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캐나다:The world's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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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목차

  • 1부 인간의 기원과 문화
    • 기원전 10,000년까지
    • 해석 기반 마련하기: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으며 어떻게 아는가?
    • 1과 마른 뼈들은 말한다.
    • 기원전 10,000년까지
    • 전환점 농촌
  • 2부 정착
    • 기원전 10,000년에서 서기 1,000년까지
    • 초기 도시와 그 중요성: 발굴, 텍스트, 해석
    • 2과 마을에서 도시국가로
    • 식량 우선: 농촌
    • 기원전 10,000년에서 기원전 750년까지
    • 3과 유역 문명 64
    • 나일 강과 인더스 강
    • 기원전 7,000년에서 기원전 750년까지
    • 4과 다중심적 세계 88
    • 동아시아, 아메리카, 서아프리카 지역의 도시와 국가
    • 기원전 1,700년에서 서기 1,000년까지
    • 전환점 도시국가에서 제국으로 118
  • 3부 제국과 제국주의 122
    • 기원전 2,000년에서 서기 1,100년까지
    • 제국은 무엇이며 왜 중요한가?
    • 5과 제국의 여명 124
    • 북아프리카, 서아시아, 지중해 지역의 제국 건설
    • 기원전 2,000년에서 기원전 300년까지
    • 6과 로마와 이방인 162
    • 제국의 부상과 분열
    • 기원전 753년에서 서기 1453년까지
    • 7과 중국 204
    • 균열과 통일: 진나라, 한나라, 수나라, 당나라
    • 기원전 200년에서 서기 900년까지
    • 8과 인도 제국 240
    • 분열된 아대륙의 문화적 결합
    • 기원전 1,500년에서 서기 1,100년까지
    • 전환점 정치와 종교
  • 4부 세계 종교의 부상
    • 기원전 2,500년에서 서기 1,500년까지
    • 빵만으로 살 수 없다: 세계 역사 속 종교
    • 9과 힌두교와 불교
    • 신성한 아대륙: 인도와 다른 국가에서의 종교 확산
    • 기원전 1,500년에서 서기 1,200년까지
    • 10과 유대교와 기독교
    • 성경 인물: 서아시아와 유럽에서의 하나님의 변화
    • 기원전 1,700년에서 서기 1,100년까지
    • 11과 이슬람교
    • 알라에 대한 복종: 세계를 잇는 이슬람 문명
    • 서기 570년에서 서기 1,500년까지
    • 전환점 종교와 교역
    • 5부 세계 교역: 현대 세계의 시작
    • 1300년에서 1700년까지
    • 교역, 상인, 질병, 이주
    • 12과 세계 교역로 개척
    • 초기 경제 체제의 지리와 철학
    • 1300년에서 1500년까지
    • 13과 대서양과 태평양의 개방
    • 경제 성장, 종교와 르네상스, 세계의 연결
    • 1300년에서 1500년까지
    • 14과 세계 교역의 단일화
    • 새로운 교역 패턴에 대한 새로운 철학
    • 1500년에서 1776년까지
    • 15과 이주
    • 새로운 글로벌 세계에서의 인구 변화
    • 1300년에서 1750년까지
    • 전환점 시간을 거친 비교
  • 6부 사회적 변화
    • 1640년에서 1914년까지
    • 서부 혁명과 그 영향
    • 16과 유럽과 아메리카의 정치 혁명
    • 계몽주의 시대의 정치적 권리 탄생
    • 1649년에서 1830년까지
    • 17과 산업 혁명
    • 세계의 진전
    • 1700년에서 1914년까지
    • 18과 국수주의, 제국주의 그리고 저항
    • 산업 강대국 간의 경쟁
    • 1650년에서 1914년까지
    • 전환점 올림픽과 국제 정치
  • 7부 발전하는 기술
    • 1914년에서 1991년까지
    • 새로운 국제 질서의 경쟁 비전
    • 19과 대량 생산과 파괴의 원리
    • 기술 체제
    • 1914년에서 1937년까지
    • 20과 제2차 세계 대전
    • 지옥으로 그리고 일상으로
    • 1937년에서 1949년까지
    • 21과 냉전, 새로운 국가 그리고 권위에 대한 반란
    • 제2차 세계 대전 후 세계의 재구성
    • 1945년에서 1991년까지
    • 22과 중국과 인도
    • 21세기로
    • 전환점 과거에서 현재로 그리고 미래로
  • 8부 역사의 유용성
    • 과거에 비추어 현재 이해하기
    • 23과 현대사: 진화, 정착, 정치 그리고 종교
    • 24과 현대사: 교역, 사회 혁명, 기술, 정체성

