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분쟁지역 중동"의 두 판 사이의 차이

cefia
이동: 둘러보기, 검색
cefia>Dominicy
(새 문서: p.77 1948/1956/1967/1973 수 많은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은 생존을 위해 싸웠다. -------------------------------------------------------------------------------------...)
 
잔글 (판 1개를 가져왔습니다)
 
(차이 없음)

2021년 9월 12일 (일) 22:28 기준 최신판

p.77

1948/1956/1967/1973 수 많은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은 생존을 위해 싸웠다.


1979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평화협정을 체결하였다.


1987 이스라엘이 점령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최초의 인티파다(Intifada)가 일어났다.


2000 두 번째 인티파다(Intifada)가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위한 협상 실패 후 일어났다.


이스라엘은 1948년 국가가 건설된 직후부터 생존을 위해 싸워야 했다. 아랍국가들과 팔레스타인인(이스라엘에 살고 있는 아랍인)은 이스라엘을 부정하며 신생국가인 이스라엘을 부분적으로는 무력을 동원해 제거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이스라엘과 인근 국가들과 수 많은 유혈전쟁이 일어났고, 이스라엘 내부에서는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위한 투쟁도 계속되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이스라엘은 주로 미국과 유럽 국가들의 지지를 얻었다. 1960년대 말 이스라엘은 일명 6일전쟁의 승리로 위상이 높아졌고, 군사적으로 매우 우세하다는 점을 입증하면서 상당히 넓은 영토를 획득하였다. 6일전쟁 이후 다수의 팔레스타인인의 태도도 바뀌었다. 그들은 조용히 기다리기만 하면 아랍국가들이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을 무너뜨릴 것이라 생각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랍국가들이 몇 일 싸우지도 않고 지는 것을 보면서 그러한 바람이 물거품이 되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 독립을 위한 단체들은 이스라엘을 상대로 보다 강력한 게릴라활동을 펼쳤다. 팔레스타인 독립 문제는 다른 아랍권 국가들에게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세계 강국들은 6일전쟁을 계기로 중동지역을 좀 더 유심히 지켜보게 되었다. 미국은 이스라엘과 전략적 파트너 관계 안에서 이스라엘과의 접촉을 강화하면서 소비에트연방을 그 일대에서 몰아내고자 하였다. 소비에트연방은 그 반대로 아랍권 국가들에게 다양한 무기를 공급하면서 이들 국가를 지원하였다. 1973년 10월 6일 즉, 유태인들이 속죄의 날로 지키는 명절("욤 키푸르")에 이집트와 시리아의 공습으로 일명 욤-키푸르-전쟁이 시작되었다. 이스라엘 군대는 초기에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결국 적군을 완전히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은 약점을 드러내는 큰 손실을 보았다. 항시 방어태세를 갖추어야 하는 상황 그리고 국방비로 인한 경제 및 사회적 상황은 악화되고 있었다. 미국의 중재로 이집트와 긴장완화를 위한 노력들이 처음으로 시도되었다.


M1 이스라엘 2007년 Mittelmeer 지중해 Tyros 티로스 Libanon 레바논 Akko 아코 Haifa 하이파 Tel Aviv 텔아비브 Jaffa 자파 Ramla 라믈라 Beersheba 베르셰바 Aegypten 이집트 Sinai 시나이 Negev 네게브 Eilat 에일랏 Golf von Akaba 아카바만 Akaba 아카바 Nazareth 나사렛 Nablus 나블루스 Jericho 예리코 Jerusalem 예수살렘 Bethlehem 베들레헴 Hebron 헤브론 Safed 사페드 Tiberias 티베리아스 Jordan 요르단 Golan 골란 Syrien 시리아 Kuneitra 쿠네이트라 Jarmuk 얄무크 Ghor-Kanal 고어운하 Amman 암만 Totes Meer 사해 Jordanien 요르단 Akaba 아카바 [ ] 이스라엘 [ ] 1967년 이래 이스라엘이 점령한 지역 [ ] 일시적으로 통제된 안전구역 [ ] 점령지역 내 이스라엘의 주요 주거지 [ ] 1994년 5월 4일자 협약에 근거한 팔레스타인 자치지역 [ ] 2005년 이스라엘이 철수한 지역

