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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및 위치
이란(페르시아어: ایران)은 서남아시아에 있는 이슬람 공화국이다. 공식 명칭은 이란 이슬람 공화국(페르시아어: جمهوری اسلامی ایران 좀후리-예 에슬라미-예 이란)이며, 1935년 전에는 페르시아로 알려져 있었다. 옛날부터 이란은 군주제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군주제는 시작된 지 약 1400년 만에 폐지되었으며 현재는 공화제 국가이다.
간략역사
이란은 BC 4000년 이전부터의 거주 흔적이 알려져 있고 당시의 선사시대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란고원에 처음으로 국가를 건설한 것은 BC 559년으로, 아케메네스왕조의 페르시아제국 건국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 다리우스1세는 흑해· 나일강·인더스강까지 영토를 확장하는 등 제국을 건설하였으나, BC 490년 그리스와 마라톤전투에서 패한 뒤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셀레우코스왕조· 파르티아제국을 거쳐, 3세기 초 사산왕조 페르시아 건국으로 다시 페르시아의 부흥시대를 맞아 400여 년간 영화를 유지하다 651년 아랍인의 침입으로 멸망하였다. 그 후 7세기부터 16세기까지의 중세시대에는 타민족의 지배를 받은 이란 역사의 암흑기다. 7세기부터 11세기까지는 아랍인의 지배를 받아 이때부터 이슬람화가 급속히 진행되어, 전통적인 파할레비문자 대신 아랍문자가, 조로아스터교[拜火敎] 대신 이슬람교가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9세기에 한때 사파르왕조·사만왕조가 일어났으나 얼마 가지 못했고,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는 투르크계 셀주크왕조의 지배를, 이후 16세기까지는 몽골계 티무르제국(帝國)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다 1502년 사파비왕조가 일어나면서 강력한 이란 민족국가를 형성, 당시 수도 이스파한은 '세계의 중심'으로 불릴 만큼 큰 번영을 누렸고, 이때 비로소 시아파 이슬람교가 국교로 정해졌다. 18세기 후반부터는 투르크멘족의 카자르왕조가 창건되어 수도를 테헤란으로 옮겼다. 19세기 초 카자르왕조시대 후반에는 러시아의 압박을 받았고, 1857년에는 아프가니스탄 문제로 영국과 싸워 패하였다. 이러한 대외적인 패전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여전히 전제정치가 행해지자 결국 국민의 반발을 초래, 1906년 헌법 제정을 비롯해 의회 제도가 성립되었다. 제1차세계대전 중에는 중립을 선언하였으나 국토는 전쟁터가 되었다. 그 결과 이란에 진출하려던 영국·러시아에 눌려 반식민국가 상태를 면치 못하다가, 1918년 페르시아-영국조약으로 영국보호령이 되었다. 이에 항거하여 이란 카자크 병단(兵團)의 대장(隊長) 레자한이 무력 정치개혁을 일으켜 카자르왕조를 무너뜨리고 1925년 스스로 레자샤라 칭한 뒤, 팔레비왕조의 기초를 닦았다. 레자샤는 중앙집권제를 실시하고, 치외법권의 철폐, 철도의 부설, 여성의 차도르 착용 금지 등 후진성 탈피에 노력하는 한편, 각종 불평등조약을 폐기하고, 국제연맹에도 가입하였다. 이어 서아시아 여러 나라와 동맹을 맺고 지속적으로 유럽세력 배제를 위한 투쟁을 펼치는 한편, 1935년에는 국호를 이란으로 바꾸었다. 1941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즉위한 모하마드 레자샤는 민족주의 기치 아래 모든 석유산업을 국유화하고, 1955년에는 중동조약기구에 가입하는 한편, 1959년에는 미국과 방위조약을 체결하였다. 또 석유 수출로 얻은 막대한 수입을 바탕으로 1961년에는 농지개혁·문맹퇴치·중립외교·여성참정권 등을 골자로 하는 '백색혁명'을 단행하였으나, 이로 인해 반백색혁명 시위와 반정부 운동이 격화되었다. 