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과 전쟁의 사회적 영향

cefia
cefia>Dominicy님의 2016년 1월 22일 (금) 14:10 판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이동: 둘러보기, 검색

5과 전쟁이 사회에 끼친 영향

학습목표
- 아프리카계 미국인들, 멕시코계 미국인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국내에서 어떤 방식으로 전쟁을 경험했는가?
- 일본계 미국인들은 어떤 어려움에 직면했는가?
- 전쟁은 여성들의 노동조건을 어떻게 바꾸었는가?

요점
전쟁이 여성들과 인종적, 민족적 소수집단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했지만 일본계 미국인들은 널리 퍼진 불관용의 희생자가 되었다.

핵심용어
- 인종간평등회의(Congress of Racial Equility, CORE)
- 브라체로(bracero)
- 바리오(barrio)
- 강제수용
- 니세이(Nisei)

학습주안점
- 영향력을 이해하기: 이번 과를 학습하면서 전시의 여성들과 소수인종들의 경험을 열거하여 다음 표를 완성하시오.
∙ 여성들: 여성들이 공장과 조선소의 일자리를 채우다
∙ 아프리카계 미국인
∙ 멕시코게 미국인
∙ 일본계 미국인


배경
전쟁에 이기기 위해 미국은 인적자원을 포함한 모든 국가 자원을 총동원 해야만 했다. 미국 사회의 일부 계층에게 이 상황은 새로운 기회를 가져왔다. 하지만 소수 인종의 사람들에게는 이 기회를 유리하게 이용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다. 사회적 편견은 많은 사람들의 자유로운 사회 진출을 가로막았다.
전쟁 초기에 대부분의 군수 산업체들은 흑인 근로자 고용을 거부했다. 필립 랜돌프(A. Philip Randolph)라는 노조 지도자는 대규모 항의 시위를 통해 정부로 하여금 이러한 차별을 폐지하도록 압박을 가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우리들 충성된 흑인 미국 시민들은 국가를 위해 일하고 싸울 권리를 요구한다”는 슬로건을 내세우고 워싱턴 항의행진을 주도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을 포함한 반대자들은 흑인들의 항의행진이 국민 단합을 해치고 폭력사태를 불러올 것을 우려했다. 이에 대해 랜돌프는 아래와 같은 입장을 밝혔다:
“우리는 국민 단합과 국토방위를 위해 우리의 역할을 수행할 권리를 얻기 원한다. 그러나 전 인구의 10분의1이나 되는 사람들이 미국 시민으로서의 기본권을 무시당하는 상황아래서 국민 단합은 기대하기 어렵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만일 흑인들이 이 국방 노력에서 무엇인가 역할을 할 수 있다면 그 비용은 300억 내지 400억이 들겠지만 우리는 토지소유자로서, 노동자로서 그리고 소비자로서 내는 세금으로 이를 충당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서 싸울 것이며 치열하게 투쟁할 것이다.” - 1941년 1월 15일 A. 필립 랜돌프의 보도자료


아프리카계 미국인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차별을 철폐하기 위해 수십 년을 투쟁해 왔었다. 그러나 미국 남부에서 소위 짐 크로우 제도 같은 차별 행태가 지속되고 있었고 북부에서도 비공식적인 차별이 고용, 교육 그리고 주택분야에서 행해지고 있었다.

