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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공화국(Republic of Hungary) | |
인구 | 9,874,784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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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적 | 93,030㎢ (남한 면적의 0.94배) |
언어 | 헝가리어 |
문자 | 로마자 |
정부 | 대통령제를 가미한 내각 책임제 |
통화 | 포린트, Ft 로 표기 |
GDP | 1,171억 달러 |
HDI | 0.831 (37위, 2012년 조사) |
국제전화 | +36 |
도메인 | .hu |
헝가리는 중앙유럽에 있는 내륙국이며 수도는 부다페스트다.
서쪽과 북서쪽으로는 오스트리아, 북쪽으로는 슬로바키아, 북동쪽으로는우크라이나, 동쪽과 남동쪽으로는루마니아, 남쪽으로는 세르비아, 남서쪽으로는 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와 함께 비셰그라드 그룹의 일원이자, 유럽 연합의 정회원국이다. 헝가리의 주민은 대부분 우랄족에 속하는 헝가리인이다.
목차
역사
헝가리의 국토는 헝가리 평원이라 불리는 광대한 평원을 중심으로 하여, 예부터 다양한 민족이 침입하여 정착하여 왔다. 고대에는 판노니아라 불리고, 판노니아족 등이 거주하였다. 기원전 1세기에는 로마 제국에 점령되어, 로마 속주|속주 일리리쿰에 편입되었다가, 1세기 중엽 로마 속주|속주 판노니아으로 분리되었다. 헝가리인이 10세기 말 헝가리 왕국을 수립하여, 14세기부터 15세기경에는 주변의 여러 왕국과 동군 연합을 맺고 오스만 제국의 침입을 받을 때까지는 중앙 유럽의 강국으로 군림하였다. 헝가리는 15세기 후반까지 오스만 제국의 강력한 압력을 받게 되었다. 1526년에 헝가리는 모하치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군에 패배하여, 국왕 러요시 2세가 전사하였다. 1541년에 부다가 함락되어, 그 결과 동남부와 중부의 3분의 2를 오스만 제국(오스만 제국령 헝가리), 북서부의 3분의 1을 합스부르크 왕가의 오스트리아에 의하여 분할 지배되어(왕령 헝가리), 양 제국이 충돌하여 만나는 최전선이 되었다. 오스만제국이 군사적으로 후퇴하자, 1699년의 카를로비츠 조약에서 헝가리 및 헝가리국왕령의 크로아티아와 트란실바니아는 오스트리아에 할양되었다.
헝가리 측에서는 지배자가 합스부르크 왕가으로 변한 것일 뿐, 꾸준히 독립을 요구하는 운동이 반복되었다. 1848년 3월 혁명에서는 코슈트 러요시이 지도한 독립운동은 러시아군의 개입으로 실패하였으나, 오스트리아에 민족독립운동을 억제하기 위한 타협을 결단케하여, 1867년에 아우스글라이히(화협)가 맺어졌다. 이렇게 하여, 합스부르크 왕가는 오스트리아 제국과 헝가리왕국에서 이중군주로서 군림하였으나, 양국은 외교 등을 제외하고는 각각의 정부를 가지고 연합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직전에 헝가리는 제국으로부터 분리독립(1918년)하면서 공화국이 되었다. 1918년에 헝가리 최초의 공화제국가인 헝가리민주공화국이 성립하여, 사회민주당계의 카로이 미하이(Károlyi Mihály)가 초대 대통령 및 수상을 맡았다. 1920년에 체결된 트리아농 조약에 의해, 헝가리는 트란실바니아 등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시대의 왕국령 가운데, 면적의 72%, 인구의 64%를 잃고, 헝가리인의 전인구 중 반수 가량이 헝가리 국외로 남겨지게 되었다. 합스부르크가를 대신하는 왕이 선출되지 않음에 따라, 1920년 3월 1일 호르티 미클로시이 섭정으로서 통치하는 헝가리 왕국의 성립을 선언하였으나, 영토를 상실함에 따른 반작용으로 차츰 우경화되었다.
