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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이후 독일연방공화국은 이민국이 된다.


1968-1983년 독일에 민주주의, 환경, 평화를 위한 시위가 점점 늘어난다.


1974-1977년 독일에서는 또 다시 테러 형태의 폭력행위가 늘어난다.


1973년 이후 실업률과 "신 빈곤"이 증가한다.

Wettrüsten 경쟁적 무장 Arbeitslosigkeit 실업 Umweltzerstörung 환경파괴


M1 "청년시위의 원일을 찾습니다." (호르스트 하이트칭거(Horst Haitzinger)의 캐리커처)

1968년, 역동적인 한 해 1965년 연방하원 선거 결과 기민/기사당(CDU/CSU)이 47.6%의 표를 획득하고, 사민당(SPD)이 39.3%, 자민당(FDP)이 9.5%의 표를 획득하였다. 1966년 대연정이 결성되자 연방하원은 기민/기사당(CDU/CSU)과 사민당(SPD)으로 구성된 거대여당과 극 소수의 자민당(FDP)-야당으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각종 모임, 시위, 팜플렛을 이용해 대연정의 정책을 견제하는 "원외야권운동(Außerparlamentarische Opposition)"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원외야권운동에 참여한 사람들 중 상당 수가 대학생이었다. 서독의 대학에는 학생 단체들이 대학 수업의 낙후된 형태와 내용에 대해 반대하면서 나치-과거사에 대한 보다 공개적인 논의를 요구하였다. 대학 내에서 시작된 운동은 거리 시위로 확산되었다. 대학생들은 모두를 위한 더 좋은 교육기회("시민권리로서의 교육")를 요구하였고, 사회적 불평등과 권위주의적 교육에 반대하며, 개인의 자유로운 자기 실현 기회 확대 및 민주주의 확대를 요구하였다. 이들은 그 외에도 점점 더 잔인해져 가는 베트남 전쟁 등 시사적인 정치 문제에 대해서도 다루었다. 시위대원들은 종종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하기도 하였는데, 경찰 역시 폭력을 동원하기도 하였다.

Unter den Talern 산골짜기에서 들려오는 Muff von 1000 Jahren 1000년이 넘은 소리 M2 1968년, 대학생들의 불만과 소란 함부르크 대학교에서 일어난 시위 중 학생들이 수업의 새로운 형태와 내용을 요구하고 있다.


p. 29 테러리스트들이 국가를 위협하다 1969년 연방하원 선거 결과 정권이 교체되었다. 사회주의-자유주의 정권(사민당(SPD)/자민당(FDP))이 결성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민당(SPD)을 통해 원외야권운동가들을 정치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몇몇 단체는 극단적인 성격을 띄었다. 그들은 백화점에 불을 지르고 은행에 침입하였다. 극좌파 단체인 "적군파(Rote Armee Fraktion)"는 법원 건물과 군사 시설에 폭탄테러를 하였고, 정치가, 판사, 경제계 인사들을 납치하거나 살해하였다. 적군파는 테러행위를 통해 남아메리카에서 극좌주의 단체들이 일으킨 혁명처럼 정부에 대항하며 국민들을 혁명에 참여시키고자 하였다. 적군파는 독일이 유럽에서 "미국 제국주의"를 돕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았다. 연방하원과 연방정부는 적군파에 대해 강경 대응하였다. 안보 관련 법이 강화되었고 체계적인 추적을 통해 경찰은 대부분의 테러리스트를 체포하였다. 그들은 장기 또는 무기한 금고형에 처해졌다. 그 이후 개별 폭력사건들이 일어나기는 했지만, 국가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테러행위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환경 오염 문제가 심각해지다 서독의 빠르고 포괄적인 산업화는 문제점들을 수반하였다. 1990년 연방정부가 발표한 환경보고에 따르면 토양, 수자원, 공기가 심각하게 오염되었다. 당시 보고에서 4가지 사례를 발췌하였다. - 서독 주민 1인당 매년 약 365kg의 쓰레기를 "생산"한다. 일반 가정 폐기물 및 일반 가정 폐기물과 유사한 종류의 산업폐기물의 총량은 매년 3천만 톤에 달한다. 약 1만 대의 철도차량을 채울 수 있는 양이다. 만약 쓰레기로 채운 철도차량을 연결한다면 그 길이가 베를린에서 아프리카 내륙지방까지 이어질 것이다. - 주택, 도로, 산업단지 등의 건설을 위한 토지의 양이 지속적으로 증가하였다. 1984년에서 1989년 사이 매년 약 300km2가 증가했다. 다시 말해 매년 브레멘시 만큼의 면적이 건설용으로 추가 사용되었다. - 매일 2천250만 입방미터의 폐수가 발생해 처리되었다. 1963년에는 일일 폐수의 양이 1천330만 입방미터였다. - 1957년에서 1989년 사이 서독의 에너지 소비량이 두 배 증가하였다. 약 87% 가량이 나무, 석탄, 석유, 가스를 에너지원으로 사용해 생산된 에너지였다. 연간 주민 1인당 12톤의 이산화탄소가 배출되었다. 그 결과 "온실가스효과"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즉, 지구에서 우주공간으로 발생되는 열에너지의 양이 줄어들어 지구의 기후가 변할 수도 있게 되었다. 전세계적으로 주민 1인당 배출한 이산화탄소의 양은 4톤 수준이었다.

