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유주 바이에른과 바이에른을 구성하는 지역들"의 두 판 사이의 차이
cefia>Dominicy (새 문서: p.90 2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바이에른 독일에서 가장 큰 연방주인 바이에른은 주의 경계가 역사의 흐름 안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
잔글 (판 1개를 가져왔습니다) |
(차이 없음)
|
2021년 9월 12일 (일) 22:27 기준 최신판
p.90
2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바이에른 독일에서 가장 큰 연방주인 바이에른은 주의 경계가 역사의 흐름 안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유일한 주이기도 하다. 전통적으로 바이에른 지역에 속했던, 역사가 중세시대 초기까지 이르는 지역들 외에 19세기 초 나폴레옹 시대를 맞아 프랑크 및 슈바벤 지역이 추가되었다. 이들 지역의 대부분은 교회 및 귀족이 지배하던 영토이거나 자유시였다. 메디아티지룽(Mediatisierung, 역자주- 영방 병합의 일종)과 세속화를 통해 이들 지역에 대한 귀족과 교회의 권한이 바이에른의 선제후에게 양도되었다. 1806년 1월 1일에는 나폴레옹의 아량으로 바이에른은 왕국으로 격상으로 되었다. 1814/15년 개최된 비엔나회의를 통해 경계가 약간 수정 된 이래 바이에른 영토의 경계는 계속 유지되었고, 심지어 독일이 (1871년 이래) 하나의 국가의 모습을 갖추고 훗날 독일연방공화국이 탄생한 이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단, 1947년 라인팔츠 지역이 바이에른주에서 탈락하게 된 것만 예외다.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통일성? 바이에른 최초의 왕이었던 막스 I. 요제프(Max I. Joseph) 와 그의 장관이었던 몬트겔라스(Montgelas)는 전통적인 바이에른 지역에 새로운 지역이 편입되게 되면 문제가 많을 것이라는 점을 예상했다. 그래서 매우 포괄적인 개혁을 추진함으로써 통일된 현대적인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개혁이 불가피했던 이유는 영토 편입 초기에 프랑켄 지방 사람들이나 슈바벤 지방 사람 모두 "진짜 바이에른 사람"이 될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선 정서, 전통, 종교가 달랐다. 프랑크 지방에서는 대부분이 개신교인이었고 민족적 자유주의를 추구하는 성향이 강한 반면, 슈바벤 지역에서는 대부분이 카톨릭교 신자였고 연방주의 체제를 선호했다. 그에 반해 대부분이 카톨릭교 신자에 농업에 종사했던 전통적인 바이에른 지역 주민들은 새로 설립되는 국가에 대해 상당한 애국심을 보였다. 그러나 200년 넘는 시간이 지나고, 역사와 성공사례(특히 3백 만 명의 피난민과 망명인이 1945년 이후 유입되고 통합됨)를 공유하다 보니 과거 존재했던 각 지역에 따른 차이는 사라진 지 오래다. 바이에른주 주민들의 대부분은 자신을 진짜 "바이에른인"이라고 느낀다고 답한다. 특히 자신을 세계 속에서 정의할 때면 자신을 바이에른인이라고 정의하곤 한다. 물론 오늘날까지 지역에 따른 전통의 차이가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 각 지역 사람들 간에 정서 차이나 지역별 선거 결과의 차이는 여전히 확인된다.
모든 지역을 고려하다 정당과 국가 기관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지역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우선 공직 및 정당의 주요 직책들은 각 지역의 대표들에게 고루 분포될 수 있게 한다(비례대표제). 각종 기관의 위치를 선택할 때에도 주도나 특정 지역으로의 집중화 현상을 방지한다. 그래서 예를 들어 지역대학 컨셉트나 바이에른주 역사의 집을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에 설립한 것 등을 들 수 있다. 각 지역 방언이나 관습 또는 바이에른의 다양한 "지역" 별 차이를 강조하는 모든 것들은 바이에른주 내에서 모두 동일하게 인정을 받는다. 동시에 "문화주"으로서의 바이에른주의 정체성 강조(바이에른주 헌법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음)를 통해 단결을 강화한다.
p. 91
M1 바이에른주의 문장
M2 바이에른주 헌법 중 일부 발췌
단락 1: 바이에른주의 기본토대
제3조 법치주, 문화주, 사회복지주
(1) 바이에른은 법치주이자, 문화주이자, 사회복지주이다. 바이에른은 공익을 위해 힘쓴다.