헝가리는 나치 독일의 후원하에 1930년대 말, 뮌헨 협정과 빈 중재, 슬로바키아-헝가리 전쟁 등으로 일부 영토를 회복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잃은 땅을 회복하기 위해, 또한 나치 독일의 압박을 받아, 추축국에 가담하였으나, 전쟁의 국면은 서서히 열세가 되어, 1944년에는 호르티는 추축국으로부터 이탈하려고 하였으나, 나치 독일군과 화살십자당에 의한 쿠데타(판자르파우스트 작전)으로 저지되어, 1945년 5월 8일의 패전까지 추축국으로서 전쟁을 치렀다. 1945년 5월 8일의 패전에 의해 소비에트연방에 점령된 헝가리에서는 공산화가 추진되었다. 1946년 2월 1일에 왕제가 폐지되고, 헝가리왕국은 명실공히 붕괴하였다. 소비에트연방 점령하의 헝가리에서는, 1949년 사회주의공화국을 표방한 헝가리 공화국(제2공화국)이 성립하였다. 1989년 10월 공산당 일당지배체제를 청산하고 사회자유주의로 선회했다.[1]
탄생과 번창
로마 제국은 기원전 35년부터 기원전 9년 사이에 도나우 강 서안 지역을 정복하였다. 이로써 기원전 9년부터 4세기 말엽까지, 로마 제국의 로마 속주|속주 판노니아이 훗날 헝가리의 영토가 되는 지역을 포함하는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4세기 후반에는 훈족이 침입, 서기 433년에 서로마 제국으로부터 판노니아의 지배를 인정받고, 훈족에 의하여 판노니아를 주요영토(일부는 현재의 불가리아, 루마니아를 포함)로 하는 독립국가가 처음으로 탄생하였다. 헝가리는 896년, 현재의 체코 및 슬로바키아를 중심으로 한 영토를 가지고 있던 대 모라비아(Great Moravia)를 멸망시키고 판노니아 평원(헝가리 분지)를 차지한 헝가리인|마자르인들과 이들을 이끌고 들어온 아르파드에 의해 건국되었다.(→그 이전의 역사는 헝가리인 참조). 그 후로는 지금의 스위스나 북이탈리아, 발칸 반도를 원정하면서 약탈을 계속했지만 955년 아우구스부르크 부근에서 독일 황제 오토 군대에 패해 지휘관들이 처형당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헝가리인들은 보다 평화적인 방향으로 노선을 바꿔 게자 공의 통치가 시작됐다.
헝가리 왕국의 건국과 전성기
마자르 대공 게저의 아들이었던 이슈트반 1세은 헝가리인 내부의 이교도인 부족장과의 싸움에서 이겨 기독교을 국교로 받아들이고 행정 조직을 정비하면서, 신성 로마 제국 오토 2세의 후원으로 헝가리 왕국을 건국(1000년)하고 국왕의 지위에 올랐다. 이렇게 해서 헝가리는 중앙유럽에 위치한 가톨릭 국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112년에 크로아티아과 슬로베니아, 달마티아과도 동군연합(同君聯合)을 이루는 등 세력을 확장하였다. 12세기 후반 농업, 공업(수공업), 상업의 발전으로 세속 영주층의 권력이 커졌다. 토커이, 에게르 등의 와인 산지는 이 무렵 개척지에 들어온 프랑스인들에게 의해 확립된 것이다. 벨러 4세의 치하(1235년~70년)이던 1241년~1242년, 몽골의 침입으로 국토가 황폐화되고, 대다수의 주민들이 죽임을 당했다. 몽골군이 갑작스럽게 물러간 후 벨러 4세은 방위를 위해 봉건영주에게 석조 성을 쌓는 것을 허용했다. 벨러 4세 자신이 왕궁지 에스테르곰을 대주교에게 양도하고, 부더 남쪽에 있는 야트막한 언덕에 성벽을 쌓아 왕궁(부다 성)을 짓고 이 곳을 부더라고 명명했다. 그때까지 부더는 오부더(구(舊) 부더)였다. 1301년 엔드레 3세이 사망하자 아르파드 왕가는 단절되었고, 여러 가문들이 헝가리의 군주|헝가리의 왕위을 소유하려고 분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야기에우워 왕가|야노시 왕가의 마차시 1세의 절대주의 통치 하(1458년~90년)에서 헝가리는 영토를 확장하고 르네상스 문화를 도입해 영화를 누리는 헝가리의 황금시대가 열렸다. 그렇지만 그 영화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고 도자 죄르지의 농민 전쟁(1514년), 중간 귀족과 대 귀족의 항쟁 등이 이어지며 나라는 쇠퇴의 길로 들어섰다.
