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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월 12일 (일) 22:28 기준 최신판
4과 1932년 선거
학습목표
- 후버 대통령은 대공황에 대해 어떻게 대처했는가?
- 루즈벨트는 미국인들에게 “새로운 정책(new deal)”을 제시했을 때 무엇을 의미했는가?
- 1932년 선거는 왜 미국 정치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는가?
요점
대공황이 더 악화되면서 사람들은 그들의 삶의 고초가 후버 대통령과 공화당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1932년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의 프랭클린 D.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가 압도적으로 승리했고 정부의 역할에 대한 심도 있는 변화를 가져왔다.
핵심용어
- 할리-스무트 관세(Hawley-Smoot Tariff)
- 부흥금융공사(Reconstruction Finance Corporation)
- 보너스 군대(Bonus Army)
학습주안점
- 비교하기
본 과를 학습하면서 1932년 대통령 선거 후보자들의 중요한 정책을 열거하여 다음 표를 완성하시오.
∙ 허버트 후버
정부에 대한 생각
- 최소한의 정부에 대한 신념
- 정부에 대한 엄격한 관점(작은 정부가 더 좋은 정부다)
∙ 프랭클린 델라노 루즈벨트
정부에 대한 생각
- 정부의 역할에 대한 실험을 기꺼이 하고자 함.
- 정부의 역할의 확대를 지지함.
배경
1932년 후버 대통령은 인기 가수인 루디 발리(Rudy Vallee)에게 대통령 선거운동을 위한 주제곡을 의뢰했다. 후버는 사람들이 대공황기의 어려움을 잊도록 도울 수 있는 노래를 원했다. 발리가 작곡한 “형제여, 내게 10센트 동전 하나 줄 수 있는가”는 브로드웨이의 뮤지컬인 “뉴 아메리카나(New Americana)”에서 따온 것이었는데 곧 대공황기를 상징하는데 적합한 상징이 되었다. 미국인들에게 널리 불러졌지만 이 노래는 후버 대통령이 선거운동 주제곡으로 기대했던 것처럼 낙관주의를 불러일으키는 노래는 아니었다.
“한번은 내가 철로를 만들었네, 나는 기차가 달리게 했지. 분초를 다투며 달릴 수 있도록. 한번은 내가 철로를 만들었네. 이제 다 끝났으니, 형제여, 내게 10달러짜리 동전 하나 줄 수 있겠나.”
이와는 반대로 1932년 대통령 선거의 민주당 후보였던 프랭클린 델라노 루즈벨트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선거운동 주제곡을 만들었다.
“행복한 날들이 다시 찾아 왔네. 하늘은 다시 맑게 개였으니 신나는 노래를 다시 부르세. 행복한 날들이 다시 찾아 왔네.”
후버는 특이하게도 기술자(engineer)였던 이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위대한 기술자”로 알려져 있었고 미국이 대공황에서 벗어나도록 조정하고자(engineer)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신념에 대해 철저하게 고수했기 때문에 그가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에 대한 심각한 한계가 있었다.
후버의 제한적인 정책
주식시장이 붕괴한 후 몇 달 동안 후버 대통령은 재개 지도자들과 함께 회복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감이라고 주장했다. 후버는 미국 경제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통제 밖에 있는 세계적인 경제여건”에 대공황의 책임을 돌렸다. 후버의 조언을 받아서 재계와 정부의 지도자들은 경제에 있어서 대중의 자신감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공장들이 문을 닫아도 후버정부 관리들은 곧 경제여건이 회복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 역사 속의 한 장면: FDR의 취임식을 그린 이 뉴요커(New Yorker)지 표지는 새 대통령 루즈벨트와 후버를 대조적으로 그리고 있다.
- 편견을 발견하기: 이 그림이 특정한 후보에 대해 비판적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두 후보에 대한 미국 대중의 인식에 대해 비판적이라고 생각하는가?