경제적 차별
1941년 군수 업체들은 무기대여법 사업을 위해 수백만의 신규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그런데도 흑인 근로자 5분의 1은 실업자였다. 대공황 시기에 실업자 구호를 위해 설치된 정부기관들은 백인만을 고용하겠다는 고용주들의 요구를 들어주고 있었다. 랜돌프는 그의 워싱턴 행진 계획이 대통령으로 하여금 이 차별 현상을 없애도록 설득하게 되기를 바랐다. 그는 대통령에게 7월 4일 독립기념일에 수천 명의 항의 행진을 수도 워싱턴에서 보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고 루스벨트는 랜돌프에게 이 행진을 포기하라고 요구했지만 그는 거부했다.
결국 1941년 6월 25일 대통령은 행정명령 8802호를 발령하여 훈련생을 포함한 방위산업체의 모든 직종을 “인종, 종교, 피부색, 출신국에 따른 차별 없이” 모든 미국인에게 개방하도록 했다. 이 행정명령에 따라 공정고용실행위원회(Fair Employment Practices Committee)가 설립되어 방위산업체와 정부기관에서의 차별행위에 대한 불만사항을 처리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위원회는 강제력을 갖지 못해 많은 고용주들이 위원회의 권고를 무시하곤 했지만 사상 최초로 직업상의 차별행위에 대한 정부의 조치가 실행되었고 랜돌프는 워싱턴 행진을 취소했다.
그리하여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전쟁 경기의 혜택을 부분적으로 나누어 가질 수 있게 되었다. 1940년대에 2백만 이상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남부로부터 북부지역의 도시로 이주해 왔다. 이들은 일자리의 기회를 찾을 수는 있었지만 새로운 문제에 부딪쳤다. 흑인 격리관행 때문에 이들은 사람이 많은 도시 빈민지역의 열악한 주거지에서 살 수 밖에 없었다. 1941년도 조사에 의하면 흑인들이 사는 집 가운데 50퍼센트가 불량주택이었는데 백인들의 경우는 그 비율이 14퍼센트에 불과했다.
뿐만 아니라 백인 근로자들과 주택소유자들은 흑인들의 유입을 두려워하고 반대했고 일부 도시에서는 폭력적인 사태로까지 발전했다. 1943년 6월 디트로이트에서 일어난 인종폭동으로 34명이 사망하고 수백만 달러의 피해가 발생했다. 그 해 여름 뉴욕에서도 유사한 폭동이 일어났다.

군대에서의 격리제도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나 백인 다 같이 전쟁에서는 똑 같은 위험에 처했다. 그러나 미국 군대는 백인과 흑인을 철저히 격리시켰다. 휴가를 받아 고향에 돌아온 흑인 병사들은 제복을 입고도 차별을 맛보아야 했다. 전시 중 볼티모어 도시연맹에서 일하던 알렉산더 J. 알렌(Alexander J. Allen)은 “해외에서 파시즘과 싸우다 돌아와 제 나라에서 인종차별을 당하면 전쟁의 목적이 무색해 진다”고 말했다. 예컨대 캔자스에서는 점심 간이식당 주인이 일단의 아프리카계 미군 병사들에게 밥을 팔기를 거부했다. 한 병사의 회고:
“그 사람은 ‘여기서는 유색인종을 받지 않는다.’고 거듭 말했다. 우리는 그 자의 말을 무시하고 식당 문 안에 그냥 서있었는데 우리들 눈앞에서 독일군 포로들이 카운터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계속 이를 바라보았다. 이런 일이 실제 일어나고 있었다. 이건 헛소리가 아니다. 살리나 사람들은 적군에게는 식사를 제공하면서 흑인 미군 병사들은 내쳤다.” - 로이드 브라운(Llyod Brown)

분열된 여론
1942년에 실시된 조사에서 백인 10명 중 여섯은 흑인들이 현 상황에 만족하고 있으며 따라서 새로운 기회를 베풀어 줄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고 했다. 정부의 태도도 이러한 생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루스벨트 대통령도 전쟁노력에 지장을 초래하면서까지 사회적 평등을 보장하려고 애쓸 생각이 없었다. “나는 솔직히 이 시점에서 완전한 사회를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1943년 말 그는 공개적으로 토로한 바 있다.

  • 미국인의 일생

- A. 필립 랜돌프, 1889-1979뉴욕에서 대학을 나오고 선박에서 웨이터로 일하던 A. 필립 랜돌프는 노동조합 조직가로서 일하기 시작했다. 1925년부터 랜돌프는 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로 이루어진 철도 노동조합인 침대차사환노동조합(Brotherhood of Sleeping Car Poters)를 위해 일하면서 명성을 얻었다. 이 노동조합은 1937년에 임금의 인상과 노동시간과 승차시간의 단축을 얻어냈다.제2차 세계대전 후 랜돌프는 노동계 지도자로 계속해서 일했고 1955년 결성된 미국노동총연맹과 산업별노동조합회의의 연합조직(AFL-CIO)에서 부의장이 되었다. 민권운동이 시작되자 여러해 전 랜돌프가 바라던 행진이 마침내 이루어졌다. 1963년 8월, 그는 워싱턴 D.C 행진을 이끌었고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이 저 유명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을 할 때 그의 옆에 있었다.

