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feed xmlns="http://www.w3.org/2005/Atom" xml:lang="ko">
	<id>http://dh.aks.ac.kr/~dh_edu/wiki/api.php?action=feedcontributions&amp;feedformat=atom&amp;user=%EA%B3%A0%EA%B5%B0%EB%B6%84%ED%88%AC</id>
	<title>dh_edu - 사용자 기여 [ko]</title>
	<link rel="self" type="application/atom+x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api.php?action=feedcontributions&amp;feedformat=atom&amp;user=%EA%B3%A0%EA%B5%B0%EB%B6%84%ED%88%AC"/>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ED%8A%B9%EC%88%98:%EA%B8%B0%EC%97%AC/%EA%B3%A0%EA%B5%B0%EB%B6%84%ED%88%AC"/>
	<updated>2026-05-13T15:09:27Z</updated>
	<subtitle>사용자 기여</subtitle>
	<generator>MediaWiki 1.31.8</generator>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86%8C%EC%84%A4%EA%B0%80_%EA%B5%AC%EB%B3%B4_%EC%94%A8%EC%9D%98_%EC%9D%BC%EC%9D%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558</id>
		<title>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ᐧ༚̮ᐧ</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86%8C%EC%84%A4%EA%B0%80_%EA%B5%AC%EB%B3%B4_%EC%94%A8%EC%9D%98_%EC%9D%BC%EC%9D%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558"/>
		<updated>2025-06-23T18:25:1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고군분투: /* 배경과 의의 */&lt;/p&gt;
&lt;hr /&gt;
&lt;div&gt;[[파일:ㄱㅂ.jpg|200px|left]]&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ced1fc;“&lt;br /&gt;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lt;br /&gt;
|'''장르''' || 모더니즘 소설&lt;br /&gt;
|-&lt;br /&gt;
| '''작가''' || 박태원&lt;br /&gt;
|-&lt;br /&gt;
| '''시대''' || 1934년 - [[근대]]   &lt;br /&gt;
|-&lt;br /&gt;
| '''배경'''|| 일제강점기, 지식인의 무력함 &lt;br /&gt;
|}&lt;br /&gt;
&lt;br /&gt;
== 장르 ==&lt;br /&gt;
'''모더니즘'''은 19세기 말과 20세기에 유럽에서 전방위적으로 나타난 예술운동이자 현상으로 모더니즘 문학은 전통과의 단절 및 개인주의 등을 대표적인 특징으로 한다. 제 1차 세계 대전 및 급격한 기술 발전으로 야기된 사회적 변화가 문학 주제에서의 ‘ 19세기 기성 전통과의 단절 ‘ 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때, 19세기의 문학 전통은 ''' 리얼리즘'''을 표방한다. 인간의 삶과 그를 둘러싼 환경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모방 및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리얼리즘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모더니즘은 전적인 주관성과 개인적 경험을 작품의 근원으로 여긴다. 이는 곧 문학의 탈도구성과 독자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19세기 리얼리즘 하에서 문학은 독자들을 계몽시키거나 그들에게 오락을 제공하려는 뚜렷한 목적성을 지니고 있던 반면 모더니즘 문학은 그 어떠한 목적성에서도 벗어나 ''' 문학만을 위한 문학''', 즉 자기목적성만을 보여준다.&lt;br /&gt;
&amp;lt;p&amp;gt;&lt;br /&gt;
'''모더니즘 소설''' 역시 전통적인 소설 구조와 서술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식과 주제를 탐구하는 양상을 보인다. 모더니즘 소설은 '''의식의 흐름''' 기법을 통해 등장인물들의 내면 세계, 심리, 의식을 가감없이 드러내고, 전통적 문법과 구문을 깨뜨리며 새로운 서술 방식을 시도하는 '''언어 실험''', 시작 - 중간 - 결말이라는 구조에서 벗어나 파편화되고 비정형적인 서사 전개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인간 정신의 복잡성과 비합리성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 작가 ==&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fcddce;“&lt;br /&gt;
|+ 박태원 朴泰遠&lt;br /&gt;
|-&lt;br /&gt;
|colspan=&amp;quot;2&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 |  [[File:ㅂㅌㅇ.jpg|100px]]&lt;br /&gt;
|-&lt;br /&gt;
|'''출생''' || 1909년 12월 7일&lt;br /&gt;
|-&lt;br /&gt;
| '''사망''' || 1986년 7월 10일&lt;br /&gt;
|-&lt;br /&gt;
| '''호''' || 구보(丘甫, 仇甫, 九甫)&amp;lt;ref&amp;gt;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라는 작품 이름도 여기에서 비롯한 것이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저서'''|| &amp;lt;천변풍경&amp;gt;, &amp;lt;골목 안&amp;gt;&amp;lt;ref&amp;gt;2024년 대학수학능력시험에 출제되기도 하였다.&amp;lt;/ref&amp;gt;&lt;br /&gt;
|- &lt;br /&gt;
| '''직업''' || 소설가, 시인, 문학평론가&lt;br /&gt;
|}&lt;br /&gt;
&lt;br /&gt;
'''박태원'''은 조선의 소설가, 시인, 문학평론가로 이상, 정지용 등과 더불어 1930년대 모더니즘 문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해방 이후 6.25 전쟁 중 아내와, 자식을 놔두고 홀로 월북하여 그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아주 자세히 알려져 있지는 않다.&lt;br /&gt;
1909년 12월 7일 대한제국 시기 서울 종로에서 태어난 그는 숙부(박용남)가 서양의학 소아내과 의사, 숙모가 보통학교 교사 등으로 일하는 제법 부유하고 개화적인 이른바 서구적 집안 분위기에서 자랐다. 이후  경성제1고등보통학교&amp;lt;ref&amp;gt;현재의 경기고등학교이다&amp;lt;/ref&amp;gt; 재학 중이던 1926년 《조선문단》에 시 〈누님〉을 발표하며 18세의 나이로 등단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amp;lt;ref&amp;gt;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창작한 &amp;lt;반 년간&amp;gt;이라는 작품이 있다.&amp;lt;/ref&amp;gt; 일본 호세이 대학에 진학하지만 1929년 11월, 1학년 시절에 중퇴한 후 귀국하여 1930년 신생 10월호에 단편 소설 〈수염〉을 발표하고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시작하였다. 본격적으로 문단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33년 이상,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조용만, 이효석 등과 함께 문학 동인들의 모임인 구인회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이들 구인회는 순수문학적인 성격을 바탕으로 실험적인 기법과 문장을 문학의 본령으로 내세웠다. 박태원의 소설은 당시로써는 모험적이고 실험적인 시도였기 때문에 당대 문단의 주류를 이루던 사회주의 성향의 '''카프'''와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1930년대 왕성하게 활동하여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1934)''', '''방란장 주인(1936)''', '''천변풍경(1936)''' 등과 같은 대표작들을 발표하였다. 1940년대 일본의 탄압이 심해졌고 이 시기에 박태원은 아세아의 여명(1941.2), 군국의 어머니(1942), 「원구(1945.5-8)」 등 일제의 대동아전쟁을 찬양하고 군국주의를 미화하는 친일 성향 작품들을 발표하여 친일파로 전향하였다는 비판이 있기도 하다. &amp;lt;p&amp;gt; &lt;br /&gt;
광복 후인 1946년 좌익 계열의 문학인 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 등을 맡는 등 잠시 남로당 계열의 문예 운동에 몸을 담았다가, 1947년 탈맹(문동 탈퇴)을 한 이듬해 1948년 국민보도연맹에 사무위원으로 가입하며 본격적인 사회주의, 좌익 성향의 활동을 보인다. 결국에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6.25 전쟁 중 구인회 시절 절친한 동료였던 이태준을 포함해 정인택 설정식 이용악 등과 함께 월북을 감행하여 평양에 정착한다. 전술한 바와 같이 그가 사회주의 성향 단체인 카프와 한때 갈등을 빚기도 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꽤나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amp;lt;p&amp;gt;'''월북 후'''의 생애는 북한 소설가 정태은의 글을 통해 조금이나마 확인된다. 1955년까지 평양문학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던 그는 월북 전의 행보를 이유로 평안남도 강서 지방에서 4년 간 강제 노동을 하였다고 한다. 이후 1960년 다시 대학교수로 복귀하기는 하였지만 강제노동의 휴유증으로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는 지경에 이른다. 청각과 언어능력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창작 활동을 포기하지 않아 동학농민전쟁을 소재로 한 대하 역사소설 &amp;lt; 갑오농민전쟁 &amp;gt;, &amp;lt;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amp;gt; 등을 창작하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tywBeKArUCo?si=Xt0095foxDsQa-uw&amp;quot; title=&amp;quot;YouTube video player&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 &amp;lt;p&amp;gt;&lt;br /&gt;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대학 노트를 들고 다니는 주인공 '''구보 씨'''가 하루 동안 경성을 돌아다니면서 보는 것과 그에 유발되는 상념 및 의식적으로 행하는 사색을 통해 일제 강점기 조선 경성부에 거주하는 '''지식인의 무기력함과 그 일상'''을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다. 주인공의 동선과 그가 만나는 인물들 대부분이 체계적이거나 작가의 치밀한 구성으로 이루어져있다기보다는 철저히 우연을 따르는 점이 특징적이다.&lt;br /&gt;
시력이 약하고 장가도 안 간 무기력한 소설가 구보씨는 무기력한 삶을 살아가는 인물로, 아침에 제 방에서 나와 마루 끝에 놓인 구두를 신고, 기둥 못에 걸린 단장을 들고 문을 나와 걷기도 한다. 그러다가 우두커니 다리 곁에 가 서 있는 자신의 무의미한 행동을 새삼스럽게 깨달은 그는 종로 네거리를 바라보고 걷다가, 다방으로 돌아다닌다. 문득 구보씨는 모든 사람을 정신병자라고 생각해놓고 관찰해 보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낀다. 주인공 구보씨는 그런 것에 흥미를 느끼려는 자기가 이미 환자임을 깨닫고, 비가 내리는 거리를 걸어 집으로 향한다.. 집에서 출발하 여 광교, 종로, 화신상회, 조선은행 앞, 경성역, 경찰서 앞 다방, 종각 뒤의 술집, 카페, 종로 거리를 거쳐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동안에 느낀 복잡한 감정들을 교차시키면서 행복의 가능성을 모색해 보려 한다. 구보는 경성의 온갖 거리를 돌아다니며 그는 작년 여름에 맞선을 본 여인을 만나기도 하고 경성역에서는 노파, 시골 신사, 병자들을 관찰하면서 구보는 '''당대의 세태, 사회문제 등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보여주면서도 어떠한 행동도 보여주지 못하는 일제 강점기 '''지식인의 나약한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lt;br /&gt;
&lt;br /&gt;
기존의 소설이 인물 간의 극적 갈등, 사건의 개연적인 전개를 중시했다면 이 소설은 거리의 풍경과 주변 인물의  묘사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 과정에서 '''자유연상 기법'''을 활용해서 발단 - 전개-위기-절정-결말의 형태와는 달리 내면에 떠오르는 연상과정을 작품 속에 드러내고&amp;lt;ref&amp;gt;모더니즘 소설의 일반적인 특징이기도 하다&amp;lt;/ref&amp;gt;과거와 현재,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구보 씨의 내면 흐름에 초점을 맞추어 그의 사고와 심리를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상의 특징을 통해 사회문제나 그 시대의 세태를 인식하고 비판적 사고로 지닌 인물이지만,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하는 일제 강점기 지식인인 구보 씨의 나약한 모습을 효과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amp;lt;p&amp;gt;&lt;br /&gt;
또한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를 활용하기도 한다. 표면적으로는 작품의 서술자와 주인공이 분리되어 있는 3인칭 시점을 취하고 있으나 서술자가 인물의 시점에 동화되어 그 인물의 시점에서 서술을 전개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기법을 통해 서술자와 등장인물 사이의 거리를 사실상 소멸시킴으로써 독자 입장에선 주인공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분석할 수 있게 된다. &amp;lt;p&amp;gt; 주인공 구보 씨는 정신, 육체 모든 면에서 '''당대의 자본주의적 현실과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다. 그 또한 세속적 일상과 고의적으로 거리를 두고 세계와의 화해를 거부하는 고독한 삶을 자발적으로 선택한 인물이지만 동시에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세계와의 불편한 관계를 거부하며 화해'''를 꿈꾸기도 한다.&lt;br /&gt;
&lt;br /&gt;
== 배경과 의의 ==&lt;br /&gt;
&lt;br /&gt;
이 작품의 주인공인 구보 씨는 작가인 '''박태원의 모습인 반영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까지 다녀왔던 일제 강점기 시기의 지식인이었던 박태원이 당대 사회에 느끼고 있던 문제인식, 환멸, 그리고 거기에서 비롯된 무기력함을 소설을 통해 표출한 것이라 파악된다. 또한 단순히 세태의 파악에 그치지 않고 일상적인 행복을 추구하고자 하는 지향을 작품 내내 꾸준히 보임으로써 문학사적 진전을 보여준다. 또한 전술한 바와 같이 자유연상 기법 등을 활용해 모더니즘 소설로써의 성격을 강하게 드러내기도 한다.&lt;br /&gt;
1930년대는 일제가 만주 사변을 일으키면서 우리 민족에 대한 탄압을 더욱 심하게 하던 시기였다. 그 당시의 경성은 대한 제국의 멸망과 함께 조선 총독부의 정책에 따라 대대적인 '''공간의 재조직'''이 이루어졌다. 일본의 주도 하에 한국인의 정서, 이익과는 무관하게 이루어진 이러한 도시 계획은 기존의 한국인들이 가지던 연대감을 최소화하고 '''개인주의'''가 만연하는 역효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로 인해 '''도시 구성원 개갠인 간의 불신의 감정 및 고독과 소외 현상'''이 증폭되며 지배적 공간과 문화에서 벗어나 있는 이들이 느끼는 빈곤감과 타락이 심화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경성이라는 '''도시를 공간적 배경으로 삼는 소설'''들이 대거 등장하였던 것이다.&lt;br /&gt;
&lt;br /&gt;
== 참고 문헌 ==&lt;br /&gt;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위키피디아 https://ko.wikipedia.org/wiki/%EC%86%8C%EC%84%A4%EA%B0%80_%EA%B5%AC%EB%B3%B4%EC%94%A8%EC%9D%98_%EC%9D%BC%EC%9D%BC &amp;lt;p&amp;gt;&lt;br /&gt;
근대성과 근대문학, 나병철 지음, 문예출판사, 1996 &amp;lt;p&amp;gt;&lt;br /&gt;
박태원, 위키피디아 https://ko.wikipedia.org/wiki/%EB%B0%95%ED%83%9C%EC%9B%90_(1909%EB%85%84 &amp;lt;p&amp;gt;&lt;br /&gt;
이은선, ｢박태원 소설과 ‘재현’의 문제｣ (『현대소설연구』 44, 한국현대소설학회, 2010)&lt;br /&gt;
&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분류: 시대별로 살펴보는 한국 문학 작품의 흐름과 변화]]&lt;br /&gt;
[[분류:김치찌개]]&lt;/div&gt;</summary>
		<author><name>고군분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4%91%EC%95%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555</id>
		<title>광야ᐧ༚̮ᐧ</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4%91%EC%95%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555"/>
		<updated>2025-06-23T18:22:4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고군분투: /* 배경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lt;br /&gt;
|+광야&lt;br /&gt;
|'''장르''' || 저항시, 서정시&lt;br /&gt;
|-&lt;br /&gt;
| '''작가''' || 이육사&lt;br /&gt;
|-&lt;br /&gt;
| '''시대''' || 1945년 - [[근대]]   &lt;br /&gt;
|-&lt;br /&gt;
| '''배경'''|| 일제강점기 &lt;br /&gt;
|}&lt;br /&gt;
&lt;br /&gt;
== 원문 ==&lt;br /&gt;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까마득한 날에&lt;br /&gt;
하늘이 처음 열리고&lt;br /&gt;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lt;br /&gt;
&lt;br /&gt;
모든 산맥들이&lt;br /&gt;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lt;br /&gt;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lt;br /&gt;
&lt;br /&gt;
끊임없는 광음을&lt;br /&gt;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lt;br /&gt;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lt;br /&gt;
&lt;br /&gt;
지금 눈 내리고&lt;br /&gt;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lt;br /&gt;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lt;br /&gt;
&lt;br /&gt;
다시 천고의 뒤에&lt;br /&gt;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lt;br /&gt;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 배경 ==&lt;br /&gt;
시인 이육사의 말년 작품으로 유고로 전하여지다가, 그의 사후인 1945년 12월 17일『자유신문』에 동생 이원조(李源朝)에 의하여 '''「꽃」'''과 함께 발표되었다. 이 시가 창작된 것은 해방 이전 일제강점기 시기로 일본에 대한 저항정신을 매우 함축적이고 서정적인 표현을 통해 비유적으로 나타낸 시이다. 그의 생전 마지막 작품이 1939년에 발표된 것을 감안하였을 땐 1939년부터 그가 사망한 1944년 사이에 쓰였을 것으로 파악된다. 사실 광야라는 작품 자체에는 기존의 저항시와는 다르게 일제에 대한 직접적인 저항 등이 표출되어 있지는 않다. 하지만 이육사의 생애와 그의 다른 작품들을 감안하였을 때 광야 역시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드러낸 '''저항시'''라고 봐야 옳을 것이다.&lt;br /&gt;
&lt;br /&gt;
== 작가 ==&lt;br /&gt;
[[파일:ㅇㅇㅅ.jpg|200px|left]]&lt;br /&gt;
&amp;lt;p&amp;gt;&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fbe1df;“&lt;br /&gt;
|+ 이육사 李陸史&lt;br /&gt;
|'''출생''' || 1904년 5월 18일&lt;br /&gt;
|-&lt;br /&gt;
| '''사망''' || 1944년 1월 16일&lt;br /&gt;
|-&lt;br /&gt;
| '''본명''' || 이원록(李源祿)&lt;br /&gt;
|-&lt;br /&gt;
| '''작품'''||  광야, 황혼, 절정, 청포도, 강 건너간 노래&lt;br /&gt;
|- &lt;br /&gt;
| '''직업''' || 시인, 독립운동가, 언론인&lt;br /&gt;
|}&lt;br /&gt;
&amp;lt;p&amp;gt;&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c92e16&amp;quot;&amp;gt;이육사&amp;lt;/font&amp;gt;는 일제강점기의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경상북도 예안&amp;lt;ref&amp;gt;현재의 경상북도 안동&amp;lt;/ref&amp;gt;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대한제국 시기 장릉(章陵) 참봉을 지낸 조부 이중직(李中稙, 1847 ~ 1916. 1. 17)에게서 소학을 배우는 등 한문학을 공부하다가 조부가 사망한 1916년, 그의 가문인 진성이씨 문중에서 설립한 보문의숙(이후 도산공립보통학교로 개칭)에서 수학하기 시작하였다. 어린 시절 한문학을 공부한 것의 영향으로 그의 시에서는 한시의 기승전결과 유사한 형식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시작한 것은 대구로 이사한 1925년이다. 그는 형제들과 함께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bee826&amp;quot;&amp;gt;의열단&amp;lt;/span&amp;gt;'''&amp;lt;ref&amp;gt;1919년에 찯단했다&amp;lt;/ref&amp;gt;에 가입한 이후 1927년에 일어난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가담한 혐의로 형제 이원기, 이원일과 함께 처음으로 투옥된다. 이때 본인의 수감번호였던 264에서 필명 '''이육사'''&amp;lt;ref&amp;gt;많은 이들이 본명으로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amp;lt;/ref&amp;gt;를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1930년, 27세의 나이로 &amp;lt;조선일보&amp;gt;에 &amp;lt;말&amp;gt;을 발표하며 처음으로 등단하게 되고 조선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잠시 일하기도 하였다. 1932년 난징에 있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입교한 그는 특수 부대원 훈련을 받았고 이듬해 4월에 졸업한다. 같은 해 7월에 곧바로 귀국한 그는 본인의 필명으로 '''&amp;lt;황혼&amp;gt;, &amp;lt;신조선&amp;gt;''' 등을 발표하며 창작활동에도 매진한다. 하지만 1934년, 그는 의열단 출신이라는 이유로 경성부 본정경찰서에 의해 검거된 뒤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다. 혹독한 고문을 받고 간신히 풀려난 그는, 그의 대표작이자 저항정신, 광복에 대한 염원이 담긴  &amp;lt;청포도&amp;gt;, &amp;lt;절정&amp;gt; 등을 발표한다. 1943년 베이징으로 압송된 그는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교도소에서 결국 옥사하게 된다. 1968년에는 고향 안동에 그의 비석이 건립되었고 2000년에는 이육사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lt;br /&gt;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0550 이육사 문학관]이 건설되어 매년 문학의 밤, 육사 백일장, 기념 세미나 등을 개최하고 있다.&lt;br /&gt;
&lt;br /&gt;
== 내용 및 해석 ==&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cCeppR6Gs5I?si=QhqKE9f7gPlVqsdi&amp;quot; title=&amp;quot;YouTube video player&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 &amp;lt;p&amp;gt; '''광야'''는 5연 15행의 자유시로, 1~3연에서는 과거를 4연에서는 현재의 비관적 상황에 이어 미래의 모습을 그린 5연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3단계로 시가 구성된다. 우선 1연에서는 천지가 창조되기 이전의 근원적 상황을 표현하고 2연에서는 산맥과 같은 광대한 자연조차도 침범하지 못하는 신성한 광야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3연에서는 태초의 자연상태에서 벗어나 문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1-3연에 걸쳐 광야가 형성되고 발전하는 과정을 순차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그 이후 4연에서는 '''지금'''이라는 시어를 통해 현재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 현재의 모습은 '''눈 내리고'''라는 구절을 통해 나타나다시피 암울한 상황이다. 그러면서도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를 통해 담담하고 결연한 극복 의지를 드러내며 5연에서는 미래의 어느 시점에 반드시 '''백마 타고 오는 노인'''이 올 것을 예언하며 현실에 대한 극복의지와 더불어 긍정적 미래에 대한 기대를 보여준다. &amp;lt;p&amp;gt; 이 시에 나타나는 특징으로는 태초부터 천고의 뒤까지의 광범위한 시간의 압축과 더불어 광야의 광활한 공간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광야’는 이상적인 공간, 즉 이육사가 지닌 이념이 실현되는 공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공간의 무한성과 광활함은 이육사 시의 대표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이육사는 이 시에서 직접적인 저항정신의 표출 등을 극도로 자제하고 시의 처음부터 끝까지 절제되고 담담한 어조로 일관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기법은 또다른 대표적 저항시인인 '''윤동주'''와는 확연히 대비되는 것으로 윤동주가 고백적 어조로 본인이 느낀 무기력함, 부끄러움 등을 가감없이 시에 표현하였다면 이육사는  매우 함축적이고 세련되었으며 강렬한 시어를 통해 독자적인 시세계를 구축한 것이다.&lt;br /&gt;
== 참고문헌 ==&lt;br /&gt;
&lt;br /&gt;
이육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5444 &amp;lt;p&amp;gt;&lt;br /&gt;
이육사 문학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0550 &amp;lt;p&amp;gt;&lt;br /&gt;
이육사의 &amp;lt;광야&amp;gt; 연구 - 비평문학, 한국비평문학회, 박순원, 2011&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시대별로 살펴보는 한국 문학 작품의 흐름과 변화]]&lt;br /&gt;
[[분류:김치찌개]]&lt;/div&gt;</summary>
		<author><name>고군분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B6%84%EB%A5%98:%EA%B9%80%EC%B9%98%EC%B0%8C%EA%B0%9C&amp;diff=60553</id>
		<title>분류:김치찌개</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B6%84%EB%A5%98:%EA%B9%80%EC%B9%98%EC%B0%8C%EA%B0%9C&amp;diff=60553"/>
		<updated>2025-06-23T18:21:4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고군분투: &lt;/p&gt;
&lt;hr /&gt;
&lt;div&gt;2024130040 국어국문학과 이지우&lt;br /&gt;
&lt;br /&gt;
&lt;br /&gt;
우선은 우리 조의 주제가 '''시대별로 살펴보는 한국 문학 작품의 흐름과 변화'''임을 감안한다면 개별적인 문학 작품에 대한 설명 뿐 아니라 그 시대의 사회적 분위기, 역사적 사건, 문학적 흐름 등을 포괄적이면서도 구체적으로 서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조선초기, 조선중기, 조선후기, 근대, 현대 5가지의 시대를 각각 개인 페이지로 만들자고 제안하였고 그를 통해 시대 설명에 대한 충분한 구체성을 확보하는 결과를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 조의 궁극적 의도는 문학 작품과 그 배경을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것이었기에 시대적 배경에 대한 풍부한 서술을 통하여 개별 작품에 대한 심층적 이해를 도모할 필요가 있었고 5가지의 시대 페이지를 개별적으로 만든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amp;lt;p&amp;gt; 또한 우리 조의 경우에는 한 페이지를 여러 조원들이 함께 만드는 것이 아니라 총 20개의 개인 페이지를 조원 4명에게 각각 5개씩 분배하여 독자적으로 페이지를 구축하기로 하였습니다. 이 경우, 페이지들 간의 통일성이 조금은 떨어질 수도 있지만 페이지 하나하나의 완성도가 올라가고 조원 개개인의 개성과 시대 및 작품에 대한 이해를 개성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lt;br /&gt;
또한 1개의 시대 페이지와 4개의 작품 페이지를 독자적으로 완성했어야 하다보니 해당 영역에 대한 심층적인 자료 탐구를 통해 인문학적 지식을 상당히 많이 쌓을 수 있기도 하였습니다.&lt;br /&gt;
&lt;br /&gt;
&amp;lt;p&amp;gt;&lt;br /&gt;
앞에서 설명하였다시피 밑에 있는 5개의 페이지는 모두 독자적으로 작성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개별 페이지에서 정보의 질,양, 유기성 등에 특별히 신경을 써 문학과 그 시대적 배경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끔 페이지를 구축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우선 '''근대''' 페이지의 경우에는 각각 역사적 관점과, 문학사적 관점에서 정의하는 근대의 범위를 상단에 기재하였고 191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문학의 흐름을 표로 정리하여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 아래에는 191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를 각 단락으로 나누어 해당 시기의 문학사를 서사갈래, 서정갈래로 각각 나누어 설명하고, 대표적인 작품, 문학을 이끌었던 단체, 유명 작가, 영향을 끼친 역사적 사건 혹은 사회적 분위기 등을 서술하여 읽는 이들이 개별 작품 페이지에 진입하기에 앞서 그 시대상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amp;lt;p&amp;gt;&lt;br /&gt;
&lt;br /&gt;
저희 조의 경우에는 시기와 작품이라는 단락에 5개의 시기 페이지와 그 시기에 해당하는 3개의 작품들을 순서대로 배열하는 방식을 택하였습니다. 개별 페이지 내부에 따로 하이퍼링크를 추가하기보다는 각 작품의 작가, 배경, 내용의 상세한 내용들을 전부 작품 페이지에 서술하여 보다 직관적이고 풍부한 페이지를 만들고자 하는 의도였습니다.&lt;br /&gt;
또한 제가 맡았던 작품의 경우에는 열하일기, 구운몽,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광야였는데 그중 열하일기와 구운몽의 경우에는 제가 맡은 근대 시기의 작품이 아닌 조선 후기의 작품이었기에 해당 시대의 전반적인 문학의 흐름에 대한 조사에 특별히 신경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열하일기의 경우에는 서정,서사 갈래가 아닌 여행기라는 특수한 장르의 작품이었고 박지원의 청나라 답사라는 사건이 절대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기에 배경 단락을 서술하는 데에 특별히 큰 공을 기울였습니다. 또한 열하일기는 단순히 청나라 답사 과정에서 관찰하고 본 것들을 서술한 내용 뿐 아니라 거기에서 비롯된 박지원의 이용후생, 실학적 사상 등 저자의 가치관이 가감없이 드러나는 작품이기에 박지원의 전반적 생애 및 정치적 입장, 평소의 가치관을 집중적으로 탐구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amp;lt;p&amp;gt;&lt;br /&gt;
구운몽의 경우에는 평소에 상당히 익숙하게 접했던 작품이기도 하고 워낙에 유명한 작품이기에 페이지 작성 과정이 비교적 수월할 것이라 판단하였으나 생각보다 어려움을 겪었지만 작가 김만중의 생애와 이 소설을 쓰던 시기에 그가 유배생활 중이었다는 점, 작품의 서사구조와 불교, 도교적 사상에 주목하여 페이지를 작성할 수 있었습니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과 광야라는 작품은 제가 직접 조사하였던 근대에 해당하는 작품이기도 하고 일제강점기라는 시기의 쓰인 작품이기에 그 시대적 배경이 확실하여 비교적 수월하게 작성할 수 있었습니다&lt;/div&gt;</summary>
		<author><name>고군분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B6%84%EB%A5%98:%EA%B9%80%EC%B9%98%EC%B0%8C%EA%B0%9C&amp;diff=60385</id>
		<title>분류:김치찌개</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B6%84%EB%A5%98:%EA%B9%80%EC%B9%98%EC%B0%8C%EA%B0%9C&amp;diff=60385"/>
		<updated>2025-06-23T16:05:5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고군분투: &lt;/p&gt;
&lt;hr /&gt;
&lt;div&gt;2024130040 국어국문학과 이지우&lt;br /&gt;
&lt;br /&gt;
&lt;br /&gt;
우선은 우리 조의 주제가 ''''시대별로 살펴보는 한국 문학 작품의 흐름과 변화'''임을 감안한다면 개별적인 문학 작품에 대한 설명 뿐 아니라 그 시대의 사회적 분위기, 역사적 사건, 문학적 흐름 등을 포괄적이면서도 구체적으로 서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조선초기, 조선중기, 조선후기, 근대, 현대 5가지의 시대를 각각 개인 페이지로 만들자고 제안하였고 그를 통해 시대 설명에 대한 충분한 구체성을 확보하는 결과를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 조의 궁극적 의도는 문학 작품과 그 배경을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것이었기에 시대적 배경에 대한 풍부한 서술을 통하여 개별 작품에 대한 심층적 이해를 도모할 필요가 있었고 5가지의 시대 페이지를 개별적으로 만든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amp;lt;p&amp;gt; 또한 우리 조의 경우에는 한 페이지를 여러 조원들이 함께 만드는 것이 아니라 총 20개의 개인 페이지를 조원 4명에게 각각 5개씩 분배하여 독자적으로 페이지를 구축하기로 하였습니다. 이 경우, 페이지들 간의 통일성이 조금은 떨어질 수도 있지만 페이지 하나하나의 완성도가 올라가고 조원 개개인의 개성과 시대 및 작품에 대한 이해를 개성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lt;br /&gt;
또한 1개의 시대 페이지와 4개의 작품 페이지를 독자적으로 완성했어야 하다보니 해당 영역에 대한 심층적인 자료 탐구를 통해 인문학적 지식을 상당히 많이 쌓을 수 있기도 하였습니다.&lt;br /&gt;
&lt;br /&gt;
&amp;lt;p&amp;gt;&lt;br /&gt;
앞에서 설명하였다시피 밑에 있는 5개의 페이지는 모두 독자적으로 작성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개별 페이지에서 정보의 질,양, 유기성 등에 특별히 신경을 써 문학과 그 시대적 배경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끔 페이지를 구축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우선 '''근대''' 페이지의 경우에는 각각 역사적 관점과, 문학사적 관점에서 정의하는 근대의 범위를 상단에 기재하였고 191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문학의 흐름을 표로 정리하여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 아래에는 191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를 각 단락으로 나누어 해당 시기의 문학사를 서사갈래, 서정갈래로 각각 나누어 설명하고, 대표적인 작품, 문학을 이끌었던 단체, 유명 작가, 영향을 끼친 역사적 사건 혹은 사회적 분위기 등을 서술하여 읽는 이들이 개별 작품 페이지에 진입하기에 앞서 그 시대상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lt;/div&gt;</summary>
		<author><name>고군분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7%BC%EB%8C%80&amp;diff=60372</id>
		<title>근대</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7%BC%EB%8C%80&amp;diff=60372"/>
		<updated>2025-06-23T16:02:4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고군분투: /* 근대문학의 흐름 */&lt;/p&gt;
&lt;hr /&gt;
&lt;div&gt;'''역사적 관점''' : 19세기 후반 개항, 갑신정변, 갑오개혁 전후 ~ 1945년 광복까지 &amp;lt;p&amp;gt;&lt;br /&gt;
'''문학사적 관점''' : 1900년대 초반&amp;lt;ref&amp;gt;주로 이광수가 '''무정'''을 발표한 1917년을 근대문학의 시작으로 본다&amp;lt;/ref&amp;gt;  ~ 1945년 광복까지 &lt;br /&gt;
&lt;br /&gt;
==근대문학의 흐름==&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lt;br /&gt;
&lt;br /&gt;
! 시기 || 서정갈래 || 서사갈래&lt;br /&gt;
|-&lt;br /&gt;
|'''1910년대''' || 상징주의 시, 현대적 자유시 || 신소설&lt;br /&gt;
|-&lt;br /&gt;
| '''1920년대''' || 낭만주의 시 || 낭만주의 소설, 현실주의 소설 &lt;br /&gt;
|-&lt;br /&gt;
| '''1930년대''' || 모더니즘 시 || 모더니즘 소설, 농촌 소설 &lt;br /&gt;
|-&lt;br /&gt;
| '''1940년대'''|| 청록파, 저항시 || 암흑기&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green&amp;quot;&amp;gt;'''1910년대'''&amp;lt;/font&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서정갈래'''''&amp;lt;p&amp;gt;김억&amp;lt;ref&amp;gt;시인 김소월의 스승으로 알려져있다. &amp;lt;/ref&amp;gt; 을 중심으로 &amp;lt;ins&amp;gt;상징주의 시&amp;lt;/ins&amp;gt;가 등장하였다. 상징주의는 19세기 후반 프랑스의 사실주의, 자연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등장한 문예사조이다. 낭만주의와 같이 현실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문학적으로 표현하려 했고, 이를 위해 상징적 표현을 사용하였다. 한국에서는 1918년에 김억이 최초의 문예 주간지인 태서문예신보에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와 시론을 번역하여 소개하였다. 김억은 내적 리듬, 즉 내재율만을 가진 자유시는 자칫 산문과 구별되기 어려울 수 있다며 엄격한 외재율, 그 중에서도 중국 한시에 나타나는 압운&amp;lt;ref&amp;gt; 여러 행을 걸쳐 발현되는 규칙이다. 비슷한 개념으로 rhyme을 떠올릴 수 있다. &amp;lt;/ref&amp;gt;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김억의 이러한 주장은 크게 주목받지 못하였다. &amp;lt;p&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서사갈래''''' &amp;lt;p&amp;gt;&lt;br /&gt;
'''신소설 ''': 고전소설에서 근대소설로 넘어가는 분기점에 위치한 &amp;lt;ins&amp;gt;과도기적 소설&amp;lt;/ins&amp;gt;이다. 1906년 대한매일신보의 광고에서 처음 사용된 단어로, 개화기 소설이라고도 부른다. 인간의 이성과 경험을 신뢰하고 이를 통해 더 나은 사회를 만들려 했던 계몽주의의 사상이 담겨있다. &lt;br /&gt;
주로 우연에 의해 사건이 전개되는 등 서사적 측면에서는 고전소설의 특징을, 구조와 형식 측면에서는 외국 소설의 영향을 받았다. 근대적 인쇄, 출판, 유통 방식과 결합하여 문학의 본격적인 대중 유통이 시작되었다. &amp;lt;p&amp;gt;&lt;br /&gt;
&lt;br /&gt;
'''이광수의 &amp;lt;무정&amp;gt; ''' : 이전의 신소설과는 구분되는 &amp;lt;ins&amp;gt;‘최초의 근대소설’&amp;lt;/ins&amp;gt;로 분류할 수 있는 작품이다. 연재 당시, 엄청난 인기와 동시에 사회적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문학사적으로 따지면 이전까지처럼 서로 얼굴도 모르는 두 사람의 정략결혼이라는 전근대적 혼인 방식이 아닌 '연애에 기초한 혼인'을 최초로 서사화하고 이를 근대적 삶의 실천이자 심지어 민족 계몽으로까지 그 범위를 확장했다는 점에서 아주 큰 의의가 있는 작품이다. 또 '연애'라는 단어가 이 당시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지금과 같은 의미가 아닌 'LOVE', 사랑의 의미였다는 것을 고려해보면 개인과 개인이 감정의 주체로서 교제 인물을 선택하고 이로써 자아를 자각하는 의미로서도 의의가 있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green&amp;quot;&amp;gt;'''1920년대'''&amp;lt;/font&amp;gt;===&lt;br /&gt;
----&lt;br /&gt;
1920년대 한국문학은 3.1운동으로 대표되는 민족저항의식과 그로 인한 일본의 문화통치에 큰 영향을 받았다. &lt;br /&gt;
&lt;br /&gt;
 &amp;lt;p&amp;gt;&lt;br /&gt;
3.1운동의 실패로 인해 드리운 암울한 정서의 영향을 받아 감상적이면서 퇴폐적인 &amp;lt;ins&amp;gt;낭만주의 문학&amp;lt;/ins&amp;gt;이 등장하였다. &amp;lt;p&amp;gt; 한편, 낭만주의 문학에 대척점에 서있는 문예사조로 암울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자 한 &amp;lt;ins&amp;gt;사실주의 문학&amp;lt;/ins&amp;gt; 역시 등장하였다.사실주의 문학 계열 중 하나로 사회주의 사상이 본격적으로 문학계에 유입되며 '''''신경향파'''''가 대두하였다. 신경향파 문학은 낭만적 감상주의를 극복하고 한반도의 암울한 현실을 예술적 인식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주인공의 개인적인 복수, 본능적인 반항,살인,방화, 자살 등으로 작품을 마무리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 영향을 받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이란 뜻의 '''''카프'''''&amp;lt;ref&amp;gt; 1925년에 결성되어 1935년에 해체되었다. &amp;lt;/ref&amp;gt;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amp;lt;p&amp;gt; 이러한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대항하여 민족주의 진영에서는 '''''국민문학파'''''&amp;lt;ref&amp;gt; 최남선, 이광수, 염상섭 등 중견작가들의 주도로 등장하였다. &amp;lt;/ref&amp;gt;라는 사조가 등장하였다. 이들은 일제의  문화적인 예속을 거부하는 민족주의 운동을 문학적으로 반영하였으며, 그 맥락에서 시조부흥운동, 역사소설 창작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일제로부터의 해방·광복이라는 동일한 궁극적인 목표는 카프와 동일하였지만 실천 방법에 있어서 서로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p&amp;gt; &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green&amp;quot;&amp;gt;'''1930년대'''&amp;lt;/font&amp;gt;=== &lt;br /&gt;
----&lt;br /&gt;
1920년을 지배한 낭만주의 사조에 반발하여 지성과 논리를 강조하는 '''''모더니즘 문학'''''이 등장하였다. 모더니즘의 등장에는 당시 조선 식민지 사회의 시대적 배경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세계 대공황으로 경제 위기에 처한 일본이 식민지 조선에 대한 수탈을 강화하는 한편 대륙 침략을 단행함으로써 위기를 탈출하려고 하였고, 이 과정에서 당시 식민지 조선은 군사 기지의 목적으로 중화학 공업이 발달하게 되고 급속한 도시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이러한 도시화 속에서의 극단적 개인주의와 인간성 상실에 대한 문제인식을 기반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모더니즘 문학인 것이다. 영미 모더니즘에 영향을 받아 우리 나라에 모더니즘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1924년 무렵이다. 고한용(高漢容)이 &amp;lt;다다이슴＞(開闢, 51호)·＜서울 왓든 다다이스트의 이약이＞(개벽, 52호)·＜다다？ 다다!＞(동아일보, 1924.11.24.)·＜잘못 안 다다이슴＞(동아일보, 1924.12.1.) 등의 글을 발표하였다. 양주동(梁柱東)은 ＜정오 이·삼 正誤二三＞(朝鮮文壇, 12호)에서 이미지즘의 개념과 문학적 성격을 소개하고 있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green&amp;quot;&amp;gt;'''1940년대'''&amp;lt;/font&amp;gt;=== &lt;br /&gt;
----&lt;br /&gt;
&lt;br /&gt;
'''''서정갈래''''' &amp;lt;p&amp;gt;&lt;br /&gt;
조지훈,박목월, 박두진 세 명의 시인이 결성한 '''''청록파'''''가 등장하였다. 이들은 서정성을 극대화한 자연친화적인 시풍을 보여줬다. 이 세 사람의 시인은 이후의 활동과 함께 광복 이전과 이후의 한국시를 이어주는 징검다리로서의 구실을 했고 시의 순수성을 굳건히 지키며 시의 바른 길을 밝혀 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이 청록파 시인들의 공통적인 특징인 자연의 세계는 전기의 전원시를 한층 발전시킨 참신한 감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김수영, 박인환 등의 시인들은 이들의 시를 현실도피적이라며 비판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시는 시대 현실에 대해 도피적인 시세계라기보다 추악한 도시 현실을 외면한다는 뜻에서 자연 복귀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동양 시인의 체질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세계가 그들의 시적 근거로 형상화하였으며 광복 후 시단의 전통의 집대성에 큰 영향을 끼쳤으므로 광복부터 6·25 전쟁까지의 한 시기를 대표하게 되었다.&amp;lt;p&amp;gt; 한편, 일본제국이 확장되도 민족말살통치가 극심해지며 윤동주, 이육사, 한용운 등을 중심으로 '''''저항시'''''가 등장하였다. 검열을 피해 일본어로 쓰이기도 하였다. 당대의 시인들은 강한 검열 속에서도 민족 의식과 조국 사랑을 담은 저항시를 지속적으로 발표하였다. 그러한 당대 저항시는 자유와 희망에 대한 강렬한 염원을 반영하며, 사회적 억압을 문학적으로 승화하고 민족적 자긍심과 독립 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p&amp;gt;&lt;br /&gt;
&lt;br /&gt;
'''''서사갈래''''' &amp;lt;p&amp;gt;&lt;br /&gt;
1940년대 서사갈래는 일본의 민족말살통치의 영향으로 인해 시련을 맞이하였다. &lt;br /&gt;
이 시기를 전후로 문단에 발에 들인 작가로는 황순원, 최명익, 정인태, 현덕, 김이석, 안수길, 김영수, 정비석, 김사량, 최인욱, 곽하신, 최태웅, 임옥인, 지하련 등 이있다.&lt;br /&gt;
시에서 출발하여 시적 언어와 산문성을 결함시킨 '''''황순원'''''은 초기 단편에서 소년과 소녀를 등장시켜 그들이 겪어야 하는 통과 제의(通過祭儀) 의 아픔을 그리고 있다.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는 '기러기' , '세레나데' , '별' , '닭제' , '소나기' , '늪' 등이 있는데, 이는 유년기의 소년, 소녀들이 성인으로 가는 시련과 아픔의 과정을 통하여 역사를 헤쳐 나간다는 것의 어려움, 그런 역사에 대해서 비관하거나 절망하지 않는 면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이와 반대로 최명익은 마르크스주의적인 세계관을 토대로 모더니즘적 작품 경향을 보여 주는데, 자의식적인 성인을 주인공으로 하여 현실의 상황을 절망적이고 암담한 분위기로 조성하고 있다. 그의 대표작에는 '역설' , '장삼 이사' , '무성격자' , '비 오는 길' , '봄과 신작로'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lt;br /&gt;
한국민족대백과사전 &amp;lt;국민문학&amp;gt;, &amp;lt;카프&amp;gt;, &amp;lt;시조부흥운동&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주석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 시대별로 살펴보는 한국 문학 작품의 흐름과 변화]]&lt;br /&gt;
[[분류:김치찌개]]&lt;/div&gt;</summary>
		<author><name>고군분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B6%84%EB%A5%98:%EA%B9%80%EC%B9%98%EC%B0%8C%EA%B0%9C&amp;diff=60321</id>
		<title>분류:김치찌개</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B6%84%EB%A5%98:%EA%B9%80%EC%B9%98%EC%B0%8C%EA%B0%9C&amp;diff=60321"/>
		<updated>2025-06-23T15:38:1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고군분투: &lt;/p&gt;
&lt;hr /&gt;
&lt;div&gt;2024130040 국어국문학과 이지우&lt;br /&gt;
&lt;br /&gt;
&lt;br /&gt;
우선은 우리 조의 주제가 ''''시대별로 살펴보는 한국 문학 작품의 흐름과 변화'''임을 감안한다면 개별적인 문학 작품에 대한 설명 뿐 아니라 그 시대의 사회적 분위기, 역사적 사건, 문학적 흐름 등을 포괄적이면서도 구체적으로 서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한 측면에서 조선초기, 조선중기, 조선후기, 근대, 현대 5가지의 시대를 각각 개인 페이지로 만들자고 제안하였고 그를 통해 시대 설명에 대한 충분한 구체성을 확보하는 결과를 얻게 되었다. 우리 조의 궁극적 의도는 문학 작품과 그 배경을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것이었기에 시대적 배경에 대한 풍부한 서술을 통하여 개별 작품에 대한 심층적 이해를 도모할 필요가 있었고 5가지의 시대 페이지를 개별적으로 만든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amp;lt;p&amp;gt; 또한 우리 조의 경우에는 한 페이지를 여러 조원들이 함께 만드는 것이 아니라 총 20개의 개인 페이지를 조원 4명에게 각각 5개씩 분배하여 독자적으로 페이지를 구축하기로 하였다. 이 경우, 페이지들 간의 통일성이 조금은 떨어질 수도 있지만 페이지 하나하나의 완성도가 올라가고 조원 개개인의 개성과 시대 및 작품에 대한 이해를 개성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lt;br /&gt;
또한 1개의 시대 페이지와 4개의 작품 페이지를 독자적으로 완성했어야 하다보니 해당 영역에 대한 심층적인 자료 탐구를 통해 인문학적 지식을 상당히 많이 쌓을 수 있었다.&lt;/div&gt;</summary>
		<author><name>고군분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7%BC%EB%8C%80&amp;diff=60314</id>
		<title>근대</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7%BC%EB%8C%80&amp;diff=60314"/>
		<updated>2025-06-23T15:32:3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고군분투: &lt;/p&gt;
&lt;hr /&gt;
&lt;div&gt;'''역사적 관점''' : 19세기 후반 개항, 갑신정변, 갑오개혁 전후 ~ 1945년 광복까지 &amp;lt;p&amp;gt;&lt;br /&gt;
'''문학사적 관점''' : 1900년대 초반&amp;lt;ref&amp;gt;주로 이광수가 '''무정'''을 발표한 1917년을 근대문학의 시작으로 본다&amp;lt;/ref&amp;gt;  ~ 1945년 광복까지 &lt;br /&gt;
&lt;br /&gt;
==근대문학의 흐름==&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lt;br /&gt;
&lt;br /&gt;
! 시기 || 서정갈래 || 서사갈래&lt;br /&gt;
|-&lt;br /&gt;
|'''1910년대''' || 상징주의 시, 현대적 자유시 || 신소설&lt;br /&gt;
|-&lt;br /&gt;
| '''1920년대''' || 낭만주의 시 || 낭만주의 소설, 현실주의 소설 &lt;br /&gt;
|-&lt;br /&gt;
| '''1930년대''' || 모더니즘 시 || 모더니즘 소설, 농촌 소설 &lt;br /&gt;
|-&lt;br /&gt;
| '''1940년대'''|| 청록파, 저항시 ||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green&amp;quot;&amp;gt;'''1910년대'''&amp;lt;/font&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서정갈래'''''&amp;lt;p&amp;gt;김억&amp;lt;ref&amp;gt;시인 김소월의 스승으로 알려져있다. &amp;lt;/ref&amp;gt; 을 중심으로 &amp;lt;ins&amp;gt;상징주의 시&amp;lt;/ins&amp;gt;가 등장하였다. 상징주의는 19세기 후반 프랑스의 사실주의, 자연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등장한 문예사조이다. 낭만주의와 같이 현실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문학적으로 표현하려 했고, 이를 위해 상징적 표현을 사용하였다. 한국에서는 1918년에 김억이 최초의 문예 주간지인 태서문예신보에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와 시론을 번역하여 소개하였다. 김억은 내적 리듬, 즉 내재율만을 가진 자유시는 자칫 산문과 구별되기 어려울 수 있다며 엄격한 외재율, 그 중에서도 중국 한시에 나타나는 압운&amp;lt;ref&amp;gt; 여러 행을 걸쳐 발현되는 규칙이다. 비슷한 개념으로 rhyme을 떠올릴 수 있다. &amp;lt;/ref&amp;gt;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김억의 이러한 주장은 크게 주목받지 못하였다. &amp;lt;p&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서사갈래''''' &amp;lt;p&amp;gt;&lt;br /&gt;
'''신소설 ''': 고전소설에서 근대소설로 넘어가는 분기점에 위치한 &amp;lt;ins&amp;gt;과도기적 소설&amp;lt;/ins&amp;gt;이다. 1906년 대한매일신보의 광고에서 처음 사용된 단어로, 개화기 소설이라고도 부른다. 인간의 이성과 경험을 신뢰하고 이를 통해 더 나은 사회를 만들려 했던 계몽주의의 사상이 담겨있다. &lt;br /&gt;
주로 우연에 의해 사건이 전개되는 등 서사적 측면에서는 고전소설의 특징을, 구조와 형식 측면에서는 외국 소설의 영향을 받았다. 근대적 인쇄, 출판, 유통 방식과 결합하여 문학의 본격적인 대중 유통이 시작되었다. &amp;lt;p&amp;gt;&lt;br /&gt;
&lt;br /&gt;
'''이광수의 &amp;lt;무정&amp;gt; ''' : 이전의 신소설과는 구분되는 &amp;lt;ins&amp;gt;‘최초의 근대소설’&amp;lt;/ins&amp;gt;로 분류할 수 있는 작품이다. 연재 당시, 엄청난 인기와 동시에 사회적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문학사적으로 따지면 이전까지처럼 서로 얼굴도 모르는 두 사람의 정략결혼이라는 전근대적 혼인 방식이 아닌 '연애에 기초한 혼인'을 최초로 서사화하고 이를 근대적 삶의 실천이자 심지어 민족 계몽으로까지 그 범위를 확장했다는 점에서 아주 큰 의의가 있는 작품이다. 또 '연애'라는 단어가 이 당시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지금과 같은 의미가 아닌 'LOVE', 사랑의 의미였다는 것을 고려해보면 개인과 개인이 감정의 주체로서 교제 인물을 선택하고 이로써 자아를 자각하는 의미로서도 의의가 있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green&amp;quot;&amp;gt;'''1920년대'''&amp;lt;/font&amp;gt;===&lt;br /&gt;
----&lt;br /&gt;
1920년대 한국문학은 3.1운동으로 대표되는 민족저항의식과 그로 인한 일본의 문화통치에 큰 영향을 받았다. &lt;br /&gt;
&lt;br /&gt;
 &amp;lt;p&amp;gt;&lt;br /&gt;
3.1운동의 실패로 인해 드리운 암울한 정서의 영향을 받아 감상적이면서 퇴폐적인 &amp;lt;ins&amp;gt;낭만주의 문학&amp;lt;/ins&amp;gt;이 등장하였다. &amp;lt;p&amp;gt; 한편, 낭만주의 문학에 대척점에 서있는 문예사조로 암울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자 한 &amp;lt;ins&amp;gt;사실주의 문학&amp;lt;/ins&amp;gt; 역시 등장하였다.사실주의 문학 계열 중 하나로 사회주의 사상이 본격적으로 문학계에 유입되며 '''''신경향파'''''가 대두하였다. 신경향파 문학은 낭만적 감상주의를 극복하고 한반도의 암울한 현실을 예술적 인식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주인공의 개인적인 복수, 본능적인 반항,살인,방화, 자살 등으로 작품을 마무리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 영향을 받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이란 뜻의 '''''카프'''''&amp;lt;ref&amp;gt; 1925년에 결성되어 1935년에 해체되었다. &amp;lt;/ref&amp;gt;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amp;lt;p&amp;gt; 이러한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대항하여 민족주의 진영에서는 '''''국민문학파'''''&amp;lt;ref&amp;gt; 최남선, 이광수, 염상섭 등 중견작가들의 주도로 등장하였다. &amp;lt;/ref&amp;gt;라는 사조가 등장하였다. 이들은 일제의  문화적인 예속을 거부하는 민족주의 운동을 문학적으로 반영하였으며, 그 맥락에서 시조부흥운동, 역사소설 창작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일제로부터의 해방·광복이라는 동일한 궁극적인 목표는 카프와 동일하였지만 실천 방법에 있어서 서로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p&amp;gt; &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green&amp;quot;&amp;gt;'''1930년대'''&amp;lt;/font&amp;gt;=== &lt;br /&gt;
----&lt;br /&gt;
1920년을 지배한 낭만주의 사조에 반발하여 지성과 논리를 강조하는 '''''모더니즘 문학'''''이 등장하였다. 모더니즘의 등장에는 당시 조선 식민지 사회의 시대적 배경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세계 대공황으로 경제 위기에 처한 일본이 식민지 조선에 대한 수탈을 강화하는 한편 대륙 침략을 단행함으로써 위기를 탈출하려고 하였고, 이 과정에서 당시 식민지 조선은 군사 기지의 목적으로 중화학 공업이 발달하게 되고 급속한 도시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이러한 도시화 속에서의 극단적 개인주의와 인간성 상실에 대한 문제인식을 기반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모더니즘 문학인 것이다. 영미 모더니즘에 영향을 받아 우리 나라에 모더니즘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1924년 무렵이다. 고한용(高漢容)이 &amp;lt;다다이슴＞(開闢, 51호)·＜서울 왓든 다다이스트의 이약이＞(개벽, 52호)·＜다다？ 다다!＞(동아일보, 1924.11.24.)·＜잘못 안 다다이슴＞(동아일보, 1924.12.1.) 등의 글을 발표하였다. 양주동(梁柱東)은 ＜정오 이·삼 正誤二三＞(朝鮮文壇, 12호)에서 이미지즘의 개념과 문학적 성격을 소개하고 있다.&lt;br /&gt;
&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green&amp;quot;&amp;gt;'''1940년대'''&amp;lt;/font&amp;gt;=== &lt;br /&gt;
----&lt;br /&gt;
&lt;br /&gt;
'''''서정갈래''''' &amp;lt;p&amp;gt;&lt;br /&gt;