자발적인 활동이 실패하다
후버는 미국 기업들의 자발적인 통제가 경제위기를 끝낼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믿었다. 그는 곧 백악관의 주도로 재계지도자들의 회의를 소집했고 임금 수준을 유지하겠다는 약속을 얻어내었다. 처음에는 많은 기업들이 임금 수준을 높게 유지했다. 그러나 1931년 말에는 기업들은 은밀히 노동자들의 임금을 삭감했다
후버는 자발적인 활동이라는 그의 원칙을 고집했다. 그는 내성적인 사람이었는데 기업가로서는 성공했지만 정치 경력은 부족했다. 그래서 그는 정치적인 타협에 있어서 유연성을 별로 보여주지 못했다. 대중의 요구에 따라 자신의 입장에서 불가피하게 물러서게 됐을 때도 후버는 변화된 계획을 미국인들에게 그다지 설득력 있게 제시하지 못했다. 한 해 동안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면서 사람들은 후버와 공화당에게 위기의 책임을 묻기 시작했다.
정부의 정책
후버는 자신의 신념에 투철했고 대중들을 지속적으로 설득을 해왔지만 수많은 미국인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대공황이 시작되기 전에도 의회는 후버의 지원을 받아 1929년 6월 농산물유통법(Agricultural Marketing Act)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연방농업위원회(Federal Farm Board)를 구성하여 곡물의 가격을 안정시켜서 농민들을 구제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 법안은 실패작이었음이 드러났고 1억5천만 달러의 손실을 입고 곡물의 가격은 더 심한 하락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게 되었다.
대공황이 더 심해지자 공화당은 1930년 중간선거에서 패배해 더 이상 하원을 지배하지 못했고 상원에서도 1석 차이로 다수당의 지위를 간신히 유지했다. 고통이 지속되고 비난이 증대하자 후버는 더 적극적인 접근법을 택했다.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 정부는 새로운 공공건물, 도로, 공원과 댐을 건설하기 위해 더 많은 지출을 했다. (나중에 후버 댐으로 개칭된) 보울더 댐(Boulder Dam) 공사는 1930년 시작되었다. 백악관 고용비상자문위원회(President's Emergency Committee on Employment)는 각 지역에 구제프로그램을 만들 것을 권고했다.
해외의 수입품으로부터 국내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로 1930년 의회는 역사상 가장 높은 수입관세를 부과하는 할리-스무트 관세법(Hawley-Smoot Tariff)을 통과시켰다. 할리-스무트 관세는 역효과를 내었다. 유럽 국가들도 관세를 올렸고 세계 무역은 급작스럽게 쇠퇴하였다. 후버는 제1차 세계대전 연합국들의 전시 부채상환을 유예해 주었지만 유럽의 경제는 더 약화되었다.
1932년 초 후버는 부흥금융공사(Reconstruction Finance Corporation)를 설립해서 대기업, 철도, 보험사 등의 기관에 정부 융자를 제공했다. 이 법은 대출을 확대할 수 있도록 은행들에게도 자금을 지원했다. 또한 같은 해에 의회는 주택대출은행법(Home Loan Bank Act)을 통과시켜서 주택담보대출 금리를 인하해서 주택소유자들이 자신의 집을 보전하고 농부들이 농장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왔다.
- 역사 속의 한 장면: 이 사진에서 보이는 보울더 댐 건설에는 대량의 철근 기둥 구조를 가지고 있었고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에 소요된 정도의 철강이 사용되었다.
- 정보를 종합하기: 후버는 보울더 댐 건설 비용 지출을 통해 무엇을 성취하기를 기대했는가?
부흥금융공사는 사회 상층부의 번영이 경제 전체를 돕는다는 이론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 보통사람들은 굶주리고 있는데 정부가 은행과 대기업들만을 돕는 것으로 비쳐졌다. 부흥금융공사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은행들은 계속해서 파산했다.
후버에 대한 불만이 증가하다
후버는 위에서 말한 계획들을 지지했지만 각 주와 각 지방정부가 구제 프로그램을 주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연방정부가 직접적으로 구제하는 것은 사람들의 자존감을 파괴하고 대규모의 관료제를 낳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직접적인 지원을 거부하자 대중들은 격렬하게 저항했고 부정적인 여론이 확산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구호활동으로 “위대한 인도주의자”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대공황기의 구호활동에 대한 그의 태도 때문에 그는 냉혹하고 완고한 사람으로 보여 졌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문제 때문에 후버를 비난했지만 늘 정당한 비판만 했던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을 때 신문들은 백악관 뜰에서 개에게 먹이를 주는 후버의 사진을 게재했다. 사람들은 후버가 “우리 국민들은 배고픔과 추위로부터 보호되어 왔습니다.”와 같은 말을 할 때 야유를 보냈다.
