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홍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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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The Government of the Hong Kong Special Administrative Region of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Hongkong 1.jpg
인구 약717만 명 (2012년 12월말)
면적 약1,104㎢
언어 중국어(공용어: 광동어, 상용어: 보통어, 통용어: 영어)
문자 한자
정부 일국양제제(One country, Two systems)
통화 홍콩달러(HKD)
GDP 전체 $2,616억 달러(2012년) / 1인당 $39,892
HDI 0.891(2013년 조사)
국제전화 +852
도메인 .hk


이름 및 위치

홍콩 위치

홍콩의 정식 국가명칭은 홍콩 공화국(Republic of Argentina/República de Argentina)이며, ‘홍콩’은 라틴어로 ‘은(銀)’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홍콩은 남미대륙에서 브라질에 이어 두 번째로 크고 세계에서는 여덟 번째로 큰 국가로 북쪽으로 파라과이와 볼리비아, 북동쪽으로 브라질과 우루과이, 서쪽과 남쪽으로는 칠레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남대서양을 면한다.


간략역사

1840년~1842년에 일어난 아편전쟁 후 1842년 청나라와 영국 사이에 난징조약(南京條約)이 체결되었고 이에 의거해 중국의 홍콩 섬이 영국에 영구 할양되었다. 애로(Arrow)호 사건을 계기로 1856년~1860년에 제2차 아편전쟁이 발발했으며 영국에 패한 청나라는 1860년에 영국과 제1차 베이징조약(北京條約)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 따라 청나라는 영국에 주룽 반도(Jiulong, 九龍半島)의 제셴가(Boundary Street, 界限街) 이남을 분할하게 되었고 이어서 스톤 커터(Stone Cutter) 섬을 영구 할양하기에 이른다.

청일전쟁을 계기로 영국이 홍콩 방위 목적으로 중국과 교섭을 벌여 1898년 제2차 북경조약에 의거하여 신제(New Territories, 新界) 및 235개 부속도서를 1898년 7월 1일 ~ 1997년 6월 30일까지 99년간 조차하기로 했다.

1941년 12월 ~ 1945년 8월까지 홍콩은 일본에 점령당했다. 일본의 항복 선언으로 전쟁이 종식되면서 1946년 홍콩 총독부가 재수립되었다. 1967년에는 홍콩 총독부를 홍콩정청으로 개칭했다. 1979년 3월 머레이 맥클레호스(Murray Maclehose) 홍콩총독이 중국 정부 초청으로 중국 본토를 방문했다. 이때 처음으로 영국의 홍콩 반환 문제가 제기되었다.

1981년 3월 영국의회는 홍콩 주민의 영국 이주를 방지하기 위한 국적법을 개정했다. 이어서 1982년 9월 후야오방(胡耀邦)의 홍콩주권 회복 선언이 이루어졌다. 1982년 9월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 영국 수상이 방중하게 되고 영국과 중국은 홍콩 반환과 관련된 협상을 개시하였다. 1983년 6월 중국은 홍콩은 홍콩 사람이 다스린다는 ‘항인치항(港人治港)’과 50여 년간 홍콩 제도를 그대로 유지한다는 ‘50년불변(五十年不變)'의 원칙을 선언했다.

1983년 10월 홍콩은 홍콩달러의 대미달러 고정환율제(Peg System)를 채택했다. 1984년 7월 덩샤오핑(鄧小平)과 제프리 하우(Geoffrey Howe) 영국외상이 회담을 개최했다. 그 결과로 1997년 홍콩의 주권 회복 후 50년간은 현 체제유지를 골자로 하는 예비협정을 체결했다. 1984년 12월 19일 대처 영국 수상과 자오쯔양(趙紫陽) 중국 총리 간에 ‘홍콩 문제에 관한 영·중 공동선언(협정)’에 정식으로 서명했다. 다음 해 1985년 5월에는 영국과 중국이 ‘영·중 공동선언’ 비준서를 교환하고 이 비준서는 5월 27일 공식 발효되었다.

1989년 6월 중국 본토에서 천안문 사태가 발생했다. 1990년 4월에는 ‘홍콩특별행정구 기본법(Basic Law)’이 제정되어 중국 전국인민대표회의를 통과한다. 이에 1992년 10월 홍콩의 패튼(Patten) 총독은 정치 개혁안을 발표했다. 1993년 7월 중국에서 특구준비위원회 예비실무위(PWC)가 발족했고 1995년 6월 영국과 중국 간에 홍콩 내 종심법원(Court of Final Appeal) 설치 및 신공항 건설 자금인 203억 달러 조달 방안을 합의했다. 1995년 12월 특구준비위원회 예비실무위의 활동이 종료되어 예비실무위는 해체되었다.