1973년 제5차 5개년경제계획 시행 중 석유·중화학공업에 치우친 나머지 보수 시아파의 반(反)팔레비투쟁이 격화되기 시작해 결국 1979년 1월, 팔레비는 이집트로 망명하고, 반정부 이슬람혁명을 주도한 호메이니가 이슬람공화국을 수립함으로써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1980년 9월 샤트알아랍수로와 아트그섬 영유권을 둘러싸고 이라크와 8년간의 전쟁을 치르면서 국제적인 고립과 막대한 인적·물적·경제적인 손실을 초래하였다. 그러나 전후 국제적인 고립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과 함께 1989년 호메이니의 사망으로 하메네이가 최고지도자의 지위를 계승하고, 라프산자니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전후복구 및 경제사회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는 한편, 실용주의 정책을 채택하였다. 1997년 하타미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뒤에도 역시 경제난 회복을 위한 개방·개혁정책을 추진하였으나, 외교·국방·사법 등 실질적인 권력은 최고지도자인 하메네이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 성직자와 보수파가 장악함으로써 가시적인 개혁은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2001년 6월 대선에서 강력한 개혁파인 하타미가 77%의 압도적인 지지로 재선에 성공함으로써 이란의 개혁노선은 훨씬 많은 힘을 얻게 되었다.
지리
이란은 국토의 절반이 산악지대이며, 나머지 반이 사막, 황야 및 평야로 이루어져 있어 경작지가 거의 없다. 즉 중앙부에 펼쳐져 있는 이란고원은 북쪽에 엘부르즈산맥, 서북쪽에서 남동쪽으로 길게 자그로스산맥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 산악지대이며, 나머지는 카스피해(海) 연안의 저지대, 페르시아만(灣)·오만만(灣) 연안 일대의 좁은 평야이다. 이란고원은 기복이 심하지 않은 내륙 고원으로서 남동부는 해발고도가 극히 낮으나(300m) 북서부로 갈수록 점차 높아진다(1,500m). 엘부르즈·자그로스 두 산맥은 알프스히말라야조산운동으로 생겨난 해발고도 3,000m의 대습곡산맥으로서 지진대(地震帶)이기 때문에 심한 지진으로 큰 피해를 내기도 한다. 엘부르즈산맥에 있는 성층화산(成層火山)인 다마반드산(5,604m)은 이란의 최고봉이다. 대표적인 강으로는 자그로스산맥에서 발원해 메소포타미아의 샤트알아랍강(江)과 합류하는 카룬강, 이란고원에서 발원해 엘부르즈산맥에 횡곡(橫谷)을 만들면서 카스피해로 흘러들어가는 세피드루트강이 있다. 국토의 반 이상이 염성 사막으로 황무지를 이루어 경지율은 낮으며 삼림은 주로 카스피해 주변에 분포한다. 이란은 특히 호수가 많은 나라다. 세계에서 가장 큰 내륙해인 카스피해는 러시아와 접경지역에 있으며, 수면이 해면보다 28m나 낮다. 또 폭 50㎞, 길이 130㎞로, 이란에서 가장 큰 호수인 레자이야호(湖)를 비롯해 곳곳에 크고 작은 호수가 있으나 대부분 강한 소금 성분을 띤다. 기후는 지역에 따라 많은 차이를 보이는데, 엘부르즈·자그로스 두 산맥으로 인해 해역에서 멀리 떨어진 이란고원 일대는 강수량이 극히 적어 겨울철에만 비가 내리며, 건조한 내륙성 기후로 인해 연교차가 심하다. 테헤란의 7월 평균기온이 29.5℃인 데 반해 1월은 3.5℃에 지나지 않아 연교차가 26℃에 이르며, 페르시아만 연안과 오만만 연안의 여름은 특히 무더워 45℃를 넘는 것은 보통이다. 동부와 중부 지역에도 거의 비가 내리지 않아 연강수량이 100㎜에도 미치지 못하며, 소금 성분이 많은 카비르사막과 루트사막이 이 지역에 펼쳐져 있다. 반면 카스피해 연안은 연간 1,000㎜ 이상의 강수량을 보이며, 동부는 겨울에 비가 많은 지중해성 기후, 서부는 연중 비가 오는 온대습윤기후로 활엽수가 무성하다. 엘부르즈·자그로스산맥의 산간지대나 북서부의 아제르바이잔고원은 겨울 추위가 극심하고 적설량이 많다. 떡갈나무·너도밤나무 및 활엽상록수가 주종을 이루며, 사막지대에서는 내염성 식물이 자란다. 전체 국토면적 중에서 경작가능지 9.78%, 농경지 1.29%, 기타 88.93% (2005년)이다.