이스라엘이 설치한 국경: --- 이미 설치 완료 --- 설치 중


p. 78 1977년 11월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Anwar al Sadat) 대통령이 이스라엘의 메나헴 베긴(Menachem Begin) 국무총리의 초청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하였고, 이때 평화협상이 시작되었다. 평화협상은 1978년 9월 사다트 대통령과 베긴 국무총리를 캠프 데이비드로 초청한 미국의 카터 대통령에 의해 보다 적극적으로 진행되었다. 여기에서 양국 대표는 두 나라의 평화를 위한 기본조건들을 합의하였다. 1979년 3월 26일 서명한 평화협약으로 카터, 사다트, 베긴 모두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이 협약 체결로 ("땅 대신에 평화"원칙에 따라) 1982년 이스라엘은 시나이 일대 지역을 이집트에 반환하였다. 이스라엘과 평화협약을 체결한 결과 이집트는 아랍연맹에서 퇴출되고, 사다트 대통령은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결국 지금(2007)에 이르기까지 그 이후 추가 평화협약이 단 1개 더 체결되었다(요르단과 1994년). 시리아, 레바논 등의 기타 아랍국가들과는 아직까지 아무런 합의점을 찾지 못한 상태인데, 그 이유는 무엇보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들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스라엘이 합의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인들의 투쟁 1964년 PLO(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설립되었고, 산하에 수 많은 팔레스타인 단체들이 조직되어 팔레스타인인들의 정치적 대표 기구로서 자리잡았다. 1969년 이후 야세르 아라파트(Yassir Arafat)가 PLO의 대표직을 수행했다. PLO와 협력하는 팔레스타인 단체들은 이스라엘과 이스라엘 점령지역에서만 투쟁할 뿐 아니라, 아랍 이웃국가들을 이스라엘 지역을 공격하기 위한 기지로 삼기도 한다. 결국 그래서 레바논에 대해 이스라엘이 두 차례 침공을 하는 사건이 일어났다(1978년, 1982년 수도인 베이루트까지 점령). 1972년 뮌헨에서 이스라엘 국가대표단에 대한 공격 등 팔레스타인인들의 지속되는 테러로 점점 더 많은 아랍 국가들이 PLO의 활동에 대해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1980년대에는 팔레스타인 문제가 거의 사라진 듯 했고, 이라크와 이란의 걸프전쟁 때문에 잊혀졌다. 그러나 서부 요르단과 가자지구에 대한 이스라엘의 점령이 계속되지, 팔레스타인인들은 1987년 일명 인티파다(Intifada, 아랍어로 뿌리치기 위해 일어난다는 뜻)가 시작되었다. 그 이후 몇 년 동안 이스라엘 점령지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의 유혈 조항운동과 대대적인 시위가 계속되었다. 냉전 종식 이후 중동 지역의 상황도 바뀌었다. 소비에트연방의 몰락으로 아랍국가들은 막강한 파트너를 상실했고, 새로운 평화질서 정착을 추구하기 시작한 미국도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간 매우 길고 어렵고, 부분적으로는 비공개였던 협상을 지원하였다(일명 오슬로 평화 프로세스). 1994년 가자-예리코-협약 체결을 통해 상호 인정과 서요르단과 가자지구의 단계적 자율성 보장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1995년에는 이스라엘의 이츠하크 라빈(Yitzhak Rabin) 국무총리와 PLO의 야세르 아라파트(Yassir Arafat) 대표가 한 협약을 체결하였다. 이 협약을 통해 팔레스타인인들의 자치권 확대, 서요르단 내 팔레스타인인들의 대표적 주거지로부터 이스라엘의 철 수 등이 언급되었다. 더디게 개척되고 있던 평화로 향하는 길은 양측 극단주의자들 때문에 방해를 받기도 하였다. 팔레스타인 테러단체들이 민간 유태인에 대해 점점 많은 공격행위를 일삼았고 1995년 11월 4일에는 이츠하크 라빈(Yitzhak Rabin) 국무총리가 10만 명이 넘는 인원이 참석한 한 평화집회에서 젊은 유태인 극단주의자에 의해 살해되었다. 라빈의 후임자였던 네타냐후(Netanjahu), 바라크(Barak), 샤론(Sharon) 총리 시절에는 평화프로세스가 진척이 없었다.


M2 이집트 안와르 사다트(Anwar al Sadat) 대통령 1977년 아랍인들과 유태인 사이의 화해를 위한 첫 걸음을 옮긴 사람이다. 사다트 대통령이 평화프로세스에 어떠한 기여를 했는지 조사해보라.


p. 79 M3 자기 그림자 뛰어넘기 (칼-하인츠 쇼넨펠트(Karl-Heinz Schoenenfeld)의 캐리커처, 1993년) 이 캐리커처는 예리코와 가자지구 내 팔레스타인인들의 자치권에 관한 협약 체결을 앞으로 공개되었다. 캐리커쳐를 설명하고 어떠한 메시지를 전하려고 한 것인지 논하라.