헝가리의 분할 통치 기간
서방으로의 팽창정책을 추진하던 오스만 제국과 헝가리 왕국의 충돌이 불가피하였다.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러요시 2세이 지휘하던 헝가리 왕국군은 오스만 제국의 술탄인 쉴레이만 대제이 이끄는 오스만 제국군에게 완패하고, 국왕 자신도 전사하였다. 이 전쟁의 패배로 인하여 헝가리는 오스만 헝가리과 트란실바니아을 오스만 제국에게 할양하였다. 오스만 제국군은 이에 그치지 않고 진격하여 빈을 공격했고, 1541년에는 부더를 점령했다. 이로써, 헝가리는 약 150년간 합스부르크 왕가이 직접 통치하는 도나우 강 서쪽의 로열 헝가리(합스부르크 헝가리)와 오스만 왕가이 직접 통치하는 부다를 포함한 구 헝가리 왕국의 중앙부인 오스만 헝가리, 오스만 아래서 큰 자치를 누리는 트란실바니아을 통치한 터키 보호령의 헝가리 왕국(1570년부터 트란실바니아 공국)으로 3분된다. 헝가리의 황금기는 16세기 초 오스만 제국에 의해 정복되고 16세기 오스트리아이 헝가리의 나머지 땅마저 지배하게 되어 끝이 났다. 17세기 말에는 오스트리아가 헝가리 땅을 전부 차지하게 되었다.
국토의 3분할로 헝가리의 모든 도시는 각기 다른 발전의 길을 걷게 되면서 다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일례로, 도나우 강 서쪽의 쇼프론이나 케세그는 경제, 상업 면에서 오스트리아와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된다. 트란실바니아 공국은 터키 보호령 하에 있었지만 헝가리인의 통치국가로 발전해 갔다. 콜로주바르(현 루마니아 령, 클루즈 또는 나포카)는 당시 가장 번성했던 도시였다. 3분할 시 베트렌, 라코츠, 그 후 테케리의 "클루츠" 군과 대 터키, 대 합스부르크 전쟁에 나서 조국통일을 이루는 중심지였다. 야노시 왕가와 합스부르크 왕가가 헝가리의 왕위를 두고 서로 다투었지만, 합스부르크의 혼인 정책으로 야노시 가문은 합스부르크 가문에 흡수당하면서, 오스트리아의 군주|오스트리아의 대공이 헝가리의 왕을 겸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683년 대투르크 전쟁의 결과,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최전성기 때의 영토를 모두 회복한다.
헝가리의 독립 운동과 이중 제국의 성립
1703년 합스부르크의 통치에 반대하여 트란실바니아 대공 라코치 페렌츠 2세이 주동한 민족 반란이 일어나지만 결국 실패한다. 1848년에 코슈트의 주도로 1848년 헝가리 혁명이 일어났으나, 러시아 제국의 개입으로 실패한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가 보오전쟁에서 패배하고 헝가리에 호의적인 바이에른 공녀 엘리자베트|시씨 황후으로 인해 오스트리아과 헝가리에선 대타협이 이루어져,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 아래에 있던 헝가리는 1867년 오스트리아와의 타협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자치 왕국으로 승격되었다. 헝가리는 외교과 국방을 제외한 부분에서 엄청난 자치를 보장받으면서, 헝가리의 경제와 문화는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1914년 7월 28일 ~ 1918년 11월 11일) 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면서 종전 직전인 1918년 10월 31일 헝가리는 독립을 선언하고, 헝가리 최초의 공화제국가인 헝가리민주공화국이 성립하여, 사회민주당계의 미하이 카로이(Mihály Károlyi)가 초대 대통령 및 수상을 맡았다. 1919년에는 공산 혁명이 일어나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이 세워졌지만 루마니아 왕국|루마니아이 침공해 소비에트 공화국을 무너뜨리고 前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해군 제독이었던 미클로시 호르티을 집권시키는 등, 1919년 8월~11월 중순까지 루마니아가 부다페스트를 점령하였다. 헝가리는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국이었고, 전쟁의 책임을 마무리하는 교섭이 진행되어, 연합국 (제1차 세계 대전)|연합국과 헝가리간의 트리아농 조약(1920년 6월 4일)에 따라 전쟁 전의 영토(슬로바키아, 보이보디나, 트란실바니아, 슬라보니아)와 인구의 대부분을 중앙 유럽의 신생 독립국들에게 할양할 수 밖에 없는 손실을 입었다. 이는 나중에 헝가리가 추축국에 가담하게 되는 배경이 된다.
