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미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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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Myanmar)
Mya 1.jpg
인구 6,098만 명(2013년 4월 정부 발표)
면적 676,578㎢
언어 미얀마어, 소수민족 고유어
정부 공화국
통화 챠트(Kyat)
GDP $ 594.27억(2013년 추정치)
국제전화 +95
도메인 .mm


이름 및 위치

미얀마 위치

미얀마는 두 차례의 국명 변경이 있었다. 1948년 1월 4일 영국에서 독립하면서 국명을 ‘버마연방(Union of Burma)’이라 정했으나 1988년 9월 군사 정부가 등장해 1989년 6월 ‘미얀마연방(The Union of Myanmar)’으로 개칭하였다. 그리고 2010년 10월 21일 신헌법의 규정에 따라 ‘미얀마연방공화국(The Republic of the Union of Myanmar)’으로 다시 개칭하였다.

미얀마는 인도차이나반도 북서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동경 92°~102°, 북위 10°~28°에 위치하고 있다. 남쪽으로는 안다만(Andaman) 해와 마타반(Martaban) 만, 남서쪽으로는 벵골(Bengal) 만을 접하고 있다. 그리고 동쪽으로는 타이(1,800㎞), 라오스(235㎞), 북쪽으로는 중국(2,185㎞), 서쪽으로는 인도(1,463㎞) 및 방글라데시(193㎞)와 접경하고 있다. 접경 지역의 총길이는 5,876㎞에 이른다. 해안선의 길이는 2,051㎞에 달하며, 면적은 676,577㎢이다.


간략역사

미얀마에 사람이 거주한 시기는 약 5천 년 전 석기시대로 아냐띠얀족이 에야워디강에 거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멸종되었거나 이후 이주자들에게 동화되어 지금은 그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 이후 미얀마로 이주해 온 종족은 인도네시아인으로 추정되는데, 이들도 이후 몽고족의 일파로 대체되었다.

서력기원의 시초에는 몽족이 싯따웅강 하류 지방에 정착하고, 인도로부터 농업기술과 힌두교·불교를 전수 받았다고 한다. 6세기경 몽족은 현재의 미얀마 하부에 중심을 둔 '뚜원나부미(황금의 땅)'라는 도시 국가를 건설했다. 버마족의 선조격인 표족(驃族)은 기원전 1세기부터 서기 800년까지 미얀마 중·북부에 도시 왕국을 건설했다. 대표적인 도시국가는 베익따노, 한린, 뜨예켓뜨야 등이다.

11세기가 되면서 에야워디강 중류 유역에 버마족의 버간 왕조가 일어나, 남쪽의 몽족 지역, 샨 고원까지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왕조는 1287년 몽골군의 침공을 받아 멸망하였다. 그후 미얀마는 타이계의 여러 종족(샨족·타이족)의 침입 등으로 어지러웠으나, 16세기가 되어 싯따웅강 중류의 따웅우에 버마족의 2차 통일왕조인 따웅우 왕조가 일어났다. 이 왕조는 1560년경 현재의 미얀마령을 넘어 타이 북부와 라오스까지도 판도에 넣고 1569년에는 태국 아유타야 왕조까지도 공략하였다. 그러나 이 왕조는 여러 차례에 걸친 외정(外征)과 내전으로 피폐하였으며, 17세기에는 삼각주지대의 반란으로 따웅우를 버리고 에야워디강 중류 유역의 잉와로 천도하였으나, 1752년 이곳까지 북상해온 몽족에게 멸망하였다.

얼마 후 버마족은 알라웅퍼야로 재집결되어 꽁바웅 왕조로 재탄생 하였다. 이 왕조는 몽족을 물리치고, 1755년 에야워디강 삼각주로 진출하여 몽족을 정벌했다. 이때의 승리를 기념하여 더공이라 불리던 도시가 랑군(‘전쟁의 끝’이라는 뜻으로 지금의 양곤)으로 개명되었다. 몽족의 최후 거점인 버고는 1757년 꽁바웅에 점령되고, 그후 몽족은 완전히 세력을 잃었다. 또한 이 왕조는 1767년 태국 아유타야 왕조를 완전 점령하는 등 강력한 국권을 보여주었으나, 19세기 들어 아시아로 진출한 영국과 충돌하게 되었다. 3번에 걸친 영국-미얀마 전쟁(1824~26, 1852, 1885)으로 결국 미얀마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고, 인도의 한 주로 편입되었다.

