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능스님(法能, 1932生, 비구니)
법능(法能)스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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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 | 법능(法能) |
법호 | |
속명 | 신정자(申貞子) |
출생 | 1932.02.04. |
출가 | 1956년 |
입적 | 2021.11.4(음) |
사찰 | 천개사 서울특별시 서초구 원지동 441 |
특이사항 |
목차
정의
법능(法能)스님은 남고사에서 우일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서울 천개사를 창건한 대한민국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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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 | 전남 목포 출생, 대구신학대학 졸업 |
1956 | 남고사에서 우일스님을 은사로 출가, 영봉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
1959 | 송광사에서 석암(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원효사 주석 |
1968 | 천개사 창건 및 주지 |
2004 | 천개사 주지 |
2021.11.4(음) | 천개사에서 입적 |
문중 | 백양사(白羊寺)문중 |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 지훈(志訓)・계수(桂修) |
문중계보 | 우일(又一)→법능(法能)→지훈(志訓), 계수(桂修) |
활동 및 공헌
출가
법능(法能)은 1932년 2월 4일 전남 목포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이름은 신정자(申貞子)이다. 대구 신학대학을 졸업한 스님은 1956년 나이 25세에 남고사에서 우일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그리고 영봉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였고, 1959년 송광사에서 석암(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하였다.
원효사 창건
스님은 은사스님과 함께 도봉산 원효사를 창건하고 그곳에서 수행 정진하였는데, 도봉산이 유원지로 개발되면서 사람들이 몰려들어 수행에 방해가 되자 조용한 수행터를 찾아 청계산 자락으로 거처를 옮겼다.
천개사를 창건
1968년 법능스님은 은사스님의 소개로 한 보살을 만나 평당 1,500원을 주고 지금의 천개사터를 사서 작은 토굴을 짓고 살기 시작하였다. 1972년에 그린벨트가 생겨나면서 천개사 주변 지역 또한 개발이 제한되었고 덕분에 천개사는 개발의 광풍을 피한 채 지금까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지켜오고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천개사의 신도는 많이 늘어났지만 옛집이 낡아서 비가 오면 지붕이 새기 일쑤였다. 이에 신도들의 요청에 따라 불사가 시작되었고 10여 년이 흐른 뒤 마무리할 수 있었다. 불사 전에는 상좌와 손상좌들 모두 선객들이기 때문에 해제에만 머물렀는데, 지금은 손상좌들이 돌아가면서 소임을 보는 중이다.
몇 년 전 인근 강남 지역의 그린벨트가 해제되면서 천개사 주변 또한 개발이 시작되어 현재는 백여 미터 앞까지 상가들이 들어찼다. 그러나 천개사는 아늑한 산속에 자리하고 있어 속세의 번다함에 물들지 않고 여전히 고요함을 유지하고 있다.
천개사는 잠시 머물기만 해도 부처님의 자비와 평온을 느낄 수 있고, 마음을 내려놓고 쉴 수 있는 사찰이다. 천개사를 찾는 많은 등산객들은 ‘이렇게 좋은 곳이 있는 줄 몰랐다’며 감탄을 연발한다.
만행
법능스님은 언젠가 서울에 마땅한 거처가 없어 난감해하던 지장암 스님 한분을 선뜻 천개사에 묵게 해주었다. 젊은 시절 스님도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으며 살았기에, 서로 마음을 나누는 따뜻한 인심을 간직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6·25전쟁 당시 진주로 피난을 가던 스님은 어느 마을을 지나다가 밤이 너무 깊어 하룻밤을 묵기로 하고, 마을 초입에 있는 집에 들어갔다. 부자가 단 둘이 사는 집이었는데, 집주인이 다행히 스님의 청을 들어주어 고단한 몸을 뉘일 수 있었다.
그런데 잠결에 아들의 코를 주먹으로 때려서 코피가 나게 만들었다. 스님은 코피가 난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너무 무안하고 죄송스러워서 모른 척 계속 누워있다가 동이 트기도 전에 일어나 서둘러 그 집을 빠져나왔다고 한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집주인은 스님을 비구스님으로 착각하고 한 집에 머물도록 허락한 것이었다.
