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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역사공동연구에서 역사지리학의 수법 MURAI Shosuke
1.『노송당일본행록(老松堂日本行錄)』의 교주(校注)부터 『중세왜인전(中世倭人傳)』까지 1980년대 전반 나는 도쿄(東京)대학 사료편찬소에서 조수로 있었다. 편찬소의 교수였던 다나카 다케오(田中健夫)씨(1923~2009)로부터 중세 한일관계사의 중요사료를 문고본으로 간행하자는 이야기가 있는데 『노송당일본행록』의 교주작업을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이 사료는 1420년에 조선왕조의 회례사(回禮使) 송희경(宋希璟)이 그 전 해에 있었던 을해동정(乙亥東征) 이후의 양국관계에 대하여 무로마치(室町)막부와 교섭을 위해 교토(京都)를 방문했을 때, 왕복 여정 속에서 얻은 견문을 한시와 거기에 덧붙인 서(序)라는 형식으로 담은 기록이다. 교주본은 1987년 3월에 Iwanami Bunko(岩波書店)에서 『노송당일본행록-조선사절이 본 중세일본(老松堂日本行録 朝鮮使節の見た中世日本)』으로 간행되었는데, 대상이 여행기인데 저자가 걸은 경로를 답사도 하지 않고 거의 책상 위에서의 작업으로 시종일관하고 말았다(1)。 그것이 미련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1986년에 첫 해외여행으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 부산에서 조령(鳥嶺)을 넘어 서울에 이르는 여정을 따라갔고 그 외에도 일본 국내 부분과 관련해서는 1990년에 하카타(博多, 현재의 후쿠오카(福岡)시)에서 아카마가세키(赤間關, 현재의 시모노세키(下關)시)를 경유하여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항로를 따라가는 루트를 답사했다. 그리고 『노송당일본행록』의 여정뿐만 아니라 답사의 대상을 한·중·일의 항구도시 및 이를 연결하는 항로로 넓혀서 기회만 있으면 각지를 방문했다. 1991년 11월 일본소재의 재단법인 한국문화연구진흥재단(현 공익재단법인 한창우·철문화재단(韓昌祐·哲文化財團) 으로부터 연구조성을 받아 나를 대표자로 하는 「삼포에서 부산왜관으로-이조시대의 대일교역과 항구도시(三浦から釜山倭館へ 李朝時代の対日交易と港町)」라는 테마로 1년간 공동연구를 진행했다. 이를 담당하는 조직으로 손승철(孫承喆), 아라노 야스노리(荒野泰典), 다카하시 기미아키(高橋公明)씨 그리고 나까지 4명이 「항구도시 연구회(港町硏究會)」를 결성하여(후에 세키 슈이치(關周一)·츠루 다케이(鶴田啓) 씨가 합류), 일본의 국립국회도서관·국립역사민속자료관, 한국의 서울대학 규장각도서관·국립중앙도서관·국사편찬위원회에서의 사료조사와 호쿠리쿠(北陸)지방(시가(滋賀)현~도야마(富山)현), 산인(山陰)지방(야마구치(山口)현~돗토리(鳥取)현)의 항구도시와 삼포 및 부산왜관에 대하여 현지조사를 실시했다. 그 보고서는 1993년 3월 동 재단이 간행하는 『세이큐 학술논집(青丘学術論集)』제3집에 무라이(村井)·아라노(荒野)·다카하시(高橋)·손승철 공동으로「삼포에서 부산왜관으로-이조시대의 대일교역과 항구도시」라는 논문으로 게재되었다. 논문은 무라이(村井)「삼포의 진성과 관한(三浦の鎮城と関限)」, 아라노(荒野)「부산왜관의 초량 이전(釜山倭館の草梁移転)」, 다카하시(高橋)「근세전기의 쓰시마번과 조선정부(近世前期の対馬藩と朝鮮政府)」, 손승철·무라이(村井)「조선전기「삼포」관계사료목록(朝鮮前期「三浦」関係史料目録)」의 4부로 이루어져 있다. 