인 10월 17일에는 시위가 더욱 격화되어 학생들뿐만 아니라 다수의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학생 시위는 점차 시민항쟁의 양상을 띠어갔다.''' 밤늦게까지 계속된 시위에서 시민들은 충무파출소, 한국방송공사, 서구청, 부산세무서 등을 파괴하였고, 경찰차량을 불태우거나 파손시켰다.&lt;br /&gt;
&lt;br /&gt;
====마산의 시민항쟁====&lt;br /&gt;
&lt;br /&gt;
민주항쟁은 18일에 마산으로 확산되었다. 늦은 오후에는 1,000여 명의 경남대학교 학생들이 마산 시내 번화가에 산발적으로 집결했으며, 일부시민들도 가담해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어두워진 다음 학생과 시민들의 데모는 격화되어 파출소, 공화당사, 방송국, 신문사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파괴하였다. 이튿날인 19일에는 시위가 더욱 치열해져 마산 시내는 한때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저녁 8시경, 시위대는 경남대학과 마산대학&amp;lt;ref&amp;gt;1985년 창원대학으로 교명이 변경되었으며, 현재의 마산대학교와 다르다.&amp;lt;/ref&amp;gt;, 그리고 고등학생까지 합세하여 약 8,000명에 이르렀으며, 시내 곳곳에서 몽둥이를 들고 동사무소와 파출소로 몰려가 시설을 파괴하였고, 경찰차량에 불을 질렀다.&lt;br /&gt;
&lt;br /&gt;
====부산 계엄령, 마산 위수령====&lt;br /&gt;
[[파일:계엄포고문.jpg|270px|섬네일|왼쪽|부산지역에 내려진 계엄포고문을 읽고 있는 시민들]]&lt;br /&gt;
부산대학교 시위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박정희 정부는 학생 시위로 시작된 시위가 대규모 시민항쟁으로 사태가 심상치 않게 확대되어가자 강경책으로 대응했다. 정부는 18일 자정을 기해 '''부산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동원한 과격한 진압'''을 통해 시위 참여자들과 이를 방조한 일반 시민들까지 1,058명을 연행하고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으며, 부산지구 계엄사령부는 각 대학 휴교조처와 야간통행금지시간을 2시간 연장하는 등의 항이 담긴 포고문을 발표했다.&lt;br /&gt;
&lt;br /&gt;
부산에 계엄령이 선포된 이튿날인 19일에 마산 시위가 확대됨에 따라 그 다음날인 10월 20일 정오, 정부가 '''마산 및 창원 지역에 위수령을 발령'''해 통행금지 시간이 연장되고, 경남대학 등에는 휴교조처가 취해졌으며, 24일에는 깡패를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132명을 검거, 23명을 구속했다. 이렇게 '''표면적으로는 부마민주항쟁이 단시간에 진압되는 듯 보였지만, 항쟁은 이미 유신체제의 균열을 불러오고 있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항쟁의 전개 과정에서 볼 수 있듯, 부마민주항쟁에서 특징적인 것은 먼저 시위대의 가장 큰 분노의 대상이 공화당사와 경찰·파출소였다는 점, 다음으로는 “부가가치세를 철폐하라”, “잘 먹고 잘 살아라”등의 구호에서 드러나듯이 세무서에 대한 공격, 그리고 신문사와 방송국에 대한 공격을 들 수 있다.&lt;br /&gt;
&lt;br /&gt;
부마민주항쟁은 1970년대 유신체제 밑에서 쌓였던 침묵하는 언론, 조세, 시민을 억압하는 경찰에 대한 불만 등 정치·사회·경제·문화·종교 등 각 부문에 걸친 여러 모순의 폭발이었고, 헌법 개정과 긴급조치로 겨우 유지되던 유신체제와 박정희 정권의 붕괴를 촉진시킨 결정적인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10.26사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또한 이 사건은 1980년 5월 18일의 광주 민주화운동과 1987년 6월 민주항쟁에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된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억눌린 우리 역사&amp;lt;/br&amp;gt;터져나온 분노&amp;lt;/br&amp;gt;매운 연기 칼바람에도&amp;lt;/br&amp;gt;함성소리 드높았던&amp;lt;/br&amp;gt;동트는 새벽벌&amp;lt;/br&amp;gt;시월이 오면&amp;lt;/br&amp;gt;핏발 선 가슴마다&amp;lt;/br&amp;gt;살아오는 십 일육&amp;lt;/br&amp;gt;동지여 전진하자&amp;lt;/br&amp;gt;깨치고 나가자&amp;lt;/br&amp;gt;뜨거운 가슴으로&amp;lt;/br&amp;gt;빛나는 내일로'''''&amp;lt;/br&amp;gt;&amp;lt;small&amp;gt;-'''부산대학교''' 새벽벌도서관 10.16 기념비&amp;lt;/small&amp;gt;&amp;lt;/div&amp;gt;&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호빵이👻]]: 부마항쟁 페이지 전체 작성&amp;lt;/br&amp;gt;&lt;br /&gt;
[[이나자키로빈]]: 부마항쟁 원인 중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 작성&lt;br /&gt;
&lt;br /&gt;
=='''5.18민주화운동'''==&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AMetwTuXYHTCXINqr7ZJpzO5CHFEMQO5-Uqau51RkXA&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원인===&lt;br /&gt;
====유신체제의 붕괴====&lt;br /&gt;
&lt;br /&gt;
[[파일:김재규.jpg|섬네일|오른쪽|암살 당시 상황을 재현하는 김재규]]&lt;br /&gt;
&lt;br /&gt;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amp;lt;small&amp;gt; - 김재규&amp;lt;/small&amp;gt;&lt;br /&gt;
1979년 10월 4일 신민당 총재 김영삼이 국회에서 의원직을 제명당하자 10월 15부터 10월 20까지 부산 · 마산 등지에서는 부마항쟁이 일어났고, 이의 해결을 둘러싼 노선대립으로 갈등 중 10월 26일 &amp;lt;ins&amp;gt;[[김재규]]&amp;lt;/ins&amp;gt;가 박정희를 살해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ins&amp;gt;[[10.26 사태]]&amp;lt;/ins&amp;gt;의 사후 수습과정에서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을 중심으로 신군부 세력이 부상하였으며, 이들은 &amp;lt;ins&amp;gt;[[12.12 사건]]&amp;lt;/ins&amp;gt;의 하극상을 통하여 군부를 장악하였다. 1980년 2월 29일 김대중 등이 복권되었으나 그 해 봄, 신군부는 최규하 과도 정부를 유명무실하게 하고 국민들이 요구하는 민주주의와 이를 위한 명확한 정치일정 제시를 거부하면서 권력기반을 구축하였다.&lt;br /&gt;
&lt;br /&gt;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lt;br /&gt;
한 시대의 대격변을 예고하는 단초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시작됐다. 1979년 8월 9일 오전, 신민당의 당사 4층 강당에서는 봉제업체인 YH무역주식회사의 여성노동자 200여명이 기업주의 폐업에 반발하여 폐업조치 철회 농성을 벌였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인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신민당이 당사 건물을 내준 것이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폭력을 동원하여 농성을 해산시켰다. 결국 이 사건은 노동 탄압 사건을 넘어선 야당에 대한 정치 탄압 사건으로 발전하였다.&lt;br /&gt;
&lt;br /&gt;
이날 경찰은 1000여명의 진압대원을 신민당사로 난입시켜 농성을 하고 있던 174명의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로 밖으로 끌어냈다. 또한 경찰은 총재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김영삼 총재와 당 간부들을 끌어내면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박정희 정권은 이 노동자 농성 사건을 빌미로 신민당 분열공작을 시도하였다. 유신정권과 비밀리에 결탁한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 3명이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 부총재 전원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접수시켰다. 그리고 법원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신민당 총재단의 직무 집행을 정지시키고 박정희 정권의 꼭두각시를 총재직무대행으로 선임하였다.&lt;br /&gt;
&lt;br /&gt;
아울러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의 동교동 자택을 전면 봉쇄하였고,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에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끊으라고 요구한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즈』 회견내용을 “반헌정적, 반민족적 작태”로 몰아서 국회에 징계 동의안을 제출했다. 10월 4일 오후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의원 159명은 여당 총회장에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제명 결의안을 '''기습적으로''' 처리해 버렸다.&lt;br /&gt;
&lt;br /&gt;
노사분규 사태로 시작된 사건이 제1야당 당수의 의원직 제명으로 확대된 정치적 사태를 지켜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유신체제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이 고조되었다. 또한 이 사건은 그동안 다소 주춤하던 대학가에 반유신 반독재 운동의 열기가 다시 확산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청춘을 바쳐, 학생 운동====&lt;br /&gt;
&lt;br /&gt;
[[파일:서울의_봄.JPG|섬네일|오른쪽|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앞에 모인 시위대]]&lt;br /&gt;
&lt;br /&gt;
군부의 재집권 야욕에 대한 국민적 저항은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표출되었다. 1980년 3월, 서울대 총학생회 출범을 시작으로 4월 초순에는 전국의 주요 대학들이 총학생회를 결성하기 시작하였다. 대학별로 독재 정권에 아부했던 어용교수와 족벌사학 퇴진 운동을 벌였고, 특히 병영집체훈련(당시 대학 신입생들은 의무적으로 군부대에 10일 간 입대하여 각종 군사훈련을 이수해야 했다.) 거부가 주요 이슈로 전면 등장했다. 각 대학의 병영집체훈련 거부운동이 본격화되고 전국적인 쟁점으로 떠오르자 신군부는 신문, 방송을 통해 ‘학생들의 안보의식 결여’를 비난하고 교내 시위·농성을 집중적으로 보도하게 했다.  5월 1일에 서울대가 입영훈련 거부투쟁 철회를 결정하고 ‘계엄령 해제’와 ‘유신잔당 퇴진’, ‘정부개헌중단’과 ‘노동 3권 보장’ 등을 요구하기 시작하면서 대학가는 이제까지의 학내 문제 중심의 운동에서 정치개혁을 위한 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그간 정부와 대학 간에 팽팽하게 유지되던 긴장 관계는 폭발 직전으로 내닫게 된 것이다.&lt;br /&gt;
&lt;br /&gt;
약 열흘 간의 대정부 투쟁을 준비한 대학가는 5월 10일 고려대 총학생회장실에서 열린 ‘총학생회장단 회의’에 참석한 전국 23개 대학 대표들은 ‘비상계엄의 즉각 해제’와 ‘전두환, 신현확 등 유신잔당 퇴진’ 등을 결의하고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정세에 대한 공동대처 방안을 마련했다. 이후 5월 13일부터 5월 14일에 걸쳐 서울 · 부산 · 대구 · 광주 등 37개 대학에서 계엄철폐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5월 15일에는 서울역에서 시위가 발생하는 등 학생시위는 서울시가지를 거의 마비시키는 등 야간까지 지속되어 사태가 절정에 달하면서 신군부 세력을 위협하였다. 5월 16일 24개 대학 학생대표들은 당분간 시국의 추이를 관망하기로 결정하고 가두시위를 중단하면서 소강상태에 돌입하는 듯하였다.&lt;br /&gt;
&lt;br /&gt;
====1980년 봄의 광주====&lt;br /&gt;
5월 17일 신군부 세력이 이전까지는 제주도를 제외한 지역에 한정되었던 비상계엄을 전국에 확대하는 조치인 계엄포고 10호(17일 24시에 발효: 각 대학 휴교령 포함)를 밤 9시 40분에 의결하고 밤 11시 40분에 발표하면서 밤 11시를 전후한 시점부터 김대중 · 김종필이 연행되는 등 권력형 부정축재자 및 소요조종 혐의자, 학생 시위 주동자가 체포되었다. 이날 밤 광주지역의 사회운동·학생운동의 지도자도 상당수가 검거되었다. 광주의 검거대상자는 전남대 12명, 조선대 10명 등 총 22명이었다. 전남에서 계엄합동수사단은 광주505보안대가 중심이고, 중앙정보부, 경찰 등이 보조역할을 했다. 전남 계엄합동수사단은 22대 차량과 86명의 인원이 출동해 정동년 등 복적생들과 대학의 총학생회 간부들을 집중 검거했다.&lt;br /&gt;
&lt;br /&gt;
한편 육군본부는 14일 오전 7시55분에 국가 중요 보안목표와 주요대학에 군 병력 배치 명령을 하달했다. 이 명령에 따라 전남북계엄분소장인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광주 시내 주요 시설물에 이날 오후부터 계엄병력을 배치했다. 31사단 96연대 병력이 광주시내 KBS건물에 42명, MBC 21명, CBS 11명, VOC(전일방송) 11명 등 주요 방송사 건물에 배치돼 경비에 들어간 것이다.&lt;br /&gt;
&lt;br /&gt;
이날 오후 전교사령관은 7공수여단의 광주배치에 따른 수송수단 지원도 미리 협의했다. 그리고 5월 8일부터 16일 사이에 공수부대 수뇌부들도 헬기를 타고 서울에서 내려와 광주 상무대의 전투병과교육사령부를 방문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광주에서 시위가 격화되면 즉각적으로 최정예 군부대를 동원해서 진압할 준비를 철저하게 갖추고 있었다. 5월 18일에 시작된 광주의 비극은 그 이전에 이미 시한폭탄처럼 준비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lt;br /&gt;
{{구글지도 | 위도=35.175961433346885 | 경도=126.90865311973532 | 줌=13 }}  [[파일:금남로.JPG|섬네일|오른쪽|금남로 앞에 집결한 버스와 시민군]]&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18일&amp;lt;/span&amp;gt;&lt;br /&gt;
휴교령이 내려질 경우 교문 앞에서 집결한다는 결의에 따라 학생들은 5월 18일 오전 전남대학교 앞에 모였다. 공수부대원들이 전남대 앞 시위를 저지하자 대학생들은 광주역에 재집결해서 시위를 이어갔다. 시위대가 점차 늘어나면서 공수부대원이 시내에서 시위진압에 나섰으며 18일 오후 1시부터 무차별 진압작전이 이루어져 부상자가 속출하였다.&lt;br /&gt;
&lt;br /&gt;
군인들이 금남로 등 시내 중심가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이나 여자를 마구 구타하고 짓밟으며 찌르는 등의 잔혹 행동을 하자 시민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이에 시위대는 오후 4시 이후 파출소 파괴 등 적극공세에 나섰다. '''계엄군의 과잉 무력진압은 시위를 해산시키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오히려 시민들을 단결시켰으며, 결국 19일 시민 · 학생 연대가 발생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lt;br /&gt;
&lt;br /&gt;
 '''''광주 애국 시민 여러분! 이것이 웬 말입니까? 웬 벼락이란 말입니까? 죄 없는 학생들을 총칼로 찔러 죽이고 몽둥이로 두들겨 트럭으로 실어가며 부녀자를 발가벗겨 총칼로 찌르는 놈들이 이 누구란 말입니까? 이제 우리가 살길은 전시민이 하나로 뭉쳐 청년 학생들을 보호하고 유신잔당과 극악무도한 살인마 전두환 일파와 공수 특전단 놈들을 한놈도 남김없이 쳐부수는 길 뿐입니다. 우리는 이제 다 보았습니다. 다 알게 되었읍니다. 왜 학생들이 그토록 소리 높이 외쳤는가를, 우리의 적은 경찰도 군대도 아닙니다. 우리의 적은 전국민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바로 유신잔당과 전두환 일파 그놈들입니다.''''' &amp;lt;small&amp;gt; - 1980년 5월 19일에 '광주시민민주투쟁회'명의의 호소문&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19일&amp;lt;/span&amp;gt;&lt;br /&gt;
19일 오전에는 일시적 소강상태였으나 오후 들어서 분노한 학생 · 시민들이 군 · 경찰과 공방전을 벌이면서 시위는 점차 격화되었다. '''시민들은 공포감에서 벗어나 자신의 생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단순한 학생시위에서 시민봉기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계엄군은 시위대를 포위하여 구타하였으며 일부 고등학생까지 포함된 시위대는 돌과 화염병으로 저항하였고 파출소와 방송국 등에 침입하였다. 뒤처진 공수부대를 공격하거나 고립된 차량을 포위하기도 하였으며 총과 방패를 빼앗기도 하였고, 오후 4시 50분 시민들에게 포위된 계엄군의 장갑차에서 최초의 발포가 있었다. 19일 밤비가 내리는 가운데 시위가 산발적으로 계속되었으며, 20일 오전 비가 그치고 대규모 시위는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오후부터 다시 시작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20일&amp;lt;/span&amp;gt;&lt;br /&gt;
'''20일 오후 6시부터 택시와 버스 운전 기사들이 광주역과 무등경기장에 모여 대형 버스와 트럭을 앞세우고 일시에 금남로에 집결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들을 앞세운 시위는 계엄군을 몰아내는 데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였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5.18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에 &amp;lt;ins&amp;gt;[[지대한 영향]]&amp;lt;/ins&amp;gt;을 끼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학생 운동에 뛰어든 많은 대학생들은 대학교에 들어와서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의 실상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아 학생 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군부정권은 5.18 이후로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다. 전두환은 김대중 등에게 '광주 사태'의 책임을 물어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했고,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 선언을 한 직후, 8월 27일 소위 체육관 선거를 통해 전두환은 대통령 자리를 탈취했다.&lt;br /&gt;
&lt;br /&gt;
지역적인 면에서는 '''광주광역시를 비롯한 전라도 지역의 트라우마'''로 작용해 이후의 민주정의당 및 &amp;lt;ins&amp;gt;[[3당 합당]]&amp;lt;/ins&amp;gt;으로 이어지는 보수 세력에 대해 적대심을 가지고, 민주당계 정당의 표밭이 되는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미 박정희 정부 시절부터 유무형의 정치적인 차별을 받고 있었지만 5.18의 참상은 전라도가 다시는 보수 세력을 지지하지 않게 만들 정도로 심각한 사건이며 호남소외론의 가장 결정적인 명분이 되었다.&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이나자키로빈]]: 5.18 민주화운동 페이지 전체 작성&lt;br /&gt;
&lt;br /&gt;
=='''6월민주항쟁'''==&lt;br /&gt;
===타임라인===&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src='https://cdn.knightlab.com/libs/timeline3/latest/embed/index.html?source=1NnXWs5RMTIf-6DOEu9_rX2k4mgzUk1AQHYneCuwXN1Q&amp;amp;font=Default&amp;amp;lang=en&amp;amp;initial_zoom=2&amp;amp;height=650' width='100%' height='65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 frameborder='0'&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원인===&lt;br /&gt;
====[[박종철고문치사사건]]====&lt;br /&gt;
&lt;br /&gt;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박종철은 1987년 1월 13일 자정 경 하숙집에서 치안본부(現 경찰청)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게 연행되었다.‘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이자 ‘민주화추진위원회’ 지도위원으로 수배 받고 있었던 박종운을 잡기위해 연행한 것이었다. 취조실로 연행해간 공안 당국은 박종철에게 박종운의 소재를 물었으나, 박종철은 순순히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경찰은 잔혹한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가하였고, 박종철은 끝내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했다. 당시 경찰은 초기 발표에서 고문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라고 사망원인을 발표하였으나, 시체부검 결과 전기고문과 물고문에 의한 살인인 것으로 밝혀졌다.&lt;br /&gt;
&lt;br /&gt;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저 죽음을 응시해주길 바란다. 저 죽음을 끝내 지켜주길 바란다. 저 죽음을 다시 죽이지 말아주길 바란다.''''' &amp;lt;small&amp;gt; - 동아일보 1987년 1월 17일자 김중배 칼럼 중&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사건 진상의 일부가 공개되자 2월 7일 전국 주요 도시에서 &amp;quot;박종철군 범국민추도식&amp;quot; 및 도심 시위가 열렸고 이어 3월 3일에는 &amp;quot;박종철군 49재와 고문추방 국민대행진&amp;quot;과 함께 또 다른 시위가 열렸다. 이후 4월 2일 서울대학교 학부모 130여 명이 ‘건국대학교 사태‘ 등 시국관련 구속학생의 징계철회를 요구하며 철야 농성을 벌였다.&lt;br /&gt;
&lt;br /&gt;
====정부의 개헌논의 유보====&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lt;br /&g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JazJFsgu4oc?si=sOE7w1tz-jKVztC9&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lt;br /&g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그러나 전두환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1987년 4월 13일 [[4.13호헌조치]]라 불리는 ‘대통령 특별담화‘를 발표, 개헌(改憲) 논의를 유보하겠다고 밝혔다. [[4.13호헌조치]]에서 전두환은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와 대통령 선거는 자유 경선의 분위기가 보장되는 가운데 1987년 내에 공정한 선거관리를 통해 차질 없이 실시할 수 있게 모든 노력을 다할것‘이라고 다짐했으며, 또 ‘민정당의 후임 대통령 후보는 조속한 시일 안에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인물 가운데서 당헌 절차와 민주 방식에 따라 전당대회에서 선출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호헌조치‘라는 그 이름대로 현행 헌법에 따라 권력을 이양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국민들의 큰 기대를 얻을 것이라 믿었으나, 기대는 커녕 오히려 반발을 가져오는 요인이 되고 말았다. 곧바로 이튿날인 4월 14일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 등 각계 인사들이, 호헌 조치를 비판하는 시국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정부 최루탄에 의한 [[이한열]] 사망====&lt;br /&gt;
[[파일:이한열.jpg|200px|섬네일|오른쪽|최루탄에 피격당한 후 이종창에게 부축받는 이한열]]&lt;br /&gt;
먼저 1987년 5월 27일 야당과 재야, 종교계 등이 힘을 모아 ‘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여당인 민주정의당에서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6월 10일에 맞춰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6 · 10국민대회]])’를 치르기로 결정하였다. 대학생들은 국본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를 중심으로 6 · 10국민대회에 호응하여 6월 초부터 각 대학별로 연일 집회와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6 · 10국민대회]] 하루 전날인 6월 9일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교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는 곧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학생들은 물론 시민들의 분노가 들끓었다. 이러한 분노 속에서 6 · 10국민대회가 열렸다. 경찰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6 · 10국민대회가 열리는 성공회대성당을 원천 봉쇄하였다. 그 결과 6 · 10국민대회는 대회장에 미리 들어가 있던 소수의 인원만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대회 예정 시간인 오후 6시 이전부터 서울 시내 곳곳에서 대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시민들도 다양한 방식으로 6 · 10국민대회와 학생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날 밤 늦게까지 시위를 벌이던 학생들은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이후 5일 동안 농성을 계속하였다. 애초 계획된 것은 아니었지만 대학생들의 명동성당 농성은 6 · 10국민대회가 단발성 행사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인 저항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lt;br /&gt;
&lt;br /&gt;
====민주항쟁 확산====&lt;br /&gt;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로 개헌하라!'''''   &amp;lt;small&amp;gt;-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제시한 슬로건&amp;lt;/small&amp;gt;&lt;br /&gt;
명동성당 농성을 거치며 항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유월항쟁의 전국화 과정에는 일정한 패턴이 존재하였다. 6월 10일 서울 외에도 전국 주요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위가 벌어졌지만, 15일까지 항쟁의 중심은 6 · 10국민대회와 명동성당 농성이 전개된 서울이었다. 하지만 6월 15일 경부터는 부산, 대전, 진주 등에서 격렬한 시위가 전개되었다. 그러다가 6월 20일부터 대규모 시위가 광주, 전주, 순천, 익산 등 호남 지방으로 옮겨졌다. 6 · 10국민대회 이후 약 20일 동안 전국 곳곳에서 매일 평균 100회 이상의 시위가 동시다발로 벌어졌다. 특히 6월 18일 ‘최루탄추방대회’와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은 전국 곳곳에서 한꺼번에 1백만 명 이상이 참여하였다. 갈수록 참가 지역이 전국 곳곳으로 확산되어 대도시, 중소도시뿐만 아니라 농촌 지역의 군 단위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6월 26일 하루에만 37~38개 시 · 군에서 시위가 동시에 벌어졌다. 유월항쟁에 참가한 연 인원은 400~500만 명으로 추산된다.&lt;br /&gt;
&lt;br /&gt;
반면 유월항쟁의 전국적 동시다발 시위는 경찰 병력을 분산시켰다. 분산된 경찰 병력으로는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거센 시위의 물결을 막아 낼 수 없었다. 경찰이 시위 진압에 최루탄을 남발하면서 최루탄도 점차 고갈되기 시작하였다. 유월항쟁 기간 동안 경찰이 사용한 최루탄만 총 67만 발이 넘었다. 더불어, 전두환 정권이 집권 내내 강조했던 88서울올림픽이 얼마 남지 않아 미국 등 국제사회의 이목이 집중된 상황에서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운동 때처럼 유혈 사태와 대량 학살을 반복하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무엇보다 군대를 동원하더라도 이러한 대규모 시민 항쟁을 진압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결국 경찰력으로 항쟁을 막기 힘들고, 군대 투입도 어렵다고 판단한 전두환 정권은 1987년 6월 29일 ‘ 6 · 29민주화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하였다. 그리고 그동안 의식불명 상태에 있었던 이한열이 7월 5일 끝내 사망하였다. 5일장 후 7월 9일 치러진 이한열의 노제에 100만 명의 인파가 모인 것을 끝으로 약 한 달 동안 지속된 유월항쟁은 마무리되었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1987년 6월항쟁이 '''대통령[[직선제]] 개헌'''이라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이 항쟁에 동참한 학생과 시민들의 요구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제시한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 개헌’이라는 슬로건으로 모아졌기 때문이었다. 유월항쟁은 이러한 민주화 세력의 통합성, 즉 각기 다른 성격과 지향을 가진 여러 주체들이 모두 동의할 수 있는 ‘최소 강령’하에 ‘최대 연합’으로 결집하였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딩잉잉]]:6월민주항쟁 페이지 전체 작성&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기밀문서]]&lt;br /&gt;
[[분류:4.19혁명관련]]&lt;br /&gt;
[[분류:부마항쟁관련]]&lt;br /&gt;
[[분류:5.18민주화운동관련]]&lt;br /&gt;
[[분류:6월민주항쟁관련]]&lt;br /&gt;
[[분류:뎐]]&lt;br /&gt;
[[분류:이나자키로빈]]&lt;br /&gt;
[[분류:호빵이👻]]&lt;br /&gt;
[[분류:•ᴗ•]]&lt;br /&gt;
[[분류:딩잉잉]]&lt;/div&gt;</summary>
		<author><name>딩잉잉</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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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6 · 10국민대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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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1T15:53:5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딩잉잉: /* 개요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1987년 6월 10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는 ‘박종철군 고문살인 은폐조작규탄및 호헌철폐 민주헌법쟁취를위한 범국민대회’를 개최하여 6월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다. 같은 날 민주정의당 대표위원 노태우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자 전두환 정권의 간선제 호헌에 대한 국민의 저항이 급격히 확산되었다. 15일까지 명동성당농성투쟁, 18일 최루탄추방대회, 26일 민주헌법쟁취대행진에 이르기까지 20여 일간 전국적으로 500여 만 명이 참가하여 4·13호헌조치 철폐, 직선제개헌 쟁취, 독재정권 타도 등 반독재민주화를 요구하였다.&lt;br /&gt;
&lt;br /&gt;
[[파일:국민대회.png|500px|섬네일|오른쪽|시위대를 막기 위해 전경들이 빼곡히 늘어서 있는 모습]]&lt;br /&gt;
[[파일:명동성당.png|500px|섬네일|오른쪽|명동성당에 모인 시민들이 '민주헌법 쟁취하여 민주정부수립' 현수막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는 모습]]&lt;br /&gt;
&lt;br /&gt;
==6 ·10 국민대회 선언문==&lt;br /&gt;
&lt;br /&gt;
국민합의 배신한 4·13호헌조치는 무효임을 전 국민의 이름으로 선언한다.&lt;br /&gt;
오늘 우리는 전 세계 이목이 우리를 주시하는 가운데 40년 독재정치를 청산하고 희망찬 민주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거보를 전 국민과 함께 내딛는다. 국가의 미래요 소망인 꽃다운 젊은이를 야만적인 고문으로 죽여 놓고 그것도 모자라 뻔뻔스럽게 국민을 속이려 했던 현 정권에게 국민의 분노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여주고, 국민적 여망인 개헌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4·13폭거를 철회시키기 위한 민주장정을 시작한다.&lt;br /&gt;
&lt;br /&gt;
(중략)&lt;br /&gt;
&lt;br /&gt;
우리 국민은 민정당이 대단한 결단이나 되는 것처럼 강조하는 현 대통령의 7년 단임 공약에 큰 기대를 걸고 있지 않다. 현 정권이 제1의 통치명분으로 내세워온 평화적 정권교체라는 것도 실은 현대통령의 형식적 퇴임 이후 친정체제와 수렴첨정 하에 광주학살에 참여한 장성들 간의 자리바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지각 있는 국민이라면 상식으로 간주하고 있는 사실이다. 언제부턴가 평화적 ‘정권교체’라는 말이 ‘정부이양’이라는 애매모호한 말로 슬쩍 둔갑해버린 것도 저들의 이러한 속셈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것은 군부독재의 통치를 영구화하려는 요식행위에 불과하다.&lt;br /&gt;
&lt;br /&gt;
(중략)&lt;br /&gt;
&lt;br /&gt;
그러므로 국민적 의사를 전적으로 묵살한 4·13폭거는 시대적 대세인 민주화를 거스르려는 음모요 국가 권력의 주인인 국민을 향한 도전장이 아닐 수 없다. 결국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의 힘에 밀려, “여야가 국회에서 합의하면 개헌에 반대하지 않겠다”고 한 전 대통령의 작년 4·30발언은 영구집권음모를 은폐하기 위한 한낱 속임수에 지나지 않았음이 분명해지고 말았다. 애초부터 개헌의 의사는 눈곱만치도 없었으며, 그동안 마치 날치기 통과라도 강행할 것 같던 내각책임제 개헌안도 국민의 대통령직선제 개헌열망을 무마하고 민주세력을 이간시켜 탄압하면서 원래의 의도인 호헌의 명분을 만들기 위한 위장전술에 지나지 않았다.&lt;br /&gt;
따라서 모든 국민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고 국민들을 한없는 배신감과 절망으로 몰아간 4·13폭거는 마땅히 철회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4·13조치에 기초하여 현정권이 영구집권을 위한 시나리오를 강행한다면, 국내외의 조롱과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며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사태를 스스로 잉태하는 것임을 경고해둔다.&lt;br /&gt;
이제 우리 국민은 이 민족의 40년 숙원인 민주화를 달성하기 위해 일어섰다. 이 민주화라는 과제가 88올림픽을 이유로 연기될 수 없다. 인류평화의 제전이요 민족의 축제가 되어야 할 88올림픽이 민주화를 늦추고 현행헌법대로 독재정권을 연장시키는 데 악용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민주화라는 ‘민족적 대사’를 완수한 이후에 전 국민의 압도적 지지 위에 세워진 튼튼한 민주정부 하에서 다가오는 88올림픽을 민주시민의 감격과 긍지를 가지고 치러야 한다.&lt;br /&gt;
&lt;br /&gt;
(중략)&lt;br /&gt;
&lt;br /&gt;
이제 우리 국민은 그 어떠한 이유나 명분으로도 더 이상 민주화의 실현이 지연되어서는 안 된다고 요구하고 있다. 분단을 이유로, 경제개발을 이유로, 그리고 지금은 올림픽을 이유로 민주화를 유보하자는 역대 독재정권의 거짓 논리에서 이제는 깨어나고 있다.&lt;br /&gt;
오늘 고 박종철 군을 고문살인하고 은폐 조작한 거짓 정권을 규탄하고 국민의 여망을 배신한 4·13폭거가 무효임을 선언하는 우리 국민들의 행진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대세가 되었다. 세계의 양심과 이성이 우리를 격려하고 민주제단에 피 뿌린 민주영령들이 우리를 향도하며, 민주화 의지로 사기충전한 온 국민의 민주화 결의가 큰 강줄기를 형성하니 무엇이 두려운가. 자! 이제 우리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찬연한 민주새벽의 그날을 앞당기자. 민주, 민권승리의 확신과 필승의 의지를 가지고 오늘 우리 모두에게 맡겨진 민족의 과제 앞에 힘차게 전진하자.&lt;br /&gt;
&lt;br /&gt;
1987년 6월 10일&lt;br /&gt;
호헌반대 민주헌법쟁취 운동본부&lt;br /&gt;
&lt;br /&gt;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lt;br /&gt;
「대회 선언문 - 국민합의 배신한 4.13 호헌조치는 무효임을 전 국민의 이름으로 선언한다」&lt;br /&gt;
&lt;br /&gt;
1987년 6월 10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소장&lt;br /&gt;
&lt;br /&gt;
== 6 ·10 국민대회 선언문 해설==&lt;br /&gt;
&lt;br /&gt;
이 사료는 1987년 6월 10일 발표된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 선언문이다. 6·10항쟁의 시작을 연 선언으로서 6월 항쟁 전체를 관통하는 주요 정신과 기조, 항쟁의 의의가 담겨있다. 우선 5·18민주화운동을 “광주학살”로 규정하고 전두환 정부를 “광주학살에 참여한 정치군인”으로 지칭하여 정권의 정당성이 없음을 지적하고, 6월 항쟁의 근간에 5·18민주화운동이 있음들 드러내고 있다. 또한 “국가의 미래요 소망인 꽃다운 젊은이를 야만적인 고문으로 죽여 놓고 그것도 모자라 뻔뻔스럽게 국민을 속이려 했던 현 정권”이라 지적하여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항쟁의 대의명분임을 언명한다. 이어서 4·13호헌조치에 대해 “현정권이 영구집권을 위한 시나리오”이자 “시대적 대세인 민주화를 거스르려는 음모요 국가 권력의 주인인 국민을 향한 도전장”이기 때문에 “마땅히 철회”되어야 한다고 선언한다. 마지막으로 민주화는 “그 어떠한 이유나 명분으로도 더 이상 민주화의 실현이 지연되어서는 안”되며, “88올림픽을 이유로”, “분단을 이유로, 경제개발을 이유로” 유보되어서는 안 된다며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정신임을 선언하였다.&lt;br /&gt;
&lt;br /&gt;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정부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 논의를 일체 금지하고 현행 헌법을 통한 대통령 선거를 치른다는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였고, 이는 각계각층의 4·13호헌조치 반대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5월 27일 각계 인사로 구성된 ‘호헌철폐 및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이하 국본)가 결성되었다. 이날 약 1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발기인대회가 열렸는데, 발기인은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주화실천가족협의회·농민·여성·문화예술·언론출판·노동·교육·문인·청년·도시하층민 등 각 부문 대표 943명, 각 지역 대표 352명, 천주교 253명, 개신교 270명, 불교 160명 등 총 2,191명이었다. 국본은 4·13 호헌조치는 건국정신과 민주화를 부정하므로 무효임을 선언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한 국민적 행동을 조직·전개할 것을 결의했다. 이후 국본은 6월 항쟁을 주도했다.&lt;br /&gt;
국본은 6월 10일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열기로 결정하고 준비에 들어갔다. 서울 등 22개 지역에서 동시다발로 개최될 예정이었다. 그 와중에 6월 9일 국민대회 참가 결의대회에서 연세대학교 학생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쓰러지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6월 항쟁의 또 다른 도화선이 되었다. 6월 10일 ‘박종철 고문살인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개최되었다. 국본 측에서는 22개 지역에서 24만명이 참가했다고 추산했다. 시민들의 참여가 도드라졌는데 대부분의 도시에서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시위를 지켜보고 시위대의 일원이 되었으며, 시위대에게 음료와 먹을거리를 제공하는 모습이 곳곳에서목격되었다. 주요 도시에서는 많은 차량들이 경적을 울려 시위대에 호응하여 화제가 되었다.&lt;/div&gt;</summary>
		<author><name>딩잉잉</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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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6 · 10국민대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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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1T15:53:4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딩잉잉: /* 개요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1987년 6월 10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는 ‘박종철군 고문살인 은폐조작규탄및 호헌철폐 민주헌법쟁취를위한 범국민대회’를 개최하여 6월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다. 같은 날 민주정의당 대표위원 노태우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자 전두환 정권의 간선제 호헌에 대한 국민의 저항이 급격히 확산되었다. 15일까지 명동성당농성투쟁, 18일 최루탄추방대회, 26일 민주헌법쟁취대행진에 이르기까지 20여 일간 전국적으로 500여 만 명이 참가하여 4·13호헌조치 철폐, 직선제개헌 쟁취, 독재정권 타도 등 반독재민주화를 요구하였다.&lt;br /&gt;
&lt;br /&gt;
[[파일:국민대회.png|200px|섬네일|오른쪽|시위대를 막기 위해 전경들이 빼곡히 늘어서 있는 모습]]&lt;br /&gt;
[[파일:명동성당.png|200px|섬네일|오른쪽|명동성당에 모인 시민들이 '민주헌법 쟁취하여 민주정부수립' 현수막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는 모습]]&lt;br /&gt;
&lt;br /&gt;
==6 ·10 국민대회 선언문==&lt;br /&gt;
&lt;br /&gt;
국민합의 배신한 4·13호헌조치는 무효임을 전 국민의 이름으로 선언한다.&lt;br /&gt;
오늘 우리는 전 세계 이목이 우리를 주시하는 가운데 40년 독재정치를 청산하고 희망찬 민주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거보를 전 국민과 함께 내딛는다. 국가의 미래요 소망인 꽃다운 젊은이를 야만적인 고문으로 죽여 놓고 그것도 모자라 뻔뻔스럽게 국민을 속이려 했던 현 정권에게 국민의 분노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여주고, 국민적 여망인 개헌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4·13폭거를 철회시키기 위한 민주장정을 시작한다.&lt;br /&gt;
&lt;br /&gt;
(중략)&lt;br /&gt;
&lt;br /&gt;
우리 국민은 민정당이 대단한 결단이나 되는 것처럼 강조하는 현 대통령의 7년 단임 공약에 큰 기대를 걸고 있지 않다. 현 정권이 제1의 통치명분으로 내세워온 평화적 정권교체라는 것도 실은 현대통령의 형식적 퇴임 이후 친정체제와 수렴첨정 하에 광주학살에 참여한 장성들 간의 자리바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지각 있는 국민이라면 상식으로 간주하고 있는 사실이다. 언제부턴가 평화적 ‘정권교체’라는 말이 ‘정부이양’이라는 애매모호한 말로 슬쩍 둔갑해버린 것도 저들의 이러한 속셈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것은 군부독재의 통치를 영구화하려는 요식행위에 불과하다.&lt;br /&gt;
&lt;br /&gt;
(중략)&lt;br /&gt;
&lt;br /&gt;
그러므로 국민적 의사를 전적으로 묵살한 4·13폭거는 시대적 대세인 민주화를 거스르려는 음모요 국가 권력의 주인인 국민을 향한 도전장이 아닐 수 없다. 결국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의 힘에 밀려, “여야가 국회에서 합의하면 개헌에 반대하지 않겠다”고 한 전 대통령의 작년 4·30발언은 영구집권음모를 은폐하기 위한 한낱 속임수에 지나지 않았음이 분명해지고 말았다. 애초부터 개헌의 의사는 눈곱만치도 없었으며, 그동안 마치 날치기 통과라도 강행할 것 같던 내각책임제 개헌안도 국민의 대통령직선제 개헌열망을 무마하고 민주세력을 이간시켜 탄압하면서 원래의 의도인 호헌의 명분을 만들기 위한 위장전술에 지나지 않았다.&lt;br /&gt;
따라서 모든 국민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고 국민들을 한없는 배신감과 절망으로 몰아간 4·13폭거는 마땅히 철회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4·13조치에 기초하여 현정권이 영구집권을 위한 시나리오를 강행한다면, 국내외의 조롱과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며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사태를 스스로 잉태하는 것임을 경고해둔다.&lt;br /&gt;
이제 우리 국민은 이 민족의 40년 숙원인 민주화를 달성하기 위해 일어섰다. 이 민주화라는 과제가 88올림픽을 이유로 연기될 수 없다. 인류평화의 제전이요 민족의 축제가 되어야 할 88올림픽이 민주화를 늦추고 현행헌법대로 독재정권을 연장시키는 데 악용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민주화라는 ‘민족적 대사’를 완수한 이후에 전 국민의 압도적 지지 위에 세워진 튼튼한 민주정부 하에서 다가오는 88올림픽을 민주시민의 감격과 긍지를 가지고 치러야 한다.&lt;br /&gt;
&lt;br /&gt;
(중략)&lt;br /&gt;
&lt;br /&gt;
이제 우리 국민은 그 어떠한 이유나 명분으로도 더 이상 민주화의 실현이 지연되어서는 안 된다고 요구하고 있다. 분단을 이유로, 경제개발을 이유로, 그리고 지금은 올림픽을 이유로 민주화를 유보하자는 역대 독재정권의 거짓 논리에서 이제는 깨어나고 있다.&lt;br /&gt;
오늘 고 박종철 군을 고문살인하고 은폐 조작한 거짓 정권을 규탄하고 국민의 여망을 배신한 4·13폭거가 무효임을 선언하는 우리 국민들의 행진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대세가 되었다. 세계의 양심과 이성이 우리를 격려하고 민주제단에 피 뿌린 민주영령들이 우리를 향도하며, 민주화 의지로 사기충전한 온 국민의 민주화 결의가 큰 강줄기를 형성하니 무엇이 두려운가. 자! 이제 우리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찬연한 민주새벽의 그날을 앞당기자. 민주, 민권승리의 확신과 필승의 의지를 가지고 오늘 우리 모두에게 맡겨진 민족의 과제 앞에 힘차게 전진하자.&lt;br /&gt;
&lt;br /&gt;
1987년 6월 10일&lt;br /&gt;
호헌반대 민주헌법쟁취 운동본부&lt;br /&gt;
&lt;br /&gt;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lt;br /&gt;
「대회 선언문 - 국민합의 배신한 4.13 호헌조치는 무효임을 전 국민의 이름으로 선언한다」&lt;br /&gt;
&lt;br /&gt;
1987년 6월 10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소장&lt;br /&gt;
&lt;br /&gt;
== 6 ·10 국민대회 선언문 해설==&lt;br /&gt;
&lt;br /&gt;
이 사료는 1987년 6월 10일 발표된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 선언문이다. 6·10항쟁의 시작을 연 선언으로서 6월 항쟁 전체를 관통하는 주요 정신과 기조, 항쟁의 의의가 담겨있다. 우선 5·18민주화운동을 “광주학살”로 규정하고 전두환 정부를 “광주학살에 참여한 정치군인”으로 지칭하여 정권의 정당성이 없음을 지적하고, 6월 항쟁의 근간에 5·18민주화운동이 있음들 드러내고 있다. 또한 “국가의 미래요 소망인 꽃다운 젊은이를 야만적인 고문으로 죽여 놓고 그것도 모자라 뻔뻔스럽게 국민을 속이려 했던 현 정권”이라 지적하여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항쟁의 대의명분임을 언명한다. 이어서 4·13호헌조치에 대해 “현정권이 영구집권을 위한 시나리오”이자 “시대적 대세인 민주화를 거스르려는 음모요 국가 권력의 주인인 국민을 향한 도전장”이기 때문에 “마땅히 철회”되어야 한다고 선언한다. 마지막으로 민주화는 “그 어떠한 이유나 명분으로도 더 이상 민주화의 실현이 지연되어서는 안”되며, “88올림픽을 이유로”, “분단을 이유로, 경제개발을 이유로” 유보되어서는 안 된다며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정신임을 선언하였다.&lt;br /&gt;
&lt;br /&gt;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정부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 논의를 일체 금지하고 현행 헌법을 통한 대통령 선거를 치른다는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였고, 이는 각계각층의 4·13호헌조치 반대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5월 27일 각계 인사로 구성된 ‘호헌철폐 및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이하 국본)가 결성되었다. 이날 약 1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발기인대회가 열렸는데, 발기인은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주화실천가족협의회·농민·여성·문화예술·언론출판·노동·교육·문인·청년·도시하층민 등 각 부문 대표 943명, 각 지역 대표 352명, 천주교 253명, 개신교 270명, 불교 160명 등 총 2,191명이었다. 국본은 4·13 호헌조치는 건국정신과 민주화를 부정하므로 무효임을 선언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한 국민적 행동을 조직·전개할 것을 결의했다. 이후 국본은 6월 항쟁을 주도했다.&lt;br /&gt;
국본은 6월 10일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열기로 결정하고 준비에 들어갔다. 서울 등 22개 지역에서 동시다발로 개최될 예정이었다. 그 와중에 6월 9일 국민대회 참가 결의대회에서 연세대학교 학생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쓰러지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6월 항쟁의 또 다른 도화선이 되었다. 6월 10일 ‘박종철 고문살인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개최되었다. 국본 측에서는 22개 지역에서 24만명이 참가했다고 추산했다. 시민들의 참여가 도드라졌는데 대부분의 도시에서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시위를 지켜보고 시위대의 일원이 되었으며, 시위대에게 음료와 먹을거리를 제공하는 모습이 곳곳에서목격되었다. 주요 도시에서는 많은 차량들이 경적을 울려 시위대에 호응하여 화제가 되었다.&lt;/div&gt;</summary>
		<author><name>딩잉잉</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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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6_%C2%B7_10%EA%B5%AD%EB%AF%BC%EB%8C%80%ED%9A%8C&amp;diff=35857</id>
