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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월 12일 (일) 22:28 기준 최신판

3과 대항문화

학습목표
- 대항문화는 어떤 사회적 변화를 일으켰는가?
- 어떻게 음악은 이 시기의 문화변화에서 영향을 받고 또 기여했는가?

요점
1960년대에 자유와 개별성을 추구하는 젊은이들의 문화가 꽃피었다. 대항문화는 개인적인 관계, 마약, 음약에 대한 새로운 태도로 많은 미국인들에게 충격을 주었지만 결국 미국사회를 변화시켰다.

핵심용어
- 대항문화
- 우드스톡 페스티발

학습주안점
- 세부사항을 찾아내기: 아래의 웹형 도표를 옮겨 그리시오. 본 과를 학습하면서 대항문화의 특징과 그것이 만들어낸 변화들로 채워 넣으시오.


배경
회색 정장차림의 남성이 1950년대의 상징이었다면 머리를 길게 기르고 밝은 색의 구슬과 꽃으로 장식한 튀는 옷차림을 한 긴 머리의 히피는 1960년대의 상징이었다. 전자는 성인으로 보이고 책임감이 있고 사무직에 맞는 깔끔한 옷차림이다. 그는 조직 안에 있는 사람이고 그의 시대의 문화에 순응한다. 후자인 히피는 회색정장과 그 옷이 나타내는 엄격한 삶을 거부한다. 히피세대는 기업과 권대의 권력보다 “꽃의 권력”을 선호하는데 결국 주도적인 문화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변화의 시대
1960년대에 많은 젊은이들은 그들 주위에서 보는 주류 문화에 대항하거나 반대되는 가치를 채택했다. 이 대항문화에 속한 사람들은 젊음, 즉흥성, 개별성을 가치 있게 여긴다. 히피라고도 불리는 이들 젊은이들은 평화와 사랑과 자유를 추구한다. 그리고 그들은 새로운 스타일의 의상과 음악 그리고 성관계에 대한 더 자유로운 태도를 실험하고 기분전환을 위해 마약을 사용한다. 그 결과로 “세대차(generation gap)”가 나타났는데 이것은 구세대와 신세대간의 이해와 소동의 결여를 가리킨다.

  • 사진 [1950년대 전형적인 정장차림의 중년 남성]
  • 사진 [히피 차림의 젊은 남성] 히피들(아래 앉아있는 모습의 사진)은 50년대의 사람들(좌측 사진)과 같아 보이지 않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했다.

소위 젊은 세대는 미국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무엇보다도 미국역사상 가장 거대한 세대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 뒤이은 “베이비붐(Baby Boom)”으로 1960년대 학생인구가 크게 늘었다. 수치상으로만 보아도 베이비부머들은 변화를 일으키는 세력이 되었다. 음반업계는 그들이 좋아하는 음악을 만들기 위해 몰려들었고 의상디자이너들은 그들이 도입한 스타일을 복제했다. 대학은 그들을 수용하기 위해 학과목과 규정을 바꿨다.

