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과 1950년대의 분위기

cef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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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과 1950년대의 분위기

학습목표
- 왜 1950년대에 안락함과 안정이 미국인들에게 그렇게 중요했는가?
- 1950년대에 남성과 여성에게 어떤 역할이 주어졌는가?
- 1950년대의 순응주의에 사람들은 어떻게 저항했는가?

요점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많은 미국인들은 경제적인 번영을 누렸다. 어떤 사람들은 1950년대의 순응적인 분위기를 환영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사람을 제약하는 분위기를 싫어하고 여기에 저항했다.

핵심용어
- 록큰롤
- 비트닉

학습주안점
- 풀어서 설명하기: 아래 표를 옮겨 그리고 이번 과를 학습하면서 1950년대의 분위기를 구체적으로 풀어서 서술하시오.
- 1950년대의 분위기
∙ 순응성
∙ 사회적인 역할
∙ 순응성에 대한 도전


배경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1950년대에 안락한 삶을 누렸다. 그들은 아직은 경제적 침체와 전쟁으로부터 회복하고 있던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해서 모험보다는 안정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1950년대에 성장기를 보냈던 한 역사가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거대한 조직들이 확산되고 기술이 빠르게 변화하고 교외 주거지역이 등장하고 삶이 표준화된 것은 새로운 도전이 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적응하며 살았다. 그런 삶이란 극적인 삶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고, 또 그렇게 살고 있듯이 이것이 일상생활의 진리였다. 1950년대의 삶이란 그들이, 다른 어느 누구도 경험했던 삶보다 더 낳은 삶이었다.” - 제프리 페렛(Geoffrey Perrett), 위대함의 꿈: 미국인들의 삶 1945-1963(A Dream of Greatness: The American People 1945-1963)
미국인들은 순응적인 삶이 가져다주는 개인과 집단의 명백한 조화를 환영했다. 투쟁보다는 타협이 분쟁이 해결되는 방식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이 새로 획득한 번영의 삶을 즐기고 그들의 자녀들에게 더 좋은 기회를 제공하기를 원했다.


평안과 안정
사회학자 데이비드 리즈만(David Riesman)은 과거에는 미국인들이 개인주의를 중시했지만 이제는 순응을 더 선호한다고 관찰했다. 리즈만은 인기가 많았던 동화책인 “작은 황금책(Little Golden Book)” 시리즈 중 하나인 “기관차 투틀”(Tootle the Engine)”을 인용한다. 이 책에서 어린 기관차인 투틀은 선로를 따라 가는 것 보다는 들에서 노는 것이 더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사는 “기관차마을” 사람들은 그의 습관을 고쳐 놓으려고 애를 썼다 투틀은 마침내 그의 친구들의 이야기를 받아들인다. “어찌되었든지 선로 위에 있는거야” 리즈만은 이 이야기가 1950년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영향력 있는 비유였다고 생각한다.

