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원스님(慈元, 1937生, 비구니)
활동 및 공헌
출생
무애(無碍) 자원(慈元)스님은 1937년 4월 10일 충북 보은군 보은면에서 아버지 황계성과 어머니 임병순 사이의 7남매 중 장녀로 태어났다. 본관은 창원이며, 이름은 황규환이다.
출가동기
스님은 어려서부터 문득문득 절에 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고 하니 불연이 각별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6·25전쟁 이후 불교계에는 정화운동이 일어났다. 스님이 17세 되던 해의 일이다. 그 즈음 5세에 동진 출가한 계주스님의 상좌가 17세가 되어 돌연 속퇴를 하여 스님의 앞집에 와 있었다.
그림입니다.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p270
평소 스님들의 생활이 궁금했던 자원스님은 자신과 동갑인 그 스님이 머물고 있는 앞집에 밤낮없이 드나들며 스님들의 생활에 대해 묻고 또 물었다. 그림입니다.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p27
그런데 이상하게도 속퇴한 스님으로부터 스님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신심이 나고 스님이 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는 것이었다. 자원스님의 속내를 눈치 챈 그 스님은 미타사를 소개해주었고, 이렇게 하여 1953년 17세의 나이로 미타사의 계주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교육
수행 속에서 저절로 깨닫게 되는 것 스님은 행자 시절 보문사 강원에서 인홍 노스님께 초발심자경과 『치문』을 배웠는데, 은사스님의 반대로 배움에 대한 나래를 거기서 접을 수밖에 없었다. 은사스님께서는 스님이 책을 보거나 만지지도 못하게 하셨고, 심지어는 스님이 어쩌다 숨어서 책을 보다 들키기라도 할 때면 책을 찢어버리거나 아궁이에 넣어버렸다. 은사스님은 수행자의 삶에서 경전을 통한 공부보다는 수행 속에서 절로 깨달아 배워지는 것을 높이 사셨으며, 특별히 따로 경전 공부를 하지 않으셨다. 그러면서도 책을 읽으면 그 뜻을 다 헤아리셨다. 더욱이 자원스님이 책 내용을 잘못 이해하는 것을 본 뒤로는 경전을 통한 공부를 강경하게 만류하여 결국 『서장』을 배우던 중 그만두게 되었다. 그림입니다.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p272 자원스님이 강원을 그만 둔 후에 은사스님은 당신이 지금까지 쭉 그렇게 해왔던 것처럼 직접 가르칠 생각이셨는데, 스님은 배움에 대한 간절함을 쉽게 거둘 수 없어 은사스님의 뜻을 저버리고 지명스님을 찾아 물어물어 개심사를 찾아갔다. 지명스님은 서울에 올 때마다 미타사에서 기거를 하셨는데, 자원스님은 지명스님께 배움을 청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지명스님은 마침 결제 중이었다.
결제철인지도 모르고 무작정 들어선 자원스님을 그간 안면이 있던 행 노스님 등이 알아보고 방부를 받아주어 그곳에서 3년간 안거를 성만하게 되었다.
안거 후 자원스님은 1955년 12월 5일 성북동 미타사에서 대은화상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1959년 세수 23세 때에 선학원에서 석암화상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하였다.
수행
스님은 개심사에서의 안거를 시작으로 충남 법련사에서 하안거를, 수덕사 견성암에서 하안거를 성만하였다. 이후 청양 장복사에서 하안거, 울진 불영사에서 몇 년을 나면서 10년이 넘도록 결제, 해제가 따로 없이 안거를 성만하였고, 전국의 기도처를 다니며 수행 정진을 거듭하였다.
그러던 중 스님이 35세 되던 해인 1971년 은사스님이 계신 미타사에 돌아와 은사스님을 시봉하기 시작하였다. 은사스님을 모시던 중 수정암의 쾌유스님이 입적하셨다는 부고가 미타사에 도착했다. 그런데 부고의 내용인즉 장례를 5일장으로 한다는 것이다.
스님의 신분으로 5일장을 한다는 게 자원스님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자 은사스님이 “나도 널 찾으려면 5일장은 해야 하지 않겠냐?”고 말씀하셨다. 스님은 그동안 은사스님께 소홀히 대했던 죄송한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몰랐던 그때의 아픈 기억이 아직까지 남아있다고 한다.
미타사 주지 취임과 불사
은사스님을 시봉한 지 5년쯤 지난 1976년 음력 12월 19일 은사스님이 입적하시고, 자원스님은 그해 12월 미타사 주지에 취임하였다.
주지에 취임한 스님은 불사의 원력을 세우고 1978년에 법당을 2층으로 중수하면서 1층은 영단으로, 2층은 법당으로 사용하였다. 같은 해 지하 20평 지상 2층의 요사채를 완공하였으며, 1980년에는 칠성각 10평과 산신각 5평을 중수하고, 그 후 1990년 2월에는 일주문을 완공하였다. 스님은 성품이 인자하여 미타사 불사뿐만 아니라 중앙승가대학교 보타사 수행관 불사 등 젊은 승려들의 불사에 언제나 격려와 보시를 베풀었다.
자원스님은 은사스님께서 왜 그렇게 공부를 하지 못하게 하였는지 그 뜻을 뒤늦게야 이해했다. 중노릇하는 데는 특별한 것이 필요치 않고, 생활 속에서 자신의 마음을 사유하고 살피며 진실한 마음으로 사는 게 더 중요한 덕목이었던 것이다.
자원스님은 2004년 현재 세수 68세, 법랍 51세로 미타사 주지로 수행 정진 중이며, 수계제자로는 대영·선오(禪悟)·수법(修法)·선근·성록스님 등이 있다.
참고자료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p. 269~273.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389. 인터넷 게시물 한국관광공사 https://lifeee.tistory.com/2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