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공예
한지(韓紙)
손으로 떠서 만든 우리 나라 전래의 종이.
내용
오늘날 닥나무 껍질로 만든 전래의 종이를 모두 한지로 통칭되고 있으나 중국 등지에서는 시대에 따라 계림지(鷄林紙)·고려지 또는 조선지라 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한지가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구체적인 증거는 없다. 다만 지리적으로 중국과 인접해 있어 고대부터 문물교류를 통해 중국의 제지기술이 유입되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그 가운데 4세기경 불교의 전래와 함께 도입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 한지의 불교전래설은 610년(영양왕 32) 고구려의 승려 담징(曇徵)이 일본으로 종이 기술을 전수한 기록이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다.
또 경주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704년 추정)과 755년(경덕왕 14)에 제작된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은 모두 불교와 관련되어 나타난 한지자료이다.
특히, 대방광불화엄경 발문에 적혀 있는 종이 만드는 기술과 제작처의 지명 그리고 지작인(紙作人) 등은 우리 나라 한지의 역사를 밝혀주는 귀중한 단서이다.
고려시대에는 목판인쇄술과 함께 금속활자 인쇄술이 발전하면서 한지의 수요가 급증하였고, 대장경조판과 각종 서적의 간행에 따른 종이의 수요가 확대되자 농가에서 닥나무재배를 권장하기도 하였다. 또한 종이를 생산하던 지소(紙所)와 조지부곡(造紙部曲)을 두어 국가의 한지 수요를 뒷받침 하고 있었다.
한지 수요와 생산이 가장 활발하던 시기는 15∼16세기이다. 이 시기는 고려시대이래 지속되어 온 지소와 조지부곡이 폐지되고 관영제지소인 조지소가 1415년(태종 15) 설립되어 제지생산을 국가가 주도하였다.
이 시기는 중국으로부터 제지 기술을 도입하고 닥나무 생산을 확대하려는 노력뿐만 아니라 부족한 닥나무 대신 쑥대·밀·보릿짚[孟麥節]·대껍질[竹皮]·삼대[麻骨]·버드나무(柳木皮)·짚(蒿精)·초절목피(草節木皮)·잡초(雜草)·수태(水苔) 등을 혼용지료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가에서 운영했던 관영제지소인 조지소는 공납제의 폐단과 지장(紙匠)에 대한 지나친 신역(身役)의 강요로 결국 관영수공업이 쇠퇴하는 원인으로 이어졌다. 여기에 국가 재정이 결핍되고 관리의 부정부패가 더해지면서 관영제지수공업은 15세기 후반부터 쇠퇴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관영수공업이 쇠퇴한 반면 사찰을 중심으로 하는 사찰제지업이 활기를 띠었고, 또한 사장(私匠)에 의한 민간에서의 제지생산도 활발해지는데 이는 조선 전기에는 찾아 볼 수 없는 변화상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