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과 레이건의 2차임기
3과 레이건의 2차 임기
학습목표
- 미국은 1980년대에 어떻게 애국심의 회복을 경험했는가?
- 레이건의 임내 동안 지속된 사회적인 주요 논쟁은 무엇이었는가?
- 경제는 1980년대 동안 어떻게 변화했는가?
- 레이건의 불간섭 스타일은 어떤 문제들을 낳았는가?
- 레이건 시대의 유산은 무엇이었는가?
요점
1984년 재선에 성공한 후 레이건은 지속적으로 경제와 사회문제에 있어 보수적인 정책을 지속했다. 국내문제와 해외 문제에 있어서 정부는 중요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심각한 실수도 있었다.
핵심용어
- AIDS
- 산디니스타
- 콘트라
- 이란-콘트라 사건
- INF조약
– 특정계층에 대한 재정지원
학습주안점
- 주제를 파악하기: 이번 과를 학습하면서 레이건 재임 시의 성과와 중요한 사건들로 아래 표를 채우시오.
배경
1984년 재선 운동을 하면서 레이건 대통령은 유권자들에게 4년 전보다 지금이 더 나은가 물었다. 청중이 그렇다고 외치자 그는 말했다. “지금까지 본 것은 (앞으로 올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미국의 아침’을 보여주는 그의 선거운동 광고는 새로운 낙관론의 시대를 예고했다.
레이건의 상대후보는 카터 행정부에서 부통령을 지낸 월터 먼데일(Walter Mondale)이었고 그의 런닝메이트는 제럴딘 페라로(Geraldine Ferraro)로서 그녀는 양당의 대통령 선거 후보 티켓에 오른 미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이었다. 비교적 호전된 경제와 그의 개인적 인기에 힘입어 레이건 대통령은 대승을 거두었다. 레이건은 총투표의 59퍼센트를 얻고 수도 워싱턴과 먼데일의 고향 미네소타주를 제외한 48주 모두에서 선거인단 표를 가져갔다. 이는 사상 두 번째로 큰 1위와 2위 간의 선거인단 표차였다.
애국심의 회복
레이건은 그가 젊었을 때 느꼈던 국가에 대한 공동체 의식을 회복하고 미국을 강하게 만들었던 사람들의 덕성을 되찾기 원했다. 베트남전쟁 이래 미국은 여러 해 동안 사회적 소용돌이 속에 지내왔는데 1980년대는 애국심을 되살릴 몇 가지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1984년의 하계올림픽이 반세기만에 처음으로 미국의 로스앤젤레스에서 다시 개최되었다. 전 세계 수억 인구에 TV로 중계된 개막식 장면은 애국적인 축제였다. 소련과 동독을 포함한 일부 공산국가가 이 대회를 보이콧했는데 이는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항의하여 모스크바 올림픽에 참가하지 않은데 대한 보복이었다. 그 결과 미국은 유례없이 많은 수의 메달을 획득하였다.
- 사진 [먼데일과 페라로의 유세장면]역사 속의 한 장면: 제랄딘 페라로는 주요 정당으로서는 처음으로 월터 먼데일의 부통령 후보가 됨으로 새로운 역사를 만들었다.
- 결론을 내리기: 왜 레이건은 월터 먼데일을 쉽게 패배시켰는가?
2년 뒤 1986년에는 뉴욕항에 세워진 자유의 여신상 100주년을 기념했다. 미국에 들어오는 많은 이민자들을 맞아준 이 기념물은 전 세계인에게 자유의 상징이 되었다.
그런데 긴 예복을 입은 이 구리로 된 여신상은 한 세기가 지나는 동안 부식되있었다. 대대적인 수리를 마치고 미국은 자유의 여신상 백주년 기념행사를 화려하게 치렀다.
그 이듬해 미국은 헌법제정 200주년을 기념했다. 정부와 민간단체들이 강연과 연구발표회와 이 나라를 강하게 만든 합중국헌법의 특성을 논의하는 집회들을 열었다. 이러한 행사들을 통해 국민들은 정부의 견제와 균형 그리고 권력분립 같은 튼튼한 원칙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되었다.