정치 체제 논쟁과 2차 세계 대전
헝가리는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합스부르크가를 대신하는 왕이 선출되지 않음에 따라, 왕정을 유지할지 공화정을 선포할 지 엄청난 논쟁에 있었다. 결국 헝가리 귀족들은 왕정을 우선 유지하고 서서히 공화정으로 나아가자고 합의했으며, 호르티 미클로시을 섭정왕으로 선출(1920년 3월 1일)하고, 그가 통치하는 헝가리왕국의 성립을 선언하였다. 섭정왕 미클로시 호르티은 영토를 상실함에 따른 반작용으로 차츰 우경화되었다. 이리하여 헝가리는 1930년대에 나치 독일의 강요로 동맹 관계를 맺었다. 아돌프 히틀러|히틀러은 헝가리에 있는 유대인들을 학살하기 위해 헝가리를 침공하여 호르티를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 합작자로 대체해야 했다. 그 때문에 나치 독일은 호르티는 물론 아들까지도 감금했고, 소련군이 풀어주게 된다.
헝가리는 나치 독일 주도의 추축국에 가담하면서, 뮌헨 협정(1938년), 빈 중재(1938년 및 1940년)를 통해 루마니아 왕국|루마니아으로부터 트란실바니아 북서부를 할양받았고 슬로바키아-헝가리 전쟁(1939년) 등으로 슬로바키아과의 국경 지역 일부를 합병하였다. 헝가리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잃은 땅을 회복하기 위해 또한 나치 독일의 압박을 받아, 추축국에 가담하여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공격해 현재의 슬로베니아 일부 지역과 세르비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전역을 합병, 대국이 되었다. 그러나, 전세가 불리해지자 1944년, 호르티는 추축국으로부터 이탈하려고 하였으나, 아돌프 히틀러의 도움을 받은 살러시 페렌츠이 이끄는 화살십자당이 헝가리를 장악{나치 독일군과 화살십자당에 의한 쿠데타(판자르파우스트 작전)}함으로써, 이탈은 저지되었다. 결국 헝가리는 1945년 5월 8일의 패전까지 추축국으로서 전쟁을 치르고 부다페스트 포위전으로 연합국으로 돌아서게 된다. 종전 후, 1946년 2월 1일에 왕제가 폐지되고, 헝가리왕국은 명실공히 붕괴되었다. 헝가리는 파리 조약 (1947년)|파리 조약(1947년)에 따라, 전쟁으로 얻은 영토를 모두 잃었으며 소련에 의해 헝가리 인민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소비에트연방 점령 하의 헝가리에서는, 1949년 사회주의공화국을 표방한 헝가리 공화국(제2공화국)이 성립되었다.
헝가리 인민 공화국
1956년 10월 23일 발발한 1956년 헝가리 혁명 이후 10월 24일 수상으로 임명된 임레 너지은 소련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바르샤바 조약 기구 탈퇴를 선언했다. 그러자 소련군이 개입, 독자노선 추구를 이끈 임레 너지을 사형시키고, 반공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하지만 이후 헝가리는 중앙유럽의 민주화를 주도한다. 1980년대 후반이 되자,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과 함께, 공산당(헝가리사회주의노동자당) 독재의 한계가 드러났다. 1980년대 후반의 헝가리 민주화운동 결과, 1989년 5월, 헝가리는 서방측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에 설치되어 있던 철조망인 이른바 "철의 커튼"을 철거하고 국경을 개방하였다. 1989년 8월에는 헝가리 사회주의노동자당이 하야하고, 1989년 10월 23일에는 신헌법(헝가리공화국헌법)의 시행으로, 다당제과 대통령제을 기반으로 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을 도입하고 국호를 "헝가리 공화국으로 변경했다. 이로써 헝가리 인민 공화국은 명실 공히 붕괴되었다. 헝가리는 1980년대 말 바르샤바 조약 폐지도 주도하였다.
헝가리 공화국
1991년 소련이 해체되자 헝가리는 서유럽 국가들과 관계를 더욱 긴밀히 하며 1996년에는 OECD, 1999년에는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 2004년 5월 1일에는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과 함께 유럽 연합에 가입했다. 헝가리의 국기|헝가리 제3공화국의 국기과 헝가리의 국장|국장에는, 공산당 시대의 붉은 별의 문장이 제거되었다. 또한 나치 독일, 화살십자당,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일당 독재에 의한 압제의 반발로서 하켄크로이츠, 화살십자, 낫과 망치, 붉은 별의 사용이 1993년 개정 형법에 의해 금지되어 있다. 헝가리는 지금까지도 정치가 안정되지 못하여 2007년에 반정부 폭동이 일어난 바 있다. 2009년 3월 15일에는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선 혁명기념일에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다.[2]
2011년 4월 18일 헝가리 의회에서 새 헌법인 《헝가리 기본법》이 통과되었다. 새 헌법은 2012년 1월 1일을 기해 효력이 발생했으며 정식 국호도 "헝가리 공화국"에서 "헝가리"로 변경되었다. 그러나 헝가리의 이러한 헌법 개정은 국체의 변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헝가리 공화국의 체제와 민주주의를 계승한다. 또한 헝가리는 헝가리 공화국과 동일한 명칭임을 의미한다.
