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운달스님(雲達, 1942生, 비구니)

biguni
이병두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9월 18일 (수) 07:02 판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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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운달(雲達)스님은 중앙종회의원, 동학사 미타암 주지, 대한민국 비구니회 원로의장단 부회장을 엮임한 명사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42 광주 출생
동학사에서 지현(智玄)스님을 은사로 출가
1964 서울 청룡사에서 무불(無佛)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68 동학사 강원 졸업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71~1973 운문사 강원 중강[1]
운문사 강원 동문회장
1972 운문사 강원 졸업
1973 동국대학교 행정대학원 1년 수료
1974 동학사 미타암 불사
1996~2003 전국비구니회 충남 남부지회장 역임
1998~2000 중앙종회의원 및 동학사 미타암 주지
1998 중앙종회의원 12ㆍ13ㆍ14대 역임
2003 전국비구니회 섭외부장 역임
2004 미타암 주지 및 중앙종회의원
대한불교조계종 종립학교 관리위원
2005 전국비구니회 총무부장 역임
2005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비구니 종책특보 역임
2008 전국비구니회 부회장
2009 민주평화통일자문위원회 상임위원(현)
2011 대한불교조계종 화쟁위원
2016 전국비구니회 원로의장단 차석 부의장
2021 전국비구니회 원로의장단 부의장
2021 비구니 명사 법계[2] 품수
문중 삼현문중(三賢)
수행지침 의무를 다하고 권리를 찾아라.
생활신조 바르고 정직하게 살아라.
상훈 운문사 강원 졸업 시 종정상, 공로상 수상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우림·다래·진공·부동·종남·유곡·계명·불원·벽상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대은(大恩, 7)→도길(道吉, 8)→인정(仁貞, 9)지현(智玄, 10)운달(雲達, 11)→벽상(碧常, 12), 시화(始華, 12), 우림(牛林, 12), 진공(眞空, 12), 유곡(遊谷, 12), 철우(哲祐, 12), 금어(金魚, 12), 우성(宇晟, 12), 다래(茶來, 12), 부동(不動, 12), 수초(守初, 12), 계명(鷄鳴, 12), 현수(玄守, 12), 동성(東星, 12)

활동 및 공헌

출생

[중앙종회에서]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p195
[제8차 세계여성불자대회]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p196
[운달스님]
사진출처:불교신문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13764
[미타암전경]
사진출처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ohmark/220541031472)

금용 운달(雲達)스님은 1942년 음력 12월 9일 광주시에서 아버지 박문영과 어머니 정납준 사이의 4남 4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이며, 이름은 박경화이다.

태몽

스님이 태어나기 전인 일제시대 때 아버지는 광주 지원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어느 날 일본인 지원장이 꿈을 꾸었다. 큰 호랑이 한 마리가 법원 안에 들어와 으르렁거리고 있었으나 아무도 그 호랑이를 제지하지 못해 쩔쩔매고 있었다. 그런데 스님의 아버지가 청사 안으로 들어와 호랑이를 품에 가뿐히 안고 나가는 것이었다.
이에 일본인 지원장은 스님의 아버지가 장차 큰일을 할 아들을 낳을 것이라며 직원들에게 잘 지켜보라고 했다고 한다. 마침 그때 스님의 어머니가 잉태하여 딸을 낳았는데, 바로 그 분이 운달스님이다.

출가동기

예사롭지 않은 태몽과 함께 태어난 스님은 어렸을 때부터 여느 아이들보다 특별한 면이 많았다. 매사에 대범하고 여자아이들보다 사내아이들과 어울려 놀기를 즐겨하고 항상 대장 노릇을 하여 여장부라고 불렸다. 이렇게 활달하고 거침이 없었던 스님은 여고시절 방학을 맞아 남해 화방사로 공부하러 갔다가 불교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화방사 주지스님께서 어느 날 말씀하셨다. “학생은 누구이며, 나는 누구인가? ‘나’라는 존재를 깊이 한번 생각해본 적이 있느냐? 보통 사람들이 모두 나는 어떻고 하면서 말은 하지만 정작 ‘나’에 대해 자세히 일러보라면 대답하는 자가 없다.” 주지스님의 말씀을 듣고 스님은 ‘나는 과연 누구인가?’ 하고 생각해보았다.