계속되는 사회적 논쟁
레이건 대통령의 당선에 이르는 동안 보수주의자들은 사회적, 경제적 문제들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에 대중의 지지를 모았다. 1980년대의 보수주의 정부정책으로 사회적 이슈들에 관한 논쟁은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민권문제
연방정부의 투표권 확대 공약에 따라 수십 년간 투표하지 못했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투표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들 새로운 유권자들 덕택에 지역이나 주, 연방단위의 공직에 점점 더 많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선출되었다. 1983년에 노스캐롤라이나주의 샬롯트, 필라델피아, 시카고가 사상 처음으로 흑인 시장을 뽑았다. 바로 하비 간트(Harvey Gantt), 윌슨 구드(Wilson Goode), 해롤드 워싱튼(Harold Washington)이다. 1960년대와 70년대에 클리블랜드, 로스앤젤레스, 디트로이트 그리고 애틀란타가 이미 흑인 시장을 선출한 바 있다. 1989년에 뉴욕 시민들은 미국에서 가장 인구 많은 도시 시장으로 흑인인 데이빗 딘킨스(David Dinkins)를 뽑았다.
1980년 모두 합해 4,890명이던 흑인 선출직 공무원의 숫자가 10년 뒤 7,335명으로 늘었다. 이들 중 대다수가 남동부 지역에서 나왔다.
- 사진 [연설을 하는 제시 잭슨]
민권운동가 제시 잭슨은 1980년대 중반 레이건 대통령의 사회정책을 비판하고 유권자 등록을 장려하기 위해 전국을 순회했다.
- 1차 자료 비교하기: 민권운동의 유산
[수십년의 민권운동 후 미국인은 진보가 이루어졌는지에 대해 의견이 갈렸다.
- 본질적으로 진보했다.“민권운동 전에는 흑인과 백인 간에는 광범위한 분리가 있었다. 이제는 그렇지 않다. 흑인들도 자기 소리를 낼수 있게 되옸고 흑인과 백인 사이에 우정이 형성되고 있다. 인종적 상황은 이전보다 더 건전해졌다.” - 에일린 바르트(Eileen Barth), 은퇴한 사회복지사
- 진보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이 나라는 마틴 루터 킹과 로버트 케네디의 시절보다 더 분리되어 있다. 마틴 루터 킹과 로버트 케네디는 법과 정부에 의한 분리와 차별과 싸웠고 그것은 이미 변화였다. 그러나 여전히 북부의 도시에서도 더 많은 흑인들이 분리된 공동체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는 통합된 사회를 원했던 것이지 공식적인 인종주의를 끝내자는 것은 아니었다.”- 앤토니 루이스(Anthony Lewis)]
1983년 레이건 대통령은 마틴 루터 킹 2세 목사의 탄생일을 국경일로 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이같은 상징적 승리에 불구하고 민권 투쟁은 증폭되어 갔고 비판자들은 많은 연방정부정책들이 주정부와 지방정부의 권한을 짓밟고 있다고 항의했다. 레이건은 1965년 제정 투표권법의 효력연장을 저지하려 했다가 비판이 거세지자 물러섰다. [878] 그는 민권운동에 미온적인 인사들로 연방판사를 임명했다. 행정부는 또한 소수자 우대 정책(Affirmative Action)을 해제했다.
여성운동
여성들이 과거에는 허용되지 않던 직장이나 활동기회를 갖게 되자 여성운동에 대한 반발이 일어났다. 이러한 반작용이 극명하게 나타난 것은 1982년에 제안된 평등권 헌법개정이 각 주의회의 충분한 동의를 얻지 못해 무산된 때였다.
낙태반대 단체들은 1973년 로우 대 웨이드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로 인정된 낙태할 권리 폐지를 목표로 삼아 나섰다. 반대자들은 연방정부의 빈곤층에 대한 낙태비용 보조를 저지하려고 운동을 벌였다.