(2) 주는 자연적 생활터전과 문화의 계승을 보호한다.
출처: 바이에른주 주의회 홈페이지
(http://www.bayern.landtag.de/bayer_verfasung.html)
M3 "1806년 바이에른의 왕관 - 바이에른 왕국 200년}
2006년 3월 29일, 뮌헨에서 개최된 전시회 개막식 때 바이에른주의 쿠르트 팔트하우저(Kurt Falthauser) 재무부장관의 연설 중에서:
역사는 정치의 토대가 됩니다. 역사는 오늘날 우리의 모습에 대한 설명뿐 아니라, 정치적 선택을 위한 역사적 선례를 제공해주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역사는 공동의 뿌리를 가진 이들에게 정체성과 소속감을 제공해줍니다. 역사는 바이에른 왕국 초기 전통적인 바이에른 지역과 새로 편입된 지역 모두가 바이에른이라는 공동의 정체성을 갖게 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바이에른주 헌법의 서문을 보면 수천 년 된 우리 영토의 역사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정체성과 발전. 이 둘은 서로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라, 하나의 쌍을 이루는 개념이라 생각합니다. 때문에 1806년 1월 1일 역사적인 그날을 떠올리면 바이에른과 왕국의 찬란한 역사를 추억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날을 떠올리며 여전히 개혁되고 새로워져야 하는 부분들을 생각하며 앞으로 나가야 할 것입니다.
출처: 2006/067 언론보도 http://www.schloesser.bayern.de/deutschlaktuellarchiv06lmu_resleroeffnung29-03-06.rtf (20.07.2007)
프로젝트 팁
1. 도서관이나 인터넷에서 언제, 그리고 어떠한 계기로 자신이 살고 있는 고장이 바이에른 영토로 편입되었는지 확인하라. 시 또는 게마인데 역사보관실 또는 주 역사보관실을 방문해 더 많은 자료를 찾아라. 수집한 자료를 이용하여 벽보 또는 작은 전시회용 전시물을 만들어 보자.
2. 오늘날까지 수 많은 사람들은 나는 "슈바벤", "프랑크" 또는 "전통적 바이에른" 사람이라는 인식이 남아 있다. 그리고 종종 "다른" 이들에 대한 적대감을 느낄 수도 있다. 프랑크 사람들과 슈바벤 사람들은 자신들이 전통적 바이에른 사람들에 비해 차별을 받는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 점에 착안하여 '당신은 바이에른 사람이라고 느끼는가?"라는 주제로 설문조사를 실시해보라. 이때 설문참여자의 출신을 고려해 분석을 해보자. 그 결과를 벽보로 제작하거나 교내신문에 기고문으로 작성해보자.
질문과 심화 탐구 제안
(1) M3으로부터 화자가 역사를 왜 중요하게 보고 있는지를 정리해보자
(2) 바이에른주 문자을 구성하는 각 부분의 의미를 조사해보자. (M1)
모든 바이에른주를 구성하는 지역들이 다 반영되어 있는가?
각 부분이 어떤 지역을 나타내는지 검색하고 문장이 1806년 이래 어떻게 변하였는지 확인하라.
(3) 루드비히 I.(Ludwig I.) 왕 이후 바이에른에서 문화와 역사가 바이에른의 단결을 위해 어떻게 이용되었는지 확인해보자. 이때 M2를 고려하라. 관련 자료는 바이에른주 역사의 집의 홈페이지를 참조할 수 있다: http://www.hdbg.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