		<title>6 · 10국민대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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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1T15:53:2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딩잉잉: /* 개요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1987년 6월 10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는 ‘박종철군 고문살인 은폐조작규탄및 호헌철폐 민주헌법쟁취를위한 범국민대회’를 개최하여 6월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다. 같은 날 민주정의당 대표위원 노태우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자 전두환 정권의 간선제 호헌에 대한 국민의 저항이 급격히 확산되었다. 15일까지 명동성당농성투쟁, 18일 최루탄추방대회, 26일 민주헌법쟁취대행진에 이르기까지 20여 일간 전국적으로 500여 만 명이 참가하여 4·13호헌조치 철폐, 직선제개헌 쟁취, 독재정권 타도 등 반독재민주화를 요구하였다.&lt;br /&gt;
&lt;br /&gt;
[[파일:국민대회.png|200px|섬네일|오른쪽|시위대를 막기 위해 전경들이 빼곡히 늘어서 있는 모습]]&lt;br /&gt;
[[파일:명동성당.png|200px|섬네일|왼쪽|명동성당에 모인 시민들이 '민주헌법 쟁취하여 민주정부수립' 현수막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는 모습]]&lt;br /&gt;
&lt;br /&gt;
==6 ·10 국민대회 선언문==&lt;br /&gt;
&lt;br /&gt;
국민합의 배신한 4·13호헌조치는 무효임을 전 국민의 이름으로 선언한다.&lt;br /&gt;
오늘 우리는 전 세계 이목이 우리를 주시하는 가운데 40년 독재정치를 청산하고 희망찬 민주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거보를 전 국민과 함께 내딛는다. 국가의 미래요 소망인 꽃다운 젊은이를 야만적인 고문으로 죽여 놓고 그것도 모자라 뻔뻔스럽게 국민을 속이려 했던 현 정권에게 국민의 분노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여주고, 국민적 여망인 개헌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4·13폭거를 철회시키기 위한 민주장정을 시작한다.&lt;br /&gt;
&lt;br /&gt;
(중략)&lt;br /&gt;
&lt;br /&gt;
우리 국민은 민정당이 대단한 결단이나 되는 것처럼 강조하는 현 대통령의 7년 단임 공약에 큰 기대를 걸고 있지 않다. 현 정권이 제1의 통치명분으로 내세워온 평화적 정권교체라는 것도 실은 현대통령의 형식적 퇴임 이후 친정체제와 수렴첨정 하에 광주학살에 참여한 장성들 간의 자리바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지각 있는 국민이라면 상식으로 간주하고 있는 사실이다. 언제부턴가 평화적 ‘정권교체’라는 말이 ‘정부이양’이라는 애매모호한 말로 슬쩍 둔갑해버린 것도 저들의 이러한 속셈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것은 군부독재의 통치를 영구화하려는 요식행위에 불과하다.&lt;br /&gt;
&lt;br /&gt;
(중략)&lt;br /&gt;
&lt;br /&gt;
그러므로 국민적 의사를 전적으로 묵살한 4·13폭거는 시대적 대세인 민주화를 거스르려는 음모요 국가 권력의 주인인 국민을 향한 도전장이 아닐 수 없다. 결국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의 힘에 밀려, “여야가 국회에서 합의하면 개헌에 반대하지 않겠다”고 한 전 대통령의 작년 4·30발언은 영구집권음모를 은폐하기 위한 한낱 속임수에 지나지 않았음이 분명해지고 말았다. 애초부터 개헌의 의사는 눈곱만치도 없었으며, 그동안 마치 날치기 통과라도 강행할 것 같던 내각책임제 개헌안도 국민의 대통령직선제 개헌열망을 무마하고 민주세력을 이간시켜 탄압하면서 원래의 의도인 호헌의 명분을 만들기 위한 위장전술에 지나지 않았다.&lt;br /&gt;
따라서 모든 국민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고 국민들을 한없는 배신감과 절망으로 몰아간 4·13폭거는 마땅히 철회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4·13조치에 기초하여 현정권이 영구집권을 위한 시나리오를 강행한다면, 국내외의 조롱과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며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사태를 스스로 잉태하는 것임을 경고해둔다.&lt;br /&gt;
이제 우리 국민은 이 민족의 40년 숙원인 민주화를 달성하기 위해 일어섰다. 이 민주화라는 과제가 88올림픽을 이유로 연기될 수 없다. 인류평화의 제전이요 민족의 축제가 되어야 할 88올림픽이 민주화를 늦추고 현행헌법대로 독재정권을 연장시키는 데 악용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민주화라는 ‘민족적 대사’를 완수한 이후에 전 국민의 압도적 지지 위에 세워진 튼튼한 민주정부 하에서 다가오는 88올림픽을 민주시민의 감격과 긍지를 가지고 치러야 한다.&lt;br /&gt;
&lt;br /&gt;
(중략)&lt;br /&gt;
&lt;br /&gt;
이제 우리 국민은 그 어떠한 이유나 명분으로도 더 이상 민주화의 실현이 지연되어서는 안 된다고 요구하고 있다. 분단을 이유로, 경제개발을 이유로, 그리고 지금은 올림픽을 이유로 민주화를 유보하자는 역대 독재정권의 거짓 논리에서 이제는 깨어나고 있다.&lt;br /&gt;
오늘 고 박종철 군을 고문살인하고 은폐 조작한 거짓 정권을 규탄하고 국민의 여망을 배신한 4·13폭거가 무효임을 선언하는 우리 국민들의 행진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대세가 되었다. 세계의 양심과 이성이 우리를 격려하고 민주제단에 피 뿌린 민주영령들이 우리를 향도하며, 민주화 의지로 사기충전한 온 국민의 민주화 결의가 큰 강줄기를 형성하니 무엇이 두려운가. 자! 이제 우리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찬연한 민주새벽의 그날을 앞당기자. 민주, 민권승리의 확신과 필승의 의지를 가지고 오늘 우리 모두에게 맡겨진 민족의 과제 앞에 힘차게 전진하자.&lt;br /&gt;
&lt;br /&gt;
1987년 6월 10일&lt;br /&gt;
호헌반대 민주헌법쟁취 운동본부&lt;br /&gt;
&lt;br /&gt;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lt;br /&gt;
「대회 선언문 - 국민합의 배신한 4.13 호헌조치는 무효임을 전 국민의 이름으로 선언한다」&lt;br /&gt;
&lt;br /&gt;
1987년 6월 10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소장&lt;br /&gt;
&lt;br /&gt;
== 6 ·10 국민대회 선언문 해설==&lt;br /&gt;
&lt;br /&gt;
이 사료는 1987년 6월 10일 발표된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 선언문이다. 6·10항쟁의 시작을 연 선언으로서 6월 항쟁 전체를 관통하는 주요 정신과 기조, 항쟁의 의의가 담겨있다. 우선 5·18민주화운동을 “광주학살”로 규정하고 전두환 정부를 “광주학살에 참여한 정치군인”으로 지칭하여 정권의 정당성이 없음을 지적하고, 6월 항쟁의 근간에 5·18민주화운동이 있음들 드러내고 있다. 또한 “국가의 미래요 소망인 꽃다운 젊은이를 야만적인 고문으로 죽여 놓고 그것도 모자라 뻔뻔스럽게 국민을 속이려 했던 현 정권”이라 지적하여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항쟁의 대의명분임을 언명한다. 이어서 4·13호헌조치에 대해 “현정권이 영구집권을 위한 시나리오”이자 “시대적 대세인 민주화를 거스르려는 음모요 국가 권력의 주인인 국민을 향한 도전장”이기 때문에 “마땅히 철회”되어야 한다고 선언한다. 마지막으로 민주화는 “그 어떠한 이유나 명분으로도 더 이상 민주화의 실현이 지연되어서는 안”되며, “88올림픽을 이유로”, “분단을 이유로, 경제개발을 이유로” 유보되어서는 안 된다며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정신임을 선언하였다.&lt;br /&gt;
&lt;br /&gt;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정부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 논의를 일체 금지하고 현행 헌법을 통한 대통령 선거를 치른다는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였고, 이는 각계각층의 4·13호헌조치 반대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5월 27일 각계 인사로 구성된 ‘호헌철폐 및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이하 국본)가 결성되었다. 이날 약 1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발기인대회가 열렸는데, 발기인은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주화실천가족협의회·농민·여성·문화예술·언론출판·노동·교육·문인·청년·도시하층민 등 각 부문 대표 943명, 각 지역 대표 352명, 천주교 253명, 개신교 270명, 불교 160명 등 총 2,191명이었다. 국본은 4·13 호헌조치는 건국정신과 민주화를 부정하므로 무효임을 선언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한 국민적 행동을 조직·전개할 것을 결의했다. 이후 국본은 6월 항쟁을 주도했다.&lt;br /&gt;
국본은 6월 10일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열기로 결정하고 준비에 들어갔다. 서울 등 22개 지역에서 동시다발로 개최될 예정이었다. 그 와중에 6월 9일 국민대회 참가 결의대회에서 연세대학교 학생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쓰러지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6월 항쟁의 또 다른 도화선이 되었다. 6월 10일 ‘박종철 고문살인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개최되었다. 국본 측에서는 22개 지역에서 24만명이 참가했다고 추산했다. 시민들의 참여가 도드라졌는데 대부분의 도시에서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시위를 지켜보고 시위대의 일원이 되었으며, 시위대에게 음료와 먹을거리를 제공하는 모습이 곳곳에서목격되었다. 주요 도시에서는 많은 차량들이 경적을 울려 시위대에 호응하여 화제가 되었다.&lt;/div&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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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직선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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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1T11:55:0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딩잉잉: 새 문서: ==개요== 유권자가 후보자를 선출할 대리인을 선출하는 방식인 간접 선거와 대비되어 유권자가 직접 자신의 의사를 대리할 후보자를 선출...&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유권자가 후보자를 선출할 대리인을 선출하는 방식인 간접 선거와 대비되어 유권자가 직접 자신의 의사를 대리할 후보자를 선출하는 방식의 선거 제도를 말한다. 직선제, 직선이라고도 한다.&lt;br /&gt;
&lt;br /&gt;
==대한민국의 경우==&lt;br /&gt;
대한민국의 경우 1945년 이래 여러 변화가 있었다.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문서로. 2022년 시점에서 제6공화국은 직선제이며, 그 이전에는 제1공화국(일부 기간), 제3공화국 시기에 직선제를 운용하였다. 제4공화국, 제5공화국에서 독재를 위해 '체육관 선거'로 대표되는 관선 선거로서 간접 선거를 악용했기 때문에 간접 선거에 대한 인식이 아직까지도 좋지 않다. 그러한 이유로 유신직후인 73년부터 야당 신민당은 줄기차게 직선제를 요구해왔고, 1980년대의 민주화운동에는 대통령 직선제 쟁취가 제일 주된 구호였다. 그리고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중심으로 하는 9차 개헌이 이뤄져 제13대 대통령 선거부터 최근의 제20대 대통령 선거까지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는 모두 직선제로 치러지고 있다.&lt;br /&gt;
&lt;br /&gt;
박정희, 전두환 정권이 간선제를 이용해 독재체제를 유지했었기 때문에, 대한민국 사회에서 간선제에 대한 인식이 매우 부정적인 편이며, 직선제를 지지하는 여론이 절대적 힘을 얻고 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의 발췌 개헌에서 알 수 있듯, 대통령중심제가 제왕적 대통령의 독재(신대통령제)로 변질될 위험성은 직선, 간선 가릴 것 없이 높다.&lt;br /&gt;
&lt;br /&gt;
건전한 정치체제를 유지하는 것에는 선거의 방법보다는 사회적 기반의 형성이 더욱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권력의 견제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으면 민주제 선거제도를 가지고 있어도 나치와 같은 형태의 독재정권이 창출될 수 있으며, 심지어 대통령제는커녕 의원 내각제에서도 1당 독재와 같은 형태를 통해 독재정권이 형성될 수 있다.&lt;br /&gt;
&lt;br /&gt;
==직선제 개헌==&lt;br /&gt;
대통령 직선제 개헌론은 1987년 한국 민주화를 위한 반정부운동의 상징적 구심점 역할을 했으며 등장과 소멸, 협상과 합의의 복합적 구성 과정이었다. 10·26사태 이후부터 2·12총선거시기를 거쳐 1987년 6월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6·29선언을 통해 직선제 개헌론을 정부의 공식의제로 받아들일 때까지, 그리고 7월 1일 전두환 대통령이 노태우 당대표의 선언을 공식적으로 승인할 때까지, 그리고 9차 헌법 개정 과정이 완료될 때까지 직선제 개헌론은 상이한 정치적 이해관계를 갖는 저항세력과 집권세력의 정치적 대립과 갈등, 협상의 핵심 축으로 작동했다.&lt;br /&gt;
&lt;br /&gt;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한 6·29선언 이후 ‘국본’은 7월 13일 산하에 헌법개정특별위원회를 설치했으며 8월 4일에는 ‘헌법개정요강’이라는 자료를 발간했으나 실질적으로 개헌협상은 제도권의 민정당과 민주당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 과정에서 국민의 의견수렴은 전혀 없었다.&lt;br /&gt;
&lt;br /&gt;
1985년에서 1987년 사이에 노동운동 및 학생운동 등 운동진영에서 거론되었던 새로운 체제 구성, 다양한 기획들은 전혀 반영되지 못했다. 9차 헌법 개정과 13대 대통령 선거과정을 통해 여야 정당을 비롯한 제도정치의 영역은 급속히 활성화된 반면 운동정치 영역은 위축되었다고 평가되고 있다.&lt;br /&gt;
&lt;br /&gt;
6·29선언 이후 단계적으로 이루어진 제도정치권의 개헌협상 과정에서 집권여당인 민정당과 민주당은 각각 개헌안 시안을 마련했으나 여러 측면에서 이견이 있었으며, 특히 대통령 임기와 부통령제 신설에서 큰 입장의 차이를 보였다.&lt;br /&gt;
&lt;br /&gt;
1987년 8월 3일부터 시작된 집권여당과 야당의 8인 정치회담은 8월 31일 전문과 130개 조항의 본문에 합의를 이끌어냈으며, 9월 16일 부칙까지 합의했다. 19차에 걸친 회담 끝에 8인 정치회담에서 합의된 내용을 넘겨받은 ‘헌법개정특별위원회(개헌특위)’는 9월 17일 전문과 본문 10장 130조와 부칙 6조로 구성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고, 10월 12일 대한민국 국회는 제헌국회 이후 최초로 여야 합의에 의한 헌법개정안을 가결했다.&lt;/div&gt;</summary>
		<author><name>딩잉잉</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8%B0%EB%B0%80%EB%AC%B8%EC%84%9C&amp;diff=35396</id>
		<title>기밀문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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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1T11:52:4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딩잉잉: /* 의의 */&lt;/p&gt;
&lt;hr /&gt;
&lt;div&gt;=='''컨텐츠 주제'''==&lt;br /&gt;
[[파일:이한열사진.jpeg|center]]&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amp;lt;big&amp;gt;'''&amp;lt;span style=&amp;quot;color:#CD0000&amp;quot;&amp;gt;투쟁의 불꽃, 자유의 환호&amp;lt;/span&amp;gt;'''&amp;lt;br/&amp;gt;&lt;br /&gt;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으로 일궈낸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역사에 대해 함께 살펴보자.&amp;lt;/span&amp;gt;&amp;lt;/big&amp;gt;&amp;lt;/div&amp;gt;&lt;br /&gt;
&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이나자키로빈]]&lt;br /&gt;
&lt;br /&gt;
=='''팀원'''==&lt;br /&gt;
*오현지(2022131143) [[뎐]]&amp;lt;br/&amp;gt;&lt;br /&gt;
*김여원(2023130209) [[이나자키로빈]]&amp;lt;br/&amp;gt;&lt;br /&gt;
*김하은(2022131345) [[호빵이👻]]&amp;lt;br/&amp;gt;&lt;br /&gt;
*박정원(2023130350) [[•ᴗ•]]&amp;lt;br/&amp;gt;&lt;br /&gt;
*최필중(2023130216) [[딩잉잉]]&amp;lt;br/&amp;gt;&lt;br /&gt;
&lt;br /&gt;
=='''기획의도'''==&lt;br /&gt;
===기획배경===&lt;br /&gt;
1945년 광복 이후 대한민국 국민들은 자유민주국가로서의 미래를 기대했으나 실상은 그러지 못했다.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보여주듯 현재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는 그것을 누리지 못한 앞선 세대들의 목숨을 바친 항쟁의 대가이다. 민주항쟁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의 핵심 동력이었다. 오늘날 우리나라 민주의식의 중요한 기둥이 되는 네 가지 항쟁을 선별하고 각 항쟁의 배경, 전개과정, 의의를 비롯해 세부적이고 자세한 내용에 대한 기사를 작성한다.&lt;br /&gt;
===기획목적===&lt;br /&gt;
작금의 현실까지 오기에는 수없이 많은 투쟁이 있었지만 4.19혁명, 부마항쟁, 5.18민주항쟁, 6월민주항쟁이라는 네 가지 사건을 살펴보기로 한 것은 가장 많이 다뤄지고, 가장 많이 알려진 사건이기 때문이다. 관련된 사건과 역사 인물들에 대해 자세히 적어 내어 민주항쟁의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지 않으면 알기 힘든 각 민주항쟁의 자세한 내막을 밝혀낸다.&lt;br /&gt;
===기대하는 바===&lt;br /&gt;
타임라인과 온톨로지를 활용해 내용의 전반적인 이해를 돕고 자세한 설명을 통해 사건의 자세한 내막을 들어낸다. 네 가지 항쟁을 각각 큰 목차로 설정하고 세부 기사를 그 내부에 작성해 독자의 관심과 수요에 부합하는 정보를 전달하는 데 효과적일 것으로 기대된다. 민주항쟁에 참여한 사람들의 희생과 투쟁에 대한 존경심을 부르고 역사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다.&lt;br /&gt;
===기여===&lt;br /&gt;
[[뎐]], [[이나자키로빈]], [[호빵이👻]]: 기획의도 페이지 작성&lt;br /&gt;
&lt;br /&gt;
=='''온톨로지'''==&lt;br /&gt;
{{NetworkGraph | title=민주항쟁.lst}}&lt;br /&gt;
[[민주항쟁.lst]]&lt;br /&gt;
===기여===&lt;br /&gt;
*[[뎐]]: 온톨로지 제작&lt;br /&gt;
=='''컨텐츠 구조'''==&lt;br /&gt;
===클래스(Class)===&lt;br /&gt;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color:white&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0%&amp;quot; | 클래스 !! style=&amp;quot;width:40%&amp;quot; | 설명 !! style=&amp;quot;45%&amp;quot; | 노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제||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대표 키워드인 민주항쟁을 주제로서 나타내었다 || 만주항쟁&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항쟁||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민주화운동 시기 발생했던 주요 운동들을 ‘항쟁’이라는 키워드로 분류하였다. || 4.19혁명, 부마항쟁, 5.18 민주화운동, 6월민주항쟁&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사건||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항쟁의 원인, 결과가 되는 사건을 정리하였다|| 3.15부정선거, 고려대 4.18학생시위, 3.15의거, YH사건, 10.26사태, 12.12 군사반란, 비상계엄령,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고문추방민족대행진, 4.13호헌조치, 6.29선언, 대통령직선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지역||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요 항쟁들이 일어났던 지역을 정리하였다|| 마산, 부산, 광주&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인물||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요사건들을 발생시킨 인물, 참여했던 인물을 묶어서 정리하였다|| 이승만, 이기붕, 김주열, 박정희, 김재규, 전두환, 신군부, 시민군, 박종철, 이한열, 노태우&lt;br /&gt;
|-&lt;br /&gt;
|}&lt;br /&gt;
===관계성(Relation)===&lt;br /&gt;
*&amp;lt;font color=#228B22&amp;gt;'''~은 ~에 속한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주요 항쟁들이 민주항쟁에 속함을 나타내거나 인물의 소속을 나타낸다.&lt;br /&gt;
***해당노드:&lt;br /&gt;
***#4.19혁명 -&amp;gt; 민주항쟁&lt;br /&gt;
***#부마항쟁 -&amp;gt; 민주항쟁&lt;br /&gt;
***#5.18민주화운동 -&amp;gt; 민주항쟁&lt;br /&gt;
***#6월 민주항쟁 -&amp;gt; 민주항쟁&lt;br /&gt;
***#전두환 -&amp;gt; 신군부&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의 원인이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어떠한 사건과 인과관계를 이루는 또다른 사건 혹은 인물을 설명한다.&lt;br /&gt;
***#이기붕 -&amp;gt; 3.15부정선거&lt;br /&gt;
***#김주열 -&amp;gt; 고려대 4.18학생시위&lt;br /&gt;
***#고려대 4.18학생시위 -&amp;gt; 4.19혁명&lt;br /&gt;
***#3.15의거 -&amp;gt; 4.19혁명&lt;br /&gt;
***#김주열 -&amp;gt; 4.19혁명&lt;br /&gt;
***#3.15부정선거 -&amp;gt; 3.15의거&lt;br /&gt;
***#YH사건 -&amp;gt; 부마항쟁&lt;br /&gt;
***#부마항쟁 -&amp;gt; 10.26사태&lt;br /&gt;
***#박정희 -&amp;gt; 10.26사태&lt;br /&gt;
***#비상계엄령 -&amp;gt; 5.18민주화운동&lt;br /&gt;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 -&amp;gt; 고문추방민족대행진&lt;br /&gt;
***#고문추방민족대행진 -&amp;gt; 4.13호헌조치&lt;br /&gt;
***#4.13호헌조치 -&amp;gt; 6월민주항쟁&lt;br /&gt;
***#6월민주항쟁 -&amp;gt; 6.29선언&lt;br /&gt;
***#6월민주항쟁 -&amp;gt; 대통령직선제&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을 발생시켰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사건과 그 사건을 직접적으로 발생시킨 인물을 연결한다.&lt;br /&gt;
***#이승만 -&amp;gt; 3.15부정선거&lt;br /&gt;
***#김재규 -&amp;gt; 10.26사태&lt;br /&gt;
***#신군부 -&amp;gt; 1212군사반란&lt;br /&gt;
***#전두환 -&amp;gt; 비상계엄령&lt;br /&gt;
***#노태우 -&amp;gt; 6.29선언&lt;br /&gt;
***#시민군 -&amp;gt; 5.18민주화운동&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에 희생되었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민주항쟁의 진압과정 등 에서 희생된 인물을 설명한다&lt;br /&gt;
***#김주열 -&amp;gt; 3.15의거&lt;br /&gt;
***#이한열 -&amp;gt; 6월 민주항쟁&lt;br /&gt;
***#박종철&amp;gt;박종철 고문치사 사건&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에서 발생했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설명한다.&lt;br /&gt;
***#3.15의거 -&amp;gt; 마산&lt;br /&gt;
***#부마항쟁 -&amp;gt; 부산&lt;br /&gt;
***#부마항쟁 -&amp;gt; 마산&lt;br /&gt;
***#5.18민주화운동 -&amp;gt; 광주&lt;br /&gt;
===기여===&lt;br /&gt;
*[[뎐]]: 컨텐츠 구조 페이지 작성&lt;br /&gt;
=='''4.19혁명'''==&lt;br /&gt;
===타임라인===&lt;br /&gt;
===원인===&lt;br /&gt;
====[[3.15 부정선거]]====&lt;br /&gt;
[[파일:3.15부정선거_개표_모습.png|300픽셀|섬네일|오른쪽|3.15부정선거 당시 개표하는 사진&amp;lt;ref&amp;gt;사진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amp;lt;/ref&amp;gt;]]&lt;br /&gt;
1959년 대한민국은 제 4대 대통령 선거와 제 5대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당시 자유당에서는 12년째 대통령으로서 연임 중이던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이기붕]]'''을 부통령 후보로 선임하였다. 그러나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병세의 악화로 사망하게 되고,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은 확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선거의 초점은 자유당의 조병옥과 민주당의 장면 간의 선거전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본격적인 선거유세의 시작과 함께 정부와 여당의 잇따른 야당선거운동 방해사건으로 부정선거가 시작되었다. 1960년 3월 15일 선거가 시작된 이후에도 다양한 방법의 부정행위가 일어났고, 개표 결과 이승만과 이기붕의 득표가 100%에 육박하는 결과로 나오자 자유당은 득표수를 하향 조정해 최종 집계에 반영할 것을 지시했다. 결국 이승만 88.7%, 이기붕 79%의 득표율을 가지며 정, 부통령에 당선되었다.&amp;lt;ref&amp;gt;자세한 내용은 3.15부정선거 페이지 참조&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부정선거 반대시위, [[3.15 의거]]의 발생====&lt;br /&gt;
3.15 부정선거를 반대하는 시위는 초기에는 중, 고등학생들의 산발적인 시위로 전개되었다. 3월 15일 선거일 밤 경남 마산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으며,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여 1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amp;lt;br/&amp;gt;&lt;br /&gt;
3월 15일 실종되었던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4월 11일 마산부두에서 발견되자 마산 시민들은 시청, 파출소 등을 파괴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2차 시위가 일어난 것이다.&lt;br /&gt;
&lt;br /&gt;
====[[고려대학교 4.18 학생시위]]의 발생====&lt;br /&gt;
1, 2차 마산시위를 계기로 부정선거 무효와 이승만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났다. '4.18 선언문'을 낭독하고 시내로 진출하였다. 이는 4월 19일 학생들과 일반 시민들이 가세한 대규모 시위로 이어지게 되었다.&lt;br /&gt;
====전국적인 4.19 혁명의 발생====&lt;br /&gt;
분노한 전국의 시민과 학생들이 다음 날인 4월 19일 총궐기하여 '이승만 하야와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며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경찰은 또다시 무차별 발포에 나섰고,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여기에 이승만 정부는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지만 이러한 압박에도 시민들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lt;br /&gt;
====이승만 대통령의 혼란 수습 시도====&lt;br /&gt;
이승만 대통령은 4.19 시위로 인한 정국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4월 20일 국무위원 전원과 자유당 당무위원 전원의 사표를 제출하도록 지시하였으며, 4월 23일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외무장관에 허정, 내무장관에 이호, 법무장관에 권승렬을 임명하는 등 개각을 단행하였다.&amp;lt;br/&amp;gt;&lt;br /&gt;
그러나 미국은 4.19직후 국무부 성명을 통해 한국에서 발생한 사태는 부정선거에 대한 '군중의 불만'을 반영한 것 이라고 했고, 양유찬 주미대사를 불러 '부정선거에 대한 철저한 조사', '경향신문 복간', '국가보안법 개정' 등을 촉구하는 각서를 전달하였다.&amp;lt;br/&amp;gt;&lt;br /&gt;
그리고 4월 25일, 이승만 정권에 분노한 전국 27개 대학 258명의 교수가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 모여 14개항의 시국 선언문을 발표하며 학생, 시민들과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들은 3.15 부정선거 및 4.19 사태의 책임을 지고 대통령이 물러날 것을 주장하였으며, &amp;quot;학생들의 피에 보답하자&amp;quot;는 플랜 카드를 앞세워 국회의사당까지 행진하였다. &lt;br /&gt;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lt;br /&gt;
무력진압에도 대규모 시위가 이어지며 시민들은 완강하게 투쟁하였다. 4월 26일 시위대가 경무대로 다시 집결하는 등 사태가 심각하게 진행되자, 오전 10시 30분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 성명을 발표하였다. 4월 27일 이승만은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하며 대통령직을 하야하고 하와이로 망명하였으며 자유당 정권도 끝나게 된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우리 국민들, 특히 학생과 청년들의 주도로 이루어진 4.19 혁명은 학생과 일반 대중이 단결하여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아시아 최초의 시건이다. 4.19혁명은 부마항쟁, 5.18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그리고 2017년 촛불시위에 이르기 까지 정권에 대항하는 국민들이 단합을 이루는 초석이 되었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도 시민 저항권에 대한 근거로써 4.19혁명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문구가 있다.&lt;br /&gt;
===기여===&lt;br /&gt;
[[뎐]]: 4.19혁명 페이지 원인, 의의 작성 &lt;br /&gt;
&lt;br /&gt;
[[•ᴗ•]]: 4.19혁명 페이지 전개 작성&lt;br /&gt;
&lt;br /&gt;
=='''부마항쟁'''==&lt;br /&gt;
===타임라인===&lt;br /&gt;
===원인===&lt;br /&gt;
====[[유신 헌법]]과 [[긴급조치]]====&lt;br /&gt;
1971년 선거에서 김대중을 누르고 대통령에 3선된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해 국회 해산,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등 법의 일부 기능을 정지시키고 전국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했다.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된 이른바 유신헌법에 의해 제정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법」 에 의거해 박정희가 제8대 대통령으로 재차 당선되었고, 이 유신 헌법이 발효된 기간을 유신 체제라고 부른다. 유신 체제는 행정, 입법, 사법의 3권을 모두 쥔 대통령이 종신 집권할 수 있도록 설계된 1인 대통령제였다. 박정희는 유신 헌법에 의거해 대통령의 권한으로 취할 수 있었던 특별조치인 긴급조치를 선포함으로써 헌법에 반대하는 시위 및 운동과 방송, 언론 활동을 하는 반정부 인사들을 연행, 체포, 고문하는 등 억압을 가했다.&lt;br /&gt;
&lt;br /&gt;
====한국경제의 위기====&lt;br /&gt;
1970년대 말 한국경제는''' [[오일쇼크]]'''라는 세계경제의 위기와 결합해 가라앉고 말았다. 경제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정부는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과 함께 '''[[경제안정화정책]]'''을 수용했고, 중소자본가, 봉급생활자, 도시 노동자와 농민 등에 안정화 비용을 부과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이와 같은 안정화 정책은 경제위기로 어려운 처지에 있던 중소기업들의 도산을 가속하여 기업 부도율이 치솟고 하층민들을 더 깊은 고통에 몰아넣었다. 특히 '''부가가치세'''를 도입한 이후 물가가 상승하면서 일상에 타격을 주었으며, 노동집약적 제조업이 집중되었던 부산과 마산에서는 상황이 더욱 심각하여 1979년 부산 지역 부도율은 서울의 3배에 달했다.&lt;br /&gt;
&lt;br /&gt;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lt;br /&gt;
한 시대의 대격변을 예고하는 단초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시작됐다. 1979년 8월 9일 오전, 신민당의 당사 4층 강당에서는 봉제업체인 YH무역주식회사의 여성노동자 200여명이 기업주의 폐업에 반발하여 폐업조치 철회 농성을 벌였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인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신민당이 당사 건물을 내준 것이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폭력을 동원하여 농성을 해산시켰다. 결국 이 사건은 노동 탄압 사건을 넘어선 야당에 대한 정치 탄압 사건으로 발전하였다.&lt;br /&gt;
&lt;br /&gt;
이날 경찰은 1000여명의 진압대원을 신민당사로 난입시켜 농성을 하고 있던 174명의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로 밖으로 끌어냈다. 또한 경찰은 총재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김영삼 총재와 당 간부들을 끌어내면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박정희 정권은 이 노동자 농성 사건을 빌미로 신민당 분열공작을 시도하였다. 유신정권과 비밀리에 결탁한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 3명이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 부총재 전원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접수시켰다. 그리고 법원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신민당 총재단의 직무 집행을 정지시키고 박정희 정권의 꼭두각시를 총재직무대행으로 선임하였다.&lt;br /&gt;
&lt;br /&gt;
아울러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의 동교동 자택을 전면 봉쇄하였고,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에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끊으라고 요구한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즈』 회견내용을 “반헌정적, 반민족적 작태”로 몰아서 국회에 징계 동의안을 제출했다. 10월 4일 오후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의원 159명은 여당 총회장에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제명 결의안을 '''기습적으로''' 처리해 버렸다. 노사분규 사태로 시작된 사건이 제1야당 당수의 의원직 제명으로 확대된 정치적 사태를 지켜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유신체제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이 고조되었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유신 철폐, 독재 타도!'''''   &amp;lt;small&amp;gt;-10.16 부마항쟁 당시 시위대의 구호&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부산대학교 민주선언문, 학생 시위에서 시민항쟁으로====&lt;br /&gt;
[[파일:부산시위대.jpg|250px|섬네일|오른쪽|광복동을 지나는 시위 행렬]]&lt;br /&gt;
1979년 10월 16일 아침 10시 부산대학교 구내 도서관 앞에서 약 500명의 학생들이 모여 “유신정권 물러가라”, “정치탄압 중지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반정부 시위를 벌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민주선언문」]]'''을 통해 민주화, 언론 자유, 인권 보장의 신념을 확인하고, “제도화된 폭력성과 조직적 악의 근원인 유신헌법과 독재집권층의 퇴진만이 5천 만 겨레의 통일의 첫걸음이라고 주장하면서 형제의 피를 요구하는 자유와 민주의 깃발을 우리가 잡고 반민주의 무리, 불의의 무리들을 향해 외치며 나아가자”라고 선언하였다. 이후 학생들은 교문을 나가 거리에서 시위했다. 이때 학생 수는 약 5,000명으로 불어나 있었고, 광복동과 남포동 등 부산시내 중심가까지 진출해 애국가 등의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며, 이를 제지하려는 경찰과 이곳저곳에서 충돌하였다. 비슷한 시간, 부산 동아대학교에서도 1,000여 명의 학생이 부산대학교 학생과 합류하여 가두시위를 벌였다. 부산대학교 데모로 학생 수백 명이 연행되고 100여 명이 다쳤지만 이튿날인 10월 17일에는 시위가 더욱 격화되어 학생들뿐만 아니라 다수의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학생 시위는 점차 시민항쟁의 양상을 띠어갔다.''' 밤늦게까지 계속된 시위에서 시민들은 충무파출소, 한국방송공사, 서구청, 부산세무서 등을 파괴하였고, 경찰차량을 불태우거나 파손시켰다.&lt;br /&gt;
&lt;br /&gt;
====마산의 시민항쟁====&lt;br /&gt;
&lt;br /&gt;
민주항쟁은 18일에 마산으로 확산되었다. 늦은 오후에는 1,000여 명의 경남대학교 학생들이 마산 시내 번화가에 산발적으로 집결했으며, 일부시민들도 가담해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어두워진 다음 학생과 시민들의 데모는 격화되어 파출소, 공화당사, 방송국, 신문사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파괴하였다. 이튿날인 19일에는 시위가 더욱 치열해져 마산 시내는 한때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저녁 8시경, 시위대는 경남대학과 마산대학&amp;lt;ref&amp;gt;1985년 창원대학으로 교명이 변경되었으며, 현재의 마산대학교와 다르다.&amp;lt;/ref&amp;gt;, 그리고 고등학생까지 합세하여 약 8,000명에 이르렀으며, 시내 곳곳에서 몽둥이를 들고 동사무소와 파출소로 몰려가 시설을 파괴하였고, 경찰차량에 불을 질렀다.&lt;br /&gt;
&lt;br /&gt;
====부산 계엄령, 마산 위수령====&lt;br /&gt;
[[파일:계엄포고문.jpg|270px|섬네일|왼쪽|부산지역에 내려진 계엄포고문을 읽고 있는 시민들]]&lt;br /&gt;
부산대학교 시위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박정희 정부는 학생 시위로 시작된 시위가 대규모 시민항쟁으로 사태가 심상치 않게 확대되어가자 강경책으로 대응했다. 정부는 18일 자정을 기해 '''부산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동원한 과격한 진압'''을 통해 시위 참여자들과 이를 방조한 일반 시민들까지 1,058명을 연행하고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으며, 부산지구 계엄사령부는 각 대학 휴교조처와 야간통행금지시간을 2시간 연장하는 등의 항이 담긴 포고문을 발표했다.&lt;br /&gt;
&lt;br /&gt;
부산에 계엄령이 선포된 이튿날인 19일에 마산 시위가 확대됨에 따라 그 다음날인 10월 20일 정오, 정부가 '''마산 및 창원 지역에 위수령을 발령'''해 통행금지 시간이 연장되고, 경남대학 등에는 휴교조처가 취해졌으며, 24일에는 깡패를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132명을 검거, 23명을 구속했다. 이렇게 '''표면적으로는 부마민주항쟁이 단시간에 진압되는 듯 보였지만, 항쟁은 이미 유신체제의 균열을 불러오고 있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항쟁의 전개 과정에서 볼 수 있듯, 부마민주항쟁에서 특징적인 것은 먼저 시위대의 가장 큰 분노의 대상이 공화당사와 경찰·파출소였다는 점, 다음으로는 “부가가치세를 철폐하라”, “잘 먹고 잘 살아라”등의 구호에서 드러나듯이 세무서에 대한 공격, 그리고 신문사와 방송국에 대한 공격을 들 수 있다.&lt;br /&gt;
&lt;br /&gt;
부마민주항쟁은 1970년대 유신체제 밑에서 쌓였던 침묵하는 언론, 조세, 시민을 억압하는 경찰에 대한 불만 등 정치·사회·경제·문화·종교 등 각 부문에 걸친 여러 모순의 폭발이었고, 헌법 개정과 긴급조치로 겨우 유지되던 유신체제와 박정희 정권의 붕괴를 촉진시킨 결정적인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10.26사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또한 이 사건은 1980년 5월 18일의 광주 민주화운동과 1987년 6월 민주항쟁에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된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억눌린 우리 역사&amp;lt;/br&amp;gt;터져나온 분노&amp;lt;/br&amp;gt;매운 연기 칼바람에도&amp;lt;/br&amp;gt;함성소리 드높았던&amp;lt;/br&amp;gt;동트는 새벽벌&amp;lt;/br&amp;gt;시월이 오면&amp;lt;/br&amp;gt;핏발 선 가슴마다&amp;lt;/br&amp;gt;살아오는 십 일육&amp;lt;/br&amp;gt;동지여 전진하자&amp;lt;/br&amp;gt;깨치고 나가자&amp;lt;/br&amp;gt;뜨거운 가슴으로&amp;lt;/br&amp;gt;빛나는 내일로'''''&amp;lt;/br&amp;gt;&amp;lt;small&amp;gt;-'''부산대학교''' 새벽벌도서관 10.16 기념비&amp;lt;/small&amp;gt;&amp;lt;/div&amp;gt;&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호빵이👻]]: 부마항쟁 페이지 전체 작성&amp;lt;/br&amp;gt;&lt;br /&gt;
[[이나자키로빈]]: 부마항쟁 원인 중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 작성&lt;br /&gt;
&lt;br /&gt;
=='''5.18민주화운동'''==&lt;br /&gt;
===타임라인===&lt;br /&gt;
===원인===&lt;br /&gt;
====유신체제의 붕괴====&lt;br /&gt;
&lt;br /&gt;
[[파일:김재규.jpg|섬네일|오른쪽|암살 당시 상황을 재현하는 김재규]]&lt;br /&gt;
&lt;br /&gt;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amp;lt;small&amp;gt; - 김재규&amp;lt;/small&amp;gt;&lt;br /&gt;
1979년 10월 4일 신민당 총재 김영삼이 국회에서 의원직을 제명당하자 10월 15부터 10월 20까지 부산 · 마산 등지에서는 부마항쟁이 일어났고, 이의 해결을 둘러싼 노선대립으로 갈등 중 10월 26일 &amp;lt;ins&amp;gt;[[김재규]]&amp;lt;/ins&amp;gt;가 박정희를 살해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ins&amp;gt;[[10.26 사태]]&amp;lt;/ins&amp;gt;의 사후 수습과정에서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을 중심으로 신군부 세력이 부상하였으며, 이들은 &amp;lt;ins&amp;gt;[[12.12 사건]]&amp;lt;/ins&amp;gt;의 하극상을 통하여 군부를 장악하였다. 1980년 2월 29일 김대중 등이 복권되었으나 그 해 봄, 신군부는 최규하 과도 정부를 유명무실하게 하고 국민들이 요구하는 민주주의와 이를 위한 명확한 정치일정 제시를 거부하면서 권력기반을 구축하였다.&lt;br /&gt;
&lt;br /&gt;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lt;br /&gt;
한 시대의 대격변을 예고하는 단초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시작됐다. 1979년 8월 9일 오전, 신민당의 당사 4층 강당에서는 봉제업체인 YH무역주식회사의 여성노동자 200여명이 기업주의 폐업에 반발하여 폐업조치 철회 농성을 벌였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인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신민당이 당사 건물을 내준 것이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폭력을 동원하여 농성을 해산시켰다. 결국 이 사건은 노동 탄압 사건을 넘어선 야당에 대한 정치 탄압 사건으로 발전하였다.&lt;br /&gt;
&lt;br /&gt;
이날 경찰은 1000여명의 진압대원을 신민당사로 난입시켜 농성을 하고 있던 174명의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로 밖으로 끌어냈다. 또한 경찰은 총재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김영삼 총재와 당 간부들을 끌어내면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박정희 정권은 이 노동자 농성 사건을 빌미로 신민당 분열공작을 시도하였다. 유신정권과 비밀리에 결탁한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 3명이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 부총재 전원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접수시켰다. 그리고 법원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신민당 총재단의 직무 집행을 정지시키고 박정희 정권의 꼭두각시를 총재직무대행으로 선임하였다.&lt;br /&gt;
&lt;br /&gt;
아울러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의 동교동 자택을 전면 봉쇄하였고,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에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끊으라고 요구한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즈』 회견내용을 “반헌정적, 반민족적 작태”로 몰아서 국회에 징계 동의안을 제출했다. 10월 4일 오후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의원 159명은 여당 총회장에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제명 결의안을 '''기습적으로''' 처리해 버렸다.&lt;br /&gt;
&lt;br /&gt;
노사분규 사태로 시작된 사건이 제1야당 당수의 의원직 제명으로 확대된 정치적 사태를 지켜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유신체제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이 고조되었다. 또한 이 사건은 그동안 다소 주춤하던 대학가에 반유신 반독재 운동의 열기가 다시 확산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청춘을 바쳐, 학생 운동====&lt;br /&gt;
&lt;br /&gt;
[[파일:서울의_봄.JPG|섬네일|오른쪽|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앞에 모인 시위대]]&lt;br /&gt;
&lt;br /&gt;
군부의 재집권 야욕에 대한 국민적 저항은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표출되었다. 1980년 3월, 서울대 총학생회 출범을 시작으로 4월 초순에는 전국의 주요 대학들이 총학생회를 결성하기 시작하였다. 대학별로 독재 정권에 아부했던 어용교수와 족벌사학 퇴진 운동을 벌였고, 특히 병영집체훈련(당시 대학 신입생들은 의무적으로 군부대에 10일 간 입대하여 각종 군사훈련을 이수해야 했다.) 거부가 주요 이슈로 전면 등장했다. 각 대학의 병영집체훈련 거부운동이 본격화되고 전국적인 쟁점으로 떠오르자 신군부는 신문, 방송을 통해 ‘학생들의 안보의식 결여’를 비난하고 교내 시위·농성을 집중적으로 보도하게 했다.  5월 1일에 서울대가 입영훈련 거부투쟁 철회를 결정하고 ‘계엄령 해제’와 ‘유신잔당 퇴진’, ‘정부개헌중단’과 ‘노동 3권 보장’ 등을 요구하기 시작하면서 대학가는 이제까지의 학내 문제 중심의 운동에서 정치개혁을 위한 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그간 정부와 대학 간에 팽팽하게 유지되던 긴장 관계는 폭발 직전으로 내닫게 된 것이다.&lt;br /&gt;
&lt;br /&gt;
약 열흘 간의 대정부 투쟁을 준비한 대학가는 5월 10일 고려대 총학생회장실에서 열린 ‘총학생회장단 회의’에 참석한 전국 23개 대학 대표들은 ‘비상계엄의 즉각 해제’와 ‘전두환, 신현확 등 유신잔당 퇴진’ 등을 결의하고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정세에 대한 공동대처 방안을 마련했다. 이후 5월 13일부터 5월 14일에 걸쳐 서울 · 부산 · 대구 · 광주 등 37개 대학에서 계엄철폐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5월 15일에는 서울역에서 시위가 발생하는 등 학생시위는 서울시가지를 거의 마비시키는 등 야간까지 지속되어 사태가 절정에 달하면서 신군부 세력을 위협하였다. 5월 16일 24개 대학 학생대표들은 당분간 시국의 추이를 관망하기로 결정하고 가두시위를 중단하면서 소강상태에 돌입하는 듯하였다.&lt;br /&gt;
&lt;br /&gt;
====1980년 봄의 광주====&lt;br /&gt;
5월 17일 신군부 세력이 이전까지는 제주도를 제외한 지역에 한정되었던 비상계엄을 전국에 확대하는 조치인 계엄포고 10호(17일 24시에 발효: 각 대학 휴교령 포함)를 밤 9시 40분에 의결하고 밤 11시 40분에 발표하면서 밤 11시를 전후한 시점부터 김대중 · 김종필이 연행되는 등 권력형 부정축재자 및 소요조종 혐의자, 학생 시위 주동자가 체포되었다. 이날 밤 광주지역의 사회운동·학생운동의 지도자도 상당수가 검거되었다. 광주의 검거대상자는 전남대 12명, 조선대 10명 등 총 22명이었다. 전남에서 계엄합동수사단은 광주505보안대가 중심이고, 중앙정보부, 경찰 등이 보조역할을 했다. 전남 계엄합동수사단은 22대 차량과 86명의 인원이 출동해 정동년 등 복적생들과 대학의 총학생회 간부들을 집중 검거했다.&lt;br /&gt;
&lt;br /&gt;
한편 육군본부는 14일 오전 7시55분에 국가 중요 보안목표와 주요대학에 군 병력 배치 명령을 하달했다. 이 명령에 따라 전남북계엄분소장인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광주 시내 주요 시설물에 이날 오후부터 계엄병력을 배치했다. 31사단 96연대 병력이 광주시내 KBS건물에 42명, MBC 21명, CBS 11명, VOC(전일방송) 11명 등 주요 방송사 건물에 배치돼 경비에 들어간 것이다.&lt;br /&gt;