사회
주민
이란은 오랜 역사와 주변 지역으로부터의 영향에 따라 다민족국가가 형성되었다. 크게 페르시아족(族)·인도이란어족· 투르크족·셈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 인구의 절반이 조금 넘는 51%를 차지하는 페르시아인이 주류이며, 민족적으로 터키인과 같은 투르크족 계통의 아제르바이잔족이 24%를, 인도이란어 계통의 언어를 구사하는 길락-마잔다란족이 8%를, 쿠르드족이 7%를, 아랍족이 3%를, 투르크멘족이 2%를, 그밖에 유태인 기타 소수민족이 1% 정도를 차지한다. 언어적으로는 페르시아계통이 51%, 터키 계통이 26%, 쿠르드어 9%, 아랍어 1%, 기타 6% 등이다. 공용어는 페르시아어이며, 아랍문자를 사용하고, 일부 소수민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이슬람교 시아파 교도(무슬림 98% 중에서 시아파 90%, 수니파 8%)들이다. 이란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페르시아인들은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 분야의 요직을 두루 겸해 국회의원 290명 가운데 5석을 제외한 285석(2001)을 독점하고 있다. 소수 인도이란어족은 루르족·바흐티아르족·발루치족·쿠르드족·아르메니아족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루르족과 바흐티아르족은 이란 서부의 자그로스산맥 중부에서 남부에 걸쳐 부족 단위로 유목생활을 하거나 정착생활을 한다. 발루치족은 수니파 유목 민족으로, 전근대적인 부족 통치 제도를 유지하고 있는데, 이란 내에서는 가장 오지인 파키스탄 접경지역에 거주한다. 쿠르드족은 터키·이라크·시리아· 이란 접경지대에 광범위하게 거주하는 민족으로, 오래 전부터 독립국가 건설을 지향하며 게릴라전을 벌이기도 했으나, 2001년 진압된 상태로, 부족 단위 또는 부족간 연합체를 구성해 살아 간다. 아르메니아족은 테헤란 북부 등 대부분 도시에 거주하며, 주로 상업·전문직에 종사하는 인텔리들이다. 투르크족 계통은 터키와 접경지대에 위치한 동서 아제르바이잔 주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터키어의 방언을 사용하며 이란 전체 인구의 24%를 차지하는 아제르바이잔족, 남부 시라즈 주변에 거주하는 유목 민족인 카슈카이족, 투르크메니스탄과 접경지대에 거주하는 투르크멘족 등이 있다. 그밖에 셈족계로, 단순노동자나 농수산업에 종사하는 아랍족, 초기 형태의 기독교를 신봉하며 아시리아어를 사용하는 아시리아족, 종교의 자유는 인정받고 있으나 어느 정도의 차별을 받고 있는 유태인 등이 소수민족으로 꼽힌다. 인구 1000명당 출산률이 16.57 명, 사망률이 5.65명, 유아사망률이 38.12명으로 높은 유아사망률 때문에 출산률이 급감하였다. 기대수명은 70.56 세로 비교적 높은 편이다.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등 200만 명(1999)에 달하는 난민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거주하여 많은 문제를 안게 되었다.