그 서언에서 나는 연구의 목적을 「①남겨진 문헌사료의 소재를 확인하고 그 중요한 부분을 정독(精讀)하는 것, ②현지에 직접 가서 한국인연구자의 협력을 받으며 역사적 경관을 관찰하고 지명과 전승 등을 청취하는 것 등의 역사지리적 조사를 실시하고 그 결과를 문헌 상의 기록과 대조하는 것, ③한국의 중·근세사 연구자와의 교류를 통하여 장래적인 연구협력의 기초를 형성하는 것」 3가지로 정리했다. 본 논문에서 말하는「역사지리학의 수법」은 이러한 연구방법을 가리킨다. 공동연구의 성과는 상기 논문과 거의 동시에 간행된 신서판(新書判)의 졸저『중세 왜인전(中世倭人伝)』(Iwanami Shoten(岩波書店), 1993년 3월)의 「Ⅱ 「삼포」-이국 속의 중세(「三浦」 異国のなかの中世)」에도 담겨 있다(2). 이 연구에서는 1472년 조선에서 간행된 일본·류큐(琉球)지지(地誌)『해동제국기(海東諸国紀)』에 실려있는 3장의 그림지도「웅천제포지도(熊川薺浦之圖)」(현재의 진해시 제덕동), 「동래부산포지도(東萊富山浦之圖)」(현재의 부산광역시 동구), 「울산염포지도(蔚山塩浦之圖)」(현재의 울산광역시 동구)를 손에 들고 현지를 답사하면서 그림지도의 해안선, 산의 모양, 취락 등의 묘사가 상당한 수준으로 정확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사 당시 부산포(富山浦)는 완전히 부산시(釜山市)의 시가지화되어 있었지만 제포·염포는 예전의 모습을 상당부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재 제포는 근해까지 매립되었고 염포는 취락이 자동차공장의 부지가 되어 소멸되었다. 졸저의 기술 및 사진은 삼포 옛터의 예전의 모습을 기록한 문헌으로서 어느 정도의 의미를 갖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2.국제심포지엄과 한국·중국에서의 체재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에 걸쳐서 일본과 한국·중국과의 인적 왕래가 급격하게 확대된 시기였다. 그 이전에는 대외관계사를 연구하고 있어도 상대국에 도항(渡航)하여 현지조사를 해보겠다는 발상을 쉽게 하기 힘든 상황이 있었다. 그 때를 생각하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그리고 학문 상의 교류는 도항에 의한 조사 뿐 아니라, 여러 나라의 연구자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국제심포지엄과, 중장기 체재를 통한 재외연구라고 하는 형태로도 왕성하게 이어졌다. 지금부터는 내가 직접 관여했던 것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1990년에 사료편찬소에서 문학부로 이적하게 된 나는 다음 해 도쿄(東京)대학에서 개최한 「도쿄(東京)대학·서울대학교 제1회 심포지엄:한일 교류와 비교-역사와 현재(日韓の交流と比較 歴史と現在 )」에서 「중세 조일무역에서의 경전의 수입(中世日朝貿易における経典の輸入)」이라는 제목으로 보고를 했다(3). 1992년에는 시마네(島根)현이 주최하고 마쓰에(松江)시에서 개최된 심포지엄 「환일본해(동해)시리즈92 고려불교문화와 산인(環日本海(東海)シリーズ92 高麗仏教文化と山陰)」에서 일본·한국·북한의 연구자와 함께 「중세일본의 안과 밖(中世日本の内と外)」이라는 제목으로 보고를 했다(4). 1995년에는 한국국사편찬위원회 주최 심포지엄 「광복(1945년)이후 50년간의 사료정리·편찬사업의 성과와 과제」에 초청을 받아 「일본의 사료정리사업과 한국관계자료(日本の史料整理事業と韓国関係資料)」라는 제목으로 보고를 했다. 