&lt;br /&gt;
이날 오후 전교사령관은 7공수여단의 광주배치에 따른 수송수단 지원도 미리 협의했다. 그리고 5월 8일부터 16일 사이에 공수부대 수뇌부들도 헬기를 타고 서울에서 내려와 광주 상무대의 전투병과교육사령부를 방문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광주에서 시위가 격화되면 즉각적으로 최정예 군부대를 동원해서 진압할 준비를 철저하게 갖추고 있었다. 5월 18일에 시작된 광주의 비극은 그 이전에 이미 시한폭탄처럼 준비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lt;br /&gt;
{{구글지도 | 위도=35.175961433346885 | 경도=126.90865311973532 | 줌=13 }}  [[파일:금남로.JPG|섬네일|오른쪽|금남로 앞에 집결한 버스와 시민군]]&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18일&amp;lt;/span&amp;gt;&lt;br /&gt;
휴교령이 내려질 경우 교문 앞에서 집결한다는 결의에 따라 학생들은 5월 18일 오전 전남대학교 앞에 모였다. 공수부대원들이 전남대 앞 시위를 저지하자 대학생들은 광주역에 재집결해서 시위를 이어갔다. 시위대가 점차 늘어나면서 공수부대원이 시내에서 시위진압에 나섰으며 18일 오후 1시부터 무차별 진압작전이 이루어져 부상자가 속출하였다.&lt;br /&gt;
&lt;br /&gt;
군인들이 금남로 등 시내 중심가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이나 여자를 마구 구타하고 짓밟으며 찌르는 등의 잔혹 행동을 하자 시민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이에 시위대는 오후 4시 이후 파출소 파괴 등 적극공세에 나섰다. '''계엄군의 과잉 무력진압은 시위를 해산시키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오히려 시민들을 단결시켰으며, 결국 19일 시민 · 학생 연대가 발생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lt;br /&gt;
&lt;br /&gt;
 '''''광주 애국 시민 여러분! 이것이 웬 말입니까? 웬 벼락이란 말입니까? 죄 없는 학생들을 총칼로 찔러 죽이고 몽둥이로 두들겨 트럭으로 실어가며 부녀자를 발가벗겨 총칼로 찌르는 놈들이 이 누구란 말입니까? 이제 우리가 살길은 전시민이 하나로 뭉쳐 청년 학생들을 보호하고 유신잔당과 극악무도한 살인마 전두환 일파와 공수 특전단 놈들을 한놈도 남김없이 쳐부수는 길 뿐입니다. 우리는 이제 다 보았습니다. 다 알게 되었읍니다. 왜 학생들이 그토록 소리 높이 외쳤는가를, 우리의 적은 경찰도 군대도 아닙니다. 우리의 적은 전국민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바로 유신잔당과 전두환 일파 그놈들입니다.''''' &amp;lt;small&amp;gt; - 1980년 5월 19일에 '광주시민민주투쟁회'명의의 호소문&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19일&amp;lt;/span&amp;gt;&lt;br /&gt;
19일 오전에는 일시적 소강상태였으나 오후 들어서 분노한 학생 · 시민들이 군 · 경찰과 공방전을 벌이면서 시위는 점차 격화되었다. '''시민들은 공포감에서 벗어나 자신의 생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단순한 학생시위에서 시민봉기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계엄군은 시위대를 포위하여 구타하였으며 일부 고등학생까지 포함된 시위대는 돌과 화염병으로 저항하였고 파출소와 방송국 등에 침입하였다. 뒤처진 공수부대를 공격하거나 고립된 차량을 포위하기도 하였으며 총과 방패를 빼앗기도 하였고, 오후 4시 50분 시민들에게 포위된 계엄군의 장갑차에서 최초의 발포가 있었다. 19일 밤비가 내리는 가운데 시위가 산발적으로 계속되었으며, 20일 오전 비가 그치고 대규모 시위는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오후부터 다시 시작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20일&amp;lt;/span&amp;gt;&lt;br /&gt;
'''20일 오후 6시부터 택시와 버스 운전 기사들이 광주역과 무등경기장에 모여 대형 버스와 트럭을 앞세우고 일시에 금남로에 집결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들을 앞세운 시위는 계엄군을 몰아내는 데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였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5.18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에 &amp;lt;ins&amp;gt;[[지대한 영향]]&amp;lt;/ins&amp;gt;을 끼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학생 운동에 뛰어든 많은 대학생들은 대학교에 들어와서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의 실상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아 학생 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군부정권은 5.18 이후로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다. 전두환은 김대중 등에게 '광주 사태'의 책임을 물어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했고,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 선언을 한 직후, 8월 27일 소위 체육관 선거를 통해 전두환은 대통령 자리를 탈취했다.&lt;br /&gt;
&lt;br /&gt;
지역적인 면에서는 '''광주광역시를 비롯한 전라도 지역의 트라우마'''로 작용해 이후의 민주정의당 및 &amp;lt;ins&amp;gt;[[3당 합당]]&amp;lt;/ins&amp;gt;으로 이어지는 보수 세력에 대해 적대심을 가지고, 민주당계 정당의 표밭이 되는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미 박정희 정부 시절부터 유무형의 정치적인 차별을 받고 있었지만 5.18의 참상은 전라도가 다시는 보수 세력을 지지하지 않게 만들 정도로 심각한 사건이며 호남소외론의 가장 결정적인 명분이 되었다.&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이나자키로빈]]: 5.18 민주화운동 페이지 전체 작성&lt;br /&gt;
&lt;br /&gt;
=='''6월민주항쟁'''==&lt;br /&gt;
===타임라인===&lt;br /&gt;
===원인===&lt;br /&gt;
====[[박종철고문치사사건]]====&lt;br /&gt;
&lt;br /&gt;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박종철은 1987년 1월 13일 자정 경 하숙집에서 치안본부(現 경찰청)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게 연행되었다.‘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이자 ‘민주화추진위원회’ 지도위원으로 수배 받고 있었던 박종운을 잡기위해 연행한 것이었다. 취조실로 연행해간 공안 당국은 박종철에게 박종운의 소재를 물었으나, 박종철은 순순히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경찰은 잔혹한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가하였고, 박종철은 끝내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했다. 당시 경찰은 초기 발표에서 고문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라고 사망원인을 발표하였으나, 시체부검 결과 전기고문과 물고문에 의한 살인인 것으로 밝혀졌다.&lt;br /&gt;
&lt;br /&gt;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저 죽음을 응시해주길 바란다. 저 죽음을 끝내 지켜주길 바란다. 저 죽음을 다시 죽이지 말아주길 바란다.''''' &amp;lt;small&amp;gt; - 동아일보 1987년 1월 17일자 김중배 칼럼 중&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사건 진상의 일부가 공개되자 2월 7일 전국 주요 도시에서 &amp;quot;박종철군 범국민추도식&amp;quot; 및 도심 시위가 열렸고 이어 3월 3일에는 &amp;quot;박종철군 49재와 고문추방 국민대행진&amp;quot;과 함께 또 다른 시위가 열렸다. 이후 4월 2일 서울대학교 학부모 130여 명이 ‘건국대학교 사태‘ 등 시국관련 구속학생의 징계철회를 요구하며 철야 농성을 벌였다.&lt;br /&gt;
&lt;br /&gt;
====정부의 개헌논의 유보====&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lt;br /&g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JazJFsgu4oc?si=sOE7w1tz-jKVztC9&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lt;br /&g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그러나 전두환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1987년 4월 13일 [[4.13호헌조치]]라 불리는 ‘대통령 특별담화‘를 발표, 개헌(改憲) 논의를 유보하겠다고 밝혔다. [[4.13호헌조치]]에서 전두환은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와 대통령 선거는 자유 경선의 분위기가 보장되는 가운데 1987년 내에 공정한 선거관리를 통해 차질 없이 실시할 수 있게 모든 노력을 다할것‘이라고 다짐했으며, 또 ‘민정당의 후임 대통령 후보는 조속한 시일 안에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인물 가운데서 당헌 절차와 민주 방식에 따라 전당대회에서 선출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호헌조치‘라는 그 이름대로 현행 헌법에 따라 권력을 이양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국민들의 큰 기대를 얻을 것이라 믿었으나, 기대는 커녕 오히려 반발을 가져오는 요인이 되고 말았다. 곧바로 이튿날인 4월 14일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 등 각계 인사들이, 호헌 조치를 비판하는 시국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정부 최루탄에 의한 [[이한열]] 사망====&lt;br /&gt;
[[파일:이한열.jpg|200px|섬네일|오른쪽|최루탄에 피격당한 후 이종창에게 부축받는 이한열]]&lt;br /&gt;
먼저 1987년 5월 27일 야당과 재야, 종교계 등이 힘을 모아 ‘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여당인 민주정의당에서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6월 10일에 맞춰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6 · 10국민대회]])’를 치르기로 결정하였다. 대학생들은 국본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를 중심으로 6 · 10국민대회에 호응하여 6월 초부터 각 대학별로 연일 집회와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6 · 10국민대회]] 하루 전날인 6월 9일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교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는 곧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학생들은 물론 시민들의 분노가 들끓었다. 이러한 분노 속에서 6 · 10국민대회가 열렸다. 경찰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6 · 10국민대회가 열리는 성공회대성당을 원천 봉쇄하였다. 그 결과 6 · 10국민대회는 대회장에 미리 들어가 있던 소수의 인원만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대회 예정 시간인 오후 6시 이전부터 서울 시내 곳곳에서 대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시민들도 다양한 방식으로 6 · 10국민대회와 학생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날 밤 늦게까지 시위를 벌이던 학생들은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이후 5일 동안 농성을 계속하였다. 애초 계획된 것은 아니었지만 대학생들의 명동성당 농성은 6 · 10국민대회가 단발성 행사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인 저항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lt;br /&gt;
&lt;br /&gt;
====민주항쟁 확산====&lt;br /&gt;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로 개헌하라!'''''   &amp;lt;small&amp;gt;-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제시한 슬로건&amp;lt;/small&amp;gt;&lt;br /&gt;
명동성당 농성을 거치며 항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유월항쟁의 전국화 과정에는 일정한 패턴이 존재하였다. 6월 10일 서울 외에도 전국 주요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위가 벌어졌지만, 15일까지 항쟁의 중심은 6 · 10국민대회와 명동성당 농성이 전개된 서울이었다. 하지만 6월 15일 경부터는 부산, 대전, 진주 등에서 격렬한 시위가 전개되었다. 그러다가 6월 20일부터 대규모 시위가 광주, 전주, 순천, 익산 등 호남 지방으로 옮겨졌다. 6 · 10국민대회 이후 약 20일 동안 전국 곳곳에서 매일 평균 100회 이상의 시위가 동시다발로 벌어졌다. 특히 6월 18일 ‘최루탄추방대회’와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은 전국 곳곳에서 한꺼번에 1백만 명 이상이 참여하였다. 갈수록 참가 지역이 전국 곳곳으로 확산되어 대도시, 중소도시뿐만 아니라 농촌 지역의 군 단위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6월 26일 하루에만 37~38개 시 · 군에서 시위가 동시에 벌어졌다. 유월항쟁에 참가한 연 인원은 400~500만 명으로 추산된다.&lt;br /&gt;
&lt;br /&gt;
반면 유월항쟁의 전국적 동시다발 시위는 경찰 병력을 분산시켰다. 분산된 경찰 병력으로는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거센 시위의 물결을 막아 낼 수 없었다. 경찰이 시위 진압에 최루탄을 남발하면서 최루탄도 점차 고갈되기 시작하였다. 유월항쟁 기간 동안 경찰이 사용한 최루탄만 총 67만 발이 넘었다. 더불어, 전두환 정권이 집권 내내 강조했던 88서울올림픽이 얼마 남지 않아 미국 등 국제사회의 이목이 집중된 상황에서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운동 때처럼 유혈 사태와 대량 학살을 반복하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무엇보다 군대를 동원하더라도 이러한 대규모 시민 항쟁을 진압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결국 경찰력으로 항쟁을 막기 힘들고, 군대 투입도 어렵다고 판단한 전두환 정권은 1987년 6월 29일 ‘ 6 · 29민주화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하였다. 그리고 그동안 의식불명 상태에 있었던 이한열이 7월 5일 끝내 사망하였다. 5일장 후 7월 9일 치러진 이한열의 노제에 100만 명의 인파가 모인 것을 끝으로 약 한 달 동안 지속된 유월항쟁은 마무리되었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1987년 6월항쟁이 '''대통령[[직선제]] 개헌'''이라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이 항쟁에 동참한 학생과 시민들의 요구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제시한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 개헌’이라는 슬로건으로 모아졌기 때문이었다. 유월항쟁은 이러한 민주화 세력의 통합성, 즉 각기 다른 성격과 지향을 가진 여러 주체들이 모두 동의할 수 있는 ‘최소 강령’하에 ‘최대 연합’으로 결집하였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딩잉잉]]:6월민주항쟁 페이지 전체 작성&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기밀문서]]&lt;br /&gt;
[[분류:4.19혁명관련]]&lt;br /&gt;
[[분류:부마항쟁관련]]&lt;br /&gt;
[[분류:5.18민주화운동관련]]&lt;br /&gt;
[[분류:6월민주항쟁관련]]&lt;br /&gt;
[[분류:뎐]]&lt;br /&gt;
[[분류:이나자키로빈]]&lt;br /&gt;
[[분류:호빵이👻]]&lt;br /&gt;
[[분류:•ᴗ•]]&lt;br /&gt;
[[분류:딩잉잉]]&lt;/div&gt;</summary>
		<author><name>딩잉잉</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8%B0%EB%B0%80%EB%AC%B8%EC%84%9C&amp;diff=35395</id>
		<title>기밀문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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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1T11:52:3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딩잉잉: /* 민주항쟁 확산 */&lt;/p&gt;
&lt;hr /&gt;
&lt;div&gt;=='''컨텐츠 주제'''==&lt;br /&gt;
[[파일:이한열사진.jpeg|center]]&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amp;lt;big&amp;gt;'''&amp;lt;span style=&amp;quot;color:#CD0000&amp;quot;&amp;gt;투쟁의 불꽃, 자유의 환호&amp;lt;/span&amp;gt;'''&amp;lt;br/&amp;gt;&lt;br /&gt;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으로 일궈낸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역사에 대해 함께 살펴보자.&amp;lt;/span&amp;gt;&amp;lt;/big&amp;gt;&amp;lt;/div&amp;gt;&lt;br /&gt;
&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이나자키로빈]]&lt;br /&gt;
&lt;br /&gt;
=='''팀원'''==&lt;br /&gt;
*오현지(2022131143) [[뎐]]&amp;lt;br/&amp;gt;&lt;br /&gt;
*김여원(2023130209) [[이나자키로빈]]&amp;lt;br/&amp;gt;&lt;br /&gt;
*김하은(2022131345) [[호빵이👻]]&amp;lt;br/&amp;gt;&lt;br /&gt;
*박정원(2023130350) [[•ᴗ•]]&amp;lt;br/&amp;gt;&lt;br /&gt;
*최필중(2023130216) [[딩잉잉]]&amp;lt;br/&amp;gt;&lt;br /&gt;
&lt;br /&gt;
=='''기획의도'''==&lt;br /&gt;
===기획배경===&lt;br /&gt;
1945년 광복 이후 대한민국 국민들은 자유민주국가로서의 미래를 기대했으나 실상은 그러지 못했다.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보여주듯 현재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는 그것을 누리지 못한 앞선 세대들의 목숨을 바친 항쟁의 대가이다. 민주항쟁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의 핵심 동력이었다. 오늘날 우리나라 민주의식의 중요한 기둥이 되는 네 가지 항쟁을 선별하고 각 항쟁의 배경, 전개과정, 의의를 비롯해 세부적이고 자세한 내용에 대한 기사를 작성한다.&lt;br /&gt;
===기획목적===&lt;br /&gt;
작금의 현실까지 오기에는 수없이 많은 투쟁이 있었지만 4.19혁명, 부마항쟁, 5.18민주항쟁, 6월민주항쟁이라는 네 가지 사건을 살펴보기로 한 것은 가장 많이 다뤄지고, 가장 많이 알려진 사건이기 때문이다. 관련된 사건과 역사 인물들에 대해 자세히 적어 내어 민주항쟁의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지 않으면 알기 힘든 각 민주항쟁의 자세한 내막을 밝혀낸다.&lt;br /&gt;
===기대하는 바===&lt;br /&gt;
타임라인과 온톨로지를 활용해 내용의 전반적인 이해를 돕고 자세한 설명을 통해 사건의 자세한 내막을 들어낸다. 네 가지 항쟁을 각각 큰 목차로 설정하고 세부 기사를 그 내부에 작성해 독자의 관심과 수요에 부합하는 정보를 전달하는 데 효과적일 것으로 기대된다. 민주항쟁에 참여한 사람들의 희생과 투쟁에 대한 존경심을 부르고 역사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다.&lt;br /&gt;
===기여===&lt;br /&gt;
[[뎐]], [[이나자키로빈]], [[호빵이👻]]: 기획의도 페이지 작성&lt;br /&gt;
&lt;br /&gt;
=='''온톨로지'''==&lt;br /&gt;
{{NetworkGraph | title=민주항쟁.lst}}&lt;br /&gt;
[[민주항쟁.lst]]&lt;br /&gt;
===기여===&lt;br /&gt;
*[[뎐]]: 온톨로지 제작&lt;br /&gt;
=='''컨텐츠 구조'''==&lt;br /&gt;
===클래스(Class)===&lt;br /&gt;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color:white&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0%&amp;quot; | 클래스 !! style=&amp;quot;width:40%&amp;quot; | 설명 !! style=&amp;quot;45%&amp;quot; | 노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제||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대표 키워드인 민주항쟁을 주제로서 나타내었다 || 만주항쟁&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항쟁||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민주화운동 시기 발생했던 주요 운동들을 ‘항쟁’이라는 키워드로 분류하였다. || 4.19혁명, 부마항쟁, 5.18 민주화운동, 6월민주항쟁&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사건||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항쟁의 원인, 결과가 되는 사건을 정리하였다|| 3.15부정선거, 고려대 4.18학생시위, 3.15의거, YH사건, 10.26사태, 12.12 군사반란, 비상계엄령,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고문추방민족대행진, 4.13호헌조치, 6.29선언, 대통령직선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지역||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요 항쟁들이 일어났던 지역을 정리하였다|| 마산, 부산, 광주&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인물||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요사건들을 발생시킨 인물, 참여했던 인물을 묶어서 정리하였다|| 이승만, 이기붕, 김주열, 박정희, 김재규, 전두환, 신군부, 시민군, 박종철, 이한열, 노태우&lt;br /&gt;
|-&lt;br /&gt;
|}&lt;br /&gt;
===관계성(Relation)===&lt;br /&gt;
*&amp;lt;font color=#228B22&amp;gt;'''~은 ~에 속한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주요 항쟁들이 민주항쟁에 속함을 나타내거나 인물의 소속을 나타낸다.&lt;br /&gt;
***해당노드:&lt;br /&gt;
***#4.19혁명 -&amp;gt; 민주항쟁&lt;br /&gt;
***#부마항쟁 -&amp;gt; 민주항쟁&lt;br /&gt;
***#5.18민주화운동 -&amp;gt; 민주항쟁&lt;br /&gt;
***#6월 민주항쟁 -&amp;gt; 민주항쟁&lt;br /&gt;
***#전두환 -&amp;gt; 신군부&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의 원인이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어떠한 사건과 인과관계를 이루는 또다른 사건 혹은 인물을 설명한다.&lt;br /&gt;
***#이기붕 -&amp;gt; 3.15부정선거&lt;br /&gt;
***#김주열 -&amp;gt; 고려대 4.18학생시위&lt;br /&gt;
***#고려대 4.18학생시위 -&amp;gt; 4.19혁명&lt;br /&gt;
***#3.15의거 -&amp;gt; 4.19혁명&lt;br /&gt;
***#김주열 -&amp;gt; 4.19혁명&lt;br /&gt;
***#3.15부정선거 -&amp;gt; 3.15의거&lt;br /&gt;
***#YH사건 -&amp;gt; 부마항쟁&lt;br /&gt;
***#부마항쟁 -&amp;gt; 10.26사태&lt;br /&gt;
***#박정희 -&amp;gt; 10.26사태&lt;br /&gt;
***#비상계엄령 -&amp;gt; 5.18민주화운동&lt;br /&gt;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 -&amp;gt; 고문추방민족대행진&lt;br /&gt;
***#고문추방민족대행진 -&amp;gt; 4.13호헌조치&lt;br /&gt;
***#4.13호헌조치 -&amp;gt; 6월민주항쟁&lt;br /&gt;
***#6월민주항쟁 -&amp;gt; 6.29선언&lt;br /&gt;
***#6월민주항쟁 -&amp;gt; 대통령직선제&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을 발생시켰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사건과 그 사건을 직접적으로 발생시킨 인물을 연결한다.&lt;br /&gt;
***#이승만 -&amp;gt; 3.15부정선거&lt;br /&gt;
***#김재규 -&amp;gt; 10.26사태&lt;br /&gt;
***#신군부 -&amp;gt; 1212군사반란&lt;br /&gt;
***#전두환 -&amp;gt; 비상계엄령&lt;br /&gt;
***#노태우 -&amp;gt; 6.29선언&lt;br /&gt;
***#시민군 -&amp;gt; 5.18민주화운동&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에 희생되었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민주항쟁의 진압과정 등 에서 희생된 인물을 설명한다&lt;br /&gt;
***#김주열 -&amp;gt; 3.15의거&lt;br /&gt;
***#이한열 -&amp;gt; 6월 민주항쟁&lt;br /&gt;
***#박종철&amp;gt;박종철 고문치사 사건&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에서 발생했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설명한다.&lt;br /&gt;
***#3.15의거 -&amp;gt; 마산&lt;br /&gt;
***#부마항쟁 -&amp;gt; 부산&lt;br /&gt;
***#부마항쟁 -&amp;gt; 마산&lt;br /&gt;
***#5.18민주화운동 -&amp;gt; 광주&lt;br /&gt;
===기여===&lt;br /&gt;
*[[뎐]]: 컨텐츠 구조 페이지 작성&lt;br /&gt;
=='''4.19혁명'''==&lt;br /&gt;
===타임라인===&lt;br /&gt;
===원인===&lt;br /&gt;
====[[3.15 부정선거]]====&lt;br /&gt;
[[파일:3.15부정선거_개표_모습.png|300픽셀|섬네일|오른쪽|3.15부정선거 당시 개표하는 사진&amp;lt;ref&amp;gt;사진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amp;lt;/ref&amp;gt;]]&lt;br /&gt;
1959년 대한민국은 제 4대 대통령 선거와 제 5대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당시 자유당에서는 12년째 대통령으로서 연임 중이던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이기붕]]'''을 부통령 후보로 선임하였다. 그러나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병세의 악화로 사망하게 되고,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은 확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선거의 초점은 자유당의 조병옥과 민주당의 장면 간의 선거전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본격적인 선거유세의 시작과 함께 정부와 여당의 잇따른 야당선거운동 방해사건으로 부정선거가 시작되었다. 1960년 3월 15일 선거가 시작된 이후에도 다양한 방법의 부정행위가 일어났고, 개표 결과 이승만과 이기붕의 득표가 100%에 육박하는 결과로 나오자 자유당은 득표수를 하향 조정해 최종 집계에 반영할 것을 지시했다. 결국 이승만 88.7%, 이기붕 79%의 득표율을 가지며 정, 부통령에 당선되었다.&amp;lt;ref&amp;gt;자세한 내용은 3.15부정선거 페이지 참조&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부정선거 반대시위, [[3.15 의거]]의 발생====&lt;br /&gt;
3.15 부정선거를 반대하는 시위는 초기에는 중, 고등학생들의 산발적인 시위로 전개되었다. 3월 15일 선거일 밤 경남 마산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으며,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여 1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amp;lt;br/&amp;gt;&lt;br /&gt;
3월 15일 실종되었던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4월 11일 마산부두에서 발견되자 마산 시민들은 시청, 파출소 등을 파괴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2차 시위가 일어난 것이다.&lt;br /&gt;
&lt;br /&gt;
====[[고려대학교 4.18 학생시위]]의 발생====&lt;br /&gt;
1, 2차 마산시위를 계기로 부정선거 무효와 이승만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났다. '4.18 선언문'을 낭독하고 시내로 진출하였다. 이는 4월 19일 학생들과 일반 시민들이 가세한 대규모 시위로 이어지게 되었다.&lt;br /&gt;
====전국적인 4.19 혁명의 발생====&lt;br /&gt;
분노한 전국의 시민과 학생들이 다음 날인 4월 19일 총궐기하여 '이승만 하야와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며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경찰은 또다시 무차별 발포에 나섰고,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여기에 이승만 정부는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지만 이러한 압박에도 시민들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lt;br /&gt;
====이승만 대통령의 혼란 수습 시도====&lt;br /&gt;
이승만 대통령은 4.19 시위로 인한 정국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4월 20일 국무위원 전원과 자유당 당무위원 전원의 사표를 제출하도록 지시하였으며, 4월 23일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외무장관에 허정, 내무장관에 이호, 법무장관에 권승렬을 임명하는 등 개각을 단행하였다.&amp;lt;br/&amp;gt;&lt;br /&gt;
그러나 미국은 4.19직후 국무부 성명을 통해 한국에서 발생한 사태는 부정선거에 대한 '군중의 불만'을 반영한 것 이라고 했고, 양유찬 주미대사를 불러 '부정선거에 대한 철저한 조사', '경향신문 복간', '국가보안법 개정' 등을 촉구하는 각서를 전달하였다.&amp;lt;br/&amp;gt;&lt;br /&gt;
그리고 4월 25일, 이승만 정권에 분노한 전국 27개 대학 258명의 교수가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 모여 14개항의 시국 선언문을 발표하며 학생, 시민들과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들은 3.15 부정선거 및 4.19 사태의 책임을 지고 대통령이 물러날 것을 주장하였으며, &amp;quot;학생들의 피에 보답하자&amp;quot;는 플랜 카드를 앞세워 국회의사당까지 행진하였다. &lt;br /&gt;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lt;br /&gt;
무력진압에도 대규모 시위가 이어지며 시민들은 완강하게 투쟁하였다. 4월 26일 시위대가 경무대로 다시 집결하는 등 사태가 심각하게 진행되자, 오전 10시 30분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 성명을 발표하였다. 4월 27일 이승만은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하며 대통령직을 하야하고 하와이로 망명하였으며 자유당 정권도 끝나게 된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우리 국민들, 특히 학생과 청년들의 주도로 이루어진 4.19 혁명은 학생과 일반 대중이 단결하여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아시아 최초의 시건이다. 4.19혁명은 부마항쟁, 5.18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그리고 2017년 촛불시위에 이르기 까지 정권에 대항하는 국민들이 단합을 이루는 초석이 되었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도 시민 저항권에 대한 근거로써 4.19혁명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문구가 있다.&lt;br /&gt;
===기여===&lt;br /&gt;
[[뎐]]: 4.19혁명 페이지 원인, 의의 작성 &lt;br /&gt;
&lt;br /&gt;
[[•ᴗ•]]: 4.19혁명 페이지 전개 작성&lt;br /&gt;
&lt;br /&gt;
=='''부마항쟁'''==&lt;br /&gt;
===타임라인===&lt;br /&gt;
===원인===&lt;br /&gt;
====[[유신 헌법]]과 [[긴급조치]]====&lt;br /&gt;
1971년 선거에서 김대중을 누르고 대통령에 3선된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해 국회 해산,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등 법의 일부 기능을 정지시키고 전국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했다.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된 이른바 유신헌법에 의해 제정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법」 에 의거해 박정희가 제8대 대통령으로 재차 당선되었고, 이 유신 헌법이 발효된 기간을 유신 체제라고 부른다. 유신 체제는 행정, 입법, 사법의 3권을 모두 쥔 대통령이 종신 집권할 수 있도록 설계된 1인 대통령제였다. 박정희는 유신 헌법에 의거해 대통령의 권한으로 취할 수 있었던 특별조치인 긴급조치를 선포함으로써 헌법에 반대하는 시위 및 운동과 방송, 언론 활동을 하는 반정부 인사들을 연행, 체포, 고문하는 등 억압을 가했다.&lt;br /&gt;
&lt;br /&gt;
====한국경제의 위기====&lt;br /&gt;
1970년대 말 한국경제는''' [[오일쇼크]]'''라는 세계경제의 위기와 결합해 가라앉고 말았다. 경제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정부는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과 함께 '''[[경제안정화정책]]'''을 수용했고, 중소자본가, 봉급생활자, 도시 노동자와 농민 등에 안정화 비용을 부과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이와 같은 안정화 정책은 경제위기로 어려운 처지에 있던 중소기업들의 도산을 가속하여 기업 부도율이 치솟고 하층민들을 더 깊은 고통에 몰아넣었다. 특히 '''부가가치세'''를 도입한 이후 물가가 상승하면서 일상에 타격을 주었으며, 노동집약적 제조업이 집중되었던 부산과 마산에서는 상황이 더욱 심각하여 1979년 부산 지역 부도율은 서울의 3배에 달했다.&lt;br /&gt;
&lt;br /&gt;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lt;br /&gt;
한 시대의 대격변을 예고하는 단초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시작됐다. 1979년 8월 9일 오전, 신민당의 당사 4층 강당에서는 봉제업체인 YH무역주식회사의 여성노동자 200여명이 기업주의 폐업에 반발하여 폐업조치 철회 농성을 벌였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인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신민당이 당사 건물을 내준 것이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폭력을 동원하여 농성을 해산시켰다. 결국 이 사건은 노동 탄압 사건을 넘어선 야당에 대한 정치 탄압 사건으로 발전하였다.&lt;br /&gt;
&lt;br /&gt;
이날 경찰은 1000여명의 진압대원을 신민당사로 난입시켜 농성을 하고 있던 174명의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로 밖으로 끌어냈다. 또한 경찰은 총재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김영삼 총재와 당 간부들을 끌어내면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박정희 정권은 이 노동자 농성 사건을 빌미로 신민당 분열공작을 시도하였다. 유신정권과 비밀리에 결탁한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 3명이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 부총재 전원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접수시켰다. 그리고 법원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신민당 총재단의 직무 집행을 정지시키고 박정희 정권의 꼭두각시를 총재직무대행으로 선임하였다.&lt;br /&gt;
&lt;br /&gt;
아울러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의 동교동 자택을 전면 봉쇄하였고,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에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끊으라고 요구한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즈』 회견내용을 “반헌정적, 반민족적 작태”로 몰아서 국회에 징계 동의안을 제출했다. 10월 4일 오후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의원 159명은 여당 총회장에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제명 결의안을 '''기습적으로''' 처리해 버렸다. 노사분규 사태로 시작된 사건이 제1야당 당수의 의원직 제명으로 확대된 정치적 사태를 지켜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유신체제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이 고조되었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유신 철폐, 독재 타도!'''''   &amp;lt;small&amp;gt;-10.16 부마항쟁 당시 시위대의 구호&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부산대학교 민주선언문, 학생 시위에서 시민항쟁으로====&lt;br /&gt;
[[파일:부산시위대.jpg|250px|섬네일|오른쪽|광복동을 지나는 시위 행렬]]&lt;br /&gt;
1979년 10월 16일 아침 10시 부산대학교 구내 도서관 앞에서 약 500명의 학생들이 모여 “유신정권 물러가라”, “정치탄압 중지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반정부 시위를 벌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민주선언문」]]'''을 통해 민주화, 언론 자유, 인권 보장의 신념을 확인하고, “제도화된 폭력성과 조직적 악의 근원인 유신헌법과 독재집권층의 퇴진만이 5천 만 겨레의 통일의 첫걸음이라고 주장하면서 형제의 피를 요구하는 자유와 민주의 깃발을 우리가 잡고 반민주의 무리, 불의의 무리들을 향해 외치며 나아가자”라고 선언하였다. 이후 학생들은 교문을 나가 거리에서 시위했다. 이때 학생 수는 약 5,000명으로 불어나 있었고, 광복동과 남포동 등 부산시내 중심가까지 진출해 애국가 등의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며, 이를 제지하려는 경찰과 이곳저곳에서 충돌하였다. 비슷한 시간, 부산 동아대학교에서도 1,000여 명의 학생이 부산대학교 학생과 합류하여 가두시위를 벌였다. 부산대학교 데모로 학생 수백 명이 연행되고 100여 명이 다쳤지만 이튿날인 10월 17일에는 시위가 더욱 격화되어 학생들뿐만 아니라 다수의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학생 시위는 점차 시민항쟁의 양상을 띠어갔다.''' 밤늦게까지 계속된 시위에서 시민들은 충무파출소, 한국방송공사, 서구청, 부산세무서 등을 파괴하였고, 경찰차량을 불태우거나 파손시켰다.&lt;br /&gt;
&lt;br /&gt;
====마산의 시민항쟁====&lt;br /&gt;
&lt;br /&gt;
민주항쟁은 18일에 마산으로 확산되었다. 늦은 오후에는 1,000여 명의 경남대학교 학생들이 마산 시내 번화가에 산발적으로 집결했으며, 일부시민들도 가담해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어두워진 다음 학생과 시민들의 데모는 격화되어 파출소, 공화당사, 방송국, 신문사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파괴하였다. 이튿날인 19일에는 시위가 더욱 치열해져 마산 시내는 한때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저녁 8시경, 시위대는 경남대학과 마산대학&amp;lt;ref&amp;gt;1985년 창원대학으로 교명이 변경되었으며, 현재의 마산대학교와 다르다.&amp;lt;/ref&amp;gt;, 그리고 고등학생까지 합세하여 약 8,000명에 이르렀으며, 시내 곳곳에서 몽둥이를 들고 동사무소와 파출소로 몰려가 시설을 파괴하였고, 경찰차량에 불을 질렀다.&lt;br /&gt;
&lt;br /&gt;
====부산 계엄령, 마산 위수령====&lt;br /&gt;
[[파일:계엄포고문.jpg|270px|섬네일|왼쪽|부산지역에 내려진 계엄포고문을 읽고 있는 시민들]]&lt;br /&gt;
부산대학교 시위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박정희 정부는 학생 시위로 시작된 시위가 대규모 시민항쟁으로 사태가 심상치 않게 확대되어가자 강경책으로 대응했다. 정부는 18일 자정을 기해 '''부산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동원한 과격한 진압'''을 통해 시위 참여자들과 이를 방조한 일반 시민들까지 1,058명을 연행하고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으며, 부산지구 계엄사령부는 각 대학 휴교조처와 야간통행금지시간을 2시간 연장하는 등의 항이 담긴 포고문을 발표했다.&lt;br /&gt;
&lt;br /&gt;
부산에 계엄령이 선포된 이튿날인 19일에 마산 시위가 확대됨에 따라 그 다음날인 10월 20일 정오, 정부가 '''마산 및 창원 지역에 위수령을 발령'''해 통행금지 시간이 연장되고, 경남대학 등에는 휴교조처가 취해졌으며, 24일에는 깡패를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132명을 검거, 23명을 구속했다. 이렇게 '''표면적으로는 부마민주항쟁이 단시간에 진압되는 듯 보였지만, 항쟁은 이미 유신체제의 균열을 불러오고 있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항쟁의 전개 과정에서 볼 수 있듯, 부마민주항쟁에서 특징적인 것은 먼저 시위대의 가장 큰 분노의 대상이 공화당사와 경찰·파출소였다는 점, 다음으로는 “부가가치세를 철폐하라”, “잘 먹고 잘 살아라”등의 구호에서 드러나듯이 세무서에 대한 공격, 그리고 신문사와 방송국에 대한 공격을 들 수 있다.&lt;br /&gt;
&lt;br /&gt;
부마민주항쟁은 1970년대 유신체제 밑에서 쌓였던 침묵하는 언론, 조세, 시민을 억압하는 경찰에 대한 불만 등 정치·사회·경제·문화·종교 등 각 부문에 걸친 여러 모순의 폭발이었고, 헌법 개정과 긴급조치로 겨우 유지되던 유신체제와 박정희 정권의 붕괴를 촉진시킨 결정적인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10.26사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또한 이 사건은 1980년 5월 18일의 광주 민주화운동과 1987년 6월 민주항쟁에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된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억눌린 우리 역사&amp;lt;/br&amp;gt;터져나온 분노&amp;lt;/br&amp;gt;매운 연기 칼바람에도&amp;lt;/br&amp;gt;함성소리 드높았던&amp;lt;/br&amp;gt;동트는 새벽벌&amp;lt;/br&amp;gt;시월이 오면&amp;lt;/br&amp;gt;핏발 선 가슴마다&amp;lt;/br&amp;gt;살아오는 십 일육&amp;lt;/br&amp;gt;동지여 전진하자&amp;lt;/br&amp;gt;깨치고 나가자&amp;lt;/br&amp;gt;뜨거운 가슴으로&amp;lt;/br&amp;gt;빛나는 내일로'''''&amp;lt;/br&amp;gt;&amp;lt;small&amp;gt;-'''부산대학교''' 새벽벌도서관 10.16 기념비&amp;lt;/small&amp;gt;&amp;lt;/div&amp;gt;&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호빵이👻]]: 부마항쟁 페이지 전체 작성&amp;lt;/br&amp;gt;&lt;br /&gt;
[[이나자키로빈]]: 부마항쟁 원인 중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 작성&lt;br /&gt;
&lt;br /&gt;
=='''5.18민주화운동'''==&lt;br /&gt;
===타임라인===&lt;br /&gt;
===원인===&lt;br /&gt;
====유신체제의 붕괴====&lt;br /&gt;
&lt;br /&gt;
[[파일:김재규.jpg|섬네일|오른쪽|암살 당시 상황을 재현하는 김재규]]&lt;br /&gt;
&lt;br /&gt;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amp;lt;small&amp;gt; - 김재규&amp;lt;/small&amp;gt;&lt;br /&gt;
1979년 10월 4일 신민당 총재 김영삼이 국회에서 의원직을 제명당하자 10월 15부터 10월 20까지 부산 · 마산 등지에서는 부마항쟁이 일어났고, 이의 해결을 둘러싼 노선대립으로 갈등 중 10월 26일 &amp;lt;ins&amp;gt;[[김재규]]&amp;lt;/ins&amp;gt;가 박정희를 살해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ins&amp;gt;[[10.26 사태]]&amp;lt;/ins&amp;gt;의 사후 수습과정에서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을 중심으로 신군부 세력이 부상하였으며, 이들은 &amp;lt;ins&amp;gt;[[12.12 사건]]&amp;lt;/ins&amp;gt;의 하극상을 통하여 군부를 장악하였다. 1980년 2월 29일 김대중 등이 복권되었으나 그 해 봄, 신군부는 최규하 과도 정부를 유명무실하게 하고 국민들이 요구하는 민주주의와 이를 위한 명확한 정치일정 제시를 거부하면서 권력기반을 구축하였다.&lt;br /&gt;
&lt;br /&gt;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lt;br /&gt;
한 시대의 대격변을 예고하는 단초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시작됐다. 1979년 8월 9일 오전, 신민당의 당사 4층 강당에서는 봉제업체인 YH무역주식회사의 여성노동자 200여명이 기업주의 폐업에 반발하여 폐업조치 철회 농성을 벌였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인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신민당이 당사 건물을 내준 것이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폭력을 동원하여 농성을 해산시켰다. 결국 이 사건은 노동 탄압 사건을 넘어선 야당에 대한 정치 탄압 사건으로 발전하였다.&lt;br /&gt;
&lt;br /&gt;
이날 경찰은 1000여명의 진압대원을 신민당사로 난입시켜 농성을 하고 있던 174명의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로 밖으로 끌어냈다. 또한 경찰은 총재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김영삼 총재와 당 간부들을 끌어내면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박정희 정권은 이 노동자 농성 사건을 빌미로 신민당 분열공작을 시도하였다. 유신정권과 비밀리에 결탁한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 3명이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 부총재 전원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접수시켰다. 그리고 법원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신민당 총재단의 직무 집행을 정지시키고 박정희 정권의 꼭두각시를 총재직무대행으로 선임하였다.&lt;br /&gt;
&lt;br /&gt;
아울러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의 동교동 자택을 전면 봉쇄하였고,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에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끊으라고 요구한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즈』 회견내용을 “반헌정적, 반민족적 작태”로 몰아서 국회에 징계 동의안을 제출했다. 10월 4일 오후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의원 159명은 여당 총회장에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제명 결의안을 '''기습적으로''' 처리해 버렸다.&lt;br /&gt;
&lt;br /&gt;
노사분규 사태로 시작된 사건이 제1야당 당수의 의원직 제명으로 확대된 정치적 사태를 지켜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유신체제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이 고조되었다. 또한 이 사건은 그동안 다소 주춤하던 대학가에 반유신 반독재 운동의 열기가 다시 확산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청춘을 바쳐, 학생 운동====&lt;br /&gt;
&lt;br /&gt;
[[파일:서울의_봄.JPG|섬네일|오른쪽|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앞에 모인 시위대]]&lt;br /&gt;
&lt;br /&gt;
군부의 재집권 야욕에 대한 국민적 저항은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표출되었다. 1980년 3월, 서울대 총학생회 출범을 시작으로 4월 초순에는 전국의 주요 대학들이 총학생회를 결성하기 시작하였다. 대학별로 독재 정권에 아부했던 어용교수와 족벌사학 퇴진 운동을 벌였고, 특히 병영집체훈련(당시 대학 신입생들은 의무적으로 군부대에 10일 간 입대하여 각종 군사훈련을 이수해야 했다.) 거부가 주요 이슈로 전면 등장했다. 각 대학의 병영집체훈련 거부운동이 본격화되고 전국적인 쟁점으로 떠오르자 신군부는 신문, 방송을 통해 ‘학생들의 안보의식 결여’를 비난하고 교내 시위·농성을 집중적으로 보도하게 했다.  5월 1일에 서울대가 입영훈련 거부투쟁 철회를 결정하고 ‘계엄령 해제’와 ‘유신잔당 퇴진’, ‘정부개헌중단’과 ‘노동 3권 보장’ 등을 요구하기 시작하면서 대학가는 이제까지의 학내 문제 중심의 운동에서 정치개혁을 위한 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그간 정부와 대학 간에 팽팽하게 유지되던 긴장 관계는 폭발 직전으로 내닫게 된 것이다.&lt;br /&gt;
&lt;br /&gt;
약 열흘 간의 대정부 투쟁을 준비한 대학가는 5월 10일 고려대 총학생회장실에서 열린 ‘총학생회장단 회의’에 참석한 전국 23개 대학 대표들은 ‘비상계엄의 즉각 해제’와 ‘전두환, 신현확 등 유신잔당 퇴진’ 등을 결의하고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정세에 대한 공동대처 방안을 마련했다. 이후 5월 13일부터 5월 14일에 걸쳐 서울 · 부산 · 대구 · 광주 등 37개 대학에서 계엄철폐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5월 15일에는 서울역에서 시위가 발생하는 등 학생시위는 서울시가지를 거의 마비시키는 등 야간까지 지속되어 사태가 절정에 달하면서 신군부 세력을 위협하였다. 5월 16일 24개 대학 학생대표들은 당분간 시국의 추이를 관망하기로 결정하고 가두시위를 중단하면서 소강상태에 돌입하는 듯하였다.&lt;br /&gt;
&lt;br /&gt;
