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선스님(萬善, 1883生, 비구니)
만선(萬善)스님 | |
---|---|
법명 | 만선(萬善) |
법호 | |
속명 | 정만선 |
출생 | 1883년 |
출가 | 1901년 |
입적 | 1952년 |
사찰 | 부용사( 인천 미추홀구 도화동 624-240) |
특이사항 |
목차
정의
만선(萬善)스님은 인천 최초의 비구니 사찰인 부용사를 창건한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 내용 |
---|---|
1883 | 경북 포항 출생 |
1901 | 금강산 신계사에서 심공(心空)스님을 은사로 출가 |
인천 부용암 창건 | |
1952 | 5. 10 인천 부용암에서 입적(세수70세, 법랍52세) |
기타사항
문중 | 법기(法起)문중 |
수계제자 | 육년(六年) |
활동 및 공헌
출가
만선스님은 1883년 3ᅟᅯᆯ 28일 경북 포항에서 그 지역의 유명한 학자의 딸로 태어났다으며 이름은 정만선이다. 어느 날 부영스님으로부터 ‘너희 집안 사람들이 무고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되니 너는 17세가 되면 심공스님에게 가서 스님이 되라’라는 말씀을 들었다.
이를 계기로 스님의 모든 집안 식구가 불법을 믿고 따르게 되었는데 불행히도 스님의 조카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부영스님의 말씀이 현실로 나타나자 스님의 아버지는 딸에게 출가를 권하였고, 스님은 1901년 19세 되던 해에 금강산에서 심공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스님의 은사스님은 바깥일을 보기 위해 외출이 잦으셨고, 주로 부영 노스님께서 주로 만선스님을 돌보아 주셨다. 바위 위에서 날이 시퍼런 삭두칼로 삭발할 때 스님은 “열여덟의 참 꽃다운 나이에 시집을 왔다.”며 출가를 혼인에 비유하였다.
만공, 전강 큰스님과의 인연
그 당시 금강산 유점사에는 만공 큰스님과 전강 큰스님이 주석하고 계셨는데, 만공 큰스님은 만선스님을 보고 손주 상좌라고 부르셨고, 전강 큰스님과는 사가로 따지자면 먼 친척이 되었다. 두 스님은 만선스님을 아끼고 어여삐 여기셨다.
꿈에 절터를 보다
[[파일: 105-02.jpg |섬네일|[만성스님이 직접 쓴 천지팔양경] 출처: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p84 [[파일: 105-03.jpg |섬네일|[만성스님의 친필] 출처: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p84
금강산 유점사에서의 행자시절, 스님은 노스님과 함께 바위에서 백일 기도를 하였다. 그런데 마지막 회향 날 꿈에 마치 조리 모양 같은 절터가 선명히 보였다. 잠에서 깨어났는데도 그 광경이 눈앞에 있는 듯이 생생하여 이상히 여기던 차에 노스님이 “너 어제 잠자리에 무슨 일이 있었냐?”하고 물으셨다.
꿈 이야기를 말씀드리니 노스님도 똑같은 꿈을 꾸었다며 신기해하셨다. 노스님은 이 꿈을 부처님의 선몽으로 여기고, 만선스님에게 나한님 한 분과 짚신 몇 켤레를 주며 ‘나한님을 잘 모시고 절터를 찾아가라.’고 이르셨다.
부용암 창건 이야기
스님은 노스님의 명을 받아 나한님을 걸망에 모시고 탁발을 하면서 절터를 찾아다녔다. 그러다가 풀 한포기 까지 꿈에서 본 것과 똑같은 곳을 발견하였다.
스님이 반가운 마음에 땅주인을 알아보려 하다가, 불현듯 일전에 노스님이 이르신 말씀이 생각났다. 노스님은 이미 꿈에서 땅 주인집을 보았다며 “돌기와집에 문이 두 개인데 너는 반드시 앞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땅주인인 권모 씨의 집을 찾아가니 노스님 말씀처럼 기와집에 문이 두 개 있었다. 이에 스님은 노스님 말씀을 명심하며 앞문으로 들어가 주인에게 인사를 올렸다.
“소승 왔습니다.”
권 노인이 나오면서 “중이 여긴 어쩐 일로 오셨소?”하고 물었다. 권 노인은 여느 사람은 쉽게 말을 붙일 수도 없는 얼굴이 험상궂었으나 만선스님은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담하게 “저를 동생 삼아 주십시오.”라고 대답하였다.
조그만 체구의 비구니 스님이 등에는 울퉁불퉁하게 생긴 큰 물건을 지고 들어와 주저함 없이 대담하게 행동하자 권 노인은 마음이 동하였는지 스님을 집안으로 모시고 가서 공양을 대접하다. 스님은 공양이 끝난 후 그 집에서 자고 가라는 것을 사양하고 허름하고 다 무너져 버려진 산지기 집으로 향하셨다. 그 후 그곳에서 부처님을 한 분을 모시고 동자 둘과 함께 새로운 수행을 시작하였다. 이후 동네에서는 이상한 사람이 산지기 집에 와서 산다는 소문이 돌았다.
