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덕스님(常德, 1952生, 비구니)
상덕(常德)스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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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 | 상덕(常德) |
법호 | |
속명 | 정상덕(鄭相德) |
출생 | 1952년 |
출가 | 1955년 |
입적 | |
사찰 | 미타사 정수암(서울 성동구 옥수동 415-2) |
특이사항 |
목차
정의
상덕(常德)스님은 법성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옥수종합사회복지관장을 역임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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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 | 서울 출생 |
1955 | 옥수동 미타사에서 법성스님을 은사로 출가 |
1968 | 청룡사에서 구산(九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
1977 | 법주사에서 석암(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
1978 | 미타사 정수암 주지 취임 |
1979 |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졸업, 경국사 불교연구원 대교과 졸업 |
1984 | 대학생 불교학생회 지도법사 |
1986 | 동국대학교 행정대학원 졸업, 영등포구치소 종교위원 역임 |
1986~1994 | 전국비구니회 사회국장 역임 |
1986~ | 10개 신행단체 창립 운영 |
1987~ | 성동경찰서 경승실장 |
1988~2004 | 불교꽃예술회 창립 및 회장 역임 |
1991~1995 | 여성수도자모임 '삼소회’ 활동 |
1994 | 정수암 증축 불사,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사회복지학과 졸업 |
1996 | 불교방송 시청자위원 |
1997~2004 | 반야사 주지 |
1997~2017 | 옥수종합사회복지관 관장 |
2002~2004 |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총동문회 자문위원 불교복지관장협의회 회장, 서울시 종합복지관협회 이사 |
2018 | 옥수동 미타사 주지 |
2022 | 전국비구니회 운영위원회 위원장 |
문중 | 법기(法起)문중 |
수행지침 | 인과법(因果法), 자비보시행(慈悲布施行), 정법포교(正法布敎) |
상훈 | 조계종 총무원장 포교대상 수상(2002), 2회 법무부장관상(1997) 외 다수 |
수계제자 | 수현(修賢)·수진(修眞)·수경(修景)·수인(修仁) |
활동 및 공헌
출가
상덕(常德)스님은 1952년 6월 18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이며, 이름은 정상덕이다. 스님은 양육과 장수를 위해 1955년 네 살 때 동진 출가하게 되었다. 스님의 은사스님은 암으로 많이 편찮아서 음식을 잘 드시지 못하셨다. 은사스님의 힘든 투병 생활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상덕스님은 어린 나이에 일찍 철이 들어갔다.
비록 어린 아이였지만 '불교의 기둥이 되고 싶다.'는 발원을 한 스님은 청소와 정리정돈 등 절집 생활을 하면서 승려의 모습을 익혀나갔고, 하지 말아야 할 것과 해야 할 것을 철저히 지키는 어른들의 말씀을 반드시 따르는 기특하고 영리한 어린 행자였다. 그런 스님을 얼마나 아꼈던지 노스님은 가난한 사찰 살림에도 찬밥을 먹이지 않고 꼭 따뜻한 밥을 챙겨 먹일 정도로 정성들여 보살피셨다.
수학
미타사 강원에서 경전 공부를 할 때는 학교공부가 너무나 하고 싶어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간절히 발원을 하였다. 스님의 발원 덕분인지 사회(학교) 공부를 등한시하던 그 시절에 노스님의 적극적인 지원과 자애 속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스님은 자신을 그렇게 따뜻하게 감싸주시는 노스님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살아야 한다며 스스로를 채찍질하여 어려움을 극복해나갔고, 은사스님이 아프실 때 고사리 같은 손으로 열심히 배를 문질러 드릴 정도로 효성도 깊었다. 3년 동안 사교를 마친 뒤에는 스님의 재질을 한 눈에 알아보신 강사스님께서 크게 될 인물이라고 응원을 해주셔서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스님은 세월이 많이 지난 지금 그때를 돌이켜보면 철없는 어린 아이의 모습보다 항상 노력하는 자신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렇게 살 수 있었던 것은 평생 미타사를 떠나지 않고 보호막과 지침이 되어주신 주변 암자의 어른스님들의 은혜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상덕스님은 그 어른스님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언제나 깊이 간직하고 있다. 스님의 나이 15세에 스님을 아껴주던 노스님이 입적하시고, 18세 되던 해에 은사스님마저 입적하시고 말았다.