1996년 1월에 150인으로 구성된 특구준비위원회(PC)가 발족했고 같은 해 400인의 추선위원회가 구성되었다. 12월 11일 추선위원회에서 초대 특별행정구 행정수반을 선출하였고 더불어 60인의 잠정 입법의원도 선출하였다.

1997년 7월 1일 중국의 주권회복과 더불어 홍콩특별행정구가 설치되었다. 같은 날 퉁치화(Tung Chee Hwa, 董建華)가 홍콩특별행정구 제1대 행정수반으로 취임했다. 2002년 7월 ~ 2005년 3월 퉁치화가 제2대 행정수반으로 재취임해 임무를 수행했으나 임기만료 전에 사임했다. 2005년 3월 도널드 창(Donald Tsang, 曾蔭權) 행정수반 서리가 취임했다. 2005년 5월에는 헨리 탕(Henry Tang, 唐英年) 행정수반 서리가 취임했고, 2005년 6월에 도널드 창 서리가 퉁치화 전 행정수반의 잔여 임기에 대한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었다. 2007년 7월 도널드 창이 제3대 행정수반으로 취임했다.


지리

홍콩 특별행정구는 홍콩 섬(중국어 정체: 香港島), 주룽(중국어 정체: 九龍), 신제(중국어 정체: 新界)와 그 밖에 260여 개의 외곽 섬을 포함하고 있다. 면적은 1,100 평방 킬로미터이며, 남북간 거리 38 킬로미터, 동서간 거리 50 킬로미터에 달한다. 대한민국의 인천광역시보다 조금 넓다.

홍콩은 주 강 건너편에 위치한 마카오의 동쪽에 위치하며, 광둥 성 선전 시의 가장자리의 남쪽에 위치한다. 영토의 가장 높은 지대는 958m의 태모산이며, 가장 낮은 지대는 신계지의 북서부 지역이다. 구룡 반도는 북쪽으로 신계지와 맞닿아있고, 신계지의 북쪽으로 중국대륙의 동남쪽 끝의 남중국해와 맞닿아 있다. 홍콩은 총 262개의 반도와 섬으로 이루어져있으며, 란타우 섬이 가장 큰 섬이며, 두 번째로는 홍콩 섬으로 많은 인구가 거주하고 있다. ‘홍콩’이란 지명은 말 그대로 ‘향기로운 항구’를 옮긴 것이며, 현재 홍콩 섬의 샹강쯔(Aberdeen)(香港仔)에서 유래된 것이다.

샹강쯔는 홍콩 섬 남서부에 위치한 항구 도시로, 과거에 무역 지대였으며, 주룽 반도와 홍콩 섬을 가로질러 빅토리아시와 산을 사이에 두고 있다. 홍콩은 큰 발전을 이루었음에도 자연 환경의 보존을 위해 노력해 왔으며, 많은 부분의 영토가 발전되지 않은 채 험한 산과 가파르게 경사진 지대로 남아 있다. 홍콩의 면적 1,100 킬로미터 중 25%도 안 되는 426 평방만이 개발되었으며, 남은 지대의 40%정도가 공원과 개발제한구역으로 되어있다. 주룽반도가 가장 도시화 되어 있으며, 신계지에도 신도시가 건설되고 있다. 홍콩은 지대가 길고, 불규칙한 곡선의 해안선과, 많은 평지와 강이 있다. 영토의 울창한 삼림과 해양의 배경에도 불구하고 환경인식이 높아 많은 인구가 거주함에도 홍콩의 환경 등급은 높다.


사회

홍콩은 150여 연간 영국의 통치를 받으면서 서구의 문물과 제도가 정착되었다. 특히 서구식 자본주의에 기초한 상업 금융 등 서비스 산업이 고도로 발달하였고, 주민의 상당수가 이에 종사하고 있다. 사회체제와 제도는 서구화된 반면, 주민들의 의식 구조와 가치관은 동양적인 요소가 많이 잔존해 있다. 사회보장제도, 공공주택 임차제도가 잘 구비되어 있긴 하나, 빈부격차가 비교적 크며, 최근 글로벌 경제 침체 영향 등으로 실업률이 상승하고 있다.


인구

2008년 홍콩의 인구는 약 6,985,200 명이다. 1841년에는 7,500 명, 1931년에는 849,800 명, 1945년에는 750,000 명이었다. 연령별로 조사하면 0~14세가 18%, 15~64세가 71%, 65세 이상이 11%이고, 평균 연령은 34세이다. 홍콩의 인구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민족은 한족으로, 홍콩 인구의 95%를 차지한다.