이 보고에서는 전반에서 일본 소재의 한국사관계사료를 통람하고 후반부에서는 일본에서의 사료편찬사업의 현재 상황과 문제점을 사료편찬소를 중심으로 소개했다(5). 심포지엄 종료 후에는 전라남도·경상남도로 가서 완도의 청해진터와 각지의 왜성터 등을 답사했다. 1997년에는 한일관계사연구회가 주최하고 서울에서 열린 심포지엄 「한일양국인의 상호인식」에서 「중세한일양국인의 상호인식(中世韓日両国人の相互認識)」이라는 제목으로 보고를 했다(6). 1998년 1월에는 국립진주박물관에서 열린 임진왜란박물관개관기념 국제학술 심포지엄 「임진왜란과 진주성 전투」에서 「임진왜란의 역사적 전제-한일관계사에 있어서(壬辰倭乱の歴史的前提 日朝関係史における)」라는 제목으로 보고를 했다(7). 같은 해 11월에는 사천(泗川)시에서 주최한 심포지엄 「사천의 역사와 임진왜란」에서 「시마즈 사료를 통해 본 사천전투(島津史料から見た泗川の戦い)」라는 제목으로 보고를 했다(8). 2008년에는 안동시 국학진흥원에서 개최한 한일국제학술회의 「몽고의 고려·일본 침공과 한일관계」에서 「몽고의 내습과 이문화 접촉(蒙古襲来と異文化接触)」이라는 제목으로 보고를 했다(9). 내가 중국으로 도항하여 사학계와 교류를 한 것은 한국보다 조금 늦게 시작되었다. 1989년에 아라노(荒野)씨·윤건차(尹健次)씨와 함께 3명이 홍콩·마카오·대만을 여행했지만, 중국 본토로의 도항은 1996년에 고노 이타카시(五野井隆史)·아사미 마사카즈(淺見雅一)·히고 사토시(肥後智) 3명과 함께 상하이(上海)·항저우(杭州)·사오싱(紹興)·닝보(寧波)를 돌아본 것이 처음이었다. 이러한 여행은 사비를 털어 도항한 것이었는데 「항구도시 순례」가 주목적으로 특히 중세에 일본 승려가 방문했던 사원과 도시에 중점을 두었다. 후자의 여행 도중에 상하이 푸단(復旦)대학 일본학연구소에서 13~14세기에 일본으로 건너간 선승들을 소재로 「도래승의 세기(渡来僧の世紀)」라는 제목의 강연을 했다. 2000년에 발표한 「밍쪼우 톈닝사 탐색(明州天寧寺探索)」은 짧은 에세이인데 닝보(寧波)시립 천일각(天一閣,Tianyige)박물관이 소장한 11세기 하카타재주송인각석(博多在住宋人刻石), 닝보(寧波)시내에 남아 있는 당대의 전탑 「함통탑(咸通塔)」, 닝보(寧波)의 지방사(地方史)와 고지도, 일본에 남아 있는 경전의 간기(奧書) 를 여러모로 대조해본 역사지리학적 고찰로 이 여행의 성과이다(졸저『중세사연구의 여로(中世史研究の旅路)』Azekura Shobo(校倉書房)2014년에 재록(再錄)). 2002년 7~9월까지는 강원대학교 손승철교수의 초청으로 동 대학교 박물관에 자리를 제공받아 재외연수를 하게 되었다. 박물관원들과 손교수 세미나의 대학원생들과 교류를 하면서 한국 각지의 사적견학(특히 회암사지(檜巖寺址)와 단종릉(端宗陵)은 매우 인상적이었다)과 한국어학습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서울시의 한일문화교류기금에서 진행한 강연「『해동제국기』를 통해 보는 중세 조일간의 상호이해(『海東諸国紀』に見る中世日朝間の相互理解)」(10)와, 남기학(南基鶴)씨의 논문 「고려와 일본의 상호인식」(한국일본사학회『일본역사연구』제11집, 2000년)의 일본어번역(11)은 그 성과의 일부이다. 귀국 직후인 11월에 도쿄(東京)대학 이토 아비토(伊藤亞人)씨의 권유로 참가하게 된 진도학회결성 및 제2회 진도국제학술대회「진도문화와 지역발전」(진도군청)에서는 「진도의 삼별초-해상왕국의 꿈(珍島の三別抄 海上王国の夢)이라는 제목으로 보고를 했다(전술한 『중세연구사의 여로』에 수록). 