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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월 12일 (일) 22:28 기준 최신판
3과 홀로코스트(Holocaust)
학습목표
- 1930년대 독일은 어떤 방식으로 유대인을 박해했는가?
- 독일의 정책은 어떻게 살해에서 대학살로 발전했는가?
요점
제2차 세계대전기간동안 나치는 6백만 명의 유대인들과 수백만의 다른 희생자들의 죽음을 낳게 되는 잔혹한 계획을 시행했다.
핵심용어
- 반유대주의
- 홀로코스트
- 수용소
- 크리슈탈나하트
- 바르샤바 게토
- 반제(Wannsee) 회의
- 대학살 - 죽음의 수용소
- 전쟁피난민위원회
-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학습주안점
- 세부사항을 찾아내기: 아래의 그물망 모양의 도표를 옮겨 그리고 독일의 유대인 박해의 예를 들어서 각 원을 채우시오.
- 유대인 박해
배경
유럽의 유대인들은 여러 세기에 걸쳐 그들의 종교적 믿음 때문에 박해를 받아왔다. 1800년대 중반 새로운 형태의 반 유대인 편견이 인종이론에 기초해서 대두되었다. ‘아리안’이라고 칭하는 독일인들이 셈족이라고 부르는 중동지역 사람들보다 우월하다고 일부 사상가들이 주장한 것이다. 셈족은 아랍계와 유대계를 다 포함하지만 이 용어는 대개 유대인에게만 적용된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런 이론을 인정하지 않지만 일부는 ‘비 아리안계’ 민족을 계속 박해하는 것을 정당화 하려고 이를 이용했다. 1880년대에 이르기까지 ‘반유대주의(anti-Semitism)’라는 용어는 유대인을 대상으로 하는 때로는 폭력적인 차별 또는 적대행위를 지칭하여 사용되었다. 반유대주의가 대두하는 가운데에도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1800년대 중반부터 제1차 세계대전 사이에 과거로부터 내려온 반유대 법제도를 폐지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고난과 대공황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문제를 뒤집어씌울 대상을 찾게 되었다. 반유대주의 이론을 가지고 유대인을 비난함으로써 많은 독일인들은 민족적 우월감과 새로운 목적의식을 갖게 되었다. ‘마인 켐프’에서 아돌프 히틀러는 아리안족 우월론을 다시 제기하면서 유대인에 대한 특별한 증오감을 표현했다. 특히 그는 두 종족의 결합을 아래와 같이 경멸했다:
“유대인과의 교배로 우리 민족에 매일 찾아오는 황량함, 그리고 우리 민족의 몸에서 수 세기 후에나 제거 될 수 있는 피의 중독을 분명히 들어나게 하라. 종족의 부패가 어떻게 우리 게르만 민족의 최종적인 아리안적 가치를 끌어 내리고 실로 말살시키는가를 깊이 생각해 보라.” - 아돌프 히틀러 「나의 투쟁」에서, 1925년
독일에서의 유대인 박해
1933년 히틀러가 독일의 최고 지도자가 되자 그는 반유대주의를 국가정책으로 삼았다. 근대사의 어떠한 유대인 박해도 나치 독일의 조직적인 유럽 유대인 학살인 홀로코스트의 야만성과 견줄 수 없다. 전 유럽 유대인 인구의 약 3분의 2에 해당하는 약 6백만의 유대인이 목숨을 잃었고 5백만에서 6백만에 달하는 다른 민족도 나치에게 체포되어 죽었다.
- 역사적인 반유대주의에 근거해서 나치는 유대인들을 독일의 일상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배제하려고 했다. 1933년 4월 1일 행해진 보이코트 중에 이 안내문은 쇼핑객을 유대인이 소유한 가게에서 발길을 돌리게 하고 있다.
나치의 정책
초기의 박해는 독일에 사는 유대인들을 정치, 사회, 경제의 모든 분야에서 몰아내는 것을 목표로 했다. 1933년 4월 1일 나치는 유대인 소유의 모든 업체에 대한 1일 보이코트를 명했다. 1935년에는 뉘른베르크 법으로 유대인의 독일 국적을 박탈하고 유대인과 비유대인 간의 결혼을 불법화했다. 나치 통제하의 신문과 라디오는 유대인을 독일의 적으로 공격하고 희화화했다.