미타사 정수암 주지가 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18세의 어린 나이에 정수암 주지가 되었다. 스님은 주위 어른들께 걱정을 끼칠까봐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고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정수암을 지켜나갔다. 그렇게 2년이 지나고 스님이 20세 때 지금의 맏상좌와 인연이 닿았다. 아직 3세 밖에 되지 않은 어린 상좌를 등에 업고 영어 단어를 외우는 등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만큼 바쁜 날들이었다.
스님은 지금까지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왔다. 그러다 보니 도반 스님들을 좀더 살뜰하게 살피지 못한 것 같아 그 점이 늘 아쉬움으로 남는다. 스님은 그렇게 자기 자신을 소홀히 하면서까지 스스로 의 몫을 다하였고, 분초를 아끼며 바쁘게 지내왔다.
어린이법회등 다양한 신행단체
미타사 출신 스님 중 첫 대학졸업자로서 상덕스님은 사명감을 갖고 어린이 법회부터 포교를 시작했는데, 개원 때 400여 명이 모일 만큼 대성공이었다. 단국대학교 학생들을 교육시켜 어린이법회 선생님으로 활용하는 기지를 발휘하기도 했다.
스님은 어린이법회를 시작으로 인등법회, 신도법회 등 각종 신행 단체를 이끌고 있으며, 초파일 관욕단을 아름답게 꾸미며 한국의 전통등으로 연등을 제작하는 등 작은 사찰이지만 아름다운 사찰 만들기에 항상 노력을 아끼지 않고 끊임 없이 새로움을 창출하고 있다.
상덕스님은 ‘우리 절, 우리 스님'이라는 개념 하에 모든 것을 부처님과 함께하자는 소신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지금도 신도가 상을 당하면 아홉 차례 가량 방문을 할 만큼 신도들을 아끼며, 여러 법회를 통해 신도들이 부처님의 법과 스님들과 함께하도록 늘 노력하고 있다.
정기법회만 한 달에 7회를 열고 있는 스님은 경찰법회, 동대문시장 상인법회, 한국전력법회 등 지역 법회를 개설해서 15개 단체의 법회를 이끌어나가고 있다. 또한 교도소 법회는 뼈가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가겠다는 마음으로 임한다. 이렇게 스님은 도심 사찰로서 제 기능을 다하고자 항상 혼신을 다하고 있다. 법회를 할 때에는 각박한 삶 속에서 맑고 시원한 옹달샘 같은 법문을 하려고 애를 쓴다. 특히 청년회 회원들과 저녁 법회를 마치고 큰 양푼에 밥을 비벼서 같이 먹을 정도로 격의 없이 지내는 스님은 청년법회를 10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스님의 관심이 비단 법회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스님은 신도들이 회색 승복을 입는 것은 월권이라고 생각하고 신행복을 직접 고안해서 신도들에게 입게 하였다. 상덕스님은 이렇게 신도들과 함께하는 ‘우리 절, 우리 스님'이라는 튼튼한 울타리를 가꾸고 있다.
옥수종합사회복지관을 맡다
스님은 바쁜 와중에도 공부를 놓지 않고 행정대학원에 진학을 하였다. 그리고 기독교 성장에 디딤돌이 된 것은 복지, 의료, 교육이라고 생각하고 이 분야에서 불교가 상대적으로 뒤처진 것이 안타까워 불교대학에 진학을 하여 사회복지학을 전공하기도 했다.
그 후 1997년 IMF의 어려운 시기에 빚을 얻어 옥수종합사회복지관을 맡아, 변변한 자료도 없는 황무지 같은 복지관에서 1년 동안 직원들과 동고동락 하면서 기초를 닦았다. 스님은 '복지관 스님’이라고 불릴 만큼 복지관 사업에 정성을 쏟았다.