이러한 태도는 흑인들로 하여금 스스로 변화를 이뤄내는 노력을 하도록 몰아갔다. 흑인들이 제작하는 피츠버그 신문(Pittsburgh Courier)은 “두가지 V(Double V)” 운동을 시작했다. 첫 번째 V는 추축국에 대한 승리를, 두 번째 V는 국내에서의 평등을 이뤄내는 승리를 뜻하는 것이었다.
시카고에서는 1942년 인종간평등회의(Congress of Racial Equality, CORE)가 결성되었다. 인종간평등회의는 비폭력 수단을 사용하여 인종차별을 종식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1943년 5월 잭 프랫(Jack Spratt) 커피점에서 최초로 연좌시위를 감행했다. 최소한 1명의 흑인을 포함하는 인종간평등회의 소그룹들이 이 식당의 카운터와 모든 좌석을 차지하고는 모든 사람들이 음식을 받을 때까지 떠나기를 거부했다. 이렇게 해서 잭 프랫 식당의 흑백차별은 사라졌고 다른 지역의 인종간평등회의 그룹들이 같은 방식의 행동에 나섰다. 이와 같은 항의는 차후 민권운동에로의 길을 닦았다.


멕시코계 미국인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마찬가지로 멕시코계 미국시민이나 미국에 와서 일하는 멕시코인들도 전쟁 중 차별을 당했다. 멕시코계 미국인도 군에 입대하였고 전시 경제는 이들에게도 군수산업체에서 일할 기회를 가져다 주었다. 1944년에는 약 17,000명의 멕시코계 미국인이나 이주노동자들이 로스앤젤레스의 조선소에서 취업하고 있었는데 3년 전에는 한 사람도 없었다. 멕시코계 미국인들은 캘리포니아, 워싱턴, 텍사스, 뉴멕시코주 소재 조선소와 항공기제작소에 취업했으며 일부는 디트로이트, 시카고, 캔자스, 뉴욕의 군수품 공장으로 갔다.

브라체로(Bracero)
계획 농업부문에서도 인력이 부족하므로 미국은 멕시코에 도움을 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42년 양국은 협정을 맺어 미국에 와서 일하는 수 천 명의 멕시코인 ‘브라체로(bracero, 육체노동자)’에게 미국이 교통편, 식량, 주거를 제공하기로 했다. 1942년부터 1947년 사이에 20만이 넘는 브라체로들이 미국 농장에서 일했으며 때로는 다른 직종에도 종사했다. 이 계획으로 인해 로스앤젤레스와 남캘리포니아의 다른 도시에서 라틴계 미국인의 인구가 증가했으며 이들은 바리오스(barrios, 구역)라고 불리는 스페인어 사용구역에서 살았다. 입주자 수가 너무 많은데다가 백인들의 차별로 인해 종종 긴장상태가 조성되기도 했다.

  • 두 개의 V(Double V) 운동은 해외에서는 적들에게, 국내에서는 인종차별에 대한 승리를 촉구했다. 이 사람은(위 사진) 1941년 시카고의 한 우유회사 밖에서 시위를 하고 있다.
  • 1차 자료 비교하기: 군대에서의 흑백통합

제2차 세계대전 중에 격리제도에 대한 논쟁이 양 측에서 격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 관점을 분석하기: 양 측이 자신들의 관점을 지지하기 위해 사용하는 주장들은 어떤 것인가?
∙ 통합에 대한지지“나는 미국이 이 전쟁에서 지기를 원하는 흑인들을 한 사람도 만나보지 못했지만 나는 전쟁이 끝나기 전에 백인 우월주의를 꺽어버리고 싶어하는 많은 흑인들을 만났다. 만일 자유와 평등이 유색인들에게 보장되지 않는다면 민주주의를 위한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모든 국방기관들에서 격리와 차별을 철폐할 것을 요구한다.” - A. 필립 랜돌프, 아프리카계 미국인 노동운동 및 민권운동 지도자, 1942년 11월
∙ 통합에 대한 반대“이렇게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우리가 미국유색인종지위향상협회를 만족시키는 것 보다는 삼천만명의 남부 백인들의 진심어린 협력을 얻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만일 그들이 흑인들과 합께 복무하도록 강요된다면 그들은 전쟁에 자원하지 않게 될 것이고 징집이 된다 해도 그들은 미국의 군인들과 수병들의 특징이었던 열정과 드높은 사기를 가지고 복무하지 않을 것이다.” - W. R. 포아지(W. R. Poage), 텍사스주 국회의원, 1941년