정치인들도 베이비붐세대의 목소리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60년대 스타일
1960년대의 모습은 독특하고 경박하고 자유로웠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변화하는 태도의 신호였다. 대항문화는 규제를 거부했고 권위에 도전했다. 많은 젊은 여성들은 1950년대의 단정한 헤어스타일을 포기하고 머리를 길고 자유롭게 기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또한 헐렁한 옷 같은 더 자유로운 패션을 선택했다. 남성들도 머리를 길게 기르고 수염을 길렀다. 그들의 옷차림은 가능한 한 회색 정창자림과 다르게 입었는데 그것이 바로 핵심이었다. 이런 스타일은 기업들의 세계와 유니폼에 대한 거부를 알리는 것이었다. 물론 히피들의 옷차림 자체도 젊은 세대들에게는 일종의 유니폼이었다.
대항문화에 속한 많은 사람들이 전 세계와 국내의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과 동질감을 느꼈다. 그들은 미국 내 소수집단의 권리를 위해 싸웠고 해외에서 그들이 생각하기에 억압당하고 있는 사람들과 같은 편이 되었다. 히피들은 자주 노동자들의 옷차침을 택했는데 여기에는 청바지, 단순한 형태의 면셔츠, 농부들의 상의와 같은 단순한 옷들이 포함된다. 그들은 또한 토착전통의상들을 추구했는데 남미의 판초(ponchos), 아프리카의 다시키(dashikis),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만든 보석 같은 수공예품들이었다.
60년대의 다채로움은 의상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히피들은 그들의 자동차와 그들의 몸에도 채색을 입혔다. 그리고 장난스럽고 어울리지 않는 것을 추구하는 정신은 예술계에도 침투했다. 앤디 워홀(Andy Warhol)과 로이 릭텐스테인(Roy Lichtenstein)의 그림과 같은 1960년대의 팝아트(Pop Art)는 현대적인 삶에서 사용되는 공예품들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를 추구했다. 당시에는 조롱을 받았지만 이 수프 캔과 만화책의 풍자적인 그림들은 오늘날 미술관에 걸려있다. 또 다른 스타일인 옵아트(Op Art)는 화려한 색상과 어질어질한 착시현상으로 60년대의 정신을 사로잡았다. 여기에 속한 많은 이미지들은 향정신성 약물의 영향으로 창작되었거나 그런 것처럼 보인다. 옵아트는 특히 포스트와 대중적인 록 그룹의 신곡을 담은 앨범 표지에 많이 나타난다.

성혁명
대항문화에 참여한 사람들이 그들이 어떻게 옷을 입을 지에 대한 개인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더 많은 자유를 요구했던 것처럼 그들은 또한 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선택하는데 있어서도 더 많은 자유를 요구했다. 그들의 성행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은 행동에 대한 전통적인 많은 제약들을 거부하는 것이었으므로 “성 혁명”이라고 이름이 붙여졌다. 이 혁명을 이끌었던 여러 사람들은 성을 전통적으로 가정생활과 연결되어있는데서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생활방식을 실험했다. 어떤 히피들은 전통적인 관계를 거부하고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살며 재산과 가사를 공유했다. 다른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고 커플로 그냥 함께 살았다.
대항문화의 성혁명은 주류 매체에서 성에 관련된 주제에 대해 더 개방적으로 토론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신문, 잡지, 도서들이 불과 몇 년 전 만해도 출간할 수 없었을 것 같은 글을 실었다. 1962년 출간된 헬렌 걸리 브라운(Helen Gurley Brown)의 책 “성과 독신 여성(Sex and Single Girl)”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966년 윌리엄 H. 매스터스(William H. Masters)와 버지니아 E. 존슨(Virginia E. Johnson)은 성에 대한 과학적 연구에 대한 보고서인 “인간의 성적 반응(Human Sexual Responses)이라는 책을 출간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겼다.

  • 사진 [앤디 워홀의 수프 캔을 묘사한 작품 사진]

사진 [옵아트 작품]역사 속의 한 장면: 앤디 워홀의 그림(위)과 옵아트 포스트(우측)는 1960년대 예술가들이 추구한 비적절성을 보여준다.

