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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 아라비아 왕국 (Kingdom of Saudi Arabia) | |
인구 | 28,160,273명 (2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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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적 | 2,149,690.0㎢ |
언어 | 아랍어 |
정부 | 군주제 |
통화 | 사우디 리얄 (SR) |
GDP | 전체 $$9,217억 / 1인당 $31,275 |
HDI | 0.782 (57위, 2012년 조사) |
국제전화 | +966 |
도메인 | .sa |
이름 및 위치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어: السعودية 앗수디야/앗사우디야; as-Su‘ūdiyyah 또는 as-Sa‘ūdiyyah)는 중동에 있는 전제군주국이다. 정식 국명은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영어: Kingdom of Saudi Arabia)이다. 아라비아 반도 대부분을 차지하는 서남아시아에서 가장 큰 아랍국가이며, 북아프리카를 포함한 전체 아랍권 국가들 중에서는 알제리에 이어 두번째로 면적이 넓다. 북쪽으로 이라크와 요르단, 북동쪽으로 쿠웨이트, 동쪽으로 카타르, 바레인, 아랍에미리트와 국경을 접하고, 남쪽에는 예멘과 오만이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인구의 약 30%는 외국계 이민자들로 이민자의 대부분은 무슬림이며,이민자 중 절반 이상이 비아랍권(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 국가 출신이다.
간략역사
사우디아라비아는 이슬람교의 역사적 발생지이다. 근대 이전에는 내부·외부의 지배자들이 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끊임없는 각축전을 벌였다. 1517년 오스만 제국이 반도의 대부분에 대한 명목상의 통치권을 획득했다. 18~19세기에는 와하비로 알려진 이슬람 개혁집단이 사우드 왕조와 연합하여 중앙 아라비아 대부분의 지배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후 그들은 정치적 쇠퇴를 겪었으나, 1904년까지 영토의 대부분을 회복했다. 영국이 사우디를 보호국으로 삼았으나(1915~27), 후에 헤자즈와 나지드 왕국의 독립과 주권을 인정했다. 두 왕국은 1932년에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으로 통합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우디 왕국의 통치자들은 중동의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을 지지하고 미국과 긴밀한 동맹관계를 유지했다. 2000년에 사우디아라비아와 예멘은 오랜 국경 분쟁을 타결했다.
지리
사우디아라비아의 중앙고원은 세로로 좁다랗게 내려간 홍해 해안평야를 끼고 가파르게 솟아 장엄한 급경사면을 이룬다(→ 티하마). 이 해안 산악지대는 북부 헤자즈(알히자즈) 지방에서 고도 1,500m에 이르며 남부 아시르 지방에서는 해발고도 3,000m를 넘는다. 고원은 북동쪽으로 내리막을 이루는데 이중 용암과 자갈로 된 고원 황무지는 아치형을 이루는 광대한 몇몇 사막지대로 통합된다. 면적이 약 5만 7,000㎢인 북부의 나푸드 사막과 약 65만㎢의 면적을 가진 남부의 룹알할리(영어 이름은 Empty Quater) 대사막은 세계 최대의 연속 사막지대이다. 세로로 활 모양으로 생긴 여러 개의 산등성이들, 즉 케스타들과 다나 사막(1,450㎢)이 남부와 북부의 사막들을 연결한다. 전체적인 지형은 사막으로부터 동쪽으로 서서히 경사져 내려가다가 페르시아 만 연안의 알하사 지방에 이르러 저지 늪지대와 솔트 플랫을 형성한다. 