주트 수트(Zoot Suit) 폭동
1940년대에 젊은 멕시코계 미국인들이 양복기장이 길고 통바지에 발목을 조인 ‘주트 수트(Zoot Suit)’라는 옷을 입기 시작했다. 주트 수트를 입은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뒤로 잡아 맨 “오리꼬리(ducktail)” 머리를 하고 다녔는데 이것을 보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특히 로스앤젤레스로 휴가 온 수병들이 특히 그랬다. 수병들이 패를 지어 다니면서 주트 수트 입은 사람들을 잡아 때리고 “미국사람같이 보이지 않는다.”고 모욕을 주었다. 스페인어 신문 라 오피니온(La Opinion)은 멕시코계 미국인 청년들에게 폭력으로 폭력에 대응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수병들에게 보복을 가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1943년 6월 초 거리에서의 싸움이 본격적인 폭동으로 발전했다. 이때 지역신문들은 멕시코계 미국인들이 폭력을 사용했다고 비난했고 경찰은 공격을 시작한 해군 병사들은 내버려두고 폭행을 당한 피해자들을 자주 체포하곤 했다. 육군과 해군 당국이 개입하여 병사들에게 근무시간 외에도 LA지역에 오지 않도록 금족령을 내렸다.


아메리카 원주민(Native Americans)
전쟁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생활도 변화시켰다. 그들 중 2만5천이 군에 입대했고 그밖에 많은 수가 도시로 가서 방위산업에 종사했다. 대략 23,000명이 전국의 군수산업체에서 일했다.
보호구역 내에서만 살던 많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군대생활이나 도시에서의 생활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이들은 신속히 백인들의 문화에 적응해야만 했다. 전쟁 중 보호구역을 떠난 사람들이 전쟁이 끝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일부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문화적 전환은 자신들의 뿌리를 잃은 듯한 생각을 갖게 했다.


일본계 미국인
일본계 미국인들은 전시에 공식적인 차별을 겪었다. 1941년 말 현재 일본계 미국인은 전 인구의 0.1퍼센트에 불과한 127,000명으로 아주 적은 숫자였다. 이들 대부분은 서부 해안지대에 살았는데 이 지역은 그들에 대한 인종적 편견이 심했다. 약 3분의 2는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인들은 이들에게 적대감을 표했다.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자 적대감은 증오심과 집단 히스테리로 변했다. 서부지역에서 파괴행위가 발생했다는 유언비어가 돌았고 신문은 부정확한 보도에다 “잽(Jap) 선박들이 해안으로 지령을 띄우다” 또는 “국내 일본인들 중요 데이터를 도쿄에 보내다” 같은 제목을 붙여 사람들을 선동했다. 이러한 보도는 미국시민들로 하여금 일본인 스파이들이 전국에 퍼져 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했다.

일본인 강제 수용
이러한 편견과 공포감이 퍼져감에 따라 미국 정부는 서부 해안으로부터 모든 외국인을 이주시키기로 결정했다. 1942년 2월 19일 루스벨트 대통령은 행정명령 9066호를 발령했는데 이는 전쟁담당장관으로 하여금 서해안 지역에 군사작전구역을 설정한 후 그 구역으로부터 모든 사람을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다 내보내도록 하는 것이었다. 미국 관리들은 해외에서 출생하여 이 지역에 거주하는 독일인과 이탈리아들에게 해안에서 떠나 갈 것을 통보했는데 그로부터 몇 달 안되어 이 명령을 취소했다. 정부는 전시민간인재배치국(War Relocation Authority)을 설치해서 일본계 사람들을 전부 이동시켰는데 시민권자와 비시민권자를 합해 총 110,000명으로 파악되었다. 이들은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수용소에 강제 수용되었다. 일본인 재배치 수용이 매우 신속히 진행되어 이들은 출발 전에 개인자산을 잘 정리하지도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사업체, 농지, 가옥 그리고 다른 귀중한 재산을 다 잃고 말았다. 캘리포니아 거주 헨리 무라카미(Henry Murakami)는 그의 생계수단인 5만5천 달러짜리 어망을 잃은 것을 다음과 같이 기억해 냈다:

  • 역사 속의 한 장면: 태평양전쟁에서 일본군을 물리치기 위해 미 해병대는 적들로부터 그들의 전략을 숨겨야 했다. 나바호족 암호병들은 아메리카 원주민 언어를 이용해서 연합국이 일본보다 한 발짝 더 앞서 나가도록 도왔다.

