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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를 이끌었던 초기 지도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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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에 한국천주교회 창설을 주도한 3대 인물은 한국천주교회 창설의 선구자 이벽李檗(세례자 요한, 1754~1786)과 한국 최초의 영세자 李承薰(베드로, 1756~1801) 假聖職制度 때 主敎로 임명된 權日身(프란치스코 사베리오, 1751~1792)이다. 그리고 명도회 초기 회장 丁若鍾(아우구스티노, 1760~1801)・崔必恭 (토마스 1745∼1801)・洪敎萬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1738~1801)・이조정랑을 지낸  洪樂敏(루가, 1751~1801)・천주교회 총회장 崔昌顯(요한, 1754~1801)・ '내포의 사도' 李存昌 (존자가 루도비코, 1759~1801)도 천주교회를 이끌었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 가운데 이벽은 1785년 (정조9,乙巳)에  乙巳秋曹摘發事件이 일어난 직후에 권일신은 1791년 (정조15, 辛亥 )에 珍山事件3)이 일어난 직후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승훈, 정약종, 최필공, 홍교만, 홍낙민, 최창현은 신유옥사가 일어난 직후인 1801년 (순조1,辛酉) 2월 26일 (양력 4월 8일)에 서울 서소문 밖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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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수되었고, 이존창은 1801년 2월 27일에 공주로 호송되어 참수되었다. 이들 외에 천주교 초창기에 전교에 공헌한 인물로 '호남의 사도'柳恒儉 (아우구스티노, 1756~1801) ・尹有一(바오로, 1760~1795) ・池璜(사바, ? ~1795) 등과 淸陰 金尙憲의 후손으로 당색이 노론이었던 金健淳 (요사팟, 1776~ 1801)과 金伯淳(세례명미상, ?~1801)도 순교하였다. 이들도 모두 다산과 교유가 있었을 것이라 짐작되지만 교유의 자취가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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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2021년 6월 7일 (월) 21:00 기준 최신판




개요

내용

한국 천주교를 이끌었던 초기 지도자들 조선후기에 한국천주교회 창설을 주도한 3대 인물은 한국천주교회 창설의 선구자 이벽李檗(세례자 요한, 1754~1786)과 한국 최초의 영세자 李承薰(베드로, 1756~1801) 假聖職制度 때 主敎로 임명된 權日身(프란치스코 사베리오, 1751~1792)이다. 그리고 명도회 초기 회장 丁若鍾(아우구스티노, 1760~1801)・崔必恭 (토마스 1745∼1801)・洪敎萬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1738~1801)・이조정랑을 지낸 洪樂敏(루가, 1751~1801)・천주교회 총회장 崔昌顯(요한, 1754~1801)・ '내포의 사도' 李存昌 (존자가 루도비코, 1759~1801)도 천주교회를 이끌었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 가운데 이벽은 1785년 (정조9,乙巳)에 乙巳秋曹摘發事件이 일어난 직후에 권일신은 1791년 (정조15, 辛亥 )에 珍山事件3)이 일어난 직후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승훈, 정약종, 최필공, 홍교만, 홍낙민, 최창현은 신유옥사가 일어난 직후인 1801년 (순조1,辛酉) 2월 26일 (양력 4월 8일)에 서울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고, 이존창은 1801년 2월 27일에 공주로 호송되어 참수되었다. 이들 외에 천주교 초창기에 전교에 공헌한 인물로 '호남의 사도'柳恒儉 (아우구스티노, 1756~1801) ・尹有一(바오로, 1760~1795) ・池璜(사바, ? ~1795) 등과 淸陰 金尙憲의 후손으로 당색이 노론이었던 金健淳 (요사팟, 1776~ 1801)과 金伯淳(세례명미상, ?~1801)도 순교하였다. 이들도 모두 다산과 교유가 있었을 것이라 짐작되지만 교유의 자취가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미디어 자료

지식 관계망

천주교.lst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