보고에서는 1270년에 대몽항쟁을 위해 결기했던 삼별초가 쌓은 용장산성터(龍藏山城址)=「왕도(王都)」를 답사하면서 섬 자체 및 사방으로의 교통에 있어서 우월한 로케이션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그 결론으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삼별초가 내부적으로 심각한 노선대립을 겪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개명적(開明的) 식견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해상교통의 십자로라고 할 수 있는 진도에 위치하고 있어서 해상왕국의 창출을 목표로 하고 있었던 점에 있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어서 2004년 8월부터 다음 해 1월까지 베이징(北京)일본문화연구센터에 파견전문가(專家)로 부임하여 중국인대학원생을 대상으로 주2회·1학기분의 강의를 담당했다. 대학원생들은 매우 열심히 공부했고 붙임성도 좋아서 교실 밖에서도 다양한 교류를 가졌다. 나중에 그 중 한 학생이 도쿄(東京)대학에서 단기유학을 할 때에는 내가 지도교원을 담당하기도 했다. 자유시간에는 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하여 베이징시내를 무턱대고 돌아다녔는데 황제권력을 과시하는 공간구성과 주민공동체의 존재가 일본과는 매우 다르다는 점을 통감했다. 체재 중 베이징일본학연구센터 일본학종합강좌와 베이징대학 일본어학부에서, 한국 전라남도의 신안 침몰선과 나가사키(長崎)현 다카(鷹)도의 몽골군 침몰선을 주제로 「해상의 길, 해저의 배(海上の道、海底の船)」라는 제목의 강연을 했다.
3.과학연구비 보조금에 의한 연구 프로젝트 2000년대에 들어서부터 일본의 「과학연구비 보조금」을 받아서 실시하는 여러 명이 함께 진행하는 테마연구에 계속 관여하게 되었다. 모든 프로젝트의 주요 특징은 동아시아 해역을 필드로 하는 역사지리학의 수법에 있었다. (1) 우선 2000~2003년도에 기반연구A의 장르로 「8~17세기 동아시아 지역에 있어서의 사람·물자·정보의 교류-해역과 도시의 형성, 민족·지역 간의 상호인식을 중심으로(8~17世紀の東アジア地域における人・物・情報の交流 海域と都市の形成、民族・地域間の相互認識を中心に)」가 채용되어 그 연구대표자가 되었다. 연구조직은 총인원 52명으로 「하카타·쓰시마·삼포와 한일(일한)관계(博多・対馬・三浦と日朝(韓日)関係)」「사절·순례승의 여행(使節・巡礼僧の旅)」「류큐 네트워크론(琉球ネットワーク論)」「왜관 네트워크론(倭寇ネットワーク論)」「세계관과 이문화 커뮤니케이션(世界観と異文化コミュニケーション)」의 5가지 Section으로 나누어 한국9명, 중국3명, 대만1명, 프랑스1명, 미국1명의 해외 공동연구자가 참가했다. 특히 현지조사에 중점을 두고 일본국내와 해외에 거의 비슷한 비중을 두었다. 해외 조사지는 한국의 경상남도·전라남도, 중국의 저장성(浙江省)·장쑤성(江蘇省)·푸젠성(福建省), 대만, 포르투갈이었다. 2004년 3월에 도쿄(東京)대학 대학원 인문사회계 연구과에서 보고서 상하2권(A5판 980p)을 간행했다. 보고서는 「해역세계의 사람·물자·정보(海域世界の人・物・情報)」「자타인식과 세계관(自他認識と世界観)」「순례와 사행의 발자취(巡礼と使行の足跡)」「해적과 해상방비(海賊と海防)」「류큐제도의 세계(琉球弧の世界)」「조일관계의 전개(日朝関係の展開)」「논문목록」의 7부 편성으로 58편의 논문·사료보고·연표 등이 게재되었다. (2) 2003~2007년도에는 특정영역연구「중세고고학의 종합적 연구」산하의 계획연구로서 「중세 항만도시유적의 입지·환경에 관한 한일비교연구(中世港湾都市遺跡の立地・環境に関する日韓比較研究)」를 실시하고(최종 연도에만 「특별연구 촉진비」에 의함) 그 연구대표자가 되었다. 