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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월 12일 (일) 22:55 기준 최신판

1. 목차

  • 1 장: 명예혁명(1688 ~ 1689)
  • 2 장: 미국혁명과 독립전쟁(1763 ~ 1783)
  • 3 장: 유럽의 외교(1814 ~ 1890) 30 ~ 68
    • 빈 회의
    • 유럽의 국제회의
    • 비스마르크 외교(1871 ~ 1890)
  • 4 장: 1차세계대전(1914 ~ 1918)
  • 5 장: 파리 강화 회의
  • 6 장: 국제연맹과 집단안전보장의 실패
  • 7 장: 2차세계대전(1939 ~ 1945)
  • 8 장: 냉전(1945 ~ 1990)
  • 9 장: 국제기구
    • 국제연합기구(UNO)
    • 영연방 239 ~ 248
    • 프랑스어 사용권 국가
  • 10 장: 아랍-이스라엘 분쟁
  • 11 장: 세계정치에서의 중국(1949 ~ 1990)_미국, 소련, 제3세계와의 관계

2. 한국 관련 내용

p. 186
일본은 지속되는 러시아의 팽창을 한국 내 일본의 우월권에 대한 위협으로 바라보았으며 힘으로 대응했다.

p. 193 : 한국전쟁(1950 ~ 1953)
긴장이 여전히 높은 유럽에서 냉전이 교착상태에 빠지고, 이후 냉전은 한국에서 “열전”으로 이동했다. 한국전쟁 말에 긴장은 완화되어 학자, 외교관, 정치인들이 냉전의 “해빙”을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p. 197 : 베를린 봉쇄의 중요성
베를린 봉쇄 이후 두 개의 독일국가 수립은 이후 다른 국가의 전례가 되었다. 예를 들면 중국, 베트남, 한국이 있으며 모두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지배하는 국가로 분단되었다.