만선스님은 어린 동자 둘을 남겨 놓고 금강산을 자주 가고 하였는데, 돌아올 때마다 나한님을 몇 분씩 모시고 왔다. 집을 비울 때는 어린 동자들에게 ‘내가 없어도 부처님을 항시 생각하며 잊으면 안 된다.’고 주의를 주었고, 동네 사람들이 해 오는 떡 같은 공양물을 함부로 먹지도 말라고 하며 수행자로서의 본분을 일러두었다.
차도 없던 시절 금강산까지의 여정은 멀기만 했고 스님을 기다리며 생활하던 동자승의 머리는 봉두난발이 되어 제멋대로 자라기 일쑤였다. 그러면 동네 보살님들이 삭발을 해 주기도 하였다. 금강산에서 돌아오면, 스님이 없는 사이에 행색이 형편없어진 동자승들을 보고 마음이 아파 부여잡고 운 적이 많았다.
그렇게 몇 차례를 금강산을 왕래하였고 돌아올 때마다 나한미과 옷가지, 그 밖의 생필품을 가져왔다. 그렇게 모신 나한님이 모두 네 분이었으나, 팔 나한전을 모시고 싶으신 마음에 동자들에게도 불상을 보면 꼭 모시고 오라 신신당부하였다.
만선스님은 축지법을 썼으며 살생하는 것을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 당시 이가 많았던 터라 춘성 큰스님이 이를 잡고 있을라치면 “아이고 스님, 이 좀 잡지 마세요.” 하며 삭두칼을 꺼내들고는 진언을 하였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이가 모두 삭두칼에 달라붙었다.
만공 큰스님(그 당시에는 머리가 길고 꼬불꼬불했다.)과 전강 큰스님이 인천을 만행하시다가 부용암에 들르기도 하셨으며, 전강 큰스님은 사가의 친척인 만선스님을 의지하여 인천 용화사로 오시게 되었다.
이후 1945년부터 탁발을 다니면서 부용암 불사를 시작하여 5년에 걸쳐 불사를 이룩하였다. 탁발을 다니는 스님을 보면 얼마나 알뜰하게 살림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보살행
길에 떨어진 과일 껍질도 사람 입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지나치지 않고 걸망에 집어 담았으며, 썩은 무를 주어다가 썩은 부분은 도려내고 소금에 절여 구워내 동자들에게 고기라고 하며 먹이기도 했다. 떨어져 있는 단추나 헝겊 조각들도 주워두었다가 어느 정도 모이면 기워서 시장 근처에 사는 거지들에게 옷을 만들어다 주는 보살행을 하였다.
탁발을 할 때에는 반야심경과 십악중죄참회를 하였는데, 시주를 많이 하는 부잣집보다도 가난한 집에서 더 오래 정성을 다하여 염불을 해 주시는 중생구제 발현을 몸소 행하였다.
재미있는 것은 탁발을 다니던 중에 시청같은 관청을 보면 그냥 넘기지 않고 절을 하며 기도를 올렸다. 이를 이상히 여긴 어린 동자승들이 “스님, 여긴 절이 아니에요.”하면 “이 다음에 크면 안다. 시청에 절을 해야 스님들을 먹여 살린다.”고 하였다. 스님의 이런 모습을 본 시청 직원들이 감동하여 함께 나와 기도를 올리곤 했다.
인천 부용암
당시 부용암은 춘성 큰스님, 전강 큰스님, 혜암 큰스님, 지산 큰스님, 하동산 큰스님 등이 자주 모이는 장소가 되었다.
부용암의 사찰명은 원래 만공 큰스님이 써주신 대원암이었는데,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부용암으로 바뀌었다. 정화 당시 자명스님(이 글에 등장하는 동자스님이다. 당시 18세로 만선스님의 상좌였다가 훗날 유발상좌가 되었고, 인천에서는 복동이 보살님으로 불린다. 본명은 윤명심이다.)이 조계사에 등록을 하려고 갔는데 대원암 현판이 선학원에 걸려 있었다고 한다.
불사 중에는 스님의 지혜로움이 그 빛을 발했다. 부용암의 전기불사 할 때에 당시 동자스님은 9세였다. 전기 불사를 하려는데 생활은 어렵고 비용을 마련할 수가 없었다. 당시 숭의국민학교 쪽에 전기회사가 있었는데, 불사에 도움을 받고자 찾아가면 문도 열어주지 않고 문전박대를 하는 것이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스님은 묘책을 생각해 냈다. 동자스님을 시켜 전기회사 간부의 집에 찾아가 문을 열어 줄 때까지 바닥에 엎드려 있다가 문을 열어주면 큰 소리로 울라고 시킨 것이다.