1938년 나치당은 유대인의 삶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새로운 정책을 실시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이미 그들의 직업을 잃었는데 나치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업체를 헐값에 아리안들에게 넘겨주도록 했다. 유대인 의사와 변호사는 비유대인을 상대로 일하지 못하게 하고 유대인 학생들은 모든 공립학교에서 쫓겨났다.
조부모 가운데 3사람 이상이 유대인이면 현재의 종교가 무엇이든지 유대인으로 간주되었으며 친가와 외가 조부모 가운데 두 사람만 유대인이더라도 본인이 현재 유대교를 신봉하고 있으면 역시 유대인으로 규정했다. 많은 사람들이 스위스로 넘어갔는데 스위스 당국의 요청으로 나치정부는 유대인의 신분증에 붉은 글자로 J자를 찍었다. 나치는 또한 유대인들에게 새로운 가운데 이름으로 여자는 사라(Sarah), 남자는 이스라엘(Israel)을 쓰게 하여 이 이름이 모든 문서에 사용되었다. 독일 또는 독일 점령지역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은 “유대인”이라는 글자가 찍힌 노랑색 별을 옷에 붙이도록 했다. 이런 것들로 인해 유대인들은 공공연한 공격의 대상이 되고 경찰의 괴롭힘을 받았다.
히틀러의 경찰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하자 나치정권의 적을 추적하고 파악하기 위한 게슈타포(Gestapo)라는 이름의 새로운 비밀경찰이 조직되었다. 히틀러는 또한 SS 즉 슈츠슈타펠(Schutzstaffel, 방위대)라는 정예 경비대를 만들었는데 이는 나치당의 친위부대로 발전했다. 1939년 이전에 게슈타포는 SS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SS의 임무 가운데는 열악한 환경 아래 정치범들이 억류되어 있는 강제수용소를 경비하는 것도 들어있었다. 공산당 외에 여러 계층의 “부적합한” 사람들이 수용되었는데 이들은 주로 유대인이었고 동성애자, 여호와의 증인, 집시 그리고 노숙자들도 잡혀 들어왔다.
크리슈탈나하트(Kristallnacht)
자신들의 삶에 점차 제약이 심해지는데도 유대인들은 히틀러가 권력을 잃을 때까지 박해를 견뎌낼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나이든 사람들은 돈 없이 외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보다 독일에 머무는 것이 더 안전할 줄로 생각했다. 1938년 11월 9일 밤 나치 깡패들이 유대인들의 상점, 가옥 그리고 회당을 부시고 약탈하자 이들의 환상은 깨졌다.
이 사건은 크리슈탈나하트(Kristallnacht) 즉 “박살난 유리의 밤”으로 불렸는데 이는 유대인 상점의 부서된 유리창을 뜻한다. 유대교 회당은 거의 모두 파괴되었다. 이날 밤 나치는 수천 명의 유대인을 체포해 강제수용소로 보냈다. 그리고 나서 크리슈탈나하트의 피해를 배상하라고 유대인들에게 막대한 벌금을 물렸다. 이후 독일에 남아 있던 유대인들은 이 나라를 떠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난민들의 탈출
1933년에서 1937년에 이르기 까지 약 십삼만 명의 유대인이 나치의 권유에 따라 독일을 떠났다. 처음에는 대부분의 난민들이 유럽의 인접국가로 이주했다. 난민이 늘면서 이들은 미국, 라틴 아메리카 그리고 영국령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향했다. 그러나 대공황으로 자국민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있는 판이어서 어느 나라도 이들을 환영하지 않았다.
비판에 대응해서 루스벨트 대통령은 점차 늘어나는 유대인 피난민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국제회의를 소집했다. 프랑스의 에비앙에서 1938년 7월 열린 회의는 문제 해결에 실패했다. 32개 참가국 중 도미니카 공화국을 제하고는 모두 유대인 피난민을 받아들일 것을 거부했다.