  • 1950년대의 많은 유행들 중 하나: 특별한 안경을 끼면 관람객들은 3차원 효과를 내기 위해 제작된 3-D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청년들의 문화
1950년대의 청년들을 “침묵하는 세대(silent generation)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침묵하는 세대는 더 큰 세상의 문제와 위기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이 보였다.
1950년대의 견실한 경제는 더 많은 젊은이들이 일찍 일자리를 찾기 보다는 학교에 머무를 수 있게 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대부분의 청년들은 십대 중반에 학교를 떠나 그들의 가족들을 부양했다. 1920년대에는 점점 더 많은 청소년들이 중등교육을 마칠 수 있게 되었다. 대공황의 절정기에 많은 십대들이 학교를 떠났다. 그러나 1950년대에는 대부분의 중산층 십대청소년들은 일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는 시간제로 일하면서도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더 많은 여가시간이 주어지자 어떤 젊은이들은 파티를 열고 장난치고 남녀 사교클럽 활동에 모든 에너지를 다 쏟으며 오로지 즐거움만을 추구하며 사는 듯 보이기도 했다.
어떤 십대 청소년들, 특히 소녀들은 남는 시간에 아이를 돌보는 부업을 했다. 교외로 이사한 젊은 부부들은 아이를 돌보는 것을 도와줄 친척들이 가까이에 없었다. 1950년대에 아이 돌보기는 처음으로 친척들이 아니라 친구나 이웃의 딸들이 맡는 일자리 되었다. 1950년대 말에 십대 소녀들 중 절반이 시간제 베이비시터로 일했다.
기업들은 청소년들을 위한 상품을 팔기 시작했다. 1950년대에 광고와 영화들이 십대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소녀들은 바비 양말과 푸들 스커트를 입고 소년들은 글자가 새겨진 스웨터를 입었다. 이런 이미지는 당시의 순응을 강조하는 사회적인 분위기를 스타일에 반영한 것이다. 미디어가 그려내는 깔끔하게 단장한 십대의 모습은 “비버는 해결사(Leave It to Beaver), “아버지가 제일 잘 아셔(Father Knows Best)”같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도 찾아볼 수가 있다. 세븐틴(Seventeen), 데이트북(Datebook), 틴(teen), 쿨(Cool)과 같이 십대를 겨냥한 잡지들은 십대들에게 주는 조언들로 가득 찼는데 단지 어떻게 옷을 입어야 하는지 뿐 아니라 어떻게 조신하게 행동해야 하는지, 특히 남녀교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정보를 제공했다.
십대 소녀들은 결혼 생활을 꿈꾸며 은과 린넨 제품들을 모으기도 했는데 보통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바로 결혼을 했기 때문이다. 십대 신부들의 숫자는 1950년대에 계속 상승해서 1954년에는 절반정도가 십대였고 신랑도 일반적으로 그보다 조금 많은 나이였다.

종교의 부흥
이전에 종교를 떠났던 미국인들은 1950년대에 교회와 회당으로 다시 몰려왔다. 종교에 대한 관심이 다시 생기게 된 것은 부분적으로는 냉전이 무신론 공산주의와의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핵전쟁의 위협에 직면하여 희망을 찾기 위해 종교에 의지했다.
종교에 다시 헌신하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는 풍부하다. 1954년 의회는 충성서약을 할 때 하나님 아래서(under God)이라는 문구를 추가했고 그 다음해에는 “우리는 신을 의지한다.(In God We Trust)”라는 문구가 모든 미국 화폐에 새겨지게 했다. 종교도 다른 미국 의 영역들처럼 점점 더 상업화되었다. 곤경에 처한 사람들은 기도전화를 걸 수 있었다. 그리고 “함께 기도하는 가정은 흩어지지 않습니다.(The Family that prays together stays together)”같이 광고문구 같은 표어들이 일반적이 되었다. 전도자들은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사용해서 이전 보다 더 낳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1950년대 말에 전체 미국인의 95퍼센트가 공식적인 종교단체와 연결되어 있다고 말했다.

  • 미국인의 일생:

- 빌리 그래함(Billy Graham)(1918년생)전도자 빌리 그래함은 1950년대에 많은 지지자를 얻었다. 노스캐롤라이나 주 샬롯트(Charlotte)에서 태어난 윌리엄 프랭클린 그래험 주니어(William Franclkin Graham, Jr.)는 부유한 낙농업 목장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1939년 그는 남침례교의 목회자로 안수를 받았다.그래함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젊은 군인들을 대상으로 사역하기 위해 설립된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했고 전후에 미국과 유럽의 야외 천막에서 열리는 부흥회와 종교집회에서 설교했다. 수천 명의 미국인들이 미국 전역에서 빌리 그래함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모여들었다. 그의 직설적인 설교 스타일은 종교에 대한 입문을 쉽게 만들었고 그는 보수주의의 대변인이 되었다. 그래함은 텔레비전 방송을 통한 전도활동 외에도 디시전(Decision)이라는 잡지를 발행하고 여러 권의 책을 저술했다. 1996년 그는 의회에서 수여하는 골드메달을 수상했고 2001년에는 영국으로부터 명예기자작위를 받았다.

  • 학습이해도 확인: 왜 상당수의 미국인들이 1950년대에 종교에 의지하게 되었는가?