(왼쪽 문구:) 우리는 우리 자녀들이 살아갈 지구를 잠시 빌린 것뿐이다. (오른쪽 문구:) 잘 쓰고 돌려준다! M3 "다시는 누군가에게 뭘 빌려주지 않겠다!" (캐리커처 1988년) 1960년대 하반기에 독일은 독일이 단독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직면하게 된다. 그 결과 전세계가 공동으로 대응해야 하는 문제점들과 공동의 책임에 대한 의식이 생겨나게 된다.


p. 30 시민운동과 "녹색당(Grüne)" 환경오염이 심각해질수록 현재와 미래 세대의 삶도 타격을 입게 된다는 의식은 1970년대 그리고 그 이후에 특히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확산되었다. "삼림의 고사" 그리고 "환경보호"는 사회적 논의의 주요 키워드가 되었다. 환경오염 및 당시 해결되지 못했던 원자력에너지 문제는 다음 세대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정치정당들은 독일인들의 의식에 자리잡기 시작한 환경의식에 대해 초기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각 지자체와 도시에서는 환경파괴적인 공장과 도로 및 공항 건설 그리고 원자력 발전소 및 원자력 폐기물 처리 시설 등에 반대하는 시민운동과 반대 시위가 활성화되었다. 환경보호를 위한 극단적인 방법들과 기존 정당의 태도를 비판한 "녹색당(Grüne)"은 선거에서 점점 더 많은 지지를 얻게 되었다. 1982년 말에는 녹색당이 6개의 주의회(브레멘, 바덴뷔템베르크, 베를린, 니더작센, 헤센, 함부르크)에서 의석을 차지하였다. 1년 후 녹색당은 연방하원에도 입성하였다. 녹색당의 활동들 및 "자연보호연맹(Bund Naturschutz)", "그린피스(Greenpeace)", "로빈우드(Robin Wood)" 등과 같은 단체의 활동은 환경문제에 대한 인식을 일반대중에 확대시키는 데 있어서 크게 기여하였다.

바이에른에서의 환경보호 이미 1970년대 바이에른의 주정부는 "지역발전과 환경문제 부"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1984년에는 주의회결정 및 주민투표를 거쳐 주헌법에 환경 및 자연보호가 주의 목표라는 내용이 추가되었다. 바이에른 환경부는 1990년 그 사이 많은 긍정적 변화가 있었다고 발표하였다. 폐기물 무단 투기로 인한 쓰레기 더미들은 거의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고, 1970년 이후 폐수관의 지역 정화시설 연결 비율이 57%에서 84%까지 증가하였다. 그 결과 오염되지 않은 수자원 또는 오염 정도가 매우 낮은 수자원의 비율이 20%에서 60%까지 높아졌다. 바이에른의 전체 면적 중 거의 절반이 자연보호 및 자연관리 지역으로 설정되었다. (1970년대: 약 1/4)

평화를 위한 시위 독일에서 시위가 확산된 또 한가지 이유는 NATO의 이중결정이었다. 소비에트연방의 현대적인 중건리미사일 배치로 위협을 느낀 서유럽은 1979년 12월 이중결정을 내렸다. 즉, 소비에튼연방과 육지기반 중거리미사일에 대한 양측 동시 포기에 대한 협상을 진행하면서, 만약 이 협상이 결렬될 경우 1983년 말 이후 미국의 중거리미사일을 서유럽에 배치함으로써 "추가 무장"을 하겠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NATO의 추가 무장에 대한 결정에 대한 반대하는 시위는 평화운동으로 확산되었다. "무기 없이 평화 구축하기"라는 목표 하에 서독뿐 아니라 동독에서도 평화단체들이 결성되었다. 대부분의 평화단체들은 기독교 단체들이었다. 그들은 성경에 근거하여 "검 대신 쟁기"를 주장했다. 독일 평화운동의 절정은 1983년 10월 말 "행동주간"이었다. 슈투트가르트에서 울름까지 15만 명의 시위참여자들이 108km 길이의 인간띠를 만들었고, 본에서는 약 1백만 명의 사람이 시위에 참가하였다.