동자스님은 스님이 시킨 대로 문이 열릴 때까지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문이 열렸는데, 불행 중 다행으로 문에 동자스님은 그만 머리를 부딪쳐 저절로 울음이 터져 큰소리로 울게 되었다.
이때 스님은 “왜 부모도 없는 불쌍한 아이를 때렸냐.”고 크게 역정을 내며 무작정 집 안으로 동자스님을 안고 들어가서 방에 눕혔다. 그런 후에 동자스님에게 “머리 시커먼 사람이 들어오면 아픈 소리를 해.”라고 일러 두었다. 조금 있다가 어떤 사람이 들어오자 동자스님은 순진하게도 “아픈 소리 해, 아픈 소리 해”라고 중얼거렸다. 동자스님의 실수로 스님의 묘책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어찌 되었건 이렇게 전기회사 간부와 안면을 튼 후, 매일 찾아가서 화주를 하는데, 스님의 끊임없는 노력에 탄복한 간부가 결국 승낙을 하여 전기 불사를 할 수 있었다. 나중에 그 간부는 절에 찾아와 풍경을 달아주는 등 독실한 불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 분은 동자스님에게 “참, 어린 너도 똑똑하지만 너희 스님 같은 분은 대한민국에서 한 분밖에 없다.”라며 스님을 존경해마지 않았다고 한다.
불사가 진행되던 어느 날 어디선가 구렁이가 나와서 자리를 잡고 떠나지 않자 스님께서 흰죽을 쑤어 주었다. 그러자 구렁이는 그 흰죽을 다 먹고 떠났다고 한다.
이러한 각고의 노력은 부용암의 중창이라는 결실을 얻었고, 스님의 도량은 부처님의 가피 속에 점점 굳건히 다져졌다.
어느 날은 도둑이 들어와 부처님을 업고 달아나려다 실패한 적이 있다. 만선스님이 도량석을 하려는데 어떤 시커먼 물체가 등에 무엇인가를 지고 나가다가 “아이고, 무겁다”하고 내려놓았다. 그 당시에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하여 절에서 새벽 4시가 되면 국죽(밥알, 김치, 우거지를 섞어 쑤어 놓은 죽)을 쑤어 배고픈 객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스님은 힘들게 짐을 지고 가는 사람을 안쓰럽게 여겨 죽을 한 그릇 먹고 가라고 하였다.
그리고 죽을 다 돌린 후에 예불을 모시려는데, 법당에 부처님이 안 계신 것이 아닌가! 깜짝 놀라서 부처님의 행방을 찾으니 새벽에 본 그 사람이 놓고 간 짐 속에 계셨다. 그리고 그 짐 옆의 소나무 하나가 다 닳아 있었다. 신성한 도량 내에 계신 부처님을 함부로 도둑질 하려던 사람을 부처님께서 보시고는 괘씸히 여겨 새벽 내내 소나무 주위를 돌게 한 것으로 보인다.
만선스님은 절 살림과 수행에 있어서는 매우 엄하였다. 얼마나 엄했던지 기도 중에는 말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였으며, 걸을 때는 소리가 나지 않게 뒤꿈치를 바닥에서 뗀 채로 살금살금 걸어야 했다. 또한 마당을 쓸 때에 발자국이 남아 있으면 다시 쓸어야 했다.
당당한 여장부
[만선스님이 직접 쓴 천지팔양경과 친필]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84 스님은 어디에서건 빛을 발하는 당당한 여장부였다.
6·25전쟁 때 후퇴하던 국군이 국회의장이었던 곽상훈 씨의 모친을 부용암에 모시고 와서 보살펴 줄 것을 부탁을 하고 떠나갔다. 모친은 연세가 많았는데 아들 걱정으로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시고는 하늘에 비행기만 보이면 “우리 곽상훈이 좀 잘 해 주시오.”하고 소리치며 절을 하였다. 인민군이 점령하던 시기라 할머니의 안위를 걱정한 만선스님은 만류하며 보호를 해주었다.
하루는 인민군이 도량 내로 쳐들어와 반동분자를 찾차 만선스님은 할머님을 마루 밑에 숨겨 놓고 그 위에 올라서서 지키고 있었다. 좁은 곳에서 불편하셨는지 할머님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움직이며 소리를 내니 그 때마다 만선스님은 발로 마루를 차며 인민군에 대적하였고 마침내 할머니를 지켜냈다.
전쟁 중 인민군이 절 내에 주둔하고 있을 때에도 만선스님은 큰 연등에 곽상훈 ㅆ와 이승만 대통령의 이름을 올려 기도를 하였으며, 인민군들은 마루에도 못 앉게 하였다.
