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스님(大愚, 1949生, 비구니)
대우(大愚)스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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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 | 대우(大愚) |
법호 | 정지(正智) |
속명 | 이종현 |
출생 | 1949.04.25. |
출가 | 1963년 |
입적 | |
사찰 | 남화사 충북 괴산군 사리면 수암리 363-2 |
특이사항 |
정의
정지(正智) 대우(大愚)스님은 수원 봉녕사 강사로 묘엄스님에게 전강을 받고 중국 남경대에서 율학을 공부한 후 봉녕사 금강율학승가대원장으로 연구에 매진한 괴산 남화사 주지인 대한민국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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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 | 서울 출생 |
1963 | 가섭사에서 호관(好觀)스님을 은사로 출가 |
1965 | 가섭사에서 월산(月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
1967 | 동학사 강원 승가대학 입학 |
1974 | 범어사에서 석암(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
동학사 강원 졸업, 중앙교육원 6기 수료,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수료 | |
1975~1984 | 전국 선원 10하안거 성만 |
1984 | 봉녕사 강원에서 중강[1] |
1987~1996 | 봉녕사 강원 강사 역임 |
1992 | 봉녕사 묘엄스님에게 전강(傳講)받음 |
1993 |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관리자과정 수료 |
1998~2006 | 중국 남경대 석사과정 유학 |
2000 | 행자교육원 10기 교육도감, 습의도감 교수사 역임 |
2006 | 충북 괴산 남화사 주지 |
2008 | 봉녕사 금강율학승가대학원장의 소임, 봉녕사 금강율원서 연구 매진 |
2020 | 현재 괴산 남화사 주지 |
문중 | 법기문중(法起) |
수행지침 | 청정한 계율(戒律) |
저서 및 작품 | 〈기신론 소고〉(논문집 『수다라』에 수록) |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 진응(眞應)·종화(宗和) |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 정자(淨慈, 8)→원심(圓心, 9)→성안(成安, 10)→호관(好觀, 11)→대우(大愚, 12) |
활동 및 공헌
출생
정지(正智) 대우(大愚)스님은 1949년 4월 25일 서울 주교동에서 아버지 이희익과 어머니 최장록 사이에서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이며, 이름은 이종현이다.
불교적 가풍
스님은 아직 어린 나이인 8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당시 불교학자로 이름이 높았던 아버지와 함께 생활하며 성장하였다. 스님은 11세 때까지 불교에 대하여 아무런 관심도 없다가 국민학교 5학년 때 불현듯 사람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라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그 의문은 잠깐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마는 것이 아니라 시도 때도 없이 끊임없이 일어났는데, 그럴 때마다 어린 가슴은 터질듯이 답답하기만 하였다. 부친께서 불교신문 편집국장으로 재직 중이었기에 스님은 자연스럽게 불교신문에 연재되는 동화를 읽으며 지냈다.
추담스님을 뵙고 출가를 결심하다
그러던 어느 날 당시 법주사 주지인 추담스님이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스님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정성껏 반찬을 만들어 추담스님에게 공양을 올렸다. 그러나 스님은 아무 것도 드시지 않고 간장 한 가지만으로 공양하였다. 그 모습은 어린 아이에게 큰 충격과 감동으로 와 닿아 출가를 결심하게 만들었다. 다음날 아버지께 스님이 물었다. “여자도 출가할 수 있나요?” 아버지가 출가를 할 수 있다고 대답하자 스님은 “그러면 저도 출가를 하겠어요.” 하고 결심을 밝혔다. 그러나 아버지는 “스님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라며 허락하지 않았다.