영국령 시대의 미얀마는 영국의 아시아 식민지 경영의 거점이 되었다. 영국은 특히 인도방면에 대한 식량 공급지로서 에야워디·싯따웅강의 삼각주 지대에 주목하여 이곳에 인도인을 이입하고, 또 버마족·까렌족을 이용하여 벼농사를 개발하였다. 그 결과 에야워디 삼각주는 1930년대에 세계 최대의 수출용 벼농사지대로 발전하여, 미얀마는 세계 제1의 쌀 수출국이 되었다. 영국은 또 미얀마에서 티크재를 벌채하여 유럽으로 수출하였고, 석유·텅스텐 광석 등도 개발되었다.

영국의 분할통치정책(divide and rule)은 버마족과 비(非)버마족간의 대립을 조장하였다. 예를 들어 까렌족(Karen)은 영국의 선교사들로부터 기독교를 수용하였고, 자신들의 영토를 꼬뚜래(Kohtoole: 백합의 땅)라고 명명하면서 독자적인 정체성을 형성해 나갔다. 독립 후 까렌족은 중앙정부에 가장 거세게 분리 독립을 요구한 소수종족이 되었다.또한 영국은 미얀마 경영의 중심을 랑군에 두고 그곳에 인도인 상인과 기업가를 초치하고, 공무원 등도 인도인을 채용하였으며, 또 구르카족·까렌족 등 비(非)버마족을 모집하여 군대를 만들어 미얀마를 다스렸다.

1920년대 들어 미얀마 민족주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웅산을 비롯한 양공대학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기존 승려 중심의 계몽 운동 성격을 초월하여 대영 식민 투쟁을 본격화 하기 시작한 것이다. 1940년대 초 민족주의자들은 일본을 끌여 들여 영국을 본국에서 내쫓는데는 성공하였으나 곧 일본의 파시스트적 합병에 반대하여 항일 운동을 벌였다. 2차 대전 이후 미얀마로 재진격한 영국과의 합의 끝에 1948년 1월 4일 버마 연방이 탄생했다. 그러나 독립 영웅 아웅산이 독립을 목전에 앞두고 정적인 우 쏘에게 피살당함으로써 지도력의 공백을 초래했다.

우 누를 총리로 하는 의회민주주의가 채택되었으나 네윈의 쿠데타가 있기 전까지 미얀마는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소수종족과 공산당 세력으로 인해 긴 내전을 겪어야 했다. 이미 1946년 7월 공산당 과격파 ‘적기(赤旗) 공산당’의 반란시 이미 시작되었고, 1948년부터 공산당 다수파(미얀마 공산당, 속칭 '백기 공산당')가 반란을 일으켰다. 1949년 까렌족이 독립을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키는 등 내전은 확대되었다. 우 누의 정치적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반파시스트인민자유연맹(AFPFL)도 1958년 청렴파(Clean)와 안정파(Stable)로 양분되었다.

우 누가 이끄는 미얀마 정부는 이러한 국내 안정을 배경으로 하여 복지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국영공장의 건설, 외국계 대기업의 국유화, 토지개혁 등을 통해서 경제개발을 이루려고 하였다. 그러나 게릴라전은 계속되고, 국가지도형 경제개발은 잘 진전되지 않았으며, 농촌에서의 토지개혁도 제대로 진전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1956년경부터 정부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아져서, 미얀마의 정국은 다시 불안해졌다. 거기에 반정부군측이 단결을 강화하여, 1959년 미얀마 공산당과 까렌족 좌파와의 제휴가 이루어져 내전이 다시 확대되고, 샨족·카친족 등의 민족자결 요구도 높아졌으며, 그중에는 무장 반란부대가 출현하기도 하였다. 우 누 정부는 이러한 사태를 수습하지 못하였고, 설상가상으로 여당마저 분열하는 등, 미얀마 정계는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초에 걸쳐 커다란 혼란 상태에 빠졌다. 이러한 혼란중에 1962년 3월 2일 장군 네윈이 이끄는 미얀마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정당활동을 정지시키고, 총리 우 누 등 많은 정치인을 체포함으로써 미얀마는 군정에 들어갔다.