스님은 아무리 깊이 생각해봐도 도무지 해답을 얻을 수가 없었다. 이에 스님은 기회를 봐서 입산하여 자신의 근원에 대한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출가

그 당시 시국은 3·15 부정선거 후 4·19혁명과 5·16군사정변이 잇달아 일어나 어수선하고 뒤숭숭하기 짝이 없었다. 스님은 4·19 혁명에 가담하였다가 경찰에 붙잡혀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며칠 뒤 경찰서에서 훈방 조치로 풀려난 스님은 곧바로 계룡산 동학사에 찾아가 부처님께 귀의하기에 이른다. 1963년 지현스님을 은사로 삭발 출가하였으며, 출가한 곳이 강원이기에 그해에 강원에 입학하였다.

너나없이 모두가 힘든 시절, 절 살림이 궁핍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어려운 절 살림에 스님은 사무실 소임을 보았다. 당시 사무실에서 하는 일이란 고작 기안을 작성하여 공문을 만드는 일이 전부였다.

삼천 배 절 기도 수행

그 후 동학사에서 행자 생활을 하던 중 은사스님의 부름을 받고 지리산 도솔암에서 21일간 하루 삼천배 절 기도를 시작하였다. 공양주[3] , 채공[4]을 살면서 삼천 배를 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허리는 금방이라도 끊어지는 것 같고 하루 24시간은 짧기만 했다. 틈나는 대로 산에 가서 나무도 해야 하고, 장에 가서 쌀도 팔아 와야 하니 딴 생각을 할 겨를이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른들은 끊임없이 야단을 치셨다. 고무신을 잘 떨어뜨린다고 숱하게 꾸중을 들었고, 심지어는 수채 구멍에 밥 한 톨이라도 흘리면 반드시 주워 먹어야 했다. 이렇게 힘들게 21일 기도를 마쳤고, 출가의 목적을 찾고자 지리산 대원사에서 ‘나’라는 존재와 고군분투하며 몸 조복을 받기 위하여 매진하였다.

꿈속에서 운달 불명을 받다

1964년 서울 청룡사에서 무불스님을 계사로 스님을 비롯해 다섯 명의 사미니 스님들이 수계하였다. 그때 무불화상으로부터 4명은 불명을 받았는데, 스님은 받지 못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은사 지현스님께서 잠깐 잠이 든 사이 비몽사몽 중에 ‘지현은 밖으로 나와 이름을 받아라!’라는 큰 소리가 들려 밖으로 나가 보니 구름 덮인 하늘에서 누군가 팔만 내민 채 ‘내가 박경화에게 세상에서 가장 좋은 운달’이라는 이름을 주려고 하니 받아라!’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황망한 중에도 은사스님께서 무슨 ‘운’자냐고 물으니 구름 ‘운(雲)’이라고 하기에 이어서 또 ‘달’자를 물으려는 찰나 문소리에 그만 꿈에서 깨어나고 말았다.

꿈 이야기를 하시면서 은사스님은 구름 ‘운(雲)’자에 통달할 ‘달(達)’자를 합해 ‘운달’이란 법명을 주셨다. 운달산에 머물며 김용사를 최초로 창건한 분이 운달조사였다.

운달스님은 1968년 동학사에서 사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자운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하였다. 1972년 운문사 대교과를 졸업하고, 1971년부터 1973년까지 운문사 중강과 운문사 불교 전문 강원 동문회장을 역임하였다. 대교과 졸업 때 종정스님 표창장과 본사 주지로부터 공로상을 받았으나, 스님은 다른 사람이 받아야 할 상을 대신 받은 것 같아 크게 부끄러웠다고 겸허히 말한다.