마약문제
1960년대 대항문화에 속한 사람들 중에는 향정신성 약물에 의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 강력한 화학약물은 뇌가 비정상적으로 활동하도록 한다. 향정신성 약물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환각을 경험하고 현실을 다르게 인지한다. 1950년대의 비트닉들은 1960년대에 영감을 주었는데 그들도 마약을 실험했지만 비트닉들은 상대적으로 소수였다. 1960년대에 마약, 특히 마리화나는 미국의 젊은이들 사이에 훨씬 더 많이 퍼졌다.
향정신성 약물의 초기 옹호자는 하버드대학에서 티모시 리어리(Timothy Leary) 연구원이었다. 그는 하버드대학에서 리처드 앨퍼트(Richard Alpert)와 함께 일반적으로 LSD라고 알려진 리세르그산 디에틸아미드(lysergic acid diethylamide)를 합성했다. 두 사람은 학부생들을 마약실험에 참여시켰다는 이유로 연구원 자리에서 해고되었다. 리어리는 마약이 정신을 자유롭게 한다고 설파하기 시작했다. 그는 청중들에게 “함께 하라, 흥분하라, 벗어던져라.(Tune in, turn on, drop out)”고 충고했다.
리어리의 견해는 마약 복용의 한 가지 측면만을 보여준다. 마약의 다른 측면에는 심각한 위험이 놓여 있다. 과용이나 마약 복용으로 인한 사고로 죽을 가능성이 높다. 1960년대를 이끈 세 명의 음악인, 재니스 조플린(Janis Joplin), 짐 모리슨(JIm Morrison),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는 모두 마약 과용의 합병증으로 죽었다. 그리고 그들만이 전부인 것은 아니다. 그들의 죽음은 현실을 강화하거나 현실로부터 도피하는데 마약을 의지했던 사람들이 내몰려간 극단적인 비극을 보여준다.


음악계
음악은 60년대의 변화를 반영하면서 또한 변화에 기여하기도 했다. 1950년대의 록큰롤은 음악의 혁명을 시작했고 젊은이들이 자신들을 위한 음악을 갖도록 하였는데 이 음악은 많은 성인들을 분개하게 했다. 1960년대 초에는 포크 음악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일어났다. 대항문화에 속한 사람들은 전 세계의 보통사람들의 음악, 즉 “민중들(folk)”이 세대에서 세대를 거처 전수해온 전통적인 노래들에 관심을 가졌다. 그들은 또한 압제에 대한 저항의 노래들, 즉 선원이나 철도원 같은 노동자들의 노래와 노예시대에 기원한 노래들을 좋아했다.
1964년은 영국의 침공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록음악에 있어서 혁명적인 해로 기록되었다. 이 해에 비틀즈(Beatles)가 미국에서 첫 순회공연을 가졌다. 이 “전설적인 4인조(Fab Four)”는 그들의 고향인 영국에서 폭풍적인 인기를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미국에서도 돌풍을 불러 일으켰는데 그들의 음악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엉뚱한 유머와 그들의 장발의 더벅머리(mob top) 스타일 때문이기도 했다. 비틀즈는 또 다른 영국 그룹인 롤링스톤즈(Rolling Stones)처럼 당시의 음악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롤링스톤즈의 믹 재거(Mick Jagger)는 극적으로 열광을 불러일으키는 공연의 대가였다. 또 한명의 자극적인 연주자로 술고래였던 텍사스 출신의 재니스 조플린이 있었는데 그녀는 전통적인 블루스를 강렬하게 해석해내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 심화학습: 문화

- 헤어스타일[젊은이들의 문화 중에서 성인들을 가장 거슬리게 했던 것은 장발이었다. 젊은이들은 장발을 반항의 상징이라고 생각했고 아프리카계 미국인 젊은이들은 자연적인 아프리카 스타일의 긴 머리로 인종적인 자부심을 표현했다. 많은 고등학교들이 장발을 금지했는데 학생들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고소해서 법정에서도 논란이 되었다.]

  • 학습이해도 확인: 60년대 미국 음악에 미친 영향들에 대해 서술하시오.


우드스톡(Woodstock)
다양한 대항문화의 흐름들이 1969년 우드스톡 음악과 예술 페어(Woodstock Music and Art Fair)에 함께 모였다. 약 40만 명의 사람들이 뉴욕 주 베델의 넓은 초원에 모여 여러 날 동안 록 세계의 주요 밴드들의 연주를 들었다. 무더위와 비에도 불구하고 우드스톡 페스티발에 참석한 사람들은 그들이 그 행사에서 경험한 연대감에 대해 일종의 경외심을 가지고 회상했다.