출가
그러나 계속해서 아버지를 졸라 허락을 받아낸 스님은 국민학교를 졸업한 뒤 아버지가 서울에 있는 작은 암자를 소개시켜 주었으나 스님들이 많은 곳으로 출가하고 싶다고 하여 속리산 법주사 수정암으로 출가를 하게 되었다. 그때가 1963년 7월, 스님 나이 15세 되던 해 여름이었다. 무남독녀로 어려서 외롭게만 자랐던 스님에게 대중이 많은 수정암은 그야말로 사람이 사는 곳이었다. 또한 절집의 모든 것들이 새롭고 신비스럽기만 하였다. 타고난 성격이 신명이 많고 장난기가 많았던 터라 마치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수정암은 스님 세상만 같았다. 당시 스님이 얼마나 개구쟁이였던지 은사스님이 하루에 한 번씩 바뀔 정도였다.
은사인 호관스님을 만나다
한 달을 그렇게 지내고 있는데 당시 음성 가섭사 주지로 계시던 호관스님이 수정암에 오셨다. 호관스님은 어른들과 말씀을 나누신 후 행자인 스님에게 같이 가자고 하셨다. 다른 스님 같았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는데 호관스님과는 인연이었는지 두말 없이 따라나서게 되었다. 그렇게 호관스님과 스승의 인연을 맺고 마포 극락암에서 삭발을 한 뒤 스님은 가섭사로 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 산길이 얼마나 멀던지 몹시 힘겨웠지만 스승님은 행자를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앞장서 걸어가 버리셨다. 스님의 고된 행자 시절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새벽예불로 시작 되는 하루 일과는 너무도 힘들었다. 호랑이보다 더 무섭게 몰아붙이던 은사스님이 그때는 너무나 야속하여 원망도 많이 하였지만, 그 시절이 지금껏 스님을 버텨오 게 한 가장 큰 힘이 되고 있음에 스님은 늘 감사히 생각한다.
동학사 강원 입학
그렇게 고된 행자 생활을 한 지 5년 만에 스님은 동학사 강원으로 가게 되었다. 그때 스님 나이 18세에 불과했지만 늦었다는 생각에 마음은 조급하기만 했다.
스님은 강원 생활을 참으로 알뜰히 보냈는데 경전보기를 좋아하여 공부를 열심히 하였다. 당시 도반들인 일연, 지형, 상덕, 일초스님 등도 모두가 공부하기를 좋아하는 학구파들이었는데, 스님에게는 더할 수 없이 소중한 인연들이었다. 그때 도반들은 강원을 졸업하면 학교를 세우자는 말도 곧잘 했는데, 그 영향 때문인지 지금은 다들 하나같이 강단에서 후학을 가르치는 강백이 되어 있다. 늘 매사에 경전 읽기에 매진하였던 스님을 눈여겨보신 호경 강사스님은 졸업 후 남아서 경전을 재독할 것을 권유하셨다. 평소에도 『화엄경』은 그 수량이나 내용이 방대하여 세 번 정도는 보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던 터라 도반들이 다 떠난 강원에서 스님은 몇 개월을 더 머물게 되었다. 그러다가 좀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 보자는 도반스님들의 권유로 경전을 덮고 강원을 떠났다. 배움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학교에 진학하고자 했을 때 은사스님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은사스님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스님은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선방을 택하다
당시 일대 강백이었던 호경 강사스님이 선방으로 떠나지 못한 것을 후회하던 모습이 떠올랐고, 글공부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에 스님은 그토록 하고 싶었던 공부에 대한 욕심을 접고 선방으로 향하게 된다. 결국 마지막 해결책은 참선뿐이라는 생각에 스님은 마음을 단단히 꾸리고 첫 철을 내원사에서 보냈다.