지리
지형
93,030㎢의 면적을 지니고 있는 헝가리는 동남유럽에 있다. 남북 길이는 250km, 동서 길이는 524km이다. 2,258km의 국경을 이루며 서쪽으로는 오스트리아, 남서부로는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북동쪽으로는 우크라이나, 북쪽에는 슬로바키아과 국경을 접한다. 국토의 중앙부는 해발 고도 약 100m 전후의 헝가리 분지가 차지하고, 도나우 강 중앙 유역에 위치하는 내륙국이다. 서부에는 중앙유럽 최대의 벌러톤 호(湖)가 있어, 그 남쪽에는 옛 사구열(砂丘列)과 넓은 계곡이 발달되어 있다. 사구간에는 푸스타라고 불리는 스텝이 펼쳐져 있고, 관개로 비옥한 경지를 이루고 있다. 티서 강(Tisza 江) 동쪽에는 비사지(飛砂地)나 저습지가 많다.[3]
헝가리의 현재 국경은 처음 1차 세계대전 이후 생긴 것으로 1920년 트리아농 조약 이후 헝가리 제국은 원래 영토의 71%를 잃었고 인구의 58.5%도 사라졌다. 나치군과 연합하여 슬로바키아와 우크라이나,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와 맞닿고 있는 일부 지역에 대한 영토권을 확보하기도 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후 이러한 영토를 모두 잃었다.
헝가리 국토는 카르파티아 산맥의 기슭에 넓게 펼쳐진 카르파티아 분지의 가운데 평야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헝가리 평원 또는 헝가리 분지라고도 불리는 국토의 중심은 중앙을 흐르는 도나우 강에 의해 거의 양분되어 있다. 동쪽에는 큰 지류인 티사강도 흐르고 있다. 국토의 서부에도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큰 호수인 발라톤호가 있다. 또한 각지에 온천이 용출되어 공중 욕탕이 오래 전부터 건설, 이용되어 왔다. 유럽 유수의 온천 대국이어서, 많은 관광객이 온천을 목적으로 몰려든다.
기후
기후는 전반적으로 대륙성 기후에 속하여 비교적 온화하고 사계절도 있다. 중부유럽의 해양성 기후와 러시아 남부의 스텝기후와의 접점(接點)에 있다. 위도가 비교적 높고, 겨울은 춥지만 지중해로부터 해양성기후의 영향을 받아, 겨울에도 습윤하고 흐린 경향이 있다. 최저 기온인 1월은 평균 영하 1℃ 이며 심한 경우 영하 20℃까지 내려가는 경우가 있으며, 최고인 7월은 22℃ 이다. 연간 평균 기온은 10℃ 전후이다. 연강수량은 500∼700㎜ 로 서부에 약간 많고, 활엽수가 무성한데, 동부에는 초지가 많다.[4]
정치
헝가리는 대통령제를 택해, 대통령은 임기 5년으로 의회에 의해 선출되며, 수상을 임명하는 등 의례적인 직무를 수행하는 국가 원수이다. 자신이 각료를 선택해서 행정을 행한다. 폴란드와 달리 점진적 개혁정책을 수행, 중앙유럽에서 가장 안정적인 민주화과정을 밟고 있다. 대통령의 임기는 의회가 5년마다 선출한다. 총리를 임명하거나, 의회 선거의 날짜를 잡는 것은 대통령의 몫이다. 입법부인 국민의회(Országgyűlés)는 일원제이며, 민선이고 임기 4년이다. 정원은 386명이다. 국민의회는 국가의 최고권위기관이고, 모든 법은 국민의회를 거치지 않고는 성립되지 않는다. 순수한 사법권을 행사하는 최고재판소와는 별도로 헌법재판소가 존재하여, 법률의 합헌성을 심사하고 있다.