한번은 누구든지 삼배를 하면 차비를 주는 주지스님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그곳을 찾아갔다. 그리고 주지스님에게 삼배를 하였더니 소문대로 밥도 주고 잠도 재워주었으며 게다가 차비 1,000원까지 챙겨주셨다. 주지스님은 법능스님에게 "학교는 다녔느냐"하고 물었다. “저는 학교에 다닌 적이 없고, 글도 모릅니다.” 스님의 대답을 들은 주지스님은 글을 배워야 한다면서 천수경을 가르쳐주셨다. 그러다가 갑자기 이상하다는 듯 물어보셨다. "비구가 아니더냐? "네, 저는 바구니입니다.“ 그때 주지스님은 너무나 놀란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또 한번은 진도에 가게 되었는데, 여비가 떨어져서 부둣가를 서성이고 있었다. 그런데 어린아이를 등에 업은 한 아주머니가 다가와 "왜 이러고 있느냐고 물었다. 아주머니는 스님의 사정을 듣더니 집으로 데리고 가서 재워주었다. 감사한 마음으로 하룻밤 신세를 진 스님은 더 이상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새벽 일찍 그 집을 나왔다고 한다.
진도 청룡사 창건
법능스님은 진도 북산에 청룡사를 창건한 적이 있다. 당시 스님은 주지를 살 형편이 못되어 다른 스님에게 절을 맡겼는데, 주지를 맡은 스님들은 채 몇 달을 살지 못하고 절을 떠나기 일쑤여서 법능스님이 직접 청룡사를 꾸려갔다.
스님은 그곳에서 1년정도 머물다가 결국 은사스님의 부름을 받고 진도를 떠나게 되었다. 법능스님이 절을 떠난다는 소식에 청룡사의 젊은 보살들과 처자들은 ‘우리가 탁발을 해서 스님이 사실 수 있도록 도와드릴 테니 가지 말라.' 며 만류했다.
그때 좋은 인연을 맺었던 젊은 처자들은 할머니가 되어서도 스님을 만나기 위해 천개사로 찾아오고 있다고 한다. 스님을 창건주로 하여 선학원에 등록 한 청룡사는 결국 쌍계사 주지소임을 살던 비구스님에게 맡겼다. 스님은 너무 멀어서 자주 갈수가 없고, 스님의 집안은 모두 선객들이라 주지를 살려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어린이 포교에 힘쓰다.
법능스님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포교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 포교에 매진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스님은 유아교육학과를 전공하여 포교의 일선에서 활동하는 젊은이들이 더욱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미혼의 직장 여성들에게는 중앙승가대학교 부설 보육학과에 입학하여 어린이 포교 분야에서 활동하도록 권한다. 실제로 천개사 신도 가운데 스님의 조언대로 방송통신대와 경원대 등에 입학하여 유아교육을 전공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스님은 종단 차원에서도 불교의 발전을 위해 어린이 포교에 매진하고 있는 이들에게 전문적인 교육 서비스와 물질적인 보조 등 아낌없는 지원을 해야하고, 또 불교유치원이 부족한 형편에서 그나마 있는 유치원의 재정이 어려우면 사찰이 직접 맡아 운영을 하여 어린이 포교에 힘써야 한다고 강조한다. 수십 년 후를 생각하는 장기적인 안목으로 새싹 포교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상구보리(上求菩提)의 목적은 하화중생(下化衆生)
한편 신도들에게는 보람되게 사는 방법으로 포교사 자격증을 취득하여 포교당을 운영하도록 권장한다. 또 불법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퇴직 후 좋은 곳에 땅을 사서 포교당을 운영하라는 조언을 해 준다. "일생 모은 돈으로 건물 사서 세놓고 살다 가면 무엇이 남습니까? 극락세계 만들어 포교하고 중생 제도하며 가치 있게 살다 가야 현생에도 좋고 내생에도 좋은 일이 되는 것입니다.”
상구보리(上求菩提)의 목적은 하화중생(下化衆生)이라고 말하는 법능스님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부처님 법을 널리 알리려면 포교사를 많이 육성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기회가 닿을 때마다 발심을 권장하고 있다.