상기병을 극복하다
선방 생활은 너무도 재미있었지만 초심자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하루라도 빨리 성불하고 싶은 조급한 마음에 그만 상기가 오르게 되었고, 한 번 오른 상기는 내생까지 가져간다는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스님의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허탈하였다. 그러나 거기서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상기는 참선방에서 내려야 한다는 말에 계속 선방을 전전하였다. 공양주 등 후원 소임을 살고 하루 2천배씩 절 기도를 하면서 생각을 자꾸 밑으로 내리는 공부를 하였다. 그러자 어느 날 바위가 발끝으로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상기가 반쯤 내리는 것이었다. 그 후로 계속 결제를 다니다 해인사에서 상기가 완전히 내렸는데, 그때 같이 공부한 도반스님들의 도움이 너무도 컸다. 그 고마움을 스님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내원사에서 3년 결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때만 하여도 비구니로서는 첫 결사였던 만큼 공부도 정말 열심히 하였다. 그러나 스님은 3년간 산문 밖 출입을 하지 않은 것 외에는 아무것도 내보일 게 없다며 겸손한 말씀으로 일관한다. 결사가 끝난 후에도 스님은 내원사로 돌아와 공양주 소임을 한 철 살았는데, 3년 동안 외호해준 대중들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스님은 전생에 공양주라고 할 만큼 신명나게 소임을 다했다. 대중들과 함께 한다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계율 공부
그러나 스님의 마음 한구석에는 늘 못다 한 공부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었다. 특히 강원에 있을 때부터 율에 대한 관심은 남달랐다. 수행자라면 철저한 계행이 있어야 하는데 오늘날 승가가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은 율이 없기 때문이라는 생각에 전수자는 못 되더라도 지키는 사람은 되어 야겠다고 결심하였다. 그 이후로 선방을 다니면서도 해제 때 계율 특강이 열리는 곳이 있으면 빠짐없이 참석하여 강의를 들었다. 비구니를 대상으로 한 첫 계율 특강이 진관사에서 열렸을 때는 물론 운문사와 봉녕사의 계율 특강도 놓치지 않았다. 1974년 비구니계 수계 이후 마음이 느슨해지면 범어사에서 열리는 수계산림에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참석하여 계율을 듣기도 했다. 50권 남짓 되는 분량의 『율장집』을 한 질 사놓고 네댓 명의 도반들과 함께 일타 큰스님께 수학 허락을 받아냈지만, 그 계획은 일타 큰스님의 건강 악화로 무산되어 스님을 안타깝게 했다. 그럴 즈음 봉녕사에서 7일 동안 계율 특강이 열렸다. 스님은 율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터라 열심히 들었는데 그 모습을 눈여겨보신 묘엄스님이 봉녕사에서 중강을 맡아달라고 하셨다.
수원 봉녕사에서 중강
이에 스님은 자격이 없다며 사양하자 묘엄스님은 좋은 사상으로만 가르치라며 재차 부탁하셨고, 스님은 대신 묘엄스님께 율장을 가르쳐 달라고 청을 드려 허락을 받았다. 율장을 배운다는 기대와 학인들을 가르친다는 의무감을 갖고 스님은 1984년 10월부터 중강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학인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스스로의 공부에 부족함을 느낀 스님은 그때부터 밤낮으로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그런 시간들이 2년을 넘으면서 치문을 완전히 독파해야겠다는 결의로 이어졌다. 스님은 봉녕사에서 4년 동안 『치문』만을 가르쳤다. 그것은 한 가지라도 완전히 내 것으로 소화해야겠다는 스님의 투철한 자세에서 비롯되었다.
묘엄스님께 전강을 받다
스님은 1992년 중강을 시작한 지 8년 만에 묘엄스님에게 전강을 받고, 그 후로도 몇 해를 더 학인들과 함께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언어의 한계가 느껴지기 시작하였다. 학인들에게 선의 도리를 가르쳤지만 그것은 스스로가 체험하고 터득한 공부가 아니라 남의 소리였던 것이다. 깨닫지 못한 사람이 깨달음에 대하여 말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모순이고 잘못된 것인지를 절감면서 스님은 다시 선방행을 결심하게 된다. 처음부터 강단에 끝까지 남을 생각은 없었던 터라 미련도 아쉬움도 없었다.
