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은스님(慈恩, 1943生, 비구니)
자은(慈恩)스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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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 | 자은(慈恩) |
법호 | 대웅(大雄) |
속명 | 김경자(金敬子) |
출생 | 1943.04.03. |
출가 | 1963년 |
입적 | 2004.04.23. (세수62세, 법랍42세) |
사찰 | 용담사 경상남도 양산시 용당동 133-2 |
특이사항 |
목차
정의
대웅(大雄) 자은(慈恩)스님은 흐트러짐 없는 철저한 수행 생활을 했고, 양산 용담사 주지로 요사채, 대웅전 불사를 완공한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1943 | 경남 양산 출생 |
1963 | 범어사 대성암에서 무착(無着)스님을 은사로 출가 |
1964 | 해인사에서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
1974 | 범어사에서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
운문사 강원 사집과 수료 | |
1978 | 견성암에서 안거 성만 |
1980 | 범어사 대성암에서 안거 성만 |
1981 | 불영사에서 안거 성만 |
1982 | 지장암에서 하안거 성만, |
동화사 양진암, 유가사 수도암, 음성 미타사, 지장암, 대성암, 해인사 약수암 등 안거 성만 (제방 선원에서 16년 간 안거 성만) | |
1986 | 용담사 주지 취임 |
1995 | 요사채 50평 불사 완공 |
1997 | 대웅전 31평 불사 완공, 점안식 봉행 |
1997~2000 | 천수기도 일일 천독(千讀) 3년간 기도 회향 |
2004 | 2004.4.23. 용담사에서 입적(세수 62세, 법랍 42세) |
문중 | 계민문중(戒珉) |
수행지침 | 생활을 철저히 지키자. |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 성륜(性輪)·일지(日智) |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 선덕(善德, 10)→금룡(金龍, 11)→일조(日照, 12)→무착(無着, 13)→자은(慈恩, 14)→성륜(性輪, 15) |
활동 및 공헌
출생
대웅(大雄) 자은(慈恩)스님은 1943년 4월 3일 경남 양산시 하북면에서 아버지 김원주와 어머니 정계순 사이에서 2남 1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이며, 이름은 김경자이다.
출가동기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 나쁜 습관에 물이 든다며 밖에 못 나가게 하여 주로 집에서 지냈는데, 그 때문인지 책을 좋아하여 늘 책과 함께 살았다. 이때 친척이신 철웅 큰스님이 보관하고 있던 만공 큰스님의 필기 공책 설법집을 읽기도 하였다.
스님이 출가를 결심하게 된 것은 철웅 큰스님의 권유도 있었지만, 어느 날 친구가 빌려 준 사명대사 책을 읽고 난 뒤였다. 그러나 집에서 출가를 만류하는 바람에 단식을 하는 등 1년에 걸쳐 부모님을 설득하여 21세 되던 해인 1963년 대성암에서 무착스님을 은사로 출가하기에 이른다. 출가 당시 스님의 어머니께서 대중 공양을 위해 1년치 양식을 가지고 오셔서 쌀 한 가마니와 찰밥 공양을 하였다.
스님이 출가하기 1년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다음 해 스님마저 출가하자 스님의 어머니는 경봉, 우룡스님 밑에서 참선을 하며 살아갔다.
수학과 수행
1964년 스님의 나이 22세 되던 해, 해인사에서 자운화상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32세 되던 해인 1974년 범어사에서 동산화상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하였다.
스님이 출가한 직후 범어사 대성암에는 54명 정도의 사부대중이 정진 중이었다. 행자 때 자원하여 공양주를 혼자서 맡았는데, 대중이 많아 쌀 한 가마니를 3일 만에 먹었다.
또한 산철에는 만성스님을 뵈러 오는 스님들이 많아 하루에 여섯 번씩 밥을 해야만 했다. 밥을 할 때마다 불을 때서 해야 하므로 번거롭기 그지없었지만 힘들다는 생각조차 없이 객스님들에게 공양을 지어 올렸다. 그렇게 힘들게 1년 동안 공양주를 살고 나서 일주일을 앓아누웠다. 은사스님께서는 그런 스님에게 “행자 때 복을 지어서 평생을 산다. 너는 잘하고 있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스님이 소임을 살면서 여기저기 잔심부름으로 불려 다니자 은사스님께서 공부가 우선이고, 소임이 있다면 나중의 일이라며 공부에 좀 더 전념할 수 있도록 많은 배려를 해주셨다.
공양주를 살고 난 스님은 돌림 소임을 살면서 큰 방에서 1년간 공부를 할 수 있었다. 하루에 2 시간 씩만 자면서 출가 전에 배우던 『초발심자경문』을 끝까지 배우고 염불과 참선 등을 공부하려고 많은 애를 썼다. 또 이 기간 동안 입방선을 빠져 본 적이 없었다.
잠을 안 자고 공부하는 스님이 안쓰러웠는지 한번은 은사스님께서 스님을 큰방으로 불러 놓고 대중 공사를 붙여 “조그만 아이도 저렇게 공부하려고 애를 쓴다.”며 대중을 경책하신 일도 있다.
보문품[1] 1만 독
그러나 너무 무리하게 공부를 하는 바람에 스님은 상기가 올라 10년을 고생하였다. 은사스님께서 석남사의 행자들이 상기가 올랐을 때 보문품을 읽으며 고쳤다고 비책을 일러주셨지만, 스님은 은사스님 말씀을 그대로 실행하지 않아 꾸중을 듣기도 했다.