나 이외에도 연구분담자 2명, 해외공동연구자 2명, 연구협력자7명으로 구성되었고 항구도시유적에 초점을 맞추어 한일 비교를 시도했다. 현지조사는 한국에서 4회(남해안, 서해안, 울릉도를 포함하는 동해안, 제주도), 일본에서 3회(서북 규슈(九州), 오이타(大分)현, 이즈모(出雲)·오키(隱岐))에서 실시하고, 한반도의 서·남해안과 동해안을 포함하는 일본해연안과의 사이에 조석의 차가 극단적으로 차이가 있어서 그것이 항만의 입지와 구조에 큰 변이를 초래했다는 점 등을 확인했다. 보고서는 2008년 3월에 도쿄(東京)대학 대학원 인문사회계 연구과에서 간행되었고 나의 「항구가 생기는 장소-한일 비교에서(港のできる場所 日韓の比較から)」 외에 사가(佐賀)현 사시(佐志)·오이타(大分)현 후나이(府內)·제주도·제포 등의 항구도시 유적과 한국 내 왜구의 발자취에 관한 역사지리학적 고찰을 수록하고 있다. (3) 2005~2009년도에는 특정영역연구 「동아시아해역교류와 일본전통문화형성과의 관계-닝보(寧波)를 초점으로 하는 학제적 Creation(東アジア海域交流と日本伝統文化形成との関係 寧波を焦点とする学際的創生)」(통칭 닝프로(にんぷろ)) 산하의 계획연구 「중·근세 조선을 둘러싼 동아시아교류와 닝보(中・近世朝鮮をめぐる東アジア交流と寧波)」(연구대표자 모리히라 마사히코(森平雅彦)씨)에 연구분담자로 참가했다. 현지조사에서는 한반도 서해안해역의 극단적인 조석의 차, 다도해와 빠른 조류를 실제로 볼 수 있었다. 닝프로의 연구성과는 Kyuko Shoin(汲古書院)에서 시리즈『동아시아해역 총서(東アジア海域叢書)』로 잇달아 간행되고 있고 그 14책째인 『중·근세의 조선반도와 해역교류(中近世の朝鮮半島と海域交流)』2013년에는, 모리히라(森平)씨의 웅편「문헌과 현지 대조를 바탕으로 한 고려~송 항로의 복원-『고려도경』해도 연구(文献と現地の照合による高麗~宋航路の復元 『高麗図経』海道の研究)」가 수록되어 있다. 나는 동 서에 「15세기 조선·남만의 해역교류-성종의 호초구청 1건을 통해(15世紀朝鮮・南蛮の海域交流 成宗の胡椒求請一件から)」를 기고하고, 명 중심의 책봉체제의 틀 밖에서 조선~규슈(九州)~류큐(琉球)~동남아시아를 연결하는 해역교류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논했다. (4) 2010~2013년도에는 기반연구B의 장르로 「전근대 동아시아의 외교와 이문화접촉-일명관계를 축으로 한 비교사적 고찰(前近代東アジアの外交と異文化接触 日明関係を軸とした比較史的考察)」이 채용되어 그 연구대표자가 되었다(연구분담자 6명). 내용은 저명한 견명사절(遣明使節) 사쿠겐 슈료(策彦周良)가 쓴 『초도집(初渡集)』이하의 문헌사료 윤독(輪讀)과, 견명사가 걸었던 닝보(寧波)~베이징(北京)간의 행로를 따라가 보는 현지조사의 2가지를 중심으로 하는 전형적인 역사지리학의 수법이었다(12). 행로 중 창장(長江)이남 부분은 「닝프로」등 과거의 조사에서 답사를 마친 상태였기 때문에 본 연구에서는 창장(長江)이북을 3개의 구간으로 나누어 3년차까지 답사를 했다. 이외에 견명사 행로와 비교하는 의미에서 서울·베이징(北京) 간의 연행로(燕行路) 중에서 랴오닝성(遼寧省)부분을 마지막 연차에 답사했다. 성과는 무라이(村井) 저『일명관계사연구입문-아시아 속의 견명선(日明関係史研究入門 アジアのなかの遣明船)』(가제, Bensei(勉誠)출판에서 근간 예정)에 논문·인물전·답사기록·사료교주 등 다양한 형태로 게재될 예정이다.