M4 1983년, 평화를 위한 인간띠


p. 31 이미 1973년 경제적 상황은 완전히 변했다. 이스라엘과 이집트/시리아 간 전쟁 중 10개 아랍 국가들이 "석유라는 무기"를 사용하였다. 그들은 서구 산업국가를 대상으로 석유공급을 중단해 많은 생산공장의 가동이 중단되었다. 서독에서도 에너지부족 문제가 심각해졌고 전례 없는 수준으로 석유가격이 인상되었다. 독일연방정부는 심지어 차 없는 일요일 제도를 도입해 자동차 사용을 금지시키기까지 하였다. "석유파동"의 또 다른 문제는 물가인상과 주요 수출상품의 가격인상이었다. 상당 부분 수출에 의존하고 있던 독일 경제는 큰 타격을 입었다. 당시 서독의 실업률이 이를 입증해준다. 한 해 동안 실업자 수는 27만 명에서 100만 명 이상으로 급증하였다. 1980년에는 실업자 수가 2백 만 명에 달했다(경제활동 인구의 9.3%). 실업률은 그 이후 독일 국내 정치의 주요 문제로 자리잡게 되었다. 수십 년 동안 경제수준은 높아졌지만 다른 산업국에서처럼 독일에서도 "신 빈곤"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독일에서는 이미 1988년에 520만 명의 월 평균 소득이 1039.50마르크(약 524.50유로)로 독일인의 평균 월소득의 절반 이하 수준이었다. 소득 수준이 이러한 경우 빈곤층으로 분류되고 국가의 사회부조를 받았다.

"손님노동자"가 등장하다 1964년에는 100만 번째 "손님노동자"가 독일에 입국했다. 손님노동자는 당시 외국인 노동자들을 지칭하는 표현이었다. 100만 번째 손님노동자는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오토바이를 선물로 받았다. 독일은 당시 여러 가지 이유에서 고향을 떠나야 하는 많은 외국인들이 선호하는 나라가 되었다. 이들 외국인 노동자들은 임금이 낮고 부지런한 인력으로 독일 기업에 고용되거나 고향에서 찾지 못한 일자리를 독일에서 구했다. 그들은 박해, 전쟁, 빈곤 때문에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었다. 대부분은 수년 간 일을 하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독일에 정착한 사람도 상당히 많았다. 일부 산업분야와 일부 직업에서는 손님노동자들이 주요 노동력을 제공하였다. 그들은 지금까지도 독일의 경제 성장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외국인들도 사회부조, 실업수당, 자녀수당, 주택수당을 수급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도 세금과 사회부담금을 납부하며 독일에 보탬이 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외국인 혐오주의적인 발언이나 행동들이 발견되기도 한다. 실질적으로 독일에 외국인이 지나치게 많은 것일까? 독일에 사는 외국인의 수는 외국인 혐오주의와는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외국인 혐오주의는 사실 외국인 비율이 낮은 지역에서도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실업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자신의 부가 위협 받는 느낌 때문에 많은 독일인들은 일자리나 안전한 보금자리를 찾아 독일에 온 외국인들에게 부당하게 독일의 여러 문제점들에 대한 책임을 전가한다.


M5 호드리기지스 드 자(Rodrigues de Sá) 포르투갈 출신의 호드리기지스 드 자(Rodrigues de Sá)는 쾰른에 도착하자마자 인터뷰를 하고 있다.

[?] "68운동" 68운동은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세대 전체가 참여한 시위운동이었다. 특히 자본주의에 바탕을 둔 소비문화의 확산과 가정, 학교, 대학, 일자리에서의 권위주의 등에 대한 반대가 핵심을 이룬 운동이었다. 독일과 프랑스에서는 특히 대학생들이 적극적으로 나섰고 큰 소란들이 자주 일어났다. 국가와 자본주의적 시스템은 바뀌지 않았지만 68운동은 사회의 민주화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여성의 권리가 개선되었고, 남자와 여자, 부모와 자녀, 선생과 학생 등과 같은 학교나 가정에서의 전통적인 권력 관계가 변하였다.