서울 보문사에서 노스님을 2년간 시봉하면서 『치문』을 배우고 아침저녁으로는 기도 끝에 선불장에서 세등(世燈)스님의 가르침을 받으며 공부를 하였다. 그 뒤 운문사 강원에서 3개월가량 사집을 공부하는 동안 당시 강원에 유행중인 옴이 전염될까 걱정이 되어 강원을 나와 은사스님 밑에서 노스님을 시봉하였다.
그러나 스님의 몸이 워낙 약해서 휴양차 상용스님이 계신 영주로 가서 16년 동안 선방에 안거를 하러 다녔다. 상용스님께서 스님을 보자마자 “아직 죽지 않고 살았네!” 라고 말했을 정도로 허약하고 영양실조에 걸려 있었다. 밥을 한 술 먹으면 물을 열 술 마셔야 했고, 시력이 떨어져 사물이 뿌옇게 보일 지경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은사스님께서 오셔서 신심이 없다고 꾸중하시자 처음에는 10번씩 보문품을 독송하다가 나중에는 30독, 50독, 100독으로 차츰 독송하는 횟수가 늘었고, 3년이 되던 해는 1만 독을 하게 됐다. 하루에 1만 독을 끝내는 날에는 얼굴이 새까맣게 변했다.
그러던 어느 날은 햇볕이 느껴져서 감탄하듯 말했다. “스님, 스님, 오늘은 햇볕이 나네요!”
그러자 은사스님께서 툭 한 말씀하셨다. “매일 햇볕이다.”
기도 중 스님의 몸에서 엉클어 진 수세미가 수없이 나왔으며, 어느 날 꿈에는 상용스님이 가사 장삼을 수하시고 스님의 몸을 태우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왜 저를 태웁니까?” 하고 물으니까 상용스님은 “너는 태워야 한다.”라고 하시면서 스님을 계속 태웠는데 몸이 다 탄 뒤 짧은 막대기 하나만 남아서 빨갛게 달구어져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때 그 막대기마저 타버렸어야 하는데 업이 덜 녹아서 타다 만 것 같다고 스님은 말한다.
그 이후로 차츰 병세가 호전되어 37세 되던 1979년에는 ‘비실비실’이라는 별명을 들으면서 대성암에서 철을 났지만, 아무래도 완치가 되지 않은 병 때문에 중간에 나오게 되었다.
그 뒤 철웅 큰스님 밑에서 공부를 하면서 병세가 많이 호전되어 파계사 성전에서 하안거를 성만하였다. 그리고 1980년 스님의 나이 38세 되던 해 해인사 약수암에서 안거 중일 때, 배우 김지미 주연의 영화 ‘비구니’ 제작 반대운동으로 엄청난 인파가 몰리는 바람에 밀리는 군중에 깔려 다리를 다치는 불상사를 겪기도 하였다.
39세 되던 해인 1981년 견성암에서 동안거를 나는데, 그때 스님의 나이가 너무 어려 보였는지 어른 스님들이 다각(茶角)[2]을 맡도록 하였다.
제방 선원에서 안거
1982년 지장암에서 하안거를 성만한 후, 다시 동화사 양진암에서 동안거와 하안거를, 유가사 수도암에서는 3년 결사를 들어갔는데 한 철 후에 파하는 바람에 다시 불영사, 음성 미타사, 지장암, 대성암 등 제방 선방에서 안거를 하였다.
용담사로 오다
1986년 스님이 44세 되던 해, 현재의 용담사를 500만 원에 구입하여 들어왔다. 처음 스님이 왔을 때 50명 정도 찾아오던 신도들이 1년 뒤에는 3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스님은 그 후 법당 13평, 요사 9평 1채와 8평 1채가 있던 것을 10년 뒤 불사를 새로 하여 1995년 요사채 50평을 완공하고, 1998년 법당 31평을 완공하여 9월 20일 점안식을 할 수 있었다.
원래 용담사는 탑곡사라는 절이 있던 터로서 주변 마을 사람들이 탑골이라 불렀던 곳이다. 스님은 구로 관음포교원의 일면스님 법문 테이프에서 ‘천수다라니를 하루에 일천 독讀을 하면 이루지 못할 소원이 없다.’는 법문을 듣고 법당 터를 닦으면서 기도를 시작하였다.
스님은 천수기도를 계속 하고 있는데 만 3년이 되자 하루에 일천 독을 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입적
2004년 음력 4월 23일 스님은 용담사에서 세수 62세, 법랍 42세로 세연을 접었다. 스님의 수계제자로는 성륜(性輪)·일지(日智)스님이 있다.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뜨란출판사, 2007, pp.198~203.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390.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p. 341, 343.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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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은(慈恩)스님 | 본항목 | 비구니 | 자은스님(慈恩, 1943~2004) | 慈恩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자은스님(慈恩,_1943生,_비구니)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속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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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은스님(慈恩) | 계민문중(戒珉) | ~의 일원이다 | |
자은스님(慈恩) | 무착스님(無着) | ~의 수계제자이다 | |
자은스님(慈恩) | 범어사 대성암 | ~에서 출가하다 | |
자은스님(慈恩) | 자운스님(慈雲)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사미니계 |
자은스님(慈恩) | 동산스님(東山)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비구니계 |
자은스님(慈恩) | 범어사 대성암 | ~에서 수행하다 | |
자은스님(慈恩) | 양산 용담사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주지(감원) |
자은스님(慈恩) | 양산 용담사 | ~을(를) 정비하다 | |
자은스님(慈恩) | 안거 | ~을(를) 성만하다 | 부산 범어사 대성암(청룡동), 울진 불영사, 평창 월정사 지장암, 대구 동화사 양진암(도학동), 유가사 수도암, 음성 미타사, 평창 월정사 지장암, 부산 범어사 대성암(청룡동), 합천 해인사 약수암 등 |
지도
- 용담사 : 경상남도 양산시 용당동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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