다시 선방으로 향하다
1996년, 마지막 삶은 선방에서 회향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살아왔기에 어떤 일이 있어도 떠나리라 생각했다. 윤회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그 길 밖에 없음을 새삼 느끼게 된 이유에는 또 하나의 동기가 있었다. 『능엄경』을 세 번째 가르치던 때였다. 어느 날 생과 사가 하나로 압축되어 나타나는 꿈을 꾸게 되었는데, 그 꿈이 너무나 끔찍하여 깨어난 후에도 진저리가 쳐질 정도였다. 더 이상 강단에 머물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학장스님을 생각하면 죄송한 마음이 많았지만 사람이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깨달음을 이루기 위한 능력과, 사람이 아무리 자유로워도 깨달음을 위한 자유에 미칠 수 없음을 재확인하고, 1997년 4월 29일 12년의 강단생활을 접고 스님은 봉녕사를 떠나 선방으로 향하였다. 결제철 만큼은 죽기 살기로 좌복을 지키고 싶었던 스님의 소망은 내놓을 것 없는 속살림에 어른 대접만 받는 것 같아 마음은 늘 불편했다. 내원사와 백흥암에서 정진하던 스님은 강단을 떠난 지 3년이 되자 접어두었던 율에 대한 미련이 다시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이때 동학사에서 강사 제의가 들어왔다. 그러나 율장을 번역하려면 중국을 갈 수밖에 없는 현실 때문에 고민하고 있을 즈음 한 제자의 권유로 중국행을 결심하였다.
중국 남경대 석사 과정 입학
1999년 3월 48세에 스님은 좀 더 넓고 깊은 율을 연구하기 위하여 중국으로 떠났다. 천진사범대학과 북경대학교의 어학연수과정을 거쳐 남경대학교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배움에는 나이가 상관없겠지만 조금 늦은 듯한 유학길은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스님은 어느 젊은 사람 못지않게 배움에 대한 열의가 대단하였다. ‘도선율사의 계율 사상’을 주제로 2006년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8년간의 유학은 율장을 보는 안목을 열어주었다.
중국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대우 스님에게 묘엄 스님은 2008년 율맥을 전하고 봉녕사 금강율학승가대학원장의 소임을 맡겼다. 그로부터 4년, 가장 존경하는 대학자이자 스승인 묘엄 스님아래서 율원의 학인들과 밤새워 율장을 연구했다.
청정한 계율이 올곧게 뿌리 내리기를
이 땅에 청정한 계율이 올곧게 뿌리를 내려서 모든 수행자들이 혼탁한 중생세계에 한 송이 아름다운 연꽃으로 피어나기를 스님은 평생의 수행력으로 발원하고 있다.
대우스님은 2022년 현재 괴산 남화사 주지로 있으며 수계제자로는 진응(眞應)·종화(宗和)스님이 있다. .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p. 170-177.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64.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365.
- 충청타임즈, 괴산 남화사서 서가모니 석불좌상 점안법회(2015년) http://www.cctimes.kr/news/articleView.html?idxno=424610
- 법보신문, ‘괴산 남화사 주지 대우 스님’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94127 (2016.09.05.)
-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daeuseu/
- 금강신문, 나의 스승 나의 은사2_종달 이희익 https://www.ggb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0556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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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大愚)스님 | 본항목 | 대우스님(大愚, 1949~) | 大愚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대우스님(大愚,_1949生,_비구니)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속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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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스님(大愚) | 법기문중(法起) | ~의 일원이다 | |
대우스님(大愚) | 호관스님(好觀) | ~의 수계제자이다 | |
대우스님(大愚) | 음성 가섭사 | ~에서 출가하다 | |
대우스님(大愚) | 월산스님(月山)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사미니계 |
대우스님(大愚) | 석암스님(昔巖)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비구니계 |
대우스님(大愚) | 대한불교조계종 행자교육원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교수사 |
대우스님(大愚) | 괴산 남화사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주지 |
대우스님(大愚) | 안거 | ~을(를) 성만하다 | 전국 선원 |
지도
- 금강암 : 충북 괴산군 사리면 수암리 3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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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주를 보좌하는 소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