페르시아 만의 해안선은 블규칙적이고 연안해역은 수심이 대단히 얕다. 1년 내내 끊이지 않고 흐르는 영구천은 전혀 없다. 전반적인 담수 공급은 지하수를 통해 이루어지고 얼마간은 오아시스와 같은 지표수로 이루어진다. 그밖에 수많은 내륙의 와디(강우기에만 물이 흐르는 사막지대의 특징적인 건곡)와, 지하 깊숙이 있는 대수층의 물이 투수되면서 채워지는 지하수를 끌어낸 우물에서 급수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경작가능한 토지의 0.5%가 관개에 의존한다. 토양은 매우 척박해서 토양을 형성한 기반암의 구조를 잘 나타내준다. 광대한 지역이 크기가 고르지 않은 자갈들로 뒤덮여 있다. 와디와 강 유역과 오아시스 등지에서는 퇴적층이 발견된다. 사우디아라비아는 거의 전지역이 하나의 사막으로서 뚜렷한 3개의 기후지대로 나뉜다. 첫째 지대는 예멘 국경 가까이에 있는 아시르 지방으로, 연평균강우량 480㎜ 정도이며 습윤·온화한 기온을 나타낸다. 지역의 분포는 그리 넓지 않다. 둘째 지대는 서부 산악지대를 따라 초원지대가 펼쳐져 있는데 북부는 동서너비가 160km 미만이지만 메카 부근에서는 그 너비가 거의 480km에 이른다. 셋째 지대는 전국토의 95% 이상을 차지하는 건조한 불모 사막지대와 반건조 사막지대이다. 룹알할리 사막에서는 10년 동안 비가 전혀 내리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다. 전국 기온은 겨울철이 14~23℃로서 상대적으로 시원한 편이고, 여름은 지독한 더위를 보여 6∼8월에는 38℃가 넘으며 종종 54℃까지 올라가기도 한다. 습도는 해안지대가 특히 높고 그 이외의 지역은 낮은 편이다. 식생으로는 유목민들이 사육하는 양과 염소의 사료가 되는 약간의 목초와 관목들이 있다. 도처에서 발견되는 대추야자는 이 나라에 가장 널리 퍼져 있는 자생 나무이다. 야생동물로는 늑대·하이에나·여우 등이 있으며 가젤·표범·산양 등 몸집이 좀더 큰 동물들도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매장량은 세계 총매장량의 약 1/4을 차지하는 것으로 추산되며, 천연 가스 매장량은 세계 총매장량의 약 4%를 차지한다. 보크사이트·금·구리·납 등 고품위철광석도 매장되어 있다.
사회
주민
사우디아라비아의 인구 구성은 아랍인이 단연 우세하다. 홍해 연안지방에 셈족과 아프리카 흑인 사이의 혼혈인 검은 피부의 주민들이 많이 살며, 동부지방에서는 이란·파키스탄·인도 등과 인종적인 교류가 있었음이 명확히 드러난다. 수많은 외국 근로자들이 거주하고 있다. 이슬람교의 발상지로서 거의 전인구가 수니파 이슬람교도이며 나머지는 이슬람교 제2의 종파인 시아파교도이다. 석유산업 근로자들을 비롯한 외국 사람들만이 그리스도교도이다. 공용어는 아랍어이고, 영어도 널리 쓰이고 있는데, 특히 석유산업이 집중되어 있는 동부지방에서 많이 사용된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비교적 높은 출생률을 기록하고 있으며 인구의 약 45%가 15세 미만이다. 광대한 사막들이 사람들의 거주지 사이에 놓여 있지만, 전체 인구의 약 3/4이 도시지역에 거주한다.
문화
비교적 자유로운 아랍 여러 나라의 영향이 여과되어 들어오고 외국 유학생들이 여러 서구적인 문화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사우디아라비아의 문화는 엄격한 이슬람교 율법의 지배를 받고 있다. 시, 정형적인 산문, 웅변 등이 이슬람 시대 이전부터 지금까지 최고의 예술로 여겨지고 있으며 많은 시인과 순회 이야기꾼이 존재한다. 19세기말 연대기의 편자인 우스만 이븐 비슈르가 최고의 작가로 꼽히며, 유목민들과 문맹인 부락민들이 여전히 민속문학의 본류를 잇고 있으나 오늘날에는 신문과 정기 간행물에 문학작품들이 실리기도 한다. 엄격한 와하브 법전에 의해 대중 앞에서의 공연은 금지되어 있지만 음악과 춤은 항상 사우디인들의 일상생활 속에 일부분으로 자리잡고 있다. 시각예술은 기하학적인 디자인, 꽃 문양이나 추상적 디자인, 장식서체 등에 한정되어 있다.
