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묘희스님(妙喜, 1937生, 비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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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상행(上行) 묘희(妙喜)스님은 한국불교 자제공덕회를 설립하여 평생 불교사회복지에 헌신하신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37 경북 상주 출생
1951 문경 대승사 윤필암에서 월혜(月慧)스님을 은사로 출가,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60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73 동국대학교 행정대학원 수료
1974 약수암 주지
1982 중앙승가대학교 비구니수행관 학감
1983 사당 새마을유아원 원장
1985 대한불교 조계종 제8대 중앙종회의원
1991 (사)불교자제공덕회 원장
2007 입적(2007년4월1일, 세수 72세, 법랍57세)
문중 수정(水晶)문중
수행지침 지악작선 요익중생(止惡作善 饒益衆生)
생활신조 열심히 산다.
상훈 자랑스런 서울시민상, 노인복지부분 경기도지사상외 다수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준현(俊玄)·민홍(敏弘)·송우(松雨)·지묵·효정·지황·성화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청언(淸彦, 5)→태용(泰容, 6)→선진(善眞, 7)→월혜(月慧, 8)묘희(妙熙, 9)→준현(俊玄, 10), 민홍(敏弘, 10), 송우(松雨, 10)

활동 및 공헌

출가

[전국비구니회 섭외부장시절]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161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162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163
[대만 자제공덕회와 자매결연 기념]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164
[관악구 신림동 경로잔치]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165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167
[화성군 남양면 경로잔치]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168
[사당유치원 원장 시절]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169
[자제정사]사진출처:다음블로그 https://blog.daum.net/hjkim3200/12516815

상행(上行) 묘희(妙喜)스님은 1937년 3월 20일 경북 상주군 함창면 구향동에서 아버지 이춘식과 어머니 이아지 사이의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본관은 영천이고, 이름은 이애운이며, 아명은 순길(順吉)이다. 스님이 점촌 호서국민학교를 다닐 때의 일이다. 당시 스님의 아버지는 점촌역 근처에서 춘강당 시계방을 경영하고 계셨다. 차가 귀하던 시절 문경 봉암사나 문경 대승사, 문경 김룡사에 계시는 스님들이 볼일이 있어 나왔다가 버스가 끊어지는 바람에 묵을 곳이 마땅치 않아 낭패를 당하면 집에 모시고 가서 쉬어 가게 하던, 신심이 돈독한 불자였다.

성철, 청담, 향곡스님 등 훌륭한 대덕 큰스님들이 열심히 공부하러 다니실 때는 춘강당 시계방에 하룻밤 묵어가시면서 어린 순길이를 무릎에 앉혀놓고 부처님 이야기를 들려주곤 하셨는데, 그때마다 어린 순길의 불심은 커져만 갔다. 이런 환경 속에서 호서국민학교를 졸업한 스님은 1951년 집과 가까운 문경 대승사 윤필암에서 월혜스님을 은사로 출가를 했다. 같은 해 자운 큰스님을 계사스님으로 모시고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그로부터 8년 뒤인 1960년에 역시 자운 큰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품수 받았다.

하나뿐인 딸을 출가시킨 뒤 스님의 부모님 역시 춘강당 시계방과 재산을 모두 정리하여 당시 봉암사에서 수행 중이시던 성철 큰스님을 비롯한 여러 스님들께 보시하고, 각각 다른 사찰로 출가하셨다.

어린 나이에 절에 들어와 엄한 행자 생활이 힘들었을 텐데 전생에 선근[1]이 많았는지 묘희스님은 적응을 잘 해나갔다. 그리고 스님의 사형이신 묘엄스님이 마치 친동생처럼 따뜻하게 감싸주고 보살펴서 스님의 수행 생활에 큰 의지처가 되어주셨다.

수학

당시 유일한 비구니 선방이었던 윤필암에는 전국의 제방 납자들이 많이 모여 들었지만 묘희스님은 17세 되던 해에 운문사 강원으로 경전을 배우러 갔다. 그곳에서 『치문』과 사집[2], 사교[3]를 배운 뒤에 양산 통도사에서 율문을 배웠다. 뒤이어 동학사에서 대교를 배우는 한편 후배들에게 초심과 『치문』을 가르치며 경봉 강사스님의 기대를 듬뿍 받았다.