- 학습이해도 확인: 19390년대 중반에 나치가 유대인을 박해한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 역사 속의 한 장면: 맨 아래 사진에서 유대인 가게점원이 크라슈탈나하트 폭동으로 깨진 유리창을 청소하고 있다. 그 위의 사진에서 신분증에 찍힌 J 도장이 이 소녀가 유대인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살해에서 대학살(genocide)로
독일군이 유럽의 대부분을 휩쓰는 가운데 이전에 독일을 떠나 온 사람들을 포함해 점점 더 많은 유대인들이 독일의 통제 아래로 들어왔다. 예컨대 1939년 폴란드 침공으로 2백만의 유대인이 추가로 독일 통치를 받게 되었다. 나치는 이 유대인들을 그들만의 거주 지역을 설정해 울타리나 장벽을 치고 또는 경비대를 세워 격리하고자 했다. 바르샤바에서 나치는 이 폴란드 수도 인구의 30퍼센트에 이르는 40만 명 이상의 유대인을 전체 면적의 3퍼센트도 채 안 되는 구역으로 몰아 넣었다. 이 바르샤바 게토를 철조망을 위에 올린 장벽으로 둘러싸고 경비병이 지켰다. 유대인들은 거의 식량을 배급 받지 못했고, 배고픔에 사람은 너무 많고 위생은 나빠서 질병이 발생했다. 매달 수천 명씩 게토에서 죽었다. 그러나 나치는 이보다 더 효과적으로 유대인을 죽일 방도를 모색했다.
아인자츠그루펜 (Einsatzgruppen)
소련 침공 시에 히틀러는 아인자츠그루펜(Einsatzgruppen, 특수임무 부대)이라는 이름의 이동 살인부대로 하여금 공산당 정치지도자들과 점령지역의 모든 유대인을 살해할 것을 명했다. 이들은 대상자들을 잡아 배수로나 새로 판 구덩이로 데려가 살해했다. 우크라이나 키에프 외곽에 위치한 바비 야르라는 이름의 협곡에서 나치는 단 이틀 동안에 유대인 3만3천명 이상을 학살했다.
히틀러는 총살부대에 의한 대량학살이 전쟁지대에서는 괜찮으나 서부나 중부유럽의 점령지역에서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1942년 1월 나치 요원들이 베를린 근교의 반제(Wannsee)에서 회의를 열고 새로운 방식에 합의했다. 그들이 세운 계획을 어느 나치 지도자는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후의 해결책’이라고 불렀다. 이 계획은 폴란드에 특별 수용소를 세워 그곳에서 유럽의 유대인 전체를 대상으로 인종적, 문화적으로 완전히 말살하는 대학살(genocide)을 감행하는 것이었다.
죽음의 수용소
나치는 사람을 가장 효과적으로 죽이는 방법으로 독가스를 택했다. 농약으로 쓰이는 자이클론 B가 최고의 효능을 가진 것으로 증명되었다. 1942년 1월 서부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샤워장으로 가장한 특별설계 가스실이 최초로 작업을 개시했다. 나치는 이 같은 시설을 갖춘 수용소를 도합 6개소 만들었다. 강제노동수용소와 달리 이들 죽음의 캠프는 오직 대학살만을 위한 것이었다.
폴란드, 네덜란드, 독일 그리고 다른 나라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을 소떼를 실어 나르던 철도화물칸에 빽빽이 채워 이들 학살장소로 수송해 왔다. 유대인들에게는 일하러 동쪽으로 간다고 말했다. 여섯 수용소 중 네 곳에서는 거의 대부분 도착 즉시 살해되었다. 규모가 큰 나머지 두 곳 아우슈비츠와 마즈다네크에서는 잡혀 온 사람들을 한 줄로 세워 노인과 어린애를 데리고 있는 여자들 그리고 일을 시키기에 너무 허약해 보이는 사람들은 곧 바로 가스실로 들여보내 살해했다. 유대인 수감자들이 시체를 화장장이나 거대한 불가마로 옮겨가 태웠다.
- 역사 속의 한 장면: 나치는 독일(맨 위)과, 프랑스(가운데)와 네덜란드(맨 아래)를 포함한 독일 점령지에서 유대인들이 유대인이라고 표시된 완장을 차거나 노란색 별을 붙이도록 강요했다.