바쁜 생활로 도반들과 함께 보낸 시간은 적었지만 아이들에게는 한 치도 소홀히 대하지 않았다. 아무리 힘들어도 함께 공부할 수 있는 시간과 자리를 차례로 마련했다. 그리고 복지관 직원들에게는 1주일에 한 번씩 발원문을 쓰게 하여 그들에게 불심을 심어 주기 위해 노력하였다. 스님은 늘 ‘실질적으로 살아있는 불교, 도움을 주는 사찰, 자비를 실천하는 스님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2004년에는 제8차 세계여성불자대회 (8th Sakyadhita)의 부추진위원장으로 활약하여 국제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러내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상덕스님은 2017년 옥수종합사회복지관 관장에서 정년 퇴임하고 2018년부터는 미타사 주지를 맡고 있다.
수계제자로는 수현(修賢)·수진(修眞)·수경(修景)·수인(修仁)스님 등이 있다.
옥수동 미타사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曹溪寺)의 말사이다. 888년(진성여왕 2)대원(大願)이 창건하였으며, 1115년(예종 10)에 봉적(奉寂)과 만보(萬寶) 두 비구니가 지금의 금호동 골짜기에서 종남산(終南山)으로 절을 옮겨 극락전을 창건하였다.
1824년(순조 4)대원(大願)이 무량수전을 짓다가 3년만에 입적하자, 그의 상좌 환신(幻信)이 뒤를 이어 1827년에 완공하였다. 1862년(철종 13)인허(印虛)가 화주가 되어 조대비(趙大妃)의 하사금과 조진관(趙鎭寬)의 부지 기부로 극락전을 다시 짓고 요사를 수리하였다.
1873년(고종 10) 비구니 성흔(性欣)이 불전과 요사를 고쳤으며, 1928년에는 선담(仙曇)이 7층 석탑을 세웠다. 1933년에는 주지 돈형과 화주 이경화(李京華), 전경각 등이 산신각을 중수하였고, 1938년에는 화주 안성훈(安性勳) 등이 무량수전을 중수하였다.
부속 암자로는 대승암과 칠성암, 금보암·금수암·정수암·용운암·관음암·토굴암 등 8개가 있다. 사세가 번성할 당시에는 모두 9동 66칸의 건물이 있었다.
유물로는 1883년(고종 20)에 조성된 칠성탱화를 비롯하여 1887년에 학허(鶴虛)가 그린 아미타후불탱화와 현왕탱화, 감로왕탱화·신중탱화·지장탱화, 1900년(광무 4)에 보암(寶庵)이 그린 신중탱화와 아미타후불탱화가 있다.
옥수종합사회복지관
부처님의 자비를 행하는 대한불교조계종사회복지재단은 1,7000여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대한불교조계종에서 전문적 사회복지사업 수행을 통해 더 많은 이름을 구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동물이 되고자 1995년 2월 25일에 설립되었다.
본 재단은 부처님의 자비와 구제의 원력으로 불교계의 인적 물적 복지자원 개발 활용함으로서 국민복지 지원과 진흥에 이바지하며 복지 분야에 관한 제반조사연구·교육 홍보를 통하여 문화복지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목적으로 현재 약 150 여개의 다양한 사회복지시설운영과 자비나눔 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p. 351~357.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231.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151, 362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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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덕(常德)스님 | 본항목 | 상덕스님(常德, 1952~) | 常德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상덕스님(常德,_1952生,_비구니)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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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덕(常德)스님 | 법기(法起)문중 | ~의 일원이다 |
상덕(常德)스님 | 법성스님 | ~의 제자이다 |
상덕(常德)스님 | 옥수동 미타사 | ~에서 출가하다 |
상덕(常德)스님 | 구산(九山)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 |
상덕(常德)스님 | 석암(昔岩)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 |
상덕(常德)스님 | 미타사 정수암 | ~의 감원(주지)을 역임하다 |
상덕(常德)스님 | 반야사 | ~의 감원(주지)을 역임하다 |
상덕(常德)스님 | 미타사 | ~의 감원(주지)을 역임하다 |
상덕(常德)스님 | 미타사 정수암 | ~을 중창하다 |
지도
- 미타사 정수암 (서울 성동구 옥수동 41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