큰 등을 두고 예불을 하고 쇠를 치면 인민군이 왜 종을 치냐며 방해하였다. 이에 만선스님은 “야 이놈아. 너도 너희 대통령 빌어라. 나는 우리 대통령 빌테니.”라며 한 번도 주눅이 들지 않고 당당한 모습으로 인민군에게 큰 소리를 쳤다. 기도를 하지 말라며 스님의 면전에 총부리를 겨누어도 “나 죽어도 좋다, 나 죽고 평화가 이루어진다면 쏴라.”며 쇠치고 예불을 올리셨다.
인민군들이 자고 있으면 발로 흔들어 깨우면서 “일어나라 일어 나. 이 쎄(혀)가 빠질 놈들아”하며 두려움 없이 대했다. 현재 국회의원인 조병학 씨를 비롯하여 방판사 등 많은 사람들이 만선스님에 도움으로 목숨을 구했다고 한다.
부용암은 전쟁의 와중에서도 ‘승려가 동냥을 해서 중생을 살려야 한다.’는 스님의 원력으로 인민군과 피난민의 구분 없이 대접하였다. 또한 전쟁 중에 부모를 잃은 고아들을 데려다 길렀는데 중간에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아이들도 있지만 남녀 20명이 넘었다.
6·25전쟁이 끝나고 휴전되자 곽상훈 씨가 부용암에 찾아왔는데 “휴전을 하면 어떻게 하나, 통일을 해야지.”하면서 반으로 갈라진 나라를 크게 한탄하였다.
새로 부임한 인천시장은 반드시 만선스님을 만나러 와야 했다. 시장이 오지 않으면 만선스님이 직접 찾아가서 만났다. 찾아가면 “니가 시장이 되었으면 인천에 절이 몇 개나 되는지 알아야지 모르면 안 된다.”고 엄포를 놓았고, 그러면 시장들은 “맞습니다, 맞습니다.”하며 머리를 조아렸다고 한다. 스님의 위용을 짐작하고도 남는 이야기다.
구도열
스님은 또한 수행정진의 구도열이 굉장히 높았다. 일단 기도애 들어가면 부처님께 올린 마지(밥)가 꽁꽁 얼어 땅에 떨어져 굴러도 흐트러지지 않을 정도로 일념으로 행하여였다.
또한 자신에게 너무나도 엄격하여서 절대 눕는 법이 없었다. 밤에 잘 때도 좌정을 한 채로 잠을 잤으며, 시간을 정해 놓고 자는 것이 아니라 자는 시간을 아끼고 아껴 잠시 앉은 채로 눈을 붙였다.
신통쟁이 스님
일체 생식을 하였고, 콩나물을 소금에 무쳐서 가지고 다니며 먹었으며 쑥과 솔잎을 주로 먹었다. 이런 절제된 생활 속에서 스님은 영험한 힘을 가지게 되셨는데, 부용암에 머물 당시 신통한 일이 많아 스님을 일컬어 신통쟁이 스님이라고 불렀다.
스님은 축지법을 사용할 줄 알아 걸음걸이가 날아다니는 듯 했고, 사람들의 병도 잘 고쳐 주었다. 당시 유행하던 눈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들 앞에서 진언을 외면 씻은 듯이 치료가 되어 스님을 찾는 신도들의 수가 늘었다.
스님이 중창한 이래 ‘인천 부용암의 부처님은 영험하셔서 아기가 유산되거나 임신이 안되는 사람들이 기도를 하면 반드시 아기를 낳는다.’는 말이 널리 퍼졌다고 한다.
입적
스님은 1952년 부용암에서 세속의 연을 다하였다. 수계 제자로는 육년(六年)스님이 있고 손상좌로는 학수(연경)스님·본각(本覺)스님이 있다.
인천 부용사
부용사는 인천 최초의 비구니 사찰로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이다. 금강산 신계사 법기암에서 수행했던 만선 스님이 1926년에 창건한 절로 1920년대에는 수봉산을 영산이라 불렀고 자그마한 이 절터 외 주변엔 아무것도 없었다고 한다. 현재 부용사 경내에는 대웅전, 응진전(1957년 나한전), 요사채 등이 자리하고 있다.
[부용사] 글 및 사진출처: 오마이뉴스, 갈곳 잃은 아이 키워 결혼까지... 스님들은 기꺼이 '부모'가 됐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744423
사찰
- 부용사(부용암):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도화동 624-240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p. 79~86.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104.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160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
만선(萬善)스님 | 본항목 | 만선스님(萬善, 1883~1952) | 萬善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만선스님(萬善,_1883生,_비구니)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
만선(萬善)스님 | 법기(法起)문중 | ~의 일원이다 |
만선(萬善)스님 | 심공(心空)스님 | ~의 수계제자이다 |
만선(萬善)스님 | 인천부용암 | ~을 창건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