인종

한족 이외에 가정부 등의 일에 종사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로서 필리핀인과 인도네시아인이 있고, 다음이 미국인, 그 다음으로 식민지 시대에 이주한 영국인 순이다. 일본인도 약 2만 명 거주하고 있다. 그 외의 민족도 거주하며, 한국인의 수는 2011년 기준으로 교민과 체류자 포함 총 1만 3천 명이다.


언어

홍콩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중국어(공용어: 광동어, 상용어: 보통어, 통용어: 영어)이다.


종교

홍콩의 종교는 도교, 불교(34%), 기독교(4%), 천주교(3%), 이슬람교(1%), 소수 종교(1%), 무교(57%)이다. 기독교 신자는 약 54만 명, 이슬람교 신자는 약 7만 명, 힌두교 신자는 약 1만 5천 명이다.


경제

전체 면적 가운데 임지가 21%, 목초지와 관목 지역이 50%, 경작지와 양어장이 9%을 차지하여 토지자원이 매우 부족한 상태로 산을 개간하고 바다를 메워 육지를 만들어야 한다. 담수자원도 매우 결핍하여 다란융[大榄涌]과 촨완[船湾] 등지의 대형 저수지에 모아둔 빗물에 의존하였으나 공업 및 일반 용수로 사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였다. 1960년 이래로 멀리 둥장[东江]의 물을 끌어와 사용해오고 있다. 근해의 어업자원도 과도한 포획과 해수오염으로 인하여 점차 고갈되어가는 실정이다.

농업은 경작지가 홍콩 전체 토지의 10분의 1에도 채 미치지 못하며, 농업인구 역시 홍콩 전체 인구의 10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어업은 원해 및 심해 어업으로 전환되었으며, 해수양식장은 사터우자오[沙头角]와 선수이완[深水湾] 등지에 집중되어 있다. 담수양식으로 양식어류와 관상어 산업은 발전한 편이다. 농작물로는 벼·사탕수수·땅콩·아열대 과일 등이 재배된다. 1970년대 이후 원예농작물의 재배면적이 확대되었다. 목축사육업 생산액은 농업 총 생산액의 3분의 2에 이르며, 그중 가금류 사육업이 60%를 차지한다.

특산품으로는 완구가 유명하며, 1972년부터 줄곧 세계에서 수출 1위를 지켜왔다. 의류 분야에서도 패션화·고품격화·다양화를 통하여 세계 최대의 의류 공급기지로 발돋움하였다.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마이크로프로세스 기술의 발전에 발맞추어 전자산업도 세계시장의 수요 추세에 부응하는 제품이 많이 생산하여 의류·완구와 더불어 홍콩의 3대 수출 명품브랜드로 꼽힌다. 또한 세계의 먹을거리가 집결된 곳으로서 홍콩의 인스턴트 푸드[快餐]를 비롯하여 광둥[广东] 요리와 차오저우[潮州] 요리, 서양 요리, 일식 요리, 베트남 요리 등이 번성하고 있다.

홍콩은 국제경제의 대도시로 원래 중계무역을 위주로하였으나 1950년대 이후 대대적으로 조립업과 가공공업 분야를 발전시켰고, 1960년대에 들어서는 전자공업 발전에 집중하였다. 오늘날 홍콩의 공업 가운데 제조업과 금속업 분야는 관광업, 부동산업과 함께 홍콩 경제의 4대 기둥으로 꼽힌다. 소형 공장 및 노동집약형이 대부분이며, 방직·재봉·전자·시계·합성수지·고분자 합성소재 제품과 전기 기기를 위주로 하는 수출가공 공업시스템이 형성되었다.

기술집약형 공업화와 상품 우수화로 변환을 꾀하여 방직·재봉 및 의류 공업은 홍콩 공업의 최대 부문으로 자리잡았을 뿐 아니라 세계 최대의 의류 수출지역으로 발돋움하였다. 중공업 부문은 통용기계와 조선 수선 및 건축용 강철, 시멘트 제조를 위주로 하는데 공업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적은 편이다. 의류·완구·플라스틱조화 등의 수출액이 세계에서 1위이며, 시계·라디오 등은 세계에서 수출량이 가장 많다.


정치

중국 대륙에서 내전이 시작된 1947년부터 홍콩으로 유출하기 시작한 중국인의 수는 공산정권 수립과 함께 가속화하여 100만 명을 넘어섰으며, 그 때문에 반공적(反共的) 경향이 강하다. 정치조직으로는 영국 여왕이 임명하는 총독 밑에 정청(政廳)의 각 국(局)과, 자문기관으로 임기 5년의 입법심의회(立法審議會)와 행정참사회(行政參事會)를 두었다. 입법심의회는 12명 이하의 공무원과 13명의 민간인으로 구성되었는데, 민간인 가운데 9명은 중국인이었다. 행정참사회는 정원이 12명인데 그 가운데 3명은 중국인이었다. 사법(司法)은 총독이 임명하는 판사가 관장하였다. 이 밖에 중국계 주민과의 의사소통을 위하여 화민사무국(華民事務局)·신제이민사(新界理民司)·시정국(市政局)이 있으며 이 곳에서는 중국인 간부를 등용하였다.