1962년 3월 2일, 네윈(Ne Win)은 쿠데타를 일으켰고 곧 혁명평의회(Revolutionary Council)를 조직한 후 군 간부 정당인 버마사회주의계획당(BSPP)을 조직하여 국가를 장악하였다. 혁명평의회는 4월 30일 ‘버마식사회주의: 혁명평의회 노선의 성명서’에 이어 이듬해 1월 17일, 버마식사회주의의 실천 강령을 뒷받침하기 위해 ‘인간과 환경의 상호체계: 버마사회주의당의 노선’을 발표하였다. ‘버마식사회주의’는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제외하고 우 누의 복지국가론(Welfare State)에서 주장된 불교도경제(Buddhist economy)와 그 궤를 같이 한다. 그러나 네윈은 점성술, 산자술등과 같은 다소 미신적이고 비과학적 신앙에 광적으로 의지하며 정책을 결정하였고, 소수의 선택된 상가(僧家) 집단을 후원 하는 등 애초에 내세운 체제의 이념과 상반된 행위를 보였다. 또한 심각한 외국인 혐오증으로 인도인과 중국인들을 강제로 추방함과 동시에 그 정도에 있어서 더욱 강력한 쇄국 정책을 실시한다.

그 뿐만 아니라 경제와 경영에 대한 실무경험과 지식이 부족한 군인이 국영화된 기업을 경영하였고, 급속하게 진행되는 국유화 정책에 행정면의 계획 수행 능력이 미미하였다. 자본 부족으로 투자계획의 수행은 물론이고 필요한 자본재나 원자재의 수입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경제적 통상수교거부정책으로 인해 민간 기업이 외국과의 합작이나 자유로운 교역을 달성할 수 없었다.

1987년부터 미곡 가격의 상승, 생필품의 부족 등 국가 경제가 파탄에 이르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9월 5일 암거래상에게 타격을 준다는 명분으로 25, 35, 75짯(kyat)을 무효화시켰다. 대학생들의 신학기 등록이 임박한 시기에 취한 조치는 학생들의 불만을 사기에 충분했다.

1988년 3월, 6월, 8월 민주화 요구시위를 진압하고 신군부가 등장했다. 쏘마웅(Saw Maung)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군사정부는 국가법질서회복평의회(SLORC)를 출범시켰고, 가까운 시기에 다당제 총선을 실시한다는 조건을 내세웠다. 1990년 아웅산수치(Aung San Suu Kyi)를 중심으로 하는 국민민주연합(NLD)이 군부의 후원으로 급조된 국민통합당(NUP)를 압도하며 485석 중 392석을 차지하였으나 SLORC은 의회를 구성하지 않았다. 1992년 땅쉐(Than Shwe)가 국가 권력을 승계하였고, 1993년 헌법 초안을 구성하기 위해 소수종족과 야당으로 구성되는 국민회의(National Convention)를 설치하는 한편, 대중 동원 단체인 연방단결발전연합(USDA)을 결성하였다. 1997년 11월 국가평화발전평의회(SPDC)로 개칭하기 몇 달 전 미얀마는 서방세계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회원국의 도움으로 아세안(ASEAN)의 정식회원국이 되었다.

2002년 5월 아웅산수치가 가택연금에서 해제되고, 대규모의 정치범들이 석방되는 등 체제 변동의 긍정적 요소가 목격되었다. 그러나 1년 후 정부는 아웅산수치가 북부지역을 여행하면서 국민들로부터 혼란과 폭력을 유도하는 등 대중을 선동한다는 명목으로 정규군과 정규군의 후원을 받는 USDA를 동원하여 디베인(Depeyin)에서 아웅산수치와 NLD 당원들을 체포하였다. 미국 부시 대통령과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 등 전 세계 유력 지도자들의 비난이 이어지자 군부는 아웅산수치를 인세인(Insein) 감옥에서 가택연금 형태로 전환했다.