조지훈,박목월, 박두진 세 명의 시인이 결성한 '''''청록파'''''가 등장하였다. 이들은 서정성을 극대화한 자연친화적인 시풍을 보여줬다. 이 세 사람의 시인은 이후의 활동과 함께 광복 이전과 이후의 한국시를 이어주는 징검다리로서의 구실을 했고 시의 순수성을 굳건히 지키며 시의 바른 길을 밝혀 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이 청록파 시인들의 공통적인 특징인 자연의 세계는 전기의 전원시를 한층 발전시킨 참신한 감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김수영, 박인환 등의 시인들은 이들의 시를 현실도피적이라며 비판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시는 시대 현실에 대해 도피적인 시세계라기보다 추악한 도시 현실을 외면한다는 뜻에서 자연 복귀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동양 시인의 체질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세계가 그들의 시적 근거로 형상화하였으며 광복 후 시단의 전통의 집대성에 큰 영향을 끼쳤으므로 광복부터 6·25 전쟁까지의 한 시기를 대표하게 되었다.&amp;lt;p&amp;gt; 한편, 일본제국이 확장되도 민족말살통치가 극심해지며 윤동주, 이육사, 한용운 등을 중심으로 '''''저항시'''''가 등장하였다. 검열을 피해 일본어로 쓰이기도 하였다. 당대의 시인들은 강한 검열 속에서도 민족 의식과 조국 사랑을 담은 저항시를 지속적으로 발표하였다. 그러한 당대 저항시는 자유와 희망에 대한 강렬한 염원을 반영하며, 사회적 억압을 문학적으로 승화하고 민족적 자긍심과 독립 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p&amp;gt;&lt;br /&gt;
&lt;br /&gt;
'''''서사갈래''''' &amp;lt;p&amp;gt;&lt;br /&gt;
1940년대 서사갈래는 일본의 민족말살통치의 영향으로 인해 시련을 맞이하였다. &lt;br /&gt;
이 시기를 전후로 문단에 발에 들인 작가로는 황순원, 최명익, 정인태, 현덕, 김이석, 안수길, 김영수, 정비석, 김사량, 최인욱, 곽하신, 최태웅, 임옥인, 지하련 등 이있다.&lt;br /&gt;
시에서 출발하여 시적 언어와 산문성을 결함시킨 '''''황순원'''''은 초기 단편에서 소년과 소녀를 등장시켜 그들이 겪어야 하는 통과 제의(通過祭儀) 의 아픔을 그리고 있다.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는 '기러기' , '세레나데' , '별' , '닭제' , '소나기' , '늪' 등이 있는데, 이는 유년기의 소년, 소녀들이 성인으로 가는 시련과 아픔의 과정을 통하여 역사를 헤쳐 나간다는 것의 어려움, 그런 역사에 대해서 비관하거나 절망하지 않는 면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이와 반대로 최명익은 마르크스주의적인 세계관을 토대로 모더니즘적 작품 경향을 보여 주는데, 자의식적인 성인을 주인공으로 하여 현실의 상황을 절망적이고 암담한 분위기로 조성하고 있다. 그의 대표작에는 '역설' , '장삼 이사' , '무성격자' , '비 오는 길' , '봄과 신작로'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lt;br /&gt;
한국민족대백과사전 &amp;lt;국민문학&amp;gt;, &amp;lt;카프&amp;gt;, &amp;lt;시조부흥운동&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주석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 시대별로 살펴보는 한국 문학 작품의 흐름과 변화]]&lt;br /&gt;
[[분류:김치찌개]]&lt;/div&gt;</summary>
		<author><name>고군분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B6%84%EB%A5%98:%EA%B9%80%EC%B9%98%EC%B0%8C%EA%B0%9C&amp;diff=60308</id>
		<title>분류:김치찌개</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B6%84%EB%A5%98:%EA%B9%80%EC%B9%98%EC%B0%8C%EA%B0%9C&amp;diff=60308"/>
		<updated>2025-06-23T15:21:0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고군분투: &lt;/p&gt;
&lt;hr /&gt;
&lt;div&gt;2024130040 국어국문학과 이지우&lt;br /&gt;
&lt;br /&gt;
&lt;br /&gt;
우선은 우리 조의 주제가 ''''시대별로 살펴보는 한국 문학 작품의 흐름과 변화'''임을 감안한다면 개별적인 문학 작품에 대한 설명 뿐 아니라 그 시대의 사회적 분위기, 역사적 사건, 문학적 흐름 등을 포괄적이면서도 구체적으로 서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한 측면에서 조선초기, 조선중기, 조선후기, 근대, 현대 5가지의 시대를 각각 개인 페이지로 만들자고 제안하였고 그를 통해 시대 설명에 대한 충분한 구체성을 확보하는 결과를 얻게 되었다. 우리 조의 궁극적 의도는 문학 작품과 그 배경을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것이었기에 시대적 배경에 대한 풍부한 서술을 통하여 개별 작품에 대한 심층적 이해를 도모할 필요가 있었고 5가지의 시대 페이지를 개별적으로 만든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lt;/div&gt;</summary>
		<author><name>고군분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4%91%EC%95%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296</id>
		<title>광야ᐧ༚̮ᐧ</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4%91%EC%95%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296"/>
		<updated>2025-06-23T14:57:5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고군분투: /* 각주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lt;br /&gt;
|+광야&lt;br /&gt;
|'''장르''' || 저항시, 서정시&lt;br /&gt;
|-&lt;br /&gt;
| '''작가''' || 이육사&lt;br /&gt;
|-&lt;br /&gt;
| '''시대''' || 1945년 - [[근대]]   &lt;br /&gt;
|-&lt;br /&gt;
| '''배경'''|| 일제강점기 &lt;br /&gt;
|}&lt;br /&gt;
&lt;br /&gt;
== 원문 ==&lt;br /&gt;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까마득한 날에&lt;br /&gt;
하늘이 처음 열리고&lt;br /&gt;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lt;br /&gt;
&lt;br /&gt;
모든 산맥들이&lt;br /&gt;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lt;br /&gt;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lt;br /&gt;
&lt;br /&gt;
끊임없는 광음을&lt;br /&gt;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lt;br /&gt;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lt;br /&gt;
&lt;br /&gt;
지금 눈 내리고&lt;br /&gt;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lt;br /&gt;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lt;br /&gt;
&lt;br /&gt;
다시 천고의 뒤에&lt;br /&gt;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lt;br /&gt;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 배경 ==&lt;br /&gt;
시인 이육사의 말년 작품으로 유고로 전하여지다가, 그가 사망한 후인 1945년 12월 17일『자유신문』에 동생 이원조(李源朝)에 의하여 '''「꽃」'''과 함께 발표되었다. 광복 이전 일제강점기 시절의 창작된 시로 일본에 대한 저항정신을 서정적 표현을 통해 비유적으로 나타낸 시이다. 그의 생전 마지막 작품이 1939년에 발표된 것을 감안하였을 땐 1939년부터 그가 사망한 1944년 사이에 쓰였을 것으로 파악된다. 사실 광야라는 작품 자체에는 기존의 저항시와는 다르게 일제에 대한 직접적인 저항 등이 표출되어 있지는 않다. 하지만 이육사의 생애와 그의 다른 작품들을 감안하였을 때 광야 역시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드러낸 '''저항시'''라고 봐야 옳을 것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 작가 ==&lt;br /&gt;
[[파일:ㅇㅇㅅ.jpg|200px|left]]&lt;br /&gt;
&amp;lt;p&amp;gt;&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fbe1df;“&lt;br /&gt;
|+ 이육사 李陸史&lt;br /&gt;
|'''출생''' || 1904년 5월 18일&lt;br /&gt;
|-&lt;br /&gt;
| '''사망''' || 1944년 1월 16일&lt;br /&gt;
|-&lt;br /&gt;
| '''본명''' || 이원록(李源祿)&lt;br /&gt;
|-&lt;br /&gt;
| '''작품'''||  광야, 황혼, 절정, 청포도, 강 건너간 노래&lt;br /&gt;
|- &lt;br /&gt;
| '''직업''' || 시인, 독립운동가, 언론인&lt;br /&gt;
|}&lt;br /&gt;
&amp;lt;p&amp;gt;&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c92e16&amp;quot;&amp;gt;이육사&amp;lt;/font&amp;gt;는 일제강점기의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경상북도 예안&amp;lt;ref&amp;gt;현재의 경상북도 안동&amp;lt;/ref&amp;gt;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대한제국 시기 장릉(章陵) 참봉을 지낸 조부 이중직(李中稙, 1847 ~ 1916. 1. 17)에게서 소학을 배우는 등 한문학을 공부하다가 조부가 사망한 1916년, 그의 가문인 진성이씨 문중에서 설립한 보문의숙(이후 도산공립보통학교로 개칭)에서 수학하기 시작하였다. 어린 시절 한문학을 공부한 것의 영향으로 그의 시에서는 한시의 기승전결과 유사한 형식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시작한 것은 대구로 이사한 1925년이다. 그는 형제들과 함께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bee826&amp;quot;&amp;gt;의열단&amp;lt;/span&amp;gt;'''&amp;lt;ref&amp;gt;1919년에 찯단했다&amp;lt;/ref&amp;gt;에 가입한 이후 1927년에 일어난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가담한 혐의로 형제 이원기, 이원일과 함께 처음으로 투옥된다. 이때 본인의 수감번호였던 264에서 필명 '''이육사'''&amp;lt;ref&amp;gt;많은 이들이 본명으로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amp;lt;/ref&amp;gt;를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1930년, 27세의 나이로 &amp;lt;조선일보&amp;gt;에 &amp;lt;말&amp;gt;을 발표하며 처음으로 등단하게 되고 조선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잠시 일하기도 하였다. 1932년 난징에 있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입교한 그는 특수 부대원 훈련을 받았고 이듬해 4월에 졸업한다. 같은 해 7월에 곧바로 귀국한 그는 본인의 필명으로 '''&amp;lt;황혼&amp;gt;, &amp;lt;신조선&amp;gt;''' 등을 발표하며 창작활동에도 매진한다. 하지만 1934년, 그는 의열단 출신이라는 이유로 경성부 본정경찰서에 의해 검거된 뒤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다. 혹독한 고문을 받고 간신히 풀려난 그는, 그의 대표작이자 저항정신, 광복에 대한 염원이 담긴  &amp;lt;청포도&amp;gt;, &amp;lt;절정&amp;gt; 등을 발표한다. 1943년 베이징으로 압송된 그는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교도소에서 결국 옥사하게 된다. 1968년에는 고향 안동에 그의 비석이 건립되었고 2000년에는 이육사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lt;br /&gt;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0550 이육사 문학관]이 건설되어 매년 문학의 밤, 육사 백일장, 기념 세미나 등을 개최하고 있다.&lt;br /&gt;
&lt;br /&gt;
== 내용 및 해석 ==&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cCeppR6Gs5I?si=QhqKE9f7gPlVqsdi&amp;quot; title=&amp;quot;YouTube video player&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 &amp;lt;p&amp;gt; '''광야'''는 5연 15행의 자유시로, 1~3연에서는 과거를 4연에서는 현재의 비관적 상황에 이어 미래의 모습을 그린 5연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3단계로 시가 구성된다. 우선 1연에서는 천지가 창조되기 이전의 근원적 상황을 표현하고 2연에서는 산맥과 같은 광대한 자연조차도 침범하지 못하는 신성한 광야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3연에서는 태초의 자연상태에서 벗어나 문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1-3연에 걸쳐 광야가 형성되고 발전하는 과정을 순차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그 이후 4연에서는 '''지금'''이라는 시어를 통해 현재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 현재의 모습은 '''눈 내리고'''라는 구절을 통해 나타나다시피 암울한 상황이다. 그러면서도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를 통해 담담하고 결연한 극복 의지를 드러내며 5연에서는 미래의 어느 시점에 반드시 '''백마 타고 오는 노인'''이 올 것을 예언하며 현실에 대한 극복의지와 더불어 긍정적 미래에 대한 기대를 보여준다. &amp;lt;p&amp;gt; 이 시에 나타나는 특징으로는 태초부터 천고의 뒤까지의 광범위한 시간의 압축과 더불어 광야의 광활한 공간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광야’는 이상적인 공간, 즉 이육사가 지닌 이념이 실현되는 공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공간의 무한성과 광활함은 이육사 시의 대표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이육사는 이 시에서 직접적인 저항정신의 표출 등을 극도로 자제하고 시의 처음부터 끝까지 절제되고 담담한 어조로 일관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기법은 또다른 대표적 저항시인인 '''윤동주'''와는 확연히 대비되는 것으로 윤동주가 고백적 어조로 본인이 느낀 무기력함, 부끄러움 등을 가감없이 시에 표현하였다면 이육사는  매우 함축적이고 세련되었으며 강렬한 시어를 통해 독자적인 시세계를 구축한 것이다.&lt;br /&gt;
== 참고문헌 ==&lt;br /&gt;
&lt;br /&gt;
이육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5444 &amp;lt;p&amp;gt;&lt;br /&gt;
이육사 문학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0550 &amp;lt;p&amp;gt;&lt;br /&gt;
이육사의 &amp;lt;광야&amp;gt; 연구 - 비평문학, 한국비평문학회, 박순원, 2011&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시대별로 살펴보는 한국 문학 작품의 흐름과 변화]]&lt;br /&gt;
[[분류:김치찌개]]&lt;/div&gt;</summary>
		<author><name>고군분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86%8C%EC%84%A4%EA%B0%80_%EA%B5%AC%EB%B3%B4_%EC%94%A8%EC%9D%98_%EC%9D%BC%EC%9D%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295</id>
		<title>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ᐧ༚̮ᐧ</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86%8C%EC%84%A4%EA%B0%80_%EA%B5%AC%EB%B3%B4_%EC%94%A8%EC%9D%98_%EC%9D%BC%EC%9D%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295"/>
		<updated>2025-06-23T14:57:4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고군분투: /* 각주 */&lt;/p&gt;
&lt;hr /&gt;
&lt;div&gt;[[파일:ㄱㅂ.jpg|200px|left]]&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ced1fc;“&lt;br /&gt;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lt;br /&gt;
|'''장르''' || 모더니즘 소설&lt;br /&gt;
|-&lt;br /&gt;
| '''작가''' || 박태원&lt;br /&gt;
|-&lt;br /&gt;
| '''시대''' || 1934년 - [[근대]]   &lt;br /&gt;
|-&lt;br /&gt;
| '''배경'''|| 일제강점기, 지식인의 무력함 &lt;br /&gt;
|}&lt;br /&gt;
&lt;br /&gt;
== 장르 ==&lt;br /&gt;
'''모더니즘'''은 19세기 말과 20세기에 유럽에서 전방위적으로 나타난 예술운동이자 현상으로 모더니즘 문학은 전통과의 단절 및 개인주의 등을 대표적인 특징으로 한다. 제 1차 세계 대전 및 급격한 기술 발전으로 야기된 사회적 변화가 문학 주제에서의 ‘ 19세기 기성 전통과의 단절 ‘ 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때, 19세기의 문학 전통은 ''' 리얼리즘'''을 표방한다. 인간의 삶과 그를 둘러싼 환경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모방 및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리얼리즘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모더니즘은 전적인 주관성과 개인적 경험을 작품의 근원으로 여긴다. 이는 곧 문학의 탈도구성과 독자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19세기 리얼리즘 하에서 문학은 독자들을 계몽시키거나 그들에게 오락을 제공하려는 뚜렷한 목적성을 지니고 있던 반면 모더니즘 문학은 그 어떠한 목적성에서도 벗어나 ''' 문학만을 위한 문학''', 즉 자기목적성만을 보여준다.&lt;br /&gt;
&amp;lt;p&amp;gt;&lt;br /&gt;
'''모더니즘 소설''' 역시 전통적인 소설 구조와 서술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식과 주제를 탐구하는 양상을 보인다. 모더니즘 소설은 '''의식의 흐름''' 기법을 통해 등장인물들의 내면 세계, 심리, 의식을 가감없이 드러내고, 전통적 문법과 구문을 깨뜨리며 새로운 서술 방식을 시도하는 '''언어 실험''', 시작 - 중간 - 결말이라는 구조에서 벗어나 파편화되고 비정형적인 서사 전개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인간 정신의 복잡성과 비합리성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 작가 ==&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fcddce;“&lt;br /&gt;
|+ 박태원 朴泰遠&lt;br /&gt;
|-&lt;br /&gt;
|colspan=&amp;quot;2&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 |  [[File:ㅂㅌㅇ.jpg|100px]]&lt;br /&gt;
|-&lt;br /&gt;
|'''출생''' || 1909년 12월 7일&lt;br /&gt;
|-&lt;br /&gt;
| '''사망''' || 1986년 7월 10일&lt;br /&gt;
|-&lt;br /&gt;
| '''호''' || 구보(丘甫, 仇甫, 九甫)&amp;lt;ref&amp;gt;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라는 작품 이름도 여기에서 비롯한 것이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저서'''|| &amp;lt;천변풍경&amp;gt;, &amp;lt;골목 안&amp;gt;&amp;lt;ref&amp;gt;2024년 대학수학능력시험에 출제되기도 하였다.&amp;lt;/ref&amp;gt;&lt;br /&gt;
|- &lt;br /&gt;
| '''직업''' || 소설가, 시인, 문학평론가&lt;br /&gt;
|}&lt;br /&gt;
&lt;br /&gt;
'''박태원'''은 조선의 소설가, 시인, 문학평론가로 이상, 정지용 등과 더불어 1930년대 모더니즘 문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해방 이후 6.25 전쟁 중 아내와, 자식을 놔두고 홀로 월북하여 그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아주 자세히 알려져 있지는 않다.&lt;br /&gt;
1909년 12월 7일 대한제국 시기 서울 종로에서 태어난 그는 숙부(박용남)가 서양의학 소아내과 의사, 숙모가 보통학교 교사 등으로 일하는 제법 부유하고 개화적인 이른바 서구적 집안 분위기에서 자랐다. 이후  경성제1고등보통학교&amp;lt;ref&amp;gt;현재의 경기고등학교이다&amp;lt;/ref&amp;gt; 재학 중이던 1926년 《조선문단》에 시 〈누님〉을 발표하며 18세의 나이로 등단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amp;lt;ref&amp;gt;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창작한 &amp;lt;반 년간&amp;gt;이라는 작품이 있다.&amp;lt;/ref&amp;gt; 일본 호세이 대학에 진학하지만 1929년 11월, 1학년 시절에 중퇴한 후 귀국하여 1930년 신생 10월호에 단편 소설 〈수염〉을 발표하고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시작하였다. 본격적으로 문단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33년 이상,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조용만, 이효석 등과 함께 문학 동인들의 모임인 구인회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이들 구인회는 순수문학적인 성격을 바탕으로 실험적인 기법과 문장을 문학의 본령으로 내세웠다. 박태원의 소설은 당시로써는 모험적이고 실험적인 시도였기 때문에 당대 문단의 주류를 이루던 사회주의 성향의 '''카프'''와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1930년대 왕성하게 활동하여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1934)''', '''방란장 주인(1936)''', '''천변풍경(1936)''' 등과 같은 대표작들을 발표하였다. 1940년대 일본의 탄압이 심해졌고 이 시기에 박태원은 아세아의 여명(1941.2), 군국의 어머니(1942), 「원구(1945.5-8)」 등 일제의 대동아전쟁을 찬양하고 군국주의를 미화하는 친일 성향 작품들을 발표하여 친일파로 전향하였다는 비판이 있기도 하다. &amp;lt;p&amp;gt; &lt;br /&gt;
광복 후인 1946년 좌익 계열의 문학인 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 등을 맡는 등 잠시 남로당 계열의 문예 운동에 몸을 담았다가, 1947년 탈맹(문동 탈퇴)을 한 이듬해 1948년 국민보도연맹에 사무위원으로 가입하며 본격적인 사회주의, 좌익 성향의 활동을 보인다. 결국에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6.25 전쟁 중 구인회 시절 절친한 동료였던 이태준을 포함해 정인택 설정식 이용악 등과 함께 월북을 감행하여 평양에 정착한다. 전술한 바와 같이 그가 사회주의 성향 단체인 카프와 한때 갈등을 빚기도 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꽤나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amp;lt;p&amp;gt;'''월북 후'''의 생애는 북한 소설가 정태은의 글을 통해 조금이나마 확인된다. 1955년까지 평양문학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던 그는 월북 전의 행보를 이유로 평안남도 강서 지방에서 4년 간 강제 노동을 하였다고 한다. 이후 1960년 다시 대학교수로 복귀하기는 하였지만 강제노동의 휴유증으로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는 지경에 이른다. 청각과 언어능력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창작 활동을 포기하지 않아 동학농민전쟁을 소재로 한 대하 역사소설 &amp;lt; 갑오농민전쟁 &amp;gt;, &amp;lt;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amp;gt; 등을 창작하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tywBeKArUCo?si=Xt0095foxDsQa-uw&amp;quot; title=&amp;quot;YouTube video player&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 &amp;lt;p&amp;gt;&lt;br /&gt;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대학 노트를 들고 다니는 주인공 '''구보 씨'''가 하루 동안 경성을 돌아다니면서 보는 것과 그에 유발되는 상념 및 의식적으로 행하는 사색을 통해 일제 강점기 조선 경성부에 거주하는 '''지식인의 무기력함과 그 일상'''을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다. 주인공의 동선과 그가 만나는 인물들 대부분이 체계적이거나 작가의 치밀한 구성으로 이루어져있다기보다는 철저히 우연을 따르는 점이 특징적이다.&lt;br /&gt;
시력이 약하고 장가도 안 간 무기력한 소설가 구보씨는 무기력한 삶을 살아가는 인물로, 아침에 제 방에서 나와 마루 끝에 놓인 구두를 신고, 기둥 못에 걸린 단장을 들고 문을 나와 걷기도 한다. 그러다가 우두커니 다리 곁에 가 서 있는 자신의 무의미한 행동을 새삼스럽게 깨달은 그는 종로 네거리를 바라보고 걷다가, 다방으로 돌아다닌다. 문득 구보씨는 모든 사람을 정신병자라고 생각해놓고 관찰해 보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낀다. 주인공 구보씨는 그런 것에 흥미를 느끼려는 자기가 이미 환자임을 깨닫고, 비가 내리는 거리를 걸어 집으로 향한다.. 집에서 출발하 여 광교, 종로, 화신상회, 조선은행 앞, 경성역, 경찰서 앞 다방, 종각 뒤의 술집, 카페, 종로 거리를 거쳐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동안에 느낀 복잡한 감정들을 교차시키면서 행복의 가능성을 모색해 보려 한다. 구보는 경성의 온갖 거리를 돌아다니며 그는 작년 여름에 맞선을 본 여인을 만나기도 하고 경성역에서는 노파, 시골 신사, 병자들을 관찰하면서 구보는 '''당대의 세태, 사회문제 등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보여주면서도 어떠한 행동도 보여주지 못하는 일제 강점기 '''지식인의 나약한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lt;br /&gt;
&lt;br /&gt;
기존의 소설이 인물 간의 극적 갈등, 사건의 개연적인 전개를 중시했다면 이 소설은 거리의 풍경과 주변 인물의  묘사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 과정에서 '''자유연상 기법'''을 활용해서 발단 - 전개-위기-절정-결말의 형태와는 달리 내면에 떠오르는 연상과정을 작품 속에 드러내고&amp;lt;ref&amp;gt;모더니즘 소설의 일반적인 특징이기도 하다&amp;lt;/ref&amp;gt;과거와 현재,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구보 씨의 내면 흐름에 초점을 맞추어 그의 사고와 심리를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상의 특징을 통해 사회문제나 그 시대의 세태를 인식하고 비판적 사고로 지닌 인물이지만,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하는 일제 강점기 지식인인 구보 씨의 나약한 모습을 효과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amp;lt;p&amp;gt;&lt;br /&gt;
또한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를 활용하기도 한다. 표면적으로는 작품의 서술자와 주인공이 분리되어 있는 3인칭 시점을 취하고 있으나 서술자가 인물의 시점에 동화되어 그 인물의 시점에서 서술을 전개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기법을 통해 서술자와 등장인물 사이의 거리를 사실상 소멸시킴으로써 독자 입장에선 주인공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분석할 수 있게 된다. &amp;lt;p&amp;gt; 주인공 구보 씨는 정신, 육체 모든 면에서 '''당대의 자본주의적 현실과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다. 그 또한 세속적 일상과 고의적으로 거리를 두고 세계와의 화해를 거부하는 고독한 삶을 자발적으로 선택한 인물이지만 동시에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세계와의 불편한 관계를 거부하며 화해'''를 꿈꾸기도 한다.&lt;br /&gt;
&lt;br /&gt;
== 배경과 의의 ==&lt;br /&gt;
&lt;br /&gt;
이 작품의 주인공인 구보 씨는 작가인 '''박태원의 모습인 반영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까지 다녀왔던 일제 강점기 시기의 지식인이었던 박태원이 당대 사회에 느끼고 있던 문제인식, 환멸, 그리고 거기에서 비롯된 무기력함을 소설을 통해 표출한 것이라 파악된다. 또한 단순히 세태의 파악에 그치지 않고 일상적인 행복을 추구하고자 하는 지향을 작품 내내 꾸준히 보임으로써 문학사적 진전을 보여준다. 또한 전술한 바와 같이 자유연상 기법 등을 활용해 모더니즘 소설로써의 성격을 강하게 드러내기도 한다.&lt;br /&gt;
1930년대는 일제가 만주 사변을 일으키면서 우리 민족에 대한 탄압을 더욱 심하게 하던 시기였다. 그 당시의 경성은 대한 제국의 멸망과 함께 조선 총독부의 정책에 따라 대대적인 '''공간의 재조직'''이 이루어졌다. 일본의 주도 하에 한국인들의 이익과는 상관없이 이루어진 이러한 도시 계획은 기존의 농경생활이 갖는 연대감이 사라지고 '''개인주의'''가 만연하는 병폐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로 인해 '''도시 구성원 개갠인 간의 불신의 감정 및 고독과 소외 현상'''이 증폭되며 문명의 수혜를 누리지 못하는 계층이 느끼는 빈곤감과 타락이 심화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경성이라는 '''도시를 공간적 배경으로 삼는 소설'''들이 대거 등장하였던 것이다. &lt;br /&gt;
&lt;br /&gt;
== 참고 문헌 ==&lt;br /&gt;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위키피디아 https://ko.wikipedia.org/wiki/%EC%86%8C%EC%84%A4%EA%B0%80_%EA%B5%AC%EB%B3%B4%EC%94%A8%EC%9D%98_%EC%9D%BC%EC%9D%BC &amp;lt;p&amp;gt;&lt;br /&gt;
근대성과 근대문학, 나병철 지음, 문예출판사, 1996 &amp;lt;p&amp;gt;&lt;br /&gt;
박태원, 위키피디아 https://ko.wikipedia.org/wiki/%EB%B0%95%ED%83%9C%EC%9B%90_(1909%EB%85%84 &amp;lt;p&amp;gt;&lt;br /&gt;
이은선, ｢박태원 소설과 ‘재현’의 문제｣ (『현대소설연구』 44, 한국현대소설학회, 2010)&lt;br /&gt;
&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분류: 시대별로 살펴보는 한국 문학 작품의 흐름과 변화]]&lt;br /&gt;
[[분류:김치찌개]]&lt;/div&gt;</summary>
		<author><name>고군분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7%BC%EB%8C%80&amp;diff=60294</id>
		<title>근대</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7%BC%EB%8C%80&amp;diff=60294"/>
		<updated>2025-06-23T14:57:2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고군분투: /*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역사적 관점''' : 19세기 후반 개항, 갑신정변, 갑오개혁 전후 ~ 1945년 광복까지 &amp;lt;p&amp;gt;&lt;br /&gt;
'''문학사적 관점''' : 1900년대 초반&amp;lt;ref&amp;gt;주로 이광수가 '''무정'''을 발표한 1917년을 근대문학의 시작으로 본다&amp;lt;/ref&amp;gt;  ~ 1945년 광복까지 &lt;br /&gt;
&lt;br /&gt;
==근대문학의 흐름==&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lt;br /&gt;
&lt;br /&gt;
! 시기 || 서정갈래 || 서사갈래&lt;br /&gt;
|-&lt;br /&gt;
|'''1910년대''' || 상징주의 시, 현대적 자유시 || 신소설&lt;br /&gt;
|-&lt;br /&gt;
| '''1920년대''' || 낭만주의 시 || 낭만주의 소설, 현실주의 소설 &lt;br /&gt;
|-&lt;br /&gt;
| '''1930년대''' || 모더니즘 시 || 모더니즘 소설, 농촌 소설 &lt;br /&gt;
|-&lt;br /&gt;
| '''1940년대'''|| 청록파, 저항시 ||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1910년대'''===&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서정갈래'''''&amp;lt;p&amp;gt;김억&amp;lt;ref&amp;gt;시인 김소월의 스승으로 알려져있다. &amp;lt;/ref&amp;gt; 을 중심으로 &amp;lt;ins&amp;gt;상징주의 시&amp;lt;/ins&amp;gt;가 등장하였다. 상징주의는 19세기 후반 프랑스의 사실주의, 자연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등장한 문예사조이다. 낭만주의와 같이 현실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문학적으로 표현하려 했고, 이를 위해 상징적 표현을 사용하였다. 한국에서는 1918년에 김억이 최초의 문예 주간지인 태서문예신보에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와 시론을 번역하여 소개하였다. 김억은 내적 리듬, 즉 내재율만을 가진 자유시는 자칫 산문과 구별되기 어려울 수 있다며 엄격한 외재율, 그 중에서도 중국 한시에 나타나는 압운&amp;lt;ref&amp;gt; 여러 행을 걸쳐 발현되는 규칙이다. 비슷한 개념으로 rhyme을 떠올릴 수 있다. &amp;lt;/ref&amp;gt;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김억의 이러한 주장은 크게 주목받지 못하였다. &amp;lt;p&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서사갈래''''' &amp;lt;p&amp;gt;&lt;br /&gt;
'''신소설 ''': 고전소설에서 근대소설로 넘어가는 분기점에 위치한 &amp;lt;ins&amp;gt;과도기적 소설&amp;lt;/ins&amp;gt;이다. 1906년 대한매일신보의 광고에서 처음 사용된 단어로, 개화기 소설이라고도 부른다. 인간의 이성과 경험을 신뢰하고 이를 통해 더 나은 사회를 만들려 했던 계몽주의의 사상이 담겨있다. &lt;br /&gt;
주로 우연에 의해 사건이 전개되는 등 서사적 측면에서는 고전소설의 특징을, 구조와 형식 측면에서는 외국 소설의 영향을 받았다. 근대적 인쇄, 출판, 유통 방식과 결합하여 문학의 본격적인 대중 유통이 시작되었다. &amp;lt;p&amp;gt;&lt;br /&gt;
&lt;br /&gt;
'''이광수의 &amp;lt;무정&amp;gt; ''' : 이전의 신소설과는 구분되는 &amp;lt;ins&amp;gt;‘최초의 근대소설’&amp;lt;/ins&amp;gt;로 분류할 수 있는 작품이다. 연재 당시, 엄청난 인기와 동시에 사회적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문학사적으로 따지면 이전까지처럼 서로 얼굴도 모르는 두 사람의 정략결혼이라는 전근대적 혼인 방식이 아닌 '연애에 기초한 혼인'을 최초로 서사화하고 이를 근대적 삶의 실천이자 심지어 민족 계몽으로까지 그 범위를 확장했다는 점에서 아주 큰 의의가 있는 작품이다. 또 '연애'라는 단어가 이 당시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지금과 같은 의미가 아닌 'LOVE', 사랑의 의미였다는 것을 고려해보면 개인과 개인이 감정의 주체로서 교제 인물을 선택하고 이로써 자아를 자각하는 의미로서도 의의가 있다.&lt;br /&gt;
&lt;br /&gt;
==='''1920년대'''===&lt;br /&gt;
----&lt;br /&gt;
1920년대 한국문학은 3.1운동으로 대표되는 민족저항의식과 그로 인한 일본의 문화통치에 큰 영향을 받았다. &lt;br /&gt;
&lt;br /&gt;
 &amp;lt;p&amp;gt;&lt;br /&gt;
3.1운동의 실패로 인해 드리운 암울한 정서의 영향을 받아 감상적이면서 퇴폐적인 &amp;lt;ins&amp;gt;낭만주의 문학&amp;lt;/ins&amp;gt;이 등장하였다. &amp;lt;p&amp;gt; 한편, 낭만주의 문학에 대척점에 서있는 문예사조로 암울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자 한 &amp;lt;ins&amp;gt;사실주의 문학&amp;lt;/ins&amp;gt; 역시 등장하였다.사실주의 문학 계열 중 하나로 사회주의 사상이 본격적으로 문학계에 유입되며 '''''신경향파'''''가 대두하였다. 신경향파 문학은 낭만적 감상주의를 극복하고 한반도의 암울한 현실을 예술적 인식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주인공의 개인적인 복수, 본능적인 반항,살인,방화, 자살 등으로 작품을 마무리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 영향을 받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이란 뜻의 '''''카프'''''&amp;lt;ref&amp;gt; 1925년에 결성되어 1935년에 해체되었다. &amp;lt;/ref&amp;gt;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amp;lt;p&amp;gt; 이러한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대항하여 민족주의 진영에서는 '''''국민문학파'''''&amp;lt;ref&amp;gt; 최남선, 이광수, 염상섭 등 중견작가들의 주도로 등장하였다. &amp;lt;/ref&amp;gt;라는 사조가 등장하였다. 이들은 일제의  문화적인 예속을 거부하는 민족주의 운동을 문학적으로 반영하였으며, 그 맥락에서 시조부흥운동, 역사소설 창작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일제로부터의 해방·광복이라는 동일한 궁극적인 목표는 카프와 동일하였지만 실천 방법에 있어서 서로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p&amp;gt; &lt;br /&gt;
&lt;br /&gt;
==='''1930년대'''=== &lt;br /&gt;
----&lt;br /&gt;
1920년을 지배한 낭만주의 사조에 반발하여 지성과 논리를 강조하는 '''''모더니즘 문학'''''이 등장하였다. 모더니즘의 등장에는 당시 조선 식민지 사회의 시대적 배경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세계 대공황으로 경제 위기에 처한 일본이 식민지 조선에 대한 수탈을 강화하는 한편 대륙 침략을 단행함으로써 위기를 탈출하려고 하였고, 이 과정에서 당시 식민지 조선은 군사 기지의 목적으로 중화학 공업이 발달하게 되고 급속한 도시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이러한 도시화 속에서의 극단적 개인주의와 인간성 상실에 대한 문제인식을 기반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모더니즘 문학인 것이다. 영미 모더니즘에 영향을 받아 우리 나라에 모더니즘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1924년 무렵이다. 고한용(高漢容)이 &amp;lt;다다이슴＞(開闢, 51호)·＜서울 왓든 다다이스트의 이약이＞(개벽, 52호)·＜다다？ 다다!＞(동아일보, 1924.11.24.)·＜잘못 안 다다이슴＞(동아일보, 1924.12.1.) 등의 글을 발표하였다. 양주동(梁柱東)은 ＜정오 이·삼 正誤二三＞(朝鮮文壇, 12호)에서 이미지즘의 개념과 문학적 성격을 소개하고 있다.&lt;br /&gt;
&lt;br /&gt;
==='''1940년대'''=== &lt;br /&gt;
----&lt;br /&gt;
&lt;br /&gt;
'''''서정갈래''''' &amp;lt;p&amp;gt;&lt;br /&gt;
조지훈,박목월, 박두진 세 명의 시인이 결성한 '''''청록파'''''가 등장하였다. 이들은 서정성을 극대화한 자연친화적인 시풍을 보여줬다. 이 세 사람의 시인은 이후의 활동과 함께 광복 이전과 이후의 한국시를 이어주는 징검다리로서의 구실을 했고 시의 순수성을 굳건히 지키며 시의 바른 길을 밝혀 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이 청록파 시인들의 공통적인 특징인 자연의 세계는 전기의 전원시를 한층 발전시킨 참신한 감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김수영, 박인환 등의 시인들은 이들의 시를 현실도피적이라며 비판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시는 시대 현실에 대해 도피적인 시세계라기보다 추악한 도시 현실을 외면한다는 뜻에서 자연 복귀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동양 시인의 체질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세계가 그들의 시적 근거로 형상화하였으며 광복 후 시단의 전통의 집대성에 큰 영향을 끼쳤으므로 광복부터 6·25 전쟁까지의 한 시기를 대표하게 되었다.&amp;lt;p&amp;gt; 한편, 일본제국이 확장되도 민족말살통치가 극심해지며 윤동주, 이육사, 한용운 등을 중심으로 '''''저항시'''''가 등장하였다. 검열을 피해 일본어로 쓰이기도 하였다. 당대의 시인들은 강한 검열 속에서도 민족 의식과 조국 사랑을 담은 저항시를 지속적으로 발표하였다. 그러한 당대 저항시는 자유와 희망에 대한 강렬한 염원을 반영하며, 사회적 억압을 문학적으로 승화하고 민족적 자긍심과 독립 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lt;br /&gt;
&lt;br /&gt;
&amp;lt;p&amp;gt;&lt;br /&gt;
&lt;br /&gt;
'''''서사갈래''''' &amp;lt;p&amp;gt;&lt;br /&gt;
1940년대 서사갈래는 일본의 민족말살통치의 영향으로 인해 시련을 맞이하였다. &lt;br /&gt;
이 시기를 전후로 문단에 발에 들인 작가로는 황순원, 최명익, 정인태, 현덕, 김이석, 안수길, 김영수, 정비석, 김사량, 최인욱, 곽하신, 최태웅, 임옥인, 지하련 등 이있다.&lt;br /&gt;
시에서 출발하여 시적 언어와 산문성을 결함시킨 '''''황순원'''''은 초기 단편에서 소년과 소녀를 등장시켜 그들이 겪어야 하는 통과 제의(通過祭儀) 의 아픔을 그리고 있다.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는 '기러기' , '세레나데' , '별' , '닭제' , '소나기' , '늪' 등이 있는데, 이는 유년기의 소년, 소녀들이 성인으로 가는 시련과 아픔의 과정을 통하여 역사를 헤쳐 나간다는 것의 어려움, 그런 역사에 대해서 비관하거나 절망하지 않는 면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이와 반대로 최명익은 마르크스주의적인 세계관을 토대로 모더니즘적 작품 경향을 보여 주는데, 자의식적인 성인을 주인공으로 하여 현실의 상황을 절망적이고 암담한 분위기로 조성하고 있다. 그의 대표작에는 '역설' , '장삼 이사' , '무성격자' , '비 오는 길' , '봄과 신작로'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lt;br /&gt;
한국민족대백과사전 &amp;lt;국민문학&amp;gt;, &amp;lt;카프&amp;gt;, &amp;lt;시조부흥운동&amp;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주석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 시대별로 살펴보는 한국 문학 작품의 흐름과 변화]]&lt;br /&gt;
[[분류:김치찌개]]&lt;/div&gt;</summary>
		<author><name>고군분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5%AC%EC%9A%B4%EB%AA%BD%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293</id>
		<title>구운몽ᐧ༚̮ᐧ</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5%AC%EC%9A%B4%EB%AA%BD%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293"/>
		<updated>2025-06-23T14:57:1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고군분투: /* 각주 */&lt;/p&gt;
&lt;hr /&gt;
&lt;div&gt;[[파일:ㄱㅇㅁ.jpg|right]]&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dbf0fa;“&lt;br /&gt;
|+구운몽 &lt;br /&gt;
|'''장르''' || 고전 소설 ( 몽자류 소설, 영웅 소설 ) &lt;br /&gt;
|-&lt;br /&gt;
| '''작가''' || 김만중&lt;br /&gt;
|-&lt;br /&gt;
| '''시대''' || 1687년 - [[조선 후기]]   &lt;br /&gt;
|-&lt;br /&gt;
| '''배경'''|| 불교, 도교 사상&lt;br /&gt;
|}&lt;br /&gt;
&amp;lt;p&amp;gt; &lt;br /&gt;
&lt;br /&gt;
== 장르 ==&lt;br /&gt;
&lt;br /&gt;
구운몽은 한국의 '''고전소설'''이다. 이본이 다수 존재하며 어떤 것이 원본인지 특정하기 어려운 고전소설의 특성상 구운몽을 고전소설의 하위갈래 중 하나로 규정짓기는 어렵다고 할 수 있다. 더불어 구운몽은 일반적인 고전소설과 비교하여 심층적인 서사 구조를 가지기에 단일 작품이 '''몽자류 소설, 영웅 소설, 전기 소설'''의 특징을 모두 보여주는 특이한 사례라고 봐야 할 것이다. 당시에 매우 큰 대중적 인기를 끌었을 것으로 파악되며 그 영향력으로 인해 &amp;lt;옥루몽&amp;gt;, &amp;lt;옥련몽&amp;gt; 등의 몽자류 소설에도 만만치 않은 영향을 끼쳤다. &amp;lt;p&amp;gt; 몽자류 소설은 글자 그대로 ‘몽(夢)’자가 붙은 소설&amp;lt;ref&amp;gt;몽유록계 소설 역시 ‘몽(夢)’자가 붙지만 몽자류 소설과는 다르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 &amp;lt;/ref&amp;gt;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 소설의 구조는 환몽구조로 주인공이 꿈을 꾸는 과정을 거쳐 꿈 속에서 다른 인물로 태어나 새로운 삶을 경험한 뒤에 다시 꿈에서 깨는 과정을 거쳐 심오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구조이다. &amp;lt;p&amp;gt; 주인공 성진이 입몽 이후 지상계에서 젊은 나이에 높은 관직에 오르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등 구운몽은 영웅적 일대기의 구조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영웅소설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구운몽을 분석할 때 주로 환몽구조, 천상계에 주목하지만 실제로 구운몽은 지상계에서 성진이 보내는 영웅적 삶이 큰 분량을 차지한다. 영웅소설, 영웅적 일대기는 당시 향유층 사이에서 가장 대중적 인기가 높았던 서사인 만큼 구운몽의 대중성, 통속성을 확인할 수 있다. &amp;lt;p&amp;gt; 전기소설은 ‘기이한 이야기’라는 뜻으로 작품의 환상성, 비현실성이 그 특징이다. 특이하게도 구운몽은 지상계에서 그 전기적 특징이 드러난다.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작가 ==&lt;br /&gt;
&lt;br /&gt;
[[파일:ㄱㅁㅈ.png]]&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d2bcfa;“&lt;br /&gt;
|+ 김만중(金萬重)&lt;br /&gt;
|'''출생''' || 1637년 3월 6일 &lt;br /&gt;
|-&lt;br /&gt;
| '''사망''' || 1692년 6월 14일&lt;br /&gt;
|-&lt;br /&gt;
| '''호''' || 서포(西浦)&lt;br /&gt;
|-&lt;br /&gt;
| '''저서'''|| 구운몽, 사씨남정기 &lt;br /&gt;
|- &lt;br /&gt;
| '''직업''' || 소설가, 문신&lt;br /&gt;
|}&lt;br /&gt;
&lt;br /&gt;
''' 김만중''' 은 조선 시대의 소설가이자 문신이다. 숙종의 장인 김만기의 동생이며 1648년 12세에 이미 과문(科文)을 쓸 만큼 글재주가 향상되었고, 1650년 14세에 향시(鄕試)에 합격하였다. 1653년 사마시에 1등으로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었다. 1665년 29세의 나이로 처음 관직에 올라 이후 사간원정언(正言)·지평(持平)·수찬(修撰)·교리(校理)를 지냈다. 그 뒤 시강원 사서(侍講院 司書)에 임명되었다. 1667년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으로 옮겼다가 문학(文學 : 세자 시강원의 정5품 벼슬)으로 전직되었고, 바로 홍문관 수찬(修撰)이 되기도 했다. 1671년 암행어사가 되어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시찰했고 1672년 동부승지가 되었다. 그러나 효종비 인선왕후의 사망으로 불거진 제2차 예송논쟁에서 서인이 패배하자, 서인이었던 김만중도 파직되어 처음으로 관직 생활에서 쓴 맛을 보게 된다. 1679년에 복직하여 예조참의, 공조판서, 대사헌 등을 지냈으나 탄핵으로 자리를 옮기기도 했다.&lt;br /&gt;
1686년에는 장희빈 일가에 대해서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숙종의 분노를 사서 처음으로 선천으로 유배를 떠나게 된다. 1687년 귀양에서 풀려났지만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 세력이 대거 축출되면서 김만중도 다시 탄핵을 받아 남해의 노도로 유배되었다. 1692년 결국 노도에서 사망하였으며, 이 시기에 또다른 유명 작품인 &amp;lt;사씨남정기&amp;gt;&amp;lt;ref&amp;gt;이 작품은 숙종을 모델로 삼은 작품이다.&amp;lt;/ref&amp;gt;를 집필하였다. &lt;br /&gt;
&lt;br /&gt;
김만중의 아버지 김익겸은 일찍이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했기에, 김만중은 유복자로 태어나 '''어머니 윤씨'''로부터 형 김만기와 함께 자상하고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윤씨는 한문 실력을 갖추고 있어 직접 아들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김만중은 형 김만기와 함께 오직 어머니 윤씨만을 의지하고 살았고, 부인 윤씨는 두 형제가 아비 없이 자라는 것에 대해 걱정하면서 남부럽지 않게 키우기 위해 모든 정성을 기울였다. 이렇듯 어머니와 유독 각별한 사이였던 김만중은 유배 생활을 전전하며 소설을 좋아하는 어머니를 위해 소설 창작을 하였다고 한다. &lt;br /&gt;
구운몽 역시 김만중이 '''유배생활을 하던 중 창작한 작품'''이다. &lt;br /&gt;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의 ｢소설변증설(小說辨證說)｣에 의하면, 김만중이 귀양지에서 어머니의 한가함과 근심을 덜어 주기 위하여 하룻밤 사이에 이 작품을 지었다고 한다. 혹은 중국에 사신으로 가게 된 김만중이 중국 소설을 사오라고 한 어머니의 부탁을 잊어버려 돌아오는 길에 부랴부랴 이 작품을 지어 드렸다는 이야기가 그의 집안에서 전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 배경 ==&lt;br /&gt;
&lt;br /&gt;
삼국유사의 실려있는 '''조신의 꿈'''&amp;lt;ref&amp;gt;조신지몽이라고도 불린다&amp;lt;/ref&amp;gt;와 상당히 비슷한 서사구조를 지니고 있어 그 영향을 받아 창작된 것으로 파악된다. 조신의 꿈은 불도를 닦던 20살 남짓의 젊은 승려 조신이 절에 찾아온 미녀에 마음이 끌린 나머지 불공을 드리던 가운데 미녀와 도망가지만 세속에서 미녀와 함께 살며 온갖 고난을 겪고, 조신이 다 늙어 불도를 버리고 환속한 결정을 후회하는 순간 깨어보니 이것 모두가 꿈이었다는 내용의 작품이다. 조신의 꿈에 등장하는 세속으로의 일탈, 환몽구조 등의 화소를 구운몽에서 그대로 확인할 수 있다. 주인공 성진이 몸 담고 있는 세계가 천상계, 즉 불교의 세계인 만큼 '''불교적 색채'''가 강한 작품이다. 한편, 작품의 말미에는 장자의 호접몽을 인용하여 '''도교적 사상''' 역시 담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구운몽은 그 이본에 따라 한글로 집필된 것과 한문으로 집필된 것이 각각 존재하지만 일반적으로 김만중의 원작은 한글로 집필되었을 것으로 본다. 김만중이 당대 조선 사대부였음을 고려한다면 이례적이게도 한글로 쓴 문학이라야 진정한 국문학이라는 국문학관을 피력하는 등 '''한글소설에 우호적인 작가'''였기 때문이다. &amp;lt;ref&amp;gt;물론, 이것은 구운몽 같이 문학사적 의의가 큰 작품이 한글로 창작되었길 바라는 학자들의 바램이 일부 투영된 것이기도 하다.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김만중이 『구운몽』을 언제 어디서 지었는지에 의해 김무조 수가 1974년 「서포소설의 연구」에서 구운몽은 서포가 이 세상에 나서 목적했던 모든 것이 이제는 소생할 길이 없다는 결정적 시기에 제작됐다며 남해 용문사 등 남해의 지명과 서포의 사상적 측면을 연계해 남해설을 처음 주장했다. 하지만 1988년 일본 천리대 도서관에서 서포의 일대기를 담은 『서포연보』가 발견됨으로써 『구운몽』의 저작 시기는 선천의 귀양지로 확실해졌다.&lt;br /&gt;
&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to2iL6sENfs?si=uityJwDuFSlt7ncF&amp;quot; title=&amp;quot;YouTube video player&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lt;br /&gt;
구운몽은 큰 틀에서 '''천상계-&amp;gt;입몽-&amp;gt;지상계-&amp;gt;각몽-&amp;gt;천상계-&amp;gt; 육관대사의 설파'''로 이어지는 서사를 보여준다. 육관대사 밑에서 불도를 수행하는 주인공 성진이 용왕에게 심부름을 갔다가 팔선녀와 눈이 맞아 세속적 욕망을 탐하게 되고 이를 알게된 육관대사는 성진을 지상계로 보낸다. 지상계에서 성진은 천상계에서의 기억을 잃은 채 양소유라는 완전히 다른 인물로 살게 되고&amp;lt;ref&amp;gt;마찬가지로 환몽구조를 보여주는 몽유록류 고전소설과의 차이다. 몽유록에서는 주인공이 입몽하지만 동일한 자아를 유지한다.&amp;lt;/ref&amp;gt; 양소유는 지상계에서 이른 나이에 성공을 이루며 모든 세속적 욕망을 이루지만 깊은 회의를 느끼게 되고 결국엔 꿈에서 깨어 천상계로 돌아온다. 꿈에서 깬 성진은 육관대사에게 세속적 삶이 전부 쓸모없음을 깨달았다고 자부하지만 육관대사는 성진이 여전히 꿈에서 깨지 못했다고 하며 참·거짓의 이분법적 구분을 넘어서 불가와 속세 두 세계 모두를 긍정하는 이치에 대한 깨달음을 설파하며 작품이 마무리된다. &amp;lt;ref&amp;gt;이 부분에서 장자의 &amp;lt;호접몽&amp;gt;을 인용하기도 한다&amp;lt;/ref&amp;gt; 구운몽의 주제는 결국 작품의 마무리 부분에 나오는 '''육관대사의 설파'''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단순히 세속적 욕망에서 벗어난 불교적 깨달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을 넘어서 이분법적 구분 자체를 타파하고자 하는 일종의 도교적 사고방식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amp;lt;p&amp;gt;&lt;br /&gt;
물론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고전소설은 그 특성상 이본이 매우 다양하기에 이본에 따라 그 주제를 다르게 정의함이 마땅하다. 구운몽의 이본 중에는 마지막 육관대사의 설파가 빠진 채 성진이 속세의 삶에 회의를 느끼고 천상계로 복귀한 후 곧바로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작품도 존재한다. 이러한 경우 ‘인생무상’이라는 주제가 강조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또다른 이본은 성진이 천상계로 복귀하는 서사가 아예 삭제되고 지상계에서 부귀영화를 누린 후 그대로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영웅적, 통속적 주제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처럼 구운몽은 그 이본, 환몽구조에 따라 작품의 주제가 크게 달라지는 특징을 보인다. &amp;lt;p&amp;gt; &lt;br /&gt;
한편, 구운몽의 지상계(꿈)는 고전소설에 일반적으로 등장하는 지상계와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구운몽의 지상계는 분명 천상계와는 구분되지만, 성진은 그 지상계에서도 비현실적 공간을 넘나들고 환상적 체험을 하는 등 그곳은 완전히 현실적인 공간이 아닌 것이다. 이렇듯 구운몽은 비단 환몽구조 뿐 아니라 '''서사전개 그 자체를 통해서 이분법적 사고방식의 타파'''라는 주제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 참고문헌 ==&lt;br /&gt;
&lt;br /&gt;
논문 - &amp;lt;연정 구운몽&amp;gt;의 서사 전개 및 주제 구현 양상과 그 의미, 엄태웅, 고려대학교, 동양고전학회 &amp;lt;p&amp;gt;&lt;br /&gt;
네이버 지식백과 &amp;lt;몽자류 소설&amp;gt; &amp;lt;p&amp;gt;&lt;br /&gt;
논문 - &amp;lt;구운몽&amp;gt;의 의미 구조 연구, 김병국, 건국대학겨, 어문연구학회&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분류: 시대별로 살펴보는 한국 문학 작품의 흐름과 변화]]&lt;br /&gt;
[[분류:김치찌개]]&lt;/div&gt;</summary>
		<author><name>고군분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B6%84%EB%A5%98:%EC%8B%9C%EB%8C%80%EB%B3%84%EB%A1%9C_%EC%82%B4%ED%8E%B4%EB%B3%B4%EB%8A%94_%ED%95%9C%EA%B5%AD_%EB%AC%B8%ED%95%99_%EC%9E%91%ED%92%88%EC%9D%98_%ED%9D%90%EB%A6%84%EA%B3%BC_%EB%B3%80%ED%99%94&amp;diff=60292</id>
		<title>분류:시대별로 살펴보는 한국 문학 작품의 흐름과 변화</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B6%84%EB%A5%98:%EC%8B%9C%EB%8C%80%EB%B3%84%EB%A1%9C_%EC%82%B4%ED%8E%B4%EB%B3%B4%EB%8A%94_%ED%95%9C%EA%B5%AD_%EB%AC%B8%ED%95%99_%EC%9E%91%ED%92%88%EC%9D%98_%ED%9D%90%EB%A6%84%EA%B3%BC_%EB%B3%80%ED%99%94&amp;diff=60292"/>
		<updated>2025-06-23T14:56:4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고군분투: 빈 문서를 만듦&lt;/p&gt;
&lt;hr /&gt;
&lt;div&gt;&lt;/div&gt;</summary>
		<author><name>고군분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B6%84%EB%A5%98:%EA%B9%80%EC%B9%98%EC%B0%8C%EA%B0%9C&amp;diff=60290</id>
		<title>분류:김치찌개</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B%B6%84%EB%A5%98:%EA%B9%80%EC%B9%98%EC%B0%8C%EA%B0%9C&amp;diff=60290"/>
		<updated>2025-06-23T14:53:0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고군분투: 새 문서: 2024130040 국어국문학과 이지우&lt;/p&gt;
&lt;hr /&gt;
&lt;div&gt;2024130040 국어국문학과 이지우&lt;/div&gt;</summary>
		<author><name>고군분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7%B4%ED%95%98%EC%9D%BC%EA%B8%B0%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288</id>
		<title>열하일기ᐧ༚̮ᐧ</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7%B4%ED%95%98%EC%9D%BC%EA%B8%B0%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288"/>
		<updated>2025-06-23T14:51:2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고군분투: /* 각주 */&lt;/p&gt;
&lt;hr /&gt;
&lt;div&gt;[[파일:ㅇㅎㅇㄱ.jpg|right]]&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bfddf7;“&lt;br /&gt;
|+ 열하일기&lt;br /&gt;
|'''장르''' || 여행기&lt;br /&gt;
|-&lt;br /&gt;
| '''작가''' || 박지원&lt;br /&gt;
|-&lt;br /&gt;
| '''시대''' || 1780년 - [[조선 후기]]   &lt;br /&gt;
|-&lt;br /&gt;
| '''배경'''|| 청나라 답사 &lt;br /&gt;
|}&lt;br /&gt;
&lt;br /&gt;
== 장르 ==&lt;br /&gt;
&lt;br /&gt;