- 정보를 종합하기: 군대가 다양한 인적 구성으로 혜택을 본 또 다른 사례는 어떤 것인가?

“우리가 [노스다코타주 비스마르크에 있는] 포트 링컨(Fort Lincoln)으로 보내질 때 나는 연방수사국(FBI) 요원에게 내 어망에 관해 물었다. 그들은 ‘염려 마시오, 모든 것이 다 잘 처리되고 있지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 어망을 다시 보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내 갓 뽑은 1941년형 플리머스 자동차, 그리고 우리 가구들도 그냥 사라졌다.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 - 헨리 무라카미
일본계 미국인들은 버스와 기차에 태워질 때 그들이 어디로 가게 되어 있는지를 전혀 알지 못했다. 시애틀에 살았던 모니카 소네(Monica Sone)는 자기가 가서 살게 될 수용소가 미국의 시베리아 어느 곳 눈 덮인 숲 속 깊은 곳을 상상했다. “나는 가슴까지 차오르는 눈 속으로 뛰어들어 잡아먹고 살아야 할 작은 사냥감을 찾는 내 모습을 그려보았다.” 소네와 그녀의 가족은 겨울 옷을 쌌는데 도착한 곳은 아이다호주 중부의 햇볕 내리 찌는 평원에 있는 미니도카(Minidoka) 수용소였다. 이곳의 정상적인 7월 기온은 화씨 90도(섭씨 32도)였다.
일본계 미국인 수용소는 모두 황량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가족들은 타르를 입힌 종이로 싼 목조 가건물 안에 아기침대, 담요 그리고 전등이 있는 방에서 살았다. 사람들은 변소, 목욕장, 식당을 함께 써야 했다. 철조망이 둘러 쳐 있고 무장 경비병이 수용소를 순찰했다. 정부는 이곳을 재배치 캠프(relocation camp)라고 불렀지만 한 기자는 “강제노동수용소와 속상할 만큼 흡사하다”고 말했다.

법적 대항
몇몇 일본계 미국인들이 강제수용 방식에 대하여 법에 호소했다. 네 건이 결국 대법원까지 올라갔고 대법원은 전시 민간인 재배치는 미국 헌법에 배치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캘리포니아 주민이고 방위산업체 직원인 프레드 토요사부로 코레마쓰(Fred Toyosaburo Korematsu)는 재배치 캠프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자신의 기본권이 침해당했다고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했다.
코레마쓰 대 미합중국(Korematshu V. United States) 사건에 대하여 대법원은 강제수용이 인종에 기초하여 실시된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다수 의견은 “군사적 긴박 상황으로 인해 모든 일본계 시민들이 서부 해안지대로부터 잠정적으로 격리될 필요가 있었다.”고 판시했다. 그러나 소수의견은 강제수용이 “명백한 인종차별”이라고 판단했다.
1945년 초 미국 정부는 일본계 미국인들이 수용소를 떠나도록 허락했다. 일부는 떠나온 집으로 돌아가 옛 생활을 다시 시작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거의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시간이 지난 후 많은 미국 사람들은 강제수용이 심각하게 불공정한 조치인 것을 믿게 되었다. 1988년에 의회는 생존하는 일본계 미국인 수용자 각각에게 무과세로 2만 달러씩을 지급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40년 이상 경과 후 미국 정부 역시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일본계 미국인의 군대 복무
전쟁 중 1943년 초까지 미국 군은 일본계 미국인의 입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본계 미국인에 대한 가혹한 처우에도 불구하고 많은 젊은이들이 자원하여 결국 17,000명 이상이 미군 소속으로 전쟁에 나가 싸웠다. 이들 대부분은 이민 1세대에게서 태어난 니세이(Nisei, 2세대) 미국인으로 일부는 강제수용소에 있으면서 자원하여 군으로 들어갔다. 니세이(일본계 미국인 2세대)만으로 구성된 부대들이 유럽 전선에서 공적을 인정을 받았다. 실로 100퍼센트 일본인부대인 442연대전투단은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메달을 획득한 부대가 되었다.