p. 32 M6 새 출발을 위한 정부 1969년 10월 28일 브란트 총리의 정부성명 중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정부의 정책은 지속성과 새로워지기를 추구합니다. 우리는 민주주의의 확대를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우리 사회 여러 분야에서의 공동의사결정, 공동책임은 향후 몇 년 동안 사회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정부는 비판적 파트너를 찾고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 여러분은 지난 몇 년 동안 독일 땅에 정착한 두 번째 민주주의가 첫 번째 민주주의와 같은 길을 걷게 될 것을 우려했습니다. 저는 절대 그렇게 되지 않을 거라 믿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민주주의의 종말을 앞두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한 출발선상에 서 있습니다. 출처: Peter Pulte 발행: Regierungserklärungen 1949-1973. Berlin/New York 1973. P. 227, 요약


M7 독일연방공화국의 외국인들 7a 연방공화국, 이민국이 되다. 1964: 110만 명의 외국인, 총 5790만 명의 인구 중 1.9% 1981: 460만 명의 외국인, 총 6170만 명의 인구 중 7.5% 1992: 650만 명의 외국인, 총 7903만 명의 인구 중 8.2% 외국인의 출신 국가: 1964: 이탈리아 29.0%, 스페인 14.4%, 그리스 14.3%, 터키 6.9%, 유고슬라비아 5.3% 1981: 터키 33.6%, 유고슬라비아 13.8%, 이탈리아 13.4%, 그리스 6.6%, 스페인 3.8%

7b 외국인 - 사회적 부담? 쾰른(kan): 본 소재 미래의 노동 연구소(IZA)의 발표에 따르면 독일에 사는 외국인들은 사회복지국가인 독일에 부담이 되기 보다는 국가에 기여하고 있다. 외국인 1인당 국가로부터 받는 지원보다 평균 1840유로 높은 액수의 세금과 부담금을 납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4년 기준 모든 외국은 평균 7390유로를 납부하고 평균 5550유로의 지원을 받았다. 독일인들은 외국인들보다 같은 해 1인 당 2750유로를 더 납부한 것으로 나타났다. 900유로의 차이가 나타나는 것은 외국인들의 소득이 평균적으로 더 낮고 실업률이 더 높기 때문이다. 출처: Augsburger Allgemeine, 2006년 9월 5일


M8 테러리스트들의 국가적 위협 8a 납치, 살인, 강요 1979년 11월 10일: 서베를린에서는 베를린시에서 가장 직급이 높은 판사인 드렌크만(Drenkmann)이 자기 집에서 살해되었다. 1975년 2월 27일: 베를린의 기민당(CDU) 주대표인 페터 로렌츠(Peter Lorenz)가 납치당했다. 범인은 로렌츠를 풀어주는 대가로 테러리스트 네 명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1975년 4월 24일: 독일 테러리스트들이 슈톡홀름 소재 독일 대사관을 점령하고 11명을 인질로 삼는다. 연방정부는 26명의 테러리스트를 석방하라는 요구를 거절한다. 테러리스트들은 두 명의 인질을 살인하고 건물을 폭파한다. 이 과정에서 테러리스트 한 명이 죽고 인질들을 중상을 입는다. 스웨덴 경찰은 나머지 5명의 범인을 체포한다. 1977년 4월 7일: 공무용 차량에 타고 있던 연방검찰관인 지그프리드 부박(Siegfried Buback)과 그의 운전기사 및 공무원 한 명이 칼스루헤 길거리에서 사살된다. 1977년 9월 5일: 기업가 연합 대표였던 한스 마틴 슐라이어(Hans-Martin Schleyer)가 납치되고, 그의 운전기사와 보디가드 3명은 살해된다. 1977년 10월 13일: 팔레스타인인들이 마요르카에서 프랑크푸르트로 향하던 루프트한자 항공기를 납치해 모가디슈(소말리아)에 착륙시킨다. 그들은 독일 테러리스트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기장은 살해된다. 10월 18일에는 연방국경수비대의 특수부대가 기습하여 인질들을 구출한다. 몇 시간 후 RAF의 대표 안드레아스 바더(Andreas Baader)와 구드룬 인슬린(Gudrun Ensslin)이 슈투트가르트-슈탐하임 교도소에서 자살한다.