자선단체들과 지역정부의 구호활동은 후버가 기대했던 것만큼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지 못했다. 1932년에 후버는 관행을 깨고 부흥금융공사가 각 주에 실업구제를 위한 자금을 지원했지만 그 규모가 작았고 너무 늦었다.
대공황이 심화되자 영국의 경제학자인 존 메이너드 케인즈(John Maynard Keynes)의 이론을 지지하는 경제학자들이 등장했다. 케인즈는 대규모의 정부지출이 붕괴하는 경제를 돕고 민간부문의 지출 및 상품과 재화의 생산을 고무시킨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경제이론은 아직은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참전용사들이 워싱턴에서 행진하다
후버의 지지율은 1932년 일자리를 잃은 제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들과 그들의 가족들 2만 명이 워싱턴에 모일 때 최저점에 달했다. 스스로를 보너스군대(Bonus Army)라고 부른 이들은 1945년으로 예정된 연금 보너스를 즉각적으로 지불해 줄 것을 요구했다. 하원에서는 이들의 요구를 승인했지만 상원은 거부했다. 대부분의 보너스군대는 집으로 돌아갔지만 몇 천 명이 판자집에 살면서 남아있었다.
- 학습이해도 확인: 후버는 직접적인 연방정부의 구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가?
- 오늘날까지 이어보기
- 정부에 대한 철학FDR의 뉴딜정책은 미국인들의 삶에 있어 정부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철학의 탄생을 보여주었다. FDR의 시대 이후로 미국인들은 정부의 크기와 역할이 어떠하여야 하는지에 대한 상반되는 의견을 가져오고 있다. 1933년 루즈벨트의 뉴딜정책은 사회와 복지제도에 대한 정부의 역할을 확대했다.
1964년 FDR의 전통을 이어서 존슨 대통령은 가난과 싸우는 법령을 제공하고 의료혜택을 제공하는 “위대한 사회”를 약속했다.
1981년 정부는 최소한의 역할만을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보수주의자들이 승리를 거두었고 레이건 대통령은 사회복지 지출을 삭감하기 시작했다.
1993년 클린턴 대통령은 FDR의 행동주의와 레이건의 보수주의를 타협시켜 더 작지만 적극적인 정부를 추진했다.
- 사회복지에 있어서 큰 정부의 역할과 제한적인 정부의 역할의 결과는 어떻게 되겠는가?
보너스군대의 행진은 대체로 평화로웠지만 몇 건의 폭력적인 사태 때문에 후버는 군대를 동원했다. 대통령은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에게 펜실베니아 애버뉴(Pennsylvania Avenue)에 모인 사람들 만을 해산시키라고 명령했지만 맥아더는 행진에 참가한 모든 사람들을 워싱턴에서 몰아내기 위해 병력을 사용하였다. 보너스군대의 참전용사들은 벽돌과 돌멩이로 무장한 채 자신들의 나라의 총과 탱크와 최류탄과 맞섰다. 많은 사람들이 부상했다. 후버는 크게 당황했지만 맥아더의 작전에 대해 책임을 졌다. 다음 선거에서 이 험악한 장면의 영상들은 후버의 낙선에 기여했다.
미국을 위한 새로운 정책(New Deal)
“나는 미국인들을 위한 새로운 정책(New Deal)을 펼칠 것을 서약합니다.” 대통령 후보 프랭클린 델라노 루즈벨트는 1932년 7월 시카고 컨벤션에서 민주당의 후보 지명을 수락하면서 이렇게 선언했다. 대의원들은 환호했고 오르간은 선거주제곡인 “행복한 날들이 다시 돌아왔네.”를 힘차게 울렸다. 공화당은 6월에 후버를 대통령 후보로 다시 지명했다. 대통령 선거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두 후보 간의 차이점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민주당의 프랭클린 루즈벨트와 엘리너 루즈벨트 부부는 대선에서 승리할 주목할 만한 정치적인 역량을 가졌다. 언론에서 “FDR”이라는 애칭으로 불러진 프랭클린은 1882년 태어났다. 그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법률회사에 취직했지만 그의 주된 관심은 정치였다. 그는 두 차례 뉴욕주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윌슨 대통령 시절 해군성차관보를 역임했다.