성적 지향문제
동성애자 권리 운동도 유사하게 사회여론의 양분을 불러왔다. 후천성면역결핍증(acquired immuno-deficiency syndrome, AIDS)의 확산이 동성애 반대운동을 부추겼다. 대부분의 AIDS 환자들은 정맥주사기 사용자들과 동성애 남자들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오염된 혈액의 수혈로 감염되었다. 1980년대 말에 이르러 AIDS 치료와 약 개발에 엄청난 비용이 들게 되자 사람들은 경악했다. 많은 사람들은 정부가 여러 가지 예방책에 대해 논쟁의 여지가 있는 정보를 주는 것보다는 차라리 성적 절제가 최선의 방도임을 알리는데 주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에이즈가 사회에 널리 퍼져나가자 동성애권리에 대한 반대 또한 거세졌다.
대법원의 보수파
많은 사회문제들이 사법기관에 맡겨졌는데 이때 법원은 그 분위기가 바뀌고 있었다. 레이건 대통령의 지명을 받은 연방 판사들은 상당한 보수주의 경향을 보였다. 1981년 대통령은 아리조나 출신 샌드라 데이 오코너(Sandra Day O’Connor) 판사를 미국역사상 최초로 여성 대법원 판사로 지명했다. 1986년에는 또 한 사람의 보수주의자인 앤토닌 스칼리아(Antonin Scalia)를 대법원으로 보내고 보수파 판사 윌리엄 렌키스트(William Rehnquist)를 대법원장에 임명했다.
오코너, 스칼리아, 렌키스트 세 사람은 상원의 인준을 받았으나 네 번째로 지명된 보수파 판사이며 법학교수인 로버트 보크(Rober Bork)는 거부되었다. 1986년 선거에서 민주당이 상원의 다수의석을 점했고 대부분의 민주당 상원의원은 레이건의 대법원 보수화 목표에 동조하지 않았다. 진보단체들은 1987년 연대하여 상원에 로비를 벌여 보크 임명을 저지한 것이다. 결국 상원의 인준을 얻은 앤소니 케네디(Anthony Kennedy) 판사는 중도보수파였고 1988년에 취임했다.
호전되는 경제
1982년의 불경기로부터 여러 분야에서 경기가 되살아나는 반면 다른 쪽에서는 회복이 더디거나 아예 나아지는 소식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번영은 전국적으로 고르게 나타나지 않았다.
- 사진 [낙태 문제에 대한 시위대가 함께 모여 있는 사진]
역사 속의 한 장면: 선택옹호 진영과 생명옹호 진영의 활동가들이 이 대회에서 함께 모였다.
- 적절성을 결정하기: 레이건은 대통령으로서 생명옹호 조항을 어떻게 진전시켰는가?
- 미국인의 일생
- 샌드라 데이 오코너(1930년 생)
[텍사스주 엘파소 출신의 산드라 데이는 스탠포드대학 로스쿨을 3등으로 졸업했지만 여성이었기 때문에 개인 법률회사에 취업할 수 없었다. 그녀는 카운티 정부의 변호사로 일했고 아리조나주에 개인 사무실을 열었다. 육아로 휴직한 후 다시 복귀하여 다양한 역할을 맡았는데 법무부 차관보, 주 상원의원, 고등법원 판사 등을 역임했고 레이건에 의해 대법관에 임명되었다.]
농촌의 위기
미국 농민은 미국인이 먹을 양보다 더 많이 생산하여 나머지를 해외에 수출해왔는데 1980년대에 와서 공급과잉과 가격하락을 겪게 되었다. 여러가지 원인으로 해외수요가 감소하고 공급은 수요를 초과했다. 밀 가격은 1980년에 1부쉘 당 3.91 달러에서 1984년에 3.39 달러, 1986년에 2.42 달러로 떨어졌고 1980년 3.11 달러이던 옥수수도 6년 후에는 그 반값이 되었다.