====1980년 봄의 광주====&lt;br /&gt;
5월 17일 신군부 세력이 이전까지는 제주도를 제외한 지역에 한정되었던 비상계엄을 전국에 확대하는 조치인 계엄포고 10호(17일 24시에 발효: 각 대학 휴교령 포함)를 밤 9시 40분에 의결하고 밤 11시 40분에 발표하면서 밤 11시를 전후한 시점부터 김대중 · 김종필이 연행되는 등 권력형 부정축재자 및 소요조종 혐의자, 학생 시위 주동자가 체포되었다. 이날 밤 광주지역의 사회운동·학생운동의 지도자도 상당수가 검거되었다. 광주의 검거대상자는 전남대 12명, 조선대 10명 등 총 22명이었다. 전남에서 계엄합동수사단은 광주505보안대가 중심이고, 중앙정보부, 경찰 등이 보조역할을 했다. 전남 계엄합동수사단은 22대 차량과 86명의 인원이 출동해 정동년 등 복적생들과 대학의 총학생회 간부들을 집중 검거했다.&lt;br /&gt;
&lt;br /&gt;
한편 육군본부는 14일 오전 7시55분에 국가 중요 보안목표와 주요대학에 군 병력 배치 명령을 하달했다. 이 명령에 따라 전남북계엄분소장인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광주 시내 주요 시설물에 이날 오후부터 계엄병력을 배치했다. 31사단 96연대 병력이 광주시내 KBS건물에 42명, MBC 21명, CBS 11명, VOC(전일방송) 11명 등 주요 방송사 건물에 배치돼 경비에 들어간 것이다.&lt;br /&gt;
&lt;br /&gt;
이날 오후 전교사령관은 7공수여단의 광주배치에 따른 수송수단 지원도 미리 협의했다. 그리고 5월 8일부터 16일 사이에 공수부대 수뇌부들도 헬기를 타고 서울에서 내려와 광주 상무대의 전투병과교육사령부를 방문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광주에서 시위가 격화되면 즉각적으로 최정예 군부대를 동원해서 진압할 준비를 철저하게 갖추고 있었다. 5월 18일에 시작된 광주의 비극은 그 이전에 이미 시한폭탄처럼 준비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lt;br /&gt;
{{구글지도 | 위도=35.175961433346885 | 경도=126.90865311973532 | 줌=13 }}  [[파일:금남로.JPG|섬네일|오른쪽|금남로 앞에 집결한 버스와 시민군]]&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18일&amp;lt;/span&amp;gt;&lt;br /&gt;
휴교령이 내려질 경우 교문 앞에서 집결한다는 결의에 따라 학생들은 5월 18일 오전 전남대학교 앞에 모였다. 공수부대원들이 전남대 앞 시위를 저지하자 대학생들은 광주역에 재집결해서 시위를 이어갔다. 시위대가 점차 늘어나면서 공수부대원이 시내에서 시위진압에 나섰으며 18일 오후 1시부터 무차별 진압작전이 이루어져 부상자가 속출하였다.&lt;br /&gt;
&lt;br /&gt;
군인들이 금남로 등 시내 중심가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이나 여자를 마구 구타하고 짓밟으며 찌르는 등의 잔혹 행동을 하자 시민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이에 시위대는 오후 4시 이후 파출소 파괴 등 적극공세에 나섰다. '''계엄군의 과잉 무력진압은 시위를 해산시키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오히려 시민들을 단결시켰으며, 결국 19일 시민 · 학생 연대가 발생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lt;br /&gt;
&lt;br /&gt;
 '''''광주 애국 시민 여러분! 이것이 웬 말입니까? 웬 벼락이란 말입니까? 죄 없는 학생들을 총칼로 찔러 죽이고 몽둥이로 두들겨 트럭으로 실어가며 부녀자를 발가벗겨 총칼로 찌르는 놈들이 이 누구란 말입니까? 이제 우리가 살길은 전시민이 하나로 뭉쳐 청년 학생들을 보호하고 유신잔당과 극악무도한 살인마 전두환 일파와 공수 특전단 놈들을 한놈도 남김없이 쳐부수는 길 뿐입니다. 우리는 이제 다 보았습니다. 다 알게 되었읍니다. 왜 학생들이 그토록 소리 높이 외쳤는가를, 우리의 적은 경찰도 군대도 아닙니다. 우리의 적은 전국민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바로 유신잔당과 전두환 일파 그놈들입니다.''''' &amp;lt;small&amp;gt; - 1980년 5월 19일에 '광주시민민주투쟁회'명의의 호소문&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19일&amp;lt;/span&amp;gt;&lt;br /&gt;
19일 오전에는 일시적 소강상태였으나 오후 들어서 분노한 학생 · 시민들이 군 · 경찰과 공방전을 벌이면서 시위는 점차 격화되었다. '''시민들은 공포감에서 벗어나 자신의 생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단순한 학생시위에서 시민봉기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계엄군은 시위대를 포위하여 구타하였으며 일부 고등학생까지 포함된 시위대는 돌과 화염병으로 저항하였고 파출소와 방송국 등에 침입하였다. 뒤처진 공수부대를 공격하거나 고립된 차량을 포위하기도 하였으며 총과 방패를 빼앗기도 하였고, 오후 4시 50분 시민들에게 포위된 계엄군의 장갑차에서 최초의 발포가 있었다. 19일 밤비가 내리는 가운데 시위가 산발적으로 계속되었으며, 20일 오전 비가 그치고 대규모 시위는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오후부터 다시 시작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20일&amp;lt;/span&amp;gt;&lt;br /&gt;
'''20일 오후 6시부터 택시와 버스 운전 기사들이 광주역과 무등경기장에 모여 대형 버스와 트럭을 앞세우고 일시에 금남로에 집결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들을 앞세운 시위는 계엄군을 몰아내는 데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였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5.18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에 &amp;lt;ins&amp;gt;[[지대한 영향]]&amp;lt;/ins&amp;gt;을 끼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학생 운동에 뛰어든 많은 대학생들은 대학교에 들어와서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의 실상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아 학생 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군부정권은 5.18 이후로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다. 전두환은 김대중 등에게 '광주 사태'의 책임을 물어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했고,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 선언을 한 직후, 8월 27일 소위 체육관 선거를 통해 전두환은 대통령 자리를 탈취했다.&lt;br /&gt;
&lt;br /&gt;
지역적인 면에서는 '''광주광역시를 비롯한 전라도 지역의 트라우마'''로 작용해 이후의 민주정의당 및 &amp;lt;ins&amp;gt;[[3당 합당]]&amp;lt;/ins&amp;gt;으로 이어지는 보수 세력에 대해 적대심을 가지고, 민주당계 정당의 표밭이 되는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미 박정희 정부 시절부터 유무형의 정치적인 차별을 받고 있었지만 5.18의 참상은 전라도가 다시는 보수 세력을 지지하지 않게 만들 정도로 심각한 사건이며 호남소외론의 가장 결정적인 명분이 되었다.&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이나자키로빈]]: 5.18 민주화운동 페이지 전체 작성&lt;br /&gt;
&lt;br /&gt;
=='''6월민주항쟁'''==&lt;br /&gt;
===타임라인===&lt;br /&gt;
===원인===&lt;br /&gt;
====[[박종철고문치사사건]]====&lt;br /&gt;
&lt;br /&gt;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박종철은 1987년 1월 13일 자정 경 하숙집에서 치안본부(現 경찰청)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게 연행되었다.‘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이자 ‘민주화추진위원회’ 지도위원으로 수배 받고 있었던 박종운을 잡기위해 연행한 것이었다. 취조실로 연행해간 공안 당국은 박종철에게 박종운의 소재를 물었으나, 박종철은 순순히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경찰은 잔혹한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가하였고, 박종철은 끝내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했다. 당시 경찰은 초기 발표에서 고문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라고 사망원인을 발표하였으나, 시체부검 결과 전기고문과 물고문에 의한 살인인 것으로 밝혀졌다.&lt;br /&gt;
&lt;br /&gt;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저 죽음을 응시해주길 바란다. 저 죽음을 끝내 지켜주길 바란다. 저 죽음을 다시 죽이지 말아주길 바란다.''''' &amp;lt;small&amp;gt; - 동아일보 1987년 1월 17일자 김중배 칼럼 중&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사건 진상의 일부가 공개되자 2월 7일 전국 주요 도시에서 &amp;quot;박종철군 범국민추도식&amp;quot; 및 도심 시위가 열렸고 이어 3월 3일에는 &amp;quot;박종철군 49재와 고문추방 국민대행진&amp;quot;과 함께 또 다른 시위가 열렸다. 이후 4월 2일 서울대학교 학부모 130여 명이 ‘건국대학교 사태‘ 등 시국관련 구속학생의 징계철회를 요구하며 철야 농성을 벌였다.&lt;br /&gt;
&lt;br /&gt;
====정부의 개헌논의 유보====&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lt;br /&g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JazJFsgu4oc?si=sOE7w1tz-jKVztC9&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lt;br /&g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그러나 전두환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1987년 4월 13일 [[4.13호헌조치]]라 불리는 ‘대통령 특별담화‘를 발표, 개헌(改憲) 논의를 유보하겠다고 밝혔다. [[4.13호헌조치]]에서 전두환은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와 대통령 선거는 자유 경선의 분위기가 보장되는 가운데 1987년 내에 공정한 선거관리를 통해 차질 없이 실시할 수 있게 모든 노력을 다할것‘이라고 다짐했으며, 또 ‘민정당의 후임 대통령 후보는 조속한 시일 안에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인물 가운데서 당헌 절차와 민주 방식에 따라 전당대회에서 선출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호헌조치‘라는 그 이름대로 현행 헌법에 따라 권력을 이양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국민들의 큰 기대를 얻을 것이라 믿었으나, 기대는 커녕 오히려 반발을 가져오는 요인이 되고 말았다. 곧바로 이튿날인 4월 14일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 등 각계 인사들이, 호헌 조치를 비판하는 시국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정부 최루탄에 의한 [[이한열]] 사망====&lt;br /&gt;
[[파일:이한열.jpg|200px|섬네일|오른쪽|최루탄에 피격당한 후 이종창에게 부축받는 이한열]]&lt;br /&gt;
먼저 1987년 5월 27일 야당과 재야, 종교계 등이 힘을 모아 ‘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여당인 민주정의당에서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6월 10일에 맞춰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6 · 10국민대회]])’를 치르기로 결정하였다. 대학생들은 국본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를 중심으로 6 · 10국민대회에 호응하여 6월 초부터 각 대학별로 연일 집회와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6 · 10국민대회]] 하루 전날인 6월 9일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교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는 곧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학생들은 물론 시민들의 분노가 들끓었다. 이러한 분노 속에서 6 · 10국민대회가 열렸다. 경찰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6 · 10국민대회가 열리는 성공회대성당을 원천 봉쇄하였다. 그 결과 6 · 10국민대회는 대회장에 미리 들어가 있던 소수의 인원만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대회 예정 시간인 오후 6시 이전부터 서울 시내 곳곳에서 대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시민들도 다양한 방식으로 6 · 10국민대회와 학생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날 밤 늦게까지 시위를 벌이던 학생들은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이후 5일 동안 농성을 계속하였다. 애초 계획된 것은 아니었지만 대학생들의 명동성당 농성은 6 · 10국민대회가 단발성 행사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인 저항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lt;br /&gt;
&lt;br /&gt;
====민주항쟁 확산====&lt;br /&gt;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로 개헌하라!'''''   &amp;lt;small&amp;gt;-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제시한 슬로건&amp;lt;/small&amp;gt;&lt;br /&gt;
명동성당 농성을 거치며 항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유월항쟁의 전국화 과정에는 일정한 패턴이 존재하였다. 6월 10일 서울 외에도 전국 주요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위가 벌어졌지만, 15일까지 항쟁의 중심은 6 · 10국민대회와 명동성당 농성이 전개된 서울이었다. 하지만 6월 15일 경부터는 부산, 대전, 진주 등에서 격렬한 시위가 전개되었다. 그러다가 6월 20일부터 대규모 시위가 광주, 전주, 순천, 익산 등 호남 지방으로 옮겨졌다. 6 · 10국민대회 이후 약 20일 동안 전국 곳곳에서 매일 평균 100회 이상의 시위가 동시다발로 벌어졌다. 특히 6월 18일 ‘최루탄추방대회’와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은 전국 곳곳에서 한꺼번에 1백만 명 이상이 참여하였다. 갈수록 참가 지역이 전국 곳곳으로 확산되어 대도시, 중소도시뿐만 아니라 농촌 지역의 군 단위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6월 26일 하루에만 37~38개 시 · 군에서 시위가 동시에 벌어졌다. 유월항쟁에 참가한 연 인원은 400~500만 명으로 추산된다.&lt;br /&gt;
&lt;br /&gt;
반면 유월항쟁의 전국적 동시다발 시위는 경찰 병력을 분산시켰다. 분산된 경찰 병력으로는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거센 시위의 물결을 막아 낼 수 없었다. 경찰이 시위 진압에 최루탄을 남발하면서 최루탄도 점차 고갈되기 시작하였다. 유월항쟁 기간 동안 경찰이 사용한 최루탄만 총 67만 발이 넘었다. 더불어, 전두환 정권이 집권 내내 강조했던 88서울올림픽이 얼마 남지 않아 미국 등 국제사회의 이목이 집중된 상황에서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운동 때처럼 유혈 사태와 대량 학살을 반복하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무엇보다 군대를 동원하더라도 이러한 대규모 시민 항쟁을 진압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결국 경찰력으로 항쟁을 막기 힘들고, 군대 투입도 어렵다고 판단한 전두환 정권은 1987년 6월 29일 ‘ 6 · 29민주화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하였다. 그리고 그동안 의식불명 상태에 있었던 이한열이 7월 5일 끝내 사망하였다. 5일장 후 7월 9일 치러진 이한열의 노제에 100만 명의 인파가 모인 것을 끝으로 약 한 달 동안 지속된 유월항쟁은 마무리되었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1987년 6월항쟁이 '''대통령직선제 개헌'''이라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이 항쟁에 동참한 학생과 시민들의 요구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제시한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 개헌’이라는 슬로건으로 모아졌기 때문이었다. 유월항쟁은 이러한 민주화 세력의 통합성, 즉 각기 다른 성격과 지향을 가진 여러 주체들이 모두 동의할 수 있는 ‘최소 강령’하에 ‘최대 연합’으로 결집하였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딩잉잉]]:6월민주항쟁 페이지 전체 작성&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기밀문서]]&lt;br /&gt;
[[분류:4.19혁명관련]]&lt;br /&gt;
[[분류:부마항쟁관련]]&lt;br /&gt;
[[분류:5.18민주화운동관련]]&lt;br /&gt;
[[분류:6월민주항쟁관련]]&lt;br /&gt;
[[분류:뎐]]&lt;br /&gt;
[[분류:이나자키로빈]]&lt;br /&gt;
[[분류:호빵이👻]]&lt;br /&gt;
[[분류:•ᴗ•]]&lt;br /&gt;
[[분류:딩잉잉]]&lt;/div&gt;</summary>
		<author><name>딩잉잉</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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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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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6 · 10국민대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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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1T11:51:2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딩잉잉: 새 문서: ==개요== 1987년 6월 10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는 ‘박종철군 고문살인 은폐조작규탄및 호헌철폐 민주헌법쟁취를위한 범국민대...&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1987년 6월 10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는 ‘박종철군 고문살인 은폐조작규탄및 호헌철폐 민주헌법쟁취를위한 범국민대회’를 개최하여 6월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다. 같은 날 민주정의당 대표위원 노태우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자 전두환 정권의 간선제 호헌에 대한 국민의 저항이 급격히 확산되었다. 15일까지 명동성당농성투쟁, 18일 최루탄추방대회, 26일 민주헌법쟁취대행진에 이르기까지 20여 일간 전국적으로 500여 만 명이 참가하여 4·13호헌조치 철폐, 직선제개헌 쟁취, 독재정권 타도 등 반독재민주화를 요구하였다.&lt;br /&gt;
&lt;br /&gt;
==6 ·10 국민대회 선언문==&lt;br /&gt;
&lt;br /&gt;
국민합의 배신한 4·13호헌조치는 무효임을 전 국민의 이름으로 선언한다.&lt;br /&gt;
오늘 우리는 전 세계 이목이 우리를 주시하는 가운데 40년 독재정치를 청산하고 희망찬 민주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거보를 전 국민과 함께 내딛는다. 국가의 미래요 소망인 꽃다운 젊은이를 야만적인 고문으로 죽여 놓고 그것도 모자라 뻔뻔스럽게 국민을 속이려 했던 현 정권에게 국민의 분노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여주고, 국민적 여망인 개헌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4·13폭거를 철회시키기 위한 민주장정을 시작한다.&lt;br /&gt;
&lt;br /&gt;
(중략)&lt;br /&gt;
&lt;br /&gt;
우리 국민은 민정당이 대단한 결단이나 되는 것처럼 강조하는 현 대통령의 7년 단임 공약에 큰 기대를 걸고 있지 않다. 현 정권이 제1의 통치명분으로 내세워온 평화적 정권교체라는 것도 실은 현대통령의 형식적 퇴임 이후 친정체제와 수렴첨정 하에 광주학살에 참여한 장성들 간의 자리바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지각 있는 국민이라면 상식으로 간주하고 있는 사실이다. 언제부턴가 평화적 ‘정권교체’라는 말이 ‘정부이양’이라는 애매모호한 말로 슬쩍 둔갑해버린 것도 저들의 이러한 속셈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것은 군부독재의 통치를 영구화하려는 요식행위에 불과하다.&lt;br /&gt;
&lt;br /&gt;
(중략)&lt;br /&gt;
&lt;br /&gt;
그러므로 국민적 의사를 전적으로 묵살한 4·13폭거는 시대적 대세인 민주화를 거스르려는 음모요 국가 권력의 주인인 국민을 향한 도전장이 아닐 수 없다. 결국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의 힘에 밀려, “여야가 국회에서 합의하면 개헌에 반대하지 않겠다”고 한 전 대통령의 작년 4·30발언은 영구집권음모를 은폐하기 위한 한낱 속임수에 지나지 않았음이 분명해지고 말았다. 애초부터 개헌의 의사는 눈곱만치도 없었으며, 그동안 마치 날치기 통과라도 강행할 것 같던 내각책임제 개헌안도 국민의 대통령직선제 개헌열망을 무마하고 민주세력을 이간시켜 탄압하면서 원래의 의도인 호헌의 명분을 만들기 위한 위장전술에 지나지 않았다.&lt;br /&gt;
따라서 모든 국민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고 국민들을 한없는 배신감과 절망으로 몰아간 4·13폭거는 마땅히 철회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4·13조치에 기초하여 현정권이 영구집권을 위한 시나리오를 강행한다면, 국내외의 조롱과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며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사태를 스스로 잉태하는 것임을 경고해둔다.&lt;br /&gt;
이제 우리 국민은 이 민족의 40년 숙원인 민주화를 달성하기 위해 일어섰다. 이 민주화라는 과제가 88올림픽을 이유로 연기될 수 없다. 인류평화의 제전이요 민족의 축제가 되어야 할 88올림픽이 민주화를 늦추고 현행헌법대로 독재정권을 연장시키는 데 악용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민주화라는 ‘민족적 대사’를 완수한 이후에 전 국민의 압도적 지지 위에 세워진 튼튼한 민주정부 하에서 다가오는 88올림픽을 민주시민의 감격과 긍지를 가지고 치러야 한다.&lt;br /&gt;
&lt;br /&gt;
(중략)&lt;br /&gt;
&lt;br /&gt;
이제 우리 국민은 그 어떠한 이유나 명분으로도 더 이상 민주화의 실현이 지연되어서는 안 된다고 요구하고 있다. 분단을 이유로, 경제개발을 이유로, 그리고 지금은 올림픽을 이유로 민주화를 유보하자는 역대 독재정권의 거짓 논리에서 이제는 깨어나고 있다.&lt;br /&gt;
오늘 고 박종철 군을 고문살인하고 은폐 조작한 거짓 정권을 규탄하고 국민의 여망을 배신한 4·13폭거가 무효임을 선언하는 우리 국민들의 행진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대세가 되었다. 세계의 양심과 이성이 우리를 격려하고 민주제단에 피 뿌린 민주영령들이 우리를 향도하며, 민주화 의지로 사기충전한 온 국민의 민주화 결의가 큰 강줄기를 형성하니 무엇이 두려운가. 자! 이제 우리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찬연한 민주새벽의 그날을 앞당기자. 민주, 민권승리의 확신과 필승의 의지를 가지고 오늘 우리 모두에게 맡겨진 민족의 과제 앞에 힘차게 전진하자.&lt;br /&gt;
&lt;br /&gt;
1987년 6월 10일&lt;br /&gt;
호헌반대 민주헌법쟁취 운동본부&lt;br /&gt;
&lt;br /&gt;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lt;br /&gt;
「대회 선언문 - 국민합의 배신한 4.13 호헌조치는 무효임을 전 국민의 이름으로 선언한다」&lt;br /&gt;
&lt;br /&gt;
1987년 6월 10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소장&lt;br /&gt;
&lt;br /&gt;
== 6 ·10 국민대회 선언문 해설==&lt;br /&gt;
&lt;br /&gt;
이 사료는 1987년 6월 10일 발표된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 선언문이다. 6·10항쟁의 시작을 연 선언으로서 6월 항쟁 전체를 관통하는 주요 정신과 기조, 항쟁의 의의가 담겨있다. 우선 5·18민주화운동을 “광주학살”로 규정하고 전두환 정부를 “광주학살에 참여한 정치군인”으로 지칭하여 정권의 정당성이 없음을 지적하고, 6월 항쟁의 근간에 5·18민주화운동이 있음들 드러내고 있다. 또한 “국가의 미래요 소망인 꽃다운 젊은이를 야만적인 고문으로 죽여 놓고 그것도 모자라 뻔뻔스럽게 국민을 속이려 했던 현 정권”이라 지적하여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항쟁의 대의명분임을 언명한다. 이어서 4·13호헌조치에 대해 “현정권이 영구집권을 위한 시나리오”이자 “시대적 대세인 민주화를 거스르려는 음모요 국가 권력의 주인인 국민을 향한 도전장”이기 때문에 “마땅히 철회”되어야 한다고 선언한다. 마지막으로 민주화는 “그 어떠한 이유나 명분으로도 더 이상 민주화의 실현이 지연되어서는 안”되며, “88올림픽을 이유로”, “분단을 이유로, 경제개발을 이유로” 유보되어서는 안 된다며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정신임을 선언하였다.&lt;br /&gt;
&lt;br /&gt;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정부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 논의를 일체 금지하고 현행 헌법을 통한 대통령 선거를 치른다는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였고, 이는 각계각층의 4·13호헌조치 반대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5월 27일 각계 인사로 구성된 ‘호헌철폐 및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이하 국본)가 결성되었다. 이날 약 1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발기인대회가 열렸는데, 발기인은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주화실천가족협의회·농민·여성·문화예술·언론출판·노동·교육·문인·청년·도시하층민 등 각 부문 대표 943명, 각 지역 대표 352명, 천주교 253명, 개신교 270명, 불교 160명 등 총 2,191명이었다. 국본은 4·13 호헌조치는 건국정신과 민주화를 부정하므로 무효임을 선언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한 국민적 행동을 조직·전개할 것을 결의했다. 이후 국본은 6월 항쟁을 주도했다.&lt;br /&gt;
국본은 6월 10일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열기로 결정하고 준비에 들어갔다. 서울 등 22개 지역에서 동시다발로 개최될 예정이었다. 그 와중에 6월 9일 국민대회 참가 결의대회에서 연세대학교 학생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쓰러지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6월 항쟁의 또 다른 도화선이 되었다. 6월 10일 ‘박종철 고문살인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개최되었다. 국본 측에서는 22개 지역에서 24만명이 참가했다고 추산했다. 시민들의 참여가 도드라졌는데 대부분의 도시에서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시위를 지켜보고 시위대의 일원이 되었으며, 시위대에게 음료와 먹을거리를 제공하는 모습이 곳곳에서목격되었다. 주요 도시에서는 많은 차량들이 경적을 울려 시위대에 호응하여 화제가 되었다.&lt;/div&gt;</summary>
		<author><name>딩잉잉</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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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기밀문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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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1T11:47:3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딩잉잉: /* 정부 최루탄에 의한 이한열 사망 */&lt;/p&gt;
&lt;hr /&gt;
&lt;div&gt;=='''컨텐츠 주제'''==&lt;br /&gt;
[[파일:이한열사진.jpeg|center]]&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amp;lt;big&amp;gt;'''&amp;lt;span style=&amp;quot;color:#CD0000&amp;quot;&amp;gt;투쟁의 불꽃, 자유의 환호&amp;lt;/span&amp;gt;'''&amp;lt;br/&amp;gt;&lt;br /&gt;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으로 일궈낸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역사에 대해 함께 살펴보자.&amp;lt;/span&amp;gt;&amp;lt;/big&amp;gt;&amp;lt;/div&amp;gt;&lt;br /&gt;
&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이나자키로빈]]&lt;br /&gt;
&lt;br /&gt;
=='''팀원'''==&lt;br /&gt;
*오현지(2022131143) [[뎐]]&amp;lt;br/&amp;gt;&lt;br /&gt;
*김여원(2023130209) [[이나자키로빈]]&amp;lt;br/&amp;gt;&lt;br /&gt;
*김하은(2022131345) [[호빵이👻]]&amp;lt;br/&amp;gt;&lt;br /&gt;
*박정원(2023130350) [[•ᴗ•]]&amp;lt;br/&amp;gt;&lt;br /&gt;
*최필중(2023130216) [[딩잉잉]]&amp;lt;br/&amp;gt;&lt;br /&gt;
&lt;br /&gt;
=='''기획의도'''==&lt;br /&gt;
===기획배경===&lt;br /&gt;
1945년 광복 이후 대한민국 국민들은 자유민주국가로서의 미래를 기대했으나 실상은 그러지 못했다.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보여주듯 현재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는 그것을 누리지 못한 앞선 세대들의 목숨을 바친 항쟁의 대가이다. 민주항쟁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의 핵심 동력이었다. 오늘날 우리나라 민주의식의 중요한 기둥이 되는 네 가지 항쟁을 선별하고 각 항쟁의 배경, 전개과정, 의의를 비롯해 세부적이고 자세한 내용에 대한 기사를 작성한다.&lt;br /&gt;
===기획목적===&lt;br /&gt;
작금의 현실까지 오기에는 수없이 많은 투쟁이 있었지만 4.19혁명, 부마항쟁, 5.18민주항쟁, 6월민주항쟁이라는 네 가지 사건을 살펴보기로 한 것은 가장 많이 다뤄지고, 가장 많이 알려진 사건이기 때문이다. 관련된 사건과 역사 인물들에 대해 자세히 적어 내어 민주항쟁의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지 않으면 알기 힘든 각 민주항쟁의 자세한 내막을 밝혀낸다.&lt;br /&gt;
===기대하는 바===&lt;br /&gt;
타임라인과 온톨로지를 활용해 내용의 전반적인 이해를 돕고 자세한 설명을 통해 사건의 자세한 내막을 들어낸다. 네 가지 항쟁을 각각 큰 목차로 설정하고 세부 기사를 그 내부에 작성해 독자의 관심과 수요에 부합하는 정보를 전달하는 데 효과적일 것으로 기대된다. 민주항쟁에 참여한 사람들의 희생과 투쟁에 대한 존경심을 부르고 역사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다.&lt;br /&gt;
===기여===&lt;br /&gt;
[[뎐]], [[이나자키로빈]], [[호빵이👻]]: 기획의도 페이지 작성&lt;br /&gt;
&lt;br /&gt;
=='''온톨로지'''==&lt;br /&gt;
{{NetworkGraph | title=민주항쟁.lst}}&lt;br /&gt;
[[민주항쟁.lst]]&lt;br /&gt;
===기여===&lt;br /&gt;
*[[뎐]]: 온톨로지 제작&lt;br /&gt;
=='''컨텐츠 구조'''==&lt;br /&gt;
===클래스(Class)===&lt;br /&gt;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background-color:white&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0%&amp;quot; | 클래스 !! style=&amp;quot;width:40%&amp;quot; | 설명 !! style=&amp;quot;45%&amp;quot; | 노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제||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대표 키워드인 민주항쟁을 주제로서 나타내었다 || 만주항쟁&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항쟁||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민주화운동 시기 발생했던 주요 운동들을 ‘항쟁’이라는 키워드로 분류하였다. || 4.19혁명, 부마항쟁, 5.18 민주화운동, 6월민주항쟁&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사건||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항쟁의 원인, 결과가 되는 사건을 정리하였다|| 3.15부정선거, 고려대 4.18학생시위, 3.15의거, YH사건, 10.26사태, 12.12 군사반란, 비상계엄령,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고문추방민족대행진, 4.13호헌조치, 6.29선언, 대통령직선제&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지역||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요 항쟁들이 일어났던 지역을 정리하였다|| 마산, 부산, 광주&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인물||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 주요사건들을 발생시킨 인물, 참여했던 인물을 묶어서 정리하였다|| 이승만, 이기붕, 김주열, 박정희, 김재규, 전두환, 신군부, 시민군, 박종철, 이한열, 노태우&lt;br /&gt;
|-&lt;br /&gt;
|}&lt;br /&gt;
===관계성(Relation)===&lt;br /&gt;
*&amp;lt;font color=#228B22&amp;gt;'''~은 ~에 속한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주요 항쟁들이 민주항쟁에 속함을 나타내거나 인물의 소속을 나타낸다.&lt;br /&gt;
***해당노드:&lt;br /&gt;
***#4.19혁명 -&amp;gt; 민주항쟁&lt;br /&gt;
***#부마항쟁 -&amp;gt; 민주항쟁&lt;br /&gt;
***#5.18민주화운동 -&amp;gt; 민주항쟁&lt;br /&gt;
***#6월 민주항쟁 -&amp;gt; 민주항쟁&lt;br /&gt;
***#전두환 -&amp;gt; 신군부&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의 원인이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어떠한 사건과 인과관계를 이루는 또다른 사건 혹은 인물을 설명한다.&lt;br /&gt;
***#이기붕 -&amp;gt; 3.15부정선거&lt;br /&gt;
***#김주열 -&amp;gt; 고려대 4.18학생시위&lt;br /&gt;
***#고려대 4.18학생시위 -&amp;gt; 4.19혁명&lt;br /&gt;
***#3.15의거 -&amp;gt; 4.19혁명&lt;br /&gt;
***#김주열 -&amp;gt; 4.19혁명&lt;br /&gt;
***#3.15부정선거 -&amp;gt; 3.15의거&lt;br /&gt;
***#YH사건 -&amp;gt; 부마항쟁&lt;br /&gt;
***#부마항쟁 -&amp;gt; 10.26사태&lt;br /&gt;
***#박정희 -&amp;gt; 10.26사태&lt;br /&gt;
***#비상계엄령 -&amp;gt; 5.18민주화운동&lt;br /&gt;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 -&amp;gt; 고문추방민족대행진&lt;br /&gt;
***#고문추방민족대행진 -&amp;gt; 4.13호헌조치&lt;br /&gt;
***#4.13호헌조치 -&amp;gt; 6월민주항쟁&lt;br /&gt;
***#6월민주항쟁 -&amp;gt; 6.29선언&lt;br /&gt;
***#6월민주항쟁 -&amp;gt; 대통령직선제&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을 발생시켰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사건과 그 사건을 직접적으로 발생시킨 인물을 연결한다.&lt;br /&gt;
***#이승만 -&amp;gt; 3.15부정선거&lt;br /&gt;
***#김재규 -&amp;gt; 10.26사태&lt;br /&gt;
***#신군부 -&amp;gt; 1212군사반란&lt;br /&gt;
***#전두환 -&amp;gt; 비상계엄령&lt;br /&gt;
***#노태우 -&amp;gt; 6.29선언&lt;br /&gt;
***#시민군 -&amp;gt; 5.18민주화운동&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에 희생되었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민주항쟁의 진압과정 등 에서 희생된 인물을 설명한다&lt;br /&gt;
***#김주열 -&amp;gt; 3.15의거&lt;br /&gt;
***#이한열 -&amp;gt; 6월 민주항쟁&lt;br /&gt;
***#박종철&amp;gt;박종철 고문치사 사건&lt;br /&gt;
*&amp;lt;font color= #228B22&amp;gt;'''~은 ~에서 발생했다'''&amp;lt;/font&amp;gt;&lt;br /&gt;
**설명: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설명한다.&lt;br /&gt;
***#3.15의거 -&amp;gt; 마산&lt;br /&gt;
***#부마항쟁 -&amp;gt; 부산&lt;br /&gt;
***#부마항쟁 -&amp;gt; 마산&lt;br /&gt;
***#5.18민주화운동 -&amp;gt; 광주&lt;br /&gt;
===기여===&lt;br /&gt;
*[[뎐]]: 컨텐츠 구조 페이지 작성&lt;br /&gt;
=='''4.19혁명'''==&lt;br /&gt;
===타임라인===&lt;br /&gt;
===원인===&lt;br /&gt;
====[[3.15 부정선거]]====&lt;br /&gt;
[[파일:3.15부정선거_개표_모습.png|300픽셀|섬네일|오른쪽|3.15부정선거 당시 개표하는 사진&amp;lt;ref&amp;gt;사진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amp;lt;/ref&amp;gt;]]&lt;br /&gt;
1959년 대한민국은 제 4대 대통령 선거와 제 5대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당시 자유당에서는 12년째 대통령으로서 연임 중이던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이기붕]]'''을 부통령 후보로 선임하였다. 그러나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병세의 악화로 사망하게 되고,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은 확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선거의 초점은 자유당의 조병옥과 민주당의 장면 간의 선거전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본격적인 선거유세의 시작과 함께 정부와 여당의 잇따른 야당선거운동 방해사건으로 부정선거가 시작되었다. 1960년 3월 15일 선거가 시작된 이후에도 다양한 방법의 부정행위가 일어났고, 개표 결과 이승만과 이기붕의 득표가 100%에 육박하는 결과로 나오자 자유당은 득표수를 하향 조정해 최종 집계에 반영할 것을 지시했다. 결국 이승만 88.7%, 이기붕 79%의 득표율을 가지며 정, 부통령에 당선되었다.&amp;lt;ref&amp;gt;자세한 내용은 3.15부정선거 페이지 참조&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부정선거 반대시위, [[3.15 의거]]의 발생====&lt;br /&gt;
3.15 부정선거를 반대하는 시위는 초기에는 중, 고등학생들의 산발적인 시위로 전개되었다. 3월 15일 선거일 밤 경남 마산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으며,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여 1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amp;lt;br/&amp;gt;&lt;br /&gt;
3월 15일 실종되었던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4월 11일 마산부두에서 발견되자 마산 시민들은 시청, 파출소 등을 파괴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2차 시위가 일어난 것이다.&lt;br /&gt;
&lt;br /&gt;
====[[고려대학교 4.18 학생시위]]의 발생====&lt;br /&gt;
1, 2차 마산시위를 계기로 부정선거 무효와 이승만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났다. '4.18 선언문'을 낭독하고 시내로 진출하였다. 이는 4월 19일 학생들과 일반 시민들이 가세한 대규모 시위로 이어지게 되었다.&lt;br /&gt;
====전국적인 4.19 혁명의 발생====&lt;br /&gt;
분노한 전국의 시민과 학생들이 다음 날인 4월 19일 총궐기하여 '이승만 하야와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며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경찰은 또다시 무차별 발포에 나섰고,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여기에 이승만 정부는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지만 이러한 압박에도 시민들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lt;br /&gt;
====이승만 대통령의 혼란 수습 시도====&lt;br /&gt;
이승만 대통령은 4.19 시위로 인한 정국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4월 20일 국무위원 전원과 자유당 당무위원 전원의 사표를 제출하도록 지시하였으며, 4월 23일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외무장관에 허정, 내무장관에 이호, 법무장관에 권승렬을 임명하는 등 개각을 단행하였다.&amp;lt;br/&amp;gt;&lt;br /&gt;
그러나 미국은 4.19직후 국무부 성명을 통해 한국에서 발생한 사태는 부정선거에 대한 '군중의 불만'을 반영한 것 이라고 했고, 양유찬 주미대사를 불러 '부정선거에 대한 철저한 조사', '경향신문 복간', '국가보안법 개정' 등을 촉구하는 각서를 전달하였다.&amp;lt;br/&amp;gt;&lt;br /&gt;
그리고 4월 25일, 이승만 정권에 분노한 전국 27개 대학 258명의 교수가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 모여 14개항의 시국 선언문을 발표하며 학생, 시민들과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들은 3.15 부정선거 및 4.19 사태의 책임을 지고 대통령이 물러날 것을 주장하였으며, &amp;quot;학생들의 피에 보답하자&amp;quot;는 플랜 카드를 앞세워 국회의사당까지 행진하였다. &lt;br /&gt;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lt;br /&gt;
무력진압에도 대규모 시위가 이어지며 시민들은 완강하게 투쟁하였다. 4월 26일 시위대가 경무대로 다시 집결하는 등 사태가 심각하게 진행되자, 오전 10시 30분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 성명을 발표하였다. 4월 27일 이승만은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하며 대통령직을 하야하고 하와이로 망명하였으며 자유당 정권도 끝나게 된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우리 국민들, 특히 학생과 청년들의 주도로 이루어진 4.19 혁명은 학생과 일반 대중이 단결하여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아시아 최초의 시건이다. 4.19혁명은 부마항쟁, 5.18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그리고 2017년 촛불시위에 이르기 까지 정권에 대항하는 국민들이 단합을 이루는 초석이 되었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도 시민 저항권에 대한 근거로써 4.19혁명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문구가 있다.&lt;br /&gt;
===기여===&lt;br /&gt;
[[뎐]]: 4.19혁명 페이지 원인, 의의 작성 &lt;br /&gt;
&lt;br /&gt;
[[•ᴗ•]]: 4.19혁명 페이지 전개 작성&lt;br /&gt;
&lt;br /&gt;
=='''부마항쟁'''==&lt;br /&gt;
===타임라인===&lt;br /&gt;
===원인===&lt;br /&gt;
====[[유신 헌법]]과 [[긴급조치]]====&lt;br /&gt;
1971년 선거에서 김대중을 누르고 대통령에 3선된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해 국회 해산,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등 법의 일부 기능을 정지시키고 전국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했다.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된 이른바 유신헌법에 의해 제정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법」 에 의거해 박정희가 제8대 대통령으로 재차 당선되었고, 이 유신 헌법이 발효된 기간을 유신 체제라고 부른다. 유신 체제는 행정, 입법, 사법의 3권을 모두 쥔 대통령이 종신 집권할 수 있도록 설계된 1인 대통령제였다. 박정희는 유신 헌법에 의거해 대통령의 권한으로 취할 수 있었던 특별조치인 긴급조치를 선포함으로써 헌법에 반대하는 시위 및 운동과 방송, 언론 활동을 하는 반정부 인사들을 연행, 체포, 고문하는 등 억압을 가했다.&lt;br /&gt;
&lt;br /&gt;
====한국경제의 위기====&lt;br /&gt;
1970년대 말 한국경제는''' [[오일쇼크]]'''라는 세계경제의 위기와 결합해 가라앉고 말았다. 경제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정부는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과 함께 '''[[경제안정화정책]]'''을 수용했고, 중소자본가, 봉급생활자, 도시 노동자와 농민 등에 안정화 비용을 부과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이와 같은 안정화 정책은 경제위기로 어려운 처지에 있던 중소기업들의 도산을 가속하여 기업 부도율이 치솟고 하층민들을 더 깊은 고통에 몰아넣었다. 특히 '''부가가치세'''를 도입한 이후 물가가 상승하면서 일상에 타격을 주었으며, 노동집약적 제조업이 집중되었던 부산과 마산에서는 상황이 더욱 심각하여 1979년 부산 지역 부도율은 서울의 3배에 달했다.&lt;br /&gt;
&lt;br /&gt;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lt;br /&gt;
한 시대의 대격변을 예고하는 단초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시작됐다. 1979년 8월 9일 오전, 신민당의 당사 4층 강당에서는 봉제업체인 YH무역주식회사의 여성노동자 200여명이 기업주의 폐업에 반발하여 폐업조치 철회 농성을 벌였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인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신민당이 당사 건물을 내준 것이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폭력을 동원하여 농성을 해산시켰다. 결국 이 사건은 노동 탄압 사건을 넘어선 야당에 대한 정치 탄압 사건으로 발전하였다.&lt;br /&gt;
&lt;br /&gt;
이날 경찰은 1000여명의 진압대원을 신민당사로 난입시켜 농성을 하고 있던 174명의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로 밖으로 끌어냈다. 또한 경찰은 총재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김영삼 총재와 당 간부들을 끌어내면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박정희 정권은 이 노동자 농성 사건을 빌미로 신민당 분열공작을 시도하였다. 유신정권과 비밀리에 결탁한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 3명이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 부총재 전원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접수시켰다. 그리고 법원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신민당 총재단의 직무 집행을 정지시키고 박정희 정권의 꼭두각시를 총재직무대행으로 선임하였다.&lt;br /&gt;
&lt;br /&gt;
아울러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의 동교동 자택을 전면 봉쇄하였고,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에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끊으라고 요구한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즈』 회견내용을 “반헌정적, 반민족적 작태”로 몰아서 국회에 징계 동의안을 제출했다. 10월 4일 오후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의원 159명은 여당 총회장에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제명 결의안을 '''기습적으로''' 처리해 버렸다. 노사분규 사태로 시작된 사건이 제1야당 당수의 의원직 제명으로 확대된 정치적 사태를 지켜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유신체제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이 고조되었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유신 철폐, 독재 타도!'''''   &amp;lt;small&amp;gt;-10.16 부마항쟁 당시 시위대의 구호&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부산대학교 민주선언문, 학생 시위에서 시민항쟁으로====&lt;br /&gt;
[[파일:부산시위대.jpg|250px|섬네일|오른쪽|광복동을 지나는 시위 행렬]]&lt;br /&gt;
1979년 10월 16일 아침 10시 부산대학교 구내 도서관 앞에서 약 500명의 학생들이 모여 “유신정권 물러가라”, “정치탄압 중지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반정부 시위를 벌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민주선언문」]]'''을 통해 민주화, 언론 자유, 인권 보장의 신념을 확인하고, “제도화된 폭력성과 조직적 악의 근원인 유신헌법과 독재집권층의 퇴진만이 5천 만 겨레의 통일의 첫걸음이라고 주장하면서 형제의 피를 요구하는 자유와 민주의 깃발을 우리가 잡고 반민주의 무리, 불의의 무리들을 향해 외치며 나아가자”라고 선언하였다. 이후 학생들은 교문을 나가 거리에서 시위했다. 이때 학생 수는 약 5,000명으로 불어나 있었고, 광복동과 남포동 등 부산시내 중심가까지 진출해 애국가 등의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며, 이를 제지하려는 경찰과 이곳저곳에서 충돌하였다. 비슷한 시간, 부산 동아대학교에서도 1,000여 명의 학생이 부산대학교 학생과 합류하여 가두시위를 벌였다. 부산대학교 데모로 학생 수백 명이 연행되고 100여 명이 다쳤지만 이튿날인 10월 17일에는 시위가 더욱 격화되어 학생들뿐만 아니라 다수의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학생 시위는 점차 시민항쟁의 양상을 띠어갔다.''' 밤늦게까지 계속된 시위에서 시민들은 충무파출소, 한국방송공사, 서구청, 부산세무서 등을 파괴하였고, 경찰차량을 불태우거나 파손시켰다.&lt;br /&gt;