4.다소간의 전망-왜관, 왜구, 대운하 나는 2006년에 발족된 「일중역사공동연구」에 다음해부터 외부집필위원으로 참가하고 고대·중근세사 부회에 소속되어 「15~16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일중관계」라는 테마를 담당했다. 이 프로젝트에서는 같은 테마를 원칙으로 하여 일본과 중국에서 1명씩 담당하여 의견을 나누는 형식을 취하고, 나의 파트너는 일본 전후사가 전문인 王新生 베이징(北京)대학 역사계교수였다. 2008년에 베이징의 중국사회과학원에서 초안 발표회가 있어서 의견을 나눈 끝에 2010년에 『일중역사공동연구 제1기 보고서』(일·중 원문)를 간행하고 프로젝트는 종료되었다. 전후사 부분과 파트너 상호의 코멘트는 양국간에 타협이 이루어지지 못해서 게재되지 못했다(13). 논문집의 공동간행은 약간의 난항을 겪었지만 일본어판은 2014년에 이르러 기타오카 신이치(北岡伸一)·步平 저『일중역사공동연구보고서』제1권 고대·중근세사편, 동 제2권 근현대사편으로 Bensei(勉誠)출판에서 간행되었다. 이 공동연구에서는 쌍방의 국가적 입장을 배경으로 한 공식견해의 응수라고 하는 색채가 강해서(14), 역사지리학의 수법을 바탕으로 한 현지조사라는 발상은 찾아볼 수 없었다. 2007년 12월 후쿠오카(福岡)현 다자이후(太宰府)시의 규슈(九州)국립박물관에서 「조선통신사 400년 기념 국제심포지엄: 아시아 속의 조일관계사(朝鮮通信使400年記念国際シンポジウム:アジアのなかの日朝関係史)」가 개최되었다. 이것은 도쿄(東京)의 조선왕조실록강독회 30주년, 서울의 한일관계사학회 15주년, 후쿠오카(福岡)의 세종실록연구회 1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로 성과는 기타지마 만지(北島万次)·손승철·하시모토 유(橋本雄)·무라이(村井) 저 『조일교류와 상극의 역사(日朝交流と相克の歴史)』, Azekura Shobo(校倉書房), 2009로 간행되었다. 특히 그 중 Ⅲ부「왜관·왜성을 걷다(倭館・倭城を歩く)」에는 손승철의 「제포왜관의 과거와 현재(薺浦倭館の過去と現在)」, 오니시 노부유키(大西信行)의 「제포에서 부산포로(薺浦から富山浦へ)」, 무라이(村井)「왜성을 둘러싼 교류와 갈등(倭城をめぐる交流と葛藤)」, 유재춘(柳在春)「한일성곽변천사의 비교 일고(韓日城郭変遷史の比較一考)」, 윤유숙(尹裕淑)「근세왜관-조일접촉과 밀무역(近世倭館 朝日接触と密貿易)」이 수록되어 있어서, 조일(한일)관계사에 있어서 역사지리학적 수법이 정착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전술한 과학연구비 프로젝트(1)(2)에서 해외공동연구자 이영(李領)씨의 왜구의 이동루트에 관한 연구와 제포의 경관을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서 복원하고자 하는 손승철씨의 연구는 역사지리학적 방법으로 매우 뛰어난 것으로 내가 관여한 국제공동연구가 그 발달에 다소나마 공헌할 수 있었다면 매우 기쁜 일이다. 이러한 연구방법은 내셔널리즘에 지배되던 역사해석에서 가능한 한 자유로워지고 현지를 답사하면서 새로운 시각이 열리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왜구집단을 규슈(九州)에서 바다를 건넌 무사단=완전한 외부자로 보는 이영씨의 의견에는 역사지리적 수법에서 벗어난 것이 아닌지 라는 의구심을 품게 된다. 왜구에 대해서는 도쿄(東京)대학 사료편찬소와 중국국가박물관이 공동으로 진행한「왜구도권(倭寇圖卷)」「항왜도권(抗倭圖卷)」연구를 통해, 정밀한 디지털화상에 의한 화중(畵中)문자의 발견을 비롯해 큰 진전이 있었다. 