종교
사우디아라비아는 종교의 자유가 없는 나라라고 불리거나 혹은 종교의 자유가 다른 국가보다 덜 보장되는 것으로 알려진 아랍 국가 가운데 하나로, 국민의 절대 다수 종교는 이슬람교이다. 단,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다고 알려진 다른 아랍 국가 중에서도 그러듯 이 나라에서도 또한 개인이 국가 세금을 더 내면 해당 개인은 국가에서 지정한 이슬람교 이외의 종교를 믿을 수 있게 해준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이슬람교의 발상지이고 수니파 이슬람교가 국교이며 건국 이념에서도 "알라 외에는 신이 없으며, 무함마드는 그의 사도이다."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다른 종교는 존재할 수 없다. 라마단(禁食)이 엄격하게 지켜지며(이 때문에 1998년 아시안 게임에 불참하였다), 공항에서 술, 음란 잡지 등은 적발시 압수조치될 정도로 엄격하다. 종교 때문에 야구 등 시간 제한이 없는 스포츠보다는 축구 등 시간 제한이 있는 스포츠가 발달하였다. 종파 별로는 전체 인구의 85 ~ 90%가 수니파이며, 10 ~ 15%는 시아파에 속하는데,[1] 시아파는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로부터 차별을 받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무슬림이나 무슬림 이외의 사람들이 이슬람교 이외의 종교를 인정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며, 내국인과 외국인들의 이슬람교 이외의 종교 집회가 금지된다. 사우디 국민은 이슬람교에서 다른 종교로 개종하면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에 따라서 배교자로 참수형을 당하거나 국외로 추방당하는 것 둘 중에 하나를 골라야만 한다. 사우디아라비아는 태어난 직후부터 남녀가 부동석일 정도로 남녀구별이 엄격하여, 초등학교부터 남녀 공학 학교가 단 하나도 없는 몇 안 되는 나라이다. 교과목에도 꾸란이 포함되어 있다. 강간과 성폭력은 살인과 같은 중대 범죄로 간주되며, 실제로 사우디 법원은 성폭행을 저지른 남성을 참수한 바 있다. 이 나라에 거주하는 외국인이라도 성폭력을 저지르면 참수된다. 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의 여성들은 심한 차별을 받고 있는데, 사우디는 여성의 운전을 금지하는 법은 없으나, 여성에게는 운전 면허를 발급해 주지 않고 있다. 또, 다리를 드러내면 안 되기 때문에 치마도 긴 치마만 입으며, 8살 생일이 지난 여자는 아바야(검은 천으로 만든 겉옷)을 둘러야 한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종교적인 이유로 여아 살해 및 여자를 대상으로 하는 명예 살인이 합법화되기 때문에 남녀 성비는 강원도 화천군 수준인 1.212에 달한다.
경제
사우디아라비아는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이 함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혼합경제체제의 개발도상국이다. 석유의 생산·수출이 경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1970년부터 실시된 5개년계획으로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되었으며, 국민총생산(GNP)이 인구증가 속도보다 빠르게 증가하지는 않지만 1인당 GNP는 여러 선진국들의 GNP와 비슷한 수준이다. 농업은 전체 노동력의 약 1/7을 고용하고 있으며 GNP의 약 5%를 차지한다. 농업생산은 물의 부족, 토양 염분의 증가, 소규모 농지 등으로 인해 제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1980년대에 정부는 농민들을 위한 광범위한 대출 지원계획을 마련했으며 지하수를 개발하고 농촌지역의 경제기반을 개선할 자금을 조성했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여러 가지 품목들 가운데 밀·달걀·우유 등의 품목을 자급자족할 수 있게 되었다. 주요농산물은 밀·수수·보리·기장·알팔파 등이다. 그러나 아직도 식품 공급의 약 70%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최대 산유국으로서 석유 생산량이 세계에서 3번째로 크며 세계 총생산량의 약 1/12을 생산한다. 1970년대와 1980년대초에 걸쳐 정부는 사우디아라비아 석유 생산 전체를 담당하는 아람코(Aramco : Arabian American Oil Company)를 점차 인수하여 완전한 소유권을 획득한 후 페트로민(Petromin : General Petroleum and Mineral Organization)을 통해 관리하고 있다. 페트로민은 또한 석유의 개발·정제·판매 사업을 담당한다. 아람코에 의해 상당량의 천연 가스가 생산되며 그밖에 석회석·대리석·석고·점토·암염 등의 광물도 개발중이다. 공업 부문은 석유를 포함해서 GNP의 약 1/4을 차지하며 총노동력의 약 1/10을 고용한다. 