스님이 동학사에서 공부할 당시에는 6·25전쟁 직후라 부모를 잃은 전쟁 고아가 많았다. 스님은 아이들을 보면서 '앞으로 불교계는 어려운 여건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위해 반드시 구제 사업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고, 누구보다도 먼저 스님이 그 일을 시작하겠다는 실로 크나큰 서원을 세웠다. 스님의 나이 겨우 19세였다. 어린 나이에 이와 같은 보살의 마음을 낸 것은 아마도 속가 부모님들의 선근 때문일 것이다.

영화나 연극공연이 드물던 시절, 스님은 동학사에서 연극 '이차돈 선사'를 주관했는데 인근 30리 밖에서도 구경꾼이 몰려들 정도로 엄청난 호평을 받았다.

동학사에서 경전을 두루 섭렵한 뒤 스님은 서울로 올라와 마포 석불암에서 교무를 살면서 동국대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를 했다. 그러나 동국대학교에서 청강생이 물의를 일으킨 사건이 발생하여 학교 당국은 더 이상 청강생을 받지 않았다. 이때 못 다한 학업의 꿈은 1973년 동국대학교 행정대학원을 수료하면서 이루어졌다.

사회복지시설 운영

이듬해 스님은 신림동 약수사의 주지를 맡게 되었고, 중앙승가대학교 비구니수행관 학감으로 3년간 재직했다. 1983년에는 사당동 시립유아원을 위탁받아 10년 동안 운영을 했으며, 목동청소년회관을 건립할 때 청소년수련원 불사에 온힘을 기울였다. 1985년 대한불교 조계종 중앙종회 8대의원으로 활동했던 묘희스님은 전국비구니회 섭외부장을 맡아 한국 불교의 다목적회관 건립을 위해 여러 모로 애를 썼지만 스님의 큰 뜻을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일로 깊은 좌절감을 느낀 스님은 훌쩍 대만으로 건너갔다.

대만 자제공덕회와의 인연

묘희스님은 그곳에서 사회사업가로서 불교 자제공덕회를 이끌어가던 자제정사의 챙옌(證嚴)스님을 만나 출가에 버금가는 삶의 중대한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그동안 스님이 꿈꿔온 모든 일들을 진작부터 실행하고 계셨던 챙옌스님은 모든 면에서 뜻이 일치하는 분이었다. 묘희스님은 새로운 각오로 재기를 다짐했다.

'무엇이든 있는 즉시 베풀어라.' 라고 하신 챙옌스님의 말씀을 마음 깊이 새긴 채 한국으로 돌아온 스님은 자신의 이상과 꿈을 실현할 곳을 찾기 위해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그런 와중에 수차례 대만을 오가면서 1986년 대만 불교 자제공덕회와 자매결연을 맺었다. 이때 챙옌스님이 스님에게 『법화경』을 한 권 주시며 '이 경은 성불직경의 경이니 바로 중생을 제도하자.'고 하셨다. 스님은 『법화경』을 3년 동안 수지 독송하면서 그 오묘한 진리를 깨닫고, 앞으로 펼쳐 나갈 복지사업에 힘과 용기 그리고 확신을 얻었다.

대만 불교자제공덕회는 불교의 사회활동이 전무함을 안타깝게 여긴 비구니 챙옌스님이 1966년에 설립한 정사정사, 자제공덕회, 자제공덕기금회 등 3개의 기본 조직을 바탕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현재 전 세계 36개국 162개소의 지부 분회를 두고 있다.

긴급 구조와 장기적인 구제 사업을 중심으로 병원과 학교 건립, 골수기증, 출판, 방송 등 전방위적 자원봉사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한국과 북한 등 54개국이 이들의 도움을 받았다. 불교국가 중 가장 모범적인 신도 교육의 사례로 손꼽히는 자제공덕회는 전 세계 300만 명의 신도를 보유하고 있다.

자제공덕회는 신도 교육을 통해 성장한 단체이다. 신도 교육은 평신도, 자제위원, 봉사자 교육으로 나뉜다. 평신도 교육은 자제 위원들이 담당하며, 1주일 단위로 교육이 실시된다. 교육은 시청각, 음악, 수화, 명상 등 다양한 방법으로 진행되는데, 문화교양 강좌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어 불자가 아닌 사람들의 참여율도 매우 높은 편이다. 또한 자제위원은 본인이 관리하는 평신도들의 신행생활, 생활상의 애로, 경조사를 챙겨줘야 하는 책무를 지니며, 평신도들은 희망에 따라 봉사자 교육을 받고 사회복지시설에서 봉사활동을 펼치며 신행 활동을 병행한다.