청나라 황제인 건륭제의 70세 생일을 축하가기 위한 사절로  '''박지원'''이 청나라에 다녀온 일을 적은 &amp;lt;font color=&amp;quot;background:red&amp;quot;&amp;gt;여행기&amp;lt;/font&amp;gt;이다. 여행기는 일상을 떠나 낯선 곳에서 경험한 제반사항에 의미를 부여하며 기록으로 남기는 과정의 총체이다. 여행의 과정에서 접한 것들을 현실적으로 재해석하여 삶에 응용할 것을 전제로 하는 유목적적 여정으로, 인생에서 펼치는 다양한 유람과 놀이, 개인적, 사회적 차원의 견문 확장, 그리고 삶의 도전과 성찰이라는 문제의식을 던진다. 문학작품으로써의 여행기는  인생을 각성하는 계기를 주고, 생애를 숙고하고 성찰하는 동기를 부여하며, 문화 간의 소통과 융합, 현실세계에 실천하고 적용하는 다차원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조선 후기에 쓰인 또다른 여행기로 1712년 김창업이 연경(현재의 베이징)으로 사행을 다녀온 후 당시 중국의 정치, 사회, 문화를 상세히 기록한 '''가재연행록''' 등이 존재한다. &lt;br /&gt;
이러한 여행은 단순한 이동의 기록, 외교 사행이나 이국 풍물기에 머무르지 않고, ‘집’을 떠나 ‘타자’와 마주하며, 조선이라는 체제와 문명의 근본을 다시 묻는 철학적 탐색의 길에 들어설 수 있게 해준다. 여행기는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 가치관, 그리고 사회적 관심사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이러한 여행기들을 통해 당시 사람들의 삶과 사고 방식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lt;br /&gt;
&lt;br /&gt;
== 작가 ==&lt;br /&gt;
[[파일:ㅂㅈㅇ.jpg|ㅣleft]]&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f6e8a1;“&lt;br /&gt;
|+ 박지원 朴趾源&lt;br /&gt;
|'''출생''' || 1737년 3월 5일 &lt;br /&gt;
|-&lt;br /&gt;
| '''사망''' || 1805년 12월 5일&lt;br /&gt;
|-&lt;br /&gt;
| '''호''' || 연암(燕巖)&amp;lt;ref&amp;gt;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호이다&amp;lt;/ref&amp;gt;,연상(煙湘)&lt;br /&gt;
|-&lt;br /&gt;
| '''저서'''|| 열하일기, 양반전&amp;lt;ref&amp;gt;열하일기 내부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이다&amp;lt;/ref&amp;gt;&lt;br /&gt;
|- &lt;br /&gt;
| '''직업''' || 소설가, 실학자&lt;br /&gt;
|}&lt;br /&gt;
&lt;br /&gt;
'''박지원'''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문장가이다. [[열하일기]], 양반전, 허생전 등의 문학작품을 창작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실학으로 대표되는 '''북학'''(北學)의 가장 대표적인 학자이기도 하다. 정통 노론 가문의 양반&amp;lt;ref&amp;gt;실학자라는 점, 풍자소설을 창작하였다는 점에서 그가 미천한 신분을 가졌을 거라고 오해하는 사람이 많지만 그렇지 않다&amp;lt;/ref&amp;gt;으로 소설, 철학, 천문학, 농사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활동하였다. &amp;lt;p&amp;gt; 예조, 공조, 호조, 병조참판을 역임한 뒤 대사간에 임명되어 사도세자의 스승을 맡기도 했던 지돈녕부사 박필균(朴弼均, 1685~1760)의 셋째 아들 박사유(1703~1767)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752년 이보천(李輔天)의 딸과 결혼했으며 처삼촌이자 성호 이익(李瀷)의 사상적 영향을 받은 홍문관교리 이양천(李亮天)에게서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후 3년 동안 문을 걸어 잠그고 공부에 전념해 경학·병학·농학 등 모든 경세실용의 학문을 연구했다. 어려서부터 비범한 문학적 재능을 보인 그는 18세 무렵에 &amp;lt;광문자전(廣文者傳)&amp;gt;을 지었으며 1757년 &amp;lt;민옹전(閔翁傳)&amp;gt;을 지었고 1767년까지 &amp;lt;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amp;gt;에 실려 있는 9편의 단편 소설을 지었다. 이 시기부터 양반 사회의 무능함, 위선 등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가장 친한 벗이었던 이희천이 1771년 청나라 태학사(太學士) 주린(朱璘)이 1696년 편찬한 &amp;lt;명기집략(明紀輯略)&amp;gt;을 소장했다는 이유로 처형되자, 크게 상심한 후 과거의 뜻을 접은 그는 이덕무(李德懋), 이서구(李書九), 서상수(徐常修), 유금(柳琴), 유득공(柳得恭), 박제가(朴齊家), 이희경(李喜慶)과 활발하게 교류하며 '''북학파실학'''(北學派實學)이라는 학풍, 문풍을 이룩한다. 청나라 방문 이후, 50살의 나이로 1786년 처음 벼슬에 올라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에 임명되었다. 1789년 평시서주부(平市署主簿), 1790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와 제릉령(齊陵令), 1791년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과 안의현감(安義縣監)을 지냈으며 자송문을 바치라는 명을 받은 이후에도 1796년 제용감주부(濟用監主簿)와 의릉령(懿陵令), 1797년 면천군수(沔川郡守)를 지냈다. 1799년에는 1년 전에 정조가 내린 권농정구농서(勸農政求農書)의 하교에 응해 &amp;lt;과농소초(課農小抄)&amp;gt;(&amp;lt;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amp;gt;를 부록으로 붙임)를 바쳤다. 이 책은 농업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농업 생산 관계를 조정하는 문제를 깊이있게 다룬 것으로 박지원 사상의 원숙한 경지를 잘 보여준다. 1800년 양양부사가 되었고 1801년 봄에 사직했다가 이후 건강이 악화되어 1805년 10월 20일 68세에 눈을 감았는데 손자가 조선 후기 개화파 형성의 거목인 환재 박규수. 사후 부여받은 시호는 문도(文度)로 순종 융희 3년(1909) 8월 20일 정약용, 권돈인, 남이 등과 함께 시호를 받았다.&lt;br /&gt;
안의현감 시절에는 북경 여행의 경험을 토대로 실험적 작업을 시도했으며, 면천군수 시절의 경험은 『과농소초(課農小抄)』 · 『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 · 『안설(按說)』 등을 남기게 되었다. 박지원이 남긴 저술 중에서 특히 『열하일기(熱河日記)』와 위의 책들은 박지원이 추구하던 현실 개혁의 포부를 이론적으로 펼쳐보인 작업의 하나이다. 박지원는 서학(西學)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는 자연과학적 지식의 근원을 이해하려 한 것이며 새로운 문물에 대한 애착을 보인 결과였다. 이러한 관심은 홍대용과의 교유에서 보이는 우주론의 심화를 위한 작업이며, 실제로 북경을 여행할 때 천주당이나 관상대를 구경하면서 서양인을 만나고 싶어하였다.&lt;br /&gt;
천문학에 깊은 관심을 보인 박지원이 펼친 우주의 질서는 당시의 중국학자들도 놀라게 했으며 이는 박지원이 가진 세계관의 확대와 전환을 의미한다. 나아가 당시에 풍미하던 주자학(朱子學)의 사변적 세계에만 침잠하는 것을 반성하면서 이론적 세계의 현실 적용, 곧 유학의 본질 속에서 개혁의 이론적 근거를 찾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 배경 ==&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lKb0PQI6MWw?si=xRUjjqlr5jTdS0Dg&amp;quot; title=&amp;quot;YouTube video player&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 &amp;lt;p&amp;gt;&lt;br /&gt;
1780년, 청나라 건륭제의 70세 생일에 조선은 '''진하겸사은사'''(進賀兼謝恩使)를 청에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연암이 속한 사행단은 ‘진하 겸 사은을 위한 별사’라는 명칭을 지녔다. 진하는 황제의 생일이나 즉위 같은 경사를 축하하기 위한 사행이고, 사은은 청나라로부터 받은 배려나 조치를 감사하기 위한 사행이다. 이 특별한 사행의 목적은 건륭제의 고희를 축하함과 동시에, 1년 전 조선사행의 실수로 북경에서 발생한 화재 사건에 대해 조선에 책임을 묻지 않기로 한 청의 관용에 감사를 표하기 위한 것이었다. &lt;br /&gt;
사행단의 총 인원은 270명. 『열하일기』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함께 사행을 떠난 노이점이 쓴 『수사록』에는 “압록강을 건넌 사람은 총 270명이고 말은 194필이다”라고 기록돼 있다.&lt;br /&gt;
이 사행단에서 박지원은 청나라의 선진문물과 접촉하며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중요함을 깨닫고 귀국 후  &amp;lt;열하일기(熱河日記)&amp;gt;의 저술에 전력을 기울이게 된다. 재밌는 점은, 1780년 당시 박지원은 아무런 관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가 청나라 파견단에 동행할 수 있었던 것일까? 파견단의 사신단장으로 뽑힌 박명원이 바로 박지원의 8촌형이었던 것이었고, 박지원은 그의 자제군관(子弟軍官) 자격으로 청나라에 가게 된 것이다. 당시에는 사신들이 자신을 호위할 군관을 지정할 수 있었는데 정사는 4명을, 부사는 3명, 서장관은 1명을 고를 수 있었다. 박명원은 잘 알고 지내던 무관을 지명할 수도 있었지만 자신의 친척들 가운데 전도 유망한 선비를 지명해도 되었기에 8촌동생을 데려간 것이었다. 자제군관은 일종의 개인 수행원으로 공식 사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활동의 제약이 적어서, 중국 선비들과 교류하거나 유람을 하거나 서적 등을 구입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위로 박지원이 청의 문물, 문화 등과 매우 자유롭게 접촉할 수 있게 되며 열하일기를 저술할 수 있었던 것이다. 본디 목적지는 연경(燕京)이었으나 당시 건륭제가 열하&amp;lt;ref&amp;gt;오늘 날의 허베이성 청더&amp;lt;/ref&amp;gt;의 피서 산장에 있었기 때문에 결국 열하까지 여정이 계속되었다. 여름의 베이징은 너무 덥기 때문에 장성 너머 북쪽에 황제 전용 여름 별장인 피서 산장이 있다.황제를 따라 열하까지 간 덕에 &amp;lt;열하일기&amp;gt;란 제목이 붙여졌다.&lt;br /&gt;
원래 조선 사신단은 건륭제가 연경에 없다는 소식을 듣자 그냥 연경에서 구색만 맞추고 돌아가려 했지만, 아직 조선 사신은 한 명도 가본 적이 없다는 말에 결국 열하까지 갔다 왔다. &lt;br /&gt;
박지원은 압록강을 건넌 지 15일 만에 요양(遼陽)에 도착하였으며, 이후 7월 10일 십리하(十里河)를 출발하여 판교보(板橋堡), 장성점(長盛店), 사하보(沙河堡)를 거쳐 심양(瀋陽)에 이르렀다. 박지원은 심양에서 하루를 묵은 뒤 거류하(巨流河)를 거쳐 14일 소흑산(小黑山)에 이르러 하루를 묵었다. 7월 15일에 신광녕(新廣寧)을 거쳐 산해관(山海關)까지 9일이 걸렸으며, 산해관에서 연경까지는 11일이 걸렸다. 압록강에서 연경까지의 거리는 약 2,300여 리로 긴 여정이었다.&lt;br /&gt;
8월 5일부터 9일까지는 연경에서 열하에 이르는 여정이었다. 열하로 가는 길에는 부사 서장관과 역관 3명, 비장 4명, 하인 등 모두 74명이 동행했다. 가는 길은 녹록치 않았다. 비가 자주 와 시간이 지체되어 사신단 일행은 하룻밤에 여덟 번이나 강을 건너며 서두르기도 하였다. 말이 더위에 쓰러지고, 일행 역시 더위를 먹을 정도로 매우 힘든 여정이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lt;br /&gt;
총 26권 10책으로 되어 있으며, 열하까지의 여정, 여행에서의 인상 깊었던 점, 가지각색의 체험, 청나라 사람들과의 필담 등이 담겨 있다. &lt;br /&gt;
큰 틀에서 열하일기는 날짜 별로 서술이 되어있다. 의주에서 연경까지를 도강록(渡江錄), 성경잡지(盛京雜識), 일신수필(馹汛隨筆), 관내정사(關內程史)로 나누어 기록했으며, 연경에서 열하까지의 여정은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으로 나누어 기록하였다. 우선, 도강록에는 6월 24일부터 7월 9일까지 압록강에서 요양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이 담겨 있다. 7월 10일부터 7월 14일까지의 기록인 성경잡지에서는 조선 유학자들의 화이론과 춘추대의를 간접적으로 비판하며, 이용후생하는 중국인들의 자세를 보고 배울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amp;lt;p&amp;gt; 열하일기에는 주제별로 항목을 정해 청 학자들과의 교류내용과 정책에 대한 논평, 경험한 것들에 대한 박지원의 생각이 들어있기도 하다. 망양록(忘羊錄)에서는 청 학자들과 음악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였으며, 심세편(審勢篇)에서는 조선사람의 다섯 가지 허망된 일[五妄]과 중국 선비들의 세 가지 어려운 일[三難] 등에 대해 상호 토론하였다. 혹정필담(鵠汀筆談)에서는 윤가전(尹嘉銓)과 천문 및 역법, 서학(西學) 등에 관해 얘기하였고, 찰십륜포(札什倫布), 반선시말(班禪始末), 황교문답(黃敎問答)에서는 열하에서 체험한 반선(班禪)에 대한 내용과 건륭제의 반선 정책, 청과 주변 이민족이 지닌 각종 종교에 대해 정리하였다.&amp;lt;p&amp;gt;&lt;br /&gt;
종합적으로 보았을 때, 열하일기의 가장 주요한 주제는 '''이용후생(利用厚生)'''이라고 할 수 있다. 박지원은 청나라 마을의 커다란 가옥과 반듯한 거리, 벽돌로 쌓은 담장, 수레, 책문의 규모나 시설에 놀라움을 표현하고 마을 내 우물의 모습, 물을 깃는 방법, 기와를 잇는 방법, 벽돌을 사용하는 데 이로운 점, 가마제도 등 청 사람들의 사소한 생활 모습까지도 세세히 기록하며 조선 백성들이 생활에서 겪는 불편함 등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함과 동시에 청의 선진문물이 가진 실용성과 효용성에 주목하여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열하일기의 많은 부분은 청나라 사람들과의 필담이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청의 학자, 상인, 농민 등 다양한 계층과 교류함으로써 당시 조선에 팽배했던 반청사상에서 벗어나 청의 문화를 사실적, 객관적으로 이해하고자 한 것이다. &lt;br /&gt;
&lt;br /&gt;
== 참고문헌 ==&lt;br /&gt;
연암을 따라, 사유의 자취를 걷다(1) 연암, 조선을 넘어 청나라로 - 김경민·곽영군 기자 https://www.hynews.kr/news/view.php?idx=74157 &amp;lt;p&amp;gt;&lt;br /&gt;
우리역사넷 - 열하일기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r300735&amp;amp;code=kc_age_30&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분류: 시대별로 살펴보는 한국 문학 작품의 흐름과 변화]]&lt;br /&gt;
[[분류:김치찌개]]&lt;/div&gt;</summary>
		<author><name>고군분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7%B4%ED%95%98%EC%9D%BC%EA%B8%B0%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287</id>
		<title>열하일기ᐧ༚̮ᐧ</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7%B4%ED%95%98%EC%9D%BC%EA%B8%B0%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287"/>
		<updated>2025-06-23T14:51:1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고군분투: /* 각주 */&lt;/p&gt;
&lt;hr /&gt;
&lt;div&gt;[[파일:ㅇㅎㅇㄱ.jpg|right]]&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bfddf7;“&lt;br /&gt;
|+ 열하일기&lt;br /&gt;
|'''장르''' || 여행기&lt;br /&gt;
|-&lt;br /&gt;
| '''작가''' || 박지원&lt;br /&gt;
|-&lt;br /&gt;
| '''시대''' || 1780년 - [[조선 후기]]   &lt;br /&gt;
|-&lt;br /&gt;
| '''배경'''|| 청나라 답사 &lt;br /&gt;
|}&lt;br /&gt;
&lt;br /&gt;
== 장르 ==&lt;br /&gt;
&lt;br /&gt;
청나라 황제인 건륭제의 70세 생일을 축하가기 위한 사절로  '''박지원'''이 청나라에 다녀온 일을 적은 &amp;lt;font color=&amp;quot;background:red&amp;quot;&amp;gt;여행기&amp;lt;/font&amp;gt;이다. 여행기는 일상을 떠나 낯선 곳에서 경험한 제반사항에 의미를 부여하며 기록으로 남기는 과정의 총체이다. 여행의 과정에서 접한 것들을 현실적으로 재해석하여 삶에 응용할 것을 전제로 하는 유목적적 여정으로, 인생에서 펼치는 다양한 유람과 놀이, 개인적, 사회적 차원의 견문 확장, 그리고 삶의 도전과 성찰이라는 문제의식을 던진다. 문학작품으로써의 여행기는  인생을 각성하는 계기를 주고, 생애를 숙고하고 성찰하는 동기를 부여하며, 문화 간의 소통과 융합, 현실세계에 실천하고 적용하는 다차원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조선 후기에 쓰인 또다른 여행기로 1712년 김창업이 연경(현재의 베이징)으로 사행을 다녀온 후 당시 중국의 정치, 사회, 문화를 상세히 기록한 '''가재연행록''' 등이 존재한다. &lt;br /&gt;
이러한 여행은 단순한 이동의 기록, 외교 사행이나 이국 풍물기에 머무르지 않고, ‘집’을 떠나 ‘타자’와 마주하며, 조선이라는 체제와 문명의 근본을 다시 묻는 철학적 탐색의 길에 들어설 수 있게 해준다. 여행기는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 가치관, 그리고 사회적 관심사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이러한 여행기들을 통해 당시 사람들의 삶과 사고 방식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lt;br /&gt;
&lt;br /&gt;
== 작가 ==&lt;br /&gt;
[[파일:ㅂㅈㅇ.jpg|ㅣleft]]&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f6e8a1;“&lt;br /&gt;
|+ 박지원 朴趾源&lt;br /&gt;
|'''출생''' || 1737년 3월 5일 &lt;br /&gt;
|-&lt;br /&gt;
| '''사망''' || 1805년 12월 5일&lt;br /&gt;
|-&lt;br /&gt;
| '''호''' || 연암(燕巖)&amp;lt;ref&amp;gt;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호이다&amp;lt;/ref&amp;gt;,연상(煙湘)&lt;br /&gt;
|-&lt;br /&gt;
| '''저서'''|| 열하일기, 양반전&amp;lt;ref&amp;gt;열하일기 내부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이다&amp;lt;/ref&amp;gt;&lt;br /&gt;
|- &lt;br /&gt;
| '''직업''' || 소설가, 실학자&lt;br /&gt;
|}&lt;br /&gt;
&lt;br /&gt;
'''박지원'''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문장가이다. [[열하일기]], 양반전, 허생전 등의 문학작품을 창작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실학으로 대표되는 '''북학'''(北學)의 가장 대표적인 학자이기도 하다. 정통 노론 가문의 양반&amp;lt;ref&amp;gt;실학자라는 점, 풍자소설을 창작하였다는 점에서 그가 미천한 신분을 가졌을 거라고 오해하는 사람이 많지만 그렇지 않다&amp;lt;/ref&amp;gt;으로 소설, 철학, 천문학, 농사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활동하였다. &amp;lt;p&amp;gt; 예조, 공조, 호조, 병조참판을 역임한 뒤 대사간에 임명되어 사도세자의 스승을 맡기도 했던 지돈녕부사 박필균(朴弼均, 1685~1760)의 셋째 아들 박사유(1703~1767)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752년 이보천(李輔天)의 딸과 결혼했으며 처삼촌이자 성호 이익(李瀷)의 사상적 영향을 받은 홍문관교리 이양천(李亮天)에게서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후 3년 동안 문을 걸어 잠그고 공부에 전념해 경학·병학·농학 등 모든 경세실용의 학문을 연구했다. 어려서부터 비범한 문학적 재능을 보인 그는 18세 무렵에 &amp;lt;광문자전(廣文者傳)&amp;gt;을 지었으며 1757년 &amp;lt;민옹전(閔翁傳)&amp;gt;을 지었고 1767년까지 &amp;lt;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amp;gt;에 실려 있는 9편의 단편 소설을 지었다. 이 시기부터 양반 사회의 무능함, 위선 등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가장 친한 벗이었던 이희천이 1771년 청나라 태학사(太學士) 주린(朱璘)이 1696년 편찬한 &amp;lt;명기집략(明紀輯略)&amp;gt;을 소장했다는 이유로 처형되자, 크게 상심한 후 과거의 뜻을 접은 그는 이덕무(李德懋), 이서구(李書九), 서상수(徐常修), 유금(柳琴), 유득공(柳得恭), 박제가(朴齊家), 이희경(李喜慶)과 활발하게 교류하며 '''북학파실학'''(北學派實學)이라는 학풍, 문풍을 이룩한다. 청나라 방문 이후, 50살의 나이로 1786년 처음 벼슬에 올라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에 임명되었다. 1789년 평시서주부(平市署主簿), 1790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와 제릉령(齊陵令), 1791년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과 안의현감(安義縣監)을 지냈으며 자송문을 바치라는 명을 받은 이후에도 1796년 제용감주부(濟用監主簿)와 의릉령(懿陵令), 1797년 면천군수(沔川郡守)를 지냈다. 1799년에는 1년 전에 정조가 내린 권농정구농서(勸農政求農書)의 하교에 응해 &amp;lt;과농소초(課農小抄)&amp;gt;(&amp;lt;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amp;gt;를 부록으로 붙임)를 바쳤다. 이 책은 농업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농업 생산 관계를 조정하는 문제를 깊이있게 다룬 것으로 박지원 사상의 원숙한 경지를 잘 보여준다. 1800년 양양부사가 되었고 1801년 봄에 사직했다가 이후 건강이 악화되어 1805년 10월 20일 68세에 눈을 감았는데 손자가 조선 후기 개화파 형성의 거목인 환재 박규수. 사후 부여받은 시호는 문도(文度)로 순종 융희 3년(1909) 8월 20일 정약용, 권돈인, 남이 등과 함께 시호를 받았다.&lt;br /&gt;
안의현감 시절에는 북경 여행의 경험을 토대로 실험적 작업을 시도했으며, 면천군수 시절의 경험은 『과농소초(課農小抄)』 · 『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 · 『안설(按說)』 등을 남기게 되었다. 박지원이 남긴 저술 중에서 특히 『열하일기(熱河日記)』와 위의 책들은 박지원이 추구하던 현실 개혁의 포부를 이론적으로 펼쳐보인 작업의 하나이다. 박지원는 서학(西學)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는 자연과학적 지식의 근원을 이해하려 한 것이며 새로운 문물에 대한 애착을 보인 결과였다. 이러한 관심은 홍대용과의 교유에서 보이는 우주론의 심화를 위한 작업이며, 실제로 북경을 여행할 때 천주당이나 관상대를 구경하면서 서양인을 만나고 싶어하였다.&lt;br /&gt;
천문학에 깊은 관심을 보인 박지원이 펼친 우주의 질서는 당시의 중국학자들도 놀라게 했으며 이는 박지원이 가진 세계관의 확대와 전환을 의미한다. 나아가 당시에 풍미하던 주자학(朱子學)의 사변적 세계에만 침잠하는 것을 반성하면서 이론적 세계의 현실 적용, 곧 유학의 본질 속에서 개혁의 이론적 근거를 찾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 배경 ==&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lKb0PQI6MWw?si=xRUjjqlr5jTdS0Dg&amp;quot; title=&amp;quot;YouTube video player&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 &amp;lt;p&amp;gt;&lt;br /&gt;
1780년, 청나라 건륭제의 70세 생일에 조선은 '''진하겸사은사'''(進賀兼謝恩使)를 청에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연암이 속한 사행단은 ‘진하 겸 사은을 위한 별사’라는 명칭을 지녔다. 진하는 황제의 생일이나 즉위 같은 경사를 축하하기 위한 사행이고, 사은은 청나라로부터 받은 배려나 조치를 감사하기 위한 사행이다. 이 특별한 사행의 목적은 건륭제의 고희를 축하함과 동시에, 1년 전 조선사행의 실수로 북경에서 발생한 화재 사건에 대해 조선에 책임을 묻지 않기로 한 청의 관용에 감사를 표하기 위한 것이었다. &lt;br /&gt;
사행단의 총 인원은 270명. 『열하일기』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함께 사행을 떠난 노이점이 쓴 『수사록』에는 “압록강을 건넌 사람은 총 270명이고 말은 194필이다”라고 기록돼 있다.&lt;br /&gt;
이 사행단에서 박지원은 청나라의 선진문물과 접촉하며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중요함을 깨닫고 귀국 후  &amp;lt;열하일기(熱河日記)&amp;gt;의 저술에 전력을 기울이게 된다. 재밌는 점은, 1780년 당시 박지원은 아무런 관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가 청나라 파견단에 동행할 수 있었던 것일까? 파견단의 사신단장으로 뽑힌 박명원이 바로 박지원의 8촌형이었던 것이었고, 박지원은 그의 자제군관(子弟軍官) 자격으로 청나라에 가게 된 것이다. 당시에는 사신들이 자신을 호위할 군관을 지정할 수 있었는데 정사는 4명을, 부사는 3명, 서장관은 1명을 고를 수 있었다. 박명원은 잘 알고 지내던 무관을 지명할 수도 있었지만 자신의 친척들 가운데 전도 유망한 선비를 지명해도 되었기에 8촌동생을 데려간 것이었다. 자제군관은 일종의 개인 수행원으로 공식 사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활동의 제약이 적어서, 중국 선비들과 교류하거나 유람을 하거나 서적 등을 구입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위로 박지원이 청의 문물, 문화 등과 매우 자유롭게 접촉할 수 있게 되며 열하일기를 저술할 수 있었던 것이다. 본디 목적지는 연경(燕京)이었으나 당시 건륭제가 열하&amp;lt;ref&amp;gt;오늘 날의 허베이성 청더&amp;lt;/ref&amp;gt;의 피서 산장에 있었기 때문에 결국 열하까지 여정이 계속되었다. 여름의 베이징은 너무 덥기 때문에 장성 너머 북쪽에 황제 전용 여름 별장인 피서 산장이 있다.황제를 따라 열하까지 간 덕에 &amp;lt;열하일기&amp;gt;란 제목이 붙여졌다.&lt;br /&gt;
원래 조선 사신단은 건륭제가 연경에 없다는 소식을 듣자 그냥 연경에서 구색만 맞추고 돌아가려 했지만, 아직 조선 사신은 한 명도 가본 적이 없다는 말에 결국 열하까지 갔다 왔다. &lt;br /&gt;
박지원은 압록강을 건넌 지 15일 만에 요양(遼陽)에 도착하였으며, 이후 7월 10일 십리하(十里河)를 출발하여 판교보(板橋堡), 장성점(長盛店), 사하보(沙河堡)를 거쳐 심양(瀋陽)에 이르렀다. 박지원은 심양에서 하루를 묵은 뒤 거류하(巨流河)를 거쳐 14일 소흑산(小黑山)에 이르러 하루를 묵었다. 7월 15일에 신광녕(新廣寧)을 거쳐 산해관(山海關)까지 9일이 걸렸으며, 산해관에서 연경까지는 11일이 걸렸다. 압록강에서 연경까지의 거리는 약 2,300여 리로 긴 여정이었다.&lt;br /&gt;
8월 5일부터 9일까지는 연경에서 열하에 이르는 여정이었다. 열하로 가는 길에는 부사 서장관과 역관 3명, 비장 4명, 하인 등 모두 74명이 동행했다. 가는 길은 녹록치 않았다. 비가 자주 와 시간이 지체되어 사신단 일행은 하룻밤에 여덟 번이나 강을 건너며 서두르기도 하였다. 말이 더위에 쓰러지고, 일행 역시 더위를 먹을 정도로 매우 힘든 여정이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lt;br /&gt;
총 26권 10책으로 되어 있으며, 열하까지의 여정, 여행에서의 인상 깊었던 점, 가지각색의 체험, 청나라 사람들과의 필담 등이 담겨 있다. &lt;br /&gt;
큰 틀에서 열하일기는 날짜 별로 서술이 되어있다. 의주에서 연경까지를 도강록(渡江錄), 성경잡지(盛京雜識), 일신수필(馹汛隨筆), 관내정사(關內程史)로 나누어 기록했으며, 연경에서 열하까지의 여정은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으로 나누어 기록하였다. 우선, 도강록에는 6월 24일부터 7월 9일까지 압록강에서 요양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이 담겨 있다. 7월 10일부터 7월 14일까지의 기록인 성경잡지에서는 조선 유학자들의 화이론과 춘추대의를 간접적으로 비판하며, 이용후생하는 중국인들의 자세를 보고 배울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amp;lt;p&amp;gt; 열하일기에는 주제별로 항목을 정해 청 학자들과의 교류내용과 정책에 대한 논평, 경험한 것들에 대한 박지원의 생각이 들어있기도 하다. 망양록(忘羊錄)에서는 청 학자들과 음악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였으며, 심세편(審勢篇)에서는 조선사람의 다섯 가지 허망된 일[五妄]과 중국 선비들의 세 가지 어려운 일[三難] 등에 대해 상호 토론하였다. 혹정필담(鵠汀筆談)에서는 윤가전(尹嘉銓)과 천문 및 역법, 서학(西學) 등에 관해 얘기하였고, 찰십륜포(札什倫布), 반선시말(班禪始末), 황교문답(黃敎問答)에서는 열하에서 체험한 반선(班禪)에 대한 내용과 건륭제의 반선 정책, 청과 주변 이민족이 지닌 각종 종교에 대해 정리하였다.&amp;lt;p&amp;gt;&lt;br /&gt;
종합적으로 보았을 때, 열하일기의 가장 주요한 주제는 '''이용후생(利用厚生)'''이라고 할 수 있다. 박지원은 청나라 마을의 커다란 가옥과 반듯한 거리, 벽돌로 쌓은 담장, 수레, 책문의 규모나 시설에 놀라움을 표현하고 마을 내 우물의 모습, 물을 깃는 방법, 기와를 잇는 방법, 벽돌을 사용하는 데 이로운 점, 가마제도 등 청 사람들의 사소한 생활 모습까지도 세세히 기록하며 조선 백성들이 생활에서 겪는 불편함 등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함과 동시에 청의 선진문물이 가진 실용성과 효용성에 주목하여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열하일기의 많은 부분은 청나라 사람들과의 필담이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청의 학자, 상인, 농민 등 다양한 계층과 교류함으로써 당시 조선에 팽배했던 반청사상에서 벗어나 청의 문화를 사실적, 객관적으로 이해하고자 한 것이다. &lt;br /&gt;
&lt;br /&gt;
== 참고문헌 ==&lt;br /&gt;
연암을 따라, 사유의 자취를 걷다(1) 연암, 조선을 넘어 청나라로 - 김경민·곽영군 기자 https://www.hynews.kr/news/view.php?idx=74157 &amp;lt;p&amp;gt;&lt;br /&gt;
우리역사넷 - 열하일기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r300735&amp;amp;code=kc_age_30&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분류: 시대별로 살펴보는 한국 문학 작품의 흐름과 변화]]&lt;br /&gt;
[[분류:유익한건물]]&lt;/div&gt;</summary>
		<author><name>고군분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7%B4%ED%95%98%EC%9D%BC%EA%B8%B0%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286</id>
		<title>열하일기ᐧ༚̮ᐧ</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7%B4%ED%95%98%EC%9D%BC%EA%B8%B0%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286"/>
		<updated>2025-06-23T14:48:5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고군분투: /* 각주 */&lt;/p&gt;
&lt;hr /&gt;
&lt;div&gt;[[파일:ㅇㅎㅇㄱ.jpg|right]]&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bfddf7;“&lt;br /&gt;
|+ 열하일기&lt;br /&gt;
|'''장르''' || 여행기&lt;br /&gt;
|-&lt;br /&gt;
| '''작가''' || 박지원&lt;br /&gt;
|-&lt;br /&gt;
| '''시대''' || 1780년 - [[조선 후기]]   &lt;br /&gt;
|-&lt;br /&gt;
| '''배경'''|| 청나라 답사 &lt;br /&gt;
|}&lt;br /&gt;
&lt;br /&gt;
== 장르 ==&lt;br /&gt;
&lt;br /&gt;
청나라 황제인 건륭제의 70세 생일을 축하가기 위한 사절로  '''박지원'''이 청나라에 다녀온 일을 적은 &amp;lt;font color=&amp;quot;background:red&amp;quot;&amp;gt;여행기&amp;lt;/font&amp;gt;이다. 여행기는 일상을 떠나 낯선 곳에서 경험한 제반사항에 의미를 부여하며 기록으로 남기는 과정의 총체이다. 여행의 과정에서 접한 것들을 현실적으로 재해석하여 삶에 응용할 것을 전제로 하는 유목적적 여정으로, 인생에서 펼치는 다양한 유람과 놀이, 개인적, 사회적 차원의 견문 확장, 그리고 삶의 도전과 성찰이라는 문제의식을 던진다. 문학작품으로써의 여행기는  인생을 각성하는 계기를 주고, 생애를 숙고하고 성찰하는 동기를 부여하며, 문화 간의 소통과 융합, 현실세계에 실천하고 적용하는 다차원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조선 후기에 쓰인 또다른 여행기로 1712년 김창업이 연경(현재의 베이징)으로 사행을 다녀온 후 당시 중국의 정치, 사회, 문화를 상세히 기록한 '''가재연행록''' 등이 존재한다. &lt;br /&gt;
이러한 여행은 단순한 이동의 기록, 외교 사행이나 이국 풍물기에 머무르지 않고, ‘집’을 떠나 ‘타자’와 마주하며, 조선이라는 체제와 문명의 근본을 다시 묻는 철학적 탐색의 길에 들어설 수 있게 해준다. 여행기는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 가치관, 그리고 사회적 관심사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이러한 여행기들을 통해 당시 사람들의 삶과 사고 방식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lt;br /&gt;
&lt;br /&gt;
== 작가 ==&lt;br /&gt;
[[파일:ㅂㅈㅇ.jpg|ㅣleft]]&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f6e8a1;“&lt;br /&gt;
|+ 박지원 朴趾源&lt;br /&gt;
|'''출생''' || 1737년 3월 5일 &lt;br /&gt;
|-&lt;br /&gt;
| '''사망''' || 1805년 12월 5일&lt;br /&gt;
|-&lt;br /&gt;
| '''호''' || 연암(燕巖)&amp;lt;ref&amp;gt;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호이다&amp;lt;/ref&amp;gt;,연상(煙湘)&lt;br /&gt;
|-&lt;br /&gt;
| '''저서'''|| 열하일기, 양반전&amp;lt;ref&amp;gt;열하일기 내부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이다&amp;lt;/ref&amp;gt;&lt;br /&gt;
|- &lt;br /&gt;
| '''직업''' || 소설가, 실학자&lt;br /&gt;
|}&lt;br /&gt;
&lt;br /&gt;
'''박지원'''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문장가이다. [[열하일기]], 양반전, 허생전 등의 문학작품을 창작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실학으로 대표되는 '''북학'''(北學)의 가장 대표적인 학자이기도 하다. 정통 노론 가문의 양반&amp;lt;ref&amp;gt;실학자라는 점, 풍자소설을 창작하였다는 점에서 그가 미천한 신분을 가졌을 거라고 오해하는 사람이 많지만 그렇지 않다&amp;lt;/ref&amp;gt;으로 소설, 철학, 천문학, 농사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활동하였다. &amp;lt;p&amp;gt; 예조, 공조, 호조, 병조참판을 역임한 뒤 대사간에 임명되어 사도세자의 스승을 맡기도 했던 지돈녕부사 박필균(朴弼均, 1685~1760)의 셋째 아들 박사유(1703~1767)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752년 이보천(李輔天)의 딸과 결혼했으며 처삼촌이자 성호 이익(李瀷)의 사상적 영향을 받은 홍문관교리 이양천(李亮天)에게서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후 3년 동안 문을 걸어 잠그고 공부에 전념해 경학·병학·농학 등 모든 경세실용의 학문을 연구했다. 어려서부터 비범한 문학적 재능을 보인 그는 18세 무렵에 &amp;lt;광문자전(廣文者傳)&amp;gt;을 지었으며 1757년 &amp;lt;민옹전(閔翁傳)&amp;gt;을 지었고 1767년까지 &amp;lt;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amp;gt;에 실려 있는 9편의 단편 소설을 지었다. 이 시기부터 양반 사회의 무능함, 위선 등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가장 친한 벗이었던 이희천이 1771년 청나라 태학사(太學士) 주린(朱璘)이 1696년 편찬한 &amp;lt;명기집략(明紀輯略)&amp;gt;을 소장했다는 이유로 처형되자, 크게 상심한 후 과거의 뜻을 접은 그는 이덕무(李德懋), 이서구(李書九), 서상수(徐常修), 유금(柳琴), 유득공(柳得恭), 박제가(朴齊家), 이희경(李喜慶)과 활발하게 교류하며 '''북학파실학'''(北學派實學)이라는 학풍, 문풍을 이룩한다. 청나라 방문 이후, 50살의 나이로 1786년 처음 벼슬에 올라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에 임명되었다. 1789년 평시서주부(平市署主簿), 1790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와 제릉령(齊陵令), 1791년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과 안의현감(安義縣監)을 지냈으며 자송문을 바치라는 명을 받은 이후에도 1796년 제용감주부(濟用監主簿)와 의릉령(懿陵令), 1797년 면천군수(沔川郡守)를 지냈다. 1799년에는 1년 전에 정조가 내린 권농정구농서(勸農政求農書)의 하교에 응해 &amp;lt;과농소초(課農小抄)&amp;gt;(&amp;lt;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amp;gt;를 부록으로 붙임)를 바쳤다. 이 책은 농업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농업 생산 관계를 조정하는 문제를 깊이있게 다룬 것으로 박지원 사상의 원숙한 경지를 잘 보여준다. 1800년 양양부사가 되었고 1801년 봄에 사직했다가 이후 건강이 악화되어 1805년 10월 20일 68세에 눈을 감았는데 손자가 조선 후기 개화파 형성의 거목인 환재 박규수. 사후 부여받은 시호는 문도(文度)로 순종 융희 3년(1909) 8월 20일 정약용, 권돈인, 남이 등과 함께 시호를 받았다.&lt;br /&gt;
안의현감 시절에는 북경 여행의 경험을 토대로 실험적 작업을 시도했으며, 면천군수 시절의 경험은 『과농소초(課農小抄)』 · 『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 · 『안설(按說)』 등을 남기게 되었다. 박지원이 남긴 저술 중에서 특히 『열하일기(熱河日記)』와 위의 책들은 박지원이 추구하던 현실 개혁의 포부를 이론적으로 펼쳐보인 작업의 하나이다. 박지원는 서학(西學)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는 자연과학적 지식의 근원을 이해하려 한 것이며 새로운 문물에 대한 애착을 보인 결과였다. 이러한 관심은 홍대용과의 교유에서 보이는 우주론의 심화를 위한 작업이며, 실제로 북경을 여행할 때 천주당이나 관상대를 구경하면서 서양인을 만나고 싶어하였다.&lt;br /&gt;
천문학에 깊은 관심을 보인 박지원이 펼친 우주의 질서는 당시의 중국학자들도 놀라게 했으며 이는 박지원이 가진 세계관의 확대와 전환을 의미한다. 나아가 당시에 풍미하던 주자학(朱子學)의 사변적 세계에만 침잠하는 것을 반성하면서 이론적 세계의 현실 적용, 곧 유학의 본질 속에서 개혁의 이론적 근거를 찾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 배경 ==&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lKb0PQI6MWw?si=xRUjjqlr5jTdS0Dg&amp;quot; title=&amp;quot;YouTube video player&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 &amp;lt;p&amp;gt;&lt;br /&gt;
1780년, 청나라 건륭제의 70세 생일에 조선은 '''진하겸사은사'''(進賀兼謝恩使)를 청에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연암이 속한 사행단은 ‘진하 겸 사은을 위한 별사’라는 명칭을 지녔다. 진하는 황제의 생일이나 즉위 같은 경사를 축하하기 위한 사행이고, 사은은 청나라로부터 받은 배려나 조치를 감사하기 위한 사행이다. 이 특별한 사행의 목적은 건륭제의 고희를 축하함과 동시에, 1년 전 조선사행의 실수로 북경에서 발생한 화재 사건에 대해 조선에 책임을 묻지 않기로 한 청의 관용에 감사를 표하기 위한 것이었다. &lt;br /&gt;
사행단의 총 인원은 270명. 『열하일기』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함께 사행을 떠난 노이점이 쓴 『수사록』에는 “압록강을 건넌 사람은 총 270명이고 말은 194필이다”라고 기록돼 있다.&lt;br /&gt;
이 사행단에서 박지원은 청나라의 선진문물과 접촉하며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중요함을 깨닫고 귀국 후  &amp;lt;열하일기(熱河日記)&amp;gt;의 저술에 전력을 기울이게 된다. 재밌는 점은, 1780년 당시 박지원은 아무런 관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가 청나라 파견단에 동행할 수 있었던 것일까? 파견단의 사신단장으로 뽑힌 박명원이 바로 박지원의 8촌형이었던 것이었고, 박지원은 그의 자제군관(子弟軍官) 자격으로 청나라에 가게 된 것이다. 당시에는 사신들이 자신을 호위할 군관을 지정할 수 있었는데 정사는 4명을, 부사는 3명, 서장관은 1명을 고를 수 있었다. 박명원은 잘 알고 지내던 무관을 지명할 수도 있었지만 자신의 친척들 가운데 전도 유망한 선비를 지명해도 되었기에 8촌동생을 데려간 것이었다. 자제군관은 일종의 개인 수행원으로 공식 사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활동의 제약이 적어서, 중국 선비들과 교류하거나 유람을 하거나 서적 등을 구입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위로 박지원이 청의 문물, 문화 등과 매우 자유롭게 접촉할 수 있게 되며 열하일기를 저술할 수 있었던 것이다. 본디 목적지는 연경(燕京)이었으나 당시 건륭제가 열하&amp;lt;ref&amp;gt;오늘 날의 허베이성 청더&amp;lt;/ref&amp;gt;의 피서 산장에 있었기 때문에 결국 열하까지 여정이 계속되었다. 여름의 베이징은 너무 덥기 때문에 장성 너머 북쪽에 황제 전용 여름 별장인 피서 산장이 있다.황제를 따라 열하까지 간 덕에 &amp;lt;열하일기&amp;gt;란 제목이 붙여졌다.&lt;br /&gt;
원래 조선 사신단은 건륭제가 연경에 없다는 소식을 듣자 그냥 연경에서 구색만 맞추고 돌아가려 했지만, 아직 조선 사신은 한 명도 가본 적이 없다는 말에 결국 열하까지 갔다 왔다. &lt;br /&gt;
박지원은 압록강을 건넌 지 15일 만에 요양(遼陽)에 도착하였으며, 이후 7월 10일 십리하(十里河)를 출발하여 판교보(板橋堡), 장성점(長盛店), 사하보(沙河堡)를 거쳐 심양(瀋陽)에 이르렀다. 박지원은 심양에서 하루를 묵은 뒤 거류하(巨流河)를 거쳐 14일 소흑산(小黑山)에 이르러 하루를 묵었다. 7월 15일에 신광녕(新廣寧)을 거쳐 산해관(山海關)까지 9일이 걸렸으며, 산해관에서 연경까지는 11일이 걸렸다. 압록강에서 연경까지의 거리는 약 2,300여 리로 긴 여정이었다.&lt;br /&gt;
8월 5일부터 9일까지는 연경에서 열하에 이르는 여정이었다. 열하로 가는 길에는 부사 서장관과 역관 3명, 비장 4명, 하인 등 모두 74명이 동행했다. 가는 길은 녹록치 않았다. 비가 자주 와 시간이 지체되어 사신단 일행은 하룻밤에 여덟 번이나 강을 건너며 서두르기도 하였다. 말이 더위에 쓰러지고, 일행 역시 더위를 먹을 정도로 매우 힘든 여정이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lt;br /&gt;
총 26권 10책으로 되어 있으며, 열하까지의 여정, 여행에서의 인상 깊었던 점, 가지각색의 체험, 청나라 사람들과의 필담 등이 담겨 있다. &lt;br /&gt;
큰 틀에서 열하일기는 날짜 별로 서술이 되어있다. 의주에서 연경까지를 도강록(渡江錄), 성경잡지(盛京雜識), 일신수필(馹汛隨筆), 관내정사(關內程史)로 나누어 기록했으며, 연경에서 열하까지의 여정은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으로 나누어 기록하였다. 우선, 도강록에는 6월 24일부터 7월 9일까지 압록강에서 요양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이 담겨 있다. 7월 10일부터 7월 14일까지의 기록인 성경잡지에서는 조선 유학자들의 화이론과 춘추대의를 간접적으로 비판하며, 이용후생하는 중국인들의 자세를 보고 배울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amp;lt;p&amp;gt; 열하일기에는 주제별로 항목을 정해 청 학자들과의 교류내용과 정책에 대한 논평, 경험한 것들에 대한 박지원의 생각이 들어있기도 하다. 망양록(忘羊錄)에서는 청 학자들과 음악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였으며, 심세편(審勢篇)에서는 조선사람의 다섯 가지 허망된 일[五妄]과 중국 선비들의 세 가지 어려운 일[三難] 등에 대해 상호 토론하였다. 혹정필담(鵠汀筆談)에서는 윤가전(尹嘉銓)과 천문 및 역법, 서학(西學) 등에 관해 얘기하였고, 찰십륜포(札什倫布), 반선시말(班禪始末), 황교문답(黃敎問答)에서는 열하에서 체험한 반선(班禪)에 대한 내용과 건륭제의 반선 정책, 청과 주변 이민족이 지닌 각종 종교에 대해 정리하였다.&amp;lt;p&amp;gt;&lt;br /&gt;
종합적으로 보았을 때, 열하일기의 가장 주요한 주제는 '''이용후생(利用厚生)'''이라고 할 수 있다. 박지원은 청나라 마을의 커다란 가옥과 반듯한 거리, 벽돌로 쌓은 담장, 수레, 책문의 규모나 시설에 놀라움을 표현하고 마을 내 우물의 모습, 물을 깃는 방법, 기와를 잇는 방법, 벽돌을 사용하는 데 이로운 점, 가마제도 등 청 사람들의 사소한 생활 모습까지도 세세히 기록하며 조선 백성들이 생활에서 겪는 불편함 등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함과 동시에 청의 선진문물이 가진 실용성과 효용성에 주목하여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열하일기의 많은 부분은 청나라 사람들과의 필담이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청의 학자, 상인, 농민 등 다양한 계층과 교류함으로써 당시 조선에 팽배했던 반청사상에서 벗어나 청의 문화를 사실적, 객관적으로 이해하고자 한 것이다. &lt;br /&gt;
&lt;br /&gt;
== 참고문헌 ==&lt;br /&gt;
연암을 따라, 사유의 자취를 걷다(1) 연암, 조선을 넘어 청나라로 - 김경민·곽영군 기자 https://www.hynews.kr/news/view.php?idx=74157 &amp;lt;p&amp;gt;&lt;br /&gt;
우리역사넷 - 열하일기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r300735&amp;amp;code=kc_age_30&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분류: 시대별로 살펴보는 한국 문학 작품의 흐름과 변화]]&lt;br /&gt;
[[분류: 김치찌개]]&lt;/div&gt;</summary>
		<author><name>고군분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7%B4%ED%95%98%EC%9D%BC%EA%B8%B0%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285</id>
		<title>열하일기ᐧ༚̮ᐧ</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97%B4%ED%95%98%EC%9D%BC%EA%B8%B0%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285"/>
		<updated>2025-06-23T14:46:1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고군분투: &lt;/p&gt;
&lt;hr /&gt;
&lt;div&gt;[[파일:ㅇㅎㅇㄱ.jpg|right]]&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bfddf7;“&lt;br /&gt;
|+ 열하일기&lt;br /&gt;
|'''장르''' || 여행기&lt;br /&gt;
|-&lt;br /&gt;
| '''작가''' || 박지원&lt;br /&gt;
|-&lt;br /&gt;
| '''시대''' || 1780년 - [[조선 후기]]   &lt;br /&gt;
|-&lt;br /&gt;
| '''배경'''|| 청나라 답사 &lt;br /&gt;
|}&lt;br /&gt;
&lt;br /&gt;
== 장르 ==&lt;br /&gt;
&lt;br /&gt;
청나라 황제인 건륭제의 70세 생일을 축하가기 위한 사절로  '''박지원'''이 청나라에 다녀온 일을 적은 &amp;lt;font color=&amp;quot;background:red&amp;quot;&amp;gt;여행기&amp;lt;/font&amp;gt;이다. 여행기는 일상을 떠나 낯선 곳에서 경험한 제반사항에 의미를 부여하며 기록으로 남기는 과정의 총체이다. 여행의 과정에서 접한 것들을 현실적으로 재해석하여 삶에 응용할 것을 전제로 하는 유목적적 여정으로, 인생에서 펼치는 다양한 유람과 놀이, 개인적, 사회적 차원의 견문 확장, 그리고 삶의 도전과 성찰이라는 문제의식을 던진다. 문학작품으로써의 여행기는  인생을 각성하는 계기를 주고, 생애를 숙고하고 성찰하는 동기를 부여하며, 문화 간의 소통과 융합, 현실세계에 실천하고 적용하는 다차원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조선 후기에 쓰인 또다른 여행기로 1712년 김창업이 연경(현재의 베이징)으로 사행을 다녀온 후 당시 중국의 정치, 사회, 문화를 상세히 기록한 '''가재연행록''' 등이 존재한다. &lt;br /&gt;
이러한 여행은 단순한 이동의 기록, 외교 사행이나 이국 풍물기에 머무르지 않고, ‘집’을 떠나 ‘타자’와 마주하며, 조선이라는 체제와 문명의 근본을 다시 묻는 철학적 탐색의 길에 들어설 수 있게 해준다. 여행기는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 가치관, 그리고 사회적 관심사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이러한 여행기들을 통해 당시 사람들의 삶과 사고 방식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lt;br /&gt;
&lt;br /&gt;
== 작가 ==&lt;br /&gt;
[[파일:ㅂㅈㅇ.jpg|ㅣleft]]&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f6e8a1;“&lt;br /&gt;
|+ 박지원 朴趾源&lt;br /&gt;
|'''출생''' || 1737년 3월 5일 &lt;br /&gt;
|-&lt;br /&gt;
| '''사망''' || 1805년 12월 5일&lt;br /&gt;
|-&lt;br /&gt;
| '''호''' || 연암(燕巖)&amp;lt;ref&amp;gt;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호이다&amp;lt;/ref&amp;gt;,연상(煙湘)&lt;br /&gt;
|-&lt;br /&gt;
| '''저서'''|| 열하일기, 양반전&amp;lt;ref&amp;gt;열하일기 내부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이다&amp;lt;/ref&amp;gt;&lt;br /&gt;
|- &lt;br /&gt;
| '''직업''' || 소설가, 실학자&lt;br /&gt;
|}&lt;br /&gt;
&lt;br /&gt;
'''박지원'''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문장가이다. [[열하일기]], 양반전, 허생전 등의 문학작품을 창작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실학으로 대표되는 '''북학'''(北學)의 가장 대표적인 학자이기도 하다. 정통 노론 가문의 양반&amp;lt;ref&amp;gt;실학자라는 점, 풍자소설을 창작하였다는 점에서 그가 미천한 신분을 가졌을 거라고 오해하는 사람이 많지만 그렇지 않다&amp;lt;/ref&amp;gt;으로 소설, 철학, 천문학, 농사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활동하였다. &amp;lt;p&amp;gt; 예조, 공조, 호조, 병조참판을 역임한 뒤 대사간에 임명되어 사도세자의 스승을 맡기도 했던 지돈녕부사 박필균(朴弼均, 1685~1760)의 셋째 아들 박사유(1703~1767)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752년 이보천(李輔天)의 딸과 결혼했으며 처삼촌이자 성호 이익(李瀷)의 사상적 영향을 받은 홍문관교리 이양천(李亮天)에게서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후 3년 동안 문을 걸어 잠그고 공부에 전념해 경학·병학·농학 등 모든 경세실용의 학문을 연구했다. 어려서부터 비범한 문학적 재능을 보인 그는 18세 무렵에 &amp;lt;광문자전(廣文者傳)&amp;gt;을 지었으며 1757년 &amp;lt;민옹전(閔翁傳)&amp;gt;을 지었고 1767년까지 &amp;lt;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amp;gt;에 실려 있는 9편의 단편 소설을 지었다. 이 시기부터 양반 사회의 무능함, 위선 등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가장 친한 벗이었던 이희천이 1771년 청나라 태학사(太學士) 주린(朱璘)이 1696년 편찬한 &amp;lt;명기집략(明紀輯略)&amp;gt;을 소장했다는 이유로 처형되자, 크게 상심한 후 과거의 뜻을 접은 그는 이덕무(李德懋), 이서구(李書九), 서상수(徐常修), 유금(柳琴), 유득공(柳得恭), 박제가(朴齊家), 이희경(李喜慶)과 활발하게 교류하며 '''북학파실학'''(北學派實學)이라는 학풍, 문풍을 이룩한다. 청나라 방문 이후, 50살의 나이로 1786년 처음 벼슬에 올라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에 임명되었다. 1789년 평시서주부(平市署主簿), 1790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와 제릉령(齊陵令), 1791년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과 안의현감(安義縣監)을 지냈으며 자송문을 바치라는 명을 받은 이후에도 1796년 제용감주부(濟用監主簿)와 의릉령(懿陵令), 1797년 면천군수(沔川郡守)를 지냈다. 1799년에는 1년 전에 정조가 내린 권농정구농서(勸農政求農書)의 하교에 응해 &amp;lt;과농소초(課農小抄)&amp;gt;(&amp;lt;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amp;gt;를 부록으로 붙임)를 바쳤다. 이 책은 농업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농업 생산 관계를 조정하는 문제를 깊이있게 다룬 것으로 박지원 사상의 원숙한 경지를 잘 보여준다. 1800년 양양부사가 되었고 1801년 봄에 사직했다가 이후 건강이 악화되어 1805년 10월 20일 68세에 눈을 감았는데 손자가 조선 후기 개화파 형성의 거목인 환재 박규수. 사후 부여받은 시호는 문도(文度)로 순종 융희 3년(1909) 8월 20일 정약용, 권돈인, 남이 등과 함께 시호를 받았다.&lt;br /&gt;
안의현감 시절에는 북경 여행의 경험을 토대로 실험적 작업을 시도했으며, 면천군수 시절의 경험은 『과농소초(課農小抄)』 · 『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 · 『안설(按說)』 등을 남기게 되었다. 박지원이 남긴 저술 중에서 특히 『열하일기(熱河日記)』와 위의 책들은 박지원이 추구하던 현실 개혁의 포부를 이론적으로 펼쳐보인 작업의 하나이다. 박지원는 서학(西學)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는 자연과학적 지식의 근원을 이해하려 한 것이며 새로운 문물에 대한 애착을 보인 결과였다. 이러한 관심은 홍대용과의 교유에서 보이는 우주론의 심화를 위한 작업이며, 실제로 북경을 여행할 때 천주당이나 관상대를 구경하면서 서양인을 만나고 싶어하였다.&lt;br /&gt;
천문학에 깊은 관심을 보인 박지원이 펼친 우주의 질서는 당시의 중국학자들도 놀라게 했으며 이는 박지원이 가진 세계관의 확대와 전환을 의미한다. 나아가 당시에 풍미하던 주자학(朱子學)의 사변적 세계에만 침잠하는 것을 반성하면서 이론적 세계의 현실 적용, 곧 유학의 본질 속에서 개혁의 이론적 근거를 찾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 배경 ==&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lKb0PQI6MWw?si=xRUjjqlr5jTdS0Dg&amp;quot; title=&amp;quot;YouTube video player&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 &amp;lt;p&amp;gt;&lt;br /&gt;
1780년, 청나라 건륭제의 70세 생일에 조선은 '''진하겸사은사'''(進賀兼謝恩使)를 청에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연암이 속한 사행단은 ‘진하 겸 사은을 위한 별사’라는 명칭을 지녔다. 진하는 황제의 생일이나 즉위 같은 경사를 축하하기 위한 사행이고, 사은은 청나라로부터 받은 배려나 조치를 감사하기 위한 사행이다. 이 특별한 사행의 목적은 건륭제의 고희를 축하함과 동시에, 1년 전 조선사행의 실수로 북경에서 발생한 화재 사건에 대해 조선에 책임을 묻지 않기로 한 청의 관용에 감사를 표하기 위한 것이었다. &lt;br /&gt;
사행단의 총 인원은 270명. 『열하일기』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함께 사행을 떠난 노이점이 쓴 『수사록』에는 “압록강을 건넌 사람은 총 270명이고 말은 194필이다”라고 기록돼 있다.&lt;br /&gt;
이 사행단에서 박지원은 청나라의 선진문물과 접촉하며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중요함을 깨닫고 귀국 후  &amp;lt;열하일기(熱河日記)&amp;gt;의 저술에 전력을 기울이게 된다. 재밌는 점은, 1780년 당시 박지원은 아무런 관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가 청나라 파견단에 동행할 수 있었던 것일까? 파견단의 사신단장으로 뽑힌 박명원이 바로 박지원의 8촌형이었던 것이었고, 박지원은 그의 자제군관(子弟軍官) 자격으로 청나라에 가게 된 것이다. 당시에는 사신들이 자신을 호위할 군관을 지정할 수 있었는데 정사는 4명을, 부사는 3명, 서장관은 1명을 고를 수 있었다. 박명원은 잘 알고 지내던 무관을 지명할 수도 있었지만 자신의 친척들 가운데 전도 유망한 선비를 지명해도 되었기에 8촌동생을 데려간 것이었다. 자제군관은 일종의 개인 수행원으로 공식 사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활동의 제약이 적어서, 중국 선비들과 교류하거나 유람을 하거나 서적 등을 구입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위로 박지원이 청의 문물, 문화 등과 매우 자유롭게 접촉할 수 있게 되며 열하일기를 저술할 수 있었던 것이다. 본디 목적지는 연경(燕京)이었으나 당시 건륭제가 열하&amp;lt;ref&amp;gt;오늘 날의 허베이성 청더&amp;lt;/ref&amp;gt;의 피서 산장에 있었기 때문에 결국 열하까지 여정이 계속되었다. 여름의 베이징은 너무 덥기 때문에 장성 너머 북쪽에 황제 전용 여름 별장인 피서 산장이 있다.황제를 따라 열하까지 간 덕에 &amp;lt;열하일기&amp;gt;란 제목이 붙여졌다.&lt;br /&gt;
원래 조선 사신단은 건륭제가 연경에 없다는 소식을 듣자 그냥 연경에서 구색만 맞추고 돌아가려 했지만, 아직 조선 사신은 한 명도 가본 적이 없다는 말에 결국 열하까지 갔다 왔다. &lt;br /&gt;
박지원은 압록강을 건넌 지 15일 만에 요양(遼陽)에 도착하였으며, 이후 7월 10일 십리하(十里河)를 출발하여 판교보(板橋堡), 장성점(長盛店), 사하보(沙河堡)를 거쳐 심양(瀋陽)에 이르렀다. 박지원은 심양에서 하루를 묵은 뒤 거류하(巨流河)를 거쳐 14일 소흑산(小黑山)에 이르러 하루를 묵었다. 7월 15일에 신광녕(新廣寧)을 거쳐 산해관(山海關)까지 9일이 걸렸으며, 산해관에서 연경까지는 11일이 걸렸다. 압록강에서 연경까지의 거리는 약 2,300여 리로 긴 여정이었다.&lt;br /&gt;
8월 5일부터 9일까지는 연경에서 열하에 이르는 여정이었다. 열하로 가는 길에는 부사 서장관과 역관 3명, 비장 4명, 하인 등 모두 74명이 동행했다. 가는 길은 녹록치 않았다. 비가 자주 와 시간이 지체되어 사신단 일행은 하룻밤에 여덟 번이나 강을 건너며 서두르기도 하였다. 말이 더위에 쓰러지고, 일행 역시 더위를 먹을 정도로 매우 힘든 여정이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lt;br /&gt;
총 26권 10책으로 되어 있으며, 열하까지의 여정, 여행에서의 인상 깊었던 점, 가지각색의 체험, 청나라 사람들과의 필담 등이 담겨 있다. &lt;br /&gt;
큰 틀에서 열하일기는 날짜 별로 서술이 되어있다. 의주에서 연경까지를 도강록(渡江錄), 성경잡지(盛京雜識), 일신수필(馹汛隨筆), 관내정사(關內程史)로 나누어 기록했으며, 연경에서 열하까지의 여정은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으로 나누어 기록하였다. 우선, 도강록에는 6월 24일부터 7월 9일까지 압록강에서 요양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이 담겨 있다. 7월 10일부터 7월 14일까지의 기록인 성경잡지에서는 조선 유학자들의 화이론과 춘추대의를 간접적으로 비판하며, 이용후생하는 중국인들의 자세를 보고 배울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amp;lt;p&amp;gt; 열하일기에는 주제별로 항목을 정해 청 학자들과의 교류내용과 정책에 대한 논평, 경험한 것들에 대한 박지원의 생각이 들어있기도 하다. 망양록(忘羊錄)에서는 청 학자들과 음악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였으며, 심세편(審勢篇)에서는 조선사람의 다섯 가지 허망된 일[五妄]과 중국 선비들의 세 가지 어려운 일[三難] 등에 대해 상호 토론하였다. 혹정필담(鵠汀筆談)에서는 윤가전(尹嘉銓)과 천문 및 역법, 서학(西學) 등에 관해 얘기하였고, 찰십륜포(札什倫布), 반선시말(班禪始末), 황교문답(黃敎問答)에서는 열하에서 체험한 반선(班禪)에 대한 내용과 건륭제의 반선 정책, 청과 주변 이민족이 지닌 각종 종교에 대해 정리하였다.&amp;lt;p&amp;gt;&lt;br /&gt;
종합적으로 보았을 때, 열하일기의 가장 주요한 주제는 '''이용후생(利用厚生)'''이라고 할 수 있다. 박지원은 청나라 마을의 커다란 가옥과 반듯한 거리, 벽돌로 쌓은 담장, 수레, 책문의 규모나 시설에 놀라움을 표현하고 마을 내 우물의 모습, 물을 깃는 방법, 기와를 잇는 방법, 벽돌을 사용하는 데 이로운 점, 가마제도 등 청 사람들의 사소한 생활 모습까지도 세세히 기록하며 조선 백성들이 생활에서 겪는 불편함 등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함과 동시에 청의 선진문물이 가진 실용성과 효용성에 주목하여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열하일기의 많은 부분은 청나라 사람들과의 필담이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청의 학자, 상인, 농민 등 다양한 계층과 교류함으로써 당시 조선에 팽배했던 반청사상에서 벗어나 청의 문화를 사실적, 객관적으로 이해하고자 한 것이다. &lt;br /&gt;