문화
이란은 유럽·아프리카 아시아의 중간지대에 위치하여 동서문명(Silk Road)의 가교역할을 하는 한편, 북방 유목민족 문화와 인더스문명·메소포타미아문명을 흡수해 복합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나라다. 또한 복합민족국가로서 인종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인구의 90% 이상이 시아파 이슬람교를 믿는 까닭에 국가의 단일성을 유지할 수 있었고, 이러한 종교적 단일성으로 인해 11세기에서 16세기에 걸친 셀주크투르크· 몽골 등 이민족의 지배에도 동화되지 않았다. 이슬람문화권의 중심국으로서, 이슬람사원을 비롯한 건축예술이 일찍부터 발달하였고, 특히 양탄자 직조 기술은 뛰어난 예술성과 장인정신으로 인해 세계에서도 명물로 손꼽힌다. 이슬람교 이전의 페르시아적인 조로아스터교·노루즈(Nou Roz) 등 고유문화도 이슬람 문화에 융화되지 않고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이란 혁명 후 국민생활의 이슬람화가 촉진되었는데, 특히 금요기도회는 종교행사인 동시에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일체감과 정치 학습의 기회를 제공한다. 시아파 최대 종교행사는 아슈라(Ashura)로서, 제3대 이만 후세인이 전장에서 순교한 날을 기념해 전국가적인 애도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다. 라마단(금식월)을 준수하고, 매년 이슬람 성지를 순례하는 기간인 하지(Hajj) 때는 8~9만 명의 순례객이 사우디아라비아·이라크 성지를 방문하기도 한다. 이슬람 율법(Islamic Code)은 특히 남녀의 유별성을 강조해 여성들은 외출시에 항상 차도르를 둘러야 하지만, 다른 이슬람권 국가들과는 달리 이란에서는 개방·개혁정책에 힘입어 이러한 관습이 퇴조하고 있으며, 여성참정권도 일부 인정된다. 식생활은 유목·촌락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날 것이나 뱀장어·조개처럼 비늘 없는 해산물은 먹지 않지만, 새우만은 예외다. 돼지고기와 개고기는 금기시한다. 이란인들은 또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긍심이 강하고, 훼르도우시(Ferdowsi)·사디(Sadi)·하페즈(Hafez) 등 뛰어난 시인의 작품을 즐겨 읽음은 물론, 이들을 민족적 영웅으로 숭상하는 이도 적지 않다. 이슬람 문명과 이란혁명에 바탕을 두고 있던 문화·사회생활은, 그러나 1997년 8월 하타미(Khatami) 정부의 출범과 함께 2001년 현재 제2기 하타미 정부에 이르기까지 계속 개혁·개방정책을 추구함으로써 급격히 변해가고 있다.
종교
이란은 인접한 이라크와 아라비아반도 등 서남아시아 이슬람지역 다른 나라들과 달리 아랍 문화권에 속하지 않으며, 민족도 아랍과 다른 이란 민족이다. 언어 또한 파르시(페르시아어)를 쓰고 있다. 다만 이슬람교가 지배종교가 되고 칼리프제에 복속된 이후 아랍어와 파르시의 교류가 많아졌다. 파르시는 기원전 7세기~ 기원전 4세기 무렵에 쐐기문자를 빌려서 기록하였으나, 7세기 말에 이슬람 문화가 이란에 전파되면서, 아랍 문자와 비슷한 알파벳을 쓰는 표기로 바뀌었다. 이슬람 문화권의 여성들이 흔히 쓰는 히잡(머리쓰개) 중에서 특히 이란 지역의 여성들이 많이 사용하는 온몸을 덮는 두건을 차도르라고 부른다. 이란의 수도 테헤란의 거리를 걷는 페르시아 여성들을 보면은 차도르를 입고 다니는 여성들이 있지만, 반면에 차도르를 입지 않고 양의를 입는 여성들도 많이 있다. 이슬람 문화로 인해 남녀 공학이 금지되어 있다. 여기에 더해 이란은 리그 오브 레전드에서도 여성 챔피언을 규제하고 있다. 2011년 조사에 따르면 이슬람교 99.4% 크리스트교0.16% 조로아스터교0.03% 유대교0.01% 무신론0.4% 그외 0.1%로 조사되었다. 이슬람교 신자의 90~95% 이상이 트웰버 시아파 이슬람교를 믿는다.[5][6][7] 약 4~8%의 나머지가 수니파 이슬람교를 믿는다. 그 밖의 기타 종교로는 크리스트교, 조로아스터교, 유대교 등이 포함되어 있으나 그 수는 매우 적은 편이다.