같은 해 8월 30일 킨늉(Khin Nyunt) 총리는 ‘발전과 진보적 변화’라는 7단계 민주화 이행 방안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2004년 10월 킨늉은 부패와 부정축재 혐의로 체포되었고 강경 노선의 군부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다. 7단계 민주화 로드맵의 4단계에 해당되는 헌법 초안 마련이 국민회의에서 2007년 9월 완성되었다. 한편 군부는 국가의 균형적 발전이라는 명분으로 2005년 11월 6일 수도를 양곤에서 중부 산악지방인 삔머나로 천도하고 네피도(왕의 궁전)로 개칭했다.


사회

2011년 4월 신정부 출범시 국내외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미얀마의 테인 세인 대통령은 수치여사 감금 해제(2010.11.13.) 및 해외활동 허용, 반체제인사 블랙리스트 해제, 언론 검열 철폐, 시장환율 도입, 수출입 인허가 제도 폐지 등 개혁 및 개방조치를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특히, 2012년 7월 1일 대통령의 개혁 및 개방정책에 반대하던 친군부 성향의 아웅 민트 우 부통령의 사임은 정부 내 반개혁파의 영향력을 감소시키는 계기가 됐으며, 이후 개혁성향 인사의 대거 등용을 통해 친정체제를 강화했다. 또한, 신정부는 전력난 해소, 도로망 개선, 국민주택 확대, 신규투자 확대를 통한 일자리 확대, 공무원 월급 인상 등 국민들의 체감에 직접적인 정책들을 중점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신정부의 이러한 조치에 대해 서방세계뿐만 아니라, 미얀마 일반 국민들도 대부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고, 현 집권세력의 2015년 대선시 재집권 가능성을 밝게 하고 있다.

하지만, 2012년에 소수민족의 내전, 라카인주(Rakhine State)에서의 인종분쟁, 로힝가(Rohingya) 처리, 불교도와 무슬림간의 종교 갈등, 개발에 따른 토지보상 및 환경보호 분쟁 등과 같은 사회적 문제가 빈번히 발생하면서 이에 대한 신정부의 대처능력이 향후 재집권 여부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2011년 신정부가 출범한 이후, 일부 반개혁적 친군부 성향의 인사가 사임한 바 있으나, 군부는 여전히 헌법에 의거하여 국방부, 내무부(경찰관할), 국경부 장관의 지명권을 보유하고 있으며, 또한 신정부는 국방부에 대한 감사 권한이 없는 관계로 군부의 활동에 대해 직접적인 관여가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다.

또한, 군부는 산하의 MEC(Myanmar Economic Corporation)와 UMEHL(Union of Myanmar Economic Holdings Limited)라는 2개의 지주회사를 통해 자원개발, 농수산, 건설, 무역 등 미얀마 경제의 최소 60% 이상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어 종래에 비해 다소 약화됐다고는 해도 여전히 정치·경제적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아울러, 국방비는 미얀마에서 가장 큰 정부지출 항목 중의 하나다. 미얀마의 육해공 병력은 40만 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불교승려의 경우 정확한 통계는 없으나 약 40만 명에 달한다고 하는데 테라바다 불교 특성상 세속적인 관심보다 개인수도에 역점을 두기 때문에 정권에 커다란 위협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2007년 9월의 시위사태에서 젊은 승려들이 대규모로 시위에 참가한 점을 볼 때 언제든 이러한 사태가 벌어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과거 군부뿐만 아니라 신정부 역시 불교 및 승려에 대하여 많은 배려를 하고 있으며 군부 실세들이 직접 고승들을 찾아 인사를 하고 선물을 전달하는 광경을 수시로 볼 수 있다. 최근에는 불교승려들이 정치적인 문제보다는 환경보호, 종교갈등, 소수민족 보호 등과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발언 및 참여를 확대하는 추세이다.

과거 미얀마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던 학생들에 대해서는 군사정부가 예방조치로 민주화 운동의 중심인 양곤대학 자체를 수년간 폐교한 적이 있으며 이후 도심에서 떨어진 곳으로 학교를 이전하여 학생중심의 민주화 운동의 불씨를 차단한 바 있다. 그러나 신정부 출범 이후에는 계속되는 개혁과 개방조치로 인해 정부의 정책에 대한 이들의 반감이 많이 줄어들었으며, 취업 및 창업이라는 현실적인 문제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또한 1988년 시위를 주도했던 반정부 인사들도 신정부의 대대적인 정치범 석방 및 블랙리스트 제외로 대부분 자유롭게 활동하고 있으며, 이들 또한 반정부 시위보다는 노동환경 개선, 환경보호, 소수민족 보호 등과 사회적인 문제 개선에 초점을 두고 있다.