&lt;br /&gt;
== 참고문헌 ==&lt;br /&gt;
연암을 따라, 사유의 자취를 걷다(1) 연암, 조선을 넘어 청나라로 - 김경민·곽영군 기자 https://www.hynews.kr/news/view.php?idx=74157 &amp;lt;p&amp;gt;&lt;br /&gt;
우리역사넷 - 열하일기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r300735&amp;amp;code=kc_age_30&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분류:시대별로 살펴보는 한국 문학 작품의 흐름과 변화]]&lt;br /&gt;
[[분류:김치찌개]]&lt;/div&gt;</summary>
		<author><name>고군분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4%91%EC%95%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217</id>
		<title>광야ᐧ༚̮ᐧ</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4%91%EC%95%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217"/>
		<updated>2025-06-23T11:46:1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고군분투: /*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lt;br /&gt;
|+광야&lt;br /&gt;
|'''장르''' || 저항시, 서정시&lt;br /&gt;
|-&lt;br /&gt;
| '''작가''' || 이육사&lt;br /&gt;
|-&lt;br /&gt;
| '''시대''' || 1945년 - [[근대]]   &lt;br /&gt;
|-&lt;br /&gt;
| '''배경'''|| 일제강점기 &lt;br /&gt;
|}&lt;br /&gt;
&lt;br /&gt;
== 원문 ==&lt;br /&gt;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까마득한 날에&lt;br /&gt;
하늘이 처음 열리고&lt;br /&gt;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lt;br /&gt;
&lt;br /&gt;
모든 산맥들이&lt;br /&gt;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lt;br /&gt;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lt;br /&gt;
&lt;br /&gt;
끊임없는 광음을&lt;br /&gt;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lt;br /&gt;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lt;br /&gt;
&lt;br /&gt;
지금 눈 내리고&lt;br /&gt;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lt;br /&gt;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lt;br /&gt;
&lt;br /&gt;
다시 천고의 뒤에&lt;br /&gt;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lt;br /&gt;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 배경 ==&lt;br /&gt;
시인 이육사의 말년 작품으로 유고로 전하여지다가, 그가 사망한 후인 1945년 12월 17일『자유신문』에 동생 이원조(李源朝)에 의하여 '''「꽃」'''과 함께 발표되었다. 광복 이전 일제강점기 시절의 창작된 시로 일본에 대한 저항정신을 서정적 표현을 통해 비유적으로 나타낸 시이다. 그의 생전 마지막 작품이 1939년에 발표된 것을 감안하였을 땐 1939년부터 그가 사망한 1944년 사이에 쓰였을 것으로 파악된다. 사실 광야라는 작품 자체에는 기존의 저항시와는 다르게 일제에 대한 직접적인 저항 등이 표출되어 있지는 않다. 하지만 이육사의 생애와 그의 다른 작품들을 감안하였을 때 광야 역시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드러낸 '''저항시'''라고 봐야 옳을 것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 작가 ==&lt;br /&gt;
[[파일:ㅇㅇㅅ.jpg|200px|left]]&lt;br /&gt;
&amp;lt;p&amp;gt;&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fbe1df;“&lt;br /&gt;
|+ 이육사 李陸史&lt;br /&gt;
|'''출생''' || 1904년 5월 18일&lt;br /&gt;
|-&lt;br /&gt;
| '''사망''' || 1944년 1월 16일&lt;br /&gt;
|-&lt;br /&gt;
| '''본명''' || 이원록(李源祿)&lt;br /&gt;
|-&lt;br /&gt;
| '''작품'''||  광야, 황혼, 절정, 청포도, 강 건너간 노래&lt;br /&gt;
|- &lt;br /&gt;
| '''직업''' || 시인, 독립운동가, 언론인&lt;br /&gt;
|}&lt;br /&gt;
&amp;lt;p&amp;gt;&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c92e16&amp;quot;&amp;gt;이육사&amp;lt;/font&amp;gt;는 일제강점기의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경상북도 예안&amp;lt;ref&amp;gt;현재의 경상북도 안동&amp;lt;/ref&amp;gt;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대한제국 시기 장릉(章陵) 참봉을 지낸 조부 이중직(李中稙, 1847 ~ 1916. 1. 17)에게서 소학을 배우는 등 한문학을 공부하다가 조부가 사망한 1916년, 그의 가문인 진성이씨 문중에서 설립한 보문의숙(이후 도산공립보통학교로 개칭)에서 수학하기 시작하였다. 어린 시절 한문학을 공부한 것의 영향으로 그의 시에서는 한시의 기승전결과 유사한 형식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시작한 것은 대구로 이사한 1925년이다. 그는 형제들과 함께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bee826&amp;quot;&amp;gt;의열단&amp;lt;/span&amp;gt;'''&amp;lt;ref&amp;gt;1919년에 찯단했다&amp;lt;/ref&amp;gt;에 가입한 이후 1927년에 일어난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가담한 혐의로 형제 이원기, 이원일과 함께 처음으로 투옥된다. 이때 본인의 수감번호였던 264에서 필명 '''이육사'''&amp;lt;ref&amp;gt;많은 이들이 본명으로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amp;lt;/ref&amp;gt;를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1930년, 27세의 나이로 &amp;lt;조선일보&amp;gt;에 &amp;lt;말&amp;gt;을 발표하며 처음으로 등단하게 되고 조선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잠시 일하기도 하였다. 1932년 난징에 있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입교한 그는 특수 부대원 훈련을 받았고 이듬해 4월에 졸업한다. 같은 해 7월에 곧바로 귀국한 그는 본인의 필명으로 '''&amp;lt;황혼&amp;gt;, &amp;lt;신조선&amp;gt;''' 등을 발표하며 창작활동에도 매진한다. 하지만 1934년, 그는 의열단 출신이라는 이유로 경성부 본정경찰서에 의해 검거된 뒤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다. 혹독한 고문을 받고 간신히 풀려난 그는, 그의 대표작이자 저항정신, 광복에 대한 염원이 담긴  &amp;lt;청포도&amp;gt;, &amp;lt;절정&amp;gt; 등을 발표한다. 1943년 베이징으로 압송된 그는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교도소에서 결국 옥사하게 된다. 1968년에는 고향 안동에 그의 비석이 건립되었고 2000년에는 이육사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lt;br /&gt;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0550 이육사 문학관]이 건설되어 매년 문학의 밤, 육사 백일장, 기념 세미나 등을 개최하고 있다.&lt;br /&gt;
&lt;br /&gt;
== 내용 및 해석 ==&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cCeppR6Gs5I?si=QhqKE9f7gPlVqsdi&amp;quot; title=&amp;quot;YouTube video player&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 &amp;lt;p&amp;gt; '''광야'''는 5연 15행의 자유시로, 1~3연에서는 과거를 4연에서는 현재의 비관적 상황에 이어 미래의 모습을 그린 5연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3단계로 시가 구성된다. 우선 1연에서는 천지가 창조되기 이전의 근원적 상황을 표현하고 2연에서는 산맥과 같은 광대한 자연조차도 침범하지 못하는 신성한 광야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3연에서는 태초의 자연상태에서 벗어나 문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1-3연에 걸쳐 광야가 형성되고 발전하는 과정을 순차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그 이후 4연에서는 '''지금'''이라는 시어를 통해 현재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 현재의 모습은 '''눈 내리고'''라는 구절을 통해 나타나다시피 암울한 상황이다. 그러면서도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를 통해 담담하고 결연한 극복 의지를 드러내며 5연에서는 미래의 어느 시점에 반드시 '''백마 타고 오는 노인'''이 올 것을 예언하며 현실에 대한 극복의지와 더불어 긍정적 미래에 대한 기대를 보여준다. &amp;lt;p&amp;gt; 이 시에 나타나는 특징으로는 태초부터 천고의 뒤까지의 광범위한 시간의 압축과 더불어 광야의 광활한 공간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광야’는 이상적인 공간, 즉 이육사가 지닌 이념이 실현되는 공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공간의 무한성과 광활함은 이육사 시의 대표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이육사는 이 시에서 직접적인 저항정신의 표출 등을 극도로 자제하고 시의 처음부터 끝까지 절제되고 담담한 어조로 일관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기법은 또다른 대표적 저항시인인 '''윤동주'''와는 확연히 대비되는 것으로 윤동주가 고백적 어조로 본인이 느낀 무기력함, 부끄러움 등을 가감없이 시에 표현하였다면 이육사는  매우 함축적이고 세련되었으며 강렬한 시어를 통해 독자적인 시세계를 구축한 것이다.&lt;br /&gt;
== 참고문헌 ==&lt;br /&gt;
&lt;br /&gt;
이육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5444 &amp;lt;p&amp;gt;&lt;br /&gt;
이육사 문학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0550 &amp;lt;p&amp;gt;&lt;br /&gt;
이육사의 &amp;lt;광야&amp;gt; 연구 - 비평문학, 한국비평문학회, 박순원, 2011&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고군분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4%91%EC%95%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216</id>
		<title>광야ᐧ༚̮ᐧ</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4%91%EC%95%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216"/>
		<updated>2025-06-23T11:45:5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고군분투: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lt;br /&gt;
|+광야&lt;br /&gt;
|'''장르''' || 저항시, 서정시&lt;br /&gt;
|-&lt;br /&gt;
| '''작가''' || 이육사&lt;br /&gt;
|-&lt;br /&gt;
| '''시대''' || 1945년 - [[근대]]   &lt;br /&gt;
|-&lt;br /&gt;
| '''배경'''|| 일제강점기 &lt;br /&gt;
|}&lt;br /&gt;
&lt;br /&gt;
== 원문 ==&lt;br /&gt;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까마득한 날에&lt;br /&gt;
하늘이 처음 열리고&lt;br /&gt;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lt;br /&gt;
&lt;br /&gt;
모든 산맥들이&lt;br /&gt;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lt;br /&gt;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lt;br /&gt;
&lt;br /&gt;
끊임없는 광음을&lt;br /&gt;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lt;br /&gt;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lt;br /&gt;
&lt;br /&gt;
지금 눈 내리고&lt;br /&gt;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lt;br /&gt;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lt;br /&gt;
&lt;br /&gt;
다시 천고의 뒤에&lt;br /&gt;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lt;br /&gt;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 배경 ==&lt;br /&gt;
시인 이육사의 말년 작품으로 유고로 전하여지다가, 그가 사망한 후인 1945년 12월 17일『자유신문』에 동생 이원조(李源朝)에 의하여 '''「꽃」'''과 함께 발표되었다. 광복 이전 일제강점기 시절의 창작된 시로 일본에 대한 저항정신을 서정적 표현을 통해 비유적으로 나타낸 시이다. 그의 생전 마지막 작품이 1939년에 발표된 것을 감안하였을 땐 1939년부터 그가 사망한 1944년 사이에 쓰였을 것으로 파악된다. 사실 광야라는 작품 자체에는 기존의 저항시와는 다르게 일제에 대한 직접적인 저항 등이 표출되어 있지는 않다. 하지만 이육사의 생애와 그의 다른 작품들을 감안하였을 때 광야 역시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드러낸 '''저항시'''라고 봐야 옳을 것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 작가 ==&lt;br /&gt;
[[파일:ㅇㅇㅅ.jpg|200px|left]]&lt;br /&gt;
&amp;lt;p&amp;gt;&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fbe1df;“&lt;br /&gt;
|+ 이육사 李陸史&lt;br /&gt;
|'''출생''' || 1904년 5월 18일&lt;br /&gt;
|-&lt;br /&gt;
| '''사망''' || 1944년 1월 16일&lt;br /&gt;
|-&lt;br /&gt;
| '''본명''' || 이원록(李源祿)&lt;br /&gt;
|-&lt;br /&gt;
| '''작품'''||  광야, 황혼, 절정, 청포도, 강 건너간 노래&lt;br /&gt;
|- &lt;br /&gt;
| '''직업''' || 시인, 독립운동가, 언론인&lt;br /&gt;
|}&lt;br /&gt;
&amp;lt;p&amp;gt;&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c92e16&amp;quot;&amp;gt;이육사&amp;lt;/font&amp;gt;는 일제강점기의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경상북도 예안&amp;lt;ref&amp;gt;현재의 경상북도 안동&amp;lt;/ref&amp;gt;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대한제국 시기 장릉(章陵) 참봉을 지낸 조부 이중직(李中稙, 1847 ~ 1916. 1. 17)에게서 소학을 배우는 등 한문학을 공부하다가 조부가 사망한 1916년, 그의 가문인 진성이씨 문중에서 설립한 보문의숙(이후 도산공립보통학교로 개칭)에서 수학하기 시작하였다. 어린 시절 한문학을 공부한 것의 영향으로 그의 시에서는 한시의 기승전결과 유사한 형식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시작한 것은 대구로 이사한 1925년이다. 그는 형제들과 함께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bee826&amp;quot;&amp;gt;의열단&amp;lt;/span&amp;gt;'''&amp;lt;ref&amp;gt;1919년에 찯단했다&amp;lt;/ref&amp;gt;에 가입한 이후 1927년에 일어난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가담한 혐의로 형제 이원기, 이원일과 함께 처음으로 투옥된다. 이때 본인의 수감번호였던 264에서 필명 '''이육사'''&amp;lt;ref&amp;gt;많은 이들이 본명으로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amp;lt;/ref&amp;gt;를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1930년, 27세의 나이로 &amp;lt;조선일보&amp;gt;에 &amp;lt;말&amp;gt;을 발표하며 처음으로 등단하게 되고 조선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잠시 일하기도 하였다. 1932년 난징에 있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입교한 그는 특수 부대원 훈련을 받았고 이듬해 4월에 졸업한다. 같은 해 7월에 곧바로 귀국한 그는 본인의 필명으로 '''&amp;lt;황혼&amp;gt;, &amp;lt;신조선&amp;gt;''' 등을 발표하며 창작활동에도 매진한다. 하지만 1934년, 그는 의열단 출신이라는 이유로 경성부 본정경찰서에 의해 검거된 뒤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다. 혹독한 고문을 받고 간신히 풀려난 그는, 그의 대표작이자 저항정신, 광복에 대한 염원이 담긴  &amp;lt;청포도&amp;gt;, &amp;lt;절정&amp;gt; 등을 발표한다. 1943년 베이징으로 압송된 그는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교도소에서 결국 옥사하게 된다. 1968년에는 고향 안동에 그의 비석이 건립되었고 2000년에는 이육사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lt;br /&gt;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0550 이육사 문학관]이 건설되어 매년 문학의 밤, 육사 백일장, 기념 세미나 등을 개최하고 있다.&lt;br /&gt;
&lt;br /&gt;
== 내용 및 해석 ==&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cCeppR6Gs5I?si=QhqKE9f7gPlVqsdi&amp;quot; title=&amp;quot;YouTube video player&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 &amp;lt;p&amp;gt; '''광야'''는 5연 15행의 자유시로, 1~3연에서는 과거를 4연에서는 현재의 비관적 상황에 이어 미래의 모습을 그린 5연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3단계로 시가 구성된다. 우선 1연에서는 천지가 창조되기 이전의 근원적 상황을 표현하고 2연에서는 산맥과 같은 광대한 자연조차도 침범하지 못하는 신성한 광야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3연에서는 태초의 자연상태에서 벗어나 문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1-3연에 걸쳐 광야가 형성되고 발전하는 과정을 순차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그 이후 4연에서는 '''지금'''이라는 시어를 통해 현재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 현재의 모습은 '''눈 내리고'''라는 구절을 통해 나타나다시피 암울한 상황이다. 그러면서도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를 통해 담담하고 결연한 극복 의지를 드러내며 5연에서는 미래의 어느 시점에 반드시 '''백마 타고 오는 노인'''이 올 것을 예언하며 현실에 대한 극복의지와 더불어 긍정적 미래에 대한 기대를 보여준다. &amp;lt;p&amp;gt; 이 시에 나타나는 특징으로는 태초부터 천고의 뒤까지의 광범위한 시간의 압축과 더불어 광야의 광활한 공간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광야’는 이상적인 공간, 즉 이육사가 지닌 이념이 실현되는 공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공간의 무한성과 광활함은 이육사 시의 대표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이육사는 이 시에서 직접적인 저항정신의 표출 등을 극도로 자제하고 시의 처음부터 끝까지 절제되고 담담한 어조로 일관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기법은 또다른 대표적 저항시인인 '''윤동주'''와는 확연히 대비되는 것으로 윤동주가 고백적 어조로 본인이 느낀 무기력함, 부끄러움 등을 가감없이 시에 표현하였다면 이육사는  매우 함축적이고 세련되었으며 강렬한 시어를 통해 독자적인 시세계를 구축한 것이다.&lt;br /&gt;
== 참고문헌 ==&lt;br /&gt;
&lt;br /&gt;
이육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5444 &amp;lt;p&amp;gt;&lt;br /&gt;
이육사 문학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0550&lt;br /&gt;
이육사의 &amp;lt;광야&amp;gt; 연구 - 비평문학, 한국비평문학회, 박순원, 2011&lt;br /&gt;
&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고군분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4%91%EC%95%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213</id>
		<title>광야ᐧ༚̮ᐧ</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4%91%EC%95%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213"/>
		<updated>2025-06-23T11:40:1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고군분투: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lt;br /&gt;
|+광야&lt;br /&gt;
|'''장르''' || 저항시, 서정시&lt;br /&gt;
|-&lt;br /&gt;
| '''작가''' || 이육사&lt;br /&gt;
|-&lt;br /&gt;
| '''시대''' || 1945년 - [[근대]]   &lt;br /&gt;
|-&lt;br /&gt;
| '''배경'''|| 일제강점기 &lt;br /&gt;
|}&lt;br /&gt;
&lt;br /&gt;
== 원문 ==&lt;br /&gt;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까마득한 날에&lt;br /&gt;
하늘이 처음 열리고&lt;br /&gt;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lt;br /&gt;
&lt;br /&gt;
모든 산맥들이&lt;br /&gt;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lt;br /&gt;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lt;br /&gt;
&lt;br /&gt;
끊임없는 광음을&lt;br /&gt;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lt;br /&gt;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lt;br /&gt;
&lt;br /&gt;
지금 눈 내리고&lt;br /&gt;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lt;br /&gt;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lt;br /&gt;
&lt;br /&gt;
다시 천고의 뒤에&lt;br /&gt;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lt;br /&gt;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 배경 ==&lt;br /&gt;
시인 이육사의 말년 작품으로 유고로 전하여지다가, 그가 사망한 후인 1945년 12월 17일『자유신문』에 동생 이원조(李源朝)에 의하여 '''「꽃」'''과 함께 발표되었다. 광복 이전 일제강점기 시절의 창작된 시로 일본에 대한 저항정신을 서정적 표현을 통해 비유적으로 나타낸 시이다. 그의 생전 마지막 작품이 1939년에 발표된 것을 감안하였을 땐 1939년부터 그가 사망한 1944년 사이에 쓰였을 것으로 파악된다. 사실 광야라는 작품 자체에는 기존의 저항시와는 다르게 일제에 대한 직접적인 저항 등이 표출되어 있지는 않다. 하지만 이육사의 생애와 그의 다른 작품들을 감안하였을 때 광야 역시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드러낸 '''저항시'''라고 봐야 옳을 것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 작가 ==&lt;br /&gt;
[[파일:ㅇㅇㅅ.jpg|200px|left]]&lt;br /&gt;
&amp;lt;p&amp;gt;&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fbe1df;“&lt;br /&gt;
|+ 이육사 李陸史&lt;br /&gt;
|'''출생''' || 1904년 5월 18일&lt;br /&gt;
|-&lt;br /&gt;
| '''사망''' || 1944년 1월 16일&lt;br /&gt;
|-&lt;br /&gt;
| '''본명''' || 이원록(李源祿)&lt;br /&gt;
|-&lt;br /&gt;
| '''작품'''||  광야, 황혼, 절정, 청포도, 강 건너간 노래&lt;br /&gt;
|- &lt;br /&gt;
| '''직업''' || 시인, 독립운동가, 언론인&lt;br /&gt;
|}&lt;br /&gt;
&amp;lt;p&amp;gt;&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c92e16&amp;quot;&amp;gt;이육사&amp;lt;/font&amp;gt;는 일제강점기의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경상북도 예안&amp;lt;ref&amp;gt;현재의 경상북도 안동&amp;lt;/ref&amp;gt;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대한제국 시기 장릉(章陵) 참봉을 지낸 조부 이중직(李中稙, 1847 ~ 1916. 1. 17)에게서 소학을 배우는 등 한문학을 공부하다가 조부가 사망한 1916년, 그의 가문인 진성이씨 문중에서 설립한 보문의숙(이후 도산공립보통학교로 개칭)에서 수학하기 시작하였다. 어린 시절 한문학을 공부한 것의 영향으로 그의 시에서는 한시의 기승전결과 유사한 형식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시작한 것은 대구로 이사한 1925년이다. 그는 형제들과 함께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bee826&amp;quot;&amp;gt;의열단&amp;lt;/span&amp;gt;'''&amp;lt;ref&amp;gt;1919년에 찯단했다&amp;lt;/ref&amp;gt;에 가입한 이후 1927년에 일어난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가담한 혐의로 형제 이원기, 이원일과 함께 처음으로 투옥된다. 이때 본인의 수감번호였던 264에서 필명 '''이육사'''&amp;lt;ref&amp;gt;많은 이들이 본명으로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amp;lt;/ref&amp;gt;를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1930년, 27세의 나이로 &amp;lt;조선일보&amp;gt;에 &amp;lt;말&amp;gt;을 발표하며 처음으로 등단하게 되고 조선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잠시 일하기도 하였다. 1932년 난징에 있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입교한 그는 특수 부대원 훈련을 받았고 이듬해 4월에 졸업한다. 같은 해 7월에 곧바로 귀국한 그는 본인의 필명으로 '''&amp;lt;황혼&amp;gt;, &amp;lt;신조선&amp;gt;''' 등을 발표하며 창작활동에도 매진한다. 하지만 1934년, 그는 의열단 출신이라는 이유로 경성부 본정경찰서에 의해 검거된 뒤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다. 혹독한 고문을 받고 간신히 풀려난 그는, 그의 대표작이자 저항정신, 광복에 대한 염원이 담긴  &amp;lt;청포도&amp;gt;, &amp;lt;절정&amp;gt; 등을 발표한다. 1943년 베이징으로 압송된 그는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교도소에서 결국 옥사하게 된다. 1968년에는 고향 안동에 그의 비석이 건립되었고 2000년에는 이육사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lt;br /&gt;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0550 이육사 문학관]이 건설되어 매년 문학의 밤, 육사 백일장, 기념 세미나 등을 개최하고 있다.&lt;br /&gt;
&lt;br /&gt;
== 내용 및 해석 ==&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cCeppR6Gs5I?si=QhqKE9f7gPlVqsdi&amp;quot; title=&amp;quot;YouTube video player&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 &amp;lt;p&amp;gt; '''광야'''는 5연 15행의 자유시로, 1~3연에서는 과거를 4연에서는 현재의 비관적 상황에 이어 미래의 모습을 그린 5연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3단계로 시가 구성된다. 우선 1연에서는 천지가 창조되기 이전의 근원적 상황을 표현하고 2연에서는 산맥과 같은 광대한 자연조차도 침범하지 못하는 신성한 광야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3연에서는 태초의 자연상태에서 벗어나 문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1-3연에 걸쳐 광야가 형성되고 발전하는 과정을 순차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그 이후 4연에서는 '''지금'''이라는 시어를 통해 현재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 현재의 모습은 '''눈 내리고'''라는 구절을 통해 나타나다시피 암울한 상황이다. 그러면서도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를 통해 담담하고 결연한 극복 의지를 드러내며 5연에서는 미래의 어느 시점에 반드시 '''백마 타고 오는 노인'''이 올 것을 예언하며 현실에 대한 극복의지와 더불어 긍정적 미래에 대한 기대를 보여준다. &amp;lt;p&amp;gt; 이 시에 나타나는 특징으로는 태초부터 천고의 뒤까지의 광범위한 시간의 압축과 더불어 광야의 광활한 공간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공간의 무한성과 광활함은 이육사 시의 대표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이육사는 이 시에서 직접적인 저항정신의 표출 등을 극도로 자제하고 시의 처음부터 끝까지 절제되고 담담한 어조로 일관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기법은 또다른 대표적 저항시인인 '''윤동주'''와는 확연히 대비되는 것으로 윤동주가 고백적 어조로 본인이 느낀 무기력함, 부끄러움 등을 가감없이 시에 표현하였다면 이육사는  매우 함축적이고 세련되었으며 강렬한 시어를 통해 독자적인 시세계를 구축한 것이다.&lt;br /&gt;
== 참고문헌 ==&lt;br /&gt;
&lt;br /&gt;
이육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5444 &amp;lt;p&amp;gt;&lt;br /&gt;
이육사 문학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0550&lt;br /&gt;
이육사의 &amp;lt;광야&amp;gt; 연구 - 비평문학, 한국비평문학회, 박순원, 2011&lt;br /&gt;
&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고군분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4%91%EC%95%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211</id>
		<title>광야ᐧ༚̮ᐧ</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4%91%EC%95%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211"/>
		<updated>2025-06-23T11:25:1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고군분투: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lt;br /&gt;
|+광야&lt;br /&gt;
|'''장르''' || 저항시, 서정시&lt;br /&gt;
|-&lt;br /&gt;
| '''작가''' || 이육사&lt;br /&gt;
|-&lt;br /&gt;
| '''시대''' || 1945년 - [[근대]]   &lt;br /&gt;
|-&lt;br /&gt;
| '''배경'''|| 일제강점기 &lt;br /&gt;
|}&lt;br /&gt;
&lt;br /&gt;
== 원문 ==&lt;br /&gt;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까마득한 날에&lt;br /&gt;
하늘이 처음 열리고&lt;br /&gt;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lt;br /&gt;
&lt;br /&gt;
모든 산맥들이&lt;br /&gt;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lt;br /&gt;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lt;br /&gt;
&lt;br /&gt;
끊임없는 광음을&lt;br /&gt;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lt;br /&gt;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lt;br /&gt;
&lt;br /&gt;
지금 눈 내리고&lt;br /&gt;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lt;br /&gt;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lt;br /&gt;
&lt;br /&gt;
다시 천고의 뒤에&lt;br /&gt;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lt;br /&gt;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 배경 ==&lt;br /&gt;
시인 이육사의 말년 작품으로 유고로 전하여지다가, 그가 사망한 후인 1945년 12월 17일『자유신문』에 동생 이원조(李源朝)에 의하여 '''「꽃」'''과 함께 발표되었다. 광복 이전 일제강점기 시절의 창작된 시로 일본에 대한 저항정신을 서정적 표현을 통해 비유적으로 나타낸 시이다. 그의 생전 마지막 작품이 1939년에 발표된 것을 감안하였을 땐 1939년부터 그가 사망한 1944년 사이에 쓰였을 것으로 파악된다. 사실 광야라는 작품 자체에는 기존의 저항시와는 다르게 일제에 대한 직접적인 저항 등이 표출되어 있지는 않다. 하지만 이육사의 생애와 그의 다른 작품들을 감안하였을 때 광야 역시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드러낸 '''저항시'''라고 봐야 옳을 것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 작가 ==&lt;br /&gt;
[[파일:ㅇㅇㅅ.jpg|200px|left]]&lt;br /&gt;
&amp;lt;p&amp;gt;&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fbe1df;“&lt;br /&gt;
|+ 이육사 李陸史&lt;br /&gt;
|'''출생''' || 1904년 5월 18일&lt;br /&gt;
|-&lt;br /&gt;
| '''사망''' || 1944년 1월 16일&lt;br /&gt;
|-&lt;br /&gt;
| '''본명''' || 이원록(李源祿)&lt;br /&gt;
|-&lt;br /&gt;
| '''작품'''||  광야, 황혼, 절정, 청포도, 강 건너간 노래&lt;br /&gt;
|- &lt;br /&gt;
| '''직업''' || 시인, 독립운동가, 언론인&lt;br /&gt;
|}&lt;br /&gt;
&amp;lt;p&amp;gt;&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c92e16&amp;quot;&amp;gt;이육사&amp;lt;/font&amp;gt;는 일제강점기의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경상북도 예안&amp;lt;ref&amp;gt;현재의 경상북도 안동&amp;lt;/ref&amp;gt;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대한제국 시기 장릉(章陵) 참봉을 지낸 조부 이중직(李中稙, 1847 ~ 1916. 1. 17)에게서 소학을 배우는 등 한문학을 공부하다가 조부가 사망한 1916년, 그의 가문인 진성이씨 문중에서 설립한 보문의숙(이후 도산공립보통학교로 개칭)에서 수학하기 시작하였다. 어린 시절 한문학을 공부한 것의 영향으로 그의 시에서는 한시의 기승전결과 유사한 형식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시작한 것은 대구로 이사한 1925년이다. 그는 형제들과 함께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bee826&amp;quot;&amp;gt;의열단&amp;lt;/span&amp;gt;'''&amp;lt;ref&amp;gt;1919년에 찯단했다&amp;lt;/ref&amp;gt;에 가입한 이후 1927년에 일어난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가담한 혐의로 형제 이원기, 이원일과 함께 처음으로 투옥된다. 이때 본인의 수감번호였던 264에서 필명 '''이육사'''&amp;lt;ref&amp;gt;많은 이들이 본명으로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amp;lt;/ref&amp;gt;를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1930년, 27세의 나이로 &amp;lt;조선일보&amp;gt;에 &amp;lt;말&amp;gt;을 발표하며 처음으로 등단하게 되고 조선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잠시 일하기도 하였다. 1932년 난징에 있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입교한 그는 특수 부대원 훈련을 받았고 이듬해 4월에 졸업한다. 같은 해 7월에 곧바로 귀국한 그는 본인의 필명으로 '''&amp;lt;황혼&amp;gt;, &amp;lt;신조선&amp;gt;''' 등을 발표하며 창작활동에도 매진한다. 하지만 1934년, 그는 의열단 출신이라는 이유로 경성부 본정경찰서에 의해 검거된 뒤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다. 혹독한 고문을 받고 간신히 풀려난 그는, 그의 대표작이자 저항정신, 광복에 대한 염원이 담긴  &amp;lt;청포도&amp;gt;, &amp;lt;절정&amp;gt; 등을 발표한다. 1943년 베이징으로 압송된 그는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교도소에서 결국 옥사하게 된다. 1968년에는 고향 안동에 그의 비석이 건립되었고 2000년에는 이육사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lt;br /&gt;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0550 이육사 문학관]이 건설되어 매년 문학의 밤, 육사 백일장, 기념 세미나 등을 개최하고 있다.&lt;br /&gt;
&lt;br /&gt;
== 내용 및 해석 ==&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cCeppR6Gs5I?si=QhqKE9f7gPlVqsdi&amp;quot; title=&amp;quot;YouTube video player&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 &amp;lt;p&amp;gt; '''광야'''는 5연 15행의 자유시로, 1~3연에서는 과거를 4연에서는 현재의 비관적 상황에 이어 미래의 모습을 그린 5연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3단계로 시가 구성된다. &lt;br /&gt;
&lt;br /&gt;
== 참고문헌 ==&lt;br /&gt;
&lt;br /&gt;
이육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5444&lt;br /&gt;
이육사 문학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0550&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고군분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4%91%EC%95%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209</id>
		<title>광야ᐧ༚̮ᐧ</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4%91%EC%95%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209"/>
		<updated>2025-06-23T11:11:1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고군분투: /* 작가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lt;br /&gt;
|+광야&lt;br /&gt;
|'''장르''' || 저항시, 서정시&lt;br /&gt;
|-&lt;br /&gt;
| '''작가''' || 이육사&lt;br /&gt;
|-&lt;br /&gt;
| '''시대''' || 1945년 - [[근대]]   &lt;br /&gt;
|-&lt;br /&gt;
| '''배경'''|| 일제강점기 &lt;br /&gt;
|}&lt;br /&gt;
&lt;br /&gt;
== 원문 ==&lt;br /&gt;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까마득한 날에&lt;br /&gt;
하늘이 처음 열리고&lt;br /&gt;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lt;br /&gt;
&lt;br /&gt;
모든 산맥들이&lt;br /&gt;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lt;br /&gt;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lt;br /&gt;
&lt;br /&gt;
끊임없는 광음을&lt;br /&gt;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lt;br /&gt;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lt;br /&gt;
&lt;br /&gt;
지금 눈 내리고&lt;br /&gt;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lt;br /&gt;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lt;br /&gt;
&lt;br /&gt;
다시 천고의 뒤에&lt;br /&gt;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lt;br /&gt;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 배경 ==&lt;br /&gt;
시인 이육사의 말년 작품으로 유고로 전하여지다가, 그가 사망한 후인 1945년 12월 17일『자유신문』에 동생 이원조(李源朝)에 의하여 「꽃」과 함께 발표되었다. 광복 이전 일제강점기 시절의 창작된 시로 일본에 대한 저항정신을 서정적 표현을 통해 비유적으로 나타낸 시이다. 그의 생전 마지막 작품이 1939년에 발표된 것을 감안하였을 땐 1939년부터 그가 사망한 1944년 사이에 쓰였을 것으로 파악된다. 사실 광야라는 작품 자체에는 기존의 저항시와는 다르게 일제에 대한 직접적인 저항 등이 표출되어 있지는 않다. 하지만 이육사의 생애와 그의 다른 작품들을 감안하였을 때 광야 역시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드러낸 '''저항시'''라고 봐야 옳을 것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 작가 ==&lt;br /&gt;
[[파일:ㅇㅇㅅ.jpg|200px|left]]&lt;br /&gt;
&amp;lt;p&amp;gt;&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fbe1df;“&lt;br /&gt;
|+ 이육사 李陸史&lt;br /&gt;
|'''출생''' || 1904년 5월 18일&lt;br /&gt;
|-&lt;br /&gt;
| '''사망''' || 1944년 1월 16일&lt;br /&gt;
|-&lt;br /&gt;
| '''본명''' || 이원록(李源祿)&lt;br /&gt;
|-&lt;br /&gt;
| '''작품'''||  광야, 황혼, 절정, 청포도, 강 건너간 노래&lt;br /&gt;
|- &lt;br /&gt;
| '''직업''' || 시인, 독립운동가, 언론인&lt;br /&gt;
|}&lt;br /&gt;
&amp;lt;p&amp;gt;&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c92e16&amp;quot;&amp;gt;이육사&amp;lt;/font&amp;gt;는 일제강점기의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경상북도 예안&amp;lt;ref&amp;gt;현재의 경상북도 안동&amp;lt;/ref&amp;gt;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대한제국 시기 장릉(章陵) 참봉을 지낸 조부 이중직(李中稙, 1847 ~ 1916. 1. 17)에게서 소학을 배우는 등 한문학을 공부하다가 조부가 사망한 1916년, 그의 가문인 진성이씨 문중에서 설립한 보문의숙(이후 도산공립보통학교로 개칭)에서 수학하기 시작하였다. 어린 시절 한문학을 공부한 것의 영향으로 그의 시에서는 한시의 기승전결과 유사한 형식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시작한 것은 대구로 이사한 1925년이다. 그는 형제들과 함께 '''&amp;lt;span style=&amp;quot;background:#bee826&amp;quot;&amp;gt;의열단&amp;lt;/span&amp;gt;'''&amp;lt;ref&amp;gt;1919년에 찯단했다&amp;lt;/ref&amp;gt;에 가입한 이후 1927년에 일어난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가담한 혐의로 형제 이원기, 이원일과 함께 처음으로 투옥된다. 이때 본인의 수감번호였던 264에서 필명 '''이육사'''&amp;lt;ref&amp;gt;많은 이들이 본명으로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amp;lt;/ref&amp;gt;를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1930년, 27세의 나이로 &amp;lt;조선일보&amp;gt;에 &amp;lt;말&amp;gt;을 발표하며 처음으로 등단하게 되고 조선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잠시 일하기도 하였다. 1932년 난징에 있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입교한 그는 특수 부대원 훈련을 받았고 이듬해 4월에 졸업한다. 같은 해 7월에 곧바로 귀국한 그는 본인의 필명으로 '''&amp;lt;황혼&amp;gt;, &amp;lt;신조선&amp;gt;''' 등을 발표하며 창작활동에도 매진한다. 하지만 1934년, 그는 의열단 출신이라는 이유로 경성부 본정경찰서에 의해 검거된 뒤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다. 혹독한 고문을 받고 간신히 풀려난 그는, 그의 대표작이자 저항정신, 광복에 대한 염원이 담긴  &amp;lt;청포도&amp;gt;, &amp;lt;절정&amp;gt; 등을 발표한다. 1943년 베이징으로 압송된 그는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교도소에서 결국 옥사하게 된다. 1968년에는 고향 안동에 그의 비석이 건립되었고 2000년에는 이육사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lt;br /&gt;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0550 이육사 문학관]이 건설되어 매년 문학의 밤, 육사 백일장, 기념 세미나 등을 개최하고 있다.&lt;br /&gt;
&lt;br /&gt;
== 내용 및 해석 ==&lt;br /&gt;
&lt;br /&gt;
== 참고문헌 ==&lt;br /&gt;
&lt;br /&gt;
이육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5444&lt;br /&gt;
이육사 문학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0550&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고군분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4%91%EC%95%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208</id>
		<title>광야ᐧ༚̮ᐧ</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4%91%EC%95%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208"/>
		<updated>2025-06-23T11:10:1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고군분투: /*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lt;br /&gt;
|+광야&lt;br /&gt;
|'''장르''' || 저항시, 서정시&lt;br /&gt;
|-&lt;br /&gt;
| '''작가''' || 이육사&lt;br /&gt;
|-&lt;br /&gt;
| '''시대''' || 1945년 - [[근대]]   &lt;br /&gt;
|-&lt;br /&gt;
| '''배경'''|| 일제강점기 &lt;br /&gt;
|}&lt;br /&gt;
&lt;br /&gt;
== 원문 ==&lt;br /&gt;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까마득한 날에&lt;br /&gt;
하늘이 처음 열리고&lt;br /&gt;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lt;br /&gt;
&lt;br /&gt;
모든 산맥들이&lt;br /&gt;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lt;br /&gt;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lt;br /&gt;
&lt;br /&gt;
끊임없는 광음을&lt;br /&gt;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lt;br /&gt;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lt;br /&gt;
&lt;br /&gt;
지금 눈 내리고&lt;br /&gt;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lt;br /&gt;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lt;br /&gt;
&lt;br /&gt;
다시 천고의 뒤에&lt;br /&gt;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lt;br /&gt;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 배경 ==&lt;br /&gt;
시인 이육사의 말년 작품으로 유고로 전하여지다가, 그가 사망한 후인 1945년 12월 17일『자유신문』에 동생 이원조(李源朝)에 의하여 「꽃」과 함께 발표되었다. 광복 이전 일제강점기 시절의 창작된 시로 일본에 대한 저항정신을 서정적 표현을 통해 비유적으로 나타낸 시이다. 그의 생전 마지막 작품이 1939년에 발표된 것을 감안하였을 땐 1939년부터 그가 사망한 1944년 사이에 쓰였을 것으로 파악된다. 사실 광야라는 작품 자체에는 기존의 저항시와는 다르게 일제에 대한 직접적인 저항 등이 표출되어 있지는 않다. 하지만 이육사의 생애와 그의 다른 작품들을 감안하였을 때 광야 역시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드러낸 '''저항시'''라고 봐야 옳을 것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 작가 ==&lt;br /&gt;
[[파일:ㅇㅇㅅ.jpg|200px|left]]&lt;br /&gt;
&amp;lt;p&amp;gt;&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fbe1df;“&lt;br /&gt;
|+ 이육사 李陸史&lt;br /&gt;
|'''출생''' || 1904년 5월 18일&lt;br /&gt;
|-&lt;br /&gt;
| '''사망''' || 1944년 1월 16일&lt;br /&gt;
|-&lt;br /&gt;
| '''본명''' || 이원록(李源祿)&lt;br /&gt;
|-&lt;br /&gt;
| '''작품'''||  광야, 황혼, 절정, 청포도, 강 건너간 노래&lt;br /&gt;
|- &lt;br /&gt;
| '''직업''' || 시인, 독립운동가, 언론인&lt;br /&gt;
|}&lt;br /&gt;
&amp;lt;p&amp;gt;&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c92e16&amp;quot;&amp;gt;이육사&amp;lt;/font&amp;gt;는 일제강점기의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경상북도 예안&amp;lt;ref&amp;gt;현재의 경상북도 안동&amp;lt;/ref&amp;gt;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대한제국 시기 장릉(章陵) 참봉을 지낸 조부 이중직(李中稙, 1847 ~ 1916. 1. 17)에게서 소학을 배우는 등 한문학을 공부하다가 조부가 사망한 1916년, 그의 가문인 진성이씨 문중에서 설립한 보문의숙(이후 도산공립보통학교로 개칭)에서 수학하기 시작하였다. 어린 시절 한문학을 공부한 것의 영향으로 그의 시에서는 한시의 기승전결과 유사한 형식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시작한 것은 대구로 이사한 1925년이다. 그는 형제들과 함께 '''의열단'''&amp;lt;ref&amp;gt;1919년에 찯단했다&amp;lt;/ref&amp;gt;에 가입한 이후 1927년에 일어난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가담한 혐의로 형제 이원기, 이원일과 함께 처음으로 투옥된다. 이때 본인의 수감번호였던 264에서 필명 '''이육사'''&amp;lt;ref&amp;gt;많은 이들이 본명으로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amp;lt;/ref&amp;gt;를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1930년, 27세의 나이로 &amp;lt;조선일보&amp;gt;에 &amp;lt;말&amp;gt;을 발표하며 처음으로 등단하게 되고 조선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잠시 일하기도 하였다. 1932년 난징에 있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입교한 그는 특수 부대원 훈련을 받았고 이듬해 4월에 졸업한다. 같은 해 7월에 곧바로 귀국한 그는 본인의 필명으로 '''&amp;lt;황혼&amp;gt;, &amp;lt;신조선&amp;gt;''' 등을 발표하며 창작활동에도 매진한다. 하지만 1934년, 그는 의열단 출신이라는 이유로 경성부 본정경찰서에 의해 검거된 뒤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다. 혹독한 고문을 받고 간신히 풀려난 그는, 그의 대표작이자 저항정신, 광복에 대한 염원이 담긴  &amp;lt;청포도&amp;gt;, &amp;lt;절정&amp;gt; 등을 발표한다. 1943년 베이징으로 압송된 그는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교도소에서 결국 옥사하게 된다. 1968년에는 고향 안동에 그의 비석이 건립되었고 2000년에는 이육사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lt;br /&gt;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0550 이육사 문학관]이 건설되어 매년 문학의 밤, 육사 백일장, 기념 세미나 등을 개최하고 있다.&lt;br /&gt;
&lt;br /&gt;
== 내용 및 해석 ==&lt;br /&gt;
&lt;br /&gt;
== 참고문헌 ==&lt;br /&gt;
&lt;br /&gt;
이육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5444&lt;br /&gt;
이육사 문학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0550&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고군분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4%91%EC%95%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207</id>
		<title>광야ᐧ༚̮ᐧ</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4%91%EC%95%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207"/>
		<updated>2025-06-23T11:09:2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고군분투: /* 작가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lt;br /&gt;
|+광야&lt;br /&gt;
|'''장르''' || 저항시, 서정시&lt;br /&gt;
|-&lt;br /&gt;
| '''작가''' || 이육사&lt;br /&gt;
|-&lt;br /&gt;
| '''시대''' || 1945년 - [[근대]]   &lt;br /&gt;
|-&lt;br /&gt;
| '''배경'''|| 일제강점기 &lt;br /&gt;
|}&lt;br /&gt;
&lt;br /&gt;
== 원문 ==&lt;br /&gt;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까마득한 날에&lt;br /&gt;
하늘이 처음 열리고&lt;br /&gt;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lt;br /&gt;
&lt;br /&gt;
모든 산맥들이&lt;br /&gt;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lt;br /&gt;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lt;br /&gt;
&lt;br /&gt;
끊임없는 광음을&lt;br /&gt;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lt;br /&gt;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lt;br /&gt;
&lt;br /&gt;
지금 눈 내리고&lt;br /&gt;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lt;br /&gt;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lt;br /&gt;
&lt;br /&gt;
다시 천고의 뒤에&lt;br /&gt;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lt;br /&gt;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 배경 ==&lt;br /&gt;
시인 이육사의 말년 작품으로 유고로 전하여지다가, 그가 사망한 후인 1945년 12월 17일『자유신문』에 동생 이원조(李源朝)에 의하여 「꽃」과 함께 발표되었다. 광복 이전 일제강점기 시절의 창작된 시로 일본에 대한 저항정신을 서정적 표현을 통해 비유적으로 나타낸 시이다. 그의 생전 마지막 작품이 1939년에 발표된 것을 감안하였을 땐 1939년부터 그가 사망한 1944년 사이에 쓰였을 것으로 파악된다. 사실 광야라는 작품 자체에는 기존의 저항시와는 다르게 일제에 대한 직접적인 저항 등이 표출되어 있지는 않다. 하지만 이육사의 생애와 그의 다른 작품들을 감안하였을 때 광야 역시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드러낸 '''저항시'''라고 봐야 옳을 것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 작가 ==&lt;br /&gt;
[[파일:ㅇㅇㅅ.jpg|200px|left]]&lt;br /&gt;
&amp;lt;p&amp;gt;&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fbe1df;“&lt;br /&gt;
|+ 이육사 李陸史&lt;br /&gt;
|'''출생''' || 1904년 5월 18일&lt;br /&gt;
|-&lt;br /&gt;
| '''사망''' || 1944년 1월 16일&lt;br /&gt;
|-&lt;br /&gt;
| '''본명''' || 이원록(李源祿)&lt;br /&gt;
|-&lt;br /&gt;
| '''작품'''||  광야, 황혼, 절정, 청포도, 강 건너간 노래&lt;br /&gt;
|- &lt;br /&gt;
| '''직업''' || 시인, 독립운동가, 언론인&lt;br /&gt;
|}&lt;br /&gt;