pp. 198 ~ 201: 한국전쟁
-한국전쟁(1950 ~ 1953=) 1950년 6월 한국은 냉전의 전투지가 되었다. 1910년 이후로 일본이 한국을 지배했다. 그러나 1943년 루즈벨트, 처칠, 장제스의 카이로 선언은 한국의 독립을 약속했다. 1945년 일본이 소련군과 미군 모두에게 항복하는 사건이 한국의 통일을 앗아갔다. 한반도는 중앙선인 38도선을 경계로 분단되었다. 북부지역은 소련이, 남부지역은 미국이 점령했다. 이 분할점령은 임시조치였다. 그러나 한반도를 통일하려는 지루한 회의가 실패로 돌아갔다. 이는 소련과 미국 모두 통일한국이 상대방 진영으로 넘어갈 가능성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양 초강대국은 이제 냉전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1947년 미국은 한반도 통일 문제를 유엔으로 가져갔고, 유엔은 선거를 통해 통일을 이루기 위해 국제연합한국임시위원단을 지명했다. 유엔은 1948년 4월 남한에서 실시된 선거를 감독했다. 소련과 북한은 위원회 참여를 거부했다. 남한에서 실시된 선거로 대한민국을 선포한 국회를 구성하였고 국수주의자인 70세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그의 권위는 38도선 이남에만 미쳤다. 소련은 김일성이 이끄는 공산주의 정권인 북한을 수립하는 것으로 보복했다. 소련과 미국은 한반도 북부와 남부에 독립적이지 않지만 한국인이 이끄는 정권을 수립한 후 각자의 점령군을 철수했다. 1950년 1월에 미 국무장관인 딘 애치슨은 한국이 미국군사방어선 영역 밖에 있다고 규정했다. 다시 말해서 공격받을시 한국은 미국의 지원에 의지할 수 없다는 뜻이다. 김일성의 북한정권은 양측 국회의 통합 또는 총선을 통해 한반도를 평화통일하자고 전면적인 선전전을 개시하여 이승만의 국내문제를 이용하려 시도했다. 동시에 남한을 침략할 비밀계획을 세우고 있는 듯 했다. 6월 25일 대규모 북한군이 한반도를 분단하고 있는 38도선을 넘어왔다. 한국전쟁이 시작되었다. 남한침략 이후 미국은 이 상황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로 가져갔다. 미국은 소련의 부재를 틈타 정전과 북한군의 38도선 이북으로 철수를 요구하는 다수의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트루먼은 도쿄에 있는 맥아더에게 남한에 물자를 보내라 명령했다. 그리고 미 7함대에게 중국과 대만 사이로 항해하라고 명령했다. [전쟁진행 과정] 북한 침략자가 첫 번째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을 무시하자, 트루먼은 6월 27일 미 공군과 해군 부대에 명령했다. 같은 날 안전보장이사회는 모든 회원국에게 남한에 지원을 제공할 것을 요구함으로써 유엔의 전쟁으로 만들었다. 결국 32개국이 결의안을 따랐다. 소련 대표단은 공산주의 중국이 유엔 회원국임을 거부한 것에 항의하며 1950년 1월 이후 유엔을 떠났다. 전쟁의 초기국면은 북한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북한은 남한을 휩쓸고 한반도의 동쪽 끝의 작은 지역을 제외하고 대부분을 점령했다. 그러나 9월에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는 인천에 해병대 합동 상륙작전으로 반격했다. 이 작전으로 남한의 수도인 서울을 함락했고(9월 25일) 남한의 공산주의자 통신망을 절단했으며 수천 명을 항복시켰다. 유엔군은 10월 7일 남한 전지역을 탈환했다. 유엔군의 반격이 북한으로 수행되어 중국과의 국경인 압록강에 이르렀다. 이는 한반도를 힘으로 재통일하려는 시도임이 명백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10월 26일 중국 “자원병” 20만 명의 공격을 유발하였고, 이들은 12월 15일 맥아더의 군대를 38도선 아래로 밀어내었다. 중국의 공격은 미연에 방지하려는 행동이었다. 중국은 1931년 일본이 한국을 통해 중국을 공격한 것을 잊지 않았다. 따라서 중국은 일본에 있는 새로운 미국 전력이 이런 행동을 반복하려 한다고 믿었다. 게다가 미국의 장제스 지원, 맥아더의 장제스 방문, 미국의 10월 7일 38도선 돌파와 압록강 접근, 장제스의 중국본토로 복귀 가능성 등 이 모든 것이 결합되어 마오쩌둥 정권의 경각심을 불렀고 1917년 혁명이후 실패로 끝난 러시아 내 반공산주의 개입과 유사한 반공산주의 군사작전을 미국이 의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중국은 선제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중국군은 1951년 1월 1일 두 번째 군사작전을 전개하여 유엔군을 서울 밖으로 밀어냈다. 유엔에서 중국은 침략자로 규정되었고 워싱턴에 맥아더는 전문을 보내 38도선이 다시 경계선으로 설정되는 것을 받아들이느니 차라리 중국을 공격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유엔군은 3월 13일 서울을 재탈환하고 38도선 바로 아래까지 남한을 회복했다. 맥아더는 이후 중국군 사령관에게 항복하거나 대량살상 폭격에 직면할 것임을 촉구하는 개인적 성명서를 발표할 기회를 가졌다. 맥아더의 방침은 유엔 원칙과 트루먼 행정부에게 지나치게 공격적으로 간주되었다. 중국을 붕괴시키려는 맥아더의 방침은 아마도 소련을 끌어들여 삼차세계대전을 촉발할 수 있었다. 두 초강대국은 한국의 상황을 국지전으로 유지되길 원했음에 주목해야 한다. 이를 고려하여 트루먼은 맥아더를 교체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하원 공화당 지도자에게 핵무기 사용을 포함한 가장 강력한 중국 공격 조치를 권고하는 서한을 보냈다. 그는 또한 한국은 전 세계 패권전쟁을 결정해야하는 중요한 지점이라고 말했다. 또한 “여기서 우리는 유럽 전쟁을 군대로 싸운다. 그러나 외교관은 말로 싸운다. 우리는 승리해야 한다. 승리의 대체물은 없다.”라고 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4월 11일 맥아더를 해임했다. 전투가 38도선 부근에서 교착상태에 빠지는 동안, 정전 회담이 시작되었으나 회담은 포로교환에 관한 의견충돌로 2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1953년 마침내 휴전협정이 판문점에서 조인되었다.

[한국전쟁의 결과] 비록 한국전쟁은 아시아에서 수행되었지만, 유럽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한국전쟁은 전후 유럽정권의 대내외 정책에 영향을 주었다.

[대량파괴] 1950년이 발발한 한국전쟁이 오래 지속되어 양측 모두에 대량 파괴로 이어졌다. 북한과 남한은 수많은 재산을 상실했다. 전쟁 결과 농경지, 공업, 교량, 주택까지 파괴되었다. 한국경제는 1953년까지 지속된 전쟁으로 완전히 황폐화되었다. 남북한 모두 자국 경제를 재건하는 커다란 문제에 직면하였다.