자제정사 건립 운영

묘희스님은 봉사의 원력을 실현하기 위하여 1989년 경기도 화성군에 부지를 매입했다. 그리고 곧바로 공사에 착수하고 건물을 짓기 시작하여 1990년에 완공했다. 이렇게 하여 스님이 그토록 간절하게 염원하던 '한국 불교자제공덕회'가 설립되었고, 그 다음해에는 양로원을 개원했다.

이 일을 추진하는 동안 초지일관 수행과 불사에 전념하던 스님은 제대로 건강을 돌보지 못하여 결국 간암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러나 법화경 수행 공덕으로 건강을 되찾아 많은 어르신들을 모실 수 있게 되었다.

푸른 들판과 작은 공장이 혼재된 농촌지역에 자리 잡은 자제정사 입구에는 '노후수도도량'이란 간판이 붙어 있다. 자칫 잘 모르는 사람들은 노스님들이 수행하는 사찰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런 뜻은 아니다. 자제정사는 출가자와 노인이 수행과 생활을 병행하는 장소이다.

1991년 할머니 한 분과 함께 시작한 자제정사는 점차 사람도 늘고 건물도 커지며 성장을 거듭 해왔고, 스님이 조직한 민간단체인 불교자제공덕회의 후원금으로 갈 곳 없는 노인을 무료로 보살피고 있다. 한편 자제정사 스님들은 1만여 평의 밭을 손수 일구며 사계절 싱싱한 야채를 식탁에 올리고 있다.

자제정사는 일반 양로원과 다소 다르다. 단순 수용시설이 아니라 스님들과 할머니들이 함께 수행하는 도반처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자비는 봉사가 아닙니다. 명예를 추구해서도 안 돼요. 제가 죽더라도 자제정사의 순수한 뜻이 이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그뿐이에요. 더 이상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자제정사는 할머니 65명과 비구니스님 15명이 한 식구로 살고 있다. 물론 할머니들의 뒷바라지는 스님들 몫이다. 자제정사의 스님들은 '힘없고 가난한 이를 돕는 자비 실천 또한 불교의 수행' 이라고 믿고 있다.

날이 갈수록 갈 곳 없는 노인들의 수가 점점 늘어가자 자제정사는 수용공간이 부족하여 중창 불사를 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불사를 하는 과정 속에서 스님은 경제적 어려움을 비롯한 여러 가지 난관을 겪어야 했고, 스님의 건강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그러다가 결국 1996년 뇌종양 수술을 받게 되었다. 다행히 수술이 잘 되어 무사히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고, 이후 양로원 중창 불사에 박차를 가해 마침내 완공을 이루어냈다.

교정시설 교화활동

한편 스님은 건강이 좋지 않은 가운데 10년 동안 서울구치소 종교위원으로서 교화 활동을 폈다. 그 중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법화경을 통해 사형수 한 사람을 교화한 것이다. 스님은 그때 세상의 악연을 끝내고 떠나는 한 사형수가 모든 사람에게 참회를 하고 편안히 웃으면서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나면 반드시 묘희스님의 은혜를 갚겠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에 스님은 눈시울을 붉혔다.

다정다감하며 인자한 묘희스님은 약수사에 있을 때부터 지역 주민들에게 자비를 베풀었으며, 그 공덕으로 '자랑스러운 서울시민상'과 신림10동 ‘시립삼광노인회상'을 수상했다. 양로원 원장으로 재직하는 중에는 '경기도지사상'을 비롯하여 ‘화성군수상', '한국불교여성회총재상', '서울구치소 법무부장관상' 등을 받았다.

병마(病魔)를 물리친 복지사업

묘희스님은 자제정사 양로원의 어른들을 좀 더 잘 모시기 위해 교계 안팎으로 뛰어다니며 수행과 불사에 전념했다. 그렇게 10년이 흘렀을 무렵, 어느 날부터인가 오른쪽 다리에 마비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뇌종양이 재발한 것이었다. 스님은 어쩔 수 없이 4년 3개월 만에 재수술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수술실에 들어간 지 2시간 만에 담당의사가 나와 종양이 너무 크니 수술을 포기하는 게 어떻겠냐는 말을 했다. 그때 묘희스님을 모시고 있던 보호자 스님은 포기하지 말고 최선을 다 해달라며 간곡히 부탁을 드렸다.