2. 한국 관련 내용

p. 206
진나라는 한국 북쪽 지역에 대한 주권을 가지게 되었고 남쪽 지역의 유에 부족과의 싸움에서도 일부 승리하였다


p. 232 한국
중국은 한국을 오랜 기간 동안은 통치하지 않았지만 그 문화는 한반도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쳤다. 한나라 황제인 무제는 기원전 109년에서 108년 사이에 만주와 함께 한반도 북쪽 지역을 정복하였다. 중국군 수비대는 한국을 통제하고 한국에 영향력을 미쳤다. 베트남과 마찬가지로 한국은 선사시대 중국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으며 상 왕조의 많은 기술과 나중의 철 기술, 종지 제작, 인쇄, 칠기 제조, 도자기(두 번 구운 녹색 빛의 한국 청자는 그만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음), 밀과 쌀 농작, 표의문자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1446년 한국은 왕을 중심으로 음성학을 기반으로 하는 한글이라는 글자 체계를 만들었다. 한국인은 한글이 세계 문자 중 가장 과학적으로 만들어졌다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종식까지 한국의 엘리트층은 간단한 형태의 한글 사용을 꺼려하였으며 보다 권위 있고 지적이며 복잡한 형태인 한자를 즐겨 사용했다. 서기 220년 한나라가 멸망한 뒤, 한국은 비록 중국의 속국이 되었지만 중국의 직접적인 관여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일부 중국인들은 계속해서 한국에 거주하였지만 군사력은 행사하지 못했다. 수나라는 한국을 정복하기 위해 세 번이나 원정에 나섰지만 모두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더 큰 세력의 당나라는 7세기에 한국 정복에 나섰고 원정에 성공함으로 서기 668년에서 676년까지 한국의 많은 부분을 점령했다. 하지만 한국은 중국 통치에서 벗어났고 비록 역내 중국의 우월한 세력 덕분에 중국의 종속국임을 받아들이도록 강요당했지만 계속해서 독립국 상태를 이어나갔다. 중국은 한국에 있어 정치 또는 군사적 통치보다는 문화적으로 더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유교, 법률, 관료적 행정, 문학, 예술 및 대승불교 모두 중국을 통해 한국에 소개되었지만 그 과정에는 어떠한 정부의 강요나 압박이 없었다. 서기 935년 당나라가 멸망하고 한국의 신라 시대 또한 막을 내렸다. 그 뒤를 이어 고려가 건국되었고 중국 당나라 수도인 장안을 본으로 삼아 지금 남한의 수도인 서울 북쪽에 개성이라는 수도를 건설했다. 중국과 한국은 양국의 관계를 “형과 아우”라고 묘사했다.


p. 232
한국과 중국으로부터 온 이주자들은 기원전 200년에서 서기 500년 사이 일본에 도착했다. 서기 500년이 되자 일본 귀족의 1/3은 자신이 한국인 또는 중국인의 후손이라고 주장했으며 상당수의 장인과 금속공은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한국 관계는 평화롭지 않았고 서로에 대한 침략과 공습을 계속해서 펼쳐나갔다. 동 기간, 중국은 일본인을 묘사할 때 “난쟁이”를 의미하는 한자를 사용했으며 이는 일본의 열위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서기 405년 왕인이라고 불리는 한국 박사가 중국 서적을 가르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는 일본의 초기 문자로 사용되었으며 일본에 대한 정보는 8세기부터 기록되기 시작했다. 일본 초기에 대한 대부분의 기록은 고고학적 기록이나 중국과 한국의 문학에 나온 내용으로부터 알게 된 것이다.


p. 235
중국은 자신의 주권 하에 있지 않았던 일본과, 한국처럼 잠시 동안 지배했던 국가를 포함한 주변국에 영향을 미쳤다.


p. 283
스리랑카, 티베트, 중국, 한국, 일본을 포함한 나머지 아시아 국가에서도 많은 수의 불교 신자가 생겨났다.


p. 290 아시아에서의 불교
(지도: 위에서부터 시계 반대방향으로) 일본해 한국 서울 평양 개성 불국사 석굴암 경주

불교는 부처가 깨달음을 얻었던 인도 북동쪽 부다가야에서 시작하여 교역로를 따라 아시아를 향해 세 가지 방향으로 퍼져나갔다. 북쪽으로는 힌두 쿠시 산맥과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 신장과 한국, 그리고 일본까지, 남쪽으로는 스리랑카까지, 그리고 동쪽으로는 미얀마를 지난 동남아시아 왕국과 섬으로 퍼져나갔다.