이스라엘 군대의 철수도 중단되었고 이스라엘 정부는 팔레스타인 영토에 유태인 주거지를 신설하였다. 그리고 서로에 대한 테러가 계속되었다. 2000년 9월에는 두 번째 인티파다(Intifada), 일명 알-아크사-인티파다가 시작되었다. 그에 대한 대응으로 이스라엘 정부는 테러에 대한 총책임이 있다고 여겨지는 아라파트(Arafat)와의 소통을 단절하고 그를 라말라 소재 본부에 실질적으로 감금한 것과 마찬가지 조치를 취했다. 그 밖에도 2002년 6월에 서요르단과의 경계에 장벽 설치가 시작되어, 테러리스트들의 이스라엘 입국을 막고자 하였다. 알-아크사-인티파다는 팔레스타인 자살테러범들과 이스라엘의 반격으로 2005년까지 수천 명의 사람들을 희생시켰다. UN, 미국, EU 그리고 러시아(일명 "중동-콰르텟")의 중재 노력들은 수포로 돌아갔다.

폭력은 끝이 없나? 평화프로세스는 야세르 아라파트(Yassir Arafat)가 2004년 11월 사망한 이후에야 적어도 부분적으로 다시 진전을 보였다. 2005년 2월 초 이스라엘의 아리엘 샤론(Ariel Schron) 국무총리와 팔레스타인 자치기구의 대표이자 아라파트(Arafat)의 후임자인 마흐무드 아바스(Mahmud Abbas)가 휴전협정을 체결함으로써 두 번 째 인티파다가 공식 종결되었다. 2005년 여름에는 38년만에 처음으로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 군대와 유태인 주민들이 완전히 철수하였다. 극단주의적이고 강경한 이슬람교 팔레스타인단체인 하마스(Hamas)가 2006년 1월 팔레스타인 의회 선거 시 승리를 거두면서 그러나 상황이 다시 첨예화될 조짐을 보였다. 하마스는 이스라엘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평화협정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이스라엘 정부, EU, 미국은 하마스가 이끄는 정부와의 협력을 거부하였고 제재를 가하기 시작했다. 2006년 말 파타(Fatah)와 하마스 두 단체 간 의회 내 권력 다툼이 커져 추종자들 간에 유혈 사태까지 일어났다. 2007년 2월 초 양 단체의 대표들이 합일점을 찾고 공공으로 정부를 구성하기로 합의했지만, 공동정부는 일시적으로만 유지되었다. 내전이나 다를 바 없는 사태들이 결국 분열을 일으켰다. 아바스(Abbas)가 이끄는 PLO는 서요르단을 점령하였고, 하마스는 가자지구를 차지했다. 평화프로세스는 팔레스타인 단체들이 단결할 때 그리고 팔레스타인인과 이스라엘인들이 상대방의 국가를 인정해줄 때에야 비로소 진척될 수 있을 것이다.


p. 80 M4 테러와 보복테러 좌: 텔아비브의 한 디스코텍 방문자들을 향한 자산테러 이후 희생자와 구호자들의 모습, 2001년 우: 이스라엘 군인들이 아랍 청소년들을 향해 발사하는 모습, 2002년


M5 부끄러워요. 16살 된 한 자살테러리스트가 기자에게 한 말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부끄럽습니다. (…) 제가 부끄러운 이유는 제가 아직도 살아있고 수 십 명의 유태인을 죽이지 못한 것이 부끄럽습니다. (…) 그쪽에 가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우리 적군의 땅, 침입자들의 땅. 전 관심 없습니다. (…) 제게 중요한 곳은 예루살렘이에요. 바로 우리 가족의 뿌리가 있는 곳이죠. (…) 제 학교 친구 두 명이 총에 맞아 죽었어요. 저는 제 가장 친한 친구가 총에 맞아 길거리에 쓰러져 배에서 피를 쏟아내며 죽는 것을 봤어요. 작은 피 웅덩이가 금방 강이 되어 시장 쪽으로 흘러갔어요. (…)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탱크를 향해 돌을 던지다가 그렇게 된 거였어요. 저희는 당시 12살이었어요. (…) 저는 (테러시도 전) 푹 잤어요. 전 이 일이 좋은 일이라는 것을 알아요. 알라신은 현재이자 미래입니다. 그는 나를 이해해주실 것에요. (…) 엄마 (…)는 아직 완전히 이해해주시지는 않았어요. (…) 제 자살테러 계획을 들으시고 우셨어요. 이스라엘은 그 이후 우리 집을 완전히 밀어버렸어요. 그들은 그게 우리에게 복수나 형벌이 된다고 생각 하나 봐요. 우리에게는 사실 큰 명예인데 말이죠. 이제는 엄마도 침입자들에 대해 분노하시게 되었어요. 엄마는 이제서야 배우기 시작하는 거죠. 출처: Erich Follath. Ich schäme mich, am Leben zu sein, in: Siegel Spezcial. Terror: Der Krieg des 21. Jahrhunderts. Hamburg 2004, p. 105