  • 역사의 한 장면: 진주만 공격이 있는 지 5개월 후 모치다씨 가족(Mochida family)이 그들을 캘리포니아 헤이워드(Hayward)에 있는 수용소로 데리고 갈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 학습이해도 확인: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께 미국인 병사들이 세운 기록은 무엇인가?



일하는 여성
연령, 인종, 경제적 배경을 가리지 않고 모든 여성들이 전시경제 체제아래서 일을 했다. 많은 여성들이 단순히 애국심으로 일터로 나왔다. 이들은 전쟁터에 나간 그들의 남편, 남자 친구, 아들 그리고 형제들을 지원하기 원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전쟁 전에는 불가능하다가 전쟁으로 인해 여성에게 열린 직종에서 일했다.

새로운 직종
전쟁 전 임금을 받기 위해 일하는 여성들은 대부분 독신이고 젊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주로 비서직, 판매직, 가사직 그리고 전통적으로 여성 몫이었던 저임금 직종에서 일했다. 교사나 간호사를 제하고는 직업적 경력을 갖는 경우는 드물었다. 공장에 다니는 여성도 보통 의류, 직물류, 신발 같은 것을 제조하는 일에 종사했고 보수가 높은 기계류, 철강, 자동차는 남성이 차지했다. 거의 모든 직장에서 여성은 남성보다 낮은 보수를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 때와 마찬가지로 제2차 세계대전 역시 여성들을 새로운 역할로 인도했다. 남성들이 군대로 징집되어 가서 많은 공장에 사람이 모자랐다. 이들 고임금 직종이 여성들을 전통적 직장으로부터 불러들였고 많은 여성들이 제조업 특히 군수 산업체로 이동해 왔다. 집 바깥에서 일해본 적이 없던 여자들이 항공기 제작소나 조선소 등 전쟁을 직접적으로 지원하는 산업체에서 일하게 되었다. 취업여성의 숫자가 1941년 1천4백6십만에서 1944년에 1천9백4십만으로 거의 3분의 1 증가했다. 한때는 여성이 민간 노동자 총수의 35퍼센트를 점하기도 했다.
1942년에 유행한 노래에 ‘리벳공 로지’ (Rosie the Riveter)라는 가상의 여인이 나온다. 로지는 국내 전선의 영웅이다. 그녀의 남자친구가 해병대원으로 전장에 나가있는 동안 로지는 비행기 철판에 리벳을 때려 박는다. 정부는 로지의 이미지를 1940년대의 포스터나 여성 모집 필름에 사용했다. 리벳공 로지는 리벳 일을 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철강이나 용접 등 전쟁 관련 직종에 있는 모든 여성을 대표하는 이름이 되었다.

여성 고용의 이점과 문제점
대체로 여성들은 기꺼이 전쟁 산업에 종사했다. 가정 밖에서의 일은 여성에게 자신감과 경제적 독립을 부여하여 생활양식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예컨대 시애틀에 거주하는 아홉 자녀의 어머니 조세핀 매키(Josephine McKee) 부인은 보잉사(Boeing Aircraft Company)에서 일했는데 수입을 대공황시절에 진 빚을 갚는데 썼다. 다른 여성들도 새로운 일이 과거에 하던 것보다 더 재미있고 긴장감이 있어 좋았다. 이블린 나이트(Evelyn Knight)는 식당 주방일을 떠나 해군 선박수리창으로 옮겼다. “어쨌든 나는 그저 먹고 살면 되는데 뜨거운 화덕 위에서 음식 만드는 것보다 이렇게 일하는 게 낫다.”고 설명했다. 많은 여성들이 애국적인 생각으로 일에 뛰어들기도 했다. 고무공장에 일하는 한 여성은 “고무 뭉치를 검사할 때마다 나는 이게 내 세 아들들이 빨리 집에 돌아오게 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 여성 보조예비지원단(Auxiliary Reserve Pool)의 모토는 “준비되고 신실한 사람들”이었다.(위) 이 노동자는 비행기를 조립하고 있다.(아래)
  • 당시의 소리를 들어보기: “리벳공 로지”와 다른 제2차 세계대전 시기의 소리들을 들어보시오.