남성과 여성의 역할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시대에 미국인들은 남성과 여성으로서 기대되는 역할이 무엇인지 문명하게 알고 있었다. 이런 역할들은 미국인들에게 널리 설득력을 갖는 사회적 종교적 전통에 의해 규정된 것이었다. 남자들은 학교에 가고 일자리를 찾아 아내와 아이들을 부양해야 했다. 집에서 벗어난 공적인 영역이 그들의 공간이었고 그들은 돈을 벌고 중요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결정을 내렸다.
여성들은 남편들을 위한 보조적인 역할을 해야 했다. 가정을 관리하고 식사를 요리하고 아이들을 키었다. 많은 부모들이 소아과 의사인 벤자민 스폭이 쓴 법을 통과시키다.
1946 소아과 의사 스폭에게서 육아법에 대한 도움을 받았다. 그가 쓴 “유아와 아동 육아전서(Common Sense Book of Babe and Child Care)”는 아이를 키우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대부분의 중산층 여성들은 가정적인 역할에 정응하여 아이들을 키우고 교외에 있는 그들의 집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다. 1956년 라이프(Life)지는 “아내의 바쁜 일과(Busy Wife’s Achievements)라는 기사를 실었다. 이 글은 16세에 결혼해서 네 명의 아이들 둔 가정주부의 삶을 소개했는데 학교의 학부모 모임에 참가하고 아이들의 소녀단 활동을 살피고 자선활동에 참여하며 분주하게 살아가는 일상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가정관리자, 엄마, 손님접대자, 지역사회활동가로 봉사하고 있었다. 그녀의 가족에 대한 의무와 지역사회에 대한 봉사는 교외에서 사는 많은 중산층 여성들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순응에 대한 도전
사회적은 순응은 개인과 집단의 차이를 가려버리는 것을 용이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모든 미국인들이 위에서 소개한 중산층의 삶의 모델에 맞추어 살았던 것은 아니다.

일하는 여성들 많은 여성들이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가정 밖의 일터에서 일하는 것에 만족했고 좋은 일자리를 포기하기를 꺼려했다. 기혼과 미혼을 포함한 어떤 여성들은 생계를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일했다. 일반적인 관행은 여성이 결혼하면 일을 그만두는 것이었지만 모든 여성이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다. 1950년대에 기혼 여성의 24퍼센트가 직업을 갖고 있었다. 1960년에는 31퍼센트로 상승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 끝날 무렵에 일자리를 가진 기혼 여성의 수는 미혼여성의 수를 처음으로 넘어섰고 전후 시기에 그 차이는 더 커졌다.
가정 박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비서, 교사, 간호사, 영업직 등의 직업을 가졌다. 스스로 돈을 번다는 만족감 외에도 여성들은 자동차나 전자제품 같이 “근사한 삶”의 일부인 제품들을 구입할 수 있기를 원했다.
1963년에 베티 프리단(Betty Friedan)은 1950년대의 여성스러움의 이상에 대해 비판하는 책을 펴냈다. “여성의 신비(feminine mystique)”에서 프리단은 여성이 다른 역할을 맡는 것을 어렵게 만다는 문화에 대해 비난했다. 수백만의 여성들이 1950년대 그들의 역할 때문에 좌절감을 느끼고 있다고 고발했다.
“여성들은 가정 밖에 있는 어떤 것에도 관심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것이 1950년대의 확고한 복음이었다. 정치도 안 되고 예술도 안 되고 과학도 안 되고 대형 사건들, 작은 사건들, 전쟁이나 평화, 미국이나 세계 그 어떤 것이든지 아내나 어머니로서의 역할 그리고 가사와 연결된 일이 아니면 어떤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베티 프리단, “여성의 신비”

  • 심화학습: 일상생활

- 타파웨어 파티: 얼 사일러스 타파(Earl Silas Tupper)에 의해 디자인된 플라스틱 용기인 타파웨어(Tupperware)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큰 인기를 끌었다. 많은 여성들이 타파웨어 파티를 열어 가정에서 타바웨어를 팔았는데 교외생활의 사회적인 모임의 일부가 되었다. 영업을 파티를 개최하는 여성들은 친구들과 지인들을 토대해서 구매자들이 편안하게 느낄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고 제품들을 보여주었다. 파티를 주최한 사람이 파티 끝에 주문을 받고 판매 금액의 일정 비율을 수수료로 받았다. 구매자이면서 동시에 판매자의 역할을 하게 된 이 여성들은 가정에서 판매를 하는 방식이 1950년대에 또한 유행하던 방문판매보다 덜 스트레스를 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54년에 가정 파티를 개척한 타파웨어의 부사장이었던 브라우니 와이즈(Brownie Wise)는 비즈니스위크(BusinessWeek)지의 청 여성 표지모델이 되었다. 위의 사진은 1946년의 타파웨어 광고이다.