1920년에 FDR은 부통령 선거에 나갔다가 패배했다. 다음해 여름, 그는 소아마비를 앓았고 다시는 도움이 없이 걸을 수 없게 되었다. 그는 1920년대 대부분을 조지아주 웜스피링즈(Warm Springs)에서 요양을 하며 보냈지만 그의 아내의 도움으로 정치에 대한 관심을 이어갈 수 있었다.
시어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의 조카인 엘리너 루즈벨트(Eleanor Roosevelt)는 1884년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1905년 먼 친척인 프랭클린과 결혼했다. 1920년대에 엘리너는 뉴욕 주에서 주택공급을 위한 입법활동과 주정부 개혁, 산아제한, 여성노동자들의 근로조건 향상 등 여러 가지 활동을 벌였다. 1928년에 FDR이 뉴욕주 주지사로 출마하도록 설득되었을 때 엘리너는 이미 경험이 많은 정치인이며 사회개혁가로서의 위치를 가지고 있었다.
- 역사속의 한 장면: 맥아더의 군대는 시위대를 해산한 후 보너스군대의 야영지에 발포했다.
- 적절성에 대해 판단하기: 보너스군대에 대한 정부의 대응은 대통령 선거에서 후버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고 생각하는가?
- 심화학습: 정부
- 수정헌법 제20조: 1932년 3월 2일 의회는 수정헌법 제20조를 발의했다. “레임덕 수정안”이라고 불린 이 법안의 목적은 11월의 선거일과 의회 대표와 대통령이 취임하는 시기까지의 기간을 단축하는 것이었다. 이 수정안 전에는 선출된 관리들이 3월 4일에 취임했다. 4개월이 넘는 선거 후의 기간 동안 선거에서 진 사람들은 “레임덕”이 되어 별다른 영향력 없이 시간을 보냈다. 이 수정안은 취임일을 1월 20일로 바꿔서 레임덕 기간을 반으로 줄였다. 1933년 10월 15일 모든 주가 이 수정안을 비준했다. 처음으로 적용된 대통령의 임기는 FDR의 두 번째 임기였는데 1937년 1월 20일 시작되었다.
FDR이 뉴욕주 지사(1929-1932)로 성공을 거둔 후 그의 지지자들은 그가 대통령 후보에 도전할 준비가 되었다고 믿었다. 그의 함박웃음과 상냥한 태도는 당시 미국이 절실히 필요로 하던 낙관주의 정신을 잘 보여주었다.
후버와는 달리 FDR은 정부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실험을 기꺼이 하고자 하였다. 그는 부유한 환경에서 자라났지만 부분적으로는 그의 장애 때문에 보통사람들을 위한 진정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또한 미국의 부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의 격차에서 큰 도전을 받았다.
뉴욕주 주지사로 재임할 때에 루즈벨트는 대공황기의 구호활공을 열정적으로 벌였다. 1931년 그는 대공황기에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첫 번째 주립 기관을 설립했다. FDR은 대통령 후보로서 “뉴딜” 정책을 약속할 때에 이와 같은 프로그램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1932년 선거
후버는 대통령 재선에 나서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선거운동은 두 사람 사이의 경쟁이 아니라 정부의 역할에 대한 두 가지 철학 사이의 경쟁이다.” - 헐버트 후버대통령, 1932년 여름
이 선언은 1932년 대통령선거가 그 후로 오랫동안 미친 영향을 정확하게 설명해준다. 1932년 대통령선거는 연방정부가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고 해결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들과 대공황과 같은 대규모의 문제들은 정부의 지원을 필요로 한다고 느끼는 사람들 간의 역사적인 대결이었다. 이 선거는 이후 수십 년 간의 공공정책에 거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후버는 여전히 대공황을 완화하기 위한 자발적인 지원을 주장하면서 민주당의 입장을 공격했다. 그는 만일 민주당의 정책이 채택된다면 “더 이상 우리가 과거에 알아왔던 미국이 아닐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연방정부에 더 많은 권력을 주자는 견해를 완고하게 거부했다.
루즈벨트는 반대로 “가치의 재평가”와 기업에 대한 통제를 주장했다.