행정 구역
헝가리는 43개의 지방 행정 구역으로 구분된다. 그중 19개는 주(州)로 번역될 수 있는 메제(megye)고 23개는 메제와 동격의 도시주(都市州, megyei város)다. 또한 수도 부다페스트(Budapest, 부더페슈트)는 시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 독립된 수도다. 부다페스트는 1873년에 부다(Buda, 부더)와 페스트(Pest, 페슈트)가 합병되면서 정해진 이름이다. 농업 지역에 위치하고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대학과 19세기 독립 혁명에 연유하는 교회가 있는 데브레첸(Debrecen)에도 공업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 북부의 미슈콜츠(Miskolc)는 제철·금속공업으로 알려져 있고, 남부의 세게드(Seged)과 터키적 영향이 강한 소도시 페치 (헝가리)|페치(Pécs)도 공업 중심지가 되어 가고 있다.[5]
경제
거시경제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헝가리 경제는 농업과 소규모 공업을 위주로 하였으나, 전후 산업국으로 탈바꿈하였다. 1950년대 초 공산정부는 자급자족의 경제를 위해 산업화에 주력하였고, 주 관할의 공장과 농장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중공업에 치중한 결과 경공업이 경시되어 소비재 부족이 심화되고, 농업 생산성이 떨어지는 등 경제의 불균형 현상이 심각해졌다. 이러한 문제점을 타개하기 위해 1968년, 공산주의 시장경제발전을 목표로 한 대폭적인 경제 개혁이 시행되었다. 서방과의 무역을 확대하고 시장에 제한된 자유를 허용하는 새로운 경제 개혁을 전개하였고, 초반에는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어, 공업 생산량이 크게 늘어났으며, 중앙유럽 공산국가 중에서는 소비재가 풍부한 나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199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외채가 급격히 증가하여, 1993년에는 150억달러에 이르렀다. 경제 성장률도 1970년대에는 높은 수준을 유지했으나, 1980년대 들어 침체를 면치 못했다. 1982년 소규모 사기업 승인, 1986년 파산법 시행 등 일련의 경제개혁조치를 단행하였으며 1989년 사기업육성과 외국인에 대한 투자규제완화 등의 신회사법을 제정하였다. 이로 인해 외국 직접투자호조 및 관광수지 흑자를 보고 있다. 이런 가운데 1980년대에 민주화의 물결이 거세지면서, 민주주의 체제의 도입 필요성도 커졌으며,공식적으로 체제를 전환하였다. 헝가리는 체제전환 이래, 외국자본을 받아들여 적극적으로 경제 개방을 진행하였다. 그 결과, 1997년 이후 연간 4% 이상의 고성장을 계속함과 함께, 2004년에는 경제의 민간부문이 국내총생산의 80%를 차지하고, "구 동구권의 우등생"이라고 불릴 정도가 되었다. 또한 2004년의 유럽연합 가입은 당시의 헝가리 경제에 순풍이 되었다.
민주주의 체제 도입 초기인 1990년대 초반에는 혼란과 인플레이션, 무역 구조의 변화 등으로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를 기록하였다. 그러나 1994년 이후 안정기에 접어들어었으며, 1996년에는 OECD에 가입하였다. 1996년 이후 국영기업의 민영화 및 중소기업 육성에 노력하고 있다.[6] 1990년대 후반 세계를 강타한 금융위기에도 별 영향을 받지 않고 안정적인 성장세를 보였다. 2000년대 들어 헝가리 경제는 5% 이상의 높은 성장률을 보였고, 2004년에는 유럽 연합(EU)에 가입하였다. 그러나 유럽 연합 가입 이후 침체기에 접어들어, 이후 연 1%대 성장에 머물고 있으며, 인플레이션도 심해지고 있다. 인플레이션과 실업률의 증가로 빈부의 격차가 커지고, 이것은 일상화된 사회문제가 되었다. 또한 거액의 재정적자도 중요한 과제이다. 최근 다소 침체기에 들었으나, 헝가리는 중앙유럽의 체제 전환국 중에서는 안정적인 성장을 나타냈으며, 국민소득도 높은 편이다. 현 정권이 목표로 하는 유로화 도입에의 전망은 보이지 않는다.
농업
농업에서는 단고추이 명산품이고, 헝가리요리에도 흔히 사용된다. 거위의 사육도 번성하여, 도나우강 서안(두난툴(Dunántúl) 지방)이 주산지이다. 헝가리산 푸아그라도 많이 수출되고 있다.
