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중공업화 정책과 1970년대 한국의 경제
1972년 시작된 제 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박정희 정부에게 삼권분립을 넘어서는 초헌법적인 권력과 종신집권 가능성을 열어준 같은 해 10월의 유신개헌과 함께 시작됩니다. 경제적으로 성장을 지속하던 70년대 초반, 수출 드라이브 정책의 성공으로 자신감을 얻은 한국 정부는 경공업부문에서 한국 수출품의 경쟁력이 장기적으로 약화될 것을 예측하고 수출을 촉진하고 중간재와 자본재의 수입대체산업을 육성할 수 있는 새로운 전략으로 중화학공업을 선정, 제3차 (1972~1976)와 4차 (1977~1981) 경제개발 5개년 계획기간동안 조선, 자동차, 유화산업 등을 육성하기 위한 대규모 투자를 감행합니다. 유신 개헌 직후인 1973년 1월 중화학공업화 선언과 함께 제시된 1980년까지 수출 100억달러 달성,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 달성이라는 목표는 1977년 그 목표를 달성하기까지 1970년대를 규정하는 슬로건이 되고 정부는 거의 전시동원체제에 가까운 전격적인 형태로 중공업화정책을 추진합니다. 이런 공격적인 산업정책은 정부가 단순히 돈을 빌려주는 은행가의 역할을 넘어서서 어떤 산업, 어떤 기술에 투자를 해야할지를 결정하는 기업가의 역할까지 수행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중화학공업정책은 그 공과에 대한 합의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은 논쟁적인 정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기간동안 한국경제는 노동집약적 산업 중심의 경공업체제에서 탈피해서 중화학공업이 수출의 주력이 되는 보다 진화된 산업체제로 급속도로 이전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급성장한 철강, 전자, 자동차, 석유화학 등의 산업들과 기업들 –현대, 기아자동차, 대우 조선, POSCO 등 -은 이후 한국경제의 장기적인 성장동력을 제공하게 됩니다.
하지만, 당시로서는 엄청난 규모의 투자로 막대한 돈이 시중에 풀렸고 제 1차 오일 쇼크에 뒤이은 중동 건설붐으로 외화가 유입되면서 물가는 지속적으로 상승했습니다. 그리고 중화학공업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해외 차입이 지속적으로 증가하면서, 경상수지가 지속적으로 적자를 기록했고 총 외채도 꾸준히 증가해서 1980년에는 외채가 $250억 달러, 당시 한국 GDP의 40%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가 됩니다. (Collins and Park, 1989) 국내적으로도, 강남개발을 시작으로 부동산 투기열풍이 불면서 경제적인 불안정이 지속됩니다. 중화학공업정책이 막바지에 접어든 시기에 발생한 1979년의 2차 오일쇼크는 세계적인 경기 침체을 유발하면서 중화학공업에 큰 타격을 주었고 70년대 중반 공격적인 투자로 생산된 설비들이 유휴설비로 전락하면서 참여한 기업들의 채산성이 급격히 악화됩니다. 이로 인해 정부의 지휘에 따라 이들 산업에 투자했던 금융기관들은 대규모 부실채권을 떠안게 되는데, 여기에다 기록적인 흉년, 박정희 암살과 그에 따른 정치적 불확실성이 더해지면서, 1980년 한국 경제는 1957년 이후 처음으로 GDP가 2.7 퍼센트 감소하는 불황에 빠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