  • 그래프를 해석하기: 이 그래프는 1900년에서 1960년에 이르는 기간의 미혼과 기혼 여성 노동자의 수를 보여준다.

- 비교하기: 미혼 여성 노동자들이 기혼여성들 보다 더 많았던 해는 언제인가?

젊은이들의 반란
젊은이들도 1950년대 사회의 규범에 도전했다. 어떤 젊은이들은 그들이 부모세대의 가치를 거부하고 스스로 오해받고 있고 외롭다고 느꼈다. 1955년 개봉한 “이유 없는 반항(Rebel Without a Cause”과 같은 영화들은 이러한 소외감을 잘 표현했다. 이 영화에 등장한 청춘스타, 제임스 딘(James Dean)은 십대의 우상이 되었고 영화계의 전설이 되었다.
.D. 샐린저(.D. Salinger)의 1951년 소설 호밀 밭의 파수꾼(Catcher in the Rye)에서 주인공 홀든 콜필드(Holden Caulfield)는 그가 기숙학교를 다닐 때, 그리고 세상에 나갔을 때 자기의 주위의 “위선자들(phonies)”로부터 고통을 당했다. 이 책에서 홀든은 세상에 순응하려는 강한 압력에 굴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투쟁을 한다. 많은 독자들이 이 경험에 공감할 수 있었다.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스타일을 추구했다. 1952년 디스크 자키인 앨런 프리드(Alan Freed)는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Cleveland)에서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주로 흑인 청중들을 위해 리듬앤블루스(rhythm-and-blues)를 틀었다. 당시 다른 백인이나 흑인, 디스크 자키들도 리듬앤블루스를 때때로 틀어주었지만 그렇게 많은 청중을 얻지는 못했다. 그러나 프리드의 카리스마 넘치는 방송스타일 때문에 흑인과 백인 할 것 없이 많은 십대 청취자들을 확보하게 되었다. 프리드가 진행한 프로그램인 “문독 록큰롤 파티(Moondog Rock’n’Roll Party)”는 리듬앤블루스에서부터 발전해간 록큰롤 음악을 널리 알렸다. 전국의 십대들은 록큰롤을 상징하는 강한 비트와 단순한 멜로디에 이끌려 곧 팬이 되었다. 그들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스타인 척 베리(Chuck Berry), 리틀 리처드(Little Richard), 팻 도미노(Fat Domino)와 백인 음악인인 빌 할리(Bill Haley), 더 코멧츠(The Comets), 제리 리 루이스(Jerry Lee Lewis), 버디 할리(Buddy Holly)와 같은 그들이 좋아하는 연주자의 음반을 사기 위해 몰려들었다.
가장 잘 알려진 록큰롤 가수중 하나는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였다. 프레슬리의 공연은 그의 열정적인 스타일과 잘생긴 외모를 보여주었고 그가 가는 곳마다 소리를 지르는 십대 소녀들의 무리를 끌어 모았다. “Don't Be Cruel”, “Hound Dog” “Heart break Hotel” 등의 곡을 담은 그의 많은 음반들은 큰 히트를 거두었다. 록음악은 미국에서부터 유럽과 아시아로 펴져서 많은 인기를 누렸고 음악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1957년에 결성된 영국의 그룹 비틀즈(Beatles)의 초기 노래들도 미국의 록큰롤에서 영감을 얻었다.