가격이 좋았을 때 농기구도 사고 땅도 사느라고 빚을 진 농민들은 가격하락에 큰 타격을 입었다. 불과 몇 년 전에 닉슨과 포드 행정부의 농무장관 얼 부츠(Earl Butz)는 농민들에게 “경계에서 경계까지” 작물을 심어 창고를 가득 채우라고 독려했었다. 이제 빚을 갚지 못하는 농민들은 파산으로 땅을 빼앗길 지경에 이르렀다.
가족단위 농장주들의 곤경은 대중의 동정을 불러일으켰고 농업지대 출신 의원들은 워싱턴에서 이들을 구제할 방도를 모색했다. 연방정부는 가격지지제도와 융자를 계속하여 농민의 소득이 떨어지지 않도록 개입했다. 1987년에 이르기까지 농업부문 연방 지출은 한 해 200억 달러를 초과했고 이는 미국 총 농가소득의 30퍼센트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1980년대 정부 보조로 많은 농민이 파산을 면했으나 이런 것은 돈만 많이 드는 일시적 조치였고 미국 농업의 근본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제조업의 전환
미국 고유의 여러 산업이 1980년대에 들어와 외국과의 경쟁 때문에 밀려나게 되었고 1981-82의 불경기로 실업과 폐업이 많아져서 이 때 고임금 직종에서 떠난 사람들은 경기가 살아나도 유사한 일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제철소 등 금속공업 종사자의 수는 1980년 12월에 1,140,000명이었는데 2년 후 814,000으로 줄었다. 1982년부터 경제가 급속도로 좋아졌지만 금속 노동자 수는 계속 내려가 1986년 12월 728,000이 되었다. 직물산업도 계속적으로 종사자 수가 줄었다.
이러한 사양화는 미국 역사상 경제가 제조업을 떠나는 과정을 보여준다. 대부분의 경우 노동자들은 다른 산업 분야에 가서 새 일을 하고 회사는 타국 기업에 대한 경쟁력을 강화하여 다시 일어섰다. 그러나 해고와 폐업의 규모가 커서 타격을 입은 노동자 개인이나 특정 공업지대의 도시들은 적응이 어려웠다. 이런 상황은 동북부 지역과 북부 중서부지역이 특히 심했다.
부의 불균형
미국의 부자들은 레이건 시대에 누구보다 더 번영을 구가했다. 포브스지가 선정한 400대 부자들의 순자산은 레이건 대통령 집권기간 동안 세배 가까이 늘었다. 정치평론가 케빈 필립스(Kevin Phillips)는 이 새로운 계급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표현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상층부에서 – 수천만 달러, 수억 달러, 5억 달러, 10억 달러짜리 부자들 가운데에서 – 미국 부의 치명적인 집중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백만장자도 흔해져서 그 수가 1989년에 150만에 이르렀다.” - 정치 평론가 케빈 필립스, 뉴욕타임스 매거진 1990년 6월 24일 기사
- 심화학습: 기술
- 우주왕복선[이전의 아폴로 프로그램과는 다르게 1981년 이륙한 우주왕복선 컬럼비아호는 비행기의 형태를 가졌고 비행기처럼 착륙했고 여러 번 반복해서 미션을 수행할 수 있었다. 우주왕복선은 매우 유망한 계획으로 보였지만 1986년 챌린저호가 발사 2분후에 폭발하면서 안전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었다. 또 한번의 재앙이 2003년 2월 컬림비아호가 착륙을 앞두고 텍사스 주 상공에서 해체됨으로 일어났다. 사고에 대한 조사로 NASA 정책의 문제들이 밝혀졌지만 왕복우주선 계획은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
- 학습이해도 확인: 미국 경제는 1980년대에 어떤 변화를 겪었는가?