&lt;br /&gt;
====마산의 시민항쟁====&lt;br /&gt;
&lt;br /&gt;
민주항쟁은 18일에 마산으로 확산되었다. 늦은 오후에는 1,000여 명의 경남대학교 학생들이 마산 시내 번화가에 산발적으로 집결했으며, 일부시민들도 가담해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어두워진 다음 학생과 시민들의 데모는 격화되어 파출소, 공화당사, 방송국, 신문사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파괴하였다. 이튿날인 19일에는 시위가 더욱 치열해져 마산 시내는 한때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저녁 8시경, 시위대는 경남대학과 마산대학&amp;lt;ref&amp;gt;1985년 창원대학으로 교명이 변경되었으며, 현재의 마산대학교와 다르다.&amp;lt;/ref&amp;gt;, 그리고 고등학생까지 합세하여 약 8,000명에 이르렀으며, 시내 곳곳에서 몽둥이를 들고 동사무소와 파출소로 몰려가 시설을 파괴하였고, 경찰차량에 불을 질렀다.&lt;br /&gt;
&lt;br /&gt;
====부산 계엄령, 마산 위수령====&lt;br /&gt;
[[파일:계엄포고문.jpg|270px|섬네일|왼쪽|부산지역에 내려진 계엄포고문을 읽고 있는 시민들]]&lt;br /&gt;
부산대학교 시위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박정희 정부는 학생 시위로 시작된 시위가 대규모 시민항쟁으로 사태가 심상치 않게 확대되어가자 강경책으로 대응했다. 정부는 18일 자정을 기해 '''부산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동원한 과격한 진압'''을 통해 시위 참여자들과 이를 방조한 일반 시민들까지 1,058명을 연행하고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으며, 부산지구 계엄사령부는 각 대학 휴교조처와 야간통행금지시간을 2시간 연장하는 등의 항이 담긴 포고문을 발표했다.&lt;br /&gt;
&lt;br /&gt;
부산에 계엄령이 선포된 이튿날인 19일에 마산 시위가 확대됨에 따라 그 다음날인 10월 20일 정오, 정부가 '''마산 및 창원 지역에 위수령을 발령'''해 통행금지 시간이 연장되고, 경남대학 등에는 휴교조처가 취해졌으며, 24일에는 깡패를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132명을 검거, 23명을 구속했다. 이렇게 '''표면적으로는 부마민주항쟁이 단시간에 진압되는 듯 보였지만, 항쟁은 이미 유신체제의 균열을 불러오고 있었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항쟁의 전개 과정에서 볼 수 있듯, 부마민주항쟁에서 특징적인 것은 먼저 시위대의 가장 큰 분노의 대상이 공화당사와 경찰·파출소였다는 점, 다음으로는 “부가가치세를 철폐하라”, “잘 먹고 잘 살아라”등의 구호에서 드러나듯이 세무서에 대한 공격, 그리고 신문사와 방송국에 대한 공격을 들 수 있다.&lt;br /&gt;
&lt;br /&gt;
부마민주항쟁은 1970년대 유신체제 밑에서 쌓였던 침묵하는 언론, 조세, 시민을 억압하는 경찰에 대한 불만 등 정치·사회·경제·문화·종교 등 각 부문에 걸친 여러 모순의 폭발이었고, 헌법 개정과 긴급조치로 겨우 유지되던 유신체제와 박정희 정권의 붕괴를 촉진시킨 결정적인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10.26사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또한 이 사건은 1980년 5월 18일의 광주 민주화운동과 1987년 6월 민주항쟁에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된다.&lt;br /&gt;
&lt;br /&gt;
&amp;lt;/br&amp;gt;&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억눌린 우리 역사&amp;lt;/br&amp;gt;터져나온 분노&amp;lt;/br&amp;gt;매운 연기 칼바람에도&amp;lt;/br&amp;gt;함성소리 드높았던&amp;lt;/br&amp;gt;동트는 새벽벌&amp;lt;/br&amp;gt;시월이 오면&amp;lt;/br&amp;gt;핏발 선 가슴마다&amp;lt;/br&amp;gt;살아오는 십 일육&amp;lt;/br&amp;gt;동지여 전진하자&amp;lt;/br&amp;gt;깨치고 나가자&amp;lt;/br&amp;gt;뜨거운 가슴으로&amp;lt;/br&amp;gt;빛나는 내일로'''''&amp;lt;/br&amp;gt;&amp;lt;small&amp;gt;-'''부산대학교''' 새벽벌도서관 10.16 기념비&amp;lt;/small&amp;gt;&amp;lt;/div&amp;gt;&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호빵이👻]]: 부마항쟁 페이지 전체 작성&amp;lt;/br&amp;gt;&lt;br /&gt;
[[이나자키로빈]]: 부마항쟁 원인 중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 작성&lt;br /&gt;
&lt;br /&gt;
=='''5.18민주화운동'''==&lt;br /&gt;
===타임라인===&lt;br /&gt;
===원인===&lt;br /&gt;
====유신체제의 붕괴====&lt;br /&gt;
&lt;br /&gt;
[[파일:김재규.jpg|섬네일|오른쪽|암살 당시 상황을 재현하는 김재규]]&lt;br /&gt;
&lt;br /&gt;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amp;lt;small&amp;gt; - 김재규&amp;lt;/small&amp;gt;&lt;br /&gt;
1979년 10월 4일 신민당 총재 김영삼이 국회에서 의원직을 제명당하자 10월 15부터 10월 20까지 부산 · 마산 등지에서는 부마항쟁이 일어났고, 이의 해결을 둘러싼 노선대립으로 갈등 중 10월 26일 &amp;lt;ins&amp;gt;[[김재규]]&amp;lt;/ins&amp;gt;가 박정희를 살해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ins&amp;gt;[[10.26 사태]]&amp;lt;/ins&amp;gt;의 사후 수습과정에서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을 중심으로 신군부 세력이 부상하였으며, 이들은 &amp;lt;ins&amp;gt;[[12.12 사건]]&amp;lt;/ins&amp;gt;의 하극상을 통하여 군부를 장악하였다. 1980년 2월 29일 김대중 등이 복권되었으나 그 해 봄, 신군부는 최규하 과도 정부를 유명무실하게 하고 국민들이 요구하는 민주주의와 이를 위한 명확한 정치일정 제시를 거부하면서 권력기반을 구축하였다.&lt;br /&gt;
&lt;br /&gt;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lt;br /&gt;
한 시대의 대격변을 예고하는 단초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시작됐다. 1979년 8월 9일 오전, 신민당의 당사 4층 강당에서는 봉제업체인 YH무역주식회사의 여성노동자 200여명이 기업주의 폐업에 반발하여 폐업조치 철회 농성을 벌였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인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신민당이 당사 건물을 내준 것이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폭력을 동원하여 농성을 해산시켰다. 결국 이 사건은 노동 탄압 사건을 넘어선 야당에 대한 정치 탄압 사건으로 발전하였다.&lt;br /&gt;
&lt;br /&gt;
이날 경찰은 1000여명의 진압대원을 신민당사로 난입시켜 농성을 하고 있던 174명의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로 밖으로 끌어냈다. 또한 경찰은 총재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김영삼 총재와 당 간부들을 끌어내면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박정희 정권은 이 노동자 농성 사건을 빌미로 신민당 분열공작을 시도하였다. 유신정권과 비밀리에 결탁한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 3명이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 부총재 전원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접수시켰다. 그리고 법원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신민당 총재단의 직무 집행을 정지시키고 박정희 정권의 꼭두각시를 총재직무대행으로 선임하였다.&lt;br /&gt;
&lt;br /&gt;
아울러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의 동교동 자택을 전면 봉쇄하였고,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에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끊으라고 요구한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즈』 회견내용을 “반헌정적, 반민족적 작태”로 몰아서 국회에 징계 동의안을 제출했다. 10월 4일 오후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의원 159명은 여당 총회장에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제명 결의안을 '''기습적으로''' 처리해 버렸다.&lt;br /&gt;
&lt;br /&gt;
노사분규 사태로 시작된 사건이 제1야당 당수의 의원직 제명으로 확대된 정치적 사태를 지켜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유신체제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이 고조되었다. 또한 이 사건은 그동안 다소 주춤하던 대학가에 반유신 반독재 운동의 열기가 다시 확산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청춘을 바쳐, 학생 운동====&lt;br /&gt;
&lt;br /&gt;
[[파일:서울의_봄.JPG|섬네일|오른쪽|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앞에 모인 시위대]]&lt;br /&gt;
&lt;br /&gt;
군부의 재집권 야욕에 대한 국민적 저항은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표출되었다. 1980년 3월, 서울대 총학생회 출범을 시작으로 4월 초순에는 전국의 주요 대학들이 총학생회를 결성하기 시작하였다. 대학별로 독재 정권에 아부했던 어용교수와 족벌사학 퇴진 운동을 벌였고, 특히 병영집체훈련(당시 대학 신입생들은 의무적으로 군부대에 10일 간 입대하여 각종 군사훈련을 이수해야 했다.) 거부가 주요 이슈로 전면 등장했다. 각 대학의 병영집체훈련 거부운동이 본격화되고 전국적인 쟁점으로 떠오르자 신군부는 신문, 방송을 통해 ‘학생들의 안보의식 결여’를 비난하고 교내 시위·농성을 집중적으로 보도하게 했다.  5월 1일에 서울대가 입영훈련 거부투쟁 철회를 결정하고 ‘계엄령 해제’와 ‘유신잔당 퇴진’, ‘정부개헌중단’과 ‘노동 3권 보장’ 등을 요구하기 시작하면서 대학가는 이제까지의 학내 문제 중심의 운동에서 정치개혁을 위한 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그간 정부와 대학 간에 팽팽하게 유지되던 긴장 관계는 폭발 직전으로 내닫게 된 것이다.&lt;br /&gt;
&lt;br /&gt;
약 열흘 간의 대정부 투쟁을 준비한 대학가는 5월 10일 고려대 총학생회장실에서 열린 ‘총학생회장단 회의’에 참석한 전국 23개 대학 대표들은 ‘비상계엄의 즉각 해제’와 ‘전두환, 신현확 등 유신잔당 퇴진’ 등을 결의하고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정세에 대한 공동대처 방안을 마련했다. 이후 5월 13일부터 5월 14일에 걸쳐 서울 · 부산 · 대구 · 광주 등 37개 대학에서 계엄철폐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5월 15일에는 서울역에서 시위가 발생하는 등 학생시위는 서울시가지를 거의 마비시키는 등 야간까지 지속되어 사태가 절정에 달하면서 신군부 세력을 위협하였다. 5월 16일 24개 대학 학생대표들은 당분간 시국의 추이를 관망하기로 결정하고 가두시위를 중단하면서 소강상태에 돌입하는 듯하였다.&lt;br /&gt;
&lt;br /&gt;
====1980년 봄의 광주====&lt;br /&gt;
5월 17일 신군부 세력이 이전까지는 제주도를 제외한 지역에 한정되었던 비상계엄을 전국에 확대하는 조치인 계엄포고 10호(17일 24시에 발효: 각 대학 휴교령 포함)를 밤 9시 40분에 의결하고 밤 11시 40분에 발표하면서 밤 11시를 전후한 시점부터 김대중 · 김종필이 연행되는 등 권력형 부정축재자 및 소요조종 혐의자, 학생 시위 주동자가 체포되었다. 이날 밤 광주지역의 사회운동·학생운동의 지도자도 상당수가 검거되었다. 광주의 검거대상자는 전남대 12명, 조선대 10명 등 총 22명이었다. 전남에서 계엄합동수사단은 광주505보안대가 중심이고, 중앙정보부, 경찰 등이 보조역할을 했다. 전남 계엄합동수사단은 22대 차량과 86명의 인원이 출동해 정동년 등 복적생들과 대학의 총학생회 간부들을 집중 검거했다.&lt;br /&gt;
&lt;br /&gt;
한편 육군본부는 14일 오전 7시55분에 국가 중요 보안목표와 주요대학에 군 병력 배치 명령을 하달했다. 이 명령에 따라 전남북계엄분소장인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광주 시내 주요 시설물에 이날 오후부터 계엄병력을 배치했다. 31사단 96연대 병력이 광주시내 KBS건물에 42명, MBC 21명, CBS 11명, VOC(전일방송) 11명 등 주요 방송사 건물에 배치돼 경비에 들어간 것이다.&lt;br /&gt;
&lt;br /&gt;
이날 오후 전교사령관은 7공수여단의 광주배치에 따른 수송수단 지원도 미리 협의했다. 그리고 5월 8일부터 16일 사이에 공수부대 수뇌부들도 헬기를 타고 서울에서 내려와 광주 상무대의 전투병과교육사령부를 방문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광주에서 시위가 격화되면 즉각적으로 최정예 군부대를 동원해서 진압할 준비를 철저하게 갖추고 있었다. 5월 18일에 시작된 광주의 비극은 그 이전에 이미 시한폭탄처럼 준비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lt;br /&gt;
{{구글지도 | 위도=35.175961433346885 | 경도=126.90865311973532 | 줌=13 }}  [[파일:금남로.JPG|섬네일|오른쪽|금남로 앞에 집결한 버스와 시민군]]&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18일&amp;lt;/span&amp;gt;&lt;br /&gt;
휴교령이 내려질 경우 교문 앞에서 집결한다는 결의에 따라 학생들은 5월 18일 오전 전남대학교 앞에 모였다. 공수부대원들이 전남대 앞 시위를 저지하자 대학생들은 광주역에 재집결해서 시위를 이어갔다. 시위대가 점차 늘어나면서 공수부대원이 시내에서 시위진압에 나섰으며 18일 오후 1시부터 무차별 진압작전이 이루어져 부상자가 속출하였다.&lt;br /&gt;
&lt;br /&gt;
군인들이 금남로 등 시내 중심가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이나 여자를 마구 구타하고 짓밟으며 찌르는 등의 잔혹 행동을 하자 시민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이에 시위대는 오후 4시 이후 파출소 파괴 등 적극공세에 나섰다. '''계엄군의 과잉 무력진압은 시위를 해산시키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오히려 시민들을 단결시켰으며, 결국 19일 시민 · 학생 연대가 발생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lt;br /&gt;
&lt;br /&gt;
 '''''광주 애국 시민 여러분! 이것이 웬 말입니까? 웬 벼락이란 말입니까? 죄 없는 학생들을 총칼로 찔러 죽이고 몽둥이로 두들겨 트럭으로 실어가며 부녀자를 발가벗겨 총칼로 찌르는 놈들이 이 누구란 말입니까? 이제 우리가 살길은 전시민이 하나로 뭉쳐 청년 학생들을 보호하고 유신잔당과 극악무도한 살인마 전두환 일파와 공수 특전단 놈들을 한놈도 남김없이 쳐부수는 길 뿐입니다. 우리는 이제 다 보았습니다. 다 알게 되었읍니다. 왜 학생들이 그토록 소리 높이 외쳤는가를, 우리의 적은 경찰도 군대도 아닙니다. 우리의 적은 전국민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바로 유신잔당과 전두환 일파 그놈들입니다.''''' &amp;lt;small&amp;gt; - 1980년 5월 19일에 '광주시민민주투쟁회'명의의 호소문&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19일&amp;lt;/span&amp;gt;&lt;br /&gt;
19일 오전에는 일시적 소강상태였으나 오후 들어서 분노한 학생 · 시민들이 군 · 경찰과 공방전을 벌이면서 시위는 점차 격화되었다. '''시민들은 공포감에서 벗어나 자신의 생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단순한 학생시위에서 시민봉기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계엄군은 시위대를 포위하여 구타하였으며 일부 고등학생까지 포함된 시위대는 돌과 화염병으로 저항하였고 파출소와 방송국 등에 침입하였다. 뒤처진 공수부대를 공격하거나 고립된 차량을 포위하기도 하였으며 총과 방패를 빼앗기도 하였고, 오후 4시 50분 시민들에게 포위된 계엄군의 장갑차에서 최초의 발포가 있었다. 19일 밤비가 내리는 가운데 시위가 산발적으로 계속되었으며, 20일 오전 비가 그치고 대규모 시위는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오후부터 다시 시작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FFF0F5&amp;quot;&amp;gt;5월 20일&amp;lt;/span&amp;gt;&lt;br /&gt;
'''20일 오후 6시부터 택시와 버스 운전 기사들이 광주역과 무등경기장에 모여 대형 버스와 트럭을 앞세우고 일시에 금남로에 집결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들을 앞세운 시위는 계엄군을 몰아내는 데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였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5.18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에 &amp;lt;ins&amp;gt;[[지대한 영향]]&amp;lt;/ins&amp;gt;을 끼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학생 운동에 뛰어든 많은 대학생들은 대학교에 들어와서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의 실상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아 학생 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군부정권은 5.18 이후로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다. 전두환은 김대중 등에게 '광주 사태'의 책임을 물어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했고,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 선언을 한 직후, 8월 27일 소위 체육관 선거를 통해 전두환은 대통령 자리를 탈취했다.&lt;br /&gt;
&lt;br /&gt;
지역적인 면에서는 '''광주광역시를 비롯한 전라도 지역의 트라우마'''로 작용해 이후의 민주정의당 및 &amp;lt;ins&amp;gt;[[3당 합당]]&amp;lt;/ins&amp;gt;으로 이어지는 보수 세력에 대해 적대심을 가지고, 민주당계 정당의 표밭이 되는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미 박정희 정부 시절부터 유무형의 정치적인 차별을 받고 있었지만 5.18의 참상은 전라도가 다시는 보수 세력을 지지하지 않게 만들 정도로 심각한 사건이며 호남소외론의 가장 결정적인 명분이 되었다.&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이나자키로빈]]: 5.18 민주화운동 페이지 전체 작성&lt;br /&gt;
&lt;br /&gt;
=='''6월민주항쟁'''==&lt;br /&gt;
===타임라인===&lt;br /&gt;
===원인===&lt;br /&gt;
====[[박종철고문치사사건]]====&lt;br /&gt;
&lt;br /&gt;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박종철은 1987년 1월 13일 자정 경 하숙집에서 치안본부(現 경찰청)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게 연행되었다.‘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이자 ‘민주화추진위원회’ 지도위원으로 수배 받고 있었던 박종운을 잡기위해 연행한 것이었다. 취조실로 연행해간 공안 당국은 박종철에게 박종운의 소재를 물었으나, 박종철은 순순히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경찰은 잔혹한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가하였고, 박종철은 끝내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했다. 당시 경찰은 초기 발표에서 고문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라고 사망원인을 발표하였으나, 시체부검 결과 전기고문과 물고문에 의한 살인인 것으로 밝혀졌다.&lt;br /&gt;
&lt;br /&gt;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저 죽음을 응시해주길 바란다. 저 죽음을 끝내 지켜주길 바란다. 저 죽음을 다시 죽이지 말아주길 바란다.''''' &amp;lt;small&amp;gt; - 동아일보 1987년 1월 17일자 김중배 칼럼 중&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사건 진상의 일부가 공개되자 2월 7일 전국 주요 도시에서 &amp;quot;박종철군 범국민추도식&amp;quot; 및 도심 시위가 열렸고 이어 3월 3일에는 &amp;quot;박종철군 49재와 고문추방 국민대행진&amp;quot;과 함께 또 다른 시위가 열렸다. 이후 4월 2일 서울대학교 학부모 130여 명이 ‘건국대학교 사태‘ 등 시국관련 구속학생의 징계철회를 요구하며 철야 농성을 벌였다.&lt;br /&gt;
&lt;br /&gt;
====정부의 개헌논의 유보====&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lt;br /&g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JazJFsgu4oc?si=sOE7w1tz-jKVztC9&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lt;br /&g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그러나 전두환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1987년 4월 13일 [[4.13호헌조치]]라 불리는 ‘대통령 특별담화‘를 발표, 개헌(改憲) 논의를 유보하겠다고 밝혔다. [[4.13호헌조치]]에서 전두환은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와 대통령 선거는 자유 경선의 분위기가 보장되는 가운데 1987년 내에 공정한 선거관리를 통해 차질 없이 실시할 수 있게 모든 노력을 다할것‘이라고 다짐했으며, 또 ‘민정당의 후임 대통령 후보는 조속한 시일 안에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인물 가운데서 당헌 절차와 민주 방식에 따라 전당대회에서 선출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호헌조치‘라는 그 이름대로 현행 헌법에 따라 권력을 이양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국민들의 큰 기대를 얻을 것이라 믿었으나, 기대는 커녕 오히려 반발을 가져오는 요인이 되고 말았다. 곧바로 이튿날인 4월 14일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 등 각계 인사들이, 호헌 조치를 비판하는 시국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정부 최루탄에 의한 [[이한열]] 사망====&lt;br /&gt;
[[파일:이한열.jpg|200px|섬네일|오른쪽|최루탄에 피격당한 후 이종창에게 부축받는 이한열]]&lt;br /&gt;
먼저 1987년 5월 27일 야당과 재야, 종교계 등이 힘을 모아 ‘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여당인 민주정의당에서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6월 10일에 맞춰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6 · 10국민대회]])’를 치르기로 결정하였다. 대학생들은 국본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를 중심으로 6 · 10국민대회에 호응하여 6월 초부터 각 대학별로 연일 집회와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6 · 10국민대회]] 하루 전날인 6월 9일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교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는 곧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학생들은 물론 시민들의 분노가 들끓었다. 이러한 분노 속에서 6 · 10국민대회가 열렸다. 경찰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6 · 10국민대회가 열리는 성공회대성당을 원천 봉쇄하였다. 그 결과 6 · 10국민대회는 대회장에 미리 들어가 있던 소수의 인원만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대회 예정 시간인 오후 6시 이전부터 서울 시내 곳곳에서 대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시민들도 다양한 방식으로 6 · 10국민대회와 학생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날 밤 늦게까지 시위를 벌이던 학생들은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이후 5일 동안 농성을 계속하였다. 애초 계획된 것은 아니었지만 대학생들의 명동성당 농성은 6 · 10국민대회가 단발성 행사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인 저항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lt;br /&gt;
&lt;br /&gt;
====민주항쟁 확산====&lt;br /&gt;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로 개헌하라!'''''   &amp;lt;small&amp;gt;-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제시한 슬로건&amp;lt;/small&amp;gt;&lt;br /&gt;
명동성당 농성을 거치며 항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유월항쟁의 전국화 과정에는 일정한 패턴이 존재하였다. 6월 10일 서울 외에도 전국 주요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위가 벌어졌지만, 15일까지 항쟁의 중심은 6 · 10국민대회와 명동성당 농성이 전개된 서울이었다. 하지만 6월 15일 경부터는 부산, 대전, 진주 등에서 격렬한 시위가 전개되었다. 그러다가 6월 20일부터 대규모 시위가 광주, 전주, 순천, 익산 등 호남 지방으로 옮겨졌다. 6 · 10국민대회 이후 약 20일 동안 전국 곳곳에서 매일 평균 100회 이상의 시위가 동시다발로 벌어졌다. 특히 6월 18일 ‘최루탄추방대회’와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은 전국 곳곳에서 한꺼번에 1백만 명 이상이 참여하였다. 갈수록 참가 지역이 전국 곳곳으로 확산되어 대도시, 중소도시뿐만 아니라 농촌 지역의 군 단위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6월 26일 하루에만 37~38개 시 · 군에서 시위가 동시에 벌어졌다. 유월항쟁에 참가한 연 인원은 400~500만 명으로 추산된다.&lt;br /&gt;
&lt;br /&gt;
반면 유월항쟁의 전국적 동시다발 시위는 경찰 병력을 분산시켰다. 분산된 경찰 병력으로는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거센 시위의 물결을 막아 낼 수 없었다. 경찰이 시위 진압에 최루탄을 남발하면서 최루탄도 점차 고갈되기 시작하였다. 유월항쟁 기간 동안 경찰이 사용한 최루탄만 총 67만 발이 넘었다. 더불어, 전두환 정권이 집권 내내 강조했던 88서울올림픽이 얼마 남지 않아 미국 등 국제사회의 이목이 집중된 상황에서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운동 때처럼 유혈 사태와 대량 학살을 반복하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무엇보다 군대를 동원하더라도 이러한 대규모 시민 항쟁을 진압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결국 경찰력으로 항쟁을 막기 힘들고, 군대 투입도 어렵다고 판단한 전두환 정권은 1987년 6월 29일 ‘ 6 · 29민주화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하였다. 그리고 그동안 의식불명 상태에 있었던 이한열이 7월 5일 끝내 사망하였다. 5일장 후 7월 9일 치러진 이한열의 노제에 100만 명의 인파가 모인 것을 끝으로 약 한 달 동안 지속된 유월항쟁은 마무리되었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1987년 6월항쟁이 '''대통령직선제 개헌'''이라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이 항쟁에 동참한 학생과 시민들의 요구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제시한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 개헌’이라는 슬로건으로 모아졌기 때문이었다. 유월항쟁은 이러한 민주화 세력의 통합성, 즉 각기 다른 성격과 지향을 가진 여러 주체들이 모두 동의할 수 있는 ‘최소 강령’하에 ‘최대 연합’으로 결집하였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기여===&lt;br /&gt;
[[딩잉잉]]:6월민주항쟁 페이지 전체 작성&lt;br /&gt;
&lt;br /&gt;
==각주==&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기밀문서]]&lt;br /&gt;
[[분류:4.19혁명관련]]&lt;br /&gt;
[[분류:부마항쟁관련]]&lt;br /&gt;
[[분류:5.18민주화운동관련]]&lt;br /&gt;
[[분류:6월민주항쟁관련]]&lt;br /&gt;
[[분류:뎐]]&lt;br /&gt;
[[분류:이나자키로빈]]&lt;br /&gt;
[[분류:호빵이👻]]&lt;br /&gt;
[[분류:•ᴗ•]]&lt;br /&gt;
[[분류:딩잉잉]]&lt;/div&gt;</summary>
		<author><name>딩잉잉</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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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박종철고문치사사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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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0T05:56:4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딩잉잉: /* 추모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lt;br /&gt;
 '''''종철아! 잘 가그래이… 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대이….''''' &amp;lt;small&amp;gt; -박종철의 아버지 박정기가 화장한 박종철의 유해를 임진강에 뿌리며 한 말. 이후 장례식장과 시민들이 박종철을 추모할 때 쓰는 구호가 되었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던 중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한 사건. 전두환정권 말기인 1987년 1월 14일, 경찰은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 박종철을 불법 체포하여 고문하다가 사망케 했다. 이 사건은 공안당국의 조직적인 은폐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 진상이 폭로되어 1987년 6월항쟁의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전두환정권의 탄압과 그에 대한 저항은 1980년대 중·후반에 더해가고 있었다. 경찰은 ‘민주화추진위원회사건’ 관련 수배자 박종운의 소재 파악을 위해 그 후배인 박종철을 불법으로 체포했다. 경찰은 박종철에게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가했다. 박종철은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했다. 같은 달 15일강민창 치안본부장은 단순 쇼크사인 것처럼 발표했다.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심문을 시작, 박종철군의 친구의 소재를 묻던 중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중앙대 부속 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사망하였다”'''고 공식 발표했다. 부검의(剖檢醫)의 증언과 언론 보도 등으로 의혹이 제기되자 사건발생 5일 만인 19일에 물고문 사실을 공식 시인했다. 수사경관 조한경과 강진규 등 2명을 구속했다. 정부는 내무부장관 김종호와 치안본부장 강민창의 전격 해임과 고문근절 대책 수립 등으로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lt;br /&gt;
&lt;br /&gt;
1987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미사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김승훈 신부는 박종철 고문치사와 관련된 경찰의 은폐 조작을 폭로했다.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 등 대공간부 3명이 이 사건을 축소 조작하였고, 고문가담 경관이 2명이 아니라 5명이었다는 사실이 폭로되었다. 안기부, 법무부, 내무부, 검찰, 청와대 비서실 및 이들 기관의 기관장이 참여하는 관계기관대책회의가 은폐 조작에 조직적으로 관여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파일:박종철.jpg]]&lt;br /&gt;
&lt;br /&gt;
박종철 고문치사와 은폐 조작사건은 전두환정권의 정당성에 큰 타격을 주었고 정권 규탄 시위를 촉발했다. &lt;br /&gt;
이 사건은 1987년 6월항쟁의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여 민주화운동의 촉매제 역할을 했다.&lt;br /&gt;
&lt;br /&gt;
==추모==&lt;br /&gt;
&lt;br /&gt;
서울대학교 인문대학과 중앙도서관 사이에는 박종철이 당했던 고문을 형상화한 '박종철 열사 기념비'와 흉상이 세워져 있다. 모교인 혜광고등학교에도 2002년에 펜촉 모양의 기념비가 신관과 본관 사이에 세워졌다. 박종철 문서의 관련 기사를 참조해 보면 알겠지만 이 기념비가 세워지는 데도 동기회의 많은 노력이 있었다. 사건 초창기에는 박종철 이름만 꺼내도 교사들에게 무자비한 구타를 당하기 일쑤였다고. 겨우 이름을 말할 수 있게 된 것도 2002년경이라 그때야 기념비를 세울 수 있게 된 것인데 초기안은 흉상이었으나 학교의 반대로 인해 기념비 정도로 타협한 거라고 한다. 2018년 1월 13일에는 31주기를 하루 앞두고 그가 지냈던 하숙집 골목 앞 길이 '박종철 거리'로 제정되었다. 녹두거리 대학5길에 박종철 거리임을 알리는 동판이 있으며 인근 도덕소공원 담장에 그의 모습을 그린 벽화가 있다.&lt;br /&gt;
&lt;br /&gt;
2020년 6월 민주항쟁 33주년을 맞아 서울특별시 관악구 박종철 거리에 생전 박종철의 모습을 본뜬 동상과 벤치가 마련됐다. 벤치에는 1986년 7월, 박종철이 구속 상태에서 썼던 편지의 한 구절이 오롯이 새겨졌다. 이 벤치는 서울대 동문들의 모금과 관악구의 지원으로 서울대 미술대학에서 제작했다. 박종철 거리 일대에는 박종철을 기리는 기념관과 기념 공원도 조성될 예정으로 전해졌다.&lt;br /&gt;
&lt;br /&gt;
아래의 시는 정호승 시인의 '부치지 않은 편지'로, 박종철에 대한 추모의 의미로 제작되었다. &amp;lt;br/&amp;gt;&amp;lt;br/&amp;gt;&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풀잎은 쓰러져도 하늘을 보고''&amp;lt;br/&amp;gt;&lt;br /&gt;
''꽃 피기는 쉬워도 아름답긴 어려워라''&amp;lt;br/&amp;gt;&lt;br /&gt;
''시대의 새벽 길 홀로 걷다가''&amp;lt;br/&amp;gt;&lt;br /&gt;
''사랑과 죽음의 자유를 만나''&amp;lt;br/&amp;gt;&lt;br /&gt;
''언 강 바람 속으로 무덤도 없이''&amp;lt;br/&amp;gt;&lt;br /&gt;
''세찬 눈보라 속으로 노래도 없이''&amp;lt;br/&amp;gt;&lt;br /&gt;
''꽃잎처럼 흘러 흘러 그대 잘 가라''&amp;lt;br/&amp;gt;&lt;br /&gt;
''그대 눈물 이제 곧 강물 되리니''&amp;lt;br/&amp;gt;&lt;br /&gt;
''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 되리니''&amp;lt;br/&amp;gt;&lt;br /&gt;
''산을 입에 물고 나는''&amp;lt;br/&amp;gt;&lt;br /&gt;
''눈물의 작은 새여''&amp;lt;br/&amp;gt;&lt;br /&gt;
''뒤돌아보지 말고 그대 잘 가라'' &amp;lt;/div&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딩잉잉</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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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박종철고문치사사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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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0T05:56:3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딩잉잉: /* 추모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lt;br /&gt;
 '''''종철아! 잘 가그래이… 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대이….''''' &amp;lt;small&amp;gt; -박종철의 아버지 박정기가 화장한 박종철의 유해를 임진강에 뿌리며 한 말. 이후 장례식장과 시민들이 박종철을 추모할 때 쓰는 구호가 되었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던 중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한 사건. 전두환정권 말기인 1987년 1월 14일, 경찰은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 박종철을 불법 체포하여 고문하다가 사망케 했다. 이 사건은 공안당국의 조직적인 은폐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 진상이 폭로되어 1987년 6월항쟁의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전두환정권의 탄압과 그에 대한 저항은 1980년대 중·후반에 더해가고 있었다. 경찰은 ‘민주화추진위원회사건’ 관련 수배자 박종운의 소재 파악을 위해 그 후배인 박종철을 불법으로 체포했다. 경찰은 박종철에게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가했다. 박종철은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했다. 같은 달 15일강민창 치안본부장은 단순 쇼크사인 것처럼 발표했다.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심문을 시작, 박종철군의 친구의 소재를 묻던 중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중앙대 부속 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사망하였다”'''고 공식 발표했다. 부검의(剖檢醫)의 증언과 언론 보도 등으로 의혹이 제기되자 사건발생 5일 만인 19일에 물고문 사실을 공식 시인했다. 수사경관 조한경과 강진규 등 2명을 구속했다. 정부는 내무부장관 김종호와 치안본부장 강민창의 전격 해임과 고문근절 대책 수립 등으로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lt;br /&gt;
&lt;br /&gt;
1987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미사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김승훈 신부는 박종철 고문치사와 관련된 경찰의 은폐 조작을 폭로했다.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 등 대공간부 3명이 이 사건을 축소 조작하였고, 고문가담 경관이 2명이 아니라 5명이었다는 사실이 폭로되었다. 안기부, 법무부, 내무부, 검찰, 청와대 비서실 및 이들 기관의 기관장이 참여하는 관계기관대책회의가 은폐 조작에 조직적으로 관여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파일:박종철.jpg]]&lt;br /&gt;
&lt;br /&gt;
박종철 고문치사와 은폐 조작사건은 전두환정권의 정당성에 큰 타격을 주었고 정권 규탄 시위를 촉발했다. &lt;br /&gt;
이 사건은 1987년 6월항쟁의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여 민주화운동의 촉매제 역할을 했다.&lt;br /&gt;
&lt;br /&gt;
==추모==&lt;br /&gt;
&lt;br /&gt;
서울대학교 인문대학과 중앙도서관 사이에는 박종철이 당했던 고문을 형상화한 '박종철 열사 기념비'와 흉상이 세워져 있다. 모교인 혜광고등학교에도 2002년에 펜촉 모양의 기념비가 신관과 본관 사이에 세워졌다. 박종철 문서의 관련 기사를 참조해 보면 알겠지만 이 기념비가 세워지는 데도 동기회의 많은 노력이 있었다. 사건 초창기에는 박종철 이름만 꺼내도 교사들에게 무자비한 구타를 당하기 일쑤였다고. 겨우 이름을 말할 수 있게 된 것도 2002년경이라 그때야 기념비를 세울 수 있게 된 것인데 초기안은 흉상이었으나 학교의 반대로 인해 기념비 정도로 타협한 거라고 한다. 2018년 1월 13일에는 31주기를 하루 앞두고 그가 지냈던 하숙집 골목 앞 길이 '박종철 거리'로 제정되었다. 녹두거리 대학5길에 박종철 거리임을 알리는 동판이 있으며 인근 도덕소공원 담장에 그의 모습을 그린 벽화가 있다.&lt;br /&gt;
&lt;br /&gt;
2020년 6월 민주항쟁 33주년을 맞아 서울특별시 관악구 박종철 거리에 생전 박종철의 모습을 본뜬 동상과 벤치가 마련됐다. 벤치에는 1986년 7월, 박종철이 구속 상태에서 썼던 편지의 한 구절이 오롯이 새겨졌다. 이 벤치는 서울대 동문들의 모금과 관악구의 지원으로 서울대 미술대학에서 제작했다. 박종철 거리 일대에는 박종철을 기리는 기념관과 기념 공원도 조성될 예정으로 전해졌다.&lt;br /&gt;
&lt;br /&gt;
아래의 시는 정호승 시인의 '부치지 않은 편지'로, 박종철에 대한 추모의 의미로 제작되었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풀잎은 쓰러져도 하늘을 보고''&amp;lt;br/&amp;gt;&lt;br /&gt;
''꽃 피기는 쉬워도 아름답긴 어려워라''&amp;lt;br/&amp;gt;&lt;br /&gt;
''시대의 새벽 길 홀로 걷다가''&amp;lt;br/&amp;gt;&lt;br /&gt;
''사랑과 죽음의 자유를 만나''&amp;lt;br/&amp;gt;&lt;br /&gt;
''언 강 바람 속으로 무덤도 없이''&amp;lt;br/&amp;gt;&lt;br /&gt;
''세찬 눈보라 속으로 노래도 없이''&amp;lt;br/&amp;gt;&lt;br /&gt;
''꽃잎처럼 흘러 흘러 그대 잘 가라''&amp;lt;br/&amp;gt;&lt;br /&gt;
''그대 눈물 이제 곧 강물 되리니''&amp;lt;br/&amp;gt;&lt;br /&gt;
''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 되리니''&amp;lt;br/&amp;gt;&lt;br /&gt;
''산을 입에 물고 나는''&amp;lt;br/&amp;gt;&lt;br /&gt;
''눈물의 작은 새여''&amp;lt;br/&amp;g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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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name>딩잉잉</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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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개요==&lt;br /&gt;
&lt;br /&gt;
 '''''종철아! 잘 가그래이… 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대이….''''' &amp;lt;small&amp;gt; -박종철의 아버지 박정기가 화장한 박종철의 유해를 임진강에 뿌리며 한 말. 이후 장례식장과 시민들이 박종철을 추모할 때 쓰는 구호가 되었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던 중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한 사건. 전두환정권 말기인 1987년 1월 14일, 경찰은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 박종철을 불법 체포하여 고문하다가 사망케 했다. 이 사건은 공안당국의 조직적인 은폐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 진상이 폭로되어 1987년 6월항쟁의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전두환정권의 탄압과 그에 대한 저항은 1980년대 중·후반에 더해가고 있었다. 경찰은 ‘민주화추진위원회사건’ 관련 수배자 박종운의 소재 파악을 위해 그 후배인 박종철을 불법으로 체포했다. 경찰은 박종철에게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가했다. 박종철은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했다. 같은 달 15일강민창 치안본부장은 단순 쇼크사인 것처럼 발표했다.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심문을 시작, 박종철군의 친구의 소재를 묻던 중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중앙대 부속 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사망하였다”'''고 공식 발표했다. 부검의(剖檢醫)의 증언과 언론 보도 등으로 의혹이 제기되자 사건발생 5일 만인 19일에 물고문 사실을 공식 시인했다. 수사경관 조한경과 강진규 등 2명을 구속했다. 정부는 내무부장관 김종호와 치안본부장 강민창의 전격 해임과 고문근절 대책 수립 등으로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lt;br /&gt;
&lt;br /&gt;
1987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미사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김승훈 신부는 박종철 고문치사와 관련된 경찰의 은폐 조작을 폭로했다.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 등 대공간부 3명이 이 사건을 축소 조작하였고, 고문가담 경관이 2명이 아니라 5명이었다는 사실이 폭로되었다. 안기부, 법무부, 내무부, 검찰, 청와대 비서실 및 이들 기관의 기관장이 참여하는 관계기관대책회의가 은폐 조작에 조직적으로 관여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파일:박종철.jpg]]&lt;br /&gt;
&lt;br /&gt;
박종철 고문치사와 은폐 조작사건은 전두환정권의 정당성에 큰 타격을 주었고 정권 규탄 시위를 촉발했다. &lt;br /&gt;
이 사건은 1987년 6월항쟁의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여 민주화운동의 촉매제 역할을 했다.&lt;br /&gt;
&lt;br /&gt;
==추모==&lt;br /&gt;
&lt;br /&gt;
서울대학교 인문대학과 중앙도서관 사이에는 박종철이 당했던 고문을 형상화한 '박종철 열사 기념비'와 흉상이 세워져 있다. 모교인 혜광고등학교에도 2002년에 펜촉 모양의 기념비가 신관과 본관 사이에 세워졌다. 박종철 문서의 관련 기사를 참조해 보면 알겠지만 이 기념비가 세워지는 데도 동기회의 많은 노력이 있었다. 사건 초창기에는 박종철 이름만 꺼내도 교사들에게 무자비한 구타를 당하기 일쑤였다고. 겨우 이름을 말할 수 있게 된 것도 2002년경이라 그때야 기념비를 세울 수 있게 된 것인데 초기안은 흉상이었으나 학교의 반대로 인해 기념비 정도로 타협한 거라고 한다. 2018년 1월 13일에는 31주기를 하루 앞두고 그가 지냈던 하숙집 골목 앞 길이 '박종철 거리'로 제정되었다. 녹두거리 대학5길에 박종철 거리임을 알리는 동판이 있으며 인근 도덕소공원 담장에 그의 모습을 그린 벽화가 있다.&lt;br /&gt;
&lt;br /&gt;
2020년 6월 민주항쟁 33주년을 맞아 서울특별시 관악구 박종철 거리에 생전 박종철의 모습을 본뜬 동상과 벤치가 마련됐다. 벤치에는 1986년 7월, 박종철이 구속 상태에서 썼던 편지의 한 구절이 오롯이 새겨졌다. 이 벤치는 서울대 동문들의 모금과 관악구의 지원으로 서울대 미술대학에서 제작했다. 박종철 거리 일대에는 박종철을 기리는 기념관과 기념 공원도 조성될 예정으로 전해졌다.&lt;br /&gt;
&lt;br /&gt;
아래의 시는 정호승 시인의 '부치지 않은 편지'로, 박종철에 대한 추모의 의미로 제작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풀잎은 쓰러져도 하늘을 보고''&amp;lt;br/&amp;gt;&lt;br /&gt;
''꽃 피기는 쉬워도 아름답긴 어려워라''&amp;lt;br/&amp;gt;&lt;br /&gt;
''시대의 새벽 길 홀로 걷다가''&amp;lt;br/&amp;gt;&lt;br /&gt;
''사랑과 죽음의 자유를 만나''&amp;lt;br/&amp;gt;&lt;br /&gt;
''언 강 바람 속으로 무덤도 없이''&amp;lt;br/&amp;gt;&lt;br /&gt;
''세찬 눈보라 속으로 노래도 없이''&amp;lt;br/&amp;gt;&lt;br /&gt;
''꽃잎처럼 흘러 흘러 그대 잘 가라''&amp;lt;br/&amp;gt;&lt;br /&gt;
''그대 눈물 이제 곧 강물 되리니''&amp;lt;br/&amp;gt;&lt;br /&gt;
''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 되리니''&amp;lt;br/&amp;gt;&lt;br /&gt;
''산을 입에 물고 나는''&amp;lt;br/&amp;gt;&lt;br /&gt;
''눈물의 작은 새여''&amp;lt;br/&amp;gt;&lt;br /&gt;
''뒤돌아보지 말고 그대 잘 가라'' &amp;lt;/div&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딩잉잉</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B0%95%EC%A2%85%EC%B2%A0%EA%B3%A0%EB%AC%B8%EC%B9%98%EC%82%AC%EC%82%AC%EA%B1%B4&amp;diff=33586</id>
		<title>박종철고문치사사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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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0T05:56:1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딩잉잉: /* 추모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lt;br /&gt;
 '''''종철아! 잘 가그래이… 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대이….''''' &amp;lt;small&amp;gt; -박종철의 아버지 박정기가 화장한 박종철의 유해를 임진강에 뿌리며 한 말. 이후 장례식장과 시민들이 박종철을 추모할 때 쓰는 구호가 되었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던 중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한 사건. 전두환정권 말기인 1987년 1월 14일, 경찰은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 박종철을 불법 체포하여 고문하다가 사망케 했다. 이 사건은 공안당국의 조직적인 은폐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 진상이 폭로되어 1987년 6월항쟁의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전두환정권의 탄압과 그에 대한 저항은 1980년대 중·후반에 더해가고 있었다. 경찰은 ‘민주화추진위원회사건’ 관련 수배자 박종운의 소재 파악을 위해 그 후배인 박종철을 불법으로 체포했다. 경찰은 박종철에게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가했다. 박종철은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했다. 같은 달 15일강민창 치안본부장은 단순 쇼크사인 것처럼 발표했다.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심문을 시작, 박종철군의 친구의 소재를 묻던 중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중앙대 부속 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사망하였다”'''고 공식 발표했다. 부검의(剖檢醫)의 증언과 언론 보도 등으로 의혹이 제기되자 사건발생 5일 만인 19일에 물고문 사실을 공식 시인했다. 수사경관 조한경과 강진규 등 2명을 구속했다. 정부는 내무부장관 김종호와 치안본부장 강민창의 전격 해임과 고문근절 대책 수립 등으로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lt;br /&gt;