M 8b RAF측에서 언론에 전달한 사진 슐라이어의 생존을 알리기 위해 납치범들이 사진과 음성녹음 파일을 공개한다. 연방정부는 구속된 테러리스트들의 석방 요구를 거절한다. 6주 후 모가디슈 사건이 발생한 다음 날 슐라이어의 시신이 버려진 한 차량의 트렁크에서 발견된다.


p. 33

M9 "녹색 정치"의 기본원칙 장기간 녹색당의 연방대표를 역임한 클라우디어 로트(Claudia Roth)는 녹색당의 정치적 목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녹색당의 정치적 목표는 두 개의 기본적인 철학을 바탕에 둔다. 하나는 지금 우리가 살고 이 지구는 우리 자녀들이 살아갈 지구를 우리가 잠시 빌려 쓸 뿐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우리는 마치 또 하나의 지구를 여분으로 가지고 있는 것처럼 지구를 함부로 다루고 있다. 경제활동의 방식은 물질적 풍요를 보장해주기는 하지만, 이는 매우 높은 양의 에너지와 자원을 소비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며 따라서 막대한 양의 폐기물과 유해물질이 발생하게 된다. 우리는 필요로 하는 자원을 제3세계로부터 싼 값에 즉, 불공정한 가격에 구입해 사용한다. 녹색당의 정치적 목표가 바탕에 둔 또 다른 철학은 우리 사회의 불가피한 변화는 사람들이 정치와 경제 분야에서 내려지는 결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는 점이다. 바로 이 때문에 녹색당은 직접적 민주주의의 도구들이 포괄적으로 적용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저자가 실시한 인터뷰 내용


M10 어떻게 평화를 창출하는가? 10a 1983년 기자인 프란츠 알트(Franz Alt)가 "평화를 가능하다. 산상수훈의 정치(Frieden ist möglich. Die Politik der Bergpredigt)"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몇 달이 되지 않아 인쇄된 50만부가 모두 팔렸다. 평화를 사랑하는 방식에 있어서 원수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보다 더 이성적이고 적절한 방식은 없는 것 같다. 원수를 사랑함으로써 분쟁과 폭력성을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원수를 사랑함으로써 피를 흘리지 않고 위협하지 않으면서 싸울 수는 있게 된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타인의 상황과 타인의 입장에 자신을 대입해 생각해본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내가 스스로 무장을 하면서, 왜 다른 사람이 무장하는 것을 비난하는가? 상대방이 무장을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할까? 정치인들은 군대와 무기산업의 압력 하에서 무장을 통해 상대를 위협하고 이를 통해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평화를 사랑하는 것이야 말고 생존을 가능케 한다. 우리 독일인들은 헬무트 콜(Helmut Kohl) 총리가 독일의 재무장에 동의할 경우 자신이 했던 정부성명 내용 중 다음 내용을 상기시켜주어야 할 것이다. "평화를 최소한의 무기로 창출하는 것, 그것이 이 시대의 과제다." 무장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각종 모임과 서신을 통해 평화의 의무를 알려야 한다! 독자편지를 통해 여론을 조성하자! 정당에 가입하자! 평화운동에 참여하여 평화단체를 설립하자! 우리는 결코 힘이 없지 않다. Franz Alt: Frieden ist möglich. München 1983, p. 87, 요약


10b 프란츠 알트(Franz Alt)의 책과 평화운동에 관하여 한 잡지에 실린 글이다: 또 다시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 원인은 전쟁과 관련된 민족을 구성하는 사람들의 평화애호의 부족이 아닐 것이다. 또한 개인의 평화애호가 전쟁 없는 평화 시대를 가능케 하는 이유도 아닐 것이다. 바로 이점이 프란츠 알트(Franz Alt)와 수 많은 평화운동가들이 간과하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일명 평화교육을 실시하기 위한 각종 노력들이 별로 설득력 있어 보이지 않는다. 평화교육 내용을 살펴보면 작은 집단이나 단체의 행위와 전쟁과 평화라는 큰 문제에 관한 결정 사이의 전혀 입증된 바 없는 인과관계가 소개된다. 전쟁 예방은 오늘날과 같은 세계 정세 속에서 이성의 문제다. 수 많은 사람들은 정부의 국방정책에 반대하기 위해 시위에 참여하지만, 사실상 무엇에 반대하는 것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한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단지 평화를 위해 시위를 한다는 사실이다. 평화애호만으로 평화를 보장하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다. Manfred Hättich: Weltfrieden durch Friedfertigkeit? Eine Antwort auf Franz Alt. München 1983, p. 94, 요약


질문과 심화 탐구 제안 (1) 본 장의 제목 끝에 첨가된 물음표가 필요한 이유를 제시하고 물음표에 대한 각자의 의견을 제시하라. (VT, M1-M10) (2) 1970년대를 서독사람들이 새 출발의 시기라고 인식하였는지 설명하라. (VT, M2, M6) (3) 시민운동이 시작되고 녹색당이 성공을 거둔 이유에 대해 설명하라. (VT, M1, M3, M9) (4) 환경 및 자연에 대한 인식의 확대가 어떠한 변화를 가져왔는지 조사하라. (5) 평화운동의 동기와 목표 그리고 평화운동에 대한 비판에 대해 토론하라. (VT, M4, M10a, 10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