경제
이란의 1인당 GDP는 8,700달러이며 산업별 인구 인구 구성 비율은 농업 11%, 공업 44.9%, 서비스업 44.1% (2006년 추산)이다. 이란은 6500만의 인구, 석유·천연가스 등 풍부한 부존자원, 인근 중앙아시아 국가로 진출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 및 오랜 역사와 전통, 문화적 긍지 등으로 말미암아 중동 지역 최대의 시장이며 높은 경제성장 잠재력을 가지고 있어 중동 지역 안에서 공업화를 달성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이다. 노동인구의 약 30%(2001년 추산)가 종사하는 농목업(農牧業)이 기간산업이지만, 기후와 지형조건 때문에 농경지는 총면적의 10%에 불과하며, 휴한지(休閑地)가 많아 실제 경작 가능한 면적은 매년 농경지 면적의 1/3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더욱이 낙후한 농업기술과 대토지소유제도로 인해 생산성도 낮다. 주요 농작물은 밀·보리·채소·사탕무·목화·포도·멜론 등이며, 카스피해(海) 연안에서는 벼·차·오렌지도 재배한다. 목축업은 국토 면적의 약 1/4이 목초지여서 상당히 발달, 주로 농민과 유목민에 의해 이루어진다. 산양·면양·소 등이 사육되며, 육류·모피·유류 등으로 상품화된다. 어업은 카스피해에서 산출되는 캐비아가 유명하며, 그밖에 페르시아만(灣)에서 정어리·새우 등이 많이 잡힌다. 석유자원은 1908년, 마스젯솔레이만(灣) 유전이 발견되면서 앵글로페르시아(지금의 브리티시) 석유회사가 상업적 채유를 시작한 이후 미국·네덜란드·프랑스의 여러 회사들이 출자한 국제재단(컨소시엄)이 발족하여 이권을 계승하였다. 또 1958년부터는 이탈리아·캐나다·독일·일본 등에도 새 광구(鑛區)의 이권이 주어졌지만 그 후 전면 국유화해 오늘에 이른다. 2006년 추산 총매장량은 약 1,384억 배럴로, 사우디아라비아, 캐나다 다음으로 세계 3위이며, 1일 생산량은 397만 배럴로 사우디아라비아, 러시아, 미국 다음으로 세계 4위, 석유수출국기구(OPEC) 내에서는 생산량 2위를 차지한다(2005년 추산). 총생산량 가운데 68%를 수출한다. 여기서 얻은 막대한 재정은 제조업 부문에 투자되며, 1990년 이후 비석유제품의 수출 확대 정책에 따라 공업도 활기를 띠고 있다. 주요 공업은 전통적인 직물을 비롯해 식품가공·자동차·철강 등으로 숙련 노동력과 사회간접자본·원료 등의 부족으로 인해 아직까지는 낙후한 상태다. 수출품은 석유와 석유 관련 제품이 주종을 이루며, 수입품은 기계·자동차·화학제품 등이다. 주요 무역상대국은 이란혁명 후 미국과의 관계 악화로 독일·영국·이탈리아·에스파냐·일본·한국 등 유럽·동북아시아 국가가 대부분이다. 무역은 수출 666.7억달러, 수입 456.7억 달러 (2006년 추산)로서 100억 달러 흑자는 전년도의 21억 달러 적자를 기록한 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난다. 2006년 추산 약 584.6억 달러의 외환을 보유하고 있으며, 총외채는 137.3억 달러로, 외채구조는 안정적이다. 물가상승률은 12%(2006년 추산) 내외이지만 체감물가는 20% 이상이다. 또한 물가 상승과 함께 이란 경제의 최대 과제로 꼽히는 것이 고용 문제로, 정부 당국은 2007년 추산 실업률을 15%라고 발표하고 있다. 절대 빈곤층의 비율도 40%에 이른다. 재정수지는 수입이 1108억 달러, 지출이 936.1억 달러이다(2006년 추산). 풍부한 석유자원을 바탕으로 한 석유 이권료(利權料)와 매상이윤 배당으로 들어오는 막대한 국고수입이 주요 재정수입원이다. 이란의 경제는 다른 중동 국가와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석유에 의존하고, 과도한 정부보조금과 복수환율제 채택 등 비효율적 경제 운용으로 풀어야 할 과제가 있는데, 지속적인 개혁·개방 정책과 적극적인 대외 선린우호정책의 추진으로 대외 관계를 강화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 최근 산업화에 필요한 기술과 자본의 유입 증대에 힘입고, 석유에 의존하는 경제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입 대체산업 육성, 비석유 부문의 수출산업화, 산업 간접시설 확충 등의 산업화 정책 추진으로 상당히 높은 경제성장률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산업 정책은 핵개발 의혹같은 외교 갈등이 해소될 때 성공할 수 있다.