- 결과를 예측하기: 왜 이 별들은 유대인들의 삶을 더 어렵게 했는가?
- 심화학습: 세계적 사건들
- 덴마크의 구출: 전쟁 중에 한 나라가 그 나라의 전 유대인 공동체를 파멸에서부터 구해내었다. 1943년 10월, 덴마크의 어부들은 덴마크의 8천명에 달하는 거의 모든 유대인들을 해로를 통해 중립국인 스웨덴으로 비밀리에 이송했다. 독일의 관리들이 덴마크 레지스탕스에게 유대인들이 강제추방될 것이라고 경고했었기 때문이다. 덴마크의 성공은 놀라운 것이었지만 또한 매우 드문 경우였다. 유대인 인구가 덴마크보다 많고 비유대인들이 돕고자 하지 않거나 인근에 안전한 피난처가 없는 경우에는 훨씬 더 어려웠다.
일을 시키려고 남겨둔 사람들은 최악의 상황을 견뎌야 했다. 아우슈비츠에 수용된 유대인들은 몇 달 이상 생명을 유지하지 못했다. 남자나 여자나 다 같이 머리를 박박 깎고 팔에 수감자 번호를 새겼다. 옷은 한 벌 밖에 주지 않고 난방이 안 된 막사의 널판지 바닥 위에서 여러 사람이 한데 자게 했다. 매일 주는 음식이라고는 가짜 커피 한잔에 작은 빵 한 조각 그리고 상한 야채로 만든 맛없고 희멀건 수프가 전부였다. 질병이 수용소를 휩쓸어 노동과 기아로 약해진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고문이나 의학 실험으로 희생된 사람들도 많았다. 간간히 “선별”을 실시해서 독일인 감시자들이 허약한 수감자들을 가스실로 보냈다.
반격 일부 유대인들은 나치에 저항을 벌였다. 폴란드, 프랑스 그리고 다른 지역에서 유대인들은 레지스탕스 단체에 가담해 싸웠고 몇몇 게토와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은 폭동을 일으켰다. 1943년 8월 유대인들의 폭동으로 트레블링카 수용소는 결국 폐쇄됐다. 그러나 폭동으로 많은 사람을 구하기에는 너무 늦었고 이내 독일인들에 제압당했다.
도주는 가장 보편적인 저항이었다. 대부분 수용소를 벗어나지 못했고 도망쳐 나가도 곧 다시 붙잡혀 왔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은 탈출에 성공하여 죽음의 수용소의 실상을 외부 세계에 알렸다. 트레블링카 수용소에서 몇 사람이 도망쳐 나와 1942년 바르샤바에서 그곳으로 보내진 3십만의 유대인들이 어떻게 됐는지를 바르샤바 게토에 전했다. 그 결과 1943년 4월 아직 바르샤바 게토에 남아 있던 약 5만 명의 유대인들이 최후로 트레블링카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폭동을 일으켰다. 겨우 피스톨과 수제폭탄으로 무장한 유대인들이 27일 동안이나 탱크와 대포로 공격하는 독일군 2천 이상의 병력을 상대로 저항을 계속했다. 결국 독일인들은 이 반란을 제압했지만 바르샤바의 유대인들은 비록 한정된 기간이었지만 강제수용을 저지했다.
- 각 지역별로 추정된 유대인 홀로코스트 희생자수
- 독일 134,500 / 프랑스 77,320 / 룩셈부르크 1,000 / 벨기에 28,900 / 덴마크 100 / 노르웨이 700 / 오스트리아 50,000 이탈리아 7,680 / 유고슬라비아 56,200 / 그리스 60,000 / 루마니아 271,000 / 헝가리 550,000 / 체코슬로바키아 146,150 / 리투아니아 140,000 / 라트비아 70,000 / 폴란드 2,900,000 / 소련 1,000,000
- 최소 6백만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됨
- 지도읽기: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홀로코스트의 공포를 경험했다.
- 장소 이해: 어느 나라가 홀로코스트에 의해 가장 많이 영향을 받았겠는가?