&amp;lt;p&amp;gt;&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c92e16&amp;quot;&amp;gt;이육사&amp;lt;/font&amp;gt;는 일제강점기의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경상북도 예안&amp;lt;ref&amp;gt;현재의 경상북도 안동&amp;lt;/ref&amp;gt;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대한제국 시기 장릉(章陵) 참봉을 지낸 조부 이중직(李中稙, 1847 ~ 1916. 1. 17)에게서 소학을 배우는 등 한문학을 공부하다가 조부가 사망한 1916년, 그의 가문인 진성이씨 문중에서 설립한 보문의숙(이후 도산공립보통학교로 개칭)에서 수학하기 시작하였다. 어린 시절 한문학을 공부한 것의 영향으로 그의 시에서는 한시의 기승전결과 유사한 형식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시작한 것은 대구로 이사한 1925년이다. 그는 형제들과 함께 '''의열단'''&amp;lt;ref&amp;gt;1919년에 찯단했다&amp;lt;/ref&amp;gt;에 가입한 이후 1927년에 일어난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가담한 혐의로 형제 이원기, 이원일과 함께 처음으로 투옥된다. 이때 본인의 수감번호였던 264에서 필명 '''이육사'''&amp;lt;ref&amp;gt;많은 이들이 본명으로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amp;lt;/ref&amp;gt;를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1930년, 27세의 나이로 &amp;lt;조선일보&amp;gt;에 &amp;lt;말&amp;gt;을 발표하며 처음으로 등단하게 되고 조선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잠시 일하기도 하였다. 1932년 난징에 있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입교한 그는 특수 부대원 훈련을 받았고 이듬해 4월에 졸업한다. 같은 해 7월에 곧바로 귀국한 그는 본인의 필명으로 '''&amp;lt;황혼&amp;gt;, &amp;lt;신조선&amp;gt;''' 등을 발표하며 창작활동에도 매진한다. 하지만 1934년, 그는 의열단 출신이라는 이유로 경성부 본정경찰서에 의해 검거된 뒤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다. 혹독한 고문을 받고 간신히 풀려난 그는, 그의 대표작이자 저항정신, 광복에 대한 염원이 담긴  &amp;lt;청포도&amp;gt;, &amp;lt;절정&amp;gt; 등을 발표한다. 1943년 베이징으로 압송된 그는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교도소에서 결국 옥사하게 된다. 1968년에는 고향 안동에 그의 비석이 건립되었고 2000년에는 이육사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lt;br /&gt;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0550 이육사 문학관]이 건설되어 매년 문학의 밤, 육사 백일장, 기념 세미나 등을 개최하고 있다.&lt;br /&gt;
&lt;br /&gt;
== 내용 및 해석 ==&lt;br /&gt;
&lt;br /&gt;
== 참고문헌 ==&lt;br /&gt;
&lt;br /&gt;
이육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5444&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고군분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4%91%EC%95%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206</id>
		<title>광야ᐧ༚̮ᐧ</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4%91%EC%95%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206"/>
		<updated>2025-06-23T11:08:4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고군분투: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lt;br /&gt;
|+광야&lt;br /&gt;
|'''장르''' || 저항시, 서정시&lt;br /&gt;
|-&lt;br /&gt;
| '''작가''' || 이육사&lt;br /&gt;
|-&lt;br /&gt;
| '''시대''' || 1945년 - [[근대]]   &lt;br /&gt;
|-&lt;br /&gt;
| '''배경'''|| 일제강점기 &lt;br /&gt;
|}&lt;br /&gt;
&lt;br /&gt;
== 원문 ==&lt;br /&gt;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까마득한 날에&lt;br /&gt;
하늘이 처음 열리고&lt;br /&gt;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lt;br /&gt;
&lt;br /&gt;
모든 산맥들이&lt;br /&gt;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lt;br /&gt;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lt;br /&gt;
&lt;br /&gt;
끊임없는 광음을&lt;br /&gt;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lt;br /&gt;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lt;br /&gt;
&lt;br /&gt;
지금 눈 내리고&lt;br /&gt;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lt;br /&gt;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lt;br /&gt;
&lt;br /&gt;
다시 천고의 뒤에&lt;br /&gt;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lt;br /&gt;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 배경 ==&lt;br /&gt;
시인 이육사의 말년 작품으로 유고로 전하여지다가, 그가 사망한 후인 1945년 12월 17일『자유신문』에 동생 이원조(李源朝)에 의하여 「꽃」과 함께 발표되었다. 광복 이전 일제강점기 시절의 창작된 시로 일본에 대한 저항정신을 서정적 표현을 통해 비유적으로 나타낸 시이다. 그의 생전 마지막 작품이 1939년에 발표된 것을 감안하였을 땐 1939년부터 그가 사망한 1944년 사이에 쓰였을 것으로 파악된다. 사실 광야라는 작품 자체에는 기존의 저항시와는 다르게 일제에 대한 직접적인 저항 등이 표출되어 있지는 않다. 하지만 이육사의 생애와 그의 다른 작품들을 감안하였을 때 광야 역시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드러낸 '''저항시'''라고 봐야 옳을 것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 작가 ==&lt;br /&gt;
[[파일:ㅇㅇㅅ.jpg|200px|left]]&lt;br /&gt;
&amp;lt;p&amp;gt;&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fbe1df;“&lt;br /&gt;
|+ 이육사 李陸史&lt;br /&gt;
|'''출생''' || 1904년 5월 18일&lt;br /&gt;
|-&lt;br /&gt;
| '''사망''' || 1944년 1월 16일&lt;br /&gt;
|-&lt;br /&gt;
| '''본명''' || 이원록(李源祿)&lt;br /&gt;
|-&lt;br /&gt;
| '''작품'''||  광야, 황혼, 절정, 청포도, 강 건너간 노래&lt;br /&gt;
|- &lt;br /&gt;
| '''직업''' || 시인, 독립운동가, 언론인&lt;br /&gt;
|}&lt;br /&gt;
&amp;lt;p&amp;gt;&lt;br /&gt;
&amp;lt;font color=&amp;quot;#c92e16&amp;quot;&amp;gt;이육사&amp;lt;/font&amp;gt;는 일제강점기의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경상북도 예안&amp;lt;ref&amp;gt;현재의 경상북도 안동&amp;lt;/ref&amp;gt;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대한제국 시기 장릉(章陵) 참봉을 지낸 조부 이중직(李中稙, 1847 ~ 1916. 1. 17)에게서 소학을 배우는 등 한문학을 공부하다가 조부가 사망한 1916년, 그의 가문인 진성이씨 문중에서 설립한 보문의숙(이후 도산공립보통학교로 개칭)에서 수학하기 시작하였다. 어린 시절 한문학을 공부한 것의 영향으로 그의 시에서는 한시의 기승전결과 유사한 형식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시작한 것은 대구로 이사한 1925년이다. 그는 형제들과 함께 '''의열단'''&amp;lt;ref&amp;gt;1919년에 찯단했다&amp;lt;/ref&amp;gt;에 가입한 이후 1927년에 일어난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가담한 혐의로 형제 이원기, 이원일과 함께 처음으로 투옥된다. 이때 본인의 수감번호였던 264에서 필명 '''이육사'''&amp;lt;ref&amp;gt;많은 이들이 본명으로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amp;lt;/ref&amp;gt;를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1930년, 27세의 나이로 &amp;lt;조선일보&amp;gt;에 &amp;lt;말&amp;gt;을 발표하며 처음으로 등단하게 되고 조선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잠시 일하기도 하였다. 1932년 난징에 있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입교한 그는 특수 부대원 훈련을 받았고 이듬해 4월에 졸업한다. 같은 해 7월에 곧바로 귀국한 그는 본인의 필명으로 '''&amp;lt;황혼&amp;gt;, &amp;lt;신조선&amp;gt;''' 등을 발표하며 창작활동에도 매진한다. 하지만 1934년, 그는 의열단 출신이라는 이유로 경성부 본정경찰서에 의해 검거된 뒤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다. 혹독한 고문을 받고 간신히 풀려난 그는, 그의 대표작이자 저항정신, 광복에 대한 염원이 담긴  &amp;lt;청포도&amp;gt;, &amp;lt;절정&amp;gt; 등을 발표한다. 1943년 베이징으로 압송된 그는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교도소에서 결국 옥사하게 된다. 1968년에는 고향 안동에 그의 비석이 건립되었고 2000년에는 이육사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0550 이육사 문학관]&lt;br /&gt;
&lt;br /&gt;
== 내용 및 해석 ==&lt;br /&gt;
&lt;br /&gt;
== 참고문헌 ==&lt;br /&gt;
&lt;br /&gt;
이육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5444&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고군분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4%91%EC%95%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205</id>
		<title>광야ᐧ༚̮ᐧ</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4%91%EC%95%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205"/>
		<updated>2025-06-23T10:59:3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고군분투: /* 작가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lt;br /&gt;
|+광야&lt;br /&gt;
|'''장르''' || 저항시, 서정시&lt;br /&gt;
|-&lt;br /&gt;
| '''작가''' || 이육사&lt;br /&gt;
|-&lt;br /&gt;
| '''시대''' || 1945년 - [[근대]]   &lt;br /&gt;
|-&lt;br /&gt;
| '''배경'''|| 일제강점기 &lt;br /&gt;
|}&lt;br /&gt;
&lt;br /&gt;
== 원문 ==&lt;br /&gt;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까마득한 날에&lt;br /&gt;
하늘이 처음 열리고&lt;br /&gt;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lt;br /&gt;
&lt;br /&gt;
모든 산맥들이&lt;br /&gt;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lt;br /&gt;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lt;br /&gt;
&lt;br /&gt;
끊임없는 광음을&lt;br /&gt;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lt;br /&gt;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lt;br /&gt;
&lt;br /&gt;
지금 눈 내리고&lt;br /&gt;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lt;br /&gt;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lt;br /&gt;
&lt;br /&gt;
다시 천고의 뒤에&lt;br /&gt;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lt;br /&gt;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 배경 ==&lt;br /&gt;
시인 이육사의 말년 작품으로 유고로 전하여지다가, 그가 사망한 후인 1945년 12월 17일『자유신문』에 동생 이원조(李源朝)에 의하여 「꽃」과 함께 발표되었다. 광복 이전 일제강점기 시절의 창작된 시로 일본에 대한 저항정신을 서정적 표현을 통해 비유적으로 나타낸 시이다. 그의 생전 마지막 작품이 1939년에 발표된 것을 감안하였을 땐 1939년부터 그가 사망한 1944년 사이에 쓰였을 것으로 파악된다. 사실 광야라는 작품 자체에는 기존의 저항시와는 다르게 일제에 대한 직접적인 저항 등이 표출되어 있지는 않다. 하지만 이육사의 생애와 그의 다른 작품들을 감안하였을 때 광야 역시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드러낸 '''저항시'''라고 봐야 옳을 것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 작가 ==&lt;br /&gt;
[[파일:ㅇㅇㅅ.jpg|200px|left]]&lt;br /&gt;
&amp;lt;p&amp;gt;&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fbe1df;“&lt;br /&gt;
|+ 이육사 李陸史&lt;br /&gt;
|'''출생''' || 1904년 5월 18일&lt;br /&gt;
|-&lt;br /&gt;
| '''사망''' || 1944년 1월 16일&lt;br /&gt;
|-&lt;br /&gt;
| '''본명''' || 이원록(李源祿)&lt;br /&gt;
|-&lt;br /&gt;
| '''작품'''||  광야, 황혼, 절정, 청포도, 강 건너간 노래&lt;br /&gt;
|- &lt;br /&gt;
| '''직업''' || 시인, 독립운동가, 언론인&lt;br /&gt;
|}&lt;br /&gt;
&amp;lt;p&amp;gt;&lt;br /&gt;
이육사는 일제강점기의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경상북도 예안&amp;lt;ref&amp;gt;현재의 경상북도 안동&amp;lt;/ref&amp;gt;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대한제국 시기 장릉(章陵) 참봉을 지낸 조부 이중직(李中稙, 1847 ~ 1916. 1. 17)에게서 소학을 배우는 등 한문학을 공부하다가 조부가 사망한 1916년, 그의 가문인 진성이씨 문중에서 설립한 보문의숙(이후 도산공립보통학교로 개칭)에서 수학하기 시작하였다. 어린 시절 한문학을 공부한 것의 영향으로 그의 시에서는 한시의 기승전결과 유사한 형식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시작한 것은 대구로 이사한 1925년이다. 그는 형제들과 함께 '''의열단'''&amp;lt;ref&amp;gt;1919년에 찯단했다&amp;lt;/ref&amp;gt;에 가입한 이후 1927년에 일어난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가담한 혐의로 형제 이원기, 이원일과 함께 처음으로 투옥된다. 이때 본인의 수감번호였던 264에서 필명 '''이육사'''&amp;lt;ref&amp;gt;많은 이들이 본명으로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amp;lt;/ref&amp;gt;를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1930년, 27세의 나이로 &amp;lt;조선일보&amp;gt;에 &amp;lt;말&amp;gt;을 발표하며 처음으로 등단하게 되고 조선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잠시 일하기도 하였다. 1932년 난징에 있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입교한 그는 특수 부대원 훈련을 받았고 이듬해 4월에 졸업한다. 같은 해 7월에 곧바로 귀국한 그는 본인의 필명으로 &amp;lt;황혼&amp;gt;, &amp;lt;신조선&amp;gt; 등을 발표하며 창작활동에도 매진한다.&lt;br /&gt;
&lt;br /&gt;
== 내용 및 해석 ==&lt;br /&gt;
&lt;br /&gt;
== 참고문헌 ==&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고군분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4%91%EC%95%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204</id>
		<title>광야ᐧ༚̮ᐧ</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4%91%EC%95%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204"/>
		<updated>2025-06-23T10:59:2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고군분투: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lt;br /&gt;
|+광야&lt;br /&gt;
|'''장르''' || 저항시, 서정시&lt;br /&gt;
|-&lt;br /&gt;
| '''작가''' || 이육사&lt;br /&gt;
|-&lt;br /&gt;
| '''시대''' || 1945년 - [[근대]]   &lt;br /&gt;
|-&lt;br /&gt;
| '''배경'''|| 일제강점기 &lt;br /&gt;
|}&lt;br /&gt;
&lt;br /&gt;
== 원문 ==&lt;br /&gt;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까마득한 날에&lt;br /&gt;
하늘이 처음 열리고&lt;br /&gt;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lt;br /&gt;
&lt;br /&gt;
모든 산맥들이&lt;br /&gt;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lt;br /&gt;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lt;br /&gt;
&lt;br /&gt;
끊임없는 광음을&lt;br /&gt;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lt;br /&gt;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lt;br /&gt;
&lt;br /&gt;
지금 눈 내리고&lt;br /&gt;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lt;br /&gt;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lt;br /&gt;
&lt;br /&gt;
다시 천고의 뒤에&lt;br /&gt;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lt;br /&gt;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 배경 ==&lt;br /&gt;
시인 이육사의 말년 작품으로 유고로 전하여지다가, 그가 사망한 후인 1945년 12월 17일『자유신문』에 동생 이원조(李源朝)에 의하여 「꽃」과 함께 발표되었다. 광복 이전 일제강점기 시절의 창작된 시로 일본에 대한 저항정신을 서정적 표현을 통해 비유적으로 나타낸 시이다. 그의 생전 마지막 작품이 1939년에 발표된 것을 감안하였을 땐 1939년부터 그가 사망한 1944년 사이에 쓰였을 것으로 파악된다. 사실 광야라는 작품 자체에는 기존의 저항시와는 다르게 일제에 대한 직접적인 저항 등이 표출되어 있지는 않다. 하지만 이육사의 생애와 그의 다른 작품들을 감안하였을 때 광야 역시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드러낸 '''저항시'''라고 봐야 옳을 것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 작가 ==&lt;br /&gt;
[[파일:ㅇㅇㅅ.jpg|200px|left]]&lt;br /&gt;
&amp;lt;p&amp;gt;&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fbe1df;“&lt;br /&gt;
|+ 이육사 李陸史&lt;br /&gt;
|'''출생''' || 1904년 5월 18일&lt;br /&gt;
|-&lt;br /&gt;
| '''사망''' || 1944년 1월 16일&lt;br /&gt;
|-&lt;br /&gt;
| '''본명''' || 이원록(李源祿)&lt;br /&gt;
|-&lt;br /&gt;
| '''작품'''||  광야, 황혼, 절정, 청포도, 강 건너간 노래&lt;br /&gt;
|- &lt;br /&gt;
| '''직업''' || 시인, 독립운동가, 언론인&lt;br /&gt;
|}&lt;br /&gt;
&lt;br /&gt;
이육사는 일제강점기의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경상북도 예안&amp;lt;ref&amp;gt;현재의 경상북도 안동&amp;lt;/ref&amp;gt;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대한제국 시기 장릉(章陵) 참봉을 지낸 조부 이중직(李中稙, 1847 ~ 1916. 1. 17)에게서 소학을 배우는 등 한문학을 공부하다가 조부가 사망한 1916년, 그의 가문인 진성이씨 문중에서 설립한 보문의숙(이후 도산공립보통학교로 개칭)에서 수학하기 시작하였다. 어린 시절 한문학을 공부한 것의 영향으로 그의 시에서는 한시의 기승전결과 유사한 형식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시작한 것은 대구로 이사한 1925년이다. 그는 형제들과 함께 '''의열단'''&amp;lt;ref&amp;gt;1919년에 찯단했다&amp;lt;/ref&amp;gt;에 가입한 이후 1927년에 일어난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가담한 혐의로 형제 이원기, 이원일과 함께 처음으로 투옥된다. 이때 본인의 수감번호였던 264에서 필명 '''이육사'''&amp;lt;ref&amp;gt;많은 이들이 본명으로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amp;lt;/ref&amp;gt;를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1930년, 27세의 나이로 &amp;lt;조선일보&amp;gt;에 &amp;lt;말&amp;gt;을 발표하며 처음으로 등단하게 되고 조선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잠시 일하기도 하였다. 1932년 난징에 있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입교한 그는 특수 부대원 훈련을 받았고 이듬해 4월에 졸업한다. 같은 해 7월에 곧바로 귀국한 그는 본인의 필명으로 &amp;lt;황혼&amp;gt;, &amp;lt;신조선&amp;gt; 등을 발표하며 창작활동에도 매진한다. &lt;br /&gt;
== 내용 및 해석 ==&lt;br /&gt;
&lt;br /&gt;
== 참고문헌 ==&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고군분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4%91%EC%95%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197</id>
		<title>광야ᐧ༚̮ᐧ</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4%91%EC%95%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197"/>
		<updated>2025-06-23T10:08:5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고군분투: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lt;br /&gt;
|+광야&lt;br /&gt;
|'''장르''' || 저항시&lt;br /&gt;
|-&lt;br /&gt;
| '''작가''' || 이육사&lt;br /&gt;
|-&lt;br /&gt;
| '''시대''' || 1945년 - [[근대]]   &lt;br /&gt;
|-&lt;br /&gt;
| '''배경'''|| 일제강점기 &lt;br /&gt;
|}&lt;br /&gt;
&lt;br /&gt;
== 원문 ==&lt;br /&gt;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까마득한 날에&lt;br /&gt;
하늘이 처음 열리고&lt;br /&gt;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lt;br /&gt;
&lt;br /&gt;
모든 산맥들이&lt;br /&gt;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lt;br /&gt;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lt;br /&gt;
&lt;br /&gt;
끊임없는 광음을&lt;br /&gt;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lt;br /&gt;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lt;br /&gt;
&lt;br /&gt;
지금 눈 내리고&lt;br /&gt;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lt;br /&gt;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lt;br /&gt;
&lt;br /&gt;
다시 천고의 뒤에&lt;br /&gt;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lt;br /&gt;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 배경 ==&lt;br /&gt;
&lt;br /&gt;
== 작가 ==&lt;br /&gt;
[[파일:ㅇㅇㅅ.jpg|200px|left]]&lt;br /&gt;
&amp;lt;p&amp;gt;&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fbe1df;“&lt;br /&gt;
|+ 이육사 李陸史&lt;br /&gt;
|'''출생''' || 1904년 5월 18일&lt;br /&gt;
|-&lt;br /&gt;
| '''사망''' || 1944년 1월 16일&lt;br /&gt;
|-&lt;br /&gt;
| '''본명''' || 이원록(李源祿)&lt;br /&gt;
|-&lt;br /&gt;
| '''작품'''||  광야, 황혼, 절정, 청포도, 강 건너간 노래&lt;br /&gt;
|- &lt;br /&gt;
| '''직업''' || 시인, 독립운동가&lt;br /&gt;
|}&lt;br /&gt;
&lt;br /&gt;
== 내용 및 해석 ==&lt;/div&gt;</summary>
		<author><name>고군분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4%91%EC%95%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196</id>
		<title>광야ᐧ༚̮ᐧ</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4%91%EC%95%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196"/>
		<updated>2025-06-23T10:07:1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고군분투: /* 작가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lt;br /&gt;
|+광야&lt;br /&gt;
|'''장르''' || 저항시&lt;br /&gt;
|-&lt;br /&gt;
| '''작가''' || 이육사&lt;br /&gt;
|-&lt;br /&gt;
| '''시대''' || 1945년 - [[근대]]   &lt;br /&gt;
|-&lt;br /&gt;
| '''배경'''|| 일제강점기 &lt;br /&gt;
|}&lt;br /&gt;
&lt;br /&gt;
== 원문 ==&lt;br /&gt;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까마득한 날에&lt;br /&gt;
하늘이 처음 열리고&lt;br /&gt;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lt;br /&gt;
&lt;br /&gt;
모든 산맥들이&lt;br /&gt;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lt;br /&gt;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lt;br /&gt;
&lt;br /&gt;
끊임없는 광음을&lt;br /&gt;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lt;br /&gt;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lt;br /&gt;
&lt;br /&gt;
지금 눈 내리고&lt;br /&gt;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lt;br /&gt;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lt;br /&gt;
&lt;br /&gt;
다시 천고의 뒤에&lt;br /&gt;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lt;br /&gt;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 장르 ==&lt;br /&gt;
&lt;br /&gt;
== 작가 ==&lt;br /&gt;
[[파일:ㅇㅇㅅ.jpg|200px|left]]&lt;br /&gt;
&amp;lt;p&amp;gt;&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fbe1df;“&lt;br /&gt;
|+ 이육사 李陸史&lt;br /&gt;
|'''출생''' || 1904년 5월 18일&lt;br /&gt;
|-&lt;br /&gt;
| '''사망''' || 1944년 1월 16일&lt;br /&gt;
|-&lt;br /&gt;
| '''본명''' || 이원록(李源祿)&lt;br /&gt;
|-&lt;br /&gt;
| '''작품'''||  광야, 황혼, 절정, 청포도, 강 건너간 노래&lt;br /&gt;
|- &lt;br /&gt;
| '''직업''' || 시인, 독립운동가&lt;br /&gt;
|}&lt;br /&gt;
&lt;br /&gt;
== 배경 ==&lt;/div&gt;</summary>
		<author><name>고군분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4%91%EC%95%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195</id>
		<title>광야ᐧ༚̮ᐧ</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4%91%EC%95%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195"/>
		<updated>2025-06-23T10:07:0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고군분투: /* 작가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lt;br /&gt;
|+광야&lt;br /&gt;
|'''장르''' || 저항시&lt;br /&gt;
|-&lt;br /&gt;
| '''작가''' || 이육사&lt;br /&gt;
|-&lt;br /&gt;
| '''시대''' || 1945년 - [[근대]]   &lt;br /&gt;
|-&lt;br /&gt;
| '''배경'''|| 일제강점기 &lt;br /&gt;
|}&lt;br /&gt;
&lt;br /&gt;
== 원문 ==&lt;br /&gt;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까마득한 날에&lt;br /&gt;
하늘이 처음 열리고&lt;br /&gt;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lt;br /&gt;
&lt;br /&gt;
모든 산맥들이&lt;br /&gt;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lt;br /&gt;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lt;br /&gt;
&lt;br /&gt;
끊임없는 광음을&lt;br /&gt;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lt;br /&gt;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lt;br /&gt;
&lt;br /&gt;
지금 눈 내리고&lt;br /&gt;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lt;br /&gt;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lt;br /&gt;
&lt;br /&gt;
다시 천고의 뒤에&lt;br /&gt;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lt;br /&gt;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 장르 ==&lt;br /&gt;
&lt;br /&gt;
== 작가 ==&lt;br /&gt;
[[파일:ㅇㅇㅅ.jpg|200px|left]]&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fbe1df;“&lt;br /&gt;
|+ 이육사 李陸史&lt;br /&gt;
|'''출생''' || 1904년 5월 18일&lt;br /&gt;
|-&lt;br /&gt;
| '''사망''' || 1944년 1월 16일&lt;br /&gt;
|-&lt;br /&gt;
| '''본명''' || 이원록(李源祿)&lt;br /&gt;
|-&lt;br /&gt;
| '''작품'''||  광야, 황혼, 절정, 청포도, 강 건너간 노래&lt;br /&gt;
|- &lt;br /&gt;
| '''직업''' || 시인, 독립운동가&lt;br /&gt;
|}&lt;br /&gt;
&lt;br /&gt;
== 배경 ==&lt;/div&gt;</summary>
		<author><name>고군분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4%91%EC%95%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193</id>
		<title>광야ᐧ༚̮ᐧ</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4%91%EC%95%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193"/>
		<updated>2025-06-23T09:57:2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고군분투: /* 원문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lt;br /&gt;
|+광야&lt;br /&gt;
|'''장르''' || 저항시&lt;br /&gt;
|-&lt;br /&gt;
| '''작가''' || 이육사&lt;br /&gt;
|-&lt;br /&gt;
| '''시대''' || 1945년 - [[근대]]   &lt;br /&gt;
|-&lt;br /&gt;
| '''배경'''|| 일제강점기 &lt;br /&gt;
|}&lt;br /&gt;
&lt;br /&gt;
== 원문 ==&lt;br /&gt;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까마득한 날에&lt;br /&gt;
하늘이 처음 열리고&lt;br /&gt;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lt;br /&gt;
&lt;br /&gt;
모든 산맥들이&lt;br /&gt;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lt;br /&gt;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lt;br /&gt;
&lt;br /&gt;
끊임없는 광음을&lt;br /&gt;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lt;br /&gt;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lt;br /&gt;
&lt;br /&gt;
지금 눈 내리고&lt;br /&gt;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lt;br /&gt;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lt;br /&gt;
&lt;br /&gt;
다시 천고의 뒤에&lt;br /&gt;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lt;br /&gt;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 장르 ==&lt;br /&gt;
&lt;br /&gt;
== 작가 ==&lt;br /&gt;
[[파일:ㅇㅇㅅ.jpg|200px|left]]&lt;br /&gt;
&lt;br /&gt;
== 배경 ==&lt;/div&gt;</summary>
		<author><name>고군분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4%91%EC%95%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192</id>
		<title>광야ᐧ༚̮ᐧ</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4%91%EC%95%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192"/>
		<updated>2025-06-23T09:57:1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고군분투: /* 원문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lt;br /&gt;
|+광야&lt;br /&gt;
|'''장르''' || 저항시&lt;br /&gt;
|-&lt;br /&gt;
| '''작가''' || 이육사&lt;br /&gt;
|-&lt;br /&gt;
| '''시대''' || 1945년 - [[근대]]   &lt;br /&gt;
|-&lt;br /&gt;
| '''배경'''|| 일제강점기 &lt;br /&gt;
|}&lt;br /&gt;
&lt;br /&gt;
== 원문 ==&lt;br /&gt;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까마득한 날에&lt;br /&gt;
하늘이 처음 열리고&lt;br /&gt;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lt;br /&gt;
&lt;br /&gt;
모든 산맥들이&lt;br /&gt;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lt;br /&gt;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lt;br /&gt;
&lt;br /&gt;
끊임없는 광음을&lt;br /&gt;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lt;br /&gt;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lt;br /&gt;
&lt;br /&gt;
지금 눈 내리고&lt;br /&gt;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lt;br /&gt;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lt;br /&gt;
&lt;br /&gt;
다시 천고의 뒤에&lt;br /&gt;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lt;br /&gt;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 장르 ==&lt;br /&gt;
&lt;br /&gt;
== 작가 ==&lt;br /&gt;
[[파일:ㅇㅇㅅ.jpg|200px|left]]&lt;br /&gt;
&lt;br /&gt;
== 배경 ==&lt;/div&gt;</summary>
		<author><name>고군분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5%AC%EC%9A%B4%EB%AA%BD%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160</id>
		<title>구운몽ᐧ༚̮ᐧ</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5%AC%EC%9A%B4%EB%AA%BD%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160"/>
		<updated>2025-06-23T08:59:0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고군분투: /* 작가 */&lt;/p&gt;
&lt;hr /&gt;
&lt;div&gt;[[파일:ㄱㅇㅁ.jpg|right]]&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dbf0fa;“&lt;br /&gt;
|+구운몽 &lt;br /&gt;
|'''장르''' || 고전 소설 ( 몽자류 소설, 영웅 소설 ) &lt;br /&gt;
|-&lt;br /&gt;
| '''작가''' || 김만중&lt;br /&gt;
|-&lt;br /&gt;
| '''시대''' || 1687년 - [[조선 후기]]   &lt;br /&gt;
|-&lt;br /&gt;
| '''배경'''|| 불교, 도교 사상&lt;br /&gt;
|}&lt;br /&gt;
&amp;lt;p&amp;gt; &lt;br /&gt;
&lt;br /&gt;
== 장르 ==&lt;br /&gt;
&lt;br /&gt;
구운몽은 한국의 '''고전소설'''이다. 이본이 다수 존재하며 어떤 것이 원본인지 특정하기 어려운 고전소설의 특성상 구운몽을 고전소설의 하위갈래 중 하나로 규정짓기는 어렵다고 할 수 있다. 더불어 구운몽은 일반적인 고전소설과 비교하여 심층적인 서사 구조를 가지기에 단일 작품이 '''몽자류 소설, 영웅 소설, 전기 소설'''의 특징을 모두 보여주는 특이한 사례라고 봐야 할 것이다. 당시에 매우 큰 대중적 인기를 끌었을 것으로 파악되며 그 영향력으로 인해 &amp;lt;옥루몽&amp;gt;, &amp;lt;옥련몽&amp;gt; 등의 몽자류 소설에도 만만치 않은 영향을 끼쳤다. &amp;lt;p&amp;gt; 몽자류 소설은 글자 그대로 ‘몽(夢)’자가 붙은 소설&amp;lt;ref&amp;gt;몽유록계 소설 역시 ‘몽(夢)’자가 붙지만 몽자류 소설과는 다르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 &amp;lt;/ref&amp;gt;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 소설의 구조는 환몽구조로 주인공이 꿈을 꾸는 과정을 거쳐 꿈 속에서 다른 인물로 태어나 새로운 삶을 경험한 뒤에 다시 꿈에서 깨는 과정을 거쳐 심오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구조이다. &amp;lt;p&amp;gt; 주인공 성진이 입몽 이후 지상계에서 젊은 나이에 높은 관직에 오르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등 구운몽은 영웅적 일대기의 구조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영웅소설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구운몽을 분석할 때 주로 환몽구조, 천상계에 주목하지만 실제로 구운몽은 지상계에서 성진이 보내는 영웅적 삶이 큰 분량을 차지한다. 영웅소설, 영웅적 일대기는 당시 향유층 사이에서 가장 대중적 인기가 높았던 서사인 만큼 구운몽의 대중성, 통속성을 확인할 수 있다. &amp;lt;p&amp;gt; 전기소설은 ‘기이한 이야기’라는 뜻으로 작품의 환상성, 비현실성이 그 특징이다. 특이하게도 구운몽은 지상계에서 그 전기적 특징이 드러난다.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작가 ==&lt;br /&gt;
&lt;br /&gt;
[[파일:ㄱㅁㅈ.png]]&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d2bcfa;“&lt;br /&gt;
|+ 김만중(金萬重)&lt;br /&gt;
|'''출생''' || 1637년 3월 6일 &lt;br /&gt;
|-&lt;br /&gt;
| '''사망''' || 1692년 6월 14일&lt;br /&gt;
|-&lt;br /&gt;
| '''호''' || 서포(西浦)&lt;br /&gt;
|-&lt;br /&gt;
| '''저서'''|| 구운몽, 사씨남정기 &lt;br /&gt;
|- &lt;br /&gt;
| '''직업''' || 소설가, 문신&lt;br /&gt;
|}&lt;br /&gt;
&lt;br /&gt;
''' 김만중''' 은 조선 시대의 소설가이자 문신이다. 숙종의 장인 김만기의 동생이며 1648년 12세에 이미 과문(科文)을 쓸 만큼 글재주가 향상되었고, 1650년 14세에 향시(鄕試)에 합격하였다. 1653년 사마시에 1등으로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었다. 1665년 29세의 나이로 처음 관직에 올라 이후 사간원정언(正言)·지평(持平)·수찬(修撰)·교리(校理)를 지냈다. 그 뒤 시강원 사서(侍講院 司書)에 임명되었다. 1667년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으로 옮겼다가 문학(文學 : 세자 시강원의 정5품 벼슬)으로 전직되었고, 바로 홍문관 수찬(修撰)이 되기도 했다. 1671년 암행어사가 되어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시찰했고 1672년 동부승지가 되었다. 그러나 효종비 인선왕후의 사망으로 불거진 제2차 예송논쟁에서 서인이 패배하자, 서인이었던 김만중도 파직되어 처음으로 관직 생활에서 쓴 맛을 보게 된다. 1679년에 복직하여 예조참의, 공조판서, 대사헌 등을 지냈으나 탄핵으로 자리를 옮기기도 했다.&lt;br /&gt;
1686년에는 장희빈 일가에 대해서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숙종의 분노를 사서 처음으로 선천으로 유배를 떠나게 된다. 1687년 귀양에서 풀려났지만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 세력이 대거 축출되면서 김만중도 다시 탄핵을 받아 남해의 노도로 유배되었다. 1692년 결국 노도에서 사망하였으며, 이 시기에 또다른 유명 작품인 &amp;lt;사씨남정기&amp;gt;&amp;lt;ref&amp;gt;이 작품은 숙종을 모델로 삼은 작품이다.&amp;lt;/ref&amp;gt;를 집필하였다. &lt;br /&gt;
&lt;br /&gt;
김만중의 아버지 김익겸은 일찍이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했기에, 김만중은 유복자로 태어나 '''어머니 윤씨'''로부터 형 김만기와 함께 자상하고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윤씨는 한문 실력을 갖추고 있어 직접 아들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김만중은 형 김만기와 함께 오직 어머니 윤씨만을 의지하고 살았고, 부인 윤씨는 두 형제가 아비 없이 자라는 것에 대해 걱정하면서 남부럽지 않게 키우기 위해 모든 정성을 기울였다. 이렇듯 어머니와 유독 각별한 사이였던 김만중은 유배 생활을 전전하며 소설을 좋아하는 어머니를 위해 소설 창작을 하였다고 한다. &lt;br /&gt;
구운몽 역시 김만중이 '''유배생활을 하던 중 창작한 작품'''이다. &lt;br /&gt;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의 ｢소설변증설(小說辨證說)｣에 의하면, 김만중이 귀양지에서 어머니의 한가함과 근심을 덜어 주기 위하여 하룻밤 사이에 이 작품을 지었다고 한다. 혹은 중국에 사신으로 가게 된 김만중이 중국 소설을 사오라고 한 어머니의 부탁을 잊어버려 돌아오는 길에 부랴부랴 이 작품을 지어 드렸다는 이야기가 그의 집안에서 전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 배경 ==&lt;br /&gt;
&lt;br /&gt;
삼국유사의 실려있는 '''조신의 꿈'''&amp;lt;ref&amp;gt;조신지몽이라고도 불린다&amp;lt;/ref&amp;gt;와 상당히 비슷한 서사구조를 지니고 있어 그 영향을 받아 창작된 것으로 파악된다. 조신의 꿈은 불도를 닦던 20살 남짓의 젊은 승려 조신이 절에 찾아온 미녀에 마음이 끌린 나머지 불공을 드리던 가운데 미녀와 도망가지만 세속에서 미녀와 함께 살며 온갖 고난을 겪고, 조신이 다 늙어 불도를 버리고 환속한 결정을 후회하는 순간 깨어보니 이것 모두가 꿈이었다는 내용의 작품이다. 조신의 꿈에 등장하는 세속으로의 일탈, 환몽구조 등의 화소를 구운몽에서 그대로 확인할 수 있다. 주인공 성진이 몸 담고 있는 세계가 천상계, 즉 불교의 세계인 만큼 '''불교적 색채'''가 강한 작품이다. 한편, 작품의 말미에는 장자의 호접몽을 인용하여 '''도교적 사상''' 역시 담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구운몽은 그 이본에 따라 한글로 집필된 것과 한문으로 집필된 것이 각각 존재하지만 일반적으로 김만중의 원작은 한글로 집필되었을 것으로 본다. 김만중이 당대 조선 사대부였음을 고려한다면 이례적이게도 한글로 쓴 문학이라야 진정한 국문학이라는 국문학관을 피력하는 등 '''한글소설에 우호적인 작가'''였기 때문이다. &amp;lt;ref&amp;gt;물론, 이것은 구운몽 같이 문학사적 의의가 큰 작품이 한글로 창작되었길 바라는 학자들의 바램이 일부 투영된 것이기도 하다.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김만중이 『구운몽』을 언제 어디서 지었는지에 의해 김무조 수가 1974년 「서포소설의 연구」에서 구운몽은 서포가 이 세상에 나서 목적했던 모든 것이 이제는 소생할 길이 없다는 결정적 시기에 제작됐다며 남해 용문사 등 남해의 지명과 서포의 사상적 측면을 연계해 남해설을 처음 주장했다. 하지만 1988년 일본 천리대 도서관에서 서포의 일대기를 담은 『서포연보』가 발견됨으로써 『구운몽』의 저작 시기는 선천의 귀양지로 확실해졌다.&lt;br /&gt;
&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to2iL6sENfs?si=uityJwDuFSlt7ncF&amp;quot; title=&amp;quot;YouTube video player&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lt;br /&gt;
구운몽은 큰 틀에서 '''천상계-&amp;gt;입몽-&amp;gt;지상계-&amp;gt;각몽-&amp;gt;천상계-&amp;gt; 육관대사의 설파'''로 이어지는 서사를 보여준다. 육관대사 밑에서 불도를 수행하는 주인공 성진이 용왕에게 심부름을 갔다가 팔선녀와 눈이 맞아 세속적 욕망을 탐하게 되고 이를 알게된 육관대사는 성진을 지상계로 보낸다. 지상계에서 성진은 천상계에서의 기억을 잃은 채 양소유라는 완전히 다른 인물로 살게 되고&amp;lt;ref&amp;gt;마찬가지로 환몽구조를 보여주는 몽유록류 고전소설과의 차이다. 몽유록에서는 주인공이 입몽하지만 동일한 자아를 유지한다.&amp;lt;/ref&amp;gt; 양소유는 지상계에서 이른 나이에 성공을 이루며 모든 세속적 욕망을 이루지만 깊은 회의를 느끼게 되고 결국엔 꿈에서 깨어 천상계로 돌아온다. 꿈에서 깬 성진은 육관대사에게 세속적 삶이 전부 쓸모없음을 깨달았다고 자부하지만 육관대사는 성진이 여전히 꿈에서 깨지 못했다고 하며 참·거짓의 이분법적 구분을 넘어서 불가와 속세 두 세계 모두를 긍정하는 이치에 대한 깨달음을 설파하며 작품이 마무리된다. &amp;lt;ref&amp;gt;이 부분에서 장자의 &amp;lt;호접몽&amp;gt;을 인용하기도 한다&amp;lt;/ref&amp;gt; 구운몽의 주제는 결국 작품의 마무리 부분에 나오는 '''육관대사의 설파'''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단순히 세속적 욕망에서 벗어난 불교적 깨달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을 넘어서 이분법적 구분 자체를 타파하고자 하는 일종의 도교적 사고방식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amp;lt;p&amp;gt;&lt;br /&gt;
물론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고전소설은 그 특성상 이본이 매우 다양하기에 이본에 따라 그 주제를 다르게 정의함이 마땅하다. 구운몽의 이본 중에는 마지막 육관대사의 설파가 빠진 채 성진이 속세의 삶에 회의를 느끼고 천상계로 복귀한 후 곧바로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작품도 존재한다. 이러한 경우 ‘인생무상’이라는 주제가 강조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또다른 이본은 성진이 천상계로 복귀하는 서사가 아예 삭제되고 지상계에서 부귀영화를 누린 후 그대로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영웅적, 통속적 주제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처럼 구운몽은 그 이본, 환몽구조에 따라 작품의 주제가 크게 달라지는 특징을 보인다. &amp;lt;p&amp;gt; &lt;br /&gt;
한편, 구운몽의 지상계(꿈)는 고전소설에 일반적으로 등장하는 지상계와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구운몽의 지상계는 분명 천상계와는 구분되지만, 성진은 그 지상계에서도 비현실적 공간을 넘나들고 환상적 체험을 하는 등 그곳은 완전히 현실적인 공간이 아닌 것이다. 이렇듯 구운몽은 비단 환몽구조 뿐 아니라 '''서사전개 그 자체를 통해서 이분법적 사고방식의 타파'''라는 주제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 참고문헌 ==&lt;br /&gt;
&lt;br /&gt;
논문 - &amp;lt;연정 구운몽&amp;gt;의 서사 전개 및 주제 구현 양상과 그 의미, 엄태웅, 고려대학교, 동양고전학회 &amp;lt;p&amp;gt;&lt;br /&gt;
네이버 지식백과 &amp;lt;몽자류 소설&amp;gt; &amp;lt;p&amp;gt;&lt;br /&gt;
논문 - &amp;lt;구운몽&amp;gt;의 의미 구조 연구, 김병국, 건국대학겨, 어문연구학회&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고군분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5%AC%EC%9A%B4%EB%AA%BD%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159</id>
		<title>구운몽ᐧ༚̮ᐧ</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A%B5%AC%EC%9A%B4%EB%AA%BD%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159"/>
		<updated>2025-06-23T08:58:3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고군분투: &lt;/p&gt;
&lt;hr /&gt;
&lt;div&gt;[[파일:ㄱㅇㅁ.jpg|right]]&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dbf0fa;“&lt;br /&gt;
|+구운몽 &lt;br /&gt;
|'''장르''' || 고전 소설 ( 몽자류 소설, 영웅 소설 ) &lt;br /&gt;
|-&lt;br /&gt;
| '''작가''' || 김만중&lt;br /&gt;
|-&lt;br /&gt;
| '''시대''' || 1687년 - [[조선 후기]]   &lt;br /&gt;
|-&lt;br /&gt;
| '''배경'''|| 불교, 도교 사상&lt;br /&gt;
|}&lt;br /&gt;
&amp;lt;p&amp;gt; &lt;br /&gt;
&lt;br /&gt;
== 장르 ==&lt;br /&gt;
&lt;br /&gt;
구운몽은 한국의 '''고전소설'''이다. 이본이 다수 존재하며 어떤 것이 원본인지 특정하기 어려운 고전소설의 특성상 구운몽을 고전소설의 하위갈래 중 하나로 규정짓기는 어렵다고 할 수 있다. 더불어 구운몽은 일반적인 고전소설과 비교하여 심층적인 서사 구조를 가지기에 단일 작품이 '''몽자류 소설, 영웅 소설, 전기 소설'''의 특징을 모두 보여주는 특이한 사례라고 봐야 할 것이다. 당시에 매우 큰 대중적 인기를 끌었을 것으로 파악되며 그 영향력으로 인해 &amp;lt;옥루몽&amp;gt;, &amp;lt;옥련몽&amp;gt; 등의 몽자류 소설에도 만만치 않은 영향을 끼쳤다. &amp;lt;p&amp;gt; 몽자류 소설은 글자 그대로 ‘몽(夢)’자가 붙은 소설&amp;lt;ref&amp;gt;몽유록계 소설 역시 ‘몽(夢)’자가 붙지만 몽자류 소설과는 다르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 &amp;lt;/ref&amp;gt;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 소설의 구조는 환몽구조로 주인공이 꿈을 꾸는 과정을 거쳐 꿈 속에서 다른 인물로 태어나 새로운 삶을 경험한 뒤에 다시 꿈에서 깨는 과정을 거쳐 심오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구조이다. &amp;lt;p&amp;gt; 주인공 성진이 입몽 이후 지상계에서 젊은 나이에 높은 관직에 오르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등 구운몽은 영웅적 일대기의 구조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영웅소설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구운몽을 분석할 때 주로 환몽구조, 천상계에 주목하지만 실제로 구운몽은 지상계에서 성진이 보내는 영웅적 삶이 큰 분량을 차지한다. 영웅소설, 영웅적 일대기는 당시 향유층 사이에서 가장 대중적 인기가 높았던 서사인 만큼 구운몽의 대중성, 통속성을 확인할 수 있다. &amp;lt;p&amp;gt; 전기소설은 ‘기이한 이야기’라는 뜻으로 작품의 환상성, 비현실성이 그 특징이다. 특이하게도 구운몽은 지상계에서 그 전기적 특징이 드러난다.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작가 ==&lt;br /&gt;
&lt;br /&gt;
[[파일:ㄱㅁㅈ.png]]&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lt;br /&gt;
|+ 김만중(金萬重)&lt;br /&gt;
|'''출생''' || 1637년 3월 6일 &lt;br /&gt;
|-&lt;br /&gt;
| '''사망''' || 1692년 6월 14일&lt;br /&gt;
|-&lt;br /&gt;
| '''호''' || 서포(西浦)&lt;br /&gt;
|-&lt;br /&gt;
| '''저서'''|| 구운몽, 사씨남정기 &lt;br /&gt;
|- &lt;br /&gt;
| '''직업''' || 소설가, 문신&lt;br /&gt;
|}&lt;br /&gt;
&lt;br /&gt;
''' 김만중''' 은 조선 시대의 소설가이자 문신이다. 숙종의 장인 김만기의 동생이며 1648년 12세에 이미 과문(科文)을 쓸 만큼 글재주가 향상되었고, 1650년 14세에 향시(鄕試)에 합격하였다. 1653년 사마시에 1등으로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었다. 1665년 29세의 나이로 처음 관직에 올라 이후 사간원정언(正言)·지평(持平)·수찬(修撰)·교리(校理)를 지냈다. 그 뒤 시강원 사서(侍講院 司書)에 임명되었다. 1667년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으로 옮겼다가 문학(文學 : 세자 시강원의 정5품 벼슬)으로 전직되었고, 바로 홍문관 수찬(修撰)이 되기도 했다. 1671년 암행어사가 되어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시찰했고 1672년 동부승지가 되었다. 그러나 효종비 인선왕후의 사망으로 불거진 제2차 예송논쟁에서 서인이 패배하자, 서인이었던 김만중도 파직되어 처음으로 관직 생활에서 쓴 맛을 보게 된다. 1679년에 복직하여 예조참의, 공조판서, 대사헌 등을 지냈으나 탄핵으로 자리를 옮기기도 했다.&lt;br /&gt;
1686년에는 장희빈 일가에 대해서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숙종의 분노를 사서 처음으로 선천으로 유배를 떠나게 된다. 1687년 귀양에서 풀려났지만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 세력이 대거 축출되면서 김만중도 다시 탄핵을 받아 남해의 노도로 유배되었다. 1692년 결국 노도에서 사망하였으며, 이 시기에 또다른 유명 작품인 &amp;lt;사씨남정기&amp;gt;&amp;lt;ref&amp;gt;이 작품은 숙종을 모델로 삼은 작품이다.&amp;lt;/ref&amp;gt;를 집필하였다. &lt;br /&gt;
&lt;br /&gt;
김만중의 아버지 김익겸은 일찍이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했기에, 김만중은 유복자로 태어나 '''어머니 윤씨'''로부터 형 김만기와 함께 자상하고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윤씨는 한문 실력을 갖추고 있어 직접 아들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김만중은 형 김만기와 함께 오직 어머니 윤씨만을 의지하고 살았고, 부인 윤씨는 두 형제가 아비 없이 자라는 것에 대해 걱정하면서 남부럽지 않게 키우기 위해 모든 정성을 기울였다. 이렇듯 어머니와 유독 각별한 사이였던 김만중은 유배 생활을 전전하며 소설을 좋아하는 어머니를 위해 소설 창작을 하였다고 한다. &lt;br /&gt;
구운몽 역시 김만중이 '''유배생활을 하던 중 창작한 작품'''이다. &lt;br /&gt;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의 ｢소설변증설(小說辨證說)｣에 의하면, 김만중이 귀양지에서 어머니의 한가함과 근심을 덜어 주기 위하여 하룻밤 사이에 이 작품을 지었다고 한다. 혹은 중국에 사신으로 가게 된 김만중이 중국 소설을 사오라고 한 어머니의 부탁을 잊어버려 돌아오는 길에 부랴부랴 이 작품을 지어 드렸다는 이야기가 그의 집안에서 전해지고 있다. &lt;br /&gt;
&lt;br /&gt;
== 배경 ==&lt;br /&gt;
&lt;br /&gt;
삼국유사의 실려있는 '''조신의 꿈'''&amp;lt;ref&amp;gt;조신지몽이라고도 불린다&amp;lt;/ref&amp;gt;와 상당히 비슷한 서사구조를 지니고 있어 그 영향을 받아 창작된 것으로 파악된다. 조신의 꿈은 불도를 닦던 20살 남짓의 젊은 승려 조신이 절에 찾아온 미녀에 마음이 끌린 나머지 불공을 드리던 가운데 미녀와 도망가지만 세속에서 미녀와 함께 살며 온갖 고난을 겪고, 조신이 다 늙어 불도를 버리고 환속한 결정을 후회하는 순간 깨어보니 이것 모두가 꿈이었다는 내용의 작품이다. 조신의 꿈에 등장하는 세속으로의 일탈, 환몽구조 등의 화소를 구운몽에서 그대로 확인할 수 있다. 주인공 성진이 몸 담고 있는 세계가 천상계, 즉 불교의 세계인 만큼 '''불교적 색채'''가 강한 작품이다. 한편, 작품의 말미에는 장자의 호접몽을 인용하여 '''도교적 사상''' 역시 담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구운몽은 그 이본에 따라 한글로 집필된 것과 한문으로 집필된 것이 각각 존재하지만 일반적으로 김만중의 원작은 한글로 집필되었을 것으로 본다. 김만중이 당대 조선 사대부였음을 고려한다면 이례적이게도 한글로 쓴 문학이라야 진정한 국문학이라는 국문학관을 피력하는 등 '''한글소설에 우호적인 작가'''였기 때문이다. &amp;lt;ref&amp;gt;물론, 이것은 구운몽 같이 문학사적 의의가 큰 작품이 한글로 창작되었길 바라는 학자들의 바램이 일부 투영된 것이기도 하다. &amp;lt;/ref&amp;gt;&lt;br /&gt;
&lt;br /&gt;
김만중이 『구운몽』을 언제 어디서 지었는지에 의해 김무조 수가 1974년 「서포소설의 연구」에서 구운몽은 서포가 이 세상에 나서 목적했던 모든 것이 이제는 소생할 길이 없다는 결정적 시기에 제작됐다며 남해 용문사 등 남해의 지명과 서포의 사상적 측면을 연계해 남해설을 처음 주장했다. 하지만 1988년 일본 천리대 도서관에서 서포의 일대기를 담은 『서포연보』가 발견됨으로써 『구운몽』의 저작 시기는 선천의 귀양지로 확실해졌다.&lt;br /&gt;