의사는 다시 수술실에 들어갔고, 수술은 장장 10시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대수술을 마친 스님은 1시간 만에 마취에서 깨어났다. 그러나 오른쪽 손과 발은 움직이지 않았다. 소뇌를 5cm만 남겨 놓고 전부 제거해버렸기 때문이었다. 스님은 이루말로 다하지 못할 만큼 크게 낙담했다.

퇴원을 앞두고 의사는 스님에게 6개월의 짧은 삶을 선고했다. 이후 스님은 참을 수 없는 통증을 견뎌내야 했다. 상상도 못할 고통 속에서 힘든 나날을 보내는 동안 스님의 곁에는 스님을 아끼는 이들의 사랑과 격려가 늘 함께 했다. 통증과의 싸움은 6개월을 넘어 일 년 가까이 지속되었다.

묘희스님은 통증이 심할수록 법화경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으며 마음을 비워 나갔다. 그리고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와 참회의 기도를 했다. 스님은 날이 갈수록 부처님 마음을 닮아 가고 있었다.

스님은 세수 칠순이 되어갈 무렵 자제양로원의 발전을 위해, 복지사업에 능력이 있고 스님이 못다 이룬 꿈의 나래를 활짝 펼칠 수 있는 유능한 스님이 와주기를 간절히 발원했다.

그리고 2004년 1월 스님의 간절한 뜻은 마침내 이루어져 중앙승가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인 보각스님을 원장스님으로 모시게 되었다. 보각스님을 맞이한 후 묘희스님은 '나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편안합니다. 인연이면 언제라도 만나게 되는 법이지요.' 라고 말했다.

불교자제공덕회를 사회복지법인으로

새롭게 부임한 원장스님은 사단법인 한국 불교자제공덕회를 사회복지법인으로 전환했고, 복지다운 복지를 실천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런 모습에 묘희스님은 눈물을 글썽이며 매우 흐뭇해했다.

스님은 그동안 스님이 발원한 모든 뜻을 이루기까지 불교자제공덕회 회원들과 여러 불자들의 도움이 얼마나 컸는지 알고 있고, 그들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기에 몸은 비록 불편하나 마음만은 밝고 편안하다고 한다. 스님은 움직이지 못하여 누워서 지내고 있지만 자신의 크고 웅대한 서원이 시방세계에 연꽃을 피울 수 있도록 언제나 발원했다.

입적

한국불교자제공덕회 설립자 묘희스님은 2007년4월1일 세수 72세, 법랍57세로 입적했다. 묘희스님의 수계제자로는 준현(俊玄)·민홍(敏弘)·송우(松雨)·지묵·효정·지황·성화스님 등이 있다.

참고자료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묘희(妙喜)스님 본항목 묘희스님(妙喜, 1937~2007) 妙喜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묘희스님(妙喜,_1937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묘희스님(妙喜) 수정문중(水晶) ~의 일원이다
묘희스님(妙喜) 월혜스님(月慧) ~의 수계제자이다
묘희스님(妙喜) 대승사 윤필암 ~에서 출가하다
묘희스님(妙喜) 자운스님(慈雲)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비구니계
묘희스님(妙喜) 서울 약수사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묘희스님(妙喜) 화성 자제정사 ~을(를) 창건하다
묘희스님(妙喜) 화성 자제정사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묘희스님(妙喜) 자제공덕회 ~을(를) 건립하다

지도

  • 자제정사 :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북양리 616-2



다른 비구니 스님

지식관계망




주석

  1. 좋은 과보를 낳게 하는 착한 말과 행동, 의지
  2. 선종에서 중시하는 것으로, 불교를 학습하는 데에 기본이 되는 네 가지 책. 곧 《서장(書狀)》, 《도서(都書)》, 《선요(禪要)》, 《절요(節要)》를 이른다.
  3. 여러 설이 있으나 보통 능엄경, 기신론, 금강경, 원각경의 4과목을 강원에서는 4교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