1980년대 말에 와서는 미국의 부는 제2차 세계대전 이래 가장 심하게 편재되어 있었다. 현 화폐가치로 따져 미국 가정 상위 5분의 1의 연 평균소득이 1980년의 93,225 달러에서 1989년에는 23 퍼센트가 늘어 114,912 달러가 되었다. 하위 5분의 1의 경우에는 같은 기간에 단 4 퍼센트 증가해 9,075 달러에서 9,433 달러가 되었다. 많은 가정이 부부 맞벌이로 소득을 키웠다.
그러나 개인별 임금은 오히려 줄었다. 소득 불균형은 레이건 대통령 임기 이후에도 미국에서 계속 심화되었고 상황은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했다.
레이건의 불간섭 스타일
레이건 대통령은 경제에 대하여 될 수만 있으면 규제를 줄이려 했다. 10년 지나 어느 당도, 공화건 민주건, 이에 대해 이의를 달지 않았다. 레이건은 정부 운영에 있어서도 불간섭주의를 견지했다. 그는 스스로 결정을 하기 보다 자기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에게 권한을 맡겼다. 여러 차례 이런 방식은 문제를 야기했다.
S & L 사건
'저축기관' 즉 S&L이라고 불리는 저축-대출(savings and loan) 은행들이 개인에게 주택 담보 대출을 해왔다. 레이건 행정부는 의회와 공동보조로 S&L에 대한 규제완화를 추진하여 이들이 위험성은 높으나 수익이 많은 투자를 할 수 있도록 했다.
일부 규제완화를 받은 S&L의 직원들이 새 법을 이용하여 거대한 개인 재산을 마련하려고 하여 여러 사람이 과열된 부동산 시장에서 위험한 투자를 했다. 1980년대 말에 시장이 진정되자 많은 S&L 회사들이 도산하고 예금자들의 돈 약 26억 달러를 횡령했다.
은행 계좌들이 당국의 보증 하에 있기 때문에 수백 개의 S&L이 무너지자 정부가 납세자들의 돈을 가지고 이들의 돈 수십억 달러를 갚아 줘야 하게 되었다. 은행 직원 여러 명의 고의적인 은폐 등이 사건에서의 역할로 인해 형사재판을 받게 되었다.
이란-콘트라 사태
니카라과에서 레이건 행정부는 1979년 집권한 마르크스주의 정부를 몰아내기 원했다. 집권 그룹인 산디니스타의 이름은 1920년대부터 니카라과 독립운동을 벌여온 독립운동가의 이름에서 딴 것이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산디니스타 혁명이 여타 중남미 제국에 확산될까 걱정했다.
중앙정보국(CIA) 주관으로 미국은 반정부 게릴라조직인 콘트라(Contras)를 무장시키고 훈련시켰는데 이 말은 스페인어로 ‘반혁명 군’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활동은 미국이 타국 상황에 개입하는데 대한 법을 위반하는 것이었다.
의회는 1984년 이 비밀활동을 파악하고 콘트라에 대한 지원을 금지했다. 레이건 행정부의 일부 관리들은 그래도 콘트라에 대한 지원이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이란에 대한 비밀 무기판매에서 나오는 수익금을 몰래 콘트라에게 보냈다. 그런데 이란에 무기를 판매하는 것은 레바논에서 친이란 테러 그룹이 인질로 잡고 있는 미국인들의 석방을 얻어내려는 목적에서였다.
1986년 가을 이러한 일련의 비밀활동이 폭로되자 이 일들을 주관했던 올리버 노스(Oliver North) 해병중령이 모든 책임을 지게 되었다. 후에 이란-콘트라 사건이라고 불린 이 일로 레이건 행정부는 최악의 비판을 받았다. 대통령은 노스 중령의 활동을 전혀 알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레이건의 유산
이란-콘트라 사건은 로널드 레이건에 대한 개인적 지지를 훼손하지 않았다. 1989년 그가 백악관을 떠날 때 여론조사는 60퍼센트 이상의 미국민이 그의 전반적인 국정수행에 대해 좋은 점수를 주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 도표: 무기제한협정, 179-1993
[SLAT II, INF, START II의 목적을 비교하는 도표]
- 도표를 해석하기: 소련의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 정책은 미국과 소련사이의 군비경쟁을 완화시키는데 도움이 되었다.