- 폴란드의 로지(Lodz) 게토에 있는 유대인들이 헬름노(Chelmno)에 있는 죽음의 수용소로 이송하는 기차에 올라타고 있다. 독일인들은 유대인들의 소지품을 압수하고 어디로 가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해방과 구조
미국 정부는 나치의 유대인 대량학살에 대해서 1942년 11월에 이미 정보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언론은 이를 보도하는데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의회 또한 피난 오는 유대인을 위해 이민 할당수를 늘려 주지 않았고 정부는 기존 할당수도 다 채우지 않았다.
결국 1944년 1월 루스벨트 대통령은 국무부의 반대를 물리치고 나치의 박해를 받은 사람들을 돕는 전쟁피난민위원회(War Refugee Board, WRB)를 창설했다. 비록 출발은 늦었지만 전쟁피난민위원회의 활동으로 약 20만 명의 생명을 구했다. 예를 들어 전쟁피난민위원회의 자금지원으로 스웨덴 외교관 라울 왈렌버그(Raoul Wallenberg)는 수천 명의 헝가리 유대인들에게 특별 스웨덴 여권을 발급함으로써 이들을 나치의 손아귀로부터 구해냈다. 유대인들을 미국으로 데려오려는 전쟁피난민위원회의 노력은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약 1천 명의 피난민을 구출하여 뉴욕주 오스웨고(Oswego)에 있는 육군 병영으로 데려왔는데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 같은 계획을 더 이상 확대시키지 않았다.
1944년 말 연합군이 진격해 오자 나치는 독일 영토 바깥의 유대인 수용소를 닫고 그곳의 수감자들을 독일 내의 수용소로 옮겼다. 유럽 해방이 임박했을 때 독일 경비대는 진격해오는 연합군에 앞서 유대인들을 이동시켰는데 이 죽음의 행진에서 수천 명이 희생되었다. 1945년 미군 병사들은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최초로 목격할 수 있었다. 한 젊은 병사는 부헨발트의 막사에 진입하면서 그가 발견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악취가 너무도 심해 나는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나는 맨 아래쪽 침상에 있는 한 사람을 보았다. 그는 너무도 허약해 일어나지 못하고 겨우 머리만 돌릴 뿐이었다. 그는 꼭 해골처럼 보였고 눈은 쑥 들어가 있었다. 그는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저 그 깊이 들어간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 두 눈은 아직도 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 미군 병사 레온 베이스(Leon Bass)
독일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만행과 전쟁 중의 행위에 대하여 연합국은 재판을 열어 다수의 나치 지도자들을 심판했다. 그들은 평화를 파괴한 죄, 인도주의에 대한 죄 그리고 전쟁범죄로 기소되었다. 미국, 영국, 소련 그리고 프랑스가 선임한 재판관들로 구성한 국제 군사재판이 1945년 11월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열렸다. 나치 피고인 24명 중 12명이 사형선고를 받았다. 유죄판결을 받은 자들의 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재판을 통하여 개인도 전쟁에서의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는 원칙이 수립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재판은 확고하게 나치 전범들의 주장 즉 자기들은 단지 “명령에 복종했다”는 항변을 거부했다.
- 역사 속의 한 장면: 새롭게 해방된 사람들의 얼굴은 그들이 오스트리아 에벤제(Ebensee)의 강제수용소에서 겪은 굶주림과 공포를 보여준다.
- 원인과 결과를 인식하기: 수용소의 해방은 어떻게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이 열리는데 기여했는가?
3과 평가
단원 이해도 평가
1. 크리슈탈나하트는 나치 치하의 유대인들에게 왜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 사건이 되었는가?
2. (a) 강제수용소의 목적은 무엇인가? (b) 죽음의 수용소의 목적은 무엇인가?
3. 전쟁 중에 홀로코스트가 저질러 지고 있다는 소식에 대해 미국은 어떻게 반응했는가?
비판적인 사고와 글쓰기
4. 핵심 문제 이해하기: 나치는 대학살을 위한 그들의 계획을 어떻게 실행했는가?
5. 정보를 전하는 글을 작성하기: 1942년 바르샤바의 게토에 사는 한 유대인 청소년의 입장에서 짧은 글을 지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