“우리는 지난 사반세기의 입법과 국민들의 의식의 변화를 통해 민간경제력 또한 국민이 위임한 것이라는 견해에 도달했다고 생각합니다.” - 프랭클린 델라노 루즈벨트, 1932년
이런 선언들이 FDR의 새로운 입장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많은 미국인들은 루즈벨트의 정책 때문에 지지한 것도 아니었고 후버가 지나치게 수동적이라고 거부했던 것도 아니다. 이미 오래 전에 공화당원들도 후버를 버렸다. 원래부터 내성적인 사람이었지만 후버는 우울하고 고립되어 갔다. 그는 선거유세 연설도 몇 번 하지 않았다. 군중들은 후버의 자동차퍼레이드를 향해 야유를 퍼부었다.
FDR은 유권자 직접 투표에서 7백만 표의 큰 차이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대부분의 그의 지지자들은 1928년 이후에 민주당 편에 선 집단들, 즉 도시 노동자들, 광부들과 가톨릭 및 유대인의 후손들로부터 나왔다.
- 1차 자료 비교: 대공황에 맞서기
- 1932년 대통령 선거운동에서 철학적인 차이가 분명하게 나타났다.
- 관점을 분석하기: 두 후보의 진술을 비교해 보라.
∙ 적극적인 수단의 사용에 반대함.
“반대자들은 우리가 변화해야 하며 새로운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변화에 대해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세대에 걸쳐 입증되고 또 지키기 위해 싸워 온 미국인들의 삶의 모든 기초를 바꾸려는 제안에 대해 반대하는 것이다.” - 허버트 후버, 1932년 10월 31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 연설
∙ 적극적인 수단의 사용을 옹호함.
“나는 여러분께 다른 연설에서도 말씀드린바 있지만 다시 모두에게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대폭락이후 지난 2년간 후버 행정부가 실업의 어려움과 맞서기 위해 행한 유일한 노력은 실업의 존재를 부인한 것뿐입니다.” - 프랭클린 D. 루즈벨트, 1932년 10월 13일 선거운동 연설
- 학습이해도 확인: FDR은 1932년 선거에서 어떤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는가?
1933년, 비가 내리던 날에 FDR은 대공황으로 피폐해진 군중들 앞에서 미합중국의 대통령직에 취임하는 선서를 했다. 기자였던 토마스 스톡스(Thomas Stokes)는 루즈벨트가 “이 나라는 행동을 요구하며 바로 지금 행동할 것을 요구합니다.”라고 말했을 때 군중들 사이에 희망의 기운이 감도는 것을 목격했다.
이런 구호들은 시민들의 필요에 대한 대통령의 지도력과 연방정부의 응답의 방식에 전반적인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궁극적으로 그러한 변화는 많은 미국인들이 그들의 정부와 정부의 책임에 대해 생각하던 방식을 변화시켰다.
대공황의 수렁 속에서 많은 미국인들은 전통적으로 소중하게 생각해오던 “자수성가(making it on their own)”의 신념을 버려야 했다. 그들은 그들의 유일한 희망으로 정부를 의지하게 되었다. 그래서 다음 장에서 보게 되겠지만 루즈벨트의 시대는 미국 사회에서 정부의 역할을 변화시켰던 많은 프로그램들의 시작을 목도하게 되었다.
FDR의 취임연설은 미국의 많은 사람들에게 미래를 향해 새롭게 희망을 갖게 하였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먼저 저의 확고한 신념을 밝히고자 합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유일한 것은 두려움 그 자체입니다.” -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 1933년 첫 번째 취임 연설
자신의 삶에서 여러 번 두려움을 극복했던 사람으로서 루즈벨트는 확신과 자신감을 가지고 근심에 빠진 국민들을 안심시켰다.
4과 평가
단원 이해도 평가
1. 후버대통령은 대공황과 그 고통을 어떻게 끝내기를 바랬는가?
2. 할리-스무트 관세와 부흥금융공사의 의도는 무엇이었는가?
3. 보너스군대 사건이 후버의 몰락에 어떻게 기여했는가?
4. 프랭클린 델라노 루즈벨트가 1932년 선거에서 미국 유권자들에게 어떤 호소력을 가졌는지 서술하시오.
비판적인 사고와 글쓰기
5. 사실과 의견을 구분하기: 후버에 대한 비판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대공황은 어떤 대통령이라도 실패하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설명해보시오.
6. 새로운 이야기 작성하기: FDR의 취임연설을 취재하는 기자가 되어 대통령이 무엇이라고 말했고 미국인들은 그 연설에 어떻게 반응했는지 간단한 신문기사를 작성해 보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