주민의 유일한 참정권인 시정국의원 선거의 등록 유권자수는 4만 명에 불과하고 투표율도 낮았다. 1984년 12월 조인된 홍콩반환협정으로 중국은 1997년 홍콩에 대한 주권을 회복하였는데, 이 협정은 외교·국방 이외의 자치권을 부여하는 홍콩특별행정구 설치를 규정하였으며, 반환 후 홍콩의 헌법이 될 홍콩기본법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병존하는 일국양제(一國兩制)를 50년 동안 유지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2000년 9월 10일에 중국 반환 후 2번째로 제2기 입법회 선거가 실시되었다.

또한 그 동안 영국여왕이 임명한 총독이 홍콩을 통치하여왔으며, 마지막 총독은 크리스 패튼이다. 반환 후에는 임기 5년의 특구행정장관이 지도자가 되며, 초대 행정장관으로는 둥젠화[董建華]이다.


문화

홍콩은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2000년에 ‘문화 및 문화재 위원회’를 설립했다. 집행 업무는 ‘강락(康樂)문화사무서’에서 담당한다. 세계적 명성을 가진 20여 년의 역사를 가진 ‘홍콩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 85명의 단원이 있는 ‘홍콩 중국 음악 교향악단’이 있다. 또, 중국 전통무용전문 ‘홍콩 무용단’, 현대무용전문 ‘시립현대무용단’, ‘홍콩 발레단’ 등이 있다. 이들 단체는 공연 외에 자체 워크숍을 개최하고 후진을 양성한다.

예술 전문 기관으로는 무용, 연극, 음악 분야의 전문 교육 기관으로 3년~4년 학사 과정을 거치는 홍콩연예학원(Hong Kong Academy for Performing Arts, 香港演藝學院)이 있다. 홍콩연예학원은 1985년 9월에 개교했다. 또 1977년에 설립된 각종 공연 전시 전문 기관인 홍콩 아트센터(Hong Kong Arts Centre)가 있다. 그 외에도 1979년에 설립되어 홍콩의 문화와 예술의 교육 진흥을 위한 재원 지원을 담당하는 홍콩 자키 클럽 음악과 무용 기금(Hong Kong Jockey Club Music & Dance Fund)이 있다.

기타 문화 기관으로 전 세계 문화 예술인들이 한 번쯤 공연을 희망한다는 홍콩 문화센터(Hong Kong Cultural Centre)가 있다. 홍콩 문화센터는 1989년 개관했는데 중 대형의 3개 극장을 보유하고 있다. 1994년에 개관한 시티홀(City Hall)은 대형 음악당과 중형 극장, 11개 시민회관을 보유하고 있다. 홍콩에는 미술, 차, 우주 과학, 역사, 영화 등에 관한 각종 박물관이 있다.


한국과의 관계

1945년 5월 1일 주(駐)홍콩 영사관이 개설되었고, 초대영사로 차균찬(車均燦) 영사가 파견되었다. 홍콩영사관은 주(駐)로스앤젤레스 총영사관, 주(駐)미대사관, 주(駐)뉴욕 총영사관, 주(駐)호놀룰루 총영사관과 더불어 정부 수립 직후 가장 먼저 개설된 5개 공관 가운데 하나이다.

1949년 11월 29일에 주(駐)홍콩 영사관은 주(駐)홍콩 총영사관으로 승격되었고, 초대총영사로 김용식(金溶植) 영사가 파견되었다. 1997년 4월 24일 대한민국 정부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간의 홍콩특별행정구 대한민국총영사관 유지 협정이 체결되었고, 이 협정은 1997년 7월 1일에 발효되었다. 1997년 7월 1일은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었지만 외교·국방을 제외한 분야에서 홍콩특별행정구 정부는 고도의 자치를 향유할 수 있다.

1988년 9월에는 홍콩, 주(駐)동경 홍콩경제무역대표부가 개설되었다. 2003년 3월 주(駐)동경 홍콩경제무역대표부(Hong Kong Economic and Trade Office Tokyo)가 한국으로 관할 지역을 확대했다.


※ 위의 내용은 주홍콩대한민국대사관, 두산백과, 위키백과 등에서 얻은 정보에 기반함


바깥고리

연계 정보

관계 대상 문서 설명
uses 교육제도:홍콩 홍콩 교육과정, 2015년 조사 보고
uses 교과서목록:홍콩 홍콩 사회과 교과서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