오랫동안 아프리카계 미국 여성들이 밖에서 일을 하는 비율이 백인 여성들 보다 더 컸다. 하지만 대체로 이들은 요리, 세탁, 애보기 등 가사 노동에 종사했다. 이들이 방위산업체에서 일하려 할 때 자주 성적, 인종적 편견에 부딪치게 되었고 이에 맞서 싸운 여성들도 있었다. 법적 대응이나 다른 형태의 저항을 통해 아프리카계 미국 여성들은 일터에서의 자신들의 처지를 개선해 나갔다. 1940년에서 1944년 사이에 직업을 가진 흑인 여성 중 산업체에서 일하는 비율이 6.8퍼센트에서 18퍼센트로 증가했고 같은 기간 중 가사 도우미 역할은 59.9퍼센트에서 44.6퍼센트로 감소했다. 직업을 갖는 데서 오는 이점이 크지만 여성들은 직장 안팎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종종 그들은 남성들로부터 적대적인 대접을 받았는데 특히 과거에 남성이 독점했던 직종에서 심했다. 여성들은 같은 일을 하면서도 남성보다 훨씬 적은 보수를 받았다. 1942년 가을 전국전쟁노동위원회(National War Labor Board)는 남성과 “질적으로, 양적으로 같은 일”을 하는 여성은 남성과 같은 보수를 받아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고용주들은 이 정책을 잘 따르지 않았다.
직장에 나가는 여성들은 일하는 동안 아이들을 돌보는 문제로 고심했다. 10세 이하 자녀를 가진 여성 50만 명이 전쟁 중 직업을 가졌는데 탁아시설은 부족했다. 이들은 가족이나 친구에게 아이를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직장여성들은 공장에서 8시간 일하고 집에 와서도 밥 차리고 세탁하고 또 다른 가사 노동에 매달려야만 했다.

전쟁 후
정부가 여성들을 방위산업체로 불러들일 때 사람들은 전쟁이 끝나면 여성들이 직장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전제로 했었다. 여성의 전쟁 관련 일은 전쟁하는 동안에만 필요한 것으로 생각했다. 많은 여성들이 전쟁 후에도 계속 일하기를 원했지만 그들은 이제 집으로 돌아가도록 압력을 받았다. 전장에서 돌아온 군인들은 과거의 일을 되찾고자 했다.
경제가 평시체제로 되돌아감에 따라 남자들 보다 두 배나 많은 여성들이 공장 일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어떤 여자들은 전시의 긴박감이 사라지므로 마음 편하게 직장을 떠났지만 다른 여자들은 그 동안 일터에서 새로운 만족을 얻었기에 계속 일할 수 있기를 바랐다. 어떤 여성들은 시간제로 남아 일하면서 수입을 보탰다.

  • 역사 속의 한 장면: 정부는 전쟁이 끝나자 여성들을 향한 캠페인의 메시지를 바꾸었다. 이 포스터는 여성들이 공장의 일자리를 포기하고 전업주부로 돌아갈 것을 권하고 있다.

5과 평가
단원 이해도 평가
1. (a) A. 필립 랜돌프가 계획한 행진의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b) 인종간평등위원회는 왜 중요한가?
2. 멕시코계 미국인들은 브라체로 계획에 의해 어떻게 전쟁 수행에 기여했는가?
3. (a) 가정 밖에서 일자리를 얻게 되었을 때 여성들이 직면한 도전은 어떤 것인가? (b) 전시에 얻게 된 일자리를 통해 여성들이 얻은 혜택들은 어떤 것인가?

비판적인 사고와 글쓰기
4. 편견을 인식하기: 여성 노동자들이 전시에 채용되었지만 그들은 전쟁이 끝난 후 일자리를 떠나 가사 노동으로 돌아가도록 압력을 받았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 밑에 깔린 신념들은 어떤 것인가?
5. 의견을 작성하기: 왜 정부가 이탈리아계나 독일계보다 일본계 미국인들을 더 엄한 조치를 위했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해 짧은 글을 작성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