&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to2iL6sENfs?si=uityJwDuFSlt7ncF&amp;quot; title=&amp;quot;YouTube video player&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lt;br /&gt;
구운몽은 큰 틀에서 '''천상계-&amp;gt;입몽-&amp;gt;지상계-&amp;gt;각몽-&amp;gt;천상계-&amp;gt; 육관대사의 설파'''로 이어지는 서사를 보여준다. 육관대사 밑에서 불도를 수행하는 주인공 성진이 용왕에게 심부름을 갔다가 팔선녀와 눈이 맞아 세속적 욕망을 탐하게 되고 이를 알게된 육관대사는 성진을 지상계로 보낸다. 지상계에서 성진은 천상계에서의 기억을 잃은 채 양소유라는 완전히 다른 인물로 살게 되고&amp;lt;ref&amp;gt;마찬가지로 환몽구조를 보여주는 몽유록류 고전소설과의 차이다. 몽유록에서는 주인공이 입몽하지만 동일한 자아를 유지한다.&amp;lt;/ref&amp;gt; 양소유는 지상계에서 이른 나이에 성공을 이루며 모든 세속적 욕망을 이루지만 깊은 회의를 느끼게 되고 결국엔 꿈에서 깨어 천상계로 돌아온다. 꿈에서 깬 성진은 육관대사에게 세속적 삶이 전부 쓸모없음을 깨달았다고 자부하지만 육관대사는 성진이 여전히 꿈에서 깨지 못했다고 하며 참·거짓의 이분법적 구분을 넘어서 불가와 속세 두 세계 모두를 긍정하는 이치에 대한 깨달음을 설파하며 작품이 마무리된다. &amp;lt;ref&amp;gt;이 부분에서 장자의 &amp;lt;호접몽&amp;gt;을 인용하기도 한다&amp;lt;/ref&amp;gt; 구운몽의 주제는 결국 작품의 마무리 부분에 나오는 '''육관대사의 설파'''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단순히 세속적 욕망에서 벗어난 불교적 깨달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을 넘어서 이분법적 구분 자체를 타파하고자 하는 일종의 도교적 사고방식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amp;lt;p&amp;gt;&lt;br /&gt;
물론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고전소설은 그 특성상 이본이 매우 다양하기에 이본에 따라 그 주제를 다르게 정의함이 마땅하다. 구운몽의 이본 중에는 마지막 육관대사의 설파가 빠진 채 성진이 속세의 삶에 회의를 느끼고 천상계로 복귀한 후 곧바로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작품도 존재한다. 이러한 경우 ‘인생무상’이라는 주제가 강조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또다른 이본은 성진이 천상계로 복귀하는 서사가 아예 삭제되고 지상계에서 부귀영화를 누린 후 그대로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영웅적, 통속적 주제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처럼 구운몽은 그 이본, 환몽구조에 따라 작품의 주제가 크게 달라지는 특징을 보인다. &amp;lt;p&amp;gt; &lt;br /&gt;
한편, 구운몽의 지상계(꿈)는 고전소설에 일반적으로 등장하는 지상계와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구운몽의 지상계는 분명 천상계와는 구분되지만, 성진은 그 지상계에서도 비현실적 공간을 넘나들고 환상적 체험을 하는 등 그곳은 완전히 현실적인 공간이 아닌 것이다. 이렇듯 구운몽은 비단 환몽구조 뿐 아니라 '''서사전개 그 자체를 통해서 이분법적 사고방식의 타파'''라는 주제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 참고문헌 ==&lt;br /&gt;
&lt;br /&gt;
논문 - &amp;lt;연정 구운몽&amp;gt;의 서사 전개 및 주제 구현 양상과 그 의미, 엄태웅, 고려대학교, 동양고전학회 &amp;lt;p&amp;gt;&lt;br /&gt;
네이버 지식백과 &amp;lt;몽자류 소설&amp;gt; &amp;lt;p&amp;gt;&lt;br /&gt;
논문 - &amp;lt;구운몽&amp;gt;의 의미 구조 연구, 김병국, 건국대학겨, 어문연구학회&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lt;br /&gt;
&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고군분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86%8C%EC%84%A4%EA%B0%80_%EA%B5%AC%EB%B3%B4_%EC%94%A8%EC%9D%98_%EC%9D%BC%EC%9D%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158</id>
		<title>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ᐧ༚̮ᐧ</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86%8C%EC%84%A4%EA%B0%80_%EA%B5%AC%EB%B3%B4_%EC%94%A8%EC%9D%98_%EC%9D%BC%EC%9D%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158"/>
		<updated>2025-06-23T08:56:3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고군분투: /* 내용 */&lt;/p&gt;
&lt;hr /&gt;
&lt;div&gt;[[파일:ㄱㅂ.jpg|200px|left]]&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ced1fc;“&lt;br /&gt;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lt;br /&gt;
|'''장르''' || 모더니즘 소설&lt;br /&gt;
|-&lt;br /&gt;
| '''작가''' || 박태원&lt;br /&gt;
|-&lt;br /&gt;
| '''시대''' || 1934년 - [[근대]]   &lt;br /&gt;
|-&lt;br /&gt;
| '''배경'''|| 일제강점기, 지식인의 무력함 &lt;br /&gt;
|}&lt;br /&gt;
&lt;br /&gt;
== 장르 ==&lt;br /&gt;
'''모더니즘'''은 19세기 말과 20세기에 유럽에서 전방위적으로 나타난 예술운동이자 현상으로 모더니즘 문학은 전통과의 단절 및 개인주의 등을 대표적인 특징으로 한다. 제 1차 세계 대전 및 급격한 기술 발전으로 야기된 사회적 변화가 문학 주제에서의 ‘ 19세기 기성 전통과의 단절 ‘ 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때, 19세기의 문학 전통은 ''' 리얼리즘'''을 표방한다. 인간의 삶과 그를 둘러싼 환경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모방 및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리얼리즘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모더니즘은 전적인 주관성과 개인적 경험을 작품의 근원으로 여긴다. 이는 곧 문학의 탈도구성과 독자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19세기 리얼리즘 하에서 문학은 독자들을 계몽시키거나 그들에게 오락을 제공하려는 뚜렷한 목적성을 지니고 있던 반면 모더니즘 문학은 그 어떠한 목적성에서도 벗어나 ''' 문학만을 위한 문학''', 즉 자기목적성만을 보여준다.&lt;br /&gt;
&amp;lt;p&amp;gt;&lt;br /&gt;
'''모더니즘 소설''' 역시 전통적인 소설 구조와 서술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식과 주제를 탐구하는 양상을 보인다. 모더니즘 소설은 '''의식의 흐름''' 기법을 통해 등장인물들의 내면 세계, 심리, 의식을 가감없이 드러내고, 전통적 문법과 구문을 깨뜨리며 새로운 서술 방식을 시도하는 '''언어 실험''', 시작 - 중간 - 결말이라는 구조에서 벗어나 파편화되고 비정형적인 서사 전개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인간 정신의 복잡성과 비합리성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 작가 ==&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fcddce;“&lt;br /&gt;
|+ 박태원 朴泰遠&lt;br /&gt;
|-&lt;br /&gt;
|colspan=&amp;quot;2&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 |  [[File:ㅂㅌㅇ.jpg|100px]]&lt;br /&gt;
|-&lt;br /&gt;
|'''출생''' || 1909년 12월 7일&lt;br /&gt;
|-&lt;br /&gt;
| '''사망''' || 1986년 7월 10일&lt;br /&gt;
|-&lt;br /&gt;
| '''호''' || 구보(丘甫, 仇甫, 九甫)&amp;lt;ref&amp;gt;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라는 작품 이름도 여기에서 비롯한 것이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저서'''|| &amp;lt;천변풍경&amp;gt;, &amp;lt;골목 안&amp;gt;&amp;lt;ref&amp;gt;2024년 대학수학능력시험에 출제되기도 하였다.&amp;lt;/ref&amp;gt;&lt;br /&gt;
|- &lt;br /&gt;
| '''직업''' || 소설가, 시인, 문학평론가&lt;br /&gt;
|}&lt;br /&gt;
&lt;br /&gt;
'''박태원'''은 조선의 소설가, 시인, 문학평론가로 이상, 정지용 등과 더불어 1930년대 모더니즘 문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해방 이후 6.25 전쟁 중 아내와, 자식을 놔두고 홀로 월북하여 그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아주 자세히 알려져 있지는 않다.&lt;br /&gt;
1909년 12월 7일 대한제국 시기 서울 종로에서 태어난 그는 숙부(박용남)가 서양의학 소아내과 의사, 숙모가 보통학교 교사 등으로 일하는 제법 부유하고 개화적인 이른바 서구적 집안 분위기에서 자랐다. 이후  경성제1고등보통학교&amp;lt;ref&amp;gt;현재의 경기고등학교이다&amp;lt;/ref&amp;gt; 재학 중이던 1926년 《조선문단》에 시 〈누님〉을 발표하며 18세의 나이로 등단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amp;lt;ref&amp;gt;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창작한 &amp;lt;반 년간&amp;gt;이라는 작품이 있다.&amp;lt;/ref&amp;gt; 일본 호세이 대학에 진학하지만 1929년 11월, 1학년 시절에 중퇴한 후 귀국하여 1930년 신생 10월호에 단편 소설 〈수염〉을 발표하고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시작하였다. 본격적으로 문단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33년 이상,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조용만, 이효석 등과 함께 문학 동인들의 모임인 구인회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이들 구인회는 순수문학적인 성격을 바탕으로 실험적인 기법과 문장을 문학의 본령으로 내세웠다. 박태원의 소설은 당시로써는 모험적이고 실험적인 시도였기 때문에 당대 문단의 주류를 이루던 사회주의 성향의 '''카프'''와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1930년대 왕성하게 활동하여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1934)''', '''방란장 주인(1936)''', '''천변풍경(1936)''' 등과 같은 대표작들을 발표하였다. 1940년대 일본의 탄압이 심해졌고 이 시기에 박태원은 아세아의 여명(1941.2), 군국의 어머니(1942), 「원구(1945.5-8)」 등 일제의 대동아전쟁을 찬양하고 군국주의를 미화하는 친일 성향 작품들을 발표하여 친일파로 전향하였다는 비판이 있기도 하다. &amp;lt;p&amp;gt; &lt;br /&gt;
광복 후인 1946년 좌익 계열의 문학인 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 등을 맡는 등 잠시 남로당 계열의 문예 운동에 몸을 담았다가, 1947년 탈맹(문동 탈퇴)을 한 이듬해 1948년 국민보도연맹에 사무위원으로 가입하며 본격적인 사회주의, 좌익 성향의 활동을 보인다. 결국에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6.25 전쟁 중 구인회 시절 절친한 동료였던 이태준을 포함해 정인택 설정식 이용악 등과 함께 월북을 감행하여 평양에 정착한다. 전술한 바와 같이 그가 사회주의 성향 단체인 카프와 한때 갈등을 빚기도 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꽤나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amp;lt;p&amp;gt;'''월북 후'''의 생애는 북한 소설가 정태은의 글을 통해 조금이나마 확인된다. 1955년까지 평양문학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던 그는 월북 전의 행보를 이유로 평안남도 강서 지방에서 4년 간 강제 노동을 하였다고 한다. 이후 1960년 다시 대학교수로 복귀하기는 하였지만 강제노동의 휴유증으로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는 지경에 이른다. 청각과 언어능력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창작 활동을 포기하지 않아 동학농민전쟁을 소재로 한 대하 역사소설 &amp;lt; 갑오농민전쟁 &amp;gt;, &amp;lt;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amp;gt; 등을 창작하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tywBeKArUCo?si=Xt0095foxDsQa-uw&amp;quot; title=&amp;quot;YouTube video player&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 &amp;lt;p&amp;gt;&lt;br /&gt;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대학 노트를 들고 다니는 주인공 '''구보 씨'''가 하루 동안 경성을 돌아다니면서 보는 것과 그에 유발되는 상념 및 의식적으로 행하는 사색을 통해 일제 강점기 조선 경성부에 거주하는 '''지식인의 무기력함과 그 일상'''을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다. 주인공의 동선과 그가 만나는 인물들 대부분이 체계적이거나 작가의 치밀한 구성으로 이루어져있다기보다는 철저히 우연을 따르는 점이 특징적이다.&lt;br /&gt;
시력이 약하고 장가도 안 간 무기력한 소설가 구보씨는 무기력한 삶을 살아가는 인물로, 아침에 제 방에서 나와 마루 끝에 놓인 구두를 신고, 기둥 못에 걸린 단장을 들고 문을 나와 걷기도 한다. 그러다가 우두커니 다리 곁에 가 서 있는 자신의 무의미한 행동을 새삼스럽게 깨달은 그는 종로 네거리를 바라보고 걷다가, 다방으로 돌아다닌다. 문득 구보씨는 모든 사람을 정신병자라고 생각해놓고 관찰해 보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낀다. 주인공 구보씨는 그런 것에 흥미를 느끼려는 자기가 이미 환자임을 깨닫고, 비가 내리는 거리를 걸어 집으로 향한다.. 집에서 출발하 여 광교, 종로, 화신상회, 조선은행 앞, 경성역, 경찰서 앞 다방, 종각 뒤의 술집, 카페, 종로 거리를 거쳐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동안에 느낀 복잡한 감정들을 교차시키면서 행복의 가능성을 모색해 보려 한다. 구보는 경성의 온갖 거리를 돌아다니며 그는 작년 여름에 맞선을 본 여인을 만나기도 하고 경성역에서는 노파, 시골 신사, 병자들을 관찰하면서 구보는 '''당대의 세태, 사회문제 등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보여주면서도 어떠한 행동도 보여주지 못하는 일제 강점기 '''지식인의 나약한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lt;br /&gt;
&lt;br /&gt;
기존의 소설이 인물 간의 극적 갈등, 사건의 개연적인 전개를 중시했다면 이 소설은 거리의 풍경과 주변 인물의  묘사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 과정에서 '''자유연상 기법'''을 활용해서 발단 - 전개-위기-절정-결말의 형태와는 달리 내면에 떠오르는 연상과정을 작품 속에 드러내고&amp;lt;ref&amp;gt;모더니즘 소설의 일반적인 특징이기도 하다&amp;lt;/ref&amp;gt;과거와 현재,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구보 씨의 내면 흐름에 초점을 맞추어 그의 사고와 심리를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상의 특징을 통해 사회문제나 그 시대의 세태를 인식하고 비판적 사고로 지닌 인물이지만,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하는 일제 강점기 지식인인 구보 씨의 나약한 모습을 효과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amp;lt;p&amp;gt;&lt;br /&gt;
또한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를 활용하기도 한다. 표면적으로는 작품의 서술자와 주인공이 분리되어 있는 3인칭 시점을 취하고 있으나 서술자가 인물의 시점에 동화되어 그 인물의 시점에서 서술을 전개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기법을 통해 서술자와 등장인물 사이의 거리를 사실상 소멸시킴으로써 독자 입장에선 주인공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분석할 수 있게 된다. &amp;lt;p&amp;gt; 주인공 구보 씨는 정신, 육체 모든 면에서 '''당대의 자본주의적 현실과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다. 그 또한 세속적 일상과 고의적으로 거리를 두고 세계와의 화해를 거부하는 고독한 삶을 자발적으로 선택한 인물이지만 동시에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세계와의 불편한 관계를 거부하며 화해'''를 꿈꾸기도 한다.&lt;br /&gt;
&lt;br /&gt;
== 배경과 의의 ==&lt;br /&gt;
&lt;br /&gt;
이 작품의 주인공인 구보 씨는 작가인 '''박태원의 모습인 반영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까지 다녀왔던 일제 강점기 시기의 지식인이었던 박태원이 당대 사회에 느끼고 있던 문제인식, 환멸, 그리고 거기에서 비롯된 무기력함을 소설을 통해 표출한 것이라 파악된다. 또한 단순히 세태의 파악에 그치지 않고 일상적인 행복을 추구하고자 하는 지향을 작품 내내 꾸준히 보임으로써 문학사적 진전을 보여준다. 또한 전술한 바와 같이 자유연상 기법 등을 활용해 모더니즘 소설로써의 성격을 강하게 드러내기도 한다.&lt;br /&gt;
1930년대는 일제가 만주 사변을 일으키면서 우리 민족에 대한 탄압을 더욱 심하게 하던 시기였다. 그 당시의 경성은 대한 제국의 멸망과 함께 조선 총독부의 정책에 따라 대대적인 '''공간의 재조직'''이 이루어졌다. 일본의 주도 하에 한국인들의 이익과는 상관없이 이루어진 이러한 도시 계획은 기존의 농경생활이 갖는 연대감이 사라지고 '''개인주의'''가 만연하는 병폐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로 인해 '''도시 구성원 개갠인 간의 불신의 감정 및 고독과 소외 현상'''이 증폭되며 문명의 수혜를 누리지 못하는 계층이 느끼는 빈곤감과 타락이 심화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경성이라는 '''도시를 공간적 배경으로 삼는 소설'''들이 대거 등장하였던 것이다. &lt;br /&gt;
&lt;br /&gt;
== 참고 문헌 ==&lt;br /&gt;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위키피디아 https://ko.wikipedia.org/wiki/%EC%86%8C%EC%84%A4%EA%B0%80_%EA%B5%AC%EB%B3%B4%EC%94%A8%EC%9D%98_%EC%9D%BC%EC%9D%BC &amp;lt;p&amp;gt;&lt;br /&gt;
근대성과 근대문학, 나병철 지음, 문예출판사, 1996 &amp;lt;p&amp;gt;&lt;br /&gt;
박태원, 위키피디아 https://ko.wikipedia.org/wiki/%EB%B0%95%ED%83%9C%EC%9B%90_(1909%EB%85%84 &amp;lt;p&amp;gt;&lt;br /&gt;
이은선, ｢박태원 소설과 ‘재현’의 문제｣ (『현대소설연구』 44, 한국현대소설학회, 2010)&lt;br /&gt;
&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고군분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86%8C%EC%84%A4%EA%B0%80_%EA%B5%AC%EB%B3%B4_%EC%94%A8%EC%9D%98_%EC%9D%BC%EC%9D%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157</id>
		<title>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ᐧ༚̮ᐧ</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86%8C%EC%84%A4%EA%B0%80_%EA%B5%AC%EB%B3%B4_%EC%94%A8%EC%9D%98_%EC%9D%BC%EC%9D%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157"/>
		<updated>2025-06-23T08:55:2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고군분투: /* = 배경과 의의 */&lt;/p&gt;
&lt;hr /&gt;
&lt;div&gt;[[파일:ㄱㅂ.jpg|200px|left]]&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ced1fc;“&lt;br /&gt;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lt;br /&gt;
|'''장르''' || 모더니즘 소설&lt;br /&gt;
|-&lt;br /&gt;
| '''작가''' || 박태원&lt;br /&gt;
|-&lt;br /&gt;
| '''시대''' || 1934년 - [[근대]]   &lt;br /&gt;
|-&lt;br /&gt;
| '''배경'''|| 일제강점기, 지식인의 무력함 &lt;br /&gt;
|}&lt;br /&gt;
&lt;br /&gt;
== 장르 ==&lt;br /&gt;
'''모더니즘'''은 19세기 말과 20세기에 유럽에서 전방위적으로 나타난 예술운동이자 현상으로 모더니즘 문학은 전통과의 단절 및 개인주의 등을 대표적인 특징으로 한다. 제 1차 세계 대전 및 급격한 기술 발전으로 야기된 사회적 변화가 문학 주제에서의 ‘ 19세기 기성 전통과의 단절 ‘ 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때, 19세기의 문학 전통은 ''' 리얼리즘'''을 표방한다. 인간의 삶과 그를 둘러싼 환경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모방 및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리얼리즘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모더니즘은 전적인 주관성과 개인적 경험을 작품의 근원으로 여긴다. 이는 곧 문학의 탈도구성과 독자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19세기 리얼리즘 하에서 문학은 독자들을 계몽시키거나 그들에게 오락을 제공하려는 뚜렷한 목적성을 지니고 있던 반면 모더니즘 문학은 그 어떠한 목적성에서도 벗어나 ''' 문학만을 위한 문학''', 즉 자기목적성만을 보여준다.&lt;br /&gt;
&amp;lt;p&amp;gt;&lt;br /&gt;
'''모더니즘 소설''' 역시 전통적인 소설 구조와 서술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식과 주제를 탐구하는 양상을 보인다. 모더니즘 소설은 '''의식의 흐름''' 기법을 통해 등장인물들의 내면 세계, 심리, 의식을 가감없이 드러내고, 전통적 문법과 구문을 깨뜨리며 새로운 서술 방식을 시도하는 '''언어 실험''', 시작 - 중간 - 결말이라는 구조에서 벗어나 파편화되고 비정형적인 서사 전개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인간 정신의 복잡성과 비합리성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 작가 ==&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fcddce;“&lt;br /&gt;
|+ 박태원 朴泰遠&lt;br /&gt;
|-&lt;br /&gt;
|colspan=&amp;quot;2&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 |  [[File:ㅂㅌㅇ.jpg|100px]]&lt;br /&gt;
|-&lt;br /&gt;
|'''출생''' || 1909년 12월 7일&lt;br /&gt;
|-&lt;br /&gt;
| '''사망''' || 1986년 7월 10일&lt;br /&gt;
|-&lt;br /&gt;
| '''호''' || 구보(丘甫, 仇甫, 九甫)&amp;lt;ref&amp;gt;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라는 작품 이름도 여기에서 비롯한 것이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저서'''|| &amp;lt;천변풍경&amp;gt;, &amp;lt;골목 안&amp;gt;&amp;lt;ref&amp;gt;2024년 대학수학능력시험에 출제되기도 하였다.&amp;lt;/ref&amp;gt;&lt;br /&gt;
|- &lt;br /&gt;
| '''직업''' || 소설가, 시인, 문학평론가&lt;br /&gt;
|}&lt;br /&gt;
&lt;br /&gt;
'''박태원'''은 조선의 소설가, 시인, 문학평론가로 이상, 정지용 등과 더불어 1930년대 모더니즘 문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해방 이후 6.25 전쟁 중 아내와, 자식을 놔두고 홀로 월북하여 그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아주 자세히 알려져 있지는 않다.&lt;br /&gt;
1909년 12월 7일 대한제국 시기 서울 종로에서 태어난 그는 숙부(박용남)가 서양의학 소아내과 의사, 숙모가 보통학교 교사 등으로 일하는 제법 부유하고 개화적인 이른바 서구적 집안 분위기에서 자랐다. 이후  경성제1고등보통학교&amp;lt;ref&amp;gt;현재의 경기고등학교이다&amp;lt;/ref&amp;gt; 재학 중이던 1926년 《조선문단》에 시 〈누님〉을 발표하며 18세의 나이로 등단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amp;lt;ref&amp;gt;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창작한 &amp;lt;반 년간&amp;gt;이라는 작품이 있다.&amp;lt;/ref&amp;gt; 일본 호세이 대학에 진학하지만 1929년 11월, 1학년 시절에 중퇴한 후 귀국하여 1930년 신생 10월호에 단편 소설 〈수염〉을 발표하고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시작하였다. 본격적으로 문단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33년 이상,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조용만, 이효석 등과 함께 문학 동인들의 모임인 구인회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이들 구인회는 순수문학적인 성격을 바탕으로 실험적인 기법과 문장을 문학의 본령으로 내세웠다. 박태원의 소설은 당시로써는 모험적이고 실험적인 시도였기 때문에 당대 문단의 주류를 이루던 사회주의 성향의 '''카프'''와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1930년대 왕성하게 활동하여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1934)''', '''방란장 주인(1936)''', '''천변풍경(1936)''' 등과 같은 대표작들을 발표하였다. 1940년대 일본의 탄압이 심해졌고 이 시기에 박태원은 아세아의 여명(1941.2), 군국의 어머니(1942), 「원구(1945.5-8)」 등 일제의 대동아전쟁을 찬양하고 군국주의를 미화하는 친일 성향 작품들을 발표하여 친일파로 전향하였다는 비판이 있기도 하다. &amp;lt;p&amp;gt; &lt;br /&gt;
광복 후인 1946년 좌익 계열의 문학인 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 등을 맡는 등 잠시 남로당 계열의 문예 운동에 몸을 담았다가, 1947년 탈맹(문동 탈퇴)을 한 이듬해 1948년 국민보도연맹에 사무위원으로 가입하며 본격적인 사회주의, 좌익 성향의 활동을 보인다. 결국에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6.25 전쟁 중 구인회 시절 절친한 동료였던 이태준을 포함해 정인택 설정식 이용악 등과 함께 월북을 감행하여 평양에 정착한다. 전술한 바와 같이 그가 사회주의 성향 단체인 카프와 한때 갈등을 빚기도 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꽤나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amp;lt;p&amp;gt;'''월북 후'''의 생애는 북한 소설가 정태은의 글을 통해 조금이나마 확인된다. 1955년까지 평양문학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던 그는 월북 전의 행보를 이유로 평안남도 강서 지방에서 4년 간 강제 노동을 하였다고 한다. 이후 1960년 다시 대학교수로 복귀하기는 하였지만 강제노동의 휴유증으로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는 지경에 이른다. 청각과 언어능력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창작 활동을 포기하지 않아 동학농민전쟁을 소재로 한 대하 역사소설 &amp;lt; 갑오농민전쟁 &amp;gt;, &amp;lt;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amp;gt; 등을 창작하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tywBeKArUCo?si=Xt0095foxDsQa-uw&amp;quot; title=&amp;quot;YouTube video player&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 &amp;lt;p&amp;gt;&lt;br /&gt;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대학 노트를 들고 다니는 주인공 '''구보 씨'''가 하루 동안 경성을 돌아다니면서 보는 것과 그에 유발되는 상념 및 의식적으로 행하는 사색을 통해 일제 강점기 조선 경성부에 거주하는 '''지식인의 무기력함과 그 일상'''을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다. 주인공의 동선과 그가 만나는 인물들 대부분이 체계적이거나 작가의 치밀한 구성으로 이루어져있다기보다는 철저히 우연을 따르는 점이 특징적이다.&lt;br /&gt;
시력이 약하고 장가도 안 간 무기력한 소설가 구보씨는 무기력한 삶을 살아가는 인물로, 아침에 제 방에서 나와 마루 끝에 놓인 구두를 신고, 기둥 못에 걸린 단장을 들고 문을 나와 걷기도 한다. 그러다가 우두커니 다리 곁에 가 서 있는 자신의 무의미한 행동을 새삼스럽게 깨달은 그는 종로 네거리를 바라보고 걷다가, 다방으로 돌아다닌다. 문득 구보씨는 모든 사람을 정신병자라고 생각해놓고 관찰해 보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낀다. 주인공 구보씨는 그런 것에 흥미를 느끼려는 자기가 이미 환자임을 깨닫고, 비가 내리는 거리를 걸어 집으로 향한다.. 집에서 출발하 여 광교, 종로, 화신상회, 조선은행 앞, 경성역, 경찰서 앞 다방, 종각 뒤의 술집, 카페, 종로 거리를 거쳐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동안에 느낀 복잡한 감정들을 교차시키면서 행복의 가능성을 모색해 보려 한다. 구보는 경성의 온갖 거리를 돌아다니며 그는 작년 여름에 맞선을 본 여인을 만나기도 하고 경성역에서는 노파, 시골 신사, 병자들을 관찰하면서 구보는 '''당대의 세태, 사회문제 등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보여주면서도 어떠한 행동도 보여주지 못하는 일제 강점기 '''지식인의 나약한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lt;br /&gt;
&lt;br /&gt;
기존의 소설이 인물 간의 극적 갈등, 사건의 개연적인 전개를 중시했다면 이 소설은 거리의 풍경과 주변 인물의  묘사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 과정에서 '''자유연상 기법'''을 활용해서 발단 - 전개-위기-절정-결말의 형태와는 달리 내면에 떠오르는 연상과정을 작품 속에 드러내고&amp;lt;ref&amp;gt;모더니즘 소설의 일반적인 특징이기도 하다&amp;lt;/ref&amp;gt;과거와 현재,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구보 씨의 내면 흐름에 초점을 맞추어 그의 사고와 심리를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상의 특징을 통해 사회문제나 그 시대의 세태를 인식하고 비판적 사고로 지닌 인물이지만,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하는 일제 강점기 지식인인 구보 씨의 나약한 모습을 효과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amp;lt;p&amp;gt;&lt;br /&gt;
또한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를 활용하기도 한다. 표면적으로는 작품의 서술자와 주인공이 분리되어 있는 3인칭 시점을 취하고 있으나 서술자가 인물의 시점에 동화되어 그 인물의 시점에서 서술을 전개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기법을 통해 서술자와 등장인물 사이의 거리를 사실상 소멸시킴으로써 독자 입장에선 주인공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분석할 수 있게 된다. &amp;lt;p&amp;gt; 주인공 구보 씨는 정신, 육체 모든 면에서 당대의 자본주의적 현실과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다. 그 또한 세속적 일상과 고의적으로 거리를 두고 세계와의 화해를 거부하는 고독한 삶을 자발적으로 선택한 인물이지만 동시에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세계와의 불편한 관계를 거부하며 화해를 꿈꾸기도 한다. &lt;br /&gt;
&lt;br /&gt;
== 배경과 의의 ==&lt;br /&gt;
&lt;br /&gt;
이 작품의 주인공인 구보 씨는 작가인 '''박태원의 모습인 반영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까지 다녀왔던 일제 강점기 시기의 지식인이었던 박태원이 당대 사회에 느끼고 있던 문제인식, 환멸, 그리고 거기에서 비롯된 무기력함을 소설을 통해 표출한 것이라 파악된다. 또한 단순히 세태의 파악에 그치지 않고 일상적인 행복을 추구하고자 하는 지향을 작품 내내 꾸준히 보임으로써 문학사적 진전을 보여준다. 또한 전술한 바와 같이 자유연상 기법 등을 활용해 모더니즘 소설로써의 성격을 강하게 드러내기도 한다.&lt;br /&gt;
1930년대는 일제가 만주 사변을 일으키면서 우리 민족에 대한 탄압을 더욱 심하게 하던 시기였다. 그 당시의 경성은 대한 제국의 멸망과 함께 조선 총독부의 정책에 따라 대대적인 '''공간의 재조직'''이 이루어졌다. 일본의 주도 하에 한국인들의 이익과는 상관없이 이루어진 이러한 도시 계획은 기존의 농경생활이 갖는 연대감이 사라지고 '''개인주의'''가 만연하는 병폐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로 인해 '''도시 구성원 개갠인 간의 불신의 감정 및 고독과 소외 현상'''이 증폭되며 문명의 수혜를 누리지 못하는 계층이 느끼는 빈곤감과 타락이 심화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경성이라는 '''도시를 공간적 배경으로 삼는 소설'''들이 대거 등장하였던 것이다. &lt;br /&gt;
&lt;br /&gt;
== 참고 문헌 ==&lt;br /&gt;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위키피디아 https://ko.wikipedia.org/wiki/%EC%86%8C%EC%84%A4%EA%B0%80_%EA%B5%AC%EB%B3%B4%EC%94%A8%EC%9D%98_%EC%9D%BC%EC%9D%BC &amp;lt;p&amp;gt;&lt;br /&gt;
근대성과 근대문학, 나병철 지음, 문예출판사, 1996 &amp;lt;p&amp;gt;&lt;br /&gt;
박태원, 위키피디아 https://ko.wikipedia.org/wiki/%EB%B0%95%ED%83%9C%EC%9B%90_(1909%EB%85%84 &amp;lt;p&amp;gt;&lt;br /&gt;
이은선, ｢박태원 소설과 ‘재현’의 문제｣ (『현대소설연구』 44, 한국현대소설학회, 2010)&lt;br /&gt;
&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고군분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86%8C%EC%84%A4%EA%B0%80_%EA%B5%AC%EB%B3%B4_%EC%94%A8%EC%9D%98_%EC%9D%BC%EC%9D%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156</id>
		<title>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ᐧ༚̮ᐧ</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86%8C%EC%84%A4%EA%B0%80_%EA%B5%AC%EB%B3%B4_%EC%94%A8%EC%9D%98_%EC%9D%BC%EC%9D%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156"/>
		<updated>2025-06-23T08:55:1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고군분투: &lt;/p&gt;
&lt;hr /&gt;
&lt;div&gt;[[파일:ㄱㅂ.jpg|200px|left]]&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ced1fc;“&lt;br /&gt;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lt;br /&gt;
|'''장르''' || 모더니즘 소설&lt;br /&gt;
|-&lt;br /&gt;
| '''작가''' || 박태원&lt;br /&gt;
|-&lt;br /&gt;
| '''시대''' || 1934년 - [[근대]]   &lt;br /&gt;
|-&lt;br /&gt;
| '''배경'''|| 일제강점기, 지식인의 무력함 &lt;br /&gt;
|}&lt;br /&gt;
&lt;br /&gt;
== 장르 ==&lt;br /&gt;
'''모더니즘'''은 19세기 말과 20세기에 유럽에서 전방위적으로 나타난 예술운동이자 현상으로 모더니즘 문학은 전통과의 단절 및 개인주의 등을 대표적인 특징으로 한다. 제 1차 세계 대전 및 급격한 기술 발전으로 야기된 사회적 변화가 문학 주제에서의 ‘ 19세기 기성 전통과의 단절 ‘ 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때, 19세기의 문학 전통은 ''' 리얼리즘'''을 표방한다. 인간의 삶과 그를 둘러싼 환경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모방 및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리얼리즘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모더니즘은 전적인 주관성과 개인적 경험을 작품의 근원으로 여긴다. 이는 곧 문학의 탈도구성과 독자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19세기 리얼리즘 하에서 문학은 독자들을 계몽시키거나 그들에게 오락을 제공하려는 뚜렷한 목적성을 지니고 있던 반면 모더니즘 문학은 그 어떠한 목적성에서도 벗어나 ''' 문학만을 위한 문학''', 즉 자기목적성만을 보여준다.&lt;br /&gt;
&amp;lt;p&amp;gt;&lt;br /&gt;
'''모더니즘 소설''' 역시 전통적인 소설 구조와 서술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식과 주제를 탐구하는 양상을 보인다. 모더니즘 소설은 '''의식의 흐름''' 기법을 통해 등장인물들의 내면 세계, 심리, 의식을 가감없이 드러내고, 전통적 문법과 구문을 깨뜨리며 새로운 서술 방식을 시도하는 '''언어 실험''', 시작 - 중간 - 결말이라는 구조에서 벗어나 파편화되고 비정형적인 서사 전개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인간 정신의 복잡성과 비합리성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 작가 ==&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fcddce;“&lt;br /&gt;
|+ 박태원 朴泰遠&lt;br /&gt;
|-&lt;br /&gt;
|colspan=&amp;quot;2&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 |  [[File:ㅂㅌㅇ.jpg|100px]]&lt;br /&gt;
|-&lt;br /&gt;
|'''출생''' || 1909년 12월 7일&lt;br /&gt;
|-&lt;br /&gt;
| '''사망''' || 1986년 7월 10일&lt;br /&gt;
|-&lt;br /&gt;
| '''호''' || 구보(丘甫, 仇甫, 九甫)&amp;lt;ref&amp;gt;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라는 작품 이름도 여기에서 비롯한 것이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저서'''|| &amp;lt;천변풍경&amp;gt;, &amp;lt;골목 안&amp;gt;&amp;lt;ref&amp;gt;2024년 대학수학능력시험에 출제되기도 하였다.&amp;lt;/ref&amp;gt;&lt;br /&gt;
|- &lt;br /&gt;
| '''직업''' || 소설가, 시인, 문학평론가&lt;br /&gt;
|}&lt;br /&gt;
&lt;br /&gt;
'''박태원'''은 조선의 소설가, 시인, 문학평론가로 이상, 정지용 등과 더불어 1930년대 모더니즘 문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해방 이후 6.25 전쟁 중 아내와, 자식을 놔두고 홀로 월북하여 그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아주 자세히 알려져 있지는 않다.&lt;br /&gt;
1909년 12월 7일 대한제국 시기 서울 종로에서 태어난 그는 숙부(박용남)가 서양의학 소아내과 의사, 숙모가 보통학교 교사 등으로 일하는 제법 부유하고 개화적인 이른바 서구적 집안 분위기에서 자랐다. 이후  경성제1고등보통학교&amp;lt;ref&amp;gt;현재의 경기고등학교이다&amp;lt;/ref&amp;gt; 재학 중이던 1926년 《조선문단》에 시 〈누님〉을 발표하며 18세의 나이로 등단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amp;lt;ref&amp;gt;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창작한 &amp;lt;반 년간&amp;gt;이라는 작품이 있다.&amp;lt;/ref&amp;gt; 일본 호세이 대학에 진학하지만 1929년 11월, 1학년 시절에 중퇴한 후 귀국하여 1930년 신생 10월호에 단편 소설 〈수염〉을 발표하고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시작하였다. 본격적으로 문단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33년 이상,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조용만, 이효석 등과 함께 문학 동인들의 모임인 구인회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이들 구인회는 순수문학적인 성격을 바탕으로 실험적인 기법과 문장을 문학의 본령으로 내세웠다. 박태원의 소설은 당시로써는 모험적이고 실험적인 시도였기 때문에 당대 문단의 주류를 이루던 사회주의 성향의 '''카프'''와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1930년대 왕성하게 활동하여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1934)''', '''방란장 주인(1936)''', '''천변풍경(1936)''' 등과 같은 대표작들을 발표하였다. 1940년대 일본의 탄압이 심해졌고 이 시기에 박태원은 아세아의 여명(1941.2), 군국의 어머니(1942), 「원구(1945.5-8)」 등 일제의 대동아전쟁을 찬양하고 군국주의를 미화하는 친일 성향 작품들을 발표하여 친일파로 전향하였다는 비판이 있기도 하다. &amp;lt;p&amp;gt; &lt;br /&gt;
광복 후인 1946년 좌익 계열의 문학인 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 등을 맡는 등 잠시 남로당 계열의 문예 운동에 몸을 담았다가, 1947년 탈맹(문동 탈퇴)을 한 이듬해 1948년 국민보도연맹에 사무위원으로 가입하며 본격적인 사회주의, 좌익 성향의 활동을 보인다. 결국에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6.25 전쟁 중 구인회 시절 절친한 동료였던 이태준을 포함해 정인택 설정식 이용악 등과 함께 월북을 감행하여 평양에 정착한다. 전술한 바와 같이 그가 사회주의 성향 단체인 카프와 한때 갈등을 빚기도 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꽤나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amp;lt;p&amp;gt;'''월북 후'''의 생애는 북한 소설가 정태은의 글을 통해 조금이나마 확인된다. 1955년까지 평양문학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던 그는 월북 전의 행보를 이유로 평안남도 강서 지방에서 4년 간 강제 노동을 하였다고 한다. 이후 1960년 다시 대학교수로 복귀하기는 하였지만 강제노동의 휴유증으로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는 지경에 이른다. 청각과 언어능력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창작 활동을 포기하지 않아 동학농민전쟁을 소재로 한 대하 역사소설 &amp;lt; 갑오농민전쟁 &amp;gt;, &amp;lt;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amp;gt; 등을 창작하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tywBeKArUCo?si=Xt0095foxDsQa-uw&amp;quot; title=&amp;quot;YouTube video player&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 &amp;lt;p&amp;gt;&lt;br /&gt;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대학 노트를 들고 다니는 주인공 '''구보 씨'''가 하루 동안 경성을 돌아다니면서 보는 것과 그에 유발되는 상념 및 의식적으로 행하는 사색을 통해 일제 강점기 조선 경성부에 거주하는 '''지식인의 무기력함과 그 일상'''을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다. 주인공의 동선과 그가 만나는 인물들 대부분이 체계적이거나 작가의 치밀한 구성으로 이루어져있다기보다는 철저히 우연을 따르는 점이 특징적이다.&lt;br /&gt;
시력이 약하고 장가도 안 간 무기력한 소설가 구보씨는 무기력한 삶을 살아가는 인물로, 아침에 제 방에서 나와 마루 끝에 놓인 구두를 신고, 기둥 못에 걸린 단장을 들고 문을 나와 걷기도 한다. 그러다가 우두커니 다리 곁에 가 서 있는 자신의 무의미한 행동을 새삼스럽게 깨달은 그는 종로 네거리를 바라보고 걷다가, 다방으로 돌아다닌다. 문득 구보씨는 모든 사람을 정신병자라고 생각해놓고 관찰해 보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낀다. 주인공 구보씨는 그런 것에 흥미를 느끼려는 자기가 이미 환자임을 깨닫고, 비가 내리는 거리를 걸어 집으로 향한다.. 집에서 출발하 여 광교, 종로, 화신상회, 조선은행 앞, 경성역, 경찰서 앞 다방, 종각 뒤의 술집, 카페, 종로 거리를 거쳐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동안에 느낀 복잡한 감정들을 교차시키면서 행복의 가능성을 모색해 보려 한다. 구보는 경성의 온갖 거리를 돌아다니며 그는 작년 여름에 맞선을 본 여인을 만나기도 하고 경성역에서는 노파, 시골 신사, 병자들을 관찰하면서 구보는 '''당대의 세태, 사회문제 등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보여주면서도 어떠한 행동도 보여주지 못하는 일제 강점기 '''지식인의 나약한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lt;br /&gt;
&lt;br /&gt;
기존의 소설이 인물 간의 극적 갈등, 사건의 개연적인 전개를 중시했다면 이 소설은 거리의 풍경과 주변 인물의  묘사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 과정에서 '''자유연상 기법'''을 활용해서 발단 - 전개-위기-절정-결말의 형태와는 달리 내면에 떠오르는 연상과정을 작품 속에 드러내고&amp;lt;ref&amp;gt;모더니즘 소설의 일반적인 특징이기도 하다&amp;lt;/ref&amp;gt;과거와 현재,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구보 씨의 내면 흐름에 초점을 맞추어 그의 사고와 심리를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상의 특징을 통해 사회문제나 그 시대의 세태를 인식하고 비판적 사고로 지닌 인물이지만,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하는 일제 강점기 지식인인 구보 씨의 나약한 모습을 효과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amp;lt;p&amp;gt;&lt;br /&gt;
또한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를 활용하기도 한다. 표면적으로는 작품의 서술자와 주인공이 분리되어 있는 3인칭 시점을 취하고 있으나 서술자가 인물의 시점에 동화되어 그 인물의 시점에서 서술을 전개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기법을 통해 서술자와 등장인물 사이의 거리를 사실상 소멸시킴으로써 독자 입장에선 주인공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분석할 수 있게 된다. &amp;lt;p&amp;gt; 주인공 구보 씨는 정신, 육체 모든 면에서 당대의 자본주의적 현실과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다. 그 또한 세속적 일상과 고의적으로 거리를 두고 세계와의 화해를 거부하는 고독한 삶을 자발적으로 선택한 인물이지만 동시에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세계와의 불편한 관계를 거부하며 화해를 꿈꾸기도 한다. &lt;br /&gt;
&lt;br /&gt;
== 배경과 의의 =&lt;br /&gt;
&lt;br /&gt;
이 작품의 주인공인 구보 씨는 작가인 '''박태원의 모습인 반영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까지 다녀왔던 일제 강점기 시기의 지식인이었던 박태원이 당대 사회에 느끼고 있던 문제인식, 환멸, 그리고 거기에서 비롯된 무기력함을 소설을 통해 표출한 것이라 파악된다. 또한 단순히 세태의 파악에 그치지 않고 일상적인 행복을 추구하고자 하는 지향을 작품 내내 꾸준히 보임으로써 문학사적 진전을 보여준다. 또한 전술한 바와 같이 자유연상 기법 등을 활용해 모더니즘 소설로써의 성격을 강하게 드러내기도 한다.&lt;br /&gt;
1930년대는 일제가 만주 사변을 일으키면서 우리 민족에 대한 탄압을 더욱 심하게 하던 시기였다. 그 당시의 경성은 대한 제국의 멸망과 함께 조선 총독부의 정책에 따라 대대적인 '''공간의 재조직'''이 이루어졌다. 일본의 주도 하에 한국인들의 이익과는 상관없이 이루어진 이러한 도시 계획은 기존의 농경생활이 갖는 연대감이 사라지고 '''개인주의'''가 만연하는 병폐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로 인해 '''도시 구성원 개갠인 간의 불신의 감정 및 고독과 소외 현상'''이 증폭되며 문명의 수혜를 누리지 못하는 계층이 느끼는 빈곤감과 타락이 심화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경성이라는 '''도시를 공간적 배경으로 삼는 소설'''들이 대거 등장하였던 것이다. &lt;br /&gt;
&lt;br /&gt;
== 참고 문헌 ==&lt;br /&gt;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위키피디아 https://ko.wikipedia.org/wiki/%EC%86%8C%EC%84%A4%EA%B0%80_%EA%B5%AC%EB%B3%B4%EC%94%A8%EC%9D%98_%EC%9D%BC%EC%9D%BC &amp;lt;p&amp;gt;&lt;br /&gt;
근대성과 근대문학, 나병철 지음, 문예출판사, 1996 &amp;lt;p&amp;gt;&lt;br /&gt;
박태원, 위키피디아 https://ko.wikipedia.org/wiki/%EB%B0%95%ED%83%9C%EC%9B%90_(1909%EB%85%84 &amp;lt;p&amp;gt;&lt;br /&gt;
이은선, ｢박태원 소설과 ‘재현’의 문제｣ (『현대소설연구』 44, 한국현대소설학회, 2010)&lt;br /&gt;
&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고군분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86%8C%EC%84%A4%EA%B0%80_%EA%B5%AC%EB%B3%B4_%EC%94%A8%EC%9D%98_%EC%9D%BC%EC%9D%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152</id>
		<title>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ᐧ༚̮ᐧ</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86%8C%EC%84%A4%EA%B0%80_%EA%B5%AC%EB%B3%B4_%EC%94%A8%EC%9D%98_%EC%9D%BC%EC%9D%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152"/>
		<updated>2025-06-23T08:29:0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고군분투: /* 내용과 의의 */&lt;/p&gt;
&lt;hr /&gt;
&lt;div&gt;[[파일:ㄱㅂ.jpg|200px|left]]&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ced1fc;“&lt;br /&gt;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lt;br /&gt;
|'''장르''' || 모더니즘 소설&lt;br /&gt;
|-&lt;br /&gt;
| '''작가''' || 박태원&lt;br /&gt;
|-&lt;br /&gt;
| '''시대''' || 1934년 - [[근대]]   &lt;br /&gt;
|-&lt;br /&gt;
| '''배경'''|| 일제강점기, 지식인의 무력함 &lt;br /&gt;
|}&lt;br /&gt;
&lt;br /&gt;
== 장르 ==&lt;br /&gt;
'''모더니즘'''은 19세기 말과 20세기에 유럽에서 전방위적으로 나타난 예술운동이자 현상으로 모더니즘 문학은 전통과의 단절 및 개인주의 등을 대표적인 특징으로 한다. 제 1차 세계 대전 및 급격한 기술 발전으로 야기된 사회적 변화가 문학 주제에서의 ‘ 19세기 기성 전통과의 단절 ‘ 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때, 19세기의 문학 전통은 ''' 리얼리즘'''을 표방한다. 인간의 삶과 그를 둘러싼 환경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모방 및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리얼리즘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모더니즘은 전적인 주관성과 개인적 경험을 작품의 근원으로 여긴다. 이는 곧 문학의 탈도구성과 독자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19세기 리얼리즘 하에서 문학은 독자들을 계몽시키거나 그들에게 오락을 제공하려는 뚜렷한 목적성을 지니고 있던 반면 모더니즘 문학은 그 어떠한 목적성에서도 벗어나 ''' 문학만을 위한 문학''', 즉 자기목적성만을 보여준다.&lt;br /&gt;
&amp;lt;p&amp;gt;&lt;br /&gt;
'''모더니즘 소설''' 역시 전통적인 소설 구조와 서술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식과 주제를 탐구하는 양상을 보인다. 모더니즘 소설은 '''의식의 흐름''' 기법을 통해 등장인물들의 내면 세계, 심리, 의식을 가감없이 드러내고, 전통적 문법과 구문을 깨뜨리며 새로운 서술 방식을 시도하는 '''언어 실험''', 시작 - 중간 - 결말이라는 구조에서 벗어나 파편화되고 비정형적인 서사 전개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인간 정신의 복잡성과 비합리성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 작가 ==&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fcddce;“&lt;br /&gt;
|+ 박태원 朴泰遠&lt;br /&gt;
|-&lt;br /&gt;
|colspan=&amp;quot;2&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 |  [[File:ㅂㅌㅇ.jpg|100px]]&lt;br /&gt;
|-&lt;br /&gt;
|'''출생''' || 1909년 12월 7일&lt;br /&gt;
|-&lt;br /&gt;
| '''사망''' || 1986년 7월 10일&lt;br /&gt;
|-&lt;br /&gt;
| '''호''' || 구보(丘甫, 仇甫, 九甫)&amp;lt;ref&amp;gt;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라는 작품 이름도 여기에서 비롯한 것이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저서'''|| &amp;lt;천변풍경&amp;gt;, &amp;lt;골목 안&amp;gt;&amp;lt;ref&amp;gt;2024년 대학수학능력시험에 출제되기도 하였다.&amp;lt;/ref&amp;gt;&lt;br /&gt;
|- &lt;br /&gt;
| '''직업''' || 소설가, 시인, 문학평론가&lt;br /&gt;
|}&lt;br /&gt;
&lt;br /&gt;
'''박태원'''은 조선의 소설가, 시인, 문학평론가로 이상, 정지용 등과 더불어 1930년대 모더니즘 문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해방 이후 6.25 전쟁 중 아내와, 자식을 놔두고 홀로 월북하여 그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아주 자세히 알려져 있지는 않다.&lt;br /&gt;
1909년 12월 7일 대한제국 시기 서울 종로에서 태어난 그는 숙부(박용남)가 서양의학 소아내과 의사, 숙모가 보통학교 교사 등으로 일하는 제법 부유하고 개화적인 이른바 서구적 집안 분위기에서 자랐다. 이후  경성제1고등보통학교&amp;lt;ref&amp;gt;현재의 경기고등학교이다&amp;lt;/ref&amp;gt; 재학 중이던 1926년 《조선문단》에 시 〈누님〉을 발표하며 18세의 나이로 등단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amp;lt;ref&amp;gt;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창작한 &amp;lt;반 년간&amp;gt;이라는 작품이 있다.&amp;lt;/ref&amp;gt; 일본 호세이 대학에 진학하지만 1929년 11월, 1학년 시절에 중퇴한 후 귀국하여 1930년 신생 10월호에 단편 소설 〈수염〉을 발표하고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시작하였다. 본격적으로 문단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33년 이상,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조용만, 이효석 등과 함께 문학 동인들의 모임인 구인회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이들 구인회는 순수문학적인 성격을 바탕으로 실험적인 기법과 문장을 문학의 본령으로 내세웠다. 박태원의 소설은 당시로써는 모험적이고 실험적인 시도였기 때문에 당대 문단의 주류를 이루던 사회주의 성향의 '''카프'''와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1930년대 왕성하게 활동하여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1934)''', '''방란장 주인(1936)''', '''천변풍경(1936)''' 등과 같은 대표작들을 발표하였다. 1940년대 일본의 탄압이 심해졌고 이 시기에 박태원은 아세아의 여명(1941.2), 군국의 어머니(1942), 「원구(1945.5-8)」 등 일제의 대동아전쟁을 찬양하고 군국주의를 미화하는 친일 성향 작품들을 발표하여 친일파로 전향하였다는 비판이 있기도 하다. &amp;lt;p&amp;gt; &lt;br /&gt;
광복 후인 1946년 좌익 계열의 문학인 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 등을 맡는 등 잠시 남로당 계열의 문예 운동에 몸을 담았다가, 1947년 탈맹(문동 탈퇴)을 한 이듬해 1948년 국민보도연맹에 사무위원으로 가입하며 본격적인 사회주의, 좌익 성향의 활동을 보인다. 결국에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6.25 전쟁 중 구인회 시절 절친한 동료였던 이태준을 포함해 정인택 설정식 이용악 등과 함께 월북을 감행하여 평양에 정착한다. 전술한 바와 같이 그가 사회주의 성향 단체인 카프와 한때 갈등을 빚기도 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꽤나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amp;lt;p&amp;gt;'''월북 후'''의 생애는 북한 소설가 정태은의 글을 통해 조금이나마 확인된다. 1955년까지 평양문학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던 그는 월북 전의 행보를 이유로 평안남도 강서 지방에서 4년 간 강제 노동을 하였다고 한다. 이후 1960년 다시 대학교수로 복귀하기는 하였지만 강제노동의 휴유증으로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는 지경에 이른다. 청각과 언어능력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창작 활동을 포기하지 않아 동학농민전쟁을 소재로 한 대하 역사소설 &amp;lt; 갑오농민전쟁 &amp;gt;, &amp;lt;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amp;gt; 등을 창작하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 내용과 의의 ==&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tywBeKArUCo?si=Xt0095foxDsQa-uw&amp;quot; title=&amp;quot;YouTube video player&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 &amp;lt;p&amp;gt;&lt;br /&gt;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대학 노트를 들고 다니는 주인공 '''구보 씨'''가 하루 동안 경성을 돌아다니면서 보는 것과 그에 유발되는 상념 및 의식적으로 행하는 사색을 통해 일제 강점기 조선 경성부에 거주하는 '''지식인의 무기력함과 그 일상'''을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다. 주인공의 동선과 그가 만나는 인물들 대부분이 체계적이거나 작가의 치밀한 구성으로 이루어져있다기보다는 철저히 우연을 따르는 점이 특징적이다.&lt;br /&gt;