&lt;br /&gt;
1987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미사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김승훈 신부는 박종철 고문치사와 관련된 경찰의 은폐 조작을 폭로했다.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 등 대공간부 3명이 이 사건을 축소 조작하였고, 고문가담 경관이 2명이 아니라 5명이었다는 사실이 폭로되었다. 안기부, 법무부, 내무부, 검찰, 청와대 비서실 및 이들 기관의 기관장이 참여하는 관계기관대책회의가 은폐 조작에 조직적으로 관여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파일:박종철.jpg]]&lt;br /&gt;
&lt;br /&gt;
박종철 고문치사와 은폐 조작사건은 전두환정권의 정당성에 큰 타격을 주었고 정권 규탄 시위를 촉발했다. &lt;br /&gt;
이 사건은 1987년 6월항쟁의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여 민주화운동의 촉매제 역할을 했다.&lt;br /&gt;
&lt;br /&gt;
==추모==&lt;br /&gt;
&lt;br /&gt;
서울대학교 인문대학과 중앙도서관 사이에는 박종철이 당했던 고문을 형상화한 '박종철 열사 기념비'와 흉상이 세워져 있다. 모교인 혜광고등학교에도 2002년에 펜촉 모양의 기념비가 신관과 본관 사이에 세워졌다. 박종철 문서의 관련 기사를 참조해 보면 알겠지만 이 기념비가 세워지는 데도 동기회의 많은 노력이 있었다. 사건 초창기에는 박종철 이름만 꺼내도 교사들에게 무자비한 구타를 당하기 일쑤였다고. 겨우 이름을 말할 수 있게 된 것도 2002년경이라 그때야 기념비를 세울 수 있게 된 것인데 초기안은 흉상이었으나 학교의 반대로 인해 기념비 정도로 타협한 거라고 한다. 2018년 1월 13일에는 31주기를 하루 앞두고 그가 지냈던 하숙집 골목 앞 길이 '박종철 거리'로 제정되었다. 녹두거리 대학5길에 박종철 거리임을 알리는 동판이 있으며 인근 도덕소공원 담장에 그의 모습을 그린 벽화가 있다.&lt;br /&gt;
&lt;br /&gt;
2020년 6월 민주항쟁 33주년을 맞아 서울특별시 관악구 박종철 거리에 생전 박종철의 모습을 본뜬 동상과 벤치가 마련됐다. 벤치에는 1986년 7월, 박종철이 구속 상태에서 썼던 편지의 한 구절이 오롯이 새겨졌다. 이 벤치는 서울대 동문들의 모금과 관악구의 지원으로 서울대 미술대학에서 제작했다. 박종철 거리 일대에는 박종철을 기리는 기념관과 기념 공원도 조성될 예정으로 전해졌다.&lt;br /&gt;
&lt;br /&gt;
정호승 시인의 '부치지 않은 편지'는 박종철에 대한 추모의 의미로 제작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풀잎은 쓰러져도 하늘을 보고''&amp;lt;br/&amp;gt;&lt;br /&gt;
''꽃 피기는 쉬워도 아름답긴 어려워라''&amp;lt;br/&amp;gt;&lt;br /&gt;
''시대의 새벽 길 홀로 걷다가''&amp;lt;br/&amp;gt;&lt;br /&gt;
''사랑과 죽음의 자유를 만나''&amp;lt;br/&amp;gt;&lt;br /&gt;
''언 강 바람 속으로 무덤도 없이''&amp;lt;br/&amp;gt;&lt;br /&gt;
''세찬 눈보라 속으로 노래도 없이''&amp;lt;br/&amp;gt;&lt;br /&gt;
''꽃잎처럼 흘러 흘러 그대 잘 가라''&amp;lt;br/&amp;gt;&lt;br /&gt;
''그대 눈물 이제 곧 강물 되리니''&amp;lt;br/&amp;gt;&lt;br /&gt;
''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 되리니''&amp;lt;br/&amp;gt;&lt;br /&gt;
''산을 입에 물고 나는''&amp;lt;br/&amp;gt;&lt;br /&gt;
''눈물의 작은 새여''&amp;lt;br/&amp;gt;&lt;br /&gt;
''뒤돌아보지 말고 그대 잘 가라'' &amp;lt;/div&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딩잉잉</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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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박종철고문치사사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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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0T05:55:3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딩잉잉: /* 추모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lt;br /&gt;
 '''''종철아! 잘 가그래이… 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대이….''''' &amp;lt;small&amp;gt; -박종철의 아버지 박정기가 화장한 박종철의 유해를 임진강에 뿌리며 한 말. 이후 장례식장과 시민들이 박종철을 추모할 때 쓰는 구호가 되었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던 중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한 사건. 전두환정권 말기인 1987년 1월 14일, 경찰은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 박종철을 불법 체포하여 고문하다가 사망케 했다. 이 사건은 공안당국의 조직적인 은폐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 진상이 폭로되어 1987년 6월항쟁의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전두환정권의 탄압과 그에 대한 저항은 1980년대 중·후반에 더해가고 있었다. 경찰은 ‘민주화추진위원회사건’ 관련 수배자 박종운의 소재 파악을 위해 그 후배인 박종철을 불법으로 체포했다. 경찰은 박종철에게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가했다. 박종철은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했다. 같은 달 15일강민창 치안본부장은 단순 쇼크사인 것처럼 발표했다.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심문을 시작, 박종철군의 친구의 소재를 묻던 중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중앙대 부속 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사망하였다”'''고 공식 발표했다. 부검의(剖檢醫)의 증언과 언론 보도 등으로 의혹이 제기되자 사건발생 5일 만인 19일에 물고문 사실을 공식 시인했다. 수사경관 조한경과 강진규 등 2명을 구속했다. 정부는 내무부장관 김종호와 치안본부장 강민창의 전격 해임과 고문근절 대책 수립 등으로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lt;br /&gt;
&lt;br /&gt;
1987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미사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김승훈 신부는 박종철 고문치사와 관련된 경찰의 은폐 조작을 폭로했다.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 등 대공간부 3명이 이 사건을 축소 조작하였고, 고문가담 경관이 2명이 아니라 5명이었다는 사실이 폭로되었다. 안기부, 법무부, 내무부, 검찰, 청와대 비서실 및 이들 기관의 기관장이 참여하는 관계기관대책회의가 은폐 조작에 조직적으로 관여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파일:박종철.jpg]]&lt;br /&gt;
&lt;br /&gt;
박종철 고문치사와 은폐 조작사건은 전두환정권의 정당성에 큰 타격을 주었고 정권 규탄 시위를 촉발했다. &lt;br /&gt;
이 사건은 1987년 6월항쟁의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여 민주화운동의 촉매제 역할을 했다.&lt;br /&gt;
&lt;br /&gt;
==추모==&lt;br /&gt;
&lt;br /&gt;
서울대학교 인문대학과 중앙도서관 사이에는 박종철이 당했던 고문을 형상화한 '박종철 열사 기념비'와 흉상이 세워져 있다. 모교인 혜광고등학교에도 2002년에 펜촉 모양의 기념비가 신관과 본관 사이에 세워졌다. 박종철 문서의 관련 기사를 참조해 보면 알겠지만 이 기념비가 세워지는 데도 동기회의 많은 노력이 있었다. 사건 초창기에는 박종철 이름만 꺼내도 교사들에게 무자비한 구타를 당하기 일쑤였다고. 겨우 이름을 말할 수 있게 된 것도 2002년경이라 그때야 기념비를 세울 수 있게 된 것인데 초기안은 흉상이었으나 학교의 반대로 인해 기념비 정도로 타협한 거라고 한다. 2018년 1월 13일에는 31주기를 하루 앞두고 그가 지냈던 하숙집 골목 앞 길이 '박종철 거리'로 제정되었다. 녹두거리 대학5길에 박종철 거리임을 알리는 동판이 있으며 인근 도덕소공원 담장에 그의 모습을 그린 벽화가 있다.&lt;br /&gt;
&lt;br /&gt;
2020년 6월 민주항쟁 33주년을 맞아 서울특별시 관악구 박종철 거리에 생전 박종철의 모습을 본뜬 동상과 벤치가 마련됐다. 벤치에는 1986년 7월, 박종철이 구속 상태에서 썼던 편지의 한 구절이 오롯이 새겨졌다. 이 벤치는 서울대 동문들의 모금과 관악구의 지원으로 서울대 미술대학에서 제작했다. 박종철 거리 일대에는 박종철을 기리는 기념관과 기념 공원도 조성될 예정으로 전해졌다.&lt;br /&gt;
&lt;br /&gt;
정호승 시인의 '부치지 않은 편지'는 박종철에 대한 추모의 의미로 제작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풀잎은 쓰러져도 하늘을 보고&amp;lt;br/&amp;gt;&lt;br /&gt;
꽃 피기는 쉬워도 아름답긴 어려워라&amp;lt;br/&amp;gt;&lt;br /&gt;
시대의 새벽 길 홀로 걷다가&amp;lt;br/&amp;gt;&lt;br /&gt;
사랑과 죽음의 자유를 만나&amp;lt;br/&amp;gt;&lt;br /&gt;
언 강 바람 속으로 무덤도 없이&amp;lt;br/&amp;gt;&lt;br /&gt;
세찬 눈보라 속으로 노래도 없이&amp;lt;br/&amp;gt;&lt;br /&gt;
꽃잎처럼 흘러 흘러 그대 잘 가라&amp;lt;br/&amp;gt;&lt;br /&gt;
그대 눈물 이제 곧 강물 되리니&amp;lt;br/&amp;gt;&lt;br /&gt;
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 되리니&amp;lt;br/&amp;gt;&lt;br /&gt;
산을 입에 물고 나는&amp;lt;br/&amp;gt;&lt;br /&gt;
눈물의 작은 새여&amp;lt;br/&amp;gt;&lt;br /&gt;
뒤돌아보지 말고 그대 잘 가라'' &amp;lt;/div&amp;gt;&lt;/div&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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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박종철고문치사사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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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0T05:55:0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딩잉잉: /* 추모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lt;br /&gt;
 '''''종철아! 잘 가그래이… 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대이….''''' &amp;lt;small&amp;gt; -박종철의 아버지 박정기가 화장한 박종철의 유해를 임진강에 뿌리며 한 말. 이후 장례식장과 시민들이 박종철을 추모할 때 쓰는 구호가 되었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던 중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한 사건. 전두환정권 말기인 1987년 1월 14일, 경찰은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 박종철을 불법 체포하여 고문하다가 사망케 했다. 이 사건은 공안당국의 조직적인 은폐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 진상이 폭로되어 1987년 6월항쟁의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전두환정권의 탄압과 그에 대한 저항은 1980년대 중·후반에 더해가고 있었다. 경찰은 ‘민주화추진위원회사건’ 관련 수배자 박종운의 소재 파악을 위해 그 후배인 박종철을 불법으로 체포했다. 경찰은 박종철에게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가했다. 박종철은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했다. 같은 달 15일강민창 치안본부장은 단순 쇼크사인 것처럼 발표했다.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심문을 시작, 박종철군의 친구의 소재를 묻던 중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중앙대 부속 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사망하였다”'''고 공식 발표했다. 부검의(剖檢醫)의 증언과 언론 보도 등으로 의혹이 제기되자 사건발생 5일 만인 19일에 물고문 사실을 공식 시인했다. 수사경관 조한경과 강진규 등 2명을 구속했다. 정부는 내무부장관 김종호와 치안본부장 강민창의 전격 해임과 고문근절 대책 수립 등으로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lt;br /&gt;
&lt;br /&gt;
1987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미사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김승훈 신부는 박종철 고문치사와 관련된 경찰의 은폐 조작을 폭로했다.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 등 대공간부 3명이 이 사건을 축소 조작하였고, 고문가담 경관이 2명이 아니라 5명이었다는 사실이 폭로되었다. 안기부, 법무부, 내무부, 검찰, 청와대 비서실 및 이들 기관의 기관장이 참여하는 관계기관대책회의가 은폐 조작에 조직적으로 관여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파일:박종철.jpg]]&lt;br /&gt;
&lt;br /&gt;
박종철 고문치사와 은폐 조작사건은 전두환정권의 정당성에 큰 타격을 주었고 정권 규탄 시위를 촉발했다. &lt;br /&gt;
이 사건은 1987년 6월항쟁의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여 민주화운동의 촉매제 역할을 했다.&lt;br /&gt;
&lt;br /&gt;
==추모==&lt;br /&gt;
&lt;br /&gt;
서울대학교 인문대학과 중앙도서관 사이에는 박종철이 당했던 고문을 형상화한 '박종철 열사 기념비'와 흉상이 세워져 있다. 모교인 혜광고등학교에도 2002년에 펜촉 모양의 기념비가 신관과 본관 사이에 세워졌다. 박종철 문서의 관련 기사를 참조해 보면 알겠지만 이 기념비가 세워지는 데도 동기회의 많은 노력이 있었다. 사건 초창기에는 박종철 이름만 꺼내도 교사들에게 무자비한 구타를 당하기 일쑤였다고. 겨우 이름을 말할 수 있게 된 것도 2002년경이라 그때야 기념비를 세울 수 있게 된 것인데 초기안은 흉상이었으나 학교의 반대로 인해 기념비 정도로 타협한 거라고 한다. 2018년 1월 13일에는 31주기를 하루 앞두고 그가 지냈던 하숙집 골목 앞 길이 '박종철 거리'로 제정되었다. 녹두거리 대학5길에 박종철 거리임을 알리는 동판이 있으며 인근 도덕소공원 담장에 그의 모습을 그린 벽화가 있다.&lt;br /&gt;
&lt;br /&gt;
2020년 6월 민주항쟁 33주년을 맞아 서울특별시 관악구 박종철 거리에 생전 박종철의 모습을 본뜬 동상과 벤치가 마련됐다. 벤치에는 1986년 7월, 박종철이 구속 상태에서 썼던 편지의 한 구절이 오롯이 새겨졌다. 이 벤치는 서울대 동문들의 모금과 관악구의 지원으로 서울대 미술대학에서 제작했다. 박종철 거리 일대에는 박종철을 기리는 기념관과 기념 공원도 조성될 예정으로 전해졌다.&lt;br /&gt;
&lt;br /&gt;
정호승 시인의 '부치지 않은 편지'는 박종철에 대한 추모의 의미로 제작되었다.&lt;br /&gt;
&lt;br /&gt;
&amp;lt;div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amp;gt;&lt;br /&gt;
풀잎은 쓰러져도 하늘을 보고&amp;lt;br/&amp;gt;&lt;br /&gt;
꽃 피기는 쉬워도 아름답긴 어려워라&amp;lt;br/&amp;gt;&lt;br /&gt;
시대의 새벽 길 홀로 걷다가&amp;lt;br/&amp;gt;&lt;br /&gt;
사랑과 죽음의 자유를 만나&amp;lt;br/&amp;gt;&lt;br /&gt;
언 강 바람 속으로 무덤도 없이&amp;lt;br/&amp;gt;&lt;br /&gt;
세찬 눈보라 속으로 노래도 없이&amp;lt;br/&amp;gt;&lt;br /&gt;
꽃잎처럼 흘러 흘러 그대 잘 가라&amp;lt;br/&amp;gt;&lt;br /&gt;
그대 눈물 이제 곧 강물 되리니&amp;lt;br/&amp;gt;&lt;br /&gt;
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 되리니&amp;lt;br/&amp;gt;&lt;br /&gt;
산을 입에 물고 나는&amp;lt;br/&amp;gt;&lt;br /&gt;
눈물의 작은 새여&amp;lt;br/&amp;gt;&lt;br /&gt;
뒤돌아보지 말고 그대 잘 가라 &amp;lt;/div&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딩잉잉</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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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박종철고문치사사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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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0T05:53:2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딩잉잉: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lt;br /&gt;
 '''''종철아! 잘 가그래이… 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대이….''''' &amp;lt;small&amp;gt; -박종철의 아버지 박정기가 화장한 박종철의 유해를 임진강에 뿌리며 한 말. 이후 장례식장과 시민들이 박종철을 추모할 때 쓰는 구호가 되었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던 중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한 사건. 전두환정권 말기인 1987년 1월 14일, 경찰은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 박종철을 불법 체포하여 고문하다가 사망케 했다. 이 사건은 공안당국의 조직적인 은폐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 진상이 폭로되어 1987년 6월항쟁의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전두환정권의 탄압과 그에 대한 저항은 1980년대 중·후반에 더해가고 있었다. 경찰은 ‘민주화추진위원회사건’ 관련 수배자 박종운의 소재 파악을 위해 그 후배인 박종철을 불법으로 체포했다. 경찰은 박종철에게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가했다. 박종철은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했다. 같은 달 15일강민창 치안본부장은 단순 쇼크사인 것처럼 발표했다.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심문을 시작, 박종철군의 친구의 소재를 묻던 중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중앙대 부속 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사망하였다”'''고 공식 발표했다. 부검의(剖檢醫)의 증언과 언론 보도 등으로 의혹이 제기되자 사건발생 5일 만인 19일에 물고문 사실을 공식 시인했다. 수사경관 조한경과 강진규 등 2명을 구속했다. 정부는 내무부장관 김종호와 치안본부장 강민창의 전격 해임과 고문근절 대책 수립 등으로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lt;br /&gt;
&lt;br /&gt;
1987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미사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김승훈 신부는 박종철 고문치사와 관련된 경찰의 은폐 조작을 폭로했다.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 등 대공간부 3명이 이 사건을 축소 조작하였고, 고문가담 경관이 2명이 아니라 5명이었다는 사실이 폭로되었다. 안기부, 법무부, 내무부, 검찰, 청와대 비서실 및 이들 기관의 기관장이 참여하는 관계기관대책회의가 은폐 조작에 조직적으로 관여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파일:박종철.jpg]]&lt;br /&gt;
&lt;br /&gt;
박종철 고문치사와 은폐 조작사건은 전두환정권의 정당성에 큰 타격을 주었고 정권 규탄 시위를 촉발했다. &lt;br /&gt;
이 사건은 1987년 6월항쟁의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여 민주화운동의 촉매제 역할을 했다.&lt;br /&gt;
&lt;br /&gt;
==추모==&lt;br /&gt;
&lt;br /&gt;
서울대학교 인문대학과 중앙도서관 사이에는 박종철이 당했던 고문을 형상화한 '박종철 열사 기념비'와 흉상이 세워져 있다. 모교인 혜광고등학교에도 2002년에 펜촉 모양의 기념비가 신관과 본관 사이에 세워졌다. 박종철 문서의 관련 기사를 참조해 보면 알겠지만 이 기념비가 세워지는 데도 동기회의 많은 노력이 있었다. 사건 초창기에는 박종철 이름만 꺼내도 교사들에게 무자비한 구타를 당하기 일쑤였다고. 겨우 이름을 말할 수 있게 된 것도 2002년경이라 그때야 기념비를 세울 수 있게 된 것인데 초기안은 흉상이었으나 학교의 반대로 인해 기념비 정도로 타협한 거라고 한다. 2018년 1월 13일에는 31주기를 하루 앞두고 그가 지냈던 하숙집 골목 앞 길이 '박종철 거리'로 제정되었다. 녹두거리 대학5길에 박종철 거리임을 알리는 동판이 있으며 인근 도덕소공원 담장에 그의 모습을 그린 벽화가 있다.&lt;br /&gt;
&lt;br /&gt;
2020년 6월 민주항쟁 33주년을 맞아 서울특별시 관악구 박종철 거리에 생전 박종철의 모습을 본뜬 동상과 벤치가 마련됐다. 벤치에는 1986년 7월, 박종철이 구속 상태에서 썼던 편지의 한 구절이 오롯이 새겨졌다. 이 벤치는 서울대 동문들의 모금과 관악구의 지원으로 서울대 미술대학에서 제작했다. 박종철 거리 일대에는 박종철을 기리는 기념관과 기념 공원도 조성될 예정으로 전해졌다.&lt;br /&gt;
&lt;br /&gt;
정호승 시인의 '부치지 않은 편지'는 박종철에 대한 추모의 의미로 제작되었다.&lt;br /&gt;
&lt;br /&gt;
'''''풀잎은 쓰러져도 하늘을 보고&lt;br /&gt;
꽃 피기는 쉬워도 아름답긴 어려워라&lt;br /&gt;
시대의 새벽 길 홀로 걷다가&lt;br /&gt;
사랑과 죽음의 자유를 만나&lt;br /&gt;
언 강 바람 속으로 무덤도 없이&lt;br /&gt;
세찬 눈보라 속으로 노래도 없이&lt;br /&gt;
꽃잎처럼 흘러 흘러 그대 잘 가라&lt;br /&gt;
그대 눈물 이제 곧 강물 되리니&lt;br /&gt;
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 되리니&lt;br /&gt;
산을 입에 물고 나는&lt;br /&gt;
눈물의 작은 새여&lt;br /&gt;
뒤돌아보지 말고 그대 잘 가라'''''''&lt;/div&gt;</summary>
		<author><name>딩잉잉</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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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딩잉잉: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lt;br /&gt;
 '''''종철아! 잘 가그래이… 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대이….''''' &amp;lt;small&amp;gt; -박종철의 아버지 박정기가 화장한 박종철의 유해를 임진강에 뿌리며 한 말. 이후 장례식장과 시민들이 박종철을 추모할 때 쓰는 구호가 되었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던 중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한 사건. 전두환정권 말기인 1987년 1월 14일, 경찰은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 박종철을 불법 체포하여 고문하다가 사망케 했다. 이 사건은 공안당국의 조직적인 은폐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 진상이 폭로되어 1987년 6월항쟁의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전두환정권의 탄압과 그에 대한 저항은 1980년대 중·후반에 더해가고 있었다. 경찰은 ‘민주화추진위원회사건’ 관련 수배자 박종운의 소재 파악을 위해 그 후배인 박종철을 불법으로 체포했다. 경찰은 박종철에게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가했다. 박종철은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했다. 같은 달 15일강민창 치안본부장은 단순 쇼크사인 것처럼 발표했다.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심문을 시작, 박종철군의 친구의 소재를 묻던 중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중앙대 부속 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사망하였다”'''고 공식 발표했다. 부검의(剖檢醫)의 증언과 언론 보도 등으로 의혹이 제기되자 사건발생 5일 만인 19일에 물고문 사실을 공식 시인했다. 수사경관 조한경과 강진규 등 2명을 구속했다. 정부는 내무부장관 김종호와 치안본부장 강민창의 전격 해임과 고문근절 대책 수립 등으로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lt;br /&gt;
&lt;br /&gt;
1987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미사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김승훈 신부는 박종철 고문치사와 관련된 경찰의 은폐 조작을 폭로했다.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 등 대공간부 3명이 이 사건을 축소 조작하였고, 고문가담 경관이 2명이 아니라 5명이었다는 사실이 폭로되었다. 안기부, 법무부, 내무부, 검찰, 청와대 비서실 및 이들 기관의 기관장이 참여하는 관계기관대책회의가 은폐 조작에 조직적으로 관여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파일:박종철.jpg]]&lt;br /&gt;
&lt;br /&gt;
박종철 고문치사와 은폐 조작사건은 전두환정권의 정당성에 큰 타격을 주었고 정권 규탄 시위를 촉발했다. &lt;br /&gt;
이 사건은 1987년 6월항쟁의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여 민주화운동의 촉매제 역할을 했다.&lt;/div&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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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딩잉잉: /* 개요 */&lt;/p&gt;
&lt;hr /&gt;
&lt;div&gt;==개요==&lt;br /&gt;
&lt;br /&gt;
 '''''종철아! 잘 가그래이… 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대이….''''' &amp;lt;small&amp;gt; -박종철의 아버지 박정기가 화장한 박종철의 유해를 임진강에 뿌리며 한 말. 이후 장례식장과 시민들이 박종철을 추모할 때 쓰는 구호가 되었다.&amp;lt;/small&amp;gt;&lt;br /&gt;
&lt;br /&gt;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던 중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한 사건. 전두환정권 말기인 1987년 1월 14일, 경찰은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 박종철을 불법 체포하여 고문하다가 사망케 했다. 이 사건은 공안당국의 조직적인 은폐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 진상이 폭로되어 1987년 6월항쟁의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lt;br /&gt;
&lt;br /&gt;
==전개==&lt;br /&gt;
전두환정권의 탄압과 그에 대한 저항은 1980년대 중·후반에 더해가고 있었다. 경찰은 ‘민주화추진위원회사건’ 관련 수배자 박종운의 소재 파악을 위해 그 후배인 박종철을 불법으로 체포했다. 경찰은 박종철에게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가했다. 박종철은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했다. 같은 달 15일강민창 치안본부장은 단순 쇼크사인 것처럼 발표했다.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심문을 시작, 박종철군의 친구의 소재를 묻던 중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중앙대 부속 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사망하였다”고 공식 발표했다. 부검의(剖檢醫)의 증언과 언론 보도 등으로 의혹이 제기되자 사건발생 5일 만인 19일에 물고문 사실을 공식 시인했다. 수사경관 조한경과 강진규 등 2명을 구속했다. 정부는 내무부장관 김종호와 치안본부장 강민창의 전격 해임과 고문근절 대책 수립 등으로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lt;br /&gt;
&lt;br /&gt;
1987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미사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김승훈 신부는 박종철 고문치사와 관련된 경찰의 은폐 조작을 폭로했다.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 등 대공간부 3명이 이 사건을 축소 조작하였고, 고문가담 경관이 2명이 아니라 5명이었다는 사실이 폭로되었다. 안기부, 법무부, 내무부, 검찰, 청와대 비서실 및 이들 기관의 기관장이 참여하는 관계기관대책회의가 은폐 조작에 조직적으로 관여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박종철 고문치사와 은폐 조작사건은 전두환정권의 정당성에 큰 타격을 주었고 정권 규탄 시위를 촉발했다. 이 사건은 1987년 6월항쟁의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여 민주화운동의 촉매제 역할을 했다.&lt;/div&gt;</summary>
		<author><name>딩잉잉</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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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4.13호헌조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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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0T05:35:4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딩잉잉: /* 개요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lt;br /&gt;
==개요==&lt;br /&gt;
[[파일:전두환호헌조치.jpg|300px|섬네일|왼쪽|전 대통령, 특별담화를 통해 `개헌논의 유보` 성명, `현행헌법으로 정부이양`, `대통령 선거 연내 실시` 발표]]&lt;br /&gt;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발표한 담화. '호헌'이란 '현재의 헌(憲)법을 옹호(護)한다'는 뜻으로, '호헌조치'라는 것은 현행 헌법을 바꾸지 않고 계속 유지하겠다는 뜻이다. 전두환은 이 조치를 통해 일체의 개헌 논의를 중단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역풍을 불러일으켜 전국적인 민주화 운동인 6월 항쟁을 점화했다.&lt;br /&gt;
&lt;br /&gt;
1985년 12대 총선에서 신한민주당은 독재 정권의 오만 방해와 갖은 술책에도 불구하고 대도시에서 선전하면서 야당 돌풍을 일으켰다. 이후 대통령 직선제 개헌에 대한 요구가 각계에서 터져 나오면서 신민당은 1000만 개헌 서명운동을 주도하기에 이른다.&lt;br /&gt;
&lt;br /&gt;
이런 범국민적인 직선제 개헌 요구에 못 이겨서 결국 1986년 7월 30일 여당인 민주정의당(이하 민정당)과 야당인 신민당의 합의로 대한민국 국회에 헌법개정특별위원회가 발족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여야의 입장은 팽팽했는데 민정당은 자신들이 주도하던 정권의 연장을 위해 의원내각제 개헌을 주장한 반면 신민당은 국민적인 열망에 따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주장해 합의점이 도통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다.&lt;br /&gt;
&lt;br /&gt;
이런 가운데 1987년 1월 14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벌어지면서 국민들이 전두환 정권의 폭력성에 분노해 민주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여기에 대통령 직선제 개헌에 대한 압박이 더해지자 결국 전두환은 권력 유지에 위험을 느끼고 승부수를 던지며 중대 선언을 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대통령 특별담화문 영상 편집본==&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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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대통령 특별담화문 전문==&lt;br /&gt;
&lt;br /&gt;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lt;br /&gt;
&lt;br /&gt;
본인은 오늘 국민 여러분께서 그동안 큰 관심을 가져오신 개헌 문제에 관해서 본인이 깊이 생각해온 바를 직접 말씀드리고 국민의 이해와 협조를 구하고자 합니다. 흔히 세월이 빠르다고 합니다만 이제 대통령의 임기를 겨우 10개월 정도 남겨놓고 있는 지금 본인은 새삼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수 없읍니다. 그동안 국민여러분과 함께 땀흘려 이룩한 성취의 보람을 키워가기 위해서는 앞으로 남은 임기 동안에 마무리 지어야 할 국가적 과제가 너무도 크고 지금 우리가 내릴 선택의 결과가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현시기의 중대성과 당면한 정치일정의 촉박함을 생각할때 어떻게든 헌법문제를 매듭짓고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 대다수 국민의 솔직한 바람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다행히 지금 우리는 지난 7년간의 꾸준한 노력이 헛되지 않아 각 분야에서 눈부신 성장과 발전을 이룩하고 있읍니다만, 안타깝게도 지난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우리 정치의 모읍은 국민의 기대수준에 미치지 못한 채 오히려 실망과 좌절감만을 안겨주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모든 국민이 그토록 바라던 합의개헌은 한치의 진전도 이룩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 문제를 놓고 정파간에 심각한 반목과 대립만을 거듭하고 있음은 심히 답답하고 유감스런 일이 아닐수 없읍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합의개헌의 실마리가 풀리기는 커녕 국론이 분열되고 사회혼란이 조성되어 끝내는 평화적 정부이양마저 과연 제대로 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국민의 공통된 우려라고 할 수 있겠읍니다. 본인은 취임이래 지금까지 어떻게 하든지 이 땅에 민주주의의 새로운 전통을 수립하겠다는 신념 아래 평화적인 정부이양을 기필코 실현시키기 위해 있는 노력을 다 기울여 왔읍니다. 평화적 정부이양의 과제는 우리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건국이념으로 받아들인 이후 40년 헌정사에서 한번도 이루어보지 못했으며, 지금까지 그 어떤 집권자나 정당, 그리고 그 어느 정치인도 풀지 못했던 숙제입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민주발전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읍니다. 평화적 정부이양이야말로 우리나라의 진정한 민주발전을 성취하는데 있어 그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과제인 것입니다. 모두 잘 아시다시피 현행헌법은 1인 장기집권의 악순환을 단절하고 민주주의를 정착시켜야한다는 시대적 요청에 따라 헌정사상 처음으로 단임이라는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지금까지의 그 어떤 헌법보다도 완벽하게 평화적 정권교체를 보장하고 있읍니다. 당시의 국민적 여망이 얼마나 간절했던 것인가는 7년 전 개헌국민투표에서 국민 여러분이 보내준 압도적인 지지가 잘 말해주고 있다고 하겠읍니다. 본인은 온 국민의 정치적 결단으로 탄생된 이 헌법을 끝까지 준수하고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대통령으로서 책무를 다하는 것이며 그 내용의 핵심인 단임을 한번 실현해보지도 않은 채 이를 고치는 것을 능사로 알아서는 안 된다고 믿어왔읍니다. 그러나 본인은 1년 전인 작년 4월 30일 3당대표들과 만나 여야가 좋은 헌법안을 합의해서 건의해오면 본인의 재임중에라도 헌법을 고치는 데 반대하지 않겠다고 함으로써 합의개헌의 길을 열어 놓은 바 있읍니다. 이것은 당시 헌법개정 문제를 놓고 여야가 심각하게 대립한 끝에 길거리에서 밀고 당기는 사태까지 벌어지는 상황에서 국가적 혼란과 갈등을 막고 국민적 대화합을 바탕으로 성숙된 민주정치의 기틀을 마련해보자는 본인의 간절한 충정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따라서 본인은 국회에서 대화와 타협을 통해 진지한 합의노력이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하고 인내와 성의를 다해 왔읍니다. 야당이 국회에 헌법개정특별위원회 구성을 요구했을 때 이에 응해준 것도 그렇읍니다만, 특히 그 구성을 여야동수로 한 것은 다수당으로서는 도저히 생각하기 어려운 큰 양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당이 개헌을 하지 않겠다는 종전의 당론을 변경하면서까지 의원내각제 개헌안을 마련해서 내놓은 것도 진정한 타협의 자세를 실천해보인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밖에도 여러차례의 여야 대표회담을 통해 헌법특위의 정상화를 위한 온갖 노력을 기울였을 뿐만 아니라, 기회 있을 때마다 야당의 요구를 적극 수용하여 진지한 협상을 모색해 왔던 것입니다. '''이러한 꾸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야당은 대통령직선제라는 당론만을 고집하면서 지금까지 단 한차례의 양보도 한일이 없읍니다.''' 도대체 소수당이 일체의 타협을 배제하고 어떻게 헌법문제를 해결하며, 또 어떻게 민주주의를 하겠다는 것인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읍니다. 있는 법도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서 헌법만 고치면 하루아침에 민주주의가 다 될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이만저만한 환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과거 여덟차례나 헌법을 고친 우리의 정치사가 여실히 말해주고 있읍니다. 분명히 말씀드립니다만, 본인의 단임 의지가 확고한 이상, 사실 헌법과 관련하여 본인 자신의 개인적인 이해관계란 따로 있을 수 없읍니다. 다만 물러나는 대통령으로서의 헌법은 누구보다도 더 허심탄회하고 공정하게 국가와 민족의 먼 장래를 내다보면서 헌법문제를 볼 수 있는 입장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제도나 장단점은 있게 마련입니다만 '''대통령 직선제는 과거에 우리가 수차례 경험한 바 있어 비교적 익숙한 제도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경험은 결코 자랑스러운 것도 아니고 바람직한 것은 더욱 아니었읍니다. 국민이 원한다는 명분아래 집권연장을 위한 개헌이 여러차례 이루어져 1인 장기집권의 폐해가 누적되었고 결국에는 평화적인 정부교체에 실패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전국적인 과열선거로 테러와 폭력이 난무하고, 감당할 수 없는 선심공세와 막대한 자금살포로 경제파탄의 어려움을 초래하였으며, 더구나 지역감정을 자극하여 나라와 국민을 분열시킨 그 폐단을 우리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읍니다. 특히 지난날 여섯차례의 직선제에 의한 대통령선거가 모두 여당의 승리로 끝나 이 제도는 여당에 유리한 것이라고 평가되어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로 인해 선거가 끝난 후에도 선거결과에 승복하지 않아 그 후유증이 심각하였으며 &amp;quot;전부 아니면 전무&amp;quot;라는 식의 극한투쟁만 되돌이 되었읍니다. 바로 그러한 과오와 위험 때문에 대통령 직선제는 우리의 불행한 헌정사와 더불어 역사 속에 매몰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나라의 급속한 발전과 국민의식의 성숙한 변화가 이루어진 오늘에 와서 이미 지나가 버린 제도를 다시 들고 나오는 것은 역사의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리려는 것이나 다름 없읍니다. 외국의 예를 보더라도 이 지구상에서 170여개국 가운데 약 40개국이 넘는 개발도상국들이 대통령직선제를 채택하고 있지만 평화적 정부교체가 제대로 실천되고 있는 나라는 거의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따라서 이왕 헌법을 고치려면 보다 나은 헌법으로 고치자는 것이 당연한 이치일 것입니다. 나라마다 헌법이나 제도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는 그 나라의 역사적 배경과 문화적 전지(傳紙), 그리고 정치적 상황과 당면한 현실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문제를 참작하여 현행제도에 대한 타협안으로 민정당이 의원내각제를 내놓은 것으로 본인은 이해하고 있읍니다. 이 제도는 오늘날과 같이 다원화된 사회 속에서 각계각층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고 여야가 극한대립이 아닌 국정운영의 동반자로서 공존할 수 있으며, 자율과 개방 속에서 선진국으로 발전하고 있는 시대적 추세에 부응할 수 있다는 점에서 민주발전을 기약할 수 있는 제도라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원내각제는 흔히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불리고 있읍니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본산인 유럽을 비롯해서 선진민주주의 국가의 대부분이 이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입증되고 있으며 과거 우리나라의 정통 야당들이 내각책임제 개헌을 소리높여 주장해 왔던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읍니다.''' 사실 다른나라들의 정치사에서도 집권여당이 스스로 권력구조를 대통령제에서 내각책임제로 바꾸자고 한 실례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입니다.&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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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여러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여당이 스스로 내각책임제를 내놓고 있는데도 야당은 이를 한사코 거부해 왔을 뿐만 아니라 최근 극심한 내부의 혼란과 갈등 상태를 보임으로써 합의개헌의 전망을 극히 어둡게 만들고 있읍니다. 그들 스스로의 내부문제조차도 대화와 타협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결국은 파국으로 몰아간 그러한 상대와 더불어 합의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 과연 가능할 것인지 회의를 갖는 국민이 대다수일 것입니다. 오늘의 혼미한 야당의 모읍에 비추어 볼 때 이대로 무작정 기다리기만 하다가는 정치일정의 원만한 진행에 큰 차질이 올 것이라는 사실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읍니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어떻게 하면 한국민주주의의 새로운 장을 여는 평화적 정부이양을 제대로 성사시킬 수 있을지 다함께 생각해 보아야 하겠읍니다. '''여당이 다수표가 있다고 해서 단독으로 개헌안을 강행 통과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됩니다. 개헌은 여당이든 야당이든 일방적으로 밀어 붙여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 그렇게 되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무리가 따르는 일방적인 방식이나 변칙적 방법으로는 본래의 취지를 살리기 어렵다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나라와 사회의 혼란과 갈등을 심화시킬 뿐이며 과거 우리 정치사의 경험과 우리 국민의 성숙한 정치의식에 비추어서도 용납되기 어려운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 모두의 염원을 담은 헌법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터에 나라의 발전을 가로막을 그러한 방식을 무리하게 취할 긴박한 이유도 발견하기 어렵다고 하겠읍니다.&lt;br /&gt;
&lt;br /&gt;