[유엔] 전쟁에 유엔이 개입하여 마침에 적대행위가 종결되었다. 이는 유엔을 세계평화유지와 세계평화을 이룩하는 기구로서 유엔의 위신을 높였다. 이는 미국이 주도한 회원국들에 의한 노력 덕분이다. 한국전쟁으로 이미 불편하던 미국과 중국의 관계의 긴장이 강화되었다. 이는 미국의 원조 하에 있는 한국 내 유엔군이 중국 국경으로 전쟁을 확대했다는 점으로 촉발되었다. 중국은 이런 미국의 태도를 맹렬이 비난했고, 긴장된 관계를 더욱 악화되었다.

[군사기구의 창설] 전쟁이후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 군사기구가 창설되었다. 예를 들면 남서아시아의 동남아시아 조약기구(SEATO)와 태평양안전보장조약(ANZUS)이 공산주의 침투에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창설되었다.

[미국 금융자원의 소모] 한국전쟁은 미국 금융자원에 추가요구를 부과했으며 동시에 냉전을 심화시켰다. 미국은 이 시점에 이전의 경제원조보다는 군사원조의 관점으로 서유럽을 바라보았다. 그러므로 마샬 원조는 경제적 힘보다는 군사적 힘에 밀접하게 관련되었다. 미국의 원조가 이제 군사력을 강화 확대하는 유럽국가의 행동과 약속을 조건으로 이루어졌다.

[소비재 생산 감소] 전쟁의 결과로 소비재 생산이 하락했다. 몇몇 나라는 소비재 생산을 군사무기 생산으로 전환했다. 이는 단순하게 전쟁기간 동안에 군사무기가 수익성 좋은 시장에 공급되었기 때문이다. 일본과 주요 서유럽 국가들의 주요 산업의 경우이다.

[해리 트루먼의 권좌에서 몰 미국의 해리 트루먼은 미국인과 국외자 양측 모두에게 대외정책이 너무 가혹하다고 비판받았다. 이런 점이 그의 몰락을 촉진했다. 이는 미국인들은 그의 대외정책은 미국이 쉽게 수많은 전쟁에 관여할 수 있다고 우려했기 때문이다.

[분단된 한반도]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이 조인되어 공식적으로 한국전쟁은 종결되었다. 한반도는 38도선을 경계로 영구히 분단되었다. 1953년 이후부터 남북한 모두 권위주의적 정권 하에 있다. 북한은 신격화된 통치자인 김일성의 하에 공산진영에 남았다. 이승만 하의 남한은 1960년에 자신을 종신대통령으로 생각한 박정희로 대치되어 1979년 10월까지 이어졌다.

[중무장한 남북한] 전쟁 이후 남북한은 초강대국에 의해 중무장하게 되었고, 마찰과 지속적인 충돌이 원천인 비무장지대로 분리되었다.

[냉전] 한국전쟁은 공산주의 중국을 냉전을 끌어들였고, 베트남전쟁의 초석이 되었다. 이 외에 1955년 바르샤바 조약을 촉진했다. 따라서 전 세계는 두 군사진영으로 분리되었다.

[인명손실] 한국전쟁은 한국을 불안정하고 황폐시켰다. 또한 오백 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같은 수의 사람이 집을 잃었다. 부상자는 더 많았다.

[유럽의 보수 정당이 더 강력해졌다.] 정치 영역에서 유럽의 보수정당이 전쟁의 결과 더 강력해졌다. 이는 특히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에서 명백하다. 유럽에 정치적 경제적 안정을 가져온 것은 보수주의 회복이었다. 1948년 이후로 보수 정당은 총선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이러한 경향은 한국전쟁 동안과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새로워진 미국의 방위공약] 한국전쟁으로 미국은 유럽 내 미국의 방위공약을 재개하였다. 미국 관리들은 NATO의 힘이 공산주의 진영에 비해 불충분하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미국은 그러므로 대서양 동맹의 적자를 메워주지 않기로 결정했다. 미국은 유럽의 나토 회원국에게 결손 적자를 메워주거나 서독이 재무장하여 NATO에 통합되는 지를 요구했다. 따라서 1955년 서독은 NATO에 가입했으며 프랑스의 항의에 상관없이 재무장이 허용되었다. 또한 미국은 일본의 재무장을 생각했다. 이는 1952년 전쟁이 아직 지속될 때 시작되었다. 이 모든 것이 한국전쟁의 영향을 받았다.