p. 296
불교는 한국 남서쪽에 위치한 백제 왕국을 통해 서기 552년 중국으로부터 일본에 소개되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백제왕은 불교 서적과 부처상을 일본에 소개하면서 다른 왕국인 신라와의 전투에서 도움을 줄 것을 요청했다. 불교 학자인 쇼토쿠 타이시 태자는 한국에서 승려를 초대했고, 종교 체제와 정치 세력 중앙 집권화를 목적으로 보다 불교에 대해 많이 알기 위해 네 개의 일본 사절단을 중국 수나라로 보냈다.


p.298
인도 전역으로 불교가 전파되고 육로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과 한국, 일본 그리고 바다를 따라 스리랑카와 동남아시아, 인도네시아로 퍼져나가면서 부처의 이미지가 변하였다.


p.471
칭기스칸은 한국과 자바를 포함한 상당 부분의 동남아시아를 정복했으며 비록 실패로 돌아갔지만 일본 정복도 시도하였다.


p.477
하지만 1592년 일본은 궁극적으로 중국을 침략하기 위해 한국을 침략했다. 전쟁은 일본이 1598년에 후퇴할 때까지 몇 년간 계속되었다. 대부분의 전투는 한반도에서 벌어졌고 일부는 중국 북쪽 지방에서 벌어졌다.


p.479
제한된 수의 중국 선박이 계속해서 매년 일본을 방문했으며 한국과의 외교적 접촉도 일부 지속되었지만 일본은 많은 부분 고립 속에서 살아갈 것을 선택했다.


p.614~615
(지도)한국 만주인들은 중국을 침략하고 통치하기도 전에 자신의 고향인 만주에 국가를 건립하고 한국을 속국으로 만들었으며 내몽골 또한 속국으로 다스렸다.


p.618
비록 공식적인 식민지 통치는 1910년이 되어서야 시작되었지만 한국 또한 일본의 통치 아래 놓이게 되었다.


p.618
중국과의 교역은 “조공”이라는 명목 하에 류큐 열도를 통해 일부 진행되었고 한국은 츠시마섬을 통해 일본과 교역할 수 있었다.


p.639
1876년 일본은 한국에 공사관을 설립할 것을 강요했다. 한국은 독립국으로 간주되었지만 일본은 계속해서 한국에 대한 통치를 주장하였다. 미국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의 한국 보호국화를 승인하고 만주 남쪽 지역에 대한 지배권, 그리고 사할린 섬 남쪽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승인하는 평화 회담(본 회담을 통해 노벨 평화상을 받게 됨)을 개최했다. 하지만 일본은 1910년 유럽 세력의 반대가 사라지자 공식적으로 한국을 합병했다.


p.692
일본은 1902년 영국과 군사 동맹을 맺고 대만(1895년)과 한국(1910년)을 식민지로 종속시켰으며 1904년과 1905년 러시아와의 육상 해상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p.693
일본 정부는 식민지인 한국과 대만으로부터 쌀과 식료품을 수입하면서 위기에 대응하였다. 1920년 대 후반, 대만과 한국은 일본의 쌀 수입의 80%를, 설탕 수입의 66%를 담당했다.


p.702
수천 명의 한국, 중국, 필리핀 여성들을 일본군을 위한 “성노예”로 징집한 일본의 잔인한 소행은 전쟁이 끝나고 50년이 지난 후에서야 국제 사회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p.704
유럽 전쟁에서 승리를 얻은 소련은 8월 8일 만주와 한국을 침략했다.


p.705
(지도-위에서부터 시계 반대방향으로) 한국 서울 일본해


p.708
1990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는 40년이 지나 일본군에 의해 강제 징집되고 공개적으로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한국 여성들의 사연을 수집하고 공개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역사적으로 한국인을 비하하였기 때문에 한국 여성에 대한 대우는 특히 더 심각했다. 다음은 1992년 북한에서 성노예와 인종차별의 잔인함에 대해 인터뷰한 김 영실씨의 증언이다.