국민 여러분.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민정당이 그동안 합의개헌을 위해 끈질긴 노력을 다해왔으나 이제 합의개헌의 전망은 절망적이고 더 이상 기다릴 시간적 여유도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읍니다. 이와 같은 상황은 특히 단임 약속을 이행하고자 하는 본인의 입장에서 볼 때 실로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읍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정부를 이양하는 정치일정을 순조롭게 추진해야 하고, 또 그러기 위해서는 정치일정의 준거가 될 헌법이 우선 확정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본인은 그 누구보다도 간절히 합의개헌의 성사를 염원하면서 그 결과를 기다려 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까지 그 어떤 결과도 나타나지 않고 있읍니다. 약속을 꼭 이행하고자 하는 본인의 처지에서 시일은 자꾸 흘러만 가는데 약속을 이행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지 않으니 그 안타까움이 어느 정도일까 하는 것은 여러분께서도 충분히 짐작하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우리가 남겨두고 있는 기간은 정부를 이양하기 위한 실질적인 준비 작업을 진행하고 정치 일정을 추진하는 데에도 결코 넉넉한 시간이 아닙니다. '''헌법을 개정하는 데에는 국회에서의 토의 및 결의와 국민투표에만도 수개월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설령 개정이 된다 하더라도 여야의 이해가 크게 엇갈리는 선거법 개정을 비롯하여 수많은 부수 법안을 정비하고 그에 따라 선거를 치러야 하기 때문에 또다시 수개월의 시일이 필요한 것입니다. 새정부의 출범과 관계되는 문제를 시간에 쫓겨 졸속으로 처리하는 것은 그 자체가 시비와 혼란의 원인이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도 실로 무책임한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본인은 얼마 남지 않은 촉박한 임기와 현재의 국가적 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중대한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읍니다. 이제 본인은 임기 중 개헌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현행 헌법에 따라 내년 2월 25일 본인의 임기 만료와 더불어 후임자에게 정부를 이양할 것을 천명하는 바입니다. 이와 함께 본인은 평화적인 정부 이양과 서울 올림픽이라는 양대 국가 대사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서 국론을 분열시키고 국력을 낭비하는 소모적인 개헌 논의를 지양할 것을 선언합니다. 본인의 이 결단은 오늘의 난국을 타개하고 국가 목표를 수행하는 데 현실적으로 최선의 길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서 국민 여러분께서 전폭적인 호응과 신뢰를 보내주실 것을 간곡히 당부하고자 합니다. 두 가지의 국가 대사를 완성한 후에 충분한 시간을 두고 개헌 문제를 다시 생각한다면 나라의 백년대계를 위한 좋은 방안이 발견될 수 있을 것으로 본인은 확신하는 바입니다. 본인은 오늘 여러분에게 밝힌 결단에 따라 앞으로 평화적 정부이양을 위한 정치일정을 신속하게 진행시켜 나가야만 합니다.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와 대통령 선거는 금년안에 공정한 선거관리를 통해 자유경선의 부위기가 보장되는 가운데 차질없이 실시되도록 모든 노력을 다할것입니다. 민주정의당의 후임 대통령 후보는 조속한 시일 내에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인물 중에서 당헌절차와 민주방식에 따라 전당대회에서 선출되도록 할것입니다.&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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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여러분. 평화적 정부이양이란 단순히 집권자가 임기를 마치고 물러나는 것만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납니다. 여야 정치인은 물론 모든 국민의 적극적인 동참속에서 그야말로 평화스럽고 축복이 넘치는 분위기 속에서 정권담당임무가 교체되어야 비로소 평화적 정부이양의 참뜻이 실현되는 것임을 우리는 확실하게 꺠달아야 하겠읍니다. 이 지구상의 많은 나라 가운데 선거에 따라 평화적으로 정부를 교체하면서 제대로 민주주의를 하고있는 나라가 이십여개국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에 본인이 헌법을 지키고 물러나는 그 자체로서 우리의 민주주의는 획기적인 이정표를 세우게 된다고 하겠읍니다. 본인이 거듭 강조하고 싶은것은 이 결단의 참뜻은 어떻게 하든지 파국을 막고 어디까지나 정상적인 헌정절차에 따라 명예로운 퇴임을 매듭짓고자 하는 데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질없는 개헌타령에만 골몰하여 불법과 폭력으로 사회혼란을 조성하고 국민생활을 불안하게 하는일이 있다면 본인은 국민생활의 안전과 사회질서의 유지를 위해서 헌법이 대통령에게 부여하고 있는 모든 권한에 따라 단호하게 대처할 것임을 밝혀두는 바입니다.''' 그동안 누차 강조해왔읍니다만 우리는 이 지금 이 순간 민주와 선진과 통일의 영광스러운 역사를 창조하느냐, 아니면 후진과 빈곤의 악순환으로 되돌아갈 것이냐를 판가름하는 막바지 갈림길에 서있읍니다. 이처럼 한 민족의 향방을 가름할 중요한 시기를 더이상 낭비적인 갈등과 대립 그리고 반목으로 허송해서는 결코 안되겠읍니다. 그것은 우리의 내부분열을 심화시키고 국력을 소모시켜 국가의 존립과 국민의 생존권마저 위협하게 될 우려가 크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한 걱정은 최근의 국제정세가 주변 강대국간의 이해관계 변화로 착잡한 양상을 띠기 시작함으로써 더 한층 커지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지난 40년간 우리의 안보를 위협해 온 북한공산집단은 정권교체기의 진통을 그들의 적화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결정적 시기로 오판하고 있으며 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시기한 나머지 갖은 방해책동을 다 하고있는 실정입니다. 이러한 시기에 정치불안과 사회혼란이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 줄 수 있겠읍니까. 그것은 우리국민이 그동안 피땀흘려 쌓아올린 자력성장의 토대마저 파괴해 버릴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날 국제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치열한 무역전쟁 속에서 우리 사회가 불안하고 혼란할 때 수출이나 투자가 잘될 수 없고 경제가 제대로 풀려나갈 수 없읍니다. 우리에게 찾아올 것은 물가고와 실업과 불황과 빈곤과 침체 뿐입니다. 이에 따라 경제후퇴와 국가위기의 악순환이 시작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사회 일각에서는 과격한 좌경세력이 민주화라는 가면 아래 자유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고 불법과 선동으로 공산주의 세상을 세우겠다고 준동하고 있지 않읍니까. 본인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전복하려는 폭력좌경 세력을 엄정하게 다스리고 전환기에 해이해지기 쉬운 사회기강을 업격하게 확립함으로써 국기를 튼튼히 다져 나갈 것입니다.&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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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여러분.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이 시기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전환기인 만큼 오늘의 정치와 나라의 모읍 뿐 아니라 내일의 정치와 먼 국가장래를 내다보면서 남은 기간동안 대통령으로서 본인이 해야할 일은 참으로 많다고 생각합니다. 본인이 물려받은 우리 정치사의 유산이 너무도 힘겹고 불행했던 것이기 때문에 다음에 누가 국정을 담당하든 그 후임자와 국민여러분이 더욱 순탄하게 전진할 수 있도록 좋은 전통과 튼튼한 자산을 물려주고 싶은 것이 본인의 꾸밈없는 소망입니다. 본인이 지금 어떤 희생을 무릅쓰고서라도 단임을 준수하여 평화적 정부이양을 실현하려는 참뜻도 도저히 과거의 낡은 정치유산을 그대로 넘겨줄 수는 없다는 데에 있읍니다. 이제 우리의 정치도 나라와 사회의 성장 발전에 부응하는 선진 정치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신념에서 본인은 남은 기간 동안 민주발전의 기반을 더욱 넓히고 사회 안정과 국민 화합을 다지기 위한 조치들을 더욱 과감하게 추진해 나가고자 합니다. 그러한 노력의 하나로 본인은 국민의 정치 참여를 확대하기 위한 지방자치제를 단계적으로 실시해 나갈 계획입니다. 이 문제가 조속히 매듭지어져서 본인의 임기 내에 지방 자치가 시작된다면 민주 발전을 위한 또 하나의 튼튼한 토대가 마련되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본인이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제는 우리의 정치도 시대의 변천과 사회의 발전에 따라 꾸준한 신진대사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낡은 시대의 낡은 사고방식에 젖어 있는 인물에게 발전하는 나라의 장래를 의탁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전환기의 정치를 이끌어나갈 참신하고 유능한 정치 신진들을 광범위하게 포용하고 육성하는 정당의 노력은 매우 필요하다고 하겠읍니다. 우리의 정치가 시대조류에 맞게 올바로 발전해 나가기 위해서는 정치인들과 국민 모두가 의식의 개혁을 통한 정치풍토의 개선에 더욱 많은 정성을 쏟지 않으면 안되겠읍니다. 우리는 이제 굴절된 40년 정치사가 남긴 악순환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할 단계를 맞이하고 있읍니다. 정치세력간의 불신과 적대의식, 대화와 타협을 두려워하는 기이한 정치풍토, 그리고 폭력과 선동으로 국력을 낭비해온 극한투쟁의 후진적 양상은 하루속히 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1인 장기집권의 폐해가 청산되고 있는 이 마당에서 신뢰와 호양, 그리고 인내와 절제는 우리가 나아가야 할 새로운 정치의 모습이자 오늘의 전환기에 국민 모두의 행동지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할 필요도 없이 정치의 목표는 국리민복을 증진시키는데에 있읍니다. 우리의 정치도 이제는 국민의 다양한 욕구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대결을 중시하면서 중요한 국가문제에 당리당략을 초월하여 국민에게 봉사하고 나라를 살찌우는 새로운 전통을 세워나가야 하겠읍니다. 정치인의 사리사욕을 위해 국민에게 불안과 걱정을 주는 정치가 아니라 공익을 위해 정치인 자신의 이익을 희생함으로써 모든 국민에게 믿음과 희망을 주는 성숙한 정치로 발전해 나가야 하겠읍니다. 본인은 오늘의 정치인 모두가 본인의 결단을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고 그 토대위에서 새로운 정치의 앞날을 설계하고 건설하는 데 적극 동참해 줄 것을 기대하고자 합니다. 아울러 국민여러분께서는 안정속의 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민주시민으로서 계도적인 책임을 다해주시기를 당부하는 바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모든 노력이 합쳐져서 착실한 민주발전이 계속될 때 그간 국민여러분의 참여와 협조로 이룩해온 경제와 사회의 성장이 가속화되어 이 땅에는 위대한 새역사의 전환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본인은 굳게 믿고 있읍니다. 실로 우리국민과 정부, 그리고 '''모든 정치인들이 합심협력하여 평화적인 정부이양을 순조롭게 진행시키고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끝마치게 되면 우리는 전쟁의 공포와 후진의 굴레에서 벗어나 평화와 번영을 구가하는 희망찬 90년대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앞으로 2~3년이야말로 우리가 당당하게 선진국대열에 들어설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동안 더 큰 어려움 속에서도 위대한 저력과 무한한 가능성을 입증해온 우리가 민족사상 처음으로 맞이한 이 소중한 기회를 어떻게 놓칠 수 있겠읍니까.&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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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여러분. 본인은 이제 불과 열달 후면 이 중책을 벗고 청와대를 떠나게 됩니다. 그동안 여러분의 뜨거운 참여와 협조로 본인이 약속했던 바를 실천해 올 수 있었음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면서 끝까지 변함없는 지지와 성원을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국민여러분의 축복 속에 대임을 마무리짓고 여러분과 더불어 기쁨과 괴로움을 나누면서 융성하는 나라의 시민으로서 일상의 행복을 누리고 싶은 소박한 소망 이외에 본인은 지금 아무런 정치적 사심이 없읍니다. 그러한 개인적인 소망이 여러분의 애정과 보살핌 속에서 이루어지는 그 날이 바로 우리 민주주의의 새 아침이 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본인은 거듭 여러분의 협조를 충심으로 기대하는 바입니다. 오늘에 사는 우리 국민 여러분의 성숙한 지혜가 밑거름이 되어 이 땅에 자유민주주의의 꽃이 피고 선진과 통일의 자랑스러운 신화가 반드시 창조될 것을 본인은 확신합니다.&lt;br /&gt;
&lt;br /&gt;
새봄을 맞아 국민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건강과 행복이 깃들이기를 기원합니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아이러니하게도 만약 4.13 호헌조치가 없었더라면 한국의 민주화 시계는 조금 더 뒤로 돌려졌을 것이라는 평가가 있다. 불과 3개월 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라는 큰 이슈가 있었지만 추도 대회를 경찰이 원천 봉쇄하는 등 정권은 이슈 차단에 열심이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국민들의 관심은 줄어들고 있던 와중이었다. 또한 비록 개헌의 방향에 대해 여야 간에 첨예한 대립은 있었지만 제도권내에서 협상이라는 끈을 이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야권 내부에서는 극렬투쟁에 대한 반대 여론도 존재하고 있었다.&lt;br /&gt;
&lt;br /&gt;
이런 상황에서 호헌조치라는 전두환의 '자충수'는 당시 뚜렷한 동력이 없어 고민하던 민주화 운동 세력을 일시에 각성 및 단합시키고 대중운동의 열기를 되살리는 계기가 되었다.&lt;br /&gt;
&lt;br /&gt;
게다가 4.13 호헌조치는 여야 간의 합의를 통해 개헌해야 한다는 미국의 입장과도 정면 배치되는 것이었다. 미국 상원외교위원회가 4.13 조치 재고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키는 등 행정부와 의회 양쪽에서 전방위적으로 전두환 정권에게 압박을 가하게 됐으며 이런 외교적 상황 또한 당시 민주화 세력에게 큰 자신감을 불러일으켰다. 외교문서에 따르면 미국이 호의적으로 나오지 않자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에게 지지를 호소하는 친서를 보냈던 것이다.&lt;br /&gt;
&lt;br /&gt;
이렇듯 만약 호헌조치가 없었더라면 당시 개헌 정국은 세월아 네월아 질질 끌다가 결국 서울올림픽 열기에 휩쓸려 유야무야되고 박종철 열사도 수많은 의문사 중의 하나로 묻혔을지도 모른다. 또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군사정권 자체가 계속 이어져 나갔을지는 모른다고 쳐도 개헌이 유야무야되어서 현재까지도 제5공화국 체제의 8차 개헌 헌법이 유지되었을 수도 있었다.&lt;br /&gt;
&lt;br /&gt;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개헌에 대한 논의를 중단시키기 위한 조치가 오히려 개헌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키는 촉발점이 된 격이라고 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반면 전두환이 애초에 호헌을 하지 않고 순순히 직선제 개헌 조치를 했다면 대한민국 정치는 그나마 차후의 분쟁이 적었을 것이며 전두환 자신도 지금처럼 쓸데없이 공분을 사는 일이 줄어들었겠지만 전두환 입장에서는 5.18 민주화운동 탄압이나 야당 인사 탄압 및 언론통제 등 전두환 퇴임 후 말년이 곱게 지나가기란 이미 불가능한 시기였던 만큼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lt;/div&gt;</summary>
		<author><name>딩잉잉</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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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4.13호헌조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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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0T05:35:3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딩잉잉: /* 개요 */&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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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lt;br /&gt;
[[파일:전두환호헌조치.jpg|270px|섬네일|왼쪽|전 대통령, 특별담화를 통해 `개헌논의 유보` 성명, `현행헌법으로 정부이양`, `대통령 선거 연내 실시` 발표]]&lt;br /&gt;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발표한 담화. '호헌'이란 '현재의 헌(憲)법을 옹호(護)한다'는 뜻으로, '호헌조치'라는 것은 현행 헌법을 바꾸지 않고 계속 유지하겠다는 뜻이다. 전두환은 이 조치를 통해 일체의 개헌 논의를 중단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역풍을 불러일으켜 전국적인 민주화 운동인 6월 항쟁을 점화했다.&lt;br /&gt;
&lt;br /&gt;
1985년 12대 총선에서 신한민주당은 독재 정권의 오만 방해와 갖은 술책에도 불구하고 대도시에서 선전하면서 야당 돌풍을 일으켰다. 이후 대통령 직선제 개헌에 대한 요구가 각계에서 터져 나오면서 신민당은 1000만 개헌 서명운동을 주도하기에 이른다.&lt;br /&gt;
&lt;br /&gt;
이런 범국민적인 직선제 개헌 요구에 못 이겨서 결국 1986년 7월 30일 여당인 민주정의당(이하 민정당)과 야당인 신민당의 합의로 대한민국 국회에 헌법개정특별위원회가 발족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여야의 입장은 팽팽했는데 민정당은 자신들이 주도하던 정권의 연장을 위해 의원내각제 개헌을 주장한 반면 신민당은 국민적인 열망에 따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주장해 합의점이 도통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다.&lt;br /&gt;
&lt;br /&gt;
이런 가운데 1987년 1월 14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벌어지면서 국민들이 전두환 정권의 폭력성에 분노해 민주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여기에 대통령 직선제 개헌에 대한 압박이 더해지자 결국 전두환은 권력 유지에 위험을 느끼고 승부수를 던지며 중대 선언을 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대통령 특별담화문 영상 편집본==&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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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4월 13일 전두환 대통령 특별담화문 전문==&lt;br /&gt;
&lt;br /&gt;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lt;br /&gt;
&lt;br /&gt;
본인은 오늘 국민 여러분께서 그동안 큰 관심을 가져오신 개헌 문제에 관해서 본인이 깊이 생각해온 바를 직접 말씀드리고 국민의 이해와 협조를 구하고자 합니다. 흔히 세월이 빠르다고 합니다만 이제 대통령의 임기를 겨우 10개월 정도 남겨놓고 있는 지금 본인은 새삼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수 없읍니다. 그동안 국민여러분과 함께 땀흘려 이룩한 성취의 보람을 키워가기 위해서는 앞으로 남은 임기 동안에 마무리 지어야 할 국가적 과제가 너무도 크고 지금 우리가 내릴 선택의 결과가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현시기의 중대성과 당면한 정치일정의 촉박함을 생각할때 어떻게든 헌법문제를 매듭짓고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 대다수 국민의 솔직한 바람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다행히 지금 우리는 지난 7년간의 꾸준한 노력이 헛되지 않아 각 분야에서 눈부신 성장과 발전을 이룩하고 있읍니다만, 안타깝게도 지난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우리 정치의 모읍은 국민의 기대수준에 미치지 못한 채 오히려 실망과 좌절감만을 안겨주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모든 국민이 그토록 바라던 합의개헌은 한치의 진전도 이룩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 문제를 놓고 정파간에 심각한 반목과 대립만을 거듭하고 있음은 심히 답답하고 유감스런 일이 아닐수 없읍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합의개헌의 실마리가 풀리기는 커녕 국론이 분열되고 사회혼란이 조성되어 끝내는 평화적 정부이양마저 과연 제대로 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국민의 공통된 우려라고 할 수 있겠읍니다. 본인은 취임이래 지금까지 어떻게 하든지 이 땅에 민주주의의 새로운 전통을 수립하겠다는 신념 아래 평화적인 정부이양을 기필코 실현시키기 위해 있는 노력을 다 기울여 왔읍니다. 평화적 정부이양의 과제는 우리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건국이념으로 받아들인 이후 40년 헌정사에서 한번도 이루어보지 못했으며, 지금까지 그 어떤 집권자나 정당, 그리고 그 어느 정치인도 풀지 못했던 숙제입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민주발전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읍니다. 평화적 정부이양이야말로 우리나라의 진정한 민주발전을 성취하는데 있어 그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과제인 것입니다. 모두 잘 아시다시피 현행헌법은 1인 장기집권의 악순환을 단절하고 민주주의를 정착시켜야한다는 시대적 요청에 따라 헌정사상 처음으로 단임이라는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지금까지의 그 어떤 헌법보다도 완벽하게 평화적 정권교체를 보장하고 있읍니다. 당시의 국민적 여망이 얼마나 간절했던 것인가는 7년 전 개헌국민투표에서 국민 여러분이 보내준 압도적인 지지가 잘 말해주고 있다고 하겠읍니다. 본인은 온 국민의 정치적 결단으로 탄생된 이 헌법을 끝까지 준수하고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대통령으로서 책무를 다하는 것이며 그 내용의 핵심인 단임을 한번 실현해보지도 않은 채 이를 고치는 것을 능사로 알아서는 안 된다고 믿어왔읍니다. 그러나 본인은 1년 전인 작년 4월 30일 3당대표들과 만나 여야가 좋은 헌법안을 합의해서 건의해오면 본인의 재임중에라도 헌법을 고치는 데 반대하지 않겠다고 함으로써 합의개헌의 길을 열어 놓은 바 있읍니다. 이것은 당시 헌법개정 문제를 놓고 여야가 심각하게 대립한 끝에 길거리에서 밀고 당기는 사태까지 벌어지는 상황에서 국가적 혼란과 갈등을 막고 국민적 대화합을 바탕으로 성숙된 민주정치의 기틀을 마련해보자는 본인의 간절한 충정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따라서 본인은 국회에서 대화와 타협을 통해 진지한 합의노력이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하고 인내와 성의를 다해 왔읍니다. 야당이 국회에 헌법개정특별위원회 구성을 요구했을 때 이에 응해준 것도 그렇읍니다만, 특히 그 구성을 여야동수로 한 것은 다수당으로서는 도저히 생각하기 어려운 큰 양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당이 개헌을 하지 않겠다는 종전의 당론을 변경하면서까지 의원내각제 개헌안을 마련해서 내놓은 것도 진정한 타협의 자세를 실천해보인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밖에도 여러차례의 여야 대표회담을 통해 헌법특위의 정상화를 위한 온갖 노력을 기울였을 뿐만 아니라, 기회 있을 때마다 야당의 요구를 적극 수용하여 진지한 협상을 모색해 왔던 것입니다. '''이러한 꾸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야당은 대통령직선제라는 당론만을 고집하면서 지금까지 단 한차례의 양보도 한일이 없읍니다.''' 도대체 소수당이 일체의 타협을 배제하고 어떻게 헌법문제를 해결하며, 또 어떻게 민주주의를 하겠다는 것인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읍니다. 있는 법도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서 헌법만 고치면 하루아침에 민주주의가 다 될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이만저만한 환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과거 여덟차례나 헌법을 고친 우리의 정치사가 여실히 말해주고 있읍니다. 분명히 말씀드립니다만, 본인의 단임 의지가 확고한 이상, 사실 헌법과 관련하여 본인 자신의 개인적인 이해관계란 따로 있을 수 없읍니다. 다만 물러나는 대통령으로서의 헌법은 누구보다도 더 허심탄회하고 공정하게 국가와 민족의 먼 장래를 내다보면서 헌법문제를 볼 수 있는 입장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제도나 장단점은 있게 마련입니다만 '''대통령 직선제는 과거에 우리가 수차례 경험한 바 있어 비교적 익숙한 제도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경험은 결코 자랑스러운 것도 아니고 바람직한 것은 더욱 아니었읍니다. 국민이 원한다는 명분아래 집권연장을 위한 개헌이 여러차례 이루어져 1인 장기집권의 폐해가 누적되었고 결국에는 평화적인 정부교체에 실패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전국적인 과열선거로 테러와 폭력이 난무하고, 감당할 수 없는 선심공세와 막대한 자금살포로 경제파탄의 어려움을 초래하였으며, 더구나 지역감정을 자극하여 나라와 국민을 분열시킨 그 폐단을 우리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읍니다. 특히 지난날 여섯차례의 직선제에 의한 대통령선거가 모두 여당의 승리로 끝나 이 제도는 여당에 유리한 것이라고 평가되어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로 인해 선거가 끝난 후에도 선거결과에 승복하지 않아 그 후유증이 심각하였으며 &amp;quot;전부 아니면 전무&amp;quot;라는 식의 극한투쟁만 되돌이 되었읍니다. 바로 그러한 과오와 위험 때문에 대통령 직선제는 우리의 불행한 헌정사와 더불어 역사 속에 매몰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나라의 급속한 발전과 국민의식의 성숙한 변화가 이루어진 오늘에 와서 이미 지나가 버린 제도를 다시 들고 나오는 것은 역사의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리려는 것이나 다름 없읍니다. 외국의 예를 보더라도 이 지구상에서 170여개국 가운데 약 40개국이 넘는 개발도상국들이 대통령직선제를 채택하고 있지만 평화적 정부교체가 제대로 실천되고 있는 나라는 거의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따라서 이왕 헌법을 고치려면 보다 나은 헌법으로 고치자는 것이 당연한 이치일 것입니다. 나라마다 헌법이나 제도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는 그 나라의 역사적 배경과 문화적 전지(傳紙), 그리고 정치적 상황과 당면한 현실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문제를 참작하여 현행제도에 대한 타협안으로 민정당이 의원내각제를 내놓은 것으로 본인은 이해하고 있읍니다. 이 제도는 오늘날과 같이 다원화된 사회 속에서 각계각층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고 여야가 극한대립이 아닌 국정운영의 동반자로서 공존할 수 있으며, 자율과 개방 속에서 선진국으로 발전하고 있는 시대적 추세에 부응할 수 있다는 점에서 민주발전을 기약할 수 있는 제도라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원내각제는 흔히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불리고 있읍니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본산인 유럽을 비롯해서 선진민주주의 국가의 대부분이 이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입증되고 있으며 과거 우리나라의 정통 야당들이 내각책임제 개헌을 소리높여 주장해 왔던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읍니다.''' 사실 다른나라들의 정치사에서도 집권여당이 스스로 권력구조를 대통령제에서 내각책임제로 바꾸자고 한 실례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입니다.&lt;br /&gt;
&lt;br /&gt;
&lt;br /&gt;
국민 여러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여당이 스스로 내각책임제를 내놓고 있는데도 야당은 이를 한사코 거부해 왔을 뿐만 아니라 최근 극심한 내부의 혼란과 갈등 상태를 보임으로써 합의개헌의 전망을 극히 어둡게 만들고 있읍니다. 그들 스스로의 내부문제조차도 대화와 타협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결국은 파국으로 몰아간 그러한 상대와 더불어 합의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 과연 가능할 것인지 회의를 갖는 국민이 대다수일 것입니다. 오늘의 혼미한 야당의 모읍에 비추어 볼 때 이대로 무작정 기다리기만 하다가는 정치일정의 원만한 진행에 큰 차질이 올 것이라는 사실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읍니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어떻게 하면 한국민주주의의 새로운 장을 여는 평화적 정부이양을 제대로 성사시킬 수 있을지 다함께 생각해 보아야 하겠읍니다. '''여당이 다수표가 있다고 해서 단독으로 개헌안을 강행 통과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됩니다. 개헌은 여당이든 야당이든 일방적으로 밀어 붙여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 그렇게 되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무리가 따르는 일방적인 방식이나 변칙적 방법으로는 본래의 취지를 살리기 어렵다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나라와 사회의 혼란과 갈등을 심화시킬 뿐이며 과거 우리 정치사의 경험과 우리 국민의 성숙한 정치의식에 비추어서도 용납되기 어려운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 모두의 염원을 담은 헌법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터에 나라의 발전을 가로막을 그러한 방식을 무리하게 취할 긴박한 이유도 발견하기 어렵다고 하겠읍니다.&lt;br /&gt;
&lt;br /&gt;
국민 여러분.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민정당이 그동안 합의개헌을 위해 끈질긴 노력을 다해왔으나 이제 합의개헌의 전망은 절망적이고 더 이상 기다릴 시간적 여유도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읍니다. 이와 같은 상황은 특히 단임 약속을 이행하고자 하는 본인의 입장에서 볼 때 실로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읍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정부를 이양하는 정치일정을 순조롭게 추진해야 하고, 또 그러기 위해서는 정치일정의 준거가 될 헌법이 우선 확정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본인은 그 누구보다도 간절히 합의개헌의 성사를 염원하면서 그 결과를 기다려 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까지 그 어떤 결과도 나타나지 않고 있읍니다. 약속을 꼭 이행하고자 하는 본인의 처지에서 시일은 자꾸 흘러만 가는데 약속을 이행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지 않으니 그 안타까움이 어느 정도일까 하는 것은 여러분께서도 충분히 짐작하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우리가 남겨두고 있는 기간은 정부를 이양하기 위한 실질적인 준비 작업을 진행하고 정치 일정을 추진하는 데에도 결코 넉넉한 시간이 아닙니다. '''헌법을 개정하는 데에는 국회에서의 토의 및 결의와 국민투표에만도 수개월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설령 개정이 된다 하더라도 여야의 이해가 크게 엇갈리는 선거법 개정을 비롯하여 수많은 부수 법안을 정비하고 그에 따라 선거를 치러야 하기 때문에 또다시 수개월의 시일이 필요한 것입니다. 새정부의 출범과 관계되는 문제를 시간에 쫓겨 졸속으로 처리하는 것은 그 자체가 시비와 혼란의 원인이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도 실로 무책임한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본인은 얼마 남지 않은 촉박한 임기와 현재의 국가적 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중대한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읍니다. 이제 본인은 임기 중 개헌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현행 헌법에 따라 내년 2월 25일 본인의 임기 만료와 더불어 후임자에게 정부를 이양할 것을 천명하는 바입니다. 이와 함께 본인은 평화적인 정부 이양과 서울 올림픽이라는 양대 국가 대사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서 국론을 분열시키고 국력을 낭비하는 소모적인 개헌 논의를 지양할 것을 선언합니다. 본인의 이 결단은 오늘의 난국을 타개하고 국가 목표를 수행하는 데 현실적으로 최선의 길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서 국민 여러분께서 전폭적인 호응과 신뢰를 보내주실 것을 간곡히 당부하고자 합니다. 두 가지의 국가 대사를 완성한 후에 충분한 시간을 두고 개헌 문제를 다시 생각한다면 나라의 백년대계를 위한 좋은 방안이 발견될 수 있을 것으로 본인은 확신하는 바입니다. 본인은 오늘 여러분에게 밝힌 결단에 따라 앞으로 평화적 정부이양을 위한 정치일정을 신속하게 진행시켜 나가야만 합니다.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와 대통령 선거는 금년안에 공정한 선거관리를 통해 자유경선의 부위기가 보장되는 가운데 차질없이 실시되도록 모든 노력을 다할것입니다. 민주정의당의 후임 대통령 후보는 조속한 시일 내에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인물 중에서 당헌절차와 민주방식에 따라 전당대회에서 선출되도록 할것입니다.&lt;br /&gt;
&lt;br /&gt;
&lt;br /&gt;
국민 여러분. 평화적 정부이양이란 단순히 집권자가 임기를 마치고 물러나는 것만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납니다. 여야 정치인은 물론 모든 국민의 적극적인 동참속에서 그야말로 평화스럽고 축복이 넘치는 분위기 속에서 정권담당임무가 교체되어야 비로소 평화적 정부이양의 참뜻이 실현되는 것임을 우리는 확실하게 꺠달아야 하겠읍니다. 이 지구상의 많은 나라 가운데 선거에 따라 평화적으로 정부를 교체하면서 제대로 민주주의를 하고있는 나라가 이십여개국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에 본인이 헌법을 지키고 물러나는 그 자체로서 우리의 민주주의는 획기적인 이정표를 세우게 된다고 하겠읍니다. 본인이 거듭 강조하고 싶은것은 이 결단의 참뜻은 어떻게 하든지 파국을 막고 어디까지나 정상적인 헌정절차에 따라 명예로운 퇴임을 매듭짓고자 하는 데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질없는 개헌타령에만 골몰하여 불법과 폭력으로 사회혼란을 조성하고 국민생활을 불안하게 하는일이 있다면 본인은 국민생활의 안전과 사회질서의 유지를 위해서 헌법이 대통령에게 부여하고 있는 모든 권한에 따라 단호하게 대처할 것임을 밝혀두는 바입니다.''' 그동안 누차 강조해왔읍니다만 우리는 이 지금 이 순간 민주와 선진과 통일의 영광스러운 역사를 창조하느냐, 아니면 후진과 빈곤의 악순환으로 되돌아갈 것이냐를 판가름하는 막바지 갈림길에 서있읍니다. 이처럼 한 민족의 향방을 가름할 중요한 시기를 더이상 낭비적인 갈등과 대립 그리고 반목으로 허송해서는 결코 안되겠읍니다. 그것은 우리의 내부분열을 심화시키고 국력을 소모시켜 국가의 존립과 국민의 생존권마저 위협하게 될 우려가 크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한 걱정은 최근의 국제정세가 주변 강대국간의 이해관계 변화로 착잡한 양상을 띠기 시작함으로써 더 한층 커지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지난 40년간 우리의 안보를 위협해 온 북한공산집단은 정권교체기의 진통을 그들의 적화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결정적 시기로 오판하고 있으며 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시기한 나머지 갖은 방해책동을 다 하고있는 실정입니다. 이러한 시기에 정치불안과 사회혼란이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 줄 수 있겠읍니까. 그것은 우리국민이 그동안 피땀흘려 쌓아올린 자력성장의 토대마저 파괴해 버릴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날 국제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치열한 무역전쟁 속에서 우리 사회가 불안하고 혼란할 때 수출이나 투자가 잘될 수 없고 경제가 제대로 풀려나갈 수 없읍니다. 우리에게 찾아올 것은 물가고와 실업과 불황과 빈곤과 침체 뿐입니다. 이에 따라 경제후퇴와 국가위기의 악순환이 시작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사회 일각에서는 과격한 좌경세력이 민주화라는 가면 아래 자유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고 불법과 선동으로 공산주의 세상을 세우겠다고 준동하고 있지 않읍니까. 본인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전복하려는 폭력좌경 세력을 엄정하게 다스리고 전환기에 해이해지기 쉬운 사회기강을 업격하게 확립함으로써 국기를 튼튼히 다져 나갈 것입니다.&lt;br /&gt;
&lt;br /&gt;
&lt;br /&gt;
국민 여러분.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이 시기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전환기인 만큼 오늘의 정치와 나라의 모읍 뿐 아니라 내일의 정치와 먼 국가장래를 내다보면서 남은 기간동안 대통령으로서 본인이 해야할 일은 참으로 많다고 생각합니다. 본인이 물려받은 우리 정치사의 유산이 너무도 힘겹고 불행했던 것이기 때문에 다음에 누가 국정을 담당하든 그 후임자와 국민여러분이 더욱 순탄하게 전진할 수 있도록 좋은 전통과 튼튼한 자산을 물려주고 싶은 것이 본인의 꾸밈없는 소망입니다. 본인이 지금 어떤 희생을 무릅쓰고서라도 단임을 준수하여 평화적 정부이양을 실현하려는 참뜻도 도저히 과거의 낡은 정치유산을 그대로 넘겨줄 수는 없다는 데에 있읍니다. 이제 우리의 정치도 나라와 사회의 성장 발전에 부응하는 선진 정치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신념에서 본인은 남은 기간 동안 민주발전의 기반을 더욱 넓히고 사회 안정과 국민 화합을 다지기 위한 조치들을 더욱 과감하게 추진해 나가고자 합니다. 그러한 노력의 하나로 본인은 국민의 정치 참여를 확대하기 위한 지방자치제를 단계적으로 실시해 나갈 계획입니다. 이 문제가 조속히 매듭지어져서 본인의 임기 내에 지방 자치가 시작된다면 민주 발전을 위한 또 하나의 튼튼한 토대가 마련되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본인이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제는 우리의 정치도 시대의 변천과 사회의 발전에 따라 꾸준한 신진대사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낡은 시대의 낡은 사고방식에 젖어 있는 인물에게 발전하는 나라의 장래를 의탁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전환기의 정치를 이끌어나갈 참신하고 유능한 정치 신진들을 광범위하게 포용하고 육성하는 정당의 노력은 매우 필요하다고 하겠읍니다. 우리의 정치가 시대조류에 맞게 올바로 발전해 나가기 위해서는 정치인들과 국민 모두가 의식의 개혁을 통한 정치풍토의 개선에 더욱 많은 정성을 쏟지 않으면 안되겠읍니다. 우리는 이제 굴절된 40년 정치사가 남긴 악순환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할 단계를 맞이하고 있읍니다. 정치세력간의 불신과 적대의식, 대화와 타협을 두려워하는 기이한 정치풍토, 그리고 폭력과 선동으로 국력을 낭비해온 극한투쟁의 후진적 양상은 하루속히 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1인 장기집권의 폐해가 청산되고 있는 이 마당에서 신뢰와 호양, 그리고 인내와 절제는 우리가 나아가야 할 새로운 정치의 모습이자 오늘의 전환기에 국민 모두의 행동지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할 필요도 없이 정치의 목표는 국리민복을 증진시키는데에 있읍니다. 우리의 정치도 이제는 국민의 다양한 욕구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대결을 중시하면서 중요한 국가문제에 당리당략을 초월하여 국민에게 봉사하고 나라를 살찌우는 새로운 전통을 세워나가야 하겠읍니다. 정치인의 사리사욕을 위해 국민에게 불안과 걱정을 주는 정치가 아니라 공익을 위해 정치인 자신의 이익을 희생함으로써 모든 국민에게 믿음과 희망을 주는 성숙한 정치로 발전해 나가야 하겠읍니다. 본인은 오늘의 정치인 모두가 본인의 결단을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고 그 토대위에서 새로운 정치의 앞날을 설계하고 건설하는 데 적극 동참해 줄 것을 기대하고자 합니다. 아울러 국민여러분께서는 안정속의 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민주시민으로서 계도적인 책임을 다해주시기를 당부하는 바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모든 노력이 합쳐져서 착실한 민주발전이 계속될 때 그간 국민여러분의 참여와 협조로 이룩해온 경제와 사회의 성장이 가속화되어 이 땅에는 위대한 새역사의 전환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본인은 굳게 믿고 있읍니다. 실로 우리국민과 정부, 그리고 '''모든 정치인들이 합심협력하여 평화적인 정부이양을 순조롭게 진행시키고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끝마치게 되면 우리는 전쟁의 공포와 후진의 굴레에서 벗어나 평화와 번영을 구가하는 희망찬 90년대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앞으로 2~3년이야말로 우리가 당당하게 선진국대열에 들어설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동안 더 큰 어려움 속에서도 위대한 저력과 무한한 가능성을 입증해온 우리가 민족사상 처음으로 맞이한 이 소중한 기회를 어떻게 놓칠 수 있겠읍니까.&lt;br /&gt;
&lt;br /&gt;
&lt;br /&gt;
국민 여러분. 본인은 이제 불과 열달 후면 이 중책을 벗고 청와대를 떠나게 됩니다. 그동안 여러분의 뜨거운 참여와 협조로 본인이 약속했던 바를 실천해 올 수 있었음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면서 끝까지 변함없는 지지와 성원을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국민여러분의 축복 속에 대임을 마무리짓고 여러분과 더불어 기쁨과 괴로움을 나누면서 융성하는 나라의 시민으로서 일상의 행복을 누리고 싶은 소박한 소망 이외에 본인은 지금 아무런 정치적 사심이 없읍니다. 그러한 개인적인 소망이 여러분의 애정과 보살핌 속에서 이루어지는 그 날이 바로 우리 민주주의의 새 아침이 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본인은 거듭 여러분의 협조를 충심으로 기대하는 바입니다. 오늘에 사는 우리 국민 여러분의 성숙한 지혜가 밑거름이 되어 이 땅에 자유민주주의의 꽃이 피고 선진과 통일의 자랑스러운 신화가 반드시 창조될 것을 본인은 확신합니다.&lt;br /&gt;
&lt;br /&gt;
새봄을 맞아 국민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건강과 행복이 깃들이기를 기원합니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아이러니하게도 만약 4.13 호헌조치가 없었더라면 한국의 민주화 시계는 조금 더 뒤로 돌려졌을 것이라는 평가가 있다. 불과 3개월 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라는 큰 이슈가 있었지만 추도 대회를 경찰이 원천 봉쇄하는 등 정권은 이슈 차단에 열심이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국민들의 관심은 줄어들고 있던 와중이었다. 또한 비록 개헌의 방향에 대해 여야 간에 첨예한 대립은 있었지만 제도권내에서 협상이라는 끈을 이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야권 내부에서는 극렬투쟁에 대한 반대 여론도 존재하고 있었다.&lt;br /&gt;
&lt;br /&gt;
이런 상황에서 호헌조치라는 전두환의 '자충수'는 당시 뚜렷한 동력이 없어 고민하던 민주화 운동 세력을 일시에 각성 및 단합시키고 대중운동의 열기를 되살리는 계기가 되었다.&lt;br /&gt;
&lt;br /&gt;
게다가 4.13 호헌조치는 여야 간의 합의를 통해 개헌해야 한다는 미국의 입장과도 정면 배치되는 것이었다. 미국 상원외교위원회가 4.13 조치 재고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키는 등 행정부와 의회 양쪽에서 전방위적으로 전두환 정권에게 압박을 가하게 됐으며 이런 외교적 상황 또한 당시 민주화 세력에게 큰 자신감을 불러일으켰다. 외교문서에 따르면 미국이 호의적으로 나오지 않자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에게 지지를 호소하는 친서를 보냈던 것이다.&lt;br /&gt;
&lt;br /&gt;
이렇듯 만약 호헌조치가 없었더라면 당시 개헌 정국은 세월아 네월아 질질 끌다가 결국 서울올림픽 열기에 휩쓸려 유야무야되고 박종철 열사도 수많은 의문사 중의 하나로 묻혔을지도 모른다. 또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군사정권 자체가 계속 이어져 나갔을지는 모른다고 쳐도 개헌이 유야무야되어서 현재까지도 제5공화국 체제의 8차 개헌 헌법이 유지되었을 수도 있었다.&lt;br /&gt;
&lt;br /&gt;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개헌에 대한 논의를 중단시키기 위한 조치가 오히려 개헌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키는 촉발점이 된 격이라고 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반면 전두환이 애초에 호헌을 하지 않고 순순히 직선제 개헌 조치를 했다면 대한민국 정치는 그나마 차후의 분쟁이 적었을 것이며 전두환 자신도 지금처럼 쓸데없이 공분을 사는 일이 줄어들었겠지만 전두환 입장에서는 5.18 민주화운동 탄압이나 야당 인사 탄압 및 언론통제 등 전두환 퇴임 후 말년이 곱게 지나가기란 이미 불가능한 시기였던 만큼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lt;/div&gt;</summary>
		<author><name>딩잉잉</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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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4.13호헌조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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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0T05:35:2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딩잉잉: /* 개요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lt;br /&gt;
==개요==&lt;br /&gt;
[[파일:전두환호헌조치.jpg|250px|섬네일|왼쪽|전 대통령, 특별담화를 통해 `개헌논의 유보` 성명, `현행헌법으로 정부이양`, `대통령 선거 연내 실시` 발표]]&lt;br /&gt;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발표한 담화. '호헌'이란 '현재의 헌(憲)법을 옹호(護)한다'는 뜻으로, '호헌조치'라는 것은 현행 헌법을 바꾸지 않고 계속 유지하겠다는 뜻이다. 전두환은 이 조치를 통해 일체의 개헌 논의를 중단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역풍을 불러일으켜 전국적인 민주화 운동인 6월 항쟁을 점화했다.&lt;br /&gt;
&lt;br /&gt;
1985년 12대 총선에서 신한민주당은 독재 정권의 오만 방해와 갖은 술책에도 불구하고 대도시에서 선전하면서 야당 돌풍을 일으켰다. 이후 대통령 직선제 개헌에 대한 요구가 각계에서 터져 나오면서 신민당은 1000만 개헌 서명운동을 주도하기에 이른다.&lt;br /&gt;
&lt;br /&gt;
이런 범국민적인 직선제 개헌 요구에 못 이겨서 결국 1986년 7월 30일 여당인 민주정의당(이하 민정당)과 야당인 신민당의 합의로 대한민국 국회에 헌법개정특별위원회가 발족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여야의 입장은 팽팽했는데 민정당은 자신들이 주도하던 정권의 연장을 위해 의원내각제 개헌을 주장한 반면 신민당은 국민적인 열망에 따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주장해 합의점이 도통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다.&lt;br /&gt;
&lt;br /&gt;
이런 가운데 1987년 1월 14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벌어지면서 국민들이 전두환 정권의 폭력성에 분노해 민주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여기에 대통령 직선제 개헌에 대한 압박이 더해지자 결국 전두환은 권력 유지에 위험을 느끼고 승부수를 던지며 중대 선언을 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대통령 특별담화문 영상 편집본==&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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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대통령 특별담화문 전문==&lt;br /&gt;
&lt;br /&gt;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lt;br /&gt;
&lt;br /&gt;
본인은 오늘 국민 여러분께서 그동안 큰 관심을 가져오신 개헌 문제에 관해서 본인이 깊이 생각해온 바를 직접 말씀드리고 국민의 이해와 협조를 구하고자 합니다. 흔히 세월이 빠르다고 합니다만 이제 대통령의 임기를 겨우 10개월 정도 남겨놓고 있는 지금 본인은 새삼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수 없읍니다. 그동안 국민여러분과 함께 땀흘려 이룩한 성취의 보람을 키워가기 위해서는 앞으로 남은 임기 동안에 마무리 지어야 할 국가적 과제가 너무도 크고 지금 우리가 내릴 선택의 결과가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현시기의 중대성과 당면한 정치일정의 촉박함을 생각할때 어떻게든 헌법문제를 매듭짓고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 대다수 국민의 솔직한 바람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다행히 지금 우리는 지난 7년간의 꾸준한 노력이 헛되지 않아 각 분야에서 눈부신 성장과 발전을 이룩하고 있읍니다만, 안타깝게도 지난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우리 정치의 모읍은 국민의 기대수준에 미치지 못한 채 오히려 실망과 좌절감만을 안겨주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모든 국민이 그토록 바라던 합의개헌은 한치의 진전도 이룩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 문제를 놓고 정파간에 심각한 반목과 대립만을 거듭하고 있음은 심히 답답하고 유감스런 일이 아닐수 없읍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합의개헌의 실마리가 풀리기는 커녕 국론이 분열되고 사회혼란이 조성되어 끝내는 평화적 정부이양마저 과연 제대로 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국민의 공통된 우려라고 할 수 있겠읍니다. 본인은 취임이래 지금까지 어떻게 하든지 이 땅에 민주주의의 새로운 전통을 수립하겠다는 신념 아래 평화적인 정부이양을 기필코 실현시키기 위해 있는 노력을 다 기울여 왔읍니다. 평화적 정부이양의 과제는 우리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건국이념으로 받아들인 이후 40년 헌정사에서 한번도 이루어보지 못했으며, 지금까지 그 어떤 집권자나 정당, 그리고 그 어느 정치인도 풀지 못했던 숙제입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민주발전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읍니다. 평화적 정부이양이야말로 우리나라의 진정한 민주발전을 성취하는데 있어 그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과제인 것입니다. 모두 잘 아시다시피 현행헌법은 1인 장기집권의 악순환을 단절하고 민주주의를 정착시켜야한다는 시대적 요청에 따라 헌정사상 처음으로 단임이라는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지금까지의 그 어떤 헌법보다도 완벽하게 평화적 정권교체를 보장하고 있읍니다. 당시의 국민적 여망이 얼마나 간절했던 것인가는 7년 전 개헌국민투표에서 국민 여러분이 보내준 압도적인 지지가 잘 말해주고 있다고 하겠읍니다. 본인은 온 국민의 정치적 결단으로 탄생된 이 헌법을 끝까지 준수하고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대통령으로서 책무를 다하는 것이며 그 내용의 핵심인 단임을 한번 실현해보지도 않은 채 이를 고치는 것을 능사로 알아서는 안 된다고 믿어왔읍니다. 그러나 본인은 1년 전인 작년 4월 30일 3당대표들과 만나 여야가 좋은 헌법안을 합의해서 건의해오면 본인의 재임중에라도 헌법을 고치는 데 반대하지 않겠다고 함으로써 합의개헌의 길을 열어 놓은 바 있읍니다. 이것은 당시 헌법개정 문제를 놓고 여야가 심각하게 대립한 끝에 길거리에서 밀고 당기는 사태까지 벌어지는 상황에서 국가적 혼란과 갈등을 막고 국민적 대화합을 바탕으로 성숙된 민주정치의 기틀을 마련해보자는 본인의 간절한 충정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따라서 본인은 국회에서 대화와 타협을 통해 진지한 합의노력이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하고 인내와 성의를 다해 왔읍니다. 야당이 국회에 헌법개정특별위원회 구성을 요구했을 때 이에 응해준 것도 그렇읍니다만, 특히 그 구성을 여야동수로 한 것은 다수당으로서는 도저히 생각하기 어려운 큰 양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당이 개헌을 하지 않겠다는 종전의 당론을 변경하면서까지 의원내각제 개헌안을 마련해서 내놓은 것도 진정한 타협의 자세를 실천해보인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밖에도 여러차례의 여야 대표회담을 통해 헌법특위의 정상화를 위한 온갖 노력을 기울였을 뿐만 아니라, 기회 있을 때마다 야당의 요구를 적극 수용하여 진지한 협상을 모색해 왔던 것입니다. '''이러한 꾸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야당은 대통령직선제라는 당론만을 고집하면서 지금까지 단 한차례의 양보도 한일이 없읍니다.''' 도대체 소수당이 일체의 타협을 배제하고 어떻게 헌법문제를 해결하며, 또 어떻게 민주주의를 하겠다는 것인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읍니다. 있는 법도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서 헌법만 고치면 하루아침에 민주주의가 다 될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이만저만한 환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과거 여덟차례나 헌법을 고친 우리의 정치사가 여실히 말해주고 있읍니다. 분명히 말씀드립니다만, 본인의 단임 의지가 확고한 이상, 사실 헌법과 관련하여 본인 자신의 개인적인 이해관계란 따로 있을 수 없읍니다. 다만 물러나는 대통령으로서의 헌법은 누구보다도 더 허심탄회하고 공정하게 국가와 민족의 먼 장래를 내다보면서 헌법문제를 볼 수 있는 입장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제도나 장단점은 있게 마련입니다만 '''대통령 직선제는 과거에 우리가 수차례 경험한 바 있어 비교적 익숙한 제도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경험은 결코 자랑스러운 것도 아니고 바람직한 것은 더욱 아니었읍니다. 국민이 원한다는 명분아래 집권연장을 위한 개헌이 여러차례 이루어져 1인 장기집권의 폐해가 누적되었고 결국에는 평화적인 정부교체에 실패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전국적인 과열선거로 테러와 폭력이 난무하고, 감당할 수 없는 선심공세와 막대한 자금살포로 경제파탄의 어려움을 초래하였으며, 더구나 지역감정을 자극하여 나라와 국민을 분열시킨 그 폐단을 우리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읍니다. 특히 지난날 여섯차례의 직선제에 의한 대통령선거가 모두 여당의 승리로 끝나 이 제도는 여당에 유리한 것이라고 평가되어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로 인해 선거가 끝난 후에도 선거결과에 승복하지 않아 그 후유증이 심각하였으며 &amp;quot;전부 아니면 전무&amp;quot;라는 식의 극한투쟁만 되돌이 되었읍니다. 바로 그러한 과오와 위험 때문에 대통령 직선제는 우리의 불행한 헌정사와 더불어 역사 속에 매몰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나라의 급속한 발전과 국민의식의 성숙한 변화가 이루어진 오늘에 와서 이미 지나가 버린 제도를 다시 들고 나오는 것은 역사의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리려는 것이나 다름 없읍니다. 외국의 예를 보더라도 이 지구상에서 170여개국 가운데 약 40개국이 넘는 개발도상국들이 대통령직선제를 채택하고 있지만 평화적 정부교체가 제대로 실천되고 있는 나라는 거의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따라서 이왕 헌법을 고치려면 보다 나은 헌법으로 고치자는 것이 당연한 이치일 것입니다. 나라마다 헌법이나 제도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는 그 나라의 역사적 배경과 문화적 전지(傳紙), 그리고 정치적 상황과 당면한 현실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문제를 참작하여 현행제도에 대한 타협안으로 민정당이 의원내각제를 내놓은 것으로 본인은 이해하고 있읍니다. 이 제도는 오늘날과 같이 다원화된 사회 속에서 각계각층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고 여야가 극한대립이 아닌 국정운영의 동반자로서 공존할 수 있으며, 자율과 개방 속에서 선진국으로 발전하고 있는 시대적 추세에 부응할 수 있다는 점에서 민주발전을 기약할 수 있는 제도라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원내각제는 흔히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불리고 있읍니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본산인 유럽을 비롯해서 선진민주주의 국가의 대부분이 이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입증되고 있으며 과거 우리나라의 정통 야당들이 내각책임제 개헌을 소리높여 주장해 왔던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읍니다.''' 사실 다른나라들의 정치사에서도 집권여당이 스스로 권력구조를 대통령제에서 내각책임제로 바꾸자고 한 실례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입니다.&lt;br /&gt;