M6 이스라엘과 서요르단 사이의 장벽 이스라엘의 가버사바(Kfar Saba) 시의 주민들은 높은 콘크리트벽을 보호벽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이제 평화롭게 살 수 있어요. 자살테러공격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없이 말이죠." 52세의 메이르 톨레다노(Meir Toledano)는 말한다. 이 장벽 1킬로 미터 밖 칼킬리야(Kalkilija)에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인들에게는 이 장벽이 저주스럽다. "할 수만 있다면 제 이빨로 다 뜯어내버리고 싶죠.) 40살의 모하메드 하니니(Mohammed Hanini)의 말이다. 출처: Stern. 2004년 2월 20일자 기사: http://www.stern.de/politik/ausland/index.html?id=520550&nv=cb


p. 81 M 7 헤브론에 사는 극단주의적인 유태인 가정의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 온 세상이 아랍인들을 싫어해 진짜 중요한 사실은: 그들을 차례 차례 죽여야 해. 발로 그들을 밟아 이빨로 그들을 물어 혀로 그들의 피를 핥아 그래도 아직 충분히 복수하지 못했지 "Hebron: Nach dem Massaker"라는 1994년 2월 26일자 ARD방송 중, 출처: Joachim Hundertmark-Dinkela, Berhard Lilienthal 발행: Der Nahe Osten. Konfrontation oder Koexistenz (Geschichte und Politik - Unterrichtsmaterialien), Frankfurt a.M. 1995, p. 159


M8 서동 오케스트라(West-Eastern Divan Orchestra) 1999년 이스라엘의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 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과 이제는 고인이 된 팔레스타인의 지성인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그리고 중동지역 아랍국가들의 청소년들이 함께 연주하는 오케스트라를 설립하기로 하였다.


M9 관용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이 2004년 부버 로젠츠바이크(Buber Rosenzweig) 메달을 수상하면서 했던 말: 저는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났죠. 그 이후 제가 10살 때 우리 가족은 이스라엘로 이사를 했어요. 저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갈등에 대해 듣게 되었어요. 물론 이스라엘에서 전해지는 이야기와 아랍세계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는 완전히 달랐어요. 오늘날 우리는 두 가지 모두 다 틀렸다는 것을 압니다. (…) 음악처럼 역사 역시 해석이 필요 없습니다. 두 가지 모두 정직하게 받아들이면 됩니다. 때로는 그것이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 그러나 이것은 역사의 한 단면일 뿐이지요. 다른 단면에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그 어떤 갈등도 정상일 수 없습니다. 특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서로를 잡아먹고 있는 꼴이라 더더욱 그렇습니다. (…) 우리는 프랑스혁명을 통해 이미 교훈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박애 보다 자유와 평등이 먼저 제시되었던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프랑스 혁명이 남긴 3가지 가치는 그 자체로서도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우선수위에 따라 순서대로 제시되었던 것 같습니다. 여전히 자유나 평등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박애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종종 관용이 필요하다고 말하곤 합니다. 대체 관용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나와 동등한 형편에 있는 사람을 관용한다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관용이 아닙니다. 그냥 수용하는 것이 되겠지요. 수용은 상대가 나랑 다르다는 점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공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서로 다른 악기를 다루는 연주자들이 나란히 앉아 오케스트라를 구성하는 것과 비슷하죠. 우리 모두 똑 같은 소리만 내면서 연주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정말 세상에서 가장 듣기 싫은 연주가 될 것입니다. 모든 연주자는 다른 소리를 낼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사실이 음악의 가장 중요한 원칙이지요. 이것을 수용하는 법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또한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는 폭력은 결코 수용될 수 없는 것이라는 점도 말이지요. Bad Neuheim, Germany, 2004년 3월 (http://west-easterndivan.artist.warner.de/ (20.07.2007))


질문과 심화 탐구 제안 (1) 도서관이나 인터넷에서 아라파트(Arafat)의 일생에 대해 조사해보고, 주요 사건들을 표로 만들어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라. 이 때 그를 지지하던 사람들과 반대하던 사람들의 의견을 모두 고려하라. (2) M4와 M6의 자료를 이용해 테러의 동기를 정리하라. (3) M6의 사진을 살펴보고 인터넷에서 이스라엘 국경 사진을 더 찾아보라. 국경에 대해 양측이 왜 전혀 다르게 생각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라. 이때 M1을 참고하라. (4) 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이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이의 분쟁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조사하라. 그는 음악과 중동분쟁을 어떻게 비교하고 있는가? 그의 의견에 따르면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이의 평화를 위해서는 어떠한 조건이 갖추어 져야 하는가? (M8, M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