p.717
대부분의 이주자들은 제대한 군인이었지만 그 중 수만 명의 사람들은 수십 년에 걸쳐 계속 되었던 식민 기간 동안 한국과 대만에 자리 잡았던 일반 시민이었다. 아시아 전쟁 막바지에 참전한 소련군은 만주와 북한에서 약 50만 명의 일본군을 생포하여 시베리아에 있는 노동수용소로 보내 건설 사업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p.730 6.25 전쟁 (1950-53년)
한국은 식민 통치에서 벗어나 미국과 소련의 분쟁을 경험하고 마침내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나간 국가의 예가 될 수 있다. 한반도는 1910년에서 1945년까지 일본의 식민지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한반도에 대한 통치권은 두 개로 나누어져 38선 북쪽으로는 소련이, 남쪽으로는 미국이 통치권을 가지게 되었으며 자주정부 하의 통일 국가는 먼 미래의 일이 되고 말았다. 1950년 6월 25일 공산주의 북한군이 남한을 침략했다. 북한군은 다른 거대한 공산국인 소련과 중국의 승인 하에 군사 훈련과 무기 지원을 받아 남한을 공격했다. 북한군은 UN군의 일부로 미군이 한반도에 배치되기 전까지 계속해서 남쪽으로 내려와 최남단까지 도달했다. 미군의 도착과 함께 북한군은 9월에 다시 북한으로 밀려났으며 계속해서 후퇴해 중국 국경지대까지 밀려났다. 이에 대응하여 중국이 참전하였고 무기에서의 열세를 보완하기 위해 수십만 명의 군인들을 가담하여 계속해서 공격을 개시했다. 미국과 동맹국은 기존의 무기에 헬리콥터까지 동원했다. 이들은 헬리콥터를 이용하여 군대를 수송하고 공습을 펼쳤으며 육군 이동 외과 병원(MASH: 후에 같은 이름의 장기 TV 프로그램 M*A*S*H와 영화로 유명해짐)으로 부상자를 수송했다. 중국은 경계선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왔으며 미국과 UN에서 파견된 추가 병력이 다시 중국군을 38선으로 몰아낼 때까지 남한의 수도인 서울을 또 다시 점령하였다. 군사적, 정치적 상황은 교착상태에 이르렀으며 계속되는 전투와 협상 끝에 1950년도에 만들어진 경계선을 고려하여 휴전 군사 분계선을 수정하였다. 전쟁이 끝난 1953년을 기준으로 미군 37,000명, 남한군 200,000명, 시민 50만 명이 사망했다(북한군은 공식 통계를 발표하지 않았지만 유사한 수준으로 예측됨). 중국은 150,000명의 군인이 사망했다고 발표했지만 미국은 사망자가 이 수의 4배 정도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중국의 6.25 전쟁 개입은 미국인들로 하여금 공산당에 대한 더 큰 두려움을 가지게 만들었다. 또한, 6.25 전쟁은 위대한 미국인을 군사적 교착상태에 놓이게 함으로써 중국의 명성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중국의 마오쩌둥은 미국은 핵무기를 보유했지만 “종이호랑이”에 불구하다는 자신의 발언을 다시 한 번 반복했다. 마오쩌둥은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한 이후 다시는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으며 북한도 이러한 마오쩌둥의 관점에 동의하는 듯 보였다. 아이러니하게도 6.25 전쟁은 중국과 러시아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스탈린은 중국이 미군과 대적할 경우 중국을 지원하겠다면 먼저 제안했지만 곧 제안을 철회하였다. 결국 소련은 일부 지원을 제공하였지만 스탈린의 애매모호한 행동은 중국 지도층으로 하여금 배신을 당했다고 느끼게 만들었다. 6.25 전쟁은 미국 전쟁용품의 생산기지이자 미군의 주요 휴양지였던 일본에게 번영을 가져다 주었다. 미국인과 일본인, 특히 미군과 일본 여성간의 개인적인 만남이 늘어났고 미국은 일본을 태평양에 위치한 동맹국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미국은 1952년 일본 점령기를 끝냈고 기존의 입장이었던 일본의 무장 상태 유지를 바꿔 일본이 군사 방어력을 키울 것을 장려했다. 6.25 전쟁은 미국과 유럽 동맹국간의 관계도 악화시켰다. 유럽 동맹국은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전쟁 발발 직후 미국이 대응한 것에는 동의하였지만 미군이 경계선을 넘어 북한까지 쳐들어간 것은 불필요하게 호전적이고 많은 비용을 초래했으며 결과적으로는 중국군을 자극하여 길고 끝이 없는 전쟁을 야기했다고 말했다. 또한, 근래에 독일과 전쟁을 벌였던 일부 유럽 국가들은 이전 적군이었던 일본을 공산주의와의 전쟁에서 동맹국으로 재무장시키는 미국의 새로운 전략에 우려를 표명했다.


p.758
(도표)

  • 6.25 전쟁(1950-53년)