&lt;br /&gt;
&lt;br /&gt;
국민 여러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여당이 스스로 내각책임제를 내놓고 있는데도 야당은 이를 한사코 거부해 왔을 뿐만 아니라 최근 극심한 내부의 혼란과 갈등 상태를 보임으로써 합의개헌의 전망을 극히 어둡게 만들고 있읍니다. 그들 스스로의 내부문제조차도 대화와 타협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결국은 파국으로 몰아간 그러한 상대와 더불어 합의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 과연 가능할 것인지 회의를 갖는 국민이 대다수일 것입니다. 오늘의 혼미한 야당의 모읍에 비추어 볼 때 이대로 무작정 기다리기만 하다가는 정치일정의 원만한 진행에 큰 차질이 올 것이라는 사실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읍니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어떻게 하면 한국민주주의의 새로운 장을 여는 평화적 정부이양을 제대로 성사시킬 수 있을지 다함께 생각해 보아야 하겠읍니다. '''여당이 다수표가 있다고 해서 단독으로 개헌안을 강행 통과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됩니다. 개헌은 여당이든 야당이든 일방적으로 밀어 붙여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 그렇게 되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무리가 따르는 일방적인 방식이나 변칙적 방법으로는 본래의 취지를 살리기 어렵다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나라와 사회의 혼란과 갈등을 심화시킬 뿐이며 과거 우리 정치사의 경험과 우리 국민의 성숙한 정치의식에 비추어서도 용납되기 어려운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 모두의 염원을 담은 헌법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터에 나라의 발전을 가로막을 그러한 방식을 무리하게 취할 긴박한 이유도 발견하기 어렵다고 하겠읍니다.&lt;br /&gt;
&lt;br /&gt;
국민 여러분.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민정당이 그동안 합의개헌을 위해 끈질긴 노력을 다해왔으나 이제 합의개헌의 전망은 절망적이고 더 이상 기다릴 시간적 여유도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읍니다. 이와 같은 상황은 특히 단임 약속을 이행하고자 하는 본인의 입장에서 볼 때 실로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읍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정부를 이양하는 정치일정을 순조롭게 추진해야 하고, 또 그러기 위해서는 정치일정의 준거가 될 헌법이 우선 확정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본인은 그 누구보다도 간절히 합의개헌의 성사를 염원하면서 그 결과를 기다려 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까지 그 어떤 결과도 나타나지 않고 있읍니다. 약속을 꼭 이행하고자 하는 본인의 처지에서 시일은 자꾸 흘러만 가는데 약속을 이행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지 않으니 그 안타까움이 어느 정도일까 하는 것은 여러분께서도 충분히 짐작하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우리가 남겨두고 있는 기간은 정부를 이양하기 위한 실질적인 준비 작업을 진행하고 정치 일정을 추진하는 데에도 결코 넉넉한 시간이 아닙니다. '''헌법을 개정하는 데에는 국회에서의 토의 및 결의와 국민투표에만도 수개월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설령 개정이 된다 하더라도 여야의 이해가 크게 엇갈리는 선거법 개정을 비롯하여 수많은 부수 법안을 정비하고 그에 따라 선거를 치러야 하기 때문에 또다시 수개월의 시일이 필요한 것입니다. 새정부의 출범과 관계되는 문제를 시간에 쫓겨 졸속으로 처리하는 것은 그 자체가 시비와 혼란의 원인이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도 실로 무책임한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본인은 얼마 남지 않은 촉박한 임기와 현재의 국가적 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중대한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읍니다. 이제 본인은 임기 중 개헌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현행 헌법에 따라 내년 2월 25일 본인의 임기 만료와 더불어 후임자에게 정부를 이양할 것을 천명하는 바입니다. 이와 함께 본인은 평화적인 정부 이양과 서울 올림픽이라는 양대 국가 대사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서 국론을 분열시키고 국력을 낭비하는 소모적인 개헌 논의를 지양할 것을 선언합니다. 본인의 이 결단은 오늘의 난국을 타개하고 국가 목표를 수행하는 데 현실적으로 최선의 길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서 국민 여러분께서 전폭적인 호응과 신뢰를 보내주실 것을 간곡히 당부하고자 합니다. 두 가지의 국가 대사를 완성한 후에 충분한 시간을 두고 개헌 문제를 다시 생각한다면 나라의 백년대계를 위한 좋은 방안이 발견될 수 있을 것으로 본인은 확신하는 바입니다. 본인은 오늘 여러분에게 밝힌 결단에 따라 앞으로 평화적 정부이양을 위한 정치일정을 신속하게 진행시켜 나가야만 합니다.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와 대통령 선거는 금년안에 공정한 선거관리를 통해 자유경선의 부위기가 보장되는 가운데 차질없이 실시되도록 모든 노력을 다할것입니다. 민주정의당의 후임 대통령 후보는 조속한 시일 내에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인물 중에서 당헌절차와 민주방식에 따라 전당대회에서 선출되도록 할것입니다.&lt;br /&gt;
&lt;br /&gt;
&lt;br /&gt;
국민 여러분. 평화적 정부이양이란 단순히 집권자가 임기를 마치고 물러나는 것만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납니다. 여야 정치인은 물론 모든 국민의 적극적인 동참속에서 그야말로 평화스럽고 축복이 넘치는 분위기 속에서 정권담당임무가 교체되어야 비로소 평화적 정부이양의 참뜻이 실현되는 것임을 우리는 확실하게 꺠달아야 하겠읍니다. 이 지구상의 많은 나라 가운데 선거에 따라 평화적으로 정부를 교체하면서 제대로 민주주의를 하고있는 나라가 이십여개국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에 본인이 헌법을 지키고 물러나는 그 자체로서 우리의 민주주의는 획기적인 이정표를 세우게 된다고 하겠읍니다. 본인이 거듭 강조하고 싶은것은 이 결단의 참뜻은 어떻게 하든지 파국을 막고 어디까지나 정상적인 헌정절차에 따라 명예로운 퇴임을 매듭짓고자 하는 데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질없는 개헌타령에만 골몰하여 불법과 폭력으로 사회혼란을 조성하고 국민생활을 불안하게 하는일이 있다면 본인은 국민생활의 안전과 사회질서의 유지를 위해서 헌법이 대통령에게 부여하고 있는 모든 권한에 따라 단호하게 대처할 것임을 밝혀두는 바입니다.''' 그동안 누차 강조해왔읍니다만 우리는 이 지금 이 순간 민주와 선진과 통일의 영광스러운 역사를 창조하느냐, 아니면 후진과 빈곤의 악순환으로 되돌아갈 것이냐를 판가름하는 막바지 갈림길에 서있읍니다. 이처럼 한 민족의 향방을 가름할 중요한 시기를 더이상 낭비적인 갈등과 대립 그리고 반목으로 허송해서는 결코 안되겠읍니다. 그것은 우리의 내부분열을 심화시키고 국력을 소모시켜 국가의 존립과 국민의 생존권마저 위협하게 될 우려가 크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한 걱정은 최근의 국제정세가 주변 강대국간의 이해관계 변화로 착잡한 양상을 띠기 시작함으로써 더 한층 커지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지난 40년간 우리의 안보를 위협해 온 북한공산집단은 정권교체기의 진통을 그들의 적화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결정적 시기로 오판하고 있으며 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시기한 나머지 갖은 방해책동을 다 하고있는 실정입니다. 이러한 시기에 정치불안과 사회혼란이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 줄 수 있겠읍니까. 그것은 우리국민이 그동안 피땀흘려 쌓아올린 자력성장의 토대마저 파괴해 버릴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날 국제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치열한 무역전쟁 속에서 우리 사회가 불안하고 혼란할 때 수출이나 투자가 잘될 수 없고 경제가 제대로 풀려나갈 수 없읍니다. 우리에게 찾아올 것은 물가고와 실업과 불황과 빈곤과 침체 뿐입니다. 이에 따라 경제후퇴와 국가위기의 악순환이 시작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사회 일각에서는 과격한 좌경세력이 민주화라는 가면 아래 자유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고 불법과 선동으로 공산주의 세상을 세우겠다고 준동하고 있지 않읍니까. 본인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전복하려는 폭력좌경 세력을 엄정하게 다스리고 전환기에 해이해지기 쉬운 사회기강을 업격하게 확립함으로써 국기를 튼튼히 다져 나갈 것입니다.&lt;br /&gt;
&lt;br /&gt;
&lt;br /&gt;
국민 여러분.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이 시기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전환기인 만큼 오늘의 정치와 나라의 모읍 뿐 아니라 내일의 정치와 먼 국가장래를 내다보면서 남은 기간동안 대통령으로서 본인이 해야할 일은 참으로 많다고 생각합니다. 본인이 물려받은 우리 정치사의 유산이 너무도 힘겹고 불행했던 것이기 때문에 다음에 누가 국정을 담당하든 그 후임자와 국민여러분이 더욱 순탄하게 전진할 수 있도록 좋은 전통과 튼튼한 자산을 물려주고 싶은 것이 본인의 꾸밈없는 소망입니다. 본인이 지금 어떤 희생을 무릅쓰고서라도 단임을 준수하여 평화적 정부이양을 실현하려는 참뜻도 도저히 과거의 낡은 정치유산을 그대로 넘겨줄 수는 없다는 데에 있읍니다. 이제 우리의 정치도 나라와 사회의 성장 발전에 부응하는 선진 정치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신념에서 본인은 남은 기간 동안 민주발전의 기반을 더욱 넓히고 사회 안정과 국민 화합을 다지기 위한 조치들을 더욱 과감하게 추진해 나가고자 합니다. 그러한 노력의 하나로 본인은 국민의 정치 참여를 확대하기 위한 지방자치제를 단계적으로 실시해 나갈 계획입니다. 이 문제가 조속히 매듭지어져서 본인의 임기 내에 지방 자치가 시작된다면 민주 발전을 위한 또 하나의 튼튼한 토대가 마련되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본인이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제는 우리의 정치도 시대의 변천과 사회의 발전에 따라 꾸준한 신진대사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낡은 시대의 낡은 사고방식에 젖어 있는 인물에게 발전하는 나라의 장래를 의탁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전환기의 정치를 이끌어나갈 참신하고 유능한 정치 신진들을 광범위하게 포용하고 육성하는 정당의 노력은 매우 필요하다고 하겠읍니다. 우리의 정치가 시대조류에 맞게 올바로 발전해 나가기 위해서는 정치인들과 국민 모두가 의식의 개혁을 통한 정치풍토의 개선에 더욱 많은 정성을 쏟지 않으면 안되겠읍니다. 우리는 이제 굴절된 40년 정치사가 남긴 악순환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할 단계를 맞이하고 있읍니다. 정치세력간의 불신과 적대의식, 대화와 타협을 두려워하는 기이한 정치풍토, 그리고 폭력과 선동으로 국력을 낭비해온 극한투쟁의 후진적 양상은 하루속히 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1인 장기집권의 폐해가 청산되고 있는 이 마당에서 신뢰와 호양, 그리고 인내와 절제는 우리가 나아가야 할 새로운 정치의 모습이자 오늘의 전환기에 국민 모두의 행동지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할 필요도 없이 정치의 목표는 국리민복을 증진시키는데에 있읍니다. 우리의 정치도 이제는 국민의 다양한 욕구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대결을 중시하면서 중요한 국가문제에 당리당략을 초월하여 국민에게 봉사하고 나라를 살찌우는 새로운 전통을 세워나가야 하겠읍니다. 정치인의 사리사욕을 위해 국민에게 불안과 걱정을 주는 정치가 아니라 공익을 위해 정치인 자신의 이익을 희생함으로써 모든 국민에게 믿음과 희망을 주는 성숙한 정치로 발전해 나가야 하겠읍니다. 본인은 오늘의 정치인 모두가 본인의 결단을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고 그 토대위에서 새로운 정치의 앞날을 설계하고 건설하는 데 적극 동참해 줄 것을 기대하고자 합니다. 아울러 국민여러분께서는 안정속의 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민주시민으로서 계도적인 책임을 다해주시기를 당부하는 바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모든 노력이 합쳐져서 착실한 민주발전이 계속될 때 그간 국민여러분의 참여와 협조로 이룩해온 경제와 사회의 성장이 가속화되어 이 땅에는 위대한 새역사의 전환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본인은 굳게 믿고 있읍니다. 실로 우리국민과 정부, 그리고 '''모든 정치인들이 합심협력하여 평화적인 정부이양을 순조롭게 진행시키고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끝마치게 되면 우리는 전쟁의 공포와 후진의 굴레에서 벗어나 평화와 번영을 구가하는 희망찬 90년대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앞으로 2~3년이야말로 우리가 당당하게 선진국대열에 들어설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동안 더 큰 어려움 속에서도 위대한 저력과 무한한 가능성을 입증해온 우리가 민족사상 처음으로 맞이한 이 소중한 기회를 어떻게 놓칠 수 있겠읍니까.&lt;br /&gt;
&lt;br /&gt;
&lt;br /&gt;
국민 여러분. 본인은 이제 불과 열달 후면 이 중책을 벗고 청와대를 떠나게 됩니다. 그동안 여러분의 뜨거운 참여와 협조로 본인이 약속했던 바를 실천해 올 수 있었음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면서 끝까지 변함없는 지지와 성원을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국민여러분의 축복 속에 대임을 마무리짓고 여러분과 더불어 기쁨과 괴로움을 나누면서 융성하는 나라의 시민으로서 일상의 행복을 누리고 싶은 소박한 소망 이외에 본인은 지금 아무런 정치적 사심이 없읍니다. 그러한 개인적인 소망이 여러분의 애정과 보살핌 속에서 이루어지는 그 날이 바로 우리 민주주의의 새 아침이 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본인은 거듭 여러분의 협조를 충심으로 기대하는 바입니다. 오늘에 사는 우리 국민 여러분의 성숙한 지혜가 밑거름이 되어 이 땅에 자유민주주의의 꽃이 피고 선진과 통일의 자랑스러운 신화가 반드시 창조될 것을 본인은 확신합니다.&lt;br /&gt;
&lt;br /&gt;
새봄을 맞아 국민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건강과 행복이 깃들이기를 기원합니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아이러니하게도 만약 4.13 호헌조치가 없었더라면 한국의 민주화 시계는 조금 더 뒤로 돌려졌을 것이라는 평가가 있다. 불과 3개월 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라는 큰 이슈가 있었지만 추도 대회를 경찰이 원천 봉쇄하는 등 정권은 이슈 차단에 열심이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국민들의 관심은 줄어들고 있던 와중이었다. 또한 비록 개헌의 방향에 대해 여야 간에 첨예한 대립은 있었지만 제도권내에서 협상이라는 끈을 이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야권 내부에서는 극렬투쟁에 대한 반대 여론도 존재하고 있었다.&lt;br /&gt;
&lt;br /&gt;
이런 상황에서 호헌조치라는 전두환의 '자충수'는 당시 뚜렷한 동력이 없어 고민하던 민주화 운동 세력을 일시에 각성 및 단합시키고 대중운동의 열기를 되살리는 계기가 되었다.&lt;br /&gt;
&lt;br /&gt;
게다가 4.13 호헌조치는 여야 간의 합의를 통해 개헌해야 한다는 미국의 입장과도 정면 배치되는 것이었다. 미국 상원외교위원회가 4.13 조치 재고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키는 등 행정부와 의회 양쪽에서 전방위적으로 전두환 정권에게 압박을 가하게 됐으며 이런 외교적 상황 또한 당시 민주화 세력에게 큰 자신감을 불러일으켰다. 외교문서에 따르면 미국이 호의적으로 나오지 않자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에게 지지를 호소하는 친서를 보냈던 것이다.&lt;br /&gt;
&lt;br /&gt;
이렇듯 만약 호헌조치가 없었더라면 당시 개헌 정국은 세월아 네월아 질질 끌다가 결국 서울올림픽 열기에 휩쓸려 유야무야되고 박종철 열사도 수많은 의문사 중의 하나로 묻혔을지도 모른다. 또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군사정권 자체가 계속 이어져 나갔을지는 모른다고 쳐도 개헌이 유야무야되어서 현재까지도 제5공화국 체제의 8차 개헌 헌법이 유지되었을 수도 있었다.&lt;br /&gt;
&lt;br /&gt;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개헌에 대한 논의를 중단시키기 위한 조치가 오히려 개헌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키는 촉발점이 된 격이라고 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반면 전두환이 애초에 호헌을 하지 않고 순순히 직선제 개헌 조치를 했다면 대한민국 정치는 그나마 차후의 분쟁이 적었을 것이며 전두환 자신도 지금처럼 쓸데없이 공분을 사는 일이 줄어들었겠지만 전두환 입장에서는 5.18 민주화운동 탄압이나 야당 인사 탄압 및 언론통제 등 전두환 퇴임 후 말년이 곱게 지나가기란 이미 불가능한 시기였던 만큼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lt;/div&gt;</summary>
		<author><name>딩잉잉</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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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4.13호헌조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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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12-10T05:35:1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딩잉잉: /* 개요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lt;br /&gt;
==개요==&lt;br /&gt;
[[파일:전두환호헌조치.jpg|270px|섬네일|왼쪽|전 대통령, 특별담화를 통해 `개헌논의 유보` 성명, `현행헌법으로 정부이양`, `대통령 선거 연내 실시` 발표]]&lt;br /&gt;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발표한 담화. '호헌'이란 '현재의 헌(憲)법을 옹호(護)한다'는 뜻으로, '호헌조치'라는 것은 현행 헌법을 바꾸지 않고 계속 유지하겠다는 뜻이다. 전두환은 이 조치를 통해 일체의 개헌 논의를 중단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역풍을 불러일으켜 전국적인 민주화 운동인 6월 항쟁을 점화했다.&lt;br /&gt;
&lt;br /&gt;
1985년 12대 총선에서 신한민주당은 독재 정권의 오만 방해와 갖은 술책에도 불구하고 대도시에서 선전하면서 야당 돌풍을 일으켰다. 이후 대통령 직선제 개헌에 대한 요구가 각계에서 터져 나오면서 신민당은 1000만 개헌 서명운동을 주도하기에 이른다.&lt;br /&gt;
&lt;br /&gt;
이런 범국민적인 직선제 개헌 요구에 못 이겨서 결국 1986년 7월 30일 여당인 민주정의당(이하 민정당)과 야당인 신민당의 합의로 대한민국 국회에 헌법개정특별위원회가 발족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여야의 입장은 팽팽했는데 민정당은 자신들이 주도하던 정권의 연장을 위해 의원내각제 개헌을 주장한 반면 신민당은 국민적인 열망에 따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주장해 합의점이 도통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다.&lt;br /&gt;
&lt;br /&gt;
이런 가운데 1987년 1월 14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벌어지면서 국민들이 전두환 정권의 폭력성에 분노해 민주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여기에 대통령 직선제 개헌에 대한 압박이 더해지자 결국 전두환은 권력 유지에 위험을 느끼고 승부수를 던지며 중대 선언을 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대통령 특별담화문 영상 편집본==&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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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대통령 특별담화문 전문==&lt;br /&gt;
&lt;br /&gt;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lt;br /&gt;
&lt;br /&gt;
본인은 오늘 국민 여러분께서 그동안 큰 관심을 가져오신 개헌 문제에 관해서 본인이 깊이 생각해온 바를 직접 말씀드리고 국민의 이해와 협조를 구하고자 합니다. 흔히 세월이 빠르다고 합니다만 이제 대통령의 임기를 겨우 10개월 정도 남겨놓고 있는 지금 본인은 새삼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수 없읍니다. 그동안 국민여러분과 함께 땀흘려 이룩한 성취의 보람을 키워가기 위해서는 앞으로 남은 임기 동안에 마무리 지어야 할 국가적 과제가 너무도 크고 지금 우리가 내릴 선택의 결과가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현시기의 중대성과 당면한 정치일정의 촉박함을 생각할때 어떻게든 헌법문제를 매듭짓고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 대다수 국민의 솔직한 바람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다행히 지금 우리는 지난 7년간의 꾸준한 노력이 헛되지 않아 각 분야에서 눈부신 성장과 발전을 이룩하고 있읍니다만, 안타깝게도 지난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우리 정치의 모읍은 국민의 기대수준에 미치지 못한 채 오히려 실망과 좌절감만을 안겨주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모든 국민이 그토록 바라던 합의개헌은 한치의 진전도 이룩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 문제를 놓고 정파간에 심각한 반목과 대립만을 거듭하고 있음은 심히 답답하고 유감스런 일이 아닐수 없읍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합의개헌의 실마리가 풀리기는 커녕 국론이 분열되고 사회혼란이 조성되어 끝내는 평화적 정부이양마저 과연 제대로 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국민의 공통된 우려라고 할 수 있겠읍니다. 본인은 취임이래 지금까지 어떻게 하든지 이 땅에 민주주의의 새로운 전통을 수립하겠다는 신념 아래 평화적인 정부이양을 기필코 실현시키기 위해 있는 노력을 다 기울여 왔읍니다. 평화적 정부이양의 과제는 우리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건국이념으로 받아들인 이후 40년 헌정사에서 한번도 이루어보지 못했으며, 지금까지 그 어떤 집권자나 정당, 그리고 그 어느 정치인도 풀지 못했던 숙제입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민주발전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읍니다. 평화적 정부이양이야말로 우리나라의 진정한 민주발전을 성취하는데 있어 그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과제인 것입니다. 모두 잘 아시다시피 현행헌법은 1인 장기집권의 악순환을 단절하고 민주주의를 정착시켜야한다는 시대적 요청에 따라 헌정사상 처음으로 단임이라는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지금까지의 그 어떤 헌법보다도 완벽하게 평화적 정권교체를 보장하고 있읍니다. 당시의 국민적 여망이 얼마나 간절했던 것인가는 7년 전 개헌국민투표에서 국민 여러분이 보내준 압도적인 지지가 잘 말해주고 있다고 하겠읍니다. 본인은 온 국민의 정치적 결단으로 탄생된 이 헌법을 끝까지 준수하고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대통령으로서 책무를 다하는 것이며 그 내용의 핵심인 단임을 한번 실현해보지도 않은 채 이를 고치는 것을 능사로 알아서는 안 된다고 믿어왔읍니다. 그러나 본인은 1년 전인 작년 4월 30일 3당대표들과 만나 여야가 좋은 헌법안을 합의해서 건의해오면 본인의 재임중에라도 헌법을 고치는 데 반대하지 않겠다고 함으로써 합의개헌의 길을 열어 놓은 바 있읍니다. 이것은 당시 헌법개정 문제를 놓고 여야가 심각하게 대립한 끝에 길거리에서 밀고 당기는 사태까지 벌어지는 상황에서 국가적 혼란과 갈등을 막고 국민적 대화합을 바탕으로 성숙된 민주정치의 기틀을 마련해보자는 본인의 간절한 충정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따라서 본인은 국회에서 대화와 타협을 통해 진지한 합의노력이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하고 인내와 성의를 다해 왔읍니다. 야당이 국회에 헌법개정특별위원회 구성을 요구했을 때 이에 응해준 것도 그렇읍니다만, 특히 그 구성을 여야동수로 한 것은 다수당으로서는 도저히 생각하기 어려운 큰 양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당이 개헌을 하지 않겠다는 종전의 당론을 변경하면서까지 의원내각제 개헌안을 마련해서 내놓은 것도 진정한 타협의 자세를 실천해보인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밖에도 여러차례의 여야 대표회담을 통해 헌법특위의 정상화를 위한 온갖 노력을 기울였을 뿐만 아니라, 기회 있을 때마다 야당의 요구를 적극 수용하여 진지한 협상을 모색해 왔던 것입니다. '''이러한 꾸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야당은 대통령직선제라는 당론만을 고집하면서 지금까지 단 한차례의 양보도 한일이 없읍니다.''' 도대체 소수당이 일체의 타협을 배제하고 어떻게 헌법문제를 해결하며, 또 어떻게 민주주의를 하겠다는 것인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읍니다. 있는 법도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서 헌법만 고치면 하루아침에 민주주의가 다 될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이만저만한 환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과거 여덟차례나 헌법을 고친 우리의 정치사가 여실히 말해주고 있읍니다. 분명히 말씀드립니다만, 본인의 단임 의지가 확고한 이상, 사실 헌법과 관련하여 본인 자신의 개인적인 이해관계란 따로 있을 수 없읍니다. 다만 물러나는 대통령으로서의 헌법은 누구보다도 더 허심탄회하고 공정하게 국가와 민족의 먼 장래를 내다보면서 헌법문제를 볼 수 있는 입장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제도나 장단점은 있게 마련입니다만 '''대통령 직선제는 과거에 우리가 수차례 경험한 바 있어 비교적 익숙한 제도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경험은 결코 자랑스러운 것도 아니고 바람직한 것은 더욱 아니었읍니다. 국민이 원한다는 명분아래 집권연장을 위한 개헌이 여러차례 이루어져 1인 장기집권의 폐해가 누적되었고 결국에는 평화적인 정부교체에 실패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전국적인 과열선거로 테러와 폭력이 난무하고, 감당할 수 없는 선심공세와 막대한 자금살포로 경제파탄의 어려움을 초래하였으며, 더구나 지역감정을 자극하여 나라와 국민을 분열시킨 그 폐단을 우리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읍니다. 특히 지난날 여섯차례의 직선제에 의한 대통령선거가 모두 여당의 승리로 끝나 이 제도는 여당에 유리한 것이라고 평가되어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로 인해 선거가 끝난 후에도 선거결과에 승복하지 않아 그 후유증이 심각하였으며 &amp;quot;전부 아니면 전무&amp;quot;라는 식의 극한투쟁만 되돌이 되었읍니다. 바로 그러한 과오와 위험 때문에 대통령 직선제는 우리의 불행한 헌정사와 더불어 역사 속에 매몰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나라의 급속한 발전과 국민의식의 성숙한 변화가 이루어진 오늘에 와서 이미 지나가 버린 제도를 다시 들고 나오는 것은 역사의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리려는 것이나 다름 없읍니다. 외국의 예를 보더라도 이 지구상에서 170여개국 가운데 약 40개국이 넘는 개발도상국들이 대통령직선제를 채택하고 있지만 평화적 정부교체가 제대로 실천되고 있는 나라는 거의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따라서 이왕 헌법을 고치려면 보다 나은 헌법으로 고치자는 것이 당연한 이치일 것입니다. 나라마다 헌법이나 제도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는 그 나라의 역사적 배경과 문화적 전지(傳紙), 그리고 정치적 상황과 당면한 현실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문제를 참작하여 현행제도에 대한 타협안으로 민정당이 의원내각제를 내놓은 것으로 본인은 이해하고 있읍니다. 이 제도는 오늘날과 같이 다원화된 사회 속에서 각계각층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고 여야가 극한대립이 아닌 국정운영의 동반자로서 공존할 수 있으며, 자율과 개방 속에서 선진국으로 발전하고 있는 시대적 추세에 부응할 수 있다는 점에서 민주발전을 기약할 수 있는 제도라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원내각제는 흔히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불리고 있읍니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본산인 유럽을 비롯해서 선진민주주의 국가의 대부분이 이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입증되고 있으며 과거 우리나라의 정통 야당들이 내각책임제 개헌을 소리높여 주장해 왔던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읍니다.''' 사실 다른나라들의 정치사에서도 집권여당이 스스로 권력구조를 대통령제에서 내각책임제로 바꾸자고 한 실례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입니다.&lt;br /&gt;
&lt;br /&gt;
&lt;br /&gt;
국민 여러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여당이 스스로 내각책임제를 내놓고 있는데도 야당은 이를 한사코 거부해 왔을 뿐만 아니라 최근 극심한 내부의 혼란과 갈등 상태를 보임으로써 합의개헌의 전망을 극히 어둡게 만들고 있읍니다. 그들 스스로의 내부문제조차도 대화와 타협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결국은 파국으로 몰아간 그러한 상대와 더불어 합의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 과연 가능할 것인지 회의를 갖는 국민이 대다수일 것입니다. 오늘의 혼미한 야당의 모읍에 비추어 볼 때 이대로 무작정 기다리기만 하다가는 정치일정의 원만한 진행에 큰 차질이 올 것이라는 사실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읍니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어떻게 하면 한국민주주의의 새로운 장을 여는 평화적 정부이양을 제대로 성사시킬 수 있을지 다함께 생각해 보아야 하겠읍니다. '''여당이 다수표가 있다고 해서 단독으로 개헌안을 강행 통과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됩니다. 개헌은 여당이든 야당이든 일방적으로 밀어 붙여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 그렇게 되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무리가 따르는 일방적인 방식이나 변칙적 방법으로는 본래의 취지를 살리기 어렵다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나라와 사회의 혼란과 갈등을 심화시킬 뿐이며 과거 우리 정치사의 경험과 우리 국민의 성숙한 정치의식에 비추어서도 용납되기 어려운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 모두의 염원을 담은 헌법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터에 나라의 발전을 가로막을 그러한 방식을 무리하게 취할 긴박한 이유도 발견하기 어렵다고 하겠읍니다.&lt;br /&gt;
&lt;br /&gt;
국민 여러분.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민정당이 그동안 합의개헌을 위해 끈질긴 노력을 다해왔으나 이제 합의개헌의 전망은 절망적이고 더 이상 기다릴 시간적 여유도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읍니다. 이와 같은 상황은 특히 단임 약속을 이행하고자 하는 본인의 입장에서 볼 때 실로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읍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정부를 이양하는 정치일정을 순조롭게 추진해야 하고, 또 그러기 위해서는 정치일정의 준거가 될 헌법이 우선 확정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본인은 그 누구보다도 간절히 합의개헌의 성사를 염원하면서 그 결과를 기다려 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까지 그 어떤 결과도 나타나지 않고 있읍니다. 약속을 꼭 이행하고자 하는 본인의 처지에서 시일은 자꾸 흘러만 가는데 약속을 이행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지 않으니 그 안타까움이 어느 정도일까 하는 것은 여러분께서도 충분히 짐작하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우리가 남겨두고 있는 기간은 정부를 이양하기 위한 실질적인 준비 작업을 진행하고 정치 일정을 추진하는 데에도 결코 넉넉한 시간이 아닙니다. '''헌법을 개정하는 데에는 국회에서의 토의 및 결의와 국민투표에만도 수개월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설령 개정이 된다 하더라도 여야의 이해가 크게 엇갈리는 선거법 개정을 비롯하여 수많은 부수 법안을 정비하고 그에 따라 선거를 치러야 하기 때문에 또다시 수개월의 시일이 필요한 것입니다. 새정부의 출범과 관계되는 문제를 시간에 쫓겨 졸속으로 처리하는 것은 그 자체가 시비와 혼란의 원인이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도 실로 무책임한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본인은 얼마 남지 않은 촉박한 임기와 현재의 국가적 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중대한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읍니다. 이제 본인은 임기 중 개헌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현행 헌법에 따라 내년 2월 25일 본인의 임기 만료와 더불어 후임자에게 정부를 이양할 것을 천명하는 바입니다. 이와 함께 본인은 평화적인 정부 이양과 서울 올림픽이라는 양대 국가 대사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서 국론을 분열시키고 국력을 낭비하는 소모적인 개헌 논의를 지양할 것을 선언합니다. 본인의 이 결단은 오늘의 난국을 타개하고 국가 목표를 수행하는 데 현실적으로 최선의 길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서 국민 여러분께서 전폭적인 호응과 신뢰를 보내주실 것을 간곡히 당부하고자 합니다. 두 가지의 국가 대사를 완성한 후에 충분한 시간을 두고 개헌 문제를 다시 생각한다면 나라의 백년대계를 위한 좋은 방안이 발견될 수 있을 것으로 본인은 확신하는 바입니다. 본인은 오늘 여러분에게 밝힌 결단에 따라 앞으로 평화적 정부이양을 위한 정치일정을 신속하게 진행시켜 나가야만 합니다.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와 대통령 선거는 금년안에 공정한 선거관리를 통해 자유경선의 부위기가 보장되는 가운데 차질없이 실시되도록 모든 노력을 다할것입니다. 민주정의당의 후임 대통령 후보는 조속한 시일 내에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인물 중에서 당헌절차와 민주방식에 따라 전당대회에서 선출되도록 할것입니다.&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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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국민 여러분. 평화적 정부이양이란 단순히 집권자가 임기를 마치고 물러나는 것만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납니다. 여야 정치인은 물론 모든 국민의 적극적인 동참속에서 그야말로 평화스럽고 축복이 넘치는 분위기 속에서 정권담당임무가 교체되어야 비로소 평화적 정부이양의 참뜻이 실현되는 것임을 우리는 확실하게 꺠달아야 하겠읍니다. 이 지구상의 많은 나라 가운데 선거에 따라 평화적으로 정부를 교체하면서 제대로 민주주의를 하고있는 나라가 이십여개국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에 본인이 헌법을 지키고 물러나는 그 자체로서 우리의 민주주의는 획기적인 이정표를 세우게 된다고 하겠읍니다. 본인이 거듭 강조하고 싶은것은 이 결단의 참뜻은 어떻게 하든지 파국을 막고 어디까지나 정상적인 헌정절차에 따라 명예로운 퇴임을 매듭짓고자 하는 데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질없는 개헌타령에만 골몰하여 불법과 폭력으로 사회혼란을 조성하고 국민생활을 불안하게 하는일이 있다면 본인은 국민생활의 안전과 사회질서의 유지를 위해서 헌법이 대통령에게 부여하고 있는 모든 권한에 따라 단호하게 대처할 것임을 밝혀두는 바입니다.''' 그동안 누차 강조해왔읍니다만 우리는 이 지금 이 순간 민주와 선진과 통일의 영광스러운 역사를 창조하느냐, 아니면 후진과 빈곤의 악순환으로 되돌아갈 것이냐를 판가름하는 막바지 갈림길에 서있읍니다. 이처럼 한 민족의 향방을 가름할 중요한 시기를 더이상 낭비적인 갈등과 대립 그리고 반목으로 허송해서는 결코 안되겠읍니다. 그것은 우리의 내부분열을 심화시키고 국력을 소모시켜 국가의 존립과 국민의 생존권마저 위협하게 될 우려가 크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한 걱정은 최근의 국제정세가 주변 강대국간의 이해관계 변화로 착잡한 양상을 띠기 시작함으로써 더 한층 커지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지난 40년간 우리의 안보를 위협해 온 북한공산집단은 정권교체기의 진통을 그들의 적화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결정적 시기로 오판하고 있으며 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시기한 나머지 갖은 방해책동을 다 하고있는 실정입니다. 이러한 시기에 정치불안과 사회혼란이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 줄 수 있겠읍니까. 그것은 우리국민이 그동안 피땀흘려 쌓아올린 자력성장의 토대마저 파괴해 버릴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날 국제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치열한 무역전쟁 속에서 우리 사회가 불안하고 혼란할 때 수출이나 투자가 잘될 수 없고 경제가 제대로 풀려나갈 수 없읍니다. 우리에게 찾아올 것은 물가고와 실업과 불황과 빈곤과 침체 뿐입니다. 이에 따라 경제후퇴와 국가위기의 악순환이 시작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사회 일각에서는 과격한 좌경세력이 민주화라는 가면 아래 자유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고 불법과 선동으로 공산주의 세상을 세우겠다고 준동하고 있지 않읍니까. 본인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전복하려는 폭력좌경 세력을 엄정하게 다스리고 전환기에 해이해지기 쉬운 사회기강을 업격하게 확립함으로써 국기를 튼튼히 다져 나갈 것입니다.&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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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여러분.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이 시기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전환기인 만큼 오늘의 정치와 나라의 모읍 뿐 아니라 내일의 정치와 먼 국가장래를 내다보면서 남은 기간동안 대통령으로서 본인이 해야할 일은 참으로 많다고 생각합니다. 본인이 물려받은 우리 정치사의 유산이 너무도 힘겹고 불행했던 것이기 때문에 다음에 누가 국정을 담당하든 그 후임자와 국민여러분이 더욱 순탄하게 전진할 수 있도록 좋은 전통과 튼튼한 자산을 물려주고 싶은 것이 본인의 꾸밈없는 소망입니다. 본인이 지금 어떤 희생을 무릅쓰고서라도 단임을 준수하여 평화적 정부이양을 실현하려는 참뜻도 도저히 과거의 낡은 정치유산을 그대로 넘겨줄 수는 없다는 데에 있읍니다. 이제 우리의 정치도 나라와 사회의 성장 발전에 부응하는 선진 정치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신념에서 본인은 남은 기간 동안 민주발전의 기반을 더욱 넓히고 사회 안정과 국민 화합을 다지기 위한 조치들을 더욱 과감하게 추진해 나가고자 합니다. 그러한 노력의 하나로 본인은 국민의 정치 참여를 확대하기 위한 지방자치제를 단계적으로 실시해 나갈 계획입니다. 이 문제가 조속히 매듭지어져서 본인의 임기 내에 지방 자치가 시작된다면 민주 발전을 위한 또 하나의 튼튼한 토대가 마련되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본인이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제는 우리의 정치도 시대의 변천과 사회의 발전에 따라 꾸준한 신진대사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낡은 시대의 낡은 사고방식에 젖어 있는 인물에게 발전하는 나라의 장래를 의탁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전환기의 정치를 이끌어나갈 참신하고 유능한 정치 신진들을 광범위하게 포용하고 육성하는 정당의 노력은 매우 필요하다고 하겠읍니다. 우리의 정치가 시대조류에 맞게 올바로 발전해 나가기 위해서는 정치인들과 국민 모두가 의식의 개혁을 통한 정치풍토의 개선에 더욱 많은 정성을 쏟지 않으면 안되겠읍니다. 우리는 이제 굴절된 40년 정치사가 남긴 악순환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할 단계를 맞이하고 있읍니다. 정치세력간의 불신과 적대의식, 대화와 타협을 두려워하는 기이한 정치풍토, 그리고 폭력과 선동으로 국력을 낭비해온 극한투쟁의 후진적 양상은 하루속히 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1인 장기집권의 폐해가 청산되고 있는 이 마당에서 신뢰와 호양, 그리고 인내와 절제는 우리가 나아가야 할 새로운 정치의 모습이자 오늘의 전환기에 국민 모두의 행동지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할 필요도 없이 정치의 목표는 국리민복을 증진시키는데에 있읍니다. 우리의 정치도 이제는 국민의 다양한 욕구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대결을 중시하면서 중요한 국가문제에 당리당략을 초월하여 국민에게 봉사하고 나라를 살찌우는 새로운 전통을 세워나가야 하겠읍니다. 정치인의 사리사욕을 위해 국민에게 불안과 걱정을 주는 정치가 아니라 공익을 위해 정치인 자신의 이익을 희생함으로써 모든 국민에게 믿음과 희망을 주는 성숙한 정치로 발전해 나가야 하겠읍니다. 본인은 오늘의 정치인 모두가 본인의 결단을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고 그 토대위에서 새로운 정치의 앞날을 설계하고 건설하는 데 적극 동참해 줄 것을 기대하고자 합니다. 아울러 국민여러분께서는 안정속의 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민주시민으로서 계도적인 책임을 다해주시기를 당부하는 바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모든 노력이 합쳐져서 착실한 민주발전이 계속될 때 그간 국민여러분의 참여와 협조로 이룩해온 경제와 사회의 성장이 가속화되어 이 땅에는 위대한 새역사의 전환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본인은 굳게 믿고 있읍니다. 실로 우리국민과 정부, 그리고 '''모든 정치인들이 합심협력하여 평화적인 정부이양을 순조롭게 진행시키고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끝마치게 되면 우리는 전쟁의 공포와 후진의 굴레에서 벗어나 평화와 번영을 구가하는 희망찬 90년대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앞으로 2~3년이야말로 우리가 당당하게 선진국대열에 들어설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동안 더 큰 어려움 속에서도 위대한 저력과 무한한 가능성을 입증해온 우리가 민족사상 처음으로 맞이한 이 소중한 기회를 어떻게 놓칠 수 있겠읍니까.&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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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여러분. 본인은 이제 불과 열달 후면 이 중책을 벗고 청와대를 떠나게 됩니다. 그동안 여러분의 뜨거운 참여와 협조로 본인이 약속했던 바를 실천해 올 수 있었음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면서 끝까지 변함없는 지지와 성원을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국민여러분의 축복 속에 대임을 마무리짓고 여러분과 더불어 기쁨과 괴로움을 나누면서 융성하는 나라의 시민으로서 일상의 행복을 누리고 싶은 소박한 소망 이외에 본인은 지금 아무런 정치적 사심이 없읍니다. 그러한 개인적인 소망이 여러분의 애정과 보살핌 속에서 이루어지는 그 날이 바로 우리 민주주의의 새 아침이 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본인은 거듭 여러분의 협조를 충심으로 기대하는 바입니다. 오늘에 사는 우리 국민 여러분의 성숙한 지혜가 밑거름이 되어 이 땅에 자유민주주의의 꽃이 피고 선진과 통일의 자랑스러운 신화가 반드시 창조될 것을 본인은 확신합니다.&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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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봄을 맞아 국민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건강과 행복이 깃들이기를 기원합니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아이러니하게도 만약 4.13 호헌조치가 없었더라면 한국의 민주화 시계는 조금 더 뒤로 돌려졌을 것이라는 평가가 있다. 불과 3개월 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라는 큰 이슈가 있었지만 추도 대회를 경찰이 원천 봉쇄하는 등 정권은 이슈 차단에 열심이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국민들의 관심은 줄어들고 있던 와중이었다. 또한 비록 개헌의 방향에 대해 여야 간에 첨예한 대립은 있었지만 제도권내에서 협상이라는 끈을 이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야권 내부에서는 극렬투쟁에 대한 반대 여론도 존재하고 있었다.&lt;br /&gt;
&lt;br /&gt;
이런 상황에서 호헌조치라는 전두환의 '자충수'는 당시 뚜렷한 동력이 없어 고민하던 민주화 운동 세력을 일시에 각성 및 단합시키고 대중운동의 열기를 되살리는 계기가 되었다.&lt;br /&gt;
&lt;br /&gt;
게다가 4.13 호헌조치는 여야 간의 합의를 통해 개헌해야 한다는 미국의 입장과도 정면 배치되는 것이었다. 미국 상원외교위원회가 4.13 조치 재고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키는 등 행정부와 의회 양쪽에서 전방위적으로 전두환 정권에게 압박을 가하게 됐으며 이런 외교적 상황 또한 당시 민주화 세력에게 큰 자신감을 불러일으켰다. 외교문서에 따르면 미국이 호의적으로 나오지 않자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에게 지지를 호소하는 친서를 보냈던 것이다.&lt;br /&gt;
&lt;br /&gt;
이렇듯 만약 호헌조치가 없었더라면 당시 개헌 정국은 세월아 네월아 질질 끌다가 결국 서울올림픽 열기에 휩쓸려 유야무야되고 박종철 열사도 수많은 의문사 중의 하나로 묻혔을지도 모른다. 또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군사정권 자체가 계속 이어져 나갔을지는 모른다고 쳐도 개헌이 유야무야되어서 현재까지도 제5공화국 체제의 8차 개헌 헌법이 유지되었을 수도 있었다.&lt;br /&gt;
&lt;br /&gt;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개헌에 대한 논의를 중단시키기 위한 조치가 오히려 개헌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키는 촉발점이 된 격이라고 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반면 전두환이 애초에 호헌을 하지 않고 순순히 직선제 개헌 조치를 했다면 대한민국 정치는 그나마 차후의 분쟁이 적었을 것이며 전두환 자신도 지금처럼 쓸데없이 공분을 사는 일이 줄어들었겠지만 전두환 입장에서는 5.18 민주화운동 탄압이나 야당 인사 탄압 및 언론통제 등 전두환 퇴임 후 말년이 곱게 지나가기란 이미 불가능한 시기였던 만큼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lt;/div&gt;</summary>
		<author><name>딩잉잉</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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