사우디 공업화 계획은 1970년대 중반 정유 및 석유가공 공장의 건설을 기초로 시작되었다. 정부는 외국 회사와 합동으로 주요사업들에 과감한 투자를 해나갔다. 주요계획사업으로 석유화학제품·비료·압연강철 등을 생산하는 공장들이 건설되었으며, 정부는 제빵·인쇄업·가구제조업 같은 소규모 공업을 육성하기 위해 사기업을 장려했다. 서비스업은 GNP의 약 2/5를 담당하고 있지만 고용 인구는 총노동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전기는 국영 전력회사에서 운영하는 4개의 지방 배전망에 의해 공급되며 전적으로 석유에 의해 발전된다. 통상적으로 정부 총세입의 약 2/3가 석유판매수입으로 충당되는데, 이것은 세출보다 다소 낮은 수준이다. 국방비와 치안경비가 예산의 최대 지출항목이다. 사우디아라비아 화폐국이 통화와 막대한 해외자산을 관리한다. 일반은행의 절반 이상이 사우디가 주축을 이루는 과감한 합작투자를 하고 있으며 여러 가지 해외업무를 담당하는 2개의 머천트 뱅크가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주요석유시장은 미국·일본·싱가포르·네덜란드·프랑스 등이다. 1981년 페트로민은 페르시아 만에서 홍해까지 아라비아 횡단 원유송유관을 완공함으로써 서유럽과 북아메리카까지의 수출로를 3,570km나 단축시켰다. 수입 품목으로는 다양한 제조품과 식품 등이 있으며 주요 수입대상국은 미국·일본·독일·영국·이탈리아 등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외교
사우디아라비아 왕가의 외교 정책은 기본적으로 친미이다. 1991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촉발된 걸프 전쟁 당시 미군의 이라크 침공의 전초 기지로써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미국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당시 사우디아라비아에 파견될 미군과 미 군사 시설 허용 여부를 둘러싼 사우디아라비아 왕정과 알 카에다 지도부 사이의 불협화음은 전통적인 협력 관계를 깨트리는 계기가 되었고 이는 911테러의 보다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중동원유 생산계획과 통제 권한은 미국에 협력했던 나라들이 쥐고 있다. 1962년 대한민국과 단독으로 수교하였다. 1970~80년대에는 한국의 근로자들이 사우디아라비아에 파견되었는데, 이들이 벌어온 외화는 한국 경제성장의 밑거름이 되기도 하였다. 9·11 테러 이래로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미국은 전세계에 걸쳐 원유 탐사작업과 석유산업의 투자를 늘렸다. 미국에서는 전제주의 및 신정정치 속성의 사우디아라비아 체제를 용인하는 사람들의 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역으로 사우디아라비아의 종교계와 국민 가운데 상당수는 점점 더 자국에 진출하는 미국을 배척하고 미국이 행사하는 영향력을 거부했다.
한국과의 관계
1962년 10월 16일 한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한 이후 계속 우호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다. 비동맹중립외교노선을 표방하고 있으나 실제적으로는 친서방정책을 펴고 있어 북한과의 수교는 고려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과는 경제기술협정(1974. 7)·문화협정(1975. 4)·항공협정(1975. 11) 등을 체결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1973년 12월 한국 민간기업들의 진출이 시작된 후 1970년대와 1980년대 전반기를 거치면서 한국의 해외건설 부문에서 가장 큰 규모의 시장으로 평가되어왔다. 그동안 한국업체들이 시공한 건축구조물로는 현대건설이 1976년 6월부터 3년 6개월 간에 걸친 공사 끝에 완성한 주베일 산업항을 비롯, 사우디아라비아 외교단지(1978. 9~1986. 10), 국방항공성건물(1980. 5~1986. 4) 등이 손꼽힌다. 이들 건설업체 외에도 대한무역진흥공사(KOTRA) 지부와 60여 개의 한국상사가 진출해 있다. 한국으로부터 철구조물·섬유·기계·철강·전자제품 등을 수입하며 석유를 수출한다.
※ 위의 내용은 주사우디아라비아대한민국대사관, 두산백과, 위키백과 등에서 얻은 정보에 기반함
바깥고리
연계 정보
관계 | 대상 문서 |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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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s | 교육제도:사우디아라비아 | 사우디아라비아 교육과정, 2016년 조사 보고 |
uses | 교과서목록:사우디아라비아 | 사우디아라비아 사회과 교과서 총목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