금생성불(今生成佛)

주어진 삶의 목표를 ‘금생성불(今生成佛)’이라고 생각하고 스스로를 다그쳤는데, 스님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부지런히 정진했다면 조그마한 햇빛이라도 보게 되었을지 모르는데 계속 동학사에서 소임을 살다 보니 선방과는 길이 멀었다. 게다가 해태심이 일어나고, 스님이 원래 생각했던 산사도 아니고, 대화는 잘 통하지 않는 등 모든 것이 답답하기만 했다. 너무나도 답답한 마음에 스님은 파계사 성전암으로 성철 큰스님을 찾아가 여쭈었다.

“큰스님, 어떤 것이 승입니까?”

“‘중’자를 쓸 때 작대기를 아래로 내리면 중이 되고 위로 올리면 종이 된다. 부처님 법 따라 사는 자는 중이 되고 그렇지 못하면 종노릇밖에 못한다.”

큰스님의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과연 중은 중으로 살아야 한다. 모자를 써도 중이고, 벗어도 중이니 부처님 법 따라 사는 중으로 살아야 한다.’는 깨우침이 왔다. 이에 스님은 다시 한 번 다짐하고 재발심을 일으켰다.

1973년 동국대학교 행정대학원에 입학하여 1년 수료하였으며, 1974년부터 미타암 불사를 계속하였다.

운달스님은 미타암 불사를 크게 이루었고, 양로원 등 불우시설을 후원하며 대전 불교포교에도 앞장섰다. 또한 불교 발전에 일익을 담당하고자 1998년 종회의원이 되었고, 지금도 많은 활약을 하고 있다.

은사스님과 30년 동안의 긴 세월을 함께 지내다가 계유년(1993년)에 은사스님의 입적을 보고 ‘인생이란 무상 그 자체’인 것을 재삼 실감하였다. 스님은 맡은 바 직무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불철주야 용맹정진하고 있다.

종회의원이며 명사 법계 품수

1998년 비구니 종회의원직을 맡아 종단 실정의 이모저모를 보면서, 이 시대에 살아갈 길은 도(道)를 깨치는 일 뿐임을 자각하였고 때가 되면 소리 없이 자취를 감출 생각이다. 2004년 운달스님은 비구니 종회의원 및 동학사 미타암 주지로 수행 정진 중이다.

2016 전국비구니회 원로의장단 차석 부의장 추대되고 2021 현재 전국비구니회 원로의장단 부의장으로 비구니 명사 법계를 품수했다 .

명사 법계는 <법계법>에 따라 승랍 40년 이상 명덕 법계를 수지한 비구니 스님을 대상으로 특별전형을 통해 법계위원회 심의와 중앙종회 동의, 원로회의 심의를 거쳐 품서된다. 비구니 명사는 비구 대종사에 해당하는 법계로 비구니 스님으로서 받을 수 있는 가장 높은 법계다. 종단 수행력과 지도력을 상징하는 최고 법계이기도 하다.

참고자료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운달(雲達)스님 본항목 비구 운달스님(雲達, 1942~ ) 雲達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운달스님(雲達,_1942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운달스님(雲達) 삼현문중(三賢) ~의 일원이다
운달스님(雲達) 지현스님(智玄) ~의 수계제자이다
운달스님(雲達) 공주 동학사 ~에서 출가하다
운달스님(雲達) 무불스님(無佛)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운달스님(雲達) 자운스님(慈雲) ~(으)로부터 계를 받다 비구니계
운달스님(雲達) 명사법계(明師法階) ~을(를) 품수하다
운달스님(雲達) 운문사 강원(승가대학)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동문회장
운달스님(雲達) 동학사 미타암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운달스님(雲達) 동학사 미타암 ~을(를) 정비하다
운달스님(雲達) 전국비구니회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부회장, 원로회 부의장
운달스님(雲達)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상임위원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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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비구니 최고의 법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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