아웅산 수치 여사의 차기 집권 가능성과 관련하여, 미얀마는 2008년 헌법 개정시 대통령 또는 부통령 후보의 자격요건으로 '배우자 또는 가족이 다른 국가 국적을 보유하고 있거나 다른 나라에서 후원금(지원금)을 받는 자일 경우' 입후보 자격이 없는 것으로 규정한 바 있다. 수치 여사는 배우자(사망) 및 2명의 아들이 영국국적을 보유하고 있으며, 또한 영국 등 서방세계로부터 후원을 받고 있는 관계로 수치여사가 이끄는 NLD(National League for Democracy)당이 총선에서 승리하더라도 헌법이 개정되지 않는 한, 대선 출마조차 불가능한 현실이다.

미얀마 헌법을 개정하기 위해서는 연방 상하원 합동의회 재적의원의 75% 이상이 찬성하여야 하나, 2008년 개정시 군부가 재적의원의 25%를 지명하도록 규정하여 사실상 군부의 동의가 없는 한 헌법 개정은 어려운 형편이다. 하지만, 2013년 8월에 2008년 헌법 개정여부를 조사하는 위원회(Committee)가 조직되어 2013년 12월까지 활동할 예정이다. 한편, 수치여사는 2013년 3월 27일에 있었던 국군의 날 행사에 국방부의 특별초청을 수락하여 공식 참가하여 국방부와의 관계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있어, 수치여사의 차기 집권 여부는 국방부와의 관계 개선과 미얀마 헌법개정 검토위원회의 결과에 따라 크게 좌우될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 2013년 11월 27일, 호주로 방문한 아웅산 수치 여사도 헌법수정에 최고사령관의 결정이 매우 중요하다고 재외 미얀마 국민과의 면담시에 언급하며, 헌법수정 여부는 사실상 군 최고사령관에게 달려있으며, 현재 적용중인 헌법은 미얀마를 민주주의 국가로 만드는 데 큰 걸림돌이 된다고 주장한바 있다. 이와 관련, 아웅산수치 여사는 대통령, 국회의장, 군 최고 사령관과의 사자면담을 요청한바 있으며, 이에 대해 떼인세인 대통령은 헌법 평가위원회의 검토보고서가 나오고 난 이후에 회담을 갖자고 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


인구

미얀마의 인구는 2013년 기준 6,098만 명이다.

인종

미얀마의 인구구성은 국민의 70%는 버마족이고, 25%는 카렌(Karen), 카친(Kachin) 등의 소수민족이고, 나머지 5%는 중국계와 인도계이다.

종교

전체 인구의 89.4%가 불교도이다.

정치

미얀마의 정치체계는 현실 정치 및 정부 이념을 지배하고 있는 헌법과 말레이계이슬람식군주제를 두 축으로 삼아 영국의 관습법(English Common Law)과 사법부 독립원칙에 기반을 둔 법치주의를 바탕으로 운영되고 있다. 미얀마에서 최초 성문법 형태의 헌법은 1959년에 발효되어 이후 1971년과 1984년에 두 차례의 개정을 거쳤다. 이 헌법에 따라 국가수반인 술탄은 행정권을 완전히 장악하며 5개 위원회 즉, 종교평의회(Religious Council), 추밀원(Privy Council), 각료회의(Council of Cabinet Ministers), 입법의회(Legislative Council), 왕위계승평의회(Council of Succession) 등 총 5개 기구로부터 자문을 받는다. 이와 함께 1959년 헌법에서는 이슬람교와 말레이 관습에 관련된 사항을 제외하고 정부의 조언자로서 영국최고책임자(British High Commissioner)가 각료 의장에 임명될 것을 명시했다. 하지만 사실상 대부분의 재정과 내무 업무는 자치정부에 위임되었다.