법능스님은 불자들의 연령대가 많이 낮아진 점을 주목하고 있다. 옛날에는 노보살들이 다수를 차지했는데 지금은 젊은 보살들과 거사들이 사찰을 찾아오고 있으며, 이런 변화가 정적인 불교를 동적인 불교로 바꾸고 있다는 것이다. 이때 불교계가 부처님 법에 대해 더 열심히 공부를 하여 포교에 박차를 가하고, 어려운 이웃을 위한 사회복지사업도 활발하게 펼친다면 중생의 삶과 함께 호흡하는 불교로 거듭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렇기 때문에 스님은 선(禪)과 교(敎)가 같이 발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부처님이 꽃을 든 까닭을 가섭존자만이 알고 웃음을 지었는데. 말법시대에 말없는 법문을 한다면 어떤 중생이 알아듣겠습니까? 선을 해서 혼자 도인이 된다고 포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선이나 교 모두 중생 제도에 중점을 두고 함께 해나가야 합니다. 지금은 지식시대이기 때문에 포교를 하려면 다양한 분야를 두루 알 필요가 있습니다. 때문에 외전도 많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도인도 말이 없으면 그 뜻을 중생이 알지 못하는 법입니다. 부처님도 49년간 법문을 하셨습니다. 중생들과 소통하기 위해서지요. 그래서 저는 젊은 스님들이 중생 제도의 방편으로 공부를 열심히 하길 바랍니다.”
나를 제도해야 자리이타(自利利他)가 완전히 된다.
물론 말만 잘한다고 포교가 되는 것은 아니기에 출가자 스스로가 먼저 자신을 제도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를 제도해야 자리이타(自利利他)가 완전히 된다.‘고 강조하는 스님은 무엇보다 계를 잘 지키고 살 것을 당부한다. '계를 스승으로 삼으라.'는 말씀처럼 스님들이 계를 잘 지키고 행으로 보여주면 비록 말을 잘 하지 못하더라도 포교가 원만히 이뤄지리라고 믿는다.
'사람들은 외로워서 결혼을 하고, 살다가 힘들고 괴로워서 종교를 찾아오는 것이니 종교는 그들의 괴로움을 덜어주고 마음을 평온하게 갖도록 도와줘야 한다.’고 말하는 법능스님은 젊은 스님들을 매우 귀하게 여기며, 출가승을 불법승 삼보의 보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측면에서 불교전문교육기관인 중앙승가대학교는 인재양성을 하는 데 있어 출가자의 위상 문제, 자질향상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인식 개선이 시급하다고 말한다.
입적
일생동안 돈을 손에 쥐지 않고, 집착이 없는 무상으로 살아온 ‘무심도인’ 법능스님은 2021년 11월4일(음) 천개사에서 입적했다. 수계자로는 지훈(志訓)・계수(桂修)스님이 있다.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p. 415~422.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158.
- 위키백과, 서울 천개사 대혜보각선사서 https://ko.wikipedia.org/wiki/서울_천개사_대혜보각선사서
- 불교 포커스, 강남사암련, 자비의쌀 1만3천kg 전달 http://www.bulgyofocus.net/news/articlePrint.html?idxno=67115
- 불교저널, “다가오는 선학원 100년, 새로운 시대 맞이하자” http://www.buddhismjournal.com/news/quickViewArticleView.html?idxno=4775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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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능(法能)스님 | 본항목 | 법능스님(法能, 1932~) | 法能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법능스님(法能,_1932生,_비구니)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속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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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능스님(法能) | 백양사문중(白羊寺) | ~의 일원이다 | |
법능스님(法能) | 우일스님(又一) | ~의 수계제자이다 | |
법능스님(法能) | 전주 남고사 | ~에서 출가하다 | |
법능스님(法能) | 영봉스님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사미니계 |
법능스님(法能) | 석암스님(昔巖)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비구니계 |
법능스님(法能) | 서울 천개사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주지(감원) |
법능스님(法能) | 서울 천개사 | ~을(를) 창건하다 | |
법능스님(法能) | 의정부 원효사 | ~을(를) 창건하다 | |
법능스님(法能) | 진도 청룡사 | ~을(를) 창건하다 |
지도
- 천개사 : 서울특별시 서초구 원지동 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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