(왼쪽 용어정리) 아시아 호랑이 20세기 후반 경제적으로 뛰어난 성적을 보인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국가들. 많은 경우에는 남한, 대만, 싱가포르, 홍콩, 그리고 일부 경우에는 인도네시아와 태국이 아시아 호랑이를 포함한다. (본문)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과 대만을 포함한 몇몇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정부의 가이드와 사기업 모델을 성공적으로 도입했다. 한국과 대만, 그리고 도시 국가인 홍콩과 싱가포르는 일본 모델을 도입하여 공격적이고 성공적인 경제 성장을 이끌어냄으로 종종 “아시아 호랑이”로 묘사된다.

p.780
1950년에서 1953년까지 미국과 중국은 한반도 통치를 두고 싸웠으며 미국은 남한 정부와, 중국은 북한 정부와 연맹을 맺었다.


p.857
대만, 싱가포르와 같이 외화 의존도가 낮고 기초 산업 기반 강화에 중점을 둔 국가들은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지만 남한, 인도네시아, 태국과 같이 많이 외국 융자와 투자를 유치하고 덜 신중하게 외화를 투자한 국가들은 누구보다도 큰 영향을 받았다. 이와 같은 경험을 한 국가로는 남한을 들 수 있다. 1997년 남한은 580억의 구제 금융을 지원받았는데 이는 국제통화기금(IMF) 역사 상 가장 큰 금액이었다. 몇 년간 계속된 고통과 경제재건을 통해 이러한 국가 대부분은 이전의 경제 수준으로 회복할 수 있었고 남한과 싱가포르와 같은 국가들은 이전 수준을 넘어 더 큰 발전을 이루었다.

3. 간략 분석

중등과정의 세계 역사 교과서로서 동아시아, 아메리카, 서아프리카 지역의 국가, 북아프리카, 서아시아, 지중해 지역의 제국 건설, 로마와 이방인, 중국, 인도, 이슬람교, 대서양과 태평양, 산업혁명, 제 2차 세계대전 등 광범위한 주제로 전 세계의 역사와 특징적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한국관련 서술양이 비교적 많은 역사 교과서로서, 중국이 한국에 있어 정치 또는 군사적 통치보다는 문화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고 서술하고 있다. ‘아시아에서의 불교’에서 백제 왕국을 통해 불교가 일본에 소개되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또한 한국관련 내용으로, 일본의 잔인한 소행으로 한국의 성노예를 서술하고 있음이 주목할 만하다. 1990년대 한국정신대문제대핵협의회는 일본군에 의해 강제 징집된 한국여성들의 사연을 수집했다는 서술을 포함하고 있다. 또한 한국전쟁에 관한 서술이 비교적 자세히 나타난다. 더불어 아시아의 호랑이로서 한국을 언급하며, 1997년 IMF 또한 설명하고 있다.

4. 검토 의견

페이지 한국 관련 기술 내용 검토 의견 개선 과제 코드
p. 232 ① 1446년 한국은 왕을 중심으로 음성학을 기반으로 하는 한글이라는 글자 체계를 만들었다. 한국인은 한글이 세계 문자 중 가장 과학적으로 만들어졌다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종식까지 한국의 엘리트층은 간단한 형태의 한글 사용을 꺼려하였으며 보다 권위 있고 지적이며 복잡한 형태인 한자를 즐겨 사용했다.…(후략)

② 중국은 한국에 있어 정치 또는 군사적 통치보다는 문화적으로 더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유교, 법률, 관료적 행정, 문학, 예술 및 대승불교 모두 중국을 통해 한국에 소개되었지만 그 과정에는 어떠한 정부의 강요나 압박이 없었다. 서기 935년 당나라가 멸망하고 한국의 신라 시대 또한 막을 내렸다. 그 뒤를 이어 고려가 건국되었고 중국 당나라 수도인 장안을 본으로 삼아 지금 남한의 수도인 서울 북쪽에 개성이라는 수도를 건설했다. 중국과 한국은 양국의 관계를 “형과 아우”라고 묘사했다.

① 한글창제년도(1443)한글반포년도(1446)로 수정 ② 해당 문구 삭제 C1
p. 290 <지도: 아시아의 불교>
- ‘동해’의 ‘일본해’ 표기
일본해를 ‘동해’로 표기하거나 최소한 ‘동해/일본해’로 병기 C1
p. 705 <지도: 제 2차 세계대전>
- ‘동해’의 ‘일본해’ 표기
일본해를 ‘동해’로 표기하거나 최소한 ‘동해/일본해’로 병기 C3
- 개선 과제 코드 -
개선 과제 유형
A: 동해·독도 표기 수정 필요 B: 단순표기 C: 내용 수정 필요 D: 내용 증·신설 필요 E: 기타
A1: 동해 표기 A2: 독도 표기 C1: 통계 C2: 과거 사실 C3: 객관적 기술 D1: 증설 필요 D2: 신설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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