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허스님(印虛, 1911生, 비구니)
인허(印虛)스님 | |
---|---|
법명 | 인허(印虛) |
법호 | 영영암(英煐庵) |
속명 | 방정옥(方正玉) |
출생 | 1911.12.01. |
출가 | 1960년 |
입적 | 2004.12.30. (세수 94세, 법랍 43세) |
사찰 | 내장사 성불암 전라북도 정읍시 쌍암동 463 |
특이사항 |
목차
정의
인허(印虛)스님은 출가 전 내장사 복구불사에 일조하고 내소사 지장암에서 지승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 내용 |
---|---|
1911 | 충남 예산 출생 |
1960 | 전북 내소사 지장암에서 지승스님(智勝)을 은사로 출가 [1] |
1961 | 내소사에서 해안(海眼)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2] |
1962 | 내소사에서 해안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
2004. 12. 30 | 전북 내장사 성불암에서 입적 |
문중 | 계민문중(戒珉) |
생활신조 | 덕을 닦아야 한다. |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 자인 · 자윤 |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 정공(定空, 7)→봉전(奉典, 8)→불일(佛日, 9)→지승(10)→인허(印虛, 11)→자인(慈印, 12), 자윤(慈允, 12) |
활동 및 공헌
출생
영암(煐庵) 인허(印虛)스님은 1911년 12월 1일 충남 예산군 예산읍에서 아버지 방한두와 어머니 이태고심(불명) 사이의 1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창성이며, 이름은 방정옥이다.
예산보통학교를 졸업한 인허스님이 재가 불자로 있을 때의 일이다. 내소사 해안스님께서 하안거 결제 때, 원각선원의 문을 닫고 인허스님을 앞세워 내장사 복구 불사를 시작하여 동짓달에 모두 끝마쳤다.
내장사의 역사
이인허스님이 복구 불사에 일조를 한 내장사는 660년(백제 의자왕 20년) 유해(幼海)의 초창(初創)으로 세워졌으며, 현재의 사찰은 본래 영은사(靈隱寺) 자리인데 636년(백제 무왕 37년) 영은조사(靈隱祖師)가 50여 동의 대가람으로 창건한 절이었다.
이후 1095년(고려 숙종 3년) 행안선사(幸安禪師)가 건물을 중창했는데, 1539년(조선 중종 34년)에 조령(朝令)으로 소각되었다.
1557년(명종 12년) 희묵(希默)스님이 법당과 요사를 수축하였으나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다시 소실되었으며, 1639년(인조 17년) 부용(芙蓉)스님이 절 건물을 개축하였다.
한국 최고의 가을 산을 자랑하는 내장산의 한가운데 위치한 내장사는 내장산과 화려한 단풍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내장사의 일주문에서 시작하는, 수령 50~200년짜리 단풍나무 터널은 내장산 단풍의 백미라 할 수 있다. 또 내장사를 중심으로 갈색의 굴참나무, 붉은 단풍나무, 노란 느티나무가 어우러져 화려한 장관을 연출하는데, 그 모습이 마치 붓으로 붉은 물감을 무수히 찍어 놓은 듯하다.
내장사는 백제 무왕 636년에 영은조사가 내장산 어귀인 부도전 일대에 건설한 50동의 큰 절이었다. 건축 당시에는 영은사로 불리었다.
지금의 내장사 어귀인 부도전 일대가 본래의 영은사 절터였다.
영은조사는 내장사 불사를 한 이듬해 묵담 큰스님을 모시고 수륙재를 올리기 위해 권선을 다니다가 성불암 골짜기에 와서 보니 조용하고 공부하기에 좋은 터라 생각하여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후 1095년(고려 숙종 3년) 행안선사(幸安禪師)가 건물을 중창했는데, 1539년(조선 중종 34년)에 조령(朝令)으로 소각되었다.
1557년(명종 12년) 희묵(希默)스님이 법당과 요사를 수축하였으나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다시 소실, 1639년(인조 17년) 부용(芙蓉)스님이 절 건물을 개축하였다.