이란의 외교
이란은 그동안 대외 선린 우호관계 추진, 유럽 및 아시아와의 관계 강화, 이슬람권의 지도자적 역할 추구, 주변국과의 관계 강화를 외교정책의 기조로 삼아왔다. 즉 대화와 이해를 기초로 모든 국가와 선린 우호관계를 추진하고, 국가간 자주·독립·평등·내정불간섭·주권존중 원칙을 지지하면서 일국 중심의 국제질서에 반대하는 한편, 1990년대 말부터 그리스·독일·바티칸시국·오스트리아·이탈리아·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과 관계를 강화하고 있다. 한국·중국·일본 등 동북아시아 3국과도 관계를 강화하고, 2001년 현재 이슬람제국회의기구(OIC) 의장국으로서 이슬람의원연맹 창립총회(1999)를 주최하는 한편,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건설 지지 및 반이스라엘 정책을 견지하는 등 주변 이슬람권과 관계를 강화하면서 지도적 위치를 확보하는 데 주력해 왔다. 특히 모든 형태의 테러리즘을 반대해 각종 국제 테러리즘 척결에 동참하고, 핵확산 방지 및 마약 근절, 난민 보호에 앞장서면서 페르시아만(灣) 외국군 주둔 반대, 대(對) 이라크 군사조치 반대, 중동지역 비핵화 추진 등 지역안보에도 힘써왔다. 2005년 6월 국내외 정치 분석가들의 예상을 뒤엎고, 종교적 신앙심이 투철한 저소득층의 압도적 지지로 마무드 아마디 네자드 대통령이 당선된 후 신정부는 대내외적으로 이슬람 중심의 민족주의적 강경보수 정책을 추진하게 되었다. 대외 주요 정책은 평화적 목적의 핵기술 권리와 중동지역의 지도적 지위 확보 추구, 이라크와의 협력 강화 정책 추구를 골자로 한다. 대미관계는 미국이 911 테러사건을 계기로 2002년 1월 이란·이라크·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목함에 따라, 이란-미국 관계가 다시 경색되었다. 이란 측은 미국의 경제제재 및 동결자산 해제 등 대이란 적대정책 변경이 선행되어야 관계개선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으며, 미국은 테러단체 지원 중단, 중동평화협상 방해 중지, 핵무기 등 대량살상무기 개발 시도 중단 등을 관계개선의 전제조건으로 내세우고 있다. 대EU 관계는 2002년 12월 시작된 이란-EU간 통상 협력협정(TCA) 협상이 2003년 6월까지 네차례 개최된 바 있으나, 이란의 핵문제, 인권문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 테러문제 등으로 중단된 이후 2004년 11월 핵문제에 관한 포괄적 협상 합의(파리 합의)에 따라 협상이 재개되었으나, 2005년 8월 신정부의 핵문제 관련 EU의 포괄적 제안 거부로 다시 중단된 상태이다. 이슬람원리주의에 따른 국제적 고립 탈피와 경제회복을 위해 EU와의 관계 강화 및 한국, 일본, 중국, 인도 등 아시아 국가와의 협력관계 강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특히 경제발전에 있어 동북아 3국의 지원을 위한 전략적인 파트너 관계를 희망하고 있다. 이란은 중동지역 국가 가운데 이스라엘과 이집트를 제외한 모든 국가와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최근 이집트와의 관계 복원을 위해 적극 노력 중이다. 특히 신정부는 페르시아만 주변국 및 이슬람 국가와의 관계강화에 신정부 대외정책의 우선순위를 부여하고 있다. 2006년 기준 국제연합, 국제통화기금, IBRD(국제부흥개발은행), 아시아태평양경제사회위원회, 석유수출국기구, 세계보건기구, 국제노동기구,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 국제민간항공기구, 관세협력이사회 등 각종 국제기구에 가입하였으나, WTO 가입은 미국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한국과의 관계