1984년 국왕은 총리, 재무장관, 내무장관에 임명되었고, 1986년 10월 재무장관과 내무장관에서 물러난 후 전 국왕이 수행하던 국방장관의 지위를 계승하였다. 아울러 국왕은 미얀마군부(Royal Brunei Armed Forces)의 최고통수권자이며 13명의 장관으로 구성된 각 내각의 최고 지도자이기도 하다. 국왕 직속으로 종교평의회가 설치된 것과 함께 헌법 제 2장에는 이슬람을 국교(國敎)로 정하였고, 그 중심축은 국왕에 의해 보장된다.

미얀마의 국가수반은 절대군주인 국왕이다. 실제로 미얀마에서 국왕을 견제할 수 있는 법과 제도적 장치는 전무하다. 미얀마의 국왕은 퇴직한 고위 관료들과 11명의 각료, 그리고 왕이 지명한 인물을 중심으로 추밀원의 보조를 받아 왕가의 현안을 결정하고 내각과 관료제의 도움으로 면책 특권과 실행, 헌법 조항의 개정 및 폐기 등 국정 전반을 직접 관할한다. 또한 1959년부터 왕위계승평의회를 두어 술탄 하심(Sultan Hashim, 재임 1885~1906)의 혈통을 받은 장자(長子)가 왕위를 계승하는 제도를 확립하였다.

미얀마 행정부의 수반은 총리이다. 행정부는 1959년 헌법에서 행정평의회(Executive Council)로 정식 출범하였고, 1984년까지 국무회의(Council of Ministers)로 불리다가 1984년 이후 현재의 각료회의(Council of Cabinet Ministers)로 변경되었다. 1987년 독립기념일(National Day) 연설에서 국왕은 근대적 행정 체계를 발전시키기 위하여 구조 개혁을 단행하였으나 국왕의 권한과 권위를 침해할 수 있는 소지의 개혁은 애초부터 봉쇄되었다. 각 부서를 구성하고 있는 장관과 차관은 행정부의 수반인 총리가 임명하는데, 여기서 총리는 단순히 행정부의 수반으로서가 아니라 국왕의 신분이다.

1959년 헌법에 따라 입법의회(Legislative Council)는 입법에 필요한 제반 사항을 면밀히 검토해야하지만 국내 사정에 따라 본 의회는 소집된 적이 거의 없으며, 단지 국왕의 서명에 의해 입법이 처리되고 있다. 최근 들어 미얀마의 입법부는 태동의 움직임을 보였다. 2004년 9월 25일, 술탄에 의해 21명의 입법부의원이 임명되었고, 15명의 선출위원을 포함한 45명의 입법회의 구성원을 요구하는 헌법개정을 통과시켰다. 국왕은 2005년 9월 1일 기존 입법회의를 해산하고 29명의 새로운 위원을 임명했다.

국방장관과 경찰의 최고 통치자는 군 최고통수권자인 술탄이 맡고 있으며, 현재 미얀마 군부는 크게 네 개의 조직, 즉 로열미얀마군(Royal Brunei Armed Forces), 미얀마고용구르카예비군(Brunei-employed Gurkha Reserve Unit), 세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영국군구르카(British Army Grukhas at Seria), 그리고 준 군사조직인 미얀마경찰(Royal Brunei Police)이 있다. 로열미얀마군은 1961년 3월 창설되었고, 1991년 10월 1일 편제개편으로 육군(4,550명), 해군(1,020명), 공군(620명)으로 분리되었으며 이외에 훈련반과 지원반이 추가로 창설되었고, 여군도 1982년에 창설되어 현재 580여 명의 병력을 소유하고 있다. 2004년도 국방부 예산안은 국가 총 예산의 10%인 5억 3백만 미얀마 달러였다. 복무제도는 징병제가 아니라 5년 기간의 지원병 제도이다.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 고유 권한의 경찰은 1906년 영국의 해협식민지(Straits Settlement)로부터 소수의 경찰이 파견된 것을 그 기원으로 하고 있다. 1921년 식민정부에 의해 미얀마경찰법(Brunei Police Force Enactment)이 통과되어 공식적으로 경찰이 출범하였고, 1923년부터 범죄, 이민, 운전면허증 등록과 같은 운송수단 등록 관련 업무, 외국인 등록, 소방 등의 광활한 업무를 관할하였다. 1975년 최초의 현지인 경찰국장이 임명되었다.