한국 최고의 가을 산을 자랑하는 내장산의 한가운데 위치한 내장사는 내장산과 화려한 단풍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내장사의 일주문에서 시작하는, 수령 50~200년짜리 단풍나무 터널은 내장산 단풍의 백미라 할 수 있다.
또 내장사를 중심으로 갈색의 굴참나무, 붉은 단풍나무, 노란 느티나무가 어우러져 화려한 장관을 연출하는데, 그 모습이 마치 붓으로 붉은 물감을 무수히 찍어 놓은 듯하다.
내장사는 백제 무왕 636년에 영은조사가 내장산 어귀인 부도전 일대에 건설한 50동의 큰 절이었다. 건축 당시에는 영은사로 불리었다.
지금의 내장사 어귀인 부도전 일대가 본래의 영은사 절터였다.영은조사는 내장사 불사를 한 이듬해 묵담 큰스님을 모시고 수륙재를 올리기위해 권선을 다니다가 성불암 골짜기에 와서 보니 조용하고 공부하기에 좋은 터라 생각하여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출가
인허스님은 속가의 처사님이 54세의 늦은 나이에 출가하는 모습을 보고 산문에 들어섰다. 그 뒤를 이어 스님의 막내딸이 보덕사로 출가를 하였다.
인허스님은 세수 50세 되던 해에 부안 청일암에 계시던 지승스님의 위패 상좌로 출가하였다. 스님이 재가 불자로 있을 때 내장사에서 법당 불사를 마치고 일주문 불사를 하려는데 꿈에 어느 노인이 나타나서는 아침 첫 차로 부안으로 가라고 일러주었다.
꿈도 참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내장사 주지스님인 금파스님이 오더니 이상한 꿈을 꾸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꿈 내용이 인허스님과 똑 같았다. 너무나 신기한 일이라 두 분은 노인이 꿈에서 시킨 대로 첫차를 타고 부안으로 향했고, 그 도중에 어느 거사가 스님에게 다가와서 “내가 보살님을 한 번 꼭 만나보려고 했는데 이렇게 차 안에서 만나게 되는군요?” 하고 반가워했다.
이에 스님은 “왜 나를 만나려고 했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거사가 “저희 집 주인이 문루를 내장사에 시주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스님은 그날 그 자리에서 불사를 시주하겠다는 권선을 받고 돌아와서 일주문 불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인허스님은 1961년 3월 15일 51세의 늦은 나이로 부안 지장암에서 해안 화상에게 사미니계 수계를 받았고, 다음해에 다시 부안 지장암에서 해안화상에게 비구니계를 수계하였다.
만행
스님은 계를 받고 난 뒤, 10년 동안 강원도를 무려 네 바퀴나 도는 만행을 계속하였다. 40세 때 오온(五蘊)이 개공(皆空)한 이치를 세속에 머물며 깨달았는데, 모다라니 기도를 일념으로 하여 효험을 보기도 했다.
스님은 ‘덕을 닦아야 한다. 덕을 닦으면 마음이 안정이 된다. 안정되면 모든 것을 놓을 수 있다. 그러면 그 속에서 진정 모든 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말씀을 수행 지침으로 삼고 있다. “공부를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하고 누가 물어보면 스님은 “마음을 열면 곧 성불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기 마음을 비우고 한량없이 넓혀 놓으면 바로 그것이 덕이다. 그러면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다. 고 강조한다. 또한 “마음을 비운 곳에 덕을 베풀면 그것이 성불의 길이 되고, 덕을 베풀었다는 생각을 내게 되면 그것이 곧 망상이다. 이와 같이 마음을 넓히면 비워지는 것이고, 공(空)하면 저절로 넓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집착을 버리고 덕을 닦아야 한다. 무심해야 하며, 무심한 가운데 부지런히 덕을 닦고, 그 무심한 가운데 덕을 베풀어야 한다.”고 말한다.
성불암에서의 방광
스님이 머물렀던 정읍 내징사 산내암자인 성불암 도량에서 3번의 방광이 있었다. 첫 번째 방광은 현재의 법당 자리를 환히 비추었는데 스님이 그곳을 파보았더니 반야선 같은 돌이 나왔다. 두 번째 방광은 그 돌 위에 부처님을 모시고 낙성식을 하는 날에 있었다. 세 번째 방광은 4월 7일 7시에 마치 영산홍 빛 같은 색으로 도량 전체를 환하게 비추었다고 한다.