p. 207 : 데탕트
해빙이란 단어는 냉전기간에 특징지어졌고, 독일, 한국, 쿠바의 대치에서 초래된 동서 양진영 사이의 긴장완화를 말한다.

p. 220 : 표
8. 반기문 (이름) / 한국 (국가) / 2007년 ~ 현재 (재임기간)


p. 232 : 아시아
-한국전쟁- 1950년 6월 25일 공산주의자 소련의 지원을 받은 북한이 38도선을 넘어 미국의 지원을 받는 남한을 공격했다. 같은 날 안전보장이사회는 미국의 요구로 소집되어 남북한에게 적대행위를 중단하고 북한군의 철수를 요구했다. 1950년 6월 27일 안전보장이사회는 다시 소집되어 회원국에게 군사를 제공할 것을 요구했다. 이 군대는 북한군을 패퇴시키고 이전의 38도선 경계를 다시 만들기 위해 한국 편에 서서 싸웠다. 유엔이 한국에서 행동이 실패냐 성공이냐의 판단은 전쟁기간 동안 유엔의 목표에서 기인한다. 유엔의 목표는 명백하게 6월 27일 안전보장이사회의 두 번째 결의안에 명확하게 드러난다. 목적은 침략자를 축출하고 국제평화를 회복하는 것이다. 유엔은 공산주의를 봉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국에서 국제적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싸웠다. 유엔의 행동은 기구가 창설될 때 초기 목표가 된 국제평화의 보존을 위한 유엔의 탐구에 동기로서 형성되었다. 한국전쟁의 결과는 대체적으로 유엔의 승리이다.

p. 283 : 군사적 힘
한국전쟁 동안 북한을 지원한 중국의 개입은 미국의 목적을 좌절시켰고, 1953년 판문점 평화조약 서명 재촉했다.

p. 285 : 긴장과 적대 관계
한국전쟁에서 중국의 역할은 긴장과 적대 관계에 기여했다. 중국과 미국의 긴장은 특히 1950년 한국전쟁에서 발생했다. 중국 지원병 약 삼십만 명이 전쟁에 참여했다. 중국의 행동으로 전쟁의 흐름을 바꾸었으며 한국은 중국과 미국의 대치 전선이 되었다. 미국 극동 사령관은 한국 내 유엔군 사령관을 겸했다. 맥아더 장국은 중국으로 전면적으로 침입하여 중국의 도발로 명명한 것을 저지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 제안은 거부되고 그는 1951년 사령관에서 해임되었다.

p. 291
한국전쟁의 발발 이후 소련과 중국 모두 공산주의를 주입시키는데 협력했다. 중국의 제4 야전군은 소련의 지원 하에 한국에 진군했다. 한국전쟁 말에 소련은 대련항에서 철수했고 중국에 항구 시설물을 인계하기로 약속했다.

3. 간략 분석

이 교과서는 영어권 고등학교 및 대학교 과정의 역사교과서로 세계의 근세, 근현대사를 다루고 있다. 한국에 관해서는 한국전쟁이 비교적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4. 검토 의견

페이지 한국 관련 기술 내용 검토 의견 개선 과제 코드
p. 201 [분단된 한반도]
북한은 신격화된 통치자인 김일성 하에 공산진영에 남았다. 이승만 하의 남한은 1960년 자신을 종신대통령으로 생각한 박정희로 대체되어 1979년 10월까지 이어졌다.
박정희대통령은 1963년에서 1979년까지 집권하였으므로 "1960년""1963년"으로 수정해야 하며, "종신대통령으로 생각한"이라는 표현은 삭제되어야 함 C3
p. 201 위와 동일 서술내용 분단 이후 남한과 북한의 통치자에 대해서만 단순하게 언급하고 있지만, 남한의 경우 역경을 딛고 경제성장을 이룬 부분에 관해서도 추가적으로 서술될 필요가 있음 D1
- 개선 과제 코드 -
개선 과제 유형
A: 동해·독도 표기 수정 필요 B: 단순표기 C: 내용 수정 필요 D: 내용 증·신설 필요 E: 기타
A1: 동해 표기 A2: 독도 표기 C1: 통계 C2: 과거 사실 C3: 객관적 기술 D1: 증설 필요 D2: 신설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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