종래에는 고립적인 작품이라고 생각되었던 「왜구도권」이 쑤저우(蘇州)를 중심으로 제작되었던 역사회화군의 한 축을 이루는 것으로, 묘사 대상은 1550년대 강남(江南)의 가정대왜구(嘉靖大倭寇) 라는 사실이 밝혀졌다(15). 이 사실이 갖는 의미는 매우 크며 왜구가 활동했던 강남지방에 대한 보다 정밀한 역사지리학적 답사가 가능하게 되었다. 실제로 2011년부터 시작된 사료편찬소의 연구프로젝트 「동아시아에서의 「왜구」화상의 수집과 분석(東アジアにおける「倭寇」画像の収集と分析)」에서는 중국과학원의 黃榮光씨와 미술사를 하는 이타쿠라 마사아키(板倉聖哲)씨(도쿄(東京)대학 동양문화연구소 교수), 그리고 나를 포함하여 외부공동연구원으로 참여하여 작품연구와 현지조사를 전개하고 있고 올해도 계속 중이다. 과학연구비 프로젝트(3)의 내용에서 접하게 된 송사절의 고려도항경로에 대한 면밀한 탐색은 같은 해역에서 활동했던 왜구집단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중요한 시사점을 주었다. 작년에 발생한 대형여객선 세월호의 조난사고에서도 볼 수 있었듯이 한반도 서·남쪽의 다도해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조석의 차, 빠른 유속과 탁한 해수라는 조건이 갖추어진 바다의 난코스이고 외부에서 온 지리를 잘 모르는 선단이 현지인의 안내 없이 도항할 수 있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전술 「왜구란 누구인가(倭寇とはだれか)」참조). 또 과학연구비 프로젝트(3)(4) 등을 통해 징항(京杭)대운하 연선을 답파했는데 이를 통해 일본에서는 볼 수 없는 내륙수운시스템(수역(水驛), 갑문(閘門), 배의 견인법 등)에 대하여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나아가 개인적으로는 15세기 수묵화가 셋슈(雪舟)가 견명사에 참가하여 이 루트를 왕래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그린 「당토승경도권(唐土勝景圖卷)」「국국인물도권(國國人物圖卷)」 등의 작품군에 대하여 그리게 된 과정을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주었다. 그 성과는 2008년에 항저우(杭州)시에서 열린 국제학술심포지엄 「동아시아문화교류-인물왕래」에서 「쇼운 즈이킨(笑雲瑞訴)과 셋슈 도요(雪舟等楊)-입명기와 수묵화에서 보이는 명대 중국(笑雲瑞訢と雪舟等楊 入明記と水墨画にみる明代中国)」이라는 제목으로 보고를 했고, 2011년에 『도쿄(東京)대학 동양문화연구소기요(紀要)』제160책에 논문으로 발표했다(졸저 『중세사료와의 대화(中世史料との対話)』Yosikawa Kobunkan(吉川弘文館), 2014년에 재록).
주 (1) 다나카(田中)씨는 당시 부모님 정도의 연배로 나와 나이차가 있었지만 1997년에 사료편찬소의 멤버를 중심으로 발족한 「전근대 외교관계사 연구회」(대표자·다나카씨)에서 관심을 공유하는 연구자로서 친밀한 유대관계를 구축했다. 다나카씨가 저술에 관여한 『해동제국기-조선인이 본 중세의 일본과 류큐(海東諸国紀 朝鮮人の見た中世の日本と琉球)』는 마찬가지로 Iwanami Bunko(岩波文庫)에서 1991년에 간행되었다. 그리고 아래에 기술하는 모든 조사의 성과는 2000년에 나온 『노송당 일본행록(老松堂日本行録)』 Iwanami Bunko판 3쇄에 가능한 한 반영시키고 있다.