이란은 남북한 동시수교국이며 중동 국가로는 최초로 한국과 교역을 한 국가이다. 1962년 10월 외교관계를 수립한 후 1967년 4월 주(駐)이란 한국대사관이 설치되면서 관계가 긴밀해지고 한국의 대(對)유엔정책을 지지하고 있다. 1973년 10월 석유파동 이후 급격히 증대된 석유 수입을 배경으로 상품교역·건설·인력 등 여러 면에서 양국간 협력관계가 급진적으로 확대되어 1975년 8월에는 주한 이란대사관이 설치되었다. 1975년 경제 및 기술협력에 관한 협정을, 이듬해 3월에는 무역협정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이란혁명 후 관계가 소원해져 1981년부터 1988년까지 대사대리급 관계로 변경되었다가, 1989년에야 다시 대사급 관계를 회복하였다. 북한과는 1973년 4월 수교하였다. 1989년 이란-이라크전쟁이 끝난 뒤 한국은 이란의 전후 복구사업과 이란 경제개발계획에 참여해 건설과 통상 협력이 신장되었고, 1990년대 후반에는 이란의 산업화 추진과 연계해 양국간 관계가 산업협력의 형태로까지 발전하였다. 양국의 산업협력이 고도화됨으로써 한국은 이란의 2대 교역국(1999), 이란은 한국의 3대 원유공급국으로서 상호 의존성이 갈수록 증대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양국 관계는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발전해 전기·전자·자동차·선박·제철·발전·석유화학·통신·반도체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산업협력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석유·가스 개발, 댐 건설 등 한국 측의 건설 분야 진출도 늘어나고 있다. 2006년 기준 한국은 이란과 우호조약(1969.5), 문화협정(1974.7), 경제 및 기술협력 의정서(1975.7) 무역협정(1976. 2, 2006.7 수정안 서명), 상표권 및 특허권 보호각서 교환(1976. 2), 외교관 및 관용여권 소지자의 사증면제 각서 교환(1976.11), 사회보장협정(1977.5), 수산협력 협정(1977.5), 항공협정(1998.10) ,투자보장협정(1998, 2006년 발효), 해운협정(1998년 11 가서명), 주택도시협력 양해각서(2000.5), 이중과세방지협정(2002.1. 가서명, 2006.7.6 서명) 등 협정을 체결하였다. 1988년 6월에는 이란 내 한국의 건설현장을 이라크가 폭격하여 한국인 노동자 13명이 사망하고 37명이 부상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지만, 계속 순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2005년 기준 대한(對韓)수입액은 21.4억달러, 대한수출액은 35.4억 달러로서 주요 수출품은 원유·액화석유가스(LPG)·석유화학·농수산물 등이며, 이 가운데 원유가 90%를 차지한다. 수입품은 자동차·선박·전자전기·섬유 철강 등이다.
※ 위의 내용은 주이란 대한민국대사관, 두산백과, 위키백과 등에서 얻은 정보에 기반함
바깥고리
연계 정보
관계 | 대상 문서 |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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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s | 교육제도:이란 | 이란 교육과정, 2014년 조사 보고 |
uses | 교과서목록:이란 | 이란 사회과 교과서 총목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