현재 미얀마 정부는 1988년 이래로 정당 활동을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영국의 식민지 시기 자치정부가 조직된 1959년부터 정당이 출현했다. 1962년 실시된 총선에서 미얀마 인민당이 의회 의석의 98%를 획득했을 때 술탄은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정당을 불법화 시켰다. 그러다가 1980년대 들어 정당이 재출현하게 되었지만 1988년 대부분의 정당 당수들이 체포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 시기의 정당들은 1985년 창당된 미얀마국민민주당(Brunei National Democratic Party), 1986년 미얀마국민민주당으로 분파되어 창당된 미얀마국민연합당(Brunei National United Party)이 있다.

문화

남인도 상인들이 오랫동안 미얀마 남부 몬(Mon) 지방을 왕래해 온 탓에 미얀마의 종교, 문학, 건축, 공예, 연극 등 문화적인 면에서 인도의 영향이 지대하다. 특히 불교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힌두 문화의 영향은 그다지 받지 않았다. 고대 미얀마는 인도 및 중국 문화권과 접촉이 있었으나, 중국과는 윈난성(雲南省, Yunnan)을 중심으로 접촉이 있었을 뿐, 중국 문화의 영향은 상대적으로 미미하다. 194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미얀마 정부는 문화부를 설치하여 전통 문화 보호 육성에 역점을 두고 있다.


한국과의 관계

미얀마는 한국과 1975년 외교관계를 수립했으며, 한국과 북한 사이에서 중립적 태도를 견지해 왔지만 북한과 좀 더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1983년 전두환 대통령의 미얀마 공식 방문시 북한의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로 인해 한국 외교사절 17명이 순국한 사건 이후, 북한과 단교해 오다가 2007년 4월 26일부로 북한과의 외교 관계를 정상화했다.

정치, 외교적으로 양국간 특별한 이슈는 없다. 미얀마가 회원국으로 가입하고 있는 ASEAN과 한국이 FTA를 체결했으나, 한-미얀마 교역 규모가 다른 ASEAN 회원국에 비해서 미미하고 미얀마 시장에서의 주요 경쟁 상대가 이미 FTA를 체결한 중국과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 ASEAN 회원국이기 때문에 FTA 체결에 따른 영향은 크지 않은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2009년 5월 한-아세안 특별정상회담이 제주도에서 개최됐으며 미얀마에서는 당시 테인 세인 총리가 한국을 방문하여 정상회담을 가진 바 있다.

2012년 5월 15일부터 사흘간 이명박 대통령이 외교통상부 장관, 지식경제부 장관 등 주요 정부부처 요인과 대기업을 포함한 대표단을 구성하여 미얀마를 공식 방문했다. 행정수도인 네피도에서 테인 세인 대통령과 면담했으며, 경제수도인 양곤에서 아웅산 수치 여사를 만나 양국간 협력관계 증진 방안에 대해 논의했다.

2013년 1월 10일 한국과 미얀마 정부는 공동선언문을 통해 경제협력공동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합의하였으며, 지난 6월 18일부터 20일까지 현오석 경제부총리를 단장으로하는 경제협력 사절단이 미얀마를 방문하여 떼인 세인 대통령 면담, 한-미얀마 경제장관 회담, 제1차 한-미얀마 경제협력 공동위원회를 개최하였으며, 대외협력기금(EDCF) 지원, 농촌개발협력, 한-미얀마 우정의 다리 건설, 한국기업 산업단지 조성, 미얀개발연구원(MDI; Myanmar Development Institute) 개설 지원, 투자보장협정 체결, 한-미얀마 비즈니스센터 건립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한-미얀마간 경제협력이 가시화됨에 양국간의 우호관계가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미얀마와 한국과의 주요이슈 (kotra 국가정보 - 미얀마, 2013. 12. 31., kotra(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바깥고리

연계 정보

관계 대상 문서 설명
uses 교육제도:미얀마 미얀마 교육과정, 2016년 조사 보고
uses 교과서목록:미얀마 미얀마 사회과 교과서 총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