(2)『중세왜인전(中世倭人伝)』은 2006년까지 6쇄를 거듭하였고 또 1998년에는 이영씨에 의해 한국어로 번역되었다(『중세 왜인의 세계』한림신서·일본학총서37,소화출판). 졸문의 번역으로는 이외에도 江靜 편역 「漢詩与外交」『中日関係史料与研究』제2집〔浙江省中日関係史学会叢刊5〕, 2004년 손승철·김강일 편역『동아시아 속의 중세한국과 일본(경인한일관계연구총서6)』경인문화사, 2008년(논문집, 전544p)가 있다.
(3) 졸저『국경을 넘어서-동아시아 해역세계의 중세(国境を超えて 東アジア海域世界の中世)』Azekura SHobo(校倉書房), 1997년, 수록.
(4) 환일본해마쓰에(松江)국제교류회의 저『환일본해 시리즈92 고려불교문화와 산인(環日本海シリーズ92高麗仏教文化と山陰)』1993년, 수록. 그 내용은 졸저 『중세일본의 안과 밖(中世日本の内と外)』Chikuma Shobo(筑摩書房),1997년(2013년 지쿠마학예문고판(ちくま学芸文庫版)으로 증보·재간)의 뼈대가 되었다.
(5)『국사관논총(国史館論叢)』73집, 1997년에 게재. 후에 졸저『중세사료와의 대화(中世史料との対話)』Yosikawa Kobunkan(吉川弘文館),2014년에 재록.
(6) 한국어판[손승철 편역]이 한일관계사학회 저『한일양국인의 상호인식』국학자료원, 서울, 1998년에 게재.
(7) 한국어판[장원철 편역]이 『남명학연구(南冥学研究)』7집, 1998년에, 일본어판이 『역사평론(歴史評論)』592호, 1999년에 게재. 후에 졸저 『일본 중세의 이문화 접촉(日本中世の異文化接触)』도쿄(東京)대학출판회, 2013년에 재록.
(8) 한국어판 [장원철 편역]이 『남명학연구(南冥学研究)』8집, 1999년에, 일본어판이 『역사학연구(歴史学研究)』736호, 2000년에 게재. 후에 졸저 『세계사 속의 전국시대 일본(世界史のなかの戦国日本)』Chikuma Shobo(筑摩書房), 2012년에 재록.
(9) 한일문화교류기금·동북아역사재단 저 『몽골의 고려·일본침공과 한일관계』경인문화사, 2009년에 게재.
(10)「동아시아제국과 일본의 상호인식-15·6세기의 그림지도를 중심으로(東アジア諸国と日本の相互認識 15・16世紀の絵地図を中心に)」고지마 다카유키(小島孝之)小島孝之)·고마츠 신지로(小松親次郞) 저『이문화 이해의 관점(異文化理解の視座)』도쿄(東京)대학출판회, 2003년 수록, 참조.
(11) 2000~2002년도(平成12~14)과학연구비 보조금·기반연구(A2)연구성과보고서 『글로벌리제이션의 역사적 전제에 관한 학제적 연구(グローバリゼーションの歴史的前提に関する学際的研究)』연구대표자 (아라노 야스노리(荒野泰典), 릿쿄(立敎)대학문학부, 2003년, 수록.
(12) 본 연구의 전제가 되는 일이었던, 견명사절 입명기 윤독의 성과를 정리한 무라이 쇼스케(村井章介)·스다 마키코(須田牧子) 저 『쇼운 입명기-일본의 승려가 본 명대 중국(笑雲入明記 日本僧の見た明代中国)』Heibonsha(平凡社)동양문고798,2010년이 있음.
(13)「왜구란 누구인가(倭寇とはだれか)」졸저『일본중세 경계사론(日本中世境界史論)』Iwanami Shoten(岩波書店), 2014년, 수록으로 나의 논문에 대한 왕교수의 코멘트에 관하 여 약간 언급했다.
(14) 그것이 반영되어서인지 중국측 멤버의 대부분이 사회과학원과 베이징(北京)대학의 사람으로 채워져서 담당하는 테마의 전문가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연구자가 나오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느껴졌다.
(15) 도쿄(東京)대학 사료편찬소 저 『묘사된 왜구-「왜구도권(倭寇圖卷)과 항왜도권(抗倭圖卷)』 Yosikawa Kobunkan(吉川弘文館), 201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