광업
헝가리의 광업은, 무연탄으로 이용가능한 아탄과 보크사이트이 중요 핵심이 되고 있다. 자원으로는 세계 시장 점유율 1.5%를 차지하는 아탄(1391만톤, 2002년), 석유(107만톤), 천연가스(11.5경줄)를 채굴한다. 유력한 탄전은 남동부 베치 근교, 부다페스트에서 서쪽으로 50km에 위치한 타타바니아 근교의 2 곳에 펼쳐져 있다. 유전은 중앙남부의 세게드 근교와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국경에 접하는 위치에 있다. 금속광물자원으로는 보크사이트(100만톤)가 유력하다. 벌러톤 호 북안부터 부다페스트로 향하는 북동쪽으로 이어지는 산지를 따라서 채굴되고 있다. 그러나, 채굴량은 감소 경향에 있다. (1991년에는 203.7만 톤이 채굴되었다.) 그 밖에도, 소규모이긴 하나 망간과 우라늄도 채굴되고 있다.
공업
제2차 세계 대전 전의 헝가리는 비옥한 토양과 계획적인 관개시설비에 의한 농업국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식품공업을 중심으로 한 경공업이 번성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공산주의의 계획경제에 의해 중공업화가 진행되었다. 특히, 차량 생산, 일반 기계가 우선되어 화학공업, 약품공업이 그 다음이었다. 그러나, 유기광물자원과 보크사이트을 제외하면, 공업원 재료 쪽은 혜택을 받지 못하여, 수입원재료를 가공하여, 수출하는 형태를 취하였다. 1970년대에는 공업을 중심으로 한 무역이 국민소득의 40%를 점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공산주의체제에서 민주주의체제로 전환 후, 1990년대 초에는 화학공업의 비중이 점차 낮아지는 경향을 보였다. 2003년 시점에는 전 산업에서 차지하는 공업의 비율은 점차 높아져, 수출액의 86.8%를 공업제품이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무역의존도는 수출 54.5%, 수입 59.2%까지 높아졌다. 품목별로는 기계공업이 다시 번성하게 되었고,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전기기계 36.1%, 기계류 16.2%, 자동차 8.2%이다. 세계의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높은 공업제품은 와인 (1.7%, 49만톤), 질산(1.5%, 31만톤)이다. 전통적인 산업으로는 주류 제조업이 강하다. 특히 와인이 유명한데, 부르겐란트, 쇼프론(Sopron), 비츠라니 등 유명한 산지가 있으나, 그중에서도 토커이(Tokaj)의 토커이 와인은 "와인의 왕"이라 불린다.
서비스업
부다페스트는 서유럽에서 발칸방면으로 달리는 육상 국제선의 통과지로 도로 총연장은 8만 7,000㎞, 포장률이 97%이며 철도는 총연장 8,190㎞이다.[5] 헝가리의 국제공항은 부다페스트에 있는 리스트 페렌츠 국제공항(옛 명칭: 페리헤지 국제공항)뿐이므로 항공편으로 헝가리에 입국할 때는 모두 이 공항에 도착한다. 리스트 페렌츠 국제공항에는 두 개의 터미널이 있는데, 제1터미널은 1998년에 화물운송기나 전세기편 전용터미널로 지정되어, 일반 여객은 이용하지 않는다. 여객용으로 사용하는 제2터미널은 부다페스트의 중심부에서 약 24 km 남동쪽에 위치한다. 제2터미널은 2A, 2B로 나뉘어 있으며, 2A는 말레브 헝가리 항공의 전용터미널, 2B는 그 이외의 모든 항공기가 이착륙한다. 터미널 2A와 2B는 인접한데다 내부도 연결되어 있어 만약 착오를 하더라도 간단히 이동할 수 있다.
헝가리의 통화는 헝가리 포린트|포린트(Forint, Ft)이다. 예전에는 보조통화로 피렐(1Ft=100피렐)이 있었지만, 지금은 이자 등 계산상으로만 사용하는 정도이다
은행은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8시부터 15시까지, 금요일은 8시부터 13시까지 연다. 우체국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8시부터 18시까지 연다. 주요 기차역에 있는 우체국은 24시간 영업한다.
사회
민족
집시라고 불리는 로마인이 5.3%를 차지한다. 기타 민족(독일인, 루마니아인, 터키인, 슬라브계의 슬로바키아인, 세르비아인, 슬로베니아인, 우크라이나인, 크로아티아인, 유대인)도 거주한다. 부다페스트에는 화교도 거주한다.
헝가리와 그 주변은, 매우 독특한 문화를 가졌던 다양한 민족이 거주하였던 것으로 19세기 이래 잘 알려져 있다. 2000년 현재 인구의 84.4%가 의 헝가리어을 사용하는 헝가리인(마자르인)이다. 헝가리공화국의 국민의 92.7%가 헝가리인(마자르인)이다. 마자르인은 핀우그리아어파의 헝가리어을 모어로 하고, 우랄 산맥 방면에서 이주해 온 민족이다. 마자르인의 인명은, 정식으로 표기하는 경우 성이 이름의 앞에 놓인다.