  • 1차 자료비교하기: 록큰롤 음악

반항적인 강한 비트의 록큰롤음악이 미국사회에 등장했을 때 록큰롤음악의 소리와 영향을 편견없이 받아들였던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 관점을 분석하기: 각각의 관점들은 록큰롤 음악과 청소년의 비행의 연관관계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 록큰롤에 대한지지“만일 우리 아이들이 집에서 밤에 내 라디오 프로그램을 듣고 관심을 갖게 되어 음반을 사고 음악감상과 댄스를 위해 음반을 수집하게 된다면 나는 청소년들의 비행을 막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라디오 디스크 자키 앨런 프리드, 1958년 1월 12일 자 뉴욕 타임즈
∙ 록큰롤에 대한 반대“록큰롤은 대부분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얼간이들에 의해 불려지고 연주되고 작사된다. 그리고 대부분 단순무지한 반복과 음흉하고 외설적이고 뻔한 내용들를 담은 지저분한 가사로 되어있다. 이것은 기껏해야 막 구렛나루를 기르게 된 비행청소년들에게나 어울리는 음악이다. - 가수 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 1958년 1월 12일자 뉴욕 타임즈

  • 십대 청소년들은 새로운 락큰롤 음악을 레코드 플레이어를 통해 들었다.
  • 엘비스 프레슬리는 록큰록이 유행하던 초기를 대표하는 스타였다.

많은 성인들은 이 새로운 음악을 싫어했고 비도덕적인 삶을 조장할 것이라고 염려했다. 어떤 사람들은 인종적인 문제로 록큰롤을 반대했다. 록큰롤은 흑인과 백인 십대 청소년 모두에게 인기가 있었고 흑인음악인 리듬앤블루스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1950년대의 인종 간 분리문화에서 안정감을 느끼던 사람들의 정서를 위협했다. 이들은 흑인과 백인 십대들이 같은 콘서트에 참석하고 같은 음악을 듣고 춤은 춘다는 생각에 불안함을 느꼈다. 록음악 콘서트를 금지시키고 음반가계에서 록음악 음반을 팔지 못하게 하려는 시도들도 있었지만 록큰롤의 인기는 계속 높아갔다.
비트 세대(Beat Generation) 혹은 비트닉(Beatniks)이라고 불리던 사람들은 다른 종류의 도전을 시작했다. 작가들, 예술가들과 일반인 동조자들은 즉흥성, 즉 계획 없이 순간의 느낌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추구했다. 그들은 영성을 강조하고 돈과 번영이 지배하는 세상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트닉은 전통적인 품위에 도전했고 성에 개방적이고 금지된 마약을 사용해서 다른 미국인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작가 잭 케루악(Jack Kerouac)은 비트 세대의 지도자였는데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의 커피점에서 사람들을 모아서 생각과 경험을 함께 나누었다. 전통적인 틀에서 벗어난 스타일의 케루악은 1957년의 길 위에서(On the Road)라는 베스트셀러 소설을 출간했다. 그는 초고 전체를 한 장의 긴 종이 위에다 한 달도 안 되어 작성했다. 이것은 그의 자유연상적이고 즉흥적인 글쓰기 방식을 반영한 것이었다. 케루악의 표현처럼 이 소설의 “거친 형태”는 삶에 대한 개방적인 접근을 표현하려는 것이었다. 케루악의 친구 중 하나인 앨런 긴즈버그(Allen Ginsberg)는 구조도 없고 혼란스러운 비트 운동 스타일로 많은 영향력을 미친 서사시인 “울부짖음(Howl)”을 썼다. 이 작품은 “나는 우리 세대의 최고의 지성인들이 광기에 의해 파괴되는 것을 보았다”는 말로 시작된다.


2과 평가
단원 이해도 평가
1. 왜 어떤 사람들은 1950년대의 젊은이들을 침묵하는 세대라고 불렀는가?
2. 왜 미국인들은 1950년대에 종교에 대해 다시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가?
3. 록큰롤은 1950년대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4. 비트닉은 순응성에 어떻게 도전했는가?

비판적인 사고와 글쓰기
5. 비교하기: 1950년대 남성과 여성의 역할에 대해 서술하시오.
6. 인터뷰를 작성하기: 1950년대에 자라난 친척, 이웃, 또는 친구에게 당시 젊은이들의 삶이 어떠했는지 묻고 질문과 대답 방식으로 인터뷰를 작성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