백운이 이야기
스님이 만행을 다닐 때의 일이다.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여자아이를 데리고 와서 이름을 백운이라 지어주고 같이 생활하게 되었다.
하루는 스님이 관세음보살 모다라니를 써서 백운이에게 보여주며 ‘너와 내가 오늘 이것을 먼저 외우면 부처님한테 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서 ‘그 상은 네가 꿈꾸는 것에서 깨어나는 것’이라는 말이 무의식중에 스님의 입에서 나왔다.
그 일이 있은 지 일주일째 되는 날, 백운이가 잠을 자고 일어나더니 악몽을 꾸었다고 했다. 내용인 즉 자신의 뱃속에서 풍선이 커지는 것을 스님이 터뜨렸다는 것이다.
백운이는 그렇게 모다라니를 한 번 읽은 공덕으로 잃어버렸던 맑은 정신을 되찾게 되었다. 백운이는 원래 너무나 얌전하고 정직한 아이였는데, 집착이 강해서 정신이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누구나 집착만 버리면 그 자리가 바로 성불하는 자리인데 사람들이 그것을 못하여 성불을 하지 못하는 것이라며 스님은 안타까워한다.
성불암에 다니는 한 처사도 몇 해 동안 두통으로 고생을 하였는데, 일주일 동안 모다라니 기도를 하고 나서 씻은 듯이 병이 나았다.
인허스님은 2004년12월30일세수 94세, 법랍 43세로 성불암에서 입적했다.
스님의 수계제자로는 자인·자윤스님 등이 있다. 스님의 남편과 세 남매도 출가하였다.
내장사 성불암
전북 정읍 내장사 성불암은 인허스님이 1960대 초 창건했다. 대한불교조계종 24교구 선운사의 말사로 등록되어 있다.
정읍에서 내장사 방면으로 가다보면 내장사 못미쳐 호수가에 자리잡고 있다.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을 협시불로 봉안했다.
대웅전 한켠에는 미륵불이 조성되어 있으며 절로 들어서면 인허스님의 부도가 있다.
어린이 전용법당과 성불암장학회를 운영하며 지역의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봄에는 산수유꽃이 매우 아름답고 가을에는 내장사와 함께 단풍이 절경을 이루고 있다.
- 출처: 불교용어사전 https://studybuddha.tistory.com/1396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p. 62~67.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358.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140. 347.
- 불교신문(2018.10.26) [이진두의 고승전] <31> 해안(海眼)스님 https://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69827
- 정읍신문, 성불암 비구니 인허스님 ‘좌탈입망’ 화제 (2005년) http://www.jnewsk.com/news/articleView.html?idxno=16166
- 전북일보, 비구니 선사 영암당 인허 스님 입적 (2005년) https://www.jjan.kr/article/20050106141409
- 불교신문, 94세 비구니 인허스님 좌탈 정읍 성불암서 다비식 (2005년) *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63567
- 불교타임즈, 수행 열기로 가득찬 정읍 성불암 (2011년) https://bud1080.tistory.com/1579
- 전북일보, 비구니 선사 영암당 인허 스님 입적 https://www.jjan.kr/article/20050106141409
- 정읍 성불암 홈페이지: https://cafe.daum.net/brahmavihara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
인허(印虛)스님 | 본항목 | 인허스님(印虛, 1911~2004) | 印虛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인허스님(印虛,_1911生,_비구니)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속성 |
---|---|---|---|
인허스님(印虛) | 계민문중(戒珉) | ~의 일원이다 | |
인허스님(印虛) | 지승스님(智勝) | ~의 수계제자이다 | |
인허스님(印虛) | 내소사 지장암 | ~에서 출가하다 | 위패상좌( 位牌上佐) |
인허스님(印虛) | 해안스님(海眼)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사미니계, 비구니계 |
인허스님(印虛) | 내장사 성불암 | ~에서 입적하다 | 좌탈입망(坐脫立亡) |
지도
- 내장사 성불암 : 전라북도 정읍시 쌍암동 463
다른 비구니 스님
지식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