경찰은 마약관련법을 집행하지 않기로 해서 참석자들과의 대결을 회피했다. 군중들은 질서를 지켰다. 우드스톡 참석자 중 한 사람인 톰 로우(Tom Law)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행사는 음악보다 훨씬 더 컸다. 이것은 하나의 현상이었다. 완전히 새로운 현상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당시에 지구상에서 있었던 가장 평화롭고 문명화된 모임이었을 것이다.” - 톰 로우
그러나 다른 미국인들은 이 페스티발과 거기에 반영된 분위기를 역겹다고 보았다. 이제 머리를 길게 기르고 히피스타일의 옷을 입게 된 더 나이 많은 세대의 사람들조차도 그들이 주위에서 보게 된 변화에 대해 놀랐다. 더 젊은 세대 들 중 많은 사람들에게도 이 변화들은 혼란스러운 것이었다. 특히 주류 문화에 속했던 사람들은 우드스톡 페스티발과 미국 여러 곳에서 보게 된 마약과 성과 알몸 노출에 대해 개탄해했다. 그들에게 대항문화는 도덕과 존중받는 가치들에 대한 거부를 대변하는 것이었고 당시의 문제들에 대한 유치한 반응으로 보였다.

알타몬트(Altamont)
우드스톡을 비판했던 사람들의 우려는 캘리포니아주 알타몬트 오토바이 경주장에서 1969년 12월 열린 또 다른 록 페스티발에서 현실화되었다. 30만 명이 롤링스톤즈의 콘서트를 보기 위해 그곳에서 모였다. 콘서트 진행자들이 적절한 안전을 보장해주지 못하자 롤링스톤즈는 지옥의 천사들(Hell’s Angels)이라는 악명 높은 무법자들인 오토바이 갱들을 고용해서 질서를 유지하려고 하였다. 이들은 누군가가 총을 가지고 무대에 접근하자 그를 폭행해서 사망하게 되었다. 이 추악한 폭력은 대항문화가 설파했던 가치와 모순되는 것이었다. 또한 이 사건은 “평화와 사랑”의 시대가 영원히 계속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리는 신호였다.
단순한 생활양식을 찬양했지만 대부분의 히피들은 안정된 중산층의 자녀들이었다. 미국 기업들은 나팔바지와 스테레오 세트같은 제품들을 그들을 대상으로 내놓았고 그들은 이런 제품들을 열광적으로 구매했다. 대항문화가 해체되자 히피들은 주류문화로 바로 녹아 들어갔다. 1950년대와 60년대의 주류 미국사회의 가치에 저항했던 베이비붐 세대에 많은 사람들이 1980년대에는 그들이 한 때 비난했던 바로 그 회사의 중역 자리에 앉아있기도 하였다.

  • 사진 [요란하게 채색된 버스 위에 올라탄 사람들 모습]

역사 속의 한 장면: 이 히피 집단은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살았고 요란하게 채색된 버스를 타고 여행하며 돌아다녔다.
- 추론하기: 그들은 전통적인 사회관습에 대한 거부를 어떻게 보여주고 있는가?


3과 평가
단원 이해도 평가
1. 대항문화란 무엇인가?
2. 팝아트와 옵아트는 무엇인가?
3. 성행위와 마약에 대한 새로운 태도가 어떤 새로운 태도가 대항문화의 의해 촉진되었는가?
4. 알타몬트 콘서트는 우드스톡 페스티발과 어떻게 달랐는가?

비판적인 사고와 글쓰기
5. 가정을 찾아내기: (a) 대항문화는 주류 문화에 대한 어떤 가정을 가지고 있었는가? (b) 그것은 공정했는가? 설명해보시오.
6. 편집자에게 편지쓰기: 지금은 1967년이고 당신은 십대를 가진 부모이다. 당신의 자녀가 다니는 학교에서 히피 스타일의 복장을 금지하는 규정에 대해 찬성 혹은 반대하는 편지를 편집자에게 쓰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