시력이 약하고 장가도 안 간 무기력한 소설가 구보씨는 무기력한 삶을 살아가는 인물로, 아침에 제 방에서 나와 마루 끝에 놓인 구두를 신고, 기둥 못에 걸린 단장을 들고 문을 나와 걷기도 한다. 그러다가 우두커니 다리 곁에 가 서 있는 자신의 무의미한 행동을 새삼스럽게 깨달은 그는 종로 네거리를 바라보고 걷다가, 다방으로 돌아다닌다. 문득 구보씨는 모든 사람을 정신병자라고 생각해놓고 관찰해 보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낀다. 주인공 구보씨는 그런 것에 흥미를 느끼려는 자기가 이미 환자임을 깨닫고, 비가 내리는 거리를 걸어 집으로 향한다.. 집에서 출발하 여 광교, 종로, 화신상회, 조선은행 앞, 경성역, 경찰서 앞 다방, 종각 뒤의 술집, 카페, 종로 거리를 거쳐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동안에 느낀 복잡한 감정들을 교차시키면서 행복의 가능성을 모색해 보려 한다. 구보는 경성의 온갖 거리를 돌아다니며 그는 작년 여름에 맞선을 본 여인을 만나기도 하고 경성역에서는 노파, 시골 신사, 병자들을 관찰하면서 구보는 '''당대의 세태, 사회문제 등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보여주면서도 어떠한 행동도 보여주지 못하는 일제 강점기 '''지식인의 나약한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lt;br /&gt;
&lt;br /&gt;
기존의 소설이 인물 간의 극적 갈등, 사건의 개연적인 전개를 중시했다면 이 소설은 거리의 풍경과 주변 인물의  묘사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 과정에서 '''자유연상 기법'''을 활용해서 발단 - 전개-위기-절정-결말의 형태와는 달리 내면에 떠오르는 연상과정을 작품 속에 드러내고&amp;lt;ref&amp;gt;모더니즘 소설의 일반적인 특징이기도 하다&amp;lt;/ref&amp;gt;과거와 현재,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구보 씨의 내면 흐름에 초점을 맞추어 그의 사고와 심리를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상의 특징을 통해 사회문제나 그 시대의 세태를 인식하고 비판적 사고로 지닌 인물이지만,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하는 일제 강점기 지식인인 구보 씨의 나약한 모습을 효과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amp;lt;p&amp;gt;&lt;br /&gt;
또한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를 활용하기도 한다. 표면적으로는 작품의 서술자와 주인공이 분리되어 있는 3인칭 시점을 취하고 있으나 서술자가 인물의 시점에 동화되어 그 인물의 시점에서 서술을 전개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기법을 통해 서술자와 등장인물 사이의 거리를 사실상 소멸시킴으로써 독자 입장에선 주인공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분석할 수 있게 된다. &amp;lt;p&amp;gt;&lt;br /&gt;
&lt;br /&gt;
이 작품의 주인공인 구보 씨는 작가인 '''박태원의 모습인 반영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까지 다녀왔던 일제 강점기 시기의 지식인이었던 박태원이 당대 사회에 느끼고 있던 문제인식, 환멸, 그리고 거기에서 비롯된 무기력함을 소설을 통해 표출한 것이라 파악된다. 또한 단순히 세태의 파악에 그치지 않고 일상적인 행복을 추구하고자 하는 지향을 작품 내내 꾸준히 보임으로써 문학사적 진전을 보여준다. 또한 전술한 바와 같이 자유연상 기법 등을 활용해 모더니즘 소설로써의 성격을 강하게 드러내기도 한다.&lt;br /&gt;
&lt;br /&gt;
== 참고 문헌 ==&lt;br /&gt;
&lt;br /&gt;
근대성과 근대문학, 나병철 지음, 문예출판사, 1996&lt;br /&gt;
박태원, 위키피디아 https://ko.wikipedia.org/wiki/%EB%B0%95%ED%83%9C%EC%9B%90_(1909%EB%85%84&lt;br /&gt;
이은선, ｢박태원 소설과 ‘재현’의 문제｣ (『현대소설연구』 44, 한국현대소설학회, 2010)&lt;br /&gt;
&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고군분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86%8C%EC%84%A4%EA%B0%80_%EA%B5%AC%EB%B3%B4_%EC%94%A8%EC%9D%98_%EC%9D%BC%EC%9D%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151</id>
		<title>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ᐧ༚̮ᐧ</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86%8C%EC%84%A4%EA%B0%80_%EA%B5%AC%EB%B3%B4_%EC%94%A8%EC%9D%98_%EC%9D%BC%EC%9D%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151"/>
		<updated>2025-06-23T08:27:5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고군분투: /* 내용과 의의 */&lt;/p&gt;
&lt;hr /&gt;
&lt;div&gt;[[파일:ㄱㅂ.jpg|200px|left]]&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ced1fc;“&lt;br /&gt;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lt;br /&gt;
|'''장르''' || 모더니즘 소설&lt;br /&gt;
|-&lt;br /&gt;
| '''작가''' || 박태원&lt;br /&gt;
|-&lt;br /&gt;
| '''시대''' || 1934년 - [[근대]]   &lt;br /&gt;
|-&lt;br /&gt;
| '''배경'''|| 일제강점기, 지식인의 무력함 &lt;br /&gt;
|}&lt;br /&gt;
&lt;br /&gt;
== 장르 ==&lt;br /&gt;
'''모더니즘'''은 19세기 말과 20세기에 유럽에서 전방위적으로 나타난 예술운동이자 현상으로 모더니즘 문학은 전통과의 단절 및 개인주의 등을 대표적인 특징으로 한다. 제 1차 세계 대전 및 급격한 기술 발전으로 야기된 사회적 변화가 문학 주제에서의 ‘ 19세기 기성 전통과의 단절 ‘ 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때, 19세기의 문학 전통은 ''' 리얼리즘'''을 표방한다. 인간의 삶과 그를 둘러싼 환경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모방 및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리얼리즘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모더니즘은 전적인 주관성과 개인적 경험을 작품의 근원으로 여긴다. 이는 곧 문학의 탈도구성과 독자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19세기 리얼리즘 하에서 문학은 독자들을 계몽시키거나 그들에게 오락을 제공하려는 뚜렷한 목적성을 지니고 있던 반면 모더니즘 문학은 그 어떠한 목적성에서도 벗어나 ''' 문학만을 위한 문학''', 즉 자기목적성만을 보여준다.&lt;br /&gt;
&amp;lt;p&amp;gt;&lt;br /&gt;
'''모더니즘 소설''' 역시 전통적인 소설 구조와 서술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식과 주제를 탐구하는 양상을 보인다. 모더니즘 소설은 '''의식의 흐름''' 기법을 통해 등장인물들의 내면 세계, 심리, 의식을 가감없이 드러내고, 전통적 문법과 구문을 깨뜨리며 새로운 서술 방식을 시도하는 '''언어 실험''', 시작 - 중간 - 결말이라는 구조에서 벗어나 파편화되고 비정형적인 서사 전개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인간 정신의 복잡성과 비합리성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 작가 ==&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fcddce;“&lt;br /&gt;
|+ 박태원 朴泰遠&lt;br /&gt;
|-&lt;br /&gt;
|colspan=&amp;quot;2&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 |  [[File:ㅂㅌㅇ.jpg|100px]]&lt;br /&gt;
|-&lt;br /&gt;
|'''출생''' || 1909년 12월 7일&lt;br /&gt;
|-&lt;br /&gt;
| '''사망''' || 1986년 7월 10일&lt;br /&gt;
|-&lt;br /&gt;
| '''호''' || 구보(丘甫, 仇甫, 九甫)&amp;lt;ref&amp;gt;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라는 작품 이름도 여기에서 비롯한 것이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저서'''|| &amp;lt;천변풍경&amp;gt;, &amp;lt;골목 안&amp;gt;&amp;lt;ref&amp;gt;2024년 대학수학능력시험에 출제되기도 하였다.&amp;lt;/ref&amp;gt;&lt;br /&gt;
|- &lt;br /&gt;
| '''직업''' || 소설가, 시인, 문학평론가&lt;br /&gt;
|}&lt;br /&gt;
&lt;br /&gt;
'''박태원'''은 조선의 소설가, 시인, 문학평론가로 이상, 정지용 등과 더불어 1930년대 모더니즘 문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해방 이후 6.25 전쟁 중 아내와, 자식을 놔두고 홀로 월북하여 그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아주 자세히 알려져 있지는 않다.&lt;br /&gt;
1909년 12월 7일 대한제국 시기 서울 종로에서 태어난 그는 숙부(박용남)가 서양의학 소아내과 의사, 숙모가 보통학교 교사 등으로 일하는 제법 부유하고 개화적인 이른바 서구적 집안 분위기에서 자랐다. 이후  경성제1고등보통학교&amp;lt;ref&amp;gt;현재의 경기고등학교이다&amp;lt;/ref&amp;gt; 재학 중이던 1926년 《조선문단》에 시 〈누님〉을 발표하며 18세의 나이로 등단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amp;lt;ref&amp;gt;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창작한 &amp;lt;반 년간&amp;gt;이라는 작품이 있다.&amp;lt;/ref&amp;gt; 일본 호세이 대학에 진학하지만 1929년 11월, 1학년 시절에 중퇴한 후 귀국하여 1930년 신생 10월호에 단편 소설 〈수염〉을 발표하고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시작하였다. 본격적으로 문단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33년 이상,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조용만, 이효석 등과 함께 문학 동인들의 모임인 구인회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이들 구인회는 순수문학적인 성격을 바탕으로 실험적인 기법과 문장을 문학의 본령으로 내세웠다. 박태원의 소설은 당시로써는 모험적이고 실험적인 시도였기 때문에 당대 문단의 주류를 이루던 사회주의 성향의 '''카프'''와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1930년대 왕성하게 활동하여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1934)''', '''방란장 주인(1936)''', '''천변풍경(1936)''' 등과 같은 대표작들을 발표하였다. 1940년대 일본의 탄압이 심해졌고 이 시기에 박태원은 아세아의 여명(1941.2), 군국의 어머니(1942), 「원구(1945.5-8)」 등 일제의 대동아전쟁을 찬양하고 군국주의를 미화하는 친일 성향 작품들을 발표하여 친일파로 전향하였다는 비판이 있기도 하다. &amp;lt;p&amp;gt; &lt;br /&gt;
광복 후인 1946년 좌익 계열의 문학인 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 등을 맡는 등 잠시 남로당 계열의 문예 운동에 몸을 담았다가, 1947년 탈맹(문동 탈퇴)을 한 이듬해 1948년 국민보도연맹에 사무위원으로 가입하며 본격적인 사회주의, 좌익 성향의 활동을 보인다. 결국에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6.25 전쟁 중 구인회 시절 절친한 동료였던 이태준을 포함해 정인택 설정식 이용악 등과 함께 월북을 감행하여 평양에 정착한다. 전술한 바와 같이 그가 사회주의 성향 단체인 카프와 한때 갈등을 빚기도 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꽤나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amp;lt;p&amp;gt;'''월북 후'''의 생애는 북한 소설가 정태은의 글을 통해 조금이나마 확인된다. 1955년까지 평양문학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던 그는 월북 전의 행보를 이유로 평안남도 강서 지방에서 4년 간 강제 노동을 하였다고 한다. 이후 1960년 다시 대학교수로 복귀하기는 하였지만 강제노동의 휴유증으로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는 지경에 이른다. 청각과 언어능력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창작 활동을 포기하지 않아 동학농민전쟁을 소재로 한 대하 역사소설 &amp;lt; 갑오농민전쟁 &amp;gt;, &amp;lt;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amp;gt; 등을 창작하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 내용과 의의 ==&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tywBeKArUCo?si=Xt0095foxDsQa-uw&amp;quot; title=&amp;quot;YouTube video player&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대학 노트를 들고 다니는 주인공 '''구보 씨'''가 하루 동안 경성을 돌아다니면서 보는 것과 그에 유발되는 상념 및 의식적으로 행하는 사색을 통해 일제 강점기 조선 경성부에 거주하는 '''지식인의 무기력함과 그 일상'''을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다. 주인공의 동선과 그가 만나는 인물들 대부분이 체계적이거나 작가의 치밀한 구성으로 이루어져있다기보다는 철저히 우연을 따르는 점이 특징적이다.&lt;br /&gt;
시력이 약하고 장가도 안 간 무기력한 소설가 구보씨는 무기력한 삶을 살아가는 인물로, 아침에 제 방에서 나와 마루 끝에 놓인 구두를 신고, 기둥 못에 걸린 단장을 들고 문을 나와 걷기도 한다. 그러다가 우두커니 다리 곁에 가 서 있는 자신의 무의미한 행동을 새삼스럽게 깨달은 그는 종로 네거리를 바라보고 걷다가, 다방으로 돌아다닌다. 문득 구보씨는 모든 사람을 정신병자라고 생각해놓고 관찰해 보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낀다. 주인공 구보씨는 그런 것에 흥미를 느끼려는 자기가 이미 환자임을 깨닫고, 비가 내리는 거리를 걸어 집으로 향한다.. 집에서 출발하 여 광교, 종로, 화신상회, 조선은행 앞, 경성역, 경찰서 앞 다방, 종각 뒤의 술집, 카페, 종로 거리를 거쳐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동안에 느낀 복잡한 감정들을 교차시키면서 행복의 가능성을 모색해 보려 한다. 구보는 경성의 온갖 거리를 돌아다니며 그는 작년 여름에 맞선을 본 여인을 만나기도 하고 경성역에서는 노파, 시골 신사, 병자들을 관찰하면서 구보는 '''당대의 세태, 사회문제 등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보여주면서도 어떠한 행동도 보여주지 못하는 일제 강점기 '''지식인의 나약한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lt;br /&gt;
&lt;br /&gt;
기존의 소설이 인물 간의 극적 갈등, 사건의 개연적인 전개를 중시했다면 이 소설은 거리의 풍경과 주변 인물의  묘사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 과정에서 '''자유연상 기법'''을 활용해서 발단 - 전개-위기-절정-결말의 형태와는 달리 내면에 떠오르는 연상과정을 작품 속에 드러내고&amp;lt;ref&amp;gt;모더니즘 소설의 일반적인 특징이기도 하다&amp;lt;/ref&amp;gt;과거와 현재,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구보 씨의 내면 흐름에 초점을 맞추어 그의 사고와 심리를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상의 특징을 통해 사회문제나 그 시대의 세태를 인식하고 비판적 사고로 지닌 인물이지만,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하는 일제 강점기 지식인인 구보 씨의 나약한 모습을 효과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amp;lt;p&amp;gt;&lt;br /&gt;
또한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를 활용하기도 한다. 표면적으로는 작품의 서술자와 주인공이 분리되어 있는 3인칭 시점을 취하고 있으나 서술자가 인물의 시점에 동화되어 그 인물의 시점에서 서술을 전개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기법을 통해 서술자와 등장인물 사이의 거리를 사실상 소멸시킴으로써 독자 입장에선 주인공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분석할 수 있게 된다. &amp;lt;p&amp;gt;&lt;br /&gt;
&lt;br /&gt;
이 작품의 주인공인 구보 씨는 작가인 '''박태원의 모습인 반영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까지 다녀왔던 일제 강점기 시기의 지식인이었던 박태원이 당대 사회에 느끼고 있던 문제인식, 환멸, 그리고 거기에서 비롯된 무기력함을 소설을 통해 표출한 것이라 파악된다. 또한 단순히 세태의 파악에 그치지 않고 일상적인 행복을 추구하고자 하는 지향을 작품 내내 꾸준히 보임으로써 문학사적 진전을 보여준다. 또한 전술한 바와 같이 자유연상 기법 등을 활용해 모더니즘 소설로써의 성격을 강하게 드러내기도 한다.&lt;br /&gt;
&lt;br /&gt;
== 참고 문헌 ==&lt;br /&gt;
&lt;br /&gt;
근대성과 근대문학, 나병철 지음, 문예출판사, 1996&lt;br /&gt;
박태원, 위키피디아 https://ko.wikipedia.org/wiki/%EB%B0%95%ED%83%9C%EC%9B%90_(1909%EB%85%84&lt;br /&gt;
이은선, ｢박태원 소설과 ‘재현’의 문제｣ (『현대소설연구』 44, 한국현대소설학회, 2010)&lt;br /&gt;
&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고군분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86%8C%EC%84%A4%EA%B0%80_%EA%B5%AC%EB%B3%B4_%EC%94%A8%EC%9D%98_%EC%9D%BC%EC%9D%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149</id>
		<title>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ᐧ༚̮ᐧ</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86%8C%EC%84%A4%EA%B0%80_%EA%B5%AC%EB%B3%B4_%EC%94%A8%EC%9D%98_%EC%9D%BC%EC%9D%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149"/>
		<updated>2025-06-23T08:12:5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고군분투: /* 내용과 의의 */&lt;/p&gt;
&lt;hr /&gt;
&lt;div&gt;[[파일:ㄱㅂ.jpg|200px|left]]&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ced1fc;“&lt;br /&gt;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lt;br /&gt;
|'''장르''' || 모더니즘 소설&lt;br /&gt;
|-&lt;br /&gt;
| '''작가''' || 박태원&lt;br /&gt;
|-&lt;br /&gt;
| '''시대''' || 1934년 - [[근대]]   &lt;br /&gt;
|-&lt;br /&gt;
| '''배경'''|| 일제강점기, 지식인의 무력함 &lt;br /&gt;
|}&lt;br /&gt;
&lt;br /&gt;
== 장르 ==&lt;br /&gt;
'''모더니즘'''은 19세기 말과 20세기에 유럽에서 전방위적으로 나타난 예술운동이자 현상으로 모더니즘 문학은 전통과의 단절 및 개인주의 등을 대표적인 특징으로 한다. 제 1차 세계 대전 및 급격한 기술 발전으로 야기된 사회적 변화가 문학 주제에서의 ‘ 19세기 기성 전통과의 단절 ‘ 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때, 19세기의 문학 전통은 ''' 리얼리즘'''을 표방한다. 인간의 삶과 그를 둘러싼 환경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모방 및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리얼리즘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모더니즘은 전적인 주관성과 개인적 경험을 작품의 근원으로 여긴다. 이는 곧 문학의 탈도구성과 독자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19세기 리얼리즘 하에서 문학은 독자들을 계몽시키거나 그들에게 오락을 제공하려는 뚜렷한 목적성을 지니고 있던 반면 모더니즘 문학은 그 어떠한 목적성에서도 벗어나 ''' 문학만을 위한 문학''', 즉 자기목적성만을 보여준다.&lt;br /&gt;
&amp;lt;p&amp;gt;&lt;br /&gt;
'''모더니즘 소설''' 역시 전통적인 소설 구조와 서술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식과 주제를 탐구하는 양상을 보인다. 모더니즘 소설은 '''의식의 흐름''' 기법을 통해 등장인물들의 내면 세계, 심리, 의식을 가감없이 드러내고, 전통적 문법과 구문을 깨뜨리며 새로운 서술 방식을 시도하는 '''언어 실험''', 시작 - 중간 - 결말이라는 구조에서 벗어나 파편화되고 비정형적인 서사 전개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인간 정신의 복잡성과 비합리성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 작가 ==&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fcddce;“&lt;br /&gt;
|+ 박태원 朴泰遠&lt;br /&gt;
|-&lt;br /&gt;
|colspan=&amp;quot;2&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 |  [[File:ㅂㅌㅇ.jpg|100px]]&lt;br /&gt;
|-&lt;br /&gt;
|'''출생''' || 1909년 12월 7일&lt;br /&gt;
|-&lt;br /&gt;
| '''사망''' || 1986년 7월 10일&lt;br /&gt;
|-&lt;br /&gt;
| '''호''' || 구보(丘甫, 仇甫, 九甫)&amp;lt;ref&amp;gt;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라는 작품 이름도 여기에서 비롯한 것이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저서'''|| &amp;lt;천변풍경&amp;gt;, &amp;lt;골목 안&amp;gt;&amp;lt;ref&amp;gt;2024년 대학수학능력시험에 출제되기도 하였다.&amp;lt;/ref&amp;gt;&lt;br /&gt;
|- &lt;br /&gt;
| '''직업''' || 소설가, 시인, 문학평론가&lt;br /&gt;
|}&lt;br /&gt;
&lt;br /&gt;
'''박태원'''은 조선의 소설가, 시인, 문학평론가로 이상, 정지용 등과 더불어 1930년대 모더니즘 문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해방 이후 6.25 전쟁 중 아내와, 자식을 놔두고 홀로 월북하여 그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아주 자세히 알려져 있지는 않다.&lt;br /&gt;
1909년 12월 7일 대한제국 시기 서울 종로에서 태어난 그는 숙부(박용남)가 서양의학 소아내과 의사, 숙모가 보통학교 교사 등으로 일하는 제법 부유하고 개화적인 이른바 서구적 집안 분위기에서 자랐다. 이후  경성제1고등보통학교&amp;lt;ref&amp;gt;현재의 경기고등학교이다&amp;lt;/ref&amp;gt; 재학 중이던 1926년 《조선문단》에 시 〈누님〉을 발표하며 18세의 나이로 등단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amp;lt;ref&amp;gt;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창작한 &amp;lt;반 년간&amp;gt;이라는 작품이 있다.&amp;lt;/ref&amp;gt; 일본 호세이 대학에 진학하지만 1929년 11월, 1학년 시절에 중퇴한 후 귀국하여 1930년 신생 10월호에 단편 소설 〈수염〉을 발표하고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시작하였다. 본격적으로 문단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33년 이상,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조용만, 이효석 등과 함께 문학 동인들의 모임인 구인회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이들 구인회는 순수문학적인 성격을 바탕으로 실험적인 기법과 문장을 문학의 본령으로 내세웠다. 박태원의 소설은 당시로써는 모험적이고 실험적인 시도였기 때문에 당대 문단의 주류를 이루던 사회주의 성향의 '''카프'''와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1930년대 왕성하게 활동하여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1934)''', '''방란장 주인(1936)''', '''천변풍경(1936)''' 등과 같은 대표작들을 발표하였다. 1940년대 일본의 탄압이 심해졌고 이 시기에 박태원은 아세아의 여명(1941.2), 군국의 어머니(1942), 「원구(1945.5-8)」 등 일제의 대동아전쟁을 찬양하고 군국주의를 미화하는 친일 성향 작품들을 발표하여 친일파로 전향하였다는 비판이 있기도 하다. &amp;lt;p&amp;gt; &lt;br /&gt;
광복 후인 1946년 좌익 계열의 문학인 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 등을 맡는 등 잠시 남로당 계열의 문예 운동에 몸을 담았다가, 1947년 탈맹(문동 탈퇴)을 한 이듬해 1948년 국민보도연맹에 사무위원으로 가입하며 본격적인 사회주의, 좌익 성향의 활동을 보인다. 결국에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6.25 전쟁 중 구인회 시절 절친한 동료였던 이태준을 포함해 정인택 설정식 이용악 등과 함께 월북을 감행하여 평양에 정착한다. 전술한 바와 같이 그가 사회주의 성향 단체인 카프와 한때 갈등을 빚기도 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꽤나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amp;lt;p&amp;gt;'''월북 후'''의 생애는 북한 소설가 정태은의 글을 통해 조금이나마 확인된다. 1955년까지 평양문학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던 그는 월북 전의 행보를 이유로 평안남도 강서 지방에서 4년 간 강제 노동을 하였다고 한다. 이후 1960년 다시 대학교수로 복귀하기는 하였지만 강제노동의 휴유증으로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는 지경에 이른다. 청각과 언어능력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창작 활동을 포기하지 않아 동학농민전쟁을 소재로 한 대하 역사소설 &amp;lt; 갑오농민전쟁 &amp;gt;, &amp;lt;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amp;gt; 등을 창작하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 내용과 의의 ==&lt;br /&gt;
&amp;lt;html&amp;gt;&amp;lt;iframe width=&amp;quot;560&amp;quot; height=&amp;quot;315&amp;quot; src=&amp;quot;https://www.youtube.com/embed/tywBeKArUCo?si=Xt0095foxDsQa-uw&amp;quot; title=&amp;quot;YouTube video player&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amp;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amp;quot; referrerpolicy=&amp;quot;strict-origin-when-cross-origin&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대학 노트를 들고 다니는 주인공 '''구보 씨'''가 하루 동안 경성을 돌아다니면서 보는 것과 그에 유발되는 상념 및 의식적으로 행하는 사색을 통해 일제 강점기 조선 경성부에 거주하는 '''지식인의 무기력함과 그 일상'''을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다. 주인공의 동선과 그가 만나는 인물들 대부분이 체계적이거나 작가의 치밀한 구성으로 이루어져있다기보다는 철저히 우연을 따르는 점이 특징적이다.&lt;br /&gt;
시력이 약하고 장가도 안 간 무기력한 소설가 구보씨는 무기력한 삶을 살아가는 인물로, 아침에 제 방에서 나와 마루 끝에 놓인 구두를 신고, 기둥 못에 걸린 단장을 들고 문을 나와 걷기도 한다. 그러다가 우두커니 다리 곁에 가 서 있는 자신의 무의미한 행동을 새삼스럽게 깨달은 그는 종로 네거리를 바라보고 걷다가, 다방으로 돌아다닌다. 문득 구보씨는 모든 사람을 정신병자라고 생각해놓고 관찰해 보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낀다. 주인공 구보씨는 그런 것에 흥미를 느끼려는 자기가 이미 환자임을 깨닫고, 비가 내리는 거리를 걸어 집으로 향한다.. 집에서 출발하 여 광교, 종로, 화신상회, 조선은행 앞, 경성역, 경찰서 앞 다방, 종각 뒤의 술집, 카페, 종로 거리를 거쳐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동안에 느낀 복잡한 감정들을 교차시키면서 행복의 가능성을 모색해 보려 한다. 구보는 경성의 온갖 거리를 돌아다니며 그는 작년 여름에 맞선을 본 여인을 만나기도 하고 경성역에서는 노파, 시골 신사, 병자들을 관찰하면서 구보는 '''당대의 세태, 사회문제 등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보여주면서도 어떠한 행동도 보여주지 못하는 일제 강점기 '''지식인의 나약한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lt;br /&gt;
&lt;br /&gt;
기존의 소설이 인물 간의 극적 갈등, 사건의 개연적인 전개를 중시했다면 이 소설은 거리의 풍경과 주변 인물의  묘사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 과정에서 '''자유연상 기법'''을 활용해서 발단 - 전개-위기-절정-결말의 형태와는 달리 내면에 떠오르는 연상과정을 작품 속에 드러내고&amp;lt;ref&amp;gt;모더니즘 소설의 일반적인 특징이기도 하다&amp;lt;/ref&amp;gt;과거와 현재,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구보 씨의 내면 흐름에 초점을 맞추어 그의 사고와 심리를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상의 특징을 통해 사회문제나 그 시대의 세태를 인식하고 비판적 사고로 지닌 인물이지만,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하는 일제 강점기 지식인인 구보 씨의 나약한 모습을 효과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amp;lt;p&amp;gt;&lt;br /&gt;
또한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를 활용하기도 한다. 표면적으로는 작품의 서술자와 주인공이 분리되어 있는 3인칭 시점을 취하고 있으나 서술자가 인물의 시점에 동화되어 그 인물의 시점에서 서술을 전개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기법을 통해 서술자와 등장인물 사이의 거리를 사실상 소멸시킴으로써 독자 입장에선 주인공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분석할 수 있게 된다. &amp;lt;p&amp;gt;&lt;br /&gt;
&lt;br /&gt;
이 작품의 주인공인 구보 씨는 작가인 박태원&lt;br /&gt;
&lt;br /&gt;
== 참고 문헌 ==&lt;br /&gt;
&lt;br /&gt;
근대성과 근대문학, 나병철 지음, 문예출판사, 1996&lt;br /&gt;
박태원, 위키피디아 https://ko.wikipedia.org/wiki/%EB%B0%95%ED%83%9C%EC%9B%90_(1909%EB%85%84&lt;br /&gt;
이은선, ｢박태원 소설과 ‘재현’의 문제｣ (『현대소설연구』 44, 한국현대소설학회, 2010)&lt;br /&gt;
&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고군분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86%8C%EC%84%A4%EA%B0%80_%EA%B5%AC%EB%B3%B4_%EC%94%A8%EC%9D%98_%EC%9D%BC%EC%9D%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140</id>
		<title>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ᐧ༚̮ᐧ</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86%8C%EC%84%A4%EA%B0%80_%EA%B5%AC%EB%B3%B4_%EC%94%A8%EC%9D%98_%EC%9D%BC%EC%9D%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140"/>
		<updated>2025-06-23T08:03:3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고군분투: &lt;/p&gt;
&lt;hr /&gt;
&lt;div&gt;[[파일:ㄱㅂ.jpg|200px|left]]&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ced1fc;“&lt;br /&gt;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lt;br /&gt;
|'''장르''' || 모더니즘 소설&lt;br /&gt;
|-&lt;br /&gt;
| '''작가''' || 박태원&lt;br /&gt;
|-&lt;br /&gt;
| '''시대''' || 1934년 - [[근대]]   &lt;br /&gt;
|-&lt;br /&gt;
| '''배경'''|| 일제강점기, 지식인의 무력함 &lt;br /&gt;
|}&lt;br /&gt;
&lt;br /&gt;
== 장르 ==&lt;br /&gt;
'''모더니즘'''은 19세기 말과 20세기에 유럽에서 전방위적으로 나타난 예술운동이자 현상으로 모더니즘 문학은 전통과의 단절 및 개인주의 등을 대표적인 특징으로 한다. 제 1차 세계 대전 및 급격한 기술 발전으로 야기된 사회적 변화가 문학 주제에서의 ‘ 19세기 기성 전통과의 단절 ‘ 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때, 19세기의 문학 전통은 ''' 리얼리즘'''을 표방한다. 인간의 삶과 그를 둘러싼 환경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모방 및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리얼리즘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모더니즘은 전적인 주관성과 개인적 경험을 작품의 근원으로 여긴다. 이는 곧 문학의 탈도구성과 독자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19세기 리얼리즘 하에서 문학은 독자들을 계몽시키거나 그들에게 오락을 제공하려는 뚜렷한 목적성을 지니고 있던 반면 모더니즘 문학은 그 어떠한 목적성에서도 벗어나 ''' 문학만을 위한 문학''', 즉 자기목적성만을 보여준다.&lt;br /&gt;
&amp;lt;p&amp;gt;&lt;br /&gt;
'''모더니즘 소설''' 역시 전통적인 소설 구조와 서술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식과 주제를 탐구하는 양상을 보인다. 모더니즘 소설은 '''의식의 흐름''' 기법을 통해 등장인물들의 내면 세계, 심리, 의식을 가감없이 드러내고, 전통적 문법과 구문을 깨뜨리며 새로운 서술 방식을 시도하는 '''언어 실험''', 시작 - 중간 - 결말이라는 구조에서 벗어나 파편화되고 비정형적인 서사 전개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인간 정신의 복잡성과 비합리성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 작가 ==&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fcddce;“&lt;br /&gt;
|+ 박태원 朴泰遠&lt;br /&gt;
|-&lt;br /&gt;
|colspan=&amp;quot;2&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 |  [[File:ㅂㅌㅇ.jpg|100px]]&lt;br /&gt;
|-&lt;br /&gt;
|'''출생''' || 1909년 12월 7일&lt;br /&gt;
|-&lt;br /&gt;
| '''사망''' || 1986년 7월 10일&lt;br /&gt;
|-&lt;br /&gt;
| '''호''' || 구보(丘甫, 仇甫, 九甫)&amp;lt;ref&amp;gt;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라는 작품 이름도 여기에서 비롯한 것이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저서'''|| &amp;lt;천변풍경&amp;gt;, &amp;lt;골목 안&amp;gt;&amp;lt;ref&amp;gt;2024년 대학수학능력시험에 출제되기도 하였다.&amp;lt;/ref&amp;gt;&lt;br /&gt;
|- &lt;br /&gt;
| '''직업''' || 소설가, 시인, 문학평론가&lt;br /&gt;
|}&lt;br /&gt;
&lt;br /&gt;
'''박태원'''은 조선의 소설가, 시인, 문학평론가로 이상, 정지용 등과 더불어 1930년대 모더니즘 문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해방 이후 6.25 전쟁 중 아내와, 자식을 놔두고 홀로 월북하여 그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아주 자세히 알려져 있지는 않다.&lt;br /&gt;
1909년 12월 7일 대한제국 시기 서울 종로에서 태어난 그는 숙부(박용남)가 서양의학 소아내과 의사, 숙모가 보통학교 교사 등으로 일하는 제법 부유하고 개화적인 이른바 서구적 집안 분위기에서 자랐다. 이후  경성제1고등보통학교&amp;lt;ref&amp;gt;현재의 경기고등학교이다&amp;lt;/ref&amp;gt; 재학 중이던 1926년 《조선문단》에 시 〈누님〉을 발표하며 18세의 나이로 등단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amp;lt;ref&amp;gt;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창작한 &amp;lt;반 년간&amp;gt;이라는 작품이 있다.&amp;lt;/ref&amp;gt; 일본 호세이 대학에 진학하지만 1929년 11월, 1학년 시절에 중퇴한 후 귀국하여 1930년 신생 10월호에 단편 소설 〈수염〉을 발표하고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시작하였다. 본격적으로 문단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33년 이상,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조용만, 이효석 등과 함께 문학 동인들의 모임인 구인회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이들 구인회는 순수문학적인 성격을 바탕으로 실험적인 기법과 문장을 문학의 본령으로 내세웠다. 박태원의 소설은 당시로써는 모험적이고 실험적인 시도였기 때문에 당대 문단의 주류를 이루던 사회주의 성향의 '''카프'''와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1930년대 왕성하게 활동하여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1934)''', '''방란장 주인(1936)''', '''천변풍경(1936)''' 등과 같은 대표작들을 발표하였다. 1940년대 일본의 탄압이 심해졌고 이 시기에 박태원은 아세아의 여명(1941.2), 군국의 어머니(1942), 「원구(1945.5-8)」 등 일제의 대동아전쟁을 찬양하고 군국주의를 미화하는 친일 성향 작품들을 발표하여 친일파로 전향하였다는 비판이 있기도 하다. &amp;lt;p&amp;gt; &lt;br /&gt;
광복 후인 1946년 좌익 계열의 문학인 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 등을 맡는 등 잠시 남로당 계열의 문예 운동에 몸을 담았다가, 1947년 탈맹(문동 탈퇴)을 한 이듬해 1948년 국민보도연맹에 사무위원으로 가입하며 본격적인 사회주의, 좌익 성향의 활동을 보인다. 결국에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6.25 전쟁 중 구인회 시절 절친한 동료였던 이태준을 포함해 정인택 설정식 이용악 등과 함께 월북을 감행하여 평양에 정착한다. 전술한 바와 같이 그가 사회주의 성향 단체인 카프와 한때 갈등을 빚기도 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꽤나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amp;lt;p&amp;gt;'''월북 후'''의 생애는 북한 소설가 정태은의 글을 통해 조금이나마 확인된다. 1955년까지 평양문학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던 그는 월북 전의 행보를 이유로 평안남도 강서 지방에서 4년 간 강제 노동을 하였다고 한다. 이후 1960년 다시 대학교수로 복귀하기는 하였지만 강제노동의 휴유증으로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는 지경에 이른다. 청각과 언어능력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창작 활동을 포기하지 않아 동학농민전쟁을 소재로 한 대하 역사소설 &amp;lt; 갑오농민전쟁 &amp;gt;, &amp;lt;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amp;gt; 등을 창작하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 내용과 의의 ==&lt;br /&gt;
&lt;br /&gt;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대학 노트를 들고 다니는 주인공 '''구보 씨'''가 하루 동안 경성을 돌아다니면서 보는 것과 그에 유발되는 상념 및 의식적으로 행하는 사색을 통해 일제 강점기 조선 경성부에 거주하는 '''지식인의 무기력함과 그 일상'''을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다. 주인공의 동선과 그가 만나는 인물들 대부분이 체계적이거나 작가의 치밀한 구성으로 이루어져있다기보다는 철저히 우연을 따르는 점이 특징적이다.&lt;br /&gt;
시력이 약하고 장가도 안 간 무기력한 소설가 구보씨는 무기력한 삶을 살아가는 인물로, 아침에 제 방에서 나와 마루 끝에 놓인 구두를 신고, 기둥 못에 걸린 단장을 들고 문을 나와 걷기도 한다. 그러다가 우두커니 다리 곁에 가 서 있는 자신의 무의미한 행동을 새삼스럽게 깨달은 그는 종로 네거리를 바라보고 걷다가, 다방으로 돌아다닌다. 문득 구보씨는 모든 사람을 정신병자라고 생각해놓고 관찰해 보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낀다. 주인공 구보씨는 그런 것에 흥미를 느끼려는 자기가 이미 환자임을 깨닫고, 비가 내리는 거리를 걸어 집으로 향한다.. 집에서 출발하 여 광교, 종로, 화신상회, 조선은행 앞, 경성역, 경찰서 앞 다방, 종각 뒤의 술집, 카페, 종로 거리를 거쳐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동안에 느낀 복잡한 감정들을 교차시키면서 행복의 가능성을 모색해 보려 한다. 구보는 경성의 온갖 거리를 돌아다니며 그는 작년 여름에 맞선을 본 여인을 만나기도 하고 경성역에서는 노파, 시골 신사, 병자들을 관찰하면서 구보는 '''당대의 세태, 사회문제 등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보여주면서도 어떠한 행동도 보여주지 못하는 일제 강점기 '''지식인의 나약한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lt;br /&gt;
&lt;br /&gt;
기존의 소설이 인물 간의 극적 갈등, 사건의 개연적인 전개를 중시했다면 이 소설은 거리의 풍경과 주변 인물의  묘사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 과정에서 '''자유연상 기법'''을 활용해서 발단 - 전개-위기-절정-결말의 형태와는 달리 내면에 떠오르는 연상과정을 작품 속에 드러내고&amp;lt;ref&amp;gt;모더니즘 소설의 일반적인 특징이기도 하다&amp;lt;/ref&amp;gt;과거와 현재,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구보 씨의 내면 흐름에 초점을 맞추어 그의 사고와 심리를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상의 특징을 통해 사회문제나 그 시대의 세태를 인식하고 비판적 사고로 지닌 인물이지만,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하는 일제 강점기 지식인인 구보 씨의 나약한 모습을 효과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amp;lt;p&amp;gt;&lt;br /&gt;
또한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를 활용하기도 한다. 표면적으로는 작품의 서술자와 주인공이 분리되어 있는 3인칭 시점을 취하고 있으나 서술자가 인물의 시점에 동화되어 그 인물의 시점에서 서술을 전개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기법을 통해 서술자와 등장인물 사이의 거리를 사실상 소멸시킴으로써 독자 입장에선 주인공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분석할 수 있게 된다. &lt;br /&gt;
&lt;br /&gt;
== 참고 문헌 ==&lt;br /&gt;
&lt;br /&gt;
근대성과 근대문학, 나병철 지음, 문예출판사, 1996&lt;br /&gt;
박태원, 위키피디아 https://ko.wikipedia.org/wiki/%EB%B0%95%ED%83%9C%EC%9B%90_(1909%EB%85%84&lt;br /&gt;
이은선, ｢박태원 소설과 ‘재현’의 문제｣ (『현대소설연구』 44, 한국현대소설학회, 2010)&lt;br /&gt;
&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고군분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86%8C%EC%84%A4%EA%B0%80_%EA%B5%AC%EB%B3%B4_%EC%94%A8%EC%9D%98_%EC%9D%BC%EC%9D%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077</id>
		<title>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ᐧ༚̮ᐧ</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86%8C%EC%84%A4%EA%B0%80_%EA%B5%AC%EB%B3%B4_%EC%94%A8%EC%9D%98_%EC%9D%BC%EC%9D%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077"/>
		<updated>2025-06-23T05:00:0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고군분투: /* 내용과 의의 */&lt;/p&gt;
&lt;hr /&gt;
&lt;div&gt;[[파일:ㄱㅂ.jpg|200px|left]]&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ced1fc;“&lt;br /&gt;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lt;br /&gt;
|'''장르''' || 모더니즘 소설&lt;br /&gt;
|-&lt;br /&gt;
| '''작가''' || 박태원&lt;br /&gt;
|-&lt;br /&gt;
| '''시대''' || 1934년 - [[근대]]   &lt;br /&gt;
|-&lt;br /&gt;
| '''배경'''|| 일제강점기, 지식인의 무력함 &lt;br /&gt;
|}&lt;br /&gt;
&lt;br /&gt;
== 장르 ==&lt;br /&gt;
'''모더니즘'''은 19세기 말과 20세기에 유럽에서 전방위적으로 나타난 예술운동이자 현상으로 모더니즘 문학은 전통과의 단절 및 개인주의 등을 대표적인 특징으로 한다. 제 1차 세계 대전 및 급격한 기술 발전으로 야기된 사회적 변화가 문학 주제에서의 ‘ 19세기 기성 전통과의 단절 ‘ 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때, 19세기의 문학 전통은 ''' 리얼리즘'''을 표방한다. 인간의 삶과 그를 둘러싼 환경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모방 및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리얼리즘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모더니즘은 전적인 주관성과 개인적 경험을 작품의 근원으로 여긴다. 이는 곧 문학의 탈도구성과 독자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19세기 리얼리즘 하에서 문학은 독자들을 계몽시키거나 그들에게 오락을 제공하려는 뚜렷한 목적성을 지니고 있던 반면 모더니즘 문학은 그 어떠한 목적성에서도 벗어나 ''' 문학만을 위한 문학''', 즉 자기목적성만을 보여준다.&lt;br /&gt;
&amp;lt;p&amp;gt;&lt;br /&gt;
'''모더니즘 소설''' 역시 전통적인 소설 구조와 서술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식과 주제를 탐구하는 양상을 보인다. 모더니즘 소설은 '''의식의 흐름''' 기법을 통해 등장인물들의 내면 세계, 심리, 의식을 가감없이 드러내고, 전통적 문법과 구문을 깨뜨리며 새로운 서술 방식을 시도하는 '''언어 실험''', 시작 - 중간 - 결말이라는 구조에서 벗어나 파편화되고 비정형적인 서사 전개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인간 정신의 복잡성과 비합리성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 작가 ==&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fcddce;“&lt;br /&gt;
|+ 박태원 朴泰遠&lt;br /&gt;
|-&lt;br /&gt;
|colspan=&amp;quot;2&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 |  [[File:ㅂㅌㅇ.jpg|100px]]&lt;br /&gt;
|-&lt;br /&gt;
|'''출생''' || 1909년 12월 7일&lt;br /&gt;
|-&lt;br /&gt;
| '''사망''' || 1986년 7월 10일&lt;br /&gt;
|-&lt;br /&gt;
| '''호''' || 구보(丘甫, 仇甫, 九甫)&amp;lt;ref&amp;gt;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라는 작품 이름도 여기에서 비롯한 것이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저서'''|| &amp;lt;천변풍경&amp;gt;, &amp;lt;골목 안&amp;gt;&amp;lt;ref&amp;gt;2024년 대학수학능력시험에 출제되기도 하였다.&amp;lt;/ref&amp;gt;&lt;br /&gt;
|- &lt;br /&gt;
| '''직업''' || 소설가, 시인, 문학평론가&lt;br /&gt;
|}&lt;br /&gt;
&lt;br /&gt;
'''박태원'''은 조선의 소설가, 시인, 문학평론가로 이상, 정지용 등과 더불어 1930년대 모더니즘 문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해방 이후 6.25 전쟁 중 아내와, 자식을 놔두고 홀로 월북하여 그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아주 자세히 알려져 있지는 않다.&lt;br /&gt;
1909년 12월 7일 대한제국 시기 서울 종로에서 태어난 그는 숙부(박용남)가 서양의학 소아내과 의사, 숙모가 보통학교 교사 등으로 일하는 제법 부유하고 개화적인 이른바 서구적 집안 분위기에서 자랐다. 이후  경성제1고등보통학교&amp;lt;ref&amp;gt;현재의 경기고등학교이다&amp;lt;/ref&amp;gt; 재학 중이던 1926년 《조선문단》에 시 〈누님〉을 발표하며 18세의 나이로 등단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amp;lt;ref&amp;gt;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창작한 &amp;lt;반 년간&amp;gt;이라는 작품이 있다.&amp;lt;/ref&amp;gt; 일본 호세이 대학에 진학하지만 1929년 11월, 1학년 시절에 중퇴한 후 귀국하여 1930년 신생 10월호에 단편 소설 〈수염〉을 발표하고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시작하였다. 본격적으로 문단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33년 이상,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조용만, 이효석 등과 함께 문학 동인들의 모임인 구인회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이들 구인회는 순수문학적인 성격을 바탕으로 실험적인 기법과 문장을 문학의 본령으로 내세웠다. 박태원의 소설은 당시로써는 모험적이고 실험적인 시도였기 때문에 당대 문단의 주류를 이루던 사회주의 성향의 '''카프'''와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1930년대 왕성하게 활동하여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1934)''', '''방란장 주인(1936)''', '''천변풍경(1936)''' 등과 같은 대표작들을 발표하였다. 1940년대 일본의 탄압이 심해졌고 이 시기에 박태원은 아세아의 여명(1941.2), 군국의 어머니(1942), 「원구(1945.5-8)」 등 일제의 대동아전쟁을 찬양하고 군국주의를 미화하는 친일 성향 작품들을 발표하여 친일파로 전향하였다는 비판이 있기도 하다. &amp;lt;p&amp;gt; &lt;br /&gt;
광복 후인 1946년 좌익 계열의 문학인 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 등을 맡는 등 잠시 남로당 계열의 문예 운동에 몸을 담았다가, 1947년 탈맹(문동 탈퇴)을 한 이듬해 1948년 국민보도연맹에 사무위원으로 가입하며 본격적인 사회주의, 좌익 성향의 활동을 보인다. 결국에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6.25 전쟁 중 구인회 시절 절친한 동료였던 이태준을 포함해 정인택 설정식 이용악 등과 함께 월북을 감행하여 평양에 정착한다. 전술한 바와 같이 그가 사회주의 성향 단체인 카프와 한때 갈등을 빚기도 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꽤나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amp;lt;p&amp;gt;'''월북 후'''의 생애는 북한 소설가 정태은의 글을 통해 조금이나마 확인된다. 1955년까지 평양문학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던 그는 월북 전의 행보를 이유로 평안남도 강서 지방에서 4년 간 강제 노동을 하였다고 한다. 이후 1960년 다시 대학교수로 복귀하기는 하였지만 강제노동의 휴유증으로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는 지경에 이른다. 청각과 언어능력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창작 활동을 포기하지 않아 동학농민전쟁을 소재로 한 대하 역사소설 &amp;lt; 갑오농민전쟁 &amp;gt;, &amp;lt;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amp;gt; 등을 창작하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 내용과 의의 ==&lt;br /&gt;
&lt;br /&gt;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대학 노트를 들고 다니는 주인공이 하루 동안 경성을 돌아다니면서 보는 것과 그에 유발되는 상념 및 의식적으로 행하는 사색을 통해 일제 강점기 조선 경성부에 거주하는 지식인의 무기력함과 그 일상을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다. 주인공의 동선과 그가 만나는 인물들 대부분이 체계적이거나 작가의 치밀한 구성으로 이루어져있다기보다는 철저히 우연을 따르는 점이 특징적이다.&lt;br /&gt;
시력이 약하고 장가도 안 간 무기력한 소설가 구보씨는 무기력한 삶을 살아가는 인물로, 아침에 제 방에서 나와 마루 끝에 놓인 구두를 신고, 기둥 못에 걸린 단장을 들고 문을 나와 걷기도 한다. 그러다가 우두커니 다리 곁에 가 서 있는 자신의 무의미한 행동을 새삼스럽게 깨달은 그는 종로 네거리를 바라보고 걷다가, 다방으로 돌아다닌다. 문득 구보씨는 모든 사람을 정신병자라고 생각해놓고 관찰해 보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낀다. 주인공 구보씨는 그런 것에 흥미를 느끼려는 자기가 이미 환자임을 깨닫고, 비가 내리는 거리를 걸어 집으로 향한다.. 집에서 출발하 여 광교, 종로, 화신상회, 조선은행 앞, 경성역, 경찰서 앞 다방, 종각 뒤의 술집, 카페, 종로 거리를 거쳐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동안에 느낀 복잡한 감정들을 교차시키면서 행복의 가능성을 모색해 보려 한다. 구보는 경성의 온갖 거리를 돌아다니며 그는 작년 여름에 맞선을 본 여인을 만나기도 하고 경성역에서는 노파, 시고 신사, 병자들을 관찰하면서 구보는 당대의 세태, 사회문제 등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보여주면서도 어떠한 행동도 보여주지 못하는 일제 강점기 지식인의 나약한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lt;br /&gt;
&lt;br /&gt;
 기존의 소설이 인물 간의 극적 갈등, 사건의 개연적인 전개를 중시했다면 이 소설은 거리의 풍경과 주변 인물의  묘사에 중점을 두고 있다. 과거와 현재,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구보 씨의 내면 흐름에 초점을 맞추어 그의 사고와 심리를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구보 씨는 사회문제나 그 시대의 세태를 인식하고 비판적 사고로 지닌 인물이지만,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하는 일제 강점기 지식인들의 나약한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 다&lt;br /&gt;
&lt;br /&gt;
== 참고 문헌 ==&lt;br /&gt;
&lt;br /&gt;
근대성과 근대문학, 나병철 지음, 문예출판사, 1996&lt;br /&gt;
박태원, 위키피디아 https://ko.wikipedia.org/wiki/%EB%B0%95%ED%83%9C%EC%9B%90_(1909%EB%85%84&lt;br /&gt;
이은선, ｢박태원 소설과 ‘재현’의 문제｣ (『현대소설연구』 44, 한국현대소설학회, 2010)&lt;br /&gt;
&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고군분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86%8C%EC%84%A4%EA%B0%80_%EA%B5%AC%EB%B3%B4_%EC%94%A8%EC%9D%98_%EC%9D%BC%EC%9D%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076</id>
		<title>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ᐧ༚̮ᐧ</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86%8C%EC%84%A4%EA%B0%80_%EA%B5%AC%EB%B3%B4_%EC%94%A8%EC%9D%98_%EC%9D%BC%EC%9D%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076"/>
		<updated>2025-06-23T04:59:5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고군분투: &lt;/p&gt;
&lt;hr /&gt;
&lt;div&gt;[[파일:ㄱㅂ.jpg|200px|left]]&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ced1fc;“&lt;br /&gt;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lt;br /&gt;
|'''장르''' || 모더니즘 소설&lt;br /&gt;
|-&lt;br /&gt;
| '''작가''' || 박태원&lt;br /&gt;
|-&lt;br /&gt;
| '''시대''' || 1934년 - [[근대]]   &lt;br /&gt;
|-&lt;br /&gt;
| '''배경'''|| 일제강점기, 지식인의 무력함 &lt;br /&gt;
|}&lt;br /&gt;
&lt;br /&gt;
== 장르 ==&lt;br /&gt;
'''모더니즘'''은 19세기 말과 20세기에 유럽에서 전방위적으로 나타난 예술운동이자 현상으로 모더니즘 문학은 전통과의 단절 및 개인주의 등을 대표적인 특징으로 한다. 제 1차 세계 대전 및 급격한 기술 발전으로 야기된 사회적 변화가 문학 주제에서의 ‘ 19세기 기성 전통과의 단절 ‘ 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때, 19세기의 문학 전통은 ''' 리얼리즘'''을 표방한다. 인간의 삶과 그를 둘러싼 환경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모방 및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리얼리즘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모더니즘은 전적인 주관성과 개인적 경험을 작품의 근원으로 여긴다. 이는 곧 문학의 탈도구성과 독자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19세기 리얼리즘 하에서 문학은 독자들을 계몽시키거나 그들에게 오락을 제공하려는 뚜렷한 목적성을 지니고 있던 반면 모더니즘 문학은 그 어떠한 목적성에서도 벗어나 ''' 문학만을 위한 문학''', 즉 자기목적성만을 보여준다.&lt;br /&gt;
&amp;lt;p&amp;gt;&lt;br /&gt;