- 결론을 내리기: 왜 당신은 소련해체 이후의 시대에도 군비통제조약이 필요하다고 행각하는가?
대외정책의 성공
레이건 대통령의 인기를 계속 뒷받침 한 요인의 하나는 그의 두 번째 임기 중 미국과 소련간의 관계가 개선된 것이었다.
그의 치열한 반공산주의 자세에도 불구하고 그는 1985년 소련의 최고 지도자가 된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와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소련의 부조리한 제도들을 뜯어고치려고 고르바초프는 ‘글라스노스트(glasnost)’를 제안했는데 이는 정치적 개방을 뜻하는 말이다. 그는 또한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 즉 구조개혁을 주장하며 자유기업활동을 제한적으로 인정하는 경제정책을 추진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양국관계의 개선을 가져오고 레이건과 고르바초프는 1987년 중거리핵조약(Intermediate-Range Nuclear Forces Treaty, INF)를 체결하였다. 이 조약은 유럽에 배치된 미국과 소련의 유도탄 약 2,500기를 폐기하기로 한 것이다.
국내정책
레이건 대통령이 정부의 규모를 줄이려 애쓴 것도 그의 인기를 도왔다. 그렇지만 그의 정책으로 워싱턴 관료조직이 크게 축소되지는 않았다. 사회보장, 의료보호, 의료지원 등 특정 계층에 대한 재정지원을 위한 지출이 예상보다 급속히 증가했다. 예를 들어 사회보장 지출은 고령인구가 계속 불어남으로 해서 폭증했다. 그러나 레이건 행정부하에서는 이러한 사업을 억제할 수 없었다.
레이건 임기 말이 다가올 때 경제적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막대한 예산적자와 국가채무 증대에 대한 투자가들의 우려가 결국 1987년 증권시장의 대폭락 사태를 불러왔다. 6주간 계속 주식시세가 내려가다가 급기야 10월 19일 하루에 22.6 퍼센트가 떨어졌다. 1980년대의 투기 거품이 터져버린 것이다.
증권시장은 이후 회복되었으나 레이건의 후임자 조지 H. W. 부시(George H. W. Bush) 대통령은 많은 경제문제를 떠안았다. 1980년대가 끝날 때 미국은 또 한 차례의 불경기를 맞이했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로널드 레이건의 두 번 임기에서 국가적 자부심의 회복을 위한 정열적인 활동과 그의 개인적인 낙관주의를 기억한다. 레이건은 케네디 대통령 시대 이후 처음으로 많은 미국인들의 마음에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 사진 [레이건과 고르바초프가 대화하는 모습]역사 속의 한 장면: 미국과 소련의 관계는 레이건의 두 번째 임기 동안 개선되었다. 여기서 레이건과 고르바초프는 모스크바의 성바실 대성당 밖에서 만나고 있다.
- 원인과 결과를 이해하기: 왜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는 두 나라의 관계를 부드럽게 하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는가?
3과 평가
단원 이해도 평가
1. 미국인들은 1980년대에 애국심을 어떻게 고취했는가?
2. 레이건 행정부는 인종문제에 대한 지속적인 논쟁에 어떻게 접근했는가?
3. 레이간의 정부운영스타일은 이란-콘트라 사건에 어떻게 기여했는가?
4. 특정 계층에 대한 지정지원은 왜 레이건 대통령의 유산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는가?
비판적인 사고와 글쓰기
5. 원인과 결과를 분석하기: 일부 실패한 정책이 있기는 하지만 레이건은 매우 인기가 높은 대통령이었다. 레이건의 경제적인 성공과 그의 애국심이 대중의 여론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가?
6. 입장을 변호하기: 짧은 글로 보수주의의 영향력이 레이건 시대에 사회적인 문제들과 대법원의 변화에 미친 영향이 어떻게 느껴졌는지 설명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