헝가리인은 구 헝가리 왕국령에 넒게 퍼져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르비아의 보이보디나, 크로아티아 북부, 슬로베니아 남부, 루마니아의 트란실바니아 등에도 꽤 많은 헝가리인 인구가 남아있다. 또한 헝가리인 중에는 몰다비아의 찬고(Csángó), 트란실바니아의 세케이(Székely)인과, 헝가리공화국 영내의 야스(Jász)인, 마쵸, 쿤(Kun), 팔로츠(Palóc) 등의 개성적인 문화를 가진 서브 그룹이 알려져 있다. 야스인은 알라니족의 후예, 쿤인은 쿠만인의 후예라고 하는 것이 알려져 있고 이러한 다양한 출신을 가지고 헝가리 왕국에 이주하여 헝가리에 부분적으로 동화되어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 밖의 민족으로는 통계적으로 의미가 있는 인구를 가지는 로마인(집시)과 독일인이 거주한다. 헝가리의 집시는 개성적인 민족문화로 알려져 있다. 헝가리 과학 아카데미의 추계로는 인구 약 1천만명 중에서 약 60만명이 집시이다. 또한 독일인은 동방식민운동의 일환으로 헝가리 왕국으로 이전해 온 사람들의 자손으로, 트란실바니아의 사스인(작센인)(→루마니아 독일인)과 슬로바키아의 칩스 독일인과 같이 헝가리 왕국 가운데 독자적인 민족공동체를 이룩한 사람들도 있다.
그 밖에도, 루티니아인(우크라이나인), 체코인, 크로아티아인, 루마니아인 등도 있으나, 모두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유대인 인구도 상당히 많은 수에 이르렀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중의 박해 등으로 미국이나 이스라엘으로 이주하여 간 사람이 많다.
헝가리인이 황색 인종이라고 하는 설은 아시아 및 아시아인의 정의가 애매한 것과 또한 과거의 인종분류의 정의가 현재와는 다소 다르다는 것에서 비롯된 오류라고 말할 수 있다. 근년의 DNA 분석에 의하면 헝가리인은 코카소이드(Caucasoid, 백인)으로 분류되나, 아주 작게도 몽골로이드(황색 인종) 특유의 아세트알데히드 탈수소 효소 D형이 검출되고 있는 것은, 몽골로이드와의 혼혈에 의해 유전자의 유입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인구
파일:Hungary Population.svg|thumb|right|300px|FAO가 발표한 헝가리 인구 변화(천 명 단위) 이 나라는 다른 중앙유럽 나라들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인구가 감소하는 추세에 있다. 2006년 Eurostat 추산에 따르면, 이 나라의 組(조)출산율은 천 명당 9.6명, 사망률은 천 명당 13.5명, 합계출산율은 2005년 현재 천 명당 1.28명이다. 현재 2014년 10월 22일 기준으로 헝가리 인구는 9,933,173명이다.
언어
공용어는 헝가리어다. 소수민족의 대부분도 헝가리어를 말하여, 헝가리어 인구는 98%에 이른다. 지식인들은 러시아어, 영어, 독일어을 구사하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독일어을 할 줄 안다.
또 헝가리는 프랑스어 사용국 기구(프랑코포니)의 참관국이다. 이것은 언어적으로는 영어로의, 경제적으로는 독일로의 급속한 편입을 막기 위한 측면도 있다. 영어도 널리 쓰인다.
- ↑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지리/세계의 여러 나라/독립국가연합·동유럽/헝가리#헝가리의 역사·주민|헝가리의 역사·주민〉
-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ec&sid1=104&sid2=233&oid=001&aid=0002554399 헝가리 혁명기념일에 반정부 시위)
- ↑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지리/세계의 여러 나라/독립국가연합·동유럽/헝가리#헝가리의 자연|헝가리의 자연〉
- ↑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지리/세계의 여러 나라/독립국가연합·동유럽/헝가리#헝가리의 기후|헝가리의 기후〉
- ↑ 5.0 5.1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지리/세계의 여러 나라/독립국가연합·중앙유럽/헝가리#헝가리의 교통·도시|헝가리의 교통·도시〉
- ↑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지리/세계의 여러 나라/독립국가연합·중앙유럽/헝가리#헝가리의 산업|헝가리의 산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