'''모더니즘 소설''' 역시 전통적인 소설 구조와 서술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식과 주제를 탐구하는 양상을 보인다. 모더니즘 소설은 '''의식의 흐름''' 기법을 통해 등장인물들의 내면 세계, 심리, 의식을 가감없이 드러내고, 전통적 문법과 구문을 깨뜨리며 새로운 서술 방식을 시도하는 '''언어 실험''', 시작 - 중간 - 결말이라는 구조에서 벗어나 파편화되고 비정형적인 서사 전개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인간 정신의 복잡성과 비합리성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 작가 ==&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fcddce;“&lt;br /&gt;
|+ 박태원 朴泰遠&lt;br /&gt;
|-&lt;br /&gt;
|colspan=&amp;quot;2&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 |  [[File:ㅂㅌㅇ.jpg|100px]]&lt;br /&gt;
|-&lt;br /&gt;
|'''출생''' || 1909년 12월 7일&lt;br /&gt;
|-&lt;br /&gt;
| '''사망''' || 1986년 7월 10일&lt;br /&gt;
|-&lt;br /&gt;
| '''호''' || 구보(丘甫, 仇甫, 九甫)&amp;lt;ref&amp;gt;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라는 작품 이름도 여기에서 비롯한 것이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저서'''|| &amp;lt;천변풍경&amp;gt;, &amp;lt;골목 안&amp;gt;&amp;lt;ref&amp;gt;2024년 대학수학능력시험에 출제되기도 하였다.&amp;lt;/ref&amp;gt;&lt;br /&gt;
|- &lt;br /&gt;
| '''직업''' || 소설가, 시인, 문학평론가&lt;br /&gt;
|}&lt;br /&gt;
&lt;br /&gt;
'''박태원'''은 조선의 소설가, 시인, 문학평론가로 이상, 정지용 등과 더불어 1930년대 모더니즘 문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해방 이후 6.25 전쟁 중 아내와, 자식을 놔두고 홀로 월북하여 그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아주 자세히 알려져 있지는 않다.&lt;br /&gt;
1909년 12월 7일 대한제국 시기 서울 종로에서 태어난 그는 숙부(박용남)가 서양의학 소아내과 의사, 숙모가 보통학교 교사 등으로 일하는 제법 부유하고 개화적인 이른바 서구적 집안 분위기에서 자랐다. 이후  경성제1고등보통학교&amp;lt;ref&amp;gt;현재의 경기고등학교이다&amp;lt;/ref&amp;gt; 재학 중이던 1926년 《조선문단》에 시 〈누님〉을 발표하며 18세의 나이로 등단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amp;lt;ref&amp;gt;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창작한 &amp;lt;반 년간&amp;gt;이라는 작품이 있다.&amp;lt;/ref&amp;gt; 일본 호세이 대학에 진학하지만 1929년 11월, 1학년 시절에 중퇴한 후 귀국하여 1930년 신생 10월호에 단편 소설 〈수염〉을 발표하고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시작하였다. 본격적으로 문단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33년 이상,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조용만, 이효석 등과 함께 문학 동인들의 모임인 구인회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이들 구인회는 순수문학적인 성격을 바탕으로 실험적인 기법과 문장을 문학의 본령으로 내세웠다. 박태원의 소설은 당시로써는 모험적이고 실험적인 시도였기 때문에 당대 문단의 주류를 이루던 사회주의 성향의 '''카프'''와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1930년대 왕성하게 활동하여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1934)''', '''방란장 주인(1936)''', '''천변풍경(1936)''' 등과 같은 대표작들을 발표하였다. 1940년대 일본의 탄압이 심해졌고 이 시기에 박태원은 아세아의 여명(1941.2), 군국의 어머니(1942), 「원구(1945.5-8)」 등 일제의 대동아전쟁을 찬양하고 군국주의를 미화하는 친일 성향 작품들을 발표하여 친일파로 전향하였다는 비판이 있기도 하다. &amp;lt;p&amp;gt; &lt;br /&gt;
광복 후인 1946년 좌익 계열의 문학인 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 등을 맡는 등 잠시 남로당 계열의 문예 운동에 몸을 담았다가, 1947년 탈맹(문동 탈퇴)을 한 이듬해 1948년 국민보도연맹에 사무위원으로 가입하며 본격적인 사회주의, 좌익 성향의 활동을 보인다. 결국에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6.25 전쟁 중 구인회 시절 절친한 동료였던 이태준을 포함해 정인택 설정식 이용악 등과 함께 월북을 감행하여 평양에 정착한다. 전술한 바와 같이 그가 사회주의 성향 단체인 카프와 한때 갈등을 빚기도 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꽤나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amp;lt;p&amp;gt;'''월북 후'''의 생애는 북한 소설가 정태은의 글을 통해 조금이나마 확인된다. 1955년까지 평양문학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던 그는 월북 전의 행보를 이유로 평안남도 강서 지방에서 4년 간 강제 노동을 하였다고 한다. 이후 1960년 다시 대학교수로 복귀하기는 하였지만 강제노동의 휴유증으로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는 지경에 이른다. 청각과 언어능력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창작 활동을 포기하지 않아 동학농민전쟁을 소재로 한 대하 역사소설 &amp;lt; 갑오농민전쟁 &amp;gt;, &amp;lt;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amp;gt; 등을 창작하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 내용과 의의 ==&lt;br /&gt;
&lt;br /&gt;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대학 노트를 들고 다니는 주인공이 하루 동안 경성을 돌아다니면서 보는 것과 그에 유발되는 상념 및 의식적으로 행하는 사색을 통해 일제 강점기 조선 경성부에 거주하는 지식인의 무기력함과 그 일상을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다. 주인공의 동선과 그가 만나는 인물들 대부분이 체계적이거나 작가의 치밀한 구성으로 이루어져있다기보다는 철저히 우연을 따르는 점이 특징적이다.&lt;br /&gt;
시력이 약하고 장가도 안 간 무기력한 소설가 구보씨는 무기력한 삶을 살아가는 인물로, 아침에 제 방에서 나와 마루 끝에 놓인 구두를 신고, 기둥 못에 걸린 단장을 들고 문을 나와 걷기도 한다. 그러다가 우두커니 다리 곁에 가 서 있는 자신의 무의미한 행동을 새삼스럽게 깨달은 그는 종로 네거리를 바라보고 걷다가, 다방으로 돌아다닌다. 문득 구보씨는 모든 사람을 정신병자라고 생각해놓고 관찰해 보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낀다. 주인공 구보씨는 그런 것에 흥미를 느끼려는 자기가 이미 환자임을 깨닫고, 비가 내리는 거리를 걸어 집으로 향한다.. 집에서 출발하 여 광교, 종로, 화신상회, 조선은행 앞, 경성역, 경찰서 앞 다방, 종각 뒤의 술집, 카페, 종로 거리를 거쳐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동안에 느낀 복잡한 감정들을 교차시키면서 행복의 가능성을 모색해 보려 한다. 구보는 경성의 온갖 거리를 돌아다니며 그는 작년 여름에 맞선을 본 여인을 만나기도 하고 경성역에서는 노파, 시고 신사, 병자들을 관찰하면서 구보는 당대의 세태, 사회문제 등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보여주면서도 어떠한 행동도 보여주지 못하는 일제 강점기 지식인의 나약한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lt;br /&gt;
 기존의 소설이 인물 간의 극적 갈등, 사건의 개연적인 전개를 중시했다면 이 소설은 거리의 풍경과 주변 인물의  묘사에 중점을 두고 있다. 과거와 현재,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구보 씨의 내면 흐름에 초점을 맞추어 그의 사고와 심리를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구보 씨는 사회문제나 그 시대의 세태를 인식하고 비판적 사고로 지닌 인물이지만,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하는 일제 강점기 지식인들의 나약한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 다&lt;br /&gt;
&lt;br /&gt;
== 참고 문헌 ==&lt;br /&gt;
&lt;br /&gt;
근대성과 근대문학, 나병철 지음, 문예출판사, 1996&lt;br /&gt;
박태원, 위키피디아 https://ko.wikipedia.org/wiki/%EB%B0%95%ED%83%9C%EC%9B%90_(1909%EB%85%84&lt;br /&gt;
이은선, ｢박태원 소설과 ‘재현’의 문제｣ (『현대소설연구』 44, 한국현대소설학회, 2010)&lt;br /&gt;
&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고군분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86%8C%EC%84%A4%EA%B0%80_%EA%B5%AC%EB%B3%B4_%EC%94%A8%EC%9D%98_%EC%9D%BC%EC%9D%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062</id>
		<title>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ᐧ༚̮ᐧ</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86%8C%EC%84%A4%EA%B0%80_%EA%B5%AC%EB%B3%B4_%EC%94%A8%EC%9D%98_%EC%9D%BC%EC%9D%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062"/>
		<updated>2025-06-23T04:39:3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고군분투: &lt;/p&gt;
&lt;hr /&gt;
&lt;div&gt;[[파일:ㄱㅂ.jpg|200px|left]]&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ced1fc;“&lt;br /&gt;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lt;br /&gt;
|'''장르''' || 모더니즘 소설&lt;br /&gt;
|-&lt;br /&gt;
| '''작가''' || 박태원&lt;br /&gt;
|-&lt;br /&gt;
| '''시대''' || 1934년 - [[근대]]   &lt;br /&gt;
|-&lt;br /&gt;
| '''배경'''|| 일제강점기, 지식인의 무력함 &lt;br /&gt;
|}&lt;br /&gt;
&lt;br /&gt;
== 장르 ==&lt;br /&gt;
'''모더니즘'''은 19세기 말과 20세기에 유럽에서 전방위적으로 나타난 예술운동이자 현상으로 모더니즘 문학은 전통과의 단절 및 개인주의 등을 대표적인 특징으로 한다. 제 1차 세계 대전 및 급격한 기술 발전으로 야기된 사회적 변화가 문학 주제에서의 ‘ 19세기 기성 전통과의 단절 ‘ 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때, 19세기의 문학 전통은 ''' 리얼리즘'''을 표방한다. 인간의 삶과 그를 둘러싼 환경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모방 및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리얼리즘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모더니즘은 전적인 주관성과 개인적 경험을 작품의 근원으로 여긴다. 이는 곧 문학의 탈도구성과 독자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19세기 리얼리즘 하에서 문학은 독자들을 계몽시키거나 그들에게 오락을 제공하려는 뚜렷한 목적성을 지니고 있던 반면 모더니즘 문학은 그 어떠한 목적성에서도 벗어나 ''' 문학만을 위한 문학''', 즉 자기목적성만을 보여준다.&lt;br /&gt;
&amp;lt;p&amp;gt;&lt;br /&gt;
'''모더니즘 소설''' 역시 전통적인 소설 구조와 서술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식과 주제를 탐구하는 양상을 보인다. 모더니즘 소설은 '''의식의 흐름''' 기법을 통해 등장인물들의 내면 세계, 심리, 의식을 가감없이 드러내고, 전통적 문법과 구문을 깨뜨리며 새로운 서술 방식을 시도하는 '''언어 실험''', 시작 - 중간 - 결말이라는 구조에서 벗어나 파편화되고 비정형적인 서사 전개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인간 정신의 복잡성과 비합리성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 작가 ==&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fcddce;“&lt;br /&gt;
|+ 박태원 朴泰遠&lt;br /&gt;
|-&lt;br /&gt;
|colspan=&amp;quot;2&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 |  [[File:ㅂㅌㅇ.jpg|100px]]&lt;br /&gt;
|-&lt;br /&gt;
|'''출생''' || 1909년 12월 7일&lt;br /&gt;
|-&lt;br /&gt;
| '''사망''' || 1986년 7월 10일&lt;br /&gt;
|-&lt;br /&gt;
| '''호''' || 구보(丘甫, 仇甫, 九甫)&amp;lt;ref&amp;gt;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라는 작품 이름도 여기에서 비롯한 것이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저서'''|| &amp;lt;천변풍경&amp;gt;, &amp;lt;골목 안&amp;gt;&amp;lt;ref&amp;gt;2024년 대학수학능력시험에 출제되기도 하였다.&amp;lt;/ref&amp;gt;&lt;br /&gt;
|- &lt;br /&gt;
| '''직업''' || 소설가, 시인, 문학평론가&lt;br /&gt;
|}&lt;br /&gt;
&lt;br /&gt;
'''박태원'''은 조선의 소설가, 시인, 문학평론가로 이상, 정지용 등과 더불어 1930년대 모더니즘 문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해방 이후 6.25 전쟁 중 아내와, 자식을 놔두고 홀로 월북하여 그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아주 자세히 알려져 있지는 않다.&lt;br /&gt;
1909년 12월 7일 대한제국 시기 서울 종로에서 태어난 그는 숙부(박용남)가 서양의학 소아내과 의사, 숙모가 보통학교 교사 등으로 일하는 제법 부유하고 개화적인 이른바 서구적 집안 분위기에서 자랐다. 이후  경성제1고등보통학교&amp;lt;ref&amp;gt;현재의 경기고등학교이다&amp;lt;/ref&amp;gt; 재학 중이던 1926년 《조선문단》에 시 〈누님〉을 발표하며 18세의 나이로 등단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amp;lt;ref&amp;gt;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창작한 &amp;lt;반 년간&amp;gt;이라는 작품이 있다.&amp;lt;/ref&amp;gt; 일본 호세이 대학에 진학하지만 1929년 11월, 1학년 시절에 중퇴한 후 귀국하여 1930년 신생 10월호에 단편 소설 〈수염〉을 발표하고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시작하였다. 본격적으로 문단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33년 이상,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조용만, 이효석 등과 함께 문학 동인들의 모임인 구인회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이들 구인회는 순수문학적인 성격을 바탕으로 실험적인 기법과 문장을 문학의 본령으로 내세웠다. 박태원의 소설은 당시로써는 모험적이고 실험적인 시도였기 때문에 당대 문단의 주류를 이루던 사회주의 성향의 '''카프'''와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1930년대 왕성하게 활동하여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1934)''', '''방란장 주인(1936)''', '''천변풍경(1936)''' 등과 같은 대표작들을 발표하였다. 1940년대 일본의 탄압이 심해졌고 이 시기에 박태원은 아세아의 여명(1941.2), 군국의 어머니(1942), 「원구(1945.5-8)」 등 일제의 대동아전쟁을 찬양하고 군국주의를 미화하는 친일 성향 작품들을 발표하여 친일파로 전향하였다는 비판이 있기도 하다. &amp;lt;p&amp;gt; &lt;br /&gt;
광복 후인 1946년 좌익 계열의 문학인 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 등을 맡는 등 잠시 남로당 계열의 문예 운동에 몸을 담았다가, 1947년 탈맹(문동 탈퇴)을 한 이듬해 1948년 국민보도연맹에 사무위원으로 가입하며 본격적인 사회주의, 좌익 성향의 활동을 보인다. 결국에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6.25 전쟁 중 구인회 시절 절친한 동료였던 이태준을 포함해 정인택 설정식 이용악 등과 함께 월북을 감행하여 평양에 정착한다. 전술한 바와 같이 그가 사회주의 성향 단체인 카프와 한때 갈등을 빚기도 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꽤나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amp;lt;p&amp;gt;'''월북 후'''의 생애는 북한 소설가 정태은의 글을 통해 조금이나마 확인된다. 1955년까지 평양문학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던 그는 월북 전의 행보를 이유로 평안남도 강서 지방에서 4년 간 강제 노동을 하였다고 한다. 이후 1960년 다시 대학교수로 복귀하기는 하였지만 강제노동의 휴유증으로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는 지경에 이른다. 청각과 언어능력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창작 활동을 포기하지 않아 동학농민전쟁을 소재로 한 대하 역사소설 &amp;lt; 갑오농민전쟁 &amp;gt;, &amp;lt;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amp;gt; 등을 창작하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배경 ==&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lt;br /&gt;
== 참고 문헌 ==&lt;br /&gt;
&lt;br /&gt;
근대성과 근대문학, 나병철 지음, 문예출판사, 1996&lt;br /&gt;
박태원, 위키피디아 https://ko.wikipedia.org/wiki/%EB%B0%95%ED%83%9C%EC%9B%90_(1909%EB%85%84)&lt;br /&gt;
&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고군분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86%8C%EC%84%A4%EA%B0%80_%EA%B5%AC%EB%B3%B4_%EC%94%A8%EC%9D%98_%EC%9D%BC%EC%9D%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057</id>
		<title>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ᐧ༚̮ᐧ</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86%8C%EC%84%A4%EA%B0%80_%EA%B5%AC%EB%B3%B4_%EC%94%A8%EC%9D%98_%EC%9D%BC%EC%9D%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057"/>
		<updated>2025-06-23T04:30:5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고군분투: &lt;/p&gt;
&lt;hr /&gt;
&lt;div&gt;[[파일:ㄱㅂ.jpg|200px|left]]&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ced1fc;“&lt;br /&gt;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lt;br /&gt;
|'''장르''' || 모더니즘 소설&lt;br /&gt;
|-&lt;br /&gt;
| '''작가''' || 박태원&lt;br /&gt;
|-&lt;br /&gt;
| '''시대''' || 1934년 - [[근대]]   &lt;br /&gt;
|-&lt;br /&gt;
| '''배경'''|| 일제강점기, 지식인의 무력함 &lt;br /&gt;
|}&lt;br /&gt;
&lt;br /&gt;
== 장르 ==&lt;br /&gt;
'''모더니즘'''은 19세기 말과 20세기에 유럽에서 전방위적으로 나타난 예술운동이자 현상으로 모더니즘 문학은 전통과의 단절 및 개인주의 등을 대표적인 특징으로 한다. 제 1차 세계 대전 및 급격한 기술 발전으로 야기된 사회적 변화가 문학 주제에서의 ‘ 19세기 기성 전통과의 단절 ‘ 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때, 19세기의 문학 전통은 ''' 리얼리즘'''을 표방한다. 인간의 삶과 그를 둘러싼 환경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모방 및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리얼리즘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모더니즘은 전적인 주관성과 개인적 경험을 작품의 근원으로 여긴다. 이는 곧 문학의 탈도구성과 독자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19세기 리얼리즘 하에서 문학은 독자들을 계몽시키거나 그들에게 오락을 제공하려는 뚜렷한 목적성을 지니고 있던 반면 모더니즘 문학은 그 어떠한 목적성에서도 벗어나 ''' 문학만을 위한 문학''', 즉 자기목적성만을 보여준다.&lt;br /&gt;
&amp;lt;p&amp;gt;&lt;br /&gt;
'''모더니즘 소설''' 역시 전통적인 소설 구조와 서술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식과 주제를 탐구하는 양상을 보인다. 모더니즘 소설은 '''의식의 흐름''' 기법을 통해 등장인물들의 내면 세계, 심리, 의식을 가감없이 드러내고, 전통적 문법과 구문을 깨뜨리며 새로운 서술 방식을 시도하는 '''언어 실험''', 시작 - 중간 - 결말이라는 구조에서 벗어나 파편화되고 비정형적인 서사 전개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인간 정신의 복잡성과 비합리성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 작가 ==&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fcddce;“&lt;br /&gt;
|+ 박태원 朴泰遠&lt;br /&gt;
|-&lt;br /&gt;
|colspan=&amp;quot;2&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 |  [[File:ㅂㅌㅇ.jpg|100px]]&lt;br /&gt;
|-&lt;br /&gt;
|'''출생''' || 1909년 12월 7일&lt;br /&gt;
|-&lt;br /&gt;
| '''사망''' || 1986년 7월 10일&lt;br /&gt;
|-&lt;br /&gt;
| '''호''' || 구보(丘甫, 仇甫, 九甫)&amp;lt;ref&amp;gt;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라는 작품 이름도 여기에서 비롯한 것이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저서'''|| &amp;lt;천변풍경&amp;gt;, &amp;lt;골목 안&amp;gt;&amp;lt;ref&amp;gt;2024년 대학수학능력시험에 출제되기도 하였다.&amp;lt;/ref&amp;gt;&lt;br /&gt;
|- &lt;br /&gt;
| '''직업''' || 소설가, 시인, 문학평론가&lt;br /&gt;
|}&lt;br /&gt;
&lt;br /&gt;
'''박태원'''은 조선의 소설가, 시인, 문학평론가로 이상, 정지용 등과 더불어 1930년대 모더니즘 문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해방 이후 6.25 전쟁 중 아내와, 자식을 놔두고 홀로 월북하여 그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아주 자세히 알려져 있지는 않다.&lt;br /&gt;
1909년 12월 7일 대한제국 시기 서울 종로에서 태어난 그는 숙부(박용남)가 서양의학 소아내과 의사, 숙모가 보통학교 교사 등으로 일하는 제법 부유하고 개화적인 이른바 서구적 집안 분위기에서 자랐다. 이후  경성제1고등보통학교&amp;lt;ref&amp;gt;현재의 경기고등학교이다&amp;lt;/ref&amp;gt; 재학 중이던 1926년 《조선문단》에 시 〈누님〉을 발표하며 18세의 나이로 등단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amp;lt;ref&amp;gt;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창작한 &amp;lt;반 년간&amp;gt;이라는 작품이 있다.&amp;lt;/ref&amp;gt; 일본 호세이 대학에 진학하지만 1929년 11월, 1학년 시절에 중퇴한 후 귀국하여 1930년 신생 10월호에 단편 소설 〈수염〉을 발표하고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시작하였다. 본격적으로 문단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33년 이상,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조용만, 이효석 등과 함께 문학 동인들의 모임인 구인회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이들 구인회는 순수문학적인 성격을 바탕으로 실험적인 기법과 문장을 문학의 본령으로 내세웠다. 박태원의 소설은 당시로써는 모험적이고 실험적인 시도였기 때문에 당대 문단의 주류를 이루던 사회주의 성향의 '''카프'''와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1930년대 왕성하게 활동하여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1934)''', '''방란장 주인(1936)''', '''천변풍경(1936)''' 등과 같은 대표작들을 발표하였다. 1940년대 일본의 탄압이 심해졌고 이 시기에 박태원은 아세아의 여명(1941.2), 군국의 어머니(1942), 「원구(1945.5-8)」 등 일제의 대동아전쟁을 찬양하고 군국주의를 미화하는 친일 성향 작품들을 발표하여 친일파로 전향하였다는 비판이 있기도 하다. &amp;lt;p&amp;gt; &lt;br /&gt;
광복 후인 1946년 좌익 계열의 문학인 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 등을 맡는 등 잠시 남로당 계열의 문예 운동에 몸을 담았다가, 1947년 탈맹(문동 탈퇴)을 한 이듬해 1948년 국민보도연맹에 사무위원으로 가입하며 본격적인 사회주의, 좌익 성향의 활동을 보인다. 결국에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6.25 전쟁 중 구인회 시절 절친한 동료였던 이태준을 포함해 정인택 설정식 이용악 등과 함께 월북을 감행하여 평양에 정착한다. 전술한 바와 같이 그가 사회주의 성향 단체인 카프와 한때 갈등을 빚기도 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꽤나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amp;lt;p&amp;gt;'''월북 후'''의 생애는 북한 소설가 정태은의 글을 통해 조금이나마 확인된다. 1955년까지 평양문학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던 그는 월북 전의 행보를 이유로 평안남도 강서 지방에서 4년 간 강제 노동을 하였다고 한다. 이후 1960년 다시 대학교수로 복귀하기는 하였지만 강제노동의 휴유증으로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는 지경에 이른다. &lt;br /&gt;
&lt;br /&gt;
&lt;br /&gt;
== 배경 ==&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lt;br /&gt;
== 참고 문헌 ==&lt;br /&gt;
&lt;br /&gt;
근대성과 근대문학, 나병철 지음, 문예출판사, 1996&lt;br /&gt;
박태원, 위키피디아 https://ko.wikipedia.org/wiki/%EB%B0%95%ED%83%9C%EC%9B%90_(1909%EB%85%84)&lt;br /&gt;
&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고군분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86%8C%EC%84%A4%EA%B0%80_%EA%B5%AC%EB%B3%B4_%EC%94%A8%EC%9D%98_%EC%9D%BC%EC%9D%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055</id>
		<title>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ᐧ༚̮ᐧ</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86%8C%EC%84%A4%EA%B0%80_%EA%B5%AC%EB%B3%B4_%EC%94%A8%EC%9D%98_%EC%9D%BC%EC%9D%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055"/>
		<updated>2025-06-23T04:29:3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고군분투: /* 장르 */&lt;/p&gt;
&lt;hr /&gt;
&lt;div&gt;[[파일:ㄱㅂ.jpg|200px|left]]&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ced1fc;“&lt;br /&gt;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lt;br /&gt;
|'''장르''' || 모더니즘 소설&lt;br /&gt;
|-&lt;br /&gt;
| '''작가''' || 박태원&lt;br /&gt;
|-&lt;br /&gt;
| '''시대''' || 1934년 - [[근대]]   &lt;br /&gt;
|-&lt;br /&gt;
| '''배경'''|| 일제강점기, 지식인의 무력함 &lt;br /&gt;
|}&lt;br /&gt;
&lt;br /&gt;
== 장르 ==&lt;br /&gt;
'''모더니즘'''은 19세기 말과 20세기에 유럽에서 전방위적으로 나타난 예술운동이자 현상으로 모더니즘 문학은 전통과의 단절 및 개인주의 등을 대표적인 특징으로 한다. 제 1차 세계 대전 및 급격한 기술 발전으로 야기된 사회적 변화가 문학 주제에서의 ‘ 19세기 기성 전통과의 단절 ‘ 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때, 19세기의 문학 전통은 ''' 리얼리즘'''을 표방한다. 인간의 삶과 그를 둘러싼 환경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모방 및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리얼리즘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모더니즘은 전적인 주관성과 개인적 경험을 작품의 근원으로 여긴다. 이는 곧 문학의 탈도구성과 독자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19세기 리얼리즘 하에서 문학은 독자들을 계몽시키거나 그들에게 오락을 제공하려는 뚜렷한 목적성을 지니고 있던 반면 모더니즘 문학은 그 어떠한 목적성에서도 벗어나 ''' 문학만을 위한 문학''', 즉 자기목적성만을 보여준다.&lt;br /&gt;
&amp;lt;p&amp;gt;&lt;br /&gt;
'''모더니즘 소설''' 역시 전통적인 소설 구조와 서술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식과 주제를 탐구하는 양상을 보인다. 모더니즘 소설은 '''의식의 흐름''' 기법을 통해 등장인물들의 내면 세계, 심리, 의식을 가감없이 드러내고, 전통적 문법과 구문을 깨뜨리며 새로운 서술 방식을 시도하는 '''언어 실험''', 시작 - 중간 - 결말이라는 구조에서 벗어나 파편화되고 비정형적인 서사 전개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인간 정신의 복잡성과 비합리성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 작가 ==&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fcddce;“&lt;br /&gt;
|+ 박태원 朴泰遠&lt;br /&gt;
|-&lt;br /&gt;
|colspan=&amp;quot;2&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 |  [[File:ㅂㅌㅇ.jpg|100px]]&lt;br /&gt;
|-&lt;br /&gt;
|'''출생''' || 1909년 12월 7일&lt;br /&gt;
|-&lt;br /&gt;
| '''사망''' || 1986년 7월 10일&lt;br /&gt;
|-&lt;br /&gt;
| '''호''' || 구보(丘甫, 仇甫, 九甫)&amp;lt;ref&amp;gt;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라는 작품 이름도 여기에서 비롯한 것이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저서'''|| &amp;lt;천변풍경&amp;gt;, &amp;lt;골목 안&amp;gt;&amp;lt;ref&amp;gt;2024년 대학수학능력시험에 출제되기도 하였다.&amp;lt;/ref&amp;gt;&lt;br /&gt;
|- &lt;br /&gt;
| '''직업''' || 소설가, 시인, 문학평론가&lt;br /&gt;
|}&lt;br /&gt;
&lt;br /&gt;
'''박태원'''은 조선의 소설가, 시인, 문학평론가로 이상, 정지용 등과 더불어 1930년대 모더니즘 문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해방 이후 6.25 전쟁 중 아내와, 자식을 놔두고 홀로 월북하여 그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아주 자세히 알려져 있지는 않다.&lt;br /&gt;
1909년 12월 7일 대한제국 시기 서울 종로에서 태어난 그는 숙부(박용남)가 서양의학 소아내과 의사, 숙모가 보통학교 교사 등으로 일하는 제법 부유하고 개화적인 이른바 서구적 집안 분위기에서 자랐다. 이후  경성제1고등보통학교&amp;lt;ref&amp;gt;현재의 경기고등학교이다&amp;lt;/ref&amp;gt; 재학 중이던 1926년 《조선문단》에 시 〈누님〉을 발표하며 18세의 나이로 등단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amp;lt;ref&amp;gt;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창작한 &amp;lt;반 년간&amp;gt;이라는 작품이 있다.&amp;lt;/ref&amp;gt; 일본 호세이 대학에 진학하지만 1929년 11월, 1학년 시절에 중퇴한 후 귀국하여 1930년 신생 10월호에 단편 소설 〈수염〉을 발표하고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시작하였다. 본격적으로 문단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33년 이상,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조용만, 이효석 등과 함께 문학 동인들의 모임인 구인회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이들 구인회는 순수문학적인 성격을 바탕으로 실험적인 기법과 문장을 문학의 본령으로 내세웠다. 박태원의 소설은 당시로써는 모험적이고 실험적인 시도였기 때문에 당대 문단의 주류를 이루던 사회주의 성향의 '''카프'''와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1930년대 왕성하게 활동하여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1934)''', '''방란장 주인(1936)''', '''천변풍경(1936)''' 등과 같은 대표작들을 발표하였다. 1940년대 일본의 탄압이 심해졌고 이 시기에 박태원은 아세아의 여명(1941.2), 군국의 어머니(1942), 「원구(1945.5-8)」 등 일제의 대동아전쟁을 찬양하고 군국주의를 미화하는 친일 성향 작품들을 발표하여 친일파로 전향하였다는 비판이 있기도 하다. &amp;lt;p&amp;gt; &lt;br /&gt;
광복 후인 1946년 좌익 계열의 문학인 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 등을 맡는 등 잠시 남로당 계열의 문예 운동에 몸을 담았다가, 1947년 탈맹(문동 탈퇴)을 한 이듬해 1948년 국민보도연맹에 사무위원으로 가입하며 본격적인 사회주의, 좌익 성향의 활동을 보인다. 결국에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6.25 전쟁 중 구인회 시절 절친한 동료였던 이태준을 포함해 정인택 설정식 이용악 등과 함께 월북을 감행하여 평양에 정착한다. 전술한 바와 같이 그가 사회주의 성향 단체인 카프와 한때 갈등을 빚기도 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꽤나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amp;lt;p&amp;gt;'''월북 후'''의 생애는 북한 소설가 정태은의 글을 통해 조금이나마 확인된다. 1955년까지 평양문학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던 그는 월북 전의 행보를 이유로 평안남도 강서 지방에서 4년 간 강제 노동을 하였다고 한다. 이후 1960년 다시 대학교수로 복귀하기는 하였지만 강제노동의 휴유증으로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는 지경에 이른다. &lt;br /&gt;
&lt;br /&gt;
&lt;br /&gt;
== 배경 ==&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고군분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86%8C%EC%84%A4%EA%B0%80_%EA%B5%AC%EB%B3%B4_%EC%94%A8%EC%9D%98_%EC%9D%BC%EC%9D%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053</id>
		<title>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ᐧ༚̮ᐧ</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86%8C%EC%84%A4%EA%B0%80_%EA%B5%AC%EB%B3%B4_%EC%94%A8%EC%9D%98_%EC%9D%BC%EC%9D%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60053"/>
		<updated>2025-06-23T04:07:4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고군분투: &lt;/p&gt;
&lt;hr /&gt;
&lt;div&gt;[[파일:ㄱㅂ.jpg|200px|left]]&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ced1fc;“&lt;br /&gt;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lt;br /&gt;
|'''장르''' || 모더니즘 소설&lt;br /&gt;
|-&lt;br /&gt;
| '''작가''' || 박태원&lt;br /&gt;
|-&lt;br /&gt;
| '''시대''' || 1934년 - [[근대]]   &lt;br /&gt;
|-&lt;br /&gt;
| '''배경'''|| 일제강점기, 지식인의 무력함 &lt;br /&gt;
|}&lt;br /&gt;
&lt;br /&gt;
== 장르 ==&lt;br /&gt;
'''모더니즘'''은 19세기 말과 20세기에 유럽에서 전방위적으로 나타난 예술운동이자 현상으로 모더니즘 문학은 전통과의 단절 및 개인주의 등을 대표적인 특징으로 한다. 제 1차 세계 대전 및 급격한 기술 발전으로 야기된 사회적 변화가 문학 주제에서의 ‘ 19세기 기성 전통과의 단절 ‘ 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때, 19세기의 문학 전통은 ''' 리얼리즘'''을 표방한다. 인간의 삶과 그를 둘러싼 환경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모방 및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리얼리즘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모더니즘은 전적인 주관성과 개인적 경험을 작품의 근원으로 여긴다. 이는 곧 문학의 탈도구성과 독자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19세기 리얼리즘 하에서 문학은 독자들을 계몽시키거나 그들에게 오락을 제공하려는 뚜렷한 목적성을 지니고 있던 반면 모더니즘 문학은 그 어떠한 목적성에서도 벗어나 ''' 문학만을 위한 문학''', 즉 자기목적성만을 보여준다.&lt;br /&gt;
&lt;br /&gt;
== 작가 ==&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fcddce;“&lt;br /&gt;
|+ 박태원 朴泰遠&lt;br /&gt;
|-&lt;br /&gt;
|colspan=&amp;quot;2&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 |  [[File:ㅂㅌㅇ.jpg|100px]]&lt;br /&gt;
|-&lt;br /&gt;
|'''출생''' || 1909년 12월 7일&lt;br /&gt;
|-&lt;br /&gt;
| '''사망''' || 1986년 7월 10일&lt;br /&gt;
|-&lt;br /&gt;
| '''호''' || 구보(丘甫, 仇甫, 九甫)&amp;lt;ref&amp;gt;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라는 작품 이름도 여기에서 비롯한 것이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저서'''|| &amp;lt;천변풍경&amp;gt;, &amp;lt;골목 안&amp;gt;&amp;lt;ref&amp;gt;2024년 대학수학능력시험에 출제되기도 하였다.&amp;lt;/ref&amp;gt;&lt;br /&gt;
|- &lt;br /&gt;
| '''직업''' || 소설가, 시인, 문학평론가&lt;br /&gt;
|}&lt;br /&gt;
&lt;br /&gt;
'''박태원'''은 조선의 소설가, 시인, 문학평론가로 이상, 정지용 등과 더불어 1930년대 모더니즘 문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해방 이후 6.25 전쟁 중 아내와, 자식을 놔두고 홀로 월북하여 그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아주 자세히 알려져 있지는 않다.&lt;br /&gt;
1909년 12월 7일 대한제국 시기 서울 종로에서 태어난 그는 숙부(박용남)가 서양의학 소아내과 의사, 숙모가 보통학교 교사 등으로 일하는 제법 부유하고 개화적인 이른바 서구적 집안 분위기에서 자랐다. 이후  경성제1고등보통학교&amp;lt;ref&amp;gt;현재의 경기고등학교이다&amp;lt;/ref&amp;gt; 재학 중이던 1926년 《조선문단》에 시 〈누님〉을 발표하며 18세의 나이로 등단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amp;lt;ref&amp;gt;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창작한 &amp;lt;반 년간&amp;gt;이라는 작품이 있다.&amp;lt;/ref&amp;gt; 일본 호세이 대학에 진학하지만 1929년 11월, 1학년 시절에 중퇴한 후 귀국하여 1930년 신생 10월호에 단편 소설 〈수염〉을 발표하고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시작하였다. 본격적으로 문단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33년 이상,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조용만, 이효석 등과 함께 문학 동인들의 모임인 구인회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이들 구인회는 순수문학적인 성격을 바탕으로 실험적인 기법과 문장을 문학의 본령으로 내세웠다. 박태원의 소설은 당시로써는 모험적이고 실험적인 시도였기 때문에 당대 문단의 주류를 이루던 사회주의 성향의 '''카프'''와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1930년대 왕성하게 활동하여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1934)''', '''방란장 주인(1936)''', '''천변풍경(1936)''' 등과 같은 대표작들을 발표하였다. 1940년대 일본의 탄압이 심해졌고 이 시기에 박태원은 아세아의 여명(1941.2), 군국의 어머니(1942), 「원구(1945.5-8)」 등 일제의 대동아전쟁을 찬양하고 군국주의를 미화하는 친일 성향 작품들을 발표하여 친일파로 전향하였다는 비판이 있기도 하다. &amp;lt;p&amp;gt; &lt;br /&gt;
광복 후인 1946년 좌익 계열의 문학인 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 등을 맡는 등 잠시 남로당 계열의 문예 운동에 몸을 담았다가, 1947년 탈맹(문동 탈퇴)을 한 이듬해 1948년 국민보도연맹에 사무위원으로 가입하며 본격적인 사회주의, 좌익 성향의 활동을 보인다. 결국에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6.25 전쟁 중 구인회 시절 절친한 동료였던 이태준을 포함해 정인택 설정식 이용악 등과 함께 월북을 감행하여 평양에 정착한다. 전술한 바와 같이 그가 사회주의 성향 단체인 카프와 한때 갈등을 빚기도 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꽤나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amp;lt;p&amp;gt;'''월북 후'''의 생애는 북한 소설가 정태은의 글을 통해 조금이나마 확인된다. 1955년까지 평양문학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던 그는 월북 전의 행보를 이유로 평안남도 강서 지방에서 4년 간 강제 노동을 하였다고 한다. 이후 1960년 다시 대학교수로 복귀하기는 하였지만 강제노동의 휴유증으로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는 지경에 이른다. &lt;br /&gt;
&lt;br /&gt;
&lt;br /&gt;
== 배경 ==&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고군분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86%8C%EC%84%A4%EA%B0%80_%EA%B5%AC%EB%B3%B4_%EC%94%A8%EC%9D%98_%EC%9D%BC%EC%9D%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59854</id>
		<title>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ᐧ༚̮ᐧ</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86%8C%EC%84%A4%EA%B0%80_%EA%B5%AC%EB%B3%B4_%EC%94%A8%EC%9D%98_%EC%9D%BC%EC%9D%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59854"/>
		<updated>2025-06-22T09:41:5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고군분투: /* 작가 */&lt;/p&gt;
&lt;hr /&gt;
&lt;div&gt;[[파일:ㄱㅂ.jpg|200px|left]]&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ced1fc;“&lt;br /&gt;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lt;br /&gt;
|'''장르''' || 모더니즘 소설&lt;br /&gt;
|-&lt;br /&gt;
| '''작가''' || 박태원&lt;br /&gt;
|-&lt;br /&gt;
| '''시대''' || 1934년 - [[근대]]   &lt;br /&gt;
|-&lt;br /&gt;
| '''배경'''|| 일제강점기, 지식인의 무력함 &lt;br /&gt;
|}&lt;br /&gt;
&lt;br /&gt;
== 장르 ==&lt;br /&gt;
'''모더니즘'''은 19세기 말과 20세기에 유럽에서 전방위적으로 나타난 예술운동이자 현상으로 모더니즘 문학은 전통과의 단절 및 개인주의 등을 대표적인 특징으로 한다. 제 1차 세계 대전 및 급격한 기술 발전으로 야기된 사회적 변화가 문학 주제에서의 ‘ 19세기 기성 전통과의 단절 ‘ 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때, 19세기의 문학 전통은 ''' 리얼리즘'''을 표방한다. 인간의 삶과 그를 둘러싼 환경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모방 및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리얼리즘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모더니즘은 전적인 주관성과 개인적 경험을 작품의 근원으로 여긴다. 이는 곧 문학의 탈도구성과 독자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19세기 리얼리즘 하에서 문학은 독자들을 계몽시키거나 그들에게 오락을 제공하려는 뚜렷한 목적성을 지니고 있던 반면 모더니즘 문학은 그 어떠한 목적성에서도 벗어나 ''' 문학만을 위한 문학''', 즉 자기목적성만을 보여준다.&lt;br /&gt;
&lt;br /&gt;
== 작가 ==&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fcddce;“&lt;br /&gt;
|+ 박태원 朴泰遠&lt;br /&gt;
|-&lt;br /&gt;
|colspan=&amp;quot;2&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 |  [[File:ㅂㅌㅇ.jpg|100px]]&lt;br /&gt;
|-&lt;br /&gt;
|'''출생''' || 1909년 12월 7일&lt;br /&gt;
|-&lt;br /&gt;
| '''사망''' || 1986년 7월 10일&lt;br /&gt;
|-&lt;br /&gt;
| '''호''' || 구보(丘甫, 仇甫, 九甫)&amp;lt;ref&amp;gt;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라는 작품 이름도 여기에서 비롯한 것이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저서'''|| &amp;lt;천변풍경&amp;gt;, &amp;lt;골목 안&amp;gt;&amp;lt;ref&amp;gt;2024년 대학수학능력시험에 출제되기도 하였다.&amp;lt;/ref&amp;gt;&lt;br /&gt;
|- &lt;br /&gt;
| '''직업''' || 소설가, 시인, 문학평론가&lt;br /&gt;
|}&lt;br /&gt;
&lt;br /&gt;
'''박태원'''은 조선의 소설가, 시인, 문학평론가로 이상, 정지용 등과 더불어 1930년대 모더니즘 문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해방 이후 6.25 전쟁 중 아내와, 자식을 놔두고 홀로 월북하여 그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아주 자세히 알려져 있지는 않다.&lt;br /&gt;
1909년 12월 7일 대한제국 시기 서울 종로에서 태어난 그는 숙부(박용남)가 서양의학 소아내과 의사, 숙모가 보통학교 교사 등으로 일하는 제법 부유하고 개화적인 이른바 서구적 집안 분위기에서 자랐다. 이후  경성제1고등보통학교&amp;lt;ref&amp;gt;현재의 경기고등학교이다&amp;lt;/ref&amp;gt; 재학 중이던 1926년 《조선문단》에 시 〈누님〉을 발표하며 18세의 나이로 등단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amp;lt;ref&amp;gt;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창작한 &amp;lt;반 년간&amp;gt;이라는 작품이 있다.&amp;lt;/ref&amp;gt; 일본 호세이 대학에 진학하지만 1929년 11월, 1학년 시절에 중퇴한 후 귀국하여 1930년 신생 10월호에 단편 소설 〈수염〉을 발표하고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시작하였다. 본격적으로 문단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33년 이상,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조용만, 이효석 등과 함께 문학 동인들의 모임인 구인회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이들 구인회는 순수문학적인 성격을 바탕으로 실험적인 기법과 문장을 문학의 본령으로 내세웠다. 박태원의 소설은 당시로써는 모험적이고 실험적인 시도였기 때문에 당대 문단의 주류를 이루던 사회주의 성향의 '''카프'''와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1930년대 왕성하게 활동하여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1934)''', '''방란장 주인(1936)''', '''천변풍경(1936)''' 등과 같은 대표작들을 발표하였다. 1940년대 일본의 탄압이 심해졌고 이 시기에 박태원은 아세아의 여명(1941.2), 군국의 어머니(1942), 「원구(1945.5-8)」 등 일제의 대동아전쟁을 찬양하고 군국주의를 미화하는 친일 성향 작품들을 발표하여 친일파로 전향하였다는 비판이 있기도 하다. &amp;lt;p&amp;gt; &lt;br /&gt;
광복 후인 1946년 좌익 계열의 문학인 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 등을 맡는 등 잠시 남로당 계열의 문예 운동에 몸을 담았다가, 1947년 탈맹(문동 탈퇴)을 한 이듬해 1948년 국민보도연맹에 사무위원으로 가입하며 본격적인 사회주의, 좌익 성향의 활동을 보인다. 결국에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6.25 전쟁 중 구인회 시절 절친한 동료였던 이태준을 포함해 정인택 설정식 이용악 등과 함께 월북을 감행하여 평양에 정착한다. &lt;br /&gt;
&lt;br /&gt;
&lt;br /&gt;
박태원의 소설은 당시에도 꽤 모험적이고 실험적인 시도였기 때문에 경향문학이 주류였던 당대 문단에서 꽤 독한 비판을 받았다. 박태원은 &amp;lt;내 예술에 대한 항변-작품과 비평가의 책임&amp;gt; 등의 글에서 이런 비판에 대해 항변한 적이 있지만, 이후로도 비판은 계속 되었다. 카프와 박태원과의 불화는 후일 있을 월북의 이유를 더욱 알 수 없게 만드는 요소이기도 하다.&lt;br /&gt;
&lt;br /&gt;
== 배경 ==&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고군분투</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86%8C%EC%84%A4%EA%B0%80_%EA%B5%AC%EB%B3%B4_%EC%94%A8%EC%9D%98_%EC%9D%BC%EC%9D%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59853</id>
		<title>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ᐧ༚̮ᐧ</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dh_edu/wiki/index.php?title=%EC%86%8C%EC%84%A4%EA%B0%80_%EA%B5%AC%EB%B3%B4_%EC%94%A8%EC%9D%98_%EC%9D%BC%EC%9D%BC%E1%90%A7%E0%BC%9A%CC%AE%E1%90%A7&amp;diff=59853"/>
		<updated>2025-06-22T09:41:3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고군분투: /* 작가 */&lt;/p&gt;
&lt;hr /&gt;
&lt;div&gt;[[파일:ㄱㅂ.jpg|200px|left]]&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ced1fc;“&lt;br /&gt;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lt;br /&gt;
|'''장르''' || 모더니즘 소설&lt;br /&gt;
|-&lt;br /&gt;
| '''작가''' || 박태원&lt;br /&gt;
|-&lt;br /&gt;
| '''시대''' || 1934년 - [[근대]]   &lt;br /&gt;
|-&lt;br /&gt;
| '''배경'''|| 일제강점기, 지식인의 무력함 &lt;br /&gt;
|}&lt;br /&gt;
&lt;br /&gt;
== 장르 ==&lt;br /&gt;
'''모더니즘'''은 19세기 말과 20세기에 유럽에서 전방위적으로 나타난 예술운동이자 현상으로 모더니즘 문학은 전통과의 단절 및 개인주의 등을 대표적인 특징으로 한다. 제 1차 세계 대전 및 급격한 기술 발전으로 야기된 사회적 변화가 문학 주제에서의 ‘ 19세기 기성 전통과의 단절 ‘ 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때, 19세기의 문학 전통은 ''' 리얼리즘'''을 표방한다. 인간의 삶과 그를 둘러싼 환경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모방 및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리얼리즘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모더니즘은 전적인 주관성과 개인적 경험을 작품의 근원으로 여긴다. 이는 곧 문학의 탈도구성과 독자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19세기 리얼리즘 하에서 문학은 독자들을 계몽시키거나 그들에게 오락을 제공하려는 뚜렷한 목적성을 지니고 있던 반면 모더니즘 문학은 그 어떠한 목적성에서도 벗어나 ''' 문학만을 위한 문학''', 즉 자기목적성만을 보여준다.&lt;br /&gt;
&lt;br /&gt;
== 작가 ==&lt;br /&gt;
[[파일:ㅂㅌㅇ.jpg|100px|left]] &amp;lt;p&amp;gt;&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background:#fcddce;“&lt;br /&gt;
|+ 박태원 朴泰遠&lt;br /&gt;
|-&lt;br /&gt;
|colspan=&amp;quot;2&amp;quot; style=&amp;quot;text-align:center;&amp;quot; |  [[File:ㅂㅌㅇ.jpg|100px]]&lt;br /&gt;
|'''출생''' || 1909년 12월 7일&lt;br /&gt;
|-&lt;br /&gt;
| '''사망''' || 1986년 7월 10일&lt;br /&gt;
|-&lt;br /&gt;
| '''호''' || 구보(丘甫, 仇甫, 九甫)&amp;lt;ref&amp;gt;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라는 작품 이름도 여기에서 비롯한 것이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저서'''|| &amp;lt;천변풍경&amp;gt;, &amp;lt;골목 안&amp;gt;&amp;lt;ref&amp;gt;2024년 대학수학능력시험에 출제되기도 하였다.&amp;lt;/ref&amp;gt;&lt;br /&gt;
|- &lt;br /&gt;
| '''직업''' || 소설가, 시인, 문학평론가&lt;br /&gt;
|}&lt;br /&gt;
&lt;br /&gt;
'''박태원'''은 조선의 소설가, 시인, 문학평론가로 이상, 정지용 등과 더불어 1930년대 모더니즘 문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해방 이후 6.25 전쟁 중 아내와, 자식을 놔두고 홀로 월북하여 그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아주 자세히 알려져 있지는 않다.&lt;br /&gt;
1909년 12월 7일 대한제국 시기 서울 종로에서 태어난 그는 숙부(박용남)가 서양의학 소아내과 의사, 숙모가 보통학교 교사 등으로 일하는 제법 부유하고 개화적인 이른바 서구적 집안 분위기에서 자랐다. 이후  경성제1고등보통학교&amp;lt;ref&amp;gt;현재의 경기고등학교이다&amp;lt;/ref&amp;gt; 재학 중이던 1926년 《조선문단》에 시 〈누님〉을 발표하며 18세의 나이로 등단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amp;lt;ref&amp;gt;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창작한 &amp;lt;반 년간&amp;gt;이라는 작품이 있다.&amp;lt;/ref&amp;gt; 일본 호세이 대학에 진학하지만 1929년 11월, 1학년 시절에 중퇴한 후 귀국하여 1930년 신생 10월호에 단편 소설 〈수염〉을 발표하고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시작하였다. 본격적으로 문단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33년 이상,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조용만, 이효석 등과 함께 문학 동인들의 모임인 구인회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이들 구인회는 순수문학적인 성격을 바탕으로 실험적인 기법과 문장을 문학의 본령으로 내세웠다. 박태원의 소설은 당시로써는 모험적이고 실험적인 시도였기 때문에 당대 문단의 주류를 이루던 사회주의 성향의 '''카프'''와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1930년대 왕성하게 활동하여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1934)''', '''방란장 주인(1936)''', '''천변풍경(1936)''' 등과 같은 대표작들을 발표하였다. 1940년대 일본의 탄압이 심해졌고 이 시기에 박태원은 아세아의 여명(1941.2), 군국의 어머니(1942), 「원구(1945.5-8)」 등 일제의 대동아전쟁을 찬양하고 군국주의를 미화하는 친일 성향 작품들을 발표하여 친일파로 전향하였다는 비판이 있기도 하다. &amp;lt;p&amp;gt; &lt;br /&gt;
광복 후인 1946년 좌익 계열의 문학인 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 등을 맡는 등 잠시 남로당 계열의 문예 운동에 몸을 담았다가, 1947년 탈맹(문동 탈퇴)을 한 이듬해 1948년 국민보도연맹에 사무위원으로 가입하며 본격적인 사회주의, 좌익 성향의 활동을 보인다. 결국에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6.25 전쟁 중 구인회 시절 절친한 동료였던 이태준을 포함해 정인택 설정식 이용악 등과 함께 월북을 감행하여 평양에 정착한다. &lt;br /&gt;
&lt;br /&gt;
&lt;br /&gt;
박태원의 소설은 당시에도 꽤 모험적이고 실험적인 시도였기 때문에 경향문학이 주류였던 당대 문단에서 꽤 독한 비판을 받았다. 박태원은 &amp;lt;내 예술에 대한 항변-작품과 비평가의 책임&amp;gt; 등의 글에서 이런 비판에 대해 항변한 적이 있지만, 이후로도 비판은 계속 되었다. 카프와 박태원과의 불화는 후일 있을 월북의 이유를 더욱 알 수 없게 만드는 요소이기도 하다.&lt;br /&gt;
&lt;br /&gt;
== 배경 ==&lt;br /&gt;
&lt;br /&gt;
== 내용 ==&lt;br /&gt;
&lt;br /&gt;
&lt;br /&gt;
